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강 장로의 자격(4)

딤전3:1-7 장로의 자격(4)


딤전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근신하며 아담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딤전3:4 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단정함으로 복종케 하는 자라야 할지며

딤전3:5 (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아보리요)

딤전3: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딤전3: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딤전3:1 미쁘다 이 말이여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미쁘다 이 말이여.”

사도 바울은 어떤 사실을 강조하고 싶을 때, 이와 같은 표현을 종종 사용했습니다. 여기에 사용된 “미쁘다”(trustworthy)라는 말은 “미덥다, 진실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바울이 “미쁘다”고 한 사실은 무엇입니까? 바로 뒤에 나타납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 선한 일을 사모한다 함이로다.”

이 말씀은 아무도 반박할 수 없을 만큼 자명한 사실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은 이 말씀을 자세하게 따로 설명하거나 입증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이 점을 강조하기 위해서, 바울은 “미쁘다 이 말이여”라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을 맡은 사람은 누구입니까? 지금 바울은 디모데에게 편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 당시 디모데는 에베소 교회에서 사역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에베소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을 맡은 자가 과연 누구였습니까?


행20:17 바울이 밀레도에서 사람을 에베소로 보내어 교회 장로들을 청하니

행20:28 너희는 자기를 위하여 또는 온 양떼를 위하여 삼가라 성령이 저들 가운데 너희로 감독자를 삼고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하셨느니라


이와 같이 에베소 교회에서 감독의 직분을 맡은 자들은 에베소 교회의 장로들이었습니다. 이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장로가 하는 역할은 하나님의 교회에서 하나님의 양 무리를 감독하는 일입니다.

장로가 하나님의 교회를 감독하는 일은 분명 선한 일입니다. 이는 세상의 일과는 구별되는 거룩한 일이며, 하나님에게서 받은 영광스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장로에게는 그의 직분에 합당한 자격들이 요구됩니다. 본문에는 열 다섯 가지의 자격들이 나타납니다.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이는 장로의 첫째 자격이면서, 그 뒤에 나오는 나머지 자격들을 모두 총괄하는 것입니다. 모든 양 무리가 기쁨으로 장로를 본받으며 따르기 위해서, 장로는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장로는 네 가지 분야에서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첫째, 장로는 그의 도덕성에서 책망 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둘째, 장로는 그의 가정 생활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셋째, 장로는 그의 영적 성숙함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넷째, 장로는 그의 사회적 평판에서도 책망할 것이 없어야 합니다.


딤전3: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1)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2) 절제하며 3) 근신하며 4) 아담하며 5) 나그네를 대접하며 6) 가르치기를 잘하며


여기에 기록된 여섯 가지의 항목들은 모두 장로의 도덕성에 관한 것들입니다. 장로는 이들 도덕적인 문제들과 관련해서 흠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이들 여섯 가지 항목에 대해서는 이미 차례대로 살펴보았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간단하게 간추려봅니다.

첫째, 장로는 한 아내의 남편이 되어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여자 문제로 인해서 책망할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장로는 한 여자의 남자가 되어야 합니다. 장로는 하나님이 그에게 허락하신 배필 한 여자만을 전심으로 생각하며, 온 마음을 다해 그 여자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둘째, 장로는 절제해야 합니다.

여기서의 절제는 술을 마시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어떤 사람에게 술 문제로 인해서 책망할 것이 있으면, 그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장로는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하기 때문에, 그의 삶은 지극히 성결해야 합니다. 

셋째, 장로는 근신해야 합니다.

근신(勤愼)은 삼가는 것, 곧 조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장로는 삼가 모든 일에 바르게 처신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장로는 생각도 깊어야 하고, 말하는 것도 신중해야 하고, 행동하는 것도 품위가 있어야 합니다.

넷째, 장로는 아담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모양을 의미합니다. “아담하다”라는 말의 원 뜻은 잘 정돈되어 질서가 잡힌 것을 가리킵니다. 장로는 되는대로 아무렇게나 살 수 없습니다. 장로는 교회 안에서도 교회 밖에서도 늘 아담해서,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은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다섯째, 장로는 나그네를 대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있는 모든 것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에 불과합니다. 이 사실을 제대로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장로는 물질에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장로는 베푸는 일에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여섯째, 장로는 가르치기를 잘해야 합니다.

양 무리는 순진해서 이단 사상에 빠지기가 쉽습니다. 장로는 양 무리가 그릇된 길을 가지 않도록, 하나님의 말씀을 바르게 가르쳐야 합니다. 이를 위해 장로는 먼저 그 자신이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딤전3:3 1)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2) 구타하지 아니하며 3) 오직 관용하며 4) 다투지 아니하며 5) 돈을 사랑치 아니하며


여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항목들도 모두 장로의 도덕성에 관한 것들입니다. 장로가 책망할 것이 없으려면, 이들 다섯 가지 항목에도 문제가 없어야 합니다. 오늘은 이들 다섯 가지 항목들 가운데서, 네 가지 항목들을 차례대로 살펴보겠습니다.


약2: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순종하지 않으면, 그 사람의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기쁨으로 받고, 하나님의 말씀을 즐거운 마음으로 순종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로, 장로는 술을 즐기지 아니합니다.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1) 정의

“술을 즐기다”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파로이노스”(πάροινος)입니다. 이는 “파라”(beside, 곁)와 “오이노스”(wine, 포도주)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이 낱말의 문자적 의미는 “beside wine,” 곧 “포도주 곁에 있다,” 또는 “포도주를 가까이 하다”라는 뜻입니다.


(2) 강조점

오늘 본문 2절에서, 장로는 절제해야 함을 이미 말씀했습니다. 절제에 해당하는 헬라어의 원 뜻은 “wineless, or unmixed with wine,” 곧 “포도주가 전연 없는”입니다. 사람이 포도주에 취하면, 정신이 몽롱해 집니다. 그런 사람은 영적 지도자인 장로가 될 수 없습니다.

그러면 장로가 절제해야 하는 것과 장로가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하는 것과의 차이점은 무엇입니까? 전자는 장로의 거룩한 직무를 위해서 그의 영이 맑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후자는 장로의 거룩한 직무를 위해서 그의 삶이 성결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딤전5:23 이제부터는 물만 마시지 말고 네 비위와 자주 나는 병을 인하여 포도주를 조금씩 쓰라


그 당시에는 물의 질이 좋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포도주가 식수처럼 사용되었습니다. 물론 포도주에는 많은 양의 물을 탔습니다. 보통은 일 대 팔, 그러니까 포도주 일에 물을 팔 정도로 탔습니다. 포도주에 들어있는 알코올을 희석시키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와 같이 그 당시의 포도주는 술이라기보다는 음료수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모데는 포도주를 전연 입에 대지 않고, 물만 마셨습니다. 그러다 보니 디모데의 건강이 나빠졌습니다. 오염된 물이 비위에 맞지를 않아서, 디모데는 자주 위장병을 앓아야만 했습니다. 

그러면 왜 디모데는 포도주를 전연 마시지 않고, 계속해서 물만 식수로 사용했습니까? 그는 장로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를 바라보며, 자기를 따라오는 모든 양 무리 앞에서 성결한 삶의 본을 보이기 위해 자신의 최선을 다했던 것입니다. 


(3) 적용

장로는 술을 즐기지 말아야 합니다. 이 말씀의 원 뜻은 장로가 포도주를 가까이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로는 포도주를 비롯한 모든 술을 멀리 해야 합니다. 그래야 장로는 영적 지도자로서, 모든 양 무리에게 성결한 삶의 본을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컨대 장로가 술집에 드나들면, 교인들에게 덕이 되겠습니까? 장로가 자기 집에 양주병들을 진열해놓고 있으면, 과연 본이 되겠습니까? 명절이라고 해서 장로가 포도주나 양주를 선물로 돌리면, 과연 모범이 되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모든 양 무리는 장로를 주목하고 있습니다. 장로를 본 받고, 장로의 뒤를 따르기 위해서입니다. 장로는 포도주를 가까이 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가까이 해야 합니다. 장로는 술친구들과 어울리지 말고, 하나님의 백성인 성도들과 어울리기를 기뻐해야 합니다.


살전5:22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를 성도로, 거룩한 백성으로 삼아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날마다 성결한 삶에 힘씀으로서, 예수님의 거룩하신 형상을 본받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장로는 구타하지 아니합니다.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는 자들이 쉽게 범하는 실수 가운데 하나가 바로 구타하는 것입니다. 또한 술을 마시지 않더라도, 성질이 급해서 쉽게 손이 올라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행동은 양식에 어긋납니다. 더욱이 이는 영적 지도자인 장로가 해서는 결코 안 될 행동입니다. 


(1) 정의

“구타”(毆打)는 사람을 때리고(때릴 毆) 치는 것(칠 打)을 의미합니다. 단지 우리말 성경에는 이것이 동사형으로 번역되었지만, 실제 헬라어 성경에서는 “구타하는 자”라고 명사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 원 뜻은 “a beater, 때리는 자,” 또는 “a striker, 치는 자”입니다.

예컨대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때렸습니다. 그리고는 거반 죽은 것을 버리고 갔습니다. 여기에서 “때리다”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의 “구타하다”라는 단어입니다.

또한 바울은 빌립보에서 어떤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그러자 그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서 관원들에게로 끌고 갔습니다. 무리가 그들의 옷을 찢어 벗기고, 많이 쳤습니다. 여기에서 “치다”라는 단어가 바로 오늘 본문의 “구타하다”입니다. 

이와 같이 구타는 사람을 때리고 치는 것을 의미합니다. 물론 이것은 부모가 자녀를 징계하기 위하여 그들의 몸에 손을 대는 것과는 의미가 다릅니다. 구타는 악의적인 행동이지만, 징계는 선의의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로는 교회를 감독하며, 모든 양 무리를 사랑으로 잘 보살펴야 할 책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장로가 남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지는 못할 망정, 도리어 남에게 폭력으로 상처를 입혀서야 되겠습니까?

따라서 장로는 어떠한 경우에도 구타하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폭력을 구사하는 사람, 가정에서 폭행을 일삼는 사람, 사회 생활을 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손찌검을 하는 사람은 거룩한 직분을 감당해야 할 장로로서의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2) 언어의 폭력

우리 몸에는 여러 지체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서 주로 손이나 발이 구타할 때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러나 우리 몸에는 손과 발 이상으로 아주 위험한 폭력의 도구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의 혀입니다. 바로 우리의 혀를 놀려서 입 밖으로 나오는 독한 말입니다.


시55:20 저는 손을 들어 자기와 화목한 자를 치고 그 언약을 배반하였도다(신체적 폭력)

시55:21 그 입은 우유기름보다 미끄러워도 그 마음은 전쟁이요 그 말은 기름보다 유하여도 실상은 뽑힌 칼이로다(언어의 폭력)


이 시를 기록한 다윗은 용맹스러운 군인이었습니다. 그는 용사 중의 용사였습니다. 그러한 다윗도 그의 적들이 내뱉는 언어의 폭력만큼은 몹시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기에 다윗은 이와 같이 기도했습니다.


시64:1 하나님이여 나의 근심하는 소리를 들으시고 원수의 두려움에서 나의 생명을 보존하소서

시64:2 주는 나를 숨기사 행악자의 비밀한 꾀에서와 죄악을 짓는 자의 요란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시64:3 저희가 칼 같이 자기 혀를 연마하며 화살 같이 독한 말로 겨누고

시64:4 숨은 곳에서 완전한 자를 쏘려 하다가 갑자기 쏘고 두려워하지 않도다


사실 언어의 폭력으로 인해서 희생을 당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컨대 왕상21장에 나오는 나봇이 그러했습니다. 나봇은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꾀한 거짓 증언, 곧 언어의 폭력 때문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포도원도 아합 왕에게 빼앗겼습니다.


마26:59 대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예수를 죽이려고 그를 칠 거짓 증거를 찾으매

행6:10 스데반이 지혜와 성령으로 말함을 저희가 능히 당치 못하여

행6:11 사람들을 가르쳐 말시키되 이 사람이 모세와 및 하나님을 모독하는 말하는 것을 우리가 들었노라 하게 하고


이와 같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 것도 거짓 증인들이 행한 언어의 폭력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또한 기독교 최초의 순교자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것도 역시 거짓 증인들이 행한 언어의 폭력 때문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장로는 구타하지 아니해야 합니다. 장로는 신체적인 폭력뿐만 아니라, 악의에 찬 독설이나 근거 없는 말질과 같은 언어의 폭력도 행사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장로의 뒤를 따라야 하는 모든 양 무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시141:3 여호와여 내 입 앞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하나님이 우리의 입에도 파수꾼을 세우시고, 우리 입술의 문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해서 우리가 말을 할 때는 언제나 신앙적인 말만 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언제나 남들에게 기쁨과 용기와 희망을 주는 말만 할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셋째로, 장로는 관용합니다.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여기에 “오직”이라는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이는 그 앞에 나오는 말씀과 그 뒤에 나오는 말씀을 분명하게 대조하기 위한 용도로 쓰여진 단어입니다. 장로는 구타하지 아니합니다. “그와는 달리, 그와는 정반대로” 장로는 어떠합니까? 장로는 관용합니다.


(1) 정의

우리말의 “관용”(寬容)은 너그러울 관(寬)자와 얼굴 용(容)자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 뜻은 “너그럽게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다른 사람의 실수나 잘못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싸주고 덮어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관용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피에이케”입니다. 이는 “에피”(on, 위에)라는 전치사와 “에이코스”(reasonable, 도리에 맞는)라는 단어가 합성된 것입니다. 그 뜻은 무슨 일이든지 감정에 치우쳐서 성급하게 굴지 않고, 합리적으로 차분하게 해결해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실 폭력을 사용하는 것은 자신의 감정을 이기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할 장로는 자신의 감정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장로는 자신의 감정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고, 언제나 관대하고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다른 사람들을 대해야 합니다.


(2) 예수님의 본


고후10:1 너희를 대하여 대면하면 겸비하고 떠나 있으면 담대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


예수님은 우리에게 관용의 본을 온전히 보이셨습니다. 예컨대 하루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간음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왔습니다. 그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는 전혀 관용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가련한 여인을 향하여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8:10 예수께서 일어나사 여자 외에 아무도 없는 것을 보시고 이르시되 여자여 너를 고소하던 그들이 어디 있느냐 너를 정죄한 자가 없느냐

요8:11 대답하되 주여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치 말라 하시니라


이와 같이 예수님의 관용은 상한 갈대를 꺽지 아니하시고, 꺼져 가는 심지를 끄지 아니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관용이 가장 분명하게 잘 나타났을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였습니다.


눅23:34 이에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시더라....


예수님은 아무런 죄가 없으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대적하는 자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그의 원한을 갚아달라고 하나님에게 간청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해달라고 하나님에게 기도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까지도 용서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도무지 용서하지 못할 사람이 과연 있을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이 시간 우리 마음에 원수로 남아 있는 사람을 온전히 용서하기 바랍니다.


(3) 적용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 모두에게 관용하십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예수님을 본받아 장로도 관용해야 하며, 모든 양 무리도 관용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면 관용할 수 있습니까? 관용의 비결은 무엇입니까?


히6:10 하나님이 불의치 아니하사 너희 행위와 그의 이름을 위하여 나타낸 사랑으로 이미 성도를 섬긴 것과 이제도 섬기는 것을 잊어버리지 아니하시느니라(우리가 잘한 것)

히8:12 내가 저희 불의를 긍휼히 여기고 저희 죄를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우리가 잘못한 것)


이와 같이 하나님은 우리가 잘한 것은 잊어버리지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잘못한 것은 완전하게 잊어버리십니다. 다시 기억하지 아니하십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관용의 비결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누가 우리에게 잘못을 행했습니까? 잊어버립시다. 그것을 생각하면, 괜히 속만 상하고 화만 날뿐입니다. 좋은 점만을 생각하십시다. 그리하면 자연히 너그러운 마음, 관용의 마음이 생길 것입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 모두도 관용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넷째로, 장로는 다투지 아니합니다.


딤전3: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장로는 솔선수범해서 교회의 평화를 도모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데 장로가 다투어서 교회가 하나되지 못하거나, 교회의 화목이 깨뜨려진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는 책망을 받아 마땅하며, 그에게는 장로의 자격이 없습니다.


(1) 정의  

“다투지 아니하며”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마코스”입니다. 이는 부정을 의미하는 “아”(not, 아니며)와 “마코스”(quarrelsome, 다투기 좋아하는)가 합쳐진 단어입니다. 그 의미는 말 그대로 “다투지 않는, 또는 다투기를 좋아하지 않는”입니다.

앞에 나오는 “구타”가 실제로 행해지는 폭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여기서의 “다툼”은 그 사람의 기질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들과의 화합이나 일치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와 같은 사람은 언제나 자기의 주장만을 고집합니다.

또한 “다툼”은 “관용”과도 관련이 있습니다. 관용하면 다투지 않습니다. 오른편 뺨을 치면 왼편을 돌려 대고,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며, 오 리를 요구하면 십 리를 동행하는데 무슨 다툼이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관용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 다투지 아니함입니다.


(2) 바울의 실수


행23:1 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행23:2 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행23:3 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행23:4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행23:5 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희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바울이 우리에게 아름다운 본을 많이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때만큼은 그러하지를 못했습니다. 바울은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억울한 일을 당하면 참기가 어렵습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서 우리 자신을 변호하든지, 우리에게 부당한 일을 행한 사람과 다투려고 듭니다. 


(3) 예수님의 본


마12:19 그가 다투지도 아니하며 들레지도 아니하리니 아무도 길에서 그 소리를 듣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과는 달리,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온전한 본을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부당한 처사를 당하시더라도, 결코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입으로도 아무런 실수나 잘못을 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에게는 전혀 죄가 없으십니다.

예컨대 예수님이 심문을 받으셨을 때를 생각해봅시다. 마26장을 보면, 예수님은 대제사장 가야바의 집에서 먼저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얼굴에 침 뱉으며, 주먹으로 치기도 하며 손바닥으로 때리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곧이어 마27장에서 예수님은 로마의 총독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부당하게 고소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와도 다투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아무에게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또한 그 뒤에 눅23장을 보면, 예수님은 헤롯 왕 앞에서도 심문을 받으셨습니다. 그때도 예수님은 심하게 고소를 당하시며, 많은 무시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람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질문에 아무 말도 대답지 않으셨습니다.


벧전2:21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2:22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사실 그때 예수님이 한 마디만 말씀하셔도, 땅이 갈라지며 예수님을 욕하는 자들을 삼켜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다투지 아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욕하시거나, 그들을 조금도 위협하지 아니하셨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면서, 그들을 위하여 이와 같이 기도해주셨습니다.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진실로 예수님은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복을 빌어주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다투지 아니함의 본을 끼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그의 자취를 따르기를 바라십니다. 예수님을 본받아, 우리도 다투지 아니하기를 바랍니다.


(4) 적용

때로는 우리가 억울한 일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속이 상하고, 마음도 고통스럽습니다. 그럴지라도 우리는 다투지 말아야 합니다. 특별히 장로는 이 일에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부당한 처사를 당했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벧전2:23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벧전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이 어떠한 경우에서든지 다투지 아니하셨던 비결이 어디에 있었습니까? 예수님은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맡기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이와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하나님에게 맡기셨습니다.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관이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모든 것을 공의로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장차 자신에게 영광이 주어질 것임을 분명하게 아셨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억울한 일을 당하셨습니까? 그럴지라도 다투지 마십시오. 공의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에게 부탁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다투는 순간, 그 복은 사라지고 말 것입니다.


마5:9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화평케 하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다투기를 좋아하는 자가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든지 화평을 이룰 수 있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