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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월드컵때 국가대표의 영광을 누리지 못했던 선수 중에 이동국이라고 하는 선수가 있었습니다. 국가대표로 월드컵에 나가는 것이 축구선수 최고의 영예가 될 수 있는데, 그는 그 당시 엄청난 슬럼프에 빠져서 히딩크 감독의 눈에 들지 못했고 결국은 대표에서 제외가 되는 아픔을 겪었습니다. 그는 후에 고백하기를 나는 2002년 월드컵 당시 수 천만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에서 \"대한민국\"을 환호하며 열광할 때 단 한 번도 월드컵 경기를 보지 않았었다는 것입니다.
그 후 그는 술과 더불어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깊은 시련에 빠져있었는데 다행히 군 입대를 통하여 상무팀에서 활약하게 되었고, 본 프레레 감독의 눈에 들어 매 경기마다 득점 포인트를 올리면서 본 프레레호의 황태자라는 이야기까지 들으면서 최고의 기량을 뽐내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월드컵 출전이라는 영광과 세계 4강 이라는 업적이 가져다준 군복무 면제 혜택이 주어지지 못했던 것이 오히려 약이 된 셈입니다.
우리 역시 인생을 살다보면 어느 때는 최고의 기량을 뽐내면서 범사가 잘 되는 형통의 복을 누릴 수도 있고, 어느 때는 되는 일이 아무 것도 없이 깊은 나락에 빠져든 것 같은 슬럼프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점은 우리 모두가 슬럼프에 빠질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 상황을 어떻게 하면 지혜롭게 뛰어 넘을 수 있을가 하는 것이 오늘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의 중심적인 메시지입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다윗과 관련된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다윗은 삼상 24장에서 아마도 그의 생애 최고의 영적 승리의 기쁨을 맛보았습니다. 우리는 다윗을 통하여 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셨을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전혀 다른 모습의 다윗을 만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600명으로 불어난 다윗의 공동체는 어느 한 곳에 정착할 수 없는 피난생활이었기에 의식주에 관한 일들을 뒷받침 해주는 일이 그에겐 너무나도 어렵고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느 날 다윗은 자신들이 늘 보호해 주며 챙기던 한 부자에게 어려움을 호소하게 되었습니다. 대부분의 사업은 갈멜에서 하고 있던 나발이라는 부자에게 소년들을 보내 도움을 호소하였지만 냉대만 받고 돌아온 것입니다. 내 소년들로 네게 은혜를 얻기를 원한다며 다윗이 메시지를 보냈지만 나발은 놀랍게도 나는 다윗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물과 떡과 고기를 원했지만 나발은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당시 나발은 양이 삼 천 마리, 염소가 천 마리가 될 만큼 꽤 큰 규모의 목축업을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더군다나 평상시 다윗의 공동체는 객지에서 사업을 하고있는 그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나발의 일군들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양을 칠 동안에그들이 우리와 함께 있어 밤 낮 우리에게 담이 되어 주었다고 고백한 말에서도 잘 알수 있듯이, 다윗의 공동체는 나발의 목축업에 큰 힘이 되어 주었던 것입니다.
다윗은 나발에게 할 만큼 했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어려울 때 도움을 요청하면 힘이 되어 줄것이라고 생각하고 사람들을 보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발은 다윗이 도대체 누구냐며 다윗의 공동체를 외면한 것입니다. 다윗은 분노했습니다. 600명의 공동체 중에서 200명을 남긴 후 400명을 무장시켜서 나발의 집을 응징하겠다며 출동시킨 것입니다.
오늘 본문 14절은 이렇게 다급한 상황을 듣고서 그 소식을 주인에게 알리는 일로 시작이 됩니다. 나발의 소년 중 하나가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에게 급한 상황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한 것은 이러한 긴박한 정보를 주인인 나발에게 알리지 않고 아비가일에게 알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3절에 보면 나발과 아비가일을 소개하는 내용이 재미있습니다. 나발은 완고하고 그 행사가 악하였으나 아비가일은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답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마치 어리석은 사람은 어떤 사람이고, 지혜로운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를 모델처럼 제시하고 있는 말씀과도 같습니다. 아마도 일꾼은 긴박한 상황에서 어리석은 나발에게 이 소식을 알리는 것은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문제의 발단도 나발의 완악함 때문이었기에 은혜를 외면하고 떡과 물, 그리고 고기를 나누어 주는 것을 인색하게 여기다가 목숨까지 잃을 상황에 온 것입니다.
지혜로운 여인 아비가일은 그 소식을 듣자마자 급히 떡 200 덩이와 포도주 2 가죽 부대, 그리고 잡은 양 5마리, 볶은 곡식 5 세아, 건포도 100 송이, 무화과 뭉치 200 덩어리를 나귀들에게 싣게 한 뒤, 자신은 급히 뒤 따라 가겠노라며 위로의 음식들을 먼저 보내었습니다. 가만히 계산을 해 보면 이 만한 양이면 적어도 나귀 열 마리 이상은 동원 되어야 할 만큼 많은 양의 음식들이었지만 아비가엘은 신속히 준비하는 기지를 발휘한 것입니다.
다윗은 앙갚음을 하러 가면서 21절, 22절에 보면 또 한번 다짐합니다. \"내가 선으로 그에게 도와주었거늘 그는 나에게 악으로 갚는도다\" 하면서 그는 분노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에게 속한 것은 남자 하나라도 아침까지 남겨두면 내가 하나님께 벌을 받으리라며 다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다윗을 길에서 만난 아비가일은 급히 나귀에서 뛰어내렸습니다. 그리고 다윗 앞에 엎드렸습니다. 맨 땅입니다. 하지만 그는 얼굴을 땅에 대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신하가 왕 앞에서 하는 행동입니다만 이미 아비가엘은 다윗을 왕으로 대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내 주여, 청컨대 이 죄악을 내게로 돌리시고 여종으로 주의 귀에 말하게 하시고 이 여종의 말을 들으소서.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 이름은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 지금 남편으로 인해서 생긴 이 엄청난 문제에 대해서 그는 참으로 놀랍게도 남편에게 그 책임을 전가하지 않고 자신의 불찰로 생긴 일이라며 용서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아비가일의 행동에서 두 가지의 아름답고 지혜로운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그가 극히 자신을 낮추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낮추고 있습니까? 다윗을 향해서 내 주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이 문제의 원인을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무슨 잘못된 상황이 찾아 왔을 때 끊임없이 도대체 누구 때문에 이런 일이 생겼느냐며 책임을 전가힉에 급급합니다만 아비가엘은 달랐습니다. 책임을 질줄 아는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 사회를 가리켜서 책임지는 사람이 없는 사회라는 말을 자주 듣곤 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스개말로 광주민주화 운동 때 수백 수천명이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헬기에서 쏜 기관총으로, 군인들이 쏜 개인화기로 많은 시민들이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정권이 바뀌어 청문회가 열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총을 쏜 사람은 하나도 나타나지 않았어요. 총을 쏜 사람은 하나도 없는데 총에 맞아 죽은 사람만 있게 된 셈입니다. 책임지지 않으려는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준 사회상입니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아주 단면적인 현실입니다. 책임을 지는 사람, 제가 잘 못 했습니다라고 나서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가끔씩 뉴스를 보면 국회의원들이 기업들로부터 수억원, 수십억원씩 돈을 받아가지고 문제가 됐을 때, 많은 기자들이 와서 인터뷰합니다.
알고 있습니까? 그 사람 만나본 적 있습니까? 그들은 검찰청에 들어가면서도 그 포토라인에 서서도 큰소리칩니다. 나는 그 사람 만나 본 적도 없습니다. 일면식도 없습니다. 우리는 그 뉴스를 보면서 저렇게 죄 없는 사람들을 잡아가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한 열시간쯤 조사받고 나오면서는 손에 수갑을 차고, 고개를 떨굽니다. 바로 하루도 못 가서 드러날 엄청난 죄악들을 그저 감추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가하기에 급급한 더구나 이 사회의 지도자라고 했던 그들의 모습에서 그들은 큰 실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도자는 무엇이 지도자입니까? 문제가 생겼을 때 그 책임을 자신이 지겠다고 나설 수 있는 사람이 지도자인 줄 믿습니다.
대접받을 때 앞자리에서 상석에서 대접받는게 지도자가 아닙니다. 지도자는 책임을 질 줄 아는게 지도자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문제가 생겼을 때 우리 장로님들이 앞장서서 이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그렇게 나설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그 다음에 우리 권사님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책임집니다.’ 집사님들이 ‘아닙니다. 우리가 책임집니다.’ 서로가 책임을 지겠다고 그럽니다.
책임지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아비가일은 자신의 문제로 책임을 돌렸습니다. 다윗을 향해서 이 책임은 제가 지겠습니다. 저에게 죄를 돌리시옵소서. 자신을 극도로 돌리면서 다윗의 분노를 삯히는 그녀의 모습에서 다윗은 분노가 눈 녹듯 풀렸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32절에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케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네 지혜를 찬양할지라. 네게 복을 있을 지어다.
이제 다른 사람을 다른 각도에서 보겠습니다. 다윗을 우리는 다시 보기를 원합니다. 바로 24장에서 다윗은 그의 인생 최고의 영적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굴에서 사울왕이 용변을 위해서 혼자 들어왔을 때, 주변의 측근들은 다윗에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을 축복하셔서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한 번에 사울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손에 맡기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지도 않은 말을 그들은 그럴 듯 하게 만들어서 다윗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이제 한 번에 사울의 복창에 창을 꽂으면 우리의 고생은 끝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광야피난생활을 끝내고 저 예루살렘 왕궁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당신에게 이미 기름을 붓지 않으셨습니까? 모든 백성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다윗은 참으로 대단했습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름 부어 세운 종을 해치는 것은 악한 일이다.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지 않다. 원수 갚는 것은 저를 병들어 죽게 하던지, 전쟁에 나가 죽게 하던지 그것은 하나님의 몫이다.
그리고 그는 다윗의 가장 특징되는 행동을 하게 했습니다. 왕의 옷을 조금 베는 것으로 그는 더 이상의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왕의 옷을 벤 것도 마음의 가책을 느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신실하고 순수했던 다윗, 오직 하나님을 중심해서 자기 앞의 어떤 이익과 유익이 다가온다고 해도 오직 하나님의 뜻을 기뻐했던 다윗이었습니다.
왕이 계곡을 내려간 후에 그 옷자락을 흔들면서 왕이여, 아버지여 이것이 누구의 것입니까? 옷자락을 벤 것을 보면서 사울왕은 울었지 않습니까? 내 아들아, 너는 나에게 선대하였는데, 나는 너를 악으로 갚고, 분명한 것은 내가 아노라. 네가 분명히 왕이 될 것을 내가 아노라.
하나님께서 너를 통해서 이 나라가 견고해 질 것을 내가 알고 있도다. 저는 이것을 다윗의 합격통지서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시험 중에서도 가장 큰 시험이 기말고사 아니겠어요? 졸업하는 학생들에게는 졸업고사가 아니겠습니까? 그 중요한 테스트에 하나님께서 다윗을 흔들어 보시는 그 중요한 테스트에 다윗은 멋지게 답안을 써내었습니다.
원수 갚는 것은 내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울의 입에 통해서 다윗이 합격되었음을 선포하고 있지 않습니까? 얼마나 멋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이렇게 다윗을 축복하시고, 다윗에게 있어서는 자기 생애의 최고의 영적승리를 맛보았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다윗 바로 직전의 최고의 영적승리를 거두었던 하나님 중심의 사람 다윗의 모습은 간 곳이 없고, 이성을 잃은 조직 폭력배의 모습 같은 다윗을 우리는 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를 도와주었으니까 나를 도와 주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니냐? 못 도와 주겠어? 그러면 내가 죽여버리겠다. 요약하면 그런 말입니다. 어처구니 없는 다윗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 너무나도 우리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다윗의 이성을 잃은 행동이 왜 일어날 수 있었을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요? 저는 이렇게 답을 찾았습니다. 긴장이 풀려서 그렇습니다. 영적생활에 깨어있던 그가 깨어있지 못한 것입니다. 너무나도 큰 일입니다. 그런데 그 큰 일은 깨어있으면서 기도하면서 승리했습니다.
예를 들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서 난공불략의 여리고 성을 대했을 때, 도저히 여리고 성을 함락할 수 없었습니다. 여러분 역사적으로 여리고 성은 인류 최초의 가장 큰 성이라고 말합니다. 그 여리고 성을 아무도 가나안 땅에 들어가는 사람들이 거기를 지나지 않고는 갈 수 없는데, 그 여리고 성을 이길 방법이 없었습니다.
여호수아와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 기도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승리의 방법을 주셨습니다. 매일 같이 기도하면서 침묵으로 그 성을 돌았고, 마지막에는 일곱바퀴를 새벽 같이 일어나서 돌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침묵했습니다. 이 침묵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쉬운 일이 아닙니다. 왜 침묵시켰을까요? 그런 방법을 창을 만들고, 높은 고가 사다리를 만들고, 거기에 불화살을 만들고, 대포를 만들고, 불덩어리를 쏘아 올리고, 이런 저런 방법들이 수없이 나와야 하는 상황에서 만약에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고 하면 백인백색의 이야기들이 나왔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침묵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방법을 모두가 참여하기로 했습니다. 참여하면서 하루 한 바퀴 돌고, 다음날 또 한바퀴 돌면서 이야기 하고 싶은 ‘이렇게 해서 됩니까?’ ‘이렇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 됩니까?’ ‘기도만 한다고 됩니까?’ 이런 이야기가 목구멍까지 나왔을 것 아니예요. 모두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침묵시켰습니다.
침묵한다고 하는 것 이것 보통 일이 아닙니다. 여러분 주의 종이 목회적인 중요한 목표를 가지고 끌고 갈 때에 여러분들이 순종하면서 여러분들이 하고 싶은 말을 참으면서 침묵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쉬운 것인 줄 아십니까?
그리고 마지막날 한 번 예수의 이름으로 주님의 전능하신 이름으로 소리를 지르라고 했습니다. 여리고 성은 무너진 줄 믿습니다. 그 여리고 성을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면서 여리고 성을 무너뜨렸던 그 감격, 그 다음 코스는 아이성이라고 하는 조그마한 성이었습니다. 얼마만 보내도, 조금만 보내도 된다고 하는 성이었습니다.
그런데 여호수아는 아이성에 일부를 보냈다가 참패하는 고통을 당했습니다. 무릎을 꿇고 재를 머리에 뿌리면서 하나님께 울면서 여호수아는 기도합니다. 어째서 우리가 실패했습니까? 실패의 원인은 한 가지 밖에 없지요. 불순종의 죄가 너희 가운데 있다. 긴장이 풀린 거예요.
기도해야 하는데, 큰 일을 당하면 우리 기도하는 것 잘 하지요. 우리 자식이 수능 시험이 앞에 있어. 우리 남편이 지금 승진이 눈 앞에 있어. 우리 남편이 지금 외국의 바이어와 계약을 하는데, 이 계약만 하면 1천만원, 2천만원, 1억이 들어와.
그럴 때는 시키지 않아도 기도하지요. 작정기도하지요. 철야기도 하지요. 큰 일을 앞두면 기도할 줄 압니다. 그 나쁜 것 아니예요.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작은 일은 만만하게 생각합니다. 그깟짓 것은 아무것도 아니야. 내 경험 갖고도, 한 쪽 눈 감고도 할 수 있어.
그러면서 기도하지 않습니다. 말씀을 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지 없이 깨집니다. 마치 아이성 전투에서 몰살당했던 것과 같은 작은 일일수록 깨어있기를 축원합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해본 일이고, 간단하다고 생각하는 일일수록 깨어있기를 축원합니다. 다윗은 세계 최고의 영적승리를 얻은 후에 너무나도 작은 일에 사울과의 싸움에서 영적 전쟁에서 승리를 한 다윗, 그 다윗이 아주 작은 너무나도 작은 나발과의 한 인간과의 관계에서 다윗이 너무나도 쉽게 무너지는 것을 보고 있습니다. 자기의 감정과 자기의 분노를 그는 전혀 컨트롤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이 아비가일을 한 남자의 아내라고 보고 있지 않습니다. 다윗이 이렇게 이성을 잃고 그가 정말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라고 하는 별명이 어울리는 삶과 살 때 하고는 다른 다윗을 건지시는 일에 아비가일을 사용하신 줄 믿습니다.
우리가 잘 못 될 때, 우리가 잘 못 된 판단을 할 때, 잘 못 된 길을 가고 있을 때, 아비가일은 참으로 지혜로왔습니다. 여러분, 병원에 누워있는 사람에게 ‘아이고, 맨날 주일 날 빠지고 낚시만 다니더니, 맨날 주일만 되면 온천에 돌아다니더니, 그 차 한 번 주시면 새벽기도 오겠다고 그러더니, 그 차 타고 맨날 산으로 들로 다니더니 꼴 좋다. 얻어 터진거야.’
심방가서 병원에서 다리 부러지고 머리 깨진 사람에게 그리고 이야기 하면 틀린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 받는 사람의 마음에 오기가 생깁니다. 괜히 그냥 부정하고 싶지 않아요. 그런데 그런 사람에게 찾아가서 백이면 백인이 하나님께 얻어 터진 것이 분명한데, 그 말은 입에 꺼내지도 않고, 그의 아픔을 위로하고, 그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하나님, 이 성도를, 이 집사님을 축복하시기를 원합니다. 이 집사님이 가정을 다시 세우셔서 이 가정을 세워 주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 자기의 상황을 알고 있는데, 나를 책망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책망은 커녕 기도해 주고 축복해 주다니 자신의 본래의 신앙이 회복될 줄 믿습니다. 심방하는 사람들은 지혜로와야 합니다. 그 입이 가벼워서 오히려 심방가서 덕이 안되고,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지금 아비가일은 당신이 정말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사람입니까?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모든 뜻에 맡기고,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정말 당신이 하나님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사람이라면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할 수 있습니까 하며 책망하거나 충고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다윗 앞에 엎드려서 ‘내 주여.\"하며 다윗을 세울 수 있는 만큼 세웠습니다. 그리고 문제의 원인은 바로 나로 인해서 생긴 것이니 제가 책임을 지겠다며 자신을 낮추었을 때 다윗의 분노는 눈 녹듯 사라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다윗의 아름다운 모습이 회복되기 시작을 했습니다. 다윗이 아비가일에게 말합니다. 오늘날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분명하지요. 아비가일을 다윗에게 보낸 것은 누구입니까?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랑하시고, 당신의 자녀를 사랑하신 거예요. 당신의 자녀가 깊은 슬럼프에 빠져서 영적인 슬럼프에 빠져서 잘 못된 세상적 방법으로 처신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지혜로운 아비가일을 보내셔서 당신을 일으키고 계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세상의 일반적인 개념에 있어서 삶의 패턴이 나발과 같은 사회라고 생각을 합니다. 은혜를 받을 줄 알지만, 베풀 줄 모르는 사람, 그저 도움이 되는 것은 고맙지만, 절대로 나눠 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이기적인 생각이 가득차 있는 사람, 마치 나발과 같은 생각과 삶의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 그 사회 속에서도 사회를 편안하게 하고, 기쁨이 솟아나고, 그 사회 속에 희망이 솟아나게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비가일이잖아요.
이 시대의 아비가일이 바로 예수의 사람들, 바로 우리가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이 모든 문제는 우리 속회가 부흥되지 않는 이유는 속장인 제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우리 선교회가 배가 되지 못한 것은 회장인 제가 기도하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이 교회가 하나님 부흥하지 못한 것은 제가 제대로 몫을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장로님들이 회개하고, 권사님들이 회개하고, 무슨 일이 있으면 제가 먼저 책임을 지고, 이런 분위기가 된다면 이 평안의 공동체는 아비가일로 넘치는 거예요.
때때로 우리는 깊은 영적 슬럼프에 빠질 수 있습니다. 큰 승리의 대가에 맛 본 후에 때때로 교만하고 자만하여서 이 정도의 일은 기도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서 우리의 삶의 경륜으로 어떻게 해 보려고 할 때도 있습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이 기도하실 때는 거창하게 백일잔치, 회갑잔치, 칠순잔치 같은 때만 기도하십니까? 간단하게 두 세사람이 모여서 분식 먹을 때에는 감사기도 안 하십니까? 무슨 이야기입니까? 우리는 작은 일에도 영적인 삶의 모습은 변하지 않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작은 일이라고 얕보다가 사단의 유혹으로 큰 실패를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나 당신의 사랑하는 자들을 세우셨습니다. 그 손을 잡아 일으키셨습니다. 슬럼프에서 뛰어넘게 하시고, 다시금 승리케 하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에 다시금 붙잡혀 강건하고도 바른 길, 승리의 길을 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이 주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아비가일을 보내신 하나님을 찬송하는 다윗처럼 때때로 우리가 영적 자만에 빠져서 실패의 삶을 살다가도, 믿음의 사람, 지혜의 사람을 통해서 깨닫게 하시고 회복하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시대를 일깨우는 지혜로운 아비가일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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