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에선 십자가

중앙에 선 십자가

요19:17-22

우리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의 종교’라고 불리웁니다. 그것은 갈보리 산상의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출발했기 때문입니다. 중세대에 역사를 장식했던 십자군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성지가 희희교도에게 유린당했을 때, 도자 베드로나 성 벨날의 설교에 분기한 유럽의 왕들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노소를 막론하고 십자가를 흔들면서 성지를 향해 진군하였던 것입니다. 십자가의 위세를 높였을 때라 하겠습니다. 현재 세계 모든 그리스도 교파들은 다 십자가로서 그 표지를 삼고 있습니다.

1853년 크레미야전쟁 때 나이팅게일이 적군 아군의 차이가 없이 부상병을 간호한데서 만국 적십자사가 창설되었습니다. 여기에서 십자가는 교회 밖에 나가 사회의 복지의 상징이 된 것입니다. 현재 세계에는 스위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스등 십자가로서 국기를 제정한 나라들까지 있습니다.

이과 같이 십자가의 표지가 높이 사용됨에 따라 십자가를 대하는 사람들의 인식도 가지 가지로 되기 쉽습니다. 적어도 십자가의 본의를 소홀히 하기 쉽습니다.

이제 우리가 봉독한 말씀에는 우리 그리스도교의 원십자가(原十字架)가 나타나 있습니다. 그것은 주께서 못박히신 십자가! 모든 십자가의 원형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본의를 묵상하여야 되겠습니다. 더구나 갈보리 산상, 주께서 못박히신 곳에는 세 십자가가 같이 서 있었고 주님은 그중 한가운데 계셨습니다. 이 중앙에 선 십자가는 양가의 두 십자가에 비해 볼 때 그 특색은 더욱 뚜렷했던 것입니다.

과연 십자가는 갈보리산을 분수령으로 하여 그 전과 후에 중대한 뜻의 전환을 볼 수 있습니다. 갈보리산까지의 십자가는 비참한 죄수의 상징에 지나지 않았습니다만, 갈보리 이후 십자가는 그 전자를 대표하고, 중앙의 십자가는 후자를 말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더 나아가서 이 중앙에 선 주님의 십자가에 대해 묵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첫째, 이는 특이(特異)한 십자가였습니다. 이때 갈보리 산상의 삼 십자가는 이땅 위에 온 모든 사람을 대표한다고도 보겠습니다. 이때 주님과 같이 못박혀 죽은 두 강도 중 한사람은 십자가 상에서 회개하였고 신약 외경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디스마였습니다. 회개하지 않았던 강도의 이름은 게스다였다고 합니다. 물론 디스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무서운 죄인이었습니다만 이 순간 그는 회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보시기에는 의인이 된 것입니다. 게스다는 사람 보기에도 죄인이요 하나님 보시기에도 죄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중앙에 선 십자가는 사람 보기에는 완전한 의인이었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만고에 없는 큰 죄를 지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는 사람이 보기에는 무죄하셨습니다. 어떤 사람도 주님에게서 죄를 발견치 못하였습니다. 총독 빌라도는 세 번까지나 그의 무죄를 선언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순간 전 인류의 죄를 지고 계셨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는 이 순간 만고에 없는 대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지선하신 하나님은 비록 아들이라 할지라도 죄인 되셨을 때, 얼굴을 돌리셨고, 아들은 슬픈 어조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시나이까’라고 부르짖으셨던 것입니다.

그는 죄없는 죄인, 완전한 의인이면서 최대의 죄인, 십자가에 달리신 성자였던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는 특이한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십자가는 특이하고도 심오한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대제사장, 바리새인 등 유대의 교권자들은 그리스도를 능욕하기 위해 갖은 수단을 다하였습니다. 그들은 가룟 유다에게 은 삼십을 달아 줌으로써 예수를 매수하였습니다만, 그것은 당시의 노예의 값이었습니다. 그들은 빌라도가 ‘내가 너희에게 예수를 놓아 주랴, 바라바를 놓아 주랴’하였을 때 바라바를 택함으로써 예수를 그 살인 강도 이하로 만들었습니다. 또한 주님은 로마 군인에게 왕으로 가장되어 조롱을 당하셨고, 그의 십자가 위에까지 ‘유대인의 왕 나사렛 예수’란 명패를 써 붙였습니다. 그의 달리신 십자가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최악의 극형이었습니다. 나무에 달아 죽이는 것은 히브리 율법에 저주한 바며(신 21:23), 로마 세계에서의 십자가는 송장과 합장시켜 죽이는 형과 더불어 가장 무서운 사형 방법으로서 식민지인이나, 노예에게만 과했던 극형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십자가는 강도와 강도 사이에 끼어 있었습니다. 우편에도 강도! 좌편에도 강도! 그는 완전히 강도의 취급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간악한 유대의 교권자도, 이 포악한 로마의 군인들도, 이 중앙에 선 십자가를 지신 이의 신분도, 그 십자가의 사명도, 전연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의 신분은 독특하였고, 그의 사명은 특이하였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생애는 완전히 특이하였습니다. 우선 그의 나심이 특이하셨습니다. 그는 동정녀를 통해 나심으로 전무 후무한 생을 시작하신 것입니다. 그의 소년기도 특이하였습니다. 그가 열두살 되실 때, 예루살렘 성전에서 묻고 답하실 때, 듣는 자가 다 이상히 여겼습니다.

그의 말이 이상하였습니다. 니고데모, 사마리아 여자, 음행한 여자를 따라 온 사람들, 율법학자, 빌라도, 바리새 교인 등, 그를 만나보고 그의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다 이상한 감을 금치 못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체포령을 받은 공회의 하속들은 빈손 들고 돌아가, 그 같이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더이다’(요 7:46)라고 보고하였던 것입니다.

그의 행동도 특이하였습니다. 그는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제자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그것은 선생으로서 할 수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그는 베드로가 말고의 귀를 깎았을 때, 그것을 도로 붙여 주셨습니다. 확실히 그는 특이한 사랑을 하셨고 특이한 봉사를 하셨고, 특이한 용서를 하신 것입니다.

그의 기도도 특이하였습니다. 그는 나사로를 일으켰을 때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시는 것을 감사하나이다. 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저희로 미데 하려 함이니이다’(요 11:41-42)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면밀히 예수의 이 기도문을 검토하여 본다면 어떤 사람도 이런 기도를 드릴 수 없을 것을 느낄 것입니다. 그는 기도하시면서 한번도 당신의 죄를 사하여 달라고 하신 적이 없었습니다. 확실히 그의 기도는 단순한 청원이 아니라 성부자 간의 영화로운 교제였던 것입니다.

그 외 그리스도의 생애는 모든 면에 있어 특이하였습니다. 더더구나 그의 생의 최후였던 십자가와 부활은 특이하였습니다. 그의 부활은 우선 그 사실 자체가 특이하였습니다만, 그의 십자가는 그 뜻이 특이하고도 심오하였던 것입니다.


둘째, 중앙에 선 십자가는 분리의 십자가였습니다. 그의 양편의 두 강도, 디스마와 게스다는 어제까지는 동료요, 공모자였습니다만, 오늘은 중앙에 주님의 십자가를 두고 분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분리는 영원한 분리였던 것입니다.

누가복음 23장의 기록에는 이 두 사람의 분리를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첫째 그리스도관에 있어 분리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주님을 대하여 오만하여 불손하였고 자기와 같은 동료로 생각하였습니다만, 다른 한 사람은 그리스도의 무죄하며 완전하신 것을 알았고, 그의 구주성을 인정하면서 그에게 자기를 의탁한 것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죄 의식에 있어 분리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자기의 죄인됨을 깨닫지 못하고 십자가의 형을 억울하게 생각하며 거기에서 놓여나기 위해 몸부림쳤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솔직히 자기의 죄악을 인정하여 십자가의 형이 자기에게 마땅하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내세관에 있어 분리하였습니다. 한 사람의 눈에는 내세가 보이질 않았습니다. 그는 최후까지 현세의 삶에만 치중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와 살길을 모색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깨끗이 현세의 미련을 끊고 내세를 바라보았습니다. ‘예수여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하소서’하였던 것입니다. 이 얼마나 솔직하고도 아름다운 신앙고백이겠습니까?

그들은 결과적으로 구원에 있어 영원히 분리하였습니다. 한 사람은 일생을 통해 지은 무거운 죄 위에 그의 최후에 있어 하나님이ㅡ 아들에 대한 큰 죄를 첨가하여 영원히 멸망하였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그의 최후의 순간에서 회개함으로 말미암암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신 주님의 튼튼하신 구원의 보장을 받았던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분리의 십자가입니다. 십자가 있는 곳에, 죄악의 분리가 있고 불의와의 분리가 있고, 불신앙과의 분리가 있는 법입니다. 십자가를 가슴 깊이 받아들인 성도들은 모든 과거의 죄스러운 옛 생활에서 분리하는 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분리’의 문제에 있어 대단히 신중해야 되겠습니다. 분리란 마음의 굳건한 원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사회생활에 있어 엄격한 의미에서 분리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하며,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며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입니다.

여기에 두가지 사실이 명료합니다. 첫째 이 두가지 종류의 사람들은 사회생활에 있어 밭에서나, 가정에서나, 다 같이 살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둘째, 그러나 그들은 그 신앙면 즉 중심에 있어서는 분리했던 것입니다. 주님의 제자를 위한 기도문에는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존하기를 위함이니이다’(요 17:15) 하셨습니다. 여기에 신앙의 묘미가 있습니다. 여기에 좌우에 치우치지 아니해야 ‘분리’의 결실을 거둘 것입니다.

셋째, 중앙에 선 십자가는 양면(兩面)의 십자가였습니다. 양면이란 한편에는 엄격하고, 한편에는 사랑에 넘쳤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끝까지 회개하지 않으며, 최후의 발악을 하는 한편의 강도에 대해서는 일체 답이 없었습니다. 그는 침묵을 통해 답하신 것입니다. 그 침묵은 하나님의 엄격하고 준엄하신 심판을 말합니다. 그것은 죄인과 하나님과의 영원한 단교(斷交)를 말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또 하나의 강도, 최후의 순간에서 회개한 다른 강도에게는 부드러운 음성으로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하셨습니다. 일생을 통하여 살인하며, 강도질했던 이 극악인이 최후의 순간에서 뉘우칠 때 주님은 서슴치 않고 곧 구원하셨던 것입니다. 그것은 파격의 은총이었습니다. 너무나 큰 은혜였던 것입니다. 그는 이 순간부터 주님과 더불어 영원한 교제에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주님의 십자가는 양면의 십자가였던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죄인에게는 엄격하시고 회개하는 자에게는 자애로운 십자가인 것입니다.

바울은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 1:18)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양면의 효과를 나타내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이 있는 나무에 물을 주면 그 나무는 자라고 꽃피고 열매를 맺습니다만, 죽은 나무에 물을 주면 썩어지고마는 법입니다. 의사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살리고, 강도의 손에 있는 칼은 사람을 죽이는 법입니다. 같은 원리는 지식에도, 금전에도, 권력에도, 또한 과학적인 발견에도 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모든 자에게 무조건의 축복을 주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말 할 수 없는 축복인 동시에 또한 저주인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우선 이때 회개하지 않던 강도에게는 그가 주님의 곁에서 못박힌 것은 주님께 범죄함으로 죄 위에 죄를 더하는 기회밖에 된 것이 없었습니다.

로구리양 왕의 눈을 뽑았다는 유명한 이야기는 아시는 분이 많을 것입니다. 로구리양 나라의 풍기가 문란했을 때 왕은 칙령을 내려 누구든지 이 영이 내린후 간음을 범하는 자는 용서없이 양눈을 뽑는다고 공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영이 내린 후 맨 처음으로 간음죄를 범한 사람은 왕의 사랑하는 아들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끌이어 왕 앞에 왔습니다. ‘왕이여 칙령대로 하리이까?’ 신하는 여쭈었습니다. 왕은 중대한 딜레마에 빠진 것입니다. 그를 용서한다는 것은 왕으로서의 공의가 허락지 않습니다. 그를 법대로 두눈을 뽑는다는 것은 아버지의 사랑이 허락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은 왕의 공의를 능가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왕은 눈을 뽑으라고 명령을 내린 것입니다. 형리는 왕의 명령대로 왕자의 눈 하나를 칼로써 뽑아 내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또 한눈을 뽑으려 할 때 왕은 ‘잠깐’하면서 형리를 제지시킨 후 ‘그 나머지 한눈은 내가 뽑으마’하고는 형리의 칼을 받아 자기의 눈 하나를 뽑아 내었습니다. 땅 위에는 붉은 피에 물들린 눈알 두 개가 떨어져 있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로구리양의 온 국민은 감격하며 또한 두려워하여 그 후부터는 일체 간음죄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이때 로구리양 왕은 왕으로서의 공의와 아버지로서의 사랑을 다 보존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봅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엄준하신 공의를 보는 것입니다. 그는 독생자를 죽이기까지 인류를 사랑하였습니다. 또한 아들을 죽이기까지 죄의 형벌에 엄준하셨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공의-이 양면을 동시에 또한 완전히 바라보는 것이 건전한 신앙의 요소로 믿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그 공의만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낙심할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공의성을 깨닫지 못하고 그의 사랑만 생각한다면 우리는 죄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아들의 눈을 뽑고 자기의 눈도 뽑는 로구리양 왕이 그 국민이 같은 죄를 짓는 경우 그들의 눈을 뽑지 않겠습니까? 히브리서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의 법을 폐한 자도 두세 증인을 인하여 불쌍히 여김을 받지 못하고 죽었거든 하물며 하나님 아들을 밟고 자기를 거룩하게한 언약의 피를 부정한 것으로 여기고 은혜의 성령을 욕되게 하는 저의 당연히 받을 형벌이 얼마나 더 중하겠느냐 저희는 생각하라’(히 10:28-29). 우리는 이 중앙에 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비길데 없는 사랑과 더불어 그의 무서운 진노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전자는 믿는 자에게 미칠 넘치는 은총인 것입니다. 후자는 믿지 않는 자에게 임할 무서운 심판인 것입니다.

중앙에 선 십자가! 우리는 갈보리 산상에 선 십자가에서 그 양가의 두 십자가에 비해 본 중앙의 선 십자가의 독특한 뜻을 파악하시기 바랍니다. 그 십자가로 말미암은 분리와, 그 십자가의 양면적인 뜻을 수난절을 맞이한 우리들의 마음 속 깊이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