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 무덤
요20:1-10
우리는 드디어 그리스도의 부활의 장면에 이르렀습니다. 요한복음은 여러 점에서 공관복음과 다른 입장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그리고 있습니다만 부활의 장면에서도 그렇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부활하신 후 주로 갈릴리에 나타나신 사실들을 취급하고 있습니다만 요한복음은 유다지방에 나타나신 사실에 보다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본문의 내용은 부활하신 아침 막달라 마리아가 먼저 무덤에 와서 거기에 주님이 계시지 않는 빈 무덤인 것을 발견하고 베드로와 요한에게 고하였고, 이 두 분이 달려가 예수님을 찾아와 주의 시신을 만나지 못하며 빈 무덤을 보았다는 기록입니다. 본문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재미있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나이 많은 베드로와 젊은 요한이 같이 달음질하였고 나이는 속일 수 없어 요한이 먼저 무덤에 갔으나 무덤 입문에 서서 관찰하기만 하고 들어가질 않았고, 베드로는 뒤에 따라 왔으나 무덤에 오자마자 보지도 않고 그냥 안에 뛰어들어가서 먼저 빈 무던의 내용을 확인했다는 기록입니다. 요한은 관찰에 능하고, 베드로는 행동에 빨랐다는 말입니다. 관찰에 능한데에 장점이 있고, 행동이 빠른데에 또 장점이 있습니다. 이 요한의 관찰과 베드로의 행동이 잘 협조해서 초대교회를 이룩하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사람이 성공했을 때, 가령 돈을 많이 모았다거나 높은 위치를 얻었다거나 하면 그 조상들의 무덤을 잘 장식하는 것을 봅니다. 그것은 인지상정으로서 나무람 할 수는 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무덤을 얼마나 잘 만들고 있느냐는 것이 그 자손이 얼마나 번창하고 있느냐는 것을 척도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세계에 있는 모든 큰 종교들은 모두 그 교조들의 무덤을 어마어마하게 장식해 놓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빈 무덤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의 흐름과 대조가 되고, 다른 종교와도 대조가 됩니다. 이 빈 무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보통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건은 고린도전서 15장과 같이 생각합니다. 4복음서의 부활의 기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고, 고전 15장은 부활하신 그 사실의 뜻이 무엇인가를 우리 앞에 밝혀주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 이 새벽에 무덤을 향해 올라와 그리스도의 부활의 첫목격자가 되었고, 또 그 사실을 전하는 자가 된 막달라 마리아의 경우를 두고 생각해 보십시다. 그가 이른 새벽에 이 무덤을 찾아온 목적은 엊그저께 창황하게 사랑하는 주님의 죽으심을 맞고, 장례함으로 무엇인가 그 장례가 소홀했습니다. 따뜻한 여성의 마음으로 그 장례식에서 부족한 점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였습니다. 향속을 사가지고, 기타 준비를 해서 올라왔던 것입니다.
그랬더니 무덤에 주님의 시신이 뵈지 않습니다. 첫째 마리아에게 실망이 아니었겠습니까? 그 순간 마리아의 소원이 무엇입니까? 다만 주님의 시신을 만나고 자기가 원하는대로 향속을 넣고, 그 시신을 어루만지고, 여러가지의 장례식 때 부족했던 점들을 보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로 따지면 그거 아무것도 아닙니다. 마치 현재 우리들이 조상의 무덤을 굉장히 꾸미는 것과 마찬가지가 됩니다.
다음 순간 마리아는 돌아가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물로 그가 부활의 주님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또 그분이 자기를 만났을 때 그분이 주님인 것을 또 몰랐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야” 하는 자기 이름이 불리울 때 주님인 것을 확인하게 되고, 그녀는 환희에 넘쳐 “랍오니여”하며 주의 발을 붙들었습니다. 앞서 겨우 시신을 만나 손질한다고 하는 그런정도가 아니지 않겠습니까? 비할 수 없는 큰 기쁨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장면의 마리아에게 아직도 하나가 부족했던 것입니다. 그는 왜 주께서 부활하셨는지 그 부활이 자기와 무슨 뜻이 있는지를 알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말씀 드린바 고린도전서 15장의 그 내용을 깨닫고 있지를 못한 것입니다. 그 내용을 깨달아 알 때에 비로서 우리의 구원을 대하는 자세는 완전한 상태에 들어간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단순히 부활을 만나 환희에 잠겨있는데 또 비할 수 없이 높은 차원이 된다고 믿습니다.
어떤 사람은 죽은 시신만 바라보고 그 장식으로 끝나는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과거의 역사적인 그리스도의 부활의 사실을 믿는 거기에 머물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또 더 나가서 그 부활의 뜻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되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신앙은 충실해진다고 믿습니다. 즉 빈 무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첫째 사망의 권세를 파하신 것을 말합니다(고전 15:54 이하).
마태복음에 의지하면 예수께서 돌아가시고 무덤에 장례된바 되었을 때 대제사장들 유대의 교권자들은 발라도에게 청하여 무덤을 단단히 인봉하였다고 말했습니다. 큰 돌을 굴려두고, 그 앞에 밧줄을 묶고, 그 밧줄 또한 인봉하여서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을 때 그 돌이 굴러 갔습니다. 물론 밧줄이 떨어져 갔습니다. 물론 인봉이 떨어져 나갔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그 권능있는 역사에 돌이 당할 수 있겠습니까? 밧줄이 당할 수 있겠습니까? 그 인봉이 당할 수 있겠습니까? 사람을 향하는 인봉이지 하나님을 향하는 인봉은 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가 유대 교권자의 세력을 파하신 사실을 말합니다. 나아가 빌라도가 대표하는 로마의 정권을 파하신 사실을 말합니다. 그리고 더 나가서 사망의 권세를 파하신 사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 15:54이하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권세가 어디 있느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을 봅니다. 바울 사도는 부활의 큰 교리를 논증해 가다가 드디어 마지막에 가서 감격에 넘쳐 사망을 이기신 그 부활의 뜻을 고고히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생각건데 사망은 일생을 통하여 사람을 지배하고 있는 무서운 폭군이 아니겠습니까? 히브리 2:15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살이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고래로 모든 영웅도 호걸도 부자도 정치가도 군인도 철학자도 아무도 이 사망의 권세에서 피해내지를 못하였습니다.
실존철학가 하이데커는 “사람은 죽음과 허무의 공간에 내동댕이쳐진 존재”라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우주인이 우주공간을 날으고 있는데 우주유영이라고 해서 캡슐에서 나와 밖을 관찰하는 수가 있습니다. 그 때는 단단한 로프로써 자기몸을 우주선과 결부시키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십시요. 만약 그 로프가 잘려버려서 그가 우주공간에 그냥 내동댕이 쳐졌다고 한번 가정해 보십시다. 참으로 무서운 사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는 불원간 죽어져 한 인간위성이 되어 얼음장 같은 송장이 끝없이 우주를 돌고 있을게 아니겠습니까. 하이데커는 “사람은 죽음이라는 무서운 공간 속에 내동댕이 쳐 있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것 모두 죽음이 인간을 폭군처럼 지배하고 있는 그 사실을 가리켜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셨을 때 모든 권세가 다 그앞에서 파함을 받았고 마지막에 사망의 권세까지 그 앞에서 파함을 받았습니다.
둘째 “또 머리에 쌌던 수건은 세마포와 함께 놓이지 않고 딴 곳에 개켜있더라”(7절)하신 말씀을 생각해 보십시다. 그 것은 질서 있는 부활의 역사였던 것을 가리킵니다.
이제 말씀드린 바처럼 그 부활의 사실은 모든 권세를 타파하시는 크고 두려운 사건이었습니다만 그 큰 사건속에 그리스도의 시신을 쌌던 수건이 잘 단정히 개켜 거기에 놓여 있더라는 말씀입니다. 아무렇게나 흐트러져 있던 것이 아니고 질서있게 정돈되어 있던 것을 가리켜 말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본사람과 한국사람의 신벗는 습관을 비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사람은 현관에 들어와서 신을 벗고 방으로 들어갈 때 돌아서서 신을 벗어 신을 안을 향하게 둡니다. 그래서 일본사람은 밖에 나갈 때 신을 신고 그대로 갈 수가 있고, 한국사람은 돌아서서 신을 신고 돌아서서 또 가야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글쎄올시다. 저는 그 사건을 들고 꼭 일본사람이 잘하는 것이고, 한국사람이 잘못하는 것이라고는 할 마음이 없습니다만 좌우간 일본사람은 들어올 때 나가는 것을 염두해 두고 들어오는 것이고, 한국사람은 들어올 때 나가는 것을 생각지 않고 그냥 들어온다는 말이 되지 않겠습니까? 어떤 사람은 그냥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그저 아무렇게나 신을 벗어던져버리고 들어옵니다. 한짝은 여기 있고, 한짝은 멀리 딴 곳에 있고 그래서 나갈 때면 한참이나 신을 찾아서야 신고 갈 수 있게 벗는 수도 있습니다.
요즘 신문에 보면 저 산들 혹은 강가 많은 사람이 찾아가는 곳에서는 쓰레기 더미가 되어서 한번 휴일이 지나면 수십명의 사람의 동원하여 수십대의 차로 쓰레기를 수거하고 있다는 말을 듣습니다. 나 하나가 산천을 찾아서 즐겼으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되어도 관계가 없다는 뜻이 아니겠습니까? 산천을 함부로 더럽히고, 가버리고마는 우리의 무질서한 생활, 무엇인가 느껴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천지창조하신 역사에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창조이전에 땅이 혼돈하고 깊음이 물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그 위에 운행하셨습니다. 창조전의 세상상태는 혼돈이었습니다. 하늘도 없고, 땅도 없고, 물도 없고, 육지도 없고, 전부가 뒤죽박죽이었습니다. 그다음 창조의 과업은 먼저 윗물과 아랫물을 나누시고, 그 다음에 땅위에 높은데와 낮은데를 나누셔서 물이 한군데로 모이게 하셨더라- 이래서 하늘과 땅과 바다의 구분이 생겨나왔던 사실을 가리켜 말합니다. 즉 전부가 혼돈되고 있는 것은 창조전의 상태이고, 자기 위치를 따라서 질서있게 되어 있는 것이 바로 창조였다 할 수가 있습니다. 우리는 대우주의 정연한 질서의 세계를 바라볼 때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고, 어지러운 일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고전14:33)
요즈음 우리 사회는 참으로 너무나 시끄럽고, 너무나 떠들어 정신을 차릴 도리가 없습니다. 저는 혼자 그렇게 느껴봅니다. “세상에 떠들어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거다. 아무리 좋은 일이라 하더라도 떠들기 시작하면 그 일이 옳게 될 수가 없는거다” 생각합니다. 떠들어 되는 것은 한가지 뿐입니다. 그것은 혁명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참된 나라의 안정과 평안을 기대한다면 조용하게 각자의 자기 위치로 돌아가야 된다고 믿습니다. 하여튼 부활하신 주님은 질서있게 부활하셨습니다. 제1창조에서 엿새동안 하루하루 창조의 프로그램을 진행하신 질서의 하나님은 제2창조인 거듭나는 이 도리에서 그리고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그 도리에서도 질서있게 출발하신 것을 봅니다.
살전 4장이나 계시 20장에서 최후의 프로그램을 볼 수가 있습니다. 세상의 종말, 그리스도께서 재립하실 때 먼저 죽은 자가 부활하고, 그 다음에 산자가 공중에 끌려 주님을 맞아하게 되고, 그 다음에 천년 왕국이 계속하며, 그 다음 혼돈과 최후의 큰 정쟁이 있고, 그 다음 대심판이 계속합니다. 그 심판 끝에 영원한 세계가 전개되는 것을 밝혀두고 있습니다.
우리는 최후에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더 명백하게는 알 수 없습니다만 성경말씀을 따라 그것이 하나님의 작정가운데 질서있게 진행되는 줄 압니다. 마치 창조 때 엿새동안의 과업을 따라 창조된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 모든 질서있는 종말에 하나님의 역사는 여기에 질서있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 된 것입니다.
세째로 빈 무덤은 우리 주님의 구주성의 완성이라 하겠습니다.
예수님의 일생을 통하여 세번 큰 사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동정녀의 몸에서 나신 탄생이었습니다. 둘째는 십자가의 죽음이었습니다. 그리고 세째는 죽은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사실이었습니다.
이중에 첫째는 그리스도의 독특한 신분을 가리킵니다. 그의 나심을 예언했던 이사야의 예언처럼(사 7:14) 인류에게 보이신 한 징조였다고 생각합니다. 독특한 하나님의 아들의 나심을 예고해 준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있었던 십자가와 부활, 이 두 사건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겠습니까. 십자가는 그가 무엇을 했느냐, 즉 그리스도의 성역을 말합니다. 부활은 그가 누구시냐는 그리스도의 신분을 가리키는 일인줄 생각합니다. 이 두가지가 합하여 그리스도의 구주성이 완성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렸다해서 만민의 구주가 된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좌우편에 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십자가가 우리의 구주는 못됩니다. 또 로마시대에는 수많은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박아 처형한 사실들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등의 우리의 구원에 관계없는 일로 생각합니다. 무엇 때문에 그리스도의 삽자가만이 만민을 대속하신 죽음이요, 그만이 우리의 구주가 되는 것인가? 그의 신분 때문입니다.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신분은 그리스도의 일생을 통하여 여러면에 나타나십니다. 그의 기적적인 일을 보아, 그의 탁월한 교훈을 보아, 그의 죄에 대한 자책이 없는 것으로 보아 등등의 여러가지의 조건들을 들 수 있습니다만 그러나 가장 큰 조건은 부활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 1:4에 “그리스도는 육신으로 말하면 다윗의 자손으로 나시고, 신성을 두고 말한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 된 것을 권능으로 나타내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라”는 말씀들이 나타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몇 가지의 사실을 우리 앞에 말씀해 줍니다. 첫째는 그 자신이 이제 말씀드린 바처럼 하나님의 아들 되시는 그의 신분을 선포하고, 둘째 그의 부활은 모든 사람의 부활을 첫 열매였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고전 15:20). 그리스도가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를 믿는 우리 역시 주와 더불어 같이 부활하게 된 것입니다. 하여튼 그리스도는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그의 구주성이 완성된 것으로 압니다.
옛날 헬라에 에피큐리어스라 불리우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만 그는 자기와 죽음과는 관계가 없다고 이렇게 논하였습니다. “내가 살아있을 때는 죽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과 관계 없는 것이다. 내가 죽었을 때는 살아있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와 더불어 관계없는 것이다.” 라는 말을 했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런가 생각되지만 자세히 생각해 보면 한 괴변에 지나지 못합니다. 사망의 문제는 이런 괴변가지고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교에서는 윤회설을 가지고 있습니다만 어떤 책자를 보니 석가모니는 84번이나 윤회하여 마지막에 부처님이 되었다는 기록입니다. 맨 처음에 사람으로 났고, 그 다음에 소가 되었고, 그 다음에 말이 되었고, 이런 등등의 끝없이 윤회하다가 84번째야 석가모니가 되고, 도를 깨닫게 되어 부처님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물론 저는 윤회설 자체를 믿지 않습니다만 이제 그말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고한들 84회 윤회해서 부처가 된다는 그것이 인간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한다고는 볼 수가 없지 않겠습니까?
어떤 분은 만나니 하는 말이 “왜 죽음을 생각하느냐, 죽음을 생각지도 말고 말하지도 말라” 그렇게 말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글쎄올시다. 죽음을 생각지 아니한다고 죽음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겠습니까? 가령 여러분들의 몸 속에 어떤 중한 병이 있는데 내 병을 생각하지 않겠다해서 그 병이 해결되는 것이 아니지 않겠습니까? 병원에 가서 수술을 받고 병고를 제거해 버려야 비로서 병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숙제적인 큰 사건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죽음에 억압되어 살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것은 철학적인 괴변가지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윤회적인 사상 가지고도 해결될 문제가 아니며, 생각지 않는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도 아닌줄 생각합니다. 다만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삼일만에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만이 우리의 죽음의 문제도 해결해 주시는 것입니다.
유명한 무디선생이 병이 짙어서 세상을 떠날 때가 되었을 때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앞으로 내가 며칠후에 여러분들은 시카코에 있는 신문을 통하여 디엘 무디가 죽었다는 보도를 읽을 것입니다. 그 때 여러분 결코 그 말을 믿지 마십시오. 나는 그 때 죽은 것이 아닐 것입니다. 더 화려한 새로운 생명을 주와 더불어 같이 하나님의 나라에서 보내고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는 말입니다. 부활을 믿는 신앙자가 가질 수 있는 확고한 신앙의 승리적인 말로 생각합니다.
우리는 사람이 죽으면 무덤을 장식하고마는 생활에 있지말기를 바랍니다. 더 나가서 단순히 과거에 그리스도가 부활하였다는 역사적인 사실을 믿는데 머물러도 안될 줄 생각합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부활의 참 뜻을 깨닫기를 바랍니다.
빈 무덤이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이겠습니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세를 이기시고 우리에게 사망의 권세를 이기는 길을 열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영원한 새로운 삶은 향한 질서 있는 새 출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 주님의 구주성을 완성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이 부활의 참 뜻을 고요히 묵상해 보시면서 우리가 믿는 부활의 신앙위에 굳건히 서시길 바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