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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수의 강이 흐르게 하십시오
고전 10장 1-4절
\"다 같은 신령한 음료를 마셨으니 이는 저희를 따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시라.\"(고전 10:4)
구약 성경에 나오는 아름다운 영적 진리 중에서 호렙산 반석에 관한 진리를 뺄 수 없습니다. 출애굽기 17장 2-7절, 그리고 민수기 20장 8-12절에 그 내용이 나와 있는데 이 구절의 영적 진리를 다음과 같은 간단히 정리할 수 있습니다.
<출애굽기 17:2-7절>
1. 호렙산 반석은 영원한 반석인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입니다. 2. 호렙산 반석을 세게 때린 것은 하나님의 징계, 주님의 십자가를 상징합니다. 3. 때린 반석으로부터 물이 흘러나온 것은... 십자가 사건 뒤이어 오신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상징합니다.
그리고 반석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성령이 어떤 사역을 하시는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1) 성령의 깨끗하게 하심 2) 성령의 새롭게 하심 3) 성령의 만족하게 하심
<민수기 20장 8-12절>
여기에서는 출애굽기에서 나온 사건과 다른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그때부터 약 39년이 지난 후의 시점의 사건입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이 다시 목마름에 처하게 되었고 모세는 39년전과 동일한 므리바 반석으로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39년전에 하나님은 \'반석을 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출 17:6). 그러나 이제는 그 반석이 갈라진 상태로 있기 때문에 그 반석을 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명령을 했습니다. \"반석에게 명하여 물을 내라!\"(민 20:8) 하나님 말씀대로 모세는 믿음의 말을 사용하여 이미 그를 기다리고 있는 축복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반석을 두 번 쳤습니다(민 20:11). 물은 넘치게 흘러나왔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능력입니까? 모세도 흡족했고, 백성들도 신기해했을 것입니다. \"역시 우리 지도자 모세는 정말 다르다!\"라고 칭송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반응은 전혀 의외였습니다.
하나님은 모세의 행동을 두 가지로 보셨습니다. 1)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한 것이다. 2) 사람 앞에서 나의 거룩함을 나타내지 않았다.
그 결과 어떤 일이 생겨났습니까? 모세는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신앙생활을 하면서 신기한 것이 그렇게도 좋습니까? 기적적인 능력이 그렇게 좋습니까? 아니면 그것이 없어도 최종적으로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겠습니까?
기적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고 꼭 필요할 때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아무 때나 하늘만 쳐다보고 \"기적을 보기 원하나이다!\"라고 하면 될까요? 하나님은 그런 모습을 가지고 두 가지 평가를 하실 것입니다. \"너는 나를 너무 믿지 않는구나!\"라고 하는 평가이고, 또 하나는 \"너는 나를 거룩하게 보지 않고 이용 도구로만 삼는구나!\"라고 보실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보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이 더 좋은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 본문이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지금 반석은 이미 터져 있고 생명의 물은 흐르고 있습니다. 즉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석에게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말을 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의 충만함을 요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마음 문을 열고 성령충만을 원하면 반드시 생수의 강이 우리 배에서 흘러나옵니다.
여러분! 흥분하지 마십시오. 손에 모세의 지팡이 들렸습니까? 반석을 치고 물이 흘러나온 사건이 없었다면, 지팡이를 마구 휘둘러야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돌아가시고 생명의 길을 여시고 성령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에 지팡이를 마구 휘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너무 시끄럽게 표시하지 마십시오. 따로 주문을 외울 필요도 없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성령께서 주시는 것을 언제든 가질 수 있습니다.
반석에게 인격적으로 말하십시오. \"하나님! 성령의 생수가 내 배에서 솟아 오게 하소서!\" 그리고 성령을 의심하지 마십시오. 그러면 반드시 기도대로 될 것입니다.
우리는 민수기 21장의 아름다운 진리를 꼭 기억해야 합니다. 민수기 21장으로 넘어가 보십시오. 이 장면은 므리바 반석에서 상당한 거리를 행진해 왔을 때의 장면입니다. 광야이니까 항상 물 문제가 닥칩니다. 16-18절을 보십시오. 이스라엘 백성들이 또 물이 없었을 때 그때에는 어떻게 했습니까? 이제 그들은 나무 연장을 가지고 친히 우물을 팠습니다. 그리고 믿음의 노래를 불렀습니다. \"우물물아 솟아나라. 너희는 그것을 노래하라.\" 그러자 지하에서 샘이 분출되었습니다. 므리바 반석에서 흘러나왔던 물이 그들의 발 밑에서 지하수로 흘러내렸을 것입니다. 반석이 뒤따라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반석에서 흘러나오는 물이 뒤따라왔습니다. 그 먼길을 뒤따라오면서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발 밑에서 흐르고 있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그들이 무슨 일을 해야 합니까? 발 밑에 흐르고 있는 지하수를 파내어 마시고 만족하는 일뿐입니다. 즉 내 의식세계 밑바닥에서, 내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도록 해서 그 생수를 마음껏 마시는 일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살면서 항상 하나님의 충만한 은혜로 뒤덮여있지는 않습니다. 때로 성령님의 임재도 항상 뚜렷하게 느껴지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적 느낌이나 정서가 메마르게 되는 것을 경험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식세계 깊은 곳 저편에 아직도 거기에 존재하고 계심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 생수가 필요합니까? 그렇다면 신령한 노래와 찬양을 부르며 믿음과 기도의 우물을 파면 됩니다. 그러면 그 지하수가 터지고 여러분의 배에서 생수가 흘러나오고 그 순간 즐거운 심령과 삶의 기쁨이 회복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성령의 생수가 항상 넘쳐나길 기원합니다.
사랑의 샘물을 흘려보내십시오
요한복음 4장 13-14절, 7장 38절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4)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요 7:38)
첫 번째 구절을 잘 이해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물\'과 \'샘물\'을 구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이 구절에서 샘물을 얘기할 때 이것은 \'분수형 우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분수형 우물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감추어진 샘으로부터 솟아 나온다는 것입니다. 2) 오래도록 신선하다는 것입니다. 3) 그리고 풍성하고 만족스럽다는 것입니다.
이 분수형 우물의 특징은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의 특징과 같습니다.
1) 성령 충만한 삶을 사는 사람에게는 감추어진 샘이 있습니다. 그 샘은 보이는 샘이 아닙니다. 그래서 성령 충만할수록 겸손해집니다.
2)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오래도록 영혼이 신선합니다. 잠시 마음이 시원한 것은 성령 충만이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사실상 자신의 감정만 잠시 시원한 것입니다. 진정으로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영혼의 시원함을 느끼게 됩니다.
3) 성령 충만한 사람에게는 아름다운 열매가 많습니다. 사랑, 희락, 화평, 인내,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힙니다.
이 시간 다시 한번 우리 주님이 주는 물은, 즉 성령의 생수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그러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구체적으로 시사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먼저 자신의 노력으로는 영혼의 만족이 없다는 것을 시사해줍니다. \'내 속에서\'라는 말은 \'내 노력으로\'라는 말이 아니라 \"내 안의 샘으로부터\'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죄악된 성향을 이기게 하는 강력한 힘이 우리 안에 존재함을 시사합니다. 이 힘은 우리가 씨름하는 두 가지 문제를 해결해 줍니다.
1) 첫째, 우리가 하기 싫어했던 거룩한 일을 하게 해 줍니다. 때로 어떤 사람을 보면 용서하기 싫습니다. 그러나 용서할 수 있게 해줍니다. 때로 어떤 경우에는 참기 싫습니다. 그러나 참을 수 있게 해줍니다.
2) 둘째, 우리가 좋아했던 세상적인 일을 피하게 해줍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부끄러운 사슬들이 있습니다. 그 사슬을 끊기 힘들어할 때 성령께서는 그 사슬을 버릴 수 있는 힘을 줍니다.
왜 사람들의 영혼이 곤고하게 될까요? 아마 크게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는 분명히 해야 할 일인데 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것을 죄라고 말할 수도 있지만 보통 수치라고 표현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또 하나는 분명히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아는데 그것을 끊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간단히 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치와 죄로 얼룩진 우리의 삶을 어떻게 새롭게 할 수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에게는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필요합니다.
그러면 이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의 근원은 어디일까요? 생물학적으로 배 부분, 혹은 배꼽 아래의 3센티 부분인 단전일까요?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심리학적으로 접근하여 \'그 배에서\'라는 말은 심리적인 용어선택이지 실제적인 거처는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말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유일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우리의 의식하지 못하는 깊은 세계의 어딘가에 성령께서 그분의 거처를 두고 계신다는 점입니다. 우리 몸을 하나님의 성전이라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분수형 우물의 샘 근원이 땅 속 깊은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듯이 성령의 인격적인 현존하심은 우리의 의식세계 아래의 깊은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의식할 수 있습니까? 때때로 그분의 현존하심을 드러낼 때 우리의 영혼과 삶에 주어지는 감화력 및 정서적 반응은 의식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어지는 기쁨의 샘, 평화의 생수는 의식할 수 있습니다. 이것을 우리는 \'성령의 역사\'라고 합니다. 내 안의 성령의 거처는 우리가 의식할 수 없어도 내 안의 성령의 역사는 우리가 의식할 수 있기에 내 안에 성령이 거하심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내주하시는 성령의 역사는 매우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순간의 삶과 사역에 가장 알맞은 은사와 은혜를 주십니다. 그러나 옛날의 체험과 경험이 의미 없는 것이기 때문에 잠시 감동과 감격이 조금 사라진 것 같은 느낌이 있다 하더라도 새로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속적인 성령충만의 역사는 외부에서 비둘기같이 임하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내부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은 내 안에 있음을 잊지 마십시오. 그분은 마음을 낮춘 겸손한 심령에게 솟아나 역사하심으로 이 땅에서 천국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요한복음 7장은 한 차원 더 나아갑니다. 4장은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된다고 말하고 있지만 7장은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4장은 물이 흘러 들어가서 그 압력으로 솟아난 것이고 7장은 그 솟아난 물이 흘러나가는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강물의 방향이 달라졌다는 점에 주목하십시오. 그 말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도전이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면서 정말 불쌍한 그리스도인이 있습니다. 항상 받기만 하고 주는 것은 외면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또한 항상 복만 구하고 복된 존재는 되지 않는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을 위해 열심히 무엇인가 해도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으면 영혼이 메마른 것입니다. 그처럼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이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이 원리는 일반 사람들도 다 알고 있고, 장려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그러한 삶을 살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중요합니다. 우물이 말라갈 때 먼저 물을 집어넣어 펌프질을 하는 것처럼, 우리 자신을 분수형 우물로 만드는 것이 가장 이타주의적인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이타주의적 삶을 위해서는 윤리와 박애정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참된 믿음이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성령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그리고 나면 생수의 강이 저절로 흘러 넘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사랑, 형제 사랑, 가족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이 놀라운 성령충만의 삶이 여러분들에게 있기를 바랍니다.
영광스러운 소원이 있습니까?
에스겔 47장 1-5절
\"그가 나를 데리고 전 문에 이르시니 전의 전면이 동을 향하였는데, 그 문지방 밑에서 물이 나와서 동으로 흐르다가 전 우편 제단 남편으로 흘러내리더라.\"(겔 47:1)
오늘 본문의 환상은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놀라운 환상 중의 하나입니다. 오늘 새벽이 그 환상을 접하는 특권적인 날이라 생각하고 감사하십시오. 다... 환상에서 제단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물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은총을 전해주는 성령을 상징합니다.
제단(교회)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물줄기! 이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내 안에 샘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단에서 흘러나오는 성령의 물줄기가 내 안의 생수 샘을 자극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섬기는 제단에서 말씀과 성령의 물줄기가 흘러나올 때 그 말씀과 성령을 통해 자신의 생수 샘을 터뜨리는 은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단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물줄기는 단계적으로 차 오릅니다. 그래서 발목, 무릎, 허리, 그리고 머리 위로 차 오르는데 그렇게 차 오른 각 단계가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요?
그런데 각 단계를 알기 전에 기본적으로 알아야 할 사항이 있습니다. 성전으로부터 흘러나온 강물이라 대단한 것 같지만 사실상 처음에 그 강물은 강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조그마한 물줄기였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1절의 \'나와서\'라는 말을 주목해 보십시오. 이 단어의 원어적 의미는 \'조금씩 떨어져서\'라는 말입니다. 즉 성전 동문 문지방 밑에서 몇 방울의 물이 조금씩 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처럼 성령의 역사가 처음에는 희미한 것 같아 성령의 역사인지 아닌지 그것을 느낄 수 없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손길이 희미하게 느껴져도 그 뒷 편에 하나님의 손길이 있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 폭포수와 같은 어떤 느낌을 원하십니까? 항상 강물과 같은 모습으로 역사하는 하나님의 역사를 원하십니까? 그처럼 신앙생활을 하면서 무엇이든지 한꺼번에 다 이루고 싶어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느낌을 충족시키려고 하면 하나님의 실체는 더 희미해집니다.
그러나 무엇인가 하나님의 역사가 희미한 것 같아도 그 희미해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희망을 가지고 그것을 꼭 붙잡아야 합니다. 그러한 믿음이 축복을 예비하는 믿음이 될 것이고, 바로 그 순간 그 사람은 더욱 주님의 실체를 분명하게 파악하게 될 것입니다.
1. 발목까지 차 오는 물
제단 문지방 밑에서 흘러나온 물은 곧 발목까지 차 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성령과 함께 걷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령과 함께 걷는 것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1) 하나는 하나님의 말씀과 음성에 순종하는 것을 말하고, 2) 또 하나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을 포기하는 것을 말합니다.
여러분! 아직 성령에 대한 만족스러운 경험이 없습니까? 그러면 이 첫 번째 단계를 진단해 보아야 합니다. 나에게 앞에서 말하는 \'순종과 포기\' 두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하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시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앞에서 말한 두 가지에 대한 소원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려고 하는 몸부림을 보십니다. 그러한 자세에 한가지를 더 추가한다면 \"성령에 대한 경험을 정말 순수하게 추구하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순수한 목적을 가지고 성령님 옆에 기다리고 서 있다면 성령님은 그분의 감추어놓고 있던 놀라운 축복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2. 무릎까지 차 오는 물
발목까지 차 오른 물줄기는 곧 무릎까지 차 오르게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 것이고, 무엇을 묘사하는 것일까요? 먼저 \'무릎!\' 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기도가 생각나지 않습니까? 성령님과 동행하면 기도의 거룩한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기도를 하게 됩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는 기도는 보통 기도와 다릅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탄식을 가지고 성령께서 우리의 기도에 동참하시는 중보기도입니다. 우리가 가진 부담감을 놓고 씨름하면서 우리의 마음을 쏟아놓고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에 반응하시는 느낌과 확신이 옵니다. 그것이 바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3. 허리까지 차 오른 물
무릎까지 차 오른 물은 곧 허리까지 차 오릅니다. 이 허리까지 차 오른 물은 무엇을 상징할까요? 허리는 졸라매는 부분입니다. 졸라매면 힘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허리는 능력, 힘, 에너지를 상징합니다. 허리까지 차오른 물은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권능을 가지는 것을 상징합니다. 왜 권능이 필요합니까? 증인이 되고 일꾼이 되기 위한 무장을 위해서입니다.
4. 키를 넘은 물
허리까지 차오는 물은 곧 키를 넘게 됩니다. 이것은 누구나 느끼듯이 성령의 충만함을 묘사한 것입니다. 사람이 성령으로 충만하면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 안에 잠기게 됩니다. 그리고 위대하신 그분 안에서 자신을 망각하게 됩니다. 바로 그 순간, 구체적으로 어떤 역사가 벌어지게 될까요? 먼저, 영광스러운 삶을 향한 자발적 소원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성령이 충만한 사람은 소원부터 바뀝니다. 그 소원을 보면 자신도 깜짝 놀랄만한 소원입니다. 항상 스스로 질문하십시오. \"내가 영광스러운 소원을 가지고 있는가?\"
여러분들의 소원은 어떻습니까? 거룩한 소원으로 바뀌었습니까? 이제 옛날의 이기적인 소원을 버리고 하나님의 소원으로 영혼을 채워야 합니다. 그리고 성령 충만하면 자신의 느낌과 경험을 덜 신뢰하게 됩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의 거룩한 삶에 몰입되고 자기 자신의 존재와 자신의 삶을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게 됩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사도 바울은 자신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을 아노니..\"(고후 12:2) 이 성경 구절에서 그는 옛날의 자신의 되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그러한 삶과 자세가 그를 하나님의 위대한 사역자로 만든 초석이었습니다.
그러면 성령 충만의 결과는 무엇일까요? 넘쳐흐르는 강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본문 다음에 나오는 6-12절 말씀을 보면 강 좌우편의 많은 나무가 있게 되고, 각종 먹을 실과가 생겼습니다. 또한 물이 바다로 흘러서 바다가 소성함을 입는 은총도 있었습니다. 강물이 이르는 곳마다 놀라운 생명력의 역사가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생명력이 넘치는 모습은 우리 영혼의 상태를 묘사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은 진정 우리의 영혼에 기쁨과 만족을 주는 초석입니다. 성전으로부터 흐르는 성령의 강물이 내 안의 생수 샘을 자극하는 삶! 그러한 삶이 우리들의 영혼과 삶에 큰 기쁨과 만족을 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삶에 그러한 기쁨과 만족이 넘치시기를 바랍니다.
기름 부으심의 의미
고린도후서 1장 20-22절
\"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견고케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고후 1:21)
우리는 요새 \'기름 부으심\'이란 소리를 많이 듣습니다. 오늘은 \'기름 부으심\'이 무엇인지 왜 그 \'기름 부으심\'이 중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구약시대에는 실제적으로 기름을 붓는 의식을 행했는데 그것은 신약시대의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의미가 똑같습니다. 이것이 기름 부으심과 관련된 가장 기본적인 원리입니다. 그러면 기름 붓는 것과 관련한 성경적 사례를 통해서 그 기름 붓는 것이 내포하고 있는 뜻은 무엇인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기름 붓는 것은 피 뿌림이 있는 제단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름과 피! 이것은 한 묶음입니다. 즉 성령은 십자가와 1% 오차도 없는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다. 피가 없는 성령의 역사!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1%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누가 대단한 말을 해서 성령 충만을 받을 수 있다고 해도 희생과 헌신을 모르는 성령 충만은 절대로 믿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 충만한 사람은 성령 충만한 듯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최고로 희생하고 최고로 헌신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사람입니다.
2. 기름은 성막이 봉헌될 때에도 성막 위에 기름 부어졌습니다(출 40:9).
그 순간부터 여호와의 영광의 구름(쉐키나)이 성막에 충만했고, 또한 구름이 성막 위에 떠올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했습니다. 기름 붓기 전에 기름 부은 후에 뚜렷한 차이가 있는 모습을 보십시오. 성령의 역사는 이와 같은 뚜렷한 차이를 만들어냅니다. 그러므로 기름 부으심의 역사는 회심처럼 분명한 사건입니다.
3. 레위기 14장을 보면 제사장은 문둥병자를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 피와 함께 기름을 귀, 엄지손가락, 엄지발가락에 발랐습니다.
이것은 성령에 의한 세 가지 성결을 상징합니다.
1) 귀의 성결 성령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해하기 위해서 귀를 기울이는 것을 상징합니다. 성령 충만의 증거 중의 하나가 말씀을 가까이하고 싶은 강한 마음입니다. 성령 충만하면 말씀을 듣고 싶고, 공부하고 싶고, 성경은 보고 싶습니다. 또한 말씀을 통해 인격적 만남이 이루어지고, 말씀을 묵상하며 행복을 느끼게 됩니다.
2) 엄지손가락의 성결 하나님의 강권적인 능력을 따라 봉사하는 것을 상징합니다. 참 사랑은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참 성령 충만도 \'혀끝\'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손끝\'에 있습니다.
3) 엄지발가락의 성결 성령 안에서 행하고 그분의 의지대로 인도 받는 것을 상징합니다. 이것은 가장 소홀히 여겨지는 것이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어떤 분은 유혹이 많은 장소에 가서 말합니다. \"나는 성령 충만하기 때문에 이 유혹을 이길 수 있어!\" 이것은 성령 충만함이 아니라 잘못된 영이 충만한 것입니다. 성령 충만함은 죄와 유혹이 넘치는 장소를 아예 처음부터 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발을 성결하게 하시는 성령 충만의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4. 기름 붓는 의식은 선지자, 제사장, 왕에게 행해졌습니다.
이 의식은 거룩한 사역을 위해 구별시켰다는 의식입니다. 또한 이 의식에는 지혜와 거룩함과 능력을 받았다는 상징도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직무를 감당할 힘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성령 충만을 구하면서 \"능력을 주소서!\"라고 말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하나님의 일을 잘 감당할 수 있기에 우리에게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능력을 달라고 하기 전에 한 가지 의식을 먼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나는 구별된 존재이다!\"라고 하는 의식입니다. 이런 의식을 가지고 정말 구별된 존재로서 살아가려고 노력해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이 자연스럽게 힘과 능력과 거룩함과 지혜를 주실 것입니다.
구별된 존재의식을 통해서 성령께서 힘 주셔야 우리의 봉사가 온전해집니다.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벧전 4:11)
하나님은 우리의 자연적인 능력을 활용하시면서 그분 안에서 그 능력을 사용하게 하십니다. 그 이유는 범사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는 이유 때문입니다.
5. 신약에서도 기름 붓는 의식이 남아있습니다. 야고보가 기름 붓는 의식을 통해서 육체의 치유를 권고한 것입니다(약 5장).
왜 병자에게 기름을 발랐을까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기름을 발랐습니다. 1) 당시에 육체를 고치는 방법으로 활용되었던 직접적인 치유 수단이었습니다. 2) 육체에 생기를 주는 성령의 역사를 촉진하려는 상징이 담겨있습니다.
6. 예수님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 이후 공생애의 삶을 실제적으로 수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를 통해서 태어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 시절에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하나님과 동행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기름 부으심은 공생애 시작 바로 전에 있었습니다. 그 기름 부으심 후에 예수님의 삶에 뚜렷한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속적으로 예수님의 힘과 사역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그처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은 믿음의 힘과 믿음의 사역의 원천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얼마나 소중한 것입니까? 예수님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왜냐하면 기름 부으심 안에 생명과 에너지가 원천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생명과 에너지는 영적인 힘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성령은 바로 영적인 힘의 원천입니다. 기력이 다한 삼손에게 성령이 임했을 때 그는 수백 명의 거인들이 모두 지닌 힘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에게 성령이 사라졌을 때 그는 어린아이같이 약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들의 육체적 삶의 실질적인 원천이며 우리 몸에 내주하셔서 활력을 불어넣으시는 분입니다.
그렇다면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란 얼마나 놀라운 것이며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하고 필요한 것입니까? 여러분! 우리의 능력 있는 사역을 위해서, 하나님 앞에서 쓰임 받기 위해서 믿음생활을 할 때 성령을 받았습니까?
자유로의쉼터
불세례와 성령세례
마태복음 3장 11-12절
\"나는 너희로 회개케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마 3:11)
불은 무엇을 상징합니까? 힘과 능력을 상징합니다. 잘못된 종교에서도 불은 초자연적인 것의 상징이었으며 심지어는 숭배되고 신성화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에서도 불은 신적인 것의 상징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한 성경의 예가 많이 나와 있습니다. 에덴 동산 입구를 지켰던 화염검,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타는 횃불,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나타날 때 있었던 불타는 떨기나무, 이스라엘을 인도했던 구름기둥과 불기둥, 엘리야의 갈멜산 제단이 떨어졌던 하늘의 불, 그리고 오순절날에 임한 성령의 불이 바로 그러한 예입니다.
그러면 불로 세례를 받는다는 말이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는 세 가지 세례가 나옵니다. 물세례, 성령세례, 불세례입니다. 물세례와 성령세례는 대략 알겠는데 불세례란 도대체 무엇일까요?
불세례와 성령세례는 본질상 같은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 자신이 하나님의 불이고, 성령의 역사는 불의 역사와 비슷하게 펼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령의 불세례는 요한의 물세례보다 더 강하고, 더 세밀한 성령의 사역을 암시합니다. 어떤 것은 물로 정화시킬 수도 있지만 어떤 것은 정말 불 외에는 정화시킬 수 없습니다.
불의 정화시키는 사역은 말라기 3장 2-3절에 잘 나와있습니다. \"그는 불을 연단하는 자의 불과 표백하는 자의 잿물과 같을 것이라. 그가 은을 연단하여 깨끗케 하는 자같이 앉아서 레위 자손을 깨끗케 할 것이요...\"
여기에서 말라기 선지자는 보석 만드는 대장장이를 연상하며 언급합니다. 대장장이는 도가니 앞에 앉아서 찌꺼기가 사라지고 은만 남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은에 자기의 얼굴이 비치기 시작하면 연단을 멈춥니다.
여기에서 보석 만드는 대장장이는 성령님을 상징합니다. 성령님은 우리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시면서 연단으로 우리를 찌기를 거두어 가시다가 우리의 모습에서 그분의 모습이 드러날 때에 단련을 멈추십니다.
그러므로 연단이 있을 때 왜 연단이 있느냐고 하소연하지만 말고 성령님의 열매가, 그분의 모습이 나에게 있는지를 먼저 살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어차피 우리를 위한 연단은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불로 역사하시는 성령님이 시사하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연단하는 불에 관한 유명한 본문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3장입니다. \"그 불이 각 사람의 공력이 어떠한 것을 시험할 것임이니라.\" 여기에서 \"시험한다\"는 말은 \"연단한다\"는 말입니다.
이 구절에 나오는 시험하는 불은 마지막 심판 때의 불을 말합니다. 그 때 어떤 모습으로 시험합니까? 불을 통과하게 해서 이제까지 쌓은 공력이 나타나는가를 통해 시험합니다. 그 불을 통과할 때 믿음의 공력, 말씀의 공력, 영혼사랑의 공력, 기도의 공력, 헌신의 공력들은 금, 은, 보석과 같은 공력들로서 불타지 않습니다. 그래서 풍성한 상이 있습니다.
반면에 신앙생활을 할 때 나무, 풀, 짚으로 된 공력들이 있습니다. 자랑의 공력, 야망의 공력, 세상적인 성공의 공력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예외 없이 다 타버리게 됩니다. 결국 남는 것이 하나도 없게 되고 상도 없게 될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 2가지 불 중의 하나는 소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 2가지 불이란 <현재의 성령의 불>, 아니면 <마지막 때의 심판의 불>입니다.
현재 성령의 불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미 태울 것은 다 태워버렸기 때문에 마지막 때의 심판의 불과 전혀 상관이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성령의 불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은 태워 없어져버릴 것들이 계속 남아있는 상태이기 때문에 마지막 때에 심판의 불을 통과해 수치스런 숯 덩어리와 같은 모습이 될 것입니다. 그런 상태로 주님을 만나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시라고 했습니다(히 12:29). 이 말씀은 우리를 위협하기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깨끗케 하는 하나님의 은혜가 담긴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결국 장래의 심판의 불을 미리 대비시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성령의 불이 마음속에 활활 타오르도록 기도하십시오. 자신의 모든 찌꺼기가 타서 없어질 때까지 기도하십시오. 그러면 성령의 불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는 실제적으로 어떤 모습이 나타날까요?
1) 심령에 사랑의 불길이 일어납니다. 그 불길은 미움과 이기심을 녹이는 불길입니다. 용암이 지나는 모든 곳을 녹여 하나로 만들 듯이 성령의 불길을 경험한 자마다 하나되기를 힘쓸 것입니다.
2) 우리의 인생의 엔진을 움직일 수 있는 추진력을 주고 교회의 엔진을 움직일 수 있는 추진력을 주게 될 것입니다. 성령의 불은 인간의 마음과 교회를 움직일 수 있는 유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불에 의한 열정, 성령의 다이나마이트를 추구하십시오. 영혼의 거룩한 열정을 추구하십시오. 긍휼한 마음을 추구하십시오. 죽기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추구하십시오. 소멸하시는 불을 추구하십시오. 그래서 이 세상을 살면서 어떤 불도 해치지 못하는 분으로 준비되시고, 마지막 때에 흰 세마포를 입은 아름다운 주님의 신부가 되기를 바랍니다.
성령으로 호흡하십시오
요한복음 20장 19-23절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요 20:22)
주님께서는 무대 체질이 아니셨습니다. 그저 꾸밈없이 진실하게 삶을 보여주셨고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행동에는 한번도 과장된 행동이 없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 특이한 행동을 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특이하지만 가식과 과장과 쇼맨십으로 포장된 장면은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의 강단에서 이루어지는 일부 모습에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즉 강단에서 의외로 가식이나 과장 및 쇼맨십이 많이 눈에 띤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모습이 많아지고 있다면 그 일차적인 책임은 강단을 맡은 자에게 있겠지만 성도들도 상당 부분 그 책임이 있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고, 듣는 것만으로 즐거움을 느끼는 성도들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인가 특이한 모습을 보일수록 잘 분별하는 것이 좋습니다. 가식과 과장과 쇼맨십은 재미를 줄 수 있어도 참된 길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에서 \"성령의 바람은 임의로 분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특이한 모습에 편견을 가지고 무조건 배척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주님의 행동은 특이했지만 그 안에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주일 저녁이었습니다. 두려워 문을 꼭 닫은 제자들에게 신비하게 등장하셔서 두 가지 말씀을 하셨습니다. 1)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과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서 성령 받은 사람에게 있는 위대한 두 가지 특징을 발견합니다. 하나는 \'평강\'입니다. 아무리 겉모습이 성령 받은 것처럼 보여도 마음의 평강이 없으면 성령 충만이 아니라 일시적인 감정 충만이라고 볼 수밖에 없습니다. 또 하나는 \"주님이 이곳에 나를 보내셨다\"는 \'소명의식\'입니다. 이 소명의식은 나의 현재를 지탱해주는 힘인데, 그것은 성령 충만의 뚜렷한 특징입니다.
그리고 난 다음에 주님은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습니다. \"성령을 받으라!\" 주님께서 단순히 쉴새없이 말씀을 하시다가 잠시 숨을 고르기 위해서 \'저희를 향해서 숨을 내쉬며\' 말씀하셨을까요?
아니면 교육효과를 조금 높이기 위해서 쇼맨십을 발휘한 것일까요? 그래서 \"휴... 성령을 받으라!\"라고 하셨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은 절대로 과장된 행동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하신 데에는 분명한 의도가 있을 것입니다. 그 의도가 무엇일까요? 이런 두 가지 의도가 있었을 것입니다.
1. 첫째, 숨을 내쉬고 들이마시는 행위를 통해서
성령을 받는 방법 및 성령 충만한 삶에 대한 실물교육을 하고자 했을 것입니다.
숨을 내쉴 때 육신적 삶을 내뿜고 숨을 들이마실 때 영적 삶을 받아들이는 삶! 성령론의 권위자인 심슨(A. B. Simpson) 박사의 말에 의하면 그런 삶은 성령 충만한 삶 중에서 가장 차원 높은 삶의 태도라고 합니다.
여러분! 호흡하는 것을 우습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 많은 성현들이 마음 자세를 가다듬기 위해서 호흡 자세부터 가다듬었을까요? 그 이유를 가볍게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만큼 호흡자세 및 호흡에 대한 태도는 중요한 것입니다.
왜 무술을 하는 사람들이 호흡을 중시합니까? 왜 단전호흡을 배우고, 왜 호흡훈련부터 시작할까요? 그들도 그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런 것을 너무 무시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하루에 일정 시간, 즉 기도할 때나 묵상할 때 잠깐 이런 훈련을 한 번 해 보십시오. 성령의 삶을 생각하고 숨을 들이시고, 육신의 삶을 생각하고 숨을 내뿜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서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저희 호흡은 당신의 것입니다. 호흡할 때마다 내 안에 들어오시옵소서. 이 시간 숨을 내뿜을 때 내 자신의 힘과 약점을 다 내보내면서 숨을 들이마실 때 당신의 놀라운 힘이 내 안에 들어오길 소원합니다.\"
그런 잠깐의 호흡훈련은 경건한 삶을 추구하려는 우리에게도 좋은 훈련 방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한 번 해 보십시오. 그런 훈련 때문에 갑자기 무슨 큰 능력이 나타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여러분들의 삶의 자세는 달라질 것입니다.
2. 둘째, 주님의 호흡을 친히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시려 했을 것입니다.
성령님은 결국 예수님의 영인데 예수님은 호흡이라는 상징적 행위를 통해서 그분 자신의 생명력이 넘치는 영을 제자들에게 불어넣으시려 했을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그분 자신과 동일시한다는 상징적 행위입니다.
이 행위가 주는 한 가지 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예수님을 떠나서는 결코 성령을 받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도 않았으면서 심지어는 알지도 못하면서 성령 받았다는 것! 그러한 현상은 충분히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님 없이 성령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은 결코 합당한 생각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것과 같은 비슷한 묘사가 성경에 몇 군데 있습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묘사가 주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1) 오순절날의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에 대한 묘사(행 2장)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것은 하나님의 호흡을 말합니다. 즉 하나님의 호흡에는 항거할 수 없는 에너지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2) 에스겔의 마른 뼈의 환상에서 사망한 자를 일으킨 생기의 영에 대한 묘사(겔 37장)
이 생기의 영은 하나님의 호흡입니다. 그 생기가 불자 마른 뼈가 일어나는 역사가 있었습니다. 인간의 가르침과 설교는 사회적이고 윤리적인 변화는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영적 삶은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오늘날 마른 뼈와 같은 교회가 많이 있다고 합니다. 말로는 성령 충만을 필사적으로 외치지만 그 필사적인 외침이 성령이 없음을 반증하는 현실도 우리를 가슴 아프게 합니다. 외적인 뜨거움 이상의 진정한 하나님의 생기가 심령에 불어닥치길 기도해야 합니다.
3) 인간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이 인간의 코에 불어넣은 생기에 대한 묘사(창 2장)
그 때 하나님의 호흡이 인간의 코 속으로 들어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줍니까? 우리의 삶은 동물적인 자극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호흡으로 주어진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우리의 영적 삶이 초자연적이고 신적인 것임을 보여주는 메시지입니다.
4) 니고데모와 대화할 때 성령으로 난 사람에 대한 주님의 묘사(요 3장)
그 때 주님이 니고데모에게 말했습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
이 말씀을 보면 성령으로 난 사람에 대해 주님이 말씀하신 뚜렷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 특징이란 말만 시끌벅적한 것은 성령 충만의 여부와 관계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가끔 마치 성령의 바람을 예측할 수 있는 것처럼 행동하는 분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그 분은 성령으로 난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령의 역사는 바람과 같이 신비한 것이고 감추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성령의 역사를 알 수 있을까요? 정답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손길을 자세히 느낄 수는 없지만 그것을 뒤따라오는 순결, 평화, 기쁨, 사랑의 열매는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복된 열매들을 통해서 성령의 역사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진정 오늘 이 시간에 하나님의 생기가 여러분들에게 임하여 여러분들의 영이 소생하고 열매 맺는 삶이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성령이 주시는 깊은 영성의 은혜
에베소서 1장 13-14절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인침\'은 계약적 용어이고, 법적 용어입니다. 인침은 어떤 의미를 내포하고 있을까요?
1. 인침이 내포하고 있는 첫 번째 중요한 의미는 <실제성>입니다.
\'인침\'이라는 말은 명확한 것이고, 뚜렷한 것이고, 눈에 보이는 것이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인의 경험을 실제적이고, 현실적이고, 의식적인 것으로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처음에 단순한 믿음을 가지고 소유하게 된 것이 점차 실제적이고 살아있는 경험으로 구체화되는 이유는 약속의 성령께서 인을 쳐주시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에는 다음과 같은 차원의 단계가 있습니다.
1) 1차원의 단계 용서와 구원을 단순한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단계입니다.
2) 2차원의 단계 말씀을 묵상하면서 현상을 말씀에 비추어보는 단계입니다.
3) 3차원의 단계 믿음이 시험을 통과하여 인정받게 된 단계입니다.
4) 4차원의 단계 성령께서 우리가 믿었던 것에 대해 분명한 증거를 보여주는 단계입니다. 그 증거란 심령에 전달되는 평화와 사랑과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한 증거가 있을 때 우리는 고백하게 됩니다. \"이제야 내가 믿는 주님이 어떤 분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하시고 인자하심이 영원하신 분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단계까지 나아가야 합니다.
1. 2차원의 단계는 믿고 생각하는 단계이고, 3,4차원의 단계는 깨닫고 확신하는 단계입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두 가지 인침을 얘기합니다.
1) 1,2단계는 우리가 인치는 인침입니다. \"그의 증거를 받는 이는 참되시다하여 인쳤느니라.\"(요 3:33) 2) 3,4단계는 우리의 인침에 대해 하나님(성령님)이 도장 찍으시는(인치시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엡 1:13)
하나님은 우리가 순수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받아들일 때 그 영적 감각을 성령의 인치심으로 구체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것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자기 안에 증거가 있고...\"(요일 5:10)
우리는 신을 받아들였다는 어떤 증거나 내적 감각을 추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것 없을지라도 먼저 믿게 되면 하나님은 분명히 그러한 증거나 내적 감각을 주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권하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느낌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대로 단순히 하나님을 기다리십시오.\" \"느낌을 추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을 추구하십시오.\" 참으로 잘하는 권고입니다.
그러나 신앙생활에서 느낌을 전혀 필요 없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을 마음속에 받아들인 후에는 느낌과 경험, 그리고 무수한 성령의 열매들이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분의 인을 쳤습니까? 그리고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확실히 인식하셨습니까? 그렇다면 하나님은 성령의 인치심으로 그 믿음과 깨달음을 구체화시켜줄 것입니다.
2. 인침이 내포하는 두 번째 중요한 의미는 <안전성과 확실성>입니다.
인침은 서류를 공인하고 계약이 성취될 것이라는 확신을 줍니다. 즉 성령께서는 사람들에게 충만한 믿음의 확신을 주는 분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 인치실 때 두려움이 영원히 사라지고 하나님의 약속으로 인한 놀라운 위로를 맛보는 경지에 들어서게 됩니다. 그 위로는 영혼의 닻같이 튼튼하게 견고한 위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내적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분은 갚아주신다!\"
주님은 \"너는 내 것이라!\"고 하시면서 언약 서류에 도장을 확고히 찍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을 \'나의 영원하신 친구\'라고 고백하며 찬송하는 것입니다. 친구란 누구입니까? 모든 사람이 떠나는 순간에 찾아오는 사람이 친구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곁에서 사람들이 떠날 때 오히려 우리 곁으로 오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함께 하시는 밤이라면 밤도 훤하게 느껴집니다.
그러한 성령님의 인침이 있기 때문에 축복을 확신하고 기다릴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마르는 것 같지만 끊이지 않는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대개 \'한꺼번에 주는 축복\'이 아닙니다. 한꺼번에 주시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축복과 하나님을 바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큰 축복\'이 좋은 것이 아니라 \'끊어지지 않는 축복\'이 좋은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축복은 예상하지 못한 때에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엘리야에게 보낸 까마귀처럼 우리에게도 난데없이 까마귀를 보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절대 실망하지 말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해결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어느 순간에 갑자기 해결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그런 사실을 알기에 쉽지 않은 인생 여정에서도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성령의 인치심은 이 안전에 대한 확신을 줍니다.
3. 인침이 내포하는 세 번째 중요한 의미는 <유사성과 동일성>입니다.
도장으로 인을 칠 때 종이에 도장의 모습을 나타나는 것처럼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실 때 우리 안에 예수님의 모습이 구체화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만들어 나아가십니다. 이것이 바로 인침이 주는 놀라운 은총입니다.
우리 성령님은 인을 치시고 우리는 변화시켜 나가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 속에서 끊임없이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합니다. 세상에 스타가 많이 있지만 우리는 하늘의 스타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성령께서 사람의 심령에 인을 치시면 성령의 형상이 그 심령에 남아서 언어가 달라지고 사는 자세가 달라지게 됩니다. 언어와 삶이 다른 사람을 위한 언어와 삶으로 바뀌어지게 됩니다. 성령 받고 그런 변화된 모습을 갖추는 것은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는 작은 은혜가 아니라 큰 은혜입니다. 작은 은혜는 \'분리의 은혜\'이지만 큰 은혜는 \'감싸안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작은 은혜는 율법주의자를 만들지만 큰 은혜는 사랑의 사도를 만듭니다.
어느 날 프랜시스가 거주하는 수도원에서 금식 기간 중에 누군가 죽을 훔쳐먹자 프랜시스의 제자들이 열을 올리며 분개했습니다. \"이런 괘씸한 자들이 있나!\" 그 모습을 보던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얘들아! 죽을 가져와라! 같이 먹자!\" 제자들이 묻습니다. \"선생님! 금식 기간 중에 죽을 먹다니요? 그래도 됩니까?\" 그러자 프랜시스가 말했습니다. \"죽 먹은 사람 정죄하다가 은혜 다 까먹는다. 먹자. 우리가 먹고 다 하나되자!\"
나의 의로움이 남을 정죄하는 자리로 발전한다면 그 의로움을 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차라리 의가 부족한 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데에는 더 낫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의로운 바리새인보다 죄 많은 세리를 칭찬하신 것이 아니겠습니까?
성도들의 모습을 보면 은혜를 적게 받으면 그것 가지고 남을 판단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크게 받으면 말이 달라집니다. \"내 잘못입니다. 나의 기도 부족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입을 다물고 남의 허물을 덮어씁니다. 이것인 깊은 영성입니다.
성령께서 인을 쳐주시면 이런 깊은 영성의 은혜가 주어지게 됩니다. 항상 성령의 은혜로 부족과 허물을 감싸안고 가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
사도행전 1장 8절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다이나마이트)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
이 구절에 나오는 권능이라는 단어의 헬라어에서 오늘날 강력한 폭발물을 상징하는 다이나마이트라는 단어가 유래되었습니다. 즉 성령님은 하나님의 강한 다이나마이트이고, 성도와 교회의 영적 능력의 원천이라는 말입니다.
우리에게 능력은 참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은 도덕적으로 영적으로 약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죄와 유혹에서 우리는 너무 자주 무너지지 않습니까?
우리는 나쁜 본능과 본성을 통제하기도 힘들고 이기기도 힘듭니다. 외적 습성인 술이나 담배를 끊는 것도 매우 힘들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 상황에서 내적 습성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얼마나 더 힘들겠습니까?
이런 점을 염두에 둘 때 우리는 한 가지 교훈을 얻게 됩니다. 그것은 남을 변화시키려고 혈안이 되지 말자는 것입니다. 자세히 보면 그것처럼 교만한 일도 없고, 어리석은 일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변화시켜 보겠다고 선생님의 입장에 서서 항상 가르치는 말투가 나오는 사람은 아마 가장 무지한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한 습성을 볼 때 우리가 가장 우선적으로 할 일은 무엇입니까? 부족한 그를 이해하고 성원하고 그를 위해 기도하는 일입니다. 사람은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본성은 하나님이 주신 것인데 그 본성을 어떻게 자기 스타일로 바꿀 수 있겠습니까?
사람의 물리적 변화는 가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의 화학적 변화는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원하셨고, 그 구원에는 죄와 본능을 이길 수 있는 신적 능력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 능력을 주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능력을 주실까요?
1. 첫째, 성령님은 나 자신을 흔들리지 않게 하는 능력을 줍니다.
그렇게 하고 나서 다른 어떤 일을 행하거나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의 인격적인 성품이나 도덕적이고 영적인 승리는 우리의 증언이나 사역보다 훨씬 중요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순결하고 아름다운 삶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을 차원 높은 그리스도인의 삶으로 성공적으로 인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우리들의 무엇으로 감동 받습니까? 우리들이 순결하고 선한 삶을 사는 것으로 감동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죄를 이기고, 선, 사랑, 인내, 자기희생과 같은 삶을 드러내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2. 둘째, 성령님은 고통스런 환경을 이겨낼 수 있는 능력을 줍니다.
고통 속에서도 불굴의 용기와 기쁨을 가지고 불평하지 않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서 부드러움과 온유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님의 능력 때문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한 가장 위대한 승리의 모습은 고통스런 환경을 인내로 극복하는 모습 속에서 잘 드러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가지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다음과 같은 깨달음을 주시면 그런 모습을 가질 수 있습니다. 1) 나의 출발지가 흙이었다는 사실! 2) 하나님은 지금까지 나에게 주신 것이 많다는 사실! 3) 이해할 수 없는 불행의 배후에도 하나님의 뜻이 있다는 사실!
어떤 집회에서 성령세례를 받은 한 조용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 후 여인의 삶에 나타난 변화는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그녀는 좋은 아내가 되었고 좋은 어머니가 되었으며 가족과 친지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남편을 잃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평온한 모습을 잃지 않았습니다. 성령께서 그녀의 마음에 위로를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변화된 자의 모습이 성령 충만한 모습이 아니겠습니까?
3. 셋째, 성령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우리에게는 주님과 세상을 위해서 할 일이 많이 있습니다. 그 일 중에서 쉬운 일은 별로 없습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능력을 주십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기쁨을 가지고 하는 것입니다.
어떤 여대생에게 고민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전도를 못하는 고민입니다. 그래서 목사님을 찾아가 그 문제에 관해 상담했습니다. 그러자 목사님이 그녀에게 말했습니다. \"자매님! 이제 전도하지 마십시오. 마음의 평화를 먼저 찾으십시오.\" 하나님의 일은 허우적거리며 하지말고 당연히 해야 할 일로 알아야 합니다. 그러면 자연히 마음에 기쁨이 넘치는데 성령께서는 그런 감동을 주십니다.
우리 마음에 사랑의 불을 붙이는 것, 우리들의 영혼에 믿음을 주는 것, 우리들의 언어에 거룩한 기름 부으심을 주는 것과 같은 행동을 통해서 사람들은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되고 주님의 은혜를 보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은 회개하여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게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가장 필요한 것은 성령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이 능력을 받기 전까지는 그분의 사역을 본격적으로 시작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하늘로부터 임하는 능력을 진심으로 사모해야 하지 않습니까?
성령님이 보증하시는 4가지 은총
에베소서 1장 13-14절
\"이는 우리의 기업의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엡 1:14)
인친다는 것이 법적인 용어인 것과 유사하게 보증이라는 것도 법적 서류 및 사업계약과 관련인 용어입니다. 초대교회 당시, 어떤 땅 매매가 이루어졌을 때 파는 사람은 그 땅에서 채취한 흙을 부대에 담아주었습니다. 이 흙 부대는 보증으로 그 땅의 일부분만 전달된 것인데 약속한 때에 계약한 대로 계약한 전체 땅을 넘겨주겠다는 표시입니다. 그러므로 보증은 아주 일부분이지만 \'받을 것의 일부분\'을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받을 것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성령의 인치심이 우리 기업의 보증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이 말씀은 장래에 약속된 모든 축복을 주시겠다고 보증 및 서약을 하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묘사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놀라운 영적 기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냥 약속만 믿고 의지하라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 기업의 일부분을 우리에게 주시고 누리게 하십니다. 그 주시는 일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보증인으로서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보증하는 것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요?
1. 성령님은 성결의 은총을 보증하십니다.
이것은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상 최대의 기쁨, 지상 최대의 축복은 바로 이 성결함입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거룩한 삶을 살게 도와주십니다. 그래서 천상의 삶을 부분적으로 이 땅에서 누리게 하십니다.
어떤 삶이 성결한 삶일까요? 소유 중심의 삶이 아니라 존재 중심의 삶이 바로 성결한 삶입니다. 또한 물질을 지키는 삶이 아니라 인격을 지키는 삶이 성결한 삶입니다. 존재 중심의 성결한 삶은 평안과 용기의 원천입니다. 그러므로 성결한 삶은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 아닌 것처럼 보여도 대단한 삶의 파워를 주는 인생 승리의 원천입니다.
2. 성령님은 치유의 은총를 보증하십니다.
성령님은 완벽하고 영원히 썩지 않는 육체적 삶을 보증하십니다. 그 기업의 일부분이 오늘날에도 우리들에게 주어집니다. 그 기업이란 바로 신유를 통한 건강한 삶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천국에 가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원에는 보다 차원 높고 건강한 육체적인 삶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유의 은총을 통해 건강을 체험할 수 있으며, 삶의 활력을 전달받을 수 있습니다. 불멸성과 영광의 보증인이신 성령님을 모시면 이 땅에서도 미래의 영원한 삶의 부분적 맥박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은총으로 장래 유산을 앞당겨 쓸 수 있는데, 그런 의미에서 신유는 주님 재림하시기 전에 우리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삶의 조그마한 심장박동\'같은 것입니다.
어떻게 신유가 가능할까요?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생명의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 생명을 나누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은혜는 언제나 우리 영혼에서 육체까지 미쳐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이 하나님께 열려 있을 때 우리의 육체는 치유의 은총을 경험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렇지만 주의할 사실이 있습니다. 믿음이 꼭 신유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신유가 신앙의 척도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꼭 잊지 말아야 할 사실도 있습니다. 그것은 건전한 신앙의 재건은 신유의 역사를 강화시킨다는 사실입니다.
3. 성령님은 지혜의 은총를 보증하십니다.
고전 13장 12절에는 엄청난 지적 능력을 가질 때의 삶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주님 재림하실 때 엄청나게 우리의 지적 능력이 확대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다른 모든 기능과 능력이 하나님의 영광을 완전히 드러낼 수 있기까지 확대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땅에서도 그 부분적인 맛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령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셔서 우리의 지적 능력을 탁월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의 지혜는 이성의 지혜가 아니라 말씀의 지혜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이성이 하나님의 말씀에 포로가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4. 성령님은 회복의 은총을 보증하십니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 모든 환경에서 죄의 저주는 사라지게 될 것이고 자유와 평화와 행복이 넘치는 환경이 온 우주에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자연의 모든 힘은 인간의 마음에 의해 완전히 통제될 것이며, 인간 사회의 행복과 복지에 공헌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낡은 지구는 온전히 회복된 땅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회복된 삶의 부분적인 맛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겨울의 딱딱한 껍질 아래의 싹을 통해 여름의 만발한 꽃을 상상할 수 있듯이 겨울과도 같은 이 세상에서도 우리는 봄의 징조를 찾을 수 있듯이, 성령을 통해 새로운 창조에 대한 회복의 은총을 보증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더욱 중요한 회복의 은총이 있습니다. 그것은 현재 우리와 관계된 삶에서의 주어지는 회복의 은총입니다. 예를 들어, 물질적으로 손해를 보았습니까? 저는 욥에게 나타난 예가 실제적으로 적용될 수 있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음은 잃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는 2배의 회복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자녀의 문제로 인해 심히 고민이 되십니까? 그러한 삶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삶이 아닙니다. 역시 우리가 믿음을 잃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자녀를 통해 2배의 기쁨을 주실 것입니다.
성령님께서는 우리의 영원한 기업의 보증이 되시고 이 땅에서 우리의 영원한 기업의 부분적인 맛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항상 성령님과 동행하심으로 성결, 건강, 지혜, 회복의 은총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거룩한 삶은 복 중의 복입니다
고린도전서 6장 9-11절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고전 6:11)
거룩한 삶은 복중의 복입니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싶어합니다. 문제는 그렇게 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떻게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셔야 합니다. 사람을 거룩하게 하는 것은 성령님의 주된 사역입니다. 그러면 어떤 단계를 거쳐 성령님께서 우리를 거룩하게 하실까요?
1. 먼저 성도 안에 책망의 영을 부어주십니다.
이 말은 죄책감을 가지라는 말이 아닙니다. 성도가 책망의 영을 가지는 것과 죄책감을 가지는 것은 다릅니다.
죄책감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죄악된 행동을 자꾸 집착해 생각하게 만듭니다. 2) 어려움과 문제를 죄악된 행동과 자꾸 결부시킵니다. 3) 죄로 인한 형벌을 생각하며 두려움에 빠집니다. 4)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결여시킵니다.
성도에게 책망의 영이 주어질 때 특징은 무엇입니까? 1) 죄악된 행동과 수치스런 행동 하나하나에 시달리지 않습니다. 2) 우리 안에 깊이 잠재한 죄성에 대해 눈을 뜹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을 폭넓게 받아들입니다. 죄책감에 빠진 사람은 훔친 행동만 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책망의 영을 가진 사람은 탐욕 자체를 죄로 생각합니다. 4) 진정으로 회개하는 마음을 가지게 됩니다. 5) 그리고 하나님의 긍휼에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때로 책망의 영이 주어질 때 영혼은 자신에 대해 실망하기도 합니다. \"나는 정말 극도록 부패했구나! 나는 정말 어찌할 수 없는 죄인이구나!\"
그래도 성령님께서 책망의 영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사랑하지만 눈감고 넘어가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령님께서 주시는 책망의 영은 우리 안에 있는 훈련교관입니다. 그래서 우리 안의 불순물을 보게 하십니다. 그것이 거룩함의 출발점입니다.
2. 책망의 영에 의해 자신의 죄성을 발견하면 그는 구원과 거룩함의 기쁨 가운데 온전히 살고자 더 이상 죄를 않겠다는 희망적인 각오를 합니다.
이러한 각오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는 속사람이 하는 각오입니다. 그러나 겉사람이 그 법을 사로잡아 죄를 짓게 만듭니다. 그 사실을 뻔히 알면서도 죄에 당하며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모습은 자기 혼자 죄와 싸워 얻은 결과의 실상입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혼자 죄악과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그 죄악과의 싸움을 홀로 감당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혼자 죄악과 싸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절망 중에 사도 바울처럼 외치게 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이 철저한 자기 발견은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촉매제가 됩니다.
3. 그리고 나서 성령님께서는 거룩하게 되는 방법을 계시해 주십니다.
이 계시가 유명한 로마서 8장 1-2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이 구절에는 두 개의 법이 나옵니다.
1) 하나는 죄와 사망의 법입니다. 이 법은 우리를 타락시키고 우리의 저항능력을 무력화시킵니다. 이 죄와 사망의 법은 중력의 법칙과 같아 그냥 놔두면 잔이 떨어져 깨집니다.
2) 그러나 또 한가지의 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생명의 성령의 법입니다. 이 법은 새로운 중력의 법칙과도 같습니다. 그래서 떨어지는 잔을 손으로 잡아 깨지지 않게 합니다. 성령께서는 영혼을 떨어지지 않게 새로운 중력의 법칙으로 붙잡아 줍니다.
4. 그리고 성령님의 은총은 영혼을 붙잡아 주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성령께서는 그 다음 단계까지 나아가십니다. 그 단계가 로마서 8장 2절 이후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즉 성령님은 인간의 영혼을 붙잡아 주시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친히 그 영혼을 인도해주십니다. 그래서 영을 따라 행하게 하시고(3-11절), 아들의 확신을 주시고(13-17절), 장래의 영원한 기업을 보증하시고(18-25절), 우리의 기도까지 도와주십니다(26-30절). 그래서 로마서 8장은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위대한 선포로 끝이 납니다(31-39절).
이 인도받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령의 의해 깨달아지는 말씀입니다.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요 17:17) 즉 아버지의 말씀으로 우리가 거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겉으로는 아무 변화도 없는 것 같지만 실질적으로는 말씀이 우리를 소리 없이 변화시켜 가고 있습니다.
오늘날 성결 문제로 신학자들이 대립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성결은 순간적인 체험인가, 아니면 점진적인 체험인가?\"하는 문제 때문입니다. 체험신학자들은 순간적인 체험을 중시합니다. 반면에 자유신학자들은 점진적인 체험을 중시합니다. 그러나 거룩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는 이 두 가지가 다 필요합니다. 성령께서 순간적으로 새로운 중력법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붙들어주시고, 그리고 점진적으로 말씀의 깨달음을 통해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셔야 합니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예수님이 어떻게 표현되어 있습니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우리에게는 은혜(순간적인 체험)와 진리(점진적인 체험)가 다 충만해야 합니다.
또한 요한복음 4장 24절에는 이런 예배를 권고합니다.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지니라.\" 우리는 항상 예배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데 신령함(순간적인 체험)을 추구하며 살아야 하고, 동시에 진정함(점진적인 체험)을 추구하며 살아야 합니다.
여러분들은 이 두 가지 체험을 다 소유하셔서 진정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는 복 중의 복을 소유하시기를 바랍니다.
과거의 상처에 집중하지 마십시오
로마서 8장 11절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로마서 8장 11절은 두 번이나 성령을 \'살리시는 분\'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미래의 부활을 주시는 성령님, 즉 죽은 성도의 몸을 살리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더욱 타당한 해석은 현재 살아있는 성도의 영혼과 육신을 더욱 활력 있게 만드는 성령님의 사역으로 해석하는 것입니다.
\'살린다\'라는 단어가 꼭 죽은 몸의 소생을 의미하는 단어는 아닙니다. 로마서 4장 17절에서 \'죽은 자를 살리시며\'라는 말에서 \'살린다\'는 말은 아브라함이 자녀를 낳게 될 수 있게 된 상태를 말합니다. 즉 성경에서 \'살린다\'라는 단어는 약하고 병든 몸에 활력이 넘치고, 원기가 회복되고, 감각이 되살아나는 것을 의미하는 단어로도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살린다라는 말은 1) 육체와 영혼을 깨끗하게 하고 2) 강하게 하고 3) 활력이 넘치게 한다는 말을 내포하고 있는 뜻입니다. 즉 성령님은 우리의 육신을 정화시키고, 강하게 하고, 활력이 넘치게 합니다.
육신의 삶을 생기 있게 만드는 진정한 원천은 무엇일까요? 육신의 삶의 힘의 원천은 신경의 힘이나 근육의 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닙니다. 음식, 공기, 세포조직에서 비롯된 것도 아니고, 약에서 비롯된 것도 아닙니다. 그것들이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맡고는 있지만 육신적 삶에 생기를 주는 진정한 원천은 될 수 없습니다. 육신의 삶에 생기는 주는 진정한 원천은 성령으로 말미암은 초자연적 생기입니다.
육신적 삶의 원천이 성령이 사실을 알려주는 성경의 예가 있습니다. 바로 사사기에 나오는 삼손의 예가 그것입니다. 그의 힘은 그의 근육과 뼈 혹은 몸무게와 덩치에서 나온 힘이 아니었습니다. 삼손의 힘은 성령으로부터 나온 힘이었습니다. 성령이 삼손에게 임했을 때, 그는 놀라운 힘을 얻고, 수많은 적을 물리쳤습니다. 그러나 성령이 삼손을 떠났을 때, 그는 어린아이처럼 약해졌고 결국 적에 의해 눈멀고 놀림감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이 없는 육신은 불씨만 남기고 꺼져버린 벽난로와 같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옆에 가도 전혀 온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불씨만 남은 꺼져버린 벽난로에 휘발유를 뿌려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면 불이 타올라 얼마나 실내가 따뜻해집니까? 우리의 육체가 꺼져버린 잿더미 같을지라도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시면 우리는 생명력 있는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이 진리는 단순한 진리이지만 아주 놀라운 비밀을 간직한 진리입니다.
요즘 교회에서는 \'내적 치유\'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그 내적 치유는 \"과거가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는 현대 심리학의 연구에 논리적인 근거를 두고, 신앙상담에 많이 활용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적 치유학에서는 과거의 상처가 사람들의 성격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쳐 사람들을 우울한 사람, 자신감이 없는 사람으로 만들고 결국 하나님의 은혜가 막히기 때문에 그 상처를 치유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우울한 사람,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과 상담할 때 과거에 상처받았던 일을 떠올리게 하고, 그것을 현재의 모습과 연관시키며, 심지어는 모태에서 받은 상처까지 얘기하며 현재를 진단하기도 합니다. 그러한 상담을 들은 사람은 마치 어떤 새로운 진리를 깨달은 것 같습니다. \"아! 내가 그래서 이런 성격을 가지게 되었구나!\" 그런 깨달음과 함께 자기가 원래부터 나쁜 피를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심이 되고 위로를 얻게 됩니다. 이것이 내적 치유 상담의 긍정적인 효과입니다.
그러나 과거의 상처와 현재의 성격이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그것이 현재의 고쳐야 할 성격 문제를 실제적으로 고치는 데 도움이 될까요? 이 질문은 매우 중요한 질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잘못된 성격을 어떻게 바꾸느냐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분은 과거의 상처를 치유한다고 하면서 과거의 상처로 인한 영향력을 귀신으로 역사로 생각하고 축사(逐邪)를 합니다. 그런 식으로 열심히 내적 치유 기도를 했는데 사실상 성격이 달라지지 않고 원래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왜 그럴까요? 현재를 치유해야 하는데 과거를 치유한다고 하니 과연 옳은 방향일까요?
어떤 성격에 대해 과거의 원인을 찾는 것이 이론적으로는 타당할지 몰라도 그것이 지나치면 오히려 \'사단의 양심\'을 지나치게 자극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항상 문제가 생길 때마다 과거의 잘못과 상처를 떠올리게 되고, 그런 식으로 과거의 상처를 지나치게 떠올리면 오히려 해결은 더 어렵게 됩니다. 그러므로 현재의 행동, 증상을 과거의 상처나 기억으로 이해할 수 있다는 이론, 즉 심리학자 프로이트의 <정신결정론>이 이론적으로 맞는 이론일지는 몰라도 그 이론을 너무 좋아하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현재를 결정한다\"는 이론을 따르기에는 우리의 현재의 삶과 우리 앞에 펼쳐질 미래의 삶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이 내 속에 없는 사람은 과거가 현재를 붙잡고 압박할 수 있지만 성령이 내 속에 있는 사람에게는 과거의 상처는 흩어지는 미망에 불과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과거라는 발목에 붙잡혀서 찬란한 미래, 보증된 미래의 영상이 희미해집니까?
그러므로 미래를 향해 힘차게 나아가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급선무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령 충만을 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령은 살리는 영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현재 나의 삶에 살리는 영이신 성령 충만함을 받는 것이 과거의 상처가 나에게 어떤 영향력을 미쳤다는 사실을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 내 외모 때문에 정말 위축된 삶을 살았습니다.\" 반면에 다른 분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외모는 부족해도 즐겁게 살아야지요. 웃고 사니까 사람들이 좋아하던데요.\"
성령 충만한 삶은 현재의 삶에 생기와 활력을 불어넣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과거의 상처에 집중하며 살지 마십시오. 성령 충만한 은혜로 현재를 활기차게 살아가십시오.
말씀을 경험하십시오 요한복음 14장 16-17절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우주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자세히 귀를 기울이면 수많은 하나님의 음성을 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그림을 그렸을 때, 그 그림에는 내가 의도하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마찬가지고 하나님의 창조물에는 하나님의 음성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의 음성 중에서 지상 최대의 음성이 있습니다. 바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성경은 모든 진리의 영적 표준입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말씀과 절대 모순된 입장을 취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령에 의해 철저히 인도되는 사람들은 항상 성경 말씀의 권위를 절대적으로 존중하며 성경의 원리와 가르침을 철저히 따릅니다.
그렇다면 성경과 관련된 성령님의 역할은 무엇일까요?
첫째, 성령님은 성경 말씀에 대한 해석을 줍니다.
빛이 있는 것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빛을 볼 수 있는 시각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라는 시각기관이 없으면 빛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이 있는 것만 가지고 있어서는 안됩니다. 그 말씀 속에 있는 진리를 볼 수 있는 영적 시각기관이 있어야 합니다.
그 영적 시각기관이 무엇일까요? 그 시각기관 역할을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래서 성령께서는 말씀을 실제적으로 만들고 그림처럼 생생하게 만드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보다 그리고 우리의 손으로 만지는 것보다 더 생생하고 확실하게 부각시키는 역할을 하십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령께서는 말씀에 대한 가장 위대한 주석책 역할을 합니다. 누가 말씀을 가장 잘 해석할 수 있습니까? 말씀을 주신 그분 자신이 가장 잘 해석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언뜻 생각합니다. \"목사님은 성경을 해석해야 하기 때문에 주석집을 많이 보겠구나!\" 물론 주석책을 멀리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없다면 많은 주석집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둘째, 성령님은 실제적으로 그 말씀을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말씀의 실제적인 적용을 위해서는 2가지가 필요합니다. 하나는 \'말씀에 대한 머리의 기억\'과 \'말씀에 대한 마음의 기경\'입니다. 이 2가지를 위해서 성령님의 도우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먼저 성령님께서는 필요한 때에 필요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적절한 때에 \'인도하는 빛\'으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시고 유혹을 받는 때에 \'방어하는 칼\'로 말씀을 기억나게 하십니다. 어떤 유능한 국회의원에게 어떤 사람이 질문을 했습니다. \"의원님처럼 바쁜 분이 어떻게 땀을 흘리지 않고 논의되고 있는 주제에 관한 책을 그렇게 잘 찾습니까?\" 그 국회의원이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도서관 사서가 그 일을 완벽하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제가 하는 일은 논의되고 있는 주제와 관련된 권위 있는 책을 찾아달라고 그 사서에게 쪽지를 보내는 일 뿐입니다. 그러면 사서가 즉시 알맞은 책과 필요한 신문기사를 찾아와 전달해줍니다.\"
그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때마다 적절한 말씀을 전해주고 기억하게 하시는 위대하신 사서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나 말씀이 기억이 날지라도 마음이 사막이면 말씀이 적용이 되어 싹이 나고 열매를 맺을 수가 없게 됩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는 길가밭, 돌밭, 가시떨기밭과 같은 마음을 말씀을 듣고, 깨닫고, 결실할 수 있은 옥토밭으로 만드십니다.
그처럼 성령님은 우리에게 성경의 의미를 알려주실 뿐만 아니라 모든 삶의 필요에 맞추어 가장 적절한 시간에 그 말씀을 실제적으로 적용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셋째,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결과적으로 우리에게 위로와 용기와 희망을 줍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통해 우리의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예수 안에서 받아 누려야 할 기업의 영광과 풍성함이 무엇인지, 우리를 위한 주님의 능력이 얼마나 크신지 알려주시는 분입니다.
이 성령님이 말씀을 조명하시는 효과에 대해서 가장 장엄하고 위대한 말씀이 묘사된 본문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1장 17-21절 말씀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그의 힘의 강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이 구절을 통해서 진정으로 조명되어야 할 부분은 우리의 지성의 눈이 아니라 마음의 눈임을 발견하게 됩니다. 우리 마음을 계시의 성령이 찾아올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소망과 우리가 가진 기업의 풍성함에 눈을 뜨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히브리서 5장 13절에 있는 \'말씀을 경험하는 단계\'입니다.
신앙생활에서 꿈, 환상을 체험하는 것보다 말씀을 경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즉 꿈과 환상과 비교하여 말씀에 대한 상대적인 가치를 이해해야 합니다. 예레미야 23장 28-29절 말씀이 있습니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이 말씀에서 하나님의 꿈(몽사)은 겨에 지나지 않고, 말씀은 밀이라고 합니다. 말씀에 영양가가 있어서, 말씀을 먹을 때 우리의 영혼이 자라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만약 우리가 밀과 같은 말씀을 겨와 같은 꿈으로 대치해버린다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는 영적으로 굶어 죽어버릴 것입니다.
오늘날 신앙생활에서 목격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더 소중한 것\'을 \'덜 소중한 것\'과 바꾸어서 신앙 생활하려는 것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것을 가지고 지나치게 탓할 일은 아닙니다. 도박이 나쁘다는 것을 모르고 도박하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도박이 나쁜 줄 알면서도 재미있으니까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꿈과 환상에 이끌리는 인간의 모습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성령님께서는 말씀의 참된 가치에 눈을 뜨게 하십니다. 그래서 가치 있는 길, 소중한 길을 붙잡고 따라가게 하십니다. 항상 성령님을 힘입어 진리의 길을 따라갈 수 있는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유나이티드 신대입니다. 주일(10월17)자료입니다.

깊어가는 가을
아름답게 채색되는 나뭇잎
그 잎새의 화려함만큼
은혜로운 역사가 강단마다 풍성하시기를 기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