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이요 생명이니 요11:25-26
뉴욕에 살던 한 코미디언이 죽기 전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내 시체를 해부용 실험 대상으로 기증하겠소. 특별히 하버드 대학으로 보내주길 바라오. 이것이 내 부모님의 소원을 풀어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이요. 내 부모님은 평생 소원은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었는데 내가 하버드에 들어갈 수 있는 방법은 이 길밖에는 없소.\\\" 이 사람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은 역시 고통스럽다\\\"는 의미 있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죽음은 웃을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죽음에 대해서 여러 가지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나 나 자신에게 죽음이 닥치면 죽음에 대해 이러니 저러니 결코 쉽게 말할 수 없습니다.
한 목회자가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나이 오십이 채 넘지 않은 한 젊은 실업가가 있었습니다. 단순히 실업계에 종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한때 그는 외국에 유학도 갔고, 많은 고생을 하며 공부도 했고, 학위도 땄습니다. 또 고국에 돌아와서는 회사에 취직을 하여 정열적으로 일을 했고, 성공했습니다. 1년의 3분의 1은 해외에 나가 살고, 3분의 2는 국내에 있을 정도로 왔다갔다 바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는 감기에 걸렸습니다. 두 주일이 지나도 영 몸이 개운치 않아서 오랜만에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았는데, 결과는 뜻밖에도 급성간암이었습니다. 앞으로 얼마 못살 것이라는 사형선고를 받은 그가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이러한 일이 내게 있을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결코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 한마디가 그렇게 충격적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시간이 내게 올 줄을 미리 알았더라면 지난날처럼 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참으로 충격적이요, 참으로 중요한 간증이었습니다.
어쩌면 이상할 것이 아무것도 없는 이야기 상식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런 날이 있을 줄 모르고 많은 사람들의 장례식에 참석하면서 그것이 내 차례가 될 줄 모르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죽는 데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칠팔십이 되어야 죽는 다는 보장이 없습니다. 언제나 죽음이란 현실적인 것이고 아직 어리거나 젊거나 간에 오늘 우리의 일이 될 수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고 결코 나와 먼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해결이 없는 사람은 누구든 어리석은 사람일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문제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살지 못하는 채 진행하는 모든 일은 다 부질없는 일이며 허무하고 헛되기 그지없는 일들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와도 같이 한없이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공부를 많이 해서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돈을 많이 벌어 부유한 삶을 살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문제는 죽음에 대한 바른 해답을 가지고 오늘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잘사느냐 못사느냐의 문제도 중요하나 신앙의 문제는 생명의 문제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관심을 생명문제로 돌려야 합니다. 잘살고 못살고, 성공하고 실패하고, 명예롭고 수치스럽고 하는 일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나 생명이 문제에 비하면 대수로운 일이 아닙니다. 온 국민이 만세를 불러주고 수많은 표창장을 받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구름 떼처럼 몰려들어 치하해주는 일도 필요하겠지만 보다 더 생명문제를 심각하게, 보다 더 중요하게, 그리고 깊이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생명의 문제를 다르게 해결할 줄로 착각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떠났으니, 내가 원하는 학교에 못 들어갔으니, 내가 원하는 지위를 못 얻고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니, 차라리 죽어 버리겠다고 합니다. 노인들도 뭐가 마음대로 안되면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합니다. 그런데 누가 한번 옆에서 \\\'그러면 죽으세요\\\'한다면 큰일납니다. 할머니가 하도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라고 말하니까 손자가 밥풀을 밀가루에 묻혀 가지고 \\\"할머니, 이게 죽는 약이랍니다\\\"하고 드렸더니, 그 날부터 할머니가 한 달 동안 말을 안 하시며. \\\'나쁜 놈, 나보고 죽으라고 했겠다\\\' 라고 하시더랍니다. 그러니 죽고 싶다는 말도 살고 싶다는 말의 또 다른 역설적 표현입니다. 나아가서는 남을 죽이려고 드는 경우도 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도 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게 한 사람 가야바는 당당하게 말합니다.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지 아니하는도다(요 11:50)\\\"곧 한 사람을 죽여서 모두가 편할 수 있다면 죽이는 것이 옳지 않느냐, 죽고 사는 것이 문제냐, 편안한 것이 문제지, 나를 위해서라면 몇 사람을 죽인들 그 무슨 대단한 문제가 되겠느냐 하는,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또 한 사람, 빌라도가 있습니다. 예수를 죽여서라도 자기 지위를 확고히 하고, 자기 명예를 확고히 하고, 자기 정치적 생명을 지켜나갈 수만 있다면, 개의치 않습니다. \\\'그까짓 한 사람쯤이야, 의인이냐 죄인이냐 그것도 알아볼 것이 없다는 것이 빌라도의 재판입니다.
건강을 생명 연장이 도구로 생각하여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건강과 바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명예고 지식이고 뭐고, 다 있어보았자 어디 건강과 바꾸겠느냐? 건강이 제일 중요하다\\\'고 합니다. 그래서 돈을 잃으면 조금 잃는 것이고 명예를 잃으면 많이 잃는 것이고 건강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다라는 말들을 합니다 유명한 실존주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죽지 않겠다는, 혹은 죽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인생은 불행하다\\\'고 말했다고 합니다. 사람은 죽게 되어 있는데 안 죽으려 하고 안 죽을 것이라는, 이런 생각이 인간을 불행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위력이란 대단합니다. 가진 것, 소유한 것, 무엇이든 죽음과 함께 다 없어집니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많은 소유나 그 많은 노력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이 죽음의 문제에 대한 해결은 죽음을 피해서 해결하자는 것이 아니고, 죽지 아니해서 해결하자는 것도 아니고 오래오래 장수하고자 불로초를 구해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나 대신 다른 사람을 죽여가면서라도 내가 살고자 하는 것도 아닙니다. 생명의 문제는 장수 문제 이상이요 건강 문제이상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생명은 이 모든 것을 초월합니다. 모든 것보다 위에 있습니다. 기독교에 있어서는 생명의 문제는 모든 것보다 우선합니다. 이러한 생명의 문제에 부활이라는 답이 있습니다 부활의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문제는 죽음에 대한 해답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는바 죽음에 대한 해답은 죽음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한 변화 곧 부활로 말합니다. 성경은 부활로써 죽음에 대한 해답을 줍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25, 26절)\\\"--엄청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올라오실 때마다 마리아와 마르다의 나사로의 집에 머무셨고 따라서 나사로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들어 예수가 오시기만 하면 그 병을 고칠 수 있다는 신념이 있어 사람을 예수님께 보내어 다급한 소식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사로가 죽은 다음에 오셨고 나사로를 살리겠다는 말씀을 하시지 않고 단지 그가 다시 살아나리란 말씀을 하십니다. 이 말씀에 대해서 마르다는 자연스럽게 기본적으로 마지막 날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는 살아날 것이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었기에 나사로가 종말에 다시 살아날 것을 알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때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라고 선언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예수님만이 유일한 부활이심을 나타냅니다.(I am the resurrection) 어느 한 부활이 아니라, \\\"그 부활\\\"입니다. 이 부활은 그리스도안에서만 설명되는, 오직 하나밖에 없는 사건인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 외의 모든 것은 부활을 설명하는 그림자일 뿐입니다. 오직 하나의 사실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은 다른 무엇으로 설명하려고 해서도 안됩니다.
석가가 어느 곳을 지나가는데 한 불자가 참사를 당하여 애곡하다가 석가를 보고 애원하였다고 합니다. \\\"당신은 대 선생이시니 즉은 내 아들을 좀 살려 주시오.\\\" 애걸하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며 석가는 그 불자에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네가 만일 3대 동안 장례를 한번도 치르지 않은 집에 가서 백미 한 되를 구해 오면 내가 그것으로 네 죽은 아들을 살려주리라.\\\" 부인은 아들을 살릴 수 있다는 말에 3대 무 상가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부인은 그냥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세상에 삼 대에 걸쳐 장례를 치르지 않았던 집은 어는 곳에도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석가는 부인에게 말했다고 합니다. \\\"너 보아라, 사는 집집에 임하고 사람마다 당하는 일이니 너 홀로 애통할 것이 무엇이냐?\\\" 이 말을 들은 부인은 오랜 생각 끝에 무상한 인생사를 버리고 석가의 제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기독교와 타종교의 차이 예수와 석가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시고 나인성을 지나실 때 한 과부의 외아들이 죽어 장례행렬이 나가는 것을 보고 그 외아들을 살려주시고 나사로의 무덤에서 나사로야 나오너라 명령하시어 실리십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부활이요 생명이므로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살 것이고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것이므로 `병들었다\\\', `죽었다\\\'하는 것이 아무 문제가 없다는 것입니다. 마치 빛 앞에는 어두움이 있다고도 할 수 있고 없다고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시키시는 예수님 앞에서는 죽음이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참 죽음이란, 육체의 죽음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즉 죄의 종이 되는 상태로서 육체의 목숨이 살아 잇고 죽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비록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 해도 죄 중에 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있으면, 그 생명은 영원히 죽은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생명에 대한 안목입니다. 참된 죽음은 영적인 죽음이요, 죄의 노예된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의 은총에서 이탈된 상태입니다.
전혀 예수 믿지 않으며 심지어 아들이 예수 믿는 것까지 핍박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가 이제 임종을 맞이하게 되었는데, 아들이 그 아버지를 한번 만나 달라고 부탁을 해서 한 목사님이 찾아갔습니다. \\\'이 완악한 할아버지를 어떻게 대해야 될까\\\'하고 생각을 거듭한 끝에 이렇게 농담조로 말씀을 드렸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는 아마 천당과 지옥이 있음을 믿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요?\\\" \\\"그럼요. 안 믿어요.\\\" \\\"다시 한번 묻겠습니다. 만일에 천당과 지옥이 있다면 할아버지가 죽은 다음에는 어느 쪽으로 갈 것 같습니까?\\\" 이 할아버지, 가만히 있더니 \\\"만일에 있다면 그야 지옥이겠지요\\\"하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다 믿어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준비는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네요. 만일에 천당과 지옥이 정말로 있다면 그 때에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이야기로 마음 문을 열어서 전도하여 믿게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언제 어디서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사는 복된 자리에 이르는 줄 믿습니다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에는 공산주의의 열렬한 실천자인 레닌의 시체를 포르말린에 담긴 유리관에 넣어서 보관해 놓았는데 그 유리관에는 \\\'그는 모든 나라, 모든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는 새로운 인간형을 만들어주었다\\\'라고 쓰여 있다 합니다. 얼른 보기에는 위대한 사람을 일컫는 굉장한 칭송인 것 같지만,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여기에 문제가 있는데 과거형으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는 인민의 지도자였다. 그가 이 세상에서 한 모든 일은 훌륭하였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현재입니다. 영원히 현재적인 말씀입니다. 영원한 현재이신 주님께서는 오늘도 살아 계셔서 말씀하십니다. 나사로의 죽음 앞에서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부활이다, 내가 부활할 것이다, 내가 너를 부활시키는 능력이다, 그런고로 나는 생명이다.\\\'
우리 나라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일화입니다. 주기철 목사님의 여러 해 동안 평양감옥에 있을 때에 한 감방에서 주영하라고 하는 공산주의자와 같이 생활하였다고 합니다. 일부러 그렇게 함께 지내도록 만들어놓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주기철, 주영하--공교롭게도 같은 주씨입니다. 그래서인지 서로 툭 터놓고 이런 얘기 저런 얘기를 나누게됩니다. 그런데 주영하라는 사람은 모스크바대학을 나온 철저한 공산주의자요,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상당한 고관으로 지내던 사람입니다. 어느 날, 주영하가 목사님에게 말합니다. \\\"내가 공산주의자가 되기 전에 형님을 만났더라면 예수쟁이가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주기철 목사님으로부터 많은 감화를 받았던가봅니다. 이에 주기철 목사님도 \\\"내가 예수 믿기 전에 당신을 만났더라면 나도 틀림없이 공산주의자가 되었을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제 주영하가 끝으로 중요한 말을 합니다. \\\"나는 공산주의자로서 이 땅에 평등을 이루고, 이 땅에 자유를 이루고, 모든 사람들이 잘살게 되는 사회를 만들고자 이렇게 애를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내가 놀란 것이 있습니다. 나는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납니다. 그런데 예수쟁이들은 죽음 앞에서도 아주 희색이 만면하여 하나님 앞에 간다면서 죽더군요. 그 모습을 저는 이해 할 수가 없습니다. 다만 부러울 뿐입니다.\\\"
우리가 부활을 확신한다면 죽음은 안식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내일의 부활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안식이 있을 수 없습니다. 하루해가 질 때 우리가 침상에 들어가서 안식을 누릴 수가 있는 것은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입니다. \\\"내일 아침에도 해가 떠오른다. 그리고 빛나고 새로운 내일이 시작된다.\\\" 마찬가지로 부활이라는 놀라운 사실이 전제될 때에만 우리는 \\\'죽음은 안식이다\\\'라는 명제를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부활이 진정 사실이라면, 먼 훗날 우리는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다시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생명의 기적이었듯이, 전지 전능하신 그분의 능력 안에서 다시 일어나는 부활의 사건 역시 엄청난 생명의 기적입니다. 이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들과 다시 만날 날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땅의 삶에서 느끼는 허무를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놀라운 사실은 부활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죽음 앞에서 안식을 선포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큰 기적인 이 부활에 의해서, 생명과 미래의 문제가 해답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부활도 엄연한 하나님의 계시입니다. 이 속에 말씀이 있고, 나를 향한 강한 증거가 있습니다. 우리의 생명을 해석하고 있고, 우리의 모든 생활에 대한 문제까지도 여기서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예수 부활이 곧 내 부활입니다. 예수 부활로 오늘의 내 생활의 의미가 살아나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신 예수님은 야이로의 딸도 살리심으로써 어린 소녀의 부활과 청년을 살리심으로 청년의 부활과 나사로를 살리심으로 장년의 부활 곧 모든 사람이 부활할 수 있음을 나타내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 자신이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 죽음이 마지막이 아니라는 놀라운 사실을 확증하시기에 앞서 선포하십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요 11:2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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