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환 들아 주인 에게 순종하라

사환들아 주인에게 순복하라/벧전2:18-25

사환들아 주인에게 순복하라/벧전2:18-25


당시 로마 사회에서는 노예의 수가 자유민의 수의 4배나 되어 노예문제는 사회적인 문제인 동시에 가정 문제 중에 하나였다. 노예들은 자유를 갈망하며, 교회로 몰려 왔다. 주안에서는 주인과 종의 차별이 없다고 하니까, 일부 종들은 주인에게 불순종하므로 교회 박해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베드로는 본문에서 종들이 주인에게 순복할 것을 권하고 그 본을 JX로 제시하고 있다.



Ⅰ.주인에게 순복하라(18)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되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도 그리하라” 했다. 여기서 “사환들은” 다른 곳에서 나타나는 종(δουλοs)과는 의미가 다르다. 사환들은 사회적으로 천한 계급인 종(노예)보다는 하나의 가족과 같이 생각하는 친근한 명칭이다.

유대인들과 스토아 철학자들은 종들은 주인에 대하여 도덕적인 의무가 없다고 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종들의 도덕적인 의무를 다루었다. 그 당시 관념은 노예들은 완전한 사람이 아니므로, 도덕적인 책임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노예들도 동등한 인격을 가진 자이므로 도덕적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갈3:28에 “너희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주자나 남자나 여자 없이 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이니라” 했다.

교회에서는 사회적 지위와 신분에 따라 사람들을 차별대우하지 않고, 만민을 평등하게 대우한 것이 당시 사회적 통념을 깨는 충격적인 사고였다. 그러나 노예제도 자체를 폐지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았다. 성경은 주인과 종의 상호관계를 재 조명함으로써 인권유린의 노예제도가 없어지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베드로는 “사환들아 범사에 두려워함으로 주인들에게 순복하라” 했다. 여기서 두려움은 인간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θ에 대한 두려움이다. 성도들은 사람을 두려워 하고, 사람에게 잘 보이기 위하여 눈가림(eye service)으로 일하지 말아야 한다. 사람의 눈은 속이고 피할 수 있어도 θ의 눈은 속이고 피할 수 없다.

베드로는 “선하고 관용하는 자들에게만 아니라 또한 까다로운 자들”에게 순복하라고 한다. “선하고 관용하는 자” 는 ‘착하고 공평한자’, ‘양보하는 자’ 이며, “까다로운 자” 는 그와 반대로 ‘구부러진 자’ 라는 의미로 품성이 굽어지고 까닭없이 종들을 가혹하게 대하는 자들이다.

순복의 동기가 θ에 대한 깊은 경외이기 때문에 순종의 대상은 선하고 너그러운 종들에게만 아니라, 까다로운 주인에게도 순종해야 한다.

주인에게 순복할 때에 불신 주인도 우리들의 선한 행위를 보고, θ께 돌아 오는 계기가 된다.



Ⅱ.애매한 고난을 받아도 참으라(19,20)

“애매히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함으로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우나 20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했다.

베드로는 애매한 고난을 당할 때 참으라고 한다. 애매한 고난은 부당하게 받는 고난을 말한다. 특별히 까다로운 주인을 섬기는 사환들에게 있어서 애매한 고난이 심각한 문제이다.

본문에서 노예의 인권을 인정하고, 그것이 유린될 때는 불의라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유린된 인권을 어떻게 회복해야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참으라고 한다. 19절에서 “슬픔을 참으면 아름답다” 고 했다. 불의하게 고난을 당하면 괴로움이 많으나, 이것을 참으라고 한다. 그 결과는 아름답다고 한다. 애매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벌써 은혜 받은 증거요, 앞으로 은혜받을 보장이요, 나아가서는 그 자체가 은혜이다. 또 다른 의미는 θ께서 탁월한 것으로 인정해 주시고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C. S. Lewis는 “인간 경험에 있어서 고통의 사실보다 더 보편적이고 더 완고한 사실이 오직 한가지 있다. 그것은 θ의 계심을 의식한다는 사실이다. ∴ 우리는 고통만을 설명할 것이 아니라, 그보다 주된 것은 θ에 대한 신앙을 설명해야 한다.” 했다.

우리들이 참는 것은 무조건 참는 것이 아니다. 그 결과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참는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 했다. 참는 것의 아름다움을 소유하는 여러 분들이 되시기를 바란다.



Ⅲ.고난 받으신 주님을 본 받으라(21~25)

21절에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베드로는 부당한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θ을 의식함으로 참으라고 권하면서 이것을 θ의 부르심을 연결지었다.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했다. 여기서 “본”이란 서예의 교본같은 것을 말한다. 고난의 면에서 X를 본 받아야 된다는 말씀이, 글자의 본이란 비유로 지적되어 있지만 발자취의 비유로도 사용된다. “그 자취를 따라오게” 라는 표현은 “그의 발자국을 바싹 따라오게” 라는 의미이다.

JX께서 고난의 발자국을 남기셨는데, 우리는 그 발자국들을 그대로 밟고 따라가는 자들이다. 그의 발자국을 정확하게 그대로 밟아 나가는 삶이 성도의 삶이다.

Bengel은 “X 자신은 종의 취급을 당하셨다. 그리고 그의 태도를 종들에게 모범으로 보이신 것이다.” 라고 했다.

JX는 죄가 없으시면서도 고난 당하셨다. 그래서 22절에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며” 했다.

“궤사” 는 속임(사기)를 말한다. JX는 말로도 속이는 일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J은 철저히 애매하게 불의하게 고난 당하셨다는 말이다. 23절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이는 J의 무저항주의를 보여 준다. J은 갖은 욕설과 모독을 받으실 때, 구차하게 답변하시지 않으시고, 침묵으로 일관하셨다.

우리들과는 너무 다르다. 상대방이 욕하면, 나는 더 심한 욕을 하여야 직성을 풀리지 않나? 상대방이 한대 때리면 두 배, 세배로 갚아야 속이 시원하지 않나? 상대방이 소총으로 공격해 오면, 나는 따발총을 쏘아 되고, 그것도 한이 차지 않으면, 대포를 쏘아 대지는 않나?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 했다.

마카비 시대의 순교자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 장차 다가올 θ의 심판으로 박해자들을 위협했다. 그러나 J은 고난 받으실 때, 영원한 심판으로 박해자들을 위협하시지 않으셨다. 그것은, 공의로 심판하시는 θ께 부탁했기 때문이다. J은 박해자들의 처벌을 공의로 심판하시는 θ께 맡겼다.

주님이 받으신 고난은 자신의 죄 때문이 아니라 대속적인 고난이다. 24절에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 이는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이라 저가 채찍에 맞음으로 너희는 나음을 얻었나니” 했다. JX께서 고난 받으심으로 우리들은 죄로 인한 정죄에서 벗어나, θ앞에 의인으로 나아 갈 수 있게 되었다.

J께서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신 목적은 “우리로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려 하심” 이다. 우리들은 죄에 대하여 죽은 자들로서 유혹이 올 떄에 무반응을 보여야 한다.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들은 의에 대해서는 사는 자들이다.

오늘날도 고난을 당하는 사람들이 많다 버림받은 자들처럼 고통 당하고 있지만, J는 고통 중에서도 우리들을 돌보시고, 먹이시고, 보호해 주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