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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저자 마태는 매우 흔한 이름이었다. 로마 정권을 위해 일하던 세리장 마태가 있다. 마태복음의 마태와 마가와 누가의 레위인 마태가 있다. 또한 예수가 자신을 따르라고 명한 마태가 있다. 마태라는 이름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물이란 뜻이다. 레위는 세리 때의 이름이며 그가 예수의 제자가 되었을 때 마태라는 이름을 얻었을 가능성도 있다. 마가복음 2:14에서 그는 알페오의 아들이라는 정보를 준다. 이 복음서의 제목은 마태가 저자라는 정보를 주지만 실지로 이 제목은 교회 2세기 후반에 붙인 것이다. 본문에서 저자가 마태라는 결정적 증거는 없으며 제목에 따른 저자에 대한 추정은 추측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내용 기원 및 메시아 예수의 어린 시절(1:1-2:23). 마태복음을 시작하는 헬라어 구문 비블로스 게네세오스(biblos geneseos 1:1)의 의도를 파악하기란 매우 힘들다. 일반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탄생의 기록”이란 의도가 강하다. 이는 창 5:1에서 세페르 톨레돗(seper toledot)의 의미이다. 차이는 구약에서 후손들의 명단을 의미한다면 신약에서는 예수의 조상의 가계에 대한 표현이라는 점이다. 그럼에도 “기원”의 의미인 genesis(낳다)의 의도역시 매우 강하다. 따라서 1:1은 “기원에 관한 이야기”로 보아야 할 것이다. 마태의 족보는 예수가 누구인가를 밝히기 위해 그의 족보를 적고 있다(1:1-25). 1:17의 족보가 어떻게 형성이 되었는지 알 수는 없지만 14라는 수가 다윗의 이름의 수라는 것을 감안하여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예수의 조상 중 네 명의 여성이 등장한다. 다말, 다말, 룻, 우리아의 아내(밧세바) 중 처음 셋은 이방인출신아다. 1:16에서는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가 아니라 독특하게 ”마리아가 예수를 낳았다“로 기록함으로 예수의 동정녀탄생의 의도를 보여준다. 이는 그가 성령으로 잉태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암시한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이 계보는 또한 그가 다윗의 왕권을 지닌 아들로 묘사되는 것이다(BBM 586; D. R. Bauer CBQ 57(1995), 306-23. 유대인의 왕인 예수의 탄생을 경배하기 위해 동방박사들이 찾아온다(2:1-12). 그들은 별들의 인도함을 받아 오는데 이는 성서를 가지지 않은 이방인들을 위한 자연계시적 성격이 강한다. 세례 요한의 광야 사역이 소개되며 물이 아닌 불로 세례를 줄 자인 예수는 세례요한으로부터 의를 이루기 위해 세례를 받는다. 세례 시 하늘이 열리고 들여오는 하늘의 소리는 마가복음처럼 개인을 향한 소리가 아니라(“너는 나의 사랑하는 아들이라”) 공적인 선포(“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로 바뀐다. 광야의 시험이야기는 마가복음보다 자세하다. 예수는 자신을 위해 빵을 만들지 않고 다른 이들을 위해서만 빵을 늘리는 기적을 행한다(14:13-21: 15:32-38). 사탄은 예수에게 천하만국과 영광을 주겠다고 유혹한다. 예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을 것이나 자신이 그것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질 때에 받는다(28:11). 예수는 요한이 잡힘을 듣고 갈릴리에서 활동을 시작하며 요한이 전하던 메시지를 전한다. 이는 그의 사역이 요한의 사역이 지속임을 의미한다(4:12-17). 그리고 네 명의 첫 제자들을 부르고(4:18-22) 갈릴리에서 치유기적을 행한다(4:23-25). 마태의 산상설교(5:1-7:29)는 윤리선생이나 랍비의 권위가 아닌 하나님의 권세로 가르친다. 모세와 예수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자, 산에서의 계시의 전달(마 5:1-2), 간단명료하게 하나님의 뜻이 표현된 십계명과 팔복(5:3-12)이라는 유사성을 보여준다(R. F. Collins, ABD I 629-31). 마태 공동체는 외적으로 가난한 자들은 아니었기에 그들에게 복은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마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5:1-13). 여기서 복은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존하는 행복이나 축복의 상태를 의미한다. 즉 이는 행복선언일 뿐 축복의 약속은 아니다(R. F. Collins, ABD I 629-31). 예수의 율법에 대한 견해(5:17-48)에는 예수의 가치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면도 있지만 함축적인 기독론이 강화되어 있다. 예수는 율법을 벗어나는 계명을 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요구에 도달할 수 있는 순종을 요청한다. 즉 하늘에 계신 아버지처럼 제자들이 온전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5:48). 예수가 요구하는 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의보다 높은 것이다.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표현을 통해 그들이 이해하는 내용을 자신의 권위에 근거하며 수정한다. 예수는 율법이 허락하는 것을 금하기도 하고 율법과 반대되는 요청을 하기도 한다(마 5:38-42와 신 19:17 비교). 전반적으로 예수는 모세보다 훨씬 권위 있는 자이며 하나님과 같이 법을 재정하는 자의 위치에 서있다. 6.1-18에서 예수는 자선과, 기도, 금식행위를 행할 때 발생할 수 있는 위선에 대하여 경고한다. 또한 6:19-7:27에서는 세상에 부를 쌓아 놓음으로 삶의 보장과 편안을 구축하려는 이의 욕망에 대한 어리석음에 대하여 경고하고 남을 비판하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것과 기도하는 이에 대하여 하나님이 관대하게 대하여 주심을 말하고 있다. 또한 남에게 대접받고자 한다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는 황금률이 제안 되었다(7:12). 거짓 선지자들을 알 수 있는 방법은 그들의 열매이다. 예수에게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천국에 들어간다. 예수의 말에 근거하여 행하는 자들은 집을 반석위에 짓는 자이나 말을 듣고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해 집을 짓는 어리석은 자이다(7:24-27). 8-9장은 갈릴리에서 예수의 복음전파와 사역을 기록하는데 다양한 치유기적들과 폭풍우를 잠잠케 하심, 귀신추출, 제자도에 관한 말씀들이 곳곳에 산재되어 있다. 예수가 열두제자를 부르는 사건에서 마태복음의 저자는 베드로를 우선적으로 등장시키며 마태를 9:9의 세리와 동일한 인물로 기록한다. 예수는 그들을 파송하지만 이방인과 사마리아인들에게 가지 말고 “이스라엘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 명한다. 마태의 시각에서 본다면 이는 초기제자들은 처음에는 유대인선교만 하다가 훗날 사마리아인과 이방인 선교를 했던 사실을 반영하는 것이다(28:19,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순회 설교자들에 대한 지시를 보면 막 6:8-9보다 덕 극단적인 사항이 요구된다(10:9-15). 예를 들어 신과 지팡이조차 허용되지 않는다(10절). 재정의 문제는 특히 강조가 되었다(9). 그들을 거부하는 자에 대한 소돔과 고모라 땅의 심판보다 더 무서운 심판도 강조된다(15). 그들에게 다가오는 박해에 대하여 예고된다(10:16-26). 제자들은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인간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해야 한다(10:28). 제자들이 받는 재판으로 인해 가족들은 분열하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은 감옥에서 제자를 예수에게 보내 그가 정말 기대하던 그리스도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예수는 자신이 행한 이적들을 나열하며 이사야에 의해 예언된 메시야와 같다는 사실을 말한다(11:5-6, 29:18-19; 35:5-6; 61:1). 예수는 세례요한에 대하여 그가 선지자보다 큰 이이며 이스라엘의 구원을 위해 미리 보냄 받은 사자이며(마 11:10, 출 23:20 구원사역을 준비시키기 위해 보냄 받은 엘리야(마 11:14, 말 3:1, 23-24[4:5-6])라 증언한다. 예수의 길을 예비한 세례요한은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전 태어난 모든 이 중(여자가 낳은 자 중) 가장 큰 자이다(11:11). 11:16-19에서 예수는 혼인잔치 놀이 장례식 놀이를 같이 하자고 해도 혼자 노는 아이를 빗대어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은 강퍅하고 믿지 않는 세대를 비판한다. 그 후 갈릴리 바다 근처의 믿지 않는 도시에 내릴 재앙에 대하여 언급한다(11:20-24). 그들은 예수가 가장 많이 권능을 베풀었음에도(11:20) 회개하지 않았기에 이전 이사야(23:1)나 에스겔(26-28)에서 재앙을 선포 받은 도시들보다 소돔과 고모라보다도(창 19:24-28) 더 큰 심판을 받을 것이다. 예수의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자들은 당시 어린아이들과 같이 세상에서 중요하게 여김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다. 예수는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계시를 드러냄을 감사한다(11:25-27). 안식일에 제자들이 밀 이삭을 잘라 먹는 사건으로 인한 바리새인과의 논쟁은 강한 기독론적 시각이 담겨있다. 그는 다윗이 행한 일을 할 수 있고 성전보다 큰 자이며 야훼와 같이 안식일의 주인이다(12:1-7). 또한 안식일에 사람을 치료를 하는 사건을 통해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들의 경직된 율법해석에 더욱 신경 쓰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다(9:9-14).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죽이고자 모의함으로(12:14) 그는 자리를 피한다. 많은 군중이 그를 좇으며 예수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상당수의 병자들을 치료하신다(12:15-21). 예수는 귀신들려 눈멀고 벙어리 된 자를 고치는데 바리새인들은 이를 보고 그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모함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성령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며 자신의 행동을 강한 자(사탄)를 결발한 후에 강한 자의 집을 늑탈한다는 것과 비교한다(12:22-30).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바알세불이 한 일로 돌리는 바리새인들의 죄는 결코 용서함을 받지 못할 것이다(성령 모독죄, 12:31-32). 실과를 보면 나무를 알 수 있다. 좋은 나무는 좋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선한 사람은 선한 것을 악한 사람은 악한 것을 낼 것이다(12:33-37). 표적을 요구하는 서기관가 바리새인에게 예수는 니느웨를 회개시킨 요나의 표적과 솔로몬의 지혜에 감탄했던 남방여왕의 표적을 말한다. 예수는 그들보다 더 위대한 자이다(12:41-42). 예수는 귀신들을 쫓아냈지만 그들이 돌아오면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 이따. 이 세대가 악하기에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12:43-45). 예수의 가족들이 예수에게 말하려 찾아온다. 예수는 자신의 진정한 가족은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들임을 밝힌다(12:46-50).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한 후 마가복음이 외인들이 보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외인들에게 비유로 말한다고 기록하는 반면 마태복음의 예수는 사람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비유로 말한다고 기록한다(막 4:11-12, 마 13:13). 가라지의 비유에서 곡식 가운데 있는 가라지 즉 악한 자를 제거하지 않는 이유는 선한 자들도 함께 제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악한 이들에 대한 심판은 미래의 심판 날 이루어 질 것이다(12:24-30).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가 현재는 겨자씨처럼 작아 보여도 누룩이 밀가루에 금방 퍼지는 것처럼 결국 크게 성장하게 될 것이란 내용이다(13:31-33). 비유의 목적은 시편 78:2의 인용으로 설명된다. 비유를 통해 창세부터 감추어진 것들을 드러내리라는 말이다(12:35). 예수는 가라지의 비유를 해석한다. 결국 마지막 날 의인들은 천국에 악한 자들은 풀무불로 상징된 지옥에 들어가는 심판을 받는다는 내용이다(36-43). 천국은 밭에 감추어진 보물과 값진 진주와 같다. 이 두 이야기는 전 재산을 팔아서라도 기회를 잡아야 하는 하나님 나라의 엄청난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13:44-46). 그물 비유는 선교라는 그물을 통해 악한 자와 선 한자 모두 공동체에 들어오게 되는데 훗날 하나님의 심판이 그들을 걸려내게 된다는 내용이다(13:47-50). 예수는 나사렛에서 배척을 당한다(13:53-58). 마태는 헤롯이 세례 요한을 어떻게 죽였는지를 설명한다(14:1-12). 예수는 헤롯을 피해 적막한 빈들로 가나 무리가 여러 마을로부터 걸어서 그를 좇는다. 예수는 오천 명을 먹이고 바다 위를 걸을 때 믿음이 없어 바다에 빠지는 베드로를 구한다(14:13-33). 제자들에게는 “의심”으로 말미암아 끊임없는 시련이 다가온다. 그러나 예수는 믿음이 부족한 제자들을 대표하는 베드로를 구한다(마 14:22-33). 정결함과 부정함에 대한 마태의 내용에는 막 7:3-4의 긴 내용이 빠져있고 12-14절에는 마가에 없는 내용이 추가되어 있다. 예수가 두로와 시돈 지방을 지나갈 때 가나안 여인이 나타나 흉악한 귀신이 들린 딸을 위해 간청한다. 그러나 예수는 자신이 이스라엘을 위해 보냄 받았음을 밝히나 여인의 강한 믿음은 이를 극복한다(15:21-28). 예수는 갈릴리 호숫가에 이르러 많은 병자들을 고치시고 사천 명을 먹이신다(15:29-39). 이미 12:30-40에 언급되어 있는 표징을 요구하는 바리새인의 요구가 다시 반복된다. 예수는 요나의 표적만을 보여줄 수 있다 언급하시고 저희를 떠나신다. 제자들에게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의 누룩으로 상징된 가르침에 대하여 경고하신다. 이 세대는 악하고 음란한 세대라 표적을 분별할 수 없다(16:1-4). 16장은 베드로의 신앙 고백과 예수의 부활 이후 베드로에게 주어질 역할에 대하여 설명된다(16:13-20). 예수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 고백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이성(혈육)으로 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계시로만 가능하다. 이 내용은 바울의 다메섹 고백과 동일하다(갈 1:16). 다메섹의 계시로 바울이 사도로 임명되었듯이 베드로도 사탄(지옥문) 조차 이길 수 없는 예수님이 세우실 교회의 반석으로 임명된다(16:13-20). 19절의 말씀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의 의미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는 요 20:23과 같이 교회의 죄용서/용서하지 않음에 관한 권세인가? 일반적으로 이 내용이 바리새인과 사두개인의 가르침에 대한 경고 뒤에 나온다는 사실로 인해 베드로가 우두머리 랍비의 위치에서 바른 가르침에 대한 권한을 지녔다는 의도로 해석된다. 예수는 수난과 부활에 대하여 예고하시는데 “반석”이라 칭해진 베드로가 걸림돌이 되어 사탄이라 책망을 받는다(마 16:21-23). 마태복음의 책망은 마가보다 훨씬 심하다. 제자의 길에는 목숨을 버릴 각오가 있어야 함이 강조되나 인자가 재림할 때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을 것이다(16:24-29). 마가복음과 달리 이야기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주어진 말씀(막 8:34)이 아니라 오직 제자들에게만 주어진 말씀이다(24). 본문은 행위에 대한 심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본문에서 인자가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과 즉 인자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세상 끝날 하나님 나라가 임하는 것과 동일한 것인지 아닌지가 분명하지는 않다. 마태의 변화산 사건(17:1-13)에 대한 묘사는 독특하다(A. D. A. Moses, Matthew's Transfiguration Story and Jewish-Christian Controversy(JSNTSup 122; Sheffield: Academic, 1996). 예수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다(17:2). 이는 모세에 대한 묘사를 반영한다(출 34:29-35). 모세와 엘리야가 예수와 더불어 말하는데 이 둘은 율법과 선지자들의 대표로 보여진다. 17:6의 구름에서 나는 소리는 예수의 세례 때의 하늘의 소리와 동일하다(3:17). 마태의 간질병자 소년의 치유는 마가복음의 묘사보다 간결하다. 또한 아이가 즉각 치유되지 못한 이유는 마가처럼 아버지의 믿음이 부족해서가 아니라(9:22-24) 오직 제자들의 믿음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한다(17:20). 가버나움에서 반 세겔을 납부하는 장면에 대한 묘사가 있다. 낚시를 던져 잡은 물고기의 입에 돈 한 세겔을 꺼내 베드로와 예수의 세금을 낸다(17:24-27). 마태는 이 세금이 성전세인지, 로마의 쥬피터 신전의 유지를 위해 거둔 후 두 드라크마(두 데나리온)인지 얌니야의 랍비 학교를 유지하기 위한 모금인지 밝히지는 않는다. 자발적으로 세금을 내는 이야기는 당시 초대교회에 평화로운 시민이 되기 위한 조건이기도 했다(롬 13:6-7; 벧전 2:13-16). 제자들이 지위다툼에 천국에서 가장 큰 자에 대한 논쟁에서 어린아이가 하나의 예로 주어진다. 어린아이와 같은 의존성이 없이는 천국에 들어갈 수가 없으며 이런 어린아이를 영접하는 것이 곧 예수를 영접하는 것이다(18:1-5). 예수가 제시하는 천국의 가치관에서는 권력가가 아니라 천하고 낮은 자들이 더욱 중요하다. 또한 남을 넘어지게 하는 행동을 강하게 경고하고 있으며 과장법을 사용하여 죄에 대한 경고를 하고 있다(18:8-9). 읽은 양의 비유는 요한복음에 나타난 가야바의 원칙(요 11:49-50)과 반대되는 입장을 표명한다. 예수는 잃어버린 사람을 구원하러 오셨으며 “작은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라도 망하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다”(18:14).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마태는 죄의 용서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8:15-22).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두 세 증인을 통해 훈계하고 그들의 말을 듣지 않을 때는 “교회“(여기서는 기독교 교회가 아닌 지역 공동체, 16:18의 교회와는 다름)에서 훈계하되 교회의 말도 듣지 않는다면 그를 이방인과 세리처럼 여겨야 한다(18:15-20). 이는 조직화된 공동체의 권위의 남발을 막기 휘한 정책이기도 하다.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를 통해 무한 한 용서의 원칙을 제시하신다(18:21-25). 가족의 경우가 아니라면 일곱 번 씩이나 용서해주는 것도 놀라운 일이나 예수는 무한한 횟수를 상징하는 일흔 번씩 일곱 번의(참조 4:24) 용서를 강조한다. 용서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이다. 5:27-32에서 이미 언급된 간음과 이혼문제는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시험하는 문맥에서 다시 논의된다. 여자가 이혼을 제기하는 경우는 유대인 중심의 마태 공동체에서는 언급되지 않는다(9, 막 10:11-12 비교). 이혼의 가능성에 대하여 “음행한 연구 외에”라는 조항은 당시 샤마이 학파의 주장과 유사하다(19:1-9). 그리스 어로 음행(porneia)은 다양한 음란함을 의미하나 어떤 이들은 이를 간음의 경우에 국한시켜 순결한 쪽에서의 이혼과 재혼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러나 마태는 간음의 경우 moicheia를 선호하며 유대적 문맥에서 이는 친족 내의 근친상간을 의미한다고 보여 진다(비교 행 15:20 레 17). 복음전파를 위해 독신의 삶을 사는 사람들은 당시 “고자”, “고자로 만들다“와 같은 당시 매우 모욕적인 욕을 들어야만 했다. 그러나 이는 하나님 나라의 표징이다(19:10-12). 제자들이 아이들을 거부함을 예수는 꾸짖는다. 18:3과 달리 여기서는 어린이가 비유로 사용되기 보다는 어린아이 자체가 중요시된다(19:13-15). 예수는 제자가 되길 원하는 부자청년에게 십계명 이외에 이웃사랑의 계명을 더하여 요구한다. 그리고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예수를 쫓으라 하나 그가 제물이 많아 근심하며 돌아간다. 부를 소유하고 있는 자체가 가난한 자들에 대한 불의가 되어 하나님의 징계의 대상이 될 수 있다. 부가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으면 하나님이 계실 자리가 없다(19:16-26).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름에 대한 제자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열두 보좌에 않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게 될 것이다. 의인들이 최후 심판에 참여하게 되리라는 사상은 유대교에서 그리고 영생과 함께 보상이 주어질 것이다. 마태복음에는 막 10:30의 “금세에 있어”가 빠져있다.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리라”는 20:30의 말씀을 설명하기 위해 20:1-16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등장한다. 이 비유는 마태복음에만 나온다. 결국 이전에 어떤 일을 했던 인간의 노고와 상관없이 주인의 부름에 응한 모든 일꾼들에게 동일한 영생의 생명이란 삯이 은혜의 선물로 주어진다(20:1-16).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가 있은 후 세 세베대의 아들의 어머니가 자신의 두 아들이 하늘나라에서 높은 위치에 오를 수 있도록 예수에게 요청한다(20:2--28). 그러나 가장 많이 섬기는 자가 으뜸이 될 것이다. 인자도 자신의 목숨을 많은 이들을 위한 대속 물로 주려한다(20:20-28). 예수는 여리고를 떠날 때 눈먼 사람 둘을 치유하고(29-34) 예루살렘을 입성하기 전 슥 9:9의 성취로 나귀를 탄다. 사람들은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라 칭송하며 그를 환영한다(21:1-11). 성전정화(21:12-17) 사건 이후 무화가 나무가 저주하는 사건이 나온다(21:18-22). 마가복음의 기록과 달리(막 11:12-14, 20-24) 무화과나무는 저주 즉시 말라 버린다(21:19).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는 권세에 대하여 질문하는데 세례요한과 관련하여 역 질문을 던진다(21:23-27). 두 아들에 관한 이야기는 세례 요한을 믿었던 세리와 창녀들이 오히려 유대 지도자와 당국자들보다 먼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21:28-32). 악한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는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간 주인이 보낸 종들과 아들까지 죽인 포악한 악한 소작농이며 그들이 최후 심판을 받을 것이며 하나님 나라는 열매 맺는 백성이 차지하게 되리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21:33-46). 왕실 혼인 잔치에서 유대지도자들이 하늘나라에서 거절 받고 사회에서 소외된 자들이 오히려 참석하게 된다는 사실을 다시 설명하고 있다.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말은 여기서 이신칭의의 신학을 반영하기 보다는 믿음과 회개의 삶을 삶으로 잔치에 합당한 삶을 살았는가에 대한 판단에 관한 언급이다. 그러한 삶을 살지 아니한 자들은 어두움 가운데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22:1-14). 마태의 저작 시기를 세금의 문제로 로마에 반란을 일으켜 예루살렘이 파괴되던 시기로 본다면 황제에게 세금을 과연 바쳐야 하는가 하는 질문은 매우 실존적인 문제였다. 예수는 하나님의 것과 가이사의 것에 관한 이원론적인 구분이 약한 유대인들에게 아리송한 답변을 내린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라는 것이다. 과연 가이사의 것은 존재하는가? 여기에 대한 개개인의 답변에 따라 예수의 답변은 다르게 해석될 것이다. 예수는 여기서 바치라고도 바치지 말아야 한다고도 주장하고 있지 않다. 어는 한쪽으로 이야기 했다면 예수는 바리새인과 헤롯당원들의 올무에 걸렸을 것이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절대 명령 하에 가이사의 것이라는 것은 상대적 중요성을 띤다는 사실이다(22:15-22). 부활에 대하여 부정적인 사두개인의 질문에 예수는 부활에 대한 긍정적 답변을 주시고(22:23) 가장 큰 계명에 대한 바리새인의 질문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 정의 내리신다(22:34-40). 여기서 첫째, 둘째의 의미는 결코 한 계명의 우선성이 아니라 동등한 차원에서의 순서일 뿐이다(22:34-40). 예수는 바리새인들에게 다윗의 자손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다윗보다 우월한 자신의 위치를 언급하신다(22:41-46).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 대한 비판의 주된 내용은 그들의 위선이다(23:1-36). 예수는 예수의 품으로 돌아오지 않는 예루살렘에 대하여 탄식하며(23:37-39) 성전의 멸망을 예언하신다(24:1-2). 막 13과 마찬가지로 마 24의 종말의 사건들은 당시의 시간과 미래를 혼합함으로 애매모호하게 표현되어 있다. 초대교회는 종말의 사건에 대한 구체적인 시간과 사건에 대한 언급을 회피한다. 거짓 선지자들에 대한 증언(24:11, 24)은 기독교 열광주의자들과의 갈등을 보여준다. 24:15는 멸망의 가증한 것이 성전에 서 있게 됨을(막 13:14는 모호하다) 의미하는데 이는 로마가 성전을 더럽힌 사건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본문의 유대적 배경은 이 환란이 안식일날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하라는 예수의 말에서 잘 드러난다(24:20). 24:36-51은 그날이 언제인지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있으며 오직 아버지만이 알고 있다고 주장하며 따라서 항상 깨어 있으라고 권면한다(24:29-41). 이는 청지기의 비유(24:45-51) 슬기롭고 어리석은 처녀들의 비유(25:1-13)를 통해 다시 설명된다. 깨어있으라는 말은 매일 종말을 기다리며 계산하며 살라는 말이 아니라 현재에 믿음에 충실한 삶을 살라는 말이다. 달란트의 비유에서 남아 있는 시간을 지혜롭게 보내야 함이 요청된다. 모두에게 성령 안에서 주어진 재능을 잘 사용해야 한다. 그러지 않을 경우 심판이 임한다(25:14-30). 여기서 심판에 대상은 달란트를 방탕하게 허비한 사람이 아니라 숨겨놓고 쓰지 아니한 사람이다. 따라서 신앙과 은사에 대하여 소극적인 신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다. 25:31-46은 마지막 날 심판에 대한 기준이다. 세상 사람들은 부자와 권력 있는 자들에 대한 관심을 보이는 반면 예수의 제자들은 반대로 약자와 소외된 자들에게 관심을 보여야 한다(31-46). 예수의 형제들로 표현된 그들은 일차적으로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며 복음전파의 사명 속에 박해받는 기독교 선교사들로 암시된다. 제사장들과 장로들은 예수를 잡아 죽이려 음모하고(26:1-5) 예수가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있을 시 한 여인이 귀한 향유 한 옥합을 예수의 머리에 붓는다. 이는 예수의 죽음에 대한 예언자적 표징행위이다(26:6-13). 마태는 가롯 유다가 은 삼십에 예수를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주기로 한 사실과(26:14-16) 예수는 유월절을 준비하시고 곧장 최후의 만찬에 대하여 설명한다(26:17-29). 예수는 베드로가 자신을 세 번이나 부인할 것을 미리 예고하시고(26:30-35) 겟세마네 동산에서 필사적으로 기도하신다(26:36-46). 예수는 유대 공회에서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는다(26:57-68). 베드로는 바깥 틀에서 예수를 세 번 부인한다(26:69-75). 총독 빌라도 앞에서 예수는 다시 재판을 받고 유다는 성소에 받은 은을 던져 놓고 스스로 목매어 죽는다(27:1-14). 군중들은 예수 대신 바라바를 놓아주기를 바라기에 빌라도는 예수에 대하여 유죄선고를 내리고 군병들은 그를 조롱하고 희롱하며 채찍질을 가한다(26:15-30). 마태복음 초반부에 꿈들이 주요 역할을 하듯(1:20, 2:12-13, 19) 빌라도의 아내의 예수의 무죄에 대한 꿈이 예언적 성격을 띠고 묘사된다(27:19). 그러나 유대인들의 압력으로 인해 빌라도는 그들에게 예수의 피에 대한 책임을 넘기며 결국 유죄를 선고한다(27:24). 예수는 군병들에게 조롱과 채찍질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신다. 제 육시에 땅이 어두워지며 성소 휘장이 찢어지고 무덤이 열리며 죽은 자들이 부활한다. 예수의 부활 후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여진다(27:53). 예수의 탄생 때별과 같은 하늘의 징표가 나타났다면 그의 죽음에는 지진과 무덤이 열리는 땅의 징표가 나타난 것이다. 예수는 무덤에 묻히는데 부자인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를 세마포에 ‘사서 장사지낸다(27:57-61). 군인들이 무덤을 지켰다는 이야기는 당시 그의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훔쳐갔다는 소문에 대한 반박으로 쓰여 졌을 것이다(27:62-66). 예수는 안식일 훗날 부활하였고 미명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에 의해 목격된다. 그들은 기쁨으로 다른 제자들에게 이 소식을 전하고 그들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게 된다(28:1-15). 대제사장들과 장로들은 군병들에게 뇌물을 주고 제자들이 예수의 시체를 도적질해 갔다고 소문을 내게 한다(28:11-15). 예수는 제자들에게 땅 끝까지 자신의 가르침을 전하도록 분부한다. 예수는 세상 끝날 까지 그들과 함께 할 것이다(28:16-20). 이민규 (한국성서대학교 신약학 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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