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유 설교 31 편

제목 :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                                      

성경: 눅10:25-37

 

 

 

 성경에 기록된 많은 비유들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또 가장 많이 이용되는 비유가 탕자 비유나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 대한 비유이다.

 

  이 비유를 하게 된 동기는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는 질문으로 시작하여 (예수님께서는 율법 이상의 것을 가르치신다)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이 율법의 대강령임을 알고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묻는 율법사의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들은 이웃이란 자기들에게 필요한 사람 즉 혈연, 지연, 친구, 동족으로 제한하여 다른 사람은 이웃으로 치지 않고 이방 사람은 원수로 대했다. 그들은 원수를 미워하는 것이 합법적이라고 생각하였고 그래서 내 이웃이 누구인가? 이웃의 범위 혹은 이웃은 어디까지 한계를 그어야 하는가? 를 질문했고, 이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 비유이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예수님께서 영생을 얻으려면 율법을 완전히 행해야 한다거나 사람이 그 법을 완전하게 행할 수 있다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잘못은 율법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편에 있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 구원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율법을 뒤로 밀치고 내버리고 구원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을 도구로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다. 내 행위가 나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도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영생이 있는 자가 한다. 적극적으로 율법을 사랑하고 즐거워하며 이를 행한다. (야고보가 가르치는 교훈)

 

  이웃은 범위는 모든 사람이다. 유대인들이 사마리아인들에 대한 증오가 얼마나 불타고 있었는가? 그런 사마리아 사람을 들어서 유대인의 이웃이 누구냐고 예수님은 묻는다. 제사장, 레위인 포함하여 그는 스스로 대답했다. 자비를 베푼자라고.

 

 

  상처받은 인간은 타락이후의 아담의 상태를 비유한다고 본다. 인간성의 타락, 반죽음, 완전히 죽은 것이 아니고 치유의 가능성 시사하며, 선을 행할 능력이 완전히 사라진 것이 아니다.

 

  또 사마리아인을 그리스도로 본다. 포도주에 기름을 타 부어준 것은 우리를 회개와 은혜의 약속으로 주시기 때문이고, 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당장 회복시키시지 않고 주막집 즉 교회로 보내 점점 건강을 회복시키신다는 것을 볼수 있다. 예루살렘은 교회, 여리고는 세상, 강도는 마귀, 주막은 교회, 두 렙돈은 신구약 성경 등을 상징한다.

 

 

 

 

 

 

한 율법학자가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사람이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지를 물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에 무엇이라고 기록되었느냐? 고 반문하였습니다. 이에 그는 자신 있게 대답하였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이 대답은 그 율법사의 두 손목에 차고 다니는 작은 성구 말씀 상자 속에 들어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그대로 지켜 행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때, 율법사는 다시 질문하기를 내 이웃이 누구냐고 물었습니다.

 

이에 예수님은 누가 참 이웃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하여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통하여 우리에게 의미심장한 교훈을 주셨습니다. 이 비유를 통해 인간이 어떠한 자세로 살아가는 것이 아름다운 삶의 모습인가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1.참이웃은 누구인가?(눅10:29)

 

 

유대인들은 유난히 선택받은 자로서의 자부심이 강한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방인들에 대한 시각이 남달리 경시하는 풍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사마리아 여인이 길가에서 산기가 있어 격통으로 신음하면서 도움을 청해 온다고 하더라도 개 같은 이방인 하나가 더 태어나는 것을 돕는 일이 그들의 신앙에 위배된다는 편견에 사로잡혀 부정한 물건을 바라보듯 빠른 걸음으로 피하고 마는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웃은 유대인에 국한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웃이 누구냐? 는 질문에 대답하기 위하여 예수님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비유라기 보다 실제로 있었던 한 사건을 교훈으로 삼으셨는지도 모릅니다.

 

 

   사건이 일어난 배경은 여리고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00미터이며, 사해에서 가까운 여리고는 해면보다 400미터나 낮은 곳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여리고는 30Km거리에 낙차가 1,100미터가 됩니다. 마치 채석장같이 암석뿐인 광야에 터널처럼 좁게 나 있는 꾸불꾸불하며 급경사를 이룬 이 길에는 낮에도 강도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으로서 여행하는 자들에게는 위험한 길이었습니다. 여리고는  오아시스가 있어 각종 과일과 농산물이 풍요롭고 요단강 동편에서는 팔레스타인으로 통하는 군사 경계의 중요한 관문이어서 이 길은 강도 길로 악명 높은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길에서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죽도록 두들겨 맞아 거의 빈사 상태에 빠져 쓰러져 있었습니다.

 

잠시 후, 이 길을 혼자서 지나가던 한 제사장이 이 끔찍한 광경을 목격하였습니다. 그러나, 주변을 한번 두리번거리고 나서는 신음 소리를  뒤로하고 총총 걸음으로 지나가 버렸습니다.

 

또 잠시 후, 한 레위인이 이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반송장 같은 동포를 그대로 둔 채 지나쳐 버렸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과 레위인들에게 개 취급받는 사마리아 장사꾼이 이 길을 지나 가다가 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였습니다. 그 사마리아인은 그냥 지나쳐 가지 않았습니다. 나귀에서 내려 포도주와 기름으로 상처를 씻고 응급처치를  한 뒤 나귀에 태워 하룻길을 걸어서 도착한 여리고  주막에 도착하여 여관 주인에게 치료를 부탁합니다. 그리고 돈이  더들면  나중에 갚겠노라 하면서 돈을 주며 돌아 올 때까지 돌보아 주기를 부탁합니다.

 

 

 

이 사마리아 사람은 평범한 장사꾼으로서 그 여관 주인과 잘 아는 사이인 듯 합니다. 그리고 무조건 신용할 수 있는 사이인 것 같습니다. 그래서, 비용이 더 들면 나중에 갚겠다고 하여도 의심없이 믿어 주는 것 같습니다.  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은 보통 시장의 장사치입니다. 종교적 실천 의식이나, 윤리나 인도주의 같은 의무 의식에서 도운 것이 아닙니다. 민족 감정을 초월해서 사회문제를 해결해 보겠다고 외치는 의식이 뚜렷한 바탕에서 행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행동은 한 인간의 자연스런 인정에서 였던 것  같습니다. 도움이 구체적이고 실제적입니다. 적선한다는 타산도 없습니다. 손과 발과 몸으로 도왔습니다. 자기 시간을 쓰고, 마음을 쓰고,  자기  약과 자기 나귀를 써서 한 불행한 이웃의 몸의 고통과 생명의  고통을 도왔습니다. 남의 고통에 동참해 주는 자비를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그 일을  선전할 사람 같지는 않습니다. 그에게는 길에서 일어난 사소한 한 일이었을 뿐입니다. 너무도 인정이 메마르고 살벌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에게 주는 숙연한 교훈입니다.

 

 

기독교는 전도와 설교를 해야 되는 필요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 종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하면 말 잘하고 말 많이 하는 사람들의 대명사로 통합니다. 어딘지 까다롭게 비판하고 성난 사자들처럼 무섭습니다. 사랑과  정의가 기독교의 독점물인 양 말하나, 6.25 전쟁 고아들 수십만 명 가운데 미국 사람들이 양자 양녀 삼아 키우는 예는 있어도 한국 그리스도인들이 키우고 있는 수는 거의 없습니다. 참된 자비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주님은 \'누가 이웃입니까?\' 라고 물었던 율법사에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되물었습니다. 이에 그는 \'자비를 베푼 자 이니이다\'라고 대답하자 주님은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고 하셨습니다.

 

말로 사랑을 외치고 구별된 자로서 자부하던 제사장과  레위인은  마땅히 강도 만난 동포를 도와줄 의무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피하여  도망가고 말았습니다. (갈6:9-10)에서 \"선을 행하되 낙심치 말고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라\"고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오늘날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누구입니까? 그것은 사람들 앞에 드러나는 일에는 앞장서서 솔선하다가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선행은 하기를 꺼려하는 자들입니다. 다시 말해 외식하는 자들이 오늘날의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마6:2) 하나님 보다 사람들을 더 많이 의식하는 자들이 현대판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은밀한 선행을 기뻐하십니다.

  (마6:4)에 \"네 구제함이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가 갚으시리라\"

 

 

 

 

 

2.강도 만난 자는 누구인가?(눅10:31)

 

 

주님의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강도는 과연 누구일까요? 그것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인간들에게서 하나님의 축복과 사랑을 도적질하고 강탈해 가는 마귀를 말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온갖 마귀의 마음을 심어 놓고 사람들에게서 평강과 축복과 사랑을 빼앗아 가고 불안과 반목과 싸움과 분쟁을 야기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성도들의 싸움은  눈에 보이는 사람이나 현상들과의 싸움이 아니라 그 배후에서 조종하는  원인자인 사단과의 싸움인 것입니다. 그래서 (엡6:12)에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 정사와 권세와 어두움과 악한 영들과의 싸움\"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갑자기 강도를 만나 가진 것을 모두 다 빼앗기고 죽도록 두들겨 맞아 거반 빈사 상태에 빠져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죽어 버릴 수밖에  없는 사람은 누구일까요? 그것은 바로 사단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받은 온갖 좋은 생명과 축복들을 송두리째 빼앗기고 저주와 죽음으로 신음하고 있는 인생들인 것입니다.

 

 

 

 

 

3.선한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눅10:34-35)

 

 

  1)불쌍히 여기는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3)

 

강도를 만나 죽어 가는 사람을 일신상의 편의와 득실을 계산하는 이기주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고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지금 당장 도움을 주어야 사람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가진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 입니다. 바로 이같은 마음이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요, 자비를 베푸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인간으로서 꼭 필요한 기본적인 마음가짐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야기 속에서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개취급하는 사마리아인에게 이 아름다운 참 인간의 모습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자신들이야말로 짐승같은 인간들과는 질적으로 다른 그야말로 인간 중에서도 인간으로 자부하는 바로 그 유대 선민인 그들에게는 개보다 못한 비인간적인 비열함과 매정함이 흘러 넘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2)상처를 치료해 주는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4)

 

우리 크리스천은 이 세상의 신음하는 인생들의 상처를 찾아내어 소독하며 치료해 주는 사명을 주께로부터 받은 자들입니다. 이들의 생명을 구원하며, 고통과 아픔의 상처를 치료해 주는 일이라면 바쁘게 가던 길도 멈추고 도와 주어야 하는 자들입니다.

 

이미, 우리는 강도 만난 처치에 있었다가 선한 사마리아 사람으로부터 큰 도움을 받아 새 생명의 길을 지금 가고 있는 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빚진 자의 심정으로 제2의 사마리아인으로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이웃과 사회는 우리의 도움을 기다리며 신음하고 있음을 보아야 합니다.

 

 

 

  3)돈까지 지불해 주는 자가 선한 사마리아인입니다.(눅10:35)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위해 물질까지 아낌없이 기꺼이 베풀고 투자할 수 있는 자가 참 사마리아인의 길을 갈 수 있습니다.

 

 

                                 

제목 : 밤중에  찾아온 벗의 비유                                      

본문 : 눅-11-05-13                                      

 

 

 이 간단한 비유는 기도하면 반드시 주시는 하나님으로 계시하며, 이기적인 사람도 친구의 강청을 거절치 못하고 구한 바를 주고 악한 인간도 사랑하는 자들의 구함을 준다면 선하신 하나님께서, 사랑의 하나님께서 자기백성들의 간구를 안들어 주시겠느냐는 가르침이다.

 

  우리는 기도를 하기 전에 기도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생각해야 한다. 극히 양심적인 사람들은 하나님보다 자신만을 보고 부끄러워 기도조차 못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여기 \"강청\"이란 말은 파렴치란 뜻이다. 한밤중에 여간 파렴치한 사람이 아니면 떡을 빌리러 갈 수 없다. 그가 파렴치를 무릅쓰고 갈 수 있는 것은 그와의 관계 때문이다. 벗이란 관계, 충분히 파렴치한 행동도 이해하고 들어줄만한 관계이기 때문에 강청한 것이다.

 

 

  어떤 때는 우리 스스로 내가 구하는 것이 파렴치한 것이라 생각되어 간절히 구하지 못하는 때가 있으나 어차피 우리는 정당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가서 간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의 벗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를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당당히 나가게 된 것이지 우리 자신만 보면 하나님 앞에 파렴치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좋다거나 계속 파렴치하게 하란 말은 아니다. 기도하는데 있어서 어떤 점에서는 파렴치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낙심하여 기도를 못하지 말고 파렴치할지라도 계속 기도해야 하겠다.

 

  주님이 가르치신 비유의 교훈은 하나님 앞에 기도할 때는 자신이 부끄러울 정도로 끈질기게 기도하란 말씀이다.

 

  기도의 가장 중요한 점은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간절하게 드리는 것이다. 즉 기도의 대상에 대한 바른 깨달음을 가지고 그분께 어떻게 구하여야하며 얼마나 간절히 구하여야 할 것인가가 중요하다. 잘못된 대상에게 간절히 기도만 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창18장의 아브라함이나 마15:21 이하의 가나안 여인의 끈질김, 야곱의 얍복강변의 끈질긴 간구는 마침내 응답되었다.

 

 

 

 

 

 

 

 

 

어떻게 기도해야 할까?

 

 

 

 

 

눅11:5-13          

                                     

 

서    론

 

기도는 모든 기독교인들의 특권이요 공동 관심사다. 그래서 기도는 만사를 변화시킨다고도 한다. 기도에 대한 숱하게 많은 금언들이 있다. 그러나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구체적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냥 먼저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흉내내고 있을 뿐이다. 그런가 하면 어떤 기도는 기도인지 설교인지 웅변인지 구분이 안가는 기도도 있다. 모두가 정확한 기도의 원리가 없는 까닭이다.

 

본문에는 주님께서 \"기도는 이렇게 하여라\"하신 말씀이다.

 

 

 

 

 

I.간곡한 마음으로 해야 한다(5-8)

 

 

A.기도는 한 밤중에 친구에게 찾아가 도움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

 

한 밤중에 자기 집을 찾아온 친구가 있다면 대단히 반가울 것이다. 친구란 언제 만나고 언제 보아도 싫지 않은 상대다.

 

더군다나 먼 곳까지 오느라고 시장해 하는 친구라면 그를 위해서는 무엇이든 음식을 대접해야만 한다. 그러나 막상 내게는 대접할 것이 없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없다고 체념해 버린다거나, 귀찮다고 여기면 기도는 필요치가 않다.

 

저 친구는 이 늦은 밤중에 도착하도록 까지 나를 찾아왔는데 나는 저 친구를 위해서 무엇이든 답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있어야 기도는 시작된다.

 

그래서 내게는 없지만 나를 위해서 빌려 줄 만한 곳이 있다면 마다하지 않고 그곳을 찾아가는 것이 기도다.

 

그러나 순순히 내어 주지는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미 밤이 깊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람을 통해 a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몇 개의 관문을 거쳐야 한다.

 

 1)나를 귀찮게 하지 말라 - 현대인은 자신을 귀찮게 하면 우정을 끊는다.

 

 2)문을 잠갔고, 뿐만 아니라 잠자리에 들었다 - 과연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B.기도는 친구를 감동시키는 것과 같다.

 

친구라는 사이는 서로 스스럼이 없다. 흉허물없이 지내는 사이다. 만일 예의를 지키고 약점을 들춰내지 않는다면 친구는 아니다.

 

그러나 친구라는 막연한 관계보다 절박한 필요성의 호소는 오히려 우정 이상의 힘이 있다. 그래서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면\"이라고 했다.

 

즉 친구이니 대충 말하면 알아들을 것이라는 생각이라든가, 친구가 거절하니 더 이상 조르기가 곤란하다든지, 자존심이 상한다든지 하는 문제를 앞세우면 기도는 성립될 수 없다.

 

 

 

 

 

 II.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마음으로 해야 한다(9-10).

 

 

 

 A.적극적이어야 한다.

 

분명한 목표가 있어야 한다. 한 밤중에 자기 집에 찾아온 친구를 위해서는 먹을 음식이 필요하지 오락기구가 필요한 것은 아니다.

 

목표가 정해졌다면 찾아야 한다. 그래서 비유에 나오는 사람은 음식에 여유가 있는 친구의 집을 찾아갔다.

 

찾아간 것으로 그쳐서는 곤란하다. 열어 줄 때까지 두드려야 한다.

 

 

 

 B.배고픈 친구를 먹이려는 사랑이 필요하다.

 

자기 집에 찾아온 친구를 대접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찾아 헤매도록\"인도했다. 나의 문제가 \"찾아 헤매도록\"하고 있는가?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원리를 잘 기억해야 한다.

 

 

 

 

 

III.자녀와 아버지의 관계로 해야 한다(11-13).

 

 

A.기도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반드시 하나님의 자녀된 자라야 기도할 권리가 생긴다.

 

  1) 청산유수로 하는 말이 필요한 게 아니다.

 

  2) 얼마나 많이 아느냐는 지식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3) 오직 중생의 경험이 필요하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갈망이 필요하다.

 

아버지는 언제나 자녀를 먼저 생각한다.

 

  1) 아버지의 생각은 어떻게 하면 자녀를 잘 키울까 하는 생각뿐이다.

 

  2) 자녀가 요구하는 것이 꼭 필요한 것이라면 주고 싶어진다.

 

  3) 자녀가 기뻐하는 모습을 통해 생의 보람을 느낀다.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요, 아버지로서는 인정받는 기쁨이 있다. 이는 아버지의 보람이다.

 

 

 

B.우리는 성령을 구해야 한다.

 

응답 중의 가장 큰 응답은 \"성령\"이다.

 

  1)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하나님을 아버지라 인정할 수 없다.

 

  2) 성령께서 역사할 때라야 기도가 가능하다.

 

  3) 성령께서 역사해야 기쁨과 만족이 있다.

 

우리가 성령받지 못한다면 정욕으로 기도할 수밖에 없다. 잘못 구한 기도는 응답도 없고 혹시 응답을 받는다 하여도 모두에게 불행할 뿐이다.

 

 

 

 

 결   론

 

 

기도는 성도에게 주신 하나님의 특별은혜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

 

그러나 적당히 구하는 것은 기도가 아니다.

 

한 밤중에 나를 찾아온 친구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행동이 바로 응답받는 기도의 비결이다.

 

간절한 마음, 친구에 대한 사랑, 응답 받으려는 집념이 어우러질 때 응답이 주어진다.

 

 

 

 

 

 

                                 

제목 : 어리석은 부자 비유                                      

본문 : 누가복음12:16-21                              

 

 

 이 비유를 하시게 된 동기는 주님께서 말씀을 선포하시고 가르치시는 도중에 그 말씀을 가로막고 가족의 유산에 관한 논쟁의 중재자가 되어서 부당한 형을 명하여 유업을 나와 나누게 해 달라는 요청을 받고,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장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고 책망하시고 삼가 탐심을 물리치라고 하시면서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다고 가르치시고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는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이것을 모르고 비유에 나타난 부자와 같이 먹을 곡식만 많이 쌓아 놓으면 오랫동안 평안이 먹고 마시고 즐거웁게 살 줄로 아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1.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비그리스도인들도 인명은 재천이라 했다) 마6:25~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기르신다. 사람은 더 귀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더 귀하다. 이 세상에서 죽음은 참으로 다양하다. 먹을 것이 없어서 죽는 일은 많지 않다. 굶어 죽는 것도 그 사람의 생명이 다돼서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즉 기근, 흉년 등으로 죽게하는 것이다. 병으로 죽고 사고로 죽고 밥 잘먹고 갑자기 죽는 예도 허다하다. 없어서만 못먹는게 아니라 많이 쌓아두고도 못 먹고 죽는 예가 허다하다.

 

  결국 우리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셔야 사는 것이지 소유가 많아서 사는 것은 아니다. 이 진리를 잘 깨달으면 탐심을 물리칠 수가 있다.

 

 

  2. 인생의 행복도 소유의 넉넉한데 있는 것이 아니다. 가난해서 행복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행복하지 못한다. 행복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말미암아 그 심령이 기쁨이 있고 평안해야지 다른 것으로는 행복할 수 없다.

 

  이 부자는 물질을 많이 쌓아두었으니 마음껏 먹고 마시고 즐겁게 살 줄 알았으나 생명을 불러 가시니 그가 쌓아 놓은 것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부하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가난할 때는 부자만 되면 행복할 것 같지만 부자가 되면 가난할 때가 그래도 행복했다고들 깨닫는다. 부자가 건강을 잃을 수 있고 자녀들이 잘못되는 수도 많고 도덕적 타락도 많다. 인생을 바르게 살지 못하고 허영과 사치와 향락과 죄짓는 생활을 많이 할 수 있다.

 

 

  어리석은 부자의 모습

 

  ① 많은 재산 관리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가짐 (17~19)

 

  ② 자신의 생명이 자신의 부에 의하여 잘 보전될 줄 알고 있는 점. 즉 자기 생명을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점을 몰랐다는 것이 어리석은 점이다.

 

  ③ 재산을 믿고 안일한 생활의 확실성을 자신하는 망상(19절)

 

  ④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점 - 자기 재물의 부요를 믿고 하나님께 의존하지 아니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분량에 만족하지 못한다. 또한 하나님의 축복을 망각하고 애를 쓰면서 많은 재물을 모으고 그 재물만 믿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하지만, 땅의 것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주님의 돌보심만 의지하고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자는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이다.

 

 

 

 

 

 

어리석은 부자

 

 

 

  눅 12:16-21          

 

 

  본문은 예수님의 비유 말씀 중에 한 부자가 그 전답에서 많은 소출을 거두워 심중에 생각하기를 \'이 많은 곡식을 어디에다가 쌓아 둘꼬. 쌓아 둘 곳이 없으니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지어 그곳에 물건과 곡식을 많이 쌓아 두자. 그리고 영혼이 평안이 쉬고 먹고 마시자\'고 했다.

 

  이 부자는 자기 나름대로 성공적인 삶을 계획하고 살아가는 자라고 생각했다. 영농기술이 있고 많은 수확과 근면, 성실, 자립성, 그리고 내일의 멋있는 삶을 계획할 줄 알고 재산을 아끼고 절약하는 저축가로서 나름대로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하나님 보시기에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리석은 자여!\"라고 하셨다.   왜 어리석은 자라고 하셨는가

 

 

 

1. 그의 인생관이 어리석었다.

 

 

 

  그의 인생관이 어리석다는 것은 자기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였다는데 있다. 본문에서 무려 \"나\" \"내\"라는 말이 6번이나 나온다. 이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로 농사 지은 것을 몰랐다. 햇빛을 주시고 공기를 주시고 때에 따라 비를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감사하다는 말 한번도 하지 아니했다. 그리고 이웃에 가난한 자를 돌볼 줄 몰랐다. 이 부자는 소출이 많아서 곡간을 헐고 새로 지어야 하겠다는 걱정은 해도 하나님께 감사나 가난한 이웃에 대하여 걱정한 일은 없었다.

 

 

 

2. 부의 가치관이 어리석었다.

 

 

 

 그는 부에 대하여 자기가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목적이 있었다. 사람은 그 재산에 있어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데 있는 것이 아니고 그 재산을 잘 활용하여 선한 일에 써야 되는 것이다.  재산은 <록펠러 카네>가 말한대로 \"하나님의 것을 관리하는 청지기\"라고 하였다. 재산에 대하여 잘 쓰지 아니하면 그에 대하여 화를 받게 된다.

 

 

 

3. 부자의 세계관이 어리석었다.

 

 

 

  부자는 현세주의자이지 내세를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특히,

 

   (1) 자기 죽음에 대하여 몰랐다(히9:27).

 

   (2) 자기 죄에 대하여 알지 못했다.

 

   (3) 죽음 후에 내세를 생각한 적이 없었다.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였다.

 

 

 

 결론

 

 어리석은 부자는 하나님 없이 살았기 때문에 심판을 받게 된다.

 

 

 

 

 

 

 

네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눅12:13-21

 

 

  본문 21절을 보면 세상에서는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많이 쌓아 두어 부자처럼 보였으나, 하나님 앞에서는 부유치 못한 가련한 인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사람은 풍년을 맞은 들녘에서 <내가 곡식을 더 이상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창고를 더 짓자. 거기에 곡식과 보물을 쌓아 두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며 즐기자>

 

  바로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묻습니다.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면 그대는 어떻게 하겠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는 것이 종교입니다.

 

  하나님께서 오늘 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 내포된 뜻은 우리 인생은 온 곳이 있으며, 보낸 자가 있고, 돌아가야 할 곳이 있으며, 우리 인생의 주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한자로 종교라고 하는 종자는 매우 재미있습니다.  땅이 있고 하늘이 있고, 그 위에 하나님이 계십니다.   어떻게 하나님께 인간이 나아갈 수 있는가?

 

  사람들은 제사를 통하여 신에게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제사를 지냅니다.

 

  그러므로 종손, 종가라고 하는 것은 제사를 모시는 자손, 제사를 지내는 집이라는 뜻입니다.  세상의 종교들은 금속을 녹여 부어 형상을 만들거나, 나무를 깎아 형상을 만들고, 거기에 제사를 드립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가 왜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너희가 만든 우상을 하나님이라고 하느냐? 저희 우상은 은과 금이요, 사람의 수공물이라.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며,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며, 코가 있어도 냄새 맡지 못하고, 손이 있어도 만지지 못하며, 발이 있어도 걷지 못하며, 목구멍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느니라. 우상을 만드는 자와 그것을 의지하는 자가 다 그와 같이 망하리라>(시115편)

 

 

 우리는 우리의 의식 깊은 곳에 계시는 하나님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오늘밤 네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이라고 하시는 그 하나님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이 세상에 보내시고, 내 영혼을 주관하시고, 내 영혼을 도로 불러 가실 수 있는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살아야 합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아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그는 가난한 사람입니다. 아는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통달해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혜가 가장 완전한 지혜입니다.

 

 

 

  오늘날 과학이 알지 못하는 분야가 거의 없다고 공언합니다. 세계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인공위성을 통해서 관찰할 수 있습니다. 일기예보도 정확합니다. 진정한 비밀을 가질 수 없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미국에서 청와대 안뜰에서 일어나는 일과 서로 대화하는 이야기까지 도청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습니다. 그러나 그 엄청난 과학이 하지 못하는 것이 있는데 사람의 마음을 감찰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좋은 기계가 있어도 사람의 마음을 촬영하지는 못하며, 우리의 생각을 중계하지는 못합니다.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감찰하시고 아셨나이다. 주께서 나의 모든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통촉하시오며, 나의 길과 눕는 것을 감찰하시며,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나이다. 내가 주의 신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음부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나이다>(시129편)

 

  이런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습니다.

 

 

 

  본문의 부자를 보십시오.

 

 

  그는 아마도 영리하고 부지런하여 돈을 모았을 것입니다.

 

  그는 아마도 선망의 대상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보고 사람들이 부러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그는 내세를 몰랐습니다.

 

  그는 이 세상이 전부인 줄 알았습니다.

 

  그가 내세에 대한 막연한 생각이 있었을지라도 그는 거기에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그는 영혼을 위한 대비가 없었습니다.

 

  그는 물질세계만 알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고기 덩어리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쌓아 둔 곡식으로 자기 영혼을 주장할 수 있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는 이웃이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도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진정으로 소유해야 할 것들을 하나도 갖지 못한 참으로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본문의 이 짧은 구절 가운데 그는 <나>라는 말을 여러 번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자기 자신밖에는 몰랐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인생의 종지부를 찍으려 하십니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인생은 반드시 죽습니다. 그 인생이 언제 죽을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인생은 이 세상에 홀로 왔다가 홀로 갑니다. 쌍둥이라 할지라도 함께 가지는 않습니다. 아무리 죽고 못사는 부부간이라 할지라도 그렇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사람에게 이 법칙은 예외가 없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나의 것이듯, 죽음도 전적으로 나의 것입니다.  개인적이라는 말씀입니다.

 

  이 부자가 장구한 자기의 인생을 설계하였지만, 그날 밤 그는 어디론가 떠나야 했습니다. 사람이 출세하고, 사업이니, 활동이니 동분서주해도 그것은 한 순간뿐입니다.  언제 어느 순간에서든지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시면 ,나는 하던 일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인생의 주인이 부르시면 그 앞에 설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나는 어디에 서겠습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백년전 다이너마이트를 만든 사나이가 있었습니다.

 

  그는 그것으로 수많은 돈을 벌고 일약 명사가 되었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나 버릇처럼 신문을 읽고 있는데, 자기의 사망 기사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신문기사는 이렇게 쓰여져 있었습니다.

 

  <세계 최초로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유명한 알프레드 노벨 죽다> 그 기사를 읽은 그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사실 자기 동생이 죽었는데, 기자들이 혼돈하여 자기가 죽은 것으로 기사를 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의 사망 기사 앞에서 깊은 침묵과 더불어 말할 수 없는 도전을 받았습니다. 내가 수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 있는 폭약을 만들어서 재물을 얻고 명성을 얻었으나, 결국 인생의 마지막은 이렇게 되고 마는구나!   그는 신문을 찢어 버리면서 새로운 인생을 각오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훗날 그는 하나님과 사람들을 위해서, 자신의 모든 재산을 쓰기로 결심했습니다. 그것이 저 유명한 노벨상이 된 것입니다.

 

 

 

  인간이 결국 돌아갈 곳은 두 곳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 밤 하나님께서 나의 영혼을 도로 찾으시면 나는 어디에 서겠습니까?

 

  성경은 모든 인간이 죄를 범하였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누구도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없습니다. 아무도 천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영생은 단지 하나님의 선물로만 받을 수 있습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오.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6)

 

 

 

  그래서 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필요한 것입니다.

 

영어로 종교란 말은 Religion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Re+ligate = \'다시 이어준다\' 라는 뜻입니다. 도저히 천국에 갈 수 없는 존재를 하나님과 이어주는 것, 이것이 바로 진정한 종교입니다. 누가 이 일을 할 수 있습니까? 무당입니까? 종교가입니까? 복술가입니까?

 

  기독교 외에는 없습니다. 이 일을 성취하신 분은 참 사람이시며,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습니다. 그분이 나의 지옥형벌을 지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그분이 나 때문에 죽었습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사 53:5)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마시리라>(계2:20)

 

 

 

 

 

                                 

제목 : 열매없는 무화과의 비유                                      

성경: 누가복음 13: 6-9

 

 

 본문은 열매를 기다리는 주님에게 열매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열매가 열릴 때 까지 기다려 달라는 과원지기 예수의 간구를 그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의 비유라고 일컬어지는 말씀입니다.포도원은 오늘의 교회입니다. 포도원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3년동안 정성들인 과원지기 농부는 예수이십니다. 열매없는 무화과는 바로 나의 모습이 아닙니까? 3년동안 회개의 열매를 기대하시다가 무효가 된 과원지기의 애절한 간구가 본문의 중심입니다. 구주 예수는 올해도 주인 하나님께 우리를 위해 애원하고 계십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겠나이다.\" 주님의 간구를 통해 열매없는 내가 새로운 결단을 이루며 은혜를 나눕시다.

 

 

첫째, 하나님은 지금도 성도들에게 좋은 열매를 계속 기대하십니다.

내 인생의 주인이 포도원에 무화과를 심었습니다. 길가나 돌밭이나 가시덤불이 아니라 의도와 계획에 의해 유실수가 가장 잘 자라는 비옥한 땅 포도원에 심었습니다. 땀흘리고 거름주고 울타리치고 정성을 드렸습니다. 좋은 열매는 당연한 것이고 내 인생의 소유자이신 주인의 기대도 당연합니다. 3년의 성숙기간도 충분한 시간이었습니니다. 그런데 결과는 허사였습니다. 이 나무가 바로 우리들입니다. 특별한 은혜로 선택받았습니다. 교회의 옥토에 심겨진 인생입니다. 말씀과 기도의 양분을 충분하게 섭취했습니다. 따라서 복된 열매는 당연한 귀결입니다. 주인은 그 열매를 구하셨습니다. 때도 찼습니다. 조건도 좋았습니다. 환경도 좋았습니다. 그러나 포도원의 영양분, 과원지기의 수고와 피, 땅, 결국 땅만 버리게 되었습니다. 찍혀 불에 던져져서 땔감으로 될 수밖에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과원지기는 끝까지 좋은 열매를 기대합니다.

 

 

둘째, 찍혔어야 할 나무를 그대로 두라고 애원하십니다.

과원지기는 열매맺지 못하는 책임을 자신에게 돌리셨습니다. 정성을 가꾸어 열매가 가득하게 해보겠다고 결심하셨습니다. 찍지 말라고 애원하셨습니다. 재고의 기회도 없는, 나무주인에게 무익하며, 아무런 이득도 되지 못하고 과원지기의 수고를 무효로 만든 나무였습니다. 완악하고 교만하며 강퍅한 마음들을 다시 파서 사랑과 은혜의 거름을 쏟아부어 마지막 기회를 거두어 보시겠다고 기대하셨습니다. 오늘이 바로 내 인생의 마지막 기회입니다. 돌이켜 회개하며 주인의 뜻에 부응합시다. 주인에게 유익이 되는 열매, 남에게 유익이 되는 열매를 맺기로 결심해야 되는 날입니다. 늦기 전에 정신을 차립시다. 시간이 없습니다. 자리값도 못하고 연료값도 못하고 몸값도 못하는 우리들 영적 이스라엘. 주의 오래 참으시고 덮으시는 사랑이 우리가 변화되도록 기대하고 계십니다.

 

 

셋째, 지금 열매가 없어도 희망은 있습니다.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8)  최후의 기회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받기만하고 주지 못하던 인생,   자기 배는 부른데 주인에게 유익이 없는 인생, 겉은 그럴사한데 주인에게 빈것만 내밀던 인생에게도 희망은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그랬습니다. 베드로가 그랬습니다. 요한이 그랬습니다. \"이 후에 만약 실과가 열면이어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 버리소서\" 오늘 바로 이 순간부터 새로 허락받은 내 인생을 주께 부탁드려야 합니다. 어제는 지나갔습니다. 새 날에 기회가 다가옵니다. 낙심치 말고 우리를 기대하시는 주의 희망을 나의 희망으로 여기며 삽시다. 온 정성을 다하여 주께 유익이 되고 남에게 유익이 되는 거룩한 무화과 열매를 맺는 성도들이 됩시다. 나의 영광을 드러내지 않고 겸손이 꽃을 피워 남에게 유익이 되는 거룩한 과일 무화과 열매가 되어봅시다.

 

 

                                 

제목 : 망대건축,전쟁하는 임금의 비유                                      

(눅 14:25-33)

 

 

 본문에서 망대건축하는 자가 먼저 비용을 셈해야 하는것을 말한다.

 

어떤 일을 계획하고 시작할 때는 반드시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계산하여야 한다.

 

참된신앙은 많은 비용을 요구하는데, 그것은 열심과 땀과 눈물과 주의라는 비용이다.

 

그것은 십자가로도 표현되는데, 십자가는 손해를 의미한다. 수치와 비난을 감수해야 함을 말한다. 수치와 십자가는 서로 결합되어 있다.[히12:2] 고통과 고뇌를 의미한다.

 

그리고 십자가는 죽음 그 자체를 의미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지려고 노력해야 한다. 기꺼이 져야 한다.

 

 

 

신앙생활에는 참으로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

 

천국문을 두드리는데는 열심이 있어야하고, 험난한 길을 가기 위해서는 땀을 흘려야 한다. 편안한 정자에서 쉬다가 자신의 명부를 잃어 버렸을 때는, 자신을 되찾기 위한 눈물이라는 비용이 필요하다.

 

 

 

겸손의 계곡으로 내려가기 위해서는 대단한 주의가 필요하다. 무저갱의 사자 아불루온과[계9:11] 싸울 때는, 죽을 힘을 다하는 비용이 든다.

 

 

 

이러한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우리는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상의 어떤 다른 것 보다 그리스도를 사랑해야 한다. 자신의 독선을 버려야 한다.

 

죄인된 그는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게 됨이 인간의 공로와 공의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 무한하신 하나님의 은총으로 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죄를 버려야 한다.

 

편협된 자아를 버리고, 주님과의 화합을 방해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버려야 한다. 주님을 슬프게할 그 무엇도 부인해야 한다.

 

 

 

육체의 애정과 쾌락도 억제해야 한다.

 

편안함을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을 버려야 한다.

 

경건치 못한 일에서 관심을 돌리고 주님의 길을 따라야 한다. 모든것을 복종해야 한다.

 

이러한 비용을 지불하지 않는다면 그는 실패할 것이다. 그 실패 뒤에는 조롱과 비웃음이 따른다. 그러므로 참된 신앙을 위해서라면 어떤 비용이라도 지불해야 한다.

 

우리가 이러한 비용을 계산하지 않으면 결심을 실행할 수가 없다.

 

이러한 비용을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가를 생각해 보자.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손익을 계산하고 비교해 보라.

 

 

 

칭찬과 비난을 계산해 보라.

 

우리는 사람들에 의해서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지만, 그러한 비난으로 인해 하나님과 예수님의 칭찬을 받을 것이다.

 

친구와 적을 생각해 볼 때 사단과 악한자들과의 반목이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친근하심이  있다. 의심할 바 없이 현재의 삶이 편안하지 않으나, 도래할 삶을 계산해 보면 잠시잠깐일 뿐이다. 죄를 짓는 쾌락과 하나님을 섬기는 기쁨을 비교해 보라.

 

 예수님은 이러한 냉철한 계산없이 무조건 고백하는 자의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무성의하게 복음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훨씬 더 강력하고 설득력이 있는 그 무엇이 나타나면 그들은 복음을 포기하고 만다. 그들은 계산을 바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충동속에서 자극받아 신앙생활하는 이가 있다.

 

군중심리에 의해 신앙을 갖는 이도 있다. 그들은 무리 속에 있을 때는 신앙을 가진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그러한 사람은 격리되었을 때는 신앙을 버린다.

 

 

 

단순한 환경의 신앙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자신이 교제하고, 사랑하는 이의 신앙을 따라간다.

 

 

 

전통적인 관습에 젖어 신앙생활하는 이가 있다.

 

외관상으로는 옷이 있으나 그 내부에는 생명이 없다. 감상의 신앙이라고 불리울 만한 것도 있다. 사색하고 지적인 신앙이 아니라 화가와 시인의 신앙이다.

 

 

 

위선된 신앙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의 종교이다.

 

이들은 외면적인 양상만을 주목하고, 내면적인 빛이나, 진리는 주목하지 않는다.

 

 

 

지성의 종교가 있다.

 

그들은 기독교의 의식이나 형식에 대한 찬미를 통하여 기독교를 받아들이는데,이러한 신앙은 오래가지 못한다.

 

 

 

양심의 종교라는 신앙이 있다.

 

양심이 신앙적으로 되는 것은 가능한 것이지만, 경험에 의거하는 기독교 신앙의 기초는 될 수 없다. 때때로 우리는 양심의 괴로움에 의하여 회개하고, 깨닫기도하지만, 양심이 아름답고 선하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한 행복한 신앙을 소유했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그러한 섬김은 맹종이고, 또 양심의 의무란 고된 일이며, 그런 신앙은 끊임없는 고행이며, 성령 안에서의 진정한 공의와 평화가 아니다.

 

 

 

그리스도인의 고백은 영적인 것이다.

 

이 고백을 시작하면 그는 지속적이고, 엄청난 싸움에 참여하는 것이다.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 하고,많은 적들을 이겨내야 하는 열정적인 싸움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러면 이와같이 비용을 계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비용을 계산하면 조롱과 수치감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비용을 지출하게 될 때 그 비용을 소중하게 생각하게 될 것이다. 사단은 승리할 많은 기회를 빼앗기게 될 것이다.

 

 

 

신앙생활을 시작하고 정진한다는 것은 망대를 세우는 일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이유는 건물을 받쳐주는 초석이 있어야 한다. 수고와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이다.

 

점차적인 작업과 참을성 있는 선행의 연속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작업이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천사들이 우리의 신앙을 주시하고 있다.

 

이것은 지속적인 작업이다. 이 작업은  많은 주의와 신중함을 요한다.

 

 

 

그리스도인은 전쟁에 나선 군사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려 하는 이는 우선 감당해야 할 일에 대하여 신중히 생각하고,용기를 갖고 어떤 적도 두려워 말고, 단호하고 훌륭하게 선한 계획을 추구해야 한다.

 

군사로 나선이는 전쟁의 책임을 고려해야 한다. 자기가 좋아하는 세속적인 욕망을 버리지 못한자는 싸움터에서 패하게 될 것이다.

 

전쟁이 지속될 기간을 고려해야 한다. 전쟁을 지속시켜야 하는 책임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

 

그리스도의 재산과 보물은 고갈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이 전쟁터로 나가는데 입어야 할 갑옷에 대하여 생각해야 한다.[엡6:14-17]

 

그리고 사단의 세력과 정책과 분노와 잔인성을 고려해야 한다. 자신의 나약함을 감지해야 하고,주 예수 그리스도의 강인함과 힘을 고려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약속과 그리스도의 능력이 어떻게 임하는지를 고려해야 한다.

 

그는 하나님의 영예와 대장의 영예를 그들의 생명 보다 좋아해야 한다.

 

그리고 싸운 후에 얻게될 면류관의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러면 이 비유가 어떻게 우리에게 적용되는가?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사역이 쉬운것이 아니고,오히려 매우 힘들고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뿐만아니라 평화롭고 자유로울 때는 열정적으로 보이던 많은 이들이 좌절하는 이유를 말해준다.

 

또한 본문은 우리가 잘 무장해야 할 필요성과 또 항상 경계하며 자신감을 잃지 말아야 할 필요성을 깨닫게 해 준다.

 

 

 

 

 

                                 

제목 : 잃은 양과 은전의 비유                                      

(눅 15:1-10)

 

 

 I. 잃은 양의 비유 (눅 15:4-7)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죄인들이 많이 모여 왔습니다. 그것은  주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여 그들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베풀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예수 앞에 있으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통해서 그들의 영혼이 기쁨과 능력을 얻기  때문이었습니다.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이런 예수님의 태도를 못마땅하게 여겼으며  원망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메시야가  이 땅에 찾아온 사명을 깨우쳐 주기 위해서 잃은 양을  찾아나서는  선한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1. 하나님은 한 영혼을 향해 지극한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의 목장은 이상적인 것은 못되었습니다. 그러기에  목자의 책임은 더욱 크고 무거웠으며, 또한 양들을 잃어버리고 양들이 상처를 받는 일이 흔했습니다. 본문의 목자는 한 마리의 양이 없었지므로  그 순간부터  목자의 모든 관심은 잃어버린 한 마리의 양에게  집중되고, 그는 잃어버린 양만을 생각하고, 양을 찾을 때까지 참 기쁨이  없었습니다.

 

 

 

 그 목자는 왜 이렇게까지 양을 생각했을까요? 그것은 그 잃어버린 양이 목자의 양이었기 때문이요, 또한 목자로서 잃어버린  양의  본질과 생리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양은 자기의 보호방법이  자구책이 없는 동물이며 먹이도 구하지 못하는 전적으로 목자에게 의존하는  동물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서의 잃어버린 양은 바로 우리의 자화상일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품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영혼도 잃어버리는 것을 싫어하시고 다  소유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한 마리의양을 향한 목자의 관심속에서 우리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한 개인을 향한 관심을 봅니다.   그분은  우리 속에 있는 아흔 아홉 양들만 아닌 밖에 있는 잃은 양 한마리까지도 기꺼이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삭개오를 만나셨고, 도마를 만나주셨고, 수가성 여인을 만나주셨습니다. 또한 우리 개개인을 불러주셨습니다.그러므로 우리도 개개인에 관심을 갖고 복음을 전해야 하겠습니다.

 

 

 

 2. 하나님은 잃은 양을 찾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사랑하십니다.

 

 

 4절에 보면 \"그 잃은 것을 찾도록 찾아 다니지 아니하느냐?\" 고 하였는데 여기서 계속해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 다니는 목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목자는 낮에는 물론 밤에도 새벽에도 찾았을 것이요, 하루 이틀에 찾지 못하면 한 주간, 아니 할 달도 찾았을 것입니다. 아니 평생 찾았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전도와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한 번  전도하고 포기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목자는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양을 추적하여 마침내 찾았습니다. 목자의 집념이  성공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집념은 실패할 수가 없습니다. 아니 실패해서는  안됩니다. 여기서 포기할 수 없는 집념으로 우리를 찾으시는 주님의  거룩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집요한  사랑을 보게 됩니다.

 

 

 

 3. 하나님은 죄인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십니다.

 

 

 6절에,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았노라 하리라\" 했습니다.  잃어버렸던  양을 찾은 목자는 그 기쁨을 자기 혼자 누리지 않고 자기의 친구 및 이웃과 함께 누리고자 했습니다. 여기서 \'나와 함께 즐기자\'라는 말은  \'서로간에 기쁨과 교제를  나누자\'는 의미로서, 이 말은 양에 대한  목자의 애정이 얼마나 깊은 것인가를 충분히 입증하고 있으며,  한편  목자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아 기쁨을 함께 누리고자 했다는 것은 죄인 한  사람의 회개가 하나님 한 분의 기쁨에 한정되지 않고 하나님 나라  전체에 커다란 기쁨이 된다는 사실을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양은 지혜있는 것 같지만 대단히 미련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그 양은 일찌기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목자와 함께 안전한 울안에 머물러 사는 것을 버리고 위험한 선택을  했습니다. 희망을 버리고 죽음을, 자유대신 노예를, 생명대신 죽음을 선택했습니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습니다. 마지막 순간,  최후의  순간이지만 목자는 아직도 양을 찾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손길을 통해서 찾으십니다.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양들을 향해 지극한 관심을 가지고, 지속적인 사랑으로 포기하지 말아야합니다. 그리고 죄인 하나의 회개를 크게 기뻐하시는 목자장 되신 주님읠 기쁨에 동참해야합니다.

 

 

 

 

 

 

 

 

 

 

 

II. 잃어 버린 은전의 비유 (눅 15:8-10)

 

 

 

 

 예수님은 죄인을  찾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래서 죄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의 이와 같은 사역을 비판하며, 원망하며, 조롱했습니다. 그들은  (눅15:2)예수님을 향하여 \"원망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주님은 잃은  양을 찾으시는 목자의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본문의 비유도 말씀을 하셨습니다.

 

 

 

  1. 잃어버린 은전의 가치

 

 

  예수님이 말씀하신  전자의 비유에서  양을 잃은 목자는 양을 단순히 백 마리 중의 한 마리의 양으로 즉,  숫자적인 개념이나 물량적인 것으로 백분의 일의 재산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구하기 위하여  생명을 던지기까지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를 구원하신 선한  목자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본문에도 여인이  잃어버린 은전은 분명 열 드라크마 중의 하나이지만 그렇다고 우리는 이  여인의 돈으로만 이해해서는 안됩니다. 드라크마는 헬라의 은전입니다. 헬라  시대에는 1드라크마는 양 한 마리를 살  수 있는 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은 열 드라크마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를 잃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은전을 찾고 기뻐하는 것을 보면 재산의 일부를 찾는 기쁨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더 큰 것이며, 이웃들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는 기쁨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분명 이 여인이 가지고 있는 이 열  드라크마는 팔레스틴 여인들이 가지고 있는  결혼 기념물이었을 것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결혼을 하게 되면  남자가 여자에게 사랑의 증표로  드라크마 열 닢을 줄에 꿰어서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러면 여인은 그것을 머리에다가 띠로 띠어서 남편과 남들에게 보이도록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하나를 잃어버렸다면 이 여인은  남편에게 충실하지 못했다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기에 드라크마는 이 여인과 남편과의  사랑을 상징하는 것이기 때문에 돈이나  재산의 가치 이상으로 반드시  찾지 않으면 않되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에서는 사람이 아무리 많은 빚을 져도 다른 재산은 다 빼앗아 가도 이 결혼  기념물은 가져가지 못하게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른 것은 다 잃어도 여인들이 결혼 기념물은 언제나 계속해서 간직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 이 여인에게는  이것이 재산의 전부 였는지도 모릅니다. 이 여인에게  마지막 남은 이 결혼  기념물은 누구에게도 줄 수도 없고 빼앗길 수도  없습니다. 영원토록 소중하게 간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을 잃어버렸다면  반드시 다시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방을 뒤지고 쓸어서 반드시  찾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찾으시는 마음입니다. 우리는 가치로 보면 참으로  벌레만도 못한 존재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를 찾으시는 것은 생물학적인 가치 때문이 아닙니다.  고대의 은전에는 황제의 화상이 들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하나님의 형상이  새겨져 있습니다. 주님은 로마 황제  가이사의 화상이 들어 있는  은전을 보시면서 (마22:21)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하셨습니다. (막12:17)에도 (눅20:25)에도  같은 말씀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려 져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약에서도 처음 난 초태생의 아들은 모두 하나님께 돌리라고 하십니다.

 

 

   인류의 역사에는  인간을 생물학적으로  동물과 같은  수준의 것으로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인간이 아메바에서 진화되어 원숭이가 되었고, 더 진화하여  사람이 되었다는 진화론이나, 인간의 삶에서 모든 것이 보이는  물질 뿐이라는 유물주의자들이나 공산당들이 주창했던 유물론입니다. 이러한 주장들은 사람을 비참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창조하실 때에 모든 피조물들과는  다르게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그 모양으로  창조하시어 하나님과 교제하고 하나님처럼  행동할 수 있는 존재로 창조하셨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의  대상입니다. 인간의 가치는 인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은전이  여인에게 반드시 필요하고 찾아야 되는 존재가 된  것은 은전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신랑과의 관계에 있는 것처럼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우리의 가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의  가치를 어디에서 찾습니까? 지식입니까?  돈이나 명예입니까? 직업이나 외모에서 찾습니까? 이런  것에서 자신의 존재 가치를  찾는 사람은 이런 것들이  자신에게서 떠나버리면 비참하게 되어 버립니다.  우리의 존재 가치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찾아야 합니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나

 

는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고, 내가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가장 큰 인간의 가치와 행복을 자지게 되는 것입니다.

 

  (요15:4-7)\" 내  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 같이 너희도 내 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리워 말라지나니 사람들이 이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님은 요한복음 17장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이렇게 기도합니다.  (요 17:21)\"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  이 말씀은 성부와 성자가  같은 영광 가운데 있는 것처럼, 주님이 우리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영광 가운데 있게 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세속이 말하는 인간의 존재 가치를 절대로 인정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우리 자신의 진정한 진가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것으로 나를 평가해서는 안됩니다.

 

 

 

   2. 어둠 속에 있는 은전

 

 

  우리는 예수께서  먼저 말씀하신  비유에서 양은 생명이  있는 존재로서 자신의 의지로서 길을 잃었지만  그러나 동전은 생명도 없고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잃어버려진바 되었습니다. 인간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의지와는 관계  없이 죄가운데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인인 것이며, 죄가운데 태어난 우리는 동전처럼 생명이 없으므로 스스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본문의  동전을 잃어버린 곳이  방입니다. 팔레스틴의 방은 문이 작기 때문에  빛이 들어오지 않습니다. 항상 어둡습니다. 그러기에 은전을 찾기  위해서는 등불을 켜서 비추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방 바닥에는 대개가 돌이나  진흙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바닥에다  짚을 약간 깔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기 때문에 방바닥에 떨어진 드라크마를 찾기 위해서는  짚을 걷어내고 바닥을 쓸어 내야  했습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 떨어진  동전, 무능하고 생명이 없는 실체가 바로 죄 아래 있는 우리들입니다.  죄 아래 있는 인간이 이렇게 비참합니다. 절대적으로 무능합니다.

  (엡2:1)\"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우리는 살아 있었던 존재가 아니라 죽었던 존재였습니다. (골2:13)\" 또 너희의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에게 모든 죄를 사하시고\"   죄 아래 있는 인간이 비참한 것은  자신이 잃어버린 존재라는 것조차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영적 생명이 죽어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죽어 있는 우리를 향하여 생명을  주시고 다시 태어나게 하시어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할 수 있게  하시는 분이 바로 성령 하나님이십니다. 성령께서는 하나님 앞에 찾아 나올 수 없는 인간을 찾으시어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도록 하십니다. 죄와 어두움 가운데서 영원히 찾을 수 없는 동전  같은 우리들을 성령이 찾아 내십니다.

 

  아마 이  말씀을 하시는  주님은 성령님의 사역을  말씀하시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것은 누가복음 15장에는  세 가지의 비유가 나옵니다. 첫째 비유에서 우리는 잃어버린 양을 찾으시는 목자에게서 쉽게 우리의 목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 이 본문에서는  어둠속에 있는 자들을 찾으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볼 수 있고,  세 번째의 비유는 집을 나간  작은 아들을  찾으시는 아버지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사실 이 세  비유는 삼위 하나님이 그렇게 사랑하시는 인간을 찾고 계시다는 말씀입니다.

 

 

   3. 은전을 찾은 여인의 기쁨

 

 

  우리는 양을 찾는  목자의 기쁨을 알듯이 여인이  은전을 찾고 얼마나 기뻐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눅15:9-10)\" 또 찾은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았노라 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하나가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본문에는 \"찾았다\"는 단어가 두 번이나 강조되어 있습니다.

 

 

  주전  3세기경 헬라 천문학자이며 수학자이며 물리학자인 아르키메데스는 목욕탕에서 목욕을 하다가 아르키메데스의 원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는 이 원리를 찾자마자 맨발로 목욕탕을 뛰쳐나와 거리를 달리며 외칩니다.    \"유레카!\" \"유레카!\" , \"찾았다\" \"찾았다\" . 자신이 연구하고 찾는 것을 찾게 될 때 사람들도 이렇게 기뻐하는데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우리를 찾으시고 하늘에서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기쁨이 되느니라\" 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자들이란  천사들을 말합니다.  죄인이 구원받으면 천사들 뿐만 아니라 온  우주적인 잔치가 벌어집니다. 본문에 이어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비유와 잃은 은전을 찾는 여인의 비유를 알고 난 다음에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돌아온 작은 아들을 품에 안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가락지와 좋은 옷을  입히시면서  (눅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고 하십니다.   죽었다가 살아난  아들,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는 아들을 안고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기쁨을 아십니까?

 

  죄 아래 있는 우리는 하나님 앞에 감히 설 수 없는 더럽고 추한 존재인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잃어버린 존재라는 사실도 모르는  죄에서 죽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 하나님께 우리는 찾으시고 살리셔서 주님의 영광의 자리에 함께 있게 하십니다.

 

 

  여인이 잃어 버린 은전이 방 안에 있는 것처럼, 우리가 교회 안에 있다고 해서 주님 안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가까이 있는 것 같지만 예수님을  만난적이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설교도 듣고 주일날 교회에 나와서 예배도  드리지만 성령으로 거듭나지 못하고 중생하지 못한 사람이 있습니다.

 

  나와 하나님과의 거리가 너무 멀게 있습니다. 당신과 하나님과의 거리는 얼마나 되십니까? 주님이 나를 찾아오십니다. 나를 찾아 오셔서 부르실 때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대답만 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죄를 짖고 죄 아래  빠진 순간부터  사람을 찾기 시작하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하나님을 찾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나를 찾으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자들과 기뻐하십니다.

 

  우리에게 물질적인 가치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기 때문입니다.

 

 

 

 

 

                                 

제목 : 탕자의 비유                                      

(눅 15: 11-32)

 

 

아버지에 대하여 이 보다 더 잘 이야기한  본문이 있을까?

 

 본문은 일반적으로 탕자의 비유라고 불리워진다.

그러나 실상은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아버지의 분깃을 가지고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아니라 그를 기다리는 아버지이시다. 죄인들을 영접하신 이는 성육신 하신 하나님이시다.

그는 가장 온유하고 마음을 끄는 위대한 신의 현현을, 전인류에게 나타내 주셨다.

그가 죄인들을 영접 하시는 방법은 사랑의 팔을 펴서 전인류를 감싸주시는 방법이다.

그가 죄인들을 비난하지도 않고, 오히려 그를 영접 하시고, 말할 수 없는 하늘의 복을 나누어 주실 때, 사람들은 그를 비난하였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특별한 보호와 인도로 죄인들을 당신의 은혜의 왕국으로 불러 주신다. 그리스도는 죄인을 친구로 삼으시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죄에 얽매어 고통받는 인간들에게 베푸시는 최대, 최고의 선물이다.

 

 본문의 비유는 서로 상관성 있는 비유이다.

세리와 죄인들, 그리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서로 대조되는 그룹이다. 세리와 죄인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마땅히 그들에게 가르침을 베풀어 바른 삶으로 이끌어야 한다. 그들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오히려 세리와 죄인들을 배척하고,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우리가 생각해 본다면, 교회와 세상이 나뉘어져 이원화되는 현실이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세리와 죄인들의 이원 구도처럼 위험을 내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할것이다.

예수님은 죄인들을 영접하신다. 죄로 번민하는 가련한 인생들을 그리스도는 언제나 영접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을 사랑으로 다루신다. 죄인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태도는 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탁을 나누는 것이다. 우리 주변의 불신자들은 이같이 사랑을 나누어 줄 대상이며, 관계의 회복을 통하여 하늘나라의 식탁을 함께 할 대상이지 정죄의 대상은 아니다.

 

 11절에서 32절까지의 두 아들의 비유는 1,2절의 등장인물을 반영하는 것이다.

동시에 죄인 하나가 회개하는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을 보여 주며, 회개하는 자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가르쳐 준다. 본문은 여러가지 진리를 가르쳐 준다.

세상이 인간을 버릴 때 인간도 세상을 버린다.

탕자는 더 이상 먹을 만한 것이 없을 때,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또 허랑방탕한 생활을 한 후에 회개하는 자의 위치는 자유인의 상태가 아니라, 노예의 상태라는 것이다. 그가 노예의 심정의 심정이 되어 돌아온 것에 주목하자. 그러나 그러한 죄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때 받는 환영은 비교할 바가 아니다.

아들이 돌아온 데 대한 아버지의 기쁨은, 돌아온 죄인에 대한 하나님의 기쁨이다. 아들에게 베풀어지는 향연과 춤은 아들에게 있어서 오랫동안 잃어버렸던 것이다.

본문을 통하여 특별히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주시는 훈계가 있다.

본문에 나오는 큰 아들은 불공평한 것 처럼 생각되는 이해할 수 없는 아버지의 조치에 당황하고, 불만을 갖는다.  그러나 그는 일생을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가는 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서 그는 <내가 여러해 아버지를 섬겼으나, 내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시지 않는구나>라고 불평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대답 하신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것이 다 네것이로되>

탕자의 기쁨은 한시간의 커다란 것이지만, 맏아들은 일생을 통하여 평강을 누렸다. 꾸준한 신앙생활은 황홀경을 체험하지 못하더라도 값진 것이다. 하나님의 잔잔하고 영원한 임재 하심으로부터 오는 평강은 궁극적으로 가장 좋은 것이다.

 

 

 이제 본문을 통하여 우리에게도 있는 죄의 모습을 보자.

탕자를 통하여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배반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비유에서 그 마음이 선천적인 성향을 따르고 있는 한 인물을 보는 것이다.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본문은 충실하게 묘사해 준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뜻대로 하는 이가 세상에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모두 본질적으로 교만하고, 자기 멋대로이다. 자신을 살펴 보면 어떠한가? 이것은 엄청난 위험을 수반한다.

이 아들의 요구에 따라 아버지는 각각 그 살림을 나누어 주었다.[12절]

그러면 큰아들의 재산은 어디에 갔는가?

그는 그 분깃을 즉시 아버지에게로 돌렸다.  그는 지혜롭고 현명한 자이다.

아버지의 재산은 원하였으나, 그의 사랑은 구하지 않은 둘째아들은 그 자비로운 아버지를 말로만 아버지라 불렀고, 그에 대한 존경과 아버지를 중시하는 마음은 없었다. 그는 바로 우리 자신을 반영하는 거울 속의 나와 같은 자이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보다 하나님의 선물에만 더 관심을 가지는가?

죄은 근원이 바로 여기에 있다. 하나님의 뜻은 아랑곳 없이, 자신의 만족을 채우기에 급급한 사람은 자신의 정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방종한 삶이 반드시 따르기 마련이다.

죄의 추진력은 굉장하다. <그 후 며칠이 못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아버지의 곁을 떠나 간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의 임재는 결코 함께 하시지 않는다.

<먼나라>는 어리석은 자들이 염원하는 실재하지 않는 상상속의 낙원일 뿐이다.

거기에서 아버지를 떠난 아들은 허랑방탕하여 재산을 허비하였다. 죄는 끊임없이 죄의 결과를 가중시킨다. 그는 행복을 얻는 대신에 빈곤에 휩싸이게 되었다. 풍요하고,명예로운 삶 대신에 그는 예속과 수치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그는 어디를 가나 이방인이었고,단지 붙여 사는 돼지치기일 뿐이었다.

그의 식물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금수의 먹이는 결코 사람의 배를 만족 시킬 수 없다. 그에게 먹는 기쁨은 사라졌다.

 

 이와같은 말씀은 전체가 신자에게 주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하다.

사람이 하나님 없이 자기 만족의 삶을 추구하여도 결코 만족에 이를 수가 없다. 세상적인 것만으로는 참된 만족에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의 본문은 얼마나 많은 것을 이야기 하는가?

인간의 헛된 추구와 그로인한 실패는 물론 인간의 자율성을 허용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말씀하고 있다.

아들의 분깃요구를 거절할 수도 있는 아버지, 그러나 그는 아들의 요구가 결코 갑작스러운 충동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재산분배는 아버지의 응징의 방법인 것이다.

 

 본문에는 죄의 성질이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떠나려는 마음이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인간영혼에 엄청난 파멸을 불러 일으킨다.

우리가 하나님께 등을 돌렸을 때, 우리의 영혼이 택한 여정은 길고도 지루하다. 거기에는 기쁨이 없다.

아침 일찍 일어나고, 일하며 밤 늦게야 휴식을 취하며 빵을 먹는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헛수고 일 뿐이다.

죄를 짓는 영혼의 고통은 어떤 것들인가?

그 하나는 결핍[결핍]이다.

죄는 영혼을 굶주리게 한다. 채워질 수 없는 인간의 욕망을 채울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는 없다.

친구가 없게 되는 고통이 또  있다. 이 세상의 진정한 친구는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없다.

또 하나의 고통은 노예생활이다.

죄 아래 있는 모두가 사탄의 노예이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고난을 통해서 회개의 마음을 주신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총이다.

우리가 회개에 이르는 마음을 본문을 통하여 살펴볼 수 있다.

본문의 아들은 죄악에 빠졌던 과거의 삶을 돌이켜 봄으로써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자신의 고난을 통하여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또 자신의 위치를 살펴 봄으로써 회개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있는 것을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여 회개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또 아버지에 대하여 잘못되었고,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멀고 어려운 사람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그는 고통을 통하여 아버지를 발견하였다. 그리고 부족함이 없는 아버지의 집을 생각하게 되었다.

 

 오늘의 본문은 무엇 보다도 자비와 긍휼에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친다.

본문의 중심은 돌아온 탕자가 아니라, 그 아들을 맞으시는 아버지이시다.

아버지의 긍휼과 자비를 보라. 그는 완전한 복음의 사면장을 우리에게 주신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가 필요하다. 그 아버지는 오늘도 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아버지는 집나가 고통받는 아들의 처지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아버지는 아들의 실패를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날마다 문열어 놓고,집나간 아들을 기다리신다.

그러므로 회개를 미루지 말라.

 

 용서를 위한 아버지의 준비를 보라.

그는 제일좋은 옷을 준비하고 계신다.

그는 지환을 낄 자격이 없는 사람에게, 상속자임을 인정하는 지환을 준비하고 계신다.

 아버지를 떠난 자는 지금 즉시 돌아가라.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하는자의 계속적인 순종의 큰 가치를 알라.

오늘도 이 말씀을 듣는 성도 여러분이 순종하는 삶을 통하여 아버지와 더불어 사는 행복을 누리기를 바란다.

 

 

                               

 제목 : 잔치 비유                                      

(눅14:15-24)

 

 

 이 비유는 15절에서 말한 사람에게 주는 특별한 교훈이다. 눅 9:57의 경우 한 청년이 주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이다 할 때에 ...여우도 굴이 있고...라고 대답하셨는데 이 비유도 이 말에 대한 칭찬이나, 격려나, 동의를 해주는 대신 무섭도록 엄격한, 가장 강경한 말씀을 해 주셨다.

  분노와 심판, 비천한 운명으로 채워져 있는 이야기이다. 24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힌 자에게나 아니면 어떤 강력범에게 혹은 그리스도 자신과 그분의 복음에 대한 신랄한 반대자에게 말씀이었다고 한다면 어떤 의미에서 볼 때 전혀 놀랄 필요가 없다. 그러나 우리를 놀라게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에 수긍해서 존경의 뜻으로 말했던 사람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점이다.

 

  첫째,

  이들은 초청을 수락했다. 그러나 잔치가 시작될 때 하인을 시켜 안으로 모시려고 하자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모두 변명을 늘어 놓았다. 이들은 초청을 수락할 때 철저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보고 결정하였던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막연하고 가벼운 마음으로 응답한 것이다.

  똑같은 방식으로 전반적인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있다. 저항이나 부정이나 캐물어본 적이 없이 그냥 받아들인다.

 

  둘째,

  두번째 초청은 진정한 시험이 된다. 첫번 초청은 일반적인 것이었으나 두번째 초청은 제한된 어떤 일을 하도록 강요한다. 가거나 가지 않거나 해야 한다.

 

  셋째,

  두번째 초청에 불응하고 변명한 것은 주인을 무시하고 모욕한 행위다. 그들은 다른 일이 없었다면 잔치에 참석했을 것이다. 다른 일이 있자 초청이 짐스러워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편의만을 우선시켰다. 우선의 원칙은 하나님께 적용해야 한다. 편의 위주의 원칙을 적용하면 가공스러운 잘못이 된다.

 

 

  우리가 천국에 이르기를 원하면서 그러기 위해 하는 일은 무엇인가? 복(-신령, 육신-)을 받기 원하면서 하는 일은 무엇인가?

  죄를 지으면서, 자신들을 즐겁게 하면서, 이 세상을 따라 살면서 하나님을 향하여 죄스럽게 되었노라고 말하는 것으로 천국에 들어가기를 바라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모욕이다. 하나님을 자신의 편의대로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과오는 저지르지 말자.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면 천국의 일들을 더 좋아한다는 것을 보임으로 입증해야 한다.

 

  * 이들의 변명은 속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어리석은 짓들이다. 밭이 갑자기 움직여 사라지기라도 하는가? 소들이 몇시간도 기다리지 못하는가? 평생동안 아내와 같이 살지 못할 것처럼 한 것은 무례 막급한 일이다.

  딛1:16. 입술로는 하나님을 선포하나 실 생활로는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은 하나님의 성호를 모독하는 일이다.

  하나님 보다 더 중요시 하는 것들을 보라. 돈, 성공, 인기, 욕망, 정욕. 주님을 믿노라 하고 천국에 가기를 원한다고 하면서 다른 일을 그것에 우선시킨다면 어리석은 일이다.

 

 

 

하늘나라 잔치와 초청(구원 은혜)

 

 

   눅14:15-24

 

본문의 말씀은 큰 잔치를 배설하는 중에 손님들을 초청하나 다같이 사양함으로써 또 다른 손님들이 채워지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의 내용과 마태복음 22장에 나오는 왕의 혼인 잔치비유와는 비슷한 것 같으나 다른 의미의 비유입니다. 혼인 잔치비유는 종말론적인 의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시기 나흘 전에 하신 말씀으로 심각하며 심판적이고 종말론적입니다.

 

또 혼인 잔치비유에서는 초청 받은 사람들이 간단히 사양한 것이 아니라 아주 배반을 하며 초청의 명을 띠고 간 종들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초청해 준 왕에  대해 악하게 나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복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고, 있는데 이는 철저하게 초청 받은 사람의 자세를 비판적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비판적이요 종말적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의 비유는 주인의  마음에 더 역점을 두고 있습니다. 또 초청 받은 사람들의 거절도 그냥  사양했다는 것으로 끝나고 있습니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바리새인의 한 두령의 집에 초청을 받으셨습니다. 그 집에 손님으로 초청 받으신 주님은 고창병 든 사람을 안식일임에도 고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잔치와 관계지어 두 가지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눅14:6-11/혼인 잔치에 초대받거든 상좌에 앉지 말고 말석에 앉으라. 눅14:12-14/잔치에 사람을 초대할 때 다시 갚을 것이 없는 사람을 초대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말씀이 있자 한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예수님께서 본 비유의 말씀을 하시게 되셨습니다.

 

본 비유의 주제는 하늘나라 잔치입니다. 이 잔치는 주인의 마음은 단순히  손님을 가득 채워 그로 인해 기뻐하고자 하는 순수한 즐김의 잔치라는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비유의 주제는 \"천국은 마치 잔치와 같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마치 천국 잔치에 초청 받은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먼저 잔치라고 할 때에 그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잔치의 의미>    

 

  1. 잔치는 기쁨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것은 축제를 연상케 합니다.  그러기에 전치에는 슬픔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조금 근심된 일이 있더라도 다 뒤로 미루고 우선 기뻐해야 하는 것이 잔치입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이란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 기쁨이란 감사가 그 마음의 바침이 되어야 합니다.  잔치에 참여하는 사람이 참여하는 사람이 초청해 준 자체를 고맙게 생각하고 만족한 마음으로  임할 때에 진정한 기쁨을 맛볼 수 있고 그래야 잔치입니다. 잔치에는 기쁨과 감사와 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본래 은혜라는 말은 헬라어로 Karis라고 하는데 이는 기쁨이라는 말과 그 어원을 같이 합니다. 신령한 기쁨! 곧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서 오는 넘치는  기쁨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은 곧 잔치요, 우리의 예배는 축제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축제인 예배가 눈물겹고 억울하며 한숨 짓는 것이어서는 안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올 때에는 항상 기쁨에 넘쳐야 합니다.

 

교회에 올 때는 어떠한 얼굴로 왔던지 간에 하나님의 축제에 참석하고  돌아가는 모습에는 기쁨이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 기쁨이라는 것은 돈 안 들고 봉사하는 것입니다. 내가 기뻐한다는 것은 먼저는 내 마음의 만족이요 즐거움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도 밝고 편하게 해줍니다. 웃으며 하는 이야기는  좋은 이야기는 모두 좋은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한숨짓고 울면서 하는 이야기는 듣는 사람까지 마음을 상하게 하는 나쁜 이야기들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신령한 생활을 한다는 것은 곧 감사와 기쁨의 생활로 매일 매일을 축제의 기분과  마음으로 살아가야 된다는 것입니다.

 

 

  2. 잔치라는 것은 주인의 기쁨에 참여하는 기쁨을 말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초청을 받아 어떠한 잔치에 갔다면 그것은 남의 기쁨에 내가 참여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 내 잔치가 아니라 저들의 잔치입니다. 그러나 저들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함께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기뻐하는 자와 함께 기뻐하고 슬퍼하는 자와 함께 슬퍼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은혜입니다. 그 기쁨의 원인이 내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원칙적으로 기쁨의 원인은 저쪽에 있습니다. 그러나 내 잔치, 우리 집 잔치처럼 기뻐해야 합니다. 남의 아들  장가가는 것을 보고 내 아들 장가가는 것처럼 기뻐할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잔치를 나의 잔치로 그의 기쁨을 나의 기쁨으로 받아들이며 동참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람만이 천국에 갈 수 있는 사람이며 그 사람만이 은혜의 생활을 할 수 있습니다. 진정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이란 내가 못 먹어도 그가 먹는 것을 보면 즐겁고  내가 쓰지 못해도 사랑하는 사람이 쓰는 것을 보며 그가 좋아하면 나도 좋은  것입니다. 이 마음가짐이 천국 가는 마음이요 잔칫집에 있는 마음입니다. 사촌이 논 사면 배를 아파하는 곳은 지옥입니다.

 

 

  3. 잔치의 기쁨은 소유의 기쁨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기쁨에 참여하는 기쁨, 곧 존재의 기쁨입니다. 다시 말하면 그 잔치에 내가 청함 받았다고 하는 그 사실에 대한 기쁨이지 내가 장가가는 것도 아니오 내가 잔치하는 것도  아니란 말입니다. 초청 받는 기쁨, 인격적인 기쁨, 믿음의 기쁨, 사랑의 기쁨, 이 기쁨이 곧 잔치에 참여하는 자의 기쁨이요 또한 이 기쁨이 곧 천국적인  기쁨입니다. 좀더 나아가 생각하면 개인적인 기쁨이 아니오 공동체의 기쁨입니다.  

 

잔치란 본래 모여서 같이 즐기는 것이지 혼자 하는 잔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공동체적인 기쁨을 즐깁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함께 찬송하며 같이 봉사하는 것이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우리는 우리가 드리는 예배가 잔치가 되도록 함께 기뻐하는 예배가 되도록 힘써야 하겠습니다.

 

 

  <잔치의 격조>

 

잔치의 격조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것은 우선 분위기에서 출발합니다.

 

1. 잔치에는 기쁨과 만족이 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음식이 있어야 합니다.

 

음식과 풍악과 분위기가 어울리는 격조 높은 잔치는 그 누구도 섭섭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없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옛날 우리 어른들께서는 잔치를 할 때에는  반드시 한 쪽에 거지들을 위한 장소를 마련하고 푸짐한 대접을 하며 거지들의  잔치가 되게 했던 것입니다. 다같이 배부르고 다같이 기뻐해야 원만한 잔치요 격조 높은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2. 손님이 많아야 합니다.

 

잔치에는 우선 사람이 많아야 하고 또한 손님들의 생각이 순수해야 합니다. 모처럼 잔치에 왔다가 빚 받겠다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결코 잔치에  합당치 않는 목적이 있어서는 안됩니다. 오직 잔치의 주인공을 기쁘게 하고자  하는 순수한 동기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잔치의 격조를 높입니다.

 

3. 오직 주인의 마음에 들어야 합니다.

 

주인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초청에  대한 감사와 감격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모일 때에 격조 높은 잔치가 됩니다.

 

더욱이 잔치의 정도는 그 주인이 누구냐? 하는 것에 달렸습니다.  그 주인이 왕이면 그 잔치는 왕의 잔치가 되는 것이고 그 주인이 대감이면 대감집 잔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늘나라 잔치는 하나님 아버지를 모신 잔치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어린양, 우리의 주님을 모신 잔치입니다. 이 이상 격조 높은 잔치가 어디 있습니까? 이제 문제는 그 주인을 기쁘시게 하자는 데 있습니다.

 

나 기뻐지는 것이 아니오, 얻어먹으러 간 것도 아닙니다. 이 잔치의 근본 목적은 주인이 기뻐하기 때문에 우리가 참여하여 더 기쁘게 해 드리자는 것입니다. 혼인 잔치에 갔었으면 신랑 신부를 기쁘게 해주면 끝나는 것입니다. 그들이  주인공이기에 그 외에 이 시간에 기쁨을 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도 없습니다. 그 분들이 좋고 그 분들이 기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청 받은 사람들은 오직 주인공을 기쁘게 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믿는 사람이란 무엇입니까? 우리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잔치에 초청 받은 사람입니다. 그 때문에 즐겁고 감사한 마음입니다. 이 기쁨에 내 마음을  바치는 것이 기쁨이 되어야 합니다.

 

 

  <초청 받은 사람들의 거절>

 

본문의 잔치는 누구의 잔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어쨌든 모든 것이 다  준비된 큰 잔치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풍성한 음식에 좋은 풍악도 갖추어  모든 것을 준비하였으니 함께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강권하여 데려다 가도 내 집을 가득 채워 함께 즐기자는 것입니다. 이 주인의 마음은 거기에 있습니다. 단지 함 모여 같이 즐기고, 같이 기뻐하자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더불어 기뻐하자는 일에 초대받은 사람들이 하나같이 사양하며 불응한다는 것입니다.  사양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밭을 샀으매 가 보아야겠다고 합니다.

 

이는 내 사업이 바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당신 잔치는 당신이나 기뻐할 것이고 나는 내 사업이 먼저이기 때문에 당신의 잔치에는 못 가겠다는 이야기입니다.

 

2. 두번째 사람은 소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 하여야겠으니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은 자치에 참석할 때가 아니라 소를 시험할 때이며 나를 위해서 써야 할 시간인데 당신을 위해서 시간을 쓸 수가 없다는 마음입니다.

 

3. 세번째 사람은 나는 장가를 갔으니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내 기쁨이  한창인데 남의 기쁨, 남의 잔치는 아랑곳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이상의 세 사람의 이야기를 종합해 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부 자기중심적이라는 사실입니다. 내 사업이요, 내가 하여야 할 일이 따로 있고, 그리고 내 기쁨이 따로 있기 때문에 당신의 잔치에는 못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오기를 거절할 때, 주인은 화가 나서 종에게 명하여 빨리  시내와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병신들과 소경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 오라고 말씀하십니다. 다시 말하면 가장 불행한 사람들, 오라고 말 한 마디면 고마 와서 감지덕지할 사람들을 데리고 오라는 말씀입니다.

 

\"지금 장가가서 한창 좋은 그런 사람은 그만두어라. 밭을 샀다는 돈 많은 그 사람은 그만두어라.  출세하여 이름 높은 아무개도 그만두어라. 그저 배고픈 사람, 자기 몸뚱이를  가누기에도 어렵고 힘든 그러한 사람을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의 마음은 기어이 손님을 꽉 채워 놓고 시작한 잔치를 성대하게 끝내야만 되겠다는 것입니다. 주인의 마음은 절대로 실패할 수 없다는 것으로 간절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나라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 진리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생각할 것이 있습니다.

 

준비된 잔치에 부름에 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내 슬픔도 많고, 내 공통도 많지만, 그러나 이 주인의 기쁨에  참여해야겠습니다. 내 문제, 내 처지, 내 기분을 앞세우려 들지 말고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고 교회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여 그 잔치, 그 주인의 기쁨에  내 마음을 바치게 되면 상상 밖의 큰 은혜를 받게 됩니다.  이러한 약속과 이러한 기쁨이 있는 축제는 마음으로 매일 매일을 살아가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큰 잔치에 부름 받았다고 하는 유일한 자격을 가지고 부족하기를 말하면 가난한 자요 절름발이요 병신 소경이지만, 그러나 이 초청에 응함으로써 하늘나라 잔치에서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제목 :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눅 16: 1-9)

 

 

 \"(1)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2)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3)청지기가 속으로 이르되 주인이 내 직분을 빼앗으니 내가 무엇을 할꼬 땅을 파자니 힘이 없고 빌어먹자니 부끄럽구나/ (4)내가 할 일을 알았도다. 이렇게 하면 직분을 빼앗긴 후에 저희가 나를 자기 집으로 영접하리라 하고/ (5)주인에게 빚진 자를 낱낱이 불러다가 먼저 온 자에게 이르되 네가 내 주인에게 얼마나 졌느뇨/ (6)말하되 기름 백 말이니이다 가로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빨리 앉아 오십이라 쓰라 하고/ (7)또 다른 이에게 이르되 너는 얼마나 졌느뇨 가로되 밀 백석 이니이다. 이르되 여기 네 증서를 가지고 팔십이라 쓰라 하였는지라/ (8)주인이 이 옳지 않은 청지기가 일을 지혜있게 하였으므로 칭찬하였으니 이 세대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로움이니라/ (9)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없어질 때에 저희가 영원한 처소로 너희를 영접하리라.\"

 

 

본문은 난해한 비유로 알려진 말씀입니다.

 

이 비유에 등장하는 청지기는 매우 교활하고 불의한 사람이며 그의 하는 짓도 악한들이 취하는 태도입니다. 주인으로부터 파면을 통보받고 사후 대책에 부심하다가 아주 기발한 아이디어를 창출하여, 우선 장부를 허위 조작하여 채무자들의 환심을 사는 일에 여력을 쏟게 되는데 그 방법의 재치에 감탄한 주인은 오히려 불의한 청지기를 칭찬하게 됩니다.

실로 괴악한 이 비유에 담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첫째,   이 청지기는 자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기는 주인의 재산을 맡아 관리하는 관리인인 것과 자신의 능력의 한계와 약점, 그리고 자기가 한 일에 대한 주인의 평가와 거기에 따르는 상벌을 당연한 것으로 알고 있었습니다.

 \"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 고 말했을 때 그는 조금도 당황하거나 변명하려는 기색없이 당연히 올것이 왔다는 담담한 태도로 앞날을 위한 설계에 몰입합니다.

어떻게 보면 얄밉고 화도 나게 하는 태도이지만 이미 지나간 일에 집착하거나 고심하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처신으로 간주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의 청지기입니다.

언젠가 우리는 우리들의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평가가 필연적임을 명심하고 책임 인간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해야만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거나 핑계할 수는 없습니다. \"행한대로 갚으리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역사안에서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이 필요합니다.

 

둘째,  이 청지기는 자기에게 남은 기회와 권한을 최대한으로 활용할 줄 아는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장부를 허위조작하여 빚진 자들의 환심을 산 것이 도덕적으로는 용납될 수 없는 죄악이지만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그의 태도는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활용하는 지혜를 칭찬하십니다.

마태복음 25장에 기록된 비유중에 달란트의 비유는 하나님의 마음을 잘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의 경우 그는 받은 것을 묻어두었다가 그것을 주인에게 내놓았습니다. 그러나 주인은 받은 달란트를 활용하려고 하는 노력이나 생각이 전혀 없었던 종의 태도를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고 책망하고 있습니다.

결과야 어떠하던 받은 것이나 가지고 있는 것은 최대한 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은사도 믿음도 능력도 지식도 활용해야 합니다. 활용하지 못할때 한 달란트의 가치는 보존할 수 없음은 물론 소멸되고 말 것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도 활용의 결과이며 미문의 앉은뱅이가 걷게된 것도 활용의 결과입니다.

 

아프리카의 어느 해안에서 폭풍우로 조난을 당한 배가 한 척 있었습니다.

캄캄한 밤이었습니다. 그때 마을사람들은 난파선의 선원들을 구출하려고 어선들을 동원해 수많은 생존자를 구원해 냈습니다. 그러나 워낙 배가 작고 한사람도 더 태울 수 없는 형편이어서 난파선의 틈에 끼어있는 한 선원을 보고도 그대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 후 남아있던 생존자의 구조를 위하여 지원자를 찾는데 마침 한 청년이 그 모험에 지원을 하고 나섰습니다. 그때 청년의 어머니는 한사코 반대를 하였습니다. 그것은 자기 남편도 바다에서 죽은 바가 있을 뿐 아니라 큰아들도 원양어업에 나간지 수년이 되도록 소식을 모르고 있는 형편이어서 이 아들마저 희생이 되면 혼자만 남게 될 것이라고 애원을 하며 지원을 포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젊은이는 마지막 생존자 한 사람을 살리려고 구조작업에 나섰습니다. 어머니는 애를 태우면서 아들의 성공을 빌었으며 마침내 아들은 마지막 생존자를 태우고 돌아왔는데 바로 그 생존자는 생사를 모르던 그 어머니의 큰아들이었다는 것입니다. 실로 감동적인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셋째,  이 청지기는 목적을 위하여 할 수 있는 모든 지혜와 능력을 총동원하고 있습니다.

빛의 아들을 능가하는 열심과 결단의 사람이었습니다.

우리는 선을 추구하고 의로운 일을 도모하면서, 악행을 일삼는 자들보다 얼마나 소극적이고 기피적인가에 대하여 깊이 반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쓰이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풍성한 수확을 쌓아 놓고 내 영혼만을 위한 욕심으로 고마운 이웃 또는 불우한 이웃은 전혀 잊고 있는 어리석은 부자가 아니라 내게 맡기신 주인의 것으로 주인의 기뻐하실 이웃을 위하여 투자하는 것은 지혜로운 일입니다.

건강은 건강할 때 지켜야 한다는 말처럼 내가 가지고 있을 때, 내가 쓸수 있을 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살아가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제목 :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눅 16: 19-31)

 

 

 누가복음 16:19-31까지를 가리켜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라고 말합니다. 부자와 나사로 이야기는 우리가 익히 잘 아는 내용입니다. 이 말씀은 비유일 수 있으나 실제적으로 있었던 일의 설명일 수 있습니다.

 

본문에는 나사로의 이름이 나와 있으나 부자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전설에 의하면 이 부자의 이름은 \'다이브스\'라고 합니다. 본문은 다이브스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요약하고 그 삶의 결과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는 언제나, 어떤 사회나 부자와 가난한 자가 함께 공존합니다. 미국에도 거지는 있고 일본에도 있습니다. 미국의 뒷골목 빈민굴에 가보면 그들은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처참하다고 합니다. 사회보장 제도가 만들어지고 지켜지는 나라에도 거지는 존재합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부자가 다 나쁜 사람이 아니며, 세상에 있는 거지가 다 좋은 것은 아닙니다.

 

 

성경 속의 부자 다이브스는 돈이 많은 사람을 대표하기보다는 너무 세상 살기가 좋아 하나님을 마음에 담아 둘 수 없었던 사람을 말합니다.

 

돈이 많은 게 죄가 아닙니다.

 

다이브스는 자기가 소유한 재산을 인하여 더 중요한 것에는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께 벌을 받은 것입니다.

 

 

돈 많이 벌어 축재하는 사람들의 세 가지 특성이 있습니다.

 

첫째는 값진 옷입니다. 부자로서의 자기 과시를 과거에는 옷으로 나타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자동차, 주택 등으로도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는 날마다 날마다 즐기는 생활입니다. 여가를 기분 좋게 보냅니다. 생의 목표가 그것입니다. 아침에 침상에서 일어나며 궁리하는 것이 오늘은 무엇을 하며 즐길까? 하는 것입니다.

 

셋째는 호화로운 생활입니다. 분수 넘치게 사치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부를 최대한 활용하여 남은 아랑곳하지 않고 사치합니다.

 

우리나라 부자들 가운데 한국은 겨울에 추우니까 미국 하와이에 가서 지내고 오는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합니다. 철새처럼 더위와 추위를 피해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로서는 감히 상상도 안되는 생활입니다. 그러나 부자는 많이 가졌다는 것에 문제가 있지 않습니다. 평생 한 번도 하나님을 생각할 틈도 없이 잘 사는 것이 문제입니다.

 

 

이에 비해 나사로는 어떤 삶을 살았습니까? 비참하게 살았습니다.

 

가난한 자는 남에게 부담스러운 존재입니다. 나사로에게는 부스럼이라는 병이 있었습니다. 못 먹고 병원 가지 못하니 병이 떠날 틈이 없는 것입니다. 질고를 지고 평생을 고통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 쓰레기통을 뒤지며 사는 불쌍한 인생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가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고사는 존재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나사로는 세상의 것으로는 빈 마음을 채울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지긋지긋한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모실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지에게 축복입니다. 가난히 칭찬을 들을 만한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가난을 싫어하십니다. 그러나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면 그것은 축복이라는 사실입니다.

 

가난은 소유한 재물의 많고 적음에 따라 설명되지 않습니다.

 

마음에도 부자가 있고 가난한 자가 있습니다. 나사로는 몸과 마음이 함께 가난했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일생을 통해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22절에 갑자기 그에게 죽음이 찾아왔습니다. \"이에 그 거지가 죽어 천사들에게 받들려 아브라함의 품에 들어가고 부자도 죽어 장사되매\"

 

부자보다 나사로가 먼저 죽었습니다.

 

가난한 자는 빨리 죽습니다. 부자는 젊어서 몸을 녹용, 뱀, 인삼 등으로 많이 보호했기 때문에 숨이 안 끊어져 고생을 합니다.

 

나사로는 죽었으나 누구 하나 거들떠보지 않았습니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다 어딘가 사람이 보지 않는 곳에다 버렸습니다. 그러나 부자는 호화로운 장례식을 치렀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습니다. 부자나 가난한 자나 사람은 다같이 죽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년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이 운명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사실 70 이후에는 너무 그렇게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습니다. 늙어 눈치보며 오래 살면 또 무엇하겠습니까? 남에게 피해주며 오래 살 필요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는 죽음이므로 성실하게 그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합니다.

 

 

인간에게는 세 가지 죽음이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과 단절된 영적인 죽음입니다.

 

둘째는 육신적 죽음입니다.

 

세째는 영원한 죽음입니다.

 

육신의 죽음은 가르쳐 주지 않아도 잘 압니다. 그러나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은 존재요 영원한 죽음 지옥에 가게 될 운명을 아는 사람은 흔치 않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 9:27)\"

 

육신이 죽으면 심판이 따라오게 되어 있습니다. 악인들은 하나님을 무시한 사람들입니다. 영원한 형벌을 받게 됩니다. 예수님을 믿은 사람들은 영원한 천국에 가게 됩니다.

 

 

죽은 존재는 잊혀진 존재입니다. 그들은 미래에 대하여 관심이 없습니다.

 

사람이 죽은 뒤의 운명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예수님입니다. 죽기 이전의 상태와 죽음 이후의 일을 예수님은 가장 잘 아십니다.

 

예수님은 복음서에서만 18회에 걸쳐 지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인들은 지옥이라는 말을 유치하게 생각합니다. 지옥을 말하는 사람은 무식한 사람으로 취급됩니다. 불신자들은 지옥에 대하여 모르니까 모르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며 자기 위안을 삼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자비로운 입에서 지옥이라는 말이 열 여덟 번이나 나왔다는 사실에 주의 하여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하면 안됩니다. 핵심을 피해서도 안됩니다.

 

 

육신이 죽으면 두 길이 나타납니다.

 

간단 명료하게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그 사실을 설명해 줍니다.

 

23절에 음부 지옥에 관한 말씀이 나옵니다. 지옥은 참혹한 곳이기에 하나님은 사람들이 그곳에 가지 말도록 이웃과 어린 자녀와 그를 중심으로 해서 일어나는 사건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부자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는 나사로를 보았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그는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는 영원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지옥은 바로 그런 곳입니다.

 

 

지옥이 어떤 곳입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다섯 가지로 나타납니다.

 

① 지옥은 무서운 고통을 당하는 곳입니다.

 

불꽃 가운데서 사정없이 고통받는 곳입니다. 도스트예프스키가 쓴 \'카라마쵸프의 형제들\'이라는 책에서 보면 이렇게 지옥을 설명했습니다.

 

\'만일 지옥에서 붙는 불이 물질에 붙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이 몸이 타는 불이라면 견디기 쉬울 것이다. 지옥의 불은 육체가 타는 곳이 아니라 우리 영혼이 알지 못하는 불에 타는 곳이라서 그것이 육신이 타는 것과는 비교가 안되는 아픔과 괴로움을 당하게 된다.\' 하나님은 인생을 제맘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하여 지옥을 예비하셨습니다.

 

 

② 지옥은 기도가 통하지 않는 곳입니다.

 

물 한 방울의 자비가 허락되지 않았습니다. 이 땅에서는 불신자에게도 비를 주시고 땅의 열매를 주시지만 그곳에서는 아무리 부르짖어도 응답이 없습니다.

 

 

③ 지옥은 천국을 보면서도 접근하지 못하는 곳입니다.

 

사람에게 비교의 고통이란 견디기 어려운 것입니다. 차라리 안 보이면 모르겠는데 눈 앞에 밝히 천국의 모습을 보고 있으니 더욱 괴로울 수밖에 없습니다. 가난은 그 자체로도 고통스러운 것이지만 남과 비교할 때 더욱 큰 괴로움입니다.

 

 

④ 지옥은 무섭게 기억력이 되살아나는 곳입니다.

 

무디라는 미국의 의학자는 어떤 사고를 인하여 죽음 직전까지 갔던 사람이나, 죽었다 살아난 사람들을 찾아 인터뷰를 한 내용을 \'죽음 이후\'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그 책에서 죽음 이후의 경험자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는 죽은 뒤에 좁고 긴 터널을 통과하게 되었다. 내가 살면서 경험했던 모든 일들이 기억되었고 이 세상의 모든 비밀들을 다 알게 되었다\"

 

부자는 이 땅에 살고 있는 다섯 형제를 분명하게 기억했습니다.

 

세익스피어는 그의 작품 \'리챠드 3세\'라는 책에서 지옥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불신자들은 양심에 달린 수 십, 수 백 개의 혓바닥들이 쉬지않고 지껄이는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 지옥은 자신이 지은 모든 죄악들이 기억나게 되는 곳입니다.

 

 

⑤ 지옥은 소망이 없는 곳입니다.

 

단테가 쓴 \'신곡\'이라는 책을 보면 지옥 어귀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고 했습니다. \"이 곳을 들어가는 자는 희망을 버릴지어다\"

 

 

예수님께서 지옥을 말씀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너무 자기 운명을 모르며 사는 사람들, 어리석은 사람들, 헛된 것에 눈이 멀어버린 사람들, 자기 것이 아닌 것에 집착하는 사람들, 세상 낙에 빠진 사람들, 나중에 다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것에 눈이 먼 사람들, 여기 본문 속에 부자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게 하기 위하여 이 말씀을 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세상 낙에 빠져 있는 사람들아 정신 차려라. 하나님을 탓하지 말라\" 하십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말합니다. \"하나님은 왜 지옥을 만들어 인간을 괴롭히는가? 정신적인 고통을 주는가?\" 지옥은 사람들을 위하여 만든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마귀를 가두기 위하여 만든 곳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마귀에게 속아 지옥에 가게 된 것입니다.

 

 

왜 부모가 자녀 교육을 할 때 때리는 것을 염두에 두고 회초리를 예비시켜 놓고 교육합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은 죄를 적당히 넘기실 수 없습니다.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십니다. 응분의 댓가를 치루게 하시는데 그것이 죽음 곧 영원한 죽음, 지옥입니다.

 

 

하나님은 지옥을 마련하고 계획하셨지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만큼 사람들을 지옥에 가지 못하도록 막으시는 분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수 천 년 동안 노력하셨는지 모른다. 세상에 수많은 선지자들을 보내셨습니다. 그래도 돌이키지 않자 아들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 지옥으로 걸어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돌려놓기 위하여 희생하셨습니다.

 

십자가에 못박혀 죽게 하셨습니다. 십자가의 고통은 지옥의 고통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내가 지옥에 가면 당할 고통입니다. 지옥의 고통을 그가 십자가에서 친히 다 담당하게 하시고 예수님을 살리신 다음 예수님을 지옥으로 가는 길목에 세우시고 가지 못하도록 막으십니다. \"이곳으로 가면 영원히 희망이 없다\" 얼마나 힘을 다해 막으시는지 모릅니다.

 

지옥에 떨어지는 사람들의 고통은 필설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지옥으로 빠져가는 자들을 향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리라(마 18:8-9)\"

 

지옥의 고통의 길을 피하도록 하나님은 천국을 준비하셨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사람들의 행복이 무엇입니까?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 21:4)\"

 

하나님이 준비한 나라의 행복과 기쁨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이 자리에 들어오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불신자를 부르셨습니다.

 

까다로운 조건을 제시하신 것이 아닙니다. 돈을 바쳐라, 생명을 바쳐라, 자식을 바쳐라 하지 않으셨습니다. 안내자 역할을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하셨습니다.

 

 

우리가 지옥에 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대신해 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옥가는 사람들을 천국으로 인도할 수 있는 권세를 가지신 자격자이십니다. 지금도 주님은 외치십니다. \"부자야! 가난한 자야! 왜 계속 그리로만 가는가. 나 예수를 믿으라!\" 하십니다. 그런데 왜 이 요구를 거절하십니까?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요 3:16)\"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9-10)\"

 

세상의 지식, 돈, 건강과는 상관없이 사람은 반드시 죽습니다.

 

이 지구상의 13억 인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습니다. 그들이 믿는 성경책이 천국과 지옥에 대하여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죽음 이후의 세계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매년 6억권 이상이 팔리는 책이 성경입니다.

 

 

죽는 것은 어길 수 없는 분명한 사실입니다. 두 길 중에 한 길은 분명히 가서는 안될 길입니다. 지옥을 피하는 길은 예수님 밖에 없습니다. 내일이 있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죽음과 생명의 갈림길에 놓인 우리 운명입니다.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죽음이 따라올 때 그 때는 기회가 없습니다. 가서는 안될 길에서 돌이켜야 합니다.

 

 

왜 이웃을 하나님이 내게 보냈을까요? 왜 전화를 하고 전도지를 나눠주고 괴롭히는 것일까요? 가는 길이 너무나 가서는 안될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주일학교 어린이를 통해서, 이웃을 동원해서, 사건들을 동원해서 막으십니다.

 

 

강원도에 황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탄공촌이 있는 곳입니다. 탄광촌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를 가리켜 막장인생이라고 합니다. 막바지 인생입니다.

 

미국에 이민 간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선택하는 직업이 택시운전이라고 합니다. 택시 운전 중에 생명을 잃는 사람들이 비일비재한데 직업이 없으니까 마지막으로 목숨걸고 선택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막장 인생들은 수천 미터 지하에 들어가 40℃가 넘는 곳에서 하루 8시간을 일합니다. 탄가루를 뒤집어 쓰고 그 안에서 먹고 일하면 탄가루가 폐 안으로 들어옵니다. 그러면 폐가 굳어지는데 그 병이 구폐증입니다.

 

나중에는 폐인으로 병상에서 쓸쓸하게 죽어가게 됩니다. 구폐증은 아무리 현대 의술이 발달했어도 치료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막장인생으로 어렵게 살아기지만 아이들에게만은 그 직업을 물려주지 않으려 합니다.

 

어느 광부의 아들이 쓴 시(詩)가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탄을 캐신다.

 

나는 공부를 못 하니까 나도 커서 광부가 되겠지.

 

그런데 아버지는 절대 광부가 되지 말라 하신다.

 

거지가 되었으면 되었지 광부는 절대로 되지 말라 하신다.

 

 

왜 아버지가 한사코 말린 것일까요? 광부의 생활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왜 우리에게 한사코 지옥에 가지 말라고 하실까요? 하나님은 너무나 지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돈 가지고 오라는 것 아닙니다. 지옥에는 제발 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은 상징적인 장소가 아닙니다.

 

사람들이 죽어서 실제적으로 가는 곳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믿습니다. 우리가 힘써 전도해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것을 다 잃고도 선택해야 할 것이 천국입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피해야 할 곳이 지옥입니다. 그 길과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천국이 있습니다. 영생이 있습니다. 사람의 풍요가 있습니다.

 

                                 

제목 : 무익한 종의 비유                                      

(눅 17:5-10)

 

 

 본문의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에 매우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하다가 우리들의  믿음이 없어지기도 하고,  신앙생활에 피곤을 느끼기도 하며, 혹은 가정생활,  사회생활에 무력함이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더러는 하나님의 일을 하겠다며 좋은 뜻으로 시작하였다가 낙심하여 돌아서는 나약한  사람들을 봅니다. 또한 그 이유를 찾는다면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러한 믿음을 갖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말씀도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이며, 제자들에게 필요한 참된 믿음을 가르쳐 주시는데 목적이 있습니다.  5절 \"사도들이 주께 여짜오되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하니\"라고 하였는데 바로  제자들의 요청 때문에 본문의 비유를 말씀하시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더하소서! 진정 믿음이 있으려면 믿음이 자라려면, 믿음이 점점 온전해지려면,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제자들이 믿음의  소중함을 알았다는 것만 해도 저들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음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구약성경에서 솔로몬이 하나님께 지혜를 구한 이야기를 잘 압니다. 기브온 산당에서 일 천 번제를 드린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신 하나님께서 \"내게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왕상3:5) 하실 때에 솔로몬은 치리자로서 필요한 지혜를 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에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왕상3:10)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솔로몬은 지혜뿐만 아니라 전무후무한 부와 영광을 누리며 살았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것은 지혜를 구하는  지혜 자체가 상당한 것이요, 믿음을 구하는 믿음  자체도 상당한 것이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에게 오셔서 한  가지만 구하라 한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구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겠습니까?

 

 

 

제자들은 자신들에게 믿음이 가장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저들은 주님께 믿음을 더하소서\"라고 간청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들의 수준이 높아졌음을 의미합니다.  제자들도 역시, 돈  명예, 출세 등이  모든 것을 생각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3년동안 예수님과  동행하다 보니 배운 것이 많았습니다.

 

아직도 잘 모르기는  하지만 역시 믿음이  제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모양입니다. 가만히 보니 예수님의 믿음이 대단하시더란 말입니다.  죽은지 나흘이나 된 나사로를 살리시기까지  했으니 말입니다. 이러한  사건적인 믿음을 통해서 믿음을 알게 된  것입니다.  믿음의 귀중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믿음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주여,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라는 청원을 하였습니다.  이것을 바꾸어 표현하면 기도라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을 더  하소서!\" 실족치 않으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남을 용서하려면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을 하는  데에도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적을 행하는 것도  결정적인 요소가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이  믿음이 절대적 필요성을 깨달은 저들 제자들이 바로  이 믿음을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어도  좋겠다고 하십니다. 대단한 믿음, 바윗덩이처럼 큰  믿음이 아니라 이 작은 겨자씨요 살아 있는 조그만 믿음이 있어도 이 뽕나무더러 뿌리가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면 순종할 것이라는 믿음의 위대성을 설명하십니다.

 

 

 

본문은 비유로 믿음이란  이러한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마음이란 다른 것이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종이라고 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종이라고만 부르지 않으셨습니다.

 

요15장에 보면 우리를 당신의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고 우리편에서도 예수님은 나의 친구라고 건방지게 말해서는 안됩니다. 아버지가 친구처럼 대한 다고 해서  아빠는 내 친구야! 하고 덤벼들면 후레자식되고 맙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를 친구로 대하셨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으로 언제나 대하는 자세가 있어야 합니다.

 

 

 

본문은 매우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스스로 생각하기를 \"나는 오로지  종일뿐입니다.\"하는 그  마음을 가져야  믿음이 자란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이 종이라는 의식에  대해서는 누구보다도 사도 바울이 철저한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편지  가운데에는 언제나 \"나도 사도요,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말이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노예라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기를 예수님의 종이라고 누누이 강조하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한 것이나 제자들이 실수한 그 모든 것은 바로  이러한 의식, 이러한 마음가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그러한 일들을 머리 속에  새기며 이 본문에 나타난 종의 모습을 생각해 봅시다.

 

 

 

1.종이란 첫째로 소유권이 없습니다.

 

 

 

가진 것도 없지만 자기의 생명마저도 자기의 것이 아닙니다. 그 때문에 마음대로 죽지도 못합니다. 자기의 재능은 물론 심지어 자식을 낳아도 주인의 것이 되고 맙니다. 모두가 주인의 것일 뿐 나의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믿음이 자란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 것이라 주장하고, 거기다가 하나님께 기도하여 더 많은 복을 받아 하나님의 것을 내 것으로 삼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믿음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믿음이 자라지는 않음을 알아야 합니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것입니다. 내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내가 무엇인가 좀 했다고 생각이 됩니까? 내가 지적을 나타냈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님께서 나를 통하여 나타내신 것일 따름입니다. 또한 내가 말씀을 전했다 해도 주님께서 내 입술을 통하여 역사하긴 것입니다.

 

그 아무 덧도 내가 한 것은 아니란 말입니다. 물질도 기능도, 내 자신마저도 나에게는 전혀 소유권이 없습니다. 이것이 종의 모습이요 종의 의식입니다.

 

 

 

2.종은 절대 순종합니다.

 

 

 

무슨 일을 왜, 언제, 어디서, 어떻게 하며 묻거나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라면 가고, 오라면 오는 것입니다. 폭우가 몰아치는 악천후에도 종에게는 이유가 없습니다. 본문에 보면 하루종일 밖에서 고된 일을 하다가 돌아왔습니다.

 

그래서 지금 배도 고프고 피곤도 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말하기를 음식을 준비하고 내가 먹는 동안에 수종을 들며 심부름을 한 다음에 먹으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종은 이렇게 이치를 따지거나 판단할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주인이 양을 치라면 양을 치고, 밭을 갈라면 밭을 갈아야 합니다. 하루 종일 일하고 돌아왔더라도 또 일하라면 해야 합니다. 밤을 세워야 할 뿐 거절이한 없습니다. 여기에 무슨 불평이 있고 질문이 있겠습니까?  

 

 

 

이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길 때 여기에 바로 믿음이 있고, 그 믿음은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 비해 우리는 너무나 가리고 따지는 것이 많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자라지를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진정으로 믿음이 자라기를 바란다면 주님에 대한 절대 순종, 절대 위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 주인의 말씀이 종에게서 능력화되어 그것이 종으로 하여금 능력을 생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종에게는 지혜가 없습니다. 그러나 주인이 지혜롭게 주신 말씀대로 하면 지혜로운 자가 됩니다. 또한 종에게는 능력이 없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하라는 대로 할 때에 거기에 능력이 나타납니다.

 

 

 

3.이제 세번째로 생각하는 종의 특성은 보상이 없다는 것입니다.

 

 

 

일을 시킨 일꾼에게는 그 대가로 삯을 줍니다. 그러나 종에게는 보상이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 마디의 고맙다는 인사도 없는 것이 이 종입니다.  보상은 없더라도 알아주기라도 해야겠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모두들 보면 결국은  안알아 준다고 불평들 아닙니까? 그러나 정말 종의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러니 낙심하지도 않습니다. 우리가 낙심하는 이유가 다 무엇입니까? 다소라도 받고자 하는 마음에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고자 하다가도 나중에는 받고자 하고, 처음에는 무조건 바친다고 했다 가도 뒤에는  조건으로 바치며 점점 달라지게 됩니다. 사람의 마음이 조석변개라고 하지만 가는 마음과 오는 마음이 그렇게도 다른 것입니다. 그 때문에 수고를 시작할 때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제법 하다 보니까 무엇인가 좋은 반응, 최소한 칭찬이라도 받아야 될 것이 아니냐는 당위성을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 마음 가지고는 믿음이 자랄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그와는 반대로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택함을 받아 하나님의 일을 함으로 세상은 당연히 너희를 미워하고 핍박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더욱이 나를 먼저 핍박하였으니 너희도 핍박할 것이며, 따라서 내 제자가 되었다면 핍박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핍박을 받는 자가 복이 있고 천국이 저희 것이라는 약속이 있습니다.

 

그럼으로 사례도 없고, 보수도 없는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요, 노예입니다

 

어떤한 경우에 있어서도 칭찬이나 보수를 전혀 바라지 않는 깨끗한 마음,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자에게 믿음의 능력이 있습니다. 여기에 적합한 비유가 있습니다.

 

중국에서 선교를 하던 한 선교사가 홍수에 떠내려가게 되었습니다. 그 때에 어떤 중국 사람 하나가 이 선교사를 건져내어 주었습니다. 이에 선교사가 너무 고마워서 일생 동안 이 은혜를 기억하며 살겠음이 이름을 좀 가르쳐 달라고 하였습니다. 그랬더니 그 사람이 껄껄 웃으면서 \"선한 사마리안 사람에게 이름이 있소? 있다면 내 이름을 말해 주겠오\"하더니 그대로 가 버리더랍니다.  종은 이런 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종은 어떠한 보상도 기대하지 않습니다.

 

 

 

4.종은 불평이 없다는 것입니다.

 

 

 

피곤이나 불평, 원망이 전혀 통하지를 않습니다. 여기에는 절대 의무,  절대 순종이 있을 뿐입니다. 때와 장소, 성격도 가리 것이 없습니다. 여러분, 힘들다는 말은 할 것이 아닙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죽게 되면 죽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힘들다는 말은 하는 것이 아니랍니다. 우리가 주님의 이름을 위하여 일하는 데에는 이미 앞선 수많은 순교가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죽음도 순교 아니면 순직이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기에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무엇이라고 딴 소리하거나 불평할 마음이 없어야 합니다. 이것이 참된 종의 마음입니다.

 

 

 

*이제 참으로 중요한 결정적인 말씀이 이 본문의 마지막 부분에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이렇게 수고하였으나 그 마지막 생각은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지칠 만큼 많은 수고를 하고도  한 것이 없다는 말입니다. 했다고 하더라도 마땅히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우리네 동양인의 겸손한 마음과 생각의 표현 방법이기도 합니다.  (손님을 위하여 상을 가득 차려 놓고도 차려 놓은 것이 없다고 하는 생활의 자세)

  본문의 마지막은 바로 이 점을 말하고 있습니다. 죽도록 수고하고도 일한 것이 없다는 마음! 이 마음만으로만 살아간다면 무슨 일을 하더라도 아무런 불행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정생활을 하는 데 있어서도 자식을 위해 수고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리고 아내의 마음이, 남편의 마음이 이렇게 불편이나 문제가 없을  것입니다. 무엇이나 내가 하는 일은 부족하다고 하는 마음, 수고하고도 부족하고 주고도 부족하며 오히려 죄송해지는 마음이 되는 거기에 진실이 있고  믿음이 있는 것입니다. 쉬임 없는 수고를 하고도 부족하기에 나는 무익한 종이라는 것입니다. 나아가서는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을 했을 뿐이니 무익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진정 믿음이 더하기를 바란다면 \"나는 무익한 종입니다.\"하는 자기 의식을 가지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되면 믿음은 자라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충성심도, 우리의 겸손도, 우리의 종됨도 \"우리는 무익한 종입니다.\"하는 자기 의식 속에서 보다 더 성장해갈 수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제목 : 므나 비유                                      

(눅19:11-27)

 

 

 이 비유의 동기는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기다림에 있어서 인내가 필요하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함이며 목적은 그리스도께서 떠나셔서 재림하실 때까지의 긴 기간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없는 동안 그리스도를 위해 열심히 일할 것을 가르치시기 위함이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셔서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제물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심으로 구속사역을 이루실터인데 저희들은 생각하기를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면 왕위에 오르시고 능력과 권세로 로마의 세력을 꺾으시고 당장에 지상 천국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자신이 죽으시고 승천하셔서 다시 재림하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것을 가르치시고 승천과 재림의 기간이 길게 될 것을 말씀하시며 그 기간이 의미없는 기간이 아니고 부지런히 그리스도를 위해서 충성하여야 될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 \'므나\' 희랍화폐단위 -- 100데나리온이 1므나

 

  * 사도행전 1장을 보면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때니이까라는 사도들의 질문에 너희들은 때와 기한에 관심을 두지 말고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셨다. 승천 후에 예수님께서는 성령을 보내시어 사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고 요구하심.

 

  *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 무엇인가? 자기가 할 일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은 가장 비극적이고 어리석은 일이다.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의 의무-즉 성도들의 의무는 무엇인가? 예배와 봉사와 거룩한 생활이다. 집회출석, 교회봉사, 생활의 거룩함은 누구에게나 해당된다. 교회에서 맡은 직분에 충성, 책임감 있는 직분자들 되라.

 

  * 주님이 재림하실 때 충성여하에 따라 상급이 비례된다. 태만과 게으름은 있는 것도 빼앗긴다. 그리스도께서 왕됨을 원치 않는 자들은 무서운 진노로 죽인다.

 

 

 

 

 

 

 

착하고 신실한 청지기

눅19:11-28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25:14-30)절에 있는 달란트의 비유와 대조가 되는 말씀이며,

 

누가복음 17:7절에 있는 무익한 종의 비유와,

 

마태복음 20:1-16에 있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로 서로 대조되는 말씀입니다. 이 몇 곳에 있는 말씀은 모두 하나님의 일꾼 또는 종 또는 재물 맡은 자, 즉 청지기라는 명칭으로 나타난 그리스도인의 생활입니다.

 

 

 

 첫째 누가복음 17:7-10을 보면 종이 수고하였을지라도 그 공로와 성과에 대하여 그 댓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뜻의 말씀이 나타나 있습니다.

 

  즉 밭을 갈거나 양을 치는 종이 들에서 돌아오면 주인이 그에게 앉아 쉬게하지 않고 도리어 주인의 먹을 것을 준비하고 그리고 그후에야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라고 했습니다.

 

  이와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은 한 것 뿐입니다. 해야 옳다고 했습니다.

 

 종은 주인이 보아 3가지를 겸비해야 합니다.

 

(1) 믿음직해야 합니다.

 

(2) 겸손해야 합니다

 

(3) 순종해야 합니다.  

 

이 말씀은 충성스러운 종이 수고하고 공을 세운 후에도 가져야 할 겸손이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이요 바로 청지기의 자세인 것입니다. 종은 충성심이 있어야  하는데 맡은 일에 충성해야 하고 적은 일에 충성해야 하고 죽도록 충성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계십니다.

 

 

 

 둘째 마태복음 20장에 나타난 포도원 일꾼에 대한 그 주인의 대우에 불평을 품는 비유가 오늘 우리들의 마음을 살리는 데 유익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천국을 마치 품꾼을 얻어 포도원에 들여 보내려고 이른 아침에 나간 집주인과 같다고 했습니다. 교회는 진실로 그리스도를 위한 품꾼을 구하는 것입니다. 아침에 만난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고 낮에 만난 품꾼도 해질 무렵에 들여보낸 품꾼도 해질 무렵에 들여보낸 품꾼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약속하였는데, 삯을 주려할 때 먼저 온자들 중에서 원망 불평을 하게 됩니다. 우리는 아침부터 온종일 수고하고 시달렸는데 해질 무렵에 한 시간 일한 저 사람과 같은 대우를 한단 말입니까? 하고 항의 소동이 납니다. 이것은 주의 일을 하는 사람이 남이 받는 보수나  대우에 대해 시기나 질투로 자기에 대해 우대가 없음을 원망 불평하는  마치 장사치와 같은 정신을 가진자들은 천국에서 용납되지 않는다는  경계의 말씀인 것입니다. 삯을 위해 주를 섬기고 남의 직책과 대우에 시기와 질투로 불평하는 자들을 주님께서는 결코 용납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는 천국의 소망으로 그리스도께서 구속해주신 사랑의 은총을 힘입어  감사와 찬양과 영광으로 맡은자의 일꾼으로 사명을 갈망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우리가 주의 일에 어떤 댓가를 받고자 하는 자세가 아니고 봉사자의 자세로 주님의 무한하신 은총과 공의의 사랑에 빚진자의 심령으로 갚겠다는 은혜의 보답의 신실함이 나타나야 하겠습니다.

 

약속의 말씀의 상급을 확신하여 믿어야 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에 나타난 달란트의 비유는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에  있어서 기회와 능력의 분야는 다를지라도 충성스러운자는 같은 상급을 받을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그리하여 각각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나누어 맡겼습니다. 다섯 달란트 맡았던 자나 두 달란트 맡았던 자나 다같은 칭찬과 상급을 받았습니다.

 

 

 

넷째 그러나 본문에는 열 므나의 은을 가지고 열 사람에게 똑같이 분배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돌아오실 때 맡겼던 것을 도로 찾을 때 그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급과 칭찬의 정도가 다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주님의 인간을 쓰시는 원칙과 그에 대한 대우와 처리는 과학적이고도 불평할 수 없는 철저한 원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1. 우리의 수고는 자발적 봉사이며 또한 하나님의 종된 인간의 마땅한 본분으로 이 수고에 대한 치하와 공로에 댓가를 요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2. 우리는 내게 맡기신 일에 충성하고 내게 약속한 것을 주님에 대한  감사한 것뿐이고 남에게 대한 우대와 상급에 대한 원망과 시비가 없어야하겠다는  것입니다.

 

 

 

 3. 같은 분량의 직책을 맡겼을 때에는 그 충성의 정도에 따라 상급이 다르다는 것을 깨닫게 합니다.

 

이 세가지의 진리를 우리 모두가 깨닫고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므나를 나누어 주셨다고 하였습니다. 여기 장사하는 말씀은 현대어 영어 성경대로 번역한다면 맡아서 관리하라는 말입니다.

 

 Occupy Till I, come 이라고 했습니다. 옛날 번역에는 Occupy 대신에 trade란 말을 썼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우리가 알게 되는 것을 우리가 우리의 왕으로 오실분이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을 맡아서 관리하라는  청지기란 사실입니다.

 

 그가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나라로 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백성이 피를 미워하여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됨을 원치 아니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오시는 날 우리가 그를 위하여 우리에게 맡기신 것을 그의 뜻대로 보관하고 관리하여 그에게 충성하게 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그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서 그의 나라가 임하도록 예비하여야 그에게 한므나를  맡은 자로 당연할 것입니다.

 

그가 우리의  왕됨을 거절하고 내가 스스로 그의 맡기신 것에 대하여 왕노릇 한다면 그 결과가 주께서 왕권을 가지고 오실 때 어떻게 되겠습니까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만든 자는 다섯 고을을 맡는데 한 므나를 받아 자기 마음대로 악한데 더러운데 헛된 사욕에 맡기신 것을 허비함을 보고 나의 왕됨을 원치 아니하더니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그는 평강의 왕이요 사랑의 왕이요 의의 왕이십니다. 세상의 왕은 죽은 후에 그를 따라 죽는 자의  없고 죽은 후에 그를 따라 죽는 자도 없습니다.

 

헬라의 알렉산더 대왕은 살아서 세계를 정복하는 큰 권세와 충성하는 군대를 가지고 있었고 나폴레옹도 그러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죽은 후에 그를 위해서 죽은 사람도 없고 그를 위해 재물을 바친 자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와 허물로 죽을 수 밖에 없는 때에 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여 승천하시고 재림해오신 예수는 그가 죽은 후 지금까지  온 세계 수 억의 사람들이 그를 위하여 살고 또한 그를 위하여 바치고 그를 위하여 죽습니다.

 

 

주님 재림이 임박한 현실에서, 지난날에 주님이 주신 은사와 재능들을 주님을 위해 많은 이익을 남기지 못했다면 주신 므나를 빼앗듯이 주신 것도 회수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탁은 충성입니다. 작은 일에도 충성이요 남이 보든 말든 맡은 일에 충성하라는 것이요 댓가를 생각지  말고 죽도록 충성하라는 것입니다. 그리하면 생명의 면류관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제목 : 불의한 재판관의 비유                                      

(눅 18 : 1-8)

 

 서론

 

 예나 지금이나, 기도를 시작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그 기도의 응답이 있을 때까지 붙들고 있는 사람들은 드물다.

 

  예수님은 기도하다가 쉬이 낙심하지 말라는 말씀을 하시면서 재미있는 비유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한 과부와 불의한 재판관의 싸움에 관한 것입니다. 힘 없는 여인, 하소연할 곳도 없고, 뇌물을 쓸만한 힘도 없는 연약한 여인과, 부와 권력과 아울러 교만까지 갖춘 불의한 재판관의 대결이었습니다. 이 여인에게는 전혀 승소판결이나 이로운 해결이 날 수 없는 상황에서, 시일만 차일피일 미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얼마나 아침저녁으로 찾아다녔는지 귀찮아서 그 송사를 진행시켜 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물론 비유입니다.

 

  그런데 이 비유의 목적이 기도생활의 끈기를 촉구하는 것이어서 재미있습니다. 쉽게 구하고, 쉽게 얻으려는 편의주의자들은 회개해야 합니다.  이 가련한 과부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1. 과부가 처한 상황

 

 

 

   어떤 어려운 일이었는지, 얼마나 억울한 일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혼자 사는 여인에게 있어서는 절망적인 일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그 결국을 합법적으로 보장해 줄 이는 재판관밖에 없었습니다. 오늘 우리 인생은 어떤가? 혼자는 어느 하나도 마음놓고 해결할 수 없는 연약한 과부처럼, 나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연약한 존재가 아닙니까? 우리에게는 얼마나 눈물 흘릴 일이 많은가? 얼마나 하소연할 일이 많은가? 그가 처한 상황은 우리의 상황이요, 그는 지금 우리를 대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기도하는 일밖에 더 있습니까?

 

  우리가 찾아가야 할 이가 누구입니까? 재판장이신 하나님밖에 또 있겠습니까? 이 여인은 비록 힘은 없지만 자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을 지혜롭게 선택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세상에서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는 가장 빠르고 정확한 방법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기도하는 일 뿐입니다.

 

 

 

  1절에 이 비유의 동기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가르치기 위하여라고 했습니다. 기도는 영혼의 호흡이므로 기도의 교훈에는 언제나 다음과 같은 부사가 따릅니다.  

 

      항상 기도하고(눅18-1),

 

      무시로 기도하라(엡6:18).

 

      쉬지말고 기도하라(살전5:17)

 

      기도하기를 쉬는 것은 죄다(삼상12:23)

 

 

 

 

 

   2. 과부가 취한 행동

 

 

 

   과부에게는 재판을 위해서 소용되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돈이 있어 재판관에게 뇌물을 주거나, 지위가 있어 한마디 말이라도 할 형편이 못되었습니다.

 

  그가 가진 재산이라고는 건강한 육체밖에  없었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유일한 무기였습니다. 그는 이것을 활용했습니다. 그는 아침 저녁으로 재판관의 집을 방문하고, 법정을 드나들었습니다. 얼마나 부지런히 좇아 다녔는지 모릅니다. 처음에 이 재판관은 여인을 가볍게 보았고, 그의 억울함에는 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루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재판관은 시달리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 여인을 그냥 두고는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결국은 그의 하소연을 들어주었습니다. 물론 그의 억울한 문제는 모두 해결이 되었습니다. 과부는 옳았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다른 방법으로 해결을 보지 아니하고, 오직 부지런히 재판관을 찾아다닌 것으로, 그것도 한 두번이 아니라 응답이 있을 때까지 그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이 비유에서는 기도의 간절성을 과부의 원한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이 원한은 악한 의미에서의 원한이 아니고 마음에 맺힌 한과 같은 간절한 소원을 말합니다. 삼상 1:15-16에 한나의 기도에 대하여 원통한 심정을 하나님께 통했다고 했습니다. 기도는 간절한 마음으로 해야 합니다.

 

 

 

 

 

   3. 주님이 찾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예수께서 하시고자 하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과부의 의나, 재판관의 불의가 아닙니다. 이 여인의 끈기있는 행동입니다. 처음 한 두번 재판관을 방문했던 여인은, 외면을 당하고 핀잔을 받았습니다. 물론 멸시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온갖 수모를 다 겪으면서도 자신의 요구가 관철될 때까지 쫓아다녔습니다.

 

  바로 이 말씀이 예수님의 핵심입니다. 이 불의한 재판관도 이렇게 끈질긴 여인에게는 항복을 하고 마는데 우리 하나님 아버지께서 밤낮 부르짖는 자녀들의 소원을 외면할 수 있느냐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마지막 부분에서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고 하셨을까요? 이 믿음은 무슨 믿음입니까? 그것은 인내하는 믿음이요, 용기있는 믿음이요, 끈기있는 믿음입니다. 말세의 사람들은 조급해 하고, 무언가 금방 이루려하고, 참고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때 주님이 찾으시는 사람이 바로, 오랫동안 기도하는 끈기있는 사람들입니다.

 

  신앙은 계속적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필요한 때만 믿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말세의 신자들의 믿음이 떨어질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또한 가장 기도가 요구되는 말세지말인 재림직전에 깨어 기도하는 사람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을 미리 아시고 탄식하신 말씀입니다.

 

  도시 속에 사는 사람들은 대개 중산층 이상입니다. 그러다 보니 생활에 필요가 느껴지지 않아 하나님을 필요로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마귀는 우는 사자와 같이 사납고 우리는 약합니다. 섰다고 하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고 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때문에 해결책은 기도밖에  없는 것입니다.

 

 

 

  기도는 과부가 재판관을 찾아 대화하듯이 하나님과 나와의 기도는 부모와 자녀의 대화처럼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서로의 허물을 고하고 사랑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재판관과의 대화가 면담이 이루어지지 않았어도 집으로 돌아온 그는 낙심하거나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으며 다시 자신의 문제를 빨리 해결해 달라고 독촉하는 전화를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통화선이 끊어지면 이런 독촉도 불가능합니다. 주님을 성가시도록 조르고 조릅시다.  

 

 

 

  손은 과부의 소원을 요청하는 기도의 손일 수도 있고, 재판관의 거절하는 손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재판관의 해결을 약속하는 손이라면 얼마나 감격하겠습니까? 주님은 응답해 주십니다.  주님은 나의 손을 부끄럽게 하시지 않습니다. 내가 도움을 요청하면 구원을 허락하시고, 내가 죄를 고백하면 기쁘게 용서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도 과부의 소원을 들어주었거늘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우리들의 기도하는 손을 들어주시지 아니하시겠습니까?

 

 

 

  결론

 

 

 

  쉽게 취하고 쉽게 깨며, 쉽게 사랑하고 쉽게 식는 것이 현대인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생활도 다를 바 없이 무엇이나 속성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조급한 사람들은, 전능하신 하나님이 일주일 동안에 우주와 만물을 하나씩 만드신 분임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구한 것은 받은 줄로 믿는 믿음을 가지고 기다리는 이들이 됩시다. 기다림도 믿음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얼마나 하소연을 하고 있습니까?

 

  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습니까?

 

  내 기도가 주님을 귀찮게 할만큼 오랫동안 부르짖었다고 생각합니까?

 

  그러나 기도하는 성도들의 기도는 속히 응답해 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제목 :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눅 18:9-14)

 

  학교나 직장에 들어갈 때 더러 추천서를 요구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추천서가 첨부되어도 그 추천서는 우리 현실에서 그렇게 큰 효력을 발생하지 못합니다. 우리의 경우 대부분 추천서를 본인이 받아다 본인이 제출합니다. 그러니 자동적으로 그 사람에 대한 정확한 평가를 내릴 수 없고 많이 미화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외국에서는 한국 사람들이 쓴 추천서는 신용하지 않습니다.  

  우리 현실에서의 추천서는 꼭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부수적인 자료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외국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모든 서류 가운데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것이 추천서입니다. 추천서를 받아든 사람은 그것을 보고 그 사람을 받을 것인가 아닌가를 결정합니다.

 

  우리나라 어떤 목사님이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기 전에 미국 주요 도시를 돌아 보면서 교회들을 연구하기로 했습니다. 외국인 가정은 방문 전에 반드시 연락을 해서 사전 허락을 받는 것이 원칙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 목사님은 각 도시를 돌면서 그 지역에 있는 교회에서 숙식을 해결하기로 했습니다.

  사전에 각 교회로 연락을 하고 그곳에 가면 교회에서 신세를 질 수 있는지 여부를 알려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추천해 줄 것을 지도교수에게 부탁을 했습니다.

  추천서를 쓰는 사람은 자신의 명예를 걸고 그 사람을 추천합니다. 그러므로 미화해서 쓰지 않고 자기가 겪으면서 보고 느낀 그대로를 씁니다. 추천서는 본인에게 주는 것이 아니라 추천하는 사람이 추천서를 원하는 사람에게 직접 우편으로 발송해 버립니다.

  이 목사님은 몇 개월 동안 여러 도시를 돌면서 교회를 연구할 수 있었지만 추천서를 지도교수가 어떻게 썼는지 전혀 알지를 못합니다.

  추천서를 쓰는 사람은 있는 그대로를 쓴 것이지만 그 내용이 좋지 않을 경우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지면 그 사람으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추천자가 추천서를 쓸 경우 그 어려움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추천서를 쓰신다면 뭐라고 쓰실까요? 하나님은 있는 그대로 정확하게 쓰시는 분입니다. 그렇게 쓰시는 이유는 그것이 분명한 사실이기 때문이지만 당사자는 하나님을 사람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사람들이 죄인이라서 죄인라고 쓰는데 사람들은 그것이 싫어서 하나님을 미워합니다. 하나님을 무조건 비판합니다. 내가 죄를 지어 죄인이지만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그렇게 쓸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왜 인간은 죄인일 수밖에 없을까요? 그 이유를 살펴 보겠습니다.

 

 

  1.하나님이 원하는 기준에 이르는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이 스스로를 볼 때는 의로워 보여도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죄인입니다. 오늘 본문 속에 그것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또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가니 하나는 바리새인이요 하나는 세리라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하고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가로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옵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내려 갔느니라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하시니라(눅 18:9-14)\"

 

  오늘날 현대인들 중에는 바리새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불신자들은 크게 두 종류입니다.

  첫째는 사람의 인생을 육신의 생명으로 한정하고, 숨이 떨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육신의 죽음 이후에 있는 천국과 지옥도 부정하고 죄에 대한 벌도 의에 대한 보상도 없다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둘째는 죄에 보상도 인정하고 죄인에 대한 심판도 인정하여 나름대로 선을 행하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서 내가 이 정도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인은 은근히 자기를 의인으로 인정하며 살아갑니다. 그들은 기독교의 하나님도 \'나를 의인으로 인정해 줄 것이다\'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의 선을 부정하십니다. 더러 불신자들 가운데 감동적인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선을 부정하십니다.

 

  이 명자라는 여인이 있습니다. 경찰관의 아내로 네 자녀를 데리고 어렵게 살았습니다. 어느 해 겨울 방안으로 연탄 가스가 들어와 남편과 세 아이가 죽고 9살 난 딸 아이와 단 둘이만 겨우 살았습니다. 이 사실이 보도를 통해 세상에 알려지자 상당수의 사람들이 무명으로 그 여인을 도왔습니다. 당시에 불신자들도 힘써 그녀를 도왔습니다. 남편 죽고 자식 잃고 난 뒤에 이 여인은 큰 돈을 만질 수 있었습니다.

  졸지에 큰 돈을 갖게 된 이 여인은 그 돈을 혼자 쓰지 않고 절반을 잘라 어려움을 당하는 가난한 택시 운전사 가정을 도와 주었습니다. 하나님도 이 여인이 행한 일을 잘한 일이라고는 인정하십니다. 그러나 이 여인이 이 일로 천국에 가지는 못합니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이 정도면 무조건 천국에 들어갈 것 같은데 하나님은 아니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믿는 사람들의 불의를 아시고, 불신자의 선도 아십니다. 하나님이 이 여인이 행한 선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선이 하나님에게 만족을 줄만한 선이 못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하신 분입니다. 그 하나님에게는 인간의 그 어떤 착한 행위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기준에는 미달합니다.

 

  우리는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수십 층 빌딩을 보면 높다 말합니다. 산에 올라가 이 산은 높다 말합니다. 그러나 구름 위에서 보면 모두가 납작합니다. 우리가 볼 때는 대단해 보여도 하나님이 볼 때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미국에 엘리자베스 테일러라는 여자 배우가 있습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과 결혼을 했습니다. 그녀가 한 남자와 가장 길게 결혼 생활한 것이 고작 5-6년입니다. 보석을 사주고 달래고 달래서 겨우 5-6년을 삽니다. 그 다음에는 다른 그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이렇게 사는 것만이 간음이 아닙니다. 마음 속에 나쁜 상상만 해도 그것을 하나님은 간음으로 보십니다. 하나님은 동기와 행동을 하나로 보시는 것입니다. 시작과 끝은 같은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표준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요구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람이 이 세상에 있을 수 있습니까?

 

  어떤 목사님이 주례를 하면서 감동을 받았습니다. 16년간 사랑을 나누다가 결혼한 부부였습니다. 여자 나이 40에, 남자 나이 50에 결혼을 했습니다. 부모가 반대하여 결혼하지 못하다가 끝내 결혼한 것입니다. 남자는 중간에 방황하기도 했지만 여자는 일편단심으로 그 긴 세월을 견디었습니다. 기가막힌 사랑입니다. 그런 여자나 마음에라도 나쁜 생각을 안가질까 몰라도 우리같은 보통 평범한 사람은 사랑했다 미워하고 미워했다 다시 사랑하곤 합니다.

  이런 인간이 스스로 \'내 마음은 깨끗하다\' 하니 하나님이 보실 때는 가소롭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표준에 맞는 인간이 없습니다.

 

 

  2.하나님 추방한 세계에서의 선은 선이 아닙니다.

 

  한 때 프랑스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의기투합해서 국왕을 무시하고 바다로 나가 해적이 되었습니다. 지중해 연안을 떠다니면서 여객선을 습격했습니다. 물건을 빼앗고 여자들을 강제로 욕보이기도 했습니다. 프랑스 해군이 이들을 섬멸할 힘을 갖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 해적들은 나쁜 일만 한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동료를 위하여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물건을 빼앗으면 한 사람도 욕심부리지 않고 공정하게 분배하여 나누어 가졌습니다. 아무리 예쁜 여자가 있어도 혼자 차지하지 않고 공유했습니다. 동료가 부상을 당했을 때는 밤잠을 자지 않고 곁에서 치료했습니다. 그 후 프랑스 군대에 의하여 모두 체포되었을 때 이들은 재판에 회부되었습니다.

  이들이 \"우리도 좋은 일을 한 것이 있습니다\" 말했지만 국왕과 법을 무시한 선은 선이 될 수 없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 안 믿는 세계의 선은 선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추방하고 자물쇠를 잠근 그들의 선을 하나님은 선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보좌에 자신들이 앉아서 행한 선은 하나님과는 관계없습니다.

  가출한 아이가 친구를 도와주었다 해도 어머니는 그 선행을 선행으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근본적인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보면,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십일조를 드렸고,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을 했습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상대하여 행했을지라도 내가 했기에 자칭 의인이라고 하는 자들의 선은 하나님이 인정치 않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세계에서도 내가 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정치 않겠다고 했을 때 하나님 없는 세계에서 한 일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니까 나름대로 판단합니다. 현대인들의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흑인이 목욕탕에 가서 다른 사람의 두 세배의 시간을 들여 목욕을 한다 하여도 검은 피부를 바꿀 수는 없습니다. 흑인 특유의 냄새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표범은 반점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죄인된 인간은 아무리 애를 써도 하나님을 떠나서는 그가 원하는 완전한 선을 행할 수 없습니다. 성경의 선을 보시기 바랍니다.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1-12)\"

  자기 행위와 선행으로 구원받을 육체는 하나도 없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9은 말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행위가 아닌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행위로 구원을 받는다면 천국은 천국일 수 없습니다. 보통 착하다는 유순한 사람을 보면 그 마음의 교만이 보통이 아닙니다. 스스로 괜찮다는 사람들로 천국이 가득찬다면 그곳은 교만한 사람 천지일 것입니다. 그곳은 결코 천국일 수 없습니다.

  자기의 악한 행실보다 자기의 선행, 의로움 때문에 구원받지 못하는 이들이 더 많다는 사실을 우리는 본문에서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세리와 창기가 왜 구원을 받습니까? 자기를 믿을 것이 아무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내세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예수님만 바라 보았습니다. 그래서 구원받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왜 구원을 받지 못했습니까? 자기 선행과 의로움을 의지했습니다. 행위를 의지했기 때문에 그것이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없어서 구원받지 못한 것입니다.

 

  감옥에 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중에서 7-8 명은 자신은 죄없이 들어왔다고 말한답니다. 감옥은 자칭 의인이라는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감옥보다 더한 곳이 지옥입니다. 그곳에는 100% 자기를 의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가는 곳입니다. 구원은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어떻게 얻는 것입니까?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줄 아는고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서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서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나타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6-18)\"

 

  율법의 행위로 구원을 얻을 수 없습니다. 행위로는 안됩니다. 율법으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습니다. 천주교는 행위를 강조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믿기만 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 없이 한 과거 선행이 하나님께 전혀 인정받을 수 없듯이 믿음 안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악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외국에 나가면 우리나라 지폐는 휴지 조각입니다. 그런데 누가 크레디트 카드를 주면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습니다. 이 땅의 그 어떤 것을 가지고도 천국에 갈 수는 없습니다. 천국에 가는 길은 예수라는 카드 밖에 없습니다. 이 축복을 우리만 누리는 것은 너무나 아깝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전도하는 것입니다.

  예수 하나만 가지고 나가면 하나님 앞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이 선물을 받으라고 하나님이 요청하십니다. 사람들이 지금도 거절합니다. 그러나 주저하지 말고 받으십시오. 그러면 구원받을 수 있습니다.

 

 

                                 

제목 : 씨 뿌리는 자의 비유                                      

(마 13: 1-9 , 18-23)

 

 

1. 길가와 돌밭

 

예수님께서는 천국의 비유를 말씀하실 때  비유의 방법을 종종 사용하셨다.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는 어려운 진리를 일상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는 일들과 비교하여 쉽게 가르치시려고 하는데 있다.

그러나 이 비유는 믿음으로 듣고 깨닫는 자에게는 진리 이해에 있어서 그 명료성과 심오성을 더해주는 것이지만 불신하여 깨닫지 못하는 자에게는 진리를 허락하지 않으시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마 13장에서 일곱 가지의 비유를 말씀하시는데 그 첫 번 째가 바로 본문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이다.

여기서 씨는 \'하나님의 말씀\', 복음, 진리 등을 상징하고 \'씨를 뿌리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또는 복음 전도자, 등을 가리키고 있다.  그리고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 등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마음의 상태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길가에 떨어진 씨는 새들이 먹어 버렸다고  하셨는데 여기서 새는 사단 을 가리키고 있다.

길은 많은 사람들이 밟고 다니는 곳으로서 이는 세속적 교훈, 장로들의 유전, 철학 등으로 이미 다져져 복음을 받아들여 지킬만한 마음의 바탕이 되어 있지 않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다. 이러한 자들은 복음을 들어도 그들의 교만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해 버린다는 것인데 이는 사단이 그렇게 하는 것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고 계시다.

천국은 세속적 지식이나 이성적 사유로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다만 믿음으로 수용하는 것이다.

돌밭은 토양이 깊지 않아서 씨가 발아를 했다가도  뿌리가 없어 볕이 뜨거우면 곧 말라 죽는 밭이다. 이는 복음을 듣고 기쁘게 받아들이나 그 복음으로 인하여 환난이나 핍박이 생겼을 때에 믿음의 뿌리가 없으므로 쉽게 믿음을 버리는 심령을 가리키는 것이다.

초신자들에게 우리는 이런 경우를 흔히 보게 된다.

교회는 이런 자들에게 \'돌\'로 표현된 장애 요소를 제거해 주어야 한다.

 

 

2. 가시 떨기

 

예수께서는 세 번째로 가시떨기 위에 떨어진 씨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가시떨기와 같은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그 심령 속에서 잘 자라게 하나 가시 떨기도 함께 자라게 함으로서 말씀의 성장을 가로막아 질식하게 하는 경우를 가리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가시떨기를 세상의 염려와 재리에 대한 유혹이라고 말씀하고 계시다.

세상의 염려는 일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하는 의식주에 대한 걱정이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걱정을 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이는 불신자들의 삶의 태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의식주에 대한 염려는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는 새를 먹여 살려 주시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없는 데서 오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 염려는 하나님의 감화력을 약화시켜 신앙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된다.

재리의 유혹은 물질적 가치에 대한 집착과  추구로 신자의 영적 필요를 소외시킴으로서 영혼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시떨기가 된다.

재물은 인간으로 하여금 부유해질수록 축적욕을 가중시키는 반면 그 인격에서 관대성을 감소시키고 그 자리에 비정한 마음을 채워놓는다. 신앙에 있어서 이 \'가시떨기\'인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앞에서의 돌밭인 환난과 핍박보다도 더 위험한 것이다.

왜냐하면 환난과 핍박은 외적요인 이지만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은 내적 요인이기 때문이다.

 

가시떨기에 떨어진 씨가 얼마동안 성장하다가 가시떨기에 의해 그 성장이 중단되고 결실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신앙적인 장애를 극복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성장을 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현상이다. 신앙은 이  세상에서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지속되어야하는 생명활동이므로 결코 일시적으로 있다가 없어지거나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지속적으로 성장해야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온전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의 완전성에 도달하기까지 꾸준히 성장해야 한다고 하였다.(엡 4:13)

신앙의 지구력 그것은 결실을 위한 성령의 능력이다.

 

 

3. 좋은 땅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백 배, 육십 배, 삼십 배 결실을 맺는다고 하셨다. 그것은 말씀을 듣고서 깨닫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듣는 말씀이 아니라 깨닫는 말씀이다. 말씀을 깨닫는 마음은 믿는 마음이다. 정직하고 진실된 마음이다. 순수하고 선한 마음이다.

이러한 마음은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내적 사역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에 말씀의 성장에 옥토와 같은 역할을 하게 된다. 성령의 은혜는 이러한 마음 속에서 말씀이 잘 성장하여 결실 하도록 길가와 같은 굳은 마음과 돌밭과 같은 장애 요소를 제거해  주고 가시떨기와 같은 세속적 염려와 물질적 탐욕을 정화시킨다.

성령의 감동은 말씀이 결실 하도록 수욕과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인내력을 갖게하고 항상 끊임없는 열정으로 헌신하게 만든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서 좋은 땅과 같은 마음 속에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함으로서 (갈5:22-23)

 

신자를 성결되게 하고 그 신앙적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아가도록 역사 하신다.

이처럼 좋은 땅에 떨어진 씨는 풍성한 열매를 맺게 된다.

열매를 많이 맺는 `좋은 땅\'으로서의  모범이 된 신자는 교회 역사상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다. 신약 성경에서 우리는 베드로와 바울을 그 대표적인 인물로 꼽을 수가  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영생의  말씀으로 이해했으므로 그리스도의 대사도요 수제자가 될  수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교회를 예루살렘과 온 유대 땅에 세우는데 중심 역할을 함으로서 신약 교회의 위대한 초석이 되었다. 신약 교회의 성장과 발전을 말할 때 결코 베드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바울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부르심을 받은 사도이다.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 이방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는 이 말씀처럼 온 생애를 이방인 선교에 헌신하였다.

그는 소아시아 일대와 헬라와 로마 세계에 이르기까지 많은 교회를 설립함으로서 그의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였다.

 

 

 

                                 

제목 : 가라지의 비유                                      

(마 13: 24-30, 36-43)

 

1.  좋은 씨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는 교회 안에 선악이 함께 공존하는 실상을 가리키신 말씀이다.

이 비유에서 좋은 씨를 뿌린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가리키고, 밭은 세상이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예수께서는 설명하셨다. 그리고 \'가라지\'를 심는 자는 마귀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며 추수 때는 세상 끝이고 \'추수꾼\'은 천사들이라고 설명하셨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좋은 씨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켰으나 여기서는 \'좋은 씨\'가 천국의 아들들로 설명되고 있다.  그리고 좋은 씨를 이 세상인 밭에 뿌리는 사람은 \'인자\' 곧 그리스도 자신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단순히 대속 사업만을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씨를 뿌리기 위해서 오셨다.

이것은 구속 사역과도 매우 밀접한 관련이 있다.

구속 사역이 아무리 훌륭하고 위대한 것이라 할지라도 씨 뿌리는 일, 즉 대속 사역의 은혜를 받을 자들을 선택하는 일이 없이는 무의미하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삼 년 공생애 기간을  가지셨고 이 때에 좋은 씨앗을 뿌리셨다. 예수께서 뿌린 씨앗은  매우 좋은 씨앗이어서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많은 복음의 결실을 맺었다.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 즉 성도라고 예수께서는 말씀하셨다. 좋은 씨가 정선된 씨앗이듯이 성도는 하나님께서 만세 전에 선택한 자들이다.

좋은 씨가 유익한  씨앗이듯이 성도는 모든 사람에게  유익을 주는 선한 자들이며, 좋은 씨가 혹한에도 잘 견디듯이 성도는 박해와 환난 가운데서도 잘 인내한다.

그리고 좋은 씨가 생명력을 가지고 있듯이 성도는 성령에 의하여 중생하고 생명의 부활을 하는 자들이다. 이처럼 좋은 씨는  하나님 아버지에 의하여 선택되어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의하여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들이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의 확장과 건설을 위한 가장 좋은 씨앗들이다.

 

2. 가라지

\'가라지를 뿌리는 자\'는 마귀라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39) 이 마귀는  하나님의 종들이 자고 있는  사이에 곡식 밭에 가라지를 뿌리는 자들이다.

원래 마귀는 에덴 동산에서 부터  가라지를 뿌렸던 자이다. 에덴 동산의 가라지는 하와였다. 다시 가인은 아담 가정의 가라지로 뿌려졌으며 아브라함의 가정에서는 이스마엘이,  이삭의 가정에서는 에서가 가라지로 뿌려졌다. 가인은 아벨과 함께 자랐으며 이스마엘은 이삭과 함께 자랐고  에서는 야곱과 함께 자랐다.

예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마귀는 열 두 사도들 가운데 가룟 유다를 가라지로 뿌려 다른 사도들과 함께 자라게 하였다.

이처럼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들을 자라게 할 때에 마귀는 그 속에 가라지를  뿌려 놓아 곡식과 함께 자라도록 지금도 역사하고 있다.

 

참 신자와 거짓 신자를 신자들 자신은 잘 구분하지 못하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종들은 분간할 수가 있다.(27)

이처럼 마귀는 그리스도의  사도로 광명의 천사로 의의 일꾼으로  위장하는데 능한 자이다.

신령한 교회는 성령에 의하여 중생한 참 성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는 하나님만이 알고 계시며 인정하시는 무형 교회이다. 그러나 눈에 보이는 유형 교회는 중생한 참 성도와 중생하지 아니한 거짓 성도가 함께 공존하는 교회이다.

이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 바로 가라지는 이 유형 교회 안에서 중생하지 못한 성도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들은 평소에는 그 본색을 잘 드러내지 않으나 결정적인 시기가 오면 거짓 스승, 거짓 목자, 거짓 그리스도로 그 본색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들 교회 안에 있는  적들은 교회 박의 적들보다 더 위험한  존재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색으로 위장하고 있으면서 그 해독을 암암리에 교회 안에 퍼뜨리기 때문이다.

그들은 교회의  믿음과 사랑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분쟁을  일으키며 참 성도들이 희생과 봉사를 할  때 그들은 이권을 장악하고 자기 이익을 도모한다.

 

3. 추수 때까지 연기되는 가라지 심판

이 비유에서 주인은  종들이 가라지를 뽑겠는가하고 물었을 때  추수 때까지 그냥 두라고 대답하고 있다.  교회의 주인은 그리스도 시며 그 종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가르키고  추수 때는 그리스도께서 심판하시기 위하여 재림하시는 때이다.

하나님은 그 때까지 유형교회안에 참 성도와 거짓 성도들을  공존하도록 섭리하시고 계신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염려를 하시는 것은

 

1. 가라지를 분별할 수 있는 분별력이 주의 종들에게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완전한 것이 못되기 때문에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을 뽑을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가 없기 때문이며

2. 거짓 성도는 참 성도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기 위하여 필요하며

3. 참 성도들의 사랑과 봉사를 시험하기 위해서이며    

4. 그들의 겸손과 충성심을 시험하기 위해서이다.

5. 뿐만 아니라 악을 분별할  수 있는 지혜와 대항할 수 있는  용기를 연단 시키시기 위하여 필요하기 때문이다.

가라지를 거두어 불사르는 때를 추수 때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 추수 때는 세상 끝날 이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끝날은 그리스도께서 심판 주로 재림하시는 때이다.

 

 

 

                                 

제목 : 겨자씨의 비유                                      

(마 13: 31-32)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겨자씨는 볼펜으로 점을 찍어 놓을 정도로 모든 씨 중에서도 가장 작은 씨입니다.  그런데 이를 밭에 심으면 4∼5m나 되는 큰 나무로 자라나 피곤하고 지친 새들이 찾아와 깃들어 안식을 얻습니다.

 성경에서 큰 나무는 큰 왕국을 상징합니다.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인다는 것은 수많은 나라와 백성들이 그리스도의 천국 안에 들어와 영적 쉼을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겔17:23, 31:6).

 

 겨자씨 한 알의 비유는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 시작은 작고 미미하지만 그 안에 생명이 있어 인류 역사에 큰 영향력을 미칠 만큼 크게 자란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외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처음부터 크고 장엄하게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75세의 아브라함 한 사람에게 믿음의 씨를 심으심으로 복음 역사를 시작하셨습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된 역사는 점점 자라나 후에는 큰 민족을 이루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구유에 초라하고 무력한 아기로 태어나셨습니다. 이는 당시 천하를 호령하던 로마 제국과 비교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안에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마침내 로마를 정복하고 세계를 정복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도 겨자씨 한 알과 같았습니다. 제자들의 대부분이 학벌도 지위도 없는 어부들이었고 숫자도 많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소수의 12명의 제자들에게 믿음의 씨를 심었습니다. 당시는 아무도 이 역사를 주목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 양성 역사는 점점 자라나 마침내 온 세계에 영향력을 미치는 나무가 되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세계 선교에 대한 불타는 환상이 있었습니다. 그는 죄수의 몸으로 사슬에 매여 로마에 가서 셋집에서 1대1 역사를 하였습니다. 이 역사는 당시에는 마치 태평양 한 가운데 돌을 던지는 것처럼 무모하고 무의미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셋집에서 한 1대1 역사는 생명력이 있어 점점 자라나 마침내 AD 313년에는 거대한 로마 제국을 복음으로 삼켜 버렸습니다.

 U.B.F복음 역사도 처음에는 작고 미미하여 짓밟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곳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었기 때문에 점점 자라나 37년이 지난 지금은 본국 90개 지부와 세계 90개국에 영향력을 끼치는 모임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겨자씨 한 알의 비유가 제자들에게 주는 뜻이 무엇일까요?

 제자들은 거대한 로마가 지배하는 세상에 살면서 크고 힘있는 역사를 동경했을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기적적으로 당장에 크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눅19:1). 이 때문에 그들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작은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없었고 특히 한 사람을 인내심을 가지고 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는 겨자씨 한 알과 같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에서 서서히 크게 성장하기 때문에 인내심을 가지고 가꾸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때로 양들과 말씀 공부를 하면서 오랫동안 변화가 없는 것 같이 느껴질 때 조급한 마음이 생겨 땅을 파보고 싶습니다. 그래서 때가 되기도 전에 결단을 촉구하고 양들의 목을 잡아 뽑게 됩니다. 그러면 그 마음에 자라고 있던 말씀의 씨는 죽어 버리고 맙니다. 하나님의 종들은 농부의 심정으로 참고 인내하며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때가 되면 자라 열매를 맺고 큰 거목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 한 알의 역사입니다.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작은 것 하나를 귀히 여길 줄 아는 영적 가치관을 가져야 합니다.

 

 스코틀랜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사람들 앞에서 커다란 각광을 받지 못하는 두 목사님이 앉아서 자신의 피곤한 목회 생활을 이야기했습니다.

 한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지나간 3년 동안 사역을 했지만 사실 진정한 의미에서 거듭난 성도는 로버트 마펫이라는 청년 한 사람 밖에는 아직 얻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또 다른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나는 최근에 우리 교회에서 한 주간 동안 부흥회를 가졌는데 커다란 기대를 걸고 이 집회를 인도했지만 한 사람 밖에는 얻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수 년 후 놀라운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이 한 목사님을 통해서 3년만에 얻었던 한 명의 결신자 로버트 마펫은 아프리카 선교의 기초를 놓았던 선교사가 되었고, 일주일간의 부흥 집회를 통해서 얻었던 유일한 결신자인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대륙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불을 지피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의 작은 겨자씨로부터 시작됩니다.

 

 

                                 

제목 : 누룩의 비유                                      

(마 13: 33)

 

 

1. 눈에 뜨이지 않는 누룩

 

1.1.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세상에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우리는 보통 눈에 보이는 것 시각적인 것에 매여 살기가 쉽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들을 무시할 수가 없으며 오히려 그것들이 더 큰 힘이 있는 것들이 많다.

 

우리는 하나님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삶의 방향과 역사를 섭리하시고 주재하고 계신다. 따라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의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내면적인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하나님 앞에 더욱 신실한 삶을 영위해 가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1.2. 누룩의 확산력

 

인간이 의로워지려면 반드시 외부로부터 어떠한 능력이 투입되고 확산되어야 한다. 누룩은 밀가루 반죽 안에 투입된다. 그래서 온 덩어리가 다 발효될 때까지 확산되는 것이다. 이것이 누룩의 본질이요 생명력이다.

 

이는 하늘나라 복음의 확산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복음은 누룩처럼 은밀히 점진적으로 그러나 확실하게 확산되어 나간다. 누룩의 세포 분열이 기하급수적인 것처럼 우리의 복음도 하나에서 둘로 둘에서 넷으로 퍼져 가는 누룩의 확산력을 본받아야 한다.

 

 

1.3. 누룩의 의미

 

우리는 밀가루 반죽에 누룩을 조금만 넣는다. 누룩이 들어간 반죽과 그렇지 못한 반죽과의 외견상의 차이는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얼마의 시간이 지난 후의 모습은 너무나도 엄청나다.

 

이렇게 부풀어 가는 과정은 교회의 확장과 복음의 확장에 대한 상징이며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다.

 

누룩은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성취하시려 의도하신 하늘나라의 변혁적인 모습으로 힘차고 강한 생명력과 역사를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을 단적으로 나타내 주시는 말이다.

 

처음에는 적고 미미한 누룩이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토록 왕성하게 확산되는 과정은 하나님 나라의 성장의 법칙을 보여주고 있다.

 

 

 

2. 변화시키는 누룩

 

2.1. 변혁의 필요성

 

일정한 시간의 흐름 속에서 누룩은 놀라운 모습으로 세포 분열을 한다. 이것은 파괴와 조성, 부패와 성장, 죽음과 생명의 원리가 된다. 부패한 인간이 회개함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영광을 하나님께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한 순간에 성화될 수 없는 것이며 한 걸음씩의 변화 속에서 신성해지고 변화되어 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변화의 원리이다. 누룩이 반죽 안에서 변화되어 가듯 우리의 부패된 육신이 믿음으로 변화되어 가는 과정은 천국에 비유될 수 있으며 또 변화는 이러한 의미에서 그 필요성이 있다.

 

 

2.2. 변화된 모습들

 

성도들은 항시 변화된 모습을 가져야 한다.

 

자비롭지 못한 자는 변화되지 못한 손을 가지고 있으며, 겸손하지 못한 자는 변화되지 못한 무릎을 가지고 있는 것이며, 또 불경스러운 말을 하는 자는 변화되지 못한 혀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죄를 짓고도 편안한 자는 변화되지 않는 마음을 갖고 있는 자이다.

 

이처럼 외부로 나타나는 행위들은 우리 내부 변화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누룩을 반죽에 넣듯이 우리의 마음속에 하나님의 말씀을 넣어 영적 변화의 삶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하여야 한다.

 

그것만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모습이며, 변화된 모습들을 통하여서만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기 때문이다.

 

 

2.3. 살아 있는 누룩

 

화학자들은 누룩의 발효 과정을 반죽 속에 있는 당분의 분해와 탄산의 유리라고 한다. 이것은 누룩의 생명이라고 할 수 있는 미묘한 세포군 때문이다.

 

이 세포군이 무수한 세포 증식으로 확산되어지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처럼 살아서 확산되는 것을 천국에 비유하신 것이다. 천국은 누룩과 같아서 살아서 인간의 구원을 위한 복음과 함께 역동하는 것이다. 누룩이 살아서 활동할 때에 누룩으로서의 의미가 있는 것처럼 복음이 살아 있고 확산될 때 천국은 우리에게 참 의미로 다가오는 것이다.

 

 

 

3. 활동적인 누룩

 

3.1. 누룩의 활동

 

누룩은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고 말씀드렸다. 점진적이면서도 쉬지 않는 특성 그래서 전체를 동화시키는 활동을 한다. 누룩이 이처럼 활동을 하듯이 하나님의 말씀도 활동을 하신다.(히4:12)

 

 

우리의 생활 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랑과 이해의 말씀으로 깊은 곳에 담겨져 있어야 한다.

 

말씀은 지적인 체계나 문헌 속에 가두어 두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또한 누룩은 부드럽게 해주는 작용을 한다. 굳은 반죽에도 누룩은 깊이 침투하여 부드러운 빵을 만들어 낸다. 하나님의 말씀도 굳은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변화시키는 활동을 한다.

 

 

3.2. 하나님 나라의 내적인 성숙

 

겨자씨의 비유가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숙과 복음의 확산에 대한 언급이라면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에 대하여 말씀하여 주신 것이다. 누룩은 보이지 않는 은밀한 곳에서 작용하면서도 확실한 변화를 보여준다.

 

이처럼 하나님 말씀에 대한 역사와 작용도 은밀하지만 확고한 변화를 주며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 작용을 꾸준히 도모한다.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서 은밀히 숨어서 선한 일을 해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표면적으로는 보이시지 않지만 항상 경이로운 활동을 하시며 하나님 나라의 내적 성숙을 위하셔서 누룩과 같이 확실한 힘을 발휘하고 계신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뜻에 따른 외적 성숙도 중요하지만 내적 성숙을 위한 말없는 노력도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확고한 초석이 되어 공중의 많은 새가 깃들일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영원한 안식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외적 성장과 내적 성장 중에 어느 것 하나를 강조하거나 소홀히 할 때도 하나님의 나라는 올바른 모습으로 성장하지 못한다.

 

이 둘은 반드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자라가야 한다.

 

우리의 생활을 보면 때로 균형 잡히지 않고 치우친 길을 갈 때가 많다.

 

우리의 삶이 곧 하나님 나라의 장이라고 할 때보다 세심한 하나님 나라를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제목 : 보화의 비유                                      

(마 13: 44)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미국의 부호 록펠러의 변화

 

그는 가난한 사람, 돈을 버는데 미친 사람, 돈을 쓰지 않고 모으기만 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돈을 벌어 사업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배를 사서 고철을 실어 나르는 사업을 하고 있던 어떤 날 사무실에 전화가 걸려왔다.

배가 짐을 잔뜩 싣고 오는데 폭풍우를 만나서 위험하다는 것이었다. 그는 부랴부랴 보험을 들었다.

보험 회사에서는 왠 일인가 하였다. 그런데 배가 파선되지 아니하고 무사히 귀환하였다. 록펠러는 보험료로 낸 500달러가 아까워서 몇일 동안 밥을 못 먹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상당한 부자가 되었음에도 그의 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많은 사람의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돈을 벌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나 가리지를 않았다.

그는 기상천외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는 할 수 있는 대로 은행 빛을 얻어서 미국에 있는 석유를 사들이기 시작하였다. 십여 일 동안 있는 대로 사들이니 미국에 있는 석유가 동이 나고 말았다. 그는 이 때를 이용해서 자기 회사 석유를 15배를 받고 팔아서 세계 제일의 부자가 되었다.

미국에서 이 일을 계기로 트러스트 방지법이 생겨날 정도였다.

그러나 그도 욕심에 이끌려서 사니 몸에 병이 생겨서 죽게 되었다. 의사는 그에게 처방을 내리게 되어진다. 그는 하루에 4천만원 씩을 버는 부자였지만 먹는 것은 천원이 넘으면 안되었다. 살기 위한 열 가지 이상의 규칙이 내려졌다.

그는 죽음 앞에서 비로소 자기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보잘것이 없는가를 알게 되었고 믿음을 찾게 되어진다. 믿음의 놀라운 능력과 새로움을 알게 되었고 또 다른 세계가 있는 것을 분명하게 알게 된 것이다. 그는 이제 믿음의 사람이 되어서 참다운 삶의 길을 찾게 되었고 록펠러 재단을 세워서 보람있는 여생을 보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세상을 헛되게 보람없이 살다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고 예수 안에서 참된 삶의 길을 찾도록 하신 것이다. 예수를 통하여 주시는 삶의 축복은 끝이 없다. 길, 진리, 생명, 목마르지 아니하는 샘물, 성령의 인도와 내주, 함께 하시는 동행의 은혜...

 

세상의 좋은 것들은 하나가 좋으면 하나는 좋지 않고, 목마르게 갈망하다가 얻었지만 곧 실망하고 무의미해지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만나고 주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면 삶의 모든 은혜가 위로부터 끝없이 임하게 되어진다.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 보면 신앙의 기쁨이 무엇인가 신앙의 값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알게 되어진다.

 

 

어떤 사람이 있었다. 그는 평범한 사람이었고 아침에 일어나면 일을 하고 저녁에는 쉬고 또 일어나서 일하고 또 다시 쉬고 하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무슨 일이 좀 잘되면 좋고 잘 안되면 기분이 나쁘고 하나 더하기 하나는 하나요 둘 더하기 둘은 넷인, 그런 계산 속에서만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본문의 말씀을 보니 밭을 가는 사람으로 등장을 하고 있다.

 

그것도 남의 밭을 가는 사람이었다. 그러니 일을 하면서도 무슨 재미가 있었겠는가? 그는 빨리 일이 끝나기만을 바라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열심히 일을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러다가 그는 놀라운 발견을 하게 되어진다. 밭을 갈다가 쟁기에 걸린 어떤 물체를 발견하게 되어진다. 그것은 놀라웁게도 보화였다. 보물 단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의 값은 엄청난 것이었다. 그는 거기서 숨이 멈춘 것 같은 흥분과 기쁨을 맛보게 되어진다. 그리고서는 다시 그것을 조심스럽게 그 땅에다 묻어 두고서는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사게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천국으로 비교를 하셨다. 천국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라면 이것은 바로 신앙인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신앙의 귀중한 몇 가지 교훈을 받게 되어 진다.

 

 

1. 의미 없이 살아가며 참다운 신앙을 알지 못하는 신앙생활의 단계이다.

 

농사꾼이 그냥 밭을 가는 것처럼 인간적인 보람과 기쁨은 있지만 자기 생애에 있어서 신선하고 놀라운 감격이 없는 그런 삶, 그런 신앙이다.

 

처음에 예수를 믿을 때--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신선함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여기에서의 삶은 주변의 여건에 따라 계속하여 바뀌는 생활이다.

 

예.....이스라엘 백성의 광야 생활 , 거듭나지 못한 교인

 

 

신앙 생활은 밭을 가는 생활이다. 기도, 전도, 봉사, 충성, 헌신.........

 

보화를 발견한 사람은 깊이 갈았다. 신앙생활의 참의미를 발견하지 못했을지라도 열심히 해야 한다. 그러면 보화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2. 보화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신앙인이 된 단계

 

주변의 환경에 따라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면서 살아가는 상태에서 보물 단지를 발견하고서 이 사람은 새로운 삶의 전환을 가져오게 된다.

 

보화를 발견한 사실은 너무나도 놀라운 그의 인생을 일시에 바꾸어 버리는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다. 생각지도 못한 사건이면서도 그에게는 너무나도 좋은 사건이다.

 

보화를 발견한 다음에 그에게 나타난 현상 가운데 가장 큰 것이 바로 기쁨이다. 이처럼 신앙은 성도에게 기쁨을 주는 것이다. 성령의 사역은 성도를 기쁘게 한다.

 

\"강물같이 흐르는 기쁨 성령 임하심이라.\"

 

성도는 이 세상 그 어떤 근심, 염려, 실패, 고난도 빼앗아 갈 수 없는 기쁨이 있어야 한다. 천국을 소유한 기쁨이 세상의 염려와 재리의 유혹에 의해 쉽게 덮이어 버린다면 그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할 수 없다.

 

참된 그리스도인의 여부는 이 기쁨의 내적 소유의 여부에 달려 있다.

 

 

3.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밭을 사는 단계

 

그 밭을 사기까지는 아직 보화가 자신의 소유가 아니기에 이 사람은 밭을 사기 위하여 자기의 소유를 파는 것이다. 소유를 파는 것은 사람에게 있어서 괴로운 일이다. 사업이 잘 안되어서 논밭을 팔아서 사업 자금을 하게 되면 괴롭다. 먹고 살 것이 없어서 세간 살이를 파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렇지만 자기의 소유를 팔아서 더 좋은 집을 사고 더 좋은 땅을 산다면 파는 것이 괴로운 일이 아니라 즐거운 일이 된다. 다른 사람에게 있어서는 어리석은 일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는 자만이 그 비밀을 알고 있다.  천국은 이와 같은 것이다. 내가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도 주님 얻었으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나이다 -이것이 참다운 신앙인 것이다.

 

주님 안에 모든 것이 있으니, 보화만 손에 넣으면 소유의 여러 배를 살 수 있으니 걱정이 없는 것이다. 비교의 대상이 아니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의미인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이 걸어가는 이 믿음의 길이 정말로 보화와 같은 것으로 믿고 알고 있느냐 하는 자신의믿음의 분량인 것이다.

 

어떤 사람은 신앙을 알기를 돌처럼 아는 사람이 있다. 나무나 쇳조각 정도로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니 이것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지 아니하고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얻으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기쁨도 없고 때로는 지겹고 억지가 되기도 한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자기의 소유를 다 팔더라도 신앙을 소유하는 것이 훨씬 더 자신에게 유익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막 10:29-30)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제목 : 진주의 비유                                      

(마 13:45-46)

 

1. 진주를 찾는 마음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45절)

 

 

 

  가. 고상한 마음

 

 

  본문은 본 장에 나타난 여섯 번째 천국의 비유이다. 구성상으로 보면 다섯 번째 비유와 매우 흡사한 듯 보이나 내용상으로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먼저 다섯 번째 비유에 나타난 사람은 보화를 추구하지 않는 가운데 보화를 발견했지만 이 사람은 고상한 상인으로서 좋은 진주를 찾다가 만났다. 앞의 사람이 소박성을 가지고 있다면 이 사람은 진리에 대한 갈증을 지녔다고 말할 수가 있다. 세상의 쾌락이나 영화를 추구하며 산 사람이 아니라 참 진리를 추구하며 만나기를 애쓴 사람이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들 가운데 이런 자들이 있었다. 그들은 당시 사회적 지위는 높은 사람이었으나 마음을 교만하게 갖지 아니하고 진리를 찾아 만나기를 갈구하였다. 예)니고데모

 

  이렇게 기득권측에 있으면서 심령이 가난한 상태에 있는 자들을 주님은 외면치 않으셨으며 그들을 만나주셨고 그들에게 하늘의 진리를 깨우쳐 주셨다.

 

 

 

  나. 뚜렷한 목적의식

 

 

  이 사람의 훌륭하고 고상한 점은 바른 의식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 의식을 실천하는 추진력과 실천력을 가졌다는 점이다. 예수께서는 이 사람이 장사꾼으로서 귀한 진주를 만나기 위해 여기저기 돌아다녔을 가능성을 내비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적이고 이성적이고 고상한 성품의 소유자들에게는 실천력이 떨어지는 것이 흠이 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결점이 이 상인에게는 없는 것을 보게된다.  이는 역설적으로 실천력과 추진력이 결여된 고상한 성품의 지성적 신앙인들에게 주는 교훈이라고도 볼 수가 있다.  예수께서는 여기에서 내적인 고상함이나 지적 자질 등만으로는 천국 백성이 되기에는 부족하다는 것을 지적하시는 것이다.

 

  거기에 과감한 결단력과 추진력이 보완될 때 천국의 깊고 오묘한 진리에도 접근할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인격은 지,정,의 삼 요소로 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 신앙 역시 이 세가지 요소를 두루 겸비하여야 한다.

 

  천국에 대한 지식과 정서적 수용,그리고 의지적 결단이 신앙 안에서 하나가 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천국을 소유할 수가 있다

 

 

 

 

2.극히 값진 진주를 만남

 

 

  가. 극히 값진 진주

 

 

  보화의 비유에서와 같이 여기서도 천국은 극히 값진 진주에 비유되고 있다. 이것은 매우 합당한 비유이다.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하여서 천국의 아름다움에 대한 무지를 깨우쳐야 한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자손들은 가나안 땅에 대한 지식을 전혀 갖지를 못했다. 그리하여 광야 생활의 싫증을 느낀 그들은 종종 애굽을 그리워하였고 노골적으로 해방자 모세를 원망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정탐 자로 그 땅에 다녀온 여호수아와 갈렙이 보고한 내용에 따르면 그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요 이상향이었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것을 확실히 믿었고 나머지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믿지 않았다.

 

  그 결과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가나안에 들어간 사람은 여호수아 갈렙 두 사람뿐이다. 가나안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여호수아와 갈렙의 믿음을 자극하였고 이것이 그들이 가나안에 들어가게한 원동력이 된 것이다.

 

 

  나. 하나 밖에 없는 진주

 

 

  예수께서는 이 상인이 진주 하나를 만났다고 하였다. 이는 유일무이한 구원의 길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상징적 표현이다.

 

  세상에는 고상하고 아름다운 것들이 대단히 많다. 학문이며 예술이며 사상이며 음악등 우리들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도덕 의식을 고양시키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것들은 보통의 진주일 뿐이며 극히 값진 진주는 되지 못한다. \'극히 값진 진주\'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에게만 생명이 있음을 가르쳐 준다.

 

 

  다. 진주를 만남

 

 

  진주를 찾던 상인은 극히 값진 진주를 만났다. 이는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라는 산상수훈의 교훈과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다.  극히 값진 진주를 찾으려는 이 사람의 수고와 노력이 주위 사람들에게는 매우 허황되고 무모하게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람은 구했고 마침내는 찾았다.

 

 

 

 

3. 소유를 다 팔아 진주를 삼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46절)

 

 

  상인은 값진 진주를 손에 넣기 위하여 자신의 전 소유를 다 팔아 그 값을 지불하였다. 그는 구하고 찾던 진주를 만났을 때 그것을 거저 수중에 넣으려 하거나 탈취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그 값의 절대적 값어치를 알았고 그에 합당한 값을 지불하기 위하여 전 소유를 팔았다.

 

  오늘날 성도들 가운데 천국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도 않고 거저 얻으려는 자들이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피로 값을 치르셨으므로 자신은 더이상 지불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언뜻 보기에 이 주장은 매우 타당성이 있게 보인다. 그리고 성경적인 것같아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말만 그렇게 보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우리 죄의 대가로 지불하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기 때문에 천국을 거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그리스도의 소유로 내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이 일에 철저했던 사람은 사도 바울이다. 그는 로마 교회를 향하여서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의하여 죽노니 그러므로 우리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로다(롬14: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이러한 고백들은 자기 부정 혹은 자기 포기가 없이는 천국을 소유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이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발적인 헌신과 봉사이다. 이는 선한 마음에서 나오는 사회 봉사와는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대문이다. 이것은 신실한 믿음의 증거이다.  오직 나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신 그리스도에 대한 감사로 말미암는 것이다.

 

 

 

                                 

제목 : 그물 비유                                      

(마 13:47-50)

 

 

마태복음 13장에는 일곱가지 비유가 나옵니다.

 

그물 비유는 전체 비유의 결론이라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즉 천국 비유를 말씀하는 가운데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될 것인가, 준비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것을 구체적으로 그물 비유에서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먼저 그물 비유는 교회 안에는 모든 것이 섞여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또한 우리들은 이 그물을 던져서 많은 고기를, 이 세상에 여기저기 있는 그 많은 고기들을 전부 다 교회로 모아야 할 책임이 우리들에게 있는 것을 본문은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그뿐만 아니라 이제 마지막 때 우리 예수님 재림할 그때가 되면 모든 것을 구별할텐데,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 정한 고기와 부정한 고기를 나누듯이 모든 것을 나누는 그런 때가 온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1.바다에 친 그물

 

 

  이 세상은 바다와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 가지 종류의 고기들이 있습니다. 바다 중에서도 특별히 갈릴리 바다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고도 없이 갑자기 찬바람이 불어오면서 파도가 치고 풍랑이 일기 시작합니다. 바로 이 세상이 그런 세상입니다. 전혀 생각지 못했던 시험의 바람이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때로는 바람이 불고 풍랑이 이는 세상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고기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성도들은 그물을 던져야 됩니다. 여기 그물이라는 말은 교회의 조직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고기를 잡을 때 그냥 잡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그물이 되는 교회를 통해서 고기들을 잡습니다.

 

  교회 안에는 당회도 있고 제직회도 있고 남녀전도회도 있는데 특별히 조직 가운데도 가장 작은 단위의 조직은 구역입니다. 수많은 구역이 그물과 같은데 문제는 그 그물에 구멍이 생겨지면 고기들이 잡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자꾸 밖으로 나갑니다. 그물 비유는 너무나 간단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은 얼마나 인간 구원에 대한 관심이 큰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별히 하나님은 고기를 잡을 때에 낚시를 통해서 하나씩 둘씩 잡는 것이 아니라 그물을 통해서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을 구원하시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통해서 인류를 구원해 가십니다.

  이 교회는 세상에 축복을 나누어주는 축복의 기관이기도 하고, 낙심한 세상 사람들에게, 인생길을 걸어가면서 피곤해진 심령들에게 반석을 쳐서 샘물을 나누어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또 그뿐만 아니라 교회는 이 세상이라고 하는 바다 속 여기저기에 있는 많은 고기들을 잡아서 모아야 하는 책임을 진 기관이기도 합니다. 그물이 아무리 값이 비싸고 아무리 좋다고 해도 고기를 잡지 못하는 그물은 그물이라 할 수도 없고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무슨 얘기인가 하면 교회가 아무리 건물이 좋고 시설이 좋고 조직이 좋고 다좋다 하더라도 고기를 잡지 못하면, 전도하고 선교하지 못하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라는 말입니다.

 

 

 

 

  2.그물(sagene)의 종류

 

 

  넓은 바다에서 많은 고기들을 잡을 때는 배와 배 사이에 큰 그물을 연결합니다. 그래서 이 두 배가 같은 속도로 바다를 훑습니다. 언젠가 마산 앞바다에서 고기 잡는 것을 보았는데 특별히 밤에 많은 고기가 잡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것은 우리들에게 굉장히 많은 것은 시사해 줍니다. 전도도 마찬가지입니다. 밤에, 인생의 밤에, 역경에 처해 있는 영혼들에게, 질병에서 허덕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난 속에 있는 그런 사람들에게 그때가 바로 전도할 좋은 기회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성경에는 그물이 여러 가지 의미로 기록되어져 있습니다.

 

 

  잠언 13장 14절에 보면 \"사망의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죽음이 바로 그물입니다. 또 잠언 7장 23절에 보면 \"음녀의 그물이라\"고 했습니다. 음녀는 그물과 같습니다. 남자를 일단 한번 잡아 놓고는 그 그물 안에서 헤어나지 못하도록 만듭니다.

 

  또 에스겔서 12장 13절에 보면 \"심판의 그물\"이 나옵니다. 심판도 우리에게 있어서는 그물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 말하는 그물은 그런 그물이 아니라 교회의 그물입니다. 바로 교회가 그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 교회는 조직이 잘 되어져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구역조직이 잘 되어 있어야 합니다.구역이라고 하는 단위는 아주 작은 단위지만 그러나 이 구역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구역활동이 활발하게 잘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물에 구멍이 한 번 터지고 나면 우리가 아무리 고기를 잡아도 고기가 도로 다 빠져나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부지런히 그물을 기워야 합니다.

 

 

 

  3.좋은 것과 나쁜 것

 

 

  본문을 보면,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으는 그물과 같으니\". 여기서 말하는 천국은 눈에 보이는 천국, 바로 교회를 말합니다. 교회는 그물과 같다고 했습니다. 계속해서 48절에 \"그물에 가득하매 물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버리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 보면 좋은 고기와 못된 고기를 둘로 완전히 나누었습니다.

 

  이것은 레위기 11장에 나오는 음식에 관한 규례를 여러분들이 이해를 해야 비로소 잘 이해가 됩니다.

 

레위기 11장 2절부터 보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육지 모든 짐승 중 너희의 먹을 만한 생물은 이러하니 짐승 중 무릇 굽이 갈라져 쪽발이 되고 새김질하는 것은 너희가 먹되\"라고 했습니다. 짐승 중에 먹을 수 있는 것은 두 가지 조건이 있어야 먹습니다.

 

  첫째는 굽이 갈라져야 되고

 

  둘째는 새김질을 하는 동물이어야 합니다. 이것은 무슨 말입니까? 여기서 중요한 말은 굽이 갈라졌다 하는 데 의미가 있습니다. 이 말은 세상과 구별되어졌다 하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거룩한 삶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새김질한다고 했는데 새김질하는 동물은 맹수와 같은 육식동물이 아니라 채식을 하는 동물입니다. 그들은 풀을 뜯어먹고 나서 적이 없는 가장 평화로울 때 먹은 것은 다시 되새겨서 새김질을 합니다. 그러니까 새김질한다고 하는 말은 다른 동물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평화롭게 지내는 것을 뜻합니다. 그 다음에 물고기는 어떤 것을 먹어야 됩니까?

 

 

  9절 이하를 보면 \"물에 있는 모든 것 중 너희의 먹을 만한 것은 이것이니 무릇 강과 바다와 다른 물에 있는 것 중에 지느러미와 비늘 있는 것은 너희가 먹되\"라고 했습니다. 성경에 보면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물고기는 지느러미가 있고 비늘이 있어야 됩니다.

 

  지느러미가 무엇입니까? 살아 있는 물고기는 이 지느러미로 물결을 탁탁 쳐가면서 위로 올라갑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이 세상의 물결이 자꾸 내려올 때, 유행의 물결이 내려오고 여러 가지 고난의 물결이 내려올 때에 이 물결을 따라서 그저 손쉽게 그냥 흘러가며 사는 것이 아니라, 물고기가 물결은 내려오지만 그것을 지느러미로 치며 헤엄쳐서 거슬러 올라가듯이 이 세상의 물결을 거슬러서 올라가는 그런 삶을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시대의 조류에 따라 사는 사람들은 바로 지느러미가 없는 사람입니다. 또 여기 비늘이라고 그랬습니다. 비늘이 있는 고기는 물 속에 깊이 안들어 갑니다. 이 말은 신자들이 세속의 깊은 속에, 죄악의 깊은 속에 들어가면 안된다는 것은 말해 줍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항상 천국을 바라보면서 위에서 살아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물론 오늘날에는 여기 있는 것을 문자적으로 지킬 필요는 없습니다. 모든 음식은 다 깨끗하고 선한 것입니다. 그러나 음식 때문에 성도간에 교제가 깨어지고 우상에 빠지게 되는 음식이라고 하면 우리가 먹지 않는 것이 유익합니다. 고기가 좋은 것과 못된 것,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있듯이 본문의 중요한 결론은 이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고기가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 안에는 정한 고기와 못된 고기, 즉 신실한 성도가 있는가 하면 앞에서는 거룩한 척 하지만 뒤에 가서는 더럽고 불의한 죄를 밥먹듯이 저지르는 위선적인 성도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섞여 있는 단체입니다.

 

 

 

  4.갈라냄

 

 

  본문 49절에 보면 \"세상 끝에도 이러하리라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내어 풀무 불에 던져 넣으리니 거기서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하나의 경고가 되기도 합니다.  이제 마지막 때가 되면 천사들을 보내서, 마치 고기들을 다 모아서 물가로 끌어내어 구별하듯이 갈라낸다고 했습니다. 물가라고 하는 것은 구별하는 장소, 심판의 장소를 말합니다. 이제 심판의 장소에서, 하나님의 보좌 앞에서 둘을 나눌 것입니다. 성도 중에도 구별될 거짓 성도가 있습니다(살후 3:11-12). 세상 끝에는 천사들이 와서 의인 중에서 악인을 갈라냅니다. 나눌 때가, 끝 날이 반드시 있습니다(히 9:26)

 

 

  그러므로 우리는 끝날을 위해 준비해야 합니다(벧후 3:9). 본문은 우리들에게 이제 심판의 때가 다가올 것이다. 이 심판의 때가 다가오기 전에 못된 고기일진대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라는 것을 경고해 줍니다. 성경은 분명히 우리들에게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좋은 고기가 될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했습니다. 이 이신칭의(以信稱義)의 교리에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듯이 우리가 믿기만 하면 다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 마음속에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그리고 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마음으로만 믿은 것이 아니라 생활과 연결이 되어지는 신앙 생활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에 우리는 많은 좋은 열매를 맺을 수가 있습니다. 본문에서는 특별히 마지막에 있을 심판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최후의 심판 때가 되면 악인은 그냥 던져 버린다고 했습니다. 어디다가 던져 버립니까? 지옥에다 던져 버린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말씀입니까? 우리는 모두 정한 고기, 좋은 고기가 되어서 하나님께 인정받고 마지막 때에 주님의 그릇에 다 담길 수 있는 신실한 성도가되시길 바랍니다.

 

 

 

 

 

                                 

제목 : 두 빚진자의 비유                                      

(마18:21-35)

 

 

이 비유는 베드로의 질문으로부터 시작된다. 베드로의 질문은 앞에서 주님이 범죄자에 대한 교훈에 이어서 나왔다. 교회가 범죄자를 취급할 때 어떻게 해야할까를 교훈 하시고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이고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린다. 여기에 이어서 베드로는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7번까지 하리이까? 주님은 70번씩 7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이 비유를 해주셨다. 그러므로 이 비유의  요점은 용서라는 문제이다.

 

 

  하나님 나라는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하며 용서를 하지 않는 자는 용서하지 않는 사실로 인해서 자신이 천국백성이 아닌 것을 선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왜냐하면 천국은 용서받은 사람만이 가는 나라이고 그 나라 왕이신 하나님께서 그 백성들을 어떻게 용서하시는가를 안다면 그리고 자신이 하나님께 받은 용서와 자비와 은총을 안다면 용서에 인색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용서의 차원을 이해한 사람이라면 형제의 실수와 잘못에 대하여 용서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용서는 자비에 근거하고 나온다. 천국의 왕은 자비와 긍휼이 풍성하시다. 채무자를 불쌍히 여겨서 채권까지 포기하신다. 하나님께서 죄인들에게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셔서 의무 이행을 요구하신다면 용서받고 구원받을 자가 하나도 없게 된다. 하나님은 자기 권리를 포기하실 뿐만 아니라 용서할 근거를 마련하기 위해서 큰 희생을 치르셨다. 롬3:24(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

 

  엡4:32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27절 \'그 종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 - 그 종은 30절에 같은 처지의 동관이 동일한 호소를 했을 때 허락하지 않고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었다.

  33절 \'내가 너를 불쌍히 여김과 같이 너도 네 동관을 불쌍히 여김이 마땅치 아니하냐\' - 천국은 자비하신 왕께서 다스리시며 잔인하고 무자비한 사람은 그 나라 백성되기에 합당치 않다. 형제를 용서할 줄 모르는 잔인한 자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용서의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 백성은 이점을 부단히 생각하면서 하나님의 큰 용서를 기억하고 형제를 용서하되 제한없이 용서하여야 한다.

 

 

 

(참고) 1만 달란트는 ?

 

   1 달란트 = 6,000 데나리온

 

   1 데나리온 = 노동자의 하루 품삯

 

     => 노동자의 하루품삯을 최소 1만원으로 잡아도 1달란트는 6천만원, 따라서 1만 달란트는 6천억원.

 

 

 

 

 

용서를 모르는 종

 

 

 

 

 

마태복음 18:22-30

 

예수를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닮아야 합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도달해야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계속해서 거룩하게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순간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항상 하나님께 빚진 자로서 살아가는데 그 빚을 하나님께서는 하나님께 갚을 것이 아니라 이웃에게 갚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갚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이웃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 진 빚을 갚도록 하나님께서 준비해 놓으신 기회인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본성은 자기 중심적이기 때문에 많은 순간에 이것을 망각하고 기회를 잃어가면서 인생을 헛되이 보내는 것을 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그것을 지적하시며 바르게 살것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I.긍휼 없는 인간의 본성

 

 

(마18:28) 그 종이 나가서 제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관 하나를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가로되 빚을 갚으라 하매

 

 

       A.인간 본성의 부패

 

첫째 아담을 통해서 들어온 죄는 인간의 본성을 완전히 부패시켰습니다. 이것의 결과로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으며 인간들끼리도 분열되었습니다. 선악과에 현혹된 인간의 마음은 이제 눈에 보이는 것이라면 무엇이나 욕심을 품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에게 유익하게 사용되어져야 할 돈이 오히려 사람을 죄짓게 하는 도구로 변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누구의 책임입니까? 죄의 근원이 욕심이라면 나 자신의 조그만 욕심이 책임자입니다.  욕심이 없는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 욕심이 형제를 욕하고 옥에 가두는 것입니다.

 

 

 

    B.부패한 인간의 모습

 

비유에서 채권자는 채무자를 어떻게 대합니까? 먼저 \'붙들었다\'고 합니다. 부패한 인간은 이웃의 자유를 박탈합니다. 놓아주지 않고 잡아서 복종시키려 합니다. 다음은 \'목을 잡고\'윽박지릅니다. 목을 잡는 행위는 죽이려는 위협입니다. 부패한 인간 세계에서는 남의 자유를 박탈하기도 하고 자신의 자유를 박탈당하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서 생명을 죽이기도 하고 생명을 잃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자유와 생명을 파괴하는 인간의 행위에서 부패한 우리 자신의 모습이 뚜렷이 보이고 있습니다. 억누르거나 억눌리는 일체의 모습을 하나님은 결코 원하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C.용서 없는 인생

 

욕심으로 채워진 인간의 마음은 하늘을 가리우고 자연을 황폐화시킴으로써 인간 서로간의 인정마저 고갈시키고 있습니다. 죄된 본성의 청산이 시급한 이 때에 욕심의 살을 찌우기 위한 무수한 노력들이 이웃과의 단절을 가속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노력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도 모르는 채 영혼을 스스로 죽이고 있습니다.

 

사랑이 식어진 영혼은 죽은 것입니다.

 

용서는 사랑이 없으면 나타나지 않으며 부패한 본성에서는 나올 수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용서를 맛보지 않는 자는 용서 없는 인생을 살아갈 뿐입니다.

 

 

 

 

 

II.하나님의 은혜를 잊음

 

 

(마18:29) 그 동관이 엎드리어 간구하여 가로되 나를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마18:30)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저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18:31) 그 동관들이 그것을 보고 심히 민망하여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다 고하니

 

 

      A.잊을 것과 기억할 것

 

우리네 사람들은 사소한 일은 기억하면서도 중요한 일은 잊고 사는 것 같습니다. 빌린 돈은 잊지만 빌려준 돈은 잘 기억합니다. 도움 받은 것은 쉽게 잊지만 도와준 것은 잘도 기억합니다. 자신을 높이는 일은 빠짐 없이 기억하는가 하면 낮아지는 일은 애써 잊으려 합니다.

 

문제는 중요한 것을 망각한다는 사실입니다. 죄된 성품은 완전히 잊혀질 수록 좋습니다. 그러나 죄된 성품을 깨닫게 한 것까지 잊어서는 안됩니다.

 

망각할 것과 기억할 것은 엄연히 있으되 자신이 받은 것, 낮아지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족한 것을 알아야 성장하기 때문입니다.

 

 

 

    B.하나님의 은혜를 잊음

 

용서하지 않는 종은 잊을 것을 기억하고 기억할 것을 잊은 어리석은 자 입니다. 자신에게 이득이 되는 것만을 기억한 무지한 자 입니다. 임금과 자신의 관계를 자신과 자신의 친구의 관계에서 적용하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조건 없이 탕감해 준 분은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값없이 얻은 것을 비싸게 매매하려고 한 종은 누구입니까? 우리 자신입니다.

 

땀 한 방울 흘리지 아니하고 수확을 기대하는 자를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를 잊고 사는 어리석은 자 입니다.

 

 

 

    C.은혜를 기억하는 자의 즐거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는 자는 감사의 생활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이웃을 용서하게 되고 또 용서함으로 이웃과의 관계도 화목해지는 것입니다. 감사와 용서, 그리고 화평은 그 내용이 다르다고 할지라도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결과입니다.

 

은혜를 기억하려면 생각을 해야 합니다. 무엇이 은혜인가를 생각하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생각, 이것을 우리 신앙인은 기도라고 말합니다.

 

요구하고 달라는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에 기꺼이 참여하리라는 기도입니다. 수동적이고 타성에 끌리는 기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기도입니다. 생각하기 싫어하는 신앙인은 짧은 즐거움으로 만족하지만 생각하는 신앙인은 영원한 즐거움으로 기뻐합니다.

 

 

 

 

  III.하나님을 배워야 함

 

 

      A.포용하시는 하나님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은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미처 사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가오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도저히 인간에게는 용서받지 못할 범죄라도 용서해 주시는 하나님을 말입니다.

 

죄인은 무엇인가 불안하고 도저히 메꾸지 못할 정도의 공허함이 마음에 있습니다. 세상 법은 그저 몸 하나만을 사회와 격리시켜 죄인을 방치하지만 하나님은 불안함과 공허함까지 메꾸어 주시므로 그토록 중요한 자유를 그냥 조건 없이 허락하십니다. 그래서 범죄를 근본적으로 차단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배워야 합니다.

 

 

 

    B.거룩한 분노의 하나님

 

성을 내거나 분노하는 일이 결코 신앙인의 모습은 아닙니다. 신앙인은 온유하며 항상 부족한 것을 깨닫는 겸손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진다면 신앙인은 제사장 적인 자세에서 예언자적인 자세로 바뀌어야 합니다.

 

용서하지 않는 종을 심판한 임금의 진노는 하나님의 노여움입니다. 하나님의 질서가 깨어진 것에 대한 예언자들의 분노, 이것을 거룩한 분노라고 합니다.

 

세상의 분노는 질서를 깨뜨리지만 거룩한 분노는 새로운 질서를 세웁니다.

 

세상의 분노는 복음을 가리우지만 거룩한 분노는 복음을 더욱 선명하게 드러냅니다. 인간의 분노는 하나님을 가립니다. 때문에 우리는 분노하는 것까지도 하나님께 배워야 합니다.

 

 

 

    C.사랑의 하나님

 

모든 인간에 대한 차별 없는 사랑의 근원이 하나님입니다.  차별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도 사랑의 하나님입니다. 다툼과 분쟁으로 상처 입은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화평을 이루시기 위한 사랑의 행위입니다.

 

너무 많은 물질로 죄를 지을 것 같아 필요한 것만큼 허락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지금 많은 재물로 허덕이는 사람은 그것 대문에 넘어져서 일어나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필요 없는 것들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기 때문입니다.

 

 

 

 

 

                                 

제목 : 포도원 품꾼의 비유                                      

 (마 20: 1-16)

 

1. 이 비유의 동기

베드로의 질문 - 젊은 관원의 사건과 근심하며 돌아간 젊은이...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 답변하셨다. \"세상이 새롭게 되어...\"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의 질문에서 매우 잘못되고 거짓된 어조를 탐지해 내셨다. 그래서 그를 꾸짖고 책망하고 가장 심각하게 경고하시기 위하여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의 해석의 열쇠는 \"먼저 된 자로서 나중되고...\" 먼저 된 자가 누구인가? 질문자인 베드로를 위시하여 제자들이다. 오늘날 교회에서 가장 열성적이며 충성스런 중진 일군들, 그렇게 봉사하고 충성한 것이 잘못이고 나중되는 것이 좋은 것이란 의미가 아니다. 이런 먼저 된 자들에게도 위험이 따른다는 의미이다. 이런 위험성이 없는 기독교인은 없다. 우리에게는 원수요 영혼의 대적자가 있기 때문이다. 초신자에게만 위험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성숙한 그리스도인에게도 위험성이 항상 따른다.

 

2. 이 비유중에 우리가 관심을 집중시켜야 하는 원리가 하나 있다.

그것은 기독교인의 삶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은혜라는 것이다. 이 놀라운 은혜의 원리에 맨 마지막에 온 자들도 처음부터 일한 자들과 동일하다는 사실을 생각할 수 있다. 나이가 늙어 개종한 자들에게 종종 찾아 드는 낙심, 너무 늦었다는 것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생의 늦부분에 개종한 사람들은 때때로 구원이 그에게 좀 늦게 임하였고 많은 시간을 낭비한 것을 미끼로 삼는 마귀의 유혹에 걸려들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우리 주님이 열한시에 그들을 불러 일터로 보낸 사실이 커다란 위로가 된다. 그러나 이 비유에서의 강조점은 오히려 먼저 온 사람들에게 있다. 이 비유의 중요한 목적은 먼저 된 자들에게 교훈 하시고 엄숙한 경고를 하시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3. 포도원에 이른 아침부터 보냄을 받은 이 사람들은 왜 마지막에는 그렇게 슬픈 인물로 나타났습니까?

 

① 2절 \"저가 품꾼들과 약속하여...\" 맨 처음 사람들의 경우에만 되어진 것.

그들은 ㉠ 계약을 맺으려고 노력하는 경향

          ㉡ 어떤 것들을 명문화하려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일 곧 그들이 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 너무나도 의식하고 있다. 어느 의미에서 일하는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자들이다.

 

② 그들이 자신의 일을 평가한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도 역시 평가한다. 그들은 자신들이 한 모든 것을 주의 깊게 간직하여 둔다. 그들은 얼마나 시간을 소비하였으며 얼마나 오랫동안 일을 하였으며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 종일 더위와 수고를 견딘 것 - 을 간직한다. 이 사람들은 최초의 잘못된 태도 때문에 즉 그들이 은혜의 원리를 잊었기 때문에 그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더 받을 것을 기대하였다. 그뿐 아니라 그들은 더 받을 자격이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들은 완전히 논리적이었다. 그들은 더 많이 받을 자격이 있고 더 많이 받아야 한다는 감정을 갖고 더 많은 것을 기대하였다. 그러나 더 많이 받지 못했기 때문에

 

③ 그들은 불평하기 시작했다.

그들에게 행복과 기쁨은 다 사라져 버렸다. 기독교인들이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기뻐하는 대신에 비참해지고 불평하게 된다는 것은 얼마나 비극적인 일입니까? 이것은 그들이 모든 것은 은혜로 되어진다는 것을 잊어버린 사실에서 결과되어진 것이다.

 

④ 결국 먼저 온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경멸과 다른 사람에 대한 어느 정도의 질투도 포함된다.

\"나중 온 이 사람들은 한 시간만 일하였거늘...\" 탕자비유중 맏아들의 경우. 이 경향은 충실하고 가장 훌륭한 일을 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간교한 방법으로 들어와 시험한다. <다른 사람들을 많이 주는 것은 주는 자의 뜻인데> 내것이나 받으면 되었지 남을 간섭하고 질투하는가?

 

⑤ 가장 심각하고 무서운 일은 그들의 마음속에 집주인이 불공평하다는 감정을 가진 점이다. \"네가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는가 세어 보아라. 그런데 네가 얻은 것은 무엇이냐. 다른 친구들을 보아라. 그는 아무것도 한 것이 없지만 그래도 그가 얻은 것을 보아라\"라고 마귀가 유혹한다. 종일 수고와 더위를 견딘 우리에게 한 데나리온을 주다니 - 한 시간만 일한 사람과 똑같이, 그래서 하나님은 불의 하신 분이라고 느낀다.

 

4. 이에 대한 치료책은 하나님의 왕국을 지배하는 원리를 이해하는데 있다.

하나님의 왕국은 우리가 항상 알고 있는 것과 같지 않고 전혀 다른 무엇이라는 인식이 필요. 과거의 생활 원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왕국 안에서 나의 모든 생각은 달라져야 한다. 나는 옛생각의 개념들을 가지고 다녀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매매나 권리의 개념을 가지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내가 이것을 하고 저것을 했다 해서 나는 무엇인가 대가로 받을 것을 기대할 권리가 있다고 논쟁하는 것처럼 잘못된 영은 없다.

 {예} 자동판매기식. 내가 무엇을 했다. 그러므로 나는 무엇을 얻을 자격이 있다. 기도, 헌금, 봉사. 우리는 매매하는 정신에서 벗어납시다.

\"만일 내가 이것을 하면 그러면 저것이 일어날 것이다\"라는 식 말이다. 바꾸어 말하면 우리는 무슨 일이나 권리가 없다는 것을 인식. 성경에는 상급에 대하여 가르친다. 상급조차도 은혜에 속한 것이다 - 주님은 그들에게 주어야 할 필요는 없으시다.

 

5. 하나님과 흥정하지 말자.

하나님과 약속을 맺으려 한다면 그것밖에 더 이상의 것을 얻을 수 없다. 나중 온 자들은 약속하지 않았다. 상당하게 주리라. 그들도 한 데나리온을 받았다. 우리 하나님의 은혜에 맡기면 우리가 생각해 본적도 없는 많은 것을 틀림없이 받게 된다. 우리 주님은 바리새인들에게 너희 상을 이미 받았노라고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해서 했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보여졌다. 그것이 그들의 원하는 바였고 그들이 가질 수 있는 전부였으며 더 이상 가질 수 없다.

 

6. 우리는 나의 일에 대한 기록이나 계산을 하지 말자.

하나님으로 하여금 계산을 기록하도록 하자. 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자. 계산을 기록하느라고 시간을 낭비할 필요가 없다. 하나님의 계산방법은 우리들의 물질적인 전망과는 완전히 정반대이다. 나중 된자... 모든 것이 뒤바뀐다. 전세계가 은혜로 인하여 뒤바뀌어진다. 연약한 가운데 강단으로 나아가나 능력으로 끝을 맺는 경우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나아갔다가 바보와 같은 느낌을 가질 때가 있다. 그러면 낙심된다. 결과를 의식하지 말고 일만 하라 기록은 하나님이 하신다.

 

 

 

                                 

제목 : 두 아들의 비유                                      

(마 21:28-32)

 

 

  I. 첫째 아들-이스라엘

 

 

 (마21:28) 그러나 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뇨 한 사람이 두 아들이 있는데 맏아들에게 가서 이르되 얘 오늘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 하니  (마21:29) 대답하여 가로되 아버지여 가겠소이다 하더니 가지 아니하고

 

 

  A. 종교적 지도자들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책잡으려고 다가와 당신의 권위가 어디로서냐고 묻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의 심령의 상태를 꿰뚫어 보시며 그들의 상태를 비유를 들어 일깨우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한 사람은 하나님이시고 첫째 아들은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급 인사들을 비유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비유에서 큰 아들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라고 하는 명령을 받고 대답은 흔쾌히 했으나 실제로는 들어가지 않았는데 이는 바로 종교 지도자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도 실천하지 아니한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B. 요한과 예수를 거역한 자들

 

 

  광의적인 측면에서 해석하여 적용한다면 첫째 아들은 이스라엘이고 둘째 아들은 이방인이라고 할 수 있으나 본문의 전후 사정을 잘 살펴서 해석해 보면 첫째 아들은 세례요한과 그리스도를 직접 대면하여 음성을 듣고도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라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특히 세례 요한의 책망을 들은 헤롯은 요한을 옥에 가두고 끝내는 목 베어 죽였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책잡기만 하였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를 통한 은혜를 거절하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받아들인 기회를 먼저 주었지만 그들은 예수의 복음을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C. 행함이 없는 현대 신앙인

 

 

  첫째 아들의 교훈을 현대적으로 적용하면 바로 야고보 기자가 지적한대로 죽은 신앙의 소유자들을 가리킵니다.

 

  (약2: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오늘날 입술로는 예수를 믿노라고 고백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욕과 세상의 쾌락에 이끌려 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실천하지 못하여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가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한 신앙인은 첫째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행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성도들은 이들을 비판하고 정죄하기에 앞서 이들이 행한 것과 동일한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자신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본문은 우리들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II.둘째 아들-죄인으로서의 인간

 

 

  (마21:30) 둘째 아들에게 가서 또 이같이 말하니 대답하여 가로되 싫소이다 하더니 그 후에 뉘우치고 갔으니

 

 

  A. 공통적 인간 현실

 

 

  아담과 하와의 범죄 후 범죄와 불순종은 인간의 공통형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포도원에 가서 일하기를 바라는 것인데 반하여 제 길로 달려가는 것이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를 단적으로 묘사하여,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이 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대답 후에는 지키지 아니하는 것이나 아예 처음부터 거역의 길로 가는 것은 결과적으로 같은 모습입니다.

 

그러나 본문에서 둘째 아들은 거역의 길을 가던 중에 돌아와 포도원에 비유되는 하나님 나라의 사역을 감당하였습니다.이는 공통된 죄악의 길에서 돌아서는 이가 하나님의 권속됨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B. 회개하는 행동이 동반됨

 

 

  둘째 아들은 거역의 길로 달음질 치다가 그 죄악의 길을 뉘우치고 포도원으로 돌아가는 행동의 결단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아들이 되었습니다.

 

  이는 행동과 실천이야말로 진정한 회개의 열매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죄악의 길을 걷던 인생들에게 행위가 수반된 회개를 원하십니다. 사도 바울이 다메섹 도상으로 행할 때에는 살기 등등한 죄악의 모습이었으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난 후에는 복음의 훌륭한 사역자가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이와 같은 회개를 해야 합니다.

 

 

 

  C. 온전한 용서의 하나님

 

 

  성경은 이스라엘과 교회의 역사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인간의 범죄와 그들의 회개, 그리고 그에 대한 하나님의 용서가 반복적으로 담겨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구약 요나서에 나타나는 니느웨의 회개와 누가복음에 나타나는 탕자의 회개는 인간의 범죄와 회개 그리고 하나님의 용서를 가장 잘 나타내 주고 있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거기에서 보면 하나님께서는 회개하는 인간들에 대해 계획하였던 재앙을 취소하는가 하면 자녀의 신분으로 조건 없는 온전한 회복을 이루셨습니다.

 

 

 

 

  III.세리와 창기

 

 

  (마21:31) 그 둘 중애 누가 아비의 뜻대로 하였느뇨 가로되 둘째 아들이니이다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리들과 창기들이 너희보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리라 (마21:32) 요한이 의의 도로 너희에게 왔거늘 너희는 저를 믿지 아니하였으되 세리와 창기는 믿었으며 너희는 이것을 보고도 종시 뉘우쳐 믿지 아니하였도다

 

 

  A. 진정한 믿음의 결과

 

 

  당시 세리들은 그 직업 자체가 매우 죄악시된 비천한 것으로서 이 직업에 머물게 되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부정한 방법으로라도 물질을 모을 수 있다는 것 때문이었습니다.

 

창기들 또한 필요악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비천한 자들로서 인격적으로 대우받지 못한 부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세례 요한이 세례를 베풀 때에 돌이켜 믿음을 가졌습니다. 이들은 세리와 창기, 즉 죄악된 상태에서 구원을 받음 것이 아니라 흉하고 추한 죄인들이었으나 진정으로 회개하고 믿음을 가짐으로서 신분에 관계없이 하늘 나라에 들어가게 된 것입니다.

 

 

   B. 회개를 촉구하는 메시지가 됨

 

 

  예수께서는 대제사장들과 백성들의 장로는 믿지 않는 반면 세리와 창기들은 믿고 천국에 들어가게 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은 극단적인 예를 동원하신 회개의 촉구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둔감해진 심성은 예수님 앞에서도 그 눈과 마음이 열려지지 아니하였습니다.  오늘날도 이러한 부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권이나 습관에 길들여져서 신앙의 순수성을 잃고 아집과 이기심에 찌들어 회개할 바를 회개치 못하는 심령이 바로 그들입니다.

 

  회개의 촉구에도 오히려 반감이 일고 불평과 불만의 감정이 생길 때 성도들은 자신의 신앙을 심각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C. 무한한 은혜

 

 

  세리와 창기가 요한의 메시지 앞에서 신앙으로 새로워져 하나님 나라에 들어갔다는 것은 하나님은혜의 무한함을 가르쳐 줍니다. 성경에는 이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을 수많은 곳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몇 가지 예를 든다면 다윗의 경우 살인죄와 간음죄를 범하고 책망을 받았을 때에 회개하녀 사유하심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는 세 번이나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사도 바울도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의했고 예수님을 대적하던 죄인 중의 괴수였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회개하여 하나님 나라의 거룩한 사역의 거목이 되어 열매를 맺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는 무한합니다.

 

 

 

 

                                 

제목 : 악한 농부의 비유                                      

(마 21: 33-41)

 

 1. 실과를 받으러 온 주인의 종들

 

 

(마21:33) 다시 한 비유를 들으라 한 집 주인이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거기 즙 짜는 구유를 파고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고 타국에 갔더니 (마21:34) 실과 때가 가까우매 그 실과를 받으려고 자기 종들을 농부들에게 보내니

 

 

 ① 결실해야 할 이유

예수님의 비유를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스라엘 민족의 실제적인 모습을 엿볼 수 있습니다. 여기서 포도원은 이스라엘 민족을 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서는 포도원을 만들고 산울로 두르고 즙짜는 구유와 망대를 짓고 농부들에게 세로 주었습니다.

필경 심은 포도나무는 극상품 포도나무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무조건 열매를 요구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열매 맺힐 수 있는 조건을 구비하고 은혜를 공급하여 주신 후 열매를 찾기 원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과거 이스라엘 나라에도 그러하셨듯이 오늘의 교회와 성도들에게도 충분한 은혜를 주시고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예) 달란트 비유(마 25:14-30)

 

 

 ② 포도원의 농부들

비유 속에 나오는 포도원의 농부들은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포도나무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잘 돌보고 가꾸어야 할 의무가 있고 이러한 그들의 돌봄을 통해 백성들은 믿음의 삶을 통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헌신과 충성이 하나님께서 받으실 열매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타락하고 부패했던 이스라엘 종교 지도자들은 포도원인 백성들을 잘 가꾸고 돌보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 가운데서 나타나고 있는 하나님께 드리는 아름다운 영광까지 가로채는 범

 

죄를 자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예) 삼상 2:12-18, 사 1:13)

 

 

 ③ 종들을 보낸 근거

포도원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실과 때가 되어 종들을 보내었는데 그 종들은 선지자입니다. 종들을 보낸 이유는 포도원을 세로 주고 갈 때에 체결한 합리적인 계약 때문입니다.

그러나 농부들은 종들을 예우하거나 합당한 소출을 계산해 내기보다는 오히려 포악한 행동으로서 종들 중에 하나는 심히 때리고 하나는 죽이고 하나는 돌로 쳤습니다.

그 후에 주인이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 종들을 처음보다 많이 보냈으나 저희에게도 그렇게 행했습니다.

 

 

 

2. 공경 받을 주인의 아들

 

 

(마21:37) 후에 자기 아들을 보내며 가로되 저희가 내 아들은 공경하리라 하였더니 (마21:38) 농부들이 그 아들을 보고 서로 말하되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 하고

 

 

  ① 주인의 마지막 기대

보통 주인이라면 처음 한번 주인을 배신할 때 그들을 처치했을 터이지만 이 주인은 매우 관용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마지막 기대를 모아 \'내 아들\'이면 공경하리라 여겨 아들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주인의 기대와는 전혀 어긋나게 이들은 아들까지 포도원 밖으로 쫓아내어 죽이고 말았습니다. 여기에서 주인의 아들이란 유대의 사회적 배경에서는 주인 자신을 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버지와 아들을 동일하게 보고 이해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께서도 주인의 아들로 공경을 받아야 마땅했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오히려 주인의 아들이라는 이유를 빌미삼아 상속자니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자는 속셈으로 악을 행하였던 것입니다.

 

 

 ② 농부들의 악행 이유

농부들이 정당한 계약을 어기고 종들을 많이 해하였고 끝내는 아들까지 죽이게 된 데에는 농부들의 욕심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단순히 소출을 떼어먹겠다는 속셈으로 한 것이었으나 나중에는 상속자를 죽이고 유업을 차지하겠다는 욕심이 결국은 용서받을 수 없는 죄를 낳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욕심은 죄를 낳습니다. 그래서 야고보 기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세상의 풍조에 찌들어 할 수만 있으면 많은 것을 움켜쥐려는 사악한 욕심에 포로된 현대 신앙인들에게 경종이 되는 말씀입니다.

 

 

 ③ 아들로 묘사된 그리스도

마지막으로 성밖에 끌어내어 죽임을 당하는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택하여 선민을 삼으시고 여러 선지자를 세워 말씀을 증거하여 열매를 얻기를 원하셨으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온갖 박해로 하나님의 종들을 잔해하였고 마지막 예언자이시자 메시아의 도구이신 세례 요한까지도 헤롯의 권세에 의해 목베어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포도원에 보냄을 받은 상속자인 예수님께서 오셨지만 그를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3. 권리의 상실

 

 

(마21:41) 저희가 말하되 이 악한 자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은 제때에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로 줄지니이다

 

 

 ① 당연한 결과  

 

포도원으로 비유된 이스라엘 지도자와 백성들은 하나님의 종들을 합당히 여기지 아니하다가 결국은 하나님의 독생자를 죽이고 포도원을 빼앗기기에 이르렀습니다. 즉 주후 70년에 예루살렘은 멸망되고 말았습니다.

이것은 그들이 뿌린 사악함의 결과인 것입니다.

분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지도자들과 백성들이 예수님을 죽이라고 빌라도에게 요구하며 이르기를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릴지어다\'(마 27:25)라고 한 어리석은 말대로 예루살렘은 로마의 공격 하에 무너지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후 이 천년 가까이 전 세계에 흩어져 유리 방황하는 백성이 되었으며 나치의 학대에 짓밟히는 버림받는 선민의 수모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② 이방에 넘겨진 복음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농장을 관리하고 가꾸며 충성하기를 거절할 때에 하나님은 제사장과 장로들이 \'제 때 실과를 바칠만한 다른 농부들에게 세를 줄지니라\'라고 대답한 것과 같이 이방의 다른 농부들을 택하여 복음의 포도 원을 맡기셨습니다. 그 결과 오늘 전세계에 복음의 가지가 펼쳐졌으며 수많은 영혼 구원의 실과가 하나님께 돌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주권에 의해 베풀어진 구원의 은혜 때문입니다.

특별히 이것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를 거부한 결과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거부함으로서 사명도 잃고 영생도 잃어 버렸습니다.

 

 

 ③ 경성해야 할 교회

이스라엘의 패역함을 지적하여 악행으로 인해 그들의 상실한 선민된 특권이 이방으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그리스도의 가르침 속에서 오늘날 모든 성도와 교회,

 

 교회의 지도자들은 경고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참 감람나무인 이스라엘이 합당치 않을 때 가차없이 잘라내시고 돌 감람나무인 우리들을 원가지인 그리스도께 접을 붙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겸허하게 \'우리를 합당한 자로 열매를 맺고 있는가\'를 자문해보아야 합니다.

 

 

(마21:43)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너희는 빼앗기고 그 나라의 열매 맺는 백성이 받으리라

 

 

 

                                 

제목 : 혼인 잔치의 비유                                      

(마22:1-14)

 

 

 이 비유는 천국을 혼인잔치로 비유하고 잔치에 초청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이고 이들의 거부로 사거리 길에 나가서 만나는 대로 악한자나 선한자나 모두 데려다가 잔치에 가득하게 채운 것은 이방인들이 하나님 나라로 들어온 것을 보이며, 들어온 손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손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비유의 결론은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이다.

 

 

  이 비유에서도 천국이 계시되는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로 비유된다. 보통 사람들의 혼인 잔치도 풍성하고 즐거운데 왕의 아들의 혼인 잔치는 얼마나 풍성하겠는가?  4절 \"나의 소와 살진 짐승을 잡고 모든 것을 갖추었으니\"..  눅14:15 함께 먹는 자 중에 하나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사람은 복되도다 하니..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하셨다. 하나님 나라 잔치에 참예하는 것이 얼마나 복되며 영광스러우며 모든 음식이 풍성한가? 잔치집은 먹을 것이 풍부하고 기쁨과 유쾌함이 있다. 이것은 천국이 인생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보다도 더 풍성한 하나님 나라임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복되고 영광스럽고 풍성한 잔치에 초청을 받고 한결같이 거부했다는데 문제가 있다. 더욱이 3절에 오기를 싫어하고, 5절에 저희가 돌아보지도 않고 자기 밭으로, 자기 사업처로 갔고, 눅14:18에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고,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시험하러 가고, 장가들었으니 못가겠노라. 6절에는 심지어 심부름 온 종들을 잡아 능욕하고 죽이기까지 했다.

  여기서 유대인들의 사악함이 얼마나 깊은가를 볼 수 있다. 그토록 영광스럽고 복된 왕의 혼인 잔치에 청함 받은 그 영광을 그렇게 거부할 수 있는가? 그들의 핑계가 정당화 될 수 있겠는가? 그렇게 돌아보지도 않는 무관심과 무례를 행할 수 있겠는가? 청함을 거절한 것만도 왕을 경멸하는 태도인데 거기다 종들을 어쩌자고 능욕하고 죽이는가? 상식적으로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들은 사실상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부르심을 경멸하고 거부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보내신 종들을 핍박하고 죽이고 했던 것이 역사적인 현실이다.

  유대인 뿐만이 아니고 모든 이방인들도 하나님이 선택하지 않은 사람은 역시 동일하게 천국의 부르심을 경멸히 여기던지 또는 무관심하고 어떤 자들은 모욕, 능욕하고 핍박하고 화를 내는게 사실이다.

 

  이 비유의 결론같이 택함을 입지 않고서는 복음의 부름에 순종하지 않게 되고 혹은 잔치집에 들어왔다 하더라도 택함을 입지 않은 자는 결박당하여 바깥 어두운데 쫒겨나 슬피울며 이를 갊이 있게 된다. 그러므로 이 비유에서 하나님 나라 백성은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기인하나 택함을 입지 못한 자들은 스스로 은혜의 초대를 거부함으로서 하나님 나라에 참예함에 합당치 못하게 된 것이다.

 

 

 

  인류가 끊임없이 구원의 초청을 거부하는 다양한 면이 본 비유 가운데 나타나는데

 

  ① 오기를 싫어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들의 마음을 매혹하지 못했다.

 

  ② 돌아보지도 않았다. 무관심주의. 천국과 내세에 관심이 없는 자들.  

 

  ③ 자기 밭으로 갔고,

 

  ④ 자기 사업처로 갔다.

 

  ⑤ 장가들은 것 핑계. 토지, 사업 즉 소유물에 더 열정. 간접적 행복 추구.

 

  임금의 궁전으로 가지 않고 또 복음의 부르심 앞에 적의를 품고 노하는 자들도 많다. 그러나 임금은 또다른 종을 보내며 반복하여 청한다. 왕의 호의와 은총을 거부한 것만으로도 그들은 왕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멸시했으니 벌받아 마땅한데 종들을 죽이기 까지 한 것은 완전히 왕께 대한 반역이다. 여러분이 선택받은 자라면 하나님의 부르심을 이렇게 대하지 않게 된다. 순종하는 것 같으면서도 예복을 입지 않은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도 있으니 우리 자신을 살펴보자.

 

 

 

 

 

                                 

제목 : 무화과 나무의 비유                                      

(마 24:32-33, 막 13:28-29, 눅 21:29-31)

 

 

(마 24: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마 24: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 알라

 

 

 

(막 13: 28)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막 13: 29)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 줄을 알라

 

 

 

(눅 21: 29) 이에 비유로 이르시되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눅 21: 30)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눅 21: 31) 이와 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무화과 나무의 비유는 예수님  당시의 청중과 그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서 언급하신 것입니다.

  농부의 삶과, 어부 그리고 목자의 삶을 많이 다루셨는데 당시의 청중들은 우리보다 더 많은 시간을 자연을  접하며 살았습니다. 예수님도 그런 자연 속에서  자연스럽게 주위의 자연을 보시면서 비유를 말씀신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의 무화과 나무는 이스라엘 전역에 유실수로 평범한 것이었습니다. 특별히 Bethphage(무화과 나무들의 집)이 위치한 예루살렘  근처는 더욱 그러했습니다.

 

 

 

  본문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 무화과 나무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히브리어로  \"테에나\"이며 헬라어로는 \"수콘\", 덜익은 무화과를 \"팍가\"라는 말로 아2:13절에 사용되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구약에서 \"테에나\"로 23번,  신약에서 \"수케\"로  16번 언급되었습니다. 무화과  학명은 피쿠스 카리카(Ficus carica)입니다.  무화과 나무 열매는 즙이  많고 열매를 자르지 않으면 꽃을 볼 수 없도록 생겼습니다.

 

  무화과는 둥근 종류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배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습니다. 무화과 나무는 계절에  따라 일정하게 두 차례 열매를 맺는데 5,6월에 익는 일반적인 겨울  무화과가 있고 8,9월에 익는  여름 무화과가 있습니다. 매년 4월쯤 입이  나타나며 열매의 싹은 2월쯤 볼 수  있습니다. 팔레스틴에서는 1년에 9-10개월 이상 열매를 딸 수 있다는데 어린 무화과 나무는 겨울에 얼어죽어 첫번째  열매는 딸 수 없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여러 종류의 무화과 나무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무화과 나무잎으로 몸을 가렸습니다.

 

(창 3:7)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 자기들의 몸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를 엮어 치마를 하였더라

 

  하나님은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에게 팔레스틴을 이렇게 소개했습니다.

 

(신 8:8)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들의 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팔레스틴 땅을 살펴본 사람들은 그 땅을

 

(민 13: 23) 또 에스골 골짜기에 이르러 거기서 포도 한송이 달린 가지를  베어 둘이 막대기에 꿰어 메고 또 석류와 무화과를 취하니라 라고 표현했습니다.

 

 

 

<참고구절>

 

(렘 5:17) 그들이 네 자녀들의 먹을 추수 곡물과 양식을 먹으며 네 양떼와 소떼를 먹으며 네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열매를 먹으며 네가 의뢰하는 견고한 성들을 칼로 파멸하리라

 

(사 28:4) 그 기름진 골짜기 꼭대기에 있는 그 영화의 쇠잔해 가는 꽃이 여름 전에 처음 익은 무화과와 같으리니 보는 자가 그것을  보고 얼른 따서 먹으리로다

 

(사 36:16) 히스기야를 청종치 말라 앗수르 왕이 또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각각 자기의 포도와 자기의 무화과를 먹을 것이며 각각 자기의 우물물을 마실 것이요

 

(아 2:13) 무화과 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이 피어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왕하 18:31) 너희는 히스기야의 말을 듣지 말라 앗수르 왕의 말씀이 너희는 내게 항복하고 내게로 나아오라 그리하고 너희는 각각 그 포도와 무화과를 먹고 또한 각각 자기의 우물의 물을 마시라

 

(왕하 20: 7) 이사야가 가로되 무화과 반죽을 가져오라 하매 무리가 가져다가 그 종처에 놓으니 나으니라

 

(잠 27:18) 무화과나무를 지키는 자는 그 과실을 먹고 자기 주인을 시종하는 자는 영화를 얻느니라

 

(호 9:10) 옛적에 내가 이스라엘 만나기를 광야에서 포도를 만남 같이 하였으며 너희 열조 보기를 무화과 나무에서 처음 맺힌 첫 열매를 봄 같이 하였거늘 저희가 바알브올에 가서 부끄러운 우상에게 몸을 드림으로 저희의 사랑하는 우상 같이 가증하여 졌도다

 

 

 

  구약 성경에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이 무화과 나무와 함께 살았던 것을 알 수있는데 유대 민족의 번영을 묘사하는데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왕상 4:25) 솔로몬의 사는 동안에 유다와 이스라엘이 단에서부터  브엘세바에 이르기까지 각기 포도나무 아래와 무화과나무  아래서 안연히 살았더라

 

(미 4:4) 각 사람이 자기 포도나무 아래와 자기 무화과나무 아래 앉을  것이라 그들을 두렵게 할 자가 없으리니 이는 만군의 여호와의 입이 이같이 말씀하셨음이니라

 

 

 

  무화과 나무는 더운 지방에서  무상한 커다란 잎사귀와 고마운 그늘을 제공해 줍니다. 우물 옆에  심겨진 무화과 나무를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올리브나 삼목, 그리고 감람나무와는 달리 무화과 나무는 겨울이 다가오면 잎이 떨어집니다. 그리고 다른 여러 낙옆송들이 봄철에 일찍이 생명의 신호를 보여주기 시작할 때도 무화과나무는 그 앙상한 가지들이 여름이  오기 직전까지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그리고는 눈이  나고 봉우리가 터져 며칠만에 부드러운 잎이 나옵니다. 자연은  살인적인 밤의 추

 

위는 지나가고 여름철이 왔다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4월 첫 주 동안에 싹이 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가르치셨는데 바로 그 때가 무화과나무에서 생명의 첫 신호를 보여주는 시기입니다.

 

(마 24: 32) 무화과나무의 비유를 배우라 그 가지가 연하여지고 잎사귀를 내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아나니

 

  이 말씀은 청중들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이야기였습니다.  그러나 영적으로 이 비유를 이해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Ahiqar 史話(기원전 5세기의 것으로 확인됨)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내 아들아, 너는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와 같다. 이제 주인은 그 나무를 베어 버려야 하게 되었다. 그 때 그 나무가 주인에게 말했다. 나를 옮겨 심어 주세요. 그 때에도 내가 열매를 맺지 못하거든 나를 베어버리세요. 그러나 그  주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네가 물가에 서 있으면서도 열매를 맺지 못했거늘  어찌 다른 장소에 옮겨진다고 열매를 맺겠는가?\"

 

  예수님은 이러한 民話를  알고 계셨을 것입니다. 이  민화에서는 무화과나무의 간청이 거부되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인자가 곧  문 앞에 가까이 온 것으로 회개의 기회를 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직 문은 열려있습니다.

  그러나 언제 이 문이 닫힐지 모릅니다.

 

  하나님이 허락한 이  은혜의 기간은 변경할 수 없는 최후의  것입니다. 이 마지막 기간이  회개의 기회로 이용되지  않은 채 지나가 버리면,  하나님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됩니다. 하나님에 의해  허락된 회개의 기간이 지나가 버리면, 그것을 연장 시킬 수 있는 힘은 아무에게도 없습니다.(눅 13:9)

 

 

 

  본문 말씀에 누가 문 앞에 서 있습니까?(마 24:33, 막 13:29)

 

(마 24: 33) 이와 같이 너희도 이 모든 일을 보거든 인자가 가까이 곧 문  앞에 이른줄 알라

 

  예수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십자가에 죽으신 바로 그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왜 문 앞에 계십니까?

 

  우리를 데려가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문 앞에  계시다는 것은 이제 얼마  남지 않은 임박함을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저 멀리서  오고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우리 문앞에 와 계신 것입니다.

 

 

 

  지금 회개해야 합니다. 지금 봉사해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롬 13:11)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롬 13:12) 밤이 깊고 낮이 가까왔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우리 문 앞에 예수님은 와 계십니다.

 

  그 문이 열려질 때 - 할렐루야  아멘 - 으로 예수님을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제목 : 열 처녀의 비유                                      

(마 25: 1-13)

 

 

 주님은 우리를 10처녀에 비유하셨습니다. 그들 중에는 후회하는 5처녀가 있고 천국잔치에 참여하는 5처녀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해야 되겠습니까. 후회하지 않는 지혜로운 5처녀가 되기 위하여 주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의 특징과 의미를 함께 나누기 원합니다.

 

1. 이 비유의 특징은 주님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선 본문의 배경은 당시 행해지던 결혼을 비유로 하신 말씀입니다. 마지막 때에 될 일들을 24장에서 말씀하신 후에 이어서 이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 때에 갗추어야할 성도의 신앙자세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입니다.  비유란 그 말씀의 문자에 역사성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비유가 상징하는 뜻이 중요한 것입니다. 비유를 통하여 하시고자 하는 주님의 의도를 살피는 것이 비유 해석의 방법입니다.

  결혼식의 주인공은 부모도 아니고 친구도 아니고 신랑과 신부입니다. 결혼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사랑 없는 결혼은 아무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비유를 시작하시면서 먼저 자신을 신랑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신랑으로 비유하신 이유는 그것은 바로 사랑의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도 그런 경향이 있지만 당시의 고대 사회에서는 여자가 남자를 사랑하여 프로포즈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남자 쪽에서 먼저 적극적으로 신부를 찾아 나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인간을 향한 적극적인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은 하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우리를 죄에서 구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하셨습니다. 빌립보서2:8에는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을 구원하는 일을 위하여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생명보다 귀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님께서 자신의 가장 소중한 생명을 선물로 주시면서 까지 사랑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를 향한 사랑이 가득한 신랑이 바로 주님인 것입니다.

 

2.신랑을 맞으러 나간 열 처녀는 교회의 성도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처녀들은  신랑을 기다리듯 마지막 때에 주님을 기다리며 믿음생활을 하는 교회의 성도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러면 왜 10명입니까.  성경에서 7과 10은 완전수로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0이라는 숫자의 의미는 단순히 10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날 교회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의 숫자를 상징합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특별히 교회의 성도들을 처녀로 비유하신 의미는 무엇입니까. 교회의 순결성을 가리킨 것입니다. 깨끗하고 정결한 성도의 모습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악하고 더러운 사단의 시험에 빠져서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사단은 초신자들 만을 시험한다고 생각하면 큰 오해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광야에서 40일을 기도하신 후 성령이 충만하셨습니다. 영력이 충만하셨습니다. 그런데 사단이 그 때에 찾아왔습니다. 그러므로 사단의 시험은 교회를 얼마나 오래 다녔는냐, 어떤 직분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관계없이 시험합니다. 그래서 이런 사단의 시험을 당했었던 베드로는 그의 서신에서 말하기를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라고 말씀했습니다. 근신하라는 말은 사단의 시험에 넘어져 더럽힘을 당할까 항상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말입니다. 목회자든 성도이든 누구든지 근신하고 조신하지 않으면 사단의 올무에 걸려 마땅히 입어야할 세마포의 정결한 옷을 더럽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3.신랑은 신부와 언제 도착할 시간은 정확히 모르지만 약속이 되어 있었습니다.

 

  신랑이 밤에 신부의 집을 찾아가는 것은 당시 사회 풍습이었습니다. 신랑이 신부의 집에 가서 신부를 데리고 온 후에 밤중에  결혼식을 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신부는 단장을 하고 신랑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신랑은 그의 부모와 당사자에게 어느 날 밤에 오겠다고 약속을 하지만 특별히 몇 시에 오는지 정확히는 말하지 않습니다. 때는 알지만 정확한 시간은 모른다는 것입니다.

 요14:2-3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살전4:16과 5:1-3에서 바울은 말하기를 주님께서 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하늘로서 강림하시는데 그 날과 그 시기는 마치 갑자기 예고없이 찾아오는 도적과 같이 우리에게 임한다고 했습니다.

 더 분명한 말씀을 보면, 마 24:36에 \"그러나 그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분명히 이 땅에 다시 재림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분명 그 시기와 때는 아무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마치 오늘의 비유와 같이 신랑이 오되 어느 시기에 올지 모르는 것과 같다는 말씀입니다.

 

4.신랑이 더디 오므로 10처녀는 모두 졸았습니다.

 

 5절에 보니 \"신랑이 더디 오므로 다 졸며 잘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신랑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생각보다 신랑이 늦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처녀들은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그만 졸게 되었습니다. 지혜로운 처녀는 졸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모두가 다 졸았습니다.

  마지막 때에 믿음생활을 하는 성도들의 모습을 암시하는 말씀입니다. 졸며 잔다는 것은 사단이 기승을 부리는 마지막 시대에 믿음생활을 하다보면 누구나 신앙생활에 낙심과 좌절을 경험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련한 자들만이 잔 것이 아니라 슬기 있는 처녀들도 졸았다고 했습니다. 혹 잠이 깨어있는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는 몰라도 어쨌든 모두가 다 졸며 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할 것은 우리 주위에 혹 믿음 생활에 낙심한 자들을 사랑으로 돌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정죄와 비난보다는 격려와 사랑의 훈계로서 대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이 말세 시대에 살다보면 나도 졸음이 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절대 졸지 않을 것이라고 아무도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은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하시기 위하여 우리 생각보다 더디 오십니다. 그래서 그 때까지 서로 서로 버팀목이 되어 붙들어 줌으로 함께 천국의 혼인잔치에 이르러야 합니다.    

 

5. 5처녀는 등을 준비하지 못했기 때문에 신랑을 맞이하지 못했습니다.

 

 드디어 신랑이 왔다는 방울소리가 울렸습니다. 어서 나와서 신랑을 맞으라는 소리가 나게 된 것입니다. 처녀들은 허겁지겁 깨어나서 등을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10처녀의 손에 있는 등불에는 불이 가물 가물 꺼져 가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심지를 건드려도 불이 붙지를 않습니다. 기름이 떨어진 것입니다.

 당시의 등은 올리브 기름을 접시에 담고 그 안에 헝겊으로 심지를 만들어서 불을 붙이고 들고 다닐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랴부랴 기름을 사러 갔습니다. 10절에 보니 그들이 기름을 사러 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드디어 그녀들이 기름을 사가지고 왔으나 이미 신랑은 떠나버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혼인집으로 뛰어가서 등불을 준비하고 왔으니 문을 열어달라고 간곡하게 외쳤습니다.

 \"주여 주여 우리에게 열어주소서\" 그 때에 신랑은 그들에게 이렇게 대답합니다.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하노라\"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들을 비유하기를 \"미련한 자들\"이라고 하셨습니다.

 

6.그러나 반면 5처녀는 등불을 준비해서 신랑을 맞게 되었습니다.

 

 신랑이 왔다는 소리에 잠을 깬 5처녀의 등에도 역시 불이 꺼져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들은 곧 준비한 기름을 등에 부어 불을 밝히고 신랑을 만난 것입니다.

 그렇다면 미련한 처녀와 슬기로운 처녀의 차이는 무엇입니까. 슬기로운 5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 것을 대비해서 미리 기름을 준비했지만 미련한 처녀들은 기름을 준비하지 못했다는 차이입니다. 그렇다면 이 기름을 준비하라는 뜻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많은 설교자들이 이 본문의 핵심을 기름이 무엇이냐에 초점을 맞추고 설교를 합니다.

  대부분 신학자나 설교자들은 이 기름은 성령을 가리킨다고 합니다. 말세의 성도들은 기름이 충만한 것과 같이 성령으로 충만해 있어야 주님을 만날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런 해석을 이해하면서도  자칫 교리 적인 면에서 혼동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분명 미련한 처녀들도 기름이 있었습니다. 다만 충만히 준비하지 못했을 뿐입니다. 신약성서 어디에도 성령이 충만하면 구원받고 성령이 충만하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씀은 없습니다. 우리 안에 일단 성령께서 내주 하시게 되면 우리의 행위나 충만한 상태와 관계없이 우리는 구원을 얻게 됩니다.

 그렇다면 기름을 준비한다는 말씀이 무엇이란 말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기름에 초점을 맞추지만 성경의 본문을 자세히 보면 기름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등\"에 초점이 있습니다. 비유의 시작인 1절에, \"천국은 마치 기름을 들고 나간 열 처녀와 같다 하리니\"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준비하고 나갔다는 것이 아닙니다.

 또 가장 클라이맥스가 될 수 있는 7절을 보면, \"다 일어나 등을 준비할 새\"라고 말씀합니다. 기름을 준비하는 목적도 결국은 등을 밝히기 위한 것 아니겠습니까. 신랑을 맞을 때 기름을 들고 나가야 합니까. 등불을 들고 나갑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해야 합니다. \"등불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의미는 무엇인가\".

  이 등불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성경이 성경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는가를 통하여 풀어보겠습니다. 시119:105의 말씀은 이렇습니다.\"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나이다\" 그러므로 등불을 준비하라는 말씀은 어둠을 밝히는 등불같이 인간을 멸망으로 이끄는 어두운 죄악을 밝혀서 생명의 길로 이끄는 복음의 말씀을 믿는 믿음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말세의 교회에는 두 믿음이 있습니다. 하나는 참 믿음이요 또 하나는 거짓믿음입니다. 본문의 비유대로라면 많게는 50%까지도 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곡식과 가라지의 비유에서도 나타납니다. 교회 안에 알곡이 있지만 분명 가라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에 관하여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참 믿음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라 영접하는 것입니다.

 

 마7:21-23에 보면 많은 사람들이 와서 내가 주님의 이름으로 병도 고치고 귀신도 쫓았는데 왜 나를 모른다고 하십니까라고 항의합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내게서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믿음 것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욕심을 채웠던 사람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교인들이 교회에 오면서 주님을 통하여 어떤 종교적인 위로와 이익만을 얻으려 합니다. 어려울 때는 믿음생활을 잘하다가 좀 나아지면 하나님을 떠나기도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에게 무엇을 원하시는 가에는 관심이 없고 내가 주님을 통하여 무엇을 얻을 것인 가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진정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속죄의 복음을 믿는다면 그 믿음으로 말미암는 변화는 무엇입니까. \"주님 나 같은 죄인을 영원한 형벌에서 구원해 주셨습니다. 이제 과거에는 내 마음대로 살았지만 이제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살겠습니다\"라는 고백입니다.

 

7.천국은 혼인잔치 같습니다.

 

10절에 보면 문이 닫히고 혼인잔치가 베풀어 졌다고 했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열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목적도 우리와 함께 영원히 거하는 것입니다. 혼인잔치의 풍성함과 즐거움을 함께 나누며 영원토록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찬양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를 이 영원한  혼인잔치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13에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 주님께서 이 비유를 통하여 하시고 싶으신 말씀의 결론입니다.

 \"성도들아 깨어 믿음의 등불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 저 문 밖에서부터 다가오는 신랑이 오는 방울소리를 듣지 못하고 졸음을 이기지 못하여 믿음의 잠을 자는 사람은 없습니까. 아직도 주님을 위대한 성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까. 주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 계신 분입니다. 참 믿음은 말씀의 중심이며 빛되신 예수그리스도를 내 심령 가운데 영접하여 순종하는 삶입니다. 이제 깨어서 여러분의 등불을 보십시오. 믿음을 보십시오.

  우리에게 마지막은 언제입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시는 때는 역사의 종말이지만 우리는 언제나 언제 하나님 앞에 갈지 모르는 개인적인 종말을 맞고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에게도 \"보라 신랑이로다\"하는 음성이 들릴 것입니다. 그 때 밝은 등불을 들고 주님을 맞읍시다. 서로서로 격려하고 붙들어서 함께 천국의 혼인잔치에 참여합시다. 후회하지 않는 슬기로운 믿음의 자녀들이 됩시다.

 

 

 

                                 

제목 : 달란트 비유                                      

(마 25 : 14-30)

 

 

 주인이 종들의 능력에 따라서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각각 주고 먼길을 떠났습니다. 오랜 후에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을 하는데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받았던 종은 열심히 일을 해서 받았던 돈의 갑절의 이윤을 남겨 주인 앞에 내놓았습니다. 그러자 주인은  기뻐서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일을 네게 맡기리니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마25:21) 하며 칭찬을 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인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갖고 있었던 까닭에 그 돈을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땅속에  묻었다가  주인이 돌아왔을 때 꺼내 놓았습니다. 주인은 그것을 보고 \"이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는 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 그에게서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사람에게 주어라 무릇 있는 자는 받아 풍족하게 되고 없는 자는 그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마25:26-28) 하며 심히 책망을 했습니다. 결국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문 밖으로 쫓겨나 이를 갈며 통곡했다는 것이 이 비유의 줄거리입니다.

 

 이 비유의 말씀은 달란트의 많고 적음의 문제, 금전의  가치에  대한 문제 이전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와 시간을 잘 활용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책임을 완수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우리 신앙 생활은 기회와 시간과 매우 중요한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말에는 시간이라는 단어가 한가지 뜻으로만 풀이되어 있지만,  헬라어에는 시간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 두 가지로 나뉘어 쓰이고 있습니다.

 

 하나는 \'크로노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흐르는 시간\' 을 의미합니다.

연대로 보는 시간 관념입니다. 내가 30세가 되고  50세가 되고 80세가 됐다는 말은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갇힌 사람이 출옥할 날을 손꼽아 세는 것, 잠을 이루지 못해 고통을 받으며 빨리 아침이 되기를 기다리는 것과, 교통체증  때문에 제시간에 목적지에 도달하지 못해 차 안에서 시계를 보며 초조하게 있는 것모두 크로노스의 시간 개념입니다.

 

 또 하나는 \'카이로스\'라는 말인데, 이것은 질적인  시간으로서, 의미 있는 시간, 가치있는 시간, 보람있는 시간, 생동하는 시간,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를 맺는 영원한 시간, 감격의 순간들이 모두 이에 속합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얼마나 오랜 세월을 살았느냐 하는 것보다도 시간 시간을 얼마나 값있고 질적으로 의미 있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그 신앙 생활을 평가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나 있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크로노스의  시간을 카이로스의 시간으로 바꾸지 못했기 때문에 주인으로부터 책망을 받았다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의 실패 원인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하면서 영적인 교훈을 얻고자 합니다.

 

 

 

 1. 받은 달란트를 소중히 여기지 못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각 사람의 능력에 따라서 어떤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 어떤 사람에게는 한 달란트를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신 달란트를 과소평가할 때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 가정의 곤란한 것, 잘못된 것은 확대해 보면서 다른 가정의 모든 것을 좋게 생각하는 것은 미성숙한 삶의 태도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가정, 자기에게 주어진 자식, 자기에게 주어진 아내, 남편, 직장  등을 소중히 여길 줄 모르는 사람은 한 달란트 받았던 종과 같이 실패하기가 쉬운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불평과 원망과 구실만을 찾습니다. 우리 나라가,  우리 사회가, 우리 가정이 잘못됐기 때문에 내가 못산다고 하면서 모든 책임을 회피하고, 또한 자기에게 주어진 무한한 가능성과 달란트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여 실패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농부가 오랫동안 좋은 농장을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갑자기 자기의 농장이 싫증이 나서 이것을  팔고  다른 환경의 새 농장을 사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부동산  중개소에  자기의 농장을 내놓았습니다. 부동산 중개소에서는 여러 곳에 광고를 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넓고 기름진 땅, 좋은 농가, 큰 곡식 창고, 이상적인 위치, 최신식 농기구를 갖춘 농장을 팝니다.\"

 신문 광고를 보다가 이 농부는 \"이 농장이 바로 내가 원하는  농장이구나\"하고 생각하고서 위치를 자세히 보니까 바로 자기 농장을 광고한 것이었습니다. 그때야 농부는 자기 농장이 가장 이상적인 농장임을 깨닫고 매물로 내놓았던 것을 취소하고 그 농장을 잘 가꾸면서 행복하게 살았다는 얘기입니다.

 

 남의 떡이 커 보입니다. 남의 과일이 크고 좋아 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천부의 은사를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한 달란트도 소중합니다. 비록 가진 것 없고 못났다 하더라도 내 아내가,  내남편이, 내 자식이 그렇게 소중할 수가 없습니다. 나에게만 주어진 은사를 고맙게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소중히 여길 때  그는  성공한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2. 주신 달란트를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주어진 것을 순종함으로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는 변경시킬 수 없는 상황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가지고 걱정할 필요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주어진 것은 받아들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내 키가 165CM 인데 180CM 로 만들려고 애를 써도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여자가 남자가 되겠다고 아무리 애를 써도 전혀 불가능합니다. 지구의 인력을 내 마음대로 할 수도 없습니다. 한번 내뱉은 말은 돌이킬 수 없습니다. 우리의 과거 역사를 변경시킬 수가 없습니다. 나이를 먹지 않으려고 흘러가는 세월을 멈추게 하거나 지연시킬 수도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 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눅12:25)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앞에 닥친 죽음은 받아들어야 합니다.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인간의 한계 상황을 받아들일 때에 그 사람은 성공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조상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로부터 무한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모든 동물을 다스리고 모든 과실을 마음대로 먹으며 낙원인 에덴  동산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동산 중앙에 있는,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만은 먹지 말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는 행복한 환경은 보지 아니하고 \"먹지말라\"는 그 나무 실과를 따먹으므로써 범죄하고 만 것입니다. 선악과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한계선이었습니다. 그것을 뛰어넘으려 하는 인간의 교만한 마음이  인류에게 무서운 타락의 죄악을 가져오게 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한계를 인정하지 못할 때 범죄의 결과가 나타나는 것을 우리는 요즈음에도 보게 됩니다.

 

 유전자 공학자의 말을 들어 보면 인간이 완전히 성장하는 데  20년정도 걸리므로 보통 그 7배수인 140년은 넉넉히 살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40에 죽고, 또 어떤 사람은 50,60에 죽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순리를 무시하여 교만하게도 그것을 파괴하고 한계를 넘으려는 생각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달란트를 일생동안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더욱이 그것은 나에게만 주어진 소중한 것으로 알고 잘 활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가정에 태어났지만\'.\'만일 저 사람과 같은 머리를 가졌다면\'.\'만일 내가 저 사람과 같은 학교를 나왔다면\'하고  \'만일에...,만일에...\'를 연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다가는 선한 일도, 생산적인 일도, 창조적인 일도, 의미 있는 일도 하지 못하고 일생 동안을  허송 세월할 뿐만 아니라 불평과 원망을 일삼고 책임을 회피하다가  실패를 거듭할 것이 분명합니다.

 

 

 

 3. 주신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이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고 잃어버릴까  두려워하며 땅에다 파묻었습니다. 이 사람은 모험심도, 용기도 없었기에 시도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이처럼 일생 동안 자기의 달란트를 활용해 보려고 시도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땅에 파묻어  버리고는  잃어버릴까 그 주위를 맴돌다가 일생을 탕진하고 마는 사람들을 우리는 주위에서 많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주어진 가능성을 활용하려고 시도할 때에 성공의 기회가 우리 앞에 활짝 열려지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미국의 유명한 로버트 슐러(Robert Schuller) 목사님이 부흥되지  못하는 2백 교회를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중의 한 교회 목사님에게  물었습니다. \"왜 이 교회가 부흥되지 못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그 목사님은 \"말도 마십시요 우리 교회에서는 헌금이 많이 걷히지  않아 선교비도 없어도. 그리고 교회에 인재다운 인제가 없어도.  그러니 이 교회가 부흥이 되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슐러 목사님은 \"아닙니다. 이 교회는 돈이 없는 게 문제가 아니고 당신에게 아이디어(idea)가 없는 것이 문제입니다.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당신에게 모험심이 결핍되었기 때문에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라고 그 목사님에게 충고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주어진 달란트를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우리 속담에 \"말로 배워서 되로 쓰는 사람이 있고, 되로 배워서 말로 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받은  달란트를 어떻게 활용해야 하느냐를  가르치는  중요한 근거가 됩니다.

 

 미국 일리노이 주에서 정년 퇴직할 때까지 우체부 생활을 하던  프리슬리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은퇴할 때 매달 받을 얼마의  연봉과 은혜에 예금해 놓은 1,200달러가 그의 전 재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은퇴한 우체부는 언제나 선한 마음을 가지고 동네 사람들에게  친절하게도 자기가 알고 있던 꽃을 가꾸는 방법이라는가 새를  키우는  방법 등을 가르쳐 주면서 즐겁게 지냈습니다. 이웃 사람들도 은퇴한 이 우체부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어느날 프리슬리는 이웃들을 위해 도울 일이 없을까 생각하다 일리노이 주 사람들은 바다와 멀리 떨어져 생활하기 때문에 바다 구경을  하고 싶어하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프리슬리는 그들에게 바다 구경을 시켜 주리라 결심하고 바다에 관한 책을 읽으며 사람들에게 설명해 줄 자료를 준비한 후 바다 관광을 할 사람들을 모집했습니다. 수백 명이 몰려왔습니다. 그 사람들을 버스에 싣고  플로리다 주의 마이애미 비치에 데리고 가서 구경을  시켰습니다.  바다에 대한 자세한 설명도 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즐거운 마음으로  관광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다음 번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바다  관광을 가겠다고 신청을 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돈을 벌기  시작했습니다. 얼마 후 사람들은 프리슬리에게 바다만 구경시켜 줄 것이  아니라 다른 관광 명소도 안내를 해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이제  프리슬리는 폴로리다 주뿐만 아니라 미국 전지역을 커버하는 관광 회사를 설립하고 많은 사람을 위해 봉사하게 되었습니다.

 

 은퇴한 후에 쭈그려 앉아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노력한 결과 82살 난  프리슬리는 재산이 7백만 달러나 되는 거부가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내 지식과 내 노력을 남에게 나눠주는 삶을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그에게 물질적인 축복을 허락하신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달란트, 그것이 비록 적은 것이라 할지라도 충실히 활용하게 될 때에 \'착하고 충성된 종아\' 하시며 하나님께서 말로 다  할 수 없는 축복을 주신다는 것을 알아야 될 것입니다.

 

 

 

                                 

제목 : 양과 염소의 비유                                      

(마 25: 31-46)

 

 

 마태복음은 심판의 복음이라는 별명처럼 수많은 심판에 대한 비유 또는 설화가 기록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 본 비유는 가장 엄숙하고 또 명백하게 최후의 심판을 그리고 있다.

그리고 비유의 형식을 빌린 직설적인 설화로서 자기 자신이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재림하실 때 영광의 보좌에 앉아서 심판을 베푸시되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 같이 의인과 악인을 분리하여 영벌과 영생에 들어가게 하신다고 하신다.

 

이 비유도 하나님 나라를 계시하는데 하나님 나라는 제자들이 현재 상상하고 있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계시하신다. 그들의 천국관은 자기 민족을 짓누르고 있는 여러 가지 불행에서 구원을 받는 현세적이며 지상주의 천국관, 국수주의적이고 민족적인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 나라는 그런 나라가 아니고 유대 민족을 뛰어넘어 세계 모든 민족을 그리스도 앞에 모아 선악간에 심판하여 의인들만으로 구성되는 나라임을 보이고 있다. 이때에 이런 계시는 유대인들로서 이해하기 어려웠다.    

 

여기서 의인과 악인의 분리의 기준이 무엇인가?

 

표면상으로 볼 때는 선행의 보상으로 받는 것 처럼 되어 있으나 이점을 우리는 주의해야 한다. 선행의 보상으로 영생에 들어간 것이 아님은 34절에 내 아버지께 복받은 자들이여 라고 부르는 것으로 보아 분명하다. 이 말씀은 그들이 받은 축복은 하나님의 거저 베푸신 은총에서 유래한다는 점을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리고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하라 하셨다.

자신들의 선행의 공로로 이 나라를 성취했기 때문에 그들의 공로로 인하여 상으로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으로 받고 있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 그리고 이 나라는 우리가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우리를 위해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창세전에 예비하신 나라이다.

 

* 이 비유들은 특별히 제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인데 주님께서 그들에게 이렇게 해서 영생을 상속하라고 교훈 하신 것이 아니고 제자들이 주님의 오랜 지연 때문에 낙심하지 않고 인내와 소망을 가지고 살도록 주시는 말씀이다.

 

35절, 카톨릭 - 구원의 원인에 대한 논쟁. 영생이 선행의 공로 때문이라고 주장. 그러나 그리스도의 의도는 제자들에게 선행을 격려하는데 있다.

이 선행은 영생의 원인이 아니고 결과이다. 그러나 이 말씀은 우리의 선행에 대한 보상이 약속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거저 받는 것이다. 그 상은 입양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고 함께 후사가 됨으로 그리스도의 의 때문에 받는 것이다. 그들에게 주어진 상은 당연한 몫이 아니라 값없이 거저 부여된 상이다.

하나님께 대한 예배가 인간에 대한 사랑보다, 믿음과 간구가 구제보다 더 가치가 있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더 잘 드러나 보이는 실례를 들어 보인다.

하나님을 멸시하면서 인간들에게 따스하게 대하는 구제 행위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께서는 구제와 선행에다 의를 덧붙이는 것이 아니고 거룩하고 의로운 것이 무엇인가 하는 점을 명확히 보인다. 신실한 자들이란 입술로서만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으로서 하나님께 대한 자신들의 봉사를 입증해야 한다.

자신들이 짜낸 선행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명에서 이탈한 자들은 누가 네게 이것을 요구하였나 책망 받는다. 이 귀절을 핑계삼아 너무 강조한 나머지 영적인 일을 도외시 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위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의인이기에 나타내는 선행과 구제가 귀하다.

 

40절 - 주의 백성에게 베푸는 것은 무엇이든지 그리스도 자신에게 행한 것으로 여겨주신다. 그들이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한 것이 아니고 거저 베푼 선행을 주님이 기뻐하신다. 아무리 비천해도 자신의 몸의 일부로 소중하게 보신다.

 

44절 - 스스로 기만하는 헛된 속임수 - 이자들은 외식하는 그리스도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