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목 : 간절한 기도
본 문 : 삼상 1:11
찬 송 : 3, 406, 479
본문의 브닌나는 임신치 못한 한나를 계획적으로 괴롭히기 위해 그녀를 격동시켰습니다. “(삼상1:6) 여호와께서 그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하여 번민케 하더라” 여기서 격동하다(카아스)란 이스라엘이 우상 숭배를하여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태도와 유사합니다. “(신31:29) 내가 알거니와 내가 죽은 후에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내가 너희에게 명한 길을 떠나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여 너희의 손으로 하는 일로 그를 격노케 하므로 너희가 말세에 재앙을 당하리라 하니라” 다시 말해, 이 말은 상대가 가장 싫어하는 것만 골라서 일부러 행동하는 야비한 짓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남으로부터 수모를 당하여 눈물을 흘리기도 하지만, 한나의 경우는 아들없는 설움에서 비롯된 “피눈물”을 흘렸습니다. 본래 인간은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지 않고서는 남의 한숨어린 사정을 이해하기 힘들지만, 우리는 마디마디에 한맺힌 사연을 하소연하는 한나의 기도를 통해, 그녀의 간절한 소망을 살필 수 있습니다.
1. 돌아보시고.
돌아보다(라아)란 기르다“(렘23:4) 내가 그들을 기르는 목자들을 그들 위에 세우리니 그들이 다시는 두려워 하거나 놀라거나 축이 나지 아니하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먹이다.“(창29:7) 야곱이 가로되 해가 아직 높은즉 짐승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뜯기라”로 번역되는 말이며 명사로는 양을 치는 목자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은 양치기가 밤을 지새우며 양들을 돌보는 것과 같이 아주 자상하게 보살핀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목자들은 맹수로부터 습격을 피하기 위해 양의 울타리를 항상 튼튼하게 보존해야 할 뿐만 아니라, 영양가 많고 맑은 시냇물이 흐르는 푸른 초장으로 양을 이끌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습니다. 또한 가시덩쿨이나 험준한 계곡을 빠져나가다 다친 양들의 상처에 기름을 발라주는 정성도 있어야 합니다. 마치 당시 한나는 덫에 걸려 꼼짝도 할 수 없는 가련한 양과 같았습니다. 이 양이 살려달라고 호소할 곳은 어디겠습니까? 목숨을 노리는 사자이겠습니까? 오로지 품삯에만 관심있는 삯군일까요? “(요10:13) 달아나는 것은 저가 삯군인 까닭에 양을 돌아보지 아니함이나” 단연코 아닙니다! 재산을 탕진하고 돌아온 아들을 위해 축제의 자리를 베푸셨던 사랑의 아버지. 이 아버지를 의지하여 한나는 “돌아 볼”것을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눅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2. 생각하시고.
생각하다(자칼)는 원래 찌르다(다칼)란 개념과 비슷합니다. “(전12:11) 지혜자의 말씀은 찌르는 채찍같고 회중의 스승의 말씀은 잘 박힌 못 같으니 다 한 목자의 주신 바니라” 그래서 이용어는 어떤 사람이 무의식 상태에서 아무런 반응을 나타내지 않을 때 날카로운 송곳이나 바늘로 살짝 찔러 의식을 되찾게 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만일 아주 절친하게 지내왔던 두 사람이 헤어졌다가 20년만에 우연히 마주쳤는데 얼굴을 서로 바라보면서도 알아챌 수 없다면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또한 뱃속에 치명적인 병균이 들어가 사람을 거의 죽게 하는데도 의사가 정확한 진찰을 하지 못한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겠지요. 그래서 한나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절박한 사정을 세세하고 면밀하게 굽어 살펴주시도록 기도합니다. 이같은 태도는 불의한 재판관에게 소원을 말하는 과부의 열심과도 흡사합니다. “(눅18:3)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있어 자주 그에게 가서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 주소서 하되” 그러므로 성도는 권투 선수가 잽(jab)을 자주 날리듯, 하나님에 대해 끈질기게 붙들고 늘어져야 합니다. 야곱처럼 축복을 내리지 않으면 잡은 손을 결코 놓지 않겠다는 결의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창32:26) 그 사람이 가로되 날이 새려 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가로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3. 잊지 마소서.
잊다(솨카흐)란 “못보고 빠뜨리다” “게을리 하다”란 뜻인데, 마땅히 가져가야 할 패물이나“(렘2:32) 처녀가 어찌 그 패물을 잊겠느냐 신부가 어찌 그 고운 옷을 잊겠느냐 오직 내 백성은 나를 잊었나니 그 날 수는 계수할 수 없거늘” 지켜야 할 언약 “(신4:23) 너희는 스스로 삼가서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와 세우신 언약을 잊어버려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금하신 아무 형상의 우상이든지 조각하지 말라.” 등을 망각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인간이 과거에 경험했던 쓰라린 좌절이나 슬픔을 오랫동안 기억한다면 신경성 노이로제에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진 인간, 하나님의 기억에서 제외된 인간은 실로 소망이 없는 방황자에 불과합니다. 바람처럼 이리저리 헤매는 부랑자를 보십시오! 그 사람에게서 무슨 희망이나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렇듯 인간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기억하심은 절대적입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지옥의 한복판에 내려 갈지라도 하나님이 감찰하시길 원했습니다. “(시139:8)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
성도 여러분! 우리는 매일 주님께 어떤 유형의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까? 조금 기도해 본 뒤에 응답이 없다고 곧 포기하지는 않습니까? 한나처럼 목자되신 여호와의 사랑을 얻기 위해 끈질기게 기도합시다! 물질적인 축복만을 구할 것이 아니라, 나의 헐벗은 영혼을 살펴달라고 간절히 부탁합시다. 그러면, 영적 아버지인 하나님께서는 간구하는 영적 자녀의 여러운 형편을 생각하시고 풍요로운 사랑의 손길을 베푸실 것입니다.
제 목 : 엘리 아들들의 불신앙
본 문 : 삼상 2:12-17
찬 송 : 9, 305, 334
신자들은 자신의 자녀들에게 먼저 올바른 신앙을 세워주도록 힘써야 합니다. 그렇지만 신앙 교육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닙니다. 그래서 대대로 예수를 잘 믿는 집의 자녀가 배교의 길로 들어서기도 하는 것입니다. 세속적인 가정은 세상의 즐거움만 추구합니다. 그러나 욥처럼 견건한 가정은 “향락”속에 도사리는 죄악을 두려워 합니다. “(욥1:5) 그 잔치 날이 지나면 욥이 그들을 불러다가 성결케 하되 아침에 일어나서 그들의 명수대로 번제를 드렸으니 이는 욥이 말하기를 혹시 내 아들들이 죄를 범하여 마음으로 하나님을 배반하였을까 함이라 욥의 행사가 항상 이러하였더라” 이처럼 두 유형의 가정은 삶의 양식이 전혀 다릅니다. 경건한 가정은 아침마다 송이꿀보다 더 맛있는 영의 양식을 먹으므로 “(시19:10)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 주님의 말씀을 그들의 삶 속에 적용히킵니다. 그러나 불경건한 가정은 하나님의 말씀을 한낱 보잘것없는 골동품처럼 취급합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불경건한 가정 교육의 부재로 인해 발생한 불신앙을 바라보고 이러한 실패한 실패한 가정의 비극에서 벗어나는 지혜로움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그러면 자녀 교육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제사장 엘리의 자녀들이 행한 불신앙을 살펴봅시다.
1. 불량자였습니다.
“불량자”(벨리야알)란 “없음”(벨리)과 “이익”, “유익”(야알)의 합성어로 “가치없음”, “도움이 되지 않음”, “열매가 없음”을 뜻합니다. 이 말은 악함“(잠6:12) 불량하고 악한 자는 그 행동에 궤휼한 입을 벌리며”, 파멸“(나1:1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들이 비록 강장하고 중다할지라도 반드시 멸절을 당하리니 그가 없어지리라 내가 전에는 너를 괴롭게하였으나 다시는 너를 괴롭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이란 의미로도 사용되었습니다. 원래 엘리의 두 아들은 제사장직을 수행하기 위해 성결한 존재로 부름받았습니다. “(민8:11)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요제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로 여호와를 봉사케 하기 위함이라” 그러나 자신들의 행악으로 말미암아 열매맺지 못하는 무가치한 존재로 전락했습니다. 자신들의 불신앙적 삶은 그들의 존재 가치를 살실케 했습니다. 이처럼 불신앙은 우리들의 삶에 비극을 던져줍니다. 이런 삶은 어느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물론 남들에게 인정받으면서 세상을 살아갈 때에 힘을 얻습니다. 그러나 인정받지 못하면 절망하게 됩니다. 이와 같이 불신앙은 죄악을 범하는 그것 자체에서 끝나지 않고 삶의 파멸을 초래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자녀를 세상에서 의미있는 존재가 되게 하려면 먼저 성결한 생활의 열매를 맺도록 해야 합니다. 그리할 때 우리의 자녀는 세상의 빛이 될 것입니다.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2. 여호와를 알지 못했습니다.
“알다”(야다), “발견하다” “어떤 사람과 친숙하다”를 뜻합니다. 여기서 “알다”라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녀가 성적 관계를 통해 두 몸이 하나가 될 때 서로에 대해 친밀하게 알 듯 구체적으로 경험해 얻어진 지식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가정교육을 단순한 지식 전달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삭은 아버지의 믿음을 이어받았기에 아들 야곱을 밧단 아람으로 보내어 아내를 취하도록 했습니다. “(창28:2) 일어나 밧단아람으로 가서 너의 외조부 브두엘 집에 이르러 거기서 너의 외삼촌 라반의 딸 중에서 아내를 취하라” 디모데는 어머니 유니게의 거짓없는 믿음을 직접 체득하였기에 바울의 기쁨이 되었습니다. “(딤후1: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이처럼 참된 신앙을 전수하는 가정은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져 줍니다. 그러나 엘리 가정은 영적으로 타락하여 이스라엘 백성에게 비극을 안겨 주었습니다. “(삼상4:11) 하나님의 궤는 빼앗겼고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죽임을 당하였더라” 또한 엘리의 자녀들은 하나님을 경시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자녀교육을 교사들의 손에만 맡겨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도록 자녀들을 지도해야 합니다. “(신6: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신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신6:6) 오늘날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신6: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신6: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를 삼고 (신6: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 예수님처럼 육체와 영혼이 튼튼하게 자라도록 가르쳐야 합니다. “(눅2:52)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그리하여 하나님과 사람에게 모두 인정받는 자로 육성해야 합니다.
3. 제사를 멸시했습니다.
“제물”(민하)은 주로 왕이나 다른 상관으로부터 총애를 받고자 할 때에 드렸던 예물이었습니다. 여기서 제물이 조공이라는 의미를 지닌 것은 하나님을 생사 화복을 주관하는 완으로 생각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엘리의 두 아들은 제물을 멸시했습니다. “멸시하다”(나아츠)란 “거절하다” “저주하다”를 뜻합니다. 따라서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왕으로 겨기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졌던 제물의 가치를 거절하며 저주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제물은 전혀 신성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욕심을 채우기 위한 잿밥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경건한 척하며 제사장의 직분을 유지했습니다. 이는 마치 영생을 소유하지 못한 자가 교회를 위해 봉사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이들은 자신의 명예를 나타내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도용합니다. 그러나 그 명예는 오래가지 못합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엘리 가정에게 무서운 심판을 내린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들은 자녀들을 어렸을때부터 신앙으로 철저하게 훈련시켜야 합니다. “(잠13:24)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 실패한 가정 교육이 빚은 비극적인 결과를 확인했습니다. 여러분 모두는 하나님으로부터 맏은 의의 용사로서 악을 물리칠 책임을 부여받았습니다. 그런데 바로 여러분의 자녀가 악을 조장하는 자는 아닙니까? 여러분 자녀를 다시 의의 용사로 되돌이키십시오. 이것이 바로 부모된 우리에게 부여된, 육적 양육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영적 책임입니다.
제 목 : 엘리 제사장의 영적 암흑
본 문 : 삼상 3:1-2
찬 송 : 11, 95, 259
인간의 몸은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기능이 약화됩니다. 그러나 신앙은 결코 쇠퇴해서는 안됩니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신앙인의 속은 날로 새로워야 하는 것입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모세는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을 때에도 그 눈이 흐리거나 기력이 쇠하지 않았다는 말로 그의 육체의 강건함과 신앙의 힘을 암시했습니다. “(신34:7) 모세의 죽을 때 나이 일백 이십세나 그 눈이 흐리지 아니하였고 기력이 쇠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런데 엘리 제사장은 나이가 들자 눈이 어두워졌고 몸이 약해져서 누워서 생활했습니다. 영적으로도 심히 쇠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그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대화가 단절되어 하나님의 말씀을 분별할 수 없었습니다. “(삼상3:5) 엘리에게로 달려가서 가로되 당신이 나를 부르셨기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 가로되 나는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다시 누우라 그가 가서 누웠더니” 그는 기도의 호흡을 멈춘 신자와 같이 무기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독수리가 비상하는 것처럼 새 힘을 얻습니다.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묵상함으로 엘리 제사장이 경험한 영적 무기력을 물리치고 강건한 삶을 유지해야 합니다. 당시 엘리 제사장의 영적 상태를 살펴봅시다.
1.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함.
“희귀하다”(야칼)란 귀한“(왕상5:17) 이에 왕이 영을 내려 크고 귀한 돌을 떠다가 다듬어서 전의 기초석으로 놓게 하매”, 보배로운“(대하32:27) 히스기야가 부와 영광이 극한지라 이에 은금과 보석과 향품과 방패와 온갖 보배로운 그릇들을 위하여 국고를 세우매”을 뜻하며, 보석을 수식할 때 쓰였습니다. “(삼하12:30) 그 왕의 머리에서 보석 있는 면류관을 취하니 그 중량이 한 금 달란트라 다윗이 머리에 쓰니라 다윗이 또 그 성에서 노략한 물건을 무수히 내어오고” 물론 보석은 희소성의 정도에 따라 그 가치가 결정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호와의 말씀은 모든 사람이 풍부히 섭취할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여호와의 말씀은 사막의 생수와 같기 때문에, 말씀의 기갈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런데 먹을 양식이 부족하면 배가 허기져 대용식을 찾게 되듯, 이스라엘 백성은 말씀이 희귀하자 주변의 것을 바라보았습니다. 정치적으로는 왕을 구해 강한 민족을 세우려 했으며 “(삼상9:19) 사무엘이 사울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선견자니라 너는 내 앞서 산당으로 올라가라 너희가 오늘날 나와 함께 먹을 것이요 아침에는 내가 너를 보내되 네 마음에 있는 것을 다 네게 말하리라” 종교적으로는 바알의 음식을 섭취했습니다. “(삼상12:10) 백성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우리가 여호와를 버리고 바알들과 아스다롯을 섬기므로 범죄하였나이다 그러하오나 이제 우리를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 내소서 그리하시면 우리가 주를 섬기겠나이다 하매” 사회적으로 정의를 실현하기 보다 불의의 재물을 탐했습니다. 그 결과 이스라엘 백성들의 영적 상태와 도덕 의식은 상처투성이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사1:6)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뿐이어늘 그것을 짜며 싸매며 기름으로 유하게 함을 받지 못하였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치료할 약, 즉 말씀이 바닥났습니다. 이와 같이 말씀의 不在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듭니다. 보다 안타까운 점은 백성들의 삶을 다스렸던 종교 지도자마저도 이 환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탁류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삶을 살지 못했습니다. 암흑의 세력만이 활개를 쳤습니다.
2. 이상이 보이지 아니함.
“이상”(하존)은 “장래일이나 예언적 환상 등에 관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주신 신적 계시”를 뜻합니다. 또한 “흔히....않았더라”(아인)란 아무것도 없는“(왕상8:9) 궤 안에는 두 돌판 외에 아무것도 없으니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후 여호와께서 저희와 언약을 세우실 때에 모세가 호렙에서 그 안에 넣은 것이더라”을 의미하며, “보이다”(파라츠)는 “으스러뜨리다”, “깨뜨리다”를 뜻하며 그 조각이 널리 퍼지는 것을 의미 합니다. 이것은 당시 이스라엘이 영적, 도덕적으로 타락하여 하나님의 계시에 대해 지극히 무관심했음을 단적으로 보여 줍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은 절망 속에서 헤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치 단단한 바윗돌 속에 감추어진 것처럼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뜻을 전혀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망하게 된 것입니다. “(잠29:18)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히 행하거니와 율법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느니라” 마찬가지로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성도들도 성령의 인도함을 받지 못하면 멸망의 길로 치달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무시로 깨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엡1:18) 너희 마음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3.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함.
“눈”(아인)은 때때로 “판단력”을 상징했습니다. “(창19:14) 롯이 나가서 그 딸과 정혼한 사위들에게 고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 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 사위들이 농담으로 여겼더라” 그러므로 “눈이 어둡다”란 판단력이 흐려졌음을 암시합니다. 엘리 사사는 백성들의 행로에 무엇이 놓여졌는가를 바르게 분별해야 했습니다. 백성 앞에 올무가 놓였는지, 구덩이가 파였는지를 알려 주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소경된 인도자였습니다. “(마15:14) 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하신대” 백성들과 자신과 가족을 암흑의 구렁텅이로 떨어뜨렸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영적 암흑에 처하면 멸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또한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이 악한지를 분별하지 못하며 “(고전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세상에서 나오는 쾌락만을 추구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매일 주의 기이한 법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시119:27) 나로 주의 법도의 길을 깨닫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기사를 묵상하리이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사는 세상은 엘리의 시대와 같지 않습니까? 사태의 책임이 제사장 엘리에게 있었다면 오늘날 영적 암흑의 책임은 이 시대의 제사장인 우리에게 있습니다. 먼저 여러분이 영적 눈을 밝히 뜨십시오. 그러면 여호와의 말씀과 그 가운데 숨겨진 신비스러운 비밀이 보일 것입니다. 이제 모두 일어섭시다. 그리고 앞장 서 영적 암흑을 깨뜨립시다.
제 목 : 패배한 이스라엘
본 문 : 삼상 4:17
찬 송 : 17, 93, 402
전쟁이 발발하면 전쟁을 수행중인 당사국들은 초비상 상태에 들어갑니다. 매스컴은 연일 매체를 통해 전황을 타전합니다. 국민들은 신문과 TV에 이목을 집중합니다. 그들 중에서 특히 자식을 최전방에 보낸 부모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합니다. 자식의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는 노모의 얼굴엔 주름살이 더욱 깊게 패이고, 초점 잃은 눈동자엔 눈물이 가득합니다. 그뿐입니까? 사랑하는 남편을 보낸 아내는 제발 무사하기만을 기원하며 밤새 잠못이룹니다. 한마디로 전쟁은 쓰라린 고통이요, 비극이며, 슬픔입니다. 더구나 전황을 브리핑하는 시간에 “승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립니다. 그런데 당시 이스라엘 백성은 참패당했습니다. 하늘이 무너진 듯한 패전 소식이 그들 앞에 떨어졌습니다. 한편, 오늘날의 성도도 매일 영적 전투를 치릅니다. 우리 주위에는 허다한 증인들이 싸움을 지켜봅니다. “(히12: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응원합니다. 그런데 적들은 치밀한 작전을 가지고 공격하기 때문에, 승리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만 합니다.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그러면 당시 패배한 이스라엘을 통해 영적 전투에 임하는 성도의 자세를 다시 한 번 점검합시다.
1. 도망함.
“도망하다”(누스)란 피하다“(신4:42) 이는 과거에 원혐이 없이 부지중에 오살한 자로 그곳으로 도피케하기 위함이며 그 한 성읍으로 도피한 자로 그 생명을 보존케 하기 위함이라”, 달아나다“(창14: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 왕과 고모라 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를 뜻합니다. 또한 “앞에서”(리페네)는 사물의 겉모습“(창2:6) 안개만 땅에서 올라와 온 지면을 적셨더라”이나 얼굴“(사3:15) 어찌하여 너희가 내 백성을 짓밟으며 가난한 자의 얼굴에 맷돌질 하느뇨 주 만군의 여호와 내가 말하였느니라 하시리로다” 등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블레셋 사람 앞에서 도망하였다란 말은 이스라엘 군대가 블레셋 사람의 얼굴을 피하였다는 의미로 전쟁에서 처참하고 완전하게 패배 당하였음을 뜻합니다. 블레셋 군대는 배수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반면에 이스라엘 군대는 아예 처음부터 전의를 상실하였습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참패한 원인은 적들의 무장을 너무 겁냈기 때문입니다. 다윗처럼 여호와의 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삼상17:45)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싸움의 승패는 칼이나 창같은 무기의 위용에 있지 않고, “믿음의 눈”에 달려 있는 데도 말입니다. “(히11:30)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우리도 흔히 주변의 상황만을 고려한 나머지 어려움을 당하면 황급히 도망합니다. “(막14:52) 베 홑이불을 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하니라.” 상황이 불리하게 전개되면 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급급합니다. 이는 하나님보다 사람들을 의식하는 자세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러한 자만이 용감하게 앞으로 전진하며 승리할 수 있습니다.
2. 살륙을 당함.
“살륙”(마게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재난“(출9: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역벙을 가져오며 치명적인 혼란을 초래하는 상태“(민14:37) 곧 그 땅에 대하여 악평한 자들은 여호와 앞에서 재앙으로 죽었고”를 지칭할 때 쓰였습니다. 이는 이스라엘이 당한 살륙의 성격을 암시합니다. 즉 그들의 재난은 표면적으로는 블레셋에 의한 것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았습니다. 하나님은 당시 불경건함으로 선민의 자격을 상실한 이스라엘에게 재앙을 내림으로써 애굽에서의 경우처럼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셨던 것입니다. “(출9:14) 내가 이번에는 모든 재앙을 네 마음과 네 신하와 네 백성에게 내려 너로 온 천하에 나와 같은 자가 없음을 알게 하리라” 이스라엘은 뼛속까지 스며드는 혹똑한 재난을 통해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평온할 때에 주님을 경외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렘22:21) 네가 평안할 때에 내가 네게 말하였으나 네 말이 나는 듣지 아니하리라 하였나니 네가 어려서부터 내 목소리를 청종치 아니함이 네 습관이라” 우리가 누리는 평안은 자신의 노력이나 능력에 의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평화를 누리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망각한 자는 부자 청년처럼 예기치 못한 때에 생명을 빼앗기는 재앙을 당하게 됩니다. “(눅12:20)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3. 법궤를 빼앗김.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합니다. “(출25:22)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 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 그러므로 “언약궤를 빼앗겼다”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런 임재를 더 이상 볼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즉 이스라엘은 법궤를 통해 그들을 인격적으로 다스리시던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 받았으며 보호를 받아왔던 이스라엘에게 쓰라린 상처가 되었습니다. 또한 블레셋 사람들은 이 사건을 통해 자신들을 조롱할 것입니다. “(삼상17:10) 그 블레셋 사람이 또 가로되 내가 오늘날 이스라엘의 군대를 모욕하였으니 사람을 보내어 나로 더불어 싸우게 하라 한지라”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교훈을 얻습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신자는 하나님의 능력을 맛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웃들에게 조롱마저 당한다는 사실입니다. “(마17:16) 내가 주의 제자들에게 데리고 왔으나 능히 고치지 못하더이다.” 그러므로 언약 백성인 우리는 사단의 올무에 책략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날의 성도는 과거 이스라엘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께 영적 선민입니다. 또한 우리는 비록 블레셋과 싸우는 것은 아니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강력한 마귀와 영적 전쟁을 수행합니다. 만약 우리가 대장되신 그리스도의 지도를 잘 받지 않거나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지 않는다면 과거의 이스라엘과 같이 도망하며 살륙당하며 성도의 상급을 빼앗기는 수치를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신은 꼭 이겨야 할 이 영적 전투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고 있습니까? 당신은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했습니까? 하나님의 전신갑주는 입었습니까?
제 목 : 아스돗에 내린 하나님의 심판
본 문 : 삼상 5:1-6
찬 송 : 28, 79, 332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습니다. 즉 자신이 속해 있는 법 아래서 순종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법에는 속하지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누구든 하나님의 율례를 무시하면 심판을 받습니다. 본문은 이방 백성일지라도 거룩한 하나님을 우상의 한 부류로 취급하면 불행을 당하게 됨을 보여 줍니다. 블레셋 백성은 여호와의 궤가 전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삼상4:8) 우리에게 화로다 누가 우리를 이 능한 신들의 손에서 건지리요 그들은 광야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애굽인을 친 신들이니라” 언약궤만 소유하면 블레셋이 강한 민족이 되리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래서 언약궤를 탈취하여 아스돗에 모셨습니다. “(삼상5:1) 블레셋 사람이 하나님의 궤를 빼앗아 가지고 에벤에셀에서부터 아스돗에 이르니라”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큰 불행을 당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다곤신을 섬기듯 언약궤를 숭배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의 대상은 하나님 한 분이어야 하고, 하나님이 아닌 그 어떤 것을 향한 경배는 결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죄악된 습성을 벗어 버리고 심령이 새롭게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롬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왜냐하면 우리가 불경건한 모습으로 하나님을 경배하면 심판을 당하기 때문입니다. “(롬1:18)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우리는 본문에서 당시 블레셋 사람들의 심판 과정을 보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자세를 점검해 봅시다.
1. 언약궤를 다곤 곁에 모심.
“곁에”(에첼)란 “측면”, 변두리“(겔40:7) 그 문간에 문지기 방들이 있는데 각기 장이 한 장대요 광이 한 장대요 매방 사이 벽이 오척이며 안 문통의 장이 한 장대요 그 앞에 현관이 있고 그 앞에 안 문이 있으며”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언약궤를 신당의 모서리에 놓아두었음을 의미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언약궤를 만들 때부터 성막에 모실 때까지 정성을 쏟았습니다. 또한 전쟁을 수행할 때에 언약궤는 백성의 선두에 섰고 “(수6:6)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제사장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언약궤를 메고 일곱 제사장은 일곱 양각나팔을 잡고 여호와의 궤 앞에서 행하라 하고”, 성막이나 성전에서도 모두 지극히 거룩한 지성소에 모셨습니다. “(왕상8:1) 이에 솔로몬이 여호와의 언약궤를 다윗성 곧 시온에서 메어 올리고자하여 이스라엘 장로와 모든 지파의 두목 곧 이스라엘 자손의 족장들을 예루살렘 자기에게로 소집하니” 이처럼 이스라엘의 삶의 중심부에 하나님 임재의 상징인 언약궤가 놓여 있었습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언약궤를 그처럼 중요하게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언약궤를 오로지 욕구 충족을 위한 대상물로 삼았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의 궤가 그들의 삶에 전혀 영향을 미칠 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소위 신자라고 칭하면서 하나님을 호주머니 속에 넣고 다니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성공을 추구하기 위해 필요한 때에만 하나님을 섬깁니다. 이같은 태도는 점쟁이를 들여놓고 돈을 벌었던 사람과 비슷합니다. “(행16:19) 종의 주인들은 자기 이익의 소망이 귾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잡아 가지고 저자로 관원들에게 끌어 갔다가” 그러나 이런 성도는 가롯 유다의 최후처럼 모든 것을 빼앗길 것입니다. “(행1:20)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2. 위에서 본 것처럼 하나님을 경홀히 대하면 엎드러지는 형벌을 당합니다. 여기서 “엎드러지다”(나팔)란 원래 전쟁터에서 패배하다“(사10:4) 포로 된 자의 아래에 구푸리며 죽임을 당한 자의 아래에 엎드러질 따름이니라 그럴지라도 여호와의 노가 쉬지 아니하며 그 손이 여전히 펴지리라”, 건축물이 무너지다“(암9:11) 그 날에 내가 다윗의 무너진 천막을 일으키고 그 틈을 막으며 그 퇴락한 것을 일으키고 옛적과 같이 세우고”, 땅에 쓰러지다“(시37:24) 저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손으로 붙드심이로다”를 뜻합니다. 하나님의 궤는 블레셋의 신이었던 다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다곤은 블레셋 사람들에게 풍요로운 수확을 보장했던 곡물신입니다. 그래서 농경 생활을 하였던 블레셋 사람들은 다곤을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파괴력으로 다곤을 박살냈습니다. 이 사건을 통해 하나님은 우상의 진면목을 적나라하게 폭로했슷비낟. 다곤은 풍요나 번양, 행복을 결코 보장하지 못하는 하찮은 거짓 신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상의 헛된 공약은 여전히 현대인의 마음을 유혹합니다. 예를 들어, 재물이 인간을 행복하게 한다고 주장합니다. 진정 그러합니까? 재물의 풍부함으로 인해 형제간의 우애가 파괴되지는 않았습니까? “(창36:7) 두 사람의 소유가 풍부하여 함께 거할 수 없음이러라 그들의 우거한 땅이 그들의 가축으로 인하여 그들을 용납할 수 없었더라” 오히려 어떤 경우에는 소득의 증대가 근심을 초래하기도 합니다. “(마19:22) 그 청년이 재물이 많으므로 이 말씀을 듣고 근심하며 가니라” 그러므로 바울은 썩어지지 않을 영광을 추구했던 것입니다.
3. 망하게 함
또한 하나님을 이익의 수단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은 망하게 됩니다. 여기서 “망하게 하다”(야크)는 “쳐부수다”, “깔아뭉개다” 등의 뜻으로서 상대방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는 것을 뜻합니다. “(왕상16:11) 시므리가 왕이 되어 그 위에 오를 때에 바아사의 온 집을 죽이되 남자는 그 족속이든지 그 친구든지 하나도 남기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손은 다곤 뿐 아니라 이제 블레셋 사람들에게까지 재앙을 내려 보기에도 흉한 질환이 백성들 사이에 전염되도록 했습니다. 그로 인해 블레셋 사람들은 얼굴을 들 수가 없었습니다. 독한 병에 전염되었다는 수치감으로 가득찼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광을 과소 평가하고 그분의 존귀함을 훼손하는 자는 비참한 결말을 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는 지금까지 언약궤를 단순히 축복의 도구호만 생각했던 자들이 당한 비참함을 살펴보았습니다. 당신은 어떠합니까? 블레셋 사람들처럼 하나님을 한쪽 구석에 그냥 던져두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았습니까? 결코 우리는 그러함으로 엎드러지며 망하게 되는 저주를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것 중에서 단연 으뜸되는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 하나님만을 섬김으로 본분을 다합시다.
제 목 : 복술자들의 충고
본 문 : 삼상 6:3-6
찬 송 : 14, 105, 337
복술자들은 작은 가지들을 흔들어 점괘를 알아냈던 자들입니다. “(신18:10) 그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복술자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을 하는 자나 무당이나” 성경 말씀이나 신적 영감을 통해 나오는 신령한 통찰력과는 달리, 그들은 주술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길흉을 예언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들을 가중한 일을 꾀하는 자들로 간주했습니다. “(신18:12) 무릇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 내시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때때로 그들을 동원하여 살아계신 하나님을 깨닫도록 합니다. 본문에서도 복술자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이는 마치 재물과 영예에 눈이 어두운 발람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신 사건과도 유사합니다. “(민23:7) 발람이 노래를 지어 가로되 발락이 나를 아람에서,모압 왕이 동편 산에서 데려다가 이르기를 와서 나를 위하여 야곱을 저주하라 와서 이스라엘을 꾸짖으라 하도다 (민23:8) 하나님이 저주치 않으신 자를 내 어찌 저주하며 여호와께서 꾸짖지 않으신 자를 내 어찌 꾸짖을꼬 (민23:9) 내가 바위 위에서 그들을 보며 작은 산에서 그들을 바라보니 이 백성은 홀로 처할 것이라 그를 열방 중의 하나로 여기지 않으리로다 (민23:10) 야곱의 티끌을 뉘 능히 계산하며 이스라엘 사분지 일을 뉘 능히 계수할꼬 나는 의인의 죽음같이 죽기를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도다 하매 ” 당시 복술자들은 블레셋 사람들이 당한 모든 고통을 면밀히 검토한 후, 해결책이 오직 하나님께만 속했음을 깨달았습니다. 이처럼 우상 숭배자들도 깨달았던 진리의 일면을 성도들이 몰라서야 되겠습니까? 우리 앞에는 수없이 많은 수수께끼들이 널려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해결해야 될 삶의 문제들을 이성이나 경험에 의해서만 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성도들은 문제들의 고리를 풀어가는 지혜가 오직 그분께 달렸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당시 복술자들이 충고한 죄를 범한 자들이 하여야 할 바를 살펴봅시다.
1. 거저 보내지 말라.
거저 보내지 말라(알 테솰레후 오토 레캄)을 직역하면 “당신은 그것을 빈손으로 보내지 말라”입니다. 여기서 거저(빈손)란 빈손으로“(룻3:17) 가로되 그가 내게 이 보리를 여섯 번 되어 주며 이르기를 빈손으로 네 시모에게 가지 말라 하더이다”, 헛되이“(삼하1:22) 죽은 자의 피에서,용사의 기름에서 요나단의 활이 물러가지 아니하였으며 사울의 칼이 헛되이 돌아오지 아니하였도다 ”, 무고히“(시25:3) 주를 바라는 자는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려니와 무고히 속이는 자는 수치를 당하리이다 ”를 말하며, 보내다(솰라흐)는 보내다 ”부치다“, ”파견하다“, “도로 갖다주다”“(삼하9:7) 다윗이 가로되 무서워 말라 내가 반드시 네 아비 요나단을 인하여 네게 은총을 베풀리라 내가 네 조부 사울의 밭을 다 네게 도로 주겠고 또 너는 항상 내 상에서 먹을지니라”로 잘못으로 취한 물건이나 사람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보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이 바로의 학정에서 벗어나 출애굽할 때 그 나라 사람들로부터 “은, 금 패물과 의복”을 받아 나왔던 사건과 비슷합니다. “(출12: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말대로하여 애굽 사람에게 은금 패물과 의복을 구하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탈취한 후 극심한 징벌을 받은 다음에 자신들의 잘못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조처를 취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신약의 성도들도 죄를 범한 후 입술로만 회개하면 안됩니다. 자신의 죄에 대하여 무릎꿇고 자복할 뿐만 아니라, 이제는 새 삶을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하나님께 예물로 드려야 합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
2. 속건제를 드려라.
속건제(아쉼)란 “하나님의 성물에 대해서나 이웃에게 해를 가한 경우 그 죄를 속함받기 위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나 예물”을 말합니다.(레 5:1-15) 특히 속건제를 드릴 때는 죄를 범한 자가 피해자에게 피해물 외에 그것의 1/5을 배상함으로 더 줍니다. “(레6:5) 무릇 그 거짓 맹세한 물건을 돌려 보내되 곧 그 본물에 오분 일을 더하여 돌려 보낼 것이니 그 죄가 드러나는 날에 그 임자에게 줄 것이요 (레6:6) 그는 또 그 속건제를 여호와께 가져 올지니 곧 너의 지정한 가치대로 떼 중 흠 없는 수양을 속건 제물을 위하여 제사장에게로 끌어 올 것이요 ” 또한 드리다(솰라흐)란 의무적으로 “보내다”란 뜻으로, 속건제가 “배상”의 의미로 드려졌음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타락한 인간들이 탐욕이나 소유욕으로 말미암아 불법적인 탈취나 강탈을 행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배상원칙을 만드셨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남의 물건을 탐내지 말아야 합니다. 성경은 탐욕이 큰 우상숭배라고 주장합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왜냐하면 주변에 있는 물질을 지나치게 갈망하게 되면, 그 물질을 소유하는 것이 곧 행복이라는 착각에 빠지기 때문입니다. 법궤를 탐내어 탈취했던 백성이 온갖 징벌을 당했듯, 탐욕에 눈이 어둔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습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따라서 탐욕의 죄를 범한 자는 마땅히 이를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사죄하는 태도를 지녀야 합니다.
3. 강퍅케 하지 말라.
강퍅케 하다(테카베두)는 “무겁다”(카베드)에서 유래된 말로서, “죄악이 심히 번성하다.”“(창18:20)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부르짖음이 크고 그 죄악이 심히 중하니”, 고통을 더하다“(느5:18) 매일 나를 위하여 소 하나와 살진 양 여섯을 준비하며 닭도 많이 준비하고 열흘에 한 번씩은 각종 포도주를 갖추었나니 비록 이같이 하였을지라도 내가 총독의 녹을 요구하지 아니하였음은 백성의 부역이 중함이니라”란 뜻으로도 번역됩니다. 즉 블레셋 사람들로 하여금 마음을 돌이켜 궤를 안보내려 하거나 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더 나아가 출애굽 당시의 바로의 예를 들어, 마음을 강퍅케 했을 경우 받을 고통을 경고하였습니다. 한편 이 단어는 하나님의 채찍으로 인해 마음을 스스로 완악하게 하며 교만하게 하는 바로의 태도를 가리킬 때도 사용됐습니다. “(출7:13) 그러나 바로의 마음이 강퍅하여 그들을 듣지 아니하니 여호와의 말씀과 같더라 ” 하나님은 때때로 성도를 온전케 하기 위해 매를 듭니다. 물론 이 징계는 인간에게 견디기 어려운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을 원망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욥처럼 나의 허물과 죄를 깨닫게 해달라고 간구해야 합니다. “(욥13:23) 나의 불법과 죄가 얼마나 많으니이까 나의 허물과 죄를 내게 알게 하옵소서 ” 그리고 한낱 피조물인 우리에게 뜻을 두시고 온전케 하시려는 하나님의 사랑의 채찍에 더욱 감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미 잘못을 범한 자가 허물에서 되돌이키는 방법이 어디에 있는지를 배웠습니다. 이는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원래대로의 회복을 위해 노력하며 오히려 이로 인해 또 다른 죄를 범하는 잘못을 범치 않는데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죄인입니다. 따라서 죄를 짓지 않는 것이 중요하지만 이미 지은 죄에서 돌이키는 것은 더 중요할 수밖에 없습니다. 죄의 근원적 해결자되시는 그르시도를 찾아가 이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십시오.
제 목 : 진정한 회개
본 문 : 삼상 7:3
찬 송 : 37, 331, 412
겸정색에다 흰색을 혼합하면 회색으로 탈바꿈합니다. 이 색깔은 결코 맑거나 밝은 이미지를 창출하지 못하고 우울한 느낌을 갖게 하지요, 뿐만 아니라 우리가 이런 색상의 옷을 입고 다니면 조금 더럽더라도 남의 눈에 쉽게 띄지 않습니다. 색깔이 담고 있는 모호성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럽더라도 남의 눈에 쉽게 회색분자라고 칭합니다. 그런데 요즘 신아인들도 때때로 회색의 색깔로 단장하는 것 같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진리를 좇는 대신 썩어져 가는 구습(舊習)을 따라가며 “(엡4:22)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외면합니다. “(마9: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성령의 뜻을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의 유혹에 입맞추고 있습니다. 신자이면서도 여전히 거짓말을 일삼으며 분열을 조장합니다. 과연 당신의 신앙 색깔은 무엇입니까? 참된 회개한 심령이 변화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낡고 추한 옷을 벗어 버립시다. 불순종의 아들에서 벗어, 하나님의 후사(後嗣)로 영광을 누리기 위해 새 옷을 입읍시다. “(롬8:17)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진정 하나님의 아들됨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것인가를 맛볼 것입니다. 본문은 이처럼 의의 새 옷을 입는 그리스도인의 태도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1. 전심으로 해야 합니다.
전심으로(베콜 레밥켐)란 “ ...을 가지고”를 뜻하는 전치사(베)와 모든(콜), 마음(레밥)의 합성어입니다. 따라서 이를 직역하면 “너의 모든 마음을 다하여”란 의미이며 여기서 마음은 지. 정. 의를 포괄하므로 본문은 인간의 감정과 의지와 생각을 다바쳐서 하나님께 돌아감을 의미 합니다. 이처럼 진정한 회개란 진정한 회개란 행동과 이성, 감정이 총체적으로 결합되어서 전인격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순히 지를 짓지 않겠다고 결심하는 태도는 회개의 흉내만 내는 격입니다. 왜냐하면 죄악과의 투쟁은 마치 현대전의 양상과 비슷해서 육, 해 공군력이 모두 우세해야 승리를 가져오듯, 우리도 전인적으로 사단과 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는 전심으로 하나님에게 돌아오기 위해 열심히 기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영적 전쟁은 혈과 육의 싸움과 다르기 때문에 성령을 의지해야 하며“(엡6:12)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자신의 몸을 쳐 의지적으로 주님께 복종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우상을 숭배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방 신(엘로헤 하네카르)은 문자 그대로 “이방의 낯선 신”,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알지 못하는 신”을 말합니다. 물론 역서적 사건을 통해서 꿈과 음성으로 나타났던 여호와는 이스라엘에게 항상 친근한 분이었습니다. 결코 낯설거나 미지(未知)의 신이 아닙니다. 오히려 백성들의 고통과 신음을 들으시고“(출3:7)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 적들의 한복판에서도 평화로운 잔치를 배설하시는 친밀한 신입니다.“(시23: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시고 기름으로 내 머리에 바르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마땅히 섬겨야 할 바른 대상입니다. 또 “제하다”(수르)란 떠나다“(렘17:5)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무릇 사람을 믿으며 혈육으로 그 권력을 삼고 마음이 여호와에게서 떠난 그 사람은 저주를 받을 것이라”, 폐하다“(대하8:14) 솔로몬이 또 그 부친 다윗의 정규를 좇아 제사장들의 반차를 정하여 섬기게 하고 레위 사람에게도 그 직분을 맡겨 매일에 합의한대로 찬송하며 제사장들 앞에서 수종들게 하며 또 문지기로 그 반차를 좇아 각 문을 지키게 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전에 이렇게 명하였음이라”란 말로, 불로 초가집을 전소(全燒)시키듯 우상을 그 흔적까지도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상을 이와 같이 멸시한 까닭은 무엇입니까? 먼저 이방 신은 백성을 생명의 길로 인도하기는커녕, 사랑하는 자녀들의 생명조차 앗아가는 고통을 백성들에게 주기 때문입니다. “(겔16:36)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네가 네 누추한 것을 쏟으며 네 정든 자와 행음함으로 벗은 몸을 드러내며 또 가증한 우상을 위하여 네 자녀의 피를 그 우상에게 드렸은즉” 다음으로 우상은 백성들의 성적 타락을 부채질하며“(왕상15:12)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 마지막으로 그것은 백성들의 판단력을 흐리게하여 율례를 파괴토록 충동질하기 때문입니다. “(겔20:16) 그들이 마음으로 우상을 좇아 나의 규례를 업신여기며 나의 율례를 행치 아니하며 나의 안식일을 더럽혔음이니라” 그래서 하나님은 우상과 피흘리기까지 싸우라고 명령하십니다.
3. 열심히 섬겨야 합니다.
섬기다(아바드)란 일차적으로 “노동하다”“(신5:13)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 봉사하다“(민8:11) 아론이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레위인을 요제로 여호와 앞에 드릴지니 이는 그들로 여호와를 봉사케 하기 위함이라”를 뜻합니다. 이는 농부가 비지땀을 흘리며 발을 경작하듯, 온 마음과 몸을 다하여 경배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농부는 결코 약삭빠른 계산이 아닌, 성실함으로 밭을 경작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백성들은 당장의 유익보다는, 천국의 상급을 기대하면서 정성을 다해 하나님께 경배해야 합니다. 무르익은 알곡의 물결을 마음 속에 그리는 농부처럼 기쁜 마음을 가지고 주께 봉사해야 합니다. “(딤후2: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그러면 주님께서 구름타고 다시 오실 때 “(눅19:17)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칭찬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물과 기름이 어찌 뒤섞일 수 있으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겠습니까? “(고후6: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고후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빛이 어두움을 물리치듯, 진정한 회개는 악에서 떠난 삶이며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만을 섬기는 삶입니다. 혹시 여러분은 세상적인 것과 하나님을 동시에 소유하려는 회색 분자의 상태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닙니까? 하나님은 당신에게 뜨겁든지 찰 것을 요구하십니다. “(계3:15)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 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계3:16)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이제 냉철한 결단과 이에 따른 실천적인 삶만이 여러분에게 주어져 있음을 명심합시다.
제 목 : 규격미달
본 문 : 삼상 8:3
찬 송 : 35, 377, 507
조선의 역대 임금들이 사치한 것은 보통이었으나 영조 대왕은 매우 검소한 분으로 소문났습니다. 그는 거처하던 대궐의 방문이 뚫어지면, 손수 종이 조각으로 발랐습니다. 게다가 버선도 닳아 떨어지면 해진데를 기워 신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조세의 부담을 경감하기 위해 균역법(均役法)을 실시하여 백성들의 짐을 덜었습니다. 그러나 본절에는 이와 반대되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자신들의 직분을 남용하여 백성들을 갈취했던 사무엘의 아들들입니다. 본래 하나님께서는 “(엡4:11) 그가 혹은 사도로,혹은 선지자로,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엡4:12)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는 말씀처럼 성도를 온전케하고 봉사의 일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일꾼을 세우십니다. 따라서 “섬김”의 정신에서 벗어난 지도자는 한낱 삯꾼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직권을 남용한 지도자들에게는 칭찬이 아닌, 심판만이 주어집니다. 이는 마치 품질 검사에서 불합격된 물품이 폐기 처분당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본문에서도 이스라엘 백성은 지도자의 자격을 상실한 사무엘의 아들들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외칩니다. “(삼상8:5)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열방과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 정권의 교체를 과감히 요구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왜 통치자로서의 규격 미달인 불량품이었는지 살펴봅시다.
1. 이를 추구함.
“이를 따라서”(아하레 하바차)란 “약탈”, 먹이“(삿5:19) 열왕이 와서 싸울 때에 가나안 열왕이 므깃도 물 가 다아낙에서 싸웠으나 돈을 탈취하지 못하였도다.”나, 불의한 소득“(사33:15) 오직 의롭게 행하는 자,정직히 말하는자,토색한 재물을 가증히 여기는 자,손을 흔들어 뇌물을 받지 아니하는 자,귀를 막아 피 흘리려는 꾀를 듣지 아니하는 자,눈을 감아 악을 보지 아니하는 자,”을 뜻하는 명사(베차)와 “...의 배후에”, “......을 추구하여”란 뜻의 전치사(아하르)를 합한 말입니다. 이것은 사무엘의 아들들이 백성들을 어떻게 대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들은 백성들을 착취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즉 부당하고 정직하지 못한 수단을 써서 백성들의 재산을 약탈했던 것입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워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형편없이 망가뜨린 셈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사무엘의 공명정대한 통치와 확연히 대조됩니다. 사무엘은 백성을 압제하거나, 부정 축재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삼상12:3) 내가 여기 있나니 여호와 앞과 그 기름 부음을 받은 자 앞에서 내게 대하여 증거하라 내가 뉘 소를 취하였느냐 뉘 나귀를 취하였느냐 누구를 속였느냐 누구를 압제하였느냐 내 눈을 흐리게 하는 뇌물을 뉘 손에서 취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그것을 너희에게 갚으리라.” 이는 그가 여호와의 영에 충만하여 성령의 지도하에 움직였기 때문입니다. 물질에 의해 정신을 흐리지도 않았습니다. 이와 같이 지도자는 돈에 대해 과도한 욕망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오히려 자신이 축적한 재산을 가난한 자와 함께 나누어 써야 합니다. “(출22:3) 해 돋은 후이면 피 흘린 죄가 있으리라 도적은 반드시 배상할 것이나 배상할 것이 없으면 그 몸을 팔아 그 도적질한 것을 배상할것이요.”
2. 뇌물을 취함.
“뇌물”(쇼하드)이란 “특별히 징벌을 회피할 목적으로 관리들에게 주어진 선물”을 말합니다. “(왕하16:8) 여호와의 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은금을 취하여 앗수르 왕에게 예물로 보내었더니” 이런 뇌물은 결국 사무엘의 아들들을 부패시켰습니다. “(출23:8) 너는 뇌물을 받지 말라 뇌물은 밝은 자의 눈을 어둡게 하고 의로운 자의 말을 굽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율법에 따라 옥석(玉石)을 가려야 할 자가 이권개입의 압잡이 노릇을 한 셈입니다. 우리는 이 행위를 통해 당시의 사회윤리를 가늠할 수 있습니다. 본래 사회가 선행자(善行者)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보상을, 악행자에게는 환난과 괴로움을 부여해야만 정상적인 윤리가 자리잡습니다. “(롬2:7)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롬2:10) 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라” 그러나 뇌물이 통용되면, 이러한 윤리가 무너집니다. 정당하고 바르게 살려는 자들은 도리어 절망감만 갖게 되고 악을 행한 자들이 얼굴을 뻔뻔스럽게 들고 다닙니다. 이러한 현상은 곧 사회 질서의 붕괴를 초래하므로, 성경은 뇌물의 수수를 엄격히 금합니다. “(잠17: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그러므로 지도자는 신전 의식(神前意識)을 갖고 살아야 합니다. 땀흘리며 일하는 노동의 기쁨과 정직의 미덕을 지키도록 바른 통치를 해야 합니다. “(창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3. 재판을 굽게 함.
“판결”(미쉬파트)은 다스리다“(룻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우거하였는데”, 심판하다“(창16:5) 사래가 아브람에게 이르되 나의 받는 욕은 당신이 받아야 옳도다 내가 나의 여종을 당신의 품에 두었거늘 그가 자기의 잉태함을 깨닫고 나를 멸시하니 당신과 나 사이에 여호와께서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를 뜻하는 동사(솨파트)에서 파생되었습니다. 원래 하나님은 부도덕한 일을 저지른 자에게 세차고 혹독한 재앙을 내렸습니다. 이 재앙을 통해 여호와는 의롭고 공정한 분임을 보여줍니다. “(출9:27) 바로가 사람을 보내어 모세와 아론을 불러 그들에게 이르되 이번은 내가 범죄하였노라 여호와는 의로우시고 나와 나의 백성은 악하도다” 따라서 그 분의 판결은 충동적이거나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무엘의 아들들은 여호와의 판결처럼 바르지 못했습니다. “굽게하다(나타)란 다수를 따라가다”(출23:2) 다수를 따라 악을 행하지 말며 송사에 다수를 따라 부정당한 증거를 하지 말며”, 그릇되게 하다“(욥36:18) 너는 분격함을 인하여 징책을 대적하지 말라 대속함을 얻을 일이 큰즉 스스로 그릇되게 말지니라 ”로서, 정도(正道)를 벗어나는 태도를 가리킵니다. 즉 그들은 곁으로 드러난 재산, 지위, 학벌에 따라 판결한 셈입니다. 불행하게도, 우리 역시 이런 태도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입술로는 인간은 누구나 다 평등하다고 주장하면서, 가나나한 자를 멸시합니다. “(약2: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으라 하면” 그런데 하나님은 이 행위가 범죄임을 분명하게 못박습니다. “(약2:9)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편견을 갖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정의와 불의를 전도시켜서는 안됩니다.
결론을 맺읍시다. 자신의 직분을 마땅히 감당치 못한 자는 사무엘의 아들들과 같이 결국 그 직분을 빼앗기게 됩니다. “(행1:25)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 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여러분은 과연 규격 미달의 사람이 아닙니까? 여러분들은 성도로서 거룩한 삶을 살고 있습니까? 크리스챤으로서 예수께서 걸으셨던 고난의 길을 회피하지는 않습니까? 빛과 소금의 직분을 다하고 있습니까? 짠맛을 잃어버려 사람들에게 밟히우는 수모는 당하지 않습니까?
제 목 : 참 선지자란?
본 문 : 삼상 9:6
찬 송 : 39, 347, 514
미래에 과연 어떤 일이 나에게 발생할까? 라는 문제는 인간의 최대 관심사입니다. 그렇지만 미래에 되어질 일을 자신있게 알아맞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이성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창고”속에 감추어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창고를 전혀 열 수 없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바른 길을 걸어가도록 “열쇠 담당자”를 뽑았는데, 그들이 바로 선지자들입니다. 선지자는 하나님의 대변자로서 하나님의 뜻을 인간에게 전달하며, 또한 하나님의 미래 계획에 대하여도 정보를 주는 자입니다. 따라서 선지자는 “자기의 마음속에 떠오른 예언”을 해서는 안됩니다. 또한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거나, 물질적인 보상을 추구하지 않아야 합니다. “(미3:5) 내 백성을 유혹하는 선지자는 이에 물면 평강을 외치나 그 입에 무엇을 채워주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전쟁을 준비하는도다 이런 선지자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미3:6) 그러므로 너희가 밤을 만나리니 이상을 보지 못할 것이요 흑암을 만나리니 점 치지 못하리라 하셨나니 이 선지자 위에는 해가 져서 낮이 캄캄할 것이라” 하나님은 인간처럼 식언(食言)을 하지 않기 때문에, 선지자들은 자신들은 자신들의 예언이 분명히 적중됨으로써 하나님께 속함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왕상22:28) 미가야가 가로되 왕이 참으로 평안히 돌아오시게 될진대 여호와께서 나로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리이다 또 가로되 너희 백성들아 다 들을지어다 하니라.” 뿐만 아니라, 공의를 수행하기 위해서 자신의 목숨까지도 버릴 수 있는 용단이 필요했습니다. “(삼하12:7) 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 사람이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처럼 이르시기를 내가 너로 이스라엘 왕을 삼기 위하여 네게 기름을 붓고 너를 사울의 손에서 구원하고 (15절까지)” 본문은 이러한 선지자의 좋은 모형이 되는 사무엘의 모습니 어떠했는지를 보여 줌으로써 이 시대의 선지자가 되어야 하는 성도들에게 바람직한 삶의 양태를 가르쳐 줍니다.
1. 존경받는 자.
존중히 여김을 받는(니케바드)이란 본래 무겁다(카바드)란 의미를 지녔습니다. “(욥6:3) 바다 모래보다도 무거울 것이라 그럼으로하여 나의 말이 경솔 하였구나.” 이 말은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될 때에 고통을 심히 겪다“(욥23:2) 내가 오늘도 혹독히 원망하니 받는 재앙이 탄식보다 중함이니라.”를 뜻하며, 긍정적인 의미로는 입놀림이 중후하거나 마음이 쉽게 동요되지 않는다는 뜻에서, 또한 다른 사람으로부터 비중있는 인물로 취급된다는 점에서 존경을 받다“(욥14:21) 그 아들이 존귀하나 그가 알지 못하며 비천하나 그가 깨닫지 못하나이다”로 쓰입니다. 알다시피 신자들의 삶은 결코 평탄하지 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급류를 만나기도 하며, 뜻밖의 시련에 정신이 혼미할 적도 있습니다. 이럴 때에라도 하나님이 무심하다고 말하지 않고, 욥처럼 도리어 그분을 찬양해야 합니다. “(욥1:21)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지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 하고” 이런 욥의 행위에 탄복한 하나님은 마침내 그를 기쁘게 맞아주지 않았습니까? “(42:9) 이에 데만 사람 엘리바스와 수아 사람 빌닷과 나아마 사람 소발이 가서 여호와께서 자기들에게 명하신 대로 행하니라 여호와께서 욥을 기쁘게 받으셨더라.” 이처럼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정도로 중심을 든든히 합시다. 이러한 자에게는 존경이 주어질 뿐 아니라 결국 생명의 면류관도 주어질 것입니다. “(약1: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2. 예언이 맞는 자.
반드시 다 응하다(보 야보)란 응하다(보)란 말을 거듭 써서 강조한 것입니다. 여기서 히브리어 “보”는 임하다“(시94:13) 이런 사람에게는 환난의 날에 벗어나게 하사 악인을 위하여 구덩이를 팔 때까지 평안을 주시리이다”, 살아있다“(시40: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 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 란 뜻으로, 예언한 내용이 살아있어서 결코 스쳐지나가 버리지 않고 반드시 성취됨을 말합니다. 본래 예언은 감추어진 사실을 미리 예고하는 것을 말합니다. 때문에 참 선지자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미지의 세계에 대해 어느 정도 예측은 할 수 있습니다. 그 예측은 때때로 신기하게 들어맞기도 하지만, 빗나가는 경우가 흔합니다. 그러나 참된 예언은 계시의 영에 의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말하는 고로 절대 어긋나지 않습니다. “(눅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예언하여 가로되 ” 물론 선지자가 말한 예언이 즉각적으로 성취되지 않을 경우도 있지만, “(신18:19) 무릇 그가 내 이름으로 고하는 내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내게 벌을 받을 것이요 (신18:20) 내가 고하라고 명하지 아니한 말을 어떤 선지자가 만일 방자히 내 이름으로 고하든지 다른 신들의 이름으로 말하면 그 선지자는 죽임을 당하리라 하셨느니라 (신18:21) 네가 혹시 심중에 이르기를 그 말이 여호와의 이르신 말씀인지 우리가 어떻게 알리요 하리라 (신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 시간이 경과하면 설계도릐 도면을 따라 짓는 건축물처럼 정확하게 일치합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반면 거짓 선지자는 자신의 신분을 속이고 “(렘28:15) 선지자 예레미야가 선지자 하나냐에게 이르되 하나냐여 들으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지 아니하셨거늘 네가 이 백성으로 거짓을 믿게 하는도다”, 백성을 미혹하며,“(렘23:32)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며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게 합니다. 그해서 징벌을 선포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평화를 선포합니다. “(렘23:17)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 또 자기 마음의 강퍅한 대로 행하는 모든 사람에게 이르기를 재앙이 너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였느니라.” 결국 그들ㅇ의 예언은 하나님의 묵시가 아니라 미숙한 자기 생각, 거짓된 자기 주장에 불과할 뿐입니다. “(렘23:16)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에게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을 듣지 말라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3. 길을 인도하는 자.
세상에는 여러 종류의 길이 있습니다. 소망을 주는 길이 있는가 하면, 괴움과 슬픔을 초래하는 길도 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추구하려고 애쓰기 때문에 후자를 택하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그 길의 실상을 깨닫지 못하는 것에 놓여 있습니다. 그런고로 백성의 지도자는 마땅히 올바른 길을 가르쳐 주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진정한 선지자는 죄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백성에게 깨닫게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사무엘처럼 사울의 죄악을 인해 온 밤에 처절하게 흐느끼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삼상15:11) 내가 사울을 세워 왕 삼은 것을 후회하노니 그가 돌이켜서 나를 좇지 아니하며 내 명령을 이루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신지라 사무엘이 근심하여 온 밤을 여호와께 부르짖으니라” 이런 선지자만이 백성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할 수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주위에는 사무엘과 같이 존경을 받으며 하나님의 예언을 정확히 전달하고 바른 길로 인도하는 참된 선지자가 있습니까? 혹은 여러분 스스로가 참된 선지자를 두려워하여 오히려 진리의 선포를 가로막으므로 악의 편을 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세상이 혼탁한 책임은 바로 이러한 자에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참된 진리를 소유하며 이를 과감히 선포하는 참 선지자가 되기를 요구하십니다. 당신이야 말로 오늘 이 시간에 살아 숨쉬는 사무엘이 되어야 합니다.
·
제 목 : 새 사람
본 문 : 삼상 10:6
찬 송 : 46, 208, 493
곡마단에서 많은 구경꾼들에게 매일 똑같은 연기를 보여 주는 원숭이를 보며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마치 다람쥐가 우리 안에서 쳇바퀴를 굴리는 것같은 생활을 하는 현대인과 너무나도 흡사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까? 현대인들은 고도로 전문화되고 분업화된 후기 산업사회에 살고 있디만 단순 동작을 매일 반복함으로 말미암아 쉽게 무력감에 빠져 듭니다. 이런 상활에서 벗어나기 위해 어떤 사람은 다양한 여가 생활을 즐기려 하지만, 얼굴은 늘 어두움에 그림자로 채색되어 표정 없는 마네킨처럼 윤기를 잃어가는 것이 현실입니다. 현대인! 결코 그들은 여가 생활이나 세속적인 쾌락으로서는 박제(剝製)된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인간의 내면 속에 깃든 영혼의 변화를 체험하지 않고서는 절대로 찌든 생활에서 탈출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을 통해 일상의 틀에 박힌 삶에서 헤어날 비법, 즉. 꿈 많은 청년보다 더 활기차고 왕성한 삶에서 사는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사40:30)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사40:31)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 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1. 변화의 요인(要因).
변화를 줄 수 있는 근원적인 실체는 바로 여호와의 영입니다. 영(루아흐)이란 하나님의 신“(창1: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입니나 코에서 나오는 숨결“(욥15:30) 흑암한 데를 떠나지 못하리니 불꽃이 그 가지를 말릴 것이라 하나님의 입김에 그가 떠나리라”, 하늘의 바람“(창8: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육축을 권념하사 바람으로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감하였고”을 가리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영은 “생명을 새롭게 창조하는 힘”임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이 인간을 창조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홍수로 타락된 세상을 멸하신 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실 때에도 바로 이 “루아흐”가 사용되었지 않습니까? 비록 인간의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교제가 파괴되었으나, 하나님의 영으 우리의 속사람을 새롭게 해서 소망을 갖게 만듭니다. “(고후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그렇지만 세상의 영은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감각을 상실할 뿐입니다. “(엡4:18)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엡4:19)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그러므로 몸과 마음의 흐트러진 감각을 새롭게 할 에너지는 가변적(可變的)인 인간의 내적 결심에 있지 않고, 항구(恒久)이 신실하신 여호와의 영에 달렸음을 명심합시다.
2. 변화의 과정.
임하다(찰레아흐)란 번영하다“(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감동되다“(삿14:6) 삼손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어 손에 아무것도 없어도 그 사자를 염소 새끼를 찢음 같이 찢었으나 그는 그 행한 일을 부모에게도 고하지 아니하였고”, 건너가다“(삼하19:18) 왕의 가족을 건네려 하며 왕의 선히 여기는 대로 쓰게 하려하여 나룻배가 건너가니 왕이 요단을 건너려 할 때에 게라의 아들 시므이가 왕의 앞에 엎드려”란 뜻을 지닙니다. 여기서 “감동되다”란 말은 단순히 “마음이 움직이다”란 의미가 아닙니다. 마치 호수 위에 떠 있는 돛단배처럼 바람이 부는 방향대로 흘러가는 상태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은 삶의 모든 것을 오직 성령께 의지하는 태도를 뜻합니다. 성도 여러분! 죄악된 인간의 마음이 고작 빚어내는 것이란 무엇입니까? 불의, 추악, 살인, 분쟁, 교만...,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여러분을 죽음으로 인도할 뿐입니다. “(롬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롬1:29) 곧 모든 불의,추악,탐욕,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살인,분쟁, 사기,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롬1:30)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롬1:31)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롬1: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거듭남으로 죽음을 극복하며 생명을 얻는 비결은 죄악의 강을 건너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생명의 강으로 들어오는데 있습니다. 어떤 유형의 사람이든지 예수의 영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 됨을 명심합시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
3. 변화의 결과.
변하다(하파크)란 본래 뒤집다“(호7:8)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잡되니 저는 곧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무너뜨리다“(욥9:5) 그가 진노하심으로 산을 무너뜨리시며 옮기실지라도 산이 깨닫지 못하며”란 뜻입니.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성냥갑을 거꾸로 뒤집으면, 잘 정돈되었던 알맹이들은 이리저리 흐트러져 원래의 모습을 찾지 못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쌓여 있는 여러 가지 악한 생각들을 뒤집어 밖으로 내팽개치면 우리의 악한 모습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것입니다. 이처럼 변화란 마음의 그릇 속에 담겨진 내용물을 송두리째 뒤바꾸어 놓는 것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의 모습을 생각해 보십시오! 예수를 만난 후, 자신의 원수로 여기며 혐오했던 그를 주(主)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행9:5)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결국, 변화나 회심은 지금까지 축적된 자신의 자치체계가 근본적으로 허물어지는 것을 가리킵니다.
성도 여러분! 당신은 과연 영혼이 건강한 새 사람입니까? 영혼의 권태를 당신은 온전히 극복하였습니까? 썩은 물은 흐르지 않는 데서 생깁니다. 우리들도 예수를 만난 뒤 변화하지 않으면 영과 육이 썩게 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새 사람이 되기 위해 여호와의 영을 충만히 받아 죄악의 삶을 청산하므로 매일 새롭게 거듭나는 자가 됩시다.
일본의 오끼나와에서 교역자 세미나가 열렸는데, 아래의 글은 그 때 한 교역자가 나와서 간증을 한 것입니다.
그는 냉철한 판단력과 풍부한 학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는 자유주의 신학교에서 수련을 받을 기회를 얻어 그곳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에 회의가 생겨 결국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자유주의 신학은 성령이 없이 인간의 지식만을 중심으로하여 역사, 고고학, 그리고 고등 비평으로 성경을 판단했기 때문에 공부를 하면 할수록 성경의 구석 구석에서 인간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부분들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결국에는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어느 한 구절도 믿지 못하게 되었고, 그러자 보니 자신의 신앙은 자연히 퇴보하여 끝내는 예수 그리스도까지도 부인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문제로 방황할 때, 공교롭게도 그의 시력이 점점 나빠져 나중에는 돋수가 높은 안경을 쓰고도 사물을 볼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는 의사로부터 의학적으로 고칠 수 없는 절망적인 상태라는 말까지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하나님께서 살아계시다면 저의 눈을 치료해 주십시오. 그리고 더불어 영의 눈도 뜨게 하시어 하나님을 바로 보게 해주십시오.”
순간 그는 마음 속에 무엇인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성령을 통해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목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변화된 사울에 대한 사무엘의 예언을 보면 “여호와의 신이 크게 임하리니” 가 전제되어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신은 곧 성령을 의미합니다. 이렇듯 우리는 본문과 위글을 통하여, 변하여 새 사람이 되는 것에는 무엇보다도 우선 성령의 역사하심이 있어야 함을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제 목 : 왜 성도가 연합해야 합니까?
본 문 : 삼상 11:1-2
찬 송 : 37, 279, 517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란 말은 아주 평범한 말 같지만 개이니과 사회, 국가 뿐만 아니라 교회 공동체 증에서 멸심해야 할 사항입니다. 자연계의 현상을 세심하게 관찰해 보십시오! 수소(H) 분자 둘과 산소(O) 분자 한 개가 연합되어 생명체를 유지시키는 물이 구성됩니다. 또한 물방울 하나는 아무런 힘이 없으나 이것이 뭉쳐진 강물이 벌람하게 되면 땅의 모양이 바뀌기도 합니다. 실로 미약한 것들(수소, 산소 분자, 물 한방울)이 모여 큰 것(물, 강물)이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인간도 이러해야 합니다. 개인은 미약하므로 서로 뭉쳐야 합니다. 서로 연합해야 합니다. 그래서 큰 힘을 발휘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십시오, 야베스 족은 암몬으로부터 습격을 받게 되자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 아십니까? 그것은 그들이 공동체에서 이탈하여 힘이 약해진 까닭입니다. “(삿21:8) 또 가로되 이스라엘 지파 중 미스바에 올라와서 여호와께 이르지 아니한 자가 누구뇨 하고 본즉 야베스 길르앗에서는 한 사람도 진에 이르러 총회에 참여치 아니하였으니” 이제 그들이 저지른 잘못이 무엇인가, 또 그 결과는 어떠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1. 이방인과 언약을 맺으려 함(1절).
우리와 언약하자(카라트 라누 베리트)란 문자적으로 “우리를 위해 언약을 자르자”입니다. 본래 언약(베리트)이란 말 역시 “자르다”, “먹다”란 듯의 “바라”에서 유래된 말입니다. 이것은 고대 근동에서 언약을 체결할 때 두 당사자가 희생물을 잡아 그 가운데로 지나며 언약 파기자에게는 죽음이 불가피함을 서약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특히 약소국과 강대국 간의 언약은 “약소국은 강대국을 위해 곤물을 바치는 대신, 강대국은 약소국을 보호해 준다”는 조항이 들어 있습니다. 따라서 야베스 사람들이 나하스에게 언약을 체결하자고 요청한 것은 하나님의 보호를 포기하고 그들의 보호하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한 셈입니다. 이와 같은 태도는 오늘날의 신자에게도 나타납니다. 세속에 물든 성도는 어리석은 부자처럼 물질적인 축복이 자신을 보호해 주리라고 생각하며, 정권에 기생충처럼 붙어 다니는 일부 지도자들은 권력이 자신의 방패막이라고 굳게 믿습니다. “(눅12:19)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심지어 예수의 제자들조차도 웅장한 성전이 자신들을 지지해 주는 것인양 자랑삼아 주님께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마24:1) 예수께서 성전에서 나와서 가실 때에 제자들이 성전 건물들을 가리켜 보이려고 나아오니 (마24:2)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보지 못하느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 이처럼 인간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보다는 현실적으로 느낄 수 있는 구체적인 힘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2. 이방인을 섬기게 됨(1절).
섬기다(아바드)란 일하다“(창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사 그것을 다스리며 지키게 하시고 ”의 뜻입니다. 본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왕처럼 섬기기 위해 레위 족속을 뽑아,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계신 성소에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길르앗에 사는 이스라엘 사람은 암몬 족속을 위해 일하겠다고 자청합니다. 혹 여러분의 아내가 여러분을 위해 맛있는 반찬을 만들거나 집안을 깨끗하게 청소하거나, 옷을 아름답게 매무시하지 않고 옆집 남자를 위해서 이러한 일을 하였다면 여러분의 심정이 어떻겠습니까?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밖에서 땀을 흘렸던 사랑의 수고는 증오의 손길로 변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의 신랑으로서 온 힘을 다해 그들의 상처를 치료해 왔을 뿐만 아니라,“(사30:26) 여호와께서 그 백성의 상처를 싸매시며 그들의 맞은 자리를 고치시는 날에는 달빛은 햇빛 같겠고 햇빛은 칠배가 되어 일곱날의 빛과 같으리라.” 병아리를 품은 어미닭처럼 그들을 환난으로부터 보호했습니다. “(마23:37)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 따라서 하나님께 이처럼 지극히 사랑받은 이스라엘이 암몬 족속을 섬긴다는 것은 호세아를 버린 탕녀 고멜의 행동과 똑같습니다. “(호3:1)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자손이 다른 신을 섬기고 건포도 떡을 즐길지라도 여호와가 저희를 사랑하나니 너는 또 가서 타인에게 연애를 받아 음부된 그 여인을 사랑하라 하시기로 ” 따라서 야베스인의 이런 행동은 마침내 스스로 심한 수치감을 초래케 하는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3. 모욕을 당함(2절).
모욕(하비팀)은 본래 “요리해서 만들어진 음식이나, 밀가루 반죽으로 구워서 만든 과자”를 뜻합니다. 따라서 본절에서 이 말은 나하스가 마치 요리사처럼 이스라엘 민족을 부풀은 반죽으로 만들어 자기 마음내키는 대로 요리하겠다는 의도를 상징합니다. 결국 야베스 사람들은 나하스에 의해 한갓 노리갯감에 불과한 존재로 전락된 셈입니다. 이렇게 타락한 이스라엘처럼 지존하신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피조된 우리가 사단의 심심풀이 대상이 된다면 얼마나 큰 수치입니까?
성도 여러분! 성도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갈 때 가장 아름답게 보입니까? 형제와 동거할 때입니다. “(시133:1)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다윗과 요나단의 아름다운 우정을 보십시오. 성도들의 교회 생활에도 세상과는 다른 무엇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으로 꽁꽁 뭉쳐진 교회가 아니면, 세상인들은 우리를 맛을 잃은 소금처럼 조소하며 짓밟을 것입니다.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그러므로 뭉쳐진 교회만이 사단의 계교를 물리치며, 성결을 유지함으로써 성도로서의 가치를 발할 수 있습니다.
제 목 : 백성을 위한 정치가
본 문 : 삼상 12:3-4
찬 송 : 43, 267, 372
“인민의, 인민에 의한, 인민을 위한”이란 문구가 백성들을 볼모로 한 약삭빠른 정치가들의 선전구로 사용된 적이 많습니다. 그들이 처음 정권을 잡을 때에는 항상 이런 말로 백성들을 현혹시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 그들의 본색이 드러나 백성은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의해 더욱 착취를 당합니다. 그들이 이런 정치판을 벌이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성경적인 정치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본래 정치의 권력은 하나님께 속한 것입니다. “(롬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바라.” 때문에 본질적으로 권세는 거룩한 성격을 갖습니다. 그래서 권세를 위입받은 지상의 통치자들은 그것을 거룩하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정치가 신성해질까요? 군림하려는 자세를 버리고 섬김의 삶을 살 때에만 가능합니다. “(막10:45)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하늘의 영광과 권세를 소유했으면서도 백성들을 자신의 친 형제요, 자매처럼 사랑했던 예수님! 2,000마리의 돼지떼 보다 한 사람의 영혼을 더 귀중하게 여겼던 그분의 마음씨를 본받을 때 백성들이 진정 존경하는 정치가가 될 것입니다.(막 5:1-17) 그러면 본절이 보여 주는 바른 정치가상은 어떠합니까?
1. 착취하지 아니함.
취하다(라카흐)란 단순히 가져오는 것을 말하기 보다, 점령하다“(민21:25) 이스라엘이 이같이 그 모든 성읍을 취하고 그 아모리인의 모든 성읍 헤스본과 그 모든 촌락에 거하였으니”, 아내로 삼다“(창4:19) 라멕이 두 아내를 취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며”란 의미로 남의 소유를 완전히 제것으로 만드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는 통치자들이 국가 이익이란 구실로 남의 영토를 침략하여 타민족의 삶을 송두리째 짓밟는 행동과 유사합니다. 본래 인간은 남의 것을 욕심내는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평화로운 세상을 유지하기 위해 “(출20:15) 도적질하지 말지니라”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물론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것도 도적질하는 것이지만, 공권력을 내세워 백성들의 것을 착취하는 것도 분명히 도적질 하는 것입니다. 특히 본문의 소나 나귀는 당시 사회적 상황에 비추어 볼 때 생존을 위한 긴요한 자산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은 한마디로 생존권을 절대로 위협치 않았던 것입니다. 과연 현대의 정치가 이런 방향으로 펼쳐집니까? 빈익빈 부익부의 평행선을 힘차게 달리고 있지는 않습니까? 참된 정치가는 성경의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명령, “도절질하지 말라! 그리고 네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를 마땅히 지켜야만 합니다.
2. 압제치 아니함.
압제하다(라차츠)란 깨뜨리다“(사42:3)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고 진리로 공의를 베풀 것이며”, “폭력을 쓰다”란 뜻입니다. 이는 통치자가 백성들을 힘으로 깔아 뭉개서 고통을 가하는 것을 말합니다. 권력을 잡은 자가 이런 횡포를 부리게 되면, 그것은 곧 백성들의 마음에 큰 상처가 되어 백성들로부터 원망을 삽니다. 실제로 바로의 강제노동으로 학대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증오감으로 가득차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를 수없이 원망했습니다. “(출5: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 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출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이러한 통치자의 압제는 곧 권위의 상실과 무정부적 혼란 상태, 가치관의 파괴 등을 초래합니다. 그러므로 통치자의 압제는 인간성을 말살시키는 악 기능을 감당하는 셈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통치자들에게 공권력보다는 사랑에 힘을 쓰라고 권합니다. “(롬13:8)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로마는 칼로 세상을 제패했으나 역사의 무대 뒤로 사라졌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정치가는 십자가의 사랑만이 온 세상을 말없이 움직이는 힘임을 깨달아서 사랑의 정치를 펼쳐야 합니다.
3. 잘못을 시인함.
이 세상에서 100%의 순도를 가진 금은 존재하지 않듯, 완전한 사람도 찾아 볼 수가 없습니다. 즉, 인간은 항상 실수할 가능성을 안고 사는 존재입니다. 때문에 진정한 지도자는 자신의 잘못이 드러났을 때 변명하거나 회피하려 들지 말고 겸허하게 반성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회개했습니다. 악한 아합 왕도 나봇의 포도원을 탈취한 후 엘리야의 책망을 받고 금식했지 않았습니까? “(왕상21:27) 아합이 이 모든 말씀을 들을 때에 그 옷을 찢고 굵은 베로 몸을 동이고 금식하고 굵은 베에 누우며 행보도 천천히 한지라.” 잘못을 시인할 줄 아는 지도자! 이런 지도자가 진정 국민을 위한 자이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입니다.
성도 여러분! 과연 백성을 위한 진실한 지도자가 누구이겠습니까? 헛된 공약(空約)으로 국민의 눈을 속이는 자입니까? 백성을 통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자입니까? 아닙니다. 날마다 주의 말씀을 깊이 묵상하여 공의와 정의를 베푸는 지도자, 바로 그런 자가 참된 지도자입니다. “(시1: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
제 목 : 월권행위
본 문 : 삼상 13:13-14
찬 송 : 42, 379, 522
1. 하나님은 온 우주를 사람이 평화롭게 살 수 있도록 질서있게 만드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 역시 자신에게 부여된 책임과 권한을 넘지 말도록 엄명했습니다. “(창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그래서 기독교는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밝혀주는 종교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타락한 인간은 “(삼상15:22)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란 말씀을 무시하여 월권행위를 자행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마땅히 주인을 섬겨야 할 종이 주인 행세를 한다면, 주인의 심정이 얼마나 불쾌하겠습니까? 종은 본래의 위치에서 충실해야 남보기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우리 예수님도 이 사실을 밝히 알았기 때문에 자의대로 살지 않고 주인되신 하나님의 명령에 순복했습니다. “(요12:49) 내가 내 자의로 말한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나의 말할 것과 이를 것을 친히 명령하여 주셨으니” 성도 여러분! 분수에 맞게 살아가며 종의 종됨을 분명히 인식하는 자만이 주인의 포도밭을 감당할 자격이 있습니다. “(마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찌니이다” 주인의 권한을 뺏으려고 하는 자는 반드시 진멸당할 것입니다. 그러면 본절에 나오는 사무엘의 책망을 통해 사울의 월권 행위의 본질과 그 결과에 대해 살펴 봅시다.
1. 망령되이 행했습니다.
사울의 행동은 망령되이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서 망령되이 행하다(사칼)는 어리석게 행하다“(대하16:9)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 하매”, 악하게 행하다“(대상21:8) 다윗이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하니라”란 뜻입니다. 이는 선과 악을 분별하는 도덕적 능력이나, 하나님의 뜻을 아는 영적 능력이 부족하여 규모없이 행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인간이 나이가 들어 정신이 흐려지게 되면 소위 사리에 어긋나는 망령된 행동을 가끔씩 나타내지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 경험이 축적되어 어떤 연령층에 있는 사람들보다 상식이 풍부한 노인들이 어린아이와 같이 유치하게 되는 이유는 무엇 때문일까요? 이는 자신의 경험과 연륜은 과신하여 고집을 갖게 되기 때문입니다. 사울도 왕이 되자 남의 의견을 무시하는 버릇에 빠졌던 것 같습니다. 때문에 마치 고집 쎈 어린아이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번제를 드렸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자신의 판단이 정당한가를 말씀에 비추어 검토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왕권을 인수할 만반의 준비를 다 갖추어 논 다윗도 헤브론으로의 입성 때 하나님께 먼저 물어보고 올라갔던 지혜를 우리는 본받아야 합니다. “(삼하2:1) 그 후에 다윗이 여호와께 물어 가로되 내가 유다 한 성으로 올라가리이까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올라가라 다윗이 가로되 어디로 가리이까 가라사대 헤브론으로 갈지니라”
2.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망령된 마음을 가진 사울은 그 필연적 결과로 주인되신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지키다(쇠마르)란 보존하다“(욥2:6)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를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생명은 해하지 말지니라”, 바라보다“(삼상1:12) 그가 여호와 앞에 오래 기도하는 동안에 엘 리가 그의 입을 주목 한즉”를 뜻하는데, 명사형으로 쓰일 때에는 “못을 벽에 박아서 고정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요즈음 집들은 거의 콘크리트를 부어 짓지만 옛날에는 구조물이 목조로 되어있기 때문에 집의 뼈대를 나무못을 박아서 마디마디를 연결했습니다. 따라서 마디를 연결한 못을 빼버린다면 집 전체가 망가지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지 않은 사울의 태도는 결국 왕국의 멸망을 앞당길 촉진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하는 성도는 “(마7: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마7: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는 말씀처럼 그 흔적조차 사라질 것입니다. 말씀의 일점 일획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고 이루겠다는 주님의 말씀을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받아야 합니다. “(마5:18)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 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
3. 월권 행위의 결과
하나님의 마음을 실망시킨 사울의 행위는 마침내 정권 교체를 초래케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마음에 맞는 사람을 물색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고 월권 행위를 한 사람은 자신의 지위에서 쫓겨가는 치욕을 맛봅니다. 반면 그 자리는 하나님 마음에 맞는 자에게 돌아 갑니다. 여기서 마음에 맞는(키르바보)이란 “마음에 일치하는”의 뜻입니다. 다시 말해, 사울이 취한 태도와는 완전히 다른 “하나님의 생각에 전혀 어긋나거나 빗나가지 않는 태도”를 말합니다. 우리들은 가끔 TV 속에서 마치 자로 잰듯한 모습으로 오(伍)와 열(列)을 빈틈없이 맞추는 군인들의 행군 모습을 목격하고 탄성을 지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도 자신의 마음에 일치한 자를 발견할 때 큰 기쁨을 느끼시며 그에게 온갖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 자신은 하나님의 종이라고 주장합니까? 그렇다면 종으로서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직접 보여 주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하나님과 똑같으시면서도 스스로 종의 모습을 취해 그분의 명령대로 지상생애를 마감하신 예수님! “(빌2: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그분의 자발적인 복종이 마침내 나사렛 예수를 온 세계의 주(主)와 그리스도로 만드셨음을 기억합시다. 그러나 여러분이 종된 위치를 버리고 사울과 같이 월권 행위를 자행한다면 여러분의 성도로서의 지위는 더 이상 유지될 수 없습니다.
제 목 : 왜 세상과 싸워야 합니까?
본 문 : 삼상 14:6
찬 송 : 55, 277, 387
“새장 속에 갇혀 노래하지 않는 새”는 이미 새로서의 존재 이유와 목적, 기능을 상실한 셈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아주 값비싸고 멋진 새장이 있고, 그 속에 꾀꼬리가 있는데 전혀 새소리를 들을 수 없다면 도대체 그 새장과 새는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마찬가지로 아무리 좋은 교회당에 모여서 아름답게 찬송을 부르고 훌륭한 설교 말씀을 듣는다 해도 교인들이 부름 받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한다면 그 교회와 교인은 존재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교회로 불러 모으신 까닭은 흑암이 가득찬 세상 속에서 거룩한 백성이 되어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하며, “(마5:13)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 소금이 만일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 후에는 아무 쓸데 없어 다만밖에 버리워 사람에게 밟힐 뿐이니라 (마5:14)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마5:15)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마5:16)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롬14:19)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그러므로 이런 구실을 제대로 하지 못한 교인은 열매없는 포도나무의 경우처럼 베어 버림을 당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는 결코 불의를 보고 침묵하거나 방광해서는 안되며 이것을 없애 버리기 위해 투쟁해야 합니다. 어둠의 역사가 있는 곳마다 성도의 외침은 높게 울려 퍼져야 할 것입니다. 본절은 요나단의 용맹스러운 결단을 통해 성도가 이 세상과 왜 싸워야 하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할례 없는 자들을 정복하기 위해.
할례 없는 자들(헤아레림)이란 벗겨질 포피가 있음을 의미하는 “아렐”에서 유래하여 “세속적인” 순수하지 못한“(레19:23) 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의 뜻인데, 상징적으로 “입술이 두터워 말이 더딘”을 의미 합니다. “(출6:12) 모세가 여호와 앞에 고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도 나를 듣지 아니하였거든 바로가 어찌 들으리이까 나는 입이 둔한 자니이다” 따라서 할례 없는 자들이란 하나님의 택함의 상징인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인을 가리키는 말이나 상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능력을 분명히 깨달으면서도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는 우상처럼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입 열기를 거부한 자를 총칭합니다. “(시115:4)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시115:5)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시115:6)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맡지 못하며 (시115:7)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도 못하느니라 (시115:8)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으리로다” 실제로 세상 사람들은 마음이 바로처럼 강퍅하기 때문에 아무리 놀라운 기적이 일어난다고 해도 전혀 마음이 움직이지 않습니다. 이들의 입술은 예수님을 귀신에 사로잡힌 자라고 모욕했던 서기관들의 것과 똑같습니다. “(막3:22)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서기관들은 저가 바알세불을 지폈다 하며 또 귀신의 왕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하니” 결국 이들은 눈이 가리워진 소경처럼 자기 중심에 사로잡혀서 결코 하나님의 역사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르므로 성도는 이들이 구축해 놓은 모든 무신론적 세계관에 대항하여 싸워야 할 것입니다.
2. 여호와께서 일하시기 때문에.
일하다(아솨)란 만들다“(창1: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준비하다“(창18:7) 아브라함이 또 짐승 떼에 달려가서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취하여 하인에게 주니 그가 급히 요리한지라 (창18:8) 아브라함이 뻐터와 우유와 하인이 요리한 송아지를 가져다가 그 들의 앞에 진설하고 나무아래 모셔 서매 그들이 먹으니라”를 뜻합니다. 여기서 “일하다”란 말은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엇을 만든다는 뜻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창조된 재료들을 가지고 적절하게 배치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시되 요나단의 손에 든 병기와 용감성을 이용하셔서 함께 싸우시므로 승리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일하신다란 의미를 하나님 혼자서만 모든 일을 처리하시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성경을 오해한데서 나온 그릇된 인식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뜻대로 모든 일을 주도해 나가시되, 항상 인간을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전 인류를 구원하고자 하시는 계획의 진행 과정을 살펴보십시오! 그 과정 속에는 아브라함, 모세 다윗처럼 위대한 인물이 있었던 반면, 로마 제국과 가롯 유다, 혹은 당시의 지배자였던 헤롯 왕가와 사두개인과 바리새인들 같은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자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어 나가는 한 요인이라고 생각하며 하나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일의 성취를 위해 이를 막는 이땅의 세력과 싸워냐 합니다.
3. 승리가 확실하기 때문에
“달리지·······하였느니라”(마초르)란 “장애물”을 뜻하는데, 본래 닫다“(창16: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의 동방에서 살리라 하니라”, “막다”, “만류하다”의 “아차르”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달리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일은 결코 인위적으로나 자연적으로 방해될 수 없음을 의미합니다. 성도 여러분! 비가 억수같이 내려 큰 홍수가 나서 수 없이 많은 인적, 물적 피해를 본다고하여 하늘을 닫게 할 자가 있습니까? 불임인 여인이 아들을 낳기 위해 발버둥친다고 해서 없는 아이가 태어나겠습니까? 이와 똑같이 하나님의 경정은 결코 뒤바뀌지 않습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구원을 작정했으므로 이스라엘의 승리는 이미 결정된 것이나 다름 없게 되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날 마귀와 싸우는 우리들에게도 확실한 승리를 보장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20세기 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하나님을 어떤 존재로 생각하고 있습니까? 자신들이 사는 세상에 전혀 힘을 미치지 못하는 일종의 우상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우리는 과학과 기술의 진보만을 숭상하는 물신 주의(物神主義)와 싸우기 위해 부르심을 입은 존재입니다. 비록 세소 속의 힘이 강하게 보일지라도 그것 자체가 결코 장애물이 될 수 없음을 깨달아 사단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 열심히 분투합시다.
제 목 : 사무엘의 영적 반응
본 문 : 삼상 15:11
찬 송 : 48, 356, 508
“지도자란 모름지기 읽는 자(Reader)이어야 한다”. 라는 명언이 있습니다. 특히 성경에 나오는 지도자는 하나님이 세우신 목적을 수행키 위해 뽑힌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읽을 수 있으며 이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했습니다. 그렇지만 모든 지도자가 하나님의 의도를 정확하게 포착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엘리 제사장은 하나님이 곁에 나타났음에도 전혀 깨닫지 못하는 영적 무감각자였습니다. “(삼상3:1)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반면에 사무엘은 하나님의 심정을 재빨리 알아차린 영적 감수성이 민감한 선지자입니다. 오늘날의 성도들이 보여 주는 영적 감수성(感受性)은 어떻습니까? 피리 불어도 춤 출 줄 모르며, 애곡하는 장례식에서 어린아이가 장난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지는 않습니까? “(마11:17) 가로되 우리가 너희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애곡하여도 너희가 가슴을 치지 아니하였다 함과 같도다” 옷의 유행이나 시대적 감각에는 즉각 반응을 하면서도 하나님의 슬픔에 전혀 눈물이 없는 사람은 더 이상 성도일 수 없습니다. 이제 본절을 통하여 하나님의 후회하심에 대한 사무엘의 영적 반응을 살펴봅시다.
1. 하나님의 후회(後悔).
후회하다(나함)란 본래 몹시 지쳐서 숨을 헐떡이는 모습에서 유추된 의성어(擬聲語)입니다. 여기에서 동정심을 갖다“(삿21:6) 이스라엘 자손이 그 형제 베냐민을 위하여 뉘우쳐 가로되 오늘날 이스라엘 중에 한 지파가 끊쳤도다 (삿21:7) 그 남은 자들에게 우리가 어떻게 하면 아내를 얻게 하리요 우리가 전에 여호와로 맹세하여 우리 딸을 그들의 아내로 주지 아니 하리라 하였도다”, 슬퍼하다“(출13:17) 바로가 백성을 보낸 후에 블레셋 사람의 땅의 길은 가까울지라도 하나님이 그들을 그 길로 인도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백성이 전쟁을 보면 뉘우쳐 애굽으로 돌아갈까 하셨음이라”란 말이 나옵니다. 따라서 이 용어는 늠늠하고 패기 넘쳐야 할 군마가 곧 숨이 끊어질 것 같은 나약한 모습으로 숨을 몰아 쉬는 상황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 말이 하나님에 대하여 사용되면, 하나님의 기대에 어긋나는 모든 죄악된 상태에 대한 하나님의 개탄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창조의 아름다움이 추하게 변해버리고, 마땅히 하나님께 순종해야 할 이인간이 감히 하나님의 자리까지 넘보며,“(창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이 사단의 지배하에 놀아나는 현상들“(창6:5)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이 모든 것들은 창조자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것들입니다. 성도 여러분!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도 태연한 사람을 가리켜 “뻔뻔스러운 자”라고 욕하지 않습니까? 죄를 짓고도 얼굴을 들고 다니며 목에 힘을 주는 사람은 형대판 가인(Cain)과도 같습니다.
2. 사무엘의 근심.
이러한 상황에 대해 무관심한 자들이 많은 반면 영적 감수성이 뛰어난 사무엘은 근심했습니다. 여기서 근심하다(하란)란 뜨거운 열기에 의해 쇠가 빨갛게 달아오르는 것을 묘사하는 말이었습니다. 여기서 파생 된 이 단어의 일차적 의미는 “노여워하다”“(합3:8) 여호와여 주께서 말을 타시며 구원의 병거를 모시오니 하수를 분히 여기심이니이까 강을 노여워 하심이니이까 바다를 대하여 성내심이니이까” 인데, 마음 속에서 치솟은 분노로 말미암아 목이 몹시 타는 듯한 갈증을 느끼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 말은 단순히 남의 죄악을 향해 의분을 품는 것이라기 보다, 하나님의 규례를 사모하는 마음에서 나온 맹렬한 진노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울의 잘못을 질책한 사무엘의 “지체 의식(肢體意識)”의 신앙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엡4:16)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 진정 “(벧전4:8) 무엇보다도 열심히 서로 사랑할찌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란 말씀은 결코 죄를 묵인해도 좋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형제의 죄악을 목격하고서도 아무런 느낌이 없다면, 그 사람은 비뚤어진 신앙인이라고 단정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나라 속담에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매를 주고 미운 자식에게 떡을 준다”란 말이 있듯, 이웃을 진정으로사랑하는 자는 잘못된 일에 대해 이를 되돌이키기 위한 징계와 채찍을 반드시 내립니다. “(계3:19)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한편 우리는 이러한 사무엘의 태도를 통해 진정 이웃과 나라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뜻에 민감한 사무엘의 영적 감수성을 배울 수 있습니다.
3. 사무엘의 부르짖음.
사무엘은 근심했을 뿐만 아니라 이러한 상황의 타개를 위해 여호와께 부르짖었습니다. 여기서 “부르짖다”(자아크)란 도움을 청하기 위해 남을 부르다“(삿12:2) 입다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와 나의 백성이 암몬 자손과 크게 다툴 때에 내가 너희를 부르되 너희가 나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지 아니하므로” 의 뜻입니다. “온 발”에서 온(콜)이란 끊어지지 않는 연속성을 뜻하는 “전체”를 가리키는데, “성취하다”, “온전하다”라는 동사(카랄)에서 유래되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은 밤새 쉬지 않고 온전히 기도함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청했던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여러 가지의 제목을 가지고 철야기도를 하지만, 타인이 범한 잘못 때문에 밤을 세워 부르짖는 사무엘과 같은 기도를 과연 들을 수 있습니까? 한 지체의 잘못에 대해 이렇게 흐느끼며 기도하는 마음이야말로 바로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을 찾아 들판을 찾아나서는 예수님의 마음과도 같은 것입니다. “(마12:11)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중에 어느 사람이 양 한 마리가 있어 안식일에 구덩이에 빠졌으면 붙잡아 내지 않겠느냐”
성도 여러분! 죽은 자는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저 침묵만 지킬 뿐입니다. 세상이 어떻게 움직이는 가를 날마다 비켜보면서도 이 시대의 영적 타락에 대해서 두 눈을 감아버리는 성도는 영적 현상에 무감각한 사두개인과 같습니다. “(마16:3)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천기는 분별할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 우리는 사무엘과 같이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 뿐 아니라 이로 인해 고뇌하며 자신을 지켜 깨끗게 함은 물론이거니와 이웃과 사회가 죄악의 구렁텅이로 빠지지 않도록 기도의 파수꾼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제 목 :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자
본 문 : 삼상 16:1-13
찬 송 : 49, 375, 519
한 교회에서 미개한 오지(奧地)로 파송할 성교사를 모집했을 때의 일이랍니다. 신청자를 대상으로 겨울 어느 추운 날 새벽 세시경에 시험이 있을 것이 발표되었습니다. 그런데 몇 명의 지망생이 왔으나 시험을 치기 위해서는 다시 오전 여덟시까지 기다려야 했습니다. 더욱이 시험문제는 “2×2=?”이었습니다. 왜 이렇게 이상한 시험을 시행했겠습니까? 그 이유는 “추운날 새벽 세시부터 여덟시까지 기다리면서 불평을 하는가, 화를 내지 않는가, 어린아이도 대답할 수 있는 유치한 질문에 거부반응을 보이는가, 다섯시간을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을 견디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갖추어져 있음을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선교사를 뽑는 데에도 여러 가지 까다로운 조건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쓰시려고 하는 사람을 뽑을 때는 또 어떻겠습니까? 우리는 다윗의 경우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을 세우시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선택하신 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여덟 아들 중에 이새가 가장 약하고 작게 보았던 다윗을 예선(豫選)하셨습니다. 여기서 예선하다(라아)는 분별하다“(말3:18) 그 때에 너희가 돌아와서 의인과 악인이며 하나님을 섬기는 자와 섬기지 아니하는 자를 분별하리라”, 주목하다“(욥34:21) 하나님은 사람의 길을 주목하시며 사람의 모든 걸음을 감찰하시나니”, 진찰하다“(레13:3) 제사장은 그 피부의 병을 진찰할지니 환처의 털이 희어졌고 환처가 피부보다 우묵하여졌으면 이는 문둥병의 환처라 제사장이 진단하여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이요”로서 기본 의미는 “보다”입니다. “(암9:1) 내가 보니 주께서 단 곁에 서서 이르시되 기둥 머리를 쳐서 문지방이 움직이게 하며 그것으로 부숴져서 무리의 머리에 떨어지게 하라 내가 그 남은 자를 칼로 살륙하리니 그 중에서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며 그 중에서 하나도 피하지 못하리라” 이는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특별히 분별한 한 사람을 주목해서 자세히 바라보고, 어려움 당했을 때 보호하고 진찰해 주는 사랑의 행위를 가리킵니다. 이처럼 전능하신 하나님의 따뜻하고도 세밀한 인도 안에 있게 된 사람만이 주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지내는 동안 그의 교만과 자만심은 다 사라졌지만 그 순간에도 하나님께서는 선택한 모세를 마음에 꼭 합당한 사람으로 키우고 계셨었습니다. (출 3:1-10) 뿐만 아니라 한낱 들에 나가 양을 지키는 목동에 불과한 다윗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를 택하여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선택하며 양육하셨습니다. “(삼상16:11) 또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가로되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2. 중심이 하나님께 있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뽕나무 위에라도 올라가서 주를 보기 원한 삭개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눅19:2) 삭개오라 이름하는 자가 있으니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라 (눅19:3) 저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눅19:4)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이러라 (눅19:5) 예수께서 그 곳에 이르사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하시니” 여기서 중심(레바브)은 “에워싸이다”, “열중하다”는 뜻의 “라바브”에서 유래된 명사로서 마음“(창26:35) 그들이 이삭과 리브가의 마음의 근심이 되었더라”, “용기”, “명철”“(잠8:12) 나 지혜는 명철로 주소를 삼으며 지식과 근신을 찾아 얻나니”로도 번역되며 인간의 지· 정· 의 전반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외모로 판단하는 것과 달리 눈에는 보이지 않으나 인간의 참된 가치가 머무는 지· 정· 의 전반을 종합항여 감찰하십니다. 요즈음 사람들은 교회에 나와서 예배 한 번 드리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 최선을 다한 것으로 생각하나 주님께서는 이런 마음은 모양만 있지 중심은 없는 바리새인의 외식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마23: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ㅃㅕ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마23:28) 이와 같이 너희도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안으로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그러므로 주께서 일꾼으로 세우시는 자는 지붕을 뜯어서라도 침대를 내려 주를 만나고자 했던 중풍병자와 네 사람과 같은 믿음의 중심을 가진 자들입니다. “(막2:1) 수일후에 예수께서 다시 가버나움에 들어가시니 집에 계신 소문이 들린지라 (막2:2) 많은 사람이 모여서 문 앞에라도 용신할 수 없게 되었는데 예수께서 저희에게 도를 말씀하시더니 (막2:3) 사람들이 한 중풍병자를 네 사람에게 메워 가지고 예수께로 올새 (막2:4) 무리를 인하여 예수께 데려갈 수 없으므로 그 계신 곳의 지붕을 뜯어 구멍을 내고 중풍병자의 누운 상을 달아내리니 (막2:5) 예수께서 저희의 믿음을 보시고 중풍병자에게 이르시되 소자야 네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 하시니”
3.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기름부음을 받은 다윗에게 그날부터 하나님의 신이 함께 하셨습니다. 여기서 “신”(루아흐)은 영혼“(사26:9) 밤에 내 영혼이 주를 사모하였사온즉 내 중심이 주를 간절히 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땅에서 심판하시는 때에 세계의 거민이 의를 배움이니이다”, 정신“(사19:3) 애굽인의 정신이 그 속에서 쇠약할 것이요 그 도모는 그의 파하신 바가 되리니 그들이 우상과 마술사와 신접한 자와 요술객에게 물으리로다”, 마음“(잠11:13)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바람“(출15:10) 주께서 주의 바람을 일으키시매 바다가 그들을 덮으니 그들이 흉용한 물에 납 같이 잠겼나이다”, 기운“(창45:27) 그들이 또 요셉이 자기들에게 부탁한 모든 말로 그 아비에게 고하매 그 아비 야곱이 요셉의 자기를 태우려고 보낸 수레를 보고야 기운이 소생한지라”, 등과 같이 생명체의 중심이며 사물을 변화시키는 힘의 원동력을 가리키는 여러 가지 뜻이 있으나 여기서는 하나님의 변화의 능력인 여호와의 신“(사63:11) 백성이 옛적 모세의 날을 추억하여 가로되 백성과 양 무리의 목자를 바다에서 올라오게 하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 그들 중에 성신을 두신 자가 이제 어디 계시뇨”을 의미합니다. 또 “감동되니라(찰라흐)”는 형통하다“(대하20:20) 이에 백성들이 일찍이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성취하다“(사53:10)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즉 그 영혼을 속건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 그 날은 길 것이요 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임하다“(삿15:4) 삼손이 가서 여우 삼백을 붙들어서 그 꼬리와 꼬리를 매고 홰를 취하고 그 두 꼬리 사이에 한 홰를 달고 ”, 윤택하다“(렘2:37) 네가 두 손으로 네 머리를 싸고 거기서도 나가리니 이는 네가 의지하는 자들을 나 여호와가 버렸으므로 네가 그들을 인하여 형통치 못할 것임이니라”로서 기본 의미는 “통하여 가다”입니다. 이는 여호와의 신이 주의 일을 성취하게 하기 위해 필요한 사람에게 임하여 모든 것은 형통하게 성사시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기에 브살렐에게 임한 성령 충만은 성막을 짓는데 필요한 공교(工巧)한 기술을 가지게 했습니다. “(출31: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출31:2) 내가 유다 지파 훌의 손자요 우리의 아들인 브사렐을 지명하여 부르고 (출31:3) 하나님의 신을 그에게 충만하게하여 지혜와 총명과 지식과 여러 가지 재주로 (출31:4) 공교한 일을 연구하여 금과 은과 놋으로 만들게 하며 (출31:5) 보석을 깎아 물리며 나무를 새겨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하고”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인해 성령 충만케 된 베드로의 설교는 교회를 탄생케 했습니다.(행 2;14-47). 이처럼 하나님의 일은 성령 충만을 체험한 자만이 이룰 수 있습니다.
당신은 하나님께 선택 받았습니까? 중심이 하나님께 있습니까? 성령 충만함을 받았습니까? 거짓 선지자, 자기 스스로 선 자들은 많이 있으나 진정으로 주께서 사용하시고자 하는 참 선지자가 부족한 이 시대에 누가 주께서 즐거이 세우시는 자이겠습니까? “(벧후2:1)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벧후2:2)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벧후2:3)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 불평, 불만하지 않고 미디안 광야에서의 모세같이 인내하는 자입니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주를 만나고자 하는 마음의 중심을 가진 자입니다.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하나님의 일꾼이 되려는 여러분!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우셨듯이 여러분도 하나님의 세우심을 받기 위해 이러한 것들로 준비하는 자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제 목 : 하나님의 뜻에 합한 자는
본 문 : 삼상 17:32
찬 송 : 52, 323, 521
베드로는 “(마26:33)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라고 장담했으나, 몇 시간이 지난 후, 세 번 주님을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또 미국의 줄타기 명수인 블론댐이라는 사람이 나이아가라 폭포 위를 줄을 타고 걸어서 건너가기 전에 관객으로 온 소년에게 물었습니다. “내 어깨 위에 소년을 한 사람만 올라 타라”고 요구했을 때 아무도 응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이렇듯 믿음은 입으로 시인하는 것으로 끝나느 것이 아니고 주를 두려워하는 정결한 행위로써 나타나야 합니다. “(벧전3: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행하는 믿음이 없이는 주께 나아올 수 없으며 주의 뜻에 합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뜻에 합하며 대적 마귀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겠습니까?
1. 주를 위해 싸워야 합니다.
당시 블레셋 군인들은 자신들의 군사력만 믿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모욕하였습니다. “(삼상17:25) 더러는 가로되 너희가 이 올라온 사람을 보았느냐 참으로 이스라엘을 모욕하러 왔도다 그를 죽이는 사람은 왕이 많은 재물로 부하게 하고 그 딸을 그에게 주고 그 아비의 집은 이스라엘 중에서 자유하게 하시리라 (삼상17:26) 다윗이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말하여 가로되 이 블레셋 사람을 죽여 이스라엘의 치욕을 제하는 사람에게는 어떠한 대우를 하겠느냐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 누구관대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겠느냐” 그러나 이스라엘의 어느 누구도 블레셋과 싸우려는 자는 없었습니다. 블레셋의 군사력에 압도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에 다윗은 분연히 일어나 이들과 싸울 것을 선언했습니다. 여기서 “모욕하다”(하라프)는 훼방하다“(습2:8) 내가 모압의 훼방과 암몬 자손의 후욕을 들었나니 그들이 내 백성을 훼방하고 스스로 커서 그 경계를 침범하였느니라”, 기롱하다“(삿8:15) 기드온이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러 가로되 너희가 전에 나를 기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하고”, 조롱하다“(잠17:5) 가난한 자를 조롱하는 자는 이를 지으신 주를 멸시하는 자요 사람의 재앙을 기뻐하는 자는 형벌을 면치 못할 자니라”로서 기본 의미는 비난하다“(신18:22) 만일 선지자가 있어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한일에 증험도 없고 성취함도 없으면 이는 여호와의 말씀하신 것이 아니요 그 선지자가 방자히 한 말이니 너는 그를 두려워 말지니라”입니다. 또 “싸우다”(라함)는 치다“(삿11:5)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을 치려 할 때에 길르앗 장로들이 입다를 데려 오려고 돕 땅에 가서”, 대적하다“(수24:9) 때에 모압 왕 십볼의 아들 발락이 일어나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사람을 보내어 브올의 아들 발람을 불러다가 너희를 저주케 하려하였으나”, 공격하다“(시109:3) 또 미워하는 말로 나를 두르고 무고히 나를 공격하였나이다”로서 기본 의미는 다투다“(시35:1) 여호와여 나와 다투는 자와 다투시고 나와 싸우는 자와 싸우소서”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훼방하고 조롱하는 자가 생겨났을 때 성도는 마땅히 담대하게 일어나서 대적하여 싸워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성도는 거룩한 분노를 터트릴 줄 알아야 합니다. 원수가 나타나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조롱하고 있는데도 비겁하고 안일하게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만 외친다면 이들은 성도들을 얕잡아 보고서 궤계와 다툼과 방해를 계속해서 일삼을 것입니다. 이렇듯 말씀을 핑계 삼아 안일하게 행동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마음에 합한 진정한 성도는 다윗처럼 과감히 일어나서 하나님의 거룩함을 훼손하는 악인의 포학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2. 낙담치 말아야 합니다.
당시 이스라엘은 주의 능력을 의지하고 싸워야 함에도 불구하고 심히 낙심했습니다. 여기서 “낙담하다”는 “나팔 레브”입니다. 그 가운데 “레브”는 일차적으로 “마음”, 공허하다“(삼상22: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라는 뜻의 “라바브”와 연관되어 염려하다“(삼상9:20) 사흘 전에 잃은 네 암나귀들을 염려하지 말라 찾았느니라 온 이스라엘의 사모하는 자가 누구냐 너와 네 아비의 온 집이 아니냐”, 근심하다“(애3:33) 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며 근심하게 하심이 본심이 아니시로다 ”, 상심하다“(시147:3) 상심한 자를 고치시며 저희 상처를 싸매시는도다” 등의 뜻을 나타냅니다. 또한 “나팔”은 “떨어지다”, “실패하다”, 파멸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낙담하다는 말은 마음에 근심하므로 파멸할 정도로 공허한 가운데 떨어진다란 의미를 갖습니다. 성도는 여러 가지로 당면한 문제를 두고 먼저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낙담하는 것은 하나님의 전능함을 신뢰치 않는 까닭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7:7)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실제로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런데도 염려하겠습니까? 주의 약속을 믿는 자는 어떠한 경우에도 담대해야 합니다. 이런 자만이 하나님의 뜻에 합하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는 주의 신실한 군사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함한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주위를 둘러보면서 찾지 마십시오. 바로 당신이 하나님께서 찾는 바로 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전 재산인 두 렙돈을 들고 나오는 과부의 간절한 심정을 가지고 주께로 나오십시오. “(눅21:2)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과부는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가난함에 대한 염려와 걱정을 주께 맡기고 나아왔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기에다 주의 이름이 훼방될 때 다윗과 같이 순교자적인 마음을 가지고 대적과 싸우는 열정을 가지되, 낙담치 않는 담대함 또한 보이는 주의 마음에 합한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자만이 다윗처럼 하나님의 나라에 귀히 쓰임받는 종이 될 것입니다.
제 목 : 참된 우정
본 문 : 삼상 18:1-4
찬 송 : 21, 86, 525
참된 우정이 점점 찾아보기 힘든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을 목적이 아니라 소단으로 생각하려는 이기심 역시 팽배합니다. 이러한 시대에 이해 타산과 혈연적 사슬까지 극복하고 친구를 사랑한 이상적인 실례를 성경 가운데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이 보여준 참된 우정을 통해 바른 우정의 모델을 찾아 봅시다.
1. 둘이 하나의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참된 친구는 마음이 상호 연락되어야 합니다. 여기서 “마음”(네페쉬)은 평안하다“(출31:17) 이는 나와 이스라엘 자손 사이에 영원한 표징이며 나 여호와가 엿새 동안에 천지를 창조하고 제 칠일에 쉬어 평안하였음이니라 하라”는 뜻의 “나파쉬”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뜻“(왕하9:15) 아람왕 하사엘로 더불어 싸울 때에 아람 사람에게 상한 것을 치료하려하여 이스르엘로 돌아왔던 때라 예후가 이르되 너희 뜻에 합당하거든 한 사람이라도 이 성에서 도망하여 이스르엘에 전하러 가지 못하게 하라 하니라 ”, 정신“(렘32:41) 내가 기쁨으로 그들에게 복을 주되 정녕히 나의 마음과 정신을 다하여 그들을 이 땅에 심으리라”, 중심“(시131:2) 실로 내가 내 심령으로 고요하고 평온케 하기를 젖 뗀 아이가 그 어미품에 있음 같게 하였나니 내 중심이 젖 뗀 아이와 같도다 ”으로도 번역됩니다. 또 “연락되어”(카솨르)는 공모하다“(삼상22:8) 너희가 다 공모하여 나를 대적하며 내 아들이 이새의 아들과 맹약하였으되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고 나를 위하여 슬퍼하거나 내 아들이 내 신하를 선동하여 오늘이라도 매복하였다가 나를 치려 하는 것을 내게 고발하는 자가 하나도 없도다”, 결탁되다“(창44:30) 아비의 생명과 아이의 생명이 서로 결탁되었거늘 이제 내가 주의종 우리 아비에게 돌아갈 때에 아이가 우리와 함께 하지 아니하면 ”, 얽히다“(잠22:15) 아이의 마음에는 미련한 것이 얽혔으나 징계하는 채찍이 이를 멀리 쫓아내리라”로 기본 의미는 묶다“(수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내리운 창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비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은 뜻과 정신과 중심이 하나로 묶여지되 이리저리로 얽혀서 도저히 끊으려고 해도 끊을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게 결탁되어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져야 할 첫 번째 우정관은 동고 동락하는 마음입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욥이 갑작스럽게 당한 어려움을 위로키 위해 먼 지방에서 찾아와 칠일칠야를 땅레 앉아 함께 슬퍼해 주었습니다. “(욥2:13) 칠일 칠야를 그와 함께 땅에 앉았으나 욥의 곤고함이 심함을 보는고로 그에게 한 말도 하는 자가 없었더라” 그러나 그들은 욥의 진정한 아픔과 마음의 문제를 알아내지 못하고 욥을 질책함으로써 “마음이 연락되는” 참된 우정을 보여 주지는 못했습니다. 여러분에게는 서로의 마음을 숨김없이 쏟아 놓을 진정한 친구가 있습니까?
2. 사랑이 넘쳐야 합니다.
요나단과 다윗은 자기 생명처럼 서로를 사랑했습니다. “생명”(네페쉬) 역시 “마음”과 동일어입니다. 또 “사랑하여”(아하브)는 즐기다“(창27:4) 나의 즐기는 별미를 만들어 내게로 가져다가 먹게하여 나로 죽기 전에 내 마음껏 네게 축복하게 하라”, 기뻐하다“(호4:18) 저희가 마시기를 다 하고는 행음하기를 마지 아니하며 그 방백들은 수치를 기뻐하느니라”, 사모하다“(시34:12)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 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 로서 기본 의미는 좋아하다“(사1:23) 네 방백들은 패역하여 도적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사례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치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치 아니하는도다 ” 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친구를 좋아하되 마음과 뜻과 정성은 물론 자기 목숨을 내어 놓기까지 사랑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 자기 자신을 아끼고 염려하듯이 친구를 진심으로 아끼고 염려하는 것을 말합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이 그러했습니다. 특히 요나단의 다윗을 향한 우정은 더 깊어서 마치 여인을 사모하듯이 다윗을 사랑했다고 합니다. 이와 같이 세상의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정으로 단단하게 뭉쳐진 사랑이 그리스도인이 추구해야 할 두 번째 우정관이라 하겠습니다.
3. 곧은 정절이 있어야 합니다.
“곧은 정절”이란 서로의 우정을 확인키 위해 맺은 굳은 맹세를 끝까지 지키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서 “언약”(베리트)은 “자르다”라는 뜻의 “바라”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계약“(호12:1)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 가서 날마다 거짓과 포학을 더하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맹약“(말2:14) 너희는 이르기를 어찜이니까 하는도다 이는 너와 너의 어려서 취한 아내 사이에 여호와께서 일찍이 증거하셨음을 인함이니라 그는 네 짝이요 너와 맹약한 아내로되 네가 그에게 궤사를 행하도다 ”, 조약“(사33:8) 대로가 황폐하여 행인이 끊치며 대적이 조약을 파하고 성읍들을 멸시하며 사람을 생각지 아니하며 ”을 의미합니다. 또 “맺는”(카라트)은 세우다“(출24:8) 모세가 그 피를 취하여 백성에게 뿌려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이 모든 말씀에 대하여 너희와 세우신 언약의 피니라”, 약조하다“(수9:6) 그들이 길갈 진으로 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원방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약조하사이다”로도 번역되는 말로서 기본 의미는 “자르다”입니다. 이처럼 고대 사회에서 “계약을 맺는” 것은 하나의 종교 의식으로서 제물을 갈라 놓고 계약의 당사자가 그 사이를 지나감으로써 이를 어기는 사람은 그 제물과 같이 죽임을 당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와 같이 다윗과 요나단은 우정을 위해 맹약을 세웠습니다. 요나단과 다윗의 맹약은 “(삼상20: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를 내 집에서 영영히 끊어 버리지 말라 ”였습니다. 이 맹세로 대우하여 왕의 상에서 변치 않는 언약에 근거한 것이며 더불어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를 둔 것이었습니다.
다윗과 요나단의 우정에 대한 본문의 기사는 오늘날 사랑이 끊어지고 우정이 파괴되어 배신과 변절이 난무하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를 부끄럽게 만듭니다. 그렇기에 더욱더 성경이 보여 주고 있는 이 아름다운 모습이 우리의 것이 되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당신에게는 평생을 동고 동락할 친구가 있습니까? 당신을 위해 목숨까지도 내놓을 친구가 있습니까? 이러한 우정을 갖고 싶다면 먼저 당신이 사랑을 베푸십시오. 성경이 가르쳐 주는 우정의 내용이 그대로를 친구에게 먼저 주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희생의 도는 자기 목숨까지 아끼지 않으신 그리스도를 본받을 때 비로소 성취할 수 있습니다.
제 목 : 이웃을 위해 사는 삶
본 문 : 삼상 19:2-7
찬 송 : 12, 323, 369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러면 내 양을 먹이라”(요 21:17)하신 주께서는 먼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할 것”(마 22:39)을 우리에게 당부하셨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는 것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일까요? “(마25:35)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마25:36) 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아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는”삶입니다. 다윗을 심히 사랑하기에 위태로운 지경에서는 요나단이 다윗을 어떻게 도왔는가를 알아보면서 진정한 이웃을 위한 사랑의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피할 길을 열어 주는 것입니다.
사울 왕이 무고한 다윗을 죽이려 하는 것을 안 요나단이 다윗을 은밀한 곳에 숨어 있도록 권고했습니다. 여기서 “은밀한”(아모크)은 깊다“(시92:5) 여호와여 주의 행사가 어찌 그리 크신지요 주의 생각이 심히 깊으시니이다 (시92:6) 우준한 자는 알지 못하며 무지한 자도 이를 깨닫지 못하나이다 ”는 뜻의 “아마크”에서 유래한 말로 우묵하다“(레13:25) 제사장은 진찰할지니 그 색점의 털이 희고 그 자리가 피부보다 우묵하면 이는 화상에서 발한 문둥병인즉 제사장은 그를 부정하다 할 것은 문둥병의 환처가 됨이니라”란 뜻입니다. 또 “숨어 있으라”(하바)는 피하다“(욥27:22) 하나님이 그를 아끼지 아니하시고 쏘시나니 그가 그 손에서 피하려 하여도 못할 것이라”, “갇히다”, 금하다“(욥29:10) 귀인들은 소리를 금하니 그 혀가 입 천장에 붙었었느니라”를 의미합니다. 이는 추적하는 자들이 도저히 찾을 수 없는 안전하고 깊은 곳에 피하도록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예수께서 사람들이 율법에 따라 돌로 쳐죽이려던 간음한 여인을 그들의 포악으로부터 피하게 하며 안전하게 보호해 준 것과 유사합니다. “(요8:4) 예수께 말하되 선생이여 이 여자가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혔나이다 (요8:5) 모세는 율법에 이러한 여자를 돌로 치라 명하였거니와 선생은 어떻게 말하겠나이까 (요8:6) 저희가 이렇게 말함은 고소할 조건을 얻고자하여 예수를 시험함이러라 예수께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7) 저희가 묻기를 마지 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가라사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요8:8) 다시 몸을 굽히사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요8:9) 저희가 이 말씀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받아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섰는 여자만 남았더라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 솔로몬 역시 요나단이 죄없이 쫓기는 다윗을 보호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써 곤경에 처한 가엾은 모자(母子)를 악한 여인과 간계로부터 피하게 하였습니다. “(왕상3:16) 때에 창기 두 계집이 왕에게 와서 그 앞에 서며 (왕상3:17) 한 계집은 말하되 내 주여 나와 이 계집이 한 집에서 사는데 내가 저와 함께 집에 있으며 아이를 낳았더니 (왕상3:18) 나의 해산한 지 삼일에 이 계집도 해산하고 우리가 함께 있었고 우리 둘 외에는 집에 다른 사람이 없었나이다 (왕상3:19) 그런데 밤에 저 계집이 그 아들 위에 누우므로 그 아들이 죽으니 (왕상3:20) 저가 밤중에 일어나서 계집종 나의 잠든 사이에 내 아들을 내 곁에서 가져다가 자기의 품에 뉘이고 자기의 죽은 아들을 내 품에 뉘었나이다 (왕상3:21) 미명에 내가 내 아들을 젖 먹이려고 일어나 본즉 죽었기로 내가 아침에 자세히 보니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더이다 하매 (왕상3:22) 다른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이 계집은 이르되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매 왕 앞에서 그와 같이 쟁론하는지라 (왕상3:23) 왕이 가로되 이는 말하기를 산 것은 내 아들이요 죽은 것은 네 아들이라 하고 저는 말하기를 아니라 죽은 것이 네 아들이요 산 것이 내 아들이라 하는도다 하고 (왕상3:24) 또 가로되 칼을 내게로 가져오라 하니 칼을 왕의 앞으로 가져온 지라 (왕상3:25) 왕이 이르되 산 아들을 둘에 나눠 반은 이에게 주고 반은 저에게 주라 (왕상3:26) 그 산 아들의 어미되는 계집이 그 아들을 위하여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께 아뢰어 가로되 청컨대 내 주여 산 아들을 저에게 주시고 아무쪼록 죽이지 마옵소서 하되 한 계집은 말하기를 내것도 되게 말고 네 것도 되게 말고 나누게 하라 하는지라 (왕상3:27) 왕이 대답하여 가로되 산 아들을 저 계집에게 주고 결코 죽이지 말라 저가 그 어미니라 하매 (왕상3:28) 온 이스라엘이 왕의 심리하여 판결함을 듣고 왕을 두려워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지혜가 저의 속에 있어 판결함을 봄이더라” 이렇듯 무고한 자들의 피할 길을 열어 주는 자가 진정 이웃을 위해 사는 자입니다.
2. 억울한 자를 돌보아 주는 것입니다.
사단은 무죄한 욥을 환난 속에 밀어 넣었습니다. “(욥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여기서 “무죄한”(니키)은 개끗하다“(창20:5) 그가 나더러 이는 내 누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나이까 그 여인도 그는 내 오라비라 하였사오니 나는 온전한 마음과 깨끗한 손으로 이렇게 하였나이다”는 뜻의 “나카”에서 유래된 말로 “명백한”, “ 흠없는”을 의미합니다. 또 “흘리다”(야라드)는 엎드러지다“(슥11:2) 너 잣나무여 곡할지어다 백향목이 넘어졌고 아름다운 나무가 훼멸되었도다 바산의 상수리나무여 곡할지어다 무성한 삼림이 엎드러졌도다”, 빠지다“(사14:19) 오직 너는 자기 무덤에서 내어쫓겼으니 가증한 나무가지 같고 칼에 찔려 돌구덩이에 빠진 주검에 둘러싸였으니 밟힌 시체와 같도다”로서 기본 의미는 “떨어지다”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명백하게 허물이나 죄가 없는 사람을 자신의 이기적인 이익을 위해 죄에 빠지게 하고, 협박을 해서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이런 일은 돈없고 힘없는 자들이 뇌물로 인해 마으미 굽어진 사람에 의해 자주 당하는 일입니다. “(잠17:23) 악인은 사람의 품에서 뇌물을 받고 재판을 굽게 하느니라” 사울이 다윗을 죽이려하는 것도 자기를 위한 이기적인 마음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협력하여 악이 성행하는 이 시대에 공법(公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게 해서 요나단처럼 억울한 자들을 돌보아야만 합니다.
3. 주께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인도하니”(보)는 “나아오다”‘(대상12:23) 싸움을 예비한 군대 장관들이 헤브론에 이르러 다윗에게로 나아와서 여호와의 말씀대로 사울의 나라를 저에게 돌리고자 하였으니 그 수효가 이러하였더라”, 덮어주다“(왕상1:1) 다윗왕이 나이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로서 기본 의미는 “받자”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다윗을 위기에서 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사울 왕에게 다시 데려옴으로써 화해를 시켰습니다. 이웃을 위해 사는 자들은 이처럼 원수된 자를 화해시키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특히 성도는 하나님과 원수되어 영원히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자를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가 있는 교회로 인도하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이는 회개하고 돌아오기만 하면 아무리 주홍빛같은 죄라 할지라도 흰 눈과 같이, 양털과 같이 희게 해주시는 주께로 죄로 인해 피곤한 자를 데리고 나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사1:18) 여호와께서 말씀하기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 같을 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불을지라도 양털 같이 되리라.”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고 하시는 주께로 이웃을 인도하는 것은 다윗을 다시 사울의 신하로 있게 하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큰 기쁨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마음은 시시각각 변하지만 주님은 한 번 선택해서 나아오게 한 자를 다시 버리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이웃을 위해 사는 잔치상을 벌여놓은 왕의 명령으로 길에서 만나는 사람마다 선인이나 악인을 가리지 않고 데려오는 종과 같이 열심히 전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22:9) 사거리 길에 가서 사람을 만나는대로 혼인 잔치에 청하여 오너라 한대 (마22:10) 종들이 길에 나가 악한 자나 선한 자나 만나는 대로 모두 데려오니 혼인자리에 손이 가득한지라 .” 그렇기에 이 사명을 잘 감당하는 자가 곧 진정으로 이웃을 위하는 자입니다.
예수께서 이웃의 고통과 아픔에 동참하는 자들을 “(마25:34) 내 아버지께 복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이라고 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입니까? 악인들은 “언제 우리가 돌보지 않았습니까?(마 25:44)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극히 작은 자를 돌보고 피할 길을 열어주고 주께로 인도하는 것이 바로 주의 사랑을 전하는 자임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도 참된 이웃을 찾아보기 힘든 이 시대에 요나단과 같이 이웃을 위해 사랑의 손길을 줄 수 있는 성숙한 성도로서의 미덕을 지녀야겠습니다.
제 목 : 여호와께서 왕으로 세워 주실 때에
본 문 : 삼상 20:13-14
찬 송 : 54, 216, 515
왕정 국가에 있어 최고위자는 왕입니다. “왕”(멜렉)은 “주권자” 여호와의 기름부음을 받은 자“(삼하1:14) 다윗이 저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 하고”로서 “다스린다”는 뜻의 “말라크”에서 유래한 말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라크는 단순한 통치권 뿐만 아니라 입법, 사법, 행정을 포괄한 말입니다. 그러므로 왕은 누구에게도 제약받지 않는 독재권력을 지닌 존재로 비쳐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왕정은 신정적 왕정(神政的 王政)이었으므로 이 모든 통치 행위 배후에는 하나님의 허락하심이 있어야 합니다. 또한 백성과의 관계에서도 왕이 백성을 위해 존재한다는 원칙에서 벗어나면 안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이 백성 앞에서 한 약속을 쉽게 어기는 경우는 역사를 통해 볼 때 비일비재(非一非再)했습니다. 오늘날의 정치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선거 공약으로 내세운 것읃이 몇 개나 제대로 지켜지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왕들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하게 해야 한다. 하셨습니다. “(잠29:4) 왕은 공의로 나라를 견고케 하나 뇌물을 억지로 내게 하는 자는 나라를 멸망시키느니라” 여기 요나단과 다윗의 맹약(盟約)속에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다윗을 후대(後代)왕으로 세우셨을 때 다윗이 요나단의 집에 인자와 사랑을 베풀어야 하듯이, 모든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베풀어야 할 왕으로서의 도리가 숨쉬고 있습니다. 왕은 어떤 선정을 베풀어야 할까요?
1. 인자를 베풀어야 합니다.(14)
“인자”는 사랑하다는 뜻의 “하사드”에서 유래한 말로 은혜“(렘32:18) 주는 은혜를 천만 인에게 베푸시며 아비의 죄악을 그 후 자손의 품에 갚으시오니 크고 능하신 하나님이시오 이름은 만군의 여호와시니이다.”, 성실“(왕상3:6)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선대“(수2:12) 그러므로 청하노니 내가 너희를 선대하였은즉 너희도 내 아버지의 집을 선대하여 나의 부모와 남녀 형제와 무릇 그들에게 있는 모든 자를 살려주어 우리 생명을 죽는데서 건져내기로 이제 여호와로 맹세하고 내게 진실한 표를 내라”, 자비“(사54:8) 내가 넘치는 진노로 내 얼굴을 네게서 잠시 가리웠으나 영원한 자비로 너를 긍휼히 여기리라 네 구속자 여호와의 말이니라.”를 의미합니다. 또 “베풀어서”(아사)는 준행하다“(레26:3) 너희가 나의 규례와 계명을 준행하면 ”, 대접하다“(삿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다스리다“(왕상21:7)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이르되 왕이 이제 이스라엘 나라를 다스리시나이까 일어나 식사를 하시고 마음을 즐겁게 하소서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의 포도원을 왕께 드리리이다 하고 ”로서 기본 의미는 만들다“(출36:34)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에 띠를 꿸 금고리를 만들고 그띠도 금으로 쌌더라”입니다. 이는 왕이 은혜와 자비와 성실로 백성을 다스리기로 한 약속을 철저히 준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는 정치가들의 불법과 배신으로 점철된 이 시대가 꼭 필요로 하는 정치의 도독성입니다. 그러기에 인자와 진리에서 절대로 떠나지 말아야 할 것을 지도자들은 깨달아야 합니다. “(잠3:3) 인자와 진리로 네게서 떠나지 않게 하고 그것을 네 목에 매며 네 마음판에 새기라” 보십시오. 다윗이 요나단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켜서 요나단의 집에 베푸는 자비와 선대는 “(삼하9:1) 다윗이 가로되 사울의 집에 오히려 남은 사람이 있느냐 내가 요나단을 인하여 그 사람에게 은총을 베풀리라 하니라 ”라는 명령으로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2. 평안이 지속되어야 합니다. (13)
요나단은 다윗을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로 인정하고 그를 평안히 가게 했습니다. 이러한 평안함은 여기서도 요나단이 다윗에게 베풀고 있으나 후일에는 다윗이 요나단에게 되돌려 줍니다. 한편 히브리어 “평안”(솰롬)은 “안전하다”는 뜻의 “솰람”에서 유래한 말로 평화“(신20:10) 네가 어떤 성읍으로 나아가서 치려할 때에 그 성에 먼저 평화를 선언하라”, 태평“(왕상2: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형통“(시35:27) 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을 의미합니다. 또 “가게하다”(할라크)는 그치다“(아2:11)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두루다니다“(슥1:10) 화석류나무 사이에 선 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이는 여호와께서 땅에 두루 다니라고 보내신 자들이니라”, 흉용하다“(욘1:11) 바다가 점점 흉용한지라 무리가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너를 어떻게 하여야 바다가 우리를 위하여 잔잔하겠느냐”, 분요하다“(시39:6)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로서 기본 의미는 걷다“(렘10:23) 여호와여 내가 알거니와 인생의 길이 자기에게 있지 아니하니 걸음을 지도함이 걷는 자에게 있지 아니 하니이다”입니다. 이처럼 다윗은 요나단의 호의로 안전하게 다닐 수 있었습니다. 한편 후에 다윗이 이룩한 평화는 흉용하던 불법과 분요히 일어나던 위법이 왕의 선정으로 그치어지고 태평세월이 되어 평화가 나라 전체에 두루 넘치게 됨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악한 세력의 척결과 내부적인 태평은 심지(心地)가 견고(堅固)하여,“(사26:3) 주께서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주의 명령과 법을 지키는 왕이 다스릴 때에만 있는 것입니다.“(사48:18)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 그러므로 거짓된 우상에게 절하는 이 시대에는 평강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歸結)이 아니겠습니까? 히스기야 왕 때에 이스라엘의 부와 영광이 극에 달한 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도록 자신과 백성을 이끌었기 때문입니다. “(왕하18:30) 또한 히스기야가 너희로 여호와를 의뢰하라 함을 듣지 말라 저가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정녕 우리를 건지실지라 이 성이 앗수르 왕의 손에 함락되지 않게 하시리라 할지라도”
3. 악정을 삼가야 합니다.(14)
“죽지”(무트)는 좌절하다“(삼상25:37) 아침에 나발이 포도주가 깬 후에 그 아내가 그에게 이 일을 고하매 그가 낙담하여 몸이 돌과 같이 되었더니 ”, “무감각해지다”, 망하다“(호13:1)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바알로 인하여 범죄하므로 망하였거늘”, 살해되다“(시37:32) 악인이 의인을 엿보아 살해할 기회를 찾으나”로서 기본 의미는 생명의 빛이 “꺼지다”입니다. 이는 백성들이 깊은 좌절에 빠지게 되고 또 이웃이 당하게 되는 각종 불행과 억울한 희생에도 아주 무감각해질 정도로 악정이 심한 상태를 반영합니다. 헤롯의 악정이 얼마나 공포적이었는가는 예수를 죽이기 위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두 살 이하의 사내아이를 모두 죽인 것만으로도 알 수 있습니다. “(마2:16)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마2:17)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마2:18)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 정권을 장악하기 위해서, 또 연장시키기 위해 많은 정적을 죽여야 하는 북이스라엘의 열왕(列王)들의 가는 길은 어쩔 수 없이 헤롯과 유사했고 악한 왕 여로보암의 길을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공법과 정의가 넘치는 정치를 원하십니다. “(암5:24) 오직 공법을 물 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흘릴지로다” 요나단 역시 다윗에게 자신과 자신의 가문 그리고 이스라엘에 대한 이러한 정치를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요나단은 장차 왕이 될 다윗과의 맹약을 통해 그에게 선정을 베푸는 왕이 될 것을 당부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민심은 천심이라는 말이 있듯이 왕의 정치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는지의 여부는 백성들의 목소리로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이 이 시대의 지도자의 대열에 서 있습니까? 그러면 요나단의 요구에 귀 기울이십시오. 이는 백성들의 지도자들을 향한 간절한 바램입니다. 이처럼 당신에게는 “공법이 물같이 정의가 하수같이 흐르는 ”사회를 만들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의무가 있습니다.
제 목 : 저항력이 약해지면
본 문 : 삼상 21:12-15
찬 송 : 8, 177, 393
물과 기름이 섞이어지지 않듯이 의인과 악인은 하나가 될 수 없습니다. 비록 다윗이 사울에게 쫓기는 처지였다 해도 지금까지 대적이었던 가드 왕 아기스에게 몸을 맡기려 한 것은 잘한 일이라 볼 수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과 세상에 속한 사람이 비록 일시적으로는 도울 수 있다 하더라도 이들의 상호 협조 관계는 오래갈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 사람들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힘을 상실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태산을 옮길만한 믿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그 믿음이 식어지면 성도는 대적 마귀에게 서서히 미혹되어 싸울 힘을 잃고 결국에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게 됩니다. 그러므로 마귀가 성도를 미혹하여 불신앙에 대한 저항력을 약하게 한 결과로서 일어나는 성도의 상황을 생각해 봄으로써 믿음을 더욱 굳건히 가져야 하겠습니다. “(마21:21)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 (마21:22) 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계20:7) 천년이 차매 사단이 그 옥에서 놓여 (계20:8) 나와서 땅의 사방 백성 곧 곡과 마곡을 미혹하고 모아 싸움을 붙이리니 그 수가 바다 모래 같으리라, (마25:41)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1. 근심과 걱정을 하게 합니다.(12)
믿음이 약해진 자는 이전에는 믿음으로 이겼던 일들에 대해서도 근심과 걱정을 하게 됩니다. 아기스 왕의 신하들의 말을 들은 다윗은 혹시나 자기를 죽이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마음에 쌓이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마음”(레바브)은 “에워싸다”란 뜻의 “바라브”에서 유래한 명사로 “레브”와 마찬가지로 몸으로 둘러싸인 정신의 총체로서 지· 정· 의 모두를 의미합니다. 또 “두다”(숨)는 씌우다“(출29:6) 그 머리에 관을 씌우고 그 위에 성패를 더하고”, 묻히다“(왕상2:5) 스루야의 아들 요압이 내게 행한 일 곧 이스라엘 군대의 두 장관 넬의 아들 아브넬과 예델의 아들 아마사에게 행한 일을 네가 알거니와 저가 저희를 죽여 태평시대에 전쟁의 피를 흘리고 전쟁의 피로 자기의 허리에 띤 띠와 발에 신은 신에 묻혔으니 ”, 사로잡히다“(겔25:2) 인자야 암몬 족속을 향하여 그들을 쳐서 예언하라 너는 암몬 족속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주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의 말씀에 내 성소를 더럽힐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이스라엘 땅이 황무할 때에 네가 그것을 대하여,유다 족속이 사로잡힐 때에 네가 그들을 대하여 이르기를 아하 좋다 하였도다”, 치다“(출40:8) 또 뜰 주위에 포장을 치고 뜰 문에 장을 달고 ”로서 기본 의미는 “놓다”입니다. 이는 당시 두려움이 다윗의 지· 정· 의를 모두 포함한 심중(心中)에 망을 씌우듯 함으로써 주체 못할 근심에 사로잡혀서 빠져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을 말합니다. 근심은 원천적으로 죄에 대한 결과로 생기는 걱정입니다. 즉 선악과를 따먹은 하와와 아담에게 땅에 저주를 받았으므로 종신토록 수고해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을 때 그들이 갖게 된 심적 상태르루 말합니다. “(창3:16)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게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니라 하시고 (창3:17) 아담에게 이르시되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너더러 먹지말라 한 나무 실과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종신토록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 그러나 성도를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피할 길도 주셨으니 곧 근심 중에도 여호와께 부르짖는 기도를 통하여 여기서 벗어날 수는 있습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시107:13)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구원하시되” 그러나 믿음의 저항력이 약해지면 기도할 힘을 잃게 되므로 근심과 걱정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게 됩니다.
2. 거짓말을 하게 합니다.(13)
다윗은 마음에 근심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해결키 위해 꾸며낸 행동을 하였습니다. 여기서 “행동”(타암)은 “맛보다”, “경험하다”는 뜻의 “타암”에서 유래한 말로 지식“(욥12:20) 충성된 자의 말을 없이 하시며 늙은 자의 지식을 빼앗으시며”, 명철“(시119:66) 내가 주의 계명을 믿었사오니 명철과 지식을 내게 가르치소서”로도 번역됩니다. 또 “변하여”(솨나)는 “이중으로 하다”는 원뜻을 지니며 원래와 다른 모양을 드러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이 용어는 진실을 거짓으로 바꾸는 것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러한 속임수는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서 난 것으로,“(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 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자신을 위해 파멸과 죽음의 무덤을 파는 것“(잠21:6) 속이는 말로 재물을 모으는 것은 죽음을 구하는 것이라 곧 불려 다니는 안개니라”이기에 차라리 경험하지 않는 것이 낫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도 차라리 집을 팔지 말아서 돈을 숨기지 않는 것이 더 낫지 않았겠습니까? “(행5:1)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 (행5:2)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행5:3)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행5:4)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행5: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행5: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행5:7)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 (행5:8)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행5: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행5: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곁에 장사하니” 그러므로 성도는 거짓을 획책하는 마귀가 파놓은 궤궤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더욱 믿음을 굳게 하며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엡6:11) 마귀의 궤계를 능히 대적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 ”
3. 멸시를 받게 됩니다. (14,15)
다윗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그들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스스로 미친 척 함으로 멸시를 받았습니다. 여기서 “미친 것”(솨가)은 “광분하다”, “발광하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성도들에게는 나쁜 의미로 사용되는 말로서 성도가 구원의 확신을 갖지 못하고 어설프게 행동한 결과 불신자들에게 미치광이로 보여서 조롱과 멸시를 받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왕하9:11) 예후가 나와서 그 주의 신복들에게 이르니 한 사람이 묻되 평안이뇨 그 미친 자가 무슨 까닭으로 그대에게 왔더뇨 대답하되 그대들이 그 사람과 그 말한 것을 알리라” 성도는 마땅히 믿지 않는 자의 본이 되며 빛과 소금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들의 조롱거리가 된다면 이는 목숨까지 버려 죄인의 영혼을 구원한 그리스도의 피를 조롱케 하는 결과가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과연 믿음에 굳게 섬으로써 죄악의 침투를 막을 저항력을 가지고 있습니까? 오히려 근심과 걱정, 거짓말과 불신앙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까? 멸망의 길로 가던 발걸음을 돌이켜서 저항력이 약해진 자신을 지금이라도 강하게 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함으로 단단히 영적으로 무장하십시오. 그러할 때 승리는 당신의 것이 될 것입니다. (엡6:18)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제 목 : 주께 나아가야 할 자들
본 문 : 삼상 22:2
찬 송 : 15, 446, 467
(마4:23)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마4:24)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마4:25) 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쫓았습니다. 민심은 곧 천심이며, 양들은 선한 목자를 알고 따르기 마련입니다. “(요10:4) 자기 양을 다 내어 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고로 따라 오되 (요10: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그래서 하나님의 뜻이 사울에게서 다윗으로 옮겨간 것을 아는 사람과 사울 치하(治下)에서 환난 당한 모든 자와 빚진 자와 원통한 자가 다 다윗을 따라 모였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자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윗보다 더 킂ㄴ 이이신 그리스도 우리 주께서는 “(마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사울의 통치를 벗어나 다윗에게로 나아간 역사적 사실을 통해 다윗으로 예표된 그리스도에게로 어떤 무거운 짐진 자들이 나아가야 할지를 살펴 봅시다.
1. 환난 당한 자들입니다.
일차적으로 다윗께 나아온 자는 사울의 치하에서 환난 당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환난”(마초크)은 “괴롭히다”는 뜻의 “추크”에서 유래한 말로 곤란“(신28:53) 네가 대적에게 에워싸이고 맹렬히 쳐서 곤란케 함을 당하므로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신 자녀 곧 네 몸의 소생의 고기를 먹을 것이라”, “비탄”, “걱정”, “우환”을 의미합니다. 이는 대적자로부터 말할 수 없는 괴롭힘을 받음으로 인해 걱정과 우환이 지나쳐서 비탄에 빠져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불과 같은 시련 속에서“(벧전1:7)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함이라” 믿음을 지키지 못하는 몇몇 성도는 하나님을 욕하고“(욥2:9) 그 아내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이 그래도 자기의 순전을 굳게 지키느뇨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모세와 하나님을 불신한 것처럼“(출6:8)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주기로 맹세한 땅으로 너희를 인도하고 그 땅을 너희에게 주어 기업을 삼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로라 하셨다 하라 (출6:9) 모세가 이와 같이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하나 그들이 마음의 상함과 역사의 혹독함을 인하여 모세를 듣지 아니하였더라 ”,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나아오기보다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의심을 품기도 하며, 결국에는 깊은 낙담에 빠져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환난 가운데서도 진실한 성도는 내게 오라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환난 당하는 성도의 곤란을 감찰하시며“(시31:7) 내가 주의 인자하심을 기뻐하며 즐거워할 것은 주께서 나의 곤란을 감찰하사 환난 중에 있는 내 영혼을 아셨고”, 대적을 피해 은밀한 곳으로 성도를 숨기시며“(시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당신의 오른손으로 구원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시138:7) 내가 환난 중에 다닐지라도 주께서 나를 소성케 하시고 주의 손을 펴사 내 원수들의 노를 막으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구원하시리이다”
2. 물질의 고통을 받는 자들입니다.
다음으로 다윗에게 나아온 자는 빚진 자입니다. 여기서 “빚지다”(나솨)의 기본 의미는 “빌리다”“(사24:2) 백성과 제사장이 일반일 것이며 종과 상전이 일반일 것이며 비자와 가모가 일반일 것이며 사는 자와 파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채급하는 자와 채용하는 자가 일반일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와 이자를 내는 자가 일반일 것이라”이나 주로 “강탈하다”, “취리하다”“(느5:7) 중심에 계획하고 귀인과 민장을 꾸짖어 이르기를 너희가 각기 형제에게 취리를 하는도다 하고 대회를 열고 저희를 쳐서 ”로 사용됩니다. 즉 이는 고리 대금업자에게 돈을 빌렸으나 눈덩이처럼 기하 급수(幾何級數)적으로 불어난 이자와 원금을 갚지 못해서 빚을 독촉받기도 하고 물질을 강탈당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율법을 통해 말씀하시기를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채주같이 그에게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출22:25) 네가 만일 너와 함께한 나의 백성 중 가난한 자에게 돈을 꾸이거든 너는 그에게 채주같이 하지 말며 변리를 받지 말 것이며 ”, 그 집에 들어가서 전집물을 취하지 말라“(신24:11) 너는밖에 섰고 네게 꾸는 자가 전집물을 가지고 나와서 네게 줄것이며”고 하셨습니다. 다윗을 따라 모인 자 중에 빚진 자가 있었던 것은 사울의 실정(失政)을 틈타서 고리 대금업이 성행했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이 세상에서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물질적으로 고통받는 자들은 그긋을 인간의 도움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고 근원적인 해결을 주시는 그리스도에게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3. 마음이 원통한 자들입니다.
또한 마음이 원통한 자도 다윗에게 나아왔습니다. 여기서 “마음”(레브)은 심사“(삿5:15) 잇사갈의 방백들이 드보라와 함께 하니 잇사갈의 심사를 바락도 가졌도다 그 발을 좇아 골짜기로 달려 내려가니 르우벤 시냇가에 큰 결심이 있었도다”, 뜻“(대하24:4) 그 후에 요아스가 여호와의 전을 중수할 뜻을 두고 ”, 생각“(잠24: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이란 의미로서 지· 정· 의 모두를 뜻합니다. 또 “원통하다”(마르)는 괴롭다“(욥7:11) 그런즉 내가 내 입을 금하지 아니하고 내 마음의 아픔을 인하여 말하며 내 영혼의 괴로움을 인하여 원망하리이다”, 극렬히 울다“(창27:34) 에서가 그 아비의 말을 듣고 방성 대곡하며 아비에게 이르되 내 아버지여 내게 축복하소서 내게도 그리 하소서”, 참혹하다“(삼하2:26) 아브넬이 요압에게 외쳐 가로되 칼이 영영히 사람을 상하겠느냐 마침내 참혹한 일이 생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네가 언제나 무리에게 그 형제 쫓기를 그치라 명하겠느냐”, 분격하다“(삼하17:8) 또 말하되 왕도 아시거니와 왕의 부친과 그 종자들은 용사라 저희는 들에 있는 곰이 새끼를 빼앗긴 것 같이 격분하였고 왕의 부친은 병법에 익은 사람인즉 백성과 함께 자지 아니하고”로서 기본 의미는 슬프다“(삼상30:6) 백성이 각기 자녀들을 위하여 마음이 슬퍼서 다윗을 돌로 치자 하니 다윗이 크게 군급하였으나 그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입니다. 이는 슬픈 일을 당해 참혹한 지경에 처한 사람이 괴롭고 분한 마음으로 극렬히 우는 것을 말합니다. 황성 신문의 사장이던 장지연씨가 한일 합방에 대한 슬픔을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표제로서 표현한 것도 바로 이 원통함과 유사할 것입니다. 또한 나라를 잃고 바벨론의 강가에서 눈물 흘리면서 예루살렘을 향해 바라보는 히브리 노예들도 마음에 원통함이 가득했을 것입니다. 또한 “(마26:74) 저가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 (마26:75) 이에 베드로가 예수의 말씀에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한” 경우도 역시 외와 유사합니다. 이처럼 마음이 원통하나 이 세상에서 위로 받을 수 없는 자만이 주님께 나아올 수 있습니다. 이때 주님은 “나의 멍에를 지고 나를 따르면 눈물도 슬픔도 없을 것”이라고 말씀하시며 그들을 위로하실 것입니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서 “메이 플라워호”(May Flower)를 탔던 청교도(Puritan)들은 위대한 풍요의 나라 미국을 건설했습니다. 이처럼 환난 당한 자, 물질의 고통 당하는 자, 믿음 때문에 우는 자들은 세상에서 주어지는 위로가 헛됨을 알 때 비로소 약한 자와 애통하는 자를 돌보시는 주님의 사랑의 품에 머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마음에는 환난과 고통과 울분이 없습니까? 여러분을 부르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다윗을 따라 모인 무리들과 같이 여러분들도 주님을 따라 모이십시오. 그러면 주께서 당신들을 구해 주시고 보호해 주실 것이며 눈물을 닦아 주실 것입니다.
제 목 : 우리를 찾고자 하는 자는?
본 문 : 삼상 23:22-23
찬 송 : 26, 363, 443
서부영화의 기본적 유형은 현상금을 받기 위해 악당들의 뒤를 쫓는 직업 총잡이와 쫓기는 도망자 간의 숨막히는 혈전으로 전개되는 것입니다. 전심전력을 다해 쫓는 자와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당황하는 도망자...... 결말은 뛰어난 예지에 의한 선택, 즉 순간포착에 의해 나게 됩니다. 얼마나 순간포착을 잘했는가에 따라 도망갈 수 있고, 잡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사울이 모든 지혜와 힘을 다 동원해서 다윗을 잡고자 하는 마음이 바로 전심전력을 다해 쫓는 자의 것과 동일합니다. 우리의 생명을 찾는 마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의 말씀을 통해 우리를 찾는 마귀가 어떠한 방법으로, 또한 얼마난 힘을 다하여 우리를 멸망케 하려는 지에 대해 알아 보고자 합니다.
1. 끝까지 지켜봅니다. (22)
끝까지 사냥감의 일거수 일투족(一擧手 一投足)을 자세히 살펴봅시다. 이처럼 사울도 다윗의 행방에 대해 자세히 알고자 하였습니다. 여기서 “자세히”(벤)는 삼가다“(잠14:15)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들은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 중히여기다“(단11:30) 이는 깃딤의 배들이 이르러 그를 칠 것임이라 그가 낙심하고 돌아가며 거룩한 언약을 한하고 임의로 행하며 돌아가서는 거룩한 언약을 배반하는 자를 중히 여길 것이며”, “신중하다”로 주로 번역되며 그 기본 의미는 “구별하다”입니다. 또 “살펴서”(라아)는 “주시하다”, 진찰하다“(례13:20) 그는 진찰하여 피부보다 얕고 그 털이 희면 그를 부정하다 진단할지니 이는 종기로 된 문붕병의 환처임이니라.”, 택하다“(왕하10:3) 너희 주의 아들들 중에서 가장 어질고 정직한 자를 택하여 그 아비의 위에 두고 너희 주의 집을 위하여 싸우라 하였더라”, 엿보다“(수2:1) 눈의 아들 여호수아가 싯딤에서 두 사람을 정탐으로 가만히 보내며 그들에게 이르되 가서 그 땅과 여리고를 엿보라 하매 그들이 가서 라합이라 하는 기생의 집에 들어가 거기서 유숙하더니”로 번역되며 그 기본 의미는 보다“(삿19:30) 그것을 보는 자가 다 가로되 이스라엘 자손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날까지 이런 일은 행치도 아니하였고 보지도 못하였도다 생각하고 상의한 후에 말하자 하니라”입니다. 이는 성도를 넘어뜨리려는 대적이 성도의 약점을 신중히 살펴서 그 기회를 잡고자 끝까지 지켜보는 것을 암시합니다. 삼손을 없애기 위해 블레셋 방백들은 삼손의 약점이 무엇인가를 신중하게 생각해 본 결과 “들릴라”라는 여자를 내세우지 않았습니까? 삼손의 첫째 약점이 여자엿기 때문입니다. “(삿16:4) 이 후에 삼손이 소렉 골짜기의 들릴라라 이름하는 여인을 사랑하매 (삿16:5) 블레셋 사람의 방백들이 그 여인에게로 올라와서 그에게 이르되 삼손을 꾀어서 무엇으로 말미암아 그 큰 힘이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면 그를 이기어서 결박하여 곤고케 할수 있을는지 알아보라 그리하면 우리가 각각 은 일천 일백을 네게 주리라 (삿16:6) 들릴라가 삼손에게 말하되 청컨대 당신의 큰 힘이 무엇으로 말미암아 있으며 어떻게 하면 능히 당신을 결박하여 곤고케 할 수 있을는지 내게 말하라” 결국 여자를 통한 대적의 술수에 넘어간 삼손은 머리가 밀리고 눈이 뽑히는 치욕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믿은 자라도 미혹하기 위해 마치 의사가 환자를 자세하게 진차라듯이 우리의 약점을 찾고자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습니다.
2. 고발할 기회를 찾고 있습니다. (22)
여기서 “알아보고”(야다)는 “인정하다”, “드러나다”“(잠10:9) 바른 길로 행하는 자는 걸음이 평안하려니와 굽은 길로 행하는 자는 드러나리라”, 간섭하다“(창39:6) 주인이 그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임하고 자기 식료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준수하고 아담하였더라”, 고발하다“(삼상22:17) 왕이 좌우의 시위자에게 이르되 돌이켜 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의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고발치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로서 기본 의미는 “이해하다”입니다. 즉 이는 남녀간의 성교(性交)를 가리키는 데에도 쓰일 정도로 상대에 대해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울은 고발자에게 이와 같이 다윗에 대해 철저히 파악할 것을 당부했습니다. 이와 같이 마귀는 성도들을 미혹키 위해 기회를 엿보며 성도들조차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명백하게 드러난 약점을 가지고 하나님께 직고하려고 합니다. 이러한 사례는 사단이 여호와 앞에 서서 욥의 순전하고 정직한 믿음을 격하(格下)시키고 애써 약점을 만들어 고발하는 것에서도 찾아볼수 있습니다. “(욥1:6) 하루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와서 여호와 앞에 섰고 사단도 그들 가운데 왔는지라 (욥1:7)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서 왔느냐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땅에 두루 돌아 여기 저기 다녀왔나이다 (욥1:8)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자가 세상에 없느니라 (욥1:9) 사단이 여호와께 대답하여 가로되 욥이 어찌 까닭없이 하나님을 경외하리이까 (욥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욥1:11) 이제 주의 손을 펴서 그의 모든 소유물을 치소서 그리하시면 정녕 대면하여 주를 욕하리이다 (욥1:12)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의 소유물을 다 네 손에 붙이노라 오직 그의 몸에는 네 손을 대지 말지니라 사단이 곧 여호와 앞에서 물러가니라 (욥1:13) 하루는 욥의 자녀들이 그 맏형의 집에서 식물을 먹으며 포도주를 마실 때에 ” 이처럼 사단이 찾는 것은 성도의 생명이요, 그 목적은 하나님과 단절되게 하는 것입니다. 이로 인해 혹시 불안해진 성도가 있습니까? 그러나 안심하십시오. “(롬8:38)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그러기에 우리는 이 약속을 힘입어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는 자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속이려고 합니다.(23)
한편 사울은 밀고자의 도움으로 다윗을 찾을 것을 다짐합니다. 여기서 “찾아내리라”(하파스)는 탐지하다“(수6:25)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 아비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날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탐지하려고 보낸 사자를 숨겼음이었더라”, “가면을 쓰다”, 바꾸다“(욥28:15) 정금으로도 바꿀 수 없고 은을 달아도 그 값을 당치 못하리니”, 숨기다“(신31:18) 그들이 돌이켜 다른 신을 좇는 모든 악행을 인하여 내가 그 때에 반드시 내 얼굴을 숨기리라”로서 기본 의미는 “찾다”입니다. 이처럼 이 단어는 자신의 모습을 상대에게 숨기고 접근하여 상대를 찾아내는 것을 가리킵니다. 사단 역시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양의 탈을 쓴 이리처럼 가면을 써서 그 악한 모양을 선한 사람으로 바꾸어 감언이설(甘言利說)로 성도을 속이려고 합니다. 유다를 보십시오. 사단은 유다에게 다가와 예수는 민족을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켜줄 메시야가 아니라고 현혹했습니다. 또한 유다를 이스라엘의 위대한 투사(鬪士)로 부추겨 예수를 팔 궁리를 하게 만들지 않았습니까? “(눅22:3) 열 둘 중에 하나인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사단이 들어가니 (눅22:4) 이에 유다가 대제사장들과 군관들에게 가서 예수를 넘겨 줄 방책을 의논하매” 당신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굳게 무장하지 못함으로 사단에게 접근을 허용하여 당신을 파멸케 할 기회를 제공하고 있지나 않습니까?
우리의 대적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아 다니고 있습니다. “(벧전5: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 아니 지금 당신을 넘어뜨릴 기회를 찾기 위해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온갖 궤궤를 다 써서 하나님의 약 속의 자녀 중에서 당신을 끌어내려고 합니다. 선한 가면 뒤에 있는 독화살로 도저히 회복될 수 없는 치명상을 입히고자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리 끊임없이 쫓아오는 추적자처럼 다가와서 온갖 광포와 악을 쏟을지라도, 여호와께서 성도를 지켜주심으로 이러한 악이 도리어 이를 쏟아내는 악인을 죽일 것입니다. “(시34:21) 악이 악인을 죽일 것이라 의인을 미워하는 자는 죄를 받으리로다” 또 여호와께서 그들을 넘어지게 하시므로“(잠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당신을 보호하사 주의 영광 앞에 서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해주실 것입니다. “(유1:24)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으로 서게 하실자”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오직 여호와만을 바라므로 이러한 사단의 공격으로부터 안전함을 얻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와 같은 고백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시91:2) 내가 여호와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나의 피난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 하리니 ”
제 목 : 환난이 임할지라도
본 문 : 삼상 24:4-6
찬 송 : 22, 379, 441
환난이 성도를 아주 고통스럽게 할지라도 이는 잠시 잠깐 지나는 것입니다. 즉 이는 정금을 만드는 용광로와 같아서 빛나는 믿음의 성도로서 연단하는 과정에 불과합니다. 물론 환난 중에 있는 자에게는 하루가 일년처럼 느껴질 것입니다. 이때에 예수께서는 “(마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심비(心碑)에 새긴다면 임한 환난에서도 믿음을 지킬 수 있을 것입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은 사울 왕이 비록 자신의 목숨을 원하고 있다 해도 여호와께서 직접 기름부으신 그를 해침으로 하나님께 범죄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모든 보응은 여호와께 있음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잠24:12) 네가 말하기를 나는 그것을 알지 못하였노라 할지라도 마음을 저울질 하시는 이가 어찌 통찰하지 못하시겠으며 네 영혼을 지키시는 이가 어찌 알지 못하시겠느냐 그가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증 하시리라” 이는 자신을 괴롭히던 원수에게 복수할 기회를 만났을 때에 성도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예라 하겠습니다. 이러한 본문의 사례를 통하여 환난 중에 있는 성도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습니다.
1. 복수하지 말아야 합니다. (4)
아무리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그릇된 방법으로 이를 해결하려 하면 안됩니다. 오히려 환난 속에 가리워진 주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하며 세미한 그분의 음성을 경청해야 합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다윗은 이러한 미덕을 지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는 사울을 죽일 수도 있었으나 가만히 다가가서 그 옷자락을 베는데 그쳤습니다. 여기서 “가만히”(라트)는 가리우다“(사25:7) 또 이 산에서 모든 민족의 그 가리워진 면박과 열방의 그 덮인 휘장을 제하시며 ”는 뜻의 루트에서 유래한 말로 비밀히“(삼상18:22) 사울이 그 신하들에게 명하되 너희는 다윗에게 비밀히 말하여 이르기를 보라 왕이 너를 기뻐하시고 모든 신하도 너를 사랑하나니 그런즉 네가 왕의 사위가 되는 것이 가하니라 하라”, “은밀히”를 의미합니다. 이를 통해 볼 때 다윗은 상대방의 허물을 공개적으로 비토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실수를 가려 조용히 해결하고자 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상대의 약점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일만을 함으로써 상대에 대한 예우를 다하려 한 것입니다.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으려는 욕망에 사로잡힐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원수조차 사랑하신 그리스도와 같이 또한 다윗과 같이 원수의 약적까지 감싸주어야 겠습니다.
2. 회개해야 합니다. (5)
다윗의 위대성은 옷자락을 자른 것까지 회개하는 예민한 영적 감수성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마음”(레브)은 “레바브”와 마찬가지로 지정의(知情意)까지 포함한 광범위한 의미로서의 생각“(잠24:32)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중심”, “심령”을 뜻합니다. 또 “찔려”(나카)는 자책하다“(삼하24:10) 다윗이 인구 수를 조사한 후에 그 마음에 자책하고 여호와께 아뢰되 내가 이 일을 행함으로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여호와여 이제 간구하옵나니 종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내가 심히 미련하게 행하였나이다.”, 상하다“(출9:32) 그러나 밀과 나맥은 자라지 아니한고로 상하지 아니하였더라”, 엎드러지다“(수8:24) 이스라엘이 자기를 광야로 따르던 아이 모든 거민을 들에서 죽이되 그들을 다 칼날에 엎드러지게하여 진멸하기를 마치고 온 이스라엘이 아이로 돌아와서 칼날로 죽이매”, 쇠잔하다“(시102:4) 내가 음식 먹기도 잊었음으로 내 마음이 풀 같이 쇠잔하였사오며”로서 기본 의미는 “치다”입니다. 이는 주께 범죄함으로 마음이 상하게 되었고 몸이 쇠잔해지고 자책감에 빠져서 엎드려 눈물로 회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했다 하신 주님의 말씀대로 비록 옷자락만 베기는 했지만 기실은 살인을 한 것과 같다는 찔림이 다윗의 마음에 있었던 것입니다. “(마5:28)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그렇기에 성도에게도 자기도 모르게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다는 삭개오의 고백과 같이 삶 자체가 변화되어 맺는 회개의 합당한 열매가 있어야 하겠습니다. “(눅19:8)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배나 갚겠나이다, (마3:8)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
3. 주의 명령에 따라야 합니다. (6)
다윗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을 스스로 행하였다는 자책감으로 회개했습니다. 여기서 “금하시는 것”(하랄라)은 “깨다”는 뜻의 “할랄”에서 유래한 말로 “멀리하다”, “범하지 않다”“(삼상12:23)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치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도로 너희를 가르칠 것인즉”, 단정코 아니하다“(욥27:5) 나는 단정코 너희를 옳다 하지 아니하겠고 죽기 전에는 나의 순전함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 , “불가하다”는 뜻을 지닙니다. 이는 인생에게 아무리 중요하고 유익한 것이라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멀리 하라고 하신다면 순종하여 죄를 범하지 않아야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도박, 마약, 음행 등 얼마든지 손만 뻗치면 잡을 수 있는 것들이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설혹 친구를 잃게 된다해도, 직장에서 신뢰감이 떨어진다 해도, 성도는 주의 명령과 규례를 따라 금할 것은 금해야 합니다. “산이 높으면 골도 깊다”는 말이 있듯이 환난 중에 미혹하는 것이 크면 클수록 여호와의 법도를 지키고 준행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도 더 큼을 깨달아야 하겠습니다.
성도에게 다가올 환난은 여러 가지 입니다. 그것은 국가적인 것일 수도 있으며, 또한 직장이나 가정 혹은 개인적인 시험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난이 성도를 영화롭게 하며“(시50:15)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주의 붙드심과 돌보심을 맛보게 해주기에 환난의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함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 잠시 지나가는 환난으로 인해 범죄하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한 날 있다가 없어질 시드는 풀과 같을 뿐입니다. “(시103: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그리고 시험에 마음이 잠시나마 약해진 것을 회개하십시오. 그리하여 회개의 합당한 열매로 주의 말씀을 준행하는 자가 되시길 바랍니다.
제 목 : 선한 싸움을 싸우는 자에게
본 문 : 삼상 25:28-31
찬 송 : 34, 462, 503
흔히들 이 세상은 바다요 성도는 작은 배에 탄 선원으로 비유합니다. 배는 천국을 목적지로 삼고서 항해를 계속합니다. 잔잔하던 바다에 폭풍우가 몰아쳐서 산같은 파도가 배를 삼키려고 하나 선원들은 밤새도록 파도와 싸워서 배가 파선되지 않도록 지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선원들의 사투를 하나님을 힘입어“(살전2:2)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싸우는 믿음의 선한 싸움“(딤전6: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이라고 정의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싸움은 이 세상의 임금인 사단이 하나님과 성도 사이에 연결된 끈을 끊고자 하는 데서 발생하기 때문입니다. 사울을 피해 다니는 다윗이 선한 싸움을 한다고 말할 수 있는 이유는 다윗을 죽여서 그리스도의 계보를 말살하려는 사단의 흉계가 사울 속에서 숨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단과 성도간의 영적 싸움에 등장하는 나발의 처 아비가일을 통하여, 선한 싸움을 하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봅시다.
1. 집을 세워 주십니다. (28)
“(시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숫군의 경성함이 허사”일 뿐입니다. 이를 확실히 깨달은 지혜로운 아비가일은 여호와께서 택함 받은 종 다윗에게 든든한 집을 세워주실 것을 확신했습니다. 여기서 “든든한”(아만)은 진실한“(사8:2) 내가 진실한 증인 제사장 우리야와 여베레기야의 아들 스갸랴를 불러 증거하게 하리라 하시더니”, 충실한“(시12:1) 여호와여 도우소서 경건한 자가 끊어지며 충실한 자가 인생 중에 없어지도소이다”, 오래된“(신28:59) 여호와께서 너의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단단한”으로 기본 의미는 “지탱하다”입니다. 또 “세우리니”(아사)는 “만들다”란 기본 뜻이 있으나 짓다“(출28:3) 너는 무릇 마음에 지혜 있는자 곧 내가 지혜로운 영으로 채운 자들에게 말하여 아론의 옷을 지어 그를 거룩하게하여 내게 제사장직분을 행하게 하라”, 선대하다“(룻1:8) 나오미가 두 자부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미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 은총을 베풀다“(삼하10:2) 다윗이 가로되 내가 나하스의 아들 하눈에게 은총을 베풀되 그 아비가 내게 은총을 베푼 것같이 하리라 하고 그 신복들을 명하여 그 아비 죽은 것을 조상하라 하니라 다윗의 신복들이 암몬 자손의 땅에 이르매”, 예비하다“(민15:8) 번제로나 서원을 갚는 제로나 화목제로 수송아지를 예비하여 여호와께 드릴 때에는”로도 번역됩니다. 또한 “집”(바이트)은 단순한 가옥“(레25:29) 성벽 있는 성내의 가옥을 팔았으면 판 지 만 일 년 안에는 무를 수 있나니 곧 그 기한 안에 무르려니와” 뿐만 아니라 종족“(민1:2)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회중 각 남자의 수를 그들의 가족과 종족을 따라 그 명수대로 계수할지니”, 권속“(출1:1) 야곱과 함께 각기 권속을 데리고 애굽에 이른 이스라엘 아들들의 이름은 이러하니” 등도 의미합니다. 따라서 본절의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충실한 자에게 은총을 베푸시사 오래되어도 무너지지 않을 든든한 집과 충실한 자손을 예비해 주시는 하나님의 선대를 의미합니다. 즉 주를 사랑하고 주의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시리라(축20:6)는 축복의 기원인 것입니다. 나중에 다윗의 아들 솔로몬이 범한 우상 숭배의 죄로 인해 하나님께서 그에게 벌 주실 때에도 이 약속 때문에 유다와 베냐민 지파를 다윗 왕가에게 주시는 자비하심을 보이셨습니다.
2. 생명을 보호해 주십니다.(29)
또한 아비가일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다윗의 보호자되심을 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생명”(하이)은 “호흡하다”는 뜻의 “하야”에서 유래한 말로 목숨“(시74:19) 주의 멧비둘기의 생명을 들짐승에게 주지 마시며 주의 가난한 자의 목숨을 영영히 잊지 마소서”, 평생“(왕상15:5) 이는 다윗이 헷 사람 우리아의 일 외에는 평생에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고 자기에게 명하신 모든 일을 어기지 아니하였음이라”, “생활”, 영생“(단12:2) 땅의 티끌 가운데서 자는 자 중에 많이 깨어 영생을 얻는 자도 있겠고 수욕을 받아서 무궁히 부끄러움을 입을 자도 있을 것이며 ”으로도 번역됩니다. 또 “싸웠을 것이요”(차라르)는 “봉함하다”, 에워사다“(대하6:28) 만일 이 땅에 기근이나 온역이 있거나 곡식이 시들거나 깜부기가 나거나 메뚜기나 황충이 나거나 적국이 와서 성읍을 에워 싸거나 무슨 재앙이나 무슨 질병이 있든지 무론하고”, 학대하다“(암5:12) 너희의 허물이 많고 죄악이 중함을 내가 아노라 너희는 의인을 학대하며 뇌물을 받고 성문에서 궁핍한 자를 억울하게 하는 자로다”, 군급하다“(삼상28:15) 사무엘이 사울에게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불러 올려서 나로 분요케 하느냐 사울이 대답하되 나는 심히 군급하니이다 블레셋 사람은 나를 향하여 군대를 일으켰고 하나님은 나를 떠나서 다시는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내게 대답지 아니하시기로 나의 행할 일을 배우려고 당신을 불러 올렸나이다”로서 기본 의미는 묶다:“(욥26:8) 물을 빽빽한 구름에 싸시나 그 밑의 구름이 찢어지지 아니하느니라”입니다. 따라서 본문은 평생동안 주의 뜻안에서 생활하는 성도는 주께서 환난 당할 때나 대적에 학대받을 때나 어느 때이든지 붙드시고 영생의 길로 인도해 주심을 의미합니다. 마귀는 성도의 마음을 도적질하여 하나님께 불순종하게 함으로 영원한 죽음에 이르게 하나, 하나님께서는 돌아온 탕자의 아버지가 죄악 중에 있던 아들일지라도 눈물을 훔치면서 돌아올 때에 죄를 묻지 않았던 것처럼, 한 번 택한 성도의 생명을 주무시지도 쉬시지도 않으면서 끊임없이 용서와 사랑으로 지켜주십니다. “(시121:4)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
3. 형통케 해 주십니다. (30)
하나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에게 선을 베푸시사 창대케 해주십니다. “(대하1:1) 다윗의 아들 솔로몬의 왕위가 견고하여가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하사 심히 창대케 하시니라” 아비가일 역시 다윗이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자임을 확신하고 여호와께서 선을 베푸실 것을 믿었습니다. 여기서 “선”(토브)은 좋다“(욥13:9) 하나님이 너희를 감찰하시면 좋겠느냐 너희가 사람을 속임 같이 그를 속이려느냐”는 동사에서 유래한 말로 형통“(스9:12) 그런즉 너희 여자들을 저희 아들들에게 주지 말고 저희 딸을 너희 아들을 위하여 데려오지 말며 그들을 위하여 평강과 형통을 영영히 구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왕성하여 그 땅의 아름다운 것을 먹으며 그 땅을 자손에게 유전하여 영원한 기업을 삼게 되리라 하셨나이다”, 은혜“(시68:10) 주의 회중으로 그 가운데 거하게 하셨나이다 하나님이여 가난한 자를 위하여 주의 은택을 준비하셨나이다”, 행복“(신10:13) 내가 오늘날 네 행복을 위하여 네게 명하는 여호와의 명령과 규례를 지킬 것이 아니냐”을 의미합니다. 또 “행하사”(아사)는 이루다“(창28: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대접하다“(삿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허락하다“(삼하14:22) 요압이 땅에 엎드려 절하고 왕을 위하여 복을 빌고 가로되 내 주 왕이여 종의 구함을 허락하시니 종이 왕 앞에서 은혜 받은줄을 오늘날 아나이다 하고”로서 기본 의미는 “만들다”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지하고 주의 뜻을 이루려는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사 만사에 형통케 되는 복을 허락하셔서 행복한 삶을 누리게 하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진실로 하나님께서 선대하시는 자, 곧 하나님 앞에서 정직히 주의 일에 임하는 자의 장막은 흥왕하게 됩니다. “(잠14:11) 악한 자의 집은 망하겠고 정직한 자의 장막은 흥하리라” 그 대표적인 예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기까지 하나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열국의 아비가 되는 복과 범사가 형통케 되는 복을 주셨습니다. “(창22:17)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그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창22:18)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 하셨다 하니라”
이 세상의 나그네 길을 가는 여러분! 이 세상에서 우리는 다윗처럼 쫓겨 다니면서 쉴 곳을 못 찾아 헤메는수도 있을 것입니다. 비바람 몰하쳐서 배가 파선될 지경에 빠질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 안에서 선한 싸움을 다 싸우고 달려갈 길로 다 가십시오. 믿음도 지키십시오. 저 천국에 의의 면류관이 여러분을 위해 이미 예비되어 있습니다. “(딤후4: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뿐만 아니라 현세 에서도 집과 자손의 번창을 볼 것이며, 자신의 생명이 주의 돌보심 속에 느낄 것이며 범사에 형통케 되는 주의 큰 은혜가 여러분을 감쌀 것입니다.
제 목 : 위선자의 말로
본 문 : 삼상 26:19
찬 송 : 43, 339, 509
“공연히 상냥하며 얼굴 빛을 부드럽게 하고 있는 사람 중에는 정말 참다운 인간이 적다”라고 공자는 그의 책 논어 학이편에서 말했습니다. 이처럼 위선자의 특색은 남이 볼 때에는 선한 체하고 입으로는 착한 말을 하지만 그 마음 속에는 악한 생각을 합니다. 예수께서는 이들을 겉과 속이 다른 회칠한 무덤과 같은 자들로 규정하시면서 미워하셨습니다. “(마23:25)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마23:26) 소경된 바리새인아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마23:27)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회칠한 무덤 같으니 겉으로는 아름답게 보이나 그 안에는 죽은 사람의 뼈와 모든 더러운 것이 가득하도다” 본문에서도 다윗은 이스라엘 왕 사울을 제대로 보필하지도 못하면서 교언 영색(巧言令色)과 간사로서 왕의 앞에서 아첨하는 자들을 향해 분노를 발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다윗의 분노의 일성(一聲)을 통해 위선자들의 행위와 그 말로가 어떠한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쫓겨 나게 됩니다.
위선자들은 거짓으로 자신들을 치장하여 타인을 미혹함으로 오히려 선한 자들에게 어려움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나 위선다의 더러운 형색과 음란으로 인해 결국에는 땅이 그들을 토하여 내칠 것입니다. “(렘3:2) 네 눈을 들어 자산을 보라 너의 행음치 아니한 곳이 어디 있느냐 네가 길 가에 앉아 사람을 기다린 것이 광야에 있는 아라바 사람같아서 음란과 행악으로 이 땅을 더럽혔도다 (렘3:3) 그러므로 단 비가 그쳐졌고 늦은 비가 없어졌느니라 그럴지라도 네가 창녀의 낯을 가졌으므로 수치를 알지 못하느니라” 한편 본문에서 위선자의 행위는 왕을 거짓으로 격동시켜 선한 사람을 해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격동시켜”(스트)는 충동하다“(왕상14:5) 여호와께서 아히야에게 이르시되 여로보암의 아내가 그 아들이 병듦을 인하여 네게 물으러 오나니 너는 이리이리 대답하라 저가 들어올때에 다른 사람인체 함이니라 ”, 꾀다“(신13:6) 네 동복 형제나 네 자녀나 네 품의 아내나 너와 생명을 함께하는 친구가 가만히 너를 꾀어 이르기를 너와 네 열조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 감동시키다“(삼하24:1) 여호와께서 다시 이스라엘을 향하여 진노하사 저희를 치시려고 다윗을 감동시키사 가서 이스라엘과 유다의 인구를 조사하라 하신지라”로서 기본 의미는 자극하다“(렘38:2)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되 이 성에 머무는 자는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으리라 그러나 갈대아인에게 항복하는 자는 살리니 그의 생명이 노략물을 얻음같이 살리라”입니다. 또 “해하려 하는”(라아)은 재앙을 내리다“(슥8:14) 만군의 여호와가 말하노라 전에 너희 열조가 나의 노를 격발할 때에 내가 그들에게 재앙을 내리기로 뜻하고 뉘우치지 아니하였었으나”로서 기본 의미는 깨뜨리다“(시2:9) 네가 철장으로 저희를 깨뜨림이여 질그릇 같이 부수리라 하시도다”입니다. 이는 위선자들은 일시적으로 마음에 깊은 감동을 줄 정도의 간사한 말로 상대를 꾀나 결국에는 패망과 첩격으로 접어들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교활한 술수로 선한 사람을 속이고 노략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보응하십니다. 즉 그보다 더 강한 사람을 만나게 해서 가진 것 다 빼앗기고 지금껏 이웃에게 쌓아온 죄악과 원한으로 인해 더 이상 그곳에 머물지 못하는 비참함을 경험케 합니다. 이는 후에 사울의 측근들이 모두 멸망당한 역사적 사건에서도 실증됩니다.
2. 저주 받게 됩니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에게는 모든 저주가 임할 것입니다. “(신28:15)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그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고 네게 미칠 것이니”. 여기서 “저주받다”(아라르)는 남을 죽도록 미워하여 그가 못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을 말합니다. 당시 사울과 사울의 간사한 신하들의 마음이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다윗을 심히 미워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그들은 불붙은 듯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행위가 교만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손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등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만으로 전철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6:16)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육 칠 가지니 (잠6:17)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잠6:18)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잠6:19)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이처럼 마땅히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자를 도와야 할 위치에 있는 자로서 이 일을 게을리할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을 괴롭히는 자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저주 아래 놓이게 됩니다.
3. 실패하게 됩니다.
악한 위선자들은 상대의 기업을 몰락시키려 합니다. 다윗을 대적한 무리들도 다윗으로 하여금 여호와의 기업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기업의 성장과 몰락도 여호와께 있습니다. 여기서 “기업”(나할라)은 소유하다“(잠3: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현달함은 욕이 되느니라 ”는 뜻의 “나할”에서 유래한 명사로 유업“(전7:11) 지혜는 유업같이 아름답고 햇빛을 보는 자에게 유익하도다”, 산업“(민35:8) 이스라엘 자손의 산업에서 레위인에게 너희가 성읍을 줄 때에 많이 얻은 자에게서는 많이 취하여 주고 적게 얻은 자에게서는 적게 취하여 줄 것이라 각기 얻은 산업을 따라서 그 성읍들을 레위인에게 줄지니라 ”을 의미합니다. 또 “붙지”(사파흐)는 연합하다“(사14:1) 여호와께서 야곱을 긍휼히 여기시며 이스라엘을 다시 택하여 자기 고토에 두시리니 나그네 된 자가 야곱 족속에게 가입되어 그들과 연합할 것이며”, 더하다“(합2:15) 이웃에게 술을 마시우되 자기의 분노를 더하여 그로 취케 하고 그 하체를 드러 내려 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모여 있다“(욥30:7) 떨기나무 가운데서 나귀처럼 부르짖으며 가시나무 아래 모여 있느니라 ”로서 기본 의미는 “추가하다”입니다. 따라서 본절은 위선자들이 자신의 산업이나 위업을 늘리기 위해 다윗을 배제시키며 서로 연합해서 사업을 크게 확장시키려고 시도함을 보여 줍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지 않으면 인간의 모든 시도는 무너지고 맙니다. 도무지 그들의 하는 일에 성공이 있을 수 없는 이유는 그들의 입에서 쉴새없이 쏟아져 나오는 악 때문입니다. “(잠15:28) 의인의 마음은 대답할 말을 깊이 생각하여도 악인의 입은 악을 쏟느니라”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앞길에 평강을 없게 하셨고, “(사48:22)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악인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셨느니라” 그 길을 어둡게 하셨습니다. “(잠4:19) 악인의 길은 어둠 같아서 그가 거쳐 넘어져도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지 못하느니라 ”
위선자는 선한 자를 멸망시키므로 스스로를 드러내려 하나 결국 그가 행한 악에 도리어 죽임을 당하는 자승 자박의 결과를 당하고 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의 악을 잠시라도 내버려주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시고 정직하시기에 성도에게 정직을 의무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고후13:7)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 이는 우리가 옳은 자임을 나타내고자 함이 아니라 오직 우리는 버리운 자 같을지라도 너희로 선을 행하게 하고자 함이라” 그러므로 전직한 자는 주의 장막에 유할 것이나 위선자, 사특한 자는 땅이 그들을 토하여 낼 것이며 저주를 받게 될 것이며 모든 행사에 실패가 따라다니게 될 것입니다. “(시15: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유할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거할 자 누구오니이까”
제 목 : 악인의 궤계
본 문 : 삼상 27:10-12
찬 송 : 45, 345, 395
본문은 블레셋으로 망명한 다윗과 블레셋 왕 아기스가 대화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당시 아기스는 다윗으로 하여금 이스라엘과 원수가 되게 만들려 하였고 다윗은 거짓말로 그 계획을 무마시킵니다. 이처럼 본문은 다른 마음을 품은 두 사람 사이의 진실하지 못한 공허한 대화를 수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본문에서 우리는 의인에게 품는 악인의 악한 궤계를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악인의 궤계에 성도들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다툼을 꾀합니다.(10)
아기스는 다윗으로 하여금 유대인들을 침노케 하기를 원했습니다. 이처럼 악인은 성도로 분을 내게하여 다툼을 일으키게 합니다. 본절에서 “침노하였느냐(파쇠트)”는 “달려들다.” “(삿9:44) 아비멜렉과 그를 좇은 떼는 앞으로 달려가서 성문 입구에 서고 그 나머지 두 떼는 밭에 있는 모든 자에게 달려들어 그들을 죽이니”, 엄습하다 “(삿9:33) 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은 일찍이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과 그를 좇은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들에게 행하소서.” 벌거벗기다 “호2:3) 그렇지 아니하면 내가 저를 벌거벗겨서 그 나던 날과 같게 할 것이요 저로 광야 같이 되게 하며 마른 땅같이 되게하여 목말라 죽게 할 것이며” 로도 번역됩니다. 이렇듯 악인은 성도 상호간에 이러한 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합니다. 따라서 성도는 어리석은 변론과 분쟁에 의한 다툼을 피해야 합니다. “(딛3: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악인이 꾀하는대로 성도간에 분내고 다투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성도는 주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것처럼 서로 용납하므로써 사단의 궤계를 물리쳐야 합니다. “(골3: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2. 사랑이 없어지게 합니다.(11)
다윗이 8절의 포로들에게 관용을 베풀지 않았던 것은 아기스를 두려워 했기 때문입니다. 어떤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서는 절대 사랑을 베풀 수 없습이다. 여기서 “두려워함이었더라(야레)”는 “놀라다” “(사57:11) 네가 누구를 두려워하며 누구로하여 놀랐기에 거짓을 말하며 나를 생각지 아니하며 이를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느냐 네가 나를 경외치 아니함은 내가 오래 동안 잠잠함을 인함이 아니냐.” 주저하다 “(출3:6) 또 이르시되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이니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모세가 하나님 뵈옵기를 두려워하여 얼굴을 가리우매” 염려하다 “(창31:31) 야곱이 라반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말하기를 외삼촌이 외삼촌의 딸들을 내게서 억지로 빼앗으리라하여 두려워 하였음이니이다.”로서 기본 의미는 “떨다”입니다. 이러한 상태에 있는 다른 사람의 말이 무조건 횡포요 독을 머금은 것으로만 들리기에 사랑과 화평을 이루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악인이 조장하는 놀라움과 염려, 걱정으로 성도 간의 사랑이 식게 되고 관심조차 없어지게 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하나로 이은 이 사랑의 끈을 놓치 않음으로써 악한 자의 시도를 꺾어야 하는 것입니다.
3. 미움을 꾀합니다.(12)
아기스는 다윗이 유대인으로부터 미움을 받게 하려했습니다. 여기서 “미움을 받게(바이쉬)”는 성실치 아니하다. “(욥6:15) 나의 형제는 내게 성실치 아니함이 시냇물의 마름 같고 개울의 잦음 같구나.” 속이다 “(사33:1) 화 있을진저 너 학대를 당치 아니하고도 학대하며 속임을 입지 아니하고도 속이는 자여 네가 학대하기를 마치면 네가 학대를 당할 것이며 네가 속이기를 그치면 사람이 너를 속이리라.” 가증스럽다 “(출5:21)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로 바로의 눈과 그 신하의 눈에 미 운 물건이 되게 하고 그들의 손에 칼을 주어 우리를 죽이게 하는도다 여호와는 너희를 감찰하시고 판단하시기를 원하노라.” 범죄하다 “(삼상14:33) 무리가 사울에게 고하여 가로되 보소서 백성이 고기를 피채 먹어 여호와께 범죄하였나이다 사울이 가로되 너희가 무신하게 행하였도다 이제 큰 돌을 내게로 굴려오라 하고”로서 기본 의미는 “나쁜 냄새가 나다” “(출7:18) 하수의 고기가 죽고 그 물에서는 악취가 나리니 애굽 사람들이 그 물 마시기를 싫어하리라 하라 .”입니다. 이는 서로를 성실하지 못한 사람, 상대를 속이고 죄를 지은 사람, 가증스럽게 행동하는 사람으로 보고 서로 미워하게 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실만한 죄를 지었습니까? 아닙니다. 악한 무리들의 악한 궤계로 인해 멋모르고 “예수를 십자가로!”라고 외치건 군중의 미움을 사서 골고다 언덕을 오르지 않았습니까? 미움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이 아닙니다. 절대적으로 사단의 궤계입니다. 이에 절대 성도를 미워하지 맙시다. 미워할 수밖에 없을 때에라도, 그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인하여 용서하고 사랑합시다. 우리의 미움의 상대는 성도가 아니라 사단임을 잊지 맙시다.
성도간의 시기와 질투는 행한 그대로 하나님의 국문(鞠問)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겔35:11) 그러므로 나 주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가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그들을 미워하여 노하며 질투한대로 내가 네게 행하여 너를 국문할 때에 그들로 나를 알게 하리라.” 이를 알기에 악인은 더더욱 성도 간에 다툼이 생기게 하고 서로 두려워하게하여 사랑이 식게 하며 미움이 생기게 해서 깊은 변론과 언쟁에 빠지게 하려 합니다. “(딤전6:4)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그러므로 성도는 악인의 궤계로 인해 서로를 불평하지 말며 투기하지 말고 오직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려서 “(시37:1) 행악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를 투기하지 말지어다 (시37:7) 여호와 앞에 잠잠하고 참아 기다리라 자기 길이 형통하며 악한 꾀를 이루는 자를 인하여 불평하여 말지어다” 주의 주시는 신령한 젖을 사모함으로 “(벧전2:2)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멸망의 길에서 돌아서야 합니다.
조국, 그대의 모든 결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그대를 사랑하노라.
제 목 : 아무리 부르짖어 보아도
본 문 : 삼상 28:15-16
찬 송 : 39, 336, 485
예수께서 “(눅20:25) 가라사대 그런즉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두 개의 지켜야 할 법이 있음을 보여 줍니다. 하나는 세상 법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명령과 규례입니다. 세상 법은 강제성을 띠고 있어 범법자에 대해 강한 규제를 가합니다. 그러면 주의 법도는 어떻다고 생각하십니까? 혹자는 하나님은 사랑이실 뿐 공의를 베풀지 않을 것이라고 합니다. 과연 그렇습니까? “(수24:19)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가 여호와를 능히 섬기지 못할 것은 그는 거룩하신 하나님이시오 질투하는 하나님이시니 너희 허물과 죄를 사하지 아니하실 것임이라.”고 말하는 여호수아의 말을 그냥 지나쳐도 되겠습니까? 아닙니다. 성경은 멸망이 주의 법을 어기는 자를 기다리고 있다고 했습니다. “(잠18:12)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니라.” 사울이 본문에서 두려워 떤 이유는 바로 지금이 주의 법을 어긴 자신에게 다가온 마지막 순간, 즉 멸망의 때임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로 인해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에 휩싸인 사울을 통해서 주의 법을 어긴 자에게 가해지는 하나님의 징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위급한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15절)
당시 사울은 군급한을 호소했습니다. 여기서 “군급하니이다.”(차라르)는 괴롭다. “(민33:55) 너희가 만일 그 땅 거민을 너희 앞에서 몰아내지 아니하면 너희의 남겨둔 자가 너희의 눈에 가시와 너희의 옆구리에 찌르는 것이 되어 너희 거하는 땅에서 너희를 괴롭게 할 것이요.”, 환난을 당하다 “(삿11:7) 입다가 길르앗 장로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전에 나를 미워하여 내 아버지 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이제 너희가 환난을 당하였다고 어찌하여 내게 왔느냐.”, 압박하다. “(민10:9) 또 너희 땅에서 너희가 자기를 압박하는 대적을 치러 나갈 때에는 나팔을 울려 불지니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여호와가 너희를 기억하고 너희를 너희 대적에게서 구원하리라.”, 에워싸이다. “(신28:52) 그들이 전국에서 네 모든 성읍을 에워싸고 네가 의뢰하는 바 높고 견고한 성벽을 다 헐며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의 모든 성읍에서 너를 에워싸리니”로서 기본 의미는 “차단하다”입니다. 이는 이웃의 도움조차 차단당한 채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환난에 에워싸여 있는 사면초가(四面楚歌)의 극한 상황인데다가 또 블레셋 군대의 위용이 엄청난 것을 보고 전의(戰意)를 상실한채 시시 각각으로 다가서는 자신의 죽음 앞에서 한계 상황에 처해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결국 사울에 대한 징벌은 여호와의 말씀에 겸비치 않았던 남왕국 유다에게 임한 것과 동일하게 하나님의 심판의 칼날로 나타났습니다. 백발 노옹(白髮老翁) 조차도 피할 수 없었고 혹 피했다 해도 바벨론으로 잡혀가 노예가 되는 징벌, 이것이 부를 떠난 자에게 임하는 첫째 징벌입니다.
2.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게 됩니다.(15절)
당시 사울이 처한 위기는 이스라엘을 승리케 하셨던 하나님의 음성이 끊어진 데 있습니다. 여기서 “대답지....하시기로”(아나)는 판명되다. “(신19:18) 재판장은 자세히 사실하여 그 증인이 위증인이라 그 형제를 거짓으로 무함한 것이 판명되거든” 응락하다. “(시22:21) 나를 사자 입에서 구하소서 주께서 내게 응락하시고 들소 뿔에서 구원하셨나이다.” 화답하다. “(스3:11) 서로 찬송가를 화답하며 여호와께 감사하여 가로되 주는 지선하시므로 그 인자하심이 이스라엘에게 영원하시도다 하니 모든 백성이 여호와의 전 지대가 놓임을 보고 여호와를 찬송하며 큰 소리로 즐거이 부르며”로서 기본 의미는 “말하기 시작하다” “(아2:10)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입니다. 이는 큰 소리로 부르짖어 보아도 하나님의 응답이 전혀 없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엡3:13) 그러므로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를 위한 나의 여러 환난에 대하여 낙심치 말라 이는 너희의 영광이니라.“고 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27:5)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옮겨 적었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하나님게 아무리 부르짖어도 선지자로도, 꿈으로도 응답이 전혀 없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한 남왕국 유다는 바벨론의 군대에 의해 무참히 성전이 깨어질 때 하나님께 부르짖지 않았을까요? “(왕하25:13) 갈대아 사람이 또 여호와의 전의 두 놋기둥과 받침들과 여호와의전의 놋바다를 깨뜨려 그 놋을 바벨론으로 가져가고”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가 바벨론 시위대 장관에 붙잡혔더도, 하맛 땅 림나에서 죽임을 당한 때도 마찬가지로 외치지 않았을까요? “(왕하25:18) 시위대 장관이 대제사장 스라야와 부제사장 스바냐와 전 문지기 세 사람을 잡고 (왕하25:19) 또 성중에서 사람을 잡았으니 곧 군사를 거느린 내시 하나와 또 성중에서 만난바 왕의 시종 다섯 사람과 국민을 초모하는 장관의 서기관 하나와 성중에서 만난바 국민 육십명이라 (왕하25:20)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저희를 잡아가지고 립나 바벨론 왕에게 나아가매 (왕하25:21) 바벨론 왕이 하맛 땅 립나에서 다 쳐 죽였더라 이와 같이 유다가 사로잡혀 본토에서 떠났더라.” 그러나 범죄한 자가 위기를 맞아 어쩔 수 없이 브르짖는 소리에는 하나님께서 대답치 않으셨습니다.
3. 하나님의 대적이 되고 맙니다.(16절)
당시의 위기는 결국 사울이 하나님의 대적이 되어 떠난데 그 근본 원인이 있습니다. 여기서 “대적”(아르)은 깨어있다.(우리)에서 유래하여 원한을 갖고 복수를 위해 깨어 있는 자, 즉 “원수” “(시139:20) 저희가 주를 대하여 악하게 말하며 주의 원수들이 헛되이 주의 이름을 칭하나이다.”, “적국”을 의미합니다. 또 “떠나”(수르)는 돌이키다. 멀리하다. (신7:15) 여호와께서 또 모든 질병을 네게서 멀리하사 너희가 아는바 그 애굽의 악질이 네게 임하지 않게 하시고 너를 미워하는 모든 자에게 임하게 하실 것이라.” 가리어내다. “(창30:32) 오늘 내가 외삼촌의 양떼로 두루 다니며 그 양 중에 아롱진 자와 점있는 자와 검은 자를 가리어 내며 염소중에 점 있는 자와 아롱진 자를 가리어 내리니 이같은 것이 나면 나의 삯이 되리이다.”로서 기본 의미는 “하나님을 거역하다” “(호7:14) 성심으로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며 오직 침상에서 슬피 부르짖으며 곡식과 새 포도주를 인하여 모이며 나를 거역하는도다.”입니다. 이를 종합해 보면 하나님을 거역한 자는 하나님께서 직접 가리어 내셔서 멀리하시며, 그를 향한 모든 선한 계획을 돌이키시고 그의 대적이 되심을 의미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고 거짓말을 했을 때 성령님께서는 베드로를 통해 그 진위를 가리어 내셨습니다.(행 5:1-11) 사울이 여호와의 목소리에 순종치 아니하여 그의 진노를 아말렉에게 쏟지 않음으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대적이 되셨습니. 이는 명백히 하나님을 속이고 충성을 다하지 못한 자들에게 얼굴을 돌이키심입니다. 이 순간부터 그들에게는 희망도 빛도 사라져 버리고 멸망만이 남게 됩니다.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기에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고야 맙니다. (갈6:7) 여러분은 죄를 심었습니까? 불순종, 불신, 불충성을 심었습니까? 주 앞에서는 모든 죄의 결과가 사망(약1:15)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눈을 뜨시고 실패자 사울을 바라보십시오. 주의 법을 어긴 자의 종말이 얼마나 비참합니까? 그 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고 하나님께 외쳐 보아도 응답이 없어 결국 하나님을 모르는 죄의 자녀처럼 불붙는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여 서서히 죽어가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당신은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고 하신 주의 말씀을 청종함으로 하나님의 사랑과 도우심을 경험하는 자들이 되십시오.
제 목 : 위기에 처한 다윗
본 문 : 삼상 29:2-7
본문에는 이방 나라로 피하여 살던 다윗이 동족 이스라엘과 전쟁을 치러야 하는 위기를 맞게 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토록 신실하였으며 정직했던 다윗이 왜 이런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까요?
우리는 본문을 통해서 그 이유를 알아보고, 그리할지라도 다윗을 그러한 상황에 내벼려두지 않으시고 끝까지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거짓말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사실 다윗이 위기에 처하게 된 이유를 살펴보면 삼상 27장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삼상 27장에 보면 다윗이 사울의 눈을 피해 이방 나라 가드로 도망하여 살면서 그 나라 왕 아기스에게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즉, 다윗은 이스라엘에게 거침돌이 되었던 이방인들을 침노하고서 가드왕 아기스에게는 유다 민족을 침노하였다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려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다윗은 본문에서 보듯이 아기스 왕의 신임을 얻어 이스라엘과의 전쟁에 참전해 달라는 요청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제 다윗은 동족 이스라엘에게 칼을 들이대고 싸워야 하는 아려운 상황에 접하게 되었습니다. 이 얼마나 비참한 위기상황입니까?
우리는 혹시 생활 중에 크게 혹은 작게 거짓말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그러한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철저히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거짓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며,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올무에 빠지게 합니다.
2. 하나님의 섭리로 위기를 모면하였습니다.
다윗은 이방 나라에 망명하여 살면서부터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을 드리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는 아기스 왕을 더 의지하게 되었으며 그의 인정을 받고자 거짓말까지 하게 되는 모습이 이 사실을 알게 해 줍니다. 그리하여 겪게 되는 다윗의 위기는 당연한 결과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블레셋 방백들이 다윗의 참전을 반대함으로 아기스 왕이 다윗을 돌려보내는 장면이 나옵니다.
블레셋 방백들은 다윗이 전쟁에 참전하였다가 이스라엘 편에 서게 될까 의심이 생겨났던 것입니다. 그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기스 왕이 다윗에 대해 변호하였지만 글레셋 방백들로 하여금 다윗을 끝까지 믿지 않게 인도하심으로 다윗의 참전을 막으신 것입니다. 우리의 생활을 돌아보면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에게도 있었음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위기의 상황에서 건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말입니다.
성도 여러분, 다윗이 위기에 처한 이유는 참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행위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잠시 잊고 아기스 왕에게 인정을 받고자 거짓말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다윗을 위기에서 건져 주셨습니다. 블레셋 방백들을 이용하셔서 말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손길은 못미치는 곳이 없으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생각할 때 우리의 모든 것을 어찌 맡기지 못하겠습니까?
제 목 : 하나님을 찾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본 문 : 삼상 30:3-6
찬 송 : 30, 464, 509
미국의 윌슨 천문대에는 세계에서 제일 큰 이백 인치나 되는 렌즈를 가진 망원경이 있습니다. 이 큰 렌즈로 이전에는 보지 못하던 여러 별들을 더 자세히 관찰해 볼 수 있었습니다. 성도들도 영적인 믿음의 렌즈를 더 크게 해서 주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를 불꽃같은 눈으로 바라보고 계신 주님을 주시하는 것이 성도의 도리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어려움에 처한 성도는 주께 부르짖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성도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지금이 주를 찾을만한 때요, 은혜받을 만한 때입니다. “(호10:12) 너희가 자기를 위하여 의를 심고 긍휼을 거두라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니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마침내 여호와께서 임하사 의를 비처럼 너희에게 내리시리라.” 그러면 부지런히 주를 찾을 자가 누구이겠습니까? 어려움에 처했으나 여호와를 힘입어 용기를 얻은 다윗의 경우를 예로하여 살펴 봅시다.
1. 위험에 처한 사람입니다.(6절)
백성들이 비극의 책임을 다윗에게 돌리고 그를 돌로 치려할 만큼 상황은 급박했습니다. 여기서 “군급하였으나”(차라르)는 곤고하다“(대하28:22) 이 아하스왕이 곤고할 때에 더욱 여호와께 범죄하여” 환난당하다“(느9:27) 그러므로 주께서 그 대적의 손에 붙이사 곤고를 당하게 하시매 저희가 환난을 당하여 주께 부르짖을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들으시고 크게 긍휼을 발하사 구원자들을 주어 대적의 손에서 구원하셨거늘.” 위급하다“(삼상13:6) 이스라엘 사람들이 위급함을 보고 절박하여 굴과 수풀과 바위틈과 은밀한 곳과 웅덩이에 숨으며” 학대하다“(암5:2) 처녀 이스라엘이 엎드러졌음이여 다시 일어나지 못하리로다 자기 땅에 던지움이여 일으킬 자 없으리로다.”로서 기본 의미는 고통받다 입니다. 이 말은 학대와 곤고한 환난을 당해 물리적이나 정신적으로 아주 위급한 상태에 놓여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에 야곱이 얍복 강을 건너려 하였을 때 형 에서라는 너무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홀로 남아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 때 야곱은 하나님을 만났느며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얻는 은혜를 받았습니다. 베드로가 잡혔을 때에 성도들의 합심기도는 천사로 하여금 감옥의 문을 열게 했으며, 그들이 기도하는 장소에까지 베드로를 인도해 주는 기적이 일어나게 했습니다.(행12:6-19). 그러므로 환난으로 고통받는 자 있습니까? 주를 찾으십시오. 큰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2. 슬픔에 빠진 사람입니다.(6절)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식을 잃은 슬픔을 다윗에게 가해함으로써 풀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이는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렵게 만드는 것일 뿐입니다. 슬픔에 빠진 사람은 위로자 되신 하나님을 찾음으로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한편 “슬퍼서(마라”는 어기다“(시105:28) 여호와께서 흑암을 보내사 어둡게 하시니 그 말씀을 어기지 아니하였도다.” 배반하다“(호13:16)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요 그 어린 아이는 부숴뜨리우며 그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격동하다“(욥17:2) 나를 조롱하는 자들이 오히려 나와 함께 있으므로 내 눈이 그들의 격동함을 항상 보는구나.” 심하다“(왕하14:26) 이는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고난이 심하여 매인 자도 없고 놓인자도 없고 이스라엘을 도울 자도 없음을 보셨고”로도 번역됩니다. 즉 이 말은 약속을 어기고 배반한 사람으로 인해 마음이 심하게 격동된 것을 의미합니다. 본문에서 다윗을 따르던 사람들은 자기들의 아내와 자녀가 사로 잡혀가자 슬픔 때문에 그동안 믿고 따랐던 다윗에게 배반감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다윗을 돌로 치자는 말은 그들의 슬픔이 어떠했는가를 잘 알려줍니다. 그러나 이들보다 더 큰 배신감과 슬픔을 겪은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제자들은 도망가고“(막14:50) 제자들이 다 예수를 버리고 도망하니라” 그나마 따라온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주를 부인하고(눅 22:54-62), 흠모하던 무리들은 십자가 밑에서 주님을 욕했습니다. “(마27: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이보다 더 큰 배반과 슬픔이 있겠습니까? 여러분은 이러한 배반의 십자가 위에서도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용서를 베푸신 주님을 바라보시고, 눈물을 닦아 주시는 주님의 위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3. 사로잡힌 사람입니다.(3절)
또한 당시 아말렉에 사로잡혀 간 사람들도 하나님을 찾아야 할 자들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로잡혔는지라(쇠바)”는 포로가되다“(롐41:14) 이에 미쓰바에서 이스마엘에게 포로되었던 그 모든 백성이 돌이켜 가레아의 아들 요하난에게로 돌아가니” 늑탈하다“(욥1:10) 그와 그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산울로 두르심이 아니니이까 주께서 그 손으로 하는 바를 복되게 하사 그 소유물로 땅에 널리게 하셨음이니이다.” 이끌다“(대하14:15) 또 짐승 지키는 천막을 치고 양과 약대를 많이 이끌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더라.” 끌고가다“(왕상21:10) 비류 두 사람을 그 앞에 마주 앉히고 저에게 대하여 증거하기를 네가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 하게 하고 곧 저를 끌고 나가서 돌로 쳐 죽이라 하였더라.”를 의미합니다. 즉 포로가 되어 감옥이나 강제노동장으로 끌려 가고 가진 재산은 늑탈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에는 이처럼 억울하게 옥에 갇히거나 곤고를 당하는 사람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요셉은 형들에 의해 억울하게 팔려 갔으며 “(창37:26) 유다가 자기 형제에게 이르되 우리가 우리 동생을 죽이고 그의 피를 은익한들 무엇이 유익할까 (창37:27) 자,그를 이스마엘 사람에게 팔고 우리 손을 그에게 대지 말자 그는 우리의 동생이요 우리의 골육이니라 하매 형제들이 청종하였더라 (창37:28) 때에 미디안 사람 상고들이 지나는지라 그들이 요셉을 구덩이에서 끌어 올리고 은 이십개에 그를 이스마엘 사람들에게 팔매 그 상고들이 요셉을 데리고 애굽으로 갔더라(창37:36) 미디안 사람이 애굽에서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보디발에게 요셉을 팔았더라” 보디발의 아내에 의해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창39: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넣으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사두개파는 시기하는 마음으로 사도들을 옥에 가두었습니다. “(행5: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바울 역시 두아디라 성에서 채찍으로 맞고 옥에 갇혔습니다. “(행16: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분부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그런데 이들의 공통된 특징이 있다면 옥 중에서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요셉은 옥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것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고 “(창39: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전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또한 바울과 실라는 찬양을 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 하나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처럼 억울하게 갇혔을지라도 실망치 않고 주를 찾을 때 하나님께서는 친히 찾아오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십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로서 어버지되시며 보호자되신 주를 찾으십니까? 지금이 은혜받을 만한 때요, “(히12:28) 그러므로 우리가 진동치 못할 나라를 받았은즉 은혜를 받자 이로 말미암아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섬길지니” 승리할 때입니다. “(시20:5) 우리가 너의 승리로 인하여 개가를 부르며 우리 하나님의 이름으로 우리 기를 세우리니 여호와께서 네 모든 기도를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위험에 처해 있습니까? 목숨을 다한 기도는 기적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슬픔에 빠져 있습니까? 눈물의 기도는 주님의 보좌를 흔들 것입니다. 억울함을 당했습니까? 이로 인해 낙심함으로 믿음을 잃지 마십시오. 악인의 득세는 풀 같아서 잠시 흥왕할지라도 영원히 멸망할 것입니다. 부르짖는 자만이 주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께 부르짖으십시오. 주를 찾으십시오. 은혜의 때입니다.
제 목 : 한계 상황에 처한 사울
본 문 : 삼상 31:3-5
찬 송 : 53, 326, 420
“톨스도이”는 그의 책 “인생론”에서 인생을 다음과 같이 비유했습니다. 길 가던 나그네가 사자를 만나 도망하다가 마침 우물을 발견하고 그곳으로 피하려고 하니 그 속에는 뱀이 또아리를 틀고 있기에 하는 수 없이 중간에 있는 나뭇가지에 매달려서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와서 위험을 모면했습니다. 그런데 흰 쥐와 검은 쥐가 번갈아 나와서 나뭇가지를 갉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이 비유는 백척 간두(百尺竿頭)에 서 있는 것인 인생임을 보여 줍니다. 모든 인간은 궁지에 빠진 이 나그네 같은 한계 상황에 몰려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 인간은 어떻게 해야합니까? 전쟁에 패한 사울의 입장 역시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를 어쩔 수 없이 결정해야 할 한계 상황에 놓였습니다. 그렇기에 여기서는 인간이 어떻게 한계상황으로 몰리는가, 또한 이러한 난국을 어떻게 해쳐 나갈까에 대해 사울의 경우를 들어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쫒김을 받게 됩니다.(3절)
사울이 전쟁에 패해서 도망가나 블레셋 병사들이 그를 놓치지 않고 끝까지 따라 미쳤습니다. 여기서 “따라 미치다.(마차)”는 알다“(삼하7:27)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여 주의 종에게 알게하여 이르시기를 내가 너를 위하여 집을 세우리라 하신고로 주의 종이 이 기도로 구할 마음이 생겼나이다.” 찾다“(욥3:22) 무덤을 찾아 얻으면 심히 기뻐하고 즐거워하나니” 화를 당하다.“(에8:6) 내가 어찌 내 민족의 화 당함을 참아 보며 내 친척의 멸망함을 참아 보리이까.”로서 기본 의미는 만다다“(사41:12) 네가 찾아도 너와 싸우던 자들을 만나지 못할 것이요 너를 치는 자들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이,허무한 것 같이 되리니”입니다. 이 말은 목숨을 찾는 자가 도망자의 의도를 미리 알고 도망자가 어디를 가든지간에 기필코 붙잡아서 화를 당하게 하는 것을 의미합나다. 하나님께서는 예례미야를 통해 이스라엘의 운명이 이와 같아서 칼로 몰살을 당하고 여기서 살아 남은 자는 포로가 되며 또한 애굽으로 도망하는 자에게는 칼과 기근이 끝까지 따라 붙을 것임을 말씀하셨습니다. “(렘42:13) 그러나 만일 너희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복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우리는 이 땅에 거하지 아니하리라 하며 (렘42:14) 또 말하기를 우리는 전쟁도 보이지 아니하며 나팔소리도 들리지 아니하며 식물의 핍절도 당치 아니하는 애굽 땅으로 결단코 들어가 거하리라 하면 잘못 되리라 (렘42:15) 너희 유다의 남은 자여 이제 여호와의 말씀을 들으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만일 애굽에 들어가서 거기 거하기로 고집하면 (렘42:16) 너희의 두려워하는 칼이 애굽 땅으로 따라가서 너희에게 미칠 것이요 너희의 두려워하는 기근이 애굽으로 급히 따라가서 너희에게 임하리니 너희가 거기서 죽을 것이라 (렘42:17) 무릇 애굽으로 들어가서 거기 우거하기로 고집하는 모든 사람은 이같이 되리니 곧 칼과 기근과 염병에 죽을 것인즉 내가 그들에게 내리는 재앙을 벗어나서 남을 자 없으리라.”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은 자는 쫓기는 삶을 살게 되며, 사자를 피해 열심히 도망갔으나 우물에서 뱀을 만난 경우와 같이 피할 수 없는 위기를 맞게 됩니다. 이런 환난과 근심 중에서 피할 길은 오직 우리의 보호자되시는 주께 부르짖는 것입니다. “(시86:7)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시107:6) 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건지시고”
2. 두려움이 생깁니다.(4절)
쫓기는 자와 그 주위에 있는 자를 강하게 사로잡는 것은 두려움입니다. 여기서 두려워하노라(야레)는 놀라다“(합3:2) 여호와여 내가 주께 대한 소문을 듣고 놀랐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케 하옵소서 이 수년 내에 나타내시옵소서 진노 중에라도 긍휼을 잊지 마옵소서” 위험하다.“(신8:15) 너를 인도하여 그 광대하고 위험한 광야 곧 불뱀과 전갈이 있고 물이 없는 건조한 땅을 지나게 하셨으며 또 너를 위하여 물을 굳은 반석에서 내셨으며”, 무서워하다.“(잠31:21) 그 집 사람들은 다 홍색 옷을 입었으므로 눈이 와도 그는 집 사람을 위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걱정하다.“(삼상9:5) 그들이 숩 땅에 이른 때에 사울이 함께 하는 사환에게 이르되 돌아가자 내 부친이 암나귀 생각은 고사하고 우리를 위하여 걱정하실까 두려워하노라.”로서 기본 의미는 “떨다”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항상 주위를 의식하며 두려움에 떨게 됩니다. 이러한 공포감의 시발은 성악과를 따먹음으로 범죄한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낯을 피한 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에게도 공포감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안식 후 첫날 곧 부활하신 그날에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한 곳에 모여서 문을 꼭 잠그고 있었습니다. “(요20:19)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 또한 회개한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스데반을 죽인 전력을 기억하고 제자들은 두려워 했습니다. “(행9: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또 세겜의 모든 남자를 죽이고 도망하는 야곱과 그 아들들의 공포는 어떠했겠습니까? “(창34:30) 야곱이 시므온과 레위에게 이르되 너희가 내게 화를 끼쳐 나로 이 땅 사람 곧 가나안 족속과 브리스 족속에게 냄새를 내게 하였도다 나는 수가 적은즉 그들이 모여 나를 치고 나를 죽이리니 그리하면 나와 내 집이 멸망하리라.” 그러나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첫 말씀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20:19)입니다. 그러므로 두려움과 공포에 사로잡힌 자여! 주님을 의지함으로 주님의 평강을 받으십시오.
3. 삶을 포기하려 합니다.(4절)
두려움과 공포를 이기지 못하면 삶에 대한 자포자기에 빠지게 됩니다. 사울은 더 이상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채 자살하고 맙니다. 이때 사울이 처한 방법은 칼 위에 엎드러지는 것입니다. 여기서 엎드러지다(나팔)의 기본 의미는 “떨어지다”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가 망하다“(민14:43) 아말렉인과 가나안인이 너희 앞에 있으니 너희가 그 칼에 망하리라 너희가 여호와를 배반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나” 항복하다“(왕하25:11) 성중에 남아 있는 백성과 바벨론 왕에게 항복한 자와 무리의 남은 자는 시위대 장관 느부사라단이 다 사로잡아가고”로도 번역되는 것은 암시하는 바가 큽니다. 즉 사울은 범죄함으로 인한 삶의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항복하는 심정으로 삶을 포기해 버린 것임을 이 단어는 우리로 짐작케 해줍니다. 그러나 사울처럼 자살하다고 해서 진정으로 삶의 고뇌에서 해방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뇌를 다른이에게 전가시키는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울의 자살은 이스라엘에게 도리어 큰 슬픔과 분열을 안겨다 주었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삶의 고뇌를 주님 앞에 나와 회개함으로 근원적인 치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술과 섹스, 마약 등으로 해소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고뇌를 잠깐은 잊을 수 있게 할지는 모르나 항구적인 해결책은 아님은 물론 죄악의 더 깊은 수렁으로 빠지게하여 더욱 큰 한계 상황에 접하게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세상의 나그네되시는 여러분! 두려움의 사자가, 곤고의 뱀이 닥쳐오더라도 삶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흰 쥐와 검은 쥐가 아무리 가지를 갉아 먹고 있다 해도 잡은 손을 놓지 마십시오. 그리고 영원히 끊어지지 않을 구원의 줄을 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근심과 걱정, 불신, 전쟁, 그리고 죽음이 우리의 앞을 가로 막는다고 해도 불꽃같은 눈으로 우리를 지키고 계시는 “(계2:18)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그 눈이 불꽃 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은 하나님의 아들이 가라사대” 주님과 우리 사이에 연결된 이 줄을 끊을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롬8:39)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수 없으리라.” 그러므로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수1:9)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하시니라.” 어디를 가든지 당신과 함께 하시는 분이 전능하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십시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