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1장
소개 PR (Public Relation)
1.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나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라고 따로 세우심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자기소개를 하고 있다. 보통의 사람들은 자기소개를 할 때 조금은 과장되게 설명하거나 자신의 약점보다는 장점을 극대화해서 소개한다. 그런데 바울은 모양새가 좀 다르다. 오히려 자신을 낮추고 예수님을 높인다. 낮추는 정도가 지나쳐서 ‘종’이라고 말한다. ‘종’은 우리식 표현이고 서구식 표현으로 한다면 ‘노예’다. 단순하게 겸양의 미덕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그렇게 이해한 사람들이 예수님을 하늘 높이 올리는 것처럼 하면서 실제로는 자신을 높이고 있지 않는가! 바울이 자신을 노예로 표현한 것을 그런 정도로만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노예는 여지(餘地)가 없다. 자기 생각이나 의지가 있으면 노예가 아니다. 노예는 오직 주인이 시키는 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면서도 공(功)을 하나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노예인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서 예수님을 높여서 자신을 덩달아 높이는 사람들을 흔히 본다. 그 사람들은 ‘예수님의 노예’라는 개념을 하나도 이해 못한 사기꾼에 불과하다. 현대교회는 예수님의 ‘노예’이기를 포기한 것 같다. 제자, 형제, 친구는 하려고 하면서 노예는 죽어라고 하기 싫어한다. 노예이기를 포기하면 제자도 될 수 없고, 형제나 친구도 될 수 없다는 것은 모르는 것 같다.
바울은 자신을 “부르심을 받은 사도”라고 말한다. 그렇다. 노예는 언제나 부르심을 받을 뿐이지 자기 스스로 주인 앞에 서는 것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주체라는 개념이 노예에게는 있을 리 만무하다. 스스로 주체일 수 없는 인간이 바로 노예이다. 노예에게 주체는 주인이다. 주인과 다른 주체가 있다고 한다면, 그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작용한다. ‘자기’라는 주체가 없는 주체, 신묘한 주체다. 이기적인 나는 없지만, 여기에 새로운 주체가 탄생한다. 예수님이 내가 되고, 내가 예수님이 된다. 내가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내가 된다.
노예의 임무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란다. 이미 주객이 사라지고 없는데 나의 임무, 하나님의 임무가 다를 것 있겠는가? 하나님은 끊임없이 이 세상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을 사랑하실 수밖에 없는 분이다. 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 이상 하나님일 수 없다. 따라서 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 아니 주체할 수 없어 사랑이 흘러넘치는 것, 그것이 바로 복음이고 노예의 임무다.
좀 더 풀어써야 하겠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고 하니까,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행동을 하시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되겠다. 하나님은 사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실 수밖에 없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랑은 사랑하는 행위가 아니라 사랑의 넘쳐흐름이다. 사랑의 넘쳐흐름이 복음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사명이다. 이 세상의 사명은 무언가를 하는 것으로 인식한다. 건물을 세우거나 영웅적인 무슨 일을 하는 것을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명은 이와 다르다. 무슨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넘쳐흐름이기 때문에 특별한 것이다. 이 사명은 세상의 눈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오직 하늘의 눈으로만 인식할 수 있는 사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하지만, 모든 것을 하는 기묘한 사명이다.
신성(神性)과 인성(人性)
2.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시켜서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3. 당신의 아들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자손으로 나셨으며,
4.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권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바울은 이제 복음을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복음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란다. 해 아래 새 것이 없는 법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복된 음성을 들려주었는가? 그러나 아무리 많이, 그리고 애타게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들 무슨 소용이 있는가? 귀를 닫아 버리고 눈을 막아 버린 것을.......... 그래서 마지막으로 아들을 보내셨다.
그는 육신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났고, 거룩한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로 확정된 분이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 바울의 어법을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여기서 말하는 육(肉)이라는 말은 지금 우리의 육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인간을 뜻한다. 그래서 바울이 말하는 육은 단순한 육체가 아니라 정신까지도 포함하고 있는 개념이다. 그에 반해 영(靈)이라는 것은 세상적인 것이 아님을 뜻한다. 세상적인 것과는 전혀 다른, 초월적인 것을 영적인 것이라고 한다. 다윗의 후손이라는 말은 육적인 것 중에 가장 이상적인 것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완벽한 인간을 뜻한다. 거룩의 영으로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완벽한 인간이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이야말로 완벽한 인간이다. 영과 육의 완벽한 조합, 완벽한 신성과 인성을 지니신 분,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완벽한 인성을 지니지 못했다면 완벽한 신성도 없는 것이다. 완벽한 신성이야말로 완벽한 인성인 것이다. 영과 육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듯이 신성과 인성도 따로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영과 육이라는 표현은 이분법적으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 살면서도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을 하면 영적인 것이다. 반면에 꿈을 꾸고 환상을 본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일과 관련이 없으면 육적인 것이다. 이 세상에는 육이 없이 영이 존재할 방법은 없다. 육이 없이 영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하나의 추상이요, 관념이다. 심하게 말하면, 정신병자들이나 육이 없는 영을 상상할 뿐이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이다. 영이 없는 육을 상상하며 사는 사람들은 한마디로 짐승이다. 그런 사람들은 인간이기를 포기한 것이다.
사도의 직분
5. 우리는 그를 통하여 은혜와 또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이 신앙의 복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6. 여러분도 그들 가운데 들어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7. 나는 하나님에게 사랑을 받고 부름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된 로마에 있는 모든 신도에게 이 편지를 씁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부터 여러분에게 은혜와 평화가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를 통하여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이 “우리”란다. 그렇다.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지 않은 인간이 있겠는가? 그럴 수는 없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모습대로 창조되어서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문제는 ‘그런 자의식이 있는가?’이다. 그런 자의식이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살아 갈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렇게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은 것은 “그를 통하여” 된 것이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참 중요한 문제다. 하나님의 넘쳐흐름이 바로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이 되고, 하나님이 예수님이 된다. 나와 너의 구분이 사라진 ‘하나’, 그 분을 통하여 사도직분을 받은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특이점은 여기에 있다. 단순히 절대자 하나님을 말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예수님을 우상화시키지 않는다. 하나님은 예수님으로 인해 현재화되고, 예수님은 하나님으로 인해 의미를 지닌다.
사도의 직분을 받은 이유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모든 민족이 신앙의 복종에 들어가게 하기 위함이다. 이름이라는 것은 단순이 어떤 특정한 사람을 가리키는 명칭을 넘어서는 말이다. 여기에서 이름이란 존재의 전부를 가리키는 상징어이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위한다는 말은 그의 존재 전체를 위한다는 말이다.
그를 위하는 방법은 모든 민족이 신앙의 복종에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가 신앙의 복종에 들어가면 그를 위하는 것이 된다. 신앙의 복종이란 무엇일까? 신앙이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πισπευω(피스튜)라고 하는데, 이 말이 뜻하는 바는 ‘신뢰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신앙의 복종이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말이 된다. 무엇을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그의 이름을 위하는 것이 될까? 여기서 잠간 고민해 보자. 필자에게 아들이 한명 있는데, 이 아들이 아버지를 신뢰한다고 하자. 그 내용은 무엇일까? 적어도 아들은 아버지가 일하러 나갔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버지가 목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아들이 아버지를 믿는 내용은 그런 것과는 다른 그 무엇이다. 아버지라는 존재 자체를 믿는 것이다. 거기서 신뢰라는 것이 생긴다. 역으로도 보자. 아버지는 아들의 무엇을 믿는가? 그 아들의 이름이나 어떤 행동을 믿는 것이 아니다. 그 아들의 존재 자체를 믿는 것이다. 따라서 신앙의 복종이라는 말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자체에 대한 신뢰이다.
한 가지만 주의하자. 예수님을 대상화시켜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예수님의 무엇을 믿는다는 내용이 결여되어 있다. 내용은 없이 예수님의 이름 석 자를 안다는 것을 믿음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있다. 혹자는 기적을 믿는다는 사람도 있고,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을 믿는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이런 것들은 알면 되는 것이지, 신앙의 대상은 아니지 않는가? 믿음이란 그것보다는 휠씬 더 뿌리가 깊음을 잊지 말자.
진정한 감사
8. 나는 먼저 여러분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된다는 사실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립니다.(사역)
바울은 자기소개에 이어 편지를 의례적인 감사의 말을 전한다. 그런데 이 또한 범상치가 않다.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고 있는데, 감사의 말을 로마교회 교인들이 받지 않는다. 그 감사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나의(바울의)’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 이런 신앙을 본 적이 있는가? 오늘날에는 모든 감사를 인간이 못 받아 난리법석이다. 교회가 감사를 받지 않으면 섭섭해 한다. 목사들이 모든 영광을 독차지 하려고 난리다.
8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곤란하다. 감사는 하나님만 받아야 하느니, 예수님은 단순히 중보자여야만 하느니, 등등으로 말하는 것은 바울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처사이다. 내가 어디에 있고, 예수님이 어디에 있는가, 어차피 하나인 것을.......... 인간의 언어가 지니고 있는 한계를 심각하게 고민한 흔적이 보인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 율법에 찌들려 있는 하나님을 생각할 것이고, 예수님만 이야기하면 예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릴 것이고, 나만 이야기하면 내가 우상이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래서 바울은 감사의 말을 에둘러 표현하고 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를 드린다는 표현도 음미할 만하다. 이 표현은 요즘의 시대를 생각하면 너무나도 가슴에 와 닿는다. 하나님은 한분이라니까, 너도나도 하나님이다. 그러나 분명히 지적하고 싶다. 철학의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는 사람, 그리고 예수님을 우상으로 만들어 버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바울이 믿는 하나님이 아니다. 바울의 하나님은 정확하게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이다. 바울은 이것을 지적하고 싶었다. 입으로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다른 잡다한 것들을 섬기고 있는 사람들의 하나님은 바울이 섬기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분이다. 바울도 그런 표현을 정확하게 하고 싶었던 것 같다. 물론 알아듣지는 못하겠지만............
어쨌든 감사의 받으실 분은 한 분밖에 없는 것 같다. 우리는 모두 노예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사를 받는 것은 온당하지 않은 일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교의 신비가 작동한다. 노예는 그리스도이고, 그리스도는 하나님이다. 그리스도가 노예이고 그리스도가 하나님이다. 하나님이 노예이고, 하나님이 그리스도이시다. 여기에는 너와 나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하나’만 있을 뿐이다. 정말 신묘한 것은 노예가 주체이기를 포기할 때 하나 속으로 들어가고, 하나님께서 노예이기를 자청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선물(신령한 은사)
9-10. 언젠가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여러분에게 갈 수 있는 좋은 길이 열리기를 기도할 때마다 구하며, 여러분을 생각합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그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나의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증인이십니다.(사역)
11. 내가 여러분을 간절히 보고 싶어 하는 것은, 여러분에게 어떤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여러분을 굳세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12. 이것은, 내가 여러분과 함께 지내면서, 여러분과 내가 서로의 믿음으로 서로 격려를 받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로마를 방문하고 싶어 하는 이유가 나온다. 로마를 얼마나 가고 싶어 했는지 기도할 때마다 구하고 생각한다고 한다. 그 일에 대한 증인이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나의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란다. 바울의 진심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유대인인 바울이 아들과 하나님을 증인으로 채택한다는 것은 목숨을 건 행위이다. 오늘날 자신들이 편리한대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과는 천양지차이다.
바울이 로마교회 교인들을 보고 싶어 하는 이유는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어 그들을 굳세게 하는 것이다. 무엇이 신령한 은사일까? 그리스어로 신령한 은사는 πνευματι?ν χ?ρισμα(프뉴마티온 카리스마), 영적인 선물이다. 신령한 은사라고 번역을 한 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다. 더 의미 있는 번역일 수도 있다. 그러나 현금(現今)에 신령이라는 말이 왜곡되어 있고, 은사라는 말이 잘못 사용되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 영적인 선물이라고 해야 한다.
무엇이 영적인 선물일까? 말하나 마나, 이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고,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온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은 너무나도 많다. 예수님을 통해서 온 것도 너무나도 많다. 그러나 실은 하나뿐이다. 하나만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모든 것을 안다고 해도 하나를 모르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다. 그 하나는 세상을 사랑하심이다. 세상을 사랑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친히 하늘을 버리고 이 세상으로 오셨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이 세상으로 오신 것이다. 영적인 선물은 구원받을 수 없는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은총이다. 우리에게 오는 선물은 이것이다. 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카리스마이다. 우리 모두가 이 은총(카리스마)을 받은 사람들이기도 하지만, 우리도 나누어주어야 할 것이기도 하다. 이 선물은 결정적으로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왔다.
예수님의 삶에 있어 결정적인 것 하나, 그는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였다. 그는 세리와 죄인들을 친구 삼음으로 이 세상을 구하려고 하셨고, 그 뜻을 이루셨다. 우리에게 온 선물은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영적인 선물이다. 행여 영적인 선물을 방언을 하거나, 예언, 입신, 병치유의 은사와 혼동하면 안 된다. 이런 것들도 영적인 선물일 수 있다. 이런 것들이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는데 사용되면 영적인 선물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것들은 영적인 은사가 아닐 수도 있음을 유념해야 한다.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재능도 마찬가지이다. 공부를 잘 하거나, 운동을 잘하고, 악기를 잘 다루는 것, 등등도 마찬가지다. 영적인 카리스마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영적인 선물은 매 순간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럼에도 우리들의 눈에 백태가 끼어 영적인 선물을 받아들이지를 못한다. 그래서 서로 나눔이 필요한 것이다. 눈에 끼어 있는 백태를 걷어내는 것이 나누는 것이다. 이 나눔은 신묘하다. 나누면 나눌수록 그 크기가 커진다. 나누지 않으면 언제 그런 것이 있었느냐는 듯이 사라지고 만다. 그래서 나눔 자체가 우리를 굳세게 하는 것이다. 서로 위로를 받고 서로 풍성해 지는 법이다.
복음은 열려 있다.
13.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분은 이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나는 여러분에게 가려고 여러 번 마음을 먹었으나, 지금까지 길이 막혀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습니다. 나는 다른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열매를 거둔 것과 같이, 여러분 가운데서도 그것을 얼마만큼 거두고자 하였습니다.
14. 나는 그리스 사람에게나, 미개한 사람에게나, 지혜가 있는 사람에게나, 어리석은 사람에게나, 다 빚을 진 사람입니다.
15. 그러므로 나의 간절한 소원은, 로마에 있는 여러분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바울, 그는 로마교회 교인들을 무시하지 않으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방법을 아는 사람이다. 8절에서 바울은 로마교회 교인들의 믿음을 칭찬했다. 그러면서도 뭔가 부족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믿음을 칭찬하면서 한편으로는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간절한 소원이라고 말한다. 복음을 전하기 전에 상대방을 칭찬하는 여유, 그러면서도 당신들이 배워야 할 것이 있다는 것을 기분 나쁘지 않게 전달한다.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상대방의 기분을 나쁘게 해서야 귀에 들리겠는가? 바울은 참으로 설득할 줄 아는 사람이다.
바울의 소원은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복음이 무엇일까? 일단, 하나만 잊지 말자. 일단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차별이 없다는 것이다. 똑똑한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잘난 사람이나, 부자든 가난하든, 복음이 미치는 영향은 똑같다는 것이다. 똑똑하다고 복음을 더 잘 이해하거나 미련하다고 복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은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닌 까닭이다. 어쨌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는 것이다. 문제는 ‘받아들이느냐, 받아들이지 못하느냐’이다.
복음은 믿는 사람들을 구원하는 능력이다.
16.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이 복음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모든 믿는 사람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이 말을 뒤집으면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많다는 이야기이다. 왜 복음이 부끄러울까? 복음을 따라 산다는 것은 이 세상의 부와 명예를 포기하는 것이다.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가 되려고 하면 많이 가지고 될 말인가? 그런 것이 없어야 겨우 친구가 될까, 말까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다. 복음을 알면서도 세리와 친구 되기를 꺼린다는 것이다. 가난해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고, 명예가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긴다는 것이다. 우리는 복음 앞에서 정직해져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 세상의 부와 영광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 세상의 부와 영광과 함께 복음을 받아들이겠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자세야 말로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자세이다.
바울은 이제 복음이 무엇인가를 설명한다.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는 능력”이다. 정말 쉽고도 어려운 말이다. 무엇을 믿는 것일까? 위에서 설명한대로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대상화시켜서 믿는 것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믿음이란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 존재 자체에 대한 신뢰이다. 풀어 설명하자면, 하나님의 뜻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예수그리스도의 삶을 통해 우리에게 분명하게 전해졌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이유로 십자가에 달리신 분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그 사건으로 세상을 구원하신 것이다. 십자가의 의미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따지고 보면 그것도 하나다. 이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세상을 향해 하나님 스스로를 내어 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다. 자신을 내어주는 한이 있더라도 이 세상을 살려야겠다는 하나님의 의지가 십자가의 사건에서 결정적으로 나타났다. 그것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다는 것은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방법을 믿는 것이다. 그런 방법이 세상을 구원했다는, 또 할 것이라는 것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 믿음은 믿는 사람을 십자가로 향하게 한다. 믿음이 있는 사람이 걸어가는 십자가의 길은 어려운 길이 아니다. 신바람 나고 즐거운 길이다. 애써 걸어가는 길이 아니라 걷다보니 가게 되는 길이다.
믿는 사람이 걸어가는 길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던 그 길이고, 예수그리스도께서 가셨던 그 길이다. 믿는 사람의 길, 하나님의 길, 그리스도의 길은 다른 것 같지만 실은 하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걷는 길은 항상 불완전하다. 하나님처럼 완전하게 걷고 싶어도 그렇게 하질 못한다. 그래서 은총이라는 것이다. 완전하게 그 길을 걸어내지 못해도 그 길을 걷고자 하는 의지(믿음)만 있다면 이미 구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한번이라도 인생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았다면, 무슨 뜻인지 이해가 갈 것이다. 아무리 잘 살아보려고 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우리네 인생살이다. 아무리 하나님의 뜻에 맞게 살려고 노력해도 잘 안 되는 것이 삶이다. 그런 행위로는 아무도 하나님의 구원의 참여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려고 하는 의지만 있다면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복음이다.
하나님의 의
17.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 믿음으로 믿음에까지.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바 \"의인은 믿음으로 살 것이다\" 한 것과 같습니다.(사역)
복음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의가 없다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이다. 의는 정의, 공의를 말한다. 하나님의 정의, 하나님의 공의는 무엇일까? 잘 모르지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인간의 의를 먼저 살펴보자. 인간의 의는 도둑질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도둑질 이전에 도둑질을 하게 만드는 상황을 문제시한다. 무슨 말이고 하니, 도둑질을 하면 안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러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가서 가난한 사람들이 먹고 살 수 없게 된 상황이라면, 하나님의 의는 도둑질 자체보다 도둑질을 하게 만든 그 상황을 문제시 한다. 사람의 의는 능력이 있는 사람이 잘 사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의는 능력 없는 장애인이 훨씬 더 잘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정적으로 하나님의 의는 가난한 자들을 들어 부요한 자들을 부끄럽게 한다는 것이다. 인간의 의는 부요한 사람이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다. 그래서 부요한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받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부요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의 것을 빼앗은 것이다. 그래서 부요한 사람들이 가난한 사람들에게 재산을 양보한다면, 칭찬을 받을 사람은 부요한 사람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이다. 이런 것들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다.
따라서 복음은 단순한 도덕적 생활 이상이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도 중요하지만, 복음은 그것을 넘어서 있다.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가치에 중점을 두고 있는 휴머니즘은 굉장히 중요한 것이지만, 복음은 그보다 더 넓고 깊을 수밖에 없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삶이 중요하지만, 종교적인 삶은 그것을 넘어 선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어야 하고 신앙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하나님의 의가 복음 속에 나타나 있기 때문에, 믿음 외에는 복음을 파악할 수 없다. 복음에 이르는 것도 믿음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의에 의한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