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의 땅을 바라바 봅시다 외 15편

1.제목 :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

본문 : 창-13-10-18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는 촌에서 일하는 한 여인이 땅을 지키려는, 빼앗긴 땅을 찾으려는 고투가 생생히 그려져 있습니다. 이 소설을 집필하는데만 26년이 걸렸고 3만매가 넘는 대서사시입니다. 여기서 토지는 삶의 터전으로 목숨과도 같은 것입니다.

 

  모든 식물은 땅에 뿌리를 내려야 살 수 있습니다. 모든 동물도 땅은 생존의 바탕이 됩니다. 여기엔 사람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전쟁은 땅을 빼앗으려는 땅을 지키려는 사람들의 갈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땅은 생활 습관, 문화, 감정과 정서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추운 북극지방에 사는 사람과 더운 적도지방에 사는 사람은 주거, 의상, 문화, 모든 것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거기 사는 식물도 다르고 똑같은 식물이지만 맺는 열매도 다릅니다.

 

  우리나라 한반도는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강대국들의 틈바구니에 놓인 땅입니다. 바로 그 지정학적인 위치가 우리민족의 역사를 만들어 왔습니다.

 

  오늘 본문은 아브라함과 롯 가족안에서 땅 때문에 생긴 갈등, 그 갈등을 해결하는 이야기, 그 갈등을 멋지게 해결했을 때에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을 그려가고 있습니다.

 

  본문 10절에서 “롯이 눈을 들어 땅을 보았다”고 기록했고, 14절에서는 “아브람이 눈을 들어 땅을 보았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땅을 보느냐?  어떤 땅을 얻느냐 여하에 따라 축복의 사람이 되기도 하고 저주의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땅을 얻어야 합니다.

 

  복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주시는 약속의 땅을 얻는 것입니다.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입니다.” 말씀했을 때 - 여기 땅은 하나님이 주시는 분복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가 누려야될 영광의 땅을 얘기하고 있습니다. 내 주변에 사람들을 보내서 사람을 얻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환경과 공동체를 얻는 이야기입니다.

 

  성경에 약속된 모든 삶의 능력이 내 것이 되는 축복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 있는 땅만 보고 사는 사람은 땅의 사람입니다. 영원한 땅을 보고 하늘의 땅을 보고 살아가는 사람은 하늘의 사람입니다.

 

  여기 “본다”는 것은 비전이요 가치관입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위해 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영적인 수준입니다. 믿음입니다. 가치관입니다. 인생관입니다.

 

  은혜의 영성 시리즈를 마치고 복의 근원 시리즈 그 두 번째 시간입니다.

 

첫 번째 시간에 「복의 근원이 되리라!」는 말씀을 상고해 보았습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약속의 땅을 바라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본문 아브람의 목자들과 롯의 목자들이 땅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을 때에 아브람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 문제를 해결합니다. “네가 우하면 내가 좌하고 니가 좌하면 내가 우하리라.” 너 좋은 대로 선택하라는 이야기겠지요.

 

  조금 전까지만 하더라도 땅 문제 때문에 깊은 갈등을 겪었던 아브람 가족, 특별히 이런 넉넉한 여유를 누릴 수 있었던 말입니까?

 

  우선 생각해 보면, 네가 잘되는 것이 내가 잘되는 것이고 내가 너를 사랑하니 너에게 양보하겠다는 이야기 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목축업을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목초지를 양보한다고 하는 것은 생명을 내어놓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흔쾌히 목초지를 양보합니다. 이토록 놀라운 여유가 어디서 나왔단 얘기일까요?

 

  이 땅을 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은 이렇게 더 큰 것을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에 있어서는 여유가 있었습니다. 햇빛아래 살아가는 사람은 촛불 정도는 쉽게 양보할 수 있는 것이지요. 하나님께서 주시겠다는 약속의 땅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아브람은 알고 있었습니다. 조카와 갈등을 겪으며 빼앗는 땅 정도는 아닐 것이다. 이 세상에서 싸움에서 얻는 정도의 땅은 아닐 것이다. 내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내가 꿈도 꿀 수 없는 굉장한 것이고 어마어마한 것이라는 사실을 아브람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작은 것에서는 양보할 수가 있었던 것이지요.

 

  말씀과 믿음에 바탕을 두고 긍정적으로 문제를 해결한 아브람에 반해 믿음이 없었던 롯은 하나님을 선택하기보다는 땅의 욕심을 선택했습니다. 물질을 선택했습니다. 세상적인 행복을 추구해 갔습니다.

 

  그래서 본문 10절에 보면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 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여기 세 가지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 땅이 어떤 땅인지 ① 물이 넉넉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양을 먹이기에는 안성맞춤이라고 판단했겠지요. 물이 많으니 풀이 많았을터이고, 넉넉한 목초지에서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② 여호와의 동산과 같았다. 마치 에덴동산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③ 애굽 땅과 같았다. 아브람을 따라 애굽에 내려갔을 때에 라일 강변에 펼쳐진 도시의 화려함을 보았던 터이라 이 정도 땅이면 도시 문명의 화려한 꽃을 피우고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땅이 어떤 땅이었습니까?  소돔과 고모라! 역사적으로 가장 무서운 심판을 받았던 땅이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는 화려하고 매력 있는 도시지만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이 없었습니다. 단지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행복을 약속해 줄 것 같은 착각을 주는 도시일 뿐이었습니다.

 

  이러한 유혹이 롯에게만 있을까요? 우리가 주거지를 선택할 때 세상 사람들과 다른 어떤 판단의 기준이 있습니다. 집 값이 오를만 하기 때문에, 또 학군이 좋기 때문에, 이것이 유일한 기준이라고 하면 여러분은 세상사람들과 어떤 면에서 다릅니까?

 

  일전에 싱가폴에 들렸을 때에, 한 젊은이는 내가 어디에 가면 복음을 마음껏 전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가면 우리의 셀이 부흥할 수 있을 것인가? 어디에 가면 셀을 개척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유일한 그의 가치관이었고 주택을 선택하는 판단하는 기준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직업을 선택하고 직장을 선택하는 기준이 무엇입니까? 제가 졸업한 거창고등학교에서 졸업하는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직업 선택 10계명이라고 하는게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이런 내용들이 나옵니다. 월급이 적은 쪽을 선택해라. 월급이 많고 적음이 내 인생을 가늠해서는 안되겠다는 얘기겠지요. 왕관이 아니라 십자가가 있는 곳, 단두대가 있는 곳으로 가거라. 소명을 따라 살라는 얘기겠지요. 네 아내가 한사코 말리면 틀림없다. 그곳으로 가거라.

 

  결혼을 위해서 배우자를 선택할 때에 또 우리의 집안에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에 세상사람들과 다른 어떤 기준이 있습니까? 가치관이 있습니까? 어떤 면에서 당신은 세상 사람들과 다릅니까?

 

  롯의 실수는 잘못된 가치관으로 잘못된 땅을 보았고 잘못된 땅을 찾아간 것만은 아니었습니다. 롯의 비극은 아브람을 떠난데서부터 시작이 되어졌습니다. 롯은 아브람을 떠나면서 세상을 선택해 달려갔습니다. 왜 아브람을 떠난 것이 그의 비극이 되는 것입니까? 아브람은 복의 근원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복 덩어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브람은 축복의 사람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축복의 사람을 만나는 것, 기도의 사람을 얻는 것, 믿음의 사람을 얻는 것, 이것이 내 축복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서 내가 복의 근원이 되는 것입니다. 나를 만나는 모든 사람들이 복되게 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 12절에 두 사람의 갈림길이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아브람이 끝까지 거주한 땅은 바로 가나안 땅이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외로운 땅이었으며 기근이 있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 그 곳 약속이 있는 그 땅을 붙들었습니다. 그런데 롯은 어떠했습니까? 롯은 세상과 물질을 따라갔습니다. 인간적인 행복을 추구해 갔습니다.

 

  성경에 재미있는 한 표현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습니다. “소돔까지 갔더라” 소돔까지 가려는 마음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겠지요. 물질적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갈 때에 소돔까지 가고 말더란 얘기입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망할 때까지 가더라는 얘기입니다. 자기가 가는 길이 망하는 줄 모르고 가더라고 하는 것이지요.

 

  아브람은 분명히 한 가지는 알고 있었습니다.  세상사람들 눈에는 척박해 보이는 땅이었지만 하나님이 약속하셨으니 거기 복이 있으리라. 믿음으로 아브람은 약속의 땅을 붙들었습니다. 그 땅을 떠나지 아니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는 좋은 길을 선택했느니라.

 

  하나님이 그리울 때에 하나님 찾아와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확신이 필요할 때에 말씀이 필요할 때에 말씀을 주셨습니다. 새로운 꿈이 필요할 때에 하나님께서는 아브람에게 새로운 꿈을 보여 주셨습니다.

 

  아브람에게 있어서 복이 무엇입니까? 눈이 열리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14절 말씀에 보면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오셨습니다. 아브람이라고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과연 이 땅을 양보해야 할 것인가? 또 자기를 흔쾌히 버리고 떠나는 롯을 바라볼 때에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나를 떠나라고 얘기할 때에 한켠에서는 삼촌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하나님이 삼촌과 함께 하는 것을 나는 보았어요. 삼촌은 복의 근원이라고 말씀하셨잖아요. 삼촌을 떠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약속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축복을 떠나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삼촌을 떠날 수 없어요.’ 매달리기를 기대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훌쩍 조카 롯이 떠나버리고 말았습니다. 자신이 받은 비전이 가장 가까운 롯에게까지 인정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소중하게 여겼던 가족에게조차 용납 받지 못한다고 생각할 때에 얼마나 상심이 컸을까요?

 

  믿음이 뿌리부터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꿈이 송두리째 무너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내일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눈으로 땅을 바라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믿음이 좋아진다는게 무엇을 의미합니까?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입니다. 예수믿고 은혜 받으면 사람이 변화됩니다.

 

  변화되면 사소한 일에 집착하던 사람이 큰 일을 바라보게 되는 것입니다. 땅만 보고 살던 사람이 하늘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가까운 것만 보고 살던 사람이 먼 곳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외소하던 사람의 믿음이 마음이 커지는 것입니다. 생각이 커지는 것입니다. 눈이 넓어지는 것입니다. 꿈이 커지는 것입니다. 그 믿음이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세계를 보게 하는 것입니다. 한번도 보지 못한 세계, 들어보지 못한 세계, 꿈꾸지 못한 세계를 향하여 마음과 눈이 열려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일이라고 하는게 대게 보면 너무나 뻔한 것입니다. 신기루 같은 것입니다. 붙들지만 마지막에는 한줌 재로 남아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 것처럼 펼쳐질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끝나는 날이 있습니다. 이게 세상입니다. 그러나 믿음을 열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새로운 세계가 보이게끔 되는 것입니다.

 

  롯을 떠나보낸 아브람에 찾아오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동서 남북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믿음의 세계를 보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을 사랑하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님을 만나고 난 다음에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지옥의 불쏘시개나 개처럼 취급처럼 이방인들에 대한 새로운 꿈을 꾸게 된 것입니다. 오고 오는 세대에 서울에서 동경에서 워싱톤에서 아프리카 오대양 육대주에서 펼쳐갈 하나님의 은혜의 세계를 보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방인의 사도로 나서게 된 것입니다.

 

  사도 요한은 밧모섬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버려진 땅 밧모섬에서 그는 죽는 줄로 알았습니다. 그러나 눈이 열려져 하늘을 보게 된 것입니다.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는 기록했습니다. 요한 계시록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영원히 살 새로운 세계의 꿈을 우리 모두에게 나눠주고 있습니다.

 

  마포 삼열 박사는 미국의 부통령으로 지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눈을 들어 기도하는 가운데에 한반도를 보았습니다. 예수 없이 죽어 가는 한민족을 보았습니다. 한국 땅에 와 장로회 신학대학을 세우고 한국최대의 교단인 장로교를 세우게 되는 것입니다.

 

  마틴 루터와 칼빈은 카톨릭이라는 우물안에 갇혀있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는 가운데 새로운 눈이 열려지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우기를 원하시는 교회는 바로 이런 교회가 아니다. 주님이 기뻐하는 교회는 이런 교회가 아니다.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된 것입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중국을 보았습니다. 스터드라는 젊은이는 아프리카를 보았습니다. 윌리암 캐리는 인도를 보았습니다.

 

  구 소련은 알래스카를 얼음덩이로 보았습니다. 그러나 존슨 대통령은 알래스카를 보물창고로 보았습니다. 단 720만불에 미국 본토에 1/5이 넘는 알래스카를 사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는 군사기지였고 거기는 무궁무진한 석유와 보물들이 가득히 숨겨져 있었습니다.

 

  L.A.는 끊임없이 펼쳐진 사막에 불과했습니다. 서울에 10배가 넘는 땅이었습니다. 그러나 꿈을 가진 사람들은 400km 500km 밖에서 물을 끌어다가 나무를 심고 도시를 건설합니다. 거미줄처럼 고속도로를 도시 가운데 건설하고 전세계 수많은 인종들이 모여 함께 행복한 도시를 건설해 가고 있습니다.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먼저 눈을 들라고 얘기했습니다. 눈을 깔고 땅을 보라의 반대말로 눈을 들어 하늘을 보라는 말이 아니고 눈을 크게 뜨라는 얘기입니다. 롯은 눈을 크게 떴을 때에 소돔과 고모라가 망하는 땅인줄 모르고 그 길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람은 약속의 땅이 보여졌습니다.

 

  환경을 보면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온 세상에 행복이 보이게 되는 것입니다. 내면세계를 보면 내가 나 자신을 들여다 보면 초라한 인생입니다. 그러나 내 안에 계신 예수를 바라보면 내가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 안에서 나는 존귀한 존재임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너 있는 곳에서! 내가 있는 이 땅을 복된 땅으로 만들라고 하는 것입니다.

 

  영국에 어느 마을에 부모를 일찍이 여윈채 할아버지 밑에서 자라는 에드워드 윌리암 보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너무 너무 가난해서 하루 하루 살기도 힘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꿈을 안고 어린 소년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보스톤에 자리를 잡고 거리에 신문가판대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항구를 떠날 때에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늘 기억했습니다. “너 있는 곳을 복되게 하라!” 그게 무슨 말인지 모르지만 주변을 깨끗이 청소하기 시작했습니다. 남들보다 30분 일찍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30분 먼저 신문을 설치해 놓았습니다.

 

  매일같이 그곳에서 신문을 사서 읽던 커티스란 출판사 사장이 보니까 너무나도 성실합니다. 신문사에 청소부로 취직해 주었습니다. 너무나도 성실하여 정식 사원으로 채용됩니다. 마침내 열심히 일한 그는 판매부장이 되었고, 경리부장으로 승진되었을 때에 그의 성실성과 근면성에 탄복한 커티스 사장은 그의 딸과 그를 결혼시켜 그의 사위로 삼습니다. 그리고 편집국장, 총지배인을 거쳐 마침내 거티스 출판사 사장이 되었고 미국 최고의 출판사로 만들어 가게 되는 것입니다.

 

  너 있는 곳을 항상 복되게 하라! 하나님의 말씀은 명령입니다.

 

  약속의 땅을 붙들고 버틴 아브람을 하나님이 버리지 아니했습니다.

 15절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절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역사를 바꾸는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될 것이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축복은 무한하다는 뜻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셀 수 없을 만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무한대로 펼쳐질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국 여성 가운데 사회장의 영예를 누린 백씨 성을 가진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조선말기와 일제초기를 지냈던 사람인데 어린나이에 결혼해서 일찍 남편을 여의고 16세에 혼자 사는 몸이 되었습니다. 입을 것 입지 못하고 먹을 것 먹지 못하고 모으고 모아서 200냥을 모았습니다. 그리고 시어른들과 남편의 무덤을 모시기 위하여 선산을 구입하는데 친척의 소개로 대동 강변에 한 산을 사게 되었습니다. 땅 문서를 손에 들고 이장을 하기 위해서 산에 올라가 보았더니 이장을 할 수 없는 돌로 가득찬 버려진 땅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예배당에 가서 하나님 앞에 울면서 감사 기도를 합니다. “나보다 힘없는 사람이 이 땅을 샀더라면 망하고 말았을 터인데 아직 내 몸 건강하고 재봉틀 한 대 있으니 다시 돈을 모으면 될 터인데 하나님 다른 사람 망하지 아니하고 내가 망하게 된 것 감사합니다.”

 

  그 이후 일본 사람이 대동강에 다리를 놓으려고 계획하고 시멘트 공장을 세우려고 석회암 지질을 조사하던 중 대동강변에 있는 석회암으로 쌓인 한 산을 발견하게 되는데 바로 백씨 아주머니의 땅이었습니다. 기업주 오노단은 소개를 넣어서 300냥에 산을 팔라고 합니다. 거절하지요. 1천냥? 5천냥? 깨끗이 거절합니다. 1만? 2만냥을 주겠다고 그래도 거절합니다. 도지사를 통하여 이 사람이 교회 다니는 사람인줄 알고 목사님께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나라를 위해서 산을 팔 수 있도록 설득해 달라고 부탁합니다. 목사님이 이 사람을 만났더니 “목사님 내가 아무것도 모르고 200냥에 사서 마을 사람들이 나보고 망했다고 하는데 2만냥에 사간다면 그 사람이 망하는 꼴을 내가 어떻게 볼 수 있겠습니까? 믿는 내 양심으로 나 혼자 망하고 말아야지 다른 사람 망하는 것은 볼 수 없습니다.” 목사님이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2만냥이라는 어마어마한 돈을 받고 이 산을 팝니다. 그 돈으로 교회를 지었습니다. 학교를 세웠습니다. 기독교회관 건물을 지었습니다. 장로회 신학대학교의 전신이라 할 수 있는 평양신학대학교 제단을  설립하게 되었고 후에 이 사람의 믿음을 기려서 나라에서는 그 사람의 이름을 선행이라 이름지어 “백선행”이란 인물로 오늘 기독교사에 전해오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땅은 내가 보지 못하는 땅입니다. 내가 꿈꾸지 못하는 땅입니다. 내가 땀흘려서 만든 땅이 아닙니다. 내가 가꾼 땅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우리에게 주신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땅은 영원한 땅입니다. 이제 남은 생애 우리는 의미 있는 일을 찾아야 합니다. 눈을 들어 동서 남북을 바라보라! 네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땅을 새로운 세계를 보라는 것이지요.

 

  결혼하여 자식 낳아서 자식의 기저귀를 빨면서 나는 이 아이를 모세를 키운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미 이 여인은 다른 세계를 살고 있는 것입니다. 공사판에서 땀흘리며 일하는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나는 많은 돈 벌지 못했지만 이 돈으로 아무데나 쓸 수 없다. 세계를 변화시키는데 이 돈을 쓰리라. 나는 이 돈으로 죽은 영혼을 살리는데 이 돈을 쓰리라. 이 인물은 새로운 세계를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하늘의 존재로 이미 살아가는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도 천국을 막연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 땅입니다.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구체적이고 더 실제적인 땅입니다. 생생한 땅입니다. 여기에는 거짓스러운 것도 많고 진실하지 않은 것도 많습니다. 가상적인 현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만드는 영원한 천국은 우리가 누려야 될 영원한 천국입니다. 이제는 그곳을 우리가 바라보고 살 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은 그 천국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유대인들은 천국에 가는 것을 아브라함의 품에 안긴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영원한 땅, 영원한 가치, 세계를 바꾸는 땅, 하나님께서 나 혼자 잘먹고 잘살라고 이 땅에 보내 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의 기간에는 분명한 의미가 있고 목적이 있고 경륜이 있고 하나님의 계획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발견하고 살아가는 사람이 약속의 땅을 얻는 사람입니다.

 

  한소망교회가 꿈을 펼칠 그 땅을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는 것은 일만평쯤 크기 때문이 아닙니다. 우리는 거기서 민족의 운명을 바꾸고 세계를 바꾸는 꿈을 펼쳐갈 것이기 때문에 그 땅을 약속이라 꿈땅이라 부르는 것이지요. 이미 그곳은 이 세상에 있는 땅이 아닙니다. 천국으로 이어질 땅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땅입니다. 우리 자손들에게 주실 땅입니다. 그래서 그 땅은 꿈땅이요 약속의 땅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영원으로 이어질 땅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깊은 산속에 사는 멧돼지 한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먹이를 찾아서 어슬렁 거리다가 뜻밖에 도토리 나무 밑을 지나다 이곳 저곳 도토리가 널려져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에 띄는 도토리를 다 주워 먹었지만 배가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랑잎을 코로 헤치고 주둥이로 땅을 파니까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 아니겠습니까? 맷돼지는 혼자 생각하는 것입니다. 땅속에서 도토리가 나오는 것이라구. 그래서 ‘이것 보라. 내가 얼마나 지혜로운 존재이냐. 아무도 이걸 모를 거야.’ 땅을 파헤치기 시작했습니다. 한참 팠더니 또 도토리가 하나 나옵니다. 이것 봐. 이것 나 혼자만 발견한 거야. 그래서 계속해서 땅을 파헤치는 가운데 상수리나무가 서 있을 수 없을 만큼 사방에 땅을 파헤치고 말았습니다. 상수리가 넘어지는 바람에 상수리나무에 이 멧돼지는 깔려서 죽었더랍니다.

 

  여러분 땅이나 파며 사시겠습니까? 약속의 땅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이 여러분을 위하여 준비한 축복의 땅을 바라보십시오. 의미 있고 보람찬 일을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여러분께 펼쳐질 미래에 여러분을 향한 영광스런 계획을 보십시오. 믿음의 눈을 열고 여러분의 내일을 바라보십시오. 준비한 땅을 바라보십시오. 주께서 여러분의 역사를 새롭게 펼쳐 주실 것입니다.

 

 

 

                                   

2.제목 : 인생의 카운트다운

본문 : 시-39-01-7      

                               

 여러분, 혹시 랜디 포시(Randy Paushy) 라는 분을 기억하십니까? 그는 카네기멜론 대학교 교수였는데, 지난 7월에 47세의 나이로 별세한 분입니다. 그는 췌장암 말기 판정을 받은 후에도 절망하지 않고 밝고 진지한 모습으로 마지막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의 전공은 컴퓨터 공학이지만 그가 행한 「마지막 강의」는 인생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 강의가 동영상과 책으로 만들어져 미국인은 물론 전 세계인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특별히 그 책은 출간되자마자 대번에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가는 진기록을 남겼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의 강의와 책에 큰 감동을 받았을까요? 그것은 그가 시한부 인생으로 살았지만 오히려 죽음을 앞두고 인생에 대해 진솔한 태도를 갖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역설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현실이 그에게 ‘인생을 보는 눈’을 뜨게 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원리를 발견하게 됩니다. 죽음을 알아야 인생의 진실을 알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에 대해 잘 모른 채 살아가는 우매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를 알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죽음에 관해 무관심합니다. 심지어 죽음에 관해 언급하는 것조차 터부시합니다. 특히 우리 한국 사람들이 더욱 그러합니다. 이것은 큰 실수입니다. 왜냐하면 누구에게나 반드시 죽음이 찾아옵니다. 지금도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습니다. 각자의 인생에 필연적적으로 닥칠 현실입니다. ‘남의 현실’이 아니라 ‘나의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음에 관해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무책임하고 어리석은 일인지 모릅니다.

 

 

 

마치 이런 겁니다. 사냥꾼이 꿩을 잡으려고 추격합니다. 꿩이 막 달아나다 수풀을 발견하고는 “이젠 됐다”며 수풀 속에 얼굴을 처박습니다. 꽁지는 여전히 밖으로 비죽 나와 있는데 안심합니다. 곧 사냥꾼에게 잡혀 죽음을 맞이할 줄도 모르고 안심하는 꿩의 모습! 많은 사람들이 바로 그런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나 생각합니다. 그것은 ‘안심’이 아니라 ‘한심’한 겁니다.

 

 

 

그러므로 인생을 진지하고 지혜롭게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마땅히 죽음을 인식해야 합니다. 일상생활이 바쁘고 분주하지만 잠시 멈춰서라도 그래야 마땅합니다.

 

 

 

세월의 신속함을 새삼 느끼는 계절입니다. 벌써 11월이 되었습니다. 아침저녁으로 바람이 제법 차갑게 느껴지고, 가로수의 나뭇잎은 짙게 물들어 가고 한잎 두잎 낙엽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계절에 무감각하게 지나가지 말고 인생의 진실을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기회를 가지면 좋겠습니다. 역설적으로 그것이 인생을 가장 아름답게 살아가는 비결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다윗의 ‘임종시’(臨終詩)라고 할 수 있는 시편 39편을 함께 살펴보려고 합니다. 아무쪼록 다윗이 죽음을 앞두고 깨달은 인생의 진실을 통해 우리의 인생을 다시 생각해 보고, 남은 생애 더욱 아름답고 복되게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본문은 다윗이 임종을 앞두고 병을 앓으며 지은 시가 아닌가 짐작해 봅니다. 그는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인생을 참회합니다. 그래서 이 시편 ‘임종시’인 동시에 ‘참회시’입니다. 그렇다고 어떤 특정한 죄에 대해 참회하는 것은 아닙니다.(cf. 시편 51편은 밧세바를 범한 후 참회하며 지은 시) 그저 인생을 전체적으로 회고하면서 자신의 생애가 얼마나 하잘것없는지 새삼 절감하는 의미에서 참회하는 참회시(懺悔詩)입니다.

 

 

돌이켜 보면 다윗의 인생은 한 마디로 파란만장했습니다. 어린 시절엔 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목동으로 고달픈 세월을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 사무엘 사사 겸 제사장에게 기름부음을 받게 됩니다. 그때가 대략 B.C. 1025쯤 됩니다. 그 후 블레셋의 장수 골리앗을 쳐부순 것이 계기가 되어 사울 왕에게 뽑혀갑니다. 많은 공을 세우며 사위까지 됐지만, 정적으로 몰려 10여 년 핍박 받으며 망명 생활을 하게 됩니다.(B.C. 1020~1010) 천신만고 끝에 왕이 된 후에는 약40여년 동안 이스라엘을 통치했습니다.(B.C. 1010~971)그가 왕이 된 후 부귀영화도 있었지만, 모든 인생이 그렇듯이 여전히 고난과 시련도 있었습니다. 그는 한 마디로 표현해서 인생의 밑바닥에서부터 최고 정상까지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살다가 이제 늙고 병들어 임종을 앞두게 되었습니다.

 

 

 

그는 눈앞에 닥쳐온 죽음 앞에 마음이 울컥 하며 인생의 진실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인생의 모든 고초를 이기고 왕이 되어 나라를 강국으로 건설했지만, 자신의 질병 하나 다스리지 못하는 무능력과 초라함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이게 바로 인생의 진실이라는 겁니다.

 

 

 

[1] 인생의 본질 : 인생무상

 

 

 

다윗이 깨달은 인생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인생무상’입니다. 5절을 봅니다.

 

“주께서 나의 날을 한 뼘 길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은 그가 든든히 서 있는 때에도 진실로 모두가 허사뿐이니이다” 여기서 한 뼘 길이란 최소의 길이 단위인데, 엄지를 뺀 네 손가락의 길이로 약7.5cm쯤 됩니다. 하도 짧아서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없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예를 들어보죠. 1년이나 10년의 시간과 비교해 볼 때 10분이 긴가요? 짧죠. 30분은요? 60분은요? 80분은요? 모두 짧습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라는 겁니다. 30년을 살든 90년을 살든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창세기 5장 보면 많은 사람들의 기록이 나옵니다. 그 당시는 노아 홍수 이전이라 기후가 온난하고 수명이 길었습니다. 보통 수백년씩 살았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장수한 사람이 므두셀라입니다.(창5:25~27) 969세까지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의 생애 기록이 뭐라고 되어 있습니까? 그가 자식 낳고 살다가 죽었다는 게 전부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놀랄 만큼 오래 살았는데 그래봤자 별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런 인생이기에 든든히 서 있는 때 즉 전성기조차 별 게 아니라는 겁니다. 그래서 인생은 모두가 허사라는 겁니다. 여기서 허사라는 말은 원문을 보면 히브리어로 ‘헤벨’(lb,h)인데, ‘입김’ 혹은 ‘호흡’(breath)이란 뜻입니다. 잠시 보이다가 사라지는 겁니다.

 

 

 

이 단어는 솔로몬이 전도서에서 거듭 사용한 단어입니다. 전1:1~4 “1 다윗의 아들 예루살렘 왕 전도자의 말씀이라 2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3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 4 한 세대는 가고 한 세대는 오되 땅은 영원히 있도다” 솔로몬이 세상의 온간 부귀영화를 누려보았지만 별게 아니더라는 겁니다. 입김처럼 다 사라지고 만다는 겁니다. 인생은 무상하고 땅은 영원하고 ... 그런데 사실은 인생에 비해 땅이 장구하다는 뜻입니다. 이 땅도 언젠가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리고 하나님이 예비하신 천국만이 영원합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 역시 뭐라고 말씀합니까? 벧전1:24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모든 인생은 풀처럼 덧없다는 겁니다. 그리고 인생의 부귀영화는 풀 위에 달린 꽃처럼 쉬이 스러진다는 겁니다. 문자 그대로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입니다. 순간순간 세상에서 살아갈 때는 대단한 줄 알았는데 세월이 흐르다 보면 인생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경험 해 보셨죠? 이사 갈 때 짐을 펼쳐 놓을 때 구석에 처박혀 있던 물건들이 나타납니다. 어렴풋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때는 정망 애지중지했던 물건들입니다. 그런데 빛바랜 고물이 되어 있고, 그 존재조차 잊고 있었던 겁니다. 또 이런 것도 눈에 뜨입니다. 착항 시절 받은 상장이나 메달, 트로피 등입니다. 당시에는 감격하고 환호성을 질렀을 텐데 빛이 바래고 구겨져 있습니다. 이사 가면서 버리기도 하고, 다시 싸가기도 하지만 이미 시들합니다. 나 자신도 그럴진대 내 자식들이 챙겨줄까요? 내 후손들이 챙겨줄까요? 쓰레기통에 벼려지겠죠. 조금 쓸모 있어 보이는 것은 고물장수에게 넘겨질지도 모릅니다. 고물장수 좌판 옆을 지나가던 사람이 관심을 보이며 혹 값을 물으면 아마 고물장수는 이렇게 대답할 겁니다. “아, 그거요? 1천원만 주쇼.” 인생의 영화라는 게 다 이렇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직 젊다고 건강하다고 뭐가 좀 있다고 큰소리칠 게 아닙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목회를 하다 보니까, 외람된 말씀이지만 나이에 비해 이런 저런 경험을 많이 하게 됩니다. 특히 병원을 자주 가고(제가 아파서 가는 것보다 성도들 심방하느라), 장례식장이나 묘지 혹은 화장터를 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그때 인생이 얼마나 무상한지 절감하게 됩니다. 한번은 성도 중 한 분이 병이 위중하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병원에 급시 달려가서 예배를 드리는 중에 숨을 거두셨습니다. 직원들이 와서 흰 천을 엎더니 황급히 영안실로 인도합니다. 그 광경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얼마나 마음이 착잡한지 몰랐습니다.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인간적으로 너무 슬펐습니다. 그런데 바로 아래층 응급실로 환자가 실려 오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죽은 사람이 나가고 산 사람이 죽어가는 모습으로 들어오고 ... 또 화장장에 가 보면 영구차가 수시로 들어옵니다. 영정의 주인공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습니다. 인생은 바로 이런 겁니다!

 

 

 

이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인생이 너무 가엽습니다. 하지만 부인할 수 없는 인생의 본질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게 무엇입니까? 그럴수록 인생을 지혜롭게 진지하게 살아야 한다는 역설적인 사실입니다. 이렇게 짧고 이렇게 아까운 인생이 바로 나의 인생이기에 엄벙덤벙 살아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2] 인생의 자세 : 나그네 의식, 최선의 삶, 영원한 가치 추구

 

그러면 이렇게 덧없는 인생을 어떻게 사는 게 과연 지혜로운 인생의 자세일까요? 나그네 인생임을 의식하고, 순간순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리고 영원한 가치를 추구해야 됩니다.

 

 

 

① 나그네 의식 :

 

 

 

다윗은 자신의 지나온 인생을 회고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남은 생애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4절.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이 언제까지인지 알게 하사 내가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자신의 인생이 언제 끝날지, 얼마나 남았는지 알고 싶다는 겁니다. 그리고 자신의 인생의 무상함을 깨닫게 해달라는 겁니다. 결국 무슨 말입니까? 인생을 마칠 때를 잊지 말고 기억하게 해 달라는 기원입니다.

 

 

 

그는 이어서 12절(중) 보니까 이렇게 고백합니다. “ ... 나는 주와 함께 있는 나그네이며 나의 모든 조상들처럼 떠도나이다” 인생은 떠도는 나그네라는 겁니다. 조상들만 그런 게 아니라, 자기 자신도, 모든 인생도 그렇다는 겁니다. 다행히 하나님과 함께 하기에 천국의 소망이 있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서의 삶은 흘러가는 나그네라는 사실입니다. 다윗은

 

이 엄연한 사실을 잊지 말게 해 달라는 겁니다. 세상에서 천년만년 사는 것처럼 착각하지 않도록 해 달라는 겁니다.

 

 

 

여러분, 지혜로운 인생을 다 이렇습니다. 남은 날을 계수(number, count)할 줄 압니다. 그래야 남은 날을 진지하고 지혜롭게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마라톤 경주자와 같습니다. 풀코스 42.195 km를 완주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위치를 파악하고 남은 코스를 헤아리며 작전을 세우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 인생도 이와 같습니다.

 

 

 

모세도 이렇게 기도합니다. 시90:10,12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남은 날을 계수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다른 말로 하면 ‘카운트다운’(Countdown)하는 겁니다. 로켓을 발사할 때 수를 세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텐, 나인, 에잇, 세븐, ... 쓰리, 투, 원, 제로!” 이렇게 떠날 것을 의식하는 사람은 세상에 집착하지 않습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지 않습니다.

 

 

 

② 최선의 삶 :

 

 

 

나그네 의식이 없으면 일상에 파묻혀 정신없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나그네 의식을 갖고 인생의 카운트다운을 하는 사람은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최선을 다합니다.

 

 

 

다윗은 그렇지 못한 세상 사람들의 모습을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6절 보세요.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 같이 다니고 헛된 일로 소란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거둘는지 알지 못 하나이다” ‘그림자’는 원문에 보면, 히브리어로 ‘첼렘’(!l,x)인데, ‘허상’ ‘환상’(phantom) 이란 뜻입니다. 무언가 하면서 동분서주하지만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겁니다. 재물을 쌓아놓고도 못 쓰고 간다는 겁니다. 세상의 권세를 얻어도 금세 권좌에서 내려오고 맙니다. 그러므로 매순간 의미 없이 흘러가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어느 80세 된 사람이 지나온 80년간의 삶을 분석해 보았다고 합니다. 철없이 살았던 시간 15년, 잠자는 시간 26년, 일하는 시간 21년, 먹는 시간 6년, 화낸 시간 6년, 남을 기다리는 시간 5년, 수염 깎는 시간 228일, 욕하며 보낸 시간 26일, 넥타이 매는 데 보낸 시간 18일, 담배 피운 시간 12일, 그밖에 이것저것 따지고 보니 정말 의미 있게 살았던 시간은 46시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또 75세 된 다른 사람의 생애를 분석해 보니까 잠자는 시간 20년, 일한 시간 20년, 노는 데 허비한 시간 7, 먹는 시간 6년, TV 본 시간 5년, 옷 고르고 쇼핑하느라 보낸 시간 5년, 사람 만나고 기다리며 보낸 시간 3년, 화장실에서 보낸 시간 2년, 잡 생각하느라 보낸 시간 2년 반, 커피 마시느라 보낸 시간 2년, 전화 받은 시간 1년 ... 이런 식이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보면 그렇지 않아도 짧은 인생 가운데 정말 후회 없이 뿌듯해 할 수 시간이 얼마 되지 않더라는 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세월을 아껴야 합니다. 엡5:16~18 “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세월을 아끼는 것은 흘러가는 시간을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삶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최선의 삶입니다. 영어성경(NIV)을 보면 ‘기회를 선용하라’(make the most of every opportunity)고 번역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영어성경(KJV)을 보면 ‘시간을 구속하라’(redeem the time)는 말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무슨 말인가요? 시간이 흘러가는 것은 영원히 죽어가는 것입니다. 시간의 무덤 속으로 사라집니다. 그런 시간을 영원한 시간으로 살려내라는 겁니다. 두고두고 천국에서도 기억되고 칭찬 받을 수 있는 삶을 살라는 겁니다. 이런 삶은 그냥 되지 않습니다. 세상의 죄악이나 술에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해야 가능합니다. 그래야 정신을 차리고 최선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옛날 어느 젊은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그 나이 28세였습니다. 사형을 집행하던 날, 형장에 도착한 그에게 마지막으로 5분의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비록 짧았지만 너무나도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5분을 어떻게 쓸까 생각하다 이렇게 정했습니다. 알고 있던 가적이나 친구들에게 작별 기도를 하는 데 2분, 오늘까지 살게 해준 하나님께 감사하고 곁에 있는 다른 사형수들에게 작별 인사를 나누는 데 2분, 나머지 1분은 눈에 보이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지금까지 서있게 해준 땅에 감사하는 데 사용하려고 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니까 벌써 눈에서 주르륵 흐릅니다. 가족과 친구들을 잠깐 생각하며 작별인사와 기도를 하는데 금세 2분이 지나 버렸습니다. 다음 순간 자신의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려고 하는데 얼마나 후회막심한지! 그 때 황제의 특사가 흰 손수건을 흔들려 당도합니다. 결국 사형 집행이 중지되고 그는 새로운 사람을 살게 됩니다. 그래서 남은 생애에는 정말 치열하게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순간순간을 마지막처럼 소중하게 여기며 열심히 살았습니다. 그 사형수의 이름은 러시아의 대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F. M. Dostoevskii 1821∼1881)입니다.

 

 

 

우리가 마음 속으로는 인생의 순간순간 하루하루 최선의 삶을 살겠다고 생각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엄벙덤벙 넘어갑니다. 세월이 흘러가는 것을 보면서 늘 자책만 합니다. 이 가을에 다시 한번 우리 마음의 허리띠를 졸라매고 최선을 다해 세월을 아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세상의 욕심에 취하지 말고 성령 충만함으로 늘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고 실천하기를 바랍니다.

 

 

③ 영원의 준비 :

 

 

 

우리 인생은 무상하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영원하신 하나님에게 붙어 있으면, 우리도 영원할 수 있습니다. 그 사실을 절실하게 깨달은 다윗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7절. “주여 이제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자신에게는 소망이 없습니다. 덧없는 인생에 무슨 소망이 있겠습니까? 더욱이 인간은 다 죄인이요 그 죄로 인해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롬3:10 “ ...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예외 없이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겁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죄의 결과로 인간이 영적으로 죽고, 육체적으로 죽고, 더 나아가 영원한 지옥 형벌을 당하는 영원한 사망을 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의 길이 있습니다.

 

 

 

요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십자가는 지옥의 예고편입니다. 그 모진 고통을 예수님이 우리 대신 내 대신 지신 겁니다. 그러므로 믿는 자는 더 이상 심판받지 않습니다. 일사부재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는 인생이 유한하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이 더 이상 해당되지 않습니다. 순간을 살아도 영원으로 연결됩니다. 그게 바로 ‘산 소망’입니다. 세상의 소망은 죽은 소망입니다. 성취하기 전에는 실망하고, 성취한 후에는 허망해집니다. 그러나 영생 얻은 성도들의 소망은 영원한 천국으로 이어집니다. 벧전1:3~4 “3 ...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예수 믿고 거듭난 성도들은 영원히 썩지 않고 사라지지 않는 천국의 기업을 잇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에서 남은 인생을 살아야 할까요? 흘러가는 세상의 시간과 재화들을 영원한 것으로 교환해야 합니다. 교부(敎父) 오리겐(Origen)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의 재화를 천국의 재화로 바꾸는 환전상이다!” 세상의 시간은 흘러가지만 세상의 재물은 사라지지만, 세상의 부귀영화 권세 재능도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위해 사용한 것은 영원히 천국까지 그 가치기 보존되고 기억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카운트다운을 해야 될 시간입니다. 인생의 카운트다운을 할 때도 됐습니다. 이 계절에 분주했던 일상을 잠시 멈추고 다윗의 시편에 귀를 기울여 보시기 바랍니다. 다가올 죽음을 무시하지 말고 직시하면서 인생을 지혜롭게 사는 길이 무엇인지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이번「새생명축제」가 바로 그런 좋은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가족과 이웃들에게 이런 좋은 기회를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 단 한 번뿐인 내 인생을 각자 아름답고 복된 생애, 영원한 생애로 가꾸어 가시기를 축원합니다.

                                 

 

3.제목 : 가을의 기도                                      

본문 : 욥-13-20-28                                      

 

마음 세상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다

 

하나님은 어김없이 올 가을에도 아름다운 그림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고 있습니다. 콧속으로부터 폐부 깊숙이 상쾌한 공기가 들어오는 계절, 춥지도 덥지도 않은 살기 좋은 계절, 오곡이 익어가는 결실의 계, 살아온 인생을 반추해 보고 싶은 계절, 사랑과 추억을 간직한 지나간 과거를 사색하는 계절입니다. 어렵고 힘들 때 역경을 이겨낸 보람 있는 추억이 들어있는 가을 앨범 속에는 우리의 인생이 모두 담겨있습니다. 이 좋은 계절에 살고 있는 우리는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의 인생도 열매가 익듯이 가을 속에 익어가고 있습니다. 이 가을에 우리는 살아오면서 그 동안 섭섭했던 일, 오해 했던 일 있거들랑 모두 지워버리고 사랑으로 마음을 나누며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며 살아갑시다. 마음과 마음이 모여 사는 세상은 아름답습니다. 마음은 아무리 퍼주어도 줄어들지 않습니다. 마음으로 모여 사는 마음 세상에도 가을이 익어가고 있습니다.

 

 

 

 

태풍과 폭우와 폭염이 온 국민을 힘들게 하고 지나간 후 가을 하늘이 얼마나 높고 맑고 청명한지 모르겠습니다. 기도하기에 좋은 계절, 가을이 깊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을은 기도의 계절입니다. 이맘때가 되면 우리에게는 김현승 시인의 ‘가을의 기도’ 라는 시가 떠오릅니다.“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낙엽들이 지는 때를 기다려 내게 주신 겸허한 모국어로 나를 채우소서. 가을에는 사랑하게 하소서. 오직 한 사람을 택하게 하소서.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하여 이 비옥한 시간을 가꾸게 하소서. 가을에는 호올로 있게 하소서.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무 가지에 다달은 까마귀와 같이”

 

 

 

기도의 계절, 사랑의 계절, 가장 아름다운 열매를 위해 우리에게 주신 최상의 선물인 가을을 비옥한 시간으로 채워나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오늘 정말 마른나무 끝에 다다른 까마귀처럼 정말 홀로 서 있는 한 사람의 주인공을 우리가 만나 보게 되는데 그는 모든 것에서부터 배반당한 듯한 사람이요, 심지어 가장 가까운 친구들도 와서 3일 동안 같이 울어 주었지만 친구마저도 자기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슬프고 고통스런 상황을 맞이한 사람 욥입니다. 재산을 잃고 자식을 잃고 또 건강도 잃었습니다. 친구들마저 욥이 죄를 지어 그런 일을 당한다고 하면서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친구들과 오랜 논쟁을 했습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죄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야 다른 뜻이 있을 거야.\" \"아니야 너 죄 때문에 그런 거야\" 계속해서 논쟁을 주고받다가 터질 것 같은 욥은 고개를 하나님을 향해 돌리고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바로 그 부분이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그는 답답한 가운데 여러 가지 생각들을 쏟아 내고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그가 한 기도 속에 여러 가지 문제가 많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욥이 시험 끝난 다음에 이 기도를 다시 한다면 고쳐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사람이 급한 일을 당하면 그저 마음속에 있는 모든 생각들을 거르지 않고 그냥 그대로 하나님 앞에 쏟아 내게 됩니다. 답답한 사람은 이것저것 가릴 겨를도 없이 그렇게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 가운데 얼마나 많은 기도가 하늘나라에서는 잡동사니가 되고 있는지 모릅니다.

 

 

 

 

오늘 욥이 드린 기도를 생각하면서 우리의 기도를 한번 점검해 보며 이 가을에 성숙한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은 이렇게 기도의 문을 엽니다.“주여! 주님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서. 손을 좀 대지 마옵소서.”욥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손으로 치며 자기를 괴롭게 한다고 생각하면서 하님께서 제발 그 손을 거두어 줄 것을 기도하고 있는 것입니다. 21절 말씀입니다.“곧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시며 주의 위엄으로 나를 두렵게 마옵실 것이니이다.”그러나 이 기도는 성숙한 기도가 아닙니다. 주님의 손은 결단코 하나님의 자녀를 괴롭히는 손이 아니며 공연히 하나님의 자녀들을 못살게 구는 그런 심술 맞은 손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더러는 이런 기도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제게 왜 이러십니까? 왜 이렇게 저를 치십니까? 치지 마시고 이제는 손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더 이상 저를 괴롭게 하지 마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리게 될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손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 펼치는 모든 손은 때로는 아프게도, 또는 괴롭게도 느껴지지만 사실은 그 손은 우리를 치료하는 손, 위로하는 손, 우리를 어루만지는 손, 싸매는 손, 새롭게 하는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손은 세상을 창조하신 손, 우리를 위로하는 손, 우리를 치료하는 손, 사망의 골짜기를 다니는 우리들을 구원하는 손, 연약한 중에 처해 있는 우리를 강건하게 다시 세워 주는 손, 잠시 동안 우리를 연단하시기도 하지만 그 연단을 통해서 바로 우리를 든든히 세우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사람으로 만드는 그런 우리 하나님의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아버지는 잘못한 아들을 징계하게 되는데 그러나 그 징계는 자식을 죽도록 징계하는 것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바로 세우기 위하여, 강건하게 하기 위하여, 온전한 사람을 만들기 위하여 징계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의 손을 함부로 해석해서는 곤란합니다. 하나님의 손은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는 깊고 온유한 섭리의 손인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더러는 우리가 주님의 손을 보지 않고 손에 들려 있는 매를 볼 수 있는 위험이 있습니다. 마치 그 손이 나를 죽일 것 같은 그런 느낌으로 다가 올 때가 있습니다. 마치 그 손이 나를 버린 것 같은 그런 느낌을 우리에게 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욥도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주여! 주의 손을 내게 대지 마옵소서.\"

 

 

 

 

그러나 이것은 바로 고쳐 써야 하는 기도입니다. 주님의 손이 지금 우리를 위해 일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치 토기장이가 진흙을 이렇게 저렇게 이기고 주물러서 아름다운 토기를 만들어 내듯이 또한 그 토기를 불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여 아름다운 토기로 구어 나오게 하듯이 우리 하나님의 손은 진흙 같은 우리를 만지시고 두드리시며 불 가운데로 통과하게 하셔서 우리를 지금도 완성시켜 나가고 있는 것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떻게 대하시든지 비록 아픈 손으로 다가오시더라도 그 손은 나를 죽이는 손이 아니라 만드는 손, 온전하게 하는 손, 회복하게 하는 손, 나를 더욱더 아름답게 빚어 나가는 손인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주님 손을 내게 거두어 주옵소서’라고 하는 기도는 온전치 못합니다.

 

 

 

 

주의 손을 떼지 마소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주여 내게 손을 대지 마소서’하는 대신에 ‘주여 주의 손을 떼지 마소서’지금 하나님의 손은 나로 하여금 온전하게 만들고 치료하고 회복시키고 나를 빚어 가는 과정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주님! 계속해서 저를 만들어 주시고 연단해 주옵소서. 계속해서 저를 만지셔서 온전한 모습을 가지게 해 주옵소서. 진흙과 같은 날 빚으사 주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주소서.\" 이런 귀한 고백이 우리 속에 있어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지금 받는 주님의 손길이 아프게 고통스럽게 느껴지십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손길은 지금 나를 치료하고 있고 나를 완성하고 있고 나를 아름답게 만들고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여! 주님의 손을 내게 떼지 마시고 저를 만들어 주시고 온전케 하옵소서.\" 이렇게 기도하시는 성숙한 기도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침묵하지 마옵소서

 

욥은 하나님 앞에서 계속해서 기도를 드리고 있습니다. \"하나님! 침묵하지 마옵소서. 내가 답답합니다. 말 좀 하시옵소서.\" 그의 안타까운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22절 말씀입니다. \"그리하시고 주는 나를 부르소서. 내가 대답하리이다. 혹 나로 말씀하게 하옵시고 주는 내게 대답하옵소서!\" 욥에게 있어서 자신에게 다가오는 고통, 육체적인 고통은 참을 수가 있었는데 정말 괴로운 것은 하나님이 한 마디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침묵하는 하나님의 침묵, 이것은 정말로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었습니다. 왜 이런 고통을 당하는지, 왜 이런 아픔을 겪어야 되는지 그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속 시원하게 하나님과 더불어 대화하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음성은 한 마디도 그의 귀에 들려지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생활 중에 제일 답답할 때가 언제입니까?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실 때, 내 문제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말씀하지 않는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하는 순간에는 얼마나 마음이 답답하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 입에서도 똑같은 말이 나옵니다. \"주님 제발 침묵하지 마시고 말씀 좀 해 보세요.\" 그러나 그런 기도가 우리에게 나오는데 이때에 기도를 한 단계 높여야 합니다. 하나님이 침묵하실 때야말로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가장 사랑하시고, 우리를 가장 생각하는 순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의 표현, 때로는 깊은 침묵을 통하여 하나님의 가장 깊은 사랑을 우리에게 말씀해 주실 것입니다. 욥의 고통스러운 마음만큼이나 우리 하나님의 마음도 아프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씀하실 수 없는 그런 하나님의 사정을 우리는 이해해야 합니다. 중간에 말씀하시면 도중에 효과가 떨어지기 때문에 하나님이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욥의 고통의 현장 중에 있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은행에 돈 만원을 빚졌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은행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문제입니다. 은행은 돈 만원에 별로 신경 쓰지 않습니다. 그런데 만약에 우리가 은행에 10억을 빚졌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의 문제가 아니고 은행의 문제입니다. 매일 전화 걸고 난리 날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이 심각한 처지에 있을 때에는 이미 그 문제는 우리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가 그 모든 상황을 보시며 가슴 아파하시고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우리 곁에 오셔서 일 하시고 힘쓰시며 인도하고 계시는 하나님을 우리는 믿어야 될 것입니다. 말씀하지 않고 침묵한다고 하나님이 나에게 관심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나를 버린 것이 아닙니다. 조용히 말씀하지 않는 순간은 하나님께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확실하게 일하는 순간입니다.

 

 

 

 

\"침묵하지 마옵소서”이렇게 기도하는 것을 바꾸어 \"주님이 잠잠히 사랑하시는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저는 지금 주님이 일하고 계신 것을 믿고, 저를 사랑하시는 것을 믿으며 저를 돌아보고 계신 것을 믿습니다. 설명해 주지 않아도 다 알 수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면서 조용히 주님이 말씀하는 침묵의 소리를 듣는 믿음의 귀가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침묵하셔도 우리를 향해서 사랑한다고 고백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어떤 상황 중에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욥은 자신의 발에 착고가 채워져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 자신의 사정을 표현합니다. \"주님 나를 자유롭게 해 주시고 내 발을 자유롭게 하옵소서.\" 그는 지금 그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27절 말씀입니다. \"내 발을 착고에 채우시며 나의 모든 길을 살피사 내 발자취를 한정하시나이다\" 욥은 하나님이 자신을 꽁꽁 묶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지금 질병의 사슬, 정죄의 사슬, 인간관계의 사슬, 좌절의 사슬에 묶여 있다고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보면 하나님은 그를 묶어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가 더욱더 큰 은혜와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잠시 고통의 순간을 통과하게 하신 것입니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

 

여러분이 절망하게 될 때 무엇 때문에 절망하고 있는가를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절망에서 예외 될 사람은 없으며 절망의 영향권 안에서 벗어나 절망의 사각지대에 숨을 자가 없습니다. 인간은 이래도 절망하고 저래도 절망합니다. 가난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자들도 절망합니다. 불치병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건강한 자들도 절망합니다. 결혼 못해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한 사람도 절망합니다. 신용불량자라서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용 우량자들도 절망합니다. 가을이라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봄에도 절망했었습니다. 내 맘대로 안 되어 절망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맘대로 잘 될 때도 절망했습니다. 인생의 모순 때문입니다.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풍요지수나 지식지수가 높아질수록 절망지수 또한 높아지게 되는 것입니다. 절망 앞에서는 영웅도, 위인도, 하나님의 사람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사람은, 나보다 더 힘들고, 더 가난하고, 더 실패하고, 더 아픈 사람을 보며 용기를 얻습니다. 베드로를 보며 엉터리 같은 내 자신의 영성과 인격에 안도의 숨을 내쉽니다. 엘리야를 보며 우리와 같은 연약한 질그릇이었음에 한숨을 돌립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사람 가운데 본래부터 훌륭하고 완전한 사람뿐이었다면 아마도 성경은 우리에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었을 것입니다.

 

 

 

 

우리도 살다보면 여러 가지 절망을 만나게 됩니다. 굳이 무엇 때문이 아니더라도 그냥 사는 게 힘이 듭니다. 그냥 믿는 게 힘이 듭니다. 도대체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될지에 대한 중압감이 구름이 비되어 내리듯 우리의 심장을 압박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예외일 수 없으며 위인이라고 다르지 않으며 기도의 거인이라도 봐주는 법이 없습니다. 우리의 절망은 삶의 모든 가능성과 미래에 대하여 희망의 여지가 없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아니면 그 어떤 사람의 변화에 대한 기대가 어긋나는 것 때문일 수 있습니다. 보통 깊은 산중에서 길을 잃으면 무조건 산 정상으로 올라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산위에 올라가면 길이 보인다는 뜻이겠지요. 그런데 문제는 어디가 정상인지 분별하기 힘들 때 극심한 절망에 도달하게 됩니다. 모든 문제의 정상에는 궁극적 해결자이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요즈음, 예수 믿다 절망하고, 기도하다 절망하고, 사람으로 인하여 절망하고, 교회로 인하여 절망하고 가난으로 인하여 절망한 분이 많은 것 같습니다. 절망은 누구에게나 찾아오지만 절망의 회복은 누구에게나 경험되는 것은 아닙니다. 절망의 회복을 갈망하십시오. 절망은 희망의 또 다른 이름이 되게 하는 자원입니다. 절망 중에 있는 엘리야에게 천사를 급파하신 것을 보면 하나님은 지금도 절망 중에 있는 교회, 가정, 성도들을 신속히 희망으로 회복시키시기를 소원하시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지금까지 아무렇게나 보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드렸던 모든 기도를 이 가을에 새롭게 고쳐 보시기 바랍니다. \"주의 손을 대지 마시옵소서\" 이런 기도를 \"주여, 주의 손을 내게서 떼지 마옵소서. 계속해서 저를 만드시고 빚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여러 고통의 순간 \"주여 침묵하지 마옵소서\"라는 기도 대신에 \"주여 침묵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주님 깨닫게 하옵소서\"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묶여 있는 모든 것을 보면서 \"주여 풀어 주옵소서\" 라는 기도 대신에 \"주여 오히려 더 묶어 주옵소서. 은혜의 줄로 사랑의 줄로 내 발을 묶어서 반석 위에 세우시고 사슴의 발같이 나를 만들어 주옵소서\" 이렇게 기도하는 성숙한 기도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는 나무의 뿌리와 같은 것이고, 또한 새의 날개와 같은 것입니다. 깊은 기도를 통해 영혼의 뿌리로부터 자양분을 공급받고, 그리고 영혼의 날개를 펼쳐 자유로이 창공을 날 수 있습니다. 또한 골프를 치려면 값비싼 골프채가 필요하지만, 기도에는 아무런 도구가 필요하지 않으며 테니스를 치려면 파트너가 필요하지만, 기도는 파트너 없이 혼자 할 수 있습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어디서든 가뿐하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는 것이 기도입니다.

 

 

 

 

가을에 내게 물어볼 것은 무엇인가

 

가을을 선물로 받아 살아가는 우리가 인생의 가을을 맞으면 물어볼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에게 물어볼 이야기가 있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사람들을 사랑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가벼운 마음으로 말할 수 있도록 나는 지금 많은 이들을 사랑해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열심히 살았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도록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하며 살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상처를 준 일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얼른 대답하기 위해 나는 사람들에게 상처 주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아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삶이 아름다웠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나는 기쁘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내 삶의 날들을 기쁨으로 아름답게 가꾸어 가야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가족에게 부끄러움이 없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반갑게 대답하기 위해 나는 지금 좋은 가족의 일원이 되도록 내 할 일을 다 하면서 가족을 사랑하고 부모님께 순종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이웃과 사회와 국가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힘주어 대답하기 위해 지금 이웃에 관심과 사랑을 가지고 좋은 사회인으로 살아가야 되겠습니다.

 

 

 

내 인생에 가을이 오면 나는 나에게 어떤 열매를 얼마만큼 맺었느냐고 물을 것입니다. 그때 자랑스럽게 대답하기 위해 지금 나는 내 마음의 밭에 좋은 생각의 씨를 뿌려 좋은 행동의 열매를 부지런히 키워야겠습니다.

 

 

 

 

주여,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올 가을에는 조건 없이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 믿음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하나님께로 향하는 기도하는 모든 이들이 가을 하늘이 파랗다는 것을 함께 공유했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눈과 마음과 귀를 열게 합니다. 부정적인 시각을 긍정의 시각으로 어두운 마음을 밝고 환한 마음으로 얕은 귀를 심혈의 귀로 열어 주며 한번쯤 더 생각할 기회를 제공하고 삶의 한 부분으로 점차 꽉 채워져 갑니다. 작은 교회에서 일어난 작은 기도의 불꽃들이 큰 불덩이 이루어 이 땅의 황무함과 삭막함 속으로 번져 갔으면 좋겠습니다. 이 일에 쓰임 받을 수 있음에, 더 없이 행복한 가을의 길목입니다. 누구에게나 풍성한 가을되기를 구하면서. 가을이 깊어가는 길목에서 다음 주간에 시작하는 가을부흥사경회를 통해 깊은 기도를 통해 은혜를 체험하면서 쓸쓸한 가을을 뜨거운 가슴의 영성 깊은 우리 영암의 성도들과 함께 누릴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주여, 이 가을에는 기도하게 하소서.

 

                               

4. 제목 : 일평생 여호와 앞에

본문 : 왕상-15-09-15

                                       

오늘은 열왕기상 15장 9절에서 15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일평생 여호와 앞에\"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돌아가 14절 말씀을 보면 \'오직 산당은 없이 하지 아니하니라 그러나 아사의 마음이 일평생 여호와 앞에 온전하였으며\'라고 하였습니다. \' 일평생 여호와 앞에\' 라는 말씀을 그대로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일평생을 하나님 앞에서 산다\'라는 의식을 가지고 살자는 의미입니다. 오늘 우리 모두는 어떻게 일평생을 본문의 아사왕처럼 하나님 앞에 온전하게, 그렇게 신앙생활을 하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는가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째, 아사왕이 일평생 야웨 앞에 온전하였다고 하는 말씀의 의미는 일평생 정직한 생활 (9-12)을 말합니다.

 

우리는 흔히 \'정직하다\'고 하면 \'나는 평생 거짓말 한 적이 없고, 나는 배고파 죽을 망정 남의 것을 훔쳐먹는 일이 없으니 정직하다\'라는 의미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정직이라는 말의 단어적인 의미는 \"남을 속이지 않고 마음이 곧음\"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속이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도둑질하지 않고 올바르게 살아가는 것을 우리는 정직하게 산다고 합니다. 그렇습니다. 정직한 삶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살아야 합니다. 이 사회가 그렇게 살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정직은 도덕적 규범에 불과할 뿐입니다. 도덕적인 가치기준입니다. 사회윤리적인 가치기준입니다. 여기에는 구원도 없습니다. 천국도 없습니다. 사람이 사회를 살아가는 길을 지도할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직이라는 의미는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만약에 성경이 말하고 있는 정직이 도덕적 가치기준에 의한 그런 뜻이라면 성경을 공자가 썻으면 간단할 것 아닙니까? 차라리 성경을 없애고 공자가 한 말을 설교하면 되지 않습니까?

이러한 가치기준은 지금도 학교에서도 가르치고 가정에서도 가르치고 있습니다. 종교라고 까지 하기에는 뭐하지만 굳이 종교라고까지 한다면 유교의 중심주제가 바로 \"사람이 이땅에서 올바르게 사는 길\"에 대해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도덕적 가치규범입니다.\" 사회과과목으로 말한다면 윤리과목이나 도덕과목으로 우리로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하는 \"정직\"이라는 말은 다릅니다. 정직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을 훔친 일이 없거나 거짓말을 안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단순한 도덕적인 의미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정직\"이라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떠난 그 어떤 의미에서도 정직이라는 말은 그저 사회윤리적인 정직이 되어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성경에 우리가 잘 아는 히스기야왕의 신앙과 삶을 우리는 잘 살펴볼 수 있습니다. 성경은 왕하18:3에서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야웨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한 유대에서 대대적인 종교회복운동을 일으켰던 요시야왕에 대해서도 성경은 왕하22:3에서 \"요시야가 야웨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크게 형통함을 주셨던 웃시야왕 역시 성경 대하26:4을 보니까 \"웃시야가 그 부친 아마샤의 모든 행위대로 야웨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며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의 사는 날에 하나님을 구하였고 저가 야웨를 구할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셨더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말하는 정직이라는 말은 그 어원이 \"카라트\"라고 하는 말입니다. 이 말에서 \"야솨르\"라는 말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카라트라는 말은 잘라내다, 베어내다는 뜻입니다. 야솨르라는 말은 곧다, 곧게하다는 뜻입니다.

잘라내야 곧아질 수 있습니다. 곧게되는 것은 잘라내야 하는 것입니다. 목재소나 제재소에서 쓸만한 재목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베어온 나무를 잘라내고 다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 보시기에 잘라내야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우리에게도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을 잘라내는 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묵상하고 말씀을 듣고 말씀을 순종하는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잘라내는 작업을 하기 위함입니다. 역으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삶이 되기 위함인 것입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복이 우리의 삶에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하나님 보시기에 하나님의 길로 인생이 곧게 뻗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니까 9절에서 12절을 보면 \'이스라엘왕 여로보암 제 이십년에 아사가 유다 왕이 되어 예루살렘에서 사십 일년을 치리하니라 그 모친의 이름은 마아가라 아비살롬의 딸이더라 아사가 그 조상 다윗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하게 행하여 남색하는 자를 그 땅에서 쫓아내고 그 열조의 지은 모든 우상을 없이 하고\'라 하였습니다.

 

다윗의 아들이 솔로몬입니다.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정직하고 하나님을 잘 믿었을 때 하나님은 솔로몬과 이스라엘나라를 축복하셔서 가장 강대하고 가장 부강한 시절을 허락해 주십니다.

이스라엘 중에 일천번제를 드린 왕은 이 솔로몬 밖에 없습니다. 3년동안 날마다 하나님 앞에 시간을 정해놓고 예배를 드립니다. 오늘도 이 은혜를 따라서 일천번제기도회를 드리기도 합니다. 3년을 하루도 빠뜨리지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저희 어머니 권사님과 전도사님도 우리교회의 개척을 위해서 일천번제 기도를 했습니다. 이 솔로몬이 하나님 앞에 설 때에 하나님은 솔로몬과 이스라엘을 축복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 축복을 가지고 솔로몬은 노년에 이방여인들을 후궁으로 맞이하게 됩니다. 3천명이나 되는 후궁들을 들였으니 이 솔로몬의 마지막이 얼마나 하나님을 떠나 있었는가 하는 것을 우리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이 3천여명의 후궁들은 한결같이 이방족속의 여인들입니다. 유대나라 여인들이라해도 보톤 문제가 아닐 것인데 이우상을 섬기는 이방여인들이 이스라엘에 오면서 그들이 섬기는 이방신들을 믿는 풍속을 궁중에서부터 전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온통 우상숭배의 집산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온나라가 가는 곳마다 굿을 해대고 가는 곳마다 우상숭배하는 우상숭배의 서식지가 되어버리고 만 것입니다.

 

이에 하나님이 격노하심으로 솔로몬의 아들 때에 가서 두나라로 나뉠 것임을 예언자를 통해서 예언을 하셨고 이후 나라는 그렇게 두동강이 나게 되었던 것입니다. 솔로몬의 아들은 르호보암과 여로보암입니다. 르호보암은 유대나라 왕이 됩니다. 르호보암은 그래도 신앙중심으로 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이 피에서는 그래도 히스기야나 요시야나 웃시야와 같은 귀한 왕들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북이스라엘은 이 아사왕을 제외하고는 끝까지 우상숭배만 하다가 결국 앗수르에게 멸망당하고 말았습니다.

 

이 여로보암이 북이스라엘왕이 되었습니다. 이 여로보암은 우상숭배하는 왕입니다. 본격적으로 국가적으로 공개적으로 우상숭배했던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왕중에서 가장 싫어했던 왕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들이 죽을 때 우상숭배하던 가는 왕들은 한결같이 \"저가 여로보암의 길로 갔더라\"고 마지막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 여로보암의 영향으로 북이스라엘은 몇몇 왕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우상을 숭배함으로 하나님 앞에 끊임없이 책망과 함께 고난과 고통을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여로보암의 아들은 아비얌이요, 아비얌의 아들이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아사왕입니다. 본문을 보면 \'그가 자기 조상 다윗같이 정직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사람이 많고 많은데도 그 중에 최고가 다윗이었습니다.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을 잘 믿다 간 왕은 그 마지막에 \"그가 그 조상 다윗의 길로 갔더라\"하고 끝나고 있는 것을 성경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이 아사왕도 다윗을 본받았습니다. 최고로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던 왕 다윗을 본받았습니다.

아사왕이 야웨 보시기에 정직히 행한 실례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사회의 퇴폐적인 모든 요소를 정리했습니다. 향략,쾌락 일변도의 사회를 잘라 내어 버린 것입니다.

본문에 보니까 남색하는 자를 소탕해 버렸다는 이야기입니다. 남색이 무엇입니까? 결혼생활이라고 하는 것은 창조원리를 따라서 남자와 여자가 한 가정을 이루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남색이라고 하는 것은 남자끼리 성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 시대가 해괴망측하고 문란했으며 우상숭배가 극도에 치달았는가를 단적으로 말해주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런 사회라면 저주 그 자체인 것입니다. 볼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시대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사왕을 세우셔서, 아사왕을 도구로 세우셔서 깨끗케 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개인적으로 영적이지 못하고 거룩하고 경건치 못하고 세속적이면서 정욕적인 향락과 쾌락을 즐겨하려는 욕구들이 있습니다. 이것 때문에 신앙이 구멍이 생기고 비가 샙니다. 바람이 듭니다. 실제적으로 삶에는 가정이 깨집니다. 가정이 깨지고 부부가 깨지면 그것은 바로 자녀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겉도는 청소년들은 한결같이 가정에서 상처를 받은 자녀들입니다. 그러한 애들이 돈만 주면 원조교제가 이루어 집니다. 사회가 타락합니다. 사회가 병이 듭니다. 악순환의 연속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말씀으로, 기도로 성령충만 받아 세속적인 것들을 잘라내시기 바랍니다. 잘라내야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해 집니다. 하나님 기뻐하십니다. 은혜로 사시기 바랍니다.

 

두번째로 아사왕은 조상들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없애버렸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박정희대통령이 고마운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미신을 전부 타파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가 영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아닐 것입니다.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이 나라가 깨어나고 발전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 나라를 붙잡고 미신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 민족이 5천년동안 미신만 섬겼습니다. 무당, 점쳐보지 않은 사람이 없습니다. 그 결과가 무엇입니까? 그래서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무지몽매하고 가난과 핍박 저주와 고통이 이 민족을 잡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우상의 잠에서 깨지 않는 한 이 민족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외국 한 번만 갔다오면 그것은 금방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아프리카나 네팔이나 그런 나라, 그런 민족을 보고 있으면 얼마나 한 숨이 나옵니까? 무슨 일만 있으면 점이나 치고 있고 무슨 일만 있으면 무당이나 불러서 굿이나 하고 있는데 무엇이 되겠습니까?

그러니 이 땅에 선교사님들이 왔을 때 이 땅이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감기하나 걸려도 굿을 합니다. 애가 더 정신을 차리지 못합니다. 더 시끄러워서 고통스럽습니다. 그래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아스피린 하나면 끝나 버리는 것 아닙니까? 이러한 약도 이러한 의술도 모두가 하나님을 잘 믿는 기독교국가에서 하나님이 지혜를 주셔서 개발되게 해 주신 것입니다.

 

아사왕은 솔로몬과 여로보암이 만들어 놓은 우상을 전부 타파해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 꼴을 보지 못하겠다고 하시는 것들을 전부다 없애 버렸습니다. 모두 잘라내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우상이 있습니다. 내 마음 속에 우상을 잘라내시기 바랍니다. 그 우상을 섬기느라 교회를 못나옵니다. 그 우상을 섬기느라, 나 좋은 것 하느라 주일을 어깁니다.

우리는 괴로우나 즐거우나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하나님의 자여로서 해야 하는 것은 내가 손해를 보더라도 좋아해야 합니다. 그것은 손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 심는 것입니다. 심은대로 거두게 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은 만금이 쏟아져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편에서 살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이기 때문입니다.

 

둘째, 정리하는 생활이 정직한 생활입니다 (13-)

 

오늘 본문 13절을 보면 \'또 그 모친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우상을 만들었으므로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어서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랐으나\'라고 하였습니다.

아사가 왕자로 있을 때 자기 어머니가 아세라 신상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복을 달라고 자꾸 빌었습니다. 아버지가 살아 계시는데 아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어찌하지 못하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아버지가 죽고 아들이 왕이 되었을 때 \"이건 아니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이 괘씸하게 여기고 하나님이 그렇게 미워하는 아세라 신상을 그냥 놔둘 수 없다하여 아세라 상을 찍어 버리고 그것을 끌고 예루살렘 성밖에 있는 기드론 시냇가에 가서 불살라버렸습니다.

그리고 자기 어머니를 태후라고 하는 자리에서 폐하여 버리고 평민으로 만들었습니다. 어머니가 태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한 그 권세를 이용해서 또 우상을 섬길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주변을 깨끗이 정리한 것입니다.

아들로서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습니까?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육은 사망이요 살리는 것은 영이니라\"

 

자기의 어머니의 자리인 태후도 폐했습니다. 영적인 주변을 정리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주변으로 가꾸어 나간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개혁을 아주 깨끗이 단행하였습니다. 주변정리가 이처럼 중요한 것입니다.

 

집사쯤 되었으면 나는 안주만 먹는다고 술자리에 따라 다니지 마시기 바랍니다. 처음에는 오징어 안주만 집어먹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자리가 계속되면 그것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한 잔 두 잔 하게 되고 그것을 계속하다보면 술 주정꾼이 됩니다. 세상일에 아무리 도움을 준다고 할지라도 믿음에 손해를 주는 일은 가차없이 정리할 줄 알아야 합니다.그렇게 믿음 생활을 할 때 그 믿음 생활은 성공하는 것입니다. 아사의 경우가 그렇습니다. 우리는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내 주변을 정리하면서 믿고 살아야 한다는 본문의 교훈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함경도에 김승명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돈도 많이 벌고 면장이 되어 세도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교회가 없던 그 동네에 도율림 선교사가 전도를 하여 교회를 세웠습니다. 예배당을 다 짓고 헌당식을 할 때 면장과 그 동네 유지들이 참석을 했습니다. 맥도날드 선교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습니다.

 

공자 맹자가 아닙니다. 천국이 있습니다. 구원이 있습니다. 뭔가 차원이 다른 이야기를 들은 김승명은 그 날 예수 믿기로 작정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날 큰 잔치를 열었으나 목사님이나 선교사님은 초청하지 않았습니다. 옛날 술친구들 그리고 소작인들과 면직원들을 청하여 술판이 한창 벌어지고 있을 때 \"나는 오늘부터 예수 믿소. 지금까지는 예수 없이 살았지만 오늘 이 자리는 예수와 새롭게 인연을 맺는 잔치요. 여러분들도 오는 주일날부터 교회에 나오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오면 친구가 되지만 끝까지 나오지 않으면 여러분들과 이별해도 좋소\"라고 선언했습니다.

 

지금까지는 첩살이를 했고 주색잡기를 즐겼는데 그 날로 모든 것을 정리하였습니다. 저 건너편에 있는 첩의 집을 정리했습니다. 그리고 주색잡기를 전부 끊어버리고 예수 믿기를 출발했더니 얼마나 믿음이 잘 되었는지 모릅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충성되이 잘해서 나중에는 교회에 장로가 되었습니다. 그에게 다섯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아들을 신학교에 보내어 목사가 되게 합니다. 바로 그 셋째 아들이 목사가 되어 이승만 대통령 당시 초대 군종감을 지낸 분입니다.

 

여러분 주변을 정리하시기 바랍니다. 아직도 끊어야 할 것을 끊지 못한 것은 없습니까? 주변을 정리해야 할 것을 정리하지 못한 일은 없습니까? 정리하지 못하고 10년 20년 교회 나왔다고 한들 그 믿음이 됩니까? 빨리 주변을 정리하시고 일평생 하나님 앞에 온전히 믿고 살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셋째, 성별의 생활 (14-15)

 

오늘 본문보니까 15절을 보면 \'저가 그 부친의 구별한 것과 자기의 구별한 것을 여호와의 전에 받들어 드렸으니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이더라\'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은과 금이 무엇인지 알고 있습니다. 그러면 기명은 무엇입니까? 기명이 무엇인지 알아야 구별하여 드리지 않겠습니까? 기명은 그릇을 뜻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금 그릇과 은 그릇은 다 구별하여 하나님 앞에 드렸다는 말입니다. 아사왕의 아버지 아비얌은 금 그릇과 은 그릇만 생기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하여 따로 구별해 놓았습니다. 그것을 그대로 배운 아들 아사왕 역시 금 그릇만 생기면 이것은 하나님의 것이라 구별하여 하나님의 전에 드렸습니다.

 

성별이란 말은 구별한다는 말입니다.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내 아내와 네 아내를 구별해야 합니다. 내 남편과 네 남편을 구별해야 합니다. 인생의 길을 구별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술취하면 내집인지 네집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구별하지 못하면 큰 변이 납니다.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있는 모든 나무의 실과는 다 먹어도 좋으나 동산 가운데 있는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 열매만은 절대로 먹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침범하면 안됩니다. 하나님의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그것을 분별하지 못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가장 기본적을 구별해야 하는 것이 있습니다. 일주일 중 주일날 하루는 우리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일성수라는 말은 주의 날은 거룩하게 지킨다라는 뜻입니다. 이 날은 하나님의 날입니다. 우리의 날이 아닙니다. 땅을 보게 되면 공시지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땅의 값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것, 공시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공시지가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알리는 것이 있습니다.

 

십계명 가운데 4계명이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고 했습니다.\"엿새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 칠일은 너의 하나님 야웨의 안식일인즉...\" 그러므로 우리가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 4계명을 지키는 것은 위의 1,2,3계명을 행함으로 보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사 58:13-14에서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치 아니하고 안식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야웨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치 아니하며 네 오락을 행치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야웨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야웨의 입의 말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날에 내 좋아라 하고 설악산에 가거나 대천해수욕장에 가라는 것이 아닙니다. 분명히 다른 날과는 구별을 해야합니다.

 

그리고 얻은 것의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절대 손대지 말라고 하십니다.

10분의 1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복을 주신 분이 누구십니까? 하나님이신줄 믿습니다. 하나님이 주시고 우리는 받았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한 만큼 하나님께 받은 것입니다. 우리가 받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주시기 때문에 받게 된 것입니다. 얼마나 감사합니까?

바로 이 고백이 십일조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것입니다\"를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할 때 우리가 감사하는 것과 십일조하는 것은 그 사람의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10분의 1을 하나님께 우리의 신앙고백으로 드리고 10분의 9는 우리가 사용하는 것입니다.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고 한 것 처럼 수입의 그 가운데 십분지 일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물질의 축복은 십일조생활입니다.

 

저는 많은 목회기간은 아니지만 분명히 목회하는 동안 느낀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믿음은 열심히는 아니지만, 개인형편이나 사정으로 평상이 모임이나 기도회나 교회생활에 많은 참석을 하지 못하지만, 신앙생활 열심히는 못하지만 언제나 주일성수잘하고 십일조만 착실히 잘해도 하나님의 복을 반드시 받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것을 구별할 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도 구별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지키는 자, 하나님의 것을 지킬 줄 아는 자를 하나님은 귀하게 보시고 지켜주시는 것입니다.

 

어떤 구역장님은 그렇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고 전도하고 하는데도 삶에 열매가 없습니다. 나중에 분명히 하나님의 복이 있을 것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많이 어렵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하나님의 것을 지키지 않습니다. 적당히 주일성수를 걸를 때가 있습니다. \"정말 어쩔 수 없이 하나님 아시지요, 보시지요\"할 때가 있습니다. 어찌 하나님께서 모르시겠습니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 어찌 헤아려 주시 않겠습니까?

 

그런데 눈치가 그것이 아닙니다. 주일을 드릴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의미로 \"하나님 아시지요, 하나님 보시지요\"하고 맙니다. 십일조도 때를 따라 걸를 때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것을 구별하고 우리의 분량으로 주신 것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것 건드리지 마십쇼. 반드시 빵꾸나게 되어 있습니다. 인생빵구 우습게 여기지 마십쇼. 가던 차도 빵구나면 큰 사고 나는 것입니다. 하와가 설마하면서 건드렸다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났습니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저주와 고통과 땀흘림과 죽음이 들어왔습니다. 그저 쉽게 하나님의 것 구별하지 않았다가 그 결과는 너무 큰 아픔으로 남게 된 것입니다.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아사왕은 평생에 정직한 생활을 했습니다. 다윗을 본받아 정직하였습니다. 그리고 주변을 항상 정리하며 살았습니다.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하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성별의 생활을 했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분명히 구별할 줄 알고 또 하나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5. 제목 : 좋은 사람 되게 하소서

본문 : 딤후-03-01-5  

                                     

   우리는 한 번 밖에 없는 인생을 아름답게, 가치 있게, 멋있게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의 소원이며, 꿈입니다. 누구나 다 같이 인생으로 태어나서 이 세상을 잘 살다 가기를 원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이 세상을 잘 살 수 있습니까?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배우는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고 우리가 깨닫는 가장 중요한 진리는 무엇입니까? “우리는 이 세상을 잠깐 살다가 간다.” 이 진리를 우리는 깨닫아야 합니다. “우리 인간은 나그네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을 떠나서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로 간다. 내 영혼이 구원함을 받아 영원히 하늘나라에 가서 산다.” 이것이 우리로 매일 매일을 기쁘고, 여유 있게 좋은 일을 하며, 좋은 인생이 되도록 늘 격려해 주고 가르쳐 주는 우리의 푯대요, 스승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을 잘 살아야 합니다. 잘사는 길이 무엇입니까? 사는데  맞추면 절대로 잘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영원히 산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은 영원히 죽습니다. “나는 멀지 않아 천국 간다. 나는 죽는다. 나는 잠깐인 이 세상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되겠다.” 이렇게 목표를 정할 때 사는 것도 잘살고, 죽는 것도 잘 죽고, 죽음 다음에도 영원히 갈 수 있습니다. 바울이 말한 대로 “나는 날마다 죽노라” 죽음이 앞에 있는 사람, 죽음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사람만이 이 세상을 가장 훌륭하게, 가치 있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실패, 불행, 범죄, 탈선은 내가 영원히 사는 줄 알고 이 세상에 끝없이 나 혼자 오래 오래 살 줄 아는데 있습니다. 있을 수도 없는 이 착각, 이 확실한 진리 앞에서 우리는 어리석은 도모를 할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누구나 죽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왜 잘 사셨습니까? 예수님은 항상 죽음에 맞추셨습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좋은 일 하신 겁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죽음 앞에 와 있습니다. 십자가 앞에 와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지금 살아계십니다. 살아계신 그 앞에 우리가 나와 있습니다. 주님을 따라 가면 금생에서도 영원히 살고, 땅에서도, 하늘에서도 살고, 사는 것도 잘 살고 죽는 것도 잘 죽고, 모든 일이 잘 될 줄로 믿습니다. 예수를 믿고 새로운 마음, 변화된 마음, 바로 그것은 죽음에다 초점을 맞춘다라는 것입니다.

 

   제가 곽선희 목사님 이야기 중에 늘 감동을 주는 좋은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 가정이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은 할아버지가 시장에서 솥장사 하는데 장터에서 전도지를 받고 예수를 믿었습니다. 여러분! 이렇게 그냥 “예수 믿으세요, 믿으세요.” 하지만 거기에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가 있습니다. 큰 가정을 구원하고, 그 한마디로 동네를 살리고 민족을 살리는 겁니다. 그래서 전도를 받고 이 할아버지가 예수님을 믿고 모든 삶이 새로워졌습니다. 변화됐습니다. 술, 담배, 우상 숭배, 다 끊고 옛날 생활 다 버리고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천국을 바라보는 겁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루하루를 기쁘게 살고, 매 주일마다 거지, 가난한 사람을 그렇게 도와주고, 잔치를 집에 와서 베풀고, 86세를 사셨답니다. 어느 날 오전에 낚시를 하러 가셔서 고기를 잡고 오시더니만 “나는 오늘 간다.”고 그러더랍니다. ‘어른이 왜 이러시나’ 그랬는데 정말 간다고 누우시더랍니다. 그러더니 가족들 다 불러놓고 “나, 오늘 간다. 예수 잘 믿어라. 그리고 내가 가면 장례식을 가난한 거지를 데려다가 일주일동안 잔치를 베풀어라.” 그리고 소년인 곽선희 목사님의 손을 잡고 “너는 남쪽으로 가서 목사가 되어라.” 그러더랍니다. 그 유언을 이어받아서 내려와서 목사가 되었답니다. 그래서 곽 목사님은 ‘예수 믿으면 저렇게 멋지게 사는 구나. 멋지게 죽는 구나. 죽을 때도 저렇게 멋지게 유언하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죽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우리 교단이 존경하는 문장식 목사님이라고 사형폐지 운동을 하는 훌륭한 목사님이 계십니다. 이 목사님은 20년 동안을 사형수만 마지막 임종을 지켜보는 우리 기독교의 대표입니다. 가톨릭, 불교, 기독교에도 한 분씩 계시는데, 거기서 사형할 때 유언을 받는다든지, 기도해 달라고 그러면 자기 원하는 종교대로 기도도 해 주고, 마지막에 전달 할 것도 다 해 주는 그런 역할을 합니다. 그런데 그 많은 사람을 보면 두 가지로 나타난 답니다. 끝까지 안 죽으려고 그러고, 반성 안하고, 수십 명 죽여도 이 사회가 정치가 부모가 잘못하고, 전부 책임을 남에게 전가하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너무 죄송해서 잘못했다 그러고 울고 회개하며, 기도해 달라고 그러고 찬송까지 부르고 가는 분이 있답니다. 사람은 자꾸 안 죽으려고 그러고 피하려고 그럽니다. 안 죽으려고 그러면 안 죽어집니까? 다 죽습니다. 반드시 죽습니다. 죽음은 또 언제 찾아올지 모릅니다. 왜 일찍 오냐고 그러면 안 됩니다. 일찍 올 수도 있고, 늦게 올 수도 있습니다.

 

   어떤 분은 저한테 기도 받으러 와서 “내가 왜 죽어야 됩니까?”합니다. 제가 어떻게 압니까? “내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일찍 죽어야 합니까?” 죽음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찾아옵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30세만 되면 모든 일이 하향합니다. 세포도, 기억력도, 입맛도 다 줄어듭니다. 안 줄어드는 것이 없답니다. 시력도 그때부터는 줄어든답니다. 그래서 어떤 선수도 30대가 되면 모든 분야에 절정이 옵니다.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이 내려갑니다. 어디로 갑니까? 죽음으로 갑니다. 임금에게도, 왕자에게도, 젊은 30대중전도 다 갑니다. 임금님의 시해가 그렇게 많습니다. 다 갑니다. 미국 대통령 딸, 아들도 다 갑니다. 우리나라 제일 큰 병원 원장들도 원장으로 있으면서 가는 분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내가 원장이면 안 가는 겁니까? 대통령이면 안 가는 겁니까? 어리면 안 가는 겁니까? 누구든지 이 사실을 받아들일 준비를 해야 됩니다. 그게 교인이며 인생입니다. 100% 갑니다. 한 사람이라도 남는 사람이 있으면 억울하지만 다 갑니다. 오는 것이 아침에 올지, 점심에 올지, 저녁에 올지 모릅니다. 확실한 것은 출근했다가 퇴근 못하는 분이 매일매일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아침에 인사할 때 잘하고 가라는 겁니다. “다녀오겠습니다.” 악수하고. 미국사람은 헤어지면 반드시 키스합니다. 못  돌아올 수 있으니까. 오늘 키스하기를 바랍니다. 왜 우리는 이런 것을 모릅니까? 모두 갑니다. 그래서 겸손합니다. 그래서 서둘러서 좋은 일 많이 하는 겁니다.

 

   이분만 그런 게 아닙니다. 빌 게이츠 보십시오. 지금 그분은 55세입니다. 그런데 죽을 준비 다 합니다. 재산, 거의 다 내놓았습니다. 저 나라 가려고, 선한 일 많이 하다 가야 된다는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이 다릅니까? 죽음이라는 것을 알고 늘 준비하며 살기 때문에 그 나라를 위해서 늘 좋은 일 하는 겁니다. 사랑해 주고 도와주며, 불쌍히 여겨주고 긍휼 베풀며, 먹을 것을 나눠먹고 인자하며, 자비하고 모든 분들을 도와주며, 이게 교인의 삶입니다. 좋은 일 하다가 좋은 나라가야지, 저 영원한 나라에 좋은 사람만 들어가기 때문에 좋은 사람이 되어야 됩니다. 할렐루야!  

 

   미국에 유명한 세계적인 부자가 있습니다. 빌 게이츠보다는 두 번째 부자인데, 이분이 워런 버핏이라고 하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은 이번에 자기 재산의 85%인 374억 달러를 내놨습니다. 다 내놨습니다.  어려운 분들, 암, 에이즈, 불쌍한 나라들을 위해 다 내놨습니다. 남은 15%도 곧 내놓겠답니다. 자녀에게 안준답니다. 기독교 국가의 철칙은 그게 다릅니다. 자녀에게 안줍니다. 왜 그러냐하면 자녀는 자녀의 복이 있다는 겁니다. 카네기도 13살에 미국 이민 가서 예수 잘 믿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이 학력 전부입니다. 하나님을 잘 믿으니 복 받습니다. 미국에 1등 부자 되어 이분이 교회에 기증한 오르간만 7천대입니다. 오르간 없는 곳에서 다 와서 신청하면 다 해 주고, 도서관을 2900개, 대학도 세웠습니다. 록펠러도 그랬습니다. 그게 교인입니다. 교회에 나오면 세상 사람은 임종까지 모릅니다. 가는 시간까지 모르고 발악합니다.  

 

   병원에 암 걸린 분만 나가는데 있지 않습니까? 60일 되면 거기 가서 보호받다가 돌아가는 곳이 있지 않습니까? 호스피스. 그런 시설이 있습니다. 호스피스 동에 가면 자기는 이미 끝난 겁니다. 그런데도 거기서 끝까지 은행 저축통장, 문서, 다 가지고 와서 시간만 있으면 그거 적고 계산하고, 간호사가 보면 기가 막힙니다. 저분은 갈 때가 됐는데도 자녀들한테 끝까지 안 넘겨줍니다. 자녀에게라도 넘겨줘야지, 사회에 조금이라도 좋은 일 하다가 가야지, 어떤 분은 거기 와서 간호사를 어쨌든 꼬셔가지고 살려고. 간호사는 다 아는데. 저 어른이 이제 곧 가게 되었는데도 나하고 같이 나가서 잘 살자고 그런 답니다. 가는 걸 모릅니다. 그게 차이입니다. 이 세상 영원히 사는 줄 압니다. 그래서 욕심냅니다. 끝까지 욕심 부리고 교만하며, 남을 해롭게 하고, 그렇게 사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은 끝까지 남을 좋도록 하다가 가야 됩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다 내게 돌아옵니다. 남에게 주는 것은 좋은 것이 돌아오지만 남을 나쁘게 하면 나쁜 것이 돌아옵니다. 남을 해롭게 하면 그 사람만 해로움을 당하고, 내가 빼앗아 잘 살줄 아는데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의 것도 빼앗으면 안 됩니다.  이것은 다 내게 돌아옵니다. 제가 어떤 영화를 저녁에 한번 보니까 그런 게 나왔습니다. 대감 집에 딸이 둘이 있었는데 한 딸은 전처의 딸입니다. 자기는 이제 와서 딸을 낳았는데 혼인 말이 나오는데 자꾸 그쪽에서 전처 딸을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 부인이 어떻게든 전처 딸을 없애야 되겠다는 마음을 갖고 그렇게 학대하더니만 집에 있는 종을 통해 오늘 딸을 저쪽과 결혼하려면 공을 들여야 된다고 그래서 공들이는 곳에 그 종이 기다렸다가 강간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이 어머니가 그것을 짭니다. 그러면 이 딸은 양심에 가책이 되면 못사니까 목매어 죽지 않겠나, 약을 먹고 죽든 죽을 테니까 그쪽으로 이끌어갑니다. 이것을 누가 들었느냐 하면 몸종이 들었습니다. 몸종이 듣고는 저녁에 그 어머니 딸인 아씨한테 가 그 딸을 그쪽으로 유인해 갑니다. “오늘 저녁 거기에서 공을 들이면 내일 선을 볼 때 참 좋답니다.” 이래서 딸이 거기 가서 공을 들이는데 그만 종이 딸도 모르고, 좋으니까 폭행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 딸은 너무 원통해서 거기서 목을 매어 죽습니다. 어머니는 이제 전처의 딸이 죽었는지 알고 밤늦게 서서히 갑니다. 가보니까 세상에 웬일입니까? 전처의 딸이 죽은 게 아니라 자기 딸이 죽은 겁니다.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울고 가슴을 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 사회는 너무 남을 해롭게 합니다. 나 하나, 막가파입니다. 그러니 오늘 본문대로 종말입니다. 말세입니다. 개인적으로 종말입니다. 가정이, 시대가 종말입니다. 종말은 자기는, 나만 살아야 되겠다고 하고 오늘 본문에 17가지 나오는데 제가 말씀 드리겠습니다.

 

   “자기를 사랑하고” 이게 불행한 일입니다. 남을 유익되게 해야 내게 유익이 됩니다. 남에게 줘야 좋은 것이 옵니다. 사랑해 줘야 내가 행복해 집니다. 남을 좋게 해야 됩니다. 할렐루야!  

 

   “돈을 사랑하는 것” 너무 돈을 사랑합니다. 부모도, 형제도 없습니다. 돈만 봅니다. 돈 따라 갑니다. 이것은 고통 하는 인생입니다. 그의 인생, 잘 못 삽니다. 죽지도 잘 못 합니다. 잘 못 살다가 잘 못 죽습니다. 이런 인생은 천국 문도, 땅의 문도 굳게 닫힙니다. 자기 사랑하고 돈 사랑하고, 그래서 유명한 벵겔이라는 학자는 악의 첫째 뿌리가 자기 사랑, 둘째 뿌리가 돈 사랑이고 했습니다. 여러분! 교회에 다니면서 얼마나 살 겁니까? 사랑하며 살기를 바랍니다. 주일 얼마 지킬 겁니까? 주일 몇 년 지킬 것 같습니까? 1년이 52주인데, 백년 해 봐야 얼마입니까? 5200. 5200 주일을 지킬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몇 십 년 해 봐야 그 몇 백번 지키다가 가는 건데, 그것을 못해, 힘들다 그러고. 이번에 추수감사절, 우리가 감사절 몇 년 지키겠습니까? 좋은 일 하고 다 와서 먹으니 얼마나 좋습니까? 할렐루야!  

 

   “자긍하며” 그랬습니다. 이것은 잘난 척 하고, 말로 남을 멸시하고, 요새 흔히 악플 족, 추악한 글을 올려서 남을 중상모략하고 험담하며, 헐뜯어내는 사람을 악플이라고 그럽니다. 우리는 선플이 돼야 됩니다. 선한 말 쓰고. 할렐루야! 자기가 거두는 겁니다. 돌아가는 겁니다. 어느 목사님이 그럽니다. 자기에 대해서 수천 개의 글이 올라 이렇게 많은 사람이 공격해서 조사를 해 봤답니다. 해 보니까 7명이 밤낮 들어앉아 그 짓만 하더랍니다. 자꾸 다른 이름으로. 오늘 밥만 먹고 그런 짓만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다 자기에게로 돌아갑니다.  

 

   “교만하며” 그랬습니다. “남을 무시하고” 이게 다 종말론적입니다.

 

    그 다음에 “훼방하며” 막말하는 사람입니다. 자긍하는 말보다 이 말은 더 분리를 시키고 대립시키며, 분열을 가져다주는 아주 훼방하는 말입니다. 다 사탄으로부터 옵니다. 우리 성도들은 말도 은혜로운 말, 소금을 치라고 그랬습니다. “말할 때마다 소금을 치라.” 양념이 들어간 말을 하라는 겁니다. 은혜로운 말, 감사의 말, 사랑의 말, 이해하는 말, 덮어주는 말, 불쌍히 여기는 말, 남을 세워 놓고도 막 공격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런 분들이 다 목사라고 그러고, 하나님의 종이라고 그러고, 말하는 걸 보면 다 안다 그러는데, 그게 다 악마에게 속했는데 무슨 주의 종들입니까? 말을 들어 보면 국적이 들어나는데, 말보면 전공도 들어납니다. 남을 공격하고 나 살려고 하는 것이 다 악마지, 무슨 천사의 말입니까? 천하에 없는 논리를 갖다 붙입니다. 그러나 그게 다 사탄으로 말미암아 오는 겁니다. 사랑의 말이 넘치기를 바랍니다. 집에서도 좋은 말만. 잠깐 사는 세상에 왜 남에게 못 박히는 말을 합니까? 부드러운 말, 은혜로운 말하고 유머를 많이 해야 됩니다. 괴롭고 힘들어도 유머를 많이 해야 됩니다. 남편이 늦게 들어오면 속상합니다. 새벽에 어디 갔다가 새벽에 들어오면 힘듭니다. 문 열어달라고 그러면 힘듭니다. 그러나 그때도 분위기를 바꿀 수 있습니다. “꼬꼬” 새벽에 오니까 닭이 운다고 그래서 “꼬꼬”. 남편이 그만 회개하고 일찍 들어옵니다. ‘집에 닭이 우는 구나. 내가 새벽에 오니 얼마나 울었겠나.’ 그러면서 딱 회개 합니다. 그 다음 자고 오면 그것은 남남이지 않습니까? 개처럼 짓는 겁니다. “멍멍” 집이라고 오냐 말입니다. 말로 하지 말고 그런 식으로 하면 남편이 웃고, “미안합니다.” 하며 좋아질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 사회를 어떻게 부드럽게 할 수 있습니까? 오늘 보십시오. 지식이 발달하고 우리의 외모도 아름다워지며, 여유도 있고 모든 것이 좋아졌지만 우리말은 전부다 강퍅하고, 가시가 돋치고, 독이 가득차고, 말속에 전부 미사일을 담으니 가는 곳곳마다 파괴가 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부드러운 말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에 “부모를 거역한다” 그랬습니다. 우리 모두 부모님이 낳아주시고 길러주시며, 먹여주시고 목욕해 주며, 젖 먹이고 어머니 등에 업혀서 컸습니다. 부모님을 잘 모셔야 됩니다. 이 세상에 제일 아름다운 게 부모 잘 모시는 겁니다. 우리 교회 나올 때 젊은 부부 나오는 것 예쁩니다. 아이들 데리고 오는 것 예쁩니다. 그러나 더 예쁘고 아름다운 것은 부모님을 모시고 오는 겁니다. 부모님을 부축해서, 다 어렸을 때 어머니가 우리 쓰다듬어 줘가지고 컸지 않았습니까? 우리 교인 가운데는 친정어머니도 모시고 시어머니도 모시는 분이 여러 분 있습니다. 너무 잘 모십니다. 이 어머니끼리 시기 질투도, 할머니들은 둘이 그런 경우가 있답니다. 그러나 자녀들은 잘 모시고 용돈 드리고, 사람이 성공해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출세? 몇 년 할 겁니까? 권력 몇 년 잡을 겁니까? 다 내려오는 자리인데, 천하에 없는 자리. 집에서 여러분 부모님의 할 일 잘 감당하기를 바랍니다. 백발 앞에 고개를 숙여야 됩니다. 감사치 않습니다. 잘못된 삶입니다. 다 있어도 하나님을 감사해야 됩니다. 감사할 일이 얼마나 많습니까? 범사에 감사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완석 목사님께서 암 걸려 병원에서 수술하자 그러는데도 이만하면 됐다고. 내가 80 넘도록 하나님 은혜 가운데 살았는데 수술 안 한다고. 그래서 더 건강하게 오래 사셨습니다. 아프지도 않고 2년 잘 지내셨습니다. 암 걸려도 우리 교회에 두 번이나 설교하셨습니다. 몇 번이나 설교하시면서 우리 명성교회 고맙다고, 여러분 고맙다고. 그리고 가실 때는 천사같이 고요히 가셨습니다. 이렇게 모두 감사하고 선한 일 많이 하는 분은 사는 것도 잘 살고, 가는 것도 잘 가고, 간 다음에도 천국 가서 영원히 사니 이런 축복이 어디에 있습니까? 여러분! 정말 이 세상에서 잘 살려고 하는 하늘나라에 맞춰서 살아야 할 줄로 믿습니다.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요새 너무 속된 걸 좋아하고, 불의하고, 추하고, 더럽고, 음란하고, 타락하고, 이런 악한 길을 쫓아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몸도, 마음도, 생각도, 생활도 거룩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무정하고” 정이 뚝 떨어졌습니다. 오늘 산업사회 정보화 시대에 지식이 발달하고 이렇게 도시화되면서 정은 다 끊어졌습니다. 부모, 형제, 자녀 정이 있어야 됩니다. 이렇게 만나면 반갑고 대접하고 싶으며, 사랑하고 서로 이렇게 해야 되는데, 막 따지고 원칙가지고 그러고 천한 것도 서로 서로 생명 걸고 소송하고. 저는 아직까지 소송을 한 번도 안했습니다. 제가 소송할 것 같으면 안전히 망칠 사람 많습니다. 죽여 놓을 사람도 많습니다. 그것은 명예훼손 하나 걸면 모두 그럽니다. 그러나 저는 절대로 앞으로 소송은 안합니다. 얼토당토하지 않습니다. 0%도 없는 일가지고 그러면서 모두 하나님의 종들이라고 그럽니다. 하나님 앞에 그래야 되겠습니까? 소송 막 해 대고, 검찰에 고발 막 하고.  

 

   여러분! 이 사회를 왜 이렇게 망칩니까? 오늘 교인들이 더 합니다. 주의 종들이 더합니다. 이 좋은 시대를 왜 이렇게 정이 뚝 떨어져 나가고, 이렇게 살벌한 사회, 강퍅한 사회, 동물도 안 그럽니다. “동물의 왕국” 봐도 동물이 안 그럽니다. 동물이 소송하고 그럽니까? 우리 모두 사랑하며 삽시다. 짧은 인생 잠깐인데 양보하고 이해하며, 좀 안 되면 기다리고 좀 손해 보며, 말 들으며 살면, 다 될 걸 가지고.

 

   다음은 “원통함을 풀자”입니다. 아주 원한을 갖고 있습니다. 속에 미움을, 섭섭한 것을 안에 갖고 있으며, 누구 말 하나 들으면 그것을 속에 늘 갖고 있습니다. 다 없애버려야 됩니다. 부부간에도 섭섭한 말 하지 않습니까? 못 박힌 말 하는 겁니다. 저도 사람이 덜 되어 집사람 마음을 아프게 할 때가 있었습니다. 제가 너무 죄송스럽습니다. 그러고 교회에 와서는 또 “찬송합시다.” 그러고. 그래도 늘 집사람은 그런 걸 이해를 잘합니다. 또 집사람도 제게 아픈 말을 안 하는 것은 아닙니다. 저도 그런 말을 듣지만 들은 즉시 잊어버립니다. 부부간에, 자식에 대해서, 부모에 대해서도 그런 걸 마음에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목사님에 대해서 혹시 섭섭한 마음을 속에 갖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게 병이 되고 나쁘게 됩니다. 어디 누구에게라도 혹시 속에 뭐 있으면 털어버려야 됩니다. 내 안에 주님만 모시고.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는 겁니다. 주님을 보는 겁니다. 성령으로 충만해야 되는 겁니다. 성령이 함께 하시면 내 안이 천국이 될지언정 원한이 내 안에 자리를 못 잡을 줄로 믿습니다. 증오와 미움과 이 악한 생각이 내 안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늘 기도하고 주의 평화가 우리를 주장해야 할 줄 믿습니다.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배반하고, 조급하고, 자고하고” 다 모두 그런 말들입니다. 자기중심, 자고하고 내가 잘 났고. 항상 남 잘 되게 해야 할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 지난번에 우리 총회에서 부총회장 선거가 있었는데 제가 이 말을 안 하려고 그랬는데 제일 어려운 것이 투표를 제가 누구를 해야 되느냐가 힘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생각도 안하다가 그런데 이게 몇 번 동점이 있었습니다. 제가 그것을 봤습니다. 딱 동점이 나오는 겁니다. 동점이 나오니까 완전히 그 다음에 바뀌는 겁니다. 서로가 표 관리를 철저하게 하니까 이겨도 많이 못 이깁니다. 어떤 분은 20표, 10표, 5표, 그러고 동점도 나오는 겁니다. 그래서 항상 몇 차 선거가 계속 이어나가는 겁니다. 제가 찍으려고 그러는데 손이 어디로 가야 되느냐. 이 얼마나 오랫동안 기도를 하는데. 제가 기도하는 중에 ‘내가 안 되더라도, 내가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떳떳해야 된다.’ 제 친구를 딱 찍었습니다. ‘너 되라’ 상당히 머리는 복잡한데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나오는데 ‘떨어지면 어떻게 하냐. 그런데 마음은 편안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려운 순간에도 정말 이것 큰 어려움이지만 그래도 끝까지 남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 친구 먼저 생각하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어야 됩니다.  

 

   오늘 나온 우리 모든 성도 여러분! 이 시대가 어떤 시대입니까? 앞으로도 과학은 무한히 발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인격, 그 소중한 인간관계는 다 단절되고 허물어지며, 사람 만남이 무서워지고 서먹서먹해 지며, 우리 안에는 너무 증오가 이글이글하고 앞으로 더하지 않겠습니까? 이 정도가 아니지 않습니까? 앞으로 서로가 걸어 다닐 수 있겠습니까? 이 땅 위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인 우리가 얼마 산다고, 다 가면 다 나그네인데, 야곱이 말하기를 “내 나그네의 길은 130세라.” 성경은 우리 인간은 저 본향을 향하여 달려가는 경주자라고 합니다.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인도하시니 내 주 안에 있는 긍휼 어찌 의심하리요 믿음으로 사는 자는 하늘 위로 받겠네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

무슨 일을 만나든지 만사형통 하리라♬(찬송가 434장)

 

   히말라야 고산에는 두 가지 형의 양이 있답니다. 풀을 뜯어먹으면서 아래로 내려오는 양들은 나중에 죽는 답니다. 풀을 뜯어서 위로 올라가는 양들은 끝까지 살 수 있답니다. 오늘 우리는 이 악한 세대, 되는 대로 막가파식으로 나 하나만 살아야 되겠다고 하는 이런 치열한 세상으로 나가면 우리는 같이 죽습니다. “너 그래라” 그러고 우리는 주님을 향하여. 할렐루야! 유명한 장기려 박사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주치의이고, 북한병원 원장으로 있다가 다 버리고 남한으로 내려와서 부산에 병원을 세워 전부 가난한 분을 위해서 일하다가 막사이사이상까지 받았습니다. 월급 받아서 전부 환자들 다 대주고, 돈 못내는 환자는 밤중 되면 전부 다 진찰하러 다니다가 뒷문으로 옷 입혀 가지고 도망쳐라 그랬습니다. 원무과는 그 다음 날 일어나보면 환자가 없어 어디 갔는지 도대체 알 수가 없고, 장기려 박사가 다 빼주었습니다. 교인이지 않습니까? 교인은 자기 가는 것을 아니까. 그래도 이분은 가셨지 않습니까? 좋은 일 하다가 가는 겁니다. 가는 걸 알고 사니 그렇게 잘 사는 겁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가는 것을 모르고 살면 어떻게 됩니까? 다 죽는데, 죽음이 왔을 때 막 안 줄겠다고 그러고 그것이 됩니까? 안 됩니다. “가겠습니다. 열심히 일했습니다. 새벽기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이제는 좀 천국 가서 쉬고 싶습니다.” 그래서 가야지. 할렐루야!  

 

   오늘까지 지내오면서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온 여러분! 부부간에도 사랑하고, 황혼이혼이 우리나라에 너무 많다고 합니다. 말이 됩니까? 나이 60 되고, 50 되어 가지고 무슨 이혼입니까? 또 이혼해 젊은 사람하고 살려고 그러고, 사람입니까? 그러면 젊은 사람 만나면 일찍 죽습니다. 더 빨리 죽습니다. 노인은 노인끼리 만나야 됩니다. 서로 친하게 지내고 이야기하며, 친구가 되십시오. 왜 자꾸 이 사회가 그럽니까? 내가 헤어지면 또 아이들이 얼마나 불행해 집니까? 말할 수 없는 상처를 받는데 겹겹이 왜 자꾸 그런 상처를 만드느냐 말입니다. 또 새로 시작하면 얼마나 어려운데 몇 년 더 산다고, 잠깐인데 왜 그럽니까? 65세에 결혼식해 보세요. 말이 됩니까? 창피해서 제가 말도 못합니다. 좀 그러지 마십시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좋은 날이 오는데, 그리고 사랑하고, 김치계절이 오면 김치 열심히 담고, 몇 번 못 담으면 끝나니까. “또 김치 담아야 되나요?” 그러지 말고, 김치 몇 번 담그고, 올해 맛있게 담아서 먹자 이렇게 해서 김치 양념 넣고, 굴젓도 넣고, 맛있게 해서 온 식구가 먹고 오늘 하루가 얼마나 귀합니까? 이렇게 해서 살아있는 하루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겁니다. 감사하다, 감사하다, 그러면 누구나 사랑할 수 있고, 더 감사할 수 있고, 거룩하게 살 수 있고, 믿음으로 살 수 있고, 도와주며 살 수 있고, 기쁨으로 살 수 있고, 잘살 수 있고, 건강하게 살 수 있고, 행복하게 살 수 있고, 죽는다라는 것 하나만 알고 살면 성격도 10배나 좋아지고, 절제도 10배나 더 잘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것도 못 참냐? 얼마 안 있으면 다 가는 세상인데 참아야지 참는 것도 잘 참고 다 잘 살 수 있습니다. 좋은 소리 들으면서 멋지게 사는 축복된 성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6. 제목 : 새벽에 인생의 승부를 걸자  

                                   

본문 : 시-57-06-11                                      

시편 57:6-11, 시 46:4-7

 

 

 

 

목회자들이 반 농담 반 진담으로 하는 말 중에 \"새벽기도와 설교만 없으면 목회는 할만 하다\"고 합니다.  새벽기도를 누가 만들어서 이렇게 사람 고생시키느냐고 푸념도 합니다.  목회자만이 아닙니다.  새벽기도 하기는 힘들고 안하자니 뭔가 떳떳지 못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누가 새벽기도를 만들어서 오늘같이 바쁜 시대에 사람을 이렇게 귀찮게 하는지 모르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새벽기도회를 노골적으로 반대하지 않지만 속으로 탐탁치않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지적하는 의견들을 종합해보면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직장 근무시간에 졸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새벽기도회 참석자들이다.  

 

둘째, 새벽기도회 개근생들은 신비주의적 또는 무속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다.  

 

셋째, 새벽기도회 참석자들은 새벽기도회를 율법화하여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면 복을 받지만 불참하면 벌을 받는다는 압박감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다.  

 

넷째, 새벽기도회 참석자들은 새벽기도회를 신앙을 평가하는 기준으로 삼아 새벽기도회 출석 여부를 가지고 남의 신앙 유무를 함부로 평가하는 위험한 독선에 빠지는 수가 허다하다.  

 

다섯째는 새벽기도회로 인하여 일부의 목사들이 건강의 손상과 양심의 갈등을 겪게 된다.  

 

여섯째, 만일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교인 모두가 수면부족을 이유로 아침에 늦잠을 자거나 낮잠을 자게 된다면 가정생활이나 직장생활이 정상적으로 운영될 수 없다.  

 

반대하는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이야기를 듣다보니, 하지 않아도 될 것만 같지 않습니까?

 

 

 

1. 그렇다면, 왜 새벽기도를 해야 합니까?

 

어떤 나이 많은 어부가 젊은 어부에게 노를 맡겼습니다.  그 젊은 어부는 두 손으로 노를 젖다가 한쪽 노에는 \"기도하라\", 다른 쪽 노에는 \"일하라\"고 쓰여진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물었습니다.  \"할아버지, 사람이 열심히 노력해서 살면 되지 꼭 기도라는 것을 해야 합니까?\"  이 말에 노인은 그에게 \"기도하라\"고 쓰여진 노는 묶어 두고 \"일하라\"고 쓰여진 노만 젖게 했습니다.  그러니까 배가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뱅글뱅글 원을 그리면서 제자리에서 돌기만 했습니다.  그때에 노인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기도하지 않고 일만 하면 전진이 없지.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는 법이라네.\"  그렇습니다.  인생살이의 모든 부분에서 기도는 모든 문제의 답이 됩니다.  

 

그렇다면, 꼭 새벽기도이어야만 합니까?  

 

만약, 어떤 사람이 제게 \"새벽에 기도를 꼭 해야 하나요?  하루 중 어느 시간이든지 하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다면, 저는 \"가장 조용하고 방해받지 않는 시간인 새벽에 기도하지 않는 사람이 하루의 어느 시간에 기도할 수 있습니까?\"라고 반문하고 싶습니다.   베이커라는 주경학자의 말처럼 \"새벽\"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되기 전 가장 첫 시간 신선한 생각을 하나님께 바치며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기에 새벽이야말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시간\"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속에 숨어서 부른 노래\"입니다.   다윗은 사울의 무서운 창끝을 피하여 아둘람굴과 엔게디 굴속에 숨어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절박한 상황속에서 기도합니다.

 

\"하나님 나를 제발 멸망시키지 마십시오.  나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이 불안한 나날을 빨리 끝나게 해 주십시오.  나를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애절하게 몸부림치며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자 순식간에 흔들리던 마음이 안정되고 한숨이 변하여 찬송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로다.  내 영혼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다윗은 공포와 불안이 엄습하던 어느 날 밤,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다가 \"이대로 아파하고만 있을 수 없다.  고통 가운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새벽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자신의 처지를 눈물로 호소했습니다.  \"주님 나를 도와주십시오.\"  바로 그 순간 신비한 응답을 받게 되었습니다.  내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내가 너를 이미 붙들고 있느니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 순간 아침 햇살이 찬란히 굴속으로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이른 아침이었습니다.  \"아! 하나님은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이시구나! 하나님의 역사는 새벽에 나타나는구나!\"  하나님의 신비는 언제나 아침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새벽의 신비를 깨달은 신앙인이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믿음이 새벽에 받은 은혜임을 시편 여러 곳에서 고백하고 있습니다.  시편 46편 5절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  시편 88:13 \"여호와여 오직 주께 내가 부르짖었사오니 아침에 나의 기도가 주의 앞에 달하리이다.\"  시편 119:147-148 \"내가 새벽 전에 부르짖으며 주의 말씀을 바랐사오며 주의 말씀을 묵상하려고 내 눈이 야경이 깊기 전에 깨었나이다.\"

 

이처럼 다윗은 새벽의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받은 그 엄청난 은혜들은 새벽에 하나님을 만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새벽을 여시고, 그 시간을 통해서 말씀하시고자 하는데, 우리가 자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깨어서 기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새벽은 하루의 첫 시간입니다.  하나님께 바치십시오.  하나님과 먼저 대화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은 하루의 출발을 새벽기도로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그 날을 하나님께 맡기고 살아야만 합니다.  벌써, 새벽기도회가 1, 2부로 드려진 한 주가 지났습니다.  담임목사로써 온 성도가 특별히, 직장 생활하는 성도들이 새벽에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써, 하루의 삶을 주님께 맡기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시작한 것입니다.  새벽에 기도하고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 하루하루를 승리하며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은 새벽에 역사하십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시편 46편은 남 유다의 13대 히스기야 왕 때, 주변의 큰 나라 앗수르의 산헤립 왕이 침략했던 것을 배경으로 합니다.  B.C. 701년 앗수르의 산헤립 왕은 갑자기 많은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와서 예루살렘 성을 포위하고, 히스기야 왕에게 말했습니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이 예루살렘을 구한다고 생각하지 말라.  여호와 하나님이 너희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곧 멸망할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그러나 히스기야 왕은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 왕이 우리를 훼방합니다.  우리를 구원하소서.  천하만국이 주 여호와가 하나님인 것을 알게 하옵소서.\"  그러자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새벽에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사자를 보내서 앗수르 진의 군사들, 18만 5천 명을 다 죽였습니다.  아침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어서 전쟁은 이미 끝나고 말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간절히 기도할 때에 하나님께선 새벽에 역사하시고 새벽에 도와주십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새벽에 만나를 주시고, 새벽에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새벽에 홍해가 갈라지게 했고, 새벽에 여리고 성이 무너지게 하셨습니다.  여호수아 6장을 보시면 여리고 성을 정복할 때 여호수아와 백성들은 일곱 째날 새벽에 성을 일곱 바퀴 돌았습니다.  이 때 여리고 성이 무너졌습니다.  새벽에 일어난 역사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어떤 어려운 벽이라고 해도 우리가 새벽에 모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함께 하심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벽들은 무너진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경제의 벽, 환난의 벽, 질병의 벽, 사고의 벽, 모든 벽들을 새벽 기도를 통해서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께 엎드려 구함으로 새벽의 역사를 체험하는 춘천 중앙의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반대로 새벽에 기도하지 않으면 어떻게 됩니까?  위험합니다.  환난을 겪게 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왜 망했습니까?  새벽에 깨어있지 못했습니다.   소돔과 고모라에는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밤이 맞도록 술을 마시고 춤추었습니다.  새벽이 잠든 도시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천사를 보내어 멸하시려고 할 때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새벽에 잠든 도시는 위험합니다.  새벽이 잠든 교회는 성령이 역사 할 수 없습니다.  새벽이 잠든 나라는 이미 영적인 위기가 찾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새벽에 주님을 만나는 사람, 새벽 기도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사람은 삶 전체가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새벽에 잠자는 사람과, 힘들어도 새벽에 일어나 성전에 나와 기도하는 사람 중 누구를 더 사랑하시겠습니까?  누구를 더 긍휼히 여기시겠습니까?  누구에게 복을 주시겠습니까?  누구의 기도를 들어 주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답은 말하나 마나잖습니까?

 

우리는 새벽에 깨어 새벽 일터에서 영적 일인 새벽기도를 하는 성도들이 되어야만 합니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시 57:8).\"  그럴 때, 하나님은 과거에도 일하셨듯이, 오늘도 나를 통해 일하시고, 미래에도 우리를 이끌어 승리의 삶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그날의 축복을 원하면 그날 새벽 시간의 기도를 놓치지 마십시오.  기도를 멈추는 것은 축복과 승리, 그리고 번영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새벽에 기도하지 아니하면 그날은 사탄에게 끌려 다니기 십상이기 때문입니다.

 

조지 뮬러 목사가 뇌신경병에 걸렸었습니다.  의사는 새벽기도가 그 병에 해롭다는 진단을 내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새벽기도를 했는데 뇌신경병이 완전히 치료되고 몸은 더욱 건강해졌다고 합니다.  

 

잘 믿고 싶으십니까?  새벽기도를 시작하십시오.  문제가 있으십니까?  새벽 제단에서 무릎을 꿇으십시오.  소원이 있으십니까?  새벽 일터에 나와 부르짖으십시오.  억울한 일이 있으십니까?  새벽에 나와 하나님께 이르십시오.  지혜가 모자라십니까?  새벽에 구하십시오.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에게 질병이나 시험, 죄와 허물이 있습니까?  새벽에 나와 중보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께서 새벽에 도우시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3. 그렇다면, 우리는 새벽에 어떤 기도를 해야만 합니까?

 

1)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서원 기도를 하십시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이 베개 삼았던 돌을 가져 기둥으로 세우고 그곳에서 하나님께 서원기도 하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 야곱의 서원 기도는 바로 아침 일찍이 하나님 앞에 제사 드리면서 하는 기도였습니다.  야곱은 이와 같이 서원 기도함으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 20년 동안 무사히 지내게 되었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받지 못한 품삯도 하나님께서 받게 해 주셨습니다.  네 명의 아내를 통해서 열두 자녀를 얻게 하셨으며, 또한 강퍅한 에서의 마음을 녹여서 화해하게 하고, 마침내 많은 재산을 주어서 부자가 되게 했습니다.  야곱은 서원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만나고 또한 하나님께 축복을 받았습니다.

 

야곱만이 서원 기도를 통해 응답받은 것은 아닙니다.  한나 역시 서원 기도를 통해서 아들 사무엘을 얻게 되었습니다.  한나는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하나님께 통곡하고 서원기도한 뒤에, 집에 돌아갔을 때 하나님 앞에 기도한 대로 응답 받고 축복을 받았습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는 하나님께 향하는 마음의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소원을 가지고 기도하는 것은 유치한 신앙이 아닙니다.  그래서 서원 기도를 하려는 사람, 간절한 소원이 있는 사람은 그 소원을 성취하기 위해서 새벽에 하나님께 나와야 되는 것입니다.  소원을 가지십시오.  구체적인 소원을 가지고 하나님께 아뢰시기를 바랍니다.

 

 

 

2) 기적과 승리, 구원과 보호하심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데리고 출애굽을 하게 되었습니다.  바로는 이스라엘 백성을 보내놓고 다시 후회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스라엘 백성을 뒤쫓아 와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애굽 군대를 새벽에 홍해에서 다 진멸했습니다.  기적과 승리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위기에서 구원했습니다.  언제라구요?  새벽에 역사하셨습니다.  새벽이 되자 하나님께서 구원의 손길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4장 24절과 27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24새벽에 여호와께서 불 구름 기둥 가운데서 애굽 군대를 보시고 그 군대를 어지럽게 하시며\"  \"27모세가 곧 손을 바다 위로 내어밀매 새벽에 미쳐 바다의 그 세력이 회복된지라.  애굽 사람들이 물을 거스려 도망하나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들을 바다 가운데 엎으시니\"  

 

우리는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도해야 됩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 \"평안한 삶을 위해서만 기도하지 말고, 어떤 환경이 닥쳤다 할지라도 그 환경과 싸워 승리하게 만들어 주시옵소서.  약한 자가 되지 말고 강한 자가 되게 하시고, 저주 받는 자가 되지 않고 축복 받는 자가 되게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해야 되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녀도 별로 믿음도 없고, 신앙의 변화도 없고, 갈수록 인생은 지쳐만 가는 가장이 있었습니다.  그는 항상 뭔지 모르게 쫓기는 것 같고 고생해도 아무런 대가도 없고 마치 허공을 치는 느낌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너무나 답답한 나머지는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하기로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이대로는 내가 내 삶을 지탱할 수 없습니다.  피곤하고 지쳐서 견딜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원인을 가만히 생각하다가 \"그렇지, 내가 하나님 앞에 기도가 부족해.  나는 하나님 앞에 더 열심히 기도해야 돼.  아침서부터 밤늦게까지 하나님 앞에 기도를 해야 돼.  나한테 부족한 건 바로 기도다.  기도하지 않은 죄를 나는 범했어.\"하고 그는 마음속에 이제부터는 새벽 기도를 해야겠다고 작정했습니다.

 

교회에 가서 하나님 앞에 작정하고 기도했습니다.  아침마다, 새벽마다 나가서 기도하는데 새벽 기도 하면서 딱 한 가지 달라지는 게 있었습니다.  바로 생활 패턴이었습니다.  생활이 달라져 전에는 한밤중에 밤을 중심으로 일을 했는데, 새벽 기도 하면서부터는 아침 중심으로 생활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새벽에 나와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운동도 했습니다.  공부도 했습니다.  시간의 여유를 가졌습니다.  마음이 행복합니다.  만족합니다.  감사와 기쁨이 넘쳐납니다.  회사도 직장도 잘 해결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벽 기도를 통해서 삶의 변화가 나타나고, 새벽 기도를 통해서 여유 있는 삶을 갖게 되고, 시간도 넉넉해진 것을 깨닫고 하나님 앞에 감사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새벽 기도는 우리의 일상생활 속에서 작은 기적을 만들어주는 초석이 될 수 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3) 문제 해결 및 목적 달성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여리고 성은 B.C. 1500년경, 그 당시로서는 가장 견고한 성이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으로는 도저히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시고, 여호수아가 그 말씀에 순종함으로, 아침 일찍 일어나서 여리고 성을 돌고, 돌고, 돌았을 때 하나님께서 기적으로 역사 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리고 성의 함락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정착하기에 앞서 반드시 치러야 할 과제였습니다.  만약, 그들이 여리고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면, 그들은 가나안 정복이라는 목적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새벽마다 일어나 여리고 성을 돌고 돌아, 성을 무너뜨리고 가나안 땅 정착의 교두보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새벽 기도는 문제해결의 큰 힘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열왕기하 3장에는 B.C. 853년 남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북 이스라엘의 여호람 왕과 연합하여, 모압을 공격했을 때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연합군은 모압으로 가는 도중에 물이 떨어졌습니다.  군사들이 물이 없어 목마름으로 고통당할 때, 엘리사를 찾아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대로 골짜기에다 개천을 파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골짜기에 개천을 팠는데도 물은 한 방울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새벽에 하나님께 소제의 제사를 드리자마자, 그 새벽에 골짜기에서 생수가 터져 나와 물이 넘쳐서 그 물을 군인들이 풍족하게 마시기 시작했습니다.  골짜기는 밤에 팠지만 물은 새벽에 터져 나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생수를 넉넉하게 공급하여 주신 것입니다.  새벽에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성도 여러분,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습니까?  달성해야 할 인생의 목적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새벽을 주님께 드리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분명 새벽에 문제해결을 놓고 기도하는 성도의 부르짖음에 응답하십니다.

 

 

 

4) 사명감당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벽 미명에 일찍 일어나 산에 가서 기도하시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동안에 새벽 기도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마 28:1~6).

 

성도 여러분,

 

왜 예수께서 새벽에 일어나서 기도하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을까요?  전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기도한 것입니다.  

 

제가 분명, 새벽 기도에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말씀 드렸습니다.  이것은 제 이야기가 아닙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 그렇게 역사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새벽 기도하는 우리에게 큰 은혜를 주십니다.  왜 주셨습니까?  

 

요즘 많은 사람들이 병으로 고생합니다.  옛날보다 음식은 잘 먹고, 많이 먹지만, 운동량은 줄었습니다. 자동차를 타게 되니 걷지 않게 되고 또한 가정생활에서도 빨래, 설거지도 기계가 다 하니까 운동량이 줄었습니다.  많은 여자들, 가정주부들, 남자들이 병으로 고생합니다.  당뇨병이나 중풍, 고혈압이나 각종 현대병에 시달립니다.  음식을 먹은 후에는 반드시 적당한 운동을 해주어야 합니다.  운동하지 않으면 병에 걸립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하나님 앞에 축복을 받은 다음에 축복 받은 만큼 전도를 하지 아니 하면, 영적인 신앙이 병에 걸립니다.  구원을 받고 축복을 받고 은혜를 받은 다음에 나가서 주의 복음을 전파해야 합니다.  마치 육체가 운동하는 것처럼 우리 영적인 신앙도 전도를 해야 건강합니다.  대개 시험에 들고 낙심하고 교만에 빠지고 불신앙에 빠진 사람들은 전도하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장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은 그 전도를 통해서 깨어서 기도도 하고 더 나아가서 봉사도 하고 충성도 하고 하나님 앞에 영광 돌려서 그의 삶이 더 풍족하게 넘쳐나게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축복 받는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사명 감당을 위해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한국을 방문했던 빌리 그래함 목사님 말씀 가운데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세계를 순회하며 인상 깊게 감동을 받은 몇 나라를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한결같이 아침의 나라였다.  내가 캐나다에 갔을 때에 아름다운 새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떴다.  캐나다는 자연이 아름다운 나라임을 나는 알 수 있었다.  

 

두 번째는 일본에 갔을 때에 출근하는 요란한 발자국 소리와 아침에 돌아가는 공장의 요란한 엔진 소리와 함께 나는 눈을 뜰 수 있었다.  일본은 경제 대국이요 발전하는 나라임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 나는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갔다.  고요한 새벽 기도회를 알리는 교회의 종소리, 교회가는 성도들의 발자국 소리에 나는 눈을 떴다.  이 시대에 마지막 종말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영적인 잠을 깨우는 새벽을 깨우는 함성이 한국교회에서부터 시작됨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생활 패턴을 조금씩 바꿔 가시기를 바랍니다.  다시금, 새벽문화를 만들어 봅시다.  밤 문화는 버리고 새벽 문화를 만들어 봅시다.  새벽기도회가 1,2부로 진행되니 이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  가장 소중한 새벽 시간을 주님께 드립니다.  주님께서 하루를 책임져 주십니다.  이제는 새벽에 하나님을 만나고 기도하고, 또한 새벽에 운동도 하고, 새벽에 공부함을 통해서, 여러분 삶이 하나님 앞에 갑절의 축복을 받고, 생활이 변화 받고 새로워지고, 과거의 잘못된 삶에서 올바른 삶으로 변화 받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7. 제목 : 거룩한 목적을 가진 성도

본문 : 골-01-09-12                                      

 

 오늘 우리가 읽은 이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개척한 교회가 아닙니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수년동안 복음을 전할 때 골로새에서 온 에바브로라고 하는 청년이 복음을 듣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바울로부터 훈련을 받은 다음 자기 고향 골로새로 돌아가서 교회를 개척하였는데 그 교회가 아름답게 잘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이 로마로 가서 로마 감옥에 수감되어 있을 때 골로새 교회 지도자인 에바브로가 사도 바울에게 문안을 와서 골로새 교회의 형편을 상세하게 보고해 주었습니다.

 그 보고를 들으면서 바울이 얼마나 마음이 기쁘고 감사했던지, 그 입에서는 끊임없이 감사가 나왔고, 하나님 앞에 기도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다음에 \"나는 골로새 교회를 위하여 지금까지 여러 번 기도했지만 이제는 쉬지않고 기도하겠다\" 결심하였습니다.

 

 9절을 보면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골로새 교회를 위해서 간절하게 기도하되 한두 번 기도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계속해서 기도하겠다는 것입니다.

 

 10절을 주목하시기를 바랍니다.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즉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행동하고,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가 되며,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자들이 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점점 자라는 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라는 기도를 이제는 쉬지않고 해주기로 결심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10절 말씀을 통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3가지를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자꾸 자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계속 풍성해져야 됩니다.

 둘째로, 하나님께 합당히 행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순종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순종 안 하면서 하나님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셋째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를 놓고 바울은 지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점점 자라나는 성도들이 되게 하시고,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순종의 삶을 매일 살게 해 주시고, 인생을 살면서 결과적으로 하나님 앞에 아름답고 탐스러운 열매를 남기는 삶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 기도를 끝까지 쉬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너무너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이것보다 더 중요한 기도가 없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예수 믿고 돌아오는 골로새 교인들은 대부분 가난하고 세상에서 천대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 감옥에서 쉬지않고 기도해야 된다면 우선적으로 \"주여, 이들의 가난을 물리쳐 주시고 세상에서 좀 사람 대우받을 수 있도록 이들의 신분을 바꾸어 주십시오\"라고 기도해야 될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주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앞세웠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당시 성도들은 오늘날로 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사회로부터 왕따 당하고, 어디서나 얼굴을 제대로 들고 다니기가 곤란할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당시 성도들은 신앙생활을 하며 주님을 따라갔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위해서 바울이 정말로 감옥에서 열심히 기도한다면 이런 기도가 먼저 절실히 나와야 되지 않겠습니까?

 \"주여, 이들에게도 참 자유를 주옵소서. 신앙의 자유를 주시고, 사람대우 받을 수 있도록 해주시고, 어려운 시험이나 핍박이 없도록 해주시옵소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런 기도를 다 뒤로 돌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기도 내용을 보면 \"주여, 가난해도 좋습니다. 천대받아도 좋습니다. 핍박당해도 좋습니다. 골로새 교인들이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인생을 산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 되게 해주옵소서\"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자기 비전이 아닌 하나님 비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비전을 가진 사람은 자기 중심적으로 신앙생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고현교회를 포함하여 한국교회가 가지고 있는 심각한 영적 질병 중의 하나는, 너무나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입니다.

 

 유럽 교인이 한국을 몇 번 방문한 후 한국교회를 진단하는 자리에서 말하기를 \"한국교회 교인들을 보니 딱 3가지만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고, 둘째는 자기이고, 셋째는 돈입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제가 볼 때 바로 본 것이라 생각을 합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기도를 보면 너무나 자기 중심적인 기도에 매달려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주여, 하나님을 나는 더 알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합니까?\"라고 소원하며 매달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알다시피 하나님을 아는 일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온 천지만물을 만드시고, 처음과 끝이시며, 시간을 초월해서 존재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안다 해도 얼마나 알겠습니까?

 결국 안다고 해봐야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자기를 보여주시고 계시하신 범위 안에서 그분을 아는 것인데, 성경 안에 계시해 주신 하나님만도 너무나 광대하셔서 우리는 도무지 그 옷자락을 만지는 것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인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부분적으로 알고, 알아도 조금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자꾸 발전해야 되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바울이 기도할 때 뭐라고 말했습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여기에서 \"자라게 한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한번에 하나님을 다 아는 사람은 있을 수도 없고, 알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면서, 말씀을 배우면서, 계속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 조금씩 조금씩 하나님을 알아 가는 것입니다.

 마치 물이 차오르듯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차오르는 것입니다.

 이렇게 차오르다 보면 하나님을 조금 알았을 때보다도 하나님을 많이 알게 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을 더 밝히 분별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중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수 있는 사람일수록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이 무엇인가 금방 찾아냅니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골로새 교인이 되기 위해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자라게 해 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고현의 성도 여러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는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까?

 그것을 위해서 얼마만큼 하나님 알기를 사모합니까?

 1년 전에 비해서 금년에 하나님을 하는 지식이 얼마나 성장했습니까?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빈약하면 빈약할수록 모든 신앙생활은 자기 중심에서 머무르고 만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가 말하는 신앙의 본질이 아닙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순종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순종이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가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게 하겠습니까?

 \"하나님 안에는 모든 사람이 살았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즉, 하나님은 산 자의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라 산 자의 믿음입니다.

 그리고 산 자의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한 말씀을 듣거나 배워도 그대로 순종해 보겠다고 몸부림치는 믿음이 산 믿음이며,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살아있는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들을 때는 듣는 듯 하다가 교회 밖으로 나가서는 다 귓전으로 흘려버리고, 옛날의 습관대로 제 맘대로 살다가 적당히 회개하면 되는 줄로 안다면 하나님을 우롱하는 신앙생활입니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슬프게 할 뿐 기쁘게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제목은 \"주여, 어떻게 하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하게 순종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까?\"라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도가 한 달에 한번도 나오기 어려울 정도로 여러분의 기도에서 사라져버렸다면, 여러분의 마음의 소원은 이미 다른 데 가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렇게 변질된 신자가 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 때마다 슬퍼하실 것입니다.

 아무리 요란하게 구름 떼와 같이 몰려나와 예배를 드린다고 해도 우리 하나님은 얼굴 돌리실 것입니다.

 

 바울은 골로새 성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열매 맺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선한 일에 열매 맺게 해달라고 기도합니다.

 사람은 한 생을 살다보면 열매를 남깁니다.

 평생 술주정뱅이가 되어서 되는 데로 살다가 가는 아버지 뒤에는 구역질 나는 술 냄새만 남습니다.

 그러나 평생 삯바느질하면서 자식 하나 사람 만들어 보겠다고 피눈물을 쏟으며 산 어머니의 뒤에는 세상을 바꾸어 놓는 위대한 후손을 남기게 되는 열매가 있습니다.

 이렇듯 사람에게는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 지금이라도 당장 이 세상을 하직하고 떠난다고 할 때, 여러분의 삶의 흔적에 어떤 열매들이 맺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자 하는 목적이 없이 자기를 위해 날마다 \"돈 돈\" 하다가 재산만 열매로 남겨두고 가시겠습니까?

 과연 하나님이 기뻐하실 만한 열매로 무엇을 남겨놓을까?

 이것은 우리가 고민하면서 진지하게 살펴야 할 질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한 거룩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실직을 당한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실직 후 몇 달이 지나자 가족을 위해서 아무데나 들어가서 일을 해야 되겠다고 조바심을 내다가 어느 회사에 들어갔는데, 마침 그 회사에서 판매원을 시켰던 것 같습니다.

 매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길거리를 헤매면서 무언가를 파는 세일즈맨 말입니다.

 초등학교 6학년에 다니는 딸, 4학년에 다니는 아들이 수심이 서린 눈으로 아빠를 바라봅니다.

 아빠는 집에 들어와서 절대 티를 내지 않고 명랑합니다.

 그러나 가만히 눈여겨보면 매일 구두가 엉망인 채 집에 들어오는 것입니다.

 얼마나 걸었는지 구두에 먼지가 가득 앉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한 달도 안 되어 구두 앞창이 덜렁덜렁 떨어졌습니다.

 이것을 본 자녀들이 매일같이 아빠가 왜 이렇게 힘들게 사는지를 물어도, 아빠는 설명을 안 합니다.

 \"나 일이 많아 열심히 뛰어서 이래\" 이 정도로 대꾸합니다.

 그러나 나중에는 구두가 자꾸 망가져 한두 켤레 사다가 나중에는 돈이 없어 운동화를 샀습니다.

 그런데 그 운동화도 한 달을 못 버티고 자꾸 낡아서 바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이 큰 딸의 소원이 \"어떻게 하면 아버지 구두 한 켤레 사드릴까? 그래서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릴까?\"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그래서 밤을 새워 가며 고민한 결과, 학교 갈 때 버스를 타지 않기로 결정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먼길인데도 부모 몰래 걸어서 학교를 다니면서 몇 백원씩 저금통에 계속 넣는 것입니다.

 어느날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버스를 탈 수 없다는 생각에 덥고 힘든 것을 견디면서 걸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까 자기 동생도 걸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야, 너 왜 버스 타지 않고 걸어가니?\"

 동생이 고개를 푹 숙이고 \"나, 아빠 구두 사주고 싶어서 요즘 걸어 다녀. 누나도 그렇게 하는 거야?\"

 \"그래. 너 얼마 모았어?\"

 동생이 \"나 이제 2000원 모았어. 누나는?\"

 \"나는 이제 5000원 됐어. 우리 조금만 더 모으면 아빠 구도 사줄 수 있을 꺼야?\"

 

 실제로 자기를 낳고 키워주며 사랑해주는 아빠를 기쁘게 하기 위해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버스를 타지 않고 힘겹게 학교에 걸어다니며 푼돈을 모으는 자녀들이 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오늘도 예수 안에서 모든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보실 때마다 큰 꿈을 가지고 바라보시며 기뻐하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분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인들 못하겠습니까?

 

 만약 그와 같은 거룩한 목적이 우리 가슴속에 없고, 그 거룩한 목적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다면 우리만큼 은혜를 모르는 악한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거룩한 목적을 지닌 성도로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 위해 합당한 삶을 살게 해달고 사도 바울처럼 기도를 쉬지 않는 고현의 성도님들이 되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는 위대한 후손을 열매로 맺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예수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8. 제목 : 주의 날개 그늘아래

본문 : 시-57-01-5                                      

시 57:1-5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찌라(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시편 57:1-5)

 

요즘 일본은 겨울연가의 주인공 배용준 열풍에 휩싸여 있습니다. 일본사람들은 배용준을 욘사마라고 부릅니다. 음식점, 안경점, 슈퍼마켓 어디를 가도 배용준 사진을 내걸거나 붙혀놓고 있습니다. NHK TV는 특집 재방을 하겠다고 하는가하면 주인공 최지우는 일본 고이즈미 총리를 만나기도 했습니다. 특히 욘사마의 인기는 일본 여자들에겐 상상을 초월합니다.

 

어떤 여자는 자기 집 방 하나를 온통 배용준 사진으로 장식을 하는가 하면, 어떤 여자는 공항에서 배용준이 씨익 웃으며 자기를 바라보는 순간 기절을 했다고 합니다. 어떤 남자는 자기 아내가 배용준한테 미쳤다며 이혼을 했습니다. 남편이 가지 말라는데도 아내가 배용준 나라 한국을 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일본, 중국, 대만, 월남에서 부는 한류 열풍 특히, 인기 연예인을 에워싼 열풍 원인이 뭘까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허」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텅 비어 있기 때문입니다. 정신적으로 기댈 것이 없고, 채울 수 없고, 바랄 것이 없는 동공화 현상의 결과인 것입니다.

 

예수 바로 믿고, 새벽기도 잘나오고, 주일 낮·밤 예배에 나와 말씀 먹고 사는 사람은 욘사마 때문에 기절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집도 있고, 돈도 있고, 이곳저곳 회원권도 있고, 동창도 있고, 좋은 차도 있는데 늘 마음이 허전하고 공허하고 텅빈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들은 빈둥지증후군에 시달리는 사람들입니다. 있는데 없는 사람, 가졌는데 빈손인 사람들 그들이 바로 외롭고 쓸쓸한 사람들인 것입니다.

 

둘째, 사는 동네도 신통치 않고, 가진 것도 변변치 않고, 주변도 자랑할 것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데 늘 미소짓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인생이 행복하다며 감사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더 행복한 사람입니까? 그리고 왜 이 사람은 가진 것도 없으면서 누릴 것도 없으면서 행복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지 않는 것, 손으로 잡히지 않는 것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읊은 시 중에 하나입니다.

목동 다윗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은 BC 1025년이었습니다. 15년 뒤인 1010년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 971년까지 40년간 나라를 통치했습니다. 다윗도 사람이었던 탓으로 허물도 있었고 잘못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철저하게 지켰던 한가지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신본주의자였고, 신본주의 정치가였습니다.

 

인본주의는 사람이 모든 일의 근본이 된다는 것이고 신본주의는 하나님이 모든 것의 근원이 된다는 주의입니다. 민주주의는 정치의 주체가 사람이기 때문에 사람의 철학과 사상과 이념을 따라 정치를 하는 것이고 신본주의는 정치의 주체가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섬기며 그 뜻대로 정치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든 정치 형태는 여러 가지입니다. 독재정치, 전제정치, 폭력정치, 억압정치, 통제정치, 공신정치 등 그러나 제일 좋은 것은 민주정치입니다.

 

민주정치는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보장하고 백성이 편히 일하며 살 수 있도록 해 주는 정치이기 때문에 사람이 만든 정치 형태 가운데 가장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민주정치를 이끌어 가는 주체들이 누구냐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변하기 때문에 변질될 가능성이 많다는 약점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민주정치보다 더 좋은 정치는 없습니까?

어떤 사람은 공산주의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고, 독재 정치여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지상의 정치 형태들 다시 말하면 사람이 주체가 되는 정치 형태는 다 불완전한 취약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없습니까? 바로 그것이 신본주의이며 신주정치입니다.

 

하나님이 나라의 주인이시며 권력의 수반이시며 왕이시라는 것을 믿는 사람들은 왕이 됐든, 총리가 됐든. 장관이든, 대신이든 못된 짓을 할 수도 없고 권력을 제멋대로 쓸 수가 없는 것입니다.

다윗은 그 진리를 아는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라고 노래한 것입니다. 다윗의 일생을 살펴보면 그리 순탄한 생애는 아니었습니다.

 

왕이 되기 전 10년 동안은 다윗이 왕 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울왕이 다윗을 죽이기 위해 통치는 제쳐놓고 다윗을 추격했습니다.

왕이 된 이후에는 대내외의 정적들로부터 숱한 도전을 받았습니다. 그뿐입니까? 노년에는 친아들 압살롬이 부왕을 몰아내고 왕이 되겠다며 구데타를 일으키고 아버지를 죽이기 위해 뒤를 좇았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위기에서도 쫓기는 망명생활 중에도 오직 하나님을 향한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시편 57편은 다윗이 사울왕의 추격을 피해 아둘람에 있는 굴에 피신해 있을 때 지은 시입니다.

위기, 절망, 비통 가운데서 읊은 시임에도 감사와 찬양으로 얽혀 있습니다. 그래서 주경학자들은 시편 57편을 \"다윗의 역동적 감사 찬양시\"라고 칭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고난과 고통 속에서도 감사하고 찬송했다는 것입니다.

 

시편 57편 속에 들어있는 다윗의 고난을 살펴보겠습니다.

1절을 보면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라고 했고, 3절을 보면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이라고 했고, 4절에서는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라고 했고, 6절에서는 \"내 걸음을 장애 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다\"고 했습니다.

 

재앙, 비방, 불같은 시험, 장애 공작, 웅덩이... 이런 것들이 다윗을 위협하고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노래하고 찬송하리라고 했고(7절), 주께 감사하며 찬송하리이다(9절)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가? 그는 고통불감증 환자였는가? 그 이유를 찾아보겠습니다.

 

1. 주의 날개 그늘아래 피했기 때문입니다.

1절을 보면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날개는 보호와 안전을 의미합니다. 날개 중 가장 강한 날개는 독수리 날개입니다. 독수리는 날개로 새끼를 지키고 보호합니다. 그 날개아래 있는 한 새끼는 안전하고 평안합니다.

 

다윗은 위기와 절망 속에서 하나님의 날개를 생각했습니다. 가장 안전한 곳, 가장 평안한 곳은 주님의 날개 그늘아래라는 것을 발견한 것입니다. 그리고 주목할 것은 \"이 재앙이 지나가지까지\"라는 고백입니다. 재앙은 느리던 빠르던, 크든 적든 지나간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계속되거나 반복되는 재앙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실패할 수 있고,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은 아닙니다.

위에서 살핀대로 억울하고, 고통스럽고, 한심스럽고, 답답한 일들이 철장같이 앞을 가로막고 있지만 그러나 그런 것들은 지나가는 것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다윗은 발견한 것입니다.

 

그린도전서 10:13을 보면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에게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고통을 겪고 시험을 당하더라도 예수님 안에 있으면 그 시험과 고통은 때가 되면 물러갑니다. 주께서 그렇게 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누구의 그늘아래 있느냐에 따라 행불행이 결정됩니다. 같은 섬이라도 미국에 속한 섬들, 하와이, 사이판, 괌은 잘삽니다. 그러나 인도네시아에 속한 섬들은 못삽니다.

바울의 권면대로 \"주께 붙어 있으면\" 살고, 떨어지면 주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2. 마음을 정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라고 했습니다.

확정되었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나콘\"입니다. 그 뜻은 고정되었다. 확고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두 번씩이나 확정되었고, 확정되었사오니 라고 고백한 것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기로 한 그 마음이 고정되었고 확고부동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3:14을 보면 바울이 디모데에게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도 확정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긴가 민가, 될까 안될까, 믿을까 말까, 할까 말까... 이런 태도는 흔들리는 태도이며 바로 서기 어려운 태도입니다.

 

열왕기상 18:21을 보면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시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 지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 24:15을 보면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만 섬기겠노라\"고 했습니다.

 

신앙은 결단입니다. 확정하고 확신하고 결정하고 결단해야 합니다. 어떤 암도 조기 발견만 하면 고칠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때가 늦으면 치료가 어렵다고 합니다. 지금 확정해야 합니다. 지금 결단해야 합니다.

 

3. 감사하고 찬송했기 때문입니다.

7절을 보면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라고 했고, 8절에서는 \"내 영광아 깰찌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찌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라고 했고, 9절에서는 \"주께 감사하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했습니다.

 

비파와 수금에 맞춰 새벽에 열방이 듣도록 감사하며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처한 상황은 비파를 타고 수금을 타며 노래 부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언제 잡힐지, 언제 죽을지 모르는 위기와 절망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그곳에서 감사를 찾았습니다. 거기서 노래했고, 그 악기를 연주했습니다. 그때 거기서 두 가지가 가능합니다.

 

원망하고 탄식하고 포기하고 절망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길은 더 어두워지고 상황은 더 어려워집니다. 그러나 감사하고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길이 열립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임합니다.

 

주의 날개 그늘아래 보호를 요청합시다. 더 이상 머뭇거리지말고 확정합시다. 힘들고 어려워도 감사합시다. 찬송합시다.

감사와 기도와 찬송은 옥문을 엽니다. 주님의 날개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 그늘아래서 편히 쉼을 얻읍시다. 그 날래 아래서 행복을 찾읍시다.  

 

                                 

 

9. 제목 : 형통한 사람의 형통비법

본문 : 창-39-01-6                                      

들어가는 말

어느 교회에 집사님이 계셨습니다.  이 집사님이 복권을 사놓고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 복권이 꼭 당첨되어 주님을 위해 놀라운 일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어떻게 되었을까요?  복권에 당첨이 되었습니다.  이 집사님은 너무 기분이 좋아 교회에 15인승 승합차를 사서 기증하면서 목사님께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이 저를 무척 사랑하시나봐요.  저의 이런 세밀한 부분까지 돌봐주시니까요.”  목사님께서 뭐라고 하셨을까요?  이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사님, 주님이 집사님을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것 같네요.”  

혹시 지금도 복권을 사놓고 당첨되기만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복권에 당첨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복권당첨과 같이 공짜로 무엇인가가 주어지는 것을 복이라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공짜로 주어지는 것을 가리켜서 형통한 삶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어떠한 사람이 형통한 삶을 사는 것이지, 형통한 사람의 형통비법이 무엇인지 말해줍니다.  말씀을 통해서 형통한 삶을 살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론

1.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한 비법은) 하나님께서 주도해나가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1절 말씀입니다.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그를 사니라.”

요셉을 애굽으로 데리고 간 사람이 누구입니까?  요셉 자신이었습니까?  아니면, 이스마엘 사람입니까?  분명 이스마엘 사람이었습니다.  요셉 자신이 성공하기 위해서 선택한 삶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제까지 자기와는 전혀 무관한 사람들에 의해 애굽에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에 따른 것이었습니다.  시편 105편 1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누가 보내셨다는 것입니까?  “하나님께서.”  그렇습니다.  요셉이 애굽에 팔려간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인생이라는 것이 내가 주도해 나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하나님께서 주도해나가시는 것임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지금 당장은 내 앞에 어려움들이 가득한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은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증거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다가 환상 중에 마게도냐 사람들이 와서 도와달라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결국 사도 바울은 비두니아 지역이 아닌 마게도냐 지역으로 가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도 바울이 이렇게 고백합니다.  “이는(환상을 보여주신 이유가)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그렇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계획을 받아들였습니다.  뜻을 받아들였습니다.  내 인생 내가 주도해나가겠다고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고백할 수 있는 것 - 이것이 바로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한 비법입니다.

요셉은 바로 이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처음 그가 꿈을 꾸었을 때에는 모든 것을 다 얻은 것만 같았을 것입니다.  형들의 곡식단이 자신의 곡식단에게 절을 하고 해와 달과 별들이 자신에게 절을 하는 꿈을 꾸면서 모든 것이 순탄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떠했습니까?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습니까?  계획대로 척척 이루어졌습니까?  갈수록 꼬여만 갔습니다.  형들의 시기로 죽을 처지에 놓였습니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주인에게 신뢰를 얻어 가정총무가 되었지만, 이내 억울한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습니다.  어느 것 하나 그가 꿈꾸었던 대로 되는 것이 없었습니다.  얼마든지 회의를 느낄만하지 않습니까?  “주님, 내가 평생 주님만 의지해 왔습니다.  내가 높아지겠다는 것 아니었잖습니까?  주님께서 높여주시겠다고 하신 것 아닙니까?  도대체 언제입니까?  갈수록 내 힘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가고 있는데... 주님, 정말 나를 사랑하십니까?”라고 원망 섞인 말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신뢰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도해나가신다는 사실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끝까지 인내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때를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민족은 특별히 이 부분이 약합니다.  음식점에 가서도 조금만 음식이 늦게 나오면 벨부터 누릅니다.  자장면 배달을 시켰는데 올 시간이 조금 지난 것 같으면 다시 전화를 합니다.  “출발하셨나요?”  그러면 어떻게 대답합니까?  “아직 출발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는 음식점 보셨습니까?  열이면 한 집 정도 그렇게 대답할까 거의 모든 음식점은 “방금 출발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또 어떻습니까?  그 말 그대로 믿습니까?  안 믿습니다.  그 정도로 기다릴 줄을 모릅니다.  그러나 여러분 미국이나 일본, 선진국들을 가보세요.  몇 시간을 제자리에서 기다려도 싫은 기색하지 않고 잘 기다립니다.  기다리는 것을 즐길 줄 압니다.  그만큼 기다림의 훈련이 잘 되어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반드시 도우십니다.  이끌어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에게 “나는 여호와요 모든 육체의 하나님이라 내게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렘 32:27)”고 말씀하셨습니다.  능치 못한 일이 없으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인생을 주도할 수 있도록 맡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한 비법은) 하나님과 함께 하는 인생이어야 합니다.

2절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요셉은 형통한 자가 되었습니다.  비록 그가 노예로 팔려오긴 했지만, 그는 가정총무가 되어 주인 이외엔 누구에게도 간섭받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렇듯 그가 형통한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가 있습니다.  바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좀 더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이 요셉이 하나님과 함께 하려고 노력한 결과가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요셉을 찾으셨습니다.  그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가 어떠한 인간적인 노력을 해서 하나님과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를 축복하기 위해서 찾아오십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게 되었을 때, 그를 찾아오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의 친구들이 풀무불에 들어갔을 때, 그들을 보호하고 지켜주신 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하나님은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와 늘 동행하시는 분이시며, 늘 우리 가운데 계십니다.

영어의 작별인사 중 굳 바이(good bye)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이 무엇의 준말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그대와 함께 계시기를 빈다”(God be with ye)는 말의 준말입니다.  서반아어의 경우도 작별할 때 ‘아디오스(adios)라는 말을 쓰는데, 이 말 역시 “하나님께 향하라”는 뜻이 담겨져 있습니다.(biblenet. co.kr 검색어 : 축복 형통)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그렇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삶이 형통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는 것이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명예를 얻는다고 해서 형통한 것이 아닙니다.  진짜 형통한 사람은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는 것이 축복임을 믿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믿지 못할 때 허탄한 것들을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왜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에 이방신을 섬기게 되었습니까?  왜 허탄한 것들을 의지하며 살았겠습니까?  왜 그들은 끝까지 하나님을 섬기지 못하고 우상을 섬겼을까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삶보다는 눈에 보이는 것들을 좇았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멸시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재물을 모았던 것도 하나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밤에 말을 타고 사막을 여행하고 있던 세 사람이 이상한 나그네 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나그네는 그들에게 얼마 가지 않아 마른 시내 하나를 건너게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는 이어서  “당신들이 그곳에 도착하거든 말에서 내려 마른시내에서 자갈들을 주워 자루와 호주머니에 채우도록 하시오.  그리고 나서 계속 여행하다가 해가 뜰 때 당신들이 주운 자갈들을 살펴보시오.  당신들은 기뻐하며 한편으로는 애석해 할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그 사람의 말처럼, 세 사람은  마른 시내에 도착했습니다.  그들은 호기심으로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많은 자갈들 중에 몇 개를 주워 호주머니에 넣었습니다.  다음 날 해가 뜰 무렵 그들은 주워 온 자갈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깜짝 놀랐습니다.  그 자갈들은 다이아몬드, 루비, 에메랄드 및 기타 여러 가지 보석들로 바뀌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사막에서 만났던 나그네의 말을 떠올린 그들은 그제야 그 나그네의 말을 이해했습니다.  그들은 주워온 자갈들이 보석으로 변해있어 기뻤습니다.  그러나 더 많이 주워오지 않은 것이 애석했습니다.(예화노트, 검색어 : 동행, 제목 : 사막 여행의 교훈)

우리 성도들의 삶도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캐낸 진리들이 영적 보석들로 바뀌어 우리의 금고를 채워 갈 때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은 더욱 부요해집니다.  그런 삶을 살 때는 쉽게 영적 정체기를 벗어나 다시 행진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기자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 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시119:98)”  또 이어지는 말씀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시119:100)”  말씀을 통해서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향해서 부어주시는 지혜를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말씀을 사모하고 따를 때 형통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3. (형통한 삶을 살기 위한 세 번째 비법은)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며 섬기는 것입니다.

3절, 4절 말씀입니다.  “3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4요셉이 그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으로 가정 총무를 삼고 자기 소유를 다 그 손에 위임하니.”

이 말씀을 읽어보면, 요셉이 처음부터 보디발 장군의 가정 총무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역시 평범한 노예였습니다.  다른 노예들처럼 갖은 어려운 일들은 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는 끝내 가정총무가 됩니다.  집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크고 작은 일들을 관장하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먼저는 그가 하는 일마다 잘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일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가 매사에 성실하게 최선을 다해 주인의 말에 순종했기 때문입니다.  힘들다고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어렵다고 투덜거리지 않았습니다.  신세한탄을 하기보다 그는 늘 긍정적인 말과 행동을 통해서 주인의 마음을 기쁘게 했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기록되지 않은 내용입니다.  하지만, 얼마든지 이러한 사실들을 유추할 수 있습니다.  왜요?  우리가 만약 지도자의 위치에 있다면 당연히 보디발 장군처럼 늘 성실하게 행동하고 말하는 사람에게 중요한 일을 맡길 것이기 때문입니다.  매사에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사람을 신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분명 능력있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실력을 갖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진실하며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능력은 있지만 진실하지 못하면 교만해집니다.  실력은 있지만 성실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가룟 유다를 보세요.  그는 능력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돈 맡은 사람으로서 그는 다른 제자들보다 똑똑했습니다.  판단력도 좋았습니다.  상황 판단을 잘 해서 무엇이 유리한지를 분간할 줄 아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진실되지 못했습니다.  성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팔았고, 끝내는 후회하고 목숨까지 스스로 끊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능력만 있어서는 안 됩니다.  실력만 갖춘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진실해야 합니다.  매사에 성실해야 합니다.  자녀를 키우더라도 능력과 실력을 갖춘 사람으로만 키우려고 하지 말고 진실하며 성실한 사람으로 키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어린 자녀를 둔 어머니가 유명한 현인(賢人)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녀들을 잘 키울 수 있습니까?”  현인은 어머니를 정원으로 데려갔습니다.  그는 정원에 있는 네 그루의 나무를 한번 뽑아보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는 갓 심어놓은 첫 번째 나무를 아주 쉽게 뽑았습니다.  두 번째 나무는 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힘으로 가능했습니다.  세 번째는 심은 지 꽤 지난 나무였습니다.  어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그것을 뽑았습니다.  그러나 네 번째 나무는 이미 견고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팔을 걷어붙이고 힘을 쏟았으나 나무는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때 현인이 어머니에게 말했습니다.  “자녀교육도 이 나무와 같습니다.  오랜 습관은 깊은 뿌리를 내려서 그것을 바꾸기가 어렵지요.  어린 자녀에게 좋은 습관을 갖게 하십시오.”(biblenet.co.kr 검색어 : 습관, 제목 : 복받는 습관을 가지라.)

진실성과 성실성은 어렸을 때부터 가르쳐야 합니다.  평생 동안 진실됨과 성실함이 쌓이고 쌓여 인격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초가 되어 있지 않으면 그릇된 길로 가게 됩니다.  잠언 11장 3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정직한 자의 성실은 자기를 인도하거니와 사특한 자의 패역은 자기를 망케 하느니라.”  표준새번역은 이렇게 번역합니다.  “정직한 사람은 성실하게 살아, 바른 길로 가지만, 사기꾼은 속임수를 쓰다가 제 꾀에 빠져 멸망한다.”  그렇습니다.  사람이 망하는 까닭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닙니다.  정직하지 못하고 성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속임수에만 능숙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어제는 부도난 수표 같은 것이고, 내일은 보장 없는 어음 같은 것이지만 오늘은 사용가능한 현찰이다.  그러니 지혜롭게 사용하라.”  그렇습니다.  형통한 사람은 오늘 주시는 삶을 충실하게 최선을 다해서 순간순간 깨끗하고 아름답고 성실하게 살아갑니다.  하루하루 금 같은 세월이 흘러가는데 이것을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습니다. 그냥 흘려보내면 우리는 인생을 망치는 것입니다.  폴 마이어(Paul Mayer) 이렇게 말했습니다.  “대야에 담긴 물을 발로 차서 쏟아버리는 것이나 조그마한 구멍을 통해서 한 방울 한 방울 흘러 보내는 것이나 결과는 똑같다.”(yehwa.org 검색어 : 성실 제목 :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1차 자료 : 세상을 일깨우는 1% 크리스천, 김태권)  성도 여러분, 어떤 엄청난 실수를 해서 인생을 단번에 망치는 것이나 주어진 하루하루의 삶을 성실하게 가꾸지 못해서 인생을 망치는 것이나 똑같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을 위하는 삶에 최고의 우선권을 두고, 모든 물질문제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직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새로운 순간을 맞이할 때마다, 지나간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물질생활에서 오는 모든 염려와 근심을 모두 다 하나님께 맡기고 주어진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  리

형통한 인생은 우연히 되지 않습니다.  형통한 인생은 내 힘으로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주도해 나갈 때 형통한 인생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도해나가실 때 형통한 인생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주도해나갈 수 있도록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형통한 인생은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는 인생입니다.  하나님은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힘들고 지쳐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슬픔 가운데 있을 때 찾아오십니다.  외롭고 고달플 때 찾아오십니다.  낙망하여 주저앉아 있을 때 찾아와 위로하시고 새 힘을 주십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형통한 삶입니다.  허탄한 것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소망하며 살아야 합니다.  형통한 인생은 최선을 다하며 섬기는 삶을 삽니다.  성실이 재산입니다.  능력도 중요하고 실력도 중요하겠지만, 진짜 능력과 실력은 성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성실한 사람을 보호하고 인도하시며 축복하십니다.  형통한 사람의 형통비법을 깨닫고 날마다 형통한 삶을 사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0. 제목 :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본문 : 시-57-01-11

                                     

시57: 1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시고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

시57:2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

시57:3 저가 하늘에서 보내사 나를 삼키려는 자의 비방에서 나를 구원하실지라 (셀라) 하나님이 그 인자와 진리를 보내시리로다

시57:4 내 혼이 사자 중에 처하며 내가 불사르는 자 중에 누웠으니 곧 인생 중에라 저희 이는 창과 살이요 저희 혀는 날카로운 칼 같도다

시57:5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시57:6 저희가 내 걸음을 장애하려고 그물을 예비하였으니 내 영혼이 억울하도다 저희가 내 앞에 웅덩이를 팠으나 스스로 그 중에 빠졌도다 (셀라)

시57:7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시57:8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시57:9 주여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시57:10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시57:11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오늘 본문에서 시편기자는 깊은 시름에 잠겨 서두를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왕의 추적을 피해 굴 속에 숨어 있으면서 읊은 시입니다. 그러기에 시편 57편은 \"하나님이여 나를 긍휼히 여기소서 내 영혼이 주께로 피하되 주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기까지 피하리이다\"라는 고백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음의 칼날을 피하여 도망가는 신세처럼 처량한 것은 없습니다.

\'도망자...\' 특히 억울한 누명을 쓰고 도망하는 신세라면 더욱 더 그의 신세는 처량합니다.

애매히 당하는 고난, 억울한 누명, 더구나 그를 죽이려고 좇아오는 이 압박감.... 참으로 다윗의 신세는 너무나 참담합니다.

 

\'해리슨 포드\'가 주연하는 영화 중에서 \'도망자\'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해리슨 포드는 시카고의 저명한 외과 의사 \'리차드 캠블\' 이라는 사람으로 나왔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 \'헬렌\'과 함께 시카고 근교의 고급 주택가에서 남부러울 것 없이 살던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어느날 아내 헬렌이 괴한에게 살해되는 무서운 사건이 발생합니다. 사건 당일 밤에 그는 응급 수술을 마치고 집으로 들어오는데, 어떤 외팔이 사내로부터 공격을 받게 되고 아내 헬렌은 자기의 팔에 안겨 숨지고 말았습니다.

법정에서 킴블은 의수를 단 외팔이의 사내가 범인이라고 주장하지만 모든 상황이 그를 범인으로 몰아가고, 결국 살인범이란 누명을 쓴 채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죄수들과 함께 교도소로 향하는 호송버스 안에서 억울한 누명을 쓴 이 주인공의 모습은 참담하기 그지없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가 죽어서 지금 극한 슬픔과 고통속에 있습니다. 그러나 자신은 살인자의 누명을 쓰고 감옥으로 가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할지 앞날이 막막합니다.

그런데 호송버스 안에서 몇몇 죄수가 탈주를 시도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버스가 전복되면서 지나가던 열차와 충돌하게 됩니다.

아비규환의 와중에서 킴블은 탈주에 성공하게 되는데, 사형수의 탈주 소식이 알려지자 미연방 경찰이 직접 이 사건에 개입하게 됩니다.

그때부터 킴블과 경찰관 제랄드 사이에 쫓고 쫓기는 숨가쁜 추격전이 시작됩니다.

그러나 이 주인공은 무작정 도망만 할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누명을 벗어야 하기 때문에 경찰의 집요한 추격을 받으면서도 범인 외팔이 사내를 찾기 위해서 주력합니다. 그러나 집요한 경찰의 그림자는 시시각각 그의 숨통을 죄어 옵니다.

 

산을 넘고 강을 건너고.... 건물사이를 뛰어넘고, 차가 질주하는 도로를 뛰어드는가 하면, 하수구의 긴 터널을 통하여 도망갑니다.

그런데 이 하수구가 댐으로 연결되어 있었습니다. 도망을 가다가 가다가.... 이제 막다른 길에 도달합니다. 바로 뒤에는 총을 든 경찰이 있고, 앞에는 떨어지면 죽는.... 밑이 아물거리는 댐의 아래입니다. 다급해진 그는 댐 아래로 뛰어듭니다. 경찰차가 좇아옵니다. 사냥개와 헬리콥터를 동원하여 계속해서 좇아옵니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주인공과 일심동체가 되어서 같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열심히 도망을 갑니다. 머리끝이 바짝 바짝 서고, 등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손에는 어느새 땀이 촉촉히 젖어 듭니다.

스릴이 더 하면 더 할수록 관객들은 그 아슬아슬한 기분을 만끽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영화요, 현실이 아니라는 가정에서 나오는 짜릿한 쾌감입니다.

 

만약 이것이 실제 상황이고 그 주인공이 \'나\'라고 생각해 보세요. 그렇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아무도 그 스릴을 즐기는 사람도 웃을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이 긴박한 상황, 이 억울한 누명, 이 참담한 신세... 그 누가 나의 이 억울한 심경을 알아 줄 수 있겠습니까?.....

 

본문에 나타난 다윗의 심정이 바로 그러했습니다. 아무런 잘못도 없이 무작정 사울 왕의 칼날을 피해서 도망을 다녀야만 했습니다.

사울은 다윗을 잡아죽이기 위해서 3,000명의 수색부대를 조직해서 그를 좇아 다녔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다윗이 가는 곳마다 어떻게 알아냈는지... 집요하게 좇아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윗은 지루한 도망자의 모습으로 지치고 지쳐서 어느 굴속에 들어가 숨었습니다. 그리고는 오늘 본문의 시를 지어서 하나님께 노래한 것이 시편 57편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는 곧 슬픔의 골짜기 밖으로 나와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고, 마침내 밝은 햇빛이 비치는 믿음의 정상에 서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1-6절을 보면, 다윗은 먼저 하나님께 자신의 문제에 대해서 충분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문제를 충분히 아뢰는 것... 이것이야말로 기도를 잘 할 수 있는 비결가운데 하나입니다.

우리는 종종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하나님께 아뢰야 될지 몰라서 애매모호한 기도를 드릴 때가 많습니다.

 

다윗은 논리적으로, 그리고 그의 감정과 지식을 동원하여 그의 형편과 사정을 낱낱이 아뢰었습니다.

1절에 보면, 다윗은 마치 병아리가 어미 닭의 날개 그늘아래 숨듯이 \"하나님의 날개 그늘 아래서 이 재앙이 지나가기까지 피하겠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못 본체 하실 수 있겠습니까?....

 

또한 2절에서는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일단 선한 일을 시작하시면 반드시 성취하시며 완전케 하시는 주님이심을 고백하며 그러한 주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3절에 보면, 그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원해 주시리라는 완전한 확신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구출하시기 위하여 \'인자\'와 \'진리\'라는 두 천사를 보내실 것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7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하면서 두번씩이나 자신의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확정되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그것은 \'확고 부동하다\'는 뜻으로... 하나님을 향한 나의 믿음이 견고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은 지금 비록 쫓기는 몸이지만 그 믿음이 하나님께 향하여 확고부동하므로 두려울 것이 없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람들은 무엇을 행동으로 옮길 때 먼저 마음을 결정해야 합니다.

마음이 결정되지 않으면 그것을 실행에 옮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결정하고 확정이 되면 그 다음 순서는 마음 먹은대로 그대로 진행이 되는 것입니다.

 

무슨 물건을 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먼저 무엇을 살 것인지 마음에 결정을 한 후에 물건을 찾고, 값을 보고, 품질을 살펴보고, 그리고 값을 지불해서 물건을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마음을 확정 짓는 것이 중요합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일단 마음이 확정되기만 하면 그 일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본문 7절에서 다윗은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으니....\" 라고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마음을 두고 확정하셨습니까?...

이 세상에서 사람의 마음이 쏠릴 수 있는 곳이란 아마도 수만 가지는 더 될 것입니다.

우리들 주변에는 인간을 의심케 하고, 불확실 속에서 방황하게 만드는 여러 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그러나 온 우주를 통하여 인간의 마음을 확정지을 수 있는 곳은 오직 한 군데, 하나님 뿐입니다.

이 세상에는 아무 것도 고정된 것이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 한 분만 영원히 변치 않으시고 고정되어 계십니다.

따라서 인간이 그 마음을 하나님께 확정할 때에야 비로소 확정될 수 있다는 사실은 당연한 진리인 것입니다.

 

집도 기초가 튼튼하면 오래 지탱될 수 있습니다. 모래 위에 지은 집은 고정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그 집은 기초가 흔들려 곧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 변하는 사물을 기초로 했을 때는 기초가 흔들릴 때 마다 마음도 따라서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믿음의 권속들은 비가 오고 바람이 불고 홍수가 날지라도 든든한 우리 하나님께 마음을 확정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문의 다윗처럼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라는 확신이 서게 되면 그때부터 인간은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이 확정되면 적극적인 신앙을 가질 수 있습니다.

늘 의심만 하던 사람도 마음이 확정되면 그의 믿음은 자라갑니다. 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신앙생활이 어찌나 재미있고 좋은지... 주일이 기다려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시간이 그리워집니다.

 

세상은 불완전하고, 참된 만족이 없습니다. 그러나 영원히 변치 않는 하나님, 신실하신 하나님께 마음을 정하고, 그 하나님을 좇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는 삶을 살게 되면.... 우리는 비로소 참된 만족을 얻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성도들 가운데 다윗과 같이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하면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오늘날은 하루가 다르게 사상이 변하고 그에 따라 견해의 폭이 넓어지고, 믿음이나 신념도 자꾸만 변하기 때문에....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 확정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집니다.

심지어는 일부러 진리에 대하여 눈을 돌리고 귀를 막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확정하는 것입니다.

만약 믿음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세계에 대해서 의심으로 가득차 있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무슨 일이 생겨도 요지부동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그런데, 본문 7절의 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면 상반절에서는 사실을 규명하고, 하반절에 와서는 그에 따른 결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하는 말은 사실이고, \"내가 노래하고 찬송하리이다\" 하는 말은 결심인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마음을 확정함으로써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깊은 통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죄 많고 의지할 곳 없는 인간들이 피할 곳은 오직 하나님의 날개밑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이처럼 마음을 확정하는데 작용한 힘은 무엇이었습니까?....

시편 57편 전체에 나타나 있는 내용을 보면, 우리는 그가 \'믿음\'으로 하나님께 마음을 확정했음을 알 수 있숩니다.

 

믿음 안에서.... 그는 \"내 영혼이 주께 피하되\"(1절) 라고 외쳤으며, 믿음 안에서.... \"내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부르짖음이여 곧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이루시는 하나님께로다\"(2절) 라고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영혼을 비추이는 진리의 빛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생명의 떡으로 전환시켰으며, 그것이 바로 그가 마음을 하나님께 확정할 수 있었던 초석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윗이 하나님께 그의 마음을 확정하고 나서 그 이후에 그는 어떻게 했습니까?...

7절 하반절에 보면,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즉, 하나님을 찬송하겠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확정되면 자연스레 찬송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8절 이하에 보면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하고 고백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내 영광이란, 내가 가진 모든 조건을 말합니다. 그리고 내가 가진 모든 재능과 동작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악기를 연주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했습니다.

 

다윗은 어렸을 때부터 비파 연주가 였습니다. 그리고 노래를 만들어 부르는 음악가 였습니다. 그러한 자신의 은사와 재능을 다 바쳐서 주님을 찬송하겠다고 하는 것입니다.

 

구약 시대를 보면, 소리나는 모든 악기가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데 동원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창4:21절을 보면, 이미 그 당시에 유발의 후손들이 수금과 퉁소를 만들었다고 했고, 대상23:5절을 보면, 하나님을 찬양하는 사람들이 4천명이나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대하29:26절을 보면 \"레위 사람은 다윗의 악기를 잡고 제사장은 나팔을 잡고 섰다\"고 했고, 27절을 보면 \"번제를 드리면서 나팔 불고 시를 읊고 노래를 불렀다\"고 했습니다.

그뿐아니라, 시150편을 보면 나팔이나, 비파, 수금, 그리고 소고와 제금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했습니다.

 

한마디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라면 모든 악기와 여건과 능력과 재능을 총동원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악기라도 뚜껑을 닫아 놓고 있으면 소용이 없는 것 처럼, 우리의 영혼도 깨어나서 연주를 해야만 합니다.

그래서 자신을 향하여 깨어 있으라고 명하고 있습니다. 비파와 수금도 깨라고 하면서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라는 말은 우리에게 깊은 교훈을 심어 줍니다. 아마 다윗은 새벽 일찍부터 하나님께 대한 경배를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는 새벽이 올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일찍 일어나 새벽을 깨우리라는 표현을 썼던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려면 이른 새벽 시간에 예배를 드리는 것이 굉장히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숩니다.

이른 시간에 예배를 드리면 새벽 이슬마저도 하나님께 봉헌되어질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전반적인 영적 생활에서 대단히 필요한 조건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성도들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깊은 영적 잠에 빠져 있으며 이것이 자연스런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졸고 있는 상태로 일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잠이 덜 깨어 몽롱한 상태에서 위험한 걸음을 내딛고 있는 성도들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잠이 덜 깬 상태에서 찬양을 드립니까?..... 우리의 영혼이 깨어있지 않으면 우리는 진실한 찬양을 드릴 수 없습니다.

잠자는 새는 노래하지 않습니다. 다니엘과 믿음의 세 친구는 뜨거운 풀무불 속에서도 하나님께 아름다운 찬양을 들렸습니다.

만약 그들의 영혼이 잠자고 있었다면 그들은 결코 거룩한 찬양을 드릴 수 없었을 것이고 기적의 역사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깨어 있는 것!.... 오늘 주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말씀입니다.

롬13:11절 말씀에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했습니다.

마25:13절 말씀에서도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했습니다.

막13:37절에서는 \"깨어 있으라 내가 너희에게 하는 이 말이 모든 사람에게 하는 말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믿음의 모든 권속들은 이 악한 세대에 영적으로 깨어 있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계속해서 오늘 본문 9-11절을 보면, 그는 하나님 안에서 기쁨이 넘친 나머지 자신의 감정을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했습니다.

\"내가 만민 중에서 주께 감사하오며 열방 중에서 주를 찬송하리이다\"

 

또한 다윗은 찬양하는 이유를 뭐라고 설명합니까? 10절 말씀에 보면, \"대저 주의 인자는 커서 하늘에 미치고 주의 진리는 궁창에 이르나이다\"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지면을 덮듯이 하나님의 인자가 우리의 죄를 덮는다는 사실과 우리 속에서 시작하신 선한 일을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 완전케 하시리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찬양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11절에서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하나님이여 주는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주의 영광은 온 세계 위에 높아지기를 원하나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이 확정되었다면 이처럼 찬양과 헌신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결과입니다.

왜냐하면 마음을 확정함으로써 믿음을 굳건히 할 수 있고,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진정한 찬양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확정하지 않고도 얼마든지 찬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 열과 성을 다하여 온 영혼을 쏟아 놓는 찬양을 할 때에야 하나님 앞에 우리의 찬양이 상달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다윗처럼 확정된 마음으로 노래하고 찬송한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양하리이다\"라는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겠다는 것입니다.

나는 입 다물고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남이 부르는 찬송을 듣고 그것으로 찬송을 대신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노래, 다른 사람의 찬송이 아니라, 내 노래, 내 찬송, 내 기도, 내 간증이 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무슨 친목회나 야유회를 가면 꼭 노래를 시키는 바람에.... 노래를 잘 못해서 망신을 당합니다. 그게 이 분에게 큰 스트레스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분이 작정을 하고, 노래 연습을 했습니다. 유행가 가사를 적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면서 그것을 다 외우고, 노래방에 가서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음에 작정하고 연습을 하니까.... 이제는 어느정도 노래에 자신이 생겨서 \"누가 노래 좀 시키지 않나?\" 하고 은근히 기다리게 되더라는 것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유행가 가사 몇 개 정도는 다 외우고 계실 겁니다. 뭐 동요나 건전 가요 같은 것을 보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눈물을 흘리게 하는 좋은 가사 내용이 너무 많습니다.

 

하물며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께 경배하는... 찬송을 부르고 연습하는 일에 있어서는 너무... 시간이나 정성을 드리지 않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윗은 \"새벽을 깨우겠다\"고 했습니다.

시편 46:5을 보면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신다\"고 했습니다.

 

새벽은 좋은 시간입니다.

새벽은 이른 시간입니다.

새벽은 하루의 첫 단추를 끼우는 출발의 시간입니다.

새벽은 가장 첫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래서 \"새벽을 깨우겠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뜻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을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냉수를 들이키고 담배를 빼어 물어서 조간신문을 드려다 보는 것보다는....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주의 제단에 나아와 새벽 제사를 드리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좋겠습니까?

 

둘째로, 하루의 출발을 찬송과 기도로 시작하겠다는 것입니다.

새벽 기분은 그날 하루를 좌우합니다. 새벽부터 은혜받고 기분이 좋아지면 하루의 삶이 형통하고 순조롭게 되는 것입니다.

 

셋째는, 그날 그날의 생활 리듬을 새벽으로 바꾸겠다는 것입니다.

새벽에 일찍 일어나려면 저녁에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새벽 제사를 드리려면 잠자는 시간을 약간 줄여야 합니다.

텔레비젼도 좀 줄이고, 다른 시간을 좀 줄여서... 일찍 잠에 들어야 합니다.

내일 새벽부터 새벽 제단을 쌓기로 마음을 확정하시기 바랍니다. 새벽을 깨우는 사람이 되고, 새벽에 도우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을 통해서 주님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씀하십니까?...

 

다윗은 처음에 매우 위급하고 곤고한 상황을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는 곧 슬픔의 터널을 뚫고 나와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고, 하나님을 신뢰하는 그의 믿음이 확정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밝은 햇빛이 비치는 믿음의 정상에 서서 자기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되었습니다.

 

본문 7-8절의 말씀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내가 노래하고 내가 찬송하리이다 내 영광아 깰지어다 비파야, 수금아, 깰지어다 내가 새벽을 깨우리로다\" 하고 고백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이 우리의 삶속에 적용이 되어서 마침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승리하는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들의 삶이 곤고하고 어려운 상황들을 많이 만납니다.

마치 도망자와 같이 우리의 심경이 처량하고 황폐하고 큰 압박감으로 인하여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오늘 다윗과 같이 \"하나님께 내 마음이 확정되었사오니....!\" 하고 고백하고, 결단하게 하여 주옵소서

그래서 마침내 시험과 고난의 긴 터널을 빠져나와서 믿음의 반석위에 굳게 서게 하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승리로운 삶을 살게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11.제목 :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순위

본문 : 갈-02-08-10                                      

 

우리는 문화를 초월하여 다른 문화권에 가서 전도하는 분들을 가르쳐 선교사라고 합니다. 영어로는 ‘missionary\'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본래의 뜻은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missionary의 어원인 mission은 본래 라틴어 missio의 “보낸다”에서 유래한 말입니다.)성경에는 선교사라는 말이 직접 나오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선교사와 정확하게 같은 의미를 가진 단어가 있는데 사도라고 합니다. 본래 희랍어에서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라고 하는데 그 뜻이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입니다. 사도는 좁은 의미에서는 예수님의 12제자와 같은 분들이지만 넓은 의미에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다 사도라고 할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는 모든 제자들을 다시 세상으로 보내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 요한17:18에 보면 예수께서 제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시면서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라고 하십니다. 그런데 바로 이어지는 요한17:20에 보면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라”고 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이 예수님의 기도는 제자들을 위한 기도인데 이 제자들은 비단 예수님 당시의 12제자뿐 아니라 그들을 통해 전도 받을 후대의 모든 제자들을 포함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인 갈라디아서는 본래 바울 사도가 갈라디아 교회를 상대로 당신이 진정한 주님의 사도임을 변호하기 위하여 쓰여진 편지였습니다. 본문에서는 특히 사도의 우선순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도를 넓은 의미로 적용하자면 보냄받은 그리스도인 전체이기 때문에 사도의 우선순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우선 순위라고도 할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할 일이 많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먼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우선순위적 사역은 무엇일까요?

 

1. 불신자에게 가서 전도하는 선교사역입니다.

 

성경에서 믿지 않는 자의 구원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다면 “오라”는 단어입니다. 구약을 보겠습니다. 이사야1:18입니다.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되리라.” 이사야 55:1입니다. “너희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 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 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신약에서 보겠습니다. 마태11:28의 말씀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계22:17의 말씀입니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 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 하시더라” 그러나 구원받은 자들의 소명과 관련하여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는 “가라”는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향한 마지막 명령을 기억하십니까? 마태28:19에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침례)를 주고”라고 했습니다. 그 단어 “가라‘가 본문에도 등장합니다. 본문 9절 하반부에 ”---이는 우리는 이방인에게로 저희는 할례자에게로 가게 하려 함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여기서 바울 사도는 선교의 대상은 은사와 부르심에 따라 다를수 있음을 인정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저들의 동족인 유대인 선교에 그리고 바나바와 바울은 이방인 선교에 헌신할 것을 고백합니다. 8-9절의 고백이 그것입니다. 8절에서는 베드로를 할례자인 유대인들의 사도(선교사)로 삼으신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는 이방인의 사도(선교사)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9절에서는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은혜(은사)를 따라 된 일이기에 유대인 선교로 부르심 받은 야고보, 베드로, 요한과 이방인 선교로 부르심 받은 바울과 바나바는 피차에 협력의 필요가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디에서 누구를 대상으로 사역하던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의 공통적인 부르심은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2:7을 읽어보십시오. 나는 무 할례자에게 베드로는 할례자에게 복음 전할 책임이 맡겨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넓은 의미에서 선교사가 아닌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신 모두가 선교사요,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마음들이 바로 선교의 대상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예수 믿고 언제쯤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요? 어떤 분들은 좀 영적으로 성장하고 훈련을 받은 후에 전도를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성숙하고 훈련된 사람이 전도하면 더 잘 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자신의 미성숙과 훈련 부족을 구실로 전도의 명령에 불순종하는 것은 안타까운 일입니다. 도대체 언제 여러분의 성숙과 훈련이 완성된단 말입니까? 신약성경에 보면 모든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은 만난 즉시 전도를 시작합니다. 마가복음 5장에 보면 거라사 지방에 귀신들려 무덤을 배회하던 사람이 예수님 만나고 치유를 얻자 예수님을 좇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이때 예수님은 네가 먼저 할 일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집으로 돌아가 주께서 네게 어떻게 큰일을 행하사 너를 불쌍히 여기신 것을 네 친속에게 고하라”고 하십니다. 전도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또 사마리아 여인의 케이스를 보십시오. 그녀가 예수님 만나고 언제 전도를 시작했습니까? 그녀가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깨닫자마자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 전도를 시작합니다.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고. 그리고 그 결과를 요한4:39을 보십시오. “여자의 말이 그가 나의 행한 모든 것을 내게 말하였다 증거함으로 그 동네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 제 경험에 의하면 예수 믿는분들이 성장 못하는 원인이 전도안하는 때문입니다. 전도하면 기도하게 되고 전도하면 성경공부하게 됩니다. 전도하면 인생이 변화됩니다. 금년한해 얼마나 전도사역에 헌신하셨습니까? 저는 여러분이 전도의 헌신으로 새해를 여시기를 바랍니다. 전도는 그리스도인의 우선순위인 것입니다.

 

2. 가난한 이웃들을 돌아보는 구제사역입니다.

 

본문 10절을 보십시오. 우리는 바울사도에게 선교외에 한가지 더 그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던 한가지 사역이 그의 마음의 부담이 되고 있음을 고백합니다. 읽어보실까요? “다만 우리에게 가난한 자를 생각하는 것을 부탁하였으니 이것을 나도 본래 힘써 행하노라” 이것은 바울 사도의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처음 사도들 모두 아니 초대 교인 모두의 공통적인 부담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나도 이 사역을 힘써 행한다고 고백합니다. 무슨 사역입니까? 구제 사역이었던 것입니다. 사도행전 6:1을 보십시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여기에 보면 예루살렘 교회에 이 구제 사역 문제로 다툼이 일어나기까지 했습니다. 우리는 이런 경우 교회가 다시는 시험에 들지 않도록 구제 사역을 포기하자고 결의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할 것은 초대 교회는 이 문제로 다툼이 일어날 정도로 구제 사역에 열심이었다는 것입니다. 선교사역과 함께 구제 사역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삶의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교회가 목장 교회 사역의 두가지 목표를 설정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우리 교회 목장 사역의 비전은 이렇게 정의되어 있습니다.--목장 교회 비전“ 급속하게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지구촌 교회 안에서 마을별 혹은 특성별로 교우들에게 안정적인 가족구조를 제공하여 교회 정착과 영적 성숙, 공동체적 봉사 곧 선교와 구제를 실현하도록 섬기며 더 나아가 목장 재생산을 통한 하나님 나라 확장에 기여하고자 합니다.”이것이 우리가 목장으로 모일 때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VIP 태신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여름철 단기선교에 동참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목장들이 정기적으로 사회 봉사 기관들을 방문하고 주변에 고통받는 이웃들을 대상으로 사랑을 실천하고 해마다 년말년시에 목장 교회를 중심으로 나눔을 실천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이런 우리의 선교와 구제의 실천은 중요한 우리 모두가 “빚진자”라는 성경적 정신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 받은 것--누군가가 과거에 이 복음을 위해 희생하고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지금 여기에서 이만큼 살고 있는 것--하나님과 이웃들의 사랑, 그리고 이 사회에 빚진 때문이라는 자각-이것이 우리의 자비의 실천의 성경적인 모티브라고 할수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요한3:16은 잘 기억하지만 요일3:16의 교훈은 망각하는 때가 많습니다. 요일3:16은 요한3:16이 증언한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들이 평생에 붙들고 살아야 할 또 하나의 중요한 교훈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마땅하니라” 다음 구절까지 읽어보겠습니다. 요일3:17입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 그래서 신학자들은 전도의 명령을 위대한 사명(Great Commission)이라고 불렀는가 하면 사랑의 실천을 위대한 명령(Great commandment)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이웃 사랑을 가장 큰 계명에 포함시키셨던 것입니다. 물론 이웃을 사랑한다고 해서 이세상 모든 가난한 자들을 우리가 책임질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가 여리고 길에서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는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사실 우리 한국 사람들이 구제 사역에 헌신하기를 꺼리는 원인의 하나는 우리가 크게 도와야 한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그러나 선교가 이웃에 대한 관심과 친절로 시작하듯이 사랑의 실천도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 시작하시면 됩니다.

 

구제를 포함한 사랑의 실천 사역 중에는 물질이 아닌 우리의 시간과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적지 않습니다. 우리 교우들중 적지 않은 분들이 참여하는 호스피스 사역도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교도소 사역도 그런 경우라고 할만 합니다. 양로원 봉사도 그런 경우라고 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교우들중에는 장애인 교우들이 주일마다 교회에 올수 있도록 차량 봉사를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외국에서는 교회가 가난한 이웃들을 섬기기 위해 부모들이 일할수 있도록 그들의 어린 자녀들을 교회에서 무료나 실비로 돌보아 주기도 합니다. 그리고 교우들은 교회에 나와 자원봉사로 이런 어린이들을 돌보아 줍니다. 우리 교회가 연구해 볼수 있는 프로젝트라고 생각합니다. 문제는 돈이 아니라 우리의 관심입니다. 우리의 사랑입니다. 혼자 잘 사는 세상이 아니라 사랑을 나누는 세상이 되기 위하여 우리가 고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수년전 치매로 고생하는 아내를 둔 남편 위스컨신주의 Mr.Stillwater씨의 이야기가 Moody Monthly라는 잡지에 실린 일이 있었습니다. 아내를 요양원에 맡긴 것이 마음에 걸린 남편은 하루를 마다 않고 거의 매일 저녁 요양원에 들려 한 두시간을 곁에 앉아 시간을 보내곤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요양원을 찾을때는 늘 아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사들고 갔다고 합니다. 하루는 자녀들이 함께 와서 어머니에게 아버지를 가르키며 이분이 누구냐고 묻자 남편을 몰라보는 아내는 “아이스크림 사다주는 좋은 아저씨라”고 대답합니다. 하루는 크리스마스가 가까운 어느날 남편이 아내옆에 앉아 “내가 좋으냐”고 묻자 “아이스크림 사다 주니까 좋아”하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그러자 남편은 기다렸듯이 “그러면 나하고 결혼하자”고 하자 한참 무엇인가를 생각하는듯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아이스크림 계속 사다주면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더랍니다. 남편은 요양원에서 봉사하시는 목사님께 특별한 도움을 요청하고 자녀들 그리고 요양원 식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성탄절 오후 조촐한 결혼식을 거행했다고 합니다. 주례가 치매걸린 아내에게 묻습니다. “옆에 있는 이분을 남편으로 맞이하시겠습니까?”고 아내는 또박 또박 “예”하고 대답합니다. 남편은 주례의 허락을 받아 결혼식에 참석한 하객들에게 인사 시간을 갖고 준비해온 메모지를 읽어내려 갔다고 합니다.

 

“오늘 저희들의 결혼식에 참여해주신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제가 저의 아내와 이런 번거로운 결혼식을 다시 준비한 것은 단 한번이라도 제 아내에게 ‘사랑하는 남편’소리를 듣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내일 다시 제 아내가 저를 기억 못해도 저는 오늘만이라도 저의 사랑을 되찾고 싶었습니다. 성탄절은 하나님이 저희들에게 예수님을 선물로 주신 날입니다. 이날 저는 저의 아내를 선물로 받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도 저의 아내에게 오늘 하루라도 다시 한번 남편이라고 부를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고 싶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결혼식이 아니라 사랑을 받고 사랑을 주는 오늘을 사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저희에게 이 사랑이 가능하도록 도와주신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오늘 성탄절 우리 부부는 고귀한 사랑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이 분의 아내는 치매가 치유되지 못한채로 약 6년을 더 살았는데 그러나 한가지 자기 남편을 남편으로 부르며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 남편은 아내의 장례식에서 다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것으로 족합니다. 제 아내가 요양원 결혼식후 적어도 저를 남편이라고 불러준것-그것은 크리스마스의 기적이었고 사랑의 기적이었습니다. 남은 저의 인생--사랑의 빚을 갚기 위해 제 아내보다 더 외롭고 아픈 이웃들을 사랑하며 살겠습니다.”

 

                                 

12. 제목 : 기도할 때와 기도하지 아니할 때

본문 : 대하-15-01-2                                      

 

1하나님의 신이 오뎃의 아들 아사랴에게 임하시매 2저가 나가서 아사를 맞아 이르되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

12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13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14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15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

 

  성경을 보면 \"구하라\" \"기도하라\" \"간구하라\"는 말씀이 자주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렇게 기도하라는 말씀을 많이 강조하셨을까요?

이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원하는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고 싶어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하면 축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가 기도하므로 받게 되는 축복은 뭐니뭐니해도 기도응답의 축복입니다. 따라서 기도의 응답을 받은 간증이 많아질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게 되므로 더 큰 은혜를 받게 되고, 자연히 믿음이 점점 아름다워집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되므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넘치도록 받게 됩니다.

역대하 14:1-8을 보면, 아사왕 십 년 동안  전쟁이나 환난 없이 온 나라가 평안했습니다. 이처럼 아사왕이 평강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된 이유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선과 정의를 행하였고, 모든 이방 제단과 산당과 우상을 다 없애버렸으며, 온 백성들이 하나님께 기도하게 하였고, 하나님의 율법과 명령을 지켜 행하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아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평안한 중에도 유사시를 대비하여 유다 지파에서 30만 명, 그리고 베냐민 지파에서 28만 명의 용사들을 뽑아 훈련시키는 유비무환의 국방정책을 세워나갔습니다.

그러던 중 아사왕 11년째 되던 해에 이웃나라 구스왕이 무려 100만 명의 거대한 군대를 거느리고 유다로 쳐들어왔습니다. 이들은 병거 300승으로 무장된 강력한 군대였습니다.

아무리 평소에 준비가 잘된 유다의 군대라 할지라도 적군의 숫자가 워낙 많고 가진 무기 또한 강력했기 때문에 이들과 싸워 이긴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했습니다.

이에 아사왕은 하나님 앞에 전심으로 부르짖기 시작했습니다. 『여호와여 강한 자와 약한 자 사이에는 주밖에 도와줄 이가 없사오니 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우리를 도우소서 우리가 주를 의지하오며 주의 이름을 의탁하옵고 이 많은 무리를 치러 왔나이다  여호와여 주는 우리 하나님이시오니 원컨대 사람으로 주를 이기지 못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했습니다(대하 14:11).

이 기도의 내용으로 미루어 볼 때 아사왕은 평소에 기도생활을 많이 한 믿음의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아사의 기도를 들으셔서 구스 사람들이 패하여 도망하게 되었습니다. 구스인은 최후의 한 사람까지도 살아남은 자 없을 정도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유다 백성들은 그들이 남겨놓은 식량과 무기와 약대 등 엄청난 노략물들을 가지고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후에 하나님께서 그랄 사면 모든 성읍 백성들을 두렵게 하셔서 아무도 이들에게 덤벼들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이들은 환난 때에 하나님께 기도하여 확실한 응답을 받았습니다. 사실 우리가 다 죄인이고 부족한 사람들이지만 기도하는 자가 이깁니다.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자의 손을 들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원리를 알아야 합니다. 아사왕은 환난 때에 기도하여 응답을 받았고, 응답으로 인해 체험적인 믿음의 사람이 되었으며, 더 나아가 적군으로부터 노략한 엄청난 전리품까지 얻게 되었습니다. 결국 환난이 축복이 된 것입니다.

 

로마의 황제인 콘스탄틴 대제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그는 그 당시 동전에 새겨져 있던 황제의 얼굴을 기도하는 모습으로 바꾸라고 명령했습니다. 이에 깜짝 놀란 신하들이 그 이유를 묻자 \"그것이 내가 진정으로 승리한 방법이기 때문이다.\"라고 답했다고 합니다.

그는 전쟁 때마다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전쟁에 나아감으로 해서 늘 승리했으며, 이런 기도의 응답과 체험이 쌓여 결국 기독교를 공적으로 인정한 역사에 남는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어떤 장로님은 시골에서 태어나 중학교만 마치고, 무작정 상경하여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검정고시에 합격하여 대학까지 공부하였고 그후 열심히 사업을 하여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그러나 33세 때 갑자기 각혈을 하고 쓰러졌습니다. 병원에서 진찰한 결과 심한 결핵으로 고칠 가망이 없다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가 마지막으로 서대문 시립병원에 입원했을 때,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고침을 받지 못하고 죽어나가는 것을 보며 하나님 앞에 특별히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저를 살려주시면 남은 여생 결핵환자들을 위해 살겠습니다.\"라는 서원기도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은혜를 주셔서 간절히 기도하는 가운데 기쁨과 평강이 몰려왔습니다. 그후 기적적으로 완치되어 병원에서 퇴원하게 되었고, 그후 다시 사업을 시작하여 많은 돈을 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후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그대로 지켰습니다. 그리하여 하나님으로부터 넘치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열심히 기도하여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아도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을 제대로 지키지 못하므로 큰 축복을 받지 못합니다.

그는 서원대로 자신의 재산 중 500억을 드려 사회복지 사업체인 \"사랑의 보금자리\"를 설립하고 결핵퇴치사업과 선교에 앞장서고 있습니다. 이분이 바로 이정재 장로님이십니다.

성도 여러분! 환난 중에 낙심하지 말고 전심으로 기도하면 축복을 받습니다.

 

환난 중에 기도하므로 받게 되는 축복은?

1.은혜를 받습니다.

2.믿음이 더욱 좋아집니다.

3.응답을 받습니다(기적을 체험합니다).

4. 체험적인 믿음을 가지게 됩니다.

5.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게 됩니다.

6. 더 큰 축복을 받게 됩니다.

7. 모든 것이 전화위복이 되는 기회가 됩니다.

역대하 15:10-15을 보면 『아사 왕 십 오년 삼월에 저희가 예루살렘에 모이고 그날에 노략하여 온 물건 중에서 소 칠백과 양 칠천으로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또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여 열조의 하나님 여호와를 찾기로 언약하고 무릇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찾지 아니하는 자는 대소 남녀를 무론하고 죽이는 것이 마땅하다 하고 무리가 큰 소리로 부르며 피리와 나팔을 불어 여호와께 맹세하매 온 유다가 이 맹세를 기뻐한지라 무리가 마음을 다하여 맹세하고 뜻을 다하여 여호와를 찾았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저희의 만난 바가 되시고 그 사방에 평안을 주셨더라』고 했습니다.

풍성한 제물을 드리고 온 백성들과 함께 하나님 앞에 믿음을 다짐하는 맹세를 하는 참으로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사는 이에 그치지 않고 자신의 모친인 마아가가 아세라의 가증한 목상을 만들어 섬기는 것을 안 후에 태후의 위를 폐하고 그 우상을 찍고 빻아 기드론 시냇가에서 불살라버렸습니다.

또 그 부친의 구별한 물건과 자기의 구별한 물건 곧 은과 금과 기명들을 하나님의 전에 드렸습니다. 이때부터 온 나라가 아사 왕 35년까지 다시는 전쟁이 없는 평안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나님 앞에 바르게 살던 아사에게도 문제가 생겼습니다. 아사왕 36년부터 그가 죽던 해인 41년까지 5년간 믿음이 매우 희미해졌습니다. 이렇게 된 가장 큰 원인은 오랫동안 나라가 평안하고 물질적으로 풍족한 가운데 살다보니 자연히 기도생활을 등한히 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누구나 일평생 모든 것에 부족함이 없고 건강하며 환난풍파도 없이 편안하게 사는 것이 좋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약해진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기도할 일이 없다보니 자연히 기도생활이 소홀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라면 누구나 기도시간이 짧아지고 기도가 약해지면 믿음도 점점 약해지고 하나님을 떠나 타락하게 되기 쉽습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늘 하나님 앞에 나아와 내 모든 것을 아뢰고 감사하고 또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행위입니다. 그런데도 우리 인간들은 꼭 문제가 있어야 답답한 마음에 응답해달라고 기도하고, 문제가 없으면 기도하지 않는 나쁜 습관이 있습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문제없는 사람들은 기도를 소홀히 하다가 원래 가지고 있던 믿음까지도 다 잃어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됩니다.

역대하 16:1-6을 보면, 아사 왕 36년에 이스라엘 왕 바아사가 유다를 치러 올라와서 라마를 건축하고 유다 사람이 아사와 왕래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이는 마치 해방 후 공산정권이 38선을 만들어놓고 북한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한 것과 같습니다.

예전 같으면 하나님을 찾고 부르짖으며 하나님께 전심으로 매달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동안 기도생활을 등한히 하며 살다보니 기도하는 것 자체를 잃어버렸습니다.

아사는 여호와의 전 곳간과 왕궁 곳간의 은금을 취하여 다메섹에 거한 아람 왕 벤하닷에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도움을 청했습니다. 이에 벤하닷이 아사 왕의 말을 듣고 그 군대장관들을 보내어 이스라엘 두 어 성읍을 쳤습니다.

이에 바아사가 듣고 라마 건축하는 일을 그쳤고, 아사 왕은 온 유다 무리를 거느리고 바아사가 라마를 건축하던 돌과 재목을 가져다가 게바와 미스바를 건축했습니다.

이것은 믿음의 사람의 태도가 아닙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되었을까요?

그리하여 선견자 하나니가 아사에게 『왕이 아람 왕을 의지하고 왕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지 아니한 고로 아람 왕의 군대가 왕의 손에서 벗어났나이다 구스 사람과 룹 사람의 군대가 크지 아니하며 말과 병거가 심히 많지 아니하더이까 그러나 왕이 여호와를 의지한 고로 여호와께서 왕의 손에 붙이셨나이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 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라고 책망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백만 군대도 이기게 하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돈으로 해결하려고 하느냐는 선견자의 책망입니다. 그러나 예전같으면 잘못했다고 회개했을 아사가 도리어 노하여 선견자 하나니를 옥에 가두었습니다.

이는 마치 폭군들에게서나 볼 수 있는 행동입니다. 과거에 아합은 미가야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않고 감옥에 집어넣었으며(대하 18:7), 시드기야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감옥에 넣었고(렘 32:3), 헤롯은 세례요한을 감옥에 집어넣고 목을 베어 죽이기까지 했습니다(마 14:3).

아사는 죽기 직전에 발에 심각한 병이 들었습니다. 회개할 기회가 왔습니다. 하나님을  찾을 기회가 왔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마음이 강퍅해진 증거입니다. 결국 아사는 하나님을 찾지 않고 죽었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모든 복을 다 잃어버립니다. 받은 은혜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은 물론 믿음까지도 잃어버리게 되며, 받은 축복도 모두 잃어버리게 됩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이 기도생활을 하지 않으면 얼마나 많은 손해를 보게 되는지 모릅니다.

교회 부흥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 교회를 부흥시키는 방법이 여러가지로 논의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교회의 부흥을 가져온다는 사실입니다.

미국에 있는 미국교회와 한인교회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있는 교회들의 경우 대체적으로 교회와 교인들의 숫자가 급속히 줄어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미국 내에 있는 한국교회는 계속 성장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미국 목사님들의 기도시간은 평균 8분이고, 한국 목사님의 기도 시간은 평균 30분이라고 합니다. 바로 이러한 기도시간의 차이가 교회를 살리기도 하고 문을 닫게도 합니다.

우리 교회가 날마다 기도하며 열심히 부르짖는 이유는 교회의 부흥은 하나님이 사람들을 교회로 보내주셔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이 자리에 온 것도 성령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오게 된 것입니다.

미국의 훌러 신학교의 피터 와그너 교수는 교회 성장학의 권위자입니다. 저도 이 분의 강의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 분의 말에 의하면 한국 교회가 1960년도에서 80년도에 걸쳐 급성장한 이유는 기도원마다 기도하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교회마다 기도의 불이 붙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1990년에 들어서부터 기도원에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문을 닫는 기도원이 속출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교회성장이 멈추게 되었고 대신 무속과 불교가 전통이라는 이름 아래 번성하기 시작했습니다. TV와 신문 잡지에서 점과 굿, 오늘의 운세 등의 프로그램이나 기사를 흔히 보게 되었습니다. 주택가에 절이 들어섰으며, 군대가 군승으로 넘치게 된 반면에 교회는 점점 힘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기도하지 아니하면 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지금 우리는 국가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해 있습니다. 과거 어느 때보다 더욱 기도에 힘써야 할 때입니다. 전심으로 합심하여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러한 때 아사왕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기도할 때 복을 받았습니다. 환난이 축복이 되었습니다. 평강의 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도하지 아니할 때 믿음을 잃었습니다. 평강의 복도 잃었습니다. 기도하면 고칠 수 있는 병도 기도하지 아니하므로 고침을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한 여교사가 혈압이 높고 몸이 아파서 도저히 교편생활을 해낼 수 없어서 학교를 쉬어야 했습니다. 약을 먹어도 차도가 없었습니다. 마침 예수 믿는 친구가 이러한 사정을 알고 이 분에게 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하며 고칠 것을 권했습니다. 드디어 이분은 결심을 하고 금식기도원에 들어갔습니다. 그러나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알지를 못했습니다.

저도 교회에 처음 나왔을 때 기도할 줄을 몰라서 친구에게 써달라고 하여 외워서 기도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 분이 여 전도사님을 붙들고 사정이야기를 했더니 찬송가의 첫 장에 나와있는 주기도문을 알려주면서 그대로 기도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이 분은 사흘동안 마치 주문을 외듯이 주기도문만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갑자기 속이 미식거리면서 핏덩이가 3개가 터져나왔습니다. 그후 답답한 것도 없어지고 어지러운 것도 없어졌으며 몸이 날아갈 듯이 가벼워졌습니다. 기도원에서 하산한 후 병원에 들러 진찰한 결과 아무런 이상이 없었습니다. 건강을 되찾은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이 없는 사람도 자기 병을 고쳐보겠다고 금식하며 주기도문만 외워도 이런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우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씀했습니다(약 4:2).

오늘 본문 2절을 보면 『아사와 및 유다와 베냐민의 무리들아 내 말을 들으라 너희가 여호와와 함께 하면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실지라 너희가 만일 저를 찾으면 저가 너희의 만난 바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저를 버리면 저도 너희를 버리시리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열심히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께 부르짖으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주시고 우리와 함께 하여주시며, 우리를 가까이하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버리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살려고 하면 하나님께서도 그 사람을 버리십니다. 얼마나 중요한 말씀인지 모릅니다.

오늘 오후 3시에 부산역 광장에 모여 나라와 민족을 위한 평화기도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기도하면 살길이 열립니다. 세상이 달라집니다. 환난이 축복으로 바뀝니다. 개인의 믿음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됩니다.

그러나 우리의 원수 마귀는 어떻게 해서든지 기도하지 못하게 만들려고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기회를 노리고 있습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원수마귀가 물러갑니다. 이것도 모르고 믿음이 약한 성도들은 기도하라고 하면 부담스러워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핑계를 찾습니다.

여러분들이 자신이나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업이나 국가나 무슨 문제든지 기도하므로 하나님 앞에서 해결받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습니다. 이 비밀을 아는 사람은 기도합니다. 우리가 살길은 오직 전심으로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13. 제목 : 믿음으로 살리라

본문 : 롬-01-17-  

                                   

세계 제2차 대전이 끝난 이후부터 유대인들은 유월절 행사 때마다 ‘아니마밈’ 의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아니마밈’ 이라고 하는 것은 \'나는 믿는다\' 라고 하는 뜻입니다. 이 노래는 600만명의 유대인이 무참히 죽어나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죽음을 앞에 두고 고통 당하던 유대인들이 작사 작곡해서 부르며 위로를 받았던 노래입니다. 그 내용은 \'나는 믿는다. 나의 메시아가 나를 돕기 위하여 반드시 나를 찾아오리라는 사실을 믿는다.\' 간단한 가사를 계속 반복해서 부르는 그런 찬송입니다. 그런데, 자신의 동료들이 가스실을 향해서 끌려가는 모습을 볼 때 너무 마음이 아파 이 찬송 뒤에 한 절을 더 넣어서 불렀다고 합니다. 추가된 가사는 \'그런데 때때로 메시아는 너무 늦게 오신다.\' 그러나 한 외과의사는 절대로 그 마지막 가사를 부르지 않았답니다. 그는 확실히 메시아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는 늘 단정히 행하고 죽음을 앞둔 시간이지만 유리조각으로 면도를 해가면서 몸과 마음을 단정하게 하고 끝까지 버티고 견디고 믿음으로 섰습니다. 마침내 그는 죽지 아니하고 수용소 문을 나오게 됩니다. 나오면서 그는 마지막 절을 고쳐 불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너무 서둘러서 믿음을 포기할 때가 많다. 사람들은 너무 서두른다 그래서 믿음을 포기하는 자가 많다\'라고 불렀답니다. 살아난 그는 바로 ‘의미요법’의 창시자인 빅터 프랭클이였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건강을 잃거나 물질을 잃어버리면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버리면 살지 못할 것 같다고 말을 합니다. 명예와 권세를 잃으면 살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말하면 건강이나 물질이 있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야 산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보니 복음의 능력을 믿는 믿음만 있으면 물질이 부족해도 건강을 잃어버려도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가도 살아 갈 수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말씀을 믿기만 하면, 세상의 것을 믿고 의지하는 사람보다도 더욱 멋있고 더욱 가치있고 복된 삶을 살아갈 수가 있는 줄로 믿습니다. 영국의 요한 웨슬리는 1738년 5월24일 저녁 올더스켓의 집회에 참석하였다가 루터의 로마서 주석 서문을 듣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우리 마음속에 역사하사 변화를 일으켜 주신다’ 라는 대목을 들을 때 그는 마음이 뜨거워지는 성령의 체험을 하고 회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은 요한 웨슬레 회심266주년 기념주일입니다. 우리의 마음에도 진정한 회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부터는 웨슬레회심을 기념하는 지방연합성회가 우리교회에서 열립니다. 이번 기회에 여러분의 심령가운데에 회심의 역사가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회심의 근거는 믿음입니다. 복음의 능력을 믿을 때에 놀라운 능력을 얻게 될 줄로 믿습니다.

성도들은 오직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리라” 할 때에 사탄의 세력은 도전해옵니다. 사탄은 믿음으로 살려는 성도를 그냥 두지 않고 계속 불신앙의 길로 가도록 충동합니다. 어떻게 하든 넘어뜨리려고 합니다. 그러나 이 유혹을 이겨야 합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언제나 ‘믿음으로 살리라’ 는 고백이 나와야 합니다.  믿음으로 사는 삶은,

첫째로 하나님이 전부이심을 믿는 삶입니다

두 아이가 골목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한 아이가 다른 아이에게 이렇게 자랑을 늘어놓습니다. \"우리 집은 텔레비전이 두 개나 있어. 또 우리 집에는 냉장고도 큰 게 두 개나 있지. 또 컴퓨터도 아버지 방에 한 개 있고 내 방에도 하나 있어. 너희 집에는 다 한 개 밖에 없지?\" 이 말을 들던 아이가 화가 났습니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땅바닥에 내팽개치고 일어서면서 이렇게 버럭 소리를 지릅니다. \"웃기지마 우리는 엄마가 둘이야.\" 이 유모어는 진정한 인생의 가치가 아닌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사는 사람을 꼬집은 말입니다. 세상엔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될 것 자랑하지 않고 부질없는 자랑거리를 찾아 헤매는 인생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여러분은 마땅히 자랑할 만한 것을 찾으시고 자랑하시며 사시기를 바랍니다.

어느 대기업의 임원인 장로님의 고백입니다. 사업상 장관을 모시고 대접하는데 장관이 자꾸 술을 권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장로님은“장관님, 저는 크리스챤입니다. 술을 못합니다.\"하니 장관이 정색을 하며 얼굴색이 변합니다. \"그래요, 크리스챤은 술을 먹지 않습니까?������������예, 저는 먹지 않습니다.\" \"다들 잘 먹던데?\" \" 예, 그러나 저는 먹지 않습니다.\" 그때 장관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오늘에야 진짜 예수꾼을 만났구만.\" 하더랍니다. 하나님이 삶의 전부인 사람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입니다. 믿음을 가지면 모든 것을 가진 것이 됩니다. 믿음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은 것이 됩니다. 믿음을 가지면 잃었던 것도 다시 찾을 수 있습니다. 믿음을 가지면 세상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으면 세상을 이길 수 없습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을 소유해야 합니다. 믿음으로 하나님이 전부임을 믿고 하나님으로 인하여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축복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향해 방향을 정하는 삶입니다

죠니 타다는 유명한 미술가요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지체장애자입니다. 청년시절에 다이빙 사고로 인해 목 아래가 모두 마비되었습니다. 어느 날 죠니는 친구와 함께 점심을 먹고 있었습니다. 그녀가 밥을 먹기 위해서는 수저의 모양을 입안에 잘 들어가도록 구부려야 했습니다. 그녀는 친구에게 수저를 구부려 주도록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죠니는 멀쩡한 수저를 구부리며 의아해하는 친구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수저는 구부려져야만 내게 알맞게 사용할 수 있는 것이 된단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맞도록 쓰시기 위해 구부릴 때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부리실 때 그 순간은 자신에게 해가 되는 것처럼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에 따라 모양을 만들도록 자신을 허락하며 하나님께 방향을 정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자의 모습입니다. 사실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께 더 많이 양보할수록 하나님은 우리를 변화시키시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을 더 많이 하실 줄로 믿습니다.

설계사와 건축가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설계사는 이쪽에 벽을 두고 싶은데 건축가는 저쪽에 두려고 합니다. 설계사는 이쪽에 계단을 두려고 하는데 건축가는 다른 쪽을 주장합니다. 그러나 결국에는 설계사의 주장을 따라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설계사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우리는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우리 자신 마음대로 계획을 세우고 인생을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2:19에 말합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함이니라\". 믿음으로 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사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과 사랑의 관계를 맺는 삶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 윌리암 바클레이는 목사로, 선교사로, 그리고 신학교 교수로 평생을 보냈습니다. 그는 세상에 대하여는 죽고 그리스도에 대하여는 다시 산다는 의미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 얼마 되지 않아서 젊어서 작성한 \"헌신강령\"이라는 종이쪽지가 발견되었습니다. 자신이 작성한 이 행동강령에서 젊은 바클레이는 그의 생명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쳤습니다. 그는 이 종이 위에 85세가 될 때까지 매년 그 스스로 서명을 하였습니다. 그가 갖고 있는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였습니다. 마음, 몸, 영혼, 시간, 모든 소유물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헌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지금은 다 낡고 누렇게 된 종이이지만 노학자인 바클레이는 매년 죽을 때까지 그 종이 위에 서명하는 것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는 그의 서약을 다음과 같은 말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 하나님, 당신에게, 나는 모든 일들의 관리를 맡깁니다. 아무 거리낌 없이 말씀드립니다. 내 뜻대로 마옵시고 당신 뜻대로 하옵소서\".

믿음은 하나님과 사랑하는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신뢰하고 믿는 행위입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고 말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엇으로 사십니까?

미국 남북전쟁의 영웅, 아브라함 링컨에게 한번은 참모가 와서“각하, 안심하십시오.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편입니다. 전쟁은 반드시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 줄 것입니다.\" 링컨이 그 때 조용히 말했습니다. \"이봐. 하나님은 우리편에도 계시고, 저 쪽 편에도 계시는 거야.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야 되는 거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는 것이 믿음입니다.

진정한 성도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삶의 전부이심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그 하나님을 향하여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을 사랑하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웨슬리의 회심을 가능케 하였던 이러한 믿음이 여러분에게도 있으셔서 언제나 승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4. 제목 : 주 예수께 받은 사명

본문 : 행-20-17-24  

                                     

한국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문창모장로는 의료계는 물론 교육계, 정치계, 종교계 등 각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셨습니다. 96세를 사시면서 강원도 원주에서 문 이비인후과를 개원해 43년 동안 같은 장소에서 진료를 하셨습니다. 그분은 진료하실 때마다 투철한 사명감을 가지고 하셨답니다. 국회의원 재직시에는 서울에서 원주가 가까운 거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국회 일정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려와서 진료를 하셨답니다. 그는 돌아가기 얼마 전까지 진료를 하였는데, 시골에서 일 때문에 낮에 시간 내기가 힘든 환자들을 위하여 매일 아침 6시30분에 어김없이 진료를 시작했습니다. 어느 기자가 \"장로님, 은퇴하실 때가 훨씬 지났는데 진료를 계속하고 계십니까? 이제는 좀 쉬셔도 되지 않습니까?\" 물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의사의 사명을 주셨기 때문에, 눈감는 순간까지 진료를 멈추지 않기로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라고 하시더랍니다. 의사가 된 것이 하나님의 사명이고 그 사명 감당하려고 9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진료를 꾸준히 했다는 것입니다. 사명이 있는 사람은 끝까지 최선을 다합니다. 환경과 조건을 살피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사명을 받으셨습니까? 그 사명을 어떻게 감당하고 계십니까? 역사적으로 큰 일을 했던 사람들은 누구나 확고한 사명을 발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사명감을 가지면 사명감이 그 사람을 위대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통하여 말할 수 없는 환난과 시험을 통과하면서 여러 가지 경이로운 실적들을 이루어 놓았습니다. 그는 3년에 걸친 에베소 전도를 마지막으로 소아시아 전도를 마감하고 예루살렘에 귀환할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예루살렘으로의 상경은 그의 종말을 내다보는 비장한 걸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소아시아의 마지막 거점인 밀레도에서 에베소 장로들을 불러모으고 의미심장한 고별 설교를 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는 본문에서 자신에게는“주 예수께 받은 사명”이 있노라고 고백합니다. 사도 바울의 경우 그의 삶은 하나님께 받은 사명으로 귀결되었습니다. 디모데후서 4:7에 보면,“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즉 바울이 믿음으로 자기의 갈 길을 잘 마쳤다고 피력한 것은 그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충실하였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가르치는 사명을 감당하는 지도자들과 교사들을 위한 주일로 지킵니다. 교사들은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사람에게 사명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사명은 크든 작든 다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것입니다. 성도들도 교회에서 맡겨진 어떤 일이든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것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이후로 예수께 사명 받은 자로 합당하게 사시기 바랍니다.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은,

첫째로 눈물로 훈계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명하고 덕이 있는 훌륭한 선생이 있었습니다. 불량한 아들을 둔 부모가 찾아와 아들을 새사람으로 만들어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였습니다. 마을로 내려온 선생님은 그 집에서 불량한 아들과 함께 지냈습니다. 아들은 유명한 선생님이 왔다는 말에 며칠 동안은 얌전히 굴었습니다. 그러나 일주일 후에는 여전히 불량하고 못된 짓을 하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선생님은 꾸짖지도 않았고, 교육적인 어떤 말도 하지 않아 아들의 부모는 낙심에 빠졌습니다. 선생님과의 약속기간이 3개월만 같이 있기로 하여 3개월이 지나자 선생님은 약속대로 집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못된 아들은 훌륭한 선생이 오면 자신이 무척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의외로 그렇지 않아 이상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방에서 나와 불량한 아들에게 마지막으로 신발을 신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아들은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의 신발을 신기고 신 끈을 매었습니다. 그 순간 신 끈을 매는 아들의 손등에 뜨거운 것이 떨어집니다.깜짝 놀라 위를 쳐다보니 선생님의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었습니다. 순간 아들은 목이 메이면서 선생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고 말았습니다. 3개월 동안 한마디의 꾸지람도 어떤 말씀도 하지 않은 선생님이 떠나시면서 흘린 그 눈물은 너무나 많은 의미를 간직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결국 이 불량한 아들은 선생님의 눈물 앞에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눈물의 훈계가 새 사람이 되게 한 것입니다.

눈물은 거짓이 없습니다. 감사할 때는 감사의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정말 억울할 때는 억울한 눈물이 있는 것입니다. 속이 상할 때는 속상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사랑할 때는 사랑해서 흘리는 눈물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눈물에는 거짓이 없습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인 하나 하나를 위해서 밤낮으로 삼 년 동안이나 눈물을 흘리며 믿음을 심어주었고 돌보아 주었습니다. 내가 흘린 그 눈물을 헛되지 않게 해 달라는 부탁이 본문의 내용입니다. 눈물의 생활은 진실한 삶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와 눈물로 세워졌습니다. 그러기에 피로 세워진 교회를 성장시키는 것은 눈물입니다. 그것이 교회를 자라게 하는 영양분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교회를 위하여 눈물을 흘리는 지도자가 필요합니다. 눈물을 흘리는 교사, 눈물을 흘리는 임원, 눈물을 흘리는 성도들이 필요합니다. 예수께 사명을 받은 자들은 눈물로 영혼을 가르칩니다. 눈물로 영혼을 훈계합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에게서 진정한 사명자의 눈물을 봅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눈물입니다. 이후로 눈물로 주 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는 교사들과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로 심령이 주께 매임 받은 사람들입니다

미국의 코카콜라는 세계적인 기업입니다. 미국의 외교관은 들어가지 못하는 나라가 있어도 코카콜라는 전 세계에 안 들어간 나라가 없다고 합니다. 코카콜라가 이렇게 세계적인 기업이 된 이유는 이 회사의 사장 때문입니다. 그는 코카콜라 판매에 완전히 목숨을 걸었습니다. 누구를 만나든 무슨 일을 하든 늘 코카콜라만 생각하고 코카콜라만을 말하고 다녔다고 합니다. 심지어 그는 성공의 비밀을 묻는 기자들에게.“내 혈관 속에는 피가 흐르는 것이 아니라 코카콜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는 완전히 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한 사람의 열정이 세계사람들을 콜라 없이는 못살게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이와 같은 열정의 사람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는 사도 바울입니다. 본문 24절에서“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라고 고백합니다. 고후 5장 13절에서는,“우리가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만일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라고 말합니다. 이와 같은 모습은 성령의 역사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입니다.

본문의 \"심령에 매임 바 되어”라는 말은 원어로“데데메노스 에고 토 프뉴마티”로서“성령에 붙잡혀서”라는 뜻입니다. 바울은 예루살렘행이 평탄한 길이 아니고 환난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을 아끼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예루살렘 행을 만류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주 예수께 받은 사명인 복음 증거 하는 일을 위해 생명을 아끼지 않겠노라\" 하며 예루살렘행을 결단합니다. 바울의 마음을 매고 있는 것은 바로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역사에 매이면 소명이 분명해집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셨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환경이 좋으면 하고 상황이 달라지면 안 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핍박이 있어도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불렀다면 복음을 위해 죽어도 상관없다는 자세입니다.

여러분들의 심령 속에도 불타 오르는 성령의 충만함이 있기를 바랍니다. 심령에 매인 바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소명의식에 불타오르기 바랍니다. 소명의 사람들은 조롱이나 환경의 어려움 때문에 절대로 사명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제 성령의 역사 하심으로 말미암아 심령이 주 예수께 매인 바 되시기 바랍니다. 바로 이것이 주 예수께 사명을 받은 사람들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셋째로 주께 목숨을 거는 사람들입니다

1945년 4월 8일 주일아침에 본훼퍼 목사는 사형장으로 끌려나가게 됩니다. 그때 같이 있던 영국군 포로가, \"목사님, 이것이 마지막이군요. 안녕히 가십시오\" 라고 인사를 했습니다. 그때 본훼퍼 목사님은  유명한 말을 했습니다. \"이것이 끝이 아닙니다. 나에게 있어서는 생명의 시작입니다. 감옥생활은 끝났습니다. 그러나 이제 자유 생활이 시작됩니다. 세상 고통스러운 생은 여기서 끝납니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 시작됩니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오래 살고 짧게 살고, 건강하거나 병들거나 그런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다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이다 하면서 깨끗하게 헌신하고 생명을 조금도 아깝게 여기지 않고 주께 바치면서 살아가는 생이 되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께 자기를 온전히 드렸습니다. 그러기에 자기 목숨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소중한 자신을 주님의 소유로 드리며 힘에 지나도록 수고하였다고 했습니다. 있는 힘을 모두 쏟아 부었다는 뜻입니다. 기력이 하나도 없을 만큼 최선을 다한 것입니다. 본문 24절에“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하면서 예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해 천하보다 귀한 생명을 드리겠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주께로부터 받은 사명을 감당하며 있는 힘을 쏟아 부을 만큼 예수께 목숨을 걸고 사십니까? 주께 목숨을 드릴만큼 힘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하고 있습니까

어떤 사람이 요한 웨슬레에게 \"오늘밤 열두시에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당신은 무엇을 하겠습니까?\" 라고 물었더니 웨슬레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다른 날과 다름없이 설교 준비하고, 다른 날과 다름없이 심방할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날보다 30분 일찍 잠에 들 것입니다.\" 전에 하던 일을 계속할 것이며 그리고 억지로 끌려가는 것처럼 하지 않고 30분 먼저 잠들 것이란 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명에 충실한 자의 아름다운 마지막 모습입니다. 이것이 주 예수께로부터 사명을 받은 자들의 모습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가르치는 사명을 가지고 있는 지도자와 교사 여러분, 지금 내가 하는 일이 하나님이 주신 일이요, 하나님이 원하는 일이라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하실 것을 분명히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에 사람의 일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을 하든지 주 예수께로부터 받은 사명임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눈물과 소명과 헌신으로 최선을 다하며 사명을 감당해 나가는 상급받는 교사들과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5. 제목 : 이것이 옳으니라

본문 : 엡-06-01-4                                      

 

조선시대 숙종 때 개성근방에 이름난 효자가 살고 있었습니다. 늙어 거동을 못하시는 어머니를 정성스럽게 모시고 있었는데 임금님이 그 고을로 지나가시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이 지나가신다는 소식에 어머니가 행차를 보고 싶어하시자 어머니를 지게에 태우고서 나갔다가 임금의 눈에 띄게 되었습니다. 임금님은 그의 효성을 칭찬하시면서 송아지 한 마리와 쌀 열 가마를 하사하였습니다. 효도의 대가를 톡톡히 받은 것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이웃 마을의 소문난 불효자가 자기도 상을 받아야 되겠다고 벼르게 됩니다. 몇 달 후에 임금님이 지나가시자 병석에 누워 계신 어머니를 억지로 지게에 지고서 임금님 눈에 띄는 곳에 자리잡고 있었습니다. 임금이 지나가다 또 이것을 보았고 사연을 물었습니다. 그 때 원님이 저놈은 아주 못된 놈이라고 하면서 벌을 주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금님은 효자와 똑같이 소 한 마리와 쌀 열 가마를 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이 \"효도는 흉내내기도 어려운 것이다\" 라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부모를 공경하고 효도한다는 것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오늘 본문에도 가장 옳은 일은 자녀들이 주안에서 부모에게 효도하는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옳은 일인 부모를 공경하고 효성을 다하는 자들의 생명을 보호하시며 축복하여 주시겠노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옳으니라’란 말씀은 이것이 선하다는 말씀입니다. 이것이 인간다운 인간이 되는 길입니다. 이것이 우리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란 뜻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해첫째로 주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일입니다

미국의 20대 대통령 가필드의 취임식 날 있었던 일입니다. 모든 준비가 다 끝나고 귀빈들은 정면에 마련된 특별석에 대통령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되었는데도 대통령은 취임식장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잠시 후 가필드는 한 노파를 부축하며 식장에 들어왔습니다. 노파는 가필드의 어머니였습니다. 어머니가 취임식장에 안 가겠다고 하자, 가필드는 “어머니가 안 가시면, 나도 안가요.\" 하며 겨우 부축해서 취임식장에 모시고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취임식 연설에서 ”내가 이렇게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된 것은 어머니의 은혜입니다. 나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해서 오늘날 대통령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어머니의 기도와 눈물에 감사할 줄 아는 가필드는 모인 군중들로부터 환호와 갈채를 받았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순종이라는 말은 ‘숩 아구웨테\' 라고 하는 원어입니다. ‘슈포\' 란 말은 ‘밑으로\' 하는 말이고 ‘아쿠어\' 라는 말은 ‘듣는다\' 는 말입니다. 헬라 원문대로 보면은 ‘밑에서 듣는다\' 는 뜻입니다. 말씀하실 때 밑에서 들어야 그것이 순종입니다. 즉 겸손한 마음으로 그리고 이해하려고 하는 마음으로 듣고 그대로 행하는 것이 순종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주안에서 순종하라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은혜로 주신 부모님과의 관계를 신앙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하나님 앞에 감사하면서 순종하고 공경하라는 말씀입니다. 부모님 말씀에 순종하면 축복이 되고 성공이 되고 은혜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순종하는 것이 효도입니다.

유대 민족이 수세기 동안 나라를 잃고 방황했지만 우수한 민족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엄격한 가정 교육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교육에 대한 열심은 있지만 자녀에 대한 가정 교육이 부재입니다. 유대인들은 어디를 가든지 가정이 유대 민족이 되었고, 가정이 유대 국가가 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아버지는 자녀들에게 있어서 율법의 권위요 표준입니다. 부모님에게 절대 순종하는 정신이 유대 민족을 그토록 위대한 민족으로 이끌어 왔던 것입니다. 구약성서에는 부모님을 노엽게 하거나 부모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업신여기는 자들은 돌로 쳐죽이라고 했습니다. 이런 엄격한 교육이 유대 민족으로 하여금 위대한 민족이 되게 했던 것입니다. 어버이께 신앙적으로 순종함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축복 받는 길이요 옳은 일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부모를 공경하는 일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랑의 원리를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물이 아래로만 흐르는 것처럼, 사랑은 내리 사랑이지, 위로 사랑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내리 사랑했고, 부모님이 우리를 내리 사랑했지, 우리가 부모를 위로 사랑하는 것은 안됩니다. 부모님은 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공경의 대상입니다. 그러기에 본문에 \"네 부모를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했습니다.

사랑 대신에 공경해야 합니다. \'공경하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키베드\'인데, 이는 \'무겁다\'는 뜻입니다. 몸의 간처럼 귀히 여기어 깊이 존경하고 섬기라는 말입니다.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으로 족하지 말고 부모를 귀히 여기고 존중히 여기라는 뜻입니다. 순종이 외적인 행동을 강조하는 말이라면 공경은 내적인 태도를 강조하는 말입니다. 행동뿐만 아니라 마음으로 부모님을 존중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부모의 인격을 존중히 여기는 것입니다. 말세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부모를 거역하는 일의 성행이라고 했습니다. 딤후 3장 2절에 보면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라고 하였습니다.

솔로몬은 한 나라의 왕이라 할지라도 지극한 존경의 태도를 가지고 어머니를 섬기는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열왕기상 2장19절에 보면 ‘밧세바가 이에 아도니야를 위하여 말하려고 솔로몬 왕에게 이르니 왕이 일어나 영접하여 절한 후에 다시 위에 앉고 그 모친을 위하여 자리를 베풀게 하고 그 우편에 앉게 하는지라’. 이런 부모에 대한 애정의 표현과 부모를 향한 구체적인 섬김이 있을 때 진정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것입니다.

최근 어느 단체가 65세 이상 되신 부모님을 상대로 조사한 통계에 따르면,‘노인들이 자녀에게 가장하기 싫어하는 것\' 은 다음의 세 가지라고 합니다. 첫째, 아프다는 말을 하기 싫어합니다. 아파서 혼자 끙끙대는 한이 있어도 자식에게 아프다는 말은 절대로 하지 않습니다. 둘째, 외롭다는 말을 하기 싫어합니다. 과부든, 홀아비든 외로워도 외롭다는 말은 하지 않습니다. 셋째, 용돈 달라는 소리를 하기 싫어합니다. 공원에 가서 무료 급식을 먹고, 차비가 없어서 걸어다니는 한이 있어도 자식들에게 용돈 달라는 소리는 안 합니다. 한평생 자식들을 위해 돈을 썼으면서도 자식들에게 용돈 달라는 소리는 차마 못한다는 것입니다. 혹시 부모님을 모시고 사는 분들이 있으면, 이것을 잘 유념하셔서 미리 미리 챙기시기 바랍니다.

반면에 부모들이 가장 듣고 싶어하는 말은 다음과 같은 것들입니다. ‘어쩌면 그렇게 건강하세요. 백수는 걱정 없겠어요’,  ‘아버지 어머니를 닮아서 이렇게 머리가 좋은가 봐요’ , ‘다들 부모 덕 많이 본다고 그래요’ , ‘아버지 어머니 절반만 돼도 소원이 없겠어요’ , ‘저희들 키운다고 정말 고생 많으셨죠’ ,‘역시 어머니 음식 솜씨가 최고예요’, ‘아버지 어머니처럼만 살겠습니다’ , ‘역시 우리 아버지, 어머니니까 이 정도죠’, ‘어쩌면 그렇게 기억력이 좋으세요? 젊은 사람도 못 따라가요’, ‘모두 부모님 덕분이지요’ 여러분도 부모님께 이런 말씀들을 한번 해 보시기 바랍니다. 부모를 공경하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복을 받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런 옳은 일의 주인공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일입니다

텍사스의 한 사람이 아내와 네 자녀를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가서 30년 동안 오직 자기만을 위해 살았습니다. 결국 그 사람은 돈 한푼 없이 죽었는데, 자기의 시체를 고향 텍사스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텍사스에 살고 있던 자식들은 모두 그 소식을 듣고 분개했습니다. “그 사람이 우리와 무슨 상관 있어요? 그가 아버지로서 우리에게 해준 게 뭔데요? 그 사람 때문에 어머니와 우리 모두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데 왜 우리가 그 시체에 수고와 돈을 들여야 합니까?”. 그러나 신앙심이 깊은 큰아들은 아무 말 없이 동생들의 불평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캘리포니아로 가서 아버지의 시체를 운구해오기 위해 자기 트랙터와 농기계들을 저당 잡혔습니다. 그리고 장례를 치르고 난 후 동생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성경에는 네 부모를 공경하라고 씌어 있을 뿐, 어떤 부모라는 말은 없단다\".  옳습니다. 우리가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고종 황제의 밀사였던 미국인 헐버트는 \"이 세상에서 관습적인 경로 사상이 가장 완벽하게 된 나라는 조선\"이라고 했고, 미국 공사를 역임한 샌즈의 회고록에도 \"나의 노년을 위해 조선 땅에 다시 태어나고 싶다\"고 했으며, 최초의 선교 의사인 알렌도 \"노인과 망인 사이가 단절되지 않고 연결되어 이 세상에서 가장 죽는 것이 두렵지 않은 즐거운 노인 천국이 조선\"이라고 극찬하였습니다. 이렇게 이 지구상에서 가장 효성이 지극했던 우리나라의 효가 요즘은 무너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용돈을 주지 않는다고 폭행을 하며 죽이지 않나, 늙은 부모가 귀찮다고 여행 시켜준다고 해 놓고 가서 버리지 않나 불효한 일들이 최근에 많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분명히 해야할 것이 있다면, 부모 공경이야말로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라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20장 1-17절까지에 십계명이 나옵니다. 십계명을 보면 1-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대하여 지켜야할 명령을 기록하였으며, 5- 10계명까지는 사람에 대해서 지켜야 할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에 관한 계명 중 첫째가 \"네 부모를 공경하라\" 는 부모에 대한 계명입니다. 그리고 부모공경에 대한 대가는 하나님께서 준 땅에서 생명이 길 것이라고 약속하여 주셨습니다. 이것을 본문에서는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코미디언 이주일씨는 폐암으로 죽기 전에 병상에서 \"가족이 이렇게 소중한 존재인 줄 이제야 알았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족이 가장 소중한 존재인 줄 알고, 남은 여생 동안 가족에게 더욱 사랑과 관심을 주어야 합니다. 특별히 가족 가운데 부모님에게 잘해야 합니다. 부모님이 살면 얼마나 더 사시겠습니까? 내리 사랑이라고 자식사랑에만 열심을 내며 만족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이제부터 부모님을 자식보다 더 귀중히 여기며 공경하며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땅에서 잘되고 장수하는 길이며 옳은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어버이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집시다. 그 은덕을 기리며 공경하십시다. 순종합시다. 그리고 어버이께 효도함이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고 축복 받는 옳은 길임을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16. 제목 : 천국에서 큰 자

본문 : 마-18-01-6                                    

 

성서학자인 윌리암 바클레이는 \"우리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멀어질 수도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즉 신앙 년조와 신앙의 질이 같다고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처음 믿었던 마음이 훨씬 더 순수 할 수가 있습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하게 주님을 믿었던 마음이 훨씬 더 주님 앞에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 년조가 길어지고 직분이 점점 더 높아질수록 우리의 마음은 순수한 마음을 잃어버리고 점점 복잡해지고 생각하지 말아야 될 생각들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고 교회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그렇게 마음이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머리도 복잡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주님이 좋고 주님 앞에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도 기뻤습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된 감격이 우리 속에 언제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신앙의 년조가 길어지면서 서서히 우리의 마음은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머리가 조금씩 복잡해집니다. 그때부터 우리의 관심은 \'누가 교회에서 더 중요한가? 누가 더 영향력이 큰 가? 누가 더 똑똑한가?\' 에 두게 됩니다.

예수님을 삼 년이나 따라 다니며 제자훈련을 받았던 제자들도 역시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의 마음속에는 언제나 \"우리 가운데 누가 더 크냐?\" 라는 문제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누군가 더 사랑을 받으면 못 견뎌 합니다. 누가 좀더 예수님 가까이 앉으면 비위가 상해서 속이 불편해 집니다. 본문에도 제자들은 바로 이 문제를 가지고 예수님께 나아왔습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천국에서는 누가 크니이까?\" 제자들의 관심은 누가 더 크냐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도 과연 서열이 있는 것일까? 있다면 누가 과연 첫째가 될 것인가?\" 이것이 제자들의 주된 관심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뜻밖의 대답을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어린 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이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시는 큰 자는 과연 누구입니까?

첫째로 마음을 돌이키는 자입니다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여기에 \"돌이켜\"는 원어로 ‘스트라페테’ 인데 ‘스스로 돌이키다’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한낱 행동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한 마음의 변화를 말합니다. 즉 진정한 회개를 의미하는 말입니다. 예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처음으로 선포한 말씀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는 말씀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천국에 들어가는 제일 조건은 죄에서 돌이켜 회개하는 일이며, 돌이켜 회개하는 방법은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어린 아이 때는 비교적 순수하다가 어른이 되면서 사기를 치고 남을 해치는 각종 죄를 짓고 살기에 회개하여 어린 아이처럼 순수한 사람이 되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것은 순수한 모습으로 되돌아가는 일입니다. 순수한 어린 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처음 예수 믿을 때는 주님의 구원하신 은혜와 사랑에 감격하여 범사에 감사하며 늘 찬양하는 순수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여러 가지 욕심이 우리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 주님보다 세상의 일이 더 보이고 정욕이 눈에 보입니다. 그전처럼 순수한 열정과 헌신의 모습은 사라지고 형식적으로 주님을 섬기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순수함이 아니라 변질된 마음으로 서로 시기하고 분내며 원망하고 누가 더 높으며 더 큰가 다투며 살아갑니다. 이제 우리는 주님과 첫 사랑의 관계로 돌아가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만 내세우지 말고, 전통과 역사와 교리만 자랑하지 말고, 순수한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생이었던 니고데모는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람이 다시 모태에 들어가야 되는지의 미련한 대답을 하였습니다. 오늘 우리도 혹시 니고데모와 같이 어리석은 생각을 가지고 신앙생활 하는 것은 아닙니까? 어떻게 다시 거듭날 수 있는가? 거듭남의 어려움만을 이야기하면서 돌이키지 않고 있는 약음이 천국에 들어감을 훼방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본문에 예수님은 돌이키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강조하셨습니다. ‘결단코’ 란 표현은 절대로 허락하지 아니하겠다는 강한 의지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크냐의 문제에 관심을 가질 때 천국 시민의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에게 주신 말씀처럼 우리에게도 ‘돌이켜 어린 아이와 같이 순수한 사람이 되어 나를 좇아야 된다\' 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신앙으로 돌이키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가능합니다.

둘째로 자기를 낮추는 자입니다

성 크리소스톰은 중세에 유명한 대설교가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화를 끼치며 교회를 섬겼던 분입니다. 그는 오랫동안 사제가 없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 교구에 그곳에 살고 있는 한 농부를 교육시켜 사제로 세웠습니다. 그런데 자격도 없는 자를 잘못 세운 것이 아닌가 하는 염려가 생겨 주일 예배에 몰래 참석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예배에 참석하여 그 사제가 과연 어떻게 성경을 가르치며 자기 책임을 다하는가 살펴보던 중에 그의 눈에 눈물이 가득해짐을 느꼈습니다. 이제까지 이토록 간절히 기도 드리는 사제를 본적이 없었고, 그 메시지가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로 힘있는 설교를 들어본 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드디어 예배가 끝나자 크리소스톰은 나이도 적고 배운 것도 자기만 못하며 목회 경력도 어리지만 앞으로 가서 두 무릎을 꿇고 축복해 달라하여 그의 손을 자기의 머리에 얻고 축복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것이 어린아이 같은 겸손의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점을 많이 주시고 달란트를 주셨는데 그것은 교만하여 자랑하고, 남을 무시하고, 멸시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섬기라고 준 것이요, 그 장점과 달란트로 선한 일을 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본문을 통하여 ‘천국에서 누가 더 크냐’ 로 논쟁하는 제자들에게 그런 식의 교만은 천국에서 큰 인물이 되기는커녕 천국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 죄라고 교훈 하셨습니다. 그리고 어린아이를 가운데 세우시고,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방법을 말씀함이 아니라 천국 시민의 성품에 대한 말씀입니다. 어린아이의 겸손이 천국 시민의 성품이며, 천국에서 큰 자들이 가지는 성품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0장:20절 이하에서도 \"크고자 하는 자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종이 되어야한다\"고 천국에서 큰 자의 모습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천국의 리더십은 \"섬기는 리더십\"이라는 뜻입니다. 진정으로 겸손한 사람은 남을 무너뜨리지 않고 세워줍니다. 남에게 거침돌이 되지 않고 발판이 되어줍니다. 그러므로 천국에서 가장 큰 자는 자랑하고, 뽐내고, 큰소리치고, 교만한자가 아니라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겸손한 자들입니다.

셋째로 주의 이름으로 대하는 자입니다

보스턴에 애니라는 작은 소녀가 있었습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맹인이었습니다. 정신질환으로 정신병동에 입원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버려진 아이처럼 보였습니다. 부모조차 그들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나이든 자원봉사자 한 사람이 이 애니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따뜻한 사랑에 감동이 되었는지 6개월쯤 그를 돌보았을 때 마음의 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점점 병세가 좋아져서 퇴원했고 보스턴 파킨스 맹아학교에 들어가 6년동안 우등생으로 공부를 합니다. 한 신문사의 도움으로 개안수술을 받아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앤이 어느 날 신문에 보니까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에 시달리는 아이가 한 명 있는데 아이를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광고였습니다. 신문사의 도움으로 눈을 뜬 것도 감사하고 나이든 자원봉사자의 사랑도 고마워서 \'나보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야지\' 늘 생각하였는데 흔쾌히 자원했습니다. 그후 이 아이 곁에서 함께 먹고 자기를 48년, 바로 이 아이는 인류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긴 헬렌 켈러가 되였던 것입니다. 빅토리아 여왕이 헬렌 켈러 여사에게 영국 최고의 훈장을 수여하며 \"당신처럼 모든 불리한 조건을 가진 사람이 어떻게 이렇게 엄청난 업적을 이룰 수 있었습니까?\" \"오직 한 가지 앤 설리반 선생님 때문입니다.\"  3중고의 고통을 있는 그대로 받아준 앤 설리반 선생님 때문에 헬렌 켈러는 이 땅에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5절을 통하여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천국에서 큰 자가 되기를 원하면 연약한 자를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주의 이름으로 영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처럼 대하라는 말씀입니다. 바로 여기에 천국의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자식들은 부모를 대할 때 하나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대신한 존재가 어버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모는 자식을 천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천사처럼 대해야 합니다. 아내는 남편을 주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목사는 교인을 예수님처럼 섬겨야 합니다. 교인은 목사를 주님처럼 대해야 합니다. 이 비밀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에게 실망하고 상처를 줍니다.

여러분 야구를 좋아하십니까? 외야수들을 보십시오. 타자가 공을 쳤습니다. 공이 높이 날아갑니다. 뒤에 있던 외야수가 공을 잡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공을 잡다 때로는 넘어지기도 합니다. 무릎이 까지기도 합니다. 때로는 부상을 당하기도 하고 발목이 부러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외야수들은 공 하나를 잡기 위하여 다른 모든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넘어지면서도 공을 잡았다고 기뻐하며 관중들에게 공을 흔듭니다.

어린아이처럼 자기를 낮추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 소중하고 나의 다른 모든 것들은 소중하지 않다고 생각하기에 고통을 당해도 감사하고 욕을 먹어도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이 모습이 천국에서 가장 큰 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자존심이 허락하는데 까지만 참습니다. 자신을 낮춥니다. 내가 참을 수 있는 상황까지만 참아 줍니다. 왜 신앙생활이 어렵게 느껴집니까? 외야수처럼 자기를 던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우리는 넘어지기 싫어합니다. 체면이 구겨지기 원치 않습니다. 듣기 싫은 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면서 몸을 던져야 합니다. 주님 영광만 드러난다면 내가 낮아져도, 내가 손해를 보아도, 내가 억울해도 참을 수 있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이때 여러분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되는 놀라운 축복을 소유하게 되는 줄로 믿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유나이티드 칼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