억지로진 십자가
막15:21-27
오늘은 예수께서 나귀를 타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날입니다. 보통 이를 ‘승리의 입성’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또 그때 예루살렘 시민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며 환영했기 때문에 오늘을 ‘종려 주일’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입성하신 그날에서 시작하는 이 주간을 ‘수난주간’(The Passion Week)이라고 합니다. 이 주간에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심으로서 범죄한 전인류를 대속하신 큰일을 이룩하신 것입니다. 오늘 입성하시고, 내일 월요일에 성전을 숙청하시며, 화요일은 유대인 교권자들과의 문답이 있었고, 수요일은 베다니 나사로의 집에서 고요히 쉬시면서 마리아에게 기름 부음을 받으셨으며, 목요일 저녁에 유월절을 잡수시면서 성만찬식을 제정하신 후 겟세마네 동산에 가셔서 기도하시다가 잡히셨습니다. 그날 밤을 새우시면서 유대인 공회의 재판을 받으시고, 금요일 아침 빌라도의 법정에서 사형 언도를 받으신 후 골고다 위에서 오?9시에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오후 3시에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날 금요일 저녁에 요셉의 무덤에 장례되셨다가 돌아오는 주일 새벽에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와 같이 이 주간에는 너무나 중요한 사건들이 지나갔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의 기자들은 대체로 이 한주간의 기사로 전 복음서의 3분의 1을 할당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간은 또한 ‘큰 주’(The Great Week)라고도 불리웁니다.
십자가형은 당시 로마정부가 노예들이나 반역자에게 가했던 가장 가혹한 사형의 수단으로서 최고의 고통과 수욕과 비참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께서 한번 이 형을 받으시므로 십자가는 다시없는 희생과 숭고함과 거룩함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십자가의 모양은 여러 가지였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못박히신 것으로 믿어지고, 우리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정 십자가형을 위시하여 베드로가 달렸다는 T형, 안드레가 달렸다는 X형 등을 우선 들 수 있습니다. 지금 세계에는 그리이스, 스위스, 덴마크 등 십자가로 국기를 만든 나라들도 있습니다. 전세계적인 적십자의 기구를 아시겠습니다. 심지어 공산국가들도 이 기구에 가입해 있습니다. 또 청십자가도 있습니다.
십자가의 모양이 다양했던 것처럼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여한 사람들도 여러 가지였습니다. 이제 봉독한 말씀은 구레네 시몬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억지로 십자가를 지고 간 기사입니다. 여기 억지로 진 시몬의 십자가에서 오히려 우리에게 가깝고 절실한 교훈이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먼저 그 원인을 생각하십시다. 그것은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아마 그날 아침까지 시몬이 예수의 십자가를 대신 질 것은 생각조차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아프리카 북방 현재는 트리폴리(Tripoli)라 불리우는 구레네에 거주한 유대인으로 이때 유월절을 지키러 올라온 수 많은 순교자의 틈에 끼어 왔을 것입니다. 이때 그는 예수의 처형되는 광경을 구경하러 나온 수 많은 시민들 사이에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았을 것입니다. 예수께서 너무 지쳐 십자가를 지고 가시지 못하는 것을 본 로마의 병사가 그때 길가에 서 있던 시몬에게 강제로 십자가를 지웠을 것입니다. 하여튼 그것은 시몬편에서 보아 우연히 일어난 사건이었습니다.
물론 하나님 편에서는 모든 사사건건들이 호리의 어김도 없이 엄격한 예정 속에서 진행될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 편에서 관찰할 때 세상에는 선악간에 우연히 일어나는 사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구약에 사울이 그의 아버지 기스의 잃은 나귀를 찾으러 가다가 선지자 사무엘을 만나 왕위를 받은 사건이 있습니다. 아마 우리들의 나는 것, 결혼하는 것, 성공과 실패 등 일생의 중요한 고비들도 우연의 작용으로 되어지는 일이 많습니다. 아라비아 사막에 돌풍이 불면 갑자기 눈 앞에 산이 형성되고 다시 그 산이 날아가고 골짜기가 된다고 합니다만 인생의 돌풍에 불려서 산악과 험곡이 우리 앞에 교차하는 수가 많습니다.
이제 우리 주님의 십자가의 사건에 관여한 인물들만 해도 그랬습니다. 제자로서 은 30에 스승을 판 가룟 유다, 당시의 로마의 총독으로 본의 아니지만 예수의 십자가형을 언도하고 우리가 주일마다 외우는 사도신경에까지 십자가형의 총책임자로 저주의 대상이 된 빌라도, 유대 교권자들의 대표로서 실지로 대망의 메시야를 죽이고 그로 인해 전 민족을 멸망으로 몬 원흉이 된 가야바와 안나스, 일생을 악행을 하였으나 이때 예수의 좌우편에 달렸으며 그럼으로서 구원받은 강도, 또 이제 구레네 시몬처럼 주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된 사람! 모두 그렇게 되어진 사건들이요 그 사건들을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었습니다. 영원한 역사의 한 시점에서, 광활한 우주의 한 지점에서, 우연히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에 접선된 사건들이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생각할 때 우리들은 엄숙한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모든 악행자들에 대해 저주보다 두려움을 느낄 것입니다. 모든 축복 받은 성도들에 대해 감사를 느낄 것입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가룟 유다가 될 수 있고, 빌라도나 가야바가 될 수 있으며, 또 시몬이나 회개한 강도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의미에서 또 궁극적인 의미에서 인간의 제반사는 ‘억지로 지는’ 십자가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에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주의 성도가 되며, 주의 십자가를 억지로라도 대신 질 수 있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지 모르겠습니다.
다음으로 그 내용을 생각하십시다. 그것은 대신 진 십자가였습니다. 십자가형이 인간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고통인 것은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죄수는 자신이 달릴 십자가 형틀의 전부 또는 일부를 메고 형장으로 끌려 갔습니다. 십자가에 달리면 빨리 운명하지 않습니다. 손과 발에 못을 박아 십자가에 달려 있으므로 얼마 후에는 피도 멈추고, 그 상처에서의 고통을 죽기까지 겪는 것인데 보통 운명하기까지 이틀이나 삼일씩이 요한다고 합니다. 그것은 육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또 십자가의 죄수는 끌려갈 때 그의 목에 죄목을 쓴 패를 걸고 갑니다. 주님은 좌우에 강도와 같이 달려 강도의 유로 취급 받았습니다. 또 유대인, 로마인, 지나가는 행인들까지 주께 대해 조롱하고 저주했습니다. 그것은 정신적인 고통을 말합니다.
예수께서 받으신 이 모든 육적이며 정신적인 고통은 독특한 것이었습니다. 그 때까지 이 형을 받은 모든 조수들과는 전연 다른 것이었습니다. 우선 그때 주의 좌우편에 같이 달린 강도들의 십자가와도 근본적으로 대조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첫째, 그는 이런 극형을 받으실 아무 죄가 없었습니다. 유대의 교권자들은 예수의 죄를 찾지 못해 거짓 증언자를 동원하였고(막 14:55-56), 총독 빌라도는 세 번씩이나 예수의 무죄를 선고하였던 것입니다(요 18:38, 19:4,6). 둘째, 그의 십자가는 남을 위한 대속의 고통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에 있어 십자가의 의의는 전연 달라졌고, 사람들의 십자가 개념도 180도 달라지고 승화된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성서 본문에 돌아와서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를 생각해 보십시다. 그리스도는 남을 위하여, 즉 세계 만민을 위해 대신 십자가를 지셨고, 시몬은 다시 그 십자가를 대신 진 것입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시몬이 대신 진 십자가의 뜻과 가치는 얼마나 숭고한 것이었는지 모릅니다. 잠시나마 그리스도의 고통의 일부를 대신 받았다는 것은 그 큰 구속의 대업에 이바지한 것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골 1:24)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가 교회를 위해 수고하며 육체적인 고통을 받을 때 그것이 그리스도의 구속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믿고 한 말입니다. 구레네 시몬이나 바울 뿐만이 아닙니다. 현재 우리들도 주님의 사업에 협조하며, 그 일 때문에 희생을 받는다거나 고통을 받으면 바로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지는 것이 됩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미대륙은 아주 광활한 지대로서 표준 시간만 해도 네 가지가 있습니다만 요즘처럼 비행기나 고속버스나 기차가 나타나기 전 마차로 한 달씩이나 걸려 횡단할 때 이야기입니다. 어떤 젊은 부부를 태운 마차가 대륙을 횡단하다가 밤이 되었고 아직 목적지는 먼데 이리떼의 습격을 받았습니다. 필사적으로 말을 몰았으나 이리의 빠른 발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해 말과 사람이 전부 이리의 밥이 될 지경이었습니다. 그때 마부가 하는 말이 ‘이대로 가면 전부 죽을 터이니 제가 마차에서 내려 총탄이 있는데까지 이리와 싸우겠습니다. 그 동안 주인은 빨리 말을 몰아 동리까지 가서 사람을 불러 돌아와 주십시오’하였습니다. 그래서 마부는 내려 이리와 싸우고, 젊은 부부는 마차를 몰아 목적지인 동리에 갔고 사람들을 모아 급히 말들을 타고 현장으로 달려왔으나 그때 벌써 마부는 잡아먹힌 후였습니다. 그 젊은 주인은 자기를 위해 대신 죽은 마부의 죽음을 깊이 애도하고 감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신 받은 고난은 이와 같이 숭고하고 감사한 일입니다.
요한서신에 ‘적 그리스도’란 말이 네 번 나타납니다(요일 2:18,18. 4:3, 요이 1:7). 헬라 원문은 ‘안티 크리스토스’로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자’의 뜻입니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여기 접두사 ‘안티’는 ‘대적하는’뜻도 되나 ‘대신하는’ 뜻도 된다는 사실입니다. 가령 마가복음 10:45의 ‘인자의 온 것은…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할 때 이 전치사를 쓰고 있습니다. 저는 이 이중적 듯에 어떤 교훈을 느낍니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구속의 고난에 이바지 할 수도, 그리스도를 적대하는 적 그리스도도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주를 대신하고 위하지 못할 때 자신도 모르게 주를 대적하는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그 결과를 생각하십시다. 그것은 자손에게까지 미치는 큰 축복이었습니다. 시몬이 주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진 후 그 자신도 신자가 되고, 그의 아들들도 저명한 성도가 되었다고 믿어지고 있습니다. 그 사실은 성서의 두 구절에서 추측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마가복음의 본문에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시몬’이라고 아무 주해가 없이 돌연히 소개되는 것으로 보아 그의 두 아들은 본서의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신자들이며 또 저명한 인사들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서는 로마인에게 주어진 복음서이므로 저들은 로마에서 유력한 인사들이었다는 말이 됩니다.
둘째는 로마서 16:13에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라’는 구절입니다. 두 아들 중 알렉산더란 이름은 사도행전 19:33, 디모데전서 1:20 등에도 나타나지만 이는 당시에 흔한 이름이었으므로 동인시 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로마서 16장의 루포가 시몬의 아들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믿어지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로 보낸 편지이고 또 마가복음보다 앞서 기록된 책입니다. 그렇다면 루포는 그때 벌써 로마의 저명한 그리스도인 인사로 바울에게서 문안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그보다도 루포의 어머니 즉 시몬의 아내를 바울은 ‘내 어머니’라고 하고 있습니다. 아마 바울이 어릴 때 예루살렘에서나, 가이사라 옥에 갇혀 있을 때 그녀로부터 모성적이며 신앙적인 사랑을 받은 것으로 봅니다. 시몬 자체가 이 문안에서 빠진 것은 그때 벌써 별세한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연튼 시몬이 잠시동안 억지로나마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진 것은 그와 그 자녀들에게 큰 축복을 결과 했습니다. 제 2계명에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 은혜를 내려 수천대에 이르게 한다는 말씀이 있습니다. 현세에서 육적으로 부모가 성실하고 근면하므로 자녀가 잘 살고 복을 받는 것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믿음이 남겨주는 복은 보다도 크고 보다 길 것입니다. 미국 역대의 대통령이나 국무장관을 위시하여 저명한 인사들 중에는 목사의 아들들, 더구나 선교사의 아들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지금 예루살렘에 가면 예수께서 십자가를 받아 지신 빌라도의 재판석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골고다 언덕까지 수난의 길을 ‘비아 돌로롯싸’(via dolorossa)라 부르고, 그 길을 예수께서 가시다 멈추신 지점을 따라 14정류소로 나누고 있습니다. 그중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받아 대신 진 지점은 제5정류소에 속합니다. 그의 공적이 그리스도교 유적에서 영원히 남게 된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주를 위해 고난을 받으면 영광이 있느나 죄가 있어 받는 고난은 소용이 없는 것을 가르치고 있습니다(벧전 4:14-15). 세상에는 어차피 고난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 고난을 주를 위해 받는다면 큰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막 8:34)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십자가는 그리스도를 좇는 제자들에게 누구에게나 있는 것이고, 의무적으로 져야 하는 것입니다. 억지로라도 져야 하는 것입니다.
니이체(Nietzsche)는 ‘운명의 사랑’(amor fati)이라는 말을 했습니다. ‘운명’이란 말 자체가 우리 그리스도의 낱말은 될 수 없습니다만 ‘운명’이란 각 사람에게 지어진 ‘멍에’라는 뜻입니다. 운명에 대한 세 가지의 태도가 있을 것입니다. 첫째는 인종(忍從)하는 것, 옛날 노예들의 생활에서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둘째는 반항하는 것, 자포자기 하고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셋째는 운명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어진 상황에서 만족하고 사랑하고, 그것을 극복하여 성공의 발판으로 삼는 태도입니다. 그러나 이 말을 한 니이체 자신은 마지막에 발광하여 죽고 말았습니다. 그는 현대 실존 철학의 아버지가 될 만큼 큰 학설을 전개하였지만 바른 신앙을 잃고 나갔으며 심지어 하나님이 죽었다는 말까지 하다가 그런 비참한 종말에 이른 것입니다.
우리는 ‘운명의 사랑’ 아님 ‘십자가의 사랑’을 해야 하겠습니다. 나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사랑하고 이를 억지로라도 지고 주를 따라가야 되겠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우리 죄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우리 역시 주님을 위해 십자가를 지게하기 위함이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만 이 수난주간을 맞이 하면서 단순히 주가 지신 과거의 십자가를 기념하는데 머물지 말고, 현재 나에게 주신 십자가를 발견하고 흔연히 이를 받아 지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