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신자들이 더 각별히 성의를 기울여 이 기록을 읽도록 하기 위하여 본서에서 얼마나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는가를 간단히 지적해 두는 것이 적절할 것입니다.
1. 칼빈은 사도행전 첫 주제 설정부터 삼위 일체 신론적이고 동시에 교회론적 입니다.
1) 세속 저작자들은 이 기록을 가장 높이 찬양하려고 본서를 \"생명의 여교사\"합니다. 그런데 만일에 그 가운데 보여진 사건들의 이야기가 사람들의 행위에 관련해서 무엇을 피해야 한다든지 또는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한다든지 하는 것을 단순히 경계하는 것 같은 이야기가 되어서 그런 호칭이 적합한 것처럼 된다면 사람들의 마음과 같은 신성한 기록에 대해서는 도대체 어떻게 말하면 좋을 것인가? 를 생각해야 합니다.
그 신성한 기록들은 사람의 외적 생활이 그 미덕 때문에 찬양되도록 규제하고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훨씬 더 높이 평가되어야만 할 사실들을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는 처음부터 자기 교회를 소중하게 여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의지하고 자기를 믿는 자들에게는 언제나 수호자가 되어 주셨습니다.
또 비참한 죄인들에게는 자비로우시고 은혜로우신 분이신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 말씀들은 우리에게 신앙을 가르쳐 주고 우리를 하늘보다 높이 들어 올려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반섭리에 대한 세속 저작자들의 칭찬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말씀은 위선적인 거짓 의식과 진정한 하나님 예배 식별을 가르칩니다.
또 그 말씀은 빠짐없이 선과 악을 넉넉히 판별하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현재로는 이 신성한 말씀들 가운데 보편적인 방식으로 기록되어 있는 서술을 되풀이 할 생각은 없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연구하려고 착수한 이 책에서 특별한 것만 지적하려 할 뿐입니다.
2) 본서에서 성령에 감동된 누가는 우리에게 매우 유익한 몇가지 큰일들을 제시합니다.
누가는 먼저 성령이 사도들에게 보내어졌다고 설명합니다.
성령강림은 그리스도께서 약속을 충실히 수행하신 신실하신 분이신 사실을 밝혀줍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 사랑하는 자들을 기억하신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 그리스도 자신이 교회의 영원한 지배자가 되신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주의 성령께서는 바로 그런 목적 때문에 강림하셨습니다.
그런 사실 이후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공간적인 거리에도 불구하고 약속하신 말씀 그대로 언제나 자기 사랑하는 자들과 함께 계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통치의 시초 이를테면 이 세계의 신생의 사실이 여기에 묘사되었습니다.
비록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친히 가르치신 일을 통하여 이미 얼마간 교회를 모으시기는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들이 위로부터 새로운 힘으로 무장되어서 \"대 목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이제까지 방황하고 길을 잃었던 모든 사람들을 인도하셔서 모두 한 무리 가운데 모으시기 위하여 죽으시고 또 부활하셨다\" 고 선포하기까지는 적절하게 확립된 교회 형태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심으로서 자신이 하늘과 땅의 대 주제이신 사실을 나타내신 후에 교회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발전되었는가 를 본 사도행전으로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2. 칼빈의 사도행전 주제 설정 두 번째는 복음전파의 온 세계적 확산과 사단의 복음전파 방해와 그 극복에 대해서입니다.
1) 본서에는 그리스도의 놀라우신 능력과 복음 자체의 효능과 세력이 함께 나타납니다.
비록 사단이 사방에서 온갖 노력으로 방해해도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말씀만으로 신분이 비천하고 명망도 없는 사람들을 통하여 그처럼 용이하게 전 세계를 자기에게 복종케 하심으로서 자신의 거룩한 능력의 명확한 증거를 굳게 세우셨습니다.
또한 복음이 전 세계의 저항을 받으면서도 감연히 전진했습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 도저히 복종치 않을 것처럼 보였던 모든 사람들이 큰 영광을 돌리며 돌아오는 것을 볼 때 우리는 거기에서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발견합니다.
소수이고 이름도 없는 하찮은 사람들이 온 세상 사람들의 거센 소요를 대항하여 성취한 업적은 마치 하나님이 하늘에서 천둥을 울리게 하신 것보다 더 훌륭한 사실입니다.
2)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단이 맹렬하게 그리스도의 왕국을 타도하고 그 자리에 앉으려 하는 일 없이 그리스도의 왕국은 결코 확립되지 않는다고 성령께서 알려 주십니다.
또 사단이 숙적으로 그리스도를 저항하고 또 동일한 격분에 사로잡힌 거의 전 세계가 전력을 기울여 그리스도의 통치를 허용하지 않으려 한다는 사실을 여기서 배웁니다.
더욱이 악한 자들이 이처럼 복음에 대항하여 떠들어대며 발광할 때 저들이야말로 사단의 깃발 아래서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합니다.
저들은 사단의 흉계로 그러한 광적인 소요를 피우고 있다는 사실이 확실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가 여러 곳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그 수많은 큰 소동, 수많은 적의에 찬 음모, 악한 자들의 파렴치한 수단, 그것들이 복음의 진로를 방해하려고 일어난 것이라는 사실을 보도해 주는 까닭이 바로 거기 있습니다.
결국 그리스도의 사도들이 실제 경험에서 복음은 불이요, 검이라는 사실을 간파한 것처럼 그 사도들의 발견에서 우리는 무엇인가를 배워야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사탄의 굽히지 않는 악한 의도에서나 인간의 운명적인 완악함에서나 복음은 언제나 많은 공격과 고난 속에서 시달리게 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그러한 상황은 무서운 소동을 빚어내게 된다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3. 칼빈의 사도행전 주제 설정 세 번째는 복음 전파의 소명을 받은 사도들과 복음 증거자들과 온 교회가 어떻게 그 소임을 다 하는가 입니다.
1) 한편으로 성령에 감동된 누가는 사도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명령으로 깨달은 그 소임을 용기와 끝까지 인내하는 성품으로 수행한 사실을 우리에게 말씀해 줍니다.
누가는 어떻게 그들이 절조(節操)를 지켜서 무수한 짜증과 염증과 욕된 일들을 꿀꺽꿀꺽 삼켰는지 어떻게 잔악한 박해의 풍랑을 견디었는지 결국 그들이 어떻게 갖가지 욕설과 어려움을 조용히 감내하였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참으로 이러한 사례를 통하여 우리는 주와 주의 뜻을 따르는 자들의 인내를 배웁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일찍이 복음은 십자가를 동반한다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우리가 교회의 상황이란 이 세상에서 언제나 평화롭고 번영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공허한 희망으로 자신을 속일만한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역시 그런 유사한 일들에 대응할 준비를 가져야 합니다.
2) 그러나 사도행전에서 하나님이 친히 택하시고 부르신 자들에게 큰 위로도 주십니다.
하나님이 일찍 자신의 교회를 많은 고난과 핍박 중에서 기적적으로 구해 주셨습니다.
오늘도 꼭 같이 우리를 붙드시고 도와 주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대단한 위로입니다. 사실상 교회가 계속 죽음에 둘러싸여 있을 때에 오직 하나님의 손에서만 교회가 보호를 받는다는 사실을 이 책 전체가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 자신이 교회의 안전을 가져오시는 비범하신 섭리를 우리 눈앞에 보여주십니다.
4. 칼빈의 사도행전 주제 설정 네 번째는 사도들과 복음 증거자들의 설교입니다.
본서에는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선포한 몇 개의 설교가 있습니다.
그 설교들은 하나님의 긍휼, 그리스도의 은혜, 참으로 복된 영원한 생명에 대한 소망, 하나님께 대한 기원, 회개와 하나님 경외, 하늘의 가르침의 주요한 요점을 말씀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교 신앙의 참된 본질을 그 밖에 다른 곳에서 구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5. 칼빈의 사도행전 주제설정 다섯 번째는 이 책을 주신 목적과 이 책의 귀중성입니다
현 시점에서 그 건전하고 순수한 가르침의 해석을 제쳐놓더라도, 그리스도 교회의 시발은 어떠했는가, 사도들은 어떤 모양으로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던가,
그들은 어떤 성공을 거두었던가, 그리고 그들은 동시에 어떤 싸움을 싸워야 했는가,
또 그들은 그렇게 많은 장애물 가운데 어떻게 열심히, 또 절도 있게 계속 전진했는가?
그들은 십자가의 치욕 밑에서 어떻게 훌륭하게 이 세상 모든 자랑을 극복하였는가?
또 살아 계신 하나님은 어떻게 가지 가지 놀랄만한 방식으로 그들을 도우셨는가?
이러한 사실을 참으로 아는 것이 우리에게 특별히 가치 있고 유익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특별히 우리에게 가장 적절한 책이라고 말해야 옳습니다.
만일 이 책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이러한 위대한 일들에 대한 지식은 아주 매장되어 버리거나 어두움 속에 덮혀 버리거나 혹은 의심가운데 싸여 버렸을 것입니다.
사단이 사도들이 행한 일에 대하여 기록한 것은 거짓말로 꾸며진 것 외에는 아무것도 남아있는 것이란 없다고 속여서 사도들이 말씀한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사단이 결국에는 신자들의 마음에서부터 사도들 당시의 모든 기억들을 말살시키려고 온 힘을 기울인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당시에도 사단이 일부 광적인 몽상가들과 교활한 냉소자들을 선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가명으로 기분 나쁜 조작된 말을 퍼뜨려서 어리석게도 신빙성 있는 참된 역사의 권위를 빼앗아 버립니다.
그리하여 리노의 이름 밑에서 유포된 바울이나 베드로의 이야기를 실은 책자에도 그러한 불유쾌한 장송가(葬送歌)들이 들어 있습니다.
거기에는 일부 고의적으로 불경한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만들려고 하거나 선한 사람들을 짜증나게 하려고 만들어진 일들이 있습니다.
또 거기에는 베드로와 요술쟁이 시몬의 가공적인 논쟁이 우스꽝스럽게 만들어져 있어서 그리스도교의 명예를 손상시킵니다.
\"클레멘트의 인가(認可)와 공의회\"라는 제목의 책자 서론, 또 그라티아누스의 서사시에 인용된 문서에 대해서도 동일한 판단이 성립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간과하면 안됩니다.
그 악한 자들은 옛 사람의 이름을 들어 인용함으로서 무지한 사람들을 기만합니다.
마치 그것들이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이기나 한 듯이 이 악한 자들은 그것을 거만하고 뻔뻔스럽게 자랑합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 모든 것들은 고약한 장송곡들 일 뿐입니다.
사단은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로 우리가 확신을 갖지 못하게 거짓말을 해 왔습니다 그래서 만일 이 누가의 기록이 우리들에게 존재하지 않았더라면 주님의 행적이 하나님의 작정의 실행인 경륜의 성격으로 남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승천하신 뒤에 땅 위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의 아무런 성과도 남겨 놓으시지 못했다고 생각될 것입니다.
앞서 말한 모든 것은 그리스도의 육체와 함께 사라져 버렸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셔서 하늘 영광 가운데로 받아지셔서 세상을 통치하시고 계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못할 것입니다.
또 복음의 가르침이 비록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쳐서 사도들로부터 우리에게까지 전달됐어도 그 모든 것이 사도들의 봉사를 통해서 공포됐다는 사실은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또한 그 사도들은 우리들의 신앙이 확고한 하나님의 진리에 기초되도록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도록 성령으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지 못할 뻔했습니다.
성 삼위 일체 성령 하나님이 이 책의 원저작자이십니다.
이 책이 성령으로부터 발원된 이상 이 문제들에 대해 우리의 의심을 해소시켜 줍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제 다시 한번 서론 형식으로 정당하게 말한 바를 확인합니다.
그러므로 주 자신과 함께 주신 이 책을 큰 보화로 여겨야 된다고 우리는 주장합니다.
6. 특별히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덧붙입니다.
곧 열왕기상 8장 56절에 \"그 종 모세를 통하여 무릇 말씀하신 그 모든 좋은 약속이 하나도 이루어지지 아니함이 없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마치 구약 역사의 전반부에서 조상들이 받은 언약을 구약 역사의 후반부에서 확증해 주듯이 신약 역사의 후반부에 해당하는 사도행전은 이처럼 전반부인 그리스도의 지상 사역과 후반부인 그리스도의 천상사역, 이 두 부분은 서로 확증하며 예증합니다(행5:42, 13:47-52, 26:16-23, 28:23-31).
사도행전 1장 강해
행1:1-2 데오빌로여
본문은 누가를 통해서 먼저 기록한 책, 곧 누가복음의 내용을 간략하게 말씀합니다.
1. 본문 1절은 \"데오빌로여 내가 먼저 쓴 글에는 무릇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입니다.
1)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승천하신 후에 일어난 일들을 서술하려고 먼저 번 책에서 다룬 일들을 나중의 책에 계속시키기 위해서 먼저 번 것을 요약합니다.
이 먼저번 것은 그리스도의 복음 행적을 간결하게 서술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앞선 것은 주님께서 지상에 계실 때에 행하시고 가르치신 일들의 기록입니다.
그런데 먼저 거룩한 삶이 그리스도에게 있었고, 그 후에 가르치심이 있었다고 하는 것은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 그리스도에 대한 누가의 지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참으로 선하고 고귀한 교사의 길은 먼저 말보다도 그 생활자체가 말해야 하는 것처럼 방정해야만 한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교사는 연극 배우와 조금도 다를 것이 없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한 그의 복음 거의 끝 부분에서 말씀한 바 같이(눅24:19) 그리스도는 말과 일에서 능력 있는 선지자였다는 사실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그리스도가 말씀에서와 같이 행사에서도 매우 뛰어나셨다는 말씀입니다.
이 양자 사이에는 별로 차이가 없습니다.
본 절 앞 부분에서 찬양되고 있는 행사의 능력이 기적에 속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행한다\'는 말씀은 훨씬 포괄적인 적응력을 가집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선교활동을 하시던 시기에 모든 능력 있는 사역을 포함합니다.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자리를 점령하는 것이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었습니다.
그 까닭은 메시아의 임무가 가르침에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시는 자시요, 그 백성의 구속주시요, 하나님 나라의 회복자시요, 그리고 영원한 지복(至福)의 창시자이셔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일들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신 메시아의 약속으로 전승되어 온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러한 일을 그 메시야에게 기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2) 이제 우리들에게는 그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로부터 위탁받은 전권대사의 역할을 온 인류에게 수행하셨습니다.
또 메시아에게 요망될 수 있었던 모든 일을 실제로 성취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복음의 대 요지는 두 가지입니다.
곧 그 첫째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입니다.
또 그 둘째는 그리스도의 행위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나라를 주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진노를 유화 시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피로써 자신의 택하신 자들의 죄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죽으심으로 죽음과 악마를 극복하셨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진정한 자유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정의와 생명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행하시고 말씀하신 모든 것이 확실하여 인준 받은 것과 같이 되기 위하여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기적으로서 증거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 \'행한다\' 는 말씀은 그 의미가 기적으로 확대됩니다.
그러나 그 \'행한다\'는 말씀은 기적에만 한정시킬 수는 없습니다.
3) 교훈은 끊어질 수 없는 거룩한 끈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교훈에 대한 언급이 있을 때마다 우리는 거기에 증표로서 그리스도께서 하신 일을 첨가해야 합니다.
교훈의 진리는 그 분이 행하신 것으로서 확인되는 것이요, 또 교훈의 효과는 그 분이 행하신 것으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한편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에게 유익하게 되고 또 그리스도의 기적이 그 효과를 보유하게 되기 위하여 우리는 말씀하신 분의 말씀에 유의해야 합니다.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친히 머리되시는 교회의 참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4) 본 절에 \"예수의 행하시며 가르치시기를 시작하심부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그 모든 것\' 을 말하기보다는 오히려 \'그 모든 사실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많은 행사와 가르치심을 어느 정도까지는 다루기 가능할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을 완전한 서술을 하려고 해서 전체를 다 말하기로 한다면 그것은 너무 엄청난 부담이 될 것입니다.
사도요한이 말한 대로 이 세계도 그 책을 소장하기에 넉넉하지 못할 것입니다(요21:25)
누가가 그리스도의 행적을 처음부터 쓰기 시작했다고 말한 점도 주목해야 합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리스도의 탄생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 후에 즉시 그분의 열두 살 되셨을 때로 비약하였습니다.
그리고 당시 성전에서 하셨던 그분의 토론에 대해서 간단히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그 후 18년 간에 대해서는 한마디의 언급도 없이 지나버립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리스도의 언행에 관한 본연의 기록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5) 여기 사도행전에서도 누가는 우리들의 구원의 본질에 필요한 그리스도의 행하심과 그 분의 말씀만을 다루었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들과 같은 인간성을 가지시고 이 세상에 나타나신 때부터 새로운 임무를 아버지이신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30세 대에 이르기까지는 한 가정에서 사사롭게 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의 전반생(前半生)을 알려지지 않는 채로 남겨지기 바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의 신앙을 일으켜 주는 일들에 대한 지식이 우리에게는 보다 크게 중요시 되도록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먼저 쓴 글에 대한 제시는 누가가 새로운 주제로 기록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알립니다.
2. 본문 2절은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입니다.
1) 본 절 초에 \"그의 택하신 사도들에게 성령으로 명하시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를 통해서 말씀된 이 기록으로 우리에게 말씀 해 주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신 것은 우리를 향하신 그분의 관심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교회에 대한 영원한 지배를 성취하심으로서 우리의 구원을 준비하신 그분의 뜻을 증명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끝까지 능력으로 도와주시는 분이십니다.
또 실제로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직자들을 통해 자기 백성들과 함께 하시는 분이십니다
또 주님은 세상 끝까지 동행하신다는 자기 의사(意思)를 확증시켜 주셨습니다(마28:20).
그러므로 누가를 통해서 주의 성령께서는 자기 교회 지배의 준비가 완료되지 않고는 결코 예수께서 세상을 떠나시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에 관심을 가지신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엡 4장 10절에서 사도는 그리스도의 섭리에 대하여 분명히 유의하라고 말씀합니다.
거기서 사도는 \"만물을 충만케 하기 위하여 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로 주셨다\"고 말씀했습니다.
그러나 누가를 통해서 말씀한대로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사도들에게 주셨다는 명령이란 복음을 전파하는 일입니다.
그것은 마치 외교 사절들에게 자기들을 보내신 분의 뜻을 거슬려서 제멋대로 행동하지 않도록 어떤 지령을 주는 관례와 같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의 모든 직분들은 사도들이 준 가르침을 맡기기 위해서 세운 것입니다.
2) 이 사실이 더 분명하게 되기 위해서는 하나씩 하나씩 요점을 살필 필요가 있습니다.
(1) 첫째로 누가는 그들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택하심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들의 소명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누가가 여기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하여 말씀할 때에 그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간의 공적과 대비시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세워졌다는 사실과 외람되게 제멋대로 이 직무에 나아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유의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택함을 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의 의도는 사도들의 신적 소명을 우리들이 확신토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바로 우리가 사람에게 우리의 눈을 돌리지 아니하고 사도들을 부르신 하나님의 아들에게 주목할 것을 배우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나 교회 안에서 하나의 금언이어야 합니다.
아무도 교회 안에서는 그 영예를 자기 자신들을 위해 주장해서는 안됩니다.
(2) 둘째로 누가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명령과 훈계에서 자기들이 해야 할 것을 친히 배운 자들이라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들이 자신들이 꾸며낸 일을 주장한 것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주께서 그들에게 명령하신 것을 충실하게 가르친 것뿐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명령하신 것이 더한층 위대한 권위를 지닌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것은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한 것이라고 첨부합니다.
영원한 지혜이신 하나님의 아들은 어떤 다른 것에 지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아들도 사람이시기에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에게 전해 주신 가르침이 인간의 생각에서 왔다고 생각지 않게 누가는 특히 하나님의 권위 앞으로 우리를 이끌어갑니다 그와 같은 사실은 친히 주님 자신이 자주 주장하신 말씀과 같습니다.
주님 자신도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은 것이 아니면 가르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가르침이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복음의 선교에는 인간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합니다.
복음선교에는 전 세계가 따라야 할 성령의 거룩한 명령이 있을 따름이라 말씀합니다.
3) 본 절 후반에 \"승천하신 날까지의 일을 기록하였노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이 복음서 이야기의 결말입니다.
주께서 승천하신 것은 모든것을 충만케 하시기 위한 것으로 바울은 말씀합니다(엡4:10)
우리들의 신앙은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승천에서 다른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중요한 사실에 유의하는 것만으로 넉넉할 것입니다.
우리들의 죄와 죄책과 사망에 대한 속량은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께로 올라가신 바로 그 순간에 완전히 성취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그 기록을 여기까지 서술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행사에 관한 자기의 일을 완전히 수행한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승천\'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이 세상으로부터 떠나 가셨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주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승천하신 일이 조금도 장소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헛소리에 우리를 결코 동의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4) 우리는 신구약 성경 전체를 통합하여 \"삼위 일체 하나님의 자기 계시\" 라 합니다.
우리는 구약을 율법이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율법은 복음의 한 형식\"이라고 말합니다 동시에 우리는 \"복음은 율법의 한 형식\" 이라고도 말합니다.
그 복음의 요점은 주님의 행하심과 가르치심입니다.
여기에는 자기 택하신 자들에 대한 관심과 자신의 택하신 자들의 구원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이 일의 전파자로, 사도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목사와 교사로 세우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이 복음 전파의 책임을 삼위일체 성령께서 교회에 명하신 것입니다.
행1:3-5 해 받으신 후에
본문은 주님이 부활하신 후에 40일 동안 나타나셔서 가르치신 내용입니다.
1. 본문 3절은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 입니다.
1) 본문 3절 초에 \"해 받으신 후에 또한 저희에게 확실한 많은 증거로 친히 사심을 나타내사 사십일 동안 저희에게 보이시며\"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누가가 이 말을 첨가한 것은 그리스도 부활에 대한 신앙을 확립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반드시 알아야 할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없이는 복음이 전적으로 내던져지고 맙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무런 신앙도 남아 있지 않게 됩니다.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성령으로 사도들의 입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않고는 복음의 일체의 권위가 상실됩니다.
그것은 누가를 통하여 가장 중요시하는 사실입니다. 이 진리가 의심되지 않게 그 복음이 많은 증거로 승인됐다고 누가를 통해서 말씀합니다.
이 말을 에라스므스는 고대 로마 주석가들을 따라 \'논쟁\'(arguments)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확증\'(proofs)으로 번역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수사학> 제1권에서 부호(符號)의 필요한 요인이 되는 것을 이와 같은 말로 호칭했기 때문입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부활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게 하려고 필요한 확증을 얻을 만한 여러 분명한 증거로 그 일을 사도들에게 보이셨습니다.
누가는 거의 달포에 걸쳐서 사도들에게 가끔 나타나 보이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렇게 하신 것 외에는 그러한 증거, 즉 확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만일 사도들이 한번밖에 그리스도를 보지 못했다면 다소간 의혹을 품게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께서는 몇 차례나 나타나 보이셔서 의심할 여지를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이 지니고 있었던 어리석음이 그들의 선교의 확신을 손상시키지 않게 하려고 무지의 수치를 제거하셨습니다.
2) 본문 3절 끝에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시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사도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선교하는 직임을 맡기 전에 오직 한 분 스승에 의하여 매우 훌륭하게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입으로나 붓으로 하나님 나라를 공포한 것은 무엇이거나 그리스도께서 표명하신 말씀들이었습니다.
이제 이 말씀으로 누가는 복음의 가르침이 어떤 목적을 향하고 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통하셔야 한다 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시작은 중생(重生) 입니다.
그 중생의 결말과 완성은 가장 복된 영생입니다.
중생과 영생 사이에 있는 진보는 중생(重生)의 더 완전한 전진과 증진에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사항을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개조하셔서 새 생명을 주시기까지는 우리가 하나님 나라와 무관한 사람으로 출생되고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 우리의 육체, 그리고 사람의 본성 안에 있는 일체의 것은 하나님 나라에 대립된다고 우리는 적절하게 평가해야 합니다.
생래(生來)의 인간은 이 세상의 일로 온 마음이 점령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지복(至福)과 결정적인 선을 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 나라로부터 추방되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은 우리로부터 물러가 계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복음 선교로 장차 얻을 새 생명을 명상하도록 우리를 올려주십니다
그러기 위해 그리스도는 지상의 것을 사모하는 우리의 마음을 교정하고 개조하여 우리 육의 죄를 우리에게서 벗겨 주시면서 이 세상에서 우리를 분리시켜 주십니다(롬8:13).
그래서 육신을 따라 사는 사람은 누구나 다 영원한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들의 내적인 사람은 영적 생명 안에서 앞으로 나아가 새롭게 됨으로서 그만큼 한층 하나님 나라의 완성으로 더 가까이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나아가는 것은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결국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왕국의 국민이 되도록 우리를 지배하실 것을 원하십니다.
이로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주로 말씀하신 것이 인류의 타락, 우리가 예속되어 있는 죄의 횡포, 우리 모두가 관여되고 있는 영원한 죽음의 저주와 그 선고, 또한 구원을 다시 찾는 방도, 죄의 사면, 육체의 부인, 영적 의(義), 영원한 생명에의 소망, 그 밖의 이와 유사한 일들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우리가 만일 기독교의 바른 이해를 원한다면 이런 일들에 연구를 경주해야 됩니다.
2. 본문 4절은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입니다.
1) 본문 4절 초에 \"사도와 같이 모이사 저희에게 분부하여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주님의 제자들은 전부터 사도의 직무를 이행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 때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주를 따르도록 전파하는 일시적인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계실 때 제자들에게 명하신 \'가르치라\'는 명령은 이를테면 나중에 제자들이 수행해야 할 사도직의 준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마10:7).
그러나 당시에는 그 제자들이 정상하게 가르칠 그런 능력이 아직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전에는 정규임무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에게 군중들이 모여들도록 그 제자들은 자기 동족들의 관심을 일으켜 주는 전령자의 역할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부활 이후에 그 제자들은 가르침을 전 세계에 공포하기 위해 사도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을 사도로 임명하실 때 그 임무를 자제하라 명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제하도록 하신 것은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때에는 그 제자들이 잘 믿지 않았던 많은 증거들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었습니다
그 때에 그 제자들이 그처럼 완벽하게 받은 모든 가르침을 갑작스럽게 잊어버림으로써 그들은 영적으로 대단히 무지하다는 분명한 증거를 보여 주었습니다.
그 때에 그 제자들은 역시 영적 태만의 죄과를 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영적 태만의 죄가는 단지 그들에게 약속된 은혜를 갈망하도록 자극시키려는 의도에서 그 약속된 은혜를 지연시킴으로서 치유될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주된 이유는 주께서 성령을 보내 주실 특정한 시기를 미리 지정하셔서 그로서 그 기적이 우리의 눈에 보다 더 명확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2) 따라서 그리스도는 그 제자들에게 위탁하시려고 한 일들의 중대성을 그들에게 더 잘 보여주시기 위해 그들을 잠시동안 아무것도 시키지 않은 채 방치해 두신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시간이 경과해서 사도들이 적절히 준비되기까지는 복음의 진리를 전하려는 본격적 활동이 그들에게 금지되었다는 사실로 복음의 진리가 확실해집니다.
그 제자들은 모두 한 성령을 받아야 하기에 함께 있도록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제자들이 뿔뿔이 헤어져 있었다면 그들의 통일성이 분명히 보여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께 있어 한 성령을 받은 그 이후로는 그 제자들이 아무리 각처로 흩어져 갔을지라도 그들의 복음 전도는 똑같은 원천에서 받은 것이기에 마치 같은 입으로 말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2:3)고 한 예언이 성취되기 위하여 그 제자들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복음의 선교를 시작하여야 했던 것은 적합한 일이었습니다.
\'모인다\'는 말의 원어 쉰알리조에노스( )는 분사형(分詞形)으로 여러 형으로 번역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므스의 번역이 옳게 보입니다.
\'함께 모인다\' 는 뜻이 전후 문맥에 가장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4절 끝은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 입니다.
(1) 얼마 안 있어서 이 세상을 그리스도의 지배 하에 복종시키는 일을 할 사람들은 먼저 자신들이 복종하는 일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일을 하거나 휴식을 취하거나 그것이 오직 주님의 기뻐하시는 뜻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자기들의 시범으로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과 그분의 지휘 밑에서 우리의 전 생애를 싸움에 바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어느 지휘관이 자기 군대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것보다 적은 권력을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군대의 규율이 아무도 지휘관의 명령이 없이는 움직이지 못한다고 되어 있는 이상 우리도 주께서 명령을 내리시기까지는 앞으로 나아가거나 무슨 일을 시도하거나 시행하는 일이 합당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께서 퇴각 나팔을 울리신다면 즉시로 우리는 전진을 멈춰야만 합니다.
여기 서술된 것같이 우리는 소망을 통해서 하나님의 은사에 참여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소망의 성격에 대해서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이 제 마음에 내키는 대로 경솔하게 만들어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하나님의 약속에 근거를 둔 것이어야 참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에게 자기들 스스로가 좋아하는 것을 바라보도록 허용하지 않으시고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이라는 점을 분명히 첨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더구나 그리스도 우리 주님 자신이 그 일의 증인이 되셨습니다.
우리는 비록 지옥의 전체 군세가 일어나 우리를 대항해 온다고 하더라도 성령의 조명과 감화로 \"우리는 하나님만을 신뢰한다\"고 하는 확고한 부동의 신념을 가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을 통해서는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안다\" 고 말씀했습니다(딤후1:12).
여기서 사도는 요한복음 14장 16-17절에 기록된 말씀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저는 진리의 영이라\" 하신 말씀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2) 또 \"내가 아직 너희와 함께 있어서 이 말을 너희에게 하였거니와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요14:25-26)
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요15:26)
또 \"내가 가면 보혜사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요16:7-8).
또 훨씬 이전에 그리스도께서는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는 말씀도 하셨습니다(요7:38).
3. 본문 5절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 입니다.
1) 본문 5절 상반은 \"요한은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의 말을 가지고 자신의 사도들에게 되풀이해 주셨습니다.
그 사도들 중의 어떤 이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전해 주는 세례요한의 말을 직접 그 입에서 들은 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다\"는 말씀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세례 요한을 통해서 말씀하게 하신 바가 사실이라는 것을 그들이 참으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렇게 선언하신 것은 앞선 문장을 확증하는데 크게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논증이 그리스도의 직분에서 끌어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세례 요한으로서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그 직능을 완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에게 맡겨진 사역은 성령으로 주시는 세례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분의 임무를 수행하셔야 됩니다.
그 임무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에게 명령하셨고 그 일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 일을 수행하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 중생의 은총에 대하여 이야기되는 일들을 성령이 가시적(可視的)으로 보내신 것에 한정시킨다면 그것은 그릇된 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불의 혀 모양으로 성령을 보내셨을 때에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사도들에게 이 성령을 주신 일이 있으셨습니다.
또 날마다 택함을 받은 자에게 성령의 세례를 주십니다.
그러나 그처럼 놀라운 모습으로 성령을 보내셨다는 사실은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그의 택하신 자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숨은 은혜의 표징이었습니다.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이 은혜와 세례 요한의 증언을 일치시키신 일은 적절한 일입니다
사도들이 자기 자신들만을 위해 성령을 받은 것이 아니요 모든 신자들의 유익을 위해 받았다는 사실 이외에 그 성령의 은사를 그리스도께서 넘치도록 부어주셨을 때에 거기에는 교회에 대한 그리스도의 보편적인 은사가 역시 거울 속에 비치듯이 보여집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의 택하신 자들에게 날마다 세례를 베푸심에도 불구하고 이 기념할 만한 증거를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밝혀 주셨습니다.
사도들이 세례요한으로부터는 단서(端緖)만을 받았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단서가 공허한 것이 아니고 이제 그 세례의 완성이 가까왔다는 사실을 그 사도들은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구절과 다른 유사한 구절에서 흔히 끌어낸 결론을 가지고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 사이에 차이가 있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경솔한 일입니다.
여기에는 세례에 대한 쟁점이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단순히 요한과 그리스도의 인물의 비교가 있을 따름입니다.
세례 요한이 \"나는 물로 세례를 준다\" 고 말했을 때 그것은 요한의 세례가 무엇이라는 것을 설명한 것이 아니요, 세례 요한 그 자신이 누구인가를 말한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자기의 것인 것처럼 하지 않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오늘도 목사와 교사들은 자기 자신들에 대해서 말할 때에 자기들이 세례에서 밝혀주는 모든 것의 찬사는 그리스도에게 돌려질 것이요 세례의 외부적 집례 이외에는 아무 것도 자기들에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말해야만 합니다.
세례가 죄를 씻음이요(딛3:5) 중생의 놋대야요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됨에 참여하는 일이요(롬6:4) 그리스도의 몸에 접붙이는 일의 예전으로 표제가 붙어질 때에는 그것은 단순히 외부적인 표적의 집행자인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차라리 그 표적을 유효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하신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인간에게 부여함으로서 그리스도에게로부터 빼앗지 않도록 언제나 그 구별을 지켜야 됩니다.
다만 여기서는 왜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세례요한의 이름을 들먹이셨을까 를 물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분명한 것은 요한이 자신을 물로 세례를 주는 자라고 말하고 그리스도를 성령의 세례를 주시는 분으로 설명하고 있는 점입니다.
둘째로 요한 자신은 쇄해야 하고, 그리스도는 흥해야 하는 그 사실이 마땅하기 때문입니다.
세째는 사도들 가운데서 요한이 이제까지 과대한 존경을 받았다면 그로 인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은 어느 정도 흐려지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들을 자신의 곁으로 불러모으시기 위하여 너희는 세례요한에게서 외부적인 세례를 받았을 따름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시면서 동시에 그들이 약속을 의심치 않게 그 제자들의 마음을 확고히 하셨습니다
그 제자들이야말로 세례요한을 크게 존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제자들이 요한의 손에서 받은 세례가 헛되지 않다는 사실을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가 세례의 효력과 결과를 그리스도에게서 찾아야 한다면 세례요한이 예시한 세례의 완성을 사도들이 기대하는 일은 분명히 옳았습니다.
(2) 우리는 사람의 손에 의해 받은 물세례가 무효가 아니라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도록 명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이 맡으신 부분, 즉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외적인 표적으로부터 내적인 효력에 이르는 참된 관련을 끌어냅니다.
그렇지만 표적에 대해서나 교직자에 대해서나 필요 이상의 것을 부여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 표적에서 그리스도에게 속한 약속을 기대하며 유일한 은혜의 창조주로서 그리스도를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게 돌려야 할 영예는 조금도 침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서 여기에 언급된 우리들의 세례의 열매를 기대해야 합니다.
2) 본문 5절 하반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 하셨느니라\"입니다.
여기서 \"몇 날이 못되어\" 이루리라고 하신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기대의 날짜를 빠르게 하십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으심은 이러한 고귀한 열매를 조속한 시일 안에 맺게 될 것이므로 슬퍼할 필요가 없어졌다는 말씀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리고 또한 그리스도와 요한과의 대비가 완전하게 되도록 하기 위해 \'세례\'라는 용어가 여기서 보통의 의미와는 다른 의미로 사용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행위의 법을 설명한 후에 \'신앙\'이라는 말 대신에 \'신앙의 법\'이라는 말을 사용해서 다른 면으로 병행어로 대비시켰습니다(롬3:27).
행1:6-8 저희가 모였을 때에
본문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40일 동안 계실 때에 가르치신 내용으로 제자들의 물음에 답하신 말씀입니다.
1. 본문 6절은 \"저희가 모였을 때에 예수께 묻자와 가로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 하니\" 입니다.
사도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이 질문이 나왔다고 누가는 지적합니다.
그것은 한 두 사람만의 어리석음을 통하여 이런 질문이 생겨진 것이 아니요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다는 사실을 알려줍니다.
그들은 삼년의 세월에 걸쳐 그처럼 완전하고 조심스럽게 가르침을 받았으면서도 마치 그들은 한 마디도 듣지 못한 것 같은 무지를 폭로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나 그들이 놀랄 만큼 어리석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이 질문 안에는 말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과오가 들어 있습니다.
그들은 그 왕국에 관해 묻고 있지만 그것은 지상의 왕국을 꿈꾸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지상 왕국이란 부와 사치와 외부적 평화 또 그와 유사한 복된 사항에 의존합니다.
그들이 현재를 왕국을 회복할 시기로 정할 경우에 그들은 싸우지 않고도 승리를 기뻐하려고 열망한 것입니다.
그들이 임명받은 일에 손도 대기 전에 일의 대가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동족 이스라엘에 한정시킴으로서 과오를 범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땅 끝까지에 그 범위를 넓히지 않으면 안 되는 나라입니다.
또한 이 전체 질문 안에는 필요 이상으로 알고 싶어하는 결점이 있습니다.
그들은 다윗의 왕국의 회복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말한 바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일에 대해서 하신 말씀을 그들은 가끔 들어 왔었기 때문입니다.
국민의 비참한 포로의 상황 속에서 각 사람의 심령이 장차 다가올 왕국의 희망으로 소생되었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하는 이야기였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오심으로서 왕국의 회복이 성취된다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다시 살아 나오신 것을 보았을 때 즉각적으로 이 일을 생각하게 된 것은 그러한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러는 가운데서 그들은 그처럼 좋으신 스승 밑에서 별로 진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을 표명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는 간결한 대답으로 그들의 잘못을 하나하나 견책하십니다.
본 절에서 \'회복\'이란 말이 사용되었는데 그것은 많은 피해로 파괴되고 망가뜨려진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이새의 마른 그루터기에서 한 가지가 돋아나야 하기 때문입니다.
또 처참하게 무너진 다윗의 장막이 다시 일어나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7절은 \"가라사대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 입니다.
이것은 전체 질문에 대한 전반적인 책망입니다.
주께서 숨겨두시기 원하신 것을 알려고 원한 것은 그들의 불법한 주제넘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는 것은 재빨리 배워야 합니다.
또 우리에게 알리시지 않고 숨겨두시기를 원하시는 일들은 기꺼이 알려고 하지 않은 채 그대로 두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지혜를 얻는 참된 길입니다.
그러나 어리석고 헛된 호기심은 거의 우리 모두가 천성적으로 지니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억측이 재빨리 첨가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런 두 가지 결점을 시정시켜 주시는 주의 훈계를 준수해야 합니다.
우리는 주께서 의도하신 바를 파악키 위해 하나로 연결시켜 놓으신 두 분을 이해해야 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시기와 계절에 관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 밖의 사건에서도 동일한 원리를 적용한 것으로 보아 우리는 여기서 보편적인 교훈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것을 우리가 만족하고 그가 계시하시지 않는 것에 대한 질문은 비합법적인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 두 극단 사이의 진정한 길입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자기들의 형편없는 무지를 은폐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숨은 신비는 건드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들의 전체 종교신앙이 하나님의 숨은 신비와는 전혀 별개의 것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숨은 신비를 전적으로 회피하여야 한다면 그리스도도 그의 복음도 우리가 멀리하지 않으면 안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방안(方案)을 찾아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의 주제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만큼 배우려고 열망해야 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주께서 숨겨두시려고 원하시는 것을 알아내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리해야 우리는 지혜로우면서도 절도가 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마땅히 알아야 할 한도를 넘어 더 알려 하는 어리석은 욕망으로 마음이 어지럽게 될 때마다 주께서 말씀하신 \"너희의 알 바 아니다\"라는 말씀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원하시지 않는 일과 명하시지 않는 일을 가지고 애타하지 않는 이상, 이 말씀은 우리의 분방한 마음의 본성을 억제하기에 넉넉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시간과 계절을 미리 알려는 일에 관해서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계시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 한, 정죄하시지는 않습니다.
그것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라고 한 부분인데 원문에는 후반부에 기록되었습니다. 과연 하나님은 겨울과 여름 또 그 밖의 연중 계절, 추위와 더위, 고른 일기와 불순한 일기를 다 자신의 권한 아래 두셨다는 것(창1:14)은 확실합니다.
그렇지만 계절의 진행은 변치 않는다고 약속(창8:2)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이미 사람들에게 계시하신 사실들까지 자신의 권한 아래 두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철학자들이나 농부들이 자기들의 숙련기술이나 학문이나 판단력이나 경험에 의하여 이해하는 일들은 하나님께서 어떤 의미로는 그들의 손에 맡겨두신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의 그것들을 자신에게 맡겨두셨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예언자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견해를 우리는 가져야 합니다.
그들의 역할은 하나님께서 계시하시는 사항을 아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 시기가 올 것인가의 비밀한 과정에는 모르는 채로 있어야 합니다.
이 분야에서 과분한 관심과 호기심처럼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게 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장차 올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비추어서 우리의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장래의 결과를 어둠 속에 두십니다.
그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여기에서 긴장관계가 전개되는데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게 속한 일들, 이를테면 미래의 사건들을 지배하시고 움직이시는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께 맡기려고 하지 않고 우리 스스로가 생소하고도 괴로움을 주는 고민 속에 개입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 일들을 우리들이 가로채는 일을 금하십니다. 그런 일들 가운데는 우리의 생각과는 위배되고 우리 마음의 이해력을 초월한 하나님 자신이 기뻐하시는 대로 지배하려고 하시는 일들이 있는데 그것들을 우리가 미리 알려고 하는 일입니다.
3. 본문 8절은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1) 본문 8절 초에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는 말씀에서는 그들의 호기심을 억제하는 최선의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하나님의 약속과 명령으로 이끄십니다.
호기심은 보통 나태에서 혹은 불신에서 생겨납니다.
불신은 하나님의 약속을 명상하는 것으로 치료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 자신을 극복해야 하는가를 알려줍니다.
또 주의 명령은 어떻게 우리의 의무를 이행해야 하는가를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약속을 끈기 있게 기다리면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명하신 임무를 성실하게 이행할 것을 지시하십니다.
한편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아직 성령을 받고 있지 않았으면서도 성령에게 속한 특별한 은사를 너무도 조급하게 성취하려고 한 사실을 책망하십니다.
그들은 싸움터에 나가도록 소명되었으면서도 안일하게 누워서 어려움을 피하려고만 하는 잘못된 길을 걷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권능을 받고\"라고 말씀하심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적당한 시기가 오기 전에는 할 수 없는 일을 추구하지 않도록 그들의 연약함을 충고하십니다.
그것은 두 가지 중 어느 하나로 읽을 수 있습니다.
즉 \"너희가 성령의 권능을 받을 것이다\" 혹은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실 때 너희가 권능을 받을 것이다\"
어쨌든 후자의 경우가 적당합니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실때까지 그들 자신의 결함을 그편이 잘 나타내 주기 때문입니다
2) 본문 8절 중간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에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의 가르침을 전 세계에 전하는 일을 제자들에게 임명하실 때에 그것은 하루아침에 되어질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는 그들이 이스라엘에 대해 가지고 있는 잘못된 견해를 간접적으로 논박하셨습니다.
그들은 육체적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인 자만이 이스라엘 백성이라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위치상으로는 유대의 이웃이면서도 시야로는 멀리 떨어져 있는 사마리아도 역시 그들이 거두어 들여야 할 곳으로 증언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밖에 멀리 떨어져 있어서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다른 종교의 백성들도 동일한 은혜에 참여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백성으로 반드시 모여져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을 분리시킨 수렁이 얼마나 큰가는 잘 알려진 일입니다(요4:9).
그리스도께서는 그 분리의 장벽이 무너지고 그리스도의 제자들이 그들을 한 몸으로 만들어서(엡2:14) 그리스도의 왕국이 도처에 세워지도록 명령하십니다.
제자들이 경험한 가장 악의에 찬 적들이 가득한 예루살렘, 즉 유대의 지명을 주께서 말씀하심으로 그들에게 고난과 어려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조급한 승리를 생각하지 않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처럼 많고 포악한 적들의 앞으로 나아가서 그들의 분노를 일으켜야 하는 일은 그들에게 있어서 조금도 두려움을 주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을 우선적으로 지정하십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을 장자로 보신 것입니다(출4:22).
그러면서도 일찌기 구원의 소망에서 소외되었던 모든 국민을 차별 없이 부르십니다.
이로써 우리는 복음이 도처에서 그리스도의 명령을 따라 전파되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것이 마침내 우리들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을 알게 됩니다(엡2:7).
3) 본문 8절 끝에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는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선언으로 두 가지 잘못을 시정하십니다.
(1) 첫째 주께서는 그들이 승리를 희망하기 전에 싸워야 한다는 것을 보여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국 성격이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그가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신 말씀은 농부는 수확을 거두어들이기 전에 일해야 한다는 뜻입니다(딤후 2:6).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제 장차 올 생명의 상태에 대해서 쓸데없는 공론을 하는 대신에 차라리 현재로는 하나님 나라에 도달하는 그 길에 우리의 관심을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올리어질 때에 그들이 받을 미래의 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하지만 그들이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 가야 할 길은 유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세상을 단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즐기게 될 장래의 생명의 성격에 대해서 추론하지만 한편 그들은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기 위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로 생각을 기울이지 않습니다(딤후2:11).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진 일에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
모두 다 그리스도의 깃발아래서 용감하게 싸워야 합니다.
우리가 부르심을 받은 그 길을 따라서 우리 모두 장부답게 끊임없이 전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하면 하나님께서는 적당한 때에 열매를 맺게 하실 것입니다.
(2) 둘째로 \"너희가 내 증인이 되리라\"고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셨을 때에 또 하나의 정정이 따릅니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이 지상의 왕국에 대해서 품고 있는 그릇된 생각을 뽑아 버리려고 하신 것입니다.
이를테면 주께서 몇 마디로 지적하신 것처럼 그 나라는 복음 선교에서 성립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세상의 부, 쾌락, 권력, 그밖의 세상에 속한것을 꿈꾸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 선교를 통하여 이 세상을 자기에게 굴복시키실 때에 그리스도는 세상을 통치하신다고 그들은 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는 이 세상 방식과는 달리 영적으로 지배하신다는 말이 됩니다.
사도들이 현세적인 나라를 마음에 품게 된 것은 그들의 전 국민이 공통으로 지녔던 잘못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그들이 모두 이 점에 있어서 그릇되었다 하더라도 그것은 놀랄 만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력이라는 규범에 그것을 맞추어 볼 때 어떻게 그것이 야비하고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고 우리가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까?
그래서 우리는 짐승처럼 육체가 원하는 방향으로 우리 감성이 우리를 이끌어 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잡힐 수 있는 현실에 매달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천년 왕국설 신봉자들도 똑같은 과오에 떨어진 것을 알고 있습니다.
천년왕국 신봉자들은 그리스도께서 땅 위에서 천년동안 지배하신다고 믿는 이들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왕국을 현세의 왕국들의 모습으로 상징적으로 묘사한 여러 예언들을 가장 육체에 적합하도록 적응시킨 것입니다.
그것은 실상 그들의 마음을 보다 높은 것들로 끌어올리려는 하나님의 목적이었습니다.
우리들에게 있어서는 똑같은 잘못에 빠지지 않도록 전파된 복음을 듣는데 마음을 기울여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배려(配慮)하는 길을 배워야 합니다.
행1:9-11 이 말씀을 마치시고
본문에서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9절은 \"이 말씀을 마치시고 저희 보는 데서 올리워 가시니 구름이 저를 가리워 보이지 않게 하더라\" 입니다.
1) 주의 승천에서 우리가 어떤 이익을 얻는 것은 \'기독교 강요\'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승천은 우리 신앙의 주요 조항의 하나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는 이를 입증하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실상 주님 자신이 그 사실을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확증하십니다.
그처럼 공공연히 하늘로 오르시고 그 밖의 상황으로 그 확실성을 확증하신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몰래 가만히 사라지셨다면 제자들은 정말로 이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어디서든지 바라볼 수 있는 높은 장소에 서서 그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그분께서 또 방금까지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그분이 하늘로 올리워지시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들의 눈이 그리스도의 모습을 구름에 가리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주시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승천하신 사실을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었습니다.
천사들도 나타나 그 일을 증언해 주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이 세계의 아무데서도 그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이야기는 우리 자신을 위해 조심스럽게 기록돼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의 영광으로 들어가시게 되기 전에 구름이 가리워져서 사람들이 시야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자들이 자기들의 보아온 것으로 만족하고 그 이상 더 알아보려고 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한 것 같습니다.
우리도 역시 그들에게서 우리의 마음도 그리스도의 영광의 최고 지점에까지는 올라갈 만한 능력이 없다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구름이야말로 지난날 율법시대에 장막 문 앞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연기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주제넘음을 억제하는 수단이 되게 해야 합니다.
2. 본문 10절은 \"올라가실 때에 제자들이 자세히 하늘을 쳐다보고 있는데 흰옷 입은 두 사람이 저희 곁에 서서\" 입니다.
누가는 천사들을 사람으로 호칭하는데 그들이 사람의 형태로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이 사람의 형체를 가지고 있는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사람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런 환유(換喩)는 성경, 특히 모세의 제1권에 자주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이상 그 일에 대해서 꾸물거릴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입은 흰옷이란 특별한 구별과 권위의 표시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으로서 그들을 보통 사람들과 구별지으려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제자들도 그들의 하는 말에 좀더 귀를 기울이게 하기 위한 것이요, 또 오늘 우리들도 그 환상을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셨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3. 본문 11절은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 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입니다.
1) 11절 초두는 \"가로되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입니다. 우리는 \'천사들이 마치 사도들을 미련하고 우둔한 자들로 여겨 그것을 책망할 양으로 그들을 경멸해서 이런 호칭을 사용했다\' 고 생각하는 사람들과는 견해를 같이 하지 않습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와는 반대로 이제까지 본 일도 없는 천사들이 사도들에게 친히 잘 아는 자들에게처럼 말을 걸어왔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에게 더 관심을 가지고 듣게 한 호칭이었다고 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하늘을 쳐다본 일 때문에 당치않은 책망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늘이 아닌 어디 다른데서 찾을 것입니까?
성경은 거듭거듭 우리를 그렇게 하도록 권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런 의문에 대한 대답은 그들이 하늘을 쳐다본 것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이 아니요 다만 구름이 그들 사이를 가로막아 육체적 감각으로는 그를 볼 수 없게 됐을 때에 그들은 그를 육안으로 보려고 했기 때문에 책망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시기 위하여 다시 강림하시기까지 하늘에 오르사 거기에 계시게 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가 곧 돌아오셔서 그리스도를 눈으로 다시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구절에서 배워야 할 것은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우리가 그리스도를 찾아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더구나 이 세상에서 육체적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기를 바라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배워야 합니다.
이 두 가지 욕망중의 어느 것에라도 매달리는 사람은 흔히 그리스도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가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놀라움 때문에 책망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역사 하시는 일의 위대함에 놀라서 어리둥절하게 되는 경우가 있듯이 그 사실의 신기함에 경탄했지만 그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중간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이 구절은 두 분으로 성립되었습니다.
첫부분은 사도들이 그리스도께서 땅으로 돌아오시기로 갈망하지 않도록 그분께서는 하늘로 올리워지셨다는 사실이요, 둘째 부분은 그리스도의 재림에 관해 위로의 형식으로 즉시 첨가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 하나로 결합되어 있는 양 부분에서 또 하나 하나의 각 부분에서 우리는 떡과 포도주의 상징 안에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임재하신다고 생각하는 교황제도주의자들이나 그 밖의 모든 자들을 논박하기 위한 확고한 논증을 끌어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리우셨다고 말해졌을 때 확실히 공간이 지적되기 때문입니다.
\'하늘\' 이라는 말이 여러 가지 의미로 이해된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때로는 창공으로 때로는 전체 공간으로 때로는 하나님은 온 세상에 충만하시지만 하나님의 존엄이 그 고유한 자리를 소유하는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로 이해됩니다.
그런 이유로 해서 바울은 그리스도를 모든 하늘 위에 모셨습니다(엡1:21).
그분께서는 전체 세계 위에 계시고, 또 복된 불멸의 거주지에서 최고의 자리를 차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머리가 되셔서 주관하시는 그 모든 천사들보다 탁월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떠나 계시지 않는다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또 \'하늘\'이라는 말로 세상으로부터의 분리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아무리 많은 항변을 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올리워지신 그 \'하늘\'은 이 세계의 구조와 대치되어 있는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게 된다는 일은 이 세계의 밖에 계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2) 그러나 우선 그 천사들의 목적이 무엇이었나를 우리는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야 그 말의 의미하는 바를 보다 완전히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천사들은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를 갈망하는 마음에서 탈피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목적 때문에 그들이 말하기를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을 심판하려 오시기까지는 다시 오시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제자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곧 돌아오시리라고 헛되이 기다리지 않도록 그 시기를 지정해 주는 목적입니다.
이러한 말들이 그리스도께서 육체적으로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지적하는 말이라고 누가 깨닫지 못할 것입니까?
그리스도를 세상에 모시고 싶어하는 일이 우리에게 금지되어 있다는 사실을 누가 모를 수 있을 것입니까?
그 당시에는 그리스도께서 보이는 모습으로 오실 것이었지만 이제는 날마다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오신다고 말할 때 그것은 하나의 속임수의 궤변으로서 이를 회피하려고 생각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께서 임재하시는 형식이 아닙니다.
다만 사도들은 그리스도께서 마지막 날에 나타나실 때까지 하늘에 그대로 계셔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침 받고 있는 것 뿐 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적인 임재를 바라는 일은 어리석고 그릇된 일로 비난되고 있습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성례전에서 육체적 모습으로는 임재하시지 않지만 그의 영광의 몸은 초자연적 방식으로 또는 기적적으로 현존하신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에 관한 그들의 꾸며낸 일을 천박하고도 유치한 것이라고 거부합니다.
그들은 성경적인 아무런 근거 없이 자기들 나름대로 기적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부활하신 후 제자들과 더불어 말씀하실 때 이미 영광의 몸이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상하고 신비한 능력을 통하여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천사들은 그 후에 그러한 모양으로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날까지는 사람들에게 다시 오실 것을 바라는 마음을 우리에게 금지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천사들의 명령을 따라서 우리 자신들의 발명품으로 그리스도를 하늘로부터 끌어내리려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이요,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손이나 혹은 우리의 눈 이외의 다른 감각기관에 편재(遍在)되실 것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몸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무한하다고 말하는 그들의 주장은 하나의 어리석은 꿈입니다.
그리고 그런 주장도 어려움 없이 거부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기쁜 마음으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즉 그리스도는 모든 것을 채우시기 위하여 승천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육체의 본질로서가 아니요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멀리 어디에서든지 충만하시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말씀 안에서 또는 성례전 안에서 우리와 함께 현존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그의 살과 피를 받는 자는 누구나 참으로 그리스도의 육체와 피에 참여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의심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이 참여는 교황제도주의자들의 헛소리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들은 누마폼필리우스(Numa Pompilius)가 자기의 쥬피터 엘리시우스(Jupiter Elicius)를 불러 내리고 혹은 마녀들이 자기들의 마법으로 하늘로부터 달을 불러 떨어뜨리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그런 방식으로 제단 위에 초치(招致)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성만찬에서 우리에게 떡을 주시는 일로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통하여 생명을 받게 하시려고 우리를 하늘로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가 그것에 의하여 우리에게 생명을 주려고 우리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요,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힘을 우리에게도 전입시키시는 것입니다.
2) 본 절 끝은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하였느니라\" 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리라는 것을 알게 될 때에 그리스도를 잃은 슬픔이 누그러져서 아주 제거됩니다.
그리스도의 오심의 목적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속죄주로 오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를 그 자신과 함께 복된 영생을 누리게 하시려고 곁에 모이게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호머(Homer)가 생각해 낸 신들이 단순히 자신들의 열락에만 관심 있는 것처럼 하늘에서 아무 하는 일없이 놀고 계신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혜택 없이는 다시 나타나시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대망하는 일편단심만이 한편으로는 우리들의 끈질긴 육체적 욕망을 억제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대망 하는 일이야말로 모든 역경 가운데서 우리의 인내심을 뒷받침해 줍니다.
역시 우리의 권태로운 심정을 유화시켜 주는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러한 대망은 그리스도를 속죄주로 신봉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효과를 나타내 줍니다.
부도덕한 사람들에게는 이런 기다림이야말로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올 따름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것을 들을 때 두려움이 엄습할 것입니다.
지금은 저들이 아무리 조롱할지라도 현재 그리스도의 말씀에 저들이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심판의 자리에 앉아 계신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행1:12-14 제자들이
누가는 제자들과 성도들이 예루살렘 지역 한 다락에서 기도에 힘쓴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12절은 \"제자들이 감람원이라 하는 산으로부터 예루살렘에 돌아오니 이 산은 예루살렘에서 가까워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길이라\" 입니다.
누가는 또 하나의 사건으로 이야기를 옮겨가기 위하여 사도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다함께 한 건물에 속한 한 방에 머물렀다는 사실을 이야기합니다.
그 방이란 그 집의 상층부분으로서 셋방으로 빌려준 것이었습니다.
그 집의 가장 편리한 부분은 집주인이 사용하려고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표현은 사도들이 옹색한 지역에서 제한된 형편에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러한 불편 때문에 그들은 갈라져서 사는 일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서로 헤어져서 좀더 편리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터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성령을 받게 되기까지에는 헤어져서는 안되었습니다.
장소의 거리관계를 기록한 것은 이 이야기의 신빙성을 더해줍니다.
그렇지 않다면 누가는 \'그들은 그 집이 비록 자기들의 수효에 알맞게 크지 못하고 비좁아서 불편을 느꼈으며 상당한 소음의 시끄러움도 일어났을 것이지만 같은 한 집에 그들이 함께 돌아와 함께 생활하는데서 위험의 두려움으로 놀라게 되지는 않았다\' 는 사실을 지적하려고 한 듯합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 란 2마일(약 3.2킬로미터)였습니다.
이 계산을 요한복음 11장 18절에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리쯤 되매\'한 것과 일치합니다. \'오리쯤\'은 약 3000미터입니다.
감람산은 베다니 곁에 위치합니다.
\"안식일에 가기 알맞은 거리\"는 율법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요 율법에는 단순히 주께서 안식일에 쉴 것을 명하신 것 뿐 입니다(렘17:24).
그러나 유대인들은 안식일에도 자기들 자신의 업무로 인한 바쁨에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성문에서 무거운 짐을 지고 시달리는 모습을 주께서 보시고 친히 탄식하신 것을 우리가 본 것처럼(렘17:24) 그러한 무질서를 억제하려는 생각으로 안식일에는 아무도 2마일 이상을 여행하지 못하도록 제사장들의 공동협의회에서 정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제롬은 알가시아(Algasia)에게 보낸 회신에서 이 계율은 아트리바(Attriba)와 시몬 헬리(Simon Heli) 두 랍비에게서 유래되었다고 말했습니다.
2. 본문 13절은 \"들어가 저희 유하는 다락에 올라가니 베드로, 요한, 야고보, 안드레와 빌립, 도마와 바돌로매, 마태와 및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세롯인 시몬, 야고보의 아들 유다가 다 거기 있어\" 입니다.
1) \"저희 유하는 다락\"을 혹자는 \'저들이 계속 체류하고 있었던 곳\'으로 번역합니다.
그들이 거기에 거주하는 일에 아주 익숙해져 있었던 같이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들이 그 시기에 그 세낸 방을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은 성령이 그들에게 강림하셔야 할 바로 그 때까지 였다고 생각합니다.
2) 교황주의자들은 거기 베드로의 이름이 첫 번째 지명되기에 우위성을 추론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우스꽝스러운 일에 불과합니다.
비록 베드로가 열 두 사람들 중에 우두머리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것은 베드로가 전 세계의 지배자가 되었다는 것은 아닙니다.
베드로가 그 명단에 이름이 첫 번째에 기록되었다는 이유로 사도들의 우두머리였다고 한다면 그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모친께서는 그 이름이 여기 맨 나중에 기록되었으니 다른 여인들보다 열등하였다고 하는 말이 됩니다.
이것은 그들까지도 인정할 수 없는 일일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도 우스꽝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이제까지 한 것과 같이 그 교황권을 모든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만들지 않고자 한다면 그러한 유치한 일로 교황권을 장식하는 일을 중지해야만 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다음 가는 교회의 또 하나의 우두머리가 있다는 것을 성경에서 증명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는 그들의 생각을 뒷받침해 줄 만한 한 구절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기저기 특정한 성구를 열심히 찾는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비록 어느 누구도 그들의 손에서 그것을 때려 부수지 않는다 해도 그것들이 스스로 그들의 손에서 떨어져 버릴 것입니다.
3) 그것은 그렇다 하고 누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는가를 고찰해 봅시다.
사도들은 그리스도를 배반했고 비열하게 이탈하여 각자가 두려움에 젖어 은신해 버렸던 까닭에 그들은 이탈자 또는 도망자들로 여김을 받기에 합당하였고 또 일체의 체면을 잃은 자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주의 뜻에 의해 다시 모여져서 그들의 본래 지위로 회복이 되도록 된 것을 우리가 알도록 하기 위해 누가는 그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합니다.
3. 본문 14절은 \"여자들과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 입니다.
1) 본문 14절 초 \"저들의 아내들과\"라는 말씀이 한글 개역 성경에는 \"여자들과\"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도를 추종하던 사람들을 가리킨 것으로 생각합니다.
누가가 사용한 말은 두 가지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고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누가가 그들의 아내들에 대해서 말했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 이유로 바울의 증언을 보면 그들이 나중에는 자기들의 아내들을 어디든지 데리고 다닌 습관이 있었다고 했습니다(고전9:5).
그러므로 당시에도 그들이 아내들과 떨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여행을 다니면서 아내를 데리고 자주자주 거처를 바꾸기 보다는 그 아내들과 함께 한 곳에 머무르는 편이 훨씬 쉬웠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곧 강림하실 성령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는 때에 그들이 아내들을 어떻게 이처럼 큰 은혜에 참여하지 않게 할 것입니까?
베드로의 아내는 바로 얼마 안되어서 그의 조력자가 되었습니다.
다른 아내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동일한 추측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여인들은 뒤떨어지지 않으려면 영웅적인 인내심과 견인성을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니 남편들이 성령의 능력을 기다리고 있었을 때 누가 어떻게 그녀들은 남편들로부터 떨어져 있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가 있을 것입니까?
그러나 만일 우리가 이 말의 일반적인 의미인 \'여인들\'로 읽기를 고집한다 해도 결혼한 부인들이 그 자리에 포함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봅니다.
어쨌든 누가는 그들의 전망이 어떻게 좋은 방향으로 크게 변화되었는가를 우리에게 겸해서 알려주고 싶은 것입니다.
전에는 남자들도 두려움과 당황 속에 거기서 도망쳤었습니다.
이제는 그 여인들까지도 그들과 함께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어떠한 위험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누가는 \"예수의 모친 마리아와\" 에서 그리스도의 어머니를 다른 여인들과 함께 포함시킵니다.
요한이 그녀를 자기 집에 모시도록 부탁 받았지만 그녀는 이 모임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 잠시동안만 전부 함께 모였었습니다.
그 후 그들은 각기 여기저기로 떠나간 것은 물론입니다.
3) \"예수의 아우들로 더불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아우들\' 이라는 말에 대해서 말한다면 포괄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그 말로 모든 친척을 가리키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입니다.
4) 그 다음에 \"마음을 같이 하여 전혀 기도에 힘쓰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누가는 여기서 그들이 성령강림을 기다리는 일에 전심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들이 기도하는 목적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분의 성령을 보내 주시옵소서 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유일한 참 신앙이란, 그분께서 약속한 것을 우리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게 될 때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신앙의 확실성이란 무분별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마음이 무관심하게 되게 하시려고 그의 은혜에 대한 확신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에 대한 우리의 의욕을 자극시켜 주시려는 뜻에서입니다.
더구나 신앙이란 의심의 표가 아니요 차라리 우리의 신뢰에 대한 증거입니다.
우리가 주께 기도할 때에 우리는 주께서 약속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라고 기도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본을 따라서 날마다 성령을 더해 주실 것을 계속 기도해야만 하는 일이 옳습니다.
우리는 더해 주신다고 말했는데 그것은 우리가 기도를 할 수 있게 되기 이전에 성령의 첫 열매를 먼저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올바르게 기도하는 법을 우리에게 성실하게 가르쳐 주시고 또 우리에게 할 말을 가르쳐 주실 뿐 아니라 우리 마음의 내적 감동까지를 지배하시는 유일하신 분(롬8:26)은 바로 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2) 더 나아가서 누가는 진정한 기도에 합당한 두 가지 본질적인 것을 설명합니다.
그들이 끝까지 꾸준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 마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그들의 인내심에 대한 훈련이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즉시 성령을 보내실 수 있었으면서도 잠시동안 그들을 마음 조리는 가운데서 인내하도록 버려 두셨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인내력의 습성을 가르치시기 위하여 가끔 지체하시며 또는 질질 끄시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 기도의 조급성은 해롭고 유독하기까지 한 질병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고쳐 주신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한편 주께서는 우리가 기도를 계속하도록 훈련시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기도가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란다면 응답이 지체되는 일 때문에 싫증을 느껴서는 안됩니다.
그들의 마음의 일치단결에 관해서 말한다면 그것은 과거 두려움 때문에 흩어져 달아났던 일과는 반대의 입장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리스도께서 각자는 전체를 위하여 기도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또 \"우리 아버지시여, 오늘날 우리에게 .....주옵소서 ...\"라고 한 것처럼 각 사람은 모든 사람의 입장에서 기도하였듯이 그러한 일치단결의 힘도 일반적으로 기도하는 일이 매우 필요하다는 그 점에서 쉽게 얻어지게 될 것입니다.
한 성령으로부터가 아니고는 어디서 이러한 말의 일치가 오는 것입니까?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유대인과 이방인들에게 똑같이 올바른 기도의 형태를 주고 싶어서 모든 구분을 철폐합니다.
그러므로 사도를 통해서 말씀하시기를 \"한 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롬15:6)고 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만일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른다면 우리는 참으로 모두가 형제가 되어야 합니다.
또 우리 모두는 형제로서 합의가 있어야 됩니다.
행1:15-16 모인 무리의 수가
본문은 예루살렘 지역의 한 다락에 교회가 회집되고, 그 가운데서 가룟 유다를 대신할 한 사도를 선택하는 과정이 기록되었습니다.
1. 본문 15절 상반은 \"모인 무리의 수가 한 일백 이십 명이나 되더라\" 입니다.
누가의 이런 표현이 남자만의 수효를 말한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인들은 자기 남편들의 이름 밑에 포함되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혹은 히브리인들이 \'영혼들\'이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처럼 누가가 이름들을 각 개인들의 의미로 사용한 것인가의 여부는 분명치 않습니다.
또 이 사람들은 사도들이 살고 있었던 그 다락 방에 매일 찾아온 것에 지나지 않는 것인가 혹은 계속 그들과 함께 거기에 살고 있었던 것인가 라는 점도 문제입니다.
그 방은 평소에 거기서 함께 생활하기에는 아무래도 그처럼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로서는 누가가 확실히 여기서 베드로가 설교를 했을 때에 모두 함께 모였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고 그 수효를 표명했다고 하는 것이 보다 사실에 가까운 것처럼 생각됩니다.
이 사실에서 보면 그들이 평소에는 거기에 있지 않았다는 것이 추측될 수 있습니다.
우리로서는 확실성을 가지고 이야기할 수 없지만 가능한 추측으로 말한다면 그 당시에 그들이 하나의 중대한 사실을 다루어야 했을 때에 전 교회가 소집되었던 것이라는 편에 동감합니다.
\"120명\"이라는 말의 헬라어는 대략 120명을 의미합니다.
\'일어서서\' 라는 말이 그 같은 경향을 표시해 줍니다.
2. 본문 15절 하반은 \"그때에 베드로가 그 형제 가운데 일어서서 가로되\" 입니다.
1) 베드로가 선두에 나서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베드로가 회개한 후에 교회의 수반 지도자가 될 일에 대하여는 주께서 일찍이 예언하신 바입니다(눅22:32).
그런데 로마교에서는 베드로를 지나치게 높여서 그에게 기도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나 이 부분에 나타난 대로도 베드로는 로마교가 생각하는 것 같은 그런 독특한 지위를 차지한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다른 신도들을 가리켜 \"형제들아\" 라고 하였습니다(1:16, 벧후3:15하반).
맛디아를 사도 반열에 세울 때에 자기 단독으로 임명하지 않고 회중으로 하여금 선출하도록 하였습니다(15-23). 또 주님의 뜻을 알기 위해 제비 뽑았습니다(24-26).
2) 베드로의 권위에 대한 주님의 말씀도 로마교가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와 관계된 마16:16-18절을 생각하여 보기로 합시다.
베드로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한 뒤에 예수님의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기억할 것은 예수님의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인가 입니다.
(1) 그것은 먼저 \"반석\"이란 말입니다. 헬라어에서 이 말은 여성 명사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란 말은 반석이란 뜻이 있는 남성 명사입니다.
그러므로 여성 명사로 된 \"반석\"은 시몬 베드로를 가리킨 것이 아닙니다.
여기서 \"반석\"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곧 사도적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란 고백을 가리킵니다(엡2:20, 계21:14).
성경에 하나님의 말씀을 \"반석\"이라고 하였습니다(마7:24).
(2) 또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란 말씀을 기억합시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만 그런 독특한 권세를 주시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천국 열쇠\"라 하신 것은 사도의 권위(權威)로 말씀을 전파할 특권을 가리킵니다.
사도들은 모두 다 이 특권을 받았습니다. 또 그들이 그 권위를 옳게 사용하였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들 중 하나로 관설된 것 뿐 입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들도 어떤 의미에서는 그런 특권을 가졌습니다(마23:13).
다만 그들은 그 권세를 잘못 사용한 것 뿐 입니다.
(3) 베드로는 실제에 있어서 자신의 자연적 인격으로는 교회의 반석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을 받은 뒤에도 실수하였습니다(마16:22-23, 26:69-75).
또 베드로가 외식하였기 때문에 바울에게 책망을 받은 일도 있었습니다(갈2:11-14).
3)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제정하시고 엄명하셨던 일이 한 사람의 부정한 행위로 부서져 버리게 되지 않기 위해 맛디아가 유다를 대신하여 선택되어야 하는 일은 옳았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처음부터 별 이유 없이 열 두 사람을 중요한 자신의 복음의 전달자로 선택하셨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열 두 지파의 심판자가 될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선언하셨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족속들을 한 신앙으로 모으기 위하여 일부러 그렇게 하신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이 자기들에게 베푸신 그 은혜를 거절한 이후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은 세계의 모든 나라로부터 모아지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숫자는 이를테면 신성한 숫자였습니다.
만일 그것이 유다의 악한 의도로서 손상을 받게 되었다면 그것은 처음부터 결함이 있는 것으로 되기 때문에 복음의 선교는 그만치 권위가 없었던 것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유다가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일을 자신에 관한 한 침해했다 할지라도 그것은 확고하고 손상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이 배반자는 응당 자기에게 해당된 대로 멸망했습니다.
그러나 사도의 질서는 건전하게 남아 있었습니다.
3. 본문 16절 앞부분은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입니다.
다윗이나 모든 예언자들이 성령의 지도가 아니고서는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이러한 말의 표현은 성경에서 보다 큰 권위를 주는 일입니다.
그들은 예언의 창조자가 아니요 그들의 말을 성령이 도구로 사용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너무도 멍청해서 성경에 대해서 우리가 당연히 가졌어야 할 권위부여를 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러한 종류의 표현에 잘 유의해야 합니다.
또 스스로 그러한 표현에 익숙해야 됩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권위를 계속 기억함으로 우리 신앙이 굳세게 되는 일입니다.
4. 본문 16절 끝 부분은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 입니다.
1) 교황주의자들은 베드로가 동료들에게 말하기에 그를 전 교회의 우두머리라 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즉시 교황이 되지 않는다면 성도들의 모임에서 아무도 말할 사람이 있을 수 없었다는 것처럼 말입니다.
모든 집회에서는 누군가가 수석을 차지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그 영예를 베드로에게 돌린 것이라고 우리는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교황권에 대해서 무슨 의미를 지닌다는 말입니까?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 이야기는 접어두고 성령이 베드로의 입을 통하여 무엇을 말씀하셨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베드로는 처음에 유다의 그 무서운 타락으로서 어떤 사람의 마음도 동요를 받지 않게 하기 위하여 성경은 마땅히 성취되어야 한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에 의해 매우 훌륭한 직책으로 택함을 받은 자가 자기행로의 첫발걸음에 그처럼 비참하게 타락해야 했다는 것은 전적으로 적합하지 않은 일로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그 일이 이미 성경에 예언되어 있다고 선언해서 거침돌을 제거합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일상생활에 매우 적절한 훈계를 인용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이러한 분별력을 성경의 예언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갑자기 일어나는 일에 대한 염려를 진정시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이해력을 의존하고 그것으로 우리 자신이 실족할 수 있는 작은 원인이라도 만들어내게 된다면 그보다 더 우리를 소란케 하는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예지하시고 정하시고 또 참으로 예언까지 하신 일 중에 전혀 부조리한 것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굳세게 하시기 위하여 그 죄의 원인을 즉시 고쳐 주시는 것인데 유다는 자기 몸에 일어난 일이 이미 예언되어 있었는데도 전혀 용서받지 못했을 것입니다.
유다가 배반한 것은 예언의 강요로 인하여 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자신의 마음의 사악함에 유인한 때문입니다.
2) 베드로의 설교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베드로는 성도들이 유다의 파멸에서 마음에 품을 수 있는 어려움을 제거합니다 또 거기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을 배우게 될 교훈을 끌어냅니다.
둘째로 유다 대신 한 사람을 선택하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는 것을 들려주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그 둘을 다 성경의 증언으로 입증합니다.
3) 그러니까 16절 전체 곧 \"형제들아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예수 잡는 자들을 지로한 유다를 가리켜 미리 말씀하신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에서 \"성령이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란 문구는 완전 영감설, 혹은 문자적 영감설을 잘 알려줍니다.
\"성령\"은 배후의 역사자요(Causa efficiens), \'다윗의 입\'은 도구(道具)로서 영감사역(靈感事役)을 성취시킨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의 예언대로 유다에게 성취된 요소는 두 가지 입니다.
(1) 첫 번째는 유다가 귀한 직분을 받았던 사람이라는 것입니다(17절).
(2) 두 번째로는 시109:8의 성취로서 이 직분을 빼앗긴 것을 베드로는 지적하였습니다.
여기서 \"성경이 응하였으니 마땅하도다\"라고 하였는데 \"마땅하다\"라는 말은 반드시 될 일, 곧 필연성에 속한 것을 가리킵니다.
곧 성경은 신적 필연성에 의하여 성취되고야 만다는 뜻입니다.
그 무엇이라도 성경의 성취는 막을 수 없습니다.
천지는 폐할지언정 성경은 폐하지 못한다는 말씀 그대로입니다(마5:18, 요10:35).
행1:17-22 이 사람이
본문은 사도의 수에서 가룟 유다가 제외되고 다른 사람으로 채워져야 할 필연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17절은 \"이 사람이 본래 우리 수 가운데 참예하여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 입니다.
1) 이것은 유다의 배신행위를 지적합니다. 유다는 예수님의 사도직에 세움 받았습니다
그러나 종래 배신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없어 일 못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제사장 엘리의 집이 부패하였을 때에 사무엘을 세우셨습니다.
또 사울 왕이 부패했을 때에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하나님은 돌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드실 수 있는 능력 있는 주님이십니다(마3:9하반).
2) 또 본 절은 이 수가 완전한 채로 고스란히 있게 되기 위해서는 그 공석이 보충되어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누가는 유다가 그들의 수효의 하나로 있었다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고 한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만일에 이 부분이 빠져있다면 이 몸이 이를테면 불구자가 되었을 것이라는 결과가 거기서 나오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높은 영광스러운 지위에 올려 주셨던 자가 그처럼 무서운 파멸에 곤두박질해서 떨어져야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두려운 일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범죄의 흉악성을 가중시켜 줍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조심하고 두려워하도록 경고하는 일이 됩니다.
제자들이 유다의 일을 생각할 때마다 굉장히 비통하고 쓰러졌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제자들이 해결의 길을 찾기 위해서 보다 더 유의하고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사실을 말함으로서 자기 직무에 탁월성에 대하여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2. 본문 18-19절은 \"(18)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 밭을 사고 후에 몸이 곤두박질하여 배가 터져 창자가 다 흘러 나온지라
(19) 이 일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에게 알게 되어 본 방언에 그 밭을 이르되 아 겔다마라 하니 이는 피밭이라는 뜻이라\" 입니다.
1) 본문 18절 초에 \"이 사람이 불의의 삯으로\"에서 우리는 유다의 최후에 대한 이 이야기를 누가를 통하여 여기 삽입시킨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설교에서 그것을 구별짓기 위해 이것을 모두 괄호 안에 넣습니다.
무슨 이유로 베드로는 제자들이 다 잘 아는 사실을 여기에 말할 필요가 있었습니까?
더구나 반역의 대가로 사들인 땅이 유대인들에 의하여 자기들의 모국어로 아켈다마라고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그들에게 선언한 일은 우스운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떤 이들이 말하는 것처럼 베드로가 설교한 것은 유대인들과는 다른 말을 가지고 있었던 갈릴리 사람들에게 한 것이기 때문이었다고 하는데 그것은 경박한 이유입니다.
실상 발음상으로 어느 정도의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파리 시민과 루엔 시민 사이의 차이정도 같은 것으로서 그들이 피차에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가 이 설교를 그 자리에서 한 것은 예루살렘이었기 때문에 그 말이 얼마나 적당하였을 것입니까?
그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유대인들 가운데서 그들 자신의 모국어를 헬라말로 통역해야만 했던 것입니까?
그러므로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가 이 사건을 알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알기 어렵지 않게 하기 위하여 유다의 최후에 관한 이 문장을 자신이 삽입한 것입니다.
2) 본문에 \"밭을 사고\"라는 이 말의 뜻은 두 가지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입수했다\' 는 것보다는 \'소유했다\' 는 뜻이 있습니다
누가가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유다가 그 밭을 사용하였기 때문이라든지, 혹은 자신의 그것을 샀기 때문이라든지 해서가 아닙니다. 그 토지는 유다가 죽은 후에 샀습니다.
다만 누가는 유다의 매장이 영원한 치욕의 표상이었고 동시에 유다의 허위와 사악에 대한 보복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그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유다로서는 은 삼십으로 그리스도를 팔아 넘겼다고 하기보다는 자신의 사도직을 판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다는 그 돈을 얻지 못했습니다.
다만 그 밭을 소유했을 뿐입니다. 더구나 그 밭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호칭은 배신자로부터 죄 없는 이의 피를 사들였다는 제사장들에 대한 공개적인 치욕의 표찰이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놀라운 뜻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히브리인들이 그 밭을 자기들의 모국어로 그렇게 호칭했다고 누가가 말한 것은 그가 헬라 태생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가 히브리어라고 부른 말은 유대인들이 바벨론 포로 이후에 사용한 시리아어와 갈대아어의 섞인 말을 가리킨 것이었습니다.
3. 본문 20절은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 그 직분을 타인이 취하게 하소서 하였도다\" 입니다.
1) 본문 20절 전반에 \"시편에 기록하였으되 그의 거처로 황폐하게 하시며 거기 거하는 자가 없게 하소서 하였고 또 일렀으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유다의 변절에서 생겨날 수 있었던 모든 거침들을 성경의 권위로 제거합니다.
그러면서 실상 이 구절의 의미가 의곡된 것처럼 표현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거기에 첫째로 다윗이 기도한 것은 그 일이 어느 특정한 한 사람에게가 아니라 그의 원수들(복수)에게 일어나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둘째로 베드로는 다윗이 원수들에 대해서 한 말을 잘못해서 유다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그 점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말한 것인데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의 왕국의 상태를 묘사하려고 해서입니다.
이 시편에는 하나님의 아들의 몸(the Body)인 전체 교회 일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거기 기록돼 있는 사항들은 머리(the Head)에서 성취돼야 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서 저자들이 증거 하는 바와 같이 사실로 그렇게 성취되었습니다.
이제 다윗의 원수들에 대해서 한 말들은 결코 유다의 이야기가 아니라고 항변하려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다윗은 그 구절에서 자기 자신을 그리스도의 몸으로부터 분리시켜서 혼자 있는 자로 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 생각하며 더구나 자신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상징하여 그의 형상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그 말들이 차라리 유다에게 해당된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적절합니다.
이러한 특성이 다윗이 그리스도의 상징이 되기 위해서 그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누구나 다윗에게 상징적으로 나타난 것이 그리스도에게 해당되어야 할 것이라 하더라도 결코 놀라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는 교회 전체를 생각하면서도 먼저 그 머리로부터 시작하여 그리스도께서 악한 사람들 손에서 받은 고난이 무엇인가를 특히 서술합니다.
우리는 바울의 가르침에서 성도들이 받는 고난의 재앙은 모두 그리스도의 고난의 일부분이요, 그 남은 고난을 채우려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골1:24).
차라리 다윗의 입을 통하여 전 교회를 가르치기 원하신 성령께서는 이 순서와 관계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의 박해자들에 대해서 이야기되고 있는 것이 무엇이거나 그것은 당연히 그들의 수령에게 전가됩니다. 그가 불경과 사악 속에 버티고 있는 만큼 그에 대한 징벌도 자명하고 두드러져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또 누군가가 이 시편에는 저주만이 말해졌고 예언이 없으며 그래서 베드로가 그것은 성취되어야 한다고 결론을 짓는 것은 잘못이라고 반론을 펴는 일이 있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다윗은 무슨 보복을 추구하려고 어떤 부패하거나 악한 육체적 기질에 의하여 움직여진 것이 아니요 다윗으로서는 성령을 자기의 인도자와 지휘자로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도한 것은 모두 예언의 효과를 지닌 것입니다.
그것은 성령께서는 하나님께서 성취하시기로 스스로 결정하시고 또 우리들에게 약속하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베드로는 거기서 시편으로부터 두 개의 다른 증언을 인용합니다.
첫째는 유다의 종말에 대하여 그의 이름과 가족이 함께 멸망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요(시69:26), 시편 109편 8절에서 인용한 둘째는 그의 직분을 맡기 위해서 다른 한 사람이 선택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거기 황폐한 거처, 그리고 후계자, 이 둘은 서로 모순되는 것으로 나타날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앞의 구절에서는 단지 교회의 적이 쫓겨나고 자기들이 점령하고 있던 장소를 사람이 살지 않는 텅 빈 상태로 내버려 두었다고만 성령이 표명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중의 후계자가 그 빈곳을 점령한다는 사실을 배제하는 것은 아닙니다.
실로 이것은 자격이 없었던 사람으로부터 빼앗은 직책이 다른 사람에게 주어진다는 사실로서 그 형벌의 중량이 증대하는 것입니다.
2) 본문 20절 끝에 \"그 직분을 타인에게 취하게 하소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히브리어는 그 이상 적절하게 번역될 수는 없었습니다.
(페쿠-다-)라는 원어는 \'관리(管理)\'의 뜻을 가진 말인데 \'두루 살펴본다\'는 의미에서 나왔습니다. 그 말을 \'아내\'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문맥상으로 논박을 받습니다.
그의 아내에 대해서는 다음 구절에서 \"그 아내는 과부가 되게 하소서\"라고 설명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악한 자가 땅위에서 그 생명이 제거되기를 소원한 뒤에 그의 영예로 박탈되어야 하고 그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이 그의 뒤를 계승하도록 되어야 한다고 첨부하는 것입니다. 그로 인하여 그 형벌이 배가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겸해서 그가 간접적으로 지적하는 것은 그가 말하고 있는 그 악한 배신자는 결코 어떤 범상한 자가 아니요 품위를 지니고 있는 자로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구에 그것을 잃게 될 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됩니다.
즉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한 악한 자들은 처벌을 면케 어렵게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이러한 불행한 결과가 그들 모두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4. 본문 21절은 \"이러하므로 요한의 세례로부터 우리 가운데서 올리워 가신 날까지 주 예수께서 우리 가운데 출입하실 때에\" 입니다.
1) 베드로가 내리려는 결론은 얼핏보면 너무 엉뚱하고 먼곳에서 찾는 것처럼 보입니다.
다윗이 유다의 직분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하더라도 거기서 곧장 그 후계자를 제자들이 선택하여야 한다는 결과로는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자기들이 교회의 질서를 세워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고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 일이 반드시 수행되어야 할 하나님의 뜻에 맞는 일이라고 말하자마자 제자들은 그 일을 실행에 옮겨야 할 것이라는 결론을 끄집어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교회를 다스리시기 위하여 우리의 기능을 사용하시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확인하기만 한다면 그 즉시로 우리가 무엇을 수행해야 하든지 간에 그것을 충실히 실행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더 논란할 필요도 없이 교회가 지고 있는 책무입니다.
마치 오늘에도 교회에서 이름만 걸고 그 행위가 정당하지 못하고 사악한 자들이 그 직무가 해임되고 다른 사람으로 그 자리를 대치하는 일을 우리가 들을 때가 있는데 그처럼 교회는 이 직책을 수행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아무런 의문점도 없었던 사항에 대해서 무슨 문제를 일으키는 일은 불필요한 일이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주께 복종할 수 있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의 책무가 무엇인가를 늘 생각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한 사람의 사도를 선임하는 일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사도는 부활의 증인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사도직이 복음을 전파하는 일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은 카톨릭 감독들이 말없이 가면만을 뒤집어쓰고 거만을 떨면서 자기들이 사도의 계승자라고 자랑하는 일이 얼마나 공허한 일인가를 증거 해 줍니다.
베드로는 여기서 사도 요한이 \"이를 본 자가 증거하였다\"(요19:35)고 말했을 때에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고백한 것과 같이 증인이란 그것을 눈으로 목격한 자여야 한다고 주장한 것으로 우리는 인정합니다.
이것은 신앙을 굳게 하는 일에 있어서 큰 비중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베드로는 부활의 선포자로서 자기 자신과 또는 그의 동료들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들에게 엄격한 선교의 책무를 부과합니다.
베드로가 부활을 말할 때에 그것은 그들이 단지 부활을 증거 하는 책임을 지기 때문만이 아니요 먼저 그 속에는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선교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다음에는 우리가 부활 안에 우리의 구속의 목적과 성취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부활은 그 자체 안에 그리스도의 하늘의 권위와 성령의 능력을 동반합니다.
이 능력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자녀들을 보호하며 정의와 공법을 확립하며 질서를 회복하고 죄의 포학을 근절하며 교회의 모든 원수들을 멸절시키는 일에 떨치는 힘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 피차 배치되면서도 함께 결합되어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고찰해야 합니다.
바울도 선언한 바와 같이(고전15:17) 부활이 다른 여러 곳에서도 복음의 주요점으로 언급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이었던 것입니까?
그것은 그 밖의 다른 제자들에게는 관계가 없는 일이었습니까?
베드로는 이 직무가 사도들에게만 주어진 것으로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칭호는 사도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들은 특별히 이 목적 때문에 선택함을 받은 이들이요 이 사명을 받은 이들 중에 수위를 차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주요한 증인들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증인들은 아니었습니다.
5. 본문 22절은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 할 사람이 되게 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입니다.
누가는 예수께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기 시작한 때를 이 기간의 시작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거의 삼십세가 되시기까지 조용히 사사로운 사람으로 사셨습니다.
또 주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필요한 기간 이외에는 자신이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임명하신 일을 수행해야 할 시기가 왔을 때에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새로운 사람, 방금 탄생된 사람처럼 나타나신 것입니다. 이 사실이 우리의 호기심을 억제하는 일에 얼마나 요긴했던가는 누구나 잘 아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전 생애는 절대적인 완전 이상의 훌륭한 거울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알아야 할 가장 본질적인 일들을 연구하고 성찰(省察)하도록 하려고 그리스도께서는 자기 생애의 대부분이 사람에게 알려지지 않게 묻혀지도록 되는 길을 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신앙의 확립을 위해 자신의 인격에 관한 지식을 공급해 주셨을 때 이제 누가 감히 그리스도 없이 헤맬 것입니까?
그리고 여기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에서 \'출입하실 때\'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사람들과 친밀하게 사는 일\' \'그들과 일상 생활을 함께 하는 일\' 등을 생각하고 사용합니다. 그런 의미로 시민들이 성문으로 출입한다고 말해집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0장 9절에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역대하 1장 10절에는 그 말이 감독과 지배를 나타내는 말로 보이기는 합니다.
행1:23-26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본문에서 누가는 맛디아를 사도로 택한 사실을 기록합니다.
1. 본문 23절은 \"저희가 두 사람을 천하니 하나는 바사바라고도 하고 별명은 유스도라고 하는 요셉이요 하는 맛디아라\" 입니다.
유다의 자리를 채우는 데는 한 사람밖에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 사도들은 두 사람을 추천했습니다.
그렇다면 왜 그들은 한 사람으로 만족하지 않았었는가를 물을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 너무 비슷해서 누가 더 적당한지를 그들이 식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까?
그런데 그러한 일은 실제로 제비뽑기로 결정하는 충분한 이유는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역시 요셉이 좀더 평판이 좋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혹은 사도들 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었던 때문이었던가?
그것은 전혀 있음직하지 않은 일입니다.
그리고 누가가 바로 전에 그들의 일치단결에 대한 훌륭한 증언에 부합되지 않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사도를 선택하는 데에 그들의 그러한 불화로서 오점이 남겨지는 것 같은 일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맛디아가 사람들의 많은 투표에 의하여 선택되었다고 하기보다는 하나님 자신의 결정에 의하여 지명된 것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또 증거되기 위한 이유로 차라리 제비뽑기가 시행된 것이었습니다.
사도들과 목사들 사이에 이 차이가 있었는데 목사들이 단순히 교회에 의하여 선택된 것이라면 사도들은 하나님에 의하여 부르심을 받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해서 성령에 감동된 바울은 그의 갈라디아 서신의 서문에서(1:1) \"사람들에게서 난 것도 아니요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도 아니요\"라고 스스로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이 직무의 특이성이 그처럼 크기에 맛디아 선택에서 사람들이 그 임무를 다했다고 하지만 최종적 결정은 하나님께 맡겨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음성으로 다른 사도들을 선임하여 세우셨습니다.
만일 맛디아가 사람들의 선택만으로 그 반열에 가입되었다고 한다면 그의 권위는 다른 이들의 것에 비해서 적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장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자를 하나님께 내어놓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가장 합당한 자라고 생각한 자를 자신을 위해 선택하는 중용의 길이 채택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제비의 결과로 맛디아의 사도직을 찬성하시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이제 사도들은 그처럼 중요한 사항을 위임함에 있어서 경솔하고도 변칙적으로 우연에 맡기어 행동한 것으로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비뽑기에서 그들은 확실히 무엇을 얻을 수 있었습니까?
우리는 그들이 단지 성령의 영감 아래서만 제비뽑기에 의존했었다고 대답합니다.
누가가 그렇게 공공연하게 말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성급한 사도들을 비난하려고 하지 않고 차라리 그 선거가 합법적이고 하나님께로부터 인정받은 것이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습니다.
때문에 우리는 그것으로 이렇게 확신합니다.
그들은 성령의 지도 밑에서 그 과정을 밟았습니다.
그들의 전체 행동 과정도 같은 성령의 지도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사실을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왜 그들은 하나님께 모두로부터 선택해 줍소서 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하나님의 결정을 두 사람에게 한정시키고 또 하나님을 그들의 의사에 복종하시게 만든 것일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로부터 그 자유를 빼앗은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누구든지 그 사실을 고찰할 시간을 가지는 사람이면 그것은 사도들 모두가 해야 할 임무이며 주께로부터 명령 받은 것이라고 알고 있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하려 하지 않았다는 것을 누가의 느낌에서 분명히 깨닫게 될 것입니다.
2. 본문 24절은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 뭇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여 이 두 사람 중에 누가 주의 택하신 바 되어\"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저희가 기도하여 가로되\"는 문자적으로는 \"기도하고 나서 그들이 말했다\"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의미가 불확실한 것은 없습니다.
누가는 그 기도의 말 전부를 되풀이해 주지 않습니다.
다만 간단하게 그 요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다 존경을 받고 있는 사람들이요 깨끗함에 있어서 또는 그 밖의 모든 미덕에 있어서 뛰어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모든 자질 중의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만이 홀로 아시고 판단하실 수 있는 마음의 성실성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사람들에게서 숨겨져 있는 것을 밝혀 주실 것을 하나님께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날도 목사의 선택이 있게 될 때에 그와 동일한 과정이 요청됩니다.
하나의 자리에 두 사람을 우리가 임명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역시 우리는 속임을 당하기가 매우 쉽기에 그렇습니다.
또 사람의 심중을 가려내는 일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교직자로서 합당한 자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우리를 주장하여 주옵소서 라고 기도해야 됩니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중요한 사실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교직자들을 선택하는 일에서 성실성 여하가 반드시 중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만일 그것이 결여된다면 지식도 웅변도, 그 밖의 여러 가지 장점도 다 연기와 같이 사라져 버리고 말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5절은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 보이시옵소서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하고\" 입니다.
1) \"봉사와 및 사도의 직무를 대신할 자를\"에서 이 \'봉사\'(ministry)라는 말은 경멸의 뜻이 있었기 때문에 누가는 훨씬 큰 존엄의 뜻이 담긴 \'사도직\' 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그것을 \'사도직의 봉사\' 로 설명한다면 그 의미가 더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에는 \'환치법(換置法)\' 이라는 표현법의 예가 자주 나옵니다.
확실히 누가는 그 직무의 존엄성과 그 중책을 연결 지으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 직무에 해당되는 존경과 권위가 더욱 커지게 하려 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이 힘드는 중책에 부르심을 받은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 했습니다
2) 여기 \"보이시옵소서\" 에서는 그들이 최후적 결정을 하기 전에 기도한 것이 역시 교회 정치에 있어서 신본주의(神本主義) 정신을 보여줍니다.
교회의 직원 선거가 회중의 천거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순전히 회중의 인간적 의사에 전임된 일이 아닙니다.
회중은 이 일에 있어서 사적(私的)의견을 버리고 순전히 하나님의 뜻을 알고저 하며 하나님의 간섭을 기구해야 됩니다.
3) \"유다는 이를 버리옵고 제 곳으로 갔나이다\" 란 말씀은 유다가 지옥으로 간 사실을 가리킵니다.
크로솨이데(Grosheide)는 이 말 뜻을 달리 해석하여 유다가 반역자의 자리(지위)로 갔다는 뜻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곳\" 이란 말을 지위(혹은 직무)로 해석함보다는 처소로 해석함이 자연스럽습니다.
4. 본문 26절은 \"제비 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입니다.
1) 26절 초에 \"제비 뽑아\" 라는 말씀에서 제비에 관한 긴 토론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제비뽑기로 정한 것이 전적으로 잘못된 일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무지 때문에 잘못에 빠졌거나 제비라는 말의 의미를 오해하고 있는 쪽일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의 허영심과 억측을 통해서 부패시키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허영과 억측 때문에 그들은 제비를 남용하거나 미신으로 변질시켜 버립니다.
제비에 의해서 점을 치는 것은 모두가 악마처럼 흉악한 일입니다.
그러나 위정자가 지배권과 영역을 나누는 때라든지 또는 형제들이 유산을 분배한다든지 할 대에 그것은 적합한 일입니다.
솔로몬이 제비의 결과는 하나님이 지배하신다 할 때 제비에 대한 명확한 증인입니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잠16:33)고 말씀합니다.
비록 사람들이 제비를 남용했다 하더라도 제비뽑는 일을 잘못이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점성술(占星術)은 갈대아인의 허영심과 조작으로 된 것이라 하여 비난해야 할 것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갈대아인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호기심 때문에 이 점성술의 이름을 구실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그로 인하여 유용하고도 훌륭한 과학의 명예를 크게 손상시키고 있습니다.
소위 복술가라는 사람들도 동일한 범과를 저지릅니다.
그러나 정당한 이용과 타락의 결과를 구별하는 일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누가가 그들이 제비뽑았다고 말하는 것은 제비를 어떤 항아리나 그들의 옷자락 안에 넣고 나중에 그것을 끄집어 냈다는 말입니다.
이 \'제비\'라는 말은 여러 가지 다른 뜻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가 맨 처음에 \"유다가 이 직무의 한 부분을 맡았던 자라\"(1:17)고 말했을 때 그것은 성경의 관용법대로 볼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직무를 할당하셨다는 뜻입니다.
그 후에 누가는 엄격한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 제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고-랄-)이라는 히브리어는 히브리인들에 의하여 일반적으로 양쪽이 다 관련된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그들이 하려고 했던 일에 대해서 내버려 두려고 했을 것입니다.
누가도 역시 그랬었다는 일이 있음직해 보입니다.
2) 본문 26절 중간은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입니다.
결과는 기대하지 않았던 일이 생겨났습니다.
그것은 요셉이 맛디아 보다 모두의 마음에 들었었다는 것이 추측되기 때문입니다.
또 누가가 요셉의 이름을 먼저 놓은 사실 이외에 요셉으로서는 또한 두 개의 다른 별명으로 불리어지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그가 매우 유명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일입니다.
요셉은 바사바라고 불리었습니다.
그것은 \"맹세의 아들\" 혹은 \'평온의 아들\'이라는 뜻이요, 또 그렇게 불리어진 것은 요셉이 성실과 청순, 점잖고 겸손한 성격의 거울과 같은 사람으로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별명은 비범한 정직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판단에 의한다면 그 사람은 최우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보다 맛디아 쪽을 택하셨습니다.
이 사실은 중요한 내용을 우리에게 가르쳐줍니다.
사람들의 의견으로 우리가 하늘에 올리움 받는 것처럼 뽐내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또 그들의 선택에 의해 우수한 사람들로 평가받는다 해도 우리는 하나님께서 평가하시고 인정하심을 받아야만 합니다.
하나님만이 유일하신 올바른 판단자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판단에 의해 서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사람이 자기 육체 안에 있는 모든 자랑을 무너뜨리게 하려고 하나님은 사람의 눈으로 최고로 훌륭하다 생각하는 그 사람을 제외시키는 일을 우리가 가끔 볼 수 있습니다.
\"저가 열한 사도의 수에 가입했다\"고 첨가하여 누가는 제비뽑는 일의 의문되는 억측을 다 씻어 버렸습니다.
맛디아가 제비에 뽑힌 것이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신 일로 교회가 그를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2장 강해
행2:1-4 오순절 날이
누가는 오순절 날에 성령께서 특이한 방식으로 강림하신 사실과 주의 제자들이 각 국 방언으로 전도하게 된 일과 베드로의 설교를 요약해서 기록합니다.
1. 본문 1절은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다 정해진 그 때까지 같은 장소에 머물러 있었다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견인성에 대해서 다시 한번 증언하는 일입니다.
\'다같이\' 라는 부사에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께서 왜 한달 반이나 성령 강림을 지연시키셨는가 그 이유는 우리가 앞에서 언급했습니다.
문제는 주께서는 왜 하필이면 특히 그 날에 성령을 보내셨는가 입니다.
우리는 어거스틴이 \'율법이 하나님의 손으로 석판에 씌어져서 유월절 이후 50일만에 옛 백성들에게 전해진 것과 같이 우리의 마음비에 율법을 쓰시는 역할을 지니신 성령께서도 참된 유월절이신 그리스도의 부활이후 같은 날짜만에 그 율법을 주실 때 예치하셨던 바를 완성하셨다\' 고 하는 해석을 부정하지 않습니다(고전5:7).
그러나 그가 <출애굽기의 제문제>라는 저서와 <야누아리우스에게 보낸 둘째 편지>에서 그 미묘한 해석을 강조하고 고집한 일에 관해서는 우리는 그에게 좀더 큰 절제와 겸양을 바라고 싶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거스틴이 자신의 해석에 만족하도록 해주고 싶습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보다 건실한 해석을 채택할 것입니다.
그 때가 바로 축제일로 큰 군중이 예루살렘에 모여든 때에 그 기적이 행해졌습니다.
그러므로 그로써 그 소문이 더 널리 퍼져나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한 원인으로 우리가 보게 된 것 같이 땅 끝까지 널리 퍼져 나가게 된 것입니다.
같은 목적으로 주께서는 가끔 절기때에 예루살렘에 올라가셨습니다(요2,5,7,10,12각 장).
그래서 자기가 행하신 능하신 역사가 보다 널리 알려지고 또 더 많이 모인 군중들 속에서 자신의 가르치심이 더 큰 열매를 맺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누가는 나중에 바울이 오순절까지 예루살렘에 도착하려고 서둘렀다는 사실도 보도해 줍니다.
그것은 어떤 신앙적인 입장에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더 큰 군중으로부터 더 많은 유익을 얻게 하기 위해서입니다(행20:16).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 날을 선정하심으로서 그 기적의 효용을 생각하신 것입니다.
첫째로 그 일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역사 하심에 더 많이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기적은 당시 예루살렘에서 더 널리 화제가 되었습니다.
둘째로 그 소문이 더 먼 지방에까지 퍼져나가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들은 햇곡식의 축제일로부터 계산해서 50일째의 날이라 불렀습니다.
2. 본문 2절은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입니다.
1) 제자들을 육체적 감각으로 격동시키기 위해서는 그 은사는 눈에 보이도록 나타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를 인식함에 있어서 너무도 둔감해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의 모든 감각을 일깨워주시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능력은 우리에게 인식되지 않은 채 헛되이 상실되어지고 말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약속된 성령이 오시게 되었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일에 도움이 되는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갈라진 불의 혀가 나타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보다도 차라리 우리들과 전체 교회를 위해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그들의 이익에는 그리 큰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런 표적을 더하심이 없이도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 필요한 능력을 그들에게 공급해 주실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처럼 갑자기 변화를 받은 것은 우연히 된 것도 아니요 자기 자신들의 노력에 의해서 된 것도 아니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스스로 깨달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 표적은 오늘 우리가 그것은 우리의 유익이 된다고 느끼는 것처럼 모든 시대에 유익이 되도록 결정지어져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그 표적이 지니고 있는 유사점을 간단히 고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바람의 맹렬한 세력은 그들에게 두려움을 주는 효과가 있었습니다.
우리가 육에 속한 헛된 확신을 굴복시키지 않고는 결코 옳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준비가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는 문이 믿음에 의해서 열려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로 오시는 문은 겸허와 두려움에 의하여 열려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하고 무관심한 사람들, 자기 밖에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해 주실 것이 없을 것입니다.
2) 성령이 \'바람\'으로 표현되는 일은 일반적인 일입니다.
그리스도도 사도들에게 성령을 주시려 하실때 그들을 향해 숨을 내쉬셨습니다(요20:22) 에스겔의 환상 중에서는 폭풍과 바람이 불어왔습니다(겔1:4).
실상 성령이라는 말 자체가 바람을 의미하는 말에서 왔습니다.
이 성령이라고 호칭되는 신의 본질적인 위격(位格)은 그 자체로는 이해할 수가 없기 때문에 성경은 이 바람이라는 용어를 차용하고 있습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능력으로서 그 능력에 의하여 하나님은 만물 위에 숨을 뿜어 내시듯이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혀가 나타난 것은 이 사건에 한해서 특수하게 생겨난 일입니다.
하늘로부터 그리스도에게 강림하신 비둘기의 모습이(요1:32) 그리스도의 성격과 임무에 합당한 의미를 지녔던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의미된 일에 합당한 형식을 선택하셔서 앞으로 곧 보여주려고 하시는 사도들에 대한 성령의 역사를 보여주신 것입니다.
언어의 상위(相違)는 복음이 널ㄹ 전파되는 일에 일종의 장애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만일에 복음의 설교자들이 한 가지 방언 밖에 말하지 못했다면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그리스도는 유대의 한 작은 모퉁이에 한정된 분이었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그들이 이제까지 전해 받은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전파해 주기 위하여 특수한 언어를 사도들에게 주심으로써 복음을 위한 전진의 길을 갖추어 주신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놀라우신 선하심이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속에는 인간의 교만에 대한 징벌이 축복으로 바꾸어졌기 때문입니다.
악하고 불법한 인류의 의도를 일소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면 무엇 때문에 언어의 상위가 생겨났을 것인가?(창11:7)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잃어버리고 방황하는 인간들을 통일의 축복으로 불러모으시기 위하여 사도들에게 여러 가지 다른 언어를 주셨습니다.
이러한 갈라진 혀는 이사야가 예언한 것과 같이 모든 사람으로 가나안 방언을 말하게 하였습니다(사19:18).
그들이 어떤 방언으로 말하든 간에 모든 사람들이 한 입과 한 영으로 하늘에 계신 같은 아버지를 불렀기 때문입니다(롬15:6).
이 일이 우리를 위해 된 것인데 비단 우리가 그 성과를 거두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복음이란 것이 우연하게 우리에게 비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도하심으로 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도들에게 맡겨주신 가르침에 참여하지 못하는 국민이 하나도 없도록 여러 가지 언어를 사도들에게 나누어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로써 이방인을 부르신 부르심이 확인된 것입니다.
그것은 또한 그들의 가르침에 권위를 더해 주는 일도 됩니다.
성령이 사도들의 말한 여러 방언 안에 함께 거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될 때 그 가르침이 인간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3) 이제 우리는 \'불\'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말해야 합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구사한 말속에 보여진 효능의 표상이었다는 사실을 꼭 믿어야 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외침이 비록 땅의 끝에까지 울려 퍼졌다 할지라도 그것은 헛되이 공기를 진동시킬 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의 음성이 사람들의 마음을 불타오르게 하기 위해 또는 이 세상의 허영을 태워버리고 정화시키기 위해 불처럼 되어야 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주께서 사도들에게 그들의 선교에 수반될 능력에 대한 확신을 가지게 하시지 않았다면 그들이 그처럼 어려운 책무를 걸머질 만한 대담함을 결코 지니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도들의 가르침이란 단순히 공기를 진동시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스며들어 하늘에서 오는 뜨거움으로 그들에게 채워준 것이었습니다
이 능력은 사도들의 말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차라리 그것은 날마다 여전히 나타났습니다. 그래서 그 불은 붙고 있는데 우리는 나무 그루터기와 같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됩니다.
주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한번 성령을 눈에 보이는 형식으로 주셨습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숨은 하나님의 은혜를 교회가 결코 갖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확신시켜 주는 일입니다.
3. 본문 3절은 \"불의 혀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입니다.
갑자기 단수(單數)로 바꾼 것은 누가가 불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습니다.
몇 개의 혀들이 불과 같이 나타났다고 누가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성령에게 돌립니다.
히브리어에는 동사와 결합되는 명사로 처음 문구에 생략되었던 것을 다음의 문절에서 나타내는 것이 보통이었습니다.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한 것이 바로 하나의 예(例)입니다.
누가는 헬라어로 기록했지만 거기에 많은 히브리어의 말투가 섞여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언어를 사용함에 성경의 일반적인 관례를 따르고 있습니다.
요한도 역시 비둘기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고 있습니다(요1:32).
이런 종류의 표적으로 성령의 임재를 증거하려고 하는 것이 주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그것이 단순히 공허한 표적이었다면 거기에 중요한 이름이 주어질 아무 이유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진실이 결합되어 있으므로 그 진실의 이름이 우리의 이해를 돕기 위해 제시된 표적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임했다는 성령의 충만함은 각 사람에게 동등한 정도로 은사가 주어졌다는 뜻은 아닙니다.
각자가 자기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에 적당한 정도로 뛰어난 은사였다고 할 것입니다.
4. 본문 4절은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입니다.
누가는 즉시 거기 뒤따른 결과가 무엇이었는가를 알려줍니다.
또 이 방언의 은사는 무슨 소용에 적용되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러 지방에서 온 타국인들이 자기 나라 방언으로 사도들이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각각 듣고 놀랐다는 사실을 누가가 잠시 후에 기록합니다.
어떤 이들은 생각하기를 사도들이 여러 나라 방언을 말한 것이 아니요, 한 가지 방언으로 말한 것을 그들은 자기들의 방언을 듣는 것처럼 말해진 것으로 이해했다는 것이 그럼직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동일한 음성이 듣는 이들에게 각각 특이하게 들려졌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들은 또 하나의 사실에 자기들의 추측의 근거를 두고자 합니다.
즉 베드로는 많은 종족으로부터 함께 모여온 군중들 가운데서 설교를 했는데 그 사람들은 음성이 베드로의 입에서 나온 것과는 달리 그 귀에 들려졌다고 하지 않는다면 그의 말은 이해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중요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즉 제자들은 여러 가지 외국 방언을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기적은 제자들 안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고 청중 안에서 일어났다는 것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누가가 이미 언급한 성령의 강림에 관한 표현법은 거짓이 될 것이요, 성령은 그들에게 주어진 것이 아니고 청중들에게 주어진 셈이 됩니다.
우리는 또한 바울이 자기가 방언을 할 수 있게 된 일을 인하여 어떻게 하나님께 감사하였는지를 알고 있습니다(고전14:18).
실제로 사도는 방언의 지식도 있었고 방언을 쓸 줄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그 능력을 자기 공부나 열심으로 얻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은사로 사도는 그것을 받은 것입니다.
같은 곳에서 사도는 그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의 특수한 은사라는 것을 단언합니다.
이러한 사실에서 우리는 사도들이 헬라인에게는 헬라말로 이태리인에게는 라틴말로 말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방언에 대한 이해력을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그 방언으로 청중과 진정한 교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그러면서도 베드로가 갈대아 말로 이야기했을 때 애굽인들과 엘람인들이 그가 방언을 말하는 것처럼 알아들었다는 둘째의 기적이 일어났었는지 어쩐지는 각 사람의 재량에 일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한 결론에 이르게 하는 몇 가지 제안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것들은 논쟁할 필요가 없을 만큼 그렇게 확고한 것은 아닙니다.
사도들은 그 만난 상대를 따라 또는 생겨난 기회를 따라 다른 방언을 말했는데 한 사람은 한 방언으로 다른 사람은 다른 방언으로 말할 수 있도록 되었을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즉각적으로 여러 방언을 말하게 된 것을 그들이 보았을 때 그 모든 사건에서 그들은 분명히 기적을 본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에 대해서는 비록 어느 나라 태생의 사람일지라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었다는 것이 가능한 일입니다.
예루살렘에 올라온 대부분의 사람들은 갈대아어를 알고 있었을 것이 사실 같습니다.
그러나 더구나 베드로도 역시 다른 나라 방언을 말했다고 우리가 말한다 해도 조금도 불합리할 것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이 진정 자기들의 말을 바꾸었었다고 사람들이 확실히 생각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이 문제를 가지고 더 이상 다투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행2:5-13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들이
본문은 오순절에 성령께서 강림하심에 이어서 주의 제자들이 각 국 방언으로 복음을 전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1. 본문 5절은 \"그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 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입니다.
누가가 저들을 경건한 사람들로 호칭할 때 그들이 하나님을 예배하려고 예루살렘에 올라왔다는 사실을 말하려고 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또 유대 민족의 이산(離散)이후 해마다 계속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깃발을 드시는 것처럼 얼마간 남은 자손들을 그 도시로 언제나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것은 그 성전이 아직도 충분히 실효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겸해서 누가는 하나님께서 그 능력을 선언하시는 그 기적으로 이익을 받는 자는 누구 일까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잠시 후 당장에 알게 될 것과 같이 악하고 불경건한 자들은 저들을 비웃거나 전혀 무관심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누가는 그들의 경건으로 인하여 한층 더 큰 신뢰를 사람들에게 받은 그 사람들을 증인으로 인용하기를 원했습니다.
\'천하 각 국으로부터\'라고 말함으로써 누가는 저들이 다른 나라들 그리고 널리 흩어진 나라들에서 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더구나 누가는 잠시 후에 피차 멀리 떨어진 여러 나라들의 이름을 열거합니다.
리비야와 본토, 로마와 바대와 아라비아와 기타 등등의 이름들입니다.
이것은 이 기적을 보다 인상적이게 만들어 주는 일에 도움을 줍니다.
그레데인과 아시아인과는 이웃으로 살고 있었기에 방언의 어떤 공통점이 있었지만 이태리인과 가바도기아인, 아라비아인과 본도인들 사이는 그렇게 될 수 없었습니다.
이것은 또한 저 무서운 유대인의 이산이 한창이었을 때에 하나님은 모든 곳에서 남은 자들을 보호하셨을 뿐 아니요, 거의 전멸할 것처럼 보인 고난의 백성에 얼마간의 외국인을 가담시켜 주셨습니다.
그것은 실로 상기할 만하고 놀랄만한 가치가 있는 하나님의 역사이기도 했습니다.
비록 그들이 망명해 간 곳에 멀리 흩어지고 널리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피차 갈라져서 다른 세계에 거주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신앙으로서 통합을 지켰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경솔하게 그들을 경건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로 부르지 않습니다.
\"경건한 유대인\" 은 각 국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입니다.
그들이 그때에 \"예루살렘\"에 거주한 목적은 오순절만 지키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거룩한 도시에 있으면서 경건한 생활을 하려 함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을 버리지 않으시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로 하여금 제자들의 전도를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깨닫게 하셨습니다
2. 본문 6-10절은 \"(6)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7)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8)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 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 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입니다.
1) 본문 6절은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입니다.
(1) 누가는 헬라말로 \'이 소리가 나매\'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누가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그 소문이 널리 퍼져서 많은 군중이 함께 모여오게 했다는 사실입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각각 서로 다른 장소에서 다른 시기에 사도들의 방언하는 소리를 들었다면 그 기적은 그처럼 큰 소문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직접적인 비교로서 언어의 상위가 한층 더 분명해지게 하기 위하여 그들은 모두 한 지점으로 모여온 것입니다.
거기에는 주목해야 할 또 한가지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사도들이 모국이 어디인지를 모두가 알고 있으며 더구나 그들은 외국어를 습득할 수 있도록 모국을 떠난 일이 결코 없었다는 것도 다 알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거침없이 이야기함으로서 또는 기회가 닿는대로 한 사람은 라틴말을 다른 사람은 헬라말을, 또 한 사람은 아라비아말을 , 그리고 그들 각 사람이 자기 말을 바꿀 때에 그것으로서 사람들은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비범한 역사였다는 사실을 한층 더 잘 깨닫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 소리\"는 2절에 관설된 \"바람 같은 소리\"를 이름입니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곧 여러 나라에서 돌아온 그들 각자가 그 속하여 있는 나라의 말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서 들었다는 뜻입니다.
(2) 본문 7절에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주로 사도들을 염두에 둔 말인 듯합니다.
그러나 거기 모인 120명을 염두에 둔 말이라고 해도 틀릴 것은 없습니다.
그들 중 대부분이 \"갈릴리\"로부터 예수님을 따라서 예루살렘으로 왔을 경우에 이렇게 말할 수도 있습니다.
(3) 본문 8절에는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찜이뇨\"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에 대한 해석은 두 가지입니다.
제자들은 한 개의 방언으로 말했으나 청중에게 들리기는 그들의 살던 각 국 방언으로 들렸다는 해석이 있습니다.
다른 하나는 그 때에 제자들이 거기 모인 청중들이 대표한 각 국 방언으로 말했다는 해석입니다.
어느 해석을 취하든지 그들이 기적으로 말한 것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 두 가지 중 첫째 해석이 옳다고 생각됩니다.
여기 \"우리가\" 란 말은 문법상으로 역설체(力說體) 입니다.
그들이 각기 소속 국가의 말을 아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4) 본문 9-10절은 \"(9)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10)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입니다.
이 구절들은 거기 모였던 모든 유대인들을 국가별, 혹은 지방별로 분류하여 말합니다.
이 분류에 의하면 그때에 15개국(혹은 15개 지방)에서 살던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모여서 복음을 들었던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지방들은 그 때까지 알려진 세계, 곧 세 대륙(아시아, 유럽, 아프리카)을 대표합니다
이와 같은 일은 하나님의 특수한 섭리였습니다.
복음의 세계적 전파의 출발점인 오순절 성령 강림의 때, 곧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에 저렇게 여러 나라에서 많은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 모여와서 유하였던 것입니다.
3. 본문 11-12절은 \"(11)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 하고
(12)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듣는 자들을 놀라게 해 준 두 가지 점을 지적합니다.
첫째는 본래 사도들은 무지하고 무식한 사람들이면서 별로 유명하지 않은 지역에서 출생되었지만 이제 그들은 하나님의 일들과 하늘의 지혜를 당당히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또 하나는 그들이 순식간에 새로운 방언의 은사를 받았습니다.
양자가 다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습니다.
떠들어댄 그 말이 어리석고 분별 없는 말들이었다면 그런 말들이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수 있는 힘을 결코 갖지 못했을 것입니다.
또 그 때 생겨난 일의 위엄이 그들로 하여금 그 기적에 대한 깊은 생각을 하도록 이끌어 줄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놀라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는 했지만 그 기적의 주된 효과는 그들이 묻는 말 속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좀더 배우기를 원하는 심정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경탄이란 그들에게 별로 유익한 것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확실히 우리는 하나님의 놀라우신 사역에 대하여 깊이 묵상하면서 그것을 이해하려는 의욕을 가져야 합니다.
4. 본문 13절은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입니다.
사단이 그들의 지각을 빼앗아 가버렸을 때에 인간의 무지와 사악이 얼마나 커지는가를 이 사건이 보여줍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친히 사람의 눈에 보이도록 하늘로부터 내려오셨다 할지라도 이 기적에서 보다 더 분명하게 하나님의 존엄성이 나타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조금이라도 건전한 이해력을 가진 자라면 누구나 그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분명히 마음에 감동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눈으로 친히 목도하면서도 조롱하고 또 하나님의 권능을 농담거리로 비웃으려는 자들은 얼마나 짐승과 같은 마음을 지닌 자들일 것인가?
그런데도 그런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하나님에 관해서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 조롱하는 편으로 기울어진다는 일은 이상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대낮과 같이 분명한 일들이라도 자기들의 무지로 인하여 계획적으로 자신을 완악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맹목적인 광폭으로 무모하게 휩쓸려가도록 사단에게 넘겨줌으로서 그러한 교만을 형벌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오늘의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광명의 한가운데서 소경으로 남아있고 그처럼 분명한 가르침에 귀머거리가 되고 있으며 자기들에게 주어진 구원을 마구잡이로 거절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놀랄 필요는 없는 것입니다.
자기의 능력을 놀라웁게 나타내신 하나님의 기이한 역사가 만일 사람들의 조롱의 대상이 된다고 한다면 그들에게 통상적인 것으로 보이는 가르침은 무엇이 될 것입니까?
누가는 조롱한 자들을 전적으로 타락한 자로 생각하거나 소망이 없는 자로 보려는 것이 아닙니다.
차라리 이 기적이 대중에게 어떻게 영향을 주는가를 보여주려고 합니다.
그리고 사실로 그런 일은 언제나 세상에서 생겨났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실 때마다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하나님께 대해 진정한 감정으로 접촉했었습니다.
그것은 조금도 놀랄 일은 아닙니다.
종교라는 것은 희귀한 가치요 극소수의 사람들이 소유하는 가치이며 그러면서도 그것은 오성(五性)의 시작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완고하고 고집스러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에서 보는 대로 그러한 역사(役事)는 결코 열매 없이 끝나지는 않습니다.
행2:14-17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본문에서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시작되고 있습니다.
1. 본문 14절은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입니다.
1) \"서서\"라는 말로 누가는 이 모임에서 베드로가 중요한 설교를 했다고 알립니다.
그들이 좀더 잘 알아듣게 하려고 할 때 연사들은 그들 앞에 일어서서 말했습니다.
그런데 그 설교의 요점은 그들이 이미 본 성령의 은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이제 계시되셨다고 누가가 추론한 것입니다.
2) 베드로가 여기서 지도적 입장을 취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일찍이 예언해 두셨던 대로(마16:18)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된 일입니다.
베드로가 \"소리를 높여\"말한 것이나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다 그의 지도자적 면모를 보여줍니다.
2. 본문 15-16절은 \"(15) 때가 제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 라 (16)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입니다.
1) 우선 베드로는 제자들이 술 취했다고 말한 사람들의 잘못된 견해를 반박합니다.
사람들이 흔히 아침에는 술 취하는 일이 없지 않느냐는 타당성을 내세워 반박합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취하는 자들은 밤에 취하기\'(살전5:7) 때문입니다.
그 까닭은 그들이 부끄러워 빛을 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이 악습은 심하기 때문에 그들이 그렇게 하는 것은 지당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논법은 언제나 정당한 것은 아닙니다.
이사야는 그 시절에 아침에 일어나 술을 따라가는 자들을 심히 꾸짖습니다(사5:11).
오늘날 잠자리에서 일어나자마자 돼지들처럼 술을 마시러 가는 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일반 상태는 아니기에 베드로는 그런 일은 있지 않은 일로 말합니다.
고대에 관한 얼마간의 지식을 가진 자는 일력이 해 뜨는 때부터 해 지는 때까지 하루가 열두시간으로 나뉘어져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시간은 여름에는 더 길고 겨울에는 더 짧았습니다.
오늘의 겨울 시간으로 아홉시와 여름 시간으로 여덟시에 해당되는 시각을 그때에는 제3시라고 말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술 취했다는 비난에 대한 변명을 가볍게 처리합니다.
너무 지나치게 방어에 진지해지는 것은 불필요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롱하는 자들을 가르쳐서 이해시키려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그들의 마음을 가라앉히는 일에 베드로는 관심을 기울인 것입니다.
2) 그리고 베드로는 그 사람들을 반박함에 있어서 하루의 시간의 상황을 가지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요엘의 증언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예언된 일이 이제 이루어졌다고 말함으로서 베드로는 일찍이 그들에게 약속되고 지금에는 그들의 눈에 밝히 나타난 것처럼 훌륭한 은혜를 인정하지 않는 그들의 망은(忘恩)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몇몇 사람들의 잘못을 가지고 모든 사람들의 잘못인 것처럼 비난한 일에 관해서는 동일한 죄과를 모든 사람들에게 씌어주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조롱이라는 것이 그들 모두에게 대해서 교훈을 주는 좋은 기회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께서 이를 놓치지 않은 것입니다.
3. 본문 17절은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입니다.
1) 본문 17절 초에 \"말세에 내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증거로 베드로는 메시아가 이미 나타나셨다고 증거합니다.
요엘이 마지막 날에 관한 것으로 분명하게 언급한 것이 아닌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요엘 선지자는 교회의 완전한 회복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은 마지막 시대에 관련된 것이라는 사실이 확실합니다(욜2:29).
그러므로 베드로의 말은 요엘이 말하려고 하는 의도와 일치합니다.
다만 베드로 사도는 설명의 형식으로 이 말을 첨가한 것입니다.
그것은 당시에 실추(失墜)되었던 교회의 명성이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새로워지는 일을 통해서만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알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교회의 갱신이란 새 시대의 시발점을 의미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그것을 마지막 날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메시야에 관한 사실은 유대인들에게 익히 잘 알려진 일이었습니다.
복되고 잘 정돈된 모습의 교회에 관한 모든 위대한 약속은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기까지는 성취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요엘로부터 인용된 것이 마지막 때에 속한 것이라는 사실은 그들 가운데서 의심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이제 \'말세\' 혹은 \'때가 찼다\'는 말은 그리스도의 현현(顯現)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교회의 견고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2) 그 다음에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리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교회는 성령의 주심으로만 회복될 수 있다는 사실을 베드로는 증명하고자 합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이 모두 교회의 신속한 회복을 기대 하면서도 그 회복이 어떤 방법으로 달성되어야 할 것이냐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그들의 어리석음을 책망합니다.
그런데 이 예언자가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라고 말할 때에 분명히 성령의 충만한 풍성함을 지적하려고 한 것이라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라\" 한 말을 혹은 내 영으로부터 그분께서 단순히 \"내가 내 영을 부어 주리라\"고 말한 것으로 우리는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 나중의 말은 예언자의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여기서 히브리어 (야)을 (아포)라는 헬라어로 번역한 방식을 따랐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너무 세밀한 데까지 관여하는 일은 쓸데없는 일입니다.
말에 어떤 변화가 만들어지든 간에 예언자의 의미하려고 한 것은 보유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을 부어주신다고 말씀하셨을 때에 그것을 바르게 받아들여져야 합니다. 즉 하나님은 결코 다함이 없는 유일한 샘에서처럼 그의 영으로부터 무한한 각양 은사를 사람들에게 부어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증거하는 것인데 \"은사는 여러 가지나 성령은 같고\"(고전12:4) 라고 한 것과 같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값진 교훈을 배웁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은혜 이상으로 더 훌륭한 은혜를 우리에게 주실 수 없습니다.
또 성령의 은혜 없이는 그 밖의 모든 것은 실로 무가치하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간단한 형식으로 그 백성들에게 구원을 주시기로 약속하시려고 했을 때에 성령을 그들에게 주신다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뒤따르는 일은 우리가 주신 바 성령을 받기까지는 아무런 좋은 것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모든 영적인 복의 보고(寶庫)에 들어가며 하나님의 나라에까지도 들어갈 수 있는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3) 본 절 중간에 \"모든 육체에게\"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일반적인 진술의 중요성은 다음에 올 사항에서 분명해집니다.
먼저 \"모든 육체\"라는 포괄적인 문구가 씌어지고 다음에 구분이 주어졌는데 그 구분에 의하여 예언자는 하나님께서 나이나 성별은 전혀 구별하지 않으시고 모든 사람을 한가지로 하나님의 은혜에 참예하도록 차별 없이 용납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해줍니다.
\'모든 육체\'라는 말은 젊은이나 노인, 남자나 여지가 다 포함되는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이는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그 백성들에게 그처럼 새롭고 이제까지 이야기로도 들어본 일이 없는 귀한 것을 약속하시는 것인가, 또 성령의 은혜를 분양 받지 못한 시대는 없었기에 처음부터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귀한 것을 그들에게 주시는 일이 관례처럼 된 것이 아니었는가? 하는 물음입니다.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두 문귀에서 설명됩니다.
즉 \'내가 부어 주리라\' 와 \'모든 육체에게\' 라는 문구입니다.
여기서 구약과 신약 사이에 있는 두 대립이 언급되었기 때문입니다.
\'부어준다\'는 말은 넘치는 풍성을 의미하며 그에 반하여 율법 아래서는 그러한 배당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역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하늘로 올라가시기까지는 성령이 강림하시지 않는다고 말합니다(요7:39).
\"모든 육체\" 란 무수한 군중을 의미합니다.
반대로 주님은 일찍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그의 성령을 풍성하게 허락하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 둘을 비교함에 있어 우리는 율법 아래 있었던 그 조상들이 우리들과 동일한 은혜에 참여했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께서 보이시는 것은 실제로 우리가 그들보다 낫다는 점입니다.
모든 신도들은 다 세상이 창조되었을 때부터 주께서 오늘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며 우리를 중생시키시는 그 동일한 성령을 받았습니다. 곧 모든 성도들이 지혜와 정의와 성화의 성령을 받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거듭 주장합니다.
다만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심으로서 급히 함께 모이게 된 그 많은 군중에 비교한다면 당시에 지식의 빛을 받은 자의 수효는 근소했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대낮과 같은 밝음으로 비추어 주시는 오늘 복음의 빛에서 얻은 우리의 지식에 비교한다면 옛날의 그들의 지식이란 훨씬 희미하고 빈약하며 베일에 가려진 것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 중의 몇몇 사람은 아마도 오늘에 비교할 만한 사람이 없을 정도로 훌륭한 신앙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지혜는 율법의 가르침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 신앙적인 왕들과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계시된 일들을 본 일도 들은 일도 없었기 때문입니다(마13:17, 눅10:24).
그러므로 요엘은 성령의 은혜가 신약시대에 더 풍성할 것이요 더 나아가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은혜에 참예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예언함으로 신약의 우수함을 보여줍니다.
4. 본 절 하반에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언한다\" 는 말로 사도는 희귀하고 비범한 지혜의 은사를 말해 주려 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그 다음의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한 대목도 같은 것을 가리킵니다.
민수기 12장 6절에서 우리가 아는 대로 이것은 주께서 흔히 자신을 예언자들에게 계시하실 때 쓰시던 두 가지 전형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이 구절에 의하면 주께서는 모세를 예언자들의 보통 추세와 구별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즉 \"⑥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의 이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로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로 하거니와 ⑦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나의 온 집에 충성됨이라 ⑧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일반적 표면에 이어서 추인(追認)의 형식으로 두 개의 실예가 부가되어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나 그 의미는 이런 것이니 즉 성령이 하늘로부터 부어지자마자 그들이 다 예언자가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에 대하여 반론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러한 일은 사도 자신들 가운데서도 혹은 전체 신도의 무리 가운데서도 전혀 발생한 일이 없다는 주장입니다.
거기 대해서 우리는 이같이 대답합니다.
즉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자기들의 시대에 적합한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이 그들의 일반적인 관습이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께 예배하는 일을 말할 때에는 제단, 희생 제물, 금이나 은이나 향 같은 봉헌물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거니와 이제 제단은 사라졌고 율법시대에 사용되었던 희생제물은 폐지되었으며 또 주께서는 땅에 속한 부 이상의 보다 높은 무엇을 우리 손으로부터 요구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과연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언자들은 자신들의 시대의 풍습에 자신들의 방식을 적응시키면서 당시 민중이 잘 알고 있던 형태 밑에 오늘 우리가 보면 이상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는 것까지도 포함시켰습니다.
마치 다른 곳에서 예컨대 주께서 레위인들에게 약속하실 때 일반 백성들 중에서 택하셔서 제사장을 삼고 레위인을 삼으리라고(사66:21) 하셨는데 그가 말하려고 한 의미는 단순히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누구나가 다 아무리 비천하더라도 영예로운 지위에 나아가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의 진정하고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려면 우리가 율법의 낡은 체제에서 유래된 말들을 너무 문자에만 구애되어 이해해서는 안되고 어떤 형식에 구애됨이 없이 진리를 추구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진리란 바로 사도들이 돌연히 성령의 감동을 통하여 예언자답게 이야기했으며 신적 영향을 받아 이례적으로 하늘의 신비에 관한 말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예언\'이라는 말은 단순히 뛰어난 지혜의 은사를 의미할 뿐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왕국에서는 하나님께서 그 비밀을 단지 소수의 예언자들에게만 계시하시는 것이 아니요 모든 사람들이 영적 지혜를 예언자들이 받았던 뛰어난 정도로까지 받게 될 것이라고 요엘이 말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은 또한 예레미야서에 기록된 말씀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함과 같습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가 상대해서 말하고 있는 유대인들에게 이 말로 같은 은혜에 동참하도록 권고합니다.
마치 베드로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부어주신 성령을 멀리 그리고 널리 부어주시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 풍성함을 우리와 함께 받느냐 못받느냐 하는 것은 오로지 당신들에게 달려 있습니다\"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당시 유대인들에게 말한 것은 오늘 우리에게 말하는 것으로 우리는 이해합니다
비록 우리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사는 그쳤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교회로부터 철수하신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유로 주께서는 이 동일한 약속에 의해 예외없이 우리 모두에게 날마다 성령을 주십니다.
이리하여 우리에게 만일 부족함이 있다면 그것은 단지 우리 자신의 태만에서 유래된 것일 따름입니다.
그리고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부터 일반 크리스챤 남녀를 뒤로 빼돌려 놓는 자들은 사악하고 모독적인 성령의 적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남자나 여자나 노인이나 젊은이들을 마찬가지로 받아들이실 뿐 아니라 그들을 참으로 지명하여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행2:18-21 그때에 내가
베드로 사도의 설교 중에 맨 먼저 나타난 것이 종말 신학 사상입니다.
베드로는 신약 계시 전반 혹은 구원을 선지자 요엘의 예언 성취로 보았습니다.
그러니 만큼 그는 신약시대를 종말시대로 본 것이 분명합니다(히1:2).
메시야가 오신 사실은 곧바로 천국의 현림(現臨)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재림과 천국의 완성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벧후3:8-13).
1. 본문 18절은 \"그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입니다.
이 말씀에 의하면 그 약속은 하나님을 봉사하고 예배하는 자들에게 한정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성령을 결코 남용하시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하나님께서 믿지 않는 자들과 조롱하는 자들에게도 막연하게 성령을 주셨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물론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도 있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남용인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종이 되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성령을 받기까지에는 하나님의 종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먼저 그들을 자기 가족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또 성령으로 개조하셔서 하나님을 섬기도록 하십니다.
그리고 나중에 새로운 은사로 채워주시는 것입니다.
더구나 이 예언자는 자신의 현실만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교회에 적응시키려고 의도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 때의 교회란 유대인들에게 국한되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하나님의 남종과 여종이라는 영예로운 칭호가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막혔던 장벽을 깨뜨리시고 사방에서 자신에게로 교회를 모으시게 되자 계약 백성 집단에 받아들여진 많은 사람들이 같은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습니다.
이 성령이 특히 교회를 위해 임명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오직 기억해야만 합니다.
2. 본문 19-20절은 \"(19)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 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20)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입니다.
우선 우리는 20절의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셨던 초림으로 설명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것을 부활의 마지막 날로 여깁니다.
우리는 그 두 견해를 다 찬성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예언자가 그리스도의 왕국 전체를 의미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자신의 왕국의 완성으로 인도해 주시려고 육신으로 나타나시기 시작한 그때로부터 이를 \'큰 날\' 이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예언자는 어느 특정한 한 날을 지적하는 것이 아니요 그 날을 복음이 처음 선포되던 날에서 시작하여 최후의 부활의 날까지로 간주합니다.
사도들의 시대로 그것을 한정시키려고 하는 사람들은 예언자가 이 구절과 다음 구절 사이에 만들어진 연결로 인하여 영향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주장에는 아무런 불합리한 것이 없습니다.
예언자는 이러한 사실이 세상이 마지막까지 끊임없이 계속 진행된다고 할지라도 그러한 사건들이 시작된 때를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예언자는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고 은유적(隱喩的)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에 의하면 마치 삼라만상에 무서운 변동이 일어난 것처럼 사람들을 두려움으로 기절하게 해 줄 하나님의 진노의 조짐을 하나님께서 전 세계의 구조를 통해서 보여주실 것이라는 뜻입니다.
해와 달이 각각 제 코스에서 빛을 땅위에 비취는 동안 그것은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은총의 증거가 되는 것처럼 다른 쪽으로는 그것이 하나님의 진노와 불만의 사신도 될 것이라고 예언자는 예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이 예언의 둘째 부분입니다.
예언자는 모든 육체에게 부어주신 성령의 은혜에 대해 서술한 뒤에 동시에 전 세계에는 번영과 평안이 올 것이라고 누구나가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날에는 세상이 큰 두려움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소란하게 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그리스도도 마태복음 24장과 누가복음 21장에서 충분히 우리에게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파멸이 모든 것을 위협하고 있는 때에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누구나 확실히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에 하나님의 은혜를 설명하기 위한 더 큰 효과가 있습니다.
해가 어두워지고 달에서 피의 줄기가 흘러나오며 검은 연기가 솟아오른다는 것으로 예언자는 사람들이 눈을 아무데로 돌려도 그들을 놀라게 할 많은 환영(幻影)들이 위에나 아내에나 풍부하게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이 세상이 일찍이 그처럼 비참하게 되었던 일도 없었습니다.
그처럼 두려운 하나님의 진노의 증표가 많이 나타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이러한 무시무시한 재앙을 막아낼 만한 응급의 구제수단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로우심이 얼마나 크고 훌륭한가를 알게 됩니다.
또 한편 그처럼 가까이 있는 구원의 피난처로 도피하지 않는 자들은 그 얼마나 고집스럽고 하나님께 대하여 배은망덕한 자들인가를 우리는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신도들에게 그들이 한층 더 열심히 구원을 열망하는 심정을 일으키도록 이 무서운 묘사로서 그들을 각성시키려고 하시는 것을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가 그것을 인용해서 유대인들에게 만일 그들이 자기들에게 주시는 성령의 은혜를 받지 않는다면 그들을 위해 저장해 둔 무서운 재난이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고 한 것도 같은 목적을 위해서 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넘치는 재난의 홍수가 어떻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과 관련될 수 있는가를 질문하는 자가 있을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유일한 보증이시오 그 안에서 하늘 아버지께서 자신의 선하심의 모든 보고(寶庫)를 드러내시며 그 자비심을 우리에게 쏟아 부으시는 것인데 오히려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어느 때보다도 더 맹렬하게 불타올라 이를테면 그 때문에 하늘과 땅을 한꺼번에 불로 태워버릴 뿐이라는 것은 합당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첫째로 유의해야 할 것은 인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에 너무도 우둔하기에 그들은 여러 가지 고뇌로 인하여 매를 맞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는 고생하며 고민을 걸머지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초대하시기에(마11:28) 우리는 시련을 통해서 겸손을 배우도록 많은 시련으로 굴복 받을 필요가 있습니다.
사람이란 자기 문제가 성공적이라고 생각될 때에 교만의 뿔이 돋아나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행복하다 생각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맹렬하게 멸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셋째로 우리는 육체의 안전을 필요 이상으로 추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의 은혜를 현세와 생활에 결부시키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왕국은 영적이라는 것을 알기 위해 전혀 다른 경로로 우리의 생각을 돌리도록 하는 일이 옳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는 하늘의 것이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시려고 우리가 육체에 의한 많은 고뇌를 겪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로써 이 세상을 넘어선 우리의 지복(至福)을 찾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인간들은 자기들의 배은망덕으로 자신에게 불행을 가져오는 수도 있습니다.
그 주인의 마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순종하지 않는 종은 한층 더 무거운 형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눅12:47).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친히 인격적으로 대하시면 대하실수록 우리의 불경은 더 증대하고 공공연한 반역행위로 뛰쳐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면서 한편 하나님의 여러 가지 보복의 증표가 나타났다고 할지라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인간들은 자기들의 사악한 경멸로 더욱 가혹하게 하나님께 도전하며 그분의 진노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적 둔감을 교정하려고 하시며 여전히 가르침 받기를 싫어하는 우리를 굴복시키기 원하시며 혹은 우리의 배은망덕을 벌하려고 하실지라도 그리스도의 날의 두려움은 종속적인 일입니다.
그 날이 자체 안에서 기쁘지 않은 것을 가져오는 일은 아무것도 없고 다만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는 일이 두려워할 만한 하나님의 진노를 발하게 하기 때문입니다.
3. 21절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입니다.
1) 이 부분은 매우 주목할 만한 구절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을 마치 게으른 나귀를 위협과 공갈로서 구원을 추구하도록 몰아치는 것처럼 하늘과 땅을 어두움 속에 싸이게 한 다음에 만일에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게 되면 그로 인해 구원이 우리의 눈앞에 비치어지는 길을 보여주십니다.
이 정황을 관심 있게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만으로도 그것은 참으로 너무도 큰 일입니다.
그런데 무수한 죽음의 구렁 가운데서 구원을 약속하신 것은 훨씬 더 큰 일입니다.
주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만물이 다 혼돈 속에 있고 주음의 공포로 인하여 점령되었을 때에 단지 내 이름을 부르기만 하라 그리하면 너는 구원을 받을 것이다 하십니다.
사람들이 재난의 구렁에 삼켜질지라도 도피할 수 있는 구원의 길이 주어집니다.
우리는 여기 사용되고 있는 \'누구든지\' 라는 일반적 용어도 고찰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외 없이 자신이 택한 모든 사람을 자신 앞으로 용납하십니다.
그래서 바울이 로마서 10장에서 밝히고 또 예언자가 훨씬 이전에 기록한 바와 같이 그들을 구원으로 초대하신다는 의미입니다.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모든 육체가 주께 나아오리이다\"(시65:2).
그러므로 하나님이 택하셔서 부르시고 의롭게 하시는 자들은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서 제외된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구원의 문은 모든 사람에게 개방되어 있습니다.
불신앙 이외에는 우리가 거기에 들어가는 것을 방해할 자가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가 모든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복음을 통하여 자신을 계시해 주신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을 통하여 구원이 확실한 것과 같이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이름으로 구하지 않는다면 매우 비참하게 되며 구원받지 못하는 자가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합니다.
더구나 우리의 구원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일에 기초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원(祈願)이 신앙에 근거를 두고 있기에 신앙에서 빼앗길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또 하나 그것에 못지 않게 유의하여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예언자가 여기서 말한 하나님을 부르는 일은 특별히 마지막 날에 속한다는 점을 지적한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시대를 통하여 그 이름이 불려지기를 원하신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그리스도 안에서 아버지가 되신다는 사실을 보이신 이후로는 우리가 한층 더 쉽게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더 큰 확신과 보증을 줍니다.
또 우리에게서 우리의 조심성 없다는 사실을 벗겨주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언명하신 대로 이 특권은 기도에 대한 우리의 열심을 배가시킵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라\"(요16:24) 하셨습니다.
주께서는 \"이제까지는 너희가 기도했으나 그것은 중보자와 변호인이 육체로 나타나지 않았을 때 한 기도이지만 이제는 너희가 너희의 소송을 변호해 줄 나를 소유하였으니 너희는 얼마나 큰 용기를 가지고 기도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신 것입니다.
행2:22-24 이스라엘 사람들아
본문에 계속되는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그리스도 중심 사상을 강조합니다.
사도는 오순절 성령 강림도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주께서 말씀하신대로 이루신 구원의 성격입니다(요14:26,15:26-27,16:7-8,13-15)
베드로가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기적으로 고친 후에도 길게 설교한 것은 그리스도 중심이었습니다.
사도는 백성이 자기에게 주목하는 것을 금하면서 그리스도만 높였습니다(3:11-26).
그 설교 가운데는 거의 매 절에 \"그리스도\"란 말이 나옵니다.
1. 본문 22절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하셨느니라\"입니다.
1) 본문 22절 초반에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말을 들으라 너희도 아는 바에 하나님께서 나사렛 예수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 요엘의 예언을 자기 목적에 적용합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회복의 시기가 이미 왔다는 것입니다.
또 그 일 때문에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일입니다.
이 약속은 중보자가 와야만 성취 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받은 모든 선물은 우리를 모든 것의 원천이신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해 주는 일 이외에 적당한 용도가 없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목적에 조금씩 점차적으로 가까이 나아갑니다.
베드로 사도는 예수가 그리스도시라고 즉시 선언함으로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다만 단순히 그리스도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은 한 \'사람\' 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그리스도의 기적으로서 입증합니다.
다음에 베드로는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뒤에 죽음에서 살아나셨다고 덧붙입니다.
이리해서 더욱 더 분명하고 완전하게 그리스도는 예언자들 중의 한 사람이 아니고 바로 만물을 회복하실 자로 약속된 하나님의 아들 그분이시라는 것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나사렛 예수는 명백한 증거에 의하여 하나님께 인정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는 흔히 있는 모호한 사람으로 멸시될 수 없다는 것이 첫 부분의 요지입니다.
에라스므스는 그 말을 다른 식으로 이해한 모양인데 생각이 좀 잘못된 것입니다.
그는 누가의 의도를 충분히 나타내지 않고 그 말을 \'전시했다\' 로 번역한 것입니다.
이 말은 헬라어로는 \'보여준다\' 의 뜻을 가졌기에 수학자들이 사람들의 목전에서 사물을 분명히 보여주고 필요한 증거를 내세워야 할 때에 사용되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나타내 보이심\'에서 누가가 의미하고 있는 것은 예수께서 무명의 사람으로 또는 증거나 표적이 없이 오신 것이 아니요, 오히려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야말로 그를 존귀와 영광으로 높이는 결과가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유대인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이 유대인들 가운데서 훌륭하고 위대하신 분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마치 기적들이란 다른 백성들을 위해서가 아니요 오직 유대인만을 위해서 계획되었으며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께로부터 그들 유대인들에게 보냄을 받으신 분이라는 것을 그들이 알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본절 하반에 \"큰 권능과 기사와 표적을 너희 가운데서 베푸사 너희 앞에서 그를 증거 하셨느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기적을 세 가지 다른 이름으로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새롭고 비상한 방식으로 기적으로 나타내시며 적어도 그것으로 인하여 큰 경탄감을 일으키십니다.
그러기에 그것들은 큰 권능이라고 정당히 불리워집니다.
그것은 우리가 일반으로 어떤 이상한 일이 생겨날 때에 더 감탄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를 경탄케 하기에 기적이라고 불려지는 것입니다.
그것들을 표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주께서 사람들의 마음이 기적에만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높이 올려져서 훨씬 높은 곳으로 그들을 이끌어 줄 것을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도가 세 가지 말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의 기적을 보다 높이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또 그 용어를 거듭함으로 사람들로 그것들을 깊이 생각하도록 이끌기 위함이었습니다.
더욱이 또 사도는 우리가 점차로 앞으로 나아가기를 원하기에 그리스도를 창조주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대행자로 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기적은 효과적인 증명으로 적당하냐 하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마술사라도 같은 방식으로 자신의 사기행위를 위해 신용을 획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물음에 대한 대답은 이렇습니다.
즉 사단의 마술은 하나님의 권능과 아주 다르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적그리스도의 왕국은 기적 속에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곧 이어서 그것은 거짓 기적이라고 덧붙이셨습니다(살후2:9).
할 수 있다면 택함을 받은 자라도 속게 할 만큼 외관은 훌륭하기에 우리가 그것들을 쉽게 구별할 수 없다는 항변을 한다면(마24:24)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고 둔하기에 속는다면 그 잘못은 우리 자신의 결함에서 올 따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분명히 넉넉하게 보여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만일에 볼 수 있는 눈만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하시는 기적 안에서 교리와 직무 그 둘의 넉넉한 확증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증명은 불신자에게는 확실한 것이 못되어 그들이 가끔 사단의 거짓 기적으로 속게 된다면 그 원인은 그들의 눈이 어둡기 때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맑은 심정을 가지기만 한다면 하나님께서 가끔 자신을 나타내시게 될 때마다 순수한 내적 통찰력을 가지고 하나님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심정의 불신앙을 통하여 우리의 판단력이 부패해 버렸거나 또는 우리 자신의 시력의 둔화로 우리의 눈이 어두워졌거나 흐려졌거나 하지 않았다면 사단이 우리를 속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2. 본문 23절은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못박아 죽였으나\" 입니다.
1) 본문 23절 초반은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입니다.
(1) 하나님께서 그처럼 뛰어난 능력을 주신 그 사람이 나중에 갖가지의 능욕과 고통에 놓여져 그처럼 수치스러운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사실은 얼른 보아서 설명이 잘 안 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사도는 미리 거침돌을 옮겨놓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가 처음 그것을 대할 때에 대체로 우리를 불안하게 해 주기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충고해 줍니다.
즉 그리스도는 어쩌다 우연히, 혹은 스스로 자신을 구원할 힘을 갖지 못했기에 고난을 당하신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하셨기에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에 따라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을 앎으로만 모든 어리석고 사악한 생각의 근거를 제거하게 됩니다.
또 그렇지 않았다면 마음에 생겨났을지도 모를 장애물을 제거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경솔하게 혹은 헛되이 명령을 내리시는 것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신하여야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고난을 당하셔야 했던 그 이유가 바로 거기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아는 이 동일한 지식이야말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목적과 결과를 생각하는 첫 계단입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생각할 때 우리는 즉시 중요한 사실에 직면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즉 옳은 사람이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음에 내어준 바 되었습니다.
또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죽음의 대가였다는 사실입니다.
(2)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의 삶과 죽음을 똑같이 지배한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기 위해서 여기 하나님의 섭리에 관한 중요한 한 구절이 있습니다.
누가가 그리스도의 일을 말하고 있는 그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보편적인 섭리가 전 세계에 나타나는 것이면서도 특히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 자신들에게 비치는 그 섭리의 거울을 우리가 그 자신의 인격 안에서 갖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두 가지 교훈을 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예지(豫知)와 섭리입니다.
하나님은 결정을 내리시기 전에 자신이 결정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시기에 순서로 보면 예지가 먼저이지만 누가는 그것을 하나님 계획과 섭리 다음에 놓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특정한 목적에 대해서 훨씬 이전부터 지휘하지 않으신 것은 아무것도 원하시거나 명령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사전 생각이 별로 없이 결정하기에 경솔하게 많은 일을 판결합니다.
그리나 베드로는 하나님의 계획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하여 섭리에다 하나님의 예지를 연결시킵니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기에 우리는 좀더 크게 유의해서 이 둘을 분별해야 합니다.
그들은 전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계획을 못 본 체 하고 하나님의 공허한 예지에 매달립니다. 거기서 하나님은 모든 일을 예지하십니다.
그러면서도 피조물에게 아무런 필연성(必然性)도 씌워 주시지는 않는다는 일반적인 구별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연 장차 생겨날 일에 대한 여러 가지 까닭을 알고 계신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일어난 일체의 사실을 예지하고 계셨을 뿐 아니라 그것을 그렇게 정하신 것이라고 가르칩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중요한 일반 교리를 추론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죽음을 정하심으로서 자신의 섭리를 보여주신 것처럼 전 세계를 지배하시는 일에서도 그 섭리를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장래의 일을 미리 아는 것만이 아니요,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서 장차 일어날 일을 명령하시는 것이 모두 하나님께 속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이 정하신 계획대로 내어준 바 되었다고 베드로가 말했을 때 그것이 바로 이 둘째의 요점을 명시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예지는 하나님의 뜻과는 같지 아니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따라서 만물을 지배하시고 다스리십니다.
(3) 좀더 예리한 통찰력을 가진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예지하실 뿐만 아니라 그분의 손짓과 몸짓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무엇이나 지배하신다는 것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 피조물에게 자유를 주셔서 각자로 하여금 그 본성의 질서를 따르도록 한다는 것 같은 질서의 혼란을 상상합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태양은 일찍이 하나님께로부터 우리에게 빛을 비추어 주도록 명령받은 그 기능을 다하고 있기에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인간의 본성은 선악을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되어 있기에 인간에게는 자유의지가 주어졌다고 그들은 생각합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는 일 없이 하늘에 앉아 계신 하나님을 상상합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그와는 아주 다릅니다.
인간의 일체 행위를 포함한 하나 하나 상황에는 특별한 권위가 하나님께 돌려집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이 무슨 목적으로 이것을 가르치고 있는가를 생각해 봐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넋을 잃게 해 주는 어리석은 공론을 우리는 조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단과 악한 자들의 손에서 해 받지 않게 하나님의 손에 보호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수 있게 하기 위해 우리 신앙을 훈련시키는 것이 성서의 과업입니다
이 한가지 진리를 파악하는 일이야말로 우리에게 바람직한 일입니다.
베드로도 이 구절에서 다른 목적은 아무것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정말로 여기에 그리스도 안에서 제시된 하나의 표본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침착성을 가지고 지혜로와야 한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체는 자연의 방식을 따라 소멸될 몸이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섭리에 의하여 그 육체는 소멸에서 구제를 받은 것입니다.
만일 누군가가 그리스도의 뼈는 파괴될 수 없었던가 아닌가 하고 묻는다면 자연적으로는 파괴될 수 있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령하셨기에 어느 하나의 뼈로 파괴될 수 없었던 것이라고 대답할 것입니다(요19:36).
이 실례를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에 첫 자리를 제공해야 하며 스스로는 주어진 자기 제한성 안에서 자제하여 아무리 자신의 눈이 어떤 선견지명을 가졌다 할지라도 우리의 시력으로는 꿰뚫어 볼 수 없는 하나님의 비밀을 경솔하게 침범하려고 하지 않아야 할 것을 배워야 한다고 우리는 말합니다.
2) 본 절 하반에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불법한 자들이 하나님을 순종했다고 제시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런 데서 두 가지의 어리석은 태도가 생겨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은 악의 창시자라는 생각입니다.
또 인간이 그러한 악을 범한다 해도 죄를 범한 것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이 둘째의 어리석은 생각에 관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설사 불법한 자들이 하나님께서 자신의 섭리를 따라 정하신 일을 수행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복종한 것은 조금도 없습니다.
복종이란 자발적인 감정에서 솟아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법한 자들의 의도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복종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복종이란 하나님의 뜻을 아는 일에 의존되어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서 우리에게 자신의 뜻을 계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일치하는 일을 행하는 자, 또는 그분의 지배에 자발적으로 기꺼이 따르는 자들만이 하나님을 복종하는 자입니다.
모든 불법한 자들에게서는 무엇하나 그러한 일들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리 저리로 몰아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하나님에게 복종하고 있다는 구실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고는 아무도 말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율법에서 구해야 하며 다른 편으로는 그들은 할 수 있는 대로 하나님에게 저항하려고 힘쓰고 있다는 그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악의 창시자라 말하는 어리석은 생각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를 부정합니다.
이 말에는 어떤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악한 행위란 그것을 행하는 자가 무슨 목적을 갖고 했느냐에 따라서 판정을 받습니다.
사람들이 절도나 살인을 범했을 경우에 그들은 절도라든지 혹은 살인자가 됨으로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도와 살인에는 범죄하려는 악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악의를 이용하시는 하나님은 보다 높은 차원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훨씬 다른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한쪽을 징벌하시고자 하시며 다른 쪽으로는 인내심의 훈련을 시키시고자 하십니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께서는 결코 자신의 본질, 곧 완전한 정의를 짓밟지는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불법한 자의 손으로 내어준 바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되었을 때 그것은 하나님의 뜻과 정하심에 의하여 된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자체 안에 악한 반역행위와 그 자체가 대단히 큰 죄악인 살인행위는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생각되어서는 안됩니다.
3) 본 절 끝에 \"못박아 죽였으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특별한 이유에서입니다.
즉 부활이 보다 확실하게 믿어져야 되겠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일은 유대인 간에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따라서 주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일은 하나님 능력의 비범하고도 놀라운 증거였습니다.
그런데 사도는 유대인들의 양심을 죄의식으로 찔러 주기 위해서 예수께서 그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친히 자기들의 손으로 그를 십자가에 달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전체백성이 한 목소리로 그리스도의 죽음을 요구하였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상대해서 말씀하신 많은 청중은 그러한 악하고 불신앙적인 포학한 행위에 비록 동의하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그래도 사도는 이 죄를 당연히 국민 전체의 책임으로 돌립니다. 그것은 침묵에 의해서거나 그렇지 않으면 무관심에 의해서 그들은 모두 자신들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미리부터 예수를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셨기에 알지 못했다는 구실을 붙일만한 여지는 전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내리신 죄의 선고는 회개에 이르게 하는 첫 계단입니다.
3. 본문 24절은 \"하나님께서 사망의 고통을 풀어 살리셨으니 이는 그가 사망에게 매여 있을 수 없었음이라\" 입니다.
\'사망의 고통\' 이라는 것은 육체의 감각 이상의 무엇을 의미한다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죽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성실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저주라고 들려질 때 불가불 죽음에서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난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죽음 그 자체보다 큰 재앙을 빚어내는 불안과 공포가 생겨나게 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를 짊어지신다는 조건으로 죽으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나아가셨을 때 피땀을 흘리실 정도로 심한 두려움을 느끼시게 하였던 양심의 내면적인 두려움은 그에게 대해서 육체에 가했던 모든 고문보다도 훨씬 큰 전율과 고통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가 그리스도는 이러한 종류의 고난과 더불어 싸우셨다고 말하고 또 승리하셨다고 말한 것은 그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이제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저주는 그리스도의 승리로서 삼켜져 버렸기에 죽음의 성격도 아담에게서 가졌던 것과 동일한 성격이 아니기 때문입니다(고전15:54).
우리가 여전히 고난의 찌르는 아픔을 느끼기는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신앙의 방패를 잡고 있는 한 그 고난이 가혹하게 우리를 상하지는 못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창조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죽음이 그를 주관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사도는 설명을 덧붙입니다.
행2:25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본문에 나타난 베드로 사도의 설교는 성경 중심의 사상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사도는 이 점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부활이 구약의 예언 성취로 된 사실을 강조합니다.
그리하면서도 사도는 어디까지나 구약의 말씀을 절대로 믿는 경외(敬畏)의 태도를 가지고 해석한 것입니다(29절).
사도가 이렇게 성경중심으로 말한 목적은 하나님말씀은 절대적으로 참되다는 것입니다 또 그 말씀이 이루어진 그 사건(그리스도 부활 사건)도 절대로 믿을만하다는 것입니다
본문 25절은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입니다.
1. 본문 25절 초두에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그리스도의 부활은 분명하고 확실한 예언에 의하여 증언되었습니다.
또 예언자들의 가르침의 온전한 기록에서도 증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그것을 전혀 새롭고 낯선 것처럼 유대인들에게 입증하여야만 했습니다.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게 가끔 부활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깨우쳐 주셨는데도 그들은 거기서 별로 이득을 얻지 못하고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참된 교리에 대한 어떤 원리를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곧 보게 될 것과 같이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알 수 있는 길을 열어줄런지도 모를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은사는 그리스도의 부활의 성과였기 때문에 유대인들에게 이 은사의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알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다윗의 증언을 인용하여 그리스도가 반드시 부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서 부활하시게 된 것은 자신을 위하여 살려고 해서가 아니요 그의 자녀들을 위함이었다는 사실을 사도는 자명한 사실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성령에 감동된 베드로의 생각의 방향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훨씬 먼 옛날에 예언돼 있었던 일을 새삼스러운 일처럼 생각하지 말아야 하며 더구나 다윗이 그를 교회의 머리라고 예언했기에 예수는 곧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입니다.
2) 우선 첫째로 우리는 시편에 있는 이 구절이 베드로가 단언한 것처럼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일을 말한 것으로 이해되어야 하는가 아닌가를 알아 보아야 합니다.
그런 다음에 만일 거기 본문 안에 무엇인가 주목할 만한 것이 있다면 우리는 개별적으로 고찰하게 될 것입니다.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심이로다\"(시16:10) 라고 인용한 말씀은 결코 다윗에 관한 사항이 아니라고 베드로는 언명합니다.
다윗의 육체는 무덤 속에서 썩어버렸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의 천박한 논법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다윗은 단순히 파멸로부터 자신이 면제되려고 생각했기에 그 말이 강조되어서는 안 된다고 즉시 반대를 받을런지도 모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지 부패가 침범한다 하더라도 주께서 자기를 구해 주실 것을 알고 자기는 그 위험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예언하기에 아무 방해를 받지 않습니다.
사실 그것은 히브리인 관용어에 보통 있는 것처럼 전절(前節)의 반복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의미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가 죽음의 지배 하에 억압되거나 죽음에 삼켜지는 일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러한 해석은 여기에 사용된 \'음부\'라는 말을 생각해 보면 더욱 명확해집니다.
히브리어는 (스올)이요 \'썩음\' 이라는 말의 히브리어는 (솩하트)입니다.
이 두 말이 다 \'무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다윗은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구원된다는 것을 두 번 말하고 있습니다. 결국 여기서 그는 시편 49편 15절에서 말한 \"하나님은 내 영혼을 음부의 권세에서 구속하시리로다\"한 것과 똑같은 선언을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또한 다른 면으로 보면 그가 악한 자들에 대한 일을 말할 때 \'멸망 받은 일\'을 \'무덤으로 내려간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3) 우리는 간단하게 이 일에 대답하려고 합니다.
여기에는 신도들의 일반적인 구속에 관한 일보다 훨씬 큰 무엇이 말해지고 있습니다.
다윗은 삶에서나 죽음에서나 하나님은 자기의 영원한 수호자시라고 단언합니다.
만일에 다윗이 하나님의 가호로 인하여 마침내는 안전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희망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실제로 일찍이 한 때 위험에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에서 별로 얻은 이익이 없었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됩니다.
차라리 다윗으로서는 여기서 그러한 안전이 일반 신도의 운명에 대해서 매우 훌륭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그 말들은 어떤 새로운 그리고 뛰어난 특권으로 자신이 기쁨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들려집니다.
여기에는 반복이 있고 또 그 두 구절은 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다고 우리는 인정합니다
즉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와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의 두 구절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그분의 거룩한 자를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하실 것이라는 뜻으로만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썩음에서 면제된다는 것이 특별히 약속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또 (솩하트)가 처음 부분에 사용된 (스을)과 마찬가지로 무덤을 의미한다는 사실도 역설하지는 않습니다. 그러한 말들에 대해서 변론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는 불가불 그 어원(語源)은 고려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덤이 (솩하트)라고 불리워질 때 그것은 인간의 육체를 썩게 함으로 그렇게 불리워지기에 다윗이 그 특질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말은 장소 문제보다도 오히려 썩어진다고 하는 그 상태가 더 많이 표명되고 있습니다. 시편에서 이야기되고 있는 그 사람을 하나님은 무덤 속에서 썩어지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의미의 말이 됩니다. 다윗은 이 필연에서 모면하지는 못하였기에 그 예언이 자기에게서 참으로 혹은 완전하게 성취되지는 않았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4) 이러한 상황 자체가 바로 이 시편이 전적으로 그리스도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해줍니다. 다윗은 아담의 자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인류의 이 보편적 상태, 즉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고 한 상태를 모면할 수 없었습니다(창3:19).
무덤은 아담의 모든 자손들을 집어 삼키고 그들을 소멸시키기 위해 열려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도 그 썩어짐에서 면할 수 있는 자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분리시켜 우리 자신의 모습을 바라볼 때, 썩어짐을 가지고 우리를 위협하는 무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또한 만일에 다윗이 그리스도에게서 분리되어 있다면 자기가 무덤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그 말이 조금도 자기에게는 해당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어짐에 관한 한 자기가 무덤에서 자유롭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 자신이 그리스도의 몸 안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가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음은 극복되고 그 죽음의 왕국은 타도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일 다윗이 그리스도의 지체 때문이라는 이유 이외에 무덤으로부터의 자유를 기대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고 있다면 그 자유는 머리되시는 그리스도에게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사실이 그것으로써 분명해집니다.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바른 이론이라는 것을 인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즉 하나님은 모든 인류를 썩어짐의 지배 아래 두셨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인류의 수(數)에 속해 있는 만큼 그 썩어짐에서 면할 수 없었습니다.
이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그리스도 그분의 손에 의해서만 만물의 회복이 기대될 수 있다는 의심할 수 없는 추정을 그 설교에서 느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은 베드로의 말에 그만큼 더 쉽게 동의하게 되었습니다.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메시아에 해당되는 일 이외에는 다른 적용이 불가능했다는 것을 그들이 알았기 때문입니다.
적어도 여기에 언급된 그 사람들은 그처럼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항을 가지고 다투는 만큼 뻔뻔스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습니다.
그 시기에 하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에게 배우려는 마음 준비를 가진 경건한 사람들을 청중으로 제공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구약성경에서 메시아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모습이 다윗에게 나타나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 가운데에는 어떤 신앙심도 있었고 또 성경에 대한 존경심도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오늘날 사람들은 거의 모두가 절망할 정도로 뻔뻔스럽습니다.
어떤 압력이 그들에게 가해진다 해도 그들은 그것을 벗어납니다.
도망할 길을 찾지 못했을 때에라도 그들은 무조건 부수고 뚫고 나아갑니다.
그들이 정복을 당할 때에도 여전히 승복하기를 거부합니다.
이러한 철면피와 완고는 그들의 불신앙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이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설교로 다시 돌아갑시다.
5) 다윗은 하나님이 자기의 해방자가 되실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는 것만이 아니요, 자기는 결코 무덤에서 썩어져버릴 수는 없다는 그 해방의 특이한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기에 베드로는 거기에서 당연히 이렇게 결론을 내리는 것입니다.
즉 다윗의 육체는 무덤에서 썩어졌기에 이 구절은 다윗에 대한 이야기로는 적당하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이 사실이 듣기 거북한 이야기였기에 베드로는 넌지시 돌려 말하는 방식으로 이를 부드럽게 표현합니다.
사도는 한 마디로 분명하게 이 예언은 다윗에게서 성취된 것이 아니라고 부정하지 아니하고 간접적으로 이를 표명했습니다.
다윗으로서는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무덤 속에서 썩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이제 다윗은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이 위로를 자기 개인의 것으로 삼으시고 또 이를 확대시켜서 전체 교회의 것으로 삼으셨다는 것입니다. 머리에 속한 일체성과 완전성은 그 다음에는 모든 지체 가운데 펴저나가 분배되는 것입니다.
이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에 관해서 말한 것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마치 생명의 거울을 대하듯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자신 그리고 다른 신도들에게 눈을 돌리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여기서 신앙의 본질, 양심의 영적 즐거움, 그리고 영원한 구원에의 소망 등 일반적인 교리가 우리를 위해 묘사되어 있습니다.
2. 본문 25절 중간에 \"내가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원칙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와 지금 함께 계시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눈 앞에 그를 모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께서 나타나시기 전에라도 그래야 하는데 그것은 신앙의 눈이란 현재 일어나는 경험보다도 멀리 앞을 꿰뚫어 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혼란한 사태나 모든 위험 가운데서 신앙은 언제나 하나님을 인도자로 그 앞에 모시는 일을 특질로 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아는 일만큼 우리를 지탱해 주는 일이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지 않는다는 생각은 우리를 전적으로 낙담케 하고 마침내 당황하게 합니다.
다윗은 헛되이 하나님께로 주의를 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덧붙여 말씀합니다.
3. 본문 25절 끝에 \"하나님은 내 우편에 계시도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사도는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즉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 눈앞에 모시고 있다면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의 일상적인 도움을 느끼게 될 것이기에 하나님이 우리의 신앙을 속이신다는 일을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습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대하면서 우리가 경험과 지각에서 얻는 모든 것을 앞지르며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비록 하나님이 눈 앞에 계시지 않더라도 또는 보이시지 않더라도 그분의 말씀 안에서 그를 보는 일의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게 되자마자 그것은 신앙의 결과에 의하여 압도되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크기는 하나님의 능력과 선하심의 무한한 크기를 포용할 만큼 그렇게 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사도는 약자로 생각되는 사람들은 받쳐주고 겁쟁이로 알려진 사람들을 굳세게 하기 위하여 스스로 그들 편에 가담하는 사람들에게서 예를 끌어내는 것입니다.
4. 본문 25절 하반에 \"나로 요동치 안게 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의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라고 한 것은 놀라지 않는다거나 혹은 용기를 잃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요 시편 46편 5절에 \"하나님이 그 성중에 거하시매 성이 요동치 아니할 것이라\"고 한 것처럼 힘차게 서 있다는 뜻으로 이해됩니다.
성도들이 가끔 심하게 흔들림을 당하기는 합니다. 그렇더라도 그들은 다시 힘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확고히 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도우심에 지지를 받고 있는 자는 넘어질 것을 두려워하면 안됩니다 그 반대로 하나님 이외의 다른 것에 의뢰하고 있는 자는 불어오는 아주 적은 바람에도 흔들리게 될 것입니다.
또 아주 미미한 유혹의 공격 앞에서도 그들은 땅바닥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행2:26-31 이러므로 내 마음이
본문에서 베드로사도의 설교는 다윗의 시편을 인용해 감으로서 절정에 이릅니다.
1. 본문 26절은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입니다.
성령의 조명으로 하나님을 알아 모시게 되고 동일하신 성령의 감화로 자신에 넘치는 확신 뒤에 영혼의 즐거움, 입술의 즐거움, 몸 전체의 조용한 침착함이 따라옵니다.
인간이란 모든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는 한 하나님의 도우심이 결여되어 있다고 느끼는 한 불안과 근심을 면할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비참하게도 고통을 받아야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두고 있는 확실한 신뢰는 우리를 불안에서 건져줄 뿐 아니라 우리의 마음에 놀라운 즐거움으로 채워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그리스도께서 그 제자들에 대해서 후하게 약속하셨고 또 그들로부터 결코 빼앗을 자가 없을 것이라고 확증해 주신 그 즐거움입니다(요16:22, 17:13).
이 즐거움을 말로 폭발시키는 일을 하지 않고 속에 간직해 둘 수 없다고 다윗이 말할 때에 그것은 이 기쁨의 크기를 표현하는 말입니다.
히브리어의 (카볼)은 실은 영광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다른 여러 구절에서와 마찬가지로 \'입(말)\'의 뜻으로 사용됩니다.
그래서 헬라인들은 그것을 옳게 번역했습니다. \'육체\'의 침묵이란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전체 인간의 고요한 확신을 의미합니다.
끊임없이 신자들의 평안이 흔들리고 또 불안 속에 떨게되는 것을 중대시하지 않습니다 슬픔의 와중에서도 그들은 기뻐하는 것과 같이 그들의 영적 안정을 그들에게서 빼앗아 갈 만큼 그렇게 큰 고통은 없기 때문입니다.
신자들의 평안은 영 안에 거주지를 가지고 있는 것이지 육체의 평화가 아니라고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자들은 고통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을 전적으로 돌보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의 완전하심을 통하여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받을 뿐 아니라 그들의 육체까지도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이 몸의 평화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2. 본문 27절은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입니다.
영혼을 음부에 버려 둔다는 영혼이 파멸로 정복당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말입니다.
히브리어로 \'무덤\'을 의미하는 두 다른 말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동사 (솨알)은 \'요구한다\' 는 뜻입니다.
그러기에 (스올)이란 \'음부\'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죽음이란 만족할 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으로 \"음부가 그의 영혼을 넓혔다\" 또는 \"그들의 입은 무덤처럼 열려있다\"는 따위의 번역이 나온 것입니다.
또 다른 말 (솩하트)는 \'부패\' 혹은 \'소멸\'에서 온 말입니다.
그러기에 다윗이 밝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 특성이 고찰되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이 점에서 그리스도가 음부에 내려가신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생각으로 그것은 이 예언자의 의도나 목적에서 너무 멀리 떨어진 생각으로 지나친 일입니다.
여기의 영혼이라는 말은 불멸의 본질을 지니고 있는 영이기 보다는 생명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이 죽어서 무덤에 눕게 될 때 그 무덤은 그의 생명을 지배한다고 말해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헬라어 번역의 \'거룩한 자\'란 히브리어로는 (헤시-드)라는 말인데 정확하게는 \'온유하다\'의 뜻을 지닌 말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현재 주제에 아무 관계가 없어서 이 말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더 나아가서 신자들은 자기들의 아버지의 성품을 모방하고 닮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기에 \'온유함\'이 그들 가운데서 크게 자주 찬양되었습니다.
3. 본문 28-29절은 \"(28)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 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29)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가지 우리 중에 있도다\" 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은혜로 인하여 죽음에서 생명으로 회복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생명으로 다시 나타남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복으로 주신 은사라고 다윗은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하게 성취되었습니다.
그 완전함은 조금도 결함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면서도 신자들에게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에서 일어나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시기 위하여 썩어지는 일에서 면하신 것입니다(고전15:20).
우리는 각각 순서를 따라서 마침내는 그리스도를 따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가 먼저 티끌로 돌아간 뒤에 있을 일입니다(고전15:42).
계속해서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라고 한 것은 \"주의 얼굴 빛을 비취사 우리로 구원을 얻게 하소서\"(시80:3)라고 한 말씀과 일치하며 또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시4:6-7) 라고 말씀한 것과도 일치합니다.
우리를 기쁘게 해 줄 수 있을 뿐 아니라 우리에게 활기를 주는 것은 하나님의 얼굴의 기쁨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 반면에 하나님께서 그 얼굴을 우리에게서 돌이키시거나 혹은 얼굴이 흐려지신다면 우리는 기운이 빠질 수 밖에 도리가 없습니다.
4. 본문 30절은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입니다.
1) 본문 30절 초에 \"그는 선지자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는 두 가지 이유에서 다윗이 자기의 시대보다 훨씬 뒤의 일까지를 말하여야 했다 해도 놀랄 것이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첫째는 다윗이 예언자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장차 일어날 일들이나 인간의 지력이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사항이 예언자들에게 계시되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언자들의 말은 성령의 인도하심 아래서 오랜 세월의 시간적 거리 저쪽에까지 이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의 말에 적용하는 일반적인 척도에 의해서 그 예언자들의 말을 계량(計量)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예언자들은 또한 선견자라고 불리웁니다.
그 선견자들은 높은 망루에 올라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은 거리가 멀어서 볼 수 없게 숨겨져 있는 것들을 그 선견자들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특히 다윗에게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그리스도에 관한 언급이 있을 때마다 다윗의 아들이라는 말을 입술에 올릴 만큼 이 금언이 그들 사이에 어디서나 받아들여지고 있었습니다.
이 예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한 것으로 반드시 해석되어야 한다고 증명할 필요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또 그것이 베드로의 의도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로서는 먼저 어떻게 다윗은 자기가 알지 못했던 일을 그처럼 미리 말할 수가 있었던가 하는 반대론을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윗이 예언자적인 계시와 또 자기에게 개인적으로 주신 약속에 의하여 그리스도를 알았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바울이 펴놓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10:4)고 한 원리는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 중에서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이리하여 어느 한 사람도 모든 예언자들은 신도들을 손으로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일을 그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는 사실을 의심하는 자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언자들이 제 아무리 뛰어나고 놀랄 만한 말을 했다 해도 그것들은 다 바로 그리스도의 사실을 말한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는 또한 모든 계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점이었던 것은 다윗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베드로가 결론지었을 때 그것은 타당한 논점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2) 본 절 30절 초두에 이어서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다윗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기 위해서만이 아니라 그 약속 자체가 더욱 높이 받아들여지기 위해서 하나님은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약속은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는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하신 약속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유대인들이 생각하도록 여기에 되풀이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똑같은 교훈이 우리에게도 적합합니다.
주께서는 그 계약에 대하여 장엄한 서약을 삽입하심으로서 그것이 얼마나 탁월한 것인가를 보여주려고 하신 것을 의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한편 하나님께서는 그 약속의 진실성을 우리에게 보증하시는 담보로 하나님의 거룩하신 이름을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우리의 신앙의 허약함에 대한 바람직한 구제가 있는 것입니다.
3)본 절 30절 중간에 \'그 자손 중에서\'(원문이나 영역에는 \'육체에 의한\' 자손으로 되었음-역자 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육체보다 훨씬 더 고상한 무엇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다는 것을 지적해 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인간으로는 다윗의 자손에서 나온 자연 그대로의 사람이십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양식 안에 그분의 신성을 보유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말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이 그분의 영원한 본질의 점에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일컬어지고 있습니다.
특히 그러한 방식으로 두 성질 사이에 있는 어떤 구별이 분명하게 표현되는 것입니다.
4) 본 절 30절 끝에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라고 되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이스라엘의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으로서는 동시에 선지자였기 때문에 성령의 감동으로 이스라엘의 참되신 왕으로 그리스도께서 이미 계시다는 사실을 알아 모셨다고 말씀합니다.
4. 본문 31절은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입니다.
여기서 다윗은 자기에게 허락된 선지자 직분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까지 내다볼 수 있었으며 자기까지도 그분의 은혜의 혜택 아래 있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행2:32-36 이 예수를
베드로는 앞에서 말한 시편 16편 말씀이 예수님께 응한 사실을 말씀합니다.
1. 32절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입니다.
1) 본 절 32절 초반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다윗의 증언에 의하여 입증합니다.
2) 그렇게 한 후에 베드로는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라고 말씀합니다.
자기와 그 밖의 자기의 동료들은 다 이 부활을 친히 목도한 증인들이라는 것입니다.
이 문맥은 \'살리신지라\' 는 말을 다른 의미로 이해되도록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예언한 것은 그 그리스도가 나사렛 예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도는 이 일의 성과 혹은 효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우선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셨던 분이신 사실을 보여주어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리스도가 그처럼 뛰어난 기적의 창조자라고 말하는 것은 어리석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3) 그러나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단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고 차라리 그의 성령을 부어주심으로서 교회 전체를 그의 생명에 동참하도록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2. 본문 33절은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입니다.
1) 본문 33절 초에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오른손이란 이 경우에 성경의 다른 여러 곳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 손 혹은 능력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가 죽음으로서 파멸되었다고 생각하였던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그처럼 뛰어난 영광의 정상에까지 올리우신 것은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였다는 사실을 그는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그 다음에 \'그가 약속하신 성령\' 이란 여기서는 \'약속된 성령\'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는 이제까지 종종 사도들에게 성령을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그가 이미 약속하신 바를 성취할 능력을 얻으신 것이라고 뜻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이 약속에 관한 충분한 말을 함으로서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 일이 돌발적으로 발생한 일이 아니요,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이전에 말해진 예언자(요엘)의 말이 이제 확증된 것이라는 것을 알게 하려고 한 것입니다.
3) \"아버지께 받아서\"라고 기록된 대목은 중보자 자신에게 해당되는 말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성령을 보내셨다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또 성령이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고도 말할 수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이시기에 그 자신이 성령을 보내신 것이 됩니다.
또 그리스도는 사람이시기에 성령을 우리에게 보내시기 위해서 아버지께로부터 받아야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때에도 사실은 아버지께서 아들을 통해서 보내신 것이 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말은 무식한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능력에 관해서 적당치 않은 의문을 일으킬 것을 방지하기 위하여 그들의 이해력에 알맞도록 지혜롭게 한 말입니다.
그리고 실상 그리스도의 역할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시는 일이십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개자로서 일단 아버지의 손에서 자신이 받으신 선물을 이번에는 자신의 손으로 우리에게 주신다는 사실인데 이러한 말의 형식은 신앙적인 용어로서 가장 적당합니다. 더구나 그리스도께서 올려가심을 받은 후에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성령이 보내지셨다고 베드로가 말한 그 순서를 우리는 고찰해야 됩니다. 이 말은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못하신고로 성령이 아직 저희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 또는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요16:7) 한 말씀과 일치합니다.
성령은 그 당시에 처음으로 주어지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거룩한 조상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왕좌에 앉히시기까지는 훨씬 더 풍부한 이 은혜를 주시는 일을 연기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리가 조금 전에 본바와 같이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리라\' 는 말씀으로 잘 표시되어 있습니다.
오순절 그것은 예전에는 없던 그 때의 특이한 방식의 성령의 임재하심 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능력이 이 방법에 의하여 잘 보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또한 거기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을 떠나심으로 해서 아무것도 잃어버린 것이 없으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는 계시지 않지만 그의 성령의 은혜로서 더 나은 방식으로 우리와 함께 현존해 계시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4절은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입니다.
1) 34절 초반은 \"다윗은 하늘에 올라가지 못하였으나 친히 말하여 가로되\" 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친히 목도한 결과 자체에서 그 권능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것을 그들은 쉽게 결론지을 수가 있었겠습니다.
그렇지만 주의 영광을 그들이 더욱 더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최고의 영광으로 높여져야만 할 것을 하나님께서는 그처럼 오래 전부터 정하신 것이라고 다윗의 증언으로 입증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았으라\'하신 그 말씀은 조금 뒤에 더욱 충분하게 설명된 것과 같이 그리스도가 최고의 권위를 지니시게 되셨다는 말과 똑같은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예언에 대해서 되풀이하여 말하기 전에 이 예언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해당된다는 것을 밝혀줍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가 좀더 분명하게 되기 위해서 그 문장은 이렇게 정리되어야 합니다.
즉 \"왕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셔야 한다는 사실은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진 일이었다는 것을 다윗이 선언한 것이라\" 입니다.
이제 이러한 일은 결코 그러한 영예로 높여진 일이 없는 다윗에게는 합당치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것을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한 것입니다.
더구나 성령의 신탁(神託)으로서 미리 말해졌다는 사실은 유대인들에게는 별로 신기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으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베드로가 어떤 의미로 다윗은 하늘에 올라간 일이 없다고 말했는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에서는 다윗의 영혼이 복된 안식과 하늘의 있을 곳에 받아들여졌는가 아닌가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이 승천은 바울이 에베소서 4장 10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만물을 다 포함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그는 그리스도께서 만물을 충만케 하려 하셔서 하늘 위에 오르셨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죽은 자의 상태를 논의하는 일은 범위 밖의 일입니다.
\"하나님 우편에 앉는다\"는 이 예언은 다윗에게 있어서는 성취되지 않았다는 사실 이외에는 다른 의미가 없는 것이라고 베드로는 확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예언의 진리는 다른데서 찾아져야 합니다.
이 진리는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다른 데서 발견될 수 없기에 그 예언으로 인하여 경고를 받은 유대인들은 훨씬 더 옛날에 예언된 사실이 그리스도안에서 자기들에게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됩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통치하였습니다.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하나님의 대행자이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모든 피조물 위에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앉는다\' 는 일은 전 세계 위에 높이 올리워진 자 이외에는 아무에게도 적합하지 않습니다.
2) 본절 하반에 \"주께서 내 주에게 말씀하시기를\"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권력 행사의 합법적인 방식이란 왕이라든지 혹은 그 밖의 다른 이름으로 호칭되는 통치자들이 자기가 하나님에 의하여 임명되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경우에 존재합니다.
그러기에 다윗도 당연히 통치의 명령권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분명히 선언합니다(시110:1).
그리스도께서 외람되게 그 영예를 탈취하신 것이 아니요 단지 하나님의 명령에 복종하였을 따름이라고 다윗이 말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의 논법이 건실한 것인가 아닌가를 살펴봐야 됩니다.
하나님의 우편에 앉는다는 일이 다윗에게는 합치되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 말은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말이라고 다윗은 결론짓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논박을 받게 될지도 모르게 보일 것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특별한 명령에 의해 그분의 이름으로 또 그분의 도우심으로 통치했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하나님 우편에 앉는 일이라고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사실, 곧 우리가 이미 언급한바 있는 그것을 당연한 일로 생각합니다 그것은 다윗이 손에 쥐고 행사한 것보다 훨씬 더 넓고 장엄한 지배권이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또 왕인 그의 통치에서 하나님을 대행하기는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윗의 권력은 하나님의 우편에 올리워진 자보다는 훨씬 떨어집니다.
이제 그것은 그리스도에게 돌려져야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모든 주권자의 위에 계시고 이 세상 뿐만이 아니라 장차 올 세상에서도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불리어지실 분이기 때문입니다(엡1:21).
다윗은 천사들보다 훨씬 하위에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면 그가 하나님 다음에 자리할 만큼 높은 자리를 차지하지는 못합니다.
하나님 우편에 오기 위해서는 모든 하늘 위를 멀리 올라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그의 영예의 존엄성으로 모든 피조물을 능가하는 그분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옳게 또는 적절하게 거기 앉게 되는 자가 없는 것입니다. 피조물 가운데 거하는 자가 비록 천사들의 반열에 가담하게 된다 해도 저 높은 위치에서는 훨씬 밑에 남아있게 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의 우편을 그분의 피조물 가운데서 찾아서는 안됩니다.
그 오른손은 모든 하늘의 주권자들까지도 능가하는 것입니다.
4. 본문 35절은 \"내가 네 원수로 네 발등상 되게 하기까지 너는 내 우편에 앉았으라 하셨도다 하였으니\" 입니다.
이 문장 자체의 내용이 큰 중요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원수들을 땅위에서 타도하실 때까지 왕은 최고권을 보유하도록 명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그처럼 영예로운 권위의 명칭이 한 사람의 지상의 지배자에게 부여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렇지만 다윗은 그의 모든 원수들이 그에게 복종하게 되기까지 군림하였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런 말에서 주님의 왕국은 영원하다는 것을 우리가 옳게 결론짓게 되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왕국은 잠정적인 것일 뿐만이 아니라 덧없고 짧은 기간이기도 했습니다.
더구나 다윗이 죽은 후에도 많은 그의 원수들이 여기저기 남아 있었습니다.
다윗이 수많은 괄목할 만한 승리를 얻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모든 원수를 정복하는 일에는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다윗은 인근의 몇몇 백성들을 항복시켜 조공 바치는 자를 삼았고 다른 백성들은 추방하고 또는 격파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우주적인 정복과 비교해서 무엇이라고 할 것인가?
결국 이 시편 전체의 내용에서 그리스도의 왕국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해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증거 하게 될 것입니다.
다른 요점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하지 않지만 영원한 제사장직에 관하여 여기서 설명하고 있는 사항은 다윗이라는 사람에게는 관련되지 않은 일입니다.
왕의 아들들을 다른 곳에서 (코하님)이라고 부른다고 유대인들이 투덜거리고 있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모세가 멜기세덱 왕에게 부여한 것 같은 제사장직에 관한 일입니다.
그리고 새로운 종류의 제사장직이 엄숙한 서약에 의하여 세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보편적이고 범상한 어떤 것을 상상해서는 안됩니다.
이제 다윗이 제사장 직책의 어떤 부분을 억지로 탈취하여 행사했다면 그는 큰 죄과를 범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면 그가 어떻게 아론보다 위대한 (코헨)이라고 불리어질 수 있었으며 또 모든 영원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성별하시게 되었는가?
그러나 이 시편 전체를 설명하려는 것이 우리의 현재 계획이 아니기에 하나님 우편에 앉은 이가 하늘과 땅의 주가 되신다는 베드로의 논법으로 우리는 만족합니다.
그의 원수들을 그의 발 밑에 둔다는 이야기를 한 이 구절의 후반부에 대해서는 고린도전서 15장 25절에 관한 설명을 읽어 보십시요.
5. 본문 36절은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정녕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하니라\" 입니다.
이스라엘의 집은 약속된 그리스도가 오실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누구신지를 그들은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결론을 내립니다. 즉 그들이 그처럼 치욕적으로 다룬 예수 그들이 그처럼 미워하였던 바로 그 이름이야말로 그들이 자기들의 하나님으로 또는 숭앙하여야 할 분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께서 저를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우리에게 보내신 그분 이외에 다른 이를 기다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 이 영예를 그에게 주셨기에 그 칭호는 그분의 것이라고 사도는 말합니다.
사도는 주라는 칭호와 그리스도라는 말을 함께 연결하고 있는데 그것은 유대인들에게서 일반적으로 구속주는 교회의 머리가 된다는 점과 또는 모든 것을 지배하는 최고의 권력이 그에게 주어졌다는 원칙에서 기름부음을 받아야 한다고 이해되고 있었습니다.
사도는 마치 이스라엘 온 집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즉 야곱의 자손으로 계수 되며, 또 그 약속을 기다리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분이 바로 그분이며 다른 분이 없다는 것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도는 \'집\'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 이름의 백성과 가족을 다른 모든 국민으로부터 구별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도는 (아스팔로-스) 즉 \'정녕\'이라는 말을 썼는데 그것은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참으로 신뢰하도록 하기 위함일 뿐 아니라 의심할 여지가 없는 확실한 사항까지도 가끔 그렇게 쉽게 의심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일체의 의심을 깨끗이 제거하기 위함이기도 합니다. 사도의 설교의 결말에서 그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일로서 다시 한번 그들을 책망합니다. 이로써 그들이 양심의 보다 깊은 괴로움과 아픔을 느껴 거기에서 치유를 추구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주가 되시고 교회의 지배자가 되시며 성령의 증여자가 되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이상 그 비난은 보다 큰 무게를 지니게 되었습니다.
그분을 살해한 일은 잔인하고 악의에 찬 일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말할 수 없는 불충이요 신성모독이며 반역행위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교 행위의 증거가 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치료를 찾는 일에 완만해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그러한 방식으로 마음이 상하는 일은 그들에게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손으로 그를 십자가에 달지 않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그리스도를 사형하도록 요구한 일은 그들을 유죄로 만들기에 너무도 충분합니다. 만일에 히브리서 6장 6절에서 사도가 말한 것처럼 이제는 하늘의 영광을 받고 계신 그분을 우리가 조롱함으로서 우리 자신 속에서 그분을 십자가에 못박는다면 이 말은 동일하게 우리도 유죄로 할 것입니다.
행2:37-39절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본문에는 베드로의 설교 결과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1. 본문 37절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가로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 할꼬 하거늘\" 입니다.
누가는 이제 그 설교의 성과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능력이 비단 다른 방언으로 나타났을 뿐 아니라 그것을 들은 사람들의 마음 속에도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께서 친히 나타내신 이중효과에 주목합니다.
첫째는 그들이 비탄의 감정으로 마음이 찔렸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그들이 베드로의 권고에 순종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회개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죄과에 대하여 슬픔을 느끼고 또 우리의 나쁜 짓의 자각으로 마음이 상하게 되는 일은 신앙심에 들어가는 입문입니다.
사람들이 생각 없이 있는 동안은 참된 가르침에 관심을 기울일 수 없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하나님의 말씀이 검에 비교되었습니다(히4:12).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 희생제물로 바쳐지기 위해 우리 육체를 괴롭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마음의 찔림에는 복종의 의지가 첨가되어야 됩니다.
가인과 유다는 마음에 찔림을 받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절망으로 인하여 자신들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에 방해받았습니다.
두려움에 억압된 마음은 하나님에게서 도망치는 일 이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통회하는 마음과 겸비한 심정이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실 만한 희생이라고 우리가 들었을 때에 우리 마음에 떠오르는 것은 자발적인 마음의 찔림입니다.
악한 자의 양심의 가책은 큰 사회적 불안과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언제라도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복종시키고 또 그가 명령하시는 바를 따르도록 준비되기 위해서 이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신뢰하며 우리 마음을 굳세게 하여야만 합니다.
날마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마음의 찔림을 받고 있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그러면서도 초조해 하고 또 불평을 터뜨리며 혹은 맹렬하게 반항합니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광폭으로 달려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광폭으로 달려가게 되는 그 진정한 이유란 자기들의 의사를 거슬러서 그들이 찔림을 받게 되기 때문입니다.
기쁜 마음으로 괴로움을 맛보려고 하는 동시에 하나님께로부터 고침을 받으려는 마음의 준비를 가진 사람들만이 이러한 종류의 찔림에서 이익을 얻습니다.
2. 본문 38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입니다.
1) 본문 38절 초에 \"베드로가 가로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중요한 일을 알게 됩니다.
주의 입 곁에서 묻는 자들, 곧 주께 지배를 받고 가르침을 받으려고 자신을 드리는 사람들은 결코 헛되이 떠나가게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마7:7) 라고 하신 그 약속은 결코 우리를 속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 알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이들은 누구에게나 주께서 그들의 거룩한 욕망을 거부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배우고 알고 싶어하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는 제자를 만나기만 하면 주님은 가장 훌륭하시고 가장 충실하신 스승이시며 믿음직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또 주께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바를 무엇이나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지만 않는다면 우리는 주께서 우리에게 현명한 조언을 주시지 않을까 하여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또 우리는 우리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람들의 조언과 권위에 지배를 받도록 허용해야 합니다.
이리하여 사도들의 시중을 든 사람들의 재빠르고도 신속한 복종은 그들이 구원의 길을 저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저들이 믿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2) 다음에 \"너희가 회개하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그런데 이 헬라어에는 보다 큰 강조가 있습니다.
그 말은 전 인간이 새로워지고 다른 사람으로 변화된다는 마음의 회심을 뜻합니다.
이 교리는 교황정치 시절에 비참하게 부패된 상태에 있었기에 우리는 유의해서 이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들은 특히 회개라는 명목을 어떤 외면적인 의식으로 이전시켜 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실상 마음의 거짓된 뉘우침에 대해서는 무엇인가를 지껄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상황을 가볍게 손대볼 따름입니다.
그들은 육체의 외적인 행사에 특히 비중을 둡니다.
그것은 자체 안에 어떤 해악은 없다 하더라도 별로 가치 있는 일은 못됩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질적으로 거짓되고 보잘 것 없는 것들 밖에는 아무것도 강요하는 것이 없습니다. 그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아무 목적이 없이 피곤하게 할 따름입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가르치고 있는 것처럼(롬12:2) 사람이 그 마음의 영에서 새로워질 때에 진정한 회개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또 베드로가 회개의 효력과 성질에 대해서 분명히 설교했을 것은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단지 그 요점만을 지적할 뿐입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설교한 전체 내용을 기록해 주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해해야 할 점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회개를 당부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그들에게 죄 용서의 확신을 주어 정로(正路)로 돌아오게 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죄의 용서를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복음의 두 면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교리 내용을 간단히 말씀하시고자 했을 때에 하신 말씀은 그의 이름으로 회개와 죄의 용서를 전파하는 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눅24:47).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의 중재로 인해서만 하나님과 화해될 수가 있는 것이기에 또 우리의 죄가 그의 피로 말미암지 않고는 깨끗해 질 수도 없고 제거될 수도 없기 때문에 베드로는 우리에게 분명히 그의 이름을 상기시킵니다.
네 번째로 사도는 은혜의 약속이 완성되는 보증으로 세례를 두고 있습니다.
(2)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몇 마디의 말씀 가운데서 그리스도교의 총체를 봅니다.
첫째로는 인간이 자신과 세상을 포기하면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내맡기는 일, 둘째로는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로 인하여 죄책감과 죽음에서 구원을 받고 또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 받아들여지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없이는 이러한 모든 것을 우리가 무상으로 얻을 수 없기에 그의 이름이 신앙과 회개의 유일한 기초로서 우리 앞에 놓이게 되는 것입니다.
또 한가지 우리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우리가 처음 하나님께로 돌아갈 때 시발점이 되고 있는 그 회개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회개하라\'(막1:15)는 이 설교는 교회 안에서 계속 울려나와야 합니다.
자신이 신자로 간주되기를 바라고 있는 사람들이나 또 이미 교회 안에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있는 사람들이 회개하기를 시작하기 위해서가 아니요 그들이 회개 속에서 계속 전진하기 위해서입니다. 많은 사람이 신자의 이름을 가지고 있기는 하면서도 전혀 회개를 시작하지도 않은 사람이 수두룩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세상에 대해서 또는 육체에 대해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기 위하여 그 옛 사람을 십자가에 못박기 시작해야 하는 일 이미 회개의 과정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은 목표를 향하여 계속 앞으로 달려나가야 한다는 이 가르침의 명령을 우리가 굳게 지켜야 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정 안의 내면적인 회심은 생활 속에서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이기에 행위가 요청되지 않고는 회개가 옳게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그 행위란 교황제도주의자들 가운데서 만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천박한 행위가 아니요 다만 결백함과 거룩함에 대한 건실한 증거가 되는 그런 행위를 말합니다.
3) 그 다음에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이 구절의 내용에는 세례가 죄 용서에 선행되는 것으로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순서로 말하면 그것은 나중에 와야 합니다.
세례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하여 소유하게 되는 복의 증표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복은 우리의 마음 속에 자리잡혀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회개를 말한 뒤에 유대인들에게 은혜의 확신과 구원의 희망을 촉구한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여기에 죄 용서를 삽입한 것과 마찬가지로 똑같은 의미에서 나중에 바울의 설교에서는 신앙과 회개를 결부시킵니다. 그것은 정당하게 된 일입니다.
구원의 희망이란 단순히 값없이 거저 주시는 의의 전가(轉嫁)안에서만 성립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때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값없이 의인으로 간주되는 것입니다.
또 회개의 교리는 교회 안에서 날마다 울려나와야 한다고 말한 바와 같이 죄 용서도 계속적으로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해야 됩니다.
그리고 확실히 그것은 우리가 교회에 처음 입회했을 때 못지 않게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계속 필요한 일입니다.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0-21) 고 하신 그의 이 임무가 계속적으로 관계를 맺는 일이 없이는 한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은혜로 받아 주신 일이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되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2) 더구나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게 되었던 죄 용서를 폐기시킨 듯이 복음의 다른 부분을 매우 더럽히고 타락시킵니다.
그들은 죄는 세례에서 값없이 용서받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뒤에 지은 죄는 배상(賠償)을 통하여 속량될 것이라고 합니다.
또 그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이 배상과 혼합시켜 버립니다.
그것을 인간의 공적(功績)으로 감싸 버립니다.
그러기에 그로 인하여 결국 그들은 전체 복음의 가르침을 뒤집어 엎어 버립니다.
첫째로 그들은 신앙의 확실성을 인간의 양심에서 취(取)합니다.
다음에 죄 용서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우리가 이루어 놓은 보상 사이에 갈라놓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은혜를 우리에게서 완전히 약탈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부분적으로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화해시키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통하여 얻어질 수 있는 어떤 죄 용서라도 전체적이 아니거나 완전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교황주의자들은 마치 세례의 의미와 능력이 죽음의 시기까지에는 연장되지 않는 것처럼 세례를 출생과 지나온 생애에 국한시킨 점에서 큰 오류를 범합니다.
(3) 그러므로 우리는 죄 용서는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기초되어 있으며 그리스도가 죽으심의 희생으로 이루어 놓으신 것 이외에는 어떠한 다른 속죄도 우리가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이유 때문에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이름을 표명함에서 중요한 사실을 우리에게 지적해 줍니다.
즉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이 교리의 효과를 그분 안에서 구하도록 하지 않으면 이 모든 사실은 전적으로 바르게 가르쳐질 수는 없다는 일입니다.
베드로가 저들에게 죄 용서를 받기 위해서 세례를 받으라고 했을 때 긴 설명은 필요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안에서 일찍이 인류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의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않으시고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서 해결하십니다(고후5:19). 이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이 화해의 신앙을 우리 마음에 새겨주셨습니다. 세례는 하나님께서 이 은혜를 우리에게 입증하시는 증표입니다.
또 세례는 우리의 양자됨의 성실한 공약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죄 용서를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라고 훌륭하게 설명된 것입니다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세례는 우리의 신앙을 확고하게 하며 증진시키는 일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결과인 죄 용서는 보다 하위에 있는 방편인 것처럼 거기에 첨가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구절에서 세례의 정의를 뽑아내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베드로가 그 일부분만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바울이 가르치는 바와 같이 우리의 옛 사람은 세례에 의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그로서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롬6:4, 6).
그리고 또 우리는 그리스도 그분을 옷 입었습니다(갈3:27).
또 성경은 도처에서 그것은 회개의 증표라고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세계의 전체 성질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논의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죄 용서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죄용서의 확인이 세례라는 것을 겸하여 지적합니다.
그러기에 사도가 세례의 다른 면을 말하지 않았다 해서 이상스러울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4) 본 절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례는 헛된 표가 아니요 참되고 효과 있는 증거라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무라도 세례에서 주어지는 혜택이 물의 성분 때문이라고 믿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이 분명하게 표시되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세례의 능력과 효과를 그리스도 안에서만 구하며 우리를 깨끗이 씻어주는 것은 그리스도의 보혈이므로 세례에서 우리가 씻김을 받는 줄을 알게 될 때에만 이 증표는 우리에게 유효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우리로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이런 결론을 얻습니다.
그리스도는 세례가 우리에게 지적해 주는 바로 그 목표이시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자기들이 받는 세례에서 은혜를 받습니다.
그것에 이어서 동시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을 배우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이 하나 일어나는데 그리스도께서 규정하신 형식을 변경하는 일이 베드로에게 있어서 합법적인가 하는 점입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혹은 그렇게 하려고 합니다.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 제정을 개정 혹은 폐기하는 자유가 주어졌다고 주장합니다.
본 절에 관해서는 조금도 변해진 것이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나 형식에 관해서는 교회가 원하는대로 자유롭게 이를 변경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 점에 관한 그들의 논쟁은 쉽게 논박될 수 있습니다.
우선 그리스도께서는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마법을 사용하기 위하여 마술적인 말씀을 제자들에게 주신 것이 아니요 근소한 몇 말씀 안에서 전체 신비를 요약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여야만 합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세례의 형식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오직 다만 그리스도 안에 일체의 세례의 효능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는데 불과하다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아버지 없이는 또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성화 시키시는 성령 없이는 그리스도도 믿음으로 이해될 수가 없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여기서 다루고 있는 것은 세례에 적합한 형식문제가 아니요 믿는 자들이 그리스도에게로 소생시켜 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그 분 안에서만 세례가 우리에게 예시해 주고 있는 모든 것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피로써 씻겨지며 또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의 은혜로 말미암아 새로운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본 절 끝에 \"그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들이 갑자기 외국방언을 말하기 시작함을 보았을 때 놀라움의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베드로는 만일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온다면 같은 은사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최고의 은사는 죄 용서와 생명의 갱신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어떤 눈에 보이는 은사로서 자기 능력을 그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어떤 특별 추가분이었습니다.
이 구절은 모든 신도들에게 일반적으로 주어진 성화의 은혜로 이해되어서는 안됩니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다른 방언에서 그 예를 본 성령의 은사를 그들에게 약속하십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 일은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기적으로 자기 왕국의 개국을 장식하신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런 것은 일시적인 것으로 끝났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신 눈에 보이는 은혜는 마치 거울에 비치듯이 그리스도야말로 성령의 증여자였다는 것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가 \"너희는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을 것이다\"라고 말했을 때 그의 말은 어느 정도로 전체 교회에 적용됩니다.
우리가 방언을 한다거나 혹은 예언자가 된다거나 혹은 병자를 고친다거나 혹은 기적을 행하려고 성령을 받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면서도 성령은 더 훌륭한 효용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즉 그것은 우리가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며 우리의 혀는 진정한 고백을 하도록 훈련을 받으며(롬10:10)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가며(요5:24) 가난하고 궁핍한 우리가 부해지며 그리고 사단과 이 세상에 대해서 승리자가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쪽에서 어떤 방해가 생겨나지 않는 한 성령의 은혜는 언제나 세례에 결합될 것입니다.
3. 본문 39절은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하고\" 입니다.
1) 그리스도의 은혜가 사도들에게만이 아니라 그들 자신에게 속해 있다는 것을 유대인들이 확신하게 되도록 이것은 특히 말해질 필요가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정해져 있다는 것을 보여서 그것을 입증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그의 말씀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다른 방식으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언제나 그 말씀에 관심을 기울어야 됩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우리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지 않고 일반적인 의미로 그 말씀을 받는 일은 충분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이 자기와 자기의 동료 제자들에게서 본 하나님의 은혜는 그들 자신에게로 약속되었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각자가 모두 자기는 하나님께서 상대하여 말씀하시는 자들의 수효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전적으로 믿는 일은 확고한 신앙을 위해서 필수조건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그 계시된 약속이 적용되는 것이므로 구원은 우리의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가 확신하게 될 때 그것은 진정한 신앙의 규범입니다.
그 약속이 전에 멀리 떨어졌던 자들에게까지 확대될 때 보다 넓은 확신이 더해집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과 계약을 맺으셨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약속의 힘과 효과가 이제는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되었다면 유대인들은 하나님이 그 약속을 자기들에게도 견고하고 확실하게 지키실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게 될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2) 우리는 세 계단을 주목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그 약속이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다음에 그들의 자녀들에게 주어졌습니다.
마지막으로 그것은 이방인들에게 전해지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이 다른 민족들보다 총애를 받게 된 까닭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가족의 장자요(출4:22) 또 하나의 특권으로서 다른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우월성을 주는 것은 정당한 질서를 지키는 일입니다.
그 자녀들을 추가한 것은 \"네가 내 언약을 나와 너와 네 대대 후손의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하신 약속의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양자(養子) 삼으심의 은혜 안에서 그 자녀들을 부조(父祖)들과 함께 계산해 주십니다.
3) 그러므로 이 구절은 재세례파 사람을 충분히 논박해 줍니다.
그 사람들은 신자들의 자녀들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그 아기들이 마치 교회 회원이 아닌 것처럼 세례 베풀기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린이들\'을 \'영적으로 태어난 자들\'이라고 해석함으로서 비유적인 의미를 주어 핑계하려 합니다.
그러나 이 조잡한 언측은 그들에게 아무런 유익이 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한 민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셨기 때문에 베드로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그리고 할례는 자녀로 삼으신 그 권리가 어린 아기에게까지도 공유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그가 아브라함의 자손이기 때문에 이삭과 계약을 세우신 것처럼 \"나는 너희 자손의 하나님이 되리라\"고 하신 그 약속이 계속 유효하기 때문에 유대인의 모든 자녀들은 그 동일한 계약에 들어있게 된다고 베드로는 가르쳐 줍니다.
4) \"모든 먼데 사람\" 이라는 말씀에서 일찍이 타국인이었던 이방인의 이름이 마침내 거론되었습니다.
먼데 사람이라는 말을 먼 나라로 추방되어 있는 유대인들을 가리키는 말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공간적 거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베드로는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차별을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은 계약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과 맺어진 최초의 백성들이요, 그래서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는데 이방인들은 그분의 왕국에서 제외된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 2장 12절에서 이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즉 이방인은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 의인이었는데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가까워졌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그리스도는 중간의 막힌 담을 허셨고 유대인과 이방인을 다함께 아버지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으며 또 그의 오심으로서 가까이 있는 자에게와 먼데 있는 자에게 화평을 전파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제야 우리는 베드로의 의도가 무엇인가를 이해합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찬미할 양으로 이방인들도 역시 그 은혜에 참여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동시에 유대인들에게도 그런 식으로 제공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부르신다\'는 말을 사용합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님께서는 일찍이 너희로 한 백성이 되게 하시려고 그의 목소리로서 너희를 함께 부르신 것과 같이 그래서 같은 목소리가 사방으로 울려 퍼져 그로 인하여 먼데 있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새로운 포고로써 불리어졌을 때에 그들이 모두 너희들과 함께 참여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행2:40-42 또 여려 말로 확증하여
본문에서는 주께서 사도를 통하여 말씀하게 하신 결과로 교회가 이루어지고 그들의 신앙이 생활로 나타난 사실을 말씀합니다.
1. 본문 40절은 \"또 여러 말로 확증하여 권하여 가로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입니다.
이제까지 되어진 일에서 누가는 베드로의 말을 그대로 되풀이해 준 것이 아닙니다.
누가는 다만 그 요점만을 간단하게 전해 준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다고 할지라도 누가는 여기서 다시 베드로가 빈 교리만을 공급해 준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가는 베드로 사도가 교리를 가르치는 거기에 권면의 박차를 가해 주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교리권고를 크게 역설했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합니다.
누가는 베드로가 확증하고 그들을 권면했다고 말해서 설교의 진지함을 나타내 줍니다.
유대인들에게는 그처럼 오랜 세월에 걸쳐서 감염되었던 죄과를 당장에 쉽게 제거하기가 용이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또 그들에게 습성이 되어 있었던 제사장들의 멍에를 떨쳐 버리는 일도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이 수렁에서 끌어내기 위해서는 폭력이 요구되었던 것입니다.
요점은 그들이 그 구부러진 시대를 조심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적이라고 공언하고 있는 자들로부터 떠나지 않고는 그리스도에게 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제사장들이나 율법학자들은 큰 권위를 향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의 가면과 복장을 걸침으로써 단순한 사람들을 기만하고 있었습니다.
이로 인하여 많은 사람들의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오는 일이 심각하게 방해되었습니다.
어떤 이들은 다시 흔들릴 수 있었습니다.
또 다른 이들은 진정한 신앙으로부터 떨어져 나가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아무리 그들이 교회의 이름을 자랑할지라도 구부러진 시대라고 분명히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청중들에 대하여 그들의 악의와 사악한 사귐에 얽혀들지 않도록 그들로부터 떠날 것을 명한 것입니다.
\"구원을 받으라\"고 한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들이 만일에 그러한 혹사병과 같은 무서운 것과 결합한다면 그들은 틀림없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는 뜻으로 말씀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목자의 목소리와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구별하지 못하는 자들은 얼마나 비참하게 이리 저리 내던져져 버리는 것입니까?
또 중간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많은 사람들은 나약함과 게으름 때문에 얼마나 지장을 받고 있는 것입니까?
확실히 이런 일들은 많은 경험이 증언해 주는 바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만일 그들이 구원받기 원한다면 악한 자로부터 떠날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이야말로 무시되어서는 안 되는 교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우리를 멀어지게 하는 사항을 피하도록 가르침을 받지 않고는 그리스도께서 우리 앞에 자리잡고 계신다는 것만으로 넉넉한 것은 되지 못합니다.
자기 양들을 이리의 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일이 선한 목자의 의무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는 사람들을 복음의 순수한 교리 안에 보전하기 위하여 교황제도가 어떻게 진정한 그리스도교와 다른가, 또 그리스도의 불성실한 적과 결연 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 흑사병인가를 우리는 가끔 보여주며 증거해야 됩니다.
또 베드로가 당시 교회의 상임 관리권을 손에 쥐고 있던 제사장들을 \'패역한 세대\'라고 불렀다 해서 중상이라고 탓해서는 안됩니다.
영혼을 파멸로 이끌어 갈 수 있는 위험이란 그들의 이름을 지명해서 공표합니다.
인간들은 그것이 독이라는 사실을 알지 않고는 그것을 경계하지 않습니다.
2. 본문 41절은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입니다.
누가는 베드로의 이 한 설교가 얼마나 큰 성과를 거두었는가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약 삼 천명의 사람들을 그리스도를 위해 얻은 것입니다.
그들이 그 말씀을 기쁜 마음으로 쾌히 받아 들였다고 말씀함으로서 베드로는 신앙의 능력과 성질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줍니다.
신앙이란 이처럼 복종하려는 신속성과 자발적인 의욕에서 시작되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매우 자의적인 생각을 보입니다.
그렇지만 얼마 안되어서 지조도 확신도 다 없어져 버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은 자신들을 과열시킨 어떤 돌발적인 충동에 의해서 그랬다고 우리가 생각하지 않게 하려고 조금 후에 누가는 권면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의 견인성을 말하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제자들의 무리에 가담되었으며 같은 나무에 접붙임을 받았으며 또는 그들의 가르침 안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우리도 복종하기를 더디 하거나 뒤로 물러서는 일에 재빠르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처럼 열심히 받아들인 가르침에 우리는 굳게 그리고 단호히 매달려야 합니다
더 나아가 이 실예는 우리에게 적지 않은 부끄러움을 주는 것으로 여겨져야 합니다.
한번의 설교로 그처럼 큰 무리가 그리스도에게 귀의(歸依)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백 번의 설교로 겨우 몇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확고부동하였다고 누가는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겨우 열 사람 가운데 하나가 신앙에서의 전진을 위한 얼마간의 욕구라도 보여주며 실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우리의 가르침을 역겨워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형편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의 둔감한 자와 변덕스러운 자에게 화가 있을 것입니다.
3. 본문 42절 상반은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입니다.
1) 누가는 단지 신앙과 헌신에서 그들의 변치않는 지조를 칭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굳세게 하기 위해 필요한 작업에 끊임없이 노력했다고 말합니다 그들은 사도들의 설교를 들음으로 스스로를 향상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전념했습니다. 또 많은 시간을 기도에 힘썼습니다.
그리고 성도의 교제와 떡을 떼는 일을 계속 시행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
2) 사도들의 가르침과 기도에 관해서는 그 의미가 분명합니다.
교제하는 일과 떡을 떼는 일은 다른 방식으로 이해되어야 할 것입니다.
어떤 이는 떡을 떼는 일은 주의 성만찬을 의미한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일들은 그것을 시물(施物)에 해당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또 다른 이들은 신도들이 함께 보통 식사를 하기 위해 모인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이들은 (코이노-니아) 를 \'성찬의 집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떡을 떼는 일을 의미한다고 믿고 있는 사람 편을 찬동합니다.
(코이노-니아) 라는 말은 아무런 첨가된 설명이 없이는 결코 성찬의 의미로 사용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상호교제, 시혜(施惠), 또는 그밖의 형제간의 사귐의 의무에 돌립니다 왜 떡 떼는 일을 여기서 차라리 주의 성찬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면 그 이유는 누가가 공중 앞에서 눈에 보이는 교회의 형태를 구성해 준 그런 사항들을 기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베드로는 여기서 네 가지의 특성, 그 특성에 의하여 쉽게 교회의 참되고 성실한 모습이 판단될 수 있는 그 특성에 관하여 정의를 내려줍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참된 교회를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 교회의 모습이 여기에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를테면 교회의 혼이라고 할 수 있는 교리로 시작합니다.
모든 종류의 교리를 다 지명하는 것이 아니요 사도들의 가르침, 하나님의 아들이 그들의 손에 의하여 전달하셨던 그 가르침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순수한 소리가 울려퍼지는 곳 사람들이 복음 선교를 계속하는 곳 사람들이 복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 거기서 이익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곳 거기에 교회가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의심할 수 없습니다.
교회가 사도들이 가르쳐준 그 교리의 순수성을 받아들여 그것이 교회 안에 풍성하게 되느냐 아니냐 하는 그런 증표에 의하여 교회가 원칙적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표명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2절 하반은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입니다.
이 부분과 또 마지막 부분 기도하는 일은 맨 처음 부분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의 열매 혹은 결과로 오는 것입니다.
가르침이란 우리 사이에 있는 형제적 사귐의 유대입니다.
동시에 가르침이란 하나님께로 우리가 나아가기 위해서 또는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한 문을 우리에게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찬은 교리에 대한 확증으로 거기 첨가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로서는 질서가 잘 세워진 교회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려고 이 네 가지 상항을 이야기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타당한 일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진정으로 교회로 인정받기를 원하고다만 사람들 앞에서만 그 헛된 교회의 이름을 자만하지 않으려고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이 질서를 준수하도록 노력해야 됩니다.
베드로가 공중기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다 함께 모여서 기도하지 않는다면 각자가 특히 자기 집에서 기도를 드린다는 것만으로는 넉넉지 못합니다.
함께 모인다는 것은 거기에 하나님이 내신 총체적 예배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또 거기에는 신앙고백을 함께 하는 일이 있습니다.
그리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일이 있습니다.
행2:43-45 사람마다 두려워 하는데
여기에는 초대 교회의 유무 상통(有無相通)한 생활이 기록되었습니다.
성경을 모르는 이들은 초대 교회의 현상을 공산주의와 공통되는 점이라 합니다.
이것은 결코 공산주의의 사유(私有) 재산 폐지와 같은 것이 아닙니다.
그 이유는 사도 시대의 교회가 물질을 유무 상통한 것은 공산주의에서처럼 정치와 폭력으로 시행하는 제도 아래서 강행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오히려 성령을 받은 결과로 자원하여 사랑으로 행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도 이런 분배행위가 신자 개인의 자유라는 점을 역설(力說)하였습니다(5:4) 그러면 이 부분에 기록된 바 성도들의 유무 상통한 것은 은혜로 되어진 성도들의 교통(Communion of the saints)의 일면입니다.
이 교통은 모든 다른 방면으로도 나타나는 것입니다.
곧 그들은 영적 은혜로 서로 나누며 지내는 것이 그 특징이었습니다.
그들이 물질로 서로 돕는 것도 영적 은혜로 된 것이었습니다(고후8:1-5).
1. 본문 43절은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입니다.
1) 본문 초두는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입니다.
누가는 이처럼 교회의 모습이 이 가르침에 동의하지 않은 여러 다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일도 생겨났다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것은 교회를 유지하고 발전시키기 위하여 생겨난 것입니다.
어떤 분파가 생겨난다면 모든 사람들은 단호히 그것을 반대하며 또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것은 늘 혐오하였기 때문에 만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두려운 마음을 일으켜 그들을 억제하지 않았다면 그리스도의 교회는 그들로 인하여 한 순간도 그 상태를 보유하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그 두려움이 어떤 종류의 것이었던가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는 두려움이 아니요 사람들로 마음을 조이게 하고 억제하여 그들이 감히 주의 역사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는 그런 두려움이었습니다.
오늘에도 그런 사람들이 꽤 있는데 그들은 복음을 알지 못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렇지 않으면 적어도 그리스도에게 완전하게 결연할 수 없을 정도로 이 세상의 관심에 얽매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 편에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할 만큼 그렇게 완고하지는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를테면 양쪽의 중간에 있어서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기를 두려워하기에 악한 사람들의 잔인한 행위를 지지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이제 \'사람마다\' 라고 누가가 말한 것은 이른바 일부로 전부를 나타내는 제유법(提喩法 ; synecdoche)을 사용한 것입니다.
확실히 하나님의 손을 경멸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 그 밖의 사람들은 교회를 박해하는 일에 아무런 두려움으로 방해받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의미하는 바는 많은 사람들이 입을 다물고 있을 정도로 하나님의 능력이 교회 안에 분명히 나타났었다는 것입니다.
2) 본문 끝 부분은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입니다.
이 부분도 역시 그 두려움의 영향을 설명하는데 보탬이 됩니다.
여러 가지의 기적은 그 밖의 하나님의 모든 역사와 함께 그들에게 두려워하는 생각을 일으켜 주었습니다.
그것은 왜 그들이 하나님을 반대함에서 스스로 두려움을 느껴야 했느냐 하는데 대한 유일한 이유는 아니요,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할지라도 그들은 여러 가지 지적에서 하나님이 사도들의 편에 있다고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로서 우리가 중요한 결론을 얻게 됩니다.
기적이란 사람들로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해 주는 일에 유익할 뿐 아니요 또한 악한 자들로 어느 정도로 그들의 광포성이 수정되고 부드러워지도록 하는 일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로는 지독한 강퍅성을 지닌 대표적인 예입니다(출8:8, 19).
그렇지만 제 아무리 완강한 마음일지라도 기적이 어떻게 그 마음을 깊이 움직여 줄 수 있었던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때때로 바로는 그것을 잊어버렸으나 하나님의 손이 그를 무겁게 눌렀을 때 바로는 두려움에 몰려 굴복하고 말았습니다.
누가는 이로 인하여 유대인들이 제지되고 그 때문에 매우 쉽게 파멸되었을지도 모를 교회가 그 머리를 들고 발전하게 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고 가르쳐 줍니다.
그리고 우리도 오늘의 시대에서 가끔 같은 일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또한 그들이 두려움으로 인하여 교회에 대해서 하고 싶었던 박해를 감행하지 못하도록 제재를 받았을 뿐 아니요 또한 복음의 영광에 대하여 경외의 심정으로 겸비해졌다고 가르쳐 줍니다.
2. 본문 44절은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입니다.
\'함께\'로 번역된 헬라어의 본래 의미는 \'동일하게\' 혹은 \'하나로\'의 뜻입니다.
그것은 장소의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마치 누가가 그들이 동일한 장소에 상습적으로 함께 유숙하였다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누가가 조금 뒤에 그들이 한 마음이 되어 있었다고 말하는 것처럼(4:32) 그들이 함께 일치한 생각을 가진 것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래서 그들의 생각에서부터 시작하여 그 다음에 거기서 생겨난 결과로서 그들의 관용성에까지 이르게 된 것으로 누가는 그런 적당한 순서를 따라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그들이 자체 안에서 진정 형제애로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그 증거로 부자들이 재산을 팔아서 가난한 이들을 도와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로 보게 하는 것입니다. 이제 이것은 인상적인 사람의 예입니다.
누가는 우리가 풍부하게 소유한 것에서 형제들의 빈궁을 구제해야 하는 일을 배우도록 하려고 그 사실을 기록해 준 것입니다.
3. 본문 45절은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 입니다.
이 구절은 건전한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재물(財物)의 (코이노-니아)를 제 멋대로 생각하여 그 때문에 시민생활의 질서가 뒤죽박죽이 되게 하는 열광주의 정신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의 재물을 다 모아 산더미처럼 쌓아 올려놓고 아무나 와서 자기들이 마음대로 선택하는 것을 거기서 가져갔습니다.
그런 일이 없다면 교회도 없는 것이라고 재 세례파 사람들이 생각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그들은 이 일을 크게 떠들어 대왔습니다.
우리는 두 극단을 경계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쪽에는 시민생활의 질서를 핑계 삼아서 자기들이 소유한 것은 숨기고 가난한 자로부터 속여 빼앗아 자기들은 남의 재산들이 소유한 것은 숨기고 가난한 자로부터 속여 빼앗아 자기들은 남의 재산을 강탈하지 않기 때문에 이중으로 옳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한 쪽에는 모든 것을 함께 뒤섞으려고 하는 반대 쪽의 과오를 범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누가는 확실히 하나의 다른 제도를 유념하고 있습니다.
누가는 재물의 분배에 있어서 선택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일 누구라도 모든 물건을 공유물이었기 때문에 자기만의 것을 소유한 자는 없었다고 반대론을 펴는 이에게는 아주 간단한 답을 줄 수 있습니다.
이 공유라고 하는 것은 바로 다음에 설명되고 있는 그 상황을 위하여 즉 가나한 사람들이 각각 그 요구에 따라서 구제되어야 했다는 점에 한정되어야만 했던 것입니다.
\"친구들 간에는 모든 것이 공유다\"라는 옛 격언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피다고라스파(Pythagoreans) 사람들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것은 각 사람이 자기의 집을 개인적으로 관리하지 않았다든지 혹은 자기들의 아내를 공동으로 소유하였다고 그들이 생각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가 말하고 있는 재산의 공동체는 가정관리를 폐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4장에서의 설명으로 좀더 분명하게 이해될 수 있을 것입니다.
거기서 누가는 굉장히 많은 액수의 재산을 판 두 사람의 이름만을 지명하고 있습니다.
현재 당장의 요구에 수응해 주는 일 외에 재산 공유가 생겨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은 개인적인 소유물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사도들의 규율을 지키고 있다고 주장하는 수도사(monks)들의 무분별은 우스꽝스럽기만 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누군가가 빈궁에 처해 있는데도 아무것도 팔지도 않고 관심도 두지 않습니다.
도리어 가난한 자들의 피로 자기들의 게으른 배를 채우며 또 온 세상이 굶주리고 있어야만 해도 자기들은 배불리 또는 사치스럽게 배당 받고 있다는 사실 이외에는 아무것도 재산 공동체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그 모방자라고 생각하고 싶어하는 이 처음 제자들에 대해서 무슨 유사점이 있다는 말인가?
행2:46-47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본문은 주와 주의 사도들과 함께 했던 그 당시 교회의 건실함과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1. 본문 46절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입니다.
1) 46절 초두는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입니다.
복음을 진행시키는 일에 보다 큰 편의와 기회가 성전에서 주어집니다.
그러기에 그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성전에 자주 출입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합니다.
그때에 그리스도인들을 성전으로 이끈 것은 그 장소의 신성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의 그림자와 같은 일들은 폐지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로 자기들을 본받아서 성전 예배를 권장하고 싶은 생각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에는 많은 신앙심(信仰心) 있는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딴 데로 쏠리게 하는 자들의 사사로운 관심사를 잠시 제쳐놓습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하나님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사도들은 자주 성전을 출입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이끌기 위하여 그때 사도들은 계속 성전에 있었습니다.
그때 사도들에게 영향을 준 또 다른 이유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것은 특히 사람들의 수효가 그처럼 크게 불어났습니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 가운데서 가르침을 공동으로 전해주기 위하여는 개인의 집에서는 그 모임을 편리하게 운영할 수 없었습니다.
2) 46절 후반부는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입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공중 앞에서만 진정한 신앙심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개인생활 과정과 방침도 같은 종류의 것이었다는 사실을 누가는 지적해 줍니다
어떤 이들은 이 구절에서 \'떡을 뗀다\'는 일이 성만찬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그것은 누가가 의미하는 것에서는 거리가 먼 생각으로 느껴집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함께 식사하는 일이 보통이었습니다.
또 그 식사를 간소하게 했다고 누가는 우리에게 지적해 줍니다.
호화판의 연회를 벌이는 이들은 이처럼 친밀하게 함께 식사를 즐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누가는 \'마음을 같이하여\' 라는 말을 추가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절제의 표시입니다.
이를테면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취한 생활태도는 형제다운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들의 생활은 근실한 것이고 건실하고 아름다운 일이었다는 사실이 누가가 뜻하는 바입니다.
어떤 이들은 마음의 기쁨과 진심을 하나님을 찬미하는 일과 결부시킵니다.
그리고 이 본문의 내용은 그 가능성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생활의 모든면이 참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찬미함에서 진심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러한 이유로 신자들은 어디서나 그것을 실천했었다는 의미로 여기에 명시된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인들의 당시의 상황을 유념해야 됩니다.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여러 가지 많은 위험에 둘러싸여 있었으면서도 어떻게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었던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인식과 우리를 보호하신다는 확신으로 말미암아 세상이 위협하는 어떤 곳에서도 확고한 심정으로 우리가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는 그러한 복을 그 당시 그리스도인들은 얻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교회의 공동성에 대해서 조금 전에 말한 바와 같이 이제 또한 신자들이 실천할 생활태도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도 당시 그리스도인들을 본받아서 우리의 생활방식에서 검소한 교제를 실천하며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진심을 배양하며 영적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경험을 쌓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마음의 성실성은 먼 길을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마음의 성실성을 여기서 떡을 떼는 일과 연결시킨 것이라면 그것은 사람들이 서로 공명정대하고 자기의 개인적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간계를 쓰지 않을 때 그만큼 신실한 사랑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의 성실성을 조심성 깊은 사람들이 그 신중성으로 인하여 자신들을 그처럼 심하게 고통스럽게 만들어 주는 일과 대비시켜서 그 태도를 좋아합니다.
우리가 일체의 염려를 하나님께 맡겨버리지 않을 때에 우리의 정당한 보수는 불안이요 공포입니다.
2. 본문 47절은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입니다.
1) 47절 초두는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입니다.
이 말씀은 이방인들 가운데서까지도 호의를 발견할 만큼 결백한 생활의 열매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미워하였다는 것도 우리는 의심할 필요 없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누가가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이야기한 것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착실하고 조금도 증오의 독에 감염되지 않은 부류의 사람들만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단순히 신도들이 그들의 결백한 생활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으며 인정을 받는 그런 방식으로 자신들이 행동하였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2) 47절 끝 부분은 \"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입니다.
누가는 이런 말로 그들의 부지런이 그 결과에서 헛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당시에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의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 길을 잃고 방황하는 사람들을 주의 양 무리 가운데로 끌어 모으려고 노력했습니다.
주께서 교회를 날마다 부흥시키셨기에 그들이 수고한 노력이 결코 헛되거나 무효하지 않았다고 누가는 말씀합니다.
그리고 확실히 교회가 부흥하기보다 약화된다는 사실은 우리의 게으름 때문이거나 혹은 실상 우리의 죄 때문에 유래된 것입니다.
그러나 비록 당시에 그리스도인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왕국을 촉진하기 위하여 용감하게 노력했다고 하더라도 누가는 그 당시에 이방인들을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한 분은 하나님이셨다고 해서 하나님께만 그 영예를 돌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유대인들을 포함하여 수많은 이방인들이 교회에 들어온 사실은 하나님 자신의 특별한 역사(役事)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의 능력으로 당시 그리스도인들의 노력에 열매를 맺게 해 주시지 않는다면 성직자들이 심고 물을 주어도 아무것도 성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고전3:6).
구원받아야 할 사람들이 교회에 더해졌다고 누가가 말씀한 사실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 안으로 허입(許入)되는 것은 바로 구원을 얻는 수단이라고 누가는 가르칩니다.
교회 밖에는 죄 용서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영원한 생명의 소망도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든 신자들이 구원을 받기 위해 교회에 받아들여진 것은 뛰어난 위로입니다.
바로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롬1:16)고 불리어지는 것과 같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사람들 중의 일부분만 혹은 어떤 수효만큼만 부르시는 분이십니다. 그러기에 이 은혜는 그것이 우리 구원의 첫째의 원인이 되도록 하나님의 택하심에 한정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3장 강해
행3:1-11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본문은 주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통해서 주의 성령으로 앉은뱅이를 고친 이적입니다.
1. 본문 1-2절은 \"(1) 제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올라갈새
(2) 나면서 앉은뱅이 된 자를 사람들이 메고 오니 이는 성전에 들어가는 사람들에게 구 걸하기 위하여 날마다 미문이라는 성전 문에 두는 자라\" 입니다.
1) 본문 1절 초두는 \"제 구시 기도 시간에 베드로와 요한이\" 입니다.
사도들의 손에 의하여 많은 기적이 행해진 사실을 우리는 앞에서 보았습니다.
이제 누가는 자기의 일상적인 습관을 따라 많은 기적 중에서 하나를 예로 인용합니다.
어머니 배에서 날 때부터 앉은뱅이였던 사람이 완전하게 건강상태로 회복되었습니다.
누가는 이 기적이 잘 설명되기 위하여 필요한 모든 정황을 애써 모았습니다.
만일에 앉은뱅이의 다리가 삐었다든가, 혹은 어떠한 사고에 의해 발생한 병이었다면 회복은 훨씬 손쉬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나면서부터의 결함은 그렇게 쉽게 회복될 수 없었습니다.
누가가 그 사람이 메어져 왔다고 했을 때 우리는 거기서 그 사람은 사소한 불구가 아니요 그의 다리가 죽어버린 것같이 누워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날마다 사람들에게 자비를 구걸하였던 사실로서 모든 사람들에게 더 잘 알려졌을 것입니다.
기도 시간에 그가 고침을 받아 성전 안에서 걸어 다니기 시작한 사실에서 이 기적인 소문이 더욱 멀리 퍼져나가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가 즉시 자기 발로 일어서서 뛰어다니고 기쁘게 걸어다닌 일도 이 기적에 첨가된 증거가 되었습니다.
2) 본문 1절 끝 부분은 \"성전에 올라갈새\" 입니다.
이 헬라어 (에피 토 아우토) 는 \'때\'를 지적하기도 하고, \'장소\'를 지적하기도 하는 말인 까닭에 전자의 의미가 좀더 본문의 뜻에 적합한 것 같습니다.
기도 시간인 제 구시는 해가 기울기 시작하여 저녁이 되고 있는 시간입니다.
낮이 해 뜨는 데서부터 해 지는 때까지가 열두시간으로 나뉘었고 하루 전체의 시간은 넷으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제구시하면 낮의 마지막 부분을 의미했습니다.
첫 부분이 제 삼 시까지가 되고 둘째 부분이 제 삼 시에서 제 육 시까지이며 셋째 부분이 제 육시에서 제 구 시까지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 시간은 저녁 기도를 드리기 위하여 지정된 시간이라는 것을 바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만일에 사람들이 사도들은 율법의 의식을 따라서 기도하기 위해 성전에 올라갔는가 어떤가를 묻는다면 우리는 기도하기 위해서 그랬다기 보다는 복음을 널리 퍼뜨리기 위해서 더욱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올라갔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제 우리가 무지하고 허약한 사람들과 부딪칠 때에 이 구절을 이용해서 우리가 미신적인 예배 의식에 종사하는 것처럼 암시한다면 그것은 천박한 논법이 될 것입니다.
주께서는 유대인들이 아침 저녁으로 희생제물을 드리도록 정해 주셨습니다(출29:41).
이를 실천함으로서 그들은 하루를 하나님께 기도하고 예배하는 일로 시작하고 마쳐야 한다는 것을 가르침 받았습니다(민28:4).
그러므로 베드로와 요한은 하나님이 성별하신 성전에 자유롭게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부르짖으며 그로써 자기들의 신앙심을 증거 하였기에 스스로를 더럽히지 않았습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서 옛 사람들에게 정해진 시간을 지키도록 원하셨다는 사실에서 교회도 어떤 정해진 규율이 없이는 할 수 없다는 점을 결론지을 수 있습니다.
오늘이라 할지라도 만일에 우리의 지나친 게으름이 그것을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날마다 그러한 모임을 가지는 일은 우리에게 유익할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들이 그 시간에 성전에 올라갔다는 일에 대하여 거기서 우리는 복음을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어떤 기회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이해하게 됩니다.
2. 본문 3절은 \"그가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에 들어가려 함을 보고 구걸하거늘\" 입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께서 이 불구자에게 그의 기대와는 반대로 건강을 회복시켜 주셨는가를 알게 됩니다.
그는 자기 병이 불치병이라 생각했었기에 단지 자기 생계만을 걱정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한번도 감히 요구한 일이 없었던 것을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런 식으로 우리를 앞지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그렇게 하시도록 강권하기까지 기다리고 계시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우리가 게을러져도 좋다고 허용된 것처럼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을 수고하시게 하고 우리 편에서는 빈둥거리며 태만하게 그가 우리에게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기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힘써야 할 책임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그러나 우선 이 앉은뱅이의 인간 속에서 어떻게 옳게 기도할 것인가를 알게 하기 위하여 아직 믿음으로 눈이 열려지지 않은 사람으로서 우리 앞에 실예로 보여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봅니다. 필요에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구하지 않아도 이런 사람들에게 기선(機先)을 제(制) 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고쳐주실 때 건강케 하시는 것만이 아니요 생명까지 주시는데 그렇게 하시는 이유는 바로 그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 아직도 생겨나지 않은 것을 일으키시고 하나님을 찾지도 않는 자들에게 자신을 보여주시는 일이 우리를 부르시는 첫 단계입니다(롬4:17, 사65:1).
더구나 우리는 이미 믿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할 것을 가르침 받았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자신들의 불행을 언제나 느끼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마음에는 고침을 구하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자신의 마음대로 우리가 예기치 않은 치유를 베풀어주십니다.
결국 우리가 아무리 많은 기도를 드린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역시 우리의 희망과 탄원을 초월하여 자신의 선하심을 베푸십니다.
3. 본문 4-5절은 \"(4) 베드로가 요한으로 더불어 주목하여 가로되 우리를 보라 하니
(5) 그가 저희에게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거늘\" 입니다.
베드로가 하나님의 의도에 대해서 확신이 없이는 이렇게 말하지 않습니다.
확실히 누가는 이 말로 그 사람에게 어떤 진귀하고도 이례적인 복을 희망하도록 종용(慫慂)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원할 때마다 가끔 기적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었느냐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만한 일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의 대행자였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들 자신의 의지나 독창력으로는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주께서 그렇게 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하셨을 때 그들을 통해서 역사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한 사람을 고쳐주는 일이 생겨났고 모든 사람을 예외 없이 고쳐준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다음 사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일에서도 그들은 자기들의 인도자요 지휘자이신 하나님의 성령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에게 일어서라고 명령하기 전에 그를 주목하였습니다.
이런 주목하는 시선은 성령의 특별하신 고무(鼓舞)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로 하여금 이 기적이 일어나도록 그처럼 자신감에 넘치는 확신을 가지고 말하게 한 까닭입니다.
이 말로 그 앉은뱅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각성하기를 원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동냥밖에는 아무것도 기대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4. 본문 6-8절은 \"(6) 베드로가 가로되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 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하고
(7) 오른손을 잡아 일으키니 발과 발목이 곧 힘을 얻고
(8) 뛰어 서서 걸으며 그들과 함께 성전으로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 님을 찬미하니\" 입니다.
1) 본문 6절 초두는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입니다.
베드로는 그 앉은뱅이가 구하는 종류의 원조가 자기에게는 없다는 것을 변명합니다.
베드로는 만일 자기가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기쁜 마음으로 그의 가난을 구제할 것이라고 명언(明言)합니다. 이와 같이 우리 각 사람은 주께로부터 받은 것은 이웃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여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주신 재화가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방편이요 도구가 되어야 할 것을 하나님은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준다고 말합니다.
얼른 보아서 이것은 확실히 하나의 가공적인 약속이었습니다.
베드로가 그 앉은뱅이 사나이에게 보기 드문 기대감을 일으켜 놓은 뒤에 자기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사람이라고 말한 것은 마치 입을 크게 벌린 수탉을 조롱하는 것과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즉시 그를 위로하는 말을 했습니다. 그래서 그 기적의 가치를 어떤 다른 혜시물(惠施物) 과 비교해서 한층 돋보이게 했습니다.
교황이 새로 선출될 때에 이 구절을 기괴하고도 우스꽝스러운 무언극으로 악용하는데 그것은 괘씸한 불경의 행위입니다. 돌로 만든 두 개의 작은 방이 있고 그 한 방에 그가 앉으면 사람들이 혜시(惠施)를 구걸하여 몰려옵니다.
그러면 그는 베드로의 이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 손가락으로 공중에 십자가를 그립니다
그가 다음 방으로 옮아가면 거기서 그는 돈이 가득 들어있는 주머니를 손에 듭니다.
그러면 그의 수호자들이 \"저가 재물을 흩어 빈궁한 자에게 주었도다\"(시112:9)고 그에게 환호성을 지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인용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을 그처럼 공공연하게 조롱하고 있는 그곳에는 분명히 사단이 지배자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하고 싶어서입니다.
그러나 그 전 구절로 돌아가 볼 때 베드로는 자기가 치유의 은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했을 때 확실한 계시에 의하여 인도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2) 본문 6절 후반부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입니다.
베드로는 이 앉은뱅이가 자기의 두 발을 사용할 수 있도록 고침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의 역사 하심과 그리스도께서 주신 복이라고 말합니다.
\'이름\' 이라는 말은 권위와 능력으로 해석되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에 대해서 어리석은 주장을 하는 것처럼 이 말의 발음에 무슨 마술적인 가치가 있는 것으로 우리가 몽상해서는 안됩니다.
베드로는 자기는 다만 대행자에 불과하고 오직 그 기적의 창조자는 그리스도시였다는 것을 증거하고 싶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알려져야만 하고 또 그의 이름이 숭앙되어야 하는 것을 보게 되는 일이 자기의 의무요 관심사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베드로는 여기서 \'나사렛\' 이라는 설명을 그리스도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인가?
거기에 대해서 각 사람들은 각각 자기의 판단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우리의 견해를 말한다면, 즉 그리스도는 경멸을 받아 그렇게 호칭되었으므로 베드로는 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그 나사렛 예수, 그의 이름이 유대인 가운데서 멸시되고 불명예스러워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그 이름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메시아였습니다.
또 그 분에게 하나님께서 일체의 자기의 권세를 주셨다는 사실 등등을 표명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바울이 자기는 그리스도와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을 전한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고전2:2).
3) 본문 6절 끝 부분은 \"걸으라\" 입니다.
이것은 매우 어리석은 일로 보였을런지도 모릅니다.
그 앉은뱅이 사나이는 주저하지 않고 이렇게 항변할 수 있었습니다.
즉 \"왜 당신은 먼저 내게 다리와 발을 주지 않았습니까?\"
사람에게 발도 없이 걸으라고 명령하는 일은 조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앉은뱅이는 베드로의 말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처럼 부진하였던 그가 이제는 간절하고 기쁜 마음으로 하나님의 은사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이 사실이 바로 말씀의 효력과 믿음의 결과를 모두 명백하게 만들어 줍니다.
말씀의 효력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그 앉은뱅이가 그로 인하여 감동을 받아서 지체없이 즉각적으로 순종합니다.
둘째는 그 사람의 죽은 지체에 힘을 주어 그를 새 인간으로 만들어 준 것입니다.
그가 일어나서 걸으라는 명령을 헛된 복종이 아니기에 신앙은 해당한 보상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떻게 그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가를 알게 됩니다.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성공적이게 하셔서 그로 인하여 말씀이 사람들의 심정을 뚫고 들어가게 함으로 또 거기서 약속되어 있는 일들을 친히 주심으로 역사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믿음이 헛되게 되는 일을 결코 허용하시지 않기에 신앙이 기대하고 있는 그리고 말씀을 통하여 신앙에 주어지는 일체의 복을 참으로 신앙이 향유하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설화에서 영적 회복의 보편적인 모습을 보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인해 파악된 말씀이 앉은뱅이를 건강한 몸으로 회복시켜 준 것 같이 주께서는 또 그 말씀으로 우리 영혼을 뚫고 들어와 우리를 완전하게 회복시켜 주시게 됩니다
주님은 우선 사람들의 입을 의지하여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신앙의 복종을 권장합니다. 그리고 나서 주님께서는 성령으로서 우리의 마음을 내적으로 감동시키셔서 그 말씀이 우리 안에서 산 뿌리가 내리게 하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은 그의 손을 펴사 모든 방법으로 우리 안에 자신의 역사를 완성시키십니다.
기적이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마태로부터 배웁니다.
5. 본문 9-10절은 \"(9) 모든 백성이 그 걷는 것과 및 하나님을 찬미함을 보고
(10) 그 본래 성전 미문에 앉아 구걸하던 사람인 줄 알고 그의 당한 일을 인하여 심히 기이히 여기며 놀라니라\" 입니다.
누가는 이제 이 기적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그 불구자는 하나님을 찬미함으로 자기가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를 증거 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은 놀람으로 압도당했습니다. 여기에 이중성과가 있습니다.
고침을 받은 그 사람은 하나님의 선하심을 인정하고 고백했습니다.
한편 사람들은 감동을 받고 그 소문은 널리 퍼져 나갔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사실을 보려고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누가가 사람들이 모두 크게 놀라고 기이히 여겼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단지 첫 계단을 지적한 것 뿐이요 그 다음에 보다 충분한 성과가 따랐습니다.
그들은 거기서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들의 놀람이란 그 자체 안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또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일보다는 그들을 그저 놀라게 하는데 멈춰서는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놀라움에 빠졌다는 사실은 장래의 건축을 위한 일종의 기초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만일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경시함으로 이를 간과한다면 우리는 결코 거기서 아무런 유익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참으로 이 구절은 기적이 그 자체로서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증거 해 줍니다.
즉 혼란시키는 놀라움을 일으켜 주는 것입니다.
주께서 기적으로 그의 능력과 선하심을 보여주심으로 우리를 직접 그의 앞으로 부르신다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성정이 그처럼 약하여 우리가 그 가르침이 공급해 주는 도움을 받기까지는 그에게로 나아가는 도중에 걸려 넘어지거나 힘을 잃거나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대한 우리의 놀람이 가르침에 들어가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우리는 경건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역사에 대한 깊은 생각을 가집시다.
가르침이 우리에게 냉담해지거나 무용한 것으로 여겨질 때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것으로 하나님의 역사의 영광을 멸시하는 우리의 배은을 형벌하십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하나님의 역사 그 자체로서는 우리가 마땅히 식별해야 할 정도로 식별할 만한 충분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그러기에 만일 우리가 그 목표에 도달하려고 한다면 가르침에 의하여 주어지는 도움과 하나님의 역사를 결합시키는 일을 배워야 합니다.
한쪽을 다른 쪽으로부터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일에 관해서는 경험이 충분한 입증이 됩니다. 그것이 바로 이 세상으로 하여금 기적을 그처럼 수치스럽게 악용하게 만들어 준 잘못이기 때문입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끊임없이 자기들의 기적을 우리에게 주장합니다.
비록 그들이 하고 있는 자랑이 모두 참되다는 것을 우리가 용납한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것들을 잘못된 결론으로 왜곡시킴으로서 큰 잘못을 저지르게 됩니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흐리게 하며 자기들이 꾸며낸 것을 가지고 순수한 복음의 진리를 오염시킵니다.
기적의 악용이 아니고서야 어디서 그처럼 널리 퍼져있는 미신적이고 불경건한 성자들을 향한 예배가 나온다는 말입니까?
어떠한 기적이 행해질 때마다 사람들은 반드시 감동을 받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말씀에 대해서 귀가 먹고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지 못하기에 사단은 교활하게 우리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하여 미신의 기회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실예를 든다면 우리가 어떤 기적에서 하나님의 능력을 인정한다 하십시다.
만일에 베드로가 그 기적을 행했다면 사단은 즉시 우리에게 이렇게 제의할 것입니다.
즉 \'당신은 이 분이 하나님의 사람인줄 알지 못하십니까? 그러니 당신은 그분에게 신적 경의를 바쳐야 합니다\' 라고 할 것입니다.
베드로의 설교가 그들을 바른 길로 소생시켜 주지 않았더라면 이제 유대인들도 놀란 나머지 그와 똑같은 일을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도 미신이라고 비난하는 자가 없는 교황 정치에 있어서는 이성을 초월한 인간 숭배가 쉽게 승리를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적으로 인하여 심취되어 있을 때 가르침이 우리를 바른 목표로 인도해 주도록 우리는 일층 더 진지하게 말씀에서 약(藥)을 구해야 됩니다.
6. 본문 11절은 \"나은 사람이 베드로와 요한을 붙잡으니 모든 백성이 크게 놀라며 달려 나아가 솔로몬의 행각이라 칭하는 행각에 모이거늘\" 입니다.
한 때 솔로몬의 행각이 서 있던 그 자리에 행각이 세워져서 그로 인하여 그 이름이 붙여진 것이라고 짐작됩니다.
그 옛 성전은 파괴되었는데 스룹바벨과 에스라가 그 성전을 할 수 있는 대로 그 원형에 가깝게 모방하여 재건하였기 때문입니다.
후에 헤롯이 그것을 더욱 장엄하게 재건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헛되이 사용한 그 비용은 대중의 마음에서 솔로몬의 추억을 지워버리지 못했습니다.
누가는 그 곳을 사람들이 가끔 모이는 매우 잘 알려진 장소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행3:12-16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무엇보다도 먼저 그 이적을 행한 자가 자기가 아니고 예수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밝히 지적합니다(12-16).
사도는 그렇게 함으로 그곳에 모인 민중이 자기를 영광스럽게 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의 신앙심이 허술해지지 않도록 충분한 설교로 만전을 기하였습니다.
사도가 그렇게 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① 하나님께서 그 이적을 나타내신 목적이 예수를 영화롭게 하십니다.
곧 예수가 그리스도로 인정되게 하려 하심에 있기 때문입니다(13절 상반).
② 이 예수는 유대인들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다시 살아 나셨으므로 그가 그리스도이심이 명백하게 되었습니다(13절 하반 - 15절).
그 앉은뱅이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선물로 주신 삼위일체 하나님이 그 앉은뱅이를 고쳤기 때문입니다(16절).
1. 본문 12절은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백성에게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 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설교를 시작함에 있어서 먼저 사람들을 책망합니다.
그러면서도 단순히 사람들이 기이히 여겼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모두 유용한 것이요 찬양할 만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들이 하나님의 하신일에 돌려야 할 찬양을 사람들에게 잘못 돌렸기 때문입니다
마치 베드로 사도가 즉 \"당신들은 차라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눈길을 돌려야 마땅한 때에 우리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잘못된 것이요\"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주의력을 사람에게 맞출 때에 그러한 놀람은 비난받을 만합니다.
사도가 사람에게 기울이는 주의력에 대해 비난한 사실을 우리가 유의해야 됩니다.
마치 \'우리 자신의 힘과 신앙으로\' 이 일을 행한 것처럼 생각하느냐고 사도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을 사람의 신앙심이나 미덕에 돌린다면 그것은 우리가 과오를 범하는 일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능력에 관해서 그것이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온다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한마디 말로 그것을 인정하면 서로 하나님으로부터 그분의 진리를 빼앗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리고서 그들은 그분에게서 빼앗은 것을 가지고 피조물인 인간을 존귀케 합니다
이리하여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성자들 안에 하나님의 권능을 설치해 놓고 바바라(Barbara) 라든지, 혹은 크리소고누스(Chrysognus) 의 상(像)을 세움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현존을 돌이나 나무 그루터기에 유폐시키기까지 한 것입니다.
그래도 그들이 그 첫 상황에서는 큰 잘못이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권능은 하나님께 남겨두고 그러면서도 기적에 관해서는 그것을 성자들의 신앙심에 돌림으로서 자기들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비가 오는 날씨라거나 좋은 날씨를 원한다든지 병에서 나음을 얻기 원할 때 그들은 성자들이 자기들의 성덕으로 그러한 권리와 특권을 하나님께로부터 허락받았다고 생각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성자들에게 달려가서 구원을 청하는 일을 할 것인가?
그들은 하나님이 권능의 창조자라고 고백하면서 자기들이 받은 혜택(惠澤)에 대해서 성자들의 신앙심에 감사한다는 것은 유치한 핑계입니다.
그들이 어떠한 변명을 하든지 간에 우리는 사람들이 기적을 보고 너무도 사람에게 극복한 결과 그들의 성덕이 기 기적의 원인이라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들을 베드로가 일반적으로 비난하였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이 미신을 책망한 그 설교의 첫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설교의 양식과 순서를 잘 살펴보아야 합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으로부터 피조물에게로 슬쩍 빠져버리는 경향보다 더 큰 경향이 아무것도 없기에 그러한 과오를 적당한 때에 예방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만일에 성령이 사람들에게 사도들을 주목하는 일을 금하셨다면 그 성령은 역시 모든 하찮은 성자들의 기원으로부터 우리를 더욱 물러나게 하십니다.
2. 본문 13-15절은 \"(13)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너희가 저를 넘겨 주고 빌라도가 놓아 주기로 결 안한 것을 너희가 그 앞에서 부인하였으니
(14) 너희가 거룩하고 의로운 자를 부인하고 도리어 살인한 사람을 놓아주기를 구하여
(15) 생명의 주를 죽였도다 그러나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으니 우리가 이 일에 증인이로라\" 입니다.
1) 본문 13절 초두는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입니다.
사도는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돌려놓으면서 치료에 관해 이야기를 더하려고 합니다. 그 요지는, 즉 하나님께서 사도들을 통하여 행하신 그 기적에서 그의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을 밝히려는데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결과가 나옵니다. 즉 모든 사람들은 그 교만을 감소시켜야 하며 또 그리스도만이 높이 들려져야 하기에(요3:30) 베드로나 그 밖의 누구든지 숭앙하는 자들은 모두 부당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와 사도들 사이의 명확한 구별이 밝혀지는 것입니다.
우선 첫째로 그리스도는 창조주요, 그들은 단지 대행자에 불과합니다.
둘째로 정당한 목표는 그리스도만이 영광을 받아야 하며 영광에 관한 한 사람들에게는 고려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 이외의 어느 누구에게도 기적에서 영광을 돌리는 자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의도에 어긋난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사도는 하나님을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전부터의 진정한 하나님께 대한 예배에서 그들이 멀어지는 일 이상으로 그의 마음에서 멀어지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증거하려는 목적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이 칭호를 스스로 취하셨는데 어떤 표시에 의하여 자신을 우상으로부터 구별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볼 수 없고 무한하신 하나님의 본질에서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적당하게 여겨지는 그러한 수단을 사용하셔서 우리로 하여금 그분을 알도록 인도하십니다.
그런데 터어키인(Turks)들은 자기들이 하늘과 땅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일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늘에 이르게 되기 전에 사라져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헛되고 거짓된 조작으로부터 수호하시려고 자신의 계약 안에 그들을 지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라고 부르실 때 모세가 긴 말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하늘에 올라갈 것인가? 누가 깊은 데로 내려갈 것인가? 혹은 누가 바다를 건너갈 것인가? 하지 말라 오직 그 말씀이 내게 심히 가까이 있으니\"(신30:12)라고 자세히 말씀한 바를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간단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유대인들 가운데서는 거룩한 조상들의 이름이 높이 존경을 받고 있었기에 베드로도 그들에게 하나님의 독생자가 없이는 그들도 다른 사람들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은근히 깨우쳐 줍니다.
그리고 오늘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라고 부르실 때 역시 그처럼 보다 명확한 표현으로 알려지는 일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바입니다.
이제 베드로의 이야기로 돌아갑시다.
사도는 자기가 사람들을 율법과 예언으로부터 떨어져 나오게 할 어떤 새로운 종교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런 일을 하려고 시도했다 해도 하나님께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기를 기울이도록 허락하지 않으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신13:3).
마치 바울이 영적 건축에 있어서는 터가 하나만 놓여져야 한다고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가 그리스도로부터 조금이라도 떨어지면 그 순간 멸망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겨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또한 어떤 의미에서 사도가 하나님을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부르고 있는지를 쉽게 식별할 수 있습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선조들이 하던 예배 형식을 준수한다고 어리석은 자랑을 하고 있는 것과는 달리 사도는 선조들이 지켜온 예배 형식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가 그대로 유지하여야 한다는 것을 무슨 금언처럼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이름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그들로부터 하나님께서 세우신 대로의 참된 종교가 시작되어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조상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최초의 조상들의 기준에 미달되었기에 모든 조상이 다 우리의 모범이 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모방의 영예는 단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만 주어지고 다른 이들은 거부당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또한 끊임없는 예언자들의 가르침이기도 하였습니다.
즉 \"너희 열조의 율례를 좇지 말며\"(겔20:18) 등의 말씀이 그런 뜻입니다.
2) 본문 13절 중간부분은 \"너희가 저를 넘겨주고\" 입니다.
베드로는 그 사건들이 그렇게 요청했기에 그 가르침에 통렬한 책망을 섞었습니다.
그들이 먼저 자기들의 죄를 인식하는 일이 생겨나지 않고는 그들을 참으로 하나님 앞으로 이끌어 올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는 그들을 살짝 가볍게 건드리기만 하지 아니하고 아주 엄격하게 그들이 범한 죄악의 무서운 성격을 그들에게 지적해 줍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무죄 석방하려고 한 분을 사형에 처하게 했다는 사실을 가진 자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인자는 살려주고 생명의 주를 죽이게 한 사실의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옳고 거룩하신 분을 거부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러한 대조(對照)의 요점이 바로 그런 목적 때문입니다.
인간이란 자기들의 죄과를 인식하고 진심으로 용서의 치료를 받도록 하기 위하여 그처럼 아픈 곳을 찔러야만 하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의 처음 설교에서도 비슷한 격렬함을 사용한 일이 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하나님은 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고 했습니다.
이로서 그들은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사형에 처하게 함으로서 그들은 하나님을 향한 선전포고를 한 것입니다.
베드로는 보다 높은 결과를 보는 안목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다시 살리셨기 때문에 그들의 잔악한 행위가 조금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손상시키지는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베드로가 자기와 자기의 동료들이 이 부활의 증인이라고 말한 것은 그들이 친히 그 사건을 목격한 자들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이런 언급은 사도직에 관계가 있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후에 그들이 자기들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목도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이 말에는 또 다른 의도가 포함되어 있다고 받아들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말한 사실에 더욱 권위가 있게 하기 위하여 자신에게 맡겨진 직능을 주장했다는 일이 있음직한 일입니다.
3. 본문 16절은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 입니다.
사도가 \'그 이름을 믿음으로\' 라고 말하고, 또 이어서 \'그 이름이\' 또 다시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라고 반복한 것은 하나님의 열렬한 애정의 표시인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애정의 표시입니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밝히는 일에 전적으로 헌신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반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강조합니다.
또 바울이 가끔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설교할 때에도 결코 자기가 한 말에 대해서 충분히 만족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실상 인간의 성품이란 그처럼 사악하기에 그리스도는 그 영광이 자기에게 넉넉하다고 할 만큼 찬양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베드로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터 위에 안전하게 서 있도록 하기 위하여 그처럼 자유롭게 자기의 주제(主題)를 넓히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다\"는 이 표현은 그 원인과 그 치료의 수단 양쪽을 모두 지적해 줍니다.
그 앉은뱅이를 고쳐준 것은 그리스도의 능력입니다.
그러나 신앙을 통해서 효력이 발생한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라는 또 하나의 표현은 우리의 신앙이 그리스도에게 근거하지 않고는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은 그리스도를 주시하고 그를 의뢰하는 일이라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리하여 그 방법으로 하는 일을 빼놓고는 하나님에 대한 참된 신앙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베드로 사도의 말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와 다른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생명의 증인이라는 사실을 위에서 이제 사도는 이 생명이 하나의 표적으로 유대인들에게 증명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표적은 이 생명의 결과입니다.
그것은 지금 그들이 고침 받은 앉은뱅이를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의 두드러진 증거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문구(文句)에서 사도는 신앙이 그 환자의 치유의 원인이 되었다고 했을 때에 만일 그들이 신앙에 당연히 돌려야 할 영예를 돌이지 않는다면 사도로서는 간접적으로 그들을 배은망덕한 자들이라고 비난하는 것입니다.
신앙이라는 것이 사도들에게와 마찬가지로 이 고침을 받은 사람에게도 크게 관계되어 있는 일이라 하더라도 우리는 이 일에 대해서 너무 큰 관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의 능력이란 제유법(提喩法)에 의하여 설명되기 때문입니다.
행3:17-21 형제들아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청중을 향하여 회개하라고 권면한 부분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회개함으로 사죄 받을 소망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들의 죄가 그들의 무지에 속했기 때문입니다(17절).
둘째로 그리스도의 죽으신 사건은 하나님의 영원한 경륜에 속했기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18절). 하나님의 지혜로운 경륜은 우리가 믿을만한 구원의 계획입니다.
사도는 회개하는 자들이 받을 행복에 대하여 말하였습니다(19-21절).
1. 본문 17절은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 못하여서 그리하였으며 너희 관원들도 그리한 줄 아노라\" 입니다.
1) 그들이 실망해서 넘어지고 그래서 자신의 가르침을 거절하게 될 위험성이 있다고 보는 견지에서 사도는 그들을 격려합니다.
우리의 설교라는 것은 청중에게 유익하게 되도록 잘 완화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만일 조금도 용서를 받을 희망이 없다고 한다면 형벌의 두려움은 사람들의 마음을 고질적으로 굳어지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에 대하여 다윗도 즉 \"그러한 사유하심이 주께 있음은 주를 경외케 하심이니이다\" 라고 하였습니다(시130:4).
이러한 방식으로 베드로는 그의 백성들이 알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 죄의 정상을 참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을 거부하고 그를 사형에 처하도록 내주었다 하더라도 그들은 그러한 지각을 지속할 수 있는 힘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그들이 무지했기에 그런 일을 했다고 말함으로서 결코 그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사실을 인하여 위축되고 압도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기 설교의 준엄성을 부드럽게 했을 따름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그 말의 의미를 백성들이 단순히 알지 못해서 범죄했다는 것으로 이해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위선이 그 밑에 깔려있는 까닭에 악의이냐 무지이냐 어느 것이 우세했느냐에 따라서 그 행위도 악의에나 혹은 무지에 돌려지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들이 계획적인 악의로써 보다는 과오와 맹목적인 열심히 그런 죄악을 저질렀다는 사실을 의미한 것입니다.
이런 문제에 관해서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알면서 고의적으로 죄를 범했다면 절망적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여기서는 어떤 일반적인 죄에 대해서의 언급이 아니요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어떤 사람에게나 가능한 일로 하나님의 은혜를 소멸시킨 일에 관한 언급입니다.
이 문제를 더 알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서 배울 수 있습니다.
2) 본문 17절 후반부는 \"너희 관원들도 그리 한 줄 아노라\" 입니다.
우선 이 비교는 적당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서기관과 제사장들은 무서운 열광의 피해자요, 가득 찬 악의와 배신의 사람들입니다. 그렇지만 백성들은 율법에 대한 그릇된 열성에 의하여 강요되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백성들은 자기들의 지도자들이 강권에 몰려서 그들의 사주(使嗾)의 한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향해 격분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모두 그 점에서 같은 마음이 아니었다고 대답합니다.
바울이 어떤 대목에서 이 세상의 지배자에 대해서 썼을 때,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지혜를 알았더면 결코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박지 않았을 것이라고 한 일이 있는데 많은 백성들도 바울과 같이 동일한 심정이었을 것은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지금 일반 지배자들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 가운데 교정 받을 수 있는 자가 있다면 사도는 그 사람들을 회개로 초대합니다.
2. 본문 18절은 \"그러나 하나님이 모든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사 자기의 그리스도의 해 받으실 일을 미리 알게 하신 것을 이와 같이 이루셨느니라\" 입니다.
사도가 어떤 의도에서 그들의 무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는지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하나님께서 미리 말씀하신 것을 성취하셨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인 일에 대한 죄책을 그들의 구원으로 전환시키려는 그런 방식으로 책망하는 일입니다.
무지가 당신들을 범죄하게 하였으며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이미 결정하고 계셨던 일, 즉 그리스도가 자기의 죽음으로 인하여 당신들을 구속하실 수밖에 없는 일을 성취하셨다고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신기한 목적 안에서 우리의 악한 행실이 하나의 다른 목적으로 전환되기를 소원하며 계획한다는 일은 가장 훌륭한 일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용서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가 범한 죄로 인하여 우리 자신을 파멸시키는 일에 있어서 갈 데까지는 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한 회심은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찬미하여야 할 하나님의 놀라우신 자비의 역사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의 인력을 통해 나타난 모든 생명의 소망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자기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습니다.
그 죽음이 전 세계에 대해서와 마찬가지로 그들에게도 생명을 준 일이 된 것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는 다른 곳에서 본 사실을 상기시켜 보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악한 자들의 의사에 따라 보여진 그 결과에 사람들이 거짓된 의견이나 모호한 견해로 제멋대로 생각 못하게 하려고 하나님은 자신의 뜻에 의하여 자기 독생자가 고난을 받은 것이라고 자신이 최고의 장본인이라는 입장을 취하십니다.
그들을 회개하도록 촉구함에 있어서 사도는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죄의 사유가 그들을 위하여 준비되어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힙니다.
구원이 자기 앞에 마련되지 않고는 아무도 회개의 움직임이 생겨날 수 없는 일입니다.
용서에 대하여 절망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이미 파멸의 결정적인 사람인 것처럼 하나님께 대한 무모한 저항에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가지지 않습니다.
이것이 바로 저 교황제도주의자들이 회개의 교리를 다루지 못하는 까닭입니다.
그들도 그 제목을 가지고 대단히 떠들어대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은혜의 확실성을 뒤집어 엎고 있기에 그들의 제자들에게 회개의 노력을 하도록 설득시킨다는 희망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들이 또한 죄 용서에 관해서도 약간 떠들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간들의 영혼을 불안과 공포 속에 빠뜨리고 또 갖가지 거짓으로 그들을 미로(迷路)에 몰아넣기에 그들의 가르침의 이 부분의 부패가 다른 부분까지도 전복시킵니다.
3. 본문 19절은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입니다.
우리가 만일 에라스므스나 옛 번역자들을 따른다면 이 구절은 생략된 문장입니다.
완전한 표현으로 읽는다면 \"회복의 시기가 오게 되면 당신들도 역시 그 회복을 기뻐할 것이요 그리스도가 이 세상을 심판하려고 오실 때에는 당신들은 그를 심판자로가 아니라 구속주로 발견할 것이다\" 입니다.
그러나 베자(Beza)는 이것을 \'회복의 때가 온 후에\' 라고 잘 번역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죄가 최후심판의 날과 함께 보이는 곳에서 용서를 받는 것이라고 그렇게 우리가 이해한다면 그 무난한 번역을 취하는 편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도록 소환되지 않고는 그와 화해하는 일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입니다.
첫째로 우리는 앞의 권고가 더욱 효과 있게 되기 위하여 심판의 날이 그들 앞에 공명정대하게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결산을 하게 될 때가 올 것이라는 사실의 경고보다 우리의 마음을 더 효과적으로 찔러주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그 전체의 관심을 이 세상 안에 두고 있는 한 그것은 일종의 무감각에 의하여 압박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최후심판의 메시지는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오도록 우리를 소환하는 나팔소리처럼 울려 퍼져야 됩니다.
그 때에 결국 우리는 참으로 각성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때에 우리가 새로운 생명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같은 모양으로 바울이 아덴 사람들에게 설교했을 때 하나님께서 이제는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기를 명하신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심판하실 날을 이미 정하셨다는 것입니다(행17:30, 31).
복음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주님으로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우리의 심판자로 임명되셨고 때가 되면 오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가 좋을 때에 그리스도의 가르치심에 복종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때가 오면 우리는 자신의 신앙의 열매를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사람은 베드로가 그런 의미로 최후의 날을 말하지 않은 것으로 반대합니다
이 \'유쾌하게 되는 날\' 이라는 말은 그처럼 두려움을 만들어 주는 말이 아닙니다.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신도들은 최후심판에 관한 이야기를 들을 때에 자기들을 격려해 주는 이중자극을 느낀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신앙의 이점이 분명하지 않아서 실상 하나님을 경멸하는 자들이 오히려 번영하는 것으로 보이고 그 반대로 신자들의 생애는 셀 수 없는 비참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므로 하나의 자극이란, 우리가 만일 우리의 불행의 열기를 식혀주고 우리의 모든 비참을 종식시켜줄 안식의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상기하지 않았다면 우리의 마음은 자주 낙담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하나의 자극이란 그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은 우리를 안일한 향락이나 나태로부터 흔들어 주는 일입니다.
베드로는 이 구절에서 위협과 약속을 결합시켜 놓습니다.
한 쪽으로는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줍니다.
또 한쪽으로는 두려움으로 그들을 찌르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일반적인 관례입니다.
성경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에게와 택함을 받은 자들 그 양쪽에게 다 말하는 것이 됩니다. 그러기에 주의 날을 설명함에 있어서 한 때에는 두렵고 불행한 날로 다른 때에는 기쁘고 바람직한 날로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사유(赦宥)의 소망을 가지게 함으로서 그리스도의 날이 그들에게 기쁨의 날로 제시되고 그들이 그 날을 갈망하도록 적절하게 표현합니다.
4. 본문 20절은 \"또 주께서 너희를 위하여 예정하신 그리스도 곧 예수를 보내시리니\"입니다.
율법을 모욕하는 일은 벌을 받지 않을 수 없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심판자라고 명백히 말합니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그것을 형벌사시는 바로 그분이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지금 구원을 약속하시고 그들에게 주실 그분이 그들의 구원에 관한 판결을 자기 손에 쥐고 계시다는 것을 그들이 알게 될 때 이 사실은 신자들에게 놀라운 위로를 가져다 줍니다.
사도는 덧붙여 \'이제 그들에게 설교로서 알려진 그분은 장차 오실 그분이며 무지에 대한 모든 변명을 다 제거하실 것이라\' 고 말씀합니다.
사도로서는 마치 \"그리스도는 세상을 심판하러 오시기 전에 지금 당신들에게 설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 그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그 날에 신앙의 보상을 받을 것이요 그를 거부하는 자들은 자기들의 불신앙의 형벌을 받게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습니다.
헬라어에서 볼 수 있는 두 가지 독법(讀法)이 있습니다.
어떤 사본에는 (프로케케-뤼그메논) 즉 \'전에 설교했다\'로 되었고 다른 곳에는 (프로케케이리스메논) 즉 \'보였다\' 혹은 \'그들의 눈앞에 나타났다\' 로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두 경우에 의미는 동일합니다.
복음의 가르침에서 그리스도는 그들에게 헛되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들이 이제 그리스도를 자기들의 구세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버지 하나님에 의하여 그는 심판자로서 복수하도록 다시 보냄을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본문 21절은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거룩한 선지자의 입을 의탁하여 말씀하신 바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두리라\" 입니다.
1) 우리는 이 일을 특정한 시간만으로 해석하지는 않고 그것을 전체 시대로 돌립니다.
사도가 그리스도의 왕국에 관하여서 앞서 말한 바 있는 것은 무엇이거나 간에 모든 예언자들에 의하여 증언되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시는 일을 시작하신 그 때로부터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그리스도를 사람들 앞에 내세우셨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신 그때로부터 이것은 그가 주장하신 기본적인 교리였다는 사실은 복음의 진리에 대한 충분한 증언입니다.
바울은 로마인에게 보낸 편지의 처음에서와 나중에서 동일하게 복음을 찬양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요 처음부터 약속된 것이라고 사도는 말씀합니다.
하나님 자신이 그 창시자시요, 거룩한 예언자들이 증인들이며 시대의 끊임없는 흐름이 그 증거를 확인해 줄 때 그것은 실로 그 가르침에 신빙성을 주도록 계획된 고대의 유물입니다.
이 확증은 특히 율법의 가르침 안에서 자라난 유대인들에게 필요하였습니다.
그들에게는 율법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일체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예언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증거 한 것을 단지 그들이 승인할 것을 말했을 따름입니다.
2) 본문 중간부분은 \"만유를 회복하실 때까지는\" 입니다.
이 일을 성취시키는 힘과 그 원인에 대해서 말한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으심으로 인해 이미 모든 것을 회복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아직도 충분히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그 회복이 아직 완성되는 과정에 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는 아직 노예 상태의 무거운 짐 밑에서 신음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속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바로 시작되었을 뿐이요 그 나라의 완성은 끝 날까지로 연기되어 있는 것처럼, 거기에 부가되어 있는 은택(恩澤)들도 이제는 부분적으로 나타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현재 우리가 세상에서 많은 혼란을 보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언젠가는 오셔서 모든 것을 회복시켜 주실 것이라는 소망으로 우리의 마음을 높이 들고 다시 힘을 얻어야 합니다.
한편 만일 우리가 죄의 잔재(殘滓)가 우리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을 본다든지, 또는 만일 우리가 여러 가지 고난으로 사방에서 공격을 받는다든지, 또는 이 세상이 혼란으로 가득 차 있다면 우리는 소생이 희망으로 뒷받침을 받지 못한다 할 정도로 그렇게 우리의 불행을 슬퍼하지 않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즉시 나타나시지 않는 이유입니다.
교회의 싸움은 아직 완결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시기는 하나님에 의해 정해진 것이요 우리가 예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3) 본문 후반부는 \"하늘이 마땅히 그를 받아 두리라\" 입니다.
인간의 감각이란 하나님이나 그리스도를 언제나 물질적인 또는 이 세상적인 견해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은 그리스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셨다는 설교를 들었으면서도 그가 어디 계신가는 밝혀지지 않았다고 생각하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선수(先手)를 써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계시다고 말씀합니다.
그 말씀은 중요한 결과를 가져옵니다.
즉 거리상으로는 그리스도가 비록 그들로부터 무한히 먼 거리에 떨어져 계십니다.
또 그리스도가 비록 이 세상 밖의 하늘 영광 속에 계십니다.
하지만 그들은 자기들의 마음을 높이 들어서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를 찾아야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씀은 하나의 불명확한 표현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은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받아들여졌다, 혹은 하늘에 포함되었다는 뜻으로도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또 한편 그 자신이 하늘을 포함했다는 뜻으로도 이해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처럼 불명확한 의미를 지닌 말에 대해서는 꼬치꼬치 따지지 말고 확실한 것만으로 만족하기로 하십시다.
즉 우리는 만물의 종국적인 회복을 기다리면서 하늘 이외의 어떤 다른 곳에서도 그리스도를 찾으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을 능히 능가할 수 있기까지 그리스도는 우리에게서 멀리 떠나 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3:22-24 모세가 말하되
본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메시야이신 사실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대로 성취된 사실을 말씀합니다.
1. 본문 22절은 \"모세가 말하되 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너희 형제 가운데서 나 같 은 선지자 하나를 세울 것이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그 모든 말씀을 들을 것이라\"
입니다.
1) 이 논지에 의하여 사도는 중요한 일을 증명합니다.
즉 사도는 결코 모세를 반역하도록 그들을 권장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이 최고의 스승에 대하여 순복하고 배우는 일이 율법의 일부가 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왜 베드로가 더 정확한 많은 증언을 자기 손에 쥐고 있으면서도 다른 것보다 이 증언을 인용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였는가를 의심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그렇게 한 것은 이 점에서 가르침의 권위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것이 사도가 유대인들을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도록 이끄는 일의 하나의 좋은 방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그의 가르침을 존경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이도록 설득력을 갖지 못한다면 다른 모든 것을 말한다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목적하는 바는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에게 기쁜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게 하는 일이요 하나님께서 자기들을 위하여 임명해 주신 대교사로 그들이 받아들이도록 하는 일입니다.
2) 그러나 이 점에 대해서 훨씬 더 큰 곤란한 문제가 또 하나 일어납니다.
즉 모세가 일반적으로 예언자들에 관해서 말한 바를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적용시키는 문제입니다.
비록 사도가 예언자라는 단수의 말을 사용하였지만 본문이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는 것은 한 사람의 예언자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그 용어를 가장 일반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마법사와 점술가에게서 등을 돌림으로서 이방인의 미신에 빠져드는 일을 백성들에게 금지한 이후에 즉시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에만 전적으로 의뢰한다면 그러한 헛된 일을 일체 피할 수 있는 하나의 구제수단을 그들에게 보인 것입니다.
이로써 사도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 백성들을 올바르게 가르치시기 위하여 예언자들이 주어지도록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고 약속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사도가 \'당신들이 알아서 이익이 될 만한 것을 배울 수 있도록 하나님은 결코 당신들에게 예언자의 결핍을 용납하시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 모세는 \'너희 형제 가운데\' 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교사들을 임명하셨기 때문에 다른데서 하나님의 말씀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이 알아야 합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나 같은 선지자\' 라는 말을 덧붙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한 시대에만 또 단 한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말씀을 들려주시는 것이 아니요, 계속되는 시대의 흐름을 통하여 끊임없이 우리를 가르치심으로서 우리는 반드시 그 말씀에 순종해야 된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이제까지 모세를 존경하는 관습이 있어온 것처럼 예언자들에게 동일한 존경을 바쳐야 한다고 사도는 주장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그리스도에게 국한시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이 말을 잡고 늘어지는 것은 모세가 그 예언자들이 자기와 같을 것이라고 증언했기 때문이요 그 반면에 모세와 같은 인물은 한 사람도 나오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 두 구절이 다 동일하게 유사성의 지적이 있고 그러면서 다른 의미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둘째 구절에서는 분명히 보여질 수 있도록 그 말이 유사 혹은 동등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또 하나의 논점을 잡고 있습니다. 즉 모세가 한 선구자처럼 증언한 그 예언자는 모세보다 훨씬 뛰어날 것이라는 점입니다(신18:15).
그러나 이 반대론도 다른 것보다 더 큰 힘을 가진 것은 못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이 누구로부터 우리에게 전해져 왔던지 간에 믿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실하게 하는 일에 관심을 가졌을 따름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모세가 이 점에서 마치 그리스도만을 지적해서 말한 것처럼 모세의 말을 의곡시키는 부당한 변경을 감행함으로서 유대인들의 비웃음을 살 이유는 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증언의 권위가 우리의 입장을 확실하게 하는 건전한 기초가 되는 것인데 베드로가 그 권위를 적절하게 인용하였는가 어떤가를 우리는 검토해 보아야 합니다. 베드로의 설교에는 전적으로 적절하지 않은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우리는 주장합니다.
사도는 모든 사람들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이 증언은 다른 예언자들에게 해당되는 것이며 그러면서도 원칙적으로는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일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모든 예언자의 우두머리가 되어서 뿐이 아니요 일찍이 있었던 모든 예언이 다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께서 마지막에 그리스도의 입을 통하여 어려 시기에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침내 마지막 날에는 그의 독생자를 통하여 그의 계시를 완전케 하셨습니다(히1:1-2).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오시기 전에 많은 시대에 걸쳐 그들은 예언자를 가지지 못했었다는 사실 또 우리가 말라기의 말에서 분명히 터득할 수 있는 일이 생겨난 것입니다.
말라기는 백성들에게 율법에 유의하라 명한후 즉시 세례요한과 그리스도에게 돌립니다
마치 말라기 선지자는 \"이제는 마지막 계시가 올 때까지 예언은 끝난 것이다\"(말4:4-6)라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주께서 친히 \"모든 선지자와 및 율법의 예언한 것이 요한까지니 그 이후에 천국이 전파된다\"(마11:13) 라고 하신 말씀과도 일치합니다.
사마리아의 여인이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견해를 따라서 \"우리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알게 하리이다\"(요4:25) 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은 유대인 일반 백성들 가운데 보편적으로 퍼져있었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유대 백성이 계시의 중단(中斷)이 있었던 그 정적의 기간에 그리스도에게 좀더 주의 깊게 청종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 백성들이 포로에게서의 귀환 이후에는 모든 예언자들이 자취를 감춰버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이 구절을 의곡한 것도 아니요 무지로 잘못 인용한 것도 아닙니다.
다만 사도는 모든 사람이 받아들인 그 가르침을 하나의 원리로 취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초의 단계에서 예언자들의 중개를 통하여 가르치기로 하셨습니다.
마지막에는 원칙적으로 그리스도를 통해 자기 백성들을 가르치시기로 약속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손에서 그들은 만물의 충만하고 완전한 현현(顯現)을 대망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 아버지께서 베드로에게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마17:5)하신 그 뛰어난 증언의 목적인 것입니다.
2. 본문 23절은 \"누구든지 그 선지자의 말을 듣지 아니하는 자는 백성 중에서 멸망받으리라 하였고\" 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의 권위 특히 그리스도의 권위는 여기서 그들을 반역한 자들에 대한 무거운 형벌로 인하여 자리가 굳혀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당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더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형벌을 받지 않고 무시되도록 하나님이 허용하실 수 없기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모세의 율법을 거부한 자가 있다면 그는 사형에 해당한 판결을 받았습니다.
모세가 \"그는 백성 중에서 저버림을 받을 것이다\" 라고 말했을 때 그는 이것을 고려해 넣었던 것입니다.
시편에는 \"주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습니다(33:12).
또 다른 구절에서 \"하나님이 자기의 기업으로 택하신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말해진 바와 같이 그들의 최고의 복이라는 것은 그의 백성으로 계수되는데 있다는 조건으로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을 자신을 위하여 선택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누구든지 그리스도에게 청종하지 않는 자는 생명책에서 소멸될 것이라고 그가 선언하신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분을 주님으로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자는 하나님께서는 그분만을 통하여 우리를 가르치시고 또 그분만에 의하여 우리가 하나님 자신에게 청종할 것을 원하십니다.
그러하기 때문에 사도는 교회에 속한 임원으로 간주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머리되신 분에게 순복하기를 거부하는 자로 그 몸에서 끊어집니다.
3. 본문 24절은 \"또한 사무엘 때부터 옴으로 말한 모든 선지자도 이때를 가리켜 말하였느니라\" 입니다.
모든 예언자들은 일치해서 자기들의 제자들을 그리스도에게 보낸다는 누가의 선언은 우리 말을 더욱 분명하게 증거 해 줍니다.
복음의 찬양이 모세의 증인 가운데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언의 마지막 단절이 특별히 주목되어졌다는 사실을 말한 것입니다.
이제 그 모든 예언자들이 그 긴 시대의 연속을 통하여 그처럼 자기들의 가르침의 양식을 정해서 인간들이 어떤 더 나은 그리고 더 완전한 것을 대망해야 한다고 한 목소리로 증언해 준 것은 복음의 확실성을 확인해 주는 일에 큰 역할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모세와 예언자들을 믿는 자는 반드시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복종해야 합니다(요5:47).
그것을 떠나서는 그들이 가르치는 모든 것은 절름발이요 불완전한 것입니다.
행3:25-26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본문은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신 사실을 먼저 믿어야 할 처지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1. 본문 25절은 \"너희는 선지자들의 자손이요 또 하나님이 너희 조상으로 더불어 세우신 언약의 자손이라 아브라함에게 이르시기를 땅 위의 모든 족속이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입니다.
1) 하나님이 그들의 조상들과 더불어 맺으신 계약의 은혜는 특별히 그들을 위하여 가기로 예정하셨다는 것을 베드로는 밝히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그들에게 형벌의 두려움을 가지고 고무함으로서 복음에 복종하도록 그들을 격려해 온 것과 똑같이 이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에게 제시된 하나님의 은혜를 받도록 다시 그들을 격려하는 것입니다.
이로써 우리는 하나님께서 어떤 모양으로든지 우리를 자기 곁으로 인도하시려고 하심을 볼 수 있습니다.
게으르고 둔한 자들을 자극하는 일이나 가르침 받을 차비를 하고 있는 자들을 부드럽게 인도하는 일은 두 다 지혜로운 목사의 임무입니다.
베드로가 복음이 유대인들을 향해 가도록 정해져 있다고 보여준 이 가르침의 노정(路程)을 우리는 특별히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가 하나님의 명확한 칙령에 의하여 우리에게 제공되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지 않고는 그것이 일반적인 의미로 우리에게 설교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바울은 이방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주장하는 일에 그처럼 집요하였던 것입니다(롬15:18, 엡3:3-4).
만일 어떤 사람이 생각하기를 복음이 사방으로 전파되어서 우연히 자기에게까지 온 것이라고 생각했다면 그의 신앙은 불확실할 것입니다.
실상 거기에는 신앙의 자리에 하나님의 불분명한 견해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구원의 약속에 대한 안전한 신앙을 갖기 위하여 우리가 그것을 이런 말로 할 수 있다면 하나님은 허공에 매달려 있는 것 같은 모호한 말들을 아무렇게나 뿜어대는 것이 아니요 오직 명확한 계획에 의하여 그 말씀을 우리에게 가르치신다는 것을 덧붙일 필요가 있습니다.
베드로가 유대인들에게 말하는 것은 그들이 더욱 더 대담하게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그리스도가 그들에게 약속된 분이라는 것을 깨우쳐 주는 방식입니다.
그가 어떻게 그 사실을 증명하는 것인가?
그들은 예언자들의 자손들이요 계약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사도가 그들을 예언자들의 자손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이 동일한 민족으로부터 나왔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백성 전체에 속해 있는 계약의 상속인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조상들과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후예들인 우리도 그 계약 안에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논지입니다.
이로써 저 재세례파 주의자(Anabaptists)들의 어리석은 민감성은 논박됩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내가 .....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고 말씀하셨을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에 관해서는 관심하시지 않았던 것처럼 우의적(禹意的 ; allegorically)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확실히 베드로는 여기서 율법의 그림자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는 이것이 그리스도의 왕국 자녀로 삼으신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결과로 구원의 은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자들에게까지도 확대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있는 것입니다.
육신에 의하여 신자의 자녀가 된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들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성도의 가족으로부터 스스로를 추방시킴으로서 그들은 서자로 간주되고 적자(嫡子)가 되지 못한 것이라(롬9:7)는 것을 우리는 인정합니다.
그러나 이것도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에 참여하도록 신자들의 자녀들을 부르시고 받아들이시는 일을 조금도 방해하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적인 선택은 모두가 다 효과를 발생하는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고 특수한 선택에 이르는 문을 열어주는 것으로 이를 방해할 방법도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울이 로마서 11장 23절에서 논급한 대로입니다.
거기서 우리는 문제의 해결을 구해야만 합니다.
2) 본문 25절 후반은 \"땅 위의 모든 족속이\" 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말을 아주 조잡하게 해석합니다.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의 자손이 받는 복과 같이 자기들도 복 받기를 바랄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다른 의미로 해석합니다.
그들이 하나의 사회 안으로 접붙임 될(ingrafted) 것이라는 뜻으로 봅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백성들을 자신에게로 이끌어 모으실 그 날을 아브라함의 이름이 가리키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도 역시 이 말의 의미를 설명하려고 할 때에 그들은 언제나 그 구원의 유산이 이방인들에게도 공유될 것이라고 예언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시에 유대인들에게만 속했던 하나님의 계약이 모든 사람에게 공동으로 소유되게 될 뿐 아니라 분명히 우리 자신들에게도 해당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복음을 통하여 우리에게 확증된 구원의 소망을 품게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약속을 우리에게서 의곡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의 엄숙한 포고와 같은 것이어서 그것으로 주께서는 우리를 조상들과 함께 그의 상속자로 삼으시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잠시 후에 그리스도는 먼저 유대인들에게 보냄을 받으셨다고 말했을 때 그도 역시 이 점을 고려에 넣고 한 말입니다.
이방인들도 둘째 번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순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사도는 지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5절 끝 부분은 \"너의 씨를 인하여 복을 받으리라 하셨으니\"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22:18)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그 계약은 조상들과 맺으신 것이라는 사실을 사도는 확증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바울의 해석을 수락한다면 이 증언은 현재의 경우에는 영향을 주지 못합니다. 이 씨는 그리스도라고 바울은 가르칩니다.
만일에 이 복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인류 전체에게 약속된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이 한 가족에 대한 특권과는 어떻게 관련되는 것입니까?
그래서 베드로는 다시 조금 후에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이 복을 받게되기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하여 바울의 설명에 동의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스도가 그 복된 씨가 아니라면 그것이 가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거기 대해서 바울은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돌리는 것이 이 \'씨\'라는 말에 근거를 두고 하는 것이 아니요 보다 넓은 관심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 씨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머리로 하여 하나로 되는 일이 아니고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관점에서입니다. 이스마엘과 이삭은 둘 다 아브라함의 아들들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두 개의 백성들로 나뉘어졌기 때문에 한 씨를 형성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혈육으로 보면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에게 기원을 둔 그의 가족으로부터는 소외되어 있을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세는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복을 약속할 때에 단일하게 일정한 집단(a single definite body)에게로 지목한 것입니다.
이제 이러한 단일성(單一性 ; unity) 이 머리(head)로서의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다른 어디서 발견될 것입니까?
그것이 집합명사이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자손(seed)\' 이라는 말을 바울은 이상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있습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직무를 버렸다면 아브라함의 후예는 산산이 분열된 회원들처럼 될 것입니다.
그들은 뿔뿔이 흩어져 이산될 것 밖에는 아무것도 보일 것이 없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 가르침에 동의합니다.
베드로는 모든 백성들에게 그 복을 확대시켰습니다.
그러면서 그 근원을 그리스도에게서 찾은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우리로부터 이 증언을 강탈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신자들은 그들의 논점에 대항하며 스스로 빈틈없는 무장을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구나 우리가 갈라디아서 3장 16절 주석에서 지적한 바 같이 기독교 저작자들은 이 점에 관해서 너무도 안이한 생각을 가져왔기에 더욱 대비해야 합니다.
첫째로 이 \'씨(seed)\' 라는 말에 관해서 바울이 잘못 생각해서 그것을 그리스도에게 국한시키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떠들어 댈 권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도는 그처럼 단순히 또는 독단적으로 그렇게 주장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가 지적한 바와 같은 의미에서 그렇게 했기 때문입니다.
이 점에서 우리 헬라어와 라틴어 번역자들은 모두 잘못이었다고 우리는 공언합니다.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에 의하여 복을 받을 것이라고 한 말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우리는 살펴보아야 합니다. 그들은 하나의 근거가 언급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 자손을 통하여 이방인들이 복을 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 일을 가지고 매우 반발하여 애를 먹습니다.
이 구절은 성경의 여기 저기에서 실예(實例)라든지 혹은 유사(類似)를 의미합니다.
그 반대로 소돔에서나 이스라엘에서는 저주로 되어 있습니다.
혹은 그밖의 백성들에게서는 현저한 저주의 실예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대하여 대답합니다. 즉 그것은 매우 모호한 표현이어서 구절(句節)의 문맥(context)에 따라 여러 모양으로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비열하게 그리고 교활하게 은폐하고 있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대조(對照)를 이루고 있는 많은 구절들을 모아서 그 의미가 마치 \"이방인들은 아브라함의 자손들처럼 복받기를 바라고 있다\"고 한 것처럼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경 다른 곳에는 예레미야 4장2절이나 이사야 65장 16절에서처럼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그들은 스스로 자기들의 복을 구할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 마찬가지로 \"여호와의 이름으로 복되게 하셨다\"(신10:8), 또는 그 밖의 유사한 구절들이 있는데 그것은 거기에 하나의 근거가 명시되고 있다는 것이 아주 분명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말의 표현방식은 그때의 문맥(context)에 따라서 이해되어야 된다는 것을 우리는 지적해 둡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는 지금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질 뿐이라는 사실을 말해 왔습니다.
남은문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직무(the office of Christ)의 성격을 고찰하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시범으로 주어진 분이 아니십니다.
진실로 그리스도의 안에 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을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없이는 우리가 다 저주 아래 있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또 하나의 어려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는 것과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하는 두 가지 표현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 것인 한 아브라함은 복의 표상(a type) 혹은 거울(mirror)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한 머리(the one head)에 의존하고 한 머리 안에서 피차 결합되어 있는 그 몸이 아브라함의 인격(person)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말입니다.
2. 본문 26절은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입니다.
1) 26절 상은 \"하나님이 그 종을 세워 복 주시려고 너희에게 먼저 보내사\" 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타내고 있는 사실을 모세의 말에서 거두어 들입니다.
그 말은 그러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 않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 복이란 메시아에게 그 근원을 두지 않고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이론은 옳습니다.
우리가 언제나 기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사실은 모든 인류는 저주 아래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나 유일한 구원의 길이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제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약속되어져 있다는 사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유일한 복의 근원이요 원천입니다.
그러나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복을 가지고 먼저 유대인에게 오셨고 그 다음에 우리에게 오셨다면 그리스도는 자기의 임무를 성취하신 것이 틀림없는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리의 불신앙으로 인하여 방해를 받는 일만 없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 안에서 이 역사의 능력과 효과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백성들을 축복하는 일은 율법시대에 있어서는 제사장의 임무의 일부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단지 무의미한 하나의 의식에 그치지 않게 되기 위하여 거기에 약속이 첨부된 것이었습니다. 그 약속은 민수기 6장 27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제 고대의 제사장직에 나타난 것은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 일에 대해서는 히브리서 7장 16절에 좀 더 자세하게 언급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에라스므스(Erasmus)의 번역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에라스므스의 번역에 \"그가 저를 일으켜 세우셨을 때\" 라고 했는데 그것은 마치 오래 전에 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차라리 그 말을 그리스도께서 복의 창시자로 나타나셨을 때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최근에 와서 또 갑자기 그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영향을 준 사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베드로가 언급한 모세의 마지막 구절에서처럼 성경은 그렇게 말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를 세운다는 것은 자기의 직무를 완수하는 일에 필요한 모든 은사를 그에게 채워준다는 일입니다.
또 예언자의 영예의 지위로 그를 승격시키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하늘 아버지께로부터 맡겨진 임무를 완수했을 때 세워지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이 일은 그리스도께서 베풀어 주신 복음을 통하여 그가 우리 안에서 제 1위의 자리에 모셔지게 될 때 날마다 생겨나는 것입니다.
\'제1위\' 라는 형용사로 말하면 그 말이 장자의 권리를 지적하는 말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말해왔습니다.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서 시작하여 그 다음에 이방인에게로 가셨다는 것은 옳았기 때문입니다.
2) 26절 후반은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입니다.
베드로는 다시 한번 회개의 가르침을 권합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리스도의 복안에 생명의 갱신(newness of life)을 포함시키는 일을 배우게 될 것입니다.
이사야가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실 것이라\"고 약속했을 때 \"야곱 중에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사59:20)는 제약(制約 ; reservation)을 첨가한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의 죄를 없애는 것은 그로 인하여 그들이 구실을 얻어 마음대로 죄를 범하도록 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순간에 그들을 새 사람들(new men)이 되게 하시기 위해서이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두 은혜를 조심스럽게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복음의 기초가 보존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상(無償)으로 주는 용서에 의하여 하나님과 화목 된다는 사실입니다.
다른 사람은 그것을 달리 돌려 해석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누가가 말하려는 참된 의미입니다.
누가는 분명한 말씀으로 \"너희로 하여금 돌이켜 각각 그 악함을 버리게 하셨느니라\" 고 설명하였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4장 강해
행 4:1-4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 할 때에
이 이야기에는 주로 고려되어야 할 세 가지 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복음 진리가 빛을 발하게 되자마자 사단이 할 수 있는 대로 그 일에 저항하기 위해 일어나서 그 가장 초기에 이를 부수어 버리려고 모든 노력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께서는 그 자녀들이 사단의 모든 간교에 대항하여 요동하지 않고 확고히 서게 하기 위하여 또는 악한 자들의 폭력에 굴복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꺾을 수 없는 견인불발(堅忍不拔)의 정신을 그들에게 공급해 주신다는 사실입니다.
끝으로 우리는 그 결과를 생각하게 되는데 아무리 적이 완전하게 권세를 잡고 자기 수중에 모든 지배권을 장악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을 더럽히려고 온갖 수단을 다 부린다 하더라도 또 한편 건전한 교리를 가르치는 목사들이 마치 이리의 입에 물린 양처럼 된다 하더라도 하나님은 그 아들의 왕국을 널리 확장하시며 그의 복음의 빛을 계속 밝히시며 그 자녀들의 안전을 돌보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할 때 반대세력을 일으키는 갖가지의 움직임을 만나며 또 여러 방면으로 그 진로에 방해를 받게됨을 발견할 때마다 신도들의 마음에는 그 생겨나는 일들이 비록 생소할지라도 힘을 잃거나 두려워할 까닭이 없습니다.
차라리 그런 일들은 사단의 전형적인 노력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런 일들이 오기 전에 미리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그의 가르치심과 함께 공중 앞에 나타나실 때마다 사단은 확실히 자신의 공세를 퍼부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온갖 위험이나 위협과 두려움이 올지라도 우리가 그런 것들에게 정복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또 주께서 우리에게 요청하시는 신앙의 고백에서 후회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사도들의 굳은 지조가 우리에게 한 시범으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가 충실하게 우리의 임무를 수행했을 때 주께서는 마지막에 승리를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하는 믿음으로 우리는 스스로 위로해야 합니다.
1. 본문 1-3절은 \"(1)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 인들이 이르러
(2)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하여
(3) 저희를 잡으매 날이 이미 저문고로 이튿날까지 가두었으나\" 입니다.
1) 악한 자들은 그리스도의 종들의 입을 틀어막기 위해 끊임없이 대기하고 있기에 얼마나 그들이 경계하고 감시하고 있는가가 여기에 나타났습니다.
분명히 그들은 불을 끄기 위하여 달려온 사람들처럼 급히 모여온 것입니다.
누가는 성전 맡은 자도 왔다고 말하고 또 이어서 그들은 사도들이 가르치고 있었기 때문에 매우 마땅치 않게 여겼다고 덧붙였을 때 이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우연히 그곳에 온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위로 사도들을 제지시키려는 일정한 목적을 가지고 온 것입니다.
그들은 실상 율법의 정당성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처럼 무모하게 무리에게 강요하는 그 대담성을 제지하고 동시에 백성들로 하여금 율법과 예언자들에게 복종하도록 만들기 위해 제사장들이 있었습니다.
또 모든 새로운 가르침을 방지하는 일이 제사장들의 맡은 임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성전에서 백성들을 가르칠 만한 아무런 공적 권위를 가지지 못한 낯모르는 자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의 직책의 요청을 따라 그리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그 상황을 다루어야 하는 일이 자기들의 할 일처럼 보인 것입니다.
얼른 보아서 그들의 이 행동에 비난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같이 보입니다.
결과는 그들의 의도가 사악하고 그들의 기질이 불신앙적이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2) 더욱이 사도들에게 그들은 아무런 영예도 지니지 못한 평범한 인간이었으면서도 스스로 감히 공적 권위를 주장했기에 그 점에서 비난을 모면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리고 사태가 혼란할 때에 관습에 반해서 많은 일들이 시도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종교와 하나님 예배가 수호되어야 할 필요가 있을 때에 또는 고위성직자들이 모든 길을 폐쇄하고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겨주신 그 직책을 남용함으로서 하나님을 대항하게 될 때에 그들은 그렇게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충실한 투사들이 교황정치 아래서 받아 삼켜야 한 불명예입니다. 그들 가운데서 어떤 개혁이나 개선이 완성에 도달하게 되기까지에는 천년의 세월이 흘러가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부활이 전파되고 있었기에 상심하고 난처해 했다고 말함으로서 이 점에 유의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기도 전에 그 가르침을 미워하였다는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누가는 분명히 사두개인을 이 문제에 대한 더욱 열성적인 사람들로 지목합니다.
그들은 일반적으로 제사장들과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부활이 문제로 되었기에 사두개인들은 다른 누구들보다도 가장 반대하는 입장에 있었습니다.
그처럼 세속적인 한 종파가 그러한 권력을 가질 수 있었다는 것은 실로 유대인들 간에서 하나의 괴상한 혼란의 증표였습니다.
영혼의 불멸이 하나의 꾸며낸 이야기로 아무 비난 없이 간주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 대한 무슨 경건함이 남아있을 수 있는 것입니까?
그러면서 일단 그들이 하나님의 순전한 교리를 그들 가운데서 타락하는 것을 방임할 때 사람들은 그러한 혼란의 길에 곤두박질하여 돌진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타락이 재빨리 뒤따르지 않게 하기 위하여 모든 악의 길로 빠져가지 않도록 애써 정신을 차려야 됩니다.
3) \'성전 맡은 자\' 는 제사장 가운데서 선발되었다고 어떤 이들은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차라리 그가 로마 군대의 어떤 장교였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 장소가 자연적으로나 인공적으로나 방비가 공고히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거기에다 안토니아(Antonia) 요새로 불리우는 성채(城砦)를 건축했었습니다.
그래서 헤롯이 거기에 수비대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있음직한 이야기입니다.
또 유대인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일 같은 사태가 생겼을 경우에 그들이 그곳을 피난처로 만들 수 없도록 로마군대의 수비대장이 안전하게 그 성전을 지배했다고 쉽게 생각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요세푸스(Josephus)에게서도 인증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그리스도의 적들이 소동을 진압한다는 구실 아래 세속적인 권력의 도움을 애원한 일과 잘 합치합니다.
그러는 동안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제국의 권리를 보유하는 일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처럼 로마인의 손길의 호의를 추구한 것입니다.
2. 본문 4절은 \"말씀을 들은 사람 중에 믿는 자가 많으니 남자의 수가 약 오천이나 되었더라\" 입니다.
사도들은 감옥에 갇혀 버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르침의 효과는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서 자유롭게 뻗어나갔습니다.
이리하여 역시 바울은 \"하나님의 말씀은 자기와 함께 매이지 않는다\"(딤후2:9)는 것을 의기양양하게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단과 악한 자들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맹위를 떨치도록 자유가 주어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모든 음모로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이들의 왕국을 촉진시키시고 혹은 그리스도께서 그 양들을 함께 모으시는 역사를 막지 못합니다.
또 아무런 힘도 도움도 없는 몇몇 사람들이 단지 그들의 말만으로서 전 세계가 그들을 향해 날뛰는 발광에서 보이는 힘보다 더한 큰 힘을 보여주는 그 사실을 막아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의 설교가 그처럼 풍성하고 풍요한 과실을 생산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역사입니다.
그러나 더욱 두드러진 사실은 현재의 여러 가지 위험이라도 신도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신앙의 수반물로 신봉하신 일에서 두려움을 주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것이 초신자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시발점이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르침의 효과로 인하여 자신의 몸을 내놓아 손으로 만져 보게 하는 것보다도 또는 사람들의 눈으로 목도하도록 나타나신 것보다 더 분명하게 자신이 살아 계심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믿는 사람의 수효가 약 오 천명 가량이나 증가되었다고 말해진데 대해서는 우리는 그것을 새로 가입된 사람들의 수료라기보다는 전체 교회의 회원수로 보려고 합니다.
행4:5-12 이튿날에
복음이 바로 전파되는 때에 사단은 그것을 막으려고 합니다(3-22절).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런 때에 그의 자녀들에게 용기와 능력을 주셔서 핍박을 견디어 나아가도록 하여 주십니다. 다만 그들이 주의할 것은 이런 때에 자기의 책임을 충실하게 이행해야 된다는 것입니다(Calvin).
본문은 세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1) 본문 앞부분은 사도들이 전도한 결과 믿는 자들이 많아집니다(1-4).
(2) 다음에 핍박자들이 일어납니다(5-7).
(3) 그리고 베드로 사도의 설교가 이어집니다(8-12).
1. 본문 5-6절은 \"(5) 이튿날에 관원과 장로와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였는데
(6)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및 대제사장의 문중이 다 참예하 여\" 입니다.
악한 자들은 복음과 그리스도의 이름을 없애기 위해 어떠한 간계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를 좌절시키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소망은 성취되지 못한 채로 남아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은 여기서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들은 한 회의에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 횡포성이 자행되어 외양으로는 합법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유는 추방되었습니다.
또 그 회의의 타락한 형편이란 진리도 당연히 벌을 받도록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만큼 된 모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들에게 돌연한 두려움을 가져다 주셔서 그들은 자기들의 힘으로 할 수 있는 일도 또 자기들이 무척 하고 싶었던 일도 감히 하려고 하지 못했습니다.
사도들이 자신들을 변명하려고 주장한 모든 것은 아무도 자기들을 지지하는 자가 없는 감옥의 담장 안에 폐쇄된 채로 있을 것이요 그래서 진리가 설 장소가 없게 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께서 어떻게 그들의 계획을 무위로 돌아가게 하셨는가를 봅니다.
그들은 여전히 백성들에 대한 공포의 압력 속에 있었습니다. 또 그들은 질시의 눈초리로 대하는 적개심을 피하기 위해 자기들의 격분을 억제하였숩니다.
누가가 여기서 안나스를 대제사장으로 만든 것은 이상스럽습니다.
그것은 요세푸스에 의하여 중요한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즉 빌라도가 로마로 귀환하도록 명령을 받은 이후에 비텔리우스가 권력을 잡고 예루살렘에 입성하기까지는 이 직책이 가야바에게 해임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께서 티베리우스 치하 18년에 십자가에 처형된 것은 모두가 일치하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티베리우스의 치세는 그 후 4년 간을 더 계속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로부터 빌라도가 그 총독의 직위에서 퇴임되었을 때까지 적어도 3년 간은 지났어야 할 것입니다.
그가 로마로 귀환했을 때에 티베리우스는 죽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가야바는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후에 3년 간은 여전히 대제사장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여기서 이야기한 사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즉시 일어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식으로 전체 난문제가 해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려울 것 같긴 합니다.
요세푸스는 요나단이 가야바 대신 그 자리에 임명되었다고 보고해 주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요나단은 안나스의 아들이었기에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으로 호칭되었다는 사실은 있음직한 일입니다.
가야바도 역시 두 이름을 가지고 있었는데 요셉이라고 불리우기도 했습니다.
2. 본문 7절은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묻되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 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께 대한 열심을 지니고 있는 체한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돌려져야 할 영예가 다른 이에게 주어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체하였습니다. 여기의 \'이름\' 이란 권위를 가리킵니다.
그들은 마치 자기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열광적인 수호자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놀랄만큼 끈질기게 질문을 퍼부었는데 그들은 끊임없는 질문을 통하여 그들이 누구에게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에 대해서 사도들로 하여금 부인하는 말을 하도록 했습니다.
또 그들이 공포 속에서 이미 고백한 것과 어긋난 선언을 하도록 강박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교활과 음흉함을 무위로 만드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치 아니하는 사실을 그들에게 들려주십니다.
3.본문 8절은 \"이에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백성의 관원과 장로들아\"입니다
누가가 이 말을 분명하게 첨가시켜 놓은 것은 그럴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훌륭히 말 한 것은 자신의 일이 아니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분명히 일개 여인의 소리에 벌벌 떨면서 그리스도를 부인했던 베드로가 성령의 능력으로 고무되지 않았다면 그러한 성대한 의식을 갖춘 공회 앞에서 전적으로 무너져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지혜와 담력을 크게 필요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둘에 있어서 베드로는 그처럼 뛰어났습니다.
그러기에 베드로의 대답은 정말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이제까지의 그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제 이 사실은 우리에게 두 가지의 유익을 줍니다.
그 교리가 성령으로부터 나왔다고 이야기될 때에 그 칭찬은 즉시 뒤따를 그 가르침을 도입하는 일에 큰 역할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우리의 신앙고백을 하게 될 때는 언제나 우리의 심정과 마음과 영을 인도해 주실 능력과 지혜의 성령을 주께 구하도록 가르침을 받는 것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이란 넘치는 가득 찬 분량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4. 본문 9절은 \"만일 병인에게 행한 착한 일에 대하여 이 사람이 어떻게 구원을 얻었느냐고 오늘 우리에게 질문하면\" 입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을 포학한 자로 비난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사도들이 무슨 흉악한 큰 죄를 범하거나 했던 것처럼 칭찬을 받아야 마땅한 선행에 관해서 불공정한 심문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한 병자에게 건강을 회복시켜 주었다는 일 때문에 고발되고 있다면\"에서 베드로는 심문하고 있는 바로 그 자체보다도 그들의 마음의 사악한 태도에 더욱 관심을 기울입니다.
만일 사도들이 기적을 가장해서 백성들을 하나님께 대한 참되고 성실한 예배에서 멀어지게 하려고 했었다면 종교가 이 현세적 생활의 모든 것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한 일에 대한 답변을 하도록 소환 받는 일이 당연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고발자들은 악한 마음으로 또는 아무런 이유 없이 크게 존경을 받아야 할 사항을 가지고 거기서 범죄를 만들어 냈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베드로는 그 일에 대한 확신이 뒷받침을 가지고 그들에게 대하여 조롱끼 섞인 서론으로 가볍게 책망하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선행을 정죄하기 위해서 재판관의 자리에 앉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더 중요한 사항에 들어가기 전에 그 점을 잠깐 언급하는 것뿐입니다.
5. 본문 10절은 \"너희와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은 알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하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건강하게 되어 너희 앞에 섰느니라\" 입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만일 큰 목적에 손을 대려는 의사가 없었다면 여러 가지 둔사(遁辭)를 구사하여 도망칠 길을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기적이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광을 받게 되는 목적으로 수행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는 즉시 그 이야기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중요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즉 베드로는 자기가 그의 가르치심을 확증하는 징표를 가질 수 있도록 하나님의 그러한 최고의 능력의 대행자가 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 진행 과정에서 악한 자들은 불가불 자기들이 할 수 있으면 숨기고 묻어버리려고 택했던 일들을 들을 수 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모든 책략을 기울여 자기들이 성취해 놓은 모든 것을 베드로는 그들의 바로 면전에서 선포하게 된 것인데 그 일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되는 일을 그들이 매우 마땅치 않게 여기는 일들입니다. 우선 베드로는 그 기적을 그리스도에게 돌립니다.
다음으로는 죽은 사람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사실이 불합리하고 신빙할 수 없는 일로 여겨지기에 베드로는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시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셨다 라고 한 것입니다.
이리하여 그 기적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하는 기회를 그에게 준 것입니다.
이 증언을 통해 베드로는 그가 참된 메시아였다는 사실을 입증하려 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죽였다고 그들에게 회상시킵니다.
그것은 단순히 그들이 자기들의 죄과를 인식하도록 하기 위해서나 그들을 책망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요 또한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리는 일이 헛된 수고라는 것을 깨닫고 그로써 자기들의 광폭한 어리석음을 단념하고 그 비참하고도 불행한 결말에 이르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6. 본문 11절은 \"이 예수는 너희 건축자들의 버린 돌로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 입니다.
1) 베드로는 성경의 증언에 의하여 입증합니다. 즉 이들 교회의 성직자들이 영광스러운 칭호로 높이 들려있고 하나님의 성전에서 수위(首位)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또한 악의에 차서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새로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시편 118편 22절의 성구를 인용합니다.
거기에서 다윗은 자기가 백성들의 지도자들에게 거부당한 일을 탄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다윗은 주요한 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나님께 선택되었다는 사실을 자랑합니다 더구나 다윗으로서는 보통 사용되는 은유로서 교회나 혹은 하나님 나라의 상태를 건축물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다윗은 지배권을 쥐고 있는 자들을 우두머리 건축자라 부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그 건물의 모든 무게를 받치고 있는 머릿돌이라 합니다.
그것이 바로 \"집 모퉁이의 머릿돌\"의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다윗의 위로입니다. 즉 아무리 지휘자들에 의하여 그가 맹렬히 거부를 당한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가장 낮은 자리에서 머물러 있게 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들의 불신앙적이고 사악한 노력도 하나님이 그를 최고의 영예로운 지위에 승진시키는 일을 조금도 방해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메시아에게서 완전하게 나타내시려고 하셨던 것을 다윗에게서는 그림자로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유대인들에게 한 그의 말 속에서 이 구절을 그리스도에 대한 예언으로 매우 적절하게 인용하였습니다.
이 예언이 적절하게 그리스도에게 해당된다는 사실을 유대인들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베드로가 이 시편을 인용한 의도를 알게 됐습니다.
그것은 장로들이나 제사장들이 그처럼 지나치게 자기들의 영예를 으스대어서 자기들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은 무엇이나 동의하거나 반대하거나 할 수 있는 권한과 능력을 스스로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두머리 건축자들에 의하여 거부된 그 돌이 하나님의 손에 의하여 가장 중요한 자리에 놓여져서 전체 집을 떠받들게 했다는 사실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2) 이 일은 한번만 생겨나는 일이 아니요 날마다 성취될 필요가 있는 일입니다.
오늘날도 역시 만일에 우두머리 건축자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이상스러운 일이거나 있음직 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이로 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나 찬탈하려고 해서 공허한 칭호를 자랑하는 저 교황의 헛된 자만심을 깨끗이 배격하게 됩니다.
우리가 비록 교황이나 그의 수족들에게 그들이 요구하는 대로 설령 교회의 정규적인 성직자들로 허용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안나스나 가야바와 함께 우두머리 건축자로 호칭되는 이상으로는 더 높이 올라갈 수는 없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이 하늘과 땅을 함께 혼합시키기에 적당하다고 간주되는 그 칭호가 도대체 무슨 가치가 있는가가 분명해집니다.
이제 우리는 간단히 이 구절에서 염두에 남겨둘 만한 가치 있는 것들을 무엇이나 거두어 보기로 합시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우두머리 건축자로 불리워지는데 그 이름 자체가 그들에게 자기들의 의무를 환기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신 일에 대해서 그들에게 전력을 기울이도록 해 줍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다 자기들의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지는 못하는 까닭에 무엇이 그 집을 바르게 짓는 것인가 하는 올바른 방법을 그들로 하여금 찾아내게 합시다.
우선 그리스도를 토대로 하는 일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둘째로 바울이 고린도전서 3장 12절에서 가르치는 바와 같이 그 건물에 짚이나 풀을 섞지 말고 건물 자체가 순수한 가르침으로 완성되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의 목사들을 본다든지 혹은 적어도 최고의 직위를 가진 사람들을 볼 때 그들이 악의적으로 그리스도를 버리고 또 쫓아내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을 보면 건축자들에 의하여 버려진 그리스도를 하나님께서 격찬하셨다고 말해진 사실은 우리에게 격려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반대하여 일으키는 비현실적인 이의를 대담하게 무시할 수 있으며 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영예를 그에게 돌리는 일을 주저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대해서 참으시며 못 본 체하신다 하더라도 그의 적들이 땅위에서 설치고 발광하는 동안에 하늘에서 그들의 뻔뻔스러움을 웃으시는 것입니다.
그들의 음모가 아무리 강하고 또 장비가 잘 차려지고 공급을 받고 있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영광은 안전하게 남아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스스로 확신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확신의 결과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탱함에 용감하고 대답하게 된다는 사실이 뒤따르게 됩니다.
그 왕국은 하나님 자신이 그 무적의 챔피언이 될 것이라고 확언하신 나라입니다.
우리는 이미 베드로의 절조에 대해서 말한 바 있습니다.
하나의 단순한 사람인 그가 그처럼 적대시하는 심판자들의 면전에서 또는 위험의 와중에 단 한사람의 동료와 함께 있으면서 아무런 두려움의 표시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 격렬한 군중들 앞에서 그들에게 분노로서 받아들여질 것을 알면서도 사실을 자유롭게 공언했던 것입니다.
그들의 범죄에 대한 그의 통렬한 책망에서 우리는 우리가 진리에 공공연하게 적대시하는 적을 다루어야 할 경우에 있어서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는 규율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와 관련해서 두 가지 과오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하여야 하기 때문입니다.
첫째는 우리가 침묵을 지키거나 못 본체 하여 장한 체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침묵은 진리가 배신당해야 하는 일이기에 그것은 불충실한 것이 될 것입니다.
둘째는 사람들의 심정이란 논쟁의 열기에 휩쓸릴 때 거기서 탈출하기 어렵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경솔함이나 알맞지 않는 분노에 사로잡히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중을 기하여야 하며 그러면서 도리에 벗어나지 말아야 합니다.
솔직하게 책망합시다. 그리고 또한 격정적인 욕지거리가 되지 않도록 유의합시다.
어떻게 베드로가 이러한 한계 안에 잘 머물러 있었는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처음에 존경하는 말씨로 그들에게 연설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본론에 이르렀을 때에는 날카롭게 그들을 공격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그처럼 사악한 그들의 수치스러운 불경건은 침묵으로 넘겨버릴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시범을 따르는 사람들은 베드로를 안내자로 가지는 것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성령도 안내자로 모시는 것입니다.
7. 본문 12절은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입니다.
1) 베드로는 특수론에서 좀더 일반론으로 옮기고 육체적인 유익에서 전체적인 건강으로 화제를 옮깁니다. 확실히 그리스도는 단순한 그분의 은혜의 표시를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것으로 그는 자신이 생명의 창조자이시라는 사실을 인식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원천이시라는 사실을 우리는 갖가지의 하나님이 주시는 복 가운데서 간파하지 않아야 됩니다.
이를테면 그들이 말살하려고 했던 선언, 곧 그리스도 이외에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다는 것을 선언함으로서 베드로는 그 선언으로 제사장들을 찔러주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제공해 주신 구원을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전체 백성들에 대한 그 결과와 이익을 부정함으로써 그것을 무위화하려고 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중적으로 저주를 받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귀먹은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에 하나라도 그 중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몇이라도 있다면 하는 생각으로 그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설교한 것이요, 만일에 그렇지 못하다 해도 이 증언으로서 그들은 변명할 도리가 없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2)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에서는 이미 앞서 말한 것을 베드로는 첨가 설명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정해 놓으신 일이기 때문에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베드로는 말합니다. 이 \'이름\' 이라는 말로서 베드로는 \'원인\' 혹은 \'수단\'을 의미합니다.
마치 \"구원이란 오직 하나님의 능력 안에 국한되어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에게서 구원을 구하지 아니하고 다른 수단에 의하여 구원에 참여하는 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말한 것과 같습니다.
\'천하\'라는 말은 보통 피조물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는데 모든 피조물에 있어서 구원의 능력과 권위가 그리스도에게 주어져 있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뜻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 도달하기 위해서 하늘에 올라갈 수가 없기에 이 말이 차라리 여기에 삽입된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로부터 매우 멀리 떨어져 있기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당신 앞으로 초대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손을 펴셔서 우리에게 구원을 주시고 그래서 우리가 그 구원을 기뻐하게 하시는 일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수행하신 일이요, 그리스도는 구원을 가져오기 위하여 땅위로 내려오신 것이라고 베드로는 여기서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모든 하늘 위로 올라가셨다는(엡4:10) 교리와 상치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양자로 삼으시기 위한 영원한 공약이 되시기 위하여 한번 우리와 같은 육체를 입으셨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자기 죽음의 희생으로 하나님으로 영원히 우리와 화해하게 하셨습니다.
자신의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는 우리를 위해 영원한 생명을 사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도 역시 그리스도는 우리와 함께 계셔서 우리로 하여금 영원한 구속의 열매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는 우리가 우리 구원의 계시를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가 더 이상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롬10:6)라고 말할 필요가 없도록 그 구원이 그리스도 안에 분명히 계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 것입니다.
만일에 이 가르침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면 교회가 그처럼 고민하고 있는 저 구원의 수단에 관한 많은 논쟁이 완화되었을 것입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우리와 함께 구원은 하나님께만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획득하기 위한 무수한 수단을 만들어냅니다.
그들은 구원이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진다는 사실을 감히 전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처럼 많은 추가 요인들을 만들어내서 그리스도에게 남는 것은 겨우 구원의 요인의 백 분의 일 정도가 될까 말까하는 정도입니다.
그러나 구원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기대할 수 밖에 없습니다.
베드로는 분명하게 일체의 다른 수단을 배제하고 구원은 전적으로 또는 완전하게 그리스도에게만 있고 그 일부분만이 아니라고 언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교리를 이해하기에 너무 먼 거리에 있었습니다.
행4:13-18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본문은 핍박자들이 사도들을 힐란 할 말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핍박자들은 사도들에게 지금부터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전하지 말라고 욱박지르면서 말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3-16절은 \"(13) 저희가 베드로와 요한이 기탄없이 말함을 보고 그 본래 학문 없는 범인으로 알았다가 이상히 여기며 또 그전에 예수와 함께 있던 줄도 알고
(14) 또 병 나은 사람이 그들과 함께 섰는 것을 보고 힐난할 말이 없는지라
(15) 명하여 공회에서 나가라 하고 서로 의논하여 가로되
(16)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꼬 저희로 인하여 유명한 표적 나타난 것이 예루살렘에 사 는 모든 사람에게 알려졌으니 우리도 부인할 수 없는지라\"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핍박자들의 하나의 악한 생각을 보게 됩니다.
그 박해들이 공정성과 이성을 잃고 공공연한 횡포 속으로 달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그 핍박자들은 그런 내색은 피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래서 우선 그 박해자들은 옛날의 거인들처럼 고의로 또는 자기들의 자유로운 선택에 의하여 하나님을 거스려 싸움을 걸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도록 자기들의 양심에 가책을 받았다고 성령의 감동으로 누가는 선언합니다.
그 박해자들은 병 나음을 받은 사람에게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보았으면서도 악한 생각을 가지고 그 핍박자들은 그리스도를 거스려 대항하였기 때문입니다.
그 박해자들은 베드로와 요한이 배우지 못했고 무식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사도들의 대담성 안에 인간 이상의 무슨 힘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 박해자들은 하는 수 없이 감탄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핍박자들은 그처럼 파렴치한 짓을 시작하여 진리를 압박하는 무슨 잔인한 수단을 찾기를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너무도 명백한 표적이라는 사실을 그 핍박자들이 인정할 때 그것으로 그 박해자들은 스스로 악한 생각을 가졌다는 죄책감을 인정하는 셈입니다.
박해자들이 그 표적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알려진 일이라고 말했을 때 그것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일에는 관심 없고 사람들에게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박해자들은 사실을 부정할 무슨 구실만 있다면 태연히 등을 돌리는 일에 아무런 가책도 느끼지 않았을 만큼 자기들의 철면피를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그 박해자들이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고 의논이 벌어졌을 때 그 속에 그 박해자들의 완강한 악한 의도가 폭로된 것입니다.
그 박해자들이 악마와 같은 격정을 가지고 다른 결말을 향하여 달려가게 되지 않았다면 그 핍박자들은 확실히 하나님께 자신들을 복종시켰어야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그 원수들을 도취케 하시는 착란과 광기(狂氣)의 영(spirit) 입니다.
그래서 조금 뒤에 가서 그 박해자들이 그 기적의 이야기가 그 이상 더 널리 퍼져나가지 않도록 위협함으로서 그것이 성공할 줄로 희망하였을 때 그 이상의 어리석은 생각이 무엇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단지 이 순진한 두 사람을 침묵시킴으로서 주님의 팔이 꺾여질 수 있을 것입니까?
2. 본문 17-18절은 \"(17) 이것이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저희를 위협하여 이 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 사람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18) 그들을 불러 경계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 하 니\"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도 두려워하지 않는 권력의 무서운 악을 봅니다.
종교가 마땅히 소유해야 할 권위를 행사하지 못하게 될 때 인간이 잡고 있는 지위가 신성하면 할수록 그 지위를 가진 자는 더욱 더 대담하게 발광합니다.
이것이 바로 악한 자들이 교회의 지배적인 자리에 세워지지 않도록 우리가 항상 유의하여야 하는 까닭입니다.
그리고 이 직책에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를 주기 위해서 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여지지 않기 위해 스스로 경건히 조심성 있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 직책에 부름받은 자들이 자기들의 직위를 악용하는 일이 생겨난다면 그들이 명령하거나 판결하는 것이 무엇이든 공허한 것으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성령께서 거울에 비추시는 것처럼 분명하게 해 주십니다.
특히 목사들의 권위라는 것은 제한성을 갖고 있어서 거기서 넘어져서는 안됩니다.
만일에 그 목사들이 지나치게 과감한 행동을 한다면 우리는 합법적으로 그 목사들에 대한 복종을 거부하게 될 것입니다.
그 목사들에게 복종하는 일은 큰 악을 범하는 일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4:19-23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본문은 크게 두 부분입니다.
(1) 복음전파를 반대하는 자들에게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항변합니다(19-20).
(2) 이제 핍박자들은 어떻게 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21-23).
1. 본문 19절은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가로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입니다.
1) 두 사도가 이러한 대답을 한 상대방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이 회의가 교회를 대표한 것이 틀림없는 일이었지만 그들이 자기들의 권위를 악용했기 때문에 사도들은 그들에게 복종할 까닭이 없는 것이라고 말한 때문입니다.
그리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사항에 대해서 흔히 생겨나는 바와 같이 사도들은 자기들의 적들을 비난하기 위해 상대방의 답신(答申)을 이용합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법령에 대항하여 하나님의 권위를 내세웠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 일은 다른 면으로 보면 교회의 정규적인 목사였던 그들이 동시에 하나님의 적이 아니었다고 한다면 사도들의 불복종은 합당치 않은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사도들은 또한 악하고 불성실한 목사들에게 제공하는 복종이란 비록 그들이 교회에서의 합법적인 권위를 행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을 거스르는 일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것입니다. 교황은 가볍게 이 문제를 처리합니다.
아무렇게 지껄이는 말이라도 그것이 자기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로써 어떠한 반대의 위험도 제거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오늘의 주교들은 하나님께서 예전에 제사(祭司) 계급에게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주장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어린애 같이 유치한 일로서 그들은 하나님의 뜻에 합치하는 일이 아니고는 무엇 하나도 명령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 사실은 차라리 중요한 것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발로 짓밟고 그것을 필요 없는 것으로 여기며 자기들의 헛되고 방종한 열망을 제멋대로 헤매도록 허용함으로서 충돌은 간단하게 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2) 그러기에 사람들이 무슨 직함을 가지고 있든지 그들이 우리로 하나님을 복종하는 일에서 떨어져 나가도록 인도하지 않는다는 조건 아래서만 우리가 그들의 말을 경청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모든 관례를 하나님의 말씀의 기준에 비추어 검토해야 합니다
우리는 군왕이나 그밖의 권력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최고의 왕이시오 아버지시요 주되신 하나님에게서 그에게 속한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 한도 안에서만 복종해야 합니다.
이러한 제한이 정치적인 지배에서 준수되어야 하는 것이라면 교회의 영적 통치 안에서는 그 일들이 더욱 큰 중요성을 가지고 지켜져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자기들 위에 높여지심을 받으시기에 자기들의 권위가 최소한도로 적어진다고 그들이 언제나 생각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베드로는 그러한 사항은 하나님의 심판 자리에서 정해져야 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그들에게 경고함으로서 그들의 그러한 자기 만족의 생각에서 그들을 돌이켜 놓은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하나님 앞에서\' 라고 분명히 말씀합니다.
아무리 사람들이 눈이 멀었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결코 자기 앞에서는 우선권을 가지도록 허용하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성령께서는 이 대답을 사도들의 입에 두신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적의 흉포성을 억압하기 위해서만이 아니요 또한 우리의 의무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벗겨버리고 그들 자신의 멍에를 우리에게 씌우려고 할 만큼 그렇게 거만해질 때마다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지를 성령은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러한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권위를 상기해야 합니다.
그것은 인간의 모든 우월성이라는 헛된 연기를 날려 보내는 것입니다.
2. 본문 20절은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입니다.
평화가 이뤄져야 할 때는 보고 들어 알게 된 많은 것을 말하지 않고 침묵해야 합니다.
불필요한 사항을 가지고 소동을 일으키는 일은 하나의 심술궂은 고집을 나타내는 일이요 무례한 짓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할 때 그것은 일반 말투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복음이 여기서 문제가 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가운데는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이 모두 포함되어 있습니다.
복음이 인간들의 금지로 인하여 억압되는 일이 있다면 그것은 꼴사납고 불신앙적인 하나의 범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전파하도록 명령하시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또는 전파자로 택함을 받았습니다.
또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열어주셨다는 사실을 사도들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에게 침묵을 지키도록 명하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님의 은혜를 무효화하고 인간의 구원을 파괴하려고 있는 힘을 다해 노력하는 자들입니다.
만일에 이러한 불경스러운 금지가 우리의 입을 다물게 한다면 우리의 비겁함을 인하여 우리에게 화가 있늘진저!
이제 그들이 사람들의 일을 생각하고 침묵을 지킬 때에 그리스도의 입에서 그들의 불신앙을 책망하는 무서운 음성이 들려오는 일이 없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어떤 고백을 그들에게 요구하시는가를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줍니다.
특히 가르치는 직책에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어떠한 인간의 협박으로나 어떠한 권위의 형태로 인하여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다만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맡겨주셨다고 알고 있는 그 직책을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해야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9:16)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하나님의 계명을 단지 인간들의 압제적인 명령을 저항해서만이 아니라 사단이 복음의 진행을 끊거나 방해하려고 가끔 설치해 놓는 모든 장애물에 대항해서 조절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맹렬한 강습을 막아내기 위하여 강한 방패를 필요로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이 경험하는 바입니다.
그러나 무슨 일이 생겨나든지 여기에 하나의 놋 성벽이 있습니다.
복음 선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이요 그러기에 어떤 이유 때문으로도 억압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3. 본문 21-22절은 \"(21) 관원들이 백성을 인하여 저희를 어떻게 벌할 도리를 찾지 못 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 을 돌림이러라
(22) 이 표적으로 병 나은 사람은 사십여 세나 되었더라\" 입니다.
1) 여기에 선동의 결말이 있습니다.
즉 악한 자들은 격정의 숨결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숨은 능력에 억제되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그들은 해를 가해줄 만한 방법을 찾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의 사슬에 매이고 결박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들이 위협하는 것으로 만족하고 그들의 몸에 폭행을 가하지 않는 일이 생겨날 수가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을 제지한 것은 민중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비록 알지 못하였지만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끈으로 그들을 묶으신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께서 그 자녀들을 보호하시는 그 섭리를 우리에게 권합니다.
그것이 악한 자들에게는 숨겨져 있어도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그것을 보게 됩니다.
여기에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교회의 가장 두려운 적들에 의하여 촉진되었다는 하나님의 신기한 의도가 나타난 것입니다.
제사장들의 모임은 널리 알려짐이 없이 개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은 무슨 놀랄 만한 사건을 기대하면서 기다렸으며 사도들은 무죄 방면되어 자유의 사람들로 석방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적은 패배했을 뿐 아니요 자기들의 의사에 반대로 복음을 굳게 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우리가 다시 유의하여야 할 것은 신도들이 승리를 획득하게 될 때 그것은 언제나 십자가의 겸비 아래 있다는 사실입니다.
2) 그들은 다시금 이제부터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도록 위협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십자가의 치욕 밑에서만 정복하고 승리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고 해서 누가는 그들이 모두 그 목표에 다 도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그 기적이 가져온 성과를 다시 한번 기록해 놓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지각으로 접한 그 사람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오지 아니하였으며 그 기적으로 이루어 진 신앙을 가지지도 아니하였으니 그는 절반쯤 오다가 만 셈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이 고침을 받음으로서 하나님의 능력이 인정되었다는 사실은 비록 전부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무엇인가 성과는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적들은 부끄러움에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공격의 맹위를 멈추고 잠시동안 후퇴하였다는 사실입니다.
4. 본문 23절은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류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고하니\"입니다.
우리는 즉시 왜 그들이 자기들이 당한 일들을 다른 제자들에게 자세히 말했는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부터 더 대담해지고 용기를 떨칠 수 있게 되기 위해서입니다.
또 그들의 적의 잔학한 위협에 대항하여 말씀과 기도로 스스로를 무장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기본입니다.
서로 격려하고 신앙 친교에 가담함으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서 공동의 적을 무찔러야 합니다.
그들이 자기들에게 심한 압박을 가해올 적을 보게 되는 경우에라도 그것을 피할 차비를 더욱 잘 하게 하기 위해서 어떠한 위험이 그들에게 임박하고 있는가를 그들이 생각하게 해야 합니다.
때때로 새로운 충돌을 대하게 될 때에도 그들이 당황하지 아니하고 그들이 전에 승리를 가져오게 했던 그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을 통하여 불패(不敗)의 확신 속에 남아있어야 합니다.
누가가 명백하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지만 사도들은 앞서 한 답변으로 만족했습니다.
또 그들은 격정적인 사람들에게 그 이상 항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사도들은 저들의 불신앙적인 법령을 비겁하게 감수할 정도로 그들의 처음 지조를 잊어버리지는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행4:24-31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본문에서부터는 초대교회 당시에 교회 내부 생활방식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당시 신자들은 사도들과 전도자들, 그리고 직분자들과 온 교회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주의 뜻을 따라 기도하였습니다(24-31).
우리의 적들이 오만하게 우리를 위협해 올 때 우리의 의무가 무엇인가를 우리는 이 실예에서 배우는 것입니다.
우리는 위험한 때에 조심성 없게 웃을 것이 아니요 위험의 공포가 우리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청하도록 몰아감이 마땅합니다.
이것은 바로 위협 때문에 두려워하며 우리가 자신의 의무를 내던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를 바로 서게 하는 하나의 치료법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유래되는 두 개의 교훈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자기들의 원수들이 자기들을 매우 압박하고 위협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바보나 상상력이 우둔한 사람들이 하듯이 시시덕거리지 아니하고 위협을 느끼고서 하나님의 손에서 도움을 구하려고 달려간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의무를 돌려버릴 정도로 공포 속에 휩쓸리지 아니하고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넘어지지 않을 확고한 절개를 기구한 것입니다.
1. 본문 24절은 \"저희가 듣고 일심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가로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은이시오\" 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일반 서술이지만 현재 입장에 관계되는 말입니다.
그들이 가진 전 세계 창조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인식은 그들의 현재의 이익을 위해서 적용할 수 있는 하나의 견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언자들도 역시 우리가 적들의 세력을 볼 때에 우리를 괴롭히는 그 두려움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흔히 하나님의 능력을 말해 주었습니다.
그 예언자들은 거기에다 하나님의 약속을 연결시켰습니다.
또 그들은 확신을 가지고 기도할 수 있는 대담성을 발견하는 토대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과 능력을 의지하고 우리가 구하는 바를 얻을 것이라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기도할 때에 우리의 기도는 정당한 것이 되고 또 하나님이 받으실 만한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 앞으로 오도록 초청하시고 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약속이 없이는 또는 우리로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우실 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인식함이 없이는 우리가 아무런 확신도 가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도들이 가끔 기도하려는 생각을 가질 때마다 이 두 가지 명상 경험을 하도록 함이 옳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한 천지만물의 창조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하는가를 배우는 것입니다.
그로서 모든 것이 하나님께 종속되어 있으며 그의 뜻을 따라 지배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됩니다.
또 그 전체 세계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시도하더라도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겨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악한 자들의 교만이 제아무리 거창할지라도 그것은 마치 진흙이 토기장이를 거스려 반항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성도들은 어떠한 위험이 자기들에게 덮쳐 오더라도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그 손에 쥐고 계시며 하늘과 땅 모든 것의 창조자이신 자신에게 천지의 모든 부면(部面)을 복종시키실 수 있는 분이신 까닭에 그러한 모든 위험을 한이 없는 방법으로 다루어 주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5절은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입니다.
1) 그들은 이제 둘째 부분으로 왔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수행하시려고 약속하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구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의지는 그분의 능력과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구하는 바를 받을 것이라는 넉넉한 확신을 가집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수호하시기로 엄명하신 그 약속에 유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전복시키려는 전체 세계의 노력은 헛수고가 될 것입니다.
그들의 경건함과 그의 열성의 성실성은 자기들 자신의 안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왕국의 진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에서 잘 나타났습니다.
2)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에서 우리는 다윗이 자기 자신의 일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가 하나님께 왕으로 택함을 받고 사무엘에 의하여 기름부음을 받은 후에 사방에서 우글거리는 원수들의 반대 때문에 그의 왕국을 소유하는 자리에 나아가기에 가장 큰 곤란을 경험했습니다.
우리는 그 지배자들과 백성들이 어떻게 사울 왕과 그의 가족들과 더불어 음모를 꾸몄던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중에는 블레셋 사람들과 다른 외적들이 밖으로부터 이 새 왕을 그처럼 경멸하여서 그와 더불어 전쟁을 벌이는 일에 서로 경쟁할 정도였습니다.
왕들이 분노하며 함께 모의하고 백성들이 여러 가지 계획을 만들어내고 있다고 그가 불평을 토로한 일은 이유 없는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다윗으로서는 하나님이 자기 왕국의 지지자이시라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들의 어리석은 계획을 비웃고 그들의 일이 헛된 것이라는 사실을 확신한 것입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왕국은 그리스도의 왕국의 형상으로 창건되었기 때문에 다윗은 그림자 속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고 실체를 파악하고 있는 것입니다.
실로 사도들이 여기서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는 대로 성령께서는 이 세상의 어리석은 생각을 책망하십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자신에게서와 마찬가지로 다윗의 인간 안에서 이룩하신 그리스도의 왕국을 감히 침해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깃발 아래 싸움터로 나아갈 대에 하나님께서 우리 편에 계신다는 것을 듣는 일은 놀라운 위로입니다.
우리가 확증을 받을 수 있는 것은 신분의 고하를 무론하고 모든 사람들이 사악한 음모로서 함께 이 왕국을 저항하더라도 그들은 승리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전체 세계도 하나님께 비교할 때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러나 이 일에 관하여 우리는 먼저 중요한 사실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창건자가 되시는 그 아들의 왕국을 영원히 부지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들의 뻔뻔스럼에 대항하는 하나님의 침범할 수 없는 명령 고정시킵니다.
또 우리는 하나님의 손의 도우심을 신뢰하면서 그게 비록 가공할 만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인간들의 모든 준비를 자신을 가지고 가볍게 다루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적의 기략(機略)을 평가하는 일에 힘을 씁니다.
그들의 흉계에는 끝이 없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는 우리가 그로 인하여 당황하게 될 경우를 대비하여 그들의 결의를 평가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그 적들의 발호에도 불구하고 지탱될 것이라는 시편의 가르침은 동시에 그 왕국을 타도하려고 애쓰는 많은 적들이 있을 것이라는 것을 지적해 주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는 한 쪽으로는 왕들이 분노할 것을 말하고 다른 쪽으로는 백성들이 소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함으로서 모든 계층이 그에게 적이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육체에 대하여 복음의 영적 검 이상으로 상반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그에게 복종시키시기 위하여 그 영적 검으로서 우리를 도륙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왕국은 이 세상에서는 결코 평온할 수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싸울 것을 요청 받았을 때에 무엇인가 생소한 것처럼 생각되어 당황하게 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3. 본문 26절은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입니다.
성령께서는 여기서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자는 누구나 다 하나님을 거스려 싸움을 하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그들은 흔히 이 사실을 고려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는 오직 그의 아들 자신에게서만 다스리시는 것이 그분의 뜻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거스려 배반하는 대로 그만큼 하나님의 주되심을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주님 자신이 요한복음에서 \"아들을 공경치 아니하는 자는 그를 보내신 아버지를 공경치 아니하느니라\"(5:23) 고 말씀하심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위선자들로 하여금 자기들은 하나님을 거스려 싸우고 있지 않다고 천 번이라도 고백하게 하여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아니하고는 하나님이 자기들의 명백한 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이 가르침은 두 방면으로 적용됩니다.
첫째는 복음을 저항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누르고 승리할 것이라고 우리가 생각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에 모든 육체의 두려움에 대해 우리를 강하게 무장시켜 줍니다.
둘째는 우리가 거룩한 가르침을 경홀히 여기고 우리 스스로가 하나님을 거스려 자신의 파멸에 떨어지지 않도록 우리를 경고합니다.
4. 본문 27절은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동하여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 입니다.
1) 이 예언은 그 사건으로 인하여 확증되었고 그래서 더욱 더 확실하게 믿어지게 되었다고 그들은 선언합니다. 그 의미는 \"주여 당신은 그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실로 그것이 진리라는 것을 경험한 것입니다\" 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4년 전이거나 그 무렵에 생겨났던 사건들을 회상합니다.
우리는 마찬가지 방법으로 예언된 일의 결과를 우리 신앙의 확인을 위하여 적용하는 것은 옳은 일입니다.
하지만 적들의 폭행은 그리스도를 사형할 만큼 유효하였으며 더구나 그들의 뒤따른 난폭은 맹렬하고 무서워 실로 그들의 분노는 효과 없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결과는 시편에 이야기 된 것과는 훨씬 다른 것처럼 생각 되었을런지도 모릅니다.
신도들은 자기들의 원수들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 이상의 일은 할 수가 없었다고 말함으로서 이러한 곤란에 부딪친 것입니다.
어쨌든 악한 자들이 그리스도는 사망으로 파멸되었다고 생각하고 공허한 승리의 노래를 불렀지만 신도들은 그들의 분노가 모두 헛된 것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질문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한 무리였는데 왜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 이라고 구별해서 서술되었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이 축제일에 함께 모여온 출신지의 다양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봅니다.
그 의미는 각처에서 태어난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공격하기 위해 모두 함께 결탁했다는 뜻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열광은 전적으로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2)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스려\"라는 이 말은 조금 전에 다윗에 대해서 말할 때 \'종\'이라고 번역한 동일한 헬라어입니다.
그들은 (파이스)라는 말을 대로는 \'종\'이라는 뜻으로 때로는 \'아들\'이라는 뜻으로 사용하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과 예언자의 직임을 수행하는 일에서 하나님의 대리자였기에 그러한 호칭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아들\' 이라는 말이 그리스도 자신에게는 더 합당합니다.
혹시 어떤 이는 누가가 이 말의 두 가지 의미에서 다윗에게서 그리스도의 유사성을 암시하려고 생각한 것이라고 해석 할런지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말해진 것은 시편에 기록된 것과의 참된 합치를 이루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이 그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으셨다고 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으심으로 그리스도를 왕으로 성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시에 그것이 어떠한 종류의 기름 부음인가를 관찰하여야 합니다.
그리스도는 눈에 보이는 기름으로가 아니요 성령으로서 기름부음 받으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5. 본문 28절은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성에 모였나이다\" 입니다.
그리스도의왕국이 그 음모에 의하여 타도되는 일과는 너무도 엄청나게 멀어져 그로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에 대한 이유를 우리는 이미 설명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여기에는 중요한 교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자신의 비밀스런 계획에 의하여 그처럼 지시하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하려고 결정하신 것은 악한자들의 작용을 통해서도 수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의적으로 그러한 봉사를 그에게 하려고 마음먹은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그들의 계획이나 의도를 뒤로 돌리셔서 한 쪽으로는 정의와 최고의 성실이 분명하게 나타나고 다른 쪽으로는 악과 불공정이 나타나게 하십니다.
이 문제는 우리가 제2장에서 더 충분히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말이 나온 김에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게 되는가를 살펴봅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은 이 세상에서 발생되는 모든 일의 주된 그리고 유일한 지휘자라는 사실, 악마와 모든 악한 자들은 우리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못하도록 하나님에 의하여 굴레가 씌워지고 제한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해하게 됩니다.
그들이 가장 맹렬하게 격분할 때에 그들은 자기들이 하고싶은 것을 다 하도록 자유가 주어진 것이 아니요, 우리 자신에게 유익하도록 봉사하는 정도로 느슨한 고삐만이 주어진 것입니다.
하나님의 예지(豫知)만을 인정하고 모든 일이 그분의 뜻을 따라 생겨난다는 사실에 동의하지 않는 자들은 하나님께서 그 생겨난 일들이 그렇게 생겨나도록 미리 정하셨다는 말로서 분명히 아무 소리도 못하게 될 것입니다.
누가는 이 \'뜻\'(counsel)이라는 말로 만족하지 않고 \'손\'(hand)이라는 말을 첨가합니다.
우리 개역에는 \'권능\'으로 번역되는데 그 말은 \'손\'으로 번역된다 - 역자 주.
그것은 꼭 적절하다고는 할 수 없으나 실은 좀더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물의 결말은 하나님의 뜻에 의해 지배되는 것만이 아니요 그분의 손의 능력에 의해 정해진다는 사실입니다.
6. 본문 29-30절은 \"(29)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옵시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 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입니다.
1) 그들은 자기들이 그리스도에 관하여 내세운 것을 적절하게 자신들에게 적용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으로부터 분리되시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신도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이 생겨난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께서는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적용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자기들의 적의 잔인한 행위를 제지시켜 달라고 구합니다.
그러면서 그것은 자신들이 조용하고 괴로움 없는 생활을 하도록 자신들을 위하여 구하는 것이 아니요 열심히 복음을 널리 전파하도록 구한 것입니다.
자기들의 소명(召命)을 저버리고 나태 속에서 세월을 보내기 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렇게 첨가합니다. \"주여 이제도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하옵시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실\' 것이라고 한 그 말을 유의합니다.
교만한 자를 반대하시고 그들의 교만을 끌어내리시는 것이 그분의 특별하신 일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오만하게 으시대면 으시댈수록 그들에게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더욱 도발하게 되는 일이 틀림없이 따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모욕을 받으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거기 대한 처벌을 마련하실 것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는 일입니다.
이리하여 히스기야는 자신의 극한적인 곤경에서 구원을 요청하면서 산헤림의 거만과 그의 잔인한 협박을 주 앞에 호소했습니다(사37:14, 17).
그러기에 우리의 적의 잔인과 모욕은 우리의 임무의 길을 걷지 못하도록 방해하여 우리를 실망케 하기보다는 차라리 기도의 의욕을 불타오르게 하도록 해야 합니다.
2)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옵시며\"에서 단 하나의 기적이 이처럼 그들의 적을 성나게 만들어 주었다면 이들 거룩한 사람들이 날마다 수행될 새로운 기적을 보기 원한 사실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그처럼 크게 생각하고 그것에 비하여 그 밖의 다른 것들은 비교적 가볍게 생각했다는 것을 우리는 여기서 보게됩니다.
그들은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사실만을 의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적들이 별안간 나타나고 또는 지옥 전체가 맹렬히 분노를 토해낸다 하더라도 신도들은 언제나 기적을 바라게 되는 것입니다.
말에 있어서 대담성을 가지는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이 아무 장애도 받지 않고 전진하는 것을 보는 것은 악한 자들에게는 그 이상 견디기 어려운 일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무슨 일이 생기든 간에 전파되기를 원하시는 것은 생명의 교리라는 것을 그들이 알기에 그들은 다른 아무 것보다도 선교하는 일을 더 크게 중요시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을 확증해 주실 것을 우리가 기도하도록 격려를 받을 때 거기서 우리가 마땅히 가져야 할 하나님의 은택(恩澤)을 정확하게 인식한다는 것을 우리가 여기서 배웁니다. 사도들은 하나의 영웅적인 불굴의 정신을 보여 주었습니다.
이제 그들은 다시금 자기들이 대담해지도록 힘 주시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의 소리가 이미 각처에서 울려올지라도 그의 입이 열려지도록 신도들이 주께 기도해 줄 것을 청한 것입니다(엡6:19).
그러므로 주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자각하면 할수록 우리는 역시 더 큰 진보를 위해 기도하기를 배워야만 할 것입니다.
특별히 복음을 고백하는 자유는 하나님의 특별한 은사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이 우리에게서 계속되기 위하여 우리는 끊임없이 기도해야만 합니다.
7. 본문 31절은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기도를 들으셨을 뿐만 아니라 하늘로부터의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그것을 증거해 주셨다고 누가는 선언합니다.
그 장소가 진동한 사실은 그 자체가 그들에게 별로 유익을 준 것이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들과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를 알게 해주는 또 하나의 효과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임재의 증표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열매가 따라왔는데 거기서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충만함을 보았고 또 보다 큰 담대함이 주어집니다.
우리가 더욱 더 중요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이 이 둘째 부분입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는 그곳을 진동케 하심으로서 자신의 능력을 선포하셨는데 그것은 희귀하고 비범한 사건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자기들의 요구한 것을 획득했다는 사실을 그 사건이 보충해 주었는데 그 증거란 기도의 영구한 은혜의 한 증거요 하나의 실예로 우리 앞에 제시된 일입니다
행4:32-37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본문은 가장 정직하게 복음이 증거되고 받는 가운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통치가 어디까지 미쳤는가를 말씀하는 부분입니다.
이로서 모든 성도들이 주께서 주시는 은혜 가운데 가장 질서적이고 적당한 방식으로 유무상통이 이루어졌습니다.
1. 본문 32절은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입니다.
1) 여기에 세 가지 사실이 찬양됩니다.
첫째는 신도들이 모두 한 마음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재물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셋째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부활 선포에 솔직하고 활기에 넘쳤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첫째로 성령에 감동된 누가는 무리들이 \'한 마음이 되었다\' 고 말씀합니다.
이것은 몇몇 사람들이 같은 견해를 가졌었다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누가는 교회의 신도 수가 약 오천 명으로 증가하였다고 말씀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그러한 수를 염두에 둔 선언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누가로서는 그처럼 큰 무리 가운데서 일치가 이루어졌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사실상 신앙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인간들의 마음이 모두 동일한 일을 원하기도 하며 또 거부하기도 할 정도로 그렇게 결합되는 것입니다.
불화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동일한 그리스도의 영에 의하여 지배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생겨납니다.
누가가 \'마음\' 또는 \'뜻\'(영혼으로도 번역됨- 역자 주)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그 말이 의지를 표시하는 말이라는 사실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악한 자들은 가끔 함께 모여 나쁜 짓을 할 음모를 꾸미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그러기에 이 일치는 신도들 가운데 존재한 거룩하고 훌륭한 일이었습니다.
2)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의 사랑을 대외적인 실천에서 표현한 둘째 부분입니다.
(1) 우리는 조금 후에 이런 소유물의 공유 형태가 어떤 것인가를 보게 될 것입니다.
이제 누가의 기록에서 우리가 유의해야 할 것은 그 뿌리, 곧 심령의 내면적 일치가 먼저 있었고 그 다음에 결과는 따라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2) 확실히 우리도 그 순서를 지켜야만 합니다.
먼저 살아계신 하나님께 은총을 입은 자답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신실한 마음으로 피차 서로 사랑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그 사랑을 다른 사람들에게 적용해서 우리의 사랑이 표시돼야 합니다.
대외적인 자선이라고 하더라도 만일 그것이 마음에서부터 우러나온 것이 아니라면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 가치가 없습니다. 또 우리가 적절한 애정을 가졌다고 자만하지만 그러한 애정의 증거가 외적인 행위로 보여지지 않고는 무의미한 것이 되고 맙니다.
더구나 누가는 이야기가 나온 때에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즉 부자가 자기들의 재물을 자유롭게 분배함에 있어서 그들 자신의 실리를 생각하고 그 이상 더 나아간 것이 없었을 때 각자의 개인적 이익의 견지에서 그들은 한 마음이 되지 못했던 것입니다.
2. 본문 33절은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입니다.
1) 이 셋째 부분은 교리에 관계되고 여기에서 모든 것이 파급됩니다.
누가는 사도들이 가졌던 복음전파의 열정이 약화되기는커녕 차라리 새로운 능력으로 더욱 강화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누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에만 언급하는 것은 하나의 제유법(提喩法) 입니다.
이 부분은 전체 복음을 나타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첫째로 그것이 복음의 성취였기 때문에 부활만을 말한 것입니다.
둘째로 그들이 추후에 부활문제로 격렬한 논쟁을 벌렸기에 이 부활만을 말씀합니다.
셋째로 당시 지배권을 가지고 있었던 사두개파 사람들은 부활 문제에 대해서 매우 상심하였기 때문입니다.
2)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에서 그 부요한 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그처럼 아낌없이 도와줌으로서 낯모르는 사람들의 손에서도 호의를 받게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일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널리 퍼뜨리는 일에 크게 봉사하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 부요한 자들은 관대하였기에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다고 말씀합니다.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라는 말 속에 그 이유가 잘 설명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그 부자들의 성실과 자제, 그 부자들의 겸손과 인내, 그리고 그밖의 덕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서 그들에 대한 애정을 가지게 하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 재물의 공유라는 것이 어떤 형식이었는가를 좀더 자세히 설명합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빈궁을 구제해 주기 위해서 자기들의 토지와 가옥들을 팔았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4-37절은 \"(34)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35)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36)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인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번역 하면 권위자) 라 하니
(37)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입니다.
1) 본문 34절 후반에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라는 이 말씀은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실은 불확정(不確定)한 사람에 대한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자기들의 재산에는 손을 대지 않은 사람이 많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본문의 문맥에서 추론될 수 있습니다. 누가는 성령의 감동으로 즉시 바나바 이야기를 합니다. 그 사람은 어느 누구보다도 기억될 만한 가치가 있는 이입니다.
그러기에 누가로서는 분명한 목적으로 말씀하는 것입니다.
여러 곳에서 많은 제자들에 의하여 취해진 행동은 성경에서 사용된 일반적인 관용법에 따라서 그들이 행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누가는 신도들이 자기들의 소유한 바를 전부 팔았다는 뜻으로 말씀하지 아니하고 다만 빈궁한 자들의 요구되는 바에 따라 그만큼 팔았다는 뜻으로 말씀합니다
세부적으로 누가는 중요한 사실을 첨가합니다.
부자들은 자기들의 토지에서 연간 수입되는 고정수입으로 형제들의 가난을 구제한 것만이 아니요 토지 자체까지도 아끼지 않을 만큼 그 부자들은 관대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일은 그 부자들을 전적으로 아주 발가벗기지 않고도 이룰 수 있는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단지 그 부자들의 고정 수입을 얼마간 감소하는 것만으로 성취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누가를 통해서 주신 말씀에서 우리가 역시 읽어내는 일입니다. 그 부요한 자들이 그렇게 한 목적은 아무도 빈궁한 자가 없게 하기 위함이었다는 것입니다.
더구나 누가를 통해서 성령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지적합니다. 그 부요한 자들은 각자의 필요에 따라서 분배가 되도록 조심성 있게 행했다는 사실입니다.
재물은 평등하게 분배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만 합리적인 배당이 이루어졌습니다.
그것은 아무도 극단적인 빈궁 때문에 괴롬을 당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바나바가 특히 이름을 들어 칭찬을 받은 것은 그가 자신이 소유한 유일한 토지를 팔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바나바는 다른 사람들을 능가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모든 것을 자기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자가 없고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였다고 한 말씀이 무슨 뜻인지가 이 실예로서 우리에게 분명히 지적된 것입니다.
아무도 자기 소유를 다른 사람을 전혀 고려함이 없이 자기만을 즐겁게 하기 위해 사사롭게 소유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필요한 자의 요구를 따라 공동으로 소유하려는 준비가 그들에게 되어 있었습니다.
2) 그런데 이제 우리가 만일 이 말씀을 읽고서 감동을 받지 않는다면 철판보다도 더 단단한 마음을 가진 자들입니다.
당시에 신도들은 자기 소유 재산을 아낌없이 기증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노랭이 심정으로 보유하고 있을 뿐 아니요 잔인하게도 남의 것을 강탈하는 지경입니다.
그때에 부요한 자들은 자기들의 재산을 단순하게 그리고 성실하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게 해서든지 모든 것을 우리 자신을 위해 취득하려고 천 가지, 만 가지의 간교한 술책을 고안해냅니다.
그때에 부요한 자들은 사도들의 발 앞에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 봉헌된 물건을 신성 모독적인 대담성을 가지고 횡령하기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 시절에 그 부요했던 자들은 자기들의 소유를 팔았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도 사들이려는 강한 욕망이 최고로 지배합니다. 그 시절에 사랑이 각 사람의 개인 재산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위한 공동재산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오늘에는 몰인정한 사람이 너무 많아서 그들은 신자의 신분으로도 가난한 사람들이 함께 땅 위에 사는 것까지 시기하고 물이나 공기나 창공의 공동 이용까지 아까워하는 정도입니다.
3) 그래서 이러한 일들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고 책망하기 위하여 씌여진 말씀입니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이 사악의 일부분의 책임은 있습니다.
그러한 재산의 공동소유라는 것은 한 마음 한 뜻의 지휘 아래 신앙적인 일치가 없이는 성립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많은 사람들에게는 교만이나 배은망덕이 있고 나태나 탐심이나 위선이 있어서 잘 하려는 욕망이나 잘 하려는 능력이 모두 방해를 받고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갈6:9) 하신 훈계를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재세례파 사람들과 그밖의 광신자들이 이 구절을 근거로 해서 마치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는 재산을 사유할 권리가 없는 것처럼 얼마 전에 큰 소란을 피운 일에 대해서는 우리가 일찍이 2장 44절 주석에서 논박하였습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성령이 기이한 효험과 능력으로 나타나신 그 사람들의 활동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따라야 할 법을 규정한 것이 아닙니다.
또 자기 재산을 전부 팔지 않은 자는 그리스도인으로 간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도록 예외 없이 모든 사람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말씀한 것도 아닙니다
사도행전 5장 강해
행5:1-6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으로(1-11) 나타난 교훈은 몇 가지 있습니다.
(1) 그렇게 단순하게 하나님께 많이 바치던 초대 교회에도 죄악이 들어왔습니다.
사람들이 모인 단체에는 언제나 부패의 요소가 있게 마련입니다.
(2) 하나님께서 아나니아 부부가 바친 재산을 기뻐하시지 않은 유일한 이유는 그들의 외식 때문이었습니다. 악인의 제물은 하나님 앞에 가증합니다(잠15:8상반절).
그들의 속인 행동은 보통 종류의 것이 아니고 일종 거룩을 모독하는 죄악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연보의 액수를 속였기 때문입니다.
(3) 이 때에 베드로의 역사를 통하여 그 두 사람에게 내린 징계는 사도적 권위를 보여줍니다. 이와 같은 일은 일반 교회의 권징과 다릅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 신학상으로 사도적 권징이라고 합니다.
1. 본문 1절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 아내 삽비라로 더불어 소유를 팔아\"입니다
누가가 여기까지 우리가 알아듣도록 설명해 온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함께 모여진 단체가 사람들의 단체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천사들의 단체와 같았다는 사실입니다.
부자들이 가난한 자들을 원조하기 위하여 자발적으로 자기들의 돈 뿐 아니라 그들의 토지까지도 내던졌다는 것은 견줄 데 없는 덕행이었습니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실제로 누가를 통해서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단은 이 거룩한 교단에 잠입할 계략을 고안해냈습니다.
그것은 매우 고상한 미덕으로 감싸여져 있었습니다.
사단으로서는 자신을 교묘하게 돋보이도록 놀라운 위선의 방편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나 사단은 공공연한 싸움에서 승산이 별로 없을 때 그런 위선으로 하나님의 교회를 공격하는 방법을 삼는 것은 물론입니다.
그러나 이 점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의도하신 바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이 이야기에서는 첫째로 마음의 정절이 얼마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인가 또는 사악하고 위선적인 것을 얼마나 하나님께서 혐오하시는 것인가 입니다.
그리고 둘째로는 교회에서 순결하고 거룩한 정치 형태를 얼마나 크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가를 입증하시는가 입니다.
주요 점은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에게 과하신 형벌입니다.
그 당시에 그 중한 형벌이 모든 사람들을 두렵게 한 것처럼 그것은 또한 우리에게도 우리가 성도의 겉치레를 하면서도 하나님을 경멸하는 태도로 농락한다면 하나님은 그러한 불성실을 용납하실 수 없다는 훌륭한 증거가 됩니다.
우리가 모든 사정을 고려하면서 전체면의 진실을 알려고 한다면 누가는 거짓된 헌금으로 하나님과 교회를 기만하려고 한 단 한가지 죄 때문에 아나니아를 비난한 사실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기만의 배후에는 많은 악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첫째 하나님은 그의 비뚤어진 마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두려워하는 마음 없이 하나님을 멸시한 일입니다.
둘째 그는 하나님에게 바쳐지기로 스스로 표명한 것의 일부를 절취하였습니다.
이렇게 함으로서 신성을 모독하는 부정을 자행한 일입니다.
셋째 그는 그릇된 허영심과 야심의 사람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는 이를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스스로 사람들 앞에서 환심을 사고자 한 일입니다.
넷째 그는 불신앙의 사람입니다. 그에게 하나님을 믿는 마음이 있었다면 그러한 범행의 길에 발길을 내딛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그가 신앙적이고 거룩한 계획을 망쳐놓은 일입니다.
여섯째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실제적인 위선이 그 자체 안에 있는 큰 죄악이었습니다.
일곱째 거기에다 그의 계획적이고 뻔뻔스러운 거짓말이 첨가될 수 밖에 없습니다.
아나니아가 자기의 토지의 값의 절반을 바쳤다고 하더라도 그의 행위가 표면상으로는 훌륭하고 가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한 부자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기의 재산을 고르게 분배해 주는 일은 실상 큰 미덕입니다.
그러나 \"악인의 제사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신다\"는 말씀은 영원토록 진리입니다(잠15:8)
그리고 마음의 진실함이 동반되지 않는 곳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과부가 드린 동전 두 푼을 다른 사람들이 자기들의 거대한 재산에서 끄집어낸 큰 액수보다 더 많이 드린 것이라고 그리스도께서는 생각하시는 것입니다(눅21:2).
이것이 바로 아나니아에게서 매우 강렬한 징벌을 예로 만드신 이유입니다.
2. 본문 2절은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를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입니다.
야심이라는 것이 무슨 짓을 하는지 봅시다. 아나니아는 자기가 사람들 중에서 가장 훌륭한 사람 가운데 한 사람으로 간주되지 않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돈에 욕심이 있는 자이지만 그러면서도 사람들 가운데서 스스로 좋은 명망(名望)을 얻어내기 위하여 자기 재산의 일부분을 내놓았습니다.
동시에 그는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하고 속이는 일에 대해 또 하나님이 그 거짓으로 인해 자기를 형벌 하실 것이라는 일을 전혀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실제에 있어서 그는 하나님의 눈보다도 사도들의 발을 더 존경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옳은 일을 하려고 할 때 세인의 눈길에서 인정을 받으려고 애쓰는 일이 없도록 우리 모두가 각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진정 우리에게 효과적으로 충고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구제할 때 오른손의 일을 왼손 모르게 해야 온당하다는 것입니다(마6:3).
3. 본문 3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단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입니다.
베드로는 어떻게 아나니아의 사기행위를 알게 되었습니까?
의심 없이 그것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사도들이 어느 정도까지는 하나님을 대표하였다고 암시합니다.
또 사도들이 하나님의 대리자로 행동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제 만일에 하나님의 성령께서 죽어야 할 사람의 입을 이용하셔서 비록 사람이 거짓된 미덕의 외관 속에 숨어있다고 하더라도 그 위선자를 그처럼 즉석에서 타격을 가한다고 한다면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에 출두하게 될 때에 그 나팔의 날카로운 음향을 동반한 하나님 자신의 음성 앞에 어떻게 위선 된 인간들이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까?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베드로는 사단이 아나니아의 마음에 가득 찼다고 말함으로서 그 범죄의 가공할 만한 것이라는 사실을 지적해 줍니다.
사단의 독에 마음이 찔림을 받지 않은 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또 많은 유혹이 이들 개개인에게 몰래 스며와서 그들의 마음 속까지 파고들어 갑니다.
그러나 사단이 그 마음을 잡게 될 때에 마치 하나님은 거기서 추방되는 것처럼 되기 때문에 사단이 그 사람 전체를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이 그에게 머물만한 자리가 없을 정도로 그가 사단에게 넘겨졌다는 것은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의 표지입니다.
거짓말한 일에 뒤따르는 것은 두 가지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아나니아가 성령을 소유한 것 같은 거짓 겉모양을 지은 것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아나니아가 성령을 거스려 거짓말한 것이거나 어느 것일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헬라어에) 문자적으로는 \'성령을 속인 것\' 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의 (프수-데스다이)라는 말은 이중의 대격(對格)에 연결되는 것으로 여겨지기에 그리고 그것이 본문에 더 적합하므로 우리는 차라리 아나니아가 자기의 불신행위로 성령을 조롱하였기에 책망을 받은 것이라는 견해에 동조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 누가는 조금 후에 아나니아는 사람을 속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속인 것이라고 비난함으로서 이를 확인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위선이 우리를 지배하지 못하도록 대단히 자신을 수호하는 일에 유의해야 됩니다. 위선의 본질은 하나님을 기만하려는 악이요 속담에 있듯이 생 눈을 빼가려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수치스러운 조롱으로서만 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생겨난 것은 그 마음이 사단에게 빼앗겨 버렸기 때문이라고 베드로가 말한 것은 자못 지당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모든 식별력과 이성을 잃지 않고서야 감히 그처럼 하나님을 향하여 모욕적인 행위를 가질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베드로는 그것이 마치 하나의 괴물에 관한 일인 양 아나니아를 심문합니다.
그러한 종류의 무분별은 두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절은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임의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입니다.
1) 그에게는 아무런 필요 요건이 없었는데도 죄를 범하였다는 그 사실이 그의 죄과를 더욱 크게 만들어 줍니다.
그 범죄가 어떤 외부적인 영향으로 인하여 자극되어졌다는 적당한 구실이 전혀 없는 까닭에 어디까지나 자기 자신의 자유 의지에 의하여 악으로 달려가 이를테면 일부러 자기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유발하였다는 사실은 얼마나 나쁜 일입니까?
그러나 이 사실에서 우리는 거기에 누구 한 사람이라도 법으로 그 재산을 양도하도록 강제된 일은 없었다는 사실을 추측합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가 자기 돈을 남겨두거나 자기의 토지를 팔지 않고 소유하거나 할 자유와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문장의 나중 부분에서 팔린 밭에 관하여 말할 때 그것이 실제의 값을 대신하는 것으로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자신의 소유 재산이었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있었더라도 그는 불신앙의 사람으로 여겨지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이리하여 신자들은 자기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허용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자못 정신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2) 본 절 후반은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라는 말씀입니다.
이 문구는 다르게 구성되었다 할지라도 우리는 그것이 앞의 글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의심하지 않습니다.
위선자란 많은 덮개로 가려져서 자신을 감추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자기들은 하나님과 아무 관계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나니아는 교회를 속였기에 베드로는 참으로 분명하게 그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두 세 사람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그도 그 가운데 계셔서 주재하신다\"(마18:20)는 사실을 아나니아로서는 고려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그 모임에서는 마치 자기가 눈으로 하나님을 보고 있는 것처럼 행동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에서 지배권을 잡기 원하시기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 전적으로 어떤 존경을 바친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말씀으로서 행사하시는 그 통치권을 우리는 철저하게 존경해야 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분명히 인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직책이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진 사명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기들의 사사로운 일은 행동하지 않았습니다.
한편 우리는 큰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성령을 속이는 자는 하나님을 속이는 것입니다. 그러한 말의 표현으로 성령의 신성이 확실히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바울도 동일하신 하나님의 뜻으로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므로 너희는 하나님의 성전이다\"(고전3:16)고 말씀합니다.
5. 본문 5-6절은 \"(5)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 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6)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입니다.
아나니아의 죽음은 참으로 말씀의 능력이 어떠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증해 줍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은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고후2:16)라고 말씀함으로서 이 말씀의 능력을 장엄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도는 사실상 혼의 영적 죽음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아나니아의 몸에서는 인간의 눈에는 숨겨져 있는 그 형벌의 가견적인 상징이 있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는 칼로나 세력으로나 어떤 사람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아나니아는 다만 하나의 음성을 들음으로서 생명을 빼앗긴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이 이야기를 들을 때 복음을 박해하는 일의 두려움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도 동일한 운명을 경험할 것에 대비하여 재빨리 스스로 겸손해져야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입술의 기운으로 악인을 죽일 것이다\"(사11:4)라고 선언된 사항은 악인의 우두머리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요 또한 각자 개인 개인에게도 해당되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의 고유의 본질은 구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이 제공해 주는 구원을 거절하는 자들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는 것은 참으로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누구에게라도 사도가 육체적 형벌을 준 것이 부조리하게 여겨진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첫째로 그것은 우리의 비상(非常)한 일이었습니다.
둘째로 그것은 고린도전서 12장 10절에서 밝혀진 대로 성령의 여러 은사 가운데 하나였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나중에 보게 될 바와 같이 이것이 바로 마술사 엘루마(Elymas) 가 바울에 의하여 소경이 된 까닭입니다(행13:11).
베드로는 성령께서 자기에게 주신 화살을 적당한 때에 쏘았습니다.
그것은 베드로 사도의 직책에 벗어난 일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이들이 그 형벌은 너무 잔혹하다는 의견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들이 아나니아의 죄과를 하나님의 저울로 달지 아니하고 자기 자신들의 것으로 달기 때문입니다.
또 따라서 우리가 그처럼 많은 죄악으로 가득 찬 것으로 이미 나타난 중대한 범죄를 아주 하찮은 허물 쯤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다른 이들은 그것은 신빙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날마다 그들은 대단히 많은 위선자들이 아나니아 못지 않게 하나님을 조롱해도 처벌이 면제되고 있다는 사실을 보기 때문입니다.
실상 그들이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할 만합니다. 그들 자신이 지독한 하나님 모독자들이지만 자기들의 불경 때문에 형벌의 고통을 받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처음에 그의 교회 위에 눈에 보이는 은혜를 부어주셔서 그로 인하여 우리가 그의 성령의 신비한 능력으로서 그가 우리와 함께 계실 것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습니다. 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신앙 경험에 의하여 내적으로 실감한 바를 외적인 표적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공개적으로 보여주셨던 것처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과 교회를 조롱하는 모든 위선자들에게 얼마나 무서운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가를 두 사람의 눈에 보이는 형벌에 의하여 명시하신 것입니다.
2) 본문 5절 후반에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한 사람의 형벌로 다른 사람들을 두려웁게 위협하는 일이 하나님의 의도였습니다.
그로서 그들이 의식적으로 모든 허위를 단념하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누가가 그들이 두려워한 일에 대해서 말한 바는 우리에게도 또한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의 관계에서 성실할 것을 배우게 하기 위하여 모든 세대에 대해서 일반적인 경고를 주시기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이 가련한 사람의 형벌은 그 후에 신도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재산을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에게 바치는 일을 더욱 풍성하도록 장려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선행위는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한 일이며 그 일을 더럽히는 일은 그처럼 엄하게 형벌을 받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그들은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행5:7-11 세 시간쯤 지나
본문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범죄와 그 결과에 대한 말씀의 계속입니다.
1. 본문 7절은 \"세 시간쯤 지나 그 아내가 그 생긴 일을 알지 못하고 들어오니\"입니다
하나님께서 삽비라에게 과하신 형벌에 대해서는 그것이 본보기를 위한 보다 큰 효력을 더해준 것 이외에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 더구나 그들 각자의 배신적인 의향과 그 완강한 악의를 따로따로 교회 전체가 보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어떠한 섭리에 의하여 발생한 것입니다. 그들은 똑같이 책임이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그들에 관한 정보를 동시에 접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각자가 자기 자신의 불신앙을 매우 분명히 나타냈다고 하는 것이 교회의 신도를 위해서 더욱 적절하고 유효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그런 식으로 가끔 생겨나기는 한다고 하더라도 자기 남편의 목전에 있는 일이 삽비라의 위장의 원인이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그녀의 범죄는 부끄러운 것으로 생각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녀도 외부에서 주어진 어떤 압력이 그녀에게 가해짐이 없이 자신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행동하였습니다. 그러기에 그녀는 남편보다 나을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또 그녀는 사도의 심문에서 자기들의 사기행위가 폭로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악의의 거짓말을 하는데 있어서 동일한 수준에 있었던 것입니다.
2. 본문 8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하니 가로되 예 이뿐이로라\" 입니다.
하나님은 고질적인 자들과 용서를 받을 수 없는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복수하는 일이 되지 않기 위하여 돌발적인 충동으로 형벌을 주지 아니하시고 먼저 적당한 조사를 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그것은 삽비라가 그 사건이 사람의 눈에 뜨이지 않은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베드로의 그런 심문은 마치 자기가 하나님의 심판의 자리 앞에 소환된 것과 같이 간담이 서늘해지는 충격을 받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녀에게 제 정신에 돌아올 만한 시간이 주어졌습니다.
실상 그것은 회개할 수 있는 조용한 초대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생각 없이 행동함으로서 자신이 치료될 수 없는 인간이며 또 그것은 자신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에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것을 배우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죄인들을 정상한 길로 데려오는 데는 큰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성령은 이러한 절제를 가지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대한 고집스럽고 완강한 모욕이 그 범죄에 첨가될 때에는 그것은 이미 형벌 해야 할 시기가 무르익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과도한 엄격을 좋아하지 않는 자들은 자기 자신들이 지나치게 거만하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것은 차라리 어떻게 우리가 장래에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인가를 우리에게 반영시켜 주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만일 형벌 받는 일이 없이 하나님을 기만하기를 원하는 것이라면 그것은 우리가 너무도 지나치게 그분의 거룩하신 존엄을 무시하는 일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우리가 위에서 서술한 그 모든 상황은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하나의 죽음에 해당하지 만은 않다는 것을 충분하게 증명해 줍니다.
첫째로 위선이란 그 자체가 하나님을 지극히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을 속이려는 그들의 의도는 최고의 경멸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소속되어 있는 그 모임을 지배하시는 그리스도를 존경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불신앙에 파렴치함이 첨가된 것입니다.
더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선량한 모습을 과시해 보여주려고 했던 그 사람들 앞에서 수치와 불명예를 면해 보려는 마음만을 가지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명백한 악을 부인한 일이 그들에게 아무 의미도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를테면 자기들의 죄상에 대한 완강한 부정이 모든 것의 극치점입니다.
그런데 무수한 위선자들이 날마다 이 두 사람 못지 않게 하나님과 교회를 속입니다.
그러면서도 죽음의 형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이 왜 부조리로 여겨지지 않는가 하는 것은 이미 설명한 바입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의 유일한 심판자이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시기와 방법에 의하여 그분 자신의 결정대로 각 개인을 형벌 하시는 일은 그분에게 달려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해 형벌의 특정한 방법을 규정할 권리를 가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들 두 사람의 신체적 형벌에는 아직도 숨겨져 있는 영적 심판의 중대성이 거울 속에 비치는 것처럼 우리 앞에 보여집니다.
우리가 만일 영원한 불 속에 던져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사람들의 눈앞에서 넘어져 죽었다는 것이 재앙 중의 최악의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고린도전서 10장 5절을 봅시다.
3. 본문 9-10절은 \"(9) 베드로가 가로되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 한 대 (10) 곧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 남편 곁에 장사하니\" 입니다.
사도는 자기가 조금 전에 한 말 즉 그들이 불신앙적으로 또는 경멸하는 태도로 하나님을 조롱한 일을 분명하게 지적하기 위하여 다른 말로 바꾸어 말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마치 하나님의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을 속속들이 아는 분이 아닌 것처럼 조심 없이 자기들의 사기행위를 고안해 냈기 때문에 사도는 그들이 성령을 시험한 것이라고 말씀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기들이 범죄에서 서로 공범자가 되었을 때 그들은 하나님이 마치 아무것도 모르고 가리워 지신 것처럼 서로 자기들의 계획을 자기들만이 알고 있는 것같이 생각한 것은 너무도 경솔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위가 하나님에게서 제거되거나 그분의 전지(全知)가 무시될 때에 하나님은 시험을 받으시는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로서는 성령을 말할 때에 그분은 사도들을 통하여 교회를 지배하시는 분이신 실제 사실을 의미합니다.
\"성령이 오시면 그가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요16:8)라고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실 때에 그리스도의 마음에 뜻하시고 생각하신 지배권은 성령 바로 그분이 교회의 선교를 통하여 행사하신다는 바로 그것 뿐 이라고 여기셨기 때문입니다.
4. 본문 11절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입니다.
한사람의 형벌은 모든 사람들에 대한 경종이었다고 사도는 다시 반복해서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도께서는 여기서 분명히 두 종류의 두려움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신도들은 하나님의 심판에 의한 경고를 받음으로서 그 이상의 이익을 얻을 것이 없을 정도로 그처럼 완전하게 하나님을 두려워한 적이 일찍이 없었기에 사도께서는 온 교회가 두려워했다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오래 전에 악한 자들에게 가하셨던 그 모든 형벌에 대한 이야기를 우리가 읽고 또 오늘도 날마다 실제로 악인들에게 가해지는 형벌을 볼 때에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두려움으로 인하여 범죄의 유혹과 방종에서 돌아서도록 자주 경고하시는 것입니다. 육체란 그처럼 계속적으로 점검을 받아야만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굴레만으로는 그 목적을 이루기에 불충분하기 때문입니다.
외부의 사람들에게는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진심으로 하나님을 경배하기까지는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고는 안되도록 강요한 것입니다.
행5:12-16 사도들의 손으로
초대교회의 권위는 12-16절에 나타나 있습니다. 곧 신자들의 집회열, 교회가 민중의 칭송을 받음, 신자들의 수효가 증가됨, 병 고치는 권능이 나타남과 같은 것입니다.
1. 본문 12절은 \"사도들의 손으로 민간에 표적과 기사가 많이 되매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입니다.
1) 그는 복음과 보다 일치하는 다른 종류의 기적 이야기로 돌아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자기의 능력만이 아니라 그의 자애까지 그것으로 입증하십니다.
그래서 자신의 은혜의 즐거움에 의해 사람들을 자신에게로 이끄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정죄하러 오신 것이 아니요 구원하러 오셨기 때문입니다(요3:17).
그러므로 병자들이 고침을 받고 또 다른 사람들이 마귀에게서 놓임을 받을 때에 그들의 육체에 주어진 그러한 복은 그리스도의 영적 은혜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런 표현이 타당하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본래적인 기능에서 유래된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수행된 그 무서운 기적은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누가는 그러한 기적들로 인하여 신도들의 수가 증가되었다고 말합니다.
기적들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마음의 준비를 시켜주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사람들에게는 확신을 줌으로서 신앙에 대한 시녀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이란 결코 말씀에서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이 일로서 입증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병자들이 사방에서 고침을 받으려고 거리의 광장으로 데려와졌다고 보도함으로서 많은 기적이 행해졌다는 사실을 지적해 줍니다.
하나님은 특히 그 초기에서 그의 아들의 복음을 이로서 실증하려고 하신 때문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지금까지 그처럼 자주 약속되어온 만물의 갱신이 이제 도래하였다는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명확하게 해 주시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서 그들은 자기들 자신의 고백을 따라 자기들의 전체 희망을 걸어왔던 것입니다.
\'요\'(couches 15절)라고 번역된 말은 옛 사람들이 그 위에서 낮잠을 즐기는 버릇이 있던 작은 침대를 가리킨 말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것은 가지고 다니기가 용이했으므로 사람들은 병자를 그 위에 눕혔습니다.
2) 본 절 후반은 \"믿는 사람이 다 마음을 같이 하여 솔로몬 행각에 모이고\" 입니다.
이 말은 그들이 어떤 특정한 시간에 함께 모이는 습관이 있었다는 것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일이나 가르치는 일을 위해서만이 아니라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사람들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였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각각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특정한 장소에서 늘 모임을 가졌던 것입니다.
그것은 실상 교회의 단체가 다른 방식으로는 존속할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각자가 자기 나름대로 가르치기를 원하고 각각 따로따로 기도하기를 원하였다면 그래서 공동집회라는 것이 없었다면 교회가 아무리 잘 조직되었다고 하더라도 결국에는 쇠약해져서 얼마 안되어 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에 감동된 누가로서는 그들이 다 한 마음이었다고 말씀합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모두 그러한 결정을 존중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또 누구 한 사람도 그 공중집회를 경시하여 자기 집에 머물러 있으려고 할 만큼 다루기 힘든 개인은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방식으로 그들은 예의범절만이 아니라 결단력의 시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장소가 사람들이 잘 모이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면서 위험을 무릅쓰고 모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이러한 위험을 무릅쓴 이의없는 일치는 더욱 크게 찬양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2. 본문 13-14절은 \"(13) 그 나머지는 감히 그들과 상종하는 사람이 없으나 백성이 칭 송하더라
(14) 믿고 주께로 나오는 자가 더 많으니 남녀의 큰 무리더라\" 입니다.
그 기적의 둘째 결과는 다음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즉 믿지 않는 이들은 그 놀라운 하나님의 능력에 너무도 충격을 받아서 감히 사도들을 얕잡아보지 못하였다는 사실입니다.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그들은 교회를 높일 수 밖에 없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기적으로 인하여 위험을 받았기에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을 회피하려고 한 것은 우습게 보일 수도 있었습니다.
거기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은 기적을 통해 우리를 자기에게 나아오도록 초청하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죄책감 때문에 접근이 방해를 받은 것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기적 안에 빛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뜨거운 마음으로 끌어안는 데까지 나아오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모두 나빠진 양심으로 뒤로 물러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서 어느 정도의 두려움을 뽑아내 주시기 때문에 이 경우에 약간의 효과가 있기는 합니다.
누가는 비록 그것을 기적 때문만으로는 생각하지 않았고 차라리 교회의 존엄을 증대시켜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포함시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것들 가운데는 하나님의 존엄성이 빛나도록 모든 것들이 잘 정돈되어 있습니다.
천사가 사람과 다르듯이 신도들은 다른 사람들과는 다릅니다.
신성한 규율과 진지한 신앙수련에는 악한 자들의 의사를 거스려서까지라도 그들을 제한하는 비밀한 존엄이 가로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실상 우리는 제 맘대로요 그래서 우리와 함께 교회도 우리의 세속적인 방종과 나쁜 생활로 인하여 멸시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와 그의 아내의 형벌이 불신앙의 인간들에게 겁을 주어 하나님께서 그처럼 엄격한 형벌을 주신 그 사람들과 무모하게도 짝패가 되려고 덤벼드는 일을 억제하게 하는 상당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또한 누가는 여기서 극악한 종류의 사람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우유부단한 사람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가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확실히 당시에 예루살렘에는 기적이라든지 혹은 성도들의 천사 같은 고결함이라든지에 아무런 접촉도 가져보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어떤 씨가 그 안에 숨겨져 있었던 온건한 사람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그와 비슷한 일을 봅니다. 즉 이 세상의 허영에 사로잡혀 그리스도의 멍에를 메는 일에 방해를 받는 사람들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가르침 가운데서 어떤 신성한 것을 간파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가볍게 다루는 일을 꺼려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동시에 사단은 어떻게 치명적인 쇠사슬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영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모두 제지하는가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의 관심사에 대하여 그것을 추구하기를 두려워할 뿐 아니라 오히려 그들에게 제시된 구원을 위한 치료법을 고의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거룩하고 유익한 그런 것들을 보고 동의하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훨씬 더 나쁜 상태에 밀려가기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들의 불결 가운데 여전히 누워있거나 하는 것입니다
3. 본문 15-16절은 \"(15) 심지어 병든 사람을 메고 거리에 나가 침대와 요 위에 뉘우고 베드로가 지날 때에 혹 그 그림자라도 뉘게 덮일까 바라고
(16) 예루살렘 근읍 허다한 사람들도 모여 병든 사람과 더러운 귀신에게 괴로움 받는 사람을 데리고 와서 다 나음을 얻으니라\" 입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순교자의 무덤에서 행해진다고 자기들이 말하고 있는 그 거짓된 기적을 지지하고 찬양할 뿐 아니라 순교자들의 유골을 우리에게 자랑해 보이기 위하여 이 대목을 잘못되게 이용함으로서 기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베드로의 무덤이나 옷이나 혹은 그의 뼈를 만지는 일까지라도 어찌하여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에 덮이는 일보다 치료의 능력이 없다고 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라고 말씀합니다. 거기 대해서 우리는 대답합니다.
순수한 신앙을 알지 못하는 무지한 사람들에 의하여 행해졌다고 누가가 말하고 있는 것들이 모두 사건의 진상을 말해주는 것이라고 즉각적으로 단언해서는 안됩니다.
그렇지만 보다 확실한 반증이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바로 복음의 사신들이었기에 그러한 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복음의 신앙을 촉진함에 있어서 효과를 나타내는 한도 안에서 그 은사를 사용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힘을 사도들의 입에 두셨을 뿐 아니라 그들의 그림자에도 두셨습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수다스럽게 지껄이고 있는 기적들 가운데는 그와 비슷한 아무것도 없다기 보다는 차라리 정반대 쪽인 것입니다.
그들의 기적의 목적은 세상으로 하여금 성자들에게 보호를 구하게 하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서 멀어지게 하려는데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행5:17-26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누가는 이미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들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즉 교회에는 신도들의 수효가 크게 증가했다는 사실, 각종의 은사가 훌륭하게 갖추어졌다는 사실, 기적에도 탁월해졌다는 사실 등입니다.
한 마디로 그리스도의 통치가 거기에 모든 면으로 번창하였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이제 다시 이야기하기 시작합니다. 즉 그러한 일들 때문에 악한 자들의 분노가 다시 불붙어서 그 잔인성은 전보다 더욱 격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단이 어떻게 그들을 구사하여 맹목적인 격노를 일으켰는가
특히 하나님의 분명한 능력이 그들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고 그래서 그들이 더욱 더 뻔뻔스러워지고 격렬하게 덤벼들어 마치 자기들이 하는 자체를 뒤집어 엎을 듯이 날뛰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대단한 무분별은 일종의 하나님의 두려운 형벌이기에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들을 드리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도록 모두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그들도 역시 단지 자기들이 대항하여 밀어붙이려고 하는 바로 그 하나님의 손길에 의하여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게 되도록 현기증으로 휩쓸릴 것입니다.
한편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영적 은혜로 채워주시기를 원하시는데도 불구하고 악한 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괴롭혀지는 일도 허용하신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싸울 준비를 하고 있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오늘의 상태가 그들의 것과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을 증거 할 만한 하나님의 은사를 자인하는 일은 악한 자들의 열광과 완강으로 인하여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용기를 주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적지 않은 위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1. 본문 17-18절은 \"(17)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즉 사두개인의 당파가 다 마 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18) 사도들을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더니\" 입니다.
1) 본문 17절 초두는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 입니다.
여기 \"함께 있는 사람\"은 대제사장과 더욱 가까이 관련되어 있던 사람들을 의미합니다.
대제사장은 그들의 충고를 따르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또 전체 성직자 계급 가운데서 대제사장이 선발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재판의 목적 때문이 아니요 그 파당에 대한 그들의 사랑과 열광으로 뽑힌 자들입니다.
당시에 그들은 자체 안에서 원수들처럼 부끄러움도 없이 싸우고 있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당시에 모든 것을 지배하는 권력을 손에 쥐고 있는 사람들이 사두개파 사람들이었다고 다시 반복해서 말해 줍니다.
그러한 하나의 분파가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기에 당시에 교회의 전체 정치가 무서운 황폐로 인하여 일그러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게 하려 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의 교회를 회당으로부터 분리시키신 이후로 그 회당을 그처럼 극단적인 치욕 속에 잠겨져 있도록 분명히 허용하셨습니다. 그것은 복음을 업신여기고 또 그처럼 쓰레기 가운데 머물러 있는 자들이 핑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더욱이 또 장차 올 생명의 일은 조금도 염려하지 아니하는 그들 욕심장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그들이 탈취한 그 지배권에 대한 노출된 야심과 거기 매달리려는 욕망 이외에 무엇이 있을 것입니까?
2) 본 절 17절 후반은 \"마음에 시기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입니다.
우리는 이 헬라어 (젤-루- ; 시기 - 특히 그 말이 다른 방식으로 흔하게 사용되기에)를 \'경쟁\'으로 번역하는 대신에 차라리 원어대로 두는 것을 좋게 생각합니다.
누가는 위선자들이 자기네들의 미신을 방위하기 위하여 정신이 없고 가슴을 태운 그 괴팍하고 폭력적인 세력에 대해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 인하여 인간의 열심이라는 것이 이성과 신중성으로 조종되지 않을 때에 또 하나님의 영으로 지도를 받지 않게 될 때에 하나님 보시기에 무슨 가치가 있는 것이며 무슨 칭찬을 받을 만한 것인가가 분명해집니다.
사람들이 자기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해서 그들보다 신앙적이라고 받아들여지기를 바라면서 무고한 사람의 피를 흘리려는 잔인한 정열을 가지고 악마적인 광포로 흥분하고 있는 자들을 우리가 오늘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는 바울 사도를 통해서 말씀한 것같이 많은 유대인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무분별한 열심이 문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유의해야 합니다.
다만 우리는 차라리 열렬하고 난폭한 공세로 이해합니다.
악한 자들이 고의적으로 참된 신앙을 박해하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들의 잘못을 아무리 많이 자각한다고 하더라도 그들은 신기한 일은 반대하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잘못된 종류의 열심을 가지고 스스로를 속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도 거의 모든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은 역시 자기들의 배를 위한 열광자이면서도 단순히 그 열심에 근거해서 자만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주장하는 것이 진실하다고 허용하더라도 그 무분별이 그들을 몰아서 마치 그것이 자기들의 비위에 거슬리는 것은 무엇이나 복수를 감행하도록 놓아주는 것이 최고의 미덕인 것처럼 여기는 그 불타는 잔인성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는가?
그러나 겸손한 행동을 취하려는 순간에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이 아무것도 없게 하기 위하여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를 구별하는 일이야말로 해야 할 첫째의 일입니다.
2. 본문 19절은 \"주의 사자가 밤에 옥문을 열고 끌어내어 가로되\" 입니다.
주께서는 사도들이 적의 손아귀로부터 영원히 구원받기를 원하셨기에 그들을 감옥에서 데려 내오신 것이 아닙니다. 얼마 후에 주께서는 그들이 다시 감옥으로 끌려가는 것을 허용하셨고 또 채찍으로 맞게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적으로 인하여 주께서는 그들이 주의 복음에 대한 신앙을 수호하게 하기 위하여 자신의 수중에 두시고 보호하신다는 것을 논증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교회가 그 사건을 통하여 생기 있는 용기를 발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악한 자들에게는 아무런 핑계거리도 남겨주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죽음으로부터 건져주실 것을 바라지도 말고 기대하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다만 우리들의 생명이 그분의 손에 의해 그럴 필요가 있으신 대로 보호를 받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이 적절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 일의 목적을 위하여 주께서 천사를 사용하신 일에 관해서는 그분의 관용적인 관례대로 하신 것입니다.
성경의 여러 곳을 통하여 천사는 주의 은혜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자라는 것을 증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공허한 이론이 아닌 것입니다.
그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시고 계신다는 것뿐이 아니요 또한 하늘의 영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하여 유의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우리의 연약함에 대한 유리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모든 피조물 가운데 가장 고귀한 피조물이 우리의 안전을 돌보아 주도록 정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의 보통 언약이 아닙니다. 더구나 그 천사는 밤에 감옥 문을 열었습니다.
그 천사는 그 기적이 행해진 뒤에 사람들이 그 사실을 알도록 하시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불신자들이 기적이 행해지는 것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3. 본문 20절은 \"가서 성전에 서서 이 생명의 말씀을 다 백성에게 말하라 하매\"입니다
1) 그들을 석방시킨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불굴의 노력을 계속하게 하려 함이요 또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 용감하게 그들의 적에게 도전하는 일을 계속하게 하려는 데 있습니다. 그들이 달려갈 길을 다 가고 하나님의 손이 활동을 하지 않게 되었을 때 그들은 마침내 죽음으로 끌려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특정한 시기에 주께서는 그들을 위하여 옥문을 여시고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의 임무를 자유롭게 수행하도록 하셨습니다.
그 사실은 크게 유의할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박해로부터 모면하게 되면 자기들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의 의무를 지고 있지 않은 양 그 후로는 자기들의 입을 다물고 마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을 우리가 보기 때문입니다.
그런가 하면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부인함으로서 스스로 도망칠 길을 찾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백성을 자유케 해 주시는데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시작한 진로를 포기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요 차라리 장래를 향하여 더욱 큰 열정을 보이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실상 사도들은 반대 이유를 들 수 있었을 것입니다.
즉 우리가 위험이 따르지 않고는 한 마디 말도 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에 잠시동안 침묵을 지키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단 한번의 모임 때문에 이렇게 잡혀서 갇혀 있는 것입니다.
그들이 만일 우리가 고집스럽게 나오는 것을 안다면 이 후에 적의 격노가 얼마나 더 크게 불타오를 것인가? 등등 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어야 할 것을(롬14:8) 알고 있었기에 그들은 주의 명령을 거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과하신 의무를 관심하여야만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단순한 계명으로 만족하고 일의 결과를 그분에게 맡기면서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용기를 약화시키는 많은 일들을 가끔 만나게 될 것입니다.
2) 본 절 중간에 \"이 생명의 말씀을\"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복음이 사람들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생명부여의 교리로 훌륭하게 설명됩니다.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우리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나 있으며\"가 그런 뜻입니다(롬1:17)
또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죽음의 희생으로와 부활의 양으로 또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양자로 하시는 보증으로 그 복음에서 자신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사도들에게 분명히 이야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 사도들은 자기들이 영원한 구원의 사자라는 사실을 들었을 때 복음 때문에 발생되는 모든 싸움에 더욱 더 대담하게 참여하게 된 것입니다.
지시 형용사인 \'이\' 라는 글자가 모든 것을 보다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 첨가되었습니다
마치 천사가 자기 손가락으로 그 생명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그 말씀을 우리의 입에 또는 우리의 마음에 소유할 때에 우리가 그것을 찾으려고 분명히 멀리 가야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과도 같습니다.
혹시 어떤 이들은 \'이 말씀\' 이라고 하는 대신에 환치법이 사용된 것처럼 \'이 생명의 말씀\' 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고 하는 이가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러한 견해를 거부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후자의 경우가 더 좋게 보입니다.
거기에는 그리스도의 새로운 계시가 있으며 그 안에는 생명이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4. 본문 21-25절은 \"(21) 저희가 듣고 새벽에 성전에 들어가서 가르치더니 대제사장과 그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와서 공회와 이스라엘 족속의 원로들을 다 모으고 사람을 옥에 보내어 사도들을 잡아 오라 하니
(22) 관속들이 가서 옥에서 사도들을 보지 못하고 돌아와 말하여
(23) 가로되 우리가 보니 옥은 든든하게 잠기고 지킨 사람들이 문에 섰으되 문을 열과 본즉 그 안에는 한 사람도 없더이다 하니
(24) 성전 맡은 자와 제사장들이 이 말을 듣고 의혹하여 이 일이 어찌될까 하더니
(25) 사람이 와서 고하되 보소서 옥에 가두었던 사람들이 성전에 서서 백성을 가르치더 이다 하니\" 입니다.
이제 대제사장은 전체 의회를 소집합니다.
그것은 만일에 대제사장인 그가 자기 일파만의 명예에만 사로잡혀 다른 파를 무시한다면 자기가 그러한 책임을 다 감당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두려움이 대제사장으로 하여금 전체 의회를 소집하게 한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용의주도하게 또는 정확하게 법의 형식을 유지하였습니다.
감독권을 손에 쥐고 있었던 장로들이 소집되었는데 그것은 의회의 결정과 권위에 의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렇게 시작된 회의에서 누가 온건한 결말을 희망하지 않았을 것인가?
그런데 그들은 분명히 폭력이나 횡포로 진리를 탄압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할 수 있는 대로 구실을 만들어냈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성전에서 가르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그들은 사도들이 인간적인 어떤 기만행위로 감옥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기적에 의해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자기들의 목적을 수행하려는 뜻을 멈추지 않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만 그들의 사악한 행동이나 하나님을 경멸하는 것만이 아니요 역시 무서운 광기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선자들은 아무리 공정한 것 같은 외관을 그럴싸하게 꾸밀지라도 결국에 가서는 자기들 자신의 악함을 드러내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그들은 모든 정황으로 보아 감옥 문이 하나님의 역사 하심으로 열려졌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날뛰기를 주저하지 않은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오늘 우리에게도 들어 맞습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합법적인 교회의회는 교회를 대표하기에 반드시 복종해야 한다는 자기들의 금언을 얼마나 자랑스럽게 주장하고 있는지를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더구나 그들이 합법적이라고 부르는 것, 또는 합법적으로 받아들여지기를 원하고 있는 것이란 모든 외적인 형식이 완전하게 되어 있는 그러한 모든 의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나 이제 누가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의회란 우리가 잘 알고 있기는 하지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멸절시키기 위하여 모인 그런 모임이었던 것입니다.
당시에 제사장들이 제 아무리 부정수단에 의하여 혹은 운동을 해서 은밀히 직책에 나아가서 다른 나쁜 계략이나 뇌물수여 또는 피차의 살인행위 등 폭력수단에 의해서까지 자기들의 직권을 행사한다 해도 그러면서도 제사장직의 직책이란 그리스도께서 아직 나타나시기 전이기 때문에 여전히 계속 존재했던 것입니다.
장로들의 회의에 교회가 대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 회의에서 하나님의 진리는 추구되지 않았습니다. 그 회의의 전체의 외양은 단순한 하나의 가면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이 방패의 그늘 아래서 자기들의 추행을 은폐하려고 시도한다 해도 헛수고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이 아니면 교회의 지배권을 가진 자들이 회의를 소집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악마가 자신을\'빛의 천사\'(고후11:14)로 위장하는 것이 그 악마의 전형적인 술책이기에 우리가 교회의 칭호 밑에 악마가 바랄 수 있는 가장 적당한 숨을 곳을 그에게 제공해 주는 일이 될 것입니다.
5. 본문 26절은 \"성전 맡은 자가 관속들과 같이 가서 저희를 잡아 왔으나 강제로 못함은 백성들이 돌로 칠까 두려워함이러라\" 입니다.
우리가 앞서 성전 맡은 자에 대한 이야기를 좀 말해왔습니다(4:1에서).
유대인들이 성전 맡은 자를 자기들 마음에 드는 대로 임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소속된 지방의 총독이 결정한 것으로 우리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강제로 잡혀온 것이 아니고 연행되어 왔다고 누가는 말씀합니다.
즉 민중의 폭동이 발생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들을 폭력으로 끌어온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존경하지도 않으면서 사람들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사도들의 행동의 분별력이 그들이 취한 사실에서 드러납니다.
즉 그들은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자신들이 소란의 원인이 되지 않기 위하여 관속들이 끌어가는 대로 자신들을 맡겨 두었습니다.
행5:27-28 저희를 끌어다가
사도들은 공의회로부터 복음전파 금지명령을 압력으로 받습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 이름\" 대제사장은 예수란 이름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부르지 않고 그저 \"이 이름\" 이라고만 합니다.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라고 책잡는 말은
(1) 사도적 전도의 이유를 몰이해한 무지(無知)입니다.
사도적 전도는 정죄하려는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을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
(2) 대제사장은 스스로 예수 죽이는데 주동적 역할을 해놓고 이제 와서는 그 일에 전연 관계없는 듯이 뻔뻔스럽게도 발뺌을 합니다. 이 태도가 역시 저의 철면피입니다.
본문 27-28절은 \"(27)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28)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 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입니다.
대제사장은 사도들에게 두 가지 죄를 씌웠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의회의 결정을 따르지 않았기에 그 당시 대제사장으로서는 그들에게 관명(官命)항거의 죄를 물은 것입니다.
그리고 대제사장의 선언의 둘째 부분에서는 대제사장의 악한 의도를 보여줍니다.
적어도 하나의 법정에서 대제사장이 공적 사항을 다루기 보다는 차라리 자기 자신의 개인적인 이해(利害)속에서 행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그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죽음의 오명을 제사장들과 율법학자들에게 전가하려고 하고 있다고 비난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을 괴롭혀 주는 것은 사악한 살해의 복수와 형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때에 제사장으로서는 그들의 가르침을 핑계삼아서 이야기를 시작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이 내린 결론을 보면 그가 그처럼 염려하고 있는 것이 그들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가 찾아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편 대제사장은 사도들을 폭동 교사죄(敎唆罪)로 비난합니다.
그리스도는 정당하게 사형을 받은 것이라는 점을 자명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그 고소의 주요점은 그들이 제사장들의 명령에 불복종하였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에게 복종하지 않는 것은 사형에 해당하는 죄였습니다.
그런데 전체의 명령을 일축하는 일은 얼마나 더 큰 죄일 것인가?
그러나 다른 면으로 볼 때 이 대제사장은 하나님과 교회에 대한 자기의 걸머진 책임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대제사장인 그는 자기의 권력을 마치 그것이 모든 법의 구속을 받지 않은 권력인 것처럼 생각하고 폭군처럼 그 권력을 남용하였습니다.
오늘의 교황이 동일한 방식으로 우리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는 구속받지 않는 최고의 권력을 가로채 가지기에 그의 명령이 우리로 인하여 거부당하는 것을 보자마자 우리를 종파 분리자로 정죄하는 일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그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다\'(눅10:16) 라는 말씀을 가지고 그 말씀에서 우리가 하나님을 반역하고 있다는 결론을 끌어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만일 그리스도의 사신으로 사람들의 귀를 기울이게 하려면 반드시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지고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제 그가 공개적으로 사단의 사자의 역할을 하고 있기에 그는 부끄러움도 없이 또는 허락도 없이 그리스도의 이름에서 권위를 차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대제사장이 사용하는 말의 형식까지도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는 제한없는 권력을 강탈해서 어떻게 영적 폭군이 되어 있는가를 증거해 줍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일은 무엇이나 자유롭게 기탄없이 감행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라고 누가는 말합니다.
자기들이 명하는 바는 무엇이나 이의 없이 따라야만 한다는 것이 그들의 신념이 아니라면 어디에 그러한 결정적인 단호함이 생겨났을 것인가?
행5:29-33 베드로와 사도들이
사도들이 다시 체포되어서(26절) 도리어 그 핍박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습니다(29-32). 신자들은 핍박자들에게도 복음을 전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핍박도 복음 운동의 확대를 위하여 허락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1. 본문 29절은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입니다.
이것이 바로 변호의 요점입니다. 사람은 인간보다 하나님 편을 택하게 되어 있습니다.
실상 그렇게 되어야만 합니다. 사도들의 대답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도록 명령하셨다. 그러므로 당신들이 우리를 잠잠하도록 명하는 것은 소용이 없다\" 입니다. 그러나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차라리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는 말이 타당하다는 이 선언에 관해서는 4장 19절에서 설명한 바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위가 손상되지 않는 범위에서 인간에게 권력을 주어 지배하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권위가 침해되지 않는 한도 안에서 우리를 지배하는 사람들의 뜻을 이행해야 합니다.
권력의 행사가 정당할 때에는 하나님과 사람과를 비교하는 일은 적절하지 않습니다.
어느 성실한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무엇을 명하거나 혹은 금하거나 한다면 고집스러운 사람들이 하나님께 복종하여야 한다고 반대하고 나서도 소용없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통해서 말씀이 들려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과연 인간은 하나님의 도구나 하나님의 그릇 이외에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
만일에 어떤 행정장관이 충실하게 그 직무를 수행할 때에는 누가 그를 하나님과 대립시키려고 조작한다 해도 그 행정장관은 하나님과의 불일치가 없기 때문에 그것은 반대의 결과가 될 것입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법이 행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대행인 교직자에게 순종해야만 합니다.
마치 부모나 주인의 경우에서 생겨나는 일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통치자들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복종하는 일에서 멀어지게 한다면 그 즉시로 그들은 불경하고 완강하게 하나님과 충돌하게 되는 것이므로 그들은 제 위치를 지켜서 하나님과 그분의 권위가 최고의 자리에 있게 해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그들의 직무의 모든 영향력은 사라져 버릴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흐리게 하기 위해서 영예로운 관직을 그들에게 주시려고는 생각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아버지 되는 자가 자기의 신분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아버지로서의 최고의 영예를 하나님으로부터 빼앗으려고 한다 해도 그 아버지는 여전히 인간이요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만일에 어떤 왕이나 군주나 행정장관이 하나님의 영예와 권위를 약화시켜서 그것으로 자신을 높이려고 한다 해도 그도 역시 하나의 인간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똑같은 생각이 역시 목사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어야 합니다.
아무라도 자기의 직무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는 하나님과 대립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 직책에 해당한 칭호는 벗겨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 목사가 겉치레와 속임수를 쓰게 될 것에 대비해서입니다.
목사의 직책은 영예롭고 교회의 권위는 위대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조금이라도 감소시켜서는 안되며 그리스도의 지배를 손상하는 일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쉽게 교황의 거만이 우스꽝스럽다는 것을 추론할 수 있습니다.
동시에 교황은 그리스도의 전체 주권을 자기 발 밑에 유린하고 있습니다.
또 공공연하게 하나님을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있는데 그러면서도 교황은 하나님의 이름 밑에 숨어 있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2. 30절은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입니다.
1) 본 절 초두는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도들은 교회의 수호자들로 자부하면서 최고의 영예를 원하고 있던 자들이 분명히 하나님의 적이라는 사실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로서 그들에게는 최소의 권위조차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이 됩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들은 저 사람들이 부끄러운 일이라고 생각한 바로 그 일을 자발적으로 또는 자유롭게 찬양할 때에 하나의 확신의 증표인 어떤 장애를 말한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치욕적인 죽음의 고통을 당하심으로 인해서 그의 영광이 어떤 모양으로든지 감소된 것으로 나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즉 \"실상 당신들이 예수를 죽인 것이요 그리고 당신들의 잔인성은 단순한 혹은 평범한 죽임으로서 만족하지 못하여 그를 나무에 달아 죽인 것이요 그러나 죽음이 그의 능력을 소멸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요 또는 당신들이 그에게 가했던 불공정한 치욕도 그의 영예를 파괴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며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견고하게 확실하게 존속되는 것이요\" 라고 말해질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제사장들이 범한 그들의 죄과 그리고 그들의 사악함을 인하여 그들을 책망할 때 그들은 역시 그 범죄의 장본인들이 마치 자기들이 승리나 얻은 것처럼 날뛰게 될 것에 대비하여 그리스도에게 가해진 수치스러운 죽음의 방식을 언급하면서 하나의 양보하는 방식으로 미리 처리하는 것입니다.
2) 본 절 후반은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제사장들의 명한 일들에 중요성이 별로 없는 것처럼 경솔하게 생각하고 이를 폐기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하여 자기들의 해명으로 나아갑니다
어떤 대립이 있을 경우를 제외하고는 하나님과 사람을 비교할 만한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함으로서 제사장들이 금지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명령하시기에 그들의 명령을 거절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우선 성경이 언제나 말하는 바와 같이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다시 살리셨다\' 고 말씀합니다. 이런 관용구는 성경의 곳곳에 보여집니다.
하나님이 위대한 일을 이루시려고 그들을 사용하려고 결심하셨던 예언자들이라든지 사사들이라든지 그 밖의 교직자들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려내셨다는 논법입니다.
이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비범한 또한 훌륭한 일을 맡기시려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은사로서 무장시켜 주는 일이 없이는 제아무리 뛰어난 재질을 가진 자라도 여전히 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베드로가 자기의 첫 설교에서 인용한(신18:15, 행3:22) 모세의 유명한 말을 아마 그들도 역시 고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어떤 새로운 종류의 종교를 만들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요 또는 어떠한 새로운 하나님을 백성들에게 강요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우리 조상의 하나님\'을 그 창시자로 명백하게 내세웁니다.
자기들이 거짓된 비난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기들도 잘 알고 있는 대로 자기들이 백성들을 율법과 신자들에게서 떠나게 하려고 노력하는 것처럼 책임지우려 한다는 그 거짓된 비난을 그만두게 하지 않으면 안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교화되지 못한 사람들이 조상들이 어떤 특정한 방식으로 가르쳐 준 하나의 주제를 계속 되풀이하고 그래서 자기들의 조상들의 습관이나 의식을 따르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고 한 것처럼 사도들은 자기들의 선조들에게서 받은 예배의식을 무엇이나 승인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여기서 의미하는 조상들이란 하나님께서 그들과 더불어 계약을 맺든 사람들 옳고 순수한 가르침을 따른 사람들, 참된 신앙과 함께 구원의 약속을 믿은 사람들, 자기들의 기원이 하늘 아버지께 있다고 믿고 또는 그 독생자를 통해서 그들의 모든 자손들과 함께 하나님의 아들들이 된 사람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본문 31절은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는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입니다.
여기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의 구원을 위하여 주장하신 그 방식을 보여줍니다.
주께서 자기백성을 회개케 하시고 죄 용서를 통해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하게 하십니다
더구나 복음의 전체 내용이 이 두 선언 속에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압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사도들은 여기서 자기 자신들을 변명하기 위해서만 역설하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의 직무를 훌륭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그래서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들은 그 신앙의 위험한 적들 가운데서라도 몇몇 사람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회개\'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말한바 있습니다(2:38).
이를테면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인간의 내적 전향이요 나중에 그것은 외적인 행동으로 자체를 나타내주는 일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내적으로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또는 그 마음과 생각의 갱신이 새로운 생명을 일으켜 주게 하기 위하여 중생케 하시는 성령을 우리에게 부어 주시기 때문입니다.
회개하는 마음을 주는 기능이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면 그것은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그 무엇이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진정 우리를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고 우리 안에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시켜 주며 우리로 하여금 죄의 종으로부터 의에 복종하는 자가 되도록 만들어 주는 놀라운 개혁을 일으켜 주는 그 무엇이기에 인간은 스스로 개심 할 수도 없고 스스로를 창조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회개란 인간 편에서 자발적인 회심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심정을 변화시키셔서 돌과 같은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변화시키고 단단하고 뻣뻣한 것을 부드러운 것으로 만드시며 그래서 마침내 꾸부러진 것으로부터 올바른 것으로 만들어 주시는 것이 없다면 도대체 그러한 자발성의 의욕을 일으켜 주는 근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런 일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중생 시키시는 때에 생겨나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은 일시적인 은사가 아니요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하여 우리가 완전하게 하나님께 이끌려지기까지 날마다 더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육체를 벗어버릴 때에만 달성될 것입니다.
일찌기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사람이 자기 자신과 세상을 포기하고 새로운 생활을 시작할 때 그것은 확실히 회개의 시초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만 출발했을 뿐 아직 목적지로부터는 멀리 떨어져 있기에 계속해서 정진해야 됩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를 다 그리스도의 도우심으로 획득하는 것입니다.
주께서는 우리 안에서 회개를 시작하신 바와 같이 우리에게 인내심도 주십니다.
그것은 실로 하나의 헤아릴 수 없는 은혜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죄 용서와 연결되지 않았을 때에는 우리에게 별로 유익이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선 그리스도는 우리가 하나님의 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십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분열시키는 원인이 되는 결함이 늘 붙어 있습니다.
따라서 주께서는 우리에게 은혜로우시기보다는 적대시해도 좋을 권한을 가지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돌리시지 않는 곳에 의(義)가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이 후자의 은혜는 결코 전자의 은혜로부터 분리되어서는 안됩니다.
그 반면에 복음이 이 두 부분으로 성립되지 않는다면 다시 말해서 인간들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값없이 주어지는 의로서 하나님과 화해된다는 사실, 그리고 중생케 하시는 성령에 의하여 새로운 생명을 얻은 사람으로 다시 만들어진다는 사실을 터득하지 않고는 그것은 불완전하게 될 것이요 또는 부패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으로 우리는 어떻게 그리스도안에서 구원이 얻어지는가를 간단히 이해하게 됩니다
2) 본 절 후반은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입니다.
불신앙의 사람들이 무슨 일을 고안해 내거나 그것이 그리스도께서 아버지로부터 위탁받으신 직책을 성취하는 일에 방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사도들은 의미합니다.
여기 \'하나님의 오른손\' 이란 그분의 능력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앞서 2장에서 본 바와 같이 또는 다른 곳에서 가끔 보게 되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으로 올리워지셨다고 말해졌을 경우와 같은 그런 동일한 은유가 여기에는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사람들의 손에 의하여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는 천사들과 인간들 위에 군림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의 권능으로 높이 올리워지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단과 세상의 모든 음모에 대하여 조용히 대립되어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독생자 안에서 강력하게 역사하셨고 또 앞으로도 결코 멈추지 않으실 그 하나님의 손길을 그들이 훼방할 만큼 그렇게는 결코 높이 올라갈 수 없기에 그들의 계략은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라고 그가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어쨌든 동시에 그 목적이 첨가되었는데 그가 임금과 \'구주\'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셨을 때마다 군주나 왕을 약속하신 것이 언제나 있는 일이었는데 그들의 손에 의해 하나님께서는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그 주권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고 증언하는 것입니다.
어쨌든 그들은 그의 역할을 다른 말로서 좀더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요점은 바로 이것인 것 같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백성을 다스리시기 위하여 또 그것 뿐이 아니라 자신이 구원을 가져오는 주님으로서 혹은 구원의 창시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시기 위하여 최고의 영예의 자리를 차지하셨다는 것입니다.
4. 본문 32절은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에게 주신\" 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가르침이 하나님께로부터 얻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하였습니다. 그 다음에 이제 다른 논점으로 옮겨갑니다.
즉 저들이 사태를 성급하게 단언하는 방향으로 갈 것에 대비해서 자기들은 단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도록 자기들에게 명령하시기에 말하는 것 뿐 이라는 사실입니다.
자기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는 것만을 공중 앞에서 가르치고 있으며 또 다음으로는 자기들이 그 일을 하도록 부르심을 받고 있으며 그래서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하지 않고는 가르침의 필요성을 회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모든 복음의 일군들에게 필요한 것이니 만큼 그들에게도 역시 자기들의 변호에 있어서 없어서는 안될 필수 사항이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히브리인의 어법을 따라 \'사물들\' 대신 \'말들\'이라는 말을 사용했습니다.
만일 그것을 말 자체로 해석하기를 원한다 해도 우리는 반대할 생각이 없습니다.
요점은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증인으로 세워졌을 때에 그에게 등을 돌리는 일은 옳지 않은 처사요 오직 그가 명령하시는 바를 알려주도록 말해야 합니다.
2) 본 절 끝 부분은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소명을 그 따르는 결과로서 확인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성령의 선물을 주셨을 때에 그들의 가르침을 승인하는 하나의 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실상 복음의 신앙이 알려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 이라고 말할 때 그것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해당되는 말로 생각합니다. 그 말은 이렇게 되었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들의 순종의 대가로 하나님께 후하게 보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우리의 교직까지도 그 점에서 그를 기쁘시게 하는 일입니다.
어쨌든 \"우리가 성령의 계시로 말미암아 믿음을 얻는 것인데 어찌하여 여기서는 신앙 이후에 성령이 주어진다고 말해지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성령이라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 당시에 자신의 교회를 풍부하게 하신 방언, 예언, 통변, 병 고침, 또는 그와 유사한 은사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마치 바울이 갈라디아 사람들에게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라고 물었을 때에도 같은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성령의 조명(照明)은 신앙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볼 때 그것은 신앙을 앞섭니다.
그러나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된다\'(마13:12)는 말씀대로 볼 때 나중에 그밖의 은혜가 우리를 풍성하게 하기 위하여 계속 뒤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만일 계속 성령의 새로운 은사로 풍성하게 되기를 원한다면 하나님께 대하여 믿음의 가슴을 비워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의 불신앙은 우리에게 훨씬 다른 대가를 받게 합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이 결핍되어 있어서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며 이해하지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5. 본문 33절은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 하고자 할새\" 입니다.
제사장들은 비록 철판 같은 마음을 가졌다 해도 깊이 감동을 받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제사장들은 분통을 터뜨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무슨 이론을 전개하더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하나님께 순종하게 하는 데는 조그마한 영향도 주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속에서 말씀하시지 않는다면 외적인 가르침은 귀를 때리는 일일 뿐 다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적들을 꺾어서 잠잠케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의 거친 성품이 굴복되거나 교정되기는커녕 그들은 더욱 더 미친 사람들처럼 날뛰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그 말씀의 효과를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말씀이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나아지도록 변화시키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들의 마음에 스며들어 그들의 양심을 움직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심판자로 인하여 압력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그 사실에서 그들의 분노가 솟아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마치 무슨 중요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복음 전부를 기꺼이 비웃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복음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간주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경솔한 행동을 맹렬하게 쓸어버리는 어떠한 숨은 존엄이 복음 속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나아오도록 나팔소리가 그들을 소환할 때에 그들의 광기(狂氣)가 분명해 질 것은 사실입니다.
행5:34-39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본문은 공회에서 사도들을 죽이려 하는데 대한 가말리엘의 반대 연설입니다.
1. 본문 34-35절은 \"(34)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 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여 사도들을 잠깐 밖에 나가게 하고
(35)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 하라\" 입니다.
이제 누가는 주께서 어떻게 그 악한 자들의 광기를 씻어버리셨는가를 이야기해 줍니다
그들은 사도들을 죽여 버리려고 생각하였을 때에 가말리엘이 양자 사이에 끼어 들어서 그 무모한 의논을 저지시켰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누가는 어떻게 한사람이 그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었는가를 우리가 이해하게 하기 위해 가말리엘의 신상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가말리엘은 한 바리새인이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이 파는 우리가 아는 대로 가장 존경을 받고 있었던 파였습니다.
가말리엘의 경우에는 국민 전체에게 존경을 받고 있었다고 누가는 전해줍니다.
그러나 또한 당국자들은 백성들을 두려워하였다고도 전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그들이 가말리엘의 의견을 감히 반대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들 앞에 돌발적인 또 예기하지 않은 공포의 원인을 설정함으로서 원수들의 폭행을 저지하시는 일 등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게다가 가말리엘은 자기 말이 사도들을 한층 더 대담하게 하지나 않을까 해서 그들을 밖에 나가 있도록 명령합니다.
가말리엘은 자기가 복음의 가르침을 시인했거나 혹은 복음을 수호하는 일에 변호하기 원했기에 그렇게 말한 것 같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격분에 불타고 있는 것을 알기에 점잖고 온건한 인품을 지닌 그는 그들의 지나침을 온건한 말로서 누그러뜨리는 것입니다.
아무라도 그 모든 일을 적절하게 생각해 본다면 가말리엘의 견해는 우리가 신중성 있는 사람에게서 기대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실상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처럼 받아들였다는 것을 압니다.
그들의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다음 사실로도 충분히 밝혀집니다.
즉 만일 그렇게 된다면 사람은 아무도 형벌하지 말아야 하며 더 나아가서 모든 범죄는 처벌되지 말도록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한 순간이라도 연장하는 일이 우리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는 모든 것도 거부되어야 한다는 뜻이 됩니다.
가말리엘이 말한 두 가지가 다 분명히 옳습니다.
인간들의 모든 노력은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을 깨뜨릴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한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은 무엇이든지 언제까지나 존속할 수 있을 만큼 그렇게 강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이 둘은 다 사실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끌어낸 결론으로 대체로 그것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태라고 여기는 것은 잘못입니다.
차라리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찾아내야만 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악행이 벌을 받게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목적 때문에 하나님은 행정장관들을 세우셔서 그들에게 검으로 무장시킵니다.
그런 목적 때문에 교회에 장로들을 세워서 다루기 힘든 사람들에게 질서를 강요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제 멋대로 빠져들거나 제한 받지 않고 날뛰는 죄가 허용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사악을 제거하시기 위해 홀로 넉넉하시기에 우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다고 추론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의 전체 권고는 그와 같은 것입니다.
가말리엘은 율법학자들이나 장로들이 하나님을 대항해 전쟁을 수행치 않게 경고합니다
그러면서도 마치 그 일에 대해서 의심이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합니다.
그로써 한가지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즉 가말리엘로서는 그 사건의 진가에 관해서 이미 근본적으로 불확실하여 계속 흔들리고 있기 때문에 그것이 선인지 악인지 감히 그의 마음을 확정짓지 못하고 그 상황이 자연히 좀더 잘 밝혀지기까지 얼마동안 시간이 연기되어야 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 분명합니다.
요약하면 가말리엘은 올바른 전제에서 잘못된 결론을 끌어낸 것입니다.
그는 신앙에만 적용해야 할 것을 외적 행사나 행동방식에 잘못 응용하였기 때문입니다
한편 이것을 우리의 논리가 되게 하도록 합시다.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은 비록 전세계가 그를 대항한다고 할지라도 확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서 확증되고 있는 신앙은 사단이나 인간의 어떠한 공격에 대해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존속될 수밖에 없습니다.
비록 하늘이 무너져 내린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그 창조자요 수호자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구원은 안전합니다.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왕국을 지켜주시기에 어떤 세력도 그것을 전복시킬 수 없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에게 그 기초가 있기에 사람들이 제 아무리 이를 대항하여 싸우며 흔들지라도 여전히 안전하게 남아있을 것입니다. 더구나 악한 자들이 아무리 교회를 파괴하기 위하여 전력을 기울이며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를 대적하여 제 아무리 치열한 싸움을 도발한다 하더라도 역시 그들은 승리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의도를 타격 주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이요 또 그런 방식으로 그들의 무모함에 형벌을 가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두 선언이 신앙에 잘 적용된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종들이 진리를 수호하는 일에 덜 열심이어도 좋다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자기들의 게으름 때문에 교회를 파멸에 떨어지도록 내버려 두어도 좋다는 이유도 성립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뒤집어 엎으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악행을 못 본 체하고 등을 돌리고 앉아 있어야 할 이유가 그들에게 있을 수 없습니다.
2. 본문 36-39절은 \"(36)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37)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38)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 두라 이 사상과 이 소 행이 사람에게로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39) 만일 하나님께로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 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입니다.
1) 본문 36절 초두는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입니다.
만일 우리가 요세푸스(Josephus)를 신빙할 수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가말리엘은 여기서 역사의 참된 진로를 거꾸로 만든 것이 됩니다.
요세푸스는, 즉 가말라 성에서 태어난 유다 가울라니데스는 퀴리니우스, 혹은 싸이레니우스가 총독으로 있을 때에 인구 조사의 실시를 막기 위하여 추종자들과 함께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입니다. 드다는 쿠스피우스 파더스가 총독이었을 때에 자기 스스로 하나님의 예언자라고 자랑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파더스는 글라우디우스 가이사에 의하여 유대로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전자의 이야기는 고대사
그리고 후자는 20권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누가가 \"그 후..... 유다가 일어나\" 라고 말할 때에 유다가 나중에 나온 사람인 듯이 연대적인 순서를 지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이 유사한 두 실예를 내세웠기 때문에 누가로서는 시기를 생각하지 않고 그는 이 쪽을 저쪽과 바꿀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후\'(post)라는 말은 \'그 위에\'(above) 혹은 \'한 편\'(besides) 이라는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더구나 가말리엘이 자기의 견해를 입증하는 그 실예들까지도 현재의 주제에 적절하게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들은 유다에 대해서 즉각적인 저항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가 선동했던 폭동은 많은 재난을 가져오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국 군대의 세력에 의하여 진압되었기 때문입니다. 드다는 쿠스피우스 파더스의 분투로써 재빨리 타도되지 않았다면 훨씬 더 큰 해를 입혔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말리엘은 단지 사람들이 결과를 생각하지 아니하고 일을 추진할 때 모든 일이 좋지 못하게 뒤집힌다는 사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의 공정하신 형벌에 의하여 행해진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불신앙의 제사장들은 하나님의 선하신 충고를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어리석은 당황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갈팡질팡함으로서 무가치한 이론과 함께 자기들의 이지를 박탈당하는 결과가 되고 만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사도들이 매를 맞은 시기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후에 적어도 12년은 경과한 때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그 시간을 계산해 봄으로서 추론하게 됩니다.
티베리우스 치세의 남은 5년에 칼리굴라가 지배한 3년 반이 가산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파더스가 클라우디우스에 의하여 유대로 파견된 것은 그의 재위 2년이나 3년 이내에는 아니었습니다. 가말리엘은 그 사건이 마치 어제나 그저께 생겨난 일처럼 회상하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지적한 그 시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사도들의 끈기가 그만큼 더 훌륭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유가 됩니다.
그들이 오랫동안 견디어 온 고생에 대해서 그처럼 가혹한 보상을 받았으면서도 용기를 잃지 않았고, 또 자기들이 가야 할 그 길을 쉬지 않고 계속하였기 때문입니다.
2) 본문 36절 중간부분은 \"스스로 자랑하매\" 입니다.
어떤 사본에는 \"자기가 상당한 인물이라고 말했다\"고 되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같습니다. 드다는 자기가 요단강을 마르게 해서 자기를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통과하도록 만들 수 있다고 자랑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가말리엘이 얼마나 올바른 이해를 가지지 못하고 있었던가를 알 수 있습니다.
그가 나중에 자기 말을 누그러뜨리고 또 좀 더 호의적인 견해로 기울어지면서 이 사건이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라고 단언할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짓지 못한 채 남겨두기는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가말리엘은 그리스도의 거룩한 교직자들을 협잡군들과 약탈자들과 비교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가말리엘은 의아한 생각을 가지고 말합니다.
그는 좀더 사건을 조사하게 하지 않고 아무것도 안한 것만을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가말리엘 주장에서 인정받을 수밖에 없는 유일한 것은 그가 악한 자들로 하여금 불신앙적인 무모함에서 기가 꺾어지게 한 일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항하는 일보다 더 두려워할 만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행5:40-42 저희가 옳게 여겨
본문은 사도들이 석방되고 사도들은 영적 담력을 얻습니다.
1. 본문 40절은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입니다.
가말리엘의 충고가 받아들여졌다고 누가는 성령으로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사도들은 채찍에 맞고 또 가르치는 일을 금지 당했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그때 사도들의 대적들이 얼마나 크게 격분하고 있었던가를 알게 됩니다
비록 그들이 이제는 가라앉혀졌거나 적어도 누그러졌다고 해도 여전히 과격한 방법으로 행동하였습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진리는 무시되고 인간에게만 관심을 기울였던 불명확한 권고가 얼마나 불행한 결과를 가져왔는가가 분명합니다.
가말리엘은 확실히 사도들의 생명을 아끼는 일을 생각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일한 사람들의 수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수치를 당한 것입니다. 이때에 복음의 진리는 그들의 원수들에 관한 한 영원한 침묵 속에 매장되는 것입니다.
그럴지라도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이처럼 자신의 말씀을 기적 적으로 선포하십니다.
그러나 지금은 사도들이 전하는 그 복음이 끊임없이 의곡당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일에 유의해야 합니다.
그것은 오늘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 때문에 위험 속에 빠진 사람들의 생명을 아껴주기만 한다면 혹은 그렇지 않으면 피를 흘릴 수 있는 형편에서 약간 부드러운 방식으로 돌아선 적이 있게 된다면 자기들이 적지 않게 하나님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는 동안에 그들은 불명예스럽게도 그리스도를 저버리는 일을 두려움없이 행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일이 하나님 보실 때 모든사람의 생명보다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참된 신앙에 대한 관심을 버리고 인간적인 선행의 의무로 하나님 앞에서 죄 속함을 받기 원하는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할 것입니까?
2. 본문 41절은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나니라\" 입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이 부당하게 다루어졌을 때에 그런 일로 부끄러움을 느끼지도 않고 고통조차도 느끼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무감각하였다고 생각하면 안됩니다.
사도들은 그들의 본성을 완전히 버린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능욕받는 그 일의 원인을 생각했을 때에 기쁨이 우위를 차지했습니다
그래서 신도들은 자기들이 복음을 인하여 핍박을 받게 될 때마다 언제나 두 가지 방면으로 영향을 받아야 합니다.
비록 그들이 확실히 형벌의 아픔으로 인하여 시달림을 받는다 하더라도 영적 기쁨으로 인하여 그 슬픔을 타고 넘어야 합니다.
그 기쁨에서 생겨나는 열정이 그들에게 새로운 힘을 주지 않는다면 그들은 성급한 후퇴를 하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에 있어서 죽음이 쓴 것이 될 것이라고 주께서 선언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죽음이 왔을 때에 베드로가 단 마음으로 기쁘게 맞이했을 것입니다.
그런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등에 십자가가 지워질 때에 기쁨으로 그것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서 십자가를 계속 지고 가도록 고난과 불안과 더불어 싸우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이라는 말은 누가가 불명예스러웠던 것을 영예라고 말하고 있는 점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얼른 보아서 불합리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이 세상사이의 상이성(相異性)으로 말미암아 인간들 사이에서는 최고의 치욕으로 생각되는 사항이 하나님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는 큰 존엄과 영광으로 나타납니다.
일찌기 주께서 견뎌내신 종류의 죽음은 무엇보다도 가장 불명예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가장 고상한 승리를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순응하게 될 때에(빌3:10, 롬8:29) 세상의 눈으로 볼 때에는 치욕의 대상이 된다 해도 실상은 우리가 뛰어남의 표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훌륭하게 자랑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공공연하게 자기 안에서 그리스도의 흔적을 이야기하였습니다(갈6:17).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연합하는 일의 근거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세상의 치욕을 자기의 영광으로 흡수하시는 분이십니다.
그 뿐만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는 모욕과 불명예와 조소를 최고의 영예로 바꾸어 놓으시는 분이십니다.
이리하여 비록 십자가를 지는 일에 용감하고 민첩한 사람이 그처럼 소수라고 할지라도 거의 모두 육체의 감각에 의하여 압도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그 사실을 그다지 이상스럽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실상 백 사람 중의 한 사람이 될까 말까 하는 사람이 그리스도의 수치가 이 세상의 모든 승리보다 훨씬 뛰어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수치와 그분을 따르기 원하는 자들의 수치가 오히려 유일한 위로의 기초가 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영광의 동참자 되고, 또 그리스도의 영광의 동반자가 되기 위하여 현재 그리스도의 고난에 순응하게 된다는 이 문구에 대해서 좀 더 진지하게 생각해 보아야 됩니다(롬8:17, 벧전4:13).
3. 본문 42절은 \"저희가 날마다 성전에 있든지 집에 있든지 예수는 그리스도라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쉬지 아니하니라\" 입니다.
그들에게는 주께서 주시는 기쁨과 함께 또한 주의 본성으로 흘러 나오는 바 그 근원에서 받은 변함 없는 견지성(堅持性)이 있었습니다.
이제 승리의 결과를 앞질러 자기 마음에 가지려고 하는 성급함이 우리가 당하는 박해의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또 지구력을 야기시키기 위하여 아무도 자신을 그리스도에게로 이끌어 올리지 않는다는 그 사실이 우리를 약하게 하고 우리의 마음을 교란시켜 주는 박해의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자기가 주님때문에 고난을 받을때에 스스로 복을 받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리 괴로운 싸움을 싸워야만 한다고 할지라도 결코 이탈자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죽음을 향해 용감히 진군하기 위해 채찍 맞는 일로 무장합니다.
정말 우리의 길이란 미묘한 길입니다.
우리가 지극히 사소한 박해를 통과해 왔습니다.
그랬으면서 우리는 마치 이미 퇴역군인이 된 것처럼 생각하기 일 수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에게 즉시 그 횃불을 넘겨 주려고 하는 것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오늘을 살면서 내일을 대비하지 않고 과거를 삶아 먹고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헛된 정신으로 사는 이유가 그런데 있습니다.
사도행전 6장 강해
행6:1-6 그때에 제자가
본문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먼저 구제의 불균등으로 인한 교회 내의 불평이 있습니다.
다음에 집사들을 세워서 구제 사업을 담당하도록 합니다.
1. 본문 1절은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 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집사 제도의 창설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그 시기에 관해서요, 둘째는 그 의도에 관해서요, 셋째는 사용된 의식에 관해서입니다. 그렇지만 누가는 그것이 제자들 가운데서 발생한 불평을 가라앉히기 위하여 채택한 구제책이었다고 말합니다.
속담에 \"나쁜 풍습은 좋은 법을 생겨나게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직무가 교회에서 매우 필요하고 훌륭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어찌하여 사도들이 처음부터 자기들 자신의 책임으로 집사를 임명할 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리고 지금 그들이 마치 압력을 받아서 그 제도를 받아들였는데 왜 성령께서는 그런 방향을 따라 그들에게 권하지 않았을까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 그 일이 생겨난 것은 그 때가 좋았습니다.
그리고 또 오늘 우리에게도 하나의 표본으로 더욱 유리합니다.
만일에 사도들이 어떠한 필요가 그것을 요구하지도 않았는데 집사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했었다면 사람들은 그 일에 대해 마음이 별로 내키지 않는 것을 그들이 알았을 것이요, 그들 자신은 따분한 수고를 피해 보려고 하는 것처럼 보여졌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게 선물들을 제공해 주는 일에 그처럼 관대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집사가 없이는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자기들의 경험을 통하여 확신을 얻게 된 것은 신도들에게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실로 자기들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그들은 기쁜 마음으로 집사를 선택했을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사실을 배우는 것입니다. 우선 교회라는 것이 조금도 수정할 것이 없을 정도로 그렇게 한꺼번에 형성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또 그러한 거대한 모습의 조직이 아무것도 첨가할 필요가 없을 만큼 하루 아침에 완전하게 만들어지도록 마무리지어질 수도 없을 것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인간들의 잘못으로 인하여 부패하지도 않고 소용가치가 적어지지도 않게 될 만큼 그처럼 신성하고 찬양 받을 만한 하나님의 기관이란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게 됩니다.
세상에는 어떤 악이 선한 것들과 결코 섞여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잘 배열되어 있는 것은 결코 없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의 부패는 그것의 원인입니다. 누가가 이미 설명한 그 제도는 모든 사람들의 재물이 하나님께 성별되어 바쳐져서 일반에게 분배되었을 때 또 사도들은 하나님과 가난한 자들의 집사가 되어 구호활동을 담당하였을 때 그것은 거룩한 제도였다는 사실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안되어 그 제도를 혼란케 하는 불평이 터져 나왔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지적한 바 있는 인간의 타락이 나타났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 자신의 행복을 이용물로 삼기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동시에 우리는 사단의 계략을 조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단은 끊임없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은사를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어 그 효능이 순수하고 완전하게 남아있지 않게 하는 것을 자기의 과업으로 삼고 있으며 거기에다 불순물을 섞어서 불편하게 만들고 그래서 그것을 경시하게 하고 다음에는 싫증나게 하며 마침내는 아주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사도들이 실상 자기들의 시범으로 인하여 그러한 종류의 사단의 술책에 말려들지 말아야 할 것을 가르쳐준 것입니다.
그들은 그러한 불평을 마땅치 않게 여겨서 자기들이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일로 알고 있었던 봉사활동을 그만 두어야 한다고 결정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그런 불평을 없이할 구제방법을 생각해 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을 그대로 존속시킨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일을 수행하는 바른 길입니다.
사단이 날마다 어떠한 거침돌을 일으키든 간에 우리는 우리에게 어떤 다른 면으로 유익을 주는 제도를 사단이 쫓아내지 못하도록 크게 경계해야 됩니다.
1) 본 절 초두는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를 증대시키고 또 할 수 있는 대로 사방에서 그의 백성들을 많이 더해 주시는 일 이상으로 바람직한 일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본성의 타락은 모든 것을 모든 점에서 성공시키는 일을 방해합니다.
그것은 교회의 증대에서 많은 골치 아픈 일들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몇몇 위선자들이 그 군중 속에 몰래 기어 들어온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악함이 교회의 양 무리에 감염되어 그 일부를 타락시키기까지는 그들의 사악이 즉시 발견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뻔뻔스럽고 방종한 악한 자들이 거짓 회개를 핑계삼아 교회에 끼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그 많은 사람들 가운데서 의견의 일치를 보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그들의 습관이 다른 것처럼 그들의 의견들도 다양하였습니다.
그래서 동일한 하나의 사실이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맘에 들게 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물의가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들을 위하여 교회를 대신하는 소수의 사람들을 선택하기를 원하게 하였습니다.
그 무리들을 멸시하고 미워하기까지 하게 한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를 증대시키려는 생각이 언제나 우리 가슴속에 밀착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이 있습니다. 또 우리가 전도하는 일에 고난을 감수하지 않는다는 사실도 있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전체 교회 기구와는 통합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까지도 있습니다. 그런 사실들처럼 그렇게 크게 문제시되어야 할 일도 없고 혐오하여야 할 것도 없습니다.
2) 본 절 후반은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파 사람을 원망한대\" 입니다.
종족이나 나라의 상위에서 불화의 계기를 찾게 된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성령으로 완전하게 중생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여기서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유대인도 헬라인도 없습니다(갈3:28).
따라서 이 적대 의식은 육체적인 또는 세상적인 냄새를 풍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런 종류의 일이 불시에 우리에게도 생겨나지 않도록 더욱 조심하여야 하는 이유입니다. 그들은 불평으로서 자기들의 분노를 표시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또 하나의 잘못을 저지른 것입니다. 그 불평이 정당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그것은 누가가 헬라인들이 자기들의 과부들에게 배려가 제대로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투덜거렸다고 말했을 때 실제로 일어난 일을 보도해 준 것이 아니요 일어났을 것이라고 추측한 것을 말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은 유대인 과부 쪽을 더 잘 알므로 그들을 우선시킨 것인데 그것을 헬라인들은 자기들의 과부들이 이방인으로 멸시를 받고 있다고 잘못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있음직해 보입니다. 또 그 \'구제\' 라는 말은 능동태 혹은 수동태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교회의 시초에 과부들이 집사로 선택되었던 일을 우리가 알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헬라인들이 그들의 과부들에게 충분한 보조가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불평하였다는 것이 우리 자신의 의견입니다.
그래서 \'구제\'는 그들의 관습을 따라 행해진 일상적인 배급(配給)을 의미하는 일입니다.
2. 본문 2절은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입니다.
1) 본 절 초두는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입니다.
사도들이 더 이상 성내지 않았다는 것은 아량과 침착성의 표시입니다.
그들이 재빨리 악의 순(荀)을 자르고 그것을 치료하는 방안을 마련하려는 생각을 떨쳐 버리지 아니한 것은 신중함과 거룩한 관심의 증표입니다. 모든 불화와 대립이 일단 강하게 뭉쳐지면 그것은 고치기 힘든 상처가 되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질서와 사리분별로 다스려졌다는 사실과 그래서 권위가 사도들의 수중에 쥐어져 있었으면서도 그들은 사람들에게 그들의 의도가 무엇인지를 알게 하였다는 사실이 이 모임에서 분명히 나타납니다. 또한 \'제자\'라는 말이 \'믿는 사람들\' 혹은 \'그리스도인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도 유의해야 할 일입니다.
\"네 모든 자녀는 여호와의 교훈을 받을 것이며\"(사54:13, 요6:45)라고 한 이사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 또한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렘31:34)고 한 예레미야를 통해서 주신 말씀이 그들의 경우에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2) 본 절 후반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입니다. 헬라어로 (우크 아레스톤)입니다.
이 말은 때로는 다른 것들보다 가장 우수하다는 뜻으로 쓰기도 하고 또 더 좋다고 받아들여지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때로는 확정된 것이라는 뜻으로 쓰기도 합니다.
우리는 차라리 사도들이 판결한 것을 단순히 발표한다기 보다는 유리하다고 여겨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런 행정에 참여한 것이 자기들에게 이롭지 않다고 한다면 이제까지 그 일을 운영해 온 그들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보입니다.
확실히 경험은 지혜의 아버지라는 말이 옳습니다.
사도들은 그 일이 자기들에게 적당하지 않다는 것을 경험에 의하여 발견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 그 임무가 면제되도록 교회에 요청했다고 아무것도 이상할 것은 없습니다.
무슨 잘못이 있었다면 사도들에게보다는 차라리 필요 때문이라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들은 열을 내서 그 짐을 낚아챈 것이 아니요 다른 방법이 없었기에 가난한 이들이 무시당하기보다는 차라리 자신들이 과중하게 그 짐을 질 것을 택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에 바빠서 하나님의 말씀을 저버린다는 일이 마땅치 않다고 말 할 때에 그것은 자기들이 두 가지 짐을 모두 동시에 감당할 수 없어서 불가불 어느 한 쪽을 단념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마치 \"만일 당신이 우리가 복음의 선교를 즐거움으로 봉사하게 하려면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우리에게서 면제하라. 우리는 두 가지 일의 과로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라고 사도들이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의 의견은 시기에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들은 일찍이 구제의 임무를 걸머지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가르치는 직책을 포기하지는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그 행정관리가 서로 결부되어 있었기 에 그들은 가르치는 일을 충분히 전념할 수 없을 정도로 휘말려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가르치는 일에 전심전력을 기울이지 못하게 하는 다른 일을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사도들이 가난한 일들에 대한 관심을 전적으로 단념한 것이라고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사도들은 자기들 자신의 일에 저들의 주의력을 돌릴 수 있도록 일의 경감을 추구한 것입니다.
동시에 사도들은 말씀을 전하는 임무라는 것이 그 사람을 전적으로 점유하고 그에게 다른 직업에 종사하는 일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그렇게 강요하는 일이라는 것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만일 그 일이 적절하게 고려되었다면 교회에서 여러 가지 일 처리는 매우 다르게 할당되었을 것이었습니다.
집사직을 구실로 해서 교황의 감독들은 굉장한 부를 탐했습니다.
동시에 그 교황주의자들은 한 사람이 열의 머리를 가졌다 해도 감당하기 어려울 여러 가지 직업에 자신들이 종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교회가 그 깊은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고는 존속할 수가 없다고 할 만큼 사악해졌습니다. 또 그 이상 더 부인(否認) 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한데도 자기들이 사도들의 후계자들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실로 저들은 \'봉사하는 식탁\'에 관여하지 않도록 좋은 배려를 했습니다.
그리고 또한 자기들 자신의 식탁의 쾌락은 이를 단념하도록 강요된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식탁을 염려하는 자는 남의 식탁에 관해서는 아무것도 할 것이 없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을 보아 넘기면서 이 구절을 우리 자신의 이익에 적응시켜 봅시다.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는 사실이 얼마나 거룩한 일인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복음의 선교를 우선적인 것으로 여겼을 때에 우리는 거기서 그 일보다 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복종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그들이 그 두 직무를 동일하게 해 낼 수 없다고 말할 때에 어쨌든 그 어려움이 지적된 것입니다. 우리는 사도들보다 확실히 어느 점으로나 우수하지 못합니다.
따라서 누구든지 가르치는 일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전적으로 그 직무에 최선을 다하도록 자신을 적응시켜야 합니다. \"스파르타식을 충분히 이용하라\"는 격언이 있듯이 우리에게 있어서 나태에 빠지기보다 더 용이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육체는 그럴싸한 구실을 풍성하게 공급해 줍니다.
따라서 딴 일에 스스로 관여한 사람들은 자기들이 해야 할 적절한 일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을 즉각적으로는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직자들에게 이 구절을 자주 생각하게 함으로서 그들이 스스로 격려를 받아야 합니다.
즉 거기서 사도들은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도록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돌보는 일을 단념한 사실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면에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라고 여겨지면서도 그것을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면 그 밖의 세간의 직업이나 개인의 이익을 위한 직무야말로 무슨 구실을 내세울 수 있을 것입니까?
3. 본문 3절은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입니다.
이제 우리는 집사들이 세워진 그 목적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 명칭 자체는 분명히 일반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바로 가난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서 세워진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이 사실에서 집사들에게 성찬용 접시나 잔을 다루는 일을 유일한 의무로 맡겨주는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얼마나 무성의하게 하나님과 인간을 업신여기고 있는 일인가가 분명해집니다. 확실히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사도들과 아무런 공통점도 없고 일치점도 없다는 사실을 증명하기에 긴 논의가 불필요합니다. 그러나 만일 이 일에 대해서 좀 더 알기를 원한다면 기독교강요 8장에서 자유롭게 탐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구절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선 그들을 선택하는 일이 교회에게 허용된 일입니다.
만일에 어떤 한 개인이 자기의 권한으로 교직자들을 임명하였다면 그것은 하나의 전제적인 일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합법적인 방법은 교회의 어떠한 공직을 맡게 되는 자들을 위해서는 일반의 투표에 의하여 선택되는 일입니다.
한편 사도들은 어떤 사람이 선택되어야 할 것인가를 내세웠습니다.
즉 성실하고 지혜와 그 밖의 성령의 은사로 갖추어진 인정받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독재와 무질서한 방종 사이의 중간 길입니다.
그것은 백성들의 동의와 찬성에 의하지 않고는 실상 아무것도 행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편 목사들은 일반 신도들이 지나친 과열 상태로 달려가는 것을 막아내기 위하여 사람들의 충동을 마치 말에게 굴레를 씌우듯이 자기들의 권위로서 억제하도록 규정짓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신자들에게는 원칙이 지워졌는데 그들은 누구든지 적당한 사람만을 선택해야 한다는 사실을 유의해야만 합니다.
만일 우리가 누군가를 전혀 우연한 방식으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집을 관리하게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에게 적지 않은 손해를 끼쳐드리는 일이 됩니다.
그러므로 최대의 용의주도함이 채용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양심적인 자신감이 없이는 아무도 교회에서 신성한 기능을 맡도록 선택되지 않아야 합니다.
\'일곱\' 이라는 숫자는 그 때의 필요에 적당한 수였습니다.
그래서 거기 무슨 신비한 것이 감추어져 있다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누가가 말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라는 말을 우리는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의 다른 은사들을 공급받는 일만이 아니요 또한 확실히 지혜를 구비하는 일로 해석합니다
그것이 없이는 그 직책이 제대로 수행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그들은 상습적으로 얻어 먹으려는 생각만을 가진 자들의 협잡과 사기행위, 또는 극도로 빈궁에 젖어있는 형제들에게 필요한 것까지를 빨아내는 자들을 경계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할 계제가 아닌데도 끊임없이 험담을 조작해내는 자들의 중상도 경계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직책이란 매우 힘든 일일 뿐 아니라 또한 당치 않은 불평도 면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절은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입니다.
다시 사도들은 그러지 않고서는 여러 다른 일들이 자기들이 일평생 전부를 분주하게 만들어 줄만큼 과중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지적합니다.
한 때 예배에도(in sacris) 사용된 바 있었던 옛말 \'이것을 하라\'는 격언이 이 문제에 잘 해당됩니다.
그러므로 사도들은 (포로스카르테레 - 사이)라는 동사를 사용하였는데 그 말의 의미는 무슨 일에 애착을 두어서 바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목사들은 자기들이 날마다 설교하는 일을 위하여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해도 자기들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다른 또 하나의 노력, 다른 또 하나의 열심, 다른 또 하나의 부지런함이 모두 요구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이 설교하는 일에 스스로 전력을 다했다는 것을 자부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 목사들은 설교하는 일에다 기도를 첨가합니다.
그것은 자기들만이 기도해야 할 형편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오히려 기도는 모든 신도들의 일반적인 공통된 업무입니다. 그러기에 다른 이들과 비교해서 목사들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기도의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실상 거기에는 교회의 일반적인 번영에 대해서 관심하지 않아야 하는 사람이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분명하게 그 임무가 부과되어 있는 목사들이 그 일을 위하여 누구보다도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진력하여야만 하지 않겠습니까?
이리하여 모세는 확실히 다른 사람들에게 기도하기를 권장하였으면서도 더욱 자기 자신은 기수와 같이 그 길의 선두에 섰습니다.
바울 사도께서 그처럼 자주 자신의 기도에 대해서 언급한 사실도 이유가 있습니다.
결국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됩니다.
즉 하늘로부터 성장시키는 일이 없이는 우리가 밭 갈고 씨 뿌리고 물 주고 하는 수고가 다 헛된 것이 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고전3:7).
그러므로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아니하고 열매 없이 되지 않기 위하여 하나님께 은혜를 간구하지 않는다면 선교하는 일에 분발하는 것만으로는 넉넉하지 않게 될 것입니다
말씀을 증거 하는 교직자들에게 있어서 열심히 기도하도록 권장되고 있는 일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 여기서 밝혀집니다.
5. 본문 5절은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입니다.
누가는 마치 신앙 자체가 역시 성령의 은사가 아닌 것처럼 신앙을 성령으로부터 분리시키지 않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성령\" 이라는 말로 스데반이 받은 다른 은사들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열심이든지, 신중성, 선행의 의지, 형제애, 근면, 선한 양심의 성실성 등을 가리킵니다 그래서 누가로서는 특히 하나의 실예를 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스데반이 특별히 신앙에 있어서 그 다음에는 다른 덕행에 있어서도 특출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스데반에게 성령의 은혜가 충만하였다는 것은 너무도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와 견줄 수 없었던 것이 확실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누가는 그처럼 크게 돠른 사람들을 찬양하지는 않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고대의 저작자들은 모두가 다 일치하게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이야기해 줍니다.
즉 이 일곱 사람 가운데 하나인 니골라는 요한이 계시록(2:15)에서 그가 바로 여인들이 창녀가 되기를 원한 자이므로 창피하고 치욕적인 한 종파의 창시로 지목한 그 인물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교회의 교직자들을 선택함에 있어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는 사실을 적절하게 말해 주는 일입니다.
인간의 위선이 최대의 자기 방위를 위해 유의하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속이는 것이라면 무관심하고 부주의한 사람들에게야 도대체 무슨 일이 발생할 것인가?
동시에 만일 적당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기만당하는 사실이 생겨난다면 사도들까지도 그 악한 자들에게 속임 당한 일이 있다고 누가가 우리에게 이야기한 사실을 생각하고 우리가 지나치게 당황하지 말아야 합니다.
어떤 이는 이렇게 묻는 것입니다. \'이 선거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에 의하여 지도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실지 결과가 보여줄 때 그렇다면 권면은 무슨 필요며 기도는 무슨 소용인가?\'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에 대하여 우리는 성령께서 여섯 사람을 선택하는 일에 그들의 판단을 지도하신 일은 큰 일이요 성령이 교회로 하여금 일곱째를 선택하는 과오를 범하도록 허용하신 일이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로 대답하겠습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면에서 겸비해지는 일이 옳습니다.
즉 한편 악한 자들과 불신앙의 사람들이 우리를 괴롭히는 일이 있습니다.
한편 그들의 사례로 인하여 경고를 받아 우리가 자신 안에 있는 것을 검토할 줄 알게 되는 일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우리 안에 드러나지 않는 어떤 기만의 주머니를 없이 하는 일 한편 우리가 좀더 분별하는 일에 조심해서 끊임없이 자신을 수호하며 그렇게 함으로서 부정하고 배신하는 자들이 우리를 포위하지 못하게 하는 일까지도 있습니다. 그러한 여러 면에서 겸비해질 필요가 있습니다.
니골라의 직무가 잠시동안은 유용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다음에 그러한 놀랄만한 잘못으로 떨어졌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만일 니골라가 존귀한 지위로부터 그처럼 떨어졌다면 우리 각자가 더 높이 치켜 올려지면 질수록 더욱 겸비와 두려움으로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도록 해야 합니다.
6. 본문 6절은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입니다.
안수하는 일은 율법 아래서는 성직수임의 엄숙한 상징이었습니다.
이제 사도들이 집사들에게 안수한 것은 그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한 그러한 목적에서였습니다.
그렇지만 의식 그 자체는 무용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그와 동시에 기도가 가해졌습니다. 그렇게 안수하는 기도로서 신도들은 자신들을 하나님께 바치는 교직자들을 하나님께 위임한 것입니다. 확실히 이것은 사도들에게 속한 일입니다.
사람들이 전부 자기들의 손을 집사들 위에 얹은 것이 아닙니다.
사도들이 교회의 이름으로 기도했을 때에 다른 사람들도 그들의 기도와 안수에 참여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중요한 일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즉 안수하는 일은 사도들이 사용한 것으로 보아서 질서와 품위를 세우는 하나의 견실한 의식입니다.
물론 그 자체 안에 무슨 효능이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요 그 힘과 효력은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 의한다는 사실입니다.
이것은 모든 의식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이어야 합니다.
행6:7-10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은 박윤선 목사님의 주석에 나타난 짧은 강해로 시작합니다.
1. 예루살렘 초대 교회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죄악으로 일시 떠들었습니다.
그러나 그 일로 하나님의 징계의 권위가 나타나서 교회는 큰 영력으로 더욱 위엄 있게 섰습니다(5:12-16). 뒤이어 교회를 핍박하는 환란이 일어납니다(5:17-42).
그러나 이것도 교회를 더욱 빛나게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사도들과 함께 하시었습니다. 그러므로 핍박자들은 여지없이 실패하고 교회의 위신은 높아졌습니다.
이제 또 다른 죄악이 그 교회에 생겼습니다. 그것은 물욕으로 인한 불평입니다(1절).
그러나 하나님은 실패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 많은 곳에 은혜를 많이 주시기도 하시는 전능자이십니다.
그때에 있었던 불평 때문에 초대 교회는 한 걸음 더 발전하였습니다.
곧 먼저는 재정을 맡아서 수고할 집사(執事)들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다음은 사도들은 기도와 말씀 전파에만 전력하면서 그 본래 받았던 사명 실행을 강화하게 되었습니다(2-4). 따라서 교회는 한층 더 부흥되었습니다(7절).
이렇게 집사직의 제도를 둔 것이 예루살렘 교회의 발전을 의미합니다.
2. 사도들은 그들이 전력할 일은 \"기도하는 것과 말씀전하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4절). 이것은 후대 교역자들의 할 일을 표본으로 보여주기도 합니다.
여기 \"말씀 전하는 것\"이 강조된 동시에 \"기도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강조된 사실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고는 말씀전파에 열매를 맺지 못할 뿐입니다. 또 전도자 자신이 영적으로 살기도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전도자는 말씀 전파와 함께 기도생활을 힘써야 됩니다.
1. 본문 7절은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입니다.
누가는 다시 한번 교회의 확장에 대해서 이야기합니다.
교회의 계속적인 발전에서 하나님 은혜와 능력이 더욱 더 실증(實證)되기 때문입니다.
확실히 교회의 급속한 확장, 마치 순식간에 세워진 것 같은 일은 이미 하나님의 놀라우신 역사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시작하신 그 성업을 추진시키시며 이 세상이 믿는 이들의 수효를 감소시켜 그 전체의 그루터기가지 근절시키려고 그처럼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그 수를 중대시키셨다는 사실은 한층 더 놀라운 일입니다.
1) 본 절 초두는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입니다.
누가를 통해서 말씀한 것은 그 말씀이 훨씬 멀리 퍼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두 가지 방식으로 확대되었다는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한편 새로운 제자들이 말씀에 복종하게 되어 증가되어 가는 방식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 각 사람이 말씀 안에서 진보를 이룬 방식입니다.
그런데 누가는 여기서 전자와 같은 종류의 성장을 다루고 있습니다.
누가로서는 바로 다음 \'제자의 수\' 를 언급함으로 그 일을 설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는 이 신앙의 증진을 단일한 도시에 국한시키고 있습니다.
다른 지방에도 역시 제자들이 흩어졌다는 사실이 믿어지기는 합니다.
그러면서도 일정한 조직체가 있었던 곳은 단지 예루살렘 뿐 이었기 때문입니다.
2) 본 절 끝부분은 \"하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입니다.
적절하게 말해서 우리의 믿음은 복음의 가르침에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 도에(믿음에) 복종하니라\"고 한 것은 누가가 이른 바 전유법(轉喩法)을 사용한 것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믿음\'이라는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또는 그리스도교의 실질적인 신앙고백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누가는 분명하게 제사장을 지적해서 말합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이 대체로 적대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그 제사장들 중의 다만 몇 사람의 개종자, 아니 많은 무리의 개종자가 생겨났다는 것은 모두가 더욱 놀라운 하나님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맨 처음에 제사장들은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요7:48,49)라고 비웃으며 말하여 그리스도 자신을 거스려 분노를 터뜨렸었기 때문입니다.
2. 8절은 \"스데반이 은혜와 권능이 충만하여 큰 기사와 표적을 민간에 행하니\"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교회에 대한 새로운 싸움의 이야기를 합니다. 이로서 복음의 영광은 언제나 십자가와 여러 가지 고통과 더불어 결합되어 있었다는 것이 분명해집니다
그러나 요점은 교회가 한 사람의 인간이 대표로 되어 공격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생겨난 사실은 그들의 적이 훨씬 더 큰 용기를 지니게 되었고 또 무고한 피를 흠뻑 젖었으며 평상시보다 더욱 잔인하게 분노를 터뜨린 것이었습니다.
이 일 이전에는 그들이 투옥한다든지 매를 때리는 일 이상으로 더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스데반의 생전에나 죽음에서나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이름이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해시키기 위하여 스데반이 \"믿음과 능력이 충만했다\"고 말함으로서 말문을 연 것입니다.
그 말로써 누가가 뜻하는 바는 스데반의 신앙이 뛰어났으며 또 기적을 행할 만한 능력에 있어서도 누구보다 뛰어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믿음이 충만했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의 신앙이 완벽했다고 상상하면 안됩니다.
다만 성경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사를 풍성하게 받은 사람들을 부를 때에 그러한 은사가 \'충만하다\'는 표현을 한 것 뿐 입니다.
이 \'능력\'이라는 말을 우리는 문제없이 기적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믿음\'은 지혜의 은사만이 아니요 뜨거운 열심도 포함하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의 탁월성으로 인하여 그의 이름이 유명해졌습니다.
그러기에 그 결과는 그 사악한 군중들이 한꺼번에 그에게 반항했습니다.
성령의 능력과 은혜가 등장하여 나타나게 될 때에는 흔히 그와 동시에 사단의 광포가 격발되는 일이 생겨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의 문맥으로 볼 때 스데반은 복음의 가르침을 퍼치는 일에 쉴 사이 없었고 대담하였다는 사실이 분명할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 일에 대해서 그 순간에는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게으르게 쉬고 있을 수 없었던 스데반에게 그런 신앙을 주신 주님을 찬양하는 것으로 그는 만족한 것입니다.
3. 본문 9-10절은 \"(9) 리버디노 구레네인 알렉산드리아인 길리기아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의 회당이라는 각 회당에서 어떤 자들이 일어나 스데반으로 더불어 변론할새
(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입니다.
이것은 핍박의 시초였습니다. 그 불신앙인들이 논쟁으로 그리스도를 대항하는 헛된 시도를 한 다음에 그 첫 시도가 아무런 성과를 가져오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했을 때에 그들은 중상과 소란에 호소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폭력을 구사하여 살인까지도 범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일어나\' 라는 동사로서 자기가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말로써 공격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또 그들이 처음부터 스데반을 재판 자리에 끌어내지 아니하고 먼저 반대의 논쟁으로 그를 공격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더욱이 누가는 그들이 사업상의 관계로 또는 배우려는 의욕 때문에 유대에 와서 있었던 이방인들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래서 누가는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구레네에서, 더러는 알렉산드리아에서, 더러는 길리기아에서, 그리고 그 밖의 사람들은 아시아에서 온 사람들이었다고 상기합니다.
그 사람들은 모두 리버디노의 회당에 소속되어 있었다고 누가는 말합니다.
짐작컨대 로마의 시민들인 자유민들은 자비로 회당을 건립하도록 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회당은 특히 각 지방으로부터 자주 예루살렘에 오는 습관을 가졌던 유대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그런 일을 하도록 자극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만큼 더욱 열심히 그리스도를 받아들였어야만 했습니다.
그런데도 먼저 그리스도를 반대하여 마치 나팔을 불어댄 것처럼 다른 사람들의 분노를 격발시켜 주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누가는 그 다음의 많은 구절에서 각 지방의 유대인들이 특히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적이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리고 가장 악의에 차서 소란을 일으킨 사람들이라는 사실을 이야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그들이 다수라는 것을 지목해서 말합니다.
여러 지역에서 모여온 많은 사람들이 단 한 사람에게 능가되어 그들이 부끄러워 입을 다물 수밖에 도리가 없다는 사실이 분명했기 때문에 단념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승리가 더욱 더 선명해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스데반은 이미 자기 신앙과 기적으로 사람들의 호의를 샀고 자신의 지반을 굳혔습니다 이제 누가는 논쟁을 걸어온 자들에게 자신이 그들보다 훨씬 우수하게 보이는 방식으로 반박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적들이 당하지 못했다고 누가가 말한 그 \'지혜와 성령\'을 누가는 별개의 다른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두 말은, 즉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에게 주신 지혜에 대항할 수가 없었다 하는 뜻입니다.
누가는 두 면으로 그것을 표현하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단순히 인간들로서 싸운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곧 복음의 적들이 패하게 된 이유가 그들이 스데반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하나님의 성령과 맞서 싸운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우리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의 모든 종들에게 동일한 성령을 약속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오직 진리를 위하여 성실하게 싸워야 합니다.
그리고 입과 지혜를 주께 구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말할 수 있는 충분한 장비를 갖추게 될 것이요 따라서 우리 적들의 약삭빠름도 수다함도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성령은 오늘도 화형장으로 끌려간 순교자들의 입을 통하여 큰 효력을 나타내십니다.
또 날마다 여전히 동일한 활동을 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비록 무지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들은 자기들의 음성만을 가지고도 마치 벼락치는 것과 마찬가지로 교황파의 우두머리 신학자들을 놀라게 해 줄 것입니다.
행6:11-15 사람들을 가르쳐
교회가 다시 핍박을 받았습니다(9-14).
슐라텔(A. Schlatter)은 이 단계에 교회 핍박이 극렬화 된 사실을 지적하였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교회를 대항하는 유대교의 투쟁은 이제 더욱 심해졌다. 유대교가 처음에는 기독교의 전도를 금하다가 그 다음에는 사도들을 구타하던 정도였다. 그런데 이제는 전도자를 처음으로 사형에 처하고 따라서 온 교회를 전면적으로 핍박하여 기독교를 전멸하려고 노력하게 된 것이다\"고 하였습니다.
스데반은 집사였으나 복음 전파에 사도 못지 않게 열심히 있었습니다(8-10).
그는 주로 헬라파 회당(이방에서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세운 회당들)에 출입하면서 전도하다가 대적들과 충돌되어 마침내 성전과 율법과 모세를 거스린다는 거짓 증거로서 고소를 당하였습니다(11-14). 스데반은 실상 그런 죄를 범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주장한 것은 다만 신약시대에는 성전 관념이나 율법의 의식(儀式)을 예수님 오시기 전(구약시대)과 같이 가질 것이 아니라 복음적 정신에 입각하여야 할 것이니 만큼 거기에 변동된 것이 있다고 하였을 것입니다(히9:10, 10:1).
그렇게 가르침은 사도 바울의 복음 사상과 일치한 것입니다.
1. 본문 11-13절은 \"(11)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 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12) 백성과 장로와 서기관들을 충동시켜 와서 잡아 가지고 공회에 이르러
(13) 거짓 증인들을 세우니 가로되 이 사람이 이 거룩한 곳과 율법을 거스려 말하기를 마지 아니하는도다\" 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타도되어 그 대적자들은 논쟁을 단념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거짓 증인을 내세워 중상으로 그들을 압박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악의를 가지고 싸웠다는 것은 이로써 명백해집니다.
거짓말을 바탕삼아 자신들을 변호하려 하는 것보다 더 추잡한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사람이란 어떤 다른 점에서 나무랄 만한 일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 사람을 거짓 증거로 누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자기들의 열심을 구실로 해서 예사롭게 그 일을 제멋대로 했습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오늘에도 우리에게 대하여 거짓되게 증거를 틀어넣고자 할 때에 성경의 명백한 구절들을 고의적으로 더럽히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무지를 통해서 과오를 범하는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가르침을 평판 나쁘게 만들기 위해 성경의 의미와 말을 모두 제멋대로 왜곡시키지 않는 자는 그들 중에 단 한 사람도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에게 대해서 비인도적인 중상을 강단에서 날조하기까지 합니다.
만일 당신이 이들 랍비들에게 사람을 중상하는 일이 옳은가 아닌가를 묻게 된다면 그들은 확실히 일반적으로 말해서 그것은 안 된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될 때는 선량한 열심이 그들을 변명하게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와 우리의 주장을 괴롭혀 줄 수 있는 일이 아무런 불법도 아니라고 그들이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거짓말과 불성실과 파렴치한 뻔뻔스러움을 자행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은 위선은 또한 누가가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스데반을 죽이기 위해서 거짓 증거를 난용하고 있는 그들의 눈을 멀게 하였습니다.
사단이 자기의 주권을 주장하고 나설 때에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들을 잔인한 행위로 몰아칠 뿐만 아니라 그들의 눈을 멀게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자기들이 스스로 원하는 대로 무엇이나 하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특히 이 실예로 좋은 열심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만일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위험한 구실이 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언제나 별안간 격렬한 열광으로 달려가며 동시에 일체의 범죄를 은폐하는 훌륭한 가면도 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4절은 \"그의 말에 이 나사렛 예수가 이곳을 헐고 또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 함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입니다.
1) 그들은 이처럼 그리스도를 말할 때에 마치 그에 대한 추억이 몹시 싫은 듯이 경멸하는 어조로 말합니다. 동시에 그들의 중상으로 추론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스데반이 율법의 폐기를 말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그림자에 대한 실체를 외형에 대한 본체를 대비시킨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의식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지된다고 해도 그 의식의 참된 본질은 영적인 것이기 때문에 여전히 남아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의식들을 영원히 지속하기를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유형한 것, 물질적인 것, 현세적인 것, 그리고 눈으로 분명히 볼 수 있는 것 이외의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만일에 의식의 관용이 계속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외형적인 것 이외에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본질적인 것이 그 밑에 깔려 있지 않는다면 그것은 덧없이 지나가서 소멸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식의 참된영존은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 그것이 폐기될 때에 이루어집니다
그 때로부터 그 의식의 가치와 목적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다는 일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2) 본 절 중간부분은 \"모세가 우리에게 전하여 준 규례를 고치겠다함을\" 입니다.
이로써 스데반은 율법의 의식의 아주 일부분만을 의미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습니다 인간이란 흔히 외부적인 과장된 표현에 애착을 두기 때문에 그 사람들은 스데반이 한 말을 그가 율법을 전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깎아 내린 것처럼 해석한 것입니다.
율법의 주요한 계명은 확실히 하나님께 대한 영적 예배와 신앙과 의와 그리고 공정한 재판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외부적인 의례를 훨씬 높이 존중시하기 때문에 특히 희생에 관해서 정해진 의식절차를 각별히 뛰어난 모세의 규례라고 부른 것입니다. 이것은 이 세상이 시작될 때부터 인간 본성 안에 있어온 일이요 또 끝까지 그럴 것입니다.
예를 든다면 오늘에 교황제도 주의자들은 자기들의 가면을 쓰지 않고는 하나님 예배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교황제도 주의자들은 하나님의 규례 대신에 인간이 만들어낸 시시한 것들 밖에는 아무것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이들 유대인과는 크게 다릅니다.
3) 본 절 끝 부분은 \"우리가 들었노라 하거늘\" 입니다.
스데반이 모세나 성전에 관해서 결코 존경의 생각을 갖지 않고 이야기한 일이 없었다는 사실은 스데반의 변명에서 매우 분명해질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면서도 이런 비난이 그에게 향해진 것은 전혀 구실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폐기를 가르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좋은 말로 또는 은혜롭게 한 말을 고의로 왜곡하였습니다.
그 점에서 그 증거는 거짓이었으며 또 거짓말을 하도록 매수한 것이었습니다.
비슷하게도 그리스도는 자신이 율법을 파괴하려고 오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도록 강요당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공공연하게 의식의 폐기를 말씀하셨을 때에 악한 자들은 그리스도가 마치 율법 전체를 폐기하려고 했던 것처럼 곡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의 적들은 또한 예수가 자신의 몸에 대해 예루살렘 성전과 관련시켜서 말씀하신 바를 악의로 곡해했습니다.
바울이 \"선을 이루기 위하여 악을 행하자\"(롬3:8)고 가르쳤을 때에 거기 대한 반대가 왜 일어나지 않았던가?
그러므로 오늘 우리들은 우리가 가르치는 성실하고 적절하며 유용한 일들이 짓궂게도 뒤집혀서 받아들여지고 썩어진 생각으로 곡해될 때 이상하게 생각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 실제 사실로 놀랄 것이 없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잘못 해석되는 주제가 아닌 것처럼 그렇게 조심스럽고 온건한 방법으로는 결코 다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거짓의 아비인 사단은 언제나 그런 일에 자신을 바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육체의 분별에서 벗어나는 많은 일들이 있기 때문에 인간만큼 중상을 받기 쉬운 것이 아무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런 중상이 가르침의 성실하고도 건전한 의미를 그릇되게 합니다. 참으로 사단의 이러한 악의와 그 모든 책략은 우리를 더욱 신중하게 하고 더욱 조심하게 하여 일을 왜곡시켜 말한다든지 적절하거나 정당하지 않은 말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가지고서 그들은 우리를 대항하여 싸우려고 무장을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악한 자들이 갈망하는 그 기회를 단호히 거부하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에 우리가 적절하게 또는 충실하게 마련한 그 가르침이 비뚤어진 곡해로 인하여 더럽혀지고 왜곡되고 산산조각으로 부서지는 것을 본다고 하더라도 우리가 시작한 것을 후회한다든지 혹은 그 후부터는 더욱 망설여야만 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도 사단의 직위를 피할 수 없었는데 우리가 사단의 유독성에 물린 상처에서 안전하다거나 면제되어야 한다는 것은 공평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가르침을 부정한 불명예로부터 수호해 주신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에 하나님의 진리가 방해받고 있는 그 거짓을 없애고 말살시키는 것이 우리들의 책임입니다.
다만 그 특정한 비열함이 우리의 진로를 방해하지 못하도록 정신과 결의를 우리 속에서 잃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는 인간이란 모두 죄와 악한 의욕의 완전한 노예가 될 정도로 타락되었다고 가르치기 때문에 우리의 적들은 그것을 그릇 해석하여 우리가 인간이 자기들의 자유의사에 의하여 범죄한다는 사실을 부인하고 어떤 다른 근거로 악을 행하게 되어 따라서 인간에게 조금도 죄의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만들어 냅니다.
그들은 또한 우리가 선을 행하려고 하는 욕망을 파괴한다는 비난까지를 하는 것입니다
성자들의 업적이란 언제나 그 속에 얼마간의 불완전함이 섞여있기에 본질적인 가치의 면에서는 칭찬할 만한 것이 되지 못한다고 우리가 그것을 부정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발뺌합니다.
즉 우리가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의 구별을 전혀 배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정하고 말합니다.
또 신도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죽으심 이외에서는 아무데서도 쉼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가 말하기 때문에 그들은 이렇게 반대합니다.
즉 그런 방식으로는 육의 제어가 이완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도 더 이상 소용이 없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에게 속한 영예를 사냥한 짐승처럼 산산조각으로 찢어서 자기들 마음대로 이리저리 나누어 주고 있는데 그 영예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돌릴 때에 그들은 우리를 거룩한 것들의 적이라고 당치 않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성령의 자유대신에 육의 방종을 추구하고 있다고 거짓된 비난을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만찬을 순수하고 적절하게 사용하는 일을 회복시키려고 할 때에 그들은 우리가 성만찬을 뒤집어엎고 파괴하고 있다고 뻔뻔스럽게 떠들어대는 것입니다
아카데미 철학파와 같이 모든 것을 자기 방식대로 팽개쳐 버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에서 하나님의 예정에 관한 것을 가르칠 때 그것이 그들의 비위에 거슬리기 때문에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을 폭군으로 만들어서 그가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을 영원한 죽음으로 이미 던져버린 것을 보면서 무죄한 사람들을 멸망시킴으로서 스스로 기쁨을 느끼는 그런 분으로 만들고 있다고 추악한 비난을 퍼붓습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을 모두 그런 식으로 비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거기 반하여 이런 사람들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존경하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이해하기는 합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입으로 가르치신 바를 우리가 말할 따름이라는 것을 충분히 이해하고 있기는 합니다.
확실히 이러한 악의를 받아야 하는 일은 불유쾌하고 참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그 일에 대한 정당한 이유의 방위를 단념하여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진리는 고귀한 것이요 우리에게 있어서도 그래야만 합니다.
하나님께 버림을 받은 자들에게는 그것이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고후2:16)가 될 것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스데반에 대한 비난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그 주요한 문제점은 스데반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그 가르침에서 자기의 것이라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기에 그들이 하나님과 모세를 모독했다고 한꺼번에 묶어놓은 것은 타당합니다.
그가 성전과 율법에 대해서 오만불손하게 말하였다고 그들은 입증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오심과 함께 성전과 의식에 어쩔 수 없이 종말이 왔다고 그가 말한 까닭에 그 속에 모독이 들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스데반이 그들이 보고 해주는 방식대로 말했다고는 믿어지지 않는 일입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의 거짓된 증언을 채색하기 위하여 그의 훌륭하고 진실한 선언도 짓궂게 곡해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비록 그 말을 변경시키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어쨌든 스데반이 성전과 율법에 대해서 이를 훼손시킨 원인이 된다는 점에서 그는 그 이상 더 진정한 찬사로서 그것들을 찬양할 수 없었을 정도입니다.
유대인들은 만일 그 성전의 옛 모습대로의 상태가 영원토록 지속되지 못한다면 성전의 영예가 끝장나는 것이요 또 만일에 율법의 의식이 항상 화려하게 지켜지지 않는다면(히8:5, 10:1) 율법은 효과가 없어지는 일이요, 중요성이 상실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습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전의 위대한 가치와 의식의 유효성은 차라리 그것들의 원래의 모형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돌려지게 될 때에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비난에 어떤 구실이 주어진다 해도 그것은 부정이요 사악한 것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사실이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그 사건이 사실대로인지 아닌지 그의 적들이 고발하는 대로 그가 말한 것 인지의 문제가 있겠습니다.
그러면서도 거기에 포함되고 있는 문제의 주요점은 바로 그 성질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데반이 하나님 예배의 형식이 바뀌어져야만 한다고 가르쳤다는 비난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 그들은 그것을 하나님과 모세를 훼방한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쟁점은 우리가 말한 대로 사실의 문제이기보다는 원리의 문제입니다.
눈에 보이는 성전이란 하나님의 충만하심이 거하는 보다 훌륭한 지성소의 영상에 불과합니다. 또 율법의 외관은 임시적이라고 스데반이 가르치고 내세웠을 때에 과연 하나님과 모세를 손상시키고 훼방하는 일이 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3. 본문 15절은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입니다.
피고소인이 변명하기를 사람들이 기다릴 때 그를 주목하게 되는 일은 재판정에서 흔히 있는 일입니다. 이제 누가는 스데반이 천사처럼 보였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평상시 상태에서 스데반의 얼굴 모습을 말한 것이 아닙니다.
그 순간에 스데반이 보여준 안색에 대해서 한 말입니다.
피고인들의 얼굴빛은 대체로 초췌한 것이 보통입니다.
또 말은 더듬거리기 일쑤입니다. 또 그밖에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보통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누가는 스데반에게는 그런 일들이 아무것도 없었고 오히려 그에게는 어떤 장엄한 것이 빛을 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는 때로 사무엘상 29장 9절이나 사무엘하 14장 17절, 19장 27절 등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그런 의미로 천사들의 이야기를 유추법(類推法)으로 차용하는 관습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7장 강해
행7:1-4 대제사장이 가로되
본문에서는 먼저 그 당시 공의회 의장인 대제사장이 고발된 스데반의 언행 행적에 대하여 사실여부를 묻습니다(1-). 스데반의 답변인데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기 백성을 불러내어 구원하시는 전과정을 소개하면서 아브라함을 그 실예로 들고 있습니다(2-4).
1. 본문 1절은 \"대제사장이 가로되 이것이 사실이냐\" 입니다.
1) 지금까지 대제사장이나 모든 공의회 사람들에게 공정성 비슷한 것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대제사장의 말에는 가장 불공정한 편견이 있습니다.
대제사장은 스데반에게 어떤 이유로 그렇게 가르쳐야 했는가를 묻지 않았습니다.
또는 법(法)이 마련하고 있는 바대로 변호가 중요한 사항이라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에게 변호할 기회도 주지 않았습니다. 다만 간단하게 스데반의 한 말이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그런 말을 했는가 어떤가 하는 것만을 스데반에게 심문하였습니다.
그와 유사하게 칼빈 당시 교황제도주의자들은 어떤 가르침에 대해서 그 성격을 탐사(探査)하는 일에 과감하지 못하고 또 그것이 성경에 의하여 증명될 수 있는가 아닌가를 추구하지 못하고 단지 그들은 누구라도 자기들의 미신에 대해서 감히 불평을 말하고 있는가의 여부만을 추구하며 그런 자를 유죄로 판결하면 즉시 화형에 처하였습니다
2) 더욱이 스데반의 답변은 처음에 모호하고 부적당한 것으로 보일 수가 있었습니다.
우선 스데반으로서는 아주 옛 시대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그리고 나서 스데반은 긴 이야기를 설파했는데 그 속에는 거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언급이 없었습니다.
말을 많이 함으로서 사건에서 벗어나 방황하는 것은 큰 잘못입니다.
좀더 자세히 관찰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 장황한 연설 속에는 불필요한 말은 아무것도 없고 그 사태가 요구하는 대로 요점을 말하고 있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은 종교와 하나님 예배를 뒤엎으려고 시도한 배교자로 고소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여전히 조상들이 언제나 예배하였던 그 동일한 하나님을 보유하려고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용의주도하게 강조합니다.
그래서 스데반으로서는 그 사악한 변절의 죄에 대한 고소를 가라앉히는 것입니다.
한편 스데반은 자기 적들의 율법에 대한 열심 때문에 그렇게 달려드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증대시키는 일 이외에는 염두에 가지고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처럼 가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이 거짓된 거만을 떼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조상들의 이름을 입에 올렸고 또 그 국민의 영광을 너무나도 뽐내고 있었기에 스데반은 역시 그들이 그런 것들을 자랑할 만한 바가 되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의 조상들의 잘못이 너무도 많고 커서 그들은 부끄러워하고 비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3) 이제 우리는 주요 문제인 사건의 핵심에 와 있습니다.
문제는 성전과 의식에 관한 것이었기에 스데반은 분명히 성전이 세워지기 전에 또는 모세가 출생하기 전에 그들의 조상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하나님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된 것이었다고 그들에게 생각나게 합니다.
그 연설의 첫 부분은 좀 더 면밀히 관찰해 보면 이러한 견해를 지닙니다.
연설의 둘째 부분은 하나님께서 모세의 손에 의하여 그들에게 주신 모든 외부적 의례는 하늘의 모형을 따라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이로서 의식의 법이란 그 자체에 목적이 있는 것이기 보다는 다른 목적과 관련되어 있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리고 진리를 무시하고 표적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어리석게 또는 실제로 잘못 행동하고 있다는 결론이 됩니다.
만일에 신자들이 스데반의 연설 전체를 이 두 가지 주요한 문제점에 관련된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가 끝에 가서 다시 한번 간단히 반복하려고 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거기서 그 상황에 너무도 잘 맞지 않는 사실을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할 것입니다.
한편 그 연설 자체의 목적(scopum)에 대한 설명은 우리가 관심을 기울일만한 점을 일일이 점검할 수 있도록 하는 일에 방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2. 본문 2절은 \"스데반이 가로되 여러분 부형들이여 들으소서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하란이 있기 전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 영광의 하나님이 그에게 보여\" 입니다.
1) 본문 2절에 \"여러분 부형들이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스데반은 그 의회에 앉아 있는 이들이 복음의 불구대천의 적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민중의 법에 따른 지배권은 여전히 그들의 손에 쥐어져 있고 또 그들이 교회를 통괄했으며 하나님께서는 아직 그 일을 거절하지 않으셨기 에 스데반으로서는 예절을 따라서 그들을 \'부형들\'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참으로 스데반으로서는 그 사람들의 호감을 사려고 아첨군처럼 비유를 맞추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지배권에 대해서 그 제도가 변경되어서 그들에게서 권위가 탈취될 때까지 그러한 경의를 표한 것입니다.
그들이 점유하고 있는 지위에 대해서 존경하였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그의 일을 방해하거나 그의 입을 막는 일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좋지 못하고 공허한 거짓된 직함에 대해서 우리를 거기 얽어매려고 시도하며 또한 그들의 견해가 불신앙적인데도 우리에게 동의를 강요하는 일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를 보여줍니다.
2) \"메소보다미아에 있을 때에\"에서 디그리스와 유브라데스 두 강 사이에 놓여 있는 이 지방에 그 이름이 주어진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1) 그러나 그가 \"하란에 있기 전\"이라고 말한 것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서 갈대아에서 하란으로 이주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곳은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한 성읍인데 플리니(Pliny)는 그것을 아라비아의 성읍으로 지정하고 있기는 하지만 크라서스(Crassus)와 로마군의 패전으로 유명해진 곳입니다. 갈대아가 여기서는 메소보타미아의 이름으로 기술돼 있는 것이 이상할 것 없습니다.
유브라데스와 디그리스 두 강에 둘러싸여 있는 이 지역은 엄격하게 말한다면 \'두 강 사이의 땅\'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학자들은 보통 이 이름을 앗수리와 갈대아에 부여하기 때문입니다.
(2) 요점은 바로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명확한 명령을 받아 실천에 옮겨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났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다른 쪽으로 보면 그가 고향집에 있었을 때에 그에게 주어진 바를 찾아 나섰으므로 하나님의 성실하신 자애가 그를 인도한 것입니다.
이 점에 관하여는 여호수아서 마지막 장을 살펴야 합니다(24:2-3).
(3) 그러나 여기의 모세가 한 이야기는 그것과 다소간의 차이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창세기 11장 끝 부분(11:31)에서 아브라함이 고향집을 떠나 그 조국을 바꾸었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는 12장 첫 부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이야기하면서 그는 12장 첫 부분에서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다고 첨가한 것입니다.
결론은 단순합니다.
모세는 이 나중의 구절에서 아브라함이 집을 떠난 후에 생겨난 일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고 있지 않는데 경솔하고 생각 없는 사람들이 가끔 하는 습성처럼 아브라함이 타국 땅을 방랑하려는 무모한 생각을 가지고 집을 버린 것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아브라함의 출발의 이유를 내세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그는 다른 땅에 가서 이주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그가 외국 땅에서 하나의 방랑자였더라면 하나님은 그에게 자기 친족과 아비의 집을 버리고 고향 땅을 떠나 이주하도록 명령하실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모세의 말과 매우 훌륭하게 일치하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 게 됩니다.
그것은 모세가 이 여행길이 인간적인 가벼운 심정에서 취해진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된 것이라는 사실을 관련시킨 다음에 모세는 나중에 잎에서 생략한 것을 첨가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일을 적적하게 처리하는 일반적인 히브리 방식입니다.
3) \"영광의 하나님\"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서론에서 스데반은 자기가 조상들로부터 또는 조상들이 지켜온 진실된 종교로부터 추호라도 이탈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종교의 모든 것, 하나님께 예배, 율법의 가르침, 모든 예언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함께 이루신 그 약속에 의존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셨다고 고백할 때에 스데반으로서는 그 최초의 계시로부터 샘물과 같이 흘러 나오는 율법과 하나님 그분 자신을 \"영광의 하나님\" 이라고 부름으로서 그분을 거짓되고 가공적인 신들과 구별하여 홀로 영광을 받으실 만한 분으로 여긴 것입니다.
3. 본문 3절은 \"가라사대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 내가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 하시니\"입니다.
1) 본문 3절 초에 \"네 고향과 친척을 떠나\"에서 자기 고향 땅에서 떠나 유랑하게 되는 일이 그 자체가 그다지 괴로운 일이 아니라는 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의 마음에 고통을 더하시려고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1) 그리고 그것은 다만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하시려는 데 목표가 있는 것이 아니요 또 다른 사항 때문이기도 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그가 거주할 만한 땅에 대한 아무런 편의를 그에게 제공하지 아니하셨고 얼마동안 그를 미결상태와 호의 속에 두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순종은 더욱 더 칭찬할만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고향 땅의 쾌적함도 다 버리고 그가 유랑과 다름없는 길을 자진해서 떠났기 때문이요 또 자기가 몸을 안착시킬 만한 확실한 땅도 발견하지 못한 채로 오히려 얼마동안 이곳 저곳으로 방황하도록 명령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땅에 대한 설명이 그에게 연기되어 있기에 그것은 속임(frustratione)을 당하는 일과 거의 비등합니다.
(2) 더구나 아브라함이 그러한 기본적인 것들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이 얼마나 그에게 유익하였던가 하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일상 경험을 통해서 배우는 바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큰 일을 떠맡기 위해서는 거룩한 열성을 지니게 되지만 그들의 열심히 식어질 때는 즉시 그 일을 후회하고 쉽게 원상태로 되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뒤에 버리고 온 것들을 다시 회상함으로 그의 행로의 도중에 용기가 떨어지는 일을 막기 위해 하나님은 그 출발시부터 그의 마음을 엄격하게 시험하셔서 그로 하여금 무슨 일에나 경솔하거나 무분별하게 착수하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주께서 탑을 세우는 일에 관한 말씀을 하신 그 비유가 이 일과 부합됩니다(눅14:28).
주께서 그 비유에서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먼저 그 비용을 계산해 보라는 것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 건축물이 완성되지 못한 채 남겨지는 부끄러움에 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자기의 고향 땅을 떠나 먼 나라로 여행하도록 명령을 받고 또 하나님께서 그를 여러 방향으로 돌아다니게 하신 것이 아브라함 자신의 특수한 상황이었다고 하더라도 그 동일한 말씀 속에는 우리 모두의 소명에 대한 상식적인 설명이 들어있습니다.
우리는 모두가 명백하게 우리의 고향 땅을 떠나라고 명령을 받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도 자신을 부인하도록 동일한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비의 집을 떠나가도록 명령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자신의 의지와 육체의 욕망을 포기하도록 명령되고 있습니다.
결국 부모와 처자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게 한다면 그들을 모두 단념할 수 밖에 없습니다(마16:24이하. 10:37).
아브라함에게는 \'떠나라\' 는 단순한 명령이 주어졌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같은 일을 어떤 조건부로서 하도록 분부되어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느 특정한 장소에서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게 된다면 그 때에는 우리가 집에서 풀이 죽어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엎드려 있기 보다는 차라리 유랑의 길을 택하여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우리는 우리의 눈 앞에 아브라함의 시범을 놓아두어야 합니다.
그는 믿는 자들의 아버지요(롬4:16, 17), 또 모든 면으로 시험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브라함은 자기의 고향 땅, 친족들, 그리고 자기 자신을 잊어버렸습니다.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께 위탁하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여겨지기 원한다면 우리도 성질상 아브라함과 다를 것이 없어야 합니다.
2) \"네게 보일 땅으로 가라\"에서 우리는 앞에서 언급한 바를 유의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의 인내가 시험받도록 미결정 상태대로 놓여졌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의뢰하는 일을 배우기 위해서도 그것을 역시 우리 자신의 경험에 관계가 되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눈 앞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때에라도 확실히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이 믿음의 주요한 과제입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우리가 거주할 만한 땅을 보여주실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가 이 세상에서는 외국인들이기에 어느 곳에도 알맞고 영구적인 안주지는 없습니다.
결국 바울이 골로새서 3장 3절에서 말씀한 대로 우리의 생명은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죽은 사람과 같아서 하늘에 감추어져 있는 보장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원한 거주지에 관해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순례자가 되도록 명하셨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오직 그의 약속을 의뢰하도록 만드십니다.
그러한 유예(猶豫)가 우리를 실명시키지 않게 하기 위하여 우리는 신앙의 일반적인 규율에 집착하여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일을 아직 우리에게 보여주시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부르시는 그곳을 향하여 전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4. 본문 4절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 아비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사방 거하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입니다.
이 말씀 속에는 아브라함의 기꺼이 하려는 신앙의 반응(The ready response of his faith) 이 찬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한번 부르심을 받았을 때 지체하지 아니하고 즉시 서둘러서 자기 감정의 우세를 하나님의 명령의 밑으로 이끌어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왜 아브라함이 하란에 머물렀었는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아브라함의 부친의 쇠약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거기서 출발을 늦게 한 원인이 되었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부친 데라는 거기서 얼마 후에 죽었다는 것을 우리가 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께서 앞길을 분명하게 보여주시기까지 더 멀리 이주하는 모험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그 아버지의 노쇠함과 질병으로 인하여 거기에 얼마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것이 훨씬 있음직한 일처럼 보입니다. 스데반은 분명히 아브라함이 부친이 죽은 후에 거기를 떠났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7:5-8 그러나 여기서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 중에 사용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약속입니다.
1. 본문 5절은 \"그러나 여기서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저와 저의 씨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 일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첫째는 하나님께서 그 종의 인내를 시험하셨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그의 고향 땅에서 끌어내서 가나안 땅에서 타국인으로 살게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자신의 매장지로 산 땅 이외에 발을 뻗칠만한 땅도 소유하지 못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현실생활에 유용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재산으로 생각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그 특정한 땅은 얼마간의 돈을 주고 산 것이기에 주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아무것도 주신 것이 없었다고 스데반이 말한 것은 옳은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에서 기대하였던 것은 돈이나 그 밖의 무슨 인간적인 수단으로서 획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 실제로는 아직 그것을 아브라함에게 보여 주시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말씀으로 그를 붙들어 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아직 손에 쥐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간직해 두셨다고 약속하셨을 때에 그것은 우리를 굳세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그것 자체, 다시 말해서 토지의 소유는 아직 되어 있지 않았지만 의지가 되는 것으로서 하나님의 약속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약속만으로 만족하여 아브라함으로는 가나안 땅에서 하나의 유랑자의 불안정한 거주 이상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헬라어 (에팡겔레스다이)는 단순히 \'약속한다\'(promittere)는 뜻이기에 에라스므스가 왜 그것을 \'하나님이 다시 약속하셨다\'(repromisisse)로 여기서 번역하였는지 우리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반대의 의미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셨지만\' 으로 이해합니다.
속임수의 현상이 (species frustrationis) 부수적으로 드러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누군가가 혹시 그것을 차라리 자주 반복된 약속이라고 해석하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것을 각자의 견해에 맡겨두고 싶습니다.
셋째로 이 약속은 단순한 조롱과 그다지 멀지않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그 땅을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80세였고 아내는 불임녀(不姙女)였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으로서는 자녀를 낳을 희망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극도로 바보스러운 일처럼 보입니다.
어찌하여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차라리 자손을 주시리라는 약속을 하시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아브라함은 질문도 하지 않았고 자세히 캐어묻는 논쟁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들은 그것을 조용히 또는 순종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하나의 뚜렷한 신앙의 시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실제로 그것을 그의 종에게 주시는 일을 연기하실 뿐 아니요, 또한 어떤 의미에서는 그를 조롱하시는 것처럼 보일런지는 모르지만 자신의 말씀으로 그의 종을 격려하고 위로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느 정도로 역시 우리를 다루시는 일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 세상의 상속자로 부르셨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끔 우리에게 실낱같은 생활기준이 될 만한 것조차 제공하지 않으시고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도 주시지 않은 채 우리를 버려 두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일부러 그렇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육체를 가진 자의 지혜를 공허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적절한 존경의 심정을 가지게 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 본문 6절은 \"하나님이 또 이같이 말씀하시되 그 씨가 다른 땅에 나그네 되리니 그 땅 사람이 종을 삼아 사백 년 동안을 괴롭게 하리라 하시고\" 입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게 그들의 조상들이 애굽에 있을 때 그 상태가 얼마나 비참하고 치욕적이었던가를 상기시킵니다.
그리고 그들의 억압받은 노예상태는 오래 전에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예언하셨던 일이었기에 우연히 생긴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한 쪽으로는 그들의 사나운 기질을 길들이고 극기(克己)를 훈련하기 위해서 한 쪽으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그 백성들을 돌보시고 계시기에 그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해서 효과 있는 일이 되어야 했습니다.
그 백성들이 마치 죽음에서 살아난 것처럼 기적적인 회복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은 하나의 비상한 은총입니다.
동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교회(the Church of God)가 그들이 살고 있었던 이외의 다른 장소에 있었다는 사실, 또는 그들의 조상들이 성전이 세워지기 이전에 혹은 율법의 외적 의례가 제정되기 이전에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되었고 하나님의 성실성과 지도로 보호되었었다는 사실을 불가분 회상하게 됩니다.
이러한 요점들은 그 연설의 일반적 주제에 속해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유용한 훈계를 얻을 수 있습니다.
노예 상태 그 자체는 힘들고 괴로운 일입니다.
더구나 주인들이 가혹할 때에는 그것은 견딜 수 없는 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이 거룩한 사람이 자기 자손들이 노예가 되어 수치스럽고 잔인하게 다루어질 것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심한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미 약속되어 있는 가나안 땅의 상속과 타국 땅에서 노예 상태는 그 상황이 정반대로 보였다는 사실은 적지 않은 고민거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자손들이 비참한 노예상태에 두어질 것이라고 예고하셨을 때에 하나님이 처음에 하신 약속을 잊어버리신 것이라고 누가 생각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자손에게 그 땅을 주시리라고 처음에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아직 한사람의 자손도 없었습니다.
그것은 고사하고 자녀를 가질 희망은 이제 다 사라졌습니다.
결국 언제 그것을 주신다는 약속을 하시는 것입니까? 그가 죽은 후인가?
하나님은 바로 다음에 계속해서 그의 후손들이 타국으로 끌려가서 타국인의 노예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기록이 있습니다.
그리고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이라는 말씀입니까? 4백년 동안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실행하시지 않으려고 손을 떼신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까?
이런 일은 단 한번만 되어진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가끔 스스로 모순되신 것처럼 보이는 것같이 우리를 다루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약속하신 바를 취소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방식으로 말씀하시기까지 하십니다.
그러므로 육체에 의하면 하나님은 자기 모순이라고 결론 짓게 될 것이지만 그러나 신앙에 의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서로 훌륭하게 일치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하시는 일과도 일치한다는 사실은 믿기 쉽습니다.
하나님의 의도는 우리들의 신앙의 눈을 더 멀리까지 확대시키기 위하여 마치 양자 사이에 큰 거리가 끼어 있는 것처럼 그 약속을 먼 곳에서 보여주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무수한 곡절을 통하여 각종 장애를 통하여 큰 거리를 통하여 심연의 복판을 통하여 그리고 마침내는 죽음 자체를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된 구원을 향해서 길을 재촉하며 애쓰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하나님이 선택하신 그 백성이 애굽인의 노예가 되어 잔혹한 고통을 받은 것을 볼 때 우리도 오늘 같은 상태가 우리에게 임한다 해도 실망치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폭군 밑에 억압되고 또 악한 자들의 발 밑에 밟히는 일은 새로운 일이거나 희귀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7절은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입니다.
1) 본문 초두는 \"또 가라사대 종 삼는 나라를 내가 심판하리니\" 입니다.
이 심판은 그 백성의 해방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교회의 해방자이신 사실을 보이시려고 자신의 가호 아래 두신 그 백성을 위해 애굽인의 포학과 잔인에 대하여 보복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악한 자들에게 불법하게 괴로움을 당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이 세상의 심판자시어서 어떠한 포학도 벌하시지 않고 두시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자문자답해야 합니다.
\"나는 이 세상의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보호 안에 있기 때문에 모든 위법행위에 대해서 보복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특성이기 때문에 이제 나를 괴롭히는 자들은 하나님의 손에서 도망칠 수가 없을 것이다\"
그와 유사한 구절이 신명기 32장 35절에도 있습니다.
거기에서는 복수하는 일은 하나님께 속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로마서 12장 19절에서 우리가 \"진노하심에 맡겨야 한다\" 결론짓습니다.
그러므로 사도는 \"하나님이 복수하실 것이라고 약속한 사실은 우리의 성급함을 고쳐주실 것이다. 그리고 또 나쁜 감정을 억제하는 일에 틀림없이 효과가 있을 것이다. 스스로 보복하는 자는 그렇게 함으로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그 기능을 그로부터 빼앗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라고 말씀한 것과 같습니다.
시편에서 우리가 읽는 것같이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105:15)고 한 말씀대로 하나님은 그 자녀들에게 가해진 위해(危害)에 보복하시기 위하여 특별한 관심을 기울이신다고 이미 말씀하신 바를 우리가 기억해야 합니다
2) 본문 후반부는 \"그 후에 저희가 나와서 이곳에서 나를 섬기리라 하시고\" 입니다.
구속(redemption)이 성전이나 율법의 의식이 생겨나기 이전에 먼저 행해졌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은혜는 의식에 속박 받지 않았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그와 동시에 스데반은 그들이 구출된 목적이 무엇인가를 지적해 줍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이름에 대한 순수한 예배가 시행되게 하기 위하여 특정한 백성과 특정한 장소를 택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다시 하나님께서 명령하시고 인정하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관찰해야 한다는 사실을 얻어 낼 수 있습니다.
다른 국민들도 역시 하나님을 예배하려는 뜻은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예배 의식은 어디서나 무지로 출발하여 타락하고 부패하였기에 하나님께서는 유대인을 다른 국민들과 구별하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성실히 적절히 예배하도록 한 장소를 그들에게 지정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구절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경고해 줍니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인간이 하나님을 전심을 다하여 예배한다는 그 목적을 따라서 받아들여져야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은혜의 보화를 전 세계 어디에나 나누어 주셨기에 우리가 살고 있는 나라가 어디이든 간에 우리는 순결하고 거룩한 예배를 하나님께 드림으로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영광을 받게 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4. 본문 8절은 \"할례의 언약을 아브라함에게 주셨더니 그가 이삭을 낳아 여드레만에 할례를 행하고 이삭이 야곱을 야곱이 우리 열두 조상을 낳으니\" 입니다.
스데반이 할례라는 것이 하나의 신성한 계약이라는 사실을 인식했을 때에 스데반으로서는 자신에게 가해진 거짓된 중상에 대해서 넉넉하게 이를 제거합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만일 유대인들이 자기들의 구원의 기원을 외적인 표적에다 둔다면 그들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을 그는 보여줍니다.
아브라함이 만일 할례를 받기 이전에 부르심을 받았고 또 그 땅과 구원이 그의 자손들에게 약속되었다면 그들 전체 국민의 영광이 할례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너무도 명백해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울도 로마서 4장 11절에서 동일한 사실을 논합니다.
아브라함은 아직 할례를 받지 않았을 때에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기쁘게 하였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것으로 할례가 의의 원인이 되지 않는다고 추론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어떻게 하나님에 의하여 양자로 삼아졌는가를 상기하게 되는 일은 이 경우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기에 스데반이 한 말은 의심스럽거나 빗나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리고 이 두가지 사항, 즉 할례가 하나님의 은혜의 표적으로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정해진 것이라는 사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자로 삼은 일이 할례보다 이미 앞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스데반이 분명히 표명하였는데 그것은 있음직한 일입니다.
결국 여기서 할례의 의미와 본질에 대해서 더 이상 길게 토의할 필요는 없습니다.
다만 유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할례로서 확증하시는 그 사항을 아브라함에게 우선 약속하신 것인데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표적들은 공허하고 무가치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됩니다.
또 이 \'계약\' 이라는 말에는 매우 유익한 가르침이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에 유의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대한 그의 사랑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성례 전에서 우리와 계약을 맺으신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제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면 첫째로 성례전은 사람들 앞에서의 외적인 고백의 증표일 뿐만 아니요 하나님 앞에서의 내적인 신앙의 확증케 하는 효과도 있는 것입니다.
둘째로 성례전은 진리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성취하시지 않은 것들 안에서는 아무것도 나타내시지 않으시는 까닭에 그것이 공허한 형식이 아닌 것입니다.
행7:9-16 여러 조상이 요셉을
본문은 스데반의 설교에서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받은 약속이 요셉을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에 대한 말씀입니다.
1. 본문 9절은 \"여러 조상이 요셉을 시기하여 애굽에 팔았더니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 입니다.
이 부분은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행동을 보여준 이야기입니다.
그 형들은 자기들의 무고한 동생을 끝장내려고 악하고 잔인한 흉계를 꾸민 것입니다.
그러한 종류의 잔인성은 비인도적인 처사였습니다. 유대인들은 그것이 소수의 사람들이 저지른 개인적인 범죄였다고 항변할 수 없었습니다.
베냐민을 제외한 모든 족장들은 그 비열한 처사에 동시에 자신들을 더럽혔습니다.
그러므로 그 불명예는 그 백성 전체에 미쳤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그들에게 하나의 영예로운 칭호의 체면을 세워주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욱 모든 국민의 망신거리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의 족장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는가 하면 그들은 아주 철저하게 동생 살해범이었다는 것을 스데반은 보여줍니다.
노예라는 것이 일종의 죽음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라도 우리는 그들이 먼저 음모한 사실이라든지 그리고 나서 요셉이 그 잔인한 학대를 견디어 낸 일이라든지 그러한 일들의 모든 죄책이 그 형들에게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에서 분명해진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거스려 저항했을 때에 그들은 자신들을 경멸하였다고 하겠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대하여 부드러우시고 너그러우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원하는 집행자가 될 바로 그 사람을 죽이고 파멸시키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복을 포기하게 된 일이 다른 아무의 허물도 아니요 그들 자신의 허물입니다.
그와 비슷한 일로 모세를 그 백성들의 구원자로 하나님께서 그들 앞에 데려왔을 때에 모세도 거절당했다고 스데반은 조금 후에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혈족의 우월성을 자랑할 만한 아무 이유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해야 할 남은 일이란 부끄러움과 당황함으로 자신들이 어떤 형편에 있든지 오직 하나님의 자비의 덕택으로 알고 강조하는 일이요 또 그것을 빛나게 하기 위하여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이 저와 함께 계셔\"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요셉을 돕는데 있어서 자신의 능력을 분명히 나타내 보이는 그런 방식으로 요셉과 함께 하신 것은 아니었습니다.
시편 105편 18절에서 \"그 발이 착고에 상하며 그 몸이 쇠사슬에 매였으니\"라고 한 말씀이 하찮은 일의 표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요셉으로서는 과연 자기를 돕는 자가 아무도 없었을 때 그리고 또한 쇠사슬에 얽매인 굴욕으로 고통을 받고 동시에 파렴치한 사람에 의하여 형벌을 받게되었을 때에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가끔 당분간 숨어 계시는 방식으로 그의 자녀들과 함께 하십니다.
더구나 요셉은 성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기에 구원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멀리 애굽에 떨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2. 본문 10절은 \"그 모든 환난에서 건져 내사 애굽왕 바로 앞에서 은총과 지혜를 주시매 바로가 저를 애굽과 자기 온 집의 치리자로 세웠느니라\" 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그를 바로의 눈에 들게 하셨다는 그 방식을 첨가합니다.
실상 하나님께서는 어떤 다른 방법으로 그를 도와주실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마음은 훨씬 먼 곳에 있었습니다. 즉 요셉은 그 왕국의 제상이 되어 그의 아버지와 그의 전 가족을 인수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은총\'과 \'지혜\'라는 두 말 속에 환치법(換置法 ; hypallage)이 있습니다.
요셉이 지녔던 지혜가 그가 총애를 받은 원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두 말이 각각 다른 은사였다는 사실을 우리도 인정하기는 합니다.
비록 요셉이 충실한 꿈 해몽자였고 거룩한 지혜를 풍성하게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어떤 비상한 사랑으로 향하도록 감동하시지 않았다면 그 거만스러운 전제군주는 그를 그처럼 영예스러운 높은 자리에 올려놓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총애를 베푸신 그 일의 양식에 대해서 세심한 고찰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혜라는 것은 꿈을 해몽하기 위한 예언의 은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요 훌륭한 조언을 주는 신중성도 뜻합니다. 모세는 이 둘을 다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여기서 한 사람에 대해 말하는 사항은 모든 사람에게 연장됩니다.
인간이 소유하는 재능이 무엇이거나 불평등의 척도로 생각될 성질의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사 가운데서 실상 그분의 특별한 은사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그러한 은사를 주시기를 기뻐하신 그 목적에 봉사하기 위하여 자기가 기뻐하시는 대로 성공적인 결실을 가져오게 하는 분도 하나님 자신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요셉이 바로에 의하여 애굽 전국을 지배하는 자리를 맡았다 하더라도 더 적절히 말하면 하나님의 손만으로 그가 영예의 자리에 올리워진 것입니다.
3. 본문 11-13절은 \"(11) 그때에 애굽과 가나안 온 땅에 흉년들어 큰 환난이 있을새 우리 조상들이 양식이 없는지라
(12) 야곱이 애굽에 곡식 있다는 말을 듣고 먼저 우리 조상들을 보내고
(13) 또 재차 보내매 요셉이 자기 형제들에게 알게 되고 또 요셉의 친족이 바로에게 드 러나게 되니라\" 입니다.
요셉의 구출은 야곱의 전 가족이 공동으로 참여하게 된 복이었습니다.
흉년이 닥쳐오게 되었을 때에 요셉은 알맞은 시기에 앞서 보냄을 받아서 굶주린 자들을 위한 식량을 손에 넣게 된 것이요, 또 그 자신도 그 점에 대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목적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창45:5-8).
요셉이 바로 그의 형들의 음식을 공급해 줄 심부름을 맡게 되고 그들이 돈을 받고 그를 팔았으며 그가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으로 끌려갔고 그래서 그가 이 땅 위에서는 완전히 흔적이 없어졌다고 생각되어졌을 때 그러한 당연한 순서를 밟아서 하나님의 자유로우신 자애가 요셉의 인간 속에서 더욱 분명하게 빛을 발한 것입니다.
요셉으로서는 자신을 구덩이에 던지고 자기들이 모두 호흡하였던 공기마저도 그에게서 박탈하였던 자들의 입에 양식을 공급하였습니다. 요셉은 자기 생명을 탈취하기에 주저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생명을 키우고 소중히 한 것입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서 스데반은 중요한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상기시킵니다.
즉 그들의 족장들은 자기들에게 유업으로 주어진 그 땅으로부터 불가불 떠나야만 했고 그래서 그들이 다른 땅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땅에서 나그네였었기에 결국에는 멀리서 망명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4. 본문 14-15절은 \"(14) 요셉이 보내어 그 부친 야곱과 온 친족 일흔 다섯 사람을 청 하였더니
(15)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 자기와 우리 조상들이 거기서 죽고\" 입니다.
야곱이 75명의 가족들과 함께 애굽으로 왔다고 말한 일에 대해서 스데반은 모세의 말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모세는 70명으로만 말했을 뿐입니다.
여기 대해서 제롬(Jerome)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즉 누가는 스데반이 말한 바의 정확한 숫자를 그대로 기록하지 않았으며 다만 모세가 말한 숫자(창46:27)의 70인경(the Septuagint)에서 그 숫자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가 개종자였으므로 히브리어를 잘 몰랐기 때문이거나 헬라어의 읽기(reading)를 받아들이고 있는 이방인들에게 양보하기를 그가 원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헬라어 역자들이 그 숫자를 의도적으로 번역한 것인지 아닌지 혹은 나중에 그것이 잘못되어서 끼어들게 되었는지 어떤지조차 분명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후자의 경우가 물론 쉽게 생각됩니다.
헬라인들은 숫자를 알파베트 문자로 표시하는 습관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의 <하나님의 도성> 제26권에서는 요셉의 손자들과 증손자들이 포함되어 있다고 어거스틴은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 \'애굽으로 내려가\' 라는 말씀은 야곱이 생존했던 그 시절에 전체 가족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추측은 어떤 형편에서도 찬성될 수 없습니다.
다른 족장들에서도 그 기간에 많은 자녀들이 태어났기 때문입니다.
우리 생각으로는 70인경 번역자들이 모세가 기록해 놓은 것을 정확하게 번역했다고 하는 말을 있음직한 일로 보입니다.
그 역자들의 마음이 갈팡질팡했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이 특정한 숫자가(70인-역자 주) 신명기 10장 22절에 반복되어 있는데 모세의 것과 일치하며 제롬(Jerome) 시절에는 이 구절이 적어도 아무런 논란이 없이 읽혀졌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그 타당성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에 인쇄된 사본들은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러한 불일치는 책을 복사한 사람들의 잘못에서 생겨난 것이라고 결론은 짓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헬라어를 읽는 것으로 습관을 삼았던 때에 누가가 그 일로 이방인들을 혼란시켜 주어야만 했던 사실은 그다지 중요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또 그 자신은 진실한 숫자를 기록했는데 누가가 모세의 그 구절에서 그것을 잘못 변경해서 옮겨놓았다는 일도 있을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신약성경은 히브리어를 전혀 알지 못하고 다만 헬라어를 철저히 잘 알고 있었던 사람들에 의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을 모세의 기록인 구절과 일치시키기 위하여 창세기의 헬라어 역에 있는 잘못된 숫자가 역시 이 곳에 전제되었다는 일이 가능해 보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이 일에 대하여 고집스럽게 논쟁하려고 한다면 우리는 그에게 지혜의 우월을 허용하여 버려 두기로 합시다.
우리는 바울이 족보문제에 대해서 말썽을 일으키고 지나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을 금한 사실이(딛3:9) 무의미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결국 이러한 소수의 숫자가 의도적으로 언급된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다지 오랜 세월이 걸리지 않은 동안에 그들 부족의 수효가 굉장히 크게 증가된 사실에서 더욱 분명히 나타났다는 사실을 보이려는 때문입니다.
그러한 소수의 사람들에게서 2백 50년 내에 출애굽기에 보도된 바와 같은 그러한 큰 군중이 인간의 생식수단만으로는 생겨날 수가 없는 일이었습니다.
우리는 바꾸어진 숫자에 관한 단순한 문자에 대해서 호기심을 가지고 난처해하기보다는 성령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그 기적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더 타당한 일입니다.
본문의 남은 부분에서 정말 해결하기 더욱 곤란한 다른 문제들이 생겨납니다.
5. 본문 16절은 \"세겜으로 옮기워 아브라함이 세겜 하몰의 자손에게서 은으로 값주고 산 무덤에 장사되니라\" 입니다.
스데반은 족장들이 죽은 다음에 가나안 땅으로 옮겨졌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모세는 요셉의 유골에 언급했을 뿐입니다(출13:19).
또 여호수아 24장 32절에는 요셉의 유골이 장사된 사실 이외에는 다른 것은 아무것도 언급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이는 그 일에 대하여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요셉은 자기 유골에 대해서 분명한 지시를 주었는데 다른 이들은 그렇게 했다는 기록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모세는 경의를 표하려고 요셉의 이름만을 언급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또 파울라(Paula)의 여행에 관한 기록에서 제롬(Jerome)은 (파울라는 제롬의 여제자(女第子 -역자 주) 그녀가 세겜을 통과했을 때에 거기서 12족장의 무덤을 보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말합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는 요셉의 무덤 밖에는 언급한 일이 없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는 기념비가 세워졌다는 이야기는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확실히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여기서 일부의 표현으로 전체를 나타내는 제유법(提喩法)을 사용한 것이거나 혹은 누가가 말하고 있는 사항이 모세로부터 인용했다기보다는 차라리 유대인들 간에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전해듣고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많은 사항들이 있는 것처럼 그렇게 세상에 전해진 전통(fama)에서 얻은 것이거나 그 어느 쪽일거라고 말할 수 있는 이외에는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아브라함이 하몰 자손들에게서 사들인 묘소에 장사되었다고 그가 계속 이야기했을 때에 아브라함이라는 이름에 잘못이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분명해집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내를 장사지내기 위하여 헷 족속 에브론으로부터 2배의 동굴묘지를 구입했습니다(창23:9).
그러나 요셉은 다른 장소에 즉 그의 아버지 야곱이 하몰의 자손들로부터 어린 양 백 마리를 주고 산 밭에 매장되었습니다. 따라서 이 구절은 정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행7:17-19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여기서부터 스데반은 하나님의 약속 성취의 제 2단계를 말합니다.
곧 모세를 통한 성취의 단계에 대하여 말하기 시작합니다.
1. 스데반은 여기서도 하나님은 약속 성취자시라는 의식(意識)으로 말합니다.
스데반은 이 설교에서 이스라엘 역사를 한번 되풀이하고 지나가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그 역사를 신학으로 사색하며 거기 나타난 구원사(救援史)를 지적합니다.
이 구원사에 있어서 스데반으로서는 먼저 하나님의 약속 성취에 대하여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라고 하였습니다.
2. 또 여기서 \"새 임금\"이란 람세스 2세입니다.
그 람세스 2세는 애굽의 은인(恩人) 요셉을 모르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민족에게 악정(惡政)을 행하였습니다(출1:8-22).
이 점에 대하여 크로솨이데(Grosheide)는 \"하나님께서 복 주시며 그 약속을 이루려 하시면 먼저 인간의 죄악상에서 기인(起因)한 적대 운동이 일어난다. 물론 그것이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실패케 하지는 못한다\"고 하였습니다.
3. 사람들이 아무리 대적할지라도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막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번성하게 된 것도 그 때에 하나님께서 전에 약속해 주신대로(창12:2, 18:18, 22:17) 그들로 하여금 큰 민족이 되도록 복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 때 애굽 왕이 이스라엘의 번성을 막고자 각양 학정을 썼으나 실패하였습니다.
1. 본문 17-18절은 \"(17)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때가 가까우매 이스라엘 백 성이 애굽에서 번창하여 많아졌더니
(18)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임금이 애굽 왕위에 오르매\" 입니다.
스데반은 그 백성들의 해방 이야기로 옮겨갑니다.
그 많은 자손들, 단시일에 비정상하게 불어난 사건은 해방의 서곡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 백성의 불어난 일이 하나님의 특이한 은사요 그래서 그런 일은 통상적인 수단이나 정상적인 자연 질서에 의해서는 생겨나지 않는 것이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게 되도록 가정합니다.
실상 다른 면은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모든 희망을 빼앗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바로는 폭군의 가혹성으로 괴롭혔고 날마다 그들의 노예상태는 더 비참해졌습니다.
그러나 사내아이는 죽이라는 명령으로 그들 전체 멸망이 왔다고 보았습니다.
모세가 나타났을 때에 다른 하나의 구제의 표적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바로 얼마 뒤에 모세가 거절당하고 망명의 길로 도망치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거기에는 오직 실망 뿐, 아무것도 남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 약속을 기억하셨고 때가 되어 그 백성들을 불어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브라함에게 맹세하신 바를 수행하시려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스스로 배은망덕하고 사악하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은혜의 문을 스스로 닫아버린 과오를 범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이 언제나 자기 기회의 순간이 자신의 행동과 부합되게 하시려고 때의 흐름과 변천을 조절하실 때에 그분의 섭리를 인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조절에 대해서 단순히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기에 인간들은 자기들의 요구로 인하여 무질서하게 조급해져서 하나님이 그 손을 보여주실 때까지 참고 기다리며 조용히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결국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 은혜의 기쁜 증표를 가지고 빛을 발하시게 될 때에는 언제나 그 자녀들의 신앙을 훈련하시기 위하여 구원의 소망을 갑자기 끊어버리는 다른 것들을 대신 그들에게 주시는 것입니다.
모든 사내아이들은 죽여 없애라는 왕의 칙령이 전해졌을 때에 히브리인들은 완전히 끝장이 났다고 말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었겠습니까?
그러므로 중요한 교훈을 명상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더욱 더 필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죽이시고 또 다시 살리시며 깊은 곳으로 끌어내리시고 다시 끌어올리신다는 사실입니다.
2. 본문 19절 상반은 \"그가 우리 족속에게 궤계를 써서\" 입니다.
우리말 \"궤계\"를 벌게이트(Vulgate) 역에서는 이를 \'속여 넘기다\' 로 번역했습니다.
그것은 잘된 번역입니다. 애굽 왕이 유대 백성들 위에 한층 더 무거운 일을 부담시키기 위해 새로운 술책과 음험한 구실을 교활하게 생각해냈다고 스데반은 생각합니다.
거의 모든 폭군들이 그와 같이 행동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아무리 부정하게 그들의 백성들을 학대한다 하더라도 어떤 구실을 찾아내는 데에 극히 교묘한 것입니다.
바로가 표면상 가장 정당하다고 보던 바를 악용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즉 기류자(寄留者)인 유대인들이 자기 왕국 안에서 자유로운 환대를 받는 일은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며 또 그들은 많은 특권을 향유하고 있으면서 책임에서는 면제되는 일이 도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바로는 교활하게 그들을 자유인에서 경멸할 만한 노예로 전환시켰습니다.
스데반이 이 폭군은 요셉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을 때 인간들은 얼마나 쉽게 그 은의(恩誼)를 잊어버리는가가 분명해집니다.
배은망덕이 일반적으로 미움을 받는다 해도 그것보다 더 일반적인 죄는 없습니다.
3. 본문 19절 하반은 \"조상들을 괴롭게 하여 그 어린 아이들을 내어버려 살지 못하게 하려 할새\"(그들이 더 불어나지 못하게 하려고 - 한글 개역 성경에는 없음) 입니다.
에라스므스(Erasmus)는 이것을 적절하게 번역하지 못했습니다.
헬라어 (조 - 오고네이스다이) 라는 말은 \'저들의 어린 아이들이 살지 못하게\' 라는 뜻 이상의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이 말이 한 민족의 생명이란 언제나 그들의 자손에서 존속하여 살아남는다는 사실에서 유래되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스데반은 그들의 학대 모습을 다 열거한 것이 아니요 극단적인 잔인성의 한 예를 든 데 불과합니다.
그로 인하여 쉽게 생각될 수 있는 것은 아브라함의 전 자손이 얼마나 가까이 파멸에 접근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입니다.
바로는 그 잔인한 명령으로 일거에 마치 한 칼을 베듯이 그들을 모두 살해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폭력적인 만행은 예기치 못한 그리고 믿을 수 없을만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더 실증해 줍니다.
아무리 제 맘대로 모든 수단을 다하여 하나님을 저항한다 해도 바로는 결국에 아무것도 성취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행7:20-29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약속이 모세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실을 말씀합니다.
1. 본문 20-21절은 \"(20) 그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 그 부친 의 집에서 석달을 길리우더니
(21) 버리운 후에 바로의 딸이 가져다가 자기 아들로 기르매\" 입니다.
스데반이 그 때의 사정을 염두에 둔 것은 무의미한 일이 아닙니다.
모세가 태어난 것은 왕이 모든 사내 아이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내렸던 때였습니다.
그러므로 해방의 수행자로 태어나기 전에 죽임을 당하는 것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무런 인간의 도움이나 권고가 불가능했을 때에 무슨 일을 하실 수 있는 가장 큰 기회를 가지시게 된 것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인간의 약함 중에서 자신의 능력을 완전하게 나타내시는가가 역시 아주 분명해졌습니다(고후12:9). 모세는 3개월 동안 보호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양친은 자기들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기 위하여 그를 강변에 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단지 그들은 그가 빨리 죽어버리지 안게 하기 위해서 조그만 상자 속에 그를 넣었을 뿐입니다.
바로의 딸이 그를 구해냈을 때 그가 죽음을 모면하게 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단절되어 다른 민족에게 속하게 될 뿐입니다.
더욱이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마음을 붙들어 주시지 않았다면 모세는 하루 아침에 자기 동족에 대한 가장 두려운 적이 되려고 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동족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우애의 표시를 보이게 되기까지 40년의 세월이 흐른 것입니다.
2. 본문 22절은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워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입니다
1) 모세가 애굽 사람의 \'학술을 다 배웠다\'고 누가가 말씀해 줍니다.
그것은 참으로 모세의 뛰어난 점으로서 그를 칭찬하고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처럼 모세는 세속 학문의 지식을 가지고 자만하는 자가 되어 평범한 백성들을 경멸하게 되는 일도 생겨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시려는 뜻을 굳히셨기에 그러는 동안에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도 그 밖의 모든 일도 자기의 하실 일을 완성하기 위해서 준비시키신 것입니다.
여기서 인간의 육체적인 심정이 이렇게 항의할런지도 모릅니다.
\"왜 하나님은 그처럼 긴 세월동안 그 백성내의 고뇌를 못 본 채 눈을 감고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바로로 하여금 날마다 더 포학하고 잔인해지도록 허용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모세로 하여금 자기 동족 가운데서 성장하도록 허락하지 않으셨는가?
왜 하나님은 모세를 바로의 딸의 양자가 되게 함으로서 그를 이스라엘 자손들로부터 유괴해 버리셨는가?
왜 하나님은 모세가 40세가 되기까지 궁중에서 쾌락 속에 남아있도록 바라셨으며 그들로부터 떼어놓으려고 하지 않으셨는가?\"
그러나 실제로 나타난 결과는 너무도 놀라운 것이어서 그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증거하기 위하여 비상한 목적과 배려(配慮)에 의하여 지배되었었다는 사실을 우리가 깨달아 알 수 밖에 없을 정도입니다.
2) 누가는 여기서 애굽 사람들의 교육에 대해 찬양하는 투로 말하고 있는데 그러나 우리는 그 일에 대하여 불완전한 것이 없었다는 것처럼 이해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천문학은 매우 유용하고 마땅히 찬양 받을 만한 학문입니다.
그것은 이 학문이 그 많은 별들의 위치와 그처럼 뚜렷하게 구별되는 상위(相違)에서만이 아니라 그것들의 운행이나 힘이나 미묘한 기능의 면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깊이 연구할 수 있게 하기 때문입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 학문에 대하여 매우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순한 자연의 질서를 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갈대아 사람들과 같이 어리석고 공허한 공론 속에 방황하기도 했습니다.
모세도 그러한 미신을 가르침 받았는지의 여부는 확실치 않습니다.
어쨌든 그 실정이 무엇이었든지 간에 우리는 모세가 실상 세상 지혜는 없어도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유효한 것은 이 우주의 구조 안에서 배워야 한다는 것을 얼마나 성실하게 보여주고 있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자연의 신비에 대해서 학식이 있고 현명한 사람들과 더불어 날카롭게 논쟁을 하기도 하였지만 그가 좀 더 고매하게 난해한 말을 구사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가장 겸비하게 누구나가 가질 수 있는 평범의 능력의 자리에까지 내려가서 무식한 사람들이라도 자기네들의 경험으로 이해하실 수 있는 사항들을 평범한 용어로 그들에게 말했다는 사실은 확실히 뛰어난 겸허의 태도입니다.
저스틴(Justin)이 모세에 관한 이야기를 할 때에 이렇게 말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는 속임수와 마술사로서 그 백성들로 하여금 홍해를 건너게 한 한 사람의 마술사였다는 것입니다. 이리하여 사단은 하나님의 능력을 폐지하려고 할 뿐 아니라 또한 불명예스러운 오명으로 더럽히려고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마술사들과 더불어 마술을 겨룬 것이 아니었고 다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분부하신 바를 시행했을 따름이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3) 애굽 사람들도 또한 비의(秘儀)의 신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들이 자기들의 미친 사람과 같은 행동에 대한 변명의 사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나 한 것처럼 그들의 어리석고 미친듯한 조작(造作), 그리고 그들의 보기드문 추행에 대한 변명을 소개한 것입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도 그와 같이 자기들이 미사와 그밖의 여러 가지 무의미한 의식에서 속임수를 쓰고 있을 때에도 그 속에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하여 여러 가지 비법을 날조해 내고 있을 것입니다.
일반 성직자들은 실상 높은 지위에까지 올라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들 중에 좀더 선견지명이 있는 자로 인정받기를 원하는 자들은 비록 유치하고 일부러 꾸민 것같이 보일지라도 영적 비법을 조작하지 않는 의식은 없을 정도로 다 뽑아버립니다.
자기들의 \'성무일과\'(聖務日課) 라고 부르는 일에서 이와 관련된 가장 우스꽝스러운 잡동사니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미치광이 놀음은 애굽 사람들 자신들 가운데서 행해진 희생제사와 관련되어 있을 따름이기 때문에 모세가 왕실의 교육을 받았지만 고상한 학술로 훈육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모세가 그들과 함께 휩쓸렸다고는 생각되지 않습니다.
4) \"그 말과 행사가 능하더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히브리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 표현은 이중적인 탁월성을 의미합니다.
즉 기량과 학식에 있어서 풍부한 한 사람이 동시에 또한 탁월한 일을 성취하기에 알맞을 때에 쓰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모세가 희귀한 은사로 갖추어져 있어서 모든 사람들이 그를 아주 비범한 인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그처럼 높이 평가되었기에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만큼 모세가 자기들의 구속(救贖)의 종이 되리라는 희망을 더욱 적게 가졌던 것입니다.
3. 본문 23절은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사실에서 모세는 자기 동족을 위한 어떤 생각을 결코 버리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립니다.
그러나 스데반의 말은 차라리 그 반대의 견해로 기울어집니다.
즉 하나님의 성령께서 마침내 모세의 마음을 일깨워 주셔서 오랫동안 자기가 무관심해 왔던 형제들을 찾아서 가도록 마치 잠에서 깨어난 것처럼 일어났던 것입니다.
실상 모세가 자기 출신이 무엇인지를 모르고 있지 않았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자기 몸에 출신에 관한 표적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 만일에 그의 출처가 알려지지 않았다면 왕의 공주는 그를 양자로 삼았을 때에 불명예스러운 추문의 의심을 받지 않고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기에 궁정 안에서 모세의 출신에 대하여 모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모세는 오랜 세월에 걸쳐서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랑을 감히 공공연하게 표명할 만한 충분한 용기를 가지고 있지 못하였습니다.
모세가 자기의 사명을 자각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왕의 궁전에서 무위로 세월을 보낸 사실은 하나님의 영광을 더하게 하는 일에 크게 공헌한 일입니다.
그리고 나중에 모세가 모든 사람들의 희망과 자기 자신의 희망과는 반대로 돌연히 하나님께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의 마음에 일어난 자기 형제들에 대한 이 새로운 관심은 성령의 새로운 그리고 신기한 감동으로 인하여 생겨난 것이었습니다.
4. 본문 24-25절은 \"(24) 한 사람의 원통한 일 당함을 보고 보호하여 압제받는 자를 위 하여 원수를 갚아 애굽사람을 쳐 죽이니라
(25) 저는 그 형제들이 하나님께서 자기의 손을 빌어 구원하여 주시는 것을 깨달으리라 고 생각하였으나 저희가 깨닫지 못하였더라\" 입니다.
이러한 광경은 우연하게 모세에게 부딪혀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자기 백성을 해방할 자로 지명하셨을 때에 하나님은 이런 표적, 모세의 손에 의한 이런 전주곡이 생겨나도록 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아무 분별없이 일에 대처한 것이 아니요 자기의 사명을 의식하고 그 백성의 옹호자로서 합당한 일을 한 것에 불과하다고 스데반은 분명히 말해 줍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를 고무하시지 않았다면 그가 아무리 악하고 불법한 자라 할지라도 그에게 사람을 살해할 권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악한 자들에게 저항하고 그들의 포학을 제지하며 선량한 사람들을 저들의 위해(危害)에서 수호하는 일은 거룩한 일이요 크게 찬양할 만한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자신을 위하여 보복을 자행하는 개인의 권한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자기의 권한에 의하여 자기 손안에 하나님께로부터 칼이 주어지기까지는 애굽 사람을 죽일 권한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영웅적인 성격의 위대성은 성령의 역사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큰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임명한 사람들에게 그들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거기 합당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효과 있게 발휘하시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중요한 것을 이해하고 있습니다.
즉 아브라함과 맺으신 그 계약을 따라서 그 날이 가까워 오고 있기 때문에 모세는 이미 그 시절에 해방의 수행자로 백성들에게 나타났다는 것이며 그러나 그 백성들은 모든 희망을 잃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5. 본문 26-29절은 \"(26) 이튿날 이스라엘 사람이 싸울 때에 모세가 와서 화목시키려 하여 가로되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
(27) 그 동무를 해하는 사람이 모세를 밀뜨려 가로되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우 리 위에 세웠느냐
(28) 네가 어제 애굽 사람을 죽임과 같이 또 나를 죽이려느냐 하니
(29) 모세가 이 말을 인하여 도주하여 미디안 땅에서 나그네 되어 거기서 아들 둘을 낳 으니라\" 입니다.
1) 스데반은 이제 하나님의 은혜가 단순히 조상들에 의하여 무시되었을 뿐 아니요 악의로 거절되었다고 지적합니다.
스데반이 설명하고 있는 그 악한 행위가 비록 단 한 사람에게서 생겨났다 하더라도 스데반으로서는 바로 그 죄를 그들 모두에게 돌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들이 모두 하나님을 기뻐하는 자들이었다면 다 함께 모세의 건방진 언행을 제지했어야 하였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다 입을 다물었고 또 모세가 그들을 위하여 행한 선행으로 인하여 책망을 받는 일을 허용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의 목숨을 걸고 보호하여야 할 그 사람을 가장 큰 가능한 위험 속으로 내던져 버리고만 것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이었습니다.
2) 이 연설의 취의는 중요한 것입니다.
즉 그들이 조속하게 구원을 얻지 못하게 된 경험이 그 백성 자신들의 허물이요 다른 아무의 허물도 아니었다는 사실입니다.
인간들의 사악이 하나님을 지연시키는 원인이 되는 사실은 흔히 생겨납니다.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자기 백성들에게 적절한 도움을 베푸실 준비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여러 가지 방해로 그분의 손길이 우리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서 나중에 우리가 그분의 더디심(His slowness)에 잘못된 불평을 합니다.
이러한 배은망덕한 행위는 하나님께 대한 너무도 큰 무례를 보이는 일이요 또 모세에게 대해서는 너무도 심한 잔혹함을 보이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궁중에서 그러한 충실한 옹호자를 그들에게 주신 일에 대해서 그들은 하나님께 감사했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들의 모든 사랑과 존경으로서 영예를 받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치욕과 협박이라는 매우 가련하고 매우 불공정한 대우를 받습니다.
결국 그 사건이 왕에게 보고되었다는 사실은 그것이 그 백성들의 배신행위였습니다.
그러므로 나중에 그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목전에 두고도 자기들 자신의 허물로 인하여 거기 들어가는 일을 막는 일이 생겨났던 것과 같이 이제 그들이 한 사람에 의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했을 때에 40년 간이나 그들의 해방의 시기를 지연시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하셔야 할 일을 결정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러면서도 그 지연의 죄가 바로 그 임무를 담당하고 있는 모세를 방해하고 그를 괴롭혀 준 자들의 탓으로 돌려지기 때문입니다.
3) 26절 하반에 \"너희는 형제라 어찌 서로 해하느냐 하니\"라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사람들 간에 일반적인 일치가 존재하는 것은 확실합니다.
그래서 자기들 간에 친절을 실천해야 하며 모든 면에서 피차 상(傷)하게 하는 일은 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 긴밀한 유대로서 연결되어 있는 사람들이 피차 해치는 일이 있을 때에는 그것은 한층 수치스럽고 용납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모세는 여기서 그들의 마음이 서로 해치는 방향으로 기울어졌을 때에 그들이 공정한 행동을 가지게 하기 위해서 일반적인 도리를 내세웠을 뿐 아니요 또한 그들의 포학성을 완화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친척관계와 혈통관계를 지적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모두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자기의 동료에게 위해(危害)를 가했던 그 사람은 뻔뻔스러움과 위협으로 그에게 반격해 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나쁜 마음이란 사람들을 격분으로 몰아가는 것이 상례입니다.
또 인간의 실정이 조잡하면 조잡할수록 더욱 대담해지고 더욱 포학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쁜 상태를 지니고 있는 이 사람이 무슨 구실로 그처럼 오만 무례하게 모세를 향해 따지고 들었던 것인가?
그는 모세가 재판관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의 권위의 힘을 의지하여 그를 책망하지 않았고 단지 우호적인 방법으로 동등하게 그를 타일렀을 따름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에 우리에게 훈계를 할 의무를 가진 사람이 오직 재판관 뿐 이라는 말인가?
그러나 그것은 자기들이 힘이나 권력에 의하여 그렇게 하도록 강요되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권면도 용납하지 않으려는 완강하고 고집스러운 사람들의 공통된 결함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의사(醫師)들을 향하여 맹렬하게 폭행을 하는 미쳐 날뛰는 환자들과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와 비슷하게 우리의 과오를 고쳐주기 원하는 사람들을 대항해서 맹목적인 분노를 터뜨리지 않기 위하여 우리의 격분을 억제하도록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이유입니다.
우리는 또한 이 실예에서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즉 그처럼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자기들의 직분을 수행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종들은 끊임없이 많은 상해를 견디어 내며 많은 모욕을 참으며 위험 속에 빠지며 또 더구나 자신들이 잘하고 있을 때에 자신들에 관한 좋지 못한 이야기를 듣지 않고는 그 일을 감당하기 불가능하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러한 악한 자들의 모욕을 다 삼켜야만 하며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위탁하였고 또 그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다고 알고 있는 바를 중단하는 원인이 되지 않게 해야 합니다.
첫째로 모세는 스스로 지배자의 법적 권한을 부당하게 빼앗으려 한다는 잔인하고도 거짓된 비난을 여기서 걸머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방식으로 모세는 대역죄를 범한 자라는 협박을 받은 것입니다.
둘째로는 모세가 애굽 사람을 살해했다는 불명예스러운 비난이 부딪쳐 왔습니다.
이 둘이 다 극도로 모욕적인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참으로 이 거룩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그 위험스러운 공격에 의하여 깜짝 놀라게도 타격을 받았는가 하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세가 자기의 옳게 행동한 일을 후회할 정도로 추방 혹은 다른 어떤 괴로움으로서 놀림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볼 때에 우리도 역시 사단의 그와 유사한 모든 술책에 대항하여 확고하고 깨뜨릴 수 없는 용기를 가져야 할 것을 이 사례를 통하여 배우는 것입니다.
행7:30-34 사십 년이 차매
\"모세는 사십 년\"이라는 세월을 미디안에서 보냈습니다.
거기서 양을 치던 모세에게 하나님의 시간은 왔습니다.
돌연한 일로, 이제 \"천사가 ....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나타났습니다.
이것은 사람의 경영으로 되어진 일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에게는 뜻밖의 일이었습니다.
\"천사\"는 여기서 \"여호와의 사자\"로 나타나시던 여호와 자신이십니다(창22:11).
\"가시나무 떨기\"는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불꽃\"은 그 백성이 그때에 당하고 있는 고난을 상징합니다.
불이 가시나무에 붙어도 그것이 사위지 않음같이 이스라엘이 애굽인들로 말미암아 고난을 받아도 아주 멸망하지는 않았습니다.
1. 본문 30절 초두는 \"사십 년이 차매\" 입니다.
모세는 어리석은 인간이 아니었던 만큼 우리는 모세의 마음에 얼마나 많은 일들이 떠올라서 그의 사명의 확신을 약하게 할 수 있었을 것으로 쉽게 추단하게 됩니다.
사단은 교활한 계략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은 나면서부터 의혹에 대한 현저한 경향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관해 우리 마음에 스며든 의혹이 무엇이든 쉽게 문을 열어줍니다.
궁중에서 즐거움과 훌륭한 생활로부터 양들을 지키는 초라하고 곤비한 일을 떠맡기 위하여 쫓겨나게 되는 일은 어려운 변화였습니다.
그리고 특히 모세는 광야로 추방되어서 그동안 많은 세월이 흘러갔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자기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이 공허한 조롱이었다는 사실 이외에 무슨 다른 결론을 그가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가 장인 집의 양떼를 돌보기로 약속되었던 때는 이미 80세의 나이였기에 언제 자기의 임무가 그 백성을 해방시키는 일에 유용할 것이라고 희망할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원하는 것보다 훨씬 오랜 기간에 걸쳐서 어느 때거나 우리를 불안정한 상태 속에 버려두시는 일이 흔히 있기는 하지만 우리의 심정이 의기소침하지 않게 되기 위하여 성도들의 그러한 고투에 대해서 그런 고투가 우리의 기억 속에 철저하게 새겨지기까지 늘 생각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입니다.
모세는 그 기간 중에 문제를 일으키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으며 말썽장이들이 흔히 하는 식으로 탁월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 무슨 모양으로든지 스스로 밀고 나아가려고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훌륭한 자제의 시범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자기가 보다 큰 임무에 부르심을 받은 일이 전혀 없었던 것처럼 목자의 직무에 전념하였습니다.
모세가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때에 주께서 알맞은 때에 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2. 본문 30절 하반은 \"천사가 시내산 광야 가시나무 떨기 불꽃 가운데서 그에게 보이거늘\" 입니다.
1) 여기서 첫째 질문은 \"찬사란 누구였는가?\" 입니다.
둘째는 \"왜 그 천사는 그러한 모습으로 모세에게 나타났는가?\" 입니다.
누가가 그를 한 \'천사\' 라고 부른 다음에 그 천사를 소개하면서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이라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가끔 그 사자들에게 특히 자신에게 속한 고유한 것들을 나누어 주시고 공유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이 그들에게 적용되었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천사는 공공연하게 자기가 영원한 하나님이시요 그분의 존재가 자기 안에 있으며 만물이 자기 안에 존속하는 하나님이라고 선언하고 있기 때문에 이 증언은 반드시 하나님의 본질에 한정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말이 어떤 면으로도 천사에게 해당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좀더 적절하게 말한다면 천사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말하기 때문에 천사는 하나님의 위격(位格)을 떠맡고 있는 것이요 마치 자기가 그 한마디 한마디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처럼 그 명령을 반복해서 말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그런 방식으로 말한 일은 예언자들에게 매우 흔하게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누가는 이 천사가 바로 모세가 그의 인도와 보호를 받아 그 백성을 해방한 동일한 천사였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또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 4절에서 그리스도가 바로 그 인도자였다고 표명하고 있기 때문에 이 천사가 홀로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자신이 부여 받았느냐 아니냐에 대해서 우리가 이상히 여겨야 할 아무 이유가 없습니다.
2) 그러므로 우선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인간과의 어떠한 사귐(communication)도 이루시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는 확립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중보자가 계시지 않고는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영원한 신성에 대한 명백한 증언을 주고 있습니다.
또 그리스도는 아버지와 본질에 있어서 동일하신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더구나 그리스도는 한 천사로 불리워지기도 했는데 그것은 단지 그분께서 수행원이나 조수로 천사들을 거느리고 있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그 백성들의 해방이 우리 모두의 구원의 그림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구원을 성취하시기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와 마찬가지로 육체를 입으시고 종의 형태를 취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 자체대로는 결코 인간에게 나타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의 능력이 이해할 수 있는 알맞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그 이름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또 하나의 이유가 있습니다.
즉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영원하신 목적에 의하여 인간을 구원하시는 주님으로 임명되셔서 그러한 계획을 따라서 모세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2장 16절에서 그리스도는 천사들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고 한 말씀과 이 가르침과의 사이에 아무런 모순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는 잠시동안 천사의 모습을 취하셨다고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는 참으로 사람이 되셨다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는 이상 그리스도께서 천사의 성질을 취하신 일은 결코 없었기 때문입니다.
3) 이제 불붙는 가시나무떨기에 대해서 몇 마디 하겠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종류의 유추법(analogy)에 의하여 실재에 표적을 적응시키시는 사실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여러 성례 전에 공통되는 절차(ratio) 입니다.
더구나 현재의 문제에 있어서 모세의 신념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보다 더 적절한 것은 아무것도 보여질 수 없었습니다.
모세는 자기가 버리고 온 자기 백성들의 상태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수효는 비록 굉장히 많았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가시나무떨기와 다름없었습니다
가시나무 떨기란 밀집되어 있는 것이며 또 많은 가지들로 더욱 빽빽하게 되어 있어서 그만큼 불을 잘 받을 가능성이 크고 그 전체가 맹렬한 불길에 싸이기 쉽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허약한 집단이었으며 갖가지의 모든 위해(危害)에 무방비 상태로 놓여진 무리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전쟁이 발생한다 해도 싸우기에 적당치 못한 그 군중은 또한 자기 자신들의 중하(重荷) 때문에 절음발이가 되어서 단지 인구증대와 번영을 이유로 바로의 포학성을 불타오르게 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가공할 폭정에 눌린 그 백성들은 그만치 불꽃 속에 완전하게 묻혀 버린 장작과 같아서 주께서 그 가운데 자리잡으심이 없이는 잿더미로 화해버리는 일을 막을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보통이 아닌 박해의 불길이 타올랐다고는 할지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교회는 이 세상에서 전적으로 고난을 면제받을 수는 결코 없기 때문에 그 교회의 영구적인 상태가 여기에 어느 정도 묘사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불 지피기 위한 장작 이외에 다른 무엇이겠는가?
사단이 우리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불태우려고 끊임없이 무수한 불쏘시개를 던집니다.
그러나 주님은 놀랍고 특이한 은총으로 우리를 소멸에서 건져내시고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불이 이생에서 우리를 태우도록 활활 타오르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주께서는 시편 46편 5절 말씀처럼 우리의 중심에 계시기 때문에 아무런 재난도 우리를 해치지 못할 것입니다.
3. 본문 31절은 \"모세가 이 광경을 보고 기이히 여겨 알아보려고 가까이 가니 주의 소리 있어\"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조상들이 그의 임재를 확신하게 하시려고 이런 방식으로 그들을 늘 다루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인식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보여주신 환상과 사단의 환각 사이에는 명확한 상위(相違)가 있어야 할 것을 생각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명확성은 필연 이상의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의 계약이 포함되어 있고 보장되어 있는 하나님의 계시가 그런 환상 이외의 무슨 다른 방법이 있을 수 있었겠습니까?
신앙의 유일한 참된 지원(support)이 하나님을 소유하는 일이기에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하나님 자신이시라는 사실을 하나님은 분명히 밝히실 필요가 있으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은 언제나 교묘한 계략을 가지고 여기저기 슬슬 기어다니면서 기웃거리고 있으며 그처럼 많은 속임수를 가지고 있고 또는 특히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물론 거짓 주장을 하기 때문에 우리는 사단의 가짜 흉내를 쉴새없이 경계해야 됩니다.
우리는 사단이 일찍이 많은 국민들을 속였으며 또 교황제도주의자들까지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과거에 있었고 오늘도 여전히 교황권 밑에서 횡행하고 있는 모든 미신적인 기괴한 것들과 그릇된 헛소리는 그 기원을 공상과 환영과 거짓된 계시에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재세례파 교도들(the Anabaptists)까지도 그러한 착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이 보여 주신 환상을 확실한 특성으로 구별지어 주시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존엄을 우리에게 나타내실 때에만 우리가 과오를 범할 위험에서 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때문에 모세의 마음은 놀라움으로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하여 모세가 더 자세히 살펴보려고 가까이 갔을 때에 주께서는 그의 임재에 대한 더욱 생생한 자각을 그에게 일으켜 주셨고 그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으며 그 때문에 그는 크게 두려움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인정할 수 있는 것은 그런 일들 중에 어느 하나도 사단이 흉내내지 못할 것이 없지만 그러나 사단의 흉내는 너무도 불완전하여 원숭이 흉내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주께서는 이러한 표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가 단순히 몽상만 하고 있지 않게 하시려고 우리의 우둔함을 도와 주시고 동시에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성령께서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도록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임재의 표적과 상징을 새겨 주십니다.
4. 본문 32절 초반은 \"나는 네 조상의 하나님 즉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로라 하신대\" 입니다.
1) 이제 우리는 무슨 까닭으로 그 환상이 모세에게 주어졌는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하나님의 권위가 담겨지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단순한 환상은 거기에 교훈이 첨가되지 않으면 별로 크게 소용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교훈이 열등한 부분으로 첨가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훈은 모든 환상의 원인 혹은 목적으로 첨가된 것입니다.
2) 이제 하나님이 자신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부르신 사실은 그 속에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존엄은 무한하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그것을 파악하려고 한다면 그 일로 인하여 생겨나는 것은 차라리 그 존엄이 우리의 생각을 모두 삼켜 버리는 일일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 존엄에 올라가려고 시도한다면 우리는 소멸되어 버릴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파악할 수 있는 호칭으로 하나님은 자신을 옷 입히시고 꾸미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씀으로 돌아오게 하시기 위하여 그러한 칭호를 스스로 선택하셨다는 사실을 우리는 유의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이 세상에 알게 해 주신 그 구원의 도리를 그들에게 위탁하셨기 때문에 자신이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으로 불리워지신 것입니다.
그렇기는 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런 방식으로 모세에게 말씀하셨을 때에 그 때의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관심을 갖고 계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환상, 해방의 소망, 또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시려고 하셨던 그 지령(指令), 그것들은 다 하나님께서 일찌기 그 조상들에게 맺으셨던 계약에 기초한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어떠한 새로운 의혹은 사라지고 모세의 마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기초한 그 구원의 소망으로 올리워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선언은 즉 \"일찌기 네 조상들에게 그들의 구원에 대한 나의 관심을 약속했고 은혜의 계약으로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나의 가호아래 받아들였으며 그리고 또 네 종족의 노예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이 때를 이미 정해놓았던 우리는 이제 우리가 말한 바를 확증하기 위하여 네게 보이는 것이다\" 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오늘에도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양자로 삼으셨고 또 자신이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며 우리의 하나님이 되실 것이라고 약속하신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에게 확고하고 영속적인 것이 되게 하기 위하여 이 토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3) 그리스도께서는 가장 풍부한 정당성을 가지고 이 구절에서 신자들은 죽어도 산다(마22:32)는 사실을 말씀하셨습니다.
죽음에서 전체인간이 파멸되고 만다면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다\" 는 말씀이 무의미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로마가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가상해 봅시다.
로마의 집정관으로 자칭하는 자가 있다면 그는 웃음거리가 되지 않을 것인가?
관련되기 위해서는 구성요인이 서로 일치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다른 또 하나의 이유도 고려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생과 사를 통제하고 계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 사람들에게 아버지 되시기를 원하는 사람들과 또는 자신의 자녀로 여기시는 사람들을 살려 주시도록 보존하신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비록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모두 육체적으로는 다 죽었다 하더라도 성령 안에서 그들은 하나님과 함께 살아 있는 것입니다.
5. 본문 32절 후반은 \"모세가 무서워 감히 알아보지 못하더라\" 입니다.
위로와 격려가 가득 찬 음성이 모세를 기쁘게 하였다기보다는 차라리 두려워 떨게 했다는 것은 어리석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임재로 이처럼 모세가 무서워했다는 것은 그에게 유익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로서는 더욱 더 큰 경외감의 준비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마음이 충격을 받아 대경실색하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음성 때문만이 아니요, 하나님의 존엄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그 존엄의 표적을 모세가 불붙는 가시나무떨기에서 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보게 되었을때 두려워 떨게 되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일이 아닙니까?
이러한 방식으로 사람들의 마음은 경외(敬畏)에 대한 준비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가 특별히 기억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0장 22절에 \"너희가 표적을 보았고 너희가 나팔소리를 들었으니 너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일을 배워야 한다\" 함과 같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반대할 것입니다. \"모세는 왜 전에는 가까이 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두려워하는 것이며 또 살펴보려는 용기를 가지지 못하는 것인가?\"
즉 우리가 하나님에게 가까이 하면 가까이 할수록 하나님의 영광은 더욱 강하게 빛나는 것이기 때문에 그래서 우리는 당연히 더욱 큰 두려움에 사무치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자기에게 복종하게 하시려는 이유 이외에는 모세를 두렵게 하시지 않습니다.
이 두려움은 모세에게 더욱 큰 확신을 가지게 하는 적절한 준비였습니다.
그 다음에 \"네 발의 신을 벗으라\"고 하신 말씀도 동일한 목적을 위해서입니다.
이 표적으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경건한 심정으로 받아서 하나님께 속한 영광은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께 바치도록 교훈을 받은 것입니다.
6. 본문 33절은 \"주께서 가라사대 네 발에 신을 벗으라 너 섰는 곳은 거룩한 땅이니라\" 입니다.
1) 그 장소에 대해서 말씀하심으로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마음을 마치 하늘처럼 높이 올리셔서 그로 인해 땅위에 있는 모든 것에 관해서는 일체 생각하지 않게 하십니다
이제 모세 같은 사람도 땅위의 것을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자신의 관심을 드리게 하기 위해서 그처럼 많은 격려로 자극을 받아야만 했다면 그보다 백 배 이상도 더 둔한 우리에게는 더욱 박차가 가해져야 할 필요가 있지 않겠습니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장소가 어떻게 이런 거룩함을 얻게 되었는가?
그 날까지는 그 곳이 다른 장소보다 더 거룩한 곳이 아니지 않았는가?\" 라고 하는 질문이 누군가로부터 일어날런지도 모릅니다.
이 영예는 하나님의 임재에 주어진 것이지 장소에 대해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장소의 신성함이란 사람을 위해서 지칭되는 일입니다.
만일에 하나님의 임재가 그 땅을 성화하는 것이라면 사람들이 더욱 더 그렇게 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2) 어쨌든 동시에 우리는 그 점에 유의해야 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그 땅에 계속 머무르게 하시지는 않았기 때문에 그 장소는 그런 식으로 일시 거룩한 장소로 영예를 받은 것이었습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벧엘에서 자신의 임재의 징표를 주셨기 때문에 야곱이 거기에 하나님을 위해 제단을 쌓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후손들이 같은 일을 흉내냈을 때는 그 예배는 타락한 것입니다.
3) 결국 그 장소는 모세 한 사람만을 위하여 거룩한 곳으로 불리어지는 것입니다.
그로 인해서 그가 더욱 더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또한 그를 복종하는 일에 훈련이 되도록 더욱 마음을 가다듬게 한 것입니다.
오늘에 와서 하나님은 어디서나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임재를 보이십니다.
또 희미한 형태가 아니요 가장 명확한 빛과 신빙할 수 있는 진리안에서 나타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우리의 발에서 신을 벗을뿐만 아니라 우리의 옷가지도 벗어야 합니다
7 본문 34절은 \"내 백성이 애굽에서 괴로움 받음을 내가 정녕히 보고 그 탄식하는 소리를 듣고 저희를 구원하려고 내려왔노니 시방 내가 너를 애굽으로 보내리라 하시니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제 자신이 그 백성의 해방자가 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그로써 일찌기 주신 약속이후에 그처럼 오랜 세월이 경과하였음을 아시고 하나님께서는 재삼 모세를 자기의 일군으로 지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관심하실 때 또 우리의 복지에 대해서 염려하실 때에 우리의 불행을 눈여겨 보신다고 말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으시는 것처럼 보일 때에 하나님은 눈을 감으시고 우리에게 등을 돌리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려오시는 일도 같은 방식으로 되는 것인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원을 베푸시려고 장소를 옮기실 필요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손이 하늘과 땅 전체에 뻗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표현은 우리의 이해를 위하여 말해지는 방식일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고통을 경감시키지 않으셨을 때에는 그가 멀리 떨어져 계시고 또 하늘에서 무슨 다른 일로 바쁘셨던 것으로 보였을런지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제 자신이 그 백성들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느끼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십니다. 모든 것은 결국 중요한 사실로 귀결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뜻에 대해서 보다 확실해지게 되면서 아무 주저없이 하나님을 자기의 인도자로 따르게 되었을 것입니다.
또 모세 자신이 하나님의 일로 알고 있는 저 백성의 해방에 더욱 더 확신을 가지고 자신을 헌신하였을 것입니다.
우리는 또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의 탄식하는 소리를 들으셨다는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대받으며 부당하게 압박을 받는 사람들을 위해 관심하십니다.
우리가 탄식과 호소를 하나님의 가슴에 전달할 때에 특히 연민의 정을 움직이십니다.
이 말은 다른 곳에서 가끔 생각되는 것처럼 하나님께로 향해지지 않는 소경들의 또한 혼란한 불만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습니다.
행7:35-37 저희 말이
이 말씀은 29-30절의 결론입니다.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자신의 언약 성취를 위하여 모세를 세우셨다는 사실을 역설(力說)합니다.
1. 본문 35-36절은 \"(35) 저희 말이 누가 너를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하며 거절 하던 그 모세를 하나님은 가시나무 떨기 가운데서 보이던 천사의 손을 의탁하여 관 원과 속량하는 자로 보내셨으니
(36) 이 사람이 백성을 인도하여 나오게 하고 애굽과 홍해와 광야에서 사십 년 간 기사 와 표적을 행하였느니라\" 입니다.
1) 유대인의 조상들이 구원을 받은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첫째로는 그들의 신앙심이 두터워 구원받을 만한 가치가 있어서가 아니요 그들에게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을 때 그 복이 그들에게 주어졌다는 점입니다.
또 둘째로는 이러한 처음 일들에서 무엇인가 좀더 완전한 것이 희망되었었다는 점입니다.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서 그러한 결론으로 서둘렀기 때문에 많은 이야기를 생략했습니다.
모세가 그들의 옹호자, 구원자가 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임명받고 또 이미 어느 정도로 준비를 하고 있었을 때에 그들은 그의 길을 막아 버렸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제 그들의 생각을 무시하고 그들을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기사와 이적에 대해서 첨가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하기 위하는 일도 되며 동시에 모세의 소명을 분명하게 하는데도 유용한 일입니다.
이처럼 배은망덕하는 백성들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여러 가지 표적으로 그 능력을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은 확실히 놀랄만한 일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자기의 종에게 권위를 맡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그 이후로도 모세에게 경의를 표하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모세에게 모욕을 주기도 하며 때로는 경멸하고 때로는 모세와 다투기도 하며 어떤 때는 모세에게 시끄럽게 대항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거듭 폭동을 일으킨 것은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더욱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그들의 악의와 엉뚱한 모욕을 가한 셈입니다.
그들의 비열한 행동은 언제나 점점 더해갔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고집세고 목이 곧은 백성들을 놀라운 인내로서 대결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2) 본 절 초두에 \"관원과 재판장으로 세웠느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는 그들의 반칙을 과장하는 반대명제(the antitheses)가 이해되어야 합니다.
만일 어떤 폭군이 모세를 자기들의 지배자로 임명했다면 그들은 모세에게 복종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가 하나님께 해방자가 되도록 임명을 받았기 때문에 그들은 교만한 마음으로 모세를 멸시하고 거부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세의 권위를 상대하지 아니함으로서 사악하였습니다. 또 그들은 모세를 통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거부함으로서 배은망덕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3) 이제 이러한 영예로운 칭호가 모세에게 부여되었을 때에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마땅히 돌려져야 할 영예를 사람에게 양도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런 일로 인해서 그 자신의 권위에 아무런 손상도 입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가 \'해방자\'(redeemer) 로 불리워진 것은 모세가 하나님의 사자였다는 의미 이상의 다른 뜻이 없습니다.
그래서 일체의 떠맡은 일의 영광은 오직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머물러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끔 하나님의 칭호로 영예를 받게 될 때마다 하나님이 자신의 영예를 벗어 주신 것이 아니요 다만 그 일이 그들의 손을 통하여 수행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그런 방식으로 칭찬을 받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스데반이 이 직책은 천사의 손에 의하여 모세에게 주어졌다고 설명한 것은 바로 이 일을 말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런 방식으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지도와 원조 밑에서 자기가 하나님께 복종하는 것을 보여주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의 \'손\' 은 섬김이 아니라 주권(pre-eminence)이란 의미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모세의 봉사활동을 이용하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능력이 모세의 위에 똑똑히 보이게 하는 방식으로 하신 까닭입니다.
오늘날도 그리스도는 교회의 구원을 성취시키시는 최고의 지배자(moderator)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을 자기의 일군으로 고용하시는데 능력과 성취를 오직 자기에게만 의존케 하시는 그런 방식으로 하십니다.
2. 본문 37절은 \"이스라엘 자손을 대하여 하나님이 너희 형제가운데서 나와 같은 선지자를 세우리라 하던 자가 곧 이 모세라\" 입니다.
1) 스데반은 비록 그처럼 많은 말로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는 율법의 종결이라는 사실을 이런 말로서 증명하려고 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실상 누가는 그 당시에 스데반이 말한 것을 그대로 한마디 한마디 여기서 우리에게 말해 주려는 것이 아니요 그 주요한 점에 유의하는 것만으로 만족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미 3장에서 말한 바대로 이 증언은 그리스도에게 아주 꼭 맞는 일이기는 하나 다른 예언자들에게도 또한 해당됩니다.
모세는 그 백성들에게 대하여 이방인들의 부도덕한 미신으로 인하여 이리저리 끌려다녀서는 안 된다고 금지시킨 이후에 비로 뒤따라야 할 일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마술사나 점장이들을 너희가 좋아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결단코 너희들을 충실히 가르치는 예언자를 너희에게서 빼앗지 않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라고 모세는 말씀했습니다. 사실상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지혜의 완전한 성취를 가져오시게 될 때까지 예언자들의 직무는 율법의 그것과 마찬가지로 일시적인 것이었다는 사실이 이제 확실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의 연설은 중요한 의미를 표시합니다.
모세가 또 한사람의 교사를 그들 앞에 내세우고 그를 칭찬하게 될 때 그는 백성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만 계속 유념(留念)해 주기를 바라고 있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과연 예언자들은 율법의 해석자였으며 그들의 가르치는 일 전체는 모세로 말미암아 소개되어온 사항들에 대한 하나의 보충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모든 예언을 마무리 지으신 분으로서 그리스도는 더욱 더 완전한 종류의 가르침을 가져오셔야 했던 것이 잘 알려진 일이기 때문에 그리스도 바로 그분께서 최고의 지위에 앉으신다는 사실이 뒤따릅니다.
그리고 복음의 신뢰성(fides)이 조금도 의심받지 않게 되기 위하여 최고의 주권직이 그리스도에게 주장되게 되는 것입니다.
2) 우리는 이제 스데반이 왜 여기서 모세의 증언을 포함시켰는가를 이해하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자기들의 유일한 교사로 모세를 추켜 세우고 과장된 자랑을 하고 있는데 일찌기 모세 그가 살아 있을 때에는 악의적으로 또는 무분별하게 그 모세를 거부하였으며 그 모세가 죽은 후에도 그에 못지 않게 모욕과 무례함으로 대접했다는 사실을 스데반으로서는 보여주려고 한 것입니다.
모세를 믿는 자들은 모세를 자기의 전령사로 사용하셨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와 관련된 다른 사항들은 3장에서 설명된 것을 보는 것이 좋습니다.
행7:38-41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여기서 스데반의 설교는 다시 한번 정곡을 찌르고 있습니다.
스데반은 모세를 소개함에 있어서 시내산에서 말씀하시던 그 천사와 함께 있었고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생명의 말씀을 받아서 그 교회에 증거했던 자라 합니다 그 모세를 거절하는 일이 하나님을 거절하는 일이었고 그것은 금송아지로 나타났다고 말씀합니다.
1. 본문 38절은 \"시내산에서 말하던 그 천사와 및 우리 조상들과 함께 광야 교회에 있었고 또 생명의 도를 받아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입니다.
1) 그 백성들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많은 복으로 격려를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악의를 가지고 하나님을 거절하기를 멈춘 일이 없는 백성들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의 사악에 대해서 스데반은 이야기를 진행시킵니다.
만일 그들이 전에는 하나님께 불순종하였고 은혜를 모르는 자들이었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이러한 놀라운 해방은 그들로 하여금 보다 건전한 마음의 상태로 돌아오게 하는 일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제 모습 그대로였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확실히 그처럼 많은 기적이 그들의 마음에 꽂혔을 뿐 아니라 또 그들의 눈 앞에 전개된 것은 지당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실상 그러한 일들을 다 잊어버렸습니다. 그래서 애굽의 미신으로 조급히 달려갔습니다.
그들이 바다를 건너 도망해 온 저 잔혹한 노예상태의 기억은 그들의 마음의 생생하게 남아있으나 그들은 자기들을 인간 이하로 잔인하게 학대하였던 저 폭군을 자기들의 해방자 보다 더 좋아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완강한 불복종은 그처럼 많은 하나님의 복으로도 깨뜨려지거나 극복될 수 없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발광적인 불신앙은 극도에 달했습니다.
그러한 사실로 그들은 언제나 형식에 눈길을 돌렸습니다.
모세가 그 시절에 그들과 함께 광야에 있었다고 말한 스데반의 선언은 그들의 범죄의 흉악함을 크게 더해주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희귀하고도 헤아릴 수 없는 자비가 그들을 참아 주시는 것이 여기에 분명하다는 것은 제쳐놓고라도 그처럼 많은 고난에 둘러싸이고 그처럼 많은 위급한 경우에 빠져 있었을 때에 모세를 자기들의 행로의 지도자로 또는 생명의 충실한 수호자로 갖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하나님 자신에게서 불신앙적으로 도망쳤다는 것은 전혀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들짐승과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서 하나님께서 그처럼 많은 쇠사슬로도 맘대로 다룰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모세가 천사의 지도와 보호 밑에서 전체 광야시절을 통해서 그들을 통어하는 일을 쉬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면서 이 때의 이런 특정한 상황에서 그들의 악함이 얼마나 끈덕지고 불치의 것이었던가를 쉽게 판단할 수 있습니다.
그처럼 많은 재난으로도 또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그들은 겸비해지지 않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그들의 비상하게 완강한 불복종에 기인된 것이었습니다.
2) 모세는 천사와 함께 또 그 조상들과 함께 있었다고 스데반은 말씀합니다.
그러나 그 양자와의 관계는 각각 달랐습니다. 모세가 조상들과 함께 있었던 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된 그들의 인도자였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함이요 모세가 천사와는 하나님의 사신으로 함께 있었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천사와 조상들)에 대한 경의로도 불명예스러운 반역으로 달려가는 그 백성들을 막을 수가 없었을 때에 그 손상은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지휘에 가해진다는 사실이 생겨납니다. 우리는 이미 천사에 대해서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
모세가 그 백성을 해방하도록 부르심을 받았던 그 첫 환상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뒤에 하나님께서 모세와 가지셨던 그 말씀으로도 이해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해방의 창시자라는 것이 양면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러기에 그 어느 쪽을 택하느냐 하는 것은 그리 대단한 일이 되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그 양쪽에 손을 펴는 것을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모세를 애굽으로 보내시기 위하여 맨 처음에 그에게 말씀을 시작하셨던 그분이 나중에 그 일이 완성되기까지 자신이 말씀하신 뜻을 그대로 지속하셨기 때문입니다.
3) 본 절에 \"생명의 도를 받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에라스므스(Erasmus)는 이것을 \'산 말씀\'(sermonem)으로 번역했습니다.
그러나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들은 우리가 한 번역이 스데반의 한 말을 더 잘 옳게 표현한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할 것입니다.
\'신탁\'(oracle)이라는 말이 \'말씀\'(word)이라는 말보다 더 큰 존엄성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voce)에 대해서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것은 모두 신탁이라고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모세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백성들에게 알려주지 않았기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말씀에 의해 모세의 가르침에 권위를 주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결과가 따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 자신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실상 모세의 인간 안에서 하나님을 대항하여 그처럼 많이 반역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들의 완악하고 횡포한 행동이 더욱 더 폭로된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로부터 명령받은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가르치지 않을 때에 비로소 가르침에 대한 일반적인 원칙이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묻고 싶습니다.
도대체 누가 감히 자기를 모세보다 낫다고 할 자가 있겠습니까?
성령께서는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즉 모세는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부여받은 교훈을 충실히 백성들에게 설명해 준 그 단순한 이유로 인하여 그가 옳다는 신용이 그에게 주어져야만 했던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4) 그러나 \"그는 왜 율법을 산 말씀이라고 불렀는가?\"를 묻게 됩니다.
이 구절은 바울이 말한 율법은 \"죽에 하는 의문의 직분\"(고후3:7)이라는 말이나 \"진노를 이루게 한다\"(롬4:15)는 말이나 또는 \"죄의 권능\"(고전15:56)이라는 말과 일치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만일에 \'산 말씀\'이라는 것을 유효한 것 또는 인간의 경멸로서 무효화 할 수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거기에 아무런 모순도 생겨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은 적극적인 의미로 그것을 \'생명을 주는 말씀\' 으로 번역합니다.
율법이란 경건하고 거룩한 생활을 지도하는 완전한 기준입니다.
또 율법이란, 하나님의 의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정당하게 생명과 구원의 가르침으로 간주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생명과 사망의 길을 그 백성들 앞에 제시했다고(신30:19) 모세가 하늘과 땅을 두고 맹세했을 때에 그가 한 이 엄숙한 증거는 바로 이것과 합치하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20장에서 이와 유사한 기분으로 탄식하십니다.
\"이 일을 행하는 자들은 그로 인하여 살 것이라\"(겔20:13, 레18:5, 눅10:28) 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훌륭한 계율이 손상되고 하나님의 선한 율법이 더럽혀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자체 안에 생명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아무라도 이 \'산 말씀\' 이라는 말을 효과 또는 능력이 충만한 것이라고 풀이하기를 좋아한다면 거기 대해서 우리는 별로 반대할 생각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이라는 설명에 대해서는 인간의 타락한 본성 때문에 그것에 대한 우발적인 무엇이 있는 것으로 생각됩니다.
율법이 죄를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요 우리 안에서 죄를 찾아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생명을 제시해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타락으로 거기서 죽음 밖에는 다른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오직 인간에 관해서만 죽음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5) 그러면서도 이 구절에서 스데반은 좀 더 깊은 무엇을 마음에 지니고 있었습니다.
스데반으로서는 단순한 계명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요 모세의 가르침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가르침 가운데는 은혜의 약속이 포함되어 있으며 또 실로 인간의 유일한 생명이요 구원이신 그리스도 자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상대해야 했던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사람들이었는가를 상기합니다.
그들은 터무니없이 율법에 열중해 있었고 또 죽은, 그리고 죽음을 지닌 문자에만 애착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동시에 그들은 스데반에 대해서는 그가 율법 안에서 실로 그 핵심이 되는 그리스도를 추구하고 있다는 이유로 그를 대항하여 격분합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으로서는 그들의 고집스러운 무지를 간접적으로 가볍게 건드리면서 그들이 이제까지 알고 있었던 것보다 훨씬 더 크고 더 훌륭한 무엇인가가 율법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그들은 육감적이었으므로 외적인 겉모양으로 만족하고 영적인 것을 아무것도 율법에서 구하지 아니하며 더군다나 그들은 그런 것들이 자기들에게 보여지는 것도 용납하지 않을 것입니다.
6) 본 절에 \"우리에게 주던 자가 이 사람이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모세가 잘못되어 비난받아 왔던 중상을 제거하는 일에 유용합니다.
모세는 자신을 율법의 멍에 아래 복종시키고 또 공공연하게 자기가 모세의 제자 중의 한 사람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이상, 모세는 다른 사람들 가운데서 신용을 받지 못하는 일은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는 반대로 그 허위중상의 장본인들에게 자기가 받아왔던 오명(汚名)을 반려해 던져 주는 것입니다.
그 조상들이 율법에 복종하기를 원치 않았던 일에 대한 비난은 어느 정도로 그 민족 전체에게 공통적으로 관련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그와 동시에 모세는 자기 당대만이 아니고 모세가 죽은 후에라도 후대 자손들 가운데서 모세의 권위가 존속되기 위하여 예언자로 임명되었었다는 사실을 그들에게 타이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이란 그 가르침의 선교자들과 함께 그들이 사라질 때 따라서 멸절된 것이요 혹은 제거될 것이라는 말은 결코 옳지 않은 말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불멸을 주는 바로 그 자체가 사멸할 수 밖에 없다는 일보다 더 모순되는 일이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 됩니다.
즉 예언자들이나 사도들이 자기들의 시대의 사람들에게 실제로 말한 것처럼 그들은 그것을 우리를 위하여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또 그들의 가르침은 그 가르침의 선교자인 사람들에게보다는 하나님에게 그 가르침의 창시자 되심을 돌리기 때문에 영속적으로 든든하다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만일 그들에게 전해진 말씀에 대하여 어떤 반발이 있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거부하는 일이라는 점을 스데반은 경고합니다.
2. 본문 39절은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복종치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입니다.
스데반은 모세가 조상들에게 거절당했다고 말씀합니다.
동시에 왜 그들이 애굽의 미신에 스스로 몸바치기를 좋아했는가 그 이유를 지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최근까지 그처럼 심하게 고통을 겪었던 땅인 애굽의 풍속과 생활을 열열히 동경했다는 사실은 무서운 현상이요, 맹목적인 광태보다 나쁜 상태였습니다.
스데반은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여\' 라고 말씀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애굽으로 돌아가기를 바랐기 때문이 아니요,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을 그러한 타락으로 돌렸기 때문입니다. 이 타락의 회상은 그들의 기억에서 소멸되어야만 했습니다. 최대의 증오와 혐오를 제외하고 말입니다.
한 때 유대인 가운데서 애굽으로 돌아가자는 운동이 있었던 것은 과연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여기서 그 이야기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더구나 스데반은 그들이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했다\' 고 말씀할 때 그것은 그들의 반역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인도와 지도 아래 바른 길로 들어와서 갑자기 다른 방향으로 달려갔기 때문에 그것은 마치 고집센 말이 주인의 기수(騎手)를 견뎌내지 못하고 제멋대로 진로를 바꿔서 달려가는 것과 같습니다.
3. 본문 40절은 \"아론더러 이르되 우리를 인도할 신들을 우리를 위하여 만들라 애굽 땅에서 우리를 인도하던 이 모세는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노라 하고\" 입니다.
1) 유대인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역행하는 계단을 밟았더라도 스데반은 여기서 그들의 더럽고 가증스러운 반역 행위 중에서 더욱 현저한 한 예를 택했습니다.
그들은 그때에 자신들을 위해 한 송아지를 만들어 하나님 대신 예배했습니다.
사람이 이러한 배은망덕보다 더 괘씸한 일을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애굽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었습니다.
또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모세의 활동으로 이루어진 사실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냉담하게도 그들은 이러한 큰 복의 창조자를 그의 사자(使者 ; minister) 와 함께 배척합니다. 무슨 구실로 그렇게 한 것입니까?
그들이 자기들은 모세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모세가 산 위에 올라가 있는 것을 알지 못할 까닭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리운 구름 속에서 모세를 가지 곁으로 데려가셨을 때까지 그들은 자기들의 눈으로 직접 모세의 뒤를 따라 보았습니다.
더욱이 모세가 그들 가운데 부재하는 것은 그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였습니다.
때가오면 모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율법을 그들에게 가져오기 위하여 돌아오리라는 약속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오직 잠시동안 조용히 기다릴 것을 모세는 그들에게 명령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 정당한 사유도 없이 그들은 갑자기 포악한 소동을 일으켰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들의 광란이 무슨 그럴만한 정당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꾸미고 착색(着色)하기 위하여 그들은 자기들과 함께 하는 신들을 모시고 싶다고 한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이 그때까지 한번도 임재하신 표적을 주시지 않았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은 날마다 구름 기둥과 불기둥에서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우리는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께 악의에 찬 경멸로 우상숭배로 달려갔는가를 압니다.
그 많은 기적들에 대한 회상은 세상 끝 날까지 찬양을 받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그처럼 짧은 시일 안에 재빨리 잊어버리고 말았다는 사실을 볼 때 그들의 배은망덕이 얼마나 창피스럽고 사악하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이 한가지 변절만으로도 그들이 얼마나 완악하고 다루기 힘든 백성들이었는가를 충분히 알게 됩니다. 또한 우리는 그들의 다른 반역 이야기보다도 이것이 스데반의 경우에 도움이 되었다는 사실을 고려해야 합니다.
그 백성들이 공공연하게 하나님 예배를 파괴하고 율법의 가르침을 거부하며 신성을 모독하는 이방 종교를 이입하였기 때문입니다.
2) 이와는 별도로 이 구절은 매우 주목할만한 구절입니다.
그것은 모든 종류의 미신이 처음부터 거기서 흘러나온 그 원천이 되기 때문입니다.
특히 우상을 만들어 낸 실질적인 주요한 기원이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육체를 쓰고 있는 인간은 그 육체가 능히 납득할 수 있는 그런 방식으로 현존하시는 하나님을 모시기 원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모든 시대에 사람들이 우상을 만드는 일에 열광적인 이유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께서는 확실히 어느 정도 우리의 무지에 자신을 적응시키셔서 스스로 여러 가지 모습의 형상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율법시대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기 위해 많은 상징물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에는 하나님께서 세례를 통하여 또는 성찬을 통하여, 그리고 말씀의 외적 설교를 통해서까지 우리에게 내려오시는 것입니다.
3) 그러나 인간들은 여기서 이중으로 죄를 범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에 의하여 정해진 수단(ordinatis a Deo mediis) 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그들은 뻔뻔스럽게도 새로운 수단들을 추구하는 일입니다.
현재 그것은 적지 않은 과오입니다. 인간들은 수단의 제한이 없음(nullum modum tenentes)을 알고서 언제나 새로운 발명을 하려고 좀이 쑤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한계를 뛰어 넘기를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자신이 정해 놓으신 것을 제외하고 하나님의 참된 형상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뜻을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에 어긋나게 고안된 것들은 모두 거짓되고 위조된 것입니다.
둘째로는 또 하나의 용납할 수 없는 과오가 거기에 따릅니다.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에 관해서 고체적(固體的) 이고, 지상적인 것 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하기에 하나님의 임재의 모든 표적을 모두 동일한 실물로 변경합니다.
인간은 그처럼 잘못되어 자기가 만든 우상에게서 즐거움을 찾고자 할 뿐 아니요, 또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을 무엇이든지 타락시키고 망쳐서 다른 목적을 위해 사용되도록 뒤틀어 놓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과연 우리에게로 내려오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우리를 하늘로 올리시려는 그런 목적을 위해서 그렇게 하십니다.
그러나 이 땅에 얽매어 있는 우리는 그분도 역시 땅에 얽매어지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의 하늘 영광은 더럽혀집니다.
또 \"우리를 위하여 신들을 만들라\"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말이 그대로 실현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지 않는 사람은 누구나 새로운 신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또 그 전체 사건을 좀더 면밀히 고찰해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기들이 큰 수고와 함께 만든 하나님(Deum)을 소유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반대로 금송아지 형상 밑에서 참되고 영원한 하나님을 자기들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진심으로 일치한 마음을 가지고 희생제물을 드렸습니다.
또 그들은 아론이 말한 바 \"이것은 애굽에서 그들을 구해 낸 신이다\" 라고 한 말을 만장일치로 동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그러한 천박한 환상에는 관심을 두지 않으시고 다만 사람들이 그의 말씀으로부터 비록 조금이라도 떨어지게 되자마자 이방신들이 하나님의 자리에 대치되었다는 사실을 탄식하십니다.
4. 본문 41절 초두는 \"그때에 저희가 송아지를 만들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입니다
왜 이 특정한 형상이 다른 것들보다 더 그들에게 즐거움이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 다음 구절들에서 쉽게 추론할 수 있습니다. 애굽에는 무수한 우상들이 우글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크게 숭앙을 받은 것이 소였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이미 말한 바와 같이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도대체 무엇이 우상에 대한 그들의 열망을 일으켜 주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스데반이 저들이 \"그 우상 앞에 제사하며\" 라고 말씀한 그 연설에서 이 부분에 유의해야 됩니다.
아론은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하여 모이라고 명령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다 함께 모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다음과 같이 언명합니다.
자기들은 송아지를 예배하기 위해서 하나님을 기만하고 하나님 예배를 바꿔치기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갖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자기들은 송아지 형상 안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상을 만듦으로서 참된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그러기에 그 후에 뒤따르는 일들은 무엇이거나 다 우상에게 드려진 것이 됩니다.
하나님은 모든 반칙적인 의식은 배격하신다는 관점에서 볼 때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명하시지 않은 것을 하나님의 것인 양 뒤집어 씌우려고 하는 것은 헌신에 있어서 옳지 않은 일입니다.
또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어떤 형상이라도 하나님을 위해 세워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금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나중에 아무리 하나님의 영예를 위해 시도된 것이라 하더라도 그것은 신성을 모독하는 일입니다.
5. 본문 41절 후반은 \"자기 손으로 만든 것을 기뻐하더니\" 입니다.
이 구절은 이사야에서 온 말인데 어떤 사람은 예언자들에게서 온 말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비슷하게 유대인들에 대하여 자기들이 스스로 만든 것들을 가지고 좋아하고 있다고 책망합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무슨 일이든지 하나님의 특권에 속하는 것을 자신들이 가로챌 때에 그것은 확실히 놀라운 광기(狂氣)입니다.
우리는 이 \'기뻐한다\'는 것을 모세가 출애굽기 32장에서 예시해 주고 있는 의식적인 종교의 춤이라고 이해합니다.
스데반은 우상숭배자들이 행사하고 있는 공통된 과오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으신 것 이외에는 종교에서 무엇이든지를 기획할 권리가 주어지지 않았는데도 그들은 자기들이 좋아하는 것을 생각없이 만들어 내며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놓고 자기들의 손으로 만들어 놓은 것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은 그들이 이러한 방종에서 스스로 좋아하면 할수록 더욱 더 하나님을 기분 상하게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예배가 인정받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손으로 한 일들, 우리 자신의 조작을 포기해야 됩니다.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은 모두가 신성모독이요, 남용에 불과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실상 우상이라는 말은 마치 아무가치가 없다는 말과 같이 비난의 대상으로 사용되는 것이 적절한 일입니다.
어떠한 조건으로도 인간이 하나님(Deum)을 날조하도록 허용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행7:42-43 하나님이 돌이키사
스데반은 여기서 유대인들이 범죄하는 일을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의 고집 센 과오의 길로 멀리 방황하였다고 말씀합니다.
1) 따라서 온 이스라엘이 처음 내디딘 발걸음이 그들로 하여금 미로에 빠져들게 하는 진입로와 같이 되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이 때부터 그들의 광태가 증대되어 하나님의 이름을 붙인 송아지 우상 대신에 그들이 무수한 우상을 만들어 낸 것은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형벌입니다.
이 예는 우리가 하나님의 법을 따를 때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줍니다.
우리가 비록 근소한 방향으로 하나님의 법에서 벗어나게 되면 그 즉시로 갖가지 광태로 이리 저리로 끌려 다니게 되며 굉장히 많은 미신에 휘말려서 마침내는 거대한 죄의 구덩이에 몽땅 빠져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말씀 복종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형벌을 공정하게 부과하십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하나님께서 \'돌이키셨다\' 고 말씀했습니다.
이런 표현은 결국 \'하나님께서 등을 돌리셨다\' 는 뜻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인도하시는 일에 특이한 관심을 보이셨을 때에는 그의 눈길을 그 백성들에게 맞추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들의 변절을 슬퍼하시고 그의 얼굴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십니다.
2) 이 사실에서 우리는 동시에 중요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즉 우리는 주께서 우리를 인도하시기 위해 지켜보고 계실 때에 한하여 올바른 길을 따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그 얼굴을 돌이키시면 그 즉시로 우리는 과오 속으로 끌려가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미 송아지 상을 만들었을 그 시기에 하나님께 버림받았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마치 그들이 완전히 마음의 타락된 상태로 떨어졌었다고 말한 것처럼(롬1:28) 그 형벌의 통렬함을 지적하려 했습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를 통해서도 이와 비슷하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자신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실 때에 자기에게 돌려야 할 영광을 돌리지 않은 자에게는 눈이 멀고 얼이 빠지게 하며 또 부끄러운 욕정으로 달려가도록 버려 두신다는 사실입니다(롬1:21이하).
그것은 이러한 결과로 생겨난 일입니다.
즉 종교가 부패하기 시작한 그 시각부터 얼마간의 미신의 자리에 무수한 혐오할만한 것들이 뒤를 이어 발생하고 얼마간의 사소한 부패의 뒤에 굉장한 우상숭배의 괴물이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밝혀 주는 빛을 거부했기 때문에 그들은 모두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에 의하여 올바른 지각의 능력을 상실하였습니다.
따라서 그들의 판단이란 야수들의 그것보다 나을 것이 없게 된 것입니다.
사실상 우상숭배란 새끼를 많이 칩니다.
하나의 거짓 신에서 백의 신이 생겨나고 또 단일한 미신으로부터 수천의 큰 떼거리가 생겨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 편의 무분별이란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단에게 내어줌으로서 보복하시는 그 사실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배하시는 권한을 잡으신 그때로부터 그분의 역할에는 아무 변동이 없으십니다. 다만 우리 자신의 무모와 변덕스러운 성질 때문에 우리에게서 하나님을 멀리 떨어지게 한 것뿐입니다.
1. 본문 42절은 \"하나님이 돌이키사 저희를 그 하늘의 군대 섬기는 일에 버려두셨으미 이는 선지자의 책에 기록된 바 이스라엘의 집이여 사십 년을 광야에서 너희가 희생과 제물을 내게 드린 일이 있었느냐\" 입니다.
이 구절은 예언자 아모스의 말에서 인용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5:25).
스데반이 사용한 어법은 모든 예언이 한 권의 책에 집약돼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아모스가 그 백성들의 우상숭배와 그밖의 각종 범죄를 통렬하게 책망한 다음에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거스려 반역한 일이 새로운 죄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첨가합니다.
그들의 조상들이 이미 광야에 있었을 시절에 참된 신앙에서 떠났었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께서는 자기에게 희생제물이 드려진 일이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광야에서 전혀 희생제사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타락한 예배를 거절하셨기 때문입니다.
이와 똑같이 이사야서에서 하나님은 그 백성들이 아무 희생제물도 자기에게 드리지 않았으므로 그들을 타이르십니다.
말씀하시기를 \"그러나 야곱아 너는 나를 부르지 아니하였고 네 번제의 양을 내게로 가져오지 아니하였고 네 제물로 나를 공경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나는 예물로 인하여 너를 수고롭게 아니하였고 유향으로 인하여 너를 괴롭게 아니하였거늘 너는 나를 위하여 돈으로 향품을 사지 아니하며 희생의 기름으로 나를 흡족케 아니하고 네 죄짐으로 나를 수고케 하며 네 죄악으로 나를 괴롭게 하였느니라\"(사43:22-24) 하신 것입니다.
확실히 유대인들은 이러한 모든 일들을 날마다 시행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불신앙의 인간들로부터 아무런 감응도 받지 아니하셨습니다.
그들의 제의식을 인정하지도 아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지에서 온 혼잡물로 더럽혀진 것은 무엇이나 매우 증오하였습니다.
아모스는 지금까지 그런 식으로 조상들에 관해서 이야기하였습니다.
바로 다음에 첨부된 말이 그들에게 혹은 그들의 자손들에게 관계된 말일 수 있습니다.
2. 본문 43절 초두는 \"몰록의 장막과 신 레판의 별을 받들었음이여\" 입니다.
1) 어떤 이는 반대되는 의미의 접속사 대신에 이를 연사(連辭)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마치 아모스가 \"그러나 그 반대로 너희는 우상에게 존경의 뜻을 표시하였다\"라고 말한 것처럼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역적(使役的)인 의미로 이해될 수도 있습니다.
즉 \"너희가 몰록의 장막을 세웠기 때문에 내게는 희생제물을 드리지 아니하였다\"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조금 다르게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먼저 더욱 크게 강조하시기 위하여 그 조상들을 경책하시고 나서 그들의 자손들이 각종 새로운 우상을 만들어 냈기 때문에 여러 가지 미신에 말려들어 더 많은 악을 행하였다고 말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마치 그것은 예언자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렇게 말한 것과 흡사합니다.
\"오 야곱의 집이여 내가 먼 옛날 일로 거슬러 올라가 너희 족속들이 내게 어떻게 행동하였는가를 말하면 이미 너희 조상들이 광야에 있었을 바로 그 때에 벌써 타락하기 시작하였으며 내가 명령한 예배를 파멸시킨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무수한 신들의 무리를 불러 들여왔기에 불신앙에 너희는 훨씬 조상들을 능가한 것이다\"
이러한 순서가 스데반이 말하려는 목적에 더 일치합니다.
이미 말해 온 바와 같이 스데반으로서는 중요한 사실을 증거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타락하여 생소하고 낮선 의식 속에 빠져버린 이후에 그들의 범죄에 끝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에 의하여 눈 먼 자들이 되어 거듭거듭 새로운 우상숭배로서 자신들을 더럽혔고 마침내 그들은 불신앙의 절정에 다다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 예언자의 증언을 통하여 적절하게도 불신앙과 불복종의 조상들에게서 태어난 유대인들이 더욱 악해지는 방향으로 급속하게 나아가는 일을 그치지 않았다는 사실에 대한 확증을 얻은 것입니다.
2) 결국 예언자의 말들이 조금씩 다르기는 하지만 의미는 동일합니다.
유대인들을 향하여 이야기하였던 스데반은 실지로 예언자가 말한 바를 그들 자신의 용어로 한 마디 한마디 그대로 반복했었고 헬라어로 기록한 누가는 헬라어 번역을 따랐다고 하는 것이 가능한 이야기 같습니다.
예언자는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너희 우상 기윤(Chiun) 곧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들어서 신으로 삼은 별 형상을 가지고 가리라\" 고 말씀합니다(암5:26).
\'식궂( )\'이라는 말은 \'장막\'을 의미하는 말인데 그 유사성(類似性) 때문에 헬라어 번역은 그 특유한 의미에서 이를 보통명사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헬라어 역자가 \'렘판\'(Remphan)이라는 말을 그 당시에 일반적으로 더 많이 사용되었다는 사실이 있음직한 일이었다고 여겨진다면 모르거니와 어디서 인용했는지는 모릅니다.
3. 본문 43절 중간은 \"이것은 너희가 절하고자 하여 만든 형상이로다\" 입니다.
1) 예언자가 사용한 \'형상\' 이라는 말은 자체 안에 나쁜 뜻을 찾을 수 없습니다.
헬라어의 (튀포스) 곧 \'형상\'이라는 말도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모든 의례는 (튀포이 ; 형상)로 불리워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언자는 분명하게 유대인들이 만든 형상들을 비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눈에 보이는 외적인 형식에 의하여 예배드려지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혹자가 여기에는 별들이 언급되고 있다고 항변한다면 우리는 사실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러나 예언자가 우상들에게 존경할만한 이름을 허여한다 하더라도 예언자는 여전히 타락한 예배에 날카롭고 엄격한 비난을 하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강조할 따름입니다.
2) 이런 방식으로 교황제도주의자들의 우스꽝스럽고 유치한 궤변도 논박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숭배하고 있는 초상이나 조상(彫像)들은 우상이 아니라 하기에 자기들이 열중하는 그 예배는 (에이코노들-레이아) 곧 화상에 대한 숭앙이지 (에이돌-로둘-레이아) 곧 우상예배는 아니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궤변으로 하나님을 웃음거리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평범한 상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는 누구나 그러한 어리석은 행동이 그들을 극단적으로 웃음거리가 되게 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그들과 말로 논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튀포스 ; 초상)라는 말이 (에이콘 ; 형상)이라는 말보다 더 존경할 만한 풍채가 있는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들이 자신을 위하여 만들어 놓은 (튀포이 ; 초상)는 여기서 분명히 비난되고 있는데 그것은 숭배 때문( )만이 아니요, 어떤 종류의 경배의 표시 때문( ) 입니다.
그러므로 교황제도 주의자들이 거기에 교묘한 도피의 수단을 가지고 있는 줄로 생각하고 있는 그 구별이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맙니다.
4. 본문 43절 끝은 \"내가 너희를 바벨론 밖에 옮기리라 함과 같으니라\" 입니다.
예언자는 \'다메섹\'이라고 말했고 헬라어 역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결국에는 별로 다름이 없기는 하지만 이 \'바벨론\'이라는 말은 착오로 여기에 끼어 들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으로 멀리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이 그 수도였던 수리아 왕국에서 그들이 확실하고도 견고한 보호를 받고 있었다는 그러한 사고(思考)의 습성 때문에 이 예언자는 다메섹도 하나님이 그들을 더 멀리로 좇아내시는 일을 저지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예언자는 이렇게 말하는 셈입니다.
즉 \'너희는 다메섹을 적을 방비하는 요새로 가지고 있는 동안 특히 잘 방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너희를 훨씬 더 멀리 앗수르나 갈대아로 옮기실 것이다\' 입니다.
행7:44-50 광야에서
여기서는 장막, 혹은 성전의 의의(意義)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1. 본문 44절 초두는 \"광야에서 우리 조상들에게 증거의 장막이 있었으니\" 입니다.
1) \"증거의 장막\"이라는 말씀으로 스데반은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지적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자신이 그 백성들의 고삐를 풀어 주어서 제멋대로 방황하는 것을 허용하신 것처럼 유대인들이 각종 미신으로 인하여 스스로 타락한 일을 가지고 하나님께 책임을 돌릴 수는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예배하기를 원하시는지를 규정지어 주셨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따릅니다.
그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제정해 주신 형식을 따르려는 생각을 가지지 않았다는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처럼 많은 과오에 휘말리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어쨌든 성령의 감동으로 스데반은 두 가지 이유로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하나님의 지시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자신들을 위하여 무모하게 괴상한 의식을 고안해 냈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는 성전 자체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나 하나님이 제정해 주신 여러 가지 의식에 대한 견해에 있어서 올바른 목적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한 일들이 그들에게는 신령한 예배를 드리게 하기 위해 있어야만 했습니다.
그들의 관능적인 견해 때문에 그들은 단지 땅의 것과 육의 것만을 움켜잡았습니다.
다시 말하면 그 백성들이야말로 실체 대신에 그림자에 마음을 두었습니다.
유대인들이야말로 단순한 하나님의 말씀만으로 만족하지 아니하고 자기들 자신의 조작을 따라서 그리로 끌려갔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우선 책망을 받은 것은 그들의 주제넘음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들이 신령한 일 대신에 육적인 일을 추구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에 참되고 성실한 예배를 악용하고 남용한 사실에 책망이 떨어졌다는 사실입니다.
2) 그들에게는 \'증거의 장막이 있었다\' 고 스데반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범죄의 길로 달려가게 된 것은 오직 그들 자신의 음탕함과 무사려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예배하는 길이 무엇인지를 그들이 철저하게 가르침 받았다는 사실을 보게 되면 알지 못해서 그랬다는 구실은 그들에게 전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주목을 끌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굴레를 씌워서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알게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수락한 다음에 딴 방향으로 발길을 돌이킨다면 그 죄책은 이중으로 지게 되기 때문입니다.
주인의 뜻을 안 종이 알면서도 그 뜻을 이행하지 않을 때 더욱 심하게 매를 맞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눅12:47).
이것은 모든 변질되고 타락한 의식과 참되고 성실한 예배를 성령께서 구별하시는 첫째 특징입니다. 물론 참된 예배와 우상숭배와의 사이에 기초적인 차이는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되는 일 이외에는 아무것도 행하려고 하지 않는데 그렇지 않은 자는 자기들에게 적당하다고 생각되는 것은 무엇이나 하도록 권리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들의 뜻을 법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이 정해 놓으신 것만을 인정하십니다.
3) \'증거\'라는 말은 또한 이것과 관계됩니다.
히브리어 (모-에드)는 미리 정해진 장소나 시간, 인간들의 모임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모세의 기록에서 그 말을 사용한 방식은 그 이름에 대한 다른 근거를 보여 줍니다. 모세의 기록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자주 반복해서 말씀하시기를 \"내가 거기서 너희와 만나리라\"(출9:42, 43, 30:6, 36)고 하신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장막\'은 계약과 주의 말씀으로 성별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의 음성이 끊임없이 거기서 울려 퍼졌습니다. 따라서 그곳은 다른 보통 장소들과는 달랐습니다.
2. 본문 44절 하반은 \"이것은 모세에게 말씀하신 이가 명하사 저가 본 그 식대로 만들게 하신 것이라\" 입니다.
\"저가 본 그 식대로\"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급한 둘째의 특징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분부하신 의식만을 사용할 가능성이 있기는 합니다.
그러면서도 잘못된 방식으로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외형의 의식이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 주는 상징이 되지 않는다면 그러한 외적 의식에 마음을 쓸 여지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외형적인 모습에 애착을 느껴 거기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고대의 장막 구조가 하늘 모형을 따라서 완성되도록 원하셨습니다.
더구나 출애굽기 25장 40절에서 모세가 언급한 \'식양\'(typum)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알기 원한다면 히브리서 주석(8:5)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단지 스데반은 여기서 간명하게 경고할 뿐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명령하신 예배는 영적인 것이었으나 그들은 자기들의 육적인 어리석음 때문에 그것을 나쁘게 또는 반대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예배도 하나님의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계명에 근거를 둔 것이 아니고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그 계명을 적절하게 시행하기 위해서는 영적 진리의 현존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 합니다. 이 논쟁할 여지가 없는 사실과 유사한 문제가 바로 그림자가 실체에 복종하여야만 하느냐 아니냐 하는 점입니다.
모세가 그 식양(forman)을 보았다고 한 사실에 대해서 말한다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마음대로 형상들을 만들도록 허용되지 않았다는 것을 하나님의 성령은 의미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든 감각은 하나님이 보여주신 형상에 골똘히 기울여져야 할 것이요, 그렇게 함으로서 종교전체가 그것에 따라 형성되게 될 것입니다.
\'식양\'(typus) 이라는 말이 여기서는 기본적인 모형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영적 진리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3. 본문 45-46절은 \"(45)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 하나님이 저희 앞에서 좇아내신 이방인의 땅을 점령할 때에 여호수아와 함께 가지고 들어가서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 (46) 다윗이 하나님 앞에서 은혜를 받아 야곱의 집을 위하여 하나님의 처소를 준비케 하여 달라 하더니\" 입니다.
1) 45절 초두에 \"우리 조상들이 그것을 받아\"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사실로 인하여 그 백성들의 완강함이 더 한층 나타났습니다.
즉 이 장막은 그들과 함께 존속되었고 또 그들이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가지고 갔는데 그러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의 증거의 범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반역적인 속편한 마음으로 괴상하고도 모독적인 의식을 되풀이했습니다.
하나님이 저들 가운데 확실히 거하신다고 공언하면서 그들은 하나님께로부터 그처럼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신 유산에서 하나님을 추방했습니다.
이에 덧붙여서 하나님께서는 각종 많은 기적으로 그 장막을 영예롭게 했습니다.
성경의 기록의 많은 부분에서 분명한 바와 같이 장막은 지난 유대인들이 획득한 많은 승리에 의하여 확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여러 가지 많은 방법으로 인정된 예배 방식에서 후퇴하는 습성이 반복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굉장한 옹고집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습니다.
2) 45절 끝 부분에 \"다윗 때까지 이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의 법궤가 오랫동안 실로에 휴식처를 정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다윗의 통치시대까지는 안정된 거처를 가지고 있지 못했습니다.
법궤를 위한 장소를 마련하는 일이 인간에게는 허락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직 모세가 매우 빈번히 그 일에 대하여 언급한 바와 같이 주께서 지시하시는 장소에 그 법궤는 안치돼야 합니다.
실상 다윗은 그 법궤를 적에게서 탈환한 후에도 주께서 그 천사를 통하여 그 장소가 바로 하나님이 택하신 곳이었다는 사실을 하늘로부터 알려 주시기 까지는(삼하24:16) 자신이 감히 아라우나(Araunah)의 타작마당으로 가져오지 아니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에게 그 장소가 나중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예배할 곳으로 보여졌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총이라고 스데반은 자못 옳게 생각한 것입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에서(122:1,2) 그 일을 매우 크게 평가할 만한 일로 기뻐합니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여호와의 집에 올라가자 할 때에 내가 기뻐하였도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다윗에게 있어서는 제사장과 왕의 직책이 하나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법궤의 설치는 다윗의 통치의 확고 부동성을 과시해줍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엄숙한 서약으로서 자기는 자신의 집에 먼저 들어가지 아니하며 자기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며 자기 눈꺼풀로 쉬게 하지 아니하기를 자기가 주의 거하실 곳, 그리고 야곱의 하나님의 성막을 발견하기까지 하리라고 그처럼 안타깝게 자기 소원을 표명하여 말하기까지 한 까닭입니다(시132:3-5).
그 장소가 다윗에게 보여졌지만 성전을 건축하는 일은 솔로몬에게 허락된 것이었습니다(왕상5:5).
4. 본문 47-48절은 \"(47) 솔로몬이 그를 위하여 집을 지었느니라
(48)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선지자의 말 한 바\" 입니다.
1) 스데반은 여기서 솔로몬이 그 성전을 건축할 때에 하나님의 본질에 대해서는 아무런 고려도 하지 않았다는 듯이 간접적으로 솔로몬을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명령이 없이는 그 일이 착수되지 않았습니다.
그곳에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과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약속이 첨가되었습니다.
그 일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스데반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손으로 지은\' 성전 안에 거하시지 아니하신다고 말했을 때에 그것은 솔로몬을 향한 말이 아닙니다.
솔로몬은 하나님을 하늘에서 추구해야 할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솔로몬 역시 그가 드린 장엄한 기도 서두에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전이오리이까\"(왕상8:27)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비난한 것은 마치 하나님이 성전 안에 묶여있는 것처럼 성전을 잘못 사용한 그 백성들의 어리석음입니다.
그것은 그가 덧붙여 인용한 이사야의 증언에서 더 분명하게 나타납니다(사66:1이하).
스데반은 \"하나님께서는 솔로몬에 의하여 자신을 위한 성전이 지어지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러한 종류의 건물 안에 이를테면 밀폐되어 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그 백성들이 자신을 어떠한 장소에 한정시킬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는 그러한 그릇된 방식으로 자기를 대하고 있다고 탄식하시는 것과 꼭 마찬가지이다\" 라고 한 것입니다.
2) 이 예언자는 유대인들에 대해서 통렬하게 비난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신성을 성전에 국한된 것으로 생각하여 미신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을 예배하였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들은 사물에 대한 자기들 나름대로의 견해를 따라서 하나님을 측정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자기들의 희생제물과 하나님 앞에 나아가 보이기(outward show)를 다 수행한 다음에 하나님은 자기들과 화해되었으며 심지어는 자기들이 하나님에게 은공을 베풀었다고 생각한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싸늘한 많은 의식으로 넉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 자신이 육감적이요, 이 세상에 열중하고 있으면서 하나님이 자기들과 같다고 상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로 하여금 이 어리석음에서 떨어져 나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만물에 충만하다고 선언하십니다.
5. 본문 49절은 \"주께서 가라사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등상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짓겠으며 나의 안식할 처소가 어디뇨\" 입니다.
1) 하나님께서 하늘은 자기의 보좌요 땅은 자신의 발판이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한 선언이 마치 하나님이 사람처럼 몸을 가지셨다든지 혹은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질 수 있다든지 하는 식으로 받아 들여져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하나님은 무한하시므로 제한된 공간 속에 담길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그분에 대한 예배를 자기들의 성질을 표준해서 측정하면 잘못입니다.
그러나 이 예언자는 위선자들을 상대하기 때문에 그가 단순히 하나님의 본질에 대하여 논쟁하고 있는 것만이 아니요 일반적으로 하나님은 인간과는 전혀 다르며 또 인간처럼 이 세상의 허영(虛榮)에 영향을 받지 않으신다는 사실을 가르치는 것입니다.
2) 여기서 다시 중요한 문제가 제기됩니다.
왜 이 예언자는 하나님이 이 세상에서는 휴식처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인가?
성령께서는 분명히 다른 곳, 즉 시편132편 14절에서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라고 전혀 정반대의 말씀을 하시지 않았는가? 그렇습니다.
이사야도 똑같은 설명으로 교회를 영화롭게 했는데 물론 성전을 언급하면서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안식처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대해서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래 전에 자신의 임재의 표적을 성전과 그 희생제물 안에 세우셨을 때에 그분은 자신이나 자신의 능력을 그런 것들에 얽어매려고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러한 상징물에 자기들의 관심을 고착시키고 또 자신들을 위한 땅 위의 신을 만들어 낸 것은 그 생각이 잘못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또 마치 공허한 여러 의식이 그들에게 하나님을 달랠 수 있는 즉각적이고 용이한 방법을 준 것처럼 그런 구실 아래 죄를 범하는 면허라도 받은 것 같은 잘못을 범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우롱하는 길입니다.
3)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외적인 상징에 의하여 자기 백성들에게 임재하실 것이요 그래서 그들 가운데 계시겠다고 증언하실 때에 그는 저들로 하여금 신령한 방법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을 높은 곳 하늘 위로 초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몰두해 있는 위선자들은 차라리 하나님을 하늘로부터 끌어내리기 원합니다. 또 그들은 공허한 형상 이외에는 아무것도 소유한 것이 없기 때문에 우둔한 배짱만이 가득하여 태연하게 죄에 빠져버립니다.
그래서 교황주의자들은 공상에 잠겨 그리스도를 떡과 포도주 속에 가두어 버립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기들의 우상 앞에서 예배행위를 하면서 마치 거기에는 천사와 같은 고결함이 자기들을 통어하는 것처럼 거만하게 머리를 높이 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두 가지 죄과를 자세히 유의해 보아야 합니다.
첫째는 인간들이 세속적이고 육감적인 신을 자신들을 위하여 미신적으로 만들어 내는데 그 신은 그들이 이 땅에 확고하게 묶여 있어서 하늘을 동경하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로 내려오는 그런 신이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은 무가치한 예배행위로도 달랠 수 있다고 그들이 몽상하는 일입니다.
그런 일들의 결과는 바로 그들이 눈에 보이는 표적으로 얼이 빠지게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는 신앙심은 무시하면서 유치한 방법과 무가치한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달래려고 대소란을 피우는 것입니다.
4) 이제 우리는 이 예언자가 하나님은 이 세상의 아무데에도 쉬실 곳을 갖고 계시지 않는다고 말씀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게 됐습니다.
실로 하나님께서는 그 성전을 그의 임재의 증표와 보증이 되기를 의도하셨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으로 하늘에 오르며 또 순수한 신앙을 가지고 영적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자들에게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기들의 어리석은 일들을 가지고 하나님을 이 세상의 자연력에 얽어매거나 혹은 어리석게 하나님을 위한 속세적인 의식을 설정하는 미신자들 가운데에 계시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진 약속으로 인하여 마치 하나님이 성전에 계신 것과 같이 그분께서 우리의 소원을 들으시며 성례전에서 그의 능력을 나타내 주시는 일이 생겨납니다.
만일 우리가 믿음으로 그분에게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분께서는 결코 우리에게 나타나시지 않습니다. 이로 인하여 중요한 결론이 쉽게 나옵니다. 즉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거하시는 때에 그들이 하나님을 영적으로 하늘에서 추구하는 한 , 하나님은 결코 땅에 고착되시지도 않으며 어떤 장소에 포함되시지도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6. 본문 50절은 \"이 모든 것이 다 내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냐 함과 같으니라\"입니다.
이 예언자는 이러한 여러 말로 하나님은 금이나 성전의 값진 장식이나 혹은 희생제물을 필요로 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결론은 하나님께 대한 진정한 예배란 의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그분에게 드리는 것들 중 아무것도 그 자신을 위해서는 그분이 조금도 원하시는 것이 없습니다.
다만 신앙심을 추구하는 일에 그분께서 우리를 훈련시키시기 위해 필요할 따름입니다.
이 주제는 시편 50편에 길게 다루어집니다.
희생제물로서 하나님을 공양하려고 하는 일이 비록 어리석고 혐오할만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만일 위선자들이 그 속에 빠져 있지 않았다면 그들이 자기들의 노름놀이를 그처럼 높이 평가하지는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령한 예배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혐오할 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소유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구하고 계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소유물은 하나님의 은총(procario eo) 으로만 획득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여기서 분명해지는 것은 참된 종교라는 것이 인간의 육감적인 조작품과 얼마나 크게 다르냐 하는 것입니다.
행7:51-53 목이 곧고
여기서 스데반은 온 백성이 그들의 조상의 때에 선지자를 순종하지 않았던 때와 같이 그리스도를(혹은 의인)을 죽였다고 선언합니다.
1. 본문 51절은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도다\" 입니다.
1) 스데반은 자기를 고발하고 있는 그 조항들에 대해서 분명하게 답변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 중에는 스데반이 만일 소란으로 인하여 연설에 세찬 방해를 받지 않았다면 스데반으로서는 더 많은 말을 하였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우리도 기쁜 마음으로 그들의 말에 동의합니다.
우리는 그들을 재판하던 그 의회가 무엇 같은 것이었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자기들의 격분하는 소란과 함성으로 스데반에게 침묵을 강요했더라도 이상히 여겨질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한 스데반은 마치 그들이 야수이기나 한 것처럼 그들을 진정시키기 위하여 신중하게 교묘한 수법을 장황하게 사용하였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중요한 사실을 지적한 순간 그들의 분노에 불이 당겨졌습니다.
즉 율법은 그들로 말미암아 매우 나쁘게 타락하였으며 성전은 그들의 미신 때문에 더럽혀졌고 또 그들이 예배의식을 하늘의 모형을 따르도록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허한 형상에 매달릴 뿐 하나님을 영적으로 예배하지 않았으며 그래서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 중에서 망쳐지지 않은 것이란 아무것도 없었다고 스데반이 지적한 것입니다.
결국 스데반은 비록 자기의 사건에 대해서 곧 바로 이 문제를 다루지는 않았다 하더라도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그들의 격렬한 마음을 달래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데반의 논조는 자기에게 걸머지워진 죄책에 대해서 이를 변호하고 해명하기에 적절했습니다.
2) 이 취조의 두 가지 주요점이란 이런 것입니다.
첫째는 스데반이 하나님과 성전을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또 둘째는 스데반이 율법을 폐기하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중상을 제거하기 위하여 스데반은 아브라함의 부르심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여 중요한 사실을 보여줍니다.
즉 먼저 유대인들은 이방인들보다 그들의 본성이나 그들 자신의 권리나 그들의 무슨 공적으로 인하여 우수한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이라는 인간 안에서 그들을 양자로 받아들인 그 무상(無償)의 특권 때문에 우수하다는 것입니다.
성전이나 예배의식이나 할례도 있기 이전에 구원의 계약이 아브라함과 체결되었었다는 사실도 마찬가지로 스데반의 주제에 도움이 되는 일입니다.
유대인들은 그런 것들이 없이는 하나님 예배도 없고 거룩한 것도 없다고 말할 정도로 그러한 것들을 매우 자랑하였습니다.
다음에 스데반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아브라함의 후손들에게 얼마나 놀랍고 얼마나 다양하였는가를 말했습니다.
또 그 반대로 그 백성들이 얼마나 사악하게 또는 얼마나 심술궂게 자기들이 할 수 있는 한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거절하였는가를 말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들 자신의 가치 때문으로 돌려질 수 있는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무가치하지만 하나님이 자진하여 자기를 위해서 그들을 택하신 때문입니다.
또 그들이 배은망덕하지만 그들에게 끊임없이 은혜를 베풀어 주셨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그것으로 확증됩니다.
그들의 거만하고 당당한 정신이 온순해지고 겸손으로 낮추어질 수 있어서 마침내는 그들에게서 허영의 기풍이 압박을 받아 그들이 중보자에게 나아오도록 되는 것입니다.
셋째로 스데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즉 율법이 주어지는 일에서 또는 백성들이 속량받는 일에서 천사가 책임을 맡아 행사했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그리고 모세가 자기 자신의 직무를 이행하는 동안에 모세는 또 이렇게 말했습니다.
즉 자기 뒤에 다른 예언자들이 올 것인데 그들 중에 어쨌든 두드러지게 뛰어난 가장 위대하신 한 분이 반드시 계실 것이요 그분은 모든 예언을 종결시킬 것이며 또 완전한 성취를 수행하실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에 함축된 의미가 있습니다. 즉 율법에서 약속되고 찬미된 가르침과 또 그 율법의 저작자(author)를 함께 거부하고 있는 자들은 모세의 제자일 수 없다고 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스데반은 이렇게 제시합니다. 즉 모세에 의하여 규정된 고대의 일체 예배는 그 자체만으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옛 교회의 예배는 하늘의 원형을 따라서 구성된 것이기 때문에 차라리 그것은 다른 하나의 목적에 관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은 육적이며 지상적인 것 이외에는 아무것에도 생각이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나 율법의 잘못된 해석자가 되었습니다.
그 결과로 그리스도께서 율법과 성전의 종말이요 또 진리라고 공공연하게 주장하셨을 때에 성전에도 율법에도 아무런 손상이 생겨질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입니다.
3) 결국 하나님 예배는 적절하게는 희생제물이나 그 밖의 것들에 있는 것이 아니요 따라서 모든 의식이란 그리스도의 예시에 불과하다는 그 특정한 사실에 문제의 초점이 있었기 때문에 스데반의 의도는 만일 유대인들이 그에게 허용하기만 했다면 주로 이 점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에 왔을 때에 그들이 분노의 불이 붙어서 더 들을 수가 없게 되었기에 스데반이 이제까지 해온 모든 사실을 주제에 적용시킬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결론으로 그들을 \'목이 곧은 자들\'이라고 날카로운 책망을 첨가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스데반이 돌연히 그들을 향하여 거룩한 열심히 불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자기가 귀를 막고 있는 자들에게 아무런 성과도 없이 열변을 쏟았다고 느꼈기에 가르침의 줄거리를 끊고 말았습니다.
이제 \'목이 곧은 자들\' 은 말이나 소를 생각하면서 한 하나의 은유입니다.
그것은 모세가 그 백성들이 완강하고 하나님께 복종치 아니하며 길들일 수조차 없다고 말하려고 했을 때 흔히 사용하던 은유입니다(출32:9, 33:3, 5).
4) 그 다음에 일어난 비난은 그들 가운데서 더욱 효과를 나타냈습니다.
그들에게 할례란 자기들의 모든 과오를 덮어주는 보자기 역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그들을 \'마음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불렀을 때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반항하고 완강하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만이 아니요 더욱 그들이 스스로 자랑하고 있었던 그 상징 자체에서 그들은 반역적이었으며 계약을 파기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처럼 그들이 자기 자신들의 영광으로 여겨 자랑하고 있었던 바로 그 사실을 스데반은 가장 적절하게 그들을 부끄럽게 하는 것으로 그들에게 돌려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스데반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즉 그들은 주의 계약을 모독했고 따라서 그들의 할례란 아무 효과도 없고 진부한 것이 되어 버렸다는 말입니다.
이제 이러한 이야기 방식은 율법과 예언자들로부터 인용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 상징을 제정하셨기에 그 목적대로 하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왜 자기들이 할례를 받아야 했는가도 이해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즉 그것은 \"너희는 스스로 할례를 행하여 너희 마음 가죽을 베고 나 여호와께 속하라\"(렘4:4)고 기록된 바와 같이 그들이 자기들의 마음과 그 전체 타락된 생각을 다 주께 드려 할례를 받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이 \'표면적 육신의 할례\' 라고 말한 대로 그것은 하나의 공허한 것이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무가치한 보자기에 불과한 것입니다(롬2:29).
마찬가지로 오늘도 우리가 받는 세례의 진리는 영적 씻음에 있는 것이기에 우리는 우리를 진정하게 세례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주는 바로 그 반대의 경우에 대해서 염려해야 됩니다.
우리의 육과 영이 불결한 것들로 더럽혀져 있기 때문입니다.
5)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스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1) 처음 스데반이 연설을 시작했을 때에 그 사람들을 부령들이라고 부르는 것을 합당하게 생각했었는데 이제 스데반은 그들을 이처럼 통렬하게 비난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유순하게 되도록 감동 받을 희망이 보였을 동안에는 스데반이 그들을 우호적으로 대했을 뿐 아니요 존경하는 태도로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어쩔 수 없는 강직성을 스데반이 알게 되고서는 그들을 더 이상 존경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들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게 되는 것처럼 이를테면 그들이 다른 족속의 후손들이기나 한 듯이 그들을 책망하였습니다.
\"너희들은 언제나 하나님의 성령을 거스려 배반하였던 너희 조상들과 같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 자신도 역시 같은 조상으로부터 나온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은 자신을 그리스도와 연합하기 위하여 마치 그것이 무엇인가 저주받은 일인 것처럼 자기 혈족에 관한 일을 잊어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스데반은 그들이 말한 대로 그들을 모두 도매금으로 여기지 아니하고 이 특정한 군중을 향하여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2) 결국 그들이 하나님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바를 완강하게 거역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성령을 거스렸다는 소리를 듣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 안에 불어넣어 주시는 비밀한 내적 계시가 문제되는 것이 아니요 다만 하나님께서 대한 외적인 봉사직무가 문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에 대해서 특별한 관심을 기울여야 됩니다.
스데반은 유대인들에 대해서 모든 변명의 구실을 일소하려고 의도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몰라서 그런 것이 아니요 이를테면 진지하게 또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을 거스려 배반하였다고 스데반은 책망합니다.
이로서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그의 말씀을 고귀하게 여기시며 또 얼마나 경건한 마음으로 우리가 그 말씀을 받아들이기를 원하시는가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거인들과 같이 하나님과 싸우지 않게 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의 입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일군들에게 조용히 귀를 기울이도록 우리는 배워야 합니다.
2. 본문 52절 초반은 \"너희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지 아니하였느냐\" 입니다
1) 그들이 자기 조상들의 죄에 대한 책임을 질 수는 없는 일이기에 스데반이 그것을 자기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죄상에 포함시킨 일은 공정치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그렇게 하는데는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자기들이 아브라함의 신성한 자손이라는 것을 자랑스럽게 자부하고 있기에 그들의 눈앞에 그것이 얼마나 무가치한가를 말해주는 일은 필요했습니다.
마치 그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살해한 사악한 사람들의 후손이라고 할 때에 자기들의 혈통을 자랑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겠느냐고 스데반이 말한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예언자들이 쓴 글 속에 더욱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곧 그들은 예언자들의 자손이 아니요 타락하고 불법적으로 태어난 후손들이며 가나안의 자손들이요 그런 등속의 혈통을 가진 자들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또는 간접적으로 언급합니다.
오늘의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조상들을 자랑스럽게 치켜올릴 때에 그들에 대해서도 똑같은 이야기가 가능합니다.
2) 다음에 스데반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반항이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들은 오히려 자기들의 조상들로부터 일종의 유산으로 이러한 좋지 못한 경향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이 선언은 스데반이 말한 사실을 확대시켜주는 효과를 지닙니다.
더구나 그들이 스데반을 비난하고 있었던 바로 그 교회의 가장은 그들에게서 벗겨버려져야 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복음의 가르침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교회라고 자부하는 그들의 자만으로 또 그들이 대대에 걸쳐서 오랫동안 이 칭호를 사칭하는 일로 가혹하게 손상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다른 쪽을 제시하여 이렇게 증거합니다.
즉, 그들의 조상들은 그들 못지 않게 건전한 가르침에 대한 불경한 모욕과 증오로 예언자들을 거스려 날뛴 것이라고 했습니다.
끝으로 성경에서는 자손들이 동일한 죄과를 범했을 대에 그들을 죄책의 선고에 있어서 그 조상들과 하나로 연결시켜 주는 일이 끊임없는 통례로 되어 있는 일입니다.
그리고 유명한 그리스도의 말씀 \"너희가 너희 조상의 양을 채우라.
그러므로 의인 아벨의 피로부터 성전과 제단 사이에서 너희가 죽인 바라갸의 아들 사가랴의 피까지 땅위에서 흘린 의로운 피가 다 너희에게 돌아가리라\"(마23:32, 35)고 한 말씀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3. 본문 52절 하반은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입니다.
1) 여기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추찰(推察)할 수 있습니다.
즉 모든 예언자들은 그리스도를 율법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자기들의 동족을 그리스도에게 나아가도록 열심히 노력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의 오실 것을 미리 말해준 그 모든 예언을 다 열거하는 일은 너무도 장황한 일이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일반적 원칙으로서 만족해야 합니다.
예언자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약속하는 공통 직무를 가졌습니다.
2) 여기서 \'의인\' 이라는 이름은 그리스도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결백을 나타내는 일 때문만이 아니요 또 그리스도께서 끼쳐주는 영향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 정의를 확립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특이한 역할이기 때문입니다.
스데반은 이 구절에서 유대인들은 전혀 구속의 은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신 있게 논파합니다.
이미 과거에 그들의 조상들은 예언자들을 통하여 자기들에게 알려진 것들을 거부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하나님의 사신들을 잔인하게 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실상 그들의 자손들은 자기들에게 제공된 의와 구원의 창시자를 멸하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이 비교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는 그의 적들의 수치스러운 음모가 그들의 모든 불신앙적인 행위의 장점이라는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준 셈입니다.
4. 본문 53절은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도다 하니라\"
입니다.
1) 스데반을 향해 그들이 품은 맹렬한 격분을 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이라 했습니다.
그것은 마치 그 자신은 율법의 이탈자요 배신자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동일한 변절로 이끌어 가고 있는 자인 것처럼 여긴 일입니다.
비록 스데반이 그 거짓된 고소에 대해서 그것을 끝내려고 시도하기는 하였지만 자기의 답변을 완결 짓지는 못했습니다.
그들은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귀머거리에게 아무리 장광설을 퍼부어도 소용이 없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은 한두 마디로 그들의 거짓된 구실을 끝내주는 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당신들은 율법의 열광자로 자처하고 있지만 그것은 거짓말인 것이 분명합니다. 당신들은 끊임없이 율법을 범하고 파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앞 절에서 스데반이 반역적인 살인행위로 의로운 분을 살해한 일에 대하여 그들을 비난한 것과 똑같이 이제는 율법에 대한 그들의 반역을 비난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위반했다는 스데반의 주장에 대해서 조금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그들을 책망한 것은 그 점에 있었던 것이 아니요 그들로 하여금 거짓된 자만심에 스스로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예민한 수호자로 여겨지기를 바라면서도 실상은 아무 가책 없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위선자들은 그런 식으로 대해 주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응답악절(應答樂節)식의 화법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위탁된 율법에 대하여 복종하는 모양을 취해오기는 했지만 그러면서도 자기들의 오만으로 율법을 경멸한 것입니다.
2) 본 절에 \"천사의 전한\"(율법)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문자대로는 \'처분대로\'의 뜻입니다. 그러나 동일한 사실을 나타냅니다.
율법은 \"천사들로 말미암아 배치되고 베풀어졌다\"(갈3:19)고 가르쳐준 바울 이외에 이 구절에 대한 다른 해석자를 우리가 찾으려고 할 필요는 없습니다.
바울은 그 구절에서 (디아타게이스)라는 분사형(分詞型)의 말을 사용하는데 그 말에서 (디아타게)라는 명사가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에서 사도가 의미하는 것은 그 율법의 권위가 확고하게 정립되도록 율법을 공포하는 데에 천사들이 하나님의 중재자가 되고 증인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 율법을 유대인에게 주실 때에 그 천사들을 그 일에 대한 엄숙한 증인이 되도록 명령하셨기에 그 동일한 천사들이 그들의 배신에 대한 증인도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이 여기서 천사의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가 유대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율법의 범행자로 규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 7절 이하에서 가르친 바와 같이 복음은 율법보다 훨씬 뛰어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율법의 영광을 흐리게 해주는 것인데 그 복음을 경홀히 여기는 자들에게 생겨날 일이 무엇인가를 추측하게 되는 것입니다.
행7:54-58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본문의 내용은 세 부분입니다.
(1) 스데반의 설교에 유대인들이 발악합니다(54절).
(2)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님을 본다고 말씀합니다(55-56).
(3) 유대인들이 한층 더 발악하며 스데반을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칩니다(57-58).
1. 본문 54절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입니다.
1) 처음에는 그들의 진행이 어느 정도의 공정성을 나타내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국에 와서는 재판관들이 자기들의 분노를 억제하지 못하였습니다.
스데반의 연설이 처음에는 의견불일치로 생긴 소란과 투덜거림으로 방해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이제 그들은 큰 소리로 떠들어 대는 적개심의 큰 소동을 일으켜 아무 소리도 그들의 귀에 들려지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그들은 주께서 친히 만드시고 높이 끌어 올려서 쓰신 이 하나님의 사람을 살해한 것입니다.
2) 이제 누가는 사단이 어떻게 말씀의 적대자들을 움직이는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가를 훌륭하게 설명해 줍니다.
\"저희가 마음에 찔렸다\"고 그가 말한 것은 단순히 그들이 분노에 불타 있었다고 하는 의미만이 아니요 광포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 그 분노는 \'이를 갈\' 만큼 격동되어 불꽃을 일으키는 맹렬한 불길과 같았습니다.
사단이 지배하고 있는 모든 하나님의 버림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때 필연적으로 그런 식의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복음의 성질은 조금 전까지 부드러운 외양을 나타내 줄 수 있었던 위선자들을 미친 듯이 달려들게 합니다.
마치 술주정뱅이가 잠을 자려고 시도하다가 갑자기 깨어나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므온은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게 하는 일\'이 그리스도의 특성에 속하는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눅2:35).
그러면서도 이것을 구원의 도리의 탓이라고 해서는 안됩니다.
구원의 도리는 차라리 인간의 마음을 정복하고 그들을 하나님께 복종하도록 변화시키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져 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마음이 사단의 손아귀에 잡히게 될 때 그들이 말씀으로 깊이 영향을 받는다 해도 불신앙이 겉으로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의 우연히 발생되는 악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러한 예를 통하여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모든 사람을 건전한 마음으로 돌려놓은 것이라는 희망을 품어서는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또 우리의 견인불발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는 이 가르침이 매우 필요한 것이 사실입니다
가르침의 직책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하는 사람들과 날카로운 충돌이 있을 것을 각오함이 없이는 그 직책을 충실하게 수행할 수 없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존엄을 가볍게 만드는 불신앙의 사람들이 결코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스데반의 격정과 같은 그러한 열렬함에 의뢰하는 일은 흔히 필요한 일입니다.
하나님의 영예가 하나님에게서 빼앗겨지게 될 때에 우리가 눈 감을 권한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들의 불신앙은 더욱 더 불길을 일으킬 것입니다.
그리고 말씀이 진행됨을 따라서 우리는 그 불길 위에 기름을 붓는 형국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야 어떻게 되든지 간에 역시 우리는 그 악인을 용서해서는 안됩니다.
그들이 비록 온갖 지옥의 광포를 토해내는 일에 열중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반드시 그들을 강력하게 억압해야 됩니다.
그리고 기분 좋은 말로서 악한 자들의 귀를 즐겁게 해 주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위험의 두려움 때문에 약해지는 일로 인하여 성공할 수 있는 안목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확실합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을 위하여 비록 그 결과가 언제나 바람직한 정도까지는 이르지 못한다 하더라도 신앙의 가르침을 선포하는 일에 있어서 견실한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향기로운 제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2. 본문 55절 초반은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입니다.
사방에서 미쳐 날뛰는 적들에게 둘러싸여 스데반의 주장의 우월성이 한편으로는 중상과 악의에 의하여 한편으로는 폭력과 격앙된 고성(高聲)에 의하여 파괴되는 것을 보았을 때 냉혹한 얼굴들이 사방에서 그를 위협하고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그 자신이 무섭고 잔인한 죽음으로 끌려가게 되었는데 아무데도 도움이 되거나 이를 완화시켜 줄 아무 징조도 보이지 아니함을 알았을 때 얼마나 큰 곤경이 이 하나님의 종에게 강요되었는가는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이리하여 스데반이 인간의 도움에서 끊어져 그런 식으로 완전히 버려졌을 때 스데반은 하나님께로 향한 것입니다.
우리는 우선 중요한 사실 하나에 유의해야 됩니다.
첫째로는 스데반이 모든 일의 절망적인 마지막 지점에 다다라 얼른 보기에 오직 죽음만이 그를 노려보고 있을 때에 스데반은 인간과 세상으로부터 얼굴을 돌려 생사의 결재자이신 하나님을 향하여 신속하게 눈길을 돌렸다는 사실입니다.
둘째로는 그와 동시에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첨가해야 됩니다.
즉 그것은 스데반의 소망은 좌절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즉시 스데반에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누가는 스데반이 정복할 수 없는 성령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스데반이 바라보는 하늘의 환상을 막을 자가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환상을 신뢰하면서 그 결과로 자신을 안정시킵니다.
그래서 죽음에 직면하여 죽음을 극복하는 빛나는 승리를 위해 하늘을 우러러 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에 있어서는 자신이 너무도 강하게 땅에 속박되어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지 않는다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것입니다.
그 결과로 죽음에 직면해서만이 아니라 또한 모든 위험의 소문이 가냘프게 들려오기만 해도 우리의 용기는 떨어져 버립니다.
또 나무 잎새 하나가 떨어지는 소리에도 우리는 기가 꺾입니다.
그런데 그 사실은 우리를 위해서 좋은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가 아니면 어디에서 우리의 용기가 나올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마치 우리를 도와주는 유일한 가능성이 이 세상에 있다는 듯이 하늘을 저버립니다.
더구나 생태적으로 이 땅으로 기울이지는 우리에게 그 과오가 고쳐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이란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높이 올리어 주셔야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누가가 스데반이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였다고 말한 이유는 바로 스데반이 성령으로 충만하였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도 또한 가끔 재난의 습격을 받을 때마다 우리의 안내자시요, 인도자이신 그분과 함께 영적으로 하늘에 올라가야만 합니다.
그리고 분명히 그가 우리에게 비추어 주실 때까지는 우리의 눈이 하늘에 다 을 수 있을 만큼 그렇게 날카로운 시력을 가질 수 있는 길이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의 육체의 눈은 너무도 무디어서 하늘을 탐색하기가 어렵습니다.
3. 본문 55절 하반은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은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입니다.
스데반이 하늘을 향하여 눈을 들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즉시 그에게 나타나셨다고 누가는 지적해 줍니다.
그러나 그스데반은 그에게는 육안과는 다른 눈이 주어져서 그 눈의 투시력으로 그는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는 전체 도정을 날아 올라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일반적인 용기를 얻게 됩니다.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뒤로 포기하고 우리의 전심전력(sensus)을 다 기울여 힘써 하나님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와 함께 하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스데반에게 하셨던 것처럼 외적인 시각의 수단을 통하여 우리에게 나타나시는 것이 아니요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의 임재를 느낄(sentiamus)수 있도록 우리 속에서 자신을 계시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과 은혜로서 우리에게 가까이 계시다는 사실을 보여주실 뿐만 아니라 또한 자신이 우리 안에 거하신다는 것도 증거 해 주시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의 \'보이는 일\'이 우리에게 충분하다고 해야 합니다.
4. 본문 56절 초두는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입니다.
스데반이 기적이 자기에게 허용된 사실을 공공연하게 선언함으로서 하나님의 적들을 용감하게 격동시켰기에 하나님께서는 자기 종에 대한 개별적인 호감을 보이려고 하셨을 뿐 아니라 또 스데반의 적들을 놀라게 하고 괴롭혀 주시려고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하늘이 어떻게 열렸느냐고 묻습니다.
하늘의 성질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새로운 예리한 시력이 스데반에게 주어져서 모든 장애를 뛰어넘어 보이지 아니하는 하늘나라의 영광에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비록 우리가 하늘에 어느 정도의 갈라짐이 있었다고 인정한다 해도 사람의 눈은 결코 그런 높이까지 올라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은 홀로 스데반에게만 보인 것입니다.
그 장소에 서 있었던 불신앙자들에게는 그러한 광경이 보이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들의 내심이 어두워져서 진리의 밝은 빛을 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이 하늘이 자신에게 열렸다고 말한 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일에 그를 방해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그 결과는 기적이 하늘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요 차라리 스데반의 눈에서 생겨났던 것이라고 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물리적인 시각에 대해서 지나친 논의를 하는 일이 우리에게는 필요하지 않다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연적인 이치에서 혹은 자연적인 방법으로 그에게 나타나신 것이 아니요 새로운 독자적인 방법으로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에 우리의 육안을 자연적인 방법으로 자극할 무슨 빛깔이 있다는 말인가? 그러므로 이 환상 안에는 신령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결론을 짓는 일이 바른 길입니다.
더구나 하나님의 영광이 스데반에게 그 구성 내용 전체로 다 나타났다고 하는 사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입니다.
그 무한성은 피조물의 용량으로는 이해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5. 본문 56절 하반은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입니다.
1) 승리는 확실히 이 한 사람 그리스도에게 머물러 있었던 것처럼 스데반은 그리스도께서 몸을 낮추셨던 그 육체대로의 모습으로 군림하고 계신 것을 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스데반에게 나타나신 일은 결코 무의미한 일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이유에서 스데반 역시 그분을 \'인자\'(人子) 라고 부릅니다.
그것은 마치 \"당신들이 죽음으로서 파멸시켰다고 생각하고 있는 그 사람은 하늘에 오르시어 지배권을 장악하고 계신 것을 나는 봅니다. 그러므로 당신들은 원하는 대로 야유를 하시오. 나는 최후의 피 한 방울에 이르기까지 그를 위하여 싸우기를 주저할 만한 아무 이유도 가지고 있지 않소. 그는 그 분 자신의 이유와 또 나의 안전을 다 수호해 주시는 분이 되실 것이기 때문이요\" 라고 말한 것과 같습니다.
2) 그러면서도 다른 곳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신다고 이야기되었는데 어찌하여 스데반은 그리스도께서 \'서신 것\' 을 보았다고 하는가 라는 의문이 일어납니다.
어거스틴은 때로 필요 이상으로 예리해서 그리스도는 재판관으로 앉아 계시지만 이 경우에는 변호인으로 서 계셨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관용구(慣用句)들은 여러 가지겠지만 의미하는 바는 모두 동일하다고 우리는 생각합니다.
앉아 계신다든지 서 계신다든지 하는 것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자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차라리 그리스도의 권력과 왕국 통치에 관계가 있는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만물 안에 충만해 계시기에 그분의 우편은 어떤 장소로 생각해서는 안 되는 만큼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으실 수 있는 법정(法庭)의 자리를 우리가 어디에 설정할 수가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아버지의 우편에 앉거나 서거나 하셨다고 이야기될 때에 그 전체의 문맥은 하나의 은유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단순히 모든 권력이 그리스도에게 주어졌다는 것이고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신 육체대로의 모습으로 아버지의 대리로 군림하게 되는 것이며 그 성부 하나님의 다음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3) 결국 그리스도의 권력이 비록 하늘과 땅의 모든 곳에 확산되어 있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성 그대로 어디에든지 계시다고 잘못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떤 특정한 장소에 한정되어 계신다는 사실이 전 세계에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내시는 일을 방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임재를 그분의 은혜의 효력에 의하여 감지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추구하여야 합니다.
예를 들어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스데반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 구절에서 우스꽝스러운 논점을 끌어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스데반에게 보일 수 있게 자기를 가까이 끌어 내리셨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인하여 스데반의 눈의 신앙으로 그처럼 높이 올리워져서 어떠한 공간적 거리도 그의 시력의 날카로움을 깨뜨리지 못할 정도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실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적절하게 철학적으로 말한다면 하늘의 위에는 아무런 공간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하늘 이외의 어느 다른 곳이나 또는 이 세상의 요소들 위에 자리 배치를 하는 일은 그릇된 착란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넉넉합니다.
6. 본문 57절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열심의 과시로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런 식으로 허영심은 거의 언제나 위선자들을 극단적인 흥분속에 끓게 만들어 줍니다
예를 든다면 마치 그리스께서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막15:62이하)고 말씀하셨을 때에 가야바가 마치 그 말이 용납할 수 없는 불경죄라도 되는 듯이 분노의 표시로 자기의 옷을 찢으면서 응수해온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의 설명은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증언이 그들에게 그처럼 심하게 분노를 일으키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그저 광란을 폭발케 하였습니다.
우리는 차라리 이 둘째 번의 견해가 마음에 듭니다.
조금 후에 누가는 스스로 자신들을 억제하지 못하는 자들이 돌발적으로 또는 난폭하게 극단을 향하여 달려가는 습성이 있는 것처럼 그들은 격정에 사로잡혀 버리고 말았다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7. 본문 58절 초두는 \"성밖에 내치고 돌로 칠새\" 입니다.
1) 신명기 13장에 있는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거짓 예언자들에 대하여 이러한 형벌을 가하도록 율법에 제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또한 거기에 누가 그 수에 포함되는 자들인가를 밝혀 주셨습니다 그것은 백성들을 이방 신들에게로 이끌어 이반시키려고 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을 돌로 친 일은 불공정하고 흉악한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거짓된 유죄 판결로 정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은 범죄자처럼 동일한 형벌을 감수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 원인만이 그 둘의 차이를 구별지어 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차이는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의 목전에서 순교자들에 의하여 받는 능욕이 이 세상의 모든 영광의 가치를 능가할 정도로 높이 평가되는 것입니다.
2) 그러나 여기서 이러한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그럴만한 권한이 주어지지 않았는데 어떻게 유대인들이 스데반을 돌로 치는 일이 허용되었는가 입니다.
그리스도의 경우에서 그들은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요18:31)라고 대답한 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우리는 그들은 반항적인 폭등으로 그 일을 행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총독이 왜 이 무도한 행위를 처벌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은 그 백성들이 거칠고 또 거의 굴복시킬 수 없는 백성들이라는 사실을 알고 그는 은밀히 많은 일을 너그럽게 보아주었으며 그리스도의 이름이 수난 당하는 일에 대한 비난을 자기 자신이 걸머지지 않으려고 해서 그랬을 것이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특히 로마의 총독들은 그 백성들의 자기들끼리의 싸움을 계획적으로 눈감아 줌으로서 양쪽이 모두 기진맥진할 때 그들은 더욱 빨리 그들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8. 본문 58절 후반은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입니다.
1) 그러한 소란 속에서도 어떤 재판 형식이 유지되었다는 것을 누가는 말합니다.
첫 돌은 반드시 증인들에 의하여 던져져야 한다는 계율은 까닭 없이 만들어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자기 자신들의 손으로 살인을 한다는 일에 대해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망설여지는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자기들의 거짓된 맹세로 무고한 사람들의 목을 자르는 일에 대한 두려움을 덜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이미 자기들의 혀를 가지고 살인을 범한 이들은 이 무고한 사람에게도 자기들의 피 묻은 손을 대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이 증인들의 불신앙이 얼마나 맹목적이요 잔인하였는가를 우리가 추찰(推察)할 수 있습니다.
2) 그들의 옷을 벗어 사울의 발 앞에 두었다고 누가가 말한 것은 사울이 그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일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일입니다.
즉 하나님께 버려진 그런 마음에 사로잡혀져서 그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멸망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그런 따위의 개시로서 이미 자신의 청춘을 더럽힌 사람을 어느 누가 희망이 없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인가?
그리고 그를 위하여 수고하는 어떤 무지한 사람들 식으로 사울의 범과에 대한 정상을 참작하기 위해 그의 나이가 표시되지 않은 것입니다.
무지가 그의 범죄의 핑계로 호소될 수 없을 만큼의 나이에 사울은 이미 도달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누가는 조금 뒤에 사울은 신자들을 박해하기 위해 대제사장으로부터 파견되었다는 사실을 기록해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울은 아동기를 벗어난 자요 그래서 이제 그는 성인 중에 들 수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사울은 왜 청년이라고 호칭되었을까?
만일 그리스도께서 빨리 그를 저지하시지 않았더면 그가 얼마나 크게 교회에 대하여 손상을 주었을런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각자가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합니다.
그리고 중대한 사실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의 현저한 귀감이 빛을 발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맹렬하게 날뛰는 맹수를 순간적으로 길들이셨습니다.
또 그의 죄과로 말미암아 이미 그가 거의 지옥의 밑바닥에 떨어지게 되었을 때 그 고약한 하수인을 영예에로 이끌어 올리셨다는 사실입니다.
행7:59-60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본문은 스데반의 최후 기도와 순교 장면을 기록한 부분입니다.
주께서 하나님의 말씀을 성령으로 말씀하실 때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고 하신 만큼 주를 위하여 고난을 당하다가 순교한 경우는 더욱 더 그러한 것입니다.
Ⅰ. 우리는 먼저 7장에 나타난 스데반의 설교에 대한 박윤선의 강해를 살핍니다.
1. 스데반의 설교는 유대주의의 의식주의(儀式主義)와 외형주의를 공박합니다.
하나님은 어떤 일정한 지역이나 건물에 매이지 아니하시고 어디서든지 그를 계시하신다는 의미로 스데반은 말씀하였습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유대 땅이 아닌 \"메소보다미아\" 에서 아브라함에게 자기를 계시하셨고(2절), 애굽에서도 요셉과 동행하셨고(9절), 시내산 광야에서 모세와 함께 하셨습니다(30절).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신 이가 아닙니다. 성전이 없고 하나님 예배에 장막을 사용하던 시대에도 하나님의 계시들이 있었습니다(44-50).
2. 스데반의 설교는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참 신(神)이신 사실을 강조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대로(5-7) 요셉과 모세를 통하여 이루셨다는 사실을 스데반은 지적합니다(9-36).
처음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실 때에 \"발 붙일 만큼도 유업을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그의 자손에게 주시겠다고 하셨는데(5절), 하나님께서는 마침내 모세를 세우시고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가나안 땅을 향해 전진하게 하셨습니다(36절).
스데반은 이렇게 약속을 성취하시는 하나님에게로 유대인들의 주의를 끌었습니다.
그리하여 스데반은 그들로 하여금 구원 문제에 있어서 하나님 단독(單獨) 역사주의(役事主義)를 믿고 그들 자신의 것은 아무것도 의지하지 않도록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성취를 본위로 성립되는 종교가 곧바로 순수한 은혜의 종교입니다.
그때 유대인들은 율법주의에 얽매어 이 진리를 믿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이런 은혜의 종교를 외친 것은 적절하였습니다.
3. 스데반의 설교는 한편 구약 종교가 메시야 중심한 종교이라는 사실을 가르칩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기업으로 차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5-7).
이 약속이 모세로 말미암아 성취되었을 때에 모세는 메시야의 시대가 자기 시대(구약 시대) 다음에 계승될 것을 내다 보고 예언하였습니다(37절 해석 참조).
그러면 아브라함에게 주셨던 약속은 실로 메시야 시대를 목표로 하고 성취되어 온 것이 분명합니다.
사실상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은 메시야 약속을 내포하고 있습니다(창12:3).
4. 스데반의 설교에 있어서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유대인들이 옛날부터 메시야와 및 그 선지자들을 배척해 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메시야를 예언한 모세를 배척하였습니다(39-43). 기타 선지자들도 메시야를 예언하였는데 그 예언자와 함께 그 예언을 배척하였습니다(52절 상반).
그렇게 함으로서 그들은 메시야 자신을 배척했습니다(52절 하반).
이렇게 매시야를 배척하는 것이 유대 민족의 전통적 고질이었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유대인들의 병통을 바로 진맥하여 명중시킨 설교입니다.
그 때 이 설교를 들은 유대인들은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회개할 기회를 만났습니다.
그러나 그 때에 그들은 그 귀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54절).
Ⅱ. 다음에 우리는 칼빈 주석에서 강해를 살펴봅니다.
1. 본문 59절 초두는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입니다.
1) 스데반으로서는 이미 사람들에게 할 말을 다 해버렸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당 하나님을 향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사건의 결말을 잘 끌고 가기 위하여 기도로서 든든히 무장합니다.
전쟁과 다름없는 우리의 전체 생활 과정에서 매 순간 순간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우리가 의뢰할 필요가 있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가장 힘든 최후의 결전에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일은 가장 크게 필요한 일입니다.
누가는 다시 한번 그들이 참으로 어떻게 무모한 격분에 사로잡혀 있었던가를 말합니다 그들이 이 그리스도의 종이 겸비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 모양을 보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잔인성이 조금도 감소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2) 그 일과는 별도로 스데반의 기도는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 첫 부분에서 스데반은 자기의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부탁합니다.
거기서 스데반은 자기 신앙의 확고함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자기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둘째 부분에서 스데반은 인간들에 대한 그의 사랑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종교의 진정한 완전성은 이러한 두 방면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스데반의 죽음에서 한 인간이 고상하고 성스럽게 죽어 가는 비범한 예를 보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다른 많은 말을 했을 것을 믿을 수 있겠습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말이 모두 여기에 귀착됩니다.
2. 본문 59절 후반은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입니다.
1) 이 기도는 스데반의 확고한 신념을 입증한 것입니다.
그리고 스데반의 용기는 확실히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자기는 얼마 안돼서 자기를 돌무더기 속에 묻어버릴 그 돌들이 날아들게 될 것을 보면서 그리고 사방으로부터 잔인한 저주와 모욕이 자기의 머리를 향하여 육박해 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스데반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안전하게 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리하여 주께서는 분명히 그의 종들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돌려지기를 원하시는 때가 가끔 있습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그들의 구원이 한층 더 놀라운 것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 구원을 육신의 생각으로 설명하지 말고 믿음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그리고 스데반은 육신의 견해로 자신을 단념하지 아니하고 그 반대로 전멸 그 자체의 면전에서 자기가 구원받을 것을 확신하고 조용히 죽음을 대면한 것을 우리는 압니다.
스데반으로서는 자기의 마음 속에 \"우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었음이니라\"(골3:3) 한 말씀을 새겨놓고 있었다는 사실이 의심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자기 육체에 대해서 더 이상 염려하지 아니하고 자기 영혼이 그리스도의 손에 맡겨지는 것으로 만족한 것입니다.
스데반이 이 현재의 삶에 대한 생각을 잊어버리고 그것에 대한 모든 관심을 완전히 버리지 못했다면 그가 한 것과 같은 방식의 기도를 진심으로 드릴 수는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2) 우리가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우리는 언제나 수천의 죽음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명을 모든 위험에서 틀림없이 끌어내시게 되기 위하여 다윗과 함께 날마다 우리 영혼을 하나님의 손에 위탁하는 일이 옳은 일입니다(시31:5).
그러나 우리가 특정한 죽음으로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혼을 받아 주시도록 이러한 기도에 매달려야 합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자기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분명히 맡기셔서 그로 인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영혼의 영원한 보호자가 되셨기 때문입니다(눅23:46).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손에 우리의 영혼을 맡기기만 한다면 우리의 영혼이 육체를 떠날 때에 아무렇게나 방황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의 안전한 보호 안에 들어가게 된다는 사실을 아는 일은 무상의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이 신념은 반드시 우리로 하여금 조용히 죽음을 대하도록 가르쳐 줍니다.
그렇습니다.
진지한 신뢰의 태도를 가지고 자기 영혼을 그리스도에게 맡기는 자는 누구나 반드시 그와 동시에 자신을 기쁜 마음으로 포기하고 그분의 뜻에 전적으로 복종해야 됩니다. 그 이상 무엇이 더 있겠습니까?
3) 이 구절은 중요한 다음의 사실을 증거 해 줍니다.
인간의 영혼이란 어떤 미치광이의 헛소리대로 사라져 버리는 하나의 숨결이 아니요, 이 생명이 끊어져도 살아 남는 하나의 본질적인 영이라는 사실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배웁니다.
모든 권세가 아버지께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주어졌기 때문에 우리가 그리스도께 기도하는 일은 옳고 적절한 일입니다.
그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그리스도의 보호(fidem) 안에 맡기게 됩니다.
3. 본문 60절은 \"무릎을 끓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입니다.
1) 이것은 스데반의 기도의 둘째 부분입니다.
이 부분에서 스데반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의 신앙에 인간에 대한 그의 사랑을 결합시켜 놓았습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을 발견하는 사람들에게 가담되기를 갈망한다면 우리도 이러한 태도를 취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분명합니다.
스데반은 자기의 원수들, 실로 불구대천의 원수들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잔인성이 그로 하여금 복수를 열망하도록 격분시킬 수 있었던 그 가장 위급한 순간에 스데반은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품고 있던 그러한 애정과 선의를 매우 밝히 드러냅니다.
누가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이 스데반의 행한 일은 그리스도께서 우리 모두에게도 행하도록 분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상도를 벗어나서 우리를 대적하는 자들에게 호의로 대할 만큼 무범침해를 용서한다는 것 이상으로 더 어려운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우리는 스데반을 우리의 모범으로 우리 눈앞에 두어야 됩니다.
누가는 스데반이 확실히 \"큰 소리로 부르짖었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스데반이 성실하게 또는 마음으로부터 말한 것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이 증거 해 주시게 된다는 일을 제외하고는 사람들 앞에서 아무것도 나타내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스데반은 자기 원수들의 잔혹함을 완화시는 일에 소용되는 일은 무엇이나 무시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듯이 그의 음성을 높인 것입니다.
즉각적으로는 아무런 결과도 생겨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스데반이 헛되이 기도한 것은 아닌 것이 확실합니다.
바울이야말로 그 죄가 모든 사람에게 지워지지 않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실상 우리는 만일 스데반이 그런 기도를 하지 않았다면 교회는 바울이라는 사람을 갖게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 어거스틴과 같이 그렇게 따라 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말은 너무도 강하게 표현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님께서 바울을 용서하셨다는 그 사실에서 스데반의 기도가 무효하지는 않았다는 것이 확실해졌다는 말입니다.
2) 스데반이 조금 전에 그들을 가리켜 성령을 거스려 반역한 자들이라고 말한 일이 있으며 그것이 성령을 거스린 죄로 나타난 사실이라는 견지에서 보면 영원히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데 어떻게 스데반이 그들을 위해 기도했는가 하는 의문이 생겨납니다.
그 대답은 용이합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차별없이 적용되는 일은 보편적으로 모든 사람에 대한 일로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스데반으로서는 한 사람의 예외도 있을 수 없다는 식으로 그 백성들의 일단이 반역적이라고 말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스데반이 어떤 종류의 반역행위를 거기서 비난했는가도 지적했습니다.
한때 성령을 거역한 자들이 곧 성령을 거스려 범죄하고 있는 자들이라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라고 스데반이 하나님께 기도할 때에 그것은 그 죄의 선고가 그들에게 내려지지 않게 되기를 바라는 의미입니다.
3) 본문 60절 끝 부분에 \"이 말을 하고 자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스데반이 이 말을 자기의 마지막 숨길을 거두면서 한 말이라는 것을 우리가 알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이것은 스데반의 놀라운 지조의 한 증거입니다.
\'잔다\' 는 말도 또한 스데반의 죽음의 평화로운 모습을 나타내 줍니다.
스데반은 이미 죽어가고 있었으면서 이 기도를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자기 자신의 용서를 초래하려는 희망으로나 그렇게 해서 그 원수들을 유화시키려는 안타까운 생각에 몰려서 그렇게 할 마음이 생긴 것이 아니요 다만 그들이 다시 제 정신으로 돌아와 회개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한 것입니다.
4) \'잔다\'는 말이 성경에서 죽음을 가리키는 뜻으로 사용될 때 그것은 육체에 관련된 말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무지한 사람들과 함께 영혼도 마찬가지로 잔다는 어리석은 추측을 아무도 하지 않게 하기 위해 하는 말씀입니다
사도행전 8장 강해
행8:1-4 사울이
우선 이 말씀에서 보여주는 것은 이 세상에서 신자들의 상태가 어떠한가 입니다.
시편 44편 22절 말씀처럼 그들은 도살할 양과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원수들에게 자기들의 마음에 품은 잔인한 행위를 감행할 수 있도록 지배하는 자유를 주셨을 때에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박해의 결과는 무엇인가를 우리가 보게 됩니다.
박해는 복음의 진보를 크게 저해하지 못 한다기 보다는 차라리 하나님의 계획을 따라 그 전진을 위하여 보탬이 되는 것입니다.
예컨대 누가가 언급한 것과 같이 뿔뿔이 흩어진 사람들이 그때까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던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일치 안으로 집합시켰다는 사실은 분명히 하나의 기적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차례대로 그러한 사실들을 하나하나 고찰해 봅시다.
1. 본문 1절은 \"사울이 그의 죽임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입니다
1) 본 절에 \"그 날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스데반에게서 일은 시작되었습니다.
그 후에 모든 사람에게 차별 없이 핍박자들의 맹위가 떨쳐졌습니다.
마치 사나운 들짐승처럼 그 불신앙의 사람들이 일단 피를 맛보게 되자 그 핍박자들은 피에 대한 욕구가 어느 때보다도 더욱 강렬해져서 가일층 학살행위로 자신들을 달려가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일체의 잔인성의 아비인 사단은 일단 그 핍박자들에게 무고한 피로서 더럽혀지게 하였습니다. 먼저 그 핍박자들에게서 인도적인 행동의 감각을 빼앗습니다. 그리고 나서 만족할 줄 모르는 목마름을 그 핍박자들에게 일으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잔인한 살육행위에 대한 이러한 맹렬한 충동의 근거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그 결과로 일단 시작되면 그 핍박자들은 자기들 자신의 생각으로는 멈추지 못하게 됩니다. 거기다가 아무 구애 받음이 없이 사람들을 해칠 수 있는 능력이 자기들의 손안에 쥐어져 있을 때에 그 핍박자들의 뻔뻔스러움은 자기들의 하는 일이 성공적일 때에 더욱 증대됩니다.
그렇게 돼서 가일층 그 핍박자들은 억제할 수 없이 되어 돌진하게 되는 것입니다.
누가는 역시 큰 핍박이 났다고 말함으로서 그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확실히 교회는 이제까지 조금도 평안하지 못했습니다.
또 교회는 악한 자들로 인한 시달림에서 면제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잠시 휴식을 가지도록 그들을 아껴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욱 심하게 괴로움을 받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실은 역시 우리 자신의 시절로 적용됩니다.
만일에 우리의 적들의 광포가 이를테면 그 불꽃이 멀리에 뛰어 붙지 않을 만큼 잠 속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주께서 우리의 약함을 이해하고 계시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에 대한 적개심이 영원히 끝나버린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차라리 저들이 갑자기 또는 가끔 우리를 향하여 무섭게 달려드는 더 큰 공격에 대비해서 만반의 준비태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다음의 일도 또한 기억하여야 합니다. 만일에 한 사람의 지조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로 하여금 잔학한 행동을 하도록 자극하였다고 하더라도 그 죄과에 대한 비난을 그에게 돌리는 것은 불공정하다는 사실입니다.
스데반 시절에 교회가 평상시보다 더욱 심한 괴로움을 받고 있었다고 누가가 기록했을 때에 누가는 그 사실로 인하여 스데반에게 오욕의 낙인을 찍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스데반은 연대기수처럼 용감하게 싸운 자기의 시범으로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기에 찬양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누가는 그를 평가합니다.
누가가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라고 호칭하였을 때에 그가 의미하는 것은 그 밖의 교회들이 다른 곳에도 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누가는 그 후에 생겨난 사건들에 하나의 전기(轉機)를 스스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신도들의 집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도피로 말미암아 그것이 산산조각으로 부서졌던 것인데 그러나 끊겨지고 흩어진 회원들로부터 즉시 많은 교회들이 발생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은 종래에는 예루살렘의 담장 안에 폐쇄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멀리 그리고 널리 퍼져나가게 된 것입니다.
2) 본 절 끝에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흩어진 것은 아니었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멀리 그리고 널리\' 혹은 \'모든 곳\' 하는 우리의 표현에 대해서 보편적인 어법을 사용합니다.
위험은 특정한 몇몇 사람에게 있었던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원수들의 잔학성이 전체 교회를 통하여 발광하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흔히 아주 사소한 소문에도 다른 곳으로 도망칩니다.
그런 경우에 그들은 심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 그리스도의 사람들의 도주는 전혀 다른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때 그리스도인들은 조금도 허둥지둥하거나 대경실색해 도망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악한 자들의 광포가 어떤 다른 방법으로는 끝장을 가져오게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을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누가는 그때 그리스도인들이 유대의 여러 곳으로 흩어졌을 뿐 아니요 \'사마리아\'까지도 갔다고 말씀합니다. 그래서 유대인과 이방인들을 갈라놓았던 그 \'중간에 막힌담\'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엡2:14).
사마리아인들의 개종은 이방인들의 소명의 첫 열매와 같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들과 유대인들이 공통적으로 할례는 받았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이유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사마리아에는 가짜 예배 밖에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요4:22).
그것은 오직 생명 없는 모방행위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때에 복음을 위한 문을 활짝 여셨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왕권이 예루살렘에서 내쫓김을 받았을 때에 그것이 이방인들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누가는 사도들을 그 수효에 포함시키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일반적인 위험에서 제외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니요 선한 목자의 의무가 양 무리의 안전을 위해서 습격해 오는 이리떼를 막아내는데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이런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도들은 복음을 전 세계에 전파하도록 명령을 받았던 것인데 폭력으로 말미암아 거기서 추방되게 되었을 때까지도 그 사도들은 왜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던가? 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그리스도께서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시작하도록 그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 그 사도들의 안내자가 되셔서 친히 그분의 손으로 그 사도들을 다른 곳으로 데려가시게 되는 사실을 그 사도들이 확실히 알게 되기까지 그 사도들은 거기 머물러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사도들이 얼마나 조심하는 심정으로 복음의 선포를 위하여 전진하였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들에게 걸머지워진 책무로 인하여 위축되었기 때문이 아니요, 다만 그 사도들이 그 일의 새로움과 익숙치 못함으로 인하여 당황하여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도들은 복음이 예루살렘에서 그처럼 강력하게 저항을 받고 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에 그 사도들이 이 최초의 처참한 장애를 돌파하기까지는 다른 어느 곳으로 과감히 옮겨가지 않은 것입니다.
확실히 그 사도들은 거기에 머물러 있으므로 자기들 자신의 편안과 안전이나 편의를 찾으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 사도들은 계속 고생스러운 짐을 지고 있었습니다.
또 그 사도들은 계속 많은 위험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또 그 사도들은 최대의 원통함으로 속을 썩혔기 때문입니다. 그럼으로 그 사도들이 자기들의 임무를 수행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특히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모두 도망했을 때에 그 사도들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은 겁내지 않는 확고부동한 명백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사도들이 모두 한 곳에서 일하지 않아도 좋도록 그 사도들 자신이 지역을 할당하여 나뉘어 갈 수 있지 않았겠느냐고 항의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즉 예루살렘만이 그 사도들 모두에게 충분한 일을 마련해 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요약하면 그 사도들이 박해를 피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따라서 자진하여 도망가지 않았다는 것은 찬양할 만한 일이었다고 누가는 말씀합니다.
그렇지만 누가는 동일한 책임을 갖지 않았던 사람들의 도망을 비난하지는 않습니다.
사도들은 자기들의 사명이 특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곰곰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 사도들의 사명이란, 이리떼들이 양 무리를 습격해 왔을 때에 그들의 수비를 충실히 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터틀리안이나 그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박해의 두려움을 피하여 도망하는 일의 타당성을 예외 없이 부정하고 있는데 그것은 지나치게 엄격한 일입니다.
교회가 그들의 목사가 도망했기 때문에 적에게 굴복하지만 않게 된다면 그런 정도의 도망은 허용되어야 한다는 어거스틴의 견해가 보다 낫습니다.
그것은 확실히 하나의 매우 좋은 중용책 입니다.
즉 그런 점에서 어거스틴의 견해는 육체의 소심성에 너무 치우치는 것도 아니요 그렇다고 해서 자기들의 생명을 구할 만한 기회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무모하게도 죽음으로 돌진하지 않게 하기 때문입니다.
이 일에 관심을 가진 이들은 호노라터스(Honoratus)에게 보낸 제180 서간문을 읽어보는 것이 좋습니다.
사도들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만일 그 사도들이 바로 그 초창기 시절에 박해를 두려워하며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면 어느 누가 그 사도들을 고용군들이었다고 당연히 말하지 않을 것입니까?
그 당시 그 자리를 그 사도들이 떠났다면 얼마나 유해하며 파렴치한 일이었겠습니까?
그것은 모든 사람들의 의기를 꺾어 버리는 일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았겠습니까?
후세의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손상을 끼쳐주는 악한 사례가 되었겠습니까?
사실 때로는 목사도 역시 도망하도록 허용되는 일이 생기게도 될 것입니다.
즉 목사 한 사람만이 공격을 받게 된다면 또는 그 목사가 부재중이기 때문에 교회가 흩어지게 될 염려가 없다면 말입니다. 그러나 만일에 그 싸움이 자기와 양 무리들이 공동으로 개입된다면 그 목사가 끝까지 참고 견디어내지 않을 때에만 그 목사는 자기 직책에서 배신하는 이탈자가 되는 것입니다.
공직에 있지 않은 이들에게는 보다 큰 자유가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위하여 크게 울더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경건한 사람들이 스데반을 장사하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박해의 열기 속에서 신도들의 마음은 굴복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또 신도들이 과중한 열기에 데워지지 않은 듯이 참된 종교의 의무에 자신들을 헌신하셨다는 것을 누가는 보여줍니다.
장례 하는 일은 그리 대수롭지 않은 일처럼 보일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을 무시한다는 이야기 이상으로 그 신도들은 눈을 바로 뜨고 자기들의 생명의 위협으로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의 상황은 그 신도들이 대담하게 죽음을 무시한 사실을 증거 해 주고 있는 것처럼 한편 우리도 역시 그 사실에서 그 신도들이 진정으로 그 사건에 대해서 그처럼 마음을 쓰게 된 데에는 매우 강하고 필요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순교자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안에서 그의 복음의 영광을 위하여 훌륭한 승리를 거두신 사람들입니다. 그러한 거룩한 순교자의 몸이 야수들에게 던져진 채로 버려져서는 안 된다는 것은 그 신도들의 신앙훈련을 위해 매우 큰 중요성을 지닌 일이기 때문입니다.
만일 그 신도들이 스데반과 함께 죽는 일에 동참할 준비가 꽤 있지 않았다면 그 신도들은 그리스도를 향해서 참으로 살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순교자를 장사지내는 그 신도들의 열심은 그 신도들에게 있어서 자기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데서 오는 무적의 견고성을 나타내는 실천 행위였습니다.
그래서 그 신도들은 무분별한 열심으로서 상대방을 약올리기 위하여 쓸데없는 일을 가지고 바빴던 것이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또는 어디서나 신자들 가운데서 유효할 수 밖에 없는 그 일반적 이유도 역시 그 신도들에게 중요하였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장례식은 부활의 소망에 유의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창시 때부터 하나님께서 그것을 이 목적을 위해서 마련하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체를 고의적으로 매장하지 않고 내버려 두는 일은 언제나 비인도적인 야만행위로 여겨졌습니다. 미개한 사람들은 왜 그들이 그처럼 장례 하는 권한을 신성시하여야 하는지를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목적이 확실하게 알려져 있습니다.
즉 생존해 있는 자들은 시체들이 죽음에서 다시 부활하게 되기까지 하나의 감금소와 같은 땅속에 위탁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일입니다.
이로 인하여 분명한 것은 이 의식이 죽은 자에게 보다는 차라리 산 자에게 가치 있는 일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면서도 또한 우리가 복된 불멸성이 약속되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그 시체에 대해서 거기 해당한 영예를 부여하는 일이 우리의 인간성의 일면이기도 한 것입니다.
2) 본 절 끝에 \"위하여 크게 울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또한 그 신도들의 슬퍼하는 일에서 그 신도들의 경건과 신앙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 신도들을 칭찬하고 있습니다.
슬프고 불행한 사건은 대단히 많은 사람들에게 그들이 전에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여러 가지 원인들을 단념하게 만들어 주는 효능이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 반하여 그 사람들은 자기들의 슬픔을 통하여 중요한 사실 하나를 나타내 줍니다.
즉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신도들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원인에도 후퇴하려는 생각을 고집하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 신도들은 한 사람의 죽음에서 하나님의 교회가 얼마나 큰 손실을 입었는가를 반영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인간들이 현명해지기 위해서는 인간들에게 전적으로 둔감한 것을 요구하는 저 어리석은 철학이 거부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인간의 모든 감정을 배척한 예전의 스토아 철학자들은 상식을 잃은 사람들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에도 그와 똑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즐겨 교회 안에 끌어 들이려는 어떤 환상가들이 많이 있습니다.
또 그러면서도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는 무쇠의 심장을 요구하면서 그들 자신은 더할 나위 없이 연하고 나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게는 한 방울의 눈물도 허용하지 못하지만 만일 자기들이 원하고 있는 일과는 달리 무슨 일이 생겨난다면 그들은 끝없는 비탄에 젖어들게 됩니다.
장난기 섞인 투로 말해 본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런 식으로 그들의 자만심을 재미있게 벌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이들까지도 웃을 웃음거리로 만드시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성격 속에 부여하신 감수성은 그 자체로서는 그것을 주신 창조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부패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를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그 경우와의 관련에서 평가되어야 됩니다.
그리고 둘째는 그것이 절제 있게 작용한다는 제한성을 보유하고 있는가의 여부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를 기뻐하여야 하는 사실을 부정하는 사람은 인간이기보다는 나무나 돌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런 은사들이 없어질 때에는 역시 슬픔이 허용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본 구절에 돌아가 말한다면 바울도 신자들이 자기들의 가족 중의 한 사람이 죽어서 떠나갔을 때에 그 신자들에게 전적으로 슬퍼하는 일을 금지하지 않고 있습니다(살전4:13)
그렇지만 그 신자들과 불신자들 사이에는 차이가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은 소망이 그 신자들에게 위로가 되어야 하며 견디기 힘든 조바심을 치료하는 일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실제적인 죽음의 근원은 우리에게 매우 당연히 슬픔의 원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는 사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슬픔을 가라앉히는 적절한 것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회가 훌륭하고 특출한 사람들을 잃게 된 사실을 우리가 비통해 할 때에 거기에는 슬픔의 정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과잉을 교정시켜 주는 그러한 위로를 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3. 본문 3절은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 새 각 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입니다.
여기에는 유의하여야 할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그때에 신자들의 원수들의 잔학성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 그리고 그러한 잔인한 이리와 같은 바울을 하나의 목자로 만드심으로서 그를 명예롭게 하신 하나님의 자애가 얼마나 놀라운 것인가 하는 일입니다.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 그가 떠들어대고 있었던 파괴의 열의는 모든 희망을 다 끊어버린 것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의 나중의 회심은 일층 더 눈부신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 그가 그 잔인한 섬멸전의 지도자가 되어야 했다는 사실은 그가 다른 악한 자들과 함께 스데반을 죽일 음모를 꾸며온 이후 하나님께서 그에게 과하신 형벌이었다는 사실은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가끔 버림받은 자에게서 보다 택함 받은 자에게서 더 엄격하게 죄를 벌하시기 때문입니다.
4. 본문 4절은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입니다.
누가는 또한 여기서 신도들의 흩어져간 일이 많은 사람들을 신앙의 일치로 인도하게 된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경륜에 의하여 생겨난 일이라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어두움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가져오시는 정상한 방법입니다.
오직 한 장소에서만 들려졌던 복음의 소리가 이제는 어느 곳에서나 들려집니다.
이 사례에서 우리는 박해에 굴복하지 말고 차라리 용감하게 되도록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는 사실을 배웁니다.
성도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도피했을 때에 그들은 추방으로 인해서나 또는 그 순간의 괴로움으로 인해서나 혹은 장래에 대한 무슨 불안감으로 인해서 낙심함으로서 비겁 혹은 무기력에도 퇴화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히려 마치 자기들은 조금도 어떤 괴로움을 받아온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일에 여전히 열심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그 성도들이 자주 거주지를 옮김으로서 방랑하는 생활을 감수했다는 사실을 지적해 주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이 사람들의 형제로 간주되기를 원한다면 어떠한 십자가의 괴로움이나 두려움이라도 우리가 계속적으로 공개적인 신앙고백을 하는 일에서 실망감을 갖게 되지 않도록 열심히 우리 자신을 격려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증진시키는 일에 결코 피곤을 느끼지 않도록 되어야 합니다.
순교를 경험하는 일의 첫 사항인 이 추방과 도피가 우리로 하여금 벙어리가 되게 하고 활기를 잃게 해주는 일은 우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8:5-13 빌립이
본문은 핍박으로 흩어진 자 중에 하나인 빌립이 전도자로서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5절은 \"빌립이 사마리아 성에 내려가 그리스도를 백성에게 전파하니\" 입니다.
누가는 그때 사도들과 전도자들이 어디서나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누가는 이제 특히 빌립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그것은 빌립의 선교가 다른 사람들의 설교보다 더 효과적이거나 열매를 많이 맺었기 때문만이 아니요 또한 다음에 누가가 첨가하게 될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따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누가가 \'사마리아 성\' 이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힐카누스에 의하여 파괴되고 그 후에 헤롯에 의하여 재건된 세바스데라고 불리어진 사마리아의 성입니다.
여기에 관해서는 요세푸스의 고대사 제13권과 제15권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고 누가가 말합니다.
그것은 복음의 전체 대의가 그리스도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후에(12절) 누가가 사용한 다른 표현이 실상 더 완전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같은 사실을 의미합니다.
누가는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스도의 이름과 결합시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서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복을 우리가 얻게 되는 일, 그리고 우리가 영적 의로 새로워지고 이 세상에 대해서는 죽음으로서 하늘 생명에 이르게 되는 일 등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되는 일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리스도의 선교는 역시 그 자체 안에 이 기능을 포함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렇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즉 그리스도께서 그의 은혜로 인하여 파멸되어 있는 세상을 회복시킨다는 일이요 또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아버지와 화해시키실 때 생겨난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그의 성령으로 재생시키고 사단은 추방되었을 때에 하나님의 왕국이 우리 안에 세워진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또 사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떠나지 않았다고 누가가 앞서 보도해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이야기되고 있는 빌립은 일곱 집사의 한 사람일 것이요 그의 말이 역시 예언하였던 그 사람일 것입니다(행21:9).
2. 본문 6절은 \"무리가 빌립의 말도 듣고 행하는 표적도 보고 일심으로 그의 말하는 것을 좇더라\" 입니다.
누가가 사마리아인들이 빌립의 가르침을 어떻게 받아들였는가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귀를 기울여 들었고 그들의 구미를 자극했다고 누가는 말하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의 자극제가 기적들로 인하여 가해졌습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큰 관심을 일으켰습니다.
이것은 신앙에 이르는 적절한 도정입니다. 믿음이란 듣는 데서 생겨납니다(롬10:14).
아직 듣기도 전에 그것을 거부하는 사람들이 어떻게 신앙에 이룰 수 있을 것입니까?
그러므로 그들이 스스로 들으려는 의욕을 표시한 사실은 존경과 관심의 첫 계단입니다 그러기에 오늘 이 세계에서 신앙이라는 것이 그처럼 희귀하고 실상은 거의 존재하지도 않는다 해도 놀라운 일은 아닙니다.
과연 몇 사람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황공한 심정으로 경청하는 것일까?
그러므로 대다수의 사람들이 진리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기도 전에 또 아주 미미하게 맛을 보기도 전에 그 진리를 거부하는 일이 생겨납니다.
요컨대 듣는 일이 신앙의 시작이기에 그와 동시에 만일 그 가르침의 위엄이 우리의 영혼에 감화를 주지 않는다면 듣는 일 자체만으로는 넉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확실히 누구나 자기가 하나님과 관계가 있는 사실을 곰곰이 생각해 보는 자라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때에 경멸하는 생각을 가질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안에 포함되어 있는 가르침 자체는 권위가 있습니다.
따라서 듣는 일에서 자동적으로 관심이 솟아날 것입니다.
기적에 관해서 이야기한다면 그 기적들은 두 가지 용도를 가집니다.
먼저 기적은 우리로 하여금 복음을 들을 준비를 하게 하는 일을 합니다.
다음은 복음을 믿는 일에서 우리의 결의를 확고하게 해주는 일 등입니다.
\'일심으로\' 라는 부사는 들었다는 말과 관심을 일으켰다는 말에도 관련된 말입니다.
우리는 후자가 더 좋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일심으로 관심을 일으켰다는 견해를 취합니다.
이제 누가는 많은 수효의 사람들이 갑자기 공동 일치하여 진지하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그 가르침의 힘과 효과를 칭찬합니다.
3. 본문 7절은 \"많은 사람에게 붙었던 더러운 귀신들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나가고 또 많은 중풍병자와 앉은뱅이가 나으니\" 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기적으로 빌립에게 권위를 주도록 유발되었는가를 우리가 알기 위해서 누가는 간단하게 몇 가지 종류를 언급합니다.
더러운 귀신이 내뱉은 큰 소리지름은 반항의 표시였습니다.
그러므로 비록 악마가 완강하게 저항할지라도 그리스도께서 자기 권위로 악마를 억압하신 사실은 그리스도의 능력을 과시하는 일에서 크게 가치 있는 일이었습니다.
4. 본문 8절은 \"그 성에 큰 기쁨이 있더라\" 입니다.
누가가 언급하는 기쁨이란 신앙의 열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로우시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될 때에 우리의 마음은 모든 지각에 뛰어나는 비길 데 없는 기쁨으로 충만하게 된다는 결과가 필연적입니다(빌4:7).
5. 본문 9절은 \"그 성에 시몬이라 하는 사람이 전부터 있어 마술을 행하여 사마리아 백성을 놀라게 하며 자칭 큰 자라 하니\" 입니다.
실로 이것은 복음을 위한 문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는 전혀 닫혀져 있었다고 생각될 수 있었던 하나의 장애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마음이 시몬의 요술에 매혹되어 점점 더 강하게 뿌리를 내렸습니다.
더구나 그러한 잘못이 오랜 기간을 거쳐 일단 뿌리를 내리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의 마음에서 뽑아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며, 또 이미 굳어져 버린 그들의 생활습관을 건전한 양식으로 돌아오게 한다는 일이 얼마나 곤란한 일인가는 경험이 가르쳐 줍니다
그들은 시몬을 하나님의 예언자로만이 아니요 거의 그를 하나님의 성령 자체인 것처럼 받아들이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미신은 그 잘못에 있어서 그들을 더 완강하게 만들어 주고 있었습니다.
6. 본문 10-11절은 \"(10) 낮은 사람부터 높은 사람까지 다 청종하여 가로되 이 사람은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하더라
(11) 오래 동안 그 마술에 놀랐으므로 저희가 청종하더니\" 입니다.
1) 여기 \'큰 능력\'이라고 설명된 말은 어떤 경향을 가리킵니다.
이를테면 아무리 신성한 것이 그 자체 안에 있다고 할지라도 이 \'큰 것\'이 그것을 빛을 잃게 할 것이요. 무가치하게 만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이 그 장애물을 깨뜨려버린 사실에서 그리스도의 권능이 더 분명하게 빛을 발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낮은 사람으로부터 높은 사람까지 ...... 다 그 마술에 놀랐다\' 고 말하여 이 사실을 상세히 설명합니다.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모두 현혹되어 있었습니다. 특히 그것은 범상한 사기행위가 아니었기에 복음이 무슨 접근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인가?
시몬의 마술에 대한 경탄이 그들의 분별력을 전부 점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리가 얼마나 위대한 능력이 있는가 가 이로 인하여 명백해질 뿐만 아니라 그와 동시에 빌림을 통하여 우리 앞에 제시된 견인불발의 한 실예로 보여진 것입니다.
비록 빌립 스스로가 방법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주께서 그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대로 그러한 성공을 기대하면서 변치 않는 정신을 가지고 주의 일에 전력을 기울인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란 통 털어서 우리의 노력이 헛되게 될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는 바를 무엇이나 대담하게 시도하는 일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인식합시다. 즉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일어난 일과 같은 사탄의 매혹은 불신앙에 대한 일반적인 형벌이라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어디에나 시몬이 있어서 그러한 사기행위로 사람들을 속이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마술사들의 속임수로 현혹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는 대로는 만일에 사단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두움 속에서 사람들을 미혹케 한다 해도 그것은 기발하거나 진귀한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빛으로 지배되지 아니하는 자들은 모두 모든 죄과의 먹이가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편 누가는 그들 모두가 차별 없이 속임수에 넘어갔다고 말했을 때에 그것은 우리에게 중요한 사실을 각성시켜 줍니다.
즉 우리가 가진 아무리 예리한 분별력이나 무슨 판단력 혹은 지혜라고 하더라도 사단의 교활에서 우리를 수호하기에 넉넉하지는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확실히 이 세상이 두드러지게 영리하다고 여기는 바로 그 사람들이 어떻게 바보스럽고 어리석은 과오에 휘말려 들었는가를 알고 있습니다.
2) 행8:10절 끝 부분에 \"크다 일컫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단은 기만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을 악용합니다.
그것은 구실을 붙일만한 가치가 있기는 고사하고 가장 폐해가 큰 종류의 속임수입니다 시몬은 하나님의 고유한 권능의 칭호를 스스로 사칭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시몬은 마치 태양이 그 자체의 빛으로서 모든 별들을 흐릿하게 만들어 주듯이 다른 곳에서 모든 신성한 것을 억압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악하고 수치스러운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신성모독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은 것을 읽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날마다 아무 일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사람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속해 있는 것을 사단에게 양도해 주는 일보다 더 쉬운 일이 아무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사람들은 종교를 하나의 구실로 만들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실에서 사마리아 사람들이 얻은 이익이 무엇이었겠습니까?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기의 능력을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표명하십니다.
또 그것을 다른데서 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보여 주십니다.
또 하나님께서 자신의 지배아래 우리를 남아 있게 하시려고 기피되어야 할 사단의 거짓과 계략을 폭로하실 때에 우리는 복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7. 본문 12절은 \"빌립이 하나님 나라와 및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에 관하여 전도함을 저희가 믿고 남녀가 다 세례를 받으니\" 입니다.
시몬의 환상에 의하여 자기들의 지각을 전적으로 박탈당했던 사람들이 빌립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사실, 우둔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하늘의 지혜의 참여자가 되었다는 사실은 기적입니다.
이를테면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지옥에서 빠져나와 하늘로 올리워졌습니다.
세례가 신앙 이후에 왔다는 사실이 불신자들에 관한 한 그리스도께서 제정하신 바와 일치합니다(막16:16).
그들이 세례의 표적을 받기 전에 신앙으로 교회의 집단에 가담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재세례파가 이 구절에서 유아들에게는 세례를 베풀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려고 하는 일은 전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남자나 여자가 공개적으로 자기들의 신앙을 고백하는 일이 없이는 세례를 받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가족이 동시에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그러한 조건에서 그들도 세례 받는 일이 허용되었습니다.
그 계약은 \"내가....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창17:7) 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8. 본문 13절은 \"시몬도 믿고 세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시몬도 믿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자기의 속임수로 성중 전체를 미혹시켰던 그 사람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하나님의 진리를 받아들입니다. 자신을 최고의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자랑하던 그 사람이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킵니다. 시몬으로서는 복음의 지식으로 밝아졌는데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이 아니요 전체 백성들을 위하는 일이 되었습니다.
시몬으로 인해 무지한 사람들을 방해할 수 있었던 그 장애물이 제거되었습니다.
누가가 나중에 시몬이 그 표적을 보고 놀랐다고 말한 것이 이와 관계된 일입니다.
주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반신반인(半神半人)으로 생각한 그 사람을 격파하여 승리하시기를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시몬의 헛된 자랑이 뽑혀지게 될 때 또는 시몬이 참된 기적에 대해서 영광을 돌리지 않을 수 없을 때에 비로소 생겨납니다.
시몬으로서는 성실하고 마음으로부터 사랑을 가지고 스스로 그리스도에게 복종한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시몬의 부당한 야심이나 또는 시몬의 불신앙적인 행동이나 또는 성령의 은사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가 즉시 펼쳐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시몬이 믿지는 않았으면서도 단지 믿는 체 했을 따름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과 견해를 같이하지 않습니다.
누가는 분명히 마술사였던 시몬이 믿었다고 주장합니다.
또 시몬은 감탄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그 이유를 첨가합니다.
그러므로 어떻게 시몬은 조금 후에 위선자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배신하는 것인가?
이 문제에 대하여 우리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신앙과 단순한 가장 사이에는 어떤 중간위치가 있습니다.
에피큐리안들이나 루시안의 제자들은 내심으로는 웃고 있으면서 영원한 생명의 소망이란 자기들을 위해서는 하나의 지어낸 이야기요 그래서 결국에 그들은 개나 돼지 이상의 종교를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자기들은 믿는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한편 많은 사람들이 비록 양자 되게 하는 영에 의하여 중생 되지는 않았을지라도 또는 그 마음으로부터 순전한 사랑으로 스스로 하나님께 복종하지는 아니할지라도 말씀의 능력으로 정복을 당하며 또는 가르침 받은 바가 진리라는 사실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심정을 느끼게 되어 그로 인하여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구원의 창시자도 되시며 이 세상의 심판자도 되시는 하나님께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존재하지 않는 신앙을 있는 것처럼 위장하지 아니하며 그러나 자기들은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마가복음 4장에서(눅8:13) 말씀하신 일시적인 신앙입니다.
마음에 뿌려진 말씀의 씨가 즉시 여러 가지 세상의 걱정이나 나쁜 욕망으로 인하여 질식되어서 결코 성숙한데 이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로 차라리 쓸데없는 잡초로 변질되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시몬의 신앙은 바로 그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시몬은 복음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느낍니다.
또 시몬의 양심의 자각으로 인하여 그것을 부득이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것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시몬에게는 자기부정이 없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시몬의 마음은 조금 후에 그가 나타낸 위장 속에 싸여 있었다는 결론이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시몬의 위선은 자기가 자신을 속인 것 같은 그런 종류의 것이었고 에피큐리안들이나 그 동류들이 자랑하는 것 같은 그런 거창한 위선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을 경멸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감히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 본 절 중간에 \"세례를 받은 후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례 안에 나타난 은혜는 세례를 받는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 이 시몬의 예로 매우 분명하게 되었습니다.
교황주의자들의 가르침은 누구나가 죽음을 면치 못할 죄의 장애를 나타내는 일만 없다면 모든 사람들이 그 표적(세례)으로 진리와 그 효과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마치 신앙이 없이도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듯이 성례 전에 마술적인 잠재력을 돌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자신에 있어서는 중요한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주께서는 성례전을 통하여 거기 동반되는 일체의 약속을 우리에게 제공해 주십니다.
그러나 주님은 성례전을 쓸데없이 혹은 아무 목적 없이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인하여 지시를 받아서 우리는 성례전이 약속한 바를 무엇이나 그리스도에게서 구하도록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세례를 받은 일이 당시에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그러면서도 만일 회개가 나중에 따랐다고 하면 흑자가 생각하는 것 같이 그 이점은 소멸되거나 없어지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오랜 시간 후에 하나님의 성령이 마침내 역사하셔서 그로 인하여 성례전이 그 효험을 나타내기 시작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3) 본 절 후반에 \"빌립을 따라 다니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빌립이 그 마술사를 수용했다는 사실에서 위선자를 적발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가 분명해졌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인내심의 시금석입니다.
데마는 한때 바울의 동반자였으나 나중에는 수치스러운 이탈자가 되었습니다(딤후4:10) 우리는 사악하고 간교한 자들이 때때로 스스로를 우리에게 가담하는 그 불행한 경험을 회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만일 악한 자들이 남몰래 우리들 안으로 잠입하는 일이 있게 된다면 마치 우리가 그들의 모든 죄과에 대한 책임이 있는 것처럼 거만한 흑평가들이 부정하게 우리를 탓하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에 대한 불명예의 오점을 가끔 실어오는 능란한 솜씨를 엄격하게 경계해야 됩니다. 또 우리는 위대한 사람들이 속임을 당했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모든 종류의 사람들을 아무 선택 없이 허용하는 일이 없도록 우리 자신의 태도에 더 각별히 조심해야 됩니다.
시몬이 그 표적의 위대함으로 인하여 놀랐다고 누가는 말했는데 그로서 우리는 시몬이 자랑하고 있었던 그 위대한 능력이라는 것이 흐릿한 환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여기에 관련되어 있는 일은 단순한 감탄만이 아니요 사람을 자신의 몸 밖으로 이송시켜 주는 황홀경이기 때문입니다.
행8:14-17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본문은 주의 뜻을 따르는 사도들의 회에서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를 돕는 장면입니다.
1. 본문 14절은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사마리아도 하나님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듣고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매\" 입니다.
1)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보다 큰 은사로 끊임없이 신도들을 풍부하게 하시는 관례를 따라 사마리아 사람들 가운데서 이루신 은혜의 진보를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빌립의 주선으로 사마리아에서 그 역사를 시작하게 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영에 의하여 사도들이 그 계획을 구성하게 하시고 시행하게 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따라 자기 과업의 여러 가지 국면을 위하여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도구를 사용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빌립의 활동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을 신앙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성령을 주시려고 베드로와 요한을 임명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자기들의 손을 서로 뻗칠 때 교회의 일치를 촉진시키십니다.
또 하나님은 차례로 사람들을 상호 결속시키시고 전체 교회를 서로 결속시키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시작하신 과업을 빌립을 통해서 완성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나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들이 양심적으로 그 처음 교회와 더불어 형제로서 결합을 연마하도록 그들을 마치 사슬로 묶듯이 결속시키기 원하셨습니다.
둘째로 하나님께서는 전 세계에 복음을 공포할 명령이 주어진 사도들에게(막16:15) 그들이 모두 하나의 복음과 한 신앙 안으로 함께 더욱 밀접하게 성장하도록 이 특권으로 그들에게 포상하기 원하셨습니다.
또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기질과 풍습에 피차 오랫동안 다르게 살아왔습니다.
그러기에 그처럼 갈라진 그들은 그리스도를 갈라 놓거나 적어도 자기들만으로 갈라진 새 교회를 형성하게 될 위험이 있었습니다.
동시에 사도들은 형제들을 돕는 일에 열심히 진력하였습니다.
이에 사도들은 요청이 들어오기를 기다리지 않고 자진해서 이 책임을 수행했습니다.
사도들은 마치 빌립이 자기의 임무를 충분히 이행하지 못하지나 않는가 의심하고 있었던 것처럼 불신감에서 이 일을 한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빌립이 하는 일에 도움을 주겠다고 나선 것입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빌립에게 동료 사역자가 되려고 해서만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사도들은 빌립이 수행한 그 수고를 주의 이름으로 인정해 주려고 왔습니다.
한편 빌립 입장에서 보면 자기가 세우기 시작한 건물에 다른 사람들이 마무리를 짓기 때문에 자기가 어떤 모양으로나 멸시를 당한다고 불평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은 서로 예의 바르게 공동의 순수한 신앙 안에서 각자를 위해 자기들의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그러니까 거룩한 교제의 문을 닫는 것은 야심일 뿐인 것입니다.
또 여기서는 다른 사람들이 베드로를 보냈다고 말씀합니다.
이는 베드로가 동료들 위에서 최고 권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오히려 베드로가 그 단체에 예속되고 거기 복종하는 방식으로 그들 가운데서 뛰어났었다는 사실을 말해 줍니다.
2) 본 절 초두에 \"예루살렘에 있는 사도들이\" 라는 말씀은 두 가지로 해석됩니다.
모든 사도들이 다 그때 예루살렘에 있었다는 뜻이거나 다른 사람들이 이리 저리로 떠나갔을 때에 몇 사람들이 거기 남아 있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차라리 후자를 더 좋게 생각합니다.
몇몇 사람들은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각종 사명을 따라 행동하였을 것입니다.
또 그 밖의 부대들은 사령본부에 있는 것처럼 예루살렘에 있었을 것으로 그들 사이에 합의를 보았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각자가 어느 기간동안 자기의 특별한 사명을 띤 여행을 한 후에 거기에 함께 모이는 관습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첫째로 그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르는 동안에 안일 무위하게 시간을 보내지 않았습니다.
둘째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전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명령하셨기에 그들은 둥지를 틀고 앉아 있지는 못하였을 것이 확실합니다(막16:15).
2. 본문 15절은 \"그들이 내려가서 저희를 위하여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입니다.
베드로와 요한 일행들은 우선 가르치는 자로서 직책을 수행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사도들이야말로 벙어리 배우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기록에서 그 사도들과 빌립이 공동으로 가졌던 것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만 그들의 옴으로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가져온 새로운 일을 말씀합니다.
이제 마침내 사마리아 사람들에게도 성령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지적했을 뿐입니다.
3. 본문 16절은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입니다.
1) 여기서 질문이 생깁니다. 사마리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을 뿐이요 그래서 그 성도들은 아직 성령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세례란 아무런 능력이나 은혜도 없는 하나의 공허한 일일 수밖에 없거나 세례가 소유하고 있는 일체의 효력은 성령으로부터 오는 것일 것입니다.
세례에서 우리는 우리의 죄에서 씻김을 받습니다.
그러나 바울을 통해서 우리가 씻김을 받는 것은 성령의 역사라고 가르칩니다(딛3:5).
세례의 물은 그리스도의 피의 표상입니다.
그러나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는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가 씻김을 받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다고 말씀합니다(벧전1:2).
세례에서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힙니다.
그러므로 세례로 인하여 우리는 생명의 새로움으로 다시 살리심을 받습니다(롬6:6).
그러나 성령하나님의 성화(聖化) 역사가 없다면 그 모든 것의 근원은 무엇이겠습니까?
만일 세례가 성령 하나님에게서 분리된다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실상 세례에서 그리스도를 옷 입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역시 성령으로도 옷 입힘을 받았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확실히 여기서는 성령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그의 자녀로 중생 시키시는 성령의 일반 은혜를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주께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영예를 주시기 위하여 복음의 초창기에 관여한 몇몇 사람들에게 주시기를 원하신 것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아직 활동하고 계시기에 성령이 아직 제자들에게 계시지 않았다고 한 요한의 말씀(7:39)이 그런 의미에서 이해되어야 합니다.
물론 그들이 성령에게서 믿음과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거룩한 의욕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완전히 성령 없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요 다만 나중에 그리스도의 왕국의 영광이 그 안에서 더욱 완전하게 비칠 그 비상한 은사가 아직 풍부하지 못했다는 말씀입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이미 자기들에게 주신 양자 되게 하는 영을 받았기 때문에 성령의 은사가 최고의 상태로 첨가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에서 하나님은 한 때 그의 교회에 눈으로 볼 수 있는 성령의 임재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영원토록 복음의 권위를 수립하고 동시에 성령께서 언제나 믿는 자들의 통치자와 안내자가 되실 것이라는 사실을 증거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2) 본 절 끝 부분에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세례를 경홀히 여겨서 말씀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그 당시에 그들에게 주어진 모든 것은 세례를 통하여 모든 신도들에게 부여되는 양자됨과 신생의 일반적인 은혜였다는 사실입니다.
사실상 그리스도의 왕국과 복음의 영광의 광채가 첨가된 성령의 은사가 그들 중 어떤 이들에게 주어진 사실은 특이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런 것들의 가치는 각자가 자기 자신의 재능의 정도를 따라서 교회에 유익을 줄 수 있다는 사실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에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교황제도주의자들이 자기들의 가공적인 견신례를 찬양하고자 할 때 아직 안수식을 행하지 않은 사람들은 절반 크리스챤이라는 신성을 더럽히는 주장을 큰 소리로 내뱉는 일을 주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일이 이제는 허용되지 않습니다.
잠정적인 표적에 불과한 것을 가지고 그들은 마치 성령이 자기들의 자유재량에 있는 것처럼 그것을 교회의 영구적인 원칙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의 증거와 보증이 실재성이 없이 공허하게 진열될 때에 그것은 너무나도 수치스러운 웃음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그들 자신도 역시 그러한 은사는 잠시동안만 교회에 주어졌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게 됐습니다.
그로 인해 사도들이 시행했던 안수는 그 목적이 달성되었을 때 끝났다는 결론입니다.
우리는 그들이 안수할 때에 기름도 사용한다는 일에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도들이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하던 것을(막6:13) 일반적인 성례전이 되게 하기 위하여 그래서 실재성 자체가 없어진 뒤에도 그 표적은 영원히 지속되게 하기 위하여 교회에 영구적인 법을 과하는 일은 극단적인 횡포였습니다.
실로 더욱 가증스러운 모독이 더해졌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죄는 오직 세례에 의하여 용서를 받는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또 신생의 성령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 없이도 감히 내놓는 그 더러운 기름을 통하여 주어진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성경 말씀이 증언하는 바로는 우리가 세례로 그리스도를 옷 입고 그리스도의 몸에 접목되며 우리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의로서 새로워진다는 것입니다
신성을 모독하는 강탈자들은 세례에서 탈취한 약탈물들을 그들 자신의 성례전이라는 남을 현혹시키는 가면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것은 한사람의 거짓말이 아니요 그들의 모든 학교에서 날마다 지껄여대는 총회의의 법령이 된 것입니다.
4. 본문 17절은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입니다.
그러니까 사마리아에서도 말씀의 공적 증거가 선행했으며 안수는 기도 이후입니다.
그렇게 안수하는 방식으로 사도들은 자기들이 겸손하기 위하여 기도한 그 성령의 은혜가 외적인 의식의 일부이거나 그 속에 성령의 은혜가 갇혀있는 것이 아닌 사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면서도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사도들이 그 의식을 결코 경시하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탁하신 것이요, 또 그들은 그것을 부주의해서 시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기에 그 효과도 거기 결부되어 있었습니다.
이렇게 표적의 이익과 효력은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서 역사 하시는데 있습니다.
또 그것이 어떻게 시행되든지 간에 하나님만이 유일한 은혜의 부여자이십니다.
또 하나님만이 자신의 권한의 힘으로 인한 심판자로 남아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안수는 그것으로 하나님이 그 백성들에게 적절한 때에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혜를 주시게 될 경우에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그런데 교회가 실제로 그러한 은사를 빼앗겼습니다.
그러기에 그 행위는 단지 헛된 형식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행8:18-25 시몬이
본문은 계속해서 빌립의 사마리아 전도를 돕는 장면으로 마술사 시몬의 그릇된 사상을 권징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8-19절은 \"(18) 시몬이 사도들의 안수함으로 성령 받는 것을 보고 돈을 드려 (19) 가로되 이 권능을 내게도 주어 누구든지 내가 안수하는 사람은 성령을 받게 하여 주소서 하니\" 입니다.
여기 마술사였던 시몬의 위선이 백일하에 드러납니다. 이것은 시몬이 전에 거짓으로 믿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시몬은 확신을 받고 진지하게 그리스도께 굴복했습니다.
진정한 자아 부정 뒤에 곧 참 신앙이 이어져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과 싸움을 벌이지 않는 범위에서만 복음에 굴복할 뿐 자신들의 옛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말이지 성령의 가르침이 마음 속에 숨겨진 생각을 파헤치지 않고 내면의 불결이 그대로 남아 있다면 이것은 그리스도와 사단을 혼합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시몬에게 있는 이 겉치레를 제거하십니다.
이것은 시몬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고백함으로써 자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을 더 이상 속이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숨겨져 있던 야심이 사도들과 동등하게 되고 싶어하는 시몬의 욕망에서 이제 그 정체를 드러냅니다.
이렇게 해서 한가지 잘못은 이미 드러났습니다.
다른 하나는 물론 시몬이 하나님의 은혜를 사고 파는 것으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이익을 받고 비열하게 팔아 먹고자 하는 것입니다.
시몬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쏟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일군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하는 점을 깊이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사람이야말로 참 신앙의 핵심에는 어렴풋한 지식도 없는 세속적인 사람입니다.
전에 마술로 돈을 번 사람이기에 시몬은 자기도 하나님의 이런 저런 은혜를 수여할 수 있다면 독특히 재미를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기에 시몬이 추구하는 것은 틀림없이 이 세상 눈으로 보는 재물과 영광이었습니다
그와 동시에 시몬은 이 하늘의 능력을 자신의 요술과 다를 바 없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하나님의 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간략하게 시몬의 죄와 그 종류를 종합해 봅시다.
시몬은 성령의 여러 은사를 통한 그리스도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몬은 거기에 경의를 표하지도 않습니다.
시몬은 사도들에게 하늘의 영광이 허락된 것은 그들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을 뚜렷하게 드러내려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점을 깨닫지 못하고 있습니다.
시몬은 자기 야심에 사로잡혀서 하나님을 뒷전으로 물리고 자신을 앞세우려 합니다.
그리고 시몬은 세상을 자기 손아귀에 잡아 보려 하고 있습니다.
시몬은 마치 성령에게 값을 매길 수 있는 듯이 돈으로 사려고 합니다.
2. 본문 20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네가 하나님의 선물을 돈주고 살 줄로 생각하였으니 네 은과 네가 함께 망할지어다\" 입니다.
1) 베드로는 여기서 그를 가차없이 통박합니다. 시몬을 책망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의 돈과 함께 망할지도 모른다는 무서운 저주를 더합니다.
사도께서는 그에게 천벌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에게 겁을 주는 뜻에서 하나님의 공정한 처벌이 가까이서 그를 위협하고 있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시몬은 하나님의 영을 흉측하게 매매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점에서 그가 받아 마땅한 것이 무엇인가를 베드로는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 영을 그처럼 모독하다니 네 돈과 함께 패망할 소리를 하는구나\' 입니다 이것을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것은 베드로가 시몬의 파멸보다는 그의 구원을 더 바라고 있었다는 점을 쉽게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마치 재판관 역할을 맡기라도 한 것처럼 시몬의 불경에 어떠한 처벌이 내려야 마땅한가 하는 점을 선언합니다.
시몬이 이 정도로 강경한 문책을 받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은 그래야 시몬이 그의 죄악의 극악성을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시몬의 돈을 파멸에 내어 주는 것도 같은 뜻에서 하는 일입니다.
그 돈이 그처럼 흉악하게 사용되었다는 점에서 그것 자체도 그 죄악의 전염을 받아 더럽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실 우리는 그 자체에 있어서 무익한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는 것을 허용하기보다는 온 세상의 파멸을 택해야 됩니다.
2)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이와 같이 신성 모독죄를 범하는 사람을 저주할 경우 그 사람보다는 그가 한 일을 안중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의 죄과를 두고 분노하되 자비롭게 사람들을 건지는 방향으로 행동해야 됩니다.
하나님의 언도는 바로 이와 같습니다.
곧 사형에 해당한다고 넘겨주는 사람들은 간음자, 도둑, 주정뱅이와 악당입니다(고전6:9,10, 엡5:5).
정말이지 이들이 사람인 한 이 언도는 구원의 소망을 절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현재 상태만을 두고 말하면서 그들이 계속 고집을 피울 경우 그들에게 어떠한 종말이 대기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선언할 뿐입니다.
3. 본문 21절은 \"하나님 앞에서 네 마음이 바르지 못하니 이 도에는 네가 관계도 없고 분깃 될 것도 없느니라\" 입니다.
1) 여기서 시몬이 하나님의 은혜를 돈으로 따지기 때문에 그는 전혀 은혜를 받지 못한다고 하는 식으로 말의 순서를 다르게 엮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성령의 측량할 수 없는 은사를 돈으로 바꿀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다니 돈과 함께 망할 사람이군\' 하는 식으로 읽는 것이 훨씬 더 이해가 잘 갑니다.
벌게이트역의 \'이 말씀에 있어서를\' 에라스므스는 \'이 문제에 있어서\'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것이 더 적절합니다.
즉 베드로의 의도는 그들이 전체 사역에 있어서 그것을 불순한 방법으로 상품화하려는 신성 모독적인 사람이 들어 설 자리가 전무하다는 것입니다.
2) 더욱이 로마 카톨릭과 옛 신학자들은 \'시모니\'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 말하는 \'시모니\'는 시몬이 한 일과 아무 관계없습니다
시몬은 성령의 은혜를 돈으로 사려했습니다.
그렇지만 로마 카톨릭에서는 못된 \'시모니\'를 자신들의 공허한 생활에 적용시킵니다.
오늘날 로마 카톨릭 사회에 팽배하고 있는 성직 매매를 완화하는 뜻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 안에서 그 따위 장사를 시행하고 있기 때문에 이 과오는 이제 그 자체로서 충분히 추악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우리는 \'시모니\' 의 정확한 정의를 여기에 삽입합니다.
그것은 성령의 은사를 되지 못하게 팔아 먹는 것, 또 이 은사를 야심이나 기타 더러운 목적으로 남용하는 이와 비슷한 일입니다.
그릇된 수단으로 교회 통치에 참여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모두 시몬의 모방자들입니다.
오늘날 도처에서 아무 거리낌없이 그런 정신이 당연한 권리인양 진행됩니다.
그리고 전체 교황주의자들의 직제를 통틀어 볼 때 아무도 이러한 간접적인 수단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들 속에 파고 들어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공연한 성직 매매자가 아닌 사제가 하나도 없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물론 수치스러운 일이지만 우리는 이것이 사이비 복음주의자들 사이에서 거침없이 활개를 치고 있다는 점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3) 그러나 우리가 시몬의 오염으로 더럽혀지지 않으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성령의 여러 은사는 돈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순수하고 거저 베푸시는 자비로 주어진다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그것은 교회의 덕육(德育)을 위한 것이라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각자 자신의 능력의 한계가 허용하는 범위에서 자기 형제를 돕고 자기가 받은 은사를 주제넘지 않게 교회의 공동 혜택을 위해서 사용하면, 어느 누구고 개인의 우월성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홀로 모두 위에 서시는 것을 막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4) 하지만 \"그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바르지 못하다\"는 이유로 시몬으로 하여금 특별한 은사에 관해서 성령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배제하는 베드로의 태도는 충격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유다가 악하다고 해서 성령의 은사를 강하게 받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고린도 교인들의 경우 그들의 마음이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서 있었더라면, 성령의 여러 은사가 그처럼 못쓰게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고전14).
그러므로 베드로가 제시하는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 것으로 보이는 것은 마음이 불결한 사람 가운데 성령의 은사가 뛰어난 사람들도 아주 흔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마땅히 그러한 은혜를 받기에 합당치 않은 자에게 그러한 은혜를 주신다 해도 그것은 조금도 불합리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둘째로, 베드로는 여기서 일반적인 원칙을 규정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사를 서로 나누어 갖는 것이 교회의 특징이므로 그리스도에게 속하지 않은 시몬은 하나님의 권속의 한 구성원의 입장에서 신실한 자들이 누리는 동일한 은혜를 나눠 가질 수 없다는 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덧붙여 말할 것은 과거에는 이러한 은사를 누리는 것을 비난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4. 본문 22절은 \"그러므로 너의 이 악함을 회개하고 주께 기도하라 혹 마음에 품은 것을 사하여 주시리라\" 입니다.
1) 베드로는 시몬에게 회개하고 기도할 것을 권하여 그에게 사죄의 여지를 남겨둡니다. 그것은 회심의 감정에 이끌리는 사람이라야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은총을 베푸실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절망에 사로잡히고 말면 그 사람은 뻔뻔스럽게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은 믿음으로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만이 바른 길인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베드로가 시몬에게 청천벽력의 말을 한 뒤 곧 이어 구원의 확신을 불어넣어 줍니다.
그러나 우리는 시몬의 죄가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니라는 점을 엿볼 수 있습니다.
물론 가능하다면 우리는 지옥에 있는 사람이라도 이끌어 내야 됩니다.
모든 악한 사람들이 유기자가 되었다는 확실한 증거를 대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사죄의 여지를 보여주지 않고 가혹하게 처벌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외고집과 오만 때문에 더 날카로운 질책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의 경우에는 한 손으로 쓰러뜨리고 다른 손으로는 일으켜 세우는 것이 적합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저주를 퍼부어 멸망케 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2) 그러나 베드로는 \'혹\' 이라는 말로서 공포와 의심을 제기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 및 그와 유사한 구절에서 기도는 불안하고 의심스런 마음으로 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증명하려고 하는데 그들은 거기에 대한 이유로서 인간이 자신의 기도가 틀림없이 행복한 결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점을 확신하는 것은 무모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라는 말을 내세웁니다.
(에이 아마 ; 혹)는 하나님께서 너를 용서하실지도(si qua) 모른다(whether God may forgive you)는 의미입니다. 베드로가 이것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시몬의 마음을 당황하게 내버려 두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에게 간절한 기도를 하게 하도록 보다 강력하게 권고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어떤 문제가 우리 손안에 들어올 경우에는 우리가 너무 무관심하거나 나태하지만 난제 그 자체는 우리에게 자극을 주는 면에 있어서 적잖은 가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시몬에게 두려운 마음을 불어넣어 주는 것은 그의 마음에서 사죄를 얻는 확신을 제거하거나 그를 초조하게 만들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베드로는 시몬이 겸손하게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를 드릴 경우 소망이 있다는 점을 확신시켜 주면서, 그의 죄악의 심각성 때문에 사죄가 어려운 문제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은 단지 그의 열성을 복돋아 주려는 뜻에서 하는 말입니다.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께 접근하는데 우리를 안내하는 빛, 기도의 근원이어야 합니다.
5. 본문 23절은 \"내가 보니 너는 악독이 가득하며 불의에 매인 바 되었도다\" 입니다.
1) 베드로는 다시 시몬을 엄히 꾸짖습니다.
그리고 그 시몬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들어 절망감을 불어넣습니다.
이럴 수밖에 없는 것은 시몬이 억지로라도 자신을 반성하게끔 되지 않았다면 그는 결코 진심으로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땅히 책망 받아야 할 사람을 두고 오히려 그를 추켜세우거나, 상처를 내줘야 할 사람을 두고 살짝 긁어만 주는데서 그치는 것보다 그에게 치명적인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이 자신의 죄의식에 대해서 진정한 슬픔과 고통을 체험하기까지는 이와 같은 가혹성을 보여주어 그의 마음에 상처를 주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속에서는 악성 종양이 자리를 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점차적으로 그 사람 자신을 망치고 말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나 중용을 유지하여 사람들의 구원에 관심을 갖어야 됩니다.
2) 베드로의 말에는 훌륭한 은유가 두 가지 들어 있습니다.
그 하나는, 우리에게 독초와 쑥을 열매로 맺는 뿌리를 갖지 말라고 명령하는 모세의 말에서 따온 것입니다(신29:18).
이것은 일단 마음에 불경건의 독이 배태될 경우에 생기는 내면적인 악을 두고 말하는 것으로 그것이 일단 이 독으로 전염되고 나면 거기서는 쓴맛 밖에 나올 것이 없습니다
\'불의에 매인 바\'(불의의 쇠고랑)라는 표현 역시 동일한 내용으로 전체 마음이 사단의 손아귀에 꽉 붙잡혀 있는 경우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경건한 사람이라도 악한 행동에 휩쓸려 들어가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깊은 마음 속은 타락하지 않은 그대로일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위선은 인간성이 타고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께서 비춰 주시면 우리는 우리의 죄악을 숨겨진 다발 그대로 소중히 간직할 정도로 맹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의도는 시몬이 한가지 면에서만 빠져 들어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마음의 뿌리가 타락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시몬의 경우에는 한가지 죄에만 사단의 올무에 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시몬의 모든 의식이 꼼짝달싹 할 수 없이 붙잡혀서 통째로 사단에게 넘겨져 있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불의의 쇠고랑을 찬 노예라는 뜻입니다.
동시에 죄의 심각성은 눈에 나타나는 수치스런 행동만이 아니라는 경고입니다.
즉, 마음의 자세에 따라 평가되어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 셈입니다.
6. 본문 24절은 \"시몬이 대답하여 가로되 나를 위하여 주께 기도하여 말한 것이 하나도 내게 임하지 말게 하소서 하니라\" 입니다.
1) 여기서는 시몬이 베드로의 위협을 크게 생각한 것이 아니라 그의 구원이 취급되고 있었다는 점을 깨달은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말한 사람은 베드로 한 사람 뿐입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모두를 상대로 말씀했습니다.
그때 그 말씀에 그들 모두가 동의하고 있었습니다.
2) 여기서 그 후에 시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던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성경은 추측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제공하지 않습니다.
시몬은 책망을 받아들이고 죄의식에 사로 잡히며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하고 하나님의 자비로 돌아와 자신을 교회의 기도에 위임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은 회개에 대한 결코 사소한 표현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몬이 회개했다는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교부들은 한가지로 후에 그가 베드로의 심각한 대적이 되어 그와 로마에서 사흘간에 걸쳐 논쟁을 벌인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클레멘트(Clement)의 이름이 나오는 논쟁 기록에도 보면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데 너무 구역질나는 미친 소리로 가득한 것이라서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귀담아 들을 수 있었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입니다.
마지막으로 어거스틴(Augustine)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당시에 로마에서 오고 간 여러 가지 믿을 수 없는 소문에 대해서 야누아리우스에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가장 안전한 길은 우리에게 떠맡겨진 불확실한 여러 견해를 완전히 무시하고 그저 성경에 기록된 것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다른 곳에 나오는 시몬 이야기는 여러 가지 이유에서 미심쩍은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은 것 같습니다
7. 본문 25절은 \"두 사도가 주의 말씀을 증거 하여 말한 후 예루살렘으로 돌아갈 새 사마리아인의 여러 촌에서 복음을 전하니라\" 입니다.
1) 이것은 베드로와 요한이 와서 사마리아인들에게 성령의 은사를 풍성하게 했을 뿐 아니라 빌립이 가르친 바를 확증함으로써 그들이 이미 받아들인 믿음에 그들이 확고히 서도록 했다는 이야기입니다.
곧 \'증거하다\' 는 말은 그들의 증거 덕분에 하나님 말씀에 대한 완전하고 순수한 권위가 확립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리고 이 진리가 정식으로 입증된 확실한 것으로 받아들여졌다는 뜻입니다.
사도들의 가르침의 특징은 자신들이나 남들이 조작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에게 배웠던 것을 충실하게 선포했다는 점입니다.
2) 누가는 그들이 이것을 한 도시뿐 아니라 여러마을에 다니며 행한것으로 기록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일에 어찌나 불이 붙어 있던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주의 이름을 그들의 입술에 올렸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생명의 씨앗이 한 도시에서 시작해서 온 지역에 뿌려지기 시작했습니다.
행8:26-31 주의 사자가
본문에서부터는 전도자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에게 전도하는 장면입니다.
1. 본문 26절은 \"주의 사자가 빌립더러 일러 가로되 일어나서 남으로 향하여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가라 하니 그 길은 광야라\" 입니다.
1) 본문 초반에 \"주의 사자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어떻게 복음이 에디오피아인들에게 미치게 되었는가 를 기록합니다.
누가는 오직 한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으로 개종한 사건을 기록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이 그 나라에서 차지하는 큰 권위와 권세를 생각하면 그의 신앙은 그 향기를 곳곳에 내뿜었을 수 있습니다.
복음은 아주 가냘픈 데서부터 시작했지만 하나의 씨앗이 짧은 기간에 넓은 지역에 퍼지게 되었다는 사실에서 성령의 능력이 보다 명백하게 드러났습니다.
먼저 천사는 빌립에게 남쪽으로 가라는 명령을 내리지만 거기에 대한 이유와 목적은 밝히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상대하시면서 그들의 순종을 시험하기 위해 이처럼 행동하시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할 일을 제시하시고 거기에 따르는 이런저런 지시를 주시지만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은밀하게 자신의 수중에 두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의 이유나 우리의 순종의 결과가 당장 명백하지는 않더라도 그분의 단순한 명령으로 만족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습니다.
그 이유가 명백하게 드러나지 않는다해도 하나님의 모든 명령에는 우리가 그에게 순종하는 만큼 우리의 시도는 성공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약속이 내포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명령이 없이는 아무것도 무모하게 시도하지 않을 경우에는 우리의 노력이 하나님의 인준을 받고 있다는 이 한가지 사실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그러나 천사들이 날마다 하늘에서 내려와 우리에게 우리의 할 일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것은 아니지 않느냐는 반론을 제기한다면 거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에는 우리의 해야 할 일에 대한 지시 사항이 얼마든지 담겨 있으며 누구든지 하나님에게 상의하며 성령의 지도에 자신을 내맡기는 사람에게는 결코 충고가 부족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서 우리의 준비와 열성을 가로막고 지연시키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우리 자신의 태만과 소홀한 기도입니다
2) 본문 후반에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모든 학자들의 공통된 견해는 히브리어 (아자아)가 여기서 가자(Gaza)로 불리워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따라서 페르시아의 왕 캄비제가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을 때 이것에 보물을 보관했기 때문에 그가 이것의 지명을 그렇게 불렀다는 식으로 말하는 폼포니우스 멜리(Pomponius Mela)의 말은 틀립니다.
물론 \'가자\'(gaza)라는 말이 페르시아말로는 보물 또는 재물을 뜻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누가 역시 이 내시가 간다게의 보물을 책임 맡고 있었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그러나 히브리의 명칭이 캄비제 출생이전부처 사용되고 있었던 만큼 우리는 후대에 와서 그 말이 변화된 것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서 아인(y)이 G로 바꾸는 일은 다른 모든 예에서 볼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광야\'라는 말이 나오는 것은 알렉산더 대제가 옛 가자(Caza)를 황폐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콘스탄틴(A.D 274-323)을 두 번째 새로운 가자의 건설자로 보는 사람들은 누가의 반박을 받고 있는 셈입니다.
누가는 콘스탄틴 150년 전에 이 가자가 있었다는 점을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콘스탄틴은 이미 건설되어 있는 이 도시를 더 아름답게 만들고 확장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 도시가 \'해안지방\' 이었으며 옛 도시 로마 자리에서 2.5 마일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는 점에 대해서는 모두들 의견을 같이합니다.
2. 본문 27절은 \"일어나 가서 보니 에디오피아 사람 곧 에디오피아 여왕 간다게의 모든 국고를 맡은 큰 권세가 있는 내시가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입니다.
1) 본문 초두에 \"에디오피아 사람\"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곧 이어 그를 내시라고 부르고 있지만 여기서는 그를 남자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방의 왕과 여왕들은 내시에게 그들의 가장 중요한 업무를 맡기는 것이 상례였으므로 나중에 가서는 대신들도 그들 역시 남자들이었지만 무분별하게 \'내시\'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마지막에 가서야 빌립은 자신이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 공연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결과를 맡기고 그분이 명령하시는 곳으로 전진하는 자는 그분의 명령과 주관 하에 시도된 모든 일이 좋은 결과를 낳는다는 점을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간다게\' 라는 명칭은 한 여인의 이름이 아니고 로마의 황제들에게 공통적으로 사용된 \'시이저\' 와 같은 이름입니다.
따라서 에디오피아 사람들은 그들의 모든 여왕을 \'간다게\' 로 불렀습니다.
이것은 플리니(pliny)의 주장에 입각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한마디 덧붙인다면 역사가들은 이 내시의 위풍당당한 모습에서 에디오피아가 당시 화려하고 부유한 나라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이 나라의 수도는 미로이(Meroe)였습니다.
세속사가들 역시 그곳에서는 여자들이 지배하는 것이 상례였다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이것은 누가의 증거를 지지하는 것입니다.
2) 본 절 끝에 \"예배하러 예루살렘에 왔다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당시 이처럼 먼 지역에까지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참 하나님의 이름이 넓게 퍼져 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사람은 자신의 동족과 다른 예배 행위를 공공연하게 시행하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이 비밀리에 유대에 올 수는 없었으며 그에게 큰 많은 수행원이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흩어지는 것과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지식의 향기가 이방민족 세계에 퍼지게 되었으며 이 백성들의 유랑은 참 신앙심에 대한 일종의 전파 구실을 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전 동방 지역에 걸쳐서 참 하나님을 경배하는 자들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실 로마인들은 유대종교를 잔인한 칙령으로 정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이 거기에 전향하는 것을 막을 재간이 없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오심의 광채로 율법의 그림자를 흩으심으로서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를 제거하시고 중간에 막힌 담을 헐어버림으로서 도처에 있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함께 모으시기 이전에 있었던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한 서막(序幕)이었습니다(엡2:14).
내시가 예루살렘에 예배하러 온 것을 미신으로 돌려서는 안됩니다.
그는 분명히 자기 나라에서 하나님께 기도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독실한 사람은 하나님 경배자들에게 규정된 관습을 소홀히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을 마음 속 깊이 은밀하게 간직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그것을 사람들 앞에서 공공연하게 고백하는 것이 그의 의도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동족과의 인연을 끊음으로서 그가 많은 사람에게 증오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에게 있어서는 자신이 알기로 하나님께서 요청하시는 신앙의 외형적인 고백이 사람들의 평가보다 더 귀했습니다.
그가 율법의 지시게 대한 희미한 섬광을 보고서 그 정도로 깨달았다면 오늘날 우리들이 배신적인 침묵으로 복음의 환한 빛을 꺼버린다면 얼마나 창피스러운 일이겠습니까?
여기서 그 때는 이미 제사가 폐기된 때요 지금은 하나님이 지역 구별에 상관없이 온 사방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원하시는 때가 아닌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그러나 대답은 간단합니다. 곧 복음의 진리에 대해서 아직 계시 받지 않은 자들이 율법의 그림자를 지킨 것은 미신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이 의식에 관한 한 그리스도에 의해서 폐기되고 있다는 말씀을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공개적으로 드러내시는 곳에서는 그가 안 계셨던 동안에 그를 대표하던 옛 의식은 사라진다는 의미로 이해 되야 합니다.
주님께서 내시에게 한 교사를 보내시기 전에 그를 예루살렘까지 오게 하신 이유는 아직 율법의 초보적인 단계를 통해서 준비를 갖추는 것이 그에게 유익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후에 그가 복음의 가르침을 더욱 더 가까이 받아들이는 적격자가 되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몇몇 사도들을 대면시켜 주시지 않은 이유는 그분의 은밀한 섭리 속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혹시 내시가 자기에게 제시되고 자신의 생각을 능가하는 한 보화에 대해서 더 큰 비중을 두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닌가 하는 추측이 가능할 뿐입니다.
그가 외형적으로 화려한 의식과 성전의 모습에서 따로 떨어져서 혼자 조용히 구원의 방법을 구한 다음에 그리스도를 그에게 제시하는 편이 더 낫기 때문일 것입니다.
3. 본문 28-30절은 \"(28) 돌아가는데 병거를 타고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더라
(29) 성령이 빌립더러 이르시되 이 병거로 가까이 나아가라 하시거늘
(30) 빌립이 달려가서 선지자 이사야의 글 읽는 것을 듣고 말하되 읽는 것을 깨닫느뇨\"
입니다.
내시가 선지자 이사야의 글을 읽고 있었다는 사실은 자신의 생각에 따라 고안해 낸 신이 아니라 율법의 가르침을 통해서 알게 된 유일신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증거입니다.
사실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한다는 것은 껍질뿐인 의식만 잡고 늘어지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말씀을 더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경솔과 혼란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속에서 그의 말씀에 의해서 비추어 주시지 않는다면 율법 속에 규정되고 있는 예배 방식은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학교에서(in His school) 교육을 받은 그분의 제자만이 하나님을 제대로 예배하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내시는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하면서 그저 읽고 있다는 점에서 내시는 시간을 낭비하는 사람처럼 보일지 모릅니다.
그 내시는 다른 교사의 도움을 받기 전에는 이 선지자의 의미를 이해할 수 없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그는 배우겠다는 욕망으로 선지서를 일고 있었던 만큼 그는 어느 정도의 성과를 기대하고 있었으며 사실 그는 그것을 깨닫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왜 내시는 자기가 읽고 있는 구절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말을 하는가?
그것은 그가 보다 더 애매한 구절들에 대한 자신의 무지를 겸손히 인정한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신앙으로 초청하기도 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격려하는 뜻에서 기록된 하나님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해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구절이 이사야서에는 많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책을 읽어서 아무런 혜택을 받지 못할 정도로 미개하거나 원시적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매(每) 10절씩을 제대로 충분하고 완전히 다 이해하고 넘어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내시의 이사야서 읽기는 마치 이와 같았습니다.
요컨대 자신의 교육에 도움이 되는 문제에 있어서 물론 이것이 그의 역량에 한정된 것이긴 했지만 그의 공부는 틀림없이 그에게 유익을 끼쳤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에게 숨겨진 내용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성가심 때문에 내시는 그 책을 내동댕이치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성경 읽는 방법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명백한 문제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열어 제쳐 주시는 문제에 대해서는 간절하고 즉각적인 마음으로 받아들여야 마땅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우리에게 모호한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더 선명한 빛이 비춰 올 때까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옳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성경을 읽는 것을 지겨워하지 않고 한결같이 계속해서 읽는다면 끝내는 성경에 익숙하게 됩니다.
4. 본문 31절은 \"대답하되 지도하는 사람이 없으니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하고 빌립을 청하여 병거에 올라 같이 앉으라 하니라\" 입니다.
1) 본 절 중간에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시는 일개 평민인 빌립의 질문을 허용합니다.
또 내시는 자신의 무지를 거침없이 솔직하게 인정합니다.
이와 같은 사실에서 내시의 겸손은 아주 뛰어납니다.
자신의 능력에 대한 자만심으로 가득 차 있는 자라면 이렇게 유순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성경 읽기가 극소수의 사람들에게서만 결실을 맺는 것은 기꺼이 배우려는 사람이 백에 하나도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의 무지에 대한 의식 때문에 수치를 느끼는 것은 사실이지만 남의 제자가 되기보다는 자신의 무지를 그대로 간직하려듭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방지게 남을 가르치려고 덤비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내시는 자신의 무지를 어찌나 철저하게 외식했던지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제자가 되어 성경을 읽었다는 점을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성경에는 우리의 모든 지능을 초월하는 지혜가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성경에 대한 참된 존경입니다.
그러나 이런 이유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싫어하지 않고 부지런히 읽는 가운데 성경의 계시에 의존하며 해설자를 우리에게 주실 것을 갈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2) 본 절 중간에 \"빌립을 청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시가 자신을 위한 해설자와 교사를 청했다는 사실은 또 다른 겸손의 실예입니다.
내시는 부자에게 공통된 오만심으로 빌립을 배척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지금 읽고 있는 말을 이해하겠습니까?\" 라는 빌립의 말에는 내시의 무지에 대한 일종의 말없는 핀잔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자들은 사람들이 자기들에게 함부로 말할 경우에 그런 말을 모욕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경우 그들은 \'그래 그게 어떻다는 거야?\'
아니면 \"당신 같은 사람이 나와 무슨 볼 일이 있어?\" 라는 말을 금방 내뱉습니다.
그러나 내시는 말없이 빌립을 맞아들여 가르침을 청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을 우리의 교사로 모시려면 이러한 마음의 자세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겸손하고 말없는 자에게 임하십니다(사66:2).
오늘날 우리 중에 어떤 사람이 자신의 결점을 알고 배우려 든다면 주님은 우리가 헛 고생하게 버려 두시기보다는 차라리 천사들을 보내어 가르쳐 주실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내시의 본을 따라 주께서 성경을 이해하는데 사용하도록 제시하시는 방법을 총동원해야 됩니다.
광신자들은 하늘로부터 영감(靈感)을 구하며 동시에 하나님의 종을 무시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종의 지시를 받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런가 하면 자신들의 통찰력을 의지하면서 아무의 말도 듣지 않으려 하고 어떤 참고 서적도 읽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친히 우리에게 사용하도록 정하시는 보조 수단이 무시 받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또 하나님이 내신 수단에 대한 경멸을 벌하지 않고 그냥 지나치시지 않습니다.
우리에게는 성경뿐 아니라 우리를 돕는 교사들과 해설자들이 허용되어 있다는 점을 명시해야겠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내시에게 천사를 보내기보다는 빌립을 선택하셨던 이유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처럼 간접적으로 천사의 음성을 통해서 빌립을 부르시고 천사를 직접 보내시지 않은 것은 우리가 사람들의 말을 듣는 습관을 기르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천사들은 침묵을 지키는데 하나님의 음성이 사람들의 입에서 울려 퍼진다는 것은 외적인 전파에 대한 비상한 추천입니다.
행8:32-35 읽는 성경 구절은
본문에서는 에디오피아 내시가 읽고 있던 성경구절을 빌립이 설명해 주는 장면입니다.
1. 본문 32절은 \"읽는 성경 구절은 이것이니 일렀으되 저가 사지로 가는 양과 같이 끌 리었고 털 깎는 자 앞에 있는 어린양의 잠잠함과 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입니다.
엄격히 말하면 내시가 읽은 것은 하나의 연속적인 것 내지는 짧은 절(節)입니다.
내시가 이 구절을 읽게 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따라 된 일이요 결과적으로 빌립은 기독교의 전체 본질을 적절하게 유도할 수 있는 하나의 주제 내지는 기본적인 원칙을 갖게 된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성령의 은밀한 지시에 따라 철저한 교훈을 위한 자료가 내시의 손에 쥐어지고 다음에 그 방법이 사람의 사역을 통해 명백하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내시가 읽은 이 구절은 그리스도에 관한 유명한 예언입니다.
이것이 특별히 다른 것에 비해 특이한 것은 이 예언에서 이사야는 교회가 구속(救贖)받을 방법을 꾸밈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방법이란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죽음으로 인간을 위한 생명을 획득하고 그가 자신을 인간의 죄악의 속죄를 위한 희생 제물로 바치며 그 결과로 우리가 파멸에서 건져냄을 받으며 다음에 곧장 우리를 하늘로 데려가기 위해서 그가 하나님의 손길에 의해서 고난을 받고 바로 지옥에 내려가신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 구절은 인간들이 어떻게 하나님과 화해되고 그들이 어떻게 의를 획득하며 어떻게 사단의 횡포와 죄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되는가 하는 점, 곧 구원의 모든 면의 원천을 뚜렷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여기서는 누가가 인용하고 있는 부분만 설명합니다.
이것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누가는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속량해서 생명을 회복시켜 주기 위해서는 아예 잃어버려 포기될 정도나 다름없는 사람처럼 완전히 박살나야 된다는 점을 가르칩니다.
다음으로 누가는 그리스도의 죽음은 생명을 주는 것이며 이 절망의 구덩이에서 유일 무이한 승리가 나올 것이라는 점을 주장합니다.
그리스도를 도살당하기 위해 고분고분히 끌려가는 \'수양\'과 또 털을 자르도록 말없이 복종하는 양에 비교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희생이 자발적이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순종하신 사실은 틀림없이 하나님을 달래 드리는 방법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 빌라도 앞에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것은(요18:34. 36) 그의 생명을 구원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아버지께서 정하신 희생제물로서 자신을 자발적으로 바침으로서 우리를 기다리던 그 처벌을 자신이 뒤집어쓰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죽으실 수밖에 없었다는 점과 자신의 순종으로 인간의 고의적인 불순종을 멸하기 위해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죽음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 이 두 가지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끝으로 여기서 우리는 베드로가 가르치듯이 고난을 이기는 격려를 얻습니다(벧전2:18절 이하).
그러나 우리는 신앙에 대한 가르침에 우선을 두는 것이 마땅합니다.
2. 본문 33절은 \"낮을 때에 공변된 판단을 받지 못하였으니 누가 가히 그 세대를 말하리요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 입니다.
1) 이것은 이 내시가 읽고 있던 두루마리가 헬라어로 된 것이었거나 누가가 기록한 것이었거나 둘 중에 하나이겠지만 이것은 당시 사용되던 사본이었습니다.
이사야는 그리스도께서 속박과 심판에서 벗어난 것으로 말씀합니다.
이것으로 그리스도는 그의 낮추심 뒤에 곧 이어진 놀라운 승리를 송축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에 압도되고 말았다면 그에게서 바랄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사야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손에 매를 맞아 죽음을 당하신 것으로 묘사함으로서 우리의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를 확증한 다음에 여기서는 그에게 새로운 역할을 돌림으로서 그리스도로 하여금 사망의 심연에서 승리자로서 출현하고 지옥 그 자체에서부터 영원한 생명의 창시자로 돌출하게 하고 있습니다.
물론 우리는 이 구절이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다는 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강제로 감옥에서 십자가로 끌려가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제거되다\'를 무(無)로 전락된다는 의미와 똑같이 생각합니다.
그리고 (락하크) 라는 히브리어의 의미는 (아이레스다이)라는 헬라어의 의미나 마찬가지로 애매합니다.
그러나 누구든지 문맥을 보다 더 면밀하게 검토해 본다면 선지자가 지금까지 우리 앞에 제시한 우울하고 징그러운 광경으로부터 예기치 않은 영광의 새로운 출현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우리의 지적에 동의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헬라어의 번역은 선지자의 말과 본질적으로 크게 다른 것은 아닙니다.
요컨대 그리스도의 수욕 내지는 배척에 있어서 그의 심판이 제거된 것은 그가 박살난 모양을 하고 있어야 했을 때에 아버지께서 그의 사건을 변호하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심판\'이라는 말은 다른 여러 곳에서처럼 \'권리\'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 본문에서는 그것이 \'정죄\'의 의미를 지닙니다.
선지자는 그리스도께서 마치 정죄 받은 절망적인 사람처럼 진퇴양난의 기로에 처한 다음에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일으켜 세움을 받을 것이라는 점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그의 나라의 영광으로 들어 올려 주시기 전에 죽음에 내던져질 필요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가르침이 교회의 전체 몸에 적용되어야 마땅한 것은 모든 경건한 자들이 사망의 밥이 되지 않으려면 그들은 마땅히 하나님의 손길에 이끌려 기적적으로 일으켜 세워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의 변호자로 나타나시게 되면 그분께서는 그들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실 뿐 아니라 수많은 죽음에서 그들을 이끌어내어 그들에게 혁혁한 승리를 안겨 주십니다. 이것은 골로새서 2장에 있는 대로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영광스러운 승리를 가져 오신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2) 본 절 중간에 \"그 세대\"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선지자는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죽으심을 송축한 뒤에 여기서는 그리스도의 승리가 짤막한 기간에 국한되지 않고 만대에 걸쳐서 확장되지 않을 수 없는 그러한 것이라는 점을 계속해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 선지자의 탄식에는 그리스도의 나라의 영속성을 인간의 혀로 표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주석가들은 이 구절을 비참하게 곡해해 오고 있습니다.
교부들은 아리우스와 논쟁하면서 이 구절에서 하나님 말씀의 영원한 세대를 입증하려 하는데 그것은 선지자의 의도에 매우 어긋나는 노릇입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세대에 적용하는데 이것 역시 사실과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선지자가 여기서 당시 세대의 인간들을 꾸중하는 것으로 보는 사람들 역시 선지자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교회에 대한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의 견해가 더 낫습니다.
물론 이들이 \'세대\'라는 단어를 후손 또는 자손으로 보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선지자가 사용하는 (도르)라는 히브리어는 한 세데(an age) 또는 인간이 생명의 기간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아버지의 은총으로 사망에서 단번에 구원받게 될 경우 그의 생명이 영원할 것이라는 선지자의 의미에는 전혀 애매한 점이 없습니다.
물론 끝이 없는 이 생명이 전체 교회에 확대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백성들을 위해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는 머리의 것으로 돌린 이 승리의 열매와 성과를 이제 모든 지체를 통해서 송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첫째로 각 신자는 이 구절에서 영생에 대한 확신을 받을 수 있습니다.
둘째로 교회의 영속성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확증되고 있습니다.
3) 본 절 끝부분에 \"그 생명이 땅에서 빼앗김이로다 하였거늘\"이란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멸망 받았기 때문에 천상천하에서 그처럼 장엄하게 지배한다는 사실은 정말 모순되어 보일 것입니다.
파멸이 생명의 원인이라는 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지옥이 그리스도께서 하늘에 올라가기 위한 계단이 되고 구원의 즐거운 광채가 저 십자가의 소름과 어둠에서 비쳐오며 복된 불멸(不滅)이 저 사망의 심연에서부터 흘러 넘치게 된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에 의해 발생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낮추셨기에 아버지께서는 그리스도를 높여 주셨습니다.
그 결과 모든 무릎이 그 앞에 꿇게 되었습니다(빌2:10).
이제 우리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누릴 교제의 종류를 깊이 생각하는 가운데 어느 누구도 동일한 길을 가는 것을 어려워 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3. 본문 34절은 \"내시가 빌립더러 말하되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 입니다.
이것은 내시가 얼마나 진지하게 배우고 자 했는가 하는 점을 잘 묘사하는 구절입니다.
내시는 마치 불확실한 미로를 헤매듯 이사야의 여러 예언 가운데서 배회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그것을 읽는 것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오만한 자세를 취하지 않았기에 내시는 그가 자신의 예리한 통찰력을 총동원해서 일생동안 수고했어도 얻지 못했을 예상 밖의 도움을 갑자기 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무지를 의식하고 배우려는 자세를 저버리지 않을 경우 주님께서는 자녀들인 우리에게 스승으로서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뿌려진 씨앗이 당분간은 떨어진 땅 밑에 숨겨져 있듯이 주님께서는 그의 영의 조명(照明)을 통해서 지루하기 짝이 없고 성과가 없는 독서에 밝은 이해의 빛을 발하실 것입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성경에 있는 구원의 길이 그의 백성에게 꽉 닫혀지고 그들의 독서가 당장 무익하게 될 정도로 그들의 눈을 꽉 닫아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종종 마치 장애물이 그들 앞에 놓여진 것처럼 그들을 꼼짝 달싹 못하게 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에게 그들의 무지를 상기시킴으로서 그들을 겸손하도록 단련하거나 그들이 자신들의 무감각을 제쳐버리고 더욱 더 관심을 기울이게 하거나, 기도의 불이 붙게 하거나 그것을 사모하는 가운데 진리를 더욱 더 사랑하게 하거나 아니면 때대로 정당한 평가를 받지 못하는 그의 하늘의 지혜의 우월성을 보다 더 잘 추천하기 위해서일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신실한 자들이 당장에 완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 해도 그들이 오만한 경멸로 스스로 그 길을 봉쇄하지만 않는다면 그들은 그들의 수고가 탕진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언제나 깨달을 것입니다.
완전한 계시의 시간이 올 때까지는 지식에 대한 아주 작은 분량의 시식만으로도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며 신앙을 갖는다는 것은 우리에게 충분한 발전 속도인 줄로 알고 만족하도록 합시다.
4. 본문 35절은 \"빌립이 입을 열어 이 글에서 시작하여 예수를 가르쳐 복음을 전하니\"
입니다.
성경에 \'입을 열어\' 라는 표현에는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에 대한 \'긴 이야기를 시작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의 의미는 빌립이 그리스도에 대해 드디어 말하기 시작했다는 뜻입니다.
빌립이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시작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이보다 더 예리하게 묘사하는 구절이 따로 없기 때문입니다.
또 이사야의 예언이 그때 마침 그 내시의 손에 쥐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빌립은 그리스도의 오심이 어떠하며 거기서 기대할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한 다음에 현실 그 자체로 돌아와 내시로 하여금 성경에 약속되어 있던 그리스도께서 이제 나타나셨다는 점을 알게하고 그 내시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능력을 소유하게 합니다
우리는 빌립이 그리스도를 \'전파했다\' 는 식으로 번역하지만 누가는 \'복음을 전파했다\' 로 말합니다.
그 의미는 빌립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복음을 통해서 자신을 계시하셨으며 후대에 전하도록 명령하신 내용을 가르쳤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알게 되면 전체 복음이 우리의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행8:36-40 길 가다가
본문은 빌립이 에디오피아 내시가 성령으로 복음을 받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실을 확인하고서 세례를 베푸는 장면입니다.
1. 본문 36절은 \"길 가다가 물 있는 곳에 이르러 내시가 말하되 보라 물이 있으니 내가 세례를 받음에 무슨 거리낌이 있느뇨\" 입니다.
여기에 내시의 세례가 따르고 있습니다.
내시는 짧은 시간에 자발적으로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내맡기고 굴복할 정도로 큰 발전을 보았습니다.
내시가 그처럼 정열적으로 외적인 고백을 하려하는 것을 볼 때 이미 원숙한 신앙이 어떤 형태로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내시가 직접 세례를 요청하지 않은 것은 그의 겸손 때문이라는 크리소스톰의 견해를 우리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은 이러한 식의 질문이 \'나에게 세례를 베풀어 주십시요\'하는 말보다 더 간절한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 외에 내시는 세례가 자신 안에 새 생명에 대한 상징이요 따라서 그것은 말씀에 덧붙혀진 것이요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것이니 만큼 그것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을 정도로 그리스도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러므로 내시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들은 내용을 기꺼이 받아 들였듯이 그는 이제 열열한 마음으로 자신의 신앙을 외적으로 고백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속으로만 믿을 뿐 자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점을 사람들 앞에서 증거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충분한 신앙이 아닙니다.
여왕의 미움과 모욕과 그밖에 여러 생각이 떠올라서 세례 받는 것을 저지했겠지만 내시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의 제자로 계수되는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내시가 서너 시간의 초보적인 단계를 통해 그만큼 전진할 수 있었다면 5년, 10년 아니 20년 간의 가르침을 통해 받은 신앙을 자기 속에만 감춰두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이들의 태만이야말로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입니까?
2. 37절 없음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한글개역 성경에는 난외 주에 있음
1) 내시가 먼저 그의 신앙을 고백하고 나서야 세례를 받고 있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하나의 일반적인 원칙을 택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지금까지 교회밖에 있던 자들의 경우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점을 증거하기 전에는 교회로 받아들여져서는 안됩니다.
첫째로 세례는 신앙의 부록이요 따라서 순서상 신앙에 대한 종속적인 의식입니다.
둘째로 세례는 신앙의 서명(seal)인데, 신앙이 없이 세례를 베푼다는 것은 불신앙적이요, 아주 터무니 없는 모독입니다.
그러나 광신자들은 이런 핑계로 유아세례를 공격하는데 어리석고 그릇된 처사입니다.
왜 내시의 경우 신앙이 세례에 선행하지 않으면 안되었습니까?
그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이 상징을 통해서 교회의 권속의 구성원들을 구별하시는 만큼 세례 받으려는 자들은 교회에 접붙임을 받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인들이 신앙에 의해서 접붙여지듯이 경건한 자들의 자녀들이 교회의 타고난 자손들이 되며 출생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구성원으로 계수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가 또한 우리의 자녀들의 아버지라는 원칙 밑에서 우리를 입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경우에는 신앙이 필수적이지만 이것을 자녀들에게 적용하는 것이 나쁜 것은 그들에 대한 양식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어떤 위대한 사람들은 신앙이 세례로부터 확증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입증한다면서 이 증거를 잘못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들은 \'내시는 세례 받기 전에 먼저 완전한 신앙을 제시할 것을 명령받고 있다. 따라서 여기에 더 이상 더 할 것이 있을 수 없다\' 하는 식으로 변론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온 마음\' 이란 \'진실한\' \'거짓이 없는\'의 의미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따라서 \'온 마음을 다해서\' 믿는 자들이 완전하게 믿는다고 상상할 이유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의 믿음이 연약하고 가냘파도 그의 마음은 건전하고 위선이 전혀 없을 수 있습니다.
다윗이 온 마음을 다해서 여호와를 사랑한다는 말을 우리는 이런 식으로 설명합니다.
빌립은 물론 전에도 사마리아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빌립은 그들이 아직 목표에 훨씬 미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온 마음을 다하는 신앙이란 마음에 산 뿌리를 두고 있지만 아직 매일 매일 증대하기를 바라는 그러한 신앙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2) 내시는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 고 고백합니다.
세례만큼은 그리스도에게 그 바탕을 두고 있으며 세례의 능력과 진실성이 그리스도에게만 있는 만큼 내시는 그리스도만을 자신 앞에 내세우고 있습니다.
요컨대 내시는 아브라함과 언약을 맺으시고 모세의 손에 율법을 맡기셨으며 한 백성을 나머지 세계 민족과 구별하셨고 그리스도를 약속하셔서 그를 통해 세상에 대하여 자비로우신 한 하나님이 계시다는 점을 전부터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내시는 예수께서 세상의 구속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 곧 이 명칭에 성경이 그리스도에게 대해 말하는 모든 것이 간략하게 내포되어 있다는 점을 시인합니다 이것이 빌립이 언급하는 완전한 신앙입니다.
이 신앙은 그리스도를 과거에 약속되었으며 마침내 계시된 분으로 그것도 아무런 위선이 없이 진지한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요구하는 그대로입니다.
성인으로 이러한 신앙이 없이 자신의 유아 세례를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헛된 자랑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유아들을 자신 있게 받아들여 주시는 것은 그들이 이해할 나이와 능력에 도달하자마자 그들이 자신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굴복하여 그의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신앙의 분별력을 통해서 세례 속에 대표되고 있는 그의 능력을 알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입니다.
3. 본문 38절은 \"이에 명하여 병거를 머물고 빌립과 내시가 둘 다 물에 내려가 빌립이 세례를 주고\" 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옛 사람들의 세례 의식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온 몸을 물 속에 담갔습니다.
오늘날 성행하고 있는 습관은 목사가 몸이나 머리에 물을 뿌리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의식상의 물이란 하찮은 것이요 그것 때문에 교회를 가르거나 혼란하게 논쟁을 벌일 정도의 것은 아닙니다.
물론 세례 의식 자체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해 주신 것이므로 그것이 사라지게 버려두기 보다는 그것을 백 번이고 죽도록 지키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물은 우리의 씻음과 새 생명을 상징하는 것이요 그리스도께서는 마치 거울을 통해 보여주듯 우리에게 물로 그의 피를 대신 보여 주시므로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청결을 거기서 구하게 하셨으며 우리가 그의 영으로 거듭나는 것은 우리가 죄에 대해서는 죽고 의에 대해서 살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벧전2:24). 우리에게는 틀림없이 세례의 본질을 조성(助成)하는 모든 것이 있습니다.
교회는 처음부터 이 본질을 그대로 두고 약간씩 다른 의식을 실천해 오고 있습니다.
세 번 물에 잠기는 사람들이 있었는가 하면 오직 한번만 물에 잠기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비본질적인 의식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단순한 제도를 더럽히지만 않는다면 꼭 필요하지 않은 문제를 가지고 미주알 고주알 따지는 것은 우리의 본문이 아닙니다.
4. 본문 39절은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주의 영이 빌립을 이끌어 간지라 내시는 혼연히 길을 가므로 그를 다시 보지 못하니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둘이 물에서 올라갈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내시의 이야기를 맺는 대목에 이르러서 누가는 빌립이 내시의 눈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기록합니다.
내시는 이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와 같이 파송을 받았다가 수고에 대한 사의를 표할 겨를도 없이 갑자기 사라지고 말았다는 점, 한 푼의 돈도 받지 않고 사라진 데서 그가 접근해 온 것은 비위를 맞추어 돈을 뺏어 내기 위한 수작이 아니었다는 점을 쉽게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내시의 믿음을 확신시키는데 있어서 적잖은 의미를 지닙니다.
그리스도의 종들은 빌립이 내시로부터 아무런 보상도 받지 않은 이 방법을 보고 아무런 보상을 바라지 않고 하나님께 자신들의 봉사를 드리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들은 인간들에게 무보수로 봉사함으로서 하늘의 보상을 소망하도록 해야겠습니다.
물론 주님은 복음의 일군들에게 그들이 가르치는 자들에게서 삯 받는 것을 허용합니다(고전9:9).
동시에 주님은 그들이 돈만 바라고 이득을 위해 일하는 것을 금하십니다(요10:12).
모름지기 그들의 목표는 인간들을 하나님 편으로 얻어 내는 것이어야 합니다.
2) 본 절 중간에 \"혼연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지식은 언제나 이 열매를 동반합니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의 자비와 보고를 활짝 열어 제칠 뿐 아니라 그의 아들을 통해서 자신을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데서 자신의 마음을 우리에게 쏟아 놓으심으로서 우리의 행복을 완전하게 만드는데 있어서 그 어느 것도 부족한 것이 없도록 하시는 이것보다 더 순수한 기쁨의 근원이 또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될 때 하늘은 청명하기 시작하고 땅은 평온하며 이로서 양심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슬프고 무서운 의식에서 해방되고 사단의 횡포에서 벗어나며 사망의 흑암에서 헤어날 뿐 아니라 생명의 빛을 대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지자들은 그리스도의 나라를 두고 이야기 할 때마다 으레껏 우리에게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환희에 넘치고 승리에 찬 찬송을 부를 것을 당부합니다.
그러나 세상 헛된 기쁨으로 마음이 가득 찬 자들은 이런 영적 기쁨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과 세상의 모든 유혹을 무시하는 법을 익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참으로 즐겁게 하실 수 있게 해야 합니다.
5. 본문 40절은 \"빌립은 아소도에 나타나 여러 성을 지나 다니며 복음을 전하고 가이사랴에 이르니라\" 입니다.
여호수아 11장에서 보면 아소도는 아낙자손들을 내쫓을 수 없었던 성들 중 하나입니다 이곳은 아스갈론에서 25마일(2백 스타디아) 떨어진 곳입니다.
히브리인들은 이곳을 (아쉬돋)으로 부릅니다.
빌립은 당시 그곳까지 날리워 갔다가 거기서부터는 정상적인 인간의 걸음걸이로 여행을 했는데 그 때에 빌립은 지나가는 곳마다 복음의 씨앗을 뿌렸습니다.
물론 여행을 하면서 신앙의 명성을 전파한 것은 비상하고 놀라운 행동이었습니다.
누가는 빌립이 가이사랴에 이르기까지 그 중간에 있는 모든 도시에서 전파했다는 말은 분명히 밝힙니다.
그렇지만 그가 사마리아에 돌아왔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빌립이 가이사랴에 얼마동안 머물러 있지 않았는가 를 추측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는 미해결의 장으로 남겨 두겠습니다
사도행전 9장 강해
행9:1-5 사울이
본문은 사울의 개종체험의 성격으로 하늘에서 빛이 그를 둘러 비추고, 또 하늘이 열려서 실제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뵈옵는 장면입니다.
1. 본문 1절은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특별히 중요한 사건, 곧 사울의 유명한 회심 이야기를 말씀합니다.
곧 그가 야수와 같이 미쳐 날뛰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를 자신의 지배 아래 끌어들였을 뿐 아니라 그를 완전히 다른 세 사람으로 만드신 사건을 기록합니다.
누가는 모든 내용을 하나님의 기념할 만한 행동에 어울리는 순서에 따라 기술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그대로 따르는 가운데 매 단계를 검토하는 것이 낫습니다.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라는 말씀은 사울이 일단 무고한 피로 얼룩지고 나서부터는 그 후로 동일한 잔인성을 계속 발휘했다는 뜻입니다.
또 사울은 스데반의 죽음에서 기록된 불길한 시초부터 계속 미칠 듯이 피에 굶주린 교회의 원수였다는 뜻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사울이 그처럼 갑자기 유순하게 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만큼 더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나운 이리가 양으로 변할 뿐 아니라 그가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 거기에서 하나님의 놀라운 손길은 명백하게 드러난 셈입니다.
2. 본문 2절은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 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입니다.
사울이 그리스도를 고백하는 모든 자들을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데려가기 위해 대제사장의 공문을 받은 것은 그에게 상처를 끼칠 무장과 권세가 주어졌다는 뜻입니다.
여기에 \'여자들\'이 언급되고 있는 것은 피를 쏟게 하고자 하는 사울의 마음이 어느 정도였는가 하는 점을 보다 더 명백하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사울은 전쟁의 도가니 속에 있는 무장 군인들마저 흔히 구별하기 마련인 남녀의 성을 무시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우리에게 횡포하게 행동할 특권을 부여받았을 뿐 아니라 경건한 자를 닥치는 대로 죽이고 집어 삼키는 권세를 부여받은 포악한 짐승을 제시합니다.
사울은 마치 칼을 손에 든 미친 사람과 같았습니다.
당파(secta) 로 번역하는 말을 누가는 도(道)로 이야기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은유법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의 의도는 신실한 자들을 전부 잔인하게 파멸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이름을 말살하는 데 있었습니다.
3. 본문 3절은 \"사울이 행하여 다메섹에 가까이 가더니 홀연히 하늘로서 빛이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 입니다.
1) 본문 초두에 \"사울이 행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사울이 제사장에게 공문을 청했다는 점에서 그는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미칠 듯이 덤벼든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여기서는 자신의 의지에 반대되는 순종을 강요받습니다.
어찌나 열렬했던지 스스로 파멸을 향해 곤두박질하던 사람이 자신의 마음의 의도와 반대되는 구원으로 부름 받은 것은 하나님의 비상한 자비 덕분입니다.
주님께서는 사울이 그 공문을 받아 다메섹에 접근하는 것을 허용하신 사실에서 우리는 주께서 무슨 일을 실천하실 때 얼마나 정확한 순간과 올바른 시기를 선택하시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경건한 자들을 더 일찍이 불안과 공포에서 해방시킬 필요가 있으셨다면 주님은 물론 그렇게 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막 양의 우리에 들어서려는 이리의 벌어진 아가리를 꼭 다물게 함으로서 주님은 자신의 중재를 더없이 명백하게 드러내 보여 주십니다.
또한 인간들의 오만은 그들의 하는 일의 진전과 함께 중대하기 마련입니다.
그렇게 볼 때 바울은 이제 자신의 광기를 어느 정도 진척시키는 가운데 더욱 더 오만불손하게 되어 있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그의 회심은 그만큼 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2) 본문 끝 부분에 \"저를 둘러 비추는지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러한 교만을 제지하고 그러한 야만적인 충돌을 꺾으며 그러한 격정, 곧 비뚤어진 열성에서 나오는 맹목적인 격정을 내리누르고 마지막으로 재갈을 물리지 않은 야수를 잡아 끈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상대할 자는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라는 점을 바울이 깨닫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위엄에 대한 상징을 어느 정도 보여 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그를 낮추는 문제도 개재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그가 그리스도에 의해 즉각 성령의 쉬운 멍에를 맬 자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사울은 그의 흉맹이 과격하게 꺾여지기 전에는 그러한 온순한 대우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확실히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계시하시는 그 방법을 종종 달리 하시기 전에는 인간들의 이해력이 그리스도의 신령한 영광 그 자체를 파악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에게 자신의 신성을 증거 하시되 바울에게 공포를 자아내게 하는 자신의 임재에 대한 눈에 보이는 표적을 허용하십니다.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을 대할 때 벌벌 떨기 마련이지만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을 깨달은 바울이 체험한 공포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것이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4. 본문 4절은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입니다.
1) 누가는 사울이 땅에 쓰러졌다는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즉 인간이 하나님의 영광을 직접 깨닫고 압도될 경우 당황한 가운데 넘어져 거의 무(無)로 전락하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그의 말 위에 걸터 앉아 있을 때 멸시하던 그리스도의 바로 그 음성을 통해 가르침을 받기로 다짐하는 겸손의 시작이었습니다.
2) 본문 중간에 \"사울아 사울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온 사방에서 바울에게 쏟아진 빛을 번개에 비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것은 공중에 번뜩거린 섬광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의 교두을 박살내기 위해 격한 어조로 발하신 이 음성을 일종의 낙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은 그 음성을 듣고 그는 나가 넘어져 쩔쩔매고 있을 뿐 아니라 완전히 손을 들고 말았으며 그 결과 지금까지 복음을 타도하는 권리로 으스대며 뻐기던 사람이 이제는 자기 자신의 눈에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누가가 \"사울아 사울아\"하는 히브리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가 당시 백성들이 흔히 사용하던 방식으로 말씀하셨을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보고하기 때문입니다.
5. 본문 5절은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입니다.
이제는 길들여진 바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그는 아직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하나는 아니었습니다. 그의 속에 있던 교만이 꺾이고 광포가 누그러졌지만 그는 아직 그리스도를 순종하는 건전한 단계에 이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까지 일어난 것은 큰 소리를 지르며 수없이 하나님을 모독하던 사람이 지시사항을 수행할 준비만 갖추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안이 벙벙해져 대경실색하며 당황한 사람이 하는 질문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해서 사울이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그러한 징조를 보고도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겠습니까?
그러므로 이 외침은 주저하고 불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더욱 다구쳐 회개하게 하십니다.
\"나는 예수라\"고 하시는 말씀은 하늘에서 말씀하시는 음성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바울이 지금까지 하나님을 상대로 전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울의 마음을 아프게 찔렀습니다.
사울은 이 음성을 듣고 도저히 피할 길 없는 손길의 임자이신 그분을 상대로 계속 반역했다가는 결국에 가서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자 당장 순진하게 굴복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이 구절에는 특별히 유익한 가르침이 내포되어 있으며 그 가치는 참으로 다양합니다.
첫째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이 자신의 대 목적이요, 그리스도께서는 이것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점을 선언하심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이 복음을 귀하게 여기시는가 하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자기 자신을 부정할 수 없으시듯이 이 복음의 변호를 결코 포기하실 수 없으십니다.
둘째 경건한 자들에게는 그들이 복음 증거의 무거운 짐을 지고 고생할 때 하나님의 아들께서 그들과 함께 이 십자가를 분담해 주신다는 소식이야말로 더 없는 위로입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께서 친히 그 짐의 밑에 그분의 어깨를 들이밀고 있다는 소식을 듣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와 함께 고난을 받고 있으시며 마치 복음의 원수들이 우리를 통해서 그분 자신의 옆구리에 상처를 낸 것과 다름없는 같은 아픔을 받고 계시다는 점을 우리들이 실제로 확신하기를 바란다는 말씀은 결코 공연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신자들이 오늘날 복음의 변호를 위해서 당하는 모든 박해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고난의 연장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골1:24).
더욱이 이 위로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의 머리와 함께 고난을 받는 것을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도록 하는데 있을 뿐 아니라 모든 우리의 고난이 그리스도와 우리에게 공통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하늘에서부터 선포하시는 그 분께서 우리를 우리의 모든 불행에서 구원해 주실 것이라는 사실을 소망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여기서 교회의 핍박자들에게 기다리고 있는 무시무시한 심판이 무엇인가 하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거인처럼 하늘을 향해 돌격하고 창을 휘두르지만 그 창은 곧 자신들의 머리를 향해 되돌아오고야 맙니다. 그렇습니다.
그들은 하늘을 괴롭혀 봐야 하나님의 진노의 벼락을 자초할 뿐입니다.
여기에는 또한 아무도 자기 형제에게 부당한 상처를 입힘으로서 그리스도를 공격하거나 열성을 핑계로 무모하고 맹목적인 분노에 사로잡혀 진리를 배척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일반적인 경고도 담겨 있습니다.
\"가시채를 뒷발질하기가 네게 고생이니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소나 말이 그들을 모는데 사용하는 막대기에 찔릴 경우 거기에 발길질 해봤자 더 쿡쿡 찌르는 막대기에 곱절의 아픔을 맛볼 수밖에 없는 장면에서 따온 격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이 비유를 사용하신 것이 아주 적절한 것은 싫든지 좋든지 그의 지배 아래 들어가는 것이 마땅한 때에 기를 쓰고 그에게 반대해 봤자 인간들은 곱절의 성처를 자초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기꺼이 그리스도에게 굴복하는 자들은 그에게서 아무런 찔림을 받지 않고 그 안에서 이미 마련된 모든 상처에 대한 치료를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독침을 그에게 쑤셔 넣으려고 몸부림치는 자들은 자기들이 채찍에 내맡겨진 노새나 소와 다름없다는 점을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에게 그리스도는 의지할 토대이지만 그리스도에게 돌격하는 버림받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리스도가 그 견고함으로 그들을 박살내는 돌입니다.
그런데 이 표현은 복음의 원수들을 두고 사용된 것이지만 그 경고는 우리들에게도 확대 적용될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무슨 일을 할 때 재갈을 이로 물로 날뛰면서 무슨 일을 성취할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그러지 말고 유순한 말처럼 그 주님의 손길에 따라 들라면 들고 가자면 가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설령 주께서 우리를 채찍으로 때리실 경우에는 즉각 채찍에 반응을 보입시다.
그래야 고집 센 말과 나귀가 난폭하게 굴지 못하도록 그들의 턱을 단단한 재갈쇠로 봉해 버리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시32:9).
그 외에도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부르시면서 날마다 베푸시는 그 은혜에 대한 보편적인 형태를 대하게 됩니다.
물론 모두가 그처럼 강포하게 복음에 대해서 반기를 드는 것은 아니겠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에 대한 교만과 반역은 우리 모두에게 본질적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천성적으로 사악하고 잔인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서는 일은 우리의 본성에 반해서 하나님의 기적적이요 은밀한 능력에 의해서 일어납니다.
물론 로마 카톨릭에서도 우리의 회심을 하나님의 은혜의 덕분으로 돌리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가 협조하는것으로 생각하기에 오직 일부분에 있어서만 그렇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주께서 우리의 육신을 죽이실 때 바울과 같은 방식으로 제지하십니다. 우리의 의지는 우리의 교만이 꺾인 다음 우리가 주를 따르기에 적합하고 적극적인 사람으로 변하기 전에는 바울의 의지와 같이 한 치도 순종할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회심의 시작이란 우리 편에서 하나님을 부르거나 찾지 않았지만 주께서 먼저 방황하고 곁길로 가는 우리를 찾아 오셔서 우리의 마음의 꿋꿋한 욕망을 바꾸어 놓아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이게 하는데 있습니다.
더욱이 이 설화는 마음의 가르침을 확증하는데 큰 가치가 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항상 그리스도의 제자였다면 불경건하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은 바울이 그의 선생의 것으로 말하는 증거의 권위를 약화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에 바울이 처음부터 천성이 유순하고 고분고분 했더라면 우리는 인간적인 것 이상의 것을 그에게서 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치명적인 원수, 복음의 반역자, 자신의 지혜에 대한 자만심으로 배가 부르고 진정한 신앙에 대한 증오심으로 불타는 사람, 위선으로 눈이 어두우며 그 진리를 파괴하려고 굳은 결심을 한 사람인 바울이 갑자기 비상한 방법으로 새로운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것은 곧 이리가 양으로 변할 뿐 아니라 목자의 역할을 담당하는데 나아갑니다.
이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의 손으로 하늘에서부터 파송된 천사를 공공연하게 이끌어 내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다소의 사울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 하늘에서부터 그의 입술을 통해 말씀하시려고 새로 창조한 사람을 대하는 것입니다.
행9:6-9 네가 일어나
본문은 주께서 사울의 개종을 주도하시는 중에 주의 은혜로 멍에를 메워서 주의 도구와 그릇으로 사용하실 준비의 내용입니다.
1. 본문 6절은 \"(그리고 그가 떨면서 어리둥절한 채 주여 제가 어떻게 할까요 하고 묻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 영역 성경에는 난외 주에 있음) 네가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행할 것을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입니다.
1) 이것은 바울의 완악함을 꺾는 뜻에서 그가 세차게 얻어 맞은 징계의 결과입니다.
바울은 방금까지 혐오하던 분의 명령을 수행할 준비가 된 사람으로 자신을 바칩니다.
그리스도의 뜻이 무엇이냐는 질문으로 바울은 그분의 권위와 능력을 인정합니다.
물론 버림받은 자들도 하나님의 위협을 받을 때는 겁에 질린 나머지 그분에게 억지로 경의롤 표하고 그분의 명령을 순복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불평하는 일과 마음 속에 오만을 가꾸는 일을 그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울을 낮추시되 그의 마음 속에서부터 효과적으로 작용하셨습니다.
바울이 더 적극적으로 하나님께 순복한 것은 그의 본성이 좋아서가 아니었습니다.
바로는 마치 모루(anvil)와 같아서 자신의 견고성 때문에 자기에게 와 닿는 하나님의 채찍이 마치 두들기는 망치인 것처럼 거기에 굴하지 않고 되튕겨 버렸습니다(출7:13).
그러나 바울의 마음은 거기에 본래 없던 부드러움이 성령에 의해서 허용되자 갑자기 쇠에서 살로 변했습니다.
우리 역시 이 동일한 사실을 날마다 체험하고 있습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우리를 꾸중하고 위험하고 겁을 주며 심지어는 매를 들기까지 하시지만 하나님의 영이 속 마음을 부드럽게 해 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이러한 보조 수단을 통해서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2) 본문 초두에 \"주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시기를\"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무쇠 목을 그리스도의 멍에 밑에 들이밀고 난 다음부터 그분의 선하신 손길에 의한 지배를 받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경주장 트랙으로 우리를 데려오실 경우에 그분은 출발점이나 도중에 우리를 내팽개쳐 버리시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목표를 향해 인도해 주십니다.
여기서 누가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자신의 말을 듣게 만들어 놓고 나서 그에게 지시사항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기록함으로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지도의 계속적인 면을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목적을 위해 사람의 사역을 사용하신다 해서 전혀 차이가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들어 자신의 일을 완성하신다 해도 그 권위와 능력은 여전히 자신의 수중에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영원한 지혜이신 그리스도께서 이제 열심히 들을 자세를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가르침을 받아 먹으려고 입을 쩍 벌리고 있는 사람을 다른 사람에게 가서 배우라고 보냄으로서 사람을 초조하게 하는 것은 모순되어 보일 수 있습니다.
주께서 바울을 그의 제자 중 한사람에게 배우도록 보내신 것은 마치 주께서 그와 친밀하게 말하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가 지금가지 그렇게도 교만하게 멸시하고 그렇게 가혹하게 박해했던 그의 종들에게 보내시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하심으로서 주님께서는 바울의 겸손을 시험하고자 하셨습니다.
우리도 그의 본을 통해서 겸손한 자세를 배워야겠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울 같은 사람을 평범한 제자의 교훈을 받도록 하셨는데 그리스도의 임명을 받은 교사요, 또 실제로 그리스도의 일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사람이 어디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바울을 아나니아에게 보낸 것은 교회의 사역에 대한 영예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천성적으로 속되고 거짓말과 허영에 빠져 있는 입술의 주인공들인 우리들 가운데서 형제들을 뽑아 주님의 성스러운 말씀을 소리쳐 외치게 하십니다.
이것이야말로 인류에게 허락하신 크나큰 영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도 세상의 수치스러운 배은망덕은 다시 고개를 쳐드는 게 사실입니다. 그것은 아무도 하나님이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말씀하실 때 견딜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천사들이 직접 자기들에게 날아와 주었으면 하거나 하늘이 두 쪽으로 갈라지면서 하나님의 영광이 눈에 보이게 드러났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이따위 극악한 호기심은 교만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불경건한 경멸에서 생깁니다.
그것은 수 없는 공상의 문을 활짝 열어 제치며 신자들 간의 일치점을 부숴뜨립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사람을 통해서 가르침을 받는 것을 그분의 뜻으로 선언할 뿐 아니라 자신이 세우신 제도를 추천하고 그것을 인정하시는 것입니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눅10:16)라는 말씀 역시 이것과 관계된 것으로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에 대한 올바른 경의를 확보하기 위해 하신 말씀입니다
3) 본문 끝 부분에 \"네게 이를 자가 있느니라 하시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가르치는 직무에 관한 한 아나니아에게 주님 대신 행동할 것을 임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주께서 자신의 권위를 그에게 양도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가 복음의 충성된 일군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만을 배우고 그의 일군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분은 오직 그리스도 자신 뿐 이라는 이 지침을 항상 견지하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사역자들이 이러한 귀한 기능을 핑계삼아 교만하거나 그들의 천한 상황이 하늘의 지혜를 훼손하는 잘못이 없도록 경계해야겠습니다.
2. 본문 7절은 \"같이 가던 사람들은 소리만 듣고 아무도 보지 못하여 말을 못하고 섰더니\"입니다.
누가가 바울의 동료들을 언급하는 것은 그들이 이 환상의 증인들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설명은 바울이 제22장에서 말하는 것과 약간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동료들이 빛을 보고 당황하게 되어 음성을 듣지 못한 것으로 말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여기에 잘못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면서 여기의 부정어가 필경사의 무지 때문에 잘못 기재된 것으로 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음성을 듣기는 들었지만 그것이 누구의 음성인지 또 무슨 얘기가 오고 갔는지 몰랐을 것이라는 사실을 생각할 때 이것은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닙니다.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이 나머지 말씀하시는 이의 소리는 듣지 못하더라\" 는 말은 분명히 그리스도의 말씀을 자기 혼자만 알아 들을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그것이 애매하고 이해할 수 없는 음성으로 들리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릴 수는 없습니다.
이 구절에서 누가는 음성은 들렸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음성이 사람이낸 소리였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발하신 음성이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기적을 통해서 믿음을 확립하는 뜻에서 바울의 동료들은 번개와 같은 빛을 보고 바울이 땅에 쓰러지는 것을 보며 분명하지는 않지만 하늘에서 들려오는 음성을 듣지만 그와 동시에 바울 혼자서만 자기가 해야 할 일에 대해 가르침을 받습니다.
3. 본문 8절은 \"사울이 땅에서 일어나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사람의 손에 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서\" 입니다.
여기서는 바울이 혼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쓰러졌을 뿐 아니라 당분간 시력까지 박탈당해서 자신의 과거의 예리함을 망각하게 되었다는 점을 덧붙입니다.
\"눈은 떴으나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라는 대목은 그의 눈이 비늘 같은 것으로 덮여 있었다는(18절) 대목과 일치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구절의 의미는 그가 눈을 떴으나 보지 못했다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이 글자 그대로 눈먼 상태였으며 이 시력의 상실이 사흘간 계속되었다는 뜻입니다.
4. 본문 9절은 \"사흘 동안을 보지 못하고 식음을 전폐하니라\" 입니다.
누가의 주장은 기적의 일부입니다.
이것은 물론 동양인들이 우리보다 더 허기를 잘 참는다지만 우리는 그들이 음식이 전혀 없거나 어떤 강압적인 상황에 말려 들지 않고서 그처럼 사흘간에 걸쳐 금식을 했다는 어떤 기사도 읽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마치 죽은 사람처럼 사흘간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가 보통 이상으로 겁에 질려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행9:10-12 그때에 다메섹에
본문은 사울이라고 하는 바울을 쓰시는데서 아나니아를 선각자로 쓰시는 경우입니다.
1. 본문 10절은 \"그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중에 불러 가라사대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입니다.
1) 다른 사도들에 비해 아나니아라 하는 이 사람이 선택받은 것은 바울로 하여금 그의 오만을 박탈당한 뒤에 가장 하찮은 사람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또 절정에서 가장 밑창으로 내려오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런데 이 환상이 아나니아에게 필요했던 것은 아나니아로 하여금 자기에게 부과된 바울을 가르치는 임무를 거절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곧 아나니아는 바울이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그래도 거기서 움츠려들 뿐 아니라 최소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가 주님께서 명령하시는 사항을 진지하고 용감하게 수행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바울을 부르심에 대한 확증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또 아나니아는 자신의 수고에 대한 성공적인 결과의 약속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그리스도께서는 아나니아에게 환상을 통해 나타나심으로서 그에게 생기를 불어넣고 확증을 주심으로서 바울에 대한 모든 준비를 갖추고 계시니 이것은 바울로 하여금 아나니아가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라도 되는 것처럼 아나니아의 말을 청종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주님은 곧장 바울을 아나니아에게 보내시면서 아나니아의 집을 가리켜 보여 주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방법이 그에게 확증을 주는 면에 있어서 더 적절했던 것은 그가 이것을 통해 주께서 자신의 일에 관심을 쓰시고 계시다는 사실을 더 잘 깨닫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앞서 바울을 만나신 방법 그대로 여기서도 그의 요청이 없었는데도 주님의 종을 통해서 다시 그에게 주님의 손길을 내밀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은혜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셈입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여기서 잃은 양을 찾는 일에 더욱 더 자발적이고 초조해 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본문 중간 부분에 \"환상 중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환상이란 하나님의 임재를 증거하는 어떤 상징이 그의 눈에 제시되었다는 뜻입니다. 환상의 용도란 말씀의 위엄을 확증함으로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신뢰를 지니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러 선지자들을 상대로 이러한 확증 방법을 사용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주님의 종들에게 환상이나 꿈으로 말씀하신다는 점을 친히 말씀하십니다.
물론 주님은 사단에게 거짓 환영을 통해서 불신자들을 속이도록 허용한 일도 있습니다
그러나 사단의 속임수는 오직 흑암에서만 통용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의 마음을 친히 조명하심으로서 그들에게 속임수를 무서워할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확증시켜 주십니다.
그러므로 아나니아는 그 부르심이 참으로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2. 본문 11절은 \"주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자를 찾으라 저가 기도하는 중이다\" 입니다.
누가는 이 사흘 기간에 바울이 기도에 열중하고 있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 이것이 바울이 금식한 이유 중에 하나였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바울이 그처럼 오래 배고픔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황홀경에 있는 사람에게 흔히 있는 감각의 마비 때문이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기도는 짤막한 기도가 아니라 바울이 자신에게 완전히 평정한 마음이 허용되기까지 기도를 계속했다는 뜻이 틀림없습니다.
다른 여러 가지 공포의 원인은 접어 두더러도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라는 음성은 여전히 그의 귀에 쟁쟁하게 들여오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마음은 완전한 계시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가운데 이상한 고통을 받았을 것이요 주께서 그를 사흘 동안이나 기다리게 한 이유는 그의 기도에 대한 열정에 불이 붙어 더 강력한 화염으로 발전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을 것입니다.
3. 본문 12절은 \"저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입니다.
여기서 누가가 아직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그대로 보고하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의 말을 여기서 덧붙이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확실치 않습니다.
이것을 누가의 얘기로 돌리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이런 말씀을 사용하셨을리 없다는 점을 이유로 제시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쉽게 설명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아나니아에게 \"그가 너를 반기지 않을 것으로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은 그는 이미 네가 누구라는 것을 환상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네 이름과 그밖에 네가 그에게 할 일을 이미 다 설명해 놓았다\"는 식으로 격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둘 중에 어느 것을 취사 선택하느냐 하는 문제는 신자에게 맡기겠습니다.
행9:13-16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본문은 아나니아가 사울의 소문에 의한 선입견적인 평가에 대하여 주께서 친히 말씀해 주시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3절은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입니다.
아나니아는 주님에게 위험을 예로 들면서 반론을 제기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신앙의 연약성을 드러내는 행동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성도들과 그리스도의 종들이 사망의 공포 때문에 자신들의 임무를 수행하는데 주저하게 되고 또 불안한 동요에 빠지는 수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분명히 아나니아는 다른 방향으로 가는 것을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나니아가 그리스도께 순종을 거절할 정도로 못된 공포에 휘말려 들지 않았다는 것은 훌륭한 사람의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사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일의 시작이 느려지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아나니아가 곧장 자신을 망각하고 재빨리 그리스도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달려간 것은 뛰어난 경건의 상징입니다.
하지만 이 말로 아나니아는 자기에게 명령된 바를 완전히 거절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 절 사형 집행자에게 보내신다니 무슨 뜻입니까?\" 라는 간접적인 변명을 조용히 제시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거기에는 순종하고자 하는 욕망과 두려워하는 공표가 뒤섞여 있었습니다.
2. 본문 14절은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를 결박할 권세를 대제사장들에게 받았나이다 하거늘\" 입니다.
여기서는 사울이 준비하고 있던 박해 소식이 상당히 넓게 퍼져 있었으며 그 결과 그의 회심은 더욱 더 특이하게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 그의 신실한 백성들에게 심한 고통을 허용하시는 것은 후에 있을 그러한 갑작스런 구원의 복이 더욱더 두드러지게 나타나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경건한 자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고 있다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이 표현을 그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으로 고백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에게 영광을 돌렸다는 뜻으로 이해하든 그들이 항상 그의 보호를 의지하고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하든 확신이 없이는 기도할 수 없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둘 중에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의 신성은 명백하게 입증되고 있을 뿐 아니라 만약에 둘째 의미를 택한다면 이것이 더 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우리는 신실한 자들의 본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전파된 다음에 그의 이름을 부르라는 가르침을 받는 셈입니다.
3. 본문 15절은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입니다.
1) 명령의 반복과 성공에 대한 약속의 말씀은 모든 의심을 제거합니다.
그러므로 수많은 채찍을 받고도 무감각이 깨우쳐지지 않는 경우가 있다면 거기에는 더 이상 변명의 여지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일을 아주 많이 보게 됩니다.
제 아무리 주님께서 집요하게 부르셔도 그들은 그들의 생을 허송할 뿐 아니라 온갖 쾌락으로 자신들의 태만을 키워 나갈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두 번째 명령을 받고 당장 모든 지연을 뒤로 물리치는 아나니아의 본을 받아야 하는 이유입니다.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는 오늘날은 더 이상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일이 없지 않으냐고 반박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성경의 권위가 충분히 우리에게 확립된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음성을 거기서부터 들어야 합니다.
2) 본문 중간에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그리스도의이름을 파괴하려 하던 사람에게 이제 그 이름을 전파할 책임이 지워집니다.
만약에 (스큐-오스)를 \'그릇\'으로 본다면 이 은유는 여기에 잘 적용됩니다.
복음의 일군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알림으로서 그릇의 역할을 다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히브리어에 있어서 일상 도구라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순하게 \'이름을 전하다\' 를 그에게 영광스럽게 그 이름을 \'높이다\' 또는 \'극찬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입니다.
세상이 복음전파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서 모두 함께 모이게 될 때 그리스도는 어떤 의미에서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되는 것입니다.
\"택한 그릇\" 또는 에라스므스의 번역대로 \"선택받은 도구\" 란 특별한 일군에 대한 말입니다. \'도구\' 라는 말 자체가 인간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수고를 주님의 뜻에 따라 사용하시기 전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도구라면 엄격히 말해서 주님만이 유일한 행위자요 행위의 능력과 솜씨가 주님의 손에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여기서 바울을 두고 말씀하신 것은 구별없이 모두에게 적용됩니다.
따라서 제 아무리 우리가 힘든 수고를 하고 제 아무리 일을 잘해 내더라도 자화자찬할 이유는 티끌만큼도 없습니다.
\'그릇\' 이라는 단어를 두고 박식한 체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들은 히브리어를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는 소리를 해댑니다.
누가는 이 명칭에 속격을 사용하지만 이것은 일반 히브리 관례에 따른 표현입니다 더욱이 누가는 \"이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의 보통 일군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위대한 은사를 받을 것이다\" 라는 뜻에서 사도의 탁월성을 표현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누구에게 어떠한 장점이 있든 그것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은총에 의존한다는 점을 깨달아야겠습니다.
이것은 \"누가 당신을 남달리 월등하게 만들었습니까?\"(고전4:7 ; 새 번역) 라는 바울의 말 그대로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울이 위대하고 탁월한 일을 위해 선택받았다는 점을 선언합니다.
4. 본문 16절은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해를 얼마나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상대 할 쪽이 온순한 사단이나 고분고분 굴복하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바울이 십자가를 져야 하는 것을 동시에 배워야 할 것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나는 그에게 숱한 고생을 당하게 할 것이요, 숱한 수치를 견디게 할 것이요, 온갖 종류의 투쟁을 이겨내게 함으로서 그 어느 정도 그의 임무를 방해하거나 제지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라는 말씀이나 같습니다.
주님은 여기서 자신이 바울의 교사로 나섬으로서 우리 각자가 그의 도장에서 진전을 볼수록 십자가를 짊어지기에 더 적격자가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주십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엑 침착하고 유순한 마음을 주시기 전에는 우리는 그 십자가를 마다고 발버둥치며 그것을 더 없는 재앙으로 여기고 피하기 마련입니다.
마지막으로 이 구절은 그 어느 누구도 그의 마음에 고난을 받겠다는 각오가 서 있지 않고서는 이 적대적인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자격이 없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충성된 일군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려면 우리는 그에게 지식과 지혜의 영을 구할 뿐 아니라 인내와 용기의 영을 구하는 가운데 경건한 자들의 몫인 절망적인 고난 때문에 으스러지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행9:17-19상반절 아나니아가 떠나
본문은 주의 분부대로 아나니아가 순종함으로 사울이 안수 받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7절은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가로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시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입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누구를 하나님에게 추천할 때 손을 얹는 것은 엄숙하게 행하는 정규적인 의식이었습니다.
사도들은 성령의 눈에 보이는 은사를 베풀거나 어떤 사람을 교회의 일군으로 임명할 때 제사 의식에서 따온 이 습관을 사용했습니다.
아나니아가 바울에게 자기 손을 얹은 이유는 한편으로는 그를 하나님께 성별하려는 뜻에서요, 또 한편으로는 그를 위해 성령의 은사를 획득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르침에 대한 언급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이 다음에 말하는 대목을 보면 그를 가르치는 임무도 아나니아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이 명백합니다.
그 후에 이어지는 그의 세례를 볼 때 우리는 그가 신앙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바울은 성령을 아나니아의 손을 통해서 받았다 해서 로마 카톨릭에서는 안수를 감독들만의 일로 돌리는데 이것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2. 본문 18-19절 상반절은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입니다.
바울의 눈먼 상태는 비단 공포나 당황 때문에 생긴 것만은 아니요 이런 방법을 통해서 그는 자신의 과거 기고만장해 하던 자만심을 완전히 벗어 버리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과거의 무지를 지적 받은 셈이었습니다.
그가 가말리엘의 문하생이었다는 그의 자랑만 보더라도(행22:3) 그는 자신의 명석에 대해서 큰 자부심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 명석은 한낱 무지(blindness)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의 마음으로 보기 시작하도록 사흘동안 시력을 박탈당했습니다.
스스로 현명한 체 하는 사람은 모조리 진정한 지혜의 양식에 따라 개조되기 위해 바보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의의 태양인만큼 우리가 주님없이 본다는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이요 마음의 눈을 여는 분은 주님뿐이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면이 바울에게 제시되었으며 그 사도를 통해 우리에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시력이 비늘로 제약을 받는 것은 그가 자신의 통찰력을 모두 무지로 돌리고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빛이 그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바울은 참된 빛은 그리스도 이외의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으며 그의 은총이 아닌 어떤 방법을 통해서도 허용될 수 없다는 사실을 배우고 있습니다.
바울은 사흘간이나 굶어서 허약해져 있었는데도 자신이 세례를 받기 전에 서둘러 음식을 취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바울이 배우려는 강렬한 욕구가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바울은 자신의 영혼이 생기를 얻기 전에 자신의 몸을 먼저 회복하지 않았습니다.
행9:19하반절-25 즉시로 각 회당에서
본문은 주의 도구와 그릇이 된 사울이 그 즉시로 다메섹 각 회당에서 복음을 전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19하반절-20절은 \"(19)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입니다.
누가는 바울의 회심이 얼마나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는가 를 기록합니다.
그런데 바울은 당장 공중 앞에 나타나서 자신이 그리스도의 한 제자라는 점을 고백했을 뿐 아니라 단호하게 복음을 변호하면서 자신을 이 복음의 원수들의 증오와 분노에 내어 맡기고 있습니다.
따라서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리스도에게 맹렬한 공격으로 돌진하던 사람이 말없이 그의 지배에 굴복할 뿐 아니라 마치 선발대처럼 그리스도의 영광을 변호하기 위해 가장 위험한 지역까지 돌진하고 있습니다.
물론 바울이 아나니아 라는 대리인을 통해 그처럼 쉽사리 개조된 것이 아니라 바울이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기초적인 것을 받아먹을 때 하나님을 통해 고차원적인 것을 받았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말씀이 바울 전도의 요점입니다.
같은 의도로 곧 이어서 바울은 \"이 분이 바로 그리스도였다\"는 사실을 덧붙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율법과 선지자로부터 메시아의 참된 직무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메시아에 대해서 약속되고 기다리기로 되어 있던 모든 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드러났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그의 전도의 내용은 바로 이런 뜻입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는 구속자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을 것인데 그가 만물을 행복한 상태로 회복하신 것이라는 사실은 이론의 여지가 없는 철칙이었습니다.
바울은 나세렛 예수가 바로 이 구속자라는 사실을 역설합니다.
이 사실을 가르치자면 그들이 메시아의 지상 왕국에 대해서 품고 있던 엄청난 오류를 그들의 머리 속에서 뽑아 내버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무슨 목적으로 율법에 약속되었는가 하는 점을 다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마리아의 아들이요, 율법과 선지자들이 증거하는 바로 그분이시라는 이 한가지 목표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누가는 이 한 단어로서 만족하고 있습니다
2. 본문 21절은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 부르는 사람을 잔해하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저희를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점을 알려주는 뜻에서 덧붙여집니다.
바울의 복음에 대한 반대는 곳곳에 소문이 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러한 급작스런 변화가 하나님의 손길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다는 점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기적의 한가지 결과는 그들이 갑작스럽게 새롭게 된 사람을 보고 모두들 당황하게 된 것이요 그 결과 바울의 가르침이 그들의 마음에 더 크게 작용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기적을 강조하는 뜻에서 그가 야수와 같이 잔인하게 날뛰고 있었으며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의 계획을 실천하려고 다메섹에 내려온 사람이었다는 상황을 서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모든 구원의 확신을 그리스도에게 두는 방향에서 그의 이름을 고백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요, \"혹은 병거를 혹은 말을 의지하나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시20:7) 라고 하는 구절과 같은 내용입니다.
사실 성경이 하나님을 두고 부르는 이름은 뭐든지 그리스도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3. 본문 22절은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키니라\" 입니다.
여기서 누가는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고백하는 바울의 정열을 칭찬합니다.
또 바울 사도라 그가 강력한 논리로 유대인들을 반박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힘을 더 얻어\"라는 말은 그가 성경의 여러 가지 증언과 성령의 다른 도움으로 무장되어 있어서 그의 모든 적대자들을 능가했기 때문에 그는 논쟁에 있어서 승자였으며 그의 고백에는 위력이 있었다는 뜻입니다.
누가가 사용하는 \'굴복시키니라\' 라는 말씀은 그들이 바울에게 쫓겨 정신을 잃을 정도로 대경실색하게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굴복시키는 방법은 예수가 그리스도시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있는 힘을 다해 저항해 봤지만 패배하고 혼란하게 되고 말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이 논박하는데 있어서 유익하다는 자신의 말의 진실성을 체험으로 입증한 셈입니다(딤후3:16).
바울은 또한 진리를 옹호하는데 하나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감독과 교사들에게 요구하는 바를 실제로 보여 준 셈입니다(딛1:17).
그리고 사실 누가는 바울이 그의 논쟁에 있어서 얼마나 승리를 거두었던지 유대인들을 쓰러 넘어뜨릴 정도였다는 사실과 그들의 오만은 아직도 진리에 굴복할 정도로 박살이 나거나 길들여지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러기에 그들의 양심은 아직도 내부에서 저항을 그치지 않습니다.
또 그들의 헛된 견해에 대한 터전을 상실해 놓고도 그리스도에게 굴복하지 않습니다.
바울이 승리할 수 있었던 원천은 성경이 검(劍)의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단자들이 들고 일어나 참된 진리를 반대하며 싸우거나 불경건한 자들이 모든 신앙심을 뒤엎으려고 분투하거나 버림받은 자들이 끈질기게 저항을 해 오거나 우리는 이 원천에서 우리의 무장을 갖춰야 한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경에서 아무런 무기도 발견하지 못할 뿐 아니라 이 모든 것이 그들에게 불리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그들은 이단자들과의 논쟁은 있을 수 없으며 그 어느 것도 성경을 통해 확정될 수 없다는 비참한 도피성에서 그들의 은신처를 찾습니다.
그러나 사단도 말씀의 검으로 굴복된다면 왜 그것이 이단자들을 도망하게 할 수 없겠습니까?
물론 이것은 그들이 항복한다거나 성가신 존재로서의 역할을 그만둔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 스스로 정죄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소란을 피하려면 하나님께 반기를 선동하지 말고 침착하고 온순한 마음으로 성경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평안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합니다.
4. 본문 23-24절은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저희가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 늘\" 입니다.
이 \'여러 날\'이라는 표현은 바울에게 좋은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허락되었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유대인들은 처음부터 바울의 복음 전파를 저지하려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님께서는 일단 시작하신 과정이 그처럼 빨리 중단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또 주님께서는 바울 사도가 복음 전파에 진전을 볼 때까지 그의 놀라운 섭리에 따라서 그의 원수들의 의도를 방해하고 그들의 노력을 제지하며 그들의 악의와 분노를 견제하셨다는 뜻입니다.
불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싸움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점을 빤히 알면서도 기를 쓰고 발광하기 마련입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다면 하나님 말씀을 기꺼이 멸시하려 합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좋건 싫건 그 말씀의 능력을 억지로라도 깨닫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마치 미친 야수나 마찬가지로 곤두박질하며 달려드는 것입니다.
인간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말씀의 지배에 굴복하기 전에는 그들의 무분별한 육정은 거의 언제나 그러한 잔인성으로 발전하고 맙니다.
이러한 맹목은 사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그들의 양심에 와 닿는 상처가 주는 고통 때문이 아니라면 왜 그들이 이처럼 노발대발하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방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도 건전한 종교를 증오하는 자들의 위선을 처벌하시는 것은 그들이 흑암의 친구요 빛을 기피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사단이 일단 비뚤어진 열광자들에게 진리를 박해하도록 사주하고 나면 그들은 제멋대로 자기들이 좋아하는 일에 빠져들게 되고 맙니다.
그들은 사람을 죽인다는 것이 극악한 행동이라는 사실을 빤히 알면서도 그런 계획을 서슴없이 실천하려는 것은 그들의 열성이 그들에게 변명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로마 카톨릭에서는 그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말살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다는 식으로 나옵니다.
그들은 대담하게 이 검(劍)을 승격할 뿐 아니라 우리를 파멸하기 의한 여러 가지 음모, 상상을 불허하는 갖가지 계략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이런 일을 당하지 않으려면 주의해야 합니다.
먼저 나쁜 명분을 변호하는데 빠져들지 않도록 경계해야 합니다.
다음으로 선한 명분에 대해서는 만족스런 행동을 해야 됩니다.
첫째 그들은 은밀하게 바울에 대한 매복을 시도했습니다.
둘째 그런 방법이 아무런 효과를 맺지 못하자 그 도시의 지도자에게 접근했습니다.
셋째 그들이 어떻든 그를 가로막기 위해 성문에 파수병을 배치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누가가 여기서 유대인들이 한 짓으로 돌리는 사건을 아레다(King Aretas) 왕의 방백의 일로 얘기하고 있습니다.
5. 본문 25절은 \"그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리니라\" 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이 바울을 이런 방법으로 구출한 것이 합법적이며 바울로서도 그런 방식으로 위기를 모면한 것이 정당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되는 것은 법(法)은 성벽(城壁)을 성스러운 것으로 성문(城門)을 불가침의 것으로 선언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로서는 개인을 위해 공공질서를 소란하게 하기보다는 죽었어야 옳지 않았는가 하는 얘기가 나올 법도 합니다.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처벌을 부과함으로서 담을 넘는 것을 금하는 법의 의도를 생각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의도는 성이 도둑들에게 침해당하지 않고 시민들이 배역적인 공격으로부터 보호받게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무고한 사람을 구출하는 문제에 있어서 이 이유는 더 이상 구속력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바울을 이처럼 바구니에 담아 내려보낸 것은 원수의 갑작스런 공격을 받는 개인이 담을 뛰어넘는 것과 마찬가지로 합법적인 처사였습니다.
키게로는 후자의 경우를 들고 말하면서 비록 법은 낯선 사람이 담에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금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한 도시를 구출하려는 목적으로 담을 넘을 경우 그에게 잘못이 있을 수 없는 것은 법은 언제나 공평하게 적용해야 하기 때문이라는 설명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남 모르게 피했다 해서 비난을 받을 수 없는 것은 이 사건이 성민의 아우성을 받지 않고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바울이 안전하게 도망하려면 이처럼 성문지기들 몰래 도망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가운데 주님의 백성을 겸손하게 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것을 그의 연약성의 한가지 실예로 말하고 있습니다(고후11:32).
이러한 체험을 필두로 바울은 재빨리 십자가를 짊어지는데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행9:26-31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본문은 예루살렘에서 사울의 활동이 소개됩니다.
1. 본문 26절은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의 제자됨을 믿지 아니하니\" 입니다.
아직 초년병인 바울이 가까스로 원수들의 손을 빠져 나왔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한 것은 힘겹고 난처한 시작이었습니다.
바울은 마치 우스개거리 마냥 이리저리 발길질만 당하고 아무 데서고 쉴 곳을 발견하지 못하는 사람과 같이 보였을 수 있습니다.
바울이 그의 온 백성의 적개심을 산 것은 그리스도의 이름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에게서마저 배척을 받습니다.
그가 어찌 마치 인간사회에서 버림을 받은 사람처럼 절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이러한 배척이 있는 이상 그에게 교회를 배척하는 일 외에 무엇이 남아 있겠습니까?
그러나 바울은 자신의 과거 생활을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이 그를 무서워 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형제들이 그에게 간격을 두는 것을 정당한 공포로 인정합니다.
과거에는 횡포하게 날뛰었지만 이제는 노도같은 박해를 담대하게 받아들이는 거기에서 우리는 바울의 순수한 회심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바울은 신자들 사회에서 배척을 받고 있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기에게 다시 화해시켜 주실 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립니다.
우리는 바울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곧 바울사도가 그리스도의 제자들 가운데 자리를 차지하고자 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특별히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뒤흔드는 야심의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로 하여금 타락하고 배도적인 회당의 모든 책임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 가운데 가장 낮은 자리에 속한다는 생각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교육이 꼭 필요했습니다.
그리고 바울은 이 낮은 자리에서부터 최상의 영예의 자리에 올라 세상 끝날까지 교회의 핵심교사의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아무도 먼저 자발적으로 자신을 낮추어 남들과 동료가 되지 않고서는 교회에서 가르칠 자격이 없습니다.
2. 본문 27절은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니라\" 입니다.
제자들이 바울을 이 정도로 피한 것은 과격한 소심증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 표현은 일반 사람들이 아니라 사도들 자신을 두고 사용된 것입니다.
물론 체험을 통해서 그처럼 치명적인 원수라는 점이 드러난 그였다는 점에서 그를 두고 미심쩍어 한 것은 어느 정도 비난이 완화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들이 너무 고분고분하게 달려들었다가는 무모한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앞섰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에 입각한 공포를 그들의 책임으로 돌리거나 그들에게 혐의를 두는 것은 잘못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들이 그들의 신앙을 입증하라는 부름을 받았더라면 그들은 용감하게 바울 뿐 아니라 지옥의 모든 맹위에 대해서도 맞서 싸웠을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이탈하게 강요하지 않는 공포를 무조건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얻습니다.
뒤이어 덧붙이는 누가의 기록은 바나바와 누가 모두에게 적용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생각에는 바울이 자기에게 일어났던 일을 사도들에게 제 설명 했을 가능성이 더 많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특별히 바울의 담력에 관계되는 대목에 대해서는 바나바의 얘기로 돌리는 것이 더 적절한 것 같습니다.
3. 본문 28절은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입니다.
그 후에 누가는 바울이 제자들과 함께 \'출입한\' 것으로 말씀합니다.
히브리인들에게 있어서 이것은 보다 더 친밀한 사교에 대한 표현입니다.
이것은 가령 어떤 성의 주민들이 성문을 \'출입\' 한다는 표현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일단 바나바의 추천을 받고 난 다음부터 양무리의 하나로 취급을 받고 있으며 그 결과 온 교회에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는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했다는 말씀을 덧붙임으로써 복음을 증거하는 바울의 용기를 칭찬합니다.
그 숱한 장애물 가운데 있는 그에게 확고부동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바울은 감히 그의 입을 열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여기서 모두는 각자의 믿음의 분량에 따라 각자의 할 일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지적 받습니다.
요컨대 모두가 바울은 아니라 해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우리에게 있다면 말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 그것은 우리가 완전히 벙어리가 되지 않을 정도의 확신은 불러 일으켜야 당연합니다.
우리는 \'주의 이름\'을 바울이 그리스도의 명분을 강력하게 변호했다는 뜻에서 말하는 복음에 대한 고백으로 받아들입니다.
4. 본문 29절은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입니다.
1) 본문 중간에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헬라파 유대인들을 헬라에서 태어난 사람들이 아니라 그 당시 세계 도처에 흩어진 유대인들로 보는 에라스므스의 견해는 옳습니다.
이들에게는 각자의 지역에서 함께 모여서 예루살렘에 순례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본토인들이 아니라 외국인이나 낯선 사람들과 토론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전자의 경우는 그를 용납하지 않으려 했을 것이요 그 역시 그들 앞에 나타나는 것이 현명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과거에 그를 알아오던 사람들은 제쳐놓고 자기를 모르는 사람들 가운데서 진전을 볼 기미가 있는가를 타진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불요불굴의 용기를 잃지 않는 가운데 한 용사에게 맡겨진 모든 임무를 성취했습니다.
2) 본문 끝 부분에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또 열성 대신에 들어서는 격분을 봅니다.
어쩌면 위선과 미신은 광포하고 잔인한 것 이상의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입니다.
경건한 자들은 하나님의 순수한 진리가 거짓 유사 교의에 의해 침해를 받을 경우 거룩한 분노로 불타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그 방법에 있어서는 상황을 잘 판단함이 없이 결정을 내리는 일이 없을 뿐 아니라 방황하는 자들을 제 길로 이끌어 들이는 일에 신경을 써야 한다는 점을 명심하는 가운데 자신들의 열성을 제어해야 됩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절망적인 오만을 대한다 하더라도 그 칼을 자신의 손에 쥐지 말아야 하는 것은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수하는 권위를 허용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위선자들은 그 이유를 캐묻지 않고 무작정 피를 흘리는데 만 여념이 없으며 미신도 역시 맹목적인 광기에 이끌려 피에 갈증을 느낄 뿐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지금까지 경건한 자들을 괴롭히느라 이리저리 날뛰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발 딛을 곳이 없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에게 있어서는 곳곳에서 신자들을 그들의 집에서 이끌어 내어 거의 끝장을 내는 등의 만행을 일삼는 것보다 이것이 훨씬 더 나은 상황이었습니다.
5. 본문 30절은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입니다
바울이 다소로 간 것은 복음을 전파하려는 명백한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그곳은 자신의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던 고향으로 바울은 그곳에서 어느 정도 인정과 권위를 가질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형제들에 의해서 음모자들의 손에서 빠져 나와 안내를 받고 있습니다.
6. 본문 31절은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입니다.
이 말씀은 바울의 존재가 복음의 원수들에게 큰 가시였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떠나자마자 갑자기 교회가 평온하게 되었다는 말은 바울의 모습 자체가 원수들의 광분을 불러 일으켰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바울이 마치 싸움군이었다는 식의 핀잔이 아니라 바울이 모습을 드러내기만 해도 불경건한 자들은 미칠 듯이 날뛰었다는 사실에서 그를 칭찬하는 의미로 지적된 말씀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교회에 영예와 많은 분쟁을 가져오는 방향으로 그를 사용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다른 사람이 아니라 불경건한 자들을 격분케 하는 자들을 당장에 정죄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를 받는 셈입니다.
이 경고는 결코 하찮은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너무 안일한 생활을 좋아합니다.
그러므로 가장 뛰어나고 훌륭한 그리스도의 종들이라 하더라도 그들의 열성이 악인들에게 해를 꾸미도록 자극할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될 경우 그들 모두에 대해서 화를 내는 우리입니다.
그러나 이런 처사가 하나님의 영을 부당하게 대하는 일인 것은 그러한 불길을 붙이는 쪽이 바로 성령 하나님의 영감의 능력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누가가 당시 교회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는 \'평안\' 은 영속적인 것이 아니라 주께서 당분간 그의 종들에게 허용하신 휴식이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들이 계속적인 압박에 못 이겨 꼼짝달싹 할 수 없는 지경에 빠지지 않도록 박해의 회오리와 돌풍을 억제하심으로서 우리의 연약성을 생각해 주십니다.
이러한 교회의 평안의 복은 결코 흔한 것이 아니며 무시할 것이 못됩니다.
그러나 누가는 더 중요한 문제, 곧 교회가 \'든든히 서고\' 그들이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 했다는 점을 덧붙여 이야기합니다.
평화시에는 호화판 생활에 빠지기 쉬운 우리들이듯이 교회들은 그들이 바라는 더 없이 평온하고 유쾌한 시기를 즐길 때 보다는 수 없는 전쟁의 소란 속에 처해 있을 때 대부분 복을 받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성령의 거룩한 회심과 위로가 그들의 생활을 번창하게 하기 마련입니다.
이것을 빼앗길 경우 그들은 그들의 복을 상실하고 그들은 무(無)로 전락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외적인 평화를 남용해서 쾌락과 태만에 빠질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원수들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안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우리에게 기회가 있을 때 우리의 마음을 정돈해서 신앙심에 더욱 더 정진하는 습관을 갖어야 합니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끈을 풀어 주어 우리를 괴롭히게 하시는 일이 있더라도 우리 속에 있는 성령의 위로로 만족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평화시이건 전쟁시이건 우리의 과정을 감독하시는 그분을 향해 언제고 매진해야 합니다.
\'든든히 서감\'이라는 말은 신자의 숫자가 많아진다는 뜻일 수도 있고 이미 양무리 속에 있는 자들이 발전을 본다는 뜻, 곧 그들에게 새로운 은사가 쌓이며 그들의 신앙심이 더욱 강건해진다는 뜻일 수도 있습니다.
첫째 경우로 보면 그것은 사람에게 관계됩니다.
둘째 경우로 보면 그것은 성령의 은사와 관계됩니다.
우리는 이 양 견해를 다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곧 전에 교회 밖에 있던 자들이 계속 교회로 들어왔으며 교회의 권속들의 신앙과 기타 덕이 증대한 것으로 봅니다.
더욱이 건축의 비유를 여기에 사용하는 것이 아주 적절한 것은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과 집이요 신자들 또한 개별적으로 볼 때 성전들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다음에 이어지는 두 가지 사실이 있습니다.
곧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살았습니다.
또 그들이 성령의 위로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이런 것들은 이 건축의 일부입니다(딤전3:15, 고전3:16, 17).
그러므로 교회들이 평화롭게 지낼 때 그들은 쾌락이나 지상적인 기쁨에 빠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는 가운데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면에 있어서 더욱 더 자신만만하고 담대한 태도를 연마했습니다.
행9:32-35 때에 베드로가
본문은 베드로 사도의 행적으로 룻다의 사역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32-33절은 \"(32) 때에 베드로가 사방으로 두루 행하다가 룻다에 사는 성도들에 게도 내려갔더니
(33) 거기서 애니아라 하는 사람을 만나매 그가 중풍병으로 상 위에 누운지 팔 년이라\" 입니다.
1) 누가는 기적을 통해서 교회가 받은 도움을 이야기합니다.
이 기적은 두 가지로 하나는 8년 동안 중풍병을 앓아 온 사람이 갑자기 치료된 것이요, 다른 하나는 죽어있는 여자를 살린 것입니다.
먼저 누가는 베드로가 \'사방으로\' 돌아다니다가 룻다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사방\'은 교회들이 아니라 신자들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물론 큰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 헬라어로 남성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들에게 일정한 장소가 지정되지 않았던 때인 만큼 그들이 기회 닿는 대로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것은 적절한 일이었습니다.
사도들 각자가 서로 다른 임무에 집착하고 있을 때 베드로는 이 임무를 맡았습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베드로의 순방 권한에서 그의 우위성을 어리석게 주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이 거짓이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교회를 순방하고 있을 때 나머지 사도들은 사인(私人)으로서 예루살렘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다는 식의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마지막으로 물론 베드로가 핵심 사도였다는 점을 성경도 자주 언급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것을 인정합니다.
그렇다고 여기서 베드로가 세상의 지도자였다는 결론이 나오는가?
우리의 바램이 있다면 베드로의 후계자로 인정받으려고 안간 힘을 쓰는 로마의 감독께서 이 베드로의 본을 받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형제들을 격려하고 본인이 실제로 그리스도의 그 사도라는 점을 사방에서 입증해 주었으면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높은 보좌에 앉으셔서 모든 교회를 횡포하다 못해 악독한 통치로 압박하는 장본인께서는 베드로가 여러 교회를 순방한 것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는 핑계를 대고 있습니다.
2) 본문 중간에 \"룻다에 사는\" 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룻다\'는 후에 디오스폴리스(Diospolis)로 불리우는 지명(地名)으로 오래되었을 뿐 아니라 쾌적한 면에서 유명한 도시로 지중해에서 멀지 않는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그 근방에는 바위가 많았지만 유명한 항구를 가진 욥바가 있었습니다.
그 도시는 큰 암석 위에 세워졌었고 그곳에서 예루살렘까지 내다 볼 수 있었습니다.
현재로서는 사람들이 흔히 야펫(Japhet)으로 부르는 항구만 남아 있을 뿐 이 옛 도시의 폐허만 이곳저곳에서 보일 뿐입니다.
아사론(Assanon)을 누가는 일종의 도시 명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롬은 사로나(샤론)로 읽고 가이사랴와 욥바 사이의 온 평야가 이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롬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이는 독법(讀法)을 바꾸는 이유를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곳이 이웃 도시인 것으로 말하는 누가의 본문을 그대로 따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평판을 내세우는 뜻에서 쓸데없는 자랑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사람이 아니므로 이것을 문제시하지는 않습니다.
경건한 신자들로서는 누가의 의도에 적절한 것만을 아는 것으로 족할 줄 압니다.
2. 본문 34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일어나 네 자리를 정돈하라 한 대 곧 일어나니\" 입니다.
1) 본문 중간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낫게 하시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틀림없이 사도들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신이 서기전에는 결코 기적을 베풀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것은 기적의 결과가 하나님의 뜻에 의존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은 아무 병자나 마음대로 치료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의 기적에 제한을 두셔서 주께서 유익한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서는 사도들에게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생각 없이 이 말을 불쑥 내뱉은 것이 아닌 것은 하나님의 뜻이 이미 자신에게 명백하게 드러나기 전에 이런 말을 할 경우 그는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추측컨대 베드로 사도는 혼자서 기도했을 것입니다.
물론 모든 기적의 주인이 되시며 베드로를 통해서 역사하신 성령께서 그 순간 그의 혀를 조종하시며 은밀한 영감을 그의 마음에 불어 넣어 주셨을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이 말로써 자기는 이 기적을 행하는 대리인에 불과할 뿐 그 능력은 그리스도의 능력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함으로서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에만 영광을 돌리고 있습니다.
2) 본문 끝 부분에 \"네 자리를 정돈하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느 사지(四肢)하나 까딱할 수 없던 사람이 일어날 기운을 되찾을 뿐 아니라 자신의 침상을 정돈까지 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 기적의 영광을 돋보이게 합니다.
그리고 이 병의 장기간 역시 마찬가지로 이 기적의 영광을 돋보이게 하는 것은 8년간이나 앓은 중풍병이 쉽게 낫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에서 그가 간이 침대(pallet bed)에 누워 있었다는 말이 기록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온통 사지를 사용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낮잠이나 자는 작은 소파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애니아는 자신의 사지를 사용할 각오가 서 있었다는 점에서 그의 신앙의 순종을 입증했습니다.
요컨대 회복된 능력을 느끼는 쪽은 애니아였습니다.
그러나 그녀에게 일어나도록 강력하게 작용한것은 그 음성의 효과적인 능력이었습니다
3.본문 35절은 \"룻다와 사론에 사는 사람들이 다 그를 보고 주께로 돌아가니라\"입니다
이 말씀은 이 기적의 소식이 사방에 펴졌고 온 도시가 떠들썩하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성경이 \'모두\' 라는 말을 사용하는 경우 그것은 어떠한 것에 대한 전체를 포함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 대다수, 어떠한 군중을 가리켜 \'모두\' 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그 의미는 그곳 신자들의 숫자가 적었는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 들었다는 뜻입니다.
이 결론적인 문장에 이 기적의 결과, 곧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받아들였다는 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들이 사람들의 손으로 베풀어지는 경이에 놀랄 뿐 그리스도의 능력과 은혜에 대해서 알게 됨으로서 오직 그분에게만 매달리도록 하는 이 목표에 눈을 뜨지 못할 때 우리는 기적을 잘못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그의 신성한 능력에 대한 상징은 그리스도에게 돌아가는 시작이자 준비였습니다.
행9:36-38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본문은 베드로 사도의 욥바 사역입니다.
1. 본문 36절은 \"욥바에 다비다라 하는 여제자가 있으니 그 이름을 번역하면 도르가라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 입니다.
병든 자를 회복시키는 것보다 죽은 자에게 생명을 되찾아 주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이 기사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보다 더 탁월한 본보기가 됩니다.
그러나 누가는 먼저 이 기적의 대상인 다비다를 칭찬하면서 두 가지 장점을 듭니다.
먼저 그녀가 그리스도의 한 제자였다는 사실입니다.
다음은 그녀가 자신의 신앙을 선한 사업과 구제로 증거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수차에 걸쳐서 누가는 남자 그리스도인을 가리켜 \'제자\'로 불러오고 있었습니다.
여기서는 여자 그리스도인을 그렇게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명칭은 기독교란 가르침이 없이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합니다.
또 여기에 규정된 배움의 원칙은 그리스도만이 모두에게 유일한 교사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경고합니다.
참 삶의 방법과 정의를 하나님의 아들로부터 배워 아는 것만이 더 없는 칭찬을 받는 길이요 성결한 생활의 터전이요 모든 덕의 뿌리입니다.
이 후에 오는 선행의 열매는 신앙으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선행\'을 우리의 이웃들에게 도움이 되는 사랑의 자발적인 행위를 뜻하는 것으로 봅니다.
누가는 여기에 대한 특별한 예로서 구제를 들고 있습니다.
선행이 크게 칭찬을 받는 것은 성령의 증거에 따라 생각해 볼 때 그 자체에 경건하고 완전한 생활의 전모가 포함되기 때문입니다.
다비다에 대한 칭찬을 살펴보면 거기에는 하나님 경외 내지는 신앙이 먼저 나옵니다.
다음에 그녀가 형제들을 돕는 일에 특별히 가난한 자들의 필요를 충족하는 일에 바빴다는 점이 뒤따릅니다.
요컨대 의연금(alms)이라는 단어를 주로 사용하는 행위란 가난한 자와 비참한 자에게 베푸는 도움을 총칭해서 하는 것입니다.
\'다비다\' 는 히브리어라기보다는 수리아어이지만 누가는 이것을 헬라어로 번역해서 사실은 이 이름이 이 거룩한 여자의 덕에 어울리지는 않는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도르가\'는 거친 염소라는 뜻이지만 그녀의 거룩한 생활은 이 흉측한 이름자의 낙인을 쉽게 지워버리고 말았습니다.
2. 본문 37절은 \"그때에 병들어 죽으매 시체를 씻어 다락에 뉘우니라\" 입니다.
누가는 이어지는 그녀의 죽음을 잘 설명하는 뜻에서 그녀의 질병을 언급합니다.
그녀의 몸을 씻어 다락방에 안치했다는 기록 역시 마찬가지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상황은 기적에 대한 신앙을 충분히 불러 일으킬만합니다.
그들이 그녀를 곧장 무덤에 데려가지 않고 그 집의 윗 층에 안치해 놓고 지켜 보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그녀가 살아날 소망이 어느 정도 있었다는 것이 입증됩니다.
추측컨대 누가가 언급하는 정결 예식은 그 역사가 상당히 오랜 것 같습니다.
물론 이것은 죽음 그 자체가 주는 부활에 대한 어느 정도 눈에 보이는 상징을 통해서 경건한 자들의 마음에 좋은 소망을 불어 넣어 주는 뜻에서 거룩한 족장들에 의해 전수된 것은 사실입니다.
사실 영생에 대한 제시가 아직 그렇게 뚜렷하지 않았으며 영생의 보증이자 본체인 그리스도께서 아직 계시되지 않았던 시기이므로 그러한 도움을 통해서 가르침의 보호성과 그리스도 자신의 부재를 보충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죽은 자들이 어느 때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깨끗하게 나타나도록 하려는 뜻에서 죽은 자들의 몸을 씻어 왔습니다.
마지막으로 정결 예식이란 죽은 자에게나 산 자에게나 동일한 의의를 갖습니다.
산 자들이 날마다 행하는 정결은 각자가 자신의 모든 더러움을 씻음 받기 전에는 아무도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기억시켜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장례의식을 통해서 인간들에게 그들이 이 세상에서 얻은 불결 때문에 이생을 더러운 몸 그대로 떠난다는 사실을 지적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물론 정결 그 자체는 매장이나 마찬가지로 죽은 자에게 아무런 혜택이 될 리 없고 생존자들에게 교훈을 주는 뜻에서 시행되었습니다.
사망은 멸절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이므로 그것이 부활에 대한 확신을 잃게 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사망에서 생명을 대표하는 곧 멸절에 반대되어 보이는 무엇을 여기에 덧붙이는 것은 당연했습니다.
이방인들도 이 의식을 이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애니우스(Ennius)는 \"한 착한 여자가 타르키니우스의 몸을 씻고 거기에 기름을 발랐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그러나 이들의 모방은 다른 모든 의식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왜곡된 것이었습니다.
심지어는 그리스도인들마저도 경솔하게 이 본을 따랐는데 그것은 율법적인 형식의 준수가 영원하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것에 대한 필요성이 폐지된 초대 교회에서마저 그것이 통용되었다가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흐지부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수도사들은 옛 이방인들과 같이 무분별하게 유대주의를 모방합니다.
곧 그 수도사들 사회에서는 아직도 이 정결 예식이 지켜지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의 무덤에 의해 추방되었으며 다시는 부활되어서는 안 되는 그림자 속으로 그리스도를 다시 이끌어 들이는 처사입니다.
3. 본문 38절은 \"룻다가 욥바에 가까운지라 제자들이 베드로가 거기 있음을 듣고 두 사람을 보내어 지체말고 오라고 간청하니\" 입니다.
몸을 씻은 그 자체는 제자들이 앞으로 생길 일을 의심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이것은 매장을 준비하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들이 시체를 다락방에 안치해 두고 베드로를 데리러 보냈다는 것은 소망에 대한 상징이었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하나님께 이것이 부당한 처사가 아니냐는 식으로 대성통곡하지 않고 겸손히 주님의 도움을 바라며 기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다비다가 불멸하기를 바라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녀가 아직 교회에 더 이바지할 수 있도록 하는 뜻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그녀의 생명이 연장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9:39-43 베드로가 일어나
본문은 주께서 베드로 사도를 통해서 도르가라 하는 다비다를 살리신 일과 욥바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된 사실을 말씀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39절은 \"베드로가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가서 이르매 저희가 데리고 다락에 올라가니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도르가가 저희와 함께 있을 때에 지은 속옷과 겉옷을 다 내어 보이거늘\" 입니다
1) 본문 초두에 \"베드로가 일어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심부름 온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그를 데리러 온 이유를 설명했었는가 하는 점은 의심스럽지만 그들은 분명히 그에게 기적을 베풀 것을 요청한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에게 하나님의 의도가 알려졌었는가 그렇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됩니다.
만약에 이 기적의 성공에 대한 확신이 없었더라면 그가 여행을 한 것은 무모한 일이 되었을 것입니다.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곧 베드로는 주님의 의도를 직접 알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베드로가 형제들의 청을 들어준 것을 비난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리고 베드로가 가지 않으면 안될 또 다른 이유가 있었는데 그것은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경건한 권면을 통해서 그들을 북돋아 줌으로서 그들이 한 여자의 죽음 때문에 상심하지 않도록 하며 아직 연약하여 유아와 같은 교회를 든든하게 붙잡아 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자기 형제들이 그의 거절을 자기들에 대한 무시로 보지 않을까 하는 한가지 생각만으로도 그가 거기에 가는 충분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명심할 점은 주님께서 사도들을 통해서 나타나는 기적에 자신의 능력을 제시하실 때마다 주님은 그의 영의 은밀한 영향력을 이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설령 베드로가 다비다가 살아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확신을 갖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여행의 안내자와 지도자이시라는 점을 틀림없이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 결과 비록 그는 그 성과에 대해서 초조해하고 불안해 했더라도 그가 떠나기로 작정한 것은 무분별한 행동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2) 본문 중간에 \"모든 과부가 베드로의 곁에 서서 울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여기서 왜 다비다가 죽음에서 일으킴을 받았는가 하는 이유를 곧 하나님께서 가난한 자들을 불쌍히 여기셔서 이 거룩한 여자의 생명에 대한 그들의 기도에 굴복하셨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밖에 다른 이유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곱절의 생을 얻게 될 때 누가가 앞에서 칭찬한 여러 덕이 그녀를 통해서 다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의 주요 목적은 그리스도의 영광이 더욱 더 뚜렷하게 되는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녀를 그냥 더 오래 살게 하실 수도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경우 그의 계획을 변경하셔서 그녀에게 억지로 생명을 되돌려 줄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아직 제자들의 대부분이 확증을 필요로 하는 초심자들이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다비다의 제2의 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생명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재빨리 도와주어 그들의 마음에 그의 복음의 신앙을 확증하실 정도로 가난한 자들과 과부들을 보살피셨습니다.
이 기적을 통해서 하나님은 그들에게 큰 발전을 보게 하는 충분한 자료를 제공하신 셈입니다.
2. 본문 40절은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고 돌이켜 시체를 향하여 가로되 다비다야 일어나라 하니 그가 눈을 떠 베드로를 보고 일어나 앉는지라\" 입니다.
1) 본문 초두에 \"베드로가 사람을 다 내어 보내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는 기도할 시간을 갖고있는데 그는 얼핏 여전히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 미심쩍어 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애니아를 치료할 때는 지체 없이 \'애니아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를 고쳐 주신다!\' 하고 자신만만한 이야기를 하던 그였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언제나 정확히 동일한 방법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는 하나님의 능력을 충분히 깨닫고 있었지만 한 발자국 한발자국 그 기적을 향해 접근했던 것 같습니다.
그렇다 해도 그가 다락방에 있는 성도들을 목격자로 놔두는 것이 더 좋았을 텐데 그들을 내보낸 행위는 얼핏 모순으로 보이겠지만 주님께서는 아직 능력을 제시하는 시간과 방법을 아직 그에게 나타내 보여 주지 않으셨으므로 그는 기도하기에 더 적합하도록 혼자 남아 있는 쪽을 택하고 있습니다.
그가 이런 행동을 취한 데 있어서는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성경은 엘리사가 동일하게 죽은 자의 어머니도 입회하지 않고 혼자 방에 들어가 죽은 자 위에 세 번 엎드린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열왕기하 4장 32절의 인용이다. 그러나 세 번 엎드린 사람은 열왕기상 17장 21절에 나오듯이 엘리야였다 - 영어 번역자 주)
하나님의 영에게는 자신의 강력한 충격이 따로 다양하게 있으십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이 여러 가지 충격을 일반적이요 습관적인 인간의 표준에 따라 측량하려 하거나 육신의 통찰력으로 판단하려 한다면 그릇되고 부당한 처사입니다.
사실 우리는 베드로가 마치 주저하는 태도를 취한 듯 하면서 혼자 있고자 한 것은 인간의 미신을 억제하는 뜻에서 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곧 아무도 하나님의 일의 대리인에 불과한 자신을 그 일의 장본인으로 취급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였다는 점을 파악해야 됩니다.
이 대리인은 구경꾼들과 목격자들을 제거하고 초조하게 기도하는 가운데 이 문제가 자신의 손에 달려 있지 않다는 점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기다림으로서 주님만이 홀로 그 일의 주인이라는 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2) 본문 중간에 \"무릎을 꿇고\"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기도하는 것은 겸손에 대한 상징으로서 여기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곧 우리의 모든 몸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향으로 자리를 잡으며 몸의 외형적인 단련이 마음의 연약성을 돕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무릎을 꿇을 때마다 속 마음의 굴복이 이 자세와 일치하도록 하는 가운데 가식적이요 효과 없는 기도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습니다.
3) 본문 후반에 \"시체를 향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가 아무런 의식도 없는 시체를 상대로 말을 한다는 것이 쓸데없는 일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생명이 떠나간 시체를 상대로 말을 함으로서 베드로는 하나님의 영이 그를 몰아쳐 세우는 강도의 일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대한 이유를 굳이 댄다면 그저 삼인칭으로 \"이 몸에 다시 생기가 채워져 살아나기를 바란다\" 하는 식의 말보다 이러한 식의 말이 죽은 자를 살리는 하나님의 능력을 보다 더 뚜렷하게 드러낸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기에 에스겔은 부활의 상징을 통해서 백성들의 해방을 이야기할 때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겔37:4) 라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요5:25)라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입에서 나와 다비다의 몸에 영혼을 회복시켜 준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말씀이었습니다.
이어지는 사항들은 기적을 확실한 것으로 이야기하는 뜻에서 기록된 것들입니다.
3. 본문 41절은 \"베드로가 손을 내밀어 일으키고 성도들과 과부들을 불러들여 그의 산 것을 보이니\" 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다비다가 제자들 앞에 나타나 보여졌다는 점을 반복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녀가 살아난 것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들을 위해서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부활의 날까지 사라지고 마는 하나의 생기로 보는 광신자들은 이 구절을 자신들의 환상적인 사상의 증거로 잡고 늘어집니다.
그들은 \"다비다의 영혼이 저 복된 안식으로 받아들여졌더라면 수많은 어려움과 불행과 싸워야 하는 육신의 감옥으로 그것을 다시 불려들이는 것이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라는 식으로 이야기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생사간에 자신의 영광을 돌볼 권리가 없으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 우리가 자신을 그리스도에게 바칠 경우 그는 우리가 죽거나 살거나 우리에게 유익이 아니라는(빌1:21)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다비다 자신보다 자신의 영광에 더 신경을 쓰신다 해서 거기에 결코 모순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신자들의 유익은 언제고 하나님의 영광과 관련되듯이 그녀에게 생명이 회복되어 신의 선하심과 능력에 대한 보다 뚜렷한 도구 역할을 한 것은 그녀 자신에게 더 큰 복이었습니다.
4. 본문 42절은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이 주를 믿더라\" 입니다.
이 기적의 결과는 다양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경건한 부인의 죽음으로 큰 손해를 당하고 있던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뜻에서 그녀를 교회에 되돌려 주셨을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신앙으로 불러주셨습니다.
베드로가 이 큰 능력의 대리인이었지만 그는 이 사람들을 자신에게 묶어 두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고 있습니다.
5. 본문 43절은 \"베드로가 욥바에서 여러 날 있어 시몬이라 하는 피장의 집에서 유하니라\"입니다.
베드로가 \'피혁상\'(피장)과 함께 머물러 있었다는 기록에서 우리는 당시 욥바 교회를 형성하고 있던 사람들의 계층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 이 도시의 지도자급이 그리스도를 믿고 있었더라면 그들 중의 한 사람은 틀림없이 베드로를 접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그리스도의 한 사도를 이런 방식으로 소홀히 하는 것은 아주 몰인정한 처사였을 것입니다.
따라서 주님께서는 이 도시에서도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육신의 교만을 꺾는 뜻에서 평민을 동원해서 자신의 교회를 형성하셨습니다.
그와 동시에 베드로는 그러한 계급의 초청을 무시하지 않음으로서 자신의 예절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주인은 말단의 직공이 아니라 중산 계층의 상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은 그 집에서 베드로에게 시중드는 사람이 있었다는 다음에 나오는 누가의 기록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
사도행전 10장 강해
행10:1-3 가이사랴에
본문은 예수님께서 뜻하셨던 일의 성취입니다.
사도행전1:8에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하신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사도들의 전도 사역은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유대에서 사마리아로, 그리고 이방 각지(땅 끝까지)에 퍼지고 있습니다.
9장 하반부에는 베드로의 전도가 유대 변두리인 룻다와 욥바 등지에서 이루어지더니(9:32-43), 이제 10장에 와서는 베드로가 이방 사람 고넬료에게 전도한 사실이 기록되었습니다.
1. 본문 1절은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입니다.
1) 누가는 여기서 특이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유대인들 앞에서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을 특별히 높여 주신 사건입니다.
이것이 특이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에게 당신의 처사를 임명하시고 그에게 복음의 초보를 가르치기 위해 베드로를 가이사랴로 데려 오시기 때문입니다.
2) 그러나 무엇보다도 먼저 누가는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오고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베드로에게 말씀하게 된 인물인 고넬료가 어떤 사람인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는 이태리 보병대 소속의 백부장이었습니다.
일개 보병대는 1천명의 보병으로 구성되며 사령관의 지휘를 받습니다.
그리고 각 100인 중대에 또 각 지휘관이 있었습니다.
일개 군단에는 많아야 다섯 개의 보병대가 있을 뿐이었습니다.
이 보병대를 \'이달리야대\'라고 하는 것은 로마인들은 각 도와 동맹국들로부터 병사를 모집했는데 이 부대는 이태리 청년들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국적은 이태리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가이사랴의 수비대인 자기 100인 부대와 함께 그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로마에서는 각 유명한 도시에 부대를 주둔시켜 두어 갑작스런 반란을 진압하고 있었습니다.
3) 그가 사실 아주 희귀한 사람인 것은 군인으로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심이 아주 두드러졌으며 인간들과의 태도가 아주 정직하고 신실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군복무에 참여한 이태리인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굶주린 늑대들 마냥 닥치는 대로 노략질하기에 바빴으며 야수나 다를 바 없이 전반적으로 종교심이 없었으며 그들의 신의가 있었다면 산적들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습니다.
따라서 고넬료의 덕이 더욱 더 칭송을 받아 마땅한 것은 당시 타락한 대로 타락한 군대 생활 속에서도 그는 아직 성실하게 하나님을 섬겼으며 사람들에게 해나 악을 끼치지 않고 살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가 미신 속에서 태어나고 자랐지만 이것을 배척하고 참 하나님의 순수한 경배를 받아 들였다는 점에서 그는 더 큰 칭찬을 받을만합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태리인들은 지독하게 남들을 깔보고 뻐기는 편이었습니다.
말할 필요도 없이 당시 유대인들은 모두에게 천박하고 증오스럽기 짝이 없었으며 바로 그들 때문에 순수한 종교가 불신을 아니 거의 지긋지긋하게 미움을 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고넬료는 그의 우상을 포기하고 유일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예배를 택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희귀하고 뛰어난 성실성의 소유자였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그가 유대인들에게서 자신의 신앙심을 추구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을 전혀 찾을 수 없었던 것은 당시 율법에 대한 짧막한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천에 하나도 없을 정도였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였지만 고넬료는 거짓 교의에 더럽혀져 있지 않은 올바른 하나님 예배자를 만났으며 그가 그에게 아무런 누룩이 가미되지 않은 순수한 율법을 성실하게 가르쳐 주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그에 대해서 여러 가지 장점을 말하고 있는 만큼 차례차례 검토해 보기로 합시다.
2. 본문 2절은 \"그가 경건하여 온 집으로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입니다.
1) 누가는 그가 \"경건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였다는 점을 그리고 훌륭한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가르치는데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누가는 고넬료가 자기 주위의 모든 사람들에게 베푼 사랑의 봉사와 하나님께 드리는 계속적인 기도를 들어 그를 칭찬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말은 고넬료는 경건한 사람들의 정직성을 보여주는 덕에 있어서 탁월했으며 그 결과 그의 모든 생활 양식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규정하고 있는 원칙에 따라 정돈되어 있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나 율법은 두 돌판에 담겨있는 만큼 누가는 먼저 고넬료의 신앙심을 칭찬하고 다음에 인간에 대한 사랑의 임무 수행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를 통해서 우리에게 올바르게 살아가는 방법이 여기에 제시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특별한 관심을 요하는 대목입니다.
우리는 생활을 제대로 정돈하는 데 있어서 신앙과 종교를 바탕으로 하고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 이것을 무시한다면 나머지 모든 악이란 한낱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누가는 \'하나님 경외와 기도\' 를 신앙심과 하나님 예배의 열매와 증거로 취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주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란 하나님 경외와 떼어서 생각할 수 없으며 어느 누구도 하나님을 아버지와 여호와로 알고 그에게 굴복하기 전에는 경건하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칭송되고 있는 것은 즉각적인 경외, 곧 머리 속으로 하나님의 몫을 생각하고 기쁜 마음으로 그에게 굴복하는 자들의 경외라는 것을 우리는 명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더욱이 세상의 대부분은 하나님 예배를 쓸데없는 허구로 더럽히고 곡해하는 만큼 누가가 여기에 고넬료의 계속적인 기도를 덧붙인 것은 잘한 일입니다.
이 말은 그가 외형적인 의식을 통해서 신앙심을 발휘할 뿐 아니라 날마다 기도에 전념함으로서 하나님을 또한 영적으로 예배했다는 뜻입니다.
그가 끈질기게 기도했다는 말은 흔히 하기 쉬운대로 그저 형식적인 기도에 절차만 밟았다는 이야기가 아니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축복이 우리에게 그렇게 기도하도록 격려하고 신앙의 능력이 그 속에서 드러나야 마땅하듯이 그가 진지하게 기도에 힘썼다는 이야기입니다.
2) \"온 집으로 더불어\"에서 우리는 고넬료가 자기권속 가운데 교회를 두고 있었다는 이 칭찬을 가볍게 지나쳐서는 안됩니다. 물론 하나님의 진실한 예배자라면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서 자기 집에서 추방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처자식, 남녀 종들에게서 당연한 권리로서 그들의 순종을 요구하면서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이것이야말로 얼마나 망칙스러운 일인지 모릅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경건한 사람이라도 그에게 말을 듣지 않는 아내가 있을 수 있지만 남들 위에 세워진 자는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강구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자신의 권위를 차지하도록 힘쓰지 않으면 안됩니다. 사실 우리 자신 뿐 아니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께 바치는 것보다 더 바람직한 것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어떤 경건한 사람에게 자기와 다른 자식, 그릇된 행동을 하는 아내, 또는 무익하고 부정직한 종들이 있다 해도 거기에 아예 눈을 감아 버리는 가운데 태만하게 자기 집이 더럽혀지게 내 버려 두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고넬료의 경우 칭송되고 있는 것은 그의 진지함 뿐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이니 이 후자의 결과로 그는 자기 권속들을 경건함으로 자신에게 굴복하게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자기 가정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정으로 세우기 위해서는 그 결과로서 주어지는 위험에 대한 공포를 아예 얕잡아 보고 있었다는 점을 우리는 결코 과소 평가할 수 없습니다.
당시로 말하자면 유대 종교는 굉장히 미움을 사고 있었으며 로마 시민이 소위 말하는 이방 종교를 택할 경우 벌을 받지 않고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의 진지한 고백이 오늘날 세상에서 전혀 먹혀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이 부당한 적대감 때문에 자기 가정을 마치 경건한 원칙에 따라 드리는 자신의 제물로서 하나님께 드리지 않는다면 이것이야 말로 굉장히 몹쓸 비겁이 아닐 수 없습니다.
3) \"구제하고\"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도 대유법적인 표현입니다.
(1) 다시 말해서 앞에서 하나님 예배가 기도를 통해서 입증된다고 지적했지만 여기서 누가는 자선(charity) 을 언급함으로서 고넬료가 후덕한 사람이었다는 점을 입증하는 예를 제시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점을 친절하고 정직한 생활을 통해서 증거 하는 뜻에서 우리의 신앙심이 사람들에게 퍼져 나가는 것이 마땅합니다.
구제라는 말은 엄격히 말해서 자비, 곧 속 마음의 정이므로 그것은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외적인 봉사를 통해서 모습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 형제들의 역경을 보고 동정을 느끼거나 우리 사이에 있는 연합을 생각하고서 그들이 우리의 혈족인 것처럼 우리가 그들을 돌아보고 보살피거나 그들이 우리의 지체인 것처럼 그들에게 도움을 베풀고 싶은 걱정을 할 경우 순수하고 잘 정돈된 친절의 근원은 바로 이 속마음의 정입니다.
물론 위선자들도 경우에 따라서는 후하게 내놓는 아니 최소한 많이 내놓는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모든 것을 다 물쓰듯이 바친다 해도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베푸는 도움은 전혀 \'구제\'라는 이름으로 통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그런 사람이 자기에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한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그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고전13:3) 하는 바울의 말을 우리가 명심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동정하는 마음으로 돕고 하나님의 후덕이 풍성하게 제공해 주시는 것을 우리의 마음을 활짝 열어 놓고 바칠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의 친절이 최종적인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는 사실을 배워야겠습니다.
(2) 고넬료가 \'모든 사람에게\' 구제했다는 말은 주위에 있는 모든 가난한 자들을 두고 그랬다는 뜻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유대인들에게 아주 친절하게 대함으로써 그가 그들의 종교에 대해서 갖는 한 마음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가 모든 유대인의 칭찬을 받았다는 대목에서 알 수 있는 그대로입니다(22절).
(3) 그러나 그처럼 희미하고 초보적인 신앙을 받은 사람이 그처럼 숱한 장애물을 헤치고 그만큼 정직하고 성결한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오늘날 그리스도교의 교사로 자처하면서 신앙의 행위에 있어서 그처럼 냉담한 우리는 이것을 큰 수치로 여기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아주 희미한 신앙의 불꽃이 그에게 그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면 완전한 지식의 광채는 우리 속에 무엇을 가져와야 하겠습니까?
입으로는 그리스도를 떠들어 대는 우리지만 대부분의 우리는 이 거룩한 사람의 본과 동떨어져 있는 실정이 아닌가? 그래서 그에게 풍성했던 덕이 우리에게서는 희미한 그림자마저 찾아볼 수 없게 되고 말지 않았는가? 얼마나 기도에 있어서 굼뜬 우리인가? 자비로운 봉사를 실천하는데 있어서 얼마나 벌벌 떨며 주저하고만 있는 우리인가?
그것 뿐 입니까?
각자의 소유에서 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후하게 나눠 줘야 할 사람들이 인색함과 탐욕에 사로잡혀 뒷걸음질하는가 하면 그들은 광적인 소유욕에 사로잡힌 나머지 가난한 자들의 소유를 빼앗고 그들의 살을 집어삼킬 정도로 횡포를 부리며 날뛰고 있습니다.
3. 본문 3절은 \"하루는 제구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가로되 고넬료야 하니\" 입니다.
누가는 이 \'환상\'을 일종의 말씀으로 제시함으로서 고넬료가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된 것은 하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끔 여러 가지 환각에 속는 수가 많으므로 누가는 이런 의심을 제거하는 뜻에서 \'제 구시\' 라는 시간을 꼬집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당시에는 낮 시간을 해돋이부터 해질 때까지 열두 등분했었습니다.
여기서 볼 때 천사들이 나타난 때는 대낮이었으며 그 환상이 아주 똑똑하게 보였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하지만 환상에 항상 표적이 따르는 가운데 하나님의 종들에게서 환각의 두려움이 제거되었는데 이것은 그가 꿈을 통해서 나타나실 경우 그들의 마음에 의심의 여지를 허용할 수 없는 확실한 표적들이 깊게 뿌리박기 때문입니다.
행10:4-6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본문에서는 이방전도의 중요성을 알려줍니다.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은 베드로 자신도 이때까지 염두에 두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유대인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이방인들을 복음 전도의 대상으로 확신케 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초자연적 간섭이 필요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이방 전도의 당연성을 확신케 하기 위하여 먼저 천사를 고넬료에게 보내셨고 베드로에게는 환상으로 지시하셨습니다.
천사로부터 고넬료가 받은 계시의 내용과 베드로가 받은 환상의 의미는 서로 응합하여 두 사람에게 다 확신을 주었던 것입니다.
고넬료는 베드로를 청하도록 천사의 지시를 받았습니다(3-6).
1. 본문 4절은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가로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가로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하여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입니다.
1)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라는 말씀에서 누가는 고넬료의 또렷또렷한 정신상태를 일부러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본 것이 사람이 졸거나 흐리멍텅한 가운데 있을 때 갑작스럽게 덮치는 백일몽의 도깨비가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그를 사로잡은 공포는 그의 하나님의 권위에 대한 지각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임재를 깨닫는 순간 크게 겁을 먹기 아니 대경실색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의 말씀을 듣고도 우리가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다면 이것은 말씀하시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지도 눈치채지도 못한다는 이야기인데 이것은 우리에게 전혀 감각이 없다는 뜻입니다.
반대로 경건한 자들은 이들에게는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가운데서 자신을 계시해 주시는데 이사야의 말대로 그 말씀을 들을 때 떨기 마련입니다(사66:2, 5).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습이 인간들에게 공포를 자아내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항상 대경실색한 채 드러누워 있게 하며 공포에 압도되게 하려는 뜻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겸손한 마음의 준비를 갖추어 그를 경외하게 하려는 뜻에서일 뿐입니다.
2)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대답에서 우리는 고넬료의 마음이 종교심으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에 그는 당장 그가 상대하는 분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주여 뉘시오니까?\" 하는 일반적인 번역은 잘못입니다.
헬라어 어구에 있어서는 번역자로 하여금 실수하게 할만한 모호성이 전혀 없으며, 모든 사본이 (티 에스티; 무슨 일이니이까)로 일치하는 만큼 거기에 나오는 것은 잘못된 보충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고넬료는 말씀하는 상대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순종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거기에 따르는 응답으로는 명령 이외의 다른 무엇이 있을 수 없습니다.
3) \"네 기도와 구제가\"에서 만약 하나님께서 당장 우리의 기도를 들어 주시지 않을 경우 그가 말하자면 듣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들을 하기 마련인데 바로 이점 때문에 우리의 기도가 그에게 상달되며 그가 우리의 기도에 대해서 마음을 쓰신다는 식의 표현이 여기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1) 더욱이 천사는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복음을 충분히 깨달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하시는 이유를 바로 이 사실, 곧 그가 그의 기도를 분명히 들으셨으며 그의 구제를 받아 들이셨다는 사실로 돌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덕과 선행이 하나님께 기쁨이 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고맙게 여기셔서 우리에게 영광스럽게도 더 위대한 은사를 쌓아주시고 풍요하게 해 주신다는 결론은 얻습니다.
이것은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리라\"(마13:12)고 하는 말씀 그대로입니다.
이와 비슷한 것으로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라\"(마25:21)고 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주님께서는 그의 백성을 저 꼭대기까지 인도하기까지 그들에게 마치 튼튼한 계단을 놓아주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은사를 베풀어주심으로서 그들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십니다.
(2)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구절을 두 가지 면에서 남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하나님께서 고넬료의 기도와 구제를 보시고 그에게 복음의 신앙을 부여하셨다는 사실을 인간 편에서의 준비로 곡해합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자신의 근면과 덕으로 신앙을 획득하고 행위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기대하는 것으로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행이란 어찌나 가상(嘉尙)스러운 것이던지 하나님의 은혜가 그들의 받을 자격에 비례해서 개인들에게 아낌없이 쏟아진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3) 먼저 그들은 고넬료가 신앙의 일깨움을 받기 전에 그의 행위가 하나님께 열납되었다는 생각을 하는데 이것은 유치한 오류입니다.
신앙만이 우리에게 기도의 문을 열어 준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에게 신앙이 선행하지 않고서는 그가 기도해야 아무 것도 얻지 못했을 것이므로 우리는 그들의 무지를 반박하는 증거를 멀리서 찾을 필요가 없습니다.
펠리기우스는 전에 신앙이 없던 사람이라도 기도로 신앙을 얻는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대해 어거스틴은 예리한 판단으로 그를 비꼬면서 \"어느 누가 먼저 어느 정도 치료를 받아 보지 않고서 의사를 찾겠는가?\" 하는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두드릴 것을 가르치는 것은 바로 건전한 신앙입니다.
더욱이 고넬료의 하나님 경외와 신앙심은 그가 성령으로 거듭난 사람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에스겔이 하나님만이 인간의 마음을 주물러서 그를 두려워하게 하신다고 말하면서 이 칭찬을 하나님에게만 돌리는 그대로입니다(36:26).
그리고 이사야도(11:2) 여호와에 대한 경외의 영은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점을 이야기함으로서 그는 그의 지체가 아닌 다른 곳에서 발견될 수 없다는 점을 우리에게 깨닫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여기 고넬료의 경우에서 본성을 자신의 안내자로 삼아 영생을 얻고자 애쓰는 사람을 상상하는 것은 그야말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가상한 행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를 예상할 수 있다는 그들의 결론은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4) 우리 각자는 각자의 자격에 비례해서 그만큼 더 큰 은혜를 받는다는 둘째 오류를 간단히 반박할 수 있습니다.
먼저 우리는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거저 주시지 않은 선행이 하나라도 있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둘째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올바른 사용법 역시 그에게서 나오며 우리가 그의 첫 은사를 제대로 사용하는 것은 그의 둘째 은혜라는 점을 명백히 주장합니다.
셋째 우리는 언제나 결점 투성이인 우리의 행위에 의해서 무엇을 받을 자격이 우리에게 있다는 생각을 부정합니다.
물론 선행이 우리 편에 신앙의 증대를 가져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행위 자체의 공로 때문이 아닌 것은 그들이 신앙의 도움으로 얻는 사죄가 아니고서는 우리의 행위가 하나님께 열납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행위의 가치를 세워 주는 것은 신앙 뿐이라는 얘기는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나오는 소리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고넬료는 작 기도와 구제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보다 더 밝은 지식을 얻었지만 그 구제와 기도가 하나님의 호의와 친절을 살 수 있었던 것은 이미 그에게 신앙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5) 그리고 행위의 가치가 신앙에 의해서 규정될 경우 이 행위가 하나님의 인준을 받는 것은 공로 때문이 아니라 너그러움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신앙은 우리 속에서 하나님께 기쁨이 될 만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므로 우리에게 부족된 것은 그리스도에게서 빌려올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악독하게도 \'공로\'라는 말을 줄곧 뇌까리고 순진한 사람들을 헛된 자만심으로 들뜨게 하면서 인간에게 선행을 격려하는 노력은 아예 무시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인간의 양심을 언제고 불안한 가운데 내버려 두는 가운데 인간의 행위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인지 아닌지를 분명하게 이야기해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무감각하고 태만한 사람들이 그러한 혼란한 마음에 빠질 경우 그들이 맥이 빠질 것은 뻔한 노릇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로서는 비록 우리들이 행위에서 공로를 제거한다 해도 그러한 행위에 보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서 인간들이 올바른 생활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가장 훌륭하고 가장 예리한 자극을 통해서 격려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리들이 마침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자발적이요 적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것은 우리의 수고가 허사가 아니라는 점을 확신하는 경우에 한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들이 성령의 보다 더 풍성한 은사를 보지 못하고 대부분의 은사가 시들어 버리고 말게 내버려 둔다면 그 책임은 우리 자신의 배은망덕으로 돌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넬료의 기도, 구제 및 성결성을 그의 복음의 귀한 씨앗이라는 축복으로 보답하셨듯이 우리가 그의 복음의 보화를 불경하고 무책임하게 남용할 경우 우리가 기아와 배고픔에 허덕인 나머지 마침내 아사하고 말게 내버려두시는 것은 당연한 노릇입니다.
(6) 하지만 여기서 믿음은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필요로 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단순한 확신으로 충분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고넬료는 그리스도에 대해서 전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분리될 수 없다는 사실은 건전한 증거를 통해서 쉽게 확립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위엄이 그대로 드러난다면 우리는 그의 선하심을 조금이라도 맛보기는커녕 그의 영광으로 압도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께서 호의를 베푸신다는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께서 중보자가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므로 그를 가리켜 바로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말하는 경우(골1:15) 오직 성부께서는 그의 얼굴에서만 자신을 보여 주시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분이 유일한 길, 진리, 그리고 생명인 만큼(요14:6) 그분 없이 가는 곳이면 어디고 오류와 기만의 올무 투성이요 가는 곳마다 만나는 것은 사망뿐일 것입니다.
고넬료의 경우에 있어서 이 문제는 쉽게 풀립니다.
영적 은사란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 우리에게 제공되는 법이 없습니다.
특별히 중생 그 자체도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확고히 뿌리를 박게 될 때 우리의 옛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혀진다는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고 무엇인가?(롬6:5, 6)
그리고 고넬료가 그리스도의 영에 동참하고 있었다면 우리로서는 그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이 완전히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가 유대인들이 경외하는 참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동시에 약속된 중보자에 대해서 아무런 얘기도 듣지 않았다고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의 지식이 희미하고 혼잡했지만 거기에는 중보자에 대한 지식이 어느 정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에 유대 땅에 들어 온 사람치고 메시아에 대한 얘기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며 더욱이 그분에 대한 상당한 소문이 먼 지역에까지 퍼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고넬료를 아직 계시되지 않은 구속자가 가져 올 구원을 소망한 옛 조상들의 범주에 집어 넣는 것이 마땅합니다.
베드로가 그의 신앙의 기초를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전에 그 신앙의 기초가 확고했기 때문이라는 어거스틴의 이야기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성도들의 예정론\'과 기타 저서에서 고넬료가 먼저 신자가 아니었다면 기도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 사건 자체에 대해서는 우리와 견해를 같이 하고 있는 셈입니다.
2. 본문 5-6절은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저는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느니라 하더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크게 호의를 베푸시는 가운데 고넬료에게 손수 출발하지 말고 그의 심부름꾼들을 베드로에게 보내도록 명령함으로서 그는 조용히 집에 앉아서 기다리고 베드로에게는 그를 위해서 여행의 수고를 감수하게 하시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고넬료에게 이처럼 자상하게 나오시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 것은 그는 거의 말을 듣지 않으려는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날마다 강요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자기를 요구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나타나신 바 되는 것입니다(사65:1).
그러나 왜 천사가 교사의 임무를 다하지 않는 것입니까?
곧 복음이 인간의 입술을 통해서 전해지는 것보다는 하나님의 말씀이 더 큰 권위를 가질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천사가 자신의 임무를 유한한 인간에게 떠맡기는 것은 모순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환상 중에 바울에게 나타나셨지만 그를 가르치는 책임을 아나니아에게 위임함으로서 이 본을 통해 그가 자기 교회에게 위임하신 복음 전파의 사역을 확증하셨습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에게 위임하신 사명을 실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천사가 그에게 양보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기를 원하면서 동시에 하늘의 지혜의 빛으로 조명을 받고자 한다면 그는 먼저 서슴치 말고 인간들의 외적인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순응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이 인간의 음성이야말로 그리스도께서 도구로 사용하시는 것이요 우리의 믿음과 관련되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전도를 무시하고 하늘의 계시를 추구하는 자들의 광적인 교만을 얼마나 무서운 방법으로 처벌하셨는지 모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을 통해서 들려지는 것을 원하시는 만큼 그가 그의 말씀을 위탁하신 그의 일군들을 무시한다는 것은 그에게 경멸과 모독을 퍼붓는 짓이나 다름없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영들을 시험하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일군으로 자처하는 사람들을 모두 구별 없이 받아들이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듣는데서 오는 만큼(롬10:17) 말씀을 기피하고 배척하는 자들은 이것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10:7-12 마침 말하던 천사가
본문은 두 부분입니다.
먼저 고넬료가 사람을 베드로에게 보냅니다(7-8).
다음은 베드로가 환상을 보기 시작합니다(9-12).
1. 본문 7절은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입니다.
1)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에서 누가는 여기서 고넬료가 한 순간도 지체하지 않고 명령받은 사항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을 보고 그의 신속한 순종을 잘 묘사해 주고 있습니다. 그가 그처럼 자발적으로 신속하게 나올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그 약속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불신은 하나님을 따르는데 있어서 우리를 게으르게 만드는 원인입니다.
물론 오늘날은 천사가 하늘에서 우리에게 날라와서 우리에게 특정한 사람들을 지적해 주는 것이 아니라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7:7) 라고 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모든 사람의 귀에 쟁쟁하게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백에 한두 명도 한 발자국도 옮겨 놓으려 하지 않는가 하면 그처럼 굼뜨게 행동하며 발전을 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그 약속을 진심으로 믿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더 이상 꾸물대는 일이 없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부름받는 곳을 향해 달려가도록 합시다.
2) \"집안 하인 둘과\"에서 고넬료에게 자기 말을 잘 듣고 무엇이든 안심하고 맡길 수 있는 정직하고 신뢰성 있는 하인들이 있게 된 것은 그가 그의 권속을 열심히 가르친 데 대한 보상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자기 권속을 가르치는 일에 무관심한 상전들에게 정당한 처벌을 부과하시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에게 하나님 신앙과 경외를 가르치지 않을 경우 그들은 반대로 순종치 않을 뿐 아니라 믿을 수 없는 권속이 되고 말며 심지어는 이들이 배신을 하지 않을까 하는 공포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3) \"종졸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라는 말씀에서 이 군인은 고넬료와 더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만큼 그는 그에게 자기 집안 종들과 마찬가지로 하나님 경외를 심어주었습니다. 어떠한 직업이든 우리에게 하나님을 순수하게 예배하는 것을 면제하는 직업은 없습니다.
군대 생활로 말하면 당시 타락할 대로 타락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영은 여기서 군인들에게 신앙심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모든 면에 있어서 올바르게 살기를 원하지만 군대 생활을 핑계로 하나님 예배하는 일을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는 사람들의 이유는 더 이상 통하지 않습니다.
만약 그들이 자기들은 군인들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길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면 그들은 최후의 심판 날 저 두 군인들을 그들의 확고한 증인과 심판관으로서 마주치게 될 것이요 이들에 의해서 그들은 정죄를 받을 것입니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인들이 무장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저 미친 사람들 역시 여기서 정죄를 받는 셈입니다.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은 그들의 군대 생활과 종교생활을 병행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받아들인다 해서 그들의 과거 생활 방식을 포기하거나 그들의 무기를 마치 그것이 해로운 것인양 내던지거나 자신들의 직업의 자리를 단념하지 않고 있습니다.
2. 본문 8절은 \"이 일을 다 고하고 욥바로 보내니라\" 입니다.
고넬료가 그 군인과 종들에게 모든 것을 설명하는 이유는 그들이 그 명령이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깨닫고 그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게 하려는 때문입니다.
그리고 과거에 그들을 가르치는 문제에 있어서 솔직했던 그인 만큼 그는 그들에게 더 큰 문제에 대한 지식도 함께 나누어 알게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습니다.
3. 본문 9절은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시간은 제 육시더라\" 입니다.
1) \"이튿날 저희가 행하여\"에서 누가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데려 오라는 말씀을 받았다는 말을 기록하고 나서 베드로가 그에게 갈 것을 지시 받는 환상을 기록합니다.
여기서 더욱 더 확실하게 되는 것은 모든 일이 하나님의 놀라운 계획의 지배를 받고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고넬료에게 순응하도록 마련하실 뿐 아니라 그에게 배우고자 하는 욕망과 열성을 불붙여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요 반대로 베드로의 마음을 준비시켜 그에게 적극적으로 가르치는 임무를 수행하게 만드시는 분도 하나님이십니다.
누가가 엮어 가는 이야기 줄거리에 관심을 기울여 보도록 합시다
2) 베드로는 혼자서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 갔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그러하셨지만 혼자서 기도하는 것이 큰 도움이 되는 것은 우리의 마음이 모든 어지러운 것에서 벗어나 하나님에게 더 잘 집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유대인들의 건축 양식은 오늘날 우리들의 것과 달랐습니다.
곧 그들의 지붕은 걸어다닐 수 있게 평평했습니다.
그 당시 \'제6시\' 란 정오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그 시각에 기도한 것은 그의 습관에 따른 행동이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 스스로 재갈을 무는 가운데 억제하지 않는다면 거의 온종일 우리는 숱한 일거리에 정신을 빼앗기며 줄곧 부산하게 돌아다니기 마련이므로 기도할 시간을 따로 떼어 놓는 것이 유익합니다.
물론 이것은 우리가 시간에 얽매인다는 뜻이 아니고 기도가 우리의 모든 관심보다 우선권을 차지해야 하는데 이것을 잊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취하는 행동입니다.
마지막으로 그와 동시에 우리는 시간과 마찬가지로 장소에 대해서도 신경을 써야 하는데 이 양자는 우리의 연약성을 보조하는 처방책입니다.
사도들이 이 시간과 장소를 구별해서 기도할 정도였다면 굼뜨고 게으른 우리들에게 있어서야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4. 본문 10절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이 준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입니다.
\"비몽사몽간에\"(정신이 나감)에서 보는 대로 우리의 정신은 말하자면 땅에 박혀 있기 때문에 베드로가 말씀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그의 정신이 말하자면 제 자리에서 옮겨져 위로 데려감을 받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가 비상한 방법으로 세상에서 들리워졌을 때 그는 그 말씀을 받을 준비를 갖춘 셈입니다.
5. 본문 11절은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입니다.
우리 생각에는 역서 말하는 \'하늘의 열림\'은 제7장(7:56)의 그것과 다릅니다.
거기서는 하늘이 스데반에게 열리고 그 결과 그가 그리스도의 영광을 보았다는 식으로 이야기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경우에는 우리 눈에 보이는 하늘이 갈라졌으며 그 결과 거기서부터 보자기가 내려온 것 같습니다.
6. 본문 12절은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색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는데\" 입니다.
1) 어떤 사람들은 그가 어떻게 한꺼번에 모든 짐승의 무더기를 볼 수 있었느냐 하는 질문을 하겠지만 여기에 대한 대답은 간단합니다.
\'각색\' 이란 서로 다른 종류가 뒤섞여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첫 번 종류부터 마지막 종류에 이르기까지 모든 짐승을 이야기하려 들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모습을 인간적인 방식으로 평가해서는 안 되는 것은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에게는 다른 눈이 허용되었기 때문입니다.
2) 더 나가기 전에 우리는 이 환상의 목적을 분명히 해야겠습니다.
더러는 본문의 의도 이상의 것을 교묘하게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규정하셨던 구별이 이제 제거되었다는 일반적인 사실이 베드로에게 보여진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동물을 구별하셨듯이 선민을 따로 구별하시는 가운데 다른 모든 민족은 불결하고 속된 것으로 취급하셨었습니다.
이제 동물들의 구별이 제거됨과 동시에 그는 그 결과 인간들도 더 이상 과거와 같이 구별되지 않으며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전혀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가르쳐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베드로는 후에 이방인들을 불결한 사람들로 생각하고 그들에게서 움츠리지 말라는 경고를 받습니다.
틀림없이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아무런 두려움이 없이 고넬료에게 나아갈 것을 격려하고자 하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과거에는 그는 다른 민족들로부터 한 민족을 자신에게 구별하셨으니 이것은 모세가 그의 노래에서 \"지존자께서 민족들을 구분하실 때 그는 야곱으로 그의 소유를 삼으셨다\"고 말한 그대로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소유를 자신의 기업과 자신의 사유재산으로 부르곤 하셨습니다. 이 순서에 따르자면 베드로가 구원의 언약을 이방인들이 할례를 받아 들이고 유대교로 개종하기 전에 그들에게 전한다는 것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에게 던짐\'(마15:26)과 같았을 것입니다.
말하자면 말씀의 취지는 그런 방식으로 굴복하는 자들을 받아들이는데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도들은 맨 먼저 복음을 전파하도록 파송받았을 때 곁길로 빠져 이방인들에게 가는 일이 없도록 하라는 경고를 받았었습니다(마10:5).
그러나 복음 전파는 가장 성스러운 문제요 가장 중요한 것이기 때문에 베드로의 경우 이 문제와 관련해서 조금도 의심이 가거나 흔들리는 마음이 있어서는 안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그의 소명을 확신시켜 주시는 뜻에서 마치 그림을 통해 보여주시듯 율법적인 정결 및 불결의 구별이 폐지되었다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바로 이 사실에서 베드로는 과거에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가로막고 있던 담이 이제 파괴되었다는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습니다(엡2:14).
그런데 바울은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동일한 구원에 동참하게 되고 접붙임을 받아 한 몸이 되는 이것을 가리켜 만대에 걸쳐 숨겨졌던 비밀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엡3:6,9). 그러므로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손수 이 담을 허시고 모두에게 명백한 길과 출입구를 열어 제쳐 보여 주시지 않았더라면 결코 이방인들에게 하늘의 문을 감히 열어 주려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방금 지적한 바 있지만 과거에 이방인들이 할례만 받는다면 그들이 하나님 예배에 참여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던 때가 없었으나 그들이 할례 받지 않은 상태로 계속 남아 있을 경우에는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께서는 그가 지금까지 마치 숨겨진 보화 마냥 한 민족에게 보관시켜 두셨던 생명의 언약을 온 세상 공통의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환상이 우리에게 결코 적잖은 가치를 지닌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말하자면 유대인과 이방인들간의 구별이 다만 잠정적인 것 뿐 이었다는 말은 하나님께서 그가 이제 온 세상 만민을 자기 은혜 속으로 이끌어 들이고 계시며 그 결과 그는 만민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을 하늘로부터 선포하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이것은 우리를 영생의 소망으로 부르는 하늘의 명백한 선포입니다.
3) 그러나 여기서 어떤 사람은 베드로가 이 문제에 대해서 전에 가르침을 받은 일이 있지 않느냐고 반박할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와 다른 사람들은 복음을 온 세상에 전파하라는 명령을 받지 않았느냐?
그러므로 그는 자신의 소명에 대해서 무지했거나 아니면 이 환상이 불필요한 것이었다고 하는 이야기입니다.
이 소명은 너무도 새롭고 신기한 것이라서 그들이 당장 거기에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사실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과 최근에 있은 복음을 통한 이방인의 부름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령을 이해는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실제 사건에 당면하게 되자 그들은 체험하지 못한 새로운 것 때문에 주저하게 되고 당황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선명한 상징을 통해 베드로를 확신시켜 주시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행10:13-16 또 소리가 있으되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환상 중에 주의 명령을 받고 거절함으로 책망받는 장면입니다.
1. 본문 13절은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입니다.
보자기와 마찬가지로 한 음성이 하늘에서부터 들려오고 있는 것은 베드로가 양자가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알 수 있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이 말씀으로 지금까지 불결했던 이것을 정결하게 하지 않으셨더라면 그 모습만으로는 그에게 아무 소용이 없었을 것입니다.
\'잡다\'(to kill) 는 말에 대한 하나님의 의미는 인간들이 복음의 영적 칼에 의해서 그에게 제물로 바쳐진다는 뜻이라는 식의 풍유적 해석을 내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우리는 여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단순한 견해를 받아들입니다. 곧 하나님께서는 이 말씀으로 짐승의 구별에 대한 율법을 폐지함으로서 그와 동시에 그는 어느 민족도 배척하지 않는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싶습니다.
\'잡다\' 는 말이 제사를 뜻한다면 다음에 나오는 \'먹다\'는 말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2. 본문 14절은 \"베드로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지 아니한 물건을 내가 언제든지 먹지 아니하였삽나이다 한 대\" 입니다.
1)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절하는 것이 아니라 거기에 반대하는 사람의 말씨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율법에 금지된 것으로 아는 것을 손대지 않고 두려워하는 행동 자체는 옳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율법을 저돌적으로 범하지 않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소개하신 율법을 열거하고 있습니다.
요컨대 이 환상과 율법 사이에는 얼핏 보기에 어느 정도 모순이 개재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성급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율법 준수에서 이탈하기 전에 자신의 거리끼는 마음을 제거해 줄 것을 바라고 있습니다. 하지만 얼핏 보기에 베드로는 이 음식을 놓고 자기 아들을 살해하는 아브라함보다 더 저항하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에게 반대하는 문제로 말하자면 아브라함에게 더 많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감히 인간들에게 아주 흔한 일이 베드로에게 일어났다고 곧 그들이 율법의 핵심문제가 외형적이요 하찮은 문제를 추구한 거시라고 여기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아브라함의 경우에는 철저한 확신을 갖고 있었으며 모든 장애물을 고상하고 영웅적인 용기로 물리칠 수 있을 정도의 성령의 능력을 부여 받았지만 베드로의 경우에 있어서는 성령이 천천히 작용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제 아무리 하찮은 문제라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공포증을 이길 수 있는 결단력과 인내심을 허용하시기 전에는 그것이 우리에게 불안을 초래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베드로는 두가지 서로 다른 생각사이에서 주저하고 있었지만 어느 길을 따르는 것이 마땅한가 하는 점이 더 명백하게 드러나기 전에는 아무것도 시도하려 들지 않았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경건하고 성실한 사람다운 것입니다
2) 이 구절의 \'흔한\' 이란 속되다는 뜻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유대민족을 그의 특별한 백성으로 선택하셨기 때문에 그들을 속된 민족들과 구별하는 이 종교적 습관과 생활 방식을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이방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던 모든 것을 \'속된\'것으로 곧 율법의 규정에 어긋난 것으로 이야기한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사용하도록 지정하신 것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거룩하거나 깨끗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3. 본문 15절은 \"또 두 번째 소리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케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입니다.
1) 이것이 분명히 음식에 관한 말씀입니다.
그렇지만 생활의 모든 방면에 확대 적용되는 것이 마땅합니다.
글자 그대로 하면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만드신 것을 너는 더럽혀서는 안된다\'이지만 그 의미는 \"우리에게는 무엇이든 인정하거나 정죄할 권한이 없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에 따라서만 일어서고 넘어지는 만큼 그가 만사의 심판관이다\"(롬14:4)하는 뜻입니다. 음식에 관한 한 하나님께서는 율법 철폐 이후부터 모든 것이 정결하고 깨끗한 것으로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느 유한한 인간이 일어나서 새로 구별을 지으며 사람들에게 특정한 음식을 먹지 못하게 한다면 그는 하나님의 권리와 권위를 오만하게 휘어잡고 흔드는 신성 모독자입니다. 몬타누스, 프리스킬리안, 도나투스파, 타티우스파, 그리고 모든 엔크라테스파가 모두 그러한 이단들입니다.
후에 교황은 이 모든 불신앙적인 집단을 하나로 묶는 뜻에서 음식에 관한 법을 도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불신앙의 변호자들은 그들이 결코 음식의 불결 유무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억제하는 뜻에서 특정한 날에 고기를 먹는 것을 금하고 있을 뿐이라는 잘못된 말을 하고 있는데 그런 필요가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가장 푸짐한 음식을 그것도 쾌락과 방탕한 생활에 가장 적합한 음식만 골라 먹는 그들이 무슨 가장 큰 죄라도 범하는 것인 양 베이컨 덩이를 만지려 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우상의 법이 금하는 것이 더럽혀지고 불결하게 된 것이라는 그들의 상상 때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교황의 횡포는 생활 전반에 걸쳐서 동일한 교만과 함께 만연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가련한 양심들을 사로 잡기 위해서 그의 올가미를 던지지 않는 곳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의 이 모든 금지규정을 일축하도록 합시다.
우리가 언제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낸 다음에 거기에 따라 무엇이 우리에게 유익하며 자유롭게 행해도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결정해야 하는 이유는 베드로마저 하나님 말씀에 따라 합법적인 것을 \'속되게 만드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2) 뿐만 아니라 이 구절은 인간들로 하여금 그릇된 판단을 즐기게 하는 뻔뻔스러움을 제지하는데 있어서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말하자면 거의 모두가 타인의 행동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본래 심술꾸러기요 짖굿은 사람들인 우리는 불리한 쪽을 택하려 들며 이렇게 함으로서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소관 사항을 낚아채려 합니다.
이것 저것을 불결한 것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의 소관이 아니라 이 권력은 오직 하나님께만 속한다는 이 한마디는 그러한 종류의 오만을 교정하는데 충분합니다.
끝으로 이 말씀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이었던 것은 그들이 자신들의 공로가 아니라 오로지 신의 입양의 은혜에 따라 구별되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암시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언약을 누리도록 그들을 받아 들이신 이후로는 모두가 동등한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4. 본문 16절은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리워가니라\"입니다
이 환상의 반복은 마음에 아무런 주저나 불안 또는 거리낌이 남아있지 않도록 확증하는데 주효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율법 준수가 얼마나 베드로의 마음에 깊이 뿌리박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베드로가 뒤에 이어지는 사건으로부터 이 환상의 동기를 배우기까지 그를 어둠 속에 내버려 두신 이유로서는 그가 당황한 중에 이것의 의미를 제시해 주실 것을 요청하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후에 곧 도착한 심부름꾼들이 그것을 곧 해석한 것은 아주 시기적절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 그곳이 곧 하늘로 올리워 간 것\'은 베드로로 하여금 이 메시지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라는 점을 더욱 더 확실하게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행10:17-22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본문에는 베드로가 고넬료의 하인들을 만나는 일과 성령 하나님의 지시가 기록됩니다.
1. 본문 17-19절은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심하더니 마침 고넬료의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우거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저더라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입니다.
베드로는 환상 뿐 아니라 직접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가르침을 받았지만 성령께서 그에게 설명해 주시기까지 그는 그가 본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비록 우리는 베드로에게 훨씬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이것은 우리 자신의 갑갑한 상태를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왜 그가 우리에게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즉각 깨닫지 못하고 나중에는 제 아무리 많은 주석을 들어도 그것으로 만족할 줄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동시에 베드로가 당황한 마음에서 깨어나자마자 이 환상을 골똘히 생각했다는 누가의 기록을 주목해야겠습니다.
그가 이 환상을 소홀하게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은 경건한 경외심의 징조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문을 두드릴 때 그에게 문을 열어 주신 셈입니다(마7:7).
그러나 우리의 경우 우리의 태만에 대한 처벌을 받아 마땅한 것은 우리가 탐구하는 면에 있어서 너무 무관심한 까닭에 우리는 하나님 말씀에 있어서 더 나은 발전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본문 20절은 \"일어나 내려가 의심치 말고 함께 가라 내가 저희를 보내었느니라 하시니\"입니다.
성경은 신앙의 순종이 어떠한 것인가를 분명히 나타내고자 할 때 \"아무도 의심치 말고 가라\"는 표현을 자주 사용합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로마서 4장 19절에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칭찬하면서 \"그는 후손이 없었으며 또 이미 후손을 볼 나이도 지났지만 하나님께서 그에게 아기를 약속하실 때 주저하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4장 23절에서 그는 음식 문제를 다루면서 주저하는 마음을 비난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로 상반되는 이유를 판가름 해야 할 입장에 처하거나 이리저리 당황할 경우에는 흔히 이야기하는 대로 이쪽 저쪽을 다 고려해 보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는 문제에 있어서는 의심하거나 동요하는 마음이 아니라 안정되고 확고한 마음의 자세를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의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할 일에 대해서 더 이상 왈가왈부하거나 시행하라는 그의 명령에 대해서 의심하는 일이 없이 단호한 결정을 내릴 정도로 모든 것을 그에게 일임해 줄 것을 원하십니다. 그렇습니다.
그의 뜻은 모든 구름이 걷힌 다음에 우리의 길을 인도하며 모든 논쟁이 종지부를 찍을 때 우리의 온 마음이 거기에 즉각 순종하도록 우리를 안내하는 빛입니다.
우리는 그 다음에 나오는 말에서 더 잘 알 수 있습니다.
곧 베드로로 하여금 더 이상 의심스러운 문제에 대한 판단을 보류하지 않은 이유가 덧붙여지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 일을 시작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우리가 그의 명령을 순종하려면 그의 신호만 가지고도 만족해야 한다는 이야기나 다름없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또한 이 구절에서 인간의 마음이란 하나님 말씀으로 가르침을 받을 때만 안전한 행동을 할 수 있는 평안을 누리게 되며 그의 안내와 명령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시행할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는 경고를 받고 있습니다.
3. 본문 21절은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가로되 내가 곧 너희의 찾는 사람이니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입니다.
누가는 이제 어느 정도로 베드로가 순종할 자세를 갖추고 있는가 하는 점과 그가 마지막 순간에 가서 어떻게 심부름꾼을 통해서 환상이 그에게 보여진 이유를 이해하게 되었는가 하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초청을 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됩니다.
이 사람으로 말하면 만약에 \"너는 하나님께서 깨끗하다고 부르시는 것을 속된 것으로 여기지 말아라\"고 하는 말씀에 의해서 자신의 판단이 교정을 받지 않았더라면 그는 울타리 바깥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요 함께 친근하게 어울릴 수 없는 사람으로 취급했을 사람입니다.
우리에게서 우리의 모든 자만심이 제거되고 우리의 오만이 교정을 받으며 하나님의 뜻이 규정하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우리에게 옳은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정도로 그것이 우리의 온 마음을 휘어잡을 때에만 진정한 지혜는 가능합니다.
4. 본문 22절은 \"저희가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저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너를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입니다.
하인들이 고넬료를 칭찬하는 것은 비위를 맞추기 위해서나 야심 때문이 아니라 베드로가 그를 만나는데 있어서 덜 거리끼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가 유대인들의 인정을 받고 있다는 점을 지적함으로서 그가 결코 진실되고 순수한 신앙에 이국인이 아니라는 점을 베드로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물론 미신적인 사람들마저 실상은 우상을 섬기면서 자기들이 하나님 예배자라고 떠들어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넬료의 경우 그가 유대인들과 함께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사실을 이미 고백하지 않았던들 그는 결코 유일신 하나님을 섬기는 유대인들과 관계를 맺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그리 흔한 예가 아니었으므로 베드로는 여기서 크게 감동 받았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하인들은 무엇보다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한 것이라는 이 한가지 변론을 의지하는 가운데 그들이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베드로를 확신시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당신이 부름을 받는 것은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당신의 천사를 통해서 그렇게 하도록 명령하신 하나님의 지시에 의한 것이요\" 라고 말하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행10:23-29 베드로가 불러들여
본문은 베드로 일행이 가이사랴에 가서 고넬료를 만나는 내용입니다.
1. 본문 23절은 \"베드로가 불러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욥바 두어 형제도 함께 가니라\" 입니다.
1) 베드로는 하나님의 권위에 압도되어서 의심하지 않고 그들과 같이 여행 할 준비를 갖추기 위해 그들을 친절하게 맞아들입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서 가지신 권위 때문에 조용히 하나님께 굴복해야 합니다.
그분의 뜻이 알려지게 될 경우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빨리 그분께서 부르시는 곳으로 달려가는 것 뿐 입니다.
그 외에 나머지 문제는 별로 어려운 것들이 아닙니다.
2) \"이튿날 일어나 저희와 함께 갈새\" 라는 말씀에서는 심부름꾼들이 저녁 때에 도착한 것으로 볼 수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정오에 아직 그 도시에 도착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 환상도 세 번이나 되풀이 되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그것이 단지 순간적인 사건이었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하루 밤 쉬면서 피로를 푼 다음 되돌아 갈 준비를 했습니다.
더욱이 이 신자들은 전체 교회의 파송을 받은 사람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베드로와 함께 여행을 하면서 가이사랴까지 수행한 것은 친절하고 예의바른 행동이었습니다. 물론 이 사람들은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과 우의를 생각해서 여행을 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을 그분의 은혜에 대한 증거자로 삼기 위해서 동반시키십니다.
그러기에 그들이 그리스도의 지배가 이방인들에게 확대되고 있다는 점을 알고서 자신들의 신앙을 확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후에 이 같은 사실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전체 교회에 전합니다.
3) 또 한편 오늘날 목회자를 청빙하는 일이 이렇게 건실하고 아름답게 이루어지면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은 다른 분야 못지 않게 타락한 모습입니다.
지교회의 청빙 모습도 교만의 극치를 보인지 오래된 모습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부응하여 나딩굴고 매몰되는 목회자들 불쌍하기 그지 없는 존재들로 전락하고 만 것처럼 보입니다.
양방 모두다 괴이한 하나님의 뜻에 매달려 있는 모습입니다.
2. 본문 24절은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일가와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입니다.
1) 누가가 고넬료의 태도를 칭찬하는 것은 그가 간절히 베드로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또 그가 친구들과 친척들을 모아 그 신앙을 자기와 함께 나누기를 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을 불러 새 종교를 믿게 하는 것은 위험스런 상황을 야기시키는 일 일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쩌면 이런 문제로 자신을 자화 자찬할 이유가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을 불러모으라는 명령을 받지도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그냥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상 자기 혼자만 이 큰 복을 소유하도록 선택받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넬료는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의 혜택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기를 바라는 기본 신앙 양심의 소유자였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의 영광과 자기 형제들의 구원에 대한 자기 책임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각자가 자기 일만 생각하고 남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이 부당하고 무례한 일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복음이라는 보화를 땅 속에 묻어 두는 것을 수치스러운 태만의 상징으로 여겼습니다. 그는 여호와께서 이사야와 미가 선지자로 그의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점을 이룹니다.
각 개인은 형제들의 손을 잡아 끌어 초청하며 믿도록 격려하라는 바로 그 점을 성취한 셈입니다. 우리는 고넬료의 본을 통해서 교훈을 배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실 경우 우리는 태만이나 공포 때문에 우리 속에 있는 그분에 관한 지식의 빛을 꺼버릴 것이 아닙니다.
우리 신앙의 빛으로 남들에게도 그 길을 보여 주는 안내 역할을 해야겠습니다.
하늘 나라의 상속이란 비록 많은 사람이 몰려들 경우 우리 몫이 그만큼 더 줄어드는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동료 상속인들의 증대는 우리 영광을 증가시킬 것입니다
2) 또 우리는 고넬료가 얼마나 모든 허세와 거리가 먼 사람인가 하는 점을 주목합니다. 그는 자기 자신만 배울 준비를 갖추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불러들여 동료생도들을 삼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에 의존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정직성에 열성이 결부될 때 우리는 이것을 가리켜 신앙에 대한 진정한 욕망 혹은 거룩한 욕망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자기 야심 종교 영웅심으로 무지한 사람들을 사실상 무식한 방식으로 가르치겠다고 덤벼드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리석은 장황하고 세속적인 썰로서 자신들의 부족을 드러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꼭 격정적인 말을 내 밴으며 이야기를 들어 달라고 강청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주의 일에 나서는 모든 사람은 스스로와 온 세상을 하나님께 굴복시키는 가운데 그분만이 홀로 탁월하게 되시고 인간은 진실로 겸비한 자세를 취하도록 하는 것을 유일한 각오와 목표로 삼아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가르치는 수완과 은혜가 풍부한 사람이 자기 형제들에게 교사 노릇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를 자랑하는 일과 우월성에 대한 기만된 욕망이 없어야겠다는 뜻입니다.
마찬가지로 교사로 부름 받지 않은 사람은 스스로 자기 한계를 지키도록 해야 합니다. 쌍방 간에 어느 쪽이든지 야고보가 경고하듯이 지배권(mastery)을 노려서는 안됩니다(약3:1). 사실 배운 자나 못 배운 자가 각자의 자리에 서 있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방향으로 쌍방이 서로 뭉쳐져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건실하고 아름다운 교회 모습입니다.
하지만 \"그는 유대 땅에 외국인으로서 잠깐동안 군대 복무상 와 있는 사람인데 어떻게 그에게 친척이 있을 수 있었는가?\"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우리는 그의 중대에 친척이 어느 정도 끼어 있었다는 것을 가장 근사한 해결책으로 받아들일 뿐입니다.
친척들 및 서로 아는 사람들이 한 부대에 근무하는 것은 당시 관습이었습니다.
고넬료의 친척들이 그 부대에서 근무하고자 했던 것은 그가 백부장이었기 때문입니다.
3) 누가가 절친한 친구들을 가리켜 ( ) 아낭카이우스 : 필요 불가결한, 절친한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라틴어에서 서로 더 긴밀한 관계로 묶여 있는 사람들을 가리켜 \'필수적인(necessarii)\' 사람으로 부르는 것과 같습니다.
3. 본문 25-27절은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가로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의 모인 것을 보고\" 입니다.
1) 본문 25절은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입니다.
여기서 절하는 것은 무릎을 꿇거나 머리를 숙이거나 다른 몸짓으로 경의를 나타낸다는 의미( 프로세퀴내-센) 입니다.
그런데 이 경의를 사양하는 것은 단지 베드로의 겸손 때문인가?
아니면 그 행위를 딱 잘라 거절하는 것인가 입니다.
\"일어나라 나도 사람이라\" 는 베드로의 말은 고넬료의 행동을 불쾌하게 여긴 것 같습니다. 고넬료는 하나님 홀로 받으셔야 할 경의를 유한한 인간에게 표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경의에는 신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는 점을 베드로의 말에서 추측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고넬료가 베드로를 하나님으로 대치한 것으로는 보지 않습니다.
만약에 그가 하나님의 영예를 인간에게 표했다면 앞에서 칭찬 받은 그의 경건과 신앙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그가 결코 하나님에게 합당한 경배를 빼앗아 인간에게 주려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선지자요 사도인 그에게 특별한 존경을 표하려는 마음에서 잘못하여 과도한 경의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죄를 지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에게 돌리는 영예가운데 주께 돌아갈 경배가 티끌만한 모습이라도 드러난다면 그것이 쉽사리 미신으로 탈바꿈하고 만다는 것은 자명한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알지 못하는 사이에 전혀 생각지 않던 문제에 쉽게 빠지고 맙니다
오히려 세상 왕이나 정부 요직에 있는 사람들 경우에는 이런 위험이 별로 없습니다.
왕에게 경의를 표하는 사람은 공민으로서 지상 영예 범위를 지키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일군들 경우에는 문제가 다른 것은 그들의 직무가 영적이기 때문입니다.
누가 그들 발 앞에 엎드려 절한다면 그 경의(敬意)에는 영적 의미가 담깁니다.
그런 점에서 정치 질서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국민들 스스로 바치는 정중한 경의와 종교적인 바탕에서 하나님 영예와 직결되는 경의 사이에는 엄연한 구별이 있어야 마땅합니다. 이것은 잠정적인 땅의 법과 양심을 어거하는 영원한 하늘 법 사이에 구별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무릎꿇고 절하는 그 자체가 정죄 됐다고 말하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고넬료는 여기서 정치적 의식에 따라 자기 총독이나 황제에게 인사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경탄하면서 자기가 하나님 면전에 서 있을 때나 표할 경의를 베드로에게 표하였습니다.
그는 마치 자기를 망각한 사람처럼 합법적인 것 이상을 인간에게 바치고 있습니다.
그에게는 하나님의 영예를 빼앗아다가 그 노략물로 인간을 치장할 의도는 추호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표하는 경의에 하나님께 드리는 경의가 뒤섞일 경우 곧장 상상을 불허하는 죄가 아무도 몰래 기어들어 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 드리는 영예를 받는 인간은 인간 수준 이상으로 높여집니다.
2) 로마 카톨릭에서는 이 구별을 무시한 채 그것의 일부를 거머쥐고 있습니다.
그들 사회에서는 종교적인 숭배만 취급되고 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피조물에게 이것의 일부를 적용하는 구실을 그럴듯하게 꾸며대기 위해서 이것을 \'라트리아\'(latria) \'둘리아\'(dulia) 그리고 \'하이퍼둘리아\'(hyperdulia) 로 구분합니다.
\'라트리아\'란 하나님께만 사용하는 숭배를 뜻합니다.
\'둘리아\' 란 죽은 자들, 그들의 유골, 동상 및 초상화에 대한 숭배입니다.
그리고 \'하이퍼둘리아\' 는 동정녀 마리아 숭배와 그리스도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대한 숭배입니다.
그들이 유치한 무지에서 이런 잘못된 말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그들 중에 몇 명이나 이 거북한 구별을 이해하고 있는지는 의문입니다.
문제는 그 집단의 평신도들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지도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형태의 숭배가 못된 미신으로 망쳐지고 더럽게 될 수밖에 없는 것은 그들이 무모하게 피조물을 하나님과 동등하게 취급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누가는 고넬료가 하나님에게 마땅한 영예를 베드로에게 보인 것으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숭배\'(adoration) 라는 일반적인 단어를 사용하면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가 인간을 마땅한 수준 이상으로 잘못 격양시킨 데 대한 꾸중을 받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
분명히 \'둘리아\' 숭배에 대한 새 교의가 필요했더라면 베드로는 고넬료에게 \'둘리아\'를 넘어서지 말 것을 경고했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종교 및 신에 대한 영예에 대한 경의와 관계된 숭배는 하나님의 영예를 손상시키지 않은 채 그냥 놔둘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것이 결국 무슨 이름으로 변장하든 베드로는 그 자신이 사람이라는 한가지 이유만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게 물어 볼 말이 있는데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게서 소위 말하는 \'라트리아\'를 취해서 천사에게 바칠 정도로 무지했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가 천사에게 숭배한 것은 결코 과도하고 망칙한 경의가 아니라 천사에게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보고 하나님께 경의를 표하는데 의의가 있었습니다.
그럴지라도 그의 행동은 비난을 받고 있습니다(계22:8 ,9).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속하는 것을 하나님께 되돌려 드리려면 종교의 기초가 되는 영적 숭배를 손상치 말고 하나님 바로 그분을 위해 남겨두어야겠습니다.
우리 모두는 이 문제에 일생동안 엄청 주의를 기울여야만 합니다.
4. 본문 28절은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교제하는 것과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입니다.
1) 베드로사도는 먼저 그들이 어찌나 불결한 사람으로 여겨졌던지 그들은 그들의 생활방식과 대화로 성도들을 더럽히고 있다는 심각한 모욕적인 발언을 필두로 시작합니다.
이런 말은 비우호적일 뿐 아니라 그들의 비위를 건드리는 인상을 줍니다.
사실 베드로가 이런 식으로 말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가 여기 온 것은 조상들이 전해준 관습에 어긋나기 때문이고, 또 율법을 무시하는 자가 아닌가 하면서 그들이 그를 나쁘게 생각할 여지가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도가 자기는 하나님의 보냄을 받았다는 점을 확실하게 증거하자 그런 의구심은 말끔히 가시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베드로 사도가 이 말을 먼저 꺼낸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한 케케묵은 구별이 그들 마음에 뿌리깊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도께서는 그렇게 말함으로써 이 같은 잘못을 제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베드로 사도의 이야기 서두는 더없이 적절했습니다.
사도께서는 지금까지 불결한 취급을 받아온 자들에게 정결한 은사가 허락되었다고 전합니다. 그 결과 이제는 그들과 성도들 사이에 상호 교통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점을 공표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이 이방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옳지 못하다는 그의 견해는 율법이 아니라 조상들의 습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깨닫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이 결혼이나 약혼으로 그들과 얽매이는 것을 분명히 금하십니다(신7:3).
그러나 그들이 함께 먹거나 일상생활을 같이 하는 일까지 금지 당한 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너무 자주 또는 너무 친밀하게 되어 금지된 사항을 하게끔 빠져들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은 조상들이 전해준 습관을 준수했습니다.
그 결과 일반 사회적 관계마저 맺지 못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여기서 이 전통이 양심을 어거하는 것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따질 필요 없습니다.
베드로 사도의 의도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무엇이 합적인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 단지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는 것만 취급하는데 있습니다.
2)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지 않다 하지 말라\" 는 말씀에서 사도는 음식에 대해서 지적된 사항을 인간에게 적용함으로써 그 환상의 본질과 의의를 보다 더 명백하게 제시합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속되지 않다는 말을 개인에게 적용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없습니다.
모든 불신자들은 양심의 불결에 의해 오염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또 그 결과 그들은 깨끗한 것들에 자신들의 손을 댐으로써 그것들을 오염시키기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서 바울 사도는 그들의 자녀들 또한 믿음으로 깨끗하게 되기 전에는 더러운 그대로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고전7:14).
신앙만이 인간의 마음을 정결케 한다면 불신앙은 인간의 마음을 불결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단지 유대인들을 이방인과 비교하는 가운데 담이 무너졌다고 말씀합니다.
이제는 생명과 구원의 언약을 동일하게 누릴 수 있게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입양되어서 은혜의 혜택에 동참하는 자들을 이국인(outsider)으로 취급해야 한다는 점을 부정합니다.
3) 오늘날 청빙을 받은 목회자 역시 교회원들과 앞으로 교회원이 될 사람들에 대한 이 같은 이해가 있어야 새끼 교황 방식의 목회에서 탈피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쌍방이 다 진리에 대한 기본 인식이 있어야 건실하고 아름다운 교회를 이루는 것입니다.
5. 본문 29절은 \"부름을 사양치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뇨\" 입니다.
우리는 또한 베드로가 이론을 제기하지 않고 왔다는 점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사실상 목사와 교인은 이 같은 거룩한 청빙 과정을 통해서 오고 또 오신 분을 거룩한 정신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피차 새끼 교황의 방식과 미신과 우상의 방식을 털며 거절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피차에 하나님에게 장애물 역할을 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 바로 그분께서 무슨 명령을 내리시든지 순종하고 충성해야 합니다.
그게 제 아무리 우리와 동떨어져 보이고 우리의 이성에 위배되어 보이는 일이라 해도 그것을 말없이 시도하면서 수종 드는 것이 좋습니다.
이것이 신앙이 있는 사람의 \"거룩한 침묵\"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분의 명하신 바를 따라가는 이런 상태를 \"정진\"이라고 말하게 됩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 앞에서는 그분의 영원하신 뜻, 그분과 하나이신 그분의 말씀 앞에 서는 사실상 \"침묵정진\"이 있을 뿐입니다. 이것이 또한 \"주와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행10:30-33 고넬료가 가로되
고넬료의 이 답변에는 본 이야기의 반복에 불과하므로 거기에 너무 많은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습니다.
요점은 그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베드로를 초청했다는 것입니다.
1. 본문 30-32절은 \"(30) 고넬료가 가로되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구시 기도 를 하는데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저가 바닷가 피장 시몬의 집 에 우거하는니라 하시기로\" 입니다.
1) 본문 30절 초에 \"나는 금식하고 있었으며\"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애멘) 곧 \'나는 앉아 있었다\' 로 되어 있는 헬라어 사본이 많습니다.
(1) 벌게이트역에서는 \'금식\'이라는 말을 생략하는데 우리가 이것을 실수나 무관심으로 생긴 결과로 보는 것은 이 단어가 모든 헬라어 사본에 나오기 때문입니다.
(2) 더욱이 금식이 분명히 언급되고 있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넬료가 그 당시에 형식적인 방식으로 기도하고 있지 않았다는 점을 우리에게 알려주고 또 한편으로는 이 환상이 덜 의심받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말하자면 금식을 하면서 온건하게 절제하는 사람의 머리는 유령모양의 환각 작용을 쉽사리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고넬료의 의미는 그가 제 정신을 차리고 기도하고 있을 때 천사가 자기에게 나타났으며 당시 그의 마음 상태는 흔히 유령과 허깨비를 유발하는 모든 장애물과 무관했다는 이야기입니다.
시간이 여기에 기록된 것도 역시 비슷한 의미를 지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해지기 세시간 전에, 아직 대낮일 때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2) 본문 30절 후반에 \"홀연히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에서 고넬료는 자신도 하나님의 한 천사로 알고 있는 사대를 사람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나타나는 눈에 보이는 형태의 이름을 하나님이나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모세는 아브라함에게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자들을 묘사하면서 어떤 때는 사람으로 어떤 때는 천사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휘황찬란한 복장은 하늘의 영광에 대한 표시였습니다.
말하자면 바로 신의 위엄의 상징이었습니다.
이것이 천사들에게서 빛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산에서 세 제자들에게 자신의 영광을 제시하셨을 때 그의 복장에 그러한 광채가 있었다는 점을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러 파송된 천사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말을 합니다.
말하자면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연약성을 감안하여 그의 천사들에게 우리의 육신의 모양으로 내려오게 명령하실 뿐 아니라 그와 동시에 그는 그들에게 그의 영광의 햇살을 어느 정도 산포하셔서 그들에게 증거하도록 위임한 명령에 대한 경의와 확신을 불러일으켜 주십니다.
(2) 여기서 고넬료의 눈에 제시된 것은 참으로 자연스러운 몸이었습니까?
그 의복은 정말 순수한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그렇게 보인 것 뿐 입니까? 하는 질문이 제기됩니다.
이것을 특별히 알 필요도 없으며 그 어느 것도 확증될 수 없지만 추측컨대 만물의 조물주이신 하나님께서 그 천사에게 진정한 몸을 허락하셨으며 동시에 그에게 장엄하고 휘황찬란한 의복을 입혀 주셨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가지 가능한 추측은 그 천사가 사신으로서의 자신의 임무를 마치는 순간 그 몸과 의복은 무로 돌아가고 천사는 자신의 본성으로 환원되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어떻든 그가 인간의 상태를 하고 있을 동안에는 그에게는 인간적인 것이 전혀 결여되지 않았습니다.
2. 본문 33절은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더니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입니다
1) 베드로로 하여금 더욱 더 자발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가르치도록 하는 뜻에서 고넬료는 여기서 그와 다른 사람들이 배울 각오와 하나님에게 순종할 자세가 갖추어져 있다는 점을 확실히 밝히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교사란 자기 청중들로부터 확실한 성과를 기대할 수 있을 때 더욱 더 용기를 얻어 진지하게 가르치기 마련입니다.
2) \"하나님 앞에\"라는 구절은 일종의 서약의 의미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고넬료가 이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모이듯이 이 집에 모인 것은 그들이 듣는 사람의 음성을 바로 하나님 자신의 입술에서 나오는 말로 듣기 위해서라는 의미로 볼 수도 있습니다.
어느 쪽을 택하든 결국 그 의미는 동일합니다. 고넬료는 자신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을 더욱 더 불러일으키는 의미에서 본인은 결코 위장으로 조롱할 수 없는 하나님을 앞에 모시고 있다는 점을 증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앞에 계시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상대가 유한한 인간이 아니라 우리 앞에 계셔서 우리를 부르시는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마음에 새겨야지 그것을 망각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존경으로부터 말씀의 위엄과 그것을 무섭게 듣는 일이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3) 하지만 그는 남들을 무모하게 그러한 진지한 문제에 얽어 매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누구도 남의 신앙에 대한 보증을 설 자격이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나 각자는 스스로 순종을 약속했기 때문에 그들의 마음이 이런 식으로 감동된 것으로 믿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에게 진상이 밝히 드러날 때 듣는 말씀을 순종할 것을 이미 약속했으며 후에 그들 모두가 이 한사람이 말한 것을 개별적으로 사실인 것으로 확증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4)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절반쯤 받아들이는데서 그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거기에 굴복시킬 때 마침내 우리는 이 참 신앙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는 이러한 완전하고 전반적인 신앙의 예를 찾아보기가 힘듭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인간들은 마치 하나님과 무슨 계약이라도 맺은 것처럼 그의 가르침이 자기들 비위에 맞지 않을 경우에는 거기에 굴복하지 않거나 당장 그걸 무시하고 배척해 보리고 맙니다.
5) 마지막으로 고넬료가 하나님과 인간을 구별한 것은 현명한 처사였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이 가르침의 저자로 여기고 인간에게는 사역자와 사신의 임무 이상의 것을 기대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에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님에게 명령하신 모든 것은 귀담아 듣고 순종하는 생도가 되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분에게만 홀로 권위가 있고 주님은 오직 그의 일군이 되고 그분 혼자 말씀하시되 주님의 입을 통해서 말씀하시게 하소서\"하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에스겔 선지자를 통해서 \"너는 내 입의 말을 듣고 나를 대신하여 그들에게 경고할지어다\"(33:7) 하고 말씀하심으로서 그의 모든 종들에 대한 이 지침을 규정해 놓으셨습니다.
행10:34-38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고넬료 가정에서 했던 설교 중에 앞부분입니다.
1. 본문 34절은 \"베드로가 입을 열어 가로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취하지 아니 하시고\" 입니다.
1) 본문 34절에 \"베드로가 입을 열어\" 라는 말씀은 이미 지적한대로 성경은 아주 중요하고 심각한 연설이 이어질 경우 이런 표현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마태복음 5장에 보면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를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의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하셨을 때 \"그의 입을 열었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우리는 그것을 \"말씀하실 내용을 이미 숙고하신 다음에 말을 꺼내기 시작하셨다\"는 식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2) \"내가 참으로 .....깨달았도다\"는 말씀에는 여러 가지 이유, 징조 그리고 추론을 통해서 이해하거나 추측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고넬료는 이방인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그의 기도를 들어 주시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복음의 빛을 받을 만한 사람으로 생각하시었습니다.
그래서 그를 위해 특별히 천사를 임명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베드로는 경건하고 흠 없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모두 각자의 외모에 상관없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파악합니다.
그가 이전까지는 하나님의 은혜가 남들에게 미친다는 문제를 조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던 것은 그는 유대인들만 모든 민족들 가운데 선택받은 사람이기에 그들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는 단지 이방인이라는 이유 때문에 경건과 흠 없는 생활이 배척을 받고 정죄 받는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우매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단순하게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은 모두가 하나님의 나라 밖에 있으며 속된 것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그가 무할례자의 경우 하나님께서는 자신에 대한 순수한 예배와 거룩한 생활을 무시하는 것으로 터무니 없는 잘못을 범하게 된 것은 무할례 한가지 때문에 유대인들은 나머지 모든 덕을 불미스러운 것으로 여겨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올바른 판단을 막는 편견에 대해서 어느 정도의 경계를 펴야 마땅한가를 강조하는 좋은 실예 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사람\'이라는 단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그 단어를 일반적으로 설명하는 가운데 인간에게는 우열이 없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펠라기우스는 하나님은 사람을 구별하는 법이 없으므로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 선택을 받거나 버림을 받는 일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오래 전에 내세웠습니다.
그러나 이 단어는 통상적으로 말하는 외형적인 상태나 외모, 곧 인간 사회에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평판을 받게 하기도 하고 그것을 그에게서 빼앗기도 하는 그러한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재물, 고귀한 가문, 종자(從者)들, 그리고 명예는 사람을 고귀하게 만들지만 빈곤, 천한 가문 기타 등등은 그를 업신여기게 만듭니다.
여호와께서는 이러한 바탕에 입각해서 사람을 취급하는 것을 줄곧 금하고 계십니다.
그것은 외적인 것은 심판관으로 하여금 소송 자체를 보지 못하게 하는 수가 많듯이, 그러한 곳에 올바른 판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귀절에서 말하는 사람이란 인류를 두고 하는 말로서 그 의미는 무할례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방사람의 의를 보고 기뻐하시지 않거나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생각하면 하나님께서는 당분간 사람의 외모에 대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이방인들은 제쳐두고 유대인들만 그분의 선민으로 선택하신 것은 사람을 외모로 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질문이 가능합니다.
이 구별에 대한 이유를 사람들에게서 찾아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밀한 목적에 의존하고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이집트인들이 아니라 아브라함을 신에게 입양하시고 그와 자신의 언약을 맺으셨을 때 그는 그렇게 하는데 있어서 어떠한 외적 사려에 의해서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니라 거기에 대한 전적인 이유는 그의 놀라운 목적에 들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에게 매이지 않으셨습니다.
3) 그렇지만 할례를 하나님께서 기뻐하셨습니다.
그 결과 성결의 상징을 가진 자들을 자기 백성으로 여기셨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난제는 그렇게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할례와 하나님의 은혜를 비교할 때 할례는 은혜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므로 할례가 은혜보다 뒤에 오는 것이요 할례가 결코 은혜의 원인이 아니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문제는 쉽게 풀리기도 합니다.
그와 동시에 할례 받지 않은 이방인들이라 해서 하나님께서 원하실 경우에는 그 무할례가 그들을 동일한 구원에 참여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 사실은 그들이 이런 방법을 통해서 거저 유대인들에게 입양될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오심과 더불어 서로를 구별하는 담이 무너지고 하나님께서는 구별 없이 온 세상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으니 이것이야말로 새롭고 특별한 국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엡2:14).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각 나라 중\' 이라는 말의 의미입니다.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거룩한 유산으로 남아있는 동안은 이방인들은 그의 나라에서 완전히 유배된 것처럼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방인들의 빛\'으로 계시되셨을 때 영생의 언약은 모두가 동일한 조건으로 누릴 수 있는 공동의 것이 되었습니다.
2. 본문 35절은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입니다.
1) 전체 생활의 완전성이 이 두 설명적인 귀절에 요약되고 있습니다.
\'하나님 경외\' 란 바로 경건과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의\' 란 인간들이 어느 누구건 해치려 하지 않고 모두에게 적극적으로 선을 베풀려 할 때 인간 사회에서 시행되는 공정한 행동입니다.
선한 생활의 규범인 하나님의 율법이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같은 방식으로 어느 누구든 자기의 모든 행동을 그 율법과 상관시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율법의 지배를 받기 전에는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전체 생활이 하나님 경외에 기초를 두지 않을 경우 모든 봉사 활동은 순수성을 결여하게 되고 말 것입니다.
2) 그러나 이 귀절은 얼핏 구원의 원인을 행위의 공로로 돌리는 것처럼 보입니다.
행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 준다면 그와 동시에 그것은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에 의존하는 생명을 우리에게 확보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신앙이 아니라 행위에 의해서 의롭게 된다는 점을 입증한답시고 \'의\'라는 단어를 물고 늘어집니다. 그러나 너무도 시시한 소리입니다.
이 단어는 율법의 전반적이요 완전한 준수에 대한 대명사로 여기서 쓰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그것은 둘째 돌판과 사랑의 봉사에 국한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인정을 받게 하는 전반적인 의(義)가 아니라 각자가 자기의 몫을 받는 때 인간 사회에서 적용되는 정직과 성실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3) 그러므로 이제 남은 질문은, 행위가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얻어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이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데 있어서 두 가지 면이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노의 자손으로 태어나는 만큼 하나님께서는 우리 속에서 사랑을 줄 만한 것을 전혀 발견하지 못하기 때문이요, 오히려 우리의 본성은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증오를 촉발하기 때문입니다(엡2:3).
그런 이유에서 바울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화해되기 전에는 모든 인간은 하나님께 원수라는 점을 밝히 말하고 있습니다(롬5:6, 8).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은혜 속으로 받아 들이는 사건은 어디까지나 무상(無償) 은혜입니다.
인간의 행위가 온갖 잘못과 사악으로 가득하며 본래의 모습을 즐기는 한 행위에 대한 어떠한 이유도 성립될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로 입양해 주시는 자들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을 또한 자신의 영으로 중생시켜 주십니다.
그리고 그들 속에 자신의 형상을 재창조시켜 주십니다.
여기서 두 번째 사항이 드러납니다.
그렇게 하실 때 하나님께서는 단지 인간만을, 곧 모든 은혜가 텅 비어 있고, 결핍되어 있는 자를 대하시는 것이 아니라 낱낱의 인간에게서 하나님 자신의 행위(work)를, 아니 하나님 자신을 발견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신실한 자들을 가납(嘉納)한 존재로 여겨 주시는 것은 그들이 경건하고 의로운 생활을 영위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자들의 선행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점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일어나는데 곧 인간이 자신의 공로로 하나님의 은혜를 예상할 수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아니면 그는 사실 미움밖에 받을 자격이 없으므로 그는 먼저 은혜에서 오는 사랑을 받고 있으며, 그의 행위는 참작할 수 없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야기됩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을 자신의 타고난 성품 그대로 내버려 둘 경우 그는 증오의 원인 이외에 아무것도 제시할 것이 없는 만큼 그로서는 은혜로부터 오는 사랑을 받을 수 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는 원인은 하나님 자신에게만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자신의 자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결론이 나옵니다.
다음에 주목할 점은 신자들이 중생 이후에 선행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행위를 어여삐 보아주시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지 행위의 공로 때문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용서가 전혀 따르지 않고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정도로 철두철미 순결한 행위란 없다는 말씀입니다.
오히려 행위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의 불완전이 뒤섞이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행위 그 자체로는 배척을 받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므로 행위의 가치를 규정하는 것은 행위 자체의 진가가 아니라 행위에 부족한 점을 그리스도에게서 빌려 오는 신앙입니다.
3. 본문 36절은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입니다.
1) 본 절 끝에 \"보내신 말씀\" 에 관하여 : (concering the thing) 헬라어 사본에는 문장이 끊겨져 있으므로 여기에 나오는 대격(accusative)을 주격(nominative) 대신에 삽입된 것으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1) 그렇게 될 경우 의미는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보내셨던 말씀이다\"라고 하는 식이 됩니다.
또 이것을 뒤에 나오는 \"... 너희도 알거니와\"와 연결시켜 전환 문장 때문에 다른 단어가 덧붙여진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누가는 처음에는 (로곤 : 말씀)을 다음에는 (레마 : 그것)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헬라어에서는 전치사를 보충하는 것이 흔히 있는 일인 만큼 우리가 제시한 의미가 더 적절한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문장의 조잡성에 대해서는 더 잘 다듬어질 여지가 있다는 점을 우리는 솔직히 인정합니다.
(2) 우리는 그러므로 서론식으로 얘기하자면 이 구절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평화를 선포하시면서 이스라엘 자손들 가운데서 시행하신 그의 놀라운 일을 언급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그 후에 설명이 나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베드로는 그의 연설을 마치면서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시되셨던 목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3) 더욱이 그는 의도적으로 그들에게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셨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히브리어에서는 \'말씀\' 이 \'것\'(thing)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상대로 체결하신 영원한 언약에 대한 명성은 당시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따라서 오래 전부터 한 구속주가 약속되어 오고 있으며 그가 오셔서 다 쓰러진 것들을 번영하고 복된 상태로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사실보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더 익히 알려진 것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과 친분을 맺고 있던 사람들 역시 이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자신의 말의 신빙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그가 무슨 생소하고 신기한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언약에 의존했으며 이제는 결코 모호하지 않은 방법으로 계시되었으며 또한 사람의 입에서 공공연하게 전파되고 있는 교회의 회복에 대해서 이야기할 것이라는 말을 먼저 꺼내고 있습니다.
2) 본 절 중간에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베드로는 당시에 퍼져 있던 소문과 사실이 확실한 평화였다는 점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1) 우리는 이 \'화평\' 이라는 말을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화해로 봅니다.
바로 여기에 교회의 완전하고 전적인 구원이 담겨 있습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과 우리의 이별과 소외로부터는 처참한 혼란, 아니 무시무시한 \'카오스\'가 따르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아버지로서의 사랑이 비쳐오자마자 그는 그의 교회를 분산된 상태에서 모아 주시며 진정한 행복이 다시 솟아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의미는 그리스도안에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 은혜로운 모습을 드러내셨습니다.
그가 당분간 거절해 오셨던 것으로 보였던 아브라함의 자손들을 다시 한번 껴안아 주셔서 그들에게 번창하고 왕성한 상태를 확립하고자 하셨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하나님을 이 평화의 근원으로 삼듯이 그리스도를 그 평화의 보증으로 공개함으로서 그것이 신성불가침의 것이라는 점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2) 그가 \'평화\' 와 \'전파하다\'라는 말을 일부러 함께 사용하는 것은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의해서 획득된 화해의 열매가 곧장 우리에게 오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 의미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평화이시다\"라는 말을 한 다음에 곧 이어서 그리스도께서는 가까이 있는 자들과 멀리 있는 자들에게 평화를 전파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습니다(엡2:14, 17).
4. 본문 37절은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되어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라는 이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누가는 \'세례\'라는 말 속에 요한의 전체 사역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는 그것이 결코 무의미하고 가르침이 결여된 상징이 아니라는 점을 경고해 주고 있습니다.
모든 성례의 핵심은 두말할 것 없이 그 속에 새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그 빛을 발하고 그 음성이 또렷또렷하게 울려 퍼지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그러나 로마 카톨릭에서는 말씀을 묻어버리고 성례를 단지 마술적인 중얼거림으로 가득 채우고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그들의 이 불신앙적인 모독 행위를 더욱 더 혐오하는 것입니다.
2) 본 절 끝에 \"너희도 알거니와\" 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 베드로의 말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그는 과거 사건에 대한 내용을 반복하고 나서 이 사건의 결과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세상에 오심, 그의 죽으심과 부활이 우리의 구원의 기초이듯이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구원으로 제공되는 유일한 길은 무엇보다도 그가 우리의 육신을 입고 인간 사회에 사시면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실한 증거를 통해서 보여 주셨으며 마침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였다는 사실을 우리가 아는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건이 제 구실을 못하고 그것에 대한 지식이 무용지물이 되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그와 동시에 그가 왜 하늘의 영광에서 이 세상으로 내려오셨으며 왜 그가 인간보기에 그처럼 흉측하고 하나님의 입으로 저주를 받은 그런 죽음을 십자가에서 당하셨는가 하는 이유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리고 부활의 이유에 대해서도 배우지 않으면 안 되는데 그 이유는 거기서부터 모든 이 축복의 결과와 열매가 나오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비우신 것은 잃어졌던 우리에게 완전한 복된 상태를 회복시켜 주신 것은 그가 이런 방법으로 아버지에게 왕과 제사장으로 성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그는 우리의 육신을 입고서 우리에 대한 그의 형제애를 보여 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성을 손수 담당하심으로 우리에게서 이 연약성의 짐을 제거해 주셨습니다 아버지로 하여금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의 희생적인 죽음으로 우리의 죄에 대한 구속을 이루셨습니다.
죽음으로부터 승리자로 나타나시면서 그는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확보하셨습니다.
자신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서 그 문을 활짝 열어 제치셨습니다.
성령의 모든 능력이 그에게 부어짐으로 그가 그의 풍성한 데서 우리를 풍요하게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3) 베드로는 복음의 주제를 시작하면서 이러한 순서에 입각해서 가르치고 있습니다.
물론 그는 후에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내려오심. 그의 죽음과 부활이 우리에게 끼친 영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먼저 그는 나사렛의 그리스도께서 요한의 세례 뒤에 나오셨다는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요한이 백성들의 마음을 감동시켜 그리스도를 기대하게 하려고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임명된 사람이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면이 생략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특출한 선지자 취급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권위는 특별히 무식하고 배움이 없는 젊은 백성들 사이에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불러 일으키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습니다.
5. 본문 38절은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붓듯 하셨으매 저가 두루 다니시며 착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를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입니다.
1) \"나사렛 예수\"라는 말씀이 있는데 여기서 그가 그리스도에게 \'나사렛\'이라는 수식어를 쓰는 것은 그가 거기서 태어나셨기 때문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그의 일을 실천하기 시작하셨으며 이 이름이 일반적으로 통용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그가 성령과 능력으로 \"기름부음 받았다\"는 말을 하면서 환치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에게 뛰어났던 능력이 바로 이 성령을 그 원천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늘 아버지께서 그의 아들에게 기름을 부어 주실 때 그는 그의 자신의 영의 능력으로 그를 무장시켜 주셨습니다.
곧 이어서 베드로는 이 능력이 기적을 통해서 - 물론 그는 오직 한가지 종류만을 여기서 지적하고 있지만 - 드러났다는 점과 그가 이 세상에 선(善)을 행할 수 있도록 성령의 능력을 부여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사실 그분에게서 나타나야 마땅한 것은 공포를 자아내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선하심과 자비에 대한 유쾌한 맛을 통해서 세상을 이끌여 들여 그를 사랑하고 그를 갈망하게 하는 그러한 능력이어야 했습니다.
2) \"기름붓듯\"에 대한 은유는 성령의 은사에 대해서 사용되는 것으로서 다들 충분히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는 우리가 아는 대로 율법 시대에 있어서 기름은 성별에 대한 상징으로 쓰이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두루 다니셨다\'는 표현은 그의 소명의 전 과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이것은 그가 미리 예정된 기간에 해당하는 그의 임무를 다 수행하셨다는 이야기나 같습니다.
이 비유는 목적지에 이르기까지 여행 길을 계속하는 여행자들에게서 따온 것입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이야기에는 그리스도께서 3년 동안 온 유대를 다 여행하셨으며 그 결과 어느 한 구석도 그의 덕행의 범위에서 벗어난 일이 없다는 점이 암시되어 있습니다.
3) \"마귀에게 눌린 모든 자\"에서는 그리스도께서 백성들이 일상적인 질병을 치료하실 뿐 아니라 절망적인 질병까지 치료책을 강구하셨다는 점은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더 명백하게 보여주었습니다.
모든 질병은 사실 하나님께서 들고 우리를 단련하시는 수많은 회초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아버지로서의 다정함 때문에 우리를 더 가볍게 대하실 경우 우리는 그가 그의 손으로 우리를 때리셨다는 말을 하고 반대로 더 심한 매질을 하실 경우에는 그가 자신의 진노의 일군, 아닌 집행자로 사단을 사용하신다는 말을 합니다.
이것을 잘 구별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순한 열이 있거나 그와 비슷한 흔한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마귀의 고문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성의 상실, 광기, 기타 비정상적인 질병은 사단에게 돌리는 것이 타당한 것들입니다.
그러기에 성경은 미쳐 날뛰는 나머지 도저히 제어할 수 없으며 거의 야수나 다름없이 되어 버린 자들을 가리켜 마귀 들린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4)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는 말씀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의 손에 의해 제시된 이 능력들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하는 점을 곧 하나님의 임재를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점을 간략하게 시사하고 있습니다.
이미 여러 번 지적된 바 있으며 후에도 이야기되겠지만, 이것이 사실 기적의 진정한 가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들에게 표적을 주어 구별하시는 자들을 우리가 우러러 보고 존경하지 않을 경우 하나님의 위엄이 감소된다는 이 원칙을 우리는 인정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 하늘로부터 오셨다는 점을 그의 능력이 여실히 증거하고 있는 점을 볼 때 그의 권위를 인간적인 판단의 우연한 결정에 내맡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행10:39-43 우리는
본문은 베드로 사도의 고넬료 가정 초청 설교의 후반입니다.
1. 본문 39-40절은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의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저희가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주장을 믿도록 하는 뜻에서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그리스도에 대해서 가르치는 모든 것을 직접 목격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밝힙니다.
따라서 익히 알고 있는 무제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점을 밝히고 있습니다.
다음에 그는 특별한 \'증인\'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 경우의 증인은 다른 의미로 쓰이고 있습니다.
사도들의 경우에는 특별히 선발되어 그들에게 공적 임무가 부여되었습니다.
그들의 전파를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그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하나님에 의해 끌리듯 다른 사람들도 사도들의 인도 받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전서 15:14-1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증인으로 발견되리니\" 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너희는 예루살렘과 유대, 사마리아, 그리고 땅 끝까지에서 나의 증인들이 되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베드로는 자신을 역사적인 증인으로 말하는 것은 그가 이 사건들의 관찰자였기 때문입니다.
그가 그리스도의 죽음에 대해 간략히 말하는 것은 당시 백성들이 모두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의심의 여지가 많았고 신앙에 훨씬 더 중요한 부활에 대해서는 더 길게 말씀합니다.
2. 본문 41절은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후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입니다.
1) 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부활 후에 모두에게 공개적으로 나타내 보여 주지 않으셨는가 하는 질문을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경우 아무런 이유가 없다 해도 온건하고 분별력 있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목적 그것으로 충분해야 마땅합니다.
하나님께서 작정하신 것이 최선의 것이라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치 말고 믿어야 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최선의 유익을 위해 그렇게 조절하신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부활의 확실성이 확고하고 많은 증거에 의해서 충분히 입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눈으로 보는 것보다 복음을 믿는 것이 경건한 자들의 신앙 단련에 더 큰 가치입니다. 불신자들과 그리스도의 공공연한 원수들에 관한 한 그들은 수없이 반박을 받았지만 하나님께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의 부활의 영광을 보여주지 않은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물론 이들 역시 그들이 무덤을 경비하도록 고용한 군인들의 보고를 듣고 더 없이 확신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2) 그러므로 사도들이 하나님의 거룩한 경륜에 따라 선택된 것은 그들의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증거를 통해서 그 진리가 확고하게 서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은 기정 사실입니다. 이것을 인정하려 들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베드로가 여기서 추천하고 있는 하나님의 변경 불가능한 경륜을 잡아 뽑아 망치려는 사람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우리의 신앙의 확고한 근원으로 삼는다면, 우리는 이 증인들에게 배우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사도들로 말하면 하나님께서 창세 전에 손수 선택하셔서 자신의 때가 되자, 마치 자신의 손으로 이끌 듯 일반에게 내어놓은 자들, 곧 만대를 위하여 주신 선물들입니다.
3) 이제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라는 말씀을 더 상고하십시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의 영광을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유한한 인간으로서 먹고 마실 정도로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이 사실에서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무지에 대해 얼마나 관심을 베푸셨는가 하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무슨 모호성이나 의심이 있나 없나 하는 질문을 할 이유가 도무지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한때 당분간 미련한 그대로 남겨 두어 믿기 어렵게 하신 것은 그들이 보다 더 충분한 확증을 받을 때 우리로부터 온갖 의심거리를 제거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 편의 악의와 배은망덕이 하나님의 아들의 우리에 대한 그 큰 관용을 흐리게 하는 일이 없도록 유의해야 합니다.
4) 그 외에도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잡수신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호기심 많은 사람들은 \"그 잡수신 음식은 어떻게 되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합니다. 그러나 그 음식은 원래 무(無)에서 창조된 것인 만큼 그것이 그리스도의 신성한 능력에 의해서 무(無)로 전락되는 것은 손쉬운 일이었습니다.
우리 몸의 영양을 위해 취해진 음식은 소화된 다음에 배설되고 맙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이 음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영양을 위해 취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데 소모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다만 잡수시는 척하셨을 뿐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잘못입니다.
그렇게 흉내만 내봤자 무슨 도움이 되었겠습니까?
그리스도께서 잡수신 것은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그의 백성을 생각해서 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런 사람들의 하찮은 고안은 설 자리를 잃어버리기 마련입니다.
3. 본문 42절은 \"우리를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전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거하게 하셨고\" 입니다.
1)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것은 온 세상을 단번에 심판하려는 뜻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로써 사도께서는 그리스도의 지배에 대해서 말씀하기 시작합니다.
동일한 권리에 따라 천지간의 통치와 교회의 영원한 정치가 그리스도의 것으로 돌려지기 때문입니다.
\'그가 산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 노릇을 하실 것으로 이야기 되는 것은 죽은 자들은 다시 살아날 것이요 당시 살아있는 자들은 또한 순간적으로 변모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 사도께서 고린도전서 15장 51절과 52절, 데살로니가전서 4장 17절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2) \"증거하다\" 는 말에는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인간에게는 본래부터 불신하는 경향이 있는 만큼 주님께서는 친히 복음의 증인이라는 점을 강력하게 확증하시지 않을 경우 단순한 복음 전파만으로는 효과와 효력이 덜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우리는 모두 이 세상의 덫에 묶여 있는 우리의 마음을 들어 그리스도의 오심을 대망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것 뿐 아니라 자신들 변덕에 따라 이리 저리 휩쓸리지 않고 이것을 지속적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문제인가를 잘들 알고 있습니다.
4. 본문 43절은 \"저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거하되 저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 이름을 힘입어 죄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입니다.
(1) 누가는 베드로의 설교의 내용을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사건을 열거하는데 있어서 간략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2)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생각합니다.
① 첫째, 그리스도의 특별한 임무는 인간의 죄를 파괴하고 그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 는 것입니다.
② 둘째, 우리는 신앙으로 사죄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③ 셋째, 이 가르침은 생소한 것이거나 최근에 고안된 것이 아니라 유사이래 하나님의 모든 선지자들이 이미 여기에 대해 증거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1) 먼저 첫째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만약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죄를 전가(轉嫁)하지 않음으로써 화해된다면, 온 인류는 값없는 용서로 말미암아 용납되기 전에는 하나님의 미움과 적대감의 대상이라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1)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우리를 하나님의 진노에 굴복시키며 영원한 죽음의 죄책(罪責)의 쇠고랑으로 우리를 얽어매는 죄의 확정 판결을 받습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에게는 의가 없으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를 유일한 피난처로 알고 그리로 피신하라는 가르침을 받습니다.
\"신자들이 죄 사함을 받는다\"는 말에는 신자들과 하나님에 대한 대조가 암시됩니다.
신자들이 사죄를 받기 전에 하나님 편에서 그것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통해서 사죄가 주어지고 있다는 말씀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도움을 받을 때만 하나님과 사이좋게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죽음으로 단번에 하나님을 우리와 화해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오직 그리스도의 중보에 의해서만 우리가 사죄를 얻는 것이지 다른 중보자는 필요 없습니다.
(2) 사단이 인간들의 마음에서 죄책(罪責)을 제거해 버리려고 몸부림 칩니다.
그렇지만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사죄를 요청하고자 하는 불안감을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용서를 받는 길과 방법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쌍한 인간들은 사단의 기만에 속은 나머지 스스로 훌륭한 심연을 여러 개 파면서 필요 없이 꾸불꾸불한 길을 가느라 고생합니다.
그들이 정도에서 벗어난 첫 과오는 거저 제공되어 있으며 오직 신앙에 의해서만 받아 들여질 수 있는 사면(赦免)을 그들 스스로 쟁취하려고 노력했다는데 있습니다.
그 후로 헤일 수 없이 수많은 속죄 방법이 고안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가지고 하나님의 노를 풀어 보겠다고들 애써왔습니다.
이 모든 것의 원천은 하나님의 말씀 뿐 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족장들에게 제사와 제물을 드리는 예식을 위임하셨을 때 그리스도를 가리워 놓으셨습니다.
그러므로 눈멀고 불경건한 인간들은 그리스도를 제쳐놓고 허망한 그림자만 추구하는 가운데 제사 속에 있는 하나님의 모든 것을 망쳐놓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태초부터 이방인들이 실시한 모든 제사 의식과 아직도 유대민족에 의해서 실시되고 있는 제사는 모두 그리스도와 완전히 배치되는 것들입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도 그들의 속죄 의식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보혈을 흩뿌린다고 흉내냅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들이 그리스도 한 분으로 만족하지 못합니다.
온 사방에서 수천 가지의 제사 양식을 끌어들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죄사함에 동참하려는 자는 손가락 만한 넓이라도 그리스도에게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2) 둘째로 사죄가 \'믿음\'에 의해서 받아들여진다는 말을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 말하는 믿음이란 신앙의 능력과 성격을 뜻합니다.
베드로는 우리가 어떻게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를 길게 토론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시될 때 진실한 마음으로 그리스도를 모셔 들인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입니다.
성령님으로 인한 중생(重生)은 신앙의 결과인 만큼 신앙 속에 성령님에 의한 중생이 포함됐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가 의의 값없는 전가로 우리를 아버지의 사랑으로 회복시키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가 그의 영으로 우리를 성결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분의 영으로 지배한다는 조건 하에서 그의 자녀로 입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의 경우 본성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이 어떻게 되돌아 와서 그분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을 보여 주는 것으로 충분했습니다.
3) 셋째 문제를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죄에 대한 용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하나님을 화해시키기로 된 중보자로 제시하는 선지자들의 모든 귀절을 다 살펴 볼 필요는 없습니다.
중보자 이야기를 할 경우 모든 경건한 자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언약을 상기시켜 주는 것이 일반적인 교수 방법이요, 교수 원칙이었습니다.
4)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계시된 은혜는 율법과 선지자들이 오래 전부터 조상들에게 소망하도록 가르친 그것과 동일하다는 이 기본원리를 꼭 이해해야 합니다.
특별히 고넬료와 그의 동료들은 율법과 선지자들을 중시하고 있었는데 이들이 선지자들의 예언을 통해 주장된 것이 사실은 그리스도안에서 시행되고 성취되었다는 점을 알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의 일군들이 선지자들의 교수 방법과 일치하려면 그들의 전파에 있어서 그리스도를 최대한으로 존중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들은 값없는 사죄의 기본인 의는 오직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점을 계속해서 증거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이 역사성은 로마 카톨릭에서 그리스도의 보혈 대신에 자신들의 썩어 빠진 속죄 방법을 무수하게 대치시키면서 허풍을 떨어 대는 역사성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입니다.
행10:44-48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본문은 베드로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중에 성령이 임한 사실과 또 고넬료의 집에 모인 사람들에게 세례를 행한 사실입니다.
1. 본문 44절은 \"베드로가 이 말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여기서 이방인들과 유대인들이 똑같이 그의 복음의 가르침에 참여하고 있다는 점을 새로운 기적으로 확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 이방인들의 부름에 대한 특별한 상징인 것은, 바로 이 사람들 또한 언약의 무리로 선택받지 않았더라면 여호와께서는 결코 이들에게 그의 영의 은사를 허용치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누가가 기록하는 이 은사는 중생의 은혜와 다른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런 방식으로 하나님께서는 베드로의 가르침 뿐 아니라 거기에 같이 앉아 듣고 있던 자들의 신앙과 경건을 확증하셨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앞에서 우리는 그들 모두가 배우고 순종하려는 욕망으로 고취되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그렇지만 누가는 여기서 그들 모두가 성령을 받았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눈에 나타나는 상징은 복음전파가 얼마나 신령한 능력의 도구로서 효과적인 가하는 점을 명료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가 말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의 영을 쏟아 주심으로서 그가 빈 말로 허공을 치기 위해서 교사들을 보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말하는 바를 통해서 강력하게 역사 하시며 그의 영의 능력으로 그들의 말에 힘을 불어 넣으셔서 경건한 자들의 구원에 보탬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보여주시고 있습니다. 이런 이유에서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그들이 신앙을 들음으로 성량을 받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3:2).
다른 곳에서는 그가 문자의 일군이 아니라 영의 일군이라는 점을 밝힙니다(고후3:6).
확실히 방언과 기타 이와 비슷한 은사가 교회에서 중지된지 오래지만 이해와 중생의 영은 지금도 번창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복음의 외적 전파와 일치하는 것은 우리에게 그의 말씀을 존경하게 할 뿐 아니라 광신자들이 말씀을 포기하고 모호하고 오류 투성이인 영을 고안해 내는 가운데 빠져드는 치명적인 백일몽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뜻에서입니다.
3) 마지막으로 사람의 말을 듣는 사람이 그와 동시에 꼭 영을 받아들이는 것은 아닙니다. 사실 설교자들은 하나님을 따르려는 마음으로 사람을 따르던 베드로의 청중 같은 사람을 오늘날 발견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선택받은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들의 내부에 외적인 말씀과 성령의 은밀한 능력의 조화를 느끼게 해 주십니다.
2. 본문 45절은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주심을 인하여 놀라니\" 입니다.
누가는 여기서 아직 잘못된 오류에 빠져 있는 자들을 가리켜 \'신자들\'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서 모든 무지의 구름을 단번에 추방하시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구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신앙이 칭찬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오류를 눈감아 주시고 그것이 순수하고 흐리지 않은 것처럼 사랑으로 그것을 받아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가지 이상한 점은 베드로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다 알고 있는 그들이 크게 놀라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리스도를 전파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성령의 은혜를 부여하시는 것을 보고 그것이 신기한 일이라도 된다는 식으로 당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갑작스런 변화 때문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날까지 이방인들을 국외자로서 자기 백성으로부터 구별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제 그들을 동일한 사랑 가운데 포응해 주시며 그들을 동일한 영예의 자리에 높여 주시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또한 우리들이 한번 빠진 오류에서 특별히 그것이 오랜 세월에 걸쳐 계속될 경우 탈피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하는 점을 경고하는 예이기도 합니다.
3. 본문 46절은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입니다.
누가는 그들에게 내린 성령의 은사의 내용과 그것의 용법을 동시에 기록합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여러 \'방언\'의 은사를 받은 것은 여러 나라 말로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방언이 허용된 것은 복음이 서로 다른 나라 말로 외국인들에게 전파되어야 했던 필요를 채우기 위해서만 아니라 복음 자체의 장식과 영예를 위한 것이었다는 점을 이 구절에서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후에 하늘의 지혜의 위대성을 증명하도록 받은 것을 야심에 이끌린 나머지 자기 과시와 허영에 그릇 사용한 사람들이 많아졌습니다.
일례로 바울은 이 문제로 고린도인들을 호되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얼마 안 있어서 하나님께서 그가 과거에 허용하셨던 것을 빼앗아 가시며 더 이상 그것이 남용되지 못하게 하시는 것은 전혀 이상한 노릇이 아닙니다.
4. 본문 47절은 \"이에 베드로가 가로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줌을 금하리요 하고\" 입니다.
1) 베드로는 현실로부터 상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세례란 영적 은혜에 종속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받는 사람은 그와 동시에 세례를 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의 영의 보증과 증거를 통해서 자신의 자녀로 입증하시는 자들에게 목사가 외적인 상징을 허용하는 것이 올바른 순서입니다.
그러므로 가르침과 신앙이 주된 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유아는 세례를 받을 수 없다는 추론을 내리는 무식한 사람들이 있는데 전혀 근거 없는 소리입니다
물론 교회 밖에 있는 자들이 입양의 상징을 부여받기 전에 먼저 가르침을 받아야 한다는 점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태어나는 신자들의 자녀는 모태로부터 하나님 나라의 권속이라는 점을 주장합니다.
그뿐 아니라 우리가 그들의 터무니없는 이론을 배격하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신자들의 자녀들이 태어나기 전에 그들을 입양하시는데 그들에게 외적인 상징을 허용하지 않는 것은 기만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람이 그들에게 이 상징을 허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허용하신 것을 탈취해 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처사입니다.
성령의 명백한 은사에 대해서는 그것이 그들의 경우에 있어서 적당한 시기에 세례로 이어진다 해도 거기에 전혀 모순점이 있을 수 없습니다.
2) 그러나 이 증거가 결코 그들의 오류에 대한 지지가 될 수 없듯이 그것은 로마 카톨릭의 미신을 강력하게 배격합니다.
로마 카톨릭에서는 성령의 은혜를 여러 가지 상징에 결부시키면서 이런 저런 \'푸닥거리\'를 통해 이 은혜를 하늘에서 흘러 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것은 옛날 여자 무당들이 주문을 외워 달을 끌어내린다고 생각하던 것과 같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들이 이미 성령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령이 세례 속에 국한되지 않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사도들은 세례를 베푸는데 단지 물로 만족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소박성이 후대에도 그대로 유지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리고 로마 카톨릭에서 세례에 덮어 씌우는 하고 많은 엉터리 수작들이 사방에서 채택되지 않는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들은 기름, 소금, 침, 양초 따위로 세례의 권위가 더 높혀지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사실 이런 것들은 그리스도의 순수하고 티 없는 제도를 망치는 오물 찌꺼기들입니다.
5. 본문 48절은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라 하니라 저희가 베드로에게 수일 더 유하기를 청 하니라\" 입니다.
1) 먼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라는 표현은 우리가 3장 6절에서 생각한 형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례의 적합한 목표이므로 이것이 곧 우리가 그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이유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누가는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친척들에게 며칠 간 더 머물러 있어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들의 더 발전을 보려는 욕망에 대한 칭찬입니다.
물론 그들은 성령을 받았지만 더 이상 확신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극에 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그들의 본을 받는 가운데 기회가 올 때마다 그 기회를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발전을 보도록 해야겠습니다. 그러지 않고 우리가 교만에 부풀어 있다면 이 교만은 가르침의 출입구를 봉쇄하기 때문입니다.
2) \"세례를 주라 하니라\" 는 말씀은 꼭 베드로가 세례를 베풀 필요가 없었다고 말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했던 것은 다른 일군들이 이 역할을 감당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바울이 자기가 고린도에서 세례 베푼 일이 없다고 증거 하는 그대로입니다.
사도행전 11장 강해
행11:1-3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본문에서는 베드로가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전도한 사실에 대하여 할례자들이 힐난합니다. 여기 \"할례자들\"은 유대인 기독신자들입니다.
그들은 구약을 아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구약이 많이 예언한 이방 선교의 필연성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이와 같이 무식한 이유는 그들이 구약성경에 대한 깊은 지식이 없었던 까닭입니다. 그들이 겸손히 성경을 배워 알았다면 그리스도를 이방에 전파하는 일이 하나님의 뜻임을 알았을 것입니다.
그 때의 종교 지도자들은 헛된 유전을 많이 가르친 바리새인들과 랍비들이었습니다. 그런고로 구약이 일반 대중에게 바로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1. 본문 1절은 \"유대에 있는 사도들과 형제들이 이방인들도 하나님 말씀을 받았다 함을 들었더니\" 입니다.
한 권속의 회심이 온 사방 형제들에게 알려졌다는 설명은 일종의 칭찬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자기들에게 덧붙여지는 것을 마치 들에서 사람이 생겨났다는 이야기나 마찬가지로 망칙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민족에 대한 과격한 자부심(love)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을 깨달을 수 없게 된 것입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교회가 이러한 야심과 교만으로 소란하게 되었던 것은 그들이 동등성을 견딜 수 없어 했기 때문입니다.
이방인들과 동등되는 것은 그들의 권위를 감소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이방인들과 같은 멍에를 매는 문제를 두고 그처럼 고집을 피우며 싸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메시아의 오심 이후 모든 민족으로부터 교회가 성립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선지자들의 그 많은 예언과 온 세상을 상대로 복음을 전파하라는 사도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명령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극소수의 회심 사건을 보고 그것이 마치 생소한 것인 양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것이 마치 극악 무도한 짓이라도 되는 것인 양 기겁을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입니까?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들의 부르심에 대한 모든 예언을 해석하되 이방인들이 교회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모세의 율법에 굴복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그들의 눈에 비치기 시작한 부르심의 양식은 그들에게 생소한 것이었을 뿐 아니라 모든 이치에 어긋나 보였습니다.
첫째 그들은 여러 의식이 철폐되고 이방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 병합되어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하나님의 거룩한 언약에 크나큰 손상을 입히지 않을 수 없는 일인 것으로 상상한 것입니다.
율법의 목적은 이 구별을 상징하는 중간에 막힌 담의 구실을 하는데 있었습니다.
둘째 그들은 이러한 구별에 대해서 일생에 걸쳐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예기치 않던 사건의 새로운 국면을 대하게 되자 대경실색하며 자제심을 상실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은 창세 이래로 천사들에게 마저 감추어진 것으로 바울이 이야기하는 신비를 당장에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엡3:9).
2. 본문 2절은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입니다.
고집은 대개 오류와 손을 맞잡습니다.
그들이 동일한 신앙의 성령에 의해서 자신들에게 연합된 이방인들을 다정하게 맞아들이지 않은 것만 해도 우매한 무지 때문에 저지른 실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움추려 드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와 끈질기게 싸움을 하면서 가장 큰 찬사를 받아 마땅한 그가 무슨 수치스런 일이라도 한 것처럼 대들고 있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말씀을 받아 들였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 때문에 저들을 받아들여 한 하나님의 주권 밑에서 교제를 나누지 않습니까? 모두가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께 매달리는 것보다도 더 거룩한 연대성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의 메시아를 자기들의 머리로 인정하는 자들이 한 몸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율법의 외적인 형식이 파괴되는 것을 보고 이것이 마치 하늘과 땅이 뒤범벅이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점이 있습니다.
사도들과 형제들은 이 소식을 듣고 아무 소란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베드로와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을 마치 새로운 분파인 양 소개합니다.
\"형제들이 ..... 들었더니\" 이것으로 끝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베드로가 예루살렘에 올라갔을 때에 할례자들이 힐난하여 가로되\"하는 말이 나오는데 이들은 전자와 다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둘째 여기에 나오는 (페리토매-스 ; 할례자들)는 단지 유대인들이 아니라 율법의 의식을 과도하게 고집하는 자들에게 적용되는 말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양 무리 가운데 할례 받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는 이 사람들을 누구와 구별하고 있겠습니까?
마지막으로 사도들과 신자들의 온건파들이 이 논쟁을 벌였을것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설령 그들이 이 문제들에 대해서 언짢아했다 해도 그들은 베드로를 은밀히 불러서 사건의 전모를 요구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에서 여기서 말하는 \'할례자들\'을 고지식할 정도로 할례에 집착했던 자들로 봅니다.
이들은 여기에 얼마나 집착했던지 이 성스러운 의식에 의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이 율법을 고백하고 불결을 포기하지 않는 한 아무도 하나님의 나라에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3. 본문 3절은 \"가로되 네가 무할례자의 집에 들어가 함께 먹었다 하니\" 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율법이 금하는 규정이 아니라 조상 대대로 내려오는 전통이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이 문제로 자기가 너무 가혹한 대우를 받고 있다거나 자기가 필요 없이 인간의 약점에 얽매이고 있다는 반론을 제기하지 않습니다.
그는 이러한 반론을 아예 생략하고 이들이 자기에게 먼저 소개되었을 뿐 아니라 마치 하나님의 손에 이끌려 자기에게 온 것이나 다름없다는 점을 말할 뿐입니다.
그 외에도 우리는 여기서 베드로의 특이한 자제의 본을 대합니다.
그는 자신의 사건의 정당성에 입각해서 말썽을 일으키는 초보자들은 얼마든지 배척할 수도 있었지만 그는 정중하게 그들에게 그의 입장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들이 본받아야 할 점입니다.
사실 하나님께 충실하게 순종했다는 이유 때문에 그는 이처럼 수치를 당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결코 하찮은 공격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각 개인은 자신의 교의와 생활에 대한 설명을 전체 교회에 기꺼이 제시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원칙을 익히 알고 있었으며 자기도 이 양 무리의 한 사람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 질서에 순응할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교회의 판단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사실 교의가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면 이것은 인간이 판단의 위험에 종속될 수 없지만 여호와께서는 예언을 평가해 볼 것을 원하고 계시므로 주의 종들이 그들이 인정받고자 하는데 합당한 사람들인가 하는 점을 입증하려면 이러한 조건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고전14:29. 32).
교의와 행동의 변호의 한계가 무엇인가 하는 점에 대해서는 다음에 생각해 보십시다.
여기서는 베드로가 그의 행동이 지탄을 받자 기꺼이 자신의 사건을 진술하는데 동의하고 있다는 한가지 사실만을 분명히 하고 넘어갑시다.
그런데 로마의 교황이 베드로의 후계자라면 왜 그는 이 동일한 원칙의 규제를 받으려 하지 않는가?
물론 이것이 자발적인 굴복이었다지만 왜 그의 후계자는 자기에게 제시되고 있는 이 자제의 본을 본받지 않는가?
교황들이 그들의 신성모독적인 칙령을 통해 말한 것이 참이라면 베드로는 그의 보좌의 특권을 포기한 셈이요 로마 교황청의 반역자가 된 셈입니다.
그들은 교황을 온 세상의 재판관으로 세워 놓아 어떠한 인간적인 판단에도 굴하지 안게 하는가 하면 그를 구름위로 높이 추켜 올려 놓고 그의 말이라면 이유를 묻지 못하게 하며 그의 개인적인 뜻을 법으로 만들어 놓는 등의 수단을 통해 그를 사도들의 수호자로 세워 놓고 그 특권을 끈질기게 옹호하려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권리를 그처럼 쉽게 내팽개쳐 버린 것이라면 그는 얼마나 겁쟁이로 지탄을 받아 마땅합니까?
왜 그는 최소한 자기는 법의 지배를 받을 수 없는 사람이요 일반적인 질서에서 제외된 사람이라는 항변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그는 이 따위 문제는 아예 처음부터 다루지도 않고 자신의 경위를 곧장 설명하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저 우상을 저주하는데 조금도 두려워하는 마음을 갖지 않도록 합시다.
그러므로 교황들은 이미 그처럼 무절제 한 횡포를 자칭함으로서 스스로 감독단(監督團)으로부터 자신을 제외시키고 있습니다.
행11:4-18 베드로가 저희에게
베드로가 자기의 옳게 행한 일, 곧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한 일에 대하여 변호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본 환상의 내용과 천사를 만난 고넬료의 체험을 그대로 진술하였습니다(4-14). 주님으로 말미암은 기적적인 어떤 체험은 언제나 확신을 주는 법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체험만 의지하지 않고 주님의 말씀대로(16절) 이루어진 사실(15절)에 의하여 그 체험의 신빙성이 확고해진 것을 증거하였습니다.
체험이 귀하지만 그것이 하나님말씀의 인증을 받아야 안심하고 믿을 만한 것이 됩니다 베드로는 결론적으로 두 가지 강한 이론에 의하여 힐난자들의 말을 막았습니다.
(1) 유대인이나 이방인이 하나님의 선물(믿음)을 꼭 같이 받는다는 것(17절 하반)
(2)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사람이 막지 못한다는 것(17절 하반)입니다.
베드로의 증언을 들은 자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음을 선포하였습니다(18절).
그때의 난제가 베드로의 설명에 의하여 이만큼 유쾌하게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역시 순수한 초대 교회의 일면입니다.
진리의 근거가 너무나 명백함에도 불구하고 비진리를 고집하는 경향은 후대의 타락한 교회 중에 흔히 있는 일입니다.
1. 본문 4-13절은 \"(4) 베드로가 저희에게 이 일을 차례로 설명하여
(5) 가로되 내가 욥바 성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 간에 환상을 보니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을 네 귀를 매어 하늘로부터 내리워 내 앞에까지 드리우거늘
(6) 이것을 주목하여 보니 땅에 네 발 가진 것과 들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 이 보이더라
(7) 또 들으니 소리 있어 내게 이르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으라 하거늘
(8) 내가 가로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거나 깨끗지 아니한 물건은 언제든지 내 입에 들어간 일이 없나이다 하니
(9) 또 하늘로부터 두 번째 소리 있어 내게 대답하되 하나님이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 가 속되다 말라 하더라
(10)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에 모든 것이 다시 하늘로 끌려 올라가더라
(11) 마침 세 사람이 내 우거한 집 앞에 섰으니 가이사랴에서 내게로 보낸 사람이라
(12) 성령이 내게 명하사 아무 의심 말고 함께 가라 하시매 이 여섯 형제도 나와 함께 가서 그 사람의 집에 들어가니
(13) 그가 우리에게 말하기를 천사가 내 집에 서서 말하되 네가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앞 장에서 검토한 내용 그대로요, 거의 그대로 반복되고 있으므로 설명이 필요하다면 신자들은 그곳을 참고하기 바랍니다.
사실 베드로의 이 연설의 의도와 핵심은 결론 부분에 명확히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생각하기 전에 무엇 때문에 복음 전파가 구원의 원인이 되는가 하는 문제를 간략하게 생각해 봅시다.
2. 본문 14-15절은 \"(14) 그가 너와 네 온 집의 구원 얻을 말씀을 네게 이르리라 함을 보았다 하거늘
(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 이 하는지라\" 입니다.
하나님께서 \"너는 네 구원을 얻을 말을 들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구원이 인간의 말에 국한되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으로 제공하고 계시며 그와 동시에 믿음으로 그를 소유하게 하시기 때문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선하심이 놀라운 것은 죽음의 소지밖에 없으며 스스로 죽어 마땅한 자들이자 남에게도 죽음만 가져다 주는 자들인 인간들이지만 이들을 생명의 일군으로 삼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동시에 세상은 그들 앞에 제시되고 있는 참되고 확실한 구원을 무시할 뿐 아니라 그것을 발 밑에 짓밟아 버리면서 스스로 쓸데없는 여러 가지 구원을 고안해 내며 이것을 쫓는 나머지 바로 눈 앞에 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하나님의 은혜로 만족하기보다는 그들의 허기진 입을 그대로 매달아 놓고 있다는 점에서 그들의 배은망덕을 스스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3. 본문 16절은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 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입니다.
우리는 이미 제1장(5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두 세례를 비교하는 뜻에서가 아니라 자신이 요한과 다르다는 점을 지적해 보여 주려는 뜻에서 이 말씀을 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우리는 그의 실체(reality)와 상징(sign)을 구별하듯이 유한한 인간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독차지 하지 못하도록 하는 뜻에서 사역자와 원저자를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은 다만 상징일 뿐이요 정작 씻어주며 중생시켜 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구할 때 그들의 마음은 어디로 향하느냐 는 문제가 중요한 것은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물 한 방울도 그들에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와 교회 사역자들의 차이는 이것입니다.
곧 사역자들은 물이라는 외적인 상징을 수여하지만 주님의 영의 능력을 통해서 그 상징의 효과에 대한 책임을 지시며 그것을 성취하는 쪽은 그리스도이십니다.
신자들에게 이 점을 여기서 다시 상기시키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성령을 자신만의 소유로 말씀하고 요한에게는 물밖에 남겨 주시지 않는 것을 보고 요한의 세례가 우리의 세례와 다르다는 식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증거에 따라 세례를 무의미한 구경거리요 성령의 은혜가 결여된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큰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성경은 언제고 성례를 두 가지 의미로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약속으로 우리를 속이는 일이 없듯이 그가 제정하신 것이 무의미한 것으로 전략하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성령은 정결과 중생의 능력을 세례의 속성으로 말하면서 이 전체를 그리스도에게로 돌리고 있으며(딛3:5, 6)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대리 활동과 눈에 보이는 상징을 통해서 그의 영에 의해서 일하시고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이처럼 사역자와 연합되고 성령의 효력이 상징과 연합될 경우 나머지 필요한 모든 것은 성례 뿐 입니다.
인간들의 마음이 유한학 썩어질 것 자기들과 비슷한 것, 이 세상적인 요소들만 바라보는 나머지 그리스도에게서만 가능한 구원을 그에게서 찾지 않고 그의 영의 능력을 바라보지 않게 되는 방향으로 이 양자의 결합을 혼동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습니다.
조금이라도 성령을 떠나 상징만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앙의 목표에서 방황하는 자요, 조금이라도 그리스도의 영광을 긁어내서 그것으로 자신을 치장하려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신성모독 죄를 범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라는 단어를 방언 및 이와 비슷한 은사에 대해서 만이 아니라 우리의 갱신(更新)의 전반적인 은혜에 대해서도 적용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명심해야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은사는 그리스도의 능력에 대한 뛰어난 증거이므로 이 문장을 거기에 국한시키는 것은 적절한 일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눈에 보이는 성령의 은혜를 사도들에게 부여하심으로서 그 성령이 자기 수중에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셨듯이 그는 같은 방법으로 자기가 정결, 의, 및 전적인 중생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원칙이시라는 사실을 입증하셨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것을 그의 행동에 적용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앞서 가시면서 세례의 능력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셨으므로 베드로는 이 물이라는 외형적 상징의 보조수단을 따라야 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4. 본문 17절은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저희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관대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입니다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이 모든 일을 시작하신 분이자 주관자시라는 점을 증거 하는 뜻에서 베드로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는 음식문제가 더 중요해 보일지 모르지만 문제의 핵심은 하나님의 권위에 의존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하나님에게 순종한 것이지 결코 질서에 어긋나는 일을 하지 않았다는 점을 주장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성령의 은혜를 예탁해 놓으신 곳인 복음의 가르침을 심는 것이 결코 무모하거나 저돌적인 행동이 아니였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행동과 가르침, 이 모든 인준은 바로 이 표준에 입각해서 판단됩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수고하는 자에게는 변호가 충분하고 남아 돌아갑니다.
인간들이 이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해도 그들의 사특한 의견에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 말씀의 충실한 사역자들이 자기들의 가르침이 하나님에 의해서 그들에게 위탁되었다는 점을 증명해 보일 때만 그들은 그 가르침의 신뢰성과 확실성을 제대로 설명하는 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적대적인 사람들과 변론할 경우에는 그들 스스로 자승자박의 길을 가게 내버려 두고 최후의 날에 호소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에게 공공연한 반기를 들 때만 하나님을 저항하는 것이 아니라 무능력하게 우리의 소명을 수행하지 않는 것도 그에게 저항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됩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이방인들에게 세례와 형제의 교제를 부정했더라면 자기는 하나님께 원수가 되고 말았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밝힙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에 명백히 반대되는 것을 실천할 그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데려오는 자들을 받아 들이지 않거나 하나님께서 열어 놓으신 문을 닫아 버리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유아 세례를 반대하는 자들 역시 하나님을 상대해서 항쟁을 벌이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교회로 입양하는 자들을 교회로부터 외적인 상징을 박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 그들의 지위로 그리스도의 순교자들을 돕는 것이 마땅하지만 그들의 입을 다물게 하고 그들의 자유를 억제하는 데만 혈안이 된 자들의 저항 역시 이와 같은 맥락(脈絡)속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진리가 그들에게 불쾌하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이 압제받는 편을 택하는 것입니다.
5. 본문 18절은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가로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하니라\" 입니다.
1) 본 절 초두에 \"저희가 이 말을 듣고 잠잠하여\"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결과는 베드로와 논쟁을 시작한 자들의 동기가 악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뜻을 충분히 알게되자 그들이 즉시 논쟁을 중지한 것은 분명히 경건의 상징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무분별한 열성 때문에 무슨 문제를 가지고 잘못 비평하는 사람들을 무관심하게 그냥 내버려 둘 것이 아니라 실수 때문에 동요 받고 있는 그들의 마음을 하나님 말씀으로 달래야 한다는 점을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그들의 순응성의 시험에 관한 문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한 여기서 우리의 판단은 오직 하나님의 명령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을 배웁니다.
하나님의 뜻은 언제고 우리에게 정의와 진리의 확실하고 최상의 규범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명심해야 합니다.
무슨 일이든 거기에 대한 이유를 우리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주님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서 숨기시는 법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신앙이 올바른 순종에 익숙해지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이것, 또는 저것이 그에게 기쁨이 된다는 식으로 간략하게 말씀해 주시는 경우가 종종 있을 뿐입니다.
여기서 더 이상 캐 묻거나 호기심의 날개를 사정없이 펴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악마적이요 뻔뻔스런 생각이 가져오는 것은 자신의 추락 뿐 입니다.
누가는 분명히 그들이 \'잠잠해 졌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는 점을 언급합니다.
사람에 따라서는 자신들 속에 있는 것이 창피하기 때문에 그것을 내놓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억제하며 침묵을 지키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은 순응이 아니라 거짓 겸손의 표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완전히 굴복하는 자들은 당장 자신들의 주장을 철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2) 본 절 중간에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로 누가는 복음의 내용과 목표를 곧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새롭게 될 때 하나님께서 그들을 자신에게 화해시키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는 사실을 간략하게 보여줍니다.
사실 여기에는 \'회개\' 라는 단어가 \'생명 얻는\' 이라는 말과 함께 쓰이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이 신앙과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복음에 있어서 올바른 진전을 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생명의 새로움에 대해서 상고해 봐야 합니다(엡4:22).
그리고 복음을 받은 사람은 자기가 공연히 회개하도록 부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자기에게 구원이 마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 그 사람은 구원의 확신은 오직 하나님의 거저 베푸시는 자비에 의존하게 된다는 사실과 죄의 용서가 결코 태만과 무관심의 이유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3) 본 절 끝 부분에 \"회개를 주셨도다\" 라는 말씀은 두 가지 의미입니다.
곧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이 그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원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이방인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허용하신 것으로 볼 수도 있고, 아니면 모세의 말대로 그가 그의 성령으로 그들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시고(신30:6) 에스겔의 말대로 그들의 돌 같은 마음에서 살같이 부드러운 마음을 만들어 내신 것으로(11:19)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사람들을 다시 낳으시고 다시 만드시며 그들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게 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일입니다.
그리고 이 둘째 의미가 더 어울리며 성경의 용법과도 더 어울립니다.
행11:19-24 때에 스데반의 일로
안디옥의 헬라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됩니다.
안디옥 전도는 무명인사(無名人士)들이 한 것이었습니다(20절).
초대 교회 성도들은 이르는 곳마다 열심히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셨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믿게 되었습니다(21절).
물론 그 근본적인 원인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함\"에 있었습니다(21절).
그뿐 아니라 안디옥 교회가 왕성하여 후일 이방 선교의 중심이 된 원인은 바나바와 바울과 같은 전도자들이 맹렬히 활동하였던 사실에 있습니다(22-26).
1. 본문 19절은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을 인하여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도를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입니다.
1) 본문 중간에 \"흩어진 자들이\"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누가는 이전 문맥을 다시 이어갑니다.
그는 스데반의 죽음과 더불어 불경건한 자들의 잔학성이 확대되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겁에 질린 나머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는 점을 앞에서 언급한 바 있습니다.
그 결과 예루살렘에 남아 있는 자들은 사도들 뿐 이었습니다.
교회가 당시 이처럼 갈기 갈기 찢어졌으며 자신들의 공포심이나 바깥 사람들의 모욕에 못 이겨 도망자들에게 침묵이 강요되고 있던 당시였습니다.
그렇지만 누가는 아무도 예상할 수 없던 다음 사건을 이야기해 줍니다.
씨앗을 뿌리면 열매가 맺히듯이 그들의 도주와 분산의 결과는 과거에 한 도시의 성벽 속에 국한되어 있던 복음이 머나먼 지역에까지 널리 전파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은 산을 넘고 바다를 건너 세상 구석 구석까지 미쳤습니다.
이사야의 예언처럼 \"파멸이 넘쳐 흘러 의가 된 것\" 입니다(사10:22).
무수한 숫자의 신자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쫓겨나지 않았던들 구브로와 베니게가 그리스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리 없었습니다.
그보다 더 멀리 있는 이태리와 스페인이 무슨 소식을 들었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박살이 난 지체를 통해 더 많은 몸이 태어나게끔 작용하셨습니다 소수의 도망자들이 복음을 가져가지 않았던들 로마와 보디올(puteoli) 에 교회가 어떻게 생겼겠습니까?
그러나 여호와께서 당시에 사단의 노력을 기적적으로 막아 내셨듯이 오늘날 우리는 그가 십자가와 박해로부터 자신에게 승리를 확보하실 것을 그 결과 교회가 그 분산을 통해서 더 성장하게 될 것을 의심치 말아야겠습니다.
베니게(phoenicia) 는 수리아와 갈릴리 사이에 있는 나라요 안디옥은 시실리 쪽에 위치한 수리아의 가장 유명한 도시입니다.
2) 본문 끝 부분에 \"유대인에게만 전하는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방인들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박해 때문만이 아니라 그들의 어리석은 종교적 옹고집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곧 그들은 자녀의 먹을 개에게 던지는 것을 못마땅해 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 후에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전반적인 명령을 내리셨습니다.
2. 본문 20절은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입니다.
누가는 마침내 그들 가운데 이 보화를 이방인들에게까지 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설명합니다.
그러나 이 \'헬라인들\' (Greeks)을 누가는 헬라 사람들( ; 헬레-네스)이 아니라 헬라주의자들( ; 헬레-니스타이)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람들이 유대인들의 후손이었지만 그리스에 살고 있던 자들이라는 견해를 택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견해를 전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렇게 보려면 그가 앞에서(19절) 언급하는 유대인들도 그 숫자 속에 포함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들 가운데는 구브로에서 온 사람들도 있었으며 유대인들은 구브로를 그리스의 일부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누가는 다음 문장(20절)에서 헬라주의자로 부르는 자들을 이들과 구별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말씀이 처음에는 오직 유대인들에게만 전파되었다고 말해 놓고 나중에 마치 이 말을 정정하는 것처럼 본토를 떠나 구브로와 베니게에서 유랑민으로 살고 있는 자들을 지목해서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그의 의미는 헬라인들이 그들의 일부에 의해서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엄연한 대조를 파악할 때 우리는 그 단어를 이방인으로 설명해야 합니다.
누가의 의미는 소수의 사람들이 복음의 가르침을 더욱 더 자유롭게 전파한 것은 이방인의 부름 사건이 그들에게 미지수가 아니었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이것을 접어 두더라도 그들 모두의 인내가 큰 칭찬을 받아 마땅한 것은 그들은 구사일생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인데도 위험한 상황에서 하나님에 대한 자신들의 임무를 계속 수행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피하도록 허용되는 의의와 범위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들의 나머지 생에 걸쳐서 하나님의 영광을 적극적으로 확장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혹 도착한지 얼마 안되며 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추방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모든 유대인들의 의심을 받고 있으며 그들에게 적대적이었던 방문객들이 어떻게 그런 큰 확신을 가질 수 있었는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 확신의 근원이 하나님의 비상한 감화력에 의해서 조성되었으며 그 결과 그들은 기회가 자기들에게 주어지자마자 당장 자기들의 마음을 결정한 것으로 대답하겠습니다.
이러한 결정은 혈육에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3. 본문 21절은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입니다.
이어지는 성공적인 결과를 통해서 누가는 구브로와 그레네에서 온 형제들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제시한 것은 무모한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의 수고가 유익했으며 풍성한 결과를 낳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하나님의 명령과 사랑으로 생길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부름받은 사건이 하나님께 기쁨이 되었다는 구절이 이어집니다.
\'손\' 이란 능력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직접 도와주심으로서 이방인들이 유대인들과 함께 그리스도의 은혜를 누리도록 부름 받은 것은 자신의 인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을 증거해 주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 복은 그들 모두에게 큰 격려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구절은 하나님의 사역자들이 무슨 일에 무슨 노력을 쏟든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그들의 노력에 복 주시지 않을 경우에는 그 모든 것이 무용지물이 되며 허사가 되고 만다는 점을 우리에게 경고해 줍니다.
바울이 가르쳐 주고 있듯이 심고 물주는 것은 우리의 일이지만 자라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오는 것이요(고전3:6), 그의 손에 인간의 마음이 달려 있으며 그의 뜻에 따라 그것을 움직이고 다스리실 뿐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이 위태롭게 될 때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사역자들을 통해 적극적으로개입하셨으며, 그의 \'손\' 곧 성령의 은밀한 감화로 그들의 가르침이 효과를 가져오게 하셨다는 이 구절의 말씀을 명심합시다.
따라서 사역자는 자신의 능력이나 근면성을 믿고 무슨 일을 시작할 것이 아니라 온전히 그의 은혜로 성과를 가져오시는 하나님께 각자의 일을 위임하도록 합시다.
한편 가르침이 결과를 낳음에 따라 믿게된 자들은 자기들의 신앙을 하나님의 덕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우리는 \"수다한 사람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하는 말씀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여기서 믿음의 능력과 성격을 훌륭하게 묘사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냉담하고 쓸모 없는 지식이 아니라 과거에 하나님으로부터 유리된 자들을 그의 주권 밑에 복권시키며 그들을 그의 의에 동여매는 그러한 것이었습니다.
4. 본문 22절은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입니다.
만약에 이 보고가 베드로의 변명 이전에 들어왔더라면 비록 하나님께서 이 훌륭한 사람들의 사역을 그의 영의 은혜로 날인하셨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된 꾸중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분명한 상징을 통해서 더 이상 어느 민족이든 속된 것으로 여기지 말라는 점을 입증해 보이셨기 때문에 이러한 미신은 이제 그들의 마음에서 말끔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들 중에 어떤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이방 사람들에게 제시했다 해서 거기에 대해서 왈가왈부하면서 그것이 무모하다는 말을 더 이상하지 않고 있습니다.
반대로 그들은 도움을 보내면서 그들의 행동에 대한 인준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나바의 파송 이유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그 당시 사도들은 그리스도의 나라의 모든 짐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각 곳에 교회를 형성하고 곳곳에서 모든 신자들이 순결하고 거룩한 신앙으로 만장일치를 이루게 하며 어느 정도의 신자들이 모이는 곳에서마다 사역자와 목사를 세우는 것이 그들의 책임이었습니다.
사단의 간계는 다들 알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 사단은 복음의 문이 열려지는 것을 보는 순간 온 수단을 강구해서 순수한 것을 더럽히려 하며 그 결과 그리스도의 가르침에는 곧장 무수한 이단이 확산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어느 개 교회가 받은 은사가 뛰어나면 뛰어날수록 그만큼 그 교회는 더욱 큰 관심을 가짐으로서 사단이 무지하거나 아직 올바른 신앙에 충분한 기반을 닦지 못한 자들을 선동하거나 그들을 혼란 속에 내던지지 않도록 유의해야 됩니다.
곡식이 가장 상처를 받기 쉬운 시기는 초기 단계이기 때문입니다.
바나바가 파송 된 것은 신앙의 기초를 더 닦고 일의 질서를 어느 정도 바로 잡아 주며 미완성인 교회에 어느 정도 형태를 갖추게 함으로서 교회가 올바른 상태를 유지하도록 하려는 목적에서였습니다.
5. 본문 23절은 \"저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 있으라 권하니\" 입니다.
이 말씀은 먼저 그들이 받은 것이 순수한 복음이었다는 점, 둘째 바나바가 그리스도의 영광 이외에 전혀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았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그가 \'하나님의 은혜\'를 보았으며 그들에게 인내할 것을 권했다는 누가의 기록에서 우리는 그들이 올바른 가르침을 받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기쁨\'은 진실한 경건에 대한 틀림없는 증거입니다.
야심이란 언제나 시기와 악의를 동반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남을 헐뜯음으로서 자신을 추겨 세우려 하는 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보다는 자신의 영광에 더욱 더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자신의 이름을 드러내는데 있어서 결국에 누구를 불러 쓰시든 그리스도의 충실한 종들은 바나바의 본을 따르는 가운데 복음의 성과를 보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리고 인간들이 각자의 노력을 함께 모으는 가운데 거기서 무슨 성과가 나오든 그것을 하나님의 일로 인정하게 될 때 각자는 서로를 시기하거나 상대방을 헐뜯고 비방하는 일이 없이 한 마음 한 음성으로 하나님의 능력을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또 여기서 주목할 점은 안디옥 사람들의 신앙과 거기에 따르는 칭찬의 대상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돌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는 개별적인 인간들의 칭찬거리를 열거할 수도 있었지만 그 교회 안에 있던 모든 장점을 \'은혜\' 라는 한 마디로 묶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바나바의 권면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나바는 그들이 받아들인 가르침을 맨 먼저 인정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가르치는 일이 흐지부지하게 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계속적인 권면을 통해 신자들의 마음에 그것을 철저하게 새겨두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실 한편으로 우리는 수없이 많고 강력한 원수들을 상대로 계속 전쟁을 수행해야 하는가 하면 한편으로는 우리의 마음은 너무도 매끄러운 것이라서 각자가 자신의 방어에 철저한 신중을 기하지 않을 경우 이 전쟁은 당장 패배로 돌아가고 말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날 부지기수의 사람들은 여기에서 이탈함으로서 이것이 너무도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을 날마다 보여주고 있습니다.
누가는 인내의 비결을 \'마음의 뜻을\'모아 계속하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신앙이란 마음에 바탕을 둘 때만이 그 뿌리가 튼튼하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마음의 뜻과 선한 의지의 의미를 아는 사람이 드물기에 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 가운데 끝까지 인내하는 사람이 옆에 하나도 없다는 점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6. 본문 24절은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입니다.
1) 본문 초두에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바나바에 대한 이 칭찬은 분명히 성령의 발언이라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그것이 그 사람 개인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발설되고 있다는 점을 깨달아야겠습니다.
타인의 수고를 시기하며 그들의 성공을 보고 당황해하는 자들 모두의 악의와 악질성이 여기서 정죄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 라는 표현에 주목합니다.
누가는 바나바를 정직하고 의로운 사람으로 말하고 나서 이 선함의 구원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는 육신의 욕망을 물리치고 성령의 지도를 받는 가운데 온 마음을 다해 경건을 개발하는데 힘쓴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왜 누가는 믿음은 성령의 은사인데 이것을 성령과 구별하고 있습니까?
그것은 그 믿음 자체가 전혀 다른 무엇이기 때문이 아니라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했다는 사실을 특별한 예를 통해서 보여 주려는 뜻에서 그렇게 언급되고 있을 뿐입니다.
2) 본문 후반에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더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미 믿는 자의 숫자가 풍성했지만 누가는 그 숫자가 바나바가 온 이후로 더 불어났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인간들이 서로 한 마음으로 돕고 타인이 시작한 일을 정직하게 인정할 때 교회의 건축(the building of the Church)이 발전하기 마련입니다.
행11:25-26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본문은 바나바가 바울 사도를 모셔다가 함께 안디옥 지역의 사역을 감당한 사실입니다 이들의 사역은 주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양 떼를 건전하게 목양하는 일입니다(26절).
교회의 건실한 아름다움과 힘은 교인들이 주의 말씀으로 건전하게 성장할 때입니다.
1. 본문 25절은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입니다.
여기서는 주 앞에서 바나바의 소박성과 단순성이 두 번씩이나 칭찬됩니다.
바나바가 안디옥 지역에서 지도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성령의 사람으로 바울이 자기보다 낫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길리기아의 다소에 가서 바울 사도를 모셔옵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자신을 망각한 채 오직 그리스도께서 윗자리를 차지하도록 하는 일을 실천적으로 수행합니다.
또 바나바는 교회의 증대, 곧 그리스도로 충만하고 그리스도의 것으로 자라가도록 온 마음을 쏟습니다. 또 바나바는 복음의 번영과 성과로만 만족합니다.
그러므로 바나바는 바울이 와서 자신의 것을 모두 빼앗아 간다해도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영광이 되는 일이기에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역사선상에 있었던 개혁주의자들의 정신이었습니다.
2. 본문 26절은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입니다.
1) 여기서는 경건한 협력에 하나님의 복이 따른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리스도인\' 이라는 거룩한 명칭이 그곳에서 유래되어 온 세상에 퍼지게 된 것은 결코 평범한 영예가 아닙니다.
이것은 주께서 주체적으로 곧 주의 성령으로 역사 하신 성령의 열매입니다.
이것은 주께서 친히 끌어올려 놓으신 결과로서 영예로운 자리입니다.
중요한 것은 주께서 친히 주체가 되셔서 자기 지체 중에 하나라도 낙오시키지 않고 함게 끌어올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이때에도 사도와 전도자들과 일반 성도들이 한가지로 주의 은총을 입습니다. 그러니까 말씀을 정직하게 전하고 받는 일이 교회의 영원한 복으로 설정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2) 사도들이 비록 예루살렘에서 그처럼 오래 가르쳤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곳에 있는 교회가 이 뛰어난 그의 아들의 명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으로 생각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이곳 안디옥 지역 사람들이 이 명칭을 받게 된 것은 많은 숫자의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안디옥에서 한 몸을 이루었거나 평화로운 분위기에서 교회를 세울 수 있는 좋은 기회가 허용되었거나 아니면 그들의 신앙을 공개적으로 고백하는 용기가 그들에게 있었거나 세 가지 이유 중에서 하나일 것입니다.
물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에 이전부터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은 그리스도교가 처음으로 흘러나온 실제적인 원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실제 모습이 공공연하게 호칭되기 시작함으로서 이 명칭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더욱 뚜렷하게 드러내는데 공헌하게 된 것은 이렇게 함으로서 이 전체 종교가 그리스도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안디옥에서부터 그리스도께서 그의 이름을 깃발처럼 휘날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결과 그리스도를 지도자로 모시고 살며 그리스도의 명칭을 자랑으로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온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안디옥 시에 큰 영예입니다.
3) 그런데 로마에 그처럼 뽐낼 만한 구실이 있다 하더라도 교황과 그의 하수인들의 오만불손한 허풍을 누가 참아 줄 수 있을 것입니까?
그들은 로마가 모든 교회의 어머니요 우두머리라고 호통을 칠 것입니다.
그러나 그처럼 모든 것을 자신들의 것으로 자화자찬하는 그들이지만 속속들이 파보면 완전히 텅 비어 있다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시 자체는 한곳의 상황이 영원할 수 없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줍니다.
설령 우리가 로마 교황청의 \'우리는 과거에도 존재하고 있었다\'는 그럴듯한 주장을 인정한다 합시다.
그러나 그들에게 안디옥에 있던 것이 절반이라도 있습니까?
4)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라는 명칭이 안디옥에서 유래되었다 해서 그 도시가 오늘날 더 나은 점이 하나라도 있습니까? 천만의 말씀입니다.
오히려 그 도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처벌을 보여주는 깨끗한 거울 노릇을 할 뿐입니다.
그곳에는 오늘날 흉측한 폐허 밖에 더 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막강한 손에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또 배은망덕한 자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을 모독하고 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칠 정도로 면허장이 주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겠습니다.
행11:27-30 그때에 선지자들이
본문은 안디옥 교회가 물질적으로 예루살렘 교회를 돕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영적으로 예루살렘 교회의 혜택을 입었으니 만큼(22절) 이제 물질적으로 보답하는 신의(信誼)를 보이게 되었습니다. 기독 신자들이 영적으로 혹은 물질적으로 서로 교통함이 그들의 생활에 중요한 한 방면입니다.
사도 신경에 있는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이란 것은 공허한 관념만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의 추상도 아닙니다. 성도들이 영적으로든지 물질적으로든지 주기도 하며 받기도 하며 힘있는대로 서로 돕는데서 성도들의 교통이란 것이 구체화하는 법입니다.
1. 본문 27절은 \"그때에 선지자들이 예루살렘에서 안디옥에 이르니\" 입니다.
안디옥 교인들이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교회의 궁핍을 덜어주기 위해 자신들의 재산을 정성껏 사용했으며 그것도 아무런 청탁이 없이 그랬다는 사실은 안디옥 교회의 신앙에 대한 칭찬입니다.
형제들에 대한 그들의 그처럼 간절한 관심은 그들이 얼마나 그리스도를 모두의 머리로 경외하고 있었는가 하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유명한 사람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그곳에 찾아왔다는 말씀은 안디옥 교회가 당시 널리 알려져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해 줍니다.
고린도전서에서처럼 신약에 나오는 \'선지자\'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의미로 쓰입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오는 선지자라는 사람들도 후에 똑같은 명칭으로 나오는 빌립의 네 딸과 마찬가지로(행21:9) 앞을 내다보는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들이었습니다.
장차 일에 대한 예언이 여기서는 아가보 한 사람에게만 있던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그 은사가 어느 정도 그들 각자에게 허용된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2. 본문 28절은 \"그 중에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입니다.
1) 본문 중간에 \"성령으로 말하되\"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이 예언의 원천이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이것이 별이나 기타 자연의 징조를 보고 추측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우리에게 알게 합니다.
그러므로 아가보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추론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은밀한 영감에 따라 하나님께서 미리 작정하신 사항을 공포한 것입니다.
물론 별의 위치를 보고 기근을 점칠 수 있는 경우도 더러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에 확실성이 없는 것은 더러는 모순된 배열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러는 하나님께서 인간들이 별을 보고 추론할 수 있는 이상의 수준의 자기 뜻에 따라 지상 생활을 지도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이렇게 하신 것은 별을 보고 판단하는 일을 버리게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이러한 예언이 맞아들어 가는 경우가 있다 해도 성령의 예언은 훨씬 능가합니다.
그러나 기근에 대한 예언은 아주 절망적인 것이요 바람직하지 않은 것처럼 보입니다.
아직 때가 되기도 전에 흉측한 사건을 예언함으로서 백성들을 비참하게 하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과 죄악에 대한 응당한 보응의 위험이 있을 경우 인간들이 사전에 그것에 대한 경고를 받는 것은 여러 가지 면에서 유익하다고 대답하겠습니다.
그 밖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첫째 인간들로 하여금 제 정신을 차릴 기회를 허용함으로서 그의 진노를 자초하고 있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심판을 예상하도록 합니다.
둘째 신실한 자들에게 사전에 경고를 주어 그들이 인내하는 자세를 갖추게 합니다.
셋째 불경건한 자들의 악의가 꺾입니다.
넷째 악한 자와 마찬가지로 선한 자들 역시 재앙과 불행은 우연히 닥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에 보복하실 때 내리는 처벌이라는 점을 알게 합니다.
다섯째 자신들의 잘못에도 불구하고 기고만장해 하는 자들로 하여금 그들의 무감각 중에서 일어나도록 하는데 그 의의가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예언의 가치는 문맥에 여실히 드러나 있는데 그것은 안디옥 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궁핍한 형제들에게 도움을 주도록 자극하는데 있었습니다.
2) 본문 끝 부분에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 는 말씀이 있습니다.
수에토니우스(Suetonius)도 이 기근을 언급하면서 공공연한 장소에서 글라우디오의 머리에 빵 조각이 날라 들어왔으며 그는 돌에 맞아 죽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의 전 생애에 걸쳐서 식량 공급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그의 \'고대사\'(Antiquities) 제15권에서 유대지방에 심한 기근이 든 것은 계속적인 가뭄 때문이었다는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 본문 29절은 \"제자들이 각각 그 힘대로 유대에 사는 형제들에게 부조를 보내기로 작정하고\" 입니다.
1) 그러나 여기서 문제가 제기됩니다. 불행을 당하기는 모두 마찬가지였는데 왜 다른 사람들은 제쳐두고 한 곳의 사람에게만 도움을 베풀었을까?
우리의 대답은 이것입니다.
첫째 유대나라는 무수한 전쟁과 기타 여러 가지 재앙을 통해서 고갈될 대로 고갈되어 있었으므로 안디옥 사람들은 그곳 형제들의 불행에 더 아픔을 느꼈습니다.
둘째 그곳에 있는 원수들이 그들에게 더욱 더 가혹하게 공격을 펴기 때문에 그들의 상황은 날로 어렵게 되어 갔습니다.
세째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특별히 유대인들이 궁핍하게 되었는데 이 문제에 대해서 나머지 모든 교회가 진지한 관심을 표했으며 결코 가볍게 넘기지 않았다는 점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디옥 사람들은 그들에게 복음을 전해 준 형제들이 자기들의 노력으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에서 그들의 감사하는 마음은 크게 칭찬을 받습니다 사실 영적인 씨앗을 뿌린 자들이 물질의 복을 수확으로 거두는 것보다 더 공정한 것도 없습니다.
각자는 자신의 공급에 급급기 마련이므로 이런 경우 그들 각자는 \"왜 내가 나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라고 하는 질문을 충분히 제기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이 형제들에게 신세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깨닫고서 그러한 무절제한 불안을 물리치고 그들에게 도움을 베푸는 쪽으로 기울고 있습니다.
안디옥 교인들은 궁핍한 형제들에게 사랑의 의무를 수행했을 뿐 아니라 복음의 본원지에 영예를 돌림으로서 그들이 복음에 대해 가지는 큰 가치성을 입증했다는 점에서 이 구호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2) 본문 초두에 \"각각 그 힘대로\"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바울의 규정을 그대로 따르고 있습니다(고후8:3).
물론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 그들이 바울 사도의 지시를 이미 알고 있었는지는 확실히 말할 수 없습니다.
한가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은 바울 사도가 두 곳에서 다 철저히 가르쳤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지켜야 할 원칙은 각자가 자기에게 있는 재산을 자세히 살피고 마치 결산보고를 하는 사람의 입장에서와 마찬가지로 형제들과 친절하게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가난한 사람도 후한 마음으로 주게 되며 조그만 선물이라도 풍요하고 호화로운 희생으로 보일 것입니다.
\'작정하고\' 라는 단어가 사용되는데 이것은 그들의 부조가 자발적이었다는 뜻입니다.
바울이 가르치고 있듯이 우리는 억지로 마지못해서가 아니라 즐거운 마음으로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에게 우리의 손을 뻗치는 것이 마땅합니다(고후9:7).
또 각 개인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서로 상대방에게 일정한 법칙을 부과하거나 자기들의 고집으로 서로에게 부담이 되지 않고 각 개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내야 할 것을 결정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또한 (디아코니아 ; 부조 또는 봉사) 라는 단어에서 부자들에게 더 많은 재물이 허락된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위임하신 청지기 직분에 따라서 그들이 가난한 자들에게 봉사자가 되도록 하는 조건 밑에서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지막으로는 이 복이 모든 백성들이 아니라 믿음의 권속에 속한 사람들에게만 보내진 것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 불신자들은 항상 우리의 친절과 자비에서 예외여야 하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사랑은 온 인류에게 미치는 것이 당연합니다.
이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다 밀접하고 거룩한 띠로 묶어 주시는 자들에게 우선권을 두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4. 본문 30절은 \"이를 실행하여 바나바와 사울의 손으로 장로들에게 보내니라\" 입니다
여기서는 두 가지 사항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안디옥 교회는 그들의 의연금을 가지고 가는데 있어서 신임할 만하며 정직성이 입증된 자들을 선발했습니다.
둘째 그들은 그것을 현명하게 분배할 \'장로들\'에게 보냈습니다.
만약 구호품이 오합지졸의 군중에게 내맡겨진다면 그래서 개인이 마치 거저 주워담을 수 있는 노략물과 같이 된다면 가장 힘센 자 틈에 궁핍한 자는 밀리게 될 것입니다.
오히려 힘센 자들의 탐욕은 다 죽어 가는 자들의 목을 자르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실성과 신뢰성에 대해서만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사람 선발과 전체 운영 면에도 일정한 질서와 분별력이 요구된다는 이 구절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릅시다.
\'장로들\' 은 교회의 통치를 맡은 자들에 대한 명칭이요 사도들의 지위는 이들보다 앞섰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가난한 자들을 위해 모은 돈을 그들의 판단을 보고 맡기고 있습니다. 그러나 혹 사도들이 그들은 동시에 식탁 봉사와 가르치는 수고를 다할 수 없다고 말함으로서 이 임무를 집사들에게 맡기지 않았는가 라고 질문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합니다
물론 집사들이 식탁 업무를 맡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장로들 밑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장로들의 권위를 무시하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 12장 강해
행12:1-5 그때에 헤롯왕이
본문은 헤롯왕이 교회를 박해한 일과 교회의 기도입니다.
1. 본문 1절은 \"그때에 헤롯 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박해가 헤롯의 조종에 따라 이어집니다.
우리가 본 대로 교회에 짧은 기간의 휴전이 허용된 것은 잠깐 숨을 돌리고 기력을 얻은 후에 다음 날 싸움에 임하는 군인들처럼 교회가 장래 일에 대한 새로운 용기를 회복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신실한 자들 역시 한 두 차례 전투를 마쳤다고 해서 영원한 평화를 스스로 기대하거나 퇴역 군인들처럼 스스로 면제를 구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주께서 기력을 회복할 잠깐동안의 시간을 허용하신다면, 그것으로 만족합시다.
이 헤롯은 부친에 의해서 살해당한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 아그립바 1세였습니다.
요세푸스는 아무데서고 그를 헤롯으로 부르지 않는데 아마 그 이유는 그의 형제 칼시스의 왕이 헤롯으로 불리웠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 사람이 교회를 괴롭히기 시작한 것은 종교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닙니다.
이러한 공공연한 구경거리를 통해서 평민의 환심을 사려는 속셈 때문입니다.
그러기 전에는 그 백성들이 헤롯에게 호감을 가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것은 독재자의 횡포에서 나온 짓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독재자들은 항상 평민들이 그들의 평화로운 지배를 교란시키진 않을까 하는 조바심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하지만 헤롯이 무고한 피를 쏟는 것은 흔히 교활한 왕들이 그러하듯이 백성들의 광기를 달래기 위해서 한 짓인지도 모릅니다.
이런 상황을 우리는 그럴듯한 구경거리를 위해서 베드로를 옥에 가뒀다는 사실을 누가의 기록에서 알 수 있습니다.
2. 본문 2절은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입니다.
여기서 의심할 수 없는 점은 이 미친 사람의 횡포가 하나님의 은밀한 능력에 따라 뒤로 미루어지고 제지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셔서 그의 양 무리를 보호하지 않으셨더라면 이 사람은 한두 사람을 죽이는 것으로 만족하거나 나머지 사람을 박해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헤롯으로서는 순교자의 더미를 쌓아올렸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원수들이 살기가 등등하지만 그들이 무서운 학살을 감행하지 않을 경우 그들의 자제력이나 너그러움 때문에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그의 양을 아끼시며 그 사람들 멋대로 행하는 것을 허용치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헤롯도 수 백 사람 아니 그 이상의 고문을 통해서 대중의 인기를 끄는 것을 주저할 정도로 인간적인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격정이 더 큰 권위에 의해서 제지되었으며 그 결과 그가 교회를 너무 과격하게 박해하지 못하게 되었다는 결론입니다.
야고보의 죽음은 어떤 반란이 일어날 때 그 주동자들을 처벌함으로서 일반 사람들에게 겁을 주는 경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죽음입니다.
그와 동시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인내심을 제공하신 다음에 그가 죽음을 당하게 허용하심으로서 그로 하여금 죽음에 있어서 용감하고 무적의 승리자로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독재자들이 무슨 계략을 꾸미든 주님께서는 그것을 향내나는 제사로 받으셔서 그의 복음의 신앙을 확증하십니다.
누가는 이 야고보를 \'요한의 형제\'로 말함으로서 그를 알패오의 아들과 구별합니다.
여기서 제3자, 곧 그리스도의 친척을 들고 나오는 사람이 있는데 그는 제자들 중에 한 사람에 불과 했으므로 우리는 두 사람 이상이 없었던 것으로 봅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싶으면 갈라디아서 제 2장을 참조하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와 알패오의 아들은 동일한 인물이요 그를 유대인들이 성전 꼭대기에서 밀쳐 떨어뜨렸으며 그의 죽음이 그처럼 크게 영향을 받은 것은 그의 성결에 대한 평판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3. 본문 3절은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 할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입니다.
여기서 헤롯이 미칠 듯이 교회를 박해하게 된 것은 모세의 율법에 대한 열성이나 복음에 대한 증오심 때문이 아니라 단지 자신의 개인적인 이득을 위해서였다는 점입니다.
백성들의 환심을 독차지하기 위해서 그는 끈질기게 그의 횡포를 고집합니다.
우리는 교회가 세상에서 공격을 받는데는 그 이유가 다양하다는 점을 깨닫습니다.
사실 비뚤어진 열성 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이 그들의 미신을 위해 머리를 싸매고 덤비며 무고한 피를 쏟으면서 그들의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는 일은 허다합니다.
그러나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인적인 이득에 끌리는 수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오래 전에 네로는 도시에 불이 나자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없었으며 미움을 사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네로는 수천 명의 신자들을 학살하는 교활한 방법을 통해서 그들의 환심을 사려고 했습니다. 아니 최소한 그들의 비난과 불평을 틀어 막으려 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자기에게 충성할 리 없는 백성들을 자기편으로 끌기 위해 헤롯은 그리스도인들이 마치 그들의 환심을 다시 사는 값이 되는 양 그들을 죽음에 내어 줍니다.
오늘날도 결코 상황이 변한 것은 아닙니다.
모두가 그리스도의 지체를 상대로 횡포를 부리지만 정작 미신에 흘린 사람은 극소수요 더러는 로마 카톨릭이란 적 그리스도에게 자신을 쓸만한 노예로 바치기도 하고 또는 수도사들과 일반 백성들의 맹렬한 환호성에 굴복하고 그것을 만족시켜 줄 뿐 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우리의 가련한 머리를 그들의 조소 앞에서 조아린다 해도 우리에게는 한가지 위로가 있으니 그것은 세상이 그처럼 수치스럽게 남용하는 우리의 피가 하나님에게는 귀한 것이요 더욱이 우리가 불경건한 자들에게 수치와 모욕을 당할수록 그만큼 하나님의 선하심은 우리를 저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4. 본문 4절은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 내고자 하더라\" 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마치 무덤에 갇힌 사람이나 다름없이 혼자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당시 그들은 밤낮을 4등분해서 각각 3시간으로 나누었으므로 헤롯은 군인들이 4명씩 4교대로 경계를 서도록 했습니다.
당장 처형치 않은 것은 유월절 잔칫날 사람 죽이는 것이 종교 범죄기 때문입니다.
헤롯이 기다린 것은 어떻게 할지 몰라서가 아니라 기회를 노리는 것 뿐 이었습니다.
사실 헤롯은 베드로가 죽는 광경이 더욱 더 장관이게끔 시간을 맞추고 있었습니다.
그 때 무수한 사람들이 사방에서 그 잔치를 위해 모여 들었기 때문입니다.
5. 본문 5절은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입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신실한 자들은 그들의 임무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입니다. 베드로는 사실 전투가 치열한 최전방에 홀로 서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그 시각에 기도로 싸움으로서 할 수 있는 한 최대의 지원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목숨을 내걸고 고난을 받고 있는 명분을 변호하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을 기도로 입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들의 영혼이 절망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베드로와 그들 가운데 함께 계시고 사실상 그들과 베드로 앞서 계신 총사령관 때문입니다. 항상 이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이 구절은 무엇보다도 우리의 형제들이 그들의 복음 증거 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의 공격을 받는 것을 볼 때마다 어떠한 마음 가짐을 가져야 하는가를 가르쳐 줍니다.
만약 우리들이 그들의 위험을 보고도 속수무책이거나 불안한 마음을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그들에게서 우리의 사랑의 본분을 기만할 뿐 아니라 우리 자신의 신앙고백을 반역적으로 포기하고 마는 셈입니다.
우리의 명분이 그들의 것과 동일할 경우 더욱이 그들이 우리의 안전을 위해 싸우고 있을 경우 우리가 그런 태도를 취하고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실족시키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자신과 그리스도를 실족시키고 있는 셈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취급받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보통 이상의 적극적인 마음 가짐으로 기도에 착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형제들 가운데는 유리하는 생활을 하며 더없이 고생을 하는가 하면 착고에 채워져 더러운 구덩이에 처 박혀 있는 사람도 있으며 수많은 사람은 질질 끌려 장작더미의 불길로 사라지기도 합니다.
날마다 더 장기간에 걸쳐서 모든 고문을 가하는 새로운 도구가 계속 고안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러한 판국에 최소한 기도하고 싶은 마음마저 없다면 우리는 짐승만도 못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박해가 일어날 때마다 우리는 기도에 전념해야 됩니다.
그리고 교회가 베드로의 생명에 대해서 더욱 더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교회가 당할 손실이 너무 켰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누가는 그들의 기도가 간절했다고 곧 계속적이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신실한 자들이 무관심하게 되는 대로 기도한 것이 아니라 베드로가 전투를 하고 있는 동안 내내 그들도 낙심하지 않고 최대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성경에 기도가 언급될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이 분명히 따르고 있습니다.
기도가 오직 하나님께만 지향한다는 사실은 신앙의 기초원리 가운데 하나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시50:15)하는 말씀으로 이 특별한 예배의 행위를 자신의 것으로 요청하고 있는 그대로입니다.
행12:6-11 헤롯이 잡아내려고
본문은 베드로 사도가 천사로 말미암아 석방된 내용입니다.
1. 본문 6절은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군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입니다.
1) 본문 초두에 \"헤롯이 잡아 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베드로의 처형 날자가 이미 확정되었고 그것도 단 하루 밤을 앞에 두고 있었다는 점을 생각할 때 교회의 기도는 얼핏 결과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에게 도움을 베푸시기로 작정하실 경우에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가장 절박한 시간을 택하셔서 구출하는 여러 가지 방법을 가지고 계시다는 사실을 신실한 자들은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기도하는 일을 중단하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들이 이처럼 기도를 쏟은 것은 베드로의 생명을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주께서 베드로에게 복음의 영광에 대한 무적의 용기를 부어 주실 것을 간구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의 못된 짓에 그의 아들의 복음을 매도(賣渡)하지 말아 주실 것을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2) 본문 중반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야 누워 자는데\"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 모든 상세한 내용은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을 더욱 더 완전하게 드러냅니다.
어느 누가 베드로는 이미 죽음에 삼킨 바 된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겠습니까?
그가 비록 숨은 쉬고 있었지만 그는 자기 목숨을 끊으려는 만반의 준비를 갖춘 무수한 사람들 틈에 끼워 있었으며 도망갈 구멍은커녕 갈라진 틈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가 죽음의 벌판에서 그의 처형자들을 옆에 두고 고스란히 빠져 나오며 그의 쇠고랑이 저절로 녹아 버리며 쇠창문이 저절로 열리는 이 모든 사건은 이 구출의 기원이 참으로 신적인 것이라는 점을 여실히 보여줍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징조를 통해서 가르침을 받은 것은 그에게 시기적절한 것이었습니다. 후에 베드로는 이런 방법으로 알려지게 된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들에게 더욱 더 확실하게 전파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러한 엄격한 감금은 헤롯에게 베드로를 살려줄 의사가 전혀 없었다는 점을 여실히 입증합니다.
2. 본문 7-8절은 \"(7)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 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8) 천사가 가로되 띠를 띠고 신을 들메라 하거늘 베드로가 그대로 하니 천사가 또 가 로되 겉옷을 입고 따라 오라 한 대\" 입니다.
이 광채는 베드로 혼자만 보았으며 군인들은 잠들어 있거나 의식이 없었기에 아무것도 깨닫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광채를 빛나게 하신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하나는 베드로가 그 빛을 이용해서 어둠 속을 헤쳐 나가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그것이 베드로에게 하늘의 영광에 대한 상징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천사들은 대낮에도 광채를 입고 나타나는 것으로 성경에 기록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틀림없이 베드로는 이 비상한 광채에서 하나님의 임재를 깨달았어야 합니다.
그와 동시에 이것을 자신에게 유익하게 선용했어야 합니다.
천사는 베드로의 옆구리를 툭툭 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자신의 백성이 잠자고 있는 동안 지켜 보시며 그들이 나른할 때 정신을 차리게 하시는 하나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가 하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계속적인 기도 때문에 우리를 지켜보실 뿐이라면 이보다 우리에게 더 비참한 노릇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연약한 육신 때문에 넘어지며 우리의 마음이 다른 데가 있으며 하나님을 찾고 있지 않을 바로 그때 우리에게는 그분이 가장 절실히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수면이 단 일종의 죽음의 모습으로서 이것은 우리의 감각을 둔하게 합니다.
우리가 잠들어 있는 동안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러나 신자들은 그들이 잠들기 전에 하나님께 그들의 안전을 위임하기 때문에 그들의 수면 역시 하나님께 부르짖습니다.
천사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베드로의 \'쇠사슬\'이 벗어지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든 길이 완전 봉쇄되어 있는 것만 같은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명령 한 마디면 그 어떠한 장애물도 제거된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온 세상이 무장을 갖추고 있다 해도 하나님께서 전쟁의 소용돌이를 잔잔케 하실 의사가 있으시다면 즉각 모든 창검이 그들의 손에서 떨어지고 말 것입니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죄악에 대해서 전쟁으로 보복하시고자 하신다면 전에 평화에 전념하던 자들도 순식간에 마음이 돌변해서 마음이 강퍅해지고 칼을 잡을 것입니다.
누가는 천사의 말 한마디 한마디와 거기에 따르는 사건 하나 하나를 기록함으로서 이 이야기의 확실성을 보여 줍니다.
그 결과 어느 모로 보나 베드로가 하나님에게 구출되었다는 사실이 명백하게 보이도록 합니다.
3. 본문 9절은 \"베드로가 나와서 따라 갈새 천사의 하는 것이 참인 줄 알지 못하고 환상을 보는가 하니라\" 입니다.
베드로는 그것을 사탄이 인간을 속이는 환영과 같은 것으로 보지는 않았습니다.
여기서 \'참\'이라는 말은 자연스럽고 인간의 수준에서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실제적인 사건과 환상을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베드로는 그것이 비록 환상이지만 즉각 순종하는 사람입니다.
베드로가 천사의 명령만 듣고도 거기에 이의를 제시함이 없이 천사의 명령을 따랐다는 점에서 그의 순종이 입증됩니다.
4. 본문 10절은 \"이에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성으로 통한 쇠문에 이르니 문이 절로 열리는지라 나와 한 거리를 지나매 천사가 곧 떠나더라\"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를 단숨에 구해내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차례 차례로 그 많은 난관을 제거함으로 그 기적의 영광을 더욱 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엿새 동안에 창조하신 것은 그에게 그만한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그의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도록 하려는 뜻에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행동하시는 방법을 우리 수준과 우리 신앙의 발전에 맞게 적응하십니다.
베드로가 만약 감옥에서 형제들이 함께 모여 있던 집으로 단번에 옮겨졌다 해도 단번의 구출이 당시에 인정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베드로가 열 번도 더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마치 우리 눈으로 직접 보듯이 이해합니다.
5. 본문 11절은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입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예상 밖의 돌발사건으로 \'정신이 나갔었는데\' 이제 \'제 정신이 들었다\' 는 말입니다.
베드로는 황홀경에서 벗어난 사람처럼 그자기 죽음에서 낚아 채내어졌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베드로의 말에는 감사의 행위가 담겨 있습니다.
베드로는 다른 증거를 찾기 전에 자기가 체험한 하나님의 복을 스스로 찬양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천사가 하나님의 파송을 받았다는 사실을 경건한 자들의 수준에 맞추어 말하고 있는데 경건한 사람들은 천사들이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자신들의 안전을 돌보는 종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한 확신이 베드로의 마음에 확고하게 자리를 잡고 있지 않았더라면 베드로는 천사를 언급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베드로는 천사를 이 은총의 임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찬양을 하나님께만 돌리고 있습니다.
사실 천사가 우리에게 도움을 베풀 경우 결코 하나님의 영광의 가장 작은 부분일망정 자신들의 것으로 취하려는 의사가 그 천사들에게는 없습니다.
베드로는 자기가 \'헤롯의 손에서\' 구출되었다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서 그의 원수의 능력과 비교해서 하나님의 복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원수의 숫자가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자기의 종에 대한 은총은 그만큼 뛰어나기 마련입니다.
하나님께서 편들어 주시기 때문에 온 세상의 적의와 악의가 완전히 무(無)로 돌아가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닙니다.
행12:12-19 깨닫고 마가라 하는
본문은 먼저 베드로 사도가 마가의 집에 가서 자초지종을 말한 뒤에 거기서 떠났다는 내용입니다.
다음은 헤롯왕이 파숫꾼들을 죽이라고 명한 내용입니다.
1. 본문 12절은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입니다.
분명히 이 여자는 특출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그녀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과 같았으며 그곳에서 형제들의 집회가 열리곤 했습니다.
그런데 누가가 그곳에 \'여러 사람이 모여\' 라고 기록하는 것은 그들이 한 시간에 모두 모이려면 거기에는 시끄러운 문제가 따랐으며 그러므로 그들은 편리한 대로 그 도시의 여러 곳에서 모임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다른 곳에서도 모인 사람들이 있었다는 점을 의심할 수 없는 것은 그렇게 많은 신자들이 기도하고 있는데 사도들도 같은 임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한 집에 그렇게 많은 군중이 모일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우리는 원수들이 살기등등해 하고 있었는데도 경건한 자들은 여전히 함께 모이고 있었다는 점을 항상 명심해야 됩니다.
이 단련이 평상시에도 유익하지만 무서운 투쟁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에는 그것이 더욱 더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2. 본문 13-14절은 \"(13) 베드로가 대문을 두드린대 로데라 하는 계집아이가 영접하러 나왔다가
(14) 베드로의 음성인 줄 알고 기뻐하여 문을 미처 열지 못하고 달려 들어가 말하되 베드로가 대문 밖에 섰더라 하니\" 입니다.
베드로의 도착을 알리는 소녀를 보고 미쳤다고 말하는 그들이 태도에서 우리는 그들이 베드로의 구출을 예상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이 기도한 것으로 볼 수 없는 것은 그들이 기대한 것은 다른 결과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하늘의 능력으로 무장되어 살거나 죽거나 그리스도의 이름에 영광을 돌릴 각오를 갖추며 양떼들이 갑작스런 이리떼들의 돌격에 놀라 뿔뿔이 흩어지는 일이 없도록 하고 연약한 자들이 넘어지지 않으며 주님께서 박해의 폭풍을 가라앉혀 주실 것을 위해 기도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에 따라 그들의 기도를 능가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들이 바라던 바 이상의 것을 허용하신 것입니다.
사실 그 일은 그들에게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라서 그들은 더욱 더 하나님께 찬양을 돌리고 있습니다.
3. 본문 15-16절은 \"(15) 저희가 말하되 네가 미쳤다 하나 계집아이는 힘써 말하되 참 말이라 하니 저희가 말하되 그러면 그의 천사라 하더라
(16) 베드로가 문 두드리기를 그치지 아니하니 저희가 문을 열어 베드로를 보고 놀라는 지라\" 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베드로의 수호자로 임명하셔서 그의 안전을 돌보게 하신 천사를 가리켜 \'그의 천사\' 로 부릅니다.
\"소작들의 천사들이 항상 아버지의 얼굴을 뵈옵느니라\"(마18:10)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런 의미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여기서 각 개인에게 개별적인 천사가 할당되어 있어서 인간들을 돌보고 있다고 추론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너무 근거가 박약한 소리입니다.
성경에 보면 한 민족을 상대로 한 천사가 허용되는가 하면(출14:19) 또 어떤 경우에는 단 한사람에게 부지기수의 천사들이 허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면 엘리사의 종의 눈이 열렸을 때 그는 이 선지자를 안전하게 보호하기 위해 수많은 불병거가 하늘에 정렬하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왕하6:17).
다니엘서에서는 페르샤 민족과 헬라민족 각자에게 한 천사가 지명됩니다(10:13, 20).
그리고 성경은 각자에게 특유한 천사가 지목되어 있는 것으로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의 천사들에게 각 신자들을 보호할 것과(시91:11) 경건한 자들 주위에 장막을 칠 것을 명령하시는 것으로(시34:7)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 요정이 둘씩 딸려 있다는 통념은 사악한 조작입니다.
우리로서는 하늘의 전 대군이 교회의 안전을 보살피고 있으며 경우에 따라서 한 천사나 여러 천사가 우리에게 그들의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신령한 광채의 햇살인 천사들이 우리의 종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우리는 그의 무한한 선하심을 확신하게 됩니다.
4. 본문 17절은 \"베드로가 저희에게 손짓하여 종용하게 하고 주께서 자기를 이끌어 옥에서 나오게 하던 일을 말하고 또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가니라\" 입니다.
여기서 \'형제들\' 은 교회의 일반성도 모두가 아니라 사도들과 장로들입니다.
물론 그 기적이 모두에게 알려질 필요가 있었지만 베드로가 이 소식을 그의 동료들에게 전함으로 그들을 특별히 존대하고자 한 것은 아주 적절한 일이었습니다.
유세비우스 이후 교회사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 \'야고보\'가 제자들 가운데 하나였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그를 교회의 세 기둥가운데 포함시키고 있기 때문에(갈2:9) 우리는 사도들이 뒤로 쳐지고 일개 제자가 그런 영광을 받은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사람이 그의 성결성 때문에 당시 유대인들에게 큰 칭송의 대상이었던 알페오의 아들 야고보였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베드로가 이 즐거운 소식이 형제들에게 전달되기를 바라는 이유는 두 가지였습니다. 그 하나는 그들을 괴롭히고 있는 불안을 제거하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그러한 하나님이 뛰어난 은총의 본보기를 통해서 그들이 더욱 더 확신을 얻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다른 곳\' 으로 떠난 이유를 우리는 이렇게 봅니다.
곧 그 집은 신실한 자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서 잘 알려져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다른 곳에서 덜 위험하게 숨어 있을 생각으로 떠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들의 원수에게 들키지 않을 곳을 찾아 나섬으로서 자기 자신 뿐 아니라 집 주인과 다른 사람들까지 안전하게 지내는 길을 택하고 있습니다.
5. 본문 18절은 \"날이 새매 군사들은 베드로가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여 적지않게 소동하니\" 입니다.
여기서는 헤롯과 군인들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이 크게 당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씀합니다. 그들은 베드로가 폭력으로 그들에게서 낚아 채 졌다거나 그가 무슨 계략을 부려서 도망한 것으로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헤롯은 그 후에 심판관의 입장에서 이 문제를 조사합니다.
그러나 군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자 그도 역시 하나님의 구출에 대한 증인이 되는 것을 말할 길이 없었습니다.
6. 본문 19절은 \"헤롯이 그를 찾아도 보지 못하매 파수군들을 심문하고 죽이라 명하니라 헤롯이 유대를 떠나 가이사랴로 내려가서 거하니라\" 입니다.
헤롯은 군인들이 자기 눈에서 사라질 것을 명하거나 또는 감옥에 도로 집어 넣을 것을 명령하고 있는데 우리는 여기서 그들의 충성과 근면이 입증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만약에 근무 태만의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였다면 거기에는 즉각 처벌이 따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헤롯이 그들을 풀어주지 않은 것은 사악한 분노에 그의 독재자로서의 횡포 뿐 아니라 수치심이 뒤섞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헤롯이 그들을 당장 데려다가 처형하기를 바랐다는 식으로 다른 해석을 내리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헤롯이 화가 나서 그들을 처형자에게 넘겨주었건 아니면 헤롯이 그들을 감옥에 집어넣는 것으로 만족했건 이것은 분명히 맹목성에 대한 뛰어난 예가 됩니다.
헤롯은 비록 눈을 꼭 감고 있었다 해도 하나님의 능력을 마땅히 깨달았어야 옳을 때에 전혀 감동을 받거나 누그러지기는 고사하고 옹고집의 악의로 하나님께 저항을 계속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사단이 불경건한 자들에게서 이해력을 박탈하는 좋은 예입니다.
그렇게 될 때 그들은 눈 뜬 장님이 되고 말며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이러한 무시무시한 무감각을 후려치심으로 자신과 교회에 대한 보복을 정당하게 처리하십니다.
행12:20-25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본문에서는 먼저 헤롯이 저주를 받아 충이 먹어서 죽은 사실에 대한 기록입니다.
다음은 하나님의 말씀은 왕성하고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으로 돌아옵니다.
1. 본문 20절은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 고로 일심으로 그에게 나아와 왕의 침소 맡은 신하 블라스도를 친하여 화목하기를 청한지라\" 입니다.
1) 교회의 원수들에게 기다리는 종말이 무엇이며 얼마나 하나님께서 교만을 싫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거울을 통해 보여주듯이 잘 보여 주고 있는 훌륭한 이야기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교만한 자들을 물리치신다는 점을 지적합니다(벧전5:5).
하나님께서는 이 헤롯을 통해 우리에게 이 점을 명백히 묘사해 주십니다.
사실 인간이 올바른 한계를 벗어날 정도로 날뛰다 보면 하나님과 맞부딪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홀로 탁월하기 위해서 모든 육신에게 침묵할 것을 명령하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한참 번성하는 그것으로 기고만장해 하던 이 왕의 교만을 그처럼 가혹하게 처벌하신다면 아무런 정당한 이유도 없이 우습게 날뛰는 일반 사람들에게야 무슨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더욱이 우리는 계속되는 이야기에 주목합니다.
곧 헤롯은 교회를 그처럼 잔인하게 괴롭힌 다음에도 만사 형통이었으며 배고파 죽어 가는 이웃 도시들을 자기 수중에 잡아 끌어 들여 벌벌 떨게 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불경건한 분노에 대한 보상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이것은 신실한 자들에게 심각한 유혹이었습니다.
경건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더 이상 관심이 없다는 의심을 하기 시작했을 것이요 이들은 이미 헤롯의 독재와 횡포가 승승장구하고 말 것이라는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도는 전혀 달랐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의 압제자를 높이 들어 올리신 것은 그를 더 세차게 내던져버리려는 의도에서였습니다.
그러므로 헤롯이 그처럼 뻐기던 그림자 같은 행복은 마치 잡아 먹으려고 살찌우게 하는 짐승이나 다름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교회의 흡혈귀 같은 원수들이 행운의 날개를 타고 날아다닙니다.
그렇지만 그것이 우리에게서 용기를 빼앗아 갈 아무런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그보다는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잠16:18)라고 하는 솔로몬의 격언을 마음에 새겨야겠습니다.
2) 본문 초두는 \"헤롯이 두로와 시돈 사람들을 대단히 노여워하나\" 는 말씀입니다.
복합분사 (뒤모마콘 ; 대단히 노여워하는)은 적의와 증오감을 표현합니다.
그러므로 헤롯은 이 두 도시를 상대로 공공연한 전쟁을 하고 있던 것이 아니라 그들 사이에 가 있는 금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야금야금 옭아내고 있었습니다.
데모스세네스(Demostbenes)의 말대로 자유 도시와 군주는 사이가 좋을 수 없습니다.
헤롯은 과격한 성질, 지독한 오만, 그리고 만족을 모르는 탐욕의 소유자였습니다.
두로와 시몬은 본래 부유한 도시요, 헤롯의 멍에 밑에 들어오지 않았던 도시인만큼 이 두 도시는 헤롯의 과격한 행동을 제어하는 장애물과 같았다는 사실이 틀림없습니다.
영광스러운 과거를 생각하고서 이 두 도시는 더욱 으시댔을 것입니다.
교만이 부(富)에서 생기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 두 도시가 교만 투성이였던 이유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둘 중에 하나를 바다의 여왕으로 부르며(23:8)그곳 상인을 임금으로 그곳 무역업자들을 총독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한 다른 곳에서 시돈의 교만은 재물에 기인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23:2).
그리고 그들은 처참한 재앙을 한 두 번 당한 것이 아니지만 그들의 유리한 입지조건은 그들의 도시를 곧 이전 상태로 회복시켜 주곤 했습니다.
이 결과 그들은 아그립바를 우습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아그립바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무시받던 사람이요 이름 없던 사람이며 쇠고랑을 차고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그는 그의 신하들을 잔인하게 다스렸기에 그의 이웃에 괴로운 존재였습니다.
3) 본문 중간은 \"저희 지방이 왕국에서 나는 양식을 쓰는고로\" 라는 말씀입니다.
헤롯은 두로와 시돈을 상대로 공공연한 전쟁을 해서 얻을 것이 없다는 것을 빤히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이 자기 왕국에서 식량을 수입해가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해서 그는 군대의 무력을 쓰지 않고도 그들의 목을 서서히 조이고 있었습니다.
이 두 도시의 영토는 좁았으며 그곳 땅은 박토였지만 인구는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배고픔에 시달리게 되자 그들은 고분고분하게 평화를 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대가가 따랐습니다.
그들에게 틀림없이 여러 가지 조건이 부과되었을 것이요 누가가 언급하는 블라스도 역시 상당한 뇌물을 받아 먹고 평화 협상의 증거 역할을 했을 것입니다.
에라스므스는 이 구절을 단어의 의미와 다르게 번역하는데 우리는 그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2. 본문 21-22절은 \"(21)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22)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입니다.
누가는 두로와 시돈 백성들에게 평화가 허용되었다는 점을 보고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힘입어 헤롯은 그들을 자기신하로 삼는 뜻에서 일장연설을 할 기회를 잡습니다
동일한 설명이 요세푸스의 <고대사> 제 19권에도 나옵니다.
다만 틀린 점이 있다면 누가는 그를 헤롯으로 부르지만 그는 아그립바로 부릅니다.
아그립바가 그의 본명이었고 그의 사생활 기간에는 바로 이 이름밖에 없었으나 왕권을 잡고 나서부터 조부의 이름을 사용함으로써 왕족의 권위를 찾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요세푸스와 누가는 실제 사건과 상세한 내용까지 놀랍게도 일치합니다.
먼저 장소에 대해서 그들은 일치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그의 의복이 황금으로 덧입혀 있어서 햇빛에 반사되어 눈을 부시게 했으며 이것 때문에 그의 신하들은 그들 하나의 신으로 칭송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갑자기 그에게 상처가 가해졌으며 그뿐 아니라 재앙의 전조인 올빼미가 그의 머리 위에 있는 끈에 앉아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그의 신성모독적인 오만이 이런 처벌을 자초했다는 점을 의심치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왕이 공공연하게 \"당신들이 신으로 존경하는 내 꼴을 보시오, 나의 비참한 말로를! \" 하고 부르짖은 소리를 기록함으로서 그가 처참한 고통을 당한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는 두로와 시돈 사람들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을 하지 않고 있지만 그가 이 오락을 씨이저의 이름으로 한 것으로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대로 이러한 오락은 평화가 체결될 경우에 행해지는 습관이었습니다.
3. 본문 23절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입니다.
1) 본문 초두는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고로\"라는 말씀입니다.
헤롯은 자신이 \'하나님\' 으로 호칭되는 것을 허용했을 뿐 아니라 자기를 망각하고 하나님께 합당한 영광을 자신에게 적용했다는 점에서 신성모독에 대한 정죄를 받습니다
이러한 칭찬은 바벨론 왕에게도 돌려지지 않았었습니다. 그러나 선지자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려 했다는 이유로 그를 비난합니다(사14:13, 14).
따라서 신성모독 죄는 교만한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들이 허용범위 이상으로 스스로를 추켜 올리는 가운데 하나님의 영광을 흐리게 하며 이렇게 함으로서 마치 거인들처럼 있는 힘을 다해 하나님을 그의 보좌에서 이끌어 내려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그들이 \'하나님\'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신들이라는 호언장담을 하지 않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을 횡령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나님을 자신들과 같은 수준으로 이끌어 내린다는 것은 자신들이 신이 되고자 하며 신처럼 취급받고자 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더욱이 이사야 선지자는 느부갓네살의 \"내가 하늘에 올라가겠다\"(사14:13)는 말을 소개함으로서 이 악의 근원을 한 마디로 꼬집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여기에 대한 유일한 처방책은 각자가 현재 놓여진 위치를 지키는 것입니다.
신분이 낮고 천한 사람들은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도록 합시다.
그리고 맨 위에 있는 왕들과 남들을 지배하는 모든 사람들은 그들 역시 유한한 인간이라는 점을 명심하고 그들의 오만을 겸손하게 하나님께 종속시키도록 합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속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시는데 인간들이 절반의 영광만 하나님께 돌리는 것은 옳지 않다는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의 완전한 겸손을 요구하시는데 일부만 드리는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지혜, 덕, 그리고 의에 대한 모든 공로를 모조리 부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영광의 가장 미미한 점 하나라도 자신의 것으로 횡령하는 자는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는 신성모독자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리고 성경은 자기를 추켜 올리는 모든 자들을 가리켜 하나님께 공개적으로 싸움을 거는 사람이라는 점을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역시 이런 일은 우리의 파멸을 가져올 뿐이라는 점을 모두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대다수의 인간들이 광포한 오만으로 스스로의 파멸의 길을 향해 곤두박질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입니다
각자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에 손을 대지 않고 고스란히 그대로 남겨 두는 자는 백에 하나도 없습니다.
2) 본문 중간에 \"곧 치니\"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천사가 베드로를 구출하는데 하나님의 종 노릇을 했듯이 여기서 이 천사는 헤롯에게 하나님의 재앙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처벌을 부과하는데서 하늘의 천사들을 이용하시기도 하고 또 때에 따라서는 마귀들을 형 집행자로 임명해서 그들의 손으로 그의 심판을 수행하게도 하십니다.
이것은 그의 선민이나 버림받은 자에게 상관없이 구별치 않고 적용됩니다.
사울이 사단에게 괴로움을 당한 적이 있는데(삼상16:14) 바로 동일한 사건이 거룩한 욥에게도 일어났습니다(욥1:11, 2:7).
시편에 보면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을 징계하는데 사용하시는 재앙이 악한 천사들의 손에 맡겨지고 있지만(78:49) 교회의 안전을 보호하는 천사가 에집트의 장자들을 후려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 경우 성경이 악령들을 하나님의 영으로 부르는 것은 그들이 마치 못해서일망정 그의 뜻에 굴복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처럼 \'악\' 자(字)가 붙지 않을 때는 하나님께 자발적으로 순종하는 천사로 보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요세푸스가 언급하는 올빼미의 상징은 그가 하늘의 천사가 아니라 마귀라는 점을 잘 나타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질병의 종류에 대해서 억측을 부리고 싶지 않습니다.
누가의 표현을 보자면 헤롯은 벌레 물려 죽은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병을 구데기의 감염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실 그의 생명이 붙어 있을 때도 그의 몸은 썩고 있으며 악취를 풍기고 있어서 말하자면 산 송장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가혹한 고통을 받고 있었을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조롱과 모욕의 대상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만한 한 인간의 광포를 말끔히 씻어 없애는데 아주 수치스러운 처벌을 선택하신 셈입니다.
만약에 헤롯이 강력한 군대를 만나 쓰러져 그처럼 가련하게 되었더라면 하나님의 심판이 그처럼 눈에 띄게 나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은 왕에게 어울리는 영광스러운 처벌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이와 구더기가 들꿇고 그의 몸에서 악취가 풍기는 그러한 처벌을 통해서 헤롯은 당연한 벌을 받고 있습니다.
바로 역시 하나님께 그처럼 수다하게 꺽이지 않는 교만으로 하나님께 대들었을 때 왕에게 어울리는 인근 왕들의 공격을 받은 것이 아니라 메뚜기와 \'뛰는 벌레들\'이 하나님의 군졸이 되어 그에게 싸움을 걸어왔습니다.
어떤 인간이 스스로 오만해질수록 하나님은 그를 그만큼 수치스럽게 저 아래로 내동댕이치고 마십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서는 이 거짓 신인 헤롯이 구데기에게 먹힌 바 되게 하며 마지막으로 \'당신들이 신으로 존경하는 내 꼴을 보시오, 나의 비참한 이 말로를! \' 하는 고백을 실토하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감히 정도 이상으로 오만을 부리지 않고 인간들의 독약과 같은 기만적인 칭찬과 아첨에 중독되지 않으려면 이 왕을 통해서 보여 주시는 무시무시한 처벌을 크게 두려워해야겠습니다.
4. 본문 24절은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더라\" 입니다.
독재자의 제거로 교회는 예상 밖으로 이리의 아가리에서 낚아 채내진 셈입니다.
그러므로 신실한 자들은 도살할 양 취급을 받지만(시44:22, 롬8:36) 교회는 항상 그 원수들을 능가하며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의 악한 독재에 의해서 거듭거듭 짓밟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곧 되살아나는 것입니다.
누가는 헤롯이 죽은 뒤에 되어진 일을 알려줄 뿐 아니라 이 본을 통해서 우리를 격려하려는 뜻에서 이 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당시에 행하신 일을 만대에 걸쳐서 되풀이하실 것이요 복음의 최종 과정은 원수들의 모든 장애물을 타파하고 통과하는 것이요 교회가 연약하면 연약할수록 그것은 하늘의 복을 받아 더 위대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로 하여금 확신하게 하고 있습니다.
5. 본문 25절은 \"바나바와 사울이 부조의 일을 마치고 마가라 하는 요한을 데리고 예루살렘에서 돌아오니라\" 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마쳤다는 봉사는 앞장에서 언급된 구제와 연관되어야 합니다.
아가보 선지자의 기근 예언에 따라 안디옥 교회 형제들이 예루살렘의 궁핍한 교회를 돕기 위해 돈을 모아서 바나바와 바울 편에 보냈습니다.
누가는 이들이 안디옥에 돌아 왔다는 점을 기록해서 새로운 이야기를 전개합니다.
여기에 마가라는 명칭을 가진 요한이 동반자로 다녀온 것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어머니는 앞에서 크게 칭찬을 받은 바 있습니다.
그러나 뒤에서 생각하겠지만 그는 후에 그들 사이에 심각하고 해를 끼치는 불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