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전서 강해
내용 목차
베드로전서 서론
1장: 믿음의 시련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3장: 선행에 힘쓸 것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본서신의 저자는 사도 베드로이며(1:1) 그가 불러주는 내용을 필기한 사람은 실루아노이다(5:12). 역사상 베드로전서를 가장 일찌기 인용한 책은 베드로후서이다(벧후 3:1). 2세기의 폴리갑과 이레니우스, 3세기의 터툴리안과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트 등은 본서신을 인용하였고, 특히 이레니우스는 본서신을 인용하면서 베드로전서라고 언급하였다.
본서신을 받은 자들은 \'흩어진 나그네\'인데, 그들은 주로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었다(2:9, 10). 본서신의 저작 시기는 아마 바울의 옥중 서신보다 후 그리고 베드로의 순교 이전, 즉 주후 65년경일 것이다.
본서신의 특징적 주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이다. 본서신은 고난받는 성도들에게 소망과 위로를 주는 책이다(1:6, 7; 2:18-21; 3:14, 16, 17; 4:12-19; 5:8-10).
1장: 믿음의 시련
1-2절, 문안 인사
[1]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진 나그네.
베드로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 중에서도 그가 항상 데리고 다니시던 세 제자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막 5:37; 9:2; 14:33).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라고 소개한다. 사도는 주 예수께서 친히 불러 세우신 자들로서 12제자들과 바울에게 해당되었다(눅 6:13; 롬 1:1). 열두 사도들은 예수님과 함께 있고 나아가 전도하며 권능을 받아 병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고쳤던 자들이었다(마 10:1; 막 3:14, 15).
베드로는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와 비두니아에 흩어져 살고 있었던 성도들에게 편지하였다. 위의 지역들은 소아시아의 지역들로서 오늘날 터어키 지역에 해당한다. 성도들을 \'나그네\'라고 부른 것은 우리의 본향이 천국이기 때문이다(히 11:13-16). 역대상 29:15에 보면, 다윗은 \"주 앞에서는 우리가 우리 열조와 다름이 없이 나그네와 우거한 자라. 세상에 있는 날이 그림자 같아서 머무름이 없나이다\"라고 하나님께 고백했다.
[2]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로 묘사하였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미리 아심\'이라는 말은 어떤 이들이 잘못 생각하듯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것을 미리 아셨다는 뜻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아셨다. 그러나 이 말은 단순히 그런 지식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사랑의 선택을 나타내는 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으로 된 것임을 분명히 증거한다(엡 1:4, 5, 11). 하나님의 선택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예수님을 믿게 된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것이 아니고 우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택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우리를 택하셨다.
둘째로,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며 그의 피뿌림을 얻은 자들이다. 성도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하며 그를 따르게 된 자들이다. 그들은 주님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부정하고 자신을 미워하며 자신의 모든 소유를 버린 자들이다(눅 9:23; 14:26, 33). 그들은 오직 주님만 따르며 그의 말씀만 따르는 자들이다. 또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뿌림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이다.
셋째로, 성도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을 입은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6: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디도서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좇아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성령의 사역은 일차적으로 교회 창설 시기에 있었던 방언과 예언과 병고침 등의 초자연적 은사들에 있었던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택하신 죄인들을 구원하는 일에 있었다. 죄인들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으로 구원을 얻는다. 이로써 성도는 세상과 구별되고 죄악과 구별되는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 된다.
[3]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라는 말은 삼위일체 하나님, 특히 성부(聖父)와 성자(聖子)의 관계를 나타낸다.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 구별되시지만, 신적 본질 즉 신성(神性)에 있어서는 동일하시다. 이것이 성경이 밝히 계시하는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신비이다.
하나님께서는 그 많으신 긍휼대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셨다. 우리들의 거듭남 곧 중생(重生)은 하나님의 전적인 긍휼과 은혜로 된 것이다. 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되었다. 그것은 우리의 중생의 근거를 나타낸다. 죄의 형벌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즉 대리적 형벌의 속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씻음을 받았고 그것에 근거하여 영원한 새 생명이 우리 속에 심어진 것이었다. 예수님의 부활은 이 모든 사실을 확증하고 보증하였다. 하나님의 선택도,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도, 성령의 중생케 하심도 다 하나님의 크신 긍휼의 결과이었다.
성도는 거듭난즉 산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죄의 결과는 죽음과 멸망이었고 거기에는 두려움과 절망만이 있었다. 그러나 이제 죄씻음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성도는 소망을 가지게 되었고 그 소망은 결코 헛되지 않은 산 소망인 것이다.
[4]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
세상의 것들은 다 썩고 더러워지고 낡아진다. 그래서 시편 102편에는 \"천지는 없어지려니와 주는 영존하시겠고 그것들은 다 옷같이 낡으리니 의복같이 바꾸시면 바뀌려니와\"라고 말씀했다(시 102:26). 또 이사야 40장에는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듦은 여호와의 기운이 그 위에 붊이라\"라고 말씀했다(사 40:6, 7). 그러나 성도들을 위해 하늘에 간직된 기업 즉 천국은 썩지도 않고 더럽지도 않고 쇠하지도 않는 영원하고 영광스러운 것이다. 성도들은 그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하나님의 상속자들인 것이다(롬 8:17).
[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었나니.
앞절에 말씀한 천국 기업은 본절에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라고 표현되었다. \'말세에 나타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재림시에 나타내신다는 뜻이다. 성도들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릴 천국은 예수님의 재림으로 더불어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다. 그리고 성도들은 이 놀라운 구원 곧 천국을 얻기 위해 지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저희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치 아니할 터이요 또 저희를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고 하셨다(요 10:27, 28). 바울 사도도 말하기를, \"이를[이 복음을]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고 했다(딤후 1:12).
[6, 7]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깐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구원이 이와 같이 확실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의 보호하심이 확실히 있기 때문에, 성도들은 세상에서 여러 가지 환난과 시험을 당하며 잠깐 근심하게도 되지만 도리어 크게 기뻐할 수 있다. 없어질 순금도 용광로 속에서 제련함으로써 나온다. 우리의 믿음의 시련은 금의 제련보다 더 귀하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환난과 시험을 통해 신앙 인격의 단련을 받아 거룩하고 겸손하고 믿음 있는 자가 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선한 열매들을 많이 맺게 되므로 장차 예수님의 재림시에 \'잘했다\'는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도 로마서 5장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줄 앎이로다\"라고 했다(롬 5:3, 4).
결론적으로, 1절부터 7절까지의 내용은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거듭나게 하셔서 천국을 얻게 하시며 세상에서 믿음으로 보호하심을 입게 하신다는 것이다. 먼저, 우리는 우리 자신이 여기에 해당하는 참된 성도들인지 스스로 질문해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성령의 거룩케 하시는 구원을 받았는가?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했는가? 또 그의 속죄의 피뿌림을 받았는가? 속죄 신앙은 성도의 기본적 신앙이며 생명선이다. 이 질문에 분명한 대답이 없다면, 여러분은 지금 이 시간에라도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한다.
만일 우리에게 속죄 신앙이 분명히 있다면, 하나님께 감사드릴 일이며,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크신 긍휼과 은혜의 선택과 대속(代贖)과 중생과 구원과 보호와 천국을 감사하고 찬송하며 그 은혜에 억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는 양으로 믿음과 순종의 삶을 힘써 살아야 한다. 산 소망을 굳게 가지자. 천국을 확신하자. 천국을 즐거워하자. 또 이 확신과 즐거움 속에서 현실의 고난과 시험을 기쁘게 맞자. 그 속에서 믿음의 단련을 받자.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이 돌려지고 장차 칭찬을 받을 만한 선한 열매들을 이 세상에서도 많이 맺는 자들이 되자.
8-12절, 구약에 예언된 그리스도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베드로가 편지하고 있는 소아시아 지방에 흩어져 살고 있던 성도들은 참으로 귀한 믿음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보지 못한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를 사랑하였다. 그들은 지금도 예수님을 보지 못하고 있지만 그를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가!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이것은 성령의 증거와 사도들의 증거로 가능하였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너희도 처음부터 나와 함께 있었으므로 증거하느니라\"고 하셨다(요 15:26, 27). 요한복음 20장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의 부활을 목격했던 동료들의 증거를 의심하는 도마에게 자신을 나타내 보이신 후에 말씀하시기를,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요 20:29). 또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진술하기를,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고 하였다(요 20:30, 31).
초대 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을 믿고 사랑하였다. 사랑은 상대방의 가치를 알 때 생긴다. 사람들은 돈의 가치를 알 때 돈을 사랑한다. 그러나 돈의 헛됨을 알 때 돈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다. 우리는 사람들의 영혼들의 가치를 알 때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도 불쌍히 여기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의 가치를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과 우리를 위해 사람이 되셨고 십자가 위에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음을 알 때, 그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사랑은 교제와 대화로 표현된다. 사람은 누구를 사랑할 때 그와 교제하고 그와 대화하기를 좋아한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성경을 읽고 기도하기를 좋아할 것이다. 또 사랑은 봉사와 수고로 표현된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돈을 쓰는 것은 아깝지 않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하나님과 그의 일을 위해 봉사하고 수고하고 물질을 아끼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특히 기쁨으로 표현된다. 사랑하면 기쁨이 생긴다. 그래서 사랑하면 얼굴이 예뻐진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기쁨이 생겨서 그런 것이다. 기쁨이 있는 얼굴은 예뻐 보이지만, 근심과 슬픔이 가득하면 미워 보이기 마련이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주를 기뻐하였다. 익명의 찬송 작가는 이렇게 썼다: \"구주를 생각만 해도 내 맘이 좋거든 주 얼굴 뵈올 때에야 얼마나 좋으랴/ 만민의 구주 예수여 귀하신 이름은 천지에 온갖 이름 중 비할 데 없도다/ 참 회개하는 자에게 소망이 되시고 구하고 찾는 자에게 기쁨이 되신다/ 사랑의 구주 예수여 내 기쁨 되시고 이제와 또한 영원히 영광이 되소서\"(찬송가 85장).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믿음의 목표는 영혼의 구원이다. 우리의 영혼은 죄로 인하여 죽었었고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주셨고 그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의 구원을 얻게 된 것이다. 우리가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 길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해야 하며 그래야 구원을 얻고 영원한 나라에 확실히 들어갈 것이다.
[10, 11]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연구하고 부지런히 살펴서 자기 속에 계신 그리스도의 영이 그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여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시는지 상고하니라.
베드로는 이 구원이 구약의 선지자들에 의해 예언된 은혜요 그 선지자들이 부지런히 연구하였던 바임을 증거한다. 또 그들 속에서 역사하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가 장차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였으므로 선지자들은 그것이 어느 시, 어떠한 때를 지시하는지 연구하였다고 증거한다.
베드로 사도가 구약 선지자들 속에 역사한 성령을 \'그리스도의 영\'이라고 표현한 것은 삼위일체의 신비를 증거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한 신성(神性)을 가지신 분이시므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시기 전, 즉 구약 시대에도 선지자들 속에 역사하실 수 있었고 또 역사하셨다.
구약의 선지자들 속에 계셨던 그리스도의 영이 그가 받으실 고난과 후에 얻으실 영광을 미리 증거하셨다는 것은 구약 성경 이사야 53:5, 6과 시편 16:10을 예로 들 수 있다. 이사야 53:5, 6,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시편 16:10,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임이니이다.\"
또 구약의 선지자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때와 시기를 연구했다는 것은 다니엘 9:24-26을 예로 들 수 있다: \"네 백성과 네 거룩한 성을 위하여 칠십 이레(7x70)로 기한을 정하였나니 허물이 마치며 죄가 끝나며 죄악이 영속(永贖)되며 영원한 의(義)가 드러나며 이상과 예언이 응하며 또 지극히 거룩한 자가 기름부음을 받으리라. 그러므로 너는 깨달아 알지니라.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令)이 날 때부터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 그 때 곤란한 동안에 성이 중건되어 거리와 해자[성밖에 둘러판 못]가 이룰 것이며 육십 이 이레 후에 기름부음을 받은 자가 끊어져 없어질 것이며 장차 한 왕의 백성이 와서 그 성읍과 성소를 훼파하려니와 그의 종말은 홍수에 엄몰됨 같을 것이며 또 끝까지 전쟁이 있으리니 황폐할 것이 작정되었느니라.\"
이 70이레의 기한에 관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자 곧 왕이 일어나기까지 일곱 이레와 육십 이 이레가 지날 것이요\"라는 말씀은 음력으로 69이레(7이레+62이레) 즉 483년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예루살렘성의 중건을 허락받았던(느 2:5, 6) 느헤미야의 때 즉 바사왕 아닥사스다 20년(느 1:1)인 주전 445년으로부터 계산하면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실 무렵이 된다고 본다.
[12] 이 섬긴 바가 자기를 위한 것이 아니요 너희를 위한 것임이 계시로 알게 되었으니 이것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을 전하는 자들로 이제 너희에게 고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하는 것이니라.
구약 선지자들이 예언한 내용이 자신들을 위한 것이 아니요 신약 성도들을 위한 것이라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드러났다. 예수께서는 구약 예언의 성취자로서 나타나셨다. 또 이 사실은 하늘로부터 보내신 성령을 힘입어 복음 전도자들이 사람들에게 선포하고 전파한 바이었다. 또 하늘의 천사들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한 바이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뜻을 받들어 섬기는 자들이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보기를 원했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8절부터 12절까지의 내용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이 믿고 사랑하며 기뻐했던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약의 선지자들을 통해 이미 예언되셨던 분이심을 증거한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하였던 그리스도 예수께서 오셨다. 예수께서는 성경에 예언된 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다. 천사들도 살펴 보기를 원했던 하나님의 구원 사역이 다 이루어졌다. 하나님의 택하신 많은 죄인들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을 보지 못했으나 믿고 사랑하며 그를 기뻐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자들 중에 속하였다.
본문은 우리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준다. 첫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확실히 믿었는가? 우리는 그를 믿고 구원을 받았는가? 둘째로, 우리는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교제하기를 좋아하고 그를 위해 봉사하기를 좋아하고 있는가? 셋째로, 우리는 특히 그를 얼마나 기뻐하고 있는가? 초대 교회 성도들과 같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그를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 모두 자신을 점검하고 주님을 믿고 주님을 사랑하고 기뻐하는 일에 분발하자!
13-25절, 거룩과 사랑을 권면함
[13] 그러므로 너희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를 온전히 바랄지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구원을 믿음으로 받았으므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야 한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라\'는 말은 나태하고 해이하거나 정신 없이 살지 말고 정신을 차리고 깨어 있는 태도를 가지라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올 은혜\'는, 4절에 말씀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을 잇게 하시나니 곧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며 5절에 말씀한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이루어질 우리의 몸의 부활과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을 가리킨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과 주께서 주실 이 영광스런 구원을 온전히 바라야 한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소망의 내용을 조금 바라거나 일시적으로만 바라지 말고 마음을 다하여 끝까지 바라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모든 소망을 거기에 두어야 한다. 그렇다. 성도의 소망은 그것뿐이다. 우리는 그것만을 바라는 자들이다. 히브리서 6:11, 12, \"우리가 간절히 원하는 것은 너희 각 사람이 동일한 부지런을 나타내어 끝까지 소망의 풍성함에 이르러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4-16] 너희가 순종하는 자식처럼 이전 알지 못할 때에 좇던 너희 사욕을 본 삼지 말고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 하셨느니라.
구원받은 우리는 이제 순종하는 자녀들처럼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전에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알지 못했던 때 좇던 육신적이고 세상적인 욕망을 본 삼지 말고 우리를 구원하신 거룩하신 하나님처럼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위의 모든 면에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구원받기 전에는 우리가 불순종적이고 불결한 삶을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순종하는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거룩은 세상의 더러운 죄악들로부터 구별되어 하나님께 드려진 상태를 말한다. 우리의 생각도 말도 행위도 다 거룩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라고 친히 말씀하셨다(레 11:45).
[17]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자를 너희가 아버지라 부른즉 너희의 나그네로 있을 때를 두려움으로 지내라.
우리가 사람들을 외모로 보시지 않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판단하시는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며 섬기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우리는 나그네와 같은 세상 생활에서 두려운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것이 아니다. 우리의 본향은 영광의 천국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와 같이 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불순종과 불결의 죄악들만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쌓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천국에 들어갈 수 있으며 어떻게 지옥의 판결을 피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의와 거룩과 선과 진실을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8, 19]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조상의 유전한 망령된 행실에서 구속된 것은 은이나 금같이 없어질 것으로 한 것이 아니요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한 것이니라.
\'너희가 알거니와\'라는 말은 복음 지식과 신앙은 모든 성도들에게 공통적이고 기본적임을 가리킨다. 속죄 신앙 없으면 구원받는 참 신앙이 없는 것이다. 복음의 기본적 지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구속(救贖)하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은 은과 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다. 그것은 1억원이나 100억원이나 1조원으로도 살 수 없는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양 같은 예수, 즉 참된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 분의 보배로운 피값으로만 가능하였다. 이렇게 귀한 은혜를 입은 우리들이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배은망덕한 자가 되지 말고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거룩한 삶을 살아야 한다.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창세 전부터 예정된 분이시다. \'미리 알리신 바 된\'이라는 원어는 \'예정된\'이라고 번역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말세에 우리를 위해 나타내신 바 되셨다. \'이 말세\'는 신약 시대를 가리킨다. 신약 시대는 인류 역사의 마지막 시대로 표현되었다. 구약 4천년의 역사가 지나고 이제 마지막 시대가 온 것이다. 이 마지막 시대는 예정된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참 사람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구속 사역을 이루신 시대이다.
[21]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셔서 부활의 영광을 주셨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믿게 되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또한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이며 하나님께 우리의 소망을 두는 것이다.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소망은 오직 하나님께 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땅에 있는 사람들이나 땅에 있는 것들에 두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 두어야 한다.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전통 사본에는 본절의 시작 부분이 \'너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순종함으로\'라고 되어 있다. \'진리\'는 복음을 가리킨다. 진리를 순종한다는 것은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을 말한다. 우리가 복음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된 일이다. 우리는 성령의 역사로 거듭나고 회개하고 복음을 믿게 된다. 그 결과, 우리의 죄악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피로 깨끗하게 되었고 그 깨끗해진 마음으로 거짓이 없이 형제들을 사랑하게 되었다. \'마음으로\'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깨끗한 마음으로\'라고 되어 있다. 성도들은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다운 삶이다. 예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한마디로 요약된 새 계명을 주셨다. 참 성도들은 이미 형제 사랑을 실천하고 있겠지만, 우리는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더 명심하자.
[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우리가 받은 구원은 이론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죽었던 영혼이 다시 살아나게 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고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영원히 있는 말씀으로 되었다. \'항상 있는\'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영원히 있는\'이라고 되어 있다. 중생의 새 생명은 죽지 않는 생명이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으로 된 생명이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실제로 거룩한 순종과 뜨거운 사랑으로 계속 나타나는 생명이다.
[24, 25]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우리가 전한 복음의 말씀은 바로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다. 이 말씀은 모든 육체와 그 모든 영광과 비교된다. 풀이 마르고 꽃이 떨어지듯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이 쇠하여지고 그 모든 영광은 오래지 않아 풀의 꽃과 같이 다 떨어질 것이다. 구약 전도서의 증거한 말씀대로,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다 헛되다. 풀같이 늙지 않고 죽지 않는 사람이 누구인가? 꽃과 같이 떨어지지 않을 사람의 영광이 무엇인가? 그러나 모든 육체와 그 모든 영광에 대조되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쇠하여지고 없어지지만,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은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이와 같이, 우리의 구원의 새 생명도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고 영원하다. 따라서 여기에 근거한 성도들의 거룩하고 사랑하는 삶은 결코 쇠하거나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5절까지의 내용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받을 은혜 곧 영광스런 부활과 천국과 영생을 확실하게, 충만하게 소망해야 한다. 이 소망은 우리가 조금 가지거나 일시적으로 가지는 소망이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이 소망을 온전히, 충만히, 끝까지 가져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순종하는 자녀들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을 본받아 모든 행실 즉 생각과 말과 행위에 있어서 거룩한 자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조상 때로부터 물려받은 망령된 행실을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깨끗이 씻음을 받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려운 마음으로 거룩한 삶을 힘써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진리를 순종함으로 우리의 영혼이 깨끗하게 되었으므로 깨끗한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복음 진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말씀이며 우리가 그 말씀으로 거듭남을 얻었으므로 우리는 사랑이 변하거나 식어지지 말고 뜨겁게 피차 사랑해야 한다.
2장: 성도의 특권과 의무
1-10절,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하라
[1] 그러므로 모든 악독과 모든 궤휼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리고.
\'모든 . . . 모든 . . . 모든 . . .\'이라는 표현은 \'온갖 종류의\'라는 뜻이다. \'악독\'은 악한 생각과 뜻을 가리킨다. \'궤휼\'은 거짓과 속임을 가리킨다. \'외식\'은 겉으로 선하게 보이나 속에는 악독한 것이요, \'시기\'는 다른 사람의 잘되는 것을 싫어하고 그를 괜히 깍아내리고 미워하는 것이다. \'비방\'은 다른 사람에 대해 정당하지 않게, 왜곡되게, 악하게 비난하거나 평론하는 것을 가리킨다. 본문은 성도들이 이런 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이것은 옛사람의 성질들이며 마귀적인 성질들이다. 구원받은 성도들도 이런 죄성들을 가지고 있고 언제든지 이런 악들에 떨어질 수 있다. 그러나 성도들은 마땅히 이런 악들을 다 버려야 한다.
[2] 갓난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려 함이라.
갓난아이들은 엄마의 젖을 사모한다. 아기들은 엄마의 젖맛을 알기 때문에 배가 고플 때 그 젖을 못빨면 마구 울어댄다. 아기들은 아프거나 몸이 안좋으면 젖을 잘 안먹으려 하겠지만 그렇지 않고 정상적이면 엄마의 젖을 사모할 것이다. 갓난아이들이 엄마의 젖을 사모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런 일이다. 아기들은 이렇게 엄마의 젖을 잘 먹을 때 건강하게 잘 자라게 된다.
이와 같이,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순전하고 신령한 젖\'이라는 말(토 로기콘 아돌론 갈라)은 \'거짓 없는, 순수한 말씀의 젖\'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젖에 비유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한 말씀\'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단 사설들, 인본주의적 생각들이나 말들, 사람의 귀를 즐겁게 하고 흥미만을 위주한 예화나 이야기들 등과 구별시킨 말이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말씀을 사모해야 한다. 성경의 바른 교훈을 늘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성도들이 이렇게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해야 할 이유는 자라기 위해서이다. \"이는 이로 말미암아 너희로 자라게 하려 함이라.\" 에베소서 4장에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씀했다(13-16절). 히브리서 5장에는 신앙 안에서 어린 아이와 장성한 자를 구별하였다(13, 14절). 우리는 주 안에서 자라야 한다. 그런데 신앙 성장의 정상적 방법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섭취하는 것이다. 디모데후서 3:15-17,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구원에 이르도록\'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들에는 없다. 이 말씀을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구원은 우리가 노력하고 행해서 이루는 것이 아니다. 구원에는 두 단계가 있다. 첫째로, 중생(重生)과 칭의(稱義)의 구원은 우리가 이미 받았다.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둘째로, 영화(榮化)의 구원은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시에 우리에게 이루어질 것이다. 베드로전서 1:5, \"너희가 말세에 나타내기로 예비하신 구원을 얻기 위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얻었나니.\" 로마서 8:24,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이다. 예수 믿고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다 장차 영화롭게 될 것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빌립보서 2:12에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씀은 이미 받은 구원, 장차 영화롭게 완성될 구원을 현실 가운데서 다 드러내라는 것이다. 즉 온전한 경건 생활과 도덕 생활을 하라, 의와 선과 진실을 다 행하라는 뜻인 것이다. 이것이 성화(聖化)이다. 법적으로 이미 얻은 의(義)를 실제로 우리의 인격과 삶에서 나타내는 것이 우리의 성화 과정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순수한 성경 말씀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거룩한 신앙 인격으로 점점 자라 가는 것이다.
[3]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주의 인자하심\'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혜를 가리킨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크신 긍휼과 은혜와 인자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의 인자하심을 통해 의롭다 하심을 받았을진대 우리는 실제적으로도 의로운 자, 죄 없는 자, 도덕적으로 온전한 자가 되기를 힘써야 마땅한 것이다.
[4]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 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하나님의 아들로, 의로운 자로 알아보지 못하였다. 불경건하고 악한 사람들은 자기 동류들이나 좋아한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버림을 당하신 예수님은 하나님께 택하심을 입으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아시고 인정하시고 사랑하시고 택하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보배이시다. 또한 그는 보배로운 산 돌이시다. \'산 돌\'이란 그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시고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시는 분이심을 뜻한다. 그는 지금도 살아 역사하시는 생명의 주님이시다.
[5] 너희도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
본문은 우리도 산 돌같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되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할 것을 말씀한다. \'신령한 집\'이라는 단수명사(오이코스 프뉴마티코스)는 성도들이 모여 한 교회를 이루는 것을 말한다. 교회를 돌들로 지은 건물에 비유한 것이다. \'신령한\' 집이라는 말은 교회가 단순히 물질적인 건물이나 육체들의 집합체가 아니고 성령께서 거하시는 집, 곧 성령의 전인 것을 나타낸다. 고린도전서 3:16,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
신약 시대의 교회는 성도들의 연합 속에 성령께서 거하시는 신령한 집이다. 에베소서 2:21, 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신약 교회는 영적인 집으로 건축되어 가고 있다. 이것은 온 세계의 모든 성도들을 포함하는 거대한 교회이다. 지금도 이 영적 교회의 건축 소리가 온 세계 곳곳에서 요란하게 들려지고 있다. 이 영적 건축, 즉 한 명의 영혼 구원을 통해 벽돌 한 장이 쌓여가는 이 건축은 물질적 예배당 건축보다 수천배 더 큰 의미가 있고 더 중요한 건축이다. 우리 모두는 비록 물질적으로는 부족하지만, 이 영적 건축, 곧 전도의 일을 크게 여기고 이 일에 힘써야 한다.
또 본문은 지어진 이 신령한 집에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한다. \'제사장\'이라는 원어(히에라튜마)는 \'제사장들의 집단\'을 가리킨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한 제사장들로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려야 한다. 그 신령한 제사란 우리의 의롭고 착하고 거룩한 삶,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우리는 모든 악독과 속임과 외식과 시기와 비방을 버리고 경건하고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므로써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려야 하는 것이다.
[6-8] 경에 기록하였으되, 보라 내가 택한 보배롭고 요긴한 모퉁이 돌을 시온에 두노니 저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치 아니하리라 하였으니 그러므로 믿는 너희에게는 보배이나 믿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건축자들의 버린 그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고 또한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 반석이 되었다 하니라. 저희가 말씀을 순종치 아니하므로 넘어지나니 이는 저희를 이렇게 정하신 것이라.
예수님은 믿는 자들에게는 보배이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그러나 그는 믿지 않는 자들에게는 \'버린 돌, 부딪히는 돌, 거치는 반석\'이 되신다. 많은 이들이 그 돌에 부딪혀 넘어졌다. 이와 같이 우리는 열심히 전하고 가르치고 권면하지만, 예수님을 믿는 자도 있고 믿지 않는 자도 있다. 하나님의 예정은 이중적이다. 그가 창세 전에 어떤 이들을 영생으로 선택하셨으나, 다른 이들은 그들의 죄 가운데 버려두셔서 영원한 형벌에 이르게 정하셨다. 죄 가운데서 멸망받을 자들도 하나님이 그렇게 정하신 것이다.
[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나 우리에게는 왠 은혜요 왠 사랑인지!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을 받은 것은 인생에게 가장 큰 복이다. 본문은 구원받은 성도들의 특권들을 몇 가지로 증거한다. 첫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우리들은 하나님의 선택을 입은 족속이 되었다. 선택받은 증거는 우리의 진실한 믿음과 회개와 순종이다.
둘째로, 성도들은 왕 같은 제사장들이다. \'왕 같은\'이라는 원어(바실레이오스)는 \'높은 특권을 가진\'이라는 뜻이다. 성도에게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 그를 섬기는 높은 특권이 있다. 히브리서 10:19,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셋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이다. 세상 나라는 부정과 불법으로 가득한 나라, 속이고 속으며 죽이고 죽는 나라, 음란하고 부도덕한 나라, 슬픔과 탄식과 고통이 가득한 나라, 죽음과 절망의 나라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의의 나라, 진리의 나라, 사랑의 나라, 평강의 나라, 기쁨의 나라, 영원한 생명의 나라이다. 성도들은 바로 이 하나님의 나라가 된 것이다.
넷째로, 성도들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 세상이 다 하나님의 소유이지만, 우리는 특별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었다. 하나님의 것의 가치는 돈으로 계산할 수 없을 정도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얼마나 가치 있게 여기셨던지 자기 독생자를 십자가에 내어주시기까지 하셨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귀한 보배들이 되었다. 또 하나님의 것은 아무도 그 손에서 빼앗을 수 없이 안전하게 보장되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귀한 특권을 동반한 구원을 주신 목적은 \'우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다. \'기이한 빛\'이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지식과 의와 생명을 가리킨다.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했던 우리가 살아계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죄악들 가운데 깊이 파묻혀 살았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보혈 공로로 값없이 완전한 의(義)를 얻게 되었고, 죽음과 영원한 멸망의 그늘진 세상에 살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 다시 죽지 않고 죽을 수도 없는 생명을 은혜로 얻게 된 것이다. 이 지식과 의와 생명은 참으로 놀랍고 놀라운 \'기이한 빛\'이다. 그러므로 이 놀라운 구원을 받은 우리는 하나님의 그 기이한 은혜와 사랑과 의와 지혜와 능력을 마땅히 찬송하며 증거하고 선전해야 할 것이다.
[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전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고 하나님의 긍휼도 얻지 못했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었고 하나님의 크신 긍휼을 얻은 자가 된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답게 거룩하고 의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증거하고 찬송하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는 우리에게 여러 가지 귀한 진리들과 교훈들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모든 악독과 모든 거짓과 외식과 시기와 모든 비방하는 말을 버려야 한다. 그것들은 다 옛사람에 속한 것들이며 마귀의 그리고 마귀와 함께 지옥에 던지울 죄인들의 성질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들을 다 버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갓난아니들같이 순수한 말씀의 젖을 사모해야 한다. 우리는 순수한 성경 말씀을 사모하여 열심히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해야 한다.
셋째로,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거룩한 신앙 인격에 있어서 자라가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어린 아이와 철부지의 상태에서 벗어나서 영적으로 장성한 자의 모습이 되어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산 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져야 한다. 교회는 영적인 건물이다. 그것은 구원받은 성도들로 이루어지는 신령한 집, 곧 하나님의 영, 성령께서 거하시는 전이다. 우리는 이 영적 성전 건축 곧 전도의 일을 외적 예배당 공사보다 더 크게 여기고 더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
다섯째로, 우리는 이 성전에서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들을 드릴 거룩한 제사장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경건하고 거룩한 헌신과 봉사의 삶을 가리킨다.
여섯째로, 우리는 성도의 특권을 깨닫고 감사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나라요 그의 특별한 소유가 되었다. 얼마나 놀라운 은혜인지!
일곱째로, 우리는 심히 무지하고 불경건하며 심히 죄악되고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었던 자들을 구원하신 하나님의 기이한 빛, 곧 참 지식과 의와 생명을 인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과 지혜와 능력을 찬송하고 증거하며 선전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목적이다.
11-12절, 육신적 욕망을 제어하라
[11]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 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이 세상에 사는 인간은 \'나그네와 행인\' 같은 존재이다. 왜냐하면 육신의 생명이 끝날 때 하나님 앞에서 선악 간에 판단을 받아 내세에서 천국 혹은 지옥에 들어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나그네 길이고 인간에게는 돌아갈 영원한 처소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인생은 내세를 준비할 것이다. 내세의 준비는 다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죄 가운데 정신 없이 살지 않고 죄를 회개하고 죄를 버리고 믿는 자답게, 성도답게 사는 것이다.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육신적 욕망들은 바로 죄악된 욕망들이다. 거기에서 음란과 방탕이 나온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성도들은 죄짓지 않고 바르게 살기를 힘써야 마땅하다.
[12]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은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 가운데서 선하게 살므로써 그들에게 바른 깨달음을 줄 수 있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그릇되이 비방하는 일이 많다. 심지어 하나님의 귀한 종 바울은 교인들을 교묘하게 궤계로 자기 사람을 삼는다는 비난을 받았었다(고후 12:16). 구약의 느헤미야도 예루살렘성을 건축하여 바사왕 아닥사스다를 모반하여 스스로 왕이 되려 한다는 비난을 받았었다(느 6:6). 그러나 그들은 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착한 종들이었다. 성도들이 악한 세상 속에서 선을 행하면 그것이 세상에 빛이 되어 하나님께서 세상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날 그들이 깨닫고 성도들에게 감동을 받고 하나님께 영광돌리는 자들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가르쳐주셨다(마 5:16).
13-17절, 인간의 제도에 순복하라
[13, 14]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혹은 위에 있는 왕이나 혹은 악행하는 자를 징벌하고 선행하는 자를 포장하기 위하여 그의 보낸 방백에게 하라.
이 세상에서 성도들의 선한 삶은 여러 면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종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우리가 왕과 그의 보낸 방백들 즉 관리들에게 순종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를 위하여\'라는 원어(디아 톤 퀴리온)는 \'주님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에게 하나님의 자녀라는 주의 이름이 있기 때문에 그리고 세속 사회의 질서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뜻 때문에라는 뜻이다. 우리는 주님의 이름과 주님의 뜻 때문에 인간의 제도들에 순종해야 한다.
로마서 13:1-7,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굴복하라. 권세는 하나님께로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의 정하신 바라. 그러므로 권세를 거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명을 거스림이니 거스리는 자들은 심판을 자취하리라. 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네가 권세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려느냐? 선을 행하라. 그리하면 그에게 칭찬을 받으리라. 그는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네게 선을 이루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위하여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너희가 공세를 바치는 것도 이를 인함이라. 저희가 하나님의 일군이 되어 바로 이 일에 항상 힘쓰느니라.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공세를 받을 자에게 공세를 바치고 국세 받을 자에게 국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15] 곧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라.
원문에는 \"왜냐하면 선행으로 어리석은 사람들의 무식한 말을 막으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은 무지하고 잘못된 말들로 성도들을 비난하기를 좋아하지만, 성도가 범사에 선하게 처신하므로 세상 사람들이 성도에게 아무런 바난할 말이 없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오직 선행에 힘써야 한다.
[16] 자유하나 그 자유로 악을 가리우는 데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하라.
성도는 죄와 율법에서 자유함을 얻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율법의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은 로마서 7장과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증거된 내용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귀한 자유를 악을 가리우는 일, 즉 악을 변명하고 정당화시키는 일에 쓰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종과 같이 해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도 동일한 내용의 말씀을 가르쳤다. 로마서 6:17, 18, 22,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 . .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5:13,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하라.\"
[17] 뭇사람을 공경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왕을 공경하라.
성도들의 선한 삶은 세상에서의 인간 관계에서 나타난다. \'뭇사람을 공경하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을 존중하라\'는 뜻이다. 우리가 모든 사람들을 존중해야 할 이유는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이기 때문이며, 또 주께서 피흘려 사신 자들이 누구인지 우리가 모르기 때문이다. 우리 눈에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자라 할지라도, 만일 주께서 그를 위해 피흘려 돌아가셨다면, 우리는 그를 얼마나 존중해야 하겠는가?
또 베드로는 형제들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왕을 공경하라고 교훈했다. 왕을 공경하라는 교훈은 사실상 10계명 중 제5계명 즉 \'부모를 공경하라\'는 계명에 포함되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명령 속에는 가정에서 부모님에 대한 공경 뿐만 아니라, 교회에서 장로들에 대한 존경, 이웃의 노인들에 대한 공경, 학교에서 선생들에 대한 존경, 직장에서 상사들에 대한 존경, 나라에서 대통령이나 관리들에 대한 존경 등을 포함한다. 이것이 다 하나님의 뜻이다.
18-25절, 종들은 주인에게 순복하라
[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사환들\'이라는 원어(오이케타이)는 \'집안의 종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구원받은 종들에게도 선한 삶을 교훈한다. 그것은 주인들에게 순복하라는 것이다. \'범사에 두려워함으로\'라는 원어는 \'모든 두려움으로, 온전히 두려워함으로\'라는 뜻이다. 종들은 주인들을 조금 두려워하지 말고 범사에 두려워하고 온전히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한다. 종들은 또한 선하고 관용하는 주인에게만 순종할 것이 아니고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19, 20]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베드로는 말하기를, 종이 어떤 잘못이 있어서 주인에게 매를 맞으면 칭찬받을 것이 없지만, 그가 선하게 행함에도 불구하고 애매히 고난을 받고 그 고난과 슬픔을 잘 참으면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운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을 생각함으로\'라는 말은 \'이렇게 주인에게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혹은 \'하나님께서 나의 고난과 슬픔을 다 보고 계시고 다 판단하고 계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종이 애매히 당하는 고난을 잘 참는 것은 미덕(美德)이다.
[21]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성도들은 이런 고난을 당하도록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해 이런 고난을 받으심으로 우리에게 본이 되셨고 우리로 하여금 그의 발자취를 따라오게 하셨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그것이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가야 할 길이다.
[22-24]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우리 구주 예수님은 죄가 없으셨고 그 입에 거짓이 없으셨으나 고난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는 욕을 받으시되 욕하지 않으셨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않으셨고 오직 공의의 심판자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셨다. 그는 마침내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다. 그는 우리를 위해 대속(代贖)의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살게 하셨다. 그가 채찍에 맞으심으로 우리는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죄의 병에서 나음을 입었다. 예수님은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삶의 본을 우리에게 보여주셨다.
[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전통사본에는 \"너희가 길 잃은 양들과 같았으나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에게 돌아왔느니라\"고 되어 있다. 우리는 과거에 길 잃은 양들이었다. 우리는 목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를 멀리 떠나 방황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왔다. 그것이 참된 회개이다. 이제 하나님은 우리의 목자와 감독이 되셨다. 우리는 그의 인도, 그의 간섭, 그의 보호, 그의 돌보심을 받게 되었다. 구원받은 성도의 삶은 오직 하나님 중심의 삶이며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11절부터 25절까지의 요점은 우리가 죄악된 육신적 욕망들을 제어하고 오직 선행을 힘쓰라는 것이다. 그것은 어두운 세상에 빛을 비추는 것이 될 것이다. 성도들의 선한 삶은, 구체적으로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순복하는 것, 모든 사람을 존중하는 것,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에게만 아니고 까다로운 자에게도 순종하는 것 등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선을 행하면서 고난을 받는 삶의 본이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따라 선을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도 받을 각오를 하면서 선행을 힘쓰는 신앙 생활을 해야 할 것이다.
3장: 선행에 힘쓰라
1-6절, 아내들에 대한 교훈
본문은 아내 된 자들에게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고 교훈한 말씀이다.
[1] 아내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라. 이는 혹 도(道)를 순종치 않는 자라도 말로 말미암지 않고 그 아내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려 함이니.
\'순복하라\'는 원어(휘포탓소)는 2장에서 사용된 말과 동일하다. 13절, \"인간에 세운 모든 제도를 주를 위하여 순복하되.\" 18절, \"사환들[종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순복하라\'는 말은 \'순종하라\'는 말이나 \'복종하라\'는 말과 뜻이 다르지 않다. 성경은 아내 된 자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순종하며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에베소서 5:22, 23,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친히 몸의 구주시니라.\" 골로새서 3:18, \"아내들아 남편[들]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그러므로 아내들의 마땅한 의무이다. 거기에는 어떤 이의(異意)가 있을 수 없다.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할 중요한 한 목적은 복음의 말씀을 순종치 않는 자, 즉 불신 남편이라도 아내의 말로가 아니고 그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기 위함이다. 그것은, 아내들의 말로 구원하기 힘든 남편들이 그의 행위로 감동을 받아 하나님께로 회개하고 돌아오게 된다는 뜻이다. 말로 안되면 행위로 보여주어야 한다. 같은 원리로, 우리는 이웃 사람들을 말로 구원하기 어려울 때 우리의 선한 행위로 그들을 구원할 수 있게 힘써야 할 것이다.
[2] 너희의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봄이라.
남편을 구원시킬 아내의 행위는 무슨 행위를 말하는가? 그것은 \'두려워하며 정결한 행위\'를 가리킨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두려워함과 남편을 두려워함을 다 포함하는 것 같다. 2:17,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2: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아내들은 자기 남편을 주인과 같이 생각하여 두려워함으로 순종해야 할 것이다. \'정결한\'이라는 원어(하그노스)는 \'순결한, 정숙한, 단정한, 흠 없는\' 등의 뜻이다. 모든 도덕 생활에서 순결하고 흠이 없을 뿐만 아니라, 특히 음란한 세상 속에서 성적으로 순결하고 단정한 것을 가리킨다.
[3] 너희 단장은 머리를 꾸미고 금을 차고 아름다운 옷을 입는 외모로 하지 말고.
본문은 여성도들이 외적인 단장에 치중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교훈한다. 예를 들어, 머리를 꾸미고 금은 보석의 목걸이, 귀걸이, 반지 등의 장신구를 차고 값비싼 아름다운 옷을 입는 것 같은 단장에 힘쓰지 말라는 것이다. \'머리를 꾸민다\'는 원어(엠플로케 트리콘)는 \'머리를 땋는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이런 단장이 죄악되므로 성도들이 이런 단장을 전혀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닌 줄 안다. 머리가 부시시 한 것보다 자주 감고 깨끗하게 단장하는 것은 필요할 것이다. 또 금은 보석이나 아름다운 옷이 다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서 누릴 수 있는 정당한 것들일 것이다.
이 말씀은, 성도의 단장이 외적인 것들에 치중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성도는 외적인 단장을 크게 여겨서는 안된다. 이런 것들의 가치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우리는 그것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천국과 구원을 받은 자들이다.
[4] 오직 마음에 숨은 사람을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의 썩지 아니할 것으로 하라. 이는 하나님 앞에 값진 것이니라.
여성도의 단장은 내면적이어야 한다. \'마음의 숨은 사람\'은 사람의 내면적 인격성을 가리킨다. 여성도의 내면적 인격은 온유하고 안정한 심령으로 단장되어야 한다. \'안정한\'이라는 원어(헤쉬키오스)는 \'조용한, 평온한\'이라는 뜻이다. 여성도들은 특히 온유하고 조용한 심령으로 자신을 단장해야 한다. 몸은 세월이 갈수록 쇠하여지지만, 이러한 고상한 인격성은 그 성질상 썩지 않고 없어지지 않는다. 이런 것이야말로 하나님 앞에서 값진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는 외적인 단장이 가치 있는 것이 아니고, 내면적 단장, 곧 고상한 인격성이 가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장차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가 받을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인 것이다.
[5, 6] 전에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부녀들도 이와 같이 자기 남편에게 순복함으로 자기를 단장하였나니 사라가 아브라함을 주라 칭하여 복종한 것같이 너희가 선을 행하고 아무 두려운 일에도 놀라지 아니함으로 그의 딸이 되었느니라.
베드로의 교훈은 새삼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성도의 이러한 덕은 예전부터 경건한 여성도들이 가졌던 덕이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변하는 인간 도덕과 풍습에 따라 살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었던 거룩한 여성들은 다 자기 남편에게 순복하였고 이러한 덕으로 자신들을 단장하였던 것이다. 그 대표적 예가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이었다. 그는 자기 남편 아브라함을 \'주인\'이라고 불렀다. 창세기 18:12,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 이것은 남편에 대한 그의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낸다. 오늘날도 만일 여성도들이 사라처럼 선을 행하고 놀라며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그들은 사라의 딸들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은 아내 된 자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다. 본문은 세 가지 가량의 내용을 강조한다. 첫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순복해야 한다. 자기 남편이 좋은 사람이든지 그렇지 못한 자든지 간에 그렇게 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과 명령이며, 아내로서의 마땅한 의무이다. 둘째로, 아내들은 자기 남편들에게 심지어 말 없이 선한 행위로 감동과 영향을 주어야 한다. 그래서 복음 진리를 믿지 않는 남편들일지라도 자기 아내들의 두려워하며 순결하고 단정한 행위를 보고 구원을 얻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셋째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내들 즉 여성도들은 머리를 꾸미거나 장신구를 걸치거나 아름다운 옷을 입는 등의 외적인 단장을 힘쓰지 말고, 온유하고 조용한 순종의 내면적 덕으로 단장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마땅하고 또 가치 있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사는 자들이고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고 소망하는 자들이기 때문에 이 세상적 가치관을 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부유한 자들이 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7절, 남편들에 대한 교훈
[7] 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
본문은 남편들에 대한 교훈이다. 첫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라고 말씀했다. 무슨 지식을 말하는가? 그것은 결혼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관한 지식을 가리키는 것 같다. 결혼은 남녀가 결합하여 한 몸과 한 인격을 이루는 것이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밀접한 관계의 시작이다. 결혼의 목적은 첫째로 남자가 외롭지 않도록 돕는 아내와 더불어 살게 하기 위함이다. 창세기 2:18,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 둘째는 자녀 출산을 위함이다. 창세기 1:27, 28,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셋째는 음행의 방지를 위함이다. 고린도전서 7:1, 2,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음행의 연고로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결혼의 의무는 사랑과 순종이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에베소서 5:25,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남편들은 아내들을 자신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로 알고 사랑해야 하며, 특히 교회를 사랑하사 자신의 몸을 주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무조건적으로, 희생적으로 사랑해야 한다. 아내들은 남편들의 따뜻한 한 마디의 말과 얼굴 표정과 행위에 편안함과 행복감을 느낀다.
성(性)에 대한 바른 지식도 필요하다. 인간의 성은 본래 부끄러운 것이 아니었고 더더욱 더럽게 여겨질 것도 아니었다. 성은 아름다운 것이다. 창세기 2:25,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그러나 성은 단지 부부 관계에서만 사용되어야 할 사랑의 도구이며, 그렇지 못한 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가져오는 음란의 죄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음란의 죄는 미워하고 배격해야 하지만, 부부 간의 아름다운 사랑은 권장해야 할 일이다. 성경은 부부 관계를 결코 더러운 일이나 부끄러운 일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건전한 부부 관계가 없을 때 음행의 죄에 떨어지기 쉽다고 교훈한다(고전 7:5). 성은 정상적 부부의 사랑에 중요한 한 요소이다.
둘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기라고 말씀했다. 창세기 2장에 증거된 대로,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이며, 남편의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마땅히 아끼고 사랑하고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는 본절에서 남편들이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할 이유로서 두 가지 사실을 더 언급했다. 첫째는 아내들이 더 연약한 그릇이라는 것이며, 둘째는 저들이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라는 것이다. 여성들은 대체로 남성들보다 몸이 연약하고 마음도 약하고 예민하다. 그렇지 않으면 전쟁에 남자들만 아니고 여자들도 참여할 것이다. 이런 연약한 아내들이 남편들과 자녀들을 위해 노동과 같이 힘든 집안 일을 하며 늙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그들을 울리지 말고 외롭게 하지 말고 그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거나 슬프게 하지 말고, 그들을 귀히 여기고 그들을 보호하고 그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해주어야 할 것이다.
또 아내들은 생명의 은혜, 즉 영생과 천국을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들이다. 아내들은 세상에서만 아는 관계가 아니고 천국에까지 같이 갈 반려자들인 것이다. 물론 천국에서는 부부로서의 짝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아내들은 천국에서도 함께 기쁨과 영광을 누릴 영원한 동료들이다. 그러므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시편 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셋째로, 본문은 남편들이 이렇게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하고 그들을 귀히 여길 때 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는다고 말씀했다. 부부 사이가 좋아야 기도도 잘 되지, 부부가 서로 다투고 나면 기도의 문이 막힌다. 왜냐하면 부부 사이가 좋지 않은 것도 죄가 되기 때문이다. 죄는 우리의 기도의 문을 가로막는다. 요한일서 3:21, 22,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의 도덕 생활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성도들은 가정에서부터, 결혼한 이들은 부부 사이에서부터 성경의 교훈대로 바르고 선하게 행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남편들에게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남편들은 지식을 따라 아내들과 동거해야 한다. 남편들은 결혼의 의미와 목적, 결혼한 이들의 의무, 그리고 성 등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아내들과 동거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남편들은 아내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그 이유는 아내들이 남편들의 갈빗대이기 때문일 뿐만 아니라, 또한 아내들은 더 연약한 그릇이며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이기 때문이다. 남편들은 연약한 아내들을 귀히 여기며 보호하며 또 영원한 천국에서도 함께 교제할 동료로서 그들을 귀히 여겨야 한다. 셋째로, 이렇게 할 때 남편들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이다. 사랑이 넘친 부부 관계는 신앙 생활에 유익하다. 그러나 부부가 서로 자주 다투면 신앙 생활에도 해가 된다.
8-12절, 선한 마음을 가지라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체휼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베드로는 인간적으로 생각할 때 마지막으로 몇 마디 더 교훈하고 그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계속 좀더 교훈하도록 감동하셨다. 베드로의 마지막 당부는 요약하면 \'다 마음을 같이하고 서로를 향해 선한 마음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첫째로,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호모프론)는 \'생각을 같이하여, 같은 생각을 하며\'라는 뜻이다. 교회의 일치와 단합은 생각의 일치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하겠으며.\"
바울도 교회 안의 생각의 일치를 강조하였다. 로마서 12:15, 16,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체 말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라는 원어(토 아우토 에이스 알렐루스 프로눈테스)도 \'서로 생각을 같이하며\'라는 뜻이다. 고린도전서 1:10,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 \'같은 마음으로\'라는 원어(엔 토 아우토 노이)도 \'같은 생각으로\'라는 뜻이다. 빌립보서 2:2,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마음을 같이하여\'라는 원어(토 아우토 프로네테)나 \'한 마음을 품어\'라는 원어(토 헨 프로눈테스)도 각각 \'생각을 같이하여,\' \'하나의 생각을 품어\'라는 뜻이다.
우리의 생각이 같아야 우리의 말도 우리의 행동도 같아질 수 있을 것이다. 분열은 생각의 다름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이 하나 되도록 힘써야 하겠다. 사심과 사욕을 버리고 상대방을 바르게 이해하며 모든 일에 있어서 생각을 같이하고 공명정대하게 일을 처리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둘째로, \'체휼하며\'라는 원어(쉼파테스)는 \'같은 감정을 가지며, 동정심(同情心)을 가지며\'라는 뜻이다. 사람은 지정의의 요소를 가진 존재인데, 생각이 첫째로 중요하지만, 또한 감정도 중요하다. 느낌이 같은 것이 좋다. 어떤 이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이는 그것을 싫어하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이루기 어려울 것이다. 성도들이 어떤 일에 대해 좋아하는 감정이나 싫어하는 감정이 같은 것이 교회의 일치와 단합을 위해 바람직하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생각을 같이하고 감정도 같이하려고 힘써야 하겠다.
셋째로, \'형제를 사랑하며\'라는 말씀은 성도의 기본적이고 가장 고상하고 포괄적인 덕이다. 예수께서는 \'서로 사랑하라\'고 친히 새 계명을 주셨다. 바울은 사랑의 성격을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고린도전서 13:4-7,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쉽게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주께서는 우리가 이런 사랑으로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신다.
넷째로, \'불쌍히 여기며\'라는 원어(유스플랑크노스)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며, 불쌍히 여기며\'라는 뜻이다. 상대방의 부족과 연약에 대해 멸시하고 배척하는 마음이 아니고 가능한 한 그를 이해하려 하고 불쌍히 여기는 부드러운 마음을 가리킨다. 사람은 어릴 때부터 그가 처한 환경과 받은 교육에 따라 인격이 형성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부족과 결함을 볼 때 이해심과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대하는 것이 필요하다.
바울도 이런 태도에 대해 많이 교훈하였다. 에베소서 4:31, 32,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골로새서 3:12-15,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옷입고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다섯째로, \'겸손하며\'라는 원어(타페이노프론)는 \'겸손한 생각을 하며\'라는 뜻이다. 전통사본의 본문(필로프론)은 \'친절한 생각을 가지며, 예절을 갖추며\'라는 뜻이다. 겸손한 생각과 친절한 생각, 그리고 예절 있는 태도는 서로 거리가 멀지 않다.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는다.\' 주께서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친절한 생각을 가지며 예절을 갖추기를 원하신다.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여섯째로,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는 교훈은 우리 주님 자신의 교훈이다. 마태복음 5:44의 전통사본에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 너희를 모욕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라고 되어 있다.
바울도 로마서 12장에서 같은 교훈을 하였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17-21절).
우리는 하나님의 참된 복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 그 복이란 죄사함과 구원의 복이며, 그 결과로 얻는 평안의 복이며, 또 최종적으로 누릴 영광스런 천국과 영생의 복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주신 이 구원의 복을 깨닫고 귀히 여기고 감사하며 또 서로에게 이 복을 빌어야 할 것이다. 이 복을 상실하는 것보다 더 큰 불행은 없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부족한 믿음의 형제라 하더라도 이 복에서 제외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진심으로 상대방을 위해 축복해야 할 것이다.
[10] 그러므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성도는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곧 천국의 날들 보기를 원한다. 인간 세상에 죽음은 죄 때문에 왔고 그것은 어둡고 슬픈 사실이며 고통스럽고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죄사함과 영생을 주셨고 천국의 복된 날들을 약속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모든 일들을 확증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이 구원의 은혜를 받고 이런 놀라운 약속의 세계를 바랄진대, 거기에 합당한 자들답게 이 세상도 살아야 할 것이다. 즉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고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악한 말\'이란 남에게 해를 주는 말, 즉 남의 마음에 상처를 주고 남의 명예에 손상을 주는 말을 가리킨다. 물론 불결하고 더럽고 음란한 말도 악한 말에 포함된다. 성도는 그런 악한 말을 그쳐야 마땅하다.
또 그 입술로 궤휼 즉 속임과 거짓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요한계시록 21:8에는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여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말씀했고, 또 요한계시록 22:15에는 \"개들과 술객들과 행음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마다 성밖에 있으리라\"고 말씀했다.
[11]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성도는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해야 한다. 선은 남에게 유익을 주는 것, 즉 마음에 평안과 기쁨, 격려와 위로를 주는 것이다. 또 성도는 서로 간의 화평을 구하며 화평을 추구해야 한다. 즉 성도는 악과 거짓을 버리고 선과 화평을 구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말에 있어서 뿐만 아니라 행실에 있어서도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5:22, 23,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14,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12]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주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 하였느니라.
주의 눈은 의인을 향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관심과 돌보심을 나타낸다. 그것은 그가 연약할 때 격려하시고, 낙심할 때 위로하시고, 위험할 때 지키시고 도우시며, 범죄할 때 근심하시고 책망하시는 그의 관심과 돌보심이다. 또 주의 귀는 의인의 간구에 기울이신다. 의인이 감사할 때나 회개할 때나 무엇을 간구할 때 하나님은 그의 기도와 간구를 잘 들어주신다. 그러나 주의 낯은 악을 행하는 자들을 향하신다. 그것은 그가 그들의 악한 행위들을 보시고 판단하시고 기억하시고 진노하시고 심판하시고 징벌하시는 것을 나타낸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경외하는 자들에게는 긍휼이 풍성하시지만, 악한 자들에 대해서는 엄위하시고 두려우시다.
결론적으로, 8절로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감정을 같이하도록 힘써야 하겠다. 이것이 교회의 참된 일치와 단합의 모습이 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하되, 특별히 부드러운 마음과 친절한 생각을 가져야 하겠다. 이것이 사랑의 참된 표현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 보복하지 말고 오히려 축복해야 하겠다. 이것이 본문이 주는 교훈들이며 이것이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는 이렇게 사랑으로 단합된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13-17절, 선을 행하며 고난을 받으라
[13]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이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너희가 선을 본받는 자들이라면\'이다. 예수 믿는 자들은 선을 본받는 자들, 곧 선하게 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선하게 살면, 양심이 있는 자들은 그런 우리를 잘 해치지 않을 것이다.
[14]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저희의 두려워함을 두려워 말며 소동치 말고.
그러나 우리가 선하게 살지라도 항상 평안한 것은 아니다. 사람은 악하기 때문에, 때때로 우리가 선하고 의롭게 살아도 우리를 핍박하고 해치려 하는 악한 자들이 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는다 할지라도 복 있는 자\'라고 말한다(원문 직역). 주께서도 마태복음 5:10에서 말씀하시기를,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고 하셨다. 성도가 의롭고 선하게 살다가 당하는 고난은 화가 아니고 복이다. 자신이 잘못해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당연히 받아야 할 것이지만,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하는 것은 복된 일이다.
베드로는 성도들이 의롭고 선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고난을 당할 때 처신해야 할 바를 몇 가지 교훈한다. 첫째, \'저희의 위협함을 두려워 말고 근심치 말라.\' \'저희의 두려워함\'이라는 원어는 \'저희의 위협함\'이라는 뜻이다. 또 \'소동치 말고\'라는 원어는 \'근심치 말고\'라는 뜻이다. 우리에게는 현세와 내세의 확실한 약속과 보장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핍박하는 자들의 위협을 두려워할 것도 없으며 근심하고 염려할 것도 없다.
[15]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둘째, \'너희 마음에 하나님을 주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원문은 전통사본에는 \'하나님을 주님으로 [혹은 주님을 하나님으로] 거룩하게 구별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과 주님께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이것은 성도의 행동의 이유가 된다. 하나님이 우리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혹은 주님을 우리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에, 우리는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셋째,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모든 자에게 대답할 바를 온유와 두려움으로 항상 예비하라.\' 우리 속에 있는 소망은 예수님의 재림과 천국과 영생이다. 이러한 소망에 관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으로 택하시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救贖)하시고 성령으로 인치셨기 때문이다. 성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 때문에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천국과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항상 대답할 바를 준비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의 구원을 다른 사람들에게 간증하기를 원하신다.
우리의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와 두려움으로 대답하라는 것은 우리의 우리 된 것이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며 연약성과 죄성을 가지고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잠시라도 교만한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우리도 언제든지 넘어질 수 있다. 우리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온유함과 두려운 마음을 가져야 한다.
[16]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넷째, \'선한 양심을 가지라.\' 사람은 마음에 가득한 것을 말과 행동으로 나타낸다. 마태복음 12:35,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우리가 사악과 거짓과 음탕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의 말과 행위는 악하고 거짓되고 음란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선과 진실과 거룩을 많이 생각하면 우리는 선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말과 행위를 나타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선한 양심을 가지고 살아가야 선한 삶을 살 수 있는 것이다.
베드로는, 너희가 선한 양심을 가짐으로써, 저들이 \'너희를 악을 행하는 자들이라고 비난할 때\'(전통사본)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선을 행함에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게 그릇된 비난을 받을 때가 있다. 그러나 성도가 선한 양심을 가지고 끝까지 선하게 말하고 선하게 행동하면 마침내 핍박자들은 부끄러움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성도가 악을 행한다고 비난했던 저들의 악한 비난이 마침내 거짓임이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고난 중에도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낫기 때문이다.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당연히 받을 고난이지만,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이다. 예수님은 이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과 기타 사도들도 이런 고난을 당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런 고난을 각오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7절까지의 내용은 요약하면, 첫째로 성도가 선과 의를 행하다가 고난과 핍박을 당하면 복 있는 자이며 그렇게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로, 성도가 이런 고난을 당할 때 대처할 방법에 대해 말씀한다.
첫째,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근심치 말아야 한다.
둘째, 오직 하나님을 주님으로 삼아야 한다.
셋째, 우리의 소망의 이유에 대한 대답을 항상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예비해야 한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 들어가 영생을 누릴 것이라는 소망의 이유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같은 죄인들을 사랑하셨고 구원하셨다는 사실을 기회 있는 대로 다른 이들에게 간증해야 한다.
넷째, 우리는 선한 양심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고난 중에서도 끝까지 선하게 처신해야 한다. 그것이 성도다운 행동이다. 마태복음 5:10-12,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바울도 동일한 교훈을 주었다. 로마서 12:19-21,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18-22절, 예수님의 죽음, 부활, 승천
[18] 그리스도께서도 한 번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으니.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증거한다. 예수께서는 우리를 위해 대속의 죽음을 죽으셨다. 그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한 번 죄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시고(전통사본)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다. \'한 번\'이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번에 완전한 속죄를 이루셨고 다시 반복될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히 10:10, 12, 14). 그의 고난과 죽음은 우리로 하나님과의 연합과 화목을 얻게 하려 하심이었다. 즉 그것은 우리의 구원을 위하심이었다.
죽임을 당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살리심을 받으셨다. \'육체로는 죽임을 당하시고 영으로는 살리심을 받으셨다.\' 본절과 다음절(19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본문에서 육체와 영을 인간 예수님의 육체와 영으로 보는 것은 정당하지 않은 것 같다. 영이 살리심을 받으려면 영도 죽임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지만, 본문은 단순히 육체와 영을 대조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육체는 예수님의 인성, 즉 인간으로서의 그의 영육을 가리키고, 영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을 가리킨다고 본다. 즉 예수께서 인간으로는 죽으셨으나 하나님의 영의 능력으로 삼일만에 부활하셨다는 뜻이라고 본다.
[19]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전파하시니라.
원문에는 \'저가 또한 영으로 옥에 있는 영들에게 가셔서 전파하셨느니라\'라고 되어 있다. \'옥에 있는 영들\'은 다음 절에 말씀한 대로 노아 시대에 홍수로 멸망 당한 자들의 영들이다.
본절은 성경에서 난해구절들 중 하나이다. 예수께서는 언제, 어디에서, 그리고 왜 저 영들에게 가셨고 또 무엇을 전파하셨는가? 여러 가지 해석들이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께서 죽으신 후 구약 성도들이 거하고 있던 \'림보\'(\'지옥의 변두리\'라는 뜻)에 내려가셔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시고 그들을 이끌어 천국에 들여보내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본문이 죽은 악인들의 구원의 가능성을 보이는 것으로 해석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러한 가능성은 누가복음 16장의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에서 분명히 부정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야기에서 예수께서는 아브라함의 입을 통해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고정된 큰 간격이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되 할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게 하였느니라\"라고 분명히 말씀하셨다(눅 16:26).
루터교회는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직전 혹은 직후에) 지옥의 영들에게 가셔서 승리의 영광을 선포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부활 전에 지옥에서 승리적 행진을 하신다는 것은 적당한 생각이 아닐 것이고, 부활 후에 가셨다면 영으로 가셨다는 것이 적당하지 않을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본절을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것이 지옥에 있는 영들에게 하나의 승리의 선포 사건이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바빙크, 크레다너스).
그러나 어거스틴을 비롯하여 기타 많은 정통적 성경학자들은 본절을 그리스도께서 지금 지옥에 있는 저 영들에게 노아 시대에 성령으로 가셔서 노아를 통해 복음을 전파하셨음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아마 이 마지막 해석이 가장 적절한 해석일 것이다.
[20]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오래 참으셨었다. 그는 사람들이 음란하고 강포하였음에도 불구하고 120년간 심판을 유보하셨다. 그 동안 노아는 하나님의 명령에 온전히 순종하여 방주를 지었다. 그러나 노아의 8식구들 외의 수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하여 불순종하였다. 하나님의 은총을 입어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었다. 오늘날도 그러한 줄 안다. 예수님은 넓은 문으로 들어가 넓은 길로 가다가 마침내 멸망할 자들은 그 수가 많으나,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로 가다가 영생에 이를 자들은 그 수가 적다고 말씀하셨다(마 7:13, 14). 구원받는 자들의 수는 심히 적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긍휼로 그 수에 들어 있기를 원하며 그 수에 든 것을 감사한다.
[21]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의 물은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를 구원하는 표가 되는 세례에 비교할 수 있다. 세례는 죄씻음을 통해 우리의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사는 것을 상징하고 확증한다. 물론 세례가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리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은 후에도 부족하고 연약할 때가 없지 않다. 그러므로 본문에는 세례가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주 예수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은 자들은 선한 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응답하고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자들인 것이다.
[22] 저는 하늘에 오르사 하나님 우편에 계시니 천사들과 권세들과 능력들이 저에게 순복하느니라.
본절은 예수님의 승천과 하나님 우편에 계심을 증거한다. 고난의 주께서는 부활하셔서 영광의 천국에 올리우셨고 하나님의 오른편에서 영광을 누리고 계신다. 모든 선한 천사들은 그에게 순복하고 있다. 그것은 주께서 누리시는 우주적 왕권, 영계와 물질계에 행사하시는 왕권을 나타낸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2절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려고 고난받으시고 죽으셨고 삼일만에 다시 사셔서 승천하시고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셔서 우주적 왕권을 행사하시는 살아계신 주님을 믿고 의지하자. 둘째로, 우리는 죄가 없으셨으나 우리의 죄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우리는 고난을 두려워 말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복음을 위해, 교회를 위해 고난받는 자들이 되자. 셋째로, 우리는 노아 시대나 소돔 고모라 시대보다 더 악하고 음란한 이 세상과 세상의 풍조를 배격하고 노아와 그의 식구들같이 오직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응답하며 순종하며 살아가자!
4장: 그리스도인다운 생활
1-6절,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삶
[1] 그리스도께서 이미 육체의 고난을 받으셨으니 너희도 같은 마음으로 갑옷을 삼으라. 이는 육체의 고난을 받은 자가 죄를 그쳤음이니.
본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육체로 대리적 고난, 곧 대속의 고난을 받으셨으므로(3:18) 우리도 같은 생각으로 무장하라고 교훈한다. 즉 우리도 선을 위해 고난받을 각오를 하라는 것이다. 3:17에서, 베드로 사도는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이미 말씀하였다. 그리스도께서는 고난을 받으심으로 죄와 상관 없는 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우리도 죄를 버리고 오직 의와 선을 위해 살아야 하는 것이다.
[2] 그 후로는 다시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대속의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는 사람의 정욕을 좇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육체의 남은 때를 살게 하려 하심이었다. 사람의 욕심은 죄를 만드는 원인자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는 사람의 욕심을 따라 살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한다.
에베소서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갈라디아서 5:16, 17,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로마서 12:1, 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너희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를 하여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
성도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야 할 이유는 이방인의 뜻을 좇아 죄악된 생활을 한 것이 지나간 때로 족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음란과 정욕과 술취함과 방탕과 연락과 무법한 우상숭배의 삶에 이끌리고 거기에 빠져 있다. 그러나 구원받은 우리는 지난 날의 죄악된 삶으로 족하다. 그 죄악된 삶도 부끄러운 것뿐이다. 구원받은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죄의 낙을 누리며 살지 말아야 한다. 더 이상 죄악된 삶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성경은 경고하기를,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라고 말씀했다(롬 8:13). 성도에게도 죄의 충동은 있으나 더 이상 죄에 빠져서는 안된다. 지나간 때가 족하다!!
[4]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
성도가 세상 친구들과 같이 극한 방탕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그들은 그를 이상히 여기며 비난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는 세상 친구들을 두려워할 것이 없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 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 . . 이 세상 친구 없어도 예수는 나의 친구니 불의한 일을 버리고 예수를 위해 삽시다\"(찬송가 359장). \"세월이 흘러 가는데 이 나그네 된 나는 괴로운 세월 가는 것 금할 길 아주 없네. 요단강가에 섰는데 내 친구 건너 가네 저 건너편에 빛난 곳 내 눈에 희미하다. . . . 큰 풍파 일어나는 것 세상 줄 끊음일세. 주께서 오라 하시면 내 고향 찾아가리\"(534장).
[5] 저희가 산 자와 죽은 자 심판하기를 예비하신 자에게 직고하리라.
예수님은 마지막 날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심판주이시다. 디모데후서 4:1, 2,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항상 힘쓰라.\" 의인과 악인은 마지막 날 다 부활하여(요 5:29; 행 24:15)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이다. 그 때 그들은 마지막 심판대 앞에서 심판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기들의 죄들을 다 직접적으로 고백하게 될 것이다.
[6] 이를 위하여 죽은 자들에게도 복음이 전파되었으니 이는 육체로는 사람처럼 심판을 받으나 영으로는 하나님처럼 살게 하려 함이니라.
사람은 육신의 죽음으로 존재가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장차 죽은 자들이 다 부활하여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된다. 그러므로 현재 죽은 자들에게도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복음이 전파되었다. 비록 그들이 죽었지만 그들 중 어떤 이들은 그 영이 영생의 생명이므로 살아 있다. 그것은 육체로는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 심판을 받아 죽었지만, 영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영원한 생명을 얻게, 즉 구원받게 하려 함이다. \'사람처럼\'이라는 원어(카타 안드로푸스)는 \'사람들을 따라\'라는 말로서 \'사람들이 받는 것처럼\'이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하나님처럼\'이라는 원어(카타 데온)는 \'하나님을 따라\'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내용은 몇 가지의 내용을 교훈한다. 첫째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본받아 선을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해야 한다.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3:17).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남은 날들을 사람의 정욕을 좇아 살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야 한다. 성도의 삶의 목표는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사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의 죄악된 삶이 지나간 때로 족한 줄 알아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아야 한다. 성도는 더 이상 죄악된 삶에 기웃거리지도 말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기억해야 한다. 마지막 날 모든 사람들은, 산 자와 죽은 자, 의인과 악인을 막론하고 다 심판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자신의 죄를 직접 고백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장차 임할 그 날을 두려워하며 오늘 하나님 앞에서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가야 하겠다.
7-11절, 근신, 사랑, 대접, 봉사
[7]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하라.
이 세상의 만물은 시작과 끝이 있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신 때가 시작이요 하나님께서 그것을 심판하시는 때가 끝이다. 예수께서는 \'추수 때\' 곧 세상 끝에 대하여 말씀하셨다(마 13:30, 39).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세상의 마지막 심판의 날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다. 하나님께서 천지 만물과 인류를 창조하신지 4천년이 지난 신약시대의 초에 사도들은 그 때 벌써 세상 종말이 왔다고 말하였다. 고린도전서 10:11,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히브리서 9:26, \"그리하면 그가 세상을 창조할 때부터 자주 고난을 받았어야 할 것이로되 이제 자기를 단번에 제사로 드려 죄를 없게 하시려고 세상 끝에 나타나셨느니라.\" 신약시대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할 시대이다.
이 세상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왔기 때문에 성도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올바른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본문은 그러한 삶을 서너 가지로 증거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신하지 못하는 삶이란 세상의 일과 쾌락에 빠져 있는 삶이다. 만일 직장이나 사업의 일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는 삶이라면, 만일 육신적 취미와 쾌락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시간이 없는 삶이라면, 그것은 분명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근신하지 못하는 삶이다. 술취하고 방탕한 삶도 그러하다.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저버리고 사는 삶이야말로 가장 어리석은 삶이다. 우리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에베소서 5:16, 17,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특히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며 기도하기를 힘써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섬기는 경건한 삶이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을 기억하는 일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은혜의 일들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다. 또 우리는 기도할 때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깨닫고 그것을 기억하게 된다. 또 우리는 기도할 때 우리의 부족과 잘못을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행할 힘을 간구하여 얻게 된다. 다시 말해, 이 세상 만물의 종말이 가깝기 때문에,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함으로써 인간의 올바른 길, 특히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8]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둘째로, 우리는 이 세상 만물의 종말이 가까움을 생각하면서 인간 관계에 있어서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1: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피차 사랑하라.\" 이것은 주께서 친히 주신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순종하는 일이다. 사랑은 모든 율법의 완성이다(롬 13:10).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잠언 10:12, \"미움은 다툼을 일으켜도 사랑은 모든 허물을 가리우느니라.\" 주께서도 새 계명을 주시기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심으로써 서로 용서해야 할 것을 친히 본으로 보여 주셨다. 바울 사도도 참된 사랑은 모든 것을 참고 견딘다고 증거하였다(고전 13:7).
[9] 서로 대접하기를 원망 없이 하고.
셋째로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우리는 서로 원망 없이 대접해야 한다. 대접한다는 말은 서로를 향해 마음으로나 말로 너그럽게 대하는 것을 말하며 상대방이 아프거나 어려운 일을 당했을 때 시간으로나 물질로 돕는 것을 말할 것이다. 성도가 서로 대접하는 것은 받을 것을 예상하고 베푸는 것이 아니고 그냥 베푸는 것이다. 그렇게 대접하는 자는 계산적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방이 자신을 위하지 않을 때라도 속상해 하지 않고 원망하거나 불평하지도 않을 것이다.
[10]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하라.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재능과 건강과 재물을 주셨다. 우리가 처한 가정 환경이나 사회 환경도 하나님이 주신 은혜이다. 이 모든 것들은 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우리의 것인양 우리 마음대로 쓰지 말고, 하나님의 것들을 맡은 선한 청지기로서 하나님의 영광과 서로의 유익, 곧 교회 전체의 유익을 위해 사용해야 하는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유익을 위해 그것들을 필요로 할 때 기꺼이 드리는 심정으로 서로 봉사해야 하는 것이다.
[11]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같이 하라. 이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니 그에게 영광과 권능이 세세에 무궁토록 있느니라. 아멘.
말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주신 말씀을 가지고 말하는 것처럼 하고 봉사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주시는 힘으로 봉사하는 것같이 해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범사에 영광을 받으셔야 하는 것이다. 영광과 권능은 우리에게 있지 않고 오직 영원히 하나님께만 있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1절까지에서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이 세상의 종말이 가까움을 느끼면서 힘써야 할 삶에 대해 몇 가지로 교훈하였다. 첫째로, 우리는 정신을 차리고 근신하여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세상 일과 육신의 쾌락에 너무 빠지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세월을 아껴야 한다. 우리는 기도하는 경건한 생활을 힘쓰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그것을 힘써 행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열심으로 서로 사랑해야 한다. 우리는 거룩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뜨겁게 열심으로 사랑하며 살아야 한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는다. 우리는 서로의 부족과 연약을 용서함으로써 사랑이 식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셋째로 그리고 사랑의 구체적 표현으로, 우리는 원망 없이 서로 대접해야 한다. 받을 것을 생각하지 말고 그냥 베풀어야 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말로, 시간으로, 물질로 서로를 향해 너그럽게 대하기를 힘써야 한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각양 은혜를 받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가진 재능과 지식, 건강과 시간, 물질을 가지고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들을 섬겨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만 영광이 돌려져야 한다.
12-19절, 성도의 고난
[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성도들에게는 시련하는 고난들이 있다. 그것들은 마치 금광석을 제련하는 용광로의 불과 같은 고통스런 시련들이다. 용광로에 넣어진 금광석에서 불순물들이 제거되고 마침내 순금이 나오듯이, 성도들이 당하는 불시험들은 성도들의 죄악성과 죄악된 습관들, 그리고 불성실하고 게으른 연약성을 다 제거하고 마침내 좋은 인격, 즉 경건하고 거룩하며 충성되고 의롭고 선하고 온유 겸손하고 진실한 인격이 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이런 불시험들을 당할 때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한다. 성도들이 고난을 당하는 것은 정상적인 일이다. 시편 34:19,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 여호와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지시는도다.\" 요한복음 16:33,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사도행전 14:22,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거하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성도들에게 닥친 고난들이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이든지, 아니면 순수한 시련의 고난들이든지 간에,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들은 이상한 일이 아니고 정상적인 일이다.
[13]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성도들의 고난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라고 표현되었다. 그리스도의 대속의 고난은 2천년 전 십자가 위에서 이미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받는 고난들은 성도들에게 남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무 죄가 없으셨고 의로우셨으나 우리의 죄 때문에 고난을 당하셨다. 이와 같이 성도들도 의롭고 선하게 살지라도 이것과 비슷한 고난을 당한다. 골로새서 1: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마태복음 5:11,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물론 성도의 고난은 우리의 죄성을 제압하는데 도움이 된다.
그러므로 성도들이 의의 고난을 당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을 생각하며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인 줄 알고 즐거워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 즉 그가 영광 중에 재림하실 때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은 지나가고 있다. 기쁨도 슬픔도 지나간다. 그러나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그 날에는 영원한 기쁨과 영원한 슬픔이 나뉘게 될 것이다.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 참된 기쁨과 즐거움을 소유한 자들이다. 성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날에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실의 고난을 기쁨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14]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우리는 복이 있는 자들이다. 베드로는 그 이유로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고 말한다. 또 전통사본에는 그 다음에 \'그는 그들에게 비난을 받으셨으나 너희에게는 영광을 받으셨느니라\'는 말씀이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영 곧 성령께서 그들 위에 계심으로 하나님의 특별한 소유임이 확인된 자들이다. 세상 사람들은 성도들을 핍박하고 욕할 때 그들 위에 계신 성령에 대해서도 비난하고 욕한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하나님과 성령님을 믿고 의지하고 섬기며 그에게 영광돌렸다. 성도들은 확실히 하나님의 사랑받는 백성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성도들처럼 복된 자들이 누구인가? 영원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의 대상이 된 자들처럼 복된 자들이 누구인가?
[15,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적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성도들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난을 당해서는 안될 것이다. 성도들은 살인하거나 도적질하거나 악을 행하거나 남의 일의 참견자가 되어서 고난을 받아서는 안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당할 때는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그 이름으로\'라는 말은 전통사본에는 \'이 점에서\'(엔 토 메레이 투토)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다고 하는 점에서 혹은 그 점 때문에\'라는 뜻이다.
[17, 18] 하나님 집에서 심판을 시작할 때가 되었나니 만일 우리에게 먼저 하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며 또 의인이 겨우 구원을 얻으면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죄인이 어디 서리요?
베드로는 하나님의 집 곧 교회 안에서 심판이 시작될 때가 되었다고 말하는데, 그것은 성도들의 고난을 가리킨 것 같다. 물론, 그것은 성도들의 고난이 하나님의 진노의 심판이나 정죄의 심판이라는 뜻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들에게는 분명히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의 심판이 없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혹은 형식적인 교회 속에는 참된 성도가 아닌 자들도 섞여 있어서 그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인지 모르겠다. 여하튼 참 성도에게는 단지 하나님의 징계나 단련이 있을 뿐이다. 그 징계나 단련은 성도 속에 남아 있는 죄성과 악한 습관과 연약성을 조금씩 제거시킨다. 히브리서 12:8,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나 성도들에게 먼저 이와 같은 엄한 징계와 단련의 심판이 있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임할 마지막 날의 심판은 얼마나 더 엄중하겠는가? 성도들은 현재 하나님의 엄한 징계와 훈련의 고난을 체험하며 살므로써 오히려 미래에 하나님의 진노와 정죄로부터 자유를 얻지만, 악인들은 현재 평안할지라도 장차 영원한 형벌의 멸망을 얻을 것이니 얼마나 두려운 일인지 모르겠다! 또한 의인들이 어렵게, 겨우 구원을 얻는다면, 경건치 않은 자들과 죄인들은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겠는가? \'겨우\'라는 원어(몰리스)는 \'어렵게 혹은 겨우\'라는 뜻인데, 의인들이 고난과 훈련을 받으면서 구원에 이른다는 의미에서 표현된 말이다.
[19]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 자들은 또한 선을 행하는 가운데 그 영혼을 미쁘신 조물주께 부탁할지어다.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이라는 표현은 앞절들에서 언급한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12절),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13절),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 것\'(14절),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는 것\'(16절) 등과 같이 성도의 고난을 표현하는 말이다. 성도의 고난은 아무리 불 같은 시험일지라도 성도를 단련시키는 것이며 하나님의 뜻대로 받는 고난이다. 3:17,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고난 중에서 성도가 취해야 할 또 하나의 태도는, 끝까지 선을 행하는 자로서 처신하면서 자신의 영혼을 신실하신 조물주께 부탁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약속에 신실하시고 전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므로 우리를 결코 버리지 않으실 것이다. 예수께서도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전에 큰 소리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라고 하셨다(누가복음 23:46).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9절까지의 말씀에서 우리는 몇 가지 진리와 교훈을 정리해 본다.
첫째로, 성도들에게는 고난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그들을 시련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는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뜻대로 고난을 받는다. 선을 행하면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우리는 성도들에게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런 고난의 현실을 당할 때 이상히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성도들의 고난은 남아 있는 죄악된 성질과 습관, 및 연약성을 제거하여 좋은 인격을 만드는 시련의 의미가 있다. 또 그것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는 의미가 있다. 특히, 성도들이 믿음 때문에 당하거나 의롭고 선하게 살면서 당하는 고난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다.
셋째로, 성도들은 고난을 당할 때 우선 그 고난을 즐거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성도들은 고난을 통해 순금과 같이 단련을 받기 때문이다. 또한 성도들은 고난을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또한 고난받는 성도들은 끝까지 선하게 살면서 자기 영혼을 신실하신 창조주 하나님께 의탁해야 한다.
5장: 장로들에게 주는 교훈
1-4절, 장로들에 대한 권면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예할 자로라.
본절에서 \'너희\'와 \'장로들\'은 구별된다. \'너희\'는 일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장로들\'은 그들 가운데서 감독자로 세움받은 자들을 가리킨다. 베드로는 자신을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라고 증거한다. 부활하신 주께서는 베드로에게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셨었다(요 21:15, 16, 17). 또 사도들은 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었다. 또 그들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의 증인이기도 하였고(행 1:21, 22; 2:32; 3:15; 5:30-32 등) 또 그리스도의 재림 시에 영광의 부활에 참여할 자들이었다. 진실한 모든 성도들이 다 그 영광에 참여할 자들이다.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좇아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를 위하여 하지 말고 오직 즐거운 뜻으로 하며.
장로의 본분은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일이다. 그 양 무리는 하나님의 양 무리이다. 그러므로 장로들은 두렵고 떨림으로 성실하게 그 직무를 다해야 한다. 양 무리를 치는 목양(牧羊)의 일은 교회의 성도들의 영적 상태를 돌아보는 일이다. 목양 혹은 목회는 담임목사에게만 맡겨진 일이 아니고 장로들에게도 맡겨진 일이다. 그것이 장로의 직분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감독 혹은 장로라고 부르는 직분에는 교회 헌법이 표현한 대로 두 반이 있다. 하나는 설교와 치리의 일을 겸하여 가진 목사요 다른 하나는 치리의 일만을 행하는 장로이다. 디모데전서 5:17, \"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그러므로 본절의 교훈은 목사와 장로 모두에게 주신 교훈이다.
본절은 장로들이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칠 때 가져야 할 마음가짐을 세 가지로 교훈하였다. 첫째는 부득이함으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라고 하였다. \'부득이함으로\'라는 원어(아낭카스토스)는 \'억지로, 의무감 때문에\'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무슨 선한 일이라도 억지로, 마지못해서, 의무감 때문에 하는 것을 기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선한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인 이 목양의 일을 억지로 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신다. 장로들은 이 직무를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수행해야 한다.
둘째는 더러운 이익을 위하여 하지 말고 즐거운 뜻으로 하라고 하였다. 목사나 장로들은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이익을 구해서는 안된다. 봉사는 항상 순수하고 깨끗해야 한다. 그러므로 목사와 장로들은 가능하면 교회 재정에 직접 관계하지 말고 또 만일 재정에 관계할 때는 돈 계산에 있어서 정확하고 깨끗해야 한다. \'즐거운 뜻으로\'라는 원어(프로뒤모스)는 \'준비된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장로의 직분을 바르게 수행하기 위해서는 순수한 동기와 준비된 마음이 필요하다.
[3] 맡기운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
셋째는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사람이 교인들의 대표자가 되고 인도하는 직분을 가질 때 다른 이들에 대해 높은 마음을 가지고 권위 의식을 가지고 대하기 쉽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에서는 용납될 수 없는 악덕이다. 예수께서는 이런 점에 대해 벌써 교훈하여두셨다. 마태복음 20:25-27, \"예수께서 제자들을 불러다가 가라사대 이방인의 집권자들이 저희를 임의로 주관하고 그 대인(大人)들이 저희에게 권세를 부리는 줄을 너희가 알거니와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아니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 장로들은 일반 교인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가지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한다.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으리라.
목자장은 예수님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것이다. 그의 재림의 날에 그는 충성된 종들에게 영광의 상급을 주실 것이다. 하나님은 상 주시는 분이시다(히 11:6). 주께서 마지막 날 복음의 일꾼들, 교회의 장로들에게 주실 영광은 시들지 않는 영광이다. 그러므로 현재 목사와 장로들은 주께서 주신 직분을 수행하는 일에 있어서 힘들고 어려운 점들이 많을지라도 낙심치 말고 하나님만 바라며 또 우리는 부족 투성이이지만 감히 그의 상 주심을 기대하며 충성할 수 있고 또 그렇게 충성해야 할 것이다.
5-6절,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베드로는 장로들에 대한 권면과 더불어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을 하였다. 젊은이들에 대한 권면은 일반 교인들에게도 적절한 교훈이다. 베드로는 젊은이들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하였다. 첫째는 장로들에게 순복하라고 하였다. 이것은 모든 성도들이 받아야 할 교훈이다. 히브리서 13:17,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저희는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기가 회계할 자인 것같이 하느니라. 저희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특히 젊은이들은 대체로 아직 인생의 고난들을 많이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교만하기 쉬운 때에 있다. 고난의 환경은 대체로 사람을 겸손하게 만드는 양약(良藥)이다. 그러므로 젊은이들은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둘째는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하였다. 전통사본에는 \'다 서로에게 순복하라\'고 되어 있다. 바울 사도도 에베소서 5:21에서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고 교훈하였다. 또 빌립보서 2:3에서는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교회의 구성원이 된 우리 모두는 서로를 존중하면서 서로에게 복종하는 마음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며 그러할 때 교회는 하나님의 의도하신 대로 일치단합된 아름다운 모습을 나타낼 것이다.
셋째는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하였다. \'허리를 동이라\'는 원어(엥콤보오마이)는 \'(허리를 동이는) 옷을 입는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신다. 잠언의 말씀대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이다. 겸손한 자는 자신이 부족한 사람인 것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을 깨닫는 자이다. 이렇게 겸손한 마음을 가질 때 장로들에게 순복할 수 있고 또 서로에게 순복할 수 있을 것이다.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하나님은 전능하신 주권자이시다. 그가 세우면 세워질 것이고 그가 파하면 파해질 것이다. 그가 높이면 높아질 것이고 그가 낮추면 낮아질 수밖에 없다. 시편 75:6, 7, \"대저 높이는 일이 동에서나 서에서 말미암지 아니하며 남에서도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재판장이신 하나님이 이를 낮추시고 저를 높이시느니라.\"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해야 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정하신 때에 그의 능력의 손으로 우리를 높이 들어 쓰실 것이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 높아지려는 자들을 결코 쓰지 않으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6절까지의 교훈은 분명하다. 첫째로, 장로들에게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부득이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고 자원함으로 하고, 더러운 이익을 위해 하지 말고 즐거운 마음과 준비된 마음으로 하고, 맡겨진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로 하지 말고 오직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교훈하였다. 목사들과 장로들은 이 교훈을 명심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젊은이들에게 장로들에게 순복하고 서로에게 순복하고 겸손으로 옷을 입으라고 교훈하였다. 이것은 젊은이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고 우리 모든 교인들에게 필요하다. 겸손한 순종의 마음가짐은 우리 모두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이것은 우리 자신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교회 전체를 위해 필요하고 유익한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께서는 교회가 사랑 가운데서 일치단합된 모습을 가지기를 원하신다.
7-14절, 마귀를 대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사람이 세상을 사는데 염려거리가 아주 없을 수는 없을 것이다. 성도들도 예외는 아니다. 인생에게는 심리적, 정신적, 육체적, 물질적 염려거리가 항상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주님이 되시며 친히 우리를 돌보신다. 하나님은 우리의 생사화복의 주관자이시다. 그는 자기 백성을 결코 버려두지 않으시며 날마다 돌보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자들은 모든 염려를 다 그에게 맡겨버려야 한다.
[8, 9]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
본절은 마귀 혹은 사탄의 존재를 증거한다. 마귀는 실제로 존재하는 영이다. 마귀의 성격은 대적하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고 교회를 대적하고 성도들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대적한다. 그는 우리로 하여금 불신앙에 떨어지고 낙심하고 좌절하며 서로 미워하게 만들기를 원한다.
마귀는 악하다. 그는 우는 사자같이 성도들을 삼키고 죽이며 멸망시키려고 한다. 그는 성도들에게 고난을 줌으로써 그들을 넘어뜨리려고 한다. 어떤 때는 질병으로, 또 어떤 때는 가난으로, 또 다른 때는 가정적, 사회적 환난으로 성도들을 시험한다. 마귀는 매우 활동적이다. 그는 온 세상을 두루 다니며 공격할 대상을 찾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아야 한다. 마귀에게 틈을 주는 것은 예를 들면 우리가 게으르거나 욕심을 품거나 세상이나 돈을 사랑하는 것이다. 성도들은 마귀에게 틈을 주지 말고 근신하고 깨어서 믿음을 굳게 하고 도리어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야고보서 4:7, 8,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순복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하나님을 가까이 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우리가 믿음을 굳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려면, 성경 읽기와 기도로 깨어 있어야 한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은 마귀를 물리치는 검이다. 예수께서도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을 때 기록된 성경 말씀을 인용하심으로써 물리치셨다(마 4:4, 7, 10).
[10, 11]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 권력이 세세무궁토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성도들은 세상에서 마귀의 시험과 고난을 당하지만,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있다. 하나님은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은혜가 풍성하시고 충만하신 하나님이시다. 그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부르셨고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이다. 그것이 바로 영광스런 천국이며 거기에서의 영생 복락이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영원한 천국에 비교해 볼 때, 성도들이 현실에서 당하는 고난은 \'잠간 고난\'에 불과하다. 그것은 아무리 길어도 100년을 넘지 못한다. 그러나 천국과 영생은 영원하고 영광스럽다. 그래서 바울도 고린도후서 4장에서 증거하기를,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겉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6-18).
하나님께서는 창세 전에 계획하시고 뜻하신 바를 남김 없이, 실패함 없이 다 이루신다. 하나님의 계획의 중심에는 우리의 구원이 있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상에 보내셨고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죄를 대속하게 하셨다. 그는 이 일을 위해 성령을 보내셔서 활동하게 하셨다. 이렇게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 분명하다. 과연 그러하다. 우리의 구원은, 확실하고 든든한 보장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그 부르심 앞에서 성실하자.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노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실루아노는 또한 바울의 협력전도자이었던 실라를 가리키는 것 같다(행 15:22; 고후 1:19; 살전 1:1; 살후 1:1). 원문에는 \'너희에게\'라는 말이 \'신실한\'에 걸려 있다. 실루아노는 베드로전서가 보내졌던 본도, 갈라디아, 갑바도기아, 아시아, 비두니아 등의 성도들에게(벧전 1:1) 신실한 형제로 인정받고 있었고 베드로도 그렇게 알고 있었다. 또 그는 지금 베드로를 위해 이 서신을 대필(代筆)하고 있다. 그렇다면, 실루아노는 바울의 협력자이었던 동시에 또한 베드로의 협력자가 되었다. 그는 바울이 전한 복음과 베드로가 전한 복음이 동일한 복음이라는 것을 잘 증거하는 인물이 된 셈이다.
베드로는 또한 자신이 증거하고 권면한 내용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거하였다. 또 전통사본에는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는 구절이 \'너희에 그 안에 굳게 선\'이라는 말로서 하나님의 참된 은혜를 수식하고 있다. 즉 베드로는 자신이 편지를 보내고 있는 성도들이 이미 하나님의 은혜 안에 굳게 서 있음을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확신 가운데서도 그는 또 그 은혜의 말씀으로 그들을 권면하고 격려한 것이다. 우리는 이미 아는 하나님의 말씀들도 또 듣고 또 음미하고 기억할 필요가 있다.
[13, 14] 함께 택하심을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피차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바벨론에 있는 교회\'는 아마 로마의 교회를 가리킬 것이다. 영적으로, 로마는 세상과 인본주의의 상징인 바벨론이었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세력이 되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 있었고 그들이 모여 하나님의 교회를 형성하고 있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또한 마가에 대한 언급도 앞절에서 실로아노에 대한 언급과 같이 초대교회의 동일한 신앙과 사랑의 교제를 나타내는 것 같다. 마가는 바울에게도 협력자이었다. 그러나 그는 또한 베드로에게도 그러하였고 본절에서 \'나의 아들\'이라고 불리웠다. 진정한 기독교는 일치된 진리와 신앙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이 진리와 이 신앙을 확인하고 확신하고 이 진리와 신앙 안에서 일치된 기독교를 확증하고 혹은 회복시키고 그것을 널리 전파하고 후대에 전수시키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7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가지의 교훈과 진리를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모든 염려를 그에게 맡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주인이시다.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이는 그 분이시고 우리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모든 짐을 그에게, 오직 그에게만 맡겨야 한다. 우리는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오직 염려 대신 감사의 기도를 그에게 올려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근신하고 깨어 우리를 넘어뜨리려는 마귀를 대적해야 한다. 마귀는 우리의 대적자이며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고 있다. 우리는 믿음을 굳게 하여 그를 대적해야 한다. 오직 말씀과 기도로 마귀를 대적하자.
셋째로, 우리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확신하자. 하나님은 우리의 구원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것을 작정하셨다. 그 일은 실패하지 않고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는 고난의 현실 속에서도 우리를 지키시고 우리를 온전케 하시고 굳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터를 견고케 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담대히 하나님을 의지하며 오직 그 앞에서 성실하게 살아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