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맹이교회 / 롬3장 강해

로마서 3장

 

그리스도인의 특권(?)

 

1. 그러면 유대 사람의 특권은 무엇이고, 할례의 이로움은 무엇입니까?

2. 모든 면에서 많이 있습니다. 첫째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그들 가운데서 얼마가 신실하지 못했으면, 어떻습니까? 그들이 신실하지 못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없어지겠습니까?

4. 그럴 수 없습니다.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이지만, 하나님은 참되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바 \"주께서 말씀하실 때에 주님의 의로우심이 드러나고, 주께서 판단을 받으실 때에 주께서 이기십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5. 그런데 우리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한다면, 무엇이라고 말하겠습니까? 우리에게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다는 말입니까? (내가 사람들이 말하는 방식으로 말합니다마는,)

6.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사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세상을 심판하실 수 있겠습니까?

7. 또 \"나의 거짓으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서, 그분에게 영광이 돌아간다면, 왜 내가 여전히 죄인으로 판정을 받아야 하느냐?\" 하고 물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8. 그러나 \"좋은 일이 생기라고, 악한 일을 하자\" 하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그런 말을 한다고 비방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심판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러면 유대인의 특권은 무엇이고, 할례의 이로운 점은 무엇이 있을까? 바울은 모든 면에서 많이 있다고 한다. 예의상 하는 말로 들려진다. 많이 있다고 해 놓고 실제로는 하나만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그렇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지적이다. 오늘날 우리가 성서를 읽을 수 있었던 것은 기나긴 세월동안 이스라엘 백성이 성서를 수호했음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그것만큼은 감사하고, 참으로 고맙다.

문제는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이다.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인쇄술이 발달하고, 컴퓨터의 저장 능력이 거의 무한대가 되어 버린 지금에서 기독교인들이 하는 일이 무엇인가?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보다 우위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유대인들은 성서라도 지킨 공헌이 있다고 하지만, 기독교인의 공헌은 무엇일까?

하나님의 사랑은 한이 없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배신해도 하나님의 신실은 계속된다. 이것을 알면 하나님을 배신할 수 있을까? 몰라서 배신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면, 하나님의 신실을 역이용하는 인간의 간교함 때문에 하나님을 배신하는 것이 아닐까?

인간의 간교함은 정말 놀랍다. 인간들의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낸다는 논리를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이런 일이 어디 이천년 전 뿐일까? 오늘날에는 이런 일이 없는가? 인간이 하나님의 의를 드러낼 방법이 있는가? 정말 교만한 생각이다.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고 별 짓을 다한다. 특히 하나님을 찬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나이트클럽처럼 꾸며 놓고 사람들을 자아도취에 빠지게 해 놓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말 아니다. 뿐만 아니다. 오늘날 하나님의 영광이 선포되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정말 영광을 받는 곳이 어디 한 곳이라도 있는가? 다, 자기네들이 영광을 독차지하고 있지 않는가? 미쳤다. 정말 돌아버린 세상이다.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이 만들어 놓은 신을 찬양하고 있을 뿐이다. 아무 생명력도 없는 자신들의 생각을 높이고 있는 것이다. 제발 정신 좀 차리자.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하나님은 하나님 스스로 영광스럽게 하신다.” 단지 인간은 끄트머리에서나마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면 감사할 따름이다.

하나님은 심판자이시다. 심판은 ‘잘라냄’이라기보다는 ‘가득 채움’이다. 잘나냄의 심판에서는 불의에서 의가 나온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가득 채움이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불의(不義) 하나라도 들어올 자리가 없다.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사고는 하늘나라에서 설 자리를 잃는다. 지금 우리나라의 경제적 번영(?)을 생각해 보라! 결과적으로 좋았단다. 그리고 70년대의 망령이 되살아나고 있는 실정이다. 망조(亡兆)다. 정신이 썩어 빠져 있으니 이런 생각들을 한다. 절대로 하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사람은 모두 죄인이다.

 

9.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 유대 사람에게 더 나은 것이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다같이 죄 아래에 있음을 우리가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10.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1. 깨닫는 사람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사람도 없다.

12. 모두가 곁길로 빠져서, 쓸모가 없게 되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13.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14.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15. \"발은 피를 흘리는 일에 빠르며,

16. 그들이 가는 길에는 파멸과 비참이 있다.

17. 그들은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한다.\"

18. \"그들의 눈에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빛이 없다.\"

19. 우리는, 율법에 있는 모든 말씀이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말한 것임을 압니다. 그것은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을 하나님 앞에서 유죄로 드러내시려는 것입니다.

20. 그러므로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인식할 뿐입니다.

 

T.V를 보거나, 신문 각종 매체에서는 선한 사람 찾아낸다고 앞 다퉈 경쟁을 한다. 특히 연말이면 더 극성이다. 누가 얼마를 기부를 했느니, 누가 무슨 일을 했느니 난리법석이다. 기부를 하건, 좋은 일을 하건 다 좋다. 그러나 잊지 말아야 할 사실 하나가 있다. 도둑놈의 소굴에서 좋은 일을 한다는 것은 결국 도둑질에 기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앞서서 죄는 행위가 아니라 상태라고 했다. 죄라는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들이 선한 행위를 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 결국에는 죄라는 상태를 더욱더 부풀리는 행위 아닌가? 성서는 참으로 묘한 말을 우리에게 선포한다. “지극히 작은 자에게 한 것이 나에게 한 것이다.” 이 말이 진리라고 한다면, 이 행위의 영광은 작은 사람에게 있다는 것이다. 작은 사람에게 한 사람의 행위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작은 사람 때문에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인터넷을 보니, 불쌍한 사람 이야기를 듣고 대통령이 눈물을 흘렸단다. 정말 불쌍하다. 자기가 하는데 연극인지 모르고 있으니, 이보다 더 불쌍한 일이 또 있을까? 정말 누가 불쌍한지 모르겠다. 해마다 북한을 포함해서 가난한 사람들을 돕느니, 마느니 말이 많다. 돕건 말건 반드시 잊지 말아야 할 것 하나가 있다. 우리가 그들을 돕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돕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걸 알아야 내가 죄인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앎의 수준을 넘어서서 각(覺)해야만 한다.

죄라는 상태에 놓여 있는 인간들이 “도토리 키 재기”를 한다. 오늘날에는 정도를 넘어 서 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네, 못 받네 참으로 말들이 많다. 이 말이라도 제대로 이해하고 말하면, 그나마 대화는 될 성 싶다. 예수라는 막대기 하나 장만하고 그것을 믿으라고 강조하고, 그것을 믿지 않으면 지옥을 간대나, 어쩐다나....... 죄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놈들이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모르겠다. 앞으로 계속할테니 이 정도만 하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바울은 성서를 근거로 의인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입증하려고 애쓴다. 율법을 절대라고 믿는 놈들에게는 그것이 특효약일까? 오늘날에 성서를 절대라고 믿는 기독교인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궁금하다. 성서를 이상하게 해석한다면 이단 취급이나 당하지 않을까?

전부 해석을 하자니 별로 재미없을 것 같다. 나머지는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하나만 보기로 하자.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다. 혀는 사람을 속인다.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다. 입에는 저주와 독설이 가득 찼다.” 이렇게 말하니, 입에 상스러운 욕지거리를 한다고 생각하면 절대 오산(誤算)이다. 혀에서 나오는 소리는 달콤한 것이다. 달콤하고 명분 있는 소리가 사람을 죽이는 소리라는 것이다. 인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와 평화의 이름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가지 않은 전쟁이 있던가를 스스로에게 물어 보기 바란다.

율법에 관한 바울의 표현,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부분 중 하나다. 그 사람들은 이것을 구약으로는 구원을 못 받고, 신약(예수그리스도)이라야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어리석고 안타까운 일이다. 율법이라는 말을 바울은 지금 고착화된 법을 가리키는 것이다. 신약이든, 구약이든 고착화되면 다 율법이다. 심지어 하나님도 살아계신 분이 아니라 고착화된 하나님은 율법이 되고 만다. 하나님도 그러한데, 우리가 가지고 있는 신약성서인들, 그 비판에서 벗어날 수 있는가?

고착화된 것의 역할은 인간이 죄 아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래서 고착화된 율법의 빛 아래에서는 발버둥 쳐봐야 죄의 골만 더 깊어질 뿐이다. “영은 살리고 문자는 죽인다”고 했다. 죽은 것은 살리지 못한다. 살아있는 것이 살릴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라고 했던가.........

 

 

믿음은 행함이 아니다.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는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한 것입니다.

22. 하나님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옵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아! 율법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단다. 천박한 자들은 이 말을 오해했고, 신실한 자들은 드디어 해방의 문이 열린 것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어찌할 수 없었던 우리들의 죄,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우리를 더욱 구렁텅이로 몰아 넣어버리는 암흑의 세계에 드디어 서광이 비추인 것이다. 이 대목에서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마음에 담아 드리지 않을 수가 없다. 너무나도 감사하고 너무나도 기쁘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모든 믿는 사람에게 온단다. 개역성서는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라고 번역을 했다. 너무나 중요한 대목이기에 그리스 원어를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δικαιοσ?νη δ? θεου / δια π?στεω? ?ησου Χριστου / ε?? π?ντα? το?? πιστε?οντα? / ο? γ?ρ ?στιν διαστολ?” (하나님의 의,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믿는 모든 사람에게, 거기에는 아무 차별이 없다.) 이 문장을 잘 엮어보면 이렇게 된다. “하나님의 의는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을 통하여 오는데, 믿는 모든 사람에게 아무 차별이 없다”

잘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는 것 같아도 큰 차이가 있다. 하나님의 의가 예수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믿음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번역이 반드시 맞다는 것도 아니도 기존의 번역이 틀리다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한쪽만 너무 강조해서 대상으로서의 믿음이 너무 지나치게 강조되었다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실을 생각하면 기존의 번역이 틀린 번역이라고 고집을 하고 싶은 생각마저 드는 대목이다.

어쨌든 지금부터 이 믿음을 설명해 보기로 하자. 먼저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가 아님을 분명히 해야 한다. 지금부터 바울은 행위에 대한 ‘반대말’로 믿음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무언가를 믿을 때 ‘내가 믿는다’고 말한다. 그런데 ‘내가 믿는다’고 말해 버리면 바울의 말을 뒤집는 결과가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말에는 이런 표현이 낯설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힘들다. 그러나 내가 믿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런 표현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지만, 믿음 속에 ‘놓여 지는 것’이다. 능동태도 아니고 수동태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노파심에 다시 한 번 짚고 넘어가자. 이천년 기독교 역사상 이처럼 왜곡된 단어도 없다. 초대교회부터 지금까지 이 문제 때문에 단 한 번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바울이 왜곡되고, 루터가 왜곡되었던 문제다. 오늘날에도 여전하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고 강단에서 수없이 외쳐대지만, 그 내용을 살펴보면 믿음이라는 행위를 해야만 구원받는다는 뜻이다. 믿음을 가지고 행위를 해야만 구원받는다는 이중의 모순 속에 놓여 있는 것이 한국교회 현실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행위의 용어가 아니라 상태의 용어이다. 이를테면 내가 아들을 믿는다고 하자.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아들을 믿는다고 말하지 않아도 믿음이라는 상태는 유지되는 것이다. 오히려 믿는다는 말을 할 때 믿음의 관계는 부서지고 있다는 반증이 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 믿음은 내가 의지가 있기 때문에 성립되는 것이 아니다. 내 의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형성되어지는 것이다. 수동태임을 다시 한 번 기억하자. 젖먹이 아이가 ‘내가 엄마를 의지해야지’라고 생각하면서 믿음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저절로 엄마와 믿음이라는 관계가 형성이 되는 것이다.

이 믿음은 어디서 오는가? 엄마가 절대적으로 아이를 신뢰해 주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 아닌가? 우리와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그 믿음은 의심해야 한다. 바울도 말했지만 하나님의 신뢰는 깨지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면, 문제는 우리 쪽에 있는 것이다. 젖먹이를 보듬고 있는 엄마처럼 하나님은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신실을 보이지만, 우리가 그 신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다. 젖먹이가 엄마 품을 떠날 때면 자기가 잘나서 큰 것처럼 생각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의 신실을 망각하고 잊어먹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친절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망각을 아시고서 예수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신실을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이셨다. 이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급선무다. 알아차리기만 하면 믿음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진 하나님의 신실, 이 신실을 바울은 어떻게 알아차렸는가? 만남을 통해서다.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그리스도와 만난 것이다. 만나지 않고 믿음이라는 것이 생길 리 만무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교는 체험의 종교라고 하지 않던가?

어떻게 만난 것일까? 그 분이 친히 찾아와 주셔서 만난 것이다. 인간들의 만남은 내가 찾아가서 만나기도 하지만, 그리스도교의 만남은 우리 쪽에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 분께서 찾아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은혜이고, 주어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는 그 분을 찾아가려고 애를 쓴다. 우리 쪽에서 시도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말이다. 우리 쪽에서 찾아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면, 인간이 이렇게 죄에 빠져 허우적거리지 않아도 되었다. 찾아갈 수가 없으니 세상에는 의인이 하나도 없게 된 것이 아닌가?

여기서 언어의 한계에 봉착한다. 그러면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는 것인가? 그렇다,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하고 있지 않는가? 그것 역시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무언가를 하고 있다는 것은 행함이 아니라 ‘귀속’이다. 찾아오시는 그 분을 향하여 가만히 서 있는 정도이다.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겨우 서 있는 정도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암탉의 날개 밑에 우리 자신을 편안히 안기게 해야지, 자기 자신의 믿음의 교만 가운데서 뛰쳐 날아가서는 안 된다. 솔개가 눈 깜짝할 사이에 너희를 삼켜 버릴 것이다”(루터)

 

 

더 이상의 피는 필요 없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합니다.

24. 그러나 사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을 힘입어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습니다.

25. 하나님께서 이 예수를 사람에게 속죄제물로 주셨습니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사람들이 이제까지 지은 죄를 너그럽게 보아 주심으로 자기의 의를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6.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가운데, 지금 이 때에 자기의 의를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라는 것과 예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의롭게 하여 주신다는 것을 나타내시려는 것입니다.

27. 그렇다면, 사람이 자랑할 것이 어디에 있습니까? 전혀 없습니다. 어떠한 법으로 의롭게 됩니까? 행위의 법으로 됩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법으로 됩니다.

28.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는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심을 받는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29. 하나님은 유대 사람만의 하나님이십니까?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시는 분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이방 사람의 하나님도 되십니다.

30. 참으로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31. 그러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폐합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웁니다.

 

그리스도를 만났다고 그 분을 다 아는 것도 아니다. 이제 그 분과 관계를 시작했을 뿐이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을 생각해 보라! 한번 만났다고 상대방을 다 아는가? 평생을 만나도 모르는 것이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한번 만났어도 다 알기도 한다. 이것이 신비다. 아무것도 모르지만 다 안다는 것이다. 알지만 모르고, 모르지만 안다.

그 신비를 표현한 바울의 말을 들어 보자. 예수님을 속죄제물로 이해하고 있다. 인간과 하나님의 벌어질 대로 벌어진 그 사이를 메우기 위해 그리스도를 속죄제물로, 인간이 아닌 하나님께서 주셨다는 것이다. 유대인이었던 바울은 이 표현보다 더 적절한 것은 없었을 것이다.

“누구든지 그 피를 믿으면 속죄함을 받습니다”. 피 자체에 무슨 마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 피의 의미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예수그리스도께서 흘리신 십자가상의 피, 그것의 의미 말이다. 고차원의 믿음이다. 그러나 쉬운 믿음이다.

유대교에서 제물을 바치는 것은 죄의 사함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를 지으면 얼마간의 제물을 바쳐야만 죄의 사함을 받을 수 있다. 그런데 죄라는 상태에 놓여지게 된 인간은 제물을 구할 수도, 바칠 생각도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직접 나선 것이다. 하나님께서 친히 제물도 마련하시고 제단에 바치셨다. 우리는 그런 하나님의 행위에 단순한 응답으로서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말이다. 우리가 우리의 죄로 인해 제물을 바칠 필요가 없어졌다. 단순한 인정만 남은 셈이다. 그래서 은혜인 것이다.

인간은 제물을 마련하지 못하고, 하나님께서 마련하셨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이후 인류역사는 대속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다. 인간은 제물을 구할수도 바칠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서로를 제물로 바치기 위해 노력했다. 피비린내나는 인류의 역사가 그 사실을 증명한다. 저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정의의 이름으로 악마의 제단에 제물을 바쳤던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로만 구원을 받는다”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더 이상 예수그리스도의 피와 같은 희생은 중지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와 똑같은 제물은 더 이상 필요 없다는 말이다. 다른 피로는 절대 구원받지 못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를 보려는 인간들의 행동은 악마의 주술,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예수그리스도의 피로 우리는 더 이상 피를 흘릴 필요가 없다.”

바울의 설득은 정말로 끈질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토록 집요한 바울의 설득을 이해할 수 없었을까? 바울이 말을 잘 못해서, 아니면 사람들의 이해력이 떨어져서.......... 둘 다 아닌 것 같다. 하늘의 신비를 더 이상 어떻게 설명할까? 비행기로 하늘을 날게 하고, 무한대의 수치를 계산할 만큼의 인간의 두뇌가 이정도도 이해하지 못할까? 그러면 하나가 남는다. 관점이 다르거나 관심이 없어서다. 관점이 다르니 관심이 없고, 관심이 없으니 관점이 다른 것이 아닌가? 하늘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의 이익에만 골몰하는 인간들, 이들이 바울의 끈질긴 설득을 필요없게 만들었다.

“하나님은 할례를 받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시고, 할례를 받지 않은 사람도 믿음으로 의롭게 하여 주십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바울의 절규다. 이 절규를 조금만이라도 이해했다면, 십자군은 없었을 터인데, 마녀 사냥도 없었을 것이고, 중동의 종교전쟁은 물론 아메리카 대륙의 대학살도 없었을 터인데......... 그런데도 계속되고 있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걸프전과 이라크전을 통해서......... 그러지 않아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해 준다는 사실, 제발 이제는 좀 알았으면 좋겠다. 그랬으면 좋겠다.

교회라는 곳이라도 알았으면 좋겠는데, 다 한통속이다. 알고 보면, 피흘림의 역사 뒤에는 항상 교회가 있었다. 교회가 승인했고, 교회가 그 열매를 따 먹었다. 지금도 여전히 선교라는 미명하에 그 열매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예수님의 피를 노리는 식인마들, 그들을 키우고 있는 것이 현실의 교회임을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아! 너무 아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인 우리의 교회들........

이제, 제발 좀 알았으면 좋겠다. 할례를 받든, 받지 않든 구원해 주신다는 사실 말이다. 교회를 다니면 어떻고, 교회를 다니지 않으면 어떤가? 예수라는 이름을 모르면 어떻고, 알면 어떤가? 그런 것, 이런 것 다 집어 치우자. 제물은 이미 바쳐졌다. 우리는 대속 제물의 의미를 알고, 그 의미를 따르면 되는 것이다. 평화로움 속에서 하나님을 바라보고 서 있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

문동수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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