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종이 아름답습니다 막11:1-11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데 나귀를 린?입성하시려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 전에도 예루살렘 성을 방문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는 나귀를 타신 적이 없습니다. 단지 걸어서 다니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는 주님이 나귀새끼를 데려오라고 하십니다. 왜 그러실까요? 거기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을 마지막 방문하시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오늘이 바로 주일입니다. 오늘부터 정확하게 6일째 되는 금요일에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십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때가 임박해 왔음을 인식하시고 이제야 본 모습을 드러내시고 계십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 만물을 통치하시는 예수님, 그 예수님의 모습을 나귀타고 입성하시는 것으로 보여주시고 계십니다.
슥9:9절에서 이미 600여년 전에 스가랴 선지자는 하나님께 받은 말씀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찌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찌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예수님이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는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그리고 그 의미는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고 영생을 주시기 위해 오신 메시야적 사명과 영적 지도자, 그리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왕으로 오신 사실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왕으로 오신 것은 바로 죄인들을 통치하시기 위함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영혼을 통치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육체도 통치하실 능력이 있으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 가정을 통치할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은 모든 인간관계를 통치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은 우리 교회를 통치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은 사탄마귀를 통치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주님은 국가와 세계를 통치하실 능력을 가지신 분입니다.
그리고 주님의 통치에 순종하면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부하직원이 직장 상사에게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학생들이 선생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이와 같이 성도들이 주님께 순종하는 것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주님의 순종이 있었기에 우리에게 죄사함과 구원의 축복이 오게 된 것입니다. 주님의 순종이 아름다운 것입니다. 십자가를 보십시오. 십자가는 순종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습니다. 십자가를 볼 때마다 순종의 아름다움을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아름다운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 첫 번째로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제자들이 아름답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시기 전에 두 명의 제자들에게 명령하셨습니다. 베다니에서 맞은 편 마을을 가리키시며 ‘가서 아직 누구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고 오라’하십니다.
여기서 맞은 편 마을은 벳바게로 생각합니다. 벳바게 마을로 가서 줄에 매여 있는 새끼나귀를 풀어서 끌고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은 두 명의 제자들에게 말씀하실 때 나귀 주인의 이름도 대지 않았습니다. 누구의 집이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고 정확하게 마을 입구에서 몇 번째 어느 집에 있는 나귀새끼라고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도 막연하게 ‘매여 있는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오라’하셨습니다.
두 명의 제자는 곧장 맞은 편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마침 거기 어린 나귀가 묶여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나귀새끼를 풀어 끌고 왔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철저하게 순종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제자들의 순종이 아름답습니다.
성도들은 주님의 제자들입니다. 주님의 제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믿고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는 성도라야 진정한 제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제자에게 말씀하신 것은 명령입니다. ‘가서 끌고 오라’는 명령입니다. 명령에 순종하는 성도가 참된 제자입니다. 명령은 때로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이지만 그래도 순종해야 하는 것이 명령입니다.
주님은 승천하시면서 ‘전도하라’ 명령하셨습니다. 상대방이 전도되기에는 불가능해 보여도 주님이 전도하라 명령하셨기 때문에 순종할 의무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주님은 ‘사랑하며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아픔을 겪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말씀을 순종하지 못하는데서 온다고 봅니다. 엡6장에서 바울사도는 이렇게 말씀을 전합니다. 자녀는 부모에게 순종하고 공경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또한 부모들에게는 자녀들을 노엽게 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부모와 자녀 사이에 갈등과 고통이 오는 이유는 이 명령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부 사이에도 그렇습니다. 엡5장은 계속말씀하고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하라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입니다. 이 명령이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부부 사이에도 이권 다툼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이것은 명령입니다. 그리고 남편은 아내를 사랑해야 합니다. 이것도 명령입니다.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지 못하면 남편의 사랑을 받을 수 없습니다. 반대로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지 않으면 아내의 순종을 받을 수 없습니다. 순종과 사랑은 서로 반응하는 것입니다.
군대에서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군법회의감입니다. 전쟁시에 명령에 불복종하면 그 자리에서 총살해도 정당합니다. 군인 한 명이 상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면 다른 사람들에게도 악영향이 미치고 그렇게 되면 전쟁에서 패배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불순종하는 군인은 현장에서 사살해도 죄가 안됩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터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주님의 명령에 불복종한다면 나만 죽는 것이 아닙니다. 사탄마귀는 틈새를 노리고 공격해 와서 나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을 쓰러뜨립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길도, 남도 사는 길도, 남을 살리는 길도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해 보려고 하십시오. 나의 정욕과 자아와 고집과 교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해 보십시오. 주님의 명령에 복종해 보십시오. 그러면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순종하면 아름다운 일들이 일어납니다.
이번엔 나귀새끼 주인의 순종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의 명령을 받고 두 제자가 맞은 편 마을로 갔습니다. 그들은 쉽게 나귀새끼를 찾았습니다.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집 문 앞에 나귀새끼가 매여 있었습니다. 두 제자는 끊을 풀고 나귀새끼를 끌고 오려는데 마침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왜 남의 집 나귀새끼를 끌고 가려느냐?’고 질문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신 그대로 대답합니다. “주께서 쓰시겠답니다.” 이에 그들이 허락하였습니다. 눅19:33절에서는 ‘주인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주인이기에 나귀새끼를 끌고 가는 것을 허락하였겠지요?
마가복음과 마태복음의 저자는 나귀새끼를 끌고 가도록 허락한 사람들에 대해 주인이라고 기록하지 않았고, 주변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나귀새끼 주인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는 이야기 입니다. 만약 나귀새끼 주인과 예수님이 아는 사이라면 제자들도 알았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주인을 모르는 것을 보면 예수님과 나귀새끼 주인과는 생면부지(生面不知)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도 나귀의 주인은 “주님이 쓰시겠답니다”라는 말씀에 끌고 가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즉 주님이 쓰시겠다는 말씀에 주인은 순종한 것입니다.
여러분, 나귀새끼는 대단히 재산가치가 높은 것입니다. 이집트에 가 보니까 자동차만 화물을 운반하는 것이 아니더군요. 조그마한 나귀가 마차에 철근이나 농산물을 싣고 도로를 다닙니다. 나귀의 주인은 나귀가 유일한 생계수단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은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나귀의 주인은 나귀가 생계의 수단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작은 트럭으로 야채장사나 화물을 운반하여 생계를 꾸려가는 분들이 있는데 그 트럭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자 드린 것과 같습니다.
나귀의 주인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선뜻 나귀새끼를 내어주는 주인의 순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이번에는 주님을 따르던 가난한 사람들의 순종이 아름답습니다.
주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아주 가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집이 없듯이 그들 가운데는 집이 없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집이 있다하여도 흙벽돌로 벽을 쌓고 사는 것이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서 금이나 은이나 동이 나와 예수님을 섬기는데 드려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렇지만 그들도 주님께 순종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나귀의 안장으로 삼았습니다. 또 다른 사람들은 겉옷을 길에 펴서 주님이 지나가시도록 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종려나무 밭에서 베어놓은 나뭇가지를 주어다 길에 깔기도 하고, 주님보다 앞서 가면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어 왕이 지나가신다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겸손하게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삶을 실천하였던 것입니다.
또한 종려나무는 그 나무 자체가 갖는 의미가 있습니다. 종려나무는 위로 곧게 자란다해서 ‘의로움’, ‘절개’, ‘꿋꿋함’ 등을 상징합니다. 또한 수명이 100년 이상이어서 ‘장수’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종려나무 가지가 위에만 남아 있는데 모양이 왕관 같아서 ‘왕’을 상징합니다.
주님을 따르던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의 겉옷을 벗어 안장을 삼거나 혹은 길에 펴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로 주님을 환영했습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최고의 것으로 주님을 왕으로 섬기는 그들의 순종은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삼성 휴대폰의 ‘애니콜 신화’를 만들어 낸 분이 이기태사장이란 분입니다. 삼성전자 정보통신부문 사장입니다. 그 분이 남모르게 해 오던 일들이 최근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이 분은 TV를 보면서 병원비가 없어 애타하는 사람, 시골교회, 해외선교, 가난한 사람 등에 아낌없이 물질선교를 해 온 분입니다. 대기업 사장인데도 재산은 대구에 1억 8천만원짜리 집 한 채입니다. 이 분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무조건 선교하는 분이었습니다. 그의 부인은 한 술 더 떠서 도움이 필요하면 카드 빚을 내서라도 선교하는 분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철저하게 순종하는 분들이었습니다. 이 분들의 순종이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제자들의 순종, 나귀 주인의 순종, 가난한 사람들의 순종, 한 대기업 사장의 순종, 그리고 누구보다도 주님께서 아버지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보면서 순종이 아름답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앞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실 날을 6일 앞두고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그 분이 타신 것은 황금마차가 아닙니다. 어린 새끼 나귀였습니다. 주님이 않으실 나귀의 안장은 임금이 앉는 자리처럼 금으로 장식되거나 파라솔리 달린 안장이 아닙니다. 그저 가난한 사람들의 겉옷이 깔려 있었습니다. 주님이 가시는 길에 깔아드린 것은 아라비아산의 고급 양탄자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의 겉옷과 쓸모없어 잘려져 길가에 버려진 종려나무가지였습니다. 그런 길을 주님은 순종하여 걸어가셨습니다.
순종, 그것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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