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로새서 강해
내용 목차
1장: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2장: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하심
3장: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4장: 그리스도의 일꾼들
골로새서의 특징적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완전 충족하심이다. 바울 사도는 이 서신에서 골로새 교회에 들어온 금욕주의적 율법주의 이단을 반박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하심과 완전 충족하심을 증거한다.
1장: 그리스도의 탁월하심
1-2절, 문안 인사
[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형제 디모데는.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것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되었음을 증거한다. 이것은 바울이 그의 직분에 대한 사명감이 분명했음을 보인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자신이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 직분을 받았다는 사명감을 가져야 한다. 목사도, 장로도, 권사도, 집사도 그러하다. 우리는 우리의 직분에 대한 사명감이 분명해야 겸손하게 그리고 낙심치 않고 하나님 앞에 충성할 수 있다.
[2] 골로새에 있는 성도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편지하노니 우리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성도들\'은 세상에서 가장 귀한 이름이다. 죄로 인하여 더러워졌던 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 공로로 죄씻음 받고 단번에 거룩하여졌다. 그것이 구원이며 하나님의 은혜이다. 성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받은 자의 존귀한 이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란 그리스도를 진실하게 믿는 자들을 가리킨다. 그들은 하나님의 가족들이며 천국의 백성들이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참 형제들이다. 사실상, 신앙 안에서 맺어진 관계는 혈육적 관계보다 더 의미 있다. 믿음 안에서 형제 자매는 육신의 형제 자매보다 더 친밀하다. 육신의 형제는 100년간의 관계이지만, 믿음의 형제는 영원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은혜와 평강\'은 사람들이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복이다. 은혜는 죄씻음과 구원의 복이요, 평강은 그 구원에 뒤따르는 혹은 그 구원과 동반되는 복이다. 이 두 가지의 복은 다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온다. 그러므로 우리가 서로를 위해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오는 은혜와 평강을 기원하며 문안하는 것은 매우 귀한 특권이다.
3-8절, 믿음, 소망, 사랑을 인해 감사함
[3] 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기도할 때마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감사하노라.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하여 항상 기도하였다. \'기도할 때마다\'라는 원어는 \'항상 기도하면서\'라고 번역할 수 있다. 다른 성도들을 위한 기도는 참으로 귀한 사랑의 행위이다. 우리도 교회를 위해, 다른 성도들을 위해, 구역 식구들을 위해, 주일학교 반 학생들을 위해, 목사와 교역자들을 위해 항상 기도하는 자들이 되자.
[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음이요.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기도할 때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그 이유는 그들의 믿음과 사랑과 소망을 인함이었다. 그것들은 한마디로 그들의 하나님께 받은 구원과 그 결과이다. 그것들은 세상의 것들과 비교할 수 없이 가치 있는 것들이다. 우리도 세상의 것들보다 우리의 구원과, 구원의 행위와, 장차 누릴 영광을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자.
첫째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께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은 구원의 생명이다. 믿는 자는 구원을 얻지만, 믿지 않는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가장 큰 보화와 같다. 그런데 이 믿음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은혜로 부르신 자들만 가질 수 있다. 골로새 교인들에게는 이 귀한 믿음이 있었다. 그들은 구원받은 자들이었다.
둘째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수님의 주신 새 계명이며 참 교회의 모습이다.
무엇이 참 교회의 모습인가? 첫째는, 하나님의 바른 말씀을 전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즉 하나님의 뜻을 성경에 계시된 그대로 바르게 선포하고 가르치고, 바른 교리 사상, 신학 사상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고백하고, 배교(背敎)의 시대에 배교에 따라가거나 배교와 타협하지 않고 잘못된 연합 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그것으로부터 분리되어 바른 입장을 취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둘째는, 성도들 간에 서로 사랑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즉 모든 성도들이 겸손히 서로 존중하고 사랑으로 일치 단합하는 교회가 참 교회이다.
[5]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인함이니 곧 너희가 전에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
셋째로, 바울 사도는 골로새 교인들이 가진 소망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였다. 소망은 성도들이 세상에서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본문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라고 표현하였다. 이것은 성도들의 소망의 내용을 가리킨다. 우리의 소망의 내용은 천국이요 부활이요 영생이다. 그것들은 영광스러운 내용들이다(롬 8:18).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들은 것\'이라는 원어는 \'복음 진리의 말씀에서 들은 것\'이라는 뜻으로 소망의 내용이 복음 진리 안에서 제시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 영광스러운 천국과 부활과 영생이 바로 구원이 의미하는 바이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바로 이 영광스러운 내용을 의미한다. 그래서 로마서 8:24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다\'고 표현했다.
\'복음 진리의 말씀\'이라는 표현은 복음이 진리의 말씀임을 보인다. 우리는 세상의 다른 어느 곳에서도 진리를 찾아볼 수 없다. 사실 다른 곳에는 진리가 없다. 진리는 오직 하나님 안에만 있고 하나님의 주신 복음 안에만 있다. 그 내용이 구원의 소식이요 영광스런 천국과 부활과 영생의 약속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을 발견한 자들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발견한 자들이다.
[6] 이 복음이 이미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와 같이 또한 온 천하에서도 열매를 맺어 자라는도다.
원문을 다시 번역하면, \'이 복음이 온 천하에서 그러하듯이 너희에게 이르매 너희가 듣고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 너희 중에서 열매를 맺는도다\'이다.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것을 가리킨다. 이미 믿어 구원받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들이다. 전통 사본들에는 \'자란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은 날부터\"라는 말에서, \'하나님의 은혜\'는 복음의 내용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대속(代贖) 사역과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는다는 이신칭의(以信稱義)의 진리를 가리킨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의 선물이며, 특히 그의 십자가 대속 사역이 그러하다.
\'깨닫다\'는 원어(에피기노스코)는 \'참된 지식에 도달하다, 바르게 인식하다, 확인하다\'는 뜻을 가진다. 구원은 복음을 듣고 하나님의 은혜를 참으로 깨달을 때 온다. 참된 지식은 믿음에 필수적 요소이다. 참된 깨달음, 참 지식, 바른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이 건립될 수 없다. 믿음은 참된 지식 위에 세워지지, 막연한 감정 위에 세워지지 않는다.
[7, 8] 이와 같이 우리와 함께 종 된 사랑하는 에바브라에게 너희가 배웠나니 그는 너희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요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우리에게 고한 자니라.
에바브라는 바울 일행과 \'함께 종 된\' 자, 곧 하나님의 동역자이었다. 골로새 교인들은 그에게서 복음을 배웠다.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치는 자가 있었고, 복음을 듣고 배우는 자들이 있었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었다. 구원은 하나님의 복음의 말씀을 듣고 배우고 믿는 데서 온다. 말씀을 배우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과 새 생명의 일을 위해 유익하고 필요한 과정이며 하나님의 정하신 방법이다.
에바브라는 그리스도의 신실한 일꾼이었다. \'신실한\'이라는 말은 \'충성된, 믿음 있는, 믿을 만한\'이라는 뜻을 가진다. \'성령 안에서 너희 사랑을 고했다\'는 표현은 성도들의 사랑이 성령의 열매이며 성령의 도우심으로 행할 수 있는 덕임을 보인다.
오늘날 우리의 교회도 에바브라처럼 신실하고 충성되고 믿을 만한 일꾼들이 많이 필요하다. 어느 때든지 일꾼들은 많으나 신실한 일꾼들은 적다. 그러나 우리는 신실한 일꾼들이 되자.
결론적으로, 1절부터 8절까지의 본문에서 중요한 진리는 성도들의 참된 믿음과 소망과 사랑으로 인한 감사이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참 믿음과, 모든 성도들에 대한 사랑과, 하늘에 간직된 소망 곧 천국과 부활과 영생으로 인하여 항상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는 자들이 되자.
9-11절, 지식, 행위, 능력을 위해 기도함
[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바울은 골로새 교인들이 복음을 받고 성령 안에서 서로 사랑한다는 소식을 듣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내용은 네 가지의 요점들이었다. 그 중에서 세 가지가 본문에 나온다. 첫째는, 골로새 교인들이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구한 것이었다. \'안다\'는 원어(에피그노시스)는 확실한 지식과 깨달음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그 일에 대해 잘 알아야 그 일을 잘 할 수 있다. 자동차 운전을 하려면, 먼저 도로 교통 법규들과 운전시 주의 사항들을 잘 알아야 한다. 세탁기를 사용하려면, 먼저 설명서를 읽어보고 그 세탁기의 특성을 잘 알아야 한다. 그래서 무슨 일을 하든지, 그 일을 잘 하려면 그 일에 대해 많이 공부해야 한다.
하나님을 믿는 일도 그러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도 없고 구원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이 계신 것과 그가 우리를 위해 어떤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구주 예수께서 누구이시며 우리를 위해 무슨 일을 하셨는지 알아야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고 또 구원을 받을 수 있다.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 생활도 그러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무슨 일을 하며 살기를 원하시는지, 또 그가 무엇을 위해 우리를 구원하셨는지, 그리고 그가 우리를 구원하신 후 왜 즉시 천국으로 데려가지 않으시고 이 세상에 살게 내버려 두시는지 등에 대해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서는 이 세상을 바르게 살 수 없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지 못하고 세상을 사는 자는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아야 바른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되, 어느 한 부분만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고 \'하나님의 모든 뜻\'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본문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져야 한다고 표현했다. 사도행전 20장에 보면, 바울 사도는 에베소 장로들에게 증거하기를,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나 꺼림이 없이 너희에게 전하여 가르쳤다\'고 했고, 또 \'내가 꺼리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다 너희에게 전하였다\'고 했다(행 20:20, 27).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완전히 알기를 힘써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깨닫으려면, 영적인 지혜와 총명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은 세상적 지혜로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오직 성령께서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지혜와 총명 곧 충만한 지혜와 총명을 주셔서 하나님의 모든 뜻을 충만하게 깨닫게 하시기를 기도해야 한다.
[10] 주께 합당히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바울 사도가 기도한 두번째 내용은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그것은, 골로새 교인들이 주께 합당히 행하기를 원한 것이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바로 알게 될 때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게 될 것이다. 무엇이 하나님께 합당한 행위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것이 그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으로 창조함을 받은 우리들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신다. 특히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께 합당하게 살게 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아야 하는 이유도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기 위해서다. 우리가 성경을 읽고 배우며 하나님의 뜻을 알기를 원하는 것은 오직 우리가 그 뜻대로 행하기 위해서다. 행위로 나타나지 않는 지식은 소용이 없다. 지식은 그 자체에 가치가 있다기보다 그 지식을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께 합당히 행하는데 가치가 있다.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할 때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게 행할 때, 하나님은 근심하실 것이며, 우리가 계속 그러하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서도 진노하실 것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길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밖에 없다.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되, 범사에 또는 온전히 기쁘시게 해야 할 것이다. 한 두 번이나 또는 일부분적으로 그를 기쁘시게 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하나님을 범사에 그리고 온전히 기쁘시게 하는 것\'--그것이 우리의 생활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그를 기쁘시게 하는 행위는, 다른 말로,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의 명령은 인간의 행복과 유익을 위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 악은 피조물에게서 나왔지, 하나님의 속성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기를 원하신다.
선하게 사는 것이 사실 구원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2:10,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디도서 2: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구속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성경의 요지는 모든 죄인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으라는 것과 구원받은 자들이 이제는 경건하고 거룩하고 선하게 살라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우리가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신 후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고 하셨다(마 5:16). 성경은 선행에 대해 많이 가르쳤는데, 특히 디도서에서 강조되었다(딛 1:8, 16; 2:3, 7, 14; 3:1, 8, 14).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기를 원한다\'는 말은 첫번째 내용에 대한 보충이라고 볼 수 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는 것이 아닌 것 같다. 그것은 세월이 좀 필요한 일인 것 같다. 거기에 하나님의 섭리적 훈련 과정의 필요성이 있다. 우리는 특히 고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배우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시편 저자는 고백하기를,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라고 했다(시 119:71).
우리의 신앙 생활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님을 더 많이, 더 확실하게, 더 깊이 아는 것이 신앙의 성장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점점 자라서 충만한 자리에 이르러야 한다. 베드로후서 3:18은 말씀하기를,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고 했다.
[11]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
바울 사도가 기도한 세번째 내용은 능력과 참음에 대한 것이다. 그는 골로새 성도들이 능력 있는 자들이 되기를 기원하였다. \'그 영광의 힘\'이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힘\'을 가리킨다. 우리 하나님은 한마디로 능력의 하나님이시다. 그의 능력은 곧 그의 영광이다. 그는 역사상 종종 그의 능력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그것이 바로 기적이다. 하나님은 지금도 동일하시다. 비록 그가 계속 기적을 나타내기를 원치 않으시지만, 그의 능력은 변함이 없으시다. 그 능력이 바로 우리의 힘이다. 바울의 기도는 바로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 곧 그의 전능(全能)으로 우리를 능력 있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다.
우리가 참으로 능력 있는 자가 되는 것이 실제로 필요한 기도 내용이다. 우리가 주의 뜻을 행하려면, 우리에게 힘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육신적 힘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정신적 힘, 영적인 힘을 말하는 것이다. 이 세상에는 환난이 많다. 우리 주께서도 세상에서 큰 고난을 당하셨다. 바울 사도도 많은 환난을 당했다. 우리에게도 고난과 환난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잘 이기고 주의 뜻을 다 행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에게 힘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그 영광의 힘을 좇아 모든 능력으로 능하게 하시며 기쁨으로 모든 견딤과 오래 참음에 이르게 하시고\"라고 말씀했다. 능력의 유익은 참음이다. 정신적 힘이 있는 자만이 잘 참을 수 있다. 그런 힘이 없는 자는 조금 참다가 낙심하거나 자포자기하고 세상과 타협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영적 힘을 가진 자는 하나님의 뜻을 아는 대로 그대로 믿고 그대로 소망하고 그대로 행해 나갈 것이다. 즉 그는 끝까지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에서 세 가지 기도의 제목을 찾았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주시는 지혜와 총명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고 점점 더 알고 충만하게 아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식의 문제이다.
둘째로, 우리는 하나님께 합당하게 행하고 하나님을 범사에, 온전히 기쁘시게 하고 선한 열매를 맺게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행위의 문제이다.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능력 있게 되어서 어떠한 고난 가운데서도 굴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믿고 소망하며 행하는 자들이 되기를 기도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능력의 문제이다. 지식과 행위와 능력을 위해 항상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받아 그렇게 사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 하겠다.
12-14절, 감사하게 하시기를 기도함
[12]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골로새 교인들을 위한 바울 사도의 기도의 네번째 내용은, 그들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게 하시기를 구한 것이었다.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드려야 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아버지\"라는 표현에 드러나 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로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다. 어두움은 무지와 부도덕과 죽음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재 세상과 장래 지옥의 모습이다. 그러나 빛은 지식과 거룩과 의와 생명을 가리킨다. 그것은 현재 참된 교회와 장래 천국의 모습이다.
성도의 기업은 천국을 가리킨다. 로마서 8:17에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이므로 하나님의 후사 곧 상속자이며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기업을 상속받기 위해 현재 고난도 받아야 한다고 말씀했다. 마태복음 25:34에 보면, 예수께서는 의인들이 마지막 심판날에 창세로부터 그들을 위해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베드로전서 1:4에는, 그 기업을 \'하늘에 간직된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기업\'이라고 표현하였다. 그것은 땅 위의 몇 억원, 아니 몇 백억원의 유산보다도 귀하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라고 표현한 것은, 성도의 기업을 우리만 얻는 것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얻고 우리도 그 중의 한 부분을 얻게 될 것을 보인다. 과연 요한계시록 7:9에 보면, 구원얻는 무리는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 속한, 아무라도 셀 수 없는 큰 무리\'라고 표현되어 있다. 우리도 그들과 더불어 천국의 한 부분을 얻게 될 것이다.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으므로\'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법적으로, 위법적으로, 혹은 무리하게 천국의 기업을 얻게 하신 것이 아니고, 우리를 합당하게 만드심으로 그렇게 하신 것을 보인다. 어떻게 우리를 합당하게 만드셨는가? 그것이 다음에 좀더 설명된 구원의 이치이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합법적 방법이었다. 하나님의 구원 방법은 법적으로 의롭고 정당하였다.
[13]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구원을 좀더 설명한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여기에 \'우리\'는 예수 믿는 자, 곧 말로만이 아니고 마음으로 믿어 순종의 행실로 나타내는 신자들을 가리킨다. \'흑암의 권세\'라는 말은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가리킨다. 고린도후서 4:4에 보면, 바울 사도는 이 세상 신 곧 사탄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고 있다고 말했다. 에베소서 2:2에 보면, 공중에 권세 잡은 자 곧 사탄은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 역사하고 있다. 요한일서 5:19에 보면, 온 세상은 악한 자 곧 사탄 안에 처해 있다고 표현되었다. 죄와 죽음과 사탄은 힘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권세\'라고 표현한 것이다. 죄와 죽음과 사탄은 마치 옛날 이스라엘 백성을 억압하고 탄압하던 애굽의 바로왕과 같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셨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다. \'그의 사랑의 아들의\'(투 휘우 테스 아가페스 아우투)라는 말은 아마 \'그의 사랑의 표시로 주신 아들\'(요 3:16; 요일 4:9, 10; 롬 5:8)이라는 뜻일 것이다.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심을 나타낸다. 다니엘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로마 나라 때에 초자연적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나라를 세우실 것을 예언하셨었다. 그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 예수께서는 천국의 가까움을 선포하셨을 뿐만 아니라(마 4:17), 하나님의 나라가 눈에 보이지 않게 이미 제자들 가운데 임하였음을 말씀하셨다(눅 17:20, 21). 그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다. 참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의 시작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2:9에는 성도들을 \'거룩한 나라\'라고 불렀다.
\'건져내사\'라는 말(에루사토)과 \'옮기셨으니\'라는 말(메테스테센)은 단순 과거 시제로서 그 사실이 단번에 이루어진 과거의 사실임을 보인다.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하나님의 구원은 과거에 단번에 이루어졌고 결코 반복되지 않는다. 구원은 반복되지 않는다. 중생 곧 거듭남도 반복되지 않는다. 예수님을 진실히 믿은 자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요 5:24).
[14]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흑암의 권세, 곧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건져내어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신 것은, 그의 아들의 구속 사역을 통해 우리의 죄를 사하심으로써이었다. 그의 아들 안에서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 \'구속\'(救贖)이라는 말은 죄값을 지불하고 속박에서 해방시킨다는 개념이다. 구주 예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값을 지불하셨고 우리를 죄책과 형벌로부터 해방시키셨다. 구속 혹은 속죄는 다른 말로 죄사함을 가리킨다. 기독교의 구원은 죄사함을 가리킨다. 복음은 죄사함의 길을 제시하는 소식이다.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얻었다\'는 말(에코멘 텐 아폴뤼트로신 텐 아페신 톤 하마르티온)은 \'우리가 구속, 곧 죄사함을 소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죄사함의 구원을 현재 소유하고 있음을 증거한다. 이처럼 구원은 확실한 사실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교훈을 받는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인해야 한다. 우리는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었는가? 우리는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한 자들이 되었는가? 우리는 흑암의 권세에서 건짐을 받았는가?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웠는가? 우리는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았는가?
둘째로, 우리가 확실히 구원받은 자들이라면, 우리는 오직 믿음과 순종의 생활을 힘써야 한다. 믿음이 참 생명의 길이며, 순종은 참 믿음의 증거이다. 믿고 순종하는 것이 빛의 생활이요 구원받은 자다운 생활이요 성도다운 생활이요 천국 백성다운 생활이다.
셋째로,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로 우리의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고 우리로 하여금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셨다. 이것이 우리가 받은 구원이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감사와 찬송의 가장 근본적 이유이며 영원한 내용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는 자들이 되자.
15-18절, 그리스도의 뛰어나심
[15]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니.
우리를 죄에서 구속(救贖)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15절부터 18절까지에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뛰어나신 인격이심을 열 가지 조목으로 증거한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요 4:24) \'아무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자\'이시지만(딤전 6:16)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을 나타내셨다. 요한복음 1: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독생하신 아들께서] 나타내셨느니라.\" 요한복음 14:9, \"예수께서 가라사대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히브리서 1:3, \"이[아들]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카라크테르, express image, exact representation)이시라.\" 인간도 하나님의 형상이지만 불완전하고 부분적인 형상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시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신 자이시다. 낳으심과 창조는 비슷하지만 동일하지 않다. 넓은 의미에선 창조도 낳으심으로 표현된다. 성경은 우리 영혼의 중생(重生, 거듭남)을 하나님의 낳으심으로 표현한다(요 1:13; 약 1:18).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그 둘은 동일하지 않다. 창조는 질적인 차이를 만든다. 창조주는 무한하시지만, 피조물은 유한(有限)하다. 그러나 낳음은 동질적이다.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님의 아들은 다 완전한 신성을 가지고 계신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에 의해 창조되신 것이 아니고 나신 것이다. 그는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1에서 \'하나님\'으로, 요한일서 5:20에서 \'참 하나님\'으로, 디도서 2:13에서 \'크신 하나님\'으로, 그리고 이사야 9:6에서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불리우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유한자가 아니시고,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하나님, 무한자에게서 나신 무한자, 영원자에게서 나신 영원자이시다. 하나님의 아들의 나심은 참으로 신비한 사실이다. 아들이 아버지께로부터 나신 때는 인간의 시간 관념으로 상상할 수 없다. 그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없고 오직 영원한 현재만 있는 하나님의 세계, 곧 영원 세계에서의 사실이다.
[16]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다. 만물이 \'그에게\'(엔 아우토) 창조되었다는 원어는, 만물이 \'그 안에서\' 혹은 \'그에 의해\'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또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디 아우투) 창조되었다는 원어도 이와 비슷하게 \'그를 통하여\' 창조되었다는 뜻이다. 요한복음 1:3,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히브리서 1:2,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그에 의해 혹은 그를 통해 창조된 세계는, 하늘에 있는 것들 곧 하늘과 해와 달과 별들과 천사들 뿐만 아니라, 또한 땅에 있는 것들 곧 땅과 바다들과 호수들과 강들과 식물들, 새들, 물고기들, 동물들을 포함한다. 그것은 보이는 것들 곧 물질 세계 뿐만 아니라, 또한 보이지 않는 것들 곧 영의 세계 또는 천사의 세계를 포함한다.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라는 말은 천사들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니엘서에 의하면, 세상 위정자들 배후에는 천사들이 있다(단 10:13, 20, 21).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의 창조의 목적이시다. 만물이 다 \'그를 위하여\'(에이스 아우톤) 창조되었다. \'그를 위하여\'라는 말은 창조의 목적을 보인다. 하나님께서는 구약 성경에서, 이스라엘을 창조하신 목적이 자기의 영광을 위함이라고 증거하셨다. 이사야 43:7, \"무릇 내 이름으로 일컫는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들을 내가 지었고 만들었느니라.\"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만물의 영장인 사람들의 창조 목적이 그러하다면, 다른 모든 것들의 목적은 두말 할 나위도 없다. 온 세상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다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보다 먼저 계시다. 요한복음 8:58, \"예수께서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요한복음 1:1, \"태초에 말씀[예수 그리스도]이 계시니라[계셨느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요한복음 17:5,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 미가 5:2,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미메 올람, 영원 전에]니라.\" 요한계시록 22:13,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요 시작과 끝이라.\"
여섯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만물을 지탱하시는 분이시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서 있다. \'함께 서 있다\'는 표현은 보존되고 유지된다는 뜻이다. 예수님은 만물의 창조자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보존자이시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사도행전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그 안에서]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존재하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라. 그가 근본이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일곱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다. 교회는 그의 몸이며 그는 교회의 머리이시다. 머리와 몸의 관계는 유기적, 생명적 관계를 나타낼 뿐만 아니라, 또한 명령적, 순종적 관계를 나타낸다. 그는 머리, 곧 우두머리, 주님, 통치자이시다. 그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에게 대항하고 영광을 돌리지 않지만, 그를 아는 사람들 곧 구원받은 사람들은 그에게 절대 순종하며 영광을 돌린다.
여덟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근본이시다. \'근본\'이라는 원어(아르케)가 \'근원, 근본, 시작\'이라는 뜻을 가지며, 요한계시록 3:14에서 예수께서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헤 아르케 테스 크티세오스 투 데우)라고 표현될 때 그것이 그가 창조의 근원이시요 시작자이심을 보이지만, \'근본\'이라는 원어는 또한 \'주권자\'라는 뜻도 가진다. 본절에서는 문맥상 주권자라는 뜻이 적합해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만물의 주권자이시다.
아홉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이시다. 이것은 그가 최초로 영광스런 부활을 하셨음을 의미한다. 그는 \'잠자는 자들의 첫열매\' 곧 죽은 자들의 부활의 첫열매이시다(고전 15:20). 아직 아무도 그와 같이 영광스런 부활을 경험치 못했다. 야이로의 딸이나 나인성 과부의 외아들이나 나사로의 부활도 죽은 몸의 회생(回生)에 불과했지 그런 영광스런 부활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영광의 부활체를 입으셨다. 장차 그가 하늘로부터 다시 오실 때, 그가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실 것이다\'(빌 3:21).
열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 \'만물의 으뜸이 되셨다\'는 원어는 \'만물 가운데서 뛰어남, 탁월함을 가지셨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만물 가운데서 뛰어나신 분이 누구이신가? 그는 온 세상에서 높임을 받으신다. 하나님을 아는 모든 진실한 성도들은 그의 이름을 높이며 경배하고 그 앞에 무릎을 꿇는다. 빌립보서 2:9-11,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뛰어나신 열 가지 점들을 증거한다. 그것들은 서너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을 정확히, 확실히 알 수 있다.
둘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창조물보다 먼저 나시고 먼저 계신 분이시다. 그는 창조의 세계, 시간 세계에 속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의 세계, 영원 세계에 속하신 분이시다.
셋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만물을 창조하셨고 보존하시는 분이시다. 그는 모든 피조물들과 인간들과 구별되신다.
넷째로,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요 만물의 주권자시요 만물 가운데서 뛰어나신 분이시다. 모든 만물들과 모든 사람들은 그의 발 아래 복종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을 바로 깨닫고 기쁨과 감사함으로 그를 믿고 그를 따르며 그에게 절대 순종하고 충성하자.
19-23절,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
이 부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화목 사역을 증거한다. 이것은 복음의 진수(眞髓)이다. 우리는 본문에서 화목의 방법, 화목의 대상, 화목의 목적, 그리고 화목의 증거에 대해 배운다.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모든 충만\'이라는 말은 \'신성(神性)의 충만\'을 가리킨다. 골로새서 2:9, \"그 안에는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는 신적 속성들 가운데 한 부분을 가지셨거나 하나님과 비슷한 모형 정도가 아니셨고, 신성의 모든 충만을 가지신 분이시다.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시다.
화목의 방법은 신적 그리스도의 십자가 위에서의 피흘리심으로이었다.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 곧 신성(神性)을 가지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 되실 수 있었다. 신적 그리스도의 죽음의 가치는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고도 남음이 있는 것이었다.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케 되기를 기뻐하심이라.
화목의 이치는 십자가 위에서 그리스도께서 흘리신 피에 숨겨 있다. 레위기 17:11의 말씀대로, 사람의 피는 곧 생명이기 때문에 피흘림을 통해 죄가 속해진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의 피를 \"죄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라고 표현하셨다(마 26:28). 또 히브리서 9:22은 \"피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고 말씀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해주는 십자가이었다. 곧 그것은 속죄의 십자가요 화목의 십자가이었다. 우리의 죄는 우리와 하나님 사이를 원수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피흘려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가 사함 받았고 하나님과 화목케 된 것이다. 로마서 5: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로마서 5:10,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화목의 대상은 만물이며, 그것은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을 포함한다. 인간의 죄로 인하여 땅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았고(창 3:17), 하나님의 창조하신 피조 세계는 지금 탄식하며 고통하고 있고(롬 8:20-22), 세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비인격적 생물의 세계나 물질 세계가 하나님과 화목케 된다는 것은 이상한 표현이지만, \'화목하다\'는 원어(아포카탈랏소)가 \'원상 회복시키다\'는 뜻을 가지는 것을 알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의 죄의 결과는 모든 피조물에게 미쳤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의 결과는 온 우주에 미친다. 하나님의 구원 계획의 마지막은 새 하늘과 새 땅이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21:5에는, \"보좌에 앉으신 이가 가라사대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다.
물론, \'만물\'이라는 말이 타락한 천사들과 회개치 않은 악인들까지 포함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좁은 길로 가는 자들보다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많고 그 결말은 멸망이라고 가르치셨고, 또 양과 염소의 비유에서 염소들, 곧 주의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사랑을 베풀지 않았던 자들에게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마 7:13, 14; 25:41). 영생의 구원에서 제외될 자들이 있을 것은 확실하다.
[21]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화목의 일차적 대상은 사람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은 이미 우리에게 이루어졌다. 우리는 예수 믿기 전, 구원받기 전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었고 마음과 생각으로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었다. 우리는 하나님을 좋아하지 않았고 하나님께 순종하려 하지도 않았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의 사이를 분리시켰고 사람과 하나님을 원수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하나님 사이는 화목케 되었다.
[22]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케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화목의 목적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세우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계획, 곧 예정과 선택의 목적이요 구원의 목적이다. 에베소서 1:4, 5에는,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라고 말씀했다.
이 목적은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셨다(요 19:30). 우리가 예수를 믿었을 때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완전한 십자가 사역의 효과가 우리에게 적용된다. 그래서 믿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간주된다. 이것을 법적인 의(義)라고 말한다. 믿는 자는 법적으로 의인이 되었고 완전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구원의 목표는 달성되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장차 다 영화롭게 변화될 것이다. 그 영화는 나의 공로로 되는 것이 아니고, 나의 행위의 노력으로 보태어져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되는 것이며 오직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것이다.
물론, 법적 구원을 받은 자들은 이제는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말고 헛된 세상의 것들을 구하지 말고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답게, 천국의 영광스런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죄의 도구가 아니고 의의 도구로, 세상의 종이 아니고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23] 만일 너희가 믿음에 거하고 터 위에 굳게 서서 너희 들은 바 복음의 소망에서 흔들리지 아니하면 그리하리라. 이 복음은 천하 만민에게 전파된 바요 나 바울은 이 복음의 일꾼이 되었노라.
화목의 증거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루신 화목 사역은 우리가 믿을 때 우리에게 적용된다. 예수님을 주와 구주로 믿는 자는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과 화목하게 된다. 믿는 자가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믿음이 중요하다. 우리가 믿음에 거하고 견고히 서고 복음 안에서 주신 소망에서 흔들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이 믿음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파된 하나님의 복음을 들을 때 생긴다. 복음 전파는 죄인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사도들과 주의 제자들은 이 복음을 온 천하에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신약 27권은 사도들을 통하여 전파된 복음의 내용을 증거한다. 2천년이 지난 오늘날도 복음은 믿는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방법이다. 신구약 66권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의 견고한 기초요 하나님의 은혜로운 수단이다. 누구든지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신구약 성경을 읽고 묵상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화목 사역을 깨닫게 될 것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한다\'(딤후 3:15).
결론적으로, 우리는 몇 가지 실제적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했는가? 하나님의 뜻은 화목이다. 그것은 우리와 하나님 사이의 화목을 말한다. 그 화목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이며 기독교 복음의 핵심이다. 여러분은 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였는가?
둘째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깨닫고 그를 믿었는가? 화목의 증거는 믿음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영접하고 믿은 자는 죄사함을 받았고 구원을 얻었고 중생(重生)했고 하나님과 화목했다. 믿음은 곧 구원이요 영원한 생명이요 하나님과의 화목이지만, 불신앙은 곧 사망이요 영원한 멸망이다. 여러분은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는가?
셋째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답게 살고 있는가? 우리가 구원받기 전 하나님과 원수되어 있었을 때, 우리는 세상의 헛된 것들 곧 돈과 육신적 쾌락만을 위해 살아 왔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것들이 헛되고 죄악되며 하나님의 진노의 원인인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자답게, 천국의 백성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흠 없는 인격자로 살아야 할 것이다. 우리는 참으로 그렇게 살고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와 구주로 참으로 믿고 하나님과 화목하여, 화목한 자답게 경건하고 의롭고 거룩하고 흠 없게 살아가야 하겠다.
24-29절, 영광의 소망 그리스도
[24] 내가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바울 사도가 받는 고난은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받는 고난이 아니고 교회를 위해 받는 고난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 고난을 슬퍼하거나 불평하지 않고 기뻐하며 즐거이 받고 있었다. 주의 종들이 예수님과 그의 복음 때문에 받는 고난은 주의 고난에 참여하는 것이며 또 하늘의 상급도 크기 때문에, 그들은 기뻐할 수 있다. 예수께서는 8복의 교훈에서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마 5:11, 12). 사도행전 5:40, 41에 보면, 공회로 모인 대제사장들이 교법사 가말리엘의 말을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았을 때, 사도들은 그 이름 때문에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를 떠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울 사도는 자신이 받는 고난을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라고 표현하였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대속(代贖)하기 위해 고난을 당하셨다. 그의 십자가 고난은 우리의 구원을 위해 완전한 공로가 되었다. 그의 속죄 사역에 첨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이란, 그리스도의 속죄적 고난이 아직 남았다는 뜻이 아니고, 단지 그의 몸 된 교회가 받아야 할 고난이 남았음을 의미한다. 그의 몸 된 교회는 이 세상에서 핍박과 순교의 고난을 많이 받아야 한다고 성경은 가르쳤다. 바울 사도는 소아시아의 교인들에게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행 14:22). 요한계시록 6장의 일곱 인(印) 중 다섯째 인의 환상에서 순교자들의 탄원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아직 잠시 동안 쉬되 저희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받아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고 하셨다(계 6:11).
바울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육체에 채우노라\"고 말한 것은, 그가 당시에 벌써 많은 고난을 당하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과연 고린도전, 후서에서 그는 자기의 당하는 고난을 자세히 간증하였다. 그는 증거하기를, \"바로 이 시간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비방을 당한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라고 하였고(고전 4:11-13), 또 말하기를,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는데 일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하였다(고후 11:23-27).
[25, 26] 내가 교회 일꾼 된 것은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내게 주신 경륜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을 이루려 함이니라.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옴으로 감취었던 것인데 이제는 그의 성도들에게 나타났고.
\'경륜\'이라는 원어(오이코노미아)는 \'직무, 사명\'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직무와 사명을 이룬다는 뜻일 것이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직무와 사명이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것임을 확신하고 있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3장에서와 같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비밀\'이라고 표현한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이방인들의 구원이 구약 시대에는 감취었던 바이었으나 이제 밝히 증거되고 있다는 뜻에서, 복음이 \'비밀\'이라고 표현된 것이다.
[27]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어떻게 풍성한 것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바울 사도는 이 비밀을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라고 말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셨고 삼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으나, 지금 성령으로 성도들 안에 계신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8:9에서 말하기를,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성령 안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고 했고, 고린도후서 13:5에서는 \"너희가 믿음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가 버리운 자니라\"라고 말했다.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또한 이 비밀을 \'비밀의 영광\'이라고 표현했고, 또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영광의 소망\'이라고 말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이 영광스러운 구원임을 나타낸다. 하늘로 승천하여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계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24장에서 친히 예언하신 대로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다시 오실 것이며(마 24:30), 그때 죽었던 성도들은 \'영광스러운 몸\'으로 부활할 것이다(고전 15:42-44; 빌 3:20, 21). 그리고 영광스럽게 부활한 성도들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아름답고 찬란한 새 하늘과 새 땅, 그리고 새 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다(계 21, 22장).
[28]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본절은 목회의 핵심과 그 목적을 보인다. 목회의 핵심은 설교이며, 설교의 중심 내용은 예수 그리스도이다. 목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하고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가르치는 일을 힘쓴다. 그 목적은 사람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기 위함이다. \'세운다\'는 원어(파리스테미)는 \'드린다\'(present)는 뜻이며 하나님께 드리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목회는 하나님의 계획대로 택한 백성들을 구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을 만들어 하나님께 드리는 일인 것이다.
\'완전한 자를 만든다\'는 말은 칭의(稱義)와 성화(聖化)를 다 포함한다. 첫째로, 죄인이 구주 예수를 믿어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을 때, 그는 법적으로 완전한 자가 된다. 그것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가 밝히 증거하는 복음의 내용이다. 그것이 의롭다 하심 곧 칭의(稱義)가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히브리서 10:10, 14의 말씀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단번 속죄로 말미암아 이미 거룩함을 얻었고 법적으로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
둘째로, 그러나 법적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들은 실제적으로도 거룩하고 의로운 생활을 해야 한다. 그것이 성경이 칭의와 더불어 강조하는 성화(聖化)의 진리이다. 성화의 진리의 강조는, 칭의의 복음 전파의 일과 더불어, 목회 사역의 다른 한 중요한 부분이다. 성화는 하나님께서 신구약 66권의 성경을 주시고 교회를 주신 또 하나의 중요한 목적이다. 성경과 교회는 일차적으로 칭의의 복음을 위해 주어졌지만 또한 성화를 위해서도 주어졌다. 칭의는 성도에게 자유와 평안과 담대함을 주지만, 성화는 그것 못지 않게 우리에게 기쁨과 용기를 더해준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거룩의 열매들을 맺어 영생에 이를 것이라고 말씀하셨다(롬 6:22). 세례 요한은 외치기를, 회개에 합당한 열매가 없는 나무는 찍혀 버리리라고 했고(마 3:8-10), 야고보서에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증거했다(약 2:17, 26).
[29]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役事)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
\'역사(役事)를 따라\'라는 원어(카타 텐 에네르게이안)는 \'힘을 따라\'라고도 번역할 수 있다. \'힘을 다하여 수고한다\'는 말(코피오 아고니조메노스)은 \'애쓰며 수고한다\'는 뜻이다. 본절은 목회의 힘과 수고에 대해 말한다. 목회의 힘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께서는 목회자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신다. 목회자는 그 힘을 힘입어 설교하며 목회한다. 그러나 목회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인간편에서 애쓰고 수고함으로 된다. 모든 일이 다 그렇지만, 목회도 성실한 노력 없이 좋은 결실을 기대할 수 없다. 달란트 비유(마 25:14-30)나 므나 비유(눅 19:11-27)는 복음의 일꾼들이 게으르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여 열매를 맺으라고 주께서 강조하신 내용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이렇게 권면하였다: \"누구든지 네 연소함을 업신여기지 못하게 하고 오직 말과 행실과 사랑과 믿음과 정절에 대하여 믿는 자에게 본이 되어 내가 이를 때까지 읽는 것과 권하는 것과 가르치는 것에 착념하라. 네 속에 있는 은사 곧 장로의 회에서 안수받을 때에 예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것을 조심 없이 말며 이 모든 일에 전심전력하여 너의 진보를 모든 사람에게 나타나게 하라. 네가 네 자신과 가르침을 삼가 이 일을 계속하라. 이것을 행함으로 네 자신과 네게 듣는 자를 구원하리라\"(딤전 4:12-16).
결론적으로, 24절부터 29절까지에서 우리는 몇 가지 교훈을 정리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광의 소망이 되심을 다시 한 번 더 확인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고 3일 만에 부활하셨고 40일 만에 승천하셨고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시지만, 장차 영광 중에 하늘로부터 다시 내려오실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든 성도들에게 영광의 소망이시다. 그가 다시 오실 때, 우리는 다 영광스럽게 부활하고 변화되며 영광스러운 새 세계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둘째로, 목사된 우리들, 그리고 넓게는 교회의 일꾼된 우리 모두들은 성실하게 애쓰며 수고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어떤 처지에서도 낙심치 않을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 예수께서 우리의 힘과 능력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게으르거나 불성실하지 말고 그의 능력을 힘입어 애쓰며 수고해야 한다. 교회의 일꾼들은 성실하게 자기의 할 일을 다 감당해야 한다.
셋째로, 우리 모든 성도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들이 되어야 한다. 어떻게 그렇게 될 수 있는가? 법적으로는 우리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그 안에 거함으로 이미 완전한 자가 되었다. 이것이 복음의 내용이다. 이것이 칭의(稱義)의 진리이다. 이것이 우리의 기쁨의 이유요, 우리의 자유의 근거요, 우리의 담대함의 원인이다. 그러나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들은 또한 실제적으로도 거룩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지식과 인격과 삶에 있어서 흠도 없고 점도 없는 온전한 인격자가 되기를 힘써야 한다. 이것이 성화(聖化)의 진리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다.
2장: 그리스도의 완전 충족하심
1-5절, 그리스도를 깨달으라
[1] 내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무릇 내 육신의 얼굴을 보지 못한 자들을 위하여 어떻게 힘쓰는 것을 너희가 알기를 원하노니.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교회와 성도들을 위하여 바쳐진 바 된 일꾼으로서 자기의 얼굴을 아는 자들이든지 모르는 자들이든지 간에 그들을 위해 충성되이 일하고자 애썼다. 그가 힘쓴 일은 무엇이었는가?
[2]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
바울 사도가 힘쓴 일의 목표는 우선 성도들로 하여금 마음에 위안을 얻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는 것이다. 참된 사랑의 연합은 참된 교회의 표지임이 분명하다. 주께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라고 말씀하셨다(요 13:35).
그런데 본문은 그 사랑의 연합이 참 지식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보인다. \'원만한 이해의\'라는 원어(테스 플레로포리아스 테스 쉬네세오스)는 직역하면 \'이해의 충만한 확신의\'라는 말로서 \'충만한 확신을 가진 이해의\'라는 뜻인 줄 안다. 이 이해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말한다. 충만한 확신을 가진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그리스도를 깨닫는다는 말은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이해와 지식과 확신이 충만해야 할 것을 보인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조금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말고 그에 대해 충만한 이해와 확신을 가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라고 표현되었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부터가 신비 중의 신비이다. 그리스도의 성육신(成肉身)은 확실히 비밀이다.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심으로 많은 사람들의 죄를 속량하셨다는 사실도 신비한 사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도 이 세상에서 처음 이루어진 신비한 사건이었다. 그의 신비한 부활체는 장차 모든 성도들이 입게 될 부활체와 비슷한 것이었다. 또한 그의 몸된 교회도 신비한 것이다. 특히 유대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교회의 회원이 된다는 사실은 비밀스런 사실이었다.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의 삶 속에서 활동하시는 사실도 비밀스러운 일이다. 참으로,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비밀이시다.
[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
그리스도의 지혜는 하나님의 지혜이며 그의 지식은 하나님의 지식이다. 누가복음 2:40이 증거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는 어릴 때부터 지혜가 충족하였다. 이사야 11:2의 예언대로, 그에게는 \'여호와의 영[신]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케 하는 영이 머물러 계셨다.\' 하나님의 비밀이신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다. 온 세계는 그를 중심으로 그리고 그를 향하여 전진하고 있고, 장차 온 우주는 그로 말미암아 새롭게 회복될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식의 보화를 다 캐어낼 수 없다.
[4] 내가 이것을 말함은 아무도 공교한 말로 너희를 속이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
공교한 말로 성도들을 속이려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족함을 주장하는 자들이었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하면서 그것에 더하여 현실적 지혜를 의지하려는 합리주의자나 현재적 신비 체험이 필요하다고 주장하는 은사주의자들은 다 속이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 모두에게 완전 충족하신 구주이시기 때문이다. 또 그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다\'(히 13:8).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깨닫고 확신함으로써 우리를 흔들어 넘어지게 하려는 자들의 말에 속지 말아야 한다.
[5] 이는 내가 육신으로는 떠나 있으나 심령으로는 너희와 함께 있어 너희의 규모와 그리스도를 믿는 너희 믿음의 굳은 것을 기쁘게 봄이라.
\'규모\'라는 원어(탁시스)는 \'질서 또는 질서 있는 행위\'라는 뜻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대로 순종하며 질서를 지키는 것을 말한다. 즉 그것은 신앙 훈련이 잘 된 것을 뜻한다. 또 \'믿음의 굳은 것\'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의심하거나 생각이 요동하지 않고 그를 확고부동하게, 확실하게 믿는 것을 말한다. 그것은 신구약 66권의 성경 말씀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잘 훈련된 신앙 생활을 하고 그들의 믿음이 확고부동하고 확실한 것을 보며 기뻐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은 그리스도께 대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 안에서의 순종 생활을 가르친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면, 우리는 그를 바로 믿게 되고 또 그에게 바로 순종하게 된다. 그리스도께 대한 바르고 충만한 지식과 믿음, 그리고 그 믿음 안에서 잘 훈련된 인격과 삶은 하나님의 원하시는 뜻이요 주의 종들이 힘쓰는 사역의 목표이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아는 데서 시작된다. 우리에게는 이런 지식, 이런 믿음, 이런 순종 생활이 있는가?
6-7절,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
[6, 7]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본절의 교훈의 요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것이다. 본절의 교훈은 골로새교회 교인들이 주님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였다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는 원어(파렐라베테 톤 크리스톤 예순 톤 퀴리온)는 \'주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하였으니\'라는 뜻이다. 예수님을 주님과 그리스도로 영접한다는 말씀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고 우리를 위하여 보내신 참 선지자와 참 제사장과 참된 왕으로 인정하고 영접한다는 뜻이다. 그것은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는[당신은]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한 시몬 베드로의 대답과 같다(마 16:16). 로마서 10:9, 10은 말씀하기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라고 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 구원이다. 요한복음 1:12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했다. 여기에 교회의 기초가 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바른 지식과 믿음 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는 세상적 교제의 단체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교제의 단체이다. 여러분은 확실히 구원을 얻었는가?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께 복종했는가? 그를 영접했는가?
본절은 이미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골로새교회 교인들에게 세 가지의 내용을 권면하고 있다. 첫째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입어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야 한다. 예수께서도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돌밭에 떨어진 씨가 뿌리를 내리지 못하여 환난이 닥칠 때 넘어지는 것을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뿌리를 내려 믿음에 굳게 서야 할 것을 교훈하셨다.
우리는 어떻게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는가? 그것은 \'교훈을 받은 대로\' 즉 성경 말씀을 통해 될 수 있다. 시편 19:7, 8은 말씀하기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라고 했다. 누가복음을 쓴 누가는 복음서 초두에서 자기가 쓰는 내용을 \'우리에게 이루어진 사실에 대하여\'라고 표현하였는데, 그 말의 원어(페리 톤 페플레로포레메논)는 \'우리에게 충분히 확정된(fully established), 지극히 확신하는(most surely believed) 사실에 대하여\'라는 뜻이다. 또 누가는 그가 복음서를 쓴 목적을 \'이는 [데오빌로] 각하로 그 배운 바의 확실함(certainty)을 알게 하려 함이로다\'고 말하였다(눅 1:4). 요한 사도도 자기가 요한복음을 쓴 목적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 20:30, 31).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의 확실함을 위하여 주신 것이 성경책이므로, 우리는 이 책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방법이다.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는 것을 1차 목표로 삼아야 하며, 이를 위하여 성경을 열심히 읽고 연구해야 한다.
둘째로, 본문은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권면한다. 우리는 왜 감사해야 하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우리가 감사함을 넘치게 할 수 있는 이유는 우리의 구원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그것은 곧 우리의 많은 죄들을 용서하셨고 우리에게 의롭다 하심과 영생과 하나님의 자녀됨과 천국 백성의 특권을 단번에 은혜로 주신 것이었다. 이 구원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이 감격적이지 않은가! 하나님의 크신 구원을 깨닫는 자마다 하나님께 넘치는 감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바울 사도는 이미 골로새서 1:3-5에서 골로새교회 교인들의 믿음과 소망과 사랑을 인하여 즉 그들의 구원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증거하였고, 또 1:12에서는 그들을 빛 가운데서 성도의 기업의 부분을 얻기에 합당하게 하신 하나님께 그들이 감사하는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에베소서 1장에 강조한 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찬송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었다. 우리의 찬송의 제목, 찬송의 이유, 우리의 헌신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즉 하나님께서 나같은 죄인, 지옥에 가야 마땅했던 죄인을 은혜로 구원하여 그의 존귀한 자녀로 삼으신 이 놀라운 구원, 그의 크신 은혜와 긍휼 때문에 우리는 찬송과 감사를 넘치게 그에게 돌리며 우리의 모든 삶을 그에게 헌신하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2차 목표이다. 즉 우리가 먼저 믿음에 굳게 섰다면, 우리는 또한 감사와 찬송을 넘치게 하나님께 돌리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셋째로, 본문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고 권면한다. 이것이 본문의 요점이라고 이미 설명했다. 믿음은 순종의 행위로 나타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예배의 형식보다 실제적 삶을 더 원하신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 우리의 주일의 예배보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의 삶이 더 중요하다. 주일 예배가 쓸 데 없다는 뜻이 아니고, 주일 예배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실제적 삶이라는 뜻이다. 실생활에서 주님을 믿고 살기 때문에 주일도 복되고 기쁜 날이 되어야 정상적이다. 그리스도인의 참된 헌신이란 정상적 신앙 생활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는 것,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진실한 믿음으로 사는 것이 곧 헌신이다. 세속 사회 속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곧 참된 헌신자의 삶이다. 세상은 불경건하고 부도덕하지만, 성도들은 경건하게 또 도덕적으로 살아야 한다. 성도들은 부도덕한 세속 사회 속에서 정의롭게, 사랑과 긍휼과 동정의 심정을 가지고, 그리고 진실하게 살아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3차 목표이다. 즉 우리는 믿음에 굳게 서고, 감사함을 넘치게 하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도덕적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먼저 우리의 믿음을 점검케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영접했는가?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굴복시켰는가? 우리는 그를 믿고 따르고 있는가?
본문은 우리에게 세 가지의 권면을 했다. 첫째로, 믿음에 굳게 서라고 했다. 그것은 성경을 읽고 연구함으로써 가능하다. 둘째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고 했다. 그것은 구원 체험의 결과이다. 셋째로,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고 했다. 그것은 순종과 헌신의 삶이며,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성경의 교훈대로, 우리는 이 세 가지를 힘쓰는 자들이 되자.
8-15절, 세상의 철학을 주의하라
[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 이것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좇음이요 그리스도를 좇음이 아니니라.
본절은 8절부터 15절까지의 요점이다. 본절을 다시 번역하면, \'누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는 말씀이다. 골로새서의 교훈의 요지는, 예수 그리스도는 유일하신 신적 구주이시며 그의 구속 사역은 완전 충만하므로 우리가 그 분만 따르고 오직 그의 진리와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초등 학문을 따르는 철학들이 있다. \'초등 학문\'이라는 원어(스토이케이아)는 \'초보적 원리들\'이라는 뜻이다. 그것은 세상의 철학들이나 종교들의 초보적 원리들을 가리킨다. \'철학과 헛된 속임수\'라는 표현은 세상의 철학들이 결국 헛된 속임수라는 것을 암시한다. 인간들의 철학들과 종교들이 참 하나님과 그의 구원의 진리로 우리를 인도하지 못한다면, 그것들은 결국 헛된 속임수가 아닌가?
\'노략할까\'라는 말은 세상의 철학들이 우리에게 좋은 것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빼앗고, 우리에게 유익을 주기보다는 오히려 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세상의 철학들은 실상 우리를 노략하는 것들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그것들이 너희를 노략할까 주의하라\'고 말했다. 세상에는 인간들의 철학들, 사상들, 종교들이 많다. 그러나 그것들은 결국 다 헛된 속임수들이요 실상 우리를 노략하는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것들에게 사로잡히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성도들은 오직 하나님의 진리와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 안에 굳게 서야 하고 그 은혜 안에 항상 거해야 한다.
[9]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세상의 철학들과 대조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받은 은혜는 무엇인가? 우선, 그리스도는 어떤 분이신가? 본절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신성(神性)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신다고 증거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신성의 한 부분이 거하시는 것이 아니고 신성의 모든 충만, 곧 충만하신 신성이 거하신다. 이 말씀은 곧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요 완전하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와 같은 분은 이 세상에, 인류 역사상 없었다. 그리스도의 진리와 같은 것도 이 세상에, 인류 역사상 없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는 역사상 전무 후무(前無後無)한, 세상의 유일한 진리이다.
[10]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그는 모든 정사와 권세의 머리시라.
\'그 안에서\'라는 말은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뜻이며, \'충만하여졌으니\'라는 원어(페플레로메노이, 완료 분사)는 영어 성경들의 번역대로 \'완전하여졌으니\'라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 믿는 우리가 존재적으로, 실질적으로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 아니고, 도덕적으로, 법적으로 완전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히브리서에는 예수 믿는 성도들이 \'거룩함을 얻었고\'(히 10:10) \'영원히 온전케 되었다\'(히 10:14)고 말씀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또한 모든 정사(政事)와 권세의 머리이시다. 여기의 \'정사와 권세\'라는 말은 세상 정치가들의 배후에서 활동하는 천사들을 가리킨다고 본다.
[11] 또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적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법적으로 완전케 된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육적인 몸을 벗는 할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육적인 몸\'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육신의 죄의 몸\'이라고 되어 있다. 그것은, 죄악되었던 옛자아 곧 옛사람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 옛사람을 벗어버렸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 믿을 때 단번에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이것이 사죄와 칭의의 법적 구원이었다. 구약의 할례는 성결을 상징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참된 도덕적 성결을 얻은 것이다. 본문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할례\'라고 표현했다.
[12, 13]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받은 죄사함의 은혜 곧 참된 도덕적 성결은 세례 의식으로 상징되었다. 세례는 죄씻음의 뜻을 가지는 의식이다. 이 세례 의식을 통하여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그리스도와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다는 확증을 얻는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므로 죄로 죽었던 우리를 다시 살리셨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법적 완전은 결국 사죄(赦罪)와 칭의(稱義), 그리고 영적인 부활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사죄 곧 죄사함을 받은 무죄(無罪) 상태는 의(義)의 상태이며, 그 결과는 영적인 새 생명인 것이다.
[14] 우리를 거스리고 우리를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를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하나님께서는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를 거스리고 대적하는 의문에 쓴 증서인 율법도 도말하시고 제하여 버리시고 십자가에 못박으셨다.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한가? 사실, 하나님의 율법이 객관적으로 폐지된 것은 아니다. 마지막 심판 때에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근거하여 죄인들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나, 사죄와 칭의를 받은 성도들에게는 율법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사죄와 칭의는 일시적이거나 부분적인 것이 아니고, 영원하고 완전한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완전하고 영원한 의(義)를 입혀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더 이상 우리를 정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폐지된 것과 같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않다\'(6:14) 또는 \'율법에서 벗어났다\'(7:6)고 하였고, 또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라고 하였다(8:1).
[15] 정사와 권세를 벗어버려 밝히 드러내시고 십자가로 승리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을 위해 율법을 폐하시는 법적인 조치를 하셨을 뿐만 아니라, 또한 한 걸음 더 나아가 율법을 통해 죄인들에게 권세를 부렸던 악령들의 세력들도 폐하셨다. \'정사와 권세\'는 악령들을 가리키며, \'벗어버렸다\'는 말은 악령들의 세력을 폐하셨다는 뜻이다. \'밝히 드러내셨다\'는 것은, 성도들에게 주신 사죄의 사실을 악령들 앞에 드러내셨다는 뜻이다. \'십자가로 승리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우리의 죄벌을 담당하시고 우리의 의를 이루셨기 때문에 실패처럼 보였던 십자가가 오히려 죄와 악령들을 이기는 사건이 되었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을 통하여 첫째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의 진리를 다시 한번 더 깨닫고 하나님께 큰 감사를 올려야 한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사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모든 죄가 사해졌고 심지어 율법과 악령들의 권세가 다 폐하여졌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단번에 죄사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고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완전하여졌다. 이 진리를 확신하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자.
둘째로, 우리는 본문의 교훈의 요점대로, 누가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고 사람들의 전통과 세상의 초보적 원리들을 따라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우리를 노략할까 주의하자. 우리가 세상의 철학들이나 인간의 사상들에 미혹되거나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 진리를 바로 깨닫고 그 진리로 만족하며 항상 그 은혜 안에 거해야 한다.
16-23절, 의식법에 얽매이지 말라
[16] 그러므로 먹고 마시는 것과 절기나 월삭이나 안식일을 인하여 누구든지 너희를 폄론하지 못하게 하라.
본절은 누구든지 의식법 문제로 신약 성도들을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말한다. 먹고 마시는 것 곧 정결, 부정결의 음식 문제, 절기나 월삭(초하룻날)이나 안식일 문제 등은 다 의식법 문제이다. \'안식일\'이라는 원어(삽바톤, 복수 명사)는 \'제7일 안식일\'도 가리킬 수 있고, 또 연중 절기들의 안식일들(무교절에 2번, 맥추절에 1번, 나팔절에 1번, 속죄일에 1번, 초막절에 2번 등 모두 7번)을 가리킬 수도 있다. \'폄론한다\'는 말은 판단한다는 뜻이다.
[17] 이것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나 몸은 그리스도의 것이니라.
구약의 의식법들은 장래 일의 그림자이었고 그 실체는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일이었다. 그것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대부분 이루어졌다. 물론 인류의 구원과 세상의 회복은 아직도 미래의 일이다. 그러나 그것도 예수께서 이루신 속죄 사역의 결과로 확실히 이루어질 것이다. 의식법의 내용이 그러하므로 신약 성도들은 이 법 아래 있지 않다. 의식법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되었다. 우리는 이제 단지 주께서 약속하신 재림과 부활과 천국의 소망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
본절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의 강조에서 더 나아가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를 가르쳤다. \'일부러 겸손함\'이라는 말은 문맥상 자기 몸의 학대 곧 금욕(禁慾)과 고행(苦行)을 가리킨다. \'그 본 것을 의지하여\'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그 보지 못한 것들 안으로 들어가\'라고 되어 있다. 그러면 이 구절의 뜻은, 거짓 교사들이 그 보지도 못한 것들을 헛되이 자랑하고 과장하면서 금욕과 고행, 그리고 천사 숭배를 가르쳤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상을 빼앗기는 것\' 곧 구원의 상실이나 신앙 생활의 실패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조심해야 한다.
[19]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는지라. 온 몸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
금욕주의와 천사 숭배는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지 않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은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어야 한다. \'온 몸은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로 공급함을 얻고 연합하여 자란다.\' 에베소서 4:15, 16,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입음으로 연락하고 상합하여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자라게 하며.\" 참된 영적 성장과 성화, 성결 생활과 도덕 생활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에서 우리가 그 안에 계속적으로 거함으로써 많은 열매를 맺게 될 것을 말씀하셨다.
또 \'하나님이 자라게 하심으로 자라느니라\'는 말씀은 성도와 교회의 영적 성장이 하나님으로 말미암는다는 사실을 증거한다. 성화는 단지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3:6, 7에서 말하기를,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하나님뿐이니라\"고 하였다.
[20-22] 너희가 세상의 초등 학문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에 순종하느냐? 곧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하는 것이니 (이 모든 것은 쓰는 대로 부패에 돌아가리라) 사람의 명과 가르침을 좇느냐?
신약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므로 세상의 초보적 원리들이나 의식법들로부터 자유하게 되었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된다. 그런데 거짓 교사들은 의식법들을 강조하여 이런 저런 것은 붙잡지도 말고 맛보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하였다. \'의문(儀文)에 순종한다\'는 말(도그마티제스데)은 \'의식법의 규례들에 순종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신약 교회에서 구약의 의식법을 좇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그런 교훈은 다 썩어질 것이요 멸망할 것이며, 그것들은 사람의 명령과 가르침에 불과하다.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
의식법의 강조나 금욕주의는 참된 경건과 성결의 삶에는 아무 유익이 없다. \'자의적 숭배\'라는 말은 자기가 만들고 자기가 부과한 경배의 행위를 가리킨다.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함\'은 금욕적 행위들을 가리킨다. 그런 것들은 그럴 듯한 모양과 말일 뿐이지, \'육체(사르크스, 육신, 사람의 죄악성) 좇는 것을 금하는 데 유익이 조금도 없다\'는 말은 참된 성결 생활과 도덕 생활에 아무런 유익과 가치가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적 성장과 성화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성화는 그리스도 안에 거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16절부터 23절에서 두 가지의 확실한 교훈을 얻는다. 첫째로, 우리는 신약 아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의식법의 완성을 바로 알고 구약의 의식법으로 자신이나 남을 판단하지 말고 또 그 의식법에 자신을 얽매이게 하지 말아야 한다. 특히 우리는 신앙 생활에 있어서 형식주의, 의식주의를 경계해야 한다. 신약의 예배는 단순하고 순수하다. 둘째로, 우리는 오직 머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 안에 거하고 그 안에서 행함으로써 영적으로 자라고 도덕적 열매를 맺어 가야 한다.
3장: 그리스도 안의 새 생활
1-4절, 위엣 것을 찾으라
[1, 2]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지 말라.
본문은 우리의 주된 관심의 문제에 대해 가르친다. \'찾는다\'는 원어(제테오)는 \'찾는다, 탐구한다, 얻기 위해 애쓴다, 열망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생각한다\'는 원어(프로네오)는 \'생각한다, 마음에 둔다, 마음을 기울인다\'는 뜻을 가진다. 이 단어들은 우리의 주된 관심에 대해 말한다. 본문은 우리가 이 땅에 살면서 무엇에 생각과 관심을 두어야 하는가에 대해 가르친다. 우리는 무엇에 우리의 마음을 기울여야 하는가? 우리는 세상에서 무엇을 찾고 탐구해야 하며, 무엇을 얻기 위해 애써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열망해야 하는가? 즉 한마디로 말해,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사람의 인격은 그가 무엇을 생각하고 무엇에 마음을 두는가에 따라 형성되고, 그의 행동도 그것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우리의 삶의 목표 설정은 우리의 인격과 삶에 직접 관계된다.
본문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하며, 땅엣 것을 찾거나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가르친다. 우리의 주된 관심,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를 위엣 것에 두고 땅엣 것에 두지 말라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하나님의 교훈이요 하나님의 뜻이다.
\'위엣 것\'이란, 하나님, 하나님의 영광,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일, 하나님의 말씀 등을 가리킨다. 주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라고 말씀하셨다(요 6:29). 곧 믿음의 일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일이다. 그래서 주께서는 전도의 일이 자신의 사명이며 양식이라고 말씀하셨다(막 1:38; 요 4:34). 또한 성경에는 우리의 거룩한 삶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했다(살전 4:3).
그러므로 우리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우리가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께 두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데 두고, 하나님의 말씀과 뜻에 순종하는 데 두고, 천국에 두고, 믿음의 일, 구원의 일, 전도하는 일, 거룩한 삶을 사는 일에 두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구원받은 성도들이 가져야 할 삶의 목표다.
반면에, \'땅엣 것\'이란, 세상의 일, 육신의 일, 의식주에 관한 일, 돈, 건강, 쾌락, 명예, 권세의 일, 직장 일, 세상 나라의 일, 세상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의 일 등이다. 땅엣 것을 찾거나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은 이런 것들이 우리의 삶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이 세상의 것들은 일시적이며 지나가는 것이고 더욱이 불경건과 부도덕으로 더럽혀져 있는 경우가 많다. 성경은 모든 세상의 일을 죄악되다고 정죄하지는 않는다. 하나님이 주신 것들은 다 선하고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은 성도에게 정당한 일이다. 죄악되지 않은 모든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한 것들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할지라도 성도들은 그것들에 우리의 주된 생각과 마음을 기울이거나 그것들을 우리의 삶의 주된 목표로 삼아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다 장차 허무하게 될 것들이기 때문이다. 그것들을 추구하는 자들은 그것들과 함께 허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땅엣 것을 찾거나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 하나님 오른편에 앉아계신다. 우리도 그리스도와 함께 살았고 신분적으로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올라가 있는 자들이다(엡 2:6).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자들이다. 우리가 죽은 것은 우리의 죄악된 옛 자아(自我)가 죄와 세상과 율법에 대하여 죽은 것이며, 우리가 다시 산 것은 하나님과 의에 대하여 다시 산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중생(重生)한 우리는 이제 우리의 주된 관심을 땅의 것들에게 두지 말고, 하늘의 것들에 두어야 한다.
[3, 4] 이는 너희가 죽었고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본절은 우리가 위엣 것을 찾고 위엣 것을 생각해야 할 이유를,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우리의 죽음이며,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의 새 생명과 부활이며,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된 새 생명을 얻은 자들이며, 우리의 생명은 지금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고 장차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날 것이다.
빌립보서 3:20, 21, \"오직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는지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요한일서 3:2,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바로 이러한 사실 때문에, 우리는 일시적이며 허무하고 많은 경우 죄악으로 더럽혀 있는 땅엣 것들을 위하여 살지 말고, 영원하고 거룩하고 존귀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한 것들을 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1절부터 4절까지는 우리가 우리의 주된 관심을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을 가르쳤다. 우리는 신적 구주의 속죄 사역으로 말미암아 모든 죄를 씻음 받고 그와 함께 다시 산 자가 되었기 때문에 땅엣 것들을 찾거나 생각하지 말고, 위엣 것들을 찾고 생각해야 한다. 구원받은 성도들은, 비록 세상에 살며 세상의 일들을 하고 죄악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 즐기기도 하지만, 세상의 것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아야 한다. 세상의 것들은 지나가는 것이며 허무한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들은 우리의 주된 관심을 하나님께 두며, 천국에 두며, 하나님의 일에 두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데 두며, 하나님의 뜻을 순종하는 데 두어야 한다. 그것들이 무슨 일들인가? 그것들이 믿음의 일이며 구원의 일이며 성화의 일이며 순종의 일이며 교회의 일이며 전도의 일이다. 이것들이 가치 있는 선한 열매들이다. 우리는 이러한 일들에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두고 힘쓰고 애써야 한다.
5-11절,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그리스도인의 행위와 생활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 진리에 근거함을 나타낸다. 골로새서 2:6, 16; 3:1, 5, 12에 계속해서 다섯 번이나 \'그러므로\'라는 말씀이 나온다. 2:6은 신적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와 주님으로 영접했으니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라는 말씀이었다. 2:16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셨고 율법 특히 의식법을 폐하셨으니 그러므로 의식법에 얽매이지 말라는 말씀이었다. 3:1과 3:5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살았으니 그러므로 위엣 것을 찾고 생각하고, 땅에 있는 지체들 곧 죄악된 성질들을 다 죽이라는 말씀이다. 3:12도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여 거룩케 하셨으니 그러므로 긍휼과 온유와 인내로 옷입으라는 말씀이다.
\'땅에 있는 지체\'는 단순히 우리의 몸을 가리키지 않는다. 만일 이 말이 우리의 몸을 가리킨다면, 몸을 죽이라는 것은 금욕과 고행을 가리킬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도 언급했듯이(골 2:18-23), 금욕(禁慾)과 고행(苦行)은 성화(聖化)를 위한 정당하고 유익한 방법이 못된다. \'땅에 있는 지체\'라는 말은 우리의 몸의 죄악성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다음에 열거된 음란, 부정(不淨), 사욕(邪慾), 악한 정욕, 탐심 등의 말들을 통하여 알 수 있다.
\'음란\'은 정당하지 않은 성적인 행위들을 총괄하여 말한다. 성(性)은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것이지만, 정상적 부부 관계를 벗어난 성적 행위들은 음란이다. \'부정\'(不淨)은 특히 성적으로 생각과 말과 행실에 있어서 깨끗지 않고 더러운 것을 강조한 말이다. \'사욕\'(邪慾)이나 \'악한 정욕\'도 인간의 정당한 감정이 아닌, 비정상적인, 지나친 욕망을 가리킨다. 이 네 가지의 말들은 다 성적인 죄악들을 묘사한다. 우리는 이와 같은 잘못된 성적 욕망과 행위들을 죽여야 한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세상의 음란한 풍조들을 조심해야 한다. 세상은 언제나 음란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예를 들어, 옛날부터 세속 사회 속에 있었고 오늘날 젊은이들의 사회에서 유행하는 사교춤은 비정상적인 성적 충동을 자극하는 풍습이므로 성도들에게 합당치 않다. 현대 사회는 특히 텔레비젼과 컴퓨터로 인하여 급속히 음란해지고 있다. 음란 잡지와 음란 영화는 음란을 조장하는 것들이므로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들이다. 성인 비디오라는 것들도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성도들의 신앙을 파괴하는 마귀의 독소들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것들 이상의 음란물들이 청년들과 아이들의 컴퓨터 CD나 인터넷이나 컴퓨터 게임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 우리는 모든 종류의 음란 자극물들을 경계해야 한다. 텔레비젼과 컴퓨터는 여러 방면에 유익이 있지만, 잘못 사용되면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 극히 가증한 물건이 된다.
기독청년들은 남녀 관계를 항상 조심해야 한다. 성도의 사랑의 교제는 음란한 교제이어서는 안된다. 음란한 교제는 복이 아니고 저주이다. 그러므로 부부가 아닌 남녀는 너무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지혜이다. 주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고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청년들과 학생들을 포함하여 오늘날 우리 모든 성도들이 유념해야 할 교훈이다(마 5:28). 또한, 여성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교훈대로 경건하고 단정하기를 원한다면, 미니 스커트나, 옆이 갈라진 치마나, 소매가 없는 옷이나, 앞이 파진 옷이나, 딱들어 붙는 바지 등을 입지 않아야 할 것이다. 성경에는 \'여자들이 아담한 옷을 입으라\'고 말씀했다(딤전 2:9).
\'탐심\'이라는 말은 주로 물질에 관한 말이지만, 이웃의 아내를 탐하는 것도 포함한다. 출애굽기 20:17,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하나님이 주신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 많은 것을 원하는 것이 탐심이다. 탐심을 우상숭배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 대신에 최고 가치를 두는 것이 우상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탐심을 죽이고, 하나님이 주신 현재의 환경과 여건에서 감사하고 자족하며 살아야 한다.
[6]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
\'이것들\'은 앞절에서 말한 음란, 부정, 사욕, 악한 정욕, 탐심을 가리킨다. 이것들 때문에 하나님의 진노가 임한다. 전통 사본에는, \'하나님의 진노가 불순종의 아들들에게 임한다\'고 되어 있다. 성도는 이런 죄악들을 회개하고 구원함을 얻었고 깨끗해졌지만, 회개치 않고 불순종하는 자들은 음란과 탐심의 죄 가운데 살다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순종하는 아들들인가, 아니면 불순종하는 아들들인가?
[7, 8]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 살 때에는 그 가운데서 행하였으나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버리라.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우리도 과거에는 죄악되었다. 또 죄 가운데 곧 음란과 탐심 가운데 살았었다. 그러나 이제는 예수 믿는 자들이 되었고 죄씻음과 구원함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육신의 옛 죄악성들을 다 죽이고 그 행위들을 다 벗어버려야 한다. 본문은 우리가 벗어버려야 할 죄악들을 또 열거한다. \"곧 분과 악의와 훼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전통 사본에는 \'분(忿)과\'라는 말 다음에 \'노(怒)와\'라는 말이 있다. \'악의\'(惡意)는 남을 해치려는 마음을 가리킨다. \'훼방\'은 남을 비난하는 말이라는 뜻이다. \'부끄러운 말\'이란 더러운 욕설이나 남을 해하는 말을 가리킨다. 음란한 말이나 남을 저주하는 말, 그리고 쌍시옷(\'?\') 자로 시작하는 말이나 \'새끼\'로 끝나는 말 등은 성도에게 합당치 않은 것들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을 벗어버려야 한다.
[9, 10] 너희가 서로 거짓말을 말라. 옛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
위에 열거한 악들에 더하여 \'거짓말\'은 매우 나쁜 악이다. 거짓말은 에덴 동산에서 마귀가 하와를 속일 때 사용한 악이다. 마귀의 근본적 특징은 거짓과 속임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특징은 진실이며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거짓말 하는 것은 버릇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거짓말이 버릇이 되지 않도록 우리는 작은 일, 사소한 일에서부터 진실 훈련을 해야 한다. 부자라도 거짓된 자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며, 가난해도 진실한 자는 하나님이 사랑하신다.
원문에서, 본절의 \'벗어버리고\'와 다음 절의 \'입었으니\'라는 말은 \'벗어버리고 . . . 입었기 때문에\'라고 번역해야 한다(과거 분사로서 원인을 나타냄. 영어 성경은 seeing 혹은 since라는 말로 시작되는 구절로 번역함). 또한, 원문은, 성도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것이 과거에 이루어진 일임을 나타낸다(과거 분사는 과거에 이루어진 일을 나타냄). \'옛사람\'은 죄로 인해 하나님 앞에서 정죄되었던 옛 자아를 가리킨다.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리고 새사람을 입은 때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 즉 중생(重生)하고 칭의(稱義)함을 받았을 때이다.
우리가 입은 새사람은 \'우리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이다. 구원의 두 요소는 지식과 도덕성이다. 구원받은 우리는 근본적으로 참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을 알게 되었고 또 그 지식이 날마다 더욱 새로워진다. 또한 에베소서 4:24에 증거한 대로, 구원받은 우리는 \'의와 참된 거룩\'을 단번에, 법적으로 얻게 되었고, 또 날마다 실제적으로도 그렇게 변화되어간다. 성도는 이와 같이 옛사람을 벗어버렸고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모든 악을 떠나고 또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11] 거기는 헬라인과 유대인이나 할례당과 무할례당이나 야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분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거기는\'이라는 말은 \'새사람의 세계에는\'이라는 뜻이다. 새사람의 세계에는 이방인이나 유대인, 할례받은 자나 할례받지 않은 자, 야만인이나 문화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차별이 있을 수 없다.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라는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贖罪)와 의(義)가 충족하며 그 외에 무엇이 필요치 않다는 뜻이다. 구주 예수 그리스도는 죄인들의 구원의 충족한 원인이시요 조건이시다. 예수님 외에 다른 무엇이 필요치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에 있어서 \'모든 것\'이시다. 또 그리스도께서 \'만유 안에 계시다\'는 말씀은 이 충족한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구원받은 모든 사람 안에 계시다는 뜻이다.
결론적으로, 본문은 그리스도인의 생활 원리를 증거한다. 그리스도인은 여기에 열거된 악을 버리고 그와 반대되는 선을 행해야 한다. 즉 음란을 버리고 성결함을 구해야 하며, 탐심을 버리고 자족하는 삶을 살아야 하며, 분노를 버리고 온유함을, 악의를 버리고 선의(善意)를 품어야 하며, 훼방을 버리고 덕스런 말을 하며, 부끄러운 말을 버리고 좋은 말을 하고, 거짓말을 버리고 진실한 말을 해야 한다.
성도가 이렇게 해야 할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모든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한 분만으로 충족하며, 거기에 무엇을 더할 것이 없다. 죄로 인하여 하나님과 분리되었던 우리의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과 연합되었기 때문에, 즉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렸고 새사람을 입었고,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답게, 의인답게, 천국백성답게 모든 악을 버리고 선으로 무장되어야 하는 것이다.
12절, 긍휼과 겸손과 오래 참음
[12] 그러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
\'그러므로\'라는 말씀은 앞절들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성도들이 옛사람을 벗어버렸고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즉 \'구원을 받았기 때문에\'라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의 윤리적 삶은 하나님의 은혜로 얻은 구원에 근거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죄씻음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원하시는 의롭고 선한 윤리적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법적인 의와 거룩을 단번에 입혀주신 후에 우리로 하여금 거기에 합당한 삶을 살도록 권면하시고 격려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처럼\'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의 진리에 대해 말한다. 선택의 가치는 하나님의 특별한 사랑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천하 만민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성도들은 그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랑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의 선택함을 받은 자들은 특별한 복을 받은 자들인 것이다. 거기에 선택의 가치가 있다.
선택의 목적과 증거는 거룩함에 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그 죄로부터 건져내시고 그 죄들을 씻어 깨끗케 하시기 위하여 그들을 선택하셨다. 에베소서 1:4,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성도(聖徒)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룩하여진 자들이다. 고린도전서 1: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곧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과.\" 그러므로 사람이 죄와 불신앙 가운데 사는 것은 버림받은 증거이지만,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룩하고 선한 삶을 살려고 애쓰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함을 받은 증거이다.
긍휼과 자비와.
본문은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들이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인격과 덕을 열거한다. 본절은 먼저 \'긍휼과 자비를 옷입으라\'고 말한다. \'긍휼\'이라는 원어(스플랑크나 오이크티르무)는 \'긍휼의 심정\'이라는 말이다. \'긍휼과 자비\'는 비슷한 뜻이다. 긍휼과 자비는 멸시, 학대, 훼방, 악행과 반대되는 말이다. 그것은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하나님께서는 죄를 향해서는 그렇지 않아도 죄인들을 향해서는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시다.
죄인들은 참으로 불쌍하다. 그것은 죄의 결과들 때문이다. 평화롭고 안전하고 사랑이 넘치고 건강해야 할 사람들의 삶 가운데는 죄로 인해 고생스럽고 불행한 일들이 많다. 거기에는 미움과 싸움과 갈등이 있고, 협박과 구타와 폭행이 있고, 인신 매매와 집단 따돌림이 있고, 배신과 이혼이 있고, 비참한 전쟁들이 있다. 또 자연적 재난들도 있어 가뭄, 홍수, 태풍, 폭설, 지진, 화산, 해일 등이 있다. 그런 것이 아니라도, 사람은 늙고 병들고 마침내 죽고 만다. 죄의 값은 실로 큰 불행이다.
긍휼과 자비는 이런 불행스런 일들을 안고 사는 죄인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심정이다. 이것은 그의 백성이 본받아야 할 심정이다. 우리는 이웃을 향해 또 서로를 향해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죄로 인해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이 지구 위에서 죄의 결과로 고생과 불행을 안고 살고 있는 이웃들을 바라보면서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자가 되어야 할 것이다.
겸손과 온유와.
본절은 또 \'겸손과 온유를 옷입으라\'고 말한다. 겸손과 온유는 긍휼과 자비의 심정을 가진 자에게서 볼 수 있는 덕이다. 겸손과 온유는 교만, 높은 마음, 자랑, 과장, 이웃에 대한 멸시와 거친 말과 마음에 반대되는 말이다. 성경은 교만을 \'마귀의 죄\'라고 말했다(딤전 3:6). 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고 말씀했다(잠 16:18).
교만은 사람이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흙으로 지음을 받은 피조물인 것을 알지 못하는 데서 생긴 어리석은 죄악이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을 바로 알 때 겸손해질 수 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티끌과 같은 나\'라고 표현하였다(창 18:27). 더욱이, 사람은 완전하지 않고 실수와 부족이 많은 존재이다. 완전히 정직하고 선하고 진실한 사람은 없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악과 거짓이 있어서 때때로 그것이 나타난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을 높이거나 자기 지혜를 신뢰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깨닫고 겸손해야 한다. 죄성과 연약성을 많이 가진 인간은 그렇게 존귀한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을 \'지렁이 같은 너 야곱아\'라고 부르셨다(사 41:14).
겸손과 온유는 바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덕이다. 예수께서는 친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하셨다(마 11:29).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난 지 8일 만에 할례를 받으셨고(눅 2:21) 인간 부모에게 복종하셨고(눅 2:51)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눅 2:41, 42). 그는 30세쯤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 3:13-17; 눅 3:23). 그는 이와 같이 사람들과 더불어 30여년 동안 사셨고 마침내 십자가에 죽으셨다.
바울 사도는, 빌립보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겸손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너희 안에 이[겸손한]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 2:5-8).
겸손과 온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얻은 모든 성도들과 교회의 일꾼들에게 요구되는 가장 큰 덕이다. 우리가 주 예수님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의 겸손과 온유를 본받아야 한다. 교만은 마귀와 그의 자녀들의 죄악이요, 겸손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자녀들의 덕이다. 모세는 겸손하고 온유하였다. 민수기에는,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승하더라\"고 기록되어 있다(민 12:3). 또 신명기 17장에 보면, 왕이 되는 자는 하나님의 율법책을 곁에 두고 늘 읽음으로써 그의 마음이 그 형제 위에 교만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신 17: 18-20). 오늘날도 우리는 교회의 중한 직분을 가질수록 겸손과 온유로 단장되어야 한다.
오래 참음을 옷입고.
본절은 또 \'오래 참음으로 옷입으라\'고 말씀했다. 오래 참음은 조급함과 반대된다. 조급한 자는 자기 마음과 감정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이다. 그는 절제심이 적고 쉽게 성을 내고 오해와 잘못된 판단을 잘하게 된다. 그러나 오래 참는 자는 모든 일을 깊이 생각하고 신중하고 진지하게 처리할 것이다. 또 비록 자기에게 잘못을 행한 자들에 대해서도 그들이 바른 생각과 깨달음을 가질 때까지 기다려 주는 여유를 가질 것이다. 완전한 사람은 없다. 상대방의 잘못은 아마 과거의 나의 잘못이었고 또 미래의 나의 잘못일 수도 있다. 인간의 부족과 연약과 악함을 생각한다면, 성급하게 남을 정죄하고 격노할 것은 없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에서 사랑의 첫번째 성격이 오래 참는 것이라고 말했다(고전 13:4). 우리가 상대방을 참으로 사랑한다면, 상대방의 잘못으로 인해 상한 우리 자신의 감정을 억제할 수 있고 그가 그의 잘못을 깨달을 때까지 참고 기다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사랑은 무엇보다 오래 참는 것이다.
그것이 실상 죄인을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성격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볼 수 있듯이, 인간은 반복적으로 하나님을 대항하여 범죄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오래 참으셨고 노하기를 더디하셨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고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오래 참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씀이다.
결론적으로, 본절은 우리가 옛사람을 벗어버렸고 새사람을 입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택하신 거룩하고 사랑하신 자들로서 갖추어야 할 덕들을 열거하였다.
그것들은 첫째로 긍휼과 자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저주를 받은 세상에서 죄의 결과인 고생과 불행을 안고 살고 있는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다 한 배를 탄 자들과 같다. 우리는 이웃에 대해 긍휼과 자비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둘째는 겸손과 온유이다. 우리는 피조물인 인생, 특히 죄인인 인생에게 합당치 않은 교만과 높은 마음을 다 버리고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인정하는 가운데 겸손과 온유의 심정을 가져야 한다. 특별히 우리 주 예수께서는 친히 겸손과 온유의 본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마음을 본받아 겸손과 온유의 마음을 가져야 한다.
셋째는 오래 참음이다. 자신의 부족과 연약을 아는 자는 상대방의 부족을 볼 때도 오래 참을 수 있을 것이다. 더욱이 우리가 상대방을 사랑한다면,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상대방을 향해 오래 참을 수 있을 것이다. 오래 참음은 사랑의 하나님께서 죄인들을 향해 가지시는 바로 그 마음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도 연약한 이웃들을 향해 오래 참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13-15절, 용서, 사랑, 평강
[13] 누가 뉘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혐의\'라는 원어(몸페)는 \'불평거리, 원망거리\'를 뜻한다. 용서한다는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할 때 그것을 없었던 것처럼 간주해 주는 행위이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치 않는 자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도덕적 혼란만 초래할 것이다. 마태복음 18:15-17,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가서 너와 그 사람과만 상대하여 권고하라. 만일 들으면 네가 네 형제를 얻은 것이요, 만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데리고 가서 두 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증참케 하라. 만일 그들의 말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말하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거든 이방인과 세리와 같이 여기라.\"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는 것\'은 앞절에서 언급한 긍휼과 자비 그리고 오래 참음에서만 나올 수 있다. 잘못은 잘못이고 악은 악이다. 그러나 우리가 긍휼과 오래 참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자를 용납하고 용서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저나 나나 사람은 다 부족하고 불완전하여 이런 저런 실수와 잘못을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절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고 말씀한다. 주 예수께서는 우리의 많은 죄, 많은 결함과 부족에도 불구하고 우리를 용납하셨고 우리를 용서하셨다. 우리의 죄와 허물이 지옥 형벌을 받아야 마땅했을 때 그는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해를 끼친 이웃의 죄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더 잘 용서해야 마땅할 것인가?
주께서는 마태복음 18:21-35에서 우리가 왜 이웃의 허물을 용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한 비유로 말씀해주셨다. 그 비유에서 주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받은 용서는 마치 1만 달란트 빚진 종이 그 빚을 탕감 받은 것과 같고,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이웃의 죄는 마치 1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의 빚과 같다고 하셨다. 1만 달란트와 1백 데나리온의 차이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게 크다.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에 해당하였다. 그러면 1만 달란트는 6천만 데나리온이다. 당시에 한 데나리온은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었으니, 약 5만원으로만 계산해도 100데나리온은 500만원에 해당하지만, 1만 달란트는 3조원에 해당한다. 500만원과 3조원은 비교할 수 없이 큰 차이이다.
이와 같이, 지옥 갈 우리의 죄악을 주께서 용서하신 것과, 우리가 우리의 동료의 잘못을 용서하는 것과는 이런 큰 차이가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해주신 큰 용서를 받은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을 범한 자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은 너무나 마땅한 일이다. 더욱이, 우리가 구원을 받은 이후에도 지금까지 크고 작은 많은 실수와 잘못을 범했음에도 불구하고 주께서 우리의 죄를 계속적으로 용서해주시는 것을 생각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잘못을 범하는 자의 잘못을 한 두 번 용서해줄 뿐만 아니라, 주의 교훈과 같이,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마 18:22) 용서해주어야 마땅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사실, 용서는 사랑의 첫걸음이요 기초이다. 용서 없이는 서로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부족이 많은 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용서로 표현되었듯이, 우리의 사랑도 용서로 표현되고 증거되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요한복음 13장에 증거된 대로 주께서 마지막 유월절 식사를 하신 후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뜻이었다.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단순히 봉사의 정신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나 심지어 오늘 어떤 이들이 흉내내듯이 다른 이들의 발을 씻어주라는 뜻이 아니고, 서로를 진심으로 용서함으로써 참된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주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을 주셨던 것이다.
[14]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 이는 온전하게 매는 띠니라.
사랑의 중요성, 사랑의 완전성은 아마 설명이 불필요할 정도일 것이다. 주께서는 인간의 윤리적 강령인 십계명을 사랑이라는 말로 요약하셨다. 즉 인간의 마땅한 도리는, 첫째로 하나님을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사랑하는 것이요, 둘째로 이웃을 자기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또 주께서는 제자들의 상호간의 삶의 지침을 한마디로 \'서로 사랑하라\'는 새 계명으로 표현하셨다.
바울 사도도 말씀하기를, \". . .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고 했다(롬 13:8-10). 또 그는 고린도전서 13장에서 사랑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말씀했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4-7절).
본절은 사랑을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표현하였다. \'온전하게 매는\'이라는 원어(텔레이오테토스)는 \'완전함의\'라는 뜻이다. 사랑이 완전함의 띠라는 말은, 사랑 자체가 우리가 그것으로 단장해야 할 완전한 덕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만 아니라, 또한 사랑을 통해 완전한 일치가 가능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용서로 표현되는 사랑만이 교회가 내적으로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유일한 길이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4:8은 말씀하기를, \"무엇보다도 열심으로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고 했다.
[15]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하나님의 평강\'이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시는 평강은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다. 뿐만 아니라, 요한복음 14:27에 보면 주께서는 친히 말씀하시기를,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고 하셨다.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는 말씀은 때때로 우리의 마음이 평강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렇다, 그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우리는 때때로 염려하며 근심하며 불안해 하고 심지어 낙심하기도 한다. 그러나 즉시 우리의 믿음 없음을 회개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은혜를 간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을 주장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빌립보서 4:6, 7에는 말씀하기를,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고 했다.
개인의 마음의 평안은 서로간의 화평으로 이어진다. 그것이 \'평강을 위하여 너희가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개인이 마음으로 평안을 누릴 뿐만 아니라, 또한 모든 성도들이 한 몸이 되고 모든 교회가 사랑의 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목적이기도 하다. 교회는 사랑과 화평 안에서 한 몸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와 거짓이 혼합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고린도후서 6:14-18은 분명히 말씀했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가라사대 내가 저희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저희 하나님이 되고 저희는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저희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특히, 요한계시록 18:2은 말세에 나타날 바벨론 곧 적그리스도적인 나라의 특징이 \'각종 더러운 영의 모이는 곳\' 즉 혼합주의적 세계일 것을 말씀했다. 이단과 거짓 교훈이 사탄의 역사이지만, 그것 못지 않게 두려운 역사는 정통과 이단의 혼합이다. 성령은 빛과 어두움을 나누시는 영이며 진리와 거짓을 분별케 하시는 영이시지만, 악령은 혼동의 영이며 혼동케 하는 영이다. 이단이 악하지만, 그보다 더 악한 것은 정통과 이단의 혼합이다. 최근에 세계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바와 같이, 기독교와 이방 종교의 혼합, 개신교와 천주교의 혼합, 보수주의와 자유주의의 혼합의 경향은 확실히 성령의 역사가 아니고 악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경적 지식과 믿음 안에서,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우리는 모든 교만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성경을 배우고 확신하기를 힘써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배우되 전체적으로, 체계적으로, 그리고 역사적 기독교 신앙에 입각하여 배우고 확신하기를 힘써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사랑하시는 교회를 위해 17세기에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등 여러 신앙고백서들과 19세기, 20세기에 핫지나 벌코프나 박형룡 등의 신학자들을 은혜로 주셨다. 우리는 그런 신앙의 귀한 유산들을 참고하면서 성경의 바른 지식의 체계를 정리하고 확신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또한 너희는 감사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13절에 \'혐의\'라는 말과 대조된다. 서로간에 원망과 불평을 가지는 대신에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서로를 향해 감사하는 자들이 되라는 뜻이다. 애굽에서 나와 광야를 통과하던 옛날 이스라엘은 항상 하나님을 향해 그리고 그들의 지도자를 향해 불평하고 원망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악하게 여기시고 징벌하셨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같이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과 지도자의 인도를 온전히 순종했던 자들도 있었다. 오늘날 우리는 바른 지식과 믿음을 가지고 항상 하나님께 감사하며 또 서로를 향해 감사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늘 우리가 생각한 용서, 사랑, 평강, 감사는 다 연결되어 있다. 참된 용서는 참 사랑의 표현이요 증거이다. 용서와 사랑이 있는 곳에 싸움과 분열 대신에 화평이 있다. 또 거기에서는 불평과 원망 대신에 감사하는 자들이 있을 것이다. 바로 이것이 우리들의 삶, 우리 교회의 삶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서로에 대해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우리는 사랑이라는 완전함의 띠를 띠려고 하고 있는가? 우리의 마음은 평안하고 또 서로간의 화평을 도모하고 있는가? 우리는 불평이나 원망 대신에 감사하는 자인가? 우리 모두는 이 질문에 대해 \'예\'라고 대답할 수 있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힘써야 할 것이다.
16-17절, 말씀 충만, 피차 권면, 찬양과 감사
[16]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 계실 때 친히 하신 말씀과 또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을 다 포함할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은 네 권의 복음서들과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다. 요한계시록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의 말씀이다.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은 서신서들에 기록되어 있다.
\'너희 속에\'라는 말은 \'너희 마음 속에, 즉 너희 생각과 기억과 사상 속에\'라는 뜻이다. 여기에서 \'너희\'는 목사들이 아니라 일반 성도들을 가리킨다. 목사들이 그리스도의 말씀,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을 받아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일반 성도들도 그러해야 한다는 말씀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게 하라.\'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7에서,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고 말씀하셨다.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해야 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되 풍성히 거해야 한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마지막 부탁을 하실 때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다(마 28:20).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의 한 부분을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배워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하도록 해야 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딤후 3:16) 성경 안에는 불필요한 말씀이 없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말씀을 가르치고 배우기를 힘쓰고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말씀과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도록 해야 한다.
어떻게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하게 거하게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할 수 있다. 그래서 시편 1:2에는, 복 있는 자는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 자로다\"라고 말씀했다. 성경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는 말씀의 충만함을 받게 될 것이다. 시편 119편의 저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정금보다 더 사랑한다고 증거했고, 그 말씀을 종일 묵상하며 새벽 전에 바라고 묵상한다고 증거했다(127, 97, 147절).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었을 것이 분명하다. 사도행전 17:11, 12에 보면, 베뢰아 사람들은 바울 사도가 증거한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았고 그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연구함으로써 많은 사람들이 믿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우리도 성경을 읽고 듣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말씀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하나님의 말씀은 곧 지혜이다. 시편 119:98-100, \"주의 계명이 항상 나와 함께하므로 그것이 나로 원수보다 지혜롭게 하나이다. 내가 주의 증거를 묵상하므로 나의 명철함이 나의 모든 스승보다 승하며 주의 법도를 지키므로 나의 명철함이 노인보다 승하니이다.\" 이 지혜는 자신의 삶을 바르게 만들 뿐 아니라, 또 남에게도 유익을 준다. 즉 지혜가 있는 자는 남을 가르치고 권면할 수 있다. 잠언 12:18, \"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우리는 말씀의 지혜를 얻어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일은 교회 생활에 중요한 요소이다. 데살로니가전서 5:11, 14, \"피차 권면하고 피차 덕을 세우기를 너희가 하는 것같이 하라. . . . 규모 없는 자들을 권계하며 마음이 약한 자들을 안위하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오래 참으라.\" 히브리서 3:13,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강퍅케 됨을 면하라.\" 히브리서 10:24, 25,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한 방법으로 본문은 찬송시를 든다. 본문을 다시 번역해 보면, \'모든 지혜로,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라고 할 수 있다. 찬송시로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말씀은 얼른 보면 이상하게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신명기 32장의 모세의 예언적 시를 기억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또 구약의 시편들에는 이렇게 가르치고 권면하는 의도가 있다. \'시\'는 구약 시편을 가리키고, \'찬미\'는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돌리는 찬송시들을, 그리고 \'신령한 노래들\'은 기타 회개와 간증과 권면의 내용들을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 찬송가의 많은 노래들이 일차적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내용들이지만, 또한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는 목적도 가지고 있다. 찬송시들은 성도들의 믿음과 그 성장에 많은 유익을 준다.
마음에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을\'이라는 말이 전통 사본에는 \'주를\'이라고 되어 있다. 우리의 찬송의 대상은 하나님이며 또 주 예수님, 곧 성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요한계시록 5:13, \"내가 또 들으니 하늘 위에와 땅 위에와 땅 아래와 바다 위에와 또 그 가운데 모든 만물이 가로되, 보좌에 앉으신 이와 어린양에게 찬송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토록 돌릴지어다 하니.\"
\'마음에\'라는 말(엔 테 카르디아)은 \'마음으로\'라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의 찬양이 겉모습으로나 목소리로만 해서는 안되고 마음에서 우러나서 해야 함을 보인다. 마태복음 15:8에 보면 예수께서는 외식하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해 구약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을 이렇게 인용하셨다: \"이 백성이 입술로는 나를 존경하되 마음은 내게서 멀도다.\" 진정한 찬송은 마음의 찬송이다. 마음에서 나오지 않는 찬송은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찬송이 되지 못한다.
\'감사함으로\'라는 말(엔 카리티)은 일차적으로는 \'은혜로\'라는 뜻이다. 찬양의 내용은 하나님의 은혜, 곧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신 은혜에 관한 것이며, 그 은혜를 받은 자들만이 참으로 하나님께 찬송할 수 있다. 찬송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하는 것이요 또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함으로\' 하는 것이다.
모든 성도들은 마음으로, 은혜로, 감사함으로 주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찬송은 성도들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찬송 중에 거하신다(시 22:3). 성경은 우리가 \'새 노래\' 곧 구원의 노래로 하나님을 찬송하라고 가르친다(시 96, 98편). 성경은 또 \'호흡이 있는 자마다 하나님을 찬양하라\'고 가르친다(시 150:6). 히브리서 13:15,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우리는 찬송을 하되 우리 자신의 육신적 만족이나 즐거움을 목표로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과 다른 이들의 유익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성경은 또 우리에게 \'아름답고 거룩한 것으로\' 하나님께 경배하라고 가르쳤기 때문에(시 96:9), 우리는 하나님께 아름다운 곡조로 찬송해야 한다. 또 성경은 우리에게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할 것을 가르쳤기 때문에(빌 1:10), 우리는 지극히 선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아름다운 음악에는 어떤 질서가 있다. 현대 음악과 같이, 정상적 화음을 깨뜨리는 무질서와 혼란, 지나친 단조의 사용, 그리고 감정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리듬과 비트 등은 하나님께 대한 찬양이나 성도들의 노래로서 합당치 않다.
[17]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성도는 왜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해야 하는가?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중보자이시기 때문이다. 갈라디아서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니고서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인정 받을 어떤 선한 일도 행할 수 없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의요 힘이요 지혜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범사에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말하며 또 무슨 일이든지 그를 힙입어 행해야 한다.
또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주 안에서, 즉 주 예수님 때문에, 그의 의 때문에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의 신앙 생활은 예수 그리스도 중심이다. 우리는 그의 대속 사역 때문에, 그의 의 때문에 힘을 얻고 기쁨과 담력을 얻는 것이다. 우리의 감사의 이유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의, 그의 구원이다.
결론적으로, 16, 17절의 교훈은 세 가지다. 첫째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우리 속에 풍성히 거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고 듣고 배우고 연구하고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말씀의 충만함을 얻어야 한다. 둘째는, 피차 가르치고 권면하라는 것이다. 여기에 성도의 교제의 중요성이 있다. 우리는 자신의 믿음을 위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의 믿음을 위해야 한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은 그것을 위한 한 수단이 된다. 셋째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찬송하며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범사에 그에게 감사하라는 것이다.
18-21절, 가정 윤리
구원은 죄씻음 받는 것이다. 그것은 죄인이 변하여 의인이 되는 것이요, 죄악된 옛사람이 변하여 거룩한 새사람이 되는 것이다. 신분적으로 그럴 뿐만 아니라, 또한 실제적으로 인격과 삶이 바뀌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미 구원받은 우리에게 주께서는 성경을 통해 많은 교훈을 주신다. 구원은 내세에 영광스럽게 나타날 것이지만, 현세에서도 똑같이 흠과 점 없는 인격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어 어두움 가운데 살고 있는 많은 이들에게 증거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새사람의 실제적 인격과 삶에 대해, 바울 사도는 앞절들에서 성결, 자족, 진실, 긍휼과 자비, 온유와 겸손, 인내와 용서, 사랑, 화평, 감사, 말씀 충만, 피차 권면, 찬송과 감사 등을 이미 교훈하였다. 이제 그는 본문에서 가정 윤리에 대해 교훈한다. 그는 먼저 남편과 아내의 관계에 대하여 그리고 그 다음 부모와 자녀의 관계에 대하여 가르친다.
[18]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마땅하니라.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아내의 의무는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 안에서 마땅하다고 본문은 말씀한다. \'마땅하다\'는 말은 \'합당하다\'는 뜻이다.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합당한 일이다.
성경은 아내가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남편이 아내에게 복종하라고 말하지 않고,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말한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아내들이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하되 주께 하듯하라고 말씀했다. 남편의 위치는 교회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의 위치에 비유되었다. 교회가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 복종하듯이, 아내들도 자기 남편들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했다. 이와 같이, 부부는 대등하지 않다. 대등하다면, 누가 누구에게 복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성경이 이렇게 아내와 남편의 위치의 차등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근거한 것이다. 디모데전서 2:11-13,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지 아니하노니 오직 종용할지니라.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이와가 그 후며.\" 창세기 2장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을 만드실 때 남자를 먼저 만드셨다. 그런 다음, 그를 돕는 자를 만들기 위해 그를 깊이 잠들게 하시고 그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셨다. 여기에 나타난 하나님의 창조 의도는 아내가 남편과 대등한 독립된 개체가 되는 것이 아니고, 남편을 돕고 남편에게 종속되고 남편과 한 인격체가 되는 것이다. 거기에 결혼의 심오하고 복된 뜻이 있다.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의도요 창조 질서이다.
오늘 시대의 사람들은 남녀 평등을 말한다.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군대에서나 사회 전반에 걸쳐 성 차별을 없애야 한다는 목소리를 우리는 듣는다. 그것은 남존여비적 사회 전통 속에서 고통을 당했던 여성들에게는 반가운 소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런 시대적 풍조에 근거하여 성경의 명확한 진리와 교훈을 옛시대에 속한 것으로 돌리려는 생각은 성경의 권위에 도전하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진리와 교훈은 시대 제약성을 가지지 않는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의 권위처럼, 신약의 사도들의 권위는 곧 하나님의 권위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말씀하기를, \"형제들아 굳게 서서 말로나 우리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유전을 지키라\"고 했다(살후 2:15). 또 그는 에베소 교회에 편지할 때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고 말씀했다(엡 2:20).
성경에 남녀의 동등성을 보이는 듯한 구절이 없지 않다. 예를 들어, 갈라디아서 3:28,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그러나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은혜로 주신 칭의(稱義)의 복을 누림에 있어서 민족이나 사회 신분이나 남녀의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말씀은 가정과 교회 안에서의 남녀의 기능적 구별과 차등이 없다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가정과 교회 안에서의 남녀의 구별과 차등은 성경의 다른 곳들에서 바로 바울 자신을 통하여 명백히 증거되었기 때문이다(고전 14:34-38; 딤전 2:11-14).
아내가 남편에게 복종하는 것은 실제로 아내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사랑은 싸움과 갈등 속에서는 원만히 꽃 피울 수 없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으로 행복을 느끼며 산다. 그러나 싸우면 사랑이 식어지고 행복도 사라질 것이다. 그렇지만 아내가 남편과 다투지 않고 복종한다면 사랑의 관계가 잘 이루어질 것이다.
[19] 남편들아, 아내를 사랑하며 괴롭게 하지 말라.
한편, 남편의 의무는 아내를 사랑하고 그를 괴롭게 하지 않는 것이다. 에베소서 5장에 보면, 남편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되,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해야 한다고 교훈했다. 십자가 위에 달려 죽으신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위해 가지셨던 사랑은 무조건적이며 희생적이었다. 하나님께서는 남편이 자기 아내를 그런 사랑으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신다.
\'괴롭게 한다\'는 원어는 \'독하게 한다, 거칠게 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말과 행위에 있어서 다 적용된다. 아내는 남편의 사랑의 대상이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다(고전 13:4). 그러므로 사랑한다면 상대에게 독한 말이나 거친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아내에게 독한 말을 하거나 거칠게 대하는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는 교훈도 창세기 2장에 증거된 창조의 이치에 근거한다. 아내는 남편의 갈빗대 하나로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 아내는 남편과 별개의 존재가 아니고, 바로 남편의 가장 귀한 몸의 일부분, 곧 남편이 사랑의 품으로 품어야 할 대상이라는 말이다. 남편이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사랑하는 일이요 자기 행복을 위하는 일이다. 그러나 남편이 자기 아내를 학대하는 것은 결국 자기 몸을 학대하는 어리석은 일이며 자기 행복을 깨뜨리는 일이다.
성경의 이러한 교훈은 동양의 남존여비(男尊女卑) 사상과는 다르다. 남존여비 사상은 일방적으로 여자가 남자를 섬기라는 사상이다. 그러나 성경의 교훈은 쌍방적이어서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할 뿐 아니라, 또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해야 할 것을 보인다. 동양에서 여성이 학대를 당하고 인격적 취급을 받지 못하던 풍습은 매우 잘못된 풍습이었다. 성경의 교훈은 그런 동양적 풍습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실제로 남편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아내 사랑은 아내의 행복과 평안과 기쁨을 만들고 그것은 곧 남편을 위한 봉사와 희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부부의 갈등이나 걱정은 없어질 것이다. 가정은 피곤한 세상 생활에서 안식처가 될 것이다. 남편의 아내 사랑은 결국 자신의 행복으로 돌아올 것이다.
[20]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
자녀와 부모의 관계에서, 자녀의 의무는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라는 말은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 외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믿지 않는 부모가 신앙 생활과 교회 생활을 반대한다면, 자녀는 그것에 순종할 수 없다. 그러나 그 외의 모든 일에 있어서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해야 한다.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라는 말은 영어 성경들의 번역처럼 \'주를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부모 순종은 곧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다. 하나님은 사회의 질서를 귀히 여기시고 무질서를 싫어하신다. 자녀가 부모에게, 젊은이가 노인에게, 종이 주인에게, 학생이 선생에게, 하급자가 상급자에게 예절을 갖추고 그를 존중하는 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마음가짐이다.
하나님께서는 자녀들이 부모를 조롱하거나 멸시치 말고 공경하고 순종해야 할 것을 성경에 가르치셨다. 출애굽기 20:12,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신명기 27:16, \"그 부모를 경홀히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 할 것이요 모든 백성은 아멘 할지니라.\" 잠언 30:17,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
특히 구약 율법에는, 부모에게 불순종하는 아들을 성읍 사람들이 돌로 쳐 죽이라고 엄히 규정되어 있다. 신명기 21:18-21,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그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범사에 순종해야 한다. 구약 역사에서 훌륭한 믿음의 한 인물인 에스더는 자기를 길러준 친척 모르드개에게 항상 순종했다. 에스더 2:20, \"에스더가 모르드개의 명한 대로 그 종족과 민족을 고하지 아니하니 저가 모르드개의 명을 양육받을 때와 같이 좇음이더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인간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에게 순종하셨다. 누가복음 2:51, \"예수께서 한가지로[그들과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그들에게]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부모에게 순종하는 자녀들을 \'마마 보이\'라고 부르는 것은 잘못된 말이다. 그들은 \'마마 보이\'가 아니고, 에스더같이, 예수님같이 하나님의 뜻을 바르게 순종하는 자들이다.
[21]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격노케 말지니 낙심할까 함이라.
한편, 부모의 의무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않는 것이다. \'아비들아\'라는 말은 자녀 교육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어머니보다 아버지에게 있음을 보인다. 그러나 어머니에게도 똑같이 책임이 있다.
\'자녀를 격노케 말라\'는 것은 교육을 전제한 것이다. 무관심하면 격노케 할 것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자녀를 교육시키려고 할 때 그를 격노케 해서는 안된다. 격노케 한다는 것은 성질을 나게 한다는 뜻인데, 그것은 대체로 부당한 요구나 처분에서 일어난다. 부모의 정당한 명령이나 처분에서 화를 내는 것은 일종의 불순종일 것이다. 그러나 부모라고 해서 자녀를 아무렇게나 취급해서는 안된다. 특히 그에게 부당하게 무엇을 명령해서는 안된다. 부모가 무리하게 그리고 감정적으로 자녀를 대하면 자녀의 감정은 매우 상하게 될 것이며 그것은 자녀 교육에 유익보다 해가 될 것이다.
자녀들의 감정이 상하게 되면, 그들은 낙심하고 시무룩해지고 좌절하고 열등 의식을 가지고 심지어 자포자기 하기 쉽다. 더 심각해지면, 그들은 자살하려는 충동도 가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녀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는 교육 방식은 유익보다는 해가 된다. 자녀 교육은 사리에 맞게 이루어져야 하며 그들을 격노케 하여 낙심케 만드는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자녀들이 잘못했을 때 체벌하는 것은 성경적이며 필요하다. 그러나 그 때에도 무엇이 잘못인지, 왜 잘못인지, 자녀에게 충분히 이해시킨 뒤에 매를 들어야지, 신경질적으로나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자녀를 다루어서는 안된다. \'자녀를 격노케 말라\'는 본문의 교훈은 부모가 자녀 교육에 있어서 사랑의 심정으로 해야 함을 내포하고 있다. 부모가 자녀에게 매를 들 때에도, 그것이 미운 감정의 매가 아니고 눈물어린 사랑의 매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 매는 역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결론적으로, 18절부터 21절까지에서 우리는 가정 윤리의 기본적 원리들을 가진다. 첫째로, 아내와 남편의 관계에서,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해야 하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한다. 둘째로, 자녀들과 부모의 관계에서, 자녀들은 범사에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해야 하고, 부모는 자녀를 격노케 하지 말고 사랑으로 훈계하며 양육해야 한다.
성경은 구원받은 우리가 가정에서도 구원의 아름다운 덕을 나타내야 할 것을 보인다. 구원받은 우리는 좋은 남편과 좋은 아내가 되어야 하고 또 좋은 부모와 좋은 자녀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이다. 우리가 장차 천국에서 영원히 영광을 누릴 것이지만, 그 영광을 이 땅 위에서도, 교회 안에서 그리고 가정 안에서 나타내고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22-25절, 종의 의무
[22]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성경은 노예 제도를 인정하는가? 노예 제도가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따라 대답이 달라질 수 있겠지만, 성경이 주인과 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실이다. 성경에는 종들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 주인과 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우리가 노예 제도라고 말한다면, 성경은 노예 제도를 인정한다. 그렇다면, 노예 제도 자체가 악은 아니다. 옛시대에는 경건한 성도들의 가정에 종들이 있었다. 아브라함에게 종들이 있었다(창 12:16; 16:1; 24:2). 욥에게도 종들이 있었다(욥 1:3). 사람이 빚을 많이 졌을 때나, 전쟁 포로가 되었을 때, 흔히 종이 되었다.
인류 역사상 노예 제도에 많은 폐해가 있었다. 특히, 종들에 대한 비인격적인 학대가 많았다. 그러나 성경의 노예 제도는 달랐다. 성경에는 종들에 대한 많은 배려가 있었다. 물론 종은 종이므로 주인에게 순종해야 할 위치에 있고 자유와 권리의 많은 제한이 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종들을 위해 안식년이라는 법을 주셔서 히브리 종은 6년간 일한 후에 제7년에는 자유의 몸이 되게 하셨다(출 21:2). 또 여종을 취한 주인은 평생 그에게 의복과 음식과 동침하는 것을 끊지 못하게 하셨다(출 21:10). 또 종의 눈을 쳐서 상하게 하면 그 눈 대신에 그를 놓아주게 하셨다(출 21:26). 또한, 성경에는, \"의인은 그 육축의 생명을 돌아보나 악인의 긍휼은 잔인이니라\"는 말씀이 있다(잠 12:10), 의인이 짐승에 대해 그러하다면, 하물며 그가 종들을 잔인하게 학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 옛날 같은 노예 제도는 없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새로운 형태의 주종(主從) 관계가 형성되어 있다. 그것은 돈을 매개로 하는 계약 관계이다. 가정에서나 직장에서 고용주와 피고용인들 간에는 옛날의 노예 제도 못지 않은 약속된 복종 관계가 있다. 그것은 강제적 노예 제도는 아닐지라도, 새로운 형태의 주종 관계임에는 틀림 없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말씀은 오늘날 이러한 새로운 형태의 주종 관계에 적용될 하나님의 교훈이다.
종들은 모든 일에 있어서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라고 본문은 말씀한다. \'모든 일\'은 하나님의 뜻에 반대되는 일, 즉 죄 짓는 일이거나 신앙에 반대되는 일 외의 모든 일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다. 그 일은 합리적인 일일 수도 있으나 때때로 주인이 무리하게 지시하는 일일 수도 있다. 그것은 지혜로운 일일 때도 있으나 미련한 일일 때도 있다. 그러나 모든 경우에 종들은 주인에게 순종해야 한다.
\'육신의 상전들\'이라는 말은 \'영혼의 주인\'이신 하나님과 대조하는 말인 것 같다. 우리의 참된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종들에게는 육신의 주인들이 있다. 그들은 그 주인들에게 속하므로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순종한다\'는 것은 거역하지 않고 잘 따르는 것을 말한다. 순종에는 말대꾸나 말대답이 합당치 않다. 순종에는 \'예\'만 필요하다. 종은 자기의 잘못에 대해 많은 변명을 할 필요가 없다. 다만 잘못했다고 용서를 빌고 시정하는 것이 필요할 뿐이다. 꼭 필요한 말이 있으면, 기회를 보아서 겸손한 태도로 주인에게 조언해야 할 것이다.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사람은 외모만 보기 쉽다. 그래서 나쁜 종은 사람 볼 때만, 주인이 볼 때만, 일을 잘한다. 그러다가, 주인이 없으면, 놀고 게으르고 딴 일을 한다. 그러나 좋은 종은 주인이 보든지 안보든지 잘하는 종이다. 주인이 안보는데서도 잘해야 참으로 잘하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직장에서 이런 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사람 보는데서 일 잘하는 것처럼 보이지 말고, 사람이 보든지 안보든지 내게 맡겨진 임무를 다하기 위해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주를 두려워하여\'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다 보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선악 간에 판단하고 계시고 하나님께서 그의 잘못을 징벌하실 것이기 때문에 그를 두려워하라는 말씀이다. \'성실한 마음으로\'라는 말은 원문에는 \'마음의 성실함으로\'인데, \'성실함\'이라는 원어(하플로테스)는 \'단일함, 단순함, 성실함\'이라는 뜻을 가지는 말이다. 원문이 보이는 \'마음의 성실함\'이란 마음의 단순함을 가리킨다. 자신에게 무엇이 유리할 지 이것 저것을 계산하지 않고, 꾀를 부리지 않고, 주어진 임무, 맡겨진 직무를 다하는 것 그것이 성실함이다. 성실함은 그리스도인의 중요한 덕목이다. 특히 직장 생활을 하는 이들은 성실한 마음, 단순한 마음으로 일하기를 힘써야 한다.
[23]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라.
종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즉 큰 일이나 작은 일이나, 쉬운 일이나 어려운 일이나, 드러난 일이나 드러나지 않는 일이나, 좋은 일이나 나쁜 일이나, 합리적인 일이나 무리한 일이나, 죄짓는 일만 빼놓고는 무엇이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하라고 본문은 말한다. \'마음을 다하여\'라는 말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중심으로\'라는 뜻이다. 종들은 무슨 일을 하든지 주께 하듯하고 사람에게 하듯하지 말아야 한다. 마치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되 주께 하듯하듯이, 종들은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되 하나님께, 주 예수 그리스도께 하듯해야 한다.
[24] 이는 유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앎이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종들이 육신의 주인에게 하나님께 순종하듯이 해야 할 이유는 유업의 상을 주께, 하나님께 받을 줄 알기 때문이다. \'유업의 상\'은 천국의 기업을 가리킨 줄 안다. 그러므로 성도의 신앙 생활은 그의 삶의 현실에서 해야 한다. 즉 성도는 그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섬긴다. 부모는 부모대로, 자녀는 자녀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종은 종대로, 주인은 주인대로, 목사는 목사대로, 직장인은 직장인대로, 그리스도인은 우리의 삶의 현장에서, 우리의 받은 직분과 직책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주님을 섬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리는 장차 영광스런 천국의 기업을 상으로 얻게 될 것이다.
[25]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의 보응을 받으리니 주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느니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비록 그것을 은밀히 행할지라도, 하나님께로부터 불의에 대한 보응을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외모로 사람을 취하심이 없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그의 삶의 현실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심정으로 의롭게, 선하게, 진실하게 살아가야 한다.
결론적으로, 종의 의무는 모든 일에 있어서 육신의 주인에게 순종하되 주 하나님을 섬기듯이 성실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삶의 현실 속에서 주님을 섬기듯이 그의 일에 성실해야 한다. 주께서는 그 성실한 삶을 보상하실 것이다. 특히 아랫 사람들, 직장에 고용된 사람들은 윗 사람들, 고용주들에게 범사에 순종하는 태도를 가지고 그들을 주님처럼 섬겨야 한다.
4장: 그리스도의 일꾼들
1절, 주인의 의무
[1] 상전들아, 의와 공평을 종들에게 베풀지니 너희에게도 하늘에 상전이 계심을 알지어다.
\'상전들\' 즉 주인들은 오늘날 고용주들과 직장의 윗사람들에게 적용된다. 그들은 아랫 사람들에게 \'의와 공평\'으로 행해야 한다.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을 대할 때 편벽된 마음을 버리고 공명정대하게 대해야 한다. 윗사람들은 아랫 사람들을 평가할 때, 자기들과의 친분 관계를 앞세우지 말고 그들의 인품과 실력과 성실성을 따라 평가해야 한다. 또 그들의 일한 댓가를 충분히 보상해야 한다. 땅의 주인들이 그렇게 해야 할 이유는 하늘에 참 주인이 보고 계시기 때문이다. 하늘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지극히 공의로우시고 공의로 보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땅의 주인들은 종들에게, 고용주들은 피고용인들에게, 윗사람들은 아랫 사람들에게 의와 공평을 행해야 한다.
2-6절, 기도, 지혜, 말에 대한 교훈
[2]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본문은 기도에 대해 가르친다. 기도는 사람이 하나님께 아뢰는 것이다.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송의 내용, 죄에 대한 회개와 고백의 내용, 그리고 여러 가지 간구의 내용이 포함된다. 기도는 사람과 하나님의 인격적 교제이다.
본문은 \'기도를 항상 힘쓰라\'고 가르친다. 기도는 성도가 항상 힘써야 할 일이다.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는 자는 그의 영혼이 죽은 자, 곧 영적 생명이 없는 자일 것이다. 기도는 중생한 성도의 특권이며 힘이다. 성도는 기도로 하나님과 동행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길이다. 기도는 신앙 생활의 힘이다.
본문은 또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고 가르친다. 기도는 성도가 영적으로 깨어 있는 일이다. 특히 감사함으로 하는 기도는 성도의 정상적 기도의 태도이다.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는 믿음의 태도이다. 불평과 원망은 불신앙에서 나온다. 그러므로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믿고 하는 기도이며 그것은 정상적으로 말해 감사함으로 하는 기도이다.
[3, 4] 또한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되 하나님이 전도할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사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라. 내가 이것을 인하여 매임을 당하였노라. 그리하면 내가 마땅히 할 말로써 이 비밀을 나타내리라.
바울 사도는 특히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가르친다. 그는 다른 서신들에서도 종종 이런 교훈을 하였다. 에베소서 6:18, 19,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 또 나를 위하여 구할 것은 내게 말씀을 주사 나로 입을 벌려 복음의 비밀을 담대히 알리게 하옵소서 할 것이니.\" 데살로니가전서 5:25, \"형제들아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그는 왜 우리를 위해 기도하라고 교훈하는가? 그것은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함께하심,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하며, 특히 전도 사역, 목회 사역에는 더욱 그러하기 때문이다. 기도보다 더 강력한 후원은 없다. 그것은 물질적 후원보다, 말의 격려보다 더 큰 후원이다. 그러므로 그는 성도들의 많은 기도의 후원을 요청한 것이다. 오늘날도 주의 종들을 위한 최대의 후원은 기도의 후원이다.
바울 일행을 위한 기도의 구체적 내용은 하나님께서 전도할 문을 그들에게 열어 주셔서 그리스도의 비밀을 말하게 하시기를 구하는 것이다. \'전도할 문\'이라는 원어(뒤란 투 로구)는 \'말씀의 문\'이라는 뜻으로 전도할 입술의 문, 전도의 말씀의 문, 혹은 전도할 환경 여건, 듣는 사람들의 마음의 문 등을 가리킬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하나님이 주셔야 바른 말씀을 능력 있게 전할 수 있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구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27,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 요한복음 3:34, \"하나님의 보내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 없이 주심이니라.\"
\'그리스도의 비밀\'이라는 말은 그리스도의 사실들의 의미를 가리킨다. 그리스도의 사실들, 즉 그의 기적들과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 등은 드러난 사건들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들이 가지는 의미, 즉 그의 기적들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고, 그의 죽으심이 택한 자들의 죄를 대속한 것이며 그의 부활이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과 그의 대속 사역의 참됨을 증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만 깨달을 수 있는 감추인 진리들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비밀이다. 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대인들을 위한 구주이실 뿐만 아니라 또한 이방인들을 위한 구주도 되신다는 것도 많은 유대인들에게는 감추인 비밀의 진리이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비밀 곧 복음 진리 때문에 옥에 갇힌 바 되었다. 세상은 항상 하나님께 대해 적대적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전파하면, 세상은 반감을 가지게 되어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모든 사람이 너희를 칭찬하면 화가 있도다. 저희 조상들이 거짓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다(눅 6:26). 또 바울 사도는 디모데에게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말씀했고, 또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고 했다(딤후 3:12). 참된 전도자는 항상 고난을 각오해야 한다.
바울은 4절에서 전도의 내용을 \'마땅히 할 말\'이라고 표현하였다. 전도자가 전해야 할 내용은 사도 시대로부터 분명하였다. 그것은 또한 가감할 수 없는 내용, 곧 확정된, 고정된 내용이었다.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에서 분명히 이렇게 말씀했다. \"다른 복음은 없나니 다만 어떤 사람들이 너희를 요란케 하여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하려 함이라. 그러나 우리나 혹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의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이 불변의 복음이 교회가 마땅히 전해야 할 말씀이다.
[5] 외인을 향하여서는 지혜로 행하여 세월을 아끼라.
본문은 외인을 향한 지혜에 대해 가르친다. \'외인\'은 교회 밖의 사람들 즉 불신자들을 가리킨다. 성도는 불신자에 대해 지혜롭게 행하되 특히 세월을 아낌에 있어서 그러해야 한다. \'세월을 아낀다\'는 말은 \'시간을 최선용한다. 기회를 최선용한다\'는 뜻이다.
성도가 시간을 낭비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영원을 바라보며 사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오락이나 취미 생활에 너무 시간을 낭비해서는 안된다. 심지어 돈을 버는 것도 적당히 하는 것이 좋다. 돈 버는 일에 너무 바쁘고 힘이 들어서 신앙 생활을 바로 할 수 없을 정도라면, 그것은 매우 불행한 일이다. 우리는 먹고 살 정도만 되면, 신앙 생활에 힘쓰는 것이 참된 행복인 줄 알아야 한다. 성도에게는 개인적인 성경 읽기와 기도, 가정 예배, 전도, 교회 봉사(주일학교, 찬양대, 구역권찰) 등이 돈을 버는 것보다 훨씬 더 가치 있는 일이다.
특히 외인들 즉 불신자들을 향해 시간과 기회를 최선용한다는 것은 불신자들과 단순한 교제로 시간을 보내지 말고 그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한 목표를 가진 교제를 하라는 뜻이 있다. 전도는 믿지 않는 이웃에 대한 참된 사랑의 표현이다. 전도의 목표가 없는 교제는 참된 이웃 사랑이 없는 일이다.
[6]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고루게 함같이 하라. 그리하면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리라.
본문은 은혜로운 말에 대해 가르친다. 본문은 은혜로운 말을 \'소금으로 고루게 한\' 말이라고 표현한다. \'소금으로 고루게 한다\'는 말은 \'소금으로 적절히 간을 한다\'는 뜻이다. 소금으로 적절히 간을 한 말은 무엇인가? 이것과 비교하여, 소금으로 전혀 간이 안된 \'싱거운 말\'은 무엇이며, 혹은 소금에 너무 절여진 \'짠 말\'은 무엇인가? 의미나 가치가 없는 농담이나 웃기는 말, 허탄한 말, 거짓말 등은 싱거운 말이다. 반대로, 남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말, 너무 직선적인 말 등은 짠 말이다. 싱거운 말이나 짠 말이 아니고, 소금으로 간이 적절히 든 말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실하고 선한 말, 상대에게 유익을 줄 수 있는 말을 가리킨다. 항상 은혜로 우리의 말을 진지하게 가다듬으면, 우리는 각 사람에게 마땅히 대답할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말에 온전한 자가 온전한 자이다(약 3:2).
7-18, 그리스도의 일꾼들
[7] 두기고가 내 사정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니, 그는 사랑을 받는 형제요 신실한 일꾼이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
본절은 두기고에 대해 몇 가지로 소개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사랑받는 형제로 소개되었다. \'사랑받는 형제\'라는 명칭은 교회가 사랑의 공동체이며 성도의 관계가 서로 사랑하는 관계임을 보이는 아름다운 명칭이다. 우리는 모두 서로 사랑하는 형제 자매이어야 한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명이다(요 13:34).
둘째로, 그는 \'신실한 일꾼\'이라고 소개되었다. \'일꾼\'이라는 원어(디아코노스)는 \'집사\'와 같은 말로서 \'섬기는 자, 봉사자\'라는 뜻이다. \'신실한\'이라는 말(피스토스)은 \'충성된\'이라는 뜻으로서 봉사자에게 더없이 가치 있는 묘사이다. 봉사자에게 필요한 한 가지는 충성이다. 셋째로, 그는 \'주 안에서 함께 된 종\'이라고 소개되었다. \'종\'이라는 말(둘로스)은 완전한 복종을 나타내는 겸손한 명칭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은 다 주 안에서 함께 종 된 자들이다.
[8] 내가 저를 특별히 너희에게 보낸 것은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 너희 마음을 위로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로 우리 사정을 알게 하고\'라는 구절은, 다수 사본과 파피루스 사본(P46)에는, \'그로 너희 사정을 알게 하고\'라고 되어 있다. 두기고를 골로새 교회에 보낸 목적은, 첫째 그들의 사정을 파악하고 둘째 그들을 위로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위로한다\'는 말(파라칼레오)은 \'위로한다\'는 뜻 외에 \'격려한다, 권면한다\'는 뜻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종들은 교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고 권면하는 임무를 가지고 있다.
[9]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 오네시모를 함께 보내노니 그는 너희에게서 온 사람이라. 저희가 여기 일을 다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두기고와 함께 보내지는 오네시모는, 빌레몬서에 나타나 있는 대로, 전에는 도망친 종, 무익한 종이었으나 이제는 예수님을 믿고 바울에게 매우 필요한 수종자, 유익한 일꾼이 되었다(몬 11, 12, 15). 그도 \'신실하고 사랑을 받는 형제\'라고 불리웠다. 무시와 천대를 받을 종이 주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가 된 것이다.
[10, 11]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 (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 유스도라 하는 예수도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희는 할례당이라.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니 이런 사람들이 나의 위로가 되었느니라.
아리스다고는 특별히 바울과 함께 갇힌 일꾼이었다. 그는 바울과 함께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하고 있었다. 마가는 바나바의 조카이었다. 그는 전에 바울과 전도 여행을 하던 중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갔기 때문에 바울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으나(행 13:13; 15:37, 38), 후에 바울의 인정과 사랑을 받은 인물이 되었다. 그 다음에 유스도라 하는 예수가 언급되었다.
아리스다고, 마가, 유스도라 하는 예수, 이렇게 세 사람은 다 할례당 곧 순수한 유대인들이었다. \'이들만\'(후토이 모노이) 즉 유대인들 가운데는 이들만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함께 역사하는 자들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바울의 동역자(同役者)들은 이처럼 제한되어 있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처럼 보였던 많은 유대인들 가운데서 오직 아리스다고와 마가와 유스도만이 하나님 나라를 위한 귀한 동역자들이었다. 그들은 독립 운동의 동지들보다, 6.25 전쟁의 전우들보다 더 귀한, 하나님의 나라의 동역자들이었다.
그들이 바울에게 위로가 되었다. 그렇다. 복음 사역자에게 이보다 더 좋은 위로가 어디 있을까? 하나님 나라를 위해 바쳐진 일꾼에게 생각을 같이하고 뜻을 같이하고 함께 수고하는 자들을 가지는 것보다 더 나은 기쁨과 위로가 무엇이겠는가?
[12] 그리스도 예수의 종인 너희에게서 온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 너희로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고 확신 있게 서기를 구하나니.
에바브라는, 본서신 1:7의 증거에 의하면, 골로새 교인들에게 말씀을 가르쳐준 일꾼이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의 종\'이라고 표현된다. \'종\'이라는 말(둘로스)은 완전한 순종을 나타내는 말이다. 에바브라는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하였다. 이것이 특히 복음의 일꾼들의 일차적 사명이다. 담임목사와 장로들은 온 교회를 위해, 부목사들은 맡겨진 영혼들을 위해, 권찰들은 구역 식구들을 위해, 교사들은 반 학생들을 위해 항상 애써 기도해야 할 것이다.
기도의 목표는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서는 것\'이다. \'확신 있게\'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완전하게, 충족하게\'라고 되어 있다. \'하나님의 모든 뜻\'이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부분적 지식, 부분적 믿음, 부분적 깨달음, 부분적 생활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모든 뜻에 대한 지식과 믿음과 깨달음과 생활을 가져야 할 것을 보인다. 모든 성도들은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서야 한다. 에베소서 4:12의 말씀대로, 주께서 교회에 목사를 주신 목적은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심이다.
[13-15] 그가 너희와 라오디게아에 있는 자들과 히에라볼리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많이 수고하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사랑을 받는 의원 누가와 또 데마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 여자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고.
바울은 에바브라가 골로새 교인들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라오디게아와 히에라볼리 교인들을 위해서도 많이 수고함을 증거한다. 또 그는 사랑을 받는 의사 누가와 데마가 그들에게 문안함을 언급한다. 그런 후 골로새 교인들에게 라오디게아에 있는 형제들과 눔바와 그의 집에 있는 교회에 문안하라고 요청한다. \'눔바와 그 여자의 집\'이라는 말은, 전통 사본에는, \'눔바와 그의 집\'이라고 되어 있다. 그렇다면, 눔바는 여자가 아니고 남자의 이름일 것이다. \'그의 집에 있는 교회\'라는 말은 교회 역사의 초기에는 교회 건물이 없이 가정 집에서 모인 교회가 있었던 것을 증거한다.
[16] 이 편지를 너희에게서 읽은 후에 라오디게아인의 교회에서도 읽게 하고 또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를 너희도 읽으라.
본절은 교회에게 성경 읽기의 의무를 가르친다. 성경, 특히 사도들의 서신들은 우리가 읽어 하나님의 말씀의 풍성함을 누리며 의로운 인격자가 되라고 하나님께서 내려주신 복된 선물이다. 여기에 언급된 \'라오디게아로서 오는 편지\'는 바울 사도가 그곳에 보낸, 그러나 지금은 분실된 한 서신을 가리키든지, 아니면 초대 교회의 어떤이(말시온)가 증거했듯이 에베소서를 가리킬 것이다. 바울의 서신들은 한 지역 교회에 보내진 것이었지만, 모든 교회들에서 읽혀지도록 의도되었다.
[17, 18] 아킵보에게 이르기를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삼가 이루라고 하라. 나 바울은 친필로 문안하노니 나의 매인 것을 생각하라.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마지막으로, 그는 아킵보에게 한마디 권면을 한다. 그것은,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라\'는 것이다. 아킵보는 주 안에서 한 직분을 받았다. 주께서는 우리에게 첫째로 구원을 주시고, 둘째로 직분을 주신다. 로마서 12:5-8,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혹 권위하는 자면 권위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아킵보는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이루어야 했다. 우리도 그러하다. 우리도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완수해야 한다. 어떻게 그것을 완수할 수 있는가? 우리는 성경 말씀과 기도로, 성령의 도우심으로, 주께서 주시는 지혜와 충성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좋은 일꾼들의 모습은 신실한 일꾼, 겸손히 절대 순종하는 종,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함께 수고하고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는 일꾼이다. 일꾼들의 사명은 성도들을 위로, 격려, 권면하고, 그들을 위하여 항상 애써 기도하고, 그들을 하나님의 모든 뜻 가운데서 완전하게 세우는 것이다. 우리는 주 안에서 받은 직분을 완수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