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모데 전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 바른 교훈
2장 : 기도와 선행·
3장 : 감독과 집사의 자격
4장 : 목사의 자기 훈련
5장 : 과부와 장로에 대한 교훈
6장 : 자족하는 생활
디모데 전서와 후서 그리고 디도서는 바울 서신들 중에서 \'목회서신\'으로 불리운다. 그것은 이 서신들이 일차적으로 목회자들에게 많은 교훈을 주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봉사자들은 특히 이 서신들을 자세히 읽고 공부함으로써 좋은 일군, 충실한 봉사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서신들은 목회자들에게만 유익한 것이 아니고 모든 성도들에게도 많은 진리와 교훈을 준다.
1장: 바른 교훈
1-2절, 문안
[1] 우리 구주 하나님과.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나 곧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구원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사 43:11). 신약성경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라고 자주 표현하지만, 그를 보내주신 분은 하나님이시므로 궁극적으론 하나님이 우리의 구주이시다.
이 세상엔 하나님밖에 참 구주가 없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을 의지하고 자기 재능을 의지하고 돈과 재물을 의지하지만, 그것들은 참된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말하기를, \'사람의 구원은 헛되다\'고 했고, \"방백들을 의지하지 말며 도울 힘이 없는 인생도 의지하지 말지니 그 호흡이 끊어지면 흙으로 돌아가서 당일에 그 도모가 소멸하리로다. 야곱의 하나님으로 자기 도움을 삼으며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그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고 했다(시 60:11; 146:3-5).
구원의 능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그는 창조자이시다. 이방인들의 모든 신들은 헛 것이요 여호와께서는 하늘을 지으셨다(시 96:5). 창조자 하나님만이 참 신이시다. 천지를 짓지 아니한 신들은 땅 위에서와 하늘 아래서 망할 것이다(렘 10:11). 창조주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 그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며 무슨 계획이든지 못이룰 것이 없으신 하나님이시다(욥 42:2).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다. 그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도 말씀하시기를,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하셨다(사 45:6, 7).
또 그는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느니라.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고 하셨다(사 46:9-11).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실 수 있고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다.
무슨 도움, 무슨 구원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죄로부터의 구원을 말한다. 물론 그것은 죄의 결과인 사망, 각가지 불행, 마침내 지옥형벌 등으로부터의 구원을 포함한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사망, 불행, 지옥형벌은 하나님 자신이 내리는 죄에 대한 징벌이다. 그것은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리는 공의로운 처분이다. 그 근본원인은 인간의 죄이다. 그 죄문제는 인간이 스스로 해결해야만 할 어떤 것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죄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누가 죄로부터 인간을 자유케 할 수 있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내셨다. 친히 자기 아들을 십자가 위에 희생시킴으로써 우리를 죄로부터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를 죄로부터 건져내신 구주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는 범사에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바라고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어야 한다.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는도다. . . 백성들아 시시로 저를 의지하고 그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시 62:1, 8).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우리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시다.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그는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자신의 살아나심을 확실히 증거하셨고 그들이 보는 데서 하늘로 올리우셨다. 그는 하늘로부터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 다시 오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의인들은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악인들은 심판을 받고 마침내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광의 소망\'(골 1:28), \'복스러운 소망\'이라고 말했다(딛 2:13). 또 그는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고 말했다(빌 3:20, 21). 요한 사도도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증거하였다(요일 3:2).
예수님 믿고 죄에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께만 소망을 두고 세상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자신에게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그는 자기 재능, 자기 실력, 자기 건강을 과신하지 말아야 한다. 인생은 짧다. 백년은 곧 지나간다. 곧 늙고 병들고 쇠하는 시절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을 의지하고 소망하는 자보다 더 어리석은 자는 없다. 우리는 자신을 의지하고 소망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소망하자.
성도는 또한 세상의 것들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특히 부자들은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아야 한다. 본서신 끝부분에서 바울은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게 하라\"고 말했다(딤전 6:17). 재물은 \'정함이 없는 재물,\' 불확실한 재물이다. 세상의 것들이 다 그러하다. 성도가 이 지나가는, 불확실한 것들에 어찌 소망을 둘 수 있겠는가! 우리의 소망을 오직 하나님께, 예수님께 두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소망이시다!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바울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가 되었다고 말한다.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은 인생의 본분이다. 그러므로 구약성경 전도서는 결론적으로,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지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고 말했다(전 12:13).
에덴 동산에서 첫 사람의 실패는 불순종에 있었다. 불순종에서 인생의 모든 불행이 왔다. 그러므로 구약 율법은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복되며, 물질적 복, 건강의 복, 평강의 복을 누린다고 말한다. 그러나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면 개인적으로, 가정적으로, 사회적으로 화(禍)가 있으며 흉년과 기근, 여러 가지 질병들, 전쟁 등이 당하게 된다고 말한다. 율법에는 약 16가지의 병들을 언급한다(레 26장; 신 28장).
오늘날 구원받은 우리는 순종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다시 불순종의 길로 가서는 안된다. 불순종은 멸망의 길이고 순종은 평강의 길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했다. \'사도\'는 복음을 위해 보냄을 받은 자(롬 1:1)를 말하는데, 그는 하나님이 \'너는 사도가 되어라\'고 명령하시자 곧 순종했던 것이다. 그가 사도가 된 것은 자기 뜻대로 한 것이 아니고 주의 명령에 순종한 것이었다.
마치 이사야가 환상 중에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을 때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대답한 것처럼(사 6:8), 바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마치 예수님께서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고 부르셨을 때 \'곧 그물을 버려두고\' 주님을 따른 것과 같이(마 4:19, 20), 그는 주의 명령에 순종하였다. 우리도 하나님께 순종하는 자가 되자.
[2]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을 믿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것이 구원이 되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대로, 다른 모든 것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곧 믿음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요 곧 \'하나님의 일\'이다(요 6:27, 29). 우리는 이 믿음이 확실한 지식을 가진 믿음, 견고한 믿음이 되도록 소원하고 힘써야 한다.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믿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 생기기 때문에(롬 10:17)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움으로써 그렇게 되어야 하겠다.
디모데는 믿음 안에서 바울의 참 아들이었다. 바울은 독신으로 살았고(고전 7:7) 디모데에게는 헬라인인 아버지가 있었다(행 16:3). 그러므로 \'믿음 안에서 참 아들\'이라는 말은 바울이 육신적으로 디모데를 낳았다는 뜻이 아니고, 디모데가 바울의 전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되었다는 뜻이든지, 아니면 믿음 안에서 바울이 디모데를 진짜 아들처럼 여겼다는 뜻일 것이다.
육신적인 아들보다 영적인 아들은 더 귀하다. 육신적인 가족관계보다 영적인 가족관계가 더 귀하다. 예수님께서는 \"누가 내 모친이며 동생들이냐? . . . 누구든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는 내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니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막 3:33, 35). 우리도 믿음 안에서 서로 존경하고 따르고 순종하고 섬기는 아름다운 영적 가족들이 될 수 있다.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은혜와 긍휼\'이라는 특이한 표현은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는 표현일 것이다. 성도는 하나님과 주 예수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긍휼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구원을 받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구원을 얻은 것은 그가 원했기 때문이거나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 아니고 오직 긍휼이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었다(롬 9:16). \'긍휼에 풍성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다\'(엡 2:4, 5).
성도는 또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신앙생활을 하며 성화되어 간다.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도우신다(롬 8:14, 26). 성도는 포도나무의 가지처럼 그리스도께 연합되어 있음으로써 열매를 맺는다(요 15:4, 5). 그리스도는 머리시요 성도들은 그의 몸과 같아서, 온 몸은 그에게서 각마디를 통하여 은혜와 도움을 입는다(엡 4:16). 우리는 다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가고 있고 의와 거룩의 열매를 맺는다.
성도의 봉사생활도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이루어진다. 우리는 성령으로 봉사한다. 성령의 위로하심과 도우심이 우리에게 늘 있기 때문에 우리는 낙심치 않고 주의 영광을 바라며 일할 수 있다.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였다(고전 15:10).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강\'도 성도에게 얼마나 요긴한 복인지 모른다. 세상은 요동하는 바다물결 같고 여러 가지 염려거리들이 우리에게 밀어닥친다. 그때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이 아니면 마음의 평안을 누릴 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성경은 약속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다(빌 4:6, 7).
3-11절, 다른 교훈을 경계함
[3]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바울 사도는 마게도냐로 갈 때에 디모데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하였다. 그가 디모데를 에베소에 머물게 한 목적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게 하려 함이었다. 여기에 어떤 사람들은 누구인가? 그들이 다른 사람들을 가르치려 한 것을 보면 믿은 지 꽤 된 사람들인 것 같다. 그들은 사람들 앞에서 교사로 자처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들은 바른 말씀을 전하는 자들이 아니었다.
다른 교훈은 하나님의 말씀과 다른 교훈, 성경에 계시된 복음진리와 다른 말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른 진리, 바른 교리와 다른 말이다. 그것은 바른 말이 아니다. 그런 다른 교훈, 다른 말은 금지되어야 한다. 세상에서는 별별 말들이 많아도, 교회 안에서는 그래서는 안된다. 참 교회의 표는 바른 교훈에 있다. 교회가 성경의 바른 교훈에서 떠나면 부패하기 시작하고 참 교회의 표를 잃게 된다.
여기에 교훈의 통일성, 일치성의 필요가 있다. 무엇과의 일치를 말하는가? 하나님의 말씀, 성경말씀, 역사적 기독교 신앙과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2천년 교회역사의 정통적 흐름에의 일치이다. 신구약 66권의 성경만 참 교훈의 유일한 기준이다. 성경만이 신앙과 행위에 유일한 규범이다.
물론, 이렇게 말할 때 우리는 성경의 주관적 해석을 버리고 객관성 있는 해석을 취해야 한다. 무엇이 객관성 있는 해석인가? 일차적으로, 우리는 성경의 본문의 문법적, 문맥적 해석을 해야 한다. 그 다음, 역사적, 배경적 해석이 필요하다. 그 다음, 신학적 해석이 요구된다. 그것은 성경을 성경으로 해석하는 것, 곧 성경을 전체적으로 통일성 있게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4]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신화는 사실이 아닌 것, 비역사적인 것, 허구(虛構), 만든 이야기를 가리킨다. 그것은 역사적 사실, 역사적 사건, 역사적 계시의 말씀과 대조된다. 성경은 역사적 사실, 역사적 사건, 역사적 계시의 말씀이다. 그것은 신화가 아니다. 우리는 신화적인 것을 논하지 않고 사실을 논한다. 하나님의 진리는 허구가 아니고 사실이다.
족보는 육신적 계통, 혈통을 말한다. 그것이 귀한 유산일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육신적 족보 자체가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육신적 족보로 말하면, 천주교회가 사도들의 후예일지 모른다. 그러나 진리의 사상으로 말하면, 그 교회는 사도들로부터 이탈하였고 변질되었다. 그러므로 육신적 족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적 족보, 진리 사상의 계보이다. 사상적 계대가 중요하다. 사실상, 육신적 족보는 헛되다. 누구의 아들, 누구의 손자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하나님의 교회 내에서는 성경적 사상을 가진 자가 하나님의 참된 종이요, 성경적 입장을 취하는 자가 사도의 참 계승자이다.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경륜\'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는 \'계획\'을 뜻한다. 하나님의 경륜이란 하나님의 계획, 곧 죄인들을 향한 그의 구원계획, 성도들을 향한 그의 성화계획을 가리킨다. 그 계획이 믿음 안에 있다는 말은 구원은 믿음으로 시작되고 믿음으로 진행됨을 말한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받고, 구원받은 성도는 믿음 안에서 성화되어 간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믿음의 충만함, 곧 확신에 이르는 것이다.
참된 교훈은 이 믿음을 굳세게 하지만, 바른 교훈을 저버린 자들, 신화와 족보에 착념하는 자들은 이 믿음을 위하지 않고 변론만 일으키는 자들이다. 변론은 말만 무성한 것을 말한다. 그것은 말잔치, 말장난을 가리킨다. 그런 변론은 참 믿음에 아무 유익이 없으며 참된 믿음의 성장에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5]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거늘.
\'경계의 목적\'이라는 말은 바른 교훈의 목적, 곧 설교와 가르침의 목적을 가리킨다. 교훈의 목적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그 사랑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는 사랑이다. 첫째로 청결한 마음이란 회개한 마음, 죄씻음 받은 마음을 가리킨다. 죄가 우리 마음을 더럽혔었고 지금도 더럽힌다. 그러나 근본적인 회개와 죄씻음을 통해 마음이 깨끗함을 얻었고 또 계속 씻음을 받는다.
둘째로 선한 양심이란 바른 도덕적 분별의식을 가리킨다. 양심은 고의적 범죄로 더러워져서는 안된다. 고의적 불순종으로 화인맞은 양심이 되어서는 더더욱 안된다. 우리는 성실한 순종생활로 선한 양심을 간직해야 한다. 셋째로 거짓 없는 믿음이란 믿는 모양만 갖춘 것이 아니고 작을지라도 진실하게 믿기 시작한 믿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진실한 증거에 근거하며 솔직한 마음으로 그 증거를 받아들이게 된 믿음이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 이 세 가지에서 나는 사랑이 바른 교훈, 바른 설교의 목표이다. 하나님의 뜻은 한 마디로 사랑이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옆으로 형제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곧 경건함이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는 헛된 우상들을 다 버리게 된다. 그는 오직 삼위일체 하나님께만 찬송과 경배와 기도를 드린다. 그는 성경말씀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다.
이웃사랑, 형제사랑은 도덕법의 완성이다. 그런 사랑을 가진 자는 부모를 공경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이의 생명을 존중하고 다른 이의 순결성을 존중할 것이다. 그는 다른 이의 재산을 존중하고 다른 이의 명예를 존중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당연한 결과이다.
결국, 구원받은 새 생활의 목표는 사랑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목표다. 그것은 진실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랑, 거짓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다.
[6, 7]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인 이런 사랑을 알지 못하고 헛된 말에 빠져 있다. 그들은 바른 말, 유익한 말, 진실한 말에서 떠나 허탄한 말, 쓸데 없는 말, 무익한 말, 거짓된 말, 틀린 말에 빠져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잘못된 율법교사들이다. 참된 믿음과 사랑에 서 있지 못한 자마다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참 믿음에 유익을 주지 못하고 참 사랑을 가르치지 못하는 자마다 다 그러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말이나 자기들이 확신 있게 주장하는 말도 실상 이해하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 지식 있는 종들이 아니다.
[8] 그러나 사람이 율법을 법있게 쓰면 율법은 선한 것인 줄 우리는 아노라.
\'법있게 쓰면\'이라는 말은 \'정당하게 사용하면\'이라는 뜻이다. 율법을 잘못 해석하면 저 율법교사들처럼 허무한 오류에 빠질 수도 있지만, 그러나 율법을 정당하게 사용하면 율법은 선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본의도대로 그것을 이해하고 해석하며 복음진리에 맞게 그것을 적용한다면, 율법은 우리에게 많은 교훈과 유익을 줄 것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우리에게 다 유익하다.
[9] 알 것은 이것이니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며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며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며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며 살인하는 자며.
그러나 율법은 의인을 위해 세운 것이 아니요 죄인을 위해 세운 것임을 알아야 한다. 율법은 우리가 그것을 행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하려고 주신 것이다(롬 3:20). 그것은 죄인을 위해 주어진 것이다. 바울은 이제 9절, 10절에서 15가지의 죄인의 목록, 죄악의 목록을 열거한다.
불법한 자는 의의 율법을 거스려 행하는 자를 가리키며, 복종치 않는 자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치 않는 자를 말한다. 경건치 않은 자는 하나님 없이 사는 자를 말하며, 망령된 자는 세속적인 자, 세속적 죄악에 물든 자를 말한다. 아비를 치는 자와 어미를 치는 자라는 원어는 아비를 죽이는 자와 어미를 죽이는 자라는 뜻을 가진다.
[10, 11] 음행하는 자며 남색하는 자며 사람을 탈취하는 자며 거짓말하는 자며 거짓 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좇음이니라.
남색하는 자는 동성연애자를 가리키고, 사람을 탈취하는 자는 소위 유아 유괴자, 인신매매자를 말한다. 이상에 언급된 15가지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악된 자들이며 죄악들이다. 이런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죄를 깨닫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던 것이다. 율법을 통하여 죄를 깨닫고 죄의 댓가와 형벌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죄인들에게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죄에 대해 어떻게 진노하시고 심판하실 것인지, 지옥의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알게 될 때 죄인은 회개하며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원어(휘기아이누사 디다스칼리아)는 \'건전한 교훈, 순수한 교훈\'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복음진리를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진리를 말한다. 그것은 또한 믿음의 교훈이다.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도리이다. 율법 앞에서 죄인임을 깨닫게 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우리가 복음 안에서 받은 구원의 복이다.
그러나 불건전한 율법 선생들이 나타나 다른 교훈을 퍼뜨리고 있었다. 그들은 율법을 잘못 해석하고 잘못 적용했다. 그러나 율법을 복음과 충돌되게 해석하거나 적용해서는 안된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의 표준으로서 그리고 우리의 부족을 깨닫게 하는 수단으로서 여전히 필요하지만, 그것은 구원의 직접적 수단이거나 심지어 성화의 효력 있는 수단도 아니다. 우리의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십자가 의를 통해 왔고 우리의 성화는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성취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율법조문을 따라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성령을 따라 섬긴다.
복음을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이라고 말한 것은 복음의 목표를 보인다. 복음은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의 소식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예비하신 영광에 이르게 한다.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로 죄씻음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장차 영광의 부활에 이르게 될 것이다. 또 영광스런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예비해두신 곳이다. 그 영광의 세계가 모든 성도들의 소망이다.
12-17절,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와 찬송
[12]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자신의 과거를 생각하면 사도의 직분을 받아 힘있게 일할 힘이 도무지 없을 바울이었지만, 예수께서는 그에게 큰 은혜를 주셨다.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고 그를 힘있게 하여 사용하셨다.
우리는 본절에서 복음사역자의 힘이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온다는 사실을 다시 깨닫는다. 사람은 복음사역을 위해 아무런 힘이 없다. 영혼구원은 기적 중에 기적이다. 능력 있는 설교와 권면은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다. 또 낙심할 만한 여러 악조건 속에서도 낙심치 않고 견디어내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이다.
또 본절은 충성된 자에게 직분이 주어진다는 사실도 보인다. 바울은 비록 무지함으로 믿는 이들을 핍박했지만 충성된 인품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주께서는 그를 충성되이 여겨 직분을 주셨다. 주님은 충성된 자에게 직분을 주신다. 많이 충성한 자에게는 큰 직분을 주시고 조금 충성한 자에게는 작은 직분을 주실 것이다. 또 작은 일에 충성하면 큰 일을 맡기신다고도 말씀하셨다(마 25:21; 눅 19:17).
[13]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사람들에게는 다 과거가 있을 것이다. 과거의 부족과 실수가 있을 것이다. 바울도 과거가 있었다. 그는 과거에 \'훼방자, 핍박자, 포행자\'이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비방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해롭게 하였다. \'포행자\'라는 한자말(暴行者)은 \'폭행자\'라고도 읽을 수 있다. \'믿지 아니할 때\'라는 원어는 \'불신앙 가운데서\'라는 뜻이다. 바울은 과거에 불신앙 가운데서 무지함으로 그런 악을 행하였다. 그런데, 비록 그 죄악이 심히 컸지만, 주께서는 무지함으로 악을 행한 바울을 불쌍히 여겨주셨다.
[14]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주의 긍휼과 은혜는 참으로 컸다. 그것은 \'넘치도록 풍성하였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이라는 말은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의미할 것이다. \'믿음과 사랑과 함께\'라는 말은 주 예수님의 풍성한 은혜가 주께 대한 믿음과 사랑의 풍성함으로 나타남을 보인다. 구원의 풍성한 은혜는 구원적 믿음과 사랑의 풍성함으로 나타난다. 또한 거기에서 주를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도 생기고 직분도 주어진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미쁘다\'는 말은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이라고 번역한 원어(파세스 아포도케스 악시오스)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전적으로 받을 만한\'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은 신실한 말씀이요 전적으로 받을 만하다는 뜻이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는 것이 복된 소식이다.
\'그리스도 예수\'라는 말은 역사적 인물, 유대인의 청년 예수가 하나님이 보내신 메시야 곧 구주이심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에 약속된 구주는 다윗의 자손으로 오시지만 단순히 사람이 아닌 신적 존재이실 것이었다. 그에게는 신적 명칭과 속성이 돌려져 있다(사 9:6; 미 5:2). 그가 오시는 목적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함이셨다. 그는 이 일을 위해 그 몸에 찔림과 상함을 받으실 것이 예언되어 있었다(사 53:5).
바울이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니라\'고 표현한 것은 자신이 예수님을 비방했고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해쳤기 때문일 것이다. 모든 죄들이 다 하나님의 진노를 일으키지만, 특히 예수님과 그 복음을 대적하는 행위는 큰 죄이다. 하나님 대적, 복음 대적, 진리 대적은 죄 중에 가장 큰 죄이다. 우상숭배나 이단도 그런 류에 속한다.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절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이라는 원어(디아 투토 엘레에덴)는 \'내가 이 때문에 긍휼을 입은 것은\'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이 때문에\'는 \'죄인의 괴수이기 때문에\'를 가리키는 것 같다. 죄인의 우두머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에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셔서 후에 주를 믿어 영생얻는 자들에게 표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큰 죄인, 으뜸 죄인이 주의 긍휼을 입어 구원받았으므로, 이제 어떤 죄인이라도 주의 긍휼을 입을 수 있음이 증거되었다. 어떤 악한 죄인이라도 회개하고 구주 예수께로 나와 그를 믿으면 구원과 영생을 받을 수 있다.
[17] 만세의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을지이다. 아멘.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을 감사한 바울 사도는 이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바울은 우선 하나님을 \'왕\'이라고 표현한다. 왕은 하나님의 통치의 권세를 나타낸다. 우리는 그것을 섭리라는 말로 표현한다. 하나님은 섭리자 곧 만물과 인류를 통치하시는 분이시다.
바울은 왕이신 하나님께 몇 가지 속성들을 돌린다. \'만세의\'라는 말은 \'영원하신\'이라는 뜻이다. 인간은 시작과 끝이 있는 유한한 존재이지만, 하나님은 영원하시다. 그는 시작과 끝이 없으신 무한자이시다. \'썩지 아니하고\'라는 원어는 \'죽지 아니하고\'라는 뜻이다. 모든 피조물은 죽지만 하나님은 죽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또한 \'보이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순수한 영이시다. 영은 보이지 않는다. 보이는 세계는 물질세계뿐이다. 그러나 영은 비록 보이지 않지만 실제로 존재하고 또 보이는 물질보다 더 중요하다. 하나님은 또한 \'홀로 하나이시다.\' 세상에는 하나님이 한 분뿐이시다. 다른 신들은 다 헛 것이다. 천지를 창조하신 여호와 하나님 한 분 외엔 다 헛되다.
전통사본엔 그 다음에 \'지혜로우신\'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은 지극히 지혜로우신 분이시다. 그의 지혜는 무한하시다. 하나님의 지혜에 비하면 인간의 지혜는 바다가에 한 알의 모래알갱이만도 못하다. 바울은 이렇게 하나님의 속성들을 몇 가지 열거한 후에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세세토록 있기를 기원한다. 그것은 참으로 합당한 송영이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를 감사하며 찬송하자.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큰 죄악에서 건지신 주 은혜 고마와, 나 처음 믿은 그 시간 귀하고 귀하다. 이제껏 내가 산 것도 주님의 은혜라, 또 나를 장차 본향에 인도해 주시리. 거기서 우리 영원히 주님의 은혜로, 해처럼 밝게 살면서 주 찬양하리라. 아멘\"(찬송가 405장).
18-20절, 선한 싸움을 싸우라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아들 디모데야 전에 네게 주어졌던 예언들을 따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너는 그것들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세상엔 선한 싸움도 있고 악한 싸움도 있다. 불의의 이익을 구하는 싸움이나 탐욕적인 싸움은 악한 싸움이다. 그러나 여기에서 선한 싸움이란 특히 믿음을 위한 싸움, 진리를 위한 싸움을 가리킨다.
이 세상은 영적 싸움터와 같다. 우리의 육신 속에는 성령의 생각과 대립되는 육신의 죄악성이 있다(갈 5:17). 이 육신의 죄악성은 우리가 싸워야 할 원수이다. 또한 세상의 죄악된 세력은 우리를 대항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한다(요 16:33).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는다(딤후 3:12). 더욱이, 세상에는 사탄과 악령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그들은 우리를 대적한다. 우리는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 곧 악한 천사들과 싸운다(엡 6:12).
이 싸움에서 승리하여 믿음을 지키려면 하나님의 주신 교훈의 말씀들로 무장해야 한다.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성경은 말한다(엡 6:17). 예수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되었으되\'라고 말씀하시면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그 시험을 물리치셨다.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선한 싸움은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기 위한 싸움이다. 싸움에 지면 불신앙과 부도덕에 떨어지게 된다. 영적 싸움의 승리는 믿음과 착한 양심을 지키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다. 그것은 배교와 변절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한 속죄신앙, 복음신앙, 성경신앙을 간직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선한 양심이 약해지거나 더러워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는 말씀묵상과 기도로 깨어 있음으로써 선한 싸움에 승리해야 한다.
[20]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단에게 내어준 것은 저희로 징계를 받아 훼방하지 말게 함이니라.
영적 싸움에서의 실패자들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었다. 이렇게 이름을 언급한 것은 인신공격이 아니다. 이미 시행된 권징을 알리며 우리에게 그것으로 교훈을 주는 것이다.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것은 제명출교를 가리킨다. 교회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이지만, 교회밖은 사탄의 세계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요일 5:19). \'내가 그들을 사탄에게 내어주었다\'는 말은 사도의 권위를 보이며 권징을 집행한 자가 사도 자신임을 증거한다. 이와 같이 오늘날 목사와 당회는 하나님께서 성도들 곧 회중을 통해 위탁하신 권위를 소유하며 권징을 집행하는 기관이 된다.
권징의 목적은 저희로 비난하지 않는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함이었다. \'징계를 받다\'는 원어(파이듀도시)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배우게 하다\'는 뜻일 것이다. 저들은 바른 진리를 비난하고 참된 믿음을 비방했다. 그와 더불어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을 비난했을 것이다. 그런 자들은 좁은 길보다 포용주의를 좋아하고 타협적인 종들을 기뻐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 제명출교의 권징을 통하여 그 훼방과 비난이 중지될 것이었다.
오늘날 우리도 이런 배교와 변절을 본받지 말고, 영적 싸움에서 실패하여 믿음과 착한 양심을 잃어버리지 말고,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우자. 성경말씀의 묵상과 기도로써 선한 싸움을 싸우며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간직하자. 특히 이 배교적이고 혼란한 시대에 순수한 신앙, 성경적 신앙을 지키고 착한 양심을 간직하는 성도들이 다 되자.
2장: 기도와 선행
1-8절, 기도에 대한 교훈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禱告)와 감사를 하되.
\'그러므로\'라는 말(운)은 여기에서 어떤 논리적 결론을 의미하지 않고 단순히 말의 연속을 나타낸다. 바울은 본장에서 먼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할 것을 교훈한다. 간구, 기도, 도고, 감사는 기도의 여러 측면들을 표현한다. 특히 \'도고\'라는 원어(엔튜크시스)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다른 사람을 위한 기도\'(intercession)라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우리가 아는 이든지 모르는 이든지 간에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의무가 있다.
[2]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특히 우리는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 오늘날 말로 위정자들, 공직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즉 대통령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국무총리와 장관들, 국회의원들, 법관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말이다. 우리는 그들의 구원을 위해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한 그들의 바르고 선하고 양심적인 봉사를 위해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런 기도의 결과로, 우리는 모든 경건과 단정한 중에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이와 비슷하게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가 사로잡혀 가게 한 그 성읍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라\"고 하셨다(렘 29:7).
사람은 돈만 있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도 좋은 인격이 더 중요하다. 이와 같이, 가정도 돈만 있다고 잘 사는 것이 아니고, 국가도 경제성장만 된다고 해서 잘 사는 나라가 되는 것이 아니다. 위정자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예수 믿고 죄씻음받고 구원받아 새 사람이 될 때, 그들을 통하여 양심적인 정치, 도덕적인 정치, 어질고 선한 정치가 나오게 되며 그때 사회가 평안케 되는 것이다.
[3] 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전통사본에는 본절 초두에 \'이는\'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를 보인다. 우리가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할 이유는 그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 풍성하시다. 그는 악한 자에 대해서도 오래 참으신다. 그는 사람들의 외모의 판단과 달리 그의 주권적 긍휼에 따라 택한 죄인들을 구원하실 것이다.
[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이것은 하나님의 일반적 의지를 증거한다. 이 의지는 그가 주신 율법에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은 악인들의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그는 모든 사람에게 회개하고 구원을 받으라고 선포하시고 초청하신다. 그러나 그의 일반적 의지가 그의 적극적 의지는 아니다. 사람의 구원에 관한 하나님의 적극적 의지는 제한적이다. 그는 만세전에 자기 백성을 선택하셨다. 그 선택된 수는 확실하고 고정되어 있고 불변적이다. 그는 적극적으로 그들만 구원하기를 원하시며 또 그들만 구원하실 것이다.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원문에는 \'이는\'이라는 말이 나와서 모든 사람을 위한 기도의 이유를 반복한다.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는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므로 우리는 아무쪼록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택한 모든 사람이 다 구원얻기 위하여 기도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진리는 구약성경이나 신약성경에 공통적으로 밝히 계시된 진리이다(출 20:3; 신 6:4; 사 43:10, 11; 44:24; 46:9; 고전 8:6; 엡 4:6).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뿐이시다. 예수님께서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다(요 14:6).
[6]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贖錢)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속전\'이라는 말은 \'대속물\'과 같은 뜻으로 죄값을 의미한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는 원어(토 말튀리온 카이로이스 이디오이스)는 \'정한 때에 증거될 것이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오실 때 곧 신약시대를 가리킨다. 구약시대에는 이 사실이 단지 암시적으로, 예표적으로, 예언적으로 증거되었었다. 그러나 이제 그 실체가 되시는 예수께서 사람의 본질을 취하여 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실제로 지불하셨다. 그는 구약의 예표와 예언을 다 성취하셨다.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는 표현은(4절의 말씀과 더불어) 어떤 이들의 잘못된 사상의 근거구절이 되었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하나님은 어떤 사람들을 선택하시고 다른 사람들을 버려두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구원하기를 원하셨고, 또 예수님께서는 택한 자들의 죄값만을 지불하신 것이 아니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고 한다.
본장의 4절과 6절은 과연 그런 생각을 지지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런 생각은 성경의 명확한 진리들과 충돌되는 잘못된 생각이다. 성경은 선택과 예정의 진리를 분명히 가르친다(요 6:39, 44; 롬 9:10-18; 엡 1:4-5, 11). 이 진리는 하나님의 적극적 구원의지의 제한성을 보인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을 다 구원하기를 원하지 않으시고 오직 택한 자들만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분명히 증거한다.
또 속죄의 본질상 예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값을 지불하셨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만일 예수께서 이 세상 모든 사람의 죄값을 다 지불하셨다면, 이제 악인들을 위한 지옥형벌은 더 이상 남지 않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결국 다 구원받아야 할 것이지만, 그것은 성경의 진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고 좁은 길로 가는 자들이 적을 것이며 넓은 문으로 들어가고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을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그러면 \'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신을 속전으로 주셨다\'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여기 \'모든 사람을 위하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대략적 의미의 \'모든\'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적 표현에서 \'모든\'은 항상 엄격한 의미에서의 \'모든\'이 아니라, 대략적 의미의 \'모든\'일 경우도 많다.
예를 들어, 예배가 끝나고 교인들이 대부분 돌아가고 10여명이 남았다고 하자. 우리는 흔히 \'아, 교인들이 다 갔군요\'하고 말한다. 아직 다 간 것은 아니다. 10여명이나 남아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일상적 표현은 \'다\'[모든]라는 말을 쓰는 것이다.
디모데전후서를 살펴보면, 바울이 사용하는 \'모든\'이라는 말이 엄격한 의미의 \'모든\'이 아니고 대략적 의미의 \'모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2장 1절의 \'모든 사람\'도 엄격하게 이 세상 모든 사람을 의미하기 어렵다. 4절의 \'모든 사람\'도 대략적 의미로 볼 수 있다. 4장 15절이나 5장 20절 그리고 디모데후서 1장 15절의 \'모든 사람\'도 엄격하게 이 세상 사람 모두를 가리키기 어렵다.
혹은, 바울이 \'예수께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속전으로 주셨다\'고 말할 때, 하나님이 택하신 모든 사람을 염두에 두었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모든 시대에 그리고 모든 지역에 흩어져 있다. 그들은 선민 이스라엘 중에도 있고 이방인들 가운데 있다. 창세전에 하나님께서 택하신 그들은 그리고 오직 그들만 하나도 잃어버린 바 되지 않고 다 구원을 받을 것이다. 예수님은 바로 그들의 모두의 죄값을 실제로 십자가 위에서 다 치루셨던 것이다. 이제 그들 모두의 죄문제는 객관적으로 다 해결되었다.
[7] 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이를 위하여\'라는 말은 예수께서 택한 모든 죄인들을 위하여 속전 곧 대속제물이 되셨다는 복음진리를 위하여라는 뜻이다. 복음은 예수님의 대속의 진리이다. 바울은 그 복음을 위해 전파하는 자와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전파하는 자\'라는 말은 선포자, 설교자라는 뜻이다. 특히 바울은 이방인들을 위해 이 진리와 믿음의 도를 증거하고 가르치는 사도와 교사가 되었다.
오늘 본문의 교훈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국가 위정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그 밖에도 우리 주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해, 특히 그들의 구원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우리의 기도와 전도를 통해 하나님의 선택된 자들은 다 구원을 받게 될 것이다.
[8]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각처에서\'라는 말은 기도를 위해 일정한 장소, 더 나은 장소가 있는 것이 아니고 어느 곳에서나 기도할 수 있음을 보인다. 산에서도 빈들에서도 예배당에서도 집의 골방에서도 우리는 기도할 수 있다. 구약시대와 달리,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는 언제, 어느 곳에서나 하나님께, 그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갈 수 있다.
단지, 우리에게는 분노와 다툼이 없어야 하며 우리의 손이 거룩해야 한다. 교회 안에서 까닭 없이 혹은 부정당하게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으로 기도한다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어찌 그 기도를 들어주시겠는가? 아무리 많이 기도할지라도 죄를 품고 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신다(사 1:15; 59:2). 또 우리의 손이 남을 해치는 악독한 손 또는 하나님 앞에서 더러운 음란한 손이라면 어떻게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겠는가?
9-15절, 여자들에 대한 교훈
[9] 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아담한 옷을 입으며 염치와 정절로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아담한\'이라는 원어(코스미오스)는 \'아담한, 품위 있는, 단정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아담한 옷은 사치스런 옷이나 음란한 옷이나 단정치 못한 옷과 대조된다. 여성도는 아담하고 단정한 옷을 입어야 한다.
\'염치\'라는 말은 부끄러움을 아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뻔뻔스러움과 대조되는 말이다. \'정절\'이라는 원어(소프로쉬네)는 \'건전한 정신, 사려 깊음, 신중함\' 등을 뜻한다. 그것은 정신 없이 아무렇게나 행동하는 것과 대조된다. 여자의 아름다움은 부끄러움을 알고 사려 깊고 신중하게 행동하는 데 있다. 잠언에는 \"아름다운 여인이 삼가지 아니하는 것은 마치 돼지코에 금고리 같으니라\"고 말씀했다(잠 11:22). \'삼간다\'는 말은 사려 깊게,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을 말한다.
또 바울은 여성도가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단장치 말라고 교훈하였다. 성도는 외적인 것보다는 내적인 것에 그리고 현세적인 것보다는 내세적인 것에 더 가치를 둔다. 그러므로 자신의 머리나 몸을 지나치게 단장하는, 심히 육신적이고 현세적인 태도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 성도는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그것은 그렇게 가치 있는 단장이 아니며 그렇게 영속적이지도 않다.
[10] 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라. 이것이 하나님을 공경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성도의 단장은 선행으로 하는 단장이어야 한다. 이것은 내면성의 단장이며 인격성의 단장이다. 선한 마음을 가진 선한 인격이 되어 선한 행위의 열매를 많이 맺기를 힘쓰는 것이 성도의 참된 단장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일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가치 있는 것이 현실뿐이며 육신뿐일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외적인, 육신적인 단장만을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여길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렇지 않다. 성도는 이 땅의 헛된 것으로 자신을 단장치 말고, 하나님을 알고 내세를 아는 자다웁게 하나님의 선한 뜻을 실천하는 것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일절 순종함\'이라는 원어(파세 휘포타게)는 \'모든 순종, 완전한 순종\'이라는 뜻이다. 순종은 여자의 의무요 미덕이다. 남편에게 대드는 것은 여자의 결함이요 어그러진 모습이다. 물론 남편이 그 의무를 다해야 하며 아내를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해야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나 남편이 그렇게 하든지 하지 않든지 간에 여자는 여자다워야 한다. 남편이 자기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 벌 받을 일이지만, 여자는 그것과 상관 없이 자기의 의무를 다해야 하고 여자로서의 아름다움을 잃지 말아야 한다. 성경은 아내들이 \"범사에 그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고 가르쳤다(엡 6:24).
\'종용히\'라는 말은 오늘날 말로 \'조용히\'이다. \'조용히 배우라\'는 말은 여자의 순종이 어떻게 표현되어야 함을 보인다. 여자는 말이 많으면 안된다. \'조용히\'라는 말은 말을 많이 하지 말라는 뜻이다. 순종은 침묵 중에 행해지는 것이다. 말이 많으면 불평과 불만의 말이 나오게 마련이고 그것은 순종의 태도가 아닐 것이다. 순종은 자신이 이해가 되든지 되지 않든지 하는 것이다. 토론과 순종은 다르다. 토론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고 순종해야 할 자리나 위치가 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여성도들은 범사에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는 자가 되라고 주께서 가르치신다.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남자를\'이라는 말(안드로스)은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에 다 걸린다. \'가르치는 것\'(디다스케인)과 \'주관하는 것\'(아우덴테인)은 목사와 장로의 직분에 해당한다. 바울은 여성도들이 목사와 장로의 직분에서 제외됨을 분명하게 가르쳤다. 이것은 성경적 교훈이며 하나님의 명백한 그리고 영속적인 뜻이다. 여성도들은 교회에서 조용해야 한다.
주일학교 교사들이나 여성도들을 위한 권찰들은 목사의 감독 아래 있는 보조자들이므로 이 교훈에 위배되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그 보조자들은 목사의 정당한 교훈의 권위를 거슬려서 행동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이 교회에 주신 권위요 지켜져야 할 질서이다.
오늘날 우리는 이 말씀이 지켜지지 않고 짓밟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 주위에는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허용하는 교단들이 나타났고 여자 목사들이 목회하는 교회들로 구성된 총회가 생겨났다. 그러나 이것은 다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죄악된 일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신앙과 행위에 대하여 정확무오한 유일의 규칙이다. 여자 목사와 여자 장로를 세우는 것에 대한 어떤 이유와 변명을 든다 하더라도 그것은 성경의 명백한 교훈을 어긴 악한 일이다.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바울 사도는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는 것과 주관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 두 가지 이유를 13절과 14절에서 제시한다. 그 첫째 이유는 창조의 질서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실 때 남자를 먼저 지으셨고 그 다음에 그의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셨다. 이 창조의 질서는 여자 창조의 목적을 보인다. 하나님께서 여자를 만드신 것은 그로 하여금 남자를 돕는 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이 질서는 적어도 이 세상에서 지켜져야 한다. 여자는 남자와 대등하다는 인식을 갖지 말고 더욱이 남자를 가르치고 다스리려고 하지 말고 범사에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야 한다.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 여자가 꾀임을 보아 죄에 빠졌음이니라.
성경이 여자의 목사직과 장로직을 금하는 두번째 이유는 여자의 범죄 때문이다. 인류의 타락은 먼저 여자의 범죄로부터 시작되었다. 여자가 뱀의 꾀임을 받아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명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음으로 범죄하였고, 그 열매를 자기 남편에게도 줌으로 남자도 범죄케 되었다. 인류의 타락은 여자의 실수에 기인하였다. 여자는 결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 여자가 먼저 범죄하였고 또 남자를 범죄케 하였기 때문에 이제는 여자가 나서지 말아야 한다. 다시 말해, 여자의 범죄에 대한 책임 때문에 여자가 남자를 가르치거나 다스리는 것이 더더욱 허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15]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절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우선, 본절은 여성도들이 어떻게 생활해야 할 것을 보인다. \'정절\'이라는 말은 9절에서 설명한대로 \'건전한 정신, 사려 깊음, 신중함\' 등을 뜻한다. 여성도들은 사려 깊고 신중하게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본절은 여자의 해산의 일이 중요함을 보인다. 그것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는 인간 창조시 하나님의 명령이었다(창 1:28). 성경은 자녀를 많이 낳는 것을 하나님의 복이라고 간주한다(시 127:5). 해산은 여자의 의무이며 특권이고 여자가 할 수 있는 매우 복된 일이다.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주석가들은 여러 가지 생각으로 이 구절을 해석하려고 했지만 시원한 해석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이 구절의 뜻은 아마도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가리킬 것이다. 이런 해석은 문맥에도 맞는다. 여자는 창조의 질서상 그리고 범죄의 책임상 남자에게 완전히 순종하며 조용히 배워야 할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여자가 만일 경건한 생활을 한다면 그 해산함으로 그의 지위가 회복될 것이다. 그것은 경건한 자녀의 출산과 양육을 통해서이다. 경건한 어머니는 경건한 남자들을 길러낸다. 이 사실은 여자의 지위의 회복을 증거한다. 이런 점을 생각한다면, 여자는 남자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
3장: 감독과 집사의 자격
1-7절, 감독의 자격
[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성경에서 \'감독\'의 직분은 곧 \'장로\'의 직분이다(행 20:17, 28; 벧전 5:1, 2). 성경에서 감독 혹은 장로라 함은 오늘날 목사와 장로를 다 포함하는 말이다. 장로교 헌법에 보면, \"교회에 항존(恒存)할 직원은 다음과 같으니 장로(감독)와 집사요, 장로는 두 반이 있으니 강도(講道)와 치리를 겸한 자를 목사라 일컫고, 치리만 하는 자를 장로라 일컫나니 이는 교인의 대표자이다\"라고 쓰여 있다.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의 직분은 가장 중요하고 가장 존귀한 직분이다. 그것은 주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직접 보살피는 직분이기 때문이다. 그들이 하는 일은 바로 하나님의 일이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고 말씀하셨다(요 6:29). 성도들의 믿음을 위해 직접적으로 일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일이다.
본절에,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이라는 말에서 \'얻으려 한다\'는 원어(오레고마이)는 \'내밀다, 열망하다, 사모하다\'는 뜻이다. 손을 내밀어 무엇을 잡기를 원하듯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가 목사와 장로의 직분을 열망하고 사모해야 하는가? 그렇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고 주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그의 일을 사모할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부르심에 즉시 응답하여 그를 따라나섰었다(마 4:18-20; 요 21:15-17).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사모한다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여기에 \'사모한다\'는 원어는 \'바란다, 원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감독의 직분을 사모하는 자마다 선한 일을 원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참된 목사와 장로는 선한 사람이 될 것이 기대되며 선한 사람일 것이 기대된다.
하나님께서 교회를 돌보시는 방법은 목사와 장로들을 세우심을 통해서이다. 사도행전 14:22, 23에 보면, 바울 사도는 소아시아에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 . . 각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금식 기도하며 저희를 그 믿은 바 주께 부탁하였다.\" 또 사도행전 20:28에 보면, 그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이 이렇게 중요한 직분이라는 것을 안다면, 우리는 목사를 훈련하는 신학교 사역이 하나님의 일을 위해 얼마나 중요하다는 것과, 또 지교회에서 목사와 장로들을 세울 때 얼마나 신중하게 해야 할 지를 알 수 있다. 그러므로 2절 이하에서 하나님께서는 사도 바울을 통해 감독의 자격에 대해 자세히 교훈하셨다.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책망할 것이 없다\'는 것은 감독의 대표적 자?요건이다. 감독은 교리사상에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그는 바른 교훈에 굳게 서서 바른 말만 하고 다른 말을 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딤전 1:3, 10). 또한 그는 윤리생활에 있어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한 마디로, 그것은 흠 없는 인격을 말한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된다\'는 것은 창세기 2장에 최초의 남녀 창조와 결혼제정에서 나타난 일부일처(一夫一妻)의 하나님의 뜻을 반영한다. 감독은 결혼서약대로 부부생활의 의무와 성결을 지키는 자이어야 한다. 건전한 부부관계는 건전한 인격의 중요한 증거가 된다. 또한 이 자격요건은 독신자가 감독으로 부적합하다는 뜻을 내포하는지도 모른다.
\'절제한다\'는 원어(네팔레오스)는 \'절제한다\'는 뜻 외에 옛날 영어성경이 번역한 대로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진다. \'근신한다\'는 말은 \'건전한 정신을 가진다, 조심스런 마음을 가진다\'는 뜻이다. \'절제하며 근신한다\'는 이 두 자격요건은 비슷한 뜻을 가지는 것 같다. 이 둘은 감독이 무엇보다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깨어 있는 인격자가 되어야 함을 보인다. 양무리를 돌보는 감독자는 자신이 먼저 바른 정신을 가지고 깨어 있어야 한다.
\'아담하다\'는 원어는 9절에도 사용된 말로서 \'품위 있다, 단정하다, 존경할 만하다\'는 등의 뜻을 가진다. 인격의 흠이나 결함이나 부족이 없는 모습을 묘사할 것이다. \'나그네를 대접한다\'는 것은 인색하거나 이기적이지 않고 후한 마음을 나타낸다. 감독은 양무리를 위한 선한 목자로서 마땅히 후한 마음의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가르치기를 잘한다\'는 것도 필요한 자격요건이다. 이런 자가 되려면 먼저 자신이 진리의 지식, 곧 성경지식에 정통해야 한다. 무엇보다 그는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한다. 그 다음, 그는 분명한 논리와 사리판단력을 가져야 하며 이를 위해 편협함과 성급함을 버리고 남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거기에 더하여, 넓은 식견도 도움이 될 것이다.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않는다\'는 것은 인간의 부패성에 술을 즐기려 하는 성질이 있음을 증거한다. 그러나 술은 취하게 하며 중독성을 가진다. 이 점에 있어서 오늘날의 대부분의 술은 옛날의 것보다 더하다. 술취함은 건전한 정신을 잃게 하고 방탕과 실수의 원인이 되며 인격자를 비인격자 혹은 심지어 마귀적 인격자로 만든다. 그러므로 성경 고린도전서 6:10은 술취하는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라고 증거하였다. 잠언 23:31, \"너는 그것[포도주]을 보지도 말지어다.\"
\'구타하지 아니한다\'는 것은 인간의 죄악성 속에 구타하는 성질이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폭력은 나쁜 것이다. 우리는 남을 때릴 권한이 없다. 특히 남편은 아내를 때릴 권한이 없다. 물론 아내도 남편에게 대항해서는 안된다.
그 다음에, 전통적 사본에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이 있다. 더러운 이는 시험거리이며 거기에 넘어지면 판단력이 더욱더 흐려지게 될 것이다. 뇌물은 사람의 눈을 어둡게 한다. 성도는 정당한 이익만을 추구해야 한다. 장사하는 자나 사업하는 자는 범사에 정당하게 하고 거짓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 국가에 내는 세금까지도 속이지 말고 정당하게 다 내어야 한다.
\'관용하다\'는 원어는 \'온유하다, 부드럽다\'는 뜻이다. 거칠고 편협함은 인격의 부족이요 결함이다. 그러나 온유하고 부드러움은 좋은 인격의 덕성이다. \'다투지 않는다\'는 것도 좋은 인격의 한 증거이다. 온유와 인내심을 가진 자만이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진리문제, 신앙문제에 관해서는 선한 싸움이 필요하다.
\'돈을 사랑치 않는다\'는 것도 참된 신앙인격의 한 증거이다. 돈은 세상주의의 대표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돈을 사랑한다. 우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한다(마 6:24).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다. 돈 사랑은 신앙에 시험거리이며 올무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성도가 거기에 걸려 넘어지면 불의와 불법, 부정과 불결에 빠지고 만다.
[4, 5]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감독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이어야 한다. 집은 사회의 기본단위이다. 사람이 자기 집을 잘 다스릴 줄 알아야 하나님의 집인 교회도 잘 다스릴 수 있을 것이다. 작은 단체를 잘 다스려야 큰 단체도 잘 다스릴 수 있는 것이 이치에 맞다. 집을 잘 다스리는 것은 자녀들이 부모의 바른 말에 얼마나 단정하게 복종하는가에서 나타난다. \'단정함\'이라는 원어는 \'진지함, 품위\' 등의 뜻을 가진다.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새로 입교한 자는 장로후보에서 제외시키라고 말씀한다. 그 이유는 그가 교만에 떨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교만은 마귀의 죄이다. 그것은 신앙에 결정적 저해요인이다. 신앙훈련은 겸손훈련과도 같다. 영적 성숙은 자신이 부족한 자임을 깨닫는 과정이다. 성숙한 신앙인은 겸손히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만 높이게 된다. 그래서 신앙의 선진들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을 겸손이라고 말해왔다. 겸손훈련을 위해서는 세월이 좀 필요하다.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외인\'은 교회 밖에 있는 자들 곧 세상 사람들을 말한다. 감독 후보자는 교회밖의 사람들에게서도 선한 증거 곧 좋은 평판을 얻은 자라야 한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비난과 마귀의 올무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그들의 비난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명예를 손상시킬 것이다.
결론적으로, 감독의 자격요건들은 한 마디로 영적 성숙이다. 그 내용을 요약해보면, 첫째는 원만한 가정생활이다. 감독 후보자는 부부관계가 바르고 원만해야 하고 자녀들을 바르게 양육하는 자이어야 한다.
둘째는 건전한 정신과 깨어 있는 마음이다. 술은 이런 마음을 흐트러뜨리므로 피해야 한다.
셋째는 온유와 겸손이다. 감독 후보자는 아담하고 나그네를 잘 대접하고 구타하거나 다투지 않는 인품을 가진 자이어야 한다. 또 그는 겸손훈련을 잘 받아 교만에 떨어지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넷째는 돈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정당한 이익만을 취하는 자이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은 목사와 장로 후보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이미 목사와 장로가 된 자들, 그 외의 모든 교회직분자들, 아니 모든 성도에게 참고와 교훈이 된다. 우리 모두는 이 내용들을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화의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이다.
8-13절, 집사의 자격
[8] 이와 같이 집사들도 단정하고 일구이언(一口二言)을 하지 아니하고 술에 인박이지 아니하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고.
집사직의 유래는 사도행전 6장에 증거되어 있다. 거기 보면, 예루살렘교회에서 교인들이 많아졌을 때 사도들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에 시간을 너무 많이 빼앗기게 되자 일곱 명의 사람들을 선택하여 그들에게 그 일을 맡기게 되었다. 그것이 최초의 일곱 집사들이었다. 사도들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전무(專務)하기를 원하였다.
이와 같이, 처음에는 사도들이 모든 일을 다 하였지만, 교인들이 많아졌을 때 그들의 임무를 분담하게 된 것이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교회에서 모든 일들이 당회 곧 목사와 장로들의 책임 아래 있지만, 그들이 기도와 말씀 전파의 일에 더 많이 힘쓰기 위하여 구제와 교회살림살이 등 재정출납에 관한 일들을 협력할 봉사자들을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집사이다.
집사의 자격에 관하여는, 사도행전 6:3에 보면,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라고 말씀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라면 이 일을 잘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디모데전서 본문의 여러 가지 말씀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이라는 사도행전이 증거하는 자격요건의 자세한 설명이라고 볼 수 있다. 그 내용을 간단히 살펴보자.
첫째로, 집사 후보는 단정해야 한다. 여기 \'단정하다\'는 원어(셈노스)는 \'진지하다, 존경할 만하다\'는 뜻이다.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겉모양으로이거나 외식적이지 않고 진실하고 진지함을 말한다. 이것은 진실한 그리스도인에게 기본적일 것이다.
둘째로, 집사 후보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아야 한다. 이것도 진실, 정직, 성실을 의미한다. 사람의 진실됨과 정직함은 무엇보다 그의 말로 증거된다. 그의 말은 진실해야 하고 무겁고 신중해야 한다. 일구이언 하는 것은 그의 경박함과 거짓됨을 나타낼 것이다. 그것은 바른 인격이 아니다.
셋째로, 집사 후보는 술에 인박이지 않아야 한다. 술은 사람의 바르고 건전한 정신을 빼앗아가고 그로 하여금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그러므로 성경은 술취함을 엄하게 금지하였다. 술취하는 것은 방탕한 일이요(엡 5:18)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죄로 간주된다(고전 6:10; 갈 5:21).
넷째로, 집사 후보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 더러운 이를 탐하는 것은 탐심이다. 탐심은 물질을 사랑하고 세상을 사랑하는 일종의 우상숭배이다. 탐욕자의 신은 하나님이 아니고 물질이며 세상인 것이다. 집사직은 헌금을 취급하는 일이기 때문에 특히 탐심이 없어야 한다. 좋은 인격은 돈계산에 깨끗한 자이다. 우리는 돈을 꾸기는 쉽게 하지만 갚기는 더디게 하거나 돈셈을 흐리게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다섯째로, 집사 후보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 \'깨끗한 양심에\'라고 말씀한 것은 참된 믿음이 깨끗한 양심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믿음은 회개와 죄씻음을 동반한다. 믿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한 것은 세상사람들이 그 세계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체험이다. 물론 그것은 성경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나 그 믿음의 사실은 그것을 체험한 자만 알 수 있는 비밀이다.
[10] 이에 이 사람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고 그 후에 책망할 것이 없으면 집사의 직분을 하게 할 것이요.
이런 다섯 가지의 자격요건들을 언급한 후에, 바울 사도는 교회가 이런 점들에 대하여 집사 후보자들을 먼저 시험하여 보라고 말한다. 사람은 겉보기와 속이 다를 수 있다. 사람의 인격성은 외모로 금방 나타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시험해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정식으로 집사의 직을 주기 전에 교회는 먼저 이들 후보자들에게 임시로 이런 저런 일들을 맡겨보고 그들을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11] 여자들도 이와 같이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며 절제하며 모든 일에 충성된 자라야 할지니라.
여기의 \'여자들\'이라는 말(귀나이케스)은 집사들의 아내들을 가리킨다. 집사후보에 대한 여섯번째 자격조건은 그의 아내에 대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집사들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감독들에게도 적용된다고 본다. 집사들의 아내들도 이러해야 한다면, 감독들의 아내들은 더더욱 그러해야 한다.
첫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단정해야 한다. \'단정하다\'는 원어는 8절에서 설명한대로 \'진지하다, 존경할 만하다\'는 뜻이다. 이것은 진실한 믿음의 태도를 의미한다. 아내들도 진실하고 진지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한다.
둘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참소하지 않아야 한다. 사람의 인격의 온전함은 말의 온전함에 있다. 특히 말로 남을 거짓되이 비난하는 것이야말로 매우 나쁜 인격의 행위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인 교회의 봉사에 참여하는 자들은 남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도록 입이 무거워야 한다.
셋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절제해야 한다. \'절제한다\'는 원어(네팔레오스)는 2절에서 설명한대로 \'(술을) 절제한다\'는 뜻 외에 또한 \'깨어 있다\'는 뜻을 가진다. 이것은 바른 정신, 건전한 정신을 가지고 깨어 있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넷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 교회봉사는 하나님께 대한 충성을 필요로 한다. 맡은 자에게 필요한 것은 충성이다(고전 4:2). 그런데 남자들의 충성은 아내들의 이해와 협력이 없이는 어렵다. 아내들이 충성스러울 때 남자들은 더욱 힘있게 충성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일에\'라는 말은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남이 알아주는 일이나 몰라주는 일이나 가리지 않고 범사에 충성해야 할 것을 가리킨다.
[12] 집사들은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리는 자일지니.
집사후보에 대한 일곱째 자격조건은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남편으로서 한 아내에게만 마음을 두고 그를 사랑해야 함을 말한다. 부부관계의 순결과 사랑은 건전한 인격의 중요한 증거이다.
마지막으로, 집사후보는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이것은 바른 교훈과 모범으로 가능한 일이다. 경건하게 자녀들을 교훈하고 모범을 보이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일이기도 하다. 가정을 잘 다스리고 가정에서 존경을 받는 자라면 그는 진실한 신앙인일 것이다.
[13]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은 아름다운 지위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느니라.
본절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언급한다. 물론 내세의 상급도 있을 것이지만, 본절에 언급한 상급은 현실적 상급을 가리키는 것 같다. 그것은 아름다운 지위와 믿음의 큰 담력이다.
\'지위\'라는 말은 \'단계, 지위, 계급\' 등의 뜻을 가진다. 물론 교회 안에 어떤 계급이 있는 것이 아니고 교회 직분도 어떤 계급이 아니지만, 집사의 직분을 잘한 자들에게는 영적으로 좋은 지위와 계급이 주어진다는 말이다. 그들은 주 안에서 더욱 인정받는 자들이 된다.
집사직을 잘한 자들은 또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에 큰 담력을 얻는다. 영적 성장은 믿음의 성장이다. 모든 신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담대히 하나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지만, 믿음의 담력은 진실한 봉사를 통하여 더욱 자라고 강하여지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나타난 집사후보의 자격요건들을 다시 반복해보자. 첫째로, 집사후보는 단정하고 진지한 믿음의 사람이어야 하다. 둘째로, 집사후보는 일구이언을 하지 않아야 한다. 셋째로, 집사후보는 술에 인박이지 않아야 한다. 넷째로, 집사후보는 더러운 이를 탐하지 말아야 한다.
다섯째로, 집사후보는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한다. 여섯째로, 그들의 아내들은 단정하고 참소하지 말고 절제하고 모든 일에 충성되어야 한다. 일곱째로, 집사후보는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여덟째로, 집사후보는 자녀와 자기 집을 잘 다스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 교회의 모든 집사님들이 오늘 본문에 언급된 여덟 가지의 자격요건들을 갖춘 사람들이 되기를 바라며 앞으로 이런 사람들이 집사로 세워지기를 바란다. 그럴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교회에게나 본인에게도 유익이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 교회의 모든 집사님들은 집사의 직분을 잘 감당함으로 다 영적으로 좋은 지위와 믿음의 큰 담력을 얻게 되기를 바란다. 직분을 받고 그 직분을 감당치 못하면 직분을 안받는 것만 못하지만, 직분을 받고 그 직분을 잘 감당하면 자신의 영적 생활에 큰 유익이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이런 말씀에서 우리의 영적 성장의 목표를 확인하고 더욱 분발하여 아름다운 신앙인격자가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모두 다 믿음에 진지하고 일구이언하지 않고 술에 인박이지 않고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고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지고 참소하지 않고 절제하고 모든 일에 충성되고 한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와 집을 잘 다스리는 자가 되기를 바라고 힘써야 할 것이다.
14-16절, 경건의 비밀
[14, 15]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본서신은 목회자가 교회에서 어떻게 행할 것을 가르친 서신이다. 교회는 세상의 그 어떠한 단체와도 다르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유독(惟獨)한 단체이다. 본문은 교회를 \'하나님의 집,\'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 그리고 \'진리의 기둥과 터\'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 단체와 같이 운영되어서는 안되고, 하나님의 진리에 맞게 운영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근심하시며 진노하실 것이다.
첫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것은 교회의 건물 곧 예배당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것은 성도들의 심령을 가리킨다. 교회가 성도들의 모임이라고 해서 교회가 사람들의 모임에 불과하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단지 어떤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단체가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사교단체나 친목써클이 아니다. 그것은 단지 사람들의 집이 아니고 하나님의 집이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하나님이 지으신 집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친히 설계하시고 건축하신 집, 곧 하나님이 세우신 집이다. 예수께서는 \'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는 베드로의 신앙고백을 들으시고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하셨다(마 16:18). 교회는 우리가 계획하고 우리가 만드는 집이 아니고,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만드시는 집이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또한 하나님이 계신 집이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인들에게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라고 반문하였다(고전 3:16).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 안에는 하나님의 영께서 계시고, 정상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얼굴빛이 비취시고 그의 음성이 들리며 그의 영광이 깃들인다. 교회는 사람들만 모이는 곳이 아니고 친히 하나님이 계신 집이다.
\'하나님의 집\'이라는 말은 또 하나님이 주인이신 집 곧 하나님의 소유권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교회는 단순히 우리들의 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맘대로 인도하고 운영할 수 있는 집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뜻대로, 우리의 의향대로, 우리의 기호대로, 우리의 방침대로 운영될 집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집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방침대로, 하나님의 진리대로 운영되어야 할 집이다. 물론 장로교회는 교인들의 민주적인 토론과 결정을 존중한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을 찾는 수단에 불과하지 성경진리와 독립된 인간의 뜻을 따름을 의미하지 않는다.
둘째로,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이다. 교회라는 원어(에클레시아)는 \'불러낸다\'는 뜻을 담고 있다. 물론 이 말은 본래 사람들의 일반적 모임을 의미했다. 사도행전 19:39, 41의 \'민회\'와 \'모임\'이라는 단어는 원어에서 교회라는 말과 같은 단어이다. 그러나 차이점은 \'하나님의\'라는 말에 있다. 교회는 하나님이 불러내시고 모으신 모임이라는 데 일반적 집회들과의 차이점이 있다. 우리를 이 세상에서, 죄와 파멸에서 불러내신 분은 구주 하나님이시다. 우리를 그의 백성, 그의 양, 그의 자녀로 삼으신 분은 바로 그 분이시다. 교회는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선택하시고 구별하시고 불러내시고 모이게 하신 단체인 것이다.
셋째로,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그것은 교회의 사명과 임무를 보이는 말씀이다. 기둥은 집을 버티는 역할을 한다. 터는 집의 기초이다. 기둥과 터는 집에 매우 필수적이다. 기둥이 약하거나 터가 약해지면 집이 무너져 내릴 것이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다. 교회와 진리는 생명적 관계에 있다. 교회가 약해지면 하나님의 진리가 약하게 증거될 것이다. 교회가 흔들리면 하나님의 진리가 흔들릴 것이다. 교회가 무너지면 하나님의 진리도 무너질 것이다.
여기에 교회의 사명과 임무가 드러난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과 터이므로, 교회는 진리에 굳게 서야 하며 진리를 철저하게 보수해야 한다. 진리는 신구약 66권의 말씀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진리를 조금도 양보하거나 가감하지 말고 충실하게 다 선포하며 다 가르치며 다 믿고 다 소망하며 다 실천해야 한다. 만일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진리에 충실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 교회가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옛 신앙의 선진들이 참 교회의 표가 바른 말씀을 전파하는 데 있다고 말한 것은 옳은 말이다. 어떤 교회가 하나님의 온전한 뜻과 참된 말씀을 고의적으로 저버리고 계속 양보한다면, 마침내 그것은 옛날 이스라엘처럼 죽은 교회가 되고 말 것이다.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리우셨음이니라.
본절은 교회가 지키고 전파해야 할 진리가 무엇인지를 언급한다. 그것을 본절은 \'경건의 비밀\'이라고 표현한다. 그것이 9절에 언급한 \'믿음의 비밀\'이다. 참된 종교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위대한 진리들, 그것이 참 종교의 내용이다. 기독교는 맹목적 종교가 아니고, 우리가 이성적으로 알아야 하고 믿어야 할 내용을 이치에 맞게 제시하는 종교이다. 그 진리의 내용들은 크고 놀라운 것들이다.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라는 말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경건의 비밀의 내용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가 신구약성경의 중심이요 우리 종교의 중심이다. 그가 모든 질문의 해답이시요 그 안에 우리의 모든 문제의 해결이 있다. 그는 과연 우리의 지혜요 의요 구원이시다. 본절에 언급한 여러 가지의 내용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이다.
첫째로,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 전통사본에는 \"하나님은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라고 되어 있다. 이것이 소위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의 진리이다. 요한복음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증거는 바로 이 사실을 증거한 것이다. 이것은 그 어떤 하나님의 기적들과 비교할 수 없는 신비이다.
그리스도는 본래 신적 인격이셨다. 그는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시고 곧 하나님이시다(요 1:1). 그는 창조의 하나님이시다. 요한복음은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증거하였다(요 1:3). 그러므로 구약성경에 보면, 장차 오실 메시야 그는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고 불리울 것이라고 말씀했고(사 9:6), 또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고 말씀했다(미 5:2). \'태초에\'라는 말씀은 \'영원전에\'라는 뜻이다.
신구약성경에 증거된 예수, 교회가 보존하고 전파하는 진리의 내용인 예수, 위대한 경건의 비밀의 내용인 예수는 신적 인격이시다. 그는 단순히 인간들 중에 가장 위대한 인물, 고상한 인격자들 중에 가장 아름다운 꽃, 가장 이상적인 인격, 도덕적 스승들 중에 가장 위대한 스승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이시다. 그는 우리의 종교적 경배의 대상이 되시는 신적 존재이시며 신적 구주이시다. 그는 하늘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 아버지와 더불어 영원히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받으실 어린양이시다(계 513).
오 놀라운 하나님의 아들께서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셨다. 그는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셨다\"(빌 2:7). 그는 연약성을 가진 육신의 모습을 취하셨다. 이사야의 예언대로, 그는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는\" 모습을 취하셨다. 그는 마귀의 시험을 당하셨고 배고프셨고 목마르셨으며 주무셨다. 그러나 바로 그가 우리의 중보자, 우리의 구주, 우리의 위로자, 우리의 친구이시다!
둘째로, 그는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여기 \'영으로\'라는 말은 영어성경들이 번역하듯이 \'성령으로\'라는 뜻일 것이다. 성육신 하신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버림을 당하셨고 아무런 죄가 없으셨으나 마침내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러나 그는 성령으로 부활하셔서 그의 무죄(無罪)하심을 증거하셨고 의롭다 하심을 입으셨다. 그의 부활은 그의 무죄성과 신성(神性)의 증거이었다(롬 1:4).
그의 의롭다 하심은 대단히 중요하다. 그가 의로우신 자로서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의 대속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이 대속의 원리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셋째로, 그는 천사들에게 보이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속죄의 죽음과 부활이 천사들에게 증거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의 전생애에 천사들의 수종이 있었다. 그의 탄생 때에도, 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 때에도, 그의 부활 때에도, 그리고 그의 승천 때에도 천사들의 활동이 있었다. 그의 재림 때에도 그러할 것이다.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의 사역이 구약백성들에게 감추어진 비밀이었듯이, 그것은 또한 베드로 사도의 증거대로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었다(벧전 1:12).
넷째로, 그는 만국에서 전파되셨다. 천사들에게 증거된 그리스도의 일은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었다. 그는 세상의 구주로 오셨다. 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증거될 복음이었다. 과연 그렇게 되었다. 골로새서에서 바울은 벌써 \"이 복음은 천하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군이 되었노라\"고 증거하였다(골 1:24). 그러나 아직도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자들에게 이 복음은 계속 전파되어야 한다.
다섯째로, 그는 세상에서 믿은 바 되셨다. 그는 이제 유대인의 구주만이 아니시고 온 인류의 구주, 세상의 구주가 되셨다. 지구상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그를 구주로 영접하고 믿었다. 그것은 구약시대에는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유대민족만을 차별적으로 사랑하시던 하나님께서 이제 구원의 문을 온 세계에 활짝 열어주셨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심령들을 각 민족, 각 나라에서 수 없이 많이 일으켜 주셨다.
마지막으로, 그는 영광 가운데 올리우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승천은 사도행전 1장에 확실하게 증거된 사건이었다. 부활하신 그는 40일 후에 제자들이 보는 가운데서 천사들의 증거를 받으면서 하늘로 올리우셨다(행 1:9-11)
그리스도의 영광의 승천은 (1) 그가 지금도 살아계시다는 사실과, (2) 그가 하늘에 계시지만 지금도 땅 위에서 그의 신성으로, 성령을 통하여 활동하고 계시다는 사실과, (3) 그가 장차 영광 가운데서 다시 오실 것이라는 사실과, (4) 그가 오실 때는 약속대로 성도들을 부활시키며 영원한 천국을 주실 것이라는 사실 등을 말해준다.
이것이 경건의 비밀의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사실들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신 기독교의 위대한 진리들의 일부이다. 이것이 구약의 유대인들이 알지 못했고, 하늘의 천사들도 알지 못했던 비밀한 진리들이다. 여러분은 이 경건의 비밀을 알게 되었는가? 믿게 되었는가?
교회는 이 진리들,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경에 증거된 대로 믿고 그 진리들을 그대로 보수하고 전파해야 한다.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로서 하나님의 이 위대한 진리들을 굳게 붙들고 가감 없이, 타협 없이 증거하여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감사와 찬송을 올리면서 이 직무를 완수해야 한다.
4장: 목사의 자기 훈련
1-5절, 귀신의 가르침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케 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좇으리라 하셨으니.
앞장에서 언급한 경건의 비밀과 반대되는 사실이 있다. 그것은 배교(背敎)의 사실, 곧 진리에서 떠나는 일이다. 그 사실이 사도들에게 계시되었다. 신약시대의 사도들은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처럼 하나님의 특별한 감동을 받아 그의 뜻을 직접 계시받는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사도들의 교훈은 인간적 교훈이 아니고 성령의 교훈, 곧 하나님의 진리이다.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날 것이었다. 마치 여호수아가 죽은 후 이스라엘 백성이 부패하여 우상숭배에 떨어졌던 사사시대처럼, 사도들이 죽은 후에 배교 곧 신앙의 변절이 올 것이었다. 사실, 사도시대 말기에 이미 배교의 징조가 나타났었다. 사도 요한은 말하기를, \"아이들아 이것이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이르겠다 함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줄 아노라\"고 하였다(요일 2:18).
성경은 신약시대 말기 곧 예수님의 재림 직전에 최종적으로 그리고 절정적으로 배교의 시대가 올 것을 예언하였다. 주 예수께서는, 세상끝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게 하리라\"고 말씀하셨다(마 24:11). 사도 바울도 주의 재림 전에 \"먼저 배도(背道)하는 일이 있으리라\"고 말씀했다(살후 2:3). 오늘 시대를 가만히 살펴보면, 과연 기독교회가 하나님의 복음진리 곧 옛날부터 믿고 고백해왔던 진리에 충실하지 않고 그 진리에서 떠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배교의 시대가 오고 있다.
배교자들이 따르는 교훈은 \'미혹케 하는 영들과 귀신들의 가르침들\'이다. 세상에는 항상 악령들의 활동이 있어왔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하여 아담을 넘어지게 한 자는 바로 사탄이었다. 지금도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은 사탄이다(엡 2:2). 지금도 세상 사람들의 마음을 혼미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지 못하게 하는 자가 사탄이다(고후 4:4). 이단은 미혹의 영들의 활동이다. 사람들의 잘못된 사상과 철학과 종교는 실상 사람들의 교훈이 아니고 귀신들의 교훈이다.
이단의 정체는 진리를 가감(加減)하는 데 있다. 하나님의 진리에 무엇을 더하거나 빼는 것은 그것을 변질시키고 왜곡시키는 것이요 결국 그 진리를 부정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모세는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말을 너희는 가감하지 말라\"고 말했었다(신 4:2). 신약성경 맨마지막에도 성경에 기록된 말씀에 가감하는 것은 천국의 복을 상실하고 지옥의 재앙을 받게 되는 큰 죄임을 증거하였다(계 22:18, 19). 성경은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정확무오한 규칙이다.
어떤이들이 귀신들의 가르침들을 좇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그런 자들이 되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직 성경말씀만 믿고 따르는 자가되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우리는 심지어 기적을 의존해서도 안된다. 우리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기억해야 한다(눅 16:31). 우리의 신앙은 오직 성경말씀에 근거한 신앙이어야 한다.
[2] 자기 양심이 화인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성도는 신앙생활에 있어서 선한 양심을 가지고(1:5, 19) 범사에 양심대로 행해야 한다. 바울은 유대인의 공회 앞에서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고 고백하였다(행 23:1). 양심의 자유는 신앙에 기본적이다. 건전한 신앙은 양심을 거스려 무엇을 믿도록 강요되지 않는다.
양심이 화인 맞는다는 것은 양심의 마비, 양심이 제 기능을 못함, 곧 양심의 죽음을 의미한다. 이런 자는 옳고 그른 것을 분별치 못하고, 선과 악, 진리와 비진리를 분간치 못하게 된다. 양심이 더러워져도 모든 면에 문제가 생길 터인데, 양심이 마비되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이것처럼 큰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참된 신앙은 진실한 마음과 선한 양심 안에 세워진다.
이단자들은 양심이 마비되어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다. 양심의 마비와 외식과 거짓말은 서로 통한다. 그러나 선한 양심은 진실과 진실한 말과 통한다.
외식은 이중적인 것을 말한다. 속으로 불신앙적이면서 겉으로 믿는 척하는 것, 속으로 미워하면서 겉으로 사랑하는 척하는 것, 속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면서 겉으로 순종하는 척하는 것, 속으로 하나님 없는 세속적 삶을 살면서 겉으로 경건한 척하는 것, 속으로 돈과 쾌락을 가장 가치 있게 여기면서 겉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척하는 것, 속으로 비성경적이면서 겉으로 성경적인 척하는 것, 속으로 진리를 떠났고 진리를 대항하면서 겉으로 진리 안에 거하는 척하는 것, 이런 것이 외식이다.
이런 외식자들이 귀신들의 가르침을 따르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성령의 가르침을 저버린 자들이다. 요약하면, 성령은 사람이 양심으로 진실하게 믿어 구원과 영생에 이르게 하지만, 악령은 사람을 결국 비양심적이고 거짓되고 불신앙적이게 만들어 멸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3, 4]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 할 터이나 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바울은 귀신들의 가르침의 한 예로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가르침을 들었다. 이것은 금욕주의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결혼하는 것이나 음식을 먹는 일은 하나님의 창조질서 속에 들어 있고 그것들은 결코 죄가 아니다.
절제는 좋은 덕이지만, 금욕주의는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는 일이요 비정상적인 자기학대이다. 더욱이, 거룩함은 인간의 극기와 금욕으로 성취되지 않고(골 2:21-23)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고 했다(갈 5:16).
먹는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이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그 지으신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했다(창 1:31). 창조세계에서 악한 것은 없었다. 천사의 타락과 인간의 범죄로 물질세계가 악화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창조의 본래상태는 선하였다. 그러므로 진리를 믿는 자들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 거절할 것이 없다.
구약의 율법에 규정된 부정한 음식들에 대한 말씀은 그 음식들 자체의 부정함보다 그것들의 상징적 의미에 중요함이 있었다. 사실 구약의 모든 의식법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모형적으로, 예표적으로 나타내었다(골 2:16).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사역이 성취되고 복음이 선포된 신약 아래서 정결한 음식과 부정결한 음식을 구분할 필요는 없다.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신약 아래서 밝히 증거된 복음진리를 가리킬 것이다. 사도행전 10장에 보면, 베드로는 정오 기도시간에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한 그릇이 내려오는 환상을 보았다. 거기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었다. 하늘에서 소리가 들리기를,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고 하였다. 그때 또 소리가 있기를,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이 환상은 구약의 깨끗한 음식과 더러운 음식의 법이 이스라엘 백성과 이방인들을 상징하는 의미를 가졌다는 것과 하나님이 이제 그것들을 다 깨끗케 하셨다는 것을 보인다. 구약의 율법 아래서는 정결, 부정결의 음식이 구별되어야 했다. 그러나 복음 아래서는 이제 그 구별이 제거된다. 이제 복음 진리 안에서 모든 음식물은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올리므로 다 거룩하고 먹을 만한 것이 된다.
요약하면, 이 세상에는 귀신들의 가르침들이 있다. 말세에 배교의 시대에 그것들이 더욱 편만할 것이다. 그것들은 성경진리와 다른, 혹은 성경진리에서 떠난, 인간들의 잘못된 사상과 철학과 종교들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책인 성경의 말씀 안에 거해야 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가감치 말고 오직 성경말씀 안에 머물어야 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오직 성경에 근거해야 한다.
예나 오늘이나 잘못된 교훈 중의 하나는 금욕주의이다. 그러나 금욕주의는 구원의 길도, 성화의 길도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반대되는 불건전한 자기학대에 불과하다. 절제는 좋은 것이지만, 금욕주의는 잘못된 사상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모든 창조물을 감사함으로 사용할 수 있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이루어지고, 우리의 성화도 오직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 인간의 극기와 금욕은 죄악성을 극복하는 데 별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영적으로 자라거나 자라게 하지 못한다. 성도의 영적 성장과 성화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여 성경의 교훈 안에서 건전한 믿음의 생활을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6-10절, 경건 훈련
본문은 경건 훈련에 대해 가르친다. 경건은 모든 성도에게 가장 기본적 덕성이다. 목사들에게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훈련을 통하여 더욱 풍성해진다.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시다. 하나님과의 교통인 경건은 모든 사람에게 행복의 길이다.
[6]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어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
\'이것\'은, 앞절에서 말한 대로 \'혼인을 금하고 식물을 폐하라\'는 가르침이 귀신의 가르침이라는 분별력과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하는 진리를 말할 것이다.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친다\'는 것은 바른 분별력과 진리의 지식으로 가르치는 것을 말하는 줄 안다. 이것은 곧 성경말씀에 충실한 사역을 가리킨다.
원문에는, \"믿음의 말씀과 네가 좇는 선한 교훈으로 양육을 받으리라\"는 말씀이 \'선한 일군\'을 수식하는 말이다. 다시 번역하면, \"네가 이것으로 형제를 깨우치면, 믿음과 선한 교훈의 말씀으로 양육을 받는, 그리스도 예수의 선한 일군이 되리라.\"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군은 성경적 설교를 하는 일군이다. 성경적 설교만이 인간의 생각이나 귀신의 생각을 반영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생각과 마음을 나타낸다.
성경말씀은 \'믿음과 선한 교훈의 말씀\'이다. 바른 교훈은 믿음의 교훈이며, 잘못된 교훈은 결국 불신앙의 말이다. 또한 믿음의 교훈은 구원과 영생을 가져다 주는 선한 교훈이지만, 불신앙의 교훈은 사람을 멸망에로 이끄는 악한 교훈이다. 귀신의 교훈, 곧 이단사상이 그러하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일군은 믿음과 선한 교훈의 말씀으로 양육되는 자이다.
\'양육을 받는\'이라는 말씀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군이 하루 아침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양육의 과정을 통해 이루어짐을 보인다. 신앙은 훈련의 과정이다. 물론 최초에 믿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시작되지만, 그 믿음은 하루 아침에 완전케 되는 것이 아니고 연약한 상태에서 점점 자라가고 강하여진다. 그러므로 영적으로 어린 일군은 흠과 점이 있고 부족이 있지만, 성장한 일군은 점점 그런 것이 없어진다.
양육의 수단은 다양하겠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주된 수단이다. 하나님의 일군은 바른 말씀, 바른 교리, 바른 지식으로 양육을 받는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베드로전서 2:1, 2,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여기의 \'신령한 젖\'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킨다.
[7] 망령되고 허탄한 신화를 버리고 오직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망령된\'이라는 원어(베벨로스)는 \'속된, 세상적인\'이라는 뜻이다. \'허탄한\'이라는 원어(그라오데스)는 \'나이 많은 여자들이 말하는, 어리석은\'이라는 뜻을 가진다. \'신화\'는 사실이 아닌 이야기이다. 기독교는 사실들에 근거하고 있다. 성경의 사건들은 신화들이 아니다. 그러므로 속되고 어리석은 신화적 이야기들, 비록 그것들이 육신의 흥미와 재미와 즐거움을 일으키는 것일지라도,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신앙에 아무 유익이 없다.
그 대신, 우리는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해야 한다. \'경건\'은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는 것이다. 경건은 곧 하나님 앞에 사는 것이다. 본절은 우리가 경건을 연습하라고 교훈한다. 그것은 우리 인간에게 경건 연습, 경건 훈련이 필요함을 보인다.
\'연습한다\'는 원어(귐나죠)는 \'훈련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경건의 훈련이 필요하다. 경건생활은 성도에게 당연한 생활이지만, 또 진실한 성도라면 그렇게 다 알고 있겠지만, 그것이 훈련되지 않으면 성도의 실제적 생활이 될 수 없다. 그러므로 성도도 경건훈련을 힘쓰지 않으면 거의 세상 사람처럼 살 수 있다. 마치 거의 하나님 없이 사는 사람처럼 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개인적으로 성경 읽고 기도하는 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자에게 필수적이지만, 훈련을 통하여 성도 자신의 생활이 된다. 가정예배의 단을 쌓는 것, 주일을 거룩히 지키는 것, 예배시간에 늦지 않는 것, 십일조 생활, 수요일 밤이나 금요일 밤 기도회 또는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 또 주의 뜻을 따라 사명을 가지고 교사나 권찰이나 찬양대에 봉사하는 것, 그리고 전도하는 것 등이 다 훈련을 통해 더 잘 하게 되는 것들이다.
습관은 제2의 천성이라는 말이 있다. 개도 길들이면 사람에게 유익한 일을 많이 한다. 하물며 사람이 연습과 훈련을 통하여 선한 일을 할 때 얼마나 자신과 교회와 하나님 나라를 위해 유익하겠는가? 누가복음 4:16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자기 규례대로 회당에 들어가셨다. \'자기 규례대로\'라는 말은 \'자기 습관대로\'라는 뜻이다. 누가복음 22:39에도, 예수님이 습관을 좇아 감란산에 가셔서 거기서 기도하셨다고 증거되어 있다. 우리도 경건의 훈련을 통하여 경건생활이 습관이 되게 해야 하겠다.
[8]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육체의 연습\'은 육체적 운동을 가리킬 것이다. 사람들은 건강을 위해 구보나 체조, 혹은 제자리 뛰기를 하고 또 등산도 한다. 육체의 단련도 유익이 있다. \'약간의 유익이 있다\'는 말씀은 그 유익이 제한성을 가지기 때문일 것이다. 육체 단련을 통한 건강은 단지 이 세상 생애에 국한된다. 또 그것조차도 완전히 보장되지는 못한다. 건강관리를 잘하던 분도 때론 예기치 못한 무서운 질병에 침입 당하고 거기에 굴복되기도 한다.
그러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다.\" 왜냐하면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기 때문이다. 내생의 약속은 분명히 영생복락을 가리킨다.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다(벧전 1:9). 우리가 경건생활에 힘쓰면 미래의 구원은 확실해진다. 베드로후서 1:10, 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경건은 내생의 복뿐 아니라 금생에도 유익하다. 성경은 경건한 자에게 이 세상에서도 복될 것을 밝히 약속하였다. 마태복음 6:33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고 약속하셨다. 유명한 신명기 28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에게 자녀의 복, 사업과 직장의 복, 건강의 복, 사회적 안정과 부유의 복을 분명히 약속하셨다. 시편 119:165, \"주의 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 저희에게 장애물이 없으리이다.\" 경건은 참으로 범사에 유익하다. 그것은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다.
[9] 미쁘다 이 말이여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도다.
이것은 1:15에도 나왔던 표현이다. 그 뜻은, \"미쁘다 이 말이여 전적으로 받을 만하도다\"이다. 경건이 이처럼 중요하고 이처럼 복되다는 말은 전적으로 받을 만한 말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받을 만하다.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영생이요 행복이다. 하나님은 생명과 복의 원천이시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이 근본적인 진리를 의심치 말고 더디 믿지 말고 전적으로 수납하여 경건한 사람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경건 훈련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훈련이다.
[10] 이를 위하여 우리가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둠이니 곧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시라.
\'이를 위하여\'는 \'경건을 위하여\'라는 뜻인 줄 안다. 복음사역의 목표는 바로 이를 위해 수고하고 진력하는 것이다. 복음사역의 목표는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을 알고 그를 두려워하고 그를 믿고 그를 섬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 주의 종들은 수고하고 힘쓰는 것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돈이나 쾌락에 두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그 어떤 세상의 것들에 두지 않는다. 요한일서 2:15-17,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둔다. 그는 생명 없는 우상이 아니시다. 그는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실 뿐 아니라 지금 살아계셔서 우리의 삶을 보시고 도우시고 간섭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신다. 특별히 그는 \"모든 사람 특히 믿는 자들의 구주\"이시다. 그는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죄사함과 영생의 구원을 주실 뿐 아니라, 현실 속에서도 위기에서 도우시는 선한 목자이시다.
불경건은 인간의 근본 죄악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불경건에서 구원을 받은 자이다. 여러분은 이제 참으로 경건을 회복했는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다(요 17:3).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지식과 지혜의 시작이다(잠 1:7; 9:10). 여러분은 경건을 소유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경건한가? 또한 여러분은 경건 훈련을 힘쓰고 있는가? 경건은 훈련을 통해 습관화 되고, 생활화 된다. 오늘 본문의 교훈대로, 우리 모두가 경건 훈련을 통해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하겠다.
11-16절, 자기 훈련
[11] 네가 이것들을 명하고 가르치라.
\'이것들\'은 본서신의 앞에서 가르친 내용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들은 특히 바로 앞에서 말한 금욕주의의 미혹을 받지 말고 참된 경건훈련에 힘쓰라는 교훈을 포함한다. 본서신에 주어진 하나님의 교훈들은 디모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디모데는 그 진리들을 또 다른 이들에게 명하고 가르쳐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의도이며 성경의 목적이다.
특히 \'명하라\'는 말씀은 이 말씀이 신적 권위를 가진 말씀임을 잘 보인다. 사도의 가르침이 인간적 권위를 가진 말일 뿐이라면 명령할 성질의 것은 아닐 것이다. 오늘처럼 사람이 자기 주관과 주견을 가지고 살기를 원하는 시대에 누가 누구에게 무엇을 명령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경말씀은 하나님의 명확한 뜻이며 하나님의 요구하시는 바이기 때문에 그것을 명령할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뿐만 아니라 성경말씀은 또한 주께서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우리를 통하여 전달되고 가르쳐질 명령과 교훈이 된다. 성경은 모든 성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명령과 교훈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성도에게 유익하다.
[12]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젊은이는 지식이 부족하고 경험이 부족하고 인격이 부족할지도 모른다. 젊은 교역자도 그러하다. 그러나 교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수종드는 일군이므로 그가 무시를 당하면 그가 전파하고 가르치는 하나님의 말씀에 손상이 있게 될 것이다. 말씀의 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위하여 무시를 당치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은 젊은 교역자 디모데에게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역자 편에서도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은 자기 훈련을 말한다. 교역자 자신도 신앙생활의 모든 면에서 성도들에게 모본이 되려고 힘써야 한다. 바울은 여기에서 신앙생활의 몇 가지 면들을 열거하였다.
첫째는 말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말은 사람이 가장 실수가 많은 영역이다. 그래서 야고보서 3:1, 2,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교역자가 말에 모본이 된다면 그는 모범적인 인격자일 것이다.
둘째는 행실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하였다. 때때로 우리는 말만 잘하고 행동이 거기에 따르지 않는 위선자가 되기 쉽다. 그러나 새 생명은 새 삶이다. 참된 신앙은 의롭고 선한 행위와 함께 간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 . .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고 하였다(2:17, 26).
셋째는 사랑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하였다. 사랑은 그리스도인의 최고의 덕일 것이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였다. 십계명은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 즉 그것은, 하나님을 네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명령이다. 또한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제자들에게 남겨주셨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참된 성도가 아닐 것이다.
요한일서 3:14, 15,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치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거하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넷째는 전통사본에 보면, 심령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하였다. \'심령\' 혹은 \'영\'이라는 원어(프뉴마)는 사람의 생각 혹은 내면성을 가리킨다. 하나님을 향한 생각, 다른 성도들을 향한 생각, 그리고 구원 받지 못한 일반 사람들을 향한 생각에 있어서 성도들의 모본이 되라는 교훈이다.
다섯째는 믿음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하였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을 가르치는 말씀인데, 가르치는 자신이 믿음이 없어 의심하고 요동한다면 되겠는가? 그러므로 교역자는 먼저 자신이 견고한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기도하고 힘써야 한다. 그것은 성경을 통해 이루어진다.
누가복음 1:1-4, \"우리 중에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 처음부터 말씀의 목격자 되고 일군 된 자들의 전하여 준 그대로 내력을 저술하려고 붓을 든 사람이 많은지라.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을 알게 하려 함이로라.\"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certainty)은 기록된 성경말씀을 통하여 온다.
여섯째는 정절에 있어서 본이 되라고 하였다. \'정절\'이라는 말은 순결성, 순수성을 가리킨다. 이것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돈에 물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교역자가 돈을 사랑하기 시작한다면 그는 발람의 길, 게하시의 길, 그리고 가룟 유다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순결성은 특히 우리 말 번역대로 음란에 물들지 않는 것을 말한다. 특별히 교회의 봉사자들은 이 점에 조심해야 한다. 이성관계에 있어서 단정함을 보여야 한다. 잠언 20:11, \"비록 아이라도 그 동작으로 자기의 품행의 청결하며 정직한 여부를 나타내느니라.\"
이 여러 점들에 있어서,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교역자는 성도의 모범이 되어야 한다. 그래야 그의 말을 듣고 배우는 자들이 그를 신임할 것이며 그의 말을 신임할 것이다. 만일 그의 인격이 위선적이라고 드러난다면, 사람들이 그의 전하는 말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주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셨고(마 4:19) 또 무리에게 \'나를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제자는 선생을 따르며 그의 말과 사상, 그의 행동과 인격을 배우고 모방하는 자이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는 예수님을 본받아야 하고 특히 말씀의 봉사자들은 더욱 그 일에 앞서야 한다.
[13]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바울은 그가 올 때까지 디모데가 힘써야 할 그의 주된 임무를 언급한다. 디모데는 말씀의 사역자이었다. 그러므로 그가 전적으로 힘써야 할 일은 말씀의 봉사이다. 비록 그가 아직 젊기 때문에 바울을 통하여 더 배울 것이 없지 않았지만, 그런 상태에서 곧 그가 깨달은 지식의 정도와 소유한 분별력의 정도에서 그리고 그가 가진 성화와 인격성의 정도에서 그는 그의 직무를 수행해야 했다. 보다 원만한 지식과 분별력이 장차 주어지며 보다 성숙한 인격성이 이루어질 것이다. 그때까지 그는 그에게 맡겨진 사명의 일에 전념해야 한다.
우선, 그는 읽는 것에 착념해야 한다. 여기에 읽는 것은 물론 성경읽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성경을 읽는 것뿐 아니라 공적으로 읽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교역자 자신에게, 자신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필수적이다. 또한 그것은 교회의 공적 집회의 한 순서로서 모두에게 유익하다. \'성경교독\' 혹은 \'성경봉독\'의 순서는 매우 귀한 순서이다.
공적인 성경읽기는 하나님의 명령이었고 영적 부흥의 시대에 실천했던 행위이었다. 신명기 31:9-13, \"모세가 이 율법을 써서 여호와의 언약궤를 메는 레위 자손 제사장들과 이스라엘 모든 장로에게 주고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매 7년 끝해 곧 정기 면제년의 초막절에 온 이스라엘이 네 하나님 여호와 앞 그 택하신 곳에 모일 때에 이 율법을 낭독하여 온 이스라엘로 듣게 할지니 곧 백성의 남녀와 유치[유아들]와 네 성 안에 우거하는 타국인을 모으고 그들로 듣고 배우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며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게 하고 또 너희가 요단을 건너가서 얻을 땅에 거할 동안에 이 말씀을 알지 못하는 그들의 자녀로 듣고 네 하나님 여호와 경외하기를 배우게 할지니라.\"
느헤미야 8:1-3, \"이스라엘 자손이 그 본성에 거하였더니 7월에 이르러는 모든 백성이 일제히 수문앞 광장에 모여 학사 에스라에게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에게 명하신 모세의 율법책을 가지고 오기를 청하매 7월 1일에 제사장 에스라가 율법책을 가지고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회중 앞에 이르러 수문앞 광장에서 새벽부터 오정까지 남자, 여자 무릇 알아 들을 만한 자의 앞에서 읽으매 뭇백성이 그 율법책에 귀를 기울였는데.\"
느헤미야 9:1-3, \"그 달 24일에 이스라엘 자손이 다 모여 금식하며 굵은 베를 입고 티끌을 무릅쓰며 모든 이방 사람과 절교하고 서서 자기의 죄와 열조의 허물을 자복하고 이 날에 낮 사분지 일은 그 처소에 서서 그 하나님 여호와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낮 사분지 일은 죄를 자복하며 그 하나님 여호와께 경배하는데.\"
성경을 읽을 뿐 아니라, 그것을 권하고 가르치라고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했다. \'권하는 것\'이라는 원어(파라클레시스)는 \'권면, 위로, 격려\'라는 뜻이다. 이것은 말씀의 교역자가 성경말씀으로 성도들을 권면하고 위로하고 격려해야 할 것을 말한다.
또 가르치라고 말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을 해석하며 설명하라는 뜻이다. 이렇게 성경을 해석할 때 우리는 건전한 원리를 가지고 해야 한다. 우선 우리는 성경본문에서 각 단어의 뜻을 분명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문법적으로 그리고 문맥적으로 그 뜻을 묵상하며 성경의 본뜻 그대로 해석하려고 애써야 하며, 최종적으로 성경전체에 비추어 그 해석이 맞는가 맞지 않는가를 살펴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해석할 때 분명하게 보이는 부분은 분명하게 해석해야 하지만, 분명하지 않은 부분은 다른 해석들의 가능성을 두고 해석해야 할 것이다. 성경해석에서 독단적인 해석은 금물(禁物)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잘못된 해석일 때 죄가 되기 때문이다. 또 우리는 주관적 해석에 치우칠 수 있는 영해(靈解) 혹은 과도한 비유적, 풍유적 해석은 피하는 것이 좋다. 성경의 뜻을 오늘 현실에 적용하는 것은 좋으나 성경자체의 뜻을 오히려 혼란시키는 해석은 피해야 한다.
\'착념하라\'는 것은 일차적으로 목회자에게 주는 말씀이며 단지 넓은 의미에서 모든 성도에게 적용될 것이다. 우리 모두는 다 성경읽기를 힘쓰고 서로 권면, 격려하고, 또 가정에서 자녀들을 가르치고 교회의 주일학교 부서에서나 구역에서 서로를 가르쳐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모두의 믿음이 증진되어야 하겠다.
[14]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 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은 것을 조심 없이 말며.
\'네 속에 있는 은사\'라는 말은 디모데 속에 상주하는 어떤 은혜와 능력을 뜻하는 것 같다. \'장로의 회\'는 오늘날 교단 내에 한 지역에 있는 목사들과 장로들로 구성되는 노회(老會)에 해당한다. 디모데는 노회에서 안수 받을 때 예언으로 받은 말씀 사역자로서의 어떤 은사를 잘 간수하며 충성해야 했다.
오늘날도 주께서 주의 종들에게 각각 독특한 사명을 주시는 줄 우리는 안다. 어떤이는 해외선교의 사명을 받는다. 해외선교 중에서도 어떤이는 이슬람 지역을 위해서, 어떤이는 러시아나 중국 같은 공산 지역을 위해서 일하고자 하는 사명으로 받는다. 어떤이는 농어촌을 위해, 어떤이는 장애자들을 위해, 어떤이는 신학교 교육을 위해 사명을 받는다. 각 사명자는 하나님이 주신 마음의 소원대로 충성해야 한다.
[15]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이 모든 일\'은 앞에서 언급한 대로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것과, 성경말씀을 읽고 권하고 가르치는 말씀사역에 착념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교역자는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야 한다. 어떤 진보를 말하는가? 지식의 진보, 분별력의 진보, 인격과 인품의 진보, 사역의 열매에 있어서의 진보 등을 의미할 것이다. 참된 일군은 결코 후퇴하거나 제자리 걸음을 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가 말씀과 기도 가운데 충성한다면 결코 후퇴하거나 제자리 걸음하는 자가 되지 않을 것이다.
[16]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
\'네 자신을 삼가라\'는 것은 복음사역자의 자기 훈련을 말한다. 이것은 넓게는 모든 성도의 자기 훈련에 적용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늘 자신을 성찰하고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또 \'가르침을 삼가라\'는 것은 교역자에게 중요한 것이 그의 가르침임을 보인다. 가르침도 단순히 가르침의 방법보다 가르침의 내용이 중요하다. \'이 일을 계속하라\'는 것은 앞에서 한 교훈들이 한 번 실천하고 중단될 것이 아니고 계속 실천되어야 할 것임을 보인다.
그 결과는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는 것이다. 교역자의 자기 훈련은 우선 자기 영혼의 구원을 확실케 한다. 자기 훈련에 실패한 자는 위선자로 버리움을 당할지도 모른다. 또한 교역자가 자기 훈련에 힘쓸 때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한다. 잠언 14:25, \"진실한 증인은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느니라.\" 복음사역의 결실은 결국 사역자의 자기 훈련에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겠다. 만일 사역자의 자기 훈련이 없다면 진정한 영혼구원의 일이 어떻게 일어나겠는가?
결론적으로, 교역자는 첫째 말과 행실과 사랑과 심령과 믿음과 순결함에 있어서 모본이 되어야 하며, 둘째 개인적으로 그리고 공적으로 성경읽기와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해야 하며, 셋째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를 모든 이들에게 나타내어야 한다. 이 교훈을 넓게 적용하여, 우리 모든 성도들도 범사에 모본이 되며 말씀을 가까이 하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자신의 진보를 다른 이들에게 나타내기를 힘써야 하겠다.
5장: 과부와 장로에 대한 교훈
1-16절, 과부에 대한 교훈
[1, 2] 늙은이를 꾸짖지 말고 권하되 아비에게 하듯하며, 젊은이를 형제에게 하듯하고, 늙은 여자를 어미에게 하듯하며, 젊은 여자를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하라.
본문은 교회의 목사나 전도사나 장로들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도들을 교훈하며 권면할 때 인간의 예절과 덕을 가지고 해야 할 것을 보인다. 즉, 나이 많은 남자 성도들에게는 꾸짖지 말고 자기 아버지에게 하듯이 권면하고, 젊은 남자 성도들에게는 형제에게 하듯이 하고, 나이 많은 여자 성도들에게는 어머니에게 하듯이 하고, 젊은 여자 성도들에게는 일절 깨끗함으로 자매에게 하듯이 해야 한다. 특히 교회의 봉사자들은 젊은 여성도들에 대해 깨끗하고 덕스럽게 처신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는 사람을 사람다워지게 하는 것이지, 결코 사람으로 비상식적이고 예절 없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성도들, 특히 교회의 일군된 자들은 예절 있고 덕스러운 인격자가 되어야 하고, 가르치는 일을 하는 자들도 높은 마음을 가지고 처신하지 말고 항상 겸손하게 그리고 예절 있게 말하며 행동해야 한다.
[3] 참 과부인 과부를 경대하라.
오늘 본문의 주요 내용은 참 과부에 대한 교훈이다. \'참 과부\'란, 오늘 본문의 문맥에 의하면, 나이가 60세가 넘은 과부로서 그를 돌아볼 자녀나 친척이 없는 자를 가리킨다. 교회는 그런 자를 선대해야 한다고 본문은 가르친다. 그것은 물질적인 공급을 의미한다. 이렇게 교회의 물질적 공급을 받는 과부들은 교회의 여러 가지 일들, 예를 들어 가난한 자들을 구제하는 일이나 병환자들을 돌보는 일 등을 도왔을 것이다.
[4]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거든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 이것이 하나님 앞에 받으실 만한 것이니라.
\'자기 집에서 효를 행하여\'라는 원어는 \'자기 집에서 경건하여\'라는 뜻이다. 여기에 경건과 의롭고 선한 삶과의 연관성이 있다. 참으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믿고 순종하는 자는 의와 선을 실천할 것이다. 만일 어떤 과부에게 자녀나 손자들이 있으면 저희로 먼저 자기 집에서 경건하여 부모에게 보답하기를 배우게 하라고 본문은 말한다. 성경은 효도를 중요한 덕으로 가르친다. 자녀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마땅한 보답이며 하나님 앞에서 받으실 만한 일이다. 자녀들은 마땅히 집에서부터 주의 뜻을 실천하는 것을 배워야 한다.
[5, 6] 참 과부로서 외로운 자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어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거니와 일락을 좋아하는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
과부도 두 종류가 있다. 한 종류는, 과부로서 외롭기 때문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고 주야로 항상 간구와 기도를 하는 자가 있다. 이런 사람은 육신적으론 외롭지만 영적으론 하나님과 늘 교제함으로 은혜 풍성한 삶을 사는 자이다. 아마도 그가 남편을 잃지 않았다면 그는 그렇게 하나님과 천국을 사모하고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과부가 있다. 그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대신에 \'육신의 쾌락을 구하며 사는 자\'이다. 본문에 \'일락(逸樂)을 좋아하는\'이라는 원어(스파탈로사)는 그런 뜻을 가진다. 그의 처지는 첫번째 종류처럼 그의 신앙생활에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한다. 남편이 없는 것이 그로 하여금 오히려 자유분방한 생활을 하게 할 뿐이다. 그는 주께서 주신 환경을 최선용할 지혜를 가지지 못한 자이다. 오늘 본문은 \'이는 살았으나 죽었느니라\'고 말한다. 그는 영적 생명을 갖지 못한 자이다.
[7] 네가 또한 이것을 명하여 그들로 책망 받을 것이 없게 하라.
위의 말씀은 모든 성도에게 교훈이 된다. 구원 받은 우리는 육신에 치우쳐 세상의 헛된 쾌락을 구하며 살 자들이 아니고 하나님을 바라며 천국을 소망하고 말씀과 기도로 살아야 할 자들이다. 성도가 하나님이 주신 신천신지(新天新地)의 소망을 저버리고 이 세상에만 치우쳐 산다면 되겠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를 도무지 모르는 행위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마땅히 그런 세상적이고 쾌락적인 헛된 생활을 버리고 하나님께 소망을 둔 경건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8] 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니라.
이것은 중요한 교훈이다. 신앙과 행위가 분리될 수 없음이 다시 한번 잘 증거된다. 어떤 자녀나 손자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스스로 생각하면서 자기의 외로운 부모님이나 어떤 가족이나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다면 그는 믿음이 없는 자일 것이다. 그런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오늘 본문은 말한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차적으로 자기 가족을 사랑할 의무가 있다. 믿음은 이런 의무를 제거하지 않는다. 오히려 믿는 자는 더 많이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9, 10] 과부로 명부에 올릴 자는 나이 육십이 덜 되지 아니하고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로서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어 혹은 자녀를 양육하며 혹은 나그네를 대접하며 혹은 성도들의 발을 씻기며 혹은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하며 혹은 모든 선한 일을 좇은 자라야 할 것이요.
초대 교회는 교회가 물질적으로 돌보며 공급해야 할 과부들의 명부를 작성했다. 교회의 과부의 명부에 올릴 자는 적어도 세 가지의 자격요건을 갖춘 자이어야 했다.
첫째로, 그는 나이가 60세 이상이 되어야 했다. 60세라는 나이는 그들이 경제적으로 스스로를 공급하기 어렵고 또 그들이 재혼할 만하지도 않은 나이를 가리킨 것 같다.
둘째로, 그는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이어야 했다. \'한 남편의 아내\'라는 표현은 합법적이지 않게 이혼하고 재혼한 자를 제외하는 말일 것이다. 60세가 되기까지 한 남편의 아내이었던 자라면 그는 성실한 여자이었을 것이다.
셋째로, 그는 선한 행실의 증거가 있는 자이어야 했다. 선한 행실의 예들로서, 그는 자녀들을 양육한 일이나 나그네들을 대접한 것이나 성도들의 발을 씻긴 것이나 환난 당한 자들을 구제한 일이나 모든 선한 일을 부지런히 좇은 것 등을 들었다.
[11]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 이는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에 시집가고자 함이니.
그러나 젊은 과부는 거절하라고 본문은 말한다. 젊은 과부는 나이가 60이 되지 않은 과부들을 가리킬 것이다. 그들을 과부의 명부에 올리지 말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할 때\' 결혼하고자 할 것이기 때문이다. \'정욕으로 그리스도를 배반한다\'는 원어(카타스트레니아소시 투 크리스투)는 \'그리스도를 대항하여 음탕하게 된다, 정욕적이게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모든 젊은 과부들이 다 그렇게 된다는 말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그 중에 그런 자들이 생기게 될 수 있기 때문에 그들을 과부명부에 올리지 말라고 하였다.
[12] 처음 믿음을 저버렸으므로 심판을 받느니라.
그런 자는 처음 믿음, 곧 맨처음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믿었을 때 이제부턴 그리스도만 믿고 순종하며 따르겠다고 맹세했던 그 처음 믿음을 저버렸기 때문에 정죄를 당할 수밖에 없다. 참으로 믿고 구원 받은 자는 세상적으로 음탕하고 정욕적이게 살 수 없다. 세상적으로 음탕하고 정욕적인 자는 회개하고 죄를 청산하고 구주 예수 앞에 굴복하여 이제부터 그만을 믿고 섬기며 따르겠다고 결심해야 한다.
[13] 또 저희가 게으름을 익혀 집집에 돌아다니고 게으를 뿐 아니라 망령된 폄론을 하며 일을 만들며 마땅히 아니할 말을 하나니.
그들은 첫신앙을 저버렸을 뿐 아니라 자기 일에 성실하지 않고 게을러 일하기를 싫어하고 오히려 집집에 돌아다니며 해서는 안될 남을 비난하는 말이나 한다. 이런 자는 교회에 유익을 주는 일군이 되지 못하고 도리어 교회를 허물고 성도들에게 해를 끼치는 자이다.
[14] 그러므로 젊은이는 시집가서 아이를 낳고 집을 다스리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말기를 원하노라.
그러므로 사도는 젊은 과부들이 재혼할 수 있으면 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돌보고 대적에게 훼방할 기회를 조금도 주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정욕적인 죄를 범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길이 된다. 남편이나 아내의 사별로 인한 재혼은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정당한 일이다. 성도는 정욕의 죄를 범하는 것보다 재혼하는 것이 낫다. 그러므로,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은혜 주시지 않는데도 스스로 독신(獨身)을 서약하는 것은 자신에게 올무가 되는 어리석은 일이다.
[15] 이미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도 있도다.
\'사단에게 돌아간 자들\'이라는 원어는 \'사탄을 따라 치우친 자들\'이라는 뜻이다. 사람을 그리스도에게서 떠나게 하는 자는 사탄뿐이다.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혹 사탄의 시험을 잠시 받을 수 있을지라도 결코 사탄의 지배를 받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탄의 권세 아래서 건져 자기의 품 안에 두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밖에 있는 자는 사탄을 따라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며 진리의 정로(正路)에서 치우쳐 나간다. 그 당시에도, 12제자 중에 한 사람인 가룟 유다처럼, 이미 사탄을 따라 바른 길에서 치우쳐 나간 자들이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젊은 과부들이 결혼하여 사탄의 시험에 빠지지 않게 되기를 원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16] 만일 믿는 여자에게 과부 친척이 있거든 자기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말게 하라. 이는 참 과부를 도와주게 하려 함이니라.
사도는 교회가 돌보아야 할 참 과부가 어떤 이들이어야 하며 왜 젊은 과부들은 제외해야 하는 지를 말한 후에 다시 앞에서 언급한 바 있는 내용을 반복하였다. 믿는 성도에게 과부 친척이 있으면 그가 도와주고 교회로 짐지지 않게 해야 한다. 왜냐하면 교회가 참 과부 곧 아무에게서도 물질적 도움을 받을 수 없는 자들을 돌보며 공급하기 위해서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특히 구원 받은 성도가 먼저 자기 가족과 친척을 돌아보아야 함을 확실하게 가르친다. 자기 가족이나 친척을 돌아보지 않는 자는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보다 더 악한 자라고 본문은 말한다.
오늘 본문의 또하나의 중요한 교훈은 사람이 처음 믿은 대로 하나님만 소망하고 그의 뜻대로 경건하고 거룩하게 살아야지 세상의 향락이나 육신의 쾌락을 추구하며 살아서는 안된다는 사실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정욕적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행위요 믿음을 저버리는 행위이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정죄받을 일이다. 참된 성도는 그런 자일 수 없다.
17-25절, 장로에 대한 교훈
[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성경에서 \'장로\'는 교회를 다스리며 양들을 돌보는 자이다. 사도행전 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베드로전서 5:1, 2,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로라.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이 직책이 이렇게 중요함으로 장로들은 반드시 바른 교리적 지식과 시대를 분별하는 분별력을 가져야 하고 양들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그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장로의 첫번째 직무는 시간을 내어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보살피며 심방하는 것이다. 장로를 \'감독\'이라고 부르는 것은 양들을 이리들 곧 이단들로부터 그리고 세상의 죄악된 풍조로부터 지키는 직무를 가리킨다. 물질적 봉사는 장로의 본무가 아니다. 가난한 자라도 장로가 될 수 있다. 단지 신앙지식과 인격에 있어서 모든 성도에게 모범이 되어 하나님의 교회를 책임질 만한 자이어야 한다.
본절은 성도들이 장로들을 존경해야 하며 잘 다스리는 장로들 특히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라고 가르친다.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이란 오늘날 목사를 가리킨다. 전도사는 \'목사가 되기 위해 배우고 준비하는 과정에 있는 자\'이다. 잘 다스리는 장로들이나 목사를 배갑절이나 존경하라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일에 충실하기 때문일 것이다.
성경은 또한 성도들이 그들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치기도 하였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18] 성경에 일렀으되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 하였고 또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느니라.
\'성경\'이라는 원어(헤 그라페)는 단수명사로서 여러 개의 작은 책들로 구성된 성경을 한 권의 책으로 간주하는 것을 보인다. 디모데후서 3:16,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구약 39권과 신약 27권의 작은 책들은 다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들이며 따라서 한 권으로 간주되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신구약 66권의 책들은 다 하나님의 말씀이다.
\'성경에 일렀으되\'라는 원어(레게이 헤 그라페)는 \'성경이 말하기를\'이라는 뜻이다. 성경이 말한다는 것은 성경을 의인화(擬人化)한 표현이다. 즉 실상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지만,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살아 있는 말씀이므로 성경이 말한다고 표현한 것이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우지 말라\'는 말씀은 신명기 25:4의 말씀이다. 이것은 신명기의 신적 권위를 증거한다. 신명기의 이 말씀은 물론 일차적으로 문자적 의미를 가진다. \"곡식을 밟아 떠는 소의 입에 망을 씌워서는 안된다.\" 그러나 바울은 이 말씀을 영적으로 복음사역자들에게 적용시킨다.
\'일군이 그 삯을 받는 것이 마땅하다\'는 말씀은 구약에 나오지 않고 신약의 복음서에 나온다. 마태복음 10:10,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 누가복음 10:7, \"그 집에 유하며 주는 것을 먹고 마시라. 일군이 그 삯을 얻는 것이 마땅하니라.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옮기지 말라.\" \'성경에 일렀으되\' 하며 이 말씀을 인용한 것은 바울 사도가 이 서신을 쓸 당시 이미 복음서가 성경으로 인정된 것을 보이는 것 같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해야 할 이유와 근거를 보인다. 하나님께서 복음의 일군들을 물질적으로 공급하라고 말씀하신 것이 그 이유와 근거이다. 본절은 목회와 말씀의 사역을 위해 전적으로 바쳐진 일군들을 위해 교회가 물질적 공급으로 예우를 갖추어야 함을 가르친다.
[19] 장로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지 말 것이요.
교회에서 장로 혹은 목사가 가장 중요한 직분이기 때문에, 특별히 그들에 대한 송사는 두 세 증인이 없으면 받아들여져서는 안된다고 본문은 말한다. 이것은 신명기 19:15에 나타난 주의 뜻과 같다. 거기에 보면, \"사람이 아무 악이든지 무릇 범한 죄는 한 증인으로만 정할 것이 아니요 두 증인의 입으로나 세 증인의 입으로 그 사건을 확정할 것이며\"라고 규정되어 있다. 일반 성도들에게도 이런 원리가 적용되어야 한다면, 장로들에게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교회의 중직자에 대한 송사는 경솔히 이루어져서는 안되며 신중하게, 정확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0] 범죄한 자들을 모든 사람 앞에 꾸짖어 나머지 사람으로 두려워 하게 하라.
\'범죄한 자들\'이라는 원어는 현재분사로서 \'계속 범죄하는 자들\'이나 \'죄 가운데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문맥상 장로들을 가리킬 수도 있으나 꼭 그들에게 한정된 것은 아니다. \'모든 사람 앞에서\' 꾸짖어야 할 이유는 그들이 현재 죄 가운데 있기 때문이며 다른 이들에게 그 죄가 전염되어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범죄한 자는 공개적으로 책망 받음을 통하여 회개에 이르러야 한다. 만일 그가 그 죄의 책망을 인신공격이나 인격모독으로 생각하여 불쾌하게만 여긴다면 그는 하나님보다 자신을 더 사랑하는 자일 것이다. 정말 그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책망 받은 그 죄를 즉시 통회하며 고치려 할 것이다.
[21]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와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 앞에서 내가 엄히 명하노니 너는 편견이 없이 이것들을 지켜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며.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이라는 말은 천사들 중에 타락한 천사들 곧 사탄과 악령들도 있지만 택하심을 받은 거룩한 천사들도 있음을 보인다. 본절에서 \'택하심을 받은 천사들\'을 언급한 것은 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하나님의 일을 받들게 되기 때문일 것이다.
여하튼, 주의 종들은 범사에 편견이 없어야 하고 아무 일도 편벽되이 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정의의 하나님이심과 같이, 주의 일군들은 정의의 사람이어야 한다. 그는 범사에 공명정대하며 공평해야 하며, 모든 불의와 불공정을 버려야 한다.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도 정의로운 일을 해야 하며 사회정의에 이바지 해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사회의 법조계에 많이 진출하여 참으로 정의로운 검사나 변호사나 판사들로 활약해야 하며, 또 공정하고 정의로운 경찰들과 기타 공무원들로 많이 진출해야 하며 또 진실과 정의를 심어줄 학교교사들로도 많이 진출해야 하겠다.
특히 교회의 치리회인 당회나 노회나 총회는 참으로 바르고 공평한 회가 되어야 한다. 그러려면 공정한 토론의 장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잠언 17:15,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악하다 하는 이 두 자는 다 여호와의 미워하심을 입으니라.\" 잠언 18:17, \"송사에 원고의 말이 바른 것 같으나 그 피고가 와서 밝히느니라.\"
[22] 아무에게나 경솔히 안수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고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
\'안수\'는 안수 받는 자를 구별하며 하나님의 뜻을 위탁하고 축복하는 의미를 가지는 행위이다. 안수할 때 안수하는 자는 자기의 영혼과 마음을 상대방에게 진지하게 쏟는다. 그러므로 이런 의미심장한 행위가 경솔하게 이루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다른 사람의 죄에 간섭지 말라\'는 말씀은 다른 이들의 죄에 참여치 말라는 뜻이다. 죄는 전염성이 많다. 그러므로 성도의 교제시 우리는 죄에 빠지지 않기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깨어 있지 않으면 범죄자와의 친분관계 때문에 우리는 그의 죄에 영향을 받게 되고 그 죄에 참여케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아무리 친한 자라 하더라도 우리는 그의 범죄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네 자신을 지켜 정결케 하라\'는 말씀은 교리적으로나 윤리적으로 다 적용해야 할 교훈이다. 이 세상에는 교리적으로, 사상적으로 이단사설들이 많고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죄악된 풍조들과 일들이 많다. 이 모든 것들의 배후에는 사탄과 악령들의 활동이 있다. 구원 받은 우리는 지식과 도덕성에 있어서 이미 법적으로 깨끗게 되었고 또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되어야 한다.
[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디모데의 \'자주 나는 병\'은, 바울의 육체의 가시처럼(고후 12:7), 만성적 질병과 연약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하나님의 은혜이었을 것이다. 성도에게 고난은 결코 슬픔과 불행의 요소가 아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영적인 은혜와 복이다. 성도는 고난을 통해 더욱 겸손해지며 더욱 주님만 의지하게 되며 더욱 성결해지며 더욱 천국만 바라보게 된다.
[24, 25] 어떤 사람들의 죄는 밝히 드러나 먼저 심판에 나아가고 어떤 사람들의 죄는 그 뒤를 좇나니 이와 같이 선행도 밝히 드러나고 그렇지 아니한 것도 숨길 수 없느니라.
사람들의 죄는 혹은 먼저, 혹은 나중에 드러나 심판에 나아간다. 그것들은 결국 남김 없이 다 드러날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서 다 드러나지 않는다면, 마지막 날 하나님 앞에서 적나라하게, 철저하게, 공의롭게 다 드러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은 사람의 선하고 악한 행위대로 공의롭게 이루어질 것이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시리라.\"
예수께서는 은밀한 구제도, 무익한 말 한 마디도 다 갚음을 얻을 것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6:3, 4, \"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전통사본) 갚으시리라.\" 마태복음 12:36,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6장: 자족하는 생활
1-2절, 종들에 대한 교훈
[1] 무릇 멍에 아래 있는 종들은 자기 상전들을 범사에 마땅히 공경할 자로 알지니 이는 하나님의 이름과 교훈으로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사람이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함을 보인다. 종은 종으로서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종의 위치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마땅히 공경하는 것\'이다. 여기에 \'공경한다\'는 말은 주인을 위하고 그를 돕고 그의 말을 순종하는 것을 포함할 것이다. 그것이 종의 위치이다. 물론 주인은 주인으로서 하인들을 공의로 다스리고 그들을 사랑하여 관심과 배려를 가져야 한다. 그것이 주인의 위치이다. 종은 종으로서 좋은 종이 되어야 하고 주인은 주인으로서 좋은 주인이 되어야 한다.
믿는 성도가 된 종도 예외가 아니다. 그는 오히려 더욱 주인들에게 잘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에겐 하나님의 이름이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잘못하면 하나님의 이름이 욕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더욱 주인을 존경하고 그를 위하여 도우며 그의 지시에 순종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이, 성경은 노예제도가 있었던 옛 시대에 주인과 종의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그 관계가 잘 유지되고 그 관계 속에서 종은 종으로서의 임무를 잘 감당하게 되기를 가르친다. 노예제도의 개선은 오랜 세월을 요할 것이며 그것은 서서히 이루어질 것이었다. 그러나 사회제도의 개선이 필요하긴 하지만, 사실상 그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사람의 마음의 개조이었다. 불완전한 제도 속에서도, 만일 사람의 심령이 개조된다면, 인간관계는 좋아지고 인간의 삶은 평안을 얻게 될 것이었다.
본절의 교훈은 노예제도가 없는 오늘날에도 직장생활이나 가정생활에 적용될 수 있다. 성도는 직장에서 상관에 대해서는 존경과 협력과 순종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며, 하급자에 대해서는 공의와 사랑, 곧 관심과 배려를 가진 사랑의 마음을 가져야 할 것이다. 이 원리는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 간에도 그리고 시모와 며느리 간에도 적용된다. 각자가 자기 위치를 알고 지킨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서도 즐겁고 평강한 인간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2]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경히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니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
본절은 믿는 성도인 종이 자기 주인이 믿는 성도일 경우에 그를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욱 잘 섬겨야 함을 가르친다. 이것도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믿는 자들이 다 동등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주께서 각 사람에게 서로 다른 직책을 주셨다. 그리고 그 직책 간에는 때때로 질서가 있다. 부모와 자녀에게 질서가 있듯이, 선생과 학생에게 그리고 상급자와 하급자 사이에 질서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는 형제들 간에 친할수록 상대를 가볍게 여기지 말고 말도 존칭어를 사용하는 것이 좋다. 가정에서 부부 간에도 그러하고, 교회에서 봉사하는 각 영역에서도 그러하다.
3-10절, 자족하는 마음
[3] 누구든지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에 착념치 아니하면.
본절은 \'바른 말\'과 \'다른 교훈\'을 대조시킨다. \'바른\'이라는 원어(휘기아이논)는 1:10에서 \'바른 교훈\'이라는 말에서 사용된 그 말로서 \'건전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바른 말은 건전한 말, 유익한 말이다. \'경건에 관한 교훈\'이라는 원어(헤 카트 유세베이안 디다스칼리아)는 영어성경들의 번역대로 \'경건에 일치하는 교훈,\' \'경건에 맞는 교훈\'이라는 뜻일 것이다. 바른 말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하신 말씀이나 그를 바르게 증거하는 말씀이며 그것은 곧 경건에 이르게 하며 경건에 맞는 교훈이다. 바른 말을 하는 자는 경건하며 의로운 삶을 힘쓰지 않을 수 없다.
[4, 5] 저는 교만하여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변론과 언쟁을 좋아하는 자니 이로써 투기와 분쟁과 훼방과 악한 생각이 나며 마음이 부패하여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그러나 다른 교훈을 하며 바른 말에 착념치 않는 자는 교만하며 무지하고 싸움을 일으킨다. 그를 묘사하기 위해 변론, 언쟁, 투기, 분쟁, 훼방, 다툼 등의 여러 말이 사용되었다. 그는 생각과 마음이 부패하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생각하는 자이다. 결국 싸움은 사람의 욕심에서 발생한다. 야고보도 증거하기를,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고 하였다(약 4:1, 2).
전통사본에는 5절 끝에 \"너는 그런 자들로부터 떠나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다. 교제의 문제는 중요하다. 악은 누룩처럼 번지는 성질이 있다. 악을 용인하며 악한 자들과 자꾸 교제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악에 물들게 되기 쉽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른 교훈을 저버리고 불경건하고 교만하고 땅의 것을 탐하는 자들과 교제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자들과 가까이 하고 하나님을 멀리하는 자들과 멀리하는 것이 지혜이다. 악인은 우리의 전도의 대상이지 교제의 대상이 아니다.
[6]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지족(知足)하는 마음\'이라는 말은 물질적 욕심을 부리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자기의 처지와 형편에 감사하며 만족하는 마음을 말한다. 이것은 성도의 정상적인 마음가짐이다. 이런 마음을 가진 경건은 성도에게 큰 유익이 된다. 바울은 이미 4:8에서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고 증거하였었다. 경건을 세상적, 물질적 이익의 재료로 삼는 것은 악하고 헛된 일이지만, 진정한 경건, 자족하는 경건은 큰 유익이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당신만을 바라는 경건한 성도에게 이 세상에서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하시고 영생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감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7]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고, 또 전통사본에는 후반부에 \'분명히\'라는 말(델론)이 들어 있다. 다시 읽어보면, \"왜냐하면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며 또한 분명히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라.\"
본절은 성도가 자족하는 마음을 가져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것은 성도가 출생시 빈 손으로 이 세상에 오고 별세시 역시 분명히 빈 손으로 이 세상을 떠날 것이기 때문이다. 무덤에 묻힐 때 그가 세상에서 모았던 재물을 함께 묻는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세상의 삶이라면, 그리고 백년 후에 영원한 세계가 있는 것이 사실이라면, 조금 더 가지고 조금 덜 가진 것이 무슨 큰 문제가 되겠는가? 오히려 조금 더 가진 자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에 빈곤하고 조금 덜 가진 자가 믿음에 부요한 경우가 많지 않은가?
[8]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여기에 성도의 인생철학이 있다. 성도는 이 세상에서 탐심을 품지 말고 기본적인 의식주로 만족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공중의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 백성을 먹이시고 입히실 것이기 때문에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현실생활에 성실하면서 자족하는 생활, 하나님께 감사하며 만족하는 생활을 하자. 그것이 성도다운 생활이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성도의 생활은 경건하며 자족하는 생활로 요약된다. 경건과 자족--이것이 우리의 생활철학, 생활원리가 되게 하자.
[9]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이 있다. 경건하고 자족하는 성도의 정상적 모습과 대조하여, 이 세상에는 부하려 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이것이 탐심이다. 탐심은 무엇을 조금 더 가지려는 마음, 곧 부해지려는 마음이다. 이런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진다. \'정욕\'이라는 원어는 \'욕망\'이라는 뜻이다. 이것들은 결국 사람을 파멸케 하는 것이다. 부하려는 욕망들이 사람으로 하여금 파멸에 이르게 만든다.
[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왜 부하려 하는 자들이 파멸케 되는가? 그 이유는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다. \'일만 악\'이라는 원어는 \'모든 악\'이라는 뜻이다. 탐심과 돈 사랑이 모든 악의 근원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야고보서도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라고 말씀했다(약 1:15). 공직자 부정부패도, 청소년 윤락행위도, 어린 소녀의 유괴와 살해사건도 다 돈사랑에서 비롯되었다.
특히 성도가 돈을 사랑하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찌르게 된다고 본문은 말씀한다. 탐심과 믿음은 함께 있을 수 없다. 탐심은 우상숭배이기 때문에 참된 믿음과 함께 있을 수 없다. 마태복음 6:24에 보면, 예수님은 분명히 말씀하시기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현실에서 자기 위치를 지켜야 한다. 아랫사람은 아랫사람으로서 윗사람을 존중하고 도우며 그의 말에 순종해야 하며, 윗사람은 윗사람으로서 아랫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며 관심과 배려를 가지고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참된 경건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나의 현실에서 자족하는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의식주의 필요를 공급해 주실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결코 부하려 하거나 돈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참된 믿음에서 떠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돈을 겸하여 사랑할 수 없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11-16절, 네 가지 명령
[11] 오직 너 하나님의 사람아, 이것들을 피하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며.
바울 사도는 디모데를 향해 \'너 하나님의 사람아\'라고 부른다.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표현이 구약 시대에는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적용되었다(신 33:1; 왕상 17:24; 왕하 4:7, 9, 25). 이 말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구별하여 당신 곁에 두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시고 당신의 일에 쓰시는 자라는 뜻일 것이다. 이 말이 신약 시대에 디모데에게 사용되었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께서 구별하여 당신 곁에 두시고 성경말씀에 정통하게 하시고 당신의 일에 쓰시는 말씀의 봉사자들에게도 적용될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성도는 다 \'하나님의 사람들\'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만드셨고 당신의 특별한 소유로 삼으셨다. 성경은 구원받은 성도들이 하나님께로서 났으며(요 1:13)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며(고후 5:17) 그리스도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았으며(엡 2:10)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라고(벧전 2:9) 증거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의 사람 곧 돈의 사람이나 정욕의 사람처럼 살지 말고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 11절과 12절에 \'피하고,\' \'좇으며,\' \'싸우라,\' \'취하라\'는 말들이 원문에서는 다 명령어로 되어 있다. 이 네 가지의 명령어는 하나님의 사람에게 합당한 삶에 대해 가르쳐준다.
첫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이것들을 피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이것들\'이란 앞에서 말씀한 대로 다른 교훈을 따르고 참된 경건과 자족하는 마음 대신에 돈을 사랑하고 물질적 부요를 구하는 것을 말한다. 성도는 이런 마음가짐을 버리고 그런 생각에서 떠나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우리의 신앙 성장을 가로막고 우리를 믿음에서 떠나게 만들기 때문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으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여기에 언급한 덕들은 성도가 갖추어야 하고 실행하여야 할 생활 원리들이다. 성도는 범사에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의(義)에 반대되는 것이 죄(罪)이다. 성도는 모든 죄를 버리고 자신을 하나님 앞에 의의 도구로 바치기를 힘써야 한다. 이제는 의만을 위해 살며 의만을 행하며 살아야 한다.
성도는 또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 이전의 상태와 달리, 성도는 이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를 두려워하며 그를 섬기고 그에게만 순종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경건에 이르기를 훈련하라\"는 교훈을 받았다. 경건과 나누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 믿음이다. 경건은 곧 믿음으로 표현된다. 성도는 하나님을 믿는 자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존재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성경에 계시하신 그의 모든 진리들을 다 믿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고 묵상함으로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굳건한 믿음을 가져야 한다.
성도는 또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사랑은 성도에게 있어서 최고의 덕이다. 성도에게 있어서 믿음이 나무의 뿌리라면, 사랑은 나무에서 핀 꽃이요 맺혀진 열매이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사랑함과 형제들을 사랑함이 없다면 우리는 참된 성도가 아닐 것이다. 인내와 온유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속성으로 묘사되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다\"(고전 13:4). 이 두 덕목은 신앙 인격에 있어서 매우 필수적이다. 우리가 참으로 주를 믿고 사랑한다면 그리고 참으로 형제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오래 참는 자이어야 할 것이며 인간관계에서 온유하며 친절한 자이어야 할 것이다.
[12]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 영생을 취하라. 이를 위하여 네가 부르심을 입었고 많은 증인 앞에서 선한 증거를 증거하였도다.
셋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이 세상은 영적인 전쟁터와 같고, 성도의 신앙생활은 영적인 전쟁과 같다. 이 세상에는 우리의 믿음을 없애거나 약하게 하려는 악한 세력들이 있다. 에덴 동산에서 아담의 아내 하와에게 접근하여 그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케 만들었던 사탄은 오늘도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신앙을 심어줌으로 그들의 믿음을 파괴시키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다. 불경건한 세상의 사조와 우리 자신 속에 있는 육신의 죄악성도 참된 믿음을 대적하는 요소들이다. 싸우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 길에는 고난과 고독과 때로는 순교의 피흘림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 이겨야 한다.
넷째로, 하나님의 사람은 \'영생을 취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영생은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로마서 6:22, 23,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나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본문은 우리가 영생을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다고 말씀한다. 이와 같이, 영생의 소망은 복음 진리의 핵심에 속한다(요 3:16; 딛 1:1-3). 우리 모두는 믿음을 잘 지켜 약속된 영생을 취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13]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 앞과 본디오 빌라도를 향하여 선한 증거로 증거하신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내가 너를 명하노니.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앞에서 위의 명령들을 명한다. 하나님을 \'만물을 살게 하신 하나님\'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생명체와 생명 자체의 근원이 되심을 증거한 것이다. 그 안에는 생명이 있다. 그 안에 거하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승리자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물에게 생명을 주셨고 죽은 자들도 다시 살리실 것이기 때문이다.
[14]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나타나실 때까지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 이 명령을 지키라.
디모데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모두는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위의 네 가지 명령들을 성실히 지켜야 한다. \'점도 없고 책망 받을 것도 없이\'라는 말은 성실하게, 온전하게 지키라는 뜻이다. 피할 것을 피하고 좇을 것을 좇으며 싸울 것을 싸우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한다. 이것들 중 어느 하나도 중단하거나 대충해도 좋은 것은 없다. 피해야 할 돈 사랑은 반드시 피해야 하고, 좇아야 할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는 반드시 좇아야 하고, 싸워야 할 믿음의 싸움은 반드시 싸워야 하고, 취해야 할 영생은 반드시 취해야 한다.
[15]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의 시간표에서 마지막 대사건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다. 성경은 그의 재림을 그의 오심(파루시아) 혹은 그의 나타나심(에피파네이아, 아포칼黳시스)이라고 표현한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그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 그 때 역사의 완성, 구원의 완성이 있다. 그 때 죽은 자들의 부활과 의인과 악인의 심판이 있을 것이다(마 25:31-46; 살후 1:7-9). 그 때 우리의 구원은 영광스런 구원으로 완성될 것이다. 그것은 로마서 8장이 말씀한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다.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바울 사도는 끝으로 하나님에 대하여 몇 가지 증거한다. 첫째로, 하나님은 복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시다. \'능하신 자\'라는 원어(뒤나스테스)는 \'주권자\'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은 온 우주에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지혜와 능력이 무한하신 탁월하신 주권자이시다. 그는 실로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이시다.
[16]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시니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릴지어다. 아멘.
둘째로,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생명체들은 다 죽는 존재 혹은 죽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죽지 아니함이 있다. 그는 생명의 근원이시고 생명 자체이시다. 그는 누구에 의하여 생명을 얻으신 분이 아니시고 스스로 계신 분이시다. 여호와라는 그의 이름은 그가 스스로 계심을 나타내는 명칭이다. 우주의 모든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님에게서 비롯되었다. 그는 살아계시고 영원히 살아계시는 하나님이시다.
셋째로, 하나님은 인생들이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것이 그의 거룩이며 그의 영광이다. 그는 인생이 거하는 이 세상과 질적으로 다르시다. 그는 이 피조 세계를 초월하여 저 높이 빛 가운데 계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빛은 그의 완전성을 나타낸다. 이 세상은 유한적(有限的)이고 불완전하지만, 그는 무한하시고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다. 그의 빛은 또한 그의 도덕성을 포함할 것이다. 그는 도덕적으로도 무한히 거룩하시고 의로우시며 선하시며 진실하신 하나님, 곧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분이시다. 그의 초월하시고 완전하신 영광 앞에 인생은 아무도 가까이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넷째로, 하나님은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으신 자이시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나님은 영이시다(요 4:24). 이 세상에서 물질들은 대개 볼 수 있다. 물론, 공기나 전기나 전파같이 볼 수 없는 것도 있기는 하다. 영은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나 영은 전기나 전파같이 무(無)인격이 아니다. 영은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고 있는 인격체이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영이시다. 그러나 그는 무한하시고 완전한 영이시다.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 인생들에게 복이요 생명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바로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유일하신 주권자이시다. 오직 하나님께만 죽지 아니함이 있다. 그는 우리가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신다. 그는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으신 자이시다. 바울은 하나님을 이렇게 증거한 후 그에게 존귀와 영원한 능력을 돌렸다.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이 유일하신 주권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다시 나타내실 것인데, 그때까지 하나님의 사람들 곧 주의 종들과 모든 성도들은 성실하게, 온전하게 피할 것을 피하고 좇을 것을 좇고 싸울 것을 싸우고 취할 것을 취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우선, 우리는 하나님을 참으로 알아야 한다. 그가 얼마나 놀라우신 분이신가! 어떻게 우리같이 비천한 자들이 그를 알고 그를 섬기며 그의 백성되는 특권을 누리게 되었는가? 어떻게 그의 영께서 우리의 육체 속에 거하시게 되셨는가? 아, 생각할수록 놀랍고 놀랍다!
또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앙망해야 한다. 그는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신 약속이다. 우주의 주권자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나타나게 하실 것이다. 그의 시간표는 이루어지고 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실 것이다. 그는 영광 가운데 다시 오실 것이다. 우리 모두는 그의 재림을 대망하자.
마지막으로, 오늘 본문의 주요 교훈은 하나님의 사람이 지켜야 할 네 가지의 명령이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나타내실 때까지 우리 모두는 이 네 가지를 성실히, 온전히 지켜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신앙에 장애물이 되는,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돈 사랑, 물질 사랑을 피하고 그것을 다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의와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좇아 성도답게, 성도다운 인격을 가지고 살아가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마귀의 시험과 대적이 많은 이 세상에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잘 싸워야 한다. 이 싸움에 지는 자가 되지 말고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신앙생활의 목표요 우리의 소망인 영생을 반드시 취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이 복을 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우리를 부르셨고 구원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의 생활을 바로 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로 주신 영광스런 영생을 다 받아 누려야 한다. 이것이 성도의 목표요 소망이다.
17-21절, 정함이 없는 재물
[17]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바울 사도는 이제 \'이 세대에 부한 자들\'에 대해 교훈한다. 그러면 이 말씀은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만 해당하고 가난한 자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씀인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은 생활의 바른 지침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교훈이 된다.
바울은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세 가지의 내용을 명하라고 디모데에게 말씀한다. 첫째로, 마음을 높이지 말라고 말씀한다. \'마음을 높이지 말라\'는 원어는 \'높은 생각을 갖지 말라\'는 뜻이다. 재물이 많으면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기 쉽다. 신명기 8:12-14, \"네가 먹어 배불리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하게 되며 또 네 우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두렵건대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가난이 사람을 겸비케 만든다면, 사람에겐 가난도 유익하다. 부요만이 결코 유익한 것이 아니다. 부요는 오히려 사람을 교만케 할 위험성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요를 구하지 말고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는 자가 되자. 잠언 30:7-9,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돈이 많은 자들은 그 돈 때문에 생각과 마음이 높아지지 말고 그것의 헛됨을 알고 항상 겸비한 자가 되어야 한다. 야고보서 1:10, 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그러므로 부한 자들은 높은 생각과 마음을 가지지 말아야 한다.
둘째로, 본문에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부자들이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라고 말씀한다. \'정함이 없는\'이라는 원어는 \'불확실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이 세상의 재물은 정함이 없고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잠언에는 \"부자 되기에 애쓰지 말고 네 사사로운 지혜를 버릴지어다. 네가 어찌 허무한 것에 주목하겠느냐? 정녕히 재물은 날개를 내어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리라\"고 말씀한다(잠 23:5).
부요했던 삼풍 백화점이 무너지고 많은 생명들이 비참하게 죽음을 당하게 되자 그 백화점 주인의 가정에 그 많던 돈이 하루 아침에 \'하늘에 나는 독수리처럼\' 날아가버리고 지금도 어려움을 당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어음들을 현금 처리하지 못하여 하루 아침에 도산(倒産)하는 중소기업들도 있다. 잠간의 실수로 자동차 인사 사고를 내어 수천만원의 합의금을 내야 하는 경우들도 있다. 갑작스런 중병으로 수천만원이 소모되는 것은 여러 해의 시간이 걸리는 일이 아닐 것이다. 재물은 정함이 없고 불확실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기에 우리의 소망을 두지 말자.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자. 전통 사본에는 \'하나님께\'라는 말에 \'살아계신\'이라는 말이 첨가되어 있다. 하나님은 살아계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생명 없는 우상들과 다르다. 그는 지식과 감정과 의지를 가지신 인격적인 신이시다. 그는 온 우주를 창조하신 능력의 주님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지금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대주재자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의 기도를 잘 들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이시다. \'모든 것\' 속에는 영적인 것뿐 아니라 육적인 것도 포함된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23:1)는 고백은 모든 성도의 체험적 고백이다. 그는 주시되 부족하게 주시는 것이 아니고 후하게 주신다. 그의 공급하심은 쓰고 남음이 있다. 그래서 우리로 그의 주시는 풍성함을 누리게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이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어야 한다. 본서신 앞부분에서도 바울은 우리가 경건의 훈련을 힘쓰는 것은 우리 소망을 살아계신 하나님께 두기 때문이라고 말씀한 바가 있다(딤전 4:10).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이 참으로 헛되고 헛되지만(전 1:2), 우리는 오직 헛되지 않은 영원하신 하나님, 영광의 주님을 알게 되었고 영접케 되었고 섬기게 되었다. 모든 육체는 풀같이 마르고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같이 시드나, 우리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있을 것이다(사 40:6-8). 우리는 오직 영원하신 이 하나님께만 우리의 소망을 두자.
[18]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이 세상의 부자들이 선한 일에 부요한 자가 되라고 말씀한다. 선한 일을 행하는 것은 구원받은 모든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다. 선행은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救贖)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선한 일을 하되 풍성하게 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 무엇이 선한 사업인가? 그것은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널리 전파하는 사업이다. 그것은 믿지 않는 자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 뿐만 아니라 이미 믿는 자들에게 바른 말씀,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전달하는 일이다. 선한 사업은 또한 물질적으로 어려운 자들을 돌아보는 구제의 일을 포함한다. 주께서는 주를 믿는 어린 소자(小子) 한 사람에게 선을 베푼 것이 곧 당신께 베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마 25:40).
본문은 또한 \'나눠주기를 좋아하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선한 일이 구제를 포함함을 더욱 나타낸다. 시편 37:25, 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21:26, \"어떤 자는 종일토록 탐하기만 하나 의인은 아끼지 아니하고 시제[구제]하느니라.\" 잠언 11:24, 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본문에 \'동정하는 자\'라는 마지막 말의 원어(코이노니코스)는 \'함께 나누는 자, 인정이 있는 자, 후한 자\'라는 뜻을 가진다. 이것도 다 선행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보인다. 이 말씀은 사도행전 2장과 4장에 증거된 초대 교회의 삶을 보인다. 사도행전 2:44, 45,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사도행전 4:32,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이것\'은 앞절에서 말씀한 선행을 가리킨다. 성도의 선행은 장래를 보장하는 확실한 기초와 같다. 예수께서도 말씀을 행하는 자는 기초를 반석 위에 세운 자와 같아서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겠다고 말씀하셨다(마 7:24, 25). 반면에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말씀한다(약 2:17, 26). 믿음이 선행을 동반하면 확실한 미래가 보장된다. \'참된 생명\'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영생\'이라고 되어 있다. 선행은 성도에게 영생의 보증이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과 영생을 얻지만, 선행을 통해 그 사실이 확실하여지는 것이다.
베드로후서 1:10, 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20] 디모데야 네게 부탁한 것을 지키고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의 망령되고 허한 말과 변론을 피하라.
바울이 디모데에게 부탁한 것은 오늘 바울 서신들 속에 기록된 교훈들이다.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 성경책에 기록된 모든 말씀을 지키기를 원하신다. 이것이 보수 신앙의 본질이다. 보수 신앙이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이것이 옳은 길이다. 우리는 이 패역한 세대에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기독교회 안에도, \'거짓되이 일컫는 지식\'이 있다. 그것은 지식이라고 불리우지만 실상 참된 지식이 아닌 지식이다. 참 지식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 하나님의 뜻을 아는 지식, 하나님을 경외하며 섬기는 지식이지만, 하나님과 상관없는 지식도 우리 주위에는 많이 있다. 그러한 지식은 망령되고 헛된 말과 변론을 일으킨다. 우리는 그러한 말과 변론을 피해야 한다. 우리는 오직 우리의 신앙과 생활을 유익케 하는 바른 지식, 바른 성경말씀만을 붙잡아야 한다.
[21] 이것을 좇는 사람들이 있어 믿음에서 벗어났느니라. 은혜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좇는\'이라는 원어는 \'공언하는, 고백하는\'이라는 뜻이다. 교회 안에도 잘못된 지식을 좇는, 공언하는, 고백하는 자들이 있다. 교회 내에도 이단들이 있고 가라지들이 있고 쭉정이들이 있다. 이상한 일이다. 그러나 사탄의 존재와 활동을 생각하면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아니고 사탄의 사람들이다. 이들은 참된 믿음에서 이탈된 자들이다. 우리는 이런 자들이 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바른 말씀 안에만 거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대로 믿고 행하는 보수 신앙을 가진 자들이 되어야 한다.
오늘 본문을 요약하면, 우선 부자들에게 대한 세 가지 교훈이 있다. 첫째, 마음을 높이지 말라. 둘째,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라. 셋째, 선한 사업에 부한 자가 되라. 또 본문은 우리 모두에게 거짓된 지식과 헛된 변론을 피하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지키라고 말씀한다. 우리 모두는 참된 보수 신앙의 사람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