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20:1-10
본문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장사한지 삼일만에 부활하신 아침, 베드로와 요한이 주님의 무덤을 찾아간 광경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묘사가 어찌나 생생한지 목격자의 수기(手記)인 것을 쉽사리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의 ‘빈 무덤’을 묘사한 것입니다.
본서만이 아닙니다. 4복음서는 한결같이 부활하신 아침의 빈 무덤을 전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부활의 이대 근거를 찾는다면 4복음서의 결론인 부활장들과 고린도전서 15장일 것입니다. 전자는 다같이 빈 무덤을 전하고 후자는 부활에 관한 일대 논문을 제시합니다. 즉 전자는 부활의 역사적 사실을 전하고, 후자는 그 사실을 해석하는 것입니다.
‘빈 무덤’이라면 애굽 카이로 근교에 있는 키제에촌의 피라밋을 연상하게 됩니다. 그것은 세계 7대 불가사의의 하나로 불리 우는 쿠프왕(Cheops)의 왕능입니다. 이 피라밋은 2톤반짜리 큰 돌들을 무려 230만 개나 쌓아올린 것으로 노예 10만 명을 30년간 부려 현장에서 7km나 떨어?곳에서 이 돌들을 운반하여 와서 쌓았다는 것입니다. 이 삼각추 한 가운데 지점에 왕의 무덤이 있습니다. 또 왕의 무덤에는 그가 소유했던 보물을 같이 간직한 큰 창고가 있는데 그 창고 뚜껑인 나무판을 굴리면 한참동안 메아리가 울려 옵니다. 그 보물창고의 깊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곳에 쿠프왕의 시신도 없고, 그 보물창고에 보물도 하나 없습니다. ‘빈 무덤’인 것입니다.
저는 바로의 빈 무덤에 들어서서 성지 예루살렘에 있는 그리스도의 무덤을 연상하며 두 ‘빈 무덤’을 비교하여 보았습니다. 하나는 생전의 사치와 폭정의 자취이나, 하나는 고난과 봉사의 일생을 보내신 성자의 자취입니다. 하나는 세상의 왕자가 지나간 자취의 허무성을 보이나, 하나는 성자의 거룩한 생을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는 유한된 현세의 멸망을 말하나, 하나는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의 영화를 가리킵니다.
오늘, 부활절을 맞이하여 좀 더 그리스도의 ‘빈 무덤’의 뜻을 깊이 상고해 보도록 하십시다. 그리고 이 ‘빈 무덤’과 우리 교회, 나아가 우리들 개인의 신앙과의 관계를 밝혀 보십시다.
첫째, ‘빈 무덤’은 제자들의 활동의 신호였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수난일과 부활하신 아침에는 전연 대조적인 두 그림을 볼 수 있습니다. 한 마디로 표현하여 어두움과 빛의 대조라 하겠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운명하실 때 천지가 짙은 어둠에 쌓였다고 하였습니다만 그 때 제자들의 마음은 더욱 어두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의 아침에는 밝은 빛이 빈 무덤에서 시작하여 온 천지와 제자들의 마음 속에 힘있게 비쳐 왔습니다.
‘부활절’을 뜻하는 영어 Easter나 독어 Oster는 다같이 ‘동방절’을 뜻합니다만 동방은 즉 ‘빛’을 뜻합니다. 그리고 ‘빛’은 다시 ‘활동’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밤이 되어 어둠이 짙어지면 사람들은 하루의 노동에서 놓여 차차 잠들게 되고, 아침이 되고 햇빛이 비쳐오면 모든 활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본문만 해도 그렇습니다. 무덤을 찾아간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이 비어 있는 것을 보고 뛰어 돌아왔고, 그녀의 보고에 따라 베드로와 요한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무덤으로 달려갔습니다. 곧이어 엠마오로 갔던 두 제자들이 돌아왔고, 흩어졌던 제자들이 모여들었습니다. 모두들 눈동자가 빛나고, 호흡이 차고, 얼굴들이 붉게 물들어 상기했습니다. 빈 무덤의 소식은 아침 햇빛처럼 제자들에게 활동을 일으켜 주었던 것입니다.
교회의 생명은 활동에 있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심오한 철학을 가지고 있고 치밀한 조직체를 갖추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철학과 조직체는 언제나 생명이 넘치는 활동으로 나타나야 되겠습니다. 교회가 사상이나 이론적이 되고, 활동을 중지할 때에 교회는 생명을 잃고 마는 것입니다. 오히려 비록 무식하고 가난하다 해도 열심으로 모이고 열심으로 전도하는 교회는 부흥되고 전진하는 것입니다.
2월 14일은 성 바렌타인의 날(St. Valentine\'s Day)이라 합니다. 그는 3세기의 순교자로서 수도원에 있을 때 여러 화가, 조각가, 음악가, 문학가 또는 사본자들이 그들의 소질을 따라 하나님께 봉사하고 영광 돌리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아무 재주가 없어 주께 봉사할 길이 없는 것을 한탄하다가 생각한 것이 그 동리 사람들에게 편지를 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동민들의 사정을 알면 아는 대로, 모르면 모르는 대로 매일 편지를 보냈습니다. 그의 편지는 주민들에게서 환영되고 ‘사랑의 편지’라 불리었습니다. 그후 그는 왕의 미움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그의 사랑의 편지는 계속 그곳 주민들에게 전달되었다고 합니다. 교회는 이와 같이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받은 재능대로 주께 봉사하는 활동이 활발할 때 부흥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의 활동에는 여러 가지 동기와 목적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바울은 당시 로마교회의 사정을 밝히면서 ‘어떤 이들은 투기와 분쟁으로 어떤 이들은 착한 뜻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나니’(빌1:15)하였습니다. 심지어 ‘사단은 좋은 행상인이다’(Satan is a good salesman)라는 말까지 있습니다. 시국이 어려워지고, 교회 내에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기회삼아 명예와 지위를 얻기 위해 일을 만드는 사람들을 흔히 봅니다.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사사로운 유익을 위해 교회를 무대로 하는 활동들을 봅니다. 진정한 교회활동은 근본적으로 빈 무덤에서 출발해야 되겠습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이 그 동기가 되고, 목적이 되는 활동이라야 되겠습니다.
둘째, ‘빈 무덤’은 그리스도의 육적 부활의 증거였습니다. 성경 본문에 빈 무덤의 광경을 섬세하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쌌던 세마포는 따로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은 따로 개켜 있었다고 합니다. 결국 그 묘사는 예수의 육체가 부활하신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계의 동향은 그리스도의 육적 부활을 부정하는 경향으로 기울어지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신앙과 교회를 위해 중대한 위기로 생각합니다. 현대 신학자들은 부활의 아침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과 제자들이 주께서 부활하신 것을 믿는 것은 시인하나 실지로는 그것은 한갖 현상(現象,phenomenon)에 지나지 않았다고 보고 있습니다. 혹은 그것은 막달라 마리아의 신경과민에서 본 환상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고전 15:6에는 5백여 형제들이 일시에 부활하신 주를 보았다고 합니다. 5백명이 일시에 환상을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혹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정신적으로 부활하신 것, 즉 제자들의 마음에 부활하사 초대교회를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진리와 역사성이 분리되고, 그리스도교는 사실이 아닌 허위 위에 서 있는 것이 되겠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의 사실을 변증하면서 많은 부활의 목격자들의 명단을 들고 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에게도 나타나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역사적인 사실을 말합니다. 그것은 죽은 자의 육적 부활을 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의 후반부에서 부활의 몸의 신비성을 논하고 있습니다. 부활한 육신은 육신이지만 현세적인 제한과 질고에서 초월한 신령한 몸인 것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적 부활은 그가 부활하신 후에도 인성을 가지신 것을 뜻하고, 따라서 그의 영원한 신인양성(神人兩性)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신성과 인성을 겸전하시게 되고, 그러므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영원한 증보자가 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육적 부활은 우리 모든 성도들이 장차 부활할 보증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부활은 모든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신 것입니다(고전 15:20).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인생은 ‘죽음을 향한 생’(Sein-zum-Tode)이라 하였고, ‘죽음에 포위된 생’이라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를 놓아주려 하심이니’ 하였습니다. 죽음은 절대적인 폭군처럼 모든 인생을 위압해 왔습니다. 이와 같은 인생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모든 인생에게 ‘죽으나 산다’는 부활의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만일 현대 의학계에서 암이나 고혈압 같은 치명적인 질병을 근치하는 길을 발견한 의사가 나타난다면 그는 인류의 은인으로 칭송되고 노벨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위해 이룩하신 일은 한 두 가지 질병을 고치신 정도가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인생의 죽음을 타파하고 영원한 부활의 길을 개척하신 것입니다. 바울의 말처럼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전 15:55)라는 높은 개가를 인류에게 주신 것입니다.
셋째, 결과적으로 ‘빈 무덤’은 우리 그리스도교가 서 있는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현대신학자 불트만(Bultmann)은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에서가 아니라 부활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학파가 그리스도의 육적 부활을 부정하는 것은 이미 언급하였습니다. ‘진리 또는 계시와 역사’를 분리하여, 역사성을 부정하고 그 진리만을 주장한다면 우리 그리스도교를 허위 위에 서는 종교로 만든다는 것도 이미 지적하였습니다. 그러나 부활이란 역사적 사실은 부정하면서도 우리 그리스도교가 부활에서 시작하였다는 그 주장은 흥미 있는 일로 생각합니다. 초대교회가 ‘부활’이란 신앙에서 생기를 얻고 활동을 개시하고, 선교하여 그리스도교가 형성되었다는 뜻입니다.
여기 마지막 한 점에 있어 불트만 체계는 바른 관찰을 하였다고 생각합니다. 동시에 부활의 사실은 받지 않으면서도 그 뜻은 이렇게 중요시 하는데 반해, 주의 부활을 열심으로 주장하면서도 그 뜻에는 무관심하는 신자들이 많은데 이상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여튼 주님의 부활을 보고 새 용기과 생명을 얻은 제자들이 초대교회를 설립하였다는 사실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부활이란 근거 위에 서 있는 것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부활은 단순히 실제적 활력에서만 교회의 기초가 된 것이 아닙니다. 교리면에서도 그렇습니다. 로마서 1:4에 부활은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능력으로 증명하였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부활을 부정한다면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정하게 되고, 나아가 그의 구주성을 파괴하는 결과가 되는 것입니다.
로마에 가면 성베드로 대성당이 있습니다. 그것은 전세계 카톨릭교회의 중심부라고 하겠습니다. 이 성당의 하층에는 법왕들의 무덤들이 있고 또 그 하층에는 사도 베드로의 유골이 묻혀 있다고 합니다. 즉 성 베드로 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서 있다는 뜻이 되겠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교는 베드로의 무덤 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빈 무덤’ 위에 서 있습니다. 즉 주의 부활이 우리 교회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교회적으로만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 개개인의 신앙의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 각자 자기 나름의 예수를 믿는 동기가 있겠고, 또 다양한 목적들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공통적이며 궁극적인 목표는 ‘부활’이라야 할 것입니다. 바울은 말하였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도 망하였으리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금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 15:17-19)고, 그렇다면 우리의 믿음이 헛되지 않고, 우리의 죄가 사유를 받고, 우리가 죽어 망하지 않고, 살아 불쌍한 자가 되지 않으려면 우리의 생이 주의 부활 위에 근거하여야 될 것입니다. 우리의 생의 모든 문제가 부활의 빛 아래서 해결을 받아야 할 것입니다.
부활절이 되면 구미에서는 색칠을 한 계란을 나누어 먹는 풍습이 있습니다만 그 풍속의 기원은 이렇습니다. 십자군이 성지로 파견되는 무렵 로자린드라는 귀족이 십자군으로 출전하고 그 부인이 남아 집을 지키다가 악한 하인에게 속아 좇겨 나왔습니다. 로자린드 부인은 방황 끝에 어떤 촌락에 당도하여 촌민들의 따뜻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그 마을에는 닭이 없는 것을 알고 부인은 닭을 구하여 길렀고, 그 계란을 모아 부활절 아침에 그 촌민들의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나누어 주었습니다. 계란은 아름답게 색칠을 하였고 거기에 로자린드가의 가훈인 ‘하나님의 보호하시는 손길을 믿자’라는 구가 적혀 있었습니다. 부활절 오후에 병든 어머니를 찾으러 가는 소년이 이 마을을 지나게 되었고 로자린드 부인은 그에게도 이 계란을 주었습니다. 소년은 이 아름다운 계란을 병든 어머니께 드리려고 가다가 어떤 중병이 든 늙은 병사를 만나 그를 구하기 위해 그 계란을 주었습니다. 그 계란을 받고 거기 가훈을 읽은 병사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가 바로 귀족 로자린드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집에서 좇겨난 아내를 찾아 사방으로 헤매다가 이렇게 중병이 든 것입니다. 하여튼 부활절의 계란을 통해 이 부부는 다시 만나게 되고, 본가로 돌아가 행복한 여생을 보내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한갖 전설에 지나지 않습니다만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사는 자에게는 이와 같은 전설을 체험할 것입니다. 슈바이처는 ‘생의 외경(畏敬)’을 말했습니다. 간디는 ‘사람에게는 신성불멸의 힘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사람의 생명은 하나님의 형상을 본받아 지음 받은 존귀한 것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하나님의 형상이라면 그것은 영원불멸의 생명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원불멸의 생명은 곧 부활의 생명을 말합니다. 2천년 전 그리스도의 무덤이 빈 것처럼 장차 모든 인간의 무덤들이 빈 무덤이 될 것입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부활의 신앙이 우리 개개인과 교회와 사회를 말없이 지배하여 삶의 원천력이 되고, 근거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