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3강 아마샤와 아모스

제43강 아마샤와 아모스(7:10-17)
 
7:10-17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네가 이르기를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 이삭의 집을 향하여 경계하지 말라 하므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아모스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벧엘에 가서 이스라엘의 멸망을 선포했습니다. 이때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것을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편으로 여로보암 왕에게 무고를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직접 아모스를 만나서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고 경고했습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는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특별한 사명을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마샤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말씀을 다른 사람들도 듣지 못하도록 막았기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어떠한 벌을 받게 되는지를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선 오늘 읽은 본문을 세 대지로 나누어서 살펴봅니다. 첫째 대지는 여로보암에 대한 아마샤의 이간으로서, 10∼11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둘째 대지는 아모스에 대한 아마샤의 경고의 말로서, 12∼13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셋째 대지는 아마샤의 말에 대한 아모스의 답변으로서, 14∼17절에 있는 말씀입니다.
첫째 대지와 둘째 대지의 주인공은 아마샤입니다. 셋째 대지의 주인공은 아모스입니다. 그리고 첫째 대지에서는 왕이 공격의 대상으로 나오고, 보고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둘째 대지에서는 공격 대상이 성전이고, 서로간에 대면해서 말하는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셋째 대지는 우리가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14∼15절에서 아모스는 자기가 왜 예언을 하는지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16∼17절에서 아모스는 여호와의 말씀으로 아마샤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그럼 우리가 한 절씩 읽어가면서 생각해보기로 합니다.
(7:10) 때에 벧엘의 제사장 아마샤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에게 기별하여 가로되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그 모든 말을 이 땅이 견딜 수 없나이다
여기서 말하는 벧엘은 금송아지가 있는 곳입니다. 이스라엘의 종교적 중심지 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중심지는 사마리아였습니다. 아마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아모스의 말을 듣고 동요하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아마샤는 자신의 지위가 위태함을 느꼈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아모스가 4:14에서 보는 것과 같이 벧엘의 단들의 뿔도 꺾여 땅에 떨어진다는 등의 예언을 했기 때문에 아마샤는 아모스를 대단히 못마땅하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샤는 자기의 힘만으로는 이 일을 감당할 수 없기에 왕의 힘을 빌리려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 내용에서 볼 수 있듯이 이것은 이간질이 분명합니다. 아마샤가 아모스를 고소한 내용을 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족속 중에 아모스가 왕을 모반하나니.\" 모반이라는 것은 반역 행위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하나님 보시기에 옳지 않다고 여겨질 때에 왕을 바꾸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삼상16:1∼13에 보는 바와 같이 사무엘이 사울 대신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서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은 것입니다. 또 왕하9:1∼10에서 보는 바와 같이 엘리사가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서 아합의 아들 여호람 대신에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운 경우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섭리에 대해서 이루어진 것이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아마샤는 아모스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줄 모르고 모반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 땅이 견딜 수 없느니라.\"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냐하면 아모스가 9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왕과 성소에 대한 파멸을 예언했기 때문입니다.
(암7:9) 이삭의 산당들이 황폐되며 이스라엘의 성소들이 훼파될 것이라 내가 일어나 칼로 여로보암의 집을 치리라 하시니라
종교적인 구심점과 정치적인 구심점이 모두 다 파멸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땅이 그 말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11절에서 아마샤는 아모스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서 증거를 삼고 있습니다. 제가 11절을 읽어봅니다. 여러분, 여기서 잘못 인용된 것이 무엇인지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암7:11) 아모스가 말하기를 여로보암은 칼에 죽겠고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땅에서 떠나겠다 하나이다 하고
우선 9절에 보면 \"여로보암의 집\"이라고 했는데, 11절에서는 이것을 \"여로보암\"으로 바꾸었습니다. 아모스는 죄로 인한 하나님의 심판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질 것을 예언했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정치적인 문제로 바꾸어서 자기에게 유리하게 전달한 것입니다. 말의 전달이라는 것은 하와 때부터 시작해서 늘 문제가 되어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담과 하와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 그런데 하와는 뱀에게 말할 때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하와는 그것을 바꾸어서 \"죽을까 하노라\"고 말했습니다.
옛날 독일 뮌헨 대학에서 말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조사 연구한 적이 있습니다. 첫 출발자가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내용은 이러합니다. 옛날에 한 성자가 마을로 지나가신다는 소식을 듣고 신앙심이 깊은 부인이 이 성자를 자기 집에 모시기 위해서 거리로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사이에 그 부인의 아들이 우물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이 부인은 성자의 마음에 상처가 갈까봐 우물을 헝겊으로 덮어두고 모른 척하고 정성껏 성자에게 식사를 대접했습니다. 성자는 식사 후에 이 집의 아이를 데리고 오면 축복 기도를 해주겠다고 했습니다. 부인은 그때서야 성자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자기 아이가 우물에 빠졌음을 알렸습니다. 성자는 부인을 데리고 우물로 가서 뚜껑을 열어보았습니다. 그랬더니 그 아이가 빠져 죽은 것이 아니고 물위에 앉아서 놀고 있었습니다. 부인은 너무나 기뻐서 밧줄을 내려 아이를 올리니까 아이가 성자를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분이 우물 속에서 내 곁에서 나를 잡아주셨습니다.\"
이런 내용의 이야기를 첫째 사람이 둘째 사람에게, 둘째 사람은 셋째 사람에게 전하여 열번째 사람에게 전해지도록 하고 그 열번째 사람이 그 이야기를 되풀이 하도록 했습니다. 그랬더니 이야기의 내용이 엉뚱하게 이렇게 바뀌어졌다는 것입니다. 옛날에 낯선 한 사람이 동네에 와서 하룻밤 잘 곳을 청했습니다. 그런데 그 동네에는 돈 많은 과부가 있었는데 그 부인이 이 낯선 사람을 맞이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식사 중에 과부의 막내 아이가 우물에 빠져 아우성을 치면서 야단을 하자 과부는 그 아이가 시끄러워서 덮개로 우물을 막아버렸다는 것입니다. 그때 다른 사람이 와서 아이를 찾았습니다. 과부가 대답도 하지 않자 다른 사람이 이곳저곳을 찾다가 결국 우물 안에서 익사한 아들을 찾았다는 것입니다. 완전히 다른 내용으로 둔갑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그렇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하기 좋아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그대로 인용하지 않고 각색을 해서 훨씬 더 재미있게, 그리고 자기의 상상력을 총동원해서 말하기를 즐겨합니다. 그리해서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가고 나면 \"아는 여자가 있단다\"는 말이 어느새 \"그 여자와 결혼했단다\"는 말로 발전하기 마련인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는 우리에게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약3:2∼6)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 능히 온 몸도 굴레 씌우리라 우리가 말을 순종케 하려고 그 입에 재갈먹여 온 몸을 어거하며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 사공의 뜻대로 운전하나니 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우리는 무슨 말을 하든지 늘 진실된 말, 유익한 말, 그리고 꼭 필요한 말을 할수 있도록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아마샤는 지금까지 아모스가 전한 메시지가 아모스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인정치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지 않고 사람의 말로 듣는 데 문제가 있었던 것입니다.
(살전2:13)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 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우리는 강단에서 흘러나오는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어야 합니다. 전하는 사람이 과거에 어떠했느냐? 뽕나무를 기르는 자였느냐, 목자였느냐? 이것이 중요치 않습니다. 지금 그를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그것을 믿으면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바라보지 말고, 그의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베드로를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삼천 명을 회개시켰습니다. 오천 명을 회개시켰습니다. 그때 만일 사람들이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한 사람이다\"라고 그의 흠을 보았다면 어떻게 저들이 베드로가 전하는 메시지를 듣고서 회개하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겠습니까? 바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본시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핍박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바울이 나중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한 사도가 되어서 놀라운 역사를 일으켰습니다. 만일 사람들이 바울의 과거만 바라보면서 바울이 전하는 메시지를 거부했더라면 어떻게 바울이 엄청난 역사를 감당할 수가 있었겠습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와 바울을 바라보지 않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바라볼 때 놀라운 역사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말씀을 전하는 자 그 자체를 바라보지 말고, 그를 통해서 들려오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여야 할 것입니다.
12절 말씀을 읽어봅니다.
(7:12) 아마샤가 또 아모스에게 이르되 선견자야 너는 유다 땅으로 도망하여 가서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아마샤는 사람을 벧엘에서 사마리아로 보냈습니다. 왕에게 보고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자신은 벧엘에서 아모스를 만났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말을 했습니다. \"선견자야!\" 선견자라는 말은 묵시를 보는 자라는 뜻입니다. 사실 아모스는 이미 묵시 세 개의 묵시를 보았습니다. 아마샤는 아모스에게 유다 땅으로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곧 박해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공갈 반 회유 반으로 그렇게 말한 줄 압니다. \"거기서나 떡을 먹으며 거기서나 예언하고.\" 아마샤는 아모스를 마치 삯꾼처럼, 직업적인 선지자처럼 생각했던 것입니다.
12절에서는 하라는 것이 적혀 있고, 13절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이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7:13) 다시는 벧엘에서 예언하지 말라 이는 왕의 성소요 왕의 궁임이니라
유다 땅에서는 예언하고, 벧엘에서는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왕의 소유지에서 왕을 반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곳은 왕의 세력 하에 있습니다. 목숨이 아깝거든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기에 대해서 아모스가 무엇이라고 말을 했습니까? \"고맙다. 당신은 정말 나를 생각해주는구나.\" 이렇게 말했습니까? 만약 아모스가 그랬다면 그는 참 선지자가 아니었을 것입니다.
제가 신학교 다닐 때 어떤 교수님이 했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주의 종은 늘 준비해야 할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했습니다. 첫째는 말씀 준비입니다. 어디에 가서든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두번째는 이사갈 준비라고 했습니다. 교회가 목사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목사가 교회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교인들이 목사를 원치 아니할 때는 언제라도 보따리를 싸서 이사갈 준비를 하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세번째가 죽을 준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순교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일사각오의 정신으로 목회를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모스에게는 투철한 사명감이 있었습니다.
14∼15절에서 아모스는 왜 자기가 예언을 하는지에 대해서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7:14∼15) 아모스가 아마샤에게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선지자가 아니며 선지자의 아들도 아니요 나는 목자요 뽕나무를 배양하는 자로서 양떼를 따를 때에 여호와께서 나를 데려다가 내게 이르시기를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 하셨나니
14절에는 \"나는\"이라는 대명사가 강조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15절에서는 \"여호와께서\"라는 말이 강조되어 있습니다. \"나는 과거에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자로 바뀌었다.\" 그 변화의 주역이 누구라는 것입니까?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내 뜻, 내 힘으로 그렇게 된 것이 아닙니다. 여호와께서 나를 택하시고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에 내가 그렇게 바뀌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나는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할 수밖에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마지막 16∼17절에서 아모스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아마샤를 질타하고 있습니다. 16절은 다음과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이제 너는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니라.\" 아모스는 하나님의 권위로써 아마샤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7절도 같은 말로 시작합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그 중간에는 아마샤의 말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과 사람의 음성이 강하게 대조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15절에서 아모스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마샤는 16절에서 \"이스라엘에 대하여 예언하지 말며\"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마샤의 말은 하나님의 뜻과는 전적으로 어긋나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마샤는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마땅할 수밖에 없습니다. 또 아마샤는 아모스를 이스라엘에서 쫓아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이 아마샤를 이스라엘 땅에서 비참하게 만들어서 쫓아내신다고 하셨습니다. 정반대의 결과가 되어 버리고 만 것입니다. 17절 말씀을 보십시다.
(7:17) 여호와께서 말씀하시기를 네 아내는 성읍 중에서 창기가 될 것이요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성읍 중에서\"라고 했습니다. 공공연하게 욕을 당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까? 아마샤의 아내가 그렇게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샤의 아내만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네 자녀들은 칼에 엎드러지며.\" 아마샤의 자녀들은 전쟁에 나가서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네 땅은 줄 띄워 나누일 것이며.\" 아마샤의 재산도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말 것입니다. 그렇다고 아마샤 자신은 무사하게 될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너는 더러운 땅에서 죽을 것이요.\" 이방 나라의 포로로 끌려가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이스라엘은 정녕 사로잡혀 그 본토에서 떠나리라 하셨느니라.\" 아마샤의 죄악은 이스라엘 국가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참된 하나님의 종의 사역을 막고 방해하던 아마샤 한 사람의 잘못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이 그의 아내, 그의 자녀, 그의 땅, 그 자신 및 그의 나라에까지 미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하나님의 종을 인간이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이 심판하시기 때문입니다. 비록 잘못하는 것이 있더라도 그를 위해서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을 대적하는 것은 곧 하나님을 대적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여러분, 노아의 경우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홍수 뒤에 노아가 포도원을 지었습니다. 포도 농사가 잘 되었습니다. 포도를 따서 저장해 놓았더니 그것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한 잔 두 잔 마시는 가운데 자기도 모르게 얼큰하게 취했습니다. 대낮에 수치스러운 것을 드러내놓고 잠을 자게 되었습니다. 노아의 세 아들 가운데 하나였던 함이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의 부끄러운 모습을 보았으면 그것을 덮어주어야지요. 그런데 함이 어떻게 했습니까? 자기의 두 형제, 셈과 야벳에게 가서 아버지의 허물을 들추어내면서 흉을 보았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셈과 야벳이 어떻게 했습니까? 아버지의 부끄러운 것을 보지 않기 위해서 뒷걸음질쳤습니다. 그리고 가지고 온 담요로 아버지의 부끄러운 것을 덮어주었습니다.
여러분,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아버지의 허물을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은 하나님의 복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끄러운 것을 덮어주지 아니하고 그대로 들추어내고 흉을 보았던 함과 그 자손 가나안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게 되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분명히 노아가 잘못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덮어주었던 셈과 야벳은 복을 받았지만 그것을 들추어내었던 함은 하나님의 저주를 받고 말았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가르침을 주는 이야기인 줄 압니다. 하나님의 종이 잘못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서 심판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일은 하나님께 맡기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셈과 야벳처럼 윗사람의 허물을 덮어주면서 그를 위해서 기도해줄 수 있는 모습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비판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하면서 늘 관용의 정신으로 다른 사람의 입장을 이해하며, 허물을 덮어줄 수 있는 저와 여러분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경배 찬양] 하늘에는 주께 영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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