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 롬6:15-23
우리 성도의 삶은 온전히 순종하는 자의 삶입니다. 순종하되 누구에게 순종하느냐가 중요합니다. 오늘 성경에는 둘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죄의 종이 되든지 의의 종이 되든지 둘 중에 하나라고 말합니다. 죄의 종노릇을 하면 사망에 이르고 의에게 종노릇을 하면 영생을 얻게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로 알고 순종해야 합니다. 순종의 대상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순종을 해야 하는데 왜 순종해야 하는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종이기 때문입니다. 종의 개념을 우리가 먼저 이해 할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을 기록한 당시에 종은 누구에게나 또는 무엇에게 얽매여서 그가 시키는 대로하고, 자유를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자기 개인적인 소유가 전혀 없고, 다만 주인에게 인생 전체가 달려 있는 노예를 말하는 것입니다. 예전에 이스라엘에서는 많은 빚을 진 사람이 빚을 갚지 못할 때에 종이 되거나, 전쟁 포로 또는 부모가 종인 경우에 그 자녀들이 자동적으로 종이 되었습니다. 오늘의 상황에서 종의 삶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려면 우리 나라에 \'머슴\'이라는 좋은 개념이 있습니다. 이 머슴은 보수를 받고 일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강제로 일한다기보다는 숙명론적으로 일하는 것입니다. 그냥 그 집에 사는 것입니다. 그 집을 떠날 수가 없습니다. 노동에 대한 정당한 보상이나 대가를 받지 못합니다. 칭찬도 격려도 없습니다. 야단맞기 일쑤고 온갖 궂은 일을 다 해야 합니다. 편히 잘 수도, 좋은 옷을 입을 수도 없습니다. 머슴은 고민해서도 안되고 괴로워해서도 안됩니다. 그러나 주인을 사랑합니다. 주인의 가족을 위해서 충성합니다. 어쩌다가 주인이 작은 보상이라도 하면 그렇게 기뻐하고 감격해 합니다. 아파도 혼자 아파야 하고 외로워도 혼자 외로워해야 합니다. 그렇게 자신을 달래면서 사는 것이 보통 머슴들의 삶입니다. 주인이 내쫓아도 갈 수 없고 갈 곳도 없는 그런 입장입니다. 예수 믿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이 이런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종 된 나 바울은\"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종이 아니고 주인처럼 예수 믿는 것을 보게 됩니다. 머슴에게 주인이 어떤 일을 시켰다가 주인의 생각이 바뀌어서 머슴에게 다른 일을 하라고 하면 머슴은 이유를 불문하고 하던 일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왜 미리 말하지 않았는지 따집니다. 왜 나에게 이런 일을 시키는지 따집니다. 이것이 무슨 이야기입니까? 나는 머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거의 같은 위치라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것은 종의 모습으로 섬기는 것입니다. 칭찬도 인정도 없습니다. 대가도 보상도 없습니다. 그냥 좋아서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왜 신앙이 깊어지지 않습니까? 종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자존심이 있고 생각이 있기 때문에 종의 위치까지 내려가기가 실제로 어려운 것입니다. 우리는 철저하게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왜 그리스도께 종노릇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지를 말씀을 통하여 살펴보면서 은혜 받는 시간이 되기를 원합니다.
1. 은혜아래 있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15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더욱 죄를 지을 수 없습니다. 내가 주님의 큰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인데 이 은혜를 망각하고 전에 죄 가운데 뒹구는 어리석은 삶을 살아갈 수가 있겠습니까? 그럴 수가 없습니다. 은혜가 무엇인지 알기 위해 존 뉴톤 목사님의 예를 듭니다. 존 뉴톤은 10대 초반에 영국의 노예 선에서 승무원으로 탔습니다. 그런데 그 자신이 아프리카 백인 노예상의 흑인 아내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그 선장의 흑인 아내에게 온갖 학대를 받았습니다. 심지어는 음식을 주지 않아서 흑인 부인이 먹고 남은 음식을 주워먹을 정도였습니다. 너무 배가 고파 땅에서 얌이라는 감자 종류를 파내어 먹을 만큼 고통을 당했습니다. 이런 존 뉴톤이 노예생활에서 풀려나고, 현지 인들과 오래 같이 살다가 자신이 선장이 되었습니다. 선장이 된 이후로 그는 온갖 방탕한 생활을 다했습니다.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생활을 다 동원하여 해 보았습니다. 그렇게 살던 사람이 드디어 어느 날 기적적으로 예수를 믿게 되었습니다. 회심한 후 그는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감사하여 \'나와 같은 난봉꾼, 하나님께 삿대질하던 자\'를 하나님의 백성 삼아 준 것이 너무나 감사하여 찬송가를 많이 지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이라는 찬송입니다. ♪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와 잃었던 생명 찾았고 광명을 얻었네 그가 후에 런던에서 목회를 하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은총을 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가 죽기 전에 자신의 묘비를 썼습니다. \'한 때 불신자며 난봉꾼이던 나, 아프리카 노예들의 종인 내가 우리 주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풍성한 긍휼로 인해 보존되고 회복되고 용서받았다. 그리고 내가 한 때 그토록 오랫동안 파괴시키기를 원했던 그 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세움을 입었다.\' 한 사람이 이렇게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은총을 감격스럽게 전파하다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우리는 이 사람을 통하여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에 대하여 산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를 찾아내게 됩니다. 존 뉴톤 목사님같이 큰 은혜로 구원을 받은 자가 다시 죄 가운데 살며 죄의 종노릇을 하겠습니까? 아무리 하라고 해도 하지를 못합니다. 파스칼이 아주 의미 깊은 말을 했습니다. \"율법은 줄 수 없는 것을 요구하지만 은혜는 요구하는 모든 것을 준다.\" 은혜는 우리에게 감격을 안겨줍니다. 은혜는 자원하는 심령을 불러일으킵니다. 은혜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라면 생명이라도 내어놓게 만듭니다. 은혜는 우리를 진정한 자유인으로 만듭니다. 우리는 이런 은혜를 받은 자이기에 절대로 당연히 주님께 종노릇하게 됩니다. 종노릇하되 기쁨으로 종노릇합니다. 어거스틴은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유밖에 없는 자유인, 이것이 바로 은혜 받은 사람입니다. 흔히들 사람들은 법의 구속이 없어지고 은혜 안에서 자유인이 되면 오히려 방종하기 쉽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절대로 그렇게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경험한 우리는 이제 죄에게 종노릇하는 자가 아니라 죄와 싸우는 자입니다. 죄와 싸우는 것은 마치 시골에 똥개하고 싸우는 것과 똑 같습니다. 시골에서 살아보신 분들은 잘 아실 것입니다. 시골에는 집집마다 개를 많이 키웁니다. 게 중에는 사나운 놈들이 있습니다. 낯선 사람이 지나가면 얼마나 짖어대고 덤비는지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개와 싸워서 이길 수가 있을까요? 개가 짖으며 가까이 올 때 겁을 먹고 도망가면 그 놈은 기고만장해서 좇아옵니다. 그렇게 하면 안됩니다. 개를 이기는 삼 단계 전투 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첫째, 버티고 서서 노려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개가 멈칫합니다. 못 덤벼요, 다음으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개처럼 땅에 쭈그리고 앉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개처럼 응얼거리면 더 효과적입니다. 어디 한 번해 보자는 식으로 대들면 아주 효과가 좋습니다. 그 다음으로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개처럼 쭈그리고 앉아서 손에 돌이나 막대기를 하나 쥐는 것입니다. 그러면 더 이상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전쟁은 끝났습니다. 백전백승입니다. 참 재미있는 것은 험상궂게 생긴 놈일수록 쉽게 도망을 간다는 것입니다. 앙칼지게 짖어대는 놈일수록 쉽게 무너집니다. 그러니 개의 겉모양만 보고 지레 겁을 집어먹는다면 어리석은 사람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를 이기는 삼 단계 전투 법이 있습니다. 다시 한번 거짓을 예로 듭시다. 죄가 거짓말을 하도록 유혹해 올 경우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정면으로 맞서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4장 7절에 있는 말씀대로 마귀를 대적하는 것입니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죄에 대해서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 산 자를 마귀가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이 마귀야 어디 한번 해볼래\" 하면서 딱 정면으로 마주보면 아무리 간악한 마귀라도 멈칫합니다. 덤비지 못합니다. 두 번째로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엎드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마귀처럼 엎드릴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엎드려야 합니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입니다. \"시험에 들지 않기를 기도하라\"(눅22:40) 기도하는 사람에게는 마귀가 힘을 쓰지 못합니다. 세 번째로 아주 좋은 방법이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은혜의 막대기를 손에 쥐는 것입니다. 은혜의 막대기를 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아십니까? 사도 요한의 제자인 폴리갑이 복음을 전하다가 끌려갔습니다. 재판장은 폴리갑에게 예수를 욕하고 모른다고 하면 석방해 준다고 했습니다. 폴리갑은 그 소리를 듣고 코웃음을 쳤습니다. 그는 이렇게 담대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80인생을 살도록 주님이 한번도 나를 섭섭하게 하신 적이 없는데 이제 와서 내가 살아 남겠다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 있을 수 없어. 절대로 할 수 없어.\" 이것은 은혜의 막대기를 손에 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우리의 신분이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는 것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엠 알 디한(M. R. Dehaan)이라는 설교가가 이런 예를 들었습니다. 이것은 봉건시대의 사회구조를 전제로 한 예입니다. 과거 봉건 시대에는 주인들이 노예로서 하녀들을 거느리고 살았습니다. 어떤 사회의 경우에는 노예에 대한 엄격한 법률까지 제정되어 있었는데 이런 경우에 하녀들은 주인의 법 아래서 살고 있는 것입니다. 어떤 주인이 자기의 하녀를 위해서 이런 법을 제정한 경우를 생각해 보십시오. 기상 시간은 반드시 아침 6시여야 하며 7시까지는 집안의 모든 청소를 완료할 것, 그리고 8시까지 주인의 모든 식사 준비를 완료하고 9시까지는 자녀들을 위한 모든 뒷바라지를 끝낼 것 등등의 하루의 일정을 정하고 규칙대로 수행하며 그렇게 하지 못할 때는 추방하거나 매질도 가능한 법률을 정했다고 한다면 그런 법 아래서 행동하고 봉사하는 하녀들은 얼마나 불안하겠습니까? 그러던 어느 날 하녀와 주인 사이에 일이 벌어져서 주인이 하녀를 사랑하게 되었고 결국은 하녀와 결혼식을 올리고 아내로 맞아들였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그러면 이제 주인의 아내가 된 이 여인은 아직도 주인의 범 아래 있을까요? 아닙니다. 이제는 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 사랑 아래 살아가는 새로운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제 법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이 여인이 함부로 막 살겠습니까? 전에 6시까지 일어나야 했던 이 여인은 이제는 10시까지라도 잘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법 아래 있을 때의 삶이 얼마나 비참했던가를 잊어버리지 않은 여인이라면 주인의 엄청난 사랑과 호의로 자신이 주인의 아내라는 놀라운 신분이 된 것을 깊이 깨닫는다면 이제는 5시쯤 일어나야 마땅하지 않겠습니까? 바울 사도는 지금 비슷한 논리를 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주께 순종할 이유는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엄청난 은혜를 통해서 죄 사함을 받고 구원받아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그리스도의 사랑의 대상이 되었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를 범할 수가 있을까요? 일시적인 실수는 가능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내가 그분을 사랑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예수님께 던질 수밖에 없으며, 예수님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노예로 살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디에 있습니까? 바로 은혜 때문입니다.
2. 의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18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과거에는 죄의 종이었지만 이제는 의의 종이 되었기에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우리가 죄의 종에서 해방을 받으려면 의의 종이 되어야 합니다. 의의 종이 안되고 죄의 종에서 해방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과거 예수 알기 전의 우리의 삶은 죄의 종이었습니다. 죄를 사랑했고 세상의 여러 가지 것에 종노릇했습니다. 어떤 사람이 큰 BMW 자동차를 사서 즐겼습니다. 그는 고속도로를 달리면서 \"나의 BMW, 나의 BMW!\"라고 늘 중얼거렸습니다. 그러다가 나무를 들이받고 차가 완전히 망가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피를 흘리면서도 \"나의 BMW! 나의 BMW!\"를 외치는 것이었습니다. 그걸 본 앰뷸런스 운전자가 \"여보세요. 피가 많이 흐릅니다.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갔어요\"라고 말하니, 이 사람은 갑자기 \"나의 롤렉스시계! 나의 롤렉스시계!\"를 외치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완전히 물질에 종 된 죄악의 삶을 살고 있는 자입니다. 이렇게 세상에 종 된 삶을 살게 되면 그 종 된 삶을 쉽게 끊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인간적으로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고 쉽고 끊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듣지 않았습니까? 놀음을 하지 않고 끊으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썼습니다. 아무리 결심해도 잘 안됩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손가락을 잘랐습니다. 그렇게 하면 될 것 같지만 안됩니다. 손가락을 자르니까 화투장을 발가락에 넣고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사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엄하게 억누르는 율법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자유를 얻은 사람들이 은혜 아래 산다고 해서, 방종하면서 마음대로 죄를 범할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 된 자리에서 자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를 안 짓겠다고 결심하는 것으로 해결됩니까? 인간의 결심으로 죄에 대해 자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구체적인 예를 들어 말씀드린다면 에베소서 4장에서 거짓말하는 사람들에게 거짓말을 하지 말고 참말을 말하라고 하고 도적질하는 사람에게는 더 이상 도적질하지 말고 구제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 거짓말쟁이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언제 거짓말쟁이의 딱지를 면할 수가 있을까요? 그것은 거짓말을 중단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또 거짓말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거짓말하던 그 입술에서 참말이 나올 때 그는 비로소 진실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그때에야 그는 거짓에서 참으로 자유 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도둑질하는 사람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언제 도둑놈이라는 불명예스런 명칭에서 자유 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도둑질을 중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언제 또 도둑질을 시작할지 모릅니다. 성경은 도둑질하던 사람에게 구제하라고 가르칩니다. 남의 것을 빼앗던 그 손이 오히려 자신의 가진 것을 나누어주는 손으로 변할 때 이 사람은 비로소 도둑질하는 것에서 자유 하게 되는 것입니다. 언제 우리가 죄의 종 된 자리에서 자유 할까요? 그것은 우리가 죄의 종이 안되겠다는 결심만으로는 충분하지가 않습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의의 종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의의 종이 된다는 사실은 의의 근원이 되신 유일한 분인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미국인 형제 한 사람이 붉은 글씨로 문구를 새겨 놓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습니다. \"I\'m a slave for Christ\"(나는 예수 그리스도 종입니다)\"라는 문구였습니다. 어느 분이 싹 지나치고 나서 생각해 보니까 기특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옆을 스쳐 지나갔지만 다시 돌아보고 싶어서 보았더니 그의 등뒤에도 \"Who\'s slave are you?(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고 합니다. 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 노예란 자유가 박탈당한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종은 스스로 그리스도를 위하여 자신의 자유를 포기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노예가 되지 않으면 세상의 쓸데없는 것에 노예가 됩니다. 믿음으로 예수와 합하여 하나가 된 성도들은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에 함께 죽었다고 성경은 가르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과 저주의 대상이 되어서 지옥 불에 던져져야 할 나의 옛사람은 예수님과 함께 벌써 십자가에서 죽었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그 십자가에는 예수와 함께 죄인 된 나의 옛사람도 매달려 죽었다고 이해하여야 합니다. 예수와 함께 죄인 된 나도 죽었으니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죄의 종이 아닙니다. 따라서 죄가 더 이상 우리를 주관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죄에서 해방 받은 자유인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에 영적으로는 이제까지 우리를 얽매고 있었던 죄의 고리가 끊어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거부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죄의 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은 후에도 담배를 끊지 못하여 고민하는 어느 성도가 목사님과 상담을 하였답니다. 그 성도는 목사님에게 “나는 담배를 끊으려고 여러 목사님께 안수기도도 받아 보았고 연기귀신, 니코틴 귀신, 담배 귀신 물러가라 하면서 쫓아 보는 등 별 짓을 다 해보았지만 끊지 못하여 고민하고 있습니다”라고 하며 털어놓았습니다. 그 목사님은 그 성도에게“그것은 간단한 문제입니다. 그저 당신 자신이 담배를 안 피우면 됩니다. 담배를 거절하고 끊으시면 됩니다”라고 쉽게 대답을 하였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와 합하여 하나된 우리는 이제 죄로부터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죄의 명령과 유혹을 거절하고 밀어 낼 자유가 우리에게 있습니다. 내가 거룩해지기 원하면 그렇게 순종할 수 있고, 원하지 않으면 순종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화는 원하는 것과 관계가 없습니다. 나의 주인은 내가 아니라 주님이시기에, 나의 원하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원하시면 내가 싫어한다고 해도 순종해야 합니다. 코리텐 붐 여사가 한번은 말씀을 증거하고 나서 인사하기 위해 서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전에 본 적이 있던 독일의 어느 중년 신사가 그 앞에 서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바로 나찌 치하에서 감옥에 있던 자기의 언니를 괴롭혀서, 그 언니를 굶어죽게 했던 그 간수였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을 지독하고 잔인하게 고문했던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코리텐 붐 여사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세계적인 성녀이지만 그 순간 그의 손을 잡을 마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 순간, \'주여, 저는 저분의 손을 잡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용서해 주라고 하셨기 때문에 주님, 제가 손을 내밉니다.\'라고 기도했습니다. 그 손을 잡는 순간 전기가 흐르고 것 같았고, 두 사람 사이에 얼음 같은 것이 녹아 내렸습니다. 두 사람을 화해시키는 역사가 거기서 일어났고, 그녀는 너무나 큰 하나님의 은총을 그 순간에 체험했던 것입니다. 내가 원하지 않더라도 주님이 원하시기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순종하면 역사가 나타납니다.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기에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입니다. 회심한 어거스틴이 어느 날, 거듭나기 전에 잘 다니던 홍등가 앞을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그때 마침, 예전에 몇 번 술친구가 되어 주었던 술집 여자가 아는 체를 하며 놀다 가라고 유혹했습니다. 그때 어거스틴이 뭐라고 말했는지 아십니까? \"당신은 여전히 술집 여자로 남아 있지만,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오.\" 그러면서 단호하게 거절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은 곧 \'과거의 나\'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다시는 죄악을 되풀이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는 의의 종이 되었기에 죄에 대하여는 자유 하는 자입니다. 내가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의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최영 장군이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어떻게 황금 보기를 돌같이 합니까? 어느 목사님이 아주 혈통이 좋은 진돗개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습니다. 이름이 진돌이인데, 그 녀석이 최영 장군보다 낫습니다. 진돌이는 황금을 돌같이 여깁니다. 황금을 줘 보세요. 돌인 줄 알고 거들떠보지도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치를 몰라서 그렇습니다. 만일 개가 황금의 가치를 알게 된다면 뼈다귀에 대한 욕심은 제쳐 두고 황금을 가질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욕심을 버리고 의에 대한 욕심을 가지려면 의의 가치를 알아야 합니다. 어느 목사님 집 막내 아이가 두 살 되었을 때입니다. \"엄마, 아빠\"를 겨우 부르는 정도의 아이가 세 번째 배운 말이 \"100원\"입니다. \"100원\" 할 때마다 동전 한 개씩 집어 주면 형 따라서 슈퍼마켓으로 갑니다. 껌도 집어 오고 사탕도 집어 오고 장난감 시계도 집어 오고 해서 100원의 가치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가치를 알면 욕심이 생깁니다. 그래서 \"100원\"입니다. 어느 날 심방 가려고 나서는데 이 녀석이 \"100원\"하고 손을 내밀었습니다. 100원을 주려고 뒤적거리니까 100원짜리는 없고 대신 500원 짜리가 나왔습니다. 너 이 녀석 수지 맞았다 하는 생각으로 웃으면서 500원을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 아이가 500원짜리는 생전 처음 봤거든요. 100원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니까 아빠를 유심히 쳐다보고 아빠가 자기와 장난친다고 생각했습니다. 500원 짜리 내던지고 \"100원\"하고 칭얼댔습니다. 이런 답답한 친구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막내아이가 커서 이제 돈의 가치를 분별할 줄 압니다. 만약 100원짜리와 500원짜리 동전 중에 하나만 가지라고 하면 무엇을 가질까요? 당연히 500원짜리를 갖습니다. 500원을 갖기 위해서 100원 포기하는 것이 어렵지가 않습니다. 내가 의의 종이 된 것이 얼마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면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습니다. 죄 때문에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입니다. 사랑하는 성도님들 모두가 내가 주의 은혜로 의의 종이 되었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의 좋은 머슴으로 그리스도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머지는 오늘 오후에 말씀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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