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후서 강해

디모데 후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진리 보수

2장: 좋은 일군

3장: 고통하는 시대

4장: 전도자의 직무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서신으로 알려져 있다. 신약 성경을 편집한 초대 교회는, 아마도 가장 중요한 순서대로, 구원의 복음을 해설한 로마서를 맨 처음에 두었고, 디모데전서와 디모데후서와 디도서를 거의 끝부분에 두었다. 그것은 이 세 개의 서신이 일차적으로 일반 성도들에게보다 목회자들에게 주는 교훈들을 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유언과도 같은 서신이다. 이 편지에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그리고 후시대의 모든 목사들에게 앞으로 고통하는 시대가 올 것이니 고난을 각오하며 진리를 보수하고 전도자의 직무를 다하는 그리스도의 좋은 일군이 되라고 유언적으로 교훈한다.


1장: 진리 보수


1-2절, 문안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자기의 뜻이나 주위 사람들의 뜻으로 말미암아서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대로 당신의 원하시는 자들을 일군으로 부르시고 세우신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도 당신의 원하시는 자들을 불러 사도로 삼으셨다. 마가복음 3:13, 14,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부르시니 나아온지라. 이에 열 둘을 세우셨으니.\"


본문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라는 말씀은 복음의 중심적 내용을 드러낸다. 복음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약속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1:1-3,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2] 사랑하는 아들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바울은 디모데를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불렀다. 물론 이것은 육신적 의미가 아니었다. 바울은 독신으로 살았고 디모데에게 육신적 부모가 있었다(고전 7:7; 행 16:1). 그러나 디모데는 영적으로 바울에게 \'사랑하는 아들\'과 같았다. 육적인 관계보다 영적인 관계가 더 친밀하고 값지다. 바울은 그에게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있기를 기원한다.



3-5절, 디모데를 보기 원함


[3] 나의 밤낮 간구하는 가운데 쉬지 않고 너를 생각하여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섬겨 오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바울은 자신이 밤낮 기도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무엇보다 기도의 사람들이었다. 예수님 자신도 우리에게 많은 기도의 본을 보여 주셨다. 마가복음 1:35, \"새벽 오히려 미명에 예수께서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시더니.\" 누가복음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ꁹ도록[밤이 지나도록, 밤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성경은 우리에게 \'쉬지 말고 기도하라\'고 교훈한다(살전 5:17).


바울은 기도 중에 쉬지 않고 디모데를 생각하였고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바울이 기도할 때마다 쉬지 않고 그를 생각한 것을 보면 디모데는 바울에게 참으로 사랑스런 아들이었다.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한 복음의 일군이었다. 바울에겐 그와 같은 동역자가 또 없었다. 빌립보서 2:20-22,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바울은 \"청결한 양심으로 조상 적부터\" 하나님을 섬겨 왔다고 표현하였다. 그는 종종 이렇게 표현하였다. 사도행전 23:1, \"바울이 [유대인의]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또 그는 후에 로마 총독 벨릭스 앞에서도 말하기를, \"나는 저희가 이단이라 하는 도를 좇아 조상의 하나님을 섬기고 율법과 및 선지자들의 글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 이것을 인하여 나도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쓰노라\"고 하였다(행 24:14-16).


양심적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성도에게 기본적인 일이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양심의 자유를 주셨고 이 자유는 아무에게도 속박을 받지 않게 하셨다. 우리는 양심적으로 옳다고 판단하는 것을 행할 자유가 있고 양심적으로 옳지 않다고 판단하는 것을 행하지 않을 자유가 있다. 양심에 거슬려 행하는 것처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신앙은 양심적인 생각에서 성장한다. 비양심적인 위선은 가장 무서운 악이다.


[4] 네 눈물을 생각하여 너 보기를 원함은 내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함이니.


디모데는 눈물의 사람이었다. 그것이 어떤 의미를 가진 눈물인지 본문은 말하고 있지 않지만, 우리는 그것을 추측해 볼 수 있다. 성도에게 있는 참된 눈물은 구원의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감격의 눈물이요, 자신의 부족을 통회하는 눈물이요, 또한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고 구원할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 흘리는 눈물이다. 디모데에게는 이런 눈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우리에게도 이런 눈물이 있어야 하겠다.


바울은 이런 디모데를 보기 원하였다. \'원한다\'는 원어(에피포데오)는 \'간절히 원한다\'(desire earnestly, desire greatly)는 뜻이다. 바울은 디모데를 간절히 보고 싶어 했다. 그것은 세상적, 육신적 차원에서가 아니고 신앙적, 영적 차원에서 그러했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신앙적, 영적 차원에서 보고 싶고 대화하고 싶고 교제하고 싶은 사람이었다는 말이다. 우리에게는 그런 신앙의 친구가 있는가, 우리는 다른 교우에게 그런 신앙의 친구가 되었는가?


그가 디모데를 그렇게 간절히 보고 싶어했던 것은 그의 기쁨이 가득하게 하려 함이라고 그는 말한다. 보기 싫은 사람을 보면 기쁠 것이 없고 오히려 기분이 상할지도 모르지만, 보고 싶은 사람을 볼 때 그의 기쁨은 가득하게 될 것이다. 기쁨은 마음의 만족에서 나오며, 슬픔과 탄식은 마음의 불만족에서 나올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그리고 진실한 성도들에게 만족과 충만한 기쁨을 줄 수 있는 아름다운 신앙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자.


[5] 이는 네 속에 거짓이 없는 믿음을 생각함이라. 이 믿음은 먼저 네 외조모 로이스와 네 어머니 유니게 속에 있더니 네 속에도 있는 줄을 확신하노라.


바울이 이렇게 디모데를 간절히 보기 원한 것은 무엇보다 디모데 속에 있는 진실한 믿음을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거짓이 없는\'이라는 원어(안휘포크리토스)는 \'위선적이지 않은, 가장 되지 않은, 꾸민 것이 아닌, 진실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는 말은 세상에 \'거짓된 믿음, 위선적 믿음, 가짜 믿음\'도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것은 믿음처럼 보이지만 실상 믿음이 아닌 것, 믿는 체하지만 실상 믿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디모데는 그런 위선자가 아니었다. 그는 진실한 믿음을 가진 청년이었다. 오늘 시대에도 요구되는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을 가진 자들이다. 이 시대가 너무 거짓되고 혼란하기 때문에 우리는 진실하게 믿는 자를 찾아보기 간절히 원하는 것이다.


본문은 또한 디모데의 진실한 믿음이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을 통해 전달받은 것이었다. 그의 외조모 로이스와 그의 어머니 유니게 속에 바로 그런 진실한 믿음이 있었다. 이제 그 동일한 믿음이 아들 디모데에게도 있는 것이다. 경건한 자녀는 경건한 가정에서 나온다. 가정에서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특히 경건한 어머니들이 얼마나 요구되는 것인지! 불경건하고 음란하고 악한 세대에서 경건하고 거룩한 어머니들의 역할이 얼마나 큰 것인지!



오늘 본문에서 결론적으로 강조할 만한 사실은 믿음 안에서 바울과 디모데의 아름다운 관계이다. 디모데는 바울에게 사랑하는 아들이었고, 기도할 때마다 항상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간절히 보고 싶은 아들이요 후배요 동역자이었다. 왜 그러했는가? 그것은 돈이나 육신의 재능이나 세상 권력 때문이었는가? 그것은 세상적인 어떤 것 때문이 아니고 디모데에게 있었던 참된 눈물과 그의 마음 속에 있는 거짓이 없는 믿음 때문이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 이런 아름다운 믿음이 있기를 원하시며 오늘 교역자와 성도들간에 그리고 성도들 상호간에 이런 아름다운 인간 관계, 교제의 관계가 있기를 원하시는 줄 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날의 참된 디모데들이 되자.



6-11절,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6] 그러므로 내가 나의 안수함으로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기 위하여 너로 생각하게 하노니.


사도들의 안수는 특별한 은사를 동반했던 것 같다.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 교인들을 위해 기도하고 안수하였을 때도 성령이 저희에게 내려오셨었다. 사도행전 8:17, \"이제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은지라.\" 이와 같이, 바울 사도께서 디모데에게 안수했을 때 하나님의 은사가 디모데 속에 주어졌다. 이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가 안수받았던 때를 상기시키면서 그 때 받은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 은사는 복음의 일군으로서 필요한 하나님 사랑, 사명감, 열심, 충성심 등을 동반한 은사이었을 것이다.


[7]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본절에 \'마음\'이라고 번역된 원어(프뉴마)는 \'영\'이라는 말이다. 그것은 \'심령\'이라는 뜻을 가질 수 있다. \'근신하는\'이라는 원어(소프로니스모스)는 \'건전한 생각의\'(of a sound mind)라는 뜻이다. 디모데가 자기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하여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두려워하는 심령을 주지 않으셨고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심령을 주셨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의 일군들은 주의 일을 함에 있어서 두려워하지 말고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으로 심령이 불붙어 올라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의 일군들도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으로 심령이 불붙어 올라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하겠다.


[8]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


\'우리 주의 증거\'라는 말은 \'우리 주에 대한 증거\'나 \'우리 주를 증거함\'을 가리킨다.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원어는 \'복음을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뜻이다. \'함께\'라는 말은 \'바울과 함께\'를 가리킬 것이다. 바울은 지금 주를 위하여 옥에 갇힌 몸이다. 디모데도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오늘 우리는 주를 위하여 무엇을 하였는가? 우리는 주를 위하여 어떤 고난에 동참하였는가?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죽게 내어주셨는데 우리는 주를 위해 무엇을 하였는가?


디모데는 우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누구든지 이 음란하고 죄 많은 세대에서 나와 내 말을 부끄러워하면 인자도 아버지의 영광으로 거룩한 천사들과 함께 올 때에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셨다(막 8:38). 바울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로마서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를 부끄러워 말아야 한다.


디모데는 또한 주를 위해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했다. 성도가 주를 위해 핍박을 당하고 옥에 갇히는 것은 기뻐할 일이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5:11, 12). 그래서 본장 12절에서 바울은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한다\'고 말한다. 또 16절에 보면, 오네시보로의 가족들도 바울이 사슬에 매여 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주를 위한 고난을 부끄러워 말자.


성경 역사상 믿음의 선진들은 여러 가지 고난을 받았었다. 히브리서 11:36, 37,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 . .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또 주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아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막 10:29, 30).


디모데는 하나님께로부터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심령을 받았기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와 또 주를 위하여 옥에 갇힌 바울을 부끄러워 말고 복음을 위하여 그와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한다. \'하나님의 능력을 좇아\'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도우시며 특히 고난 중에서 그러하심을 보인다. 디모데 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 모두도 주의 복음과 주를 위한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이다.


[9]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부르심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 뜻과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9절부터 11절까지의 말씀은 주의 종들이 그것을 위해 고난도 받아야 할 그 복음의 근원, 그 복음의 확증, 그리고 그 복음의 도구를 증거한다. 본절은 우선 구원의 복음 혹은 복음이 제공하는 구원의 근원을 보인다. 죄인들의 구원과 하나님의 거룩한 부르심은 사람들의 의로운 행위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뜻과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서 나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쁘신 뜻대로 구원하실 자를 예정하신다. 로마서 9:18,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퍅케 하시느니라.\" 그의 기쁘신 뜻에 따라 하나님은 영원한 때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를 주셨다. 하나님의 이 예정과 은혜, 그리고 그 구원의 복음은 영원적이다.


[10]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저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본절은 구원의 복음의 확증을 보인다. 그것은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다. 하나님의 은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나타났으며,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로 확증되었다.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을 가리킨다. \'복음으로써\'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부활이 복음의 내용인 것을 보인다. 부활이야말로 인생에게 기쁜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었다면 우리는 우리의 미래의 부활을 확신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부활로 썩지 아니할 영원한 생명이 확증되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구원과 영생의 확증, 곧 복음의 확증이다.


[11] 내가 이 복음을 위하여 반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었노라.


본절은 마지막으로 복음의 도구를 보인다. 복음의 도구는 전도자들이며 처음 전도자들 가운데 바울은 대표적 예이었다. 전통 사본에는 \'교사\'라는 말이 \'이방인들의 교사\'라고 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이방인들을 위해 복음의 선포자와 해설자로 세우심을 입었다. 그가 쓴 13권의 서신들이 없었다면 신약 성경은 크게 부족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필요 적절한 인물로 사용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복음을 바르게 파악하기 위해 바울 서신, 특히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자세히 연구해야 한다. 시대가 정신적으로, 신앙 사상적으로 혼란할수록 성도들은 사도들의 교훈들을 자세히 살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주의 종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다시 불일듯하게 해야 할 것을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두려워하는 심령을 주지 않으셨고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심령을 주셨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의 심령과 우리 속에 주신 하나님의 은사도 하나님이 주신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 속에서 불붙기를 원한다.


본문은 또한 우리가 이런 심령을 가지고 하나님의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복음을 위하여 함께 고난을 받으라고 권한다.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고난의 길을 걸었다. 오늘날도 진실한 많은 성도들이 주를 위해, 주의 복음을 위해 고난을 감수하고 있다. 우리는 주를 위해 얼마만큼 고난을 받았으며 어떻게 고난을 각오하고 있는가?


본문은 마지막으로 구원의 복음이 어떤 복음인지 보인다. 그것은 하나님의 긍휼의 복음 곧 하나님의 영원하신 뜻과 예정에서 나온 복음이며,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확증된 복음이며, 바울을 통해 밝히 선포되고 해설된 복음이다. 특히, 바울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복음을 확증하였음을 증거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의 은혜와 소망을 가지며 복음을 확신하며 복음을 전파하며 복음을 위해 고난까지도 받을 수 있다. 이 사실과 이 믿음을 통해 오늘 우리도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는 자들이 되자.



12-18절, 복음 사역과 고난


[12] 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이를 인하여\'는 앞절에 말한 대로 \'복음을 위해 전파자와 사도와 교사로 세우심을 입은 일 때문에\'라는 뜻이다. 바울의 고난 곧 지금 그가 옥에 갇혀 당하는 고난은 복음 전도자로서 받는 고난이었다. 그가 전도자가 아니었다면 그런 고난을 받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이 악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고난의 길이다. 사탄은 영혼 구원의 일을 가장 미워한다. 악한 자들도 자신들의 악함이 드러나는 것을 가장 꺼려한다. 복음이 세상의 악을 정죄하기 때문에, 악한 세상은 복음 전파를 가장 싫어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전도자에게 고난이 있다는 것은 당연하다.


바울은 고난 중에 있었으나 그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가 자기의 의뢰한 자를 알고 저가 자기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지키실 수 있음을 확신하기 때문이라고 그는 표현한다. 바울이 의뢰한 자란 모든 성도들이 믿고 의지하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또 바울이 의탁한 것이란 자기의 영혼과 생명 그리고 그가 사명으로 받아 힘쓰는 복음 사역과 그가 세운 교회들일 것이다. \'그 날까지\'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혹은 하나님의 심판 때까지를 가리킬 것이다.


바울이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다. 그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서 현재의 고난은 장차 갚음을 받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공의롭게 모든 일을 판단하시고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에 현재의 부당한 고난을 부끄러워할 것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시고 아시고 판단하실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사랑이 풍성하시다. 그는 결코 자기 백성과 사랑하는 종들을 버리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자기 종들이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경제적으로 당하는 고통을 결코 모른 척하시거나 무관심하지 않으실 것이다. 그는 사랑하는 부모 이상이시고 사랑하는 친구 이상이시다. 그는 그들을 반드시 돌아보실 것이고 도우실 것이다.


하나님은 또한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는 자기의 참된 종들을 돌아보시고 도우실 수 있는 능력이 넉넉하시다. 그는 하고자 하시면 무슨 일이라도 하실 수 있는 전능자이시다. 그러므로 그가 어떤 하나님이신 줄을 아는 자라면 사실상 염려할 것도 없고 부끄러워 얼굴을 붉힐 필요도 없다. 오직 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고 그의 처분을 기다리면 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는 거짓말을 하지 않으신다. 그는 헛된 약속을 남발하는 엉터리 신이 아니시다. 그는 약속에 신실하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끝까지 사랑하시고 고난 중에서 반드시 돌아보실 것이다. 그는 모든 인생이 믿을 만한 하나님이시다. 인생은 다 거짓되지만 오직 하나님은 신실하시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아는 바울은 그의 당하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우리도 하나님을 알므로, 그의 공의와 사랑과 전능과 신실함을 알므로, 그를 위하여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수 있다.


[13]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


복음 전도자로서 받는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간증한 바울은 이제 디모데에게 그 복음을 간직하라고 명령한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 \'바른 말을 본받아\'라는 원어(휘포튀포신 휘기아이논톤 로곤)는 \'바른 말씀들의 윤곽을\'이라는 뜻이다. \'바른 말씀들의 윤곽\'은 바른 교리와 윤리의 윤곽 혹은 개요를 가리킬 것이다. \'지키라\'는 원어(에케)는 \'가지고 있으라, 붙들라\'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으로써\'라는 뜻일 것이다. 이것은 바른 말씀들의 윤곽을 지키는 방법을 보인다. 그 방법은 주님을 믿고 사랑함으로써이다. 복음 전도자는 그가 전하는 바른 말씀들의 윤곽을 굳게 붙잡아야 한다. 그래야 그는 말씀을 바르게 전파할 수 있다. 그는 고난 중에서 그 말씀을 포기하지 말고 굳게 간직해야 한다.


[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은 복음 전파의 일을 가리킬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디모데에게 그 직무를 부탁하셨다. 그것은 \'아름다운\' 직무이다. 성경은 복음 전도자의 발을 아름다운 발이라고 말씀한다(사 52:7). \'지키라\'는 원어(퓔락손)는 \'간직하라, 준행하라\'는 뜻이다. 디모데의 첫번째 사명은 바른 말씀들을 붙잡고 그 말씀들을 전파하는 직무를 행하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날 교회와 목사의 일차적 직무이다. 교회와 목사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성실하게 전파해야 한다.


그 사명의 수행은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다. 성령 곧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며 이것은 성도의 참으로 놀랍고도 놀라운 특권이다.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로 인하여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와 화목하시며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는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은 예수님 자신의 약속의 성취이다. 요한복음 14:16, 17,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성령께서는 우리가 거듭나서 예수를 믿을 때 우리 속에 들어오셨다. 에베소서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고린도전서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의 활동은 무엇인가? 성령께서는 그 명칭 그대로 거룩한 영이시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 속에서 거룩한 정신과 거룩한 마음으로 활동하신다. 또한 그는 \'보혜사\'(파라클레토스)이시다. 그 말은 \'위로자, 격려자\'라는 뜻이다. 특히 성령은 우리를 도우셔서 우리로 하나님의 말씀과 그가 주신 직무를 행하게 하신다(겔 36:27). 디모데의 복음 전도의 직무도 디모데 속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잘 수행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모데에게 그에게 맡겨진 아름다운 일을 성령으로 지키고 수행하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15]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나를 버린 이 일을 네가 아나니 그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느니라.


\'모든 사람\'은 문자 그대로 \'모든 사람\'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모든\'이라는 말은 때때로 대략적 의미로 사용된다. 아시아에 있는 많은 사람들, 아니 거의 모든 사람들이 바울을 반대했고 그를 버렸다. 디모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바울을 버린 대표적 인물 중에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있었다. 그들은 유명한 인물들이었을 것이다.


바울의 사역은 이와 같이 평탄하지 않았다. 또 바울 사도께서 곳곳에 복음을 전할 때 믿지 않고 그를 반대하는 자들도 많았다. 사도행전 28:23-25, \"저희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에 많이 오니 바울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강론하여 하나님 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더라. 그 말을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아니하는 사람도 있어 서로 맞지 아니하여.\" 한 두 사람이 바울을 버려도 인간적으로 괴로왔을 것인데, 다수의 사람들이 바울을 이해하지 못하고 바울의 반대편에 설 때 바울의 인간적 괴로움은 실로 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경험했던 바이었다. 요한복음 6:66-68, \"이러므로 제자 중에 많이 물러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 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계시매 우리가 뉘게로 가오리이까?\"


사람들이 바울을 버린 것은 그의 입장이 바르고 강직했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들은 항상 부드러운 말을 좋아하는 것 같다. 이것은 인간의 죄성이 만드는 성향이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철저히 믿고 따르기보다 적당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그들은 또한 악과 정면으로 싸우기보다 적절히 타협하고 절충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의와 죄, 진리와 비진리, 빛과 어두움 사이에는 타협과 절충이 있을 수 없고 오직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순종하고 충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를 대항하고 진노케 하는 자들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우리를 지지하든지 반대하든지 간에, 주의 참된 종들은 사람의 비위를 맞추려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바른 생각을 하고 바른 말을 하고 바른 행동을 해야 할 것이다.


구약 시대 에스라와 느헤미야의 때는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생활로부터 돌아온 후에도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고 현실과 적당히 타협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 에스라와 느헤미야는, 성경의 다른 진실한 종들과 같이, 타협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한 본을 보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모든 잘못된 점들을 고치는 대개혁을 단행하였다. 그러나 그 때는 비록 반대자들도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바른 교훈과 행동을 따라주었다.


에스라 10:11, \"이제 너희 열조의 하나님 앞에서 죄를 자복하고 그 뜻대로 행하여 이 땅 족속들과 이방 여인을 끊어버리라.\" 에스라 10장 16절 이하에는 이방 여인을 취한 자들의 명단이 공개되어 있다.


느헤미야 13:1, 3, \"그 날에 모세의 책을 낭독하여 백성에게 들렸는데 그 책에 기록하기를 암몬 사람과 모압 사람은 영영히 하나님의 회에 들어오지 못하리니[라] . . . 백성이 이 율법을 듣고 곧 섞인 무리를 이스라엘 가운데서 몰수히 분리케 하였느니라.\"


느헤미야 13:4-5, 8-9, \"이전에 우리 하나님의 전 골방을 맡은 제사장 엘리아십이 도비야와 연락이 있었으므로 도비야를 위하여 한 큰 방을 갖추었으니 . . . 내가 심히 근심하여 도비야의 세간을 그 방 밖으로 다 내어던지고 명하여 그 방을 정결케 하고 하나님의 전의 기명과 소제물과 유향을 다시 그리로 들여 놓았느니라.\" 우리는 오늘날도 이런 지도자들과 이런 부흥의 일이 교회 안에 일어나기를 소원한다.


[16] 원컨대 주께서 오네시보로의 집에 긍휼을 베푸시옵소서.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


바울에게는 고난만 있은 것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위로도 있었다. 그것은 오네시보로의 집을 통해 왔다.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들은 바울에게 하나님이 보내신 위로와 격려이었다. 우선, 그는 바울을 자주 유쾌케 하였다. 인간 바울은 고난 중에 자주 피곤하고 지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마다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바울을 기쁘게 하였고 그를 격려하였다.


또한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참으로 믿음이 있는 성도이었다. 세상 친구들은 사람이 부유하고 평안할 때는 많으나 그가 가난하고 어려울 때에는 대부분 그를 떠나간다. 세상 사람들은 이기적인 자들이 많다. 진짜 친구는 적다. 바울에게도 그러했던 것 같다. 그가 옥에 갇히게 되고 사형을 받게 될 가능성이 많아질 때 소수의 진정한 친구들과 동료들만이 그의 곁에 있게 되었을 것이다. 오네시보로는 그런 사람들 중의 하나이었다.


[17, 18]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 (원컨대 주께서 저로 하여금 그 날에 주의 긍휼을 얻게 하여 주옵소서.) 또 저가 에베소에서 얼마큼 나를 섬긴 것을 네가 잘 아느니라.


뿐만 아니라, 오네시보로는 로마에 있을 때에 바울을 부지런히 찾아 만났다. 아마도 지하 감옥에 갇혀 있었을 바울을 수소문하여 찾아온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오네시보로는 \'부지런히 찾아\' 마침내 바울을 만났다. 차가운 감옥 바닥에서 날마다 하늘의 주님만을 앙모하였을 바울에게 오네시보로의 방문은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마지막으로,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서도 바울을 많이 섬겼었다. 디모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얼마큼\'이라는 원어(호사)는 \'얼마나 많이\'라는 뜻이다. 아마 오네시보로는 에베소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사역하는 동안, 오네시보로는 바울을 여러 가지 일들에서, 여러 가지 방식으로 도왔고 섬겼다. 그것은 바울에게 있는 주의 이름 때문이었을 것이다. 주의 이름으로 소자(小子) 한 사람을 영접하는 자는 곧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라고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결론적으로, 우리 교회는 말세에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당하는 어떠한 고난도 부끄러워하지 말고 그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잡고 보수하고 그 말씀만을 전파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진리 보수--이것이 오늘 본문의 중요한 교훈이다.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씀들의 윤곽을 붙들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만 있다면 어떤 고난이 있더라도 교회를 버리거나 떠나는 자가 되지 말고 주의 참된 종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는 바울을 버린 자들, 부겔로와 허모게네가 되지 말고, 끝까지 오네시보로와 그의 가족들과 같은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2장: 좋은 일군


1-2절, 충성된 사람들


[1] 내 아들아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 장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복음 사역의 임무를 수행해야 하므로, 많은 사람이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갖지 못하고 있으므로, 진실한 일군들이 부족하므로\'라는 뜻을 가질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디모데는 더욱 굳게 서서 말씀 증거의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는 속죄와 의롭다 하심과 영생의 은혜이다. 그 은혜 속에서 강하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와 의(義)를 굳세게 의지하라, 그 은혜 안에서 죄악들을 버리고 마귀 권세를 담대히 물리치라, 세상을 크게 여기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을 가진다.


[2] 또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 저희가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으리라.


\'내게 들은 바\'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 즉 그의 탄생, 그의 기적들, 그의 십자가의 죽음, 그의 부활, 그의 승천 등에 관한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곧 복음의 주요 주제들이다. \'많은 증인 앞에서\'라는 말은 위의 사실들이 증인들에 의해 확증되었음을 보인다. 여기에 기독교의 독특한 성격이 있다. 기독교 진리는 다 사실들이다. 그것들은 증인들에 의하여 확증되었다. 그것들은 다 믿을 만한 것들이었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수님의 법적 부친인 요셉은 그의 특별한 탄생에 대한 산 증인이었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를 가만히 끊으려 하였다. 그것은 마리아가 자기와 결혼하기도 전에 아기를 배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가 평소 불량한 소녀가 아니었음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 때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났다. 그는 마리아가 성령으로 아기를 잉태하였다는 것과 그 아기가 자기 백성을 구원할 자라는 것을 증거하였다.


마리아 자신도 참된 증인이었다. 누구보다도 그는 자신이 잉태한 아기에 대해 참된 증거를 할 수 있었다. 그 아기는 요셉과의 관계에서 잉태된 아기가 아니었다. 그 아기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잉태된 아기는 더더욱 아니었다. 요셉과 약혼 관계이었으므로 그런 일은 큰 죄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자신의 몸에 잉태된 아기가 일찌기 자기에게 나타났던 가브리엘 천사의 말대로 하나님의 성령의 권능으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와 같이, 요셉과 마리아는 복음의 참된 증인들이었다.


예수님의 기적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예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변화시키셨다. 그를 통해 소경들이 눈을 떴고, 문둥병자들이 고침을 받았으며, 앉은뱅이들이 일어났고, 귀신 들린 자들이 고침을 받았다. 그는 심지어 죽은 자들을 살리셨다. 그는 또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셨다. 이 모든 기적들은 예수께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행하신 것들이었다. 거기에는 많은 증인들이 있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누가 이런 말들을 믿었겠는가? 만일 그것들이 사실이 아니었다면, 사람들은 즉각적으로 기독교의 거짓됨을 증명하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도 그러하다. 그의 부활을 확인한 자들은 한 두 명이 아니었고 또한 하루 이틀 확인한 것도 아니었다. 성경은 증거하기를, 500여 성도들이 그의 부활을 목격했고 40일 동안 그러하였다고 했다(행 1:3; 고전 15:6). 예수님에 관한 사실들은 다 증인들에 의해 증거된 것들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들에는 그것들을 증거할 증인들이 있었다.


기독교는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다.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들은 소설이나 신화가 아니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들이었다. 예수님은 꾸며진 인물이 아니시다. 만일 그가 기적을 행한 적이 없는데 행했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가장 악한 거짓말일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는 거짓말이 아니다. 성경은 거짓말하는 자는 영원한 지옥불에 던지울 것을 말씀했다(계 21:8).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많은 증인 앞에서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말한다. \'충성된 사람들\'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가? \'충성된\'이라는 원어(피스토스)는 \'믿음\'이라는 말(피스티스)과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 충성된 사람은 무엇보다 믿음이 있는 자이다. 믿음이 있되, 진실한 믿음, 계속적인 믿음, 시종일관한 믿음이 있는 자를 충성된 자라고 말할 것이다. 그는 변덕스럽거나 변태무쌍하지 않다. 그는 언제나 항상 자기 위치에 있어서 자기의 맡은 일을 충실하게 행하는 자이다. 그는 참으로 믿을 만한 자이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께 받은 복음 진리를 디모데에게 들려 주었었다. 이제 디모데는 많은 증인들 앞에서 바울에게 들은 그 복음 진리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해야 한다. 그래서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복음 진리가 후시대에 전달되어 가는 방식이다. 이것이 바른 교훈이 계승되는 방법이다. 이것이 진정한 제자 훈련이며 신학 교육이다. 교회는 이러한 계승의 방법을 통하여 하나님의 바른 말씀이 후대에 전달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여기에 충성된 사람들의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의 교회에는 복음 진리를 받고 배워 또 다른 사람들에게 가르칠 만한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오늘날도 이 복음 사역을 위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성경 말씀을 진실하게 믿고 계속적으로 시종일관하게 믿는 자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믿을 만한 사람들, 충성된 사람들이 필요하다.



말씀을 정리하자. 오늘 본문은 목사 된 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속에서 강하고, 많은 증인들을 통해 확증된 복음 진리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여 그들로 하여금 또 다른 사람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하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일반적인 목회와 더불어 목사가 힘써야 할 제자 훈련의 사명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바른 계승이 없다면, 다음 세대는 바른 말씀의 기근과 기갈을 면치 못할 것이다.


오늘 본문은 또한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충성된 사람이 될 것을 요청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진실하게, 계속적으로, 시종일관하게 믿는 자들이 되고 믿을 만한 자들, 충성된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잘 배우고 또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잘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3-13절,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


[3]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


전통 사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므로\'라는 말(운)이 있다. 이것은 1절과 3절에 나란히 나타난다. 1절에서 바울은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 안에서 강하고 내게 들은 바를 충성된 사람들에게 부탁하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바른 말씀의 지식이 전파되고 부흥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본절에서 그는 \'그러므로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고난을 받으라\'고 권면하였다. 그것은 바울의 고난의 현실을 생각할 때 디모데도 고난을 각오해야 하기 때문이다. 바울의 고전분투(苦戰奮鬪)를 기억하면서 디모데도 그런 각오를 가져야 한다.


바울은 본절에서 복음 사역자를 군인으로 비유하고 전도를 영적 전쟁으로 묘사한다. 마귀는 영혼들이 구원 받는 것을 가장 싫어하기 때문에 그 일을 방해하며 전도자를 핍박한다. 악한 자들은 빛을 미워하며 빛을 전하는 자들도 미워한다. 그러므로 전도는 이 세상에서 고난을 각오하며 수행해야 할 봉사이다.


[4] 군사로 다니는 자는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하나도 없나니 이는 군사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하려 함이라.


군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는다. 훈련이 있으면 언제나 참여해야 한다. 비상이 걸리면 언제나 출동할 준비를 해야 한다. 전쟁이 나면 언제나 출전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군인이 몸이 피곤하다거나 집안에 무슨 일이 있다고 이런 일들을 안할 수 없는 것이다. 군인은 군인으로 모집한 자를 기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군인의 본분이다. 오늘날로 말하자면, 군인은 그를 부른 국가를 위해 일하는 것이다. 그의 충성된 행위와 수고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은 평안히 생활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복음의 일군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인들이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들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들을 부르시고 세우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해야 한다. 물론 복음 사역자들이 자기 집을 내팽개쳐 두거나 자기 가족들에 대해 무관심해도 된다는 뜻은 아니다. 자기 집을 돌보는 것도 기본적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주의 종들은 무엇보다 주의 일이 첫째이다. 그들은 주의 군사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땅히 자기 생활에 얽매이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5] 경기하는 자가 법대로 경기하지 아니하면 면류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경기장에서 경기하는 선수들에 비교하였다. 그런데 경기하는 선수들은 자기 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모든 경기에는 규칙들이 있다. 예를 들어, 달리기 선수에게는 경기 트랙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있다. 또 축구 선수에게는 공을 가진 상대방 선수를 발이나 몸으로 쳐서는 안된다는 규칙이 있다. 아무리 훌륭한 선수라도 반칙을 몇 번 하면 경기장에서 퇴장하는 벌칙을 당한다. 경기의 규칙들은 잘 지키기 쉽지 않다. 그러나 그것들을 잘 지키지 않으면 승리하여 상을 받을 수 없다.


[6] 수고하는 농부가 곡식을 먼저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바울은 복음 사역자들을 또한 논과 밭에서 수고하는 농부들에 비교하였다. 농사는 부지런함과 땀 흘리는 수고가 없이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다. 땅을 일구어 고르게 하고 그 위에 씨를 뿌리고 적당하게 물을 공급해주고 때때로 잡초를 제거하고 병충해를 막아내고 마침내 잘 익은 곡식들을 추수하기까지 부지런하게 수고함과 뙤약볕에 많은 땀을 흘림이 없이는 결코 풍성한 수확을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농사의 수고는 어려운 일이지만, 농부가 수고했을 때 곡식을 먼저 거두는 것은 마땅하다.


[7] 내 말하는 것을 생각하라. 주께서 범사에 네게 총명을 주시리라.


이상의 내용들은 복음 사역을 설명하기 위한 비유들이다. 이 비유들은 복음의 일군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되어야 할 지를 말해준다. 그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것을 첫째로 생각해야 한다. 또한 그들은 자기 생각과 뜻대로 하지 말고 하나님께서 신구약 66권의 책에 말씀해주신 규칙대로 행동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부지런함과 많은 눈물과 땀을 흘려야 한다. 그 때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가 될 것이다.


[8] 나의 복음과 같이 다윗의 씨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


\'나의 복음\'이란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직접 계시로 받은 복음, 그래서 그가 전파해 왔고 지금도 전파하고 있는 복음을 가리킨다. 그 복음의 기본적 내용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씨로 오셨고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셨다는 사실들이 들어 있었다.


\'다윗의 씨로\'라는 말은 예수께서, 비록 육신적으로가 아니고 오직 법적으로이지만, 다윗의 자손이었던 요셉의 아들로 태어나셨음을 말한다(눅 3:23). 그것은 예수께서 구약 성경에 약속된 그 메시야이심을 의미했다. \'다윗의 씨로\'라는 말은 또한 예수께서 단지 하나님의 아들 곧 참된 신성을 가지신 분만이 아니고, 또한 참된 인성을 소유하셨음을 말한다. 그는 참으로 사람이시기 때문에 죽으실 수 있었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기억하라\'고 말한 것은 앞 절들에서 말한 비유들과 연관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경기하듯이 행하고 농부처럼 수고해야 한다. 이것은 한 마디로 복음 사역자들은 안이한 생각을 버리고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각오하며 일하라는 뜻이다. 물론 충성된 봉사의 결말은 주의 칭찬과 상급일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비교할 수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기억한다면, 우리가 어떻게 일해야 할 지를 알 것이다.


[9]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아니하니라.


바울은 예수님의 발자취를 따랐다. 그는 예수님을 따라 고난을 받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는 복음을 인하여 죄수와 같이 옥에 갇히며 쇠고랑에 매이는 자리에까지 갔다. 바울은 지금 부자유한 상태에 있다. 죄수의 신분으로 옥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큰 문제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죄인을 죄에서 자유케 하는 복음 곧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매어둘 수 있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도 매어둘 수 없었다. 오히려 그 말씀을 탄압했던 로마제국은 몇 백년이 안되어 기독교 앞에 굴복하였다. 아니, 그 동안에도 진실한 성도들은 카타콤이라고 불리우는 지하 동굴에서 그들의 신앙을 지켜 왔었다. 러시아와 중국과 이북이 기독교를 탄압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매어둘 수는 없었다. 하나님의 복음은 죄인들을 죄의 사슬에서 풀어주는 복음이며 아무도 그 자유의 복음을 묶어둘 수 없다.


[10] 그러므로 내가 택하신 자를 위하여 모든 것을 참음은 저희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려 함이로다.


바울은 고난 중에도 모든 것을 참았다. 그것은 누구를 위하여 그러했는가? 바울은 \'택하신 자를 위하여\'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여기에 선택의 진리가 언급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구원을 얻을 것이며 그들만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아버지게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라고 말씀하셨다(요 6:37).


바울은 택한 자들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을 영원한 영광과 함께 얻게 하기 위하여 모든 것을 참았다고 증거한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원\'이란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 이루셔서 누구든지 그를 믿기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죄인들은 누구든지 회개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게 된다.


\'영원한 영광과 함께\'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이 \'영원한 영광\'을 동반하는 구원임을 뜻한다. 구원은 영광스럽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은 빈약한 구원이 아니고, 완전하고 영광스러운 구원이다. 그것은 의와 선과 진실이 충만한, 가장 최선의 구원이다. 성경은 이렇게 구원 받은 자들이 거하게 될 세계를 \'의의 거하는 바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말씀했고(벧후 3:13), 또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씀했다(롬 8:18).


[11]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죽었으면\'이라는 말은 \'죽으면\'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신실하다\'는 말이다.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말은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믿을 만하며 참된 말씀이지만 특별히 다음에 말하는 것은 믿을 만하며 참된 말씀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면 또한 살 것이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으나 삼일만에 다시 사셨듯이,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면 반드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이것은 참되고 믿을 만한 말씀이다.


[12]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우리가 주를 부인하면 주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라.


우리가 참으면 또한 그와 함께 왕노릇할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의 고난을 참으신 후에 부활과 승천의 영광을 얻으셨다. 히브리서 12:2,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 모두도 복음을 위하여 받는 고난을 참으면 그의 영광에 참여할 것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주를 부인한다면 주님도 우리를 부인하실 것이다. 마태복음 10:32, 33,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부인하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주를 부인하는 자가 되지 말자.


[13]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


우리는 불신실하고 우리의 믿음은 보잘 것 없고 우리의 마음도 약하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신실하시다. 그는 언제나 믿을 만한 분이시다. 그는 결코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는 그의 약속의 말씀을 믿을 수 있고 굳게 믿어야 한다. 만일 우리가 복음 때문에 고난을 받아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고난을 잘 참고 견딘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와 함께 왕노릇하게 될 것이다.


오늘 교훈의 요지는, 복음 사역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들이 되어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군인들이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않듯이, 복음의 일군들은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주의 뜻을 생각하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경기자들이 규칙대로 경기하듯이 복음 사역자들은 성경 말씀의 규칙대로 일해야 하며, 농부들이 많이 수고하듯이 복음 사역자들은 많은 눈물의 수고가 있어야 한다.


복음 사역자들이 받는 고난의 결과는 무엇인가? 그것은 택한 자들의 구원이다. 그 구원은 영원하며 영광스럽다. 물론 복음 사역자들 자신의 구원은 두말 할 것도 없다. 주를 위하여 고난을 받고 심지어 죽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반드시 영광 가운데 다시 살아날 것이다. 이것은 참되고 믿을 만한 말씀이다. 그러므로 모든 복음 사역자들과 성도들은 고난을 각오하고 주의 일에 충성해야 하겠다.



14-19절,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


[14]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 말다툼을 하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엄히 명하라. 이는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함이니라.


\'너는 저희로 이 일을 기억하게 하여\'라는 말씀에서 \'저희\'는 앞에 2절에서 말한 \'충성된 사람들\' 곧 복음의 일군들을 가리킨 것 같다. \'이 일\'이라는 말은 이제까지 앞 부분에서 말한 일군들의 자세를 가리켰을 것이다. 즉,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서 고난을 각오하고 자기 생활에 얽매이지 말고 법대로 행하며 많은 수고와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약속을 대망하는 자세를 가리켰을 것이다. \'기억하게 하여\'라는 원어(휘포미므네스케, 현재 명령형)는 \'계속 기억시키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진리의 교훈은 한 번 듣고 말 것이 아니고 계속 기억해야 할 말씀이다.


디모데는 복음의 일군들에게 일군의 바른 자세에 대한 교훈을 늘 기억하면서 말다툼에 빠지지 말라고 하나님 앞에서, 주님 앞에서 엄히 명해야 했다. 말다툼은 예를 들면 용어 문제, 이름 문제, 명칭 문제를 가리킨다. 그것은 사소하고 지엽적인 문제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본질적 내용과 본질적 정신에 관한 것이다. 어떤 일에 대한 바른 입장과 태도가 중요하지, 용어나 이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일군들은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한다.


말다툼은 유익이 하나도 없고 도리어 듣는 자들을 망하게 한다. 복음의 일군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자라도록 해야 하는 자들인데, 말다툼은 전혀 그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말다툼은 도리어 듣는 자들에게 큰 싸움이라도 있는 것처럼 오해를 주어 그들로 시험에 빠지게 하고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약하게 하거나 파괴시킨다. 그것은 교회로 힘을 얻게 하는 대신에 힘을 잃게 하고 힘을 분열시키는 것이다. 그런 말다툼은 마귀가 기뻐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다툼을 하지 말아야 한다.


[15]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진리의 말씀\'은 1:13에 말씀한 \'바른 말\' 곧 건전하고 유익한 말씀을 가리키며, 2:2에 언급한 \'내게 들은 바\'이며, 2:8에 말한 \'나의 복음\'이며 2:9에 언급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것은 교회가 소유한 하나님의 진리, 곧 복음 진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말다툼의 말이나 내용과 다르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구원의 말씀이며 생명을 주는 말씀이다. 교회의 힘은 그 진리의 말씀, 그 일치된 사상 속에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종들은 그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해야 한다. \'옳게 분변한다\'는 원어(오르도투메오)는 \'왜곡함이 없이, 바르게, 진실하게 해설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바른 성경 해석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경 본문을 주관적으로 해석하거나 그 뜻을 근거 없이 추측하고 상상하거나 성경 다른 곳의 명백한 진리와 상충되게 해석하는 것과 반대된다. 그러므로 사람이 처음 구원을 받으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그것을 읽게 되지만, 점점 성경을 알게 될수록 이제는 성경 본문을 바르게 해석하는 문제가 중요하게 된다.


우리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해설하려면, 우선 성경 본문의 각 단어의 바른 뜻을 알아야 하며, 각 문장의 뜻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며, 또 문장과 문장 간의 앞뒤 문맥을 바르게 이해해야 한다. 또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성경 가운데 어려운 부분들은 분명한 다른 부분들에 비추어 해석되어야 한다. 모든 성도는 성경을 읽고 들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바르게 해석해야 하며, 모든 복음 사역자들은 더욱 그러해야 한다.


디모데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설함으로써 이제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은 자기 임무를 다 하는 일군이다. 일군이 자기 임무를 다하지 못하면 부끄러움을 당하게 되나, 자기 임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일군은 결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인정된\'이라는 원어(도키몬)는 \'시험된, 증명된, 확인된\'이라는 뜻을 가진다. 복음 사역자는 설교할 때나 말씀을 가르칠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에게서 그가 성경을 바르게 해석하고 있다는 인정을 받아야 한다.


\'힘쓰라\'는 말은 바른 말씀의 봉사자가 되는데 인간편에서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인다. 이 말씀은 일차적으로 목사들에게 주는 명령이다. 목사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진리의 말씀을 바르게 해석하고 해설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믿은 지 오래되어 다른 이들과 어린 성도들을 가르치고 권면해야 할 위치에 있는 모든 성도들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는 다 진리의 말씀을 옳게 해석하고 해설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16]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라. 저희는 경건치 아니함에 점점 나아가나니.


원문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데)이 있다. 이것은 앞 절과의 대조를 보인다. \'망령된\'이라는 원어(베벨로스)는 \'속된, 종교적이지 않은, 거룩하지 않은, 세상적인\'이라는 뜻이다. \'헛된 말\'이라는 원어(케노포니아)는 \'헛된 지꺼림, 헛된 논쟁, 헛된 변론\'이라는 뜻이다. 이 세상엔 그리고 때때로 교회 안에도 망령되고 헛된 말들이 많이 있다. 예를 들면, 불경건하고 불신앙적인 말들, 거짓되고 불결한 말들, 중요한 의미가 없는 헛된 논쟁들과 변론들이 그것이다.


\'버린다\'는 원어(페리이스테미)는 \'떨어져 있다, 끊다. 피한다\'는 뜻이다. 주의 종들은 진리의 말씀은 보수하고 바르게 해석해야 하지만, 반면에 속되고 헛된 말들, 불경건하고 무의미한 변론들과 논쟁들은 피하고 끊어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점점 더 경건치 아니함에 나아가게 하기 때문이다. 진리의 말씀은 경건과 믿음에 유익한 말씀이지만, 헛된 말들은 점점 더 불경건과 불신앙에로 나아가게 할 뿐이다.


[17] 저희 말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은데 그 중에 후메내오와 빌레도가 있느니라.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 감\'과 같다. \'독한 창질\'이라는 원어(강가이나)는 몸의 한 부분이 썩어 다른 부분들까지 썩게 하고 마침내 뼈들까지 썩게 하는 무서운 병을 가리킨다고 한다. (영어 성경은 canker 혹은 gangrene이라고 번역했다.) 그것은 오늘날의 암과 비슷한 병이다.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 그리고 이단들은 바로 이러한 무서운 병과 같다. 그것을 조기에 발견하여 조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몸을 버리게 된다. 교회가 이단에 대하여 진지하게 대처하지 않으면 마침내 온 교회가 부패하고 속화될 것이다. 바울은 이단자들의 이름을 언급하였다. 후메내오와 빌레도. 오늘날도 교회를 부패시키는 이단자들의 이름을 분명히 들어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로 하여금 조심하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18]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


바울은 덧붙여서 저 이단자들이 왜 잘못인지를 말한다. 그것은 말다툼과 같은 지엽적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진리에 관한 문제이었다. 저들은 진리에 관하여 그릇되었다. 구체적으로, 그들은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고 말하였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백한 진리를 왜곡시키는 오류이다. 만일 그들의 말이 옳다면, 우리가 장차 부활할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은 헛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과연 어떤 이들은 그들의 말에 영향을 받았고 그래서 부활에 대한 그들의 믿음이 허물어졌다.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자들도 이와 비슷하게 성경 진리를 부정하는 이단자들이다. 예를 들어, 신정통주의의 시조인 유명한 신학자 칼 바르트는 말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사건이 역사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 아무런 증거도 없고, 어떤 증거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는 것이 명백하다. . . . 실제로 성경 역사에 결정적 요소들인 창조 이야기와 및 다른 많은 이야기들과 공통적으로, 예수의 부활 역사도 \'신화\'(saga) 혹은 \'전설\'(legend)로 간주되고 묘사되어야 한다는 것을 반대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확실히 역사로 생각될 수 있지만, 부활은 그렇지 않다\"고 하였다(교회 교의학, 4권, 1부, 335, 336쪽).


불트만 학파의 시조인 독일의 신학자 루돌프 불트만도 말하기를, \"(그것에 대해서) 바울이 여전히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빈 무덤의 이야기들은 신화들이다\"고 했고(신약 신학, 1권, 45쪽), 판넨베르트 학파의 시조인 신학자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도 말하기를, \"복음서들에 보도된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나타나심들은 바울에 의해 언급되지 않았으며, 그것들은 강하게 전설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속에서 그 자체의 역사적 알맹이를 거의 찾을 수 없다\"고 하였다(예수--신인[神人], 89쪽).


유명한 미국의 사회 윤리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몸의 부활의 개념은 물론 문자적으로 참될 수 없다\"고 말했고(비극을 너머서, 290쪽), 그는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하여 말하기를, \"기독교의 교리 중에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소망보다 더 속임과 착각에로 인도한 교리는 없다\"고 했다(같은 책, 21쪽).


바르트, 불트만, 판넨베르트, 니이버 같은 이런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오늘날의 후메내오와 빌레도이다. 그러나 세계의 많은 대교단들과 우리 나라의 몇 몇 대교단들이 이런 이단적 사상들을 배격하지 않고 용납하였고, 그래서 오늘날 세계의 다수의 개신 교회들은 신학적으로 변질되고 부패되어 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큰 죄요 교회의 불성실이다.


[19]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으니 인침이 있어 일렀으되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 하며 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 하였느니라.


이 세상에는 이와 같이 불경건하고 헛된 말들 그리고 이단들이 있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진리의 말씀의 터 곧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과 교리들을 말한다. 히브리서 6:1, 2,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께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지니라.\" 여기에 열거한 진리들은 성경의 기본적 진리들의 몇 가지 예들이며 이런 진리들의 터는 다시 닦여져서는 안되는 터이다. 이단들은 성경의 근본적 진리들을 부정하고 왜곡시키지만, 하나님의 진리의 터, 바른 교리 체계의 터는 견고히 확립되어 있다. 참된 교회는 이 진리의 터 위에 세워져 있다.


뿐만 아니라, 이 터 위에는 두 가지 내용의 인침이 있다. 하나는, 주께서 자기 백성을 아신다는 사실이다. \'자기 백성\'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을 가리킨다. 마태복음 1:21, \"[천사가 마리아의 남편 요셉에게 말하기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요한복음 6:39,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은 확실하여 그들은 다 믿을 것이고 바른 믿음에 굳게 설 것이며 마침내 다 영광스런 구원에 이를 것이다.


인침의 내용 중 또 하나는,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마다 불의에서 떠날지어다는 말씀이다. 이것도 명백한 진리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진심으로 부르는 모든 참된 성도들은 불의에서 떠나야 한다. 불의에서 떠나지 않는 자들은 참된 성도의 표를 가지지 못한 자이다. 그들이 진정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불의에서 떠날 것이다. 무엇이 불의인가? 그것은 도덕적 악 뿐만 아니라, 또한 종교적 비진리와 이단을 포함한다. 그 둘이 다 불의이다. 진리의 말씀과 도덕적 선이 옳은 길이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들은 진리의 말씀을 붙들고 도덕적 선을 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14절부터 19절까지의 본문은 진리의 말씀과 헛된 말이 서로 다른 두 길임을 잘 보이고 있다. 진리의 말씀은 생명과 경건에 이르게 하는 유익한 말씀인 반면에, 말다툼이나 속되고 헛된 말들은 \'독한 창질의 썩어져감\'과 같아 결국 사람을 멸망에 이르게 한다. 이 두 길은 완연히 다르다. 모든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어느 길을 택하고 어느 길로 가야 할 지는 너무 분명하다. 우리는 말다툼을 하지 말며 망령되고 헛된 말을 버리고, 오직 진리의 말씀을 옳게 파악하고 해석하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견고한 터는 섰다. 하나님의 모든 택한 백성들은 불의를 떠나야 하며 떠날 것이다. 그들은 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에 굳게 설 것이다. 우리는 그런 자들이 되자.



20-26절, 귀히 쓰는 그릇


[20] 큰 집에는 금과 은의 그릇이 있을 뿐 아니요 나무와 질그릇도 있어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나니.


부잣집에는 금그릇과 은그릇도 있고 나무그릇과 질그릇도 있어서 귀히 쓰는 것도 있고 천히 쓰는 것도 있다. 주인 밥상에 놓이는 밥그릇이나 국그릇은 좋은 그릇일 것이다. 아니, 귀한 손님이 오면 사용하려고 잘 보관해 놓은 더 좋은 그릇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반면에 빨래통이나 쓰레기통, 오물통 등으로 쓰이는 그릇도 있을 것이다.


[21]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함이 되리라.


\'이런 것\'은 앞에서 말한 후메내오와 빌레도의 말과 같은 불신앙적인 이단 사설들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서 귀히 쓰는 그릇이 되려면 무엇보다 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모든 이단 사설들에 조금이라도 물들지 않고 바른 신앙 사상, 바른 교리 사상을 가져야 주님의 일을 바르게 할 수 있다. 주께서 귀히 쓰시는 종은 그의 바른 말씀, 순수한 말씀을 가진 종이다. 그러한 자는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에 예비된 그릇이 될 것이다.


[22] 또한 네가 청년의 정욕을 피하고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좇으라.


주의 종은 또한 윤리적으로도 깨끗해야 한다. 젊은 교역자들은 무엇보다 청년의 정욕을 피해야 한다. 음란의 죄는 매우 치명적인 죄이기 때문이다. 정욕의 시험은 피하는 것이 최선의 길이다. 남녀 관계에서 오는 시험은 가까이 안하는 것이 가장 좋은 대책이다. 성경에서 요셉은 그것에 대한 좋은 예이다.


창세기 39:10, 12,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 . . 그 여인이 그 옷을 잡고 가로되 나와 동침하자. 요셉이 자기 옷을 그 손에 버리고 도망하여 나가매.\"


비록 사람은 요셉의 진실을 알아주지 않았고 그를 감옥에 갇히게 하였지만, 하나님은 그의 진실과 순결을 아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범죄치 않으려 애쓴 경건한 요셉과 함께 하셨고 그와 그의 하는 일에 복을 주셨다.


또한 \'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부르는 자들과 함께\'라는 말씀은 참 교회의 모습을 보인다. \'깨끗한 마음\'은 \'순수한 마음\'이라는 뜻이다. 무엇이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인가? 그것은 모든 죄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을 진실하게 믿는 마음이다. 세상적 동기를 가진 마음이 아니고,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마음, 모든 미움을 버리고 서로 사랑하는 마음, 자신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며 또한 다른 이의 믿음의 성장을 위하는 마음이다. 이런 순수한 마음으로 주를 부르는 자들이 모인 곳이 참된 교회이다.


이런 마음으로 주의 이름을 부르면서 모여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쓰라고 본문은 말한다. 의는 모든 죄와 불의와 악에 반대되는 말이다. 의는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행위를 말한다. 의는 성경적 행위이다. 그것은 세상 표준이나 세상 사고방식에 따른 행위와 다르다. 우리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기만을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믿음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모든 불신앙과 의심을 다 버리고 믿는 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참된 믿음은 성경말씀을 통해서 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한다.


또 우리는 사랑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요 13:34). 사랑은 모든 윤리적 선을 포함하는 가장 고상한 덕이며 우리가 영원히 간직해야 할 성품이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 사랑할 것이다.


또 우리는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화평은 사랑의 증거이다. 우리 속엔 싸움의 씨앗이 되는 미움이나 교만이 없어야 한다. 우리의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해야 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용서하려 해야 한다.


주의 이름을 순수하게 부르는 모든 성도들과 종들은 다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특히 주께서 귀히 쓰는 그릇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할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하고 온전해야 한다. 주께서는 이런 그릇들을 크게 들어 사용하실 것이다.


[23]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을 버리라. 이에서 다툼이 나는 줄 앎이라.


주의 종들이 가지기를 힘써야 할 것들이 있고 반대로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은 버려야 한다. 왜냐하면 거기에서 다툼이 나기 때문이다. 어리석고 무식한 변론이란 용어 문제, 명칭 문제로 다투는 말다툼이나 불신앙적, 비성경적 변론들을 말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어리석은 일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본절은 주의 종에게 필요한 덕목으로 온유하고 다투지 않는 성품을 강조하고 있다. 과연 이런 성품은 지도자에게 필요한 성품이다. 지도자가 이런 성품이 없고 사사건건 사람들과 다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스라엘의 훌륭한 지도자 모세는 매우 온유한 자이었다. 민수기 12:3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주의 종들은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는 자이어야 한다. 자녀 교육에서와 비슷하게, 영혼들을 양육하는 일은 많은 고통과 눈물과 인내를 요구한다.


[25]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할지니 혹 하나님이 저희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징계한다\'는 말은 \'교훈한다, 교정한다\'는 뜻을 포함한다. 주의 종들은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저들에게 혹시 회개함을 주셔서 진리를 알게 하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이다.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하나님이 저들을 긍휼히 여기셔서 돌아오게 하신다면 저들도 회개하여 복음의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26] 저희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좇게 하실까 함이라.


다시 번역하면, \"마귀에게 사로잡혀 그 뜻을 따랐던 저희로 깨어 그 올무에서 벗어나게 하실까 함이라.\" 에베소서 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거역하는 자들은 마귀에게 포로가 되어 그가 시키는 대로 행하는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긍휼을 베푸시면 그들이 잠에서 깨듯이, 술취함에서 깨듯이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게 될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결론적으로, 20절로 26절까지는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일군이 힘써야 할 몇 가지 점들을 강조한다. 첫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깨끗해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간직하고 오직 그 말씀만을 전파해야 한다. 둘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윤리적으로, 인격적으로도 깨끗하고 온전해야 한다. 그들은 육신의 정욕을 피하고 의와 믿음과 사랑과 화평을 가지기를 힘써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의 종들은 특히 다투지 말고 온유함으로 가르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거역하는 자가 있을지라도 그들을 온유함으로 교훈하고 교정하고 징계해야 한다. 바른 사상, 바른 인격, 온유한 성품--이것은 하나님께서 귀히 쓰시는 종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이며 힘써야 할 목표이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도 영적 성장의 목표가 된다.




3장: 고통하는 시대


1-9절, 고통하는 시대


[1] 네가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네가 이것을 알라\'고 교훈하였다. 주의 종들은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는 이 예언의 말씀을 알아야 한다. 주의 종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도 이 사실을 알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사실을 모르고 있으면, 그런 때가 닥칠 때 우리는 낙심하거나 당황하게 될 것이다. 혹은 시대의 풍조와 유행에 역행하지 못하고 우리도 거기에 휩쓸려 변질되고 타락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이 예언의 말씀을 잘 알아 두어야 한다.


우리가 알아야 할 바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를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것은 말세의 한 징조에 대한 예언이다. \'고통하는\'이라는 원어(칼레포스)는 \'사납다, 다루기 어렵다, 위험하다\'는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고통하는 때란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다루기 어려운 시대, 위험한 시대를 가리킨다. \'때\'라는 원어(카이로이)는 \'때들, 시대들\'이라는 뜻으로서 이런 위험한 때, 어려운 때가 한 번만 있는 것이 아니고 종종 있을 것을 암시한다. 신앙적, 도덕적 각성과 부흥의 때가 있고 신앙적, 도덕적 침체와 방황의 때가 있다.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있었고 또 있을 것이다.


[2]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교만하며 훼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치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와서, 2절 이하의 말씀이 앞절에서 \'어려운 때\'라고 바울이 표현한 이유를 보인다. 2절 이하에 19가지의 내용이 나온다. 이것들은 다 말세에 올 어려운 때들을 묘사한다. 이 때들은 주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영적으로, 신앙적으로 싸워나가기에 매우 어렵고 위험한 때들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시대가 올 것, 그것도 종종 올 것을 미리 알고 각오하고 거기에 대처하여야 한다. 다가올 그 시대의 형편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할 것이다. 이기심은 아마 모든 인간의 공통적 죄악성의 본질적 요소일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양심과 사회 여론 때문에 이기적 행위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이웃을 위해 무엇인가 선을 행하는 자가 되려고 한다. 이방 종교들도 선행을 가르치고 있다. 세상에는 이웃을 위해 사는 도덕적 인물들이 많이 있다.


그러나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할 것이다. 사람들은 다른 이들이 추위에 떨든지 굶어 죽어가든지 관심치 않고 자신만을 위해서 살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일을 성실히 하는 것이 선이기는 하지만, 자기만을 위해 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한 삶이 아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돈도 시간도 아끼지 않지만, 이웃을 위해서는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결코 선한 사람이 아니다. 에스겔 16:49, 50에 보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유황불로 멸망 당했던 소돔성의 죄악은 첫째 교만함, 둘째 식물이 풍족했으나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않았음, 셋째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하나님 앞에서 행하였음이라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셨다.


둘째로,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이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곧 탐심이다. 이것은 인간성의 뿌리 깊은 죄악이다. 디모데전서 6:10은, 돈을 사랑함이 모든 악의 뿌리라고 말씀했다. 그러나 말세에 고통하는 때에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이다. 돈 사랑, 그것이 그 시대의 특성이 될 것이다. 돈이면 안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을 사랑할 것이다. 돈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자리에 앉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하나님처럼 숭배할 것이다. 사람들은 신앙도, 도덕성도 돈보다, 즉 물질의 풍성함, 경제의 윤택함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는 어떤 부지런함과 수고도 아끼지 않으나, 신앙과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는 단 몇 시간도 성실치 않을 것이다.


셋째로, 사람들은 자긍할 것이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을 감추고 다른 사람들 앞에 나서려 하지 않고 자신의 선행이나 업적도 드러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겸손치 않은 자는 자긍하며 자기를 자랑하는 자가 될 것이다. 말세에 임할 고통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각각 자기를 자랑하고 선전하고 자기를 내세울 것이다.


넷째로, 사람들은 교만할 것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의 부족한 점을 깨닫고 자기를 그렇게 대단한 인물로 생각지 않는다. 그러나 교만한 자는 자신의 결점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자신을 사실보다 더 크게 여긴다. 그는 자기 자신을 대단한 인물이라고 착각한다. 이런 자들은 진실한 자들이 대하기 어려운 자들이다.


다섯째로, 사람들은 훼방할 것이다. 훼방하는 것은 남을 욕하고 비방하는 것을 말한다. 선한 사람은 가능한 한 남의 허물을 덮어주고 남의 약점에 대해 침묵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악한 사람은 남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내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좋아하며, 심지어 남에게 없는 약점까지도 만들어 내어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고 비방하는 자가 될 것이다. 장차 다가올 어려운 시대에는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여섯째로, 사람들은 부모를 거역할 것이다. 부모를 공경하고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명령하신 인간의 기본적 의무이다. 그러나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은 자기를 낳으신 부모를 멸시하고 거역한다. 말세에 고통하는 시대에는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일곱째로, 사람들은 감사치 않을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사는 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인생이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그러나 무지하고 불경건한 인생들은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하지 않는다. 그 외에도, 우리는 부모님께 감사해야 하고 우리에게 혜택을 준 우리 주위 사람들에게 감사할 줄 알아야 한다. 특히 나라가 어려울 때에 책임을 서로에게 전가시키지만 말고 우리 모두가 자신의 부족과 불성실을 반성해야 한다.


오늘의 재난은 어느 한 두 사람의 실수 때문에 온 것이 아니고 우리 국민 전체의 총체적 비진실과 불성실의 산물이다. 대기업들의 불성실한 경영, 정부의 불성실한 감독, 그리고 온 나라 어느 한 부분도 예외 없이 만연한 부정과 부패가 오늘의 위기의 근본 원인이다. 이것이 온 국민이 반성해야 할 점이다.


예수께서는 참새 한 마리도 하나님의 뜻이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셨다. 오늘의 이 경제 위기는 하나님이 내리신 징벌이다. 그러나 제2의 6.25전쟁과 같은 재난보다는 아직 작은 징벌이다. 그러므로 이제 정치인들은 돈으로가 아니고 깨끗하고 진실한 도덕성으로 하는 정치를 하려 해야 한다. 기업인들은 진실하고 성실한 기업 경영을 해야 한다. 주부들은 사치와 낭비를 버리고 근검 절약하며 저축하는 생활을 힘써야 한다. 무엇보다 사회의 각계각층에서 부정부패를 없애고 진실히 행하고 각자 자기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


여덟째로,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인데, 그 때 사람들은 거룩하지 않을 것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죄로부터 떠나고 불경건한 세속적인 삶으로부터 떠나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깨끗하고 정결함을 말한다. 그러나 고통하는 때가 오면 사람들은 죄를 미워하거나 떠나려 하지 않고 죄악과 불경건에 뒤범벅이 될 것이다. 사람들은 사상적으로, 지식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깨끗하지 않을 것이다.


[3]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참소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 아니하며.


아홉째로, 그 때에 사람들은 무정할 것이다. 무정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인정과 사랑이 없음을 말한다. 사람들은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을 생각함이 없을 것이다.


열째로, 사람들은 원통함을 풀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상대방의 잘못을 용서하려 하지 않고 서로 화해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의 마음에는 악한 보복심이 그대로 있다.


열한째로, 사람들은 참소할 것이다. 참소하는 것은 훼방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것은 거짓으로 남을 비난하는 것이다. 악한 사람들은 자기를 반대하는 자나 자기에게 손해를 줄 만한 경쟁자라고 생각되는 자를 비난한다. 그것은 진리의 판단에서 나온 비평이 아니고, 순전히 이기적 동기에서 하는 비난이다. 그것은 악한 비난이다.


열두째로, 사람들은 절제하지 않을 것이다. 절제는 여러 방면에 관계된다. 사람에게는 술의 절제 뿐만 아니라, 또한 말의 절제, 감정의 절제, 오락의 절제 등도 필요하다.


열 셋째로, 사람들은 사나울 것이다. 이것은 온유하고 양순한 성품과 정반대 되는 것이다. 이것은 노아 홍수 심판 직전에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다(창 6:11, 13). 사람들은 말과 행동으로 서로를 죽일 것이다. 경건한 사람이 사람들을 무서워할 시대이다.


열넷째로, 사람들은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양심을 잃어버리는 시대의 모습이다. 선을 싫어하는 시대는 상상하기도 싫다.


[4] 배반하여 팔며 조급하며 자고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열다섯째로, 사람들은 배반하여 팔 것이다. 그것은 의리를 깨뜨리고 배신하고 반역하는 것을 말한다. 불의에 대해 반대하는 것은 의롭고 선한 일이다. 그러나 선하고 의로운 선생을 배신하여 판 가룟 유다처럼, 선하고 의로운 친구나 스승을 배반하여 파는 행위는 큰 악이다.


열여섯째로, 사람들은 조급할 것이다. 지혜 있는 사람은 신중히 생각하고 신중히 판단하며 신중히 말하고 신중히 행동한다. 그러나 지혜 없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판단하고 무슨 말이나 다 믿고 아무렇게나 말을 내뱉고 아무렇게나 행동한다. 고통하는 시대에 사람들이 그러할 것이다.


열일곱째로, 사람들은 자고(自高)할 것이다. 이것은 자긍함과 교만과 비슷하다. 자고함 혹은 높은 마음은 곧 교만이다. 교만하고 높은 마음을 가진 자는 남을 무시하고 멸시한다. 또 그런 자는 무례한 말을 하고 무례한 행동을 한다.


열여덟째로,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쾌락이 다 나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즐거움들이 있다(전 5:18). 그러나 고통하는 때에 사람들은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할 것이다. 사람들은 운동이나 등산이나 여행이나 외식이나 쇼핑이나 텔레비젼 시청을 위해서는 돈도 쓰고 시간도 쓸 것이지만, 하나님께 예배하거나 성경 읽고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기뻐하는 일들, 곧 전도와 봉사 등을 하는 데는 시간도 돈도 쓰기를 아까와 할 것이다.


[5]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니 이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마지막 열아홉째로, 사람들은 경건의 모양만 가지고 경건의 능력은 부정할 것이다. 경건의 모양이 있다는 것은 예수 믿는다는 이름이나 교회 다니는 모양이나, 교회의 직분을 가지는 것이며 심지어 찬양대나 주일학교 교사로서 봉사를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경건의 능력을 부정한다. 그것은 불경건이며 불신앙이다. 그것은 사실상 무신론과 다를 바 없다. 그것은 무서운 죄악이다.


바울 사도는 이와 같이 열아홉 가지의 특성들을 열거한 후에 디모데에게 \"이런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고 교훈하였다. \'돌아서라\'는 말은 \'그들을 피하라, 그들과의 교제를 끊으라, 그들과 사귀지 말라, 그들과 친구가 되지 말라, 그들을 가까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왜 그래야 하는가? 첫째로, 그것은 그들이 참된 성도, 참된 형제, 참된 교인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의 참된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둘째로, 우리가 그런 자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면, 우리도 그들의 악에 감염되기 때문이다. 악은 전염성을 가졌다. 셋째로, 우리가 그런 자들에게서 돌아서지 않으면, 다른 사람들은 우리를 그들과 같은 류의 사람으로 여길 것이며 이로 인해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과 명예가 짓밟히며 더럽혀질 것이다.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진리 운동은 숫자 운동이나 돈 운동이 아니다. 진리 운동은 사람들을 죄로부터 건져내고 그들로 하여금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인격자가 되게 훈련시키며 오직 천국에만 소망을 두게 하는 운동이다. 그것은 숫자가 많든 적든이 문제가 아니고 돈이 많든 적든이 문제가 아니다. 지상에서 하나님의 참된 나라가 외적 영광을 항상 동반하지는 않았다.



결론적으로, 1절로 5절의 말씀의 요지는 말세에 사람들이 19가지의 특성을 가지는 고통하는 때가 올 것을 알고 주의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그런 특성을 가진 자들에게서 돌어서라는 교훈이다. 우리 모두는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참된 백성이 되자. 어떠한 시대가 우리 앞에 다가올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충성된 자들이 되자.



6-12절, 바울의 간증


바울은 악한 자들과 대조하여 자신을 간증하면서 디모데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참된 신앙의 길, 참된 봉사의 길을 교훈한다.


[6] 저희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 여자는 죄를 중히 지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바 되어.


\'저희\'는 말세에 고통하는 때의 특성들을 지닌 자들, 곧 불경건하고 악한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 중에 남의 집에 가만히 들어가 어리석은 여자를 유인하는 자들이 있었다. \'어리석은 여자\'라는 원어(귀나이카리아)는 \'작은 여자들, 보잘 것 없는 여자들, 어리석은 여자들\'이라는 뜻을 가진다. 본문은 그 여자들을 세 가지로 묘사하고 있다.


첫째로, 그들은 죄를 중히 진 자들이었다. 죄를 중히 지었다는 표현은 죄의 무거운 짐을 의미한다. 그들의 죄는 한 두 가지의 죄가 아니고 한 두 번의 죄가 아니라, 누적된 무거운 짐이 된 죄이었다. 죄는 짐이다. 그것은 벗어버려야 할 무거운 짐이다. 그것은 회개함으로만 벗어버릴 수 있는 짐이다. 시편 32:3-5, \"내가 토설치 아니할 때에 종일 신음하므로 내 뼈가 쇠하였도다. 주의 손이 주야로 나를 누르시오니 내 진액이 화하여 여름 가물에 마름같이 되었나이다. 내가 이르기를 내 허물을 여호와께 자복하리라 하고 주께 내 죄를 아뢰고 내 죄악을 숨기지 아니하였더니 곧 주께서 내 죄의 악을 사하셨나이다.\"


둘째로, 그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린 바 된 자들이었다. 욕심은 사람의 행동이 나타나기 전의 마음 상태이다. 사람이 죄를 짓지 아니하려면 생각부터 깨끗해야 한다. 죄를 자꾸 생각하고 상상하면 범죄하게 된다. 사람이 생각을 깨끗이 하려면 보는 것부터 조심해야 한다. 성 범죄자의 다수가 음란 잡지나 비디오를 즐겨 보는 자들이라는 통계가 있다. 보는 것에서 생각의 불결과 욕심이 생기고 그 다음 단계는 그것을 실행하는 범죄이다. 그런데 저 어리석은 여자들은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려 범죄하였다.


[7] 항상 배우나 마침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느니라.


셋째로, 그들은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자들이었다. \'마침내\'라는 원어(메데포테)는 \'결코\'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죄를 버리고 죄씻음을 받으라는 교훈이므로, 회개가 없이는 아무도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 그러므로 회개는 참된 성도에게 필수적이다. 참된 회개가 없이는 아무도 영생의 진리에 도달할 수 없다. 범죄자마다 죄의 종이요 마귀의 종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 죄사함과 영생을 얻는다. 참으로 구원 받은 자들은 진리를 배우고 그것을 깨닫고 참 지식과 믿음에 이르는 자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이런 가련한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8] 얀네와 얌브레가 모세를 대적한 것같이 저희도 진리를 대적하니 이 사람들은 그 마음이 부패한 자요 믿음에 관하여는 버리운 자들이라.


얀네와 얌브레는 성경에서 본문 외에 아무 곳에도 언급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들은 바울 당시에 유대인의 전통이나 공적인 글들에 의해 출애굽 당시 모세를 대적했던 인물로 알려졌던 것 같다. 바울은 어리석은 여자들을 유인했던 저 악한 자들도 그들과 비슷하다고 말하면서 저들을 세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그들은 진리를 대적하는 자들이었다. 바울이 전한 하나님의 진리는 사람이 그것을 믿고 구원을 받아야 할 진리인데, 그 진리를 믿고 순종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불신하고 거절하고 대항하니, 얼마나 불쌍한 일인가?


둘째로, 그들은 마음이 부패한 자들이었다. \'마음\'이라는 원어(누스)는 \'생각\'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생각이 중요하다. 사람의 부패는 그 생각의 부패에서 비롯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구원은 생각의 새로워짐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을 알고 죄악의 무서운 정체를 알고 죄를 미워하고 떠나는, 생각의 변화가 없이는 진정한 회개도, 참된 구원도 없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에게는 바른 생각, 바른 사상, 바른 정신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러나 저들은 그 생각이 부패한 자들이었다.


셋째로, 그들은 믿음에 관하여 버리운 자들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다. 믿는 자가 있고 믿지 않는 자가 있다.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택하신 자들은 믿을 것이나 택하시지 않은 자들 곧 버려두신 자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있어서 예수 믿는 것은 가장 큰 행복이요 예수 믿지 않는 것은 가장 큰 불행이다. 그런데 저들은 믿음이 없는 자들이었다.


[9] 그러나 저희가 더 나가지 못할 것은 저 두 사람의 된 것과 같이 저희 어리석음이 드러날 것임이니라.


저 악한 자들이 이와 같이 진리를 대적하고 생각이 부패하고 믿음이 없는 자들로 행동하고 있지만, 그들의 어리석음은 마침내 모든 사람에게 드러날 것이다. 원문에는 \'모든 사람에게\'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는 누구나 어리석은 자이다. 진리를 대적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죄를 짓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죄를 회개할 줄 모르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된 믿음이 없는 자는 어리석은 자이다. 저들의 어리석음은 마침내 다 드러날 것이다.


[10] 나의 교훈과 행실과 의향과 믿음과 오래 참음과 사랑과 인내와.


원문에는 \'그러나\'라는 말이 본절 초두에 있다. 바울은 저 악인들과 대조하며 자신에 대해 간증한다. \'나의 교훈\'은 바울이 오직 전파하고 가르친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킨다. 그것은 복음적 교훈이며 성경적 교훈이다. \'행실\'은 그의 복음에 합한 행실, 복음에 일치한 행실을 가리킨다. 그것이 신행일치(信行一致)이다. 바른 행위는 참된 믿음의 증거이다. 선한 행위가 없는 믿음은 가짜이든가 죽은 믿음이다. \'의향\'은 행위의 동기, 행위의 의도를 말한다. 남은 그것을 잘 모르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아시며 진실한 이들도 알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말씀인 성경을 믿는 것이다. 바울은 참으로 믿는 자이었고 이제 이 믿음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오래 참음\'은 이 믿음이 오래 참음을 필요로 함을 보인다. 하나님을 믿는 자는 그의 약속을 참고 기다려야 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다 이해하지 못한다. 사람은 하나님의 작정된 시간표를 도무지 알 수 없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이시며 그는 약속하신 대로 모든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사실이다. 참된 성도는 그 하나님을 믿고 오래 참는다.


\'사랑\'은 하나님의 윤리적 교훈의 요점이다. 예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곧 우리에게 주셨다. \'인내\'는 이 사랑에 필수적인 덕이다. 믿음에 오래 참음이 뒤따르듯이, 사랑에도 인내가 뒤따른다.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바울 사도는 사랑을 설명하면서 \"사랑은 오래 참는다\"고 하였다. 이 사랑의 인내는 특히 다음에 나오는 두 가지의 일 곧 \'핍박과 고난\'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11] 핍박과 고난과 또한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과 어떠한 핍박 받은 것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 주께서 이 모든 것 가운데서 나를 건지셨느니라.


바울은 많은 핍박들과 고난들을 받았고 그 가운데서 인내하였다. 그것은 그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리고 그의 택한 백성, 복음으로 구원을 받아야 할 백성을 사랑했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그의 심령 속에 진실한 사랑이 없었다면, 그는 그런 많은 고난과 핍박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안디옥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당한 일들이 바로 그 핍박과 고난의 예들이다. 사도행전 13:50에 보면, 소아시아 지방인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믿지 않는 유대인들은 바울을 시기하여 경건한 귀부인들과 성내의 유력한 사람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였었다. 사도행전 14:5에 보면, 이고니온에서도 순종치 아니하는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바울을 학대하고 돌로 치려 하였다. 사도행전 14:19에 보면, 루스드라에서도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선동하여 돌로 바울을 쳤을 때, 바울이 죽은 줄 알고 성 밖으로 끌어 내쳤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이런 일들을 \"네가 과연 보고 알았거니와\"라고 말한다. \'네가 과연 보고 알았다\'는 원어(파레콜루데카스)는 \'가까이 따라왔다, 완전히 알았다\'는 뜻이다. 이 말씀을 보면, 디모데는 바울의 초기의 전도 여행 때부터 그를 따라다닌 인물이었던 것 같다. 여하튼 디모데는 바울의 이 간증의 말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그의 영적인 아버지인 바울과 함께 가까이 활동하면서 그가 무엇을 가르쳤는지, 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 그가 어떻게 믿고 사랑하며 어떻게 오래 참고 인내했는지, 그가 어떤 핍박과 고난들을 받았었는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바울은 많은 핍박과 고난을 받았지만, 주께서 그 모든 가운데서 그를 건져주셨다. 그가 순교해야 할 때가 되면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뜻 가운데서, 그의 허락 가운데서 될 것이다. 그의 뜻이 아니라면, 그의 허락이 없이는, 아무도 바울의 목숨을 취할 수 없다. 하나님은 홀로 세상의 모든 일을 주관하시고 통치하시는 주님이시다. 그는 무슨 일이든지 하실 수 있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주님이시다. 그는 다니엘을 사자굴에서 건지셨고 바울을 많은 핍박과 고난과 죽음의 위험 가운데서 건지셨다. 그는 오늘날 우리와 우리 민족도 이 경제적 위기에서 구원하실 수 있는 주권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주 하나님 앞에 신실해야 한다.


[12]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


다시 직역하면,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들도 핍박을 받으리라.\" 이것은 바울 자신이 핍박과 고난의 길을 걸었던 것처럼 진실한 성도들도 그러한 길을 걸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상 사실이었다. 우리 한국 교회에서도 일제 시대에 그리고 공산 정권 하에서 그러하였다. 성도를 위한 핍박과 고난이 이제 다 끝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아직도 남아 있다. 그것은 언제 우리에게 현실로 닥쳐올지 모른다. 그러나 진실한 성도들은 항상 그것을 각오하면서 바르게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6절로 12절의 말씀에서 배울 바는 첫째로 우리가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죄를 중히 졌고 여러 가지 욕심에 끌렸고 항상 배우나 결코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었다. 죄는 독과 같고 불과 같다. 그것을 품고 있는 자는 죽고 망한다. 우리는 죄를 철저히 회개하고 버려야 한다. 우리는 결코 어리석은 여자들처럼 되어서는 안된다.


둘째로, 우리는 진리의 대적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들은 생각이 부패되었고 믿음이 없는 자들이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들을 때 그것을 깨닫고 받고 믿고 복종하는 진리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의 생각과 사상은 진리로 바로 정립되어야 한다. 우리는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을 본받는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그의 바른 교훈, 바른 행실, 바른 의향, 믿음, 오래 참음, 사랑, 인내, 특히 그의 핍박과 고난의 견딤을 성경에 간증된 대로 본받기를 원한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모든 자에게 바울과 같은 핍박과 고난의 삶이 예정되어 있다. 그러나 그 길에는 바울의 경우처럼 주 하나님의 보호와 구원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우리도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며 충성되이 주를 섬기는 자들이 되자.



13-17절, 성경의 효능


세상과 교회는 판이하게 다르다. 악인들과 성도들도 판이하게 다르다. 세상의 수많은 책들과 성경책도 판이하게 다르다. 본문은 성경의 몇 가지 효능을 증거함으로써 우리가 세상과 악인들과 구별되게 참된 믿음 안에 거하여야 할 것을 교훈하고 있다.


[13]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은 더욱 악하여져서 속이기도 하고 속기도 하나니.


\'악한 사람들과 속이는 자들\'--세상에는 이런 류의 사람들이 있다. 우리는 이런 자들을 볼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버려두신 악인들이다. 우리는 단지 그들을 불쌍히 여기며 할 수 있는 대로 그들을 인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들의 특징은 점점 악해지는 것이며 속이는 것이며 또 속임을 당하는 것이다. 세상은 악하며 속이며 속는 세상이다.


[14] 그러나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들은 세상과 다르다. 하나님의 백성과 마귀의 자녀들은 명백히 구별된다. 요한일서 3:10, \"이러므로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나타나나니 무릇 의를 행치 아니하는 자나 또는 그 형제를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니라.\"


악한 세상, 속이고 속는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흔들리지 않는 믿음 위에 굳게 서야 한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거한다\'는 말은 지금 있는 것에 그대로 머무는 것을 말한다. 본절에서 지금 있는 것이란 디모데가 이미 배우고 확신한 것들을 말한다. 원문의 뜻은, \"너는 네가 배운 것들 그리고 네가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라\"이다.


우리가 먼저 잘 배우고 확신해야 그 안에 거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잘 배우지 못하고 확신하지도 못하면 그 안에 거하라는 말이 아무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진리, 성경 진리, 성경의 교리 체계를 잘 배우고 이해하고 그것에 대한 확실한 지식을 가져야 하며, 그 지식이 자신의 확고한 믿음이 되게 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그 안에 거해야 한다. 그 배운 내용들, 그 확신한 내용들 안에 거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 안에 거한다는 것은 악한 세상과 세상의 악인들, 속이고 속는 사람들의 사상이나 행위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을 내포한다. 변질되었거나 변질되고 있는 교회들의 악한 풍조에 영향을 받지 말라는 뜻을 내포한다. 흔들리지 말고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뜻이다. 뒤로 물러나 불신앙과 의심에 빠지지 말라는 뜻이다. 네가 배우고 확신한 옛 신앙, 역사적 기독교 신앙, 성경적 신앙에 머물라는 말씀이다.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며\"라는 말씀은 원문에서 앞 문장에 \'거하라\'는 명령어에 이어지는 분사의 형태이다. 그것은, \"네가 뉘게서 배운 것을 알면서, 너는 배우고 확신한 것들에 거하라\"는 뜻이다. 전통적 사본에 보면, \'뉘게서\'라는 말에서 \'뉘\' 즉 \'누구\'라는 말(티노스)은 단수 명사이다. 이것은 여러 명의 선생을 가리키지 않고 한 명의 선생을 가리킨다. 그 선생은 아마 바울 자신을 가리키는 것 같다.


좋은 선생은 좋은 지식을 주며, 부족한 선생은 부족한 지식을 줄 것이다. 바울은 좋은 선생이었다. 그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고 그 지식을 성실히 전달하기 위해 애쓴 선생이었다. 그런 선생을 가진 자들은 복되다. 오늘날도 바울의 사상, 곧 주께서 바울 사도를 통하여 주신 복음 진리의 지식에 정통하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가진 선생을 둔 제자들은 복되다.


그 선생의 지식, 믿음, 분별력, 입장, 인격, 삶을 기억하는 것은 어지러운 세상에서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뉘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 시대의 사조에 적응하는데는 도움이 안되겠지만, 바른 것을 간직하고 보수하는 데는 도움이 된다. 이전에 배웠던 일을 기억하는 것은 새 것을 만들어 내는 데는 도움이 안되겠지만, 옛 것을 보존하는 데는 도움이 될 것이다.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기 위해서는 그가 누구에게서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바른 진리를 배운 자들은 그 진리를 가르쳐준 자를 기억하는 것이 그 진리를 보수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5]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라는 말씀은, 원문을 정확히 번역하면, \"그리고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는 것을\"이다. 이것은 앞 절에 \'알면서\'라는 분사에 걸리는 종속절로서 \"그리고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는 것을 알면서\"라는 뜻이다. 즉, 디모데가 배우고 확신한 것들 안에 거하는데 도움이 되는 두 가지 지식은, 첫째 그가 누구에게서 그것들을 배웠는가를 기억하는 것이며, 둘째 그가 어려서부터 배우고 알았던 성경을 기억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디모데는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다. 이것이야말로 복된 일이다. 오늘날 많은 어린이들이 성경 대신에 세속적 오락에 빠져 있다. 많은 그리스도인의 자녀들도 예외가 아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성경을 가르치고 있는가? 여러분의 자녀들이 텔레비전을 보는 시간과 성경을 읽는 시간을 비교해 보라. 비교할 수 없이 성경 읽는 시간이 적지 않은가? 아니, 전혀 성경을 읽히지 않는 자녀들은 없는가? 어려서부터 태권도니, 피아노니, 컴퓨터니, 영어니 가르칠 줄은 알아도 인생에게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르칠 줄 모르는 부모들은 없는가? 자녀들로 하여금 어릴 때부터 성경을 알게 하라.


바울 사도는 이제 성경의 몇 가지 효능에 대해 말씀한다. 첫째로, 성경은 구원의 지혜를 준다. 이것이 성경의 가장 중요한 효능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첫번째 목적은 성경을 통해 인생이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이 구원은 죄인이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는 구원이다. 요한복음 20:30, 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복음서는 단순한 진리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책이다. 어떻게 그것이 증거되었는가? 그의 기적들과 부활을 통하여 증거되었다. 로마서는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의에 대하여 증거하고, 갈라디아서는 이 은혜의 복음을 변증한다. 왜냐하면 그 복음을 왜곡시킨 이단사상이 교회 속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현대 교회는 빈약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재정적으로나 숫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고, 교리 사상적으로, 믿음의 지식에 있어서 하는 말이다. 교인들은 주의 참된 진리의 지식을 가지려고 하기보다는 우선 듣기 쉽고 듣기 좋은 말들, 단순히 귀를 즐겁게 하는 말들, 단지 웃기고 울리는 감동적인 말들, 디모데후서 4:3, 4에 증거한 대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것은 교회들과 교인들이 속화되는 징조이거나 이미 속화된 증거일 것이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는 책이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여 믿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요동하는 세상, 악한 세상, 속이고 속는 세상에서 참된 성도가 요동하지 않고 배운 바 진리의 지식과 확신에 굳게 거하기 위해서는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한다. 그는 성경을 읽고 배우고 자세히 읽고 배워 참된 성경적 지식과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성경의 두번째 효능은 성도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는 점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은 사람을 구원시켜 이 세상에서 실제로 의로운 인격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구원은 법적인 구원인 동시에 실제적인 구원이다. 법적으로 신자들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대속 공로로 완전한 의를 얻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인이 되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새 생명과 성령을 우리 속에 주셔서 우리가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인격자가 되게 하신다. 성경은 이 실제적 의를 위해 도구로 사용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 이것을 성경 영감(靈感)이라고 말한다. \'모든 성경\'이라는 말은 구약 39권의 모든 책들을 가리킨다. 즉, 예를 들어, 하나님의 이름이 한 번도 안나오는 에스더서나, 성도의 시와 간증과 고백과 같은 시편이나, 남녀 간의 연애시와 같아 보이는 아가서도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되었다는 뜻이다.


또한 \'모든 성경\'이라는 말은 각 성경의 모든 부분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성경은 그 주요한 사상들에 있어서만 영감된 것이 아니고 그 모든 부분들, 예를 들어 그 역사적 사실들, 인명, 지명, 숫자까지도 영감되었다는 뜻이다. 심지어 성경의 각 단어들까지도 영감되었다는 증거들이 있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16은 아브라함에게 주신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에서 \'네 씨\'라는 말이 복수명사가 아니고 단수명사라는 사실에 근거하여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임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이라는 말(데오프뉴스토스, God-breathed)은 하나님께서 숨을 내쉬어 기록케 하셨다는 것을 원어적으로 의미한다. 그 말은 성경의 신적 원천을 보인다. 성경은 하나님께로서 나온 말씀이며, 성경의 사상은 사람의 사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상임을 나타낸다. 이것은 또한 성경의 신적 권위를 보인다. 성경은 사람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는 하나님의 말씀임을 나타낸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진정으로 사람에게 유익을 준다. 이미 구원받은 성도들에게도 그러하다. 성경은 유익한 책이다. 성경은 단순히 이론적인 책이 아니다. 물론 성경은 이론적인 책이다. 사상이나 이론이 없는 사람은 없다. 단지 그 사상, 그 이론이 옳으냐 그르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성경은 이론적이지만 그 이론이 옳고 그 사상이 옳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참된 유익을 준다.


성경이 주는 유익을 본절은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라고 표현하였다. \'교훈\'이란 교리적인 방면과 윤리적인 방면을 다 포함한다. 즉 성경은 믿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행위에 대해서도 교훈한다. 교리와 윤리, 믿음과 행위는 균형이 있어야 한다. 교리만 좋아하거나 윤리만 좋아해서는 안된다. 둘 다 필요하다. 어떤 이는 지성적이고 어떤 이는 감성적이며 또 어떤 이는 의지적이지만, 신앙 생활에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의 균형이 필요하다.


\'책망\'은 잘못된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잘못된 사상, 즉 사상의 오류를 지적한다. 성경은 또한 우리의 잘못된 행실 즉 행위의 오류를 지적한다. 사람은 사상적으로, 행위적으로, 인격적으로 잘못과 결함이 많다. 죄는 사람의 사상과 인격을 심히 망가뜨렸다. 이것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후에도 때때로, 아니 빈번히 드러난다. 그러므로 인격의 고질적 결함들을 고치기 위해서 우리는 부지런히 성경을 읽고 배워야 한다. 성경의 책망을 듣지 못하는 자는 자신의 부족을 지적받지 못하는 자와 같으므로 그것을 고칠 기회를 잃게 된다.


\'바르게 함\'은 잘못의 교정이다. 성경은 우리를 잘못된 곳에서 바른 곳으로 이끈다. 성경을 통해 우리는 바른 사상, 바른 지식, 바른 인격, 바른 행동, 바른 삶을 가지도록 훈련을 받는다.


\'의로 교육함\'은 구원받은 성도들을 위한 성경의 궁극적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해 성도들이 의로운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의(義)는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법적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 그러나 이 의가 실제적으로 인격과 삶 속에서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의로 교육함이다. 이것은 자신과 남을 위해서 다 그러하다. 성경이 이렇게 유익한 책인데 왜 어떤 성도는 성경을 읽지 않고 자녀에게 성경을 가르치지 않는가? 왜 성경을 통해 의로운 인격자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무시하면서 하나님을 믿고자 하는가?


[17]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성경의 세번째 효능은 선한 일을 위해 우리를 온전히 준비시키는 것이다. \'온전케\'라는 말은 원어(알티오스, 엑살티죠)에서 \'온전히 준비되게\'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성도들을 의로운 인격자가 되게 하시는 목적은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되게 하시기 위해서이다.


성경은 현세에서 필요하다. 천국에서는 성도들이 완전 성화된 상태이므로 흠과 결함이 없고 죄와 부족이 없을 것이다. 결함들과 부족들은 현세에서 있다. 그러므로 현세에서 성도들에게 의의 훈련이 필요하고 성경 교육이 필요한 것이다. 의의 훈련을 받아야 비로소 완전케 되는 것이 아니고, 이미 완전한 의를 받았기 때문에 그 의에 합당하게, 즉 이 완전한 의로 부르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야 마땅하기 때문에 의의 훈련을 받는 것이다.


그래야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의 삶이 어두운 세상에 빛이 되고 이 세상에서 진리의 진리됨, 새 생명의 생명됨을 증거하는 도구가 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의로운 인격자, 선한 일을 위해 온전히 준비된 인격자가 되기를 원하신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선한 일들 중 가장 첫번째 것은 죄인을 구원하는 전도의 일이다. 전도는 우리가 세상에서 할 수 있는 가장 선한 일이다. 그것은 죄인을 영원한 지옥 형벌로부터 영광스런 천국으로 건져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좋은 일이 무엇인가? 하나님은 구원받은 성도가 이런 선한 일을 위해 사용되기를 원하신다.



결론적으로, 13절로 17절까지의 말씀의 내용은 우리가 배우고 확신한 진리들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거하게 하기 위해 도움이 되는 두 가지 내용을 본문은 말한다. 첫째는, 우리가 누구에게서 그 바른 진리들을 배웠는지를 아는 것이며, 둘째는 성경의 효능을 아는 것이다.


특히, 본문은 성경의 몇 가지 효능을 증거한다. 우리는 그것을 세 가지로 정리해 보았다. 첫째로, 성경은 사람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 둘째로,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를 의로운 인격이 되게 훈련시킨다. 셋째로, 성경은 성도들을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시킨다.


여러분은 십자가의 은혜의 복음, 자유의 복음, 믿음으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그 복음을 누구에게서 배웠는가? 여러분은 성경의 효능을 아는가?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구원을 받았는가?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을 참으로 믿게 되었는가?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실제로 의로운 인격자로 훈련되고 있는가? 여러분은 성경을 통해 선한 일을 위해 잘 준비되고 있는가? 여러분의 생애는 무엇을 위해 드려질 것인가?




4장: 전도자의 직무


1-2절, 말씀 전파의 사명


100년 전에 미국과 호주와 카나다에 말씀 전파의 사명을 받은 젊은이들이 없었더라면, 그 때 복음이 우리 나라에 전파되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상 아무도 말씀 전파의 사명을 느끼지 않고 자기들의 일에만 분주했더라면, 복음은 온 세상에 확산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이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는 것이며 여기에 말씀 전파의 엄숙한 사명이 있다. 본문은 이 사명에 대해 증거한다.


[1]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바울 사도는 복음 전파의 일이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엄숙한 명령임을 암시한다. 그것은 왜 우리가 복음을 전파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이다. 본절을 전통 사본대로 다시 번역하면,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 앞과 주 예수 그리스도 곧 그의 나타나실 때에 그의 나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자 앞에서 엄히 명하노니\"이다.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앞 부분의 성경의 효능에 관한 말씀에 연결된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며, 구원받은 자가 의로운 인격자로 훈련되게 하며, 또한 선한 일을 위하여 온전히 준비되게 한다. 그러므로 말씀 전파의 일은 대단히 중요하고 필요하다. 바로 그 일이 하나님이 복음 사역자들에게 맡기신 주된 임무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 일은 디모데에게 엄숙히 명령한다.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씀은 전도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죄인들을 멸망으로부터 구원해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다. 요한복음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복음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라는 말씀은 전도가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명이며 명령임을 암시한다. 마가복음 1:38, \"이르시되 우리가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거기서도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하시고.\" 마태복음 9:13,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하시니라.\" 마태복음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바울 사도는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과 그 때 그의 나라에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것을 말씀한다. 성경은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것을 밝히 증거한다. 주님께서 친히 그것을 증거하셨고 약속하셨다. 사도들도 한결같이 그 사실을 증거하였다. 신약 성경의 마지막 주요 진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분명한 소망이다. \"이것들을 증거하신 이가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거기에 우리의 소망이 있고 온 세상의 소망이 있다.


주의 재림의 목적은 무엇보다 심판하심에 있다. 사도신경의 말씀대로, 하늘에 올리우신 예수 그리스도는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다. 요한복음 5:22, \"아버지께서 아무도 심판하지 아니하시고 심판을 다 아들에게 맡기셨으니.\" 예수님은 영광 중에 다시 오셔서 모든 사람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하실 심판은 단지 그 당시에 살아 있는 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미 죽은 모든 자들에게도 해당된다. 그 때 대사건이 있을 것이다. 지구 곳곳의 공동 묘지들이 열릴 것이며, 납골당들에 대소동이 있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20:11-15, \"또 내가 크고 흰 보좌와 그 위에 앉으신 자를 보니 땅과 하늘이 그 앞에서 피하여 간 데 없더라. 또 내가 보니 죽은 자들이 무론 대소하고 그 보좌 앞에 섰는데 책들이 펴 있고 또 다른 책이 펴졌으니 곧 생명책이라. 죽은 자들이 자기 행위를 따라 책들에 기록된 대로 심판을 받으니 바다가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서 죽은 자들을 내어 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사망과 음부도 불못에 던지우니 이것은 둘째 사망 곧 불못이라. 누구든지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자는 불못에 던지우더라.\"


재림하셔서 심판하실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엄히 명한다는 것은 말씀 전파의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보인다. 주께서 심판하실 때, 복음의 말씀을 믿고 구원받은 자들은 천국의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믿지 않는 자들은 지옥의 형벌의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복음의 말씀을 정말 믿는다면, 우리는 말씀 전파의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이 복음을 정말 믿을진대, 우리가 이 복음을 정말 믿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일에 힘써야 한다. 우리가 이 중대한 전도의 일에 힘쓰지 않는다면, 주께서 우리에게 그 책임을 물으실 것이다. 우리를 이기적이라고 책망하실 것이다.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명한 내용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말씀\'은 복음 진리를 말한다. 아무 말이나 전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바른 교훈\' 곧 정통적 교리와 교훈을 가리킨다. 그것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의 말씀이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구원의 소식이다. 이것이 신구약 66권에 증거된 성경적 기독교 진리와 신앙의 요점이다. 교회는 그것을 밝히 전파해야 한다.


\'전파하라\'는 것은 선포하라는 뜻이다. 전도는 선포적이어야 한다. 전도는 단순히 대화나 토론이 아니다. 전도는 무엇을 함께 추구하는 것도 아니다. 전도는 사람들이 그것을 듣든지 아니듣든지, 그것을 좋아하든지 안좋아하든지 관계치 말고 하나님의 뜻을 성실하게 선포하는 것이다. 인간의 사상과 견해는 복잡하고 불완전하기 때문에 토론이 필요하고 최선의 결론이 필요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단순하고 완전하다. 그러므로 그것은 의논할 것이 아니고 선포하면 된다.


이 말씀 전파의 일은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이라고 본문은 가르친다. 전도는 때가 좋든지 좋지 않든지 항상 힘써야 할 일이다. \'항상 힘쓰라\'는 말은 원어적으로 \'즉각적으로, 절박하게 힘쓰라\'는 뜻을 가진다. 전도의 말씀은 언제 어디에서나 즉각적으로 선포해야 할 말씀이며 절박하게 전파해야 할 말씀이다. 지금도 많은 죄인들이 영원한 멸망으로 들어가고 있다. 그러므로 전도에는 적절한 때나 적절하지 않은 때가 없다. 전도는 우리 모두가 항상 힘써야 할 일이다. 전도의 결과에 너무 마음을 쓸 것이 아니다. 오직 하나님의 뜻을 선포하면 된다.


\'범사에 오래 참으라\'는 말씀은 전도의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암시한다. \'범사에\'라는 말은 \'온전히\'라는 뜻이다. 사탄은 쉽사리 자기 권세 아래 있는 죄인들을 내어놓지 않으려 한다. 거기에 더하여, 때때로 핍박과 고난이 있다. 또한, 전도의 결실이 금방 보이지 않거나 때때로 전도로 예수 믿은 자들이 연약한 모습들을 보인다. 이 모든 것들은 전도자를 낙망케 하는 요인들이다. 그러므로 전도하는 이들은 범사에 혹은 온전히 오래 참음으로 이 일을 수행해야 한다.


말씀 전파의 일은 경책함과 경계함과 권면함을 수반해야 한다. 전도와 양육은 서로 상관 없는 일이 될 수 없다. 말씀의 선포와 더불어, 잘못된 것들에 대한 경책함과 경계함도 필요하고, 하나님의 온전하신 뜻에 대한 권면함도 필요하다.


전도는 하나님의 엄숙한 명령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명령이다. 그러므로 전도는 우리에게, 우리 교회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다. 이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일을 위해 몸과 시간을 드리며, 이 일을 위해 기도하며, 이 일을 위해 물질로 후원해야 한다.



3-5절, 전도자의 고충


본문은 전도자의 고충으로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싫어함에 대해 증거한다. 이 외에도, 본장에 나타나 있는 대로 참된 동역자들이 부족하며 복음의 대적자들이 있다는 사실도 전도자의 고충이지만, 오늘은 본문의 내용만 조금 생각하고자 한다.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 절과 연관하여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말씀 전파를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때가 이르리니\'라는 말씀은 예언의 말씀이다. 복음이 세상에 전파되었다고 해서, 교회가 곳곳에 세워졌다고 해서, 세상의 미래가 밝은 것은 아니다. 성경은 오히려 어두운 날, 어려운 날이 있을 것을 예언한다. 물론, 역사상 부흥의 때, 각성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배교의 시대, 교회가 속화되는 시대, 영적인 침체의 시대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받지 않는다\'는 원어는 \'견디지 못한다, 참지 못한다\'는 뜻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인내하며 듣지 못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재미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니까 읽고 듣고 배우는 것이지 육신적 재미 때문에 듣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바른 교훈인가?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66권의 책에 밝히 계시된 진리가 바른 교훈이다. 그것은 성경적 교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교리와 윤리로 구성된다. 무엇을 믿을 것인가라는 문제가 교리의 문제이며,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문제가 윤리의 문제이다.


바른 교리의 요점은 속죄의 복음 진리이다. 이것을 좀더 자세히 해설한 것이 신학이다. 성경적 진리는 옛부터 믿어온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보존되어 있다. 그것이 바른 신학의 내용이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인간이 누구이며 특히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왜 오셔서 무엇을 하셨는지, 구원이 무엇인지, 내세의 소망은 무엇인지 등이 그 주요 내용이다.


바른 윤리는 우상들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경외하며 섬기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모든 죄를 버리고 의롭고 거룩하며 선하고 겸손하고 사랑하며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그런데 때가 이르면 사람들은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둘 것이다. \'귀가 가렵다\'는 말은 귀를 긁어주는 말, 곧 귀를 즐겁게 하는 말을 원한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말들의 주제는 천적(天的)이거나 영적이거나 신본주의적이지 않고, 세상적이고 육신적이고 인본주의적이다. 그런 소원은 사욕, 즉 육신적 욕망에 불과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사욕을 가지며 그것을 충족시킬 스승들을 많이 둘 것이다.


[4]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 성경적 바른 교훈, 옛 신앙을 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들을 좇을 것이다. 사람들은 진리 대신에 헛된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허탄한 이야기\'라는 원어는 \'신화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사실이 아닌 지어낸 이야기들이다. 이것은 재미 있을 수는 있으나 무의미하고 무가치한 이야기들이다. 사람들은 이런 쓸데 없는 이야기들을 좋아할 것이다. 확실한 근거가 없는 예화들이나 비진실한, 과장된 간증들도 이런 류와 가깝다. 우리는 진리를 좋아하고, 이런 헛된 말들을 좋아해서는 안된다.


[5]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그러나 이 악한 시대에도 복음 사역자는 자기 직무에 충실해야 한다. 본문의 네 마디는 다 명령어이다.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 고난을 받으라. 전도인의 일을 하라. 네 직무를 다하라.\" 첫번째 명령어는 \'모든 일에 근신하라\'는 것이다. 범사에 깨어 있고 조심하지 않으면 시대의 풍조에 물들고 영향을 받아 타협하고 변질되기 쉽다. 두번째 명령어는 \'고난을 받으라\'는 것이다. 고난 각오, 이것이 어려운 시대에 부름을 받은 주의 종들의 마음가짐이어야 한다. 마귀의 종들이 세력을 얻고 악한 자들이 앞장 서서 분주히 왕래하며 무지한 군중들이 그들을 지지하는 시대가 올 것이기 때문에, 그런 시대에는 주의 참된 종들이 고난을 각오하고 죽을 각오도 해야 한다.


세번째 명령어는 \'전도인의 일을 하라\'는 것이고, 네번째 명령어는 \'네 직무를 다하라\'는 것이다. 전도인의 일은 전도이다.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며 경책하며 경계하고 권면하는 것이다. 환경이 어떠하든지 간에 전도자는 이 직무를 수행해야 하고 이 직무를 완수해야 한다. 여기에는 인내가 필요하다. 전도자는 골고다의 길, 곧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의 길을 가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낙심치 말고 끝까지 인내하면서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특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내용을 변질시키거나 사람들의 기호나 취향에 맞추어 절충시키려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뜻을 충실히 선포해야 한다. 인간의 현실에 절충하거나 타협해서는 안된다. 거기에 어려움이 따를 것이지만 낙망치 말고 바른 말씀을 가감 없이, 타협 없이, 충실히 전파해야 한다.



오늘 시대는 어떠한가? 교인들이 바른 교훈을 좋아하는 시대인가, 아니면 이 예언의 말씀대로 바른 교훈을 좋아하지 않는 시대가 되었는가? 여러분은 어떤 상태에 있는가? 바른 교훈을 참으로 좋아하고 있는가? 바른 교훈을 싫어하는 자는 없는가? 만일 여러분의 심령이 바른 교훈을 싫어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그것은 참으로 회개해야 할 문제이다.


합정동교회의 방향은 무엇인가? 이 배교와 타협과 혼돈의 시대에도, 우리 교회와 이 강단은 바른 교훈을 성실히, 계속하여 선포할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들을 시대의 흐름에 따라, 사람들의 기호와 취향에 따라 절충할 것인가? 부디, 하나님께서 긍휼과 능력을 베푸셔서 우리 교회는 끝까지 바른 교훈만을 성실하게, 힘있게 전파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6-8절, 사명의 길


[6]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옥에 갇혀서 이 마지막 편지를 썼던 노(老) 사도 바울은 지금 자신의 순교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고 있다. 디모데후서는 이런 상황에서 쓴 유언적 서신이다. \'관제(灌祭, drink offering)\'는 포도주나 기름 등을 붓는 제사 방식을 말한다. \'부음이 되고\'라는 말은 \'부어지고 있고\'라는 뜻인데, 자신이 순교의 희생 제물이 될 것을 암시한다.


바울은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자신을 붓고 있는가? 그것은 오직 하나님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이었다. 그것이 전도자의 길이요 전도자가 목표로 하는 생애이다. 참된 전도자는 진리를 위해 바르게 살다가 그 진리를 위해 죽기까지도 원한다.


옛날에 제물은 계약을 확증하는 뜻이 있었다. 바울의 순교의 죽음은 그가 전파했던 복음의 약속을 확증하는 제물과 같았다. 기독교 복음은 이와 같이 순교자들의 피로 인쳐진 복음이다. 순교자들은 진리를 위해 충성되이 살았고 진리를 위해 기꺼이 죽었었다. 오늘 우리도 이 진리를 굳게 붙잡고 하나님 앞에 충성하자.


\'떠날 기약\'이라는 말은 죽을 때를 가리킨다. 바울은 지금, 아마도 하나님이 주신 통찰력으로, 자신의 죽음의 시간이 가까움을 느끼고 있다. 죽음은 떠나는 것이다. 어디로 떠나는 것인가? 하나님께로 떠나는 것, 이 세상에서 천국으로 떠나는 것이다. 성도는 거기서 임시로 거처하다가 주 예수께서 오실 때 함께 와서 육체와 다시 결합하여 영광스러운 몸이 되어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는 주의 재림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질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러나 그 때가 되기 전까지 성도는 임시로 세상을 떠나 하나님께서 계신 하늘로 올리워 간다. 그것이 성도의 죽음이다. 다시 말해, 성도의 죽음은 세상에서 천국으로 이동하는 것이요 이사하는 것이다.


[7]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죽음이 가까움을 느끼는 바울 사도는 자신의 사명의 생애를 이 몇 마디로 표현하였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웠다. 나는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 나는 믿음을 지켰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의 진실한 고백이었다. 사람들이 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그에게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성도의 생애가 싸움의 생애임을 보인다. 그러나 그 싸움은 나쁜 싸움이 아니고 선한 싸움이다. 신앙 생활은 영적 싸움이다. 성도는 날마다 자신의 죄악성과 싸우며 세상의 악한 풍조와 싸우며 그 배후에 활동하는 사탄과 악령들과 싸운다(엡 6:12; 2:2). 더욱이, 전도와 설교는 큰 싸움이다. 사명의 길은 싸움의 길이다. 바른 말씀의 전파는 마귀가 가장 싫어하는 일이다. 진리를 전파하는 것도, 진리를 보수하는 것도 싸움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무슨 싸움이든지 싸움은 언제나 힘들고 피곤해지기 쉽고 지치기 쉽다. 영적 싸움도 그러하다. 그러나 성도의 싸움, 사명자의 싸움은 선한 싸움이며 반드시 싸워 이겨야 할 싸움이다.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구원받은 이후의 바울의 삶은 선한 싸움을 싸운 삶이었다.


\'내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쳤다\'는 말은 바울 사도가 어떻게 사명의 길에 충성했는지를 증거한다. 바울 사도의 \'달려갈 길\'이란 전도자의 길이었다. 그는 그 사명의 일, 곧 전도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사도행전 20:24에 보면, 그는 고백하기를,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고 했다. 그의 사명의 길에는 많은 고난이 있었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면서 그의 일을 다 마쳤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각각의 사명의 일이 있다. 여러분의 사명은 무엇인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애에 주신 사명의 일을 깨닫고 그 일을 다 마쳐야 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위해 최선을 다하자. 중간에 주저앉거나 포기하지 말고 사명의 목표를 향해 힘써 달리자.


\'내가 믿음을 지켰다\'는 마지막 말은 믿음의 귀중함을 잘 증거한다. 지킬 것 중에 지킬 것은 믿음이다. 주 예수께 대한 믿음은 생명이며 보화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 그러나 그 믿음이 없으면 아무 것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참된 믿음이 파선되고 변질되는 것은 가장 슬픈 일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온갖 고난 중에서도 이 믿음을 지켰다. 오늘날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바른 믿음, 성경적 믿음, 순수한 믿음을 끝까지 잘 지키는 자들이 되자.


[8]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의의 면류관\'은 \'의라고 하는 면류관\' 곧 천국에서 누릴 완전한 의(義)를 가리킨다고 본다. 이와 같이, 성경 다른 곳에서 \'생명의 면류관\'(약 1:12; 계 2:10)과 \'영광의 면류관\'(벧전 5:4)이라는 표현들은 \'생명이라는 면류관\' 곧 영원한 생명과, \'영광이라는 면류관\' 곧 영원한 천국의 영광을 가리킨다고 생각된다.


이 의의 면류관 즉 의는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그에게 주실 것이라고 바울은 말한다. \'그 날\'은 주의 재림의 때, 마지막 심판의 때를 가리킬 것이다. 주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실 때 바울에게 의의 면류관을 주신다는 말은 바울을 의롭다고 선언하신다는 뜻일 것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이미 의롭다 하심을 받았지만, 장차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최종적으로 다시 의롭다고 선언될 것이다. 최종 심판에서 인류가 의인과 악인 두 부류로 나뉠 때, 바울은 완전한 의인으로 인정을 받고 영광을 얻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받을 의는 인간의 행위에 근거한 의가 아니다. 의는 하나님의 뜻을 다 행한 것을 말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99퍼센트 행한 것도 그에게 의가 되지 못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100퍼센트 행한 것이 의이다. 지극히 작은 부족과 결함도 의가 되지 못하고 죄로 간주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의 의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밖에 없다. 로마서 10:4은 말씀하기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고 했다.


이 영광스런 의는 바울에게만 주실 복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 주어질 복이다. 바울은 여기에서 성도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성경적 믿음과 소망의 핵심을 잘 드러낸다. 참된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의 재림과 천국과 부활을 사모하는 것이다. 반대로, 이 소망이 없이 세상의 것들에만 마음을 두고 있는 자들, 주의 재림에 대해 아무 사모하는 마음이 없는 자들은 참 신자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바울의 모범적 삶을 본받자. 우리도 바울처럼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킨 자로 우리의 삶을 마치기를 소원하자. 참된 믿음과 소망을 가지고 주의 재림을 사모함으로써 영광스런 의의 면류관, 곧 마지막 심판대에서 의인이라는 선언을 받게 될 것을 기대하자.



9-22절, 속히 내게로 오라


본문은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노(老)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속히 오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우리는 본문의 시작과 끝 부분에서 그 요청의 말을 읽을 수 있다. 9절,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21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본문에서, 바울은 이런 요청을 하면서, 복음 사역의 몇 가지 어려운 점들을 증거한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일은 중단 없이 진행되었고 이루어져 갔다.


[9, 10]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바울은 디모데가 속히 자기에게로 오기를 요청하였다. 왜 그러했는가? 원문에는 10절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서 그 이유를 보인다. 그것은 한마디로 동역자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복음 사역의 어려움 중에 가장 큰 것이 이것일 것이다--복음 사역자의 부족!


데마는 골로새서 4:14에 의하면 바울의 동역자로서 골로새 교인들에게 문안하였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떠나갔다. 아마 그에게는 옥에 갇히 바울의 모습이 초라하게 보였을 것이다. 그 노(老) 사도에게서는 세상적 소망이나 영광을 찾아볼 수 없었다. 데마의 생각에는, 바울은 속이는 자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속임수에 불과했을지도 모르겠다. 요한일서 2:15은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고 말씀했다.


바울은 또 말하기를,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다고 했다. 그는 그들이 왜 그 곳으로 갔는지 언급지 않았다. 아마도 그들이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배신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하튼 그들은 지금 바울 곁에 있지 않다. 옥에 갇혀 몸이 부자유스럽고 나이 많은 바울 사도 곁에 그를 도울 마땅한 복음 사역자가 없었다.


[10, 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었노라.


누가는 골로새서 4:14에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라고 표현되어 있다. 그는 의사로서 주께 헌신하여 바울과 더불어 전도 활동에 참여하였고 지금도 바울 곁에서 그를 돕고 있다. 그는 바울을 위해 의학적 배려도 아끼지 않았을 것이다.


두기고는 에베소로 보내어졌고, \'누가만\' 바울과 함께 있었다. \'누가만\'이라는 표현은 바울 사도의 곁에 필요한 동역자들이 부족했다는 것을 잘 나타낸다. 본문 20절 이하에도 몇 명의 인물들의 이름이 언급되지만, 복음 사역을 위해 중요한 일군들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마가는, 사도행전 15장에 보면, 바울의 처음 전도 여행시에 바울과 함께 있었으나 밤빌리아의 버가에서 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와 함께 일하기를 강하게 거절하였었다. 이런 확고한 신념 때문에 바울은 심지어 가장 절친했던 동역자 바나바와 심히 다투었고 마침내 서로 헤어지기까지 했었다(36-41절 참조). 그러나 이제 바울은 마가가 그의 일에 유익하므로 데려오라고 말하는 것이다. 이전에는 마음이 약했던 마가가 이제는 바울에게 유익한 일군이 되었다.


복음 사역에는 사람이 필요하다. 충성된 일군이 필요하다. 그러나 교인들은 많으나,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충성된 일군은 많지 않은 것 같다. 대 사도 바울에게 동역자가 부족했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아직 디모데 같은 동역자가 있었고, 누가도 있었다. 또 마가도 이제 그에게 유익한 동역자의 한 사람이었다. 그들은 어서 속히 바울에게 와야 했다.


[13] 네가 올 때에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고 또 책은 특별히 가죽 종이에 쓴 것을 가져오라.


바울에게 있어서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동역자의 부족뿐이 아니었다. 그는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다. 감옥은 춥고 배고프며 기타 육신적 고통이 있는 곳이다. 더군다나 겨울이 다가오고 있었다(21절 참조). \"내가 드로아 가보의 집에 둔 겉옷을 가지고 오라\"는 말 속에서 우리는 감옥에 갇혀 있는 노(老) 사도가 밤의 추위에 떠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추위, 그것은 복음 사역의 어려움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런 상황에서도 주의 일에 힘썼고 성경 말씀을 읽는 일에 관심을 가졌다. 그는 디모데에게 가죽 종이에 쓴 책을 가져오라고 부탁했다. 그것은 물론 성경책이다. 원문에는 복수명사로 되어 있다. 그것은 여러 권의 책들, 즉 여러 개의 두루마리들을 의미한다. \'가죽 종이\'라는 원어(멤브라나)는 양피지 즉 양의 가죽을 말려서 만든 종이를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옥 중에서도, 배고픔과 추위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일을 쉬지 않았고 성경 말씀을 읽고 묵상하며 연구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는 평안할 때, 건강할 때, 경제적 여유가 있을 때 얼마나 더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더 성경 말씀을 읽고 연구하고 배우는 일에 힘써야 하겠는가?


[14, 15] 구리 장색 알렉산더가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니,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복음 사역의 또 하나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이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디모데전서 1:20에 언급된, 착한 양심을 버리고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한 자들 중에 한 사람인 그 알렉산더일 것이다. 그는 처음에 교인이었던 것 같다. 직분자 중에 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옛날 모세를 대적했던 고라처럼, 또 예수님의 열 두 제자 중 하나이었던 가룟 유다처럼, 그는 하나님과 진리를 배반한 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였다. \'해를 많이 보였다\'는 말은 \'악한 일을 많이 행했다\'는 뜻이다.


또 그는 바울의 말을 심히 대적했다. 요한복음에 보면, 예수님 당시에 유대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았고 무시했고 그와 변론했고 그의 말씀을 심히 대적했었다. 이런 자들이 구약 교회 안에도, 신약 교회 안에도 있었다. 진리의 말씀을 바로 전파했던 예수님에게도, 바울에게도 있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의 사역에 이런 대적자들이 있다고 해서 이상히 여길 것은 없다. 복음 사역에는 항상 이런 어려움이 있기 마련이다.


요한삼서에 보면, 더 기가 막힌 일이 있었다. 9절로 11절을 읽어본다. \"내가 두어 자를 교회에게 썼으나 저희 중에 으뜸되기를 좋아하는 디오드레베가 우리를 접대하지 아니하니 이러므로 내가 가면 그 행한 일을 잊지 아니하리라. 저가 악한 말로 우리를 망령되이 폄론하고도[부당하게 비난하고도] 유위부족하여[오히려 부족하여] 형제들을 접대치도 아니하고 접대하고자 하는 자를 금하여 교회에서 내어쫓는도다. 사랑하는 자여 악한 것을 본받지 말고 선한 것을 본받으라.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 교회 안에는 구리장색 알렉산더 같고, 디오드레베 같은 사람들이 종종 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고 말한다. 진실한 성도는 이런 자를 주의해야 한다. 이런 자가 있다고 해서 낙심할 것은 없다. 주의하면 된다. 이런 자들과 동류가 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런 자들과 사귀면 신앙에 유익 대신에 큰 손해를 입기 때문이다.


바울은 \'주께서 그 행한 대로 저에게 갚으시리라\'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마지막 심판 때에 악인들을 심판하시는 것은 물론이지만, 현세에서도 그는 악인들의 악을 보응하신다. 그 까닭은, 그 징벌로 인하여 악인들이 회개하고 구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며, 또 하나님의 일이 너무 방해를 받지 않고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16] 내가 처음 변명할 때에 나와 함께 한 자가 하나도 없고 다 나를 버렸으나 저희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복음 사역의 어려움은 대적자가 있는 것뿐 아니라, 또한 때때로 외로이 홀로 싸워야 하는 것이다. 바울이 처음 복음을 변명할 때 그의 편에 선 자가 아무도 없었다. 얼마나 외로운 사역의 걸음인가! 이것이 진실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이 때때로 가야 했던 길이다. 노아가 이 길을 갔고, 엘리야가 이 길을 갔으며, 다니엘이 이 길을 갔다. 바울도 이 길을 갔고, 우리도 그러해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그를 버렸던 자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했다. 바울은 저 무지하고 깨달음이 없었던 자들을 긍휼과 사랑으로 감싸고 있었다. 이것이 주님이 보여주셨던 긍휼과 사랑이다. 주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고 말씀하셨다(눅 23:34).


[17]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를 강건케 하심은 나로 말미암아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이방인으로 듣게 하려 하심이니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이 있다. 바울의 복음 사역에 대적자가 있었고, 또 사람들의 지지나 격려는 커녕 오히려 모든 사람이 그를 버림으로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함이 있었지만, 그러나 주께서는 그와 함께 하셨고 그를 강건케 하셨다. 복음 사역자의 용기와 힘은 거기에 있다. 또 주께서 함께 하신다는 그 한가지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신 목적은 그를 통해 전도의 말씀이 온전히 전파되어 모든 이방인들이 듣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원문에는 \'이방인\' 앞에 \'모든\'이라는 말이 있다. 복음은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이다. 주께서 전도자들, 설교자들을 강건케 하시는 것은 이 말씀이 바로 전파되어 택한 백성들이 다 구원 얻게 하기 위해서이다.


극심한 반대와 비난, 그리고 위협과 고난이 바울에게 있었지만, 그는 \'사자의 입에서 건지웠다.\' \'사자의 입\'이라는 말은 그를 죽이려는 무서운 악의 세력을 비유한 표현일 것이다.


[18]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 가도록 구원하시리니 그에게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구원하신다\'는 원어(소죠)는 \'구원한다\'는 뜻 외에 \'지킨다\'는 뜻이 있다. 이 경우는 영어 성경의 번역대로 \'지킨다\'는 뜻이 적합해 보인다. 주께서는 바울을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셨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기까지 지키실 것이다. 바울뿐 아니라, 주의 신실한 모든 종들과 자녀들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만 의지하고 주님 앞에서만 신실하자.


성경에서 \'주\'는 대부분의 경우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께서 바울을 강건케 하시고 모든 악에서 구원하시고 끝까지 보존하신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영광을 세세 무궁토록 돌린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그는 신적 능력을 가지시고 일하시며 신적 영광을 받으시는 참된 하나님이시다.


[19-22] 브리스가와 아굴라와 및 오네시보로의 집에 문안하라. 에라스도는 고린도에 머물렀고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노니 겨울 전에 너는 어서 오라. 으불로와 부데와 리노와 글라우디아와 모든 형제가 다 네게 문안하느니라. 나는 주께서 네 심령에 함께 계시기를 바라노니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드로비모는 병듦으로 밀레도에 두었다\'는 원어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었다\'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병고치는 은사를 받은 자이었다. 사도들이 다 그러하였다. 그러나 바울 사도의 사역 말기에 그는 드로비모를 병든 채 밀레도에 두는 일이 있었다. 이것은 사도 시대의 말기에 주께서 병고침의 은사를 점차 거두어 가신 증거일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의 뜻은, 기적이 모든 시대에 계속되는 것이 아니었다. 기적들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의 말씀들을 확증하는 목적을 가졌을 뿐이며, 그 목적이 이루어졌을 때 기적들이 거두어지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었다.



말씀을 정리해본다. 복음 사역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다. 동역자의 부족이 그 첫째의 어려움이다. 본문에서 \'추위\'로 표현된 육체적 고난, 감옥에 갇힘, 의식주의 궁핍 등이 또 다른 하나의 어려움이다. 그리고 대적자가 있고 교인들이 진실한 전도자를 이해하지 못하고 버리는 것이 또 하나의 어려움이다. 복음 사역에만 이런 어려움이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신앙 생활 전반에서 때때로 이런 류의 어려움이 있다. 참된 교제를 나눌 대상이 없음, 의식주의 궁핍, 홀로 외로이 싸워야 함 등의 어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바울에게는 디모데나 누가나 마가와 같은 몇 명의 동역자가 있었다. 또 바울은 어려움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일에 힘썼고 성경 읽기에 힘쓰고자 하였다. 더욱이, 사람들은 그를 버렸을지라도, 주께서는 그를 도우셨고 구원하셨고 또 앞으로도 끝날까지 그를 지키실 것이다.


오늘 우리는 데마처럼 이 세상을 사랑하여 변절치 말고, 바울과 디모데처럼 충성된 일군, 충성된 동역자가 되자. 또 어떤 환경 속에서도 낙망치 말고 하나님의 일에 힘쓰고 성경 읽기에 힘쓰자. 또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고 지키심을 잊지 말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