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시록 제 1 장
●중요 내용과 계시의 순서 (요한 계시록 1:1,2)
Ⅰ. 이 책의 유래를 말해 주는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이 책은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이다. 모든 성서에 기록된 말씀들은 모두 그렇다. 왜냐하면 모든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어지며, 모든 것이 그에게 집중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마지막 때에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의 아들에 관해 말씀하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가 어떤 원칙과 방법에 의해 그가 세상을 다스리고 계신지를 알기를 원하셨다. 그리하여 교회의 예언자로서 그리스도는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우리에게 알게 하셨다.
2. 이 책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주신" 계시이다. 비록 그리스도 자신이 하나님이시며, 생명과 광명을 그의 안에 가지고 계셨지만, 그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로서의 본분을 다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가르치심을 받으셨다. 비록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형언할 수 없는 크나큰 지혜와 판단력, 그리고 통찰력을 받으셨지만, 그도 인간인고로 아버지께서 하시고자 원하시는 것을 다 깨닫지는 못하셨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고귀한 하나님의 뜻은 신성한 예지로서만 알 수 있고, 하나님은 그의 펴시고자 하시는 고귀한 뜻을 계시에 의해서만 우리 피조물에게 나타내신다. 이 때 인간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사이에서 교량적인 역할을 담당하시는 이가 바로 우리 주 예수님이시다. 우리가 하나님께 무엇을 요구하며,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무엇을 요구하시는지를, 우리는 오로지 우리 주 예수를 통하지 않고서는 도저히 알 수가 없다.
3. 이 계시는 그리스도께서 "천사를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 계시의 놀라운 순서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은 그리스도께 계시하셨으며, 그리스도는 교회들에게 이 계시를 전하기 위해 천사들을 부르셨다. 천사는 하나님의 사자들이며 그들은 구원받을 후사들을 위한 구원의 영이며, 그리스도의 종들이다. 이렇듯 모든 주권과 능력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를 드려야 한다.
4. 천사들은 "사도 요한에게 그것을 지시하였다." 천사들이 그리스도의 사자들인 것과 마찬가지로 목회자들은 교회의 사자들이다. 그들은 하늘로부터 받은 말씀을 교회에 전해 주어야 한다. 요한은 이러한 일을 위해 선택받은 사도였다. 그는 여러 사도들 중에서 그때까지 살아남은 유일한 사도였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다른 사도들은 그들의 증언을 피로써 보증하였다고 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복음증거를 위해 순교하였다는 것이다. 요한 계시록은 하나님의 계시를 기록한 마지막 책이 되었다. 그 때문에 마지막 남은 한 사람의 사도에 의해 이 말씀이 교회에 전해졌다. 요한은 사랑받는 제자였다. 구약 성서에서의 선지자 다니엘과 같이 요한은 신약 성서에 있어서 "매우 사랑받는 제자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종이었으며, 복음서 기자요, 예언자요, 사도였다. 이렇게 그는 세 가지의 소임을 수행함으로써 그리스도를 섬겼다. 야고보는 사도였지만 예언자도 복음서 기자도 아니었다. 마태 역시 복음서 기자요, 사도이기는 했지만, 예언자는 아니었다. 누가는 복음서 기자이기는 했지만, 예언자도 사도도 아니었다. 그러나 요한은 세 가지의 일을 수행했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는 요한을 자기의 "종 요한"이라고 부르셨다.
5. 요한은 이 계시를 교회와 모든 종들에게 전할 의무가 있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특별한 종, 다시 말해서 목회자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의 모든 종들과 교회의 회원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며, 지켜나가야 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다.
Ⅱ. 여기서 우리는 속히 이루어져야 할 계시의 중요한 문제가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복음서 기자들은 우리에게 지나간 일을 말해주지만, 예언자들은 앞으로 있을 일들에 대해서 설명하여 준다. 그러나 이러한 장래의 사건들은 하나님께서 비쳐 주는 빛 가운데서가 아니면 밝히 볼 수 있다. 오직 그 빛 가운데서만 우리는 바르게 보며, 하나님의 지혜롭고 거룩하신 뜻에 잘 응답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계시한 그대로 명확하게 예언할 수 있다면, 그러한 예언이 성취되는 것을 미리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예언이 약간 희미하게 예언됨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성서에 대한 존경심을 가지고 보다 더 이에 대해 탐구하는 마음을 가지게 한다.
우리는 이 계시에서 교회의 관리 방법 및 거룩한 섭리의 일반적인 생각들을 알 수 있다. 그뿐 아니라 좋은 교훈의 말씀도 배울 수가 있다. 이러한 사건들은 "반드시 일어날 뿐만 아니라, 속히" 일어날 것이다. 말하자면 모든 것이 조만간에 이루어질 것이다. 그 이유는 세상의 종말이 가까웠기 때문이다.
Ⅲ. 여기에는 예언의 증거가 있다(2절). 그것은 요한에게 지시된 것이었으며,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다. 구약 성서의 역사적인 책들, 다시 말해서 사사기, 열왕기, 역대기 등은 그 책에 역사가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사야서, 예레미야서와 같이 예언의 말씀을 기록한 책들에는 항상 쓴 사람의 이름을 붙였다.
신약 성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요한이 자기의 첫 편지서에서는 자기의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러나 예언의 말씀을 대해서는 그와 반대로 이름을 붙였다. 이것은 예언의 말씀의 진실성을 책임지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자기의 이름뿐만 아니라, 자기의 소임까지도 밝혀 주었다. 그는 멀리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한 사람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즉 자기가 본 것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증거 하였다. 그는 목격자였으며, 자기가 본 것을 하나도 숨기지 않았다. 이 계시록에 기록된 말씀은 요한 자신이 발견한 것도, 꾸며서 하는 말도 아니며, 더하거나 뺀 것이 없이, 듣고 본 그대로의 하나님의 기록이며,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이다.
●사도 요한의 축복 (요한 계시록 1:3-8)
여기서 우리는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존중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도 요한의 축복의 말씀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축복은 보다 널리 그리고 보다 특별히 주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Ⅰ. 예언의 말씀을 읽거나 듣는 모든 사람들을 널리 축복하였다. 이러한 축복은 우리들로 하여금 계시록의 말씀을 연구하도록 격려하여 주며, 그 말씀 안에 있는 많은 분명치 못한 것들 때문에, 그 말씀을 상고하는데 싫증감을 느끼지 않도록 만들어 주고자 하시는 의도가 있는 것 같다. 사도 요한은 보다 세심한 주의력과 열의를 가지고 읽는 자들의 수고에 대해 보답을 하고 있다.
1. 하나님의 말씀을 즐겁게 읽는다는 것은 축복받은 특권이다. 이것은 다른 이방인들은 누릴 수 없었고, 다만 유대인들만이 가질 수 있었던 중요한 이점들 중의 하나였다.
2. 성서의 말씀을 연구하는 것은 복된 일이며, 또한 그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에 잘 응한 사람들이다.
3. 성서의 말씀을 우리 자신이 직접 읽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읽는 것을 듣는 것조차도 커다란 특권이다. 그들은 그들이 읽는 말씀의 의미를 우리에게 설명해 주고, 우리들에게 그 말씀을 이해시킬 수 있는 자백을 부여받은 사람들이다.
4. 성서의 말씀을 읽고 듣는 것으로만으로는 그리 흡족한 축복이 되지 못한다. 거기 기록된 말씀을 지켜 나가는 생활을 하여야만 한다. 그 말씀들을 늘 염두에 두고, 마음에 깊이 새기는 생활을 하는 것이 실로 축복을 가져다준다.
5. 성서의 말씀이 뜻하는 바를 알고, 그 말씀에 가일층 가까이 접근하면 할수록 우리는 더 커다란 관심을 쏟게 된다. 때가 가까이 임했으므로 우리는 그날이 오는 것을 더 세심하게 주시하여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은 그의 축복을 특별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전했다(4절). 일곱 교회들의 이름은 11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 교회들에 보내는 뚜렷한 메시지는 각각 2장과 3장에 기록되어 있다. 사도 요한의 축복이 특별히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게 전해진 것은 그 일곱 교회들이 모두 밧모라는 섬과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또 사도 요한은 그 교회들에 대한 대해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감독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사도들이 살아 있을 때,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 이들 교회에 있는 모든 충실한 사도들에게 주는 축복의 내용이 어떤 것인지 살펴보자. 그것은 "은혜와 평강," 거룩함과 위로의 축복이었다. "은혜"라 함은 우리에게로 향한 하나님의 친절이며, 우리 마음속에서의 하나님의 선하신 역사이다. 그리고 "평강"이라 함은 이러한 은혜에 대한 확신을 말함이다. 진정한 은혜가 없는 곳에 진정한 평강이 있을 수 없다. 그리고 은혜가 앞서 가는 곳에 평강이 뒤따른다.
2. 이런 축복이 언제 우리에게 오는가 하는 것을 살펴보자. 누구의 이름으로 사도 요한은 교회를 축복하는가? 그는 삼위일체이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고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행위이며, 하나님만이 존경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만 그의 백성들을 축복하여야만 한다.
(1) 하나님 아버지의 이름이 맨 처음으로 일컬어졌다. 그것은 곧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이시며, 삼위일체의 제일 인격이시며,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심을 나타낸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여호와로 묘사되었다. 그것은 전에 있었던 구약 성서의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오늘의 신약 성서 시대의 교회에서도 그렇고, 또한 앞으로 올 승리하는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영원히 변함없으신 분이심을 나타낸다.
(2) 성령은 "일곱 영"이라고 일컬어졌다. 그것은 숫자나, 본질적인 면에 있어서 일곱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다양한 재능을 가지고 계시는 무한하시며, 완전하신 영을 의미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성령은 하나님의 보좌 앞에 서 계신다. 이는 그의 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가 만드신 모든 것을 관리하시기 때문이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성령 다음에 그리스도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 까닭은 요한이 그리스도의 품격에 대하여 보다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그를 육체로 나시게 하셨다. 그래서 전에는 그가 땅에 살으셨고 일을 볼 수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다시 그를 볼 수가 있다.
여기서 우리는 이 그리스도께 대한 요한의 특별한 기록을 살펴보자(5절).
[1] 그리스도는 "충성된 증인"이시다. 그는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모든 뜻을 나타내 주시는 증인이었다(요 1:18). 그리스도는 아들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알맞은 때에 우리에게 나타내 주시는 증인이시었다. 우리는 그의 증언을 안심하고 믿을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충실한 증인이시며, 속지도 않으시고, 우리를 속이지도 않으시기 때문이다.
[2]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부활하신 분이시며, 부활의 처음 열매가 되신 분이시다. 또한 그는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을 부활시킨 유일하신 분이시며, 같은 능력으로 그의 백성들을 무덤에서 이끌어 내어 영원한 영광으로 이끌어 주실 분이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그의 백성들에게 생명의 소망을 품을 수 있게 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3] 그리스도는 이 땅의 모든 왕들의 지배자이시다. 땅의 왕들은 그리스도부터 그들의 권위를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의 권세가 제한을 받으며, 그들의 분노가 제재를 받는다. 그리스도에 의해 그들의 생각이 다스림을 받으며, 그들은 그리스도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 이것은 교회에 대해 기쁜 소식이다. 그리고 이것은 만왕의 왕이 되시며 만주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증명해 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4] 그리스도는 교회와 백성들의 좋은 친구이시다. 그는 그들을 위해 위대한 일을 하셨으며, 이는 순전히 사랑의 발로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영원한 사랑을 추구하기 위해 그들을 사랑했으며, 그는 먼저 "그의 피로써 그들을 죄에서 해방시키셨다. " 죄는 영혼에 대해 죄의 오점과 타락의 오점을 남긴다. 그리스도의 보혈이 아니고서는 그 어느 것으로도 이 영혼의 오점을 지울 수가 없다. 그의 피가 아니고서는 이를 씻어낼 수가 없다. 그리스도는 이처럼 그들을 위해, 그들의 용서와 순결을 위해 기꺼이 피를 흘려주셨다.
다음으로 그리스도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해 그들을 왕과 제사장으로 삼아"주셨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의롭게 여기시고, 정결케 하심으로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의 왕들로 삼으셨다. 말하자면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허락을 받고 그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왕들로서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며, 죄를 극복하고, 자기들의 영을 다스리며, 사탄을 정복하고, 또한 기도 중에 능력을 얻는다. 그리고는 세상을 심판하게 된다. 그리스도는 그들이 하나님께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을 제사장으로 삼아 주셨다. 이러한 모든 것에 합당하도록 제사장들에게 필요한 자격을 부여하셨다. 따라서 그들은 영원 무궁하도록 능력과 영광을 주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5] 그는 세상의 심판자가 되실 것이다.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리로다"(7절). 요한 계시록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하신다고 하는 예언으로부터 시작해서, 그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해 자주 묵상하도록 해야 한다. 또한 믿음과 소망의 눈으로 이를 지켜보아야 한다. 요한은 마치 재림의 날을 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다. "볼지어다. 그가 오시리라. 그것은 너희의 눈으로 보는 것같이 확실한 것이다. 그는 공공연히 오실 것이다.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이다. "그의 백성들의 눈이 보며, 그의 대적들의 눈, 너희의 눈과 나의 눈, 모든 눈들이 볼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를 찌르고도 회개하지 않고, 그에게 상처를 입히고, 그를 배반함으로 다시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게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포를 주며, 또 믿음이 없는 이 세상에 놀라움을 주기 위해서 오신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복음에 순종치 않은 사람은 물론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도 복수를 하시기 위해 오신다.
[6] 이러한 그리스도께 대한 설명을 그리스도 자신이 확증하여 주셨다(8절). 우리 주 예수는 여기서 아버지 하나님께 돌려드리는 같은 영광과 능력을 가지신 분으로 묘사되었다(4절). 그는 처음이며 마지막이시다. 모든 것은 그에게서 비롯되었으며, 그를 위해 있다. 또한 그는 전능하신 분이시다. 그리스도의 이름을 감히 지우려고 하는 사람은 생명록에서 그 자신의 이름이 도말함을 받는다. 그리스도를 존중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로부터 존중히 여김을 받을 것이며, 그리스도를 멸시하는 자들은 그의 멸시를 받을 것이다.
●요한에게 보여 준 그리스도의 환상 (요한 계시록 1:9-20)
여기서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요한에게 계시를 보여 주실 때의 영광스러운 환상을 볼 수 있다.
Ⅰ. 이런 환상을 본 사람에 대한 설명이 나와 있다. 여기서 요한은 환상을 본 자기 자신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1. 요한의 현재의 위치와 상태를 보자. 그는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다. 또한 요한은 그 당시 다른 독실한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그리스도를 위해 핍박당하고, 추방당하고, 또는 옥에 투옥된 사람이었다. 요한이 사도이기는 하였으나, 그들의 "형제"였다. 요한은 교회에 있어서의 자기 자신의 권위보다는, 오히려 교회에 대하여 형제라고 하는 관계를 더 자랑하는 것같이 보인다. 가룟 유다는 사도가 될 수는 있었는지 몰라도,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는 한 형제가 될 수 없었다.
요한은 그들의 동참자였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영적인 교섭과 교제를 선택하여야만 한다. 그는 환난의 동참자였다. 박해를 받는 하나님의 종들은 어느 누구도 혼자서 환난과 핍박을 받는 것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도 이런 환난을 함께 받고 있다. 그는 참음의 동참자였다. 요한은 주님으로부터 은혜를 입거나 혹은 고난을 당하거나, 서로가 위로하여, 고통과 기쁨을 같이 나누어 가졌다. 성도들과 같이 그런 비상한 인내를 우리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당당히, 떳떳하게 그와 같은 시련에 맞설 수 있다.
그는 "형제요,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였다. 요한은 주로 말미암아 교회와 세상을 지배하는 그리스도의 왕다운 능력을 주장하고, 또 계시의 말씀에 대하여 침해하려고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반대하고, 계시록의 말씀을 지지하고, 신봉함으로써, 예수의 환난과 참음에 동참하려고 고난받는 사람이 되었다.
이러한 설명으로 요한은 자기의 현재의 위치를 시인했으며, 그들의 공동 소유인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바에 따라, 보다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것을 그들에게 당부하였다.
2. 요한이 환상을 본 그 장소에 대한 설명이 있다. 그는 "밧모섬"에 있었다. 그는 누가 자기를 그런 곳으로 추방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들은 자기들이 겪는 고난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말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밧모섬은 에게해에 있는 섬으로 알려져 있다. 그 섬은 시클라데스(Cyclades)라고 하는 군도 중의 한 섬이었으며, 둘레가 약 35마일 가량 되는 섬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감금된 상태하에서도, 악을 행한 자로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 임마누엘이시며, 구세주가 되시는 그리스도를 증거하다가 고난당한다는 사실에서 사도 요한은 크게 위안을 받고 있었다. 그것은 받을 만한 고난이었다. 영광의 영광 하나님의 영은 이러한 핍박받는 사도의 머리 위에 머물러 계셨다.
3. 그가 이런 환상을 본 날과 때에 관한 기록이 있다. 그것은 "주의 날"이었다. 이날은 그리스도께서 성찬식을 "주님의 만찬"이라고 하듯이, 그 자신을 위해 구분하고 성별해 놓으신 주님의 날이었다. 이날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억하고 지키는 한 주간의 첫날이다. 그를 우리의 주님이시라고 하는 우리 무리들은 그의 안식일에 그를 경배해야 한다. 주님께서 그날을 제정하셨다. 그 안에서 우리는 기뻐해야 한다.
4. 이 때에 요한의 영은 어떠한 상태에 있었던가를 볼 수 있다. 그때 요한의 영은 "성령 안에 거하고 있었다. " 요한은 환상을 보았을 때만이 아니라, 환상을 보기 전에도 놀랬다. 그는 하나님의 영의 성스러우시며 인자하신 영향을 받아서, 성스럽고도 귀중한 영적인 상태 아래 있었다. 하나님은 자기의 사랑하는 백성들의 영혼이 자기의 고귀한 계시를 알도록 해 주시기 위해 성령의 감화를 내려 주신다. 그러므로 주의 날에 하나님과 영적인 교제를 즐기려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각이 육적인 것에서부터 멀리 하도록 노력해야 하며, 영적인 것과 교제가 잘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Ⅱ. 사도 요한이 성령 안에서 들은 것을 설명하고 있다. 나팔 소리 같은 큰 소리가 있었다. 그때에 요한은 자기 스스로에 대해 "처음이요, 나중"이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들었다. 그리고 사도 요한에게 지금부터 계시하는 것을 기록하라고 명하시고, 즉시 이 말씀을 이미 언급한 바가 있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로 보내라고 명령하시는 말씀을 들었다. 이처럼 구원의 으뜸이 되시는 우리 주 예수는 나팔 소리와 같은 음성으로 영광된 그의 모습을 주시하라고 사도 요한에게 말씀하셨다.
Ⅲ. 그가 본 것에 대해 설명한 것이 또 있다. 누구의 소리인지, 또 어디서부터 들려 오는 소리인지, "그 소리를 듣기 위해 그가 몸을 돌이켰을 때"에 매우 놀라운 광경이 그의 앞에 전개되었다.
1. 요한은 1장 마지막 절에서 설명된 바와 같은 "일곱 금촛대"를 보았는데 그것은 곧 교회를 표상하는 것이었다. 교회가 촛대로 비유되었다. 왜냐하면 교회는 복음의 빛을 발하기 때문이다. 교회는 초가 아니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빛이며, 그의 복음이 우리의 등불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으로 빛을 받아들이고, 다른 사람들에게 비추어 준다. 교회는 금촛대이다. 왜냐하면 순금에 필적할 수 있으리만큼 교회가 귀중하며, 순전해야 하기 때문이다. 목사들만이 아니라, 교회의 성도들도 그래야 한다. 그 빛은 다른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사람들 앞에 밝은 빛을 비추어야 한다.
2. 요한은 금촛대 사이를 거니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 세상 날 때까지, 교회를 빛과 생명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 주시면서, 그의 교회와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는 교회의 활력을 불어넣어 주시는 영이시다.
(1) 여기서 우리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나신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찾아 볼 수 있다.
[1] 그는 "발에 끌리는 옷을 입고" 계셨다. 그것은 정의와 명예를 나타내는 제사장과 왕의 옷이다.
[2] 그는 "가슴에 금띠를 띠고" 계셨다. 그것은 그의 백성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는 대제사장의 흉배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구속자로서의 모든 일을 하실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것을 뜻한다.
[3]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았다." 그는 고대의 사람이었다. 그의 서리같이 하얀 머리털은 후패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영광의 면류관을 뜻하는 것이었다.
[4] "그의 눈은 불꽃같았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속을 찌르며, 그들의 가슴속까지 파고드는 듯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대적들에게는 공포심을 가지게 하는 눈이다.
[5] "그의 발은 풀무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았다." 그것은 튼튼하고, 견고하며, 자신의 유익을 유지하며, 자기의 대적들을 굴복시켜 가루처럼 만드는 것을 뜻한다.
[6] "그의 음성은 많은 물소리와 같았다." 그것은 찬 곳으로 흘러나오는 많은 냇물을 말한다. 그리하여 가까이 있는 자나 멀리 있는 자나 할 것 없이 모두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하신다. 이처럼 그의 복음의 말씀은 무한한 지혜와 지식의 원천에서 흘러나오는 거대한 물줄기와 같다.
[7] 그의 "오른손에 일곱 별이 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지시를 따르고 있는 일곱 교회의 목사들이었다. 그들은 주님으로부터 그들의 빛과 권세를 받았으며, 주님의 보호를 받아 지탱해 나가고 있다.
[8] "그 입에서 좌우에 검이 나오고"있다. 그리스도의 검은 좌우편에 날이 서서, 한 편 상처를 입히며, 동시에 치료를 하고 죄는 좌우로 쳐서 멸망시키고 있음을 뜻한다.
[9]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취는 것 같았다."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눈으로 보기에는, 그의 얼굴에서 비취는 광채의 밝기가 너무나 세고 찬란한 것이었다.
(2) 그리스도의 모습은 사도 요한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17절). 그는 "그 발 앞에 엎드러져 죽은 자같이" 되었다. 요한 자신이 비록 전부터 다소 주님과 친숙했다고는 하나, 그리스도의 모습이 나타내는 영광과 광채가 너무나 찬란하매, 그가 압도당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오늘날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우리와 같은 인간들을 통해서 말씀하시는데 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그 사람들을 볼 때 우리는 두려움을 가지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하나님의 얼굴을 직접 뵌다면 살아남을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3)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베풀어주신 정중한 친절이 있다. "그가 오른손을 그에게 얹으셨다"(17절). 주께서 요한을 일으켜 주셨다. 주님은 크신 능력을 가지고 요한을 꾸짖지 않으셨다. 오히려 요한에게 힘을 북돋아 주셨으며, 그에게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1] 우선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주셨다. "두려워 말라." 그는 그의 제자가 노예처럼 두려워하는 것을 쫓아 버려 주셨다.
[2] 요한에게 나타나신 이가 요한에게 첫 번째는 그의 신성에 대해 "처음이요 나중"임을 알려 주셨다. 두 번째로는 "내가 전에 죽었노라"고 하심으로 그가 앞서 당한 고난에 대해 말씀해 주셨다. 그것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것을 그의 제자들이 본 것과 같다. 세 번째로는 그의 부활과 생명에 대해 "나는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다"고 하심으로, 그가 죽음을 정복하시고 무덤 문을 여셨으며, 영원한 생명의 동참자가 되셨음을 알려 주셨다. 네 번째로는, 그의 직무와 권위에 대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노라"고 하셨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통치권을 의미한다. 그것은 닫으면 열 자가 없고, 열면 닫을 자가 없는 열쇠이다. 그가 원하시는 대로, 그는 사망의 문을 여실 수도 있고, 행복과 자비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여실 수도 있다. 그는 만민의 심판자이시며, 그의 선교에 대해서는 아무도 항고할 수가 없다. 다섯 번째로, 그가 원하시고 계신 뜻을 알려주기 위해,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고 하셨다. 여섯 번째로는, 일곱 별의 의미에 대해 "그것들은 일곱 교회의 사자들"이라고 말씀하셨고, 일곱 촛대에 대해서는 "그것들은 일곱 교회"이라고 말씀하셨다. 이제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을 통해 그들에게 특별한 소식을 전하고자 하신다
계시록 제 2
●에베소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1-7)
Ⅰ. 이 편지의 수신자에 대해 알아보자.
1. 첫 번째의 편지는 에베소 교회에 보냈다. 에베소 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지고(행 19장), 나중에는 요한이 오랫동안 상주하면서 다스린 유명한 교회이다. 디모데가 그 당시의 이 교회의 담임 목사거나 감독이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매우 우수한 인물이었으며, 백성들의 영혼을 훌륭하게 보살폈던 디모데가 이 에베소 교회의 목회자들에게 퍼부었던 그런 비난을 받아 마땅한, 태만한 사람이 되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2. 이 편지의 발신자에 대해 알아보자. 여기서 우리는 제 1장에서 사도 요한에게 나타나셨던 그리스도에 대한 여러 칭호들 중의 하나를 볼 수 있다. 그는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있고, 일곱 금촛대 사이를 걸어다니시는" 분이시다(계 1:13, 16).
이 칭호는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지고 있다.
(1) 그는 "오른손에 별을 쥐고 계시는 이"이시다.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주님의 각별한 염려와 보호를 받고 있다. 별들의 수를 아시며, 별들을 각각 그 이름대로 부르시며, "묘성을 매어 떨기 되게 하시며, 삼성의 띠를 푸시는 것은"(욥 38:31) 하나님의 영광이시다. 그리고 별들이 세상에 대해 주는 축복보다도 더 큰 축복을 교회에 주고 있는 목사들이 주님의 손안에 있다고 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시다. 주께서는 그들의 모든 행동을 지시하시며, 그들로 하여금 각자의 궤도를 따라서 돌게 하신다. 주님은 또 빛과 능력으로 그들을 채워 주시며, 그들을 돌봐 주신다. 그렇지 없으면 그들은 떨어지는 별의 신세가 된다. 그들은 주님의 손안에 들어 있는 도구이며, 그들이 행하는 모든 선은 그들을 쥐고 계시는 주님의 손을 향해서 이루어진다.
(2) "그는 금촛대의 사이를 거니신다." 다른 하나의 것이 목회자들과 주님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과 같이, 이것은 교회와 주님의 관계를 말해 준다. 그리스도께서는 친밀하신 방법으로 임재하시며, 그의 교회들에 대해 소상하게 알고 계신다. 주께서는 그들의 실정을 잘 아시며 또 언제나 주목하고 계신다. 사람들이 주님의 정원을 거닐 때 기쁨을 맛보는 것과 같이 주님은 교회들 사이를 거니시면서 즐거움을 느끼신다. 그리스도께서는 비록 하늘에 계시면서도 땅에 있는 교회들의 잘못이 무엇이며, 그들이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주시하시면서, 그것들 사이를 거닐고 계신다. 이러한 사실은 교회를 보살피는 사람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된다. 주 예수께서는 그의 손바닥 위에 그 교회들의 이름들을 새겨놓고 계신다.
Ⅱ.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으며, 다음에 나오는 교회들에게 보내는 것도 대개 비슷하다.
1. 그리스도께서 이 에베소 교회와 목사들, 그리고 신도들에게 하신 칭찬의 말씀이 있다. 주께서는 그들의 행위를 알고 계신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하시는 칭찬과 비난은 엄숙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왜냐하면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은 생각 없이 나오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은 그가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잘 알고 계신다. 주님께서는 아래와 같은 이유 때문에 에베소 교회에 대해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1) 그들이 책임을 수행하는데 있어서 게을리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네 행위와 수고를 아노라"(2절). 이는 많은 수고를 하며 매우 부지런하였던 이 교회의 목사들과 관계가 있는 말씀이다. 권위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그리스도의 손안에 있는 별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빛을 나누어주기 위해 항상 활동할 필요가 있다. "네가 참고 내 이름을 위하여 견디고 게으르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3절). 그리스도께서는 이와 같이 시시각각으로 일어나는 모든 일들과 그를 위해 일하는 종들의 수고를 알고 계신다. 따라서 "그들의 수고가 주안에서 헛되지 않는다."
(2) 고난 속에서의 그들의 인내 때문에 에베소 교회는 칭찬을 받았다. "너 수고와 네 인내를 … 아노라"(2절). 우리들이 부지런하다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리스도의 선한 군사로서 우리는 고난을 참고 견디어야 하며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한다. 목사들은 많이 참아야 하며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또한 그러한 인내가 없이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사람들의 모욕과 하나님의 책망을 견디기 위해서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어떤 시련이 있을 때에는 "네가 참고 견디었노라"(3절)는 약속의 말씀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인내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이 세상을 살아가는 중에 그러한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이며, 인내가 요청되는 일을 부지런히 하여 유종의 미를 거두어야 한다.
(3) 에베소 교회의 신자들이 악한 자들과 맞서서, 그들의 거짓을 드러낸 열심을 칭찬하셨다. "악한 자들을 용납지 아니한 것을 아노라"(2절). 이 말씀은 죄를 가볍게 보지 않으며, 더욱이 죄를 용납지 않는 그리스도인의 끈기와 잘 일치하는 말씀이다. 비록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온유함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그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서는 그들을 꾸짖는 정당한 열의를 나타내 보여주어야 한다. 이러한 그들의 열의 때문에 보다 많은 칭찬을 듣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는 허위와 음모, 악인들의 교리에 대한 신자들의 시련 즉 "자칭 사도라 하되, 아닌 자들을 시험하여 그 거짓된 것을 네가 드러낸 것"이란 그리스도인의 분별력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열심이란 신중성에서 비롯된다. 그 어느 누구도 시험받기 전에는 버림을 받아서는 안 된다. 어떤 이는 자기가 보통의 목사가 아니라, 사도라고 주장하면서 이 에베소 교회에서 행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허위를 면밀히 검토해 본 결과, 그것이 거짓이라는 것이 드러나게 되었다.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사실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드디어 그 진실을 알게 된다.
2. 이 교회에 대해 책망의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4절), 좋은 점을 많이 가진 자는 또한 그 만큼 잘못된 점도 많이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공정하신 주님이시며 심판자이신 우리 주 예수께서는 이 두 가지를 다 주시하고 계신다. 비록 주님께서 먼저 좋은 것을 보시고, 이에 대하여 언급하실 준비가 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또한 잘못된 점들을 주시하고, 그것들 때문에 그들을 엄하게 책망하시기도 한다. 주님께서 이 교회에 대해 책망하신 그들의 죄는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의 사랑과 열심히 부패하고 타락한 것이었다. 이는 그들이 사랑과 열심 그 자체에서 떠나거나, 그것들을 버렸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이 처음에 나타내었던 사랑의 강렬한 정도를 잃었다는 것, 즉 열의가 전보다 식어졌다고 하는 것을 말한다.
(1) 사람들이 그리스도, 거룩한 것, 그리고 하늘나라에 대해 품었던 첫사랑은 대개 활기가 넘치며 뜨거운 것이다. 하나님은 남편이 어디로 가든지 그를 따르고자 했던 이스라엘의 신부들의 사랑을 기억하셨다.
(2) 이러한 활기에 넘친 사랑이 부단히 계속되게 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생동적인 사랑이라도 쉽사리 약해지며 냉냉해진다.
(3)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나태해지며, 자기에게 대하여 냉정해지는 것을 볼 때, 그의 백성들에 대해 애통해 하시며, 서글프게 생각하신다. 그리고 주께서는 어떻게 해서든지, 주님이 그들을 좋게 여기고 있지 않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 주고자 하신다.
3.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충고의 말씀을 내려 주셨다.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라."
(1) 그들의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어디서 그것이 떨어져 나갔는지 생각해 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들이 그들의 현재의 실정과 과거의 실정을 비교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때가 지금 보다 얼마나 더 좋았었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또 그들이 그들의 처음 사랑을 떠남으로 얼마나 많은 평강과 능력과 순결과 즐거움을 잃었는가 하는 것도 생각해 보아야 한다. 그들이 밤에 누워서 얼마나 아늑하게 잠을 잘 수 있었으며- 그들이 아침에 얼마나 상쾌하게 깨어날 수 있었으며- 어떻게 굴욕을 견딜 수 있었고, 어떻게 그들이 하나님의 섭리를 합당하게 즐길 수 있었으며- 죽음에 대한 그들의 생각이 얼마나 수월한 것이었으며, 하늘나라에 대한 그들의 욕망과 소망이 얼마나 강력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생각해 내야 한다.
(2) 그들은 회개해야 한다. 그들은 마음속으로부터 그들의 죄많은 타락을 애통해야 하며, 이를 부끄러워해야 한다. 그들은 자기 자신들을 책망해야 하며,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하고, 그것 때문에,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서 모든 것을 자백하여야 한다. 그리고 자신들 스스로를 판단하고 책망해야 한다.
(3) 그들은 돌아와서 처음 행위를 다시 찾아서 행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새롭게 다시 시작해야 하며, 그들이 맨 처음 발을 헛디뎠던 곳까지 한 발자국 또 한 발자국 되돌아가야 한다. 그들은 맨 처음에 가졌던 열심과 양순함과 성실함을 회복시키며 그것들을 되찾도록 노력해야 한다. 또한 그들이 하나님의 길에 들어서서, 그들이 맨 처음에 드리던 것과 같이 진정으로 기도하며, 성실히 그 결과를 기다려야 한다.
4. 주께서는 이런 좋은 충고의 말씀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하셨고, 재촉하셨다.
(1) 주님의 말씀을 중요시하지 않는다면, "내가 네게 임하여 네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고 하신 혹독한 위협의 말씀으로 그들에게 강요하고 재촉하셨다. 만일에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와 성령의 존재를 무시한다면, 주께서는 우리를 매우 분히 여기시리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되면 주님은 회개하지 않은 교회와 죄인들을 심판하시기 위해 갑자기 그리고 놀라웁게 임하시사 교회의 특권 등을 박탈할 것이며, 그들로부터 복음의 말씀과 목사들과 예배 의식을 거두어 가실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복음의 말씀을 거두어 가신다면, 교회와 교회의 사자들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2) "오직 네게 이것이 있으니 네가 니골라당의 행위를 미워하는 도다. 나도 이것을 미워하노라"(6절)라고 하신 말씀과 같이 그들 중에는 그래도 아직 선한 사람이 있다고 하는 격려의 말씀을 들려 주셨다. 이 말은 곧 "비록 너희들이 사랑에 있어서는 선하다고 할 수 없지만, 악을 증오하는데 있어서는 잘하였다"는 말이다. 니골라당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빙자하여 자기 자신들을 위하는 불실한 종파였다. 그들은 가증스러운 교리를 가지고 있었으며, 악의에 가득 찬 죄를 짓고 있었고, 그리스도와 모든 독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하여는 증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였다. 사악한 교리와 음모에 대하여 바른 투기와 혐오심을 가지고 있었던 에베소 교회에 대한 칭찬을 주님은 잊지 않고 언급하셨다. 진실과 과오, 악과 선에 대해 무관심한 심령을 두고 사람들은 "자비로운 마음" 또는 "온후한 마음"이라고 일컬을는지 모르지만, 그러한 마음은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할 수 없다. 우리의 구속주가 되시는 주님은 자기의 충고의 말씀이 보다 효과를 거둘 수 있도록, 그처럼 가혹한 위협의 말씀에, 이상과 같은 온후하신 칭찬의 말씀을 덧붙여 주셨다.
Ⅲ. 에베소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씀이 계셨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1) 이 말씀은 곧 성서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하신 말씀이라는 뜻이다.
(2) 어느 한 교회에 하신 말씀은 곧 모든 시대, 모든 장소에 있는 모든 교회들과 관련이 있는 말씀이라는 뜻이다.
(3) 우리의 청력을 가장 유용하게 사용하는 길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청력은 잃어버려도 무관하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들은 그 어떤 소리도 들을 수 있는 청력을 가지지 못하기를 바라고 싶다.
2. 이기는 자에게 주시는 커다란 은혜의 말씀이 계셨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죄와 사탄, 세상 그리고 육에 대한 싸움이다. 우리는 다만 이러한 싸움을 싸우기만 하는 것으로는 만족스럽지 못하다. 우리는 끝까지 물고 늘어져야 한다. 우리는 영적인 적에게 굴복 당해서는 안 되며, 앞서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이미 승리를 얻은 것같이, 우리도 승리를 얻기까지, 선한 싸움을 싸워야 한다. 그리하여 싸워서 승리하는 자는 영광스러운 개선과 보상을 받게 된다. 여기서는 싸움에 승리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주어 먹게 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졌다. 그들은 아담이 그의 시련의 과정을 잘 극복하였다면 얻을 수 있었던 거룩함의 완성과 그 확실함을 받게 될 것이다. 잘만하였다면 아담은 낙원 한 가운데 있는 생명 나무의 과실을 먹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거룩하고 행복된 상태를 유지하리라는 보증을 확약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시련과 싸움에 이기는 자들은 이 지상의 낙원이 아니라, 하늘나라에 있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완전하고도 학실한 거룩함과 행복된 생명 나무와 같이 길이 보호함을 받을 것이다(계 22:1, 2).
●서머나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8-11)
우리는 아시아에 있는 다른 교회에 보낸 두 번째 편지를 계속해서 살펴보게 되었다.
Ⅰ. 서론이라고 할까 또는 제목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두 곳에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 누구에게 이 편지가 직접 전달될 것인가 하는 것을 보여 주는 서두가 있다. 그것은 "서머나 교회의 사자에게" 가는 것이었다. 서머나는 오늘날까지도 우리의 상인들에 의해서, 큰 무역의 중심지요, 부요의 도시였던 것으로 유명한 도시였으며, 아마 일곱 도시 중에서, 유일하게 오늘날까지도 같은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도시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회교에 의해 정복되었기 때문에 그 교회의 존재는 조금도 돋보이지 못하게 되었다.
2. 여기에는 우리 주님의 또다른 영광스러운 칭호를 보여 주고 있는 설명이 있다. 그것은 "처음이요 나중이요 죽었다가 살아나신 이"라는 것인데 이 칭호는 1장 17,18절에서 온 것이다.
(1)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이 세상에서의 우리 인간들에게는 아주 극소한 분량의 시간만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주 되시는 그리스도는 처음이요 나중이시다. 그는 처음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그로 말미암아 지음 받았고, 그리고 그는 만물보다도 먼저 하나님과 계셨는데 이는 곧 그 자신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는 나중이시다. 왜냐하면 만물은 그를 위하여 지음 받았고, 그는 만물을 심판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로, 영원히, 하나님께 돌려야 할 칭호이시다. 그리고 그것은 변함없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가 되시는 분에게 돌릴 칭호이시기도 하다. "예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변함이 없으시다. " 그는 처음이시었다. 왜냐하면 교회가 처음에 그에 의해서 기초가 놓여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나중이시다. 왜냐하면 시간이 종말을 고할 때, 그에 의해서 그 마지막 마무리가 맺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2) 그는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시다. 그는 죽었었는데, 우리의 죄 때문에 죽었던 것이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는 죽으셨다. 그리고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이 성취되었다. 그는 살아나셨다. 그리고 그가 다시 사심으로 이러한 구원이 우리의 구원이 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다"(롬 5:10). 우리는 성찬을 받을 때마다 그의 죽으심을 기억하며, 매 주일마다 그의 부활과 생명을 기억한다.
Ⅱ. 그리스도께서 모든 인간들과 특히 그의 교회들이 행한 바에 대해 완전히 아신다고 하는 그의 전지(全知)하심에 대한 일반적인 선언과 함께 서머나 교회에 보내는 이 편지의 핵심 즉 다음과 같은 점들에 대해 그가 주목하고 계신다는 것을 밝혀 주셨다.
1. 그들이 이룩한 영적인 성장에 대해 아노라고 하셨다. 이러한 말씀은 짧은 삽입구 모양으로 표현되었지만, 그러나 매우 힘이 있는 표현이기도 하다. "실상은 네가 부요한 자니라"(3절). 물질 면에서는 가난하지만 영적으로는 부요한 자이며--마음은 가난하나 은혜는 부요한 자이다. 그들의 영적인 부요는 그들의 외적인 빈곡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물질에 있어서 부요한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영적으로는 가난하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런 교회였다. 때로는 외적으로 빈곤한 사람들이 내적으로는 부요하며, 믿음과 선한 행위에 있어서 부요하며, 그 특권과, 은혜의 선물, 소망 그리고 상속할 재산이 부요한 경우가 많다. 영적인 부요는 흔히 부지런히 수고한 보상으로 얻어진다고 "부지런한 손이 부요를 이룩한다. "영적인 부요가 있는 곳에서는 외적인 빈곤을 잘 감내할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와 그리고 선한 양식 때문에 물질상의 어려움을 겪게 되면 그들은 영적으로 부요한 자들이 되며, 그러한 영적인 부요가 오히려 그들에게 더욱 만족스러운 것이며, 또 오래 지속되는 것이기도 하다.
2. 그들이 당하고 있는 환난을 아신다고 하셨다. "내가 네 환난과 궁핍을 아노니," 그들은 재산을 몰수당하기까지의 핍박을 당하고 있다.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들의 모든 환난을 특히 주목하고 계신다. 그들이 당하는 모든 고난중에 그리스도께서도 고난 당하신다. 그리하여 그들을 괴롭히는 자들에게 그러한 고난을 갚아 주시며, 고난을 당한 자들에게는 그의 품안에서 쉿 수 있는 안식을 주실 것이다.
3. 그는 그들의 대적들의 악독함과 거짓됨도 아시고 계신다. "자칭 유대인이라 하는 자들의 훼방도 아노니 실상은 유대인이 아니라."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이미 버렸는데도 여전히 그들은 하나님과 특별한 계약 관계를 맺고 있는 백성이라고 자랑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스스로를 잘못 자랑하고 있는 사람들을 말한다. 또는 지금은 낡아버렸을 뿐만 아니라, 폐기된 그러한 유대인의 관습과 의식을 그대로 고집 하려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러한 사람들은 그들이 실상은 "사단의 회"인데도, 그들은 이 세상에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교회라고 주장할 것이다.
(1)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영적인 이스라엘로서의 교회를 이 세상에 가지시고 계신 것같이, 사단 역시 그의 회를 이 세상에 두고 있다. 세워진 복음의 진리에 거슬리기 위해 세워진 회합, 그리고 가증스러운 잘못을 조장 또는 선동하는 모임--복음적인 예배의 순수성과 신령함을 모독하기 위해 세워진 회합, 그리고 하나님의 뜻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간의 날조된 관습과 의식을 조장 또는 선동하는 모임--하나님께 때한 참다운 예배와 예배자들을 모욕하고 핍박하기 위해서 세워진 모임 등, --이런 모든 회합과 모임이 곧 사단의 회이다. 사단이 그 모임을 주장하며, 그 모임을 통해 사단이 일하고, 그들을 통해 사단은 자기 만족을 누리고 있고, 사단은 그들로부터 무시무시한 공경과 영광을 받고 있다.
(2) 사단의 회가 스스로를 하나님의 교회 또는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라고 일컫는 것은 신성 모독이다. 사단의 이익을 증진시키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이 사용되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크게 더럽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러한 신성모독을 분히 여기시사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에게 빠른 보복을 내리실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당할 앞날의 시련을 미리 아시고, 이에 대해 미리 경고하심으로, 그들에게 미리 대비시키신다.
(1) 그리스도께서는 장래의 시련에 대해 미리 경고하신다.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라"(10절).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여러 고비의 시련이 계속 몰려 올 것이며, 그 고난의 도가 점점 더 높아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들은 전에 있었던 시련으로 이미 약해진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들은 옥에 갇혀야만 하게 되었다. 마귀는 그의 수하인 악인들을 충동하여 하나님의 사람들을 핍박하게 한다. 폭군과 핍박자들은, 그들 스스로는 자기들의 적개심을 만족시키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마귀의 도구 노릇을 하고 있으며, 사단의 악의에 의해 총동받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2) 그리스도께서는 이러한 임박한 환난에 대해 미리 대비시켜 주신다.
[1] 그는 이런 말씀으로 권면하신다. "네가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 말라." 이것은 단지 명령의 말씀뿐만이 아니라 힘을 북돋아 주는 말씀이기도 하며, 아마 노예적인 공포심을 금하게 하는 말씀일 뿐만 아니라, 그의 영혼으로 하여금 힘과 용기를 갖추도록 격려하여 주는 말씀이기도 하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그들이 당할 고난이 얼마나 한정된 것인가를 보여 주셨다.
첫째, 그것은 전체적인 것이 못된다고 하였다. 그들 가운데서 옥에 갇히는 자는 전부가 아니라 그 중의 일부라고 하셨고, 따라서 옥중에 갇힌 자들은 그 남은 사람들의 방문과 위로를 통해 힘을 얻음으로 능히 그 고난을 참아낼 수 있다고 하셨다.
둘째, 그들은 영원히 옥에 갇히는 것이 아니라, 한정된 시간, "열흘"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이라고 하셨다. 그것은 영원한 시련이 아니다. "택하신 자들을 인하여서 그 기한이 짧아질 것이다. "
셋째, 그 시련은 그들을 멸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믿음, 인내, 그리고 용기가 과연 영광을 받기에 합당한가 아닌가를 시험하기 위한 것임을 알려 주셨다.
[3] 그들이 충성하면 영광스러운 보답을 내려 주신다고 제안하시고 약속하셨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
첫째, 그 보상은 확실한 것이다. "내가 네게 주리라." 주께서는 그가 하실 수 있는 말씀들을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가 하시고자 하신 일은 반드시 그대로 실행하셨다. 그들은 주님이 직접 내리시는 보상을 받을 것이며, 그들의 원수는 아무도 그것을 주님의 손에서부터 빼앗을 수 없으며, 그들의 머리로부터도 빼앗아 갈 수 없다.
둘째, 그 보답이 매우 적절한 보답이란 것을 보여 주셨다.
a. 그들의 빈곤, 그들의 충성, 그리고 그들의 분투 노력에 대해서 "면류관"이 보답으로써 약속되었다.
b. 죽기까지 충성하는 자, 죽어도 충성을 버리지 않는 자, 그리고 그리스도께 충성을 다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버리는 자에게 "생명의 면류관"이 약속된 것은 매우 적절한 보답이다. 그를 섬기거나 또는 그를 위해 목숨을 다 바친 사람에게는 다른 세상에서 그보다 훨씬 더 좋고, 또 영원히 계속되는 귀한 생명을 상급으로 받게 된다.
Ⅲ. 먼저의 편지와 같이 여기에도 결론 부분이 나온다.
1. 온 인류와 온 세상은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들 사이에 주고받은 바를 귀 기울여 들으라고 하는 우주적인 부르심이 있다.--다시 말해서 주께서 그들에게 어떤 명령을 내리셨으며, 주께서 그들을 어떻게 위로하셨으며, 주께서 그들의 실수를 어떻게 책망하셨으며, 주께서 그들의 충성에 대해 어떤 상급을 내리시겠다고 말씀하셨는가를 들어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어떻게 다루시는가 하는 문제는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이 관심을 가져야 할 사항이다. 이로써 온 세상은 지식과 지혜를 배울 수 있을 것이다.
2. 승리하고 정복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시고자 하는 은혜로운 약속의 말씀이 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사망의 혀를 받지 아니하리라"(11절).
(1) 육체의 죽음이 있은 뒤에도 인간에게는 첫 번째 뿐만 아니라 두 번째의 사망도 있다.
(2) 둘째 사망은 첫째 사망보다 극도로 더 처참한 죽음이다. 죽어가는 자의 단말마의 부르짖음이 끊임없이 들려온다(그것은 아무런 도움을 받을 길이 없는 영혼의 처절한 절규이다). 그리고 그 기간도 "영원한 죽음"이다. 언제나 죽어가고 있는 것이며 끊임없이 죽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죽음을 당하는 자는 정말로 비참하다.
(3)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비참한 죽음으로부터 그의 모든 충성된 종들을 지켜 주신다.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둘째 사망이 아무런 맥을 추지 못한다. 첫째 사망이 그들을 해하지 못하며, 둘째 사망도 그들을 지배할 수 없다.
●버가모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12-17)
Ⅰ. 버가모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의 제목에 대해 살펴보자.
1. 이 편지의 수신인은 "버가모 교회의 사자"이다. 버가모는 "신 트로이(런던도 한때는 그렇게 일컬어졌던 것과 같이)라고 하며, 옛 트로이의 폐허 위에 재건된 도시였는지, 혹은 같은 이름의 다른 도시였는지 확실하지 않다. 버가모는 그리스도께서 일찍이 복음의 말씀을 전파하게 하시고 또 성령의 은혜를 부어 주시사 복음적인 교회를 세우게 하신 곳이다.
2. 버가모 교회에 이 편지를 보낸 사람은, 여기서 그 자신을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1:16), 그 입에서 좌우에 날선 검이 나오는 이"라고 하신 바로 같은 예수님이시다. 각각의 교회에 보내는 편지의 앞부분에서 일컬어진 그리스도의 여러 가지 칭호들은, 각각 그 교회의 상태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는 이들이 많이 있다. 에베소 교회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잠에 취해 타락해 가고 있는 교회를 일깨우고, 바른 길로 돌이키게 하기 위해서는 "손에 별들을 붙잡고, 금촛대 사이에 다니시는"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는 것 이상 더 좋은 방법이 있을 수 없다. 버가모 교회에는 타락한 심령을 가진 사람들이 판을 치고 있었다. 그들은 교회의 신앙과 풍습을 타락시키고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의 검으로 그들과 대항하시고자 하셨기 때문에, 그 자신의 칭호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라고 하셨다.
(1) 하나님의 말씀은 검이다. 그것은 공격과 방비를 겸할 수 있는 무기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질 때 죄와 죄인들을 모두 베어버릴 수 있다.
(2) 그것은 "날선 검"이다. 그 검으로는 아무리 굳은 마음도 찔러서 상처낼 수 있다. 아무리 단단하게 묶은 매듭이라도 짤라낼 수 있다. 그것은 혼과 영을 구분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영혼과 어떤 관습들로 인하여 다른 영혼처럼 되어버리거나 또는 매우 중요한 요소처럼 보이는, 그런 죄된 습성을 분리시킬 수 있다.
(3) 그것은 "좌우에 날선 검"이다. 그것은 상하 좌우 어느 쪽으로도 찌를 수 있다. 거기에는 율법을 어긴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율법의 "칼날"이 있으며, 복음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찌를 수 있는 복음의 "칼날"도 있다. 거기에는 찔러 상처를 낼 수 있는 칼날이 있고, 그리고 곪은 상처를 파헤쳐서 낫게 할 수 있는 칼날도 있다. 이 칼날에서 피할 수 있는 곳이란 없다. 오른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칼날이 있고, 왼쪽으로 피해도 거기에 역시 칼날이 기다리고 있다. 그 칼은 어느 방향으로도 찌를 수 있다.
Ⅱ. 제목 부분에서부터 편지서의 본론 부분으로 옮겨갈 수 있는데, 이러한 방법은 다른 나머지 모든 서신에서도 같다.
1. 그리스도께서는 이 교회가 당하고 있는 시련과 어려움에 대해 주목하고 계신다. "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라"(13절). 하나님의 종들의 수고와 노력은 그들이 어떤 환경에서 그런 수고를 했는가를 바르게 이해할 때 더 잘 알 수 있다. 이처럼 이 버가모 교회의 선한 활동에 대해 그 광채를 더욱 돋보이게 한 것은 이 교회가 세워진 고장의 그 환경 때문인데, 그 곳은 다름 아닌 "사단의 위"가 있는 곳이었다. 우리의 위대하신 주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의 우리가 얻는 모든 이점과 기회를 주시하고 계신 것과 같이, 우리가 살고 있는 고장에서 우리가 또 당하고 있는 모든 시련과 낙심의 조건들 역시 주시하시면서, 그것들을 크게 참작하여 주신다. 버가모의 교인들은 사단의 위가 있으며, 사단이 세력을 뻗치고 있는 곳에서 살았다. 사단의 "통치권"은 온 세상에 미치고 있었으며, 그의 "위"는 사악과 과오와 잔악함 때문에 악명이 높은 고장에 자리잡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 도시의 로마 집정관은 그리스도인들을 매우 적대시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하여 그의 핍박의 자리가 곧 사단의 자리였다.
2. 주께서는 그들의 견실함을 칭찬하셨다.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고,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다. " 이 두 가지의 표현은 같은 것을 의미한다. 전자는 아마 결과를 의미할 것이요, 그리고 후자는 원인 또는 그 방법을 말할 것이다.
(1) "너는 내 이름을 굳게 잡았다. 너는 나와의 관계를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오히려 내 이름으로 너희가 일컬어지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아내가 남편의 이름으로 일컬어지는 것같이 너희도 나의 이름으로 일컬어졌다. 이것을 너희는 너희의 영광과 특권으로 굳게 붙잡고 있다. "
(2) "너희를 이처럼 충실하게 한 것은 믿음의 은혜이다. 너희는 복음의 위대한 교리를 저버리지 아니하였으며, 기독교의 신앙에서도 떠나지 아니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해서 너희의 믿음을 굳게 지켰다. " 우리의 믿음이 우리의 충실한 신앙 생활에 영향을 끼친다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저버리는 사람도 그들의 성실함, 그리고 하나님과 양심에 대한 충실함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그들 나름대로의 충실한 신앙을 유지하려고 하는 이들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보통 사람들은 그들의 신앙을 파선시키는 암초 위에 그들의 선한 양심 역시 파선시킨다. 그런데 우리의 은혜로우신 주님은 그들이 살았던 장소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살았던 시대적인 환경에 대해서도 그들의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도록 교회의 충실성을 증진시켜 주신다. 그리하여 그들은 "주님의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그들 가운데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그들의 신앙을 충실히 지킬 수 있었다. 이 사람이 누구이며, 그의 이름에 어떤 애매한 점이 있는지 없는지 확실한 기록이 없다. 하여간 안디바는 그리스도의 충실한 제자였으며, 그것 때문에 순교를 당했고, 사단의 거하는 곳에서 그의 믿음과 충성을 그의 피로 보증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살았던 다른 나머지 신자들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며 그것을 보았지만, 그들 역시 그들의 용기를 읽거나 그들의 성실함을 저버리지 않고 있었다. 이러한 것이 그들의 명예에 대해 추가해서 언급된 치하이다.
3. 주께서는 그들의 잘못된 태만을 책망하셨다(14절). "그러나 네게 두어 가지 책망할 것이 있나니 거기 네게 발람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그리고 네게도 내가 미워하는 니골라당의 교훈을 지키는 자들이 있도다." 그들 가운데는 우상에게 받쳐졌던 제물을 먹는 것이 율법에 거슬리는 것이 아니며, 단순한 간음은 죄가 되지 않는다고 가르치는 자들이 더러 있었다. 그들은 발람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도덕한 예배를 통해 그들을 부도덕한 생활로 유인하는 자들이었다. 여기서 다음의 사실들을 살펴보자.
(1) 때로 영적인 불결과 육체적인 불결이 공존한다. 때로 타락한 교리와 타락된 예배는 타락된 교제로 사람들을 이끌고 간다고
(2) 이단사설을 따르는 무리들에게 그들의 지도자의 이름을 따서 붙이는 것은 매우 합당한 일이다.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가 어떤 사람들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손쉽게 나타낼 수 있기 때문이다. 타락된 교리와 행동을 가지고 있는 자들과 계속 사귐을 가지는 것은 하나님을 노하시게 하는 것이며, 온 세상을 죄로 물들게 하는 처사이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의 죄에 동참하는 자들이" 된다고 비록 교회가 그러한 이단 사설에 빠졌거나, 부도덕한 생활을 하고 사람들에 대해 육체적인 형벌을 내릴 권리가 없다고 할지라도, 그들은 그들의 교회의 사귐에서 추방할 권리는 가지고 있다. 그런데도 만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교회의 머리가 되시며, 법을 정해 주신 그리스도께서는 그것 때문에 노여워하실 것이다.
4. 주께서는 그들에게 회개하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회개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내가 네게 속히 임하여……"(16절). 여기서 다음과 같은 점들을 살펴보자.
(1) 회개란 죄인들과 마찬가지로 성도들의 의무이기도 하다. 다만 그것은 복된 의무이다.
(2) 회개는 또 개개인의 의무인 동시에 교회와 공동체의 의무이기도 하다. 함께 죄를 범한 자들은 함께 회개하여야 한다.
(3) 그리스도인의 모임은 죄를 범한 사람들이 어떤 묵인 아래 그들과의 관계를 지속하는 한 그러한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회개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
(4) 하나님께서 어떤 교회의 타락된 지체들을 벌하실 때에는 그 교회가 그러한 자들과의 교제를 계속하는 것 때문에 그 교회 전체를 책망하시며, 온 사회에 대해 그의 책벌의 소나기를 쏟아 부어 주신다.
(5)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점 이상으로 깊은 상처를 내며,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점이 또 없다. 말씀의 위력을 가지고 죄인들의 양심을 찔러 줄 수 있도록 하라. 그리하면 그 죄인은 자신을 두려워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위협이 실현되면 죄인들은 도리어 멸망 받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검은 조만간에, 그들에게 확신을 주든지 또한 혼란을 가져오게 하든지 하기 위해 죄인들을 붙들고 계신다.
Ⅲ. 이 편지의 결론은 다음과 같다.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우주적인 경각심을 환기시킨 뒤에는, 이기는 자에게 줄 커다란 은총이 약속되었다.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터인데 이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17절).
1. 감추어진 만나. 그리스도와의 사귐에서 얻어지는 그리스도의 영이 주는 영향과 위로는 시시각각으로 땅에 사는 인간들을 돕기 위해 하늘로부터 오는 것이며, 하늘에 사는 성도들과 천사들이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을 땅에 사는 성도들이 미리 맛보게 하여 주는 것이다. 세상의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 만나가 감추어져 있다. 다른 사람들은 이러한 기쁨에 동참할 수가 없게 되었다. 만나는 지성소 가운데 있는 언약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져 있다.
2. 흰 돌 위에는 새 이름이 새겨져 있다. 흰 돌은 죄의 허물로부터 놓임을 받게 된 것을 말한다. 고대의 관습에서 형벌을 면제받게 된 사람에게는 흰 돌을, 형벌이 선고된 사람에게는 검은 돌을 준 것에서 유래되었다. 새 이름이란 양자로 들어가게 된 가정 즉 양가(養家)의 이름이다. 양자로 들어가게 되는 사람은 그 양가의 성을 따라야 한다. 그 자신외의 다른 사람들은 그가 양자로 들어간 사람인지, 아닌지를 알 수 없다. 그 사람도 언제나 알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가 참고 견디면 그가 아들이 된 것과 상속자가 되었다고 하는 그 증거를 알게 될 것이다.
●두아디라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2:18-29)
모든 편지들의 구성이 거의 같다. 따라서 다른 편지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 편지에서도 편지의 서두, 내용, 그리고 결론을 고찰해 보아야 한다.
Ⅰ. 서두에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기록되어 있다.
1. 수신자에 대한 기록이 있다고 이 편지는 "두아디라 교회의 사자에게" 보낸 편지다. 두아디라는, 북으로는 무시아와 그리고 남쪽으로는 무역의 고장 루디아와 인접하고 있는, 로마 총독이 관할하고 있는 아시아의 한 도시였다. 특히 루디아는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사업상 그 곳을 방문하였다가 "바울의 설교를 듣는 중에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고, 바울과 실라를 환대한 자주 장사 루디아의 고향이다. 그녀의 고향인 두아디라에 그녀가 복음을 전파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그 고장에 복음적인 교회가 성공적으로 세워졌다고 하는 것은 이 편지를 볼 때 확실하다.
2. 편지를 보낸 사람에 대한 기록이 있다. 이 편지는 "하나님의 아들"이 보냈다.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 눈이 불꽃같고 그 발이 빛난 주석과 같다"고 묘사되었다. 여기에 나오는 그의 총괄적인 칭호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말하자면 하나님의 영원하신 독생자이시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 아버지와 같은 본성을 가지셨지만, 동시에 별개의 것이면서도 종속적인 삶의 양태를 가지고 계신 분임을 보여 준다고 그에 대한 여기의 표현은 두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다.
(1) 불꽃과 같은 그의 눈은 그의 투시력과 완벽한 지식, 모든 사람과 사물에 대한 그의 통찰력을 나타내며, 그가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23절)이심을 보여 주며, 그가 그런 분이심을 모든 교회들에게 알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
(2) 빛난 주석과 같은 그의 말은 그의 섭리가 확고하고, 장엄하게 그리고 순결하고 거룩하게 시행된다는 것을 나타내 보여 준다. 그가 온전한 지혜를 가지고 심판하시는 것처럼, 그는 온전한 능력과 견고한 힘을 가지고 활동하신다.
Ⅱ. 다른 편지서들과 마찬가지로 이 편지의 내용 또는 핵심 사항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들이 있다.
1. 그리스도께서 이 두아디라 교회의 목사와 성도들에게 주시는 명예로운 품성과 칭찬의 말씀이 있다. 그들에게 이러한 칭찬을 주신 분은 그들에게 대해 결코 낯설지 않으며, 그들 자신들과 그리고 그들이 취한 행동의 원칙에 대해서도 잘 아시는 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이 두아디라 교회에 대해 다음과 같은 칭찬할 점들에 더해 언급하셨다.
(1) 그들의 "사랑"에 대해 아신다고 하셨다. 그들의 사랑이란, 보다 일반적으로 말해서는, 모든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는 일이었을 것이며, 보다 특별한 의미로는 믿음의 식구들에 대해 행한 것을 말할 것이다. 사랑이 없는 곳에 신앙도 있을 수 없다.
(2) 그들의 "섬김"에 대해 말씀하셨는데, 이는 그들의 목회적인 섬김을 의미하는 말이다. 따라서 이 말은 말씀과 교리를 가르치기 위해 수고한 교회의 임원들에게 주로 해당되는 말이다.
(3) 그들의 "믿음"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이것은 다른 나머지의 것들, 즉 그들의 사랑과 섬김이 가능하게 하였던 은혜이다.
(4) 그들의 "인내"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 대해 사랑하며, 부지런하며, 충실한 사람들도 아직도 그들에게 인내심을 길러 주는 사건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이다.
(5) 그들이 점점 더 성숙해 가고 있는 것에 대해 언급하셨는데, 그들의 나중 행위가 처음 행위 보다 좋다고 하셨다. 이것은 하나의 훌륭한 성품이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의 첫 사랑을 버렸고, 처음 열심을 잃어버렸는데, 이 사람들은 점점 더 지혜로워지며, 훌륭해지고 있었다. " 그들의 나중 일이 그들의 가장 좋은 일이 됨으로 그들은 매일매일 보다 더 훌륭하게 되고, 그들의 최후의 것이 가장 최선의 것이 되도록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2. 잘못된 일에 대한 성실한 견책의 말씀이 있다. 이러한 견책은 교회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퍼부은 것이 아니고, 그들 가운데 있는 악독한 유혹자들에 퍼부은 것이었다. 교회의 잘못은 그들에게 지나치게 너그러웠다는 점이다.
(1) 이 아득한 유혹자들은 이세벨과 같은 여자로 간주되어, 그녀의 이름을 그들에게 붙였다. 이세벨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핍박하였고, 우상을 섬기는 자와 거짓 선지자들을 크게 도와 준 여자였다. 이런 유혹자들의 죄는 하나님의 종들을 간음죄에 빠지도록 유혹한 것과 우상에게 제물을 바치도록 미혹한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선지자라고 했고, 교회의 목사들 보다 훨씬 더 굉장한 권위가 있다고 선전하였다. 두 가지의 것이 그들의 죄를 가중시켰다. 그들은 그들의 정신과 의도가 같았음으로 마치 한 사람처럼 여겨졌다.
[1] 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가지고, 하나님의 교리와 하나님을 예배하는데 반대하기 위하여 사용하였다. 이것이 그들의 죄를 더 가중시켰다.
[2] 그들은 하나님의 인내하심을 잘못 이용하여 그들의 악행을 더욱 굳게 하는데 이용하였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주셨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첫째, 회개는 죄인의 멸망을 막기 위해 필요하다.
둘째, 회개에는 시간, 어느 정도의 시간 즉 적당한 시간이 필요하다. 시간은 매우 위대한 일을 한다.
셋째, 하나님이 회개의 기회를 주실 때, 하나님은 회개의 열매를 기대하신다.
넷째, 회개의 기회를 놓치면 죄인은 이중적인 멸망을 당하게 될 것이다.
(2) 그런데 두아디아 교회가 왜 이러한 이세벨의 잘못 때문에 책망을 받아야 할까? 왜냐하면 두아디라 교회가 그 여자로 하여금 그 도시의 백성들을 미혹하도록 용납하였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어떻게 그런 일을 도울 수 있단 말인가? 교회로서 그들은 그 여자를 벌주거나 옥에 가둘 수 있는 공적인 권리는 가지고 있지 못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여자를 책망하거나 파문시킬 수 있는 치리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따라서 그들이 가지고 있는 힘을 그들이 사용하지 않음으로, 그 여자의 죄에 가담한 결과를 가져 온 것으로 보인다.
3. 사람들을 미혹하는 이 이세벨에 대한 징벌이 기록되어 있다(22,23절). 즉 바벨론의 멸망과 같은 멸망이 예언되었다.
(1) "내가 그를 침상에 던질 터이요"라고 하셨는데, 그 침상은 안락한 침상이 아니라, 고통의 침상이며, 불꽃의 침상이다. 그리고 그 여자와 더불어 죄를 범한 자들도 그 여자와 함께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회개하면 그것은 징벌을 미리 막을 수 있다.
(2) "내가 사망으로 그의 자녀를 죽이리니"라고 하셨는데 말하자면 둘째 사망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죽음이며, 다시는 생명의 가망이 전혀 없는 죽음이며, 부활의 소망도 없고, 오직 영원한 수치와 멸시만 있을 따름이다.
4. 이런 악독한 미혹자를 멸하시는 그리스도의 계획은 오직 다른 사람도, 특히 그의 교회를 교훈 하시고자 하심이라는 말씀이 있다. "모든 교회가 나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살피는 자인줄 알지라." 하나님은 "그가 행하시는 심판으로" 그 자신을 나타내신다. 그리고 이러한 미혹자들에게 보여 주는 보응으로써 아래와 같은 사실을 또한 나타내시기를 원하신다.
(1) 사람들의 마음과 그들의 교리, 계획, 구조와 기질, 격식, 그들의 무관심 그리고 우상 숭배에 기울어지는 그들의 은밀한 경향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완벽하신 지식을 나타내신다.
(2)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는" 그리스도의 공정한 심판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이 그들을 보호해 주지 못하며, 비록 교회라 할지라도 죄지은 자들에게는 그들의 보호처가 될 수 있는 성역이 되지 못한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
5. 스스로를 정결하고 순결하게 지키는 사람들에 대한 격려의 말씀이 있다. "두아디라에 남아 있어……"(24절).
(1) 이 미혹자들은 자기들의 교리를 "깊은 것" 즉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는 심오한 신비라고 했으며, 목사들보다도 오히려 신앙에 대한 심오한 이해를 가지고 있다고 사람들을 설득하고자 하였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탄의 깊은 곳" 즉 사탄의 미혹과 악독 그리고 악마적인 비법이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경건한 자들의 위대한 신비"(mystery)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사악한 자들의 신비"(mystery)도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신비를 멸시하는 것은 위험한 노릇이다. 그리고 사탄의 신비를 받아들이는 것도 마찬가지로 위험한 노릇이다.
(3) 그의 충성된 종들에게는 그리스도께서 온유하심을 보여주셨다. "다른 짐으로는 너희에게 지울 것이 없노라. 다만 너희에게 있는 것을 내가 올 때까지 굳게 잡으라"(24,25절). "나는 어떤 새로운 신비(mystery)을 가지고 너희의 신앙을 더 무겁게 하거나, 어떤 새로운 법을 가지고 너희의 양심을 무겁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나는 다만 너희가 이미 받은 바에 대해 주의를 환기시켜 주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올 때까지 그것을 굳게 붙잡아라. 나는 그 이상 더 바랄 것이 없다. "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백성들이 미혹을 더 이상 받지 않도록 끝내 주려고 오신다. 그러므로 "그들이 그들의 굳건한 신앙과 선한 양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지키고 있으면, 모든 난관과 위험은 주목될 수 있다. "
Ⅲ. 이제는 이 메시지의 결론 부분을 살펴 볼 때가 되었다(26-29절).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1. 참고 끝까지 견딘 승리의 신도들에게 줄 보상의 약속이 두 가지로 제시되었다.
(1) 다른 모든 세계를 다스리는 매우 위대한 힘과 지배력을 약속하셨다. "만국을 다스리는 권세"는 현세에서, 콘스탄틴 황제때와 같이, 황제가 그리스도인이 되어, 세계가 그리스도인 황제의 다스림을 받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고, 또 다른 세계에서, 신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의 보좌에 앉아서, 그리스도와 교회의 원수들에게 형벌을 선포하고 또 부과시키는 즐거움을 누리는 것을 가리킬 수도 있다. "올바른 자들은 아침에 왕노릇하리라."
(2) 그와 같은 권세자들에게는 지식과 지혜가 필요하다. "내가 또 그에게 새벽별을 주노라." 그리스도는 새벽별이시다. 그는 사람들에게 하루의 광명을 가져다주시며, 은혜와 영광의 빛을 가져다주신다. 그리고 그들이 부활의 아침에 누리게 될 통치권과 위엄의 자리에 어울리는 빛과 지혜를 온전케 하여 주실 것이다.
2. 이 편지서도 다른 편지서와 같이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씀으로 끝을 맺고 있다. "귀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 이 편지서 보다 앞서 나온 편지서들에서는 이러한 명령이 결론적인 약속 보다 앞에 나온다. 그러나 다음에 나오는 편지서들에서는 이러한 주의를 환기시키는 명령이 약속의 뒤에 나온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교회들에게 주신 권고에 말씀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약속의 말씀에도 주목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계시록 제 3장
●사데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3:1-6).
Ⅰ. 서론 부분을 살펴보자.
1. 이 편지의 수신자는 "사데 교회의 사자"이다. 사데는 트몰러스 산록에 자리잡은 루디아의 옛 도시로써 소아시아 지방의 수부였다고 한다. 그리고 요한의 설교를 듣고 그 지역에서 제일 먼저 회개한 도시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사데 교회는 맨 먼저 기독교에서 떨어져 나갔으며, 그리하여 제일 먼저 폐허가 된 도시라고도 한다. 그 폐허는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데, 거기에는 어떤 교회의 흔적도 없었다.
2. 편지의 발신자는 주 예수이시다. 여기 그의 모습은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그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이"이시다. 그런데 1장 4절에 의하면 일곱 영은 "보좌 앞에" 있는 영들이라고 한다.
(1) 주님은 일곱 영을 가지고 계신다고 하는데, 다시 말해서 여러 가지 다양한 능력과 은혜와 작용을 나타내는 성령을 가지고 계신다는 뜻이다. 주님은 한 몸이시면서도 여러 다양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으신데, 여기 일곱이라고 표시된 것은 교회의 숫자가 일곱이며, 교회의 사자들의 숫자가 일곱이기 때문이다. 이는 곧 모든 교역자들과 모든 교회에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한 영력(營力)의 공급이 있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한 것이다. 그 영력(營力)은 교회가 확장되고, 유지될 수 있도록 그 교회의 교역자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개선되지 못할 때는 벌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그 때까지는 성령이 그들에게서 철수하지 않으신다. 교회도 개개 신자들과 마찬가지로 각각의 영력(營力)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편지는 쇠퇴해 가고 있는 교역자와 교회에 보내지고 있는데, 이제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온전한 능력을 가진 일곱 영, 곧 성령을 가지고 계시며 따라서 그들은 그에게서 그들의 소생할 수 있는 활동력을 공급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자각할 수 있게 되었다.
(2) 주님은 교회의 사자들인 일곱 별을 가지고 계신다. 그들은 주님에 의해 파견되었고 또한 주님께 대해 책임을 져야 하기에, 그들은 충성을 다해야 하며, 열심을 다해야 한다. 그 교역자들은 주님께서 고용한 교역자들이며, 주님은 교회의 이익을 위해 그 교역자들과 사귐을 가지고자 영적인 영향력을 구사하고 계신다. 보통 성령은 목회를 통해서 활동하시며, 목회는 성령의 도우심이 없으면 효과를 낼 수 없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손이 이 양자를 모두 지탱해 주신다.
Ⅱ. 이 편지의 핵심 부분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주목할 만한 점 한 가지가 있다. 다른 편지들에서는 먼저 그리스도께서 그 교회들의 잘한 점을 칭찬하고 나서, 그들의 잘못에 대해 책망하고 있는데 반해 이 편지(와 그리고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는 그렇지 않다.
1. 먼저 책망의 말씀, 그것도 매우 심한 말씀에서부터 시작하고 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죽은 자로다. " 위선과 신앙의 쇠퇴가 곧 그 교회와 그 교회의 행위를 잘 아시는 분으로부터의 책망이다.
(1) 이 교회의 평판은 매우 좋게 나 있다. 이 교회는 번창하는 교회라는 명성을 획득하고 있었으며, 순수한 교리라든가, 그들 사이에 있었던 일치 그리고 예배와 품위 그리고 질서에 있어서의 통일성 등으로 해서 살아 있는 교회라는 이름을 듣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 불행한 분열의 조짐은 찾아 볼 수 없었다.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는 만사가 순조롭고 잘된 것이라고 보였다.
(2) 그러나 이 교회의 실제는 소문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이름은 살아 있으나 실제로는 죽었다.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능력이 없었으며,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생의 원칙이 없었다. 그들이 아직 전적인 소멸의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영혼과 그들의 봉사, 그 교회의 교역자들의 목회와 기도와 설교와 대화는 크게 죽고 있었으며, 교인들도 설교를 듣는거나, 기도하는 것이나 대화에 있어서 역시 크게 죽고 있었다. 아직 목숨이 약간 붙어 있기는 하나, 거의 끝장이 난 상태에서 죽음 직전에 놓여 있었다.
2. 이러한 퇴보된 교회에 대해 우리 주님께서는 가장 적절한 충고를 주신다. "너는 일깨워 그 남은 바 죽게 다니 것을 굳게 하라"(2절).
(1) 주님은 그들에게 깨어 일어나라고 권고하신다.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죽음과 타락의 원인은 그들이 깨어있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깨어있지 못하면 우리는 우리의 기반을 잃어버린다. 따라서 우리는 죄와 사탄과 그리고 우리의 선한 생명과 능력을 무너뜨리고자 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각심을 높여야 한다.
(2) 주님은 그들에게 그 남은바 죽게 된 것을 굳게 하라고 권고하신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이 사람들에 관한 권고라고 이해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순결함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들이 극소수나마 있었다. 그러나 그들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죽음 일보전에 있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이 온통 죽음과 멸망의 분위기에 쌓여 있는 것을 보면서도 우리 자신을 생명과 "선한 능력" 가운데 간직하고 있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또는 우리가 다음과 같은 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같이, 이것은 행위에 관한 것이라고도 이해할 수 있다. "내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의 온전한 것(또는 충만한 것)을 찾지 못하였노니," 그들에게는 부족한 것이 있었다. 그들에게 껍데기는 있었으나 알맹이는 없었다. 그들에게 형체는 있었으나 영혼은 없었고, 그림자는 있었으나 실재는 없었다. 내용물이 부족하였다. 그들의 행위는 텅비고 헛된 것이다. 그들의 기도는 거룩한 요망으로 채워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의 구제도 참된 자비에서 우러나온 것이 아니다. 안식일은 하나님께 대한 영혼의 참된 봉헌이 결여된 채 지켜졌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외적인 결핍된 상태에서는 그 형태마저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3)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 자신을 돌아보고,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라"고 권고하신다(3절). 그들은 그들이 어떤 것을 받고 또 들었으며, 또 하나님으로부터 어떤 메시지를 받았고, 그들이 받은 자비와 은혜의 표가 어떤 것인지, 어떤 설교를 들었는가를 기억할 뿐만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받았으며 또 들었는가, 하나님의 자녀의 영향력이 그들의 영혼에 어떤 영향을 끼쳤고, 또 하나님의 말씀과 의식들에 대해 그들이 어떠한 애정심을 품게 되었는지, 그들이 처음에 복음의 말씀을 들었을 때 어떻게 환영하였었는가를 또한 기억하여야 한다. "그때에 너희가 말하던 축복은 어디로 갔는가?"
(4) 주님은 그들에게 그들이 받은 것을 잃지 않도록 굳게 지키도록 권고하신다. 그리고 그들이 신앙 생활을 잃어버렸으니 만큼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위험에 빠지지 않도록 "회개하라"고 권고하신다.
3. 주님은 그의 권고가 무시되지 않도록 위협적인 말씀을 덧붙이신다. "내가 도적같이 이르리니 어느 시에 네게 임할는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절).
(1) 사람들이 그들의 품위 있는 태도를 잃어버렸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신다. 그때 그들의 품위 있는 태도를 잃어버린 죄인들은 심판주의 모습에서 위협을 느낀다.
(2) 죽음에 처한 사람들에 대한 주님의 심판은 매우 신속하고도 놀라운 것이다. 그들의 영적인 죽음은 그들을 방심하게 만들며, 이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노여움을 야기시키지만, 그들은 이에 대해 통찰력을 가질 수 없게 되고, 또 이에 대한 준비를 갖추지 못하게 된다.
(3) 그리스도의 그러한 방문은 그들에게 커다란 손해를 가져다준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 오셔서 그들에게 남아있는 즐거움과 자비를 빼앗아 버리신다. 그러나 결코 속임수가 아니라, 정정당당한 방법으로 빼앗아 버리신다.
4. 우리의 복되신 주님은 그들이 비록 죄많은 사람들이지만 결코 위로와 격려를 잊지 않으신다. "심판 중에서 그는 자비를 베푸신다"(4절).
(1) 사데에 남아 있는, 비록 숫자는 적지만 충실한 남은 자들의 영예를 주님은 기억하시고 언급하셨다. "그러나 사데에 그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자 몇 명이 있다. " 그들은 그들이 살고 있던 그 당시의 시대와 장소에 널리 횡행하던 부패와 부정에 물들지 아니한 사람들이다. 하나님은 그의 곁에 남아 있는 적은 숫자의 사람들이라도 그들을 기억하신다. 그리고 그들의 숫자가 적을수록 하나님은 그들을 그만큼 귀하게 보신다.
(2) 주님은 그들에게 매우 귀한 약속을 하신다.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니리니 그들은 합당한 자인 연고라." 그들로 의로움과 인정받음과 위로를 나타내 주는 흰옷이거나 또는 저 세상에서 받을 명예와 영광의 흰옷을 입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의 낙원에서 즐거운 걸음을 걷게 될 것이다. 그때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얼마나 즐거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걸어갈 것인가! 그것은 그들의 충성이 그들에게 가져다 준 고결함에 합당한 명예이다. 그리고 그것이 법적인 것이 아니라, 복음적인 가치관에서 온 것이며, 그들의 공적이 아니라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것이기는 해도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그러한 특권을 부여하신 것은 매우 합당한 처사이다. 이 땅에서 참으로 거룩한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걸으며, 세상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는 자는 저 세상에서 명예와 영광의 흰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걸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합당한 상급이다.
Ⅲ. 이제 우리는 이 편지의 결론 부분을 살펴보자. 앞서의 편지와 같이 여기에도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1. 이기는 자들에게 주는 커다란 상급이 약속되었다(5절). 그것은 이미 언급한 바가 있는 편지들의 경우와 마찬가지이다. "이기는 자는 이와 같이 흰옷을 입을 것이요," 순결한 은혜에 대한 상급은 온전히 순결한 영광이 될 것이다. 거룩함이 온전하면 그 자체가 상급이 되기도 한다. 영광이란 온전해진 은혜이다. 그 구별은 종류상의 구별이 아니다, 다만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그런데 그 경우에 매우 합당한 또 다른 약속이 첨부되었다.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서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
(1) 그리스도께서는 생명의 책을 가지고 계신다. 그 책에 이름이 기록된 자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
[1] 그것은 영원한 선택의 책이다.
[2] 그것은 악한 세대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았으며, 경건한 삶과 능력을 간직한 자들의 이름을 기억하는 책이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택하신 그의 충실한 성도들의 이름을 결코 그의 생명책에서 지우시지 않으실 것이다. 사람들은 세례가 신앙 고백을 통해서 그들의 이름을 교회의 명록 속에 써넣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름이 영적인 삶을 동반하지 않는, 다만 세상에서 살아가는데 필요한 그러한 이름이라면 그러한 이름은 지워지고 말 것이다. 때로 그러한 이름은 그들의 악행 때문에 하나님을 떠나게 되며 그들이 죽기도 전에 그 이름이 지워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기는 자들의 이름은 결코 지워지지 않는다.
(3)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과 그의 모든 천사들 앞에서 이 생명의 책을 내놓으시고 거기에 기록된 이름들을 시인하여 주신다. 그 생명책이 열렸을 때 그리스도는 마치 재판장과 같이 이를 판정하실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또 그들의 대장으로서 그들을 이끌고 하늘로 개선하면서 그들을 아버지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고 그들의 이름을 시인하실 것이다. "보십시오, 당신께서 나에게 맡기신 자녀들이 여기 있습니다. " 이 때에 그들이 받는 상급과 명예가 얼마나 놀랍고도 큰 것인가!
2. 온 우주적인 경각심을 촉구하는 명령의 말씀으로써 이 메시지는 끝나고 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모든 인간은 반드시 주목해서 들어야 한다. 비록 한두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해당되는 말씀인 것같이 보이지만, 그 말씀은 모든 사람들을 가르치는 말씀이시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3:7-13)
우리는 이제 아시아에 있는 교회에 보낸 여섯 번째의 편지를 살펴 볼 차례가 되었다.
Ⅰ. 그 편지의 제목은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 보여 주고 있다.
1. 이 편지는 "빌라델비아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한 것이다. 빌라델비아 역시 소아시아에 있는 도시로서 푸시아와 루디아의 접경지대에 위치하고 있다. 그리고 형제애라는 그 이름의 뜻으로 해서 유명한 도시이다. 아마 이러한 이름은 그 도시가 기독교를 받아들인 이후에 붙여진 것이며, 모든 신자들이 한 아버지를 모신 그리스도의 형제이며 또 형제여야 한다는 기독교의 교훈의 영향을 받아서 명명된 것이 아닐까 추측할 수 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 이름은 그 이전부터 있었던 이름이다. 시민들 사이에 가졌던 협동 정신에서 우러나온 사상과 친절 때문이었다. 이것은 매우 고귀한 정신이다. 그리하여 이러한 고귀한 정신의 복음의 은혜로 말미암아 성별되게 될 때, 훌륭한 교회로 성장할 수 있었다. 따라서 여기서 우리는 그 교회에 대한 잘못된 추궁이 없었던 것을 볼 수 있고 다만 공동적인 면에서의 잘못을 약간 볼 수 있으나, 그것 역시 사랑이 이들을 덮어 주고 있다.
2. 이 편지 역시 모든 교회의 머리가 되시는 같은 예수님께서 보내 주신 것이다. 그런데 이 편지에서의 우리 주님의 칭호가 어떻게 일컬어지고 있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거룩하고 진실하사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 곧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닫으면 열 사람이 없는 그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주님의 개인적인 인품은 "거룩하시고 진실하신 분"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 본성은 거룩하시며, 따라서 그의 말씀은 진실하실 수밖에 없으신 분이시다. 왜냐하면 주님은 그의 거룩하심에 의해서만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정치적인 성품은 "다윗의 열쇠를 가지신 이로서,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분"이시다. 그런데 그가 가지신 이러한 통치와 권위의 열쇠는 그의 교회를 다스리시는 열쇠이시다.
(1) 그의 통치 작용에 대해서 살펴보자.
[1] 그는 문을 여신다. 그는 그의 교회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 주신다. 그는 그의 교역자들에 말문을 열어 주신다. 그는 들어가는 문을 여시며, 마음 문을 여신다. 그는 성찬식을 통하여 보이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여신다. 그리고 그가 설정하신 구원의 원리에 입각해서 승리하는 교회에 들어가는 문을 여신다.
[2] 그는 또 문을 닫으신다. 그가 원하시면, 기회의 문과 말문을 닫으사, 완고한 죄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 속에 그들을 가두어 두신다. 그는 불신자와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는 교회의 문을 닫으시며, 은혜의 날에 깊이 잠이 들은 어리석은 처녀들에게는 하늘의 문을 닫아 주신다. 그리고 악을 행하는 자들에게는, 그들이 아무리 발버둥쳐도 그 문을 닫아 주신다.
(2) 그가 이렇게 문을 열고 닫으실 때는 매우 주권적으로 행동하신다. 사람들의 뜻이나 사람들의 능력에 의해 영향받지 않으신다. "그가 열면 닫을 사람이 없고, 그가 닫으면 열 사람이 없다." 그가 하시고 싶으신 대로 행하신다. 그러나 그가 하시는 일에 대해서 방해할 자가 없다. 이것은 그만이 소유하고 계신 특권이며 특성이시다. 그는 원하시는 교회를 택하사 거룩함과 진실에 있어서 그리스도께 충성하게 하시며, 그의 돌보심 아래서 자유와 기회의 넓은 문을 열어 주시기를 기뻐하신다.
Ⅱ. 이제는 이 편지서의 주요 부분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께서는 그가 그들을 위해 무엇을 행하셨는가 하는 것을 그들이 기억하게 하신다. "내가 네 앞에 열린 문을 두었으되 능히 닫을 사람이 없으리라"(8절). 내가 네 앞에 문을 열었으며, 아무리 대적하는 무리가 많을지라도 나는 계속해서 문을 열어 놓겠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배우자.
(1) 그리스도는 그의 교회들이 바라고 있는 모든 자유와 기회를 만들어 주시는 분이심을 알아야 한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위한 영적인 자유와 특권들을 얼마나 오랫동안 간직하고 계시는가 하는 것을 그들이 깨닫게 하여 주신다.
(3) 악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시기하여 그들 앞에 열린 자유의 문을 닫으려고 애쓴다.
(4) 우리가 그리스도를 노하게 하사 이 문을 닫게 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은 누구나 그런 일을 할 수 없다.
2. 이 교회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받았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도 내 말을 지키며 내 이름을 배반치 아니하였도다"(8절). 이 말씀 속에는 매우 부드러운 책망의 말씀에 의한 지시가 들어 있다. "네가 적은 능력을 가지고 있다. 내가 너희 앞에 열어 놓은 넓은 기회의 문에 비하면 너무나 적은 은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진실한 은혜이며 너희는 그것을 충실히 지켰도다." 참된 은혜는 비록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적은 힘도 받아 주시지만, 신자들은 적은 능력에 만족할 것이 아니라, 그 은혜가 성장하며, "그 믿음이 강하게 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기 위하여" 노력해야 한다. 참된 은혜는 비록 약하지만, 다른 일반적인 은혜보다 훨씬 커다란 은사를 행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참된 은혜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지키게 하며, 그의 이름을 배반치 않게 하여 주시기 때문이다. 순종과 충성 그리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자유롭게 고백하는 것은 참된 은혜의 열매이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는 것들이다.
3. 이 교회에 주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신 은총의 약속이 여기 열거되어 있다(9,10절). 그 은총에는 두 가지가 들어 있다.
(1) 그리스도께서는 그 교회의 원수들이 그 교회 앞에 굴복하게 하여 주신다.
[1] 그 교회의 원수들은 "자칭 유대인"이라고 하는 자들이라고 기술되었다. 그들이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은 거짓이며, 실상 그들은 "사단의 회"에 불과하였다. "하나님을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회야말로 하나님의 이스라엘이다. 그러나 거짓 신들을 예배하거나, 참 하나님이라도 거짓된 방법으로 예배하는 회들은 사단의 회이다. 그들이 비록 하나님의 유일한 백성이라고 고백하지만 그 고백은 거짓일 따름이다.
[2] 교회에 대한 그들의 굴복이 기술되었다. "저희로 와서 네 발 앞에 절하게 하리라." 그러나 교회 자체에 대해 경배하거나 영광을 돌리는 것은 아니며, 교회의 목회에 대해서 우러러보는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 자신들이 잘못 되었었으며, 교회는 올바르며, 그리고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 역시 교회와 사귐을 갖기를 원하며, 그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같은 하나님께 예배하기를 원한다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이러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날 수 있을 것인가? 그의 원수들의 마음에 임하시는 하나님의 능력과 그의 교회에 베푸시는 특별하신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은 가능하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줄을 알게 하리라." 다음을 살펴보자.
첫째, 모든 교회는 그리스도의 특별하신 사랑과 은혜로 말미암는 명예와 행복을 누릴 수 있다.
둘째,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원수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는 방법으로 그의 백성에 대한 그의 은혜를 그의 백성들이 알게 하신다.
셋째, 이 그리스도의 은혜는 원수들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여 줌으로 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와 함께 사귐을 가지고자 멸망하게 만든다.
(2) 그리스도께서 그의 교회에 대해 주시는 약속은 가장 가혹한 시험의 때(10절)에도 계속 은혜를 간직하게 하여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그들의 지난날의 충성에 대한 보상이다. "가진 자에게는 더 주리라." 다음 사실들을 살펴보자.
[1] 그리스도의 복음은 인내의 말씀이다. 그것은 죄많은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인내의 열매이다. 그것은 사람들에게 인류를 위한 그리스도의 모범적인 고난에 대한 인내를 보여준다. 그것은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와 같은 고난을 참는 인내를 가지게 하여 준다.
[2] 이 복음은 그 복음을 따르는 자들이 힘써 지켜야 할 말씀이다. 그들은 이 복음에 기록된 대로 믿고 실천하며 그리고 예배하여야 한다.
[3] 우리는 이러한 인내의 날에 유혹을 물리쳐야 한다. 복음적인 평화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인내 끝에 온다.
[4] 때로 그 시련은 매우 보편적으로 임하는 경우가 많다. 그 시련은 온 세상에 임하며, 또 그만큼 보편적인 동시에 때로는 길지 않을 수 있다.
[5] 평화의 날에 복음의 말씀을 잘 지킨 자들은 유혹과 시련의 날에 그리스도로부터 보호함을 받는다. 복음을 지키는 것이 곧 시련을 이길 준비를 하는 것이 된다. 평화의 날에 그들로 하여금 충실하게 하도록 만들어 준 것 같은 하나님의 은혜가 핍박의 날에도 그들로 하여금 충실하게 만들어 준다.
4. 그리스도는 약속을 하시기 전에 교회에 대해 그들의 임무를 다하라고 명령하셨다. 즉 그것은 인내하며,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는 것이다.
(1) 그 의무는 이런 것이다.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으라. 네가 가진 것이란 믿음과 진리와 은혜의 강함과 열심과 그리고 형제애이다. 너희는 이 보배를 가지고 있다. 그것을 굳게 붙잡으라."
(2) 그 동기는 그리스도께서 속히 임하시리라는 것 때문이다. "보라 내가 속히 임하리라. 보라, 나는 시련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오고 있으며, 그들의 충성에 대해 상급을 주며, 떨어져 나간 자들을 벌주기 위해 오리라. 그들은 그들이 바라며, 또 그들이 능히 차지할 수 있었던 면류관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참고이기는 성도들은 상급을 얻을 것이며, 뒷걸음친 자들은 그들의 상을 놓칠 것이다."
Ⅲ. 이제 이 편지의 결론 부분을 살펴보자(12,13절).
1. 주님께서는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기는 자들에게 주시는 영광스러운 상급을 약속하신다. 그것은 두 가지를 약속하신 것이다.
(1) 이기는 자는 "하나님의 성전의 기념비적인 기둥이 되게 하신다." 그 기둥은 성전을 떠받드는데 필요한 기둥이 아니다(하늘에는 그러한 버팀 나무가 필요치 않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값이 없이 주시는 능력 많은 은혜를 기념하는 것이며, 로마의 황제와 장군들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워 놓은 기둥들같이 영원한 기념물일 따름이다.
(2) 그 기념비 기둥 위에는 그 당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것과 같이 명예로운 기명이 새겨져 있다.
[1] "하나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그들은 이 축복에 참예하게 되었고, 그들은 하나님을 섬겼으며, 하나님 때문에 그들은 이 고난에 동참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교회인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이 기둥 위에는 성도들이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행한 모든 봉사가 낱낱이 기록될 것이며, 그들이 얼마나 교회를 확장시켰으며, 교회의 순결성과 명예를 유지하도록 힘써 왔는가가 자세히 기록될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 싸운 용사란 이름으로 기록되는 것이 아시아인이나 아프리카인 이라는 이름으로 기록되는 것보다 훨씬 더 위대한 이름이 될 것이다.
[2] 그 기둥에 새겨진 또 다른 이름은 그리스도의 "새 이름"이다. 그는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구속주이시며, 우리를 구원하시는 구원대의 대장이시다. 그의 이름 밑에 모든 이기는 자들의 이름이 함께 기명될 것이며, 그의 지도하에 행동하였으며, 그의 본을 받아 성도들은 용기를 얻었으며, 그의 영향을 받아 성도들은 선한 싸움을 싸웠고,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이 편지 역시 주의를 환기시키는 말씀으로 끝나고 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 지어다." 귀 있는 자들은 그리스도께서 그의 충성된 성도들을 사랑하시며, 그들의 가치를 알아주시며, 그리스도께서 어떤 명령을 내리시며, 또 그들의 충성에 또한 해 어떻게 면류관을 내리실 것인가에 대해 성령이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라오디게아 교회에 보낸 편지 (요한 계시록 3:14-22)
이제 우리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들 중에서 제일 마지막에 나오며 빌라델비아 교회와는 정반대로 제일 나쁜 교회에 대해 살펴 볼 차례가 되었다. 빌라델비아 교회에 대해서는 책망의 말씀이 하나도 없었던 것과 같이 이번에 살펴 볼 이 교회는 칭찬의 말씀을 한 마디도 들은 것이 없다. 하지만 이런 교회라 할지라도 "일곱 금 춧대"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왜냐하면 타락한 교회라 할지라도 교회임에는 틀림없기 때문이다. 먼저 살펴 본 교회에서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것들을 볼 수 있다.
Ⅰ. 누가 누구에게 보냈는가 하는 것을 나타내는 제목이 있다.
1. 수신자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사자"이다. 이 도시는 루커스강 근처에 있던 유명한 도시였으며, 매우 기다란 성곽과 세 개의 대리석으로 세워진 극장과 그리고 로마와 같이 일곱 개의 언덕 위에 세워진 도시로써 유명하였다. 사도 바울은 이 도시에 복음을 전파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것 같다. 골로새서의 마지막 장에서 사도 바울은 라오디게아 교인들에게 문안을 보내고 있다. 라오디게아는 골로새로부터 불과 20마일 이상 떨어져 있지 않았다. 이 도시에서 제 4세기에 교회 협의회가 열렸던 기사가 있다. 그러나 그 도시는 파멸된 지 오래되었으며, 오늘날까지도 폐허화된 그대로 남아 있다. 말하자면 "어린양의 진노"를 보여주는 무서운 기념비적인 도시이다.
2. 이 편지의 송신자. 이 편지에서 우리 주님은 스스로를 "아멘 이시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라고 일컫고 계신다.
(1) 그는 "아멘"이시다. 다시 말해서 그의 의도와 약속은 한결 같고 변함이 없으시므로 언제나 예이고, 언제나 아멘 이시다.
(2) 그는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다. 따라서 그가 사람들에게 행하는 하나님께 대한 증언은 능히 그대로 받아들이고 또 믿을 수 있는 것이며,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에 대해 증언할 때 그것 역시 그대로 인정될 것이다. 그 만큼 그의 증언은 미적지근한 사람들의 고백과는 달리 신속하고도 참된 것이다.
(3) 그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시다. 먼저는 그가 첫 번 창조에서의 근본이시다. 말하자면 그는 제일 원인이시며, 창조자이시며, 그리고 그 창조의 통괄자이시다. 그리고 또 그는 제이의 창조인 교회의 창조의 근본이시기도 하다. 그리하여 그는 몸된 교회의 머리이시며, 1장 5절에 밝혀진 바와 같이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이러한 칭호를 가지시게 되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자신의 신적인 능력으로 말미암아 스스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같이 새로운 세계의 머리로서 그를 섬기는 살아있는 성전과 교회가 될 수 있도록 죽은 자들을 살려 주신다.
Ⅱ. 이 편지의 중요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그들 자신들 보다 그들에 대해 더 잘 알고 계시는 이가 그 교회와 목사와 그리고 교인들을 엄히 꾸짖고 계신다. "차든지 더웁든지" 하여야 할 그들이 그렇지 못하고,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였다"(15절). 미지근하거나 냉담한 신앙은 이 세상에서 가장 나쁜 신앙적인 기질이다. 만일 믿음이 참다운 것이라면 그것은 가장 훌륭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열심히 믿어야 한다. 반대로 만일 믿음이 참다운 것이 아니라면 그것은 가장 몹쓸 사기술이다. 따라서 우리는 적극적으로 반대해야 한다. 만일 믿음이 그 어느 것보다도 귀한 것이면, 그것은 모든 것들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이다. 따라서 그러한 믿음에 대해 냉담하다면 그것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노릇이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좇을지니라"(왕상 18:21). 믿음에는 중립이란 자리가 없다. 불성실한 중립 표방자 보다는 오히려 공개적인 적대자가 더 떳떳하다. 그리고 그런 미지근한 자들보다는 차라리 이방인들에게 소망을 두는 것이 더 낫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람들이 그의 편인지 또는 그를 반대하는지를 열심히 밝혀 주시기를 바라고 계신다.
2. 매우 엄중한 책벌이 그들에게 떨어졌다.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치리라." 미지근한 물이 비위를 뒤집어서 구토를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이, 미지근한 신앙 고백 역시 그들에 대한 그리스도의 마음을 뒤집어 놓는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 대해 넌더리를 내시며, 그들을 그 이상 더 참지 못하신다. 그들은 스스로 그들의 미지근함에 대해 "사랑이라든가, 온유 또는 중용지도라든가 영혼의 관대함"이라고 일컬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그리스도를 지겹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 스스로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게 내버려두신다. 그들은 끝내 거절을 받음으로 거룩하신 그리스도께 다시 돌아올 수 없으리 만큼 철저하게 거부당하게 될 것이다.
3. 그들의 그러한 냉담하고 불일치한 신앙의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의 자만심과 자기 망상에서 오는 것임을 볼 수 있다. 그들은 모든 것을 이미 갖추고 있기 때문에 그 이상 더 성장하든지 말든지 무관심해도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한다"(17절). 여기서 우리는 그들 자신들에 대한 그들의 생각과, 그들을 보는 그리스도의 생각 사이에 얼마나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보자.
(1)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매우 좋게 생각하고 높이 평가하고 있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요하며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며, 부족할 가능성조차도 없으리 만큼 부하다고 생각한다. 아마 그들은 그들의 육신을 위해서는 필요한 모든 것들을 갖추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아니면 그들은 그들의 영혼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모두 갖추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들은 배운 바 지식을 가지고 그것을 신앙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들은 받은 바 은사가 있는데 그것을 은혜로 여겼다. 그들은 재치를 가지고 그것을 참다운 지혜라고 여겼다. 그들은 그들의 의식(儀式)을 그 의식의 주인이신 하나님보다 더 윗자리에 올려놓았다. 우리가 우리의 영혼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는 얼마나 세심한 주의가 필요할 것인가! 지옥에 떨어진 많은 영혼들 가운데는 그들이 천국으로 가는 줄로 알았던 영혼들이 틀림없이 상당히 많을 것이다. 우리는 우쭐대다가 우리들의 영혼의 관심을 떠나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않도록 날마다 하나님께 기도 드리자.
(2) 그리스도께서 그들에 대해 품으셨던 바른 생각은 조금도 틀림이 없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에 대해 잘 몰랐지만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잘 알고 계셨다. 그들의 상태는 능히 다른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연민의 정을 끌어들일 만큼 곤 고한 것이었다. 그들은 비록 스스로를 자랑했지만 그들의 상태에 대해 잘 아는 이들은 그들을 불쌍히 여겼다.
[1] 그들은 그들이 부자라고 말하며 그렇게 생각하였지만, 실상 그들은 가난하였다. 그들에게는 그들의 영혼을 실어나갈 양식이 없었다. 그들은 부요하다고 하나 그들의 영혼은 굶주리고 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공의에 빚진 바가 많건마는 그 빛의 한 모퉁이조차 갚을 길이 없었다.
[2] 그들은 눈이 멀었다. 그들은 그들의 상태, 그들이 가고 있던 길, 또는 그들이 처해 있던 위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의 처지를 볼 수 없었다. 그들은 그들의 앞일을 내다볼 수 없었다. 그들은 눈이 멀었건만 그들이 보는 줄로 알고 있었다. 그들에게 있던 빛은 실상 어두움이었다. 그러니 그 어두움이 얼마나 짙었겠는가!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분명히 그들의 눈앞에서, 그들이 볼 수 있도록 십자가에 못 박히셨건만 그리스도를 볼 수 없었다.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언제나 계시건만 그들은 믿음의 눈을 가지고 하나님을 볼 수 없었다. 그들은 죽음이 그들의 눈앞에 다가왔건만 그 죽음을 볼 수가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영원한 가장에 서 있으면서도 그 영원을 볼 수가 없었다.
[3] 그들은 벌거벗은 몸이 되어 입을 옷도 없고, 집도 없었으며, 영혼의 항구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그들에게는 입을 옷도 없었고, 칭의의 옷이라든가 성결의 옷 같은 것도 없었다. 그들은 죄와 더러움으로 말미암아 벗은 몸이 되었지만 덮어 줄 것이 없었다. 그들은 언제나 죄와 부끄러움에 노출된 채 내버림을 당하고 있었다. 그들의 의는 더러운 누더기에 불과하였다. 그들을 가리워주지 못하는 누더기였으며, 그들을 더럽게 만들어 주는 것에 불과하였다. 그들은 집도 없고 항구도 없는 벌거벗은 몸과 같은 신세였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모든 세대의 사람들의 거처가 되시며, 인간의 영혼을 위한 편안한 안식처가 되시는 하나님이 없었기 때문이다. 육체의 부요는 영혼의 부요가 될 수 없다. 육체의 겉모양은 영혼의 빛이 될 수 없다. 육체를 위한 안락한 집이 곧 영혼을 위해서는 좋은 휴식처가 될 수 없다. 인간의 영혼은 육체와는 다른 것이다. 따라서 그 본성에 알맞는 집을 지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육적인 부요 속에서도 그 영혼은 가련하고도 불쌍한 처지를 겪을 수밖에 없게 된다.
4. 그리스도께서는 이런 죄많은 백성들에게도 좋은 말씀으로 권고하신다. 그 권면은 그들이 그들 자신에 대해 가졌던 공허하고 거짓된 생각을 버리고, 그들의 진실한 모습을 찾아보도록 노력하라는 것이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18절).
(1)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선하신 권고를 저버린 사람들에 대해서도 계속 좋은 권고를 주신다.
(2) 죄인들이 그리스도의 은혜로우신 부르심과 권고를 기뻐하는 한 그들의 상태는 절대로 절망적일 수 없다.
(3) 우리의 귀한 권면자이신 복되신 주님은 모든 죄인에게 꼭 필요한 최선의 충고를 언제나 해 주신다.
[1] 이 사람들은 가난하였다. 그리하여 그에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해지도록 하라고 권면하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어디서 어떻게 하여야 참된 부요를 얻을 수 있는지를 가르쳐 주신다.
첫째, 그들이 그 부요를 얻을 수 있는 곳은 그리스도에게서이다. 그리스도는 그들을 팩톨루스(Pactolus) 강이나 포토지(Potosi) 광산으로 보내지 않고, 값진 진주이신 그 자신에게로 초대하신다.
둘째, 그들은 어떻게 해서 그로부터 이런 참된 금을 얻을 수 있는가? 그들은 그것을 사야만 한다. 이것은 매우 적절하지 못한 말처럼 들린다. 그처럼 가나한 자들이 어떻게 금을 살 수 있을까? 하지만 그들은 "돈없이, 값없이" 포도주와 젖을 사듯이(사 55:1) 그리스도에게서 사면된다. 그들은 무엇인가를 내놓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반드시 가치 있는 대가인 것만은 아니다. 다만 참된 부요를 받아들일 만한 자리를 마련하기만 하면 된다. "죄와 자만의 생각을 버리고, 가난하고 빈 마음을 품은 채 그리스도께 오라." 그리하면 그는 그의 감추어진 보화를 가지고 너를 충만케 하여 주실 것이다.
[2] 이 사람들은 벗은 몸으로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어디서 그들이 옷을 얻을 수 있다는 것과 그리고 그 옷이 능히 그들의 벗은 것과 부끄러움을 가려 줄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신다. 이런 옷을 그들은 그리스도로부터 받아야 한다. 그리고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해 주시는 흰옷을 입기 위해서는 그들이 지금 걸치고 있는 더러운 누더기를 벗어 던져야만 한다. 그 흰옷이란 그리스도 자신의 의를 가지고 그들을 의롭게 여겨 주시며, 그리고 그들을 거룩하고 성결하게 하는 옷이다.
[3] 그들은 눈이 멀었다. 그리하여 주님은 그들에게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권면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그들의 지혜와 이성을 버리고, 그리스도의 말씀과 그의 성령에 따라 순종하라는 권면이다. 그리하면 그들의 눈이 떠져서 그들이 가는 길과 그 끝이며, 그들의 의무와 그들의 참다운 이해 관계가 어떤 것인지를 밝히 볼 수 있게 될 것이다. 그리고 또 새롭고도 영광스러운 광경이 그들의 영혼 앞에 전개될 것이다. 그들 앞에 전개될 새 세계는 아름답고 찬란한 것들로 꾸며질 것이다. 그리하여 이 찬란한 광채는 금방 어둠의 권세에서부터 놓여 나온 사람들에게 황홀함을 안겨 줄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처럼 경솔한 심령들에게 주시는 그리스도의 지혜롭고 선하신 권면이시다. 그들이 그의 권면을 따르면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명예에 입각해서 그들에게 주신 그 약속이 꼭 실현되게 하실 것이다.
5. 그리스도께서는 그런 죄많은 사람들일지라도 그의 훈계와 충고를 반드시 따르도록 크고 은혜로우신 격려의 말씀을 덧붙여 주신다(19,20절). 그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1) 그는 매우 진실되고도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씀하신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심한 말을 하며 엄히 꾸짖는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너희들의 영혼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내가 만일 너희의 영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나는 너희들의 그처럼 죄악된 미지근함과 헛된 신념에 대해 그렇게 공개적으로 책망하거나 또는 이를 고쳐 주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너희를 미워한다면, 너희 멋대로 하도록 내버려두며, 죄로 말미암아 끝내는 너희 자신이 멸망하도록 버려둘 것이다." 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채찍에 의한 징계를 그들을 위한 하나님의 선의의 표시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리고 그 말씀에 따라 열심히 회개하고 그들을 치는 분에게로 돌아서야 한다. 친구의 험상궂은 얼굴과 상처가 원수의 아첨하는 웃음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2) 그들이 만일 그의 훈계를 따른다면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에게 줄 귀한 것들을 준비해 두고 계신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20절).
[1]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죄인들의 마음의 문을 찾아가시기를 즐겨하신다. 그는 자비와 친절한 마음을 가지시고 그들을 찾아 나서신다.
[2] 그리스도는 그 문이 닫혀 있다는 것을 아신다. 인간의 마음은 무지와 불신앙과 죄악된 편견 때문에 본성적으로 그리스도를 향해 닫아 놓고 있다.
[3] 그리스도는 그 마음의 문이 닫힌 것을 보고도 즉시 철수하시지 않으신다. 그는 그의 머리가 이슬에 젖을지언정 문이 열리기를 은혜롭게 기다리신다.
[4]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일깨우기 위해 모든 가능한 방법을 다 쓰시며 그들로 하여금 문을 열게 만드신다. 그는 그의 말씀으로 그들을 부르시며, 그의 성령의 충동으로 그들의 양심을 두드리신다.
[5] 그리스도에게 문을 열어 드리는 사람은 그의 임재를 맞게 되고, 커다란 위로와 도우심을 받게 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그들과 함께 식사를 나누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있는 좋은 것들을 취하실 것이다. 그는 그의 좋은 열매를 드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장 좋은 대접의 일부를 가져가실 것이다. 만일 그가 보잘 것 없는 것으로 대접받게 된다면 그가 얼마나 보잘 것 없는 것을 가져가실 것인가! 그는 새로운 은혜와 위로를 가져다주심으로 그들의 신앙과 사랑과 기쁨을 새롭게 활동하게 만들어 주실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통해 그리스도와 그의 회개한 백성들은 함께 즐거운 잔치에 참예할 것이다. 그런데 완고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마음의 문을 열어 주기를 거부한 죄인들은 얼마나 귀한 것을 잃어버렸을 것인가!
Ⅲ. 이제 우리는 이 편지의 결론 부분에 이르게 되었다. 여기에는 다른 편지에서와 마찬가지로 다음과 같은 내용들이 들어 있다.
1. 이기는 신자들에게는 다음과 같은 약속이 주어졌다. 그 약속의 내용은 이런 것들이다.
(1) 이 교회가 전적으로 미지근함과 자만심 때문에 굴복 당하고 쓰러져버린 교회처럼 보이지만, 그리스도의 책망과 권면의 말씀에 따라 새로운 열심과 활동력을 소생시켜서, 영적인 면에서 승리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2) 만일 그들이 그렇게 한다면 이전에 지은 모든 죄는 용서받고 뿐만 아니라 상급까지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상급이란 어떤 것인가?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21절). 이 말씀의 뜻은 다음과 같다.
[1] 그리스도께서도 친히 시험과 시련을 겪으셨다.
[2] 그리스도께서는 그 모든 시련을 이기셨고 단순한 정복자 이상의 분이 되셨다.
[3] 그 시련과 승리의 상급으로서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 하나님의 보좌에 함께 앉으시게 되었다. 그러한 영광은 그가 아버지와 함께 영원 전부터 가지고 계신 것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구세주로서의 그의 구원의 사업을 완성시킨다는 보증으로서 그 영광을 아버지의 손에 위탁하고 그 자신은 땅에 내려 오셨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그 일을 완성하심으로 해서 아버지와 같은 영광의 자리에 나가시기 위해 Pignus reposcere - 즉 그 보증을 되찾으신 것이다.
[4] 그리스도와 함께 시험과 승리에 동참한 사람은 따라서 그의 영광에도 동참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그의 보좌에 앉을 것이다. 그 보좌는 세상 끝날에 세상을 심판하는 심판의 보좌이며, 영원히 빛날 영광의 보좌이며, 그리스도와 연합됨으로 말미암아 머리되신 그분의 신비한 몸으로서 빛날 보좌이다.
2. 이제 전반적으로 경각심을 일깨우는 말씀과 함께 모든 말씀이 끝을 맺게 되었다(22절). 그 말씀은 곧 이 편지서를 받아 볼 사람들이 그 내용을 사사로이 풀거나 또는 어떤 특정한 교회를 위해 가르치거나 책망하거나 시정시키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 온 세상에 속한 모든 그리스도의 교회에 해당되는 말씀임을 생각하게 하여 주는 말씀이다. 그리고 또 여기에 나오는 교회들의 뒤를 이어 일어날 교회들에서도 그들의 은혜와 죄의 면에서 유사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니만큼, 그들 역시 하나님께서 여기 나오는 교회들을 대하신 것과 같은 대우를 받으리라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여기에 나오는 것은 모든 세대를 위한 하나의 전형이다. 따라서 똑같이 충성되고 열매맺는 교회는 똑 같은 상급을 받을 것이며, 충실치 못한 교회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환난을 겪어야 한다는 것을 기대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의 어떤 교회들을 대하시는 품은 세상의 다른 부분들에 대해 교훈을 주는데 유용하게 이용되고 있다. "하나님의 집에서 심판이 먼저 시작된다면, 하나님의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의 그 마지막이 어떠하겠는가?" (벧전 4:17) 이렇게 해서 이 책의 서신 부분인, 아세아에 있는 일곱 교회들에 보내는 그리스도의 메시지가 끝났다. 이제 우리는 예언의 부분을 살펴 볼 때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