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기쁨의 간증
2장: 기쁨의 봉사
3장: 기쁨의 이유
4장: 기쁨의 열매
빌립보서는 기쁨의 서신이라고 흔히 말한다. 이 짧은 서신에 \'기뻐하라\'는 말이 여덟 번, \'기쁨\'이라는 말도 다섯 번 사용되고 있다. 에베소서나 빌립보서, 골로새서, 빌레몬서, 디모데후서 같은 서신들은 바울 사도가 옥중에서, 아마 로마 옥중에서, 쓴 편지들이다.
1장: 기쁨의 간증
1-11절, 기도의 제목들
[1] 그리스도의 종 바울과 디모데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와 또는 감독들과 집사들에게 편지하노니.
\'종[종들]\'이라는 말은 바울 자신과 디모데를 지칭하는 말로 항상 주님께 순종하는 사역자의 위치를 잘 보이고 있다. \'주님께 순종하겠습니다\'고 스스로 고백하는 말이다. 말씀의 봉사자들이나 교회의 모든 직분자들은 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예수의 종으로 처신해야 할 것이다. 종은 자기를 내세울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그저 주님의 명령하신 바를 받들면 되고 그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자기 자신을 나타내려고 할 때 마음의 상함을 가질 수 있으나, 자기라는 것이 부정되면 마음이 상할 경우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오늘날 신구약 성경 말씀에 절대 순종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적인 사람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 말씀에 살고 성경 말씀에 죽으며, 성경의 교훈이 무엇인가에 유념하고 성경을 열심히 읽고, 배우려 하고 많이 배우려 하고, 많이 읽고 여기 조금 저기 조금 하지 않고 성경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꿰뚫으려고 애를 쓰고 성경을 주야로 묵상하고 다독(多讀)하고 통독하고 또 정독하고 그것을 깊이 연구하도록 해야겠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성경에 보여주신 말씀에 바르게 순종하는 종들이 되어야 한다.
이 서신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빌립보에 사는 모든 성도\'에게 보내졌다. 빌립보에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지만 하나님의 관심은 구원받은 사람에게 있었다. 그 수가 많든지 적든지 주의 피뿌림을 받아 구원받은 한 명 한 명의 영혼들이 하나님 앞에서는 보배롭고 귀하다.
이와 같이, 성경은 일차적으로 성도들을 위한 책이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해 기록되었다. 성경은 일차적으로 목사들에게 주어진 책이 아니다. 옛날 로마 카톨릭 교회의 생각처럼, 성직자들이나 그것을 연구하고 교인들은 그것을 연구하거나 읽지도 말아야 할 그런 책이 아니다. 성경은 바로 성도들을 위하여 쓰여진 책이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의 표현대로, 모든 성도들은 마땅히 성경책을 날마다 열심히 읽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심령과 삶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의 용어도 그렇게 어려운 용어로 되어 있지 않다.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를 \'코이네\'라고 부르는데, 그것은 당시의 일반 서민들이 시장에서 물건을 사고 팔면서 사용할 수 있는 통속적 언어를 가리킨다. 성경은 성경을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성경은 일반 모든 신자들이 마땅히 읽고 깨닫고, 그 하나님의 말씀의 지식을 많이 갖고, 그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서 큰 위로와 힘과 평강과 용기를 가지고, 소망 충만 확신 충만한 삶의 복을 누리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책이다.
\'감독들과 집사들에게\'라는 말은 빌립보 교회에 여러 명의 감독들과 여러 명의 집사들이 있었음을 보인다. 신약 성경에서 감독들은 또한 장로라고 불리운다(행 20:17, 28). 오늘날 장로교회에서 장로라는 말은, 장로교 헌법에 의하면, 목사와 장로를 다 포함한다. 목사는 강도(講道) 장로 즉 설교하는 장로라고 부르고 일반 장로들은 치리장로라고 부른다. \'집사들\'은 안수 받은 남자 집사들을 가리킨다.
감독이라는 말은 엄하게 들리지만 본래 양들을 보살피고 보호한다는 뜻이다. 즉 양들 곧 신도(信徒)들이 하나님의 바른 진리의 지식을 가지고 그 진리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참된 믿음과 소망 안에서 생활하고 있는지 살피는 것을 말한다. 불신앙이나 이단 사설이 교회 안에 침투에 들어오지 않도록 지키는 역할도 뜻한다. 이를 위해, 장로들은 교인들을 많이 접촉하여 그들이 잘 믿고 있는지, 혹은 잘못된 사상을 받아들이지나 않았는지 살펴야 한다.
[2]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온다. \'은혜\'란 구원의 원인이요 구원의 본질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고, 또 구원 자체가 하나님의 은혜이다. 그러므로 은혜를 받는다는 말은 구원과 별개로 생각할 수 없다. 은혜를 받았다는 것은 단순히 마음의 감동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구원받는 것이 은혜요, 구원 안에서 자라며 소망을 든든히 붙잡는 것이 은혜이다. 구원의 산 지식, 산 믿음, 구원받은 자답게 살도록 하는 힘을 얻는 것이 은혜이다. 죄씻음 받은 것이 은혜요 중생한 것이 은혜요 칭의(稱義)받은 것이 은혜요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에 이르는 것이 은혜요 영광의 몸으로 영생할 것이 은혜이다. 참으로 은혜받은 자는 구원받는 자요 구원받은 자답게 사는 자이다. 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가 받았고, 또 풍성하게 더 받아야 할 것이다.
\'평강\' 혹은 \'평안\'은 일차적으로 정신적인 평안과 안정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우리 말에 \'평안하십니까?\'라는 문안의 말과 같이 신체적인 건강이나 심지어 물질적 유여와 번영도 포함할 것이다. 이러한 평강은 하나님과 주 예수께로부터만 온다. 이러한 은혜와 평강이 오늘 우리에게도 넘치기를 바란다.
[3-5] 내가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나님께 감사하며 간구할 때마다, 너희 무리를 위하여 기쁨으로 항상 간구함은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함을 인함이라.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을 생각하거나 기도할 때마다 감사하며 기쁨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을 생각할 때 근심하며 탄식하며 슬퍼한다. 그를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고 \'아, 참 안되었다\' 하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을 생각할 때 그렇지 않았다. 감사함과 기쁨이 그에게 있었다.
그 까닭은 그들이 \'첫날부터 이제까지 복음에서 교제함을 인함\'이었다. \'첫날부터 이제까지\'라는 말은 바울이 빌립보 지역에 복음을 전한 그 때 곧 그들이 바울을 통하여 예수를 믿고 구원받았던 그 날부터, 이 서신을 쓸 당시 곧 아마 로마 감옥에 투옥되어 있던 그 때까지를 가리킬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지역에 주후 52년경에 복음을 전파했다고 추정되며 그가 로마 감옥에 투옥된 것은 주후 61년경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약 8-9년 동안의 기간이 될 것이다.
\'복음에서 너희가 교제한다\'는 원어(코이노니아 휘몬 에이스 토 유앙겔리온)의 뜻은 영어 성경들이 번역하는 대로 \'복음에 참여한다\'는 뜻이다. \'교제\'라는 원어(코이노니아)는 \'교제, 참여, 동참\'이라는 뜻이며 심지어 \'구제\'나 \'구제 헌금\'을 의미하기도 한다(롬 15:26; 히 13:16). 복음에 참여했다는 말씀은 빌립보 교회가 바울 사도의 전파하는 복음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복음 신앙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그 복음 신앙을 위해서 협력하는 복음 신앙의 협력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빌립보 교회는 바울 사도의 복음 전파의 일을 위해 기도했고 헌금으로 도왔다.
[6]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착한 일\'은 빌립보 교인들 속에 있는 구원의 새 생명, 중생,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믿음, 이런 것들을 가리키며 또 그것들과 더불어 문맥상 복음을 위한 협력을 가리킨다고 보여진다. 빌립보 교회는 구원받은 교회, 구원받은 성도들이 되었고,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협력하는 착한 일에 참여하였다.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다. 히브리서 12:2은 하나님을 \'믿음의 주(主)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라고 표현하였다. \'믿음의 주\'라는 말은 \'시작자, 조성자\'라는 뜻이고, \'온전케 하시는 이\'는 \'완성자\'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믿음을 주셔서 믿음이 시작되게 하시고 또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완전케 되게 하신다. 그는 그가 시작하신 착한 일을 그리스도 예수의 날, 곧 그의 재림의 날까지 이루실 것이다.
개인적인 성화와 교회의 복음 사역의 완성은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연약하고 불완전하고 부족하고 무지, 무식한 사람들의 손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살아계시고 전지 전능하신 주권자 하나님의 손에 있다. 그는 성도들의 중생의 생명과 믿음을 시작하시고 그 믿음을 자라게 하시고 완전케 하실 뿐만 아니라, 또한 그의 교회를 친히 세우시고 자라게 하시고 그 교회를 통하여 영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낙심치 말고 힘있게 진행하자.
[7] 내가 너희 무리를 위하여 이와 같이 생각하는 것이 마땅하니 이는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함과 확정함에 너희가 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한 자가 됨이라.
바울이 이러한 확신을 가진 근거는, 그들이 바울의 마음에 있기 때문이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의 신앙 형편과 마음가짐을,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주님을 진실히 믿고 주의 뜻을 따라 헌신하며 협력하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더욱이, 그들은 바울이 복음을 변명하고 확정할 때 다 바울과 함께 입장을 같이 했다. \'나와 함께 은혜에 참여했다\'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나의 은혜에 동참자들이 되었다\'고 되어 있다. 복음 전도에는 단순히 긍정적인 선포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복음 전도에는 때때로 부정적인 비평이나 성경적, 논리적 확정도 필요했다. 참된 복음과 복음 아닌 것을 분별하고 그 복음을 바르게 변증하고 확정(確定)하는 어려운 작업이 때때로 필요했다. 오늘 시대 같은 배교와 혼돈의 시대에는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이 어려운 일에 있어서 빌립보 교회는 바울과 입장을 같이하고 바울과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바울이 설 때 그들도 서고 바울이 넘어질 때 그들도 넘어지는 심정으로 바울과 뜻을 같이한 그런 교회이었기 때문에 바울에게는 확신이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교회도 목사가 역사적인 기독교 신앙에 바로 서서 성경적인 사상을 가진 목사가 되고, 모든 우리 교인들이 일치 단합하여 한 마음 한 뜻 한 정신으로 그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을 전파하고 그 말씀을 변명, 확정하고 그 말씀을 위하여 살고 그 말씀을 위하여 죽으려는 마음으로 진행하는 교회가 되기를 기도한다.
[8]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어떻게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바울이 사랑하지 않은 성도들이 없었겠지만, 빌립보 교회처럼 진실하고 진지하게 주님을 믿고 사랑하는 성도들을 그가 어떻게 사모하지 않았겠는가? 그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사모하였다. 그는 이 말이 거짓이 아님을 증거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라\'고 말했다.
[9]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바울 사도는 기도의 제목들을 몇 가지 열거한다. 첫째로, 그는 그들의 사랑이 점점 더 풍성하여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기를 기도했다. \'총명\'이라는 원어(아이스데시스)는 \'분별력, 판단력, 이해력, 통찰력\' 등의 뜻이다.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되 지식 있는 사랑, 분별력 있는 사랑을 해야 된다. 지식 없는 사랑, 깨달음 없는 사랑, 바른 판단력과 분별력이 없는 사랑은 우리로 하여금 잘못된 길로 가게 할 것이다. 그런 사랑은 잘못된 열심을 일으킬 뿐이다. 우리는 지식 있는 사랑의 풍성을 구하자.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합한 사랑, 마땅히 사랑할 것을 사랑하는 사랑의 풍성을 구하자.
[10]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라\'는 말씀은 참 중요한 교훈이다. 우리는 잘못하면 \'얼마큼 세속적이어도 괜찮을까?, 이 정도면 죄가 될까 안될까?\' 등을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기를 그런 생각을 버리고 \'무엇이 가장 선한 일인가?\'를 생각해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죄가 안되는 정도나, 얼마큼 세상적이어도 되나를 생각지 말고 무엇이 가장 선한 일인가를 생각하자. 최선의 삶에 우리의 목표를 두자.
이 세상에서 가장 선한 일은 영혼 구원의 일이다. 이 세상 일들 중에 가장 귀한 일은 목사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에게도 이런 사실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목사의 일이 의사나 법관이나 재벌의 일들보다 더 귀하고 중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어야 한다. 하나님의 외아들께서는 복음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다.
우리의 삶 가운데 가장 귀한 일은 믿음의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모든 시간들 중에서 성경 읽고 기도하는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 예배하는 시간이 가장 좋은 시간인 줄 알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3:8에 말씀하기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다고 했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6장에서 심지어 너희는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참, 과격하게 보이는 말씀이다. 그러나 엄격히 따져보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다 썩는 일이요 오직 한가지의 일, 곧 예수 믿는 일만이 썩지 않는, 영생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일은 우리 모두의 본업이요 그 외의 일들은 다 부업이다. 세월이 지나 죽음의 문 앞에 설 때 우리는 이 사실을 실감하게 될 것이다.
둘째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진실하여 허물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기\'를 기도했다. \'진실\'이라고 하는 원어(에일리크리네스)는 햇빛에 비추어 보아서 깨끗하고, 흠이 없다는 뜻이 있다. \'허물없이\'라는 원어(아프로스코포스)는 걸림돌이 없다는 뜻이다. 우리는 밝은 태양의 빛 아래서 한 점의 흠이 없을 정도로 진실하게, 신실하게, 거짓 없이, 이중적이지 않게, 섞인 것이 없이, 처음과 끝이 똑같고, 속과 겉이 똑같게 살며, 또 비난할 거리가 없이 깨끗한 인격자가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11]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빌립보 교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의 열매가 가득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되게 하시기를 기도하였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라는 말씀은 요한복음 15장에 나오는 주님의 포도나무 비유를 생각나게 한다. 거기에서 주께서는 \'너희가 내 안에 거하면 많은 열매를 맺지만, 나를 떠나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 영광과 찬송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12-18절, 기쁨의 간증
[12] 형제들아 나의 당한 일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된 줄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라.
\'나의 당한 일\'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히게 된 일이다. 그것이 도리어 복음의 진보가 되었다는 말은 바울이 옥에 갇힘으로 복음 전파의 일이 중단되거나 후퇴하지 않았고 도리어 전진하고 확장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사랑하는 종들이 당하는 어려운 일들까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롬 8:28). 개인적으로, 고난은 성도들의 인격을 깨끗하고 거룩하게 만들며 하나님을 더 의지하게 만들며 온유하고 겸손하게 만든다. 전도의 일에 있어서도, 만일 우리가 바울처럼 하나님 앞에 충성하기만 한다면, 고난과 핍박이 전도의 일을 중단시키지 못하며 오히려 복음의 진보와 확장을 가져올 것이다.
[13] 이러므로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온 시위대 안과 기타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으니.
\'시위대\'라는 원어(프라이토리온)는 로마 황제의 궁궐이나 그 궁궐의 시위대 뜰을 가리킨다. \'나의 매임이 그리스도 안에서 . . . 모든 사람에게 나타났다\'는 말씀은 바울의 옥에 갇힘이 그의 어떤 사회적, 도덕적 잘못 때문이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와 그의 참된 복음을 전하는 것 때문이라는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다는 뜻이다.
[14] 형제 중 다수가 나의 매임을 인하여 주 안에서 신뢰하므로 겁 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느니라.
바울 한 사람이 옥에 갇혔으나 \'형제 중 다수\'가 전도의 일에 나선 것은 참으로 기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영어 성경들과 같이 \'형제 중 다수\'에 연결시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전도의 일에 참여한 이들은 \'주 안에 있는\'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주님과 연합된 자들이요 주를 믿는 참된 믿음의 소유자들이며 의심할 것 없이 말씀과 기도로 주님과 동행하는 자들이었다. 주께서는 주 안에 거하는 자들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주 안에 항상 거할 때 주께 쓰임을 받고 열매를 맺는다.
\'나의 매임을 인하여 . . . 신뢰하므로\'라는 말씀은 이제 언급한 그 형제들이 바울의 매임을 통하여 주님과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갖게 되었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 사도의 전한 복음은 그의 옥에 갇히는 고난을 통해 확인되었다. 그들은 바울의 복음이 거짓말이 아니고 진실한 증거의 말씀임을 확신케 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겁없이 더욱 담대히 말하게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단순히 \'말씀\'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복음의 말씀, 십자가의 말씀\'을 가리킨다. 복음에 대한 신뢰와 확신은 담력과 담력 있는 증거를 낳았다. 한 사람 바울의 고난은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을 끼쳤다. 이것이 하나님의 하신 일이다.
[15]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
그런데 두 종류의 전도자들이 생겼다.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투기와 분쟁으로\'라는 말은 \'질투와 경쟁으로\'라는 뜻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바울만 하나님의 사랑하시는 종인가? 바울만 특별히 나은가? 우리가 바울보다 못한 것이 무엇인가?\' 그러나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였다. \'착한 뜻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함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함으로, 영혼 구원의 일이 긴급함으로, 잃어버린 영혼들을 불쌍히 여김으로\' 등의 뜻을 내포할 것이다.
[16] 이들은 내가 복음을 변명하기 위하여 세우심을 받은 줄 알고 사랑으로 하나.
전통 사본에는 16절과 17절은 순서가 반대이다. \'복음을 변명한다\'는 것은 사도행전 15장이나 갈라디아서에서 볼 수 있듯이 율법주의적 사상을 가진 유대인들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참된 복음 곧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변호하는 것을 가리켰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전파할 뿐만 아니라, 또한 그 복음을 변호해야 했다. 기독교 역사상, 사탄은 때때로 복음을 정면으로 반대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때때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듯하면서 교묘히 그것을 가감하고 변질시키려 했다. 그러므로 참된 복음 전도자는 이 두 가지 일, 곧 전파와 변호의 일을 다 감당해야 한다. 어떤 이들은 교리적 논쟁을 무조건 싫어하지만, 그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복음 변호의 일이 실패하면 복음 전파의 일도 헛되게 될 것이다.
본문에 \'사랑으로 한다\'는 말은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므로, 옥에 갇힌 바울을 사랑하므로, 그리고 죄와 멸망의 길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사랑하므로 복음을 전파한다는 뜻일 것이다. 전도는 사랑의 확실한 증거이다.
[17] 저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러나 다른 한 종류의 전도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바울에 대해 반감을 가지고 있었던 자들이었다. 그들은 옥에 갇힌 바울에게 고통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전도하였다. 그들은 바울을 과격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교회 안에 어떻게 이런 자들이 있을 수 있는지 의아스럽지만, 여하튼 그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순전치 못하게 다툼으로\' 전도하였다. 그들이 복음을 전한 것은 성실함과 진실함에서, 순수한 동기에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동기는 경쟁심과 이기적 야망이었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가 중요하거나 구원할 영혼들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단지 자기들의 이름과 명예가 중요했다. 이런 자들이 진실한 신자일지 우리는 잘 모르겠다.
[18] 그러면 무엇이뇨? 외모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내가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원문에는 \'그러면 무엇이뇨?\'라는 말 다음에 \'그렇지만\'이라는 말(플렌)이 있다. 어떤 이들은 외모로, 진실한 마음이 없이, 외식으로 전도하였고, 어떤 이들은 참으로, 진실한 마음으로 전도하였다. \'무슨 방도[방식]로 하든지\'라는 말은 전도의 방식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진실한 종들이 악과 타협하면서 전도해도 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교제의 원리에 대해 가르친다. 바울 사도는, 우리가 믿지 않는 자와 부당하게 멍에를 같이하지 말아야 할 것을 분명히 말했다(고후 6:14-17). 단지 본문의 뜻은, 비록 잘못된 동기와 방법으로 그리스도를 전하는 자들이 있을지라도 그들이 그리스도를 바르게만 전했다면 바울은 그것으로 인해 기뻐한다는 것뿐이다.
여하튼,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것 때문에 기뻐하고 있고 또 기뻐하겠다고 말한다. 감옥에 갇힌 것이 그의 기쁨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것이 그의 슬픔의 이유가 될 수 없었다. 옥에 갇힌 것이 오히려 복음의 진보를 가져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 바르게 전파된다면, 심지어 잘못된 동기로 그렇게 하는 자들이 있다 할지라도, 바울은 기뻐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8절까지에서 우리가 깨닫는 진리는, 첫째로, 전도의 바른 동기와 방식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전도할 때 질투심이나 경쟁심으로 혹은 외식적으로 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오직 착한 뜻으로, 곧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마음으로, 전도의 가치와 긴급성을 깨닫는 마음으로, 그리고 멸망할 영혼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해야 하고, 또한 오직 사랑으로, 진실하게, 순수한 동기로 전도해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를 점검해 보아야 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옥 중에서도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파되는 것으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이 세상에서 전도가 가장 귀한 일이 아닌가? 그리스도께서 바르게 전파되고 복음의 일이 확장되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무엇인가? 그것은 곧 하나님의 일이 아닌가? 우리의 기쁨은 어디에 있는가? 우리도 바울처럼 기쁨의 이유를 그리스도에게서 그리고 그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는 일에서 찾자.
셋째로, 우리는 본문에서 무엇보다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으시다는 것을 깨닫는다. 하나님께서는 옥에 갇힌 사랑하는 종 바울도 사용하셔서 복음이 확장되게 하셨다. 그의 갇힘을 통하여 복음이 로마 황제의 궁궐 혹은 시위대에 전파되었다. 뿐만 아니라, 한 사람 바울의 갇힘이 많은 형제들에게 확신을 주었고 그들을 분발시켰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의 모든 일들, 심지어 불행과 실패처럼 보이는 일들을 통해서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 앞에서 신실하자.
19-26절, 그리스도를 위하여
[19] 이것이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의 도우심으로 내 구원에 이르게 할 줄 아는 고로.
본절은 원문에서 \'왜냐하면\'으로 시작하여 앞절에서 말한 그의 기뻐함의 이유를 제시한다. \'이것이\'라는 말은, 앞절의 \'이로써\'라는 말과 같이, 그리스도께서 시위대 안에서 전파되는 것을 가리킨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령\'이라는 말은 원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다. 그것은 성령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성령께서는 \'그리스도의 영\'(롬 8:9), \'그 아들의 영\'(갈 4:6), 혹은 본문과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영\'으로 불리우신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관계 곧 삼위일체의 신비를 나타낸다.
\'너희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라는 말은 하나님의 작정된 뜻이 우리의 간구와 성령의 역사로 이루어짐을 보인다. 기도는 하나님의 선한 일을 이루는데 필수적이다. 하나님께서는 작정하신 일들을 주권적으로 이루시지만, 인간편에서의 기도와 간구가 필요하다. 하나님의 일들이 인간의 기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나, 인간의 기도와 간구를 통하여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 구원\'은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서 풀려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로마 황제의 궁궐과 시위대 안에 전파됨으로 그리고 빌립보 성도들의 간구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의 도우심으로 바울은 그 곳에서 풀려날 것이다. 바울은 그 일을 내다보면서 기뻐한 것이다. 본절 끝의 \'할 줄 아는 고로\'라는 말은 \'할 줄 앎이니\'라고 번역하면 정확할 것이다.
[20]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아니하고 오직 전과 같이 이제도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려 하나니.
본절은 처음에 \'나는\'이라는 말을 넣어서 읽고 끝에는 \'하려 하나니\'보다는 \'하려 하노라\'로 마치는 것이 뜻을 원문에 가깝게 드러낼 것이다. 또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의 내용은 바로 본절 후반부의 내용이다. 즉 바울 사도는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고 항상 그리스도만을 위해 살기를 간절히 기대하고 소망했다. \'아무 일에든지 부끄럽지 않다\'는 것은 범사에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것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은 진실과 의를 생명으로 여기는 모든 성도들에게 마땅한 일이다. 또 바울은 항상 아주 담대하게 살든지 죽든지 그의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히 되게 하기를 원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생활 신조이었다. 이것은 우리 모두가 본받을 만한 일이다.
[21]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니라.
바울 사도가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만 존귀케 하기를 원한 까닭은 그가 사는 것이 그 자신이 사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서, 그를 통해 사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만 위한다면 사는 것뿐 아니라 또한 죽는 것도 유익하다고 그는 말한다. 그는 갈라디아서에서도 비슷하게 말하였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2, 23]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가릴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22절을 다시 번역하면, \"그러나 만일 내가 육신적으로 산다면, 이것은 내게 수고의 열매이며, 나는 어느 것을 택할지 모르겠노라\"이다. 바울이 끼여 있다는 \'두 사이\'는 사는 것과 죽는 것을 가리킨다. 바울은 증거하기를 그 둘 중에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 즉 죽는 것이 더 좋다고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을 알고 영생과 천국의 진리를 아는 모든 성도들이 다 동감할 말이다. 이 세상은 수고로운 광야요 슬픔과 눈물의 골짜기이며 죽음의 그늘진 언덕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계신 곳에는 참된 안식과 기쁨과 생명의 충만이 있다.
[24]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육신에 거한다\'는 말은 죽지 않고 산다는 뜻이다. 바울은 죽어 주와 함께 거하는 것을 더 좋아하고 더 사모하지만(23절), 교회를 위하여, 성도들을 위하여 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말한다. \'유익하다\'는 원어(아낭카이오스)는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필요하리라.\' 이것은 오늘날 모든 사역자들과 성도들의 인생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그의 교회 곧 그의 성도들을 위하여 살지 않는다면 우리가 반드시 살아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25]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다시 번역하면, \"이런 확신이 있으므로, 나는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것을 아노니\"이다.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이것이 내용적으로 앞절에 언급한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이다. 바울이 살아야 할 이유는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서이었다. 그것 외에 다른 이유가 없었다. 만일 그가 해야 할 사명을 다해서 더 이상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할 것이 없다면, 그는 구태여 살기를 원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살 필요성이 있다는 확신이 생겼을 때, 그는 자신이 죽지 않고 살아서 그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해 그들과 함께 거할 것을 알았다.
[26] 내가 다시 너희와 같이 있음으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자랑이 나를 인하여 풍성하게 하려 함이라.
\'자랑\'이라는 원어(카우케마)는 옛날 영어 성경처럼 \'기쁨\'으로 번역할 수 있다. 문맥상 그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바울은 자신이 감옥에서 풀려나서 빌립보 교회에 가서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눔으로써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들의 기쁨이 바울로 인해 풍성하게 되리라고 믿고 있다.
결론적으로, 19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이 보이는 주요한 교훈은 \'그리스도를 위해 사는 삶\'이다.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아야 한다. 우리가 살면, 성도들의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며; 우리가 죽으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더 좋은 복을 누릴 것이다. 로마서 14:7, 8,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라.\" 고린도후서 5:14, 15,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시는도다. 우리가 생각건대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 모든 사람이 죽은 것이라. 저가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으심은 산 자들로 하여금 다시는 저희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 오직 저희를 대신하여 죽었다가 다시 사신 자를 위하여 살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는 자들이라면, 오늘 우리의 인생관을 점검하자. 이제부터는 오직 그리스도를 위하여 사는 삶을 살자. 살든지 죽든지 우리 몸에서 그리스도만 존귀케 되기를 구하자.
27-30절,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27]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가 보나 떠나 있으나 너희가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하여 협력하는 것과.
원문에는 \'오직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라는 말(모논 악시오스 투 유앙겔리우 투 크리스투)이 앞에 나와서 강조되어 있다.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돌아가셨고 그의 대속(代贖)의 죽음으로 죄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소식이다. 그것은 십자가의 복음이며 사죄(赦罪)와 칭의(稱義)의 복음 곧 하나님의 은혜의 구원의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진실히 믿는데서 부터 시작하여 복음 안에서 값없이 주신 의에 일치하게 죄짓지 않고 의롭게 사는 것과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널리 전파하고 또 그 복음을 바르게 변호하는 일을 위하여 사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삶이어야 한다. 에베소서 4:1에서, 바울 사도는 이와 비슷하게 \'너희가 부르심을 입은 부름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교훈하였다.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우리를 부르신 방향이 있다. 우리는 그 방향을 역행하지 말고 바르게 나아가야 한다.
특히,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는 구체적 내용으로 두 가지를 언급하였다. 하나는 복음을 위한 일치된 협력이다. 우리가 복음을 바르게 이해하고 복음에 합당하게 행동한다면, 우리는 복음을 위해, 복음의 신앙을 위해 일심으로 서서 한 뜻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이다. \'일심으로,\' \'한 뜻으로\'라는 말들은 교회가 생각과 뜻에 있어서 일치되어야 함을 잘 보인다.
빌립보서 2:2에도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라고 말씀했다. 또 고린도전서 1:10에는 \"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다 같은 말을 하고 너희 가운데 분쟁이 없이 같은 마음과 같은 뜻으로 온전히 합하라\"고 말씀했다. 성경은 자주 \'마음을 같이하라\'는 표현을 사용한다(고후 13:11; 벧전 3:8).
사도행전에 보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마음을 같이하여 기도했고(행 1:14),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고(행 2:46),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했고\'(행 4:32), 마음을 같이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였다(행 5:12). 이와 같이, 우리는 일치 단합된 마음으로 복음을 믿고 복음을 전파하고 복음을 변호하는 교회가 되어야 할 것이다.
[28] 아무 일에든지 대적하는 자를 인하여 두려워하지 아니하는 이 일을 듣고자 함이라. 이것이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요 너희에게는 구원의 빙거니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
복음에 합당한 생활의 구체적 내용의 또 한가지는 대적자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다. 복음을 믿고자 할 때 그리고 복음을 전하고자 할 때 종종 대적자들이 나타난다. 그것은 사탄의 방해가 있기 때문인줄 안다. 사탄은 사람들이 구원받는 것과 성도들이 예수 잘 믿고자 하는 것을 가장 싫어한다. 그러므로 믿음의 생활이나 전도의 생활에는 환난들과 핍박들이 있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자들과 그 복음에 합당하게 사는 자들은 그런 환난들과 핍박들을 능히 이겨나갈 수 있다.
성도의 환난과 핍박은 그것들을 일으키는 \'저희\'에게는 멸망의 빙거, 증거, 증표요, 환난과 핍박을 당하는 진실한 성도들에게는 구원의 빙거, 증거, 증표이다. \'이는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이니라\'는 말씀은 이렇게 진실히 믿고 핍박까지 당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의 결과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좋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것이다(고전 4:7). 우리의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다(고전 15:10). 우리가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도, 그것을 잘 이겨나가는 것도 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것 곧 하나님의 은혜의 일이다.
[29, 30]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심이라. 너희에게도 같은 싸움이 있으니 너희가 내 안에서 본 바요 이제도 내 안에서 듣는 바니라.
다시 번역하면, \"이는 그리스도를 위한 삶(토 휘페르 크리스투), 곧 그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는 것(토 훼페르 아우투 파스케인)이 너희에게 주어졌음이니, 곧 너희가 내 안에서 보았고 지금도 내 안에서 듣는 것과 똑같은 싸움을 경험하는 것이니라.\"
성도의 삶, 성도가 하나님께 은혜로 받은 구원의 삶은 그리스도를 위한 삶, 곧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는 삶이다. 그리스도를 위한 삶 속에는 당연히 고난도 포함된다. 자기를 부정하고 십자가를 지는 삶은 그리스도를 위해 수고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을 받고, 그리스도를 위해 조롱을 당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순교하는 자리에까지 나아가는 삶이다.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고 하셨다(마 5:11, 12). 또 그는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고 말씀하셨다(계 2:10).
바울에게는 그런 고난과 싸움이 있었다. 디모데후서 1:15에 보면, 아시아에 있는 모든 사람이 바울을 버렸다. 또 디모데후서 4:14에 보면, 구리장색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해를 많이 보였다. 그 외에도,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와 고린도후서에서 자신이 전도의 일을 하면서 당한 고난을 자세히 증거하였다. 고린도전서 4:9-13,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한 자같이 미말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 . . 우리는 비천하여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고린도후서 6:4-10, \"오직 모든 일에 하나님의 일꾼으로 자천하여 많이 견디는 것과 환난과 궁핍과 고난과 매 맞음과 갇힘과 요란한 것과 수고로움과 자지 못함과 먹지 못함과 . . .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고린도후서 11:23-27, \". . .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바울 뿐만 아니라 빌립보 교회도 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었고 우리도 예외일 수 없다. 한국의 초대 교회는 핍박을 경험한 교회이었다. 우리에게 아직 그런 고난과 환난과 핍박이 오지 않았다면 우리도 단단히 준비하고 있자.
결론적으로, 27절부터 30절까지의 요점은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는 교훈인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첫째로 복음을 위해 일심으로 협력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도 받을 각오를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며, 복음을 위해 일심으로 협력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을 받을 각오를 하자.
2장: 기쁨의 봉사
1-11절, 겸손한 마음으로
[1]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에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
바울 사도는 앞 부분에서 그리스도 복음에 합당하게 생활하라고 권면하면서 구체적으로 두 가지를 말했다. 일심으로 복음의 신앙을 위해 협력하고 대적자를 인해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는 또 다시 겸손한 일치 단합을 재강조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 무슨 권면이나 사랑의 무슨 위로나 성령의 무슨 교제나, 긍휼이나 자비가 있거든\'이라는 말씀은 빌립보 교회의 교인들이 하나님을 진실히 믿고 또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받은 자들이라면 그들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어떤 권면 혹은 격려, 어떤 위로 이런 것들이 있을 것이며, 그렇다면 바울 사도의 권면을 유념하고 행할 수 있을 것이라는 뜻이다.
[2]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첫번째 권면은 일심 단합, 일치 단합하라는 말씀이다. \'같이 하여,\' \'같은 사랑,\' \'합하여,\' \'한 마음\' 등 같은 뜻의 말이 네 번 반복되었다. 성경은 이처럼 교회가 일심 단합, 일치 단합하여서 주님 믿고, 주님 섬기고, 주님의 일에 힘써야 할 것을 여러 곳에서 말씀했다. 에베소서에서도 읽은 대로, 하나님도, 주 예수 그리스도도, 성령도, 믿음도, 세례도, 소망도,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 곧 교회도 하나이므로 우리는 일치 단합해야 할 것이다. 분열은 육신의 일이며 천국의 모습이 아니다. 분리하고 분열하는 자는 천국을 기업으로 받을 수 없다.
물론 이 일치는 진리 안에서, 사랑 안에서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이단과 정통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거나, 교회와 세상이 하나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잘못된 교회 연합 운동은 현대판 바벨탑 운동과 같다. 형제 사랑을 가장 강조한 서신인 요한일서는 형제 사랑이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고 정통 진리 가운데서 이루어져야 함을 분명히 했다. 요한일서는 형제 사랑을 강조하는 동시에 하나님의 자녀와 마귀의 자녀를 구별하고, 성육신의 진리를 고백하지 않는 자는 마귀로부터 왔다고 밝히 증거했다. 교회의 일치는 진리 안에서의 일치이어야 한다.
4절 끝에 나오는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는 말씀은 원문에 보면 2절 초두에 있다. 바울의 기쁨은 성도들이 일치 단합하여 믿음 생활하고, 일치 단합하여 주님 섬기는 것을 보는데에 있다. 그것을 볼 때에 기쁨이 있고, 그것을 보지 못하면 슬프다. 요한 사도도 요한이서 4절에서 \"너의 자녀 중에 우리가 아버지께 받은 계명대로 진리에 행하는 자를 내가 보니 심히 기쁘도다\"고 말했다. 요한삼서 3, 4절에서도 \"형제들이 와서 네게 있는 진리를 증거하되 네가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하니 내가 심히 기뻐하노라. 내가 내 자녀들이 진리 안에서 행한다 함을 듣는 것보다 더 즐거움이 없도다\"고 말했다. 목사의 기쁨과 즐거움은 성도들이 설교 말씀 잘 받고 성경 진리대로 바로 믿고 바로 살아가는 것을 보는 것이다.
[3]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두번째 권면은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라는 것이다. \'다툼\'이라는 원어는 당파심 혹은 이기적인 야망이라는 뜻이다. 주의 일을 하는 데 있어서는 경쟁심은 좋지 않아 보인다. 봉사의 일에 있어서도 그렇고 전도를 하는 데도 그렇다. 세상적 야망도 금물이다. \'큰 야망과 포부를 가지라\'는 것은 세상적 권면이지 성경적 권면은 아니다. 시편 131:1, \"여호와여 내 마음이 교만치 아니하고, 내 눈이 높지 아니하오며 내가 큰 일과 미치지 못할 기이한 일을 힘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앞세워야 한다. 우리는 주의 뜻이면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할 것이지만, 주의 뜻이 아니면 이것도 하지 않고 저것도 하지 않을 것이라고 고백해야 한다. 그것이 바른 신앙의 태도이다. 당파심과 인간적 야망을 버리고 오직 주님의 영광만 목표를 삼고 나아가자.
\'허영\'도 비슷한 말이다. 허영, 곧 헛된 영광이란 땅의 영광, 세상적 권세, 물질적 부요, 사람들의 칭찬 등을 말한다. 그것들이 헛된 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병들었을 때나 죽음 앞에 있을 때 그것들이 헛됨을 절감할 것이다. 또 그 전에라도 세상 영광은 있다가도 없어질 때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것들이 헛된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자기 영광, 이 땅의 영광을 구하면 서로 싸우게 되지만, 하나님의 영광만 구하면 싸울 것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허영과 다툼을 버리고 오직 하나님의 영광만 위해 살며 일치 단합하여 하나님을 섬기자.
세번째 권면은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는 것이다. 사람이 겸손하려면, 자기 자신의 부족을 알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요 자기의 자기 된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이 자기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께만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럴 때 사람은 자랑하거나 교만하거나 높은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다.
또한 남을 낫게 여기라고 했다. 그것은 남의 장점들을 볼 때 가능할 것이다. 남의 장점들은 하나님이 그에게 주신 은혜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을 인정하고 그를 존중히 여겨야 할 것이다. 우리는 남의 약점들만을 보는 자가 되지 말고, 남의 장점들을 보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4]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네번째 권면은 자기 일들만 돌아보지 말고 다른 이들의 일들도 돌아보라는 것이다. 다른 이들의 일들이란 세상의 일들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일들 곧 신앙 생활에 유익이 되는 일들을 가리킨다. 다른 이들의 영적 유익을 위해 관심을 가지고 돕는 것이 참 사랑이다. 고린도전서 13장에 증거한 대로, 사랑은 온유하고 투기하지 아니하고 자랑하지 아니하고 교만하지 아니하고 무례히 행치 아니하고 자기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성내지 아니하고 악한 것을 생각하지 아니한다. 참된 사랑은 남을 위하는 이타적 마음가짐이다. 그것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행위이기도 하다.
남의 유익을 주는 사랑의 행위는 구체적으로 심방과 구제를 통해 나타날 것이다. 예를 들어, 교우들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문안을 간다든지, 상(喪)을 당했을 때 위로의 방문을 하는 것 등은 귀한 사랑의 행위이다. 이런 점에서 근래의 장례식들을 볼 때 우리 교회도 사랑이 많은 교회라고 느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 마음\'은 앞 절에서 말씀한 겸손한 사랑의 마음을 가리킨다.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는 원문의 구절은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도 있었나니\'라는 뜻이다. 바울 사도는 겸손한 봉사의 예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을 들었다.
[6, 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6절을 원문에서 다시 번역하면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이시므로 하나님과 동등됨을 획득물(탈취물)로 여기지 않으셨으나\'이다. 예수께서는 본래 하나님과 동등되신 분이시지, 그의 선행에 대한 보상으로 그것을 얻으신 것이 아니었다.
7절 초두에 \'오히려\'라는 원어(알라)는 \'그러나\'라는 뜻이다. \'자기를 비어\'라는 말은 예수께서 신성(神性)을 포기하셨다는 뜻이 아니고, 신적 속성들의 사용을 일시적으로 보류하셨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신적 영광을 가지신 주께서 비천한 마굿간에서 출생하셨고, 인간 부모 밑에서 30년 동안 조용하게 순종하며 사셨고, 공적인 전도 사역을 하실 때에도 죄인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가난한 생활을 하셨던 것이다.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을 말한다. 요한복음 1: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셨다. 그것도 비천한 모습의 사람이 되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기까지 하셨다. 이것이 예수님의 놀라운 겸손이다. 교만한 인간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지만,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겸손히 죽기까지 아버지께 복종하셨다.
[9]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이것은 인간 예수님의 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이었다. 예수님의 신성(神性)은 성육신 이전이나 이후나, 부활 전이나 부활 후나 변함이 없으시다. 그러나 예수님의 인성(人性)은 부활 전과 후에 큰 변화가 있었다. 그는 부활하신 후에 지극히 크신 영광 곧 신성의 영광을 받으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그의 신성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10, 11]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주께서는 그를 믿는 우리에게도 이와 비슷한 이치로 교훈하셨다. 마태복음 10:39,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바울 사도도 디모데후서 2:11, 12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쁘다 이 말이여, 우리가 주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함께 살 것이요 참으면 또한 함께 왕노릇할 것이요.\"
결론적으로, 본문은 네 가지의 권면을 준다. 첫째는 일치 단합하라는 권면이다. 둘째는 다툼이나 허영을 버리라는 권면이다. 셋째는 겸손한 마음으로 남을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는 권면이다. 넷째는 남의 유익을 위하라는 권면이다. 바울 사도는 특히 겸손한 사랑의 봉사의 표본으로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을 들었다.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겸손한 마음으로 일치 단합하여 하나님의 일 곧 복음 전도의 일을 위해 그리고 다른 이들의 영적 유익, 신앙적 유익을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자.
12-18절, 너희 구원을 이루라
[12]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 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복종하여\'라는 원어(카도스 판토테 휘페쿠사테)는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라는 뜻이다. 원문대로 다시 읽어보면,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항상 복종했던 바와 같이,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빌립보 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진실히 믿었고 항상 복종하는 것을 나타내었었다. 바울은 그들의 복종이 지금 그가 떠나 있는 때에도 계속되기를 원하고 있다. 우리는 사람들이 우리를 보든지 안보든지 하나님께 복종해야 하며, 참된 지도자들이 있든지 없든지 항상 그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께 복종하되 두렵고 떨림으로 해야 한다. 하나님은 두려우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거룩하시고 공의로우신 심판자이시다. 하나님의 율법을 어기는 자들에게는 무서운 저주가 선언되어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큰 구원을 받았지만, 죄 가운데 떨어지지 않기 위해 항상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죄는 하나님께서 가장 미워하시는 바이다.
성경에서 \'구원\'은 죄 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을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미 그러한 구원을 받았다. 믿는 이들은 법적으로 완전한 의(義)와 완전한 거룩함을 얻었다(롬 3:24; 히 10:10, 14).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이 말씀은 천주교회에서 주장하듯이 우리의 선행이 구원의 공로가 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값을 다 지불하셨고 완전한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무엇을 노력하여 얻거나 무슨 공로를 쌓을 필요도 없고 쌓을 수도 없다. 오직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구원을 우리의 현실 속에서 나타내어야 할 뿐이다.
성경은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임을 밝히 증거했다. 로마서 3: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救贖)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로마서 4:4, 5,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을 은혜로 여기지 아니하고 빚으로 여기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 에베소서 2:8, 9,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그러므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말은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구원, 곧 이미 받은 완전한 의(義)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라는 뜻으로 이해된다. 즉 실제적 순종의 생활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은 구원을 그들의 실제적 삶 속에서 나타내어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과정이다. 성도들의 성화는, 비록 이 땅 위에서 불완전할지라도, 하나님의 요구이며 성도들의 마땅한 길이다. 우리는 완전한 성화를 위해 소극적이거나 게으르지 말고 날마다 성실히 달려가야 한다.
[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원문에는 본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바울 사도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말씀한 후에 즉시 우리의 순종 생활 즉 성화의 노력이 하나님께서 우리 속에서 하시는 일임을 증거하였다. 하나님의 영께서 우리 속에 거하시고 계시다. 주의 피로 구속받고 믿는 성도들에게는 성령의 교통하심, 도우심, 인도하심이 있다. 로마서 8:14,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
그런데 우리 속에서의 성령의 활동은 우리의 자발적 소원과 노력으로 나타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셔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소원을 가지고 그 소원을 따라 행한다. 경건해지려는 소원, 거룩해지려는 소원, 의로워지려는 소원, 선해지려는 소원, 그것들은 하나님이 주시는 소원이며 성령의 감동이다. 구원받은 성도에게도 남은 죄악성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경건하고 도덕적인 소원을 따라 행함으로 하나님이 주신 구원은 인격과 삶 속에서 나타나게 된다.
[14]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라.
구원을 실제적 삶 속에서 나타낸다고 하는 말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가리키는가? 그것은, 예를 들어, 모든 일을 원망과 시비가 없이 하는 것을 말한다. 교회에서 주의 일을 할 때 우리는 원망과 시비 즉 불평과 다툼을 삼가야 한다. 주께서는 일보다 우리의 성화된 인격을 더 원하신다. 원망, 불평, 논쟁, 다툼은 인격의 흠과 결함이다. 그것은 죄악이다. 우리는 그런 것들로부터 구원을 얻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마땅히 그런 흠과 결함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또는 주를 위한 봉사에서 원망, 불평, 논쟁, 다툼을 버리고 항상 사랑과 단결과 하나님께 대한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행해야 한다.
[15] 이는 너희가 흠이 없고 순전하여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 가운데서 하나님의 흠 없는 자녀로 세상에서 그들 가운데 빛들로 나타내며.
성화의 목표는 한마디로 \'흠 없는 인격과 삶\'이다. 이 세상은 항상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대\'이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바른 표준에서 볼 때 언제나 비뚤어져 있는 세상이요 하나님의 뜻에 대항하는 세상이다. 경건 대신에 불경건을 좋아하고, 거룩 대신에 더러움을 구하며, 의(義) 대신에 불의를 행하고, 선(善) 대신에 악을 따르며, 진실 대신에 거짓을 택하는 세상이다. 하나님 없는 이 세상에 부패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는가? 사람들은 사회 개혁을 부르짖지만, 과연 그것이 가능하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가?
성도들은 이런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한 이 세상에서 구원받은 자들다웁게 경건하고 도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성화는 바로 실제적 경건, 실제적 거룩을 의미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에게 기대되는 삶은 이렇게 흠 없고 순전한 삶, 즉 종교적으로, 도덕적으로 책망할 것이 없는 삶이다.
그런 삶이 바로 세상에서 \'빛\'이 된다. 하나님을 모르고 부도덕한 세상을 성경은 어두운 세상이라고 부른다(요 1:5; 벧전 2:9).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구원은 빛이다. 그것은 지식과 도덕성의 회복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뜻대로 의롭고 선하게 사는 삶의 회복이다. 예수께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은 성도들의 구원받은 삶, 성화의 삶, 흠 없는 삶을 가리키신 것이다.
[16] 생명의 말씀을 밝혀 나의 달음질도 헛되지 아니하고 수고도 헛되지 아니함으로 그리스도의 날에 나로 자랑할 것이 있게 하려 함이라.
\'밝힌다\'는 원어(에페코)는 \'드러낸다, 나타낸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생명의 말씀\'이다. 그것은 죽은 영혼을 살리는 말씀이다. 그것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했던 영혼들을 새롭게 하는 말씀이다. 구원은 새 생명이며 새 생활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새 생활을 하지 않고 옛 생활에 계속하여 머물러 있다면, 그런 구원은 구원이 아닐 것이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흠 없는 생활을 할 때, 생명의 말씀의 참됨이 드러난다.
뿐만 아니라, 만일 성도들이 구원에 합당한 삶은 살지 않는다면,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될 것이다. 그들의 사역은 결실 없는 사역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성도들이 빛의 생활을 하게 될 때, 복음 전도자들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는 날 그 성도들은 전도자들의 기쁜 자랑거리가 될 것이다. 바울은 본서신의 끝부분에서 성도들을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불렀다(4:1). 또 데살로니가전서 2:19, 20에서 그는,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냐? 그의 강림하실 때 우리 주 예수 앞에 너희가 아니냐? 너희는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이니라\"고 말했다.
[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믿음의 제물과 봉사\'란 \'믿음에서 나온, 혹은 믿음으로 하는, 희생과 봉사\'를 가리킨다. 빌립보 교인들은 진실한 믿음을 소유하였고 그 믿음으로 자신을 주께 드리며 주의 일을 위해 즐거이 봉사하였다. 그것은 바울을 기쁘게 한 일이었다. 바울은 그들의 믿음의 희생과 봉사 위에 자신을 쏟아부을지라도 기뻐하겠다고 고백한다. \'자신을 관제(灌祭, 붓는 제사)로 드린다\'는 말은 그의 순교를 의미할지도 모른다. 바울은 주를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쳤다. 그것은 억지로 하는, 불평스런 봉사가 아니었다. 그것은 기쁨의 헌신, 기쁨의 봉사이었다. 지금 옥에 갇혀 있는 그는 기꺼이 죽을 각오도 되어 있다. \'오, 빌립보 교회여, 참된 믿음과 믿음의 삶만 나타내라. 나는 나의 생명을 그대들 위에 부을 준비가 되어 있다.\' 이것이 바울 사도의 고백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면, 이제 기쁨으로 우리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자.
[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마지막으로, 구원은 기쁨의 사건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쁨의 원천이시다. 느헤미야 8:10,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이 너희의 힘이니라.\" 성령의 열매는 기쁨이다(갈 5:22). 천국은 기쁨의 세계이다(롬 14:17). 행복하지 않고는 기뻐할 수 없다. 구원은 행복한 일이다. 구원의 복음을 전한 바울 사도는 기쁨의 사도이었다. 그는 옥 중에서도 기뻐하였다. 또 그는 성도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이 기쁨은 오늘 우리의 것이다. 어떤 어려운 현실 속에서도, 성도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구원으로 인하여, 천국 소망으로 인하여, 성령 안에서 기뻐할 수 있다. 이것은 구원받지 못한 자들은 느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의 새 생명을 얻고 구원에 합당하게 주께 순종하며 흠 없는 삶을 위해 성실히 노력하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이 기쁨을 체험한다.
결론적으로, 12절부터 18절까지에서 중요한 교훈은 \'너희 구원을 이루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구원, 곧 완전한 의에 일치하는 인격과 삶을 현실 속에서 이루라는 교훈이다. 이것이 성화(聖化)다. 성화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이 세상에서, 현실 속에서 나타내는 것을 가리킨다. 그것은 한마디로 \'흠 없는 삶\'을 가리킨다. 이것은 주께서 우리 속에서 이루시는 삶이다.
물론 우리의 성화는 이 세상에서 불완전하다. 우리가 미래에 누릴 영화는 우리의 성화의 정도에 의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의에 의존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세상에서 거룩을 이루어야 한다. 그것은 미래의 나를 위해서라기보다 현재 이 \'어그러지고 거스리는\' 세상에서 흠 없는 자녀들로 살며 어두운 세상에서 빛들로 살기 위해서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또 다른 이들의 구원을 위하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나 성도의 순종의 삶, 성화의 삶은 결코 무겁고 엄숙한 일만이 아니다. 그것은 기쁨의 삶이다.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은, 참으로 순종하는 자들은, 참으로 구원에 합당한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들은, 참으로 흠 없는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들은, 참으로 믿음의 헌신, 희생, 봉사를하는 자들은 이 기쁨을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기쁨의 하나님이시며 기쁨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슬퍼하고 낙심하는 자가 되기를 원치 않으시고 우리가 기뻐하며 또 기뻐하기를 원하신다. 오늘날 이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시대 속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이 기쁨이 우리 모두에게 넘치기를 바란다.
19-30절,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
[19, 20] 내가 디모데를 속히 너희에게 보내기를 주 안에서 바람은 너희 사정을 앎으로 안위를 받으려 함이니 이는 뜻을 같이 하여 너희 사정을 진실히 생각할 자가 이밖에 내게 없음이라.
디모데는 바울 사도에게 귀한 동역자(同役者)이었다. 그는 바울과 뜻을 같이할 수 있는 자이었다. 주의 일, 교회의 일을 함에 있어서 뜻을 같이하고 생각과 정신을 같이할 수 있는 자가 있다는 것은 복이다. 아모스 3:3, \"두 사람이 의합지 못하고야 어찌 동행(同行)하겠으며.\" 또 디모데는 빌립보 교인들의 사정, 곧 그들의 형편과 처지를 진심으로 생각할 수 있는 자이었다. 참된 일꾼은 교인들의 신앙적 형편과 처지를 살필 수 있는 자일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일꾼들은 많으나 참된 일꾼, 충성된 일꾼은 드문 것 같다. 바울에게는 뜻을 같이할 동역자가 디모데 외에는 없었다.
[21, 22] 저희가 다 자기 일을 구하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지 아니하되 디모데의 연단을 너희가 아나니 자식이 아비에게 함같이 나와 함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느니라.
원문에는 21절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디모데가 바울에게 둘도 없는 귀한 동역자인 이유를 말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은 복음 전파의 일이다. 성도들은 다 자기 일에 바쁘고 교회의 일꾼들도 그러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일을 위해서는 생각과 마음과 시간을 쓰지 못했다. 그러나 디모데는 그렇지 않았다. \'디모데의 연단\'이라는 표현을 보면, 디모데는 여러 가지 시험과 환난을 통하여 인격의 훈련을 받았던 것 같다. 그런 고난은 하나님의 은혜이었다. 이제 디모데의 신앙 인격은 진실한 교인들에게 알려졌고 인정을 받았다. 디모데는 마치 자식이 아비에게 행함같이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하였다. 오늘날에는 누가 바울일 것이며 누가 디모데일 것인가? 누가 그리스도 예수의 복음을 위해 진실히 수고하며 고난도 감당할 것인가?
[23, 24] 그러므로 내가 내 일이 어떻게 될 것을 보아서 곧 이 사람을 보내기를 바라고 나도 속히 가기를 주 안에서 확신하노라.
바울은 지금 옥에 갇혀 있으므로 자유롭지 못하지만, 그의 수족(手足)이 되어줄 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디모데이었다. 바울은 할 수 있는 대로 속히 디모데를 빌립보 교회에 보내어 바울의 소식을 전하며 그 교회의 형편을 살피게 할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바울은 자기 자신도 속히 가게 될 것을 주 안에서 확신한다.
[25] 그러나 에바브로디도를 너희에게 보내는 것이 필요한 줄로 생각하노니 그는 나의 형제요 함께 수고하고 함께 군사 된 자요 너희 사자로 나의 쓸 것을 돕는 자라.
바울에게는 또 한 사람의 동역자가 있었다. 그는 에바브로디도이었다. 그는 빌립보 교회의 사자로서 바울의 쓸 것을 돕기 위해 파송되어 왔던 자이었다. 그는 주 안에서 바울의 형제이었고 바울과 함께 복음을 위해 수고한 자이었다. 바울은 그를 \'함께 군사 된 자\'라고 표현한다. 신앙 생활과 전도는 마귀와 죄와 세상과의 영적 전쟁이다. 따라서 모든 성도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군병들이다. 특히, 주의 종들과 전도자들이 그러하다.
군인들은 전쟁 때를 위하여 잘 훈련되어야 한다. 성도들의 훈련은 성경 말씀들을 읽고 듣고 배우며 그 말씀들을 실천하고 기도하기를 힘쓰는 생활이다. 말씀과 기도로 잘 훈련된 성도는 어려운 일이 닥쳐도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군인에게 필요한 것은 잘 훈련되는 것과 더불어 죽기까지 복종하는 것이다. 군인은 상관의 명령에 절대 복종해야 하며 죽음의 싸움터에도 용기 있게 나가야 한다. 성도들과 주의 종들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죽도록 충성해야 한다.
[26] 그가 너희 무리를 간절히 사모하고 자기 병든 것을 너희가 들은 줄을 알고 심히 근심한지라.
바울에게 왔던 에바브로디도는 병이 들었다. 이 소식이 빌립보 교회에 전해졌다. 에바브로디도는 빌립보 교인들을 사랑하고 간절히 사모했기 때문에 자기의 병든 소식 때문에 빌립보 교인들이 걱정할까봐 심히 근심하였다. 사랑은 자기를 먼저 생각하지 않고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며, 사랑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염려하지 않고 상대방을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다. 에바브로디도에게 바로 그런 사랑의 심령이 있었다. 오늘 우리에게도 성도들을 위한 이런 진실한 사랑이 필요하다.
[27] 저가 병들어 죽게 되었으나 하나님이 저를 긍휼히 여기셨고 저뿐 아니라 또 나를 긍휼히 여기사 내 근심 위에 근심을 면하게 하셨느니라.
사람의 육신은 참으로 약하다. 에바브로디도는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었다. 그것은 바울에게 근심이 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대(大) 사도라 하더라도 병을 쉽게 고칠 수 있는 능력은 없었던 것 같다. 하나님께서 초대 교회에 주셨던 병 고침의 은사는 사도 시대 말기에 점점 사라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에바브로디도를 긍휼히 여겨주셨다. 병의 치료는 하나님의 긍휼에 달려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긍휼히 여기시기만 한다면, 못고칠 질병이 무엇이랴? 그러므로 우리가 병들었을 때는 오직 하나님께 기도하며 그의 긍휼을 구할 것밖에 없다.
야고보서 5:14-16에는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며 병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28] 그러므로 내가 더욱 급히 저를 보낸 것은 너희로 저를 다시 보고 기뻐하게 하며 내 근심도 덜려 함이니.
바울은 하나님의 긍휼로 병이 낫고 건강을 회복한 에바브로디도를 급히 빌립보 교회로 돌려 보냈다. 그것은 그를 봄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기뻐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럼으로써 빌립보 교인들이 상심할까봐 염려했던 바울의 근심도 덜게 될 것이다. 이처럼 사랑은 상대방을 생각하고 그를 염려하는 것이다.
[29]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이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에바브로디도를 영접하라고 부탁한다. \'모든 기쁨으로\'라는 말은 억지로나 마지못해 하는 영접이 아니고 최선의 기쁨과 즐거움의 자세로 영접하라는 뜻이다. 그는 에바브로디도에 대해서만 국한하여 교훈하지 않는다.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여기에 만대(萬代)의 교회를 위한 한가지 중요한 교훈이 주어져 있다. 그것은, 교인들이 이런 충성된 일꾼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그들을 존귀히 여겨야 한다는 교훈이다. 군대에서 훌륭한 지휘관이 귀하고 중요하듯이,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위하여 진실하게 자신을 바친 충성된 일꾼들이 귀하고 중요하다. 그런 자들이 없다면, 교회는 참된 인도자들을 가지지 못할 것이며 주의 일은 매우 쇠잔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충성된 종들을 귀히 여기신다. 성도들도 그런 자들을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한다.
[30]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
에바브로디도는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참으로 충성된 일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놓은 자이었다. 그는 참으로 후대의 교회를 위하여 희생적 봉사의 모범이 되었다. 주께서는 우리 모두에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부탁하셨다. 죽기까지 하는 충성이 참된 충성이다. 우리도 주를 위해 신실하게 살다가 주를 위해 신실하게 죽자. 주를 위해 죽기까지 충성하는 종들이 되자.
결론적으로, 19절부터 30절까지의 내용은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것이다. 첫째로, 그들은 바울과 뜻을 같이할 진실한 동역자이었고 함께 군사 된 자이었다. 오늘날도 우리에게는 이런 참된 동역자들과 이런 함께 군사 된 자들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에게도 바울이 필요하고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가 필요하다. 오늘날 교회는 주의 진실한 종들을 요구하고 있다. 누가 주를 위해 자신을 즐거이 바치려는가?
둘째로, 그들은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였다. 그리스도 예수의 일이란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한 일, 곧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고 그 복음을 믿은 자들, 곧 교회를 견고하게 세우는 일이었다. 그들은 이 일을 위하여 수고했다. 에바브로디도는 그 일을 하다가 병들었고 죽기에 이르렀으나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않았다. 많은 성도들이 자기 일에 바쁘고 주의 일에 관심이 적거나 없었을 때, 디모데와 에바브로디도는 주를 위해 진실하게 바쳐졌다. 오늘날도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의 일을 구하는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이 필요하다.
셋째로, 바울 사도는 교회가 이런 충성된 종들과 일꾼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겨야 한다고 교훈하였다. 오늘날 진실한 종들과 그들의 충성과 헌신도 필요하지만, 그와 동시에 교회가 그들을 온전한 기쁨으로 영접하고 존귀히 여기는 일도 필요하다. 교회는 주의 진실한 종들을 사랑하고 존중하며 귀히 여겨야 한다.
3장: 기쁨의 이유
1-9절, 내가 가진 의(義)
옥에 갇힌 바울은 육신적으로는 고통스러웠을 것이지만 기뻐했고 또 빌립보 교인들에게 기뻐하라고 권면했다.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 때문에,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의(義) 때문이었다.
[1] 종말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교훈은 본서신의 주요 교훈이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기쁨의 이유와 원천을 보인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이시며 원천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것들은 우리에게 참된 기쁨의 이유가 되지 못한다. 건강도, 물질도, 육신의 아름다움도, 쾌락도, 세상 권세도 다 일시적이며 어느 날 없어지는 것들이 아닌가? 또 그것들을 가지고 있고 누리고 있을 때에도 그것들은 진정한 기쁨이 되지 못한다. 참 기쁨은 우리의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평강 가운데 흘러나오는 것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적 기쁨은 기쁨 후에, 아니 기쁨 중에도, 고독과 고통과 슬픔과 허탈이 있다.
우리의 기쁨은 그런 종류의 기쁨이 아니다. 우리의 기쁨은 오직 예수님의 구원 때문에, 즉 우리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고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하나님의 자녀되는 특권을 얻었고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확실한 소망을 얻었기 때문에 갖게 되는 기쁨이다. 모든 슬픔은 근본적으로 죄의 결과이다. 그러나 죄가 없는 천국은 기쁨으로 충만한 곳이다. 하나님은 기쁨의 주님이시며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는 기쁨 충만한 삶을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지상에서도 우리는 주 안에서, 하나님이 주신 구원 안에서 기뻐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너희에게 안전하다고 표현하였다. 잘 아는 내용이라도 진리의 교리와 교훈은 귀하고 안전하다. 새것은 잘 분별하지 않으면 잘못된 길에 빠지기 쉽다. 그런 점에서 옛것은 안전하다. 잘 아는 성경적 교훈은 안전하다.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손할례당을 삼가라.
\'개들\'은 도덕성이 없고 남을 물어 뜯듯이 해치는 자들을 가리킨다. \'손(損)할례당\'이라는 원어는 \'절단자들\'이라는 뜻으로 할례의 참 뜻을 알지 못하고 몸만 상하게 한 자들이라는 말이다. 이것은 할례를 주장한 유대교인들을 비꼬아 한 말이다. 저들은 참 경건도 도덕성도 잃어버린 자들이었다. 성도들은 저들을 조심해야 했다.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당이라.
할례의 참 뜻은 마음의 성결에 있었다. 이것은 중생(重生)과 성화(聖化)를 가리켰다. 참으로 중생하고 거룩하게 살고자 힘쓰는 자들이 참 할례당이다. 저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자들이다. 참된 예배와 봉사는 하나님의 성령으로 해야 한다. 또 저들은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는 자들이다. 참 성도들은 자신들이 죄악되고 허무하고 무가치함을 아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자신들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높이고 그만 기뻐하고 자랑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만 우리의 의(義)이시요 거룩이시요 완전이시요 그만이 우리의 위로와 힘과 기쁨이시기 때문이다.
[4-6]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니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내가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의 족속이요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로라.
바울 사도는 저 율법주의 거짓 교사들처럼 육신적으로 자랑할 만한 자이었다. 그는 율법에 정통한 바리새인이었고 외적으로는 흠 없는 자이었고 열심으로는 교회를 핍박한 자이었다.
[7, 8]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러나 바울은 그것들을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겼다. 왜 그러했는가? 그것은 \'그리스도를 위하여\'(디아 톤 크리스톤) 즉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말해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에\'이었다. 그리스도와 비교하면, 이 세상의 모든 좋은 것들은 다 무가치할 뿐이다. 아니, 오히려 그리스도를 소유하는데 거리낌과 해로움이 된다. 가문이나 학벌이나 재산이나 사회적 신분 등 세상의 것들, 육신적인 것들이 다 헛되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자랑할 거리가 되지 못한다. 오직 우리의 자랑은 예수 그리스도뿐이다.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주를 사랑할 수 없다(요일 2:15-17). 데마처럼 세상을 사랑하는 자는 주를 떠날 것이다(딤후 4:10). 아무도 자기를 부정하지 않고서는 주를 따를 수 없다.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가진 의(義)\'가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 곧 하나님께로서 난 의(義)라는 것이 하나님의 복음의 요점이요 기독교의 진수(眞髓)이다. 이것이 바로 로마서와 갈라디아서에서 밝히 해설되고 강조되었던 복음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교훈의 요점은 첫째로 주 안에서 기뻐하라는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기쁨의 이유요 기쁨의 원천이시다. 둘째로, 우리는 육체를 신뢰하거나 자랑하지 말자. 우리의 육신의 것들은 죄악되고 무가치하다. 우리의 가문, 학벌, 재산, 사회 신분 등이 무엇인가? 우리도 바울처럼 그것들은 다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기자. 셋째로,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자랑하자. 왜냐하면 우리의 의는 예수 그리스도뿐, 하나님께서 주신 의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은 의뿐이기 때문이다.
10-16절, 부름의 상을 위하여
바울의 기쁨의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곧 그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의(義) 때문이었다. 바울은 다른 모든 것들을 배설물로 여겼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얻은 의만을 귀중히 여겼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요 그 안에는 구원의 보화가 숨겨져 있다.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스럽게 다시 살 것이다.
[10, 11]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를 원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며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골 2:3). 그의 신성(神性), 그의 성육신(成肉身), 그의 독특한 인격, 그의 속죄 사역, 그의 은혜와 사랑, 그리고 그의 영광은 참으로 깊고 신비한 사실들이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알기 원한다.
바울 사도는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권능을 알기를 원했다.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고통과 수치와 저주의 죽음을 죽으셨으나 3일 만에 부활하셨다. 그의 부활은 영광스런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은 죽음을 영원히 정복한 부활이었다. 그의 부활체는 미래의 인간 부활체의 모델이었고 영생할 몸의 예이었다. 그의 부활의 권능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장차 성도들은 이 권능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였고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였다. 성도의 삶은 자기를 부정해야 하는 고난의 삶이다. 전도자의 삶은 더욱 그러하다. 바울은 복음 사역과 교회를 위해 많은 고난을 경험했다. 그는 순교까지도 각오하고 있다. 우리 주 예수께서 죽으신 후 부활하셨듯이, 그는 이제 그리스도의 복음을 위해 고난과 핍박을 받고 순교를 당함으로써 부활에 이르기를 바라고 있다.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몸의 부활은 육신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 상태이다. 그것은 완전 성화의 상태이다. 그러나 부활은 아직 미래의 사건이다. 성도는 아직 불완전한 성화의 상태에 있다. 성도에게는 아직도 육신의 연약성이 남아 있다. 성도의 영적 기쁨과 평강도 때때로 현실 속에서 침해를 당하고 일시적으로 위축된다.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이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주시기로 확정하신 영생과 부활이다. 그것은 성도들에게 주어지기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성도들은 그것을 위해 달려가야 한다. 성도의 삶은 영생을 위한 삶이요 부활을 향해 달음질하는 삶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으로 구원 곧 법적으로 완전한 구원을 받았다. 그러나 우리는 장차 나타날 이 구원을 위해 믿음의 달음질을 성실히 행해야 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은 칭의(稱義) 곧 의롭다 하심의 은혜는 장래에 얻을 영생과 부활의 보장이지만, 그 보장된 영생과 부활을 위해 우리는 현재 성화(聖化)의 달음질을 성실히 달려야 한다.
로마서 6:22, \"이제는 너희가 죄에게서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얻었으니 이 마지막은 영생이라.\" 갈라디아서 6:8,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13, 14]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한 일\'이란 \'한가지 일\'이라는 말이다. 신앙 생활에는 많은 일들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직 한가지 일이 필요하다. 누가복음 10:42의 전통 사본에 보면, 예수께서는 \'한가지가 필요하다\'고 말씀하셨다. 그것은 마리아가 선택한 일 곧 주의 발 아래 앉아 주의 말씀을 듣는 일이었다. 요한복음 6:27, 29에 보면, 예수께서는 다른 모든 일들은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은 하나님의 일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바울 사도에게도 한가지 일이 중요했다. 그것은 믿음의 달음질을 하는 것이었다.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라는 말은 지나간 일들을 잘한 일이든지 잘못한 일이든지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즉 인간적인 자랑거리들도 인간적인 낙심거리들도 다 잊어버린다는 뜻이다. 달음질의 목표는 분명하다. 바울은 그것을 \'앞에 있는 것,\' \'푯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 등으로 표현하였다. 그것은 다 한가지이다. 그것은 구원의 완성 곧 부활과 영생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완전 성화\'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그것은, 이미 법적으로 얻은 의가 장차 완전하게 실현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는 구절에서 \'상\'이라는 원어(브라베이온)는 경주장에서 이긴 자에게 주는 면류관 같은 상을 가리킨다. 고린도전서 9:24에도 같은 말이 사용되었는데, 거기에 보면,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말씀했다.
이 두 구절에서 사용된 \'상\'이라는 말은 성경에 다른 구절들에서 빈번히 나오는 \'상\' 개념과 다르다. 성경에 많이 나오는 \'상\'이라는 원어(미스도스)는 \'보상, 삯, 댓가\'(reward, wage)의 개념이다. 이것은 구원과 다르다. 로마서 4:4은 분명히 말씀하기를, 구원은 삯(미스도스) 곧 보상이 아니라고 했다. 성경에서 약속된 상은 주로 주를 위해 당하는 고난에 대하여(마 5:12, 미스도스; 히 11:35, 미스다포도시아), 구제에 대하여(마 6:1), 주의 종들을 영접하는 행위에 대하여(마 10:41, 42), 그리고 특히 복음 사역자들의 수고에 대하여(고전 3:8, 14; 9:17; 요이 8) 약속된 것들이었다. 그것은 신앙의 기본적 달음질에 추가된 수고와 봉사에 대해 약속된 것이다.
그러나 오늘 본문의 \'상\'은 그것과는 다른 개념이다. 그것은 신앙의 기본적 달음질의 결과로서 약속된 상이다. 그것은 어떤 보상이나 삯이나 댓가가 아니다. 신앙의 기본적 달음질은 당연한 것이다. 성도의 성실한 행위는 당연히 요청되는 것이다. 성도는 주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앙의 달음질을 성실히 행해야 한다. 우리의 목표는 영생과 부활이다. 그것은 우리의 행위에 대한 어떤 댓가가 아니다. 우리는 이미 은혜로 완전한 구원을 얻었다. 그러나 이렇게 구원을 받은 자들은 완전 성화를 향해, 그 부활과 영생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야 한다.
[15]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온전히 이룬 자들\'이라는 원어(텔레이오이)는 \'완전한 자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얻은 완전을 가리킨다. 성도들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법적으로 완전하여졌다. 히브리서 10:14, \"저가 한 제물로 거룩하게 된 자들을 영원히 온전케 하셨느니라(테텔레이오켄).\" 고린도전서 2: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 지혜를 말하노니.\" 골로새서 1: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렇게 생각할지니\'라는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내용을 가리킨다. 즉 이미 무엇을 얻었거나 이루었다고 자만하거나 나태하지 말고 뒤엣 것을 잊어버리고 앞을 향해 달려가야 한다는 생각을 말한다. 심지어 법적으로 얻은 완전한 의(義)와 구원도 성도들에게 자만이나 나태의 구실이 되어서는 안된다.
[16] 오직 우리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그대로 행할 것이라.
\'그대로 행할 것이라\'는 말씀은 전통 사본에 보면 \'같은 규칙으로 행하고 같은 생각을 가지자\'라고 되어 있다. 이것도 이제까지 말씀한 내용의 반복이다. 우리의 영적 성장과 성화(聖化)가 어디까지 이르렀든지, 우리는 교만하거나 자랑하거나 나태하거나 해이해지지 말고 오직 신앙의 목표인 완전 성화를 위해, 즉 영생과 부활을 위해 진지하게, 성실하게 달려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의 교훈은 분명하다. 우리 모두의 신앙의 목표는 동일하다. 그것은 영생과 부활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능력으로 영광의 부활에 이르셨다. 우리에게도 그 영광의 부활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므로 우리도 바울과 같이 그 목표를 향해 진지하게, 성실하게 달음질해야 한다.
17-21절, 나를 본받으라
[17]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나를 본받으라\'는 말씀은 무엇을 본받으라는 뜻인가?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두 가지 요소를 포함할 것이다. 첫째는 이신칭의(以信稱義) 즉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이며, 둘째는 완전 성화(聖化)를 향한 믿음의 성실한 달음질이다. 이신칭의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은 바로 이 사실을 가리킨다. 이것은 성도의 생명이다. 또한 완전 성화를 향한 성실한 삶은 성도에게 합당한 일이다. 그것이 바로 경건한 삶이요 의로운 삶이다. 바울 사도는 육체를 의지하거나 자랑하지 않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의(義)만 의지하는 복음 신앙을 가지고 있었고, 또 영광의 소망을 가지고 고난 중에도 믿음의 달음질을 힘써 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그의 믿음과 그의 달음질을 본받으라고 성도들에게 담대히 권면한다.
\'우리로 본을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는 말씀에 \'보이라\'는 원어(스코페이테)는 \'주시하라, 주목하라\'는 뜻이다. 바울의 걸음을 본받는 자들이 있었다. 복음에 대한 바른 지식을 가지고 예수님을 믿고 완전을 향해 성실히 달려가는 진실한 성도들이 있었다. 빌립보 교인들은 그들을 주목할 필요가 있었다. 오늘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는 성경의 교훈대로 믿고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힘쓰는 자들을 주목해야 한다. 그들은 우리의 신앙 생활에 본이 될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에게 위로와 격려가 될 것이다.
[18]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보인다.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할례를 받고 구약의 율법을 행함으로 구원을 받아야 한다고 가르침으로써 결국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효화시키는 잘못을 범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저 행위 구원론자들은 심지어 십자가의 복음, 은혜의 복음만을 전파했던 바울과 그 동료들을 핍박하였다. 저런 거짓 교사들은 실상 그리스도의 종들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원수들이었다. 바울은 저들에 대해서 갈라디아서에서 자세히 언급하며 논박하였다.
바울은 교회 안에 있는 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이미 여러 번 언급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고 있다. 바울 사도의 전도의 생애는 단순하게 복음을 전파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았고, 또한 순수한 복음을 변호하기 위해 때때로 싸워야 했다. 이것이 초대 교회의 현실이었고 2천년 신약 교회의 역사이었다. 오늘날도 그러하다. 오늘날도 기독교회들 안에 배교자들과 또 그들을 비판하기보다 그들과 타협하는 불성실한 종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참된 종들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의 교회를 어지럽히는 자들이다. 오늘날도 진실한 종들과 성도들은 저 배교자들과 타협자들로 인하여 바울처럼 눈물을 흘린다.
[19]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저희의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바울 사도는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 대해 몇 가지로 묘사한다. 첫째로, 그들의 끝은 멸망이다. 저들은 결국 하나님의 최종적 심판을 피할 수 없다. 요한계시록 19:20은 마지막 대 심판 전에 지옥 불못에 던지울 사람들을 적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라고 예언했다. 거짓 교사들의 결말은 지옥 불못이다.
둘째로, 그들의 신(神)은 저희의 배다. 이것은 저들이 육체적 욕심을 채우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알고 살고 있음을 암시한다.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먹는 것이 최고이며 그 외에도 저들은 물질욕, 정욕, 명예욕, 권세욕에 사로잡혀 그것들에 종노릇하는 자들이다. 탐심은 우상 숭배이다. 저들은 욕심을 신으로 섬기는 자들이다.
셋째로, 그들의 영광은 그들의 부끄러움에 있다. 이 말씀은 그들의 현재의 영광이 결국 부끄러움이 될 것이라는 뜻일 것이다. 하나님께서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에게 참된 영광을 주지 않으실 것이다. 저들의 영광은 사실상 저들의 수치이다. 마지막 날 그들에게는 큰 고통과 부끄러움이 있을 것이다.
넷째로, 그들은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들이다. \'땅의 일\'이란 썩어질 것, 허무한 것 그리고 죄악된 것을 의미한다. 요한일서 2:16에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 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고 증거했다. 하나님과 영원한 천국을 바라보지 않는 모든 자들은 다 헛되고 죄악된 것만을 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20]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원문에는 초두에 \'왜냐하면\'이라는 말이 또 나온다. 이것은 17절에 이어서 빌립보 교인들이 바울을 본받아야 할 이유를 다시 언급한다. 다시 말해, 그들이 바울을 본받아 믿음의 달음질을 잘하며 경건하고 의롭게 살아야 할 이유는, 많은 거짓 교사들과 이단자들이 나타나 있기 때문이며, 또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시민권\'이라는 원어(폴리튜마)는 \'시민권\' 혹은 \'나라\'라는 뜻이다. 거짓 교사들의 삶과 달리, 참된 주의 종들과 성도들은 천국 백성이며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들이다. 이것은 얼마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사실인가? 천국은 모든 사람들이 들어가기를 원하는 영광스러운 나라가 아닌가? 어떤 이들이 미국 시민권을 부러워하지만, 천국 시민권은 그것에 비교할 수 없이 더 가치 있고 더 자랑스럽다.
우리는 지금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천국으로부터 다시 오실 것을 기다리고 있다. 지금 천국에 계신 주 예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이다. 요한계시록 22:20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오심을 기다린다. 우리는 땅만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고 하늘을 우러러 보며 사는 자들이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들만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 아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다(고후 4:18).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목적은 우리를 죄와 불행과 죽음으로부터 구원하시기 위해서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구원은 미래적 의미를 가진다. 구원은 하나이지만, 세 단계가 있다. 중생(重生)과 칭의(稱義)는 구원의 과거적 측면이고, 성화(聖化)는 구원의 현재적 측면이고, 영화(榮化)는 구원의 미래적 측면이다. 우리가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이미 얻었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도우심으로 현재의 거룩함을 이루어가지만, 장차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입게 될 것이다. 그 때 우리는 실제로 죄와 불행과 죽음이 전혀 없는 삶을 경험할 것이다.
[21]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役事)로\'라는 말의 원문(카타 텐 에네르게이안 투 뒤나스다이 아우톤 카이 휘포탁사이 헤아우토 타 판타)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역사로\'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친히 만물을 자신에게 복종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계심을 증거한다. 예수님은 신적 능력을 가지고 계신 주님, 곧 전능(全能)하신 주님이시다.
예수께서는 다시 오셔서 그의 능력으로 우리의 낮고 비천한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 우리가 영생하기 위해 가질 부활의 몸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몸과 같이 영광스러울 것이다. 고린도전서 15:42-44은 증거하기를, \"죽은 자의 부활도 이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사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신령한 몸이 있느니라\"고 하였다. 사람들은 비싸고 좋은 옷을 부러워하지만, 하나님의 예비하신 부활의 몸은 그 어떤 비싼 옷보다도 더 귀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여기에 성도의 기쁨의 이유가 있다. 부활과 천국과 영생이야말로 성도들의 기쁨의 이유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우리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천국 백성이며, 또한 장차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 영광스러운 부활의 몸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천국에 소망을 두고 천국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게 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특히 기독교회들 안에 배교자들과 타협자들이 많은 말세에 우리는 시대의 풍조를 따르지 말고 깨어 믿음의 달음질을 성실히 해야 할 것이다.
4장: 기쁨의 열매
1-3절, 세 가지 권면
본문은 바울 사도의 세 가지 권면의 내용이다.
[1]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아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
\'그러므로\'라는 말은, 앞 장 끝에 언급한 대로,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기 때문에, 예수께서 오셔서 우리를 죄와 파멸로부터 완전히 구원하실 것이기 때문에, 예수께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바울은 성도들을 \'나의 사랑하고 사모하는 형제들, 나의 기쁨이요 면류관인 사랑하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우리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성도들은 함께 하나님의 한 가족이 되었고 함께 천국에 들어갈 자들이 되었다. 천국은 사랑의 공동체이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우리가 이 세상에서도 사랑을 실천하도록 우리에게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다.
특히, 바울에게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의 열매이었다. 바울은 하나님의 복음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일했고 그 결과 사랑스런 빌립보 교회가 설립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교회야말로 바울에게는 \'나의 사랑, 나의 사모하는 자들, 나의 기쁨, 나의 면류관\'이었다. 오늘도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 자신을 바친 전도자들은 성도들을 향해 그렇게 부를 것이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을 그렇게 부르면서 \'이와 같이 주 안에 서라\'고 권면하였다. \'서라\'는 원어(스테케테)는 \'굳게 서라\'는 뜻을 가진다. \'서라\'는 권면은 넘어지지 말라는 뜻을 포함한다. \'이와 같이 주 안에 굳게 서라\'는 말씀은 앞에서 언급한 복음의 진리와 교훈대로 굳게 서라는 뜻이다. 성도들은 거짓 교사들과 달리 천국 소망을 가진 자로서 굳게 서야 한다. 성도들은 \'주 안에\' 곧 주님의 진리의 지식에, 주를 믿는 믿음에, 주를 사랑함에, 주의 교훈을 순종함에, 주를 소망함에, 주께 대한 충성에, 주의 진리를 위한 선한 싸움을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모든 성도들은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이것이 본문에 나타난 첫번째 권면이다.
[2] 내가 유오디아를 권하고 순두게를 권하노니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우리가 자세히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는 권면의 말씀을 보면, 그 두 사람은 서로 생각과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 같다. 빌립보 교회는 좋은 교회이었지만, 그 교회 안에도 서로 생각이 맞지 않은 자들이 있었다. 빌립보 2:2, 3에서도 그런 형편이 암시되어 있었다. 거기에서 바울은, \'마음을 같이 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며 한 마음을 품어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라\'고 말씀했었다. 교회 안에 다투는 성도들에게 이 교훈은 절실하다. 우리는 주 안에서, 주의 진리 안에서, 성경적 교훈에 일치하여,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지도록 힘써야 한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두번째 권면이다.
[3]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 구하노니 복음에 나와 함께 힘쓰던 저 부녀들을 돕고 또한 글레멘드와 그 위에 나의 동역자들을 도우라. 그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느니라.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자 네게\'라는 말이 누구에게 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는 아마 빌립보서를 받은 자 곧 빌립보 교회의 대표자이었을 것 같다. 여하튼, 그는 바울과 함께 멍에를 같이한 자이었다. \'멍에를 같이하는 것\'은 복음 사역에 함께 수고하는 것을 가리킨다. 또 빌립보 교회에는 바울과 함께 복음에 힘썼던 여인들이 있었다. 이 전도 부인들은 복음의 일에 전념하였던 것 같다. 바울은 또 글레멘드와 그 외의 그의 동역자들을 언급한다.
바울은 이 모든 복음의 동역자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음을 증거한다. 그들의 이름들이 생명책에 있다는 것은 그들이 확실히 구원받은 자들임을 의미한다. 우리의 이름들이 하늘의 생명책에 기록된 것은 가장 복된 일이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귀신들이 너희에게 항복하는 것으로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으로 기뻐하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눅 10:20). 우리 모두의 가장 큰 감사와 기쁨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바울이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음을 확신한 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의 행위를 보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의 행위를 통해 확증되는 법이다. 그래서 바울은 데살로니가전서1:3, 4에서 이렇게 말했다.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고 기억함이니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복음 사역자들의 충성과 수고는 그들의 구원에 대한 확실한 증거이다.
바울은 이처럼 복음의 동역자들을 언급하면서 빌립보 교회의 성도들에게 \'저들을 도우라\'고 권면하였다. 이것이 본문이 보이는 세번째 권면이다.
성도들은 어떻게 복음의 일꾼들을 도와야 하는가? 첫째로, 우리는 위로와 격려의 말로 도와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님은 \'보혜사\'(파라클레토스) 곧 위로자, 격려자이시다. 위로와 격려의 말은 모든 종류의 일꾼들에게 항상 도움이 된다. 둘째로, 우리는 기도로 도와야 한다. 기도는 항상 우리가 다른 이들에게 줄 수 있는 최고의 도움이다. 그래서 바울은 성도들에게 항상 기도를 부탁하였다.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셋째로, 우리는 물질적 공급으로 도와야 한다. 이것이 본문의 본뜻인 줄 안다. 복음의 일꾼들은 세상 직업과 직장을 포기하고 오직 교회의 일에만 전념하는 자들이다. 마치 구약 시대의 레위인들과 제사장들처럼, 오늘날 교회의 전임(專任) 사역자들은 교회의 일, 복음의 일에만 매어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저들의 물질적 필요를 도와야 한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이 주는 세 가지 권면을 깨닫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하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첫째로, 우리는 주 안에 굳게 서야 한다. 주의 진리의 지식과 믿음과 소망 안에, 순종과 충성과 진리의 싸움에 굳게 서야 한다. 둘째로, 우리는 주 안에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사사로운 생각을 버리고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온전한 뜻에 일치하는 생각만을 가지도록 힘쓰자. 셋째로, 우리는 복음의 일꾼들을 돕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이 교회 일 곧 주의 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교회는 저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즐거이 공급해야 할 것이다. 복음 사역자들과 그 가족들이 의식주 문제 때문에 세상의 일에 유혹을 받지 않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다.
4-7절, 주 안에서의 특권들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특권과 같이 누리는 덕들을 증거한다.
[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항상 기뻐하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그리스도인의 특권이다. 슬픔으로 가득한 이 세상에서 누가, 어떻게 항상 기뻐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항상 기뻐할 수 있는 이유는 \'주 안에서\'라는 말에 있다. \'주 안에서\'라는 말은 주께서 우리에게 주신 구원과 그 안에 포함된 모든 은택들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우리의 근본적 죄 문제를 해결해 주셨다. 그러므로 죄의 결과들인 그 외의 모든 문제들은 주 안에서 이미 원리적으로 다 해결된 것이나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장차 천국에서 그 완전한 성취를 누리게 될 것이다(롬 14:17). 그러나 우리는 지금 이 슬픔 많은 세상에서도 항상 기뻐할 수 있는 복을 누린다. 기쁨은 성령께서 우리 속에서 일하셔서 우리로 맺게 하시는 중요한 열매이다(갈 5:22).
[5]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관용\'이라는 원어(토 에피에이케스)는 \'온유함, 친절함\'이라는 뜻이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어떻게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가? 혹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할 수 있다 할지라도, 어떻게 자기와 친분 관계가 없는 자에게, 자기보다 못한 자에게, 심지어 자기를 미워하고 비난하는 자에게 그렇게 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하신다. \'너희 관용을, 너희 온유함과 친절함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성도가 모든 사람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할 수 있는 까닭은 주께서 오시면 모든 일을 다 공의롭게 판단하시고 선악 간에 보응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는 말씀은 그 뜻이다. 장차 온 세상을 심판하러 오실 주 예수께서 가까이 와 계신다. 주의 재림이 심히 가깝다. 그러므로 모든 판단을 그에게 맡기고 우리는 오직 모든 사람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만 알고 이 세상의 것만 구하는 자들이라면 모르지만, 우리가 천국을 알고 천국의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을 구하는 참 성도라면 우리는 그렇게 할 수 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 우리같이 부족하고 죄 많은 자들을 관용하시고 너그러이 대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큰 구원의 은혜를 베푸신 것을 생각하면,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 큰 은혜 받은 것을 잊지 말고 다른 이들에게 온유하고 친절하게 대하는 자들이 되자.
[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이 세상에는 염려하고 걱정할 일들이 많이 있다. 학생은 학교 성적이나 진학의 염려, 친구들에게 따돌림 받거나 구타를 당할 염려, 청년은 취직과 결혼의 염려, 장년은 직장, 사업, 경제 문제를 인한 염려, 건강의 염려, 노년은 자녀들의 평안, 자신의 건강, 경제적 대책, 외로움 등의 염려가 있을 것이다. 인생은 염려로 가득한 삶이며 세상은 염려로 가득한 세상인 것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명령하셨다. 실상, 우리가 염려한다고 무엇을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염려는 우리의 기쁨과 평안과 활기를 빼앗아 갈 뿐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좋다. 염려하지 않는 삶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특권이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셨으니 또한 하나님께서 보장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라고 하신 것은, 염려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염려하지 말고 그 대신 기도하라고 가르친 것이다. 우리가 살아계시고 전지 전능하시고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리고 그가 우리를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고 우리를 위하시고 지키시고 도우시기를 원하심을 믿는다면, 우리는 어떤 환경과 처지에서도, 어떤 어려운 문제를 직면했을 때라도 염려하거나 당황하고 낙심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표현이다.
우리는 \'모든 일에\' 기도해야 한다. 우리가 기도하지 못할 일은 아무 것도 없다. 큰 일도, 작은 일도, 정신적인 일도, 육체적인, 물질적인 일도, 개인적인 일도, 가정적인, 교회적인, 국가적인 일도 무슨 일이든지 우리는 기도할 수 있고 기도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참 믿음이다.
우리는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아뢰되 \'감사함으로\' 그렇게 해야 한다. 감사함이야말로 믿는 자만이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하나님께서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실 것을 믿는 자가 아니고서는 결코 범사에 감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자는 감사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하며, 감사함으로 우리의 소원을 그에게 아뢰어야 한다.
[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금방 오지 않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뜻은 우리의 뜻과 다를 경우가 많다. 하나님의 시간표는 우리의 생각하는 시간표와 다를 경우가 많다. 그래서 기도가 금방 응답될 때도 있으나 기도가 오랫 동안 응답되지 않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다. 그러나 그 어떤 경우에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가장 선한 길로 우리를 인도하고 계신 것이 확실하기 때문이다. 무지하고 조급한 우리도 시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의 최선의 뜻을 깨닫게 될 것이다.
또 우리는 고난의 현실을 피하고 싶어하고 건강이나 물질적 풍요만을 복이라고 잘못 생각하지만, 그것들이 복이기도 하지만 때때로 화이기도 하다. 참된 복은 하나님을 바로 알고 바로 믿고 바로 섬기고 죄 짓지 않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삶을 살도록 우리를 인도하는 고난이나 질병이나 가난의 경험은 하나님의 미움이 아니고 사랑의 증거이며, 하나님의 저주가 아니고 복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응답보다 더 중요한 것은 지금의 현실을 믿음과 평강으로 대처해 나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의 일차적 응답은 마음과 생각의 평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이 무슨 응답인가 하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마음과 생각의 평강은 하나님이 주시는 즉각적이고 가장 고상한 응답이다.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표현은 \'모든 이해를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이라는 뜻이다. 마음의 평강을 가질 수 없으리라고 생각되는 현실 속에서도,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를 지키신다는 말씀이다. 그것은 놀라운 기도의 응답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믿고 기도하는 자들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이다. 기도의 응답과 그 일차적 응답으로서의 마음과 생각의 평강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누리는 성도의 특권이다. 그리스도 예수 밖에서는 이것이 가능하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현세와 내세의 모든 삶을 보장한다. 로마서 8:28은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했고, 로마서 8:32은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라고 말씀했다.
결론적으로, 4절부터 7절까지의 본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세 가지 특권을 증거한다. 첫째는 항상 기뻐하는 삶의 특권이다. 이것은 주 안에서만 가능하다. 둘째는 모든 사람들에게 관용과 온유함과 친절함을 나타내는 삶의 특권이다. 이것도 주의 재림이 가깝기 때문에 가능하다. 셋째는 아무 것도 염려하지 않고 오직 기도함으로 평강한 삶을 사는 특권이다. 이것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특권이요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삶이다. 하나님은 믿는 우리를 위하신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허락하신 기쁨과 친절과 평강의 삶을 누리는 자들이 되자.
8-9절, 완전을 실행하라
[8] 종말로 형제들아 무엇에든지 참되며, 무엇에든지 경건하며,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정결하며,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 무슨 덕이 있든지, 무슨 기림이 있든지, 이것들을 생각하라.
본절은 그리스도인들의 생활 목표를 보인다. 그것은 한마디로 \'완전\'이다. 우리에게 어떤 덕이나 기림(칭찬)이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어야 할 것은 분명하다. 우리가 생각해야 할 바들이 무엇인가는 분명하다. 로마서 8:5, 6에는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영[성령]을 좇는 자는 영[성령]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성령]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니라\"라고 말씀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에 속한 자들이 아니고 성령에 속한 자들이므로 마땅히 성령께서 주시는 덕과 칭찬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그것들을 몇 마디로 표현한다.
첫째로, 그는 \'무엇에든지 참되며\'라고 말씀한다. 우리는 범사에 참된 삶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위선과 거짓과 속임이야말로 하나님께서 매우 미워하시는 악이다. 우리가 비록 유능한 인물이 못될지라도 진실한 인물은 되어야 한다. 성도의 성도다운 특징은 진실함에 있다.
둘째로, 우리 말 성경의 본문은 \'무엇에든지 경건하며\'라고 말씀한다. \'경건하다\'고 번역된 원어(셈노스)는 디모데전서 3장에서 \'단정하다\'고 번역된 말로서 \'진지하다, 존경할 만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성도들은 범사에 진지한 태도로 무엇을 생각하고 믿고 행동해야 한다. 그것이 존경할 만한 인격자의 모습이다.
셋째로, 바울은 \'무엇에든지 옳으며\'라고 말씀한다. 옳은 삶, 의로운 삶, 그것이 성도들의 생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든지 불의하거나 불법, 위법하거나 부당한 것을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항상 정정당당하게 살기를 힘써야 한다.
넷째로, 바울은 \'무엇에든지 정결하며\'라고 말씀한다. \'정결하다\'는 원어(아그노스)는 \'순수하다, 단정하다, 순전하다, 무흠하다\'는 뜻을 가진다. 우리는 사사로운 욕심과 부당한 정욕을 품으므로 불결한 자, 불순한 자, 흠이 있는 자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우리는 돈 문제나 명예 문제나 이성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는 순수한 자, 순결한 자가 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무엇에든지 사랑할 만하며 무엇에든지 칭찬할 만하며\'라는 말씀들은 인격의 완전함을 묘사한다. 진실함, 진지함, 의로움, 순수함 등의 인격의 면모들은 인격의 완전함을 잘 드러낼 것이다. 그런 인격이라면 하나님과 사람들이 사랑할 만하며 칭찬할 만한 인격이다. 성도들이 생각해야 할 것들은 바로 이런 덕들이다. 성도들은 완전을 생활 목표로 삼고 그것들에 생각과 마음을 집중해야 한다.
[9] 너희는 내게 배우고 받고 듣고 본 바를 행하라.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
한 걸음 더 나아가, 바울 사도는 그것들을 행하라고 말씀한다. 원문에서 \'내게\'라는 말(엔 에모이)은 \'내 안에서\'라는 뜻이며 \'본 바\'라는 말에 걸린다. 다시 정확히 번역하면, \'너희는 배우고 받고 듣고 또한 내 안에서 본 그것들을 행하라\'이다. 빌립보 교인들이 배우고 받고 들은 것들은 방금 언급한 \'완전함\'이다. 그들은 성도가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진지하고 무엇에든지 옳고 무엇에든지 순수해야 한다는 것을 지금까지 배우고 받고 들었다.
또한 그들은 그 완전함을 바울의 신앙 생활 속에서 보았다. 바울은 범사에 모범적 삶을 살았다. 비록 엄격한 의미에서의 완전은 아닐지라도, 그는 비교적 흠이 없는 인격자로서 성도들 앞에서 행하였다. 그래서 그는 3:17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말씀하기도 하였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4:3, 4에서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치 아니하노니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그러나 이를 인하여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판단하실 이는 주시니라\"고 간증하기도 하였다. 바울의 생활 교훈은 자신이 직접 실천한 바이었다. 가장 효과적 교육은 직접 모범을 보이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 성도들에게 완전함을 생활 목표로 삼고 그것을 실천하라고 가르친다. 완전한 삶을 항상 생각하고 완전한 삶을 실행하라는 교훈이다. 하나님의 구원은 생활의 변화이다. 생활이 개선되지 않는 구원은 구원이라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고, 도덕적으로 불결한 자가 변하여 깨끗한 자가 되는 것, 그것이 진정한 구원이다. 우리가 참으로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바로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도덕적 완전은 바로 우리의 삶의 목표요 실천 강령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다\'(약 2:17).
온전한 삶의 결과는 무엇인가? 바울 사도는 계속, \"그리하면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 말씀했다. 온전한 삶의 결과는 첫째로 하나님과의 동행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는 것은 특권 중의 특권이요 가장 든든한 보장이며 보증이다. 그것은 각양의 기도 응답을 포함한다. 과연 요한일서 3:21, 22에 보면, \"사랑하는 자들아 만일 우리 마음이 우리를 책망할 것이 없으면 하나님 앞에서 담대함을 얻고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고 말씀했다. 온전한 삶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고 우리의 기도를 늘 들으시는 복된 삶인 것이다.
둘째로, 온전한 삶의 결과는 하나님의 평강이다.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성경에서 \'평강\'이라는 말(에이레네, 히브리어 샬롬)은 \'안정, 평안, 건강, 번영 등\'을 뜻한다. 그것은 불안, 전쟁, 병, 가난과 반대되는 말이다. 이사야 48:18은 말씀하기를, \"슬프다 네가 나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였도다. 만일 들었더면 네 평강이 강과 같았겠고 네 의가 바다 물결 같았을 것이며\"라고 했다. 악인들에게는 평강이 없지만(사 48:22),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평강이 넘칠 것이다. 정상적으로 말해, 그것은 건강과 물질적 여유를 포함한다.
결론적으로, 본문이 보이는 대로 진리가 그러할진대 우리는 무엇에든지 참되고 무엇에든지 진지하고 무엇에든지 옳으며 무엇에든지 순수한 인격자가 되기를 생각하고 그것을 실천하는 자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도덕적 완전, 그것이 바로 성도들이 생활 목표로 삼아야 할 내용이며 또 실천해야 할 바이다. 또한 그러한 삶에는 하나님의 함께 하심이 있고 기도의 응답이 있고 하나님의 평강이 넘칠 것이다.
10-14절, 자족하기를 배움
[10]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바울 사도의 전도 사역 초기에, 빌립보 교인들은 그를 물질적으로 후원하였으나 얼마 동안 그 일이 중단되었었다. 그러다가 그들이 다시 바울에게 물질적 도움을 보내왔다. 바울은 이 일에 대하여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하였다. 왜냐하면 그러한 물질적 도움은 그들이 그의 복음 사역과 그 고난에 동참한 일이었기 때문이다(빌 4:14). 또한 그것은 그들의 믿음과 사랑의 진실함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였다(고후 8:8; 9:13).
성도들의 편에서 전도자들을 생각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바울 사도는 다른 서신에서도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하라\"고 말씀하였다(갈 6:6). 하나님께서는 구약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소득의 10분의 1을 하나님의 것으로 구별하여 드려 성전 봉사의 일에 전념하는 레위인들의 생활비로 쓰게 하셨다(민 18:21; 신 12:19).
예수께서는 전도자들을 위한 물질적 배려와 공급이 복된 일임을 말씀하셨다. 마태복음 10:40-42,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또 누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이 소자 중 하나에게 냉수 한 그릇이라도 주는 자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사람이 결단코 상을 잃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또한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성도들이 주의 종들 중 지극히 작은 자 한 사람에게 한 선행, 곧 그가 주릴 때 먹을 것을 주고 목마를 때 마시게 하고 나그네 되었을 때 영접하고 벗었을 때 옷을 입히고 병들었을 때 돌아보고 옥에 갇혔을 때 와서 본 것이 천국에 합당한 행위임을 증거하셨다.
[11]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바울은 자신의 자족하는 생활 신조를 간증한다. 그것은 아마 그들의 물질적 후원에 대한 그의 기쁨이 그가 단지 물질을 사랑하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이었을 것이다. 그는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다\'고 말한다. 성도들의 편에서는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적으로 돕는 것이 합당하지만, 전도자들의 편에서는 물질에 속박을 받지 않고 물질을 초월하여 자족하는 생활을 하는 것이 합당하다.
주께서는 12제자들을 전도하러 보내실 때 \'너희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이나 가지지 말고 여행을 위하여 주머니나 두 벌 옷이나 신[신들]이나 지팡이[지팡이들]를 가지지 말라. 이는 일군이 저 먹을 것 받는 것이 마땅함이니라\'고 말씀하셨었다(마 10:9, 10).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복음 전파자들이 복음으로 사는 것이 합당하지만, 복음에 장애가 없게 하기 위해 자신은 그 권리를 쓰지 않았다고 증거하였다(9:12).
자족하는 생활은 전도자들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이 배워야 할 생활이다. 염려는 탐심에서 나온다. 참된 믿음은 모든 세상적 염려를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가져온다. 그래서 주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 날에 족하니라.\"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에서 성도들이 돈을 사랑치 말고 자족하며 살아야 할 것을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딤전 6:7-10).
[12]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하는 생활은 반드시 가난하게 사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중세 시대의 수도사들이 생각했듯이 가난하게 사는 것이 선(善)이며 덕(德)인 것은 아니다. 자족하는 삶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아는 삶을 말한다. 자족하는 자는 배부를 줄도 알고 배고플 줄도 알며, 풍부에 처할 줄도 알고 궁핍에 처할 줄도 안다.
이 세상의 삶은 잠시 지나가는 나그네 길이다. 우리에게는 영원한 미래의 세계가 있다. 그 세계의 영광을 확신하고 소망하는 자들은 이 세상의 빈부 귀천의 삶에 만족하거나 불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전도자들과 성도들의 의식주의 필요를 아시고 공급하실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부자되는 것을 약속하지는 않으셨으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보장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진리를 아는 자마다 탐욕도 염려도 버리고 언제나 어떤 형편에서나 자족하는 삶을 살 수 있다.
[13, 14]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그러나 너희가 내 괴로움에 함께 참예하였으니 잘하였도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어려운 환경 처지에서도 낙심치 않고 자족하며 그 환경 처지를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도우신다. 전통 사본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되어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능력을 주시고 우리를 강건케 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어떤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이겨나갈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위로와 힘과 도움이시다.
인간은 심히 제한적이다. 인간은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한다. 전도서 7:13, 14, \"하나님의 행하시는 일을 보라. 하나님이 굽게 하신 것을 누가 능히 곧게 하겠느냐?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
성경은 인간이 심히 제한적이기 때문에 인간을 의지하지 말라고 말씀했다. 이사야 2:22, \"너희는 인생을 의지하지 말라. 그의 호흡은 코에 있나니 수에 칠 가치가 어디 있느뇨?\" 돈도 재앙의 날에는 쓸데 없다. 에스겔 7:19, \"그들이 그 은을 거리에 던지며 그 금을 오예물같이 여기리니 이는 여호와 내가 진노를 베푸는 날에 그 은과 금이 능히 그들을 건지지 못하며 능히 그 심령을 족하게 하거나 그 창자를 채우지 못하고 오직 죄악에 빠치는 것이 됨이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경수가 끊어진 늙은 여자가 어떻게 아기를 가질 수 있는가 하고 의심하며 웃었던 사라를 보시고 아브라함에게 \"여호와께 능치 못한 일이 있겠느냐?\"라고 말씀하셨다(창 18:14). 또 그는 20세 이상의 남자 보행자만 60만명인 이스라엘 백성에게 1개월간 고기를 먹이시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던 모세에게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고 반문하셨다(민 11:23). 유일하신 여호와 창조주는 전능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은 비록 자신의 지식도 능력도 건강도 물질도 제한적이지만, 전능하신 참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할 때 어떤 환경 여건에서도 낙심치 않고 그 환경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역대하 16:9에 보면, 선지자 하나니는 유다왕 아사에게,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신다\'고 말씀했다.
또 이사야 40장에는 우리에게 힘을 주는 다음과 같은 말씀이 있다: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자는 피곤치 아니하시며 곤비치 아니하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자빠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결론적으로, 10절부터 14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찾는다. 첫째로, 성도들은 전도자들을 생각하고 물질로 도와야 한다. 그것은 복음 사역과 그 고난에 참여하는 일이 된다. 둘째로, 전도자들과 또한 성도들은 자족하는 삶을 배워야 한다. 염려를 다 주께 맡기고 그가 공급하시는 의식주로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를 의지할 때 현실을 이겨나갈 수 있다.
15-23절, 헌금의 의미
[15, 16] 빌립보 사람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복음의 시초에 내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에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한 교회가 너희 외에 아무도 없었느니라. 데살로니가에 있을 때에도 너희가 한 번 두 번 나의 쓸 것을 보내었도다.
\'복음의 시초에\'라는 말은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던 초기를 가리키는 것 같다. 복음은 죄인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바울은 주후 48년경 수리아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사로 파송되었고(행 13:1-3) 주후 51년경 제2차 전도 여행시 마게도냐 지방으로 건너가 그 지방의 첫성인 빌립보에서 복음을 전파하였다(행 16:12).
\'주고 받는 내 일에 참여하였다\'는 말은 \'주고 받는 일로 나와 교제하였다\'는 뜻인데,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를 떠나 다른 곳들에서 복음을 전파했을 때 빌립보 교인들은 전도 후원금으로 바울을 도왔음을 가리킨다. 그 때 바울을 도왔던 교회는 그 교회뿐이었다. 바울이 그들을 떠나 이웃 도시 데살로니가로 가서 복음을 전했을 때(행 17장), 그들은 벌써 그를 돕기 시작했었다. \'한 번 두 번\'이라는 말(카이 하팍스 카이 디스)은 \'몇 번\' 혹은 \'여러 번\'이라는 뜻이다.
헌금은 하나님께 바치는 물질을 말하며 그 용도는 전도와 구제이다. 물론 전도는 국내외의 전도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지교회의 모든 목회 활동을 포함한다. 지교회의 운영을 위해 쓰는 것은 전도 활동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자체적 교제를 위해서는 헌금을 가장 적게 써야 할 것이다.
[17] 내가 선물을 구함이 아니요 오직 너희에게 유익하도록 과실이 번성하기를 구함이라.
17절과 18절은 헌금의 의미에 대해 계시한다. 첫째로, 헌금은 성도의 열매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행실이 있는 성도가 되기를 원하신다. 좋은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듯이, 구원받은 성도는 천국 백성다운 열매를 맺어야 한다. 요한복음 15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자신을 참 포도나무로 그리고 우리를 그 가지로 비유하시면서 우리가 그 안에 거하여 열매를 많이 맺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헌금은 한 열매이다. 그것은 크게 기뻐할 열매이다(빌 4:10).
\'너희에게 유익하도록\'이라는 말은 헌금이 헌금하는 사람 자신에게 유익이 된다는 사실을 보인다. 어떤 유익을 말하는가? 그것은 헌금하는 자의 믿음의 진실성을 증거하는 유익이 있다. 우리는 헌금하는 자신을 보고 우리의 믿음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구제 헌금은 하나님께 빌려드리는 것과 같다고 성경은 말씀한다. 잠언 19:17, \"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예수께서는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드러나게 갚으시리라\'고 말씀하셨다(마 6:4, 전통 사본).
우리는 헌금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어야 한다. 주께서는 포도나무 가지들 같은 우리가 많은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구약 성경의 헌금의 표준은 소득의 온전한 십일조와 기타 예물들, 예를 들어 감사와 서원과 자원의 예물들이지만(말 3:8), 신약 성경의 헌금의 표준은 \'풍성하게 드리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8:7, \"오직 너희는 믿음과 말과 지식과 모든 간절함과 우리를 사랑하는 이 모든 일에 풍성한 것같이 이 은혜[헌금]에도 풍성하게 할지니라.\" 그러므로 신약 성도들은 소득의 십일조와 예물들 이상을 풍성하게 하나님께 드리기를 힘써야 한다.
[18] 내게는 모든 것이 있고 또 풍부한지라 에바브로디도 편에 너희의 준 것을 받으므로 내가 풍족하니 이는 받으실 만한 향기로운 제물이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
마지막 부분을 다시 번역하면, \'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제물이라\'이다. 본문에 계시된 헌금의 또 하나의 의미는,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라는 것이다. \'향기로운 냄새\'라는 표현은 구약 성경 레위기 처음 부분들에 여러 번 나오는 표현이다(레 1:9, 13, 17; 2:2, 9; 3:5, 16). 하나님께서는 번제와 소제(곡물 제사)와 화목제에서 제단에 태워지는 제물의 냄새를 \'향기로운 냄새\'라고 말씀하셨다. 전도자 바울을 위한 물질적 후원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향기로운 냄새요 받으실 만한 제물이었다. 히브리서 13:16은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고 말씀했다.
번제물과 소제물과 화목제물과 같이, 헌금은 하나님께 대한 헌신과 순종과 감사의 표시들이다. 하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린 자만이 즐거이 헌금할 수 있다. 고린도후서 8:5에 보면, 마게도냐 교인들은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 뜻을 좇아 바울 사도 일행을 위해 주었기 때문에 즐거이 헌금하였다. 또한 하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자마다 즐거이 헌금할 수 있다(고후 8:8). 요한일서 3:17, 18에는,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 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 보냐?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라고 기록되어 있다.
헌금이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므로, 그것은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예배의 중요한 요소들은 찬송과 기도와 설교와 헌금이다. 히브리서 13:15에 보면,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고 했다. 또 요한계시록 5:8에는, \"[금 대접에 가득한] 향은 성도의 기도들이라\"고 말씀했다. 마태복음 4:4에는,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했다. 찬송, 기도, 설교, 헌금--이 네 가지 가운데 설교가 가장 중요한 요소이지만, 헌금도 예배의 중요한 한 요소이다. 이것은 물론 예배 때마다 헌금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고린도전서 16:2에 보면, \"매주일 첫날에 너희 각 사람이 이(利)를 얻은 대로 저축하여 두어서 내가 갈 때에 연보를 하지 않게 하라\"는 말씀이 있다. 헌금하는 시간은 교회가 적절히 정할 수 있다.
[19, 20]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을 돌릴지어다. 아멘.
본문은 하나님께서 헌금하는 성도들에게 모든 필요한 것을 채워주실 것이라고 말씀한다. 이것은 약속과도 같은 말씀이다. 우리 하나님은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하나님이시며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다. 시편 24:1, \"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학개 2:8, \"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그러므로 헌금은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받은 하나님의 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대상 29:11, 14).
우주 만물의 주인이시며 부요하시고 풍성하신 우리 하나님께서는 믿음으로 살며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성도들의 생활의 필요를 공급하신다. 마태복음 6:33, \"너희는 먼저 그의[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의식주의 필요]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편 37:25, 26, \"내가 어려서부터 늙기까지 의인이 버림을 당하거나 그 자손이 걸식함을 보지 못하였도다.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주니 그 자손이 복을 받는도다.\" 잠언 11:24, 25,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지리라.\"
엘리야 시대의 사렙다 과부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공급하심에 대한 좋은 예이다. 요단 앞 그릿 시내가 마르자 선지자 엘리야는 시돈 땅 사르밧으로 가서 거기서 한 과부를 만나 떡 한 조각을 요청한다. 그런데 그 과부에게는 떡이 없었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가 엘리야의 요청대로 그에게 떡을 주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 과부와 그의 아들과 엘리야가 여러 날 먹게 하셨고 그 기근의 기간 동안에 \'통의 가루가 다하지 않고 병의 기름이 없어지지 않게\' 하셨다(왕상 17:8-16). 오늘날도 하나님께서는 그를 진실히 믿고 그의 뜻대로 살고자 애쓰는 그의 친백성을 결코 버리지 않으시고 그들의 필요를 공급하여 주신다.
[21-23]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도에게 각각 문안하라. 나와 함께 있는 형제들이 너희에게 문안하고 모든 성도들이 너희에게 문안하되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너희 심령에 있을지어다.
\'성도\'와 \'형제\'라는 명칭들은 귀하고 아름다운 명칭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단번에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고 형제 자매가 되었다(엡 2:19; 마 12:50). 이것은 세상 사람들 모두가 누리는 복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과 교회가 구별되는 바로 그 점이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의 성도들이 서로 문안하기를 원하며 또 자기와 함께 있는 성도들의 문안도 그들에게 알린다.
\'특별히 가이사 집 사람 중 몇이니라\'는 말씀은 놀라운 사실을 증거한다. 비록 바울 사도가 로마 감옥에 갇혀 있었으나, 그가 전한 복음은 가이사 즉 로마 황제의 집안에까지 들어갔던 것이다. 놀라운 전도의 진전과 확장과 결실이다!
결론적으로, 빌립보서의 이 마지막 부분은 우리가 우리의 신앙의 열매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제물인 헌금을 풍성하게 할 것을 가르친다. 또한 풍성하신 하나님께서 믿음으로 살며 헌금하는 성도들에게 그들의 모든 쓸 것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채우실 것을 가르친다. 우리는 헌금하는 일에 있어서도 풍성하기를 기도하며 힘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