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서 강해

야고보서 강해


내용 목차


야고보서 서론

1장: 시험을 참음

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3장: 말에 온전한 자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5장: 인내와 기도



베드로전서, 베드로후서, 요한일서, 요한이서, 요한삼서, 유다서 등과 더불어 전통적으로 \'공동 서신\'으로 불리웠던 본서신은 2세기의 옛 수리아어역에 포함되어 있었고, 비록 로마와 칼타고에서는 오랫 동안 의문시되었으나, 예루살렘과 수리아에서는 일찍부터 인정되었던 것 같다. 3, 4세기에 유명했던 오리겐, 예루살렘의 시릴, 나지안스의 그레고리, 아다나시우스, 제롬, 어거스틴 등은 본서신을 일찍부터 성경으로 인정하였다.


본서신의 저자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이었던 것 같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1) 본서의 저자는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만 부르고 사도라고 부르지 않는다. (2) 만일 본서신이 사도의 저작이었다면, 역사상 그 정경성이 의문시 되지 않았을 것이다. (3)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 중요한 세 명의 제자들 중 한 사람이었던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는 일찍 순교하였으므로(주후 44년경) 본서신의 저자일 수 없을 것이다. (4)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사도들과 거의 동등한 권위를 가진 지도적 인물이었다(행 12:17; 15:13, 19; 갈 1:19; 2:9).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주후 63년경에 순교하였다고 한다. 요세푸스에 의하면 그는 대제사장 아나누스의 명에 의해 돌에 맞아 죽었다고 하며, 유세비우스에 의하면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뜨림을 당한 다음 몽둥이로 맞아 죽었다고 한다.


아마, 본서신은 사도행전 15장에 기록된 예루살렘 회의(주후 49년경) 이전에, 그러니까 주후 45년에서 48년 사이의 어느 때에 쓰였을 것이다. 본서신을 받은 자들은 동방의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었을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행함이 있는 믿음\'이다. 사도 바울은 율법적 행위의 의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救贖)을 믿는 믿음의 의를 구별하면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복음 진리를 강조하였으나, 본서신의 저자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믿음만으로가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표현하였다.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오해를 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성경의 복음 진리나 야고보의 의도는 분명하다. 바울도 산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남을 분명히 가르쳤다(갈 5:6; 살전 1:3; 롬 6장).



1장: 시험을 참음


1절, 문안 인사


[1]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 야고보는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에게 문안하노라.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인정하고 모시고 순종할 것을 고백한 것이다. \'주\'라는 말은 \'하나님\'과 같은 의미와 권위를 가진 명칭이다.


본서신의 저자 야고보는 열두 사도 중 하나인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마 10:3)이든가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일 것이다. 저자가 자신을 \'사도\'라고 표현하지 않고 있다는 점과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서 유력한 사도적 인물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아마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가 본서신을 썼을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의 행적은 성경에 전혀 나타나 있지 않다. 그러나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는 성경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그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다. 사도행전에 보면, 옥에서 나온 베드로는 자신의 기적적으로 나온 사실을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전하라고 말했었다(행 12:17). 또 예루살렘에서 처음으로 모인 교회 회의에서 야고보의 발언은 결론을 내리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행 15:13-21). 갈라디아서에 보면, 바울 사도는 그를 \'주의 형제 야고보\'라고 부르면서 사도들과 같은 권위를 가진 인물로 언급했고(1:19) 또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와 게바와 요한\'이라고 표현했고(2:9) 또한 예루살렘에서 온 어떤 이들을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라고 표현하였다(2:12).


만일 저자가 예수님의 동생이었다면, 그가 자신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표현한 것은 예수님을 단순히 혈육의 형인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않고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로 여기고 고백한 것이며 그에 대한 자신의 순종을 고백한 것이다. 예수님은 인간적으로는 그의 형이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 그에게 주님 곧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흩어져 있는 열두 지파\'는 수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유대인들을 가리킨다. 유대인들은 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멸망 이후 온 세계에 흩어져 사는 민족이 되었다. 유대인들은 팔레스틴 뿐만 아니라 온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었다.


2-4절, 시험을 기쁘게 여기라


[2-4]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형제\'라는 말은 본서신에 19번 사용되었다. 이 말은 신약 성경에 346회 사용되었고 사도행전에만 57회 사용되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제자들\'이라는 말(30회)보다도 더 빈번히 사용되었다. 이것은 매우 친근한 명칭이다. 우리는 모두 주 안에서 형제들이다.


\'여러 가지 시험\'이라는 말은 성도에게 닥쳐오는 시험이 다양함을 보인다. 어떤 때는 친구의 배신과 비난과 따돌림, 마음의 상함, 정신적 위협과 압박이 있다. 어떤 때는 물질적 손실, 부도, 파산, 실직이 있다. 어떤 때는 육체적 질병과 사고, 핍박과 매맞음, 또 옥에 갇힘 등이 있다. 어떤 때는 가족들의 질병과 사고와 죽음, 남편이나 아내의 외도, 이혼, 자녀들의 탈선이 있고, 어떤 때는 교인들의 불완전, 교회의 분열이 있고, 국가적인 핍박, 전쟁, 경제 공황이 있다. 성도들이 당하는 시험은 여러 가지이다.


그러나 성도는 그런 시험을 당할 때 그것을 불평하거나 마지못해 당하지 말고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하고 구비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로마서 5:3, 4,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온전한 인격자가 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우리가 이 세상에서 힘써야 할 성화의 목표이다. 신앙의 인격은 시험과 시련을 통해 단련되고 성숙케 된다.



5-8절, 지혜가 부족하면 구하라


[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성도가 시험을 잘 참고 잘 대처하려면 지혜가 필요하다. 지혜는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현실에 잘 적용하는 능력을 가리킨다. 지혜 있는 자는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대로 잘 대처하여 나간다. 만일 우리가 지혜가 부족하다고 느낀다면, 우리는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다. 주께서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라고 말씀하셨다(마 7:7). 또 하나님은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다. 우리 하나님이 이런 하나님이신대 우리는 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여 얻기를 주저하겠는가?


[6-8]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우리는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 본문은 지혜를 구하면서 의심하는 자를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에 비유하였고 또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라고 표현하였다. 우리가 하나님께 지혜를 구할 때 의심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의 구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기 때문이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할 때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였듯이(왕상 3:10), 우리가 지혜를 구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합하게 무엇을 구하면 하나님이 그것을 들어주실 것도 분명하다(요일 5:14).



9-11절, 성도의 자랑


[9]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낮은 형제\'는 사회적 신분에 있어서나 경제 생활에 있어서 낮고 가난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자기의 높음\'이란 존귀하신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영광스럽고 복된 천국의 시민이 된 사실을 가리킨다. 흔히 성도에게 닥치는 큰 시험거리는 물질 문제이지만,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이 헛되다는 것과 주 예수님 안에서 얻은 구원과 복이 지극히 크고 가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것으로 만족하며 즐거워하고 자랑하는 것이다.


[10, 11]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부한 형제\'는 세상적으로 부요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자기의 낮아짐\'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적 부요의 헛됨을 인정하고 낮은 형제들과 교제하게 된 것을 가리킨다. 그들은 믿기 전에 가치 있게 여겼던 세상의 것들이 풀의 마름같이 시들고 아름다운 꽃의 떨어짐같이 없어지는 것임을 깨달았고 그래서 거기에 더 이상 큰 가치를 두지 않는다. 성도의 가치는 오직 \'썩지 않고 쇠하지 않는\' 천국 기업이요 영원히 죽지 않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요지는 본문의 말씀 그대로 세 가지이다. 첫째로, 우리는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날 때 그것을 온전히 기쁘게 여겨야 한다. 왜 그래야 하는가? 성도에게 닥치는 시험은 인내를 만들고 인내를 온전히 이루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만일 우리에게 지혜가 부족하면 하나님께 구하여 얻어야 한다. 구할 때 우리는 의심치 말고 믿음으로 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시며 지혜를 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우리들 가운데 낮은 형제들은 자신들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들은 자신들의 낮아짐을 자랑해야 한다. 왜 그러해야 하는가? 성도들은 세상의 것들이 다 풀과 같고 풀의 꽃과 같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며 또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하나님의 자녀됨과 천국과 영생과 부활만이 참으로 귀하고 가치 있는 것임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2-18절, 시험의 원인


[12] 시험을 참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이것에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을 얻을 것임이니라.


야고보서 1장에서 \'시험\'이라는 말(페이라스모스)은 \'시련\'이라는 말(도키미온)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 같다. 환난과 고난의 시험을 잘 참으면 온전한 인격자가 되므로(3, 4절) 복되다. \'옳다 인정하심을 받은\'이라는 말(도키모스)은 \'시험을 받은\'이라는 뜻이다. 성도들의 시험은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시험이다. 그것을 잘 통과하는 자들은 그들에게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이 있음이 증명될 것이다.


주께서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생명의 면류관이란 영생을 가리킨다. 면류관이란 승리한 자에게 주는 영광스런 상을 의미한다. 영생은 행위의 댓가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인데 왜 상이라고 표현되었는가? 그것은 시험들을 통과하고 승리하는 믿음의 삶의 결과라는 뜻이다. 영생은 하나님의 은혜이지만, 그것은 또한 승리적인 믿음의 삶의 결과이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승리할 것을 말씀한다. 로마서 8:35, 37,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요한일서 5:4, \"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성경은 또한 영생이 이러한 정상적인 승리적 신앙 생활의 결과라고 표현한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그러므로 영생의 영광을 얻을 자들은 세상에서 시험을 잘 참아야 한다.


[13, 14]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에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아니하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아니하시느니라.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뜻의 말(메데이스)이 있다. 시험의 원인은 무엇인가? 물론 하나님의 주권 진리에서 보면 모든 일들의 제일 원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 악의 책임을 전가시키는 방식으로 이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시험을 받을 때 내가 하나님께 시험을 받는다고 하지 말라고 말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님은 악에게 시험을 받지도 않으시고 친히 아무도 시험하지 않으신다.


본문은 시험의 원인이 각 사람의 욕심이라고 말씀한다. 각 사람은 자기 욕심에 이끌려 미혹될 때 시험에 떨어진다고 말씀한다. 예를 들어, 남에게서 비난을 받는 것이 시험이 되는 것은 자존심 혹은 명예에 대한 욕심 때문이며, 물질적 파산이 시험이 되는 것은 물질에 대한 욕심 때문이며, 몸의 질병이 시험이 되는 것은 이생에 대한 욕심 때문이다. 만일 이러한 욕심들이 없다면 그것들이 시험거리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모든 일들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의 공의의 판단과 처분과 보응을 믿는다면, 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실 것을 믿는다면, 또 삶의 최고의 목표를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으로 확신한다면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도 시험거리가 되지 못할 것이다. 사람의 시험은 자신의 욕심에서 오는 것이다.


[15, 16]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속지 말라.


세상의 것들에 대한 욕심에서 죄가 생긴다. 물질에 대한 욕심, 쾌락에 대한 욕심, 명예에 대한 욕심 등이 살인과 간음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의 죄를 낳는다. 또 그 죄가 장성하면 사망을 낳는다. \'장성한다\'는 원어(아포텔레오)는 \'끝까지 마친다\'는 뜻이다. 즉 죄가 죄로 끝마치고 사람이 그 죄를 끝까지 회개치 않는다면 죽음에 이른다는 뜻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죽음은 영육의 죽음 곧 지옥 형벌을 포함한다. 또 이와 같이 사람의 시험이 욕심에서 나는 것이므로 \'속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것은 자신이 시험받는 것을 하나님 탓으로 돌리지 말라는 뜻이다.


[17]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천지 만물은 하나님의 창조물이므로 천지 만물에 있는 모든 좋은 것들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드셨고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게 하셨으므로 사람이 땅을 정복하고 생물들을 다스리는데 쓰이는 지혜와 능력은 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들이다. 사람이 발전시킨 음악과 미술, 그리고 문학과 과학 등도 다 하나님이 주신 좋은 선물들이다. 이것들은 다 위로부터 즉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왔다. 여기의 \'빛\'은 무지와 부도덕과 구별되는 지식과 의를 가리킨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하나님은 변함이 없으시며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


[18] 그가 그 조물 중에 우리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그가 만드신 피조물들 중에서 한 첫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나으신 자들이다. \'첫열매\'란 중생(重生)의 구원을 가리킨다. 그것은 천국과 부활에 비해 볼 때 첫열매에 해당한다. 로마서 8:23,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구속(救贖)을 기다리느니라.\" 영광스럽고 완전하고 충만한 추수는 아직 미래에 있다.


또 앞으로 올 새 세계를 생각할 때도 성도들의 구원은 첫열매와 같다. 장차 만물이 새로워지고 회복될 것이다. 사도행전 3:21, \"만유를 회복하실 때.\" 로마서 8:20, 21, \"피조물이 허무한 데 굴복하는 것은 자기 뜻이 아니요 오직 굴복케 하시는 이로 말미암음이라. 그 바라는 것은 피조물도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이니라.\" 요한계시록 21:1, 5,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이 없어졌고,\"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영광스러운 천국과 부활을 우리에게 주시기 위해 우리를 중생시키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된 것이었다. 에베소서 1:4, 5,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요한복음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였으니.\" 에베소서 5:26,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8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시험에 지지 말고 잘 참고 이겨서 생명의 면류관을 받자! 둘째로, 사람의 시험의 원인은 자신 속에 있는 욕심이므로, 우리는 쾌락과 물질과 명예 등 세상에 속한 것들에 대한 모든 욕심을 버림으로써 어떤 시험에라도 떨어지지 않도록 하자!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천국의 첫열매로 구원하신 것을 깨닫고 오직 하나님만 바라고 천국만 바람으로써 모든 시험을 이기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



19-27절,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거니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너희가 알거니와\'(이스테)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그러므로\'(호스테)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진리의 말씀으로 중생된 사람이 되었으므로\'라는 뜻이다. 본문은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라\'고 교훈한다. 이것은 우리가 듣는 모든 말을 다 믿으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가 듣는 말 중에는 참된 내용도 있지만, 거짓된 것이나 불확실한 것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말을 속히 듣고 이해하고 그 내용들을 잘 분별해야 할 것이다. 듣지 않고서는 참된 것을 믿을 수 없고 또 참되지 않은 것을 반대할 수도 없다.


또 본문은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구약성경 잠언에는 입술을 제어하는 자가 지혜가 있고 말을 아끼는 자가 지식이 있다고 가르쳤다(잠 10:19; 17:27). 우리는 남에게 유익을 주는 말만을 하고 남에게 해를 끼치는 말은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예를 들어, 우리는 거짓말이나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말이나 형제의 명예를 손상시키는 악한 비난의 말을 해서는 안된다. 잠언 6:16-19, \"여호와의 미워하시는 것 곧 그 마음에 싫어하시는 것이 6, 7가지니, 곧 교만한 눈과 거짓된 혀와 무죄한 자의 피를 흘리는 손과 악한 계교를 꾀하는 마음과 빨리 악으로 달려가는 발과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및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자니라.\" 잠언 11:11-13, \"성읍은 정직한 자의 축원을 인하여 진흥하고 악한 자의 입을 인하여 무너지느니라. 지혜 없는 자는 그 이웃을 멸시하나 명철한 자는 잠잠하느니라.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을 누설하나 마음이 신실한 자는 그런 것을 숨기느니라.\"


또 본문은 우리가 \'성내기도 더디 하라\'고 교훈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전혀 화를 내지 않을 수는 없지만, 금방 화를 내지 말라는 뜻이다. 사람이 옳지 않은 일, 상식이나 경우에 맞지 않는 일을 보고 화를 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화를 내더라도 많이 생각하고 오래 참은 후에 내라는 것이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에 대해 잠언에는 많은 말씀으로 교훈했다. 잠언 12:16, \"미련한 자는 분노를 당장에 나타내거니와 슬기로운 자는 수욕을 참느니라.\" 잠언 14:17,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는 어리석은 일을 행하고.\" 잠언 14:29,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잠언 15:18, \"분을 쉽게 내는 자는 다툼을 일으켜도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시비를 그치게 하느니라.\" 잠언 16:32,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잠언 19:11,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20]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성내기를 더디 해야 할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우리가 화를 낼 때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했다. 우리는 화를 낼 때 남을 미워하기 쉬우며 그것은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 요한일서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는 방식으로 행동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화내는 것을 매우 조심해야 할 것이다.


[21]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리고 능히 너희 영혼을 구원할 바 마음에 심긴 도를 온유함으로 받으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우리가 말하기를 더디 하고 성내기도 더디 해야 하기 때문에 즉 우리가 거짓과 사악과 미움에 떨어져서는 안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가 법적으로 죄씻음을 받고 중생한 자들이 되었다면,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어 버려야 한다. 이것이 회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의 특징은 죄를 버리고 실제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이다.


또한 우리는 구원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도\'(道)라는 것은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복음의 말씀을 가리킨다. 그것은 \'너희 영혼을 구원할 수 있는 말씀\' 곧 \'구원의 말씀\'(행 13:26)이다. 이 말씀은 구약 시대의 율법이 돌비에 새겨졌던 것과 달리 그리스도인의 \'마음에 심긴 말씀\'이다. 고린도전서 15:1, 2,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로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너희가 만일 나의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이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으리라.\" 고린도후서 3:3,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한 것이며 또 돌비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심비에 한 것이라.\"


우리는 이 구원의 복음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온유함은 어린이같이 순진하고 겸손한 마음가짐을 말하며 이것은 바른 믿음의 태도이다. 교만한 마음은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앙하고 거부하고 대항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온유한 마음을 주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다 믿고 구원을 받을 것이다. 이것은 성도에게 기본적이다. 그러나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22] 너희는 도를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그러나\'라는 말(데)이 있다. 복음의 말씀을 믿고 구원을 받는 것은 기본적이지만, 야고보가 강조하고자 하는 바는 참 믿음이 행함을 동반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라\'고 강조한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자는 실상 믿지 않는 자이니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고 만다. 그러나 말씀을 행하는 자는 그 행함으로 자신의 구원을 증거한다. 여기에서 행함은 우선 앞에서 언급한 대로 덕스러운 말을 하고 덕스러운 행동을 하는 것, 예컨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게 성급히 화를 내지 않는 것을 가리킨다.


[23, 24] 누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 버리거니와.


말씀은 거울과 같다. 말씀을 듣는 것은 거울로 자신을 보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마치 거울로 자신의 더러운 얼굴을 보고 그 얼굴을 씻지 않고 잊어버리고 사는 자와 같다. 그러나 거울은 단지 보라고만 있는 것이 아니고 본 후에 더러운 것을 씻으라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듣기만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고 들은 후에 회개할 것은 회개하고 고칠 것은 고치고 실천할 것은 실천하라고 주신 것이다.


[25]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 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은 복음을 묘사한 말씀이다. 복음은 온전한 법이다. 여기에 율법 혹은 법이라는 말은 \'원리\'를 가리킨다. 이것은 로마서 8:2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라는 말씀에서의 \'법\'이라는 뜻과 같다. 복음은 완전한 법이다. 구약의 율법은 불완전한 법이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했던 제사 제도나 성막 혹은 성전은 신약 시대에 다 폐지되었다. 그러나 신약의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과 그가 이루신 의로 말미암아 완전한 구원의 원리로 주어졌다.


복음은 또한 \'자유하게 하는 원리\'이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진리이다. 바울 사도는 그 서신에서 복음의 유일성과 복음 안에 있는 자유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와 아들로서 누리는 자유를 밝히 증거하였다. 그 자유는 죄와 사망과 지옥 형벌로부터의 자유일 뿐만 아니라, 또한 율법 제도와 율법 체계, 그리고 율법의 멍에로부터의 자유이었다. 갈라디아서 5:1, \"그리스도께서 우리로 자유케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세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 바울 사도는 로마서 7:6에서도 증거하기를,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성령]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의문(儀文, 율법의 글자)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고 했다.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라는 구절에서 \'있는 자\'라는 원어(파라메이나스)는 \'그 안에 거하는 자\'라는 뜻이다. 다시 번역하면, \'자유의 온전한 법을 들여다 보고 그 안에 거하는 자\'이다. 복음 진리를 믿고 묵상하며 그 안에 거하는 참된 성도는 말씀을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고 실행하는 자이다. 즉 참된 신앙은 행위를 동반한다는 뜻이다. 믿음을 많이 강조한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가 죄 가운데 살아서는 안됨을 분명하게 강조했다. 로마서 6:1, 2, 15,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야고보는 또 말씀을 실행하는 자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가 범죄하면 하나님의 징계를 받을 것이다(히 12장). 그러나 의와 선을 행하면 하나님의 복을 받아 평안과 형통을 누릴 것이다. 신명기 28장에 계시된 복의 원리는 언제나 동일하다. 그것은 말씀을 순종할 때 받을 수 있는 복이다. 거기에는 건강의 복, 자녀의 복, 재물의 복, 평안의 복, 존귀의 복, 승리의 복 등이 포함된다.


[26] 누구든지 스스로 경건하다 생각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을 속이면 이 사람의 경건은 헛것이라.


야고보는 다시 경건과 행위의 관계를 강조한다. 그가 예를 든 행위는 말에 대한 것이다. 누가 자신이 경건하고 믿음이 있다고 생각하면서 자기 혀를 재갈 먹이지 않아서 조심스런 말을 하지 않고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며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가 정말 경건하고 믿음이 있는 자라면, 그는 자신의 언어 생활부터 고쳐야 한다. 그는 진실한 말, 선한 말, 덕스러운 말을 해야 한다. 그의 말은 사랑의 원리에 어긋나지 않아야 한다.


[27]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라.


야고보는 또 참된 경건이 어떤 행위로 나타나야 하는 지에 대해 첨가하여 말한다. 그는 두 가지를 예로 든다. 하나는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는 구제와 봉사를 포함한 사랑의 관심이며, 다른 하나는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불쌍한 교우나 이웃을 돌아볼 줄 모른다면, 또 사람이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에 불경건하고 죄악되고 음란한 유행과 풍조를 배격하지 못하고 따르고 있다면, 그의 경건과 믿음이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경건이 아니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7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교훈을 준다. 첫째로, 복음 신앙은 기본적이다.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구원할 말씀, 지금 우리의 마음에 심긴 복음의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의 온전한 법인 이 복음 진리 안에 거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행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행하지 않는 자는 자신을 속이는 자요 그의 경건은 헛것이다. 그러나 행하는 자는 복되다. 셋째로, 우리가 행해야 할 행위는 무엇인가? 본문이 특히 강조하는 바는 선하고 의로운 말과 행동이다. 우리는 말하기를 더디 하며 자기 혀를 재갈 먹여야 한다. 또 우리는 성내기를 더디 하고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자신을 지켜 세속에 물들지 말아야 한다.




2장: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13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너희가 받았으니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


원문을 직역하면, \"내 형제들아, 너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서 영광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지지 말라.\" \'영광의 우리 주\'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증거한다. 바울 사도도 예수님을 \'영광의 주\'라고 증거한 적이 있다(고전 2:8). 영광은 본래 하나님께 속한 속성이다. 영광의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요 복음적 믿음이다. 이런 믿음에 대한 언급은 야고보서가 구약적이지 않고 신약적임을 나타낸다.


야고보는 우리가 영광의 주님을 믿는 자들이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한다고 교훈한다. 그 교훈은 존귀하신 영광의 주님께서 낮고 비천한 사람으로 오셨다는 사실에 기초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증거하기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고 하였다(빌 2:5-8). 주님의 비하(卑下)의 사실을 깨닫는 자라면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을 것이다. 영광의 주님은 낮고 비천한 인생의 모습을 취하셨었기 때문이다.


[2, 3] 만일 너희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돌아보아 가로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이르되 너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원문에는 2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고 교훈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당시에 교회 안에 이런 잘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당(쉬나고게) 즉 예배당에서 교인들은 금반지를 끼고 좋은 옷을 입은 부자에게는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라고 친절히 대하지만 더러운 옷을 입은 가난한 자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등상 아래 앉든지 하라고 불친절하게 대하였다. 그들은 부자와 가난한 자를 차별하였다. 그들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였다.


[4] 너희끼리 서로 구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교인을 경제적인 척도에서 구별하는 것은 악한 일이었다. 그것은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일이었다. 사람의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이 그의 인격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서는 안된다. 예수님은 부자가 아니셨다. 구약의 선지자들도 부자가 아니었다. 바울 사도도 부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존귀한 인격자들이었다. 사람의 가치성은 그의 내면적인 덕성 즉 그의 경건과 믿음, 그의 의와 선과 진실의 덕성을 가지고 판단되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보이는 가치 판단의 기준이다. 세상은 무지해서 사람의 가치를 잘못 판단한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배운 교인들은 바른 판단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사람을 외모로 즉 그의 소유의 많고 적음을 가지고 판단하는 것은 무지하고 악한 일이다.


[5, 6]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 대하여는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유업으로 받게 아니하셨느냐?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괄시하였도다. . . .


5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증거한다. 그 이유는 네 가지로 표현되었다. 첫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께서 오히려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 대하여 가난한 자\'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세상의 가난한 자들\'이라고 되어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들이 일반적으로 하나님과 예수님을 더 잘 믿는다. 주께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마 19:23). 그러나 가난한 자들의 다수는 하나님과 천국을 보화로 삼아 믿음에 부요한 자들이 되었다. 고린도전서 1장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셨다고 증거하였다(28절).


[6, 7] . . . . 부자는 너희를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저희는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훼방하지 아니하느냐?


둘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부자들이 오히려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부자들은 성도들을 압제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기도 한다. 그들은 성도들의 아름다운 이름, 즉 성도,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백성, 천국의 시민 등의 이름을 비난하고 욕한다. 그러나 가난한 자들은 보통 성도들에게 그런 악을 행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런 부자들을 우대하고 가난한 자들을 천대하는 것은 모순된 행동인 것이다.


[8, 9] 너희가 만일 경에 기록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한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외모로 사람을 취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죄자로 정하리라.


셋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하나님의 최고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다. \'최고한 법\'이라는 원어(노모스 바실리코스)는 \'왕의 법\'이라는 뜻으로서 율법들 중에서 가장 귀한 법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율법들 중에서 가장 귀한 법은 사랑의 법이다. 그 첫째는 우리의 마음과 성품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요, 그 둘째는 우리의 이웃을 우리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면 우리는 이 귀한 법을 어기는 자가 되는 것이다.


[10, 11]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 거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원문에는 10절의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우리가 모든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에만 거친다 하더라도 모두 범한 자가 되기 때문이다. 원문에는 11절의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의 율법만 범해도 모두 범한 자가 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 이유는 모든 율법이 다 한 하나님에 의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느 한 법을 범해도 하나님의 법을 범한 것이다.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넷째로, 우리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자유의 율법\'이란 신약의 복음을 가리킨다(1:25). 그것은 우리에게 죄와 지옥 형벌과 율법 멍에에서 건져내어 자유를 주는 새로운 법이요 원리이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에 근거한 죄씻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요 우리가 값없이 받은 것이다. 우리는 이 대속의 복음에 근거하여 장차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런 큰 은혜와 긍휼을 받은 자라면 우리는 그런 자답게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사람을 외모로 취하겠는가? 어떻게 가난한 자들을 긍휼한 마음으로 대하지 않고 멸시하고 천대할 수 있겠는가?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우리가 왜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을 받을 자처럼 행동해야 하는가 하는 이유를 나타낸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받은 자로서 장차 그 긍휼에 의한 심판을 받을 것이라면 우리도 마땅히 남에게 긍휼을 베푸는 자가 되어야 하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에게도 긍휼 없는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긍휼은 그의 공의의 심판을 이기고 우리를 지옥 형벌에서 건져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이웃에 대해,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긍휼의 마음, 사랑의 마음으로 대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3절까지의 내용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라는 교훈이며, 그 이유는, 첫째로,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천국을 기업으로 주셨기 때문이며, 둘째로 부자는 성도들을 압제하고 훼방하기 때문이다. 셋째로 사람을 외모로 취하는 것은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하나님의 최고의 법을 어기는 죄가 되기 때문이며, 넷째로 우리는 자유의 법으로 심판을 받을 자답게, 즉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입은 자답게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사람에 대해 긍휼과 사랑을 가지고 대하되, 특히 가난한 자들에 대해 그렇게 하고 결코 그들을 멸시하거나 천대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자.



14-26절,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여기의 \'믿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1절)을 말한다. 그것은 말로는 구원적 믿음 곧 복음 신앙과 같다. \'행함\'이라는 원어(에르가)는 \'행위들\'이라는 말로서 믿음과 순종의 행위들 또는 선한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 믿음\' 즉 행함이 없는 그 믿음은 자신의 영혼을 구원할 수 없다. 즉 그러한 믿음은 구원적 믿음이 아니다. 구원적 믿음은 행위로 증거되는 믿음 즉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이다(갈 5:6).


[15, 16]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더웁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야고보는 자신이 강조하고 있는 행위에 대해 구체적 예를 든다. 그것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자를 돕는 행위이다.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이라는 말은 우리가 이웃의 영혼의 필요한 것만 채워주지 말고 몸의 필요한 것도 주어야 함을 보인다. 즉 우리는 이웃에게 죄사함과 영생과 내세의 천국만 전하지 말고 그에게 밥과 옷도 주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은 선행과 구제의 행위로 표현되어야 한다. 그런 행위가 없는 믿음은 참 믿음이 아니다.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이와 같이\'라는 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이 유익이 없듯이, 행함이 없는 믿음이 능히 자신을 구원하지 못하듯이\'라는 뜻이다. \'그 자체가\'라는 원어(카드 헤아우텐)는 \'그 자체만으로는\'이라는 뜻이다. 본절을 직역하면 \'이와 같이 또한 그 믿음이 만일 행함을 가지지 않는다면 그 자체만으로는 죽은 것이라.\' 야고보는 선한 행위들로 표현되지 않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강조한다.


[18, 19] 혹이 가로되,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 보면 \'너의 행위들로 네 믿음을\'이라고 되어 있다. 믿음과 행위는 분리될 수 없다. 믿음은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믿는 각 사람은 자신의 믿음을 선한 행위로 증거해야 한다. 하나님을 한 분으로 믿는 믿음은 바른 것이긴 하지만 그것이 단지 지식에 멈춘다면 그것은 귀신들이 가진 정도의 믿음에 불과하며 귀신들이 구원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 분명할진대 그런 믿음이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도 분명하지 않겠는가? 행위가 따르지 않는 믿음은 헛된 것이다.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 것인줄 알고자 하느냐?


\'허탄한\'이라는 원어(케노스)는 \'어리석은\'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행함이 없는 믿음\'(헤 피스티스 코리스 톤 에르곤)은 야고보가 본서에서 강력히 반박하고 정죄하는 믿음이다. \'헛 것\'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죽은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것은 17절의 내용의 반복이다.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사실을 다음의 두 가지 사실로 예증한다.


[21, 22]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드릴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


첫번째 예증은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리려 한 사건이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아니었다. 그의 순종의 행위는 참으로 놀라운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그가 100세에 얻은 외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 가서 번제물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하게 순종했었다. 즉 아브라함이 의인이라는 사실은 그의 순종의 행위로 증명된 것이었다. 22절을 다시 번역하면, \"네가 보거니와 그 믿음이 그의 행위들과 함께 일하고 그 행위들로 그 믿음이 온전케 되었느니라\"이다.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표현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음\'에 대해 분명하게 강조하였던 바울 사도의 표현과 다른 것은 사실이다(롬 3:22, 28, 30).


[23, 24] 이에 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응하였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는 성경의 말씀을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아브라함의 의롭다 하심은 그의 순종의 행위로 인해 확고히 되고 성취되었으며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고 불리움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리고는 21절에 이어 두번째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라고 표현한다.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 아니니라\'는 말씀은 행함이 없는 믿음 곧 죽은 믿음으로는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를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라는 두번째 예증으로서 야고보는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군들을 숨겨주고 피하게 한 것에 대해 말한다. 그것은 구약 성경 여호수아 2장에 기록되어 있다. 이 사건에서 기생 라합의 믿음은 위험을 무릅쓴 그의 선한 행위에서 나타났다. 야고보는 또 다시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라는 표현을 쓴다. 이것은 21절과 24절에 이어 세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사실의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행함이 없는 믿음이 죽은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영 혹은 영혼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 사람은 영육이 합해 있어야 산 존재가 되는 것이며 영이 떠나면 죽은 몸이 된다.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영혼이 없는 몸과 같이 죽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이것은 17절과 20절(전통 사본)에 이어 세 번째로 사용한 표현이다.


야고보가 21절과 24절과 25절에서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라고 표현한 것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고 명확히 강조한 바울 사도의 교훈과 충돌하거나 모순되는가? 우리는 그럴 수 없다고 믿는다. 우리는 모든 성경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므로 상호간에 모순이나 충돌이 있을 수 없다고 믿는다.


우선, 바울 사도의 \'이신칭의(以信稱義)\'의 복음은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 밝히 증거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고 그 복음 진리를 어둡게 하였던 천주교회의 배교적 상황 속에서 루터와 칼빈 등 종교개혁자들이 다시 한 번 더 깨닫고 확신했던 진리이기 때문에, 개신교회의 신앙을 바르게 받은 자라면 누구도 그 진리를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와 야고보의 표면적 차이점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율법을 행함으로 얻는 의(義)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는 의(義)를 구별하면서 \'사람이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야고보는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과 행함이 있는 산 믿음을 구별하면서 \'사람이 믿음으로만 아니고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표현한 것이었다. 물론 야고보의 표현 자체는 바울의 복음 진리와 충돌하는 듯한 오해를 불러일으킬 소지가 있으나, 그의 의도는 분명히 이해될 수 있다. 바울 사도도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고 강조했을 때 결코 죽은 믿음을 의미한 것이 아니고 산 믿음을 의미하였다. 로마서 6: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갈라디아서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가 효력이 없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결론적으로, 14절부터 26절까지의 요점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이 내용은 17절과 20절과 26절에 세 번이나 반복되어 있다. 이 강조된 내용이 주는 실제적 교훈은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되지 말고 산 믿음이 되어 행함으로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행위를 말하는 것인가? 그것은 라합과 같은 믿음의 행위, 아브라함과 같은 순종의 행위, 특히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 형제들에게 선을 베풀고 구제하는 행위를 말한다. 성경의 요점은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선과 사랑을 실천하라\'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은 죽은 믿음이 아니고 산 믿음, 참 믿음, 구원적 믿음인지 우리 자신을 성찰하고 과연 그렇다면 성경에 계시된 대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선행과 구제를 힘쓰자.




3장: 말에 온전한 자


1-12절, 말에 온전한 자


[1]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 된 우리가 더 큰 심판 받을 줄을 알고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


선생의 일 곧 가르치는 일은 귀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역이며 예수님의 사역이고 사도들의 사역이다. 사람들의 영혼을 구원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르쳐 바른 길로 인도하는 것은 세상의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이 귀한 일이다. 그러나 선생이 되는 데는 책임과 위험성도 따르므로 야고보는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는다\'고 말하면서 성도들에게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고 가르친다. 그렇다. 선생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고 성경 지식과 신앙 인격이 잘 갖추어진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야 그들이 말이나 행실에 실수가 없이 그 직분을 잘 감당할 것이다.


[2]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어서 많이 선생이 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가 다 실수가 많고 특히 말에 실수가 많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험적으로 수긍할 만한 말씀이다. 세상에 완전한 자는 없다. 성경 역사에도 그렇다. 심지어 모범적이었던 노아도, 아브라함도, 다윗도 흠과 실수와 부족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말에 실수가 없다면 우리는 온전한 인격자로 여김을 받을 것이다. 사람의 인격의 온전함은 말에서 증거된다. 여기에 혀의 중요성이 있다. 우리가 혀로 남에 대한 오해의 말이나 잘못된 비난의 말을 하지 않고 거짓말을 하지 않고 바른 말, 덕스러운 말만 한다면, 우리는 상당히 성숙한 인격자일 것이다.


온전한 말을 하는 혀는 그의 온 몸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다. 실상, 말은 사람의 인격을 나타낸다. 온전한 말은 온전한 인격의 표현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고 하셨다(마 12:34-37).


[3-5] 우리가 말(馬)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 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야고보는 혀의 중요성을 말의 재갈이나 배의 키에 비교한다. 말은 힘이 센 동물이지만, 사람은 말의 입에 재갈 즉 쇠토막을 물려 자기 뜻대로 그것을 이끌고 사용한다. 큰 배도 배 밑에 달려 있는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된다. 또 야고보는 혀를 불에 비교한다.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운다. 이와 같이, 사람의 혀는 작은 지체이지만, 큰 것을 자랑하며 큰 일을 행한다. 잠언 10:20, \"의인의 혀는 천은(天銀)과 같거니와.\" 잠언 12:18,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良藥) 같으니라.\" 잠언 21:28, \"확실한 증인의 말은 힘이 있느니라.\"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不義)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


본문은 혀의 악함을 증거한다. 앞절에서도 말했지만, 혀는 불과 같다. 그것은 좋은 용도의 불보다 산불이나 건물의 화재처럼 나쁜 결과를 주는 불과 같다. 그래서 야고보는 혀를 또한 불의(不義)의 세계라고 표현한다. 그것은 우리의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 즉 우리의 삶의 과정을 허물어뜨린다. 사람은 자기가 쌓은 선을 잘못된 말, 악한 말로 다 허물어 버릴 수 있다. \'그 사르는 것이 지옥불에서 나느니라\'는 말은 \'그것 즉 혀가 지옥불에 사루어지리로다\'라고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7, 8] 여러 종류의 짐승과 새며 벌레와 해물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거니와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원문에는 7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혀가 불의의 세계인 이유를 말한다. 그 이유는 혀가 길들여지지 않고 남을 죽이는 독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여러 종류의 짐승들과 새들와 벌레들 혹은 기는 것들과 해물들은 다 길들므로 사람에게 길들었다. 우리는 개나 소나 말이나 비둘기나 뱀이나 물개 등이 어떻게 길들여지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혀는 사람이 길들일 수가 없다. 그것은 \'다루기 힘든\' 악이다. \'쉬지 아니하는\'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다루기 힘든, 제어할 수 없는, 길들일 수 없는\'이라는 뜻의 말(아카타스케토스)로 되어 있다. 혀는 또 죽이는 독이 가득하다. 사람의 혀는 이렇게 심히 악하다. 그래서 바울은 죄악된 인생을 묘사하기를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혀로는 속임을 베풀며 그 입술에는 독사의 독이 있고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라고 했다(롬 3:13, 14).


[9, 10]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혀의 악함은 성도에게서도 종종 보인다. 그것은 이중적인 모순된 언어 생활에서 나타난다. 성도는 자신의 혀로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한다. 전통 사본에는 \'주 아버지\' 대신에 \'하나님 아버지\'(톤 데온 카이 파테라)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성도는 그 동일한 혀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한다. 한 입에서 찬송과 저주가 나오는 것이다. 이것은 이중적이고 모순되다. 이것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일이다.


[11, 12]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야고보는 자연의 이치를 들어 악한 말이 성도에게 합당치 않다는 것을 말한다. 샘은 단 물과 쓴 물을 함께 낼 수 없다. 과일나무는 같은 종류의 열매만 맺지 한 과일나무가 다른 열매를 맺지 않는다. \'짠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어떤 샘도 짠 물과 단 물을 함께 내지 못하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성도의 언어 생활은 확실히 달라야 한다. 성도가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난 바 되었고 그 마음이 깨끗케 되고 새롭게 되었을진대 그는 구원받은 자다운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성도의 언어 생활에 대해 많이 말씀하지만, 특히 바울의 에베소서에서 우리는 몇 구절 인용해볼 수 있다. 에베소서 4:25, 29, 31,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에베소서 5:4,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는 우리에게 두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는 우리가 많이 선생이 되지 말라는 것이다. 가르치는 직분은 귀한 것이지만 거기에는 책임과 위험성이 따른다. 잘못 가르치거나 잘못 본을 보인다면, 하나님께 큰 책망과 벌을 받을 것이다. 말의 실수가 사람의 실수 중 가장 두드러진 것인데, 가르치는 일은 이런 실수를 할 위험성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많이 선생이 되지 말고, 성경 지식과 신앙 인격에 있어서 상당히 자란 자들이 이 직분을 구하고 받아야 할 것이다.


둘째는 말에 온전한 자가 되라는 것이다. 본문은 작은 지체인 혀가 온 몸을 다스린다고 말한다. 또 작은 불이 많은 나무를 태우듯이, 혀가 온 몸을 더럽히고 우리의 삶의 과정을 불사르고 허물어뜨릴 수 있다고 경고한다. 또 본문은 우리의 혀가 얼마나 악한지, 그것이 얼마나 길들지 않고 이중적이고 모순된 일을 행하는지 지적한다. 그러므로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 우리의 신앙 생활의 목표는 무엇보다 말의 온전함에 있어야 하겠다. 우리의 성화의 목표는 일차적으로 말의 온전함에 있어야 하겠다. 말의 실수는 우리의 인격의 부족을 나타낸다.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인격자가 된다면 우리의 말도 의롭고 깨끗하고 진실하고 선하고 덕스럽게 될 것이다. 우리는 이런 자가 되기 위해 기도하고 힘써야 하겠다.



13-18절, 두 종류의 지혜


[13]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뇨? 그는 선행으로 말미암아 지혜의 온유함으로 그 행함을 보일지니라.


본절은 참 지혜가 단순히 이론이 아니고 행위로 표현되되 선함과 온유함으로 표현된다고 증거한다. 참 지혜는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요 성령의 열매로 맺혀지는 지혜이다. 성경에는 성령의 열매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선함]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라고 기록되어 있다(갈 5:22, 23). 또 전도서 8:1에는 말씀하기를, \"지혜자와 같은 자 누구며 사리의 해석을 아는 자 누구냐? 사람의 지혜는 그 사람의 얼굴에 광채가 나게 하나니 그 얼굴의 사나운 것이 변하느니라\"라고 했다. 참된 지혜는 선함과 온유함으로 표현되는 지혜이다.


[14, 15] 그러나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스려 거짓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니.


마음 속에 온유함 대신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는 자는 참된 지혜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지혜가 있는 것처럼 자랑하지 말아야 한다. 그는 진리를 거스려 거짓말하거나 속이지 말아야 한다. 그가 가지고 있는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 곧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고 세상적이요 정욕적이요 마귀적이다. \'세상적\'이라는 표현은 죄악된 세상 사람들에게서 나온 것이라는 뜻이다. 요한일서 2: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세상적 지혜는 어떤 점에서는 성도의 지혜보다 더 나아 보인다. 예수께서는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셨다(눅 16:8). \'정욕적\'이라는 원어(프쉬키코스)는 \'육욕적\'이라는 말로서 육신의 죄악된 생각과 감정과 욕망을 따르는 것이라는 뜻이다. \'마귀적\'이라는 말(다이모니오데스)은 \'귀신들 혹은 악령들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는 뜻이다.


[16]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요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니라.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다.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다. \'요란\'이라는 원어(아카타스타시아)는 \'혼란, 무질서\'를 가리킨다. 시기와 다툼이라는 마음의 악이 혼란과 무질서와 모든 악한 일들이라는 현실로 표현된다. 이것은 분명히 성경이 가르치는 지혜가 아니다.


[17, 18]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화평케 하는 자들은 화평으로 심어 의의 열매를 거두느니라.


세상적 지혜와는 대조적으로, 위로부터 난 지혜, 곧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는 어떠한가? 첫째로, 신적 지혜는 성결하다. 그것은 경건하고 도덕적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다. 그것이 거룩이요 또한 의(義)이다. 둘째로, 신적 지혜는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랑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에는 육신적 죄성에서 나오는 것들로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 등\'을 열거하였고, 이와 대조하여 성령의 열매들로 \'사랑과 화평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 등\'을 열거하였다(갈 5:19-23). 셋째로, 신적 지혜는 편벽과 거짓이 없다. 그것은 공정하고 진실하다. 출애굽기 23:3, \"가난한 자의 송사라고 편벽되이 두호하지 말지니라.\" 레위기 19:35, 36, \"너희는 재판에든지 도량형에든지 불의를 행치 말고 공평한 저울과 공평한 추와 공평한 에바와 공평한 힌을 사용하라.\" 다시 말해, 신적 지혜의 특징은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함이다.


잠언은 지혜의 삶을 가르치는 책이다(잠 1:2-6). 거기에서 강조하는 지혜도 하나님을 경외하고 악을 떠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율법대로 의롭고 거룩하고 선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다. 잠언 1:7,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2:16,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잠언 2:20, \"지혜가 너로 선한 자의 길로 행하게 하며 또 의인의 길을 지키게 하리니.\" 잠언 3:7, \"스스로 지혜롭게 여기지 말지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악을 떠날지어다.\" 잠언 8:13,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악을 미워하는 것이라.\" 잠언의 모든 말씀은 결국 야고보서 본문이 가르치는 \'위로부터 난 지혜\'와 동일하다.



결론적으로, 야고보서 3:13-18의 내용은 두 종류의 지혜를 가르친다. 마음 속에 시기와 다툼이 있고 혼란과 무질서와 온갖 악으로 표현되는 것은 \'세상적, 정욕적, 마귀적 지혜\'이다. 그러나 그와 대조되는 \'위로부터 난 지혜\'는 성결하고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고 긍휼과 선함이 가득하며 편벽과 거짓이 없다. 우리는 세상적 지혜를 버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지혜를 구하여 가져야 하겠다. 참된 지혜의 내용은 성결과 의와 선과 진실이다. 잠언 3:13-18,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너의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그 우편 손에는 장수가 있고 그 좌편 손에는 부귀가 있나니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 첩경은 다 평강이니라. 지혜는 그 얻은 자에게 생명 나무라. 지혜를 가진 자는 복되도다.\" 우리는 참된 지혜를 사모하고 하나님께 구하여 얻음으로써 참으로 지혜로운 성도가 되자!



4장: 탐욕, 비방, 자랑을 버릴 것


1-10절, 세상과 벗이 되지 말라


[1]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 다툼이 어디로 좇아 나느뇨?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 아니냐?


성도들 간에도 싸움과 다툼이 있다.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 있는 것이다. 그 원인은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 좇아 난 것\'이다. \'정욕\'이라는 원어(헤도네)는 \'쾌락, 욕망\'을 의미한다.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운다\'는 말은 신자의 본성 속에 선악 간의 싸움이 있음을 나타낸다. 갈라디아서 5장에는 그것을 육체의 소욕과 성령의 소욕의 대립으로 말씀하였다(갈 5:16, 17). 베드로전서 2:11에는 \"영혼(프쉬케)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고 말씀했다. 여기에 \'영혼\'이라고 한 말은 중생한 영혼의 지배적 성향을 가리키며, 그 성향은 범죄할 수 없는 원리이며 경건과 의와 선만을 지향하는 성질이다.


욕심은 이 세상 중심적인 것이다. 천국을 바라는 자는 이 세상의 욕심을 버릴 수 있다. 천국은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성도는 자신을 비움으로써 그 선물을 감사히 거저 받는다. 성도의 순종 생활은 댓가성 순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크신 은혜에 응답하는 감사의 순종이다. 신자가 영적인 눈이 어두워 이 세상적인 이기심과 명예심 등의 욕심을 가진다면 싸움과 다툼이 생길 것이나, 각 사람이 자신의 부족을 깨닫고 인정하고 모든 욕심을 버린다면 싸울 것이 아무 것도 없을 것이다.


[2, 3]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시기하여도\'라는 원어는 \'가지려 하여도\'라고 번역할 수 있다. 성도는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여 얻을 수 있기 때문에 부족함이 조금도 없다. 주께서는 \'구하라 주실 것이요\'라고 말씀하셨고 또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라고 하셨다(마 7:7, 8). 단지 성도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는 것은 얻지 못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성도에게 해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어린 아이가 칼을 달라고 한다고 그것을 줄 수 없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유익한 것만 주시고 해가 되는 것은 주지 않으실 것이다.


[4] 간음하는 여자들이여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의 원수임을 알지 못하느뇨?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되게 하는 것이니라.


전통 사본에는 \'간음하는 남자들과 여자들이여\'라고 되어 있다. \'간음한다\'는 말은 육신적으로나 영적으로 다 적절하다. 육신적으로 간음하는 것은 육신적 욕망을 따라 행하는 육체 사랑이요 하나님의 법을 어기는 것이다. 영적으로 간음한다는 것은 우상숭배, 세상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 등 하나님 대신 무엇을 더 사랑하는 것을 가리킨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 3:5).


간음하는 자들은 세상과 벗된 것이요 그것은 곧 하나님과 원수되는 일이다. 하나님의 원수는 하나님께로부터 진노와 심판의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지 말아야 하며 그것은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림으로써만 가능하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하나님과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그것은 불행한 길이다.


[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모든 신자들 속에는 성령님이 내주(內住)하신다. 로마서 8:9,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런데 성령님은 우리가 하나님 대신 세상의 것을 사랑할 때 우리를 향해 시기하신다. 출애굽기 20:4, 5,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 . .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이것은 세상 사랑, 명예 사랑, 돈 사랑, 쾌락 사랑을 버리고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천국만을 사랑하라는 요구이다. 이것은 거룩한 시기심이다. 우리는 참으로 세상의 욕망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따라야 한다.


[6]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


\'더욱 큰 은혜\'란 세상을 미워하고 자기를 부정하고 세상 욕심을 극복하여 하나님만 사랑하도록 하는 은혜를 가리킨다. 그러나 이 은혜를 받기 위해 우리편에서도 성실해야 한다. 우리는 우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해야 한다. 교만과 욕망은 친구이다. 교만은 명예욕에서 나온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7-10]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 주 앞에서 낮추라. 그리하면 주께서 너희를 높이시리라.


또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하고 마귀를 대적하며 하나님께 가까이 해야 한다. 우리가 마귀를 물리칠 때 마귀는 우리를 피하여 떠나며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 할 때 하나님께서도 우리를 가까이 하실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더 많이 더 자주 읽고 기도하기를 힘쓰므로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야 한다. 죄인들은 손을 깨끗이 해야 하고 하나님도 사랑하고 세상도 사랑하려는 두 마음을 품은 자들은 마음을 성결케 해야 한다. 우리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우리는 세상적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고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함으로써 하나님과 원수되었던 과거를 슬퍼하고 애통해야 한다. 또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높이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우리가 모든 세상적 욕심을 버리고 세상과 벗이 되지 말고 오직 겸손히 하나님께 순종하고 하나님을 가까이 할 것을 교훈한다. 욕심은 싸움과 다툼의 원인이며 세상의 것을 사랑하고 탐하는 자는 하나님의 원수가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에게 큰 은혜를 주셔서 세상 사랑과 세상 욕심을 극복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받아 세상적 욕심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과 천국만 바라며 살아가자!



11-12절, 피차 비방하지 말라


[11, 12]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하나이시니 능히 구원하기도 하시며 멸하기도 하시느니라. 너는 누구관대 이웃을 판단하느냐?


본문은 성도들 상호간의 사사로운 비난을 금하신 말씀이다. 성도들은 피차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 너희의 비판하는 그 비판으로 너희가 비판을 받을 것이요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니라.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고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 보라, 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찌하여 형제에게 말하기를 나로 네 눈 속에 있는 티를 빼게 하라 하겠느냐? 외식하는 자여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그 후에야 밝히 보고 형제의 눈 속에서 티를 빼리라\"고 하셨다(마 7:1-5).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본문은 두 가지를 언급하고 있다. 첫째로, 그것은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형제를 비방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율법이 가르치는 사랑의 정신에 어긋난다는 뜻일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실수가 있고 흠과 부족이 있다. 만일 우리가 서로 상대방의 흠과 부족을 찾아 비난하기 시작한다면 끝이 없을 것이며 서로 큰 상처만 입게 될 것이다. 그것은 사랑의 원리에 맞지 않는다. 사랑은 용서와 이해와 관용을 동반한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베드로전서 4: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하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우리가 서로 비방하지 말아야 할 이유는 우리가 율법의 준행자이지 판단자나 심판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입법자와 재판자는 오직 한 분 하나님뿐이시다. 그가 율법을 주셨고 모든 사람을 최종적으로 판단하실 것이다. 그가 어떤 이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구원하실 수도 있고 또 다른 이들을 그들의 죄에 대해 공의로 판단하셔서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내리실 수도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죄씻음과 구원을 받은 자들로서 겸손히 하나님의 법을 지켜야 하지 남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입장에 서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피차 사사로이 비방하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이 진리의 교훈은 하나님의 종들이 해야 할 교회적인, 공적인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금하는 것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나 신약의 사도들이 그러했듯이, 오늘날 하나님의 종이며 교회의 파수꾼 된 목사들은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필요할 때 판단과 비평을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사역은 교회의 권징의 행위로 표현되기도 한다. 참된 목사들은 설교시에 교인들이나 교회의 잘못과 악을 지적하고 고치게 해야 한다. 오류와 악을 책망하고 바르게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 말씀을 주신 목적이기도 하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고 말씀했다(딤후 3:16). 예레미야서에 보면, 구약 시대의 거짓 선지자들은 백성에게 거짓된 평강을 설교하였었다. 그러나 백성에게 진정한 평강은 없었고 있을 수 없었다(렘 8:11). 왜냐하면 죄를 회개함이 없이는 참된 평강도 있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참 선지자 예레미야는 백성에게 하나님의 책망과 심판을 선언하였었다.


특히, 구약 시대에 선지자 예레미야나 에스겔이 거짓 선지자들을 혹독히 책망하였듯이(렘 23장; 겔 34장), 신약 시대에도 초대 교회 때부터 거짓 교사들과 목사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들이 필요하였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말씀하기를,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 좇는 것을 내가 이상히 여기노라.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의 기쁨을 구하는 것이었더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고 하였다(갈 1:6-10).


또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말씀하기를, \"만일 누가 가서 우리의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을 받게 하거나 혹 너희의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 . 저런 사람들은 거짓 사도요 궤휼의 역군이니 자기를 그리스도의 사도로 가장하는 자들이니라. 이것이 이상한 일이 아니라. 사단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러므로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를 의의 일군으로 가장하는 것이 또한 큰 일이 아니라. 저희의 결국은 그 행위대로 되리라\"라고 하였다(고후 11:4, 13-15).


베드로 사도도 거짓 선생들에 대해 성도들에게 분명히 경고했다. 그는 베드로후서에 쓰기를, \"그러나 민간에 또한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났었나니 이와 같이 너희 중에도 거짓 선생들이 있으리라. 저희는 멸망케 할 이단을 가만히 끌어들여 자기들을 사신 주를 부인하고 임박한 멸망을 스스로 취하는 자들이라. 여럿이 저희 호색하는 것을 좇으리니 이로 인하여 진리의 도가 훼방을 받을 것이요 저희가 탐심을 인하여 지은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利)를 삼으니 저희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저희 멸망은 자지 아니하느니라\"라고 하였다(벧후 2:1-3).


유다도 유다서에서 분명하게 쓰기를,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우리의 일반으로 얻은 구원을 들어 너희에게 편지하려는 뜻이 간절하던 차에 성도에게 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를 위하여 힘써 싸우라는 편지로 너희를 권하여야 할 필요를 느꼈노니 이는 가만히 들어온 사람 몇이 있음이라. 저희는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치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색욕거리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라고 하였다(유 3, 4).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교회역사상 찾아볼 수 없게 심히 이단적인 자유주의 신학 사상을 배격하지 않고 포용하고 교리적 순결성과 교회적 순결성을 강조하지 않고 인본적인 연합과 일치만을 부르짖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심히 두려운 죄악이 아닐 수 없다. 오늘날 목사들이 교회들의 배교와 타협의 죄악에 대해 책망하고 외쳐야 함에도 불구하고 많은 목사들이 그렇게 하지 않고 침묵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로마서 14장을 인용하면서 하나님의 종들의 판단과 비평의 사역을 반대한다. 거기에 보면,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심하는 바를 비판하지 말라. 어떤 사람은 모든 것을 먹을 만한 믿음이 있고 연약한 자는 채소를 먹느니라. 먹는 자는 먹지 않는 자를 업신여기지 말고 먹지 못하는 자는 먹는 자를 판단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이 저를 받으셨음이니라. 남의 하인을 판단하는 너는 누구뇨? 그 섰는 것이나 넘어지는 것이 제 주인에게 있으매 저가 세움을 받으리니 이는 저를 세우시는 권능이 주께 있음이니라\"라고 말씀했다(롬 14:1-4). 그러나 그 말씀은 성경에 명백히 가르치지 않은 문제, 즉 성경에 명백히 명하지도 혹은 금하지도 않은 문제에 대하여 개인의 견해와 확신의 자유를 허용하는 말씀인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본문 다음에 언급된 대로 날과 절기에 관한 것과 먹는 음식에 관한 것이 그러하다(5, 6절).


그러나 성경은 다른 여러 곳들에서 명백한 오류와 죄악에 대해서는 판단할 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예를 들어, 로마서 16:17, 18에서는,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너희가 배운 교리=역사적 기독교 신앙]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고 말씀했고, 데살로니가후서 3:6, 14-15에서는, \"형제들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명하노니 규모 없이 행하고 우리에게 받은 유전대로 행하지 아니하는 모든 형제에게서 떠나라. 누가 이 편지에 한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거든 그 사람을 지목하여 사귀지 말고 저로 하여금 부끄럽게 하라. 그러나 원수와 같이 생각지 말고 형제같이 권하라\"고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이 가르친 바와 같이 우리는 피차 사사로이 비난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상대방의 결점을 찾아 그를 비방하려고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히려 상대방의 부족과 허물을 덮어주고 용서해 주려고 해야 하며, 서로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에 따라 행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또한 본문의 말씀을 오해하여, 하나님의 종들이 성도들과 교회의 성결과 건덕(健德)을 위해 하는 교회적인, 공적인 판단과 비평의 사역이 성경에 위배되는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된다. 성경은 오히려 주의 참된 종들이 그런 사역을 해야 할 것을 가르친다. 오늘날 교회들의 문제는 대다수의 주의 종들이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지적하고 책망하지 않고 침묵하는 데 있다. 오늘날에는 교회의 배교와 타협과 혼란의 일들에 대해 지적하고 책망하고 비판하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욱 요청된다. 목사의 이런 사역을 위해 기도해야 할 책임이 신실한 성도들과 교회들에게 있다. 영적으로 혼탁해져가는 시대에 하나님의 참되고 온전한 뜻이 성실히 다 선포되기를 기도하자.



13-17절, 헛된 계획과 자랑을 버리라


[13] 들으라, 너희 중에 말하기를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를 보리라 하는 자들아.


\'너희 중에\'라는 말은 이 교훈이 당시의 교인들에게 주신 것이요 교회 밖의 사람들에게 주신 것이 아님을 보인다. 물론 교회 밖의 세상 사람들에게도 이 교훈이 필요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이런 교훈을 받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교인들은 하나님을 알며 섬긴다는 자들인데 바르게 살지 못하므로 그들에게 이런 교훈을 주신 것이었다. 당시의 교인들 중에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우리가 아무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년을 유하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고 말하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은 헛된 계획이었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계획은 다 헛되다.


[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니라.


인생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존재이다. 오늘 우리가 살아 있으니까 살아 있는 것이지, 내일 무슨 일이 우리에게 생길지 아는 자들은 아무도 없다. 원문에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는 말 다음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내일 일을 알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생명이 잠간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같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안개\'라는 원어(아트미스)는 \'수증기, 김, 연기\' 등의 뜻이다. 수증기가 공중에 올라갈 때는 무엇이 있는 것 같지만, 잠시 후에는 그 자취를 찾아볼 수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와 같이, 인간은 살아 있을 때는 존재하는 것 같지만, 죽으면 땅에 묻히며 그 존재를 대할 수 없게 된다.


시편 39편도 인생의 삶의 제한적임과 덧없고 허무함을 잘 증거하였다. \"여호와여 나의 종말과 연한의 어떠함을 알게 하사 나로 나의 연약함을 알게 하소서.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 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사뿐이니이다. 진실로 각 사람은 그림자같이 다니고 헛된 일에 분요하며 재물을 쌓으나 누가 취할는지 알지 못하나이다\"(시 39:4-6).


[15] 너희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 저것을 하리라 할것이거늘.


본절은 성도가 마땅히 가져야 할 인생관을 증거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모든 것을 의탁하며 그의 뜻대로 이것 혹은 저것을 하겠다고 생각하며 사는 것이다. \'주의 뜻이면\'이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에게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바른 태도이다. 잠언 3:6,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우리가 살기도 하고\'라는 말씀은 인간의 생명이 하나님께 있음을 증거한다. 인간의 생명의 시작 곧 출산이나 생명의 끝마침 곧 죽음은 하나님의 주권적 손 안에 있다. 창세기 4:1,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 하와가 잉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 하니라.\" 민수기 16:22, \"모든 육체의 생명[\'영들\']의 하나님이여.\" 욥기 12:10, \"생물들의 혼과 인생들의 영이 다 그의 손에 있느니라.\" 사도행전 17:25,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 다니엘 5:23,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는 하나님.\" 누가복음 12:20,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래서 시편 127편에는 성도에게 주신 자녀를 \'하나님의 기업과 상급\'이라고 표현한 것이다.


\'이것 저것을 하리라\'는 말씀은 성도의 모든 활동들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증거한다.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우리는 하나님보다 앞서지 말며 항상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기를 소원하고 힘써야 한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仁慈)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16] 이제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자랑하니 이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헛된 계획은 말로 표현되든지 안되든지 간에 헛된 자랑이 된다. 헛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또 보장 없는 일을 자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내일은 나의 날이 아니다. 우리는 하루 동안에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그러므로 성도가 헛된 계획을 하고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은 다 악한 일이다.


[17] 이러므로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


본절에서 \'선\'은 문맥상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며 사는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것이 인생의 바른 삶인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런 바른 생활 원리, 행동 원리를 알고도 그대로 살지 않는 것, 곧 헛된 계획을 세우고 헛된 자랑을 하는 것은 죄가 된다. 그것은 불신앙과 불경건, 교만과 인본주의의 죄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두 가지 실제적 교훈을 준다. 첫째는, 우리가 세상에서 헛된 계획과 헛된 자랑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계획과 자랑은 주권자 하나님을 무시하는 불경건과 불신앙이며, 불확실한 미래를 마치 자기가 관리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인본주의의 죄악이기 때문이다. 둘째는,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며 그의 뜻 안에서 살아가며 활동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신본주의요 바른 신앙의 태도이다. 우리는 세상의 복잡한 현실 속에서 성도답게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아가야 하겠다.


 


5장: 인내와 기도


1-6절, 부자들에 대한 책망과 경고


[1-3] 들으라, 부한 자들아, 너희에게 임할 고생을 인하여 울고 통곡하라. 너희 재물은 썩었고 너희 옷은 좀먹었으며 너희 금과 은은 녹이 슬었으니 이 녹이 너희에게 증거가 되며 불같이 너희 살을 먹으리라. 너희가 말세에 재물을 쌓았도다.


본문의 부자들은 교회 밖의 사람들을 가리키지 않고 교회 안의 사람들을 가리킨다. 당시의 부자들은 말과 행실, 이론과 실제, 신앙과 생활이 일치하지 않았고 거리가 있었다. 야고보는 그들에게 고생과 재난과 불행이 임할 것을 경고하면서 울고 통곡하라고 교훈한다. \'고생\'이라는 원어(탈라이포리아)는 \'재난, 불행\' 등을 가리킨다. 야고보가 교훈한 통곡은 회개의 통곡이다. 죄인들이 회개해야 할 때 눈물로 회개치 않으면 망하고 만다.


본문은 부자들의 잘못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3절). 그들이 쌓아놓은 재물과 부는 썩었고 그들의 옷들은 좀 먹었고 금과 은은 녹이 슬었다. 그 녹은 그들의 잘못을 증거하고 불같이 그들의 살을 먹을 것이다. 한 마디로 그들은 말세에 재물을 쌓았다. 저축은 필요하고 좋으나 정도껏 해야지 지나치면 악이 된다. 저축은 기본적 생활을 위해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전도와 구제를 위해 돈을 잘 써야 한다. 지금은 말세이다. 세상은 끝나가고 있고 하나님의 심판의 날은 다가오고 있다. 돈은 선한 일에 사용되어야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지, 자기를 위해 쌓아놓고만 있으면 책망받을 죄가 된다. 물질적 부요함은 사람으로 하여금 교만하게 하고 신앙의 해이와 배반을 가져오며 결국 성도를 타락하게 한다. 그러므로 기본적 생활을 위한 것 외의 물질은 저축만 해놓지 말고 선하게 써야 한다. 전도와 구제를 위해 사용해야 한다.


[4] 보라, 너희 밭에 추수한 품군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


둘째로, 부자들의 경제 생활에는 불의함이 있었다. 그들은 그들의 밭에서 추수한 품군들에게 정당한 인건비를 지출하지 않았다. 그들은 품군들에게 돈을 주는 것을 지체했거나 돈을 떼어먹으려 했다. 일꾼들에게 무슨 일이든지 시켰으면 인건비를 지체치 말고 즉시 그리고 감사한 마음으로 즐거이 주어야 하고, 만일 외상으로 시키려 했으면 미리 약속했어야 했고 만일 줄 돈이 부족했으면 일 시키는 것을 연기했어야 했다. 인건비를 받지 못한 품군들의 우는 소리가 하나님께 들려졌다. 하나님은 억울한 자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신다.


[5, 6] 너희가 땅에서 사치하고 연락하여 도살의 날에 너희 마음을 살찌게 하였도다. 너희가 옳은 자를 정죄하였도다. 또 죽였도다. 그는 너희에게 대항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셋째로, 부자들은 자신들의 부요로 사치하고 연락하였다. 사치는 필요 이상의 것을 가지는 것이다. 그것은 집이나 옷이나 자동차나 가구나 신발 등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에 적용된다. 연락은 하나님이 주신 정당한 것 이상으로 육신의 욕망과 쾌락을 구하는 것이다. 오락이나 운동이 나쁘지 않지만, 거기에 빠지면 나쁘다. 사치와 연락은 죄악이다. 부자들은 사치와 연락으로 그들의 마음을 살찌게 하였고, 그래서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두려움과 조심함을 가지지 못했다.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물질 생활에 대해서도 판단하실 것이다. 우리는 사치하거나 연락해서는 안된다.


넷째로, 부자들은 또한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였다. 저 옳은 자들은 그들에게 대항하지 않았다. 여기에 부요함이 악의 뿌리가 된다는 사실이 더욱 드러난다. 부자들의 부요함은 그들을 사치와 연락에 빠지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옳은 자들을 정죄하고 죽이게까지 하였으니 얼마나 악하게 사용되었는가! 우리는 물질적 부요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이런 죄악에 떨어지지 않는다. 돈을 사랑함은 일만악의 뿌리이다(딤전 6:10).



7-11절, 인내에 대하여


[7, 8]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부자들의 불경건하고 방탕하고 불의하고 의인을 핍박하는 환경 속에서도 이 교훈을 받으라는 뜻이다. \'형제들아\'라는 말은 악한 부자들과 대조하여 순종하는 진실한 신자들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기본적 진리이며 그리스도인들의 확실한 첫번째 소망이다. 현실은 악할지라도 성도는 주의 재림하시기까지 오래 참아야 한다. 마치 농부가 열매를 바라면서 파종할 이른 비와 결심케 할 늦은 비를 참고 기다리는 것과 같이, 우리는 오래 참고 마음을 굳게 하고 기다려야 한다.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이다.


재림의 임박 의식은 모든 시대, 모든 성도들에게 필요하고 유익하다. 만일 이런 의식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은 해이해질 것이다. 곧 오시려는 것은 실상 하나님의 심정이다. 주의 재림이 지체되는 것은 단지 모든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시기 위함일 뿐이다.


[9] 형제들아 서로 원망하지 말라. 그리하여야 심판을 면하리라. 보라, 심판자가 문밖에 서 계시니라.


또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 서로 원망하지 않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면서 현실의 어려운 문제들의 원인을 남에게 돌리지 말아야 할 것이다. 모든 현실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고난도 그가 주셨고 악한 현실도 그러하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고 겸손케 하시기 위해, 즉 우리의 유익을 위해 고난의 현실을 주셔서 우리를 단련시키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남을 원망하지 말자. 우리는 모든 현실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자. 원망하는 것도 죄가 된다. 심판자 하나님께서 문밖에 서 계시니 우리는 우리의 모든 일을 그의 의롭고 완전한 판단에 맡기자.


[10] 형제들아 주의 이름으로 말한 선지자들로 고난과 오래 참음의 본을 삼으라.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고난을 당하였다. 그들은 백성에게 배척을 받았었다. 그들은 돌에 맞기도 하였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도 하였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이 믿음이 없고 악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지자들은 많은 고난 중에도 오래 참았다. 그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본이 된다. 우리도 참된 믿음 안에서 현실의 여러 가지 고난을 오래 참는 자들이 되자.


[11] 보라, 인내하는 자를 우리가 복되다 하나니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라.


인내하는 자는 복되다. 성경에서 인내의 한 대표적 예는 욥이다. 욥은 재물의 심히 큰 손실과 자녀들의 죽음과 자신의 건강의 상실이라는 감당키 어려운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인내하였다.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욥의 후년에 같은 수만큼의 자녀와 배갑절의 재물을 복으로 주셨다. 하나님은 결코 성도들을 고난 가운데 영영히 버려두시는 자가 아니다. 그는 자비와 긍휼이 지극히 풍성하셔서 자기의 백성을 돌아보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의 내용은 우리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 중에 혹시 악한 부자들이 있으면 회개해야 한다. 말세에 재물을 쌓는 것이나 불의로 재물을 모으는 것이나 사치하고 연락하는 것이나 의인을 정죄하고 죽이는 것 등은 다 악한 일들이다. 이런 일을 하는 악한 부자들이 있다면 회개하자.


둘째로, 우리는 잘못된 물질 생활을 버리고 바른 물질 생활을 해야 한다. 우리는 자신을 위해 물질을 쌓아놓기만 하지 말고 또 불의하게 돈을 모으거나 사치하고 연락하지 말고, 의롭고 정당하게 돈을 벌고 근검절약하게 그것을 쓰며 특히 전도와 구제의 선한 일들에 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오래 참아야 한다. 마음을 굳게 하고 서로 원망하지 말고 앞서 갔던 선지자들을 기억하면서 오래 참자. 하나님은 결코 성도를 버리지 않으시고 현세와 내세에 지키시고 도우신다.



12절, 맹세하지 말라


[12] 내 형제들아 무엇보다도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나 땅으로나 아무 다른 것으로도 맹세하지 말고 오직 너희의 그렇다 하는 것은 그렇다 하고 아니라 하는 것은 아니라 하여 죄 정함을 면하라.


맹세는 맹세하는 자가 하나님의 이름을 불러 자신의 주장이나 약속의 참됨을 판단하시고 증거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본절의 뜻은 하나님의 이름 외에 하늘이나 땅이나 어떤 다른 피조물로 쉽게 맹세하고 쉽게 변경하는 당시의 잘못된 풍조를 정죄하는 것이다. 우리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맹세해야 하고, 또 그 외의 경우에는 자신의 가부(可否)의 의사를 표현하면 된다.


합법적인 맹세는 오늘날도 여전히 정당하다. 신약 성경은 예수님과 사도 바울이 맹세하였음을 증거한다. 마태복음 26:63, 64, \"예수께서 잠잠하시거늘 대제사장이 가로되, 내가 너로 살아 계신 하나님께 맹세하게 하노니 네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인지 우리에게 말하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말하였느니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후에 인자가 권능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고린도후서 1:23, \"내가 내 영혼을 두고 하나님을 불러 증거하시게 하노니 다시 고린도에 가지 아니한 것은 너희를 아끼려 함이라.\" 갈라디아서 1:20, \"보라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이 아니로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22:2, \"하나님의 이름만이 사람이 맹세해야 할 이름이며, 맹세에서 하나님의 이름은 모든 거룩한 두려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사용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 영광스럽고 두려운 하나님의 이름으로 헛되이 혹은 경솔히 맹세하는 것이나 어떤 다른 것으로 맹세하는 것은 죄악되며 매우 미워해야 한다. 하지만 중대한 일들에서 맹세는 구약 아래서 뿐만 아니라 또한 신약 아래서도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보증되므로, 합법적 맹세는 합법적 권위에 의해 부과될 때 그러한 일들에서 행해져야 한다.\"


매튜 풀, \"모든 맹세가 금지된 것이 아니고, 일상적 일에서 거짓되고 성급하고 헛된 맹세, 정당한 이유가 없고 습관적이고 빈번한 맹세가 금지된 것이다.\"



13절, 기도할 때와 찬송할 때


[13] 너희 중에 고난 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


우리에게 고난이 있을 때는 기도할 때이다. 그 때 우리는 예배당이나 산이나 기도의 골방이나 어디든지 조용한 곳을 찾아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 근심하거나 고민하거나 염려하거나 낙심하거나 방황할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해야 한다.


우리에게 즐거운 일이 있을 때는 찬송할 때이다. 삶의 즐거움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우리의 건강도, 의식주도, 가정도, 사회적 환경도, 우리의 정신적, 육체적 모든 복이 다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즐거운 일이 있을 때 자신을 높이거나 자랑하거나 축하하거나 교만하지 말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여야 하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임을 인정해야 한다.



14-18절,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라


본문은 성도들이 병들었을 때 해야 할 일을 교훈한다. 그것은, 교회의 장로들을 청하여 기름을 바르며 죄를 고백하며 병 낫기를 위해 간구하는 것이다.


[14]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성도들이 병들면 먼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청하여야 한다. 성경에서 \'장로들\'은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치리 장로들을 다 포함하는 말이다. 목사는 설교와 치리의 책임을 겸한 자이고 치리 장로는 치리의 책임만을 가진 자라는 차이점이 있을 뿐이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목자요 감독자요 인도자이다(행 20:28). 그들의 첫번째 직무는 교인들을 돌아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병든 이들은 목사와 장로들을 청해야 하며 그들은 병든 이들을 심방해야 한다.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사도 시대의 의식이었던 것 같다. 마가복음 6:12, 13, \"제자들이 나가서 회개하라 전파하고 많은 귀신을 쫓아내며 많은 병인에게 기름을 발라 고치더라.\" 기름은 아마 그 당시에 의약품으로 사용되었든지 아니면 단순히 성령의 은혜와 능력의 상징물로 사용되었다. 우리는 병의 치료를 위해 기도하되 의술과 약품을 하나님의 치료의 도구로 인정하며 사용한다.


[15]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목사와 장로들은 병든 교인들을 방문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참된 사랑이요 사랑의 교제이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께 달려 있다. 병을 주신 이도 치료하실 이도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의 병의 원인을 정확히 아시며 또 그것의 완전한 치료 방법도 아신다. 그가 원하시면 우리의 병은 깨끗하게 치료될 것이다.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죄와 병이 연관되어 있음을 나타낸다. 물론 욥의 경우와 같이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신명기 28장에 증거된 대로, 병은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오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과 용서가 병 치료의 시작이 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몸이 병들었을 때 무엇보다 먼저 겸손히 하나님 앞에 꿇어 엎드려 자신을 성찰하고 생각나는 우리의 죄와 부족을 고백해야 한다.


[16]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죄의 고백은, 물론 공개적이지 않는 것이 유익할 때도 있지만, 때때로 공개적일 때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다른 이들에게 유익이 되고 자신에게도 유익이 되기도 한다. 특히 병 낫기를 위해 기도하고자 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거리끼는 죄악들을 하나님께 고백해야 한다. 그런 후 우리는 병 낫기를 위해 서로 기도해야 한다.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의인의 간구\'라는 원어(데에시스 디카이우 엔에르구메네)는 \'의인의 힘 있는 기도, 의인의 열렬한 기도\'라는 뜻이다. 의인은 예수님의 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성도를 가리킨다. 성도들의 힘 있는, 열렬한, 간절한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다. 병 치료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범사에 기도는 능력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일을 이루는 통로이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는 지정된 방법이다.


[17, 18]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저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아니오고 다시 기도한즉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내었느니라.


야고보는 기도 응답의 예로 엘리야 선지자를 들었다. 엘리야는 우리와 다른 어떤 초인적(超人的) 존재가 아니었다. 그는 우리와 성정(性情)이 같은 사람이었다. 그의 능력의 역사는 단지 그의 기도 생활에 있었다. 그가 비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했을 때 3년 6개월간 땅에 비가 오지 않았고 그가 다시 간절히 기도했을 때 하늘이 비를 주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도 간절히 기도할 때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이다.


[19, 20] 내 형제들아 너희 중에 미혹하여 진리를 떠난 자를 누가 돌아서게 하면 너희가 알 것은 죄인을 미혹한 길에서 돌아서게 하는 자가 그 영혼을 사망에서 구원하며 허다한 죄를 덮을 것이니라.


이 말씀은 병자 방문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병자를 방문하여 위하여 기도할 때 때로는 진리를 떠났던 자들을 돌이키게 한다. 이 일은 참으로 귀하다. 육신의 병을 치료하는 것도 귀하지만, 죄인의 영혼을 돌이키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하다. 그것은 한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는 것이다. 그것은 한 죄인의 많은 죄를 덮어주는 일이다. 심방과 기도를 통해 육신의 병뿐 아니라 영혼을 구원하게 된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20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이다. 첫째는 우리가 하늘로나 땅으로나 다른 어떤 피조물로 맹세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경솔하게 맹세하지 말라는 뜻이다. 둘째는 우리가 고난 당할 때 기도하고 즐거울 때 찬송하라는 것이다. 셋째는 병든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다. 병든 자는 교회의 장로들(목사와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그를 위해 기도하되 죄를 고백하면서 병 낫기를 위해 간절히, 힘을 쏟아 기도해야 한다. 이 때 하나님의 응답과 도우심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다른 이의 육신의 병만 고치는 것이 아니고 또한 성도들 가운데 미혹하여 진리에서 떠난 자를 돌아서게 하는 것은 더욱 귀한 일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