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가 뉘기에 바다를 순종 하게 하는고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막4:35-41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막4:35-41





복음서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의 나날을 매우 바쁘게 보내셨습니다. 가시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4장 23절로 25절에 보니 “23)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24)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 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 25)갈릴리와 데가볼리와 예루살렘과 유대와 요단강 건너편에서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고 했습니다.

그 날도 예수님은 하루 종일 많은 사람을 상대로 바쁜 시간을 보내셨습니다. 해질 녘이 되었어도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8장 18절에 보면 “예수께서 무리가 자기를 에워쌈을 보시고 저 편으로 건너가기를 명하시니라”고 증언합니다. 무리를 떠나서 쉬기 위해 배를 타고 갈릴리 건너편에 있는 한적한 마을로 가려고 한 것입니다. 이에 열 두 제자와 열성적인 추종자들이 여러 척의 배에 나누어 타고 출발했습니다. 예수님은 열 두 제자들과 함께 한 배에 타셨으며, 예수님은 곧바로 배 뒤편의 넓은 곳에서 베개를 베시고 잠이 드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인성(人性)을 가지신 예수님의 모습을 대합니다.

그런데 배가 호수 중간쯤 이르렀을 때 그들은 무서운 폭풍을 만났습니다. 갈릴리 호수는 지형적인 특이한 조건으로 인해 바람 한 점 없이 잔잔하다가도 갑자기 폭풍이 대작하는 경우가 생겨났습니다. 이 같은 돌풍은 아무리 노련한 뱃사람이라도 예측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큰 광풍에 맞서 안간힘을 썼으나 아무 소용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지쳤고 절망했습니다. 이제 배가 뒤집히면 다 죽고 말 것입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말이 있듯이, 당면한 위험을 겪어본 경험이 없는 사람은 자기가 얼마나 위험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고속도로에서 과속으로 자동차를 몰고 질주하는 사람은 사고의 두려운 결과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갈릴리 바다에서 일어나는 폭풍의 두려움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두려움도 더 컸을 것입니다. 어느 새 배 안은 물이 가득했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신 것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폭풍 속에서 배를 지탱하느라 예수님이 함께 계신 것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신 것을 알았을 때 제자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마음속의 불안과 두려움이 평정되었습니다. 여전히 바람과 파도가 미친 듯이 불어 닥쳤지만 더 이상 두렵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제자들은 배의 고물에 누워 주무시는 예수님을 흔들어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선생님, 폭풍으로 인해 우리 모두 죽게 되었습니다. 구해 주십시오!” 이에 예수님께서 깨어 일어나셔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이르시기를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자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즉시로 바람이 그치고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기를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 하셨습니다. 이에 저희가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기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라고 하였습니다.


첫 번째로, 시련은 우리에게 주님을 만날 기회를 제공해 줍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탄한 생애를 살기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기대일 뿐, 예상치 못했던 시련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사실, 언제 어떤 어려움을 만나게 될는지 그것은 아무도 알지 못합니다. 여러분은 유명 가수인 강원래 씨를 잘 아실 것입니다. 그는 춤을 잘 추던 가수였으나 지금은 1급 장애인이 되어 있습니다. 사고 당시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2000년 11월9일 오후 1시 쯤 오토바이를 타고 반포사거리에서 신호를 받고 기다리는데, 갑자기 쏘나타 승용차가 달려와서 덮쳤죠. 내가 신호를 어긴 것도 아니고, 사고를 낸 것도 아니고, 가만히 서 있는데 자동차가 와서 덮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그는 사고를 인정하고 현실로 받아들이기까지 1년의 시간이 걸렸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드디어 그는 재활에 성공했고 요즘은 가수생활과 사회봉사 활동에 열심을 내고 있습니다. 그가 그 날 집을 나서면서 그 같은 사고를 당한 것을 상상이라고 했겠습니까? 우리가 사노라면 교통사고 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시련을 겪습니다. 제자들이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십니까?” 라고 했던 것처럼, 이제 영락없이 망하게 되었다고 생각이 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면 왜 우리의 삶에 시련이 다가오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기에 욥기 5장 7절에 보니 “인생은 고난을 위하여 났나니 불티가 위로 날음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불티가 뜨거운 공기를 타고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마찬가지로 인생에 고난이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우리가 알아 둘 점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에는 인간의 삶에 고난이나 시련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담의 범죄로 인해 이 세상에 사망과 저주가 임하였고, 그 결과 우리 인간은 수고로운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 세상은 합리적인 일만 생기는 것이 아니라 불합리한 일도 생깁니다. 지금도 지구 여러 곳에서 전쟁이 일어나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고, 다치고, 집을 잃고 난민 생활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전쟁의 이유를 이런 저런 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국제정치적인 관점에서, 또는 석유의 확보 측면에서 등등 여러 방향에서 설명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 어떤 설명도 전쟁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이 될 수는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 가운데 살아가는 이라크인들에게 전쟁의 타당성을 설명하면 공감을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이라크인들에게 전쟁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 지진 피해를 입은 중국 쓰촨성 사람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지질학자들은 이번 지진의 원인을 판 이론으로 설명하거나 393억톤에 달하는 샨샤 댐의 물이 지각에 압력을 주어서 발생했다고 설명합니다. 그러나 그 같은 설명이 피해를 입은 쓰촨성 주민들에게 이번 재앙에 대한 타당한 설명이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학자들이 분석한 지진 원인은 다만 일어난 현상을 설명할 뿐입니다.

이 세상이 낙원으로 변하지 않는 한 하나님을 믿는 우리라고 시련에서 제외될 수는 없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기근을 피해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아내 사라를 애굽 왕에게 빼앗길 뻔 했습니다. 야곱은 형 에서의 복수를 피해서 먼 타국에 가서 20년 동안 온갖 고생을 겪었습니다. 요셉은 형들의 미움을 사서 은 20에 팔려 애굽으로 끌려가서 노예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하나 같이 하나님을 잘 섬겼던 사람들이지만, 혹독한 시련을 당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련은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저와 성도님들에게도 다가올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시련이 다가왔을 때 그 때를 우리에게 유익한 기회로 선용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 방법을 제자들을 통해서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처음 한 동안은 자기들의 수단과 방법으로 풍랑을 이겨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든 노력은 아무 소용이 없었고 돛은 찢겨나가고 배안에는 물이 가득해져서 침몰 직전에 이르렀습니다. 그제야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배에 타고 계신 것을 생각해 내고 즉시로 주님께 다가가서 주님을 깨웠습니다.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

사랑하는 성도님들, 시련을 만났을 때 인간적인 수단 방법을 의지하지 마시고 제자들처럼 주님께 나아가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시련을 통해서 우리를 부르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자기 힘과 지혜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때는 주님을 찾지 않으려고 고집을 부립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과 지혜가 무용지물이 되면 그제야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 하면서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렇게라도 주님을 찾는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입니다.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교수는 74세에 비로소 기독교를 믿고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분은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인으로 자부하면서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았으나, 딸이 시력을 잃어 앞을 거의 보지 못하게 되었고, 그 딸의 아들인 외손자가 과잉행동장애로 고통받다가 주님의 은혜로 둘 다 치유받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때 그 분은 자기는 병든 딸과 외손자를 위해 아무것도 해 줄 수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고쳐주신 것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로 했다고 합니다. 딸과 외손자가 불치의 병에 걸린 것은 그의 인생에 큰 풍랑을 만난 것과 같습니다. 그러한 때에 그 분은 인간의 무력함을 깨닫고 전능하신 주님을 찾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시련이 오히려 축복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인생을 살아가면서 시련이 다가올 때 현실만 바라보고 낙심하지 마시고 자신의 신앙을 점검하고 주님을 새롭게 만나 믿음을 한 단계 더 성숙시키는 기회로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두 번째로, 우리는 예수님이 함께 계심을 믿을 때 시련을 이길 수 있습니다.

제자들은 폭풍 속에서 사력을 다했으나 속수무책이었습니다. 그들은 당장이라도 배가 깨어져 물속에 갈아 앉을 것만 같아서 불안에 떨었습니다. 밤중에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속에 빠진다면 무슨 수로 살아남을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절망적인 상황이었습니다. 마음이 불안하고 두려움으로 차 있다면, 그런 사람은 절대로 시련을 이겨내지 못합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말이 있듯이, 시련을 만났을지라도 정신을 올바로 갖는다면 얼마든지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 호랑이에게 물려가면서 정신을 잃지 않을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되겠습니까? 어쩌면 그것은 인간으로서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절망적인 상황에서 불현 듯 주님께서 그들과 한 배에 타고 계신 것을 알자 모든 불안과 두려움이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창조의 근본이신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데 폭풍이 어떻게 그 배를 침몰시킬 수 있겠습니까!

바다의 풍랑이 잔잔해 지기 전에 먼저 제자들의 마음속에서 불안과 두려움의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그러고 나자, 풍랑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호랑이에게 물려가도 두렵지 않은 마음 상태란 바로 이런 경우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앞으로 30일 동안 다리오 왕 이외의 사람이나 신들에게 구하면 사자굴에 던져넣는다는 법령이 공포된 것을 알고서도 평소에 하던 대로 매일 세 번씩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활짝 열어놓고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곧 다니엘은 체포되어 사자굴에 던져졌습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조금도 두려운 기색이 없었습니다. 어쩌면 그럴 수 있었을까요?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하셔서 지켜주실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과연 하나님께서 그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다니엘을 해칠 수가 없었습니다.

사무엘상 17장에 보면, 다윗이 아버지의 심부름으로 전장에 나간 형들을 찾아갔다가 적장 골리앗이 나와서 이스라엘 군대를 모욕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 때 다윗은 할례 받지 못한 이방인이 하나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을 모독하다니, 도무지 참을 수 없었습니다. 다윗은 사울 왕에게 나아가 자기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자청했습니다. 그러나 사울 왕은 다윗을 만류했습니다. “네가 가서 저 블레셋 사람과 싸우기에 능치 못하리니 너는 소년이요 그는 어려서부터 용사임이니라” 그러나 다윗은 물러서지 않고 싸우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주의 종이 아비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떼에서 새끼를 움키면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 죽였었나이다 주의 종이 사자와 곰도 쳤은즉 사시는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한 이 할례 없는 블레셋 사람이리이까 그가 그 짐승의 하나와 같이 되리이다”

다윗이 철이 없어서 무모한 행동을 하려고 한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골리앗이 그와는 비교할 수도 없으리만치 장대하고 용맹한 용사인지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하나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었으므로 담대할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사자의 발톱과 곰의 발톱에서 건져내셨은즉 나를 이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시리이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울이 다윗에게 말하기를 “가라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시기를 원하노라”고 했습니다.

이에 다윗은 평소 입던 옷 그대로, 손에 막대기와 물매와 시냇가에서 고른 차돌 다섯 개를 주머니에 넣고 나갔습니다. 블레셋 최강의 골리앗을 상대하려는 다윗의 준비치고는 너무나 빈약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 계심을 알았기에 조금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두려워하기는커녕 물매 한 방에 골리앗의 이마를 쳐 쓰러뜨리고 달려가서 골리앗의 칼을 빼어서 그 머리를 베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어려운 시련을 만났습니까? 다윗처럼 하나님께서 성도님들과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마음에 평안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름을 타고 승천하셨지만 성령 안에서 영으로 오셔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이 사실을 믿으시고 어떤 시련이 다가와도 두려움 없이 마음에 평정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세 번째로, 시련을 이기려면 기도로써 주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배에 계신 것을 알고는 “선생님이여, 우리의 죽게 된 것을 돌아보지 아니하시나이까?”라고 주님을 향하여 큰소리로 호소했습니다. 만일 제자들의 믿음이 컸더라면 주님을 깨우지 않았을 것이지만, 그들의 믿음은 그렇게는 못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어찌하여 이렇게 무서워하느냐 너희가 어찌 믿음이 없느냐?”고 하셨습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제자들을 보시고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하신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제자들은 믿음이 적어서 그같은 위기를 만났을 때는 마치 믿음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입장에서 주님을 깨운 것은 잘 한 일입니다. 제자들처럼 우리도 시련을 이기려면 기도해야 합니다.

시편 107편에 보면, 오늘 본문의 내용과 비슷한 구절이 나옵니다.

“23)선척을 바다에 띄우며 큰 물에서 영업하는 자는 24)여호와의 행사와 그 기사를 바다에서 보나니 25)여호와께서 명하신즉 광풍이 일어나서 바다 물결을 일으키는도다 26)저희가 하늘에 올랐다가 깊은 곳에 내리니 그 위험을 인하여 그 영혼이 녹는도다 27)저희가 이리 저리 구르며 취한 자 같이 비틀거리니 지각이 혼돈하도다 28)이에 저희가 그 근심 중에서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 고통에서 인도하여 내시고 29)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시는도다 30)저희가 평온함을 인하여 기뻐하는 중에 여호와께서 저희를 소원의 항구로 인도하시는도다”

이 시편은 폭풍을 만나 고전 분투하는 뱃사람들의 형편을 실감나게 보여줍니다. 그 때 그들은 최후의 방편으로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저희의 소리를 들으시고 광풍을 평정히 하사 물결로 잔잔케 하셔서 무사히 귀항케 하셨습니다. 아무리 큰 위기를 만났을지라도 두려워 마시고 하나님께 엎드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6)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7)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고 하셨습니다. 염려 근심할 시간에 기도하십시오. 그리할 때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에게 임하여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셔서 어떤 위기 속에서도 바른 생각, 바른 판단을 하도록 해 주십니다.

한편, 잠에서 일어나신 주님께서 바람을 꾸짖으시며 바다더러 “잠잠하라 고요하라”고 명하시니 즉시로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아주 잔잔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 말씀을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 한 말씀에 즉시로 바람이 그치고 요동치던 바다가 잔잔해졌습니다. 이를 본 자들이 심히 두려워하여 서로 말하기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습니다. 앞에서는 바람과 바다를 보고 두려워했으나 이제는 주님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종류가 다릅니다. 전자는 공포를 말하고, 후자는 주님의 신적 권위에 대한 경외심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시기를 “몸은 죽여도 영혼은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마 10:28)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인간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주님을 두려워하게 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의 능력을 체험하고 믿음이 한 단계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님의 명령에 바람이 그치고 바다가 잔잔해진 것을 본 제자들은 경외하는 마음을 갖고 서로 말하기를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이 표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었습니다. 인류 역사상 바람을 꾸짖고 바다를 명하여 잔잔하게 할 수 있었던 분이 예수님 말고 또 누가 있었습니까? 예수님께서 행하신 이적들은 하나 같이 초자연적인 것이었습니다. 주님의 말씀 한 마디에 중풍병자가 일어나고,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죽은 자들도 살아났습니다.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남은 것을 거두니 열 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귀신들이 소리 지르며 떠나갔습니다. 이 모든 사례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창조주이심을 보여주는 증거들입니다.

이에 대하여 요한복음 1장 1절로 3절에 이르기를 “1)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2)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고 하였고, 그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분이 곧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께서 바람과 바다를 명하여 잔잔케 하신 것은 창조주로서 그 권능을 행사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으나 삼일 만에 부활하신 것 역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성경적으로 올바로 아는 것처럼 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달리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에서 “7)…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주 예수 보다 더 귀한 것이 없다”는 이 고백을 진실되이 할 때, 그 사람은 “저가 뉘기에 바람과 바다라도 순종하는고” 라는 물음의 답을 아는 성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우리의 삶 속에는 시련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시련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시련이 축복이 되기도 하고 재앙이 되기도 합니다. 시련이 다가올 때, 주님을 새롭게 만나는 기회로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심을 믿고 마음에 평정을 누리고, 기도로써 주님의 도우심을 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한없으신 사랑을 풍성히 경험함으로 시련을 영적 성숙을 위한 복 된 기회로 선용하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