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처드 J 마우 [훌러 총장]
오늘의 개혁교회의 목회 : 전통과 변화
리처드 J. 마우
1880년대 말 어느 날, 호레이스 언더우드 목사와 부인 릴리아스 여사는 의주 인근 마을로부터 기독교에 대해 더 알고 싶어 이들 부부를 찾아온 한 여인을 만났다. 이 만남에 관한 릴리아스 여사의 글에 따르면, 이 여인은 성서에 관한 기록물은 물론 다른 어떤 기독교 문학도 접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여인이 들었던 아주 작은 한 조각의 복음의 진리는 그녀의 마음속 좋은 텃밭에서 깊이깊이 뿌리를 내리기 시작했다고 릴리아스 여사는 적고 있다. 그 이후, 여인은 세 가지 믿음을 확신하기 위해 언더우드 부부를 찾아왔다고 말했다. 그녀의 첫 번째 믿음은 “오직 하나님 한분만이 계시며 다른 신을 경배해서는 안 된다”이며, 두 번째 믿음은 “죄악을 멀리하고, 양선하고 순전하며 진실해야 한다”이며, 세 번째 믿음은 “일곱 날 중 하루는 거룩하게 지키며 ‘예수의 피 밖에 없네(Nothing But the Blood of Jesus)’를 찬송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언더우드 부부는 이 여인에게 새로 전도 받은 신앙을 계속 지켜가라고 권고했다. 그들로부터 고무를 받은 이 여인은 마을로 돌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예수를 증거 했다. 아주 악질로 소문난 한 남자를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얼마 후에 이러한 몇 안 되는 신자들은 성경책과 교리문답서 그리고 찬송가를 구할 수 있었다. 마침내 교회가 세워지고 몇 해가 지난 후에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다.
이 일련의 사건들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에 나타낸 대로 교회의 사명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특징을 명확하게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바로 예수님이 유형적인 가톨릭교회에 대해 성도들을 모으고 완전하게 만들 수 있도록 목회와 성경말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의식(儀式)을 주셨다는 점이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여기에서 교회의 모든 일에 대해 분명히 하고 있는데, ‘목회와 성경말씀과 의식’의 일부로서 교회에서 하는 모든 일은 성도들을 “모으고 완전하게” 만드는 기본적인 두 가지 목표에 이바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만일 이 두 가지 목표달성에 실패한다면 다른 모든 교회활동은 진정으로 의미가 없다. 교회는 복음의 기본적인 진리를 선포함으로써 예수님의 몸 안으로 성도들을 불러 모아야 한다. 그리고 교회는 성도들을 “완전하게 만드는” 방법을 모색해야 한다. 이들 초기 한국 기독교인들에게는 단지 예수의 피에 관한 노래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기독교 신앙의 깊은 진리에 대한 교육이 필요했다.
오늘날, 하나님의 사람들을 “모으고 완전하게 만든다”는 목표의 달성은 쉽지 않다. 최소 두 가지의 일반적인 이유만 살펴봐도 목회 일이 점점 복잡하게 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목회자에게 점점 더 다양한 역할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최근에 고서(古書) 한권을 발견했는데, 거기서 묘사된 목사의 일은 설교하는 일과 병든 사람을 방문하는 일이었다. 이 책에서는 현대의 전형적인 목회자의 업무를 사실 그대로 설명하지 않는다. 수십 년 전에는 거론조차 되지 않았던 여러 전문분야를 교회목회가 발전시켰다. 오늘날의 목회자는 누군가 청년들, 독신자들 그리고 이혼의 고통을 경험한 사람들의 특별한 요구에 대해 봉사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오늘날 교인들은 자신이 다니는 교회가 잘 성장하기를 바란다. 교인들은 교회가 헌금이나 인적 자원을 이용하는 방법에 있어 책임을 갖기를 바란다.
목회일이 복잡하게 된 다른 이유로는 새로운 문화적 현실을 들 수 있다. 현대의 교인들은 자신들이 겪는 가족과의 갈등, 성적 유혹, 재정적 고민, 직업과 연관된 긴장상태에 대해 보다 더 공개적으로 밝히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동시에 자신이 다니는 교회 목사들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해주길 원한다. 또한 이들은 영화, 텔레비전, 인터넷, 잡지와 신문을 통해 다른 종교적․문화적 관점이나 도덕률․생활양식에 전례 없이 노출되어 있으며, 목사가 이런 현실에 정통하기를 바란다.
수년전에 나는 메노나이트 신도인 한 여성으로부터 미국 펜실베이니아 주 시골마을의 메노나이트 공동체에서 어떻게 성장했는지 들었다. 당시 그곳에는 목회 사역준비를 위한 공식적인 요구사항이 없었으며, 그저 제비뽑기로 목사를 선출했다. 연로한 목사가 사망하거나 목회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게 되면 신앙공동체는 후계자 선출을 위한 집회를 열곤 했다. 그녀의 말에 의하면 이 행사는 늘 긴장되는 일이었다고 한다. 공동체에 속한 남성들은 모두 농부였으며, 목회 활동의 책임 때문에 일상적인 농장 일을 포기하고자 원하는 사람은 으레 아무도 없었다. 제비뽑기를 할 때 남자들은 매우 긴장했으며, 목사로 선출된 사람을 발표하는 순간은 극적이기조차 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해있는 공동체의 남자들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타입이었다고 했다. 그러나 그녀가 기억하기로 새 목사를 선출하는 날만이 대중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메노나이트 농부를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어 그녀는, 그 눈물은 기쁨의 눈물이 아니었다고 덧붙였다.
적어도 개인적으로는, 목회의 부담으로 눈물을 흘리는 많은 목사들을 알고 있다. 이들은 제비뽑기로 선출된 목사들이 아니다. 그들은 목회에 대한 주님의 분명한 부르심을 체험하였으며, 자신들의 의무를 다하기 위한 준비과정으로, 광범위하고도 비싼 비용이 드는 교육과정에 자진해서 참여하였다. 그러나 신학교의 수업과정이 오늘날 목회에서 실제로 직면하는 일에 대해 준비시키고 있지 못하다는 보고를 반복해서 듣고 있다.
물론 이런 개탄은 늘 있어왔다. 과거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거나 가르치지 않는 과목에 대한 불만신고서를 접수하는 일이 빈번했다. 이런 비판에는 그래도 어느 정도 합리적인 부분이 있었다. 목회 일선의 현실적인 과제에 직면한 이들에게 별 도움은 주지 못하면서 이익을 좇는 학자들의 신학교육은 끊임없이 시험을 받기 마련이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신학교육자들이 교육과정의 내용을 변경해야 하는 이유로 충분치 않다. 사실 신학 학위 과정의 단순한 검토만으로 목회를 준비시키는 일은 더 이상 불가능하다. 신학교에서 성서학, 교회사, 조직신학 등 기존의 전통과목을 줄여서는 안 된다. 동시에 현대의 목사들은 목회 준비를 위해 배워야 할 새로운 과목들이 아주 많다. 예를 들면, 상담하는 방법, 성윤리, 정치사상, 사회적 성별관계, 교회재정, 행정, 갈등관리 등이 있다. 목회준비를 위한 정규 교과 과정으로는 이런 주제를 모두 다룰 수 없기 때문에 지속적인 교육이 필요하며, 특별 세미나 혹은 회의, 목사들의 소그룹 토론 등이 요구된다. 교회의 생명과 사명을 어떻게 조직해야하는가를 인식하는데 있어 우리는 중요하고도 새로운 도전을 받고 있다.
현재 미국 기독교 공동체내에서 많은 주목을 받고 있는 중요한 학문적 연구는 스테펀 엘링손의 2007년도 책『대형교회와 본류: 21세기 종교적 전통의 개조』이다. 이 연구에서 사회학자인 엘링손은 샌프란시스코 지역의 아홉 곳의 루터파 교회가 교회의 생명과 사명을 위해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방법과 연관하여 심층적인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엘링손은 개별 교회가 지닌 고유한 특성 외에 분석된 두 가지의 매우 다른 패턴에 주목하고 있는데, 내 강의에서도 토의한 적이 있지만, 사회학자 로버트 벨라와 그 동료들의 말을 차용하여 엘링손은 어떤 교회들은 ‘기념공동체’로 접근해 가고 있는 반면 다른 교회들은 ‘이익공동체’에 근접해 가고 있다고 보았다.
이익공동체 패턴은 윌로우 크릭과 새들백 교회와 같은 대형교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있는데, 이들 교회에서는 전통적인 교파적 정체성이나 그것을 지키려는 의도적인 시도는 더 이상 없다. 그 교회의 삶과 사명은 전통적 정체성에 진정한 의미나 매력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의 실질적 이익 혹은 절실한 욕구를 위한 것이다. 비 기독교인이 이러한 교회에 가게 되면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음악이나 이야기 또는 개념들을 접하게 된다. 이 모두는 매우 친숙한 상태에서 기독교 메시지를 받아들이도록 촉진시키기 위한 의도적 전략의 한 부분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게 된 “구도자 중심 예배”이다. 이는 더 넓은 문화 속에서는 잘 알려지지 않은 전통적인 예배를 드리는 기념공동체 교회와는 대조를 이룬다.
이익공동체 모델은 근래에 와서 주요 교파의 리더나 새로운 신흥교회운동과 관련된 젊은 세대 양쪽으로부터 일부 비판을 받고 있다. 그들은 온전한 복음이란 교회에 온 사람들을 활동적인 예배 공동체로 안내해야하고, 진지하게 기독교적 전통을 가르치고 학습시켜야 하며, 우리의 예배장소는 초월성의 경험을 촉진하는 상징들을 특징으로 삼아야함을 요구한다고 주장한다.
윌로우 크릭은 그 예배의 효율성 때문에 중요한 관심을 얻게 되었다. 그들이 최근에 발간하여 폭넓게 논의되는『리빌지(Reveal)』에서는 교인의 상당수가 윌로우 크릭과 같은 교회 활동에서는 자신들의 영적 성장이 정체되고 있음을 불평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윌로우 크릭을 이끄는 지도자들은 교인들이 자신들의 영적욕구를 교회 생활 안에서 모두 충족시키려는 기대는 하지 말아야 한다고 결론지었다. 영적으로 더 성숙되기를 원하는 사람들은 자신을 영적으로 성장시킬 책임의 상당부분이 개인으로서 자신들에게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교회가 “줄 수 있고 주어야만 하는” 분야에는 한계가 있음을 밝히고 있다. 윌로우 크릭 교회에 오는 사람은 성장을 위해서는 신앙 여정 초반에 교회를 뛰어넘는 생각할 수 있어야 함을 알아야 한다.
최근『크리스챤 투데이지(Christianity Today)』는 사설에서 윌로우 크릭 교회의 지도력을 높이 샀는데, 그들의 목회가 이룬 성과에 대해, 혹은 이루지 못한 데 대해 어쨌든 솔직하다는 점에서이다. 하지만 논설위원들은 또한 몇 가지 점에서 윌로우 크릭 교회에 대한 연구를 비판하기도 했다. 리빌지의 기사는 윌로우 크릭을 “단순히 신앙적 재화와 서비스를 배급하는 장소”로 표현하였음을 언급했다. 이는 “그 교회에 대한 매우 부정적인 시각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논설위원들은 에베소서 4장을 인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로 이어지는 중요한 영적 성장은 교회의 삶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주장에 주목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도나 성경공부 같은 개인적인 영적 수양에 대한 참여가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그들은 말한다. 하지만 윌로우 크릭 보고는 “이러한 영적 수양이 본질적으로 계속되는 교회의 삶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 못했다.
나는 크리스챤 투데이지의 논설위원들이 말하는 영적 성장에 대한 교회의 역할에 동의한다. 교회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성장에 대해 중점을 두는 일은 오늘날 기독교 전도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몇 가지 관찰을 통해 이러한 사역이 현대에서는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중요성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리는 대형 교회의 사역으로부터도 무언가를 배우려고 하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비록 그들의 어떤 모습에 대해서는 비판을 해야 하지만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 개혁 장로교의 전통은 교회의 삶에서 “구도자 중심”의 패턴을 중시하는데 대한 좋은 신학적 이유를 가지고 있다. 사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한 긍정적인 격려를 칼뱅에게서도 발견 할 수 있다. 나는 칼뱅이 소개한 실낙원의 상태에서조차 지울 수 없는 인간의 신앙적 특성을 이해하기 위해 밀접한 관계에 놓여있는 두 가지의 신학적 논지를 생각한다. 그 두 가지는 신성에 대한 지각, 그리고 종교의 씨앗이다. 칼뱅이 말하기를 모든 인간은 의식적으로 인정하든 그렇지 않든 신성에 대해 지각을 한다. 이는 신이 모든 인간에게 종교의 씨를 심어놓았기 때문이다. 비록 죄를 지은 인간이라 할지라도 신을 갈망한다. 성 아우구스티누스가 기도의 형식으로 쓴 고백록(Confessions)의 서두를 보면, “당신은 자신을 위해 우리를 창조하셨으며, 우리의 마음은 당신에게서 평안을 얻기 전까지는 안식을 얻지 못합니다.”라고 기록했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더 잘 알려진 영적 표현은 크리스마스 캐럴 “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나오는 “모든 세월의 희망과 두려움을 오늘 밤 그대 안에서 만난다.”와 같은 멋진 가사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점은 아우구스티누스와 칼뱅 두 사람 모두 우리들에게 비록 죄를 지은 심성일지라도 인간 심성의 기본적인 희망과 공포는 어떤 면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 안에서 어떻게 채워지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권고하고 있다.
사실 죄를 지은 인간 심성의 열망은 본질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칼뱅이 밝힌 대로 “인간 심성은 우상의 공장이다...우리 모두는 어머니의 뱃속에서부터 우상을 만드는데 익숙해져 있다.” 죄 많은 배반으로 말미암아 창조주와의 사활적인 관계가 단절당한 때에 우리는 진정한 하나님이 아닌 어떤 피조물을 궁극적으로 신뢰함으로써 희망을 채우고 두려움을 잠재우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엄밀히 말해서 우상으로는 진정 우리의 깊은 갈망을 채울 수 없으며 살아계신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서 우리가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우리의 심령은 살아계신 하나님 안에서 쉴 때에 비로소 안식할 수 있다.
자신의 책에서 대형교회와 전통교회에 관한 주장을 펴는 엘링손에게 질문을 한다고 가정해보라. 우리는 이익공동체를 추구해야 하는가 아니면 기념공동체를 추구해야 하는가? 내게 있어 개혁교회의 답은 두 곳 모두에 초점을 두는 모습으로 보인다. 우리가 복음을 전하고 싶은 불신자들의 경험된 “결핍”이 잘못되긴 했지만, 이것은 하나님이 그들의 마음에 심어 놓은 깊은 갈망의 표현이다.
이는 물론 우리가 자신들의 결핍을 표현하는 사람들의 표면적 의미만을 단순히 취한다는 뜻은 아니다. 표면아래에는 표면위로 나타나도록 근원에 계신 하나님이 심은 놓은 갈망이 있음을 증명함으로써 우리는 이들 결핍의 진정한 본성을 확인해야 한다. 한국어판으로도 나온 나의 책 『왜곡된 진실』에서 나는 이 관점을 조명하는 극단적인 예를 들고 있다. 한번은 어느 강연자가 인용한, 매춘부의 집 문을 두드리는 남자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는 로마 가톨릭 작가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이 얘기에 충격을 받았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뭔가 깊은 의미가 담겨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앞에 인용된 말을, 매춘부를 찾아온 남자가 하나님이 문을 열어 주리라 기대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 이야기는 성적 쾌락이나 부 혹은 권력 내지 그 밖의 다른 우주 만물의 요소나 측면을 좇아 그 안에서 궁극적인 성취를 맛보고자 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하다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The Westminster Shorter Catechism)은 이 점을 분명히 보여 준다. “인간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며, 영원토록 주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창조주에 대해 순종적인 관계일 때만이 오직 인간의 영혼을 거짓 없이, 최고로 만족시켜준다.
우리 시대의 비 신앙인이 “체득한 욕구”에 대해 생각을 해보면, 그러한 욕구나 목표, 열망 그 자체가 나쁘지는 않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오히려 그것들은 잘못 인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죄받을 생활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잘못된 장소에서 궁극적인 의미와 진정한 만족을 찾으려는 경향이 있다.
일전에 나는 한 로마가톨릭 신학자의 요청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무엇인지 그 의미와 관련된 명상록에 대해 짧게 논평을 쓴 적이 있다. 그때 나는 캘리포니아의 도로를 달리던 어떤 차의 범퍼에 붙은 스티커에 대해 언급했다. 미국인들은 종종 차 범퍼에 메모를 붙여 이런 저런 주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한다. 평소에는 이런 메모의 내용에 그다지 큰 의미를 두지 않았지만 그때만큼은, 내가 본 스티커에 적인 신학 이론이 정말 맘에 들었다. 바로 이런 문구였다.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집으로 연락하세요.” 이 스티커의 문구는 사실 우리가 하나님을 찾고, 그 분의 뜻을 알고자 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에 대한 적절한 답변이라 할 수 있다.
“집으로 돌아기는 모습”은 성경에서 “귀의”를 표현하는 좋은 예로서, “예수께서 나지막한 소리로 다정하게 부르신다. 오, 죄인이여, 집으로 돌아가라!”와 같은 그 옛날 수많은 복음찬가의 유명한 주요 테마이다.
독일의 철학자인 하이데거(Martin Heidegger)는 반세기전에 출판한 수필에서 이렇게 예언했다. “노숙(homelessness)이 세상을 지배할 것이다.” 그는 현대의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글자 그대로의 노숙(homelessness)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이 없었다. 그보다는 오히려 목표의식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질 거라는 점을 예언했다. 말하자면, 요즘 “후기 근대적” 경험이라고도 하는 일종의 ‘소속감 상실’과 일맥상통한다.
새로운 방식의 예배들은 “구도자”들을 환영하는 것이 얼마나 의미 있는 일인지 강조하면서,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뭔가를 지적하고 있다. 우리는 교회를 안전한 곳(안식처)으로, 방황하는 죄인들에게 살아계신 하나님의 집으로 오라고 초대할 수 있는 공간으로 생각해야 한다. 개혁 장로교의 전통을 이어받은 우리는 이런 새로운 교회들이 신세대 구도자들을 맞을 때 사용하는 최상의 방법과 관련된 중요한 지혜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한다. 자신이 처한 새로운 문화적 상황에서 신앙생활의 경향이나 분위기에 대해 좀 더 참신하게 생각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평생 동안의 희망과 두려움”에 도움을 주라고 내려주신 구세주의 복음! 그것이 꼭 필요한 사람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진실을 제대로 전달할 수 있는 말에 어떤 것이 있는지도 다시 한 번 생각해야 한다.
최근에 한 설교문을 읽었는데 저자는 “설교에 다른 말을 추가하거나 추론이 포함되어서는 안 된다”는 칼 바르트(Karl Barth)의 유명한 말을 인용했다. 설교에 이런 요소들이 끼어드는 이유는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접촉점(point of contact)”이나 “공통기반(common ground)”을 확립하려는 욕망 때문이라고 바르트는 확신했다. 바르트의 주장처럼, 신학적으로 볼 때 이러한 동기는 참으로 당황스럽다. 우리는 성경의 내용을 그대로 전하기만 하면 된다.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가 듣는 이의 마음과 연결되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혼 가장 깊은 내면과 “관련”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파악할 때, 성령은 우리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심지어 바르트는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 추가나 추론을 제공하는 모든 시도를 “이단”이라고까지 말한다.
이러한 모든 내용은 내가 읽은 책의 저자가 설교에 대한 바르트의 견해를 설명하면서 표현한 말들이다. 물론 저자가 바르트의 견해에 대해 정확하게 설명하고 있다는 데에는 조금도 의심하지는 않지만, 이 주제에 대해 바르트가 쓴 부분을 다시 읽고 그의 논문도 직접 살펴봄으로써 내 기억에 활기를 불어넣기로 결심했다. 사실 저자가 바르트의 견해라고 했던 것들 모두 그가 한 말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 외에 다른 이야기가 더 있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바르트는 설교를 준비할 때 “그 교회가 처한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또한 “성도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설교해야 한다.”고도 덧붙인다. 설교자는 성도들을 개인으로 인식해야 하며 그들의 삶을 형성하는 조건들과 그들의 역량, 선악에 대한 그들의 잠재력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래야만 설교자는 신도들의 마음을 감동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에게 중요한 의미가 될 수 있다. 어떤 한 목사는 “예배에는 별로 유익하지도 않으면서, 터무니없는 추측과 혼자만 말하는 독백 식”의 설교를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고 말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목사는 마음속에 늘 성도들을 생각해야 한다. 성경을 연구할 때, 성도들의 실제 삶에 대해 마음 쓰는 목사는 성경과 관련된 어떤 생각이 불시에 떠오르거나 그것의 함축적인 의미를 깨닫기가 수월하다. 바르트에 의하면, 목사가 설교를 준비하는 일은 곧 실제 우리 인생의 면면을 제시해주는 과정이며, 현대 상황에 맞는 성경의 내용을 선별해서 삶에 적용할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한다. “접촉점(point of contact)”을 구하려 애쓰지 않는다는 바르트의 말이 설교를 듣는 성도들의 생활 모습을 간과하라는 의미는 아니다.
이제 칼뱅(John Calvin)과 바르트(Karl Barth)가 바라는 점을 확실히 알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성도들의 실질적인 노력이라 할 수 있는 예배활동에 대한 진지한 자세이다. 성도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는 희망은 물론 직장에서 걱정하는 모습까지도 주의 은혜를 얻기 위한 그들의 노력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칼뱅과 바르트의 권능을 쫒아왔기에, 가장 존경하는 네덜란드의 신학자이자 위대한 정치가인 코이퍼(Abraham Kuyper)의 권능도 따라야 한다.
일찍이 나는『기독교의 오늘』이라는 제목의 논설과 내 입장을 같이 한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 논설은 지역 교회의 활성화를 우선 과제로 삼아 교회를 육성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처음에는 이런 견해가 획일화된 교회의 경계를 넘어 다양한 기독교 단체의 활성화에 주력하라는 코이퍼의 관점과 상충돼 보였다. 이때 코이퍼가 말하는 ‘획일화된 교회’란, 기독교 학교, 기독교 정당 혹은 기독교 영농조합, 기독교 예술협회 등 규격화된 교회를 말한다.
지역 교회의 역할을 줄여야한다는 생각만이 코이퍼의 관점을 정확히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준다. 그리고 코이퍼를 추종하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는 획일화된 교회의 중요성을 묵인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옳지 않다. 코이퍼가 살던 시대에는 지역 교회의 부흥화가 당연시되던 사회였다. 성도들은 지역 교회의 예배에 참여하고, 목사를 양성하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러나 그들은 교회에서 벗어나 기독교 정당의 입회인이 되거나 기독교 영농조합의 회의에 참여하는 등의 일을 하게 될 때에야 비로소 지역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이 형성되고 성숙한다는 칼뱅교의 입장을 확고히 하게 되었다.
당시 코이퍼는 기독교의 가르침이 더 큰 문화를 이루는 데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개혁교도들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으며 그와 더불어 자기 삶의 다른 영역에 교회의 가르침을 적용했다. 그러나 네덜란드나 미국에서는 이런 상황이 길게 지속되지 않았으며, 한국에서는 확실히 그런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오늘날 기독교 사회에서 가장 많이 요구하는 점은 기독교 정체성의 성장이라 할 수 있다. 후기 근대 사회의 다원적인 문화에서 사는 사람들은 직장 내에서 가해지는 여러 가지 영향력을 수단으로 정체성을 형성한다. 우리는 기독교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노력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한 노력은 교회 생활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주의 은혜를 입으며 세례를 받는 곳, 또한 우리가 신도의 길을 배우는 곳이 바로 교회이다. 성도들은 묵상회나 조찬 기도회 또는 소규모 성경 모임 및 단체와 같은, 주의 제자로서 발전할 수 있는 다양한 환경에서 체험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경험들은 우리가 지역 교회 생활을 통해 기른 정체성을 기반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습득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전령으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는 주의 제자인 성도들을 세상으로 보내는 일 또한 믿음 생활의 일부여야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코이퍼의 견해에 그리 확고한 신념을 갖지 못했으리라. 내가 본 강연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 어떤 사람이 다가와 “반기독교” 모임이라는 한국의 웹 사이트를 보여주었다. 이 모임은 한국 교회를 맹렬히 비난하고, 한국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행위를 금지하려는 사람들이 만든 단체이다. 이는 실로 무서운 일이다. 교회와 목사가 주관하는 목회활동을 비평하는 그들의 행위는 분명 매우 부당한 일이다. 우리 기독교는 영어권 국가에서도 기독교 신앙 및 입장을 비판하는 “신 무신론자”로 알려진 단체로부터 공격의 대상이 되어왔다.
우리는 이러한 비평단체에 맞서 우리 기독교 세계관을 옹호할 필요가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이런 공격에 대응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결국 더 광대한 문화 안에서 그리스도의 길에 따라 직분을 다하기 위해 또 다시 노력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목사나 그 밖의 기독교 지도자들을 그들 자신만의 권위를 높이려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으로 치부한다. 우리는 더 큰 사회에 대한 사랑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이러한 잘못된 인식에 맞설 수 있다. 또한 우리 성도들이 그들의 이웃 주민이나 직장 동료와 함께 어울리고, 더 큰 문화의 공익을 추구할 수 있도록 격려함으로써 기독교를 비난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깨트릴 수 있다. 성경에도 이를 입증하는 좋은 사례가 있다. 예레미야 29장에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단인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장면이 나온다. 그들에게는 더 이상 교회도, 신성한 통치자도 없다. 이제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삶을 창조하신 주에 대항하는 많은 반란의 무리가 있는 문화에서 살게 된 것이다. 그들은 이 낯선 문화에서 어떻게 하면 주님의 제자로 살 수 있을지 막막하다. 그때 선지자 예레미야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집을 짓고, 전원을 만들고, 그들의 아들과 딸을 출가시켜 그 땅에서 번성하리라는 주의 말씀을 전한다. 그 후 예레미야는 “내가 너희를 예루살렘에서 추방하여 보낸 도시, 바벨론의 번영을 구하라. 그리고 그곳의 대의와 번영을 위해 기도하라. 그리하면 너희는 평안해지리라.”는 주의 놀라운 권고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가지고 온다.
이 말씀은 오늘을 사는 개혁교도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나는 어느 모임에서인가 극단적인 방법으로 재침례교의 입장을 취하는 칼뱅교에 루터파의 경건주의적 요소가 있다는 점에 대해 논쟁을 벌였던 적이 있다. 칼뱅교에서는 교회를 마치 더 큰 세계가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곳으로 다룬다. 우리가 교회에 올 때는 반드시 새로운 실체를 맛봐야 한다. 이때의 실체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절대적이고 자유로운 방식으로 성도를 이끄시는 곳, 바로 신성한 공간을 말한다. 그러나 코이퍼가 그의 저명한 성명서에서 분명히 밝힌 바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자신이 창조해 낸 모든 땅에 대해 “이건 내 몫이다!”라고 외친다. 따라서 주의 제자들은 주의 소유물인 모든 땅의 “번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지한 마음으로 일상생활에 참여하는 일 또한 주를 찬양하는 방법 중 하나다. 우리는 교회에서 하나님의 모임을 시작할 때 진정한 정체성을 느낀다. 우리의 발전과 성장을 아주 소중한 방법으로 체험해야 하는 곳 또한 교회이며, 우리는 이러한 발전과 성장을 통해 매일 더 큰 문화 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전령으로서 주께 봉사할 수 있다.
지나치게 일반화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내 솔직한 생각을 말하자면, 젊은 기독교인(스스로를 종종 “구도자”라 칭하는 부류)들이 빠져있는 문화와 관련이 깊은 교회를 가장 많이 염려하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들 자신이다. 젊은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화적인 사실과 관련이 깊은 교회 음악을 원하며, 후기 근대 문화에서 그들이 직면한 도전과제에 관한 설교를 듣고 싶어 한다. 그런 반면, 우리 같은 중장년층 대부분은 “기념공동체” 형태이다. 우리는 세월이 흐른 오래된 찬송을 좋아한다. 그리고 우리는 신도들의 영혼에 오래토록 기름을 채워주는 설교와 기도 안에서 발전하고 있다.
평소 나는 예배를 주관하는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다음과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이런 예배 전쟁 시대에 어떻게 나아가야 할까요?” 이런 질문은 아주 복잡하지만, 나는 이 문제에 대해 스스로 꽤 자신하는 생각을 한 마디 충고해주고 싶다. 교회에서의 세대간 분리는 올바른 답변이 될 수 없다. 간혹 “청년층 위주의 예배”로 분리해서 예배를 보는 경우에 대한 타당한 이유가 있을 수는 있지만, 주로 나는 모든 세대가 함께 모여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처럼 세대간 통합 예배가 필요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중장년층과 청년층, 서로간의 대화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거의 유물은 잘 간직하고, 현재의 문화적인 당면 과제에는 진지하게 대응할 필요가 있다. 예배는 이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사항들로 이루어져야 한다. 현시대 문화에만 관련되거나 그 반대 경우에만 초점을 두는 예배는 좋지 않다. 신구가 한데 모여 “서로 어우러진 예배”에서만 건설적인 시도가 가능하며, 이러한 예배는 신학적인 면에서 보나 예배의 측면에서 보나 활력이 넘치는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구 세대 각 집단의 대표가 자기 자신이 경험한 영적인 여행담을 이야기해야 한다. 의무적으로 드리는 예배의 유형에 대해 입씨름하기보다는 우리 삶 가운데 주가 행하신 일을 서로 이야기하면서 경청하는 자세가 더 중요하다.
풀러 신학교의 심리학자인 내 동료들에게 배운 점을 실천해야한다는 점에 있어서도 세대 간 통합 예배는 중요하다. 청소년 발달에 대한 심리학 연구를 통해서 그들은 청년층의 심리 및 정신적 건강을 촉진시켜주는 요소 중 하나가 바로 구세대와의 규칙적인 만남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이러한 연구결과는 나이가 어린 사람이 자신의 부모님 뿐 아니라 최소 4명의 각기 다른 성인과 정기적으로 상호작용을 한다면, 그는 삶에 대해 건강한 태도를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는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처럼 신구 세대의 상호작용은 그 규모가 클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에 참여하는 사람은 반드시 상황에 몰두해야 한다. 심리학자인 내 동료 하나가 우리 중장년세대에게 조언하는 바에 따르면, 교회에서 십대 청소년과 정기적으로 대화하라고 한다. 일주일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다음 한 주일동안 기도해 줄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라고 한다. 일주일 후 그들을 찾아가, 우리의 기도로 인해서 상황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물어보라고 충고한다.
겉보기에는 하찮은 만남으로 보이지만 이는 청년층의 삶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성인들에게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질 수 있다. 그리스도의 몸(Body of Christ) 안에서 신구 세대 사이에는 우정이 필요하다. 세대간에 정신적으로 더 많이 결합된다면 “예배 전쟁”은 확연히 잠잠해지리라 믿는다.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고서라도 새로운 상황을 만들어볼 필요가 있다. 요한 계시록 14장 4절을 보면, 주의 말씀을 전파하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주께서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는 놀라운 장면이 나온다. 우리 모두는 신앙이라는 여행길에 올라 있기에, 잘 알지 못하고 때로 변화가 필요하더라도 앞으로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기꺼이 따라야 한다. 또한 지난 날 하나님의 어린양이 성도들에게 가르친 내용도 잘 기억하고 있어야 한다.
개혁 장로교의 전승 과정에 있는 우리 같은 사람들은 현재 우리 삶에도 꼭 들어맞는 놀라운 주님의 이야기에 특히 은혜를 받는다. 이때 인생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새로운 길을 찾으려는 사람들의 마음이 인간의 불안한 정신보다 더 뚜렷이 나타난다. 우리는 신학적 성전(聖傳), 즉 사람은 혼자 힘으로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지만, 우리를 창조하시고 즐거운 신앙 여행을 하는 공동체로 이끌어주시는 주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씀을 계승하는 자들이다.
“기념공동체” 대규모 사업의 일환으로 본 언더우드의 강연을 주최하게 되었다. 한국 최초의 목회 선교사들에게 신령의 인도를 받기를 기대하면서 본 강연을 마치고자 한다. 1885년, 언더우드 목사와 그의 부인 릴리어스가 한국에 왔을 때, 그들은 모든 것이 낯선 미지의 땅에 서게 되었다. 하지만 이들 부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 이끄는 대로 따르며 오직 믿음 안에서, 알 수 없는 곳으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또한 이 여행에서 언더우드 부부는 무수한 동산에 있는 그 어떠한 가축도 창조주의 힘이 닿지 않은 것을 본 적이 없으며, 시골의 울타리나 마을, 도시에서도 예수님이나 하나님의 형상 혹은 그의 모습으로 창조되지 않은 사람은 만나지 못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낯설고, 모든 것이 분명하지 않은 여행이었지만, 그들 부부는 한반도에 사는 사람들이 나약한 존재라는 점 하나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내면에 있는 깊은 열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만 채워질 수 있다는 점을 굳게 믿었다.
언더우드 부부의 노력으로 한국 교회가 생겨났으며, 주께서는 천부의 능력을 부여 받은 한국의 목회자들에게 은혜를 베푸셨다. 이들 목회자 역시 신앙의 여행길에 올라 있지만 가끔은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때도 있다. 그리고 현재, 초기 기독교 성도들의 종교정신을 이어온 사람들이 여기 한국 땅에서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환경에 직면하고 있다. 이는 지리적인 환경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조직 구성, 새로운 과학 기술, 신 개념 가족생활양식, 연예오락의 신풍조와 같은 인간 상호작용에 새로이 생겨난 낯선 사회의 모습을 의미한다. 하지만 현대를 사는 한국의 기독교인 역시 그들의 선조들이 그랬듯, 믿음 안에서 나아갈 수 있다. 낯설지만 흥미진진한 21세기의 새로운 시대로 들어가는 길과 그 길을 통과하는 방법을 주께서 알고 있다는 신념을 가지고 그가 이끄는 곳을 따라 미지의 영역으로 한 걸음 나아가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