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나서 연구

요나서 연구

 

이 완 수

 

요나서 하면 불순종한 예언자가 하나님이 내리신 고난을 겪은 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예언자로 변화되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그렇다면 과연 요나서가 불순종한 요나라고 하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지 고민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요나라고 하는 예언자가 불순종했다가 순종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장면은 분명하게 그려지고 있지만, 요나서가 그 점을 중심적으로 부각시켜 말하려고 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과연 요나서가 말하려고 하는 것은 무엇일까?

도대체 요나서는 정경의 최종형태에서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가?

요나서가 보여주고자 하는 신학적 주제

 

1) 하나님의 돌이키심

요나서의 처음 시작은 여타의 다른 소예언서들과 마찬가지로 야웨의 말씀이 임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요나에게 주어진 야웨의 말씀은 “니느웨를 상대해서 외쳐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한가지 의문을 갖게 된다. 도대체 무엇을 외쳐야 하는가? 요나서 1장에서는 요나가 니느웨에 가서 외쳐야 할 내용을 제시하지 않는다. 이 내용은 3장에 가서야 알 수 있다. 다만 니느웨에 가서 외쳐야만 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 이유는 니느웨의 악함이 야웨 앞에까지 왔기 때문이다. 이들의 악함이 무엇인지 요나서에서는 구체적으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다만 요나서 내에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1:14의 무죄한 피와 3:8의 악한 길과 손으로 행한 강포일 것이다. 하지만 12소예언서의 시리즈 물 중 요나서와 같이 니느웨 문제를 다루고 있는 나훔서에는 이들이 행한 악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요나서가 니느웨의 구원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구체적인 죄악을 지적하는 것이 별 의미가 없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야웨의 말씀을 들은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가려고 욥바에 가서 배를 탄다. 그런데 도망하려는 이유를 성서는 ‘야웨의 낯을 피하려고’로 기록하고 있다. 이는 3장의 니느웨 백성들의 행위와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니느웨 백성들은 요나의 외침을 듣고 야웨께 부르짖는 것(3:8)을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두개의 장으로 읽을 때 인간이 하나님에게 향한 두개의 다른 모습에 따라 하나님의 반응이 다르게 나타남을 알 수 있다. 야웨의 뜻을 거부하고 떠난 요나의 길이 순탄치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성서는 야웨께서 바다에 폭풍을 내리쳐 배가 위험에 빠지게 된다(1:4). 이런 상황속에서 사공들은 각기 자신의 신을 부르며 기도하지만 요나는 잠들어 있다. 요나서는 여기에서 이방인의 하나님 경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앞으로 전개되는 요나서를 통해 이방인들이 어떻게 하나님을 경외하는지를 보여주게 된다. 이때 배의 선장이 들어와서 요나를 깨우면서 요나에게 네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선장이 그 이유에 대해서 말하는데 그것은 바로 “혹시 그 하나님이 생각을 바꾸셔서 ”이 어려움에서 구원해 줄지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동일하게 3장에서 니느웨의 왕에게서 재현된다. 니느웨 왕은 백성들에게 금식을 선포하고 악행을 금지하면서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그 이유가 바로 ‘하나님이 혹시 뜻을 돌이키셔서’ 구원하실지 모른다는 것이다(3:9-10). 또한 4장에서도 이 주제는 나타나는데, 요나는 자신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도망가려 했던 이유를 설명하는데 이 주제를 사용한다. 요나서 전체는 이 주제를 보여주고 있다. 즉 요나서의 주제는 불순종한 요나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야웨의 뜻을 돌이키심”에 있는 것이다. 야웨의 자비와 긍휼, 그리고 사랑으로 인한 후회가 만들어내는 구원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이 바로 요나서가 보여주고자 하는 신학적인 주제인 것이다. 가장 극악한 악을 저질렀다고 할지라도 하나님 야웨께 돌아와서 그의 긍휼을 구하면 야웨는 그 뜻을 돌이키사 그 백성들을 구원하심에 대하여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더욱이 요나서는 이런 하나님의 사랑이 유대민족에게만 미치는 것이 아니라, 온 민족에게 향한 것임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는 아모스서가 열방 심판 신탁과 더불어 유다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을 선언하여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생각하는 이스라엘 민족과 열방이 다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서 동등한 것임을 나타낸 것처럼 구원에 있어서도 이스라엘 민족이나 이방이나 다르지 않고 동등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2) 야웨의 뜻대로 행하심

선장에 의해 잠이 깬 요나는 현재 일어난 폭풍은 자신이 야웨의 낯을 피했기 때문임을 고백한다(1:10,12). 결국 선원들은 요나의 제안대로 요나를 바다에 던짐으로서 폭풍이 멈추게 된다. 그리고 선원들은 야웨께 예물을 드리고, 서원한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선원들이 야웨께 기도하는 내용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이미 선원들이 야웨를 알고 있는 단서를 제공하는 문장이 있다. 그것이 바로 ‘야웨는 야웨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야웨는 자기 스스로 원하는 일을 행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이는 언제든지 야웨는 본인 스스로 좋아하는 방향으로 언제나 자신의 일을 수정하실 수도 있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는 요나서가 야웨께서 뜻을 돌이키심으로서 이방을 구원하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데 작용하는 원리라고 볼 수 있다. 야웨는 자기의 보기에 좋으실 대로 행하시는 분이시다. 때문에 그가 원하시는대로 이방을 구원하실 수도 있고 처벌하실 수도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은 야웨의 마음먹기에 달린 것이다.

이러한 주제는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울렸던 기도 속에서도 묻어난다. 1장에서 다른 선원들은 기도하는 모습들이 등장하지만 요나의 기도하는 모습은 등장하지 않았다. 그는 물고기 뱃속에 들어가서야 기도한다. 그런데 이 기도의 내용은 자신이 깊은 바다속에서 , 스올의 뱃속에서 구원받은 모습을 그리고 있다. 기도의 마지막은 아주 중요한 수식어로 마치는데 그것은 바로 ‘구원은 야웨께 속한 것’이라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는 전적으로 야웨의 것이다. 그것에 대해 어느 누구도 왈가왈부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야웨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속성은 3장과 4장에서도 나타난다. 3장에서 니느웨 왕은 그 백성들에게 니느웨의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선포한 것이 아니라, 야웨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명한다. 왜 니느웨 왕은 자신들의 신이 아닌 야웨께 기도하라고 했을까? 이는 이미 2장에서 구원은 야웨의 것임을 선언했기 때문이다. 구원은 야웨에 의해서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임을 이미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니느웨 백성이라 할지라도 야웨에게 나와야 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구원의 문제를 손에 쥔 야웨가 뜻을 돌이킨다면 자신들도 이 재앙에서 벗어나 구원받을 수 있다라고 생각한 탓이다. 4장에서는 이 주제는 박넝쿨을 통하여 요나를 깨우치는 데에도 사용된다. 야웨는 요나에게 박넝쿨을 네가 아끼듯이 내가 니느웨를 아끼는 것이 당연하다고 주장한다(4:11). 어떠한 이유에서건 간에 야웨가 구원을 베푸는 것은 야웨의 주도권 아래에 있는 것이다.

 

3) 요나가 다시스로 가려 한 이유

4장에서 요나는 하나님의 후회하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니느웨를 구원하실 것을 미리 알았다고 선언한다. 때문에 자기는 빨리 다시스로 도망했다고 한다(4:2). 그러면서 하나님의 후회로 인한 니느웨의 구원의 반응을 보이는데, 그것은 자기 자신을 죽여 달라는 것이다.

사뭇 이해하기 힘든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선언하는 가장 주된 이유 중의 하나는 뜻을 돌이켜 심판하지 않을 여지를 벌겠다는 것임을 모를리 없다. 그런데 왜 요나는 그 모습을 보자 자신을 죽여 달라고 하는가? 이는 신18:22절에 명시된 참 예언자와 거짓 예언자의 모습에서 이제 사신은 완전히 거짓 예언자로 낙인 찍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나는 자신의 죽음을 요청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나는 하나님의 인류에 대한 사랑과 구원 보다는 자신의 명예 기키기에 바빳던 인물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