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 2장
누가 누구를 심판한다는 말인가?
1. 그러므로 남을 심판하는 사람은, 그가 누구이든지, 죄가 없다고 변명할 수 없습니다. 남을 심판하면서 똑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 결국 남을 심판하는 것은 바로 자기 스스로를 정죄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이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공정하게 내리신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3. 이런 일을 하는 사람들을 심판하면서, 스스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런 사람이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있을 줄로 생각합니까?
4. 더구나 하나님께서 인자하심을 베푸셔서 사람을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신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풍성하신 인자하심과 관용하심과 오래 참으심을 업신여기기까지 한다니, 될 말입니까?
5. 그런 사람은 완고한 마음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 진노를 터뜨려 의로운 심판을 하실 그 날을 앞에 두고, 자기가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떤 세상인가? 바울이 보는 세상은 너무나도 정확하다. 하나님의 선하신 뜻에 의해 세상은 창조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인간들의 욕정에 의해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다.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차 있으며, 수군거리는 자요, 중상하는 자요,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요, 불손한 자요, 오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꾸미는 모략꾼이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신의가 없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로 가득 차 있는 세상이다.
이런 세상에서 누가 누구에서 나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바울 시대에는 율법을 가진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율법을 지킨다는 이유로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을 심판했다. 세상이 올바르지 않는데, 율법이라고 온당하겠는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라는 격이다. 오늘날에는 어떤가? 백성들의 고혈을 빨아 먹는 놈들이, 도둑질을 한 사람을 심판한다. 자기는 몇 백억을 해 먹어도 합법이라고 우기는 놈들이 좀도둑을 갖고 뭐라고 그러는 세상이다. 하기야, 전 국토에 삽질을 해 대면서 생태를 운운하는 세상이니, 더 말할 것이 뭐 있겠는가?
예나 지금이나 심판하는 자들은 힘이 있는 자들이다. 힘이 없는 사람들이 심판할 수 있는가? 절대 그럴 수 없다. 힘이 있고, 배웠다고 하는 놈들의 전유물이 바로 심판인 것이다. 이런 놈들이 심판하는 내용은 그대로 자신에게 몇 갑절이나 더해서 심판이 내려질 것임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더군다나 이런 놈들은 하나님의 힘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인자하셔서 오래 참으신다는 것도 모르고, 회개하기를 기다린다는 사실도 모른다. 믿는 것이라고는 자신의 힘뿐이다. 자신의 힘을 믿고 하나님을 업신여긴다. 자신의 힘으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미 이런 경험이 있다. 제 1,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인간의 힘으로는 보다 나은 미래를 건설하기는커녕 파멸만을 부를 뿐이라는 사실을 익혀서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럼에도 회개할 줄 모르는 족속들....... 자기 받을 진노를 스스로 쌓아 올리고 있다는 것을 알기나 할까?
인과응보의 하나님?
6. 하나님께서는 각자가 행한 대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사역)
7. 참으면서 선한 일을 하여 영광과 명예와 썩지 않을 것을 구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찾을 것이고, (사역)
8. 이기적인 욕심에 얽매여서 진리를 거스르고 불의를 따르는 사람에게는, 화와 분노가 있을 것이다. (사역)
9. 악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환난과 고통이 있을 것이요,
10. 선한 일을 하는 모든 사람에게는, 먼저 유대 사람을 비롯하여 그리스 사람에게 이르기까지,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을 것입니다.
11.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함이 없이 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교의 일관된 주제가 인간은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총으로 구원받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아니라 은총의 하나님을 믿는다. 그런데 여기 이해할 수 없는 문장이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이것이 뭔가? 은총의 하나님은 어디론가 없어지고 만다. 인과응보의 하나님이 등장한다. 7, 8절은 더 자세히 설명하는 것 같다. 정말 난처해진다.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까?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하나님은 인격이 아님을 다시 한 번 상기하자. 하나님을 인격으로 상정하는 것은 우리의 이해의 문제이지, 하나님의 문제는 아니다. 하나님을 인격으로만 생각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의 굴레에 걸려 들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어쨌든 바울은 하나님을 인간인 것처럼 설명하고 있다. “각 사람에게 그가 한 대로 되돌려 받을 것이다”(표준새번역) 인간이기 때문에 이런 설명이 가능한 것이다.
하나님은 인간처럼 이랬다, 저랬다 하는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 안에는 오직 하나만 존재할 뿐이고, 하나만 나타내 보이실 따름이다. 하나님에게 넘쳐흐르는 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만 넘쳐흐를 뿐이다. 그 하나의 넘쳐흐름이 우리네 인간들에게 둘로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오로지 존귀와 영광과 썩지 않을 것, 다시 말해 영원한 생명이 넘쳐 난다. 그것이 하나님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 썩을 것으로 다가 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은 하나임을 잊지 말자.
하나님은 차별함이 없는 분이다. 살아 있는 모든 존재에게 똑같이 다가오시는 분이다. 차별이 있는 것은 오히려 인간이다. 인간이 차별성을 지닐 때, 하나님의 차별 없음이 차별로 느껴지는 것뿐이다. 하나님의 하나가 둘인 인간들에게 둘로 보이는 것이다.
죄는 “하나”밖에 없다.
12. 율법을 모르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과 상관없이 망할 것이요, 율법을 알고 범죄한 사람은 율법을 따라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죄가 무엇일까? 성서에서 말하고 있는 죄는 “단수”임을 기억하자. 성서는 죄들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단 하나의 죄만 있을 뿐이다. 우리들의 세상에서 각종 죄들이 있을 뿐이다. 하나님 안에서는 오직 하나의 죄만 있다. 하나님 안에 있느냐, 밖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에서 죄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의 행위에는 ‘죄들’이 있다. 도둑질이 있고, 살인이 있고, 거짓말이 있다. 이런 것들을 인간들은 죄들이라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런 ‘죄들’을 문제시하지 않는다. 세상이 하나님을 떠나 있어서 악한데, 그 안에 무슨 선한 것이 있고 악한 것이 있겠는가?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이 있다고 하자. 그런데 이 가난한 사람에게 부자가 집을 사주었다고 하자. 이것이 선한 일인가? 우리들은 이런 일들을 선하다고 하지만, 선하지 않을 수도 있다. 가난한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성취해야 할 것들을 빼앗은 결과가 될 수도 있지 않은가.
따라서 그리스도교에서 죄의 문제는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상태의 문제이다. 죄는 어떤 상태에 놓여 있느냐와 관계가 있는 단어다. 하나님 안에 놓여 있느냐, 아니면 밖에 있느냐의 문제이다. 계속되는 하나님의 창조 안에 놓여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파괴하는 힘 아래 놓여 있느냐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인간들의 용어는 설 자리를 잃는다.
율법을 알고 모르고의 문제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알면 뭐하고 모르면 어떨까? 어차피 하나님 밖에 놓여 있는 것을........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죄된 상태에 놓여 있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인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정직해야 한다. 정직하다고만 하면 우리 모두가 죄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이다. 그것을 인식하는 순간 우리는 행위 하기를 중지할 수 있다. 행위를 중지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이신 하나님과의 “믿음”이라는 상태로 젖어 들 수 있는 것이다.
기왕지사 믿음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좀 더 가보기로 하자.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자명한 진리다. 그러나 믿음의 문제도 죄의 문제와 마찬가지로 상태의 문제다. 믿음을 행위의 문제로 생각하는 한, 그는 믿음에서 이미 멀어진 것이다. 믿음은 내가 믿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이라는 관계에 놓인 상태를 말한다. 내가 믿는다, 믿는다를 반복해서 믿음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믿음을 확신한다고 해서 믿음의 관계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바울이 말한 ‘믿음의 복종’에 이르기 위해서는 관계개선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현금(現今)의 우리나라교회 안을 들여다보면, 마음이 참람해 진다. 입으로는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고 앵무새 같이 되 뇌이면서 그 내용은 끝없이 행위를 강조한다. 정말 앞, 뒤가 맞지 않는다. 상태인 믿음을 행위로 설명한다. 그러니 믿음이 있느니, 없느니 말이 많다. 믿어야 구원받는다고 확성기까지 동원해 떠들어 대면서,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교회를 다녀야 하느니, 예배를 빠지면 안 되느니, 기도를 해야 하느니 참으로 말이 많다.
바울이 말하는 율법을 알면서도 심판을 받는 사람은, 오늘날로 보면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다. 교리 좀 안다고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교회를 다닌다고 심판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은가? 예수님을 믿는 행위로는 심판을 피할 방법이 없다. 정신 좀 차리자. 예수님과 하나님과 믿음의 관계를 형성해야만 심판을 면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마음의 율법
13.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사람이 의로운 사람이 아닙니다. 오직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의롭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14. 율법을 가지지 않은 이방 사람이, 사람의 본성을 따라 율법이 명하는 바를 실천하면, 그들은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됩니다.
15. 그런 사람은, 율법이 요구하는 일이 자기의 마음에 적혀 있음을 드러내 보입니다. 그들의 양심도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합니다.
16. 이런 일은, 내가 전하는 복음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내세우셔서 사람들이 감추고 있는 비밀들을 심판하실 그 날에 드러날 것입니다.
인간의 언어, 참으로 힘들다. 특히 마음을 언어로 나타낼 때에는 그 정도가 심하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마음을 설명해야 하는데, 의미 전달이 쉽지 않다. 집 나간 딸에게 아버지의 마음을 전해야 하는데 참으로 쉽지 않다. 이럴 때는 백 마디 말이 필요 없다. 그저 부둥켜 안아주는 것이 최상의 전달 방법이다. 바울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로마교회에게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그런데 멀리 떨어져 있어 안아줄 수 없다. 오직 활자에 의존해서 마음을 전달해야 한다. 우리는 더 힘들다. 이천년의 시간, 수 천 킬로미터의 공간을 넘어 바울의 마음을 읽어야 한다.
1장 18절부터 지금까지 바울의 마음을 정리해 보자. 사람들은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알 수 있도록 환히 드러내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자신들의 욕망 때문에 하나님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스스로 그 잘못에 대해 마땅한 대가를 받았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 없는 삶이다. 하나님 없는 삶은 1장 28절 이후로 아주 자세히 나온다. 그래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 앞에 설 수가 없다. 2장 7절과 10절에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이고, 하나님께서 영광과 존귀와 평강을 내리실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가능성이다. 지금 세상에 그런 사람이 존재한다는 말은 아니다. 12절에 율법을 알고도 심판을 당하고, 율법을 모르고도 심판을 당한다는 말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사도바울의 눈에는 가능성이 없는 세계이다. 이제는 도저히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구원을 받지 못한다. 1장 16절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능성이 있다. 그것은 믿음이다. 믿음이라는 행위가 아니라 믿음의 상태가 우리를 구원한다. 이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아니, 시작하는 것이다. 인간은 이 믿음의 관계에 들어가기 위해 자신을 개방해야만 한다. 이 개방의 시작, 이것이 행위라면 행위일 수 있겠다. 그러나 이마저도 그분께서 허락하시니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그 무엇이겠는가?
이런 이해를 전제하고 13절을 읽어 보자. 의롭게 되는 사람은 율법을 듣는 사람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사람이다. 문구에 매여서는 바울의 마음을 읽어낼 수가 없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세상이 썩어 있는데, 율법을 실천한다고 깨끗해지겠는가? 세상이 썩어 있다면 율법을 행하는 것은 썩은 세상을 더 썩게 하는 것아 아니겠는가? 이제 겨우 실마리를 발견했다. 여기에서 율법을 실천한다는 말의 의미는 주어져있는 율법의 문항이 아니다. 마음의 율법이다. 2장 29절에 “오히려 속사람으로 유대사람인 이가 참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에 따라서 받는 할례가 아니라 성령으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고 바울은 말한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율법은 조항의 율법이 아니라 마음의 율법이다. 이 마음의 율법은 다름 아닌 믿음이다.
마음의 율법은 조항의 율법을 알고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다. 하나님은 자유롭게 활동하시는 분이시다. 자유로운 그 분 앞에서는 조항 따위는 있으나 없으나 마찬가지이다.
유대사람은 오늘날 기독교인이다.
17. 그런데 스스로 유대 사람이라고 하면서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18. 그분의 뜻을 알며, 율법으로 가르침을 받아서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19.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20. 율법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으로 확신합니다.
21.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습니까?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합니까?
22.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합니까?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신전의 물건을 훔칩니까?
23. 율법을 자랑하면서도, 왜 율법을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합니까?
24. 성경에 기록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이방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한 것과 같습니다.
25. 율법을 지키면, 할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율법을 어기면, 받은 할례는 할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립니다.
26. 그러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율법의 규정을 지키면, 할례를 받지 않아도 할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 받지 않겠습니까?
27. 그리고 본래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율법을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율법 조문을 가지고 있고 할례를 받은 사람이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입니다.
28. 겉모양으로 유대 사람이라고 해서 유대 사람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살에다가 할례를 받았다고 해서 할례가 아닙니다.
29. 오히려 속이 유대 사람인 사람이 유대 사람이며, 율법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할례가 참 할례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습니다.
어려운 산을 하나 넘었다. 이제부터는 좀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다. 성서에 ‘유대사람’이라고 되어 있는 부분을 ‘기독교인’이라고 바꿔서 읽어 나가면 아주 재미있을 것 같다. 필자는 기독교인과 그리스도인을 구분해서 쓴다. 그리스도인은 제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지만 실은 우상을 섬기는 사람으로 구분하다. 애매한 부분은 애배하게 넘어가는 부분도 물론 있다. 자, 지금부터는 그런 심정으로 읽어 보자.
스스로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성서를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그분의 뜻을 알며, 성서로 가르침을 받아서 옳고 그른 것을 분간할 줄 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일수록 스스로 눈먼 사람의 길잡이요, 어둠 속에 있는 사람의 빛이라고 생각한다. 성서에서 모든 지식과 진리의 근본을 터득하였다고 하면서, 스스로 어리석은 사람의 교사요, 어린아이의 선생으로 확신한다. 그렇다면, 그런 사람이 남은 가르치면서도, 왜 자기 자신은 가르치지 않는가? 도둑질을 하지 말라고 설교하면서도, 왜 도둑질을 하는가? 간음을 하지 말라고 하면서도, 왜 간음을 하는가? 우상을 미워하면서도, 왜 교회의 물건을 훔치는가? 성서를 자랑하면서도, 왜 성서를 어겨서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가? 성서에 기록된 바, 너희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교회 안다니는 사람들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
어떤가? 너무나도 가슴이 아픈 말이 아닌가? 바울은 로마교회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에게 말하고 있음이 너무나도 자명하다. 계속해 보자.
성서의 말씀을 지키면 세례를 받은 것이 유익하지만, 성서의 말씀을 어기면 받은 세례는 세례를 받지 않은 것으로 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서의 규정을 지키면, 세례를 받지 않아도 세례를 받은 것으로 여김 받지 않겠는가? 그리고 본래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성서를 온전히 지키는 사람은 성서의 뜻을 가지고 있고, 세례를 받은 사람이면서도 성서를 지키지 않는 사람을 정죄할 것이다. 겉모양으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해서 기독교이 아니요, 겉모양으로 세례 의식을 치렀다고 해서 세례가 아니다. 오히려 속이 그리스도인 사람이 그리스도인이며, 성서의 조문을 따라서가 아니라, 성령을 따라서 마음에 받는 세례가 참 세례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칭찬을 받는다.
거의 두 페이지를 날로 먹었다. 미안한 마음에 사족 하나만 달기로 하자. 여기에서 말하는 핵심적인 사람은 기독교인 전체라기보다는 지도자급의 목사나 장로들일 것이다. 필자도 목사의 한 사람으로 바울의 비판을 벗어날 수 없다고 본다. 정신 좀 차리자. 모르는 사람은 그렇다고 쳐도, 좀 안다고 하는 사람들 말이다. 제발 공부 좀 하자. 어중간하니까 문제가 되는 것 아닌가? 차라리 모르면 모른다고 해야 옳지 않겠는가? 이렇게 말하면 또 어떤 사람들은 이제부터 모른다고 해야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모른다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다. 최소한 목사자리, 장로자리는 반납하면서 모른다고 해야 하지는 않을까? 최소한, 밥 먹고 살기 위해 목사하지 말자. 높은 자리 차지하기 위해 장로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