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 전서
(심판전 공중재림의 관점에서)
데살로니가전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많이 증거하고 있는 성경이다. 본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소망(1장), 그의 재림 때의 영광(2장), 그의 재림을 위한 준비(3장), 그의 재림의 위로(4장), 그의 재림의 돌연성(5장) 등이 증거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후서(대 심판후 지상재림의 관점에서 )
데살로니가전서와 비슷하게, 데살로니가후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많이 증거하고 있다. 본서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엄위성(1장), 그의 재림의 징조(2장), 재림 신앙의 균형(3장) 등이 증거되어 있다.
1장: 재림의 소망
1절, 바울의 기원
[1] 바울과 실루아노(실라)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1] 바울과 실루아노와 디모데는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데살로니가인들의 교회에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너희에게 있기를 바라노라.
실루아노는 사도행전에 나오는 실라를 가리킨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라는 말은 바울 사도 일행과 데살로니가 교회 그리고 모든 시대, 모든 지역의 교회들과 성도들의 영적 주소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전통 사본에는 \'은혜와 평강\'이라는 말 앞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라는 말이 들어 있다. 이것은 항상 가장 귀한 기원의 내용이다. \'은혜\'는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긍휼과 사랑을 가리킨다. 그것은 구원의 원인이며 근거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엡 2:8). 우리의 우리 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다(고전 15: 10). 선택은 우리의 소원이나 열심으로 된 것이 아니고 오직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으로 말미암음이다(롬 9:16). 하나님의 긍휼이 없었다면 우리에게는 구원도, 영생도 없었을 것이다. \'평강\'은 구원의 결과이다. 이 단어는 마음의 안정, 환경적 평온과 안전, 그리고 몸의 건강까지 포함한다. 하나님과 구주 예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의 기원은 가장 귀한 문안 인사이다.
2-3절, 바울의 감사
[2-3] 우리가 너희 무리를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고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함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2-3] 우리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며 너희 모두에 대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함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소망의 인내를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항상 하나님께 감사한 이유는 그들의 믿음 생활 때문이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라는 끝에 나오는 말은 중간에 넣어서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 . . 소망의 인내\'라고 읽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사람 앞에 보이는 외식적인 일이 아니고,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이루어진 진실한 일임을 보인다.
데살로니가인들의 믿음 생활은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는 말에서 증거된다. 첫째로, 그들에게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다. \'역사\'라는 말은 \'행위\'라는 뜻이다. 믿음은 구원의 조건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성도에게 지극히 기본적인 덕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입술의 고백만 있고 행위가 없는 믿음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런 믿음을 야고보서에서는 죽은 믿음이라고 표현하였다. 참된 믿음은 행위가 있는 믿음이다. 믿기 때문에 말씀을 사랑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며 주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것이 참믿음이다.
둘째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사랑의 수고가 있었다. 하나님의 명령의 요약은 사랑이다. 십계명의 요약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남겨주셨다.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 3:23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요약하기를,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사랑하는 자는 오래 참고 온유할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위하여 그리고 형제들을 위하여 수고할 것이다.
셋째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소망의 인내가 있었다. 우리의 소망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영광스럽게 변화되며 천국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이런 영광스러운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고난의 현실 가운데서도 오래 참을 수 있다. 세상의 헛된 소망도 사람에게 참는 마음을 갖게 하거든 하물며 하나님이 주신 영광의 소망이랴!
결론적으로, 1절부터 3절까지에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운다. 첫째로, 우리는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기원하자. 그것은 가장 귀한 기원이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믿음 생활을 점검하여, 과연 믿음의 행위, 사랑의 수고, 소망의 인내가 있는지 살펴보고, 그런 덕을 소유하도록 힘쓰자.
4-7절, 선택에 대한 확신
[4]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4]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하나님을 선택한 것을 아노라.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랑을 가리킨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소식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셨다는 소식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형제들\'이라는 말은 인간 관계에서 매우 고상한 명칭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높고 낮은 자가 없음을 보이는 사랑의 명칭이다.
바울 사도는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이라는 것을 확신하였다. 하나님의 선택은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 가운데서 얼마를 선택하셨다는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인류 전체를 선택하지 않으셨다는 것은 확실하다. 모든 사람이 다 구원을 받지는 않을 것이다. 선택의 진리는 하나님께서 인류의 나머지를 죄 가운데 내버려두셨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선택은 참으로 귀한 사실이다. 하나님의 선택을 받은 자들은 참으로 복되다.
[5] 이는 우리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오직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떠한 사람이 된 것은 너희 아는 바와 같으니라.
[5] 이는 우리의 복음이 말로만 너희에게 이른 것이 아니라 능력과 성령과 대단한 확신으로 된 것이니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를 위하여 어떻게 했다는 것을 너희도 아는 바라.
\'이는\'이라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증거를 보인다. 그 증거는 한마디로 그들의 진실한 믿음 생활이었다. 우선, 바울 사도의 전한 복음은 말로만 그들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말로만 전달되었다면 참된 구원의 일이 그들 속에 이루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바울 사도의 전한 복음은 성령의 능력과 큰 확신 가운데 전달되었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일하시지 않고서는 인간 구원의 일은 불가능하다. 불신자는 영적으로 죽은 자이기 때문에 영적으로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성령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지,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성령께서 능력으로 일하셨고 전도자 바울에게 큰 확신을 주셔서 복음을 증거케 하셨다. 전도자가 믿지 않는 내용을 남에게 믿게 할 수는 없을 것이지만, 큰 확신으로 증거된 복음은 구원의 결실을 가져왔다.
[6-7] 또 너희는 많은 환난 가운데서 성령의 기쁨으로 도를 받아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으니 그러므로 너희가 마게도냐와 아가야 모든 믿는 자의 본이 되었는지라.
[6-7] 또 너희가 성령의 기쁨으로 많은 환난 가운데서 그 말씀을 받아들여 우리와 주를 따르는 자들이 되었으므로 마케도니아와 아카야에서 믿는 모든 자들에게 본이 되었느니라.
\'많은 환난\'은 초신자들에게 믿음의 큰 방해거리이었을 것이다. 마귀는 그런 환난을 사용하여 그들의 구원을 방해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이 단지 현세의 것을 조금 보장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삶을 보장하는 진리이므로, 구원받는 자들은 많은 환난 가운데서도 믿고 구원을 받는다.
\'성령의 기쁨으로\'라는 말은 구원이 성령의 역사임을 보인다. 성령께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구원의 진리를 깨닫게 하시고 기쁨으로 받게 하신다. \'도\'는 \'말씀\'이라는 단어이다. \'도를 받아\'라는 말은 \'복음 진리를 믿었다\'는 뜻이다.
\'우리와 주를 본받은 자가 되었다\'는 말은, 그들이 고난 중에 하나님을 믿는 일에 있어서, 또 거룩하고 의로운 삶을 살려고 애쓰는 순종 생활에 있어서, 그리고 아마도 전도하는 일에 있어서까지도 바울 일행과 주님을 본받은 자가 되었다.
그래서 그들은 마게도냐와 아가야의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 구원은 변화이다. 그것은 생각의 변화, 가치관의 변화, 인생관의 변화, 행동의 변화, 인격의 변화, 삶의 변화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는 다른 이에게 본이 된다. 본이 되지 못하는 것은 참 구원이 아닐 것이다.
8-10절, 믿음의 소문
[8] 주의 말씀이 너희에게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만 들릴 뿐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 믿음의 소문이 각처에 퍼지므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노라.
[8] 이는 주의 말씀이 너희로부터 마케도니아와 아카야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향하는 너희의 믿음이 퍼져 있는 모든 곳에도 전해졌으므로 우리는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게 되었노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된 이유를 보인다. 즉 그 이유는 주의 말씀이 그들로부터 마게도냐와 아가야에 들릴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믿음이 각처에 퍼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너희 믿음의 소문\'이라는 원어는 \'너희 믿음\'인데, 이것은 그들이 믿는 진리의 내용들과 그것들을 믿는 그들의 믿음의 소문을 포함할 것이다. 바울 일행이 복음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이었듯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그 동일한 진리를 전파하는 자들이 된 것이었다. 진실한 성도들의 말과 행위를 통해 하나님의 복음이 주위에 퍼져나갔다.
[9] 저희가 우리에 대하여 스스로 고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너희 가운데 들어간 것과 너희가 어떻게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9] 그들이 우리에 관하여 스스로 말하기를 우리가 어떤 방법으로 너희에게 들어갔으며 또 너희가 어떻게 우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돌아서서 살아 계시며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며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도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와 앞절 끝의 말과 연결된다. 각처에 사람들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대해 증거하는 바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었다. 하나는, 그들이 우상을 버리고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께로 돌아와 그를 섬기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아는 것은 종교의 가장 기본적 요소이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 가장 근본적 무지요 죄악이며, 하나님을 아는 것이 가장 근본적 지식이요 의(義)이다. 이 세상에 많은 신들이 있지만,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다. 우리의 근본적 믿음은 바로 그 분을 알고 그 분을 섬기는 데 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영생이라고 말씀하셨다(요 17:3).
[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10] 또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살리신 그 분의 아들, 즉 다가올 진노로부터 우리를 구해 내신 예수께서 하늘로부터 오심을 기다린다고 하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의 두번째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것이었다. 즉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과 재림하심을 믿고 소망하였다. 특히 그들은 재림하실 예수께서 장차 있을 진노 곧 온 세상을 멸망시키실 하나님의 마지막 심판의 진노로부터 그들을 건지실 것을 믿었다.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재림, 그리고 마지막 심판 등은 그리스도인의 믿음의 기본적 요소들이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10절까지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에 대한 확신의 근거에 대해 배운다. 그것은 성도들의 진실한 믿음 생활이며, 그것은 좀 더 구체적으로 표현한다면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것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고 그의 재림을 소망하는 것이라고 본문은 말하고 있다. 성도의 진실한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삶은 하나님의 선택하심의 증거이다. 그러한 삶은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되는 삶이다. 진정한 믿음의 삶은 다른 이들에게 본이 된다.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선택하셨음을 확신하는가? 우리는 우리 자신을 살펴보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믿음과 소망과 순종의 삶을 살도록 힘쓰자.
2장: 재림 때의 영광
1-12절, 바울의 말씀 사역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위해 하나님의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고 그들의 모범적 믿음 생활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그들의 선택을 확신한 바울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그들 가운데서 사역하였는지에 대해 증거한다. 이것은 말씀 사역의 귀한 모범을 보이며 모든 복음 사역자들에게 중요한 교훈이 된다.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 가운데 들어감이 헛되지 않은 줄을 너희가 친히 아나니 너희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먼저 빌립보에서 고난과 능욕을 당하였으나 우리 하나님을 힘입어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말하였노라.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로 들어간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너희 자신들이 알고 있노라.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이전에 빌립보에서 고난을 받고 모욕을 당하였으나 우리의 하나님 안에서 담대하여 많은 투쟁을 하며 하나님의 복음을 너희에게 전하였노라.
사도행전 16장과 17장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대로, 바울은 빌립보에서 매를 많이 맞고 옥에 갇혔었고 데살로니가에서도 유대인들의 강한 반대를 받았었다. 그러나 그는 많은 싸움 중에 하나님을 힘입어 복음을 담대히 전하였다. \'말한다\'는 원어(파레시아조마이)는 \'자유로이, 담대히 말한다\'는 뜻이다.
[3-4] 우리의 권면은 간사에서나 부정에서 난 것도 아니요 궤계에 있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 전할 부탁을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3-4] 우리의 권면은 기만이나 부정이나 교활로 말미암지 않았고 오직 하나님의 승인을 받아 복음을 위탁받은 대로 전하노니 이는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며 우리의 마음을 시험하시는 하나님만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니라.
원문에는 3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와서 바울 일행이 고난 중에 하나님의 복음을 담대히 말한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그들의 권면이 간사에서나 부정(不淨)에서나 궤계에서 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간사\'라는 원어(플라네)는 \'거짓\'이라는 뜻이고, \'궤계\'라는 말도 이와 비슷하게 \'속임\'이라는 뜻이다. 만일 그들의 권면이 거짓과 불결과 속임에서 나온 것이었다면, 평안할 때는 혹시 담대하게 말할 수 있을지 몰라도 환난 중에는 그렇지 못했을 것이다. 환난 중에 거짓을 담대히 말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바울 일행이 복음을 담대히 말한 이유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아 복음 전할 부탁을 받은 대로 사람을 기쁘게 하지 않고 그들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였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들이 사람을 기쁘게 하려 했다면 환난 중에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하였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낙심치 않고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를 담대히, 가감 없이, 자유로이 전할 수 있었다. 하나님 앞에서 일하는 복음 사역자들은 현실의 악한 환경을 거슬려 담대히 일할 수 있다.
[5]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거하시느니라.
[5]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어느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구실로 하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께서 증거하시느니라.
원문에는 5절 초두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이것은, 5절부터 8절까지의 내용이 바울 일행이 거짓이나 불결한 동기에서 일하지 않고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했다는 증거임을 보인다. 그 증거는 무엇인가? 우선, 그들도 알고 있듯이, 바울 일행은 아무 때에도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않았다. 그들은 사람들을 기쁘게 하기 위해 아첨의 말을 하지 않았고 더러운 이익을 구하여 탐심의 탈을 쓰고 거짓되이 행동하지 않았다. 이 사실은 그들이 알 뿐만 아니라, 또한 하나님도 증거하실 수 있는 바이었다.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로 능히 존중할 터이나 그러나 너희에게든지 다른 이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치 아니하고
[6]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도들로서 능히 짐을 지울 수 있었지만 너희에게서나 혹 다른 사람에게서도 사람의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였으며
또한 바울 일행은 사람에게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사도이므로 존중함을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그들에게든지 다른 이들에게든지 사람에게는 영광을 구하지 않았다. 이것은, 땅의 것이 섞이지 않은 그들의 순수함을 보인다. 복음 사역자는 땅의 썩어질 것을 구하는 자가 아니므로, 사람의 영광을 구하지 않는 것이 합당하다. 그의 상급은 장차 하나님 앞에서 크게 나타날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을 믿지 않는 삯군들은 복음을 빙자하여 이 세상의 것들을 얻으려 할 것이지만, 하나님의 종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만족할 것이다.
[7-8] 오직 우리가 너희 가운데서 유순한 자 되어 유모가 자기 자녀를 기름과 같이 하였으니 우리가 이같이 너희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복음으로만 아니라 우리 목숨까지 너희에게 주기를 즐겨함은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 됨이니라.
[7-8] 오직 너희 가운데서 마치 유모가 자기의 친자녀들을 소중히 여김과 같이 온화하였느니라. 너희를 그처럼 그리워하여 하나님의 복음 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의 생명까지도 너희에게 주기를 기뻐하였으니 이는 너희가 우리의 사랑하는 자가 되었기 때문이니라.
바울 일행은 사람에게서 영광을 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영혼들을 위하여 온유한 심령으로 자기들의 목숨까지 즐거이 줄 마음으로 일하였다. 그들은 유모가 자기 자녀들을 기름같이 유순한 자들이 되었고 영혼들을 사모하고 사랑하여 단순히 말로만이 아니고 목숨까지도 주기를 즐거워하는 심정으로 일했다. 여기에 복음 사역자들에게 필요하고도 중요한 또 하나의 면모가 있다.
[9] 형제들아, 우리의 수고와 애쓴 것을 너희가 기억하리니 너희 아무에게도 누를 끼치지 아니하려고 밤과 낮으로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노라.
[9] 형제들아, 너희가 우리의 수고와 고생을 기억하리니 이는 너희 가운데서 아무에게도 짐이 되지 아니하려고 밤낮 일하면서 너희에게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였음이라.
원문에는 또 다시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바울은 다시 한번 더 자신의 말씀 사역에 대해 증거한다. 그는 자신의 수고와 애쓴 것을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기억할 것이라고 말하며 그들에게 누를 끼치지 않기 위하여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언급한다. 이런 사실들은 그의 말씀 사역이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졌음을 증거한다. 그의 동기가 순수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사도의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누를 끼쳤을 것이고 일하지 않고 편안히 섬김을 받는 자가 되려 하였을 것이다.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에 대하여 너희가 증인이요 하나님도 그러하시도다.
[10] 우리가 너희 믿는 자들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고 흠 없이 행동하였는가는 너희가 증인이며 또 하나님께서도 그러하시니라.
바울은 자신의 사역을 다시 간추려 표현하기를 \"너희 믿는 자들을 향하여 어떻게 거룩하고 옳고 흠 없이 행한 것\"이라고 한다. 바울의 말씀 사역은 한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고 흠 없이 행한 사역이었다. 이것에 대하여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증인이요 하나님도 증인이 되신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이렇게 자신의 말씀 사역에 대해 담대히 증거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그의 뒤를 따르는 교회의 말씀 사역자들과 봉사자들이 본받을 만한 일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앞에서 범사에 거룩하고 정정당당하고 흠 없이 행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11-12] 너희도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아비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노니 이는 너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11-12]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우리가 너희 각 사람에게 마치 아버지가 자기 자녀들에게 하듯이 권고하고 위로하고 증거하였으니 이는 너희를 그의 나라와 영광으로 부르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마지막으로, 바울은 그의 말씀 사역의 목적을 증거한다. 그는 사람들에게 아버지가 자기 자녀에게 하듯 권면하고 위로하고 경계하였다. 말씀 사역에는 권면도 있고 위로도 있고 경계도 있다. 권면이 필요한 자에게는 권면을, 위로가 필요한 자에게는 위로를, 경계가 필요한 자에게는 경계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무엇을 목적하는 것인가? 목회 설교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 목적은 우리를 부르사 자기 나라와 영광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부르셨다. 이것이 우리의 중생(重生)이며 회개와 믿음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그리고 구원의 결과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영광 곧 천국 영광에 이르는 것이다. 설교의 목적은 성도들로 하여금 이 놀라운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하려 함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구원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믿음 중심으로 살고 의와 선과 진실의 원리로 사는 자가 되게 하는 것이다. 성도들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합당하게 사는 삶, 곧 구원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말씀 사역에 대한 몇 가지 교훈들을 배운다. 첫째로, 우리는 말씀 사역의 잘못된 방법에 대해서 경계를 받는다. 말씀 사역의 잘못된 방법은 거짓과 불결과 속임의 동기에서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아첨의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고 행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을 기쁘게 하거나 사람에게서 영광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누를 끼치는 것이다. 이것은 이 세상의 거짓 종교들과 헛된 인생관의 특징이기도 하다.
둘째로, 우리는 말씀 사역의 바른 방법에 대해서 교훈을 받는다. 말씀 사역의 바른 방법은 하나님만 바라며 하나님만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담대히 할 말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유순한 마음으로 영혼들을 사랑하며 그들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기 목숨까지도 즐거이 주려하는 것이다. 그것은 밤낮으로 일하면서 수고하는 것이다. 그것은 거룩하고 정정당당하고 흠 없이 행하는 것이다.
셋째로, 우리는 말씀 사역의 목적에 대해서 배운다. 말씀 사역의 목적은 우리를 부르시고 구원하신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게 하기 위함이다.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란,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왔으므로 하나님 중심으로 경건하게 살며 항상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과 교통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자녀답게, 천국 백성답게 그의 원하시는 뜻대로 거룩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한 삶을 힘쓰는 것이다.
13-16절,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음
[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13] 이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사실 그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으니, 이 말씀이 믿는 너희 가운데서도 효과적으로 역사하느니라.
바울 사도가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인하여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한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았기 때문이었다. 본절에서 바울은 그가 전한 복음 진리 곧 오늘날 성경에 밝히 기록된 기독교 진리가 하나님의 말씀임을 중복적으로 증거한다. 첫째로, 그는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이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다. 둘째로, 그는 \'너희가 . . . [그 말씀을]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고 말함으로써 다시 한 번 더 그가 전한 복음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한 것이다. \'진실로 그러하다\'는 말은 그들이 바울의 전한 복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것이 바로 된 것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에덴 동산에서 하와는 하나님의 말씀보다 뱀의 말을 더 신뢰하였기 때문에 범죄하였다. 어느 시대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닫지 못하는 곳에는 구원과 영생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깨닫고 받는 심령마다 구원과 생명을 얻는다. 구약의 선지자들은 하나님의 참된 말씀을 증거하였다. 신약의 사도들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다. 이 모든 말씀들이 오늘날 신구약 성경책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성경책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닫는 것은 인생에게 지극히 중요한 일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이 하나님의 말씀이 믿는 자들 속에서 활동하였다고 증거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글자들이 아니고 살아 역사하는 말씀이다. 성경 두 구절이 이 사실을 잘 증거한다.
예레미야 23:28, 29,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夢事)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말이 불 같지 아니하냐? 반석을 쳐서 부스러뜨리는 방망이 같지 아니하냐?\"
히브리서 4:12, 13,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본받은 자 되었으니 저희가 유대인들에게 고난을 받음과 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 동일한 것을 받았느니라.
[14] 형제들아,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을 따르는 자들이 되어 그들이 유대인들에게서 고난을 받은 것같이 너희도 너희 나라 사람들에게서 동일한 것을 받았으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있어 앞절과 이어진다. 즉 본절은 앞절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데살로니가 교인들 속에서 역사한다고 말한 이유를 제시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 교인들 속에서 역사한 증거는 그들이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처럼 고난을 받으면서도 예수님을 믿고 따른 것이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유대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들\'이라는 말씀은 교회들의 위치와 소속을 보인다. 교회들의 위치는 지역적으로는 유대 지방이지만 영적으로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받은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영원히 거주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의 영원한 주소이다. 교회들은 또한 \'하나님의 교회들\'이다. 그것은 교회의 소속을 보인다. 교회는 하나님께 속하며 그 소유권은 하나님께 있다. 그러므로 교회의 최종적, 최고적 권위는 하나님의 말씀 곧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이다.
[15-16] 유대인은 주 예수와 선지자들을 죽이고 우리를 쫓아내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어 우리가 이방인에게 말하여 구원 얻게 함을 저희가 금하여 자기 죄를 항상 채우매 노하심이 끝까지 저희에게 임하였느니라.
[15-16] 그들은 주 예수와 자기들의 선지자들을 죽였고 우리를 박해하였으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적하여 16 우리가 이방인들의 구원을 위하여 말하는 것을 금지시킴으로써 항상 자신들의 죄들을 채우니 이는 그들에게 임한 진노가 극에 달하였음이니라.
유대인들의 죄악은 참으로 컸다. 그들은 주 예수님과 선지자들을 죽였고 바울 일행과 예수 믿는 성도들을 유대 땅에서 쫓아내었다. 그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아니하였고 모든 사람에게 대적이 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바울 일행이 복음을 전파하여 이방인들을 구원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대항한 매우 큰 악이었다. 그들은 그들의 죄악을 항상 채우는 자들이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그들에게 끝까지 임하게 되었다.
17-20절, 말씀 사역자의 영광과 기쁨
[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너희를 떠난 것은 얼굴이요 마음은 아니니 너희 얼굴 보기를 열정으로 더욱 힘썼노라. 그러므로 나 바울은 한 번 두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나 사단이 우리를 막았도다.
[17-18] 형제들아, 우리가 잠시 동안 너희와 헤어져 있었지만 얼굴이지 마음은 아니기에 너희의 얼굴 보기를 더욱 간절히 바랐노라. 18 그러므로 우리는 너희에게 가고자 하였으며 특히 나 바울은 한두 번 가려 하였으나 사탄이 우리를 방해하였노라.
본문에서 바울은 자신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고 그 곳으로 가려고 한두 번 시도하기도 하였음을 증거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진실한 다른 성도들을 보기를 원한다. 특별히 주의 종들은 그들을 통해 구원받고 양육받은 성도들을 보기를 간절히 원한다. 성도들 간의 교제는 이 땅 위에서 가장 아름다운 교제이다. 그것은 천국에서도 영원히 기쁘게 누릴 교제인 것이다.
그런데 사탄이 바울 일행의 길을 막았다. 이 세상에서 우리는 사탄과 악령들의 방해와 시험들을 경험한다. 우리가 사탄과 악령들을 궁극적으로는 이길 것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땅 위에서 때때로 우리의 삶 속에나 우리의 봉사의 일들 속에 사탄의 방해와 시험들을 허용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과 성도들은 그것들에 대해 염려할 것이 없다. 하나님의 일에는 고난도 있을 것이지만, 우리가 부지런히 충성하면 하나님의 때가 되어 하나님의 뜻하신 바들이 다 이루어질 것이며 하나님의 작정하신 열매들이 다 맺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
[19-20]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가 오실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임재 앞에 있을 너희가 아니겠느냐? 20 이는 너희가 우리의 영광과 기쁨이기 때문이라.
원문에는 19절과 20절 초두에 각각 \'왜냐하면\'이라는 말(가르)이 나온다. 그것은 바울이 왜 데살로니가 교인들을 보기를 원했는지에 대해 말한다. 그 이유는, 그들이 바울에게는 소망이요 기쁨이요 자랑의 면류관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장차 주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나타날 일을 말한다. 지금 교회들은 지상에서 여러 가지 싸움 속에 있고 불완전 속에 있다. 그러나 복음의 결실들은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밝히 드러날 것이다. 그 때 진실한 성도들은 말씀의 사역자들에게 영광이요 기쁨이 될 것이다.
여기에 성도들은 진실한 성도들을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을 가리킨다. 형식적인 교인들, 명목상의 크리스챤들, 이름만 가진 교인들, 실제로는 순종함이 없는 사람들, 양들이 아니고 염소들인 자들, 가룟 유다와 같이 처음부터 믿지 않고 돈에만 눈이 어두워 있는 자들, 진심으로 회개치 않은 자들, 이런 자들은 여기에 해당하지 않는다. 이런 자들은 진실한 목사들의 근심거리들이요 교회의 수치거리들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믿고 순종하는 자들, 비록 실수들은 있어도 중심이 하나님을 향하고 주 예수님을 향하고 성경 말씀에 대해 믿고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 자들, 그들은 참된 목사들의 기쁨과 면류관이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20절까지에서 우리는 세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사도들을 통해 전달된 복음, 지금 성경에 밝히 기록된 기독교 복음, 곧 신구약 66권이 성경 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알고 기쁨으로 읽고, 성경적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로 깨닫고 감사함으로 받고 믿자. 이 지식과 이 믿음은 성도에게 매우 기본적이고 중요하다.
둘째로, 우리는 믿음 생활을 하는 과정에 여러 가지 환난과 고난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초대 교회들과 앞서 간 성도들은 이 고난의 길을 꿋꿋하게 걸어갔다. 유대의 교회들이 그러했고 데살로니가 교회도 그러했다. 오늘 우리도 참믿음 가지고 어떠한 환경과 처지 속에서도 꿋꿋하게 믿음 생활을 바로 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참된 성도의 교제가 있는 교회를 만들도록 힘쓰자. 이렇게 되려면, 우리 각자가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한다. 명목상의 신자가 아니고 진실한 믿음과 순종의 행위를 가진 참된 신자가 되어야 한다. 그럴 때 우리는 서로서로에게 기쁨과 영광이 될 것이다.
3장: 재림을 위한 준비
1-10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을 확인함
[1-2] 이러므로 우리가 참다 못하여 우리만 아덴에 머물기를 좋게 여겨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인 디모데를 보내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하고 너희 믿음에 대하여 위로함으로.
[1-2] 그러므로 우리가 더이상 참을 수 없어서 우리들만 아테네에 머무르는 것을 좋게 여겨 2 우리의 형제이며 하나님의 일꾼이요 그리스도의 복음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디모데를 보내었노니 이는 너희를 굳게 세우고 너희의 믿음에 대하여 격려하므로
데살로니가 교회에 환난이 있었기 때문에,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중에 믿음을 잃어버리게 될까봐 염려하는 마음이 생겼다. 예수님의 씨 뿌리는 비유에서, 돌밭에 뿌려진 씨들은 말씀을 듣고 즉시 기쁨으로 받으나 그 속에 뿌리가 없어 잠시 견디다가 말씀을 인해 환난이나 핍박이 일어나는 때에는 곧 넘어지는 자들을 가리켰다(마 13:20, 21). 교회 안에는 그런 자들이 있을 수 있다.
그래서 바울은 디모데를 보내어 그 교인들의 형편을 살피고 그들을 권면하게 하였다. 바울은 디모데에 대해 말하면서 그를 \'우리 형제 곧 그리스도 복음의 하나님의 일군\'이라고 묘사하였다. 전통사본에는 \'또한 우리의 동역자\'라는 말이 들어있다. 바울에게 그런 좋은 동역자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바울의 전도 사역에서 그를 도와 성도들의 믿음의 형편을 살필 수 있는 동역자가 있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었다. 바울은 빌립보서에서 디모데에 대해 \"이는 뜻을 같이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 밖에 내게 없음이라\"고 증거하기도 하였다(빌 2:20).
바울이 디모데를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목적은 그들을 굳게 하고 그들의 믿음에 대해 그들을 위로하기 위해서이었다. 전통사본에는 \'위로함\'이라는 말 다음에 \'너희를\'이라는 말이 들어있어 뜻이 더욱 분명하다. 목사의 일차적 사명은 교인들의 믿음을 굳게 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는 것이다.
[3-4] 누구든지 이 여러 환난 중에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우리로 이것을 당하게 세우신 줄을 너희가 친히 알리라.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장차 받을 환난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3-4] 아무도 이러한 고난들로 인하여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우리가 세움을 받은 줄을 너희가 아느니라. 4 또한 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우리가 환난을 당하리라고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더니 과연 그렇게 된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디모데를 통하여 믿음에 굳게서고 위로함을 얻는 것이 필요한 것은 그 여러 환난 중에서 그들이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함이었다. 원문에는 3절 중간의 \'우리가 이것을\'이라는 구절과 4절의 \'우리가 너희와\'라는 구절이 \'왜냐하면 우리가 이것을\', \'왜냐하면 우리가 너희와\'라고 되어 있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중에서 요동치 않아야 할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이 우리가 그런 환난을 당하도록 정하신 줄 알기 때문이다. 또한 그들은 바울이 그들과 함께 있을 때 장차 받을 환난에 대해 미리 언급한 대로 된 것을 알기 때문이다.
[5] 이러므로 나도 참다 못하여 너희 믿음을 알기 위하여 보내었노니 이는 혹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일러니.
[5] 이로 인하여 내가 더이상 참을 수 없어서 너희의 믿음을 알아보려고 보냈으니 이는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의 수고를 헛되게 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바울은 복음을 전하고 결신자들을 확인하여 교회를 세우기만 하지 않고 그 교인들의 믿음이 보존되게 하기를 힘썼다. 왜냐하면 시험하는 자 곧 사탄이 그들을 시험하여 믿음을 잃게 할 것이 예상되었기 때문이다. 그 교인들이 믿음을 잃는다면 바울의 전도 사역은 헛수고가 될 것이다. 복음을 전하고 결신자들을 얻고 교회를 세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 못지 않게 중요한 일은 그 교인들로 하여금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고 믿음에 굳게서고 믿음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이 일이 목회자의 일차적 임무이다.
[6-7] 지금은 디모데가 너희에게로부터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하고 또 너희가 항상 우리를 잘 생각하여 우리가 너희를 간절히 보고자 함과 같이 너희도 우리를 간절히 보고자 한다 하니 이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모든 궁핍과 환난 가운데서 너희 믿음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위로를 받았노라.
[6-7] 그러나 이제 디모데가 너희에게서 우리에게로 와서 너희 믿음과 사랑의 기쁜 소식을 우리에게 전해 주었고, 또 우리가 너희를 보고 싶어함 같이 너희도 우리를 몹시 보고 싶어하며 항상 우리를 잘 기억한다고 하니 7 형제들아, 이로 인하여 우리가 우리의 모든 환난과 궁핍 가운데서도 너희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받았노라.
바울의 염려는 감사하게도 염려에 불과하였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믿음과 사랑 가운데 거하고 있었고 또한 항상 바울 일행을 기억하고 간절히 보고자 하였다. 그것은 바울 일행에게 위로가 되었다. 원문에는 \'모든 궁핍과\'라는 말이 \'우리의 모든 궁핍과\'로 되어 있다. 바울 일행은 그 당시 많은 궁핍과 환난 가운데 처해 있었다. 그러나 바울이 위로를 받은 것은 어떤 물질의 공급 때문이 아니라, 성도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 때문이었다. 성도의 믿음의 소식보다 목사를 더 기쁘게 하고 그에게 위로가 되는 것은 없다.
[8] 그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선즉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
[8] 너희가 주 안에 굳게 서면 이제 우리가 살리라.
\'그러므로\'라는 원어(호티)는 \'왜냐하면\'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과 사랑의 소식이 왜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는지를 말한다. 즉, 그는 그들이 주 안에 굳게 선다면, 우리가 이제 살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이제는 살리라\'는 말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 대한 염려 때문에 바울의 심정이 심히 약해졌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믿음의 소식을 들은 바울은 새 힘을 얻었다.
[9] 우리가 우리 하나님 앞에서 너희를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능히 어떠한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보답할꼬?
[9] 우리가 우리의 하나님 앞에서 너희로 인하여 모든 기쁨으로 기뻐하니 너희를 위하여 어떤 감사를 하나님께 드릴 수 있으리요.
바울은 이 모든 일, 즉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이 환난 가운데서도 보존되고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지 않았음을 크게 기뻐하면서 그것을 인해, 그들을 인해 하나님께 감사로 보답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그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을 그가 깨닫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믿음의 시작자시요 완성자시며(히 12:2), 우리를 환난 중에서도 지키시는 자이시다(시 91편). 그러므로 성도 개개인이나 또 성도들을 위해 세움 받은 목사들은 자신과 교회의 믿음의 보존을 위해 물론 성실히 힘써야 하지만,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사람은 부족하고 무익한 존재이며 우리를 굳게 세우시는 이는 오직 우리 하나님뿐이시다.
[10] 주야로 심히 간구함은 너희 얼굴을 보고 너희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려 함이라.
[10] 우리가 밤낮으로 열심히 기도함은 너희의 얼굴을 보고 너희의 믿음에서 부족한 것을 온전케 하려는 것이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얼굴을 보고 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기를 주야로 심히 간구하고 있었다. 이것은 목사의 사명을 잘 보여준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기 위하여 목사를 교회에 보내시고 세우신다. 목사는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이 먼저 믿음에 굳게 서고 온전해야 할 것이며, 또 성경 말씀의 충만함을 얻어 교인들의 믿음의 부족함을 온전케 하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가 이 일을 위해 충성하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지혜와 능력을 주셔서 그 일을 감당하게 하실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0절까지에 나타난 몇 가지 진리는 다음과 같다. 첫째로, 신앙생활에는 환난과 시험이 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여러 환란 중에\' 있음을 증거하였고 우리가 이것을 당하게 세우심을 받았고 또 바울 자신이 그것을 그들에게 미리 말해두었음을 증거하였다(3, 4절). 또 그는 교회를 시험하는 자가 있음을 증거하였다(5절). 또 바울 자신도 많은 궁핍과 환난 가운데 있음을 증거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환난과 시험이 많이 있을 것을 예상하고 그것을 이상하게 생각지 말아야 할 것이다.
둘째로, 우리는 환난 중에도 믿음에 굳게서는 것이 필요하다. 본문에는 \'너희 믿음\'이라는 표현이 5번이나 나온다(2, 5, 6, 7, 10절).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이 환난 가운데도 믿음에 굳게 서기를 소원하였고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에 굳게 서 있다는 소식을 듣고 큰 위로와 기쁨을 얻었다. 오늘날 우리도 우리의 믿음의 굳셈이 필요하고 특히 환난 가운데서 그것이 필요하다.
셋째로, 성도의 믿음의 굳셈을 위해 하나님께서는 목사들을 세우셨을 뿐만 아니라(2, 10절), 친히 우리를 지키시고 도우시고 인도하신다(9절).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보답하기를 원하였다. 오늘날 우리도 목사의 성경적 설교를 귀히 여기고 사모하며 또한 우리의 믿음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며 의지하자.
11-13절, 바울의 기원
[11]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는 우리 길을 너희에게로 직행하게 하옵시며.
[11] 이제 하나님이신 우리 아버지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길을 너희에게로 인도하시기를 바라노라.
원문에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자신(아우토스)과\'라고 되어 있고, 또 전통 사본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이라고 되어 있다. \'직행하다\'는 원어(카튜뒤노)는 \'곧게 만들다, 인도하다\'는 뜻이다. 본절은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의 길을 인도하여 데살로니가 교회로 가게 해주실 것을 기원한 것이다. 이 말씀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진리가 나타나 있다. 우리가 계획을 할지라도 우리의 길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다.
잠언 16:1, \"마음의 경영은 사람에게 있어도 말의 응답은 여호와께로서 나느니라.\" 잠언 16:3,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잠언 16:33,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이 말씀들은 다 하나님의 주권에 대한 진리를 보인다.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사.
[12] 또 주께서 우리가 너희를 사랑함과 같이 너희도 서로와 모든 사람에게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지고 넘치게 하여 주시기를 바라며
\'주께서\'라는 말은 우리의 성화가 주께서 도우시며 역사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인다. 주께서는 요한복음 15장의 포도나무 비유에서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5절). 바울 사도는 로마서 8장에서 우리의 성화가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이루어짐을 말씀했다. 로마서 8:13, 14,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성령]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에베소서 4:16은 말씀하기를, \"그[그리스도]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했다.
바울 사도는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더욱 많아 넘치게 하시기를 기원했다.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것은 주 예수께서 친히 제자들에게 명령하신 새 계명이었다(요 13:34). 요한 사도는 요한일서에서 서로 사랑하는 자가 어두움에서 나와 빛 가운데 있고 사망에서 나와 영생을 얻은 자라고 증거하였다(요일 2:9; 3:14, 15). 이와 같이, 서로 사랑하는 것은 구원받은 성도에게 반드시 있어야 할 일이다.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 속에는 원수 사랑도 포함된다. 마태복음 5:44에 보면, 주께서는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말씀하셨다. 전통사본에는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며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베풀며\"라는 말씀이 첨가되어 있다. 바울은 주께서 이러한 사랑이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더욱 많아 넘치게 해주시기를 기원한 것이다.
[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1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때에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 없도록 끝까지 너희 마음을 견고하게 세워주시기를 바라노라.
바울 사도는 또한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시기를 기원한다. 사람의 마음은 영혼의 활동기관이다. 그것은 지성과 감정과 의지가 거하는 곳이다. 성도의 마음은 참으로 중요하다. 마음이 연약하면 범죄하기 쉽다. 그러나 마음이 굳세면 죄를 이기고 의를 행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우리의 마음을 굳세게 해주시는 것이 필요하다.
또한 바울 사도는 우리 주 예수께서 세상에 다시 내려오실 것을 말씀한다. 성경이 가르치는 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믿는다.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주께서는 그의 모든 성도들과 함께 오실 것이다. \'그의 모든 성도\'라는 말은 지금 천국에 들어가 있는 성도들의 영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히브리서 12:23의 말씀대로 \'온전케 된 의인의 영들\'이다. 그들을 데려오시는 것은 몸의 부활을 주시기 위해서이다(살전 4:14-16).
바울 사도는 주께서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마음을 굳세게 하셔서 주의 재림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기원했다. 주의 재림 때 우리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지만, 지상에서의 우리의 행위들에 대한 심판과 칭찬과 책망도 있을 것이다. 로마서 14: 10, \"네가 어찌하여 네 형제를 판단하느뇨? 어찌하여 네 형제를 업신여기느뇨?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고린도후서 5:9, 10,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우리는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어야 할 것이다.
4장: 재림의 위로
1-2절, 더욱 많이 힘쓰라
[1] 종말로 형제들아,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너희에게 구하고 권면하노니 너희가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께 기쁘시게 할 것을 우리에게 받았으니 곧 너희 행하는 바라. 더욱 많이 힘쓰라.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끝으로 우리가 주 예수 안에서 간구하고 권고하노니 너희가 어떻게 행해야 하고 어떻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야 하는가를 우리들에게서 받은 바와 같이 더욱 더 넘치게 하라.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주 예수 안에서\' 권면하였다. \'주 예수 안에서\'라는 말은 \'주 예수와의 연합 안에서,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의 주신 구원 안에서, 주 예수의 권위로\'라는 뜻을 가진다. 그 교인들이 바울에게서 받은 교훈, 즉 그들이 마땅히 어떻게 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것인지에 대한 교훈은 오늘날 성경에 다 기록되어 있다. 그것은 한마디로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하는 생활이다.
바울의 권면은 그들이 받은 교훈대로 행하기를 더욱 많이 힘쓰라는 것이다. 성화는 하나님의 은혜로 되는 것이지만, 인간편에서도 성실히 힘써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마땅한 의무이다. 베드로후서 1:5-7,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 베드로후서 1:10-11,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2] 우리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무슨 명령으로 준 것을 너희가 아느니라.
[2] 이는 우리가 주 예수를 통하여 너희에게 준 어떤 명령을 너희가 앎이니라.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앞절에서 바울 사도가 그들에게 더욱 많이 힘쓰라고 권면한 까닭은 그가 주 예수로 말미암아 그들에게 무슨 명령들을 준 것을 그들이 알기 때문이었다. \'주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말은 \'주 예수의 권위로\'라는 뜻일 것이다. 사도들의 교훈과 명령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로 주어진 것이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3:11부터 4:2까지의 말씀에 나타난 진리들을 요약하면, 첫째로, 성화의 내용이다. 성화는 성도 피차간과 모든 사람에 대한 사랑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또 마음이 견고하여 하나님의 모든 뜻에 순종함으로써 주의 재림 때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되어야 할 것이다.
둘째로, 성화의 방법이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늘 구하며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성화는 또한 인간편에서 성실한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더욱 많이 힘쓰라\'는 교훈을 준다. 우리는 성경에 증거된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며 실천하는 일에 더욱 많이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3-8절, 거룩함을 지키라
앞에서(3:12, 13),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사랑과 거룩함을 위해 기원했던 바울은 3절부터 12절까지에서 거룩함과 사랑에 대해 교훈한다. 먼저, 3절부터 8절까지는 거룩함을 지키라는 교훈이다.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너희의 거룩함이라. 곧 음란을 버리고.
[3]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니라. 너희는 음행을 삼가고
원문에는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본절 초두에 나와서 성도들이 마땅히 행할 바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바를 더욱 많이 힘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하나님은 뜻은 성도들의 거룩함이다. \'거룩함\'이라는 말(하기아스모스)은 \'거룩하여짐 곧 성화(聖化)\'를 의미한다. 죄가 인간 세상의 근본 문제이므로 죄로부터 깨끗해짐 혹은 거룩하여짐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곧 음란을 버리고\'라는 말씀은, 거룩하여짐이라는 것이 무엇보다 음란, 곧 성적 부도덕을 버리는 것임을 보인다. 미혼 청년들이나 독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 결혼한 성도의 경우, 성도의 거룩함은 바른 부부관계에서 나타난다. 바른 부부관계를 벗어나는 것이 불결이요 죄요 음란이다.
[4] 각각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기의 아내 취할 줄을 알고.
[4] 너희 각자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어떻게 자기 자신의 그릇을 소유하는가를 알며
\'자기의 아내를 취한다\'는 원어(토 헤아우투 스큐오스 크타스다이)는 직역하면 \'자신의 그릇을 소유한다 혹은 다스린다\'는 뜻이다. \'자신의 그릇\'이라는 말을 우리말 성경처럼 \'자기의 아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Thayer, 박윤선), \'자신의 몸\'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크리소스톰, 칼빈, NIV). 문맥적으로는 둘 다 가능하지만, 성경에 사용된 예들로는 \'그릇\'이라는 단어가 \'몸\'이라는 말에 더 적합한 것 같다. 성경에는 \'소년들의 그릇\'(삼상 21:5), \'택한 그릇\'(행 9:15), \'진노의 그릇, 긍휼의 그릇\'(롬 9:22, 23), \'질그릇\'(고후 4:7), \'귀히 쓰는 그릇\'(딤후 2:21), \'연약한 그릇\'(벧전 3:7) 등의 표현들이 나오는데, 대체로 그 사람의 몸이나 그 자신을 가리키지 그의 아내를 가리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자신의 그릇을 소유한다 혹은 다스린다\'는 원어는 \'자신의 몸을 소유한다 혹은 다스린다\'는 뜻일 것이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신의 몸을 소유한다 혹은 다스린다\'는 말은 음란에 떨어지지 않고 거룩한 생활을 하는 것을 뜻한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6장에서 음행이 \'자기 몸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라고 표현했고(18절), 또 우리 몸이 \'그리스도의 지체\'이며 \'성령의 전\'이라고 말씀했다(15, 19절). 그러므로 우리 몸을 함부로 죄에 내어놓지 말고 거룩하고 존귀하게 지키고 다스려야 한다.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5]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들과 같이 색욕에 빠지지 말고
원문에서 본절은 \'거룩함과 존귀함으로\'라는 앞절의 말과 대조되는 말이다. 즉 \'각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좇지 말고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자신의 몸을 다스릴 줄 알라\'는 것이다. 이방인들은 하나님을 모르고 하나님의 심판도 모르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도 모르기 때문에 색욕, 즉 결혼관계, 부부관계를 벗어난 부정당한 욕망, 과도한 욕망, 죄악된 욕망을 좇는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마땅히 우리 자신을 통제하고 제재해야 한다. -주여 지켜주시옵소서-
[6] 이 일에 분수를 넘어서 형제를 해하지 말라. 이는 우리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고 증거한 것과 같이 이 모든 일에 주께서 신원하여 주심이니라.
[6] 어떤 문제에 있어서도 정도를 지나쳐 자기 형제를 속이지 말라. 이는 우리가 미리 경고하였고 증거한 바와 같이 주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에 대하여 벌을 주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니라.
\'분수를 넘어서\'라는 말은 흔히 말하는 \'탈선\'과 \'외도(外道)\'를 가리킨다. \'형제를 해한다\'는 말은 문맥상 성적인 탈선과 외도로 인해 형제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말할 것이다. 성도가 이런 잘못에 떨어지지 말아야 할 이유는 이 모든 일에 대해 주께서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징벌은 무섭다.
구약시대에 경건한 하나님의 사람 다윗이 자기의 충성된 신하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 우리아를 고의적으로 전쟁터에서 죽게 한 간음죄와 살인죄를 지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다윗의 집에 칼이 떠나지 않을 것을 선언하셨고, 그 이후 그의 집에는 이복 오빠가 여동생을 강간하고, 이복 동생이 형을 살해하고, 아들이 아버지를 반역하는 일들이 일어났었다(삼하 11장 이하). 범죄로 인해 다윗이 치룬 댓가 혹은 그가 받은 훈련은 매우 혹독하였다. 하나님의 징벌은 참으로 두려운 것이었다.
[7]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은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니.
[7]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것은 부정함에 이르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거룩함에 이르게 하려 하심이니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음란과 불결에 대해 보응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심이 부정케 하심이 아니요 거룩케 하심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구원의 방향, 하나님의 부르심의 방향은 분명하다. 그것은 죄로부터 거룩함으로이지, 죄로부터 부정(不淨)과 불결로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구원과 부르심에 합당하게 거룩하고 깨끗한 삶을 살아야 한다.
[8] 그러므로 저버리는 자는 사람을 저버림이 아니요 너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림이니라.
[8] 그러므로 경시하는 자는 사람을 경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그의 거룩한 영을 주신 하나님을 경시하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과 뜻을 멸시하고 거부하고 저버린다면, 우리는 사람을 저버린 것이 아니요 우리에게 그의 성령을 주신 하나님을 저버린 것이기 때문에, 그 잘못은 크다. 여기에 사람의 죄의 심각성이 있다. 죄는, 비록 인간관계의 죄라 할지라도, 그 성격상 하나님께 대한 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법을 어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죄인에 대해 보응하시고 심판하시는 것이다.
\'그의 성령\'이라는 표현은 요한일서 4:13에도 나오는데, 성령께서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시는\' 영이심을 보이며, 또한 성령께서 \'거룩한 영\'이심을 보인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시며 거룩한 영이시다. 그는 거룩한 영이시기 때문에 구원받은 성도들 속에 거룩한 생각과 거룩한 감정과 거룩한 의지를 주신다. 성령은 우리의 거룩한 정신의 원천이시다.
9-12절, 형제 사랑에 관해
[9] 형제 사랑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너희가 친히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 서로 사랑함이라.
[9] 형제 사랑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으니 이는 너희가 하나님께 몸소 배워 서로 사랑하고 있음이라.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아\'라는 원어는 한 단어인데(데오디닥토스) 그것은 형제 사랑의 교훈이 구약의 하나님의 율법에도 있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주신 새 계명에도 있고 또 그의 성령께서 하나님의 뜻을 깨우쳐 주심에도 있음을 나타낸다. 성령의 감동 속에 주어지는 성경적 설교는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다.
[10] 너희가 온 마게도냐 모든 형제를 대하여 과연 이것을 행하도다. 형제들아 권하노니 더 많이 하고.
[10] 너희가 온 마케도니아에 있는 모든 형제들에게 실로 이것을 행하는도다. 그러나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너희는 더욱 더 많이 하고
형제 사랑 혹은 서로 사랑함의 대상은 제한이 없다. 우리는 몇몇 사람들만 사랑하면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모든 백성, 곧 하나님의 선택하신 모든 사람들, 주께서 피흘려 사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한다. 데살로니가 교인들은 온 마게도냐의 모든 형제들을 사랑했다. 바울 사도는 이제 그들이 더욱 많이 사랑할 것을 권면한다. 우리도 모든 성도들을 대하여 그리고 세월이 지날수록 더 많이 사랑해야 할 것이다.
[11] 또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종용하여 자기 일을 하고 너희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
[11] 또 우리가 너희에게 명한 것같이 너희는 조용히 하고 너희 자신의 일을 행하며 너희 손수 일하도록 힘쓰라.
본절에서, 바울 사도는 몇 가지를 추가로 교훈한다. 첫째로, 그는 그들이 조용한 생활을 할 것을 교훈한다. 조용한 생활이란 불필요한 말을 삼가는 것을 말한다. 말이 많으면 실수도 많게 된다. 잠언 10:19, \"말이 많으면 허물을 면키 어려우나 그 입술을 제어하는 자는 지혜가 있느니라.\" 잠언 20:19, \"두루 다니며 한담하는 자는 남의 비밀를 누설하나니 입술을 벌린 자를 사귀지 말지니라.\"
둘째로, 바울 사도는 그들이 자기 일을 할 것을 교훈한다. 그것은 각자 자기의 일에 성실하라는 교훈이다. 잠언 18:9, \"자기의 일을 게을리 하는 자는 패가(敗家)하는 자의 형제니라.\" 잠언 27:23, \"네 양떼의 형편을 부지런히 살피며 네 소떼에 마음을 두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그들이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라고 교훈한다. 사람은 범죄한 이후 얼굴에 땀이 흘러야 먹고 살도록 작정되었다(창 3:19). 그러므로 손으로 부지런히 일하는 것은 인생의 바른 모습이다.
잠언 6: 6-11, \"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나?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잠언 10:4, 5, \"손을 게으르게 놀리는 자는 가난하게 되고 손이 부지런한 자는 부하게 되느니라. 여름에 거두는 자는 지혜로운 아들이나 추수 때에 자는 자는 부끄러움을 끼치는 아들이니라.\"
[12] 이는 외인을 대하여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12] 이는 외부 사람들에게 단정히 행하고 또한 아무것도 궁핍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이와 같이, 성도가 조용한 생활, 자기 일에 성실한 생활, 손으로 일하기를 힘쓰는 생활을 할 때, 믿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바르고 단정한 모습을 보일 수 있고, 또 물질적 궁핍함도 없을 것이다. 천국을 소망하는 성도들은 지상에서도 바르게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결코 게으르거나 낭비하는 생활을 해서는 안된다.
성도는 물질 생활에도 지혜가 필요하다. 결코 낭비하지 말고, 버는 것보다 항상 적게 쓰는 것이 지혜이다. 또 사람은 자신의 늙을 때를 대비하여 저축하는 것이 지혜이다. 또한 자녀들에게 과도히 주려 하지도 말고 노년에 그들에게 의존하려 하지도 않는 것이 지혜이다. 또 자녀들로 하여금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게 하는 것도 지혜이다. 또한 오늘날 기업들의 파산을 통해 배우는 바와 같이, 우리는 무슨 일이든지 자기의 분수에 넘치게 벌리지 말고 성실하게 조금씩 확장하는 것이 지혜이다.
결론적으로, 3절부터 12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음란을 버리고 자신의 몸을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지키고 다스려야 한다. 미혼 청년들이나 독신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신을 절제하고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 또 결혼한 이들은 부부관계를 벗어나는 음란에 떨어지지 않도록 힘써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의 보응과 징벌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거룩함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가르치신 대로 모든 성도들을 대해 사랑해야 한다. 또 우리의 사랑이 주의 모든 백성들에게 확장되도록 해야 하고 또 세월이 갈수록 그 사랑이 더 많아지도록 힘써야 한다. 성도의 이상적 삶은 서로 사랑하는 삶이다.
셋째로, 우리는 각자 조용히 자기 일에 성실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불필요한 말, 특히 남에 대한 사사로운 말을 삼가며, 자기가 해야 할 일에 성실하고, 손으로 일하기를 힘써야 한다. 성도는 게으르게 일하며 음식을 먹지 말고, 부지런히 땀 흘려 일하며 음식을 먹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의로운 천국을 소망하는 자는 지상에서도 바르고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13-18절, 죽은 자들의 부활
[13]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3] 형제들아, 잠든 자들에 관해서는 너희가 모르게 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가 소망이 없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는 것이라.
\'자는 자들\'은 죽은 자들을 묘사한다. 죽은 자를 자는 자라고 표현한 것은, 죽은 자가 자는 자와 모습이 비슷하기 때문이요, 또한 자는 자가 깨듯이 죽은 자도 마지막 날 부활할 것이기 때문이다. \'알지 못함을 원치 않는다\'는 말씀은, 죽은 자의 부활의 진리가 성도들이 알아야 할 진리요 소망의 내용임을 보인다. \'소망 없는 다른 이\'라는 말씀은, 내세(來世)나 부활이나 영생에 대한 소망을 갖지 못하고 죽음을 인생의 끝으로 생각하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소망이 없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 슬퍼할 뿐이다. 그러나 부활의 소망을 가진 성도들은 믿는 가족이나 다른 성도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의 죽음은 슬프고 괴로운 사건이 아니고 영광스런 천국의 안식에 들어간 기쁘고 복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14]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 이와 같이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 하나님이 저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14] 예수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신 것을 우리가 믿는다면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예수 안에서 잠든 자들도 그와 함께 데리고 오시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우리가 다른 성도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보인다. \'우리가 예수의 죽었다가 다시 사심을 믿을진대\'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 역사적 사실이며 믿음의 기본적 내용임을 나타낸다. 모든 성도는 이 사실을 믿어야 한다. 고린도전서 15:3, 4의 증거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복음의 기본적 내용이다. 또 로마서 10:9의 말씀대로, 사람은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마음으로 믿어 구원을 받는다. 또 고린도전서 15:14, 17의 증거대로,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다면 우리의 믿음은 헛되고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다.
\'예수 안에서 자는 자들도\'라는 구절에서 \'예수 안에서\'라는 원어(디아 투 예수)는 \'예수로 말미암아\'라는 뜻이며, 다시 번역하면 \'자는 자들도 예수로 말미암아\'이다. 그것은 죽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죄씻음과 새 생명 주심의 사역으로 말미암아 부활할 것을 뜻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저와 함께 데리고 오셔서 부활시키실 것이다.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 강림하실 때까지 우리 살아 남아 있는 자도 자는 자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15]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 남아 있는 우리가 잠들어 있는 자들보다 결단코 앞서지 못하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죽은 성도들을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데려오시는 이유를 보인다. 본문은 예수님을 \'주\'라고 부른다. 신약성경에서 예수님에 대해 \'주\'(퀴리오스)라는 말이 667회 사용되었다고 한다(J. B. Smith, Greek-English Concordance to the NT, p. 210). 사도행전에서만 108회 사용되었다고 한다. 데살로니가전서에서는 24회(전통 사본은 25회), 데살로니가후서에서는 22회(전통 사본은 21회) 사용되었다. 본문 13절부터 18절까지에서도 5번이나 사용되었다. 예수님은 우리의 주님이시다.
본문은 주께서 다시 내려오실 것을 말씀한다. 주님의 재림의 진리는 특히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에서 강조된 진리이다. 거의 매 장마다 재림의 진리가 계시되어 있다. 본문 15, 16절 외에도, 1:10,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그의 아들이 하늘로부터 강림하심을 기다린다고 말하니 이는 장래 노하심에서 우리를 건지시는 예수시니라.\" 2:19,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3:13, \"너희 마음을 굳게 하시고 우리 주 예수께서 그의 모든 성도와 함께 강림하실 때에 하나님 우리 아버지 앞에서 거룩함에 흠이 없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5: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음성과 하나님의 나팔 소리와 함께 하늘로부터 친히 내려오시리니 그러면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원문에서는 본절 초두에 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15절 초두에 나오는 \'왜냐하면\'이라는 말과 같은 뜻으로 반복 강조된 것 같다. 즉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을 하나님께서 주와 함께 데리고 오실 이유를 재차 설명한다. \'주께서 . . . 친히\'라는 원어(아우토스 호 퀴리오스)는 이 세상에 오셨던 주님, 곧 성육신하시고 기적들을 행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셨던 바로 그 주님 자신께서 오실 것임을 강조한다.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라는 말씀은 주의 재림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사건, 곧 사람의 눈으로 볼 수 있는 사건일 것을 보인다. 이것은 사도행전 1:11의 증거와 같다. 거기에 보면,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고 기록되어 있다.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라는 말씀은 또한 주의 재림이 시끄러운 사건일 것을 나타낸다. 성경에 예수 그리스도의 은밀한 공중 재림과 휴거라는 관념은 없다. 그 때 죽은 성도들의 부활과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는 일이 있을 주의 재림은 은밀한 사건이 아니고 온 세계에 시끄럽고 떠들석한 사건이 될 것이다.
주의 재림 때에 일어날 첫번째 일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고린도전서 15:51, 52,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우리는 죽은 자들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을 믿는다.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도 저희와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17] 그리고 나서 살아 남아 있는 우리도 공중에서 주와 만나기 위하여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려올라 가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영원히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의 재림 때에 일어날 두번째 일은 살아 있는 성도들의 변화이다. 고린도전서 15:52,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도 변화하리라.\"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이렇게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된 성도들은 다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흔히 \'휴거\'라고 부른다. \'영접한다\'는 원어(아판타오)는 \'만난다\'는 뜻인데,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가 공중에서 주를 만난다는 것은 우리말 번역대로 재림의 주님을 영접하는 의미일 것이다. 마태복음 24:30, 31에 보면,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 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저가 큰 나팔 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저희가 그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고 하셨다.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은 성도들에게 큰 복이다. 주께서는 세상에 아주 오셔서 친히 우리들과 함께 계실 것이고 다시는 우리를 떠나가지 않으실 것이다. 재림의 주님, 영광의 주님과 함께 거하는 곳은 아무 부족이 없는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곳이 될 것이다. 주님을 모신 그 곳은 새 세계가 될 것이다. 요한계시록 21:3, 4에는,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가로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저희와 함께 거하시리니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고 증거했다.
[18] 그러므로 이 여러 말로 서로 위로하라.
[18] 그러므로 이러한 말로 서로 위로하라.
주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들의 영광스런 부활은 성도들에게 큰 소망과 위로이다. 성도들은 이 진리와 소망으로 인하여 동료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지 않고 위로를 받는다. 로마서 12:12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라\'고 말씀했다. 우리는 이 진리의 말씀으로 서로 위로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13절부터 18절까지는 몇 가지의 귀한 진리들을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주님이시다. \'주\'라는 말은 온 세상의 주관자 곧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신적 명칭이다. 우리에게는 신적 구주, 능력의 주께서 계신다. 신적 구주를 모신 자에게는 부족함이 없다.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이다. 은금보화도 그의 것이다. 먹을 것과 입을 것도 그가 주신다. 우리의 생명과 건강이 그의 것이다. 오, 귀하신 구주, 우리 주님 예수님!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확실하다. 이것은 본서신에 강조된 진리이다. 그는 하늘로부터 우리 눈으로 볼 수 있도록 오실 것이며, 또 큰 능력과 영광으로 오실 것이다.
셋째로, 주께서 다시 오실 때, 죽은 성도들은 부활하고 산 성도들은 변화될 것이다. 죽은 자들의 부활, 곧 몸의 부활은 성경의 기본 진리이다. 사도신경의 고백대로,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도의 죽음을 슬퍼하지 말고, 우리 자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한다. 몸의 부활을 믿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서로 위로하며 소망 중에 기쁨을 가지자.
5장: 재림의 갑작스러움
1-11절, 깨어 근신하라
[1-2]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1-2] 그러나 형제들아, 그 때와 시기에 관해서는 너희에게 쓸 필요가 없으니 2 이는 주의 날이 밤에 도둑같이 오리라는 것을 너희 자신이 정확히 알고 있기 때문이니라.
\'때와 시기\'는 예수님의 재림의 때를 가리키며 그 때는 또한 죽은 자들이 부활하고 산 자들이 변화되는 때이기도 하다. 주의 재림의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쓸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에 관해 그들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의 날\'은 구약 성경에 \'여호와의 날\'로 자주 언급된 날이다. 그 날이 밤에 도적같이 온다는 비유적 표현은 주님 자신의 표현에서 비롯된 것으로서 재림의 갑작스러움을 나타낸다. 마태복음 24:42, 43,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 너희도 아는 바니 만일 집 주인이 도적이 어느 경점에 올 줄을 알았더면 깨어 있어 그 집을 뚫지 못하게 하였으리라.\" \'자세히 안다\'는 말에서 \'자세히\'라는 원어(아크리보스)는 \'정확히, 충분히\'라는 뜻이다.
[3]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3]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고 말할때에, 아이밴 여인에게 진통이 오듯 갑작스런 멸망이 그들에게 임하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임한다는 말을 좀더 설명한다. \'평안하다, 안전하다\'는 말은 심판과 멸망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안일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인다. 주께서도 재림 직전의 세상의 모습을 묘사하시면서 노아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롯의 때와 같이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는다고 표현하셨다(마 24:37, 38; 눅 17: 26-28).
그 때 멸망이 홀연히 임하게 될 것이다. 그 멸망의 갑작스러움은 마치 잉태된 여인에게 해산의 고통이 이름과 같을 것이다. 홀연히 임하는 그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 주의 재림은 세상의 대종말이 될 것이다. 주의 재림의 날은 악인들에게는 멸망의 날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지금 준비되어야 한다. 우리의 개인의 죽음도 예상할 수 없이 오며, 주의 재림도 갑작스럽게 올 것이다.
[4]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4]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니 그 날이 너희를 도둑같이 덮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라는 말은 본서신에서만 14회나 나온다(1:4; 2:1, 9, 14, 17; 3:7; 4:1, 10, 13; 5:1, 4, 12, 14, 25). 이것은 매우 친근한 호칭이다. 예수께서도 우리를 \'형제들\'이라고 부르셨다. 마태복음 28:10,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모든 성도는 주 안에서 형제이며 자매이다. 그들은 다같이 하나님의 자녀들이며 하나님의 가족들이다.
본문은 어두움에 있는 자들에게는 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할 것이지만, 어두움에 있지 않는 자들에게는 그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며, 예수 믿고 구원얻은 자들은 어두움에서 빛으로 나온 자들이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주의 재림의 날이 도적같이 임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한다. 어두움에 있는 자들은 안일하게 살다가 갑자기 멸망을 당한다. 그러나 빛의 자녀들은 준비하며 살다가 재림을 맞이할 것이다.
[5-6] 너희는 다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라 우리가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이들과 같이 자지 말고 오직 깨어 근신할지라.
[5-6] 너희는 모두 빛의 자녀들이며 낮의 자녀들이라. 우리는 밤이나 어두움에 속하지 아니하노라. 6 그러므로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이 자지 말고 깨어 있어 정신을 차리자.
본문은 빛의 아들, 낮의 아들과, 어두움의 아들, 밤의 아들을 서로 대조시킨다. 후자는 세상을 가리키며 구원받기 전의 우리의 상태를 가리킨다. 밤은 안좋다. 밝은 것이 좋다. 범죄자들이 밤을 좋아하지만, 그것은 밤이 좋아서가 아니고 자기 행위를 감추기 위해서일 뿐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어두움에 속하지 않고 빛에 속한다. 그들은 어두움의 아들이나 밤의 아들이 아니고 빛의 아들이요 낮의 아들이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키고, 빛은 지식과 의와 선과 진실을 가리킨다.
그런데 빛의 아들, 낮의 아들에게는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것은 자지 말고 깨어 근신해야 한다는 의무이다. 성도가 영적으로 잔다는 말은 죄를 짓고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한다는 뜻이다. 반면에 깨어 근신한다는 것은 정상적 신앙 생활, 곧 죄짓지 않고 성실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의롭게, 진실하게, 선하게 사는 생활을 가리킨다. 성도는 깨어 근신해야 한다. 정상적 신앙 생활을 힘써야 한다.
[7-10]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되 우리는 낮에 속하였으니 근신하여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의 투구를 쓰자. 하나님이 우리를 세우심은 노하심에 이르게 하심이 아니요 오직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사 우리로 하여금 깨든지 자든지 자기와 함께 살게 하려 하셨느니라.
[7-10] 이는 자는 자들은 밤에 자고 술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기 때문이라. 8 그러나 우리는 낯에 속하니 정신을 차리고 믿음과 사랑의 흉배를 붙이고 구원의 소망인 투구를 쓰자. 9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진노를 받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셨기 때문이라. 10 주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은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게 하시려는 것이라.
깨어 근신하는 생활을 본절에서는 믿음, 사랑, 소망의 생활로 묘사하였다. 믿음, 소망, 사랑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 생활의 모습이다. 9절 초두에는 원문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구원의 투구를 써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노하심에 이르게 정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게 정하셨기 때문이다. 범죄하는 자는 하나님의 진노에 이르게 될 것이나,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사는 자는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구원받은 자이다.
예수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신 목적이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우리가 깨든지 자든지 주와 함께 살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 살고 예수님과 함께 사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없다. \'깨든지 자든지\'라는 말은 문자적인 의미로 잠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비유적으로 죽음을 가리킬 것이나, 그 어는 쪽도 다 가능하다. 구원받은 성도는 항상 주 안에 거하며 주와 함께 산다. 그것은 성도의 정상적 신앙 생활을 의미한다.
[11] 그러므로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11] 그러므로 너희가 행하고 있는 것처럼 서로 위로하고 서로를 세워 주라.
\'피차 권면하라\'는 원어(파라칼레이테 알렐루스)는 4장 끝에 \'서로 위로하라\'는 말과 동일하다. \'피차 덕을 세우라\'는 원어는 \'서로에게 유익을 주어 서로를 건립하라\'는 뜻이다. 그것은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말씀으로 위로하고 격려함으로써 이루어진다. 본절의 교훈은, 성도가 자신의 신앙 성장에만 힘쓸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을 위로, 권면, 격려하여 서로의 신앙 성장을 힘써야 함을 보인다.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는 말은 바울 사도의 교훈이 새로운 것이 아니고 이미 그들이 행하고 있는 바임을 말한다. 그것은, 바울 사도의 교훈이 그들의 현재의 행위를 인정하면서 준 교훈임을 나타낸다. 이 말씀도 우리에게 교훈이 된다. 우리도 다른 이들을 권면할 때 그들의 현재의 선한 행위를 무시하면서가 아니고 그것을 인정하면서 권면해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11절까지는 몇 가지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주의 날, 곧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날이 도적같이 올 것이다. 둘째로, 그러므로 우리는 깨어 근신해야 한다. 깨어 근신하는 삶은 빛의 삶이며, 믿음, 소망, 사랑의 삶이요, 항상 주와 함께하는 삶이다. 곧 그것은 성도의 정상적인 신앙 생활을 가리킨다. 셋째로, 한 걸음 더 나아가 우리는 자신만 깨어 근신할 뿐만 아니라, 서로 위로하고 권면하고 덕을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즉 믿음과 소망과 사랑의 말씀으로 서로의 신앙 성장을 위하고 서로의 신앙 생활을 건립하기를 힘써야 하는 것이다.
12-15절, 교회의 건립
교회는 교인들이 모인 곳이며, 교회 건립은 교인들의 인격 건립이다. 본문은 교인들이 그들의 지도자들을 존중하고 서로 화목하며 서로의 인격을 건립하도록 돌아보아야 할 것을 교훈하는 말씀이다.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12]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간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훈게하는 사람들을 알아서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을 가리킨다.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라는 말은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이 교회를 위해, 성도들을 위해 수고하는 자들이며 또 수고할 때 그 직분의 의미가 있음을 보인다. 교회의 모든 직분은 봉사직이다. 수고하지 않는 자에게는 그의 직분이 영광이 아니고 부끄러움일 뿐이다.
교회의 목사와 장로들은 \'주 안에서\' 교인들을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를 믿는 믿음 안에서, 주의 말씀 진리 안에서\'라는 뜻이다. 주 예수께 대한 바른 믿음과 성경적 진리를 떠나서는 목사와 장로의 권위도, 설교의 권위도 없다. 교회의 직분은 오직 주 안에서, 성경적 교훈과 믿음 안에서만 권위가 있다.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이란 치리권과 교훈권을 가진 자들, 즉 목사와 장로들을 뜻한다. \'권한다\'는 원어(누데테오)는 \'훈계한다, 경고한다\'는 뜻으로 일반적인 권면보다 더 강한 의미를 지닌다.
[13]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
[13] 그들의 하는 일로 인하여 사랑으로 그들을 극진히 존경하라. 너희는 서로 화목하라.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라는 원어(디아 토 에르곤 아우톤)는 \'그들의 일(사역) 때문에\'라는 뜻이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라\'는 말씀은 하나님을 사랑함이 곧 말씀을 사랑함이며 그것이 또한 교역자를 사랑하는 것으로 나타남을 보인다. 하나님의 일은 구원의 복음을 통해 영혼들을 구원하는 말씀 사역이다. 예수께서는 전도하기 위해 세상에 오셨다(막 1:38). 또 그는 제자들에게 모든 족속에게 전도하여 그들을 제자로 삼는 일을 부탁하셨다(마 28:19, 20). 그러므로 하나님의 교회에서 말씀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일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은 없다. 말씀 사역이 가장 귀하기 때문에, 성도들은 말씀의 일꾼들을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 말씀의 봉사자들에 대한 성도들의 태도는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태도이며 또한 하나님께 대한 태도이다(마 10:40; 25:40, 45).
본문은 또 \'너희 끼리 화목하라\'고 말씀한다. 주 예수께서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라고 말씀하셨고(마 5:9), 또 제자들 앞에서 기도하시기를,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라고 하셨다(요 17:21).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의 내적 분열을 책망하시면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씀했고(고전 1:10), 또 에베소 교회에게는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가르쳤다(엡 4:2, 3). 또 갈라디아서에서는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투기\'를 육신적 일들로 열거하였고 이런 일들을 행하는 자들은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고 경고하였다(갈 5:19-21). 또 로마서에서는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고 말씀했다(롬 12:18).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교회의 화평과 화목을 매우 소원하신다. 그것은 교회가 진정으로 서로 사랑하는 모습이다. 물론, 교회의 화목을 위해서는 우선 목사와 장로들이 바로 서야 하며, 그 다음에는 오늘 본문이 가르친 대로 교인들이 목사와 장로들을 가장 귀히 여겨야 하며, 그 다음에 교인들이 서로 화목하기를 힘써야 한다.
[14] 또 형제들아 너희를 권면하노니 규모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14] 형제들아, 너희에게 권고하노니, 무질서한 자들을 훈계하며
낙담한 자들을 위로하고 약한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에게 오래 참으라.
본문은 우리가 서로 돌아봄으로써 다른 성도들을 인격적으로 건립하고 교회를 세워나가야 할 것을 가르친다. 본문은 특히 우리가 돌아보아야 할 부류의 사람들을 언급한다. 첫째는 규모 없는 자들이다. \'규모 없는\'이라는 원어(아탁토스)는 \'자기 지위를 저버린 군인\'을 가리키는 말로서 \'의무를 소홀히 하는, 무질서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교회에는 성도로서의 본분을 저버리고 성경의 교훈을 무시하고 무질서하게 행동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을 권계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권계한다\'는 원어(누데테오)는 \'훈계한다, 경고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내버려두거나, 그들이 어떤 교회적 직분이나 사회적 신분을 가졌다고 해서 그들에게 아첨하지 말고, 그들을 훈계하고 경고해야 한다.
둘째는 낙심된 자들이다. \'마음이 약한\'이라는 원어(올리고프쉬코스)는 \'낙심된, 낙담한\'이라는 뜻이다. 교회에는 마음으로나 환경적인 이유로 낙심하고 낙담하는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을 안위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우리는 그들 옆에서 그들에게 위로의 말, 격려의 말을 해주어야 한다.
셋째는 약한 자들이다. \'힘이 없는\'이라는 원어(아스데노스)는 \'약한\'이라는 뜻이다. 이 단어는 몸이 연약하고 아프거나 믿음이 약하거나 심지어 경제적 어려움을 의미할 수 있다. 교회에는 몸이 병약한 자들, 믿음이 약한 자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자들이 있다. 그런 자들을 붙들어주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붙들어준다\'는 원어(안테코마이)는 \'견고히 붙잡다, 열심으로 보살피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약한 자들을 붙들어주고 열심으로 보살펴야 한다.
덧붙여, 본문은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으라\'고 말씀한다. 어린 아이가 눈에 보이지 않게 조금씩 자라듯이, 우리의 신앙 인격의 성장도 그러하다. 우리의 성화(聖化)와 인격의 성숙은 이 세상에서 매우 불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지 못한다면, 우리의 인간 관계는 잘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오래 참으시듯이, 우리도 서로를 향해 오래 참아야 한다.
본절의 교훈은 한마디로 서로 돌아봄으로써 교회를 영적으로 건립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심방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있다. 여기에 교회 안에서 교역자들, 장로들, 권사들, 권찰들, 교사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가가 드러난다. 심방의 대상은 특히 성도의 의무를 다하지 못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 낙심된 자들, 병약한 자들, 믿음이 약한 자들, 경제적 어려움에 처한 자들이다. 만일 우리 주위에 이런 자들이 있다면, 그리고 우리에게 믿음과 건강과 기쁨과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지체치 말고 그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다른 성도의 인격을 건립하며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워나가야 한다.
[15] 삼가 누가 누구에게든지 악으로 악을 갚지 말게 하고 오직 피차 대하든지 모든 사람을 대하든지 항상 선을 좇으라.
[15]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오히려 너희 자신들 가운데서와 모든 사람들에게 선한 것을 항상 따르라.
본절은 우리에게 악을 행하는 자에게 악으로 보복하지 말고 성도 상호간이나 모든 사람 즉 불신자들에 대해서까지도 항상 선을 행하라고 가르친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12장에서도 가르치기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했다(롬 12:20, 21).
이것은 주님 자신의 가르침과 동일하다. 마태복음 5장에서 주께서는 가르치시기를, \"또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 누구든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 대며 또 너를 송사하여 속옷을 가지고자 하는 자에게 겉옷까지도 가지게 하며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네게 구하는 자에게 주며 네게 꾸고자 하는 자에게 거절하지 말라.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마 5:38-44).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5절까지의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로, 성도들은 목사와 장로들을 그들의 일 때문에 가장 귀히 여겨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교회의 화목을 지켜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서로 돌아봄으로써 교회를 세워야 한다. 특히, 교인의 의무를 소홀히 하고 무질서하게 행하는 자들을 권계하고, 낙심된 자들을 안위하고, 약한 자들을 열심히 보살피고, 모든 사람에 대해 오래 참아야 한다. 넷째로, 우리는 남에게 보복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향해 항상 선을 행해야 한다. 이상의 네 가지를 잘하게 될 때, 교회는 아름답게 건립될 것이다.
16-22절, 온전한 삶
모든 성경이 그러하지만, 오늘 본문도 성도의 온전한 삶의 한 부분을 교훈하는데, 특히 기쁨과 기도와 감사의 삶, 하나님의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존중하는 삶, 악을 버리고 선만 취하는 삶을 강조한다.
[16] 항상 기뻐하라.
[16] 항상 기뻐하라.
기쁨은 슬픔과 대조된다. 인간의 슬픔과 슬픈 일들은 죄의 결과이지만, 기쁨은 죄사함과 구원의 결과이다. 성도의 기쁨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때문에, 즉 그의 십자가 대속으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의롭다 하심을 얻고 장차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되어 천국에서 영생할 것이기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성도가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성도의 기쁨이 그의 환경이나 육신의 조건 때문이라면, 항상 기뻐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구원이 성도의 기쁨의 이유가 아니라면, 그가 어떻게 건강할 때뿐 아니라 아플 때도, 물질적 여유가 있을 때뿐 아니라 가난할 때도, 또 평안할 때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성도는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할 수 있고 또 그렇게 기뻐해야 한다.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17] 쉬지 말고 기도하라.
기도는 믿음의 표현이다.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은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의지하는 행위이다. 잠언 3:6에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라\'고 말씀했다. 성도는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하고 의지해야 하기 때문에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감사할 때는 감사의 기도를, 자신의 실수와 연약을 깨달을 때는 고백의 기도를, 그리고 무엇이 꼭 필요할 때마다 간구의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특히 성도의 믿음은 어려운 처지에서 낙망하지 않고 기도하며 간구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믿음이 있는 자는 낙심하지 않고 기도할 것이다. 그러나 성도에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낙심치 않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 성도는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께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한다. 물론 기도하는 것이 때때로 힘든 일이지만, 성도에게 기도는 결코 짐스런 일이 아니고 복된 특권이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힘을 얻는다.
[18]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18]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도가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것도 하나님 안에서만, 주 안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주권과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할 때만 가능한 일이다. 이 세상의, 아니 온 우주의,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다. 로마서 11:36, \"이는 만물[모든 것]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사랑하시고 성도들에게 좋은 것을 주실 것을 알기 때문에,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했다.
그러므로 성도에게는 고난과 환난도 유익하다. 성경을 몇 구절 읽어보자.
욥기 23:10,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같이 나오리라.\"
시편 119:67, \"고난 당하기 전에는 내가 그릇 행하였더니 이제는 주의 말씀을 지키나이다.\"
시편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린도후서 1:8, 9,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
고린도후서 12:7-9,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自高)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내게서 떠나기 위하여 내가 세 번 주께 간구하였더니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지라.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성도는 평안하거나 형통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지만, 또한 고난 중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한다. 왜냐하면 고난은 성도를 진실하게 회개케 만들고 거룩하게 하고 겸손하게 하고 하나님만 절대적으로 의지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범사에 감사할 수 있고 그렇게 감사해야 한다.
본문은 이런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의지하면서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며 살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주신 큰 복과 특권이다. 우리 모두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복과 이 특권을 마음껏 누리자.
[19] 성령을 소멸치 말며.
[19] 성령을 소멸하지 말라.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은 성령의 감동과 감화와 깨닫게 하심을 억제하거나 억누르지 말라는 뜻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성령의 생각을 육신의 생각과 구별해야 한다. 성령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 말씀에 합한 생각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의롭고 선하고 진실하게 생각하는 생각은 성령께서 주시는 생각이다. 물론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는 성경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는 점들도 있다. 그런 때에는 우리가 각각 소신껏 행해야 한다.
로마서 14:5, \"혹은 이날을 저날보다 낫게 여기고 혹은 모든 날을 같게 여기나니 각각 자기 마음에 확정할지니라.\" 14:22,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또 초대 예루살렘 교회처럼 우리는 때때로 많은 변론 후에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기도 한다(행 15장). 그러나 성경에 명확히 계시된 것에 대해서는 분명해야 한다. 죄와 의, 진리와 비진리, 정통과 이단은 명확히 구별되어야 한다.
이에 더하여, 성령의 생각은 항상 질서 있는 생각이다. 하나님은 결코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다. 고린도전서 14:29-33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예언하는 자는 둘이나 셋이나 말하고 다른 이들은 분변할 것이요 만일 곁에 앉은 다른 이에게 계시가 있거든 먼저 하던 자는 잠잠할지니라. 너희는 다 모든 사람으로 배우게 하고 모든 사람으로 권면을 받게 하기 위하여 하나씩 하나씩 예언할 수 있느니라. 예언하는 자들의 영이 예언하는 자들에게 제재를 받나니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요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그렇기 때문에 자기의 형편과 처지에 전혀 맞지 않는 과분한 생각이나, 공동체의 화평과 일치를 전혀 고려치 않는 무질서한 생각이나, 남의 의견들을 잘 듣고 이해하려고 하지 않고 자신의 견해만 주장하고 고집하는 독단적, 독선적 생각 등은 성령의 생각이라고 여겨지지 않는다. 그런 생각들은 확실히 육신의 생각이다.
[20] 예언을 멸시치 말고.
[20] 예언을 멸시하지 말라.
사도 시대에는 예언의 은사가 있었다. 예언들은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교훈적 내용들이었다. 예언은 물론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일 수도 있었다. 교훈적 내용이든지 미래의 일에 대한 것이든지 예언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성도가 그것을 멸시하거나 경시해서는 안되었다. 예언을 멸시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사도들을 통한 하나님의 예언들은 책들에, 즉 신약성경책들에 충족하게 기록되었다. 오늘날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교훈의 말씀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다\'(딤후 3:16).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성경적 사상, 성경적 교훈, 성경적 교리, 성경적 설교를 멸시치 말고 존중하고 믿고 받고 행하고자 힘써야 한다.
[21]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21] 모든 일을 시험하여 보고 선한 것을 붙잡으라.
잠언 14:15에는, \"어리석은 자는 온갖 말을 믿으나 슬기로운 자는 그 행동을 삼가느니라\"고 말씀했다. 지혜로운 성도는 사람들의 모든 말을 믿지 말고 그것들을 검토하고 판단하고 분별해야 한다. 그러므로 요한일서 4:1에는,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고 하였다. 오늘날 사탄과 악령들의 역사가 많은, 배교와 혼란의 시대에, 우리는 선과 악을, 의와 불의를, 진리와 거짓을, 정통 교리와 이단을 분별해야 하고, 오직 \'좋은 것\' 곧 선과 의와 진리와 정통 교리만을 택하고 취하고 붙잡아야 한다.
[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22] 악은 어떤 형태든지 피하라.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라는 원어(아포 판토스 에이두스 포네루)는 \'모든 형태의 혹은 모든 종류의 악을\'이라는 뜻이다. 우리는 이단의 악, 타협의 악, 세속주의의 악, 불결의 악, 거짓의 악, 불충성의 악, 나태의 악, 미움의 악, 시기의 악, 분열의 악 등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악한 생각도, 악한 말도, 악한 행위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음란한 옷차림의 악, 육감적이고 광란적인 세상 음악의 악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모든 형태의 혹은 모든 종류의 악을 버려야 한다.
결론적으로, 16절부터 22절까지는 우리의 온전한 삶을 위해 몇 가지 교훈을 준다. 첫째로, 우리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말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다. 둘째로, 우리는 성경 말씀과 성령의 감동을 멸시하거나 억제하지 말고 존중하고 그것에 순응하고 복종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모든 형태의 혹은 모든 종류의 악을 다 버리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만 취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 모두는 본문이 가르친 이런 온전한 삶을 힘쓰자.
23-24절, 온전히 거룩케 하시는 하나님
[23]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 너희로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또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전되기를 원하노라.
[23] 바로 그 화평의 하나님께서 너희를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고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까지 책망할 것이 없게 보존되기를 하나님께 기도하노라.
\'평강의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평강의 근원이 되시고 평강을 내려주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평강은 하나님의 나라의 특징이다. 로마서 14:17,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죄는 불안과 불행과 죽음을 가져왔으나, 의는 평안과 행복과 생명을 가져온다. \'평강의 하나님이 친히\'라는 말씀은 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는 일 즉 사람의 구원의 일은 하나님께서 친히 행하시고 이루시는 일임을 증거한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성도의 완전한 거룩은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일이다. \'너희로\'라는 말씀은 \'예수 믿는 너희, 구원받은 너희, 죄사함 받은 너희\'를 가리킨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성도들을 온전히 거룩하게 하시기를 기원하였다. 법적인 거룩은 이미 이루어졌다. 히브리서 10:10, \"이 뜻을 좇아 예수 그리스도의 몸을 단번에 드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함을 얻었노라.\" 그러나 실제적 거룩이 필요하다. 실제적으로 성도는 아직 완전히 성화되지 못했다. 우리 속에는 아직도 죄성이 있다. 구원받은 성도의 현재의 삶은 성화의 과정이다. 고린도후서 7: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성도는 몸이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될 때 죄성이 전혀 없는 완전 성화의 상태에 들어갈 것이다.
바울 사도는 또한 \"너희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강림하실 때에 흠 없게 보존되기를 원하노라\"고 말씀한다. 사람은 영만 가진 존재가 아니고 육도 가진 영육의 존재이다. 육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물질 세계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심히 좋았었다(창 1:31). 육이 나쁜 것이 아니고 인간 본성에 있는 죄성이 나쁘다. \'영과 혼\'은 서로 다른 것을 가리키지 않고 같은 말을 반복한 것이다. 성경에서 영과 혼은 같은 것을 가리키는 두 개의 다른 말에 불과하다. 그 두 말은 성경에서 구별 없이, 교대적으로 사용된다(전 12:7; 마 10:28; 눅 23: 46; 창 35:18; 눅 8:55; 왕상 17:21, 22; 히 12:23; 계 6:9 등).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성도들은 죄 없는 영육의 존재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영생할 부활의 몸이며 영화롭게 변화된 몸이다.
[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24] 너희를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그가 또한 이것을 행하시리라.
부르신다는 말씀은 구원과 믿음과 영생으로 부르신다는 말씀이다. \'미쁘시다\'는 말은 \'신실하다, 믿을 만하다\'는 뜻이다.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 속에 구원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그 구원을 완성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불완전하거나 중도에 실패하는 구원이 아니다. 그는 죄인을 실제로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는 죄인들의 모든 죄를 법적으로 깨끗케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들을 실제적으로도 흠과 점이 없는 거룩한 인격자들이 되게 하신다. 구원의 목표는 완전 성화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과 성도의 부활과 변화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다. 성도들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의 사역이다. 빌립보서 1: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히브리서 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물론, 인간편에서 우리는 성실히 응답하여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거룩한 삶을 살기를 힘써야 한다.
25-28절, 교역자를 위한 기도, 서로 문안, 성경읽기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복음 사역은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러므로 복음 사역에는 하나님의 도우심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절실히 필요하다. 복음 사역자들에게는 성도들의 기도가 매우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은 성도들의 열심 있는 기도로 이루어질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방편이다. 그러므로 담임 목사를 위해 기도하라. 담임 목사의 설교와 목회 사역을 위해 기도하라. 또한 부목사들을 위해, 교사들을 위해, 권찰들을 위해 기도하라.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힘있게 이루어질 것이다.
[26]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에게 문안하라.
[26] 거룩한 입맞춤으로 모든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예수 믿고 구원받은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들이므로 시시때때로 서로 문안해야 한다. \'거룩하게 입맞춤으로\'라는 말은 \'거룩한 사랑으로\'라는 뜻이다. 우리는 진실하고 깨끗한 사랑의 심정으로 서로 사랑하며 서로 문안해야 한다. 이 세상에는 슬픔과 고난이 많으므로, 우리는 서로 돌아보아 위로하며 격려하고 위하여 기도하고 도와야 할 것이다.
[27-28]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를 명하노니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27-28] 내가 주를 힘입어 너희에게 부탁하노니 이 편지가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 읽혀지게 하라. 28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헤가 너희와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바울 사도는 끝으로 \'모든 형제에게 이 편지를 읽어 들리라\'고 명령한다. 전통 사본에는 \'모든 거룩한 형제들에게\'라고 되어 있고, 28절 끝에는 \'아멘\'이라는 말이 있다. 성도들은 성경을 읽어야 하고 들어야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의 의무이다. 성도가 이 의무를 다하지 못한다면 그는 성도답지 못하다. 하나님께서는 구원받은 우리 모두가 흠과 점 없이 온전한 삶을 이루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많은 사람들을 구원으로 이끌게 되기를 원하신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성경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믿음이 확고하기를 원할진대, 우리가 완전한 성화를 사모할진대,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기를 힘써야 한다.
결론적으로, 23절부터 마지막 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의 진리를 배운다. 첫째로, 우리의 구원과 완전 성화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루실 일이다. 우리가 물론 하나님 앞에서 성실히 행해야 하지만, 우리의 구원은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시작하시고 이루실 은혜의 선물이다. 둘째로, 그렇기 때문에 성도들은 담임 목사와 그의 모든 동역자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 구원의 일과 목회 사역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힘있게 이루어질 수 있다. 셋째로, 우리는 거룩한 사랑으로 서로 문안해야 한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라는 주의 계명을 실천하는 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넷째로, 성도들은 성경책을 열심히 읽고 듣고 배워야 한다. 이것은 성도의 실제적 성화와 온전함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은혜의 방법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이며 성도의 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