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 강해

호세아 강해|……──호세아
 
27 누가 지혜자인가?
제목- 누가 지혜자인가?
본문- 호 14: 9

이제 더운 여름도 지나가기 시작합니다.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어 제법 가을이 가까왔음을 실감하게 됩니다. 지난 한 주간은 젊은이교회의 제5차 태국선교여행이도 있었고, 꿈지기교회 여름수련회도 홍천에서 있었는데 모두 좋은 일기 가운데 은혜롭게 열매를 거두게 되어 감사할 따름입니다.

태국 선교여행은 캄보디아, 버마, 라오스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골든 트라이앵글 지역에 거주하는 몽족들을 대상으로 이루어졌는데, 아시아에서 가장 우리와 닮은 얼굴을 하고 있을 뿐 아니라, 흔히 몽골리안의 특징인 반점이 있는 민족이라는 공통점이 더욱 친근감을 더해 주었습니다.

40도가 오르내리는 뜨거운 열기속에서 강행군한 전도와 병자를 위한 기도사역은 젊은이들로 하여금 큰 도전을 주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전도 사역 중에 산 비탈 잔디밭에서 축구하는 몽족 청년들을 보고 즉석에서 일곱명씩 국가대항 축구를 하였는데 축구화를 신은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너무나 진지하게 경기를 치루었습니다.

경기 결과는 1:0으로 우리가 졌는데 경기 중 몽족 선수 하나가 넘어져 팔이 빠지는 사고가 일어나 모두가 염려하였습니다만, 간호사이신 정사파이야 권사님께서 그 자리에서 팔을 맞추어 주신후 마을 병원에 데리고가서 치료받고 기브스까지 하도록 정성을 다해 주었습니다. 감사하게도 그 날 저녁 집회에서 팔을 다친 형제가 아내와 함께 참석을 하였다가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하는 기적이 일어난 줄로 믿습니다.

전 그 형제를 보면서 유두고를 생각했습니다. 사도행전 20장을 보면, 바울 사도는 드로아에서 사역중 밤이 맞도록 말씀을 전하였는데, 다락에 앉아 있던 유두고가 졸다가 떨어져 죽는 불상사가 일어났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집회 분위기를 망치고 깨뜨려졌지만 하나님게서는 바울을 통하여 그를 살리심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찬양하고 큰 영광을 돌리는 전화위복의 사건이 바로 이번 선교여행에서 일어났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우리 꿈지기 세상 중고등부 수련회도 홍천의 팔렬중학교에서 개최되었는데, 태국 선교여행에서 돌아온 다음날 달려가 보니까 너무나 시설이 훌륭하고 아름다운 환경으로 마음에 꼭 들어 좋았습니다. 중학교 1학년 1반, 2학년1반, 3학년1반 밖에 없는 아주 작은 규모의 학교였지만 이화여자대학교에서 후원하는 대안학교였습니다. 학교 정문에 들어서니 교훈이 다름아닌 성경구절이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8개월동안 호세아서를 통하여 주시는 메세지를 나누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 구체적으로 알게되는 계기가 되었고, 참 사랑의 실천이 쉽지 않지만 주님이 소원하시는 삶이기에 어떤 환경적 유혹과 도전속에서도 감당해야 하겠다는 의지를 일깨우게 되었습니다.

고멜이라고 하는 여성과 호세아라고 하는 선지자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헤아릴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 되었습니다. 창부인 고멜을 데려와 아내를 삼고 음란한 자식을 낳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너무나 충격적인 말씀이었지만, 역설적으로 순결하고 정결한 자녀를 낳으라는 메세지로 헤아리고는 우리 역시 순결한 주의 백성으로 살기를 다짐하는 계기가 된줄로 믿습니다.

오늘은 호세아서의 마지막 시간이 되겠습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오늘 말씀 중에 중요한 키워드는 \'깨닫다\' 라는 동사와 \'알다\' 라는 동사입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잠언의 결론 같은 말씀을 잠언기자는 이렇게 맺습니다. ‘누가 현숙한 여인을 얻겠느냐? 그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우리 여성들 진주 좋아하시죠? 동남아에서 세계적인 진주가 생산이 되는데, 그 중에서도 필리핀이나 태국 같은 곳이 진주가 많이 생산되는 곳입니다. 진주를 보면 아주 영롱한 우유빛을 띠고 있는데, 구슬만한 진주의 가격이 무려 1,000만원이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크기인데도 어떤 것은 1/10 가격인 100만원에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차이가 나느냐고 물어보니까 보석 세일러가 설명해 주기를, 크기가 같아도 얼마나 원형에 가까우냐에 따라서 값이 차이가 나고, 같은 원형이라도 얼마나 깨끗하고 상처 없이 자랐느냐에 따라서 값이 차이가 난다는 것이었습니다.

진주는 주로 남양만의 핑크타다막시마라는 조개에서 나오는 진주로 8mm정도의 핵을 삽입하여 12mm정도의 진주로 많이 채취하는데, 모패의 체내가 아닌 껍질 안쪽에 생성되는 반구형의 진주 종류로 원형 진주보다 가격이 비교적 낮다고 합니다.

진주의 생성되는 과정을 아시죠? 조개 속에 한 이물질이 들어가면 조개 살 속에 상처를 주게 되고,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위해 만들어지는 분비물을 점점 진주를 커가게 하는 것입니다. 진주가 커서 구슬만하다고 하는 것은 그만큼 진주가 겪은 고통의 세월이 길었음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현숙한 여인을 얻는 일은 그 값이 진주보다 귀하다고 하는 말은 우리가 현숙한 아내를 얻는 일이 많은 희생과 시간이 필요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세계 2위, 곧 세계 1위인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는데, 그것은 만남의 문제가 크다고 생각합니다. 쉽게 만나고 쉽게 헤어지는 거지요. 쉽게 만난다고 하는 것은 쉽게 만난 사랑이 고통에, 희생에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사랑은 고통이 담겨 있어야 하고, 사랑에는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그런 사랑일수록 끊어질 수 없고, 떨어질 수 없고, 깨질 수 없는 거지요.

부모가 아이를 고통 속에서 낳았는데, 어찌 그 아이를 버릴수 있습니까? 때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면서 ‘내가 너희를 사랑하는데 이렇게 사랑한다’. 끊임없이 호세아를 떠나는 고멜을 향해서 하나님께서 ‘고멜을 데려와라’ ‘저는 데려오고 싶지 않습니다’ ‘데려와라 데려오되 가서 값을 지불하고 데려와라’ 우리의 사랑은 싸구려가 아니지요. 부부간의 사랑이 유지되지 위해서는 값이 지불되어야 합니다. 공짜로 사랑이 되어지지 않습니다.

요즘은 서로 간에 생일이나 어떤 결혼기념 같은 그런 날 부부가 서로 선물을 하게 되는데, 꽃을 하든, 아주 작은 반지를 하든 중요한 것은 자신의 희생이 담겨져 있어야 합니다. 어려운 생활 때문에, 우린 어렵기 때문에 생일도 기념일도 그냥 넘어가자. 그건 별로 좋은 모습 같지는 않아요. 어렵지만 틈틈이 모아서 하는 겁니다.

뭐, 옛날 같으면 저희들이 통학하면서 하루에 5원이면 버스를 탔습니다. 10리를 걸어가야 5원이 생깁니다. 저 약대에서 부천역까지 십리를 가방을 들고 20분 동안 뜁니다. 그리고 열차를 타고 서울로 통학을 합니다. 그렇게 5원을 절약하기 위해서 25분- 30분을 뛰는 거지요. 그렇게 해서 한 두어달 모으면 한 1,500원하는 브롯치를 사구요. 그걸 사서 어머니 생일을 기다렸다가 그 브롯치를 사서 드릴 때 그 기쁨은 말할 수 없어요. 그걸 받은 어머니가 ‘이거 무슨 돈이 나서 샀니?’ ‘다 사는 법이 있지요’ 뭐, 나올 방법이 없는데, 옛날에는 솔직히 용돈이란 것도 없었어요. 얻을 수 있는, 저축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교통비에서 절약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그 1,000원을 모으기 위해서 이 아이가 얼마나 많은 세월을 버스를 안 타고, 뛰어갔느냐 하는 것을 부모는 연상을 하게 됩니다.

1,000원짜리 브롯치가 이제는 10,000원 이상이 가겠지만, 그 값 이상으로 부모들은 고마움을 느끼는 거지요. 아픔이 담긴, 고통이 담긴 사랑을 받으면서 거기서 표현할 수 없는 애정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은 싸구려가 아닙니다. 여러분 10년, 20년, 30년 부부가 행복한 삶을 지탱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눈물겨운 희생과 고통의 댓가를 지불했기 때문에 오늘의 행복과 평안을 누리는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고멜을 데려오라고 말씀합니다. 데려오되 값은 지불하고 데려오라. 희생하라는 거지요. 사랑을 유지하기 위해서 희생하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이 끊임없음을, 중단될 수 없음을 하나님의 사랑에 고통이 담겨져 있고, 하나님의 사랑에도 눈물겨운 희생이 있음을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호세아서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이것을 깨닫는 사랑이 성숙한 사랑이요, 이것을 깨닫고 아는 사랑이 성숙한 사랑인 줄로 믿습니다.

성도 여러분 누가 지혜자입니까?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을 수가 있습니까? 잘 듣는 사람입니까? 과거에는 듣는 일이 목회자를 초청하지 않으면 들을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다양하게 책들도 나와 있고, 더구나 21세기에는 정보화시대입니다. 인터넷을 통해서 실시간에 수없이 많은 정보들을, 특별히 영적인 정보들도 귀한 은혜들도 누릴 수 있습니다.

저도 세계 곳곳에 유명한, 훌륭한 분들의 설교들을 인터넷을 통해서 듣습니다. 최근에 싱가폴에 하베스트쳐치에 콩히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는데 참 좋았어요. 싱가폴에도 이렇게 훌륭한 분들이 있구나. 열정적이었어요. 한 20분 설교하는데, 숨도 쉬지 않을 정도로 강렬하게, 그리고 낮예배지만 경배와 찬양팀들이 찬양을 인도하면서 얼마나 예배가 뜨거웠는지 모릅니다.

여러분 경배와 찬양 참 중요한 것입니다. 주일 저녁 예배 때 경배와 찬양팀이 시작하기 전에 여러분들이 오셔야지 찬양팀이 한참 하고 있는데, 어슬렁어슬렁 하고 있는 것은 올바른 예배자의 태도가 아닙니다. 그 찬양을 통해서 흠뻑 은혜를 입고, 말씀을 들어야지요. ‘아직도 찬양이 끝날려면은 10분 남았겠구나’ 이런 생각을 가졌다면 그럼 그는 예배해서 실패한 거예요.

우리 경배와 찬양 샬롬, 엔크리스토 리더자들은 정말 기도로 준비해야 합니다. 일주일 내내 무슨 찬양으로 할까? 멘트는 어떻게 할까? 어떻게 기도인도를 해야 할까? 그런 부분들을 끊임없이 고민하고, 그런 비디오를 보고, 그런 테이프를 듣고, 그런 것의 사이트를 들어가서 그것을 보면서 그것이 내 것이 되도록 몸부림을 쳐야합니다. 그리고 일 주일 만에 저녁에 나와서 인도할 때 모든 성도들을 은혜의 도가니에 인도하는 줄 믿습니다. 습관으로 캐리어로 해서는 안돼요. 준비되지 않는 모습으로 하면 안 됩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듣는다고 하는 것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듣는 일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해져 있어요. 잘 듣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까? 오늘 주님은 말씀합니다. 깨닫는 자,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라고 하는 말은 지혜자란 곧 듣는 것 보다도 깨닫는 자가 지혜자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뿐만 아니라 그 말씀에서 주님 주시는 깊은 메시지를 깨달을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현숙한 여인을 얻는 일은 진주보다 귀하다라고 했습니다. 말없이 그러나 수없이 많은 눈물과 희생이 담겨진 진주, 사람들은 그래서 그것을 좋아합니다. 잠언 31장에 보면, 고통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기에 값진 진주, 그것을 찾는 일보다 현숙한 여인을 찾는 일은 더 귀한 것, 그런 여인들은 이런 결과를 갖는다고 했습니다. 그는 자녀들에게 홍색옷을 입힌다. 색이 있는 옷을 입힌다는 거예요. 요셉도 야곱에 채색옷을 입힘으로써 아버지가 그를 사랑하는 것을 표현해 주었습니다.

과거에는 색이 있는 옷을 입는다고 하는 것은 사랑받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60년대에는 생일 되면 아버지께서 장에 나가서 검정 고무신 하나 사 가지고 왔지요. 그것도 아까워서 웬만할 때는 들고 다니지 않았습니까? 60년대 초등학교 다닐 때만 해도 가방을 맨 사람이 흔치 않았습니다. 제가 시골 다닐 때 서울에서 이사온 애가 가죽가방 하나를 딱 매었는데, 그것이 큰 구경거리예요.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보자기에다가 책을 둘둘 말고, 거기다가 벤또라고 하는 도시락을 떡 얹고, 도시락에도 반찬과 밥의 구별이 없지요. 어머니가 밥을 주걱으로 턱 떠서, 꾹꾹 누르고 옆으로 밀어내면 그 빈자리가 반찬자리예요. 거기다 콩장이나 깍두기 떡 놓고서 가서 뚜껑 열어보면 절반은 빨간물로 물들어 있지요. 다 먹고나서 그 빈 도시락 책상 같이 책보와 함께 싸서 어깨에 둘러매고 뛰면 말달리는 소리가 납니다. 따그락따그락... 여성들은 허리춤에 매었습니다.

우리는 몇 십년만 지나가도 옛날 얘기 같은 그런 삶을 살았었어요. 이 얘기는 2.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색깔 있는 옷만 입혀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 어머니의 사랑을 표현하는 거예요. 현숙한 여인은 그런 어려운 환경에서도 자기 아이에게 홍색옷을 입힌다는 거예요. 부지런하고 검소해서 그 어머니가 절약하는 가운데 자식들을 바르게 챙겨나간다는 것이지요. 뿐만 아니라 그 현숙한 여인은 남편으로 하여금 성문에서 그 지역의 장로들과 더불어 이야기 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장로라고 하는 것은 유지를 말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남편을 그 지역의 유지들과 견주어서 이야기 할 만한 위치로 남편을 세워놓는다는 것이지요.

사실 지금도 웬만치 세워진 남편들은 아내 덕분인 줄로 믿습니다. 아내의 헌신적인 뒷받침이 없으면 남편은 사회적으로 설 수 없습니다. 성경의 말씀입니다. 현숙한 여인은 자기의 남편으로 하여금 성문에서 장로로 더불어 앉게 하고 대화하게 만든다고 했습니다. 특별히 우리 여성들은 남편들을 세우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남편이 대통령 된다면 부인은 뭔가요? 영부인, 대통령 부인이 되지요. 어떤 분은 남편이 자꾸 업그레이드 되면 굉장히 속상해하고, 약올라 하는 분이 있어요. 남편만 잘 되고 자기는 뭐냐는 거지요. 잘 모르는 분 같아요. 남편이 국회의원되면 아내는 국회의원 부인되는 것입니다. 올라가는 만큼 아내도 올라가는 거예요.

요즘은 여성상위라고 하지요? 여성이 올라가면 남편도 올라가요. 여성이 사회부 장관되면 남편은 장관의 남편이 되는 거예요. 이건 남녀의 차별의 문제가 아니라 부부의 문제입니다. 아내가 올라가면 남편이 올라가는 거예요. 남편이 올라가면 아내도 올라가는 거예요. 동반자적인 의미에서 서로의 배우자에 대해서 세워주기를 성경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넓은 의미에서 현숙한 여인이란 크리스찬 성도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얻는다면 그의 가정을 세우고, 그의 배우자를 세우고, 그가 속한 삶을 강건하게 만든다는 거지요. 평안의 교회에 속해 있는 사랑하는 성도들도 여러분을 통해서 여러분의 가정과 여러분의 삶의 자리가 강건해지고, 세움을 받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누가 총명한 자입니까? 성경은 말씀합니다.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곧 바로 아는 사람이 총명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안다고 하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의미로 아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서 호세아서는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백성은 망하는도다.

여호와를 알지 못하는 백성, 여호와에 대해서 지식이 없는 백성은 망하는 도다. 거기서 안다고 하는 것은 학문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더욱 구체적으로 주님은 말씀합니다.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제가 여러분을 압니다. 여러분이 저를 압니다. 그것은 단지 보이는 외형적인 것을 안다고 하는 의미가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성도들을 좀 더 깊이, 좀 더 많이 아시기를 축원합니다. 알아야합니다. 제대로 못 알면, 단편적인 것만 가지면 실수하기 쉬워요. 바로 알고, 그의 아픔과, 그의 고민과 그의 기도의 제목을 알아야 합니다.

적어도 그런 분들이 7-8분만 되어도 그의 신앙이 건강할 수 있습니다. 어떤 시련이 와도 그는 넘어지지 않습니다.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출애굽기 1장 8절에 보면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로운 파라오가 나타났다고 그랬습니다. 그건 사실 말이 안 되는 이야기예요. 왕이 되려면, 애굽에서 파라오가 되려면 어릴 때부터 궁중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술을 연마하고, 역사를 공부합니다. 역사를 공부하다 보면 바로 몇 대 위에 왕에 대한 모르겠습니까? 그 앞에 수 천년에 역사를 전부 공부할 텐데요. 요셉이 어떤 인물이었는지, 그가 총리가 되어서 이 애굽을 어떻게 다스리고, 애굽에 어떤 유익을 주었는지, 잘 배웠을 겁니다. 하지만 새로운 왕 투투모스는 요셉을 알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역사적으로는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요셉과 그의 민족 유대민족을 모르기를 원했습니다. 그들을 종으로, 노예로 삼았습니다. 알면서 모른 채 하는 이 모습 무서운 일이지요?

사무엘상 2장 12절에 보면 엘리 제사장에 두 아들을 통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무슨 말이예요? 모태신앙입니다. 주의 종의 가정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 누구보다도 잘 알겠지요? 많이 배웠을 겁니다. 하지만 그들의 삶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기뻐하시는 삶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거예요. 저를 포함해서 목회자 가정들 특별히 하나님 앞에 신실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끊임없이 성도 분들은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우리 장로님들을 비롯해서 권사님, 집사님 가정의 자녀들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신실하게 자라가도록 기도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들이 늘 조심해야 할 일은 자녀에 대해서 조심해야 됩니다. 아무개권사님, 아무개장로님 아이들 함부로 말하면 안 됩니다. 자녀에 관한 한 어느 누구도 자유롭지 못합니다. 자신이 없지요. 바로 그 문제가 내 문제가 되고, 우리의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개 성도님 가정의 자녀에 이러이러한 어려움, 주님 그 일로 인해서 그 가정 얼마나 고통 가운데 있을지 우리가 압니다. 하나님께서 그 아이를 그 자녀를 붙잡으셔서 그 가정이 기쁨의 가정이 되게 하시고, 그 아이로 인해서 하나님 영광 받으시기를 원합니다.’ 내 아이처럼 기도해 주셔야 합니다. 가장 경솔한 사람이 다른 사람 가정의 자녀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하는 사람입니다.

바로 사무엘상 2장은 그것을 말합니다. 지적으로 너무나 잘 알지만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을 위해서 그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노라. 여러분들이 10년, 20년 그 이상의 신앙생활을 하셨더라도 우리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지 못하면 사람들은 우리에게 그렇게 말할 겁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두려운 일이 아닙니까? 하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럼으로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헌신하면서 내 삶을 다 드려서 하나님의 그 사랑에 보답하고 응답하는 것이 곧 하나님을 아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이 백성이 하나님을 알지 못함으로 인해서 망한다고 호세아는 탄식합니다. 하나님의 소원이 무엇인지,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눈치가 없는지, 하나님의 뜻을 눈치 채지 못하는 거예요. 호세아 14장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는 그런 이스라엘, 에브라임에게 끊임없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가 지혜가 있어 이런 일을 깨달으며, 누가 총명이 있어 이런 일을 알겠느냐? 의인이라야 그 도를 행하리라.’

오늘 우리가 교독한 시편 1편을 보면 복 있는 사람과 복 있지 않은 곧 악인의 사람을 비교해서 말씀합니다.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 오늘 9절에서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도는 정직하니 의인이라야 그 도를 행하리라. 그러나 죄인은 그 도에 거쳐 넘어지리라‘

아무리 하나님께서 사랑의 말씀으로, 은혜의 말씀으로, 영성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선포하신다고 하더라도 악인은 그 말씀에 거쳐서 넘어진다는 거예요. 여러분, 목사의 설교에 시험 드는 사람 있지 않아요? 주님의 말씀에 시험 들고, 오히려 분이 나서 예수를 죽이려는 유대인들이 있지 않습니까? 주님이 뭐 잘 못된 얘기를 해서 그럴까요? 우리의 심령이 강팍하면 여호와의 도가 거치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말씀합니다. ‘십자가의 도가 사람들에게 미련한 것이고, 믿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어떤 이에게는 능력이 되고, 어떤 이에게는 거치는 것이 되지만 거치는 것 때문에 능력의 말씀을 포기할 수 없어요.

바울 사도의 선교여정을 보면 가는 곳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지만, 그 증거한 말씀 때문에 어떤 이들은 비방하고, 어떤 이들은 조롱하고, 어떤 이들은 죽이려고 달려들지만, 어떤 이들은 그 말씀을 듣고 주님을 영접합니다. 가는 곳곳마다 가정교회가 생기고, 가는 곳곳마다 하나님의 교회가 생깁니다. 우리 70인 전도대도 전도를 나가다 보면 아마 환영하는 가정보다 환영받지 못한 그 기회가 더 많을 것입니다. 칭찬을 받고, 격려를 받는 말보다 빙방하고 욕하고 조롱하는 말을 훨씬 더 많이 들을 것입니다. 퍼센테이지를 따져서 비방하고 조롱하고 반대하는 사람이 더 많으니까 이 전도를 중단합시다. 그렇게 해야 되겠습니까? 단 1%의 영접하는 자가 있으면 우린 그 1% 때문에 우리의 물질과 우리의 시간과 우리의 모든 정성을 기울여서 주의 복음을 증거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신앙은 그러기에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하나님의 법도는 그러므로 세상의 기준으로 예단할 수 없는 그런 비밀이 있습니다. 오늘 주님은 누가 이 삶에 지혜자 냐고 반문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말씀에 깊은 묵상이, 주님의 그 고통이 담긴 아픔이 담긴 피눈물 담긴 주님의 사랑을 깨달아 가면서 이제 내가 주님을 압니다. 이제는 주님의 사랑이 어떤지 알 것 같습니다. 그 사랑에 저도 응답하기를 원합니다. 주님의 사랑을 알아가는 길입니다. 곧 이 세상에서 지혜자요 총명의 사람인 줄 믿습니다. 지혜자로서 총명의 사람으로서 이 세상 속에 주의 백성으로 든든히 설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이 험한 세상 너무나도 다양한 이론과 사상이 범람하는 이 사회 속에서 여전히 주님의 사랑에 붙잡혀 생명을 걸고 주의 뜻 이루기를 소원하는 사랑하는 성도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내 생명 다하여 실천하며 행하기를 다짐하는 주의 제자들이 여기 있습니다. 지난 8개월 동안에 호세아서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사랑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주님의 은혜가 더 귀하고 복된지를 알게 하신 아버지 이제 행하게 하옵소서. 이제 실천하게 하옵소서. 능력의 삶으로 열매를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6 이슬과 같은 은혜
본문- 호 14: 5- 8
제목- 이슬과 같은 은혜

8월은 참으로 더운 계절이어서 무엇보다도 건강에 유의해야 할 시기입니다. 옛 어른들은 ‘더위 먹지말라’고 하는데, 더위에 육신의 건강뿐만 아니라 영적인 건강도 해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이 시기에는 영적인 긴장이 풀어지고, 기도의 줄을 놓치기 쉽고, 말씀을 묵상하는 삶이 느슨해 지는등 나태해지기 쉬운 계절이기에 더욱 긴장하여 영육간의 강건함을 유지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를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을 사랑의 말씀으로 끊임없이 인도해 주셨지만, 이스라엘은 반복해서 우상숭배와 범죄의 길로 내달아 가는 것을 우리는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여호와께서는 5절 말씀과 같이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저가 백합화 같이 피겠고 레바논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힐 것이라’ 는 참으로 놀라운 은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인류 문명의 견인차 역할을 했던 전구를 발명한 \'에디슨\'은 참으로 많은 실패를 거듭했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실패에 대하여 사람들이 물었습니다. \"얼마나 더 실패해야 합니까? 또 그 많은 실패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에디슨은 대답하기를 ‘나는 실패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전구를 만들지 못하는 방법을 수 천가지나 깨달은 것이지요.’ 마침내 에디슨은 전구 발명에 성공하였고 오늘날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에게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해 주었습니다.

실패가 없는 인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우리가 실패한 후의 자세입니다. 얼마나 많이 실패했느냐가 아니라 실패한 그 이후에 우리의 삶의 태도가 어떠한가 하는 것입니다. 실패에도 불구하고 믿음의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사랑 앞에 겸손의 고백과 절대적인 신뢰의 고백을 통하여 새로운 은혜의 삶을 누리는 것이 진정한 모습인 줄로 믿습니다. 이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우리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희에게 이슬과 같은 존재가 되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할렐루야 !

팔레스틴 지역은 건기와 우기로 나누어지는 메마른 광야지대가 대부분입니다. 우기에는 비가 내리기에 곡식들이 자라거나 짐승들이 번식할 기회가 있지만, 건기가 되면 모든 것이 메말라 버리기에 생명이 있는 대부분의 동식물들이 존재 자체를 위협받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슬 같은 존재가 되어 주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놀아운 약속입니까?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시겠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며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먼저, 이슬이 주는 의미는 바로 이슬이 그들에게 있어서 생명의 근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건기에 이슬이 없다면 모든 생명체는 죽을 수 밖에 없기에 이슬의 내림은 곧 생명의 연장을 뜻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슬은 밤에만 내리는 것이 특징입니다. 낮에는 광야의 뜨거운 동풍이 불기에 아무리 많은 양의 이슬이 내린들 동식물에게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밤에 이슬이 내린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가진 이들에게 가장 적절한 때에, 가장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신다는 의미인 줄로 믿습니다. 밤에 내리는 은혜, 그것은 우리의 고단한 삶에 있어서 가장 요긴할 때 허락하시는 주님의 손길입니다.

바울과 실라는 빌립보 감옥에 갇혔을 때, 오히려 밤중에 기도와 찬송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밤 중에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확신하였기에 오히려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옥문이 열리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알았던 간수는 자결로 자신의 책임을 면하려 했지만 , 바울을 통하여 온 가족과 함께 구원함을 얻는 놀라운 은혜를 체험하게 된 역사도 바로 밤중이었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생에도 건기와 우기가 있습니다. 매일 같이 비가 내리는 동남아에 가보면 산천초목이 다 우거져 밀림을 연상케하고, 어디를 가도 바나나, 파인애플, 파파야등 과일이 즐비하여 먹을 것에 대한 걱정이 없는 것 같이 보입니다. 일하지 않아도 먹을것이 있으니까 여유있고 낙천적인 삶의 습관이 자연 배이게 되지요. 반면에 건기와 같은 인생은 참으로 시간 시간이 견디기 어렵고 고단합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하나님의 은혜가 쏟아 붓는 것 같은 축복의 우기를 맞고 계신지, 아니면 밤중에 이슬 같은 은혜가 아니면 연명할 수도 없는 극심한 고난의 시기를 맞고 있는지요?

누구나 인생의 건기를 맞을 때가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IMF와 같은 피곤한 삶의 건기를 보내고 계신 성도들에게 밤중에 허락하시는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임할 때, 그 은혜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을 얻고 소생하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슬 같은 은혜를 내게 주시지 않았다면 나는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떠나서 나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슬같은 하나님의 은혜는 곧 우리의 생명의 근원이 되는 줄로 믿습니다.


치즈회사로 유명한 크레프트는 설립자가 가난한 시절을 보냈지만 신실한 믿음으로 회사를 키워 날마다 회사가 성장하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습니다. 큰 돈을 벌면서 수많은 종업원들과 엄청난 매출을 누립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급성장하던 회사가 어느 날 부터인가 점점 운영이 어려워지면서 적자가 나기 시작합니다. 생산라인은 멈추기 시작하엿고 종업원들은 하나 둘씩 회사를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도 안타깝고 어쩔 바를 모르던 그는 가장 가까운 친구를 찾아가서 하소연합니다. 참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우리 회사에 생기고 있다고 말입니다.

자초지종을 말없이 듣고있던 친구가 충격적인 말을 합니다. \"나는 솔직히 자네 회사가 망할 줄 알았네....하나님께서 자네 회사에 축복을 쏟아부어 주실 때, 오히려 자네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점점 멀어지기 시작을 했지. 자네 회사가 급성장한 이후로 자네가 주일 한 번 제대로 지킨 적이 있나 돌이켜 보게나.... 급성장한다고 좋아만했지. 그리고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께 예배하지 못한다고 스스로 위로하면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자네 회사는 멸망하는 길로 서서히 달리고 있었던걸세...\"

친구로부터 위로의 말이 아니라 충격적인 말을 듣고 돌아온 그는 결국 믿음의 친구의 충고를 받아들이고 두 가지를 결단했습니다. \"첫째, 무슨 일이 있어도 주일을 지키자. 둘째, 내 수입의 절반을 하나님께 드리자.\" 이렇게 결단한 이후 크래프트 치즈회사는 다시금 회복되면서 오늘날까지 세계적인 명성을 유지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하면 우리의 인생도 망하기 시작합니다. 멸망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하나님을 떠나서는 살 수 없다고 고백했던 우리의 그 절대절명의 신앙고백이 어느덧 소리 소문 없이 점점 멀어지기 시작할 때, 바쁘다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우리 스스로를 위로해 가면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할 때, 우리는 그 음성이 사단의 음성인지도 모르고 위로받지만 그때는 이미 나태와 깊은 침잠의 길로 빠진 후 입니다.

이스라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고백이 무엇입니까? ‘동식물에게 있어서 밤중에 이슬이 없으면 살 수 없는 것처럼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결코 살 수 없습니다’라고 하는 그 분명한 하나님을 향한 고백이 오늘도 여러분들에게 흔들림이 없이 분명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이슬 같은 은혜에 3번째 의미는 무엇입니까? 이슬은 어쩌다가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기분 좋을 때 한꺼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밤 조용하게 그러나 매일매일 변함없이 허락하시는 은혜. 이슬 같은 은혜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의미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자격은 누구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떠나서 우상을 섬기고, 정욕의 길로 가고, 하나님을 떠나서 자기의 육체의 소욕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도 하나님은 소리 없이 변함없이 이슬 같은 은혜를 주셔서 어느 때는 우리가 얄미울 때가 있지요.

저도 청소년 때에는 그런 생각한 적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는 사람만 주시지, 하나님한테 헌신한 사람한테만 주시지, 왜 태양과 비를 햇빛과 공기를 모든 악인들에게까지 주실까? 그렇다면 다 하나님 앞에 돌아올텐데... 우리의 인간의 마음은 그렇습니다만은 하나님의 마음은 얼마나 넓으신지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을 잊어버리고 멀리 떠난 에브라임 그들에게조차도 하나님은 이슬 같은 은혜를 허락해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우리 주님의 은혜를 말하면서 바다를 먹물 삼아서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서 그 사랑의 은혜를 기억해도 다 기록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은 그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에 힘입어서 여기까지 이른 줄로 믿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삶 속에서 때때로 건기와 같이 참으로 하나하나의 그 삶이 피곤하고 고단한 길을 걸을 때가 있다는 것입니다. 견디기 어려워서 이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그런 상황 속에 우리는 직면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건기 같은 인생을 살고 있는 성도들에게 소망의 말씀이 있습니다.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과 같으리니’... 이슬 같은 존재가 우리 하나님이 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백합화 같겠고 백향목 같이 뿌리가 박히리라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백합화는 가장 순결한 성도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도들에게 교회에서 가장 사랑받는 꽃입니다. 백합화가 되기 위해서 향기를 내기 위해서 우리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가 필요합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향기를 발하면서 살 수 있었던 것도 이슬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기 때문이었는 줄로 믿습니다.

레바논의 백향목처럼 뿌리가 깊이 박히리라고 말합니다. 요즘은 이스라엘을 가면 건기에도 나무들이 잘 자라고, 파인애플을 비롯해서 수많은 열대과일들이 가는 곳곳마다 숲을 이루고 있어요. 성지순례를 가면 이집트를 통해서 시나이반도, 시내산, 그리고 우리가 타바국경을 지나서 이스라엘을 들어가는데, 그 국경에 철조망이 쳐져 있어요. 가는 사람마다 우선 환경적으로 큰 충격을 받습니다. 이집트땅과 이스라엘땅은 똑같이 사막인데 그 철조망 하나를 건너면 낙원입니다. 온세상이 푸르러요.

그런데 이집트땅은 모래 밖에 보이지 않는 황량한 사막입니다. 어떻게 그렇게 되었는가. 이 건기에 어떻게 그들이 푸르름을 유지할 수 있는가. 가만히 보면, 호텔마다 동네마다 길거리마다 검은 호수가 나무사이를 지나가면서 조그마한 구멍을 뚫어놓았어요. 거기서 물이 송송 솟아나옵니다. 나무가 있는 곳마다 1m간격으로 구멍을 뚫어놓아서 나무 뿌리 앞으로 물이 똑똑 떨어집니다. 아무리 건기라도, 아무리 뜨거운 태양이 작렬해도 그 뿌리 밑으로 물방울이 스며들어서 곧 나무뿌리 주변만 흥건히 젖어있어요. 거기서 파인애플을 키우고, 거기서 야자나무를 키우고, 거기에 푸르른 잔디를 키웁니다.

이슬 같은 은혜가 작아 보입니까? 이슬 같은 은혜가 시시해 보입니까? 그래서 우기만 기다립니까? 언젠가 하나님이 내게 대박을 터트려 주겠지. 마치 로또복권 사놓고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렇게만 생각됩니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이슬 같은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우리 속담에 좋은 표현이 있어요. 가랑비에 속옷 젖는다. 처음에는 별거 아닌거 같지만, 나중에는 깊이깊이 젖어드는 것처럼 하나님의 이슬 같은 은혜, 그 분이 내게 이슬을 주시는지, 그 분이 정말 나를 사랑하시는지, 그 분이 정말 내게 신경을 쓰고 계시는지 그러나 그 분의 이슬 같은 은혜가 우리는 자라게 하고, 우리를 강하게 하고, 오늘 여기까지 우리를 인도해 주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때때로 건기를 맞은 인생을 살고 있는 분들이 있을 줄로 압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 그 가운데에도 백합화 같이, 백향목 같이 아름다운 꽃으로, 향기로운 나무로 우리를 세워주시되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하시는 은혜의 주님을 기억하면서 풍성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이 이슬 같이 여러분의 삶 속에 임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날마다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를 드립니다. 매일 같이 변함없이 밤중에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그 주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참으로 주님을 떠나서 살 수 없음을 고백하는 신실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회복되게 하옵소서. 우리가 주님을 떠난 그 시간에도 주님은 변함없이 은혜를 내리셨던 그 사랑, 그 은혜를 기억하며 이제 우리도 주님 앞에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고 분명히 다짐하며 고백하는 평안의 성도들 되게 하옵소서. 건기를 맞고 있는 성도들을 우리 주님 특별히 불쌍히 여기시고, 주님의 사랑의 손길, 주님의 은혜의 손길, 주님의 치료의 손길이 필요한 가정마다 이슬 같은 은혜로 그들에게 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5 돌아오면 삽니다
●돌아오면 삽니다. ● 본문: 호14:1~4

거리에 보면, 우리는 많은 현수막들을 볼 수 있습니다. 특별히 애타게 사람을 찾는 그런 현수막들을 사거리에서 자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새벽 몇시 몇분 무슨 차량과 무슨 차량이 충돌해서 사고가 난 현장의 목격자를 찾습니다. 알려주시면 후히 사례하겠습니다.\'라는 주로 증인 확보를 위해 목격자들을 찾는 내용들입니다.

전신주나 벽에 붙어 있는 벽보도 있습니다. 주로 자녀들이 집을 나가서 돌아오지 않음을 안타까와 하면서 자녀를 찾는 부모의 호소가 그 내용입니다. “아들아, 다 용서하였으니 돌아와라” 그런가하면 언잰가 서울 시내에서 큰 화제가 되었던 현수막이 있었습니다. “선영아 사랑해” 라는 다소 감성적인 면에 호소하는 이 현수막으로 인해 장안의 화제가 되어 뉴스에 나올 정도였습니다만 알고보니 어느 이벤트 회사의 마케팅 전략으로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주님께서 21세기에 오늘 본문 말씀을 하시기를 원했다면 아마도 전국 방방곡곡 사거리마다 “이스라엘아 돌아와라”는 현수막을 걸어놓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1절에 보면 우리 주님의 간절한 이스라엘을 향한 호소가 나와 있습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호세아 6장에도 같은 주제의 말씀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라. 우리가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돌아오라\'고 하는 것은 호세아서 전체의 주제이자 나아가 성경 전체의 주제이기도 합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우리가 어떻게 돌아가야 할까\'를 구체적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2절을 보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여기서 \'말씀\'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기보다 돌아가야 할 본인의 입술의 고백입니다. 2절을 조금 더 읽겠습니다. “너는 말씀을 가지고 여호와께로 돌아와서 아뢰기를, 모든 불의를 제하시고 선한 바를 받으소서. 우리가 입술로 수송아지를 대신하여 주께 드리리이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입술로 드리는 찬양과 고백이 돌아가야할 이들이 지녀야할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5장 18절에 보면, 둘째 아들이 아버지께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이것이 아들의 고백입니다.

젊은 날 부모가 사는 것이 너무 시시하게 보이고 답답해서 나 같으면 저렇게 살지는 않을 텐데 왜 인생을 저렇게 재미없게 사나 하면서,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를 재촉해서 유산을 받아내 아버지의 곁을 떠나 훨훨 날아갔습니다. 얼마나 신이 났겠어요. 많은 재산을 가지고 길을 떠난 그에게 친구 아닌 친구들이 주변에 모여들었습니다.

얼마나 인생이 재미있었겠어요. \'진작에 이런 재미를 맛볼 것을...\' 하면서 소비지향적으로 살다보니 가진 재산 탕진이 잠깐이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모으는 것 보다는 쓰는 것이 얼마나 쉽습니까? 순식간에 가진 돈을 다 써버리고 나니까 친구라고 생각했던 이들은 하나 둘씩 멀리 떠나고 집으로 찾아가도 외면합니다. 그제서야 그들이 친구가 아니었음을 알게 된 탕자는 결국 스스로 삶의 길을 개척해 보지만 여의치 않았습니다. 돼지에게 주는 쥐엄열매를 훔쳐먹는 일도 쉬운일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좌절속에서 방황하던 둘째 아들은 결국은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이렇게 작정을 합니다. “내가 하나님과 아버지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돌아가기를 원하지만 그전처럼 아들로는 돌아갈 수 없으니 품꾼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분명한 것은 둘째 아들에게 입술의 고백이 담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회개의 고백이요 겸손의 고백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품꾼으로 돌아가겠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돌아온 둘째 아들을 품꾼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손에 금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움으로서 여전히 나의 아들임을 많은 사람들 앞에 인정해 주었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 동네 사람들과 잔치를 나누면서 죽었던 아들이 다시 살아 돌아왔으니 함께 잔치하자며 기뻐하였습니다.

결국 둘째 아들에게 있어서 아버지께로 돌아갈 수 있는 중요한 터닝포인트는 바로 자신의 어떤 교만과 고집이 꺽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 내가라고 했던 삶의 관심에서, 이제는 아버지와 함께 라는 고백을 통해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며 존경하면서 살겠다고 하는 변화가 그에게 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탕자가 변한 것입니다. 가진 돈을 잃었기에 변한 것이 아니라, 그의 심령이 변하여 겸손의 모습으로 아버지에게로 돌아갔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입장에서 보면, 수 많은 돈을 잃었지만 그런 경험을 통하여 교만과 잘못된 사고가 겸손과 지혜의 사고로 바뀌었기에 오히려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열 명의 나병환자가 예수님께 나아와 고침을 받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들은 성 안에 살 수가 없고 가족과도 살 수가 없기에 늘 외롭고 힘든 생활이어서 위로가 누구보다도 필요한 그룹들이었습니다. 제사장이 나병환자라고 판정을 내리면 그들은 성 밖의 동굴에서 그들끼리 살아야 했습니다.

소문이 들립니다. “예수께서 각종 질병을 치료해 주실뿐만 아니라 죽은 자도 살리신다더라” 그들은 결심을 하고 예수께 찾아왔습니다. 사람들에게서 어떤 어려움을 당할지 모르고 심지어는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위험스러운 일이기도 했습니다. 사실 \'신앙\'이라는 우리의 행위,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다고 하는 이 행위는 우리의 인생을 걸만큼 소중하고 가치 있는 일인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주님이 그들을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에게서 낫기를 원하는 불타는 소원을 보셨습니다. “그래, 빨리 성으로 들어가서 제사장에게 너희 몸을 보여라!” 어떤 치료의 행위도 행하지 않으셨지만 그들은 주님의 말씀의 권위 앞에 확신을 가지고 성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을 합니다. 달려가다가 보니까 자신들의 병이 치유가 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돌아와 주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돌아온 것이지요. 성경은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아래 엎드려 사례하니...” 주님이 묻습니다. “아홉은 어디있느냐?” 나머지는 고침을 받지못했느냐고 되묻자 돌아온 한 사람은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다 치료를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홉 명의 나병환자도 고마운 마음이야 어찌 없었겠습니까? 평생을 성 밖에서 썩고 살아야 할 우리가 이렇게 치유를 받았으니 말입니다. 이제는 가족과 함께 정상적인 삶을 살게 되었으니 너무 고맙다는 마음을 가지고 제사장에게로 뛰어갔을 것입니다.

하지만 감사가 무었입니까? 생각이 감사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감사는 행동입니다. 돌아와 사례한 이 사람도 이제 곧 가족을 만나 새로운 삶에 대한 비전을 펼쳐나갈 꿈에 벅찼지만 그러나 그 생각보다 먼저 나를 치유한 주님 앞에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더 우선이라고 생각을 했어요. 우선순위가 분명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배자에 대한 주님의 말씀에서 우선순위가 분명한 성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마 6:33)

때때로 우리는 마음은 있지만 표현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늘 이렇게 말합니다. \"저도 마음은 있지요. 저도 마음으로는 늘 고맙게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한 명의 돌아온 이에게 축복을 더하셨습니다. 돌아온 그가 주님께 드렸던 것은 엎드려 사례하는 것이었습니다. 엎드려 절하는 것으로 그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최대의 감사를 주님께 표현한 것입니다. 감사의 고백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 앞에 돌아갈 우리의 두 번째 모습은 3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우리가 앗수르의 구원을 의지하지 아니하며 말을 타지 아니하며 다시는 우리의 손으로 지은 것을 향하여 너희는 우리의 신이라 하지 아니하리라”

여호수아 24장에 보면, 그가 백성들을 모아놓고 다짐을 받는 장면이 나오는데 매우 감동적입니다.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우리를 출애굽 시키신 후,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통해 가나안 땅까지 들어오게 하심을 기억하며, 다시한번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살기를 자신이 먼저 서원하자 백성들이 화답하는 장면입니다.

\"오늘날 택하라. 너희들이 아모리 사람들의 신을 섬기든지, 강 저편의 신들을 섬기든지 너희는 오늘날 분명히 선택하라.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지도자의 결단에 모든 백성들도 한 목소리로 화답했습니다. \"우리도 여호와만을 섬기겠나이다\" 적어도 영적 지도자인 우리가 성도들을 향하여 “나를 본 받으라” 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은 분명 인격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건강한 지도자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중요합니다.

주님 앞에서 우리가 분명한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데 어떤 모습이냐 하면, 바로 여호수아가 고백했듯이 그리고 백성들이 다짐했듯이 \"오직 하나님만 섬기겠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어떤 유혹이 다가와도 변함없이 주님만을 따라 가겠습니다 \"라는 신뢰의 고백으로 돌아가야 할 줄로 믿습니다.

4절을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제 나의 진노가 저에게서 떠나갔으니....” 갑자기 분위기가 달라집니다. 사실 13장까지는 굉장히 강력한 경고와 책망, 그리고 심판을 예고하시는 등 서슬이 시퍼런 말씀들이 많습니다만 이제는 분위기가 아주 부드럽습니다. 호세아를 통하여 고벨을 사랑하는 의지를 간접적으로 나타내신 주님께서 이제는 분명하게 당신의 속마음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침에 학교 간다고 도시락을 싸가지고 나간 아이가 저녁에 들어오면 어머니는 “학교 잘 갔다 왔니?”하고 묻기 마련이고, 아이는 “예. 잘 갔다 왔습니다.”하면 그런 줄 알지요. 그런데 어느 날 부터인가 동내 사람들이 “아들이 산 밑에서 놀고 있던데 요즘 어떻게 된거요?”라며 근황을 알려주자 어머니는 아이를 불러 확인을 하겠지요. “너 학교 안가고 산에서 놀았니?” 그것이 사실이 되었을 때 어머니는 얼마나 화가 나겠습니까?

싸리나무 채찍을 만들어 그것으로 아들 종아리를 칠려고 호통을 치는 어머니는 다시는 학교가지 말라며 책을 다 찢어 아궁이에 쳐넣겠다고 하시지요. 옛날에는 어머니가 화가 나면 주로 뭐라고 했냐하면 책을 다 찢어 아궁이에 넣는다고 그랬어요. “이놈의 자식 너 죽고 나죽자” 그러면 우리는 굉장히 겁을 먹었어요.

그렇게 어머니가 화가 나서 채찍을 들고 아들을 때리려고 할 때에 종아리를 걷으라고 하면 두려운 마음에 종아리를 걷었어요. 한대 두 대 맞아 갈때마다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렇게 아픔을 느끼다가 결국 어머니 품에 눈물로 뛰어 들어와야 되는 것인데.... 싸리나무가 쎈지 내 종아리가 쎈지 어디 한번 해봅시다. 이러고 버티고 있다면 얼마나 난감한 일입니까? 사실 어머니는 이 녀석이 한 두어대 정도 맞고 회개하면서 어머니 품으로 돌아오기를 기대하면서 종아리를 치는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백성들이 범죄하였다고 해서 아주 망하도록 채찍을 들고 휘두르시지는 않는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경고의 메세지와 심판의 메세지를 선언하실 때에는 그 말씀을 듣고 눈물로 회개의 고백을 가지고 돌아오기를 기대하시는 것인줄 믿습니다. \"이제는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겠습니다\" 주님의 품에 돌아오는 그 날이 우리의 인생에는 축복의 날이요, 하나님과 동행하는 복된 삶이 회복되는 시점이 될 줄로 믿습니다.

돌아간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용기 있는 일입니다. 탕자와 같이 만신창이가 되어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지만, 주님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두 손에 무엇인가 거창한 업적을 들고 오기를 원하는 게 아니라, 진솔한 회개의 마음, 비교할 수 없는 겸손의 마음을 가지고 오기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을 향해 나아갔던 사람들에게 오늘 호세아는 간절하게 선포합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 돌아오라”

기도 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주님 앞에 돌아갈 자격이 없지만 주님의 크신 사랑을 기대하면서 회개와 감사의 고백을 가지고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이제는 주님을 떠나서는 살수 없음을 고백하며 분명한 확신으로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책망하시며, 문책하시며 과거를 낱낱이 들추어 내시리라 염려하였지만, 오히려 내 사랑하는 아들이 죽었다가 다시 살았다며 기뻐하시며 잔치를 베푸시는 그 놀라운 아버지의 사랑의 품에 안기게 하옵소서.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24 이스라엘의 현주소
본문- 호세아 13: 9- 16
제목- 이스라엘의 현주소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될 줄로 믿습니다. 우리는 삶을 지탱할 수 있는 많은 원동력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관계에서 오는 위로 때문에 살 수도 있고, 자식들이 잘 되는모습을 바라보는 희망때문에 살 수도 있습니다. 혹은 우리의 직장이나 사업들에 대한 희망넘친 미래를 기대하며 살아갈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이요 기초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하는 사실을 확신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너무나 사랑하셨기에, 그들을 부르셔서 거룩한 백성 곧 성민으로 삼으셨고, 어느 민족보다도 풍성한 은혜와 은총을 부어 주셨습니다. 감사로 말하면 누구보다도 커야 하고, 감사의 제목을 헤아려본다면 누구보다도 감사의 제목이 많아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에브라임지파는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고 존귀하게 쓰셨기에 우상숭배와 불의의 삶을 살아가는 에브라임지파에게 하나님께서는 강력한 어조로 경고의 말씀을 주시는 줄로 믿습니다.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하였으므로 너희가 패망할 수 밖에 없노라’ 하나님께서는 에브라임 지파가 멸망할 수 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본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왕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할렐루야! 여호와 하나님은 세상의 왕과 구별되기에 왕의 왕이라고 그들은 고백하며 전쟁에 능한 왕, 어떠한 시련에도 항상 가까이 계시는 왕으로서의 하나님을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그랬던 이스라엘이 사사기에 보면 끊임없는 외국의 침략을 받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우리에게도 왕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왕을 주어 우리를 다스리게 하라\" (삼상 8:6) 자신들이 이웃나라에게 침략을 당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는 이유가 단지 왕이 없어서라는 생각에 이르자 그들은 사무엘에게 몰려가 왕을 세워주도록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사무엘선지자는 이러한 자세는 하나님의 백성다운 모습이 아님을 누차 권면하였지만 막무가내였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의 패망 원인은 여호와 앞에서의 악이었습니다. 그것도 숨어서 행하는 악이 아니라 여호와의 목전에서 행하는 악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스라엘을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시는 방법으로 이웃나라들을 선용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또 여호와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매 여호와께서 하솔에 도읍한 가나안 왕 야빈의 손에 그들을 파셨는지라\" (삿 4:1-2) 그들을 이스라엘을 깨우치도록 하시는 채찍으로 사용하신 것입니다.

20년간 수없이 많은 학대와 고난의 세월을 보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제서야 여호와께 나아옵니다. \"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짜오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의 보시기에 좋은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날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삿 10: 15) 결국 하나님 앞에 회개하고 금식하며 눈물로 돌아옵니다. 그럴때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택한 종을 사사로 세워 이스라엘을 구원하여 평화를 회복하게 하시는 역사가 사사기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패턴입니다.

그 사이클 속에서 우리는 삶의 실패의 모습도 볼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의지와 하나님의 요구도 분별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을 영적 분별력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에 기록된 실패의 삶과 성공의 삶의 내용이 모두 소개된 이유도 바로 그 실패와 승리 속에서 영적 진리를 깨닫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아야합니다. 특별히 승리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들에게는 그 승리의 삶을 잃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유지하는 지혜를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할 것입니다.

사무엘이 왕을 세워달라는 백성의 요구를 기뻐하지 않자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백성이 네게 한말을 다 들으라.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 (삼상 8:7)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아닌데... 하지만 그들은 막무가내였습니다. 완전히 분별력을 잃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공동체가 오직 그들만의 고집과 편견만이 지배하는 군중 집단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때때로 하나님은 우리가 어거지를 쓰면 그렇게 들어주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분명히 잘 못된 길인데... 자식들이 부모에게 생떼를 쓰면 그 길이 바른 길이 아닌 줄 알면서도 부모가 허락해 주는 경우가 있지만, 사실 그건 부모가 동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길로 가면 실패요 고난이요 어려운 일인줄 알지만, 네가 직접 체험해보고 깨달으라는 의미이지요. 탕자는 좋아서 그 길을 갔지만 결국 얼마 있지 못하고 뼈아픈 상처들을 가지고 돌아올 수 밖에 없었던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스라엘에 왕이 세워 졌지만, 왕이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사울입니다만 사울은 처음 얼마의 기간을 제외하고는 줄곳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의 종들을 죽이고 핍박하는 일들을 인해 그를 왕으로 세우신 하나님께서 후회하기에 이를 정도였습니다.

결국 사울왕은 블레셋과의 전투가 한창이었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했습니다. 왕만 세워 놓으면 다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던 그들이었지만, 그렇지 않다고 하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전에 너희가 왕과 방백들을 저희에게 주소서 하였느니라. 하지만 이제 너희 왕이 어디 있으며, 네 재판장들이 어디 있느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왕처럼 세우고 섬기고 있는 다양한 것들, 즉 인간관계, 자녀들, 부모와 친척들, 그리고 명예와 돈, 다양한 경험들이 여러분들의 왕이 되어 군림하고 있지않습니까? 그런 왕들만 세운다면 우리의 인생은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셨습니까? 지금도 그 왕을 세우기 위해서 온갖 시간과 물질을 투자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에브라임은 하나님 앞에 그러한 삶을 살다 보니 결국은 12절과 같은 내용이 나왔습니다. ‘에브라임의 불의가 봉합되었고 그 죄가 저장되었나니.....’ 이제는 죄가 너무나도 많아 창고에 쌓일 만큼 되었습니다. 처음엔 가리고 했지만 이제는 가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 바늘 도둑이 소 도둑된다는 말처럼, 작은 죄악의 점점 커져서 이제는 쌓아놀 만큼 커졌다는 것입니다.

죄가 쌓인 결과는 무엇입니까? 오늘 성경은 죄의 결과에 대해서 강력하게 경고하는 말씀이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13절입니다. ‘해산하는 여인의 어려움이 저에게 임하리라. 저는 어리석은 자식이로다. 때가 임하였나니 산문에서 지체할 것이 아니니라.’ 산문이란 자궁을 의미합니다. 어린아이가 자궁에서 나오는데 나오질 않고 지체하고 있는 거예요. 무슨 말입니까? 산모는 아이가 나오지 않으면 않을수록 고통이 더하는 거예요.

해산 달이 되면 임신한 여성들은 아이 낳을 준비를 합니다. 그 대표적인 신호가 통증입니다. 산통이라고 그럽니다. 처음에는 몇 시간 주기로 오다가 점점 간격이 줄어드는데 한시간, 30분, 10분 등으로 주기가 빨라지면 해산이 임박했음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목사가 어떻게 그런 걸 잘 아느냐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점은 제가 조금 알아요. 어머니께서 세브란스 간호대를 나오셔서 목회하시는 아버님을 따라서 농촌이나 섬 같은 지역에서 사역 하시던 60-70년대 만해도 병원이 없었기 때문에 당시 보건사회부 장관이 지역을 위하여 공중의로 임명을 해주어 치료할 수 있었기에, 어머니께 치료받은 주민이나 해산 때 받아준 아이가 수만명이라 국회의원 나와도 당선된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어머니께서 출타 중이시면 조산원에서 제가 전화를 받을 때가 있는데, ‘ 선생님 빨리 불러 주세요. 곧 출산할 것 같습니다 \' 하고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오면 ‘진통이 몇 분마다 옵니까?’ 하고 물어보면 처음에는 젊은 남자가 물어보니까 그 쪽에서 기가찬 모양입니다. ‘아니 젊은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요?’ ‘글쎄 진통이 몇 분마다 오냐니까요?’ ‘지금 1시간 마다 오고 있어요.’ ‘아직 멀었어요. 내일쯤 다시 연락주세요....’ 제가 엉터리 의사 노릇을 할 때도 있었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산모는 해산의 때가 가까워 올수록 진통이 심해지고 주기도 빨라지는 것을 보면서 느끼는데, 어찌 이스라엘 에브라임은 그것을 모르고 있는냐 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알고 보면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몰라요. 아버지 하나님께서 여러분들이 미워서 여러분들에게 실패를 주십니까? 우리를 미워해서 우리에게 어려운 곤경을 주십니까? 때때로 시험을 위해 고난을 허락하실 때도 있지만, 많은 경우에 에브라임처럼 스스로 고통을 자초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두 번째는 15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가 형제 중에서 결실하나 동풍이 오리니 그 근원이 마르며 그 샘이 마르고 그 적축한 모든 보배의 그릇이 약탈되리라.’ 열심히 일했습니다. 땀흘려 노력했습니다. 남들보다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리고 가득 가득 쌓아 놓았습니다. 이 정도면 노후까지 혜택을 보면서 이제는 살아갈 수 있으리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 모든 수고의 열매가 형제나 이웃 가운데 가장 많이 저축을 했다고 자부심도 가졌었는데 알고 보니까 빈그릇 이었다는 것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2장 13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는데, 첫째는 생수의 근원인 나를 버린 것과 둘째는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 웅덩이는 물을 담을 수 없는 터진 웅덩이로다.’ 결국 헛수고 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웅덩이 파느라고 얼마나 수고가 많았습니까? 깊은 웅덩이 파느라고 얼마나 고생도 많았습니까? 좀 더 크게 파자. 좀 더 넓게 파자. 좀 더 견고하게 파자. 그런데 주님이 보시니까 터진 웅덩이예요. 담아도 담아도 새어 버리는 겁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와 호세아 선지자의 말씀이 일치합니다. 저들이 형제들 가운데에서 탁월하게 열매를 맺었다고 생각했지만 동풍이 와서 그 근원조차 남겨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동풍은 곧 여호와의 바람이라고 했습니다. 얼마나 허무합니까? 정성을 다해서 쌓아놓은 우리 인생의 열매들이 다 사라져 버렸으니 말입니다. 이 말씀은 죄의 결과는 우리의 어떤 수고의 열매도 허사로 만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 번째 말씀은 16절에 있습니다. ‘사마리아가 그 하나님을 배반하였으므로 형벌을 당하여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 어린아이는 부숴뜨리우며 아이 밴 여인은 배가 갈리우리라.’ 이 말씀은 너무나도 강력해서 설교 전에 봉독을 하질 못했습니다.

엊그제 뉴스를 보니, 삼 남매를 둔 어머니가 생활고에 시달리다가 결국 아이들을 아파트에서 집어던져 모두가 목숨을 잃는 기가 막힌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여러분들은 그 뉴스를 보면서 ‘그래, 저 고층 아파트가 문제지, 아파트에만 살지 않았어도 그 아이들은 살았을 텐데...’ 혹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까? ‘우리나라에 IMF만 안 왔어도 내가 요모양은 되는 않았을텐데....’ 라고 말입니다.

저는 분명히 확신합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오늘날 교회의 위상이 많이 떨어졌다고 지각있는 분들은 염려합니다만, 사실 이렇게 된 가장 큰 이유는 교회의 지도자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끊이지 않는 목회자들의 섹스 스캔들, 머니 스캔들 같은 뉴스들이 전해질 때마다 교회는 성도와 사회에서 신뢰와 존경을 조금씩 잃어갔습니다.

이슬비에 속옷 젖는다는 말처럼 이젠 속옷까지 푹 젖은 상태입니다. 아, 이것은 바로 나의 문제이구나! 내가 영적 지도자로써 바로 살지 못했기 때문에 이 사회에서 기독교가 빛과 소금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구나...... 그렇습니다. 이 모든 결과는 우리의 부족함에서 비롯된 것임을 고백하며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 두려움으로 서길 원합니다.

최근 미국의 통계를 보면, 미국은 공립학교에 투자되는 비용보다 교도소를 관리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들어간다는 참으로 놀라운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범죄한 사람들을 관리하는 돈이 나라의 미래를 위해 투자하는 것보다 더 크다는 것이지요. 어린아이들을 위한 시설을 확충하고 훌륭한 교사들을 배출시켜서 교육의 질적 향상을 도모하는 일보다, 죄를 지은 이들을 먹이고 입히고 관리하는 비용이 더 들어가는 나라라면 파라다이스라고 할 수는 없겠지요.

이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새로워져야 할줄로 믿습니다. 분명한 것은 말씀을 통해 죄의 결과를 심각하게 경고하시는 주님의 메세지는 우리가 그렇게 패망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모가 말 안듣는 자식에게 채찍질 할 때 맞아 죽으라고 때리는 부모가 어디 있겠습니까? 한 두대 맞으면 얼른 \"어머님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돌이켜야 하는데, 자기가 무슨 천하장사라고 버티고 섰으면 부모의 입장에선 기가 막히지요. \"이 녀석이 매를 벌어요 매를...\"하면서 말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호소합니다. 지금 너희의 현재 상황, 너희의 삶의 현주소가 어떠한지를 알고 회개하고 돌아오라는 거예요. 돌아온다고 하는 말은 지난 삶을 청산하는 회개의 결단이 포함된 겁니다. 유턴하라는 거예요. 잘 알지도 못하면서 자존심 때문에 그냥 우기고 가는 사람이 되지말고 겸손히 갓길에 차를 세어놓고 사람들에게 물어보아 잘못됐으면 얼른 유턴하라는 것입니다. 회개란 결코 창피한 일도 부끄러운 일도 아닌 진정한 믿음의 용기이기에 오히려 존경받을 수 있는 결단인 것입니다.

다윗은 왕이었지만 자신의 잘못된 삶을 하나님의 종, 나단이 지적해 주었을 때, 그는 무릎을 꿇고 눈물로 회개했습니다. 어느 누가 다윗이 왕으로서 체면없이 눈물의 회개를 하였다고 평가절하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는 역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위대한 사람이라고 존경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의 현주소는 곧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나의 삶의 모습을 분명히 알아야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청산할 것은 청산하고, 끝까지 목숨을 걸고 유지할 것은 유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서두에 선언했던 것처럼,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풍성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여러분들 삶을 떠나지 아니하여 늘 하나님의 은혜 속에 풍성한 복을 누리시는 성도의 생활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생수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어리석은 백성들처럼, 오늘 우리는 땀 흘려 노력하며 일찍 수확을 거두었다고 기뻐하며 저축하였으나, 실상은 아무 것도 남기지 못한 빈 그릇뿐임을 깨닫고 주님께 고백하며 돌아서기를 원합니다.
이제 순전한 마음으로 순종하기를 원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주님의 사랑의 메시지가 우리의 심령 깊이 새겨져 주와 동행하며 사는 원동력이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3 쭉정이 같은 인생
본문- 호 13: 1-4
제목- 쭉정이 같은 인생

사람들은 누구든지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성공하기를 원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도 없을 것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성도들도 성공을 위해서 살고 계신줄 믿습니다. 목회자인 저는 목회의 성공을 원하고, 사업을 하는 분들은 사업의 성공을 원할 것입니다. 사랑을 하는 이들은 사랑의 결신을 기대하면서 온갖 시련과 역경을 견디어 가는 것입니다.

현대인들의 성공을 위한 세 가지 조건으로 Three C가 필요하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Capability입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능력은 모든 부분에서 요청되는 필수조건입니다. 능력있는 설교, 탁월한 행정력, 지혜로운 안목, 따뜻한 대인관계등은 한마디로 능력있는 목회자의 모습일 것입니다.

또한 능력이란 창조적인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어떤 세일즈맨 두 사람이 똑같이 한 회사에 입사하였습니다. 두 사람 모두 성실한 사람이었으나 한 달쯤 지나면서부터 점점 실적에 차이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이유를 찾아보니, 한 사람은 회사가 정한 출근 시간인 오전 9시에 나와 보니까 자기와 거래해야 할 사람들은 주로 9시 전에 통화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고 한 시간 일찍 출근해서 고객들과 상담을 하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었고, 다른 한 사람은 회사에서 요구하는 출근시간인 오전 9시를 정확히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성실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우리는 그를 창조적인 사람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성공적인 삶을 위한 두 번째 조건은 Character입니다. 성격이나 인격으로 번역할 수 있는 캐릭터는 그 만이 가진 무엇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영향을 받게되고, 그 사람을 만나면 무언가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그런 인격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Charisma입니다. 카리스마라는 말은 우리말로 번역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원래 헬라어의 은사라는 의미의 charis에서 시작되었는데, 어떤 사람도 흉내낼 수 없는 독특한 개성, 그만이 가진 능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박정희 대통령을 생각하면 쉽게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을 것입니다. 작지만 강한 리더쉽, 사람을 사로잡는 리더쉽같은 것 말입니다.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 역시 그 분만의 독특한 카리스마가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대선 때는 어려운 이웃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홍보성 카피로 이용해 히트를 쳤지요.

무슨 얘기입니까? 전자가 강력한 이미지의 카리스마라면, 후자는 부드럽고 따뜻한 이미지의 카리스마를 발휘했다는 것입니다. 결국은 영향력입니다. 성공을 위해 내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는 그 공동체에서 따스하고 부드러운 영향력을 발휘할 수만 있다면 그는 훨씬 성숙한 리더쉽을 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에 보면, 에브라임은 영향력이 대단한 지파였습니다. ‘에브라임이 말을 발하면 사람이 떨었도다.’ 에브라임 지파가 무슨 말을 하거나 의견을 제시하면 다른 지파는 토를 달지 못했습니다. 두려워했습니다. 권세와 위엄이 대단했습니다. 12지파 중에서 가장 잘나가던 지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실 이 에브라임에게 주신 능력과 권세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신 하나님께서는 모압평지까지 인도를 모세에게 맡기셨습니다. 그리고 다음 사역은 여호수아에게 맡기셔서 요단강을 건너게 하셨고 여리고성을 격파한 뒤 가나안 땅에 정착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그 일을 감당한 여호수아가 에브라임 지파였기에 그들의 자부심은 대단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사람들은 소속감을 좋아합니다. 우리 지역에서 대통령이 나왔다. 어느 때는 영남에서, 어느 때는 호남에서 서로 그런 자부심이 우월감으로 그리고 배타적인 모습으로 역기능으로 작용하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지난 번 국회의원 선거 때는 영남에서 호남출신 의원 그 지역의 정당은 한 사람도 국회의원 좌석을 한 자리도 얻지 못했습니다. 반대로 호남에서는 영남출신의 정당에 국회의원에 좌석을 하나도 얻지 못하는 양극화 현상을 보였습니다.

21세기가 되고 나서도 여전히 우리는 좁은 땅에서 이런 양극화 현상을 계속 가지고 있습니다. 세계 어디를 가도 지역적인 갈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조금 심한 것 같습니다. 이런 일들이 결국은 이런 소속감이 강화시켜 주지만, 그것이 역기능으로 작용한 결과에 모습인지, 순기능으로 작용하면 소속감은 좋은 것입니다. ‘어디를 가더라도 내가 평안의 성도다.’ ‘외국을 나가더라도 내가 대한민국 사람이다.’ 이것이 자부심으로 작용한다면, 얼마나 귀한 것입니까?

에브라임 지파의 사람들이 우리가 하나님이 주신 이 땅에서 우리 지파 가운데에 최고의 영적 지도자가 나왔고, 그 중에서 이 민족이 가나안 땅을 점령하고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살게 되었다. 그것을 기뻐하고, 자부심을 갖는 것은 아름다운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그를 위해서 그가 영적인 지도자로써 끝까지 그 사명을 감당하도록 기도해주고, 후원해주고, 우리가 잠잠히 뒤에서 힘이 되어주자. 이것은 얼마나 좋은 것 입니까?

사람들은 어떤 영향을 행사하고 나면, 거기에 대한 반대급부를 기대합니다. 내가 당신을 도와주었으니까, 그 대신 내가 무언가를 주어야 하지 않느냐? 경제적인 이익을 따주던지, 아니면 명예와 권세의 자리를 한 자리 주던지, 오죽하면 최근의 대통령께서 그런 말씀을 했습니다. 지난 선거 때 나를 도와주어서 어떤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은 6개월 정도로 충분하다. 그 얘기는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대통령에게 편하게 존재하지 않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부담스러운 존재라는 것입니다. 도움을 주어도 순수하게 도움을 주어야 하는데, 거기에 대해서 무언가 요구하는, 그래서 그 요구를 들어줄 수 없다고 하는 대통령의 고민을 우리는 들어야 하는 곳입니다.

에브라임지파의 모습도 다르지 않습니다. 여호수아를 배출시키고, 이스라엘의 왕국을 배출시킨 그런 지파이지만, 그들은 점점 시간이 가면서,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과 그들에게 주어진 어떤 영향력을 잘 못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을 하면 백성이 떨었도다.

정권 때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실세들이 있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승만 대통령, 전두환 대통령 모든 대통령마다 오히려 대통령 이상의 권세를 누리던 실세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실세들을 우리는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사람들이라는 그런 표현을 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공통점이 있지요. 그 정권이 쇠락하고 나면, 어김없이 그들은 감옥으로 갔습니다. 어떤 사람은 서너번씩 가야만 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지금 바라보면서 성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인생을 부러워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권력과 권세를 잘 못 사용해서 실패자의 모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에브라임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 에브라임에게 주신 하나님의 위용과 능력, 그래서 사람들은 에브라임 지파하면 성공한 지파, 에브라임사람들 하면 성공한 사람들 그렇게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들이 영광을 얻으면 얻을수록, 그들의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그들은 잘 못 되어져 갔습니다.

변하는 것이 긍정적일 때 우리는 변화라고 하지만, 그것이 옳지 않은 방향으로 갈 때는 변질이라고 말합니다. 에브라임은 변질되고 있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 1절 중반에 보면, 변질된 에브라임의 모습이 잘 소개되어져 있습니다. ‘저가 이스라엘 중에서 자기를 높이더니’ 2절에 보면 ‘저희가 자기를 위하여 우상을 부어 만들더니’

망하는 사람, 여러분 성공하는 것은 세미나도 듣고, 가서 배우기도 하고, 최고 경영자 과정에서 들어야 할 것도 많지만, 망하는 것은 배울 것이 없어요. 성경은 망하는 이유를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이 있어요. 오늘 본문말씀도 보니까, 공통적인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높이더니, 자기를 위하여 만들더니, 자기를 위하여 모두가 다 자기 중심입니다. 심지어는 어디까지 입니까? 예배도 자기를 위하여...

예배학적인, 아주 기본적인 그런 정의를 해 보면, 예배는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가 존재하는 것인줄 믿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그 모습으로 예배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런데 자기를 위하여, 자기의 특징, 자기의 소원, 자기의 방법, 자기의 어떤 기호대로 예배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잘 못된 실패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은 예배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나오셨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마음속에 여러분을 위하여 예배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예배를 하지만, 예배는 드리지만, 여러분을 위한 예배는 아닙니까? 여러분의 방법대로 하는 예배는 아닙니까? 종종 우리는 이런 일 때문에 우리는 충돌을 빚고, 때로는 우리가 실족하기도 합니다. 교회를 떠나는 이유가 되기도 합니다.
한국의 많은 목회자들이 미국에 갔다 오면 달라지는 것 중에 하나가 예배의 어떤 형태를 바꾸는 것입니다. 미국교회에 가면 강단 뒤에다가 성가대석을 설치한 교회들이 있습니다. 어떤 예배학에 대한 분명한 신학적 주관이 있어서 그러면 좋은데, 가보니까 그런 것을 보고서는 교회를 뜯어 고쳐서 뒤에다가 성가대석을 해놓고, 그리고 똑같이 모방을 합니다. 흉내라고 해야 되겠지요.

여러분 우리 한국인의 정서는요, 그 강대 뒤에 성가대석이 있으면요, 성가대들은 목회자의 뒷모습을 보게 되잖아요. 사람이 대화를 해도, 얼굴을 마주 보고, 그것도 눈을 바라보면서 대화를 해야 서로의 대화에 교감이 생기고, 이해가 생기고, 정도 오고가는 거지요. 그런데 눈길이 마주치지만 않아도 우리는 거리감을 느끼는데, 뒷모습만 보고 무슨 은혜가 되겠습니까? 이것은 우리 한국인의 정서입니다. 어느 목사님은 그렇게 한지 몇 달 만에 다시 또 뜯어고쳤어요. 많은 돈만 들어갔습니다. 교인들이 속으로 짜증을 냅니다. ‘뭐 이렇게 목회에 주관이 없나’

우리가 보고 배우는 것은 중요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확신과 신념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 한국인들은 예의를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언어도 아주 표현이 다양합니다. 어른들에게는 ‘진지 잡수셨습니까?’, ‘진지 드셨습니까?’, ‘식사하셨습니까?’, ‘밥 먹었니?’, ‘밥 먹었냐?’, 다 내용은 같지만 천차만별입니다. 만약에 자기보다 윗사람보고 ‘밥 먹었냐?’ 한다면, 따귀를 맞을 거예요. 하지만 어린 아이보고 ‘진지 잡수셨습니까?’하면 배꼽을 잡고 웃을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예배에도 격이 있다는 얘기입니다. 최고의 수준을, 최고의 모습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그렇고, 또 여러분들도 닮기를 원합니다.

그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고 하는데, 성도들은 목회자를 닮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이고, 비신앙적인 지도자라면 닮아서는 안 되겠지만, 여러분들이 그렇지 않고, 정말 여러분이 존경하고 인정하는 지도자라면, 지도자를 닮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예배하는 것은 결단코 우리를 위하여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예배는 그 분을 기쁘시게 하고, 그 분의 뜻을 받들고, 그 분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그것을 결단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하나님 앞에 모든 정성을 드리는 것, 그래서 예배라고 하는 워십은 엎드려 절한다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내가 드릴 수 있는 최고의 경의를 드리는 것입니다.

지난 주간 태국 방콕을 다녀왔습니다. 방콕에 가면 왕국을 꼭 방문하게 되는데, 태국의 포미퐁 왕은 지금도 거리마다 왕과 왕비의 사진이 크게 시내 곳곳에 걸려 있습니다. 태국에서 반드시 하지 말아야 할 것은 손가락으로 그 사진을 가리키는 것도 그 나라에서는 금지 되어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독재의 나라 같지만, 그 나라는 민주주의입니다. 그런데 왕에 대한 존경심이 대단합니다. 군대에서 쿠데타가 일어나도 수상은 바꿀 지언정 왕은 절대로 그들이 터치하지 않습니다.

수상이 국민투표로 당선되면, 왕궁에서 왕에게 임명장을 받는데, 왕궁에 보면 저 끝에까지 상당히 멉니다만은, 마룻바닥으로 된 왕궁 알현실에 왕이 앉아 있으면, 국민투표에 의헤서 당선된 그 나라의 실제적인 지도자 수상이 무릎을 꿇고 왕 앞에까지 기어갑니다. 가서 왕에서 임명장을 받습니다. 태국이란 나라에서 이런 강력한 왕권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을 예배자의 모습입니다. 엎드려 절한다는 것이지요. 여러분들은 편안하게 의자에 앉아 있지만, 여러분의 마음의 자세는 엎드려 절하는 마음으로 예배를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제가 예배를 드릴 때 다리를 꼬고 앉는 것을 허용하지 않는 거예요.

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저도 지금 여러분들과 함께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제가 대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자의 자세는 하나님 앞에서의 자세여야 합니다. 우리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에브라임은 지금 중대한 실수를 범하고 있다는 거지요. 하나님이 그를 높여 주셨는데, 하나님이 그에게 능력을 주셨는데, 오히려 그들은 능력과 권세를 가지고 인간적인 만용을 부리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들은 자기를 위하여 여러 모양으로 찾아가다가 결국은 우상에게까지 갔어요.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송아지에게 입을 맞추면서 그 송아지도 자기를 위하여 만들어 놓았습니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 중에 예배라고 하는 말, 예배라고 하는 형식을 있지만, 사실 여러분을 위하여 예배하는 분들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의 자녀를 위해서 예배하십니까? 여러분의 안전을 위하여 예배하십니까? 어떤 분들은 먼 길을 떠나는데,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뭔가 찜찜해서 예배는 드리고 가야 되겠다. 그래서 드리는 예배는 그것을 진정한 예배가 아니겠지요? 자기를 위하여 드리는 예배겠지요? 예배는 언제나 순수해야 합니다.

3절을 보겠습니다. 이런 에브라임에게 우리 주님께서 4가지의 말씀을 통해서 그들에게 현재적 상황을 말씀하십니다. ‘저희는 아침 구름 같으며 쉽게 사라지는 이슬 같으며 타작 마당에서 광풍에 날리우는 쭉정이 같으며 굴뚝에서 나가는 연기 같으리라’ 에브라임의 현상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4가지는 뭔가 있는 것 같지만, 사라져 버리고 잡을 수 없는 허무한 것들입니다. 아침안개, 아침구름, 이슬, 굴뚝에서 나는 연기, 바람에 날리우는 쭉정이는 아루런 의미가 없는 거예요.

결국 그들은 자신의 삶을 위해서 우상을 만든 일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러한 선언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경고하시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정말 쭉정이가 되기를 원하고, 아침구름 같은 이슬 같은 그런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부모가 자식이 망하는 것을 기대하고 원하는 부모는 없다는 거지요. 채찍을 때려도 맞아 죽으라는 부모는 없어요. 깨달아서 바른 길을 가기를 원하기에 부모는 자식을 향해서 채찍을 드는 것이지요.

오늘 하나님께서 호세아를 통해서 에브라임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결론적인 4절에 주님의 속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아침구름 같고, 이슬 같고. 연기 같고, 쭉정이 같지만 그러나 너희가 애굽에서 출애굽한 때부터 나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 였다.’ 너희가 광야에서 나를 바라보며, 너희가 평야에서 나를 바라보며, 고백했던 그 고백 여호수아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면서. ‘나와 내 집은 오직 여호와만을 섬기겠노라’ 그렇게 선언했을 때, 모든 백성들이 여호와께 뭐라고 했습니까? ‘우리들도 여호와만을 섬기겠습니다’
순수할 때입니다. 은혜로울 때입니다. 성령충만할 때입니다. 지금 주님은 그 때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이 그렇게 순수하고, 은혜 충만하고, 하나님 말씀 안에 신실할 때가 있었노라. 사실은 환경적으로 어려웠을 때, 광야에 살 때 정말 너희들 제대로 예수 믿었고, 광야에 설 때 정말 주님을 주님으로 인정했고, 광야에 설 때 정말 예배자로써의 부끄러운 모습이 없었어요. 그런데 지금 땅을 기업으로 주고, 너희들의 경제와 너희들의 모든 삶의 넉넉함과 충만함과 힘을 주셨을 때, 어찌하여 너희들이 이렇게 되었느냐?

하나님이 복 주실 때 잘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건강을 주셨을 때 충성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 나 외에는 구원자가 없느니라. 오늘 주님의 말씀이 혹 우리가 잘 못 생각하고, 잘 못된 길을 가고, 예배한다고 하면서도 나를 위해서 예배한다고 하는 잘 못된 에브라임의 현주소와 같이 하나님보다 자신이 더 이제는 소중해 지고, 하나님 앞에 예배하기보다는 예배의 형식을 빌어서 나의 영화와 나의 모든 육체의 욕심을 채우기를 원했던 우리들의 오습들, 다시금 광야에서 인도하셨던 여호와 하나님을 바라보면서, 그 분 밖에 없는 유일하신 구원자 그 분을 의지하면서 새롭고 순결한 이스라엘의 모습으로 하나님이 가장 축복하시고,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에브라임의 모습으로 회복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바울사도의 권면의 말씀입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를 세워주셨을 때, 우리에게 건강을 주셨을 때, 넘치는 재물과 은혜를 주셨을 때, 순수함을 잃지 아니하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예배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님을 기억합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소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행하는 진정한 이 시대의 예배자로 저희를 삼아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2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리라
본문- 호세아 12: 7- 14
제목-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라

지난 6개월 동안 여러분의 가정과 자녀들, 그리고 사업등 우리가 관심해야할 모든 부분에 함께 하셨던 에벤에셀의 하나님께 진심으로 영광과 찬송을 돌리기를 원합니다. 할렐루야 !

오늘은 맥추감사주일입니다. 보리농사를 지어 하나님께 감사했던 우리 조상들의 감사의 정신을 본받아 저를 비롯하여 역곡이나 부천 지역에 살고 계신 분들 중에 보리농사를 짓는 분은 안 계실만큼 우리의 삶의 패턴은 바뀌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정신은 바뀌지 않고 변함이 없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아주 특별한 존재로 생각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켜 ‘너는 내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보통 백성이 아니라 거룩한 백성, 내가 너를 뽑아서 세운 백성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정말 살맛나는 인생의 의미를 가졌을 것입니다. 9절 말씀을 보면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옴으로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라고 하셨습니다.

고통의 땅, 죄악의 땅에서 나올 때부터 이미 하나님은 그들의 하나님이 되셨고, 그들의 여호와가 되신 줄 믿습니다. 뿐만 아니라 어떤 사건이나 특별한 계기가 있을 때 만의 하나님이 아니라, 어떤 경우에도 끝없이 그들의 삶을 책임지시는 하나님이라고 하는 사실을 10절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 13절에서 ‘선지자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선지자로 저를 보호하셨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 여러분의 가정과 직장에서, 또한 우리 평안의 교회를 통하여 우리를 인도하시고 보호해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믿음의 확신이 오늘 우리로 하여금 감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서로 사랑하면 모든 것을 사랑의 의미로 해석합니다. 언어도 사랑의 언어가 되고 세상을 바라볼 때도 사랑의 안목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감사라고 하는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바울의 고백처럼 버릴 것이 하나도 없음을 발견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바라기는 우리의 모든 삶이 이제 감사의 언어로, 감사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께 영광돌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대단히 분노하시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언제 하나님께서 분노하십니까?’ 7절을 보겠습니다. ‘저는 상고여늘 거짓 저울을 가지고 사취하기를 좋아하는도다.’ 상고라고 하는 말은 상인이라는 말입니다.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백성이 상업적 이익을 추구하는 존재가 된 것을 보고 분노하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나도 지금 상업을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가?\' 좀더 말씀을 나누면서 그런 부분들은 분명하게 여러분 마음속에서 이해가 되실 것입니다.

다시 한번 본문을 생각해 봅니다. ‘에브라임은 상고이거늘.....’ 지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요구하고 기대하는 것은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이거늘...\'인데, 선지자를 통해서 오늘 경고하시는 말씀은 ‘에브라임은 상인이거늘,이라고 하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문제의 핵심입니다.

하나님의 자녀 에브라임’하면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거룩한 백성이라는 이미지가 먼저 떠올라야 하는데, 상고의 이미지가 먼저 떠오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황요한 목사를 여러분이나 이 지역 사람들이 장사꾼이라는 이미지로 남는다면 저는 목회 그만 두어야 하겠지요? 존경하는 김장로님을 생각할 때 ‘아유~ 그 사람 장사꾼이야’ 이런 이미지가 먼저 클로즈업된다면 이건 심각한 상황입니다.

여러분은 미국 프로 농구 최고의 스타 \'마이클 조던\'을 아실것입니다. 그는 이름 하나만으로도 무려 10억달러가 넘는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그가 등에 달고 있는 번호가 23번인데, 티셔츠도 23번이 찍힌 것만 팔린다는 것입니다. 그의 이름만 들어도 사람들은 농구의 황제, 농구를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이미지가 고정된 것이지요.

사실 상고라는 히브리말의 어원적 의미는 \'가나안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출애굽시켜 가나안땅에 들어가게 하실 때, 모세나 여호수아를 통해서 거듭 당부하신 것이 무엇이냐 하면 \'너희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면 절대로 가나안 사람같이 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광야 40년동안 훈련의 내용이 그것이었어요. 오직 하나님만을 섬기고 가나안 사람들이 섬기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 그들과 같이 되지 말라고 시내산에서도, 요단강을 앞둔 모압평지에서도 다짐 또 다짐을 시키셨습니다. 그렇게 당신의 선지자들을 통하여 다짐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으로 들어갔지만 언제부터인가 에브라임이 상고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가나안 사람처럼 되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8절 말씀처럼 에브라임의 착각에 있었습니다. ‘에브라임이 말하기를 나는 실로 부자라....’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재물도 많이 얻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평가합니다. ‘무릇 나의 수고한 중에서 죄라 할만한 불의를 발견할 자 없으리라.‘ 자신의 삶에 대한 평가를 스스로 내리면서 부끄러움도 죄가 될만한 일도 없다고 자위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러한 에브라임을 보고 얼마나 분노하셨는지 모릅니다. ‘너희가 애굽에서 나올 때 부터 나는 네 하나님 여호와가 되었는데, 너희가 지금 하나님 앞을 떠나 가나안 사람이 되고 우상을 섬기면서 많은 재물을 얻었으면서도 나는 죄라고 할 만한 것이 아무 것도 없노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내가 너희에게 내가 이렇게 선언하노라. \"너희로 다시금 장막에 거하게 하리라.’

무슨 말입니까? 장막은 텐트를 말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텐트 생활을 하던 시대 곧 광야의 삶으로 되돌리시겠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두려운 말씀입니까?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속일 수 없습니다. 갈라디아서 6장 7절에서 주님은 말씀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그렇습니다. 지금 그들은 가나안 사람이 되어 바알과 아세라 앞에 재물을 주고 엎드려 제사를 드리면서 많은 소득의 기회를 얻었고, 그 불의한 소득을 가지고 살아가면서도 하나님 앞에 불의함이 없다며 자만하는 아이러니한 모습을 주님은 바라보고 계신 것입니다.

오늘 본문말씀이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세지의 핵심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에브라임의 위치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선언합니다. \'자기의 육체를 위해서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지는 것을 거둔다\'고 말입니다. 결국 부자라고 말하지만, 자신이 많은 재물을 축적해 놓았다고 뿌듯해하지만,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그것은 자기의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쌓아놓은 쓰레기 더미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요즘 뉴스를 보면, 자기의 인생을 위해서 권력을 이용하고, 수많은 재물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이루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정권이 바뀌면 줄줄이 감옥으로 가는 모습을 보시죠? 결국 자기 육체를 위해서 썩어질 것들만 쌓아놓은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는 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으로 하여금 여러분의 삶 속에서 하나님이 되게 하라 그 말 이예요.

전도서 5장 19절에 보면, ‘어떤 사람이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그랬습니다. 우리에게 물질을 주신 것은, 우리에게 부요함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물론 여러분들이 잠자지 않고,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누웠습니다. 노력하고 수고하고 땀 흘렸습니다. 그래서 얻은 많은 소득들이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물질과 부요를 주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손에 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주인은 천지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의 삶에 주가 되시기 때문입니다.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해서, 저는 감사의 헌금을 많이 드리라고 말하기 보다는 오히려 여러분이 살아가는 삶 속에서 거품을 좀 빼기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여러분의 삶 속에 끼어 들었다면, 불순물들이 여러분의 영적인 삶에 섞여 있다면, 그래서 그것이 커 보이고, 많아 보이고, 오늘 본문 말씀처럼 ‘나는 부자라’ 이런 착각 속에 살아왔다고 하는 그런 것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좀 더 내 삶에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고, 내 삶에 부요함이 좀 부족함이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부끄럼이 없이 살아가는 그러한 성결된 성도의 삶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상고의 일을 포기하지 않을 때, 하나님의 자리에 재물을 대신 올려놓고 살아갈 때, 9절에서 우리 주님은 놀라운 경고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너로 다시 장막에 거하게 하겠다. 다시금 떠돌이 생활을 하게 하겠다.

여러분에게 부탁합니다. 상고의 삶을 포기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가나안 삶을 포기하기를 축원합니다. 에브라임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이요, 우리의 숙제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모든 성도들에게 주시는 말씀과 동일하게 이 시대에 상고로써가 아니라 에브라임으로써 진정으로 하나님이 하나님 되신 삶을 살아가는 그런 거룩한 백성으로서 살아가기를 주님은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 주님의 기대에 2003년 후반기도 기대에 충분히 미칠 수 있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는 성도의 삶이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가나안의 사람의 그 부요함과 쾌락에 화려함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자녀였던 이스라엘 에브라임이 그것에 점점 빠져들면서, 이제 그들을 향해서 ‘저는 상고여늘’, ‘저는 가나안 사람같이 되었거늘’ 이렇게 한탄하시는 주의 음성을 듣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이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을 보시는 주님, 지난 전반기의 우리의 삶이 바로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탄식하시는 에브라임의 모습이 아닌지 돌아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 영적 불순물들을 제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수많은 재물을 얻었으나 가나안 사람 같이 되었던 그러한 우리의 삶에서 착각을 제하여 주시고, 진정으로 하나님 앞에 하나님의 자녀로써의 삶을 기뻐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 물질과 풍요함이 하나님의 선물임을 기억하며 감사하게 하옵소서, 오늘도 우리와 함께 하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맥추감사주일을 맞이한 사랑하는 성도들 삶 속에 오늘도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이 허락하신 은혜를 기뻐하며, 감사하면서 우리의 생각도, 우리의 언어도 감사의 언어로, 감사의 생각으로 주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1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라
본문- 호 11: 12- 12: 6
제목- 항상 하나님만을 바라보라

우리가 신앙생활을 함에 있어서 \"항상\"이라고 하는 말을 바로 적용하며 살기란 그리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항상) 기도하라. 범사(항상)에 감사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 16-18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성도들의 삶의 태도를 분석해 보면 대개 두 유형으로 확연히 구별됨을 알 수 있습니다. 한 유형은 어려운 일이 생기면 주님을 바라보는 그룹입니다. 가정이나 자녀, 사업이나 건강등에 문제가 생기면 그제서야 주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몸부림칩니다.또 다른 유형은 좋은 일 즉 무엇인가 잘 되는 일이 있어야 하나님을 바라보는 유형입니다.

\'항상\'이라고 하는 말은 기쁨이나 슬픔등 모든 삶의 영역을 다 포함하는 말입니다. 성경은 그래서 기도할 때, 감사할 때, 기뻐할 때, 항상이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성이 언제나 맑아야 합니다. 영적 각성의 삶의 태도 또한 늘 깨어있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들이 읽고 있는 책은 어떤 것입니까? 혹시 여러분이 읽고 있는 책이 하나님을 향한 관심으로 더 나아가게 하는 책인지, 아니면 하나님을 향한 열정에서 식어지게 하는 책인지를 여러분 스스로 구별할 수 있기를 원합니다. 지금 여러분들이 즐겨보는 비디오는 어떻습니까?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관심과 사랑에서 멀어지게 만들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가 자주 만나는 사람들도 체크해 보아야합니다. 그들과 만남이 지속되는 동안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과의 영적 교제가 더욱 가까워지게 만들어 주는지, 아니면 세상과 가까워지게 하는지를 분별해야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신앙이란 다름아닌 하나님, 그 분을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부부 간의 사랑을 뭐라고 말할 수 있어요?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한다고 매일 이야기 하지만, 그 사랑이 신뢰받기 위해서는 다른 여자에게 한눈을 팔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요. 매일 사랑한다며 선물을 사오더라도 이틀이 멀다하고 외박을 한다면 그는 결코 사랑에 관하여 신뢰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것은 다른 어떤 우상에게도 한눈을 팔지 않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내 마음이 확정되고 확정되었다\"고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마음이 주님을 향하여 고정될 때 창조주 하나님은 가장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12절을 읽겠습니다. ‘에브라임은 거짓으로, 이스라엘 족속은 궤휼로, 유다는 곧 신실하시고 거룩하신 자에게 대하여 정함이 없도다.’ 성도여러분,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는 일에 장애물이 되는 첫 번째 이유가 여기 소개되어 있습니다. 12절 이 말씀을 요약하면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장애물은 \'거짓과 속임\'이라는 사단의 속성입니다.

우리 안에 거짓과 속임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짓과 속임이 심각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다분히 의도적이라고 하는데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거짓을 말할 때 모르고 거짓을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내게 유익이 되고 도움이 되니까 한다는 것이지요.

어느 모임에 갔더니 요즘에 가장 많이 하는 거짓말이 이거랍니다. ‘아유, 차가 막혀서 늦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모임에 참석한 사람들이 늦게오는 사람이 뭐라고 변명할 것인지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친구 분명히 늦게와서 ‘차가 막혀서 늦었다...’라고 얘기할 거라는 거예요.

모두가 다 웃었어요. 본인은 모르지만 거기 참석한 사람은 그 웃음의 이유를 알고 있었습니다. 간혹 신실한 분들에게 오해가 될수도 있지만 그리 염려할 것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평소 생활을 보면 신뢰할지 안 할지 가늠이 되기 때문입니다. 심은대로 거둔다는 말씀이 실감나는 대목입니다.

거짓과 속임이 문제인것은 그것이 의도적이라고 하는 데 있습니다. 사람을 속이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성도들에게서 하나님을 항상 바라보는 일에 첫 번째 장애가 되는 거짓과 속임의 삶을 여러분의 삶에서 완전히 제거하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이시기를 축원합니다. 완벽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여러분들이 고민하고, 땀 흘려서 애쓰고, 손해가 되어도 거짓과 속임에서 떠나려고 하는 그런 삶의 모습을 보여줄 때 사람들은 여러분을 향해서 신뢰하기 시작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모습 즉 아름답고 선한 양심을 주셨습니다. 이 양심은 성령충만한 사람들에게서 더욱 분명히 찾아볼 수 있는데 그것은 성령의 속성이 거룩하며 순결하며 온유하다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당신의 뜻을 헤아릴 수 있는 바로미터로 양심을 주신줄 믿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장애물의 두 번째는 무엇입니까? 12장 1절을 읽겠습니다. ‘에브라임은 바람을 먹으며 동풍을 따라가며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기름을 애굽에 보내도다’ 지금 에브라임의 문제가 1절에 지적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삶은 동풍을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동풍이란 팔레스틴 지역의 뜨거운 사막에서 부는 바람입니다. 이 열풍이 한 번 지나가면 남아나는 것이 없을 정도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세상의 강력한 힘을 의지하고 있음을 비유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를 이끌고 가는 강력한 힘, 때로는 유행으로, 때로는 어떤 습관으로, 때로는 어떤 제도로 시대의 성도들의 삶을 이끌어 가려고 유혹할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것들에 휩싸여서 이끌려갈 때가 많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한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애급에 기름을 바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치적인 안정을 위해서 강대국인 앗수르와 계약을 맺고 애급을 의지하는 정치적 에브라임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람도 너무나 정치적이면 신뢰가 생기지않고 가벼워보입니다만, 국가간에도 모든것을 순리로 풀지않고 정치적으로만 해결하려 한다면 좋은 관계를 오래동안 유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결국그들의 두 번째 문제는 하나님 앞에서 신뢰의 대상을 잃어 버렸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믿지 말아야 할 것, 신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의지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시간을 쓰고, 돈을 쓰면서 인생을 소비하는 충동지향적인 삶을 영위하고 있다는 겁니다.

이런 예를 인생으로 축소해 보면 \'야곱\'의 삶속에서 이러한 특징을 잘 찾아볼 수 있습니다. 형 에서를 속입니다. 아버지도 속입니다. 삼촌까지 속입니다. 자기의 재산증식을 위해서는 모든 수단방법을 다 동원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꾀와 경험 외에는 믿을 것이 없다\'라고 말입니다. 성공했습니다. 거부가 되었습니다. 너무 재산이 많아져서 이제 삼촌 라반의 집에서 함께 동거할 수 없을 만큼 되었습니다.

야곱이 생각합니다. ‘이제는 고향으로 돌아가야지.....’ 사람의 심리적인 구조 중에 독특한 것이 하나 있는데, 실패할 때는 고향을 찾지 않지만 성공하면 이상하리만치 고향을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어릴때 다니던 초등학교에 찾아가서 이것저것 비품도 기증하고, 운동회를 하면 몇 백만원씩 기부금도 선뜻 냅니다. 동네 어른들 모셔다가 잔치도 벌이고 동창회도 크게 벌입니다.

평소 성공하기 전에는 얼굴도 내밀지 않습니다. 동네 근처도 지나가지 않습니다. 어쩌다 가야할 일이 있어도 소문 없이 왔다가 갑니다. 하지만 성공하면 동네방네 전화해서 자기가 이제 고향으로 내려간다고 하는 것을 모두에게 알리기 좋아합니다. 성공컴플렉스가 작용하는 것입니다.

야곱의 생각도 우리의 생각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야곱이 금의환향하고 고향에 가서 성공했음을 자랑하고 싶었는데, 고향으로 가는 그에게 날벼락 같은 소식이 들려옵니다. 이제는 잊었던 옛날 이야기인데, 형은 잊지 않았어요. 상처를 받은 사람은 잊는 법이 없습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잊지만, 상처받은 사람은 잊지를 않아요. 형 에서가 4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야곱을 죽이러 온다는 거지요. 결국 몇 대로 나누어서 형의 마음을 위로해 보려고 하지만, 그것도 허사입니다.

모든 가족과 모든 재산을 먼저 보내고, 그는 혼자 얍복강가에 나왔습니다. 이제 야곱의 인생에서 재산이라든지, 인간관계라든지, 사회생활이라든지, 이런 복잡하고 여러 가지 어렵고 다사다난한 문제들이 야곱을 떠났습니다. 그걸 떠나서는 살 수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한 번 떠나 보세요. 살 수 있습니다. 이제 비로소 야곱은 홀로 남았어요. 홀로 남아 보니까 그 야곱에게 기도가 회복된 줄 믿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여러분 인생이 복잡하면 기도가 되지 않아요. 사회생활 복잡하게 하는 분들 다 정리하기를 바랍니다. 제가 헤브론에서 주관하는 전국 축구 대표자 단장직을 2년동안 하고, 지난 5월에 더 이상 내가 교회일로 분주해서. 내가 좀 어려우니 사임을 해야 하겠다고 메일을 보냈어요. 이름만 걸고 할 수 있지만, 제 성격에 이름만 걸고 명예로 있는건 원치 않고, 하면 잘 하고 싶은데 내가 지금 너무 일이 많아서 그러니 다른 사람 좋은 분을 새롭게 추대하면 좋겠다. 그렇게 제가 사임을 했습니다.

그랬더니 얼마 있다가 이 세상 정보가 얼마나 빠른지 할렐루야 축구단에서 저에게 전국 축구 대표단 단장직 제의가 왔어요. 거긴 그룹이 더 큰 겁니다. 이영복감독으로 있는 그 축구단이 주관하는 전국적인 모임인데, 그 제가 그런 대답을 보냈어요. 내가 이쪽에도 내 일이 분주해서 사임을 했는데, 여기 일이 좀더 크다고 여기일을 맡으면 내가 어떻게 됩니까? 제가 기도로 후원을 할테니, 거기도 좀 다른 사람을 찾아보십시오.

감사하게도 저는 명예에 관해서 욕심이 많치 않은 것 같아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습니다. 아마 여러분들의 기도가 굉장히 강하게 작용하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회적인 일에 너무 깊이 빠지지 마세요. 사회에 헌신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기도할 수 없을 만큼, 그것이 하나님의 일에 장애가 될 만큼 하지 마세요.

야곱이 모든 것을 떠나보낸 후에 비로소 기도가 회복된 줄 믿습니다. 밤을 세면서 기도하는 그에게 하나님 사자를 보내셨습니다. 그를 붙잡고 이제는 나를 떠나서는 살 수 없다는 정말 진실한 기독교인의 고백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진정한 성도로서의 이제는 구실을 시작합니다. 주님 나를 떠나면 안 됩니다. 그 전엔 주님 없이도 잘 나갔는데, 이제는 아니예요. 철이 들은 거예요. 하나님께서 야곱의 의지를 시험합니다. 환도뼈를 쳐서 탈골을 시킵니다. 그래도 놓치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과 여러분의 건강과 여러분의 여러 가지 모양을 하나님께서 한 번 치셔서 정말 이 사람이 이것이 없어도 나를 의지하고 나와 함께 의지할 것인가를 시험하실 때가 있어요. 한 방에 떨어지지 마세요. 야곱은 환도뼈가 탈골된 뒤에도 하나님의 사자를 붙잡고 눈물로 간구합니다. 나를 떠나서는 내가 살 수 없습니다. 그 전에는 그런 줄 알았는데 철없을 때 그랬습니다. 이제 주님 앞에 눈물로 호소합니다. 주님 나를 떠나지 마세요. 그 때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이스라엘의 이름을 주신 줄 믿습니다. 이제 다시는 야곱이라 하지 말고 이스라엘이라 하라. 영적인 변화를 그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야곱 같은 인생, 야곱 같은 에브라임의 문제,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세상의 것을 신뢰했던 것이 문제였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렇다면 언제 우리가 하나님을 항상 바라볼 수 있습니까? 결론이 4절부터 나오기 시작합니다. ‘천사와 힘을 겨루어 이기고 울며 그에게 간구하였으며 하나님은 벧엘에서 저를 만나셨고 말씀하셨다.’ 드디어 야곱이 변화됩니다. 야곱이 변해서 이스라엘이 됩니다. 하나님을 떠났던 이스라엘, 에브라임이 하나님의 백성 선민으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 엎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야곱을 만나주셨을 뿐만 아니라 말씀까지 주신 줄로 믿습니다.

6절은 결론입니다. ‘그런즉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공의를 지키며 항상 너의 하나님을 바라볼찌니라’

기도하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에브라임같이 야곱같이 인생을 살았던 우리들 항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일에 장애물을 가지고 살았던 우리들의 삶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리고 회개합니다. 하나님 아버지, 이제 주님을 나의 구주, 나의 하나님으로 바라볼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옵소서. 이제는 주님을 떠나서는 결단코 살 수 없음을 눈물로 고백하는 야곱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다가오셔서 우리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이제는 이스라엘로, 이제는 세상에서 승리자로써 우리를 세워주시는 그 하나님을 바라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20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성령
본문- 호세아 11: 1-4
제목-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성령

요즘 인사가 달라졌지요. ‘할렐루야’ 하면 ‘전도합시다’ 라고 응답하는데 얼마나 분위기가 좋은지 모릅니다. 어떤 동역자에게 전화가 왔길래 ‘할렐루야’ 그랬더니 ‘뭐, 좋은 일 있어요?’ 그래요. 하지만 우리 평안의 성도들은 저와 코드가 맞기에 응답도 은혜로운줄 믿습니다.

오늘은 성령강림절입니다. 일년 12달, 365일이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마땅한 일이지만, 특별히 오순절 다락방에 임했던 성령 강림의 뜨거운 역사를 기념하면서, 6월 둘째 주일을 성령강림주일로 지키게 되었는데, 여러분들의 마음속에도 성령의 뜨거움이 함께 하셔서 요한 웨슬리를 통하여 이루셨던 300년전의 기적을 이루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주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말씀하시면서 ‘너희가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였노라’라고 하신 말씀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사랑한다고 하는 말은 언제 들어도 좋은 것인데, 주님께서 말씀하고 계신 이 사랑은 매우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헬라어로 ‘사랑’하면 필레오나 에피투미야, 혹은 우리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주님의 사랑을 의미하는 아가페를 생각하는데, 오늘 본문에 쓰여진 사랑이란, 좀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사랑이란 뜻의 ‘헤세드’는 은혜, 축복 등 좋은 의미는 거의 다 가지고 있어서 히브리어 단어 중 가장 광범위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 말씀의 사랑이라는 단어는 좀더 독특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내가 너를 선택하여 버리지 아니하였다’ 라는 뜻의 \'아헤브\'입니다.

사랑이란 버리지 않고 선택한 것인 줄 믿습니다. 미움이라고 하는 것이 선택하지 않고 버렸다는 의미이고보면 더욱 실감나는 단어입니다. 과거 같으면 부부가 서로 갈라설 때, 자식만은 내가 키우겠노라고 아내는 울면서 호소했고, 남편은 법정에 까지 가서 자녀를 데려가겠노라고 했습니다만, 요즘은 세상이 많이 변해서인지 아이들을 서로 안 데려가겠다고 안달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버려진 아이들이 많아 부모 없이 자라나는 아이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해 이혼율이 30%라는 말은 곧 열 명의 아이들 중에 3명은 부모의 사랑과 관심에서 버림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버림받았다는 것은 일시적인 상황이 아니라 평생토록 마음에 상처로 남아서 고통속에 살아가게 될만큼 큰 일입니다.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한다고 할 때, 그냥 언어적, 추상적으로 사랑한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선택하였노라고 하는 아주 분명한 구체적인 사랑의 언어, 즉 아헤브로써 부르신줄 믿습니다. \"내가 너를 버리지 않고 선택하였노라\"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노라\" 주님은 이렇게 당신의 백성들을 부르셔서 선민으로 삼으셨고 거룩한 백성으로 불러 주셨습니다.

요즘 부모들은 자녀들을 생각함에 있어서 양극화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강남에서는 아이들의 머리카락이나 세포조직을 떼어내 유전자 검사를 하는 것이 유행이라고 하지요. 하지만 다른 지역에서는 이런 이야기들은 남의 일 같아 보입니다. 유전자 검사를 해서 우리 아이가 무슨 특성이 있고, 무슨 재능이 있는지를 미리 알고 싶다는 열정은 좋지만 거기에 목을 메는 듯하여 보기 안타까운것도 사실입니다. 오히려 전문가들도 유전자 검사가 참고사항이지 완전히 신뢰하기는 어렵다고 말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실 여러분 자녀들의 특성을 알아보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미술학원 한 서너달 보내보면 이 아이가 그림에 재능이 있는지 아닌지 알 수 있지요. 아이들 피아노 학원에 몇 달 보내보아도 음악적 재능이 있는지 잘 알 수가 있지 않습니까? 아니다 싶으면 그냥 바이엘가지만 보내도 좋을 것입니다. 스포츠 분야도 마찬가지입니다. 중요한것은 임상적 테스트를 통하여 발견하는 것이 정확하고 아이들에게도 무리하지 않고 상처를 주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어렸을 때 사랑하였다고 말씀할 뿐만 아니라 1절 후반에 보면, 너희를 불러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러냈다고 하는 말은 선택했다고 하는 의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430년 동안 애굽이라는 고난의 땅, 죄악이 관영하는 땅에서 고통받고 있었을 때 불러내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중요한 것은 불러내는 것인 줄 믿습니다. 자식들이 잘못된 곳에 가 있으면 부모가 불러내잖아요. ‘아무개야, 거긴 안돼. 거기는 가면 안 돼....’ 어제 뉴스를 보니까 누드클럽이란 곳이 있어서 20.30대 여성들이 눈만 가리고 온갖 술시중을 하는데, 하룻밤에 수십만원씩 버는 재미에 은행원도, 주부도, 심지어는 대학생들까지 찾아와 일하기를 원하다는 것입니다.

남자분들 중에는 직장에서 대외담당업무 즉 해외 바이어를 상대하는 분들을 가리켜 술상무라고 하지요. 그 사람들 기분맞추려니까 술자리 안 갈수가 없어서 하루 이틀 하다보니 술상무가 되었노라고 말입니다. 하지만 냉정히 생각해보면, 그것도 자기가 싫으면 안 할 수 있는 것이지요. 운동이나 여행같은 프로그램을 가지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거래상담도 월활히 이룰 수 있었다는 지혜로운 분들의 고백을 우리는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니까 ‘선지자들이 저희를 부를수록 저희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하나님의 성전을 찾지 않고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가는 사람들, 그들이 그곳을 찾는 이유는 그곳에 가면 육체의 소욕을 채울 수 있기에 간다는 것입니다. 자기의 심령 깊은 곳에 그것을 즐기려는 욕망이 있기에 술상무도 하고 밤거리도 배회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3절에 보면 우리 주님께서 가르치십니다.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사랑은 자녀를 바르게 가르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걸음마부터 가르치는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운전도 처음에 누구에게 어떻게 배웠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운전 태도가 나타납니다. 신앙생활도 어느 교회에서, 어느 목회자에게 어떤 분위기 속에서 첫걸음을 했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신앙적인 칼라가 드러나게 되어 있어요.

4절에 보면 ‘내가 저희를 사람의 줄로 이끌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람을 사람으로 보는 것입니다. 귀한 영혼을 영혼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줄이라는 이 표현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씀하기 위해서 거기다가 설명을 했어요. ‘내가 사람의 줄, 곧 사랑의 줄로 저희를 이끌었다.’ 주님이 우리를 이끄시는 줄은 사랑의 줄인줄 믿습니다. 어떤 사랑의 줄입니까? 버리지 아니하시고, 끝까지 지키시고, 첫걸음부터 인내를 가지고 가르치시는 사랑의 줄인 줄 믿습니다.

사랑의 줄은 부드러운 줄입니다. 인내의 줄입니다. 관심의 줄입니다. 교회가 부흥하거나 선교회가 부흥하는 일도 관심의 줄이 있는 부서가 부흥하는 줄 믿습니다. 어느 한 가정이 등록을 하면 각 부서 지도자들은 눈에서 빛이 나야지요. ‘저 성도의 나이가 한 50대쯤 되는 것 보니까 분명히 청년이 있을 것 같다. 분명히 중학생이나 고등학생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안내할 때에 거기에 벌써 대기하고 있어야지요. ‘혹시 중학교 자녀가 없습니까? 혹시 대학생이 없습니까?

관심의 끈, 사랑의 줄을 놓치지 않으시기를 바랍니다. 새로 오신 분들 오늘 여기에 누가 새로 왔는지 파악해야 합니다. 지금 저 뒷자리에 보니까 지난 달에 아이를 낳고 요양중이던 서문밀양 자매가 오늘 처음 교회에 나온 것이 보입니다. 할렐루야 ! 얼마나 감사해요. 목사의 머리 속에 아무개가 지금 아이를 낳고 친정에 가 있는 것이 머리 속에 입력되어 있어서 기도가 됩니다. 언제 그 분이 몸조리를 끝내고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오실 것인가!

우리 전도사님들, 지역장님들, 선교회장, 속장님들의 머리 속에 그런 사랑의 줄들이 꽉 차 있어야 합니다. 관심이 되지 않으면 연결이 될 수 없는 거예요. 오늘 주님께서 줄을 잡으시는데, 사람의 줄이 개나 짐승에게 끄는 그런 물리적 줄이 아니라 사랑의 줄로 우리를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이 당신을 자녀로 여기시는 줄 믿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줄이라 하시고서 거기에 설명을 붙였어요. ‘사랑의 줄로 너희를 이끌었도다.’ 오늘 한 영혼을 이끌수 있는 유일한 끈은 사랑의 끈인 줄 믿습니다. 이 사랑의 끈은 관심의 끈입니다. 1년을 기다리는 끈이고 10년을 기다리며 덮어주는 용서의 끈인 줄 믿습니다. 이 사랑의 끈에 우리가 먼저 주님 안에 붙잡혔고, 오늘 또 다른 영혼들을 사랑의 끈으로 이끌기를 원합니다.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성령께 붙잡혀서 오늘 여러분들이 주님의 자녀가 되었듯이, 또 다른 영혼들을 주님의 사랑의 줄, 성령이 인도하시는 그 능력의 줄에 이끌림 받을 수 있도록 인도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성령강림주일을 맞이해서 사랑의 줄로 이끄시는 성령의 놀라운 역사 속에 저희들 새롭게 깨달음 받기를 원하고, 또 도전되기를 원합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고 기다리시고 인내하시며 이끄시는 하나님 아버지,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모든 성도들이 주님의 그 사랑의 줄에 붙잡힐 뿐만 아니라, 그 사랑의 줄에 새로운 영혼들을 이끌수 있는 전도자의 삶을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9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본문- 호세아 10: 9-15
말씀- 너희 묵은 땅을 기경하라

‘할렐루야, 전도합시다!’ 오늘부터 교회의 인사가 바뀌었습니다. 제가 이형훈 장로님댁에 전화를 걸면 ‘할렐루야 전도합시다. 이형훈장로입니다.’ 라고 하시기 바랍니다. 가끔 전화를 받는 이들 중에는 상식이 멀리 출장을 가셨는지 다짜고짜 ‘여보쇼! 누구쇼?’라며 상대방을 심문하듯 전화를 받는 사람들이 있어요. ‘황목사입니다’라고 저를 밝히면 그제서야 태도가 달라지고 목소리가 부드러워지는데, 성숙한 시민이라면 누가 전화를 해도 자기를 먼저 소개하는 겸손한 자세가 되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 달력을 보면서 마음 한켠이 서늘함을 느꼈습니다. ‘벌써 6월이구나...’ 6월이 주는 느낌은, 주님 앞에 한 것도 없이 벌써 절반이 가고 있구나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한 것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달력을 넘길 때마다 요즘은 그러한 생각이 더욱 커지는 것을 보면 이젠 나이가 조금은 실감되는 듯 합니다.

달력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엔 어김없이 작은 숫자로 표시된 음력이 있는데, 과거 선조들은 그 음력을 중심으로 절기를 구별하곤 하였습니다. 특히 농사를 짓는 농부의 경우엔 절기를 피부로 느끼면서 볍씨 파종을 준비하거나, 모를 심는 시기나 김을 매는 시기, 추수할 시기등을 마음으로 부터 준비해 가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지금이 곧 여호와를 찾을 때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영적인 농부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기경하고 씨를 뿌려야 할 시대적 분별력을 가질 때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아침 대표 기도하신 장로님의 기도처럼, 우리 사회가 지금보다 경제적으로 더 풍성하고 좋았던 시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럴 때 일수록 알고 보면 시대의 영성은 텅 비어 있어서 신앙은 공허하고 세속적이며, 물질적 소욕들이 마음과 삶의 중심을 사로잡는 이 때에, 지금이 여호와 하나님을 찾을 때라고 하는 지적은 적절한 말씀인 줄 믿습니다.

농부가 지금 씨를 뿌려야 할 때라고 느끼면, 먼저 소와 농사의 도구들을 챙기게 마련이고, 농사를 위한 계획을 짜게 될 것입니다. 겨울동안 묵었던 딱딱하기 그지없는 땅들을 깊이 쟁기질해서 뒤엎어 놓는 것부터 농사는 시작되는 것입니다. 오늘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저와 여러분들이 아직도 마음 한 구석에 쟁기질 되어 있지 않은 가시덤불이나 엉겅퀴등을 말씀으로 온전히 쟁기질 되어 풍성한 열매를 맺을 수 있는 옥토가 되어지기를 축원합니다.

묵은 땅을 기경해야 한다는 것은 시대적인 사명인 줄로 믿습니다. 이제 이 시대는 하나님을 찾고 찾으며 기도하며 전도해야 한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분명히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묵은 땅은 기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봄철에 그렇게 쟁기질도 하고, 쇠스랑질도 했으나 한 해가 지나고 나면 또 길가처럼 딱딱해지고 누가 갖다 놓았는지 돌맹이들도 잡초도 많아진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봄이 되면 어김없이 쟁기질을 해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작년에 아무리 성령 충만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올해 변함없는 성령의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심령의 밭에 쟁기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끊임없이 자신의 마음 밭을 기경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묵은 땅을 기경할 때에 우리는 일어나 빛을 발할 수 있고, 묵은 땅을 기경할 때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을 바로 감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들이 묵은 땅을 기경할 수 있습니까? 첫째는 목표가 분명한 사람입니다. 농부가 밭에 무엇을 심어야 하겠다고 하는 분명한 목적을 가졌다면, 이미 지난 가을에 그 씨앗 종자를 준비해 두엇을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수시로 창고에 나가 그 종자가 썩지 않는지, 통풍은 잘 되는지 확인해 보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른 봄이 되면 쟁기질을 하면서 자신의 목표를 구체화하기 시작할 것이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은 꿈은 가진 자의 것이라는 사르트르의 말처럼 예수 안에서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꿈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하지 않습니까?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방자하거니와.....’ 이 말씀을 킹 제임스 버전은 ‘꿈이 없는 백성은 망하거니와....’ 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꿈이 없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꿈이 없으면 이길 수 없습니다. 꿈이 없으면 하나님의 뜻을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이지요. 분명한 목표를 세우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교회가 6월에 추천하는 도서는 ‘목적이 이끄는 삶’입니다. 새들백처치로 유명한 릭 웨렌목사가 쓴 ‘목적이 이끄는 교회(The Purppose Driven Church)’ 가 출판된 이후 세계적인 베스트 셀러가 된 이후 나온 책이 바로 이 책입니다. 이 글은 우리의 삶이 언제나 목표지향적이어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데, 우리의 삶 속에서 어떤 목표가 여러분들에게 주어져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최초의 흑인대통령이었던 \'만델라\'는 무려 27년동안이나 감옥에 있었습니다. 백인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민주운동을 했다는 이유로 인생의 햇볕이 보이지 않는 깊은 감옥에서 살았지만 그는 꿈을 가졌기에 승리한 줄로 믿습니다. 그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기자들이 물었습니다. ‘당신은 어떻게 27년동안이나 감옥생활을 하면서도 견딜수 있었습니까?’ 만델라가 대답합니다. ‘나는 한 번도 내일 아침이면 이 감옥을 나서리라고 하는 희망을 포기한 적이 없습니다.’ 만델라가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었던 힘은 꿈이었습니다. 만약 그에게 꿈이 없었다면 27년이 아니라 2년 7개월도 견디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표가 분명한 삶을 살아야 하나님의 뜻을 이룰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부정적 그루터기들을 뿌리뽑지 않으면 안됩니다. 예를 들면 우리 안에 있는 안일주의, 이기주의, 패배주의입니다. 이런 것들은 결단코 뿌리 뽑아야 할 부정적인 요소인 줄로 믿습니다.


안일주의가 어떤 것 입니까? 감리교 300만 총력전도운동하자면, 지금이 그런거 할때냐고 비웃습니다. 70인 전도대를 만들고, 제3교구를 위해서 기도하며 전도하자고 하면 짜증을 내지요. 목사님, 이제 우리교회도 교인수가 천명이 넘지 않았습니까? 이만하면 된 거 아닙니까? 이제는 뭘 해도 할 수 있고, 뭐가 아쉽다고 또 전도 입니까? 그렇게 말할 수 있고, 말은 못해도 속으로 생각할 수도 있어요.

성도 여러분, 디모데전서 2장 4절을 보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소원한다’고 말씀하신 줄 믿습니다. 황요한 목사의 희망사항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소원인 줄로 믿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전도는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해야 할 성도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안에 있는 안일주의를 제거해야 합니다. 먹고 살만 합니까? 이제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그렇게 심각하게 필요하지 않습니까? 아니지요. 건강할 때 하나님이 더 귀하고, 많은 것을 주셨을 때 하나님이 더 귀하고, 언제나 우리가 바른 길로 형통한 길로 그 도우심의 하나님의 손길을 여러분들이 기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두번째로 버려야할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이기주의입니다. 우리 집안은 별고 없는데, 우리 자녀들은 잘 되고 있는데, 우리 교회는 별 문제가 없는데, 우리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울타리 안에서 늘 만족하고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주님의 이 땅에 오심은 이기주의를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고, 자기만의 성취를 위해서 그것을 채워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빌 하이벨즈 목사의 ‘예수님의 리더쉽’이라는 책에 보면, 그 분의 리더쉽이 모든 인류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섬김의 리더쉽이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섬기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내 손길과 내 발길을 통해 주의 손길을 느낄 수만 있다면 우리는 기꺼이 그들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왜 우리가 복지센터를 짓겠다고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섬김이요 희생의 마인드가 없으면 불가능한 사역입니다.

저는 어제도 종일토록 섬기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아침 9시부터 꽃예술 선교회가 모이고, 성전마다 꽃꽂이를 준비하느라 분주한 이들이 조금 있다가 임마누엘 성가대 연습이 시작되면서, 또 연합속회로 모이면서 온 교회가 정말로 살아있는 느김이었습니다. 역동적이라고 하는 표현이 이럴때 필요한가 봅니다. 할렐루야 !

저녁에는 남선교회 연합회가 주관한 부천남지방 성가제에 참석을 했어요. 저는 감리사로써 성가제에서 설교를 한 뒤, 가운데 자리에 앉아서 성가대원 한사람 한 사람을 쭈욱 바라보았습니다. 지금 저 사람들이 저 자리에 있을 만한 그렇게 한가한 사람들이 아닌데....하는 생각이 들자 마음이 뭉쿨해옴을 느꼈습니다. 시간을 희생하고, 물질을 희생하고, 자신의 달란트를 선용하면서 저 자리에 서 있다고 하는 것이 참으로 놀라웠습니다. 더구나 어제는 한일 월드컵 1주년을 기념하는 국가대항 A매치가 오후7시, 바로 그시간에 열리고 있었습니다만 성전은 가득했답니다.

간디는 말합니다. 병든 신앙이란 희생이 없는 신앙이라고 말입니다. 여러분 간디는 사실 크리스찬은 아닙니다. 하지만 기독교에 대해서, 성경에 대해서 통달하고 있는 사람이예요. 크리스찬이 아닌 지성인이 크리스찬을 보면서 판단합니다. 어떤 성도가 건강한 성도이며, 어떤 교회가 건강한 교회인지를 그들은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기에 두려운 생각마저 들게 됩니다. 여러분 안에 희생이 있습니까? 여러분 안에 섬김이 있습니까? 그것이 없는 평범한 삶이라면 믿음없는 세상 사람들도 우리를 병들었다고 손가락질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버려야 할 것은 패배주의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전도합시다. 성장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합니다\" 라고 말하면 \"무슨 소리입니까? 지금은 전도가 안 되는 시대입니다. 아파트 열 집을 두드려 보세요. 아홉집은 문을 열지 않습니다.\"라며 핏대를 올립니다. 맞습니다. 맞는 이야기입니다. 70년대부터 이어진 교회성장의 곡선이 90년대를 분기점으로 하향곡선을 이룬다고 하는 평가는 상식적으로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성도여러분, 믿음이 무엇입니까? 남들이 하향곡선을 걷는다고 우리도 하향곡선을 걸어야 옳은 것입니다. 남들이 타락의 길을 간다고 우리도 타락의 길을 걸어야 형평에 맞는냐 그말입니다. 세상이 육체의 소욕을 따라가는 일이 시대의 흐름이고 유행이라고 해서 여러분도 따라 가야 하겠느냐 그 말입니다.

역사적으로 불가능이 없다고 말한 사람이 둘 있습니다. 하나는 나폴레옹입니다. 자기 사전에 불가능이 없다고 큰소리 쳤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의 힘을 의지해서 유럽을 의지하고 러시아까지 침공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러시아 전투에서 실패를 하면서 나폴레옹은 몰락하고, 외로운 섬에서 그는 그의 인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또 한사람 바로 바울 사도입니다. 그도 역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나폴레옹과 분명히 다른 것이 있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결국 그는 전 세계의 상징인 로마, 땅 끝의 상징인 로마까지 복음을 증거하는 승리자가 된 줄로 믿습니다. 육신의 힘, 세상의 힘을 의지한 사람은 되는 것 같았지만 실패자가 되었지만, 오히려 세상적으로 볼 때 연약한 자요, 나약한 자요, 실패자 같이 보인 바울은 주님의 능력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마침내 로마를 정복한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

이 땅에서 패배주의를 제거해야 합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네가 네 길과 네 용사의 많음을 의뢰하였음이라’ 쇠퇴하고 멸망하고 하나님이 원하지 않는 길을 갔던 그 사람들의 대표적인 삶의 스타일이 자기의 길을 의지하고 용사의 많음을 의지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있어서 용사가 무엇입니까? 돈의 많음을 의지하고, 아직도 나는 이정도면 견딜만 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변에 수많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백그라운드가 있다고 해서 아직도 나는 든든하다고 생각하고 계십니까?

그런 것들이 많다고 여겨질수록 우리가 무릎을 꿇는 시간은 적어지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네 길과 네 용사를 의지할 수록 너의 산성은 훼파되고 너희의 흙덩어리는 깨뜨려지리라\" 깨질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전능하신 여호와, 우리의 산성과 반석이 되시는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견고히 설 줄로 믿습니다.

미국의 자동차 도시 디트로이트에 가면 자동차왕 헨리 포드를 기념한 기념관이 있는데, 거기에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포드는 꿈을 가졌고, 그의 아내는 기도를 가졌다\" 꿈보다 중요한 것은 기도인 줄 믿습니다. 남편이 원대한 꿈을 가졌을 때,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아내는 그 시간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꿈과 기도는 별개가 아닙니다. 우리가 비전을 가졌다면 우리에게 인생의 꿈을 가졌다면, 그것을 위하여 무릎을 꿇으시기를 축원합니다. 꿈이 클수록, 꿈이 많을수록 여러분의 기도의 시간이 많아지기를 부탁합니다.

평안의 교회도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습니다. 창립 2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우리의 내면적인, 그리고 우리의 외형적인 모든 부분에 있어서 새 출발을 하여야합니다. 과거에 묵었던 모든 생각과 사고들은 다 갈아엎어야 합니다. 안일주의도 엎어야 하고, 이기주의도 엎어야 하고, 패배주의도 갈아엎어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 안에서 능력 주시는 주님 안에서 우리가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심어서 이 제단, 이 거룩한 하나님의 공동체를 통해서 주의 역사를 일으켜 가고, 말씀이 흥왕하면서 날마다 그 수가 더해가는 구원의 방주가 될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고마우신 하나님, 우리 안에 있는 묵은 땅에 여러 가지 요소들을 기경하기를 원합니다. 깊이 깊이 쟁기질되어 어떤 말씀을 우리에게 주시던지, 좋은 땅 옥토가 되어 30배, 60배, 혹은 100배의 결실을 맺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8 우상들의 최후
본문- 호 10: 1-8
제목- 우상들의 최후

서로 인사하겠습니다. ‘성령의 사람이 됩시다’ ‘성령 충만으로 사명감당 합시다’ 오늘은 우리 감리교회를 시작한 요한 웨슬리 목사님께서 런던의 올더스케잇이라고 하는 거리의 한 작은 집회장소에서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음이 뜨거워졌던 감격을 되새기는 웨슬리 회심 265년 주년 기념주일입니다.

특별히 올해는 웨슬리가 태어난 지 300년이 되는 해이기에 감리교 본부에서는 300만 총력전도운동을 전국적으로 벌이고 있고, 이에 발맞추어 우리 중부연회도 6월9일부터 11일까지 인천 시립 실내체육관에서 28개 지방이 함께 참여하는 큰 연합집회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웨슬리의 탄생 300주년과 회심 265주년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한 사람의 영적 변화를 통하여 자신과 이웃 그리고 국가와 민족을 구해내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 중에 영혼을 구원하는 일보다 더 귀중한 일은 없습니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소원하시느니라\" (딤전 2:4) 우리가 요한 웨슬리를 통한 하나님의 구원사역을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시는 줄 믿습니다. 갈대아 우르에서 아브라함을 75세에 불러내시면서 하나님의 구원역사는 시작되었고, 80세에 모세를 광야에서 부르시면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시작된 줄로 믿습니다. 85세에 갈렙에게 비전을 주셔서 ‘이 산지를 내게 주옵소서’ 라고 척박한 땅 헤브론을 구했던 그를 통해 다윗의 초기 도읍지로, 결국에는 이스라엘을 통합할 수 있는 발판을 만든 곳이 된 줄로 믿습니다.

한 사람입니다. 한 사람이 성령의 사람이 된다면 얼마나 많은 역사가 일어나는지 모릅니다. 바로 300년 전에 하나님께서 영국 땅에 요한웨슬리하고 하는 귀한 믿음의 아들을 주셨고, 그가 목회자의 가정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과 영국 국교회 목사로서 미국 조지아주에 선교사로 파송받아 일하는 등, 일련의 사역을 통하여 헌신해 오던 중에도 웨슬리의 마음속에는 말할 수 없는 번민과 힘든 부분들이 있었습니다.

능력의 사역을 감당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압박감과 스트레스는 그로하여금 깊은 좌절감에 빠지게 하였고, 구원의 확신에 대한 회의를 갖게 하였습니다. 영국국교회(성공회)의 목사로서, 옥스퍼드 대학을 나온 최고의 수재이었지만 그는 시간이 지날수록 자신의 사역이 점점 더 어렵고 힘들기만 했습니다.

1738년 5월24일 오후 8시가 넘어 시련과 무거운 마음을 가지고 런던의 올더스케잇 거리를 거닐고 있을 때 작은 소그룹모임에서 찬송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그 집회에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순서가 진행되면서 사회자가 로마서 서문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 말씀의 요지는 이것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대목을 듣는 중에 웨슬리의 심장은 뛰기 시작했습니다. 큰 성령의 감동에 사로잡힌 줄 믿습니다. 그는 그 날밤 돌아와서 자기의 일기장에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그 날 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내 마음이 뜨거워짐을 느꼈노라.’

그 날 이후 그의 설교가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설교의 제목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이란 복음적 제목으로 달라졌습니다. 영국국교회가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교회가 쇠퇴하고 있던 차에 교회를 떠나던 사람들이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국교회는 그것을 반가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복음적인 설교를 하려면, 그런 성령 충만한 설교를 하려면 우리 국교회 강단에 설 수 없다며 강단권을 박탈했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힌 일입니까!

결국 그는 공원으로 나가야 했고, 공장의 빈터나 거리로 가야 했습니다. 그런데 웨슬리 목사님이 가는 곳곳마다 공원은 가득 차고, 공장의 마당은 사람들로 인산인해가 되었습니다. 그 당시에 찍은 사진을 웨슬리 박물관에서 보니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모였는지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더구나 영국은 공원이 많은 도시라 공원은 말씀을 증거하는데 좋은 장소가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

그는 방방곡곡을 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면서 우리가 지금까지 알던 \'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이 아니라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성령의 능력에 붙잡히면 우리도 이 일을 할 수 있다고 증거하기 시작하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은 웨슬리와 그의 동역자들을 가리켜 ‘Methodist\'라고 불렀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기도하는 것도, 말씀을 전하는 것도, 그들의 삶도 준비되고, 규모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그것이 감리교회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감리교회는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주의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의 삶의 가장 중요한 지표가 되며 기준이 됨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인간의 이론이나 사상에 의해서도 침해되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지는 변하겠거니와 하나님의 말씀은 변할 수 없다\'는 아주 분명한 신앙고백적인 기초 위에 감리교회는 탄생된 줄로 믿습니다.

미국에서는 교단에 대한 특징을 이야기 할 때, 감리교회를 가리켜 뜨거운 난로 옆에 있다고 하고, 다른 한 교단은 냉장고 옆에 있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뜨거움과 차가움의 비유일 것입니다. 감리교회의 이 복음주의적 뜨거운 열정은 감리교도로 하여금 무엇을 고백하게 했느냐 하면, 말씀과 삶 속에서 언제나 \'아멘\'이라고 하는 고백을 하나님 앞에 드린줄로 믿습니다.

감리교회의 특징은 아멘이 살아있는 것입니다. 아멘할 줄 모르는 교인은 감리교인이 아닙니다.
지난 중부연회 기념강연에서 웨슬리 신학을 전공한 어느 목사님이 강연을 하면서 우리 감리교회가 이제는 아멘을 회복해야겠다고 호소했을 때 전 연회원으로부터 박수를 받았어요. 평안의 성도들도 아멘신앙을 회복하시기를 축원합니다.

감리교회의 두 번째 특징은 전도하는 교회라는 것입니다. 300년 전 영국의 상황은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의 서로 죽이고 죽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 끝에 결국 잉글랜드가 승리한여 대영제국으로 통일이 되었으나 내적으로는 앙금이 가득한 상황이었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과거의 자기 나라의 언어를 따로 쓰고, 국기를 따로 걸고, 스코틀랜드 같은 곳은 심지어 화폐도 따로 만들어 쓰고 있을 정도입니다.

요한 웨슬리는 잉글랜드 출신이었지만, 스코틀랜드, 아일랜드나 웨일즈까지 구별하지 않고 말을 타고 다니며 복음을 증거했는데, 그가 복음을 증거한 거리를 환산하면 지구를 수십바퀴를 돌 만큼 많은 거리였습니다. 그는 거리에서나 공원, 공장이나 학교등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였습니다.

지난 사순절 기간동안, 40일 특별 새벽 기도회를 통해서 70명의 자원하는 성도들이 생겼고, 이제 그들을 지원하는 재정적인 후원자들이 계속 생겨나고 있습니다. 감리교회가 전도의 은사를 가진 그런 공동체인 것처럼, 우리 평안의 교회에 전도가 중심이 되고, 기도가 중심이 되는 그런 교회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요한 웨슬리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적인 교회로, 전도하는 교회로, 기도하는 교회로 삼으신 줄을 믿습니다. 그 놀라운 감리교의 전통이 한국에도 왔어요. 한국은 지금 5000교회 150만에 가까운 성도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올해는 감독회장께서 일만교회 삼백만성도 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간혹 부정적인 목소리를 내는 사람도 있습니다. \"지금 교회가 줄어가고 있는데, 지금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가고 있는데, 현상유지만 해도 대단한 것인데, 삼백만이 애들 이름이냐.......\"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진 적이 없습니다. 언제나 믿음의 사람, 언제나 주님 앞에 ‘나는 부족하지만, 주님 나와 함께 하시면 할 수 있습니다. \"하겠습니다. 가겠습니다. 나를 당신의 전도의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그렇게 헌신을 결단했던 사람들을 통해서 주의 역사는 이루어진 줄로 믿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올해와 내년에 우리 감리교회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해라고 확신하고 참으로 기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 시기에 감리사가 된 것도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요한 웨슬리의 마음을 뜨겁게 했던 성령은 웨슬리로 하여금 전도하게 만들었고, 무지와 부패와 질병으로 말미암아 삼류국가로 전락하고 있던 영국을, 유혈혁명이 아닌 복음이라는 무혈혁명, 영적혁명으로 영국을 건진줄 믿습니다. 영국은 결국 하나님의 말씀이 살린 것입니다.

지금 대한민국도 다시금 복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전도의 열정으로, 기도의 열정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외형적으로는 먹고 살기가 너무나 좋아졌습니다. 문화생활도 즐깁니다. 자기실현을 위해서 아낌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아닌 육에 속한 사람이 되어 간다면 이것은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비유하셨습니다. 시편 80편에도 보면 ‘주께서 한 포도나무를 애굽에서 가져다가 열방을 쫓아내시고 이를 심으셨나이다’ 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호세아 10장 1절에도 ‘이스라엘은 열매 맺는 무성한 포도나무라’ 라는 비슷한 의미의 말씀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의 원문의 의미는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하여 열매 맺는 포도나무’라는 것입니다.

포도나무가 이스라엘을 상징한다면, 하나님의 백성들인 이스라엘이 열매를 맺는 이유는 오직 하나, 하나님 영광을 위해서 인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건강과 풍성한 재물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여지기를 축원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자기를 위하여 열매를 맺었다고 호세아 선지자는 지적하고 있습니다. 본질을 벗어난 것은 창조의 목적에 따라 쓰임받을 수 없기에 큰 문제가 이닐 수 없습니다.

어떤 결과가 생겼습니까? 1절 중반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열매가 많을수록 우상의 제단을 많게 하며, 땅이 아름다울수록 주상을 아름답게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열매로 동네마다 우상을 세워간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의 집이라고 하던 벧엘에도, 길갈에도, 여리고에도 세워집니다. 뿐만아니라 우상의 여러 가지 조각들을 좀더 아름답게 멋있게 만들기 위해 그들은 많은 돈을 투자하는 그들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2절에 보면 \"이제 죄를 받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두 번째 이스라엘의 문제는 저들이 두 마음을 품음것입니다. 호세아가 지적한 것처럼 오늘은 하나님께로, 내일은 바알 우상에게로 발걸음을 돌리는 이중적인 삶의 행태입니다. 마음이 나뉘었다고 뜻의 히브리어 \'할라크\'는 속인다, 기만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하나님, 나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있습니다.’ 그러나 바알에게 가서는 또 다른 고백을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반쪽은 딴 곳에 가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두 마음을 품었습니다. 하나님께로 마음이 고정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고정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시편 108편에 보면 다윗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을 고정하였으니 내가 노래하며 찬송하리이다.’ 하나님께 마음이 고정된 자만이 하나님을 노래할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적당하게 교회 다니면서 하나님을 속익 목사를 속이고 성도들을 속입니다. 얼마는 갈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 삶은 평안이 없고, 그의 눈동자는 중심을 잃어서 피곤하기 짝이 없는 거예요.

세 번째 이스라엘의 문제는 3절에 보면, 그들이 이제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놀랍지요? 순결한 주의 백성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합니다. 제가 다녔던 고등학교의 교훈이 경천애인(敬天愛人)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람을 사랑하자’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한다고 하는 말은 두려워 한다는 말입니다. 무서워 한다는 것과 다른 의미입니다. 긍정적으로 하나님을 존경하고, 소중히 여기고 아끼며 그 분만이 나의 삶의 중심이라고 고백하는 그런 자세를 가진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을 만홀이 여긴다면 경외의 마음은 나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지금 하나님 앞에서 그들이 자기를 위해서 열매를 맺기 시작하고, 두 마음을 품고 어디를 가서 내 인생에 유익을 얻을까? 갈팡질팡하다가 결국은 강심장이 되어 하나님도 무섭지 않답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인간적인 우상들이 배경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인간적인 배경이 든든하기 때문에 사업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문제없다’ 라고 생각했던 인생들에게 하나님께서는 그 인간적인 우상을 깨뜨려 버리겠다고 선언하십니다. 하지만 여호와로 자기 하나님을 삼은 백성은 복이 있는 줄로 믿습니다. 여호와 그 분이 우리의 구주가 됨을 고백하는 백성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산성이 되시고 울타리가 되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상들의 최후를 봅니다. 더 이상 우상들은 이 도시에 우뚝 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부수겠다고 하시면 그것은 부수어지는 것입니다. 이 땅에 가득찬 우상들을 예수의 복음으로 깨뜨려야 하니다. 기도로 깨뜨려야합니다. 우상으로 말미암아 황폐된 도시들을 다시금 복음으로 소생시켜야 합니다.

오늘 웨슬리 회심 기념주일을 맞이해서 요한 웨슬리의 마음속에 성령의 충만함으로 전도하게 하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사랑하게 하신것 처럼, 육체를 신뢰했던 교만함을 내어 버리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을 신뢰하는 순결한 믿음의 사람으로 새롭게 거듭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두 마음을 품어 하나님께로 고정되지 못 했던 이스라엘같이, 풍성한 열매를 주셨지만 자기를 위하여 헛된 삶을 살았던 이스라엘같은 우리의 모습을 바라보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시니 감사드립니다.

웨슬리 한 사람의 마음에 성령의 충만함을 주셔서 영국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세계를 구원함것 같이, 오늘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의 가슴 속에도 전도의 영으로 충만케 하여 주시옵소서. 기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시고, 전도하는 교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7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본문- 호세아 9: 10-17
제목-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여러분들이 길을 나서게 되면 사거리나 넓은 도로를 건널수 있도록 만든 횡단보도를 만나게 됩니다. 저는 횡단보도를 서로간의 약속을 실천하는 장소라고 생각합니다. 사람과 자동차의 약속, 더 정확하게 말하면, 사람과 자동차를 운행하는 사람과의 약속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횡단보도를 유심히 보면 그 앞에 정지선이 그려져 있습니다. 눈이 나쁜 사람도 잘 보일 수 있도록 아주 두껍고 선명하게 그려져 있는 정지선은 모든 차량이 보행자를 위하여 반드시 그 곳에서 서겠다는 약속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횡단보도가 있는 사거리를 유심히 바라보고 서 있노라면. 정지선에서 정지하는 차가 있는 반면에 아예 무시하는 차들도 있어 보행자들의 안전이 보장되지 못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교통안전진흥원의 통계를 보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정지선에서 정확하게 정지하는 준수율이 22.6%라고 나와 있는 반면에 정지선을 무시하고 횡단보도까지 와서 멈추는 차량들이 53.1%, 아예 횡단보도를 몇 미터씩 침범하는 차들이 24.3%였습니다. 결국 정지선을 무시하는 차들이 무려 77.4%라는 통계가 나와 있어 교통사고의 상당수가 횡단보도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알 수 있었습니다.

정지선이란 사회적인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지키면 모두가 행복하고 편안하지만, 그 약속을 어기면 불행한 일들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행위 곧 사회적 약속이 깨어지는 삶의 현장에서 불안을 느기는 주체는 사람입니다. 자녀들을 아침마다 학교로 보내는 부모들의 마음이 편안하지 못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흔히 우리가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를 말할 때 기준은 1차적으로는 GDP 즉 국가총생산이나 국민총소득 같은 것들을 비교하여 평가하지만, 사실 저의 생각으로는 그러한 외적 통계나 수치는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됩니다.

정지선을 지키지 않는 사람들이 77%가 넘는 나라를 선진국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미국이나 영국을 가 보면 교통법규를 잘 지키는 수준을 넘어서서 보행자들을 배려하는 모습이 감동적일 때가 많습니다. 그들의 대부분은 어김없이 정지선에서 약속이나 한 듯이 멈춥니다. 더 놀라운 것은 보행신호가 끝나고 자동차가 가도 되는 상황에서 어떤 보행자가 뒤늦게 횡단보도에 뛰어들면 그가 건너편 인도에 올라갈 때까지 절대로 차를 움직이지 않고 기다려줍니다. 미소까지 보이면서 말입니다.

자기의 권리이지만 남을 위해 자신의 권리를 유보하고 양보하고 있는 거지요. 저는 교회 차량을 운행하는 분들에게도 늘 부탁하는 말씀이 다름아닌 교회차량이 교통질서를 가장 잘 지켜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기독교인들 중에도 교통법규를 안 지키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 자신들이 먼저 새로워져야 할 부분이라고 믿습니다.

오늘 호세아서 9장을 보면 이스라엘의 문제가 보입니다. 성도들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힘써야 할 것을 하지않아 하나님과의 원만한 관계가 깨어진 상태를 보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조화가 깨어진 인생에게는 기쁨도 행복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두려움과 근심에 사로잡히게 되어 점점 어두움의 권세에 종노릇하게 되고 결국 사탄의 권세에 붙잡히게 되는 줄 믿습니다.

창세기 3장이 좋은 예가 됩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모든 것을 준비해 주셔서 아담과 하와에게 부족함이 없이 허락하신 창조주는 그것을 다스리며 관리하도록 은혜와 권세를 아울러 주셨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그렇습니다. 에덴에서의 삶은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은혜와 은총의 장소였습니다만 아담과 하와는 인간의 욕심에 불을 지른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스스로 은혜의 그릇을 엎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고 말았습니다.

‘네가 정녕 죽으리라’ 라는 확고한 주의 말씀에 의심의 마음을 갖게한 사탄은 결국 그들로 하여금 ‘죽을지도 모른다...’라는 가정법을 쓰게 만들었습니다. 의심의 눈으로 바라본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는 예전과 달라보였습니다. \"보암직도 하고 먹음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하였다\"고 성경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뢰의 눈으로 바라볼 때와 의심의 눈으로 바라볼 때가 달랐다는 것입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약속을 깨뜨린 후, 축복의 동산에서 추방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저주의 시작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깨뜨리면서 부터였습니다. 로마서 6장을 보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습니다. 욕심이 잉태하여 죄를 낳았고, 죄가 장성하여 사망이 들어온 것입니다. 조금씩 조금씩 생겼던 우리의 욕심이 사탄의 유혹에 이끌려 죄악으로 그리고 마침내 죽음의 세계로 이끌고 간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에브라임으로 표현된 이 백성들은 정말로 하나님의 복을 많이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복을 받았다고 할 때에 가장 중요한 의미는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은 것인 줄을 믿습니다. 그것보다 귀한 것이 없어요. 하나님의 자녀로 선택받은 것, 하나님의 일꾼으로 부름받은 것이 가장 큰 복인 줄 믿습니다.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무화과나무에서 처음 맺힌 열매를 봄과 같이 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전에는 하나님과 이스라엘과의 관계가 그렇게 좋았습니다. 허니문이었어요. 광야에서 포도열매를 만난 것처럼, 정말 무화과나무에서 첫 열매를 얻는 기쁨같이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처럼 보이고, 하나님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처럼 보일 때 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10절 후반에 보면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라는 함으로서 현재의 그들은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고 미워하시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우상에게 우리의 몸과 마음이 빼앗기는 것입니다. \"나는 질투하는 하나님이라\" 특별히 당신의 자녀들이 우상에게로 가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정말로 싫어하십니다. 그런데 에브라임이 바알브올에게로 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말씀을 봉독하면서 얼마나 섬듯하고, 얼마나 두려운 말씀들입니까? 너희가 아이를 낳지도 못할 것이고, 기를 써서 아이를 낳아도 아이가 살지 못 할 것이다. 이거보다 더 큰 저주가 어디 있어요? 너희가 아무리 곡식을 심는들 곡식이 계속해서 수확이 감소할 것이고, 결국에는 추수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망할 것이라는 이야기지요.

성도 여러분, 이런 문제들이 생길 때 빨리 분별력을 가지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렇지 못한 것을 성경에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에브라임에게 두 가지를 특별히 부탁하는데, 9장 1절에 보면 육신의 것을 기뻐하지 말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방사람처럼 기뻐 뛰놀지 말라\" 지금 우상의 제단 앞에 가서 죄인의 부흥의 길을 흥분되어서 기뻐 뛰놀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것 때문에 너희 타작마당이 떨어질 것이고, 너희 소득이 다 줄어들 것이고, 다시는 추수할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방우상의 타작마당에서 음행의 값을 좋아하는 이스라엘, 죄 짓는 것이 재미있고, 죄 짓는 것이 즐거워서, 그 우상의 자리에서 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그들을 바라보면서 우리 하나님께서 강력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7절과 8절에서 말씀하고 계십니다. 죄악이 많음으로 하나님께서 다 기억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때로는 악인이 잘 될 때가 있습니다. 형통할 때가 있습니다. 어제도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과 같이 앉아서 대화하면서 세상의 법을 지킬 때에는 손해가 되고, 법을 지키지 않으면, 사업이 잘 되고 무슨 문제가 해결되면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이 사회의 구조가 참으로 잘 못 된, 법은 제대로 되어 있지만 그 법은 지켜지지 않고, 편법들이 난무하는 그런 이야기들을 하면서 마음에 고통을 느꼈습니다.

아마도 성경에서 악인이 형통하며, 의인이 고통 받는 것에 대해서 제일 고민하고 마음 아파했던 사람이 욥일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장시간 장문의 욥기를 보면 결론은 그것입니다. 왜 악인이 잘 되고, 의인이 고통을 받습니까? 그것 때문에 하나님과 주변 사람들과 끊임없는 논쟁을 하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런 마음에 혼란스러울 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악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악인의 꾀를 쫓지 말고, 조인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말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도 다양한데, 보편적인 은혜가 있습니다. 그것은 악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가장 못되게 구는 그 집의 논은 비가 좀 안 오면 좋은데, 그 집은 아무리 벼를 심어도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추수가 되지 않고, 곡식이 되질 않고, ‘거봐. 너 못되게 굴면 하나님께서 너 복주지 않아’ 이렇게 되면 참 좋겠는데, 그 못되게 구는 악인의 논에도 하나님은 어김없이 비를 주시고, 햇볕을 주셔서 벼가 잘 자라고, 곡식이 열매를 맺는단 말이예요. 우린 그런 하나님의 은혜를 보편적인 은혜라고 말합니다. 악인이 무슨 일을 해도 허가도 잘 봤고, 사업도 잘 하고, 더 소득도 늘어나고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보편적인 은혜, 일반 섭리를 중단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 때가 하나님의 때 곧 심판의 때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그 때에 각각 행한 대로 보응을 받으리라. 하나님 머리 나쁘신 분 아닙니다. 우리의 머리털까지 세고 계신 분입니다. 우리는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집니다. 저도 이제는 수첩을 반드시 들고 다니는데, 하루의 일정을, 한 주간의 일정을, 한 달의 일정을 수첩을 보아야 정확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수할 수가 있어요. 이제는 아주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집사람보고도 아주 내 생명줄이라고 그래요. 그러면서 제 교회수첩을 가지고 다닙니다. 이제는 기억력이 자꾸 떨어집니다.

하지만 우리 하나님은 그런 법이 없습니다. 우리를 다 세신바 되었고, 기억하신바 된 줄 믿습니다. 정확하고 철저하게...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종말론적인 믿음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 오늘을 보고 사는게 아니예요.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주님의 그 날, 심판의 그 날을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미래지양적인 삶이지요. 오늘이 아니라 내일입니다.

\'조지 스웬돌\'은 죄에 대한 정의를 이렇게 내렸습니다. \"죄는 그 본심을 숨기고 겉으로는 환영한다. 죄는 유다처럼 미소지으며 입맞춤하지만 결국에는 배반하고, 죄는 겉으로는 정중하지만 요압처럼 결국 아브넬을 죽이고 만다\"

가룟유다가 주님한테 찾아와서 미소를 지으면서 입맞춤까지 했습니다. 사양사람들도 입맞춤은 아무나 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과는 그냥 악수 정도를 나눕니다. 조금 친하면 볼에다가 입맞춤 하고요. 사랑하는 사람이어야 입에다가 입맞춤합니다. 지금 가룟유다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입맞춤을 하고 있어요. \"내가 정말 당신을 사랑합니다. 보통 관계가 아니라 사랑하는 관계입니다\" 라고 사람들 앞에 거짓된 애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는 이미 은 삼십을 받고 예수를 팔아먹기로 일을 끝낸 뒤였습니다.

미국사람들이 성도들을 표현할 때 쓰는 말중에 ‘거북이 크리스찬’이란 말이 있습니다. 얼핏 들으면 느릿느릿한 사람들을 그렇게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보통 짐승들이 먹이를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는 기간이 있는데, 새는 평균 9일을 먹지 않고 버틸 수 있다고 하고, 개는 20일을 버틸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북이는 무려 500일을 먹지 않고도 견딘다고 해서 붙여진 말입니다.

생명의 양식인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고 빈둥대면서도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빗대어서 하는 말이 바로 \"거북이 크리스찬\"이라는 것이지요.장기간동안 기도도, 전도도 행하지 않으면서도 자신이 크리스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일껏는 말입니다. 이런이들을 향하여 주님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살았다고 하나 실상은 죽은 자로다\"

아모스 8장은 말씀합니다. \"양식이 없어서 주림이 아니요, 물이 없어서 갈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말씀의 기갈로 이 백성들이 죽어 간다는 것입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의 하루의 생활, 여러분의 일주일의 생활, 여러분의 한달과 일 년의 생활에서 무엇보다 말씀의 양식을 먼저 충족시키는 삶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배에서 중심은 말씀이지요? 물론 말씀이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 늘 예배를 늦게 옵니다. ‘왜 늦게 오셨어요?’ ‘아직 설교 시작 안 했잖아요?’ 설교가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것들을 소홀히 하라는 말은 아니지요. 아직 설교가 시작되지 않았다고, 안심하고 오는 분은 참 안타깝지요? 좀 모자라는 사람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설교 끝나면 훌쩍 갑니다. 왜 가냐니까, 설교 들었으니까 간다는 거예요. 축도가 끝나야지요. 축도가 예배를 마무리 하는 것인데, 화장실 들어갔다가 그냥 나오는 사람하고 똑같은 거지요. 뭔가 정리가 안 되는 사람들이 있어요.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일용할 양식 말씀인 줄로 믿습니다.

이 백성이 말씀의 기갈로 죽어간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스라엘 에브라임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백성들도 육신의 양식만을 구하지, 영적인 양식을 구하지 못하고 점점 기갈이 되어서 호세가가 볼 때에 더 이상 살 기력이 없고, 살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금 10절 말씀처럼 너희가 과거에 광야에서 포도인 것처럼, 무화과의 첫 열매인 것처럼 주님의 기뻐하심이 되고, 주님의 즐거움이 되는 그러한 삶으로 돌아오라고 말씀하는 거예요.

오늘의 말씀의 제목이 그것입니다.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이 말은 주님과의 관계가 가장 아름답고 원만할 때를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평안의 성도들의 삶이 광야에서 포도인 우리, 주님께서 우리를 기뻐하시고, 주님께서 우리를 감격해 하시는 광야의 포도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필요한 존재라는 말입니다. 나그네에게 광야에서 포도는 그를 살리는 겁니다. 오아시스와 같은 거지요. 오늘 이 시대의 성도들이 사회의 정말 산소같이, 이 사회에 정말 필요한 포도와 같이, 더 나아가서는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실만한 성도의 삶으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명히 분별해 가면서 주의 듯 이루어 가는 평안의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메마른 삶 속에서 갈수록 영적인 양식을 등한히 여기면서 여전히 생명이 붙어있음을 만족케 하는 어리석음을 가졌던 저희에게 말씀을 통하여 깨달음 주시고, 분별을 허락하시니 감사합니다. 이제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같이 언제나 주님 앞에 기뻐하심을 입는 성도의 삶을 살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6 부모, 하나님의 파수꾼
본문- 호세아 9: 5-9
제목- 부모, 하나님의 파수꾼

할렐루야!
오늘은 가정마다 허락하신 존귀한 부모님들을 위해 제정된 어버이주일입니다. 오늘 아침 교회로 들어오시면서 젊은이들이 정성껏 만든 카네이션 꽃송이가 한아름씩 가슴에 달릴 때마다 감회가 크셨으리라 믿습니다.

어느 성도님께서는 카네이션 꽃을 보면서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아내가 전해주었는데 참으로 감동적이었습니다. 전에는 카네이션 꽃송이를 달면서도 잘 몰랐는데, 샤론 꽃 예술선교회에서 활동하면서 유심히 보니까, 카네이션 끝자락이 톱니바퀴처럼 갈갈이 찢겨져 있는것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어버이의 마음이 아니겠느냐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부모님 되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수고와 눈물이 필요하기에, 그렇게 카네이션 끝이 톱니바퀴처럼 갈갈이 찢어진 그 모습속에 자식 때문에 속상하고, 배우자 때문에 마음 고생하고, 먹고 사는 일 때문에 피곤하고, 사업과 직장 때문에 고단했던 일들이 틉새마다 알알이 끼어있을 것 같다는 발견은 놀라운 안목이라고 생각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분들은 믿음의 부모로써 오늘까지 이 자리를 지켜오신 것을 축하하며 감사를 드립니다. 모든 사람들은 행복한 가정을 꿈꾸고 살아갑니다. 결혼하면서 부부는 남다른 행복한 가정을 가질 것이라고 야무진 계획을 저마다 가지고 출발합니다.

지난 주일에 부부 중 가장 모델이 될 수 있는 부부가 아담과 하와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하지만 그 가정은 자녀들을 낳고 키워가면서 가정으로써의 모델에는 실패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가정에서 최초의 살인자가 나왔고, 형제간의 미움과 시기가 나왔기 때문입니다. 부부로써는 모델이었는데, 가정으로써는 모델이 될 수 없다면 이것도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라기는 성도들 가정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어 행복한 가정이 되어야하겠는데,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입을 수 있을까 하는 부분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 부분에서 가장 모델이 될 수 있는 가정이 노아의 가정인 줄로 확신하며 소개하고 싶습니다.

성경에서 노아의 가정은 여덟 식구로 소개되어져 있는데, 아직도 우리는 그 이름을 모르는 노아의 아내와 셈, 함, 야벳으로 불리워진 세 아들과 아내들이 전부입니다. 모두 여덟 식구가 노아의 가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후에 노아와 자녀들이 장수하면서 수 많은 자녀들을 낳아 번성한 집안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가 죄악이 관영한 사회에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방주를 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도 바닷가가 아닌 산에서, 8식구가 탈만한 작은 규모가 아닌 지금의 축구 경기장 만한 큰 규모의 배를 3층으로 지으라고 했을 때, 그건 정말 무리한 일이었고 더구나 당시의 분위기에서는 어울리지 않았습니다.

놀라운 일은 삼층으로 된 방주의 구조를 일일이 말씀해 주셨고, 어떤 동물들을 넣어야 할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용해야 할지를 알려주신 엄청난 하나님의 일에 노아와 그 가족들이 함께 참여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하면 아버지의 신앙에서 그 자녀들이 이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자녀들은 부모들이 하는 일이 자기들의 상식이나 지식에 배치된다며 부모의 요구들에 당황하거나 거부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아마 지금 노아의 가정에서 자녀들은 그러한 상황을 맞고있는 것 같습니다. 우선 배의 규모가 너무나 컸고, 바다도 아닌 산에서 짓는다고 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맞지않았고, 더구나 지금은 먹고 살기 좋은 세상인데 하나님의 심판이 왠말이냐! 라고 말할 수 있는 시대였습니다.

그런데 노아의 가정은 방주를 짓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인 줄로 믿습니다. 여덟 명의 식구가 노아와 같이 믿음이 모두 좋았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그들이 부모와 생각과 믿음이 차이가 있을 지라도 아버지 노아에 대한 신뢰만큼은 확고했다는 사실입니다.

가족들이 남편으로서의 노아, 아버지로서의 노아를 깊이 신뢰할 수 있었기에 그 아버지가 하는 일에 기꺼이 순종하겠다고 하는 가족 공동체로서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리 부모들은 적어서 가정에서 이와 같은 권위가 있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권위, 인격적인 권위가 있어서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라면 나와 생각은 다르지만 옳은 길이라 믿고 따라가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 같은 사람도 구원의 은혜를 주시다니...’ 혹은 ‘나 같은 사람을 성도로 삼으시고, 교사로 성가대원으로 세워주시다니...\'하면서 늘 감격하고 감사하는 분위기가 끊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여러분들이 집사가 되고 권사가 되고, 장로가 된 일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사실 제가 목사인 것도, 더 나아가서 감리사인 것도 너무나 과분한 것이지요. 할렐루야 성가대가 설교 전에 찬양을 할 때면 저는 이렇게 앉아서 그들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저 사람은 성가대 앉기가 과분하다........’ 할렐루야 ! 사실 우리 모두는 이 자리에 있는 것 자체가 과분한 은혜인줄로 믿습니다.

당연하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여기 회중석에 앉은 여러분들도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구원받은 백성으로서 이 자리에 앉아 있는것 자체가 기적이 아닙니까? 그저 과분한 은혜인 줄로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은혜받은 사람의 특징적인 분위기는 언제나 감사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사도는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느니라\"고 고백한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을까? 어느 목사님이 자기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 성공을 한 장로님의 가정에 초대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가슴 설레겠어요? 그 어려운 외국에 가서 이민하고 성공해서 초대를 받았어요. 얼마나 복을 받았을까? 얼마나 하나님의 은혜로 살까? 궁금해 하면서 워싱톤을 찾았습니다. 워싱톤에 사는 이 장로님네에 도착을 해 보니까 너무 멋있어요. 유리알 같이 빛나는 호숫가 옆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있었습니다. 정말 훌륭했어요.

식사 대접을 받고, 장로님께서 목사님에게 간증을 합니다. 목사님 제 간증을 한 번 들어보시지요. 미국에 와서 저와 자녀들이 고생을 했는데, 다 하나님의 복을 받아서 이렇게 살게 되었습니다. 언젠가 우리 자녀들이 모여서 회의를 했답니다. 우리 부모님 남은 생애는 좀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살게 해 드리자. 그렇게 의견을 내고 자녀들이 돈을 모았답니다. 그리고 그 돈을 모아서 부모님이 마음에 드는 집을 사라고 돈을 가지고 왔는데, 350만불을 가지고 왔답니다. 우리 돈으로 환산하면 약 40억원이 되는 돈입니다. 미국의 워싱톤에서 40억원정도의 집이면 우리나라에서는 한 10억 정도의 집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무나 자녀 씀씀이가 고맙고, 아버지 덕분에 성공을 하고, 다 축복을 받았지만, 그것도 그 마음 씀씀이가 얼마나 고맙습니까? 요즘 같으면 부모 재산 뜯어갈려고 혈안인데, 자식들이 돈을 모아서 노후에 부모님들 사시라고, 그렇게 거금을 만들어 왔으니, 그 돈을 받아든 아버지가 아이들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너무 고마운데, 지금 내가 나가는 교회가 건축 중에 있어, 아버지 생각에 이 돈을 건축헌금으로 드리고 싶은데, 너희들이 준 돈이니 너희들의 동의를 받고 싶다. 시쳇말로 얼마나 김새는 말입니까?

아무리 잘 사는 자녀들이라고 해도 40억원을 모아 왔는데, 이 보통 정성이겠어요? 그런데 그 돈을 건축헌금을 하겠다니까, 자녀들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자녀들이 의견을 모아왔습니다. 아버지 원하시는 대로 하세요. 그래서 아버지는 자기가 섬기는 교회에 건축헌금으로 그 돈을 드렸습니다. 생각지도 않은 건축헌금이 많이 들어와서, 그 교회는 은혜 가운데 건축을 마치고, 봉헌을 잘 하게 되었습니다. 타코마 중앙교회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나니까 자녀들이 얼마 있다가 다시 모여서 회의를 했어요. 지난 번에 우리가 마련해 드린 돈은 건축헌금을 드려서 교회가 빚이 없이 봉헌을 잘 하게 되었는데, 이번에는 우리가 아버님에게 집을 장만해 드리면, 이제는 사실 수 있을거다. 조금 계획을 바꿔 가지고, 이번에는 자기들이 좋은 곳에 땅을 사고, 집을 지어서 입주를 시켜 드렸어요. 목사님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집이 바로 그 집입니다. 자식도 이쯤 되야 되지 않겠어요? 또 부모가 그러한 믿음이 되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버지의 좋은 신앙, 노아의 가정에서 노아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나머지 식구들이 그 가장인, 그 남편인, 그 아버지인, 그 신앙을 따라가면서 함께 복을 누리지 않겠습니까? 부모가 된 여러분들은 노아의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장로님과 같은 믿음을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이 노아의 믿음, 이 장로님의 믿음이 무엇입니까?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믿음인 줄 믿습니다. 거기서 일부를 드렸어도 귀한 믿음인데, 자식들 앞에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은혜를 입었으니, 먼저 그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갚는 것이 옳지 않느냐 하는 것을 본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미국의 청교도의 신앙이기도 합니다. 목숨을 걸고 메인플라워호를 타고, 범모스를 떠나서, 그 배가 범모스에서 만들어지고, 저 아일랜드에서 만들어지고, 플로스에서 출발을 했는데, 목숨을 걸고 신대륙에 도착한 이들이 제일 먼저 예배를 드리고, 제일 먼저 교회를 짓고, 그 다음에 학교를 짓고, 그리고 자기들의 집을 지었다는 그 순서는 단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청교도의 신앙인 미국이 오늘까지 하나님이 지켜주시는 이유예요. 별의별 일들이 그 나라에서 일어나는 데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지켜주시는 이유가 거기에 있어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울한 통계를 여러분에게 한 가지 알려드리겠습니다. 통계청에서 지난 2002년도에 통계를 내었는데, 작년 한 해 동안 결혼한 쌍이 30.6573쌍이었고, 이혼한 쌍이 14.5324쌍이었습니다. 작년에 결혼하고 이혼한 것만 보면, 거의 절반이 이혼을 했어요. 60.70되신 모든 가정을 통틀었을 때, 작년도 우리나라에 이혼율이 30%입니다. 미국은 작년에 40%, 일본은 22%입니다. 세계2위의 이혼율인데, 통계청에 발표해 이런 전망을 썼어요. 얼마 있지 않아서 미국의 이혼율을 추월해서. 세계 1위 국가가 될 전망이다.

왜냐하면 그런 젊은이들의 이혼율이 50%를 육박하기 때문에, 지금 나이 드신 분들이 그나마 가정을 지키기에 30%이지, 곧 젊은이들의 가정의 비율이 많아지면, 30%에서 금새 40%의 미국을 앞질러 갈 것이다. 통계는 정확한 것입니다. 통계는 과학이거든요. 얼마 있지 않아서 대한민국은 세계 제일의 이혼국가가 될 것입니다. 두 가정 중 하나는 이혼한 가정이 나올 거예요. 가슴 아픈 이야기입니다.

왜 이혼 하냐고 물어보니까 44.7%가 성격차이라고 말했습니다. 14.4%가 가족간의 불화, 13.6%가 경제문제, 8.6%가 배우자의 부정이었습니다. 이 말은 결혼할 때 조금만 신중하면, 우리나라의 이혼율은 15%대로 내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몇 달 만에 결혼하는 사람들, 지나가다가 멋있어 보여서 쫓아가서 청혼했다는 사람들, 친구 결혼식에 갔다가 그 사진 찍다가 멋있게 보이는 사람을 만나서 결혼한 사람, 혹시 그런 분들이 계셔도 오해는 하지 마세요. 제가 말하는 것은 아주 짧은 만남, 상대방을 깊이 알지 못하고 만나는 만남의 기간을 말하는 거예요. 적어도 상담전문가인 제가 여러분에게 제안하기는 3년 정도의 사귐의 기간은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어디서 만났던 만남의 장소와 동기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동기가 되었으면 그를 깊이 알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여행도 같이 해 보아야 하고, 음식도 같이 먹어 봐야 하고, 교회에서 수련회도 같이 가봐야 하고, 해외여행도 해 보아야 하고, 궃은 일 좋은 일 함께 지나봐야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의 삶이 드러나게 되고, ‘이 사람은 정상적일 때는 괜찮은데, 어려운 문제가 닥칠 때에는 위기관리 능력이 없구나. 안 되겠다.’ 평가가 되어지는 거예요. 적어도 한 1,2년 정도는 그저 멀리서 사귀는 정도가 되는 거고, 나머지 한 1년 정도는 정말로 배우자로 생각하고. 사귀어 가면서 마지막 결론에 도달해야 청혼이 되는 거예요. 나와 함께 삽시다. 프로포즈가 되는 거예요. 그래도 사실 완벽한 가정을 이루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오늘 이 통계에서 보는 것처럼 성격차이 때문에 44.7%가 이혼한다고 하는 이런 가슴 아픈 통계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성격차이란 이야기는 상대방을 서로 잘 알지 못하고, 결혼에 이르렀다는 말입니다. 부모님들 정신 차려야 합니다. 결혼을 해야 할 우리 젊은이들도 긴장을 해야 합니다. 배우자는 그렇게 간단히 정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가정은 축복의 공동체이고, 가정은 그 하나님이 주신 그 부부를 통해서 이루어가는 생육하고 번성하면서 하나님이 주신 복을 누려가는 통로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가정이 행복할 줄로 믿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러므로 부모 자신들이 먼저 순결한 믿음의 파수꾼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 부모와 자손들의 믿음이 순결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자식들이 우 리 부모님의 신앙이라면 믿어야겠다. 저 사람의 신앙이라면 우리가 인정할 수 있다고 신뢰를 받아야 합니다. 마치 노아처럼, 이 워싱톤의 장로님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신앙이 순결한 믿음으로 준비되고 나면, 먼저 우리들의 신앙이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믿음이 되어서 모든 가족 구성원들을 감격하게 이끌 수 있습니다.

물리적으로 협박하고 이끄는 것이 아니라, ‘너 내가 장로인데, 니가 아들로써 안 나오면 어찌 되겠느냐!’ 이렇게 협박해서 교회를 나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우리 아버지처럼 장로의 신앙을 가지고 이 제단에서 섬겨야 되겠다고, 우리 아버지가 권사인데, 우리 아버지가 집사인데, 나도 그런 믿음을 가지고, 이 제단에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살겠노라고, 신앙의 본을 보여야 되지 않겠느냐고 하는 거예요.

부모는 그래서 신앙의 파수꾼이 되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가정을 지키는 파수꾼이 되고, 교회를 지키는 파수꾼이 되어야 합니다. 나아가서는 이 나라, 이 민족, 대한민국을 지키는 영적인 파수꾼들이 바로 부모님들인 줄로 믿습니다. 그래야 자녀들에게 그 유산을 심겨주고, 이 나라에 미래가 있고, 이 나라 이 민족에 미래가 보이지 않겠습니까?

어버이주일인 오늘 어버이인 오늘 자신들의 순결한 믿음과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믿음이 준비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복되게 하시고, 하나님 약속하신 은혜를 허락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아무쪼록 평안의 모든 가정들이 주님 주시는 복으로 행복한 가정이 되시고, 상처와 여러 가지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여러분들에게 최후의 손길을 허락해 주셔서 치유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아가는 은혜로운 가정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파수꾼의 사명을 주셨습니다. 먼저 가정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교회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이 민족의 파수꾼으로 세워주셨습니다. 잘 감당할 수 있도록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게 하시고, 순결한 믿음을 지니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15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
본문- 호세아 9장 1-4절
제목- 여호와로 인하여 기뻐하라

오늘은 가정주일이며 이 달은 가정의 달입니다. 5월처럼 우리의 입에서 가정이라는 말이 자주 쓰여지고 들려지는 때는 없을 것입니다. 5월 한 달 동안 가정이란 주제를 염두에 두고 호세아서 강해와 조화를 이루려고 생각합니다.

가정의 달을 맞이한 여러분께 이런 질문을 하면 아마도 당황하시겠지요? ‘가정이 무엇입니까?’ 늘 믿음으로 사는 성도에게 ‘믿음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당황스러운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우린 한참 앞서 가 있다고 생각했는데, 아주 기본적인 주제로 질문해 오면 때때로 그런 느낌을 갖게 됩니다만, 가정의 달을 맞이하여 하나님께서 가정을 만드신 이유가 무엇일까?를 깊이 생각해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먼저 평안의 공동체에 속해 있는 모든 가정의 남편들이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행복한 남편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또 아내들도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은 아내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가 주관적으로 좋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아야 하고 행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가정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인류 최초의 사회제도일뿐만 아니라 가정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섭리를 계속 이어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달에 모델이 될 수 있는 가정을 찾아본다면 아무래도 아담과 하와의 가정일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를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고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가정,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남편과 아내라면 더 이상 좋은 모델은 없습니다. 혹 우리가 그들의 죄악의 문제를 기억하고 ‘그 사람들 선악과 따먹고, 에덴의 동산에서 쫓겨나지 않았느냐?’ 라고 말한다면 옳지않습니다. 그것은 그 다음 이야기입니다. 그들의 욕심과 교만과 그리고 불순종의 삶이 그러한 결과를 가져왔지만,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본래의 모습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주말이면 교회나 웨딩홀마다 새로운 커플들이 탄생합니다. 하지만 그들이 출발하면서 망할 것을 생각하고 헤어질 것을 염두에 두고 새출발을 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에게는 청운의 꿈이 있기에 행복한 파라다이스를 꿈꿉니다. 지금은 어렵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더욱 복되리라는 희망과 꿈을 가지고 출발하기에 사람들은 그들을 향하여 축복하기에 인색하지 않는 것입니다.

가정을 이야기 할 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던 인류 최초의 가정, 그것에 포커스를 맞추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볼 때 참으로 행복하게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볼 때도 너무나 보시기에 좋았습니다. 그래서 창조의 어떤 대상들보다도 하나님은 더 좋은 표현을 하셨습니다. 창조한 첫 날부터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던 주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나서는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라고 세상 것과 분명한 차별을 두어 평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아담과 하와를 부부로 세우시고, 그들 부부를 통해서 가정을 이루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거기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살면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하신줄 믿습니다. 이사야는 고백하기를 ‘그들로 하여금 나를 찬송케 하려 함이라’고 창조의 목적을 분별하고 선포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인류를 지으시고 가정을 허락하신 이유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을 높이며 찬송하며 살도록 지으셨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특권을 주셨습니다. 흔히 5대 특권이란, \"생육하고 번성하며, 땅에 충만하여 정복하며 다스리라\"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권리와 의무가 담겨져 있습니다. 우리는 소유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잘 다스리고 관리해야 할 책임도 있음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정에 주신 최고의 선물은 바로 자녀입니다. 자녀를 소유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때때로 있습니다만 그것은 오해입니다. 내 자녀 내 맘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무슨 참견이냐! 그러면서 자녀들을 학대하거나 폭행할 때, 웃이 신고하여 경찰관이 찾아오면 경찰관한테도 행패를 부립니다. ‘내 아니 내 맘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무슨 간섭이냐!.....\' 아주 무지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자녀는 결코 소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소유라고 생각하기에 자기 마음에 원하는 대로 대학도 정해주고 전공도 정해준뒤 잘 키웠노라고 좋아하는 소위 대리만족을 즐기는 부모들이 아직도 많지요? 자녀의 인생이 아니라 부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아주 어처구니없는 일들이 과거 한 세기동안 있어 왔습니다. 분명한 것은 자녀들은 부모의 인생을 대신 살아주는 사람이 아닙니다. 자녀는 자녀로서의 인생이 있는 거예요. 우리 부모는 단지 그들의 인생이 신앙의 길로 가도록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도록 준비해 주고, 그 길을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생육과 번성의 기회를 주실 뿐만 아니라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도록 하셨습니다. 여기에는 큰 책임이 따라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환경적으로 여러 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필리핀을 갈 때마다 마음이 아픈 이유는 그들이 꼭 우리나라 70년대의 모습, 즉 증산, 수출, 건설로 대표되는 성장 드라이브 정책을 그대로 답습하는 듯 하여 돈 되는 일이 라면 무엇도 서슴치 않았던 우리의 전철을 되밟고 있기 때문입니다.

수출과 성장 그 이외에는 어떤 이야기도 해서는 안 됩니다. 인권도 이야기하면 안 되고, 환경도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입니다. 먹고 사는 문제가 너무나 중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환경은 파괴되고, 자연은 본래의 모습을 일어버렸고 급기야 인권은 땅에 떨어질때로 떨어진 인권 후진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우리는 그것을 회복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를 세우고 실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일을 위해 사회적인 비용이 얼마나 많이 들어갈지 모르지만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청계천 삼일 고가도로가 철거되고, 창경궁 담장을 휘감겨돌던 혜화동 고가차도가 철거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복원 프로젝트를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사실은 그들도 자연을 회복시키는 그 자체를 반대하는 분들은 하나도 없을 거예요. 단지 철거공사나 시설공사를 하는 몇 년 동안 입을 경제적인 손해나 불편함 때문일 것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청계천에 맑은 물이 흐르고, 거기에 송사리떼와 이름모를 물고기들이 뛰 노는 모습 말입니다. 얼마나 서울이 멋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고 할 때에는 분명한 하나님의 계획하심에 대한 분별을 원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욕심은 눈 앞의 이익 때문에 그것을 파괴하는 일에 급급했었습니다. 자연과의 부조화라는 결과를 가져온 것입니다.

지난 주간에 하와이 선교 100주년 대회에 다녀왔는데, 안내자에게 \"흔히 하와이라고 하는 호놀룰루시가 있는 오하우섬이 굉장히 넓어 보이는데 우리나라 제주도하고 크기가 어떻게 됩니까\"라고 물었더니 놀랍게도 그런 질문을 수 백번 듣는다면서 사실은 제주도를 엎어놓으면 거의 똑같을 만큼 면적이 비슷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하와이가 넓게 보이는 이유는 2가지입니다. 하나는 나무가 많기 때문입니다. 집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나무를 많이 심었어요. 그리고 그들은 자연을 개발하기보다 그대로 보존하는 정책을 유지하려고 애쓴 결과 오늘날의 지상낙원으로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지요. 심지어는 모래를 남태평양에서 사다가 계속 비치에 쏟아부어 화산재로 말미암아 검은 모래밖에 없는 오하우섬, 그 유명한 와이키키 비치를 세계 최고의 비치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그들은 개발보다는 보존하는데 더 많은 돈을 들이고 있었습니다.



오늘 제목은 본문말씀과는 역설적인 제목입니다. 우리가 정말 기쁘시게 해야할 여호와, 그로 인하여 기뻐하는 삶을 살자는 도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스라엘은 전혀 하나님 앞에 기뻐하심을 입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정의 달인 오월, 첫 주일에 저는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의 가정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창조적 형상으로 회복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로버트 슐러 목사님은 가정을 이렇게 말합니다. ‘가정은 작은 공화국이다. 남편은 황제요. 아내는 황후요. 아들은 황태자다. 이 말은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최고로 소중하다는 거지요. 황제국가에서 남자 중에 최고는 황제잖아요. 여자 중에 최고는 황후지 않습니까? 자녀 중에 최고는 황태자이지요. 그 분의 의도는 가정의 구성원 하나하나가 이 세상에 가장 소중한 존재 하나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프랑스에 더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더욱 많아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가정이 점점 더 많아지는 것을 나폴레옹이 소원했습니다. 여러분, 우리나라에서 우리 시민들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야 되지 않겠어요? 우리나라에 필요한 것은 공장하나 더 세우는 것이 아니라, 경찰서 하나 더 만드는 것이 아니라, 교회가 하나 더 세워지면 좋겠고, 우리 옆집에 그리스도인 가정이 하나 더 늘어났으면 좋겠다. 그것이 제대로 되는 나라, 제대로 되는 크리스찬의 삶의 모습입니다.

이야기 한 가지를 드리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를 창조하셨는데, 적적했던 아담이 하나님께서 아름다운 하와를 창조해 주시니까 너무 좋았어요. 아름다운 아내를 본 아담이 너무 기뻐서 하나님께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 제 아내를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게 만드셨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래야 네가 사랑하고 좋아할 것 아니냐!’, ‘하나님, 제 아내를 어떻게 저렇게 착하게 만드셨습니까?’ ‘그래야 네가 기뻐할 것 아니냐!’ ‘하나님,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내 아내가 아름답고 착하기는 한데, 좀 맹한 데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합니다. ‘그래야 너 같은 바보하고 살지 않니’

아마 만든 이야기라고 생각이 드는데, 여러분 가정에서 남편이 아내를 바라볼 때, 과거에는 ‘왜 우리 부인은 저런 게 모자랄까?’, 아내가 남편을 바라볼 때, ‘왜 우리 남편은 옆집 남편같이 그런 달란트가 없을까?’ 그리고 속상해 하고, 아쉬워 했을텐데, 이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오히려 배우자의 약점과 부족함이 감사의 조건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사의 조건이기를 바랍니다. 배우자의 약점이, 배우자의 연약함이 내게 감사가 된다고 하는 것은 놀라운 깨달음입니다. ‘아, 그래서 나와 배우자가 되었구나!’,‘나의 아내가 되고 나의 남편이 되었구나!’그렇지요. 그가 그 부족함이 없었으면 나를 만났겠습니까? 딴사람 만났지요. 여러분의 배우자가 혹 부족하거나 모자른 점이 있거든 오히려 감사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아내는 누구 옆에 있을 때에 누가 제일 행복할까요? 우리 아내들만 대답합니다. 목사님 옆에? 목사님 옆에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하면 안 됩니다. 좋다고 이야기 해야 되요. 좋은 거 하고, 행복한 것은 다릅니다. 행복하다고 하면 남편들이 시기합니다. 그러면 제가 목회하기 어려워요. 그냥 좋다고만 그러세요. 남편이 옆에 있어야 아내는 행복합니다. 세상에 어떤 것보다도 아내에게는 남편이 옆에 있어야 합니다. 바꾸면 남편 옆에는 아내가 있어야 남편이 있어야 행복합니다. 가정에 아주 소박한 그렇지만 너무나도 중요한 원리입니다. 아내 옆에는 남편이 옆에 있어야 하고, 남편 옆에는 아내가 있어야 합니다.

자, 오늘 본문 말씀과 대입을 해서 결론을 내리기 원합니다. 성경에서 구약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지만. 또 남편으로 비유를 하셨습니다. 신약에서는 주님을 우리의 신랑이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우리가 아내이기도 하고, 신부이기도 하는 말입니다. 우리 성도들이 가장 행복할 때가 언제입니까? 남편 되신, 신랑 되신, 주님 곁에 있을 때...우리 성도들은 가장 행복할 때가 주님과 함께 할 때가 가장 행복한 삶인 줄 믿습니다.

호세아서에 있어서 남편은 호세아였고, 아내는 고멜이었습니다. 이 고멜이 자꾸만 집을 나갑니다. 왜 나가는 줄을 아세요? 행복을 찾아서 나갑니다. 이유가 있어요. 나 더 행복하기 위해서, 좀 더 행복하기 위해서, 많이 행복하기 위해서 집을 나갑니다. 나가서 고멜을 바알을 섬겼습니다. 바알은 물질우상이지요? 나 물질을 더 원합니다. 더 많은 물질을 쓰기 원합니다. 그리고 바알을 찾아갔지만, 바알로 만족이 되지 않았습니다. 고멜로 대표되는 이스라엘, 에브라임은 아세라를 찾아갑니다.

아세라는 쾌락의 상징인 신입니다. 이제는 밥만 먹고 살지 못합니다. 그래서 쾌락을 찾아갑니다. 그런데 아세라신을 섬기며, 쾌락을 즐겨보지만, 그것 가지고 만족이 되지 않습니다. 앗수르를 찾아가고, 애굽을 찾아갑니다. 그것은 세상의 권세를 의미합니다. 애굽이 도와주는 것 같고, 앗수르가 도와주는 것 같았지만, 성경에 보니까 결국은 앗수르와 애굽은 이스라엘을 먹어버렸어요. 결국 물질을 찾아갔던 이스라엘, 쾌락을 찾아갔던 에브라임, 그리고 세상 권세를 의지했던 그들은 결국엔 완전히 망해버리고 말았습니다. 더 나은 행복을 찾아서 나갔는데, 그들은 결국 만신창이가 되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돌아올 기력도, 돌아올 명목도 없는 그들에게 우리 주님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너희 죄가 주홍같이 붉을 지라도 양털같이 흰눈같이 하리라’

정말 감격적인 초청입니다. 이제는 집으로 돌아올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런데 주님은 그에게 돌아오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고멜을 초청하는 호세아의 말씀입니다. 이 넉넉한 주님의 사랑, 이 넉넉한 신랑 되시는 주님의 요청을 우리가 들으면서 우리는 용기를 가지고, 신랑 되신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입니다. ‘저 받아 줄거지요?’ ‘그럼!’ ‘저 이런 잘못이 있는데요? 죽을 죄를 졌는데요?’ ‘내가 대신 죽어주지’ 주님은 그래서 십자가를 지신 줄 믿습니다. 물질 가지고도, 쾌락 가지고도, 세상의 권세를 가지고도, 행복할 수 없었던 이스라엘. 바로 고멜로 상징된 그들은 이제 신랑되신 주님 곁으로 돌아오는 결단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호세아는 호소합니다. ‘여호와께 돌아오라’ 신랑 되신 주님께 돌아오라는 것입니다. 가정이 뭐예요? 떠났던 가정들, 떠났던 남편과 아내들, 떠났던 자녀들과 부모들이 하나가 되어지고, 회복되어지는 것이 가정의 축복인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이번 5월 가정의 달 오늘 가정의 주일을 맞이하면서 하나님께서 우리의 가정을 창조하신 목적과 뜻을 분명히 이해하면서 우리가 주님 곁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함을 고백하고, 그래서 요즘에 유행하는 올인이 아니라, 저는 여러분들에게 홈인, 가정 안에 있을 때 우리가 행복하고, 우리가 평안할 수 있을 때, 주의 뜻을 가정을 통해서 이루어 질 수 있음을 믿고, 이 가정의 달에 평안의 모든 가정들이 예수 안에서 홈인하는 공동체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은혜와 사랑의 주님, 우리에게 가정을 주시고, 배우자와 자녀들을 주셨음을 감사드립니다. 연약하고 부족하여 주님께로 돌아올 기력조차 자격조차 없는 우리이지만, 주님은 그런 우리를 용서하시고, 사랑하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그 사랑에 힘입어 저희들 돌아갈 용기와 기력을 얻고, 주님 앞에 다시금 섭니다. 주님, 다시금 주님 앞에 분명히 고백하기를 원합니다. 주님 곁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주님 안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으면 무엇이든지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14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자
본문- 호세아 8장 1절-7절
제목- 바람을 심고 광풍을 거둘 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호세아를 통해 ‘내가 이만큼 사랑한다’며 고멜을 아내로 삼으라는 말씀을 통해 당신의 마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의 모습을 보노라면 너무나도 실망스럽고 안타까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러한 백성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5절의 말씀을 보면 ‘내가 이스라엘로 인하여 분노가 끓는다’라고까지 하셨습니다. 자식들이 빗나간 삶을 살며 불순종 할 때 부모들이 마음의 분노를 표현하면서 \"속이 끓는다 끓어 ....\"라고 하지요.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무엇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그렇게 분노하게 하셨을까요? 먼저 그들의 문제를 찾아보기를 원합니다. 1절 중반에 보면, ‘이는 무리가 내 언약을 어기며 내 율법을 범하였음이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언약의 관계인 이스라엘 백성들의 범죄가 문제였습니다.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이 하나님과의 맺은 인격적 약속을 깨뜨린 삶의 모습이 하나님으로 하여금 분노하게 만든 것입니다.

베델성서대학에서는 이러한 삶의 모습을 ‘하나님과의 부조화’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지고 나니까 자신과의 조화도 깨어지게 되고 결국은 이웃과의 조화로운 삶도 깨어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연과의 조화도 깨어져 버렸습니다. 환경문제는 바로 파괴자가 되어버린 인간에게 되돌아온 하나님의 심판이요 자연의 항거인 셈입니다.

축복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저주하는 자가 되어버렸고, 예배하는 자로 부름을 받았으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어버렸으며, 감사하는 자로서 부름을 받았으나 오히려 불평하며 육신의 정욕으로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은 모든면에서 부조화를 이루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2- 3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두 번째 문제가 나와 있습니다. ‘저희가 부르짖기를 하나님이여, 우리 이스라엘이 주를 아나이다’ 언제나 그들은 입술로 하나님을 잘 알고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나는 교회를 잘 알아, 나는 성경을 잘 알아, 나는 목사님을 잘 알아.....’,그렇게 언제나 입으로 말하고 있지만 아무도 그 말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이 그 말을 뒷받침해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문제는 4절에 있습니다. ‘저희가 왕을 세웠으나 내게로 말미암지 않았고,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라’ 무슨 말씀입니까? 그들은 자신들이 중요한 일을 결정한다고 자부심을 가졌지만 실상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민족들이 왕을 세우는 일처럼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께서는 ‘나하고는 상관없다’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그들은 국ㄱ가적인 일이나 가정적인 일에 먼저 그나라와 그의를 이루려는 의지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일이 무엇인지를 고민하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다만 자기들에게 유익이 된다면 만족하였고 아쉬울것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하심과 인도하심은 안중에도 없었던 것입니다.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인도하셨던 하나님의 존재는 이제 중요하지 않게 된 것입니다.

뿐만아니라 그들은 은과 금으로 자기들을 위하여 우상을 세웠다고 했습니다. 6절에 보니까 그 우상들은 공장에서 만든 신이요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들이었습니다. 호세아 선지자는 선언합니다. ‘신이 어찌 공장에서 만들어지고, 우상이 어찌 사람의 손끝에서 나올 수 있겠느냐? 믿지 않는 가정을 방문하다보면 제일 먼저 분에 띄는 것이 바로 부적들입니다.문설주나 천정에 붙이는 것이 일반적이나 심지어는 팬티 속에도 부적을 넣고 다니고, 자동차 엔진룸에도 마른 명태와 명주실을 함께 묶어서 다니기도 합니다.

그것이 그들의 신이 되고 경배의 대상이 되는 모습들을 보면서 선지자 호세아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최고의 걸작품으로 만드셨는데, 어찌하여 사람이 손으로 만든 물건들 앞에 스스로 엎드려 절하는 신세로 전락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들 중에서도 믿음을 갖지 못했을 때 돼지머리 앞에서 절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모습을 한 번 상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최고의 존재가 피조물인 짐승의 머리 앞에 절하고 있다는 사실말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문화적, 전통적 삶의 단편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거기에 왜 절을 합니까? 이유는 분명합니다. 사업이 잘 되게해달라고 마음의 소원을 구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절하라고 요청합니다. 내 사업 좀 잘 되게 해 달라고 말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하나님을 몰라서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습니다. 시내산에서 말씀으로 언약을 맺은 언약백성입니다. 그런데 살다 보니까 남들보다 농사도 더 잘지어야 되겠고, 인생도 남보다 더 멋지게 즐겨야겠기에 욕심이 우상을 만들고 그것을 섬기도록 이끈 것입니다.

실제로 우리의 일상생활이나 교회생활 조차도 삶의 실천적 모습이 따라주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법을 지키며 순수하고 순결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손해보지 않도록 배려가 되는 사회가 아니라, 법을 지키면 손해라는 생각이 모든 사람들 마음 속에 가득차 있는 구조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너도 나도 알면서 법을 어깁니다.

하지만 한 기업가가 믿음대로 사업하기로 작정하고서 법대로 사업을 하려니까 그것은 마치 100m 경주를 두 손 꽁꽁 묶어놓고 달리라고 하는 것과 같았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그냥 세상 풍조대로 따라하면 그만인데 믿음의 양심과 법대로 실천하려니까 온갖 장애가 가로막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순결한 믿음을 가지고 한 10년쯤 사업을 하다가 뒤를 돌아다 보니 어느새 자신의 기업이 머리가 되어있었노라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 법을 지키는 것도 중요합니다만, 나아가 하나님과의 언약을 지킨다고 하는 것이 때때로 손해같이 느껴지지만, 바보처럼 순수하게 그 말씀 지키며 주님과 동행하다보면 결국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여 주실줄 믿습니다. 그 분께서 세워 주셔야 승리요 축복인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


평안의 교회도 만 20년을 지내오면서 정말 정도를 걸으려고 애썼습니다. 아마 그냥 오시는 분 다 받았으면 지금 2.000명도 넘었을 겁니다. 정도를 걷기가 쉬운 일이 아니지만, 지금 우리가 바른 길을 가면서, 이제 모든 분들이 평안의 교회를 보면서, ‘그 교회는 정도를 걸어가는 교회야’ 그렇게 이제는 인정을 받으면서, 이렇게 하나님이 부흥을 주신 것은 예사로운 일이 아닌 줄 믿습니다. 그것은 저 뿐만 아니라, 여러분들도 같이 협력해 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오늘 이스라엘의 모습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위해서, 하나님과 언약한 백성이지만, 자기를 위해서 우상을 찾아가고, 자기를 위해서 하나님이 아니라 앗수르를 찾아가고, 애굽을 찾아가고 있지만 결과는 패망이었고, 오늘 말씀 7절에 마지막 결론을 보면 ‘너희들은 바람을 심었지만, 광풍을 거두게 될 것이다’ 엄청난 저주를 지금 그들은 듣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하나님 앞에 설 수는 없는 것입니까? 이제는 도저히 불가능한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몇 가지 변화를 위한 중요한 말씀을 허락하셨습니다.

첫째는 그들의 문제를 그대로 인정하는 겸손함을 필요합니다. ‘주님 말씀 듣고 보니까 제 문제가 그게 문제였군요’ 문제를 문제로 알지 못하니까 우상을 찾아가고, 바벨론에게 가고, 앗수르에게 가는 것 아니겠어요? 문제를 알고 나서 ‘이게 제 문제였습니다. 인정합니다’ 라고 겸손하게, 주님 앞에 자신을 인정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회개는 거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튕겨나가면 안 됩니다. 사실 체면이나 자존심이 걸림돌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내가 20년은 믿은 사람인데 이제와서 무슨 회개인가?\' 하지만 이런 것들을 벗어버리고 나면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그대로 인정할 수 있는 겸손함이 주어질 줄로 믿습니다.

두 번째는 나팔을 불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그 해답이 1절 첫머리에 나와 있어요. 다시 말하면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를 말씀하시지만, 그 해답을 먼저 말씀하시고 계신 거예요. ‘나팔을 내 입에 댈지어다’ 나팔을 불어야 할 사람은 나팔을 불어야지요. 목사의 사명은 나팔을 부는 겁니다. 말씀을 통해서 잠자는 영혼들을 깨워야 하는 겁니다. 기상 나팔을 불어야 하는 시간인지, 취침 나팔을 불어야 하는 시간인지, 지금 전쟁에서 전진해야할 나팔인지, 후퇴해야 할 나팔인지, 나팔이 분명해야 합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나팔수가 나팔이 분명하지 않으면 어떻게 전쟁에 참여한 사람들이 전쟁을 바로 할 수 있겠느냐! 저는 늘 기도가 그것입니다. 주님, 주님의 나팔수로 쓰시되, 바르게 쓰게 하옵소서. 나팔을 분명하게 불게 하옵소서. ‘황 목사의 설교를 들었는데, 도저히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어’ 이러면 곤란하잖아요. 제 설교는 제가 들어봐도 어려운 게 없어요. 신학적인 것도 별로 없는 것 같아요. 쉬워야 합니다. 분명해야 합니다. 오늘 무슨 말씀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내가 그 말씀에서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지, 아주 단순하고 명료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나팔수로 우리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이 말은 우리 모두가 사명이 있다는 말입니다. 성가대는 성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높이는 것이 나팔수의 사명인 줄 믿습니다. 성가대가 나팔을 잘 분다는 말은 성가를 통해서 하나님을 송축하는 거예요. 찬양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거거든요. 그래서 성가대라는 말을 쓰지 말고, 찬양대라고 하자. 그러는 분들도 있습니다. 다 좋은 말씀이예요. 거룩한 노래가 인간을 위해서 부르겠습니까? 하나님을 위해서 여러분들은 회갑잔치에, 칠순잔치에 결혼식에 가면 안 됩니다. 어디 가야 되요? 회갑예배, 결혼예배면 초청받아서 특송할 수 있어요. 하지만 예배가 아닌 곳에는 성가대가 찬양대가 갈 수 없는 거예요. 정신 나간 겁니다. 예배는 주인공이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을 높일 수 있는 겁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나팔을 분다고 할 때, 여러분 나름대로 불어야 할 나팔이 있습니다. 집사님으로써 불어야 할 나팔이 있고, 권사님으로서 불어야 할 나팔이 있습니다. 교사로써 불어야 할 나팔이 있고, 선교회원으로서 불어야 할 나팔이 있습니다. 이제 그 나팔을 입에 대라는 거예요. 이제는 내 사명을 다시금 회복하고, 사명의 자리에 가라는 겁니다. 사명의 자리를 떠나서, 다른 데로 빈둥대고, 어슬렁거리지 말라는 거예요.

하나님 앞에서 서야할 네가 지금 하나님이 아닌 앗수르와 애굽으로 가 있고, 우상한테 가서 엉뚱한 곳에 있지 말라는 거예요. 죄악된 백성, 완악한 민족을 위해서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이스라엘의 모습들. 바로 그들을 위해서 우리 주님께서 마지막으로 선택한 해답을 오늘 여러분들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을 우리는 고난주일이라고 말합니다. 주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날이고, 이 날 주님께서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님을 환호하느라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길에 깔거나 들고 흔들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런데 사실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 것은 영광의 자리에 참여하시러 가시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가신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 가신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하고, 우리 성도들의 길을 십자가의 길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십자가의 길에도 영광이 있어요.

여러분 집사님 되시고, 권사님, 장로님 되신 것, 또 제가 목사가 된 것 다 이것 영광의 자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알고 보면 제가 후드를 하고 있는 것처럼, 소의 멍에를 형상화 한 것입니다. 목사의 멍에는 이만큼 큽니다. 그것을 말하는 것이고,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도 다 멍에가 있어요. 집사님이 장로 안 시켜 준다고, 권사 안 시켜 준다고 삐치는 것은 뭘 모르는 거지요. 작은 멍에를, 1Kg짜리 멍에를 10Kg짜리 멍에를 얹혀주겠다고 하는데, 이게 헌신과 결단과 생명을 내어 논 자세가 아니면 안 되는 거잖아요. 그거 안 해주었다고 삐친다고 하면은, 시험 든다고 하면, 뭘 몰라도 한참 모르는 것 아니겠습니까?

고난의 길입니다. 물론 고난의 길이 거룩하신 주님의 일이기에 우리는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만, 그 기본적인 마음의 자세는 고난의 길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실 때, 물론 ‘호산나’ 환호했어요. 물론 해야 당연하지요.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의 길을 가신 겁니다. 오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위해서 고난의 길을 들어가시고, 이제 이번주 금요일날 주님은 십자가에 못 박히셨어요. 1년 중에 가장 십자가를 여러분을 깊이 새기셔야 할 주간이 바로 이번 주간입니다. 그래서 이번 고난 주일은 우리가 가능하면 우리가 유흥에 관한, 즐거움에 대한 그런 것들을 절제하고 쉬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은 운동하는 일도 없습니다. ‘주님의 일이지만 그것도 좀 우리가 절제하자’라고 하는 겁니다.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탄식과 분노밖에는 우리가 얻을 수 없는 그런 존재인 우리를 마지막 주님의 카드. 이제는 이 백성들을 위해서 이것 밖에는 안 되겠다고 하는 주님의 마지막 선택, 십자가인 줄 믿습니다.
죄 없으신 주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게 함으로써 우리를 용서하신 줄 믿습니다. 당신의 허리를 창으로 찌르는 군사에게까지 ‘저가 하는 일을 저가 알지 못하오니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자가는 용서할 수 없는 사람을 용서하는 능력인 줄 믿습니다. 그래서 십자가 때문에 은혜를 입은 줄 믿습니다.

지금 오늘 1절부터 7절까지 어느 한 구석에 희망이 보입니까? 그런 우리를, 그런 용서받을 수 없는 우리를 주님의 십자가는 용서하신 줄 믿습니다. 이 놀라운 십자가의 사랑, 오늘 그 십자가의 사랑을 통해서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회복을 선언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얼마나 큰 것을 다시 한번 증거합니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이 여러분 삶 속을 지배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용서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주님 십자가로 용서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사랑 받을 수 없는 삶을 살았지만, 십자가로 사랑하시니 감사합니다. 이 은혜, 그 구원의 기쁨을 저희들 이제는 변함없이 간직하기를 원합니다. 사랑하는 평안의 성도들 고난주일을 맞이하여 다시금 주님의 고난의 십자가를 바라보며 그 사랑이 얼마나 컸음을 기억하며 새로워지는 한 주간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3 하나님을 떠난 민족
본문- 호세아 7: 8-16
제목- 하나님을 떠난 민족

4월이 되었습니다. 교회 앞 샬롬 공원에도 벚꽃이 만개하여 교회를 찾는모든 분들에게 활짝 웃는 모습으로 환영하고 있습니다. 사순절 특별새벽기도회에 참석하시느라 진해 군항제를 비롯한 전국의 벚꽃 축제에 못 가셔서 서운할 분들이 계시겠지만 오히려 새벽에 도우시는 주님을 만나는 기쁨으로 충만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님께서는 육체의 정욕을 위해 살아가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말씀하신 후, 하나님을 떠난 민족이 어떤 결과를 얻게될 것인가를 오늘 본문을 통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민족의 첫 번째 특징은 8절에 보면, ‘뒤집지 않은 전병과 같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대개 부침개를 부쳐본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남자 분들도 계란 프라이는 해 보셨을 것입니다. 적당히 뒤집어야 앞뒤가 골고루 익게 마련입니다. 그런데 뒤집지 않은 전병이라면 한 쪽은 설익고, 한 쪽은 새카맣게 타버린 상태가 되었음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9절에 보면 ‘백발이 얼룩얼룩한 상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의 상황으로 교훈했다면 ‘백지에 먹물을 튀겨놓은 것 같은 상태\'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하얀 백발에 얼룩이 있다는 것은, 그들의 순결함에 문제가 있을 뿐 아니라 누구든지 얼룩의 상태를 쉽게 깨달을 수 있는 상황임을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친구 중에 시력이 나쁜 친구가 있었습니다. 영등포 역전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에 맞추어 약속된 장소를 가다보니 친구가 먼저 기다리고 있어서 그 친구 앞으로 반갑게 가고 있는데 아무 반응이 없는 것입니다. 이쯤되면 손을 흔들면서 반갑다는 표를 해 주어야 하는데, 그냥 쳐다만 보고 있어 제 마음이 상했습니다. ‘나를 무시하는 건가.....’

사람이 제일 기분 나쁠 때가 무시당한다고 느낄 때이지요. 아내가 남편을 무시할 때, 남편이 아내를 무시할 때 우리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거 이상하다’ 하고 좀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제야 ‘ 너 왔느냐’ 며 반기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오는 것 안 보여...\' 하며 언짢게 반문했더니 \'미안해. 사실은 내가 시력이 안 좋아서 20 - 30m만 떨어져 있어도 흐릿하게만 보이지 누군지 구별이 안돼.....’ 그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제 서운한 마음이 좀 풀렸어요.

육신의 시력이 떨어져도 자기를 향해 다가오는 사람도 구별하지 못하는 아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지금 이스라엘의 상태는 영적인 안목이 완전히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자신들의 상태를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주지만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10절에 보면, \'이스라엘의 교만은 그 얼굴에 증거가 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얼굴은 마음을 표시해 주는 바로미터가 됩니다. 눈을 마음의 창이라고 하지만 넓은 의미에서 얼굴 전체가 마음의 창입니다. 얼굴을 통해 겸손한 모습과 교만한 모습도 구별할 수 있습니다. 슬픈 마음과 행복한 마음도 읽을 수 있습니다. 얼굴은 우리의 마음속 다양한 상태를 다 드러내 주는 온도계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교만이 무엇인가요?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 교만인 줄 믿습니다. 죄악 중에 죄악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거예요. 그들은여호와께로 돌아오지도 아니하며 구하지도 아니하고 있었습니다. 전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순결한 삶을 포기하고 이방의 여러 신들을 필요에 따라 섬기는 혼합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8절에서 ‘에브라임이 열방에 혼합되니 뒤집지 않은 전병이로다’ 고 말씀하시는 비유는, 단순히 앗수르에 의해서 이스라엘이, 바벨론에 의해서 유다가 민족적 순수함이 훼손되었음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몇 가지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혼합된 신앙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예배를 위해서는 성전을 찾아가고, 육신의 정욕과 인간적인 삶을 위해서는 바알과 아세라를 찾아가는 그런 의식을 가진 민족을 주님은 정말로 분노하고 계신 것입니다. 열방에 혼합되었다는 말씀은 바로 영적인 순수함을 잃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들은 육신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그들은 본문 말씀 11절에 보면 애굽을 향하여 부르짖고, 앗수르를 향해서 발걸음을 달렸습니다. 당시의 애굽이나 앗수르는 강대국이었습니다. 미국이나 영국 같이 강대국이었습니다. 요즘 이라크 전쟁을 바라보면서, 저는 참 마음이 착잡합니다. 근본적으로 전쟁은 반대해야 하고, 또 그 전쟁은 일어나지 말았어야 하지만, 이제 전쟁은 시간이 퍽 지났습니다. 전쟁은 군인들간의 일이지만, 군인과 상관없는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초기에는 프랑스와 독일 같은 나라를 중심해서 미국의 전쟁을 반대할 때, ‘그 나라는 꽤 괜찮은 나라인가보다’라고 착각하신 분도 계셨을 겁니다. 하지만 제가 볼 때에는, 전쟁을 하자는 미국이나 영국과 해서는 안 된다는 프랑스와 독일이 똑같은 사람들, 똑같은 나라들입니다. 요즘에 프랑스와 독일이 무엇이라고 얘기하고 있습니까? 반대하던 그들이 ‘우리는 미국이 이기기를 원한다’고 말합니다. 보름도 안 지나서 그렇게 태도를 바꾸고, 말을 바꾸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라크 정권이 무너지기를 바란다’ 보름 전에는 상상도 못 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요? 미국이 전쟁에 다 이겨가니까, 미국과 영국이 이라크의 석유를 다 차지할 것 같으니까 ‘이제 우리도 조금 나눠줘’ 그 얘기입니다. 세계의 정치는 이해관계에 따라서 정의도 없고, 선도 없는 그런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여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육체의 어떤 목적을 위해서 때로는 앗수르를 찾아가고, 때로는 애굽을 찾아가지만, 우리 주님이 볼 때는 그저 안타까운 일입니다.

다윗의 고백이 요즘 우리의 마음을 더욱더 새롭게 해 줍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니 활과 창에 수효에 있지 아니하도다’ 많은 무기를 가졌다고 이기는 것도 아니고, 적은 군사라고 지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신들의 삶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세상에 힘을 가진 애굽과 앗수르를 찾아다니면서, 조공을 바치고 ‘우리의 힘이 되어 주세요. 우리의 방패가 되어 주세요.’ 하고 그들이 열심이지만, 주님께서 보실 때는 아니라는 겁니다. 마치 그들의 모습은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비둘기 모이 주어본 적 있으십니까? 그냥 가면 비둘기들이 훠억 날아가지만, 비둘기 먹이 한 봉지를 사들고 멀리멀리 뿌려주다가 점점 가까이 뿌려주면 나중에는 발밑에까지 옵니다. 그냥 덥썩 잡는 거 간단해요.

애굽이 도와주는 것 같고, 앗수르가 도와주는 것 같아서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가지만, 결국 애굽과 앗수르는 이스라엘과 유다를 한 입에 삼켜버리고 말았어요. 16절에 결론이 나와 있습니다. ‘그 방백들은 그 혀의 거친 말로 인하여 칼에 엎드러지고....’ 에브라임이 의지했던 애굽과 앗수르는 오히려 그들의 지도자들을 한 칼에 쳐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이스라엘은 애굽의 조롱거리가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더니... 그 백성도 별거 아니었구만...’ 세상은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세상이 우리를 도와줄 것 같지만, 결코 세상의 권세잡은 사탄의 세력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함을 원치않기에 도움이 아니라 지배의 칼날로 억압할 따름입니다. 잠시 이해관계로 돕는 시늉만 할 뿐임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너희들이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백발이 얼룩얼룩한 그런 상태 같이, 뒤집지 않은 전병 같이 그런 상황에 있는 너희를 주의 종을 통해서 말씀하지만 그들은 돌아오지 않습니다. 구하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 14절에 보면 성심으로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부르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 주님은 이스라엘, 에브라임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15절에 보면 ‘내가 저희 팔을 훈련시켜 강건하게 하였다’라고 하셨습니다. 야구 선수 중에 가장 주목받는 사람이 투수이지요? 투수가 잘 해야 경기가 잘 풀려갑니다. 그러기 위해서 그는 여름뿐만 아니라 겨울철에도 비닐하우스로 스프링 캠프를 만들어 놓고 하루에도 수 백번씩 투구연습을 해야합니다. 팔이 강건해 지고 어깨가 강해져야 좋은 투구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팔을 훈련시켜서 강건하게 하였다라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그들의 모든 삶의 상황 속에서 승리할 수 있는 능력들을 충분하게 준비시켜 주셨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물질도 충분히 주셨고, 건강도 넉넉히 주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배할 수 있는 시간도, 충성할 수 있는 넉넉한 능력도 주셨다는 겁니다.

20세기 최고의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합니다. ‘모든 역사는 껍질을 벗기고 나면, 결국 영적인 부분만 남는다.’ 여러분 역사를 어떻게 바라보십니까? 역사란 권력을 잡은 자들이 투쟁해서 승리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는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영적인 스토리인줄로 믿습니다. 지금은 깨어있을 때입니다. 세계의 급변하는 상황이나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안목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우리 한국 사회도 영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있습니다. 먹을 것이 모자라거나, 입을 것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어려움에 도움을 청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어려움의 문제는 우리나라가 이제 만불을 회복했는데, 아직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사람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3만불이 넘는 미국이나 스위스에도 거지들은 있어요. 중요한 것은 지금 우리 사회의 문제는, 지금 우리들의 문제는 교육의 기회가 없거나 교육의 환경이 부족하거나 우리의 환경이 불충분해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회복지 시설이 부족해서 생기는 문제가 아니라는 거예요.

무슨 말씀 입니까?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문제는 모자람의 문제도 아니고, 불충분의 문제도 아니라는 겁니다. 영적인 문제인줄 믿습니다. 희망을 보여주는, 하나님의 사람들이 비전을 가지고 세상을 향해서 빛을 비추어주어야 해요. 그 빛이 다름 아닌 말씀을 통해서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니이다’ 말씀을 통해서 우리 민족이 갈 길을 비추어주고, 여러분들의 인생길에 말씀이 비전이 되어주어서, 여러분이 이끌어주어야 하는데, 그게 아니라 앗수르가 어디입니까? 애굽이 어디입니까? 거기에 연줄 대기에 바쁘다고 하면 우리의 결론은 너무나도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책망만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13절에 보면 ‘화있을진저 패망할 진저’ 무서운 말씀을 선포하지만, 희망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16절에 보면 ‘저희가 돌아오나 높으신 자에게로 돌아오지 아니한다’라고 말합니다. 무엇인가 바삐 가긴 갑니다. 무엇인가 열심히 하긴 합니다. 그런데 헛수고 하고 있는 겁니다. ‘요즘 어때요?’ ‘바쁩니다’ 그렇게 바쁜데 집에 가져오는 것도 없지요? 우리 아내들이 제일 짜증나는 게 뭐예요? 남편은 새벽부터 밤까지 정말 바쁜데, 가져 오는게 없어요. 기다리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그 무슨 얘기예요? 헛수고 하고 있다는 얘기예요. 주머니가 터졌는데, 거기다가 아무리 갖다가 부은들 그게 남아나겠습니까? 주머니가 터졌는데...

너희의 삶 속에 황충이 먹지 않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그런데 황충이 들면 소용없잖아요. 지금 이스라엘은 바쁩니다. 분주합니다. 열심히 삽니다. 그런데 헛수고예요. 그들이 지금 돌아는 가는데, 여호와 하나님, 크신 하나님, 높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말은 바꾸어 말하면, 그 속에 해답이 있는 거예요.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로 그들이 발걸음을 돌리면 이스라엘에 희망이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문제는 바로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이 사회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인간의 힘을 의지했던 그 발걸음들이 돌이켜서 전능하신 하나님께로 발걸음을 돌릴 때 이 민족은 애굽의 조롱거리가 된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여호와 닛시에 깃발을 높이 드는 승리의 사람들이 될 줄로 믿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승리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세상에 나아가지만, 하나님은 권세를 주셔서 귀신을 내어 쫓고, 병을 고치고, 천국이 가까웠다는 복음을 전하는 당당한 승리자들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이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을 떠난 민족에 특징을 보이고 있는 이스라엘, 에브라임, 오늘 이 나라 이 민족이 하나님을 떠나서 세상을 의지하고 그것에 분주한 그 삶, 그것이 이제 나의 문제라고 고백하고, 인정하면서 ‘하나님 이제라도 전능하신 하나님 주님 앞에 돌아가기를 원합니다’ 진정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운동과 역사의 흐름이 바로 이 자리, 평안의 공동체로부터 시작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좋으신 하나님, 우리의 모습을 바로 보지 못하고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었음을 고백합니다. 교만함과 완악함이 그 얼굴에 증거가 되었던 이스라엘의 모습속에서 오늘 우리의 현 주소를 알게하시고 새롭게 하옵소서.
삶의 문제가 생길 때마다 어리석은 비둘기 같이 애굽을 향하고 앗수르를 찾았던 우리의 발걸음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 높으신 하나님께로 돌아가 희망이 넘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주님께로 돌아가는 운동이 일어나게 하시고, 기도의 운동이 회복되게 하시고, 전도의 운동이 새롭게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