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전장 강해

사도행전 강론 서론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복음서 다음에 이어지는 초대교회의 역사서입니다. 구약성경 39권 중에는 “여호수아”로부터 에스더서까지 12권이 역사서이지만, 신약 27권 중에는 사도행전만 역사서로 되어있습니다.

사도행전이란 말은 헬라말의 “프라케이스아포스토론(πράξειςάποστόλων)”을 번역한 말로써 “사도들의 행적들”이란 뜻입니다. 이 사도행전의 총괄적 내용은 본문에서 상당부분을 말씀드리지만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중의 성경개론 부분(620p)을 꼭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1. 성경을 처음 읽으셨을 때 이 성경은 누가, 언제, 무슨 목적으로 기록한 말씀인가?하는 것을 알아보시는 것이 꼭 필요합니다. 성경의 원저자는 성령님이시지만 성령님이 누구를 감동하셔서 성경을 기록하게 하셨는지를 알아보셔야 하는데 사도행전은 그 저자가 표면에 나타나 있지 않기 때문에 그것을 알아보려면 성경을 더 세밀하게 살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1) 우선 고대의 역사가들은 말하기를 사도행전은 예수님의 제자와 의사이며 또 바울선교의 동행자인 “누가”가 기록하였다고 전하여 왔습니다. 이렇게 전해져 오는 것을 “전통”이라고 하는데 전통은 믿을만한 것도 있고 풍설도 있습니다. 주후 92년-101년에 사역한 로마교회의 감독인 “클레멘”(빌4:3에도 “글레맨드”가 있음)과 주후 115년-119년에 사역한 요한의 후계자인 “이레내오”가 사도행전은 누가복음서의 저자인 “누가”가 기록하였다고 전하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전통은 사도 후계자들의 전통이기 때문에 가장 권위가 있는 내용으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본문 1절에서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가 ‘데오빌로’라는 사람에게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을 먼저 기록하여 전달한 사실이 있었다”고 명시하였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이 무엇인가?”할 때 그것은 복음서를 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4복음서 중에 “데오빌로”란 사람에게 전달한 책이 있는가?를 살펴보니, 눅1:3에서 “누가복음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줄 알아서 기록을 한다”고 하신 말씀이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사도행전을 기록한 사람은 곧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이요, 또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여 제일 먼저 “데오빌로”란 사람에게 전달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또 사도행전을 읽어보면, 행16:10에서 “우리가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하시므로 이 사도행전의 저자가 바울사도의 2차 전도여행 중에 동행한 사실이 있고, 또 20:15에서는 “우리가 바울을 배에 태우고 미둘레네로 갔다”하셨고, 또 21:1에서는 “우리가 저희를 작별하고 고스, 로도를 거쳐 베니게로 갔다”하시므로 이 저자가 바울사도의 3차 전도여행에도 동행한 사실이 있으며, 또 행27:1, 28:1에서는 “우리가 로마로 갈 일이 작정되어 율리오란 백부장의 인도를 받아 로마로 갔는데(행28:14) 로마에서도 바울 일행(저자포함)을 의심하면서 상대하더라”(행28:22)고 말씀한 것을 보면 이 사도행전 저자는 바울의 마지막 로마행까지 동행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바울의 동행자는 여러 사람인데 그 중에 누가 제일 유력한 자인가? 할 때에 바울과의 동행자로서는 실라와 바나바와 디모데와 소바더, 아리스다고, 세군도, 두기고, 부리스길라, 아굴라등이 있었지만 그 중에도 “누가”가 더 유력시 되는 것은 바울사도가 누가를 가리켜 “사랑하는 누가”(골4:14)라 하셨고, 또 “동역자 누가”(몬24)란 말씀도 하셨으며 또 바울사도가 로마에서 마지막에 기록한 딤후4:11에서는 “다른 이는 다 자기의 길로 가고 누가만 함께 있다”고 하셨으므로 동행자중 바울과 가장 많이 활약한 사람이 “누가”인 것을 짐작하게 하는 것입니다.

4) 또 사도행전에는 누가복음에 있는 말씀과 비슷한 문체가 나타나는데, 예를들면 눅24:49에서 “내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힘입을 때까지 이 성에 유하라”하셨는데 이 말씀은 행1:4의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과 1:8의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내증인이 되라”하신 말씀과 동일한 문투가 되는 것입니다. 또“은혜”라는 말과 “속죄”라는 용어도 역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여러차례 나타나고 있고, “민족의 차별없이 이방에 복음이 전파된다”는 말씀이나(눅2:32,행10:34-35) “기독교가 성령의 역사로 확증된다”는 말씀이나(눅1:15,35, 행2:1,8) 부자를 경계하고(눅1:53,6:24,행8:18-24) 여인을 전도에 참여시킨 것과(눅1:39,행12:12,13) 로마관리에 대한 호의적 표현(눅20:20-26,행12:7,18:12-17)도 역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서 공통적으로 찾아볼 수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누가의 기록임을 증명하게 되는 것입니다.

5) 사도행전 곳곳에 의학적인 용어가 나오는 것이 누가의 의사직과 상통하는 점이 있는 것입니다. 예를들면 행3:7에서 “발과 발목이 힘을 얻었다”는 말씀은 의학적 진단의 구체적 표현이며 또 4:22에서 “성전 미문에 앉았다가 베드로, 요한을 주목하고 병고침 받은 사람의 나이가 40세쯤 되었다”고 한 것도 그 연령측정에 의학적 기술이 참고될 수 있는 것이며 행9:18의 “음식을 먹고 강건하여졌다”는 말씀과 28:8의 “보블리오의 부친이 이질과 열병에 걸렸다”는 진단도 역시 의학적인 전문 용어이기 때문에 “의사 누가”가 기록한 것이 틀림없다고 보는 것입니다. 성경을 누가 기록 하였던지 크게 문제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성경을 연구하는데는 상당한 유익이 있으며, 또 배우는 자세도 그만큼 주밀하여야 할 것입니다.

2. 기록한 연대와 장소에 대하여

1) 기록한 연대는 주후 62년경이요, 그렇게 보는 이유는 사도행전의 마지막 부분인 행28:30에서 “바울사도가 로마 옥에서 풀려나와 2년간 셋집에 계시면서 자유로이 전도하셨다”는 말씀으로 그치고, 그 후의 바울의 최후 순교 기사가 없는 것과 주후 64년 7월 18일, 19일에 있었던 기독교인 대학살 사건(로마시의 화재사건을 기독교인의 소행으로 인정하여 황제가 핍박한 사건)이 기재되지 않은 점과 바울이 그 시기에 순교당한 것으로 추측하여 그보다 2년전인 주후 62년경으로 추산한 것입니다.

2) 장소는 로마라고 봅니다. 그 장소의 문제는 바울의 선교사업과 가장 인연이 많은 “안디옥, 에베소, 로마”중에 안디옥은 선교의 출발지이기는 하지만 최후 종착지가 아니며 에베소에서는 선교기회를 많이 가졌으나 행20:16,17에서 에베소를 떠난 기사가 있으므로 결국은 “로마”에서 바울이 최후에 거주하셨고(행28:31), 또 로마를 최후 선교 목표지로 정하셨다는 말씀이 행19:21에 있음을 보아서 사도행전은 “로마에서 기록하셨다”고 보는 것입니다.

3. 그러면 이 사도행전에는 무슨 말씀이 있으며, 저희들이 이 말씀에서 어떤 은혜를 받으셔야 하는가?할 때에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승천 기사(1:9)와 재림약속의 말씀(1:11), 또 약속하신대로 성령님이 오셔서 복음전파에 역사하신 사실(2:1-4)을 비롯하여 초대교회가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되어 조직, 운영되고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여 각처에 교회가 세워지며 복음이 확산되는 역사를 기록해 주신 것입니다. 따라서 저희들은 이 말씀을 살피는 중에 우선 ① 성령님의 역사와 ② 복음전파의 과정과 여기에 수반한 성령님의 역사에 대한 것과 ③ 교회의 역사를 살필 수 있고 ④ 또 성도들의 신앙생활과 사명생활의 모범이 어떠하여야 하겠는가?를 깨닫게 하시며 ⑤ 특히 핍박속에서도 믿음과 전도의 결실이 여전히 나타났다는 사실을 교훈해 주시는 것입니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뜻은 곧 “사도행전을 모범하자”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계속 이어지는 본문 강론을 정독하시기 바랍니다.

 

제 1 과 부활부터 승천까지 (행 1:1-11)

 

서론에서 말씀드린 바와같이 사도행전은 복음전파의 역사를 기록한 책입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리면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님이 강림하셔서 교회를 설립하시고 교회로 하여금 직분자들을 세워 이방땅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파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또 그 시기에 신약성경도 주셨습니다.

위 본문 말씀을 분류하면 ① 본서 집필 동기에 관한 말씀(1-2절) ② 부활 후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3-8절) ③ 승천에 관한 말씀(9-11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본서의 집필 동기에 대하여(1-2절)

1) 본서는 저자 “누가”가 “데오빌로(Qeovfile)”에게 예수님 부활후의 복음의 역사(사도행전)를 집필하여 전달할 책임을 갖고 기록한 것입니다.

2) “데오빌로”란 이름의 뜻은 “하나님께 사랑스러운 자” 또는 “하나님께 사랑받는 자여”란 뜻입니다. 또 눅1:3에서 “누가”가 “데오빌로”에게 “각하”란 존칭을 사용한 것을 보면 그가 신앙적으로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지위에 있는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내가 먼저 쓴 글에는”하신 말씀에서 누가는 먼저 글을 써서 그에게 보낸 사실이 있었으니 이것은 틀림없는 누가복음인 것입니다(눅1:3). 그 먼저 쓴 글에 ① “예수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②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③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셨다고 하셨습니다(2절). 그러면 위 ①②③항의 말씀이 누가복음 어디에 기록되었을까요?

①항은 누가복음 전체에 예수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이 있고 ②항의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셨음”은 “성령을 받도록 명령하셨다”는 뜻으로 눅24:49에서 “내가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너희에게 보내리니 너희는 위로부터 능력을 입히울 때까지 이성에 유하라”고 명하신 말씀과 상통하는 것이요 ③항은 눅9:51에서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가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실 것을 굳게 결심하셨다”는 말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는 “데오빌로”에게 이미 전달한 “누가복음”을 예수님의 행적과 교훈과 성령 보내심과 승천의 약속으로 요약하였습니다.

2. 부활중에 제자들에게 분부하신 말씀에 대하여(3-8절)

1) 3절에서 예수님은 십자가의 고난으로 해를 받으신 후 40일간 지상에 계시면서 11회 나타내 주셨다는 말씀이 있으므로(승천후에는 6회 나타나심) 부활의 확실함을 충분히 증거하셨고, 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으니 이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하나님의 통치세계에 관한 일들로서 40일간 지상에 계시면서 주신 말씀들은 주로 성경에서 말씀하신 것과(마28:16-20,막16:14-20, 눅24:36-53,요20:19-21:5,행1:4-9) 성경에 기록되지 않은 내용들이 더 있었을 것입니다(요21:25).

2)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으로 승천하시기 직전에 사도들과 함께 모인 자리에서 분부하신 일이 있었습니다(4절).

① 그 분부의 내용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12제자들을 복음전파의 기초적 인물로 세우셨고, 또 예루살렘을 복음의 시발지로 삼으셨기 때문에 그들이 흩어지지 않은채 한자리에서 성령세례 받기를 원하셨기 때문이요,

㉡ “내게 들은바”란 예수님이 눅24:49에서 이미 말씀하셨음을 상기시키는 것이며

㉢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하나님이 구약시대부터 성령 보내실 것을 약속하신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욜2:28-29).

㉣ “기다리라”는 말씀은 약속하신 성령님을 보내실 때가 정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범사에 때를 두고 일하십니다(전3:1). 예수님의 탄생(갈4:4)과 십자가의 죽으심(요7:6,17:1)과 부활도 그런 것처럼(마12:40,막15:29,행10:40) 성령의 강림도 작정하신 때가 있기 때문입니다.

② 그때는 몇 날 남지 않았다고 하셨습니다. 5절 말씀에서 “요한이 물로 세례를 주었으나 너희는‧‧‧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하신 내용의 뜻은 마3:11 강론에서 말씀드렸습니다. 다만 “몇 날이 못되어”란 몇 일 정도를 의미할까요? 성령님은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렀을때 강림하셨고(행2:1-2), 또 예수님의 이 분부도 승천하시던 날 이전에 말씀하신 것이기 때문에 확실한 시일을 계산하기 어려운 것입니다. 다만 오순절은 예수님의 부활하신 날부터 50일째 되는 주일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유월절 예비일에 돌아가셨습니다(요19:14). 유월절 예비일은 유대력으로 니산월(1월) 14일이고, 유월절 절기는 15일로부터 21일까지 7일을 지킨 것입니다(출12:1-27). 그러니까 부활은 16일에 하셨고, 부활후 40일간 계셨으며, 성령강림은 부활후 50일만에 성취되었으니까 “몇 날이 못되어”란 뜻은 10여일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6-8절에 보시면 제자들의 질문과 예수님의 대답의 말씀이 있습니다.

①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이스라엘 나라 회복의 때가 이때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 “이스라엘 나라 회복”이란 두가지 의미가 있으니, 하나는 조국이 바벨론에게 멸망 당한 후 예수님 시대까지 약600년 동안 독립을 못한 상태에서 독립되기를 바란 의미가 있고, 또 한가지는 “이스라엘”을 선민단체로 생각하여 천국건설의 완성의 때를 의미하는데 예수님의 대답이 후자에 속한 것을 보면(8절) 그들의 질문도 후자에 속한 질문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 예수님은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으니(전3:1) 너희의 알 바가 아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만사의 통치는 하나님의 독자적 주권에 따라 행하시므로(대상16:31) 인간이 거기에 관심 둘 일이 아니란 것입니다. 또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와 기한은 예수님의 재림과도 관계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에 관한 것은 아버지의 권한에 있는 것이라하여 모른다고 하신 일이 있었습니다(마24:36). 또 인생이 미래에 대한 것을 구체적으로 알면 자기에게 맡겨진 현재의 사명을 등한히 할 우려가 있을 수 있어서 유익하지 않은 것입니다.

㉢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 권한에 속한 때와 기한에 대하여 언급을 피하시고 오직 천국을 건설하시는 영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말씀으로 복음 전파할 것을 분부하신 것입니다.

② 그 말씀이 바로 “오직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다와 사마리아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8절)는 말씀입니다

㉠ 이 말씀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전도의 핵심요절로 강조하는 것이요 ㉡ 또 이 말씀은 오순절 성령강림과 함께 복음이 전파될 것을 예언하신 말씀도 되며 ㉢ 오늘의 성도들도 성령충만의 능력을 받아 전도사명을 잘 이행하셔야 할 것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 전도의 대상을 예루살렘, 유다, 사마리아 땅끝의 순서로 말씀하신 것은 가까운 이웃부터 먼 곳으로 확산시키라는 말씀입니다. 문제는 증인되는 자가 권능을 받아야 하는데 이것은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는 권능이 우선이고, 다음에 은사적 권능을 받아서 전도사명에 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전도에 관한 말씀은 다른 설교집으로 증언할 계획입니다).

3. 승천에 관한 말씀입니다(9-11절).

1) 9절에서 “이 말씀을 마치시고”하셨는데 이 말씀은 승천 직전에 말씀하신 내용(행1:4-8)만이 아니고, 승천이전에 말씀하신 내용(막16:14-18)들을 포함한 말씀이며 마지막 분부가 전도의 사명(행1:8,막16:15)을 주신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수님의 승천기사는 막16:19에도 간단한 기록이 있으나 본문 9절 말씀이 더 자세합니다. “저희가 보는데서 올리워 가시다가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① 이 때에 승천하신 장소는 감람원이었고(12절,마26:30) ② “저희”란 하늘을 쳐다본 갈릴리에서 온 사람들로서 11사도들 외에 많은 군중을 의미하며 ③ 올리워 가심은 그 몸이 공중으로 솟은 것이니 마치 엘리야가 회오리바람에 들려 오름 같았을 것입니다(왕하2:11). ④ 그 후에 구름으로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였으니 이 가리움은 자연현상으로 된 것이 아니라 초자연적 역사로 구름을 이동시켜 가리운 것입니다(눅9:34,출13:21). 칼빈선생님은 “예수님의 승천을 보는자들이 가시적으로 충분한 확인을 하였으므로 더 오래 살필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그렇게 하셨다”고 하셨습니다

3) 그때 흰옷 입은 두사람이 제자들 곁에 서서 증언을 하였으니 이 두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시의 무덤에 있던 천사들일 것이요(요21:12),

① 그들은 하늘만 자세히 쳐다보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서서 하늘만 쳐다보느냐?”고 하였으니 이는 현상계적인 계시는 끝났기 때문에 부활승천을 확인한 것으로 족하다는 뜻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들에게도 주신 말씀입니다. 즉 하나님의 계시의 신비가 하늘 쪽에서 또 어떻게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②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하였으니, 이 말씀은 예수님이 직접 증언하신 것(마24:27,30,37,39)을 천사가 다시 증언한 것이요, 재림의 모양도 역시 승천 하실 때처럼 구름을 타고 오실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마24:30,계1:7,살전4:17). 예수님의 승천과 재림에 구름이 동원된 것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확실하게 보고 확실한 믿음을 갖게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예수님의 승천과 성령강림의 약속과 전도의 사명과 재림에 관한 말씀을 증언해 주신 것입니다.

제 2 과 승천 이후의 제자들 (행 1:12-20)

 

예수님이 승천하신 다음 성령님이 강림하시기까지 제자들이 행한 일들을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승천 이후의 제자들”이란 제목을 택하였습니다

본문 말씀은 2대지로 나누어 상고할 수 있으니 곧 ① 전혀 기도에 힘쓴 제자들(12-14절) ② 가룟유다의 결국을 설명함(15-20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전혀 기도에 힘쓴 제자들(12-14절).

1) 예수님은 감람원에서 승천하셨고, 제자들은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다

① 감람원은 예루살렘 도성 동쪽의 남북으로 뻗은 작은 산맥입니다. 동쪽의 요단강에 인접한 여리고(해저 250m)에서 예루살렘까지 약 90리이며, 해발 약 762m의 높은 지점에 예루살렘 도성이 있습니다. 감람산은 해발 830m라고 합니다. 따라서 감람산은 예루살렘 성안에서 볼때는 동쪽을 성벽처럼 감싸준 68m정도의 얕은 산이며 이 산이 북에서 남으로 1.6Km정도 뻗어 있습니다. 그 남쪽 언덕을 “시온산”이라 하는데 그곳에서는 예루살렘 도성전체를 북서향으로 내려다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감람산은 그 산맥의 중간 동쪽에 위치하는 언덕입니다. 그 서쪽 밑에 겟세마네 골짜기가 있고, 겟세마네 골짜기에서 서남쪽으로 뻗어내려가는 곳을 기드론 골짜기라고 합니다. 그곳에 감람나무가 많이 있어서 감람원이라 하였고, 지금도 그렇게 부른다고 합니다.

② 감람원의 설명을 자세히 한 이유는 12절의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와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는 말씀을 설명드리기 위함입니다. 안식일에는 휴식을 하여야 하므로 보행할만한 거리는 감람원에서 예루살렘까지의 거리 정도이고, 이 거리는 약 5리에 해당하므로 그 당시에 율법을 지킨 사람들이 그렇게 행하였고, 또 그것을 정당하게 여긴 것입니다.

2) 그러면 오늘날도 주일에 5리정도만 걸어야 하는가? 할 때 그렇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 이유는 ① 5리 보행이란 정도가 안식일을 지키는 관례에 해당된 것이었고 ② 또 그것을 정당화 하셨다 하더라도 현재 우리는 안식일이 아닌 주일을 지키기 때문입니다. ③ 그러나 이 제도가 성수주일을 위한 경건의 모범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경건한 예배와 신령한 은혜를 추구함에 있어 지장을 줄만큼 육체가 피곤하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④ 이런 질문이 신학교 교수님(이상근)에게 질문 되었을때 교수님은 대답하시기를 “주일날 예배목적을 위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부산 송도에서 동래까지 다녀오는 것은 할 수 있다. 그러나 예배를 드리고 오다가 부산진이나 초량쯤에 내려 사사로운 볼일을 보고 오면 안된다”고 하였습니다. 이런 규범은 주일을 거룩하게 잘 지켜서 복이 되고 영광이 되게 하자는 것이므로 그렇게 노력하는 것을 율법주의로 배격할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신학교 기숙사에서 시험 공부를 하면서 토요일 밤 12시까지 공부를 하다가 12시가 넘는 것을 모르고 10분쯤 더한 것을 주일 범한 죄로 여기면서 아쉬워하는 것을 본 일이 있었습니다. 성수주일은 안식일 규례에 얽매인 날짜 변동이 아니고 율법에서 탈피한 사도들의 모범이요(고전16:2), 자유의 규범입니다. 따라서 계율에 속박된 사람은 계율대로 복종해야 하지만 자유인은 율법의 요구 이상으로 더 많이 실천하도록 노력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감람원에서 예루살렘으로 온 제자들이 “저희의 유하는 다락”에 들어가니 제자들과 예수님의 모친과 아우들, 그리고 다른 여자들이 모여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고 있었습니다.

① 그러니까 11제자 중 중심인물들은 미리 와서 기도에 임하였고, 다른 제자들은 얼마 후에 와서 합력한 것입니다.

② 그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의 약속한 것을 기다리라” 는 말씀을 철저히 믿고 시행한 것이요, 성령님의 은총을 힘입음에 있어 당연히 기도로 준비함이 옳을 것입니다.

③ 이때에 사도들과 예수님의 가족들과 다른 여인들과 또 다른 제자들이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한 것”은 순수한 마음의 결합일 뿐 세욕에 얽매이는 불순한 분위기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④ 그들은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썼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보고 또 승천하신 예수님을 본 자들의 마음이 어떠하였겠습니까? 그들에게는 사심과 정욕이 다 빠져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마음을 같이 한 것”은 오직 주님의 뜻을 성취하는데만 집중하였을 것이요, “전혀 기도에 힘썼다”는 그 자체도 허탄한 것들에 대하여 뜻을 두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⑤ “저희 유하는 다락”이란 마지막 성찬을 시행하신 곳인지(막14:15) 아니면 부활 후에 모였던 곳(요20:19)인지 알 수 없으나 오순절 이후에 여러 사람들이 마가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모여 기도하였다(행12:12)는 말씀에 따라 오순절에 모인 장소는 마가의 다락방으로 추측하는 것입니다.

2. 가룟유다의 결국을 설명함(15-20절).

1) 그 당시의 모인 사람의 수는 120이나 되었습니다. “120명이나 되었다”는 표현은 “퍽 많다”는 평가이고, 12제자의 10배입니다. 따라서 지도자 한 사람당 10명의 성도를 담당할 수 있는 수였습니다(현재 주일 학교나 구역원도 1인 지도하에 10명 정도가 알맞는 수일 것입니다. 그리고 주일 낮예배의 출석수는 새벽기도회 모임수의 약 10배란 사실은 역사가 증명을 합니다. 교인이 늘기를 바라는 성도는 반드시 새벽기도회에 나오셔야 합니다. 이것은 한국교회의 전통적 추세입니다).

2) 이때에 베드로는 형제들 가운데 일어서서 가룟유다가 망하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

① 베드로가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15절)한 것은 주목을 집중시킨 일이며 “형제들아”(16절)한 것을 보면 수제자라는 권위에서 탈피하여 가족의 형님과 같은 느낌을 줍니다. 교회의 모든 선배들은 다 그런 느낌을 주어야 할 것입니다.

② 베드로의 설명은 이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잡도록 지로한(길을 인도한) 가룟유다에 대하여는 옛날에 성령님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예언하게 하신 말씀이 그대로 응한 것이므로 마땅하다는 것입니다. 이때 베드로가 인용한 20절 말씀은 바로 시69:25과 109:8의 말씀입니다. 유다는 망하여도 성경은 응해야 하며 성경대로 된 것은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이므로 사람이 어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 시69:25의 말씀은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그 장막에)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란 말씀으로 다윗이 “자기를 해하려는 악한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하여 그들의 삶의 터전이 황폐하여지게 해달라”는 기도요,

㉡ 시109:8 말씀은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한 것이니, 이 말씀도 역시 “악인의 연수를 단축하여 죽게 하심으로써(앞부분의 말씀) 그의 직분(에피스코포스;έπίσκοπος;감독직을 뜻함)을 타인에게 넘겨 주시라”는 기도입니다. 따라서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판 악인이기 때문에 옛날에 다윗이 소원한 기도처럼 악인의 심판이 응하게 된 것이라는 뜻입니다. 악한자 유다는 죽어 망하였고, 그 직분은 “맛디아”에게로 돌아갔으니 결국 그 예언대로 응한 것입니다.

③ 그러면 그 밭을 “피밭”이라고 한 의미는 무엇이며 목매어 죽은 유다가(마27:6-8) 어떻게 곤두박질되어 창자가 흘러나왔을까요? 마태복음27:7-8에 보시면 유다가 가책을 받고 성전고에 던진 돈으로 나그네의 묘지용 밭을 샀기 때문에 “예수님을 피흘려 죽게한 돈으로 산 밭”이란 뜻으로 피밭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서는 “배가 터져 창자가 흘러 나온지라‧‧‧이 일을 알게 되자 그 밭을 이르되 알게다마라”하였으니 이 말은 아람방언으로 “피밭”이란 뜻이요, 여기에는 “유다의 신체에서 피를 흘린 밭”이라는 뜻이 근거가 된 것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피흘리심은 생각을 못하고, 가룟유다의 피흘림만 연상한 자들은 그런 뜻으로 “피밭”이라 하였을 것이요, 또 유다의 은30에 대한 출처를 아는 사람들은 전자의 뜻으로 “피밭”이라는 말을 사용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마27:5에서 “스스로 목매어 죽은 유다의 시체”가 어떻게 곤두박질 되어 창자가 터져 나왔을까요? 이것은 유다의 죽은 장소가 경사진 곳이요, 또 목을 맨 줄이 끊어져서 그 시체가 벼랑으로 굴러 떨어졌을 것으로 상상할 수 있으니 문제될 것이 없습니다. 또 유다가 내놓은 돈으로 산 밭에서 자신이 죽었는지도 모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받아야 할 교훈은 ① 다 거기 있어‧‧‧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쓴 것과 ② 가롯유다가 예언이 응하는 섭리에 따라 인생을 산 것과 ③ 악인의 결국이 어떻게 되었는가를 깨닫게 해 주십니다.

제 3 과 결원된 사도를 보충함 (행 1:21-26)

 

위의 본문 말씀에는 “결원된 사도를 보충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보면 ① 사도보선의 타당성과 자격을 먼저 말씀하신 후(21-22절) ② 선택하여 임직하는 절차를 말씀하셨습니다(24-26절).

1. 사도보선의 타당성과 자격에 대하여(21-22절)

1) 우선 이 설명은 21절의 “이러하므로”란 접속 연결로 보아서 베드로 사도의 이어지는 설명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제자들을 대표한 위치에서 이만한 설명을 한 것을 보면 다음에 이어지는 사도보선에 대한 인도와 추천도 역시 베드로가 한 것으로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

2) 사도보선의 타당성은 ① 가룟유다가 결원이 되었고 ②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시109:8)하신 예언을 따라야 하며 ③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일을 명령하실때 두 사람씩 짝을 지어 일하게 하신 것을 보아(눅10:1) 두 사람이 합력하여 전도사역을 하게 하는 것이 이상적이기 때문이며 ④ 예수님이 세우셨던 12명의 제자를 구약의 예언의 말씀에 따라 그대로 확보하는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았기 때문입니다.

3) 그 자격자는 “예수님과 항상 같이 있었던 자”이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즉 예수님이 요한의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신 때로부터 그의 복음사역 기간을 거쳐 승천하신 날까지 예수님과 항상 함께 회동한 사람”이어야 한다고 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① 예수님을 잘 아는 사람이어야 하고 ② 또 부활의 목격자로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시작과 근원은 예수님이시고, 사도들은 그 복음을 직접 보고 체험한 자들로서 그 사실을 후시대에 전달할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도되는 자격이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었듯이 오늘날도 복음을 소개하는 사역자는 예수님과 성경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2. 선택하여 임직하는 절차에 대하여(23-26절)

1) 11사도가 모였고, 대표사도(베드로)가 취지를 설명한 후(21-22절)

2) “두사람을 추천하여 그 중에서 한사람을 제비로 뽑아 선택하자”하였으니 이것은 오늘날 시행되는 민주적 회의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3) 그리하여 바사바(별명;유도스)와 맛디아를 추천한 것입니다. 이 추천의 방법을 구두로 하였는지 투표로 하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과반수 제자들의 동의로 추천되었을 것입니다.

4) 그리고 추천된 두 사람을 놓고 또 제비를 뽑는 방식을 택한 것입니다. 제비란 두 사람의 이름표를 통 안에 넣고 대표자 한사람이 집어내는 방식을 연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두 사람중 한사람을 제비로 뽑을 때는 인간적 자격기준을 초월하여 일체불문에 붙이고 하나님의 뜻만을 찾아내는 방법이었습니다. 추천을 할 때는 일정한 표준에 해당하는 비슷한 자격자를 몇 사람 선택한 후에 다시 제비를 뽑아 선택하면 사람이 판단하는 신분상의 비판을 상당하게 방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이렇게 이상적인 방법을 본보여 주셨습니다. 요즈음 교회에서 직분자를 선택하려면 공동의회 결과로 개표하는 시간이 길고, 또 “누구는 몇 표, 누구는 몇 표”라는 우열을 공개하게 되어 표를 많이 받은 사람은 못 받은 사람에게 미안하고, 적게 받은 사람은 성도의 성원을 못 받은 것에 대한 열등감을 갖게 되지 않습니까? 따라서 현실교회는 임직자 선발하는 법에 대하여 가능한한 성경에 가깝도록 개선하는 방안을 연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5) 그래서 그들은 기도로 하나님께 부탁하기를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수 있을 것입니까? 주께서 그런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고 제곳으로 갔나이다”라고 기도를 한 것입니다. 이 기도의 내용에서 ① “누가 주의 택하신바 되어”하였으니 제비로 당선되는 자는 “주님의 택한 자이기 때문에 당선된 줄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도 누가 당선 됐던지 꼭 그렇게 믿는 성도가 되셔야 합니다.

②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초대교회 당시의 최고 직분이지만 그 직분이 봉사직이었음을 알 수 있고, 또 사도의 직무란 특수한 것이었습니다. 또 “대신할 자”란 본문에서는 제곳으로 간 유다의 자리(직임)를 대신한다는 뜻이지만 사도란 이름 자체의 뜻은 예수님이 하실 일을 대신하는 것입니다.

③ “가룟유다가 제곳으로 갔다”는 것은 그가 신본주의(예수님 중심)를 따르지 않고 자율주의(자기 중심)를 따라갔다는 뜻입니다.

6) 이런 절차에 의하여 제비를 뽑으니 “맛디아”가 당선되어 열한사도에 가입을 시켜 12사도를 구성한 것입니다. 12사도의 구성은 교회의 빈틈없는 조직과 책임을 의미할 수도 있습니다.

7) 따라서 사도행전 1장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앞두고 성경지식(1-12절)과 기도의 준비(13-14절)와 직분의 조직(15-26절)을 갖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3.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은 교훈을 받고 또 연구해야 할 과제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1) 교훈이란 ① 제자들이 성경의 예언이 성취되게 하기 위하여 노력한 점과 ② 교회의 조직과 책임에 공백이 없도록 시도한 점과 ③ 상당한 명분과 타당성에 따라 직임자를 선출,임직한 것과 ④ 직임자를 선출할때 민주적 방식을 활용하고, 예수님과 가장 오래 함께 한 사람, 즉 유력한 사람들을 추천하여 신분상 비판없이 제비로 뽑은 사실과 ⑤ 기도하고 제비에 뽑힌 사람을 주님의 택하신 자로 믿은 것과 ⑥ 열한사도에 가입한 그 자체로 임직이 시행된 점을 보면 임명자체가 중요한 것일뿐 임직예식이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물론 그후에 안수임직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행6:6,13:3,딤후1:6) 예수님이 12제자를 임명하실때나 맛디아를 보선할 때는 안수식이 없었고, 임명 그 자체로 충분하였던 것입니다. 과거에 감리교에서는 장로를 안수없이 취임시켰습니다. 장황스런 임직식이 교훈을 주는 의미가 있겠지만 그 의식자체는 큰 은혜를 끼치는 것이 아닙니다.

2) 사도의 특수직임이 무엇이냐?하는 점입니다. 이 사도란 용어가 마태복음10:2에서부터 나왔기 때문에 마10:2의 강론에서 설명을 드린 일이 있었습니다.

① 사도란 “아포스토로스(ajpostovlou\")”로서 “전권대사” 또는 “보냄을 받은 자”(눅6:13)로 주인의 직권을 대행하는 뜻이 있다고 합니다.

② 사도의 은사적 직분은 초대교회 당시에만 있었고,

③ 사도의 직임은 ㉠ 예수님을 성도에게 소개하는 직임과 ㉡ 기독교의 기초를 성경기록으로 수립하고 ㉢ 초대교회를 설립하여 기독교 신앙생활의 모범을 시도하는 직임입니다.

④ 이런 직임을 감당하기 위하여 주신 은사는 영감의 은사(고전2:13)와 특별한 기적의 은사(마10:1,8,히2:3,4)외에 반드시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목격한 자이어야 하는 것입니다(행1:22,고전15:8).

우리는 이 사도의 직임이 오늘의 목사직과 같은 줄로 알면 안됩니다. 사도는 초대교회 당시에만 있었던 특수한 직임이기 때문입니다.

3) 마지막으로 오늘의 교회가 직분자를 세우고, 교회를 다스리는 일을 어떻게 행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① 11사도의 맛디아 보선은 사도들이 시행한 것으로 민주방식을 시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사도가 계실때는 기독교의 법이 사도들의 니도에 있었습니다(고전3:11,엡2:20). 그러나 지금은 사도들이 안 계십니다. 어떻게 교회제도를 연결시켰을까요?

② 마지막 사도는 바울이었고, 바울은 디모데를 사도아닌 후계자로 세웠습니다(딤후1:6). 디모데를 “하나님의 사람”이라 하셨고(딤전6:11), 목회서신을 그에게 주신 것을 보면 그가 곧 최초의 사도아닌 목회자였습니다. 오늘의 목사의 원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충성된 사람에게 부탁하라”(딤후2:2)하시므로 그에게 직분임명권을 주었습니다. 즉 목사가 교회의 직분을 임명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③ 구약시대의 통치는 민주방식이란 것이 없었고, 오직 모세나 선지자가 계시받아 명령했으며 재판과 통솔하는 일에 장로를 협력하게 하였습니다(출18:21-22,19:7,8,신27:1).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한 사람이 사도요, 그 전달된 계시(성경)를 가르치는 사람이 교사 또는 복음사역자요, 다스리는 일은 민주방식에 의하도록 한 것입니다.

④ 바울사도는 에베소교회에 감독자(장로)를 세운 일이 있었습니다(행20:17). 처음에는 바울사도와 이 장로들과의 회합이 교회치리회가 되었습니다(딤전4:14). 그 치리회에서 디모데를 목사로 세웠습니다(딤전4:5). 그리고 디모데에게 주신 목회서신에서 “충성된 자에게 직임을 부탁하라” 하시고(딤후2:2), 그 직임의 종류를 장로와 집사로 구분하시고, 각각 그 자격을 말씀하셨습니다(딤전3:1-13). 따라서 이런 배경들이 현실교회의 임직 절차와 정치적 제도를 탄생시킨 것입니다.

⑤ 누가 치리자가 되고, 누가 복음사역자가 되든지 성령충만한 중에서 받은 은사의 달란트로 하나님의 일을 할 때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다만 전문적 달란트를 최대한 활용하기 위하여 복음사역자는 신령한 일에 몰두하고, 치리장로는 치리하는 일에 전념하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제 4 과 성령강림의 성취 (행 2:1-13)

이 말씀은 예수님이 예언하신 대로(행1:5) 성령강림이 성취된 사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필자가 집필한 “성령님에 대한 설교”중 본문과 관련하여 ① “오순절과 성령강림의 의미” ② “오순절때에 있었던 일”이란 제목으로 증언한 말씀이 있사오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 말씀을 구분하면 ① 성령강림의 상태(1-4절) ② 방언으로 복음이 각국인에게 알려짐(5-13절)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1. 성령강림의 상태에 대하여(1-4절)

1) 약속하신 성령님은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렀을 때 강림하셨습니다.

① 오순절이란 레23:15-16에 근거한 신약적 용어입니다(여기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한 설교”중 “오순절 때 있었던 일”이란 제목에서 상세히 설명하였습니다).

② “오순절날이 이미 이르렀다”하심은 오순절 절기에 시간적으로 못미친 것이 아님을 뜻합니다. 다시 말하면 “예표된 시기가 되었을 때”라는 뜻입니다(18절,레23:15-16).

2) 저희가 다 같이 한곳에 모였을 때 성령님이 강림하셨으니,

① “저희”란 기도에 힘썼던 120명의 제자들이요(행1:14-15),

② 그들이 다 한곳에 모인 것은 참으로 의미있는 일입니다. 즉 12사도와 모든 제자들이 다 모인 것입니다. 한사람도 합심과 협력에서 벗어난 일이 없는 일치를 의미합니다. 사람이 중대한 일을 계획할 때에 한사람의 낙오도 없이 모여야 하듯 모든 제자들이 다 모인 것은 참으로 큰 일을 할 수 있는 은혜의 기회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③ 그들은 모여서 기도에 힘쓰며 성령님이 어떻게 나타나실 것인가?하고 퍽 궁금하게 기다렸을 것입니다.

3) 그런데 홀연히 이상한 일이 나타난 것입니다.

① 홀연히 나타나신 상태는 성령강림의 실제역사를 몰랐던 상태에서 별안간 이상한 일이 생긴 것을 의미하며

②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다”(2절) 하였으니 ㉠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같은) 소리가 앉은자들의 귀에 들렸고 ㉡ 또 그 바람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였음은 앉은자들이 바람 그 자체를 피부로 느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령님이 강림하신 상태가 바람의 역사를 통하여 몸소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③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고 하였습니다(3절).

㉠ 혀처럼 생긴 불꽃이 갈라진 모양으로 각사람의 머리위에 임한 것이 보였으니 이 “혀모양”은 “입으로 증언함”을 뜻하고, “갈라진 모양”은 사방으로 퍼질 것을 예시함이며 “각사람의 머리위에 임한 것”은 그들이 다 성령충만(즉 성령세례)의 은혜를 받았음과 전도자 될 것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 그 불꽃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이었고, 또 각사람 위에 머물러 있었으나 육체적 뜨거움을 느꼈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④ 또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하셨으니(4절), 이 충만의 상태를 전체적으로 체험하게 하셨고, 또 성령님 자체는 보이지 않는 영이시므로 나타난 체험으로만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체험하게 하신 이유는 아무도 성령강림을 부인하지 못하게 하시기 위함일 것입니다.

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이 강림하신 성령님이 그 이전에 역사하신 성령님과 어떻게 구별되느냐? 하는 것인데, 여기에 대하여 성령님에 대한 설교 “오순절과 성령강림의 의미”에서 자세히 설명하였습니다.

2. 방언으로 복음이 각국인에게 알려짐에 대하여(5-13절)

1) 성령의 충만으로 방언을 하게 된 사람들은 그 방언으로 전도를 하게 되었습니다.

① 이 방언의 성격은 하나님의 능력으로 배우지 않은 외국말로 전도하게 된 것입니다.

② 성령충만한 제자들이(4절) 외국말을 하게되자, 예루살렘에 우거하던 각국에서 모여온 경건한 유대인들(복음적 신앙인인지 아니면 율법주의적 경건한 신앙인인지는 알 수 없음)이 모여와서 그 사실을 보고 놀라게 된 것입니다. 배우지 않은 외국어를 스스럼없이 알아듣도록 하니 어찌 놀라고 소동하지 않겠습니까?(6절)

③ 그 당시에 말을 한 이들은 다 갈릴리 사람들(7절)이었고, 또 들은 자들이 각각 자기들 나라 말로 알아듣게 말하는 것을 직접 듣고 확인한 것입니다(8절).

④ 그 당시 예루살렘에 우거하였던 사람들이 “천하각국으로부터 왔다”고 하셨는데(5절), 이 뜻은 세계의 한 부분을 표현하는 통속적 표현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모여온 사람들의 국적은 바데, 메데, 엘람, 메소포타미아, 유대와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 애굽,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또 여러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들의 연고지는 지도를 보시면 쉽게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9-11절).

㉠ 바데, 메데, 엘람, 메소포타미아는 유대땅 중심에서 볼 때 동쪽이요,

㉡ 갑바디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는 서북쪽이며

㉢ 애굽, 구레네 가까운 리비야는 남서쪽이요,

㉣ 로마는 먼 서쪽이며

㉤ 아라비아는 동남쪽이므로 천하각국(동서사방)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의 시발지 예루살렘은 지리적으로 세계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⑤ 많은 이방인들이 왔고, 또 로마에서 살다온 구약적 종교와 무관한 유대인, 그리고 유대교에 입교한 유대인들도 있었다고 하였습니다(10절).

2) 따라서 놀램과 의혹과 조롱이 있었으니(12-13절)

① 배우지 않은 자들이 외국방언을 하니 놀라지 않을 수 없고

② 그 능력의 출처를 모르므로 의혹을 갖게 되었을 것이며

③ 심지어 외국말을 모르는 사람들은 술에 취하여 제멋대로 지껄이는 말이라고 조롱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은혜의 역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자에게는 조롱거리가 되고, 이해하고 받는 자에게만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오늘의 성도들이 이상과 같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를 체험해야하는가? 할 때 그와 같은 상태의 사건을 단회적이라고 해석한다면 체험할 수 없을 것이요, 또 그 같은 상태가 반복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체험을 했어야 할 것입니다. ① 귀로 들리는 바람소리 ② 피부로 느껴지는 바람의 가득함 ③ 눈으로 볼 수 있는 불의 혀같이 갈라진 불꽃이 자기들 위에 나타나는 것 ④ 또 외국말을 필요에 따라 방언으로 표현하는 것이 체험되었다면 그런 체험을 통해서 “오순절적인 성령세례를 받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필자가 볼 때는 그런 체험이 원색적으로 나타난 일이 없는 줄로 알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의 상태는 단회적 사역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제 5 과 요엘이 예언한 성령 (행 2:14-21, 욜 2:28-32)

 

이 시간에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성령”이란 제목으로 교훈을 받겠습니다.

본문 14절에서 베드로는 11사도와 뜻을 같이하여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놀라운 사건(성령강림)에 대하여 말할 것이니 귀를 기울이라” 하고 그들의 성령 받은 상태가 술취한 자같이 보였지만 그때가 제3시 아침인즉 관례상 술을 먹지 않은 때이므로(전10:16) 술취한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15절). 또 베드로는 이 말을 증언할 때 다 듣게 하기 위하여 소리를 높였고 또 자기의 말에 귀를 기울일 것을 촉구하였습니다(14절). 증언자는 알아듣도록 촉구할 책임이 있습니다.

1. 요엘 선지자는 주전 840년경의 유다선지자로써 이스라엘 민족의 장래에 관한 일과 먼 훗날에 있을 일들을 예언하였습니다.

1) 이스라엘의 장래에 관한 예언이란 욜1:4에 나타난 말씀으로 메뚜기와 황충 등의 재앙이 있을 것을 예언하셨으니 이 황충 등의 재앙은 그 당시에 있을 농작물의 재앙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팟종이, 메뚜기, 늣, 황충의 네 가지 재앙들이 가까운 장래에 있을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 네 나라의 침략통치를 예언하는 것으로도 해석을 하는 것입니다.

2) 또 먼 훗날에 있을 일을 예언한 것으로는 욜2:28-32의 말씀인데 “그 후에 내가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 자녀들이 장래일을 말할 것이며 너희 늙은이는 꿈을 꾸며 너희 젊은이는 이상을 볼 것이며 그때에 내가 또 내 신으로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줄 것이라”고 예언하신 것인데 이 예언이 있은지 약840년 후에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오순절 당시에 와서 성령의 충만한 역사가 일어났을 때에 많은 사람들이 그 성령의 역사를 이상하고 놀라운 일로 생각하니까 이때에 베드로 사도가 행2:14-21에서 “그 성령의 역사는 이상한 것이 아니라 구약에서 이미 요엘 선지자가 예언하신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면서 욜2:28-32을 인용하여 설명을 하신 것입니다.

2. 베드로가 요엘서를 인용했을 때 히브리 원문 성경을 본 것이 아니고 히브리어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역을 보았기 때문에 이 인용의 문구가 구약 원문에 비할 때 단어상으로 몇 가지 차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상으로 차이를 나타낸 것은 아닙니다. 그러면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입니까? 이 해석을 잘못하면 잘못된 신앙의 양태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1) 요엘 선지자가 “그 후에”라고 하신 말씀을 베드로는 “말세에”로 인용을 하셨고, 요엘 선지자가 “그 후”라고 한 때는 곧 “말세 신약시대”를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을 한 것입니다.

① 요엘 선지자가 농작물에 황충의 피해가 있을 것을 예언한 네 가지 황충의 재앙은 “바벨론, 바사, 헬라, 로마의 통치를 의미한다”고 앞에서 설명드렸습니다. 따라서 로마가 통치하는 마지막 시대는 곧 신약시대가 시작되는 시기에 해당하니까 말세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② 또 요엘서의 “그 후에”라는 히브리 말 “아카리드 하야밈”은 “말세 또는 말일”로 통용되는 용어로 창49:1에서는 “후일”이라 하였고, 사2:2에서는 “말일”이라고도 한 것입니다. 따라서 70인역은 이 “아카리드 하야밈” 을 헬라어로 번역할때 “엔 타이스 에스카타이스 헤메라이스(Έν Ταίς εσκάταις ήμέραις)”로 번역을 하였으니 이 말은 “날들의 마지막 날들 안에”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연속되는 모든 날들 중 최후 부분을 가리키는 말이므로 알기쉽게 “말세”라고 한 것입니다.

저희들은 흔히 세상 끝날 예수님의 재림이 임박한 시기만을 말세로 알기 쉬우나 이 “말세”는 예수님의 초림부터 시작하여 재림하시는 때까지 전부를 가리킨다는 것을 아셔야 하는 것입니다.

2) “내 신을 만민에게 부어 주시리니”하셨는데

① “내 신”이란 성령님을 뜻하고

② 이 때에 베드로 사도는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만민”이란 말을 “모든 육체”란 말로 바꾸어 인용했으니 이 말씀도 역시 70인역에 의한 것입니다. “만민”이란 “콜빠사르”를 헬라말 “파산살카(Πάσανσάρκα)”로 번역하여 “모든 육체”라고 한 것인데 이 “육체”란 뜻은 체구를 의미하는 “쏘마(σώμα)”(마6:22,10:28,롬1:24)가 아닌 부패성을 의미하는 “쌀크(σαρξ;마24:22,요8:15)”이기 때문에 부패성을 가진 모든 인간, 즉 유대인이나 이방인이나 세계인류 누구든지 모든 죄인들을 가리킨 것입니다. 따라서 “만민에게 주신다”는 것은 “인류 개개인이 다 받는다”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에게만 허락하셨던 복음적인 은혜가 특별한 민족을 초월하여 모든 이방인에게 이르기까지 편만하게 주어질 것을 예언하신 말씀입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본래 유대인이 아니었지만 차별없이 성령의 충만한 은혜 가운데 거할 수 있는 대상이 된 것입니다.

③ “부었다”는 것은 “충만하게 넘쳤다”는 뜻입니다.

④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제가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어떤 성도님들이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여 “오늘도 환상이나 꿈으로 계시를 받아 예언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혹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의 주장대로 오늘날도 “예언, 환상, 꿈을 꿀 수 있다”고 한다면 너희의 예언은 자녀들만 하고 환상은 젊은이만 보고 꿈은 노인들만 꿔야 한다고 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주장은 계시가 끝난 교회 시대에서는 있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성경 이외에 다른 계시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미 말씀을 드렸으므로 다시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그러면 ㉠ “너희의 자녀들이 예언을 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이것은 신약시대의 모든 성도들이 성경말씀을 마음대로 연구하여 가르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모세나 엘리야, 엘리사, 이사야 선지자 같은 특정인들만 예언(증언)을 하였지만 성령이 충만하여지는 신약시대에는 모든 성도들이 다 성경연구가가 되고 증언자가 될 수 있음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 “젊은이가 환상을 보고 늙은이가 꿈을 꾼다”는 것은 구약시대에 계시를 주시는 방법이 주로 “환상과 꿈”을 통하여 주셨는데 이것을 모세같은 특정인에게만 주셨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완성된 신약시대에 와서는 특별한 종족이 아닌 늙은이나 젊은이나 비천한 자에게까지 다 계시의 말씀을 직접 상대할 수 있도록 개방해 주신다는 의미인 것입니다. 따라서 노소의 제한이 없음은 물론 “특정인을 보편화시킨다”는 의미로 “늙은이, 젊은이”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 그 다음 18절을 보시면 “남종과 여종들에게도 주신다”고 하셨는데 이 남종과 여종은 비천한 계급에 있는 사람이나 남녀의 차별이 없이 성령충만의 은혜를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 그렇다면 또 환상과 꿈을 꾼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구약시대에 계시를 주시던 방법인데 히1:1에 근거하여 그런 방법으로 계시를 주시는 것이 끝났으나 사도들을 통하여 주신 성경 전체가 젊은이의 손에도 있고 노인들의 손에도 있으며 남녀귀천을 가리지 않음은 물론 어린아이의 손에까지도 있어서 누구나 보편적으로 하나님의 계시를 깨닫게 될 것이란 의미로 구약 계시의 방법에 빗대어 말씀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어떤 분들이 혹 “제단을 쌓는다 제사를 드린다”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성된 제사를 다시 드린다는 뜻이 아니요 “예배드림”의 의미로 사용하는 것처럼 “꿈을 꾼다”는 뜻도 신약의 모든 성도가 성경계시를 통하여 깨닫게 되는 상태를 표현한 말씀인 것입니다.

⑤ “남종과 여종에게 부어주신다”고 한 말씀이 모든 비천한 자들에게까지 성령충만을 주시는 의미라고 말씀드렸는데 어떤이들이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자기들도 성령을 받았다”고 하면서 비성경적인 행동을 하는 경우를 볼 때가 있습니다. 그 비성경적인 행동이란 자신들이 초대교회 사역자들 같은 능력을 받는듯이 자처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그들이 성경을 착각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18절의 “남종과 여종들에게”란 말씀이 70인역에서 “에피 투스 두루스 무, 카이 에피 타스 두라스 무(επί τούς δούλους μου, καί επί τας δούλας μου)”로 번역되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특별히 세운 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인류사회에서 천시 받는 모든 종들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엘 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은 오순절로 시작되는 신약시대에는 유대인을 초월한 범인류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구약시대에 특정인을 통하여 꿈이나 환상으로 주셨던 말씀들을 남녀노소가 다 성경으로 받아 유용하게 활용 할 것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⑥ 말세에는 하나님이 하늘에서는 기사를 베풀며(이 기사는 통치섭리를 나타내심임) 땅에서는 징조가 나타나는데 그것이 곧 “피와 불과 연기”라 하셨으니 이것은 세상에 크고 작은 전쟁이 있을 것을 예고하신 것이요,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은 예수님의 재림하시는 날로 그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된다”고 하셨으니 이것은 하나님의 진노의 상징적 표현으로 해같이 빛나던 권세자가 권세를 잃어버리고 그 밑에서 달처럼 광명을 누리던 자가 죽음으로써(피가됨) 인간 권세 영역에 큰 변화가 있을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⑦ 그리고 “누구든지 이런 일이 있기 전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는다” 하셨으니 여기에 “주의 이름을 부른다”는 뜻은 “복음을 믿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저희들은 이 말세지말을 당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옳게 깨닫고 모든 불건전한 유혹들을 피하며 끝까지 바른 신앙으로 주님의 이름만을 부르고 경성하다가 구원을 받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말세에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주시겠다는 성령의 약속은 오순절 때부터 바로 저희들에게도 주신 예언이요, 약속인줄을 아셔서 누구든지 성령의 충만한 은혜를 받고 성경 중심으로 충만한 상태의 생활을 잘 하셔야할 것입니다.(엡 5:18)

제 6 과 베드로의 세 가지 증언 (행 2:22-33)

 

이 말씀은 베드로의 증언이 계속되는 말씀입니다(14절). 베드로는 2:14절에서 소리를 높여 말하였고, 또 본문 29절에서는 “담대히 말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사람이 어떤 증언을 할 때에 소리 높여 담대히 증언하려면 그만한 확신과 사명이 투철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와같이 저희들도 복음을 담대히 증언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또 이 말씀은 세 가지 대지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① 22-23절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증언함”이요 ② 24-32절은 “부활에 관한 증언”이며 ③ 33절은 “성령님을 보내심에 대한 증언”입니다. 22절에서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하였으니 여기의 “이스라엘 사람들”이란 그 장소(성전 마당일 가능성이 있음; 행3:1)에 모인 유대인들(2:14)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증언(22-23절).

1) 하나님이 나사렛 사람 예수님으로 하여금 큰 권능과 기사(이적)와 표적을 백성들(너희) 앞에 베풀게 하여 “예수님 자신이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셨다”고 하였습니다.

① 예수님이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행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심이었고

② 그 능력을 나타내시게 한 이유는 예수님이 메시야 이심을 증거하기 위함이며(마 10:3-5, 히 2:4)

③ 권능이란 “두나미스(δύναμις; 복수 δυνάμεσι)”로 권세와 능력을 의미하고, 기사(이적)란 “테라스(Τέρας; 복수 Τέρασι)”로서 “놀라운 일”을 뜻하며 표적이란 “세메이온(σεμείον; 복수 σημείος)”으로 표징, 증거, 신호란 뜻이 있습니다. 따라서 권능, 기사, 표적은 예수님이 행하신 범상치 않은 초자연적 일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이렇게 된 것(즉 예수님이 오셔서 놀라운 일들을 나타내신 것)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대로 예수님을 내어주신 것이기 때문에 “유대인들(너희)이 법없는자들(율법없는 로마인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다”고 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은 선민의 구속사업을 미리 계획하셨고, 알리신 바도 있었으며(창1:26,3:15-21) 또 메시야가 오셔서 표적을 나타내실것에 대하여서도 이미 예언을 하셨는데(사29:18,42:7,35:5,6,61:1) 그 예언대로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②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대속의 제물로 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이 버려지신 것이고(사53:5,7)

③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일 것을 결의한 후, 율법없는 로마통치자들의 세상법을 의존하여(그들의 손을 빔) 십자가에 못박아 돌아가시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설명한 내용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민을 구속하실 목적으로 보내신 예수님을 유대인들이 로마인의 손을 빌어 죽였다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증언입니다(24-32절).

1) 하나님이 돌아가신 예수님을 그 사망의 고통에서 “풀어 살리셨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도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에(요14:6)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나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돌아가심이 하나님의 뜻에 의하여 복종하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부활이 성취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24절의 “사망의 고통”이란 돌아가실 때의 모든 고통을 의미합니다.

2) 25절 이하에서 예수님이 사망에 매여 있을 수 없는(24절) 이유를 말씀해 주셨습니다. “사망에게 매여 계신다”는 뜻은 패배자의 입장 그대로 계심을 뜻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한 예언의 말씀이 성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① 여기에서 사도행전 기자는 다윗이 예언한 시16:8-11의 말씀을 본문 25절-28절에 인용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서로 대조해 보면 다윗이 예언한 “여호와”란 말씀을 “주”라는 대명사로, “여호와를 모셨다”는 말씀을 “뵈었다”는 말씀으로, “내 영광(영)도 즐거워하며”를 “내 입술도 즐거워하며”로, “안전히 거한다”는 말씀을 “희망에 거한다”로 표현하였고, 또 “그가 내 우편에 계서 나로 요동치 않게 하신다”를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내 우편에 계신다”로, 그리고 마지막 부분에서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있다”하신 말씀을 “주의 앞에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로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사도행전 기자가 시편의 말씀을 옮길 때 번역한 사본의 다른 표현이거나 아니면 교훈상의 의미를 나타낸 것이기 때문에 약간의 용어상의 표현의 차이를 잘못된 것으로 여겨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② 여기에 인용한 내용이 어떻게 하여 예수님의 부활을 예언하심인가? 할 때

㉠ 이 인용한 말씀이 다윗의 시이기 때문에 본문의 “나”라는 말씀이 다윗 자신을 의미하지만 성경은 다윗을 메시야 모형인물로 나타내어 다윗 자신의 일과 메시야의 일을 한가지로 예언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시22:1을 보시면 쉽게 이해될 것입니다. 시22:1은 다윗이 사울에게 쫓길 때 자기의 입장을 말한 것이지만 그것이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로서 예수님의 고난을 액면대로 예언하신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마27:46). 따라서 25절의 “다윗이 항상 자기 앞에 계신 주(메시야, 예수님)를 뵙는 것은 예수님이 항상 자기 앞에 계신 하나님을 뵙는 것과 같은 것이고, 또 다윗이 주님을 우편에 모시므로 요동치 않음은 역시 예수님이 하나님을 우편에 모신 것과 같음이며 그로 인하여 마음의 기쁨과 입술의 찬송이 있음은 물론 육체도 희망에 거하게 된다”(26절)하셨으니 여기에 “육체가 희망에 거하는 뜻”은 바로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않으시고(천국으로 인도하심) 주님의 거룩한 자(다윗 또는 예수님)로 그 육체가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시며(27절) 이로써 생명(영생)의 길을 보여 주셨고 기쁨도 충만케 하실 것이라(28절)하였으니 이 예언이 성취되기 위하여 예수님이 부활하신 것이라고 증언을 한 것입니다.

㉡ 그리고 이 예언이 근거있는 확실한 것임을 증명하기 위하여 29절에서 다윗의 역사적 인물됨을 그의 묘(墓)로써 증명을 한 것입니다.

③ 다윗이 이런 예언을 할 수 있었던 근거는

㉠ 그가 선지자로서 하나님의 계시를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고(30절)

㉡ 실제적으로 하나님이 다윗에게 그의 자손 중에서 한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실 것을 맹세로 약속해 주셨기 때문에(30절) (이런 맹세의 약속에 대하여는 삼하23:2,7:11-13, 시89:4,132:11, 사9:6,7,16:5, 단2:44,7:14,18,27, 마1:1, 눅1:32-33을 참고하실 수 있습니다.)

㉢ 예수님의 부활을 미리 본 자처럼 예언할 수 있었고(31절) 따라서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도 썩음을 당하지 않으리라”는 예언도 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3) 이상과 같은 예언과 섭리적 절차에 따라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살리신 것이며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라”하였으니(32절)

① 여기의 “우리”란 그 장소에 함께 있었던 베드로를 중심한 예수님의 제자들이요

② “이 일에 증인이 되었음”은 그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확실히 보았기 때문에 그것을 증거하는 사신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③ 이 말씀에서 베드로와 함께 있던 제자들은 부활을 예언한 구약의 말씀과 부활사실을 목격한 것으로 부활을 믿고 증언자가 된 것이며 오늘 우리들은 성경의 역사적 진실성과 사도들의 증언을 믿음으로 예수님의 부활사실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3. 성령님을 보내심에 대한 증언입니다(33절).

1) 하나님은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높이셨습니다. 여기의 “오른손”이란 하나님이 힘있게 높이신 사실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2)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자리에까지 올리셨습니다(빌2:9). 얼만큼 높이신 것일까요? 성부하나님의 사역권까지 동등하게 높이신 것입니다. 본래 성부와 성자는 그 본질이 같습니다만 사역(하시는 일)에 대하여는 상호분담이 있었습니다. 이 분담에서 예수님이 고난받는 쪽을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지극히 높으신 자리는 하나님 좌편이 아니고(25절) 우편에 앉히신 것입니다(히1:3, 롬8:34). 이 우편이란 하나님의 마지막 사역인 통치와 심판을 다 담당하시는 자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요5:27).

3) 이렇게 높아지신 예수님께서 성부하나님과 합의하여(아버지께 받아서) 성령님을 보내 주셨기 때문에 약속하신대로 그 성령님이 오시게 되었다는 것입니다(33절). 성령님의 임재를 확인함에 있어서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다”하심은 성령님의 임재 상태를 눈으로 보고(불의 혀같이 갈라진 것), 귀로 듣고(바람소리와 방언의 소리), 또 부어진 체험(바람의 상태를 피부로 느낀 것)을 느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부어주셨다”는 뜻은 성령님을 물로 상징하여 충만하게 보내주신 성령세례를 뜻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과 성령강림의 근거와 역사적 사실을 확실하게 설명해 주신 것입니다.

제 7 과 복음전파와 그 결과 (행 2:34-47)

 

위의 말씀은 3대지로 나누어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① 34-36절은 베드로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증언의 계속으로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음과 하나님의 우편에 앉으신 사실과 또 이스라엘 온 집이 그를 십자가에 못박은 자들임을 정녕 알아야 할 것이라”고 증언한 것입니다. ② 36-40절은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로 지목을 받은 자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아 어찌할꼬? 하였을 때 “구원받는 방도를 깨우쳐 주신 말씀”이요 ③ 41-47절에서는 “말씀을 받은 자들의 변화된 생활”을 기록하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취지상으로 볼 때 “복음전파와 그 결과”를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더불어 현대인의 구원받는 절차와 결과도 그렇게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1. 베드로가 증언한 내용(34-36절)

1) 베드로는 예수님이 승천하셔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신 것을 증언하였습니다. 이 사실은 예수님의 승천을 목격한 것으로도 충분히 증거가 되지만 목격한 사실이나 어떤이의 체험은 성경만큼 확실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베드로는 구약성경의 말씀을 내세워 예수님의 승천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 말씀은 시110:1의 말씀으로 “주께서 내주께 말씀하시기를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주전1000년경의 사람 다윗이 예수님의 승리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입니다.

① “주께서 내 주께”란 “성부하나님께서 성자예수님께”란 뜻이요

② “내가 네 원수로”하심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괴롭힌 마귀에게”란 뜻이며

③ “네 발등상 되게 하심”은 예수님이 마귀를 발 밑에 놓고 디디게 하신다는 뜻으로 마귀에 대한 최후심판을 뜻함이요

④ “그때까지 내 우편에 앉았으라”하심은 예수님이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셔서 하나님과 동등한 영광의 위치에 계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⑤ 세상의 종말과 심판 때가 되면 그 자리를 떠나서 다시 세상으로 재림하셔야 하기 때문에 “발등상되게 하기까지”란 시한부의 표현을 하신 것입니다.

2) 이스라엘 온 집이 그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실을 밝히 증언하였습니다(36절).

① “정녕 알찌니”란 말씀이 확실한 규명을 짓는 강조어투요

② “이스라엘 온 집”이란 예수님을 대적하여 핍박한 모든 무리를 총칭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을 제외하고는 모든 이스라엘 족속이 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았으므로 그 동족들이 예수님을 못박는데 주동하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3) 그 못박힌 예수님을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① 예수님이 “주 되신 것”은 사망으로 위협하는 마귀의 세력을 이기시고 승리하셨기 때문이요

② “그리스도(기름부음 받은자, 구원자의 뜻; 요4:25-26)”되신 것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대속의 제물로 희생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마귀를 이기셨으므로 주가 되셨고, 대속의 제물이 되셨으므로 중보자(구원자)가 되신 것입니다.

2. “어찌할꼬?”한 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37-40절).

1) 그대로 들은 자들이 “어찌할꼬?”하고 질문을 하였으니,

① 그들은 “주와 그리스도를 죽인 자들”이란 말을 들었을 때 마음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자기들이 예수님을 죄인처럼 인정하고 핍박한 것이 사실인데 그 예수님이 부활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목격되고 “주와 그리스도가 되셨다”하니 찔림을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처럼 마음에 찔림(가책)을 느끼는 것은 성령님의 감동에 의한 회개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② 그래서 그들은 서슴지 않고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겠느냐?”고 질문하였으니 이렇게 죄의 가책을 느끼는 사람은 겸손하게 묻는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2) 이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대답하기를

①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고 하였습니다.

㉠ “회개”란 뜻은 불신앙에서의 돌이킴으로써 복음을 거절한 입장에서 영접하는 입장을 취하는 것이요

㉡ “각각”이란 뜻은 성도 각자가 자기의 신앙고백으로 하나님께 나가야 하며

㉢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음”은 신앙고백과 함께 복음을 영접한 자에게 인치는 표징으로 현재 세례를 베푸는 것과 같은 뜻이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것”은 성부와 성령님의 이름을 포함하여(마28:19) 대표적으로 나타낸 표현입니다.

㉣ “죄사함을 받는다”는 뜻은 근본적이고 전체적인 죄책의 면제를 받음으로 칭의에 이른다는 뜻이니, 이것은 오직 믿음으로 받는 선물입니다.

㉤ 또 “성령을 선물로 받는다”는 말씀은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시듯 성령하나님도 은혜로 거저 보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회개하고 세례받은 자에게 풍성하게 주신다는 약속입니다.

② 그들이 이방인들이지만 회개하고 세례를 받은 후에는 오순절 때에 이스라엘 선민들이 받았던 것과 같은 성령의 은혜를 선물로 받을 수 있는데 여기에 약속된 성령님은 일반적으로 역사하신 성령님이 아니고, 오순절 때에 역사하신 특별한 은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이미 구약성경 사9:1, 49:6, 57:19, 욜2:28등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전파될 것이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근거하여 베드로 사도는 이방인들인 그들(너희)의 자녀와 모든 먼데 사람(사57:19)이라도 하나님이 부르시는 자이면 얼마든지 은혜를 주시기로 약속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39절).

3) 여러 말로 확증하며 믿음을 권하였습니다(40절).

① 여러 말로 확증하였음은 예수님이 구세주 되신 사실을 증거한 것이요

②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함은 믿음을 권유한 것입니다. 패역한 세대는 예전이나 오늘이나 같습니다.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는다”는 뜻은 범죄생활 자체에서 느끼는 불행과 죄책으로 인한 영원한 심판에서 면제받고 영생하는 복을 의미합니다.

③ 이런 상태에서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시고 부르신 자에 한하여 주실 것이지만(39절) 이 사실이 구원받을 자에게 적용되는 방법은 그 자신이 믿고 복종하므로 성취되는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확실하게 증언하고(확증), 구원은 부르시는 자에 한하여 허락되지만(39절) 복음을 전파하는 것은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전파하여야 할 것입니다(행1:8).

3. 말씀을 받은자들의 변화된 생활(41-47절).

1) 베드로의 증언한 말씀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았습니다(41절). “말씀을 받는다”는 뜻은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이요(요1:1), 또 믿는 것을 뜻합니다. 베드로가 회개하고 세례 받을 것을 증언하였으니(38절), 그 증언을 받은 자들은 당연히 세례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막16:16에도 보시면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라” 하시므로 믿는 것과 세례받는 것을 하나로 묶어 표현하셨습니다. 따라서 세례받는 것과 믿는 것이 합일하지 않아도 신앙이 성립된다고 생각하시면 안됩니다. 신앙은 진리에 대한 순종이기 때문입니다.

2) 그날에 제자의 수가 3000이나 더하였으니(41절),

① 누구든지 복음을 받을 때는 예수님의 제자됨을 결심하고 따라야 할 것이요, “제자됨”이란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시고 본받으며 복종하고 섬길 것을 결심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하루에 어떻게 3000명 이상에게 세례를 베풀었을까? 할 때 여기에는 신앙고백을 입증받는 일과 세례 베푸는 의식에 상당한 시간이 소요됨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 이 “날”이란 말씀 “헤메라(ήμέρα)”가 단수이기 때문에 하루에 3000명을 세례주었다고 보아야 하며, 이 행사는 여러 제자들이 함께 시행할 수도 있고, 또 단체적으로 신앙고백을 받고(물론 개개인의 신앙고백을 확인하는 목적으로) 간단하게 물을 뿌려 세례의식을 베풀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침례의 부정적 의미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이런 놀라운 현상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기이한 만큼 그런 큰 전도의 역사도 나타난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전도 방법이 부족한 중에 성령님의 강한 역사가 나타나 주시면 상당한 전도의 효력을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저희들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으니(42절) 이는 예수님의 분부를 시행한 것이요(마28:20) 성경을 중심한 신앙적 교훈을 시도한 것으로 오늘의 교회가 시행하는 모든 교육에 해당하는 일입니다.

4) 회개하고 세례받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였습니까?

①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46절). 그들은 사도들을 믿었고, 예수님의 제자가 된 동시에 사도들의 제자가 된 것이므로 사도들의 뜻에 일치하는 마음을 가져준 것입니다. 성도의 모임에 마음이 일치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46절)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습니다.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었음”은 모임에 큰 의미를 나타낸 것입니다(44절). 여기의 성전은 예배를 위한 모임의 처소 이상의 다른 의미는 없는 것입니다.

② 그들은 모여서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고, 떡을 떼었으며(42,46절) 전혀 기도에 힘을 썼고, 물질을 통용하였으며 기쁨으로 하나님을 찬미하고, 음식을 나누며 사랑의 친교를 가진 것입니다. ㉠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을 중심으로 전체가 회집하는 일 ㉡ 사도의 가르침을 받는 교육 ㉢ 떡을 떼는 성찬 ㉣ 전혀 기도에 힘씀 ㉤ 자기소유를 팔아 각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눠주며 물건을 서로 통용하는 생활(이 생활은 자발적으로 물질소유의식을 초월한 것임) ㉥ 기쁨으로 찬미하는 생활 ㉦ 서로 음식을 나누는 사랑의 친교가 있었으니 그들의 순수한 생활을 족히 짐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현실교회는 초대교회의 실정을 구호로만 외치지 않습니까?

4) 이로 인하여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① 사람마다 두려워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는 성도의 단결과 선행에 감화를 받고 그 권위에 굴복하는 뜻이요

② 사도들로부터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으니, 이것은 병고침, 방언 등 초자연적 역사를 뜻함이며

③ 온 백성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되었고(47절)

④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능력과 감화와 칭송과 전도의 순서로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말씀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가 구원받는 백성을 많이 영입하려면 기본교인의 모임이 잘 성취되어야 하고, 이 모임에서 교육, 성찬, 기도, 사랑실천(유무상통), 기쁨의 찬미, 성도의 순수한 교제로 이웃의 칭찬을 받을 때 주께서 구원받을 백성을 더 많이 보내 주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초대교회로 돌아간다는 의미는 바로 위와 같은 정황에 이르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오직 나를 포기하고 모든 것을 주고자 할 때 능히 성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눅6:37-38).

제 8 과 앉은뱅이를 일으킴 (행 3:1-10)

 

이 말씀에서는 은혜 받은 사도들의 활동과 하나님의 능력이 불행한 사람, 즉 앉은뱅이에게 역사되어 그에게 소망을 주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구별해 보면 ①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1절) ② 미문에 앉은 앉은뱅이(2절) ③ 앉은뱅이를 일으킴(3-7절) ④ 앉은뱅이를 일으킨 결과(8-10절)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기도하러 가는 베드로와 요한에 대하여(1절)

베드로와 요한은 제9시 기도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고 하였습니다.

1) 사도들은 오순절 이후에 기도를 힘썼고(2:42) 베드로와 요한도 기도에 합력하였습니다.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이 사도들의 전부이기 때문입니다(6:4). 베드로와 요한은 연령의 차이로 노소를 이루지만 믿음 안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는 그런 차이가 아무런 지장이 없습니다.

2) 이 두 사람이 9시에 기도한 것은 그 시간이 예수님의 운명하신 때임을 기억하였는지 모릅니다(마27:46). 그 당시 제9시는 오후 3시경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규칙적인 기도는 큰 은혜를 받습니다(행10:2).

3) 그 당시에 성전은 기도하기 좋은 처소였고 예수님도 그 곳을 “기도의 처소로 삼으라”고 명하셨습니다(마21:13).

4) 성전에 올라간 것은 그 지역이 모리아산 언덕으로(창22:2, 수18:28, 왕하19:21, 삼하5:7) 예루살렘 도성 안에서도 약간 높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성전에서의 합력기도는 가장 기도를 합리적으로 행하는 방법입니다(마18:19).

2. 미문에 있는 앉은뱅이에 대하여(2절)

1) 미문이란 성전(동쪽)에 있는 아름다운(호라이안;ώραίαν) 문을 뜻합니다. 이 문은 성벽의 문이 아니고 성전 안에 있는 지도자들이 통할 수 있는 문일 것입니다.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 문의 높이가 22m, 폭이 18m이며 금과 은과 놋쇠로 장식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외에도 성경에는 양문과(느3:1, 요5:2) 분문(느2:13)이 있다고 하셨는데, 이것은 북쪽과 남쪽의 성벽문을 뜻하는 것입니다.

2) 그곳에 있는 앉은뱅이는 나면서부터 불구된 자로 사람이 고칠 수 없는 병자였고, 사람들이 성전에 출입하는 사람들로부터 구제를 받게 하기 위하여 그곳에 있게 한 자이며 그는 베드로, 요한이 들어갈 때 돈을 바라는 구걸을 하였습니다.

3) 이 앉은뱅이는 퍽 불행한 사람이었습니다.

① 그가 현실적으로 불행한 사실은 나면서부터 불구자요, 가난과 비천과 고독을 함께 갖고, 또 자기 몸까지 자기 임의로 기동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② 저희들은 이 사실에서 영적 불구의 모습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 앉은뱅이가 불구자인 것처럼 성도가 신앙에 병들어 불구자로 사는 생활 ㉡ 앉은뱅이가 서지 못하는 것처럼 신앙의 기초가 든든하지 못한 형편 ㉢ 앉은뱅이가 말은 하지만 행하지 못하는 것처럼 실천하지 못하는 형편 ㉣ 앉은뱅이가 신령한 복, 하나님의 능력을 알지 못하여 물질을 구걸하는 것처럼 오늘의 성도들도 신령한 복보다 현실적인 것을 더 앞세우는 실정 등이 비슷한 점이라고 할 것입니다.

③ 이 앉은뱅이가 누구의 죄로 날 때부터 그런 불행을 당해야만 하였을까?에 대하여 이 사실은 하나님만 아시는 일일 것입니다. 요9:1-3에 보시면 제자들이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의 연고를 여쭌 일이 있었을 때 “그 자신이나 그 부모가 죄를 범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나타내시기 위함이라”하셨으니, 불구자라 하여 무조건 죄와 결부시키는 일은 극히 삼가야 할 것입니다.

4) 그 앉은뱅이는 성전으로 들어가는 두 사도에게 구걸을 하였습니다.

① 그가 생각하는 희망이란, 한 두푼의 구제를 받아서 그날 그날 살아가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의미없는 하루하루의 생활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② 베드로와 요한은 물질 구제의 사명 앞에서 퍽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를 도와 줄만한 은과 금이 없었기 때문입니다(6절). 그러나 믿는 성도이면 소자를 실족시키지 않도록 협력하여야 할 것입니다(마18:6).

③ 다행스럽게도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을 전달하여 그의 병을 고쳐줄 수 있는 특별한 은사가 있었기 때문에 희망을 줄 수 있었습니다. 이 능력은 마 10:1에서 받은 것입니다.

3. 앉은뱅이를 일으킴에 대하여(4-7절)

1) 이때에 베드로와 요한은 함께 나란히 서서(더불어 극복함) 그 앉은뱅이를 향하여 “우리를 보라”고 하였습니다(4절). 어떤 의미로 “우리를 보라”고 하였을까요? 두 사도가 흠모의 대상일까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다 연약하고 거짓되기 때문”입니다(롬3:4). 다만 증거하는 말씀에 주목하고 하나님께 대한 신뢰감과 희망을 갖게 하기 위함입니다. 소망은 하나님께만 있기 때문입니다(롬15:13).

2) 그 앉은뱅이는 “무엇을 얻을까?”하여 바라보았습니다. “무엇을 얻을까?”란 뜻은 그가 구걸한대로 얼마의 물질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앉은뱅이의 믿음이 물질 이상의 신령한 은혜인 하나님의 능력을 기대했다고 상상하기는 어렵습니다. 따라서 그는 믿음이 거의 없는 자였습니다.

3) 이 사람에 대하여 베드로와 요한은 “내게 은과 금은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주노니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명하고 그의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① 두 사도는 은금으로 구제할 것이 없는 만큼 물질에 의존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은 물질을 의존하거나 앞세우는 세계보다 물질을 의존하지 않는 사역에서 더 잘 역사해 주실 것입니다(욥22:24-28). 따라서 현실교회도 물질을 앞세우거나 물질이 교회부흥의 관건인 듯이 의존하여서는 안될 것이요, 또 교회나 성도의 생활도 물질적 빈곤에서 벗어나는 생활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과 구조조정으로 가능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② “내게 있는 것”이란 뜻은 “은금이 없는 것”과 대조할 때, “가지고 있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하면 나사렛 예수님과 병고칠 능력을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이 사실은 마10:1과 막16:17-18에서도 증명해 주셨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성도들이 이 말씀에 의지하여 병낫기를 기도하였을 때 그 같은 역사를 나타내 주시는가? 하면, 현재는 그와 같은 성질의 능력으로 역사해 주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응답과 섭리적 은혜로 낫게 해 주시기를 기다리는 것이 더 바람직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혹 어떤 사역자가 이와같은 방식에 의하여 명령하였으나 즉시 치료되지 않을 때는 진실성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어떤이는 어떤 사역자가 명령 한마디로 “앉은뱅이를 일으켰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또 그런 사실이 오순절 교회가 생긴 동기라고도 합니다. 이 경우에 사실이 그렇다는 것을 부인할 필요는 없지만, 이 말씀에 나타난 사실대로 ㉠ 그가 나면서부터 앉은뱅이 된 자로 심한 상태였는지 ㉡ 그가 즉시 나아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는지 ㉢ 많은 사람이 모인 곳에서 그 사실을 확실하게 규명하고 영광을 돌렸는지(12절)를 잘 확인 하셔야 할 것입니다. 만일 이와 꼭 같은 일이 나타났다면 사회의 매스컴이 전세계에 알렸을 것입니다. ㉣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병고치는 능력이 받는 자의 믿음과 크게 상관없이 베푸는 자의 소원으로 전달된 사실입니다. 혹 그 옆에 그와 같은 병자가 또 있었다면 그도 역시 베푸는 자의 소원에 따라 고침의 은혜를 받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기독교 신앙백과 460p 참조)

③ “나사렛 예수의 이름으로 걸으라”한 뜻은 “예수님이 일으키신다”는 사실을 전달하였음과 동시에 사도들이 영광의 예수님을 나타내지 않고 나사렛 예수님 즉 인간적으로 각박한 예수님을 소개한 점에도 의미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④ “옳은 손을 잡아 일으킨 것”은 예수님의 능력이 임하는 사실을 알고 시행한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게 있는 것으로 준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은사는 사도들에게 주신 특별은사가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4. 이렇게 명령한 결과 어떻게 되었습니까?(8-10절)

1) 완전하게 고침을 받았습니다. 여기에 “완전하다”는 의미는 신속하게 또 어떤 통증을 느꼈다는 사실도 없이 힘없는 발과 발목에 힘이 들어가서(더운 피가 통하여) 뛰어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였으니, 이것은 마치 송아지 새끼가 어미 몸에서 나오자마자 잘 뛰는 것과 같은 것으로 성전에 들어가는 다른 사람들과 아무런 차이가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는 하나님을 찬미하였습니다. 그가 구걸할 때는 물질을 구하였지만 예수님의 이름으로 병을 고친 다음에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감사와 찬미를 드린 것입니다(8절). 오늘의 성도들도 참체된 신앙에서 말씀으로 힘을 얻고 활발하게 뛴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3) 이 사실은 몇 사람만 있는 곳에서 된 것이 아니라 모든 백성에게 알려진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백성(예루살렘의 많은 사람들)이 그의 걷는 것과 하나님께 찬미함을 보고 또 그가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을 앎으로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랐다”고 한 것입니다(9-10절). 오늘의 교회들도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좋은 일들이 있어야 잘 부흥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을 오늘의 성도들이 어떤 의미로 받아야 할까요? 만일 오늘도 이와 같은 사도적 권능이 나타난다면 많은 병자에게도 큰 소망을 주겠지만 지금은 사도가 존속하는 시대도 아니요, 그런 비상 은혜가 거의 없는 실정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을 주신 의미는

①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신 사실을 알게 하심이요

② 그 특별 능력을 받은 사도와 선지자들이 기록한 계시의 말씀인 성경을 믿게 하시기 위함이며

③ 기독교의 기초를 수립하던 시대에 그 기초 작업의 한 방법으로 그와 같은 비상섭리를 쓰신 것이요(마11:3-6, 요10:38, 히2:3-4)

④ 교회시대에는 생명의 말씀인 성경을 은혜와 신앙생활의 방편으로 주신 것입니다(딤후3:15-17). 또 말씀에 능력이 함께 하시는 역사도 하십니다(시 107:20, 히 4:12).

⑤ 이와 같은 결론은 하나님이 교회시대에 “사도적 비상섭리를 전혀 안 쓰신다”고 단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특별섭리를 베푸실 자유와 능력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사도가 없고 사도적 비상은혜가 현저하게 역사되지 않는 만큼 하나님은 말씀을 앞세워 구원사역을 이루시고(롬10:17), 비상섭리를 발동하실 때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보통 기적의 섭리로 나타내신다고 믿는 것입니다(고전12:9, 약5:15, 딤후4:17). 따라서 오늘의 성도들도 건강을 위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에 의지하여 기도하실 수 있습니다(약 5:13-15). 그리고 건강한 성도가 이 말씀을 받을 때는 영적 불구자 생활에서 자유함을 힘입고,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나가면서 뛰어가는 신앙생활을 하시므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고(막9:23, 시23:3, 사40:31), 또 그런 일로 쓰임 받는 성도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10절).

제 9 과 베드로의 증언 (행 3:11-16)

 

위의 말씀 중 11절을 제외하고는 전부 베드로가 증언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의 증언”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11절에서 병나은 사람은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았습니다.

왜 붙잡았을까요?

1) 너무도 놀라운 기적을 힘입었기 때문에 감사의 뜻을 표하고

2) 또 베드로와 요한을 무조건 더 의지하고 싶은 생각이 났을 것이며

3) 어떤 연고로 이런 신비한 능력이 나타났는지를 알 필요가 있었을 것이요

4) 일단 자기에게 능력을 전달해 준 사람들이 “우리를 보라”한 후, “나사렛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하면서 오른손을 잡아 일으켰은 즉 나사렛 예수님에 대한 것도 알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2. 이때에 그 사실을 알게된 모든 백성들도 함께 놀라 한 장소에 모이게 되었으니, 그 장소가 바로 솔로몬 행각이었습니다. 이 행각은 성전 동편의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을 것이며 또 “솔로몬의 행각”으로 불려진 것은 그 건물이 헤롯왕 때 재건된 것이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백성들이 그 장소에 모인 것은 역시 놀라운 기적에 대하여 출처를 알기 위함이었을 것이며 베드로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능력의 출처와 함께 능력의 주이신 나사렛 예수님을 증언하게 된 것입니다.

3. 베드로의 증언의 요지(12-26절)

1) “능력이 나타난 일에 대하여 기이히 여길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12절). 그 이유는 어느 사람이나 개인의 권능과 경건(신앙의식)으로 나타낸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그래서 그들은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고 하였습니다(12절). 즉 예수님이 능력을 전달하신 것이므로 자신들은 능력자인 취급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은 오늘날도 꼭같이 적용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사역자가 말씀증언으로 감동을 끼쳤든지, 또 어떤 능력적 은사를 나타냈다 하더라도 역시 자신이 한 것이 아닌 주님이 하신 것으로(고전15:10) 확인을 시키고 자신은 더 겸손한 위치에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3) 예수님이 능력을 발하시게 된 경위와 이유를 설명하였습니다(13,15,18절).

① 13절에서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 그의 종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을 부활, 승천하게 하시고 영광의 주(히2:9)를 삼으셨기 때문에 권능이 그에게로부터 임하였다는 뜻이요,

② 15절에서는 예수님을 “생명의 주”라 하시고, “하나님이 죽은자 가운데서 그를 살리셨음으로 예수님이 곧 영광의 주, 생명의 주이시기 때문에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③ 18절에서는 이 사실(예수님이 구세주가 되셔야 할 일)에 대하여는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그의 해 받으실 것(구속사업)을 미리 알리신대로 이루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즉 예수님이 능력을 행하신 것은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구원자)”이시기 때문이요, 또 그가 구세주로 오실 일에 대하여서도 구약시대의 모든 선지자들이 다 예언한 바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 39권을 기록한 모든 선지자들이 메시야의 출현을 어떻게 예언하였는가?에 대하여는 본인이 집필한 기독교 신앙백과의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란 제목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생명의 주요, 부활하신 자요(15절),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그런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것입니다.

4) 그리고 그 예수님을 죽인자들이 바로 그들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13-15절). “너희가 저를 빌라도에게 넘겨주었고 빌라도가 놓아주기로 결안한 것을 또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거절)하였으므로 결국 살인자를 놓아주고 거룩하고 의로우신 자를 죽인 것이라”고 하였습니다(마27:18-21). 따라서 사도들은 예수님의 죽으심(십자가)과 사심(부활)에 대한 증인이 된 것입니다.

5) 그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그 병자를 완전히 낫게 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16절). 그 능력의 출처를 설명하심에서 16절을 보시면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란 세 가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① “그 이름을 믿음”이란 “이름” 자체를 예수님의 인격의 대명사로 사용한 것입니다.

② 따라서 “그 이름”이란 뜻도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이요

③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란 예수님이 믿음을 주시는 분이요(믿음의 주; 히12:2),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알게된 사도들의 믿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사도들이 예수님에 근거한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예수님이 그들을 통하여 자기의 능력을 전달케 하셔서 그 병자를 성하게 하고 완전히 낫게 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너희의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한 것과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다”하심은 확실한 환자를 확실한 능력으로 확실하게 완치시킨 것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6) 베드로는 그들이 회개할 것을 촉구하는 증언을 하였습니다(17,19절).

① 모인 백성들이 이스라엘의 같은 동족이므로 “형제들”이라 호칭하였고

② 그들과 그들의 관원들이 “알지 못하여 범죄한 것을 이해한다”는 뜻으로 말하였습니다(17절). “그들”이란 예수님을 관원들에게 넘겨준 유대인들이요, 그들의 “관원들”은 곧 로마인들로서 빌라도와 그 부하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베드로는 그들에게 “회개하고 돌이켜‧‧‧죄 없이함을 받으라”하였으니, “회개하고 돌이킴”은 죄를 없이하는 방법으로 배척한 예수님을 다시 영접하는 믿음을 뜻하고, “죄없이 함”이란 영구적으로 죄책을 면하는 의의 은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즉 “예수를 믿고 죄사함을 받으라”(행2:38)는 뜻과 같은 것입니다.

④ 그래야만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님께로부터 이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의 뜻은 구원의 즐거움과 구원의 출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인간은 죄책에서 또는 범죄에서 벗어날 때 유쾌하게 되는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7) 베드로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하여 증언하였습니다(20-21절).

① 하나님은 영원 전부터 택한 백성을 위하여 그리스도의 구속사업을 예정하셨고,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그 사실을 미리 예언하셨으니 “그 사실”이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예수님을 하나님 우편에 계시게 하시다가 세상을 심판하실 때에는 다시 세상에 보내실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시110:1).

② 20절 초두에 “주”는 하나님이시고, “너희”는 선민을 뜻하며, “예정하신 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사업과 재림이고, “영원 전부터”란 예정시기를 의미하며 “만유를 회복하심”은 구원사업의 완성이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심은 부활하신 주님이 재림시까지 마땅히 하나님 우편에 계셔야 할 것을 증언한 것입니다(눅24:26).

8) 베드로는 예수님에 대한 구약시대의 선지자의 예언을 증언하였습니다(22-24절).

① 모세가 말하기를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 나같은 선지자를 세울 것이라” 하였으니(22절), 이 말씀은 신18:15의 말씀을 인용하신 것으로 유대인에게서(너희 형제) 능력의 선지자, 즉 예수님이 오실 것을 예언하신 것입니다.

②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22절)하심은 예수님의 권위를 절대화하신 말씀으로 예수님이 계시의 주되심을 증언한 것입니다(마17:5). 따라서 그의 말을 듣지 않는자는 절대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자이므로 백성중에서 멸망받을 것인데(23절, 시2:12)

③ 이 사실(메시야 초림의 언약)은 사무엘 선지자로부터 그 후의 모든 선지자들도 예언한 바라고 한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예언의 말씀은 삼상7:15,17, 사7:14, 9:6, 미5:2 등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9) 베드로는 구원의 소망을 일깨워 주는 증언을 하였습니다(25-26절).

① 너희는 선지자들(선민계열)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께로부터 메시야 언약을 받은 조상들의 후손들이며

② 더 나아가서는 “땅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그리스도; 마1:1)를 인하여 복 받을 것이라”고 약속받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이요

③ 메시야를 먼저 보내셔서 복을 주시되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신 특별한 대상인 만큼 속히 회개하고 메시야를 영접하라고 촉구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베드로는 ① 구약성경에 근거한 메시야를 증언하였고 ② 오직 능력이 주님으로부터 전달 된 것과 ③ 예수님만을 사모하고 의지하여야 할 것과 ④ 이방인 구원에 앞서 약속 받은 후손들에게 먼저 구원의 손길을 펼치신 것과 ⑤ 불신앙의 완악을 물리치고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하는 증언을 한 것입니다.

제 10 과 최초의 핍박과 전도 (행 4:1-12)

 

이 말씀을 살피면 ① 1절-4절의 말씀은 “사도들에 대한 핍박과 전도의 효력에 대한 말씀”이요 ② 5절-7절 말씀은 핍박자들이 모여 앉은뱅이를 일으킨 “권세의 출처를 물은 내용”이요 ③ 8절-10절 말씀은 위의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대답”이며 ④ 11절-12절은 “예수님에 대한 증언”의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총제목을 “최초의 핍박과 전도”라고 정하였습니다.

1. 사도들에 대한 핍박과 전도의 효력에 대하여(1-4절)

1) 오순절 이후 최초에 전도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고, 사도들은 예수님의 전도사역(막1:38)을 계승한 사람들이며 그후에 집사직을 받은 스데반과 빌립이 전도를 하였고(행6:9-10,8:12) 또 그후에는 사울이 변화되어 전도자와 사도가 되었으며(행9:15) 믿음의 형제들은 전도자들을 협력하였고(행9:30) 그 다음에 평신도 대표로 고넬료가 전도한 사실이 나타나 있습니다(행10:1-2, 24). 여기에서 직분자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증언하였고, 평신도 고넬료는 사람들을 모아오는 역할을 하였습니다(행10:24). 따라서 전도사역의 순서가 예수님, 사도들, 집사들, 평신도 순위로 나타난 것과 직분자들은 증언하였고, 평신도들은 전도자에게 협력하였으며 사람들을 모아오는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6:4, 9:30, 10:24).

2)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자들과 사두개인들은 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를 들어 전도하는 것을 싫어하였습니다(2절).

① 성전 맡은자들은 제사장의 관할 하에서 성전을 지키는 관리인들이요

② 사두개인들은 천사와 신령한 도리를 믿지 않는 세속화된 신앙을 가진 교파단체입니다(마16:6,22:23).

③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관에 맞지 않는 복음을 전파한다 하여 사도들의 전도를 싫어하였습니다.

3) 그래서 전도자들을 핍박하려고 잡았으나 이미 날이 저물었으므로 그 다음날 처리하기 위하여 가두었습니다.

① 이들이 다음날 처리한다는 뜻은 재판관들이 모였을 때 고발하기 위함이요

② 고발하기 전에 가둔 것은 그들의 사회적 권위를 남용하여 행세를 부렸기 때문입니다.

4) 그런데 그 순간에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서 믿는 자의 수가 많아졌으니 남자의 수가 약 5,000명이나 되었다는 것입니다.

① 사도들의 전도로 복음(말씀)을 들은 자 중에서 믿는 자가 생겼으니 이들이 믿게 된 것은 거듭난 은혜와 함께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요(요3:3, 벧전1:23)

② 또 놀라운 것은 전도자에 대한 핍박이 심하고 그들이 갇히는 것을 보면서도 믿는 자가 많이 생겼으니 믿음의 역사는 핍박이나 환경에 구애받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남자의 수만 5,000명을 헤아린 것은 남존여비의 생활의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마15:38). 여기에 여자의 수까지 포함하면 믿은 사람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이 전도 열매는 최초의 전도사역에 성령의 충만함이 있었고, 또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백성들이 많은 때를 만났기 때문에 그런 결과를 얻은 것입니다.

2. 핍박자들이 모여 권세의 출처를 물음에 대하여(5-7절)

1) 이튿날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으니(5절) 여기의 관원은 공회원 또는 관직에 있는자요(요3:1, 막15:43), 장로는 신약의 교회에서 세운 장로가 아닌 구약시대의 전통에 의한 장로로써(창50:7, 수8:33) 사회의 유지에 해당하고, 재판권을 이행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룻4:2).

2) 그 장소에는 (이미 은퇴한) 대제사장인 안나스와 그의 사위요, 젊은 대제사장인 가야바와 그 문중들, 그리고 신분을 알기 어려운 요한과 알렉산더도 함께 하였으니(6절) 이들은 다 재판에 관여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3) 그들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너희가 무슨 권세로 또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앉은뱅이를 일으킨 일)을 행하였느냐?”고 질문하였으니(7절) 그 질문은 당연한 것입니다. 비상한 능력의 출처를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우리 주변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사건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어떤이가 믿음을 앞세워 안수를 하면 뜨거움을 느끼며 병의 차도가 있다고 하는데 그 능력이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하나님의 능력은 의심할 바가 없겠지만 기압술을 발휘하여서도 그런 능력이 나타나는 것이 사실이요, 또 방언이란 이름으로 이상한 소리를 나타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방 종교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일이기 때문에 바른 분별이 필요한 것입니다. 또 어떤이가 안수를 하면 안수 받은 자가 어떤 충격에 의하여 뒤로 자빠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거룩하신 성령님은 깨닫게 하시고 참회하게 하시며 병을 고쳐주실 것인데 왜 뒤로 넘어지게 하시겠는가? 하는데서도 상당한 분별이 요구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신자나 불신자나 능력의 출처를 알아야함은 당연한 것입니다.

3. 핍박자들의 질문에 대답한 말씀(8-10절).

1) 이 대답은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말씀하였습니다(8절).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말하였다”는 뜻은 그 대답의 진리성과 도덕성이 완벽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베드로는 질문의 핵심이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과 “구원을 얻게한 일”이라고 전제하였으니 착한 일은 병을 고쳐준 일이요, 구원을 얻게한 일은 죄에서 건짐을 받고 영생 얻게 하신 일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여기에 “구원 얻게한 일”을 착한 일에 포함시키지 않는 이유는 도덕적 선행을 착한 일로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3) 그 병인을 강건하게 만들어 그들 앞에 세우신 이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으나 하나님께로부터 살림을 받은 나사렛 사람 예수그리스도가 하신 일이라고 한 것입니다.

① 이 말씀에서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적 사실을 증언하였고

② 예수그리스도가 나사렛에서 자라난 역사적인 인물임과

③ 그가 바로 병인을 낫게하고 강건케 하여 대중 앞에 서게 하셨다 하므로 능력을 나타내신 분은 예수님이요, 또 병나음이 완벽함을 증거한 것입니다. 선한이는 한 분 예수님뿐이요(마19:17), 권능은 하나님께만 속한 것이므로(욥12:13, 시62:11) 모든 선한 일과 구원의 은총이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분명히 증거한 것입니다.

4. 또 베드로는 중요한 진리 두가지를 밝혔으니(11-12절)

하나는 예수님을 메시야되게 하신 하나님의 섭리요, 또 한가지는 예수님만이 유일한 구세주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

1)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다”는 말씀은 이미 마21:42에서 설명드린대로 비유적인 말씀입니다. 건축자들이 어떤 돌을 자기들의 용도에 써 보려 했으나 그들의 기술 부족으로 적용할 수 없게 되자 버렸는데 이 버려진 돌을 기술 있는 건축자가 더 요긴한 모퉁이의 머릿돌로 사용하였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비유는 이미 시118:22에서 다윗이 예언한 말씀으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불필요한 인간으로 생각하여 십자가에 못박아 아까움 없이 버렸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버림당한 예수님과 그의 죽으심을 택한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는 제물로 받으시고 요긴한 구원의 중보자로 세우셨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예수님만이 구원의 유일한 중보자라고 증언한 것입니다(12절). 그 이유는 ①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거니와 ② 하나님의 외아들로서 대속의 십자가를 지신분도 예수님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정통적 신앙의 성도들은 천하의 역사중에 구원자 되신 분은 예수님 한 분인줄로만 믿는 것입니다.

3) 그런데 현실 기독교사상 중에는 종교 다원주의란 것이 유포되고 있습니다. 종교 다원주의의 주장은 하나님이 여러 방도로 구원하시는데 기독교는 기독교식으로 구원하여 천국에 보내고, 불교는 불교식으로 구원하여 행복을 주고, 또 다른 종교는 그 종교의 특색있는 원리로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자도 아무나 될 수 없거니와 구원의 개념 자체도 의미가 다른 것을 무조건 종교통합으로 일치시켜 보려는 자들의 억측일 따름입니다. 이런 잘못된 주장에 현혹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런 면에서 성도는 다른 종교의 특색에 대하여 관심이나 매력을 느끼면 안됩니다. 예수님만 구원자가 되시는 이유는 그분만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시는 중보사역을 하셨고, 또 그 분만이 하나님이 중보자로 세우신 하나님의 독생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받으셔야 할 중요한 내용은 ① 핍박 중에도 전도 열매는 있었다는 사실과 ② 사랑이 핍절되거나 평안이 없어도 영적 은혜를 받음에는 지장이 없음과 ③ 어떤 권능이던지 권능의 출처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중요하며 ④ 불신앙은 진리(예수님)의 대적행위일지라도 돌이켜 예수님을 영접하면 충분한 회개가 되는 것이요 ⑤ 죄사함과 생명과 영생의 구세주는 오직 예수님뿐이므로 예수님을 알고 만나게 된 자만 구원을 받게 되는 것을 확실히 알게 해 주신 것입니다.

제 11 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음 (행 4:13-22)

 

본문 앞부분의 말씀에서는 베드로와 요한의 담대한 증언이 있었고, 본문에서는 ① 공회원(재판하는 사람들)이 사도들의 비범함과 병나은 자의 확실함을 알고(13-16절) ② 예수의 이름으로 증언하는 일을 금지시켰으나(17-18절) ③ 두 사도가 “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더 옳다”하며 항거하니까(19-20절) ④ 관원(공회원)들이 백성들을 의식하여 그들을 그대로 놓아줌으로써 이 사실을 본 모든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내용입니다(21-22절).

따라서 이 말씀에서는 전도자들이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는 담대함을 보여 주셨기로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음”이란 제목을 정한 것입니다.

1. 공회원들이 확인한 사실들(13-16절)

1) 공회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사실에 입각한 말은 기탄없이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증언하는 것외에도 성령의 충만함으로 생명력 넘치는 용기가 있었습니다.

2) 핍박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을 본래 학문없는 무식한 범인으로 예측했었지만 그들의 담대함과 말하는 태도로 볼때 범인같지 않음을 깨달았으니 ① 여기에서 학문의 수련이 없는 사람이라도 성령의 충만을 받으면 인격의 성숙함을 이루어 범인같지 않게 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② 또 범인이란 뜻은 “이디오타이(ίδιϖται)”로서 전문가가 아닌 사람을 의미하는데, 그 당시 사도들은 어떤 학문을 연수한 사람들은 아니지만 전도인 다운 전문가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3) 또 병나은 사람이 두 사도들과 함께 섰으므로 그들의 손길을 통하여 능력이 나타난 것을 부인할 수 없게 되었으며(14절)

4) 그 사실(앉은뱅이가 일어난 사실)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미 알려졌기 때문에 부인할 수도 없게 된 것을 확인한 것입니다(16절). 이 사실을 확인할 때 사도들을 공회에서 나가게 한 후 그들끼리 의논하여 확인을 하였은즉 더욱 확실하게 된 것입니다.

2. 그래서 그 공회원들이 어떤 조치를 취하였습니까(17-18절)?

1) 그들은 이 사실이 민간(일반백성들)에게 더 퍼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도들을 위협하고 다시는 예수의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할 것을 결의한 후

2) 사도들을 공회석상에 다시 불러 놓고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엄히 경계한 것입니다. 따라서 아주 강도 높게 복음전파를 금지시킨 것입니다.

3. 그러나 두 사도는 강하게 대항하였으니(19-20절) 그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1)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사람의 말)을 듣는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옳기 때문이요(19절)

2) 자신들이 보고들은 역사적 사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었으니(20절) 이 대답에서 사도들은 상대방에게 스스로의 양심적 판단을 촉구하였음은 물론,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엄위하다는 사실과 역사적 진실은 어떤 핍박이나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알려져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준 것입니다. 여기에서 사도들이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하였는데 본 것은 예수님의 부활사실이요, 들은 것은 예수님의 분부하신 말씀(행1:8)인 복음전파의 부탁입니다.

3) 성도에게는 반드시 핍박을 가볍게 따돌릴 수 있는 신앙의 확신과 담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신앙의 확신은 진리에 근거한 믿음이고, 담력은 자신의 순결과 성령님의 은혜에 의한 사명의식입니다. 이것으로써 핍박을 견디고 대항하여야 합니다.

4. 핍박에 항거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21-22절)?

1) 관원들이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하였습니다. 이는 그들이 벌을 주고 싶었지만 ① 죄를 찾을 수 없고 ② 모든 사람들(백성들)이 그 된 일(능력 나타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사도들을 우러러 존경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 그래서 위협만 하고 놓아주었으니, 이 위협이란 부당한 공갈입니다.

3) 그 당시 병나은 사람은 40여세나 된 사람이기 때문에(22절) 그가 나면서 앉은뱅이된 후(행3:2) 40여년을 그렇게 살았은즉, 그 고통도 대단하였겠지만 그보다도 하나님의 병고쳐 주신 은혜를 확실하게 증거할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확실한 신앙은 사실에 근거하고 사실에 근거한 신앙은 흔들리지 않으며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을 때 핍박을 이길 수 있고, 핍박을 이기는 신앙이 있을 때 복음이 더 밝아지며 예수님이 존귀하여지고 하나님께 더 큰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입니다.

제 12 과 기독교의 모범적 출발 (행 4:23-37)

 

이 말씀은 사도들이 핍박자들의 손에서 풀려난 후 다른 동류들과 함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기도한 내용이 23절∼30절까지 기록되었고, 또 31절∼37절에서는 기도의 응답으로 큰 은혜를 힘입어 기독교적 신앙의 새 출발을 시도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제목을 “기독교의 모범적 출발”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핍박에서 풀려난 후 사도들이 기도한 내용(23∼30절)

1) 구류 당하였다가 놓임을 받은 베드로와 요한은(4:3,15절) 동류들(다른 사도들)에게 가서 그 사실을 고하였습니다(23절).

2) 이 말을 들은 동류들은 일심으로 소리를 높여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과 간구로 기도하였습니다(24절).

① 그들은 하나님께 기도하면서 하나님은 대주재시요,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이라 하였고(24절)

② 이미 성령님께서 “하나님의 종인 다윗의 입을 의탁하여 예언하게 하신 말씀을 이루시는 분이라”하였으니(25∼26절)

㉠ 다윗이 기록한 예언은 시2:1-2의 말씀으로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는고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26절)하셨는데, 그 예언의 당사자가 바로 예수님이란 뜻입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열방이 분노하고,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이 함께 모여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대적하지만 결국 그들의 목적은 허사로 돌아갈 것임을 예언하셨는데, 그 예언대로 사탄이 예수님을 죽게하였으나 하나님이 그의 죽으심을 속죄의 제물로 받으시고 다시 살리심으로 사탄은 패하고 그의 흉계는 허사가 되고 만 것입니다.

㉡ 사탄은 헤롯왕(갈릴리 분봉왕; 눅23:6∼12)과 유대 총독 빌라도와(마27:23∼24) 이방인들인 로마사람들(군병들)과 또 이스라엘 백성들(고발자들)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님을 거스려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27절).

㉢ 이 말씀 중의 “기름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란 뜻은 하나님이 예수님에게 이미 은혜를 풍성하게 주셔서(요1:16) 주와 그리스도(구원자)가 되게 하신 것이고 악한자들은 거룩한 성에 모여 예수님의 뜻을 대적하려 하지만(28절) 하나님의 뜻하신 구원의 경륜을 이루게 해 달라고 간구하게 된 것입니다.

③ 따라서 그 간구의 내용은

㉠ 핍박자들의 위협을 하감하옵시고

㉡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며

㉢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고 기도한 것입니다(29∼30절).

2. 이때에 기도의 응답이 어떻게 나타났습니까?(31∼37절)

1) 빌기를 다하였을 때 모인 곳이 진동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기도응답의 징표를 나타내 주셨음이요(31절)

2) 무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그들이 간구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하게 전하게 된 것입니다(31절). 성령충만의 표시가 하나님의 말씀을 담대히 증언하는 것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3)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많은 성도가 한자리에 있었으나, 서로 뜻이 다를 수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고 말씀대로 복종하며 서로 사랑하고 자신을 부정하는 입장에서라면 대립되는 상이한 주장이 나올 수 없을 것입니다(32절).

4)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의 재물이던 것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었으니(32절), 이는 물질을 초월한 신앙의 경지에 들어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런 일이 가능할 것인가?를 상상해 보십시요.

①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들이 죄인들을 구원해 주시기 위하여 “부요하신 자로서 가난하게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고(고후8:9)

② 가난한 자들에 대한 주님의 특별한 사랑을 생각한다면(마11:5) 이웃을 자기 몸처럼 사랑하는 정신에서 쉽게 그들과 같은 수준으로 살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그 당시는 의식주 외에 물질을 필요로 하는 큰 부담이 없이 살던 시대임을 감안할 때 더욱 가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③ 능력을 행한 베드로가 물질을 포기하고(마4:22) 이미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실과

④ 예수님께서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 어렵다”(마19:23)하시고 영생 얻기를 갈망한 어떤 부자 청년에게도 “네가 온전하고자 할진대 가서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을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좇으라”(마19:21) 하신 말씀을 상기하였을 것이요

⑤ 부자가 재산을 헌납하는 것은 더 큰 은혜를 받아야 가능하겠지만 본래 가난한 사람들은 은혜를 받고 유무상통하기가 어렵지 않았을 것입니다.

5) 기도의 응답은 신앙부흥으로 발전하였습니다(33∼37절).

①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였고

② 큰 무리가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한사람도 은혜의 핍절을 느낀 자가 없었으며

③ 밭과 집 있는 자가 그것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 발 앞에 헌납하였고

④ 사도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주었으며(행6:1-2)

⑤ 구부로에서 난 레위족 요셉은 사도들이 “바나바”(권위자)라고 일컬은 자로서 그도 밭을 팔아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고 하였습니다.

3. 이상의 말씀에서 권능 받은 사도들이 어떤 결과를 나타냈는가 하면

1)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함에 담대하였고

2) 부활과 영생의 소망을 믿는 성도들이 다 은혜를 받아 은혜의 핍절을 느낀 자가 없었으니 “은혜의 핍절이 없었다”함은 만족과 기쁨과 소망이 충만하였음을 뜻하며 이렇게 핍절한 자가 한사람도 없었음이 그 시대에 은혜 받은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행2:4).

3) 유무상통의 은헤를 받아 재물을 헌납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때에

① 그 재물의 값을 높이 들어 바치지 않고 사도들의 발 앞에 놓았다 함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깨우쳐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는 사도들 앞에 “강대상이 없었다”는 점이요, 또 한가지는 재물을 바치는 성도들이 겸손하게 드린 것임을 생각하게 하는 것입니다.

② 구부로에서 출생한 바나바도 땅을 팔아 헌납하였으니 이 바나바는 유력한 권위자로서 밭을 팔아 헌납한 것 외에도 회개한 사울을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천거하여 소개하였고(행9:26), 안디옥 교회를 시찰, 교육하였으며(행11:20,25∼26), 바울과 선교에 동행하기도 하였고(행13:2∼14), 그도 사도란 호칭을 받았습니다(행13:43).

③ “구부로”는 수리아 지역과 길리기아 지역 사이, 즉 지중해 동북부에 있는 큰 섬으로 “싸이프러스(Syprus)”라고도 합니다. 그곳 출신은 레위족 “바나바”뿐만 아니라 “나손”이란 제자도 있었습니다(행21:16). 사울이 바울로 개명하고 처음 선교사로 파송되어 나갈 때 “실루기아”에서 배를 타고 최초로 도착한 곳이 바로 구부로 섬이었습니다(행13:4).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기독교의 모범적 출발”을 보여 주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이 ①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깨닫고(24∼26절) ② 기도를 통하여 성령의 충만을 힘입었으며(29,31절) ③ 거스리는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④ 십자가와 부활을 담대히 전파하였으며 ⑤ 물질을 초월하여 서로 봉사하고 ⑥ 바나바의 이름의 뜻처럼 서로 권면하고, 위로하는 일을 잘한 것이었으니, 저희들도 이런 모범을 본받도록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3 과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심 (행 5:1-11)

 

위의 본문 말씀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헌금에 시험이 들어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은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심판하심”이라고 정하였습니다(심판하심을 응징하심으로 이해하셔도 됨).

1.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자기들 소유의 땅을 팔아(4절) 그 땅값의 일부를 감춘 다음, 일부의 값만을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그들이 “헌금을 작정하였다”는 말씀이 본문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문책당한 성격으로 볼 때 그들은 “자기들 소유의 땅을 팔아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약속을 한 일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 이유는 8절 말씀에서 “땅값이 이것 뿐이냐?”고 질문한 내용이 다 바쳐야 할 것을 적게 바친 것에 대한 책망이기 때문입니다.

2.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어떻게 헌금을 작정하였을까요?

1)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범적 헌납에 자신도 그렇게 해보고자 하는 충동을 받았을 것입니다. 행2:44-45과 행4:32-37에서 유무상통의 만족함과 바나바 등이 밭을 팔아드림을 명예로운 일로 평가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2) 헌금은 상당한 근거에 의하여 결정되어져야 합니다. 따라서 많은 금액의 헌금을 할 때는 더욱 기도하면서 헌금명목의 타당성을 확신하고, 헌금액의 정도를 합리적으로 정하고 또 헌금을 한 후에 있을 듯한 유혹에 대하여서도 미리 예방책을 확보하여야 합니다. ① 헌금명목의 타당성이란 반드시 하나님이 원하시고 영광 받으실 목적에 대한 것이요 ② 헌금의 분량은 자기의 신앙(행4:34-37)과 형편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어야 하며 ③ 헌금한 후에 있을 유혹이란 자신의 후회, 또는 주위 사람들의 비난이나 시기로 받는 괴로움 등일 것입니다. 이런 사실들을 미리 감안한 신앙적 헌금은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나님께 드린 것일뿐 다른 목적이나 이권 개입이 없으므로 후회하지 않음은 물론 계속적인 만족과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이같은 신앙에 근거하지 않은 연고로 시험을 받았으니 막상 땅을 팔아 그 전체를 드리고자 하였을 때 사단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3절).

이 사건의 형편은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성도가 순간적인 충동으로 많은 헌금을 작정하고, 그 땅을 팔아서 땅값 전체를 드리려고 하였을 때 물질의 미련과 탐심의 유혹을 받은 것입니다. “자신에게도 돈이 필요하지 않느냐?”, “일부만 드려도 다 낸줄로 알 것이 아니냐?”, “적당하게 드리고 넘어가면 그만이다”하는 유혹을 물리치지 못한 것입니다. 물욕에 의한 인색함이 하나님께 드릴 헌금에도 적용이 된 것입니다.

3. 유혹을 받고 결심한 부부는 남편 “아나니아”로 하여금 일부의 금액만 사도들의 발 앞에 드린 것입니다(2절). 이때에 베드로는

1)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3절) 하면서 아나니아의 마음에 사단이 가득한 것과 그가 성령님을 속인 것과 땅값 얼마를 감추었다는 사실을 성령님의 특별한 영감을 통하여 이 사실을 들어내어 책망한 것입니다(행8:29).

2) 또 “땅이 그대로 있을 때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4절) 하였으니, 그는 평소에 사도들 앞에서 헌금을 하고 싶어도 “땅으로 있기 때문에 하기 어렵다”는 핑계를 한 것으로 짐작이 되는 것입니다. 교회 성도들 중에는 자기의 재산이 부동산으로 있는 것을 핑계하여 헌금의 성의를 피하는 경우가 있지만 이런 경우에 “땅이 그대로 있을 때 네 땅이 아니냐?”는 말씀을 유의하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또 판 후에는 더욱 헌금하기 쉬운 여건이므로 편리하게 헌금할 수 있음을 말씀하셨습니다.

3) 필자는 청년 때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하신 말씀을 “네 아버지가 핍박을 할 때는 네 임의로 못했으나 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 없더냐”는 말씀으로 감화를 받고 성수주일의 결단을 내린 일이 있었습니다.

이 사실은 제 나이 25세 때 부친이 별세하셨는데 금요일 새벽에 돌아가셨으므로 주일날 3일 장례를 치러야 좋을 입장이었습니다. 또 그 시기는 시골에서 모를 내는 가장 바쁜 때였습니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친구들은 3일장을 치러서 순조롭게 하라는 것이요, 또 그분들은 그렇게 하려고 모내는 일정을 잡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본인과 교인들은 주일날 장례하도록 따라갈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4일장을 지낸다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때에 결정권이 본인에게 있었는데 저는 토요일 오후 2시경에 부산에서 집에 도착하여 위의 말씀을 생각하면서 동리 사람들의 비난과 핍박을 무릅쓰고 성수주일의 결단을 내려 그 날로 초라하게 장례를 끝낸 사실이 있었습니다.

성도가 핍박자들 앞에서도 그들의 핍박을 이겨야 하는데 하물며 스스로 결정하는 일까지 유혹을 받아서야 되겠는가하는 것입니다. 성도가 자기 스스로 결단하는 일까지도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여 유혹을 받는다면 크게 연약함을 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4.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4절)고 하였습니다.

1)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한 것은 아나니아의 거짓말을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사도의 안타까운 표현이요

2)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라”함은 “차라리 사람에게 하는 거짓말이 되어 작은 죄로 인정을 받았으면 좋을뻔 하였으나(마12:32, 눅12:10) 그렇지 못함이 퍽 안타까운 일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3) “하나님께로다”함은 하나님을 속였기 때문에 죄가 더 커서 큰 벌을 받아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3절에서는 “성령을 속였다”하였고, 또 9절에서는 “주의 영을 시험하였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과 성령님을 속인 죄”가 확실해졌습니다. 그런데 마12:32에서 “누구든지 말로 성령을 거역하면 이 세상과 오는 세상에도 사하심을 얻지 못하리라”고 하셨으니, 성령님을 속임은 곧 성령님을 거역함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따라서 아나니아는 회개할 기회를 힘입지 못하는 한 벌을 받을 수밖에 없고, 성령님을 거역하였을 때는 성령님의 감동아래 있지 않으므로 회심의 기회를 갖지 못하니까 버려질 가능성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거역하는 자를 권고하실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하시지 않을 수도 있으니 이는 하나님의 주권적 의지에 의함인 것입니다.

5. “아나니아”는 그 말을 듣자 엎드러져 혼이 떠나 죽었습니다(5절). 많은 사람들이 그 일로 인하여 두려워하였고 젊은이들이 그 시신을 즉시 장사하였으니 저주받은 시신을 당일에 장사하는 예는 예수님 경우에도 있었습니다.

1)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는 말씀은 “즉시 죽었다”는 뜻입니다.

2) 문제는 그 떠난 혼이 천국에 갔겠는가 할 때 “성령을 거역함에 대한 죄가 사함받지 못한다”(마12:32)는 말씀을 구원적 의미로 적용한다면 구원에 대하여 희망이 없지만 고전5:5의 “육체는 멸하나 영혼은 구원받게 하신다”는 말씀으로 적용할 때는 구원의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인즉 어느 쪽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려운 것입니다.

3) 믿음 밖에서 범한 죄는 믿음이 아니고는 사함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믿음 안에서 범한 죄는 사함받지 못하여도 믿음과 동시에 칭의의 은총을 받았기 때문에 멸망하는 심판을 받지 않으므로 구원을 받습니다. 따라서 믿음 안에서 지은 죄를 사함받지 못하였을 때는 육체적(죽음을 포함)으로 벌을 받으므로 일단락 될 수 있습니다(고전5:5).

4) 그런데 믿음을 가진 성도가 성령을 거역할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을 것입니다. 성도가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지 못하는 것은 성령충만이 미약한데서 오는 연약이요, 거역은 아닙니다. 성령님의 역사를 거역함은 불신앙의 고의적 행동이며, 이런자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6. 3시간쯤 지난 후에 이 사실을 모르고 온 그의 아내 “삽비라”도 같은 거짓말을 하였고,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였다”는 죄목으로 그도 같은 죽음을 당하였으니 “함께 꾀하는 일(범죄공모)과 주의 영을 시험하는 일”이 큰 죄임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여기의 “주의 영을 시험하였다”함은 성도가 복음사역자 앞에서 거짓말을 한 것이고, 그들은 성령님이 이런 사실을 모르실 줄로 여긴 것입니다.

7. 결론적으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헌금으로 받은 시험때문에 망한 사람입니다. 영생 구원문제는 판단하기 어려우나 육신적으로 벌받은 것이 사실이므로 우리는 이런 시험을 받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또 초대교회 당시에 그런 엄격한 일이 있은 것은 은혜와 믿음 생활의 권위를 나타내어 크게 교훈하시기 위함이며, 또 이 사건은 특수한 경우이지만 이와 방불한 심판의 사실이 후시대에 없다고 단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헌금하는데서 시험을 받아 믿음이 떨어진 사람도 많고, 또 헌금을 작정한 후 상당기간 내지 않다가 “담임목사에게 주었다”고 거짓말하여 담임목사로 하여금 변상하게 하고 그 후 얼마 못되어 거짓말한 자가 죽고 그의 후손들이 크게 파산당한 사례가 있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아무쪼록 물질로 인하여 범죄하거나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으로 시험에 들지 않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제 14 과 초대교회의 특징 (행 5:12-16)

 

이 본문말씀의 내용은 ① 초대교회 당시에 사도들을 통하여 기적이 나타난 사실과(12,15-16절) ② 그 기적들로 인하여 신앙적 변화를 가져온 사실에 대하여(13-14절) 기록하신 말씀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초대교회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이 특징이 되는 이유는 기적자체가 특수하였고, 또 그 특수한 기적의 영향으로 신앙적 변화의 감화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교회”라는 용어는 바로 앞절(5:11)에서부터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1. 초대교회의 특수한 기적(12,15-16)

1) 이 기적은 “사도들의 손으로 나타났다”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사도들의 손으로”란 뜻은 “사도들에게 주어진 권능에 의하여” 또는 “사도들의 안수에 의하여”(막16:19, 행3:7)란 뜻입니다. 마10:1에서 예수님은 사도들에게 권능을 주셨고, 행4:30에서 사도들은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소서”하고 기도하였으므로 그 기도의 응답이 사실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여기의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한 역사는 바로 성령님의 가시적(체험적) 은혜를 전달하는 형태로도 나타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행8:17,9:17,19:6).

이렇게 사도들의 손으로 병고침의 능력이 전달되고, 또 성령님의 역사가 전달된 것은 그 당시 사도들에게 주셨던 특수한 은사라고 할 수 있으니 그 이유는 그 후시대 사역자들에게는 그러한 은사가 나타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빌 2:27, 딤후 4:20)

2)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하신 말씀에서

① 기적을 힘입은 대상을 민간이라 한 것은 보편적 대상을 의미함이고, 표적과 기사(이적)란 초자연성을 띤 공통적 사건을 의미합니다. 기사와 이적은 능력의 초자연성을 내포한 용어요, “표적”은 능력이 나타난 확실한 증거를 나타낸 용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② 그런 기사가 “많이 되매”하신 것은 하나님의 능력에 의하여 그렇게 나타난 것임을 표현한 것입니다.

3) 기적이 나타난 형편은 16절에서 설명되었으니, 예루살렘 근읍의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은 것입니다. 15절에서는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위에 누이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힐까 바랐다”고 하였으니, 이는 표적과 기사가 사도들을 통하여(특히 베드로) 나타난 것을 확인한 사람들이 베드로를 신처럼 여긴 나머지 그 그림자가 지나가는 것까지 신비하게 여기며 은혜를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에서는 “그림자가 지나갈 때 기적이 나타났다”고 증언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행19:11-12에 보시면 “바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병자에게 얹어 병과 악귀를 떠나게 한 사실”이 있었으므로 베드로의 그림자를 통한 이적의 가능성도 충분히 예측할 수 있습니다. 본문 마지막 부분의 “다 나음을 얻으니라”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은 그 원문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여 “(질병이)어떤 종류이든지 고침이 되더라, 모두다”라는 뜻으로 “모두다”란 말을 끝에 붙인 것이 강한 역설체이기 때문에 “못 고친 병이 없었음을 강조하였다”고 하였습니다(사도행전 주석 123P).

2. 이런 이적들과 관련하여 나타난 신앙적 변화가 어떠하였습니까(12,13-14)?

1) 일단 사람들의 회집이 성대하였습니다.

병자를 데리고 온 사람(16절), 병고침의 기적에 놀라 관심을 갖고 은혜를 받으러 온 사람등이 솔로몬 행각에 모였고(12절),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믿고 주께로 나왔습니다. 의심하는 자(마28:17), 병을 고치려는 자들(16절)도 있었겠지만 그 중에 믿고 주께로 나온 자가 많은 것이 사실인만큼 기적은 신앙확신의 큰 영향(신앙발생의 직접 원인은 거듭남)을 주었을 것입니다.

2) “믿는 사람들이 다 마음을 같이 하였다”고 하신 것입니다(12절). 성도가 마음을 같이하는 것은 은헤 받는 일과(행1:14) 교회발전에 중요함으로 바울사도와 베드로도 이 사실을 강조하였습니다(빌2:2, 벧전3:8). 교회의 모든 성도는 예수님의 마음에 따라가고(빌2:5) 그와 비슷하게 하려면 교역자의 마음에라도 가까이 하여야만 할 것입니다.

3) 두려운 마음을 가졌으니 이 말씀이 바로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었다”(13절)는 말씀입니다. “그 나머지”란 복음의 말씀 또는 사도들과 화합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능력과 교회의 권위에 눌려 분별있는 처신을 한 것입니다. 이들은 기적을 보았으면서도 쉽게 믿음이 발생하지 않는 상태에서 조용히 떠나는 자들이었을 것입니다.

4)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이 사실은 행2:47에서도 나타난 일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나 백성의 칭송을 받을 때 발전이 있을 것입니다. 이상의 네가지 결과는 현실교회에도 꼭 있어야 할 일들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 나타난 기적이 특수하였기 때문에 본 강론에서 초대교회의 특징으로 설명한 것입니다.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그 당시에 나타난 기적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요1:1)의 권위에 굴복되어 초대교회와 같은 특수한 상황을 정의와 사랑의 실천으로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3. 끝으로 중요한 것은 신약시대의 성도들의 기적관에 대한 것입니다. 필자는 이 내용에 대하여 박윤선 목사님이 집필하신 사도행전 주석(123P)의 내용을 그대로 지면에 실어 드리오니 주밀하게 읽으시고 확신하시기를 바랍니다.

 

박윤선 목사 사도행전 주석(p123)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표적”(σημεία)과 “기사”(τέρρατα)는 기적에 대한 두 가지 명칭이다. “표적”은 그 기적의 영적 의미(그것을 행하신 이가 그리스도이심을 암시함)를 생각게 하고, “기사”는 그것의 놀라움을 생각게 하는 명칭이다. 초대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나타내셔서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믿도록 증거하셨다(히 2:4). 다시 말하면 사도들로 말미암아 기적이 나타나므로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전도의 절대적 진실성이 증명되었다(막 16:17-18). 이와 같은 복음의 권위와 진실성을 아는 자들은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다. 엄밀한 의미에서 이적은 사도들에게 국한된 은사이고, 일반 신자들에게 속한 것은 아니다.

여기서 필자인 나의 입장에 대하여 몇 마디 말해 둔다. 첫째, 일반 신자들이나 일반 교역자들 중에 누가 행하였다고 하는 이적들의 확실성 여부에 대하여 나는 말하려 하지 않는다. 그 이유는 그것은 부속문제이고, 다만 그들의 교훈과 사상이 성경적인가 함이 주요 문제이기 때문이다. 만일 이적을 행한 이의 교훈과 사상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그것과 긴밀히 관계된 이적이란 것도 기독교 신앙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비록 어떤 놀라운 일이라 할지라도 그것이 성경적이 아니라면 신앙자는 그것을 도외시 한다. 그 이유는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요 우리의 유일한 신앙 기준이기 때문이다. 둘째, 나는 계시, 곧 정경 성경의 종결성을 믿으며 이 계시와 수반한 사도적 이적(사도들의 표를 보여주는 이적)이 그 시대와 함께 종결된 줄 안다. 그러나 보통 이적, 혹은 특별 섭리(초자연적으로 되는 이적스러운 일이면서 성경 진리와 부합하는 성격이 있는 것)가 오늘날 교회 시대에도 일어남을, 나는 믿는다. 셋째, 나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난관에 대하여 반드시 이적으로만 해결해 주시기를 원치 아니하신다는 것을 믿는다. 그 이유는 우리에게 난관이 오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는 필요성이 많기 때문이다. 이 죄악 세상에는 죄악의 보응으로 난관이 있어야 합당하다. 넷째, 나는 난관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의 취지는 반드시 하나님께서 어떤 기적적인 간섭으로 도와주시기를 기대함은 아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방법은, 일반 섭리를 경유하심이 이적보다 못하지 않게 효과적이고 우리에게 유익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야고보서에 말하기를 “너희 중에 병든 자가 있느냐 저는 교회의 장로들을 청할 것이요 그들은 주의 이름으로 기름을 바르며 위하여 기도할지니라 믿음의 기도는 병든 자를 구원하리니 주께서 저를 일으키시리라 혹시 죄를 범하였을지라도 사하심을 얻으리라”고 하였다(약 5:14-15). 야고보의 이 권면은 반드시 이적적 치료를 기구하라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Warfield). 또 야고보는 신자들을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였는데(약 1:5), 이것도 기적적으로 나타나는 어떤 돌연한 계시로 말미암아 지혜를 얻기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지혜를 주시는 방법은 돌연한 계시보다도 일반적 섭리(독서나 학습이나 연구를 무시하지 않는 자연적 방법)를 통하여 되게 하시는 것이 많다. 다섯째, 나는 오늘날 나의 구원을 성취함에 있어서 영원 전에 되어 있는 하나님의 예택과 나를 구속하시기 위하여 단번에 죽으심으로 나의 구원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나로 하여금 그를 믿도록 하시는 성령님과 그의 기적스러운 특별 섭리와 그가 나에게 주신 성경(단번에 주신 믿음의 도)이 있는 것으로 만족한다. 성경은 진리와 비진리를 분별하는 등불과 같은 말씀이며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생명의 말씀인데 나의 영혼을 먹여 살리는 “도의 젖”이다(벧전 2:2).

제 15 과 사도들이 받은 두번째 핍박 (행 5:17-42)

 

이 본문 말씀을 살피면 전체의 내용이 “사도들의 전도사역에 대한 복음반대자들의 핍박 기사”라 할 수 있습니다. 첫번째 핍박기사는 행4:1-3,16-21에 기록되었고, 이 본문이 두번째 핍박기사에 해당합니다. 또 이 기사에 나타난 핍박자들은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당파가 직접 가두는 일과 재판에 회부하는 일을 하였고(17,21절),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인 장로들은 재판관으로서 심문을 하였으며 성전 맡은자와 관속들은 피의자를 호송하는 일을 하였습니다(22,26절).

그런데 감옥에 갇힌 사도들을 천사가 밤에 초자연적 능력으로 구출한 후 “성전에 서서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19-20절)하므로 구출된 사도들이 그대로 시행할 때에(21절) 고소자들과 재판관들은 사도들을 심문하고 재판하기 위하여 관원들에게 호송을 명하였던바 옥문은 그대로 잠겨 있으나 사람들이 없어진 것을 알게 되었고 또 그후에 출옥당한 사람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 성전 맡은자와 관속들로 하여금 그들을 잡아오게 하였으나 백성들의 반발을 우려하여 강제(강압적)로 취급하지 못하던 중 바리새인이요, 교법사인 “가말리엘”이 사리에 맞는 말로 핍박자들을 설득하므로 사도들을 채찍질만하고 전도를 금지시킨 후 놓아 주었다하였고(40절) 놓임받은 사도들은 “여전히 기뻐하면서 전도와 교육을 쉬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41-42절). 이상의 내용은 요약된 줄거리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은 ① 사도들이 받은 핍박과 하나님의 구출(17-29절) ② 핍박자들의 재판과 사도들의 증언(21-32절) ③ 가말리엘의 설득과 방면(33-40절) ④ 방면된 사도들의 태도(41-42절)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1. 사도들이 받은 핍박과 하나님의 구출에 대하여(17-20절)

1) 사도들을 핍박한 사람들은 대제사장과 그들과 함께한 사두개 당파였습니다(17절).

① 대제사장은 제사장들의 대표자로서 구약시대의 아론의 직분계승자입니다(출28:1-5 29:29,30:10,30, 레8:12,13,21:10-12). 대제사장은 그리스도 즉 중보자의 모형자로서(히4:14) 선민 전체를 위한 속죄제를 1년 1차 지성소에 들어가 드리는 특권과(출30:10, 레9:7) 계시를 받거나 재판하는 특권(출28:29-30절)이 있었고 이 직임은 세습되었습니다(출8:43, 민3:1-4,10).

② 사두개 당파란 구약적인 종교의 일파로서 다윗 당시의 제사장인 사독의 이름을 따서 명칭한 것으로 예측하며 주전 350년경부터 시작되어 주전 142년 하스몬 시대에 성행하였고, 주후 70년 예루살렘 멸망때까지 존속되었다고 합니다. 또 이들은 중산층계급으로 다수 구성되어 종교적, 사회적 권위를 과시하였는바 모세 5경만을 구속력 있는 율법으로 인정하였고 부활과 영혼과 천사 및 내세의 실재를 부인하는 특징이 있었다고 합니다(마16:1, 행23:8).

2) 그들이 사도들을 핍박한 이유는 “다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으니 이들은 다른 종교의 발전을 시기한 것입니다. 시기는 미움의 열매요, 살인의 준비단계가 아닐까요? 선한 일을 목표하는 종교가 다른 사람을 시기하는 것은 잘못된 일이요, 오직 자기종교의 특성을 선전하는 일과 사랑으로만 대결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그들은 핍박의 방법으로 사도들을 잡아 옥에 가두었습니다(18절). 핍박자들이 사도들을 옥에 가둘 수 있는 권세는 그들의 종교적 세력과 정권에 유착된 배려로서 얻어진 권세일 것입니다.

4) 그러나 주님의 사자(천사)를 통한 하나님의 구출 방법은 간단하였습니다. 이는 천사들이 초자연적 권능을 발동하여 기적으로 잠근 문을 열고 사도들을 끌어낸 다음 문을 본래대로 잠그고 성전에서 복음전할 것을 명하고 떠난 것입니다(19,20절). 옥문이 견고한 만큼 파숫군들이 없었는지도 모르며 있었다 하더라도 밤에 기적으로 일어난 사실이기 때문에 전혀 모를 수도 있는 것입니다(행12:10). 하나님은 위기에 처한 백성들을 구출하시되 이 사건처럼 또는 다니엘을 풀무불에서 건지신 것처럼(단3:27) 비상적 섭리로 하신 사실과 구덩이에 빠진 요셉이나(창37:27) 감옥에 갇힌 요셉(창41:39-44) 또 갈대상자에 떠 있는 모세처럼(출2:5) 일반 섭리로 구출하신 사실도 있는 것입니다.

2. 핍박자들의 재판과 사도들의 증언에 대하여(21-32절)

1) 사도들이 하나님의 사자의 분부대로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칠 때에 핍박자들은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종교재판을 하기 위하여 갇힌 사도들을 잡아오게 하였습니다(21절). 여기의 공회는 정부계통의 재판정이 아니고 종교재판정이었으니 이는 대제사장이 심문한 것과(27절) 거기에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인 장로들이 합석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2) 그들은 관속들을 시켜서 사도들을 호송해 오게 하였으나 옥문이 그대로 잠긴채 사람만 없어진 것을 보고 받았고(23절) 이로 인하여 성전 맡은자(제사장과 서기관과 레위인 등으로 반차를 정하여 성전관리를 하게 하였음)와 제사장들이 의혹(의문이 풀리지 않으므로 망설이는 태도)할 때에 “그 사도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라”는 두번째 보고를 받고(24-25절) 다시 잡아왔지만 백성들이 자신들을 돌로 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강제로 괴롭게 하지 못하였으니 이는 무법과 폭력을 마구 쓰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3) 대제사장은 ①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행4:18)고 이미 엄금하였는데 왜 위반하였느냐 하였고 ② “너희가 너희의 종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한다”하였으며 또 ③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 돌리려한다”하였으니, 첫째 질문은 1차 핍박시에 엄히 경계한 말이요(행4:18), 두번째 한 말은 복음종교의 확장으로 예루살렘에 있는 자기들의 종교가 쇠약하여 짐을 마땅치 않게 여긴 말이며 셋째로 한 말은 예수님을 죽인 죄책(이 사람의 피)을 왜 우리에게 떠넘기느냐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의인 예수님을 죽인자들이기 때문에(행3:14) 당연히 그 말을 들어야 하겠지만 예수님을 의인으로 믿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항의를 한 것입니다.

4) 여기에 대하여 사도들은 어떻게 대답하였습니까?(29-32절)

① 베드로와 사도들은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하였고(29절)

② 너희가 나무(십자가)에 달아 죽인 예수님을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셨고(30절)

③ 이스라엘 백성들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하나님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오른손으로 힘있게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으니(31절)

④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님도 역시 같은 증거의 역할을 하셨다고 하였습니다(32절). 성도는 사람의 말이 정당하여도 먼저 하나님의 명령을 복종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사람의 부당한 명령은 지킬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이란 대답은 예수님을 핍박한 죄에 대하여 분명하게 지적한 말이며 “살리셨다”함은 예수님의 부활을 또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음”은 예수님이 구세주와 심판주(만유의 주)되심을 증언함이요, “이스라엘 백성들로 회개케 하사”함은 그들의 회개를 촉구한 말이었으니 역시 메시야적 구원의 복음을 증언한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님도 그 일에 증명자가 되신 것은 그들의 복음사역에 성령님이 능력으로 역사하신 일이 바로 그 증거라고 한 것입니다(히2:4). 또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이란 말씀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즉 순종이 성령충만의 방법이란 뜻입니다.

3. 이때에 “가말리엘”의 신중한 처리를 하자는 설득이 있었습니다(33-34절).

1) “가말리엘”은 바리새 당파 사람이요, 교법사(율법선생)이며 모든 백성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34절).

2) 핍박자들이 사도들의 대답을 듣고 대노하여 사도들을 없애고자 할 때에 “가말리엘”은 피의자인 사도들을 잠시 밖으로 퇴정시키게 하고 재판관들에게 말하였습니다.

3) 이 사건을 신중하게 처리해야 할 이유는(35절)

① 과거에 “드다”가 일어나서 스스로 자랑할 때 약 400명이 따르더니 그가 죽은 후 그들이 다 흩어졌고

② 그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사람 “유다”가 백성을 꾀어 좇게 하였지만 그도 망한즉 다 흩어졌으니 이 사람들에 대한 것도 상관하지 않음이 좋다. 만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난 것이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다면 무너뜨릴 수도 없겠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하였을 때

③ 저희가 그 말을 옳게 여겨 불합리한 재판을 피하고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만 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전도를 금지 시킨 후 방면한 것입니다. 그들이 정죄도 하기전에 채찍질한 것은 잘못입니다. 또 “드다”란 인물의 역사는 잘 알기 어려우나 그 당시에 있었던 사건일 것이며 “호적할 때”란 “사도행전 당시와 1세기말에 있었다”는 사실이 요세보 사기에 소개되었다고 합니다. 가말리엘의 설득 논리는 사필귀정(事必歸正), 인과응보(因過應報)에 근거한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이 논리를 사실에 입각하여 말하므로 설득력을 나타낸 것입니다.

4) 저희들도 억울한 일을 당할 때 사필귀정과 인과응보의 때를 기다리는 믿음과 인내와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계14:12).

4. 방면된 사도들은 어떻게 하였습니까(41-42절)?

1) 예수님 이름으로 자신들이 능욕 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겨 기뻐하였으며(41절)

2)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님을 가르치는 교육과 전도를 쉬지 않았다(42절)고 하였습니다.

결론적으로 성도는 진리의 대적자들로부터 핍박을 당할 수 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믿고 기쁨으로 핍박을 감수 할 수 있어야 하며 어느 곳에 있든지 전도와 교육을 쉬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제 16 과 일곱집사를 택하여 세움 (행 6:1-7)

 

본문 말씀은 사도들이 일곱집사를 세워 업무를 분담하므로 복음사역의 효력을 나타낸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살피는 순서를 ① 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1절) ② 집사를 세우는 목적(취지설명; 2-3절) ③ 집사를 세우는 과정(4-6절) ④ 집사를 세워 분담한 결과(7절)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일곱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1절)

1) 핍박에서 풀려난 제자들의 열심있는 전도로 제자의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

① 이 사실은 예수님이 “제자를 삼아 세례를 주라”(마28:19)는 분부를 이행한 것이었고

② “제자”는 예수님을 배우고 섬기며 예수님의 분부에 무조건 복종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또 좁은 의미로 볼 때 사도, 사도적 사역자, 또는 오늘의 성직자를 의미할 수도 있지만 넓은 의미로 볼 때는 모든 성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마10:1-4, 28:19).

2) 이때에 구제의 불균형으로 원망하는 일이 생겼습니다.

① 성도의 단체에서는 누구에게든지 원망하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원망은 감사와 사랑을 해치는 일이지만 성도들은 합당하게 처리하도록 건의하고 원망은 하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② 그 당시의 원망거리는 구제가 공평하게 이루어지지 않은 일 때문이었습니다. 이 경우에 구제를 못 받은 사람은 구제 받을 권리가 있는 것이 아니므로 원망할 수 없을 것이고, 또 불균형한 구제를 한 사람들은 잘 살펴서 다음 기회에 공평하게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 파의 과부들이 매일 구제에 빠짐으로 히브리파 사람들을 원망하였다고 하였습니다.

③ 당시 구제를 시행한 사람들은 사도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공궤(구제; 재정출납)를 일삼아 하였는데도 이를 공평하게 하지 못하여 원망을 받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구제를 잘 받은 히브리파 과부들도 퍽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④ 여기의 헬라파 유대인이란 헬라에서 살다가 귀향한 유대인들이고 히브리파 사람들은 그 땅에 계속 살던 사람으로 히브리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여기에 거주지 변동의 차이가 있지만 그런 일로 사랑의 조화가 편벽되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⑤ 이는 적은 수의 사도들이 말씀전파와 기도와 공궤를 함께 하다보니 잘 살피지 못하였을 것이고 또 그 당시의 구제가 매일 시행되었다고 하였습니다.

3) 따라서 집사를 세우게 된 동기는 성도들 세계의 원망거리를 없애고 균형있는 봉사(구제)에 힘쓰며 복음사역의 분업을 통하여서 신령한 은혜의 역사를 증진케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 그리하여 사도들은 성도들 앞에서 집사 세움에 대한 취지를 설명하였습니다(2-4절).

1) 사도들은 성도들 세계에 원망이 있음을 계기로 자기들 행사에 대한 반성을 하였습니다. 반성해 보니,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매일 구제하는 일을 일삼아 하였지만 여전히 원망들을 일이 생겨 그보다 더 중요한 사명인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에 소홀한 것을 깨달은 것입니다.

2) 그래서 모든 제자들에게 이 사실을 설명하고, 그 대책으로 사역분담의 대상인 집사를 세우게 된 것입니다.

① 본문에는 집사란 직분 명칭이 없습니다. 그러나 집사란 “디아코노스(διάκονος)”는 일군, 봉사자란 뜻이므로 여기에 해당하는 직분으로 여기는 것입니다.

② 그런데 왜 일곱집사를 택하였을까요? 이것은 일곱수가 완전수라는 인식보다 그 당시 통솔대상의 수효나 업무 범위로 볼 때 그만한 수가 적당할 것으로 예측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③ 그 자격자는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또 칭찬을 받는 사람이라 하였으니 이런 대상은 신령한 은혜생활에 뛰어난 사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거의가 은혜의 핍절함을 느끼지 않을 정도였으므로(행4:34) 예수님의 인격을 닮은 것이나 덕을 세움에 부족한 사람들이 거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은 스데반과 빌립(집사)의 활동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행6:10, 8:29-39).

3) 사도들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3절)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4절)하셨으니 이 말씀은 직임자를 세운 목적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위의 1절 말씀에서 집사를 세우게 된 발상은 백성들의 원망을 안 듣도록 구제를 잘하고 사도들이 몰두하여야 할 기도와 말씀전파에 열중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① 따라서 집사들은 구제와 봉사 및 교회의 재정취급과 살림에 우선하면서 신령한 사명을 도와야 하며

②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에 우선하면서 집사들의 봉사 사업을 감독 지도해야 합니다.

③ 여기에서 분명히 할 것은 교인들의 자치활동을 위한 모금과 하나님께 드린 헌금(재산)을 구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자치활동의 모금은 자치회의 결의로 선한 목적에 사용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성도가 그 사용권을 가진 줄로 알면 안되며 어디까지나 그 사용권은 주님, 사도들, 예수님을 대표하는 복음사역자에게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사역자가 신령한 업무에 지장을 받지 않기 위하여 집사들에게 맡긴 것이므로 이 물질을 취급하는 집사나 제직회는 복음사역자의 의도에 따라 사용되게 하고 또 복음사역자의 감독을 받으며 관리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3. 집사직을 세운 과정에 대하여(5-6절)

1) 사도들이 회중에게 먼저 취지를 설명하였고 큰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였으니 이는 사도들의 독재적 명령이 아니고 이해를 통한 협력이 있게 한 것이며 민주주의적 정치를 한 것입니다.

2) 그 후에 회중들로 하여금 자격있는 자를 분별하여 스스로 선택하게 하였으니

① 이 선택방법은 누가 추천하였거나 투표함으로써 다수 회원의 동의로 받는 민주적 방식이며 결코 “나를 뽑아달라”는 식으로 출마 형식을 띤 것은 아닙니다. 요즈음 교회단체 안에서 선거풍토가 과열되어 “출마제도”를 도입한다는 말도 있습니만 이는 크게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는 일은 자천할 수 있으나 명예적 직분같은 것은 자천할 수 없어야 할 것입니다.

② 많은 사람들 중에 믿음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자로 객관적 인정을 받아 당선된 사람과 그 당선에 들지 못한 사람들로 나누어졌지만 ㉠ 당선되었거나 안되었거나 간에 하나님의 뜻으로 믿어 감사할 뿐이요 ㉡ 당선된 자들은 감사하고 더 겸손하게 충성 할 것이요 ㉢ 당선 안된 성도는 형제의 당선을 축하하고 시기하지 않으며 하나님의 뜻인 줄로 믿고 기뻐해야 할 것입니다.

3) 그런데 여기의 일곱집사 이름이 다 헬라이름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하면 헬라파 유대인중에서 선택된 것입니다. 이것은 불공평한 구제를 원망한 일에 대하여 “충분하게 잘 해보라”는 유대파 성도들의 배려라고 할 것입니다. 신앙세계에서 혹 이런 일들과 관련하여 “어느 파가 무엇을 맡아야 한다”는 편파적 주장을 내세우려 한다면 이는 벌써 기독교적 사랑의 영역을 떠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 당시 성도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건설적인 목적을 위하여 겸손하게 봉사할 뿐이었습니다.

4) 이때에 선택된 사람은 스데반과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사람 니골라였습니다.

① “유대교에 입교한”이란 뜻은 안디옥 출신 “니골라”가 유대교로 개종하였었는데 다시 복음을 믿게 된 자란 뜻입니다.

② 이 일곱집사들 중에 스데반과 빌립의 사역만 성경에 소개되었고(행6:8-7:60,8:26-40) 다른이의 사역이 다 소개되지 않은 것은 12사도들의 행적이 다 소개되지 않은 것과 같은 것입니다.

5) 이 사람들을 집사로 임직한 방법은 사도들의 안수기도였습니다.

① 세례를 베푸는 안수는 보혈의 상징인 물을 뿌리기 위함이고(히19:13,벧전1:2)

② 병자를 위한 안수는 병고침의 능력이 전달되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형식이며(막8:25,16:18,행3:7)

③ 또 초대교회 당시에는 사도들이 일반 성도에게 안수하므로(행9:17,19:6)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복음종교의 절대적 능력과 사도들의 권위를 입증한 일이 있었으며

④ 본문에 나타난 임직의 안수는 직분전달 및 성령님의 은혜가 전달되는 사실을 의식화 한 것입니다.

⑤ 그러나 꼭 안수를 해야만 사명과 직분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란 사실도 아셔야 합니다(마10:1).

⑥ 사도들의 안수는 신약시대에 감독자(목사,장로)들의 안수로 이어졌습니다(딤후2:2).

4. 집사를 세워 분담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7절)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였고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졌으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1) “말씀이 왕성하여진 뜻”은 성경의 증언과 교육이 확장되었음이고

2) 이로 인하여 전도의 열매가 많아져서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세례교인)의 수가 증가된 것이며

3) 완고하였던 제사장들까지도 이 말씀에 굴복하여 회개하고 개종하는 역사가 일어났으니 실로 종교개혁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결과는 오직 말씀의 왕성함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교회는 영적 사명(진리 전파와 기도)과 사회적 사명(정치, 구제, 봉사)이 있는 중 목사는 전자에 치중하고, 성도와 제직은 후자에 치중하여 분업사역을 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제 17 과 스데반의 역할과 핍박 (행 6:8-15)

 

이 말씀에는 “스데반의 역할과 핍박”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① 8절과 10절에 “스데반의 역할에 대한 말씀”이 있고 ② 9절-14절 말씀에 “핍박에 관한 사실”이 기록되었으며 ③ 15절에서 “핍박을 받는 스데반의 표정”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1. 스데반의 역할에 대하여(8절,10절)

1) 스데반은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나타냈습니다.

① 초대교회 당시의 직임자들은 사도가 아니었을지라도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였고 또 이적을 나타낸 사례가 있습니다. 직분의 명칭을 나타내지 않은 제자 “아나니아”나(행9:10,12) 전도자 빌립의 예언하는 딸들(행21:8-9)이 그 실례입니다.

② 스데반이 받은 은혜란 뜻은 권능을 포함하여 신앙인으로써의 인격에 관한 것과 넉넉한 축복 받은 것을 의미할 것입니다.

③ 흔히 성도들 세계에서 어려운 일을 당할 때 “은혜롭게 처리한다”는 용어를 사용하면서 적당하게 법을 피하는 것으로 이해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일들과 관련하여 “은혜롭게 한다”는 올바른 뜻은 풍성한 은혜로 목적을 쉽게 성취하는 것을 뜻합니다. 또 어려운 일을 쉽게 처리하려면 받은 은혜가 많아야 합니다. 걷기만 하는 사람은 땅위의 모든 장애물이 어렵게만 여겨질 것입니다. 그러나 걸어가지 않고 날아갈 수만 있다면 모든 장애물들을 초월하여 목적지에 갈 수 있는 것처럼 성도들은 어려운 문제들을 풍성한 은혜로 날아가듯이 해결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스데반은 은혜가 충만하므로 기적만 행한 것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도 증언하였고, 또 변론에도 이겼으며 천사의 표정을 간직함은 물론 핍박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서 순교까지 할 수 있었습니다.

2) 스데반은 지혜와 성령이 충만하여 말을 하였으니 이런 은혜로운 상태에서의 증언과 대화는 덕을 세움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지혜는 일반은총으로 주시는 은사이고 성령의 충만은 다양한 은혜로 역사해 주심인데 이 두 가지 은사가 스데반의 신앙인격을 성숙시키고 기적이 역사되게 하였을 것입니다.

2. 스데반을 핍박한 사실에 대하여(9-14절)

1) 핍박의 시기는 스데반의 사역에 잇따라 일어났고

2) 핍박한 자들은 9절에서 “어떤 자들”이라고 하시므로 그들의 신분을 나타내시지 않았지만 그들은 앞에서 사도들을 핍박한 사람들일 것이고 또 그들은 다른 사람들을 동원하여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말하게 하였고 또 그 유언비어를 구실로 잡아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하여 공회에 고발하게 하였습니다(11-12절).

3) 핍박을 시작한 장소는 이방에서 온 사람들의 공회당이었고 그 곳에서 스데반을 붙잡아 공회 재판정으로 끌고온 후 그곳에서 스데반의 증언을 들었습니다.

① 9절에 보시면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핍박을 시작한 장소를 나타내신 말씀입니다. 그 장소는 예루살렘에 있는 회당이고 그 회당은 위에 표기한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자기들 용도에 사용하기 위하여 지어놓은 “리버디노”란 회당입니다.

② “리버디노”란 뜻은 원문의 “리벨티논(λιβερπίνων)”으로 “자유인들의”란 뜻입니다. 그들이 그 회당의 이름을 “리버디노”라고 붙인 것은 각처에서 로마의 압제로 노예생활을 하다가 자유를 얻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렇게 기념하기 위한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③ 이들이 이방인인지 유대인인지는 잘 알 수 없습니다.

④ “구레네”는 아프리카 중앙 북단이요, “알렉산드리아”는 구레네와 카이로 사이의 북단이요, 길리기아는 소아세아 동남쪽(현재 터키 영지 남부)이요, 아시아는 소아시아로서 현재 터키영지 서쪽을 의미합니다.

4) 핍박자들은 핍박의 구실을 잡기 위하여 먼저 트집잡는 말을 하였지만 스데반의 지혜로운 대답에 능히 당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① 본래 “참”을 증거할 때는 자연스럽고 담대하여지는 법이며

② 또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것(10절)이었으므로 핍박자들은 그 담대함에 눌려 반론을 제기하지 못한 것입니다.

5) 핍박자들이 말과 변론으로 어찌 할 수 없게 되자 거짓증언자들을 시켜서 거짓을 유포하게 하였으니 그 거짓유포한 말이 바로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을 했다”는 것이었습니다(11절). 스데반은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할 사람이 아니며 또 지혜와 성령이 충만한 상태에서 그런 말은 더욱 할 수 없는 것입니다.

6) 그러나 핍박자들은 거짓으로 유포시킨 말을 스데반의 혐의로 잡아 공회에 고소를 하면서(12-14절) 거짓말을 더욱 합리화 시켰으니 그 합리화시킨 송사내용이 바로 13, 14절의 말씀입니다.

① 13절에서 “거룩한 곳(성전)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않는다”고 하였으나 스데반은 그렇게 행할 사람이 아니며

② 14절에서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준 규례를 고치겠다고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요 2:19 에서 “너희가 성전을 헐라 내가 3일만에 다시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일이 있으셨으나 여기의 성전은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신 말씀이었고 또 예수님은 “모세가 전하여 준 규례(율법)를 완전하게 하러 오셨다”하시고 “폐사러 오셨다”고는 하시지 않으셨습니다(마5:17). 그러나 송사자들은 임의로 떠도는 유언비어를 예수님이 하신 것처럼 뒤집어 씌우려 한 것입니다. 참으로 악한 방법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이런 송사로 핍박을 받는 스데반의 표정이 어떠하였습니까?(15절)

1)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고 하였습니다. 이 증언은 사도들의 증언이 아니고 공회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그의 얼굴을 주목하여 보고 한 말이었습니다.

2) 문제는 천사의 얼굴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에도 천사의 얼굴에 대하여 언급하신 예가 없습니다. 다만 “천사가 흰옷을 입고 광채를 나타냈다”(마28:2-3)는 말씀이 있을 뿐입니다. 따라서 “천사의 얼굴”이란 평화와 기쁨과 희망을 담은 밝은 표정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또 그 얼굴에 영광의 광채가 있을 수 있음도 상상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또 한가지 문제는 스데반이 어떤 연유로 이런 밝은 표정을 가질 수 있었을까?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순교할 때에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보았다”(행7:55-56)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본문에 나타난대로 얼굴이 천사같았을 때는 그가 순교하기 전 송사를 받는 재판석에서 였습니다. 그런고로 그 얼굴이 빛난 것은 스데반의 믿음의 확신과 변론에서 승리하는 통쾌감과 또 순교를 복으로 여기는 희망 등으로 그 얼굴에 만족한 표정을 가질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①스데반처럼 은혜와 권능과 지헤와 성령이 충만하여지기를 기도하셔야 할 것이요 ② 성도는 어디서나 핍박자들의 간악한 핍박을 예상하여 대비하셔야 할 것이며 ③ 스데반의 얼굴이 큰 핍박과 위험 중에서도 천사 같았던 것처럼 저희들도 천사같은 기쁨과 희망과 용기의 밝은 표정을 보존하여야 할 것이요 ④ 스데반이 핍박자들과의 대화에서 변론에 이겼지만 핍박자들의 핍박을 저지하지는 못하였으니 변론에 이기는 것이 불신앙의 마음을 돌이켜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방법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변론에 이기도록 지식을 갖추어야 하겠지만 그 변론지식에 의지하지 말고, 확고한 순교적 무장을 준비하여야 할 것입니다. 거듭나지 못한 심령은 이적을 체험해도 믿음이 발생하지 않는 것을 아셔야 하겠습니다.

제 18 과 스데반의 증언 (행 7:1-19)

 

사도행전 7장은 “스데반의 기사”요 내용으로는 “스데반의 증언과 순교의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1절-50절까지는 “스데반의 증언”이요, 51절-53절은 “스데반의 책망”이며, 54절-60절까지는 “핍박과 순교의 장면”을 말씀하셨습니다. 스데반의 증언을 분류하면 ① 1절-19절에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역사를 ② 20절-43절까지는 모세와 출애급의 역사를 ③ 44절-50절까지는 “증거의 장막”에 관한 역사를 증언하였는데 이 증언이 역사적 사실의 줄거리를 말한 것이지만 그 시작이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이유는 구원의 약속이 아브라함 때부터 실현되어 왔음을 입증하고 증거의 장막(구약의 성전)을 설명하므로 마친 것은 메시야에 대한 계시가 증거의 장막을 통하여 나타난 사실을 증언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는 1절-8절까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에 대하여, 9절-19절까지는 요셉의 역사에 대하여 증언한 것이며 이 내용은 창세기 12장-50장까지의 내용을 근거로 요약한 것입니다.

1.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역사에 대하여(1-8절)

1) 스데반의 증언은 대제사장이 “이것(거짓증언자들의 말)이 사실이냐?”고 심문하데 대한 대답으로 증언하였으니 심문을 받는 것도 증언의 기회가 된 것입니다(행26:27-28, 빌1:13-14). 이 때에 스데반을 심문한 재판정은 산헤드린 공회로써 이 공회는 모세 때부터 있었던 재판기관을 유대인들이 전통적으로 이어온 것으로 유대인 재판에 한하여 로마정부가 상당한 실권을 허용하였고 대제사장이 재판장이 되었으며 바리새인, 사두개인 등이 재판을 위한 공회원이 되었고 사형언도까지 내릴 수 있으나 그 집행은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예수님도 그 공회의 재판을 거치셨습니다(마26:57-68).

2) 스데반은 법정의 재판관들을 부형이라 호칭하였고 아브라함을 “우리조상”이라 함으로 한 혈통, 한 민족의 사랑을 고취시켰습니다(1-2절).

3) 스데반의 증언은 ① 아브라함이 “메소바다미아”에 있을 때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는 지시를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 이 말씀은 창11:26-31과 대조되는 말씀이며 창11:31에 보시면 “데라가 아들 아브라함의 내외와 조카 놋을 데리고 갈대아 우르를 떠난 것”으로 기록되었고 아브라함이 직접 지시를 받은 것은 창12:1에서 갈대아우르를 떠난 후 하란에 머물면서 부친 “데라”가 죽은 후였습니다. 하나님이 언약의 조상으로 택한 사람은 아브라함이었습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은 사라와 혼인한 상태였으므로 성숙한 중에 약속을 받은 것이었는데 그 부친 데라가 생존한 중이었으므로 모세는 아브라함의 고향 떠남을 데라중심으로(창11:31) 기록한 것입니다.

㉡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나타나신 상태는 말씀이나(창12:1, 출3:2) 천사를 통한 계시(창18:1-2)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요,

㉢ 그 당시에 아브라함에게 어떤 의나 선이 있어서 하나님이 그것을 보시고 선택하셨을까요? 여기에서 우리는 “무조건 선택”이란 교리를 믿고 있으며(롬9:11) 아브라함이 선택 받을 때도 그의 어떤 의를 보시고 선택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창21:1-2). 이렇게 선택받은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좋은 믿음의 결과를 나타냈습니다(창15:6). 신령한 구원의 복은 시작부터 끝까지 은혜로 되는 줄 믿으셔야 합니다(행15:11, 롬11:5).

㉣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네 고향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가나안 땅)으로 가라”(3절) 하셨을 때 그는 고향 친척이 사는 갈대아 땅을 떠나 “하란”으로 갔고 거기서 부친 데라가 죽은 후 다시 지시와 약속을 받아 가나안 땅으로 갔으니(창12:1-5) 하나님의 약속은 “그의 후손에게 복을 주신다”는 것이요(창12:2-3) 축복의 절차로서 그의 믿음과 순종을 바라신 것입니다(창12:1).

㉤ 아브라함은 과감하게 순종하였습니다. 순종하여 나오다가 얼마동안 하란에 머물렀으니 이는 부친 데라의 질병때문에 여행을 계속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창11:31-32). 그가 약속의 땅인 가나안에 들어왔지만 하나님은 그 땅을 즉시 주시지 아니하시고 “자식도 없는 그의 자손(씨)에게 주시되(5절) 그 자손들이 다른 땅(애급)에 나그네와 종이 되어 400년간 괴롭게 할 것과 그 후에 하나님이 그 나라를 심판하시고 자기 백성을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여 하나님을 섬기게 할 것이라” 하시고 그 언약의 증표로 할례를 시행하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6-7절). 이 말씀은 창15:13-14 말씀을 설명한 것입니다. 스데반은 구약성경을 연구하여 그 내용을 풀어 설명한 것입니다. ㉥ 이 약속에 따라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아 8일만에 할례를 하였고 또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열 두 조상을 낳았다고 하였습니다.

2. 요셉의 역사에 대하여(9-19절)

1) 스데반이 요셉의 역사를 기록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역사적 이동과 그들을 살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나타내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객이 될 것을 예언하신 후(창15:13) 그 성취를 위하여 요셉을 미리 내려보시고(창45:7,8) 요셉의 출세를 통하여 그 대책을 세우셨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2) 여러조상(야곱의 열아들들)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으로 팔았지만 하나님이 저와 함께 하셨고 모든 환난에서 건져내셨으며 애굽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받아, 애굽 온 집의 치리자(총리; 창41:43)를 세우셨는데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이 들고 가나안의 선민 조상들이 양식을 구하러 애굽에 왔다가 요셉을 만나게 되어 요셉이 그의 가족(온 친족) 75명을 청하여 애굽에서 살게 하였으므로 야곱이 애급에서 죽은 후 자신이 사 놓은 땅 세겜(세겜족 하몰의 자손에게 산 묘지; 창33:18-20)에 장사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장사된 무덤은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땅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곳은 아브라함이 부인 사라를 장사 지낼 때 그 지역에 “막벨라”란 굴과 함께 은 400세겔을 주고 산 것이었는데(창23:16-20) 그 후에 야곱이 그곳에 거하면서 또 은 100개를 주고 다시 산 기사가 있습니다(창33:19). 그리고 야곱도 애굽에서 죽었으나 그곳에 장사되었고(창50:19) 요셉도 그렇게 되기를 유언하였습니다(창50:25, 출13:19, 수24:32).

3) 또 중요한 증언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웠을 때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많이 번성하였는데 여기에 “약속하신 때”란 출애급에 대한 약속으로(창15:14) 이 약속이 성취되는 시기는 약속 당시로부터 약 500년 후인 모세 때에 성취하신 것입니다. “번성함” 역시 약속에 의한 것으로(창13:15) 노예생활의 고역 중에서도 여전히 번성하게 하신 것입니다(출1:12).

4) 요셉은 110세에 세상을 떠났고(창50:26)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출현했을 때는 요셉이 죽은 후 약 300년 후이며 그 당시의 왕(아메스)이 민족을 괴롭게 한 기사는 출애굽기 1장에 기록되었습니다(18-19절).

결론적으로 스데반이 이스라엘 조상들의 역사를 증언한 이유는 ① 하나님이 선민적 약속을 아브라함에게 주셨음과(마1:1) ② 그 약속이 역사 세계에서 실현된 사실과(눅3:23-38) ③ 하나님이 역사를 지배하시고 그 역사의 전개과정이 메시야 언약에 따른 구원사역으로 연결되는 사실을 증거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상의 말씀은 스데반이 구원사적(救援史的) 역사를 잘 아는 입장에서 이를 요약하여 설명한 설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19 과 스데반의 증언(II) (행 7:20-36)

 

위 본문의 전체적 내용은 “모세의 역사의 일부”를 증언한 것으로 ① 모세의 출생으로부터 40세까지 애굽의 학술을 배운 내용(20-22절)과 ② 동족을 돌보아주려 하다가 살인을 하고 미디안으로 피신하여 40년을 목자로 생활한 내용(23-29절)과 ③그가 80세에 하나님의 소명을 받은 내용(30-36절)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스데반이 공회석에서 유대인 재판관들에게 이 사실을 자세하게 말한 이유는

1) 이스라엘의 역사가 선민의 역사요 구약 성경(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이기 때문이요

2)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주신 메시야 언약(창12:2-3, 22:17-18)이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성취된 사실을 나타내려 함이며

3) 모세를 중심한 이스라엘의 출애급 역사 자체가 구속의 은혜를 모형적으로 계시해 주신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 당시의 많은 유대인들이 모세를 통하여 예언한 메시야 구속사역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성취된 사실을 몰랐기 때문입니다.

2. 본문의 내용을 세 대목으로 나누어 설명하겠습니다.

1) 모세의 출생으로부터 40세에 이르기까지(20-23절)

① 20절에서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하셨습니다. 여기의 “그때”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400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고 4대만에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다”(창15:13,16)고 약속하신 것을 실현하시는 때를 의미하며 또 그 당시에는 애굽왕의 학대가 심하였고 또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육이 중단하였던 때를 의미합니다(출1:7,11,12).

모세가 출생한 때는 출애굽 때보다 80년 전으로 주전 1530년경이며 애굽의 18왕조에 해당하는 때로서 아메스 왕(1520-1545), 아멘호텝(1545-1525), 투투메스(1525-1486)왕의 통치시절에 해당이 되나 모세의 출생연대의 계산이 학자마다 다르므로 짐작만 하고 지나가야 할 것입니다.

② 하나님은 약속의 때를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시며 그때에 태어난 모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웠다”는 것은 하나님이 자신의 독립된 주권의지로 모세를 아름답게 보신 것이며 금방 태어난 모세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③ 그 당시 모세의 부모는 “남자가 나면 하수에 던지라”(출1:22)는 왕명을 어기고 석달을 집에서 키우다가 하수에 던지는 대신 갈대상자에 넣어 하수에 띄었는데(출2:1-4)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구조의 섭리를 나타내셔서 바로왕의 딸이 그를 발견하여 왕궁에서 자기의 양자로 양육하니(출2:5-11) 모세가 왕궁에서 자라며 40년간 애굽인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다 능하여졌다고 하였습니다(21-22절).

2) 모세가 미디안으로 도주함(23-29절)

① 23절에서 “모세는 40세 때에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났다”고 하였습니다. 모세는 젖을 떼기까지 친모에게서 자랐으므로(출2:7-9) 신앙은 물론 민족의식에 대한 교육을 받았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동족에 대한 사랑을 느끼던 차 애굽인의 학대로 동족이 고역 당하는 것을 보고 동족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의 원수인 애굽사람을 쳐죽일 때, 자기가 그 원수를 죽이면 자기의 동족들이 동족의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모세의 손을 빌어 나타나셨다고 믿은 줄로 알았으나 그들은 그렇게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24-25절).

② 여기에서 모세가 원수갚는 일에 나서서 살인을 한 것은 큰 잘못이었습니다. 24절을 보시면 동족을 보호하고 압제받는 자를 위하여 싸워준 것이 결국은 살인과 보복으로 연결되게 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또 자기 백성들이 모세의 생각처럼 자기의 살인행위를 “하나님의 보응하시는 방법”으로 알아주지 않았으니 이는 그 백성들이 둔하여 그만한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면 모세의 살인이 과연 하나님의 원수 갚는 뜻을 따른 것인가 할 때 모세는 그런 지시를 받은 일도 없고 또 하나님은 개인적으로 원수 갚는 것을 금하신 분이기 때문에(신32:35) 모세의 생각자체가 잘못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④ 또 그 이튿날에 동족과의 싸움이 있었습니다. 모세는 이를 화목시키기 위하여 “형제끼리 어찌 서로 해하느냐?”고 하였는데 싸우는 자중 형제를 해하는 자가 모세를 밀뜨리며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리 위에 세웠느냐 어제 애굽사람을 죽인 것같이 또 나를 죽이려 하느냐?”하며 모세의 살인죄를 폭로하는 것이었습니다(26-28). 그래서 모세는 이를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으로 가서 나그네처럼 40년을 목자생활을 하며 그곳에서 가정을 이루고 아들들을 낳았으니 이 사실은 스데반이 출2:11-22에 기록된 것을 요약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⑤ 모세가 자신의 약점(살인죄)을 가진 상태에서 이웃에게 권면하다가 오히려 지적을 당한 것은 누구나 다른 사람을 지도 권면할 때는 자신에게 흠 잡힐만한 과오가 없었어야 할 것이며 또 모세가 법적 재판관은 아니라도 왕궁에 사는 동족이란 권위로 권면한 것을 악으로 평하여 거절하고 그의 살인죄를 폭로한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⑥ 성도는 자신의 실수로 생활환경이 달라졌을지라도 하나님은 그런 것을 적당하게 이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잠16:4). 이는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목자의 생활을 한 것이 그를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쓰시기 위한 섭리였기 때문입니다(30절, 민12:3, 시23:1).

⑦ 모세가 도망한 미디안 지역은 미디안족이 거주하는(창25:2) 지역으로 시나이반도 시내산 서부지역입니다(출2:15-21).

3) 모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음에 대하여(30-34절)

① 30절에 “40년이 차매”하신 것은 하나님이 모세를 미디안 광야에서 40년간 연단 시키신 것이며

② 모세를 부르신 하나님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천사를 통하여 나타나 주셨고(출3:2)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갔을 때(천사를 통한) 주(하나님)의 소리가 있어(31,38절)

③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아브라함 당시부터 “선민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32절). 이때에 모세는 무서워하며 감히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계시를 처음 대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④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라”하셨으니(33절) 거룩하신 하나님이 임재하신 곳이므로 그곳을 거룩하게 성별하셨고 또 신을 벗어야 당연함은 깨끗한 곳에 더러운 신을 벗고 들어가야 함이 마땅한 것처럼 신을 벗음은 성결을 차리는 태도의 표현인 것입니다.

⑤ 34절에서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정녕히 보셨고 그 탄식소리를 들으시고 저희를 구원하러 내려 오셨다”하셨으며 이 일을 위하여 “모세를 애굽으로 보낼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⑥ 이렇게 부름받은 모세가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나오게 하였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40년간 이적을 행한 것입니다(36절) 그때에 모세는 자기와 같은 선지자가 출현 할 것을 예언하였습니다(신18:15-22 강론을참조하십쇼)

이상의 말씀에서

①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약 500년 후에 지키시는 분이며 ② 만사에 때를 정하시고 계획대로 시행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③ 이 일을 위하여 모세를 사명자로 택하여 보호, 연단, 소명하시는 분이며 ④ 자기 백성들의 고충을 감찰하시고 호소를 들으시는 분이며

⑤ 모세를 하나님이 불러 쓰신 사실과 모세의 출애굽 역할이 바로 메시야를 통한 선민의 영적 구원사역의 예표란 사실을 알리기 위한 증언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20 과 스데반의 증언(Ⅲ) (행 7:37-43)

이 말씀은 스데반의 설교가 계속되는 내용으로 ① 모세에 대한 증언(37-38절) ② 조상들이 모세의 지도를 거역한 내용(39-41절) ③ 거역하는 백성들을 징계하심에 대한 말씀(42-43절)으로 되어 있습니다.

1. 모세에 대한 증언에서(37-38절)

스데반은 이스라엘 재판관들에게 모세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하여 거듭 강조합니다. 19과에서는 모세의 초기생활을 출애굽기 1,2장에 근거하여 재설하였지만 이 본문에서는 “모세가 하나님이 쓰신 사역자임”을 증언하는 말로서

1) 신18:15을 인용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 가운데 나같은 선지자를 세울 것이라”고 말한 자가 “곧 모세라”하였으니,

① 모세는 하나님의 계시로 부름을 받은자요

② 그 계시를 백성들에게 전달한 계시의 중보자이며

③ 계시를 전달하는 자기같은 선지자를 “그 후손들(너희 형제 가운데서)에게서 나게 하실 것이라”하셨으니 이 말씀의 뜻은 하나님이 모세에게 메시야 보내실 약속을 하셨다는 뜻입니다.

2) 그리고 그 모세는 자기에게 말씀을 주신 천사와 그 당시에 애굽에서 나온 조상들과 함께 광야교회에 있었으니

① 모세가 말씀을 주신 천사와 함께 있은 것은 광야의 생활 40년동안 하나님의 보호와 계시를 받은 사실을 의미한 것입니다.

② 또 이스라엘 군중이 천사와 함께 있은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상태에서 하나님과 함께 있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여기에 “광야”란 말을 붙인 것은 그 백성들이 모세와 함께 계속 광야생활만 하였기 때문이요, “교회”란 뜻은 성도의 단체를 의미하는 것으로 백성들이 우상과 불신앙의 나라인 애굽을 떠나서 신앙의 단체로 독립하였기 때문에 그렇게 명칭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스데반이 성령의 감동으로 하신 말씀이므로 하나님이 광야의 단체를 교회로 여기신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약의 교회가 오순절 이후에 시작된 것은 사실이지만 엄밀한 의미로 볼 때에는 구약시대의 선민의 단체도 곧 교회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③ 또 모세는 생명의 도를 받아 전한 사람입니다(38절).

㉠ 여기의 “생명의 도”란 “살아 역사하시는 말씀(히4:12) 또는 “영생을 주시는 말씀(요10:27-28, 벧전1:23)을 뜻하고

㉡ “후시대에 전달한 방법”은 하나님의 말씀을 글로 기록하여 전달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출17:14, 24:4, 민33:2).

④ 또 이 말씀에서 증언하는 것은 모세에게 약속하신 보내실 선지자가 바로 에수님이란 뜻과 사도시대의 교회가 광야에 있던 선민단체의 후속이므로 신약시대의 교회를 연구할 때는 구약시대와 선민단체의 역사를 참고하여야 할 것입니다.

2. 모세의 지도를 거역한 사실을 증언하였습니다(39-41절).

1) 모세 당시의 백성들이 모세의 지도를 거역한 사실이 출14:10-12, 15:24, 16:8, 32:2-4, 민14:11, 26-35, 16:등에 나타나 있는데 스데반은 이것을 요약하여 증언한 것입니다.

2) 그 조상들이 모세의 말을 불순종한 것은 곧 하나님을 거역한 일이요(출16:8), “그들의 마음이 애굽으로 향하였다”함은 애굽에서 나온 것을 후회하며 옛 세상을 사모한 것으로 마치 현실교회 성도들이 하나님의 백성의 대열에 서 있으면서 세상주의와 기복주의 사모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3) 그 조상들은 모세가 율법을 받으러 시내산에 올라가서 지체되는 기간에 참지 못하여 금송아지를 만들어 그것으로 자기들을 인도한 여호와 신을 대신하는 악행도 저질렀다고 하였습니다(출32:2-4).

4) 스데반이 모세를 겨역한 조상들의 역사를 증언한 것은 그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와 같은 거역을 감행하였기 때문이며 하나님은 거역과 우상숭배를 같은 죄악으로 간주하셨습니다(삼상15:23).

3. 거역하는 백성들을 징계하심에 대하여(42-43절)

1) 여기에서 스데반은 모세를 거역한 백성들이 “어떻게 징계를 받았다”는 설명을 하지 않고(그 역사는 출애굽기, 민수기에 나타나있음) 그런 징계를 내리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의 말씀을 예증으로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2)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통하여 전달된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했을 때 하나님이 징벌하신 것은 성경을 통하여 잘 알려진 것입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그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여러가지 재앙으로 다 죽은 것입니다(민14:29-30). 모세처럼 가나안땅에 들어가지 못한 상태에서 세상을 떠난 상당수의 선민을 제하고는 모두가 구원받지 못한 사실을 나타내주신 것입니다(고전10:5).

3) 스데반은 범죄하는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하나님에 대하여 “아모스”선지자가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여 설명하였으니 아모스 선지자는 주전76년경의 선지자로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숭배의 죄악된 생활에 버려질 것을 예언하였는데 이는 주전600년경 바벨론 통치로 성취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

① 42절에서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하늘의 군대섬기는 일에 버려두셨다 함”이 바로 그 뜻입니다.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은 우상(별神)섬김을 뜻하는 것입니다. 바벨론 시대에 별의 징조로 국운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므로 충분히 이해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늘의 별”을 군대로 변역한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이 군대란 용어는 “스트라티아(στατιά)”로 영어에 host로 번역하였으며 천체군(天體郡)이란 뜻과 일월성진(日月星辰)의 힘을 나타내는 용어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② 스데반이 인용한 암5:25-27은 “이스라엘 집이여‧‧‧바벨론 밖에 옮기리라”고 한 본문 내용인데

㉠ 42절의 “이스라엘의 집이여 40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리지 아니하였느냐”하신 말씀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하나님께 제사드린 내용을 거론한 것으로 아모스의 예언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암5:25).

㉡ 그러나 43절의 “몰록의 장막과 신(神)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며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라”한 말씀은 그 백성들이 바벨론의 통치를 받을 때 별신(神)을 숭배할 것을 예언함과 동시에 그 소행은 그 조상들이 광야에서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긴 죄와 다를 바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 그런데 문제는 별의 이름을 말할 때 아모스 선지자가 “식굿”이라 한 것을 스데반은 “몰록의 장막”이라 하였고, 또 “기윤”이라 한 것을 스데반은 “레판의 별”이라고 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식굿을 몰록”으로, “기윤을 레판”으로 표시한 어원적 해석을 주석을 통하여 살피면 다음과 같습니다.

“아모스” 선지자가 표현한 식굿(시쿠트)은 saturn이란 별을 의미하는 것으로 용어의 근원은 히브리어와 관련이 있는 “아케디안”말이고, 또 “기윤”은 같은 별신으로서 앗수르의 신이요, 앗수르 어풍의 명칭인데 스데반이 “식굿”을 히브리어로 표현한 것이 “몰록(멜렉:왕)”이고, 또 “기윤”을 헬라어로 표현한 것이 “레판”이라고 설명한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범죄하는 백성들에게 벌을 내려 별(星)우상을 섬기도록 내버려두신 것입니다(사1:20, 사8:5-8).

㉣ 43절 끝에서 “내가 너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하신 말씀은 암5:27의 “내가 너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하신 말씀을 그대로 인용한 것입니다. 다메섹 밖, 즉 다메섹 동쪽이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진리를 증언한 모세를 거역함이 곧 하나님을 거역함이요

② 하나님이 거역하는 백성을 버리시니 그들이 우상세계에서 회개하지 못하게 됨을 알 수 있고

③ 하나님은 이런 사실들을 선지자를 통하여 미리 알리셨습니다. 스데반을 재판하는 강포한 무리들은 대단히 불쾌하였을 것입니다.

제 21 과 스데반의 마지막 증언과 순교 (행 7:44-60)

이 말씀에서는 ① 모세때에 주신 증거의 장막에 대한 증언(44-48절)과 ② 순교와 관련된 기사(49-60절)로 되어 있습니다.

1. 증거의 장막에 대한 증언에 대하여(44-48절)

1) 이 증거의 장막은 출애굽 당시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명하여 세우게 하신 성막입니다(출35:10-19, 35:-40:). 이 증거의 장막은 여러가지 명칭으로 호칭되었으니 주의 성막(수22:19), 회중의 성막(출27:21), 주의 성전(삼상1:9), 주의 집(수6:24), 실로의 성막(시78:60)등입니다.

2) 이 성막은 이동하며 설치하기 좋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지성소와 성소와 제단과 뜰로 구별되며 다윗왕 때까지 천막형태로 존속되어 오다가 솔로몬왕 때에 하나님의 허락으로(왕상5:5-12, 7:51) 견고한 성전을 신축하였습니다. 그 후 바벨론 침략 때 훼파된 것을 70년 후 포로에서 해방된 백성들이 소규모로 재건한 일이 있었고(라7:19-20, 9:9, 학1:7,8), 또 그 후에 계속 황폐된 것을 주전 20년경부터 헤롯왕이 다시 큰 규모로 재건하여 예수님 시대까지 이르니 예수님 시대 사람들은 그 웅장한 성전을 우상처럼 의존하였고(마23:21, 24:1, 요2:17, 눅21:5) 예수님은 “돌하나도 돌위에 남지 않을 것”을 예언하셨는데(마24:2) 주후 70년에 그 예언대로 로마의 침략을 받아 완전히 훼파되었습니다.

3) 스데반은 이 증거의 장막을 모세가 하나님의 명령과 식양대로(출35:10-19) 만들어(44절) 여호수아와 함께 가나안 땅에까지 가지고 들어가서 그 장막형태의 성소로 다윗왕 때까지 이르다가(45절) 다윗왕이 자기민족(야곱의 집)의 복 받을 일과 하나님의 영광(하나님을 위함)을 위하여 성소(하나님의 처소)를 준비(건축함)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으나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린 자”라는 이유로 허락지 않으시고 그 아들 솔로몬왕에게 허락하셔서(대상22:8-10) 솔로몬왕이 성전을 짓게 된 것입니다(46-47절).

4) 그런데 48절에서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처럼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보좌로 삼으시고 땅을 발등상으로 삼으신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성전에서 기도하거나 제사드리는 자의 제사를 흠양하시기 위하여 그 곳에 임재하실 수는 있지만(대하5:13-14, 6:18-21, 32-33) 광대하신 하나님이 무소부재(시139:7-10)하시며 하늘천국을 그의 보좌로 삼고 계시기 때문에 사람이 지은 성전에만 계신 분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하심은 사람이 성전을 짓되 사람이 안식할 주택이 필요함처럼 하나님의 안식을 위하여 그런 뜻으로 지어드린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만물)을 다 자기의 손으로 지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지은 성전은 만물에 비할 때 지극히 작은 인간의 가공물에 불과한 것이요 또 그것이 하나님이 계셔야 할 절대적인 처소가 되는 것도 아닙니다.

5)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성전에 대한 신뢰심이 대단하였습니다. 그들의 성전에 대한 우상적 신뢰심은 신령하신 하나님보다 건물을 더 숭상하였고 제물의 물질적 가치에 더 큰 비중을 두었으며(미6:6,7) 성전 마당만 밟아도 복이 되는 줄로 잘못 아는 외식으로(사1:11-15) 빠져 들어간 것입니다.

다시말하면 신앙과 정의는 멀어지고 조상의 전통을 이어 받은 예루살렘과 성전이 있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을 돌보아 주실 것처럼 의존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일이었습니다(렘12:7-10).

6) 그런데 스데반이 본문 말씀에서 성전의 내력을 말하고 하나님의 보좌가 그 처소(사람이 지은 성전)에 있지 않음을 증언한 이유는 바로 그 백성들의 성전 우상주의를 일깨우기 위한 목적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성전을 모독하였다”는 사실로 거짓단서를 갖고 예수님을 송사하여(마26:60,61, 27:40) 죽이고 뉘우칠 줄을 몰랐습니다.

2. 스데반의 순교와 관련된 말씀(49-60절)

이 말씀은 ① 스데반의 책망과(51-53절) ② 스데반을 죽이는 자들의 태도와(54,57-59절) ③ 스데반의 순교당하는 자세(55-56, 59-60절)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스데반의 책망은 재판하는 무리들을 향하여 “목이 곧고(머리를 숙이지 못하는 교만) 마음과 귀에 할례 받지 못한 자들(깨닫지 못함을 뜻함)”이라 하였고, 또 그들도 그들의 조상들처럼 선지자들을 핍박하였고 의인이 오실 것을 예고한 자들을 죽였으니(말3:7, 마21:34-39) 너희들이 바로 그 의인이신 예수님을 잡아주고 살인한 자들이며(행3:14-15) 곧 “천사의 전한 율법(모세의 율법)을 지키지 않은 자들이라”고 책망한 것입니다. 그들의 잘못은 바로 성령을 거스린 죄였습니다(51절).

2) 이 말을 들은 자들이 마음에 찔림을 받았으나 목이 곧고 마음에 할례받지 못한 고로 회개하지 않은 채 스데반을 증오하여 이를 갈았으니 결국은 “스데반을 죽여도 괜찮다”는 재판의 결론을 내렸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형집행에 대한 일반절차(총독의 승인 받는 문제)도 밟을 겨를이 없이 스데반을 끌고 성밖으로 나가 돌로 쳐서 죽였으며 이 때 거짓증인들도 겉옷을 벗어 사울이란 청년의 발 앞에 두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가담을 한 것입니다(행8:1, 22:20). 그들이 성밖으로 끌고 나간 것은 예루살렘 도성안을 거룩한 곳으로 여겼기 때문이며(레14:40,45) 돌로 쳐서 죽이는 방법은 유대인들의 사형법이었습니다(요8:7,59,10:32).

3) 스데반이 순교당할 직전에 그는 성령이 충만하였으며 그가 하늘을 우러러 주목한 것은 죽음을 각오한 상태에서 신령한 천국을 사모한 태도였으며 그때에 그의 영안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이 하나님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게 되었으니 이는 순교당할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입니다. 천국의 영광과 부활의 주님을 믿지 않으면 순교의 소망을 갖기 어려울 것입니다. 스데반은 그 영광스러운 광경을 보았을 때 “하늘이 열리고 인자(예수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외쳤으니 이 외침은 죽음을 각오한 복음의 외침이었습니다.

4) 그러나 악한 자들은 스데반의 말에 귀를 막고 큰 소리를 지르며 스데반을 성밖으로 내치듯 끌고 나가서 돌로 쳐서 죽였습니다. 그 때 거짓증언자들도 옷을 벗어 청년 사울의 발 앞에 두고 돌을 던지는데 가담하였습니다.

5) 그러나 스데반은 순교직전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자세를 취하고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소서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하고 기도한 후 영혼이 떠난 것(자니라) 입니다.

결론적으로 스데반의 증언은 복음적이며 반격적인 증언이었고 스데반의 순교는 하나님이 인도하신 축복이요, 자기의 생명을 드렸을 뿐 아니라 영혼의 인도를 하나님께 부탁하고 자기를 죽인 악인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시기를 기도하였으니 이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랑을 그대로 실천한 것으로써 스데반은 복음의 증언과 순교와 사랑의 용서를 뛰어나게 실천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제 22 과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 (행 8:1-13)

 

이 말씀의 중심은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4-13절). 그러나 1절-3절 부분에서는 ① “사울이 성도를 핍박한 태도”(1,3절)와 ② “예루살렘교회가 핍박을 받으므로 전도의 기회를 얻게된 사실”(1절)과 ③ “경건한 무리들이 스데반을 장사한 사실”(2절)이 앞부분에 기록된 것입니다. 우선 제목을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로 정하고, 앞부분의 제목부터 순서대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사울이 성도를 핍박함에 대하여(1,3절)

1) 사울은 바울의 본명으로 스데반을 죽일 당시부터 중요한 역사적 인물로 등장하였습니다(행7:38). 바울의 자기 소개에 대한 말씀은 행22:1-21에 기록되었고 그가 성도를 핍박한 사실은 본문과 행9:1,21,26:10-12, 갈1:13,23, 딤전1:13에 나타나 있으며 그의 변화된 사역은 행9:19 이후의 기사와 그가 기록한 서신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2) 본문에서 사울이 성도를 핍박한 내용은 ① 스데반을 죽이는 것을 마땅하게 여겼고 거짓증인들이 먼저 손을 대기 위하여(신17:7) 그들의 벗은 옷을 맡아 간수해준 일이 있으며(행7:58) ② 이런 일등으로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협력하였고(1절,22:20,26:10) ③ 또 교회를 잔멸하기 위하여 각 집에 들어가 (예수믿는)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김은 물론(3절) ④ 성도에 대한 훼방과 핍박이 사람을 죽이는 일에까지 달하였다고 하였습니다(행9:1,22:4).

3) 이러한 사울이 하나님의 은혜로 변화를 받고(행9:1-22) 그가 선교의 사명을 시작하면서 그 이름이 바울로 개명되었으니(행13:9) 사울의 뜻은 “희망”이란 뜻이요, 바울의 뜻은 “작은 자”라고 합니다. 사울이 개종하고 은혜를 받으면서 자기를 작은 자로 낮추고 겸손하여졌을 뿐 아니라(고전15:9) 날마다 자기를 죽이는 생활을 한 것을 성경에서 살필 수 있습니다(고전15:31).

2. 예루살렘교회에 대한 핍박이 전도의 동기가 된 사실에 대하여(1절)

1)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났음”은 스데반을 죽인 것과 같은 핍박이 연속되었음을 뜻하며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란 오순절 당시에 은헤를 받은 성도의 단체를 의미할 것입니다(행1:12-14, 2:41-42). 이 단체는 한 예배당을 중심한 단체가 아닌 여러 지교회로 분산된 단체가 되었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 교회가 최초로 거론되었고, 그들이 회집한 장소는 확실하게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2) 이때에 사도 외에는 다 유다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졌으니 그 당시에 사도들만은 예루살렘 교회를 지키며 순교할 작정을 하였고 다른 성도들은 다 외방으로 흩어져 핍박을 피함과 동시에 전도하게 한 것입니다. 유다는 예루살렘 남쪽이요, 사마리아는 서쪽 이방지역에 해당합니다.

3) 이 말씀에서 ① 사도들이 교회를 떠나지 않은 순교적 사명을 가졌음에 대하여 배울 수 있고 ② 또 핍박의 기회를 전도의 기회로 선용한 성도들이 있은 것과 ③ 예루살렘 중심부의 핍박이 복음을 외방으로 수송하는 기회가 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3.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크게 울었다고 하였습니다(2절).

의롭고 능력있는 사역자가 순교당한 것을 본 남아 있는 성도들이 큰 감화와 충격을 받음으로써 그의 시신을 장사 지내고 크게 운 것은 그들의 신앙과 사명적 능력이 더욱 용솟음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4.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에 대하여(4-13절)

1) 스데반 당시의 핍박을 피하여 예루살렘을 떠난 사람들이 유다와 사마리아로(1절)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 때 “빌립”은 사마리아 성에 가서 그곳 백성들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였습니다(4-5절).

① 본문 말씀의 주인공인 “빌립”은 행6:5에서 스데반과 함께 일군으로(집사로) 임직받은 사람이고

② 그가 증언한 복음의 말씀은(4절) 바로 그리스도와(5절) 하나님 나라에 관한 것(12절)이었습니다.

2) 이때 빌립의 증언을 듣고 그의 행한 표적을 본 무리들이 열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았습니다(6절).

① 여기에서 빌립이 나타낸 표적은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귀신들을 쫓아낸 일과 중풍병자와 앉은뱅이를 낫게 한 일이었습니다(7절).

② 이때에 빌립이 나타낸 이적의 성격은 사도들이 역사한 성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곳에 큰 기쁨이 있었음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습니다(8절).

③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기적을) 보고 그의 말을 좇은 것은 증거와 나타남이 일치되었기 때문이며 이런 과정을 통하여 구원받는 신앙으로 열매를 맺었으니 ㉠ 그들은 구원받을 백성으로 작정된 자들로써(행13:18) ㉡ 동시에 하나님이 거듭나는 은혜를 주셨기 때문입니다(요3:3). 전도는 구원의 절차요, 과정에 속한 것이며 그 이전에 하나님의 선택과 거듭나게 하시는 은혜가 있어야만 믿게되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④ 그러나 또 중요한 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에 배타적 장벽이 무너진 것입니다(요4:9).

3) 빌립의 전도결과로 얻은 특별한 열매는 마술사 “시몬”이 믿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9-13절).

① 이 “시몬”은 사마리아에서 마술로 백성을 놀라게 하고 스스로 자기를 높이던 사람이었습니다(9절). 오랫동안 그의 마술에 놀란 사람들은 그의 마술행위를 “하나님의 능력이라”하면서 낮은 자나 높은 자들이 다 그의 말을 청종하였으니(10절) 그의 인기는 대단하였을 것입니다.

② 빌립의 전도를 듣고 많은 남녀가 세례를 받을 때 시몬도 세례를 받고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다니며 그 표적과 능력에 놀랬다고 하였으니

㉠ 여기의 빌립이 나타낸 기적은 마술사 시몬이 볼 때도 놀라운 것이었고

㉡ 시몬은 빌립이 나타낸 표적에 큰 놀라움을 느껴 빌립을 전심으로 따라 다닌 것입니다.

㉢ 성도가 기적의 체험을 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마12:38-39) 진리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 더 유익하다고 하셨습니다(창12:4, 눅5:5, 요8:47). 그 이유는 이적에 구원과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고 말씀 속에 능력과 구원이 있기 때문입니다(마8:8, 히4:12, 창1:3).

㉣ 마지막으로 빌립이 사마리아 전도에서 열매를 얻고 세례를 준 사실과 또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세례를 준 사실에 대하여(행8:38) 사도가 아닌 사람(혹은 집사)도 세례를 줄 수 있었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의 집사란 신분은 성경에 명시된바가 아니며 또 그 직분의 성격이 진리의 지식으로 보나 능력으로 볼때 오늘날의 집사직분과 전혀 같지 않은 직분인 줄로 아셔야 합니다. 오히려 사도와 방불한 초대교회 당시의 특수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는 “빌립이 특수한 직분의 은사를 받고 사도들의 감독아래 있으면서 세레를 베풀 수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으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핍박이 전도의 동기를 주고

② 사도들이 순교할 각오로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은 점과

③ 빌립을 통하여 특별한 역사를 나타내신 사실과

④ 마술사까지 회개하고 믿게된 사실과

⑤ 사마리아인들과의 친교의 길을 열게 한 점인 것입니다.

제 23 과 사마리아에 파송된 사도들의 사역 (행 8:14-25)

 

이 본문 말씀을 살펴보면 ① 14절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회에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를 사마리아에 파송한 사실”과 ② 15절-17절,25절에서 “파송된 두 사도의 사역”에 대한 말씀과 ③ 18절-24절에서 “잘못된 시몬을 책망하고 지도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내용들을 종합하여 “사마리아에 파송된 사도들의 사역”이라고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베드로와 요한 두사도를 사마리아에 파송함(14절).

1) “사마리아 백성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식을 예루살렘교회를 중심하여 거처한 사도들이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파송한 것입니다.

2)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베드로와 요한을 보냈다”는 뜻은 예루살렘교회를 중심한 곳에 사도들의 단체가 있었고 그 단체의 지도로 베드로와 요한 두 사도가 파송을 받은 것입니다.

3) 그들을 파송한 이유는 ① 사도 아닌 성도들이 그곳에 가서 증언한 복음이 바른 것인가를 확인하고(갈2:7-10) ② 그 성도의 단체를 사도들의 특권으로 공인하며 ③ 또 사도적 은사로서 은헤의 역사를 더 강하게 하여 그곳 성도들의 신앙을 굳게 세워줄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 이 사실은 교회에 대한 감독기관이 있고 교회실정에 대한 보고가 있으며 또 은혜의 활성화를 위하여 협력한 사실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2. 파송된 두 사도(베드로,요한)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15절-17절).

1) 그들은 사마리아에 내려가서 ①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였고(15절) ② 주의 말씀을 증거하였으며(25절) ③ 세례받은 성도들에게 안수하여 성령을 받게 하였고(17절) ④ 시험에 빠진 시몬을 책망하고 깨우쳐 지도하였으며(18-24절) ⑤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면서도 여러 촌에서도 전도를 하였습니다(25절).

2) 그 당시에 사마리아에서 복음을 받고 믿기를 결심하여 세례를 받은 사람들은 현실교회성도들이 세례를 받은 것처럼 받은 것이었을 뿐 오순절 당시에 가시적 또는 체험적으로 나타난 특수한 성령의 체험은 받지 못한 것입니다(행1:5,2:3-4). 다시 말하면 “물세례는 받았으나 성령세례는 받지 못했다”는 뜻입니다(16절).

3) 그러면 물세례를 받은 것은 성령님과 무관한 것인가?할 때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물세례는 성령으로 거듭난 성도가 믿음을 고백하였을 때 그것을 물세례로 인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물세례를 받은 자가 반드시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만 하는가?할 때 그렇지 않은 것입니다. 물세례를 받은 성도가 성령의 충만을 받기 위하여 노력을 하여야 하지만(엡5:18) 꼭 성령의 세례를 체험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은 오순절 당시나 사마리아 성도들에게 성령세례를 베푸신 목적이 사도의 특수한 권위를 나타내고 그들의 특수한 사역을 통해서 기독교가 절대종교임을 확증하는데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성령세례는 사도들의 안수로 전달된 만큼 사도가 없는 시대에는 그와 같은 특수한 역사가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4) 17절에 보시면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하셨는데 여기의 “두 사도”란 협력이 있음을 나타내신 것이고, “저희에게”란 그 당시에 은혜받은 모든 성도를 포함하는 말씀이며(행2:1,4,7,39) 또 “안수하매”하신 것은 은혜전달의 의식일 뿐 은혜는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것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잘못된 시몬을 지도하고 책망한 사실입니다(18-24절).

1) 이 “시몬”이란 사람은 사마리아 도성에서 마술로 사람을 놀라게 하다가 빌립의 전도로 세례를 받고 빌립을 따르며 능력에 놀란 일이 있는데(8:9-13) ① 사도들이 안수하여 성령받는 것을 보고(18절) ② 영적은사에 대한 무분별한 욕심에 빠져 시험에 든 성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③ 그는 바르지 못한(21절) 악한 마음을 품었으니(22절) 사도들이 그를 보았을 때 “악독과 불의에 매인 상태”라고 하였습니다(23절). 다시 말하면 충분한 지식이 없이 세례를 받으므로 마귀의 큰 시험에 든 것입니다.

2) 이런 상태에서 그는 사도들에게 망령된 요청을 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돈을 줄테니 자기도 사도들처럼 누구에게 안수를 하면 그들이 성령을 받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한 것이었습니다. 시몬이 이런 요청을 한 의미는 ① 성령님과 은혜의 가치를 돈으로 계산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안 것이요 ② 사도들이 돈을 받고 은혜를 거래할 사람들로 오해한 사실이요 ③ 성령님의 은혜 자체를 사람의 뜻으로 이리저리 전달할 수 있는 줄로 잘못 안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성직이나 신령한 은헤를 부정한 방법이나 탐심 또는 이기적 목적으로 사용해 보려고 한 것입니다.

3) 이때에 베드로는 “네가 하나님의 선물(성령의 은혜)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하였고(20절) 또 “네가 이 도에는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도 없다”고 하였습니다(21절).

①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하라”는 뜻은 ㉠ 우선 사도들이 저주의 권세를 갖고 저주할 필요를 느꼈다는 점과 ㉡ “은과 네”가 함께 망함은 물질과 관계된 개인이 아울러 해됨을 의미하며 ㉢ 또 시몬은 물질이 있으므로 성직을 탐한 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딤전6:10,시49:6).

② “네가 이 도에 관계도 없고 분깃될 것이 없다”는 뜻은 그가 회개하지 못하는 그 상태에서는 “진리(구원)와 거리가 멀다”는 뜻입니다. 성령님의 은혜를 물질적으로 생각하는 믿음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령한 지식이 부족한 성도들이 당할 수 있는 위험입니다.

4)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그가 회개하고 사함받는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설령 베드로가 그에게 저주를 하였다 하더라도(20절) 저주받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며 그가 저주받기 전이나 저주 받는 과정에서라도 회개하면 하나님은 다시 그 저주를 돌이키실 수 있는 것입니다(호6:1). 다시 말하면 하나님은 시몬이 회개하면 바른 지식을 갖고 새로워진 상태에서 구원을 받게 하실 수 있기 때문에 “너의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사하여 주시리라”고 깨우쳐 준 것입니다.

5) 이 말을 들은 시몬은(두려워 하면서)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베드로가)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않게 하소서”하였으니 여기에서 ① 시몬이 깨닫고 회개하므로 구원받을 소망이 있음과 ② 베드로의 말 한 마디가 얼마나 무서웠는가를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저희들은 ① 사도들의 교회에 대한 감독체제와 ② 물세례, 성령세례의 성격과 ③ 사도 또는 복음 사역은 악행하는 자에 대하여 축복대신 저주도 할 수 있음과 ④ 잘못된 신앙에서 초래된 망령된 죄라도 회개하면 소망이 있음을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제 24 과 에디오피아 내시가 전도를 받음 (행 8:26-40)

 

이 말씀은 “에디오피아 내시가 전도를 받음”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다섯 대지로 구분할 수 있으니 ① 빌립을 광야로 보내신 내용(26절) ②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난 사실(27-28절, 32-33절) ③ 빌립이 내시를 가르침에 대하여(29-31절,34-35절) ④ 내시가 세례를 받음(36-38절) ⑤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가심(39-40절)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1. 하나님이 빌립을 광야로 보내심에 대하여(26절)

1) “빌립”이 사마리아성에서 복음을 전파할 때에(행8:25) 주님의 사자가 빌립에게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고 지시하셨습니다. ① 여기의 “주님의 사자”란 천사를 의미할 것입니다. 또 29절에서는 “성령이 빌립에게 이르셨다”하셨는데 이것은 성령님이 직접(음성), 간접(천사)으로 계시의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② 성령님께서 계시의 말씀으로 전도자의 갈 길을 지시하신 사레가 있으나(행9:15,16:8-9) 대부분의 경우는 특별한 지시없이 섭리적으로 인도하십니다(행8:4). 지금은 계시를 별도로 주시는 시대가 아니므로 하나님의 섭리적 인도에 의하여 전도의 길을 가야 합니다. 섭리적 인도란 사명자의 생각과 계획에 따른 소원을 기도를 통하여 인도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빌2:13). ③ 사마리아에서 전도하는 빌립을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하신 지점은 지도를 조시고 확인하셔야 합니다.

그 곳은 예루살렘에서 애굽으로 내려가는 두 길중에 서편 지중해변경의 길을 의미할 것입니다. 또 한편의 길은 요단강을 건너 동편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고 합니다. ④ 에디오피아 나라는 애굽과 구별되는 나라로서 아프리카 대륙의 동북부에 위치하고 함의 자손이 그 원조이며(창10:7) 일명 “구스”라고도 합니다(대하1:9-13,19:9). ⑤ 가사로 내려가는 곳이 광야란 뜻은 유대광야 서남부 지역으로서 황막한 땅을 의미하는데 성령님께서는 빌립을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입니다.

2) 여기에서 하나님은 복음사역자의 길을 인도해 주시는 것을 알 수 있으며(계2:1) 복음사역자는 성령님의 인도이면 무조건 순종하여야 할 것이요, 빌립도 사마리아 도성에서의 능률있는 대중전도를 포기하고 성령님의 지시대로 광야로 갔으니 이는 자기의 소원대로 행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만 따르는 귀한 일임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남에 대하여(27-28절)

1) 빌립이 지정된 장소에 도착하였을 때 그 곳은 광야이므로 인가는 없지만 애굽으로 내려가는 길인지라 거기서 “에디오피아”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 있는 내시가 병거를 타고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돌아가면서 병거 위에서 성경(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으며 가는 것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① “만남”이란 어떤 만남이든지 중요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이 만남은 성령님이 빌립을 그곳으로 보내신 것이기 때문에(행10:5-6) 주께서 인도하신 만남입니다.

② 여기에서 에디오피아 여왕의 내시는 그 나라의 국고를 맡은 자이므로 왕의 비서와 재무장관을 겸직한 위치에 있는 큰 권세자임을 알 수 있는데

③ 그가 예루살렘으로 예배를 드리러 올 수 있는 신앙이 언제부터 전래된 것인가 할 때 왕상8:41에 근거한 솔로몬의 “이방인 구원을 위한 기도”와 시68:31의 구스인이 하나님을 경외할 것을 예언하신 것과 또 같은 시기에 “스바”여왕도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하여 예루살렘에 온 일이 있었고(왕상10:1-13), 가장 유력한 근거는 행 2:10에서 오순절 당시에 성령의 역사와 복음을 체험한 사람들 중에 애굽에서 온 자들도 있었으니 그런 경위를 통하여 이스라엘의 종교 및 복음이 전래되었을 것입니다.

④ 그 후 이스라엘 선민은 수난을 당하였으나 애급과 스바에 있는 성도들이 종교의 명맥을 이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⑤ 그러나 에디오피아 내시의 신앙이 처음부터 복음적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는 성경(사53:7-8)을 읽으면서도 복음의 의미를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⑥ 그가 에디오피아에서 에루살렘까지 다녀가는 여행의 거리는 3000리가 더 되는 먼 순례의 길입니다.

⑦ 그는 병거 위에서 사53:7-8의 말씀(본문32,33절)을 읽고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3. 빌립이 내시를 가르침에 대하여(29-31절, 34-35절)

1) 성령님께서는 내시를 만난 빌립에게 “병거로 가까이 나가라”하셨으니 이는 병거탄 사람에게 대화로 접근하여 “진리를 깨우치라”는 뜻이요

2) 빌립이 글을 읽는 내시에게 “읽는 것을 깨닫느뇨?”하였더니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겠느냐”하면서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하고 자기에게 말씀을 깨우쳐 줄 것을 요청한 것입니다. ① 내시는 예배의 정성과 성경공부의 열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에게 은혜 받을 기회를 만들어 주셨습니다(대하16:9,시107:9). ② 또 성경은 지도하는 사람을 통하여 성경을 깨닫게 하심을 알게하여 주신 것입니다.

3) 내시가 읽은 말씀은 일찌기 이사야선지자가 메시야의 수난에 대하여 예언한 말씀인데 문제는 그 말씀에 예언된 주인공이 누구를 가리킨 것인가를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그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언한 말씀입니다. 내시도 처음에 그 사실을 몰랐었지만 빌립의 지도로 확실히 알게 된 것입니다. ① “저가 사지로 가는 양같이 끌리었고 탈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 양같이 잠잠하여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다”하심은 예수님의 골고다행과 십자가에 돌아가시는 장면을 예언한 것이요, 또 “낮을 때에 공변된(공평하고 정당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감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하신 것은 예수님이 억울한 재판을 받고 돌아가실 것을 예언하면서 “하나님의 계시가 아니면 그 세대를 말할자가 없다”고 하신 것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750년경에 성령님의 계시로 “예수님에 대한 것”을 예언하였습니다. ② 본문에 인용된 32절, 33절 말씀은 사53:7,8절을 인용한 말씀이나 본문 33절이 사53:8과 꼭 같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러나 사53:8에 “그가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갔다”하심이 바로 본문 33절의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했다”하시므로 “심문을 당하고 끌려가게 된 원인”을 저자가 밝힌 것이며 또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 하였으리요”하신 말씀의 뜻을 본문에서 “누가 감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란 말씀으로 저자가 요약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하신 말씀은 사53:8중에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이란 말씀을 대변한 것입니다. 따라서 내시는 구약의 사53:7-8대로 읽었을 것이지만 누가(사도행전 저자)가 그 말씀을 반복하여 기록할 때 구약 내용의 한 절을 의미상으로 간단하게 옮긴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③ 내시는 그 예언의 주인공을 알지 못하여 빌립에게 물었고(34절) “빌립은 그 말씀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을 가르쳐 복음을 전하였다”(35절)하였으니 구약이 예언한 메시야를 가르침을 통하여 밝히 증거한 것입니다.

4. 내시가 세례를 받음에 대하여(36-38절)

1) 복음을 깨달은 내시는 물 있는 곳에 이르자 세례 받기를 요청하였고 빌립은 내시를 데리고 물에 내려가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여기에서 세례는 복음을 깨닫고 확신한 자가 세례 받기를 원하였을 때 베풀게 된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2) 한글성경에 37절이 없는 것은 없는 사본(D사본)을 권위있게 여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E사본에는 37절이 있으니 각주의 내용처럼 “빌립이 가로되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가로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줄 믿노라”하신 말씀이 있으니 이 말씀은 내시가 신앙의 진실성을 고백한 말씀입니다. 이 37절을 성경으로 볼 것이냐 구전으로만 볼것이냐 하는 문제는 어려운 연구과제입니다.

5.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감에 대하여(39-40절)

1) 내시에게 세례 베풀기를 끝내자 성령님(주의 영)께서 빌립을 “아소도”로 이끌어 가셨으니 이는 “초자연적 이동”(왕상18:12, 왕하2:16)을 뜻하며 ① 이것은 하나님께서 전도자를 이동시키실 때 특별한 능력으로 보호하시고 이동하실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이며 ② 빌립을 그렇게 이동시키신 이유는 그가 내시의 권유에 이끌리지 않게 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아소도”에서 전도하게 하심일 것입니다. ③ 아소도는 지중해변 “가사” 북쪽 약90리 거리에 있는 곳이므로 빌립이 내시를 만난 장소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이동된 것입니다.

2) 빌립은 그곳에서부터 전도하며 북쪽으로 여러 동리를 지나 “가이사랴”에 이르렀으니 “가이사랴”는 지중해변 항구로 아소도에서 약 80리 떨어진 곳입니다.

3) 또 내시가 흔연히 길을 간 것은 복음이 먼 나라로 수송되는 사실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도화선이 되어 초대교회 당시에 애굽과 에디오피아에 큰 부흥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전도와 관계되는 여러 가지 섭리를 배울 수 있었습니다. 곧 ① 전도자를 인도하시고 ② 전도 받을 자를 만나게 하시며 ③ 복음을 에디오피아로 수송하신 사실이니 하나님은 그런 방법으로 선교가 되도록 하셨습니다.

제 25 과 사울이 변화를 받음 (행 9:1-22)

 

위 본문 말씀은 “사울이 변화를 받음”이란 제목으로 살필 수 있습니다. 내용을 세분하면 ① 사울의 본래의 모습(1-2절) ②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심(3-9절) ③ 아나니아를 통한 은혜의 전달(10-16절) ④ 변화된 사울(17-22절)로 구분하여 살필 수 있고 전체의 제목을 “사울이 변화를 받음”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사울의 본래의 모습은 어떠하였습니까?(1-2절)

1) 사울의 본래 신분은 벤야민 지파요, “다소”에서 태어났고 가말리엘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웠으며 율법과 헬라어에 능통하고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바리새인이었습니다(9:11,22:3,25,빌3:5).

2) 그러나 그는 복음을 깨닫지 못한 상태에서 기독교를 핍박하였으니(행22:4,빌3:6) 이날도 여전히 성도에 대한 위협과 살기가 등등한 모습으로 다메섹 지역에 있는 성도를 예루살렘으로 결박해오기 위하여 대제사장으로부터 공문을 받고 동류자들과 함께(7절)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3) “다메섹”은 시리아 지역의 도성으로 그 당시에는 유다처럼 로마의 통치하에 있었고 현재는 시리아의 수도입니다. 초기에 셈의 손자 “우스”가 창건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치 않으며(창10:23)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셀”의 고향으로(창15:2) 그 지역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300km, 갈릴리 바다에서 동북쪽으로 약 150km에 위치한 곳입니다. 해발 746m(감람산;830m)로 세계적인 고지대라고 합니다.

2.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심(3-9절).

1) 사울이 다메섹에 가까이 갔을 때 홀연히 하늘로서 비취는 빛을 받게 되어(깜짝 놀라) 엎드러지게 되었고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그에게 나타나 주신 것이었습니다(고전15:8).

2) 이 소리를 들은 사울은 서슴지 않고 “주여 뉘시니이까”하였고 예수님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고 대답하신 후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부활하신 예수님과의 완벽한 대화였습니다.

3) 그러나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예수님은 보지 못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적 은사가 받을 자에게만 분별하여 계시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소리만 듣고 아무것도 보지 못한 동행자들은 어리둥절하여 말을 못하고 서 있었으며 사울은 엎드러진 상태에서(4절) 다시 일어나 눈을 떴으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으므로 다른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3일 동안 보지 못한채 식음을 전폐하였다고 하였습니다. ① 이는 성령님께서 사울 한사람을 변화시키기 위하여 자신의 주권과 불가항력적 능력으로 역사하신 것이었고 ② 이로 인하여 사울은 시력이 상실됨과 동시에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시력을 상실케 한 사실은 구약시대에도 있었습니다(왕하6:18). ③ 하나님께서 초자연적 능력으로 사울의 시력을 해하신 것은 완고한 자가 스스로 회개할 수 있게 하시기 위하여 고난을 가하신 것이며(시119:67) ④ 사울은 앞을 보지 못한채 식음을 전폐하고 3일동안을 다메섹에 머물러 있었습니다(9절).

3. 아나니아를 통하여 사울에게 은혜를 전달케 하심(10-16절).

1) 사울을 변화시키실 무렵에 예수님께서는 다메섹에 거주하는 제자 “아나니아”에게 환상으로 나타나셔서 미리 부탁하는 말씀을 주셨습니다(10절).

2) “아나니아”의 직분은 명시된 바가 없으나 주님의 제자임은 틀림이 없으며(10절) 그에게 주신 말씀은 11절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하시고 또 그 사울은 “자신이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 ① “직가”란 다메섹 성안의 거리 이름이고 ②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란 뜻은 다소에서 출생한 유대인이란 뜻이며(사울이 벤야민 지파이지만 정통적 선민이란 뜻으로 유다 집에 속한 자라고 표현한 것임) ③ 주님께서는 사울이 기도하는 중에 “아나니아가 자기에게 안수하여 보게하는 사실”을 미리 계시로 알게 하셨습니다.

3) 이 때에 “아나니아”는 여러 사람들에게 들은대로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고 또 다메섹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로부터 받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으니(13-14절) 이는 핍박자 사울에게 “은혜를 전달하라”는 주님의 명령이 이상하게 들려진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핍박자에게 변화와 은혜를 주신 것이 사실입니다.

4) 주님께서는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이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하시고 또 “그가 내 이름(예수)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보이리라”고 하셨습니다(15-16절). ① 예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할 그릇으로 미리 사울을 선택하신 것입니다. 사울이 이방선교사가 되는데 유리한 조건은 ㉠ 고향이 이방지역인 길리기아 “다소”요 ㉡ 헬라어에 능통한 점 ㉢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점 ㉣ 학문이 많은 점 ㉤ 가족이 없는 점등을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같은 일반적 여건 위에 성령의 충만(17절)을 힘입히셔서 자기의 일을 하게 하신 것입니다. ② 유력한 대상을 미리 선택하신 것 외에 또 “그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많은 해를 받아야 할 것을 그에게 보이신다”(16절)고 하셨으니 이는 베드로에게 예고하신 것처럼(요21:18-19) 사울에게도 그렇게 깨우쳐 주실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예수님도 그런 사실을 미리 아셨습니다(사53:4-9,요13:1).

4. 변화된 사울에 대한 말씀입니다(17-22절).

1) 아나니아는 주님의 말씀대로 “직가”에 가서 사울을 찾아 만났고 그에게 예수님의 뜻을 전달하여 말하기를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신 예수님이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하시고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하고 안수하니(12절) 즉시 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겨져 다시 보게 되었으며 또 일어나 세례를 받았고 음식을 먹으므로 강건하여 졌다고 하였습니다(17-18절). ① 사울이 앞을 못보게 된 것은 강한 빛때문이었고(행22:11) 주님께서는 3일 후에 아나니아를 통하여 보게하셨으며 또 3일간 금식상태에서 건강도 주셨습니다. ② 사울에게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다”하심은 역시 아나니아를 통하여 오순절적인 강한 은혜를 체험하게 하시고 세례까지 받게 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2) 여기에서 사울은 건강회복과 세례받음과 성령의 충만으로 변화를 받았고 또 다메섹에서 제자들(아나니아의 지도를 받는 주님의 제자들)과 몇 일을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되심”을 전파하는 자로 변한 것입니다(19-20절).

3) 이 사실을 안 사람들이 다 놀라며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성도를 잔해하고 핍박하던 사람이 아니냐”(21절) 하고 의심하며 이상한 말을 하였음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4) 그러나 사울은 더욱 힘을 얻어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증거하면서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으니(22절) 이것이 곧 성령충만으로 인한 확신과 능력으로 활동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것은 1) 하나님이 자기의 쓰실 자를 미리 택하신다는 점과 2) 일반은총에 의한 필요한 여건도 활용하신다는 점과 3) 주님이 성령으로 역사하시면 완고한 자라도 불가항력적으로 굴복되고 변화 될 수 있음과 4) 사명을 주실 때 아나니아를 통한 것처럼 간접적으로 은사를 전달하신다는 점과 5) 성령이 충만하면 신속한 변화와 능력을 나타낼 수 있음을 알게하여 주신 것입니다.

제 26 과 사울과 베드로의 사역 (행 9:23-43)

 

이 본문 말씀을 살필 때 제목을 “사울과 베드로의 사역”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① 23절-31절까지는 “변화된 사울과 관련된 믿음사역”에 관한 말씀이 있고 ② 32절-43절까지는 “베드로가 애니아의 중풍병을 고치고 또 죽은 다비다를 살린 기사”가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두 대목으로 나누어 말씀을 살피기로 하겠습니다.

1. 사울과 관련된 믿음사역에 대하여(23-31절)

1) 사울은 다메섹에서 변화를 받은 후 그곳에 여러 날을 머물렀다고 하였습니다(23절). 그는 다메섹에 머문동안 열심히 전도하였을 것입니다(행9:20,22). 그러나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였고(23절) 이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졌으며 공모자들은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고 사울의 출입을 기다렸으나(24절) 사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밖으로 달아내리므로 죽음의 위험을 피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의 사울의 제자들은 사울과 함께 예수님을 핍박하는 일에 합세한 자들일 것입니다(25절, 9:7). 하나님이 사울을 쓰시기 위하여 선택하셨으니 만큼 그를 보호하셔야 할 것이며 여기에서 사울이 보호받은 방법은 자연스런 일반은총에 의한 구출이었습니다.

2) 다메섹을 탈출한 사울은 예루살렘으로 왔으며 그가 예루살렘에 온 이유는 그곳에 있는 예수님의 제자들과 교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26절의 “사귄다”는 뜻은 자신의 개종의 과정을 알리고 신앙고백을 인정받은 다음 복음사업에 합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사울의 본래신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으므로 다 사울을 두려워하였으며 또 사울의 변화됨과 예수님의 제자됨을 믿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26절).

3) 이때에 예루살렘에 “바나바”란 제자가 있었는데 그가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들에게 사울의 변화과정을 자세히 소개하므로 친교협력에 임하도록 하였습니다(27절-28절). “바나바”는 구브로에서 출생한 레위족으로 오순절 초기에 사명에 임하였는데(행4:36) 그는 다양한 사명자의 소질을 갖춘 사람이었고(행11:24-26) 또 사도의 직임도 갖고 있었습니다(행14:14). 바나바는 사울보다 훨씬 선배인 입장에서 사명의 일을 하였습니다.

4) 사울은 예루살렘에서도 주 예수의 이름을 담대히 전하였고 또 헬라파 유대인들(행6:1)과 변론하였으나 그들은 사울이 증언하는 복음적 교리가 자기들과 맞지 않으므로 사울을 죽이려고 힘을 썼다고 하였습니다(29절). 그러나 형제들(성도들)이 이 사실을 알고 예루살렘에서 서북방 220리쯤 떨어진 지중해변의 항구도시인 “가이사랴”로 데리고 가서 그 곳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그의 고향인 길리기아 “다소”로 보냈다고 하였습니다(30절). “다소”는 안디옥에서 서쪽으로 160리쯤의 거리에 위치한 지역입니다. 사울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것은 그의 신분을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5) 이런 일들과 함께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의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졌다”고 하였습니다(31절). ①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갈릴리는 도성이 아닌 넓은 지역(道)을 의미합니다. ② 그곳의 교회들이 핍박을 받으면서도 신앙이 안정되었고 평안과 든든함이 있었으니 이는 하나님이 붙드시는 은혜였습니다. ③ 또 주를 경외하는 정성과 성령님의 위로(위로되는 말씀을 증언함)로 진행할 때 성도의 수가 더 많아졌으니 여기에서 성도의 수가 많아지는 은혜는 ㉠ 교회단체의 평안과 든든함이 있고 ㉡ 주님을 경외하는 정성이 뛰어나며 ㉢ 은혜로운 말씀(성령님의 위로)이 있었을 때 성취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2. 베드로의 사역에 대한 말씀입니다(32-43절).

베드로는 “룻다”에서 “애니아”란 성도의 중풍병을 고쳐준 사실과, “욥바”에서 “다비다”란 여제자의 죽음을 살려준 사실이 있었습니다.

1) 베드로는 (전도하기 위하여)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의 성도들에게로 갔습니다. “룻다”는 “욥바”(가이사랴 남쪽 120리쯤에 있음)의 동남쪽 약50리 지점에 있는 촌락입니다.

2) 거기서 8년이나 침상에 누운 중풍병자 “애니아”를 만나서 그에게 “예수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한대 그가 곧 일어나므로 룻다와 사론(가이사랴와 욥바 사이의 평야를 의미함)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왔다고 하였습니다(35절). 여기에서 베드로가 나타낸 기적의 성격은 행3:2-8에 기록된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일으킨 사실”과 같은 것이며 이 사실을 본 사람들이 다 놀라운 기적에 감탄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일은 그 당시에 있었던 일이었습니다(요14:11).

3) 또 당시에 “욥바”에 “다비다”(아람어 이름)란 여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이 헬라어로는 “도르가”(사슴이란 뜻)인데 여기의 “여 제자”란 뜻은 “예수님을 따르며 섬기는 자란 뜻”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가 선행과 구제를 많이 하다가 죽으매 그 시체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씻어 다락에 뉘어놓고 장례절차를 기다리던차 베드로가 “룻다”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곳에 있는 제자들이 두사람을 “룻다”로 보내어 베드로를 “욥바”로 속히 오게 하였습니다(36-38절). 제자들이 베드로를 오게 한 목적은 꼭 기적을 통하여 살리게 하기 위함보다 성실한 성도(제자)가 세상을 떠났으므로 장례에 참석케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찍이 사도들이 죽은 자를 살린 일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4) 베드로가 그 집에 와서 “도르가”의 구제를 받은 과부들이 도움받은 옷을 보이며 크게 슬퍼하는 모습을 보고(39절) 그 방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낸 후 무릎을 꿇고 기도한 다음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니 죽은 자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보며 일어나 앉았다”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죽은 자를 살린 것입니다(40절). 또 산 자를 일으켜 세우고,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니(41절) 온 “욥바”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5) 그 후에 베드로는 그 곳에서 “피장(가죽공) 시몬의 집에 여러 날 유하였다”고 하였습니다. ①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린 일에 대하여는 주님이 베푸신 특수한 이적으로서 기독교가 생명의 종교임을 증명하여 보이시기 위함이었고(히2:4) 죽은 자를 살린 기적은 구약에 3회, 신약에 5회 나타난 기록이 있습니다. ② 그런데 왜 방에 있는 사람들을 다 내보내고 기도하였을까요?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기 위한 간절한 기도를 조용한 분위기에서 시행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③ 그리고 “다비다야 일어나라”는 말씀을 외칠 때는 그 말씀이 자기의 말이 아닌 주님이 주신 말씀을 영감으로 받아 그대로 전달한 것입니다(시107:20). 주님의 말씀에는 능력이 따르지만 사람의 말에는 그런 힘이 따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받아야 할 것은

① 사울의 변화와 바나바의 중재역할을 통한 친교의 필요성과

② 신앙사상의 차이로 인한 핍박이 어느 곳에나 있음과

③ 베드로의 이적의 목적과 성질에 대한 것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27 과 고넬료를 은혜받게 하심 (행 10:1-23)

 

이 말씀은 “가이사랴”에 주둔한 백부장 고넬료가 평소에 경건한 신앙생활을 하던차 하나님이 그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기 위하여 계시로 “욥바”에 거주하는 베드로를 청하여 오도록 지시하시니 고넬료가 그대로 순종하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① 1절-2절은 “고넬료의 신분과 평소의 신앙생활”에 관한 말씀이고 ② 3절-6절, 9절-16절은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나타내신 계시의 말씀”이며 ③ 17절-22절은 “베드로가 계시를 깨달은 내용”이요 ④ 7절-8절, 23절은 “고넬료와 베드로의 순종에 관한 말씀”으로 되어있습니다. 전체의 제목은 “고넬료를 은혜 받게 하심”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고넬료의 신분과 평소의 신앙생활에 대하여(1-2절)

1) 고넬료는 “가이사랴”에 주둔한 “이달리야”대(隊)라는 로마군대의 백부장(100명의 병졸을 거느린 장교)이었습니다. 그 당시의 백부장은 군인의 권위로 보아 현재 중대장급보다 훨씬 높은 직위라고 합니다.

2) 고넬료의 군사는 로마 통치하에 있었으므로 “고넬료”도 로마사람이요, 이방인입니다. 그러나 그는 성도로서 “경건하였으며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또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항상 기도를 힘썼다”고 하였으니 성도로서의 인정 받을만한 경건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약1:27). 4절에 보시면 하나님이 더 큰 은혜를 베푸신 동기도 그의 기도와 구제가 기억되었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3) 고넬료가 “언제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에 대하여는 ① 오순절 당시에 예루살렘에 와서 직접 복음을 들었을 수도 있고(행2:5-11) ② 오순절 당시에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각국으로 흩어지면서 로마에도 전달되었음이 분명합니다(행2:10). 그 이유는 바울사도가 최초 이방전도자가 되어 로마에 갔을 때 그 곳에는 벌써 복음을 믿고 바울을 영접하는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행28:15). 따라서 고넬료는 예루살렘을 중심한 팔레스틴 지역에서 복음을 받았거나 아니면 로마에서 복음을 받았을 것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4) 우리는 고넬료가 이방인이요, 군인이란 신분으로 하나님께 대한 경건함과 가정의 합심과 기도생활과 구제를 힘쓴 일에 대하여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2. 하나님이 고넬료와 베드로에게 계시의 말씀을 주셨습니다(3-6절, 9-16절).

1) 고넬료에게 주신 계시의 방법은 환상중에 하나님의 사자(4절; 천사)가 나타나 말씀을 전하게 하신 것이었고(3절)

2) 고넬료가 이 환상을 보며 두려워 할 때에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께 상달하여 기억하신바 되었으니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는 해변에 거하는 피장(가죽공) 시몬의 집에 우거중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3) 하나님이 베드로를 청하게 하신 이유는 베드로를 말씀 증언자로 쓰셔서 고넬료의 가족들에게 은혜를 베푸시기 위함이었습니다(행10:44).

4) 고넬료는 말하던 천사가 떠나자 하인(가정의 사환) 두 사람과 종졸(부하군인) 가운데 경건한 사람(믿음이 좋은 사람) 한사람을 불러 사실을 알리고 “욥바”로 보냈으니(7-8절), 이는 즉각적인 순종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5) 고넬료의 보낸자들이 “욥바”성에 가까이 갔을 때는 그 이튿날 6시였습니다. 고넬료가 계시를 받고 사람을 보낸 시간은 그 전날 기도하던 9시 후였습니다(3절). “가이사랴”에서 “욥바”까지의 거리는 약130리입니다. 그 당시의 교통수단은 도보 외에 말을 이용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넬료가 기도한 9시는 우리의 시간으로 오후 3시경이고 오후 3시 이후에 출발하여 그 이튿날 욥바에 도착한 것이며 베드로가 기도한 9시쯤이란 새벽 3시를 의미하는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그 시간에 지붕에서 기도를 하였고 또 계시를 받았습니다. 지붕은 그들의 주택구조상 한적한 장소를 의미합니다. 그도 하나님의 계시를 비몽사몽간에 환상으로 받았습니다(10,17절). 그 때에 고넬료가 보낸 하인들이 도착을 한 것입니다.

6) 베드로가 받은 계시를 요약하면(10-16절) ①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할 때에 각색 짐승들과 기는 것과 나는 새들이 담긴 큰 보자기가 하늘로부터 줄에 매어달린 상태로 내려오는 것이었고 ② 또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는 소리를 듣고 베드로가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먹지 않았다”하였으니 이는 베드로가 율법이 명시한 부정한 생물의 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뜻이었습니다(레11:1-23). 그런데 또 두번째 소리에서 “하나님께서 깨끗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말라”는 말씀이 들렸고 이같은 계시가 세번 반복한 후에 그 그릇(보자기)이 하늘로 올리워 간 것입니다. 여기의 “하나님이 깨끗게 하셨다”는 뜻은 “예수님이 이방인의 죄를 위하여서도 속죄의 제물이 되셨다”는 뜻이었습니다.

3. 베드로가 이 계시의 의미를 깨달음에 대하여(17-22절)

1) 하나님이 쉽게 깨닫지 못할 계시를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여기에 대하여 하나님은 ① 인간의 문화수준에 따라 적절한 방법으로 주시는 경우가 있고(창3:15,21) ② 계시의 말씀(성경)을 배우고 연구하여 확신하게 하시는 경우도 있으며(딤후3:14, 행17:2-3,11) ③ 즉시 알려지지 않을지라도 시기와 사건에 접하면서 점차 알려지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요 13:7, 벧후1:19).

2) 베드로도 처음에는 그 의미를 몰라서 의심하며(이 의심은 불신앙이 아니고 무지를 나타냄임)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하는 중에(19절)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를 찾았고 그때에 또 성령님께서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일어나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각주에 보시면 어떤 사본에는 세 사람으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보낸 자는 세 사람이지만 두 사람만 방문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사본상 차이가 있음은 사람의 실수이지만 계시의 취지상 문제되지 않으므로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보는 계시와 듣는 계시를 아울러 베푸셨고 베드로는 기도 중에 계시를 받았으며 또 계시를 생각할 때에 성령님이 지시를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성도가 기도와 말씀 상고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방법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3) 성령님의 지시를 받은 베드로는 찾아온 사람들에게 방문한 이유를 물었고 그들은 고넬료에 대한 소개와 방문한 이유를 말하였습니다. 그 하인들이 소개한 고넬료는 ① 의인이요 ②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요 ③ 온 유대족속이 칭찬하는 자로서 ④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베드로를 초청하게 되었고 ⑤ 베드로의 증언하는 말씀을 들으려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고넬료는 하인들로부터 존경받는 상전이었음과 그가 하나님의 말씀듣기를 대단히 사모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베드로는 자신이 받은 계시와 자기를 초청하러 온 사실이 일치함을 깨닫고 그들을 자기의 처소에 유숙시키고 이튿날 두어형제와 함께 가이사랴로 오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하나님은 경건한 자와 사모하는 자에게 은혜를 더 주신다는 점과(대하 16:9) ② 고넬료의 신앙적 생활의 미덕과 ③ 하나님의 계시와 은혜 베푸시는 방도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28 과 고넬료 가족이 은혜를 받음 (행 10:24-48)

 

이 본문말씀은 “고넬료 가족이 은혜를 받은 내용”입니다. 이 말씀을 분류하면 ① 24절-33절까지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영접함”에 대한 말씀이요 ② 34절-43절까지는 “베드로가 증언한 말씀”이며 ③ 44절-48절까지는 “고넬료의 가족들이 은혜를 받은 내용”입니다. 이상 3대지의 순서로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고넬료”가 베드로를 영접함(24-33절).

1) 베드로 등 일행이 출발한 이튿날 “가이사랴” 고넬료의 집에 도착하였을 때 ① 고넬료는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으고 기다렸으니(24절) 이는 전도의 열심을 나타낸 것이며 ② 또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영접하여 그 발 앞에 엎드려 절을 한 것은(25절) 사도에 대한 존경심과 은혜를 사모함과 겸손함과 예절의 뛰어남을 나타낸 것입니다. ③ 이때 베드로는 엎드린 고넬료를 일으키며 “나도 사람이라”하였으니(26절) 이 뜻은 같은 사람, 같은 성도로 어떤 우열이나 계급을 따지지 말고 형제같이 대하여야 할 것을 나타낸 말일 것입니다.

2) 베드로는 고넬료와 함께 사람들이 모인 장소로 들어가(27절) 그가 방문하게 된 경위를 말하였습니다. ① 베드로 자신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이방인을 교제하지 말라”는 계명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 때부터 명하신 것이며(신7:1-4) 이는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위하여 악한 자들과 교제하지 말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시1:1, 고후6:15-17, 딛3:10).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을 구원하시는 출애굽때에도 이방인이 선민세계로 돌아와 믿음을 화합할 때는 영접하는 것을 허용하셨습니다(출12:48-49, 수6:22-25, 룻4:13-17). 따라서 “이방인을 접근하거나 교제하지 말라”는 뜻은 접근상의 금지가 아니고, 신앙생활을 해치는 친교상의 금지였습니다. 그러나 선택받음과 전통의 우월감을 가진 유대인들이 지나치게 이방인들을 경계하는 것으로 확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민의 타락에 기인하여 이방인을 구원하실 때를 정하셨는바 그때가 곧 오순절부터인 것입니다(마15:24-27, 롬11:7-11, 고후6:2, 행2:4-11). ② 베드로가 고넬료의(하인) 청탁을 받고 사양치 않은 것은 하나님의 계시때문이었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아무도(이방인이라도) 속되거나 깨끗지 않다고 하지말라”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고 보니 “보자기에 담긴 각색 짐승들과 생물들을 잡아먹으라”(행10:12-13) 하신 계시가 바로 이방인의 구원문제를 나타내주신 것이었음을 알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 베드로가 고넬료에게 초청한 이유를 물었을 때(30-33절)

① 고넬료는 나흘전 이맘때에 자신이 기도하는 중 하나님의 사자(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가 자신의 기도와 구제를 기억하시고 욥바에 우거하는 베드로를 청하라 하셔서 오시게 되었으니 잘하신 일이라 하였고

②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다”고 하므로 은혜받을 자의 바른 자세를 취한 것입니다. 그 자세는 ㉠ 하나님이 베드로를 통하여 주시는 말씀으로 믿는 것과 ㉡ 모든 말씀을 듣고자 하여 기다리는 것과 ㉢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과 같은 경건한 태도를 취한 것입니다.

2. 이때에 베드로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증언하였습니다(34-43절).

1)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않으심과 각 나라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받으시는 줄을 깨달았다”고 한 것입니다(34-35절). 이 말씀은 베드로가 “하나님은 이방인들을 죄인시 하시고 구원하시지 않는 줄로 알았으나 그렇지 않음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이방인이라 하여 무조건 나쁘게만 생각한 것이 자신이 사람을 외모로 본 과오이며 이방인 중에도 하나님을 바로 경외하는 신앙의 사람과 구원의 대상이 있음을 확인하였다는 뜻입니다.

2) “예수님은 만유의 주시요, 그리스도(기름부음을 받으신자; 구세주)시며 요한이 세례를 반포한 후에(마3:1-13)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화평의 복음(하나님과 화목하고 구원을 받으며 사랑을 실천케 하는)을 두루 전파하신 분이라”(마4:12-17) 하였고(36-37절)

3)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받으신 분이며(요1:16) 이로써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병고치심)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38절).

4) 베드로와 그 동료들(우리는; 39절)은 예수님이 각처(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복음사역을 하신 일에 대한 증인들로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나무에 달아 죽임)과 부활사건, 또 이 부활사건을 확실케 하시기 위하여 미리 택하신 중인인 사도들과 함께 음식을 먹은 사실까지 있었음을(요21:12-14) 말함으로써 부활의 확실함을 증명하였고(39-41절)

5) 또 하나님이 예수님을 산 자와 죽은 자(신자, 불신자)의 재판장(심판자)되게 하신 것을(요5:22) 백성들에게 증언하도록 사도들(우리)에게 명하신 사실과(마28:19-20, 행1:8)

6) 모든 선지자도 “그 예수님의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 받는다”는 사실을 증언하였다고 하였으니(43절) 여기에 “그 이름을 힘입는다”는 뜻은 예수님의 인격과 구원사역의 의미를 “예수”란 이름에 함축시켰음을 이해하시면 될 것입니다(마1:21,23). 따라서 베드로의 설교는 ① 의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② 예수님의 신분 ③ 예수님의 전도사역 ④ 십자가와 부활 ⑤ 심판자되심에 대한 것 그리고 ⑥ 이를 믿는 자가 죄사함 받는다는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이 증언은 구원받는 도리의 핵심입니다.

3. 고넬료 가족이 은혜를 받음에 대하여(44-48절)

1) 성령님은 베드로가 복음을 증언할 때 역사하셨고

2) 베드로의 증언하는 말씀을 듣는 모든 자에게 내려오셨으니이는 오순절 당시처럼 강하게 역사하심을 뜻하는 것입니다.

3) 방언을 말하고 하나님을 높였으니(46절) 이 사실도 오순절 당시의 성령강림의 역사와 같음을 의미하며 또 베드로도 자신들이 처음 은혜받을 때와 같은 성질의 역사라고 증언을 하였습니다(47절).

4) 이때에 할례받은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성령부어 주심을 보고 놀랐으니(45절) 이는 그런 역사를 처음 보았기 때문입니다.

5)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이 세례를 받음에 합당한 대상임을 알고 같이 온 동료 제자들에게 “세례를 주라”하였으니(48절) 이 경우는 성령세례가 물세례보다 앞선 것이었으나 때로는 물세례가 성령세례보다 앞서는 경우도 있는 것입니다(행8:6,13,17).

6) 그들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도록 청하였다고 하였습니다(48절). 은혜를 사모하는 성도는 말씀의 사역자를 영접하여 머물게 하기를 좋아합니다. 그것은 곧 주님을 사랑하고 또 말씀의 은혜를 더 받으려는 사모함 때문일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고넬료의 신앙생활에서 큰 은혜받을 자의 자격을 배울 수 있고

② 베드로의 증언이 복음의 핵심 내용들이었으며

③ 성령님은 말씀과 함께 말씀을 듣는자들에게 역사하셨고

④ 성령님의 역사하신 결과는 방언과 하나님을 높임이었으니 방언은 기적으로 나타내신 언어의 능력이요 하나님을 높인 것은 은혜받은 자의 결과가 하나님 영광에 있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제 29 과 이방인들이 은혜 받음을 확신함 (행 11:1-18)

 

이 본문말씀은 베드로가 이방인들이 복음을 받은 사실을 부당하게 여겨 힐난하는 자들에게 강하게 변호하여 듣는자들로 하여금 이방인들도 하나님께로부터 자기들이 받은 은혜와 같은 것을 받는다는 사실을 확신케 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이 은혜 받음을 확신함”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1절-3절은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힐난(따지고 비난함)하는 내용”이요 ② 4절-17절은 “베드로가 자기의 체험을 증언하는 내용”이며 ③ 18절은 “힐난하는 자들이 깨닫고 확신하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1. 할례자들이 베드로를 힐난함에 대하여(1-3절)

1) 유다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는 소문을 듣고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말하기를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먹을 수 있느냐?”하였으니(2-3절) ① 여기의 “할례자”란 할례 받은 것을 구원의 방편으로 알면서 율법을 알지 못하여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무할례자)을 죄인으로 여겨 배타적으로 대하는 자들을 의미하는 것이요 ② 유대인으로서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음식을 먹은 것”을 부당하게 여겨 추궁한 것은 역시 유대인의 이방인에 대한 배타적 의도를 나타낸 것입니다.

2. 이때에 베드로는 자신의 체험을 말하므로 그 정당성을 항변하였으니(4-17절) 베드로가 그들에게 자신이 당한 일을 차례로 설명하였으니(4절)

1) 자신이 욥바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간에 환상을 본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5-10절). 이 사실은 행10:9-16에 기록된 사실을 그대로 설명한 것이요

2) 베드로 자신이 그 계시를 받고 깨닫지 못하였으나 고넬료의 보낸 세 사람이 찾아와(행10:18; 두 사람이 찾는다는 말씀을 조화있게 해석할 것) 자신을 초청하였을 때 성령님께서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하시므로 함께 온 자들까지 여섯 형제(10:33,45)가 고넬료의 집에 갔다 하였고(11-12절)

3) 그때에 고넬료도 하나님의 지시에 의하여 자신을 청했으며(13절) 또 “베드로가 자신의 온 집에 구원 얻을 말씀(복음)을 증언할 것까지 계시로 보았다” 하였으니(14저) 이 말은 행10:22에서 교넬료의 하인들이 베드로에게 고한 말입니다.

4) 베드로가 고넬료의 권속들에게 말씀을 증언할 때에 말씀을 듣는 자들에게 처음에 자신들이 체험한 것과 같은 상태로 성령님이 임재하셨으므로(15절) 주님이 성령세례 주실 것을 약속한 말씀(행1:5)이 생각났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에서 성령세례란 뜻은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의 역사를 의미함이 더욱 확실해졌고 또 이 은혜는 이방인 성도에게도 꼭 같이 주실 수 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16-17절).

5) 그런고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이를 능히 막을 수 없다고 항변한 것입니다(17절). 이 말씀은 성령님의 불가항력적 은사의 교리를 입증하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일방적 역사에 의하여 구원을 받고 또 선을 행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3. 베드로의 이 항변에 청중들은 잠잠하여졌으며 오히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하나님이 이방인에게도 생명얻는 회개를 주신 줄로 확신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의 “생명얻는 회개”란 멸망받을 불신앙에서 구원받을 믿음으로 돌이키는 회개를 염두에 두고 말한 것입니다. 불신앙에서의 회개는 믿음을 갖는 것으로 생명(영생) 얻는 회개가 되고 믿음안에서의 범죄를 회개하는 것은 하나님의 진로를 풀어 드리고 자신의 변화와 축복에 발전을 갖는 회개가 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우리가 교훈받아야 할 것은 ① 이방인도 때가 되매 이스라엘 선민에게 약속한 꼭 같은 구원을 주셨다는 사실과 ② 구원의 말씀을 전파한 것과(14절) ③ 생명얻는 회개에 대한 것과 ④ 유대인들의 편협한 생각 또 지나친 우월감을 갖고 이방인을 배타적으로 대하는 잘못과 ⑤ 성령님의 하시는 일에 대하여 인간이 항거할 수 없음을 알게하여 주신 것입니다.

<< 보충내용 >>

1) 성경에는 이방인(행11:8), 타국인(출2:22,12:19), 외방인(레22:25), 외인(민19:10, 삿19:12, 고전5:13)이란 용어가 나옵니다. 이 용어의 공통점은 다 하나님과 거리가 먼 상태 또는 믿음과 구원에 무관한 대상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방인은 하나님이 없는자(엡2:12) 비택자와 불신자를 의미하는 것입니다(롬5:6,8,10).

2) 인간의 타락이 있은 후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구원하시고 그 후손 중 셋의 계열에서 구원자를 택하시다가 아브라함을 선민의 조상으로 세우셨고(창12:1-2) 그 아들 중에서 이삭을 또 이삭의 아들 중에서 야곱을, 야곱의 열두아들의 후손을 전부 선민통치의 대상으로 삼으셨습니다(출3:6-8). 여기의 “선민 통치의 대상”이란 하나님이 그들을 자신의 계시와 신앙중심으로 통치하신다는 뜻이요 또 그 백성들에게 구원의 은총을 우선적으로 베푸신 것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선민이 아닌 자는 다 이방인이 되었습니다(출12:43).

그렇다고 하여 이방인이 전혀 구원에서 배제된 것은 아닙니다. 예를들면 아브라함의 집 남자들에게 할례를 베풀게 하실 때 이방사람에게서 돈으로 산 자까지 다 할례를 받게 하신 일과(창17:10-14) 출애굽당시에도 동거한 타국인에게 그렇게 하셨고(출12:48-49)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이나(수6:22-25) 모압여인 “룻”(룻 4:13-17, 마1:5)도 구원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만 섬기는 하나님으로 알고 우월감을 갖다가 “르호보암” 왕 때에 나라가 분국되면서 북방이스라엘국이 자율종교체제로 변할 때(왕상12:28-33) 그들은 또 종교적 차이에서 이방인이 되어버렸고 또 앗수르의 침략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혼혈아가 생기므로 더욱 상종 못할 이방인으로 취급을 하니(눅17:16-18) 결국은 예루살렘을 중심한 유다족만 정통족이 된 것입니다. 그 때에 유대인들은 구원이 자기들에게만 있고 하나님과의 특별한 관계도 자기 족속들에게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에도 가나안여인과 사마리아의 문둥병자가 구원을 받았고(마15:24-27, 눅16:19),그 후 오순절 때부터 이방인들에게 차별없는 복음적 은혜가 열려진 것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나누어주시는 때를 오순절 이후로 정하셨고(마15:24, 고후6:2, 행2:4-11) 이방인 중에서 구원하시는 수를 이스라엘 선민의 타락한 수만큼 구원하신다고 하셨습니다(롬11:7-11,26).

따라서 하나님은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며(롬3:29) 구원의 대상은 창세전부터(엡 1:4) 확정되어 있는 것이고 그 대상을 구원하시는 순서가 이스라엘 선민이 먼저요, 그 다음이 이방인인 것을 하나님이 계획적으로 섭리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들어올 것을 예상하시고 이스라엘의 한 부분의 완악을 허용하신 것이며 완악하여진 수만큼 이방인 중에서 구원받게 하시므로 결국은 “온 이스라엘(선택된 자 전부를 의미함)이 구원을 얻는다”고 하셨습니다(롬11:25-26).

제 30 과 복음이 안디옥에 전파됨 (행 11:19-30)

 

이 말씀은 “복음이 안디옥에 전파됨”이란 제목아래 3대지로 나누어 살필 수 있습니다. ① 19절-21절까지 “안디옥에 복음이 전파된 사실”이요 ② 22절-24절까지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에 바나바를 파송한 내용”이며 ③ 25절-30절은 “바나바와 사울이 동역(同役)한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1. 복음이 안디옥에 전파됨(19-21절).

행8:1-5에 보시면 스데반이 순교당할 때 함께 핍박받던 성도들중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와 모든 땅으로 흩어져 전도하였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때에 흩어진 성도들이 이방전도의 결실에 대한 은혜를 몰랐기 때문에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에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전도하였으나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에서 온 몇 사람은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전파하였다고 하였으니 이는 이방인이 복음을 받고 이방인에게 전도하였다는 뜻입니다.

이때에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므로 (주님이 도와주시므로)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로 돌아온 것입니다. 이 수다한 사람이란 안디옥에 살고 있는 이방인을 중심한 모든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안디옥은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300리 떨어진 수리아의 도성입니다. 지역에 대한 공부는 지도를 참고하십시오.

이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핍박과 환난이 전도의 동기가 된 점과 ② 복음이 각처로 전파된 점과 (19절) ③ 각처의 사람이 전도하게 된 점과(20절) ④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수다한 사람이 돌아오게 된 사실입니다.

2. 예루살렘교회가 안디옥(교회)에 사도를 파송한 내용입니다(22-24절).

1) 여기에서 안디옥 교회란 용어를 앞당겨 사용하지 않은 이유는 파송받은 사도들이 믿는자의 모임의 성질을 확인하고 진리에 근거한 신앙을 점검한 후 세례를 베푼 다음이어야 정식 교회라는 이름을 붙이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2) 예루살렘교회는 사도들 중심으로 모인 신앙의 종주(宗主)교회였습니다(행8:1,11:22,16:4). 그래서 안디옥에 믿는 자들이 모였다는 소문을 듣고 사도 바나바를 파송하게 된 것입니다(22절).

3) 바나바는 안디옥에 와서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였으니 이 “은혜”란 하나님이 이방인등 많은 사람을 믿음으로 인도해 주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고 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확고한 신앙으로 주님을 떠나지 말라는 뜻입니다. 성도가 주님을 가까이 따르다가도 무슨 환난이나 불만이 있으면 떨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4) 24절에서는 바나바의 미덕을 칭찬하신 말씀으로 그는 ① 착한 사람이요 ②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이며 ③ 이로써 큰 무리가 주께로 더 나오더라고 하였습니다. 사도는 신앙의 모범자인 만큼(고전11:1, 엡2:20) 모범적이어야 함은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 중에 착한 것과 성령과 믿음충만한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여기의 “성령충만”은 하나님께서 바나바에게 역사해 주시는 은혜요, 믿음은 바나바가 하나님께 대한 신뢰와 충성을 가졌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가 다 충만하였음은 큰 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런 경우에 은혜를 사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로 와서 지도를 받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할 것입니다. 저희들은 어떤 환경에서라도 굳은 마음으로 주님을 붙잡는 신앙과 바나바같은 신앙의 미덕을 본받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입니다.

3. 바나바와 사울이 동역한 사실에 대하여 살펴보겠습니다(25-30절).

1) 바나바가 안디옥에 와보니 가르침 받아야 할 성도의 수가 많으므로 함께 일할 성경교사를 물색하던차 길리기아 “다소”에 가 있는 사울을 찾아가서 그를 안디옥으로 데려왔습니다. 사울이 고향 다소로 가게된 이유는 유대주의자들이 그를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행9:28-30).

2) 바나바는 본래 사울의 성경실력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행9:27) 그를 동사교역자로 영입하여 두 사람이 1년간 큰 무리를 가르치니 비로소 가르침 받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란 뜻은 참된 크리스찬, 또는 자격있는 크리스찬이란 뜻입니다. 모든 성도가 모든 이웃들로부터 “참신자”라는 인정을 받으셔야 할 것입니다.

3) 그때 다른 선지자들도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으로 왔습니다. 여기의 선지자란 미래를 예언하는 은사를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사도들이 있는 중에 또 선지자가 있은 것은 교사처럼 가르치기도 하고 또 단순한 예언으로 미래를 조명하는 사역을 하기 위함이었습니다(13:1,21:10).

4) 그 중에 “아가보”란 선지자가 성령의 감동으로 예언하기를 “천하(팔레스틴지역)가 크게 흉년들리라”하였는데 그 예언이 “글라우디오” 황제때에 성취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글라우디오”는 로마의 네번째 황제로서 주후 41년-54년까지 재임하였다고 합니다. 또 “요세보”란 역사가도 주후 44년-48년까지 유대지역에 큰 흉년이 있었음을 기록하였다고 합니다.

5) 안디옥교회와 제자(성도)들이 각각 힘대로 유대에 사는 흉년만난 성도들에게 부조(구제금)하기로 작정하여 실행(모금)한 후 이 금액을 바나바와 사울이 받아서 예루살렘교회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30절). 이는 성도가 모금한 것을 복음사역자들이 직접 예루살렘까지 가서(12:25) 예루살렘교회의 장로들에게 전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받으셔야 할 것은 ① 환난과 핍박이 전도의 동기와 길을 열게 한 사실이요 ② 주의 손이 함께 하시므로 믿고 돌아온 자가 많아진 점이요 ③ 바나바의 훌륭한 사명자적 미덕이요 ④ 동료자와 뜻을 같이하여 교육에 힘쓴 점 ⑤ 성도로 하여금 “그리스도인”되기에 합당하도록 교육한 점 ⑥ 흉년당한 성도들에게 성실하게 구제한 점등입니다.

제 31 과 헤롯의 핍박 (행 12:1-17)

 

본문 12장 전체를 살피면 “헤롯의 핍박”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을 세분하면 ① 1절 말씀은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사실”이요 ② 2절-4절은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 사실”이며 ③ 5절-11절은 “하나님의 사자가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출한 내용”이요 ④ 12절-17절은 “출옥한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찾아가서 자신의 구출 받은 사실”을 알린 말씀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런 역사를 기록하신 것은 후시대 성도들에게 큰 교훈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교훈의 예를 든다면 “핍박은 항상 따를 수 있다, 하나님은 핍박과 위기에서 구출하신다, 또 성도는 기도를 하면서도 응답을 예상치 못하는 어리석음이 있다”라는 교훈 등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1. 헤롯이 야고보를 죽인 사실에 대하여(1절)

1) 1절 말씀의 “그때”란 팔레스틴 지역의 흉년으로 인하여(11:28) 바나바와 바울이 안디옥에서 부조를 갖고 예루살렘을 다녀갈 무렵을 의미합니다(11:29-30,12:25).

2) 그 당시의 헤롯은 “아그립바 1세”로서 예수님 탄생당시에 있었던 대헤롯의 손자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헤롯왕이 네 사람 출현합니다. ① “대헤롯”으로 로마황제 “안지베돌”의 아들로 주전 37년부터 주전 2년까지 유다와 갈릴리 감사로 있었고, 예수님 탄생당시에 어린이를 학살하고(마2:16) 가이사랴, 사마리아 도성 및 예루살렘 성전 등을 건축하다가 주후 2년에 죽었으며 ② “헤롯 안디바”로서 대헤롯의 아들(넷째부인 말다스의 아들)로 부친이 죽자 주후 3년-36년까지 요단강 동편의 뵈뢰아와 갈릴리 지경을 통치하였으며 세례요한을 죽였고(마14:8-12) 예수님이 돌아가실 무렵 빌라도의 재판에도 참관하였습니다(눅23:6-7). 그가 세례요한을 죽인 이유는 자기의 본 처가 아라비아왕의 딸 “아레다”이지만 로마에 가서 그의 형인 빌립의 처 “헤로디아”와 간통하여 그를 아내로 취하였으므로 요한이 이를 책망하였기 때문이며 ③ “헤롯 아그립바 1세”이니 이는 대헤롯의 손자로 주후 37년부터 40년까지 유다를 관할하면서 사도 야고보를 죽이고(행12:1) 베드로를 가두었으며(행12:23) 유대인의 인심을 사기 위하여 성도를 핍박하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다가 충이 먹어 죽은 자였으며(행12:23) ④ “헤롯 아그립바 2세”로 주후 41년에 왕위를 받았지만 그의 나이 17세인지라 로마총독이 대신 다스리다가 주후 48년부터 70년까지 부친의 관할을 통치하는 중 바울사도를 심문하여 로마로 호송케 한 왕입니다(행26:1-23).

2. 유대인들이 베드로를 잡아 옥에 가둔 사실입니다(2-4절).

1)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자들로서 베드로가 다른 도리(복음) 전하는 것을 핍박하여 잡아 가두되 군사 네 명씩 네 패에 맡겨 지키게 하였으니

2) 이때에 베드로를 즉시 처단(종교재판을 하여 사형에 처하는 것)하지 못한 것은 그 당시가 무교절이었기 때문입니다. “무교절”이란 용어는 유월절 절기와 같은 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출12:17-18,눅22:1). 구약시대에는 유월절이란 말과 무교병이란 말만 사용하였으나 신약에 와서 무교절(마26:17,막14:1)이란 용어까지 사용하였습니다. 이 두 용어의 특색은 “유월”이란 뜻이 “재앙을 넘어가게 한다”(출12:23)는 의미요, “무교병”은 “누룩 없는 떡을 먹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출12:15,18).

3) 베드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유월절 후에 끌어내고저 한 이유는 유월절이란 거룩한 절기에는 세속에 관한 일이나(출12:16) 살생하는 일을 금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유월절에 돌아가신 것은 유월절 제사의 본체(고전5:7, 출12:5)이시기 때문입니다.

3. 하나님의 사자가 옥에 갇힌 베드로를 구출함(5-11절).

1) 베드로가 갇혔을 때 “교회(예루살렘교회 성도들)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빌었다”하였으니(5절) 이는 핍박받는 사도가 무사히 풀려나기를 기도한 것입니다.

2) 그런데 헤롯이 베드로를 잡아내어 처단하려던 전날 밤에 베드로는 두 군사틈에서 쇠사슬에 매인채 누워 자고 있었고 또 두 명의 파숫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킬 때에 홀연히 주의사자(천사)가 광채를 발하며 옥중에 나타나 베드로 곁으로 가서 그의 옆구리를 깨우며 “급히 일어나라”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습니다. 깨어난 베드로에게 띠를 띠고 신을 들메게 한 후 겉옷까지 입고 따라오라 하여 베드로가 따라나갈 때 베드로는 참이 아닌 환상을 보는 줄로 느꼈다고 하였습니다. 첫째, 둘째 파수를 지나 성문에 이르니 성문도 저절로 열려져서 한 거리를 지났을 때 천사는 떠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천사를 통하여 쇠사슬이 벗어지는 일과 파숫군들이 접근하지 못하게 하는 일과 또 성문이 저절로 열리는 일의 기적을 나타내어 베드로를 구출해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 원하는 자들을 핍박이나 속박에서 구출하시려면 어떤 섭리로도 하실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구출해 주시지 않을 때는(요21:18-19) 순교의 복을 주시기 위함일 것입니다(단3:16-18).

3) 베드로는 옥에서 멀리 나온 다음에 정신을 차리게 되었고 자신이 주의 천사로 인하여 헤롯의 손과 유대백성들의 기대(복음사역자들을 죽이려는 음모)에서 벗어나게 된 것을 알았다고 하였습니다. 베드로는 구출받은 은혜가 있을 때 잘 인식하지도 못하다가 나중에야 그 사실을 알았으니 이같은 은혜와 더디 깨닫는 일은 저희들에게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 사경을 헤멜 때 죽지 않고 살아난 이유와 살려주신 이를 알지 못하다가 나중에 은혜를 받고 자기를 살리신 이가 하나님이시며 자기를 전도자로 쓰시기 위함이었음을 늦게 깨닫는 자가 얼마나 많습니까?

4. 출옥한 베드로가 마리아의 집에 찾아간 사실(12-17절)

1) 구출받은 베드로는 마리아의 집으로 갔으니 마리아는 마가 요한의 어머니이며 마가는 그 당시에 집을 소유하였으므로 예수님과 제자들이 자주 그 집에 모였었고(막14:13-16, 행1:13,2:1,2) 또 이날도 그 곳에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였다고 하였습니다(5절).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빌더라”(5절) 하신 말씀이 바로 마가의 집에서 예루살렘교회가 시작된 것을 증명하는 뜻도 될 것입니다.

2) 베드로가 그 집 문을 두드렸을 때 문을 열어준 여동을 비롯하여 모든 사람이 믿지 않다가 베드로가 다시 힘있게 설명을 하므로 그들이 알고 놀랐으며(15절) 베드로는 그 장소에 없는 자기의 동생 야고보와 다른 형제들에게 이 사실을 전하게 한 후 다른 곳으로 갔습니다. 다른 곳으로 간 베드로는 상당기간 자신을 은신하였을 것입니다(행15:7).

여기에서 교훈받으셔야 할 것은 ① 기도의 응답이 속히 나타난 사실과 ② 기도자들이 응답의 결과를 예측하지 못하다가 나중에 알고 놀랜 사실과 ③ 베드로는 자신이 하나님의 기적을 체험하고 옥에서 구출받은 사실을 다른 성도들이 깨닫도록 힘써 말하였으니 이런 사실들이 간증의 근거가 될 수 있으나 간증은 누구의 체험이든지 반드시 성경의 원리와 부합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④ 또 복음 전할 사명자들이 모든 속박과 부조리에서 헤어나 힘있게 전도할 수 있는 은혜를 하나님께 구하셔야 할 것입니다.

제 32 과 헤롯의 죽음과 말씀의 흥왕함 (행 12:18-25)

 

이 말씀에는 ① 헤롯이 파숫군들을 처단한 사실과(18-19절) ② 헤롯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으므로 충이 먹어 죽은 사실과(20-23절) ③ 말씀이 흥왕한 사실과(24절) ④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서 부조를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온 사실(25절)을 기록하셨습니다. 따라서 “헤롯의 죽음과 말씀의 흥왕함”이란 제목을 대표로 정할 수 있습니다.

1. 헤롯이 파숫군들을 처단한 사실에 대하여(18-19절)

1) 베드로의 출옥이 밤에 기적적으로 일어난 사실이므로 그 이튿날 파숫군들이 그 사실을 알고 크게 소동하였음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 사실은 숨길 수 없는 일이므로 헤롯에게 알려졌고 헤롯은 파숫군들의 변명을 들었겠지만 베드로의 출옥상황이 파숫군들의 감시 소홀이나 아니면 탈옥하도록 문을 열어준 것으로 인정할 수밖에 없이 되었으므로 “그들을 죽이라”고 명한 것입니다. ① 헤롯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거나 하나님의 기적을 믿었더라면 이 책임을 파숫군에게 돌리지 않을 수 도 있었을 것입니다. ② 여기에서 파숫군들은 애매하게 죽임을 당한 것입니다. 이것이 마치 예수님 탄생 당시에 두 살 이하의 남자아이들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은 애매함일 것입니다(마2:16). 이 세상에는 애매하게 피해를 당하는 사례가 많습니다. 이런 억울함(애매함)에 대한 의문은 ㉠ 모든 생명의 주가 하나님이란 사실과 ㉡ 하나님이 특별하신 섭리로 살피시며 처리하신다는 사실과(눅13:1-5) ㉢ 성도의 억울함을 보상해 주시는 것과(벧전2:19) ㉣ 악인들은 어차피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로 의문을 풀 수 있을 것입니다.

2) 헤롯은 이 사실을 유대땅에 와서 집행하고 다시 자신의 궁궐이 있는 “가이사랴”로 내려가 그곳에 거하였습니다(19절).

2. 헤롯의 죽음에 대하여(20-23절)

1) 헤롯왕은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 대한 대단한 노여움을 갖고 있었습니다. 여기의 두로와 시돈지역은 가멜산 북쪽 지중해변에 있는 항구들로 왜 그들에 대한 노여움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통상거래로 인한 갈등일 것으로 추측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2) 그러나 그 지방 사람들은 자기의 고국 평야에서 나온 양식을 도로 불편상 운반해 오기 어려우므로 갈릴리 지역에서 생산되는 양식을 헤롯의 허락을 받아 수입하여 사용하였기 때문에(20절) 그 곳 사람들이 헤롯의 환심을 얻기 위하여 “가이사랴”에 온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두로와 시돈을 대표하는 앗수르 왕국의 사절단이라 할 수 있고 그들이 헤롯왕의 침소를 맡은 왕궁대신인 “블라스도”와 사전에 외교활동을 하여 헤롯의 노여움을 풀게하고 그들을 환영하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3) 이것은 화친하는 행사인만큼 의미가 크다할 수 있으며 따라서 외교사절이나 국빈을 환영 접대하는 큰 의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때에 헤롯은 모인 청중 앞에서 효유(알아듣도록 타이름)하였는데 많은 청중들이 그의 연설을 듣고 “사람의 소리가 아닌 신의 소리라”하면서 큰 갈채를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백성들의 아부하는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어떤 독재자가 연설하면 무조건 옳다고 소리지르며 손을 흔드는 것과 같은 것이며 또 권세와 독재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런 목소리를 그대로 받아 자신의 위를 유지하는데 이용할 것입니다.

4) 그러나 “그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았으므로 주의 사자가 그를 쳐서 충이 먹어 죽었다”(23절)하였으니 “이방인도 하나님의 지존하심을 나타내지 않으면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충이 먹어 죽었다”는 뜻을 “벌레에게 먹혀 죽었다”고 번역한 경우가 있으며 역사가 “요세보”는 “격렬한 고통이 뱃속에 생겨 5일 동안 크게 신음하다가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감기도 균에 의하여 병을 나타내듯이 균에 의한 가혹한 전염병으로 죽었을 것입니다. 인간이 존경을 받거나 칭찬을 받을 때는 부지런히 하나님께 영광을 되돌려드려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하여 진 사실입니다(24절).

1) “말씀이 흥왕해졌다”는 뜻은 전도가 잘 되고 성경을 살피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을 의미합니다.

2) 말씀이 흥왕하게 된 이유는 ① 우선 핍박자 헤롯이 벌받아 죽은 것으로 인정될 만큼 드러났기 때문이요 ② 제자들이 전도의 힘을 얻어 전파했기 때문이며 ③ 유대주의자들도 돌아오는 자가 많고(행9:22) ④ 또 능력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행9:40,12:10). ⑤ 또 하나님의 말씀이 흥왕해질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 말씀이 운동력 있는 살아있는 말씀이기 때문입니다(히4:12-13). 하나님의 말씀(성경)은 문자와 내용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말씀은 예수님의 말씀이요(요12:49), 성령님의 말씀도 되는 것입니다(요14:17, 벧후1:21). “살았다”는 뜻에는 생명, 불변, 영원, 활동, 능력의 뜻도 있으니 성령님의 강한 역사로 어찌 흥왕하지 않겠습니까? 성도의 심령에 말씀이 달음질하고(살후3:1) 흥왕할 수 있다면 믿음의 발전과 교회의 부흥은 자동적으로 성취될 것입니다(행19:20).

4.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를 마치고 안디옥으로 돌아감(25절).

1) 행1:27-30에서 “안디옥 성도들의 부조금을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예루살렘) 장로들에게 보냈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왔을 때 이상과 같은 사건들이 있었고 또 두 사람은 안디옥교회 중심으로 사명을 감당하기 위하여 부조사명을 끝내고 다시 돌아간 것입니다.

2) 그들이 돌아갈 때 “마가요한”을 데리고 갔으니 그는 선교의 사명을 가졌기 때문에 선교사로 파송하기 위함이었습니다(13:13). 또 바나바와 사울이 예루살렘에 있을 때 마가요한의 집과 그 곳의 교회에서 유하였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는 ① 파숫군의 억울한 죽음 ② 헤롯의 벌받은 죽음 ③ 말씀이 흥왕한 이유 ④ 협력자 동반 등에 대한 교훈을 받을 수 있습니다.

제 33 과 최초의 선교사역 (행 13:1-14)

 

본문 말씀 ① 1절에서는 “안디옥교회에 유력한 성도들이 있음”에 대하여 말씀하셨고 ② 2절에서는 “성령님의 지도에 따라 두 사람을 선교사로 임직파송한 사실”을 말씀하셨으며 ③ 4절-14절에서는 “두 선교사의 초기 선교역사”를 기록하셨습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최초의 선교사역”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안디옥교회에 유력한 성도들이 있었습니다(1절).

1) 안디옥교회는 행11:19-26에서 명시한바 대로 평신도들의 전도와 “바나바”사도의 감독으로 유력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 교회가 유력함은 진리를 잘 배워 터득한 성도들이 많다는 뜻입니다(행11:25-26).

2) 그 교회에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있었으니 누가 선지자이며 누가 교사인지에 대한 구별은 없으나 선지자는 “계시 받는 일”과 “증언하는 일”을 맡은 사람이요, 교사는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3) 그들은 “바나바”와 “니게르”라 하는 시므온(니게르는 검다는 뜻), 구레네 사람 “루기오”, 또 분봉왕 헤롯의 젖동생 “마나엔”과 “사울”이었습니다. 여기의 젖동생이란 의미는 헤롯(안디바스)의 어릴 때 같이 자라난 친구라고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① “바나바”는 권위자란 뜻으로 구부로에서 출생한 레위족이요, 사울의 선배이며 사울(바울로 개명하기 전)을 사도회에 천거한 사람입니다. 행4:36,37,11:20-26,30,12:25, 13:2-14,15:30-41을 참고하십시요.(바나바에 대한 기사) ② 시므온은 “니게르”(검다는 뜻)란 별명을 가졌으므로 그는 흑인종에 속한 사람이요 ③ 루기오와 마나엔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기록되지 않았습니다.

4) 이들이 “주를 섬겨 금식하였다”(2절) 하였으니 금식기도 자체도 그 목적이 사명에 의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기 위함일진대 주님을 섬기는 일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2. 성령님이 두 사람을 지목하여 선교하게 하심(2절).

1) 금식기도 중에 성령님께서 선지자들에게 계시로 말씀을 주셨습니다.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불러 시키는 일”이란 선교사역을 의미하며 성령님께서는 바나바와 사울을 그 책임자로 지명하셨으니 이는 성령님이 그들의 마음에 감동하셔서 선교의 소원을 주시고 또 그렇게 지명되도록 인도하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빌2:13).

2) 그들은 선교사 임직 및 파송식을 하면서 금식기도를 하였고 안수로 선교사를 임직하여 보냈으니 이 방법이 곧 성령님이 보내신 것과 같은 것입니다(3-4절). 안수로 임직한 사례는 행6:6의 해석을 참고하십시요. 여기에서 저희들은 성령님의 보내시는 방법이 인간절차(기도, 안수, 파송 등)를 통하여 하신다는 것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3. 두 선교사의 최초선교사역의 시작에 대하여(4-14절)

1) 본문 9절 말씀에서 사울이란 이름이 잠재되고 “바울”이란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사울”이란 말씀에서 바울(작은자란 뜻)이란 이름이 본명인듯 합니다. 사울(희망의 뜻)이란 이름을 잠재하고 다시 “바울”로 개칭한 것은 “작은 자”의 뜻을 나타낸 겸손을 좋아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2) 선교사는 바나바와 바울이었고 수종자로 마가요한을 대동하여(5절) 안디옥에서 서쪽 항구인 “실루기아”를 출항하여 구브로 섬으로 갔습니다. ① “실루기아”는 안디옥에서 서남쪽으로 30km쯤 떨어진 지중해변 항구이고 ② “구브로”는 현재 키프로스(cyprus:kypros)란 실루기아 항구 서남쪽 약 150km지점에 있는 물고기 모양의 큰 섬으로 넓이 9250km2(제주도의 약 5배)라고 합니다. 구약시대에는 이 섬을 “깃딤”(창10:4)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들이 “구브로”로 먼저 간 이유는 “바나바” 자신의 고향이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행4:36). ③ “살라미”는 구브로섬의 동쪽의 항구요, ④ 또 “바보”는 구브로섬 서쪽의 항구인즉 지도를 보시면 한눈에 알아보실 수 있습니다.

3) 그들은 “살라미”에서 유대인의 여러 회당을 전전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였으니 전파한 말씀은 복음이요, 전파대상은 흩어진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었습니다(5절).

4) 수종자 “요한”은 마리아의 아들 마가요한으로(행12:12) 바나바의 생질이요(골4:11) 예루살렘에 집을 갖고 있었으며(막14:13-16) 예루살렘에서 안디옥 교회에 처음으로 사도들을 파송했을 때 바나바와 사울을 따라 동행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행12:25). 신약성경에 요한이란 이름이 다섯명이나 있으니 이런 것은 인명사전을 보시면 됩니다.

5) 구브로를 동에서 서로 지나 “바보”에 이르렀을 때 유대인 거짓선지자 “바예수”를 만났습니다. “바예수”란 “예수의 아들”이란 뜻으로 자기를 높이는 과장된 별명이고 그의 본명은 “엘루마”였습니다. “엘루마”는 아람어로 지혜란 뜻입니다. 본문에서 이 “엘루마”를 “박수”라고 하였는데 이를 남자무당으로만 연상하지 마십시요. “박수”란 마고스(mavgo\")는 “박사, 점성가, 요술가, 마술사”등을 포괄하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까지 이용하면서 점쟁이처럼 행세하는 사람이었습니다.

6) 그가 구브로 총독 “서기오 바울”과 함께 있을 때 바울이 총독에게 전도하였고 총독이 듣고자 하였을 때 엘루마는 그가 믿지 못하도록 훼방하며 대적하였습니다(7-8절).

7) 이때에 바울(여기서부터 사울을 바울로 호칭함)이 성령에 충만하여(9절) 그를 주목하고 책망하였습니다(10절). ① 여기의 성령의 충만이란 확신있는 증언으로 진리의 내용을 힘있게 표현하는 것과 성령님의 붙드심의 능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② 바울사도가 박수 “엘루마”를 주목한 것은 그의 잘못을 확실하게 지적하면서 상대방을 책망하는 권위있는 태도를 나타냄이요 ③ 책망의 내용은 “궤계와 악행이 가득한 자요 마귀의 자식이요 모든이의 원수이며 주의 바른 길을 굽게 하기를 그치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복음을 훼방하거나 대적하는 자들은 다 이런 류에 속하는 자들임을 알 수 있습니다.

8) 바울은 이어서 “주의 손이 네 위에 있어 네가 소경이 되어 얼마동안 해를 보지 못하리라”한 즉 즉시 그의 눈앞에 안개와 어두움이 덮여 그가 앞을 보지 못하므로 인도할 자를 두루 구하였다고 하였습니다(11절). 이것은 사도에게 주신 징계의 권능으로 마치 베드로가 아나니아 부부에게 행한 것과 같은 역사로 생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행5:3-5,9).

9) 또 “얼마동안”이란 시간제한을 하였은 즉 그는 깨달은 후에 다시 회복되었을 것입니다(행9:17-18).

10) 이 사실을 본 총독은 믿음을 갖고 주의 가르치심에 놀랐으니 바울이 증언한 말씀은 곧 예수님의 교훈들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12절).

11) 이들 선교대원들은 “바보”에서 배를 타고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 이르렀으며 “버가”에서 수종자 요한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행 15:38) 저희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이르러 역시 전도할 목적으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갔습니다(13-14절). 마가 요한이 중도에 귀향한 이유를 잘 알 수 없으나 행15:38을 보면 바울과 서로 뜻이 맞지 않았음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최초선교의 중요성을 살핀다면 ① 사역자를 파송하는 든든한 교회 ② 사명을 갖고 나선 사역자 ③ 성령님의 특별한 도우심 ④ 동역자들 간에 뜻을 합하는 협력이 중요함을 알 수 있습니다.

제 34 과 안디옥에서 증언한 말씀(Ⅰ) (행 13:15-31)

 

이 말씀에 나타난 “안디옥”은 선교출발지인 시리아의 안디옥이 아니고(행13:1-3) “비시디아”의 안디옥입니다. “비시디아”는 소아시아 남부, 현재 터키영지 중앙부에 있는 도(道)에 해당합니다. 바울사도가 이 곳 안디옥에서 증언한 말씀은 15절-41절까지입니다. 말씀을 증언한 날은 안식일이었으니(14절,44절) 이는 이방에 흩어진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키며 회당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모임의 장소인 회당은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회당입니다. 따라서 그 공회당을 관리하는 회당장도 계파별로 여러 사람이 있었고(15절) 그곳에서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함께 들었습니다(13:43,48).

① 15-16절은 “증언의 절차”를 ② 17-19절은 “하나님이 선민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주신 사실”을 ③ 20-23절은 “사사의 통치와 다윗왕에게 메시야를 언약한 사실”을 ④ 24-25절은 “세례요한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를 처음 소개한 사실”을 ⑤ 26-31절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장사된 일과 부활한 사실”을 증언한 것입니다.

1. 증언의 절차에 대하여(15-16절)

1) 유대인들은 회당에 들어가면 성경을 읽는 것이 관례였습니다(행15:21). “율법과 선지자의 글”이란 구약성경중 역사서를 제외한 말씀을 의미합니다. 그 당시에 구약성경이 한 권으로 되어 있지 않았고 율법(모세오경과 시가서)과 역사서와 예언서(선지자의 글)로 되어 있었습니다. 율법에서는 시2:7을 읽었고(32-35절) 선지자의 글에서는 합1:5과(40절-41절) 사49:68을 읽고(47절) 설명하셨으니 이 내용은 다 메시야 언약에 관한 말씀들이었습니다.

2) 이 말씀을 읽었을 때 회당장들이 사람을 보내어 모인 백성들에게 권면할 말을 하도록 허락하였으니 고향쪽(예루살렘)에서 온 여행자들이므로 좋은 말 듣기를 원한 것이었습니다.

3) 16절에서 바울이 “손짓한 것”은 듣는이들의 이목을 모으기 위함이며 듣는 대상을 “이스라엘 사람들과 및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로 호칭한 것은 그곳에 있는 백성들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중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거의가 복음의 의미를 모르는 유대주의적 신앙인들이었습니다.

2. 하나님이 선민을 택하여 가나안 땅을 주신 사실을 증언함(17-19절).

1) 하나님이 이스라엘(야곱) 백성(12지파)을 선민으로 택하셨으므로 “이스라엘 백성의 하나님”이란 용어를 사용한 것이며(시100:3) “우리 조상들을 택하셨다”함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택함 받은 조상으로 설명한 것이고(출3:6)

2) 그 후손들인 야곱의 12지파를 나그네 된 애굽 땅에서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실 때 “그 백성을 높여 큰 권능으로 인도하셨음”은 하나님이 바로에게 열 가지 재앙과 홍해를 가르신 기적 등으로 자기 백성을 보호, 인도하셨으므로 그 백성들의 명예가 높아진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17절).

3) 그러나 그 백성들이 약 40년간 광야를 지나는 동안에 여러차례 완악한 소행을 나타냈지만 하나님이 저희를 아주 멸하시지 않고 참으신 것은(18절) 그 조상들에게 언약하신 바를(신1:26-31,9:5) 이행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4) 또 하나님께서는 가나안 땅 7족속(신7:1)을 전쟁의 승리로 멸하도록 섭리하시고 그 땅을 기업으로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19절의 “약 450년간”이란 야곱의 가족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에 간 때(주전 약1879년)로부터 다시 가나안 땅에 돌아온 때(주전 약1409년)까지를 계산하여 하나님이 그만한 기간을 두시고 약속을 이루셨다는 뜻입니다.

이 증언의 내용은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바(창15:13-14) 구원의 경륜을 역사적으로 성취하신 사실을 요약하여 설명한 것입니다.

3. 사사의 통치와 다윗왕에게 메시야를 언약한 사실(20-23절).

1) 20절에 보시면 “그후에 선지자 사무엘 때까지 사사를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 땅에 들어가자 옷니엘로부터 사무엘에 이르기까지 약 305년 동안 사사의 다스림을 받았습니다. 사무엘 선지자도 사사였습니다(20절).

2) 그 후에 백성들이 왕을 세워달라 하여 하나님이 사울왕을 세워주셨다가(삼상10:23-24) 그가 교만하여지고 탈선하므로 40년만에 폐하셨고(삼항15:17-23,16:1),다시 다윗왕을 세워 40년을 다스리게 하셨습니다(21절, 삼하5:4). 이때에 하나님께서는 이새의 아들 다윗을 보셨을 때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였으므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22절). ① 여기의 “하나님 마음에 합한 자”란 뜻은 다윗의 신앙과 겸손과 용맹을 보셨기 때문이요 ② “하나님의 뜻을 다 이루신다”하심은 ㉠ 이스라엘 나라에 복을 주시고(삼하7:8-12) ㉡ 그의 자손에서 메시야를 보내어 구원사업을 이루실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23절, 마1:1).

3) 하나님은 약속하신대로 다윗의 후손인 요셉의 아들(눅3:23)로 구세주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시게(탄생)된 것입니다(23절).

이상의 말씀에서 ① 하나님은 자기의 백성을 다스리실 때 지도자(모세, 여호수아)와 사사들과 왕들로 다스리게 하셨고 ② 왕이라도 합당하면 쓰시고 합당치 않으면 폐하셨으며 ③ 범죄한 백성들을 징계하실지라도 언약은 반드시 지키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으며 ④ 바울사도는 메시야 언약의 성취과정을 증언하고 그 메시야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밝히 나타낸 것입니다.

4. 세례요한이 “세상에 오신 메시야를 소개하였다”고 하였습니다(24-25절).

세례요한이 출현하여 예수님을 메시야로 소개한 사실은 마3:1-17(마태복음 강론 참고), 막1:1-8, 눅3:2-6,15-17, 요1:19-34에도 기록되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셨을 때 세례요한이 가장 먼저 증언하였습니다. 그리고 세례요한의 출현 그 자체도 이미 구약성경에서 예언된 것이었습니다(사40:3, 슥4:5, 말3:1,눅1:17).

5.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한 것입니다(26-31절).

1) 26절에서 바울은 팔레스틴에서 이민한 유대인들을 “아브라함의 후예”라 하였고 또 그들과 이방인 중에서 유대주의 식으로 하나님을 공경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선지자들과 세례요한을 통하여 구원의 말씀(메시야를 소개한 말씀)을 보내셨다”고 하였으니(26절) 이는 요한의 복음증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예루살렘에 사는 유대인들과 저희 관원들(로마 황제로부터 통치권을 받은 자들)이 예수님과 선지자의 말씀을 알지 못하여 죽일 죄가 없는 예수님을 정죄하고 빌라도에게 죽여달라 하므로 “선지자들의 말을 응하게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안식일마다 선지자의 글을 읽으면서도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언한 선지자들의 말씀은 사53:1-11과 요1:29에 나타나 있고, 또 예수님 자신의 예언은 눅22:14-22,24:19을 의미하는 것입니다(27-29절).

3) 예수님이 무덤 속에 장사된 사실도 역시 선지자의 예언대로 이룬 것입니다(사53:9, 마27:57-60).

4) 그러나 하나님은 죽은 가운데서 저를 살리셨습니다. 이 사실은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제자들과 예루살렘에 올라갔던 많은 사람들(500여 형제;고전15:6), 그리고 바울 자신에게까지(고전15:8) 40일을 계신 중에 승천하시기까지(행1:3) 10여 차례나 나타나 보이셨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증언한 핵심은 복음을 모르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상대로 ① 복음을 언약하신 하나님 ② 그 언약을 역사 세계에서 그대로 실현케 하신 사실 ③ 최초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소개한 것과 ④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 무죄한 예수님을 정하여 십자가에 죽였으나 ⑤ 하나님이 그를 다시 살리셨으므로 예수님이 바로 “그 메시야”가 되신 사실을 분명하게 증언한 것입니다.

제 35 과 안디옥에서 증언한 말씀(Ⅱ) (행 13:32-41)

 

이 본문 말씀은 “안디옥에서 증언한 말씀”의 계속입니다. ① 32절-36절은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이 성취된 것”을 설명함이요 ② 37절-39절은 “예수님이 구속자 되심”을 증언한 것이며 ③ 40절-41절은 “불신앙의 위험을 경고한 말씀”입니다.

1. 조상들에게 약속한 내용과 그 성취에 대하여(32-36절)

1) 바울사도 일행이 “조상들에게 주신 약속”을 안디옥 사람들에게 전파하였는데(32절), 그 내용은 33절-39절의 기록입니다.

① 33절의 “곧 하나님이 예수를 일으키셨다”는 뜻은 예수님을 보내셔서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또 부활케 하셨음을 의미하며

② “우리 자녀들에게 이 약속을 이루게 하셨다”함은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이 메시야도 되고 또 그 후손들이 메시야시대(그 시대; 복음전파가 시작된 시대)에 복음을 전파하여 하나님의 약속인 구원계획(창13:16,17:7,18:18, 눅19:9)을 이루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이 약속을 이루신 대표적인 사실은

① 메시야 예수님을 보내신 것인데 이 사실을 시편 둘째편 7절(시2:7)에서 다윗이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 내가 너를 낳았다”하시므로 이미 예언하신 것이고

② 또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시므로 그 육체가 썩음을 당하지 않으셨는데(37절)

③ 이 사실도 하나님이 다윗에게 거룩하고 미쁜 은사를 약속하신 대로(삼하7:8-16, 시89:20, 사55:3) 그 시대 사람들(너희에게;오순절 이후의 사람들; 34절)에게도 구원을 베푸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이며

④ 이 부활 사실을 시16:10에서 “주의 거룩한 자로 썩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미리 예언하신 것이 성취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⑤ 그리고 그 약속을 받은 다윗은 하나님의 뜻을 좇아 섬기다가 세상을 떠나(잠들어) 그 조상들과 함께 묻혀 썩음을 당하였지만 다윗이 이런 예언을 한 것은 하나님이 그를 선지자로 또는 메시야 모형자로(시22:1-3) 쓰셨기 때문입니다.

2. 예수님이 구속자되심을 증언함에 대하여(37-39절)

1) 38절에서 “너희가 알 것은 이 사람(부활하신 예수님)을 힘입어 죄사함 받음을 너희에게 전하는 것이라”하였으니 ① 믿는 것은 곧 아는 것이며(엡4:13) ② 예수님을 힙입음은 그의 신분과 십자가의 공로를 믿음으로 죄사함 받는 것이요,③ 이 사실을 증언하는 것이 곧 전도입니다.

2) 예수님이 구속자가 되시는 이유는 그가 썩음을 당하지 않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37절). 부활은 곧 “구원의 주”(히2:10,5:9)되심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창세 이후 자신의 능력으로 부활하신 이는 예수님 뿐입니다(요2:19,20,10:18, 롬8:1, 고전15:12,20).

3) 또 “모세의 율법으로는 모든 일로도 의롭다 하심을 얻지 못한다”(39절)하셨으니 ① 모세의 율법이란 계명을 뜻하고 ② “모든 일”이란 율법을 지키는 모든 일, 즉 제사규례나 도덕적 행실을 뜻하며 ③ 이것으로 의롭다함을 받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이 그 계명을 완벽하게 다 지키지 못하기 때문입니다(갈3:10,11). ④ 따라서 율법은 구원하는 계명이 아닌 정죄하기 위한 계명이며(롬3:20) 복음의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 뿐입니다(갈3:24).

4) “이 사람(부활하신 예수; 33절)을 힘입어 믿는자마다 의롭다함을 얻는 것이라”(39절)는 말씀에서 ① “힘입는다”는 뜻은 “죄인이 받아야 할 형벌을 예수님이 대신 받으셨다”는 뜻이요 ② “의롭다함을 얻는 것”은 법적 용어로서 무죄하게 여겨주신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학적 용어로는 “칭의”(稱義)라고 합니다. 이 “칭의”는 믿는자(구원 받을자)의 모든 죄(과거, 현재, 미래)를 포괄하여 정죄하시지 않는 보장을 뜻하는 것입니다(롬8:1). 어떤 사람들이 이 “칭의”를 착각하여 자신이 죄가 없다거나 의인인체 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믿는 성도가 칭의의 은총을 받고 구원이 확보되었어도 완전한 거룩에 이르지 못하고 자주 범죄하는 일로 인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운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늘 회개를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심히 통곡한 것”이 바로 그런 뜻입니다(마26:75).

3. 불신앙의 위험을 경고하였습니다(40-41절).

1) 40절에서 “너희는 선지자들로 말씀하신 것이 너희에게 미칠까 삼가라” 하셨으니 구약시대의 선지자들이 이미 복음의 대적자가 있을 것과(사53:1,8,29:13, 마15:8) 또 메시야를 거스리는 자들이 화 받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시2:7-9).

2) 41절의 말씀은 구약의 합1:5 말씀을 인용한 것인데 구약의 하박국 선지자는 이스라엘국의 바벨론 포로 이전의 선지자로서 범죄하며 영광을 가리우는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진노(바벨론에게 멸망 당하는 일)가 있을 것을 예언하였는데 ① 그 예언의 내용은 “보라(하나님을) 멸시하는 사람들아 너희는 놀라고 망하라(바벨론의 침략을 당할 때) 내가(하나님) 너희 때를 당하여(징계하시는때)한 일을 행할 것이니(바벨론 군사의 침략) 도무지 믿지 못할 일이라(그것이 하나님의 징계로 섭리하신 일임을 깨닫지 못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② 바울사도가 안디옥에서 전도한 후 결론적으로 이 예언의 말씀을 인용한 이유는 복음을 배척하는 것도 역시 구약시대의 백성들처럼 그 죄질이 악한 것이기 때문에 망하는 화를 받을까 두렵다는 뜻으로 증언한 것입니다. ③ 하나님이 영광 가리우는 인류를 심판하신 사례가 많습니다. 노아홍수 사건, 소돔 고무라의 멸망, 이스라엘을 400년간 애굽에서 징치(懲治)하신 일, 바벨론 포로 70년과 함께 선민의 나라를 없애신 일, 주후 70년의 예루살렘 멸망 등을 헤아려 볼 때 얼마나 무서운 일인지 알 수 없습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심판이 무서운 것을 인식시키면서 복음을 받아야 할 것을 간접적으로 시사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은 바울사도가 비시디아 안디옥에서 전도설교를 결론 지은 말씀입니다.

제 36 과 안디옥에서 전도한 결과 (행 13:42-52)

 

행13:15-41까지는 “안디옥 회당에서 증언(전도)한 말씀”이 기록되었고 이어서 위의 본문 말씀에서는 “증언의 결과에 대한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42절-43절은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부탁하신 내용”이요 ② 44절-45절은 “그 다음 안식일에 핍박받은 내용”이며 ③ 46절-48절은 “전도의 결실을 본 내용”이요 ④ 49절-52절은 “핍박을 중에도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내용입니다.

1. 말씀을 사모하는 자들에게 권면하심(42-43절).

1) 전도자들이 증언을 마치고 나갈 때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음 안식일에도 (와서) 이 말씀을 하라”고 간청하였습니다. ① 그들이 이렇게 간청한 이유는 증언한 말씀을 더 잘 알고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② 만일 그 당시에 증언한 말씀을 문자로 적어서 전달하였다면 두 번 증언하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문자표현이 불편한 시대에 교육이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상상해 보십시요. ③ 또 하나님의 말씀은 묵상하고 연구하는 방법에 따라 새로운 교훈을 받을 수 있으므로 같은 증언을 여러차례 듣는다 하여 손해되지 않을 것입니다.

2) 말씀을 마치고 폐회한 후에 안디옥에 거주하는 유대인과 그곳에 사는 이방인들로서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들이 증언을 듣고 바울과 바나바를 따랐습니다. 이때 두 사도가 “더불어 말했다”는 뜻은 같은 사상을 가지고 증언에 합력한 것을 의미하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는 뜻은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믿음과 평강을 간직하라는 권면입니다. 유대교를 신봉하던 자들이 복음신앙으로 개종하였으면 큰 은혜를 받은 것이므로 항상 개종한 복음신앙을 간직하고 흔들리지 말아야 할 것을 권면한 것입니다.

2. 그 다음 안식일에 핍박 받은 내용입니다(44-45절).

1) 그 다음 안식일에도 온 성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였습니다. 이 말씀은 전도자의 증언을 듣기 위하여 더 많이 모인 것을 뜻합니다. 처음 말씀을 들은 사람들이 “다음 주일에도 또 같은 말씀을 증언해 달라”고 부탁한 일도 있었기 때문에(42절) 그들은 더 많은 사람들을 인도해 왔습니다.

2) 그러나 개종하지 않는 유대인들은 복음을 따르는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의 증언한 것을 변박하고 비방하였습니다(45절). 종교인들 세계에서 시기가 있음은 잘못입니다. 또 기독교의 복음을 변박하고 비방한 것도 잘못입니다. 그 이유는 오직 하나님의 진리는 변박과 비방을 받을 대상이 아닌 순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인들은 이방종교 원리에 대하여 비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방종교인들로부터 부덕한 생활에 대하여 비방을 받지 않도록 더욱 잘 하여야 할 것입니다.

3) 그들은 유대교적 신앙이 옳고 복음적 신앙은 옳지 않다고 비난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는 택한 백성만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이방종교에 대하여 복음을 제시하는 것 외에 사람을 미워하거나 대적하는 태도를 취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3. 이방인들에게 전도하여 결실을 본 내용(46-48절).

1) 바울과 바나바는 변박과 비방을 받으면서도 담대하게 증언하였고 “마땅히 먼저 유대인들에게 전할 것이로되 유대인들이 복음을 버리고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태도를 취하므로 이방인에게로 향한다”고 하였습니다(46절). ① 마땅히 유대인들에게 먼저 증거해야 함은 그들이 약속을 받은 선민이므로 예수님도 우선권을 주셨기 때문이며(마15:24) ②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태도”란 복음의 배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③ 또 이방인에게로 향하여야 할 이유는 구약에서 이방인들에게 복음 전파될 것이 예언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말씀이 바로 사49:6을 인용한 본문 47절의 내용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전 800년경에 “땅 끝까지 복음이 전파되어 이방인들도 구원받을 것”을 예언하셨습니다. 이 예언에 따라 마28:19, 행1:8에서 예수님도 시행을 명하셨습니다.

2) 이렇게 증언한 결과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며 하나님의 말씀(이방인도 구원하신다는 복음의 말씀)을 찬송하였으니 이때에 “영생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① 하나님은 영생주시기로 작정된 자를 만세전에 선택하셨고(엡1:4) ② 때가 되면 복음이 임하여 믿을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살후1:10). 선택의 은혜와 제한적 속죄 및 제한적 구원을 믿는 성도들은 이 말씀을 퍽 실감있게 느끼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살후3:2에서도 “믿음은 모든 자의 것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4. 핍박을 받는 중에도 성령충만을 힘입었습니다(49-52절).

1) 주의 말씀은 계속적으로 그 지방에 두루 퍼졌고(49절)

2) 유대인들은 경건한 귀부인들과 그 성안의 유력한 자들을 선동하여 바울과 바나바를 핍박하게 하여 결국 그 지경에서 쫓아냈습니다. 경건한 귀부인은 유대주의적 종교에 열심있는 부인들이요, 또 유력한 사람들까지 선동에 휘말려 전도자 핍박에 가세한 것은 민망한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50절).

3) 결국 바울과 바나바는 복음전파의 책임을 다 하였고, 또 “그들이 구원받지 못하는 책임이 없다는 뜻”으로 발에 먼지를 떨고 그곳에서 동남쪽으로 약 250리 떨어진 “이고니온”으로 간 것입니다. 복음을 전파했으나 영생 얻음에 합당치 않은 자로 자처할 때(이는 믿지 않음을 뜻함) 일단 전도의 책임을 다한 것이며 그들의 멸망에 대하여 아무런 책임질 일이 없음을 알게 하신 내용입니다.

4) 그때에 제자들(전도자)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의 “성령충만”은 전도의 담력과 말씀의 풍성함과 사명자의 덕으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으셔야 할 것은 ① 복음전파에는 반드시 결실과 핍박이 따를 수 있으며 ② 타종교인들과의 갈등이 있으나 성도는 진리아닌 것으로 대적의 무기를 삼지 말아야 하며 ③ 진리의 말씀은 묵상하고 연구할수록 깨달음과 감화를 받게 되고 ④ 하나님은 영생주시기로 작정하신 자만 구원하시며 ⑤ 기독교는 핍박을 받아도 여전히 전파될 수 있고 또 기쁨과 사명을 잃지 않는 종교란 사실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제 37 과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함 (행 14:1-18)

 

사도행전 13장에서는 시리아의 안디옥을 전도의 출발지로 하여 “실루기아”에서 구브로 섬의 “살리미”와 “바보”를 거쳐 지금의 터키영지인 밤빌리아의 “버가”, 비시디아의 “안디옥”, 루가오니아의 “이고니온”까지 가서 전도한 것을 기록하셨고, 본문 14장에서는 루가오니아의 “이고니온”에서 같은 지역의 “루스드라”와 “더베”를 갔다가 다시 갔던 길로 되돌아오면서 “루스드라”, “이고니온”, “안디옥”을 거쳐 비시디아 지역을 남쪽으로 통과하여 밤빌리아의 “버가”에 이르고, 또 그 남쪽 해변인 “앗달리아” 항구에서(“버가”의 서쪽) 배를 타고 직접 “실루기아” 항구로 들어와 출발지인 “안디옥”에 도착하므로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이 끝난 것을 기록하셨습니다.

반드시 성경지도를 보시고 전도의 노정을 파악하시되 도(道)명과 도성의 이름을 각각 분별하여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나라도 도(道)가 있고 시(市)와 동리 이름이 있지 않습니까?

위의 본문 말씀은 ① 1절-7절에서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도한 사실” ② 8절-10절에서는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실” ③ 11절-18절에서는 “두 사도를 우상화하려는 것을 금지시킨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이 세 대지를 종합하여 “이고니온과 루스드라에서 전도함”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이고니온과 루스드라, 더베”에서 전도함(1-7절).

1) 비시디아의 안디옥에서 전도하다가 핍박에 의하여 “이고니온”으로 갔습니다. 핍박은 고난도 주지만 다른 지역으로 보내는 하나님의 인도이기도 합니다. 성직자가 한 곳에서 일하다가 어려운 일이 많을 때 갈 곳이 생긴다면 그것도 역시 하나님의 인도일 수 있음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에는 이방인과 이단자들의 핍박만 있었습니다.

2) 두 사도가 “이고니온”에 가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하니(말하니)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유대인:유대에서 온 동족, 헬라인:헬라에서 온 이방인)의 허다한 무리가 믿으므로 좋은 열매를 거두었습니다(1절).

3) 그런데 그 중에는 순종치 않는 유대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이방인들의 마음을 선동하여 전도자들에 대한 악감을 품게 하였으니 이 “악감”이란 불신앙과 배척을 의미하는 것입니다(2절).

4) 그러나 두 사도는 불신앙적인 대적을 견디며 그곳에 오래 있으면서 주님의 은혜를 힘입어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는데 그때에 주님이 저희의 손을 통하여 표적과 기사를 행하도록 은혜를 주셔서 주님의 은혜의 말씀(구원의 소식)을 계속 증거하게 하셨습니다(3절). ① 핍박과 배척을 견디면서 담대히 말씀을 증언할 때 표적과 기사를 주셨다는 점과 ② 주님은 자기의 은혜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인도하시는 분임을 알 수 있습니다.

5) 이렇게 되었을 때에 그 성안의 사람들은 두 종류로 나누이게 되었습니다. ① 유대인들의 설득에 동화되어 유대인을 좇는 자와 ② 두 사도의 증언을 믿고 따르는 자로 나누인 것입니다. 이렇게 복음은 물과 기름을 나누듯이 나누는 것입니다(4절, 마10:35-36).

6) 한 고장의 사람들이 종교적 사상으로 나누어지자 그곳의 이방인, 유대인 및 그들의 관원들은 더욱 핍박의 열을 올려 두 사도를 능욕하며 돌로 치려하였기 때문에(5절)

7) 저희가 알고 미리 도망하여 “루가오니아”의 도성인 “루스드라”와 “더베”와 그 근방으로 가서 복음을 전하게 되었습니다(6-7절). 예수님의 말씀처럼 핍박이 있을 때 “이 동리에서 저 동리로 피하여 다녀도 모든 동리를 다 다니지 못하여 인자가 오신다”(마10:23)하셨으니 핍박없는 넓은 지역으로 다니면서 전도하여 그곳의 선민을 구원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신 사실에 대하여(8-10절)

1) 마침 “루스드라”에 나면서 앉은뱅이가 되어 발을 쓰지 못하므로 걸어보지 못한 자가 있었는데 그가 바울의 말을 듣고 있을 때 바울은 그에게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큰 소리로 “네 발로 일어서라”하니 그가 일어서서 뛰어 걸었다고 하였습니다. ① 그에게 “구원 받을만한 믿음이 있다”는 것은 그가 “바울의 증언한 복음을 듣고 믿는 것”을 의미하고 ② “그런 믿음이 있음을 확인한 것”은 그의 신앙적 태도와 바울사도가 받은 영감에 의하여 확인하였을 것이며 ③ 큰 소리로 “일어서라”한 것도 역시 영감에 의한 담력으로 나타낸 외침이었습니다(행3:6).

2) 그 결과로 그는 병고침을 받았으니 병자의 믿음과 사도의 영감과 하나님의 섭리와 능력이 일치한 상태에서 능력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이적은 선교사역 중에서 두 번째 나타난 것이었습니다(13:11).

3. 두 사도를 우상화하려는 일을 금지시킨 사실에 대하여(11-18절)

1) “루스드라” 사람들은 우상 숭배심이 강하였습니다. 바울이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능력을 보고 그 지역 루가오니아 방언으로 소리를 지르되 “신들이 사람의 형상으로 우리 가운데 내려 오셨다”하며 “바나바”를 “쓰스”라 하고 “바울”을 “허메”라 하였으니 ① “쓰스”란 헬라인들이 섬기는 “제우스”나 로마인들이 섬기는 “쥬피터”신에 버금가는 그들의 최고의 신을 의미하며 ② “허메”는 그 곳 사람들이 섬기는 “쓰스” 신의 명령을 대변하는 신(말하는 신)이라고 합니다.

2) 그들은 성밖에 있는 “쓰스” 신당의 제사장을 데려다가 화관(花冠)을 드리며 대문 앞에까지 와서 무리들과 함께 그들의 방법대로 제사를 드리려고 하였습니다(13절).

3) 이 광경을 본 두 사도는 참람하였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안타까운 표현으로서 옷을 찢고 제사하려는 자들에게로 뛰어 들어가서 소리쳤습니다. “여러분들이여 어찌하여 이런 일을 합니까? 우리도 당신들과 똑같은 성정(인간본성)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당신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이런 헛된 일(피조물인 인간을 숭배하는 일)을 버리고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살아계신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함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14-15절).

4) 또 하나님이 지나간 세대(오순절 이전)에는 이방인에게 복음전파를 하시지 않았으므로 모든 족속으로 자기의 길들을 다니도록 묵인하셨으나(16절) 복음이 전파된 후에는 불신앙의 죄를 더 엄책하실 것을 예고하셨습니다. 구약 시대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증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하여 자신의 존재와 사랑을 증거하셨으니 이 증거는 “비를 주시고 결실기를 주시며 선한 일을 하사 음식과 기쁨으로 인간(너희)의 마음에 만족을 주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롬1:20). 이 말씀에서 두 사도는 인간이 피조물인 것과 하나님이 자연의 통치자로서 각종 식물을 맺어 인간에게 양식을 공급하시므로 (선한 일) 기쁨과 만족을 주시는 분이심을 설명한 것입니다(17절).

5) 이상과 같은 설명으로 무리들의 제사를 만류시켰다고 하셨습니다(18절).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핍박이 전도의 유익을 주는 경우가 있으며 ② 꾸준한 전도와 인내 중에서 하나님이 능력을 나타내 주신 점과 ③ 이방인들에게 인간우상을 포함한 서물 숭배의 근성이 팽배되어 있는 점과 ④ 하나님의 창조사역 및 자연계를 통한 선한 일로 결실기를 주시고 식물을 공급해 주심을 증거하므로 인간숭배와 우상숭배를 만류한 사실을 유의할 수 있습니다.

제 38 과 더베까지 전도하고 돌아옴 (행 14:19-28)

 

본문 말씀은 “루스드라”에서 “더베”까지 가서 전도하고 돌아오는 길에 갔던 곳을 역순으로 거쳐 “버가”까지 온 후, “버가”에서 초행지인 “앗달리아” 항구를 거쳐 “실루기아”, “안디옥”으로 돌아온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① 19절-21절(상반)은 “루스드라에서 핍박을 받고 더베에 가서 전도한 사실”을 ② 21절(하반)-26절은 “돌아오면서 권면하고 장로들을 세운 사실”을 ③ 27절-28절은 “돌아온 후 안디옥에서 행한 일”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 “루스드라”에서 핍박을 받고 “더베”에 가서 전도함(19-21절 상반).

1)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일으키는 기적을 행하고(8-10절) 이방인들로부터 신의 숭배를 받을 뻔하였지만 그곳의 유대인들은 여전히 핍박을 계속하였습니다(5절). 그들은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루스드라”까지 와서 그곳의 무리들과 합세(초인)하여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줄 알고 그 시체를 성밖으로 끌어냈다고 하였습니다(19절).

2) 그러나 바울과 바나바가 증언한 복음을 듣고 따르던 제자들이 성밖으로 내쳐진 바울의 시체에 둘러섰을 때에 바울은 다시 일어났으니 이는 바울이 돌을 맞고 기절한 상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소생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일어나자 다시 성으로 들어간 것은 제자들의 인도를 받아 성읍안에서 치료를 받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20절 상반).

3) 그리고 그 이튿날 “바나바”와 함께 “루스드라”를 떠나서 일차선교 마지막 지역인 “더베”로 가서 전도한즉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수고가 많고 생명의 위험을 느낀 전도인지라 하나님이 더 많은 열매를 주신 것입니다(시126:5-6, 고후9:6).

2. 돌아오면서 권면하고 장로들을 세움(21절 하반-26절).

1) 돌아온 노정은 “더베”에서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비시디아의 “안디옥” 순이었고(21절), 또 안디옥에서 “밤빌리아”, “버가”, “앗달리아”(새로 통과한 지역)를 거쳐 “구브로”는 들리지 않고 해로를 통하여 출발지인 시리아의 “안디옥”으로 돌아온 것입니다(25-26절).

2) 돌아오면서 전도 받은 지역의 제자들을 만나 권면한 것은 ① “마음을 굳게 하여 믿음에 거하라”(22절) 하였으니 “굳은 마음”은 변하거나 흔들리지 않는 마음으로 “복음적 신앙을 견지하라”는 뜻이고 ② 또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저 할 때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핍박이나 믿음생활로 오는 고난을 감수해라”는 뜻이었습니다. 성도가 구원을 받으므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더욱 값진 일이지만 확신이 부족한 초신자들은 쉽게 믿음을 떠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3) 두 사도들은 돌아오면서 각 교회에서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으니 이는 예루살렘교회에 세워진 장로(행11:30)외에 처음으로 거론된 말씀입니다. ① 신약교회의 장로는 구약시대의 장로(레4:1, 민11:16, 신19:12)와 같은 직이 아닙니다. 신약교회의 장로는 그 교회 성도들을 대표하는 직분으로 교회를 섬기며 다스리게 하는 직임입니다(행20:28, 딤전5:17). ② 이 직분을 “각 교회에서 세운 것”은 그 지역에서 선교하고 다른 지역으로 다녀오는 사이에 성도의 참신한 단체가 구성되었음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③ 장로를 택하여 세울 때 금식기도를 한 것은 그 직분의 성격대로 교회에 덕을 세워 주님의 뜻을 이루게 하기 위함이요, “저희를 그 믿은바 주께 부탁하였다”함은 장로로 감독하게 한 그 교회에 대하여 믿음의 대상인 하나님께 기도로 부탁하였다는 말씀입니다. ④ 신약의 교회에서 장로를 세움은 “교회가 조직되었다”는 뜻과 “장로로 치리 감독하게 하였다”는 뜻과 “장로는 모든 일에 본이 되어 성도를 가르쳐야 한다”(벧전5:3)는 뜻을 나타낸 것입니다.

3. 돌아온 후 안디옥에서 행한 일에 대하여(27-28절).

1) 돌아온 노정은 이미 말씀드렸습니다. 지도를 참고하시면서 공부를 하십시오.

2) 전도자들은 파송지인 안디옥에 이르러 교회를 모아 보고회를 가졌습니다. ① “교회를 모음”은 안디옥 도성에 있는 여러 교회성도들이 연합적으로 한 곳에 모였음을 뜻합니다. 이방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교회가 큰 예배당을 세워 한 교회로 뭉친 것이 아니고 성도의 집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 교회가 있었음을 예상할 수 있습니다. ② 보고의 내용은 선교도중에 하나님이 함께 행하신 기적과 이방인들의 마음을 열어 주시므로 믿음의 열매를 맺게 하신 것은 물론 핍박중에 보호받은 사실들도 보고하였을 것입니다.

3) 그리고 그곳에서 함께 오래 있은 것(28절)은 휴식 및 은혜의 축적과 다음 선교계획에 대한 준비를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이상의 말씀이 계획적인 최초의 이방선교요, 또 바울과 바나바의 1차 선교여행의 역사라는 점과 ② 신앙이 다른 동족(유대인)과 이방인의 끈질긴 핍박이 어디서나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전도의 열매를 주신 일과 ③ 고난과 희생이 따를수록 전도의 열매가 있다는 사실과 ④ 장로를 세워 교회를 조직하고 다스리게 한 사실과 ⑤ 돌아온 후에 자초지종을 사도회의에 잘 보고한 사실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39 과 교리와 교훈의 일치를 도모함 (행 15:1-21)

 

이 본문에서는 위의 제목에 해당하는 말씀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절-2절 말씀은 “안디옥 교회에 교리와 교훈상의 문제가 발생한 일”이요 ② 3절-5절 말씀은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예루살렘 총회에 문의한 일”이며 ③ 6절-21절까지는 “사도와 장로회의(총회)에서 토론한 내용”입니다.

“교리”는 구원문제에 관계되는 믿음에 관한 것으로 혹 할례를 구원의 방편으로 믿는다면 크게 잘못된 것과 같은 것이요, “교훈”이란 교리와 윤리를 포괄한 내용으로 어떻게 시행하고 가르칠 것이냐에 대한 것입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는 토론의 과정까지만 살피는 것이어서 “일치를 결의함”이라 하지 않고 “도모함”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1. 안다옥교회의 교리와 교훈상의 문제(1-2절)

1) 안디옥교회에 교리적인 다툼과 변론이 발생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유대로부터 안디옥으로 내려온(예루살렘이 높은 지역임) 어떤 사람들(율법주의적 신앙자들)이 안디옥에 있는 형제들에게 모세의 율법을 가르치면서 “할례를 받지 않으면 구원을 받지 못한다”고 하자 그 형제들과 교역자인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하였습니다(1-2절).

2) 바울이 할례시행을 강하게 금지시킨 일을 감안할 때(롬2:25,29,3:1, 고전7:31), 두 사도는 이를 반대하였겠지만 다른 교훈들(20절) 중에서도 의견차이를 나타낸 것입니다.

3) 2절 말씀에 “적지 않은 다툼과 변론이 일어났다”고 한 것은 폭력적인 것보다 강한 대립성을 나타낸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와 장로들(초대교회의 총회와 같은 기관임)에게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 교훈의 일치를 도모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안디옥교회 성도들은(형제들) 바울과 바나바 및 성도 중(그 중) 몇 사람(할례주장자 포함)을 예루살렘 총회에 보내기로 작정하고 전송을 한 것입니다.

2. 그들은 예루살렘에 와서 그 사실을 보고하였습니다(3-5절).

1) 파송받은 자들이 안디옥에서 베니게(갈릴리바다 서북쪽 해안지대, 페니키아라고도 하였으며 현재 레바논 지역임)와 사마리아로 여행하면서 그 지역 형제들에게 바울의 1차 선교사역의 결과로 이방인들이 예수 믿게 된 사실을 말하여 기쁨을 주었다고 하였으니 그 당시에 베니게와 사마리아 지역에도 성도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복음이 사마리아에 전파된 기사는 행8:4-6에, 베니게에 전파된 기사는 행11:19에 있습니다.

2) 그들은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교회와(성도들) 사도와 장로들(총회원)에게 영접을 받았고 그동안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보고를 할 때(4절) ① 하나님이 자기들과 함께하여 주신 일 ② 바리새파 유대인들이 일어나(나서서) “이방인에게 할례를 주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고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한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여기의 바리새파 유대인들이란 복음은 믿으나 율법적 제도를 아주 버리지 못하는 자들을 의미하며 또 그들이 “율법을 지키라”한 뜻은 복음 사역자들이 율법에 명시된 구약적 제사와 할례의식을 이행하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사도회의에서의 토론(6-21절).

사도와 장로들(총회)은 이 일로 많은 변론을 하였습니다. 많은 변론 중에 베드로의 발언(7-11절)과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와(12절) 야고보의 발언(13절)이 있었습니다.

1) 베드로의 발언은 ①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래전부터 자신을 선택하셨고 자신의 입으로 증언한 복음의 말씀을 그들로 믿게 하셨으며 ② 마음을 아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성령을 주신 것과 같이 저희에게도 구원의 은총과 성령님의 동일한 역사를 나타내셨고(행10:32-48) ③ 또 “믿음으로 저희(이방인들)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인격의 순결함과 변화를 주시므로 저희나 우리나 은혜에 차별(분간)을 두지 않으셨는데 너희가(할례를 주장한 성도들)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고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지킬 수 없는; 갈3:10-11) 율법의 멍에(완전히 지키는 사명)를 제자된 성도들에게 지게 하려 하느냐(목에 두려함)”하였고 ④ “우리(총회원들)는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동일하게 주 예수의 은혜로 구원받는 줄로 안다”고 한 것입니다. 10절의 “하나님을 시험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나타내신 일(이방인이 은혜 받는 사실)을 그대로 믿지 않고 순종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베드로가 발언한 취지는 성령님의 차별없으신 은혜에 근거하여 이방인이나 유대인이나 복음적 성도에게 생활의 차별을 둘 수 없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2) 바나바와 바울의 보고입니다(12절).

베드로의 발언을 듣고 온 무리가 잠잠한 기회에 바나바와 바울은 자신들이 이방지역에서 전도할 때에 하나님이 표적과 기사를 나타내신 일이 있음을 고하였으니 이는 “바보”에서 “바예수”를 소경되게 하고(행13:6-11) “루스드라”에서 앉은뱅이를 고친 사실(행14:8-10)을 증언한 것입니다.

3) 이 때에 야고보가 결론적인 발언을 하였습니다(13-21절).

이 야고보는 예수님의 동생으로(막6:3) 예루살렘교회에서 기둥같은 역할을 하였고(갈2:9) 또 야고보서를 기록한 분입니다.

① 야고보는 하나님이 이방인들을 구원하실 계획에 대하여 베드로가 발언한 내용이 선지자들의 예언과 합하는 사실을 말하였습니다. 14절의 “자기 이름을 위할 백성을 취하신다”는 뜻은 “하나님께 영광돌릴 백성을 구원하신다”는 뜻이요, “시므온”이 고하였다는 것은 시몬 베드로가 발언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벧후1:1).

② 또 옛날 구약시대에 알게하신 주의 말씀(18절), 즉 선지자들의 말씀인 암9:11-12을 인용하여(16-17절) 이방인 구원에 대한 선지자들의 말씀들이 일치됨을 증언한 것입니다. 여기에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은 암9:11-12의 말씀과 본문 16-17절의 말씀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 16절에서 “그날에”(메시야의 날)를 “이후에”로, “천막”을 “장막”으로, “틈난 것”을 “퇴락한 것”으로, “옛적과 같이 세우는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는 것”으로 묘사하였으니 이 말씀의 뜻은 서로 같은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령님께서 사도행전 저자를 감동하실 때 의미상으로 감동하신 것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이란 천국백성의 단체(집; 딤전3:15)를 의미합니다. 어떤 학자는 신약의 인용문이 맛소라 학파의 옮긴 문장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문장을 인용하셨던지 성령님께서 의미상으로 일치하게 영감하실 수 있음을 믿으시면 됩니다. ㉡ 17절에서는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를 “저희로 에돔의 남은 자와”로, “내 이름으로 일컬음 받는 모든 이방인들”을 “만국”으로, “기업으로 얻게 하리라”를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하였으니 암9:12의 “저희로”란 신약시대의 복음사역자들을 뜻하고(본문에는 생략되었음), “에돔의 남은 자”를 “그 남은 사람들”로 표현하였는데 이 말씀에 포함된 의미는 구원받아야 할 남은 자들이 바로 이방인이란 사실을 공통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따라서 의미상 표현에 차이가 없습니다. 야고보는 이방인을 구원하실 일에 대한 말씀이 이렇게 뚜렷하게 예언되어 있음을 말한 후에

③ 마지막으로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였습니다. 신약시대에 나타내시는 하나님의 뜻은 성령의 감동 받은 종들의 의견과 여러 종들의 의견의 일치가결로 나타났습니다. ㉠ 이방인 중에서 복음적 신앙으로 돌아온 자들에게 율법주의적인 짐을 지워 괴롭게 하지 않음이 좋고(율법주의적인 짐은 행위로 구원받게 함을 뜻함) ㉡ 다만 우상의 더러운 것(이것은 이방인들이 마땅히 금지해야 할 사항으로 우상숭배와 제물금지에 관한 것임)과 목매어 죽인 것(피 먹는 것을 금지하는 방법으로 말씀한 것임)과 피(그리스도의 보혈을 예표함과 인간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뜻으로 율법이 금한 것임; 레3:17, 7:26, 19:26)를 멀리 하도록 편지로 지도하자는 것이었습니다. ㉢ 편지로 지도방침을 전하면 예전부터 안식일마다 모여서 모세의 율법을 읽었으니 만큼 그 모임을 이용하여 사도들의 결의문을 전달하여 가르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21절). ㉣ 우상의 제물을 금지함에 대하여 우상숭배는 제 2계명에서 금지를 명하신 만큼 그 제물도 우상숭배에 이용된 것은 사실이나 우상 또는 귀신을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알 때는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피해를 받지 않으므로(고전8:4-6) 자유할 수 있습니다(롬14:1, 딤전4:4-5). 그러나 신앙적으로 피해를 당할만큼 믿음지식이 부족할 때는 그 자신이나 그 이웃의 약한 자의 양심을 위하여 삼가야 한다고 하셨습니다(롬14:1, 고전8:7,9). 본문에서 이를 금지시킨 것은 그 당시 성도들의 신앙지식이 연약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 피를 금지함에 대하여 이는 하나님께서 동물성 식물을 허락하신 때부터 피 먹는 것을 금지하셨습니다(창9:3). 이것을 금지하신 이유는 피가 곧 생명이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창9:4). 여기에서 피를 먹음은 생명을 경시하는 만행이므로 엄하게 벌하신다고 하셨습니다(레7:26). 또 생축으로 제물을 삼아 피를 흘리게 할 때 이 피는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함이 되어(히9:13:14) 신성하게 여겼으므로(히9:7) 먹지 못하게 하신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의 완성자가 되시고(마5:17) 모형적 예표를 십자가로 성취하신 만큼 보혈과의 관련성은 끝난 것이며(고전13:10) 다만 생명을 경시하는 풍조에 대하여 우상의 제물을 먹을 수 있는 믿음을 갖는 것처럼 이를 신앙적으로 극복한다면 역시 자유로울 수 있는 것입니다(롬14:1, 딤전4:4-5). 그러나 그 당시 개종한 이방인들이 그만한 신앙을 갖지 못하였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금지한 것입니다. 어떤 해석자는 우상숭배와 음행과 포악(살인)이 그 당시 백성들의 큰 죄악이었기 때문에 주신 교훈이라고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① 신앙은 일치순결을 도모하여야 하며 ② 혼난이 있을 때는 교회의 최고 기관에 문의하여 지도를 받아야 하며 ③ 하나님의 말씀은 신앙의 성숙정도에 따라 시행할 수 있음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제 40 과 총회의 가결문을 전달함 (행 15:22-35)

 

본문 22절은 “의안을 채택, 가결한 내용”이요, 23절-29절까지는 “전달한 편지의 내용”이며 30절-35절은 “편지를 전달한 결과와 그후의 사역에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총회의 가결문을 전달함”이란 제목아래 3대지로 말씀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의안을 채택하고 편지전달을 가결함(22절).

1)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와 같이 문제를 결의한 기관은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22절)라 하였고, 15:6에서는 “사도와 장로들”이라고 하였습니다. 본문에서 의결기관에 교회를 포함시킨 것은 “사도와 장로”로 구성된 총회가 온 교회의 대표기관이며 또 결의는 사도와 장로회의에서 하였을지라도 이것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교회의 협력이 있어야 하므로 “온 교회”를 포함시킨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2) 그들이 가결한 것은 편지의 내용과 전달자를 선택한 일이었습니다. ① 22절에서는 “편지의 내용을 채택했다”는 말씀이 없지만 앞부분(13-20절)에서 야고보의 최종발언에 이의(異議)를 제기한 회원이 없었으므로 그 제안이 자동채택된 것입니다. ② 그리고 본문에서는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가서 전달할 사람으로 “유다(바사바)”와 “실라”를 선택한 것입니다. ㉠ 신약성경에 “유다”란 이름이 여섯 사람 나옵니다. 본문의 유다는 일명 “바사바”라고 하는 사람으로 실라와 함께 선지자(32절)라고 하였습니다. ㉡ “실라”는 바울사도의 1차 전도시에 “버가”까지 동행하였다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교회의 일에 충성한 사람입니다. 실라는 이때에 공함 전달자로 선택되어 안디옥에 간 후 그곳에서 계속 선지자(가르치는 사명) 사명을 이행하다가 바울의 2차 선교시에 바나바와 함께 선교사로 나가서(39절) 빌립보에 가서 바울사도와 만났고 바울과 함께 감옥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옥문이 열려 나온 사실이 있었습니다(행16:19-34). ㉢ 문제를 갖고 온 바울과 바나바외에 유다와 실라를 추가로 파송한 것은 신뢰의 유익을 도모하고 합력하여 성도를 권면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32절).

2. 편지내용에 대한 것입니다(23절-29절).

1) 이 편지는 사도회의의 결정서로서 하나님의 뜻에 따른 명령서와 같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영감을 받아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이며(베드로, 야고보) 또 그들의 생활과 지도를 모범삼아 시행하도록 나타내 주셨기 때문입니다(고전11:1, 엡2:20).

2) 이 편지를 받을 대상은 안디옥과 수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 있는 이방인 성도들을 상대한 것입니다. “안디옥”은 “수리아”의 도성이고, “수리아”는 “안디옥”을 중심한 나라의 이름이며(그 당시는 하나의 행정구역이었음) “길리기아”는 수리아 서쪽에 인접한 지역입니다. 안디옥을 중심하여 주변지역의 이방인들이 복음신앙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그들에게도 지도서를 보낸 것입니다. 이 말씀은 같은 경우의 이방인들에게도 다 해당이 됩니다.

3) 23절에서 ① 발송인(사도와 장로된 형제들)과 수신인을 기록하고, 문안하였으며 ② 24절에서는 편지를 보내게 된 동기로서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 나가서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하고 마음을 혹하게 한다”는 소식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 “우리 가운데 어떤 사람들”이란 같은 복음세계 안에서 다른 사상을 가진 성도들을 의미하고 ㉡ “우리의 시킨 것도 없이”란 반드시 사도회의에서 인정하고 파송하는 자가 복음을 전하고 가르쳐야 할 것을 뜻하는 것이며 ㉢ “말로 너희를 괴롭게 한다”는 뜻은 율법의 엄격한 시행과 할례를 강요하는 일이며 ㉣ “마음을 혹하게 한다”함은 복음신앙의 자유를 율법주의 신앙으로 현혹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복음신앙의 자유란 구원받는 근거를 십자가 신앙에 두므로 율법완전시행의 의무에서 해방됨을 뜻합니다(제사와 상징적 의식의 법은 십자가로 폐지되었음; 엡2:15).

4) 본문에서 25절과 26절은 분리되지 않았습니다. 본래 성경말씀에 장절의 분류가 있었던 것은 아니므로 내용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것은 맛소라 학파에서 분류한 장절이 당초부터 착오되었거나 번역과정에서 발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맛소라 학파는 기원전부터 있었던 성경연구단체로 주후 7세기까지 활약하는 중 구약의 구독법에 따른 장절 및 난외음을 표기하였고 나중에 신약에 대한 것도 그렇게 하였다고 합니다.)

5) 26절-27절에서 파송자에 대한 신분의 확실성을 나타내 주셨습니다. ① 첫째 파송자는 바나바와 바울인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위하여 생명을 아끼지 않는 자요 또 우리의 사랑하는 자라”하므로 충분히 신용해야 할 사역자들로 추천을 한 것이요 ② 그 다음에 유다와 실라도 바나바와 바울을 협력하는 사역자로 파송한 것입니다. 27절에서 “저희도 이 일을 말로 전하리라”하신 것은 “편지의 내용을 말로 설명할 것이라”는 뜻이므로 신앙적 바른 지도에 대하여 유혹의 틈을 주지 않으려는 주밀한 시도가 엿보이는 것입니다.

6) 28절-29절은 실제적인 지도내용입니다. ① 지도자는 “성령과 우리”였으니 이것은 사도회의의 결의가 성령님의 인도로 성취되었음을 뜻합니다. 오늘의 성도들이 하나님의 일이나 교회의 일을 지도함에 있어서도 역시 배후에서 성령님의 인도하심이 있음을 아셔야 할 것입니다. ②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지우지 않는다”하였으니 이 요긴한 것들이란 복음적 신앙생활(상징이나 의문의 율법을 제외한 모든 것; 롬2:27, 골2:14)을 의미하며 “아무짐”은 율법시행에서 제외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면 제사제도, 할례, 절기, 또는 결례법 등입니다(호2:11, 고전13:10, 히3:1-6, 히7:12-19). ③ 편지의 핵심적 명령은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의 설명은 제39과를 참고하십시요. 여기의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은 신앙성숙에 따라 해방될 수 있는 잠정적 지도요 음행은 영구적 금지계율이 되는 것입니다. ④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모든 계율을 지킬 때 성령님의 역사나 다른 사람의 힘을 힘입어 저절로 지켜지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반드시 자신의 의지와 노력을 앞세울 때 성령님도 역사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삼가는 일”이 바로 자신이 먼저 노력할 것을 지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스스로 노력하는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습니다(마11:12, 대하16:9).

3. 편지를 전달한 결과와 그후의 사역에 관한 말씀(30절-35절).

1) 예루살렘에서 작별하고 안디옥으로 내려간 사람들은 안디옥에서 온 두 사도와 몇 사람(2절), 그리고 예루살렘에서 파송한 유다와 마가였습니다.

2) 그들은 안디옥에 가서 성도들을 모으고 편지를 전한 후 그들로 읽게 하였고 말로 보충설명을 하였습니다(27절).

3) 편지내용으로 위로의 말을 받은 성도들이 기뻐하였으니 그들이 기뻐한 이유는 사도들의 문안과 관심있는 지도, 그리고 율법의 무거운 짐을 벗겨 주는 은혜의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4) 얼마 후에 성도들의 전송을 받고 유다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으나(33절) “실라는 저희와 함께 유하기를 작정하여(34절)” 그대로 남아있었습니다. 이 밑줄친 부분이 본문에는 없지만 각주에 기록이 있습니다. 이것은 사본상의 차이로 그렇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 사용하는 개역 성경은 34절이 없는 사본을 옮겼기 때문이지만 역사적인 사실로 볼 때 34절의 내용이 있으므로 더욱 자연스럽습니다. 그 이유는 “실라”가 안디옥에 있으면서 바나바와 동행하여 선교를 하였기 때문입니다(39절).

5) 바나바와 바울, 그리고 많은 교사들이 안디옥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였습니다(35절).

이상의 말씀에서 주시는 교훈은 ① 성령님의 지도로 결정되는 사도회의의 문서가 오늘의 교회의 헌법처럼 신앙지도서가 된 점과 ② 반드시 지도자의 허락과 지도와 감독을 받아 복음활동을 하여야 할 것과 ③ 주의 말씀을 가르치며 전파하는 일을 계속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제 41 과 2차선교, 안디옥에서 드로아까지 (행 15:36-16:10)

 

이 말씀은 바울사도가 2차선교를 시작하여 안디옥에서부터 드로아까지 가면서 전도한 사실을 기록하였습니다. ① 36절-41절은 “2차전도 준비와 동행자 선택 및 출발에 관한 말씀”이요 ② 16:1-3절까지는 “데베, 루스드라(이고니온)에서 전도한 사실”이며 ③ 4절-5절 말씀은 “여러 성으로 다녀가면서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를 주어 지키게 한 사실”이요 ④ 6절-10절은 “선교지를 인도하시는 계시에 대한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또 “안디옥에서 드로아까지의 바울사도의 2차선교” 또는 “바울의 소아시아지역의 2차선교”라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소아시아(아시아;6절)”지역이란 유럽지역으로 가기 전 “에게해 동쪽지역”을 의미하며 현재 터키영지의 서남부 지역을 의미합니다. 본문에는 지역이름이 열 두 곳(유대, 밤빌리아, 구브로, 수리아, 길리기아, 헬라, 아시아,브루기아, 갈라디아, 무시아, 비두니아, 마게도냐) 성읍 이름이 네 곳(더베, 루스드라, 이고니온, 드로아) 나타나 있습니다. 꼭 지도를 보시고 지역과 도성을 확인하신 후 본문을 상고하십시요.

1. 2차전도 준비와 동행자 선택 및 출발에 관한 말씀(36-41절).

1) 신학사상의 일치를 위하여 “예루살렘”에 다녀온 수일 후에 “바울”은 “바나바”에게 2차선교를 제의하였습니다. 제의한 내용은 “우리가 1차전도 때에 주의 말씀을 전한 각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를 살피기 위하여 방문하자”고 하였습니다(36절).

2) 이때에 37절에서 바나바가 동반자에 대하여 제의하므로 함께 일할 뜻을 나타냈습니다.

3) 성경에서는 성도들이 무엇을 의논할 때 반대의사가 없거나 대립되는 의견이 없으면 제의자의 뜻대로 시행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행15:13-22). 의결기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유엔총회에서도 위원회의 상정한 안건에 대하여 이의가 없으면 동의와 재청을 받는 절차없이 그대로 채택되었다고 선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4) “바나바”는 1차선교 여행 때 “바울”과 동행하였던 “마가, 요한”(마가복음의 저자요, 바나바의 생질; 골4:11)도 데리고 가자고 제의하였으나(37절) 바울이 “그가 1차선교시에 밤빌리아 지역의 버가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않은자이므로(38절, 13:13) 함께 가는 것이 옳지 않다”고 반대한즉 “바울”과 “바나바” 사이에 의견대립이 크게 생긴 것입니다. 이 의견대립의 성격은 사명의 지구성이 부족하였던 사역자를 또 함께 데리고 가느냐, 마느냐에 대한 것인데 바나바는 관용성이 많았고 바울은 선교의 유익을 위하여 사명자의 부족한 점을 배려하지 않는 차이인 것입니다.

5) 결국 의견 조정이 되지 않은 채(심히 서로 다투어) 피차 갈라서는 결과를 나타냈습니다. ① 바울과 바나바는 꼭 같은 사명자라도 서로의 성격과 은사에 차이가 있을 수 있고 ② 의견대립이 있을 때에 누구 한사람이 양보하여 상대방의 뜻을 따라 주었으면 은혜로울지 모르나 그들의 경우에는 서로 융합하기 어려운 사정이 있었을 것입니다. ③ 이 경우에 서로 갈라서는 것이 현명하였습니다. 성령에 충만한 두 사도가(행11:24,13:9) 이해없이 갈라선 것은 아닐 것입니다. 각자의 계획과 은사의 특성이 다르니까 그 특성과 계획에 차질이 없기 위하여 사명상 갈라선 것입니다. 일반 성도들도 자기가 받은 은사특성과 동질성 있는 사역자를 가까이 하는 것이 유익할 것입니다. ④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구브로”로 갔고(39절) “바울”은 “실라”를 택하여 출발하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출발할 때 그곳 형제들부터 주님의 은혜에 부탁하는 전송을 받고 떠난 것입니다(40절). ⑤ 바울은 바나바를 따라 배를 타고 구브로로 가지 않고 서북쪽 육로를 따라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녀가며 교회들을 굳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41절). “길리기아”는 바울의 고향, “다소성읍”이 있는 지역이요, 그 곳에 벌써 교회들이 있었습니다. 그곳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행8:2에 근거하여 전도자들이 모든 땅으로 흩어진 사실도 있지만 사울(바울)이 개종한 후 핍박을 피하여 고향에 간 사실이 있었으므로(행9:30,11:25-26) 그 기회에 복음을 전파하였을 것입니다. ⑥ 그들이 교회를 굳게 한 방법은 복음신앙을 굳게 가질 것과 사도회의 지도를 순종하게 한 것입니다(36절,16:4).

6) 한가지 의문을 풀어야 할 것은 “마가, 요한”을 동반하는 문제에 있어서 두 사도간에 의견차이가 생겼는데 “누구의 의견이 더 합리적인가” 할 때 두 사도의 의견이 다 타당성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결국 그 타당성을 합리화시키기 위하여 서로 나누어 선교를 하게 된 것이니까요. “바울”은 “마가”를 데리고 가지 않고 “실라”를 데리고 가므로 사도행전을 장식하는 많은 선교를 성공적으로 이행하였고, “바나바”의 선교행적은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그와 함께 하였던 “마가”가 나중에 크게 변화된 사람이 되어 “바울에게 유익한 사람이 되었다”(딤후4:11)하셨고 또 마가복음을 기록한 제자로서 크게 활약하였으니 이는 “바나바”가 그를 잘 지도한 때문일 것입니다. 오늘의 성도들 중에도 “마가”와 같은 인물을 대우할 때 “바나바” 같은 사람과 “바울” 같은 사람이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2. “더베”와 “루스드라”에서 전도한 사실(16:1-3).

1) 바울사도 일행은 “더베”를 거쳐 “르스드라”에 갔다가 “디모데”란 젊은 제자(딤전4:12)를 영입하게 되었습니다. 그의 부친은 헬라인이지만 그의 모친이 유대여자(유니게)로서 신앙이 독실하여 바울의 칭찬을 받았습니다(딤후1:5). 따라서 “디모데”는 그의 어머니와 외조모의 신앙을 계승받은 사명이 있는 자였습니다(1절).

2) 뿐만 아니라 “디모데”는 “루스드라”에서는 물론 그 이웃 성읍인 “이고니온”형제들로부터도 칭찬을 받는 자였으므로(2절) 바울이 선교의 조력자로 그를 데리고 가려한즉 그곳에 있는 유대인들이 “디모데”의 아버지가 이방인임을 알고 더욱 할례 베풀 것을 주장한 것입니다. 만일 그때에 바울이 디모데에게 할례를 행하지 않으면 디모데를 데리고 가기도 어려울뿐 아니라 할례파 유대인들이 그를 복음사역자로 인정하지도 않으려고 하였을 것입니다. 이 사실은 바울이 할례를 반대한 자였고, 또 총회의 결의도 그러하였지만(행15:2,29) 부득이 할례를 시행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3) 이런 경우에 바울은 자신의 신앙양심과 총회의 결의를 불복한 죄를 지은 것이 될까요? 바울은 죄짓는 심정으로 디모데에게 할례를 시행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라”고 교훈하는 분이기 때문입니다(살전5:22). 그러면 왜 시행하였을까요? 그 이유는 ① 할례 그 자체가 복음신앙 안에서는 받아도 유익이 없고 안 받아도 손해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롬2:25-29, 갈5:6) 아무것도 아닌 일로 여겼기 때문이며 ② 그 아무것도 아닌 일을 시행하여 평화와 질서와 사명에 유익할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비슷한 사례들은 항상 있을 수 있을 것입니다.

3. 여러 교회로 다녀가면서 총회의 작정한 규례를 지키게 한 사실(16:2-5절).

1) 여기의 여러 성이란 “더베”와 “루스드라”가 있는 “루가오니아”지역의 교회들을 의미합니다.

2) 그곳의 성도들에게 “사도와 장로들의 작정한 규례(예루살렘 총회의 결의; 15:23-29)를 저희에게 주어 지키게 하니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하였다”고 하였습니다(4-5절). 이것은 교리와 생활 및 충성면에 있어서 총회의 지도대로 복종하여 교회의 영적성장을 이룩하였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 영감을 받으며 성경을 기록할 수 있었던 사도들의 결의는 곧 성경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교회의 치리기관은 완전히 순결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은 1938년에 신사참배 같은 결의도 할 수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잘못되지 않은 치리회를 만들고 섬기는 성도들이 되셔야 할 것입니다.

4. 선교지를 인도하시는 계시에 대하여(6-10절)

1) “루가오니아”지역에서 “아시아”로 가고저 하였을 때 성령님이 그곳에는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① 성령님께서 어떤 방법으로 지도하셨는지 알 수 없으나 일단 아시아로 가는 것을 막으셨습니다. ② 바울의 아시아지역의 선교사역을 배제하신 이유를 잘 알 수 없으나 전도자가 직접 가지 않아도 다른 방도로 전도하실 수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6절, 갈1:2, 계1:11).

2) 그리하여 “루가오니아”의 서쪽 “부르기아” 지역과 그 북쪽인 “갈라디아”지역을 거쳐 소아시아 북쪽인 “무시아” 접경에 이르러 “갈라디아” 북쪽 지역인 “비두니아”로 가려고 노력을 한즉 6절 말씀처럼 “성령님께서 허락지 않으셨다”고 하였습니다(7절).

3) 그리하여 “무시아”지역을 그대로 통과하여 “드로아” 항구에 도착한 것입니다(8절). 그즈음에 바울은 밤에 환상을 보았는데 “마게도냐 사람이 서서 건너와 우리를 도와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바울에게 주신 계시였습니다(9절).

4) 바울은 그 계시를 받고 그곳으로 떠나기를 힘썼으니 그가 환상으로 본 계시의 뜻을 “마게도냐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인정(깨달음)하였기 때문입니다.

5) “마게도냐”는 현재 “헬라”의 북반부(남쪽은 “아가야”임)지역을 의미합니다. “빌립보”, “데살로니가”, “뵈뢰아”가 그 지역에 있습니다. 이 지역이 “로마”와 “터키”의 통치를 받다가 1차대전후에 두지역이 병합되어 헬라국이 되었으며 로마통치 시대에 “그리스”란 명칭을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아야 할 것은 ① 사명자들이 받은 은사에 따라 적당한 동역자와 합력하여야 하며 ② 무자격자를 사명자 기용에서 배제하는데도 유익이 있으나 그를 수용하여 잘 가르치는 것도 역시 유익이 있음을 알게 하셨으며 ③성령님께서는 전도자의 길을 인도하심에 직접 역사하시는 일과 ④ 총회의 결의를 순종하므로 교회의 영적 부흥을 도모한 사실과 ⑤ 전도자의 발걸음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도 전도할 수 있음을 알게 하셨습니다.

제 42 과 빌립보에서 전도함(Ⅰ) (행 16:11-25)

 

위 말씀은 바울사도 일행이 “빌립보”에서 전도한 사실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① 11절-12절은 “바울이 드로아에서 빌립보까지 간 사실”이요 ② 13절-15절은 “안식일에 전도하여 루디아의 가정을 인도한 일”이며 ③ 16절-18절은 “기도처에 가다가 귀신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일”이요 ④ 19절-25절은 “여종의 주인과 빌립보인들로부터 핍박을 받아 감옥에 들어갔다가 하나님의 능력으로 구출받은 사실”입니다.

1. “드로아”에서 “빌립보”로 감(11-12절).

1) “드로아”는 앞에서 말씀드린대로 무시아 지역에 있는 항구입니다. 그곳에서 서북쪽으로 “에게해”를 건너 가노라면 첫번째 큰 섬이 “사모드라게”입니다.

2) 바울은 그 섬을 거쳐 다음날 “마게도냐” 지역 북쪽 항구인 “네압볼리”에 도착하였으니 이것으로 유럽에 첫발을 디딘 것입니다.

3) 또 바울일행은 그곳에서 서북쪽 육지로 약 13km 떨어진 곳 마게도냐 첫 성읍인 “빌립보” 도성으로 갔습니다. 본래 이 성읍의 이름은 “크레니티”였는데 마게도냐왕 필립2세(BC 359-336)가 자기의 이름을 따라 “빌립보(필립)”로 개칭하였다고 합니다. 현재는 그곳에 교회건물의 흔적만 있을 뿐 폐허된 지역으로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수일을 유하였으니 전도계획상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

2. 안식일에 전도하여 루디아 가족을 얻음(13-15절).

1) 바울은 안식일에 기도처를 찾아 나섰으니 혹 그곳에 사는 유대인들이 어떤 기도처에서 종교행사를 갖는 곳이 있는가를 알아보려 하셨을 것이며 그곳도 “로마”의 식민지였으므로 성읍 안에서는 종교행사가 금지되었을 것입니다. 성문 밖 강가로 나가니 마침 그곳에 모인 여자들이 있어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문 밖 강가”란 “빌립보”성 서쪽 1.6km 지점에 간지테스강(이 강은 작은 내와 같음)을 의미합니다.

2) 그곳에 모인 여인들 중에 “두아디라”성(소아시아의 “드로아”와 “버가모” 밑에 있음)에 고향을 둔 “루디아”가 자주 장사를 하기 위하여 그곳에 갔다가 그 강가에서 바울을 만나게 된 것입니다. 자주(紫紬)장사란 “폴퓰로 폴리스(πορφύρόπωλις)”로서 자주색으로 염색한 비단이나 의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자주색 또는 자주 옷감”은 폴퓰레오스(πορφύρεος; 계18:12)라고 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루디아”는 이미 하나님을 공경하고 있었습니다(14절). 그가 하나님을 공경하게 된 것은 그의 고향인 “두아디라”나 혹은 다른 곳을 여행하면서 전도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확실한 깨달음이 없었다가 그곳에서 바울을 만나 확신을 갖고 세례를 받은 것입니다.

3) “루디아”가 바울의 증언을 들을 때에 주님께서 그 마음을 열어주셨고 말씀을 잘 청종하게 하셨습니다. 이것은 성령님께서 말씀을 깨닫는 지혜를 주신 것입니다(엡1:17). 또 그는 바울사도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가족들에게도 전도하게 하였고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세례는 구원의 도리를 확신하고 믿음생활을 결심하면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현재 교회에서 기간을 두고 학습, 세례를 주는 것은 믿음과 생활을 가시적으로 확인하기 위함일 뿐 세례받는데 특정한 기간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행8:35-36).

4) 그 다음에 중요한 말씀은 15절 말씀에서 바울이 그 집을 나서려 할 때 루디아가 말하기를 “만일 나를 주 믿는 자로 알거든 내 집에 와서 유하라”하여 강권하여 있게 한 것입니다. 이 사실은 ① 루디아가 확실한 성도가 되고 ② 전도의 사명을 느꼈으며 ③ 자기 집을 전도의 근거지로 삼아 하나님의 뜻대로 이용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그의 사명적 헌신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오늘날도 이런 성도가 많으면 전도행사를 더 확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국 “빌립보”에 교회가 설립된 시발지는 그 여인의 집이었을 것이요 지금도 그곳에 루디아 기념 성전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3. 귀신들린 여종의 귀신을 쫓음(16-18절).

1) (루디아의 집에 유하면서; 15절) 또 성밖 강가의 기도하는 곳(조용한 야외장소)으로 가다가 점하는 귀신들린 여종 한사람을 만난 것입니다. 그는 “귀신의 계시로 점을 쳐서(돈을 벌어) 주인을 크게 이롭게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2) 귀신의 계시로 점을 칠 수 있을까요? 여기에는 거짓계시도 있겠지만(왕상22:21-23) 혹 맞는 것도 있었기 때문에(신13:1-3) 점치는 사람들이 돈을 주었을 것입니다. 성경에는 귀신(사탄)에게도 상당한 능력이 허용된 것을 말씀하셨습니다(욥1:6-19, 요13:2,13, 살후2:9, 계16:14).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므로 속이는 것이 전문이지만(요8:49, 엡6:11) 적당하게 속여 꾀이는 것이 맞는 경우도 있습니다. 마귀가 하와를 꾀일 때도 그럴듯하게 꾀였습니다. 사탄은 하와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눈이 밝아질 것이라”(창3:5) 하였는데 여자가 그것을 먹은즉 과연 눈이 밝아졌으니(창3:7) 이 밝아진 눈이 세상을 보는 눈일지라도 사탄의 예언을 신통하다고 느끼기에 충분하였을 것입니다. 인간이 이런 것에 속아서 귀신들린 점쟁이를 찾는 줄 압니다. 사탄은 하나님의 깊은 섭리와 미래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그것은 하나님만 주관하시는 고유계획에 관한 일이기 때문에 절대로 다른 피조물에게 분별없이 나타내시지 않으심을 아시기 바랍니다(신6:4).

3) 그 귀신들린 여인은 전도자들에게로 좇아오면서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도하는 자라”하며 그같이 여러 날을 하므로 바울이 심히 괴로웠다고 하였습니다. 귀신의 외친 말이 바른 말이었지만 복음이 사탄이나 미친자의 증언을 힘입어야 할 이유가 없고 또 제정신도 아닌 상태에서 외치는 것이므로 퍽 민망하였을 것입니다.

4) 그래서 바울은 그 귀신에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하니 귀신이 “즉시 나왔다”고 하였습니다. 바울이 귀신 쫓는 일을 처음 시행하였습니다(행19:12). 귀신을 예수님의 이름과 명령 한마디로 굴복시킨 것은 성령님께서 바울과 함께 강하게 역사하셨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기도를 많이 하여 귀신을 쫓는 일(막9:29)보다도 더 강하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4. 핍박을 받았으나 구출됨(19-25절).

1) 핍박자는 귀신병을 고침받은 종의 주인들과 그 지역의 관원들이었습니다. 주인들은 종이 점을 쳐서 벌어들인 이익이 끊김을 애석하게 여겨 바울과 실라를 저자(장터)에 있는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다가 다시 그들의 상관들(빌립보의 관원들) 앞으로 데리고 가서 저자의 무리들과 합세하여 송사하기를

2) “유대인인 이들이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치도 못할 풍속을 전하여 성을 요란케 한다”고 송사하니

3) 상관들이 무조건 두 사람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많은 매를 친 후에 옥에 가두고 발을 착고에 챈 후 든든히 지키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송사와 재판의 절차도 무시한 채 약자를 학대하는 무법한 처사인 것입니다. 정착한 무리들이 외국의 나그네를 무조건 배척한 만행이기도 한 것입니다.

4) 그러나 옥에 갖힌 바울과 실라는 낙심하지 않았고 주님과 복음을 인하여 고난받는 것을 합당하게 여겼을 것입니다(행5:41,14:22). 그러나 그 밤중에 두 사람은 합력하여 기도하고 (고난 주시는) 하나님을 찬미한 것입니다. 이 찬미소리를 다른 죄수들이 듣는 중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졌다고 하였습니다.

5) 하나님이 갇힌 자를 구원하신 사례는 행12:5-10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때는 천사의 역할로 베드로를 구출하셨으나 이때는 지진을 일으키셨고 직접 잠근문과 착고를 풀어주신 것이었습니다. 26절의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풀어진 것”은 바울과 실라 이외의 사람에게까지 미친 것은 아닌 것입니다. 그 이유는 28절에서 바울과 실라 두 사람이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하므로 그 이상 도망한 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6)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인하여 사명을 다하고 핍박받는 제자들을 이만큼 각별하게 붙들어 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내 주신 것입니다. 자연을 통치하시는 하나님은(마8:26) 자신의 원하시는 일을 위하여 언제나 특별섭리를 나타내실 수 있으나 이런 일이 오늘에 잘 나타나지 않는 것은 그 당시의 기적을 복음의 확신을 위한 증표목적으로(히2:4) 나타내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에서 교훈받으셔야 할 것은 ① “루디아” 가정이 죄에서 구원받은 일과 점하는 여종이 귀신에게서 건짐 받은 일과 바울과 실라가 핍박적 속박에서 건짐 받은 것이 전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사실과 ② 오늘의 시대에도 루디아같은 사명있는 성도가 필요한 점과 ③ 핍박을 무릅쓰고 전도하는 사명자와 핍박을 받으면서도 감사와 찬송을 부르는 전도자의 열심을 본받는 일과 ④ 때를 따라 하나님이 특별하게 역사해 주시는 은혜가 항상 필요하다는 등의 교훈을 주신 것입니다.

제 43 과 빌립보에서 전도함(Ⅱ) (행 16:25-40)

 

바울과 실라가 빌립보 감옥에서 하나님의 특별섭리로 풀려 나왔을 때 간수들이 크게 놀란 사실과 자결하려는 간수를 전도자들이 만류한즉 간수가 전도자들에게 구원의 방도를 묻고 전도를 받은 사실과 전도자들에게 특별한 혐의 가 없음을 알고 그 다음날 상관들이 평안히 나가도록 명령을 전달하였지만 바울은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 가진 것을 내세워 로마사람을 함부로 대하는 잘못을 책망하니 상관들이 친히 와서 바울을 떠나게 하므로 그곳을 떠나 “데살로니가”로 향하게 된 사실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말씀을 크게 두 대지로 나누면 ① 27절-34절은 “간수의 가족을 구원함에 대한 말씀”이요 ② 35절-40절은 “감금에서 풀려나는 과정”을 말씀하셨습니다.

1. 간수의 가족을 구원함에 대하여(27절-34절)

1) 전도자들이 감옥에서 완전히 해방되었을 때 그들은 그 자리를 떠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이 떠나면 로마법에 의하여 죄수를 놓친 간수가 죽게됨을 알고 있었고 또 간수는 옥문이 다 열렸으므로 죄수들이 도망한 줄로 알고 미리 검을 빼어 자결하려고 하였습니다(27절).

2) 이것을 본 전도자들은 크게 소리질러 “우리가 여기 있으니 네 몸을 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28절). 그때가 밤중이므로 간수가 전도자들에게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서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다시 밖으로 데리고 나와서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겠느냐?”고 물은 것입니다(28-30절).

3) 이 간수는 죄수를 다시 감금하는 문제를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구원문제를 질문하였으니 간수는 그날 밤에 큰 이적을 체험하였으므로 전도자들을 하나님의 사신으로 믿고 구원받기를 사모한 것입니다.

4) 하나님이 이런 역사로 간수의 마음에 구원을 갈망하게 하셨고 전도자들은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한 것입니다. ① “주 예수를 믿으라”는 뜻은 복음을 영접하라는 전도의 핵심내용이요 ② “너와 네 집이 구원받음”은 가족 전체의 구원이 있음을 알린 것입니다. 그때에 전도자들은 그 간수의 모든 가족들에게 전도하였고 간수는 전도자들을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매맞은 자리의 피의 흔적을 씻기고 자신과 온 가족이 다 세례를 받은 후 음식대접을 하고 하나님을 믿게 된 것을 크게 기뻐하였다고 하였습니다(32-34절). 이때에 온 가족 중에는 어린 아이도 있어서 그들까지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이런 말씀이 유아세례의 근거가 되기도 합니다.

5) 전도를 받고 세례를 받게 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밤중에 전도를 받고 밝기 전에 세례를 받았을 것입니다. 그 당시에 간수는 상전의 명령보다 전도자의 신분을 더 존중하는 입장에 있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죄수된 전도자들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가서 대접을 하고 전도를 받은 것은 관원들의 의도가 아님을 알면서 항거한 것인 만큼 그의 믿음은 더욱 확고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전도자들은 그런 이유들로서 그들의 믿음을 확인하였기 때문에 즉시 세례를 준 것입니다.

2. 감금상태에서 풀려나는 과정에 대하여(35절-40절)

1) 간수가 전도자들로부터 세례를 받은 후 전도자들을 다시 감옥에 감금한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그 이유는 36절에서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간수들에게 죄수들을 석방하라는 허락을 하였으므로 간수들은 두 전도자들에게 “너희를 놓으라 하였으니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고 전달한 것을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2) 날이 새자 상관들은 귀신쫓은 좋은 일한 사람들을 더 핍박할 이유가 없으므로 그들을 놓으라는 전갈을 보냈으나(35-36절) 바울은 오히려 “로마의 사람을 죄도 정하지 않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가두는 불법을 범하고 어찌(사과도 없이) 가만히 보내려고 하느냐? 상관들이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할 것이라”고 하였을 때(37절) 아전(지방관료)을 통하여 이 말을 들은 상관들이 두려워하여 직접 그곳에 와서 친히 권하고(잘못을 인정함) 떠나기를 청하므로(38,39절) 바울과 실라는 그곳에서 나와서 “루디아”의 집으로 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한 후 “데살로니가” 방향으로 떠난 것입니다(행17:1). ① 이 말씀에서 바울이 “길리기아 다소” 사람이지만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것은 그가 출생하였을 때부터 취득한 것이었습니다(행22:28). 바울이 로마에서 태어났거나 그 부모의 연고로 취득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② 바울이 그 시민권을 내세운 이유는 자신이 풀려나는데 대접을 받으려는 목적이 아니요 루디아 집에 있는 형제들에게 위로를 더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40절). 로마사람이 예수 믿는 일에 대하여 식민지 국민인 헬라 사람들이 반대하거나 핍박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이때에 “디모데”에 관한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그도 함께 동행한 것이 사실이며 때로는 합류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도하였을 것입니다. 16:15에서 디모데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내용은 ① 전도자들이 비겁하게 도망하지 않은 점과 ② 자신들로 말미암아 무죄한 간수가 피해받지 않게 한 것과 ③ 담대하게 전도하고 기회를 선용하여 간수의 온 가족을 구원의 길로 인도한 사실과 ④ 일반은총의 하나인 로마시민권을 내세워 형제를 위로하고 핍박을 방어하는데 이용한 것과 ⑤ 그 지역의 관리자들이 떠나라 하므로 더 있지 않은 사실을 교훈받게 됩니다. 예수님도 떠나라는 데는 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막5:17-18, 눅9:52-55).

제 44 과 데살로니가와 뵈뢰아 전도 (행 17:1-14)

 

바울사도 일행은 빌립보 감옥에서 풀려난 후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 위로하고(16:40) 데살로니가로 왔습니다. 데살로니가로 올 때에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다녀서 왔다고 하였습니다. 빌립보, 암비볼리, 아볼로니아, 데살로니가, 베뢰아, 아덴, 고린도를 지도를 보시고 꼭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① 네압볼리는 마게도냐 지역을 출입하는 항구로서 현재 “가발라”라는 작은 도시이며

② 빌립보는 네압볼리 북쪽 약 30리에 있는 성읍이며

③ 암비볼리는 빌립보에서 서쪽으로 100리 쯤의 스트림몬 해안에 있는 성읍인데 작은 지도를 보면 항구로 여겨지나 정밀한 지도를 보면 해변에서 2Km정도 스트림몬강 안 쪽에 있는 포구이며

④ 아볼로니아는 “암비볼리”에서 서쪽으로 100리쯤 “볼비”호수 남쪽변에 있으며(볼비호수 서쪽에 코로니아 호수도 있음)

⑤ 데살로니가는 “마게도냐”지역의 가장 큰 항구도시로 “아볼로니아”에서 서쪽으로 100리쯤에 있으며 현재 헬라국의 아덴 다음가는 도시입니다. 지도를 보시고 확인하십시오.

⑥ 베뢰아는 데살로니가 서쪽 150리쯤에 위치한 성읍입니다. 그 곳에서 델마코 해안으로 나오려면 데살로니가까지 거리의 약 반이 됩니다(14절).

본문말씀 1절-4절은 데살로니가에 와서 전도한 내용이요, 5절-9절은 데살로니가에서 핍박받은 내용이며 10절-12절은 베뢰아에서 전도한 내용이요, 13절-14절은 베뢰아에서 핍박을 받고 아덴으로 향한 내용입니다. 이 말씀 전체의 제목은 데살로니가와 베뢰아 전도입니다.

1. 데살로니가에서 전도한 내용(1-4절).

1) 빌립보에서 추방당하여 떠나게 된 바울 일행은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를 거쳐 “데살로니가”에 왔습니다. “암비볼리”와 “아볼로니아”는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로 오는 길목이요 빌립보에서 데살로니가까지는 약 390리쯤 됩니다.

2)바울은 어느 곳에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가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관례(규례)가 되어 있었습니다(4절).

3)그 곳에서 3주간(세 안식일)을 머물면서 세 안식일에 성경을 강론하였고 또 성경의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증명한 후 그 예수님이 곧 그리스도이심을 증언한 것입니다(2-3절). ① “성경을 강론하셨다”함은 곧 “말씀의 뜻을 풀어 가르쳤다”는 뜻으로 오늘의 성경강론 곧 설교에 해당합니다. 설교의 본뜻은 성경을 풀어 가르치는 강론입니다. ② 그 때에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야 할 것”을 성경으로 증명하였으니 이는 구약성경에서 예언하신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말씀, 즉 이사야 53장이나 시 16:10을 설명하여 증명하였을 것입니다. ③ 따라서 구약 성경이 예언하신대로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분은 예수님 뿐이므로 그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라고 전파한 것입니다. 그들은 사실을 증명하였기 때문에 힘이 있었고 성경이상 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4)이로 인하여 경건한 헬라인의 큰 무리와 적지않은 귀부인들까지 (복음)전함을 받고 바울과 실라를 따르게 되었습니다. 경건한 헬라인은 유대교에 입교한 헬라인을 뜻하고 귀부인은 존경받는 지도층의 부인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많이 믿고 따랐을 때 복음전파에 더 큰 유익을 주었을 것입니다.

2.그러나 호사다마격으로 핍박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5-9절).

1)핍박자들은 유대인들이었고(5절)

2)핍박의 방법은 시장(저자)에서 떠도는 괴악한 사람들(깡패같은 사람들)을 동원하여 떼를 지어 다니면서 전도자 일행을 찾았으나 찾지 못하자 전도자들을 잠시 영접하였던 야손과 믿음의 형제 몇 사람을 끌고 읍장(관원)들 앞에 가서 소리지르며 고발하여 이르기를 “천하를 어지럽게 하는 사람들을 야손이 영접하였고 이 사람들이 가이사 황제의 명을 거역하여 예수를 왕이라고 하였다”고 한 것입니다.

3)이리하여 고발을 받은 관원들이 그 사건을 처리하되 “보를 받고 놓았다”하였으니 이는 유사시에 다시 소환하여 심문할 수 있도록 신병을 확보(보증서와 같은 것)한 후 돌려보낸 것입니다. 악한자들은 떠들고 소동하는 것을 예사로 행합니다(5-6,8절).

3.뵈뢰아에서 전도한 내용(10-12).

1)핍박을 피한 상태에서 이상과 같은 소식을 들은 성도들이 바울과 실라를 곧 베뢰아로 보냈습니다. 베뢰아는 서쪽 육로로 150리쯤 떨어진 곳입니다.

2)이들은 그 곳에 가서도 역시 유대인의 회당에 들어가서 전도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곳 사람들은 항구도시에 사는 데살로니가 사람들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① 하나님의 말씀을 간절한 마음으로 받고 ② 그것이 그런가 하여 큰 관심을 가지며 ③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되 그 중에 헬라의 귀부인들과 남자들도 적지 아니하였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베뢰아 성도들의 신사적 행동은 성경을 상고하면서 성경중심으로 신앙생활을 영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11절은 “성경공부를 한 말씀”이고 12절은 “믿음의 열매를 거둔 말씀”이므로 성경공부와 성경제일주의가 전도의 효력을 가져 온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그러나 그 곳에서도 핍박이 따라 왔으니(13-14절)

1)이는 데살로니가에 있는 유대인들이 바울사도가 뵈뢰아에서 전도하는 줄을 알고 그 곳에까지 와서 무리를 움직여 소동케 하였으니 이는 데살로니가에서 핍박하던 방법을 재연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2)이때에 믿음의 형제들은 전도의 총책임자인 바울 한 사람을 잡히지 않게 하기 위하여 노력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전도자들은 함께 모여 다니며 전도하지 않고 서로 연락만 취하고 바울과 떨어진 상태에서 분담 사역을 하였습니다(행 16:25,17:14).

3)그 때에 실라와 디모데는 데살로니가에 더 머물러 있으면서 은밀하게 사역을 더 한 후에 아덴에서 만나게 해 줄 것을 약속하고(17:15) 바다까지 와서 “아덴”으로 향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의 바다까지는 “데살로니가”로 가는 거리의 반 정도로 약 70리이며 그 바다는 스트림몬 해안입니다. 바다까지 온 것은 배를 타고 아덴으로 가기 위함일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핍박을 피하면서 전도한 사실과 ② 한 단체가 아닌 서로 격리된 상태에서 전도를 분담한 사실과 ③ 신사적 신앙이 곧 성경 중심이요, 성경공부 중심의 신앙생활에서 전도의 열매가 잘 맺은 사실과 ④ 핍박자들은 호사다마격으로 어디에서나 나타난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제 45 과 아덴에서 전도함 (행 17:15-34)

 

위의 말씀은 바울사도가 “아덴”에서 전도한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바울은 베뢰아에서 핍박을 피하여 아덴으로 가게 되었고, “아덴”까지 바울을 인도해준 사람들이 있었으며 그들을 돌려보낼 때 베뢰아에 잠시 머물게 한 “실라”와 “디모데”를 속히 “아덴”으로 보내주도록 부탁을 하였습니다(14-15절). 본문말씀을 구분하면, 15절-18절까지는 “아덴의 철학자들과 변론한 사실”이요, 19절-21절은 “새것을 알고저 하는 자들의 사모하는 태도”에 관한 말씀이요, 22절-31절은 “바울이 증언한 설교내용”이요, 32절-34절은 “증언한 결과에 대한 말씀”입니다.

1. “아덴”의 철학자들과 변론한 일에 대하여(15-18절)

1) “아덴”은 헬라의 수도요 우상숭배가 많은 곳입니다. 아덴(아테네)이란 명칭이 제우스신에서 태어난 전쟁과 수호의 여신의 이름이며 오림푸스 12신중의 하나라고 합니다.

2)바울사도가 “아덴”에서 실라와 디모데(저희)를 기다리는 중 온 성안에 우상이 많은 것을 보고 분히 여겼으니 이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16절). ① 여기의 우상들은 오림푸스 12신의 형상들일 것이요 ② 하나님은 사람이 우상을 만들어 놓고 신으로 숭배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시므로(출20:4) ③ 성도는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을 볼 때 역시 우상숭배에 대하여 분한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3) 그때에 회당에 모인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유대주의적 신앙인들)과 또 저자(시장,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과 날마다 변론을 하였으니 이 변론은 무익한 변론이 아닌(딤후2:23) ① 복음주의를 설명하는 변론이었을 것이며 ② 또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헬라인(이방인)들도 있었을 것이므로 그들에게 유일신 하나님을 증거하고 우상숭배가 죄임을 증거하였을 것입니다(17절).

4) 이때에 “에비구레오”와 “스토이고”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을 하였습니다. ① “에비구레오”는 주전 342년에 헬라에서 출생한 사람으로 유물론적 철학자라고 합니다. 그의 주장은 만물이 자연발생한 미분자에서부터 스스로 이루어졌고 신의 간섭이나 심판이 없으며 영혼은 육체와 같은 물질에 속한 것으로 육체의 죽음과 함께 없어지고 인생의 목적은 향락과 안일에 있다는 주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② “스토이고”는 주전 300년경부터 시작된 헬라철학의 중심인물로 절대자 하나님의 창조와 통치는 믿으나 인간에게 행복을 주는 것은 오직 지식뿐이라는 주장을 하였다고 합니다. 바울이 이상과 같은 철학사상을 가진 사람들과 쟁론을 벌여 상대방의 주장을 제압한즉 그들은 바울을 보고 말쟁이(말 많은자)라고 하면서 또 예수님과 그의 부활전함을 인하여 오히려 바울을 이방신들을 전하는 자로 생각하였습니다(18절).

2. 새것을 사모하는 자들의 태도에 대하여(19-21절)

1) 아덴 사람들이나 그곳에 와서 사는 외국인(나그네)들까지 스도이고 철학의 영향을 받았음인지 새로운 지식(첨단지식과 새로운 내용)을 추구하는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런 것만 듣고 배우는데 시간을 할애하였습니다(21절).

2) 그들은 바울의 증언과 철학자들과의 변론하는 말을 듣고 더 확실하게 말해줄 것을 부탁하며 바울을 데리고 “아레오바고”로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는 아덴시의 주변에 있는 경치좋은 장소로 옛날에는 그곳에서 재판을 하였다고 합니다.(19-20절). 저희들도 새 것, 곧 진리에 대한 탐구열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바울이 증언한 내용입니다(22절-31절)

1) 바울은 그곳 사람들이 “종교성 가진 것”을 보았다고 하였습니다(22절). 그들이 종교성 가진 것을 알게 된 근거는 여러곳에 그들이 위하는(섬기고 의지하는) 우상이 많은 것과(29절) 심지어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 드리는 제단”까지 설치한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헬라인들은 많은 신을 섬기되 “제우스”나 “오림프스” 신도 있지만 다른 “알지 못하는 신”에 대하여도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사도는 그 알지 못하는 신을 알려 주겠다고 한 것입니다(23절). 인간은 누구에게나 종교성이 있습니다. 종교성이란 능력있는 신을 숭배하고 의지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을 본능적으로 갖게 된 것은 절대적 대상인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2) 바울은 그 하나님을 증언하였으니 ① 하나님은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이시요 ② 천지의 주재시며 ③ 사람이 손으로 지은 성전건물 안에만 계신 분이 아니요 ④ 사람의 섬김을 받으셔야 할 부족이 있는 분도 아니며 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요 ⑥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아담과 하와)으로 만드신 분이며 ⑦ 인류를 온 땅에 거하게 하시되 거주의 경계를 정하시고 ⑧ 또 저희의 연대(이 연대는 한 족속이 그 땅에 거하는 연대라 할 수도 있고 또 개인 한 생명의 수명을 뜻할 수도 있음)를 정하신 분이라고 하였습니다(24-26절). 이 말씀에서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고 자연과 인생 그리고 인생의 생명과 밀접한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3) 따라서 바울은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연히 알 것과 행하여야 할 것을 권면하였으니(27-29절) ① 그 하나님은 모든 각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신 분이 아니란 사실과 ② 모든 인류가 그를 힘입어 기동하며 살고 있음과 ③ 사람이 그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하여야 할 것과 ④ 하나님(신)을 사람의 고안과 기술로 새긴 우상과 같이 여겨서는 안된다고 하신 것입니다.

4) 두 가지 더 설명드려야 할 것은 ① 27절의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심”이란 인간들이 만물을 보았을 때 혹시라도(일반은총과 자연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을 발견하는 것이므로(롬2:20) 부분적으로라도) 만물의 창조자와 통치자이신 하나님을 깨달아 알기를 원하셨다는 뜻이요 ② 또 28절의 “너희 시인 중에 어떤 사람이 그(신)의 소생이라”고 하였다는 말씀은 스토이고 철학자중 “아랏스”란 시인이 “인간은 신의 소생이라”고 말한 사실이 있었음을 상기시킨 것이라고 합니다(강태국).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신이 유일신 하나님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5) 30절-31절에서는 회개와 심판을 경고하시고 믿음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① “알지 못하던 시대”란 복음으로 일깨우기 전의 시대를 의미하며 ② “하나님이 허물치 아니하셨음”은 인간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회개하지 못하는 만큼 용납하시고 정상을 살펴주셨다는 뜻이며 ③ “이제는 어디든지 다 명하여 회개하라”하셨음은 신약시대부터 복음이 만방에 전파되어 마땅히 회개할 것을 명하셨기 때문에 복음을 받고도 회개하지 않으면 긍휼없는 심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셨고, 심판주로서 예수님을 예비하여(정하신 사람) 그를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으며 이로서 인간들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다고 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부활은 믿을만한 최후의 증거인 것입니다. 이렇게 믿음의 증거가 확실히 나타났으니 회개하고 믿음을 갖지 않으면 심판을 받아 마땅할 것입니다.

4. 증언의 결과입니다(32-34절).

청중들 중에는 죽은자의 부활증언을 들었을 때 ① 혹(일부) 기롱(농락, 야유)하는 자들이 있었고 ② 또 “혹은 네 말을 다시 듣겠다”는 사람도 있었으며 ③ 바울이 그 곳을 떠났을 때(33절) 아레오바고의 관원 “디오누시오”와 “다마리”라는 여자와 또 다른 몇 사람이 바울과 친하여지기를 바라며 믿음을 가졌다고 하였습니다. 결국은 비난하는 자도 있었고 무관심한 자들도 있는 중에 하나님의 택한 백성은 믿음을 갖게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 받아야 할 것은 ① 기독교는 철학이나 지식위주의 종교가 아니란 사실과 ② 바울사도의 증언한 핵심이 하나님과 만물 및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인 점과 ③ 예수님의 부활이 믿을만한 최후 증표란 사실과 ④ 전도한 후에는 항상 비난과 무관심과 열매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46 과 고린도 전도와 귀환 (행 18:1-22)

 

이 말씀의 1절-11절은 “고린도에서 전도한 사실”이요, 12절-17절은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은 사실”이며 18절-22절은 “2차전도를 마치고 귀환한 사실”입니다. 따라서 “고린도 전도와 귀환”이란 제목이 가장 적당합니다.

1. 고린도에서 전도한 사실(1절-11절)

1) 고린도는 아덴의 서쪽 약 150리 거리에 있는 작은 항구도시입니다. 고린도의 동쪽 11km지점에 “겐그레아”항이 있고, 서쪽에는 “레기움”항이 있으며 또 아덴에서 고린도로 들어가는 입구에는 동쪽의 “에게”해와 서쪽의 “이오니아”해를 연결하는 운하가 있어 교통의 요지이며 따라서 통상을 통한 유족한 생활로 도덕성이 결여되고 “뷔너스”여신을 섬기는 미신 행위가 있었다고 합니다.

2) 바울은 그곳에서 “아굴라와 브리스길라”부부를 만났습니다. “아굴라”는 유대인의 아들로 본도(터키영지의 북부, 갈라디아 북쪽지역)에서 출생한 사람인데 장막을 만드는 업이 서로 같았으므로 함께 일을 하다가 만난 것입니다. 여기에서 바울은 천막제조업을 행하여 자급자족한 것을 알 수 있고, 아굴라 부부가 고린도에 살게 된 것은 본래 로마에 있었다가 로마 4대황제 “글라우디오”가 유대인을 로마에서 추방하였기 때문입니다.

3) 바울이 그곳에서 안식일마다 회당에 모이는 유대인과 헬라인들에게 성경을 강론하고 복음신앙을 갖도록 권면하였으며 그때에 “실라”와 “디모데”가 마게도냐에서 내려와 합력하였습니다.

4)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은 “바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붙잡혀 유대인들에게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밝히 증거한 것입니다(5절). ① 성도나 복음사역자는 말씀에 붙잡혀야 합니다. 그래야 전도를 힘있게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실감할 수 있습니다. “말씀에 붙잡힌 상태”는 성경연구에 끌리고 도취되며 복종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술에 끌리고 술먹는 맛에 사는 사람처럼 말씀에 끌리게 되는 것입니다. ②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증언은 곧 복음의 핵심을 나타낸 것이요 ③ 또 진리(복음)는 밝히(확실하고 자세하게) 증거되어야 함을 교훈하셨습니다.

5)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복음을 밝히 증거하였으나 유대인들(저희)은 전도자들을 대적하며 증거하는 일을 훼방하였습니다. 이때에 바울사도는 옷을 떨며 “너희 피가 너희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나는 깨끗하니라 이후에는 이방인에게로 가리라”하고 그곳을 떠나 회당 옆에 살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디도유스도”의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① 바울이 옷을 떤 것은 먼지를 떠는 시늉으로 전도자들이 전도의 책임을 다하였으므로 다른 책임이 없음을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요(마10:14) ② “너희 피가 너희 머리로 돌아간다”는 말씀의 “너희 피”란 불신앙적 생명을 그들의 부정(不淨)한 피(피는 곧 생명임; 신12:23)로 표현한 것이며 “너희 머리로 돌아간다”는 뜻은 그 부정한 죄값이 그들 자신(머리)에게로 돌아갈 것을 나타낸 뜻입니다. 이것은 범죄한 그 당사자가 죄값을 받아야 한다는 율법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입니다(신24:16, 수2:19). ③ 따라서 전도자는 전도한 것으로 깨끗하며(증거 안한 책임이 없음) ④ “이방인에게로 간다”함은 유대인들에게 먼저 전도하였으므로(마15:24,27) 유대인 아닌 사람들에게 전도할 것을 말한 것입니다.

6) “디도유스도”는 이미 하나님을 경외하였고 복음을 거절한 자들이 있는 반면에 ① 회당장 그리스보와 그의 온 집(가족들)이 예수를 믿었으며 ② 수다한 고린도 사람들도 믿고 세례를 받는 열매가 있었습니다(8절).

7) 9절-10절에서 예수님이 환상중에 나타나셔서 바울에게 큰 격려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 격려의 말씀은 ① (핍박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② 잠잠하지 말고 (계속) 증언하라 ③ 내가 너와 함께 있다 ④ 너를 대적하여 해롭게 할 자가 없다 ⑤ 이 성중에 내(주님) 백성이 많다(왕상19:18)는 것이었습니다. 핍박중이나 어려운 상황에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역자들은 주님이 함께하심은 물론 후원자도 있음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8) 이상과 같은 여건에서 1년 6개월을 유하며 믿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11절). 이 사실은 성경교육의 중요성을 일깨워주신 말씀입니다.

2. 유대인들의 송사를 받음(12절-17절).

1) 갈리오가 아가야 총독이 되었을 때에 유대인들이 일제히 일어나 바울을 대적하고 송사하여 재판자리에까지 가게되었습니다(12절). “갈리오”는 로마황제 “글라우디오”의 임명으로 “아가야”지역(헬라 남부)의 총독이 된 사람이며 그 시기는 바울이 고린도에 1년 6개월 머무른 마지막 시기였을 것입니다. 바울은 재판 사건이 끝난 후 여러 날 더 있다가 그곳을 떠났다고 하였습니다(18절).

2) 송사자들은 말하기를 “바울이(이사람) 율법을 어기며 하나님을 공경하라”고 권하였다는 사실을 고발하였으니 이것은 유대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이단교리에 맞지 않는 설교를 했다”는 뜻입니다. “율법을 어기어 하나님을 공경하라”한 뜻은 복음이 율법의 제사제도를 폐하였기 때문이며 이것은 율법을 어긴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전케 한 것입니다(마5:17).

3) 이때에 “갈리오”는 유대인들의 송사내용이 도덕적으로 부정한 일이나 괴악한 행동이 아니요 언어와 명칭(종교적 사리) 또는 유대인들의 종교법(너희법)에 관한 것임을 짐작하고 “유대인들끼리 스스로 재판하라”하고 재판자리에서 쫓아냈습니다. 일반재판장이 유대인의 신앙에 관한 재판을 할 수 없음은 당연한 것입니다(15-16절).

4) 또 모든 사람들(핍박, 송사자들)이 회당장 “소스데네”를 잡아 재판자리 앞에서 때렸으나 갈리오는 이 일을 상관치 았았으니(17절) ① 소스데네를 잡아 때린 것은 그가 예수님을 믿을 뿐만 아니라 바울을 따르며 자신이 관리하는 회당을 복음증언의 처소로 용납한 일에 대한 불만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훌륭한 사명자로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를 기록할때도 함께 하였습니다(고전1:1). ② “갈리오”가 폭행사건을 보면서 상관치 않은 것은 송사하는 유대인들의 인심을 의식하여 그대로 보고 넘긴 것입니다.

3. 2차전도를 마치고 귀환한 사실(18절-22절).

1) 바울은 송사에서 벗어난 후 몇 일을 더 유하다가 고린도의 형제들을 작별하고 브리스길라와 아굴라와 함께 출발지인 수리아(안디옥)로 떠날 때 “겐그레아”항을 출발하여 에베소를 거쳐 “가이사랴”에 상륙하고 예루살렘을 거쳐 안디옥으로 간 것입니다.

2) 바울 일행은 고린도에서 동남쪽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겐그레아”(작은 항구)항을 떠나 에베소로 향하였습니다. 바울이 겐그레아를 떠날 때 일찍부터 서원이 있어서 멀리를 깎았으니 이 서원은 예수님과 복음을 위하여 죽음을 각오한 것으로 예측할 수 있고(행20:24,21:13) 머리를 깎은 것은 서원을 결심한 상징적 행위일 뿐입니다. 이렇게 머리를 깎은 상태로 일행이 에베소에 도착하여 그곳에서도 회당에 들어가 유대인들과 변론을 하였고 그곳에서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를 머물게 한 후 지중해를 항해하여 가이사랴에 도착한 것입니다.

3) 에베소의 성도들은 바울을 더 오래있도록 청하였으나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곳에 머물렀으므로 허락지 않았고 “하나님의 뜻이 있으면 또 올 것이라”고 한 후 그곳을 떠났으며 가이사랴 항에 도착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 성도의 안부를 물은 후 출발지인 안디옥으로 가시므로 2차전도를 마친 것입니다(21-22절).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바울일행의 고린도 전도와 ② 협력자 브리스길라 부부를 만나게 된 것과 ③ 가는 곳마다 유대인들의 핍박을 받은 사실과 ④ 전도자에게 항상 주님의 보호와 격려가 따른다는 사실과 ⑤ 핍박중에도 전도의 열매를 주시는 것과 ⑥ 이방인 재판관이 유대인의 종교문제에 상관하지 않은 사실과 ⑦ 바울이 “말씀에 붙잡혀 복음과 진리를 밝히 증거”한 것과 ⑧ 1년 6개월을 계속 가르침에 힘쓴 사실 등입니다.

제 47 과 바울의 3차전도와 아볼로의 사역 (행 18:23-19:20)

 

이 말씀에는 “바울의 3차전도와 아볼로의 사역”이 중점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바울의 3차전도 여행의 출발지는 역시 시리아의 안디옥이었으며 출발당시의 동행자는 기록하시지 않았고(22절에서 디모데와 에라스도가 있음) 여행의 노정은 2차전도시에 가셨던 아시아와 헬라지역을 차례로 방문하되(22절) 가실때 에베소를 거쳐(19:1,22) 마게도냐와(20:1) 헬라(아가야인듯함, 20:2)와 빌립보(20:6)를 거쳐 빌립보에서(네압볼리 항구를 거쳐) 소아시아의 드로아(20:5)항에 도착하셨고 또 그곳에서 다시 선편으로 앗소(20:13), 미둘레네(14절), 기오(15절), 사모(15절), 밀레도(15절), 고스, 로도, 바다라(21:1-2)를 거쳐 뵈니게 지역의 “두로”에 상륙하였고(21:3) 또 두로에서 선편을 이용하여 돌레마이(21:7), 가이사랴(21:8)항구에 도착한 후 예루살렘(21:17)으로 가시게 된 것입니다(지도를 참고하십시요). 본문에서는 바울사도가 가시는 길에 에베소까지 가셔서 사역한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18:23절은 위에서 말씀드린 노정이요, 24-28절은 “아볼로의 전도사역”이며 19:1-10절은 “바울사도의 에베소사역”이요, 11절-20절은 바울이 에베소에서 세 가지 능력을 나타내어 열매를 얻은 사실입니다.

1. 아볼로의 전도사역(24절-28절).

1) 이 말씀은 바울 사도와는 직접 관련이 없는 내용입니다. 바

울이 에베소에 도착하기 전에(19:1) 알렉산드리아(애굽의 북부에 있는 항구 도시)에서 출생한 유대인 성경학자요 학문이 많은 “아볼로”가 에베소에서 성경을 가르치게 되었고 또 브리스길라 부부도 이미 복음사역을 하고 있었습니다.

2) 아볼로는 자신이 일찍 주의 도를 배워 예수님에 관한 것을 열심히 또 자세히 가르쳤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아볼로가 ① 예수님을 열심히 배운 사실과 (우리는 성경으로 배워야 함; 요5:39) ② 자세히 가르친 사실을 중히 여기셔야 할 것입니다. 누구든지 성경을 아는 만큼 모르는 사람들에게 가르쳐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잘 가르치려면 확신과 지식의 범위가 넓어야 할 것입니다.

3) 그러나 “아볼로”는 세례에 관한 지식에서 요한의 세례만 알고 가르쳤습니다(25절). ① 요한의 세례란 예수님이 공생애에 들어오실 무렵에 요한이 회개하고 돌아온 자에 대한 증표로 세례 준 것을 의미하는데(마3:6) 아볼로가 그것만을 가르치고 요한의 예언대로 “능력 많으신 예수님이 오셔서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마3:11)고 하신 것과 오순절 당시에 역사한 강한 성령의 세례(행2:3-4)에 대하여는 알고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② 그때에 이 사실을 안 브리스길라 부부가 그를 데려다가 하나님의 도를 더 자세히 풀어 알게 하여 주었습니다(26절). 누구나 진리의 내용을 골고루 다 잘 알지 못합니다. 얼마든지 어두운 부분이 있을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모르면 겸손하게 잘 배워야 할 것입니다.

4)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던 아볼로가 아가야(헬라 남부, 아덴과 고린도 방면)로 가기를 원하였을 때 형제들이 이를 장려하였고 아가야에 있는 제자들에게 미리 편지를 하여 아볼로를 영접하게 하였으므로 아볼로는 그곳에 가서 은혜로 말미암아 믿게된 자들에게 성경교육으로 많은 유익을 주었습니다(27절). 그는 성경으로 예수님이 구세주이심을 증거하였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유대인들과 변론하여 승리를 하였습니다(28절).

2. 바울사도의 에베소에서의 사역(9:1-10).

1) 아가야 지역으로 간 아볼로는 고린도에서 사역을 하였고(1절, 고전1:12) 그 당시에 바울은 위지방(갈라디아 지경)으로 다녀서 에베소로 가시게 되었습니다.

2) 에베소에 있는 제자들에게 “너희가 (처음)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고 물은즉 그들은 요한의 세례만 알 따름이요 성령님이 계신 것도 모른다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아볼로가 성령님의 거듭나게 하시는 사역과 오순절 당시에 나타난 성령세례(충만한 역사)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았음을 나타낸 것입니다(2-3절).

3) 이리하여 바울사도가 요한의 세례의 성격(회개의 증표)과 예수님의 세례에 대하여 증언한즉(마3:11,28:19) 저희가 듣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또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할 때(세례주는 안수일수도 있음)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여 방언과 예언(하나님의 말씀을 증언함)을 하였으니 이는 오순절 당시에 주신 은혜와 같은 성격의 역사가 나타난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4절-6절). 그때에 은혜를 받은 사람은 열 두 사람쯤이었습니다(7절).

4) 바울은 또 그곳 회당에서 3개월동안 하나님 나라(하나님을 모시고 사는 생활)에 대하여 담대히 강론하고 권면하였습니다(8절).그러나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증언한 도리를 비방한 자도 있었으니 이는 그들이 거듭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바울은 믿고 따르는 제자들만 따로 세워 두란노서원(두란노는 학자의 이름으로 서원의 명칭이 되었음)에서 날마다 강론하여 2년을 시행한즉 아시아에 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 다 그가 증언하는 주의 말씀을 들었다고 하였으니 듣는 자들만 따로 모아 강론하므로 좋은 효과를 거두게 된 것입니다.

3. 바울에게서 세 가지 능력이 나타남(11절-20절).

에베소에서 날마다 말씀을 강론할 때 세 가지 능력이 나타났으니 하나는 병고침의 능력이요 또 하나는 악귀를 쫓게됨이요 셋째는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은 것입니다.

1) 병고침의 능력은 하나님이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사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자에게 얹으면 그 병이 떠난 것이요(11-12절)

2) 같은 방법으로 악귀도 나갔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마치 모세가 지팡이로 이적을 나타낸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12년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이 예수님의 옷자락을 만지고 병이 나은 사실도 역시 같은 맥락의 이적입니다(마9:20). ① 이 사실을 목격한 유대인중 마술하는 자들이 시험적으로 바울의 증언한 예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악귀를 떠나도록 명령하여 보았으나 시행되지 않았고 ② 또 유대의 한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들도 바울처럼 모방해 보았으나(13-14절) 악귀들린 자가 말하기를 “내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아는데 너는 누구냐?”하면서 폭력을 행하는 바람에 의복을 벗김당한 채 도망하였으니 이것은 성령님이 외식자나 악한자의 뜻에 따르시지 않음을 증명하신 것이요 또 귀신 들린자가 “예수님과 바울을 안다”는 것은 거짓입니다(15-16절).

3) 주의 말씀이 흥왕하여 세력을 얻음에 대하여 ① 우선 놀라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예수님의 이름을 높여 영광을 돌렸고(17절) ② 믿는 사람들로부터 회개자복의 역사가 나타났으며(18절) ③ 마술을 행하던 많은 사람이 마술에 사용하던 책들을 모든 사람들 앞에서 불사르니 그 값이 5만(드라크마, 눅15:8, 하루 노동자 임금)이나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세력이 어디에서 온 것입니까? 이는 하나님이 역사해 주신 능력이요 하나님은 자신의 말씀이 힘있게 퍼져나갈 때(흥왕할때) 그런 능력으로 역사해 주신 것입니다. 은혜의 제일 방편은 말씀입니다. 말씀이 흥왕해질 때 다른 능력의 역사도 주신다는 것을 믿으셔야 할 것입니다(행10:44, 시107:20).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주시는 것은 ① 아볼로의 신앙지식에 공백이 있었으나 브리스길라 부부를 통하여 보충받은 사실과(25-26절) ② 아볼로처럼 학문과 성경지식이 많았을 때 유대인들의 그릇된 신앙을 설득할 수 있었음과(28절) ③ 아볼로가 일깨우지 못한 신앙지식을 바울이 일깨워준 것과 ④ 바울이 이적을 행한 것은 특별한 은사에 속한 것이며 이런 능력들이 말씀을 흥왕케 한데서 이루어진 사실과 ⑤ 미신에 얽매인 자라도 진리를 깨달으면 책을 불태우면서라도 진리를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하여 주신 것입니다.

제 48 과 은감실 업자들의 소동과 수습 (행 19:21-41)

 

이 말씀의 21절-22절은 “바울의 선교 노정”에 관한 말씀이요, 23절-34절은 “데메드리오”란 “은감실 업자의 반발 소동”에 관한 말씀이며 35절-41절은 “은감실 업자들의 소동을 진압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이 말씀의 제목을 “은감실 업자들의 소동과 이에 대한 수습”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에베소에서의 바울의 선교노정에 대하여(21절-22절)

1) 21절의 “이 일이 다 된 후”란 앞 절의 계속으로 바울이 에베소에서 말씀을 흥왕케 하고 복음전파의 세력을 얻은 후를 말하는 것입니다(19:11-20).

2) 그때에 바울은 “마게도냐와 아가야”(헬라전역)로 다녀서 예루살렘으로 가고 또 예루살렘에서 로마에까지 갈 것을 마음으로 계획하였습니다(21절).

3) 그리고 에베소에 함께 있던 “디모데”와 “에라스도” 두 사람을 먼저 “마게도냐”로 보내고 자신은 아시아에 얼마간 머무셨습니다. 두 사람을 먼저 보낸 것은 전도의 분담화를 위함이고 자신이 잠시 머문 것은 “아볼로”가 “아가야” 방면으로 떠난 후이므로(27절) 성경교육등 할 일이 있었을 것입니다.

4) “에라스도”는 바울과 함께 에베소에서 사역을 하다가(롬16:23) 바울이 디모데와 함께 “마게도냐”로 파송한 조역자요(22절) 바울의 선교말기에 고린도에서도 조역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딤후4:20).

2. 은감실 업자들의 반발 소동에 대하여(23절-34절)

1) 바울이 에베소에 잠시 더 머문 시기에(그때쯤 되어) 큰 소동이 일어났습니다. 그것은 “데메드리오”라는 “아데미”의 은감실 업자가 은장색들을 동원하여 바울사도를 상대로 항의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① “아데미”란 “큰어머니”란 뜻으로 헬라와 로마인들이 섬기는 여신(像)으로서 12신중의 하나요 제우스(쓰스; 35절)신의 딸로서 백성들을 수호, 양육한다는 여신의 이름입니다. 에베소에는 오래전부터 웅장한 아데미 전각이 있었는데 알렉산더(3세)대왕이 탄생하던 주전 356년에 어떤 정신병자의 방화로 소실된 것을 에베소 사람들이 다시 재건하였다고 합니다. 그 전각의 규모는 길이가 425척, 넓이가 220척, 높이가 60척이며 127개의 기둥이 있는데 이것을 220년만에 완공하였다고 합니다. 7대 불가사의중 하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전각 안에 세워진 “아데미”여신상은 유방이 24개인데 이것은 다산과 풍요와 양육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② “아데미의 은감실”이란 “아데미”우상을 작게 만들어서 집집마다 작은 신당을 꾸며 놓은 것을 의미하고 은장색이란 바로 그 우상을 만드는 기술자요, “데메드리오”는 그런 은감실을 설치해 주는 청부업자 역할을 하여 은장색들과 함께 적지 않은 소득을 챙긴 것입니다.

2) 그런데 바울이 에베소 뿐만아니라 거의 아시아 전역을 다니면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우상은 신이 아니라”하였으니(26절)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다 우상을 타파할 것이므로 그들의 영업이 천하여지고 불경기를 만날 것은 뻔한 일인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온 아시아 천하가 위하는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이 경홀히 여김 받을 우려도 있는 것입니다(27절).

3) 그래서 데메드리오는 분이 가득하여 은장색 직공들과 그 영업하는 사람들을 충동하여 바울의 동역자인 마게도냐사람 가이오와 또 마게도냐의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행27:2, 골4:10, 몬24)를 잡아가지고 사람들이 많이 모인 연극장으로 끌고 들어가서 바울의 증언을 지탄하는 소동을 벌이니(29절) 극장에 모인 많은 청중들이 일제히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고 자기들의 신을 칭송한 것입니다(28절).

4) 이때에 바울이 그곳으로 끌려간 가이오와 아리스다고의 입장을 협력하기 위하여 청중들 사이로 들어가려 하자 제자들이 만류하였고(30절) 또 바울의 친구인 어떤 아시아 관원도 바울을 만류하였다고 하였습니다(31절). 이는 바울의 생명에 위험이 있을 것을 우려하였기 때문입니다.

5) 이런 소동으로 이말 저말이 유포된 즉, 많은 사람들이 무엇 때문에 모인 것인지 조차 모를 정도로 질서가 없고 분란한 중에(32절) 바울의 복음을 반대하는 유대인들이 바울의 증언을 반박하고 그를 해롭게 하기 위하여 “알렉산더”를 내세워 말하게 하였으므로 알렉산더가 청중들 앞에 말하려 할 때(33절) 청중들은 그가 유대인임을 알고 유대인은 본래부터 우상을 좋아하지 않으므로 그의 말함을 용납하지 않은채 “크다 에베소 사람의 아데미여”하며 두시동안 외쳤다고 하였습니다(34절).

6) 여기의 “두시”란 말씀은 “두 시간”이라고 번역하기에 애매한 점이 있습니다. 공동번역이나 현대인 성경은 두 시간이라 하였지만 “두시”란 원문 “호스 에피 호라스 두”(ώς έπί ίσρας δύο, about over hours two)의 “호라스”가 시간이란 의미가 아닌 “때(기회)”의 복수형이기 때문에 “두 때 이상”이란 의미에 가깝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입니다.

3. 이 소동을 진압함에 대하여(35절-41절)

1) 두 때이상 소동이 계속되는 중에 서기장이 무리를 안돈시킨 후 설득을 한 것입니다. 여기의 서기장은 시의회의 서기장이나 재판하는 서기관이나(행18:14-17) 아니면 에베소 시의 공무원 같은 사람일 것입니다.

2) 그가 백성들을 설득시킨 말은 ① 에베소의 온 국민(온성)이 “아데미”가 큰 신인 것과 쓰스(제우스)신의 딸인 것과 우상의 전각을 지키는 자임을 모르는 자가 없지 않느냐?(35절) ② 이렇게 소동하는 일이 확실한 원인과 잘못에 의한 것이라고 속단 할 수 없으니 진정하고 살펴서 경솔하게 처리하지 말아야 할 것이라(36절) ③ 증언자들이 전각의 물건을 도적질한 것도 아니고 아데미 여신을 훼방한 일도 없는데(바울은 사람이 만든 우상은 신아 아니라 하였을 뿐 아데미에 대한 비판은 하지 않았음) 무조건 사람들을 잡아 왔으니 잘못된 일이요(37절) ④ 만일 누구든지 송사할 일이 있으면 재판날도 있고 재판관(총독)도 있으니 적법하게 제소하면 정식으로 민회(재판기관)에서 처리해 줄 것이라(38절) ⑤ 까닭없이 소요를 일으키면 이런 불법집회에 대하여 보고할 재료가 없으니 상부로부터 오히려 책망받을 위험이 있지 않느냐고 한 것입니다(39-40절). 그 당시에는 명분없는 회집을 금지시켰을 것입니다.

3) 이상의 말로 설득하여 무리를 흩어지게 하므로 소요사건을 진압하게 된 것입니다(41절). 바울은 이로서 에베소 전도를 마치고 마게도냐로 가셨습니다(20:1).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을 받을 수 있는 것은 ① 전도인들을 분산하여 업무를 맡긴 사실과 ② 복음신앙이 우상숭배에만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우상제조업자들의 생업에도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과 ③ “가이오”와 “아리스다고”는 잡혀 갔어도 “바울”은 보호한 사실과 ④ 성도가 아닌 입장에서라도 합리성 있는 논리로 소요를 그치게 한 사실과 ⑤ 무엇이나 억울한 것은 소송절차를 밟아서 해결하여야 하는 것과 ⑥ 불법집회(상부의 지시없이 모이는 것)는 용납되지 않은 점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 49 과 바울의 귀로와 드로아에서 있은 일 (행 20:1-16)

 

위의 본문은 3대지로 나누어 살피실 수 있습니다. 1절-5절은 “전도자들의 노정에 관한 말씀”이요, 6절-12절은 “드로아에서 일어난 일로 유두고를 살린 일”이요, 13절-16절은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귀로에 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제목을 “바울의 귀로와 드로아에서 있은 일”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전도자들의 노정에 관한 말씀(1절-5절)

1) 1절-5절 말씀에서 바울사도는 에베소에서 소요가 그친 후에 제자들을 권면하고 작별한 후 마게도냐로 가셨다고 하였습니다(1절). 그 노정은 에베소에서 행선하여 마게도냐 지역의 항구인 “네압볼리”로 가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곳 지경으로 다녀가며 권면하신후 “헬라”로 가셨으니 여기의 그곳 지경이란 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등일 것이요 헬라로 가신 곳은 아가야 지역의 아덴과 고린도를 의미할 것입니다(2절).

2) 헬라지역에서 석달을 계시다가 선편을 이용하여 직접 지중해를 건너 수리아(출발지)로 행하려 할 때에 유대인들이 바울을 해하려고 공모한다는 소식을 듣고 노정을 변경하여 마게도냐 지역을 다시 거쳐 귀로에 임한 것입니다(3절). 이것은 헬라지역의 음모자들을 피함도 되고 또 마게도냐의 교회들을 한번 더 살피는 기회가 된 것입니다.

3) 이때에 헬라지역에서 아시아까지 함께 간 사람은 “베뢰아”사람 “부로”의 아들 “소바더”와 “데살로니가”사람 “아리스다고”와 “세군도”와 “더베”사람 “가이오”와 “루가오니아”지역에서 만난 “디모데”와(행16:1-2) 아시아 사람 “두기고”와 “드로비모”였습니다. 누가와 바울까지 합하면 아홉 사람입니다(4절). ① 위의 사람들 중 “두기고”는 에베소서, 골로새서, 디모데전서를 전달한 사람이요(엡6:21, 골4:7, 딤후4:12) 또 바울이 그를 “그레데” 섬으로 보내어 “디도”의 사역을 대리케 한 사실이 있었습니다(딤1:5,3:12). ② 또 “드로비모”는 에베소 사람으로 바울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동행하다가 병으로 인하여 “밀레도”에 머물게 한 사실이 있었고(딤후4:20) 그 후에 바울이 그와 함께 예루살렘 성내에 있은 것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성소를 더럽혔다”는 과장된 내용으로 무소를 받은 일이 있었습니다(행21:28-29).

4) 바울을 제외한 여덟 사람들은 먼저 드로아에 가서 나중에 도착하는 바울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여기의 앞서가고 뒤서간 것은 업무의 분담도 있지만 핍박자들의 눈을 피하고 함께 피해 받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함일 것입니다.

2. 드로아에서 있었던 일에 대하여(6절-12절)

1) 여덟 제자들을 먼저 보내어 드로아에서 기다리게 한 후 바울과 그 동행자들은 무교절(그당시 유대인들이 지키는 유월절의 신약적 용어임; 출12:1-14, 마26:17, 눅22:1,7) 후에 빌립보에서 배로 떠나(빌립보는 항구가 아니므로 가까운 항구인 “네압볼리”를 뜻함) 5일만에 드로아에 도착하여 제자들과 함께 7일을 머문 후(6절)

2) 안식(일)후 첫날인 주일에 떡을 떼려 하여(이는 성찬예식을 의미함) 모였을 때 바울이 이튿날 떠나기 위하여 하나님의 말씀강론을 밤중까지 계속하였으니 이는 ① 주일에 성찬예식과 함께 집회를 한 근거요 ② 전도자들이 맡은 일을 충실하게 더 실천하기 위하여 시간을 당기고 밤을 새며 장시간 말씀 증거한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3) 그때에 성도들이 모인 윗 다락에 등불을 많이 켰는데 “유두고”란 청년이 3층 윗 다락의 창에 걸터앉아 깊이 졸다가 바울의 강론이 더 오래 계속되자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3층 루에서 떨어져 죽으므로 어려운 불상사를 당한 것입니다. 말씀을 듣다가 존 사람도 책임이 있지만 길게 설교한 사람도 책임이 없다고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창문에 걸터앉은 것은 육체도 위험할 뿐 아니라 신앙적으로 비유할 때도 중립적인 태도와 같은 것으로서 불안한 위치를 자초한 것입니다. 그때 만일 집회를 한 주인공이 죽은 자를 살리지 못했다면 큰 비난을 면치 못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나라 전도초기에 어떤 목사님이 교통사고로 별세하였는데 많은 불신자들이 “신령한 목사를 교통사고에 죽도록 내버려두시는 하나님을 왜 믿느냐?”하면서 비난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생각하면 현실교회는 100% 안전을 위하여 노력하셔야 할 것입니다.

4) 이때에 바울은 그 죽은 시체 위에 그 몸을 안고 기도하였습니다. 본문에 “기도하셨다”는 말씀은 없으나 ① “떠들지 말라”하신 것이 기도의 간절함을 갖기 위한 분위기를 조성하신 것이요 ② “생명이 그에게 있다”하신 것은 기도의 응답으로 생명이 살아난 것을 아시고 하신 말씀입니다(10절). 이것은 예수님이나 베드로가 죽은 자를 살린 이적과 같은 것입니다(눅7:15, 마9:25, 요11:43, 행9:40). 이런 이적은 초대교회 당시에 주셨던 특수한 능력이었습니다(마 10:1).

5) 그리하여 다시 다락으로 올라가 떡을 떼고 (성찬예식) 날이 새기까지 친교를 나눈 후에 그곳을 떠나셨으며 다른 사람들은 살아난 아이를 집회소에서 그의 집으로 데려오고 그 아이의 다시 살아남을 인하여 큰 위로를 받았다고 하였습니다(10-12절).

3. 드로아에서 밀레도까지의 귀로에 대한 말씀(13-16절)

1) 드로아에서 유두고를 살리는 놀라운 일이 있은 후 바울의 제자들은 먼저 배를 타고 “드로아”에서 남쪽 해안을 따라 약100리 떨어진 “앗소”항에 도착하여 도보로 걸어오는 바울을 기다리기로 하였습니다. 바울이 그곳까지의 항해를 피하고 도보로 간 것은 어떤 교회를 방문하던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입니다(13절).

2) 13절에서 “우리는 앞서 배를 타고 앗소에서 바울을 태우려고 그리로(앗소) 행선하였다” 하였는데 여기의 “우리”란 용어는 사도행전을 기록한 저자 “누가”가 함께 하였다는 뜻입니다(행16:10,20:15,21:1,27:1,28:1). 누가가 이 글을 쓰면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지 않은 것은 큰 겸손을 보인 것입니다.

3) 바울이 “앗소”에서 일행을 만나 함께 배를 타고 “미둘레네”로 갔으니 이곳은 “레스보스”섬의 수도이며 그 이튿날 “기오”섬에 갔고 또 그 이튿날 “사모”섬으로 갔습니다. 이 “사모”섬은 에베소와 밀레도 중간 서편에 위치한 섬으로 피타고라스(주전582-497년)의 출생지라고 합니다. 또 그 다음날 “밀레도”로 갔습니다. 이 “밀레도”는(원문 발음은 “밀렉턱스”임) 섬이 아니며 에베소에서 약 120리 남쪽해안에 있는 항구입니다. 바울이 “밀레도”로 오실 때 에베소를 거치지 않은 것은 ① 사모에서 출발하여 육지 안쪽으로 들어갔다가 나와야 하는 교통상의 지연도 있고(16절) ② 또 “에베소”에는 3년이나 계셨던 곳이므로(행19:10,20,31절)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청하여 만나기로 계획을 하였기 때문입니다(17절).

4) 바울이 이렇게 행선을 서두른 것은 오순절 전에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위함이었으니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서는 오순절을 절기로 지키는 모임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16절).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바울의 선교일정이 대단히 바쁘게 이루어진 사실과 ② 밤을 새며 교육에 열중하신 일과 ③ 음모자들 때문에 귀로일정을 변경한 사실과 ④ 죽은 유두고를 살린 일은 사도의 특수한 사역인 동시에 복음의 권위를 인정받게 하신 은사인 점과 ⑤ 섬 선교도 제외하지 않으셨고 ⑥ 오순절 같은 절기계획에 맞추어 사역을 앞당기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50 과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함 (행 20:17-37)

 

바울은 3차전도 귀로 중 밀레도에 머무시면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을 그곳으로 오게 하여 여러 가지를 교훈하시고 고별전송을 받았습니다. 본문 17절-21절은 “바울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에게 어떻게 목회한 사실을 고백한 말씀”이요, 22절-27절은 “바울의 복음전파를 위한 사명적 입장을 밝힌 내용”이며 28절-31절은 “고별부탁과 함께 송별하는 내용”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여 “에베소교회 장로들에게 권면함”이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에베소교회에서 어떻게 목회한 사실을 고백함(17절-21절).

1) 에베소교회 장로들은 바울을 만나기 위하여 약120리의 여행으로 밀레도에 왔고 그곳에서 바울의 교훈을 들었습니다. 17절의 “장로”란 직분과 28절의 “감독자”란 직분이 용어는 다르나 같은 직임이며 현재의 목사와 장로를 통칭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감독자이지만 장로라는 명칭을 쓰기도 하였고(벧전5:1, 요이:1) 또 장로를 감독이라고 명칭한 사실도 있습니다(빌1:1).

2) 바울이 말씀한 내용은 에베소교회 성도들이 밝히 아는 사실로서(17절) 에베소교회에서 3년간(31절) 목회하실 때 ① 모든 겸손과 눈물이며 유대인의 간계를 인하여 당한 시험을 참고 주를 섬긴 것과(19절) ② 유익한 것은 무엇이든지 공중 앞에서나 각 집에서 거리낌없이 전하여 가르치고(20절) ③ 유대인과 헬라인들(이방인)에게 차별없이 증거하되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가르쳤으며(21절) ④ 아무의 은이나 금이나 의복을 탐하지 아니하였고(33절) ⑤ 자신의 손으로 수고하여 자신과 동행자들의 쓸것(생활비)을 공급하였으며(34절) ⑥ 범사에 모범을 보였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을 종합하면 바울사도가 목회하실 때 모든 겸손, 눈물, 인내, 진리의 성실한 공급, 회개, 믿음, 수고와 봉사, 탐욕금지, 범사에 모범 등 오늘의 복음사역자들도 꼭 본받아야 할 것 열 가지 모범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2. 바울의 복음전파에 대한 사명적 입장(22절-27절).

1) 바울은 “심령의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한다”(22절)고 하셨습니다. ① 여기의 “심령에 매임”이란 바울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사명적 욕구와 충동을 의미하며 ② 그가 꼭 예루살렘에 가셔야 할 이유는 여러 가지 목적이 있겠지만 로마에까지 갈 수 있는 여건이 예루살렘에서 조성되어야 할 것을 예견하였기 때문입니다. ③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있게 될 일들에 대하여 자세한 계시가 없으므로 핍박 이외의 일들을 예측하지 못한다고 하신 것입니다.

2) “오직 성령이 각성에서(여러 곳을 경유할 때마다) 직접 또는 간접으로(21:4,11) 결박과 환난이 자신을 기다린다”고 증언해 주셨으나(23절) 자신의 달려갈 사명의 길과 주님께로부터 받은 은혜의 복음을 증거하는 사명을 마치기 위하여는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는다(24절) 하셨으니 이는 생명을 바칠 만큼 핍박을 두려워하지 않은 탁월한 사명감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3) 바울은 “그 동안 에베소에 왕래하며 하나님 나라의 진리를 전파하였지만 이제부터는 서로 얼굴을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25절) 하셨으니 이 말은 자신이 예루살렘에 가면 로마로 멀리 가든지 아니면 죽을지도 모른다는 예측 때문에 말씀하신 것입니다.

4) 26절-27절에서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거리낌없이 하나님의 뜻을 다 전하였기 때문에 그곳에서의 사명을 다하였으므로 “모든 사람의 피에 대하여 자신은 깨끗하다”고 하셨습니다. ① “모든 사람의 피”란 정죄 받고 심판 받을 생명(피)들을 의미하며 ② 그들에 대하여 “자신이 깨끗하다”함은 책임이 없다(깨끗함)는 뜻입니다. 이렇게 전도자는 시간과 기회가 주어졌을 때 사명적 증언만 다 하면 할 일을 다하는 것입니다.

3. 고별부탁과 함께 서로 작별함(28절-31절).

1) 바울은 고별부탁으로 ① 28절에서 “자기와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의 “삼간다”는 말씀은 “프로세코(προσέχω)”란 말로 “주의, 조심, 관심, 몰두”의 뜻이 있으므로 소극적 표현이 아닌 적극적 표현이며 따라서 “경성을 더하여 하나님의 일에 몰두하라”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감독자(장로)를 세우신 것이고 또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목양하게)하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② 교회를 “예수님의 피로 사셨다”는 뜻은 십자가의 보혈로 성도의 생명을 속량(마귀의 소유에서 해방시켜 자신의 소유를 삼으신 뜻)하셨기 때문에 주님과 연합된 주님의 소유를 뜻하는 것입니다. ③ 감독자는 양을 치는 목자와 같음을 인식하여야 할 것입니다.

2) 29절에서는 감독의 목자적 직임이 중요한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그곳을 떠난 후에 흉악한 이리(유대주의자들과 이방종교인들의 핍박을 염두에 두신 말씀)가 들어와서 성도를 아끼지 않고 심지어는 제자들까지 자신들(유혹자)을 좇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이단이나 비정통의 거짓된 교훈)을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30절).

3) 이런 것들을 방어하려면 ① 감독자들과 성도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② 항상 일깨어 살며 ③ 바울이 3년 동안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한 것을 기억하여야 한다고 하셨습니다(31절). 이 말씀은 바울과의 신앙적 유대를 같이 하고 바울이 교훈한 말씀이 굳게 서야 함을 뜻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바울이 각 사람을 훈계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훈계와 교육이 개인 상대로 실시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신 것입니다. 오늘의 신앙교육의 문제는 목회자가 성도 개인을 상대로 순서에 따른 교육을 절차대로 이행하지 못하는 점인 것입니다.

4) 바울사도는 고별사의 한 부분으로 에베소교회 성도들을 “주 예수님과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한다”고 하셨습니다(32절). ① “은혜의 말씀도 부탁을 받는가?”에 대하여 요1:1에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표현하셨고, 창1:3과 시107:20과 마8:8, 히4:12과 본문 등에서는 말씀의 생존성과 인격성과 능력성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성경말씀을 예수님의 인격과 동일시 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말씀의 임재는 곧 하나님의 임재와 같은 것입니다(출19 :10-11, 21,20:1). ② 그 말씀이 성도의 신앙을 능히 든든히 세우시고 거룩함을 입은(요17:17, 딤전4:5) 모든 성도들에게 기업(영원한 복)을 주신다 하셨으니(32절) 이는 성경말씀 자체의 힘으로 신앙과 거룩과 구원성취의 사명을 이행함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5) 바울의 생활의 본(33절-34절)을 받아 성도들도 ① 열심히 수고하고 ② 약한 자들을 도우며 ③ 주 예수님의 친히 말씀하신 바(눅6:38)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음을 기억하여 주기를 좋아하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을 교훈하셨습니다. 성도가 주기 위한 노력을 하려면 우선 자기생활에 만족하고 받을 체를 하지 말며, 남을 손해보이지 말고, 점차 덕을 세워 나가야 할 것입니다.

6)이상의 말씀을 마친 후에 다 함께 무릎을 꿇고 기도하니 감사와 이별의 아쉬움이 북받쳐 크게 울며 바울의 목을 안고 입을 맞추고(간단한 인사의 표시임) “다시 바울의 얼굴을 보지 못하리라”한 말을 인하여 근심하면서 배까지 전송을 한 것입니다. 이 사실에서 느낄 수 있는 뚜렷한 감정은 복음 사역자와 성도들간의 사랑의 유대가 얼만큼 뜨거웠는가를 실감케 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내용들을 일부 발췌하면 ① 전도자의 계획성 있는 노정에 대한 것과 ② 전도자의 계획에 따라 에베소교회 장로들이 친히 찾아와서 권면을 받은 일과 ③ 바울의 사명과 헌신성 ④ 바울의 목회에 대한 참신한 자세들 ⑤ 복음사역자가 없는 때에 흉악한 유혹자들의 횡포를 예견한 사실 ⑥ 악한 유혹을 견디고 이기기 위하여 바울이 증언한 말씀들을 기억하여야 하는 점 ⑦ 바울이 각 사람을 개인 상대로 훈계한 점과 ⑧ 성경말씀이 주님의 인격과 동일시 된 점과 ⑨ 복음사역자와 성도간의 뜨거운 사랑의 교제 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51 과 3차전도 귀로중에 있었던 일 (행 21:1-20)

 

이 말씀에는 바울사도가 “밀레도”를 떠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까지의 노정과 그때에 있었던 일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1절-8절까지는 “밀레도”에서부터 “가이사랴”까지의 노정에 관한 말씀이요, 8절-14절까지는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로 “아가보”의 예언과 “바울이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갈 것을 결심하는 내용”이요, 15절-20절까지는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사도들을 만난 일”을 말씀하신 것으로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3차전도 귀로 중에 있었던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밀레도”에서 “가이사랴”까지의 여정(1절-8절).

1) “밀레도”에서 에베소교회 장로들(저희)을 작별하고 행선하여 “고스”로 가서 하루를 유하고 또 이튿날 “로도”로 갔으며 또 그곳에서 “바다라”로 갔고 “바다라”에서 “베니게”로 건너가는 배를 만나 타고 구브로섬을 왼편으로 바라보면서 수리아쪽으로 행선하여 “두로”항에 도착하였으니 이는 그 배가 그곳에 짐을 풀기 위하여 정박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지도를 보시면 밝히 아실 수 있을 것입니다. “고스”와 “로도”는 작은 섬입니다. “누가”를 포함한(우리가;1절) 바울사도 일행이 “드로아”를 떠나 “두로”까지 오는 동안에 사역할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2) “베니게”지역인 “두로”항에 도착하여 7일을 머무는 중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고 권하였습니다(4절). 그러나 바울은 제자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말하는 권면을 듣지 않고 여러 날(7일)을 지난 후에 예루살렘이 있는 남쪽을 향하여 가시려 하니 “두로”에 있는 성도들이 그 처자와 함께 성문 밖까지 나와서 전송하므로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에서 무릎을 꿇어 기도하고 서로 작별을 한 것입니다(5-6절).

3) 배를 타고 “두로”항을 떠난 일행은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그곳에 하루를 머물다가 그 이튿날 “가이사랴”항에 도착한 것입니다. “돌레마이”란 항구는 천연의 요새지로서 옛이름은 “악고”이나 애굽왕 “돌레마이”가 관할하면서 자기의 이름으로 일컬었다고 합니다(7-8절).

2. “가이사랴”에서 있었던 일(8절-14절).

1) 바울사도 일행이 “가이사랴”에 도착하여 일곱집사 중 하나인 전도자 빌립의 집에 유하였습니다. 빌립의 집사직에 대한 말씀은 행6:1-7에 근거한 것이며 “전도자”란 구약의 전도서에서 솔로몬을 지적한 내용으로 7회(전1:1,2,12,7:27,12:8,9,10), 본문에서 집사 빌립을 지적하여 1회, 딤후4:5에서 디모데를 지적하여 1회(전도인, 전도자는 “유카리스테스”로 동의어임) 나타난 용어이므로 오늘의 전도사, 전도인과는 그 자격과 은사면에서 근본적으로 다른 직임이 되는 것입니다. 솔로몬은 전도자 직임으로 계시를 받았고(왕상3:5,11-13) 빌립도 계시를 받고 능력을 행하였으며(행8:6,26) “디모데”는 초대 목사직을 받은 자이므로(딤전4:14,5:19) 특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2) “빌립”에게는 처녀로 예언하는 네 딸이 있었습니다. 여기의 “예언한다”는 뜻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고전12:10,14:29). 그러나 9절-11절의 “아가보”란 선지자가 미래의 될 일을 예언한 것은 예언 그대로의 말씀입니다. 아가보는 안디옥에서도 미래에 대한 예언을 한 일이 있었습니다(행11:28). 그 당시는 신약성경이 요한계시록을 끝으로 완성되기 전이므로 하나님께서는 간간히 사도 아닌 사역들에게도 계시의 은사를 주셨습니다(행8:26,29). 어떤 사람들은 이런 사실을 근거로 “오늘날도 누구나 계시를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받은 계시를 증언하기도 합니다만 그것은 크게 잘못된 것입니다. 그 이유 첫째는 “계시를 끝내셨다”는 말씀(엡3:5, 히1:1-2, 유3, 계22:18-19)에 위반되기 때문이요, 둘째로 사도 아닌 성도들이 받은 계시라도 영감이 충만한 사도들의 감독을 받아 성경으로 기록되었기 때문입니다(엡2:20, 갈2:9).

3) 바울사도 일행이 “가이사랴”에 머문지 여러 날 되었을 때에 “아가보”란 선지자가 유대로부터 내려와서(가이사랴가 낮은 지역임) 전도자 일행을 만나고 바울의 띠를 가져다가 자기의 수족을 잡아매고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 띠의 임자를 이같이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고 예언을 한 것입니다. ① 이 예언을 할 때에 결박당하는 시늉을 한 것은 예언의 의미를 쉽게 터득하라는 시각적 표현이요 ② 예언의 내용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할 것과 이방인(로마인)들에게 넘겨질 것을 예고한 것입니다.

4) 이 말을 함께 들은 그곳 사람들(성도들)과 다른 제자들이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고 권면하였습니다(12절). 그러나 바울은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다”고 하시면서 여러 사람들의 권면을 받지 않으시니 제자들(우리가)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문제되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것은 4절에서 제자들이 바울에게 성령의 감동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지 말라”하였고, 11절에서 “아가보”는 성령님의 말씀으로 “바울이 결박되어 이방인에게 넘겨질 것”을 예언하였으며 여기에 따라서 제자들도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도록 권하였으니(12절) 이것이 성령님의 지시이면 바울이 순종하였어야 하지 않는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 예언과 권면을 외면하였고 오히려 제자들이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하고 바울의 뜻을 주님의 뜻으로 알고 따른 것입니다(14절).

이상의 문제를 이해하려면 4절에 나타난 “성령님의 감동”과 12절의 “제자들의 만류”는 제자들이 바울을 사랑하는 도덕적 감동의 표현이요, 11절의 “성령님의 말씀”은 바울의 미래가 어떻게 될 것에 대한 것을 나타낸 예언적 감동이요며 13절에서 바울이 “죽음을 각오했다”는 결심은 바울의 순교적 사명을 피력한 하나님의 요청이요, 12절에서 결국 예루살렘에 가도록 결정된 사실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른 일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과 제자들은 하나님의 섭리에 복종하는 중요한 신앙을 나타낸 것입니다.

3.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사도들을 만난 일에 대하여(15-20절)

1) 바울사도 일행은 “가이사랴”에서 여러 날 있은 후 행장을 준비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때에 “가이사랴”에 거주하던 몇 제자와 구부로 사람 “나손”과 “누가”(우리가; 16절,17절,18절)를 데리고 갔으며 “나손”을 데리고 간 이유는 예루살렘에서 그의 집에 유하기 위함이었으니(15절-16절) 그 당시에 성도로서 집을 갖고 있음은 희귀한 일이며 그의 집을 선교용으로 이용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 예루살렘에 도착하자 믿음의 형제들의 영접을 받았고(17절) 도착하던 이튿날에는 동행자들과 함께 “야고보”를 방문하였으니 이 “야고보”는 예루살렘교회의 감독이며(행12:17) 공회의 의장(행15:13-20)이요 예수님의 형제(동생)입니다(갈1:19). 또 그곳에는 다른 장로들도 있었습니다(18절). 그들은 이방인교회에서 모금해온 구제비를 기대하였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고16:1-4,고후9:1-5, 행20:4).

3) 그 곳에서 바울은 모든 장로들에게 문안을 하고 하나님이 자기의 봉사로 말미암아 이방세계에서 어떻게 일하게 하신 것을 낱낱이 보고하니 저희가 듣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 받을 수 있는 내용은 ① 성령님의 감동에는 도덕적 감동, 예언적 감동, 사명적 감동, 섭리적 감동이 있으며 ② 섭리에 복종함이 귀한 신앙인 것과 ③ 예언의 성격 ④ 계시의 최종성 ⑤ 전도자 직분의 성격 ⑥ 예루살렘의 사도들에게 선교보고를 한 일 등을 교훈받을 수 있습니다.

제 52 과 장로들의 제의와 천부장의 보호 (행 21:20-40)

 

본문말씀에는 바울사도 일행이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와 다른 장로들을 만나 문안하고 선교보고를 한 후에(18절) 그곳의 장로들이 바울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하여 “결례식하는 사람들의 머리깎는 비용을 제공하라”는 이상한 제의를 하였고 바울은 그대로 시행하였습니다. 그 후에 바울이 핍박자들로부터 폭행을 당하게 되자 천부장이 그 소식을 듣고 바울을 보호하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묻는 내용이 기록된 것입니다. 따라서 20절-26절의 말씀은 “장로들의 제의를 시행함”이요 27절-40절의 말씀은 “핍박 중에 천부장의 보호를 받는 내용”입니다. 이 두 가지 내용을 종합하여 “장로들의 제의와 천부장의 보호”란 제목을 정하였습니다.

1.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의가 무엇이었습니까?(20절-26절)

1) 예루살렘 장로들의 제의는 “성도 중에 서원한 네 사람을 데리고 함께 성전에 가서 결례식에 동참한 후 서원자들의 머리깎는 비용을 대주라”는 것이었습니다(23절-24절). ① 서원에 대한 말씀은 민6:1-21에 기록된 것으로 어떤 성도가 특별한 소원이나 충성에 대한 결심을 가졌을 때 일정기간 머리를 깎지 않고 부정한 것 등에 접근하지 않다가 기간이 차면 제사를 드린 후 길어진 머리를 깎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② 그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흉년이 들어서 돈이 귀하였다고 합니다(행11:27-30). 그리고 결례자를 데리고 결례식에 동참한 후 머리 깎는 비용을 대주면 율법을 시행한 자라는 인정을 받아 핍박을 면하게 되는 것입니다.

2) 그러면 장로들이 왜 이런 일을 시행하라고 권면하였을까요? ① 그 이유는 예루살렘에 있는 수만명의 유대인들이 다 율법주의 열성파들인데(20절) 그들이 바울을 오해하되 “바울이 이방에 있는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배반하고 할례를 하지 말고 규모를 지키지 말라”는 교훈을 하는 자인줄로 안다는 것입니다(21절). 바울이 복음을 증거한 것은 제도적 율법(할례, 제사 등)을 폐하는 것이므로 유대주의자들은 자기들의 입장에서 얼마든지 바울을 오해하고 음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② 그래서 장로들은 그들의 오해를 효과적으로 교정하고 핍박과 시끄러운 일들을 방지하기 위하여 행동으로 보여주라는 것이었습니다(22-24절). 행동은 말의 설득보다 훨씬 효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방인들에게는 이미 사도회의에서 결의한 내용(25절)을 전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말씀은 행15:20에서 이미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③ 바울이 장로들의 권면을 그대로 시행한 것은(26절) 어떻게 보면 외식인 것도 같고 복음적 신앙에서 후퇴한 것 같은 느낌을 갖게 되지만 이 사실은 바울의 겸손한 순종이고 양심적으로 거리낌없는 행위이며(행23:1) 또 그 당시는 율법적 생활을 계몽하여 복음적 생활로 돌이키게 하는 과도기이기 때문에 율법을 의식적 율법을 시행하지 않아도 변명할 입장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은 간단한 순종으로 유대인들의 오해를 상당하게 해소할 수 있었습니다.

2. 핍박 중에 천부장의 보호를 받음에 대하여(27절-40절).

1) 그런데 그 결례의 날인 “이레가 거의 찼을 때”(결례의 만기된 기간) 아시아에서 온 유대인들이 바울이 성전에 있는 것을 보고 무리들을 충동하여 또 핍박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27절). 그들은 주장하기를 “바울은 각처에서 우리 백성(이스라엘 백성)과 율법과 이곳(예루살렘)을 훼방하여 모든 사람을 가르치는 자요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가서 거룩한 곳을 더럽게 한 자라”하였으니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가까이 하는 것을 부정하게 여겼고 또 “헬라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갔다”는 말은 과거에 바울이 에베소 사람 “드로비모”와 함께 예루살렘 성내에 있었던 것을 성전에 들어간 줄로 잘못 알고 고발을 한 것이었습니다(28-29절).

2) 이 일로 인하여 온 성이 소동하였고 백성들이 달려와 모여 바울을 잡아 무법하게 죽이려고 성전 밖으로 끌고 나갔을 때에 그 어지러운 사실이 군대의 천부장에게 보고된 것입니다(30-31절). 천부장은 로마정부의 임명을 받은 연대장급의 장교입니다. 그는 그 지역의 치안을 담당할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사람(바울)이 무법하게 죽임을 당하게 됐다”는 보고를 받고 급히 군사들과 백부장들(소대장급)을 거느리고 간 것입니다(32절).

3) 무리들은 천부장과 군사들을 보자 폭행을 그쳤고(32절) 천부장은 바울을 결박하도록 명령한 후 무리들에게 “그가 누구며 무슨 일을 하였느냐?”고 물은즉(33절) 무리중에 어떤이는 이말로, 어떤이는 저말로 부르짖지만 확실한 죄상을 파악하기 어렵게 되자 “영문(군대진영)으로 데리고 가라”고 명한 것입니다. 바울이 군사들에게 이끌려 영문 층대에 이를 때 무리들이 또 폭행을 하므로 군사들에게 들려갔고(보호의 의미) 무리들은 바울을 없이 하고자 외치며 따라갔다고 하였습니다(34-36절).

4) 바울사도는 영문으로 끌려가는 기회에 천부장에게 “말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니까 천부장은 “헬라말을 아느냐?”하면서 “네가 이전에 난을 일으켜 4,000명의 자객을 거느리고 광야로 가던 애굽인이냐?”하고 물었으니, 이 사건은 요세보 역사에 기록된 것으로 벨릭스 총독때(주후52-60년; 행23:24) 애굽인이 정부를 전복하려고 반역한 일이 있었는데 천부장이 그 사람인줄로 오해를 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에게 “헬라말을 아느냐?”고 물은 것은 바울이 이방인인 천부장에게 알아들을 수 있도록 헬라말로 말했기 때문에 신기하게 여긴 말입니다(37-38절).

5) 바울은 천부장에게 자신의 계파(유대인)와 출생지(길리기아 다소)를 알리고 백성들에게 말할 기회를 얻은 후 층대 위에 서서 손짓하여 백성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조용하게 한 후에 유대인들이 들을 수 있는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바울이 화평을 위하여 오해를 풀게 하려고 노력한 점과 ② 죄되지 않는 일에 양보하고 협력한 점과 ③ 핍박받는 기회를 증언의 기회로 삼은 점과 ④ 증언의 분위기를 충분히 조성한 점등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 53 과 바울이 변화된 경위를 증언함 (행 22:1-30)

 

바울사도 일행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사도들을 만났고, 또 유대인들의 오해를 만회하기 위하여 결례식에 협력한 후(행21:17-19,26-27) 7일이 지난 후에 아시아로부터 온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백성들을 충동하여(22:27,30) 바울을 성전 밖으로 끌고나가 폭행하고 죽이려 하자 이 사실이 천부장에게 알려져서 임시 보호를 받는 기회에 바울 자신의 입장을 변명할 기회를 얻어 말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말은 천부장의 영문으로 들어가는 층대에서 따라오는 핍박자들에게 증언한 것입니다. 1절-2절은 “증언할 준비를 시도함”이요, 3절-5절은 “바울의 평상시의 신분”을 증언함이며 6절-16절은 “신앙적 변화의 과정”을 증언함이요, 17절-21절은 “바울이 이방인들에게 전도자로 파송 된 경위”를 증언한 말씀이요, 22절-30절은 “천부장의 신문과 바울을 공회에 세우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바울이 변화된 경위를 증언함”이란 제목으로 22장 전체의 내용을 살피도록 하겠습니다.

1. 바울이 증언할 준비를 시도함(1절-2절).

1) 바울은 듣는 대상을 “부형들”이라 하였으니 이 호칭은 ① 바울 자신도 유대인이므로 한 권속임을 나타내는 뜻과 ②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인정을 갖는 의미로 그렇게 호칭한 것입니다. “형제”, “부형”, “사랑하는 자”등의 호칭은 친교상 좋은 표현입니다.

2) “변명한다”함은 바울의 자기변호를 뜻하는 표현이며

3) “저희가 히브리 방언으로 말하는 것을 듣고 더욱 종용하여진 이유”는 히브리 방언이 이스라엘의 조상 아브라함 때부터 사용되는 선민의 전통적 언어인데 그후에 아람어, 앗수르어, 헬라어, 로마어 등으로 히브리 방언이 거의 없어져 가는 실정이었고 그 당시 팔레스틴에서는 헬라어와 아람어를 통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히브리어”를 보존한 사실에 대하여 동질성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2. 바울은 자신의 평상시(개종하기 이전)의 신분을 밝혔습니다(3절-5절).

1) 바울은 자기를 “유대인”이라고 하였으나 이 말은 유다지파란 뜻이 아니고(바울은 벤야민 지파임; 빌3:5) 그가 “길리기아 다소”에서 출생하였지만 어릴 때부터 유다지파가 사는 예루살렘에 와서 학문을 배우고 유다인들로 구성된 바리새당파에 속하였기 때문에 그 신분과 행정관할이 유다에 속하였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2) 또 어릴적부터 예루살렘에 와서 자랐고 “가말리엘”문하(행5:34)에서 조상들의 율법의 엄한 교훈을 받았으며 하나님을 섬김에 대하여 청중들처럼 열심낸 자라고 하였습니다(3절).

3) 또 자신은 개종하기 전에 자기가 증거하는 “복음의 도”를 핍박하여 사람을 죽였음은 물론 남녀를 결박하여 옥에 넘기는 일까지 하였으니 이 사실은 대제사장이나 모든 장로들이 증인이 될만큼 다 잘 아는 사실이라고(4절-5절) 하였습니다. 그리고 행9:1-15에 나타난 자신의 개종체험담을 다시 설명하게 된 것입니다.

3. 신앙적 변화의 과정을 증언함에 대하여(6절-16절).

여기에 대하여는 행9:1-18의 내용을 똑같이 재설하였기 때문에 다시 설명드릴 필요가 없습니다(본문을 그대로 읽고 지나 가십시요).

4.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전도자로 파송된 경위를 설명하셨습니다(17절-21절).

1) 17절에 보시면 바울이 개종된 직후 예루살렘 성전에서 기도할 때 비몽사몽 상태에서 계시 받은 사실을 말씀하셨는데 이 사실도 행9:26-30에 나타난 내용입니다. 그 당시에 바울은(당시는 사울이었음) 예루살렘에서 바나바의 소개로 사도들을 만났고 그곳에서 복음을 전파하다가 핍박으로 인하여 고향인 “다소”로 간 일이 있었습니다(행9:26-30).

2) 본문 17절과 18절은 개종직후 바울이 예루살렘에 머물 때에 성전에서 기도하는 중에 비몽사몽의 상태로 계시 받은 것을 증언하여 이르기를(17절) “주께서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8절)고 하셔서 자신은 대답하기를 “나는 주 믿는 자들을 가두고 또 각 회당에서 때렸으며 주의 증인 스데반의 피를 흘릴 적에도 곁에 서서 찬성하고 그 사람들의 옷을 지킨 것을 저희도 아나이다”하면서(17-20절) 유대인들로부터 어느 정도 용납을 받고 그들을 설득하는 전도자가 되기를 바랐지만 주님께서는 또 이르시되 “떠나가라 내가 너를 멀리 이방인에게로 보내리라”고 하셨기 때문에(21절) 자신은 이방지역에 가서 전도하고 돌아왔다는 말을 한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했을 때 듣는 자들이 소동을 일으킨 것입니다.

4. 천부장의 신문과 바울을 공회에 세우는 내용입니다(22절-30절).

1) 핍박자들은 바울의 증언을 듣다가 소리를 지르며 “이런 놈은 세상에서 없애야 한다하면서 떠들고 옷을 벗어 던지며 티끌을 공중에 날렸다”고 하였습니다(22-23절). ① 핍박자들이 바울을 증오한 이유는 “주 예수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였다”는 것과 “자기들과 신앙적 입장이 달라진 일”에 기인한 것입니다. ② 핍박자들이 떠들고 옷을 벗어 던지며 티끌을 공중에 날린 것은 분함을 나타내는 과격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온유하고 침착하며 질서를 지키는 일에 반대되는 것이므로 성도는 이런 과격한 행위를 삼가야 할 것입니다.

2) 천부장은 이 사실을 목격하자 부하들에게 “바울을 자신이 집무하는 영문 안으로 데려가서 채찍질하며 신문하라”고 명하니 백부장등 부하들이 가죽줄로 바울을 결박하게 된 것입니다(24-25절).

3) 이때에 바울은 곁에 섰는 백부장(군인 중대장급)에게 “너희가 로마사람된 자를 죄도 정하지 않고 채찍질할 수 있느냐?” 한즉 백부장은 그 사실을 천부장에게 전하였고(25-27절)

4) 천부장은 그 사실을 바울에게 직접 말로 확인을 받은 후 바울에게 “자신은 돈을 드려 로마시민권을 얻었다”고 하면서(바울에게 시민권을 갖게 된 경위를 묻자) 바울은 “나면서부터 얻었다”하였으니 로마에서는 “글라우디오”황제 때에 국고를 충당하기 위하여 권세자들이 시민권을 판 사실이 있었다고 하며 바울이 “나면서부터 시민권을 받은 것”은 바울의 부친이나 조부 때부터 로마정부와 관계를 맺어 일찍 받았다고 예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로마의 통치를 받는 입장에서 로마의 시민권을 받는 것은 로마시민과 같은 대우를 받는 유익이 있으며 억울함을 당했을 때는 최고 재판부에까지 상소할 수 있는 특권을 갖는 것입니다.

5) 바울이 로마시민권자임을 밝히자 신문하던 자들이 물러나고 천부장도 자신이 무법하게 결박한 것을 두려워하면서 결박을 풀게 하였고 또 유대인들이 송사하는 실상을 알기 위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나가서 그 앞에 세우게 된 것입니다. ① 여기의 “제사장들과 온 공회”란 로마정부에서 허가한 유대인들의 최고 재판기관으로 종교단체 및 유대장로(국민대표)들에게 자치권을 인정하였다고 합니다. 이 기관을 처음에는 “원로원(元老院)”이라고 부르다가 후에 “산헤드린”이라고 호칭하였는데 이 말은 “큰 재판의 집”이란 아람어라고 합니다. 이 의회의 의원 자격은 제사장들과 사두개파의 귀족들로 구성되었다가 3세기 초에는 많은 바리새인들이 학자와 장로란 명의로 공회원 자격을 얻었다고 합니다(마27:41, 막11:27,14:43,53,15:1). ② 그리고 바울을 그 재판에 회부한 것은 로마시민에게 합리적 대우를 하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상의 말씀에서 바울의 전도사역에는 ① 끝까지 핍박이 따랐고 ② 핍박자들은 설득 당하지 않았으며(22-23절) ③ 위험할 때 천부장(나라의 권세)의 보호를 받고 ④ 공회의 송사사건으로 등장하게 되었으나 ⑤ 결국 이 과정은 하나님께서 바울사도를 로마로 보내시는 인도의 섭리에 맞추어진 것입니다(행27:24).

제 54 과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호송함 (행 23:1-35)

 

본문 말씀은 천부장이 바울을 예루살렘의 공회에 세워주므로 바울이 먼저 자신의 신앙적 입장을 밝힌즉 대제사장이 노하고 또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간에 다툼이 생겨 더 큰 분쟁으로 비화되자 천부장은 바울의 신변안전을 위하여 바울을 영문 안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공회의 다툼과 대립으로 바른 재판을 할 수 없게 되었고 핍박자들은 바울을 “가이사랴”로 호송하는 도중에 죽이기 위하여 음모하였으나 이 사실이 천부장에게 알려져서 천부장이 안전한 방법으로 바울을 호송하여 “가이사랴”에 있는 “벨릭스”총독에게로 보낸 사실이 기록된 것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분류하면 ① 1절-6절은 “바울의 증언과 대제사장의 망언”이요 ② 7절-10절은 “공회원들 간의 분쟁”이며 ③ 11절은 “바울에게 나타나신 주님의 말씀”이요 ④ 12절-22절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한 사실”이요 ⑤ 23절-32절은 “천부장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호송한 내용”이며 ⑥ 33절-35절은 “벨릭스총독이 바울의 사건을 접수한 내용”입니다. 이상의 내용들을 종합하면 “예루살렘에서 다시 가이사랴로 호송함”이란 제목을 정할 수 있습니다.

1. 대제사장의 망언에 대하여(1-6절)

1) 바울은 공회를 주목하고 먼저 자신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하였으니 이는 바울의 진실한 고백이었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과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길 수만 있다면 그보다 더 큰 행복은 없을 것입니다. 만일 어떤 이유에 의하여 말씀과 양심대로 살기 어렵다면 장애되는 이유들을 다 제한 후에 반드시 말씀과 양심대로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2) 바울의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는 말을 들은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곁에 섰는 사람에게 “바울의 입을 치라”고 하였으니 대제사장이란 존귀한 직임이 무색할 정도로 망령된 말을 서슴치 않으므로 구약적 종교인의 타락성을 대표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① 사도행전에 “아나니아”란 이름이 세 사람 있습니다. ㉠ 한사람은 약속한 헌금을 가로챈 삽비라의 남편 “아나니아”요(행5:1) ㉡ 또 한사람은 사울을 지도하고 세례준 선지자이며(행9:10) ㉢ 세번째 사람은 본문에 나타난 대제사장 “아나니아”입니다. ② 대제사장의 망언을 들은 바울은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실 것이라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하면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하였으니 율법은 확실한 증거와 심문에 의하여 정죄한 다음에 합당한 벌을 주는 법이기 때문입니다(신16:18,19:15). “회칠한 담”이란 “회칠한 무덤”(마23:27)을 염두에 두신 말씀일 것입니다. 겉은 깨끗해 보이나 속이 더럽고 괴악한 것을 비유하신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말 한마디의 실수로 큰 책망을 받은 셈입니다. ③ 이때에 곁에선 사람이 “네가 대제사장을 몰라보고 욕을 하느냐”고 하자(4절) 바울은 “백성의 관원을 비방하지 말라”는 출22:28말씀을 생각하고 “그가 대제사장임을 알지 못하였다”고 해명을 하였으니 출22:28에는 “재판장을 욕하지 말며 백성의 유사를 저주하지 말라”로 기록되었으나, 당시의 대제사장이 종교적 재판장이었으므로 바울은 이를 백성의 관원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망녕된 말을 범하여도 백성이 그를 욕하거나 저주할 수 없는 것이 백성된 자의 도리였던 것입니다(5절). 문제는 왜 바울이 대제사장을 몰라 보았을까?하는 점입니다. 대제사장은 의복의 색깔과 장식이 다르기 때문에 쉽게 식별할 수도 있었겠지만 바울의 시력이나 정신적 집중이 증언에 있었기 때문에 판별하지 못했을 수도 있는 것입니다. ④ 그때에 바울은 그곳에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이 따로 자리한 것을 보고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며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심문을 받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6절). 바울 자신이 바리새인임을 표명한 것은 동정을 구한 뜻보다는 상당한 깨달음에 의하여 철저한 바리새적 사상에서 떠나게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며 “죽은자의 소망”과 “부활”이란 예수님의 부활과 성도의 부활을 증언하였음을 뜻하는 것입니다(살전4:13-17).

2. 공회원들간의 분쟁에 대하여(7-10절)

1) 6절에서 증언한 바리새파란 말과 “부활을 믿는다”는 말은 사두개인들에게는 퍽 거리끼는 것이었습니다. 사두개인들은 부활과 천사와 영을 없다고 하면서 믿지 않기 때문입니다(8절). 그리하여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고 바울을 동정하려는 바리새파와 바울을 해하고저 하는 사두개인파가 나뉘어 크게 훤화(떠들며 소란을 피움)하게 되자

2) 바리새인 중 서기관 몇 사람이 나서서 사두개인파 사람들과 다투며 “바울을 보니 악한 것이 없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에게 말씀을 준 것이면 어찌 하겠느냐“하고 대립하자 양파간에 큰 분쟁이 발생한 것입니다.

3) 이런 위험속에서 천부장은 바울의 신분을 보호하기 위하여 무리들 중에 있는 바울을 빼내어 천부장의 영문으로 들어가게 하였습니다.

3. 바울 곁에 나타나신 주님의 말씀(11절).

바울이 천부장의 영문 안에 수감되어 있을 때 부활하신 주님이 바울 곁에 오셔서 이르시기를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언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① 부활하신 주님은 항상 바울곁에 함께 계셨습니다(마28:20). ② 그 예수님은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어떻게 증언한 것을 알고 계셨고 ③ 또 로마에 가서도 증거하도록 인도하실 것을 약속하시면서 ④ “담대하라”하시고 힘을 돋우어 주신 것입니다. 주님은 핍박받는 자기의 종들을 한시도 외면하시지 않고 보호, 인도하여 주심을 알 수 있습니다.

4.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음모함에 대하여(12-22절)

1) 하룻밤을 지내고 날이 밝았을 때 유대인들은 40명이 당을 짓고 맹세하였고(12-13절) 그 사실을 대제사장들(마16:21, 행9:14 해석참조)과 장로들에게 알린 후에(14절)

2) 바울의 처리결과를 살피면서 공회(공회원들)와 함께 천부장을 찾아가서 바울을 가이사랴에 있는 천부장들(너희)에게로 데려오도록 요청하기로 하고 가까이 오기전에 길에서 습격하여 죽이기로 준비하였던 것입니다(15절). 여기의 “내려오게 한다”는 뜻은 높은 곳 예루살렘에서 총독의 궁궐이 있는 “가이사랴”로 호송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이 사실을 바울의 생질이 듣고 영문 안에 있는 바울에게 알렸으며(16절) 바울은 한 백부장을 불러 자기의 생질을 천부장에게 인도하도록 부탁하였고(17절) 천부장은 바울의 생질인 청년을 접견하여 유대인들의 음모에 관한 내용들을 자세히 안 후에(18절-21절) 그 청년을 보내며 이 일을 자신에게 고한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시켰던 것입니다(22절).

5. 천부장이 바울을 “가이사랴”로 안전하게 호송한 내용입니다(23-32절).

1) 천부장은 백부장들에게 밤 제3시(새벽)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200명과 마병 70명과 창군 200명을 준비시키고 또 바울을 태워 보낼 짐승까지 준비시켰습니다. 보병, 마병, 창군은 당시에 필요에 따라 무장한 군인들이며 짐승은 말이나 노새를 의미할 것입니다.

2) 이때에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는 “가이사랴”에 도읍한 “벨릭스”총독에게 문안과 함께 호송된 피의자(바울)의 사건경위를 편지로 보고하게 된 것입니다. 편지의 내용은 “피의자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무법하게 죽게된 것을 그가 로마사람(시민권을 가졌으므로)임을 알고 위기에서 구출하여 공회에 회부시켜 보았으나 송사하는 죄건이 결박이나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율법에 관한 것임을 알게되었고(27절-29절) 또 송사자들이 그를 총독에게 보내어 재판을 받게 하라는 요청이 있어서 보내게 된 중에(20절, 30절) 또 그를 해하려는 사람들의 간계가 있다고 알려온 사람이 있어서 호송병력까지 동원하여 보낸 것이라”는 뜻으로 편지를 써 보낸 것입니다.

3) 그리고 정한 시간에 준비한 군인들로 하여금 바울을 호송하게 할 때에 직접 천부장이 바울을 데리고 “안디바드리”(예루살렘에서 가이사랴로 가는 군용도로 160리 지점, 가이사랴까지는 280리임)까지 가서 이튿날 호송병들에게 인계하고 자신은 영문으로 돌아가므로 바울을 안전하게 호송하였고 이런 경위로 바울이 벨릭스총독 앞에 서게 된 것입니다(31절-33절). 벨릭스총독은 로마황제 가이사의 임명으로 주후 52년-60년에 유대총독을 하였습니다. 그 당시 유대총독이면 북쪽 사마리아 지역까지 통치를 하였기 때문에 총독의 관청을 사마리아 지역인 “가이사랴”에 두었을 것입니다.

6. 벨릭스총독이 바울의 사건을 접수함에 대하여(33절-35절)

총독은 천부장의 편지를 읽은 후 바울이 “길리기아” 영지의 사람임을 알고 “너를 송사하는 사람들이 오거든 네 말을 들을 것이라”하고 헤롯궁의 영창에 가두어 “그를 지키라”고 명하였습니다. 총독이 집무하는 관청은 헤롯왕이 지은 궁전이었습니다. 바울이 “길리기아”태생일지라도 사건이 유대지경에서 발단되고 송사된 것이기 때문에 벨렉스는 그 관할을 외면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것은 ① 하나님이 정치가들에게 주신 권세를 이용하여 무법한 자들의 핍박으로부터 복음 사역자를 보호해 주신 점과(롬13:1) ② 일반은총에 해당하는 재판기관을 이용하여 전도자를 보호하시기도 하시고 로마로 인도하시는 섭리를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5 과 벨릭스 앞에서 송사를 진행함 (행 24:1-27)

 

이 말씀을 살피면 1절-9절까지의 말씀은 “송사자들의 송사내용”이요, 10절-21절까지는 “바울의 변명하는 내용”이며 22절-27절은 “벨릭스의 사건 처리연기에 관한 내용”입니다. 따라서 총 제목을 “벨릭스 앞에서 송사를 진행함”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송사자들의 송사에 대하여(1절-9절)

1) 바울이 총독 벨릭스의 관청(헤롯궁)에 구류된지 5일 후에 대제사장 아나니아와 장로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와서 변사(소송대행자) “더둘로”를 내세워 총독에게 직접 고소하기에 이르렀습니다(1절).

2) 총독이 바울을 부르고 그 자리에서 “더둘로”의 송사를 듣게 되었는데(2절) ① “더둘로”는 벨릭스 총독의 좋은 정치(선견)로 인하여 백성이 태평하게 살고 생활환경이 많이 개량된 것을 치하하였으니 이 말은 읽는 성도로 하여금 아부하는 인상을 느끼게 합니다(3절). ② 또 총독을 덜 괴롭게 하기 위하여 송사사건을 줄여서 고발하는 것을(대강 여쭈다) 이해해(관용) 달라고 하였으니(4절) 이 말은 총독을 위하여 세심하게 노력한다는 뜻으로 말한 것입니다. ③ 5절에서 “더둘로”는 바울을 가리켜 “염병”이라 하였고 또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하였으니 이 말은 바울을 해하기 위하여 과장된 표현을 한 것입니다. ㉠ “염병”이란 뜻은 “로이몬(λοιμόν: pestilent)”으로 “폐해를 주는 돌림병”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울사도가 전파한 복음을 전염병처럼 증오한 표현이요 ㉡ “나사렛 이단의 괴수”란 바울이 예수님과 그 복음을 전파하는 성도들의 괴수란 뜻이요 ㉢ “이단”이란 뜻은 “하이레시스(ἁίρεσις)”로 “정통, 신조, 권위” 또는 “바른말의 반대”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이의 주장이 자기들의 주장과 다를 때도 편협된 말로 이 용어를 쓴 것입니다. 현실기독교에서는 구원받을 수 없는 잘못된 교리를 이단이라고 합니다. 바울은 율법주의 이단자에서 개종한 정통복음주의자였습니다. ④ 또 고소자는 “바울이 유대인을 소요케하고 성전을 더럽게 하려 하여 붙잡았다”하였으니 이는 범죄에 이르지도 않은 것을 고소한 것이며 “성전을 더럽히려 했다”는 것은 바울이 이방인을 데리고 성전에 들어간 것으로 예측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상의 말로 고소하자 그곳에 참가한 유대인들도 “더둘로”의 말이 옳다고 고소자의 입장에 협력하면서 총독으로 하여금 직접 심문할 것을 제의한 것입니다(6절-9절).

2. 바울의 변명에 대하여(10절-21절)

1) “더둘로”의 고소가 끝나자 총독이 바울에게 말할 것을 허락할 때 머리로 지시하는 표현을 하였으니 이런 태도는 재판관이 할 수 있는 것이나 이 성경을 기록한 저자 “누가”가 곁에서 그 광경을 목격한 것을 나타내준 것입니다.

2) 바울은 다음과 같이 변명하였습니다. ① 바울은 “벨릭스가 여러해 전부터 민족의 재판장된 것을 알고 있었으며 또 자신의 사건에 대하여 변명하게 된 것을 기쁘게 여긴다”하였으니(10절) 여기의 “변명”이란 “변호하여 밝힌다”는 뜻이며 또 “기쁘게 여긴다”함은 재판관의 공의로운 판단을 신뢰하는 표현이었을 것입니다. ② 바울 자신은 예루살렘에 올라간지 12일밖에 안되었고 성전에서 아무와도 변론한 일이 없었으며 또 회당이나 성중에서도 무리를 소동케 한 일이 없었기 때문에 직접 목격하지도 못한 일이므로 “능히 송사할 재료조차 없다”고 하였고(11절-13절) ③ 자신은 고소자들이 이단으로 여기는 도리를 따라 조상의 하나님을 섬긴 것과 율법과 선지자의 글(구약전체)에 기록된 것을 다 믿으며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을 믿고 증언하였다고 하였습니다(14절-15절). 여기에서 바울은 ㉠ 고소자들이 근거없는 송사를 한 것과 ㉡ 자신이 조상의 하나님을 계승하여 섬긴 것과 ㉢ 기록된 구약을 진리로 믿은 것과 ㉣ 바리새인들이 믿는대로 미래의 소망인 의인과 악인의 몸의 부활과 영생천국을 믿는다는 것을 나타낸 것입니다(살전4:16,17, 계20:12-13). ④ 또 바울은 의인과 악인의 부활 및 심판이 있음을 인하여 “하나님과 사람을 대하여 항상 양심에 거리낌이 없기를 힘썼다”고 하였습니다(16절). 성도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의식하고 하나님께나 사람에게 양심상 거리낌없이 대하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⑤ 바울은 선교사역을 마치고 여러해만에 예루살렘에 돌아왔을 때 이방인 성도들로부터 모금한 구제금과 결례식을 위한 제물을 갖고 성전에 들어가 결례를 행하였을 때도(행21:21-24,26) 아무런 소동없이 있었던 것을 저희가 보았다고 하였습니다(17절-18절). ⑥ 그 당시 아시아에서(핍박차) 좇아온 유대인들도 있었으니 그들이 바울 자신을 반대(송사)할 일이 있으면 마땅히 직접 송사하였을 것인즉 내가 예루살렘에서 공회 앞에 섰을 때 무슨 옳지 않은 일을 보았으면 말하라 하소서(19절-20절)하고 ⑦ 오직 나는 저희 가운데서 외치기를 “내가 죽은자의 부활에 대하여(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였으므로) 너희(공회) 앞에서 심문을 받는다고(행23:6) 말했을 따름이라”고 한 것입니다(21절).

3. 벨릭스의 사건처리 연기에 대하여(22절-27절)

1) 벨릭스가 바울의 변명을 들었을 때 그는 기독교에 대한 진리를 바울이 증언한 것보다 더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의 증언을 길게 듣지 않고 천부장 “루시아”가 내려오면 처리 할 것이라 하고 백부장에게 명하여 바울을 지키되 자유를 주며 친구 중 아무의 수종드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22절-23절). 이는 바울에 대하여 증오할만한 죄질이 없음을 알뿐만 아니라 친구의 수종드는 일을 통하여 뇌물을 확보하도록 기회를 준 것입니다.

2) 수일 후에 총독 벨릭스가 그의 아내 유대여자인 “드루실라”(아그립바 1세의 딸; 12:1)와 함께 와서 바울을 불러 “예수믿는 도를 말하라”하여 말씀을 들었으니(24절) 이는 바울에게 호의적 관심을 보여 뇌물 받기를 바람이었습니다(26절). 그러나 바울은 총독에게 뇌물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2년 이상 더 구류되었습니다. 그 사이에 바울은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하였습니다. ① “의”란 인간이 의로워지는 구원의 도리를 의미함이요 ② “절제”란 사람이 자기의 정욕대로 살 것이 아니라 진리표준으로 알맞게 살아야함이며 ③ “심판”은 장차 있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총독은 바울의 증언을 듣고 두려워하며 “지금은 가고 다음에 기회(틈)가 있으면 부를 것이라”하였으니 이는 바울을 만나는 기회에 뇌물을 받을까 하여 자주 불러 이야기하였다고 하였습니다(25절-26절). 부패한 관원의 표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렇게 뇌물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별수단을 다 써서 부정을 행하고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입니다.

3) 벨릭스는 바울을 관청내에 구류한 상태에서 유대인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2년이나 구류하여 두었으나 바울은 돈을 들여 석방 받을체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에 “보르네오 베스도”가 총독직을 대신하게 된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교훈받을 수 있는 내용들은 ① 바울이 양심따라 하나님과 사람을 대한 점(16절) ② 뇌물을 쓰지 않으면서 구류된 상태에서 견딘 점 ③ 기회있을 때마다 부활과 심판과 하나님 나라를 증거한 점(15절)을 교훈받을 수 있으며 또 경계해야 할 점은 ① 악한자들의 무고한 송사와 ② 벨릭스가 진리를 듣는척 하며 친구의 수종을 허용하면서 뇌물받기를 기다리고 ③ 사람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무죄한 자를 2년 이상씩 가두는 행위는 참으로 악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제 56 과 베스도의 처리과정 (행 25:1-27)

 

이 말씀은 세대지로 나누어 살피실 수 있습니다. 1절-8절은 “베스도가 바울에 대한 재판을 시작한 내용”이요, 9절-12절은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한 내용”이며 13절-27절은 “베스도가 아그립바왕과 상의하는 내용”으로 되어있습니다. 따라서 전체의 제목은 “베스도의 처리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1. 베스도가 바울에 대한 재판을 시작함에 대하여(1절-8절)

1) “베스도”는 벨릭스 총독의 소임을 대신하여 부임한지 3일 후에 예루살렘에 올라갔습니다. 그때에 대제사장들과 유대인중 높은 사람들(장로)이 바울을 고소하면서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옮겨 보내주기를 청원하였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청원하는 의도는 예루살렘이 신앙의 중심지이므로 이단에 관한 재판을 그곳에서 하면 고소자나 증인을 세움에 유익이 있음을 구실로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정작 속심은 그렇게 될 때에 길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기 위한 계책이었습니다(1절,3절).

2) 이때에 베스도는 바울이 벨릭스 총독때부터 가이사랴에 구류된 것을 알고 있으며 또 미구에 가이사랴로 갈 것인즉 송사할 뜻이 있는 유력한 사람들이 같이 가서 그의 옳지 않은 일을 증언하여 송사하라고 하였습니다(4절-5절).

3) 베스도가 예루살렘에서 8일 혹 10일을 지낸 후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이튿날 재판자리에 앉고 바울을 데려오게 하였더니 바울이 나오자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유대인들이 둘러서서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으로 송사하였으나 능히 증명을 하지 못하였다고 하였습니다. ① 여기에 “8일 혹 10일”이란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머문 날수를 어림잡아 기록한 것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10일 이상”으로 기록되었다고 합니다. 성경을 기록한 저자가 날짜의 확실한 수를 어림잡아 기록할 수 있고 또 날수가 중요한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 때는 성령님께서도 밝히실 필요를 갖지 않으신 것입니다. 따라서 사본상의 차이가 난 것도 역시 확실하게 밝힐 필요를 갖지 않으신 것입니다(6절). ② “여러 가지 중대한 사건”이란 송사 될만한 고소자료를 의미하지만 능히 증명하지 못한 것을 볼 때에 행21:34의 말씀처럼 “이말 저말로 부르짖었을뿐 확실한 죄상을 드러내지 못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7절). 사람마다 죄는 많지만 실제로 송사를 하려면 증거확보가 힘들기 때문에 있는 죄도 성립시키기 어려운 것입니다. 하물며 죄가 없는 형편에서 거짓증거를 내세우는 것은 더욱 어려웠을 것입니다.

4) 이때에 바울은 유대인의 율법을 거역한 일이나 성전을 더럽힌 일이나 가이사의 법을 위반한 일에 이르기까지 전혀 범죄한 일이 없다고 항변하였습니다(8,10절). 바울사도의 이 결백한 항변은 그의 순결한 생활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2.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한 일에 대하여(9-12절)

1)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그들이 요청한 대로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자기 앞에서 재판을 받겠느냐고 물을 때 바울은 이를 거절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호송해 올 때 길에서 죽일 음모를 하였고(3절) 바울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이 자신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예언과 경험으로 이미 아신 것이기 때문에(행21:11,27-30) 핍박과 환난을 자청하실 필요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내가 가이사의 재판자리 앞에 섰으니(베스도가 가이사의 신하이므로 같은 계통의 재판자리가 됨) 마땅히 가이사의 심문을 받을 것이라”고 상소요청을 한 것입니다(9,10절).

2) 또 바울은 자신이 불의를 행하여 죽을 죄(死罪)를 범하였다면 죽기를 사양치 않을 것이나 송사사건이 사실이 아닌만큼 자신을 해롭게 하려는 유대인들에게 내어주어서는 안된다고 하면서 가이사에게 호소(상소)한 것입니다(11절). 이때에 베스도는 배석한 법관들과 상의하고 가이사에게 갈 것을 승인하였습니다. 이리하여 바울은 평소에 소원하였던 로마에 갈 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행19:21,23:11). 하나님은 이같은 방법으로 전도자 바울을 로마로 보내시는 것이었습니다.

3. 베스도가 바울의 송사문제를 아그립바왕과 상의함에 대하여(13절-27절)

1) 바울의 상소사건이 로마로 호송될 것이 결정된 후 아그립바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의 부임 후 문안하러 가이사랴에 왔습니다(13절). ① “아그립바”왕은 대헤롯의 손자로 수리아지역 일부를 관할하는 왕이었습니다. 총독과 왕을 구별함에 대하여 총독은 황제의 신하로 식민지를 통치하는 관직이고 왕도 역시 황제의 윤허로 지정된 지역을 다스리는 관직입니다. 총독이 중앙집권적 정치의 책임자라면 왕은 지방자치적 통치의 책임자라고 할 수 있는데 사도행전 당시의 총독과 왕의 구별에 대하여는 확실한 것을 알 수 없습니다. ② “버니게”는 아그립바왕의 누이인데 그가 여러차례 결혼에 실패하고 아그립바왕과 연연하여 같이 동거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벨릭스의 처 “드루실라”도 버니게와 형제간이므로 결국 베스도와 아그립바는 동서간입니다(비콘주석). 그런데 이런 인적관계는 역사책마다 다른 점이 있음을 발견하였습니다.

2) 이 두 사람이 가이사랴에 여러 날 있었을 때 베스도가 바울의 송사문제를 아그립바왕에게 상의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소요문제와 관련하여 정치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에 말한 것으로 예측할 수 있습니다. 14절 이하에서 베스도가 말하기를 “전임자 벨릭스가 자기 관하에 바울이란 사람을 구류하여 두었는데 자신이 예루살렘에 갔을 때에(14절) 유대인의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이 그를 정죄판결하여 주기를 청하기로(15절) 피고가 원고들 앞에서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로마의 법이므로(16절) 함께 가이사랴에 와서 심문하여 본즉 짐작한대로 악행의 사건은 하나도 제출하지 않고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예수의 부활을 주장하였다는 문제로 송사한 것 뿐이라(17-19절) 이에 대한 사실(査實; 조사함)을 위하여 예루살렘에 가서 심문을 받겠느냐한즉(20절) 황제의 판결을 받도록 자기를 지켜주기를 호소하여 로마의 가이사 황제에게 보내기 위하여 보호하고 있다”한즉(21절)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그의 말을 들어보자 하여(22절) 그 이튿날 아그립바와 버니게가 위의(위엄있는 거동)를 베푼 자리에 (천부자들과 성중의 높은 사람들이 있는 신문소에) 바울을 있게 하고(23절) 베스도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유대의 모든 무리가 예루살렘과 이곳에서 살려둘 수 없는 죄인이라’고 외치며 (사형)판결을 청원하였으나 살피건데 죽일 죄가 없고 또 저가 황제에게 호소(상소)하였기 때문에 그곳으로 이송하기로 작정은 하였으나(24절-25절) 황제에게 범죄한 사실을 아뢸 것이 없고 죄목 없는 죄수를 상급기관에 보내는 것은 무리한 일인지라(27절) 상소재료가 있을까 하여 여러분을 앞에 내세운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은 설명으로 아그립바왕께 바울사도를 소개하는 내용으로 25장이 끝난 것입니다.

이 말씀에서 깨달을 수 있는 교훈은 ① 정의의 사도 바울은 이단자들로부터 송사를 당한 점과 ② 그 당시의 사회적 법관들은 죄 없는 것을 알면서도 백성들의 인심을 얻기 위하여 계속 구류하면서 무죄를 선포하지 않은 죄악과 ③ 바울이 황제에게 상소한 것은 신변보호의 문제도 있지만 ④ 로마에까지 가서 복음을 전파하도록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깨달을 때 죄수의 입장이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을 이룸에 필요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제 57 과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변명한 내용 (행 26:1-30)

 

앞장에서는 베스도총독이 가이사랴에서 바울을 재판하다가 바울이 가이사 황제에게 상소하므로 재판을 중지하였을 때 아그립바왕이 와서 바울에 대하여 알기를 원하므로 다시 개정하고 두 통치자가 배석한 중에서 재판을 개정한 일이 기록되었고 본문에서는 “바울의 변명을 듣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내용을 구분하면 ① 1-23절은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변명하는 내용”으로 바울 자신의 개종하기 이전의 생활과 개종의 경위와 바울이 증언한 복음의 내용이요 ② 24-30절은 “증언을 들은 재판관들의 태도”에 대한 내용이 기록되었습니다. 총 제목을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변명한 내용”이라고 정하였습니다.

1.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변명하는 내용에서(1-18절)

1) 바울은 다시 열려진 재판정에서 아그립바왕에게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다고 하였습니다(1-3절). ① 여기의 변명이란 뜻(1,2,24절)은 “지가의 정당성을 변호, 항변하는 것”입니다. 원문의 “아폴로기아(ἀπολοϒία)”란 뜻도 역시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 “변명한다”는 말을 “죄 있는 자가 죄 없는 듯이 발뺌을 할 때 쓰는 용어”로 활용되는 경우가 많아서 이 설명을 드립니다. ② 바울이 아그립바왕에게 변명하게 된 것을 다행으로 여긴 이유는 “아그립바왕이 유대인의 모든 풍속과 문제를 알기 때문이라”하였으니 여기의 풍속과 문제란 종교적 전통과 바리새인들의 태도와 정치에 관한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종교적 전통에 관한 문제를 알고 있을 때 바울의 변명을 더 잘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③ 아그립바왕은 바울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었고 바울은 손을 들어 표시한 후(1절) 너그럽게 들어주기를 요청하였으니(1절) 바울이 말할 때 손을 든 것은 “거짓증언을 안 한다”는 선서의 표현일 것이요(손짓함은 주목을 요하는 표현; 행13:16,21:40) “너그럽게 들어주기를 바란 것”은 바울 자신에게 죄가 없어도 민심차원에서 바울을 해롭게 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넓은 아량을 베풀어 줄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2) 바울사도는 증언을 할 때에 복음종교로 개종하기 이전의 생활을 먼저 말하였습니다(4-7절). ① 이것은 바울이 과거에 자기를 송사하는 무리들과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음을 나타내려 한 것입니다. 즉 “무엇이 달라서 바울이 바리새인들로부터 송사를 받게 된 것인가?”를 알리려는 목적이었습니다. ② 바울은 유대인들(민족) 세계와 예루살렘에서 젊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자신의 생활상태를 유대인들이 일찍부터 다 알고 있는 중(4절) 종교적 특징으로는 가장 규율이 엄한 바리새파에 속하여 바리새인의 생활을 하였고 바리새인들과 함께 조상적부터 받은 하나님의 약속인 “부활(죽은자 다시 살리심)을 믿고 증언한 것” 때문에 송사를 받게 된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바리새파는 종교적 규율이 엄하였습니다. 따라서 바리새인의 생활이란 율법과 전통을(마15:2) 엄하게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일관성 있게 그들의 악행을 책망하셨습니다(마23:1-36). ③ 바울이 바리새인의 신앙을 따라 부활을 믿었으나 (부활하신) 나사렛 예수의 이름을 대적하여야 할 줄로 알고 대제사장들로부터 권세를 얻어 ㉠ 예수님 따르는 성도를 옥에 가두었고 ㉡ 그들을 죽일 때에 가편 투표를 하였으며 ㉢ 회당에서 성도를 핍박할 때 강제로 모독하는 말을 하게 하였고 ㉣ 심지어는 외국 성까지 가서 성도를 핍박하였으며 ㉤ 또 그와 같은 일을 계속하기 위하여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다고 한 것입니다.

이상의 말은 바울이 개종하기 전에 철저한 바리새파인으로 기독교를 핍박한 위치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3) 그런데 다메섹으로 향하던 날 정오쯤에 하늘로서 해보다 더 밝은 빛이 자신과 동행자들에게 둘러 비취어 모두 땅에 엎드러졌는데 히브리 방언으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는 말씀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① 히브리 방언은 유대인들의 전통적 언어로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는 아람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부활하신 몸이었지만 조상들이 사용하던 방언으로 말씀하신 것이었고 ②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라”는 뜻은 “예수님을 핍박하는 행위가 마치 가시를 발로 차는 것처럼 고생스러운 일이며 불행을 자초함”이란 뜻입니다. 바울은 개종하기 전에 자기의 행위가 옳은 일인줄 알았습니다. “깨닫지 못하는 자는 멸망하는 짐승과 같다”(시49:12)고 하신 말씀이 이런 일을 두고 하신 교훈일 것입니다. ③ 이때 바울은 엎드러진 상태에서 “주여 뉘시니이까”한즉 주께서 말씀하시기를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내가 네게 나타난 것은 네가 나를 본 일과 장차 내가 네게 나타날 일(재림)에 대하여 너로 사환과 증인을 삼으려 함이니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가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저희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단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고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들었다고 한 것입니다. ④ 이 말씀을 요약하면 ㉠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강권적으로 변화를 받은 것이고 ㉡ 예수님께서 그 같은 방법으로 바울을 변화시켜 구원하신 것은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사환과 증인을 삼으시기 위함이요 여기의 “사환과 증인”이란 바울이 예수님의 심부름꾼임에 불과함을 나타내신 말씀이며 또 바울이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을 증거의 대상으로 삼게 하신 것은 대체적으로 바울을 이방인의 사도로 알지만 사실은 먼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증언하고 다음에 이방인에게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행9:15,13:45-46). 따라서 전도의 대상은 땅 끝까지의 백성들을 상대한 것입니다. ㉢ 바울에게 증인을 부탁하신 내용은 부활의 주님을 본 사실과 영혼의 눈을 뜨게 하시는 내용(거듭남)과 어둠에서 빛으로 깨닫는 생활과 마귀의 속박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일과 죄사함 받는 일과 거룩하여지는 것과 하늘의 영원한 기업을 받게 되는 진리를 증언하게 하신 것입니다.

4) 그래서 바울은 이런 체험과 예수님의 지시를 받고 거스릴 수 없어서 다메섹과 예루살렘에 있는 사람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행1:8)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회개에 합당한 일을 행하라”고 증언(선전)한 것 때문에 (19-20절) 유대인들이 자신을 죽이려 하였으나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오늘까지 생존하여 높고 낮은 사람들에게 증거하게 된 것이요 증거의 내용의 핵심은 구약의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예언한 것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과 빛을 선전(복음전파)함에 대한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21-23절). 20절의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간다”는 뜻은 불신앙이나 잘못된 신앙에서 떠남을 뜻하고 “회개의 합당한 일”이란 복음적 신앙에 입각한 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23절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은 십자가의 뜻이요 “죽은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심”은 부활을 뜻하며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심”은 전도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상의 변명으로 바울은 자신의 개종전의 형편과 개종후의 변화를 사실대로 설명한 것입니다.

2. 증언을 들은 재판과들의 태도에 관한 내용입니다(24-30절).

1) 베스도는 바울의 변명을 듣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다 너의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하였을 때 바울은 “내가 미친 것이 아니라 참된 정신으로 말하고 있으며 자신이 변화 받은 놀라운 일은 한편 구석, 은밀한 곳에서 혼자 체험한 것이 아니라(행3-7,26:24-26)” 하였고

2) 바울은 이어서 “아그립바왕께서도 선지자를 믿는 사실을 안다”하였더니 왕이 “네가 적은 말(각주;짧은 시간에)로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한다”하면서 거부하는 반응을 나타낸 것입니다. 이때에 바울은 “말을 적게 하나 많이 하나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들이 나의 결박당한 것 외에는 다 나와 같은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하므로 전도의 사명을 노골적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그 당시에 아그립바왕은 유대인들이 믿는 선지자에 대하여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던 모양입니다(마14:1-2).

3) 이때에 재판관으로 병석하였던 왕과 총독과 버니게와 또 함께 한 사람들(송사자들과 방청인들)이 다 그 자리를 떠나면서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만한 행사(죄)가 없다”하였고 또 아그립바는 베스도에게 말하기를 “저가 가이사에게 호소(상소)하지 않았다면 놓아 줄 수도 있을 뻔하였다”고 하므로 바울의 무죄성을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재판의 목적은 피의자가 상소한 것이기 때문에 재판을 종결지으려는 것이 아니요 상소재료로서 확실한 죄건을 알기 위한 목적이었습니다(행25:26). 그러나 신앙적 문제 외에 일반적 죄건을 찾지 못하였고 오히려 바울로 하여금 변명할 기회를 주었을 따름이었습니다.

이 말씀에서 저희들이 교훈을 받아야 할 것은 ① 바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역사로 개종하고 사명자가 된 사실과 ② 바울이 존귀한 사도이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사환과 증인일 뿐이란 점과 ③ 전도자가 핍박중에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으로(22절) 보호와 인도를 받은 사실과 ④ 증언내용의 핵심을 몇 가지로 지적해 주신 말씀과 ⑤ 핍박을 받은 것 같으나 높고 낮은 사람들과 먼데 사람들에게까지 전도의 기회를 주시는 일과 ⑥ 그 당시 로마정부의 재판제도에 대하여 죄가 없어도 결박을 당해야 하는 부조리한 일등 상당한 문제들을 발견케 하신 것입니다.

제 58 과 바울의 항해 과정 (행 27:1-44)

 

이 말씀에는 바울사도가 죄수(피의자)의 몸으로 다른 죄수들과 함께 로마로 호송되는 과정에서 지중해를 항해하는 중 큰 풍랑을 만났으나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① 1-12절까지는 “출발 후 뵈닉스까지의 순탄한 항해”요 ② 13절-42절까지는 “멜리데 섬까지 가는 중에 풍랑을 만난 기록”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제목을 “바울의 항해 과정”이라고 정할 수 있습니다.

1. 출발 후 뵈닉스까지의 순탄한 항해에 대하여(1-12절)

1) 출발지는 가이사랴였고 바울과 다른 죄수 몇 사람을 “아구사도”대(군부대 이름)의 백부장 “율리오”에게 맡겨 호송하게 하였으며 율리오에게는 상당수의 군인들이 함께 하였습니다(42절).

2) 로마까지 가는데는 지중해와 이오니안해와 타이레디안해를 항해하여야 하는데 직경 거리는 약 2,300Km가 되지만 북쪽의 시돈항을 거쳐 루기아의 무라성과 그레데섬을 통과하는 길로 갔기 때문에 직경 거리보다 훨씬 먼 여행임을 알 수 있습니다.

3) 그 당시 가이사랴에서 떠나는 “아드라뭇데노”(항구이름을 배이름으로 일컬음)란 배가 아시아 해변 각처를 경유하여야 하므로 함께 타고 갈 때에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행19:29, 골4:10, 몬24)도 함께 갔으며 출발 다음날 배가 시돈에 정박했을 때 호송자 율리오가 바울로 하여금 친구들의 대접을 받도록 허락한 일이 있었고(2-3절)

4) 또 시돈에서 출발하여 길리기아와 밤빌리아 앞바다를 지나 루기아의 “무라”성에 도착하였으며

5) “무라”성에서 이달리아로 가는 알렉산드리아(애굽의 항구이름) 배를 갈아타고 “니도” 맞은편에 이르렀을 때 풍세가 심하여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섬 남쪽 해안을 의지하고 항선하여 간신히 “미항”에 도착한 것입니다. 혹 풍세가 좋았다면 그레데섬 북쪽해안으로 직행하였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지도를 보시면 항해여정을 밝히 아실 수 있습니다. 꼭 참고 하십시요.

6) “그레데”섬의 미항에서 여러 날 머물러 금식하는 절기를 보냈는데(9절) 이 금식의 절기는 그 배에 탄 유대인들이 대속죄일을 지킨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레16:29). 대속죄일이 유대력으로는 7월 10일이지만 양력으로는 10월에 해당하며 그때는 바다의 풍세가 시작되는 시기로 항해하는 배들이 기상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따라서 미항에서 여러 날 머문 이유는 선원들이 풍세를 감안하기 위함이었고 또 그 일로 정박한 기회에 유대인들은 금식의 절기를 보냈다고 할 수 있습니다.

7) 따라서 행선하는데 위험이 따르므로 바울사도는 “이번 행선이 화물과 배에 많은 손해가 있음은 물론 생명에도 타격이 있을 것인즉(10절) 속히 떠나지 않는 것이 좋다”(21절) 하였지만 인솔자 백부장은 “바울의 말보다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더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그 항구에서는 과동하기에 불편한 점이 있어서 과동에 편리한 뵈닉스항으로 가자는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라 출발하였습니다. 그래서 행선하는 북쪽의 “라세아”항을 지나고 그레데 섬 서남쪽에 있는 뵈닉스항을 향하여 가는 중에(12절) 남풍이 순하게 불므로 그 바람을 이용하여 서북쪽의 목적지로 빨리 가기 위하여 닻을 감고 계속 행선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 살펴야 할 일은 ① 12절에서 “뵈닉스”항구가 “한편은 동북을, 한편은 동남을 향한 항구”라 하였는데 원문상으로는 서남(λίβα; 리바), 서북(κολον; 코론)으로 되어 있으며 ② 그 배가 뵈닉스에 정박을 하였는가?에 대하여 12절, 13절을 보면 “상륙하였다”는 말씀은 없고 “닻을 감았다”는 말씀만 있으므로 그 항구 앞바다에 잠시 정박하였다가 남풍이 순하게 불므로 오래 머물지 않은채 출발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2. 멜리데 섬에 도착하기까지 풍랑을 만난 기록(13-42절).

1) 뵈닉스항을 떠나 얼마 못 가서 “유라굴로”(동풍, 동북풍을 뜻함)란 광풍이 대작하여 방향을 따라 갈 수 없이 되었고 바람에 쫓겨 “가우다”(뵈닉스남쪽의 작은섬)섬 아래로 지날 때 거루를 끌어올리고 줄로 선체를 감고 스르디스(얕은 바다에 깔린 모래섬)에 걸리지 않도록 연장(돛)을 내리고 쫓기다가 이튿날 사공들이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짐을 버렸고 사흘째는 배의 기구(생활도구)를 버렸으며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않고 풍랑만 대작하여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다고 하였습니다.

2) 여러 사람이 오래 먹지 못하여 어려움이 계속 되었을 때 바울이 말하기를 “그레데에서 떠나지 않으므로 이런 타격과 손상을 면하였더면 좋을 뻔하였으나 지난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 곁에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 하셨으니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될 것을 믿는고로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해가 없고 오직 배만 파손될 것이요 우리가 한 섬에 걸릴 것인즉 이제는 안심하라”(21-26절)고 권면을 한 것입니다.

“함께 행선하는 자를 다 네게 주셨다”는 뜻은 “사명의 사람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그와 함께 탄 다른 사람들도 보호를 받는다”는 뜻입니다(창18:32). 사명자 곁에 있으면 덕을 봅니다.

3) 뵈닉스를 떠난지 14일째 되는 날 밤에 아드리아 바다(현재는 이오니안 해로 구분이 되었지만 옛날에는 아드리아해로 통칭하였음)로 쫓길 때 사공들이 어떤 육지에 가까워짐을 짐작하였고(27절) 바다의 깊이가 20길, 15길로 얕아지는 것을 확인한 후(28절) 암초에 걸릴 것을 우려하여 고물(배 뒷편)에 닻을 내려 날이 새기까지 기다리다가 사공들이 이물(배 앞쪽)에서 닻을 주려는 체하며 거루를 내려 자기들만 도망하려는 것을 바울이 보고(29-30절) 백부장과 군사들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들이 배에 있지 않으면 너희가 구원을 얻지 못하리라”하니 군사들이 즉시 거루줄을 끊어 버렸으니 군인들은 그때부터 바울의 말을 더 신임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11절,21절).

4) 날이 새었을 때 바울이 여러 사람들에게 “먹지 못하고 주린지가 14일인즉 음식을 먹으라”하였으니 그 동안 풍랑으로 인하여 건강의 문제와 죽음을 두려워한 마음의 불안 등으로 먹지 못한 것을 위로할 때 “한 생명의 머리털 하나도 잃을 자가 없다”하고 떡을 놓고 축사한 후 음식을 권하니 다 안심하고 음식을 먹었으며 그 배에 탄 사람들의 수는 276명이었다고 하였습니다(33절-37절).

5) 음식을 먹은 후 또 밀(짐)을 버려 배를 가볍게 한즉 날이 새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으나 경사진 해안이 보이므로 그곳으로 향할 것을 의논한 다음 닻줄을 끊어 버리고 킷줄을 늦춘 후 돛을 달아 해안을 향해 오다가 두 물이 합하는 곳에서 배가 걸리며 이물은 얕은 땅에 부딪혀 고정되고 고물을 큰 물결에 부딪혀 깨지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닻을 끊은 것은 속히 해변에 대기 위함이요 킷줄을 늦춘 것은 키를 걸어서 방향을 잡기 위함이었을 것입니다.

6) 배가 해변 가까운 곳까지 와서 깨진즉 군사들은 죄수들이 도망할 것을 우려하여 “저희를 죽이는 것이 좋다”하였으나 백부장은 바울을 구원하기 위하여 군사들의 뜻을 막고 헤엄을 치던지 널조각을 의지하여 모든 사람들을 상륙하게 한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말씀은 사실을 기록한 소설같은 내용이지만 여기에서 성도가 신앙적으로 깨달아야 할 것이 많습니다.

① 하나님이 바울을 가이사 앞에 서도록 인도하시는 섭리와(24절) ② 백부장이 복음사역자의 말을 경홀히 듣다가 실패한 점(11,21절) ③ 남풍이 순하게 분다하여 그것을 평안의 징조로 아는 어리석음과(13절) ④ 주님은 항상 바울 곁에 계셨고 위급할 때 평안의 말씀을 주신 점과(23,24절) ⑥ 바울은 “주님의 약속이 그대로 되리라”는 확고하게 믿은 것과(25절) ⑦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275명도 함께 살려주신 일이며 ⑧ 백부장 율리오가 바울을 살리기 위하여 죄수들을 죽이지 못하게 한 점과(42-43절) ⑨ 뵈닉스에서 잘못 출발한 것과 군사들이 거룻줄을 끊은 것(32절)은 결단의 잘잘못을 유의하게 하는 교훈이 되는 것입니다.

제 59 과 멜리데 섬에서 로마에 도착함 (행 28:1-15)

 

풍랑에서 구원받은 일행이 “멜리데”섬에서 30여일을 유한 후 그곳을 떠나 로마로 향한 내용이 이 말씀에 기록되었기로 제목을 “멜리데 섬에서 로마에 도착함”이라고 정하였습니다.

본문을 구분하면 ① 1절-2절은 “멜리데 섬에서 토인들의 영접을 받은 내용”이요 ② 3절-6절은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해를 받지 않은 내용”이며 ③ 7절-10절은 “그 곳의 높은 사람인 보블리오의 영접을 받고 그 부친의 병을 고쳐줌”에 대한 내용이요 ④ 11절-15절은 “멜리데 섬을 30여일만에 떠나는 내용”입니다.

1. 멜리데 섬에서 토인들의 영접을 받음에 대하여(1-2절)

1) 풍랑에서 구원받게 된 섬 이름은 “멜리데”였습니다. 이 “멜리데”섬은 이태리 남쪽에 있는 큰 섬 시칠리아(시실리)에서 남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작은 섬으로 현재 영국의 영지라고 합니다(1절).

2) 그곳에 사는 토인들이 풍랑에서 구조된 일행들에게 특별한 동정을 하여 추운 날씨에 불을 피워주며 영접하였습니다(2절).

2. 바울이 독사에 물렸으나 해를 받지 않음에 대하여(3-6절)

1) 바울이 불을 쪼이다가 나무 한 단을 불에 넣었는데 그 속에 있던 독사가 뜨거움을 피하여 밖으로 나와 바울의 손을 물었고 바울은 자기의 손을 물고 매달린 뱀을 그대로 불에 떨어버렸습니다(3,5절).

2) 토인들은 그 독사(짐승; 4절,5절)가 바울의 손을 문채 매달린 상태를 보고 바울을 살인자로 여기며 “저가 바다에서는 구원을 얻었으나 신의 공의가 그를 살지 못하게 한다”하면서 죽을 줄로 알았는데 바울이 의연히 뱀을 불에 떨구고 상함이 없음을 보자 생각을 바꾸어 신이라고 하였습니다.

3) 그곳 토인들에게도 신에 대한 믿음과 신이 공의로운 심판을 하는 줄로 아는 신앙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은 자연숭배적 신앙이었을 것입니다.

4) 그런데 4절,5절에서 독사(에키드나;ἒχιδνα)를 “짐승”이라고 표현한 것은 번역상 어색한 점이 있으나 “데리온(θηρίον)”이란 말이 맹수, 야수, 짐승을 뜻하는 말이기 때문에 크게 잘못된 번역은 아닌 것 같습니다. 다만 그 당시에 독사도 맹수, 야수종류에 포함하여 호칭하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보블리오”의 영접을 받고 그의 부친의 병을 고쳐줌에 대하여(7-10절)

1) “보블리오”는 “그 섬에서 제일 높은 사람”(7절)이라 하였은즉 촌장쯤 될 것이요 그가 그 근처에 토지가 있어서 식생활이 넉넉한 지라 조난 당한 276명의 불청객들을 영접하여 3일이나 유숙을 시킨 것은 큰 봉사였습니다(7절).

2) 마침 그의 부친이 이질과 열병에 걸려 누운 것을 보고 바울이 기도하고 안수하여 낫게 하였습니다. 여기의 기도는 신앙적 부탁의 표현이고 안수는 육체적 안위의 표현입니다. 그리고 병이 낫게 된 것은 기도에 의한 하나님의 비상섭리의 응답입니다(8절).

3) 이 사실이 알려지자 그 섬 안의 다른 병자들도 와서 바울의 기도로 고침을 받으니 이로 인하여 바울과 일행들에게 후한 대접을 하였고 떠날 때에 필요한 용품까지 제공을 하였습니다(9절-10절).

4. 멜리데 섬을 석달만에 떠나는 내용입니다(11절-15절).

1) 11절에 보시면 “석달 후에 그 섬에서 과동한 알렉산드리아 배를 타고 떠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① 여기에 “석달 후”는 바울 일행이 멜리데 섬에 도착한때부터 떠나게 된 기간이기 때문에(9-10절) 보블리오의 집에서 유숙한 3일이(7절) 그 기간에 포함된 것이고 ② 알렉산드리아 배가 멜리데섬에서 상당기간 과동한 것은 겨울의 장기적인 세찬 바람을 피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 배의 기호(이름)은 “디오스구로”였습니다. 이 말은 “신원을 보호해 주는 수호신의 이름”이라고 합니다(11절).

2) 그 배가 출발하여 로마영지인 시칠리아섬 동남쪽 항구인 “수라구사”에 도착하였고(12절) 그곳에서 3일을 머문 후 거기서 둘러가서(바람을 측면으로 받아 돌아 간 듯 함) “레기온”에 이르러 하루를 지난 후 남풍이 일어나므로 그 이튿날 “보디올”에 이르니 그곳과 로마시와 의 거리는 약 200Km 상간입니다(13절).

3) 이곳에 이른즉 믿음의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청함을 받아 7일을 유하다가 육로로 “압비오”와 삼관을 거쳐 로마로 가게 된 것입니다(14절).

4) 7일을 지난 후 “압비오”와 “삼관”에 간즉 믿음의 형제들이 바울사도의 온다는 소식을 듣고 맞으러 나와서 바울이 저희를 보고 하나님께 감사한 후 담대한 마음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죄수를 호송할 때 결박하는 것이 상례이지만(행26:29,28:20) 풍랑의 위험을 받으며 먼 여행을 하는 터라 도망의 우려가 없을 때는 상당한 자유를 줄 수 있는 재량이 호송자에게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행27:3,28:7-8,30-31).

5) 또 15절에서 압비오와 삼관까지 마중 나온 형제들을 보고 바울이 담대한 마음을 얻은 것은 사명과 기도의 협력자들을 만났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 있는 권속들이 바울이 올 것을 미리 알게 된 것은 바울의 호송이 많이 지연되는 사이에 다른 교통의 편의로 먼저 로마에 간 식구들이 그 소식을 전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하나님은 역경 중에서도 인도하셨으며 또 역경중에서 필요한 능력을 주신 것과(7-8절) 또 역경 중에서 협력하는 성도들을 만나게 하시므로 위로와 담대함을 갖게 하신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제 60 과 바울사도의 로마생활 (행 28:16-31)

 

이 말씀은 사도행전 마지막 부분으로 바울사도의 초기 로마생활을 기록한 말씀입니다.

1) 바울은 로마에 도착하자 쇠사슬에 매임을 받고(20절) 한 군사의 감시를 받으며 따로 감금되어 있었습니다(16절). 이 감금이란 오늘의 감옥처럼 폐쇠된 감옥이 아니고 상당한 자연공간과 집이 있으며 면회를 통하여 사람들을 교제할 수 있도록 허용된 상태였습니다. 오늘의 가택연금이나 옛날에 귀양가는 죄수를 위리안치하는 속박과 비슷한 것입니다(16절).

2) 로마에 도착한지 3일 후에 바울이 유대인중 높은 사람들을 청하여 모인 자리에서 “자신은 이스라엘 백성이요 조상의 규모(신앙생활에 관한 규례)를 배척한 일이 없는데 예루살렘에서(유대인들의 송사로) 로마인의 손에 죄수로 내어준바 되었고 로마인(유대총독 재판관)은 죽일 죄목을 찾지 못하여 놓으려 하였으나 유대인들이 죽이기를 꾀하므로 가이사황제에게 호소(상소)하여 온 것일뿐 민족을 송사하려 함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17-19절).

① 바울이 이 말을 한 이유는 이스라엘 한민족간의 송사로 오해를 받지 않고 유대인들과 교제하며 전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송사자가 유대인이므로 바울이 무죄석방이 되면 송사자들이 무고죄로 피소자가 될 수도 있지만 바울은 자신의 결백을 변호하고 복음을 전함에만 목적이 있음을 피력한 것입니다(고전6:6-8).

② 바울이 로마에 도착하였을 때 로마지역에서 성도들이 영접을 나온 것은 바울의 선교여정과 관계없이 로마에 복음이 전파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 오순절 당시에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가 있었다”하였고(행2:10) ㉡ 브리스길라 내외가 복음의 사신으로 이미 로마에 거주한 일이 있었으며(행18:2) ㉢ 바울이 1,2,3차 다른 지역으로 전도를 다닐 때 로마는 정치적 중심지이므로 복음이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통하여 충분히 전파될 수 있었습니다.

③ 또 바울은 20절에서 “이스라엘의 소망을 인하여 내가 이 쇠사슬에 매인바 되었다”고 하셨는데 여기의 “이스라엘의 소망”이란 부활, 영생을 뜻하는 것입니다(행26:23,6-8).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메시야와 그의 부활을 증언한 것 때문에 송사를 받고 결박되었다는 뜻입니다.

3) 이 말을 들은 유대인들은 “바울에 대하여 어떤 편지도 받은 일이 없고 또 형제 중 아무도 바울의 좋지 않은 것을 고한 자가 없다”고 하면서 바울의 신앙사상을 듣기를 원하였습니다(21-22절). 그래서 바울은 일자를 정하고 그의 우거하는 집(감옥형태로 구별한 처소)에 많이 모이게 하여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나님나라를 증거하고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말을 가지고 예수의 일로 권하였으니(23절) 여기의 ① 하나님 나라는 성도가 예수님을 모시고 사는 신앙생활과 교회생활을 비롯하여 영원한 내세의 천국을 소개함이요 ② “율법과 선지자의 글”은 구약전부를 일컫는 말로서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에 대한 소개를 증언한 것이며 ③ “예수의 일”이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증언하는 복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재판받을 때를 기다리며 감금된 상태에서도 여전히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4) 그때에 믿는 사람도 있고 믿지 않는 사람도 있어서 서로 엇갈리는 형태로 흩어지는 결과가 나왔습니다(24절). 바울의 복음을 들은 사람들은 다 유대인들이요(17절) 구약적인 유대종교를 가진 사람들이었지만 복음의 소개를 받을 때 그 복음을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믿고 예수님을 메시야로 영접하는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유대종교를 그대로 고수함)로 나누어져서 흩어진 것입니다. 이때에 바울은 이미 이사야선지자가 사6:9-10에서 예언한 말씀을 인용하여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도무지 깨닫지 못하며 보기는 보아도 도무지 알지 못하는도다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로는 둔하게 듣고 그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아와 나의 고침을 받을까 함이라”하신 말씀대로 응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상에서 말씀한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의 취지는 ① 하나님이 “징계를 받는 백성들의 심령을 어둡게 하여 은혜와 진리를 깨닫지 못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② 그와 같이 바울의 복음을 믿지 않는 유대인들도 하나님의 징계아래 있거나 아니면 비택자들이기 때문에 복음을 받지 못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의 구원을 이방인에게로 보내신줄 알라 저희는 또한 들을 것이라”(28절)고 하였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우선적으로 전도하였은즉 다음에는 이방인들이 전도를 받을 차례라는 것입니다(마13:11,15:24-28).

5) 29절이 없는 이유는 가장 오래된 헬라어 사본에 없기 때문이나, 그 후에 나타난 사본들에는 각주에 기록된 글처럼 “저가 이 말을 마칠 때에 유대인들이 서로 쟁론하며 물러가더라”는 내용이 있다고 합니다(여기에 대하여 없는 사본과 있는 사본을 실예로 들어 합리적 설명을 할만한 자료를 찾지 못하였으므로 독자들의 연구를 기대합니다). 말씀을 전달하시는 성령님께서는 확실한 내용을 주셨지만 후시대에 인간의 실수로 사본상의 착오를 일으킨 것이요 이것이 진리를 훼손시키는 근거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6) “바울은 2년을 자기 셋집에 유하며 자기에게 찾아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고 담대히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며 예수님에 관한 것을 가르치되 금하는 자가 없었다”하셨으니(30-31절) ① 재판 결과를 얻기까지 2년간을 기다린 것인지 혹 그전에 석방되어 자유로운 몸으로 거처하며 전도한 것인지는 확실히 알 수는 없으며 “자기 셋집을 얻은 것”으로 보면 상당한 자유를 허용받은 것이 사실이나 ② 다니면서 전도하지 않고 자기에게 오는 사람을 다 영접하여 복음을 전하고 가르친 것을 보면 감금(제한)의 상태가 계속된 것 같기도 한 것입니다. ③ 그리고 그 당시에는 복음의 반대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7) 마지막으로 저희들은 바울의 마지막 생애에 대하여 궁금함을 느끼게 됩니다.

① 바울은 분명히 처음에 로마에서 재판을 받았을 때는 석방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 이유는 바울이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말씀을 주신 “로마서”가(롬1:7) 주후 56년경 “아가야”지방에서 보내신 것인데(롬16:1) 그 내용의 인사말씀에서 이미 로마에 계실 때 함께 사역한 동역자들에게 문안하는 내용이 있기 때문이요(롬16:3-16) 또 디모데후서는 바울사도가 로마감옥에서 기록하여 보내신 것인데(딤후2:9,4:6,9-13) 딤후1:16,17에 보시면 바울이 로마에 계실 때 “디모데가 자기의 쇠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지런히 찾아주었다”하시므로 먼저 있었던 감금생활과 다음에 있었던 감금생활을 구별하여 나타내 주셨습니다(히13:23 참고).

② 따라서 바울은 1차 석방 후에 여러 곳에 다니시면서 자기 생애가 끝나는 시기까지 복음사역에 힘쓰셨습니다. 바울의 마지막 생애의 기록이 디모데후서 4:6-18에 나타난 것을 보면 바울의 복음사역이 승리로 끝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전설에 의하여 바울사도는 주후 설교64년-68년경 네로의 박해 때 순교당하셨다고 합니다.

이상의 말씀에서 복음은 그 어떤 경우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전파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 하나님이 쓰시는 사역자도 하나님이 선택하신 목적에 따라 쓰실만큼 끝까지 쓰시고 그의 생명을 취하여 가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여 저를 그렇게 쓰시옵소서.

사도행전 강론을 마치면서 마지막으로 생각나는 말씀은 딤후2:9의 “복음을 인하여 내가 죄인과 같이 매이는 데까지 고난을 받았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매이지 않았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핍박중에서도 진리는 전파되었습니다. 저희들은 진리전파에 담대하여야 할 것입니다. 특히 좋은 반응이 없는 말씀도 증거되어야 할 것이요, 감취어진 말씀이 없어야 함은 물론 증언자들이 증언의 불성실함이나 어떤 인간적, 현세적 이권에 의하여 이용하는 말씀이 되지 않도록 증언하여야 할 것입니다(빌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