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학 1강좌 / 권보라 교수

선교학 1 강좌

선교학 원론

 

 

1. 선교의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라

 

① mission이란 말의 개념

 

파견(sendung), 사명(aufgabe), 위임(auftrag)라는 뜻의 라틴어 ‘missio'에서 기원된 말로서 종교적으로는 아직도 믿지 않거나, 믿다가 더 이상 신앙을 유지하지 않는 사람이나, 방황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해 교회가 사명과 위임을 주어 보내는 것을 의미한다.

 

② mission과 missions

 

ㄱ. mission : 예수 그리스도 교회의 총체적인 성경적 과업을 의미하는 말로서, 교회는 이 세상에 보내진 자, 즉 순례자, 나그네, 증인, 선지자, 종, 소금, 빛이다.

 

ㄴ. missions : 신약세대 교회가 공인된 사람을 보내어 복음의 빈곤지역에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선포함과, 타신앙 내지 무신으로부터 예수 그리스도에게로의 회심자를 얻어내는 것과, 속한 단체나 나라에서 기독교의 열매가 되는 기능적이고 번식적인 교회를 세우는 일이다.

 

 

2. 주님의 세상에 대한 대위임 명령에 대하여 설명하라

 

① 마태복음 28:18-20

 

가. 모든 권세 - 왕의 주권

 

나. 제자를 삼으라 - 왕의 목적

 

다. 가서 세례를 주고 가르치라 - 왕의 교훈

 

라. 내가 너희와 함께 하리라 - 왕의 임재

 

② 마가복음 16:15

 

가. 복음 - 선교의 메시지

 

나. 온 천하 - 선교의 범위

 

다. 전파하라 - 선교의 방법

 

③ 누가복음 24:46-49

 

가. 죄사함을 얻게 하는 회개를 전하라 - 복음의 도전

 

나. 모든 족속에게 - 복음의 범위

 

다. 증인이라 - 복음의 도구

 

라.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 - 복음의 역동성

 

④ 요한복음 20:21-23

 

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낸 것 같이 - 선교의 기원

 

나.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 위임

 

다. 성령을 받으라 - 준비

 

라. 죄를 사함 - 선교

 

⑤ 사도행전 1:8

 

가. 성령을 받음 - 준비

 

나. 예루살렘으로부터 땅 끝까지 - 선교의 차서

 

다. 증인 - 복음의 도구

 

마태는 주의 권세와 나아감(참여)에, 마가는 권세(불신,권세,병을 극복함)에, 누가는 성령을 받음에, 요한은 파송(삼위 하나님에 의함) 그리고 사도행전은 성령과 선교의 차서에 강조를 둔다.

 

 

3.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에 대하여 설명하라.

 

구심적 선교와 원심적 선교는 구약과 신약의 선교에 대한 특징적인 표현으로서 전자는 개종을 후자는 회심을 목적으로 한다. 즉 구심적 선교는 구약의 선교로서 이스라엘을 중심적으로 오라는 선교를 말하고 원심적 선교란 신약의 선교로서 예루살렘에서부터 세계로 가라는 선교를 말한다.

 

그런데 선교는 구약에 근거를 두고 점차적으로 발전되어 왔다. 구약은 모든 나라에 선교해야 할 근거와 의미를 분명히 제시해주고 있다. 구약에서도 이방 선교의 동기를 찾아볼 수 있는데 룻과 나아만처럼 이방인으로서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거나 이스라엘의 신앙을 받아들인 인물들을 예로 들 수 있으며 선지자들의 글에서도 우주적인 교훈을 찾아 볼 수 있고 요나서나 이사야서에서 우주주의에 대한 색깔이 강한 사상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주성을 성취하시려는 의도는 아브라함을 부르시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흩어진 인간의 통일과 파괴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기 위한 기초작업이었다. 창세기12:3의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라는 말씀은 이스라엘 역사가 이방 역사와 긴밀하게 관련된 것임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이스라엘의 선택은 봉사를 위한 선택이었다. 물론 그 봉사는 세계 만방을 위한 것이다. 즉 이스라엘의 사명은 만방 가운데서 하나님의 우주적인 통치성과 그의 선하심을 나타내는 데 있다. 그렇게 해서 하나님의 영광과 주되심을 나타내고 모든 사람을 그에게 오게 함이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바로 그것을 나타낸다. 바로 여기에서 구약의 구심적 선교의 모습이 드러난다. 그래서 이스라엘이 그런 책임을 망각할 때는 결코 하나님의 벌을 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구약에서의 이스라엘로 들어오게 하는 선교였다.

 

이러한 구약의 구심적 선교개념은 신약에 와서 보다 발전되어 만방에 원심적인 복음 선포를 부탁하는 내용이 새로이 나타난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방선교를 반대하지 않았지만 이스라엘에게 집중적인 설교를 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계시의 역사적 상황에서 즉 구원의 차서라는 관점에서 이스라엘을 우선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선교를 위한 선포의 메시지는 예수께서 부활한 후였다. 마28:18-20의 말씀은 바로 선교의 선포이다. 그리고 모든 족속을 위하여 가라는 주의 선포적 명령은 새로운 사실의 출현이다. 그것은 복음 전도 방향의 전환점이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오라는 구심적 선교에서 가라는 원심적 선교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도 바울이 이방에 복음을 전파하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로 부르심을 받은 것도 바로 여기에 근거한다.

 

구심적 선교(구약)-오라;개종의 목적으로 함

 

원심적 선교(신약)-가라;회심을 목적으로 함

 

 

4. 카톨릭의 선교신학에 대하여 설명하라

 

로마 카톨릭의 선교 교리는 바티칸회의 때부터 포괄적으로 다루어지기 시작하여 바울4세의 선포에서 재조정되어 나타났다. 바울4세는 교회의 성격을 구원을 위한 우주적 성례로 제시하고 교회를 삼위일체 하나님의 선교를 위한 존재로 규정했다. 또한 감독들의 대회도 카톨릭의 선교에 기했다. 1971년의 감독회의에 따르면 선교는 인간 역사 가운데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자유와 구원의 계획의 의미를 그들 인간에게 나타냄이라고 하면서 비카톨릭 그리스도인들과의 제휴와 다른 종교의 신앙을 가진 사람들과의 다이얼로그를 추천했는데, 이것은 복음의 새로움과 계시의 충만성에 대한 깊은 이해를 성취하는 길로 채택되었다.

 

교황 바울4세는 거짓 가치 체계의 폐기를 위한 도전을 요청했다. 그래서 그는 넓고 깊은 의미에서 인간 문화를 복음화 시킬 것과 주님의 나라를 설립하기 위해 인간 문화의 요소를 빌릴 것, 그리고 문화에의 복음을 침투를 강조했다.

 

카톨릭의 선교신학은 1981년 로마에서 개최된 미래선교에 대한 SEDO여구센터 세미나에서 정리되어 나타났다. 그들은 선포,다이얼로그,문화화,해방을 중요 선교사역으로 규정했다. 복음의 신비성 있는 선포는 말과 침묵적 행동, 즉 불신자 가운데 복음적인 삶의 임재에 의한 증거를 말한다. 다이얼로그는 타신앙 내지는 이데올로기를 신봉하는 자에게 이미 주어진 상홍에서 존재하는 그리스도를 스스로 발견하도록 하는 것이다. 문화화는 성육신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말씀의 선포보다는 말씀이 개인이나 단체나 기관이나 문화 안에서 구현되는 것을 말한다. 해방은 억압적 구조에 대결하여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이렇게 볼 때 로마 카톨릭의 선교신학은 에큐메니칼의 그것과 병행 내지는 일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 보에티우스의 선교 개념에 대하여 설명하라.

 

전통적인 선교사상인 교회 중심주의 선교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가 세가지 임무에 나타난다. 즉 그는 선교의 목적을 ①이방을 회심시키는 것②교회를 설립하는 것③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의 은혜를 선포하는 것이라고 했는데 이방인의 회심 다음에 그들을 중심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을 선교의 목적으로 보았다는데에 주목해야 한다. 그것은 곧 보에티우스가 선교의 개념을 교회의 연합적인 삶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의미한다.

 

 

6. 하나님의 선교 신학에 대하여 설명하라.

 

하나님의 선교란 교회의 일이나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근거한 하나님의 속한 활동으로서 하나님의 일이라는 선교신학을 말하는데 선교에 있어 인간 역사에 관심을 두자는 것을 강조한다. 그것은 선교 행위의 주인이 되는 하나님은 그의 선교적인 행위를 역사 가운데서 이루신다는데 그 이론적 근거가 잇다. 따라서 육체적 심리적인 고통,무지,가난,인종차별,죽음의 위협과 같은 인간 상황 안에 있는 악의 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투쟁과 봉사를 적극 장려하는 주장이다. 물론 성경적으로 볼 때 선교는 하나님께 그 기원을 두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변방을 가로질러 육체로 오신 최초의 선교사이기 때문이다. 성육신이야말로 최초의 선교사라는 말이다. 따라서 선교의 주체는 삼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16세기 이후부터 선교를 하나님의 사역이 아니라 교회의 일로 보았었다. 그러나 아브라함 카이퍼는 그것의 잘못을 지적했다. 바네크도 선교가 삼위 하나님에 근거함을 언급했다. 빌링겐 선교대회는 선교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이라고 할 정도로 선교적 대전환점이 되었다. 즉 종래에는 선교를 교회 중심적으로 또 인간의 일로 여기는 듯한 경향이 있었는데 빌링겐 선교대회에서 선교는 우리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라고 했던 것이다. 빌링겐 회의 보고서는 우리가 참여하고 있는 선교운동은 삼위일체 하나님 그 자신 안에 근거를 가진다고 밝히고 있다. 하나님의 선교에 대한 체계적 정립은 빌링겐 대회 이후 조지 비세돔에 의해 이루어졌다.

 

비세돔에 따르면 하나님의 선교의 목적은 인간들을 하나님의 주권,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 받아들이고 인간들에게 그 나라에서 누릴 수 있는 은사들을 전해주는 데에 있다. 즉 하나님 나라가 하나님의 선교의 목표인데, 그것은 종말론적 성격을 가진다. 하나님 나라는 현세적인 형태일수 없고 실현될 것을 바라는 희망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선교는 미래가 구속사업의 연장선상에서 완성되는 것이므로 단순히 미래만 바라는 것은 옳지 않으며 과거에 이룩한 구속 사업을 중시하는 가운데 미래를 바라보아야 할 것을 요구한다.

 

결국 하나님의 선교란 주 예수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과 앞으로 완성될 하나님의 나라를 현재에 포개어 이루어 놓으려는 것이다. 그것은 말세만을 대망하여 세상을 도피하려는 사상을 배격하고 현재에 하난미 나라가 임하게 하는 적극적인 실천을 강조한다. 즉 “이미”라는 근거 위에 “아직 아니”로 나아가야 함을 말해주고 있다. 첫째,하나님의 선교는 종래의 선교 목표인 교회를 세우는 일의 약화를 뜻한다. 즉 교회를 타자를 위한 존재로 보고 교회의 중요성을 교회 그 자체보다는 세계를 위함에 둔다. 즉 구속 역사에 잇어서 교회의 중요성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교회→세계라는 종래의 구속사역의 순서를 하나님→세계→교회로 바뀌었다. 교회는 세계 가운데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해하고 그의 역사하시는 징표에 민감하여 그의 일에 참여해야 한다는 말이다. 둘째,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인간화에 둔다. 즉 하나님의 선교는 하나님이 관심을 두는 여러분야의 선교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그런 일에 관여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이 보낸 선교사로 본다. 셋째,하나님의 선교는 역사 가운데 행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하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교의 모든 내용을 그대로 긍정적하고 받아들일 수 없다. 메시야의 행동 하나님 나라를 위한 행동만 강조한 나머지 선교적인 선포적인 선포가 약화될 수 없기 때문이다. 역사 속에서의 하나님의 구원 행위는 사회적 일로만 하려고 하면 불가능하다. 역사상 참 구원 역사는 무엇이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된다. 예수 없이 행하는 복지 사업,해방운동,공의운동 등을 하나님의 선교라고 한다면 그것은 비성경적이다. 하나님의 이름과 상관 없는 봉사라 할지라도 사회악을 물리치기 위한 봉사라면 간접적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관련된다고 하는 것은 복음적 선교를 무가치한 것으로 보는 극단적인 견해이다. 참 포도나무 되신 주의 성령의 인도 없이 행하는 것은 결코 참된 구원 사업이라 할 수 없다. 참 구원사업은 삼위 하나님의 절대적이고 최종적인 계획이기 때문이다.

 

7. 맥가브란의 선교의 강조점을 쓰고 비판하라.

 

퓰러 신학교의 맥가브란 박사의 선교 사상은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교회 중심주의 선교사상을 견지하고 있다. 그는 선교란 예수 그리스도의 좋은 새 소식을 선포함과 사람을 설복하여 그의 제자, 즉 그의 교회의 신임성 있는 회원으로 만드는 사업이라 하였다. 그는 인간 구원의 요청이 육체적, 교육적인 필요나 어떤 구제 활동보다 훨씬 더 긴박하다고 강조한다. 또 그에 의하면 사회 정의나 혹은 평화 등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통해 실현될 수 있다고 한다. 그는 개개인의 변화는 사회 변화에로 연결된다고 말한다. 그런 좋은 예로서 미국 역사상 노예제도 폐지, 고아나 과부의 구제 둥의 자선 사업이 번화된 그리스도인들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을 든다. 이 같은 전통적인 선교개념은 한국교회 선교 운동의 대종을 이루고 있다고 아니할 수 없다. 자치, 자급, 자전도를 골자로 한, 한국교회가 채용한 네비우스 선교 정책은 교회 조직에 무엇보다도 역점을 두었다. 그러한 네비우스 선교정책에 큰 장점이 있다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나가는 외향성보다는 모으는 내향성에 치중한 사실과 교회의 발전만 중시한 나머지 사회적인 봉사를 등한시한 사실은 많은 사람들의 지적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교회 중심주의 선교관에서 지향해야 할 점은 교회가 자기중시 잡착에서 벗어나 세계로 향함에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세계, 즉 하나님을 떠나 있는 세계로 보내어졌다는 사실과 교회는 타자를 위한 것임을 다시 인식해야 하며 바이엘하우스가 “교회가 타자를 위한 교회로서 세계에 대한 책임안에 있을 때 교회가 하는 모든 일이 선교일 수 있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교회가 하는 일은 아무것도 아니다”라고 한 말을 기억해야한다. 교회중심주의에서는 하나님 나라가 중심에 있지 않고 교회가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이다.

 

 

8. 교회와 선교에 대해서 써라

 

극단적인 현대의 진보적인 선교 개념에서는 교회는 있어도 좋지만 없어도 주의 구속사업에 지장이 없다는 견해를 보이지만, 세계 선교, 즉 ‘복음의 만국에의 전파’의 실행을 위한 지상의 기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이다. 교회는 선교의 목적이요 또한 선교의 기구인 것이다.

 

교회는 부름을 받은 자들의 모임이다.(고전1:9 참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도록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불리움받은 백성이다.

 

교회의 시작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 부활의 신앙 안에서 그의 완전한 통치의 날을 기대함 가운데서 모임으로 시작되었다. 구약의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이스라엘이 실패하였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모퉁이 돌이 되어 그 위에 세워진 교회는 이스라엘의 영광과 이름을 상속받으며 그리스도안에서 새이스라엘이 된다. 이 하나님의 백성은 목적지에 이미 도달한 공동체가 아니고 미래에 올 도성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순례의 공동체인 것이다.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써 교회 안에 그리스도가 존재하고 그리스도가 없이 교회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스도는 교회의 머리로 존재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순종함으로 따라가야 한다. 그리스도는 구약이 기대하던 소망의 성취셨다. 공의와 의에 대하여 샬롬의 시기에 대하여 고난을 통하여 매개된 소망의 시기에 대하여. 이렇게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메시지, 즉 복음이 바로 교회가 세상에 내어놓을 메시지이다. 이렇게 주님안에서 성취된 복음은 새로운 시대의 출발과 하나님의 의와 평화의 현현을 의미하고 새 사람의 창조를 통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신다. 교회는 이 복음을 가지고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블라우(Blaw)의 말대로 “세상으로 보냄을 받은 교회 외에 다른 교회가 없고 그리스도 교회의 선교 외에 다른 선교가 없다. 하나님께서는 선교적 사명을 맡은 교회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이루시고 삶의 새로운 질서를 확랍하고 선포하는 선지자적 공동체를 만드시며 제사장적 차원에서 교회가 하나님께 찬미의 제사를 드리고 세상을 향해 중보의 기도를 드리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을 대표함으로 백성들을 주께로 오게끔 하시며,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함으로 마귀와 정사에 눌리고 노예화된 세상에 소망의 가능성을 열어주며 그 권세들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따라서 교회는 왕적인 공동체로서 왕적 권세를 가지고 선교해야 한다.

 

 

9. 호켄다이크의 샬롬의 신학에 대하여 설명하라.

 

샬롬 신학은 호켄다이크가 주장한 선교사상으로서 경건주의자들이나 메도디스트의 구원의 좁은 개념인 인간 영혼의 구원개념이나 천주교나 신교에서 볼 수 있는 교회를 통한 구원이라는 전통적인 개념을 배격한다. 후자의 경우 세계와는 격리되고 방어 중심적인 교회 중심주의는 사회에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론적인 근거는 장차 메시야가 오시는 날에 성취될 마지막 구원은 메시야가 모든 나라를 모으고(창49:10), 사람들은 그를 통치자로 모시고 섬김(단7:13,14)으로서 인간과 그가 처한 사회의 구원, 즉 전인적인 구원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교는 마땅히 마지막 구원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것을 위하여는 샬롬의 사회적 성취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본다. 그가 말한 샬롬은 인간의 상황 회복으로 치유된 모든 면 즉 의와 진리, 우애, 의사소통 그리고 평화등으로 요약된다. 그것을 위한 선포, 봉사, 증거가 바로 선교라는 것이 그의 샬롬 신학사상이다. 그는 세상을 교회보다 우위에 두고서 하나님의 구원계획의 초점은 세계이지 교회는 아니라는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에, 본래 교회의 선교는 없고 하나님의 선교에 참여함에 부름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그가 교회가 세상과 담 쌓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에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은 적극적인 대 사회 자세라고 할 수 있지만, 영적인 회개 없이 샬롬을 이룰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무시한 점은 잘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