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부활과 교회
행2:14-36
이제 봉독한 본문은 오순절 때 성령께서 강림하심으로 우리 그리스도 교회가 비로소 설립되었을 때 베드로가 교회를 대표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설명한 말씀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과 교회의 관계를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문제를 논하기 전에 그리스도의 부활과 교회의 의의에 대해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되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확실히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기적적인 일생의 마지막을 장식한 가장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그것이 너무나도 놀라운 사실이었기 때문에 고금을 통해 수많은 반대와 의심이 주님의 부활에 대해 가해져 왔습니다.
마태복음 28장에 의하면 유대의 교권자와 로마의 관헌이 합작하여 주의 부활을 전연 거짓말인 것으로 선전하였다고 합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거짓말이었다면 초대교회의 스테반을 위시한 수많은 순교자들을 어떻게 이해하겠습니까? 즉, 돈을 벌기 위해 또는 생명의 위기에서 살기 위해??거짓말을 할 수 있겠지만 어찌하여 거짓을 위해 생명을 버려 순교까지 하겠습니까?
또한 어떤 자유 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 당시 주님을 너무 사모하던 막달라 마리아를 위시한 제자들의 주관적인 심리적 현상이었다고 추측을 합니다. 과연 사람의 정성이 극할 때 심리적인 환상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고린도전서 15:5~6에는 주님의 부활을 본 분들의 순번이 기록돼 있고 그 중에 5백 여명이 일시에 보았다고 되어 있습니다. 5백 여명이 일시에 심리적인 환상을 일으킬 수 있겠습니까?
또한 근대 비판학자들 중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함에 있어 그 사실을 부인하고, 그 선교적 의의 면에만 강조하는 방법을 취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 교회는 사실을 떠난 어떤 가공의 논리에 설립된 것이겠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우리 그리스도교는 현실과 아무 관련이 없는 논리 위에 세워진 불교와 같아지고 말 것입니다.
과연 이러한 또는 이외에도 주의 부활에 대한 의심들이 많이 있겠으나 그것은 모두 이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사실인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과연 주님의 부활은 인간의 죽음이란 숙명을 깨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한 놀라운 사실이었습니다.
둘째로 우리가 미리 생각해 둘 것은 교회의 의의일 것입니다. 물론 교회의 의의를 논한다는 것은 광범위한 문제입니다만 오늘은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련시켜 그 실제적인 두 가지의 뜻만 밝히고자 합니다. 그 첫째는 교회는 신앙의 모태이며 신앙자의 단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신앙자의 집이요 그들이 모여서 기름 받는 ‘우리’인 것입니다. 둘째로 교회란 바로 우리 신자들 개개체를 말합니다. 이런 경우 ‘교회’란 낱말은 구약의 성도들에 대한 신약의 성도들의 명칭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믿음으로 구원받아 주께서 공중에 나타나실 때 주를 영접할 그 특권을 포함한 성도의 영화로운 이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상과 같은 전제하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놀라운 사실이 우리 신앙의 모체인 교회 또는 우리 신자 개개체에 미치는 영향 또는 관계를 이 제목 하에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의 기초였다는 것입니다. 교회란 원어 ‘에크레에씨아’란 불러 내었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교회란 사방에 흩어진 하나님의 백성을 불러서 모은다는 뜻이 있습니다.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내가 목자를 치매 양떼가 사방으로 ‘흩어졌다’하신 말씀처럼 모든 제자들은 사방으로 흩어진 것입니다. 이렇게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불러모아 교회를 이룩한 것은 주의 부활하신 사실이었습니다. 이렇게 모여온 무리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다렸고 거기에 성령이 강림하심으로 우리 그리스도 교회는 설립된 것입니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의 부활은 사실면에 있어서 교회의 기초가 되는 동시에 교리면에 있어서도 교회의 기초가 되었다고 하겠습니다. 교회는 더 말할 것도 없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삼는 지체이며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구주성(救主性)이 그 생명적인 요소라 하겠습니다. 또한 그의 구주성에는 그의 신성이신 신분과 그가 십자가에서 만민을 위해 속죄의 죽음을 죽으신 것이 그 핵심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이 없었던들 그의 신성도, 십자가의 구속도, 증명할 길이 없었을 것입니다. 로마 1:4에는 그리스도의 신성을 논하여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하고 있습니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그의 십자가에 의의를 준 것입니다. 우리는 주의 십자가가 구속의 죽음인 것을 믿습니다만, 그 신앙의 근거는 역시 주의 부활에 있는 것입니다. 즉, 주의 부활이 없었던들, 그러므로써 그의 신성에 대한 궁극적인 증명이 서지 못했던들, 그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대속의 죽음이란 확증도 없어지고마는 것입니다. 역대를 통해 수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우선 주께서 죽으실 때만 해도 좌우편에 두 강도가 같이 달렸고, 베드로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고 합니다마는 우리는 그때 강도들이나 베드로의 죽음을 우리를 위한 대속의 죽음으로 믿지는 않습니다.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태 16:16)라는 신앙고백을 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구주성’과 ‘신성’이란 요한복음 20:31에 의하면 복음서 전체의 목적이기도 한 것입니다. 주님의 이와 같은 양성은 물론 그의 말씀이나, 표적이나, 전 생애를 통해서도 증명되었습니다만, 최후적인 확인을 준 것은 그의 부활이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에게 인성과 신성의 양성이 있는 것을 고조하고 있습니다. 아마 그의 인성은 십자가와 통하고, 그의 신성은 부활과 통한다고도 보겠습니다. 즉 그는 완전하신 사람으로서 사람의 죄를 대신 지시고 육신이 주는 모든 고초를 겪으면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부활에는 오직 신적인 장엄성과 영광이 넘쳐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을 통하여 증명된 그리스도의 구주성에 교회는 서 있는 것입니다. 만일 주께서 부활하시지 않았다면 그의 구주성은 파괴를 당하고 그러므로 그의 교회는 설립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회를 가리켜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딤전 3:15)라고 하였습니다. 주경가 마아커스 돋(Marcus Dods)은 ‘그리스도가 강림하지 않았다는 전제 아래 인생 문제를 생각지 말라’ 하였습니다만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았다는 전제 아래는 교회란 생각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의 케뤼그마(선교)의 내용이었습니다. ‘케뤼그마’란 ‘광고’, ‘선언’등으로 번역할 수 있는 낱말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가 외치는 ‘말’이었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제 봉독한 성경 본문에 베드로의 외친 선교의 주지가 ‘너희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예수를 하나님이 부활시키셨다’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곳 뿐 아니라 사도행전 전편을 통해 사도들의 외친 말의 내용은 그리스도의 부활이었습니다. 사도행전 25:19에 보면 후일에 바울 사도가 잡히어 구류되었을 때 감사 베스도가 분봉왕 아그립바에게 유대인이 바울을 송사한 내용을 설명하면서 ‘죽은 예수를 바울이 부활했다 함이요’하였습니다.
또한 사도들의 서신에도 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장 중요한 제목이 되어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5장 같은 것은 부활에 관한 응대한 논문으로 보겠습니다.
확실히 그리스도의 부활은 초대교회의 제자들의 입을 통하여, 또한 그후의 사도들의 붓을 통하여 교회의 ‘케뤼그마’였습니다. 그리고 주님의 부활은 금일의 교회의 ‘케뤼그마’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케뤼그마’란 이 낱말은 원래 장사군들의 외치는 말이었다고 합니다. 가령 고기장사가 고기 광주리를 메고 다니며 ‘고기 사시오’라고 외치던 말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에는 적어도 두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첫째는 그 상인이 자기의 가지고 있는 물품을 명시해야 할 것입니다. 둘째는 그 물품을 팔려하는 열의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이와 같이 교회의 ‘케뤼그마’에도 두 가지의 요소가 불가결일 것입니다. 첫째는 우리의 전파하는 내용을 분명히 하는 ‘지’(知)가 필요합니다. 둘째는 그 내용을 전하려는 우리의 ‘열’(熱)이 필요합니다. 이 두 가지가 겸전한 곳에 교회의 선교는 건전하고, 그 열매도 건전할 것입니다.
교회가 외칠 ‘케뤼그마’는 그리스도의 부활이라 하였습니다. 물론 교회가 외칠 말은 부활에만 있지는 않습니다. 성삼위의 교리, 천지 창조, 인류의 타락, 십자가의 구속, 믿음으로 의인(義認)되는 것, 성결의 교리, 그리스도의 재림, 영원한 생명 등등 얼마든지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 있다 하더라도 주의 부활이 생략되었다면 그 ‘케뤼그마’는 벌써 완전한 것이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금일의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점점 그 ‘케뤼그마’에서 희미해져 가는 감이 있습니다. 혹은 수양론을 외치고, 혹은 값싼 도덕론을 강조하며, 심지어는 정치와 문화론에 기울어지기도 합니다만 ‘부활’의 제목이 더 무겁게 전해지지 못한 흠이 있습니다. 우리 초대교회가 외쳤던 선교는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중심(重心)을 잡았다는 것을 다시 한번 상기하여야 되겠습니다. 주의 부활을 등한히 한 교회의 선교는 벌써 중심(重心) 잃은 선교인 것을 명심해야 되겠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단지 이런 부활절을 맞이하여 한갖 고사(故事)로서 회상할 제목이 되어서는 안될 줄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과거의 한 역사적인 사건은 현재와 미래를 통한 우리들의 ‘부활’의 근거이기 때문입니다.
신자의 현재의 부활이란 주 예수를 믿음으로 얻는 영적인 중생을 말하고 있습니다. 골로새 2장 12절에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하였습니다. 또한 3장 1절에서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엣 것을 찾으라 거기는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느니라’ 하였습니다. 우리는 주를 믿음으로 현재의 부활을 벌써 차지한 것입니다.
신자의 미래의 부활이란 장차 주께서 재강림하실 때 이미 죽은 성도들은 무덤에서 일어나고 그때 살아있는 성도들은 그대로 몸이 변화하여 올리워가서 주를 맞이할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육적인 부활입니다. 이와 같은 성도의 미래의 육적인 부활은 현재의 영적인 부활과 상통합니다. 즉, 현재의 부활이 없이는 미래의 부활도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자의 현재의 부활이든 미래의 부활이든 그것은 다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과거사에 입각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논하여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 15:20) 하였습니다. ‘첫 열매’라는 것은 둘째, 셋째, 천째, 억만째의 열매가 뒤 따라 온다는 것을 표시합니다. 우리는 가을들판에 벼 이삭이 패어 나올 때 광경을 연상해 볼 수 있습니다. 넓은 들판에 ‘첫 이삭’이 나타났을 때 그것은 기쁨의 화제로서 온 동리에 전해져 갑니다. 그러나 온 여름 땀 흘려 수고한 때로부터 ‘첫 이삭’이 팰 때까지가 힘드는 것이지, 첫 이삭이 팼다는 말이 돌면은 그 다음 날부터 둘째, 셋째는 곧 나타나며 미구에 온 들판은 황금의 곡파를 치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은 다시 사셔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그것은 장차 하늘 나라에서 만민의 부활의 열매들이 보좌 앞에서 하나님을 찬양할 것을 뜻합니다. 시인 괴에테는 ‘만일 죽었다가 다시 산다는 이 사실을 알기까지는 너는 아무래도 우수한 나그네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놀라운 소망을 주는 그리스도의 부활이 오늘의 우리 교회의 ‘케뤼그마’가 되어야 되겠습니다.
셋째, 그리스도의 부활은 교회의 새 능력이 되었습니다. ‘나를 어두움 저 편으로 인도해 달라’고 말한 옛날 이름없는 인도의 시인이 있었습니다만, 주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을 때 제자들의 마음은 어두움 속에서 헤매고 있었습니다. 이 같이 어둡던 제자들의 마음을 밝게 해 준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사실이었습니다. 십자가 이후, 사방에 흩어지며 위축을 당해 있던 제자들의 마음을 다시 합하게 하고 새로운 용기를 준 것은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사실이었던 것입니다.
이와 같이 무덤에서 주의 시체를 찾으면서 울고 있던 막달라 마리아는 다시 사신 주님을 만나 뵙고 환희에 넘쳐 뛰어 내려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고 외쳤습니다. 이와 같이 엠마오 도상에서 실망의 발걸음을 옮기고 있던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 뛰어 예루살렘으로 돌아 왔습니다. 이와 같이 베드로와 요한은 주의 부활의 소식을 듣고 무덤을 향하여 달려갔습니다. 이와 같이 희의자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까지도 부활하신 주님을 한번 뵈었을 때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하고 고백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죽으신 이후 공포에 싸여 문을 닫고 숨소리도 크게 내지 못하던 열 한 제자들은 부활의 사실을 대했을 때 다락방에 올라가 하나님을 찬미하며, 나아가서 대담하게 복음을 선포하였던 것입니다. 작은 비자 앞에서 혼이 나서 주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 한 베드로는 대제사장 앞에서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외쳤던 것입니다. 봄철을 맞이한 산천초목에 새 힘이 넘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부활은 제자들의 마음 속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정복될 수 없는 능력을 주었던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 사는 동안 무서워하는 것이 많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은 물가 시세의 변동에 공포를 느낍니다. 학생들은 시험을 무서워합니다. 농민들은 흉년이 될까 두려워합니다. 공장주는 직공들의 스트라익을 무서워합니다. 아마 그의 각자가 느낄 공포는 다 있을 줄 믿습니다. 다만 모든 인류가 공통으로 느끼며, 가장 심각히 느끼는 공포는 ‘죽음의 공포’일 것입니다. 히브리서 2:15에는 인류를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라고 하였습니다.
이때 주님의 부활을 본 제자들은 이런 인간 최대의 두려움에서 놓여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아무 것도 그들을 억압할 두려움이 없었던 것입니다. 네로 황제는 천하의 폭군으로서 수많은 그리스도 교인을 혹은 불태워, 혹은 짐승에게 찢겨 죽게 했습니다만, 이렇게 죽음을 당한 그 시체의 얼굴들은 웃고 있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히틀러의 교회 박해 때 니일모일러 목사를 위시하여 일년간 6백 명의 목사들이 교회에서 옥으로, 옥에서 사형장으로 진군해 갔다고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 주기철 목사님이나 손양원 목사님같은 분이 탄압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으며 죽음으로 신앙의 절개를 지킨 것은 우리의 기억에 생생한 바 있습니다.
‘그리스도교는 순교자의 피에 세워지다’하였습니다. 실로 생명을 내 걸고 교회를 지켜왔던 우리 신앙자의 선배들이야말로 우리 교회의 꽃이요 자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신앙자의 용기란 우리의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입니다.
미국의 어떤 신학교의 유명한 신학자 한 분이 있었습니다. 한번은 부활절을 맞이하여 그릭 원문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에 관한 성경을 읽고 있었습니다. 그는 무심코 읽어 내려가는 중 ‘예수 살아나셨느니라’하는 한 구절이 그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습니다. 그는 깜짝 놀라 일어서서 방안을 왔다 갔다 하면서 ‘이에수우스 에에겔데에(예수 살아나셨네) 아에수우스 에에겔데에’를 외쳤습니다. 그후 그의 신앙 생활은 일변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신학자로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교리적으로는 너무나도 잘 알고 또한 가르쳐 왔습니다만, 이 순간 이 놀라운 사실이 그의 가슴에 실제적으로 느껴 왔을 때 그에게 새 생명과 새 힘을 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한갖 과거사로 기념하고 말 것은 아니며, 한갖 의식으로 지키면 다 되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가슴에 놀라운 실재가 되어져서 우리의 심령에 변화를 줄 때만이 그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의 루이 14세라면 벨사이유궁을 건축하고 그 사치는 일세를 풍미했던 호사스러운 왕이었습니다. 그는 교회에 대해 박해의 손길을 뻗쳐 성 세오졸프를 파리의 높은 감옥의 탑 위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때마침 부활절이 되어 그는 왕의 위세를 갖추고 호화를 극한 부활절 행렬대를 거느리고 파리 시가를 행렬하였습니다. 높은 감옥의 탑 위에서 이 행렬을 바라본 성자 세오졸프는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를 고요히 불렀습니다. 그의 성스러운 신앙에서 울어나는 이 찬미 소리는 감옥 탑 위서 흘러 의기양양히 행진해 가던 루이 14세의 귀에 들려 갔습니다. 이 찬미 소리는 왕에게 비상한 충격과 경책을 부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늘에서 들려오는 심판의 나팔 소리처럼 그의 마음을 찔러 주었습니다. 왕은 그의 화려한 행렬을 버리고 감옥으로 돌아가, 세오졸프 앞에서 사죄를 구하면서 그를 놓아 보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파리 시가를 행진해 가던 부활절 행렬은 의식적인 부활절 축하였습니다. 감옥 탑 속에서 노래부르던 세오졸프의 가슴에는 부활의 생명이 약동해 있었습니다. 거리의 행렬에는 속화되고, 의식화되기 쉬운 교회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옥중에서는 초대교회, 그리스도의 부활을 친히 목격한 그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부활절을 맞이하여 우리의 가슴에도 참된 느낌에서 오는 ‘예수 살아 나셨네’를 외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도 진정한 승리자의 모습으로 타락하며 속화해 가는 세상을 향해 ‘할렐루야 우리 예수 부활 승천하셨네’를 부를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