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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자 : 미상(저작자 연락요망) 차 례
I. 서 론 ------------------------------------------ 2
A. 연구 목적과 한계 ------------------------------ 2
II. 본 문 ---------------------------------------- 3
A.구약성서의 메시야 ------------------------------ 3
B.신약성서 속에서의 예수의 여러 명칭들 ----------- 5
-1.메시야(그리스도) ---------------------------- 5
-2.인자 ---------------------------------------- 7
a.언어학적 분석 ----------------------------- 7
b.전승사적 분석 ----------------------------- 8
c.‘인자’전승에 관한 예수의 이해 ------------- 9
-3.하나님의 아들 ------------------------------- 10
III. 마 무 리 --------------------------------------- 12
참 고 문 헌 -------------------------------------- 13
I. 서 론
A. 연구 목적과 한계
공관 복음서에 나타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다양하게 표현되어 진다. ‘하나님의 아들’ ‘인자’ ‘메시야’ ‘유대인의 왕’등은 이러한 예가 된다. 하지만 공관 복음서의 기자들은 교회에 신앙의 근거를 제공하기 위하여 예수의 생애 동안에 일어났던 사건들을 다양한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최초의 신자들이 자신들의 언어로 표현하기 위하여 그들의 신앙으로 공식화 하였으며, 따라서 원래 예수가 생각했던 자기이해에 대하여 정확한 연구 없이는 판단할 수가 없다. 그러나 공관복음서 속에는 이러한 다양성 속에서의 하나의 관점을 표출 시킨다. 이는 바로 예수가 바로 구세주라는 것이다. 또한 각 복음서와 구약성서의 진술들은 서로 상반되기도 하고, 복음서 저자마다 여러 예수에 관한 명칭들의 사실을 증명시키는 작업에서 구약성서의 진술을 복음서에서 인용함였으므로 이 두 자료에 대한 심도깊은 연구는 병행되어져야 할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는 구약의 개념속에 메시아의 의미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의 4복음서에 나타나는 여러 개념들을 살펴봄으로 예수의 명칭들의 의미를 살피고 이에 대한 관계성과 예수 자신이 자신에 대하여 어떠한 자인식을 하였는지 찾고자 하는것을 목적으로한다.
II. 본 문
A. 구약성서의 메시야
구약 성서의 예언을 계승한 것들 중에는 후대의 희망의 메시지를 메시야-기름부은 자-를 통하여 지향하기도 하지만 많은 경우 이 단어의 의미는 왕의 칭호로 사용되어 왔다. 그러나 고대 근동에서도 머리에 기름을 붓는 의식은 일상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에서도 명백하게 기름을 붓는 의식 왕에게 행해졌다는 증거를 가지지 못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특히 남왕국에 있어서 이러한 기름붓는 전통은 성행하였다. 이에 대하여는 히타이트족에서 기원하였다고 이야기 하기도 하지만 어찌 되었던간에 이스라엘에서의 기름부음은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왕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으며, 이례적으로 구약성서 상에서 고레스에게도 이러한 기름부은 자라는 언급이 되어짐으로 바로 이러한 ‘기름부음 받는것’은 현세적 왕의 지위의 승계가 하나님으로 부터 되어진다는 개념이었음을 드러낸다. 따라서 역사적 의미에서 ‘메시야’를 칭할 때는 하나님으로 부터 혹은 절대적 권위로 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자라는 정치적 차원으로 이해 되어질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표현되는 것과는 달리 메시야에 관한 표현은 ’메시야 예언‘이라는 표현이 나타나기도 하는데 이는 종말론적 예언의 형태로 나타난다. 메시야적 희망에 있어서 메시야는 하나님의 나라를 이스라엘과 건설 할 도구로 나타나며 유대인들
은 이러한 미래적 희망에 절대적으로 반응하였다. 그리고 미래를 지향하는 메시야적 예언들은 대예언자들의 예언속에서 발견되어진다.
하지만 이러한 역사적 상황으로 이해되어지는 메시야의 개념과는 사뭇 다른 이러한 메시야의 예언은 어떤 경로에서 생겨나게 되었는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그러나 예언자들의 예언들은 메시야에 관하여 몇가지의 특이한 성격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는 이사야 9장에 나타나는 큰 빛의 묘사는 정치적 억압으로의 해방과 군사적 속박의 소멸을 보여준다.
5 침략자의 군화와 피묻은 군복이
모두 땔감이 되어서,
불에 타 없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7 그의 왕권은 점점더 커지고
-중략-
이제부터 영원히,
공평과 정의로 그 나라를 굳게 세울 것이다. (새번역)
둘째는 이사야 11장에서 통치자의 도착과 그가 받은 영적인 은사, 메시야의 과제와 낙원을 묘사한다. 평강의 왕은 다윗에 뿌리를 둔다(1절). 그러나 이는 당대의 왕가에서 출생하는 것은 아니다. 이스라엘 역사는 폐기되며 현존하는 상황은 계속될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에 대한 비판이후에 미래의 통치는 희망적이 된다. 그런 미래의 왕국에 국가의 개념은 사라지고 따라서 왕의 개념은 많은 부분 사라진다(6-9).
세째는 스가랴 9장 9절이하는 메시야기원의 절정으로 메시야에 대하여 구약성서의 전통적 이미지를 받아들이면서 미래의 통치자는 ‘왕’으로 불리지만 그에게는 전통적 왕의 개념은 모두 사라진다.
9 도성 시온아, 크게 기뻐하라.
도성 예루살렘아, 환성을 울려라.
-중략-
얼마나 아름다운가!
총각들은 햇곡식으로 튼튼해지고
처녀들은 새 포도주로 피어날 것이다.
메시야는 전쟁의 동물인 말이 아닌 나귀를 탄다. 그리고 그는 이제 도움을 받아야 하는 가난한 자로 표현 되며(비교, 시33:16; 20:6) 모든것은 하나님에게로 돌려진다.
구약성서는 메시야의 개념의 정의에 대하여 크게 두가지로 나타낸다. 하나는 봉신의 개념으로 다른 하나는 종말론적 왕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중 종말론적 왕의 개념은 점차로 하나님의 권능과 왕의 통치가 분리 되다가 결국은 무력하게까지 반영된다. 따라서 예수가 이러한 구약 성서의 메시야의 개념을 자신의 자인식 속에 나타내었는지는 상당한 의문점을 제시한다. 그리고 예수가 자신에게 이를 적용시켰다
하더라도 이용에에 대한 구약적 의미는 아니었을 것이다.
B. 신약성서 속에서의 예수의 여러 명칭들
-1. 메시야(그리스도)
예수가 메시야였다는 것은 단언은 초기 유대인 선교에 있어서 핵심적인 신앙의 표현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이렇게 선교를 위하여 메시야라는 용어를 차용 하였어도 그 개념은 구약이나 유대교 에서 통용되던 의미라기 보다는 초기 팔레스틴 교회의 개
별적 발전에 의해 발전된 개념이었다.
공관복음서 상에서 그 기자들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보도한다. 그러나 예수의 지상 활동중에서 이 호칭은 단 두군데에서만 나타난다 - 하나는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이다.
첫째로 예수의 재판 과정에서 나타나는 ‘유대인의 왕’이라는 칭호인데, 마가복음15:26에 따르면 예수는 ‘유대인의 왕’이라 씌어진 명패 아래에서 죽었으며 이는 상당한 역사성을 내포한다. 그리고 예수가 체포되었던 이유조차도 예수가 메시야적 왕위 요구자(pretender)로 정치적 관원들에게 인식되었을 것이라는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예수의 재판과정에서 우리는 예수가 그리스도 즉 구원의 왕으로 나타내고자 하였다는 의심을 받았으며 그 때문에 사형선고를 받았다는 사실을 역사적으로 취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본문에서의 예수에 대한 ‘유대인의 왕’이라는 호칭은 정치적 입장에 근거한 것이었으리라 해석된다.
또 하나의 다른 부분은 베드로의 메시야 고백인데 이 부분에 대하여 마가복음 8:29이하는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29 예수께서 그들에게 물으셨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30 예수께서 그들에게 엄중히 경고하시기를, 자기에 관하여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하셨다.(새번역)
이 부분에 관하여 F.hahn은 베드로가 예수를 메시야적 왕으로 단언한 것에 대한 경고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부분 자체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의 예수의 언동은 다가오는 고난과 부활에 관하여 말하며 이는 부활신학을 반영하는 것으로 역사적 사실이라는 가정은 어렵게 한다. 그리고 본문 중에서도 ‘그리스도’라는 예수의 호칭은 메시야적 왕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으로 묘사 함으로 교회 내에서의 정치적 메시야로서의 인물이 아닌 ‘그리스도’의 표상을 보여준다.
따라서 예수의 메시야적 칭호는 역사적으로 의심되어 질 수밖에 없다. 예로 예수의 메시야의 지위를 생각했던 것은 세례 요한 한사람 뿐이었다. 세례 요한은 오중에서 예수에게 그의 지위에 관하여 “오실 그분이 당신이십니까?”하고 묻는다(마11:2). 그리고 예수의 대답도 “나에게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은 복이있다.”고 애매한 대답만을 남긴다(마11:6).
정리하자면 예수에 대한 메시야의 칭호는 우선 그가 ‘유대인의 왕’이라는 정치적 이유로 죽은데서 기인 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 자신은 유대 전통적 메시야의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으나, 이러한 사건은 교회에서의 예수의 메시야적 행위들을 수집케 하였으며, 이에따라 예수는 ‘종말적 메시야’로 재편집 되어 이러한 메시야적 명칭이 붙게 되었을 수 있다.
-2. 인자
인자(Son of man)는 예수가 자신에 대하여 사용한 유일한 칭호로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는 다른 칭호들에 비하여 더욱 많이 사용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가복음에서는 14회, 마태 누가의 공통어록 10회, 마태 특별자료 7회, 누가 특별자료 7회, 로 공간복음 속에서 병행구절을 제외한 38회의 사용 용례를 찾을 수 있다.
인자라는 표현에 관하여 언어학적 분석과 전승사적 분석에 의하여 비평적으로 연구할 때 이러한 자료는 더욱 축소되고 역사적 예수에게까지 소급되는 부분들을 찾을 수있을 것이다.
a. 언어학적 분석
ό υίος τοΰ άνθρώπου라는 칭호는 통속 헬라어에서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그것은 아람어 연계형 ‘바르 에나샤(bar nasa)’를 문자적으로 번역한 것이다. 아람어
‘바르’는 혈통을 나타내는 관사이고 ‘에나쉬’는 한사람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따라서 이 말을 직역 하자면 그 사람(The Man) 혹은 한 사람(A Man)이 되는 것이다. 한편 ‘바르 에시나’는 다니엘 7:13의 결과로 메시야적 칭호로 발전 하였다. 이외의 예로 에디오피아 에녹의 유사에서 이 개념은 흔히 쓰인다. 그러나 신약성서의 증거는 이 단어가 두번째 의미로 쓰이지 않음을 보인다.(마 11:18-19)
18 요한은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는 귀신이 들렸다’하고
19 인자는 와서,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니, 그들이 말하기를 ‘보아라, 저
사람은 먹기를 탐하는 자요, 포도주를 즐기는 자요, 세리와 죄인의 친구다‘
한다. 그러나 지혜는 그것이 한 일로 그 옮음이 증명된다.”(새번역)
따라서 예수가 이 단어를 자신에게 적용하였건, 아니건 언어학적으로 메시야를 의미한 것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b. 전승사적 분석
분명 ‘인자’라는 호칭은 헬레니즘적 교회의 기독론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신약의 서신문에서는 ‘인자’의 호칭이 한번도 나타나지 않는다. 따라서 전승사적 조사의 영역은 4복음서 안에 한정 되어지고 서로 비교되어 질 수있다.
누가복음 6:22(ένεκα τοΰ υίοΰ άνθρώπου)과 마태복음 5:11(ένεκεν έμοΰ)의 비교는 복음서의 51번의 인자 칭호와 인자칭호 대신에 έγώ가 경합하는 모습의 예이다. 이 두가지중 어느것이 먼저 사용된 것인가를 조사하면 중후한 ‘인자’의 표현이 후기로 갈수록 더욱 나타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c. ‘인자’전승에 관한 예수의 이해
따라서 예수가 인자였다는 고백의 대부분은 초기 공동체 들로 소급 되어진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용어의 사용의 전승사적 뿌리는 예수 자신에게 찾아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인자’의 개념이 공동체들의 전승과정 속에서 증가되었다고 할 지라도 이 진술은 예수 자신의 진술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러한 예수의 ‘인자’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예수는 스스로를 에스겔서의 인자의 표현과 일치시키고 있다고 E. Schweizer에 의하여 주장된다.
‘인자’로서의 그(에스겔)-이스라엘의 파수꾼(3:17; 33:7)으로서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했던 -는 하나님의 말씀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여 그것을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말하여야 한다(2:3ff.). 그는 이스라엘의 죄를 보며(8:5ff.),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자들(12:2f.), 그리고 그를 쫒고 말하지만 심판이 멀었다고 생각하는(12:27), 그리고 그의 말씀에 순종치 않는 자들 가운데 거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선포는 수수께끼 같은 강화의 형태를 가지고 그는 재난을 선포하며(6:1ff.; 7:1ff.) 자신은 이스라엘의 결핍의 증거로 궁핍과 고난을 짊어지고(4:9ff.; 5:1ff.; 12:6, 11, 17ff.; 21:11, 17; 24:16ff., 27) 스스로 부활과 세상의 심판을 개진시킨다. 이에따라 예수는 스스로를 종말때의 선지자로 이해하고 있으며, 이러한 부분은 공동체의 편집에서 벗어난 예수에게로 소급가능한 부분이라 생각된다.
예수의 ‘인자’의 칭호는 다른 칭호보다 더욱 역사성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인자’의 칭호 자체도 예수에게 소급되어질 때는 메시야적 사고-공동체의 예수고백- 에서가 아니라, 도리어 대명사에 가까운 칭호나, 혹은 하나의 징표로- 종말때의 징표로 에스겔 등의 예언서와 연결되어-나타난 예수의 자기이해에 근거한 칭호였을 것이다.
-3. 하나님의 아들
초기 기독교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용어는 분명히 예수의 어떤 행동들-봉사, 치유, 기적-에 근거하여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예수의 활동 기간중 그에게 결부된 어떠한 메시야적 사색이 하나님의 아들 칭호를 받아들였다는 사실이 매우 가능하다. 그러나 이러한 칭호의 기원은 하시딤(Hasidim)이 ‘하나님의 아들들’, 혹 ‘하나님의 성도’들 로 불리 웠다는 것으로 이것이 특별히 예수에게만 적용된다고 할 수는 없다.
우선 구약에서 야훼와 이스라엘의 관계는 흔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표현되었다. 동일한 의미로 왕을 하나님의 아들로 본 경우도 세 차례있다. 그러나 이와같은 표현이 지배자에 관한 것이었다거나, 혹은 일반적 표현 헬라적 개념의 신인(Theios aner)-물론 특별히 헬라지역에서의 선교에 있어서 신인이라는 개념이 널리 퍼지기도 하였지만-이었다고 보는 것 또한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예수의 귀신의 축출 사건에 있어서 그의 칭호는 신인이 아니라 모세나 엘리야와 같은 이스라엘의 언약과 관계에 있는 자로서 역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예수의 세례에 있어서 나타나는 표현 ‘내 사랑하는 아들(막 1:11)’도 특이한 예수에 대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서도 우리는 역사적 예수의 배후에 있는 그의 자의식을 발견 할 수 있을 것이다.
36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바, 아버지, 아버지께서는 모든
일을 하실 수 있으시니, 내게서 이 잔을 거두어 주십시오.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마가복음 14:36절의 아람어 에서도 ‘아바’라는 단어는 그대로 사용되었다. 기도에서 이러한 형태의 부름말은 헬레니즘적 교회에서도 아람어 원어 그대로 보전 되었다. 예수의 기도에 편집적 부분이 있다고 하더라도 ‘아바’라는 칭호가 헬라적 교회에서도 쓰여졌다는 사실은 분명히 어떤 의미에서 역사적 예수에게 소급될 수 있음을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예수는 어떤 의미에서든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고 있다는 것이다.
III. 마 무 리
본 연구는 교회 공동체의 그리스도의 모습이 아닌 역사적 예수의 자인식을 알아보는데 목적을 두었다. 따라서 연구의 방향도 먼저 구약 성서속의 ‘메시야’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이를 통하여 구약 성서의 메시야의 의미를 살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에 따라 신약성서의 공관복음서의 예수에 관한 명칭중 예수에게 소급될 수있는 명칭들을 살펴 봄으로 공동체의 예수의 이해를 얻어 낼 수 있었다.
구약 성서의 메시야의 의미는 정치적 메시야 이다. 혹은 묵시적 종말론적 메시야 이다. 이러한 개념들이 실지로 예수에게 얼마만큼의 영향을 주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예수는 이중에 어떠한 모습도 완전히 보이지는 않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자이해는 구약에 있어서의 메시야의 개념으로는 완전히 설명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에 대한 공동체의 이해는 예수를 묵시론적 메시야로 이해하게 하는 경향을 보이게 하였다.
예수에 대한 그리스도의 이해는 이러한 종말적 메시야의 의미가 예수에게 전달 되어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자신에 대하여 엄밀하게 메시야라는 개념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러한 구약성서와의 연결성은 예수의 죽음이 정치적 요인과 연결 되어진다는 사실과도 상당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예수에 대한 자인식의 차원으로 보는 것은 상당한 차원을 지닌다.
이러한 예수의 다른 자인식들이 바로 ‘인자’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에서 나타난다. 물론 이중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칭호가 예수 자신의 입에서 거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이는 분명히 예수의 자이해를 가지고 있다.
특히 인자는 예수 자신의 입으로 가장 소급의 가능성이 많은 단어이다. 인자의 칭호에 있어서 이 칭호의 언어학적 의미는 대명사가 된다. 또한 에스겔서의 내용은 이를 하나의 징표로 보이고 있다. 따라서 예수의 자인식의 일부분이 여기서 나타나게 된다. 예수는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의 징표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예수의 자인식에 있어서 그의 선포와 맥락을 같이하고 있는 부분이 된다.
또 한가지의 예수의 자인식은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를 아들과 아버지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은 이차적 편집의 산물이다. 그러나 그부분에 담겨있는 ‘아바’라는 단어는 예수가 자신을 어떻게 이해했는지를 잘 알게 한다. 예수는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안에 불가분의 요소로 있고, 하나님의 성품이 자신에게 내제되어 있음을 주장한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오는 하나님 나라의 지배자가 아니라 와있는 하나님의 나라의 증거로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삶을 이러한 징표로서 살아갔던 것이다.
우리는 예수에 대하여 여러가지 교회의 케리그마에 가려진 모습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현대의 다원화 되어가는 사회속에서 우리는 배타적으로 우리의 것만을 주장 할 수는 없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우리의 신앙의 모습을 단순히 강요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예수는 자신의 모습을 배타적인 하나의 상으로 인식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모습을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생각하고 또 그렇게 살았다. 이제 우리는 이러한 예수의 자인식의 과정을 통해 우리의 삶에도 이와 같이 적용하고 하나님 나라의 징표로 사회속의 하나님 나라의 선포를 해야만 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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