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레몬서 강해

빌레몬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자발적인 선행


 

1-7절, 성도의 참된 교제


[1]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이라는 원어는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라는 말이다. 성도에게 붙여지는 명칭들 가운데, \'그리스도인\'(크리스티아노스)이라는 명칭이 있다(행 11:26).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람,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라는 뜻이다. 또한 바울은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둘로스)\'이라고 불렀다(롬 1:1). 그것은 그리스도께 대한 절대적 순종을 강조한다. 본절에서, 그는 또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죄수(데스미오스)\'라고 부른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자임을 증거한다. 이것은 가장 고상한 명칭이 아닌가? 고난은 참된 믿음의 증거요 성도의 면류관이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편지하면서 그를,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이라고 표현하였다. 골로새서의 증거들(4:9, 17)을 볼 때, 빌레몬은 골로새에 살고 있었던 것 같다.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라는 표현은 성도의 사랑의 교제를 잘 증거한다. 성도들은 주 안에서 서로 진심으로 사랑해야 한다. \'동역자\'라는 말은 \'함께 일하는 자\'라는 뜻이다. 무슨 일을 말하는가? 그것은 하나님의 일, 곧 교회의 일을 가리킨다. 그것은 전도하고 목회하는 일, 말씀을 전하고 설교하는 일 등을 포함한다. 빌레몬은 교회의 담임 목회자이었던 것 같다. 참된 종들은 하나님의 일을 함께하는 동역자들이다.


[2] 및 자매 압비아와 및 우리와 함께 군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게 편지하노니.


\'자매 압비아\'는 빌레몬의 아내이었던 것 같다. 아킵보는 혹시 빌레몬의 아들이었는지는 모르나 여하튼 그의 교회의 주요 일군, 아마 목사이었던 것 같다. \'우리와 함께 군사 된\'이라는 표현은 주로 목회자에게 사용되는 용어이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네가 그리스도 예수의 좋은 군사로 나와 함께 고난을 받을지니\"라고 말했다(딤후 2:3). 또 골로새서 4:17에서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는 말씀을 보면, 아킵보는 교회 내에서 중요한 직분자이었다. 우리는 무슨 전쟁에 함께 군사되었는가? 영적 전쟁, 사탄과의 전쟁, 영혼들을 사탄의 쇠사슬에서 건져내는 구원 운동에 함께 군사로 참여하였다.


\'네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씀은 초대 교회가 때때로 성도의 집에서 모였음을 보인다. 로마서 16:5에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의 집에 있는 교회\'(원문에), 골로새서 4:15에는 \'눔바의 집에 있는 교회\' 그리고 본문에는 \'빌레몬의 집에 있는 교회\' 등 초대 교회는 집에서도 잘 모였다. 구약 교회와 달리, 신약 교회는 건물을 중시하지 않고 성도들의 영적 성장을 중시한다. 신약 교회의 건물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교회 활동을 위해 편리한 정도면 충분하다. 신약 교회가 힘써야 할 일은 성경 강해와 기도를 통한 성도들의 영적 성장이며, 나아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일이다.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 좇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은 성도들에게 큰 복이다.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의 결과이다. 성도는 구원받은 후에도 날마다 날마다, 목숨이 마칠 때까지 하나님의 긍휼과 은총을 필요로 한다. 또 평강은 요동하는 바닷 물결 같은 이 세상에서 얼마나 큰 복인가? 인생의 참된 복인 이 은혜와 평강은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서만 온다.


[4] 내가 항상 내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를 말함은.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생활을 하였다. 지금 감옥 중에서도 그는 감사를 쉬지 않는다.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환경에 좌우되지 말고, 하나님의 주신 은혜를 기억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생활을 해야 한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은 우리에게 \"범사에 감사하라\"고 교훈하였다.


바울은 기도할 때 빌레몬을 언급하였다. 이것은 기도의 교통이다. 우리의 기도도 우리 자신이나 우리 가족 정도만을 위하지 말고 주의 종들과 사랑하는 성도들을 위해야 한다. 우리는 기도 중 서로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좋은 점을 감사하고 그에게 필요한 점을 간구하면서 기도로 교통하자. 이것이 복된 성도의 교제이다.


[5]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


바울이 기도 중 빌레몬을 생각하며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그의 사랑과 믿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즉 빌레몬의 진실한 믿음과 사랑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 것이었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런 믿음과 사랑이 있는가? 우리는 우리 위해 죽으시고 다시 사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사랑하는가? 그에게 우리의 충성을 바치고 있는가? 또 주의 명령을 따라, 성도들 곧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성도들을 나의 형제, 나의 자매로 생각하고 거룩하고 진실하게 사랑하고 있는가? 성도의 감사의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고 우리와 다른 이들의 참된 믿음과 사랑에 있다.


[6] 이로써 네 믿음의 교제가 우리 가운데 있는 선을 알게 하고 그리스도께 미치도록 역사하느니라.


본절은, 다시 번역하면, \"네 믿음의 교제가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알게 되므로 효력있게 되기를 원하노라\"이다.


\'네 믿음의 교제\'라는 말은 성도의 참된 교제가 무엇임을 보인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세상적 놀이나 오락을 통해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운동이나 등산이나 낚시나 소풍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먹고 마시고 노는 교제가 아니다. 성도의 교제는 심지어 단순히 물질적 구제에 있는 것도 아니다. 성도의 참된 교제는 \'믿음의 교제,\' 즉 믿음 안에서 함께 기도하고 대화하며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교제인 것이다. 요한일서 1:3에도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고 말씀했다. 우리의 교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믿음의 교제이다.


이러한 믿음의 교제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성취하신 속죄사역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을 알게 되며, 그것은 우리의 신앙 성장에 큰 효력이 있다.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선한 것\'이란 하나님이 주신 진리, 구원, 새 생명, 경건과 사랑의 새 성향, 의, 영생, 천국 소망 등이다. 이러한 사실들을 알면 알수록 우리의 믿음은 더욱 자라고 굳세어진다.


[7] 형제여 성도들의 마음이 너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으니 내가 너의 사랑으로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노라.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평안함을 얻었다. 그것은 그의 참된 믿음과 사랑 때문이었다. 성도들의 마음은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는 다른 성도들을 인하여 평안함과 힘을 얻는 것이다. 이것이 성도의 참된 교제의 유익이다.


바울 사도는 성도들의 마음이 빌레몬으로 말미암아 평안함과 힘을 얻었다는 사실 때문에, 빌레몬의 사랑 때문에 많은 기쁨과 위로를 얻었다. 옥중 생활의 고난 가운데서, 바울의 기쁨과 위로는 바로 그것이었다. 오늘날도 진실한 성도들의 소식, 곧 진실한 믿음의 열매의 소식과 순수한 말씀 순종의 소식을 듣는 것이 주의 종들에게 큰 기쁨과 위로이다.



결론적으로, 1절로 7절까지의 말씀은 성도의 참된 교제에 대하여 교훈을 준다. 성도의 교제는 단순히 세상적 놀이나 오락에 있지 않고, 단순히 먹는데 있지 않고, 단순히 물질적 구제에 있지 않고, 오직 성도의 영적 생활에 있다. 성도의 교제는 기도의 교통에 있다. 기도 중 서로를 기억하며 서로의 이름을 언급하며 감사하고 간구하는 데 있다. 성도의 교제는 서로 간의 진실한 믿음, 고난으로 증명된 믿음의 생활을 보고 듣는데 있다. 성도의 교제는 진실한 성도들의 참된 사랑의 소식을 듣는데 있다. 우리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참으로 교제하는 교회가 되기를 원한다. 그 때 우리의 마음 속에도 평안과 힘과 기쁨과 위로가 넘칠 것이다.



8-25절, 자발적 선행


[8] 이러므로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네게 마땅한 일로 명할 수 있으나.


\'마땅한 일로\'라는 원어는 \'마땅한 일을\'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담력을 가지고 마땅한 일을 빌레몬에게 명할 수 있다. 선행은 하나님의 뜻이며 성도에게 마땅한 일이다. 사도가 빌레몬에게, 선생이 제자에게, 목사가 성도에게 무리한 일, 합당치 않은 일은 명령할 수 없지만, 마땅한 일은 명령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9, 10] 사랑을 인하여 도리어 간구하노니 나이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


바울 사도는 빌레몬에게 마땅한 일도 명령하는 대신에 간구하였다. 왜 그러했는가? \'사랑을 인하여\' 그렇게 했다. 사랑은 자기 중심적이지 않고 상대를 위한다. 사랑은 결코 무례히 행치 않는다.


바울이 간구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오네시모를 위하여이었다. 본문 16절에 보면,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다. 그러나 아마 그는 주인에게 불성실하고 불순종했으며 주인에게서 도망쳐 나왔던 것 같다. 바울은 그를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이라고 표현하였다. 원문에는 \'내 아들\'(토 에몬 테크논)이라고 \'내\' 자(字)가 들어 있다. 바울은 옥에 갇힌 상태에서 그에게 전도하여 그를 구원하였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위해 간구하면서 자신을 \'나이 많은 자\'요 \'갇힌 자\'라고 표현하였다. 많은 세월을 주를 위해 수고한 노(老)사도, 더욱이 지금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옥에 갇혀 있는 사도가 간구하고 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고 사랑하는 성도라면, 이렇게 옥에 갇힌 노사도의 요청과 간구를 무시할 수 있겠는가? 성도들이 그런 자를 위하지 않는다면, 세상에서 누구를 위하겠는가?


[11] 저가 전에는 네게 무익하였으나 이제는 나와 네게 유익하므로.


\'오네시모\'라는 그리스어(오네시모스)는 \'유익한\'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그는 전에는 그런 사람이 못되었다. 그가 전에는 빌레몬에게 무익한 종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나와 네게 유익한 자\'가 되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만들어 낸 변화이었다. 복음은 무익한 자를 유익한 자로 만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악한 죄인은 하나님 앞에나 사람 앞에 무익한 자이지만,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은 성도는 하나님과 사람 앞에 유익한 존재가 된다. 과거에는 나쁜 열매를 맺는 나쁜 나무이었으나, 지금은 좋은 열매를 맺는 좋은 나무가 되었다.


[12, 13] 네게 저를 돌려보내노니 저는 내 심복이라. 저를 내게 머물러 두어 내 복음을 위하여 갇힌 중에서 네 대신 나를 섬기게 하고자 하나.


바울은 오네시모를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있었다. 옛 시대에 노예 제도에서 종은 주인의 소유물이었다. 출애굽기 21:21에는 \'종은 주인의 금전이라\'고 말씀했다. 빌레몬의 종 오네시모는 이제 주인에게 돌려보내지고 있었다.


전통사본에는 \'돌려보내노니\'라는 말 다음에, \'저를 받으라\'는 말이 있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오네시모를 받으라고 부탁한다. 과거에 그가 한 일을 생각하면 어떻게 그를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 안에서 노사도의 부탁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를 받아들일 즐거운 마음을 갖겠는가?


바울은 곧 이어 \'그는 내 심복이라\'고 표현한다. \'심복\'이라는 원어(스플랑크나)는 \'내장, 창자, 마음, 심정\' 등의 뜻이다. 오네시모는 큰 은혜를 받았다. 그는 그의 영적 은인(恩人)인 바울을 위한 충성된 수종자가 되었고 바울도 그를 진심으로 아꼈다. 바울은 그를 자기에게 계속 머물러 두어 그의 복음 사역을 위해 수종드는 자로 삼고자 하였다. 그러나 그는 모든 일을 바르게 처리하고자 하였다.


[14] 다만 네 승낙이 없이는 내가 아무 것도 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아니하고 자의로 되게 하려 함이로라.


본절에 나타난 바울의 태도가 본서신에 계시된 중심 교훈이라고 본다. 그것은 자발적인 선행이라는 교훈이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그의 주인 빌레몬에게 돌려보내고 있다. 오네시모는 바울에게 필요한, 바울이 아끼는, 충성된 조수(助手)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소유권이 빌레몬에게 있음을 알았다. 그러므로 아무리 선한 일도 주인의 승낙 없이 하는 것은 선하지 않다. 바울은 주인의 승낙 아래 오네시모를 자기 곁에 두기를 원했다. 바울은 빌레몬의 선한 일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의로, 자발적으로 되게 하기를 원했다. 억지로 하는 선행도 선행이기는 하다. 그러나 그런 선행은 하나님이 하늘에서 보시기에 어떠하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자발적인 선행을 기뻐하신다.


[15] 저가 잠시 떠나게 된 것은 이를 인하여 저를 영원히 두게 함이니.


종 오네시모는 아마 주인 빌레몬의 집을 도망쳐 나간 것 같다. 그러나 그가 잠시 주인을 떠났었으나, 이제 이 일을 인해 빌레몬은 그를 영원히 두게 되었다. 그것은 100년의 이 세상에서 뿐이 아니었다. 그것은 또한 영원한 천국에서도이었다. 그것은 하나님 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 안에서 얻게 된 결과이었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주 안에서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16] 이후로는 종과 같이 아니하고 종에서 뛰어나 곧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오네시모는 이제 빌레몬에게 단순히 종이 아니었다. 그는 종 이상이었다. 그는 이제 사랑받는 형제로 둘 자가 되었다. 바울 사도에게 그러하였다면,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빌레몬에게도 그러할 것이다. 여기에 노예 제도의 변화가 있다. 성경은 옛 시대의 노예 제도를 과격하게 변화시키려 하지 않았다. 어떤 사회 제도의 개선이든지 혁명은 바람직한 방법론이 아니다. 혁명은 결코 더 나은 사회의 보장이 되지 못한다. 하나님께서는 점진적 사회의 개선을 뜻하셨다. 주인들, 윗사람들, 가진 자들의 마음가짐의 변화가 참된 사회 개선을 위해 먼저 필요하였다. 하나님께서는 주 안에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이렇게 사랑하는 형제 관계가 되게 하셨다.


[17]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무로 알진대 저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


바울은 자신을 매개로 하여 오네시모를 추천한다. 바울은 빌레몬에게, 만일 그가 바울을 동무로, 동료로 여긴다면, 오네시모를 자기처럼 영접해주기를 부탁한다. 바울이 귀히 여기는 오네시모, 주 안에서 형제된 그를, 바울의 친구된 빌레몬이 어떻게 외면하거나 박대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하는 종을 영접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듯이, 바울의 사랑하는 조수 오네시모를 영접하는 것은 곧 바울을 영접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18, 19] 저가 만일 네게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진 것이 있거든 이것을 내게로 회계하라.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너는 이 외에 네 자신으로 내게 빚진 것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


오네시모는 아마 주인에게 잘못을 범하고 그의 재산에 손해를 끼치고 도망쳤던 것 같다. 그러나 바울은 이것까지도 자신이 담당하겠다고 말한다. 바울은 친필로 이 편지를 쓰면서 오네시모의 빚을 자기가 갚겠다고 말한다. 이것은 그의 말에 대해 그가 도장을 찍거나 서명하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은 빌레몬이 자기에게 빚진 것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고 덧붙여 말했다. 그것은 무슨 뜻인가? 빌레몬은 바울에게 무슨 빚을 졌다는 말인가? 그것은 영적인 빚을 뜻하였을 것이다. 그는 바울 사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과 은혜를 받았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사도들의 글들을 통해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듯이, 그는 직접 그런 은혜를 체험하였을 것이다. 그것은 결코 물질적 보화보다 못하지 않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들은 세상의 금은 보석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욱 귀하다.


[20]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를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바울은 빌레몬을 형제로 알고 있다. 그는 주 안에서 구원받은 형제이다. 정말 그것이 사실이라면, 빌레몬은 바울의 선한 뜻, 곧 오네시모를 받아들이는 마땅한 일을 행함으로 바울로 하여금 기쁨을 얻게 하고 마음의 평안과 힘을 얻게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주의 진실한 성도들을 향한 주의 진실한 종들의 소원이 아닌가? \'오 형제들이여, 오 성도들이여, 우리로 주 안에서 여러분을 인하여 기쁨을 얻게 하고 우리의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


[21] 나는 네가 순종함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나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


바울 사도는 빌레몬이 그의 말을 순종할 것이라고 확신하였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바울은 빌레몬이 그의 말보다 더 행할 줄을 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정도의 신뢰의 관계라면, 더 바랄 것이 무엇이겠는가?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의 관계는 어떠한가? 진실한 목사는 어디에 있고, 순종하는 성도들은 어디에 있는가? 또한 목사의 가르침보다 더 행할 성도들은 어디에 있는가? 아, 이런 아름다운 관계가 오늘날 우리의 교회들 안에서도 있기를 바란다. 오늘 교회 안에도 좋은 일군들이 많이 있고, 좋은 신자들이 많이 있기를 바란다.


[22] 오직 너는 나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라. 너희 기도로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노라.


끝으로, 바울은 자기를 위해 거처를 준비해 줄 것을 부탁하고, 그들의 기도로 그가 그들에게 나아가게 되기를 바란다. 거처를 준비하는 것은 인간 편에서 할 일이지만, 바울이 옥에서 나가 골로새로 가고 못가는 것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다. 인간이 계획은 세우지만, 일을 이루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면서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밖에 없다.


[23-25]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과 함께 할지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라는 표현과 \'나의 동역자[동역자들]\'이라는 표현은 주 안에서 귀한 말들이다. 주의 피로 구원받은 우리는 주의 일을 위해 동역자가 되기 원하며, 또 필요하다면 그리스도 예수 때문에 옥에 갇히기도 하기를 원한다. 이것은 주를 믿는 자들에게 영광이다.



결론적으로, 본서신은 동역자들 간의, 성도들 간의 아름다운 교제의 관계를 잘 증거한다. 또한 본서신은 하나님의 은혜로 무익한 자가 유익한 자가 되고 종이 사랑받는 형제가 되는 것을 증거한다. 그것들은 다 하나님의 귀한 은혜이다. 그러나 본서신은 무엇보다 \'자발적 선행\'을 강조한다. 바울은 성도에게 마땅한 일, 곧 그에게 명령할 수 있는 일이라도 명령하지 않고 도리어 간구하였다. 그것은 그 선행이 억지같이 되지 않고 자발적이게 되게 하기 위해서이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발적 선행을 원하신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자발적으로 그의 뜻을 순종하고 그가 교훈하신 선을 행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것이다. 우리 모두는 진실히 주를 믿고 자발적으로 그의 뜻을 행하는 자들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