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도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장로의 자격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3장: 선행
디도서는 바울 사도의 서신들 가운데서 세 권의 목회 서신들 중의 하나이다. 다른 목회 서신들과 같이, 이 책의 중심 주제는 \'목회 교훈\'이다. 디도서는 디모데전서와 같이 장로의 자격에 대해 교훈한 후, 구원의 목적으로서의 선행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1장: 장로의 자격
1-4절, 사도의 직무
[1] 하나님의 종이요.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종\'이라고 고백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에게 사용되었던 이 명칭은 하나님께 대한 철저한 복종을 나타낸다. 하나님의 종은 바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보인다. 그 관계는 복종 관계이다. 바울은 자유자이었지만, 자원적으로, 자발적으로 하나님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께 대한 복종은 피조물의 마땅한 자세이다. 하나님과 인간은 사실상 친구 관계가 아니고 복종 관계이다. 인간은 피조물이며 흙이요 티끌이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하나님과 대화할 때 \"티끌과 같은 나라도 감히 주께 고하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창 18:27). 그것이 바른 깨달음이요 바른 고백이다. 그것이 바로 겸손이다. 겸손은 인생이 자신을 바로 알 때 생긴다. 인간의 교만은 자신을 모르는 데서 생기는 어리석은 악이다.
더욱이, 구속(救贖)의 은혜를 받은 성도는 하나님께 더욱 복종하며 살아야 한다. 죄로 인하여 영원히 죽어야 마땅했던 자들을 그의 크신 긍휼로 구원하여 주셨기 때문에 이제 나의 생명은 내 것이 아니고 오로지 그의 은혜의 선물이다. 그렇다면, 내가 어떻게 내 뜻대로 살 수 있겠는가? 내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 기꺼이 복종하며 살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복종에는 \'왜 그렇습니까?\'라든가 \'내 생각에는 이렇습니다\' 등의 말이 필요치 않다. 복종에는 침묵이 필요할 뿐이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면, 복종하는 것이다. 바울만 하나님의 종이 아니고 우리 모두도 하나님의 종이다. 우리는 그의 피조물이요 더욱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바 된 그의 백성이다. 우리는 죄에게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종이 된 자들이다(롬 6:22).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울.
\'사도(使徒)\'는 \'보냄을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는 보내신 자의 뜻을 수행하게 하기 위해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기의 생각대로 말하고 자기의 뜻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 그는 오직 그를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각대로 말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행동해야 한다.
곧 나의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바울은 무엇을 위해 사도가 되었는가? 첫째로, 그는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사도가 되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언제 그들을 택하셨는가? 그는 창세 전에 그들을 택하셨다(엡 1:4). 그가 무엇에 근거하여 그들을 택하셨는가? 그는 오직 자신의 긍휼한 뜻을 따라 그들을 택하셨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믿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택한 자들을 위해 피흘려 구속(救贖)하셨고 성령께서는 그들을 다 중생(重生)시키신다. 중생의 증거는 회개와 믿음이다. 그러므로 참으로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속죄의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이 중요하다. 참 믿음이 곧 생명이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은 하나도 잃어버림을 당하지 않고 다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만 영생에 이를 것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생에 이를 것이다.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믿지 않는 자는 영생을 얻지 못한다. 요한복음 3:36은 말씀하기를,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고 했다.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둘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을 위해서이었다. 진리의 지식은 하나님에 관한 지식, 인간이 죄와 심판 아래 있다는 지식, 구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지식,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에 관한 지식, 종말에 관한 지식을 포함한다.
\'경건함에 속한\'이라는 원어는 \'경건함에 일치하는\' 혹은 \'경건함에 이르는\'이라는 뜻이다. 진리의 지식은 경건함에 맞는 지식이다. 그것은 경건한 지식이다. 그것은 단순히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지식이 아니다. 진리의 참 지식은 경건 없는 지식, 경건과 상관 없는 지식이 아니고 경건한 지식, 경건으로 나타나는 지식이다.
지식이 중요하다. 인생은 하나님의 지식이 없어서 멸망을 당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고 말씀하셨다(호 4:6).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곧 영생이 된다(요 17:3).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가르쳤다(벧후 3:18).
[2]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셋째로, 바울이 사도가 된 것은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었다. 영생은 인생의 최대의 소원이다. 누구나 장수(長壽)하기를 원한다. 전도서는, 하나님께서 사람 속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다고 말했다(전 3:11). 죽는 것은 허무한 것이다. 하나님은 생명의 근원이시며 생명 자체이시므로 하나님 안에 영생이 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영생케 하실 수 있다.
인간은 본래 영생할 존재이었다. 그러나 죄로 인하여 죽음이 왔다. 그러므로 죄사함으로 말미암아 사람에게 영생이 있게 될 것이다. 이미 원리적으로 성도들은 영생을 얻었다. 그들은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가장 귀한 소망이며 그리스도인의 가장 큰 소망이다.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하나님은 거짓이 없으신, 거짓말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실하시다. 그러므로 그는 믿을 만하시다. 인간에게는 거짓됨이 있지만 그에게는 지극히 작은 거짓도 없으시다. 만일 하나님께 거짓이 있으시다면, 그는 하나님이 아니실 것이다. 그런 하나님이라면 아무도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은 진실하시므로 참 하나님이시다.
영생은 이 하나님께서 영원한 때 전부터 약속하신 것이다. \'영원한 때 전부터\'라고 번역된 원어(프로 크로논 아니오니온)는 칼빈 선생의 해석대로 \'오래 전부터\'라고 번역될 수 있는 말이다. 로마서 16:25에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永世) 전부터 감취었다가\"라는 말씀도 \". . . 오래 전부터 감취었다가\"라고 번역될 수 있고 그렇게 번역하는 것이 적절하다. 영생은 하나님께서 오래 전부터 아브라함 등 경건한 선진들에게 약속하셨던 바이었다.
[3] 자기 때에.
\'자기 때에\'라는 원어는 \'적절한 때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는 시간표가 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시간표대로 이루어진다. 모든 일에는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적절한 때가 있다. 아브라함은 75세에 약속을 받았으나 100세에 아들을, 그것도 한 명의 아들을 받았다. 요셉은 17세에 계시적 꿈을 꾸었지만, 30세에 그 꿈이 실현되었다. 다윗은 약 15세 쯤에 사무엘에게 기름 부음을 받았지만(삼상 17:13; 민 1:7을 비교하라), 30세가 되어 왕이 되었다(삼하 5:4, 5). 그러므로 우리는 조급하지 말고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는 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의 명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하나님의 말씀은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다. 그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요 구원과 영생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말씀을 \'전도\'(케뤼그마) 곧 선포 혹은 설교라는 방법을 통하여 나타내셨다. 그리고 이 전도의 일을 바울에게 맡기신 것이다. 이것이 사도의 직무이었다. 전도는 일차적으로 사도에게 맡겨진 임무이었다.
그러나 전도는 또한 모든 성도에게 책임이 있는 일이다. 하나님의 택한 자들을 다 찾아 구원하는 것이 그의 뜻이며 전도의 목적이다. 이것은 전임 전도자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이 다 중요하게 생각하며 책임을 느껴야 할 일이다. 전도는 남의 일이 아니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일이다. 전도를 위해 기도하자. 전도를 위해 헌금하자. 예배당 건축도 이 큰 일인 전도를 위해 의미가 있을 뿐이며, 그렇지 못하다면 그것은 어리석은 일에 불과하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하고 긴급하신 이 일에 다 참여하고 힘을 모으자.
[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로 묶는 것은 바로 이 \'같은 믿음\'이다. \'같은 믿음\'이라는 원어(코이네 피스티스)는 \'공동적 믿음, 함께 가지고 있는 믿음\'이라는 뜻이다. 이 공동적 믿음이 피부의 색갈, 언어, 지방색, 사회적 신분, 빈부, 지식, 그리고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을 하나로 묶는 끈이다. 이 공동적 믿음이 바로 사도 시대로부터 내려오는 \'옛 신앙\' 곧 성경적 신앙이다. 오늘날은 이 신앙이 변질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공동적 믿음은 참 교회의 기초이므로 이 믿음이 없으면 참 교회도 없다. 우리는 이 공동적 믿음을 성경 속에서 그리고 바른 신앙의 전통 속에서 확인하고 그 믿음을 굳게 가지고 영생의 소망 안에서 항상 주님을 섬기자.
사도의 직무는 한마디로 전도이었다. 바울 사도는 이 일을 위하여 보냄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였다. 그 일은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을 위한 것이었다. 그가 전한 바는 \'경건에 이르는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에 관한 말씀이었다. 그것이 오늘날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공동적으로 믿고 고백하며 소망하고 기뻐하는 하나님의 진리이다. 사도에게만 전도의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에게도 그 사명이 있다.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우리 모두는 이 복음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우리의 시간과 힘과 재능과 물질을 바쳐서 전도의 일에 힘쓰며 충성하자.
5-9절, 장로의 자격
[5] 내가 너를 그레데에 떨어뜨려둔 이유는 부족한 일을 바로잡고 나의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바울이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둔 이유를 보인다. \'부족한 일을 바로잡는 것\'은 신앙 사상의 면에서나 교회 행정과 질서의 면에서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의 종들은 신앙 지식에서나 교회 행정에서 부족한 점들을 보충하기 위해 필요하다.
또 바울은 디도로 하여금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하였다. \'장로\'라는 말(프레스뷔테로스)은 \'나이가 더 든 사람\'이라는 뜻이다. 물론 신약 교회의 \'장로\'라는 말은 영적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이 말은 장로가 다른 이들보다 영적으로 그리고 신앙 인격적으로 더 성장한 자이어야 함을 암시한다. \'장로들\'이라는 말은 한 교회에 장로가 적어도 두 명 이상이 있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교회가 한 사람에 의해 독단적으로 운영되는 것을 방지하는 의미가 있다고 본다.
[6] 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6절부터 9절까지는 장로의 자격에 대하여 언급한다. 이것은 디모데전서 3장의 말씀과 더불어 장로의 자격에 대해 가르치는 말씀이다.
무엇보다, 장로 후보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한다. 이것은 사상적으로나 행위적으로 온전한 인격을 의미한다. 그는 사상에 있어서 성경적으로 바른 사상에 서 있어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하고, 행위에 있어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남을 인도할 자는 자신이 남들보다 나은 인격, 곧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일부일처(一夫一妻)가 하나님의 뜻임을 암시한다. 맨처음에 하나님께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만드신 사실에서도 하나님의 그 뜻이 드러나 있다. 결혼한 자는 부부 관계와 결혼 서약에 성실해야 한다. 바른 인격은 가정에서부터 나타난다. 부부 관계에서 불성실한 자는 바른 인격자가 아니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신실한 자녀를 둔 자라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자녀를 신앙으로 바르게 양육한 자라야 한다는 뜻이다. 바른 자녀 교육은 믿음의 한 증거이다.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부모라면 자녀들을 성경 말씀과 믿음 안에서 바르게, 성실하게 가르치며 양육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의 자녀를 보면, 그 부모된 자가 얼마나 모범적인 신앙 생활을 했는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믿는\'이라는 원어(피스토스)는 \'믿는\'이라고도 번역될 수 있지만, 더 빈번히 \'신실한, 성실한, 믿을 만한\'이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본문은 \"방탕하다 하는 비방이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라고 표현하였다. 방탕은 자신의 의무나 책임, 삶의 목표 등을 잊어버리고 술과 음행 등 육신의 쾌락에 빠진 것을 말한다. 불순종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나 부모의 말씀에 다 적용된다. 참된 믿음은 순종으로 나타나며 그 결과는 경건함과 거룩함, 성실함과 단정함이다. 바른 신앙 교육은 이런 자녀들을 만들 것이다.
[7]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감독\'은 장로와 같은 직분이다. 성경 아무 곳에도 감독과 장로가 차등하다는 암시는 없다. \'감독\'이라는 말(에피스코포스)은 \'돌아보는 자, 보살피는 자, 감시하는 자\'라는 뜻이다. 장로 혹은 감독은 교회를 돌아보고 보살피며 교인들이 바른 믿음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직분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말은 \'하나님의 교회를 관리하는 자\'라는 뜻이다. 그것은 단지 재산이나 재정을 관리하는 것뿐만이 아니다. 물론 그것도 관리이다. 그러나 그것은 작은 일이다. 교회의 관리는 일차적으로 교인들의 관리, 영혼 관리이다. 교인들이 믿음 안에서 바르게 생활하도록 돌보는 것이다. 이것이 더 크고 중요한 일이다.
다시 한번 더, 본문은 감독 혹은 장로 후보자가 책망할 것이 없는 자이어야 함을 언급한다. 그는 사상에서나 행위에서나 결함이 없어야 한다. 그는 흠 없는 온전한 신앙 인격자이어야 한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제 고집대로 하지 않는 자라야 한다. 바른 신앙인은 제 뜻대로 말하거나 행동하지 않는다. 자기 주관이나 의견이나 생각대로 무엇을 주장하거나 고집하지 않는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 하고 성경대로 하려 할 것이다. 또 그는 다른 교우들과 뜻을 같이 하려 할 것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급히 분내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한다(약 1:20). 사람은 성냄으로 실수하기 쉽고 선한 일을 어그러뜨리기 쉽다. 이 말씀은 사람이 전혀 분내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사람에게 정당한 의분(義憤)은 필요하다. 비진리와 불의를 볼 때 분노하는 것은 정당한 일이다. 그러나 생각하고 또 생각한 후에 분노해야 하며, 오직 진리와 의를 위해서만 그러하고 단순히 자기 이익을 위해서 그러하지 않아야 할 것이다.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아니하며.
장로 후보자는 또한 술을 즐기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술을 즐기는 자는 술취하게 될 것이다. 술은 사람을 무책임하고 불성실하게 만든다. 술취함은 사람으로 실수하고 범죄하게 한다. 성경은 술취함을 명백히 정죄한다(고전 6:9, 10; 갈 5:21; 엡 5:18).
장로 후보자는 또한 구타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구타와 징계는 다르다. 징계는 부모가 자녀를 바르게 교육하는 한 방법이다. 성경은 징계를 허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명령한다(잠 13:24; 22:15; 23:13, 14; 29:17).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격한 감정을 가지고 아무 곳이나 또 비열한 방식으로 때리는 것은 정당하지 못하다. 예를 들어, 부모가 자녀를 주먹으로 얼굴을 치거나 머리를 때리는 것은 옳은 방식이 아니다. 징계는 감정을 가라앉히고 종아리나 손바닥 등을 때리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하기를,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고 했다(골 3:21).
부모가 자녀를 때리는 것은 허용되지만, 남편이 아내를 때리는 것은 허용될 수 없다. 남편은 아내를 때릴 권한이 없다. 결혼은 남녀의 주종(主從) 관계가 아니다. 사랑과 순종은 자발적이고 인격적인 관계이지 강요될 성질의 것이 아니다. 남녀는 둘 다 동등한 인격이므로 남자가 여자보다 힘이 더 있다고 해서 그를 구타한다면 그것은 죄악이다.
성도는 자기의 아내 뿐 아니라, 누구라도 때려서는 안된다. 자기 자녀는 예외이다. 또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경우는, 만일 부모가 허락한다면, 매를 때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누구도 때리는 자가 되어서는 안된다. 폭력은 악이다. 주께서는 오히려 누가 우리의 오른편 뺨을 때리면 왼편도 돌려대라고 가르치셨다(마 5:39). 성도는 자신의 노를 참고 인자와 온유의 심정으로 악한 자를 교훈할 수 있어야 한다. 결코 구타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될 것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더러운 이를 탐하지 않는 자이어야 한다. \'더러운 이\'는 정당하지 않는 소득을 말한다. 성도는 고리대금업을 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투기성 소득을 바라서도 안된다. 특히 명백히 사회적 악인 땅 투기, 집 투기 등에 관여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정당한 노동의 댓가만을 받으려 해야 한다. 놀면서 먹으려 하지 말고 무엇인가 부지런히 일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교회 직분자들이 교회의 헌금을 취급할 때도 극히 조심해야 한다. 헌금을 부당하게 개인의 일을 위해 유용하는 자는 큰 벌을 면치 못할 것이다. 우리는 돈에 대하여 깨끗하고 분명한 자가 되어야 한다.
[8] 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을 좋아하며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장로 후보자는 또한 나그네를 대접하는 자이어야 한다. 이 말씀은 그가 이기적이거나 개인주의적이지 않고 남과 나눌 줄 아는 인격자이어야 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사랑이며 선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선을 좋아하는 자이어야 한다. 온전한 인격은 좋은 인격, 선한 인격이며 선을 좋아하는 인격이다. 좋다는 말은 선하다는 말이다. 선행은 참 믿음의 열매이다.
장로 후보자는 또한 근신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는 자이어야 한다. 근신하는 것은 깨어 있는 것, 정신 차리는 것, 조심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좋은 인격자의 모습이다. 의로운 것은 공명정대하고 정정당당한 것이다. 성도는 항상 정의로운 인격자이어야 한다. 거룩한 것은 죄와 불결을 버리고 깨끗한 것을 말한다. 절제하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술의 절제를 의미하지만, 기타 모든 육신적 쾌락에도 적용될 것이다. 비록 선한 것이라도 거기에 지나치게 빠지면 좋지 않다.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장로 후보자는 또한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드는 자이어야 한다. 본절 앞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가르침을 받은 대로의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이다. 하나님의 바른 말씀은 신실한 말씀, 믿을 만한 말씀이다. 우리는 그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장로 후보자가 특히 그러해야 하는 것은, 첫째로 다른 이들을 바른 교훈으로 권면할 수 있기 위해서이다. 바른 교훈을 본인이 믿고 실천해야 남에게도 권면할 수 있다. 자기가 믿지도 않는 것이라면 남에게 어떻게 가르치며 권면할 수 있겠는가?
둘째로, 장로 후보자가 바른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은 바른 교훈을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바른 진리를 거스려 말하는 자들이 항상 있다. 사탄은 그들의 대장이다. 하나님의 택한 백성들은 그 진리에 대하여 아멘으로 화합하지만, 그것을 부정하고 불신하고 대항하는 교만한 자들이 있다. 그들을 책망하려면 바른 말씀을 굳게 믿는 자이어야 할 것이다.
말씀을 정리해 보자. 장로들, 감독들은 교회를 돌아보고 교인들을 보살피는 직분자들이다. 그들은 한 마디로 요약하여 책망할 것이 없는 온전한 인격자이어야 한다. 신앙 지식에 있어서나 행위에 있어서나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한다. 특히, 그들은 하나님의 바른 말씀,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한다. 그래야 다른 이들에게 권면할 수 있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을 책망할 수 있다. 이런 자들이 교회의 장로들이 되어야 한다.
또한 이런 말씀은 우리 모든 성도의 목표이다. 우리 모두는 책망할 것이 없는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읽고 배우고 믿고 소망하고 실천하자.
10-16절, 복종치 않는 자들
[10] 복종치 아니하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가 많은 중 특별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니.
당시 교회 안에는 복종치 않는 자들이 있었다. 복종은 성도의 미덕이요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과 성경적 교훈에 절대 복종해야 한다. 복종치 않는 것은 곧 하나님의 권위를 부정하고 대항하는 큰 악이다.
또 헛된 말을 하는 자들도 있었다. 헛된 말이란 의미 없고 가치 없는 말, 다른 이에게 아무런 유익을 주지 못하는 말을 가리킨다. 성경은,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악인의 마음은 가치가 적으니라\"고 말씀했다(잠 10:20). 우리 모두는 의인의 혀를 가져야 한다.
또 속이는 자들도 있었다. 속이는 것이 악한 세계의 특징이다. 주께서는,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고 말씀하셨다(요 8:44). 거짓을 좋아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지 않고 마귀에게 속한다. 또 성경은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지옥]에 참여할 것이며(계 21:8),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새 예루살렘 성밖에 있을 것이라고 말씀했다(계 22:15).
이와 같이 본문은 그레데 교회 안에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많았다고 말씀한다. 그것이 교회의 현실이었다. 지상 교회는 옛부터 문제들이 많은 불완전한 교회이었다. 그것은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들의 성화가 불완전하기 때문에 그리고 사탄의 활동이 맹렬하기 때문에 그러했다. 오늘날도 교회의 모습은 불완전하다.
복종치 않고 헛된 말을 하며 속이는 자들이 특히 할례당 가운데 심하였다. \'할례당\'은 유대교에서 온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생각 때문에 은혜의 복음에 대한 지식이 없었고 이해가 부족했던 것 같다. 진리의 지식이 없는 자들이 복음 운동에 대항한다. 그러나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이 있는 자는 복종하는 자가 될 것이다.
[11] 저희의 입을 막을 것이라. 이런 자들이 더러운 이를 취하려고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쳐 집들을 온통 엎드러치는도다.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또한 더러운 이를 취하려 하는 자들이었다. 진리를 모르는 자들에게는 대부분의 경우 세상의 이익이 삶의 전부이다. 돈이 그들의 삶의 중심이다. 더욱이, 그런 자들 가운데는 부당한 방법으로라도 물질적 부요를 얻으려는 자들이 많다. 그러나 탐심은 우상숭배이며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골 3:5; 딤전 6:10). 우리는 물질 생활에 있어서 욕심이 없고 깨끗하고 정정당당해야 한다.
또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었다. \'마땅치 아니한 것을 가르친다\'는 말은 \'가르쳐서는 안될 것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다. 참된 교사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며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는 자이다. 그러나 악한 교사는 정반대이다. 그는, 가르쳐야 할 것을 가르치지 않고 가르치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치는 자이다.
그 결과, 그들은 \'집들을 온통 엎드러쳤다.\' 즉 그들은 믿는 가정들의 믿음을 어지럽히고 파괴시켰다. 아마 그들은 집집마다 심방하며 그런 일을 했을지 모른다. 악한 자들은 종종 그런 식으로 악을 행한다. 말의 영향력은 크다. 좋은 말은 좋은 영향을 주지만, 나쁜 말은 나쁜 영향을 준다. 이단은 누룩같이 퍼진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저희의 입을 막아야 한다\'고 말한다. 불순종의 말, 헛된 말, 속이는 말, 하지 말아야 할 말을 막아야 한다. 그것은 교회를 어지럽히고 파괴시킨다. 그러므로 악한 말이 교회 안에서 퍼지지 못하게 해야 한다. 그런 말을 하는 자는 교회에 앞세우지 말아야 한다. 그런 자는 교회의 직분에서 제외되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오직 순종의 말, 가치 있는 말, 진실한 말, 해야 할 말만 해야 한다.
[12] 그레데인 중에 어떤 선지자가 말하되 그레데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악한 짐승이며 배만 위하는 게으름장이라 하니.
그레데인의 한 선지자가 말한 바와 같이, 그레데인의 풍습과 기질은 좋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거짓말장이며 남을 해치는 악한 자들이며 먹기를 좋아하고 게으른 자들이었다. 좋은 풍습이든지 나쁜 풍습이든지 사회 분위기는 그 사회의 사람들의 기질을 형성하는 것 같다. 예를 들어,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백성이 있는 반면,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하는 백성이 있다. 또 근면한 백성이 있는가 하면, 게으른 백성이 있다. 그레데인들은 대체로 거짓되며 악하며 게을렀다. 그레데 교인들도 그런 기질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했던 것 같다.
[13, 14] 이 증거가 참되도다. 그러므로 네가 저희를 엄히 꾸짖으라. 이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고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와 진리를 배반하는 사람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제 디도에게 그레데 교인들을 엄히 꾸짖으라고 말한다. 아첨은 상대방의 영혼을 참으로 사랑하는 것이 아니지만, 책망은 진정한 사랑의 표현이다. 성경은, 훈계를 듣는 것이 머리의 아름다운 관이며 목의 금사슬이라고 말씀했고(잠 1:8, 9), \'면책(面責)은 숨은 사랑보다 낫다\'고 했다(잠 27:5). 우리는 책망을 들을 줄 아는 자가 되어야 한다.
책망의 목적은 두 가지이다. 첫째는, 저희로 하여금 믿음을 온전케 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사람이 책망을 통해 잘못을 고치고 바른 신앙 인격자가 된다. 둘째는, 저희로 하여금 유대인의 허탄한 이야기들과, 진리를 배반하는 자들의 명령을 좇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잘못된 말을 듣는 것은 신앙을 해치는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책망을 통해 그런 일에 빠지지 않게 된다.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저희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죄 씻음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다. 음식물에 있어서도 더러운 것이 따로 없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아직도 죄와 불결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다. 저들은 구약의 율법대로 여전히 음식물 중에 어떤 것은 깨끗하고 어떤 것은 더럽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실상 저희의 생각과 양심이 더러운 것이다.
[16]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저 복종치 않는 자들은 하나님을 시인한다. 즉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公言)한다. 그러나 그들은 행위로 하나님을 부정한다. 다시 말해, 그들의 말과 행위, 신앙고백과 생활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진실한 믿음은 반드시 선한 행위로 나타난다. 우리는 언행(言行)이 일치하고 신행(信行)이 일치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신앙고백과 행위가 일치하지 않았으니, 그것은 가증한 위선에 불과하였다. 차라리 그들이 하나님을 모른다고 말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입으로는 안다고 말하면서, 행위로는 그를 부인하니, 그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그들은 결국 하나님께 복종치 않는 자들이었다.
또 그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었다. 신앙의 결과는 선행이다. 물론 모든 선행이 다 참된 신앙의 증거는 아니다. 참된 신앙이 없이도 어느 정도의 선행이 가능하여 보인다. 슈바이처나 테레사 수녀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고 생각되지만, 많은 진실한 선행을 했다. 그러나 신앙의 세계 안에서는, 선행이 참 신앙의 증거이다. 그러므로 믿는 자라는 이가 모든 선한 일을 버린다면 그는 참으로 믿는 자가 아니다.
10절로 16절까지의 본문은 현실 교회 안에 때때로 복종치 않는 자들이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은 헛된 말과 거짓말을 하며 더러운 이를 구하며 해서는 안될 말을 하여 믿는 가정들을 온통 어지럽히고 파괴시키기도 한다. 또 그들은 하나님을 안다고 공언하지만 행위로는 그를 부정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가증한 자들이며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들이다.
진실한 성도들은 그런 자들의 헛된 말, 거짓말, 정당치 않은 말이 교회와 성도들의 가정들의 믿음을 파괴시킨다는 사실을 알고 그들의 입을 막아야 한다. 교회는 그들로 하여금 말하지 못하게 하여야 한다. 또 참된 성도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말아야 한다. 뿐만 아니라, 목사와 장로들은 그들을 엄히 꾸짖어야 한다. 책망은 참된 사랑에서 나온다. 잘못된 말, 거짓말, 악한 말을 하는 자들은 책망을 들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바른 길로 돌이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항상 바른 말을 듣고 바른 말을 하고 흠과 점 없이 믿음에 온전히 서야 한다. 바른 지식과 바른 삶--그것이 우리의 목표이다. 우리는 바른 지식을 가진 참 신자가 되기를 원하며, 순종과 선행의 열매를 맺는 바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바른 지식과 바른 삶을 위해 우리 모두 하나님께 기도하며 날마다 힘쓰자.
2장: 바른 교훈에 합한 삶
1-3절, 나이든 남자들과 여자들
[1] 오직 너는 바른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하여.
\'오직 너는\'이라는 원어는 \'그러나 너는\'이다. 이 말은 복종치 않는 자들과 대조하여, \'다른 이들을 몰라도 너 디도는\'이라는 뜻이다. \'바른 교훈\'이라는 표현(1:9; 딤전 1:10)은 문자적으로는 \'건전한(sound) 교훈\'이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고 말했다(딤후 1:13). \'바른 말을 본받아\'라는 말은 \'바른 말의 본[윤곽, 개요]\'이라는 뜻이다. 바른 교훈은 사도들이 주신 교훈, 곧 성경적 교훈이다.
성경은 우리의 신앙 생활의 잣대, 표준, 규범이다. 하나님께서는 마귀가 다른 말, 약간 다른 말, 비슷하게 다른 말로 진리를 어지럽게 못하도록 이 책을 주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좇을지니 그들의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 속에 빛이 없기 때문이라\'고 말했다(사 8:20). 성경이 표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성경 말씀을 가감치 말라고 종종 말씀하셨다.
복음 사역자는 바른 교훈 곧 사도적 교훈, 성경적 교훈에 합한 것을 말해야 한다. 이것이 모든 복음 사역자의 의무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야 한다. 또 성경을 제멋대로 풀지 말고 조심스러이 해석해야 한다.
[2] 늙은 남자로는 절제하며 경건하며 근신하며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케 하고.
본절은 나이든 남자들에게 주어진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절제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절제한다\'는 원어(네팔레오스)는 일차적으로 술을 절제한다는 뜻이지만, 그 외에도 \'깨어 있다, 맑은 정신으로 있다\'는 뜻을 가진다. 젊었을 때는 술취하기도 하고 무절제하기도 했을지라도, 나이든 지금은 바른 정신, 맑은 정신, 깬 정신으로 절제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일 것이다.
둘째로, 나이든 남자들은 경건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여기 \'경건하다\'는 원어(셈노스)는 \'진지하다, 신중하다\'는 뜻을 가진다. 그것은 경솔하게 말하거나 가볍게 행동하지 않고, 깊이 생각하고 말하며 진지하게 행동하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이 젊은 이와 나이든 이의 차이여야 할 것이다.
셋째로, 근신하라고 말씀한다. \'근신하다\'는 원어(소프론)는 \'절제한다\'는 말고 비슷하다. 그것은 바른 생각, 건전한 생각을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넷째로,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라고 말씀한다. \'온전하다\'는 원어는 \'바른 교훈\'이라고 할 때 \'바른\'이라는 그 단어이다. 그것은 \'건전하다, 건강하다\'는 뜻을 가진다.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에 온전하다는 것은 믿음과 사랑과 인내함이 바르고 건전하고 건강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신앙 인격의 성숙함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 나이든 이들에게 신앙 인격의 성숙함, 온전함이 기대된다.
[3] 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본절은 나이든 여자들에게 주신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행실이 거룩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행실\'이라는 원어(카타스테마)는 \'처신, 태도, 행동\'이라는 뜻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구별되다. 세속적이지 않다, 부도덕하지 않다, 품위 있다\'는 뜻을 가진다. 나이든 여자들은 그 처신과 행실에 있어서 믿음 없고 부도덕한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 한다. 그는 범사에 거룩해야 한다.
둘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참소치 말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참소치 말라는 것은 거짓된 고소, 거짓된 비난, 과장된 비난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잘못된 비난은 오해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남을 오해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 또한 남을 이해하려는 마음, 넓고 너그러운 마음이 필요하다.
정당한 비평도 남의 말은 되도록 안하는 것이 좋다. 물론, 꼭 필요할 때는 해야 할 것이다. 사람이 말이 많은 것은 좋지 않다. 특히, 여성의 아름다움은 부드러움과 조용함에 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의 감동 가운데 여성들을 위하여 교훈하기를,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조용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니라\"고 하였다(벧전 3:4).
셋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술은 육신적 쾌락을 추구하는 것이며 실수의 원인이요 술취하면 단정치 못하게 된다.
넷째로, 나이든 여자들은 또한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선한 것\'은 하나님이 주신 바른 것들, 자신과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들이다. 무엇이 그러한가? 경험으로 확인된 성경 지식이 그러하다. 각종 개인적, 사회적 현실 상황을 지내면서 얻은 성경 지식, 가족 관계, 교우 관계 등 많은 대인 관계에서 얻은 성경 지식, 특히 실패의 경험에서 얻은 성경 지식이야말로 남에게 가르칠 만한 선한 것이다.
4-5절, 젊은 여자들
[4]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마지막으로, 본문은 나이든 여자들이 젊은 여자들을 가르쳐야 한다고 말하면서 가르칠 내용에 관하여 몇 가지 말한다. 그것들은 젊은 여자들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교훈이다.
첫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남편을 사랑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이 말씀은 결혼한 젊은 여자가 자기 남편만을 생각하고, 다른 남자를 사랑하거나 다른 남자에게 곁눈질하거나 한 눈을 팔지 말라는 뜻을 내포할 것이다. 또한 이 말씀은 아내가 남편보다 자식을 더 사랑하거나, 남편보다 직장을 더 사랑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결혼한 여자는 자기 남편을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남자로 생각하고 사랑해야 한다. 사랑은 멀리하거나 무관심하지 않고 가까이 하는 것이고, 그의 말을 무시하지 않고 존중하며 순종하는 것이다. 젊은 여자들은 가장 좋은 아내가 되기 위해 힘써야 한다.
둘째로, 젊은 여자들은 자기 자녀를 사랑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이 말씀은 자녀보다 돈을 더 사랑치 말라는 뜻을 내포한다. 돈 버느라고 자녀 교육에 실패해서는 안된다. 자녀 교육은 많은 시간을 들여야 되는 것이다. 자녀들을 가까이서 관찰하고, 그들과 대화하고, 함께 놀아주고 함께 기도하고, 삶의 모든 문제들에 대해 교훈하고 필요할 때는 책망도 하며 또 사랑해주어야 한다. 적절한 음식의 공급이나 기본적 학교 공부뿐 아니라, 무엇보다 하나님을 알게 하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을 가르쳐주어야 한다. 자녀 사랑은 참된 신앙 교육이 없이 이루어질 수 없다.
[5]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셋째로, 젊은 여자들은 근신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본문에 \'교훈한다\'는 원어(소프로니조)는 \'근신하게 한다\'는 뜻이다. 근신한다는 말은 건전한 생각을 가지는 것을 말한다. 불건전한 생각은 비성경적 생각, 육신적 생각, 세상적 생각, 잘못된 생각, 편협한 생각, 자기 중심적 생각, 너무 주관적인 생각 등을 가리킬 것이다. 반면에, 건전한 생각이란 성경적 생각, 성령의 감동으로 얻는 생각, 바른 생각, 선한 생각, 사랑의 동기에서 나오는 생각, 남을 유익케 하는 생각, 건설적 생각 등을 가리킬 것이다. 우리는 그런 건전한 생각을 해야 한다.
넷째로, 순전하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정욕에 빠지지 말고 순결하고 단정하라는 뜻이다.
다섯째로, 집안 일을 하라고 말씀한다. 여자의 역할이 무엇인가? 여자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의도는 여자가 남자를 돕는 자가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여자는 집안에서 집안 일을 돌아보는 자가 되었다. 시편 128:3은 여자를 \'내실에 있는 아내\'라고 표현하였다. 잠언 31:10 이하에 나오는 현숙한 여인에 대한 묘사에서도 \'그 집안 일을 보살피고 게을리 얻은 양식을 먹지 않는다\'는 말씀이 나온다. 집안 일은 여자의 본업이요 본무(本務)이다.
여섯째로, 선하라고 말씀한다. 디도서는 특히 선행에 대하여 많이 강조한다. 1장에서 장로의 자격 요건을 논하면서도 \'선을 좋아하는 것\'을 언급했고, 복종치 않는 자들은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라고 했다. 또 2장에서도 나이든 여자들은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했다. 본절 이후에도 선한 일에 대한 언급이 반복된다(2:7, 10, 14; 3:8, 14).
일곱째로,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씀한다. 남편의 의무는 주께서 교회를 사랑하심같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지만, 아내의 의무는 교회가 주께 복종하듯이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이다(엡 5:22-25). 하나님의 말씀이 이 복종을 명하셨기 때문에 여자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치 않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도록 아내들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해야 한다.
오늘 본문은 우리 모두가 바른 교훈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을 보인다. 나이든 남자들은 나이든 남자들대로, 나이든 여자들은 나이든 여자들대로, 젊은 여자들은 젊은 여자들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교훈을 받아 그 내용을 기억하면서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힘써야 한다. 우리 모두는 바른 교훈에 합한 삶을 살아야 한다.
6-8절, 젊은 남자들
[6] 너는 이와 같이 젊은 남자들을 권면하여 근신하게 하되.
6절부터 8절까지는 젊은 남자들에 대한 교훈이다. 본문은 그들로 근신하게 하라고 말씀한다. \'근신한다\'는 말씀은 생활 교훈에서 자주 나오는 말씀이다. 그것은 \'건전한 생각을 가진다\'는 뜻이다. 건전한 생각, 바른 생각은 바른 신앙 생활에 필수적이다.
[7, 8]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여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경건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하게 하라. 이는 대적하는 자로 하여금 부끄러워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라.
\'경건함\'이라는 원어(셈노테스)는 \'진지함\'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다. 또 전통 사본에는 그 다음에 \'부패치 않음\'이라는 말(아프다르시아)이 있다. 이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고,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진지함과 부패치 않음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보이라.\"
젊은 남자들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디도에게 \'범사에 네 자신으로 선한 일의 본을 보이라\'고 교훈한다. 선한 모범은 모든 면에 다 적용될 것이다. 좋은 모범은 최상의 교육이다. 선한 일의 본을 보이되 또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을 함께 보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은 교훈의 진실함, 참됨을 가리킨다. 선행은 교훈의 참됨의 증거이다. 또 진지함을 보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참된 신앙은 진지함으로 표현된다. \'부패치 않음\'이라는 그 다음의 말은 옛날 영어 성경의 번역대로 \'신실함\'(sincerity) 혹은 참됨이라는 뜻일 것이다. 또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보이라\'고 본문은 말한다.
범사에 선한 일의 본을 보이며, 교훈의 부패치 아니함과 진지함과 부패치 않음 혹은 신실함과 책망할 것이 없는 바른 말을 보이는 목적은, 대적하는 자들로 하여금 부끄러움을 당하며 우리를 악하다 할 것이 없게 하려 함이다. 우리는 악한 세상에서 선으로 악을 이겨야 한다.
9-10절, 종들
[9] 종들로는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스려 말하지 말며.
9절과 10절은 종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 둘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을 기쁘게 해야 한다. 셋째로, 종들은 자기 주인들에게 거스려 말하지 말아야 한다. \'거스려 말한다\'는 원어(안티레고)는 \'말 대답을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말씀들은 주인과 종 간의 엄격한 질서를 전제한 것이다. 다 구원받은 형제, 자매일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주인과 종 간의 질서가 유지되기를 원하셨다.
이러한 교훈의 원리는 오늘날도 직장 생활에 적용된다. 피고용자가 어떤 직장에 취직할 때 근무 시간과 봉급 등 근무 조건에 동의했다면, 그는 직장에서의 자기 위치와 직장의 질서 그리고 고용주와의 윤리적 관계를 지켜야 한다. 그는 결코 그것들을 깨뜨리거나 고용주에게 해를 끼쳐서는 안될 것이다.
[10] 떼어 먹지 말고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떼어 먹는다\'는 것은 주인이 일하라고 준 돈이나 물건의 일부분을 은밀히 감추어 자기의 것으로 삼는 행위이다. 이것은 일종의 도적질이다. 종은 그렇게 하지 말아야 한다. 동일한 원리가 그리스도인의 직장 생활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우리는 직장에서 공과 사를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직장인은 공적인 근무 시간에 사적인 일을 하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직장인은 직장의 허락되지 않는 공적인 물품이나 비용을 사적으로 쓰려 해서는 안될 것이다.
본문은, 종들이 \'오직 선한 충성을 다하라\'고 말씀한다. 원문을 직역하면, \"모든 선한 충성을 보이라.\" \'충성\'이라는 말은 \'믿음\' 혹은 \'믿을 만함\'이라고도 번역된다. 종들에게, 그리고 오늘날 직장에서 아랫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이런 충성 혹은 믿을 만함이다. 주인 혹은 윗 사람이 맡긴 일에 대하여 충성스럽게, 믿을 만하게 처리하는 것이야말로 종에게 가장 요구되는 덕목이다. 그리스도인 직장인들은 그런 심령으로 직장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종들이 이러할 때,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이 빛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구주이시다. 그의 교훈은 일차적으로 구원의 말씀이다. 그의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진실하고 선한 인격과 삶이야말로 하나님의 구원의 참됨과 그의 교훈의 참됨을 증거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질 것이다.
11-15절, 구원의 목적--선행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앞절에서 언급한 대로 종들이 선한 충성을 할 때 하나님의 교훈이 빛나게 되는 까닭을 보인다. 다시 번역하면, \"이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음이니라.\" 여기에 \'모든 사람\'은 앞에서 언급한 각 연령층의 사람들과 종들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두고 한 말씀일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가 나타났고, 구원받은 사람들은 구원의 열매를 맺었고 또 맺을 것이다.
[12]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양육한다\'는 원어(파이듀오)는 \'가르친다, 교육한다, 교훈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은 몇 가지의 내용으로 증거되었다. 첫째로, 그것은 불경건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라는 것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자는 죄를 회개한다. 회개해야 할 죄는 무엇보다 불경건과 음란과 물질의 탐욕 등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의 내용은, 이 세상에서 근신하면서, 의롭게, 경건하게 살라는 것이다. 그렇다, 그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이 아닌가? 앞에서 살펴본 대로, 성도의 삶은 근신하는 삶, 곧 건전한 생각을 가진 삶이며, 이제 성도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여 의롭게 그리고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13]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셋째로,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의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을 대망하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성도의 \'복스러운 소망\'이다. 또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표현하였다. 여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에 대한 놀라운 증거 구절이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이라고 부른 요한복음 1:1과 \'참 하나님\'이라고 부른 요한일서 5:20과 더불어 예수님을 명확하게 하나님이라고 부른 또 하나의 구절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크신 하나님\'이시다.
\'영광이 나타나심을\'이라는 말은 \'영광스런 나타나심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님의 재림은 영광스런 사건이다. 그것은 영광스런 나타나심이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다시 오심에 대해 친히 증거하시기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고 하셨다(마 24:30).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 게 하려 하심이니라.
넷째로,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의 목적을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의 교훈의 마지막 내용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으로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셨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셨다. 그가 이처럼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셨다. \'친 백성\'이라는 원어(라오스 페리우시오스)는 \'특별한 백성\'이라는 뜻으로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자기의 \'특별한 소유물\'(세굴라)로 삼으시겠다는 출애굽기 19:5의 말씀을 생각나게 한다.
그런데 어떤 특별한 백성인가? \'선한 일에 열심하는\' 특별한 백성이다. 디도서 2장의 전체 문맥에서 이 점이 중요하다. 이것이 구원의 목적이라면,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선한 일에 열심하는 삶이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인을 변화시켜 의인되게 하고, 악한 자를 변화시켜 선한 자가 되게 하시는 것이다.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의 당연한 표이다. 우리는 항상 그 표를 가지고 있어야 하겠다. 모든 성도는 선한 일에 열심내는 자들이어야 한다.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복음 사역자들은 이상의 말씀들을 사람들에게 담대히 말하고 권면하고 모든 권위로 책망하기도 해야 한다. 그들은 누구에게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아야 한다. 누구의 권위 때문인가? 인간적 권위가 아니고, 오직 하나님의 권위, 하나님의 말씀의 권위, 성경의 권위 때문이다.
3장: 선 행
1-7절, 선행과 구원
[1] 너는 저희로 하여금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게 하며.
\'저희\'는 성도들을 가리킨다. \'정사와 권세 잡은 자들\'은 세상의 권세자들 곧 위정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는 세상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유익과 질서를 위해 세우신 것이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3:1에서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고 말씀했고, 또 그는 로마서 13:4, 6에서 세상 위정자들을 \'하나님의 사자,\'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불렀다.
뿐만 아니라, 성도들은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해야 한다. 앞 장에서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 우리로 하여금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임을 증거하였다. 선행이 얼마나 중요한지! 구원받은 성도에게 선행은 꼭 맺어야 할 열매이다.
[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훼방하는 것\'은 그릇되이 남을 비난하는 것을 말한다.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라는 말씀은 디모데전서 3:3에서 감독의 자격 요건을 말씀할 때도 언급된 바이었다. 거기에 보면,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라고 되어 있다. \'관용하다\'는 원어(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하다, 친절하다, 오래 참다\'는 뜻이다. 또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1, 2절의 요점은, 남을 그릇되이 비난하거나 다투지 않고 온유하고 친절한 선한 인격자가 되라는 것이다. \'기억하게 하라\'는 말씀은 1절 초두의 \"너희는 저희로 하여금\"이라는 구절에 연결된다. \'너희는 저희로 하여금 이것들을 기억하게 하라\'는 뜻이다. 사람은 어리석어서 말씀을 많이 듣고 배워도 자꾸 잊어버린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항상 읽고 듣고 묵상하고 기도함으로써 하나님의 교훈들을 기억하는 것이 복되다.
[3]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으나.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아마도 앞 절에 말씀한,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낼\' 이유를 보이는 것 같다. 이것은 7절 말씀까지 연결되는 것 같다. 즉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을 나타낼 이유는 첫째, 우리도 전에는 악했으나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우리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었기 때문이라는 말씀인줄 안다.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른 생각도, 바른 깨달음도 없었으며, 하나님과 그의 뜻에 대한 바른 지식도 없었다. 또 우리는 \'순종치 아니한 자\'이었다.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뜻에, 곧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치 않았다. 우리는 또한 \'속은 자\'이었다. 우리는 마귀의 말에 속았고, 세상의 인생관과 가치관에 속았으며, 심지어 우리 자신의 어리석고 혼란한 생각들에 속았었다.
우리는 또한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이었다. 우리는 정욕의 종, 쾌락의 종이었다.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자는 세상이 그의 하나님이요 돈과 정욕과 쾌락이 그의 하나님이다. 죄는 이와 같이 인간을 어리석고 허무한 데 빠지게 하며 자신을 소모시키고 마침내 멸망시키게 한다.
우리는 또한 인간 관계에 있어서도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이었고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이었다. 이것들이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이었고, 구원받은 후에도 때때로 우리 속에서 머리를 드는 죄악성의 내용들이다. 구원받기 전의 인간 관계는 한마디로 서로 싸우는 질투와 미움과 악독으로 얼룩져 있었다.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났다. \'자비\'라는 원어는 \'선하심, 인자하심\'이라는 뜻을 가진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언제 나타났는가? 그것은 역사적으로 예수께서 세상에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나타났다. 그러나 경험적으로는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받았을 때 각자에게 나타났다.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우리를 \'구원하시되\'라는 원어(에소센)는 우리를 \'구원하셨다\'는 뜻으로서 과거 시제이다. 구원은 죄로부터 건져내는 것으로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졌다. 우리는 이미 법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죄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 죄인의 신분이 변하여 의인의 신분이 되었고, 죄의 형벌을 그가 담당하셨으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 거하는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셨다. 실상 우리의 의로운 행위는 누더기 옷에 불과하였다. 이사야 64:6은 말씀하기를,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라고 했고, 또 예레미야 17:9은,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고 말씀했다.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되고 무능력하여져 있다. 성경과 인류 역사가 이것을 증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하지 않으시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하셨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 이루어졌다. 우리의 구원은 그의 긍휼의 결과이었다. 하나님의 긍휼, 그의 은혜, 그의 선하심과 사랑은 우리의 구원의 유일한 원천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구체적으로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이루어졌다. 중생(重生)은 다시 남을 말하며 그것은 죄씻음으로 이루어졌다. 죄로 인하여 영혼이 죽었었기 때문에 죄씻음을 통해 그 영혼이 다시 살아났다. 죄씻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이루어진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을 우리에게 적용하셨을 때 우리가 중생케 되었고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된 것이다. 이것이 곧 \'성령의 새롭게 하심\'이다.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동일한 구원 사건이다. 구원은 성령께서 하신 일이다.
[6] 성령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사.
우리가 예수 믿고 구원받게 된 것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주신 결과이었다.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곧 그의 대속 사역과 그가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완전한 의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오신 성령님은 풍성하신 영이시다. 우리 속에 오신 하나님의 영은 부족하거나 메마른 영이 아니시다. 그는 은혜와 진리가 풍성하신 영, 은혜 위에 은혜요 진리 위에 진리인 충만하신 영이시다.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령께서 풍성히 우리 속에 오셔서 이루신 첫번째 구원의 일은 의롭다 하심이었다. 구원은 칭의 곧 의롭다 하심이다. 또한, 구원은 영생과 천국, 곧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물론 영생은 아직 소망 중에 얻은 것이다. 영생의 원리와 원소는 이미 심겨졌다.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었다. 그러나 그 영광스런 누림은 아직 미래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결국 우리를 구원하셔서 천국에서 영광스런 영생의 삶을 살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천국은 구원받은 성도를 위해 예비된 하나님의 기업이다.
1절부터 7절까지의 요점은 무엇인가? 선행과 구원의 관계는 무엇인가? 성도는 선한 인격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를 예비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성도는 인간 관계에 있어서 남을 그릇되이 비난치 않고 다투지 않고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내는 자가 되어야 한다.
왜 그런가?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은혜로 구원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도 과거에는 어리석고 반항적이며 악하고 이기적이고 남을 미워했던 가증한 죄인들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긍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성령의 역사로 우리는 구원을 받았다. 그 구원은 의롭다 하심을 얻는 구원이며 영생을 얻고 천국을 기업으로 이어받는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 위에서도 구원받은 자답게 선하고 의롭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헛된 것을 위해 살지 말고, 정욕을 위해, 육신적 쾌락을 위해 살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께, 하나님의 뜻에, 성경 말씀에 불순종하지 말아야 한다. 이제는 하나님께 복종하여 그 뜻대로, 성경 말씀의 교훈대로 선하게 살아야 한다.
8-15절, 선한 일에 힘쓰라
[8] 이 말이 미쁘도다.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이 말\'은 앞에서 언급한 구원과 영생 소망과 천국 기업에 관한 말씀이다. \'미쁘다\'는 말은 \'믿을 만하다, 확실하다\'는 뜻이다. 구원하심, 곧 무지와 불순종과 행악과 미움의 상태에서 건져내심과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과, 천국과 영생의 소망과, 이 땅 위에서의 선한 삶, 사랑의 삶에 관한 말씀은 확실하고 믿을 만한 말씀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진리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에게 이것들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고 말한다. 이것들은 방금 말한 바른 교훈 곧 성경적 교훈을 말한다. 그것은 죄로부터 건짐을 받아 의의 삶, 선한 삶을 살라는 교훈이다. 이것들을 굳세게 말하라는 것이다. \'굳세게 말한다\'는 원어(베바이오오)는 \'강하게 주장한다, 확신 있게 말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확실하고 믿을 만한 이 진리의 말씀들을 확신 있게 주장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야 할 목적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었다. 교훈의 목표는 선한 일을 힘쓰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또한 구원의 목표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여 선한 일에 열심내는 친백성이 되게 하셨다. \'조심하여\'라는 말은 성도가 조심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악한 마음에 빠질 수 있음을 암시한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가? 우리가 구원을 받았는가? 그러면 선한 일에 힘쓰자.
그러면 무엇이 선한 일인가? 디도서에서 많이 나오는 \'선하다\'는 원어(아가돈, 칼론)는 \'아름다운, 좋은, 유익한, 훌륭한, 도덕적인, 옳은\' 등의 뜻을 가지고 있다. 본문도 선한 일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다\'고 말한다. 성도가 힘써야 할 선한 일은 가정이나 직장이나 사회의 각 방면에 많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는 좋은 사람이 되어야 하고, 그 증거는 선한 일에 힘쓰는 것이다. 성도가 남에게 피해를 주지 말고 남을 속이지 말고 뇌물 같은 것을 좋아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물론이며, 선행은 그 이상이다.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을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강하게 주장해야 할 말씀들이 있는 반면, 말하지 말아야 할 주제들도 있다.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 등이 그것이다. 그런 것들은 \'피해야\' 한다. 그것들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들에게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하는 것이요 말을 해도 아무 의미가 없는 헛되고 공허한 것이다.
그러나 논쟁이라고 다 나쁜 것은 아니다. 꼭 필요한 논쟁도 있다. 진리를 규명하고 확인하는 교리적 논쟁은 필요하다. 그것은 선한 싸움이다. 오늘날처럼 자유주의와 타협주의와 은사주의가 온 기독교계에 팽배할 때 자유주의를 배격하고 타협주의와 싸우고 은사주의에 대한 경계를 일깨우는 것은 필요한 변론이요 정당한 싸움이다.
[10] 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이단에 속한\'이라는 원어(하이레티코스)는 \'당파적인, 이단적인\'이라는 뜻이다. 교회는 사실상 하나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사실상 하나이다. 그러나 오류가 교회에 침입해 들어왔다. 잘못된 생각이 교회 안에서 세력을 가지게 되었다. 이것은 사탄의 미혹이며 인간의 무지와 연약이다. 그래서 이단이 생기고 잘못된 당파가 생겼다.
\'한두 번 훈계한 후에\'라는 말은 이단과 당파의 잘못을 먼저 지적하고 가르쳐 주어야 할 것을 의미한다. 그 때 거기에 빠진 자가 돌이키면 문제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사상이나 행위에 있어서 실수와 부족이 있다. 그러나 그 잘못과 부족을 깨달을 때 거기서 돌이키는 자는 깨끗함을 받는다.
그러나 한두 번 훈계한 후에도 돌이키지 않는 이단자와 당파적 인물은 성도가 멀리해야 할 자이다. \'멀리하다\'는 원어(파라이테오마이)는 \'받아들이지 않다, 거절하다, 피하다\'는 뜻을 가진다. 이단과 오류를 버리지 않는 자들과 계속 교제하는 것은 그 악을 인정하는 것이든지 그 악에 물드는 일이다. 이 경우, 성도 개인과 교회 회중의 순결성을 위해 교제를 단절하는 것이 필요하다. 멀리하는 것은 소극주의가 아니다. 이단자들이나 오류에 빠진 자들과 멀리하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거절하는 것은 바른 방법, 곧 하나님의 방법이다.
[11] 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네가 아는 바와 같이\'라는 원어는 \'이러한 사람이 . . . 죄를 짓는다는 것을 알라\'라고 번역해야 한다. \'부패하여서\'라는 원어(에크스트레포)는 \'심히 비뚤어져서\'라는 뜻이다.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라는 원어는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자책하면서도\'라는 뜻이다.
한두 번 훈계해도 고치지 않는 이단자들은 심히 비뚤어져서 스스로를 정죄하면서도 죄를 짓는 자들이다. 그들은 강퍅한 심령을 가진 자들이다. 그들은 무지해서, 실수로 죄를 짓는 자들이 아니고,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완악한 심령으로 죄를 짓는 자들이다.
구약 민수기 15:30는 이런 자를 \'짐짓 악을 행하는\' 자로 묘사하였고, 신약 히브리서 10:25은 \'진리를 아는 지식을 받은 후 짐짓 죄를 범하는\' 것으로 묘사했고, 요한일서 5:16은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성령을 훼방하는 죄\'와 같다고 본다. 바로 이단들은 이와 같이 성경 진리와 교훈을 알면서도 그것을 부정하고 고의적으로, 심히 완악한 마음으로 죄를 짓는 것이다.
[12] 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과동하기로 작정하였노라.
바울에게는 아데마와 두기고 같은 동역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그는 디도가 속히 오기를 원하고 있다. 그는 지금 니고볼리에 있고 거기에서 겨울을 지내려고 작정하고 있다. 니고볼리는 아가야 지방 서쪽 해안에 있는 도시이었다.
[13] 교법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저희로 궁핍함이 없게 하고.
\'교법사\'라는 원어(노미코스)는 \'율법사, 법률가\'라는 뜻이다. 세나는 구약 율법을 연구한 자이었던 것 같다. 아마, 세나와 아볼로는 다 성경에 능통한 교사들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가지고 있었던 경비가 다 떨어졌던 것 같다. 바울은 지금 저희로 궁핍함이 없도록 속히 보내라고 디도에게 부탁한다.
[14] 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예비하는 좋은 일에 힘쓰기를 배우게 하라.
본절은 선행이 신앙의 열매인 것을 증거한다. 선행이 없는 자는 열매가 없는 자이지만, 선행이 많은 자는 열매가 많은 자이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는다. 구원은 좋은 생명, 새 생명의 씨이다. 이제 이 좋은 새 생명은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 기대된다.
본절은 또한 성도가 선행을 힘쓰기를 배워야 할 것을 증거한다. 우리는 너무 오랫 동안 악을 행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러므로 선을 행해야 할 줄은 알지만, 선을 행하는 방법을 잘 모르고 또 행할 능력도 부족하다. 마치 갓난 아이가 홀로 서기나 걷기나 힘든 일을 할 수 없듯이 말이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는 선행을 배움으로써 선행을 힘쓸 수 있다.
특히, 무엇이 선행인가? 하나님께서 가장 귀히 여기시는 선행은 복음을 널리 전하는 일이다. 이 전도의 일을 위해 기도하고 헌금하고 전도자를 세우고 훈련시키고 후원하는 것은 가장 귀한 선행이다. 많은 전임(full-time) 전도자들이 일어나야 한다. 세상과 타협하지 않고 십자가의 속죄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파하고 시대의 배교적 풍조와 타협치 않고 충성되이 일할 일군들이 많이 필요하다. 그리고 교회는 그들을 물질적으로 지원해야 한다. 그것은 진실한 성도들이 맺어야 할 좋은 열매들이다.
[15] 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성도들의 상호 문안은 아름다운 일이다. 바울과 함께한 자들은 바울과 함께 디도에게 문안하였다. 바울은 또 디도도 바울과 함께한 자들에게 문안하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와 함께한 자들을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묘사하였다. \'믿음 안에서\'라는 말은 참된 성도가 가진 믿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곧 복음 신앙, 성경적 신앙, 바른 신앙, 보수 신앙, 근본주의적 신앙이다. 악과 타협치 않는 것은 바른 신앙이다. 인간 바울은 연약한 인간이지만, 그가 받은 사도의 직분과 그가 전하는 하나님의 복음 진리 때문에 참된 성도들은 그를 사랑하였다. 오늘도 진실한 성도들은 진실한 종들을 사랑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8절로 15절까지의 말씀은 특별히 두어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선한 일을 힘써야 한다. 그것은 실습과 실천을 통하여 배워진다. 구원의 목표는 이 세상에서 선한 인격자들이 되고 선한 열매를 많이 맺는 것이다. 그래야 하나님께 영광이 돌아가고 하나님의 의도하신 세계 복음화의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가 구원받은 자라면, 우리는 또한 다른 이들을 구원하는 일에 동참해야 한다. 전도는 모든 성도가 행할 가장 귀하고 선하고 중요한 일이다.
둘째로, 우리는 이단과 오류를 회개치 않고 고집하는 자들을 받아들이지 말고 멀리하고 거절해야 한다. 그것은 교회의 순결성 때문이다. 이단과 오류에 빠진 자들과의 교제는 개인과 교회를 부패시키는 요인이다. 이단자나 오류에 빠진 자를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는 것은 결코 소극주의적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유일한 바른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