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희의 아침 부활절설교 막16:1-7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인들에게는 환희의 극치일 것입니다.
세상에 환희 환희 하지만 주님의 부활에 비견될만한 환희가 있겠습니까?
사건은 너무나 순식간에 이루어 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게도 허무하게 예수님의 일생이 끝날줄은 아마 아무도 몰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결코 그렇게 쉽게 끝날 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믿었고 확신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간의 예수님의 활동상으로 보아서는 예수님은 세상의 그 어떤 권력도 당할수 없다고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이 생전에 그렇게도 여러번 십자가의 고난을 예언했어도 믿기지를 않았을 것이고 그것은 하나의 지나가는 얘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십자가의 길에서 까지 요한의 어머니 살로메는 두 아들의 장래를 예수님에게 부탁을 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마지막 예루살렘 입성은 최후의 고난의 길이 아니라 영광의 길이 될걸로 알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고난의 예언은 흔히들 정치가들이 식언처럼 하듯하는 영광된 길을 암시하는 것으로 들었을 수 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예루살렘입성을 환영을 했고 이제 예수님의 영광된 나라의 회복은 시간 문제로 다가온것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비록 바라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이 예수님의 처형을 논의하고 있다는 소문이 들리긴 했어도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그렇게 저들에게 당하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모든 일은 이제 순식간에 현실로 닥치고 말았습니다 .어떻게 손을 쓸수도 없을 만큼 일들은 급박하게 돌아갔고 정신을 채 채리기도 전에 에수님은 십자가에서 최후를 마치고 말았습니다.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게 허망하게 끝날줄은 몰랐을 것입니다.
희망이 크면 실망도 크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기대했던 모든 희망이 이제 물거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실망이 얼마나 컸겠습니까?
엠마오를 가던 두 사람도 그들의 실망을 길에서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들의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했습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이 무슨일로 그렇게 근심스런 얼굴을 하고 있느냐고 물으니까 오히려 그렇게 질문하는 예수님이 이상하다는듯 당신이 지금 거기에 우거하고 오면서도 거기에서 일어난 사건을 그렇게도 모르느냐고 반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하는 말이 우리는 그사람이 이 나라를 회복할 사람이라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것입니다.
희망이 산산히 부서지고 만 것입니다.
소망이 짓밟힌 것입니다. 개인의 소망도 소망이지만 민족적 자긍심이 강한 이스라엘이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될 것으로 믿었던 그 모든 민족적 소망마저 끊어지고 만 것입니다.
절망입니다. 비극입니다. 비극비극하지만 세상에 더 이상의 비극은 없을 것입니다. 더 이상의 절망은 없을 것입니다.
너무나 급작히 다가온 절망이었습니다.
너무나 갑자기 다가온 절망이었습니다.
세상이 무너지고 하늘이 무너진다는 말은 아마 이사실을 두고 하는 말일것입니다. 이 절망의 끝에서 부활의 환희가 다가온 것입니다.
이 절망의 늪에서 부활의 기쁜 소식이 들려 온 것입니다.
환희입니다. 진실로 사상 최대의 환희입니다.
그 환희의 시작은 이렇게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1. 환희의 아침은 향유를 들고 가는 세 여자의 사랑에서 시작합니다.
안식후 첫날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 세 여자가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십자가에서 운명한지가 사흘째입니다. 온 몸에 상처투성이인 예수님의 시신은 고온 다습한 팔레스타인기후속에서 금방 부패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사로의 무덤을 찾았을때 마리아는 이미 죽은지가 나흘이나 되었다고 강조를 했습니다. 이는 부패정도가 심하다는 의미입니다. 비록 예수님은 사흘째 이긴하지마는 그러나 예수님의 온 몸은 상처투성이기 때문에 부패속도가 훨씬 빨랐을 것입니다. 그러한 무덤을 찾는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이는 사랑이 없으면 정말로 하기 힘든 일입니다.
우리네 처럼 단순히 성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그들 세 여인이 예수님의 몸(시신)에 바를 향유를 준비해서 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시신을 만진다는것, 그것은 진실로 지극한 사랑이 없으면 만질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미 사흘째에 접어들고 있는 시신을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부모자식간이라 하더라도 운명을 하고 나면 시신이 있는 방에 들어가기도 꺼림직해하는 이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 세 여인은 사흘째나 되는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유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습니다. 참으로 사랑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들입니다. 저는 어느 장례식에서 남편의 애틋한 사랑을 본 일이 있습니다.
가난하게 살던 부부였습니다. 그러던중 그만 부인은 연탄까스 중독으로 갑자기 운명을 했습니다. 남편은 그 부인의 얼굴을 부비면서 그렇게 울었습니다. 그 이튿날 입관예배를 드려야 하는데도 그 남편은 자기 부인을 내어 놓을 생각을 하지 않고 있어서 주위분들이 위로 하고 해서 간신히 입관 예배를 드린일이 있습니다. 남편의 진실된 사랑이었습니다. 여기 세 여인의 사랑은 정말로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이처럼 부활절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시작을 합니다. 부활절의 환희는 주님을 지극히 사랑하는 그 사랑에서 출발을 합니다, 헤밍웨이의 작품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에서 마지막 장면은 두 젊은이의 애틋한 사랑으로 끝을 맺습니다. 총상을 입어 더 이상 살 가망이 없는 남자는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기를 두고 얼른 이곳을 피하라고 합니다.
뒤에서는 스페인정부의 군대가 그들을 추격하고 있습니다. 총성이 울리고 총알이 빗발치듯 쏟아지고 있습니다. 시간은 급박합니다. 그래도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부짖는 여인에게 그 남자는 나는 죽는것이 아니라 당신의 마음속에서 당신의 곁에서 당신이 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늘 함께 있을 것이니 빨리 이곳을 떠나 안전한 곳으로 가라고 말합니다. 사랑입니다. 남자가 여인을 사랑합니다. 여인이 남자를 사랑합니다. 부활절의 사랑은 이런 남녀간의 사랑에 비견할바가 아닙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사랑으로도 비교할 수 없는 사랑입니다. 보다 더 깊고 더 오묘한 사랑입니다. 죽음과도 바꿀수 없는 사랑입니다. 그 어떤 두려움이나 공포도 막을 수 없는 사랑입니다. 부활절의 환희의 아침은 그 사랑으로 시작을 합니다. 주님에 대한 진실된 사랑을 간직한 이들에게 부활절의 환희의 아침은 시작한 것입니다. 우리도 사랑을 간직하십시다. 주님에 대한 진실한 사랑을 간직할진대 우리의 마음속에도 부활절아침의 환희는 시작될것입니다.
2. 환희의 메세지
그 여인들이 무덤에 도착하자 이미 돌은 굴려져 있었습니다. 돌을 굴려 내려면 어떻게 하나 걱정을 하고 왔었는데 다행히도 돌은 옮겨져 있었습니다. 누가 옮겼을까하면서 세여인은 아무런 주저함이 없이 무덤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참으로 용기있는 행동입니다. 그런데 무덤속에는 놀라운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있어야 할 예수님의 시신은 없고 그 자리에는 빛나는 천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천사의 낭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놀라지 말라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 그가 살아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 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가서 그의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이르기를 예수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너희가 거기서 뵈오리라 하라”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소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갈릴리로 가신다는것이었습니다.
과연 예수님은 살아나셨습니다. 부활의 소식이었습니다. 환희의 아침입니다. 천사의 말은 계속됩니다. 갈릴리에서 만나리라고 했습니다.
갈릴리는 예수님의 복음의 요람입니다. 갈릴리에서 복음의 사역은 시작을 했고 갈릴리에서 구원의 대 장정은 출발을 했습니다.
갈릴리는 복음의 시작인 동시에 마지막 결론의 장소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후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왜 하필이면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을까요?
왜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리일까요?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름뿐 사실은 폭력이 난무하는 거리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성전을 청결케 하실때 그들을 질타해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하나님의 집을 강도의굴혈로 만들었도다고 하셨습니다. 성전이 강도의 굴혈일진대 예루살렘거리는 어떠하겠습니까?
호세아선지자는 호세아서 6장에서 제사장의 무리가 세겜길에서 살인을 했다고 지적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평화를 잃어버린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거리와 거리에는 대립과 폭력이 난무하고 가진자와 가지지못한자간의 반목이 끊이지 않는 곳입니다. 유대인들의 무리가 십자가상의 예수님을 비아냥거려 하는말이 네가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십자가에서 내려와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노라고 비아냥거렸습니다.
만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려왔다고 가정해 본다면 십자가밑은 살벌한 곳이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살륙과 보복의 피비린내나는 험악한 장소가 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은 결코 평화의 도시가 될수 없을 것입니다. 나의 권력을 유지하기위해서 남에게 죄를 뒤집어 씌어 처형을 해야하는 비정한 거리가 예루살렘거리입니다. 어느시대나 권력자들은 자기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을 했으며 남을 억압하고 탄압하며 심지어는 칼부림까지도 서슴없이 휘두르기 까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남을 괴롭히고
살인까지 하는 인정도, 사랑도, 정의도 찾을 길 없는 참으로 비정한 거리입니다. 예수를 처형하기 위해서 애국과 민족을 빙자하여 자기 이익만을 충족시키려는 야비한 집단들이 우굴거리는 거리입니다. 정의는 사라지고 살벌한 폭력이 뒤를 잇는 무참한 거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첫 사랑의 장소입니다. 인간의 반목과 대립이 없는 비록 가난하고 힘든 곳이긴 하지만 그러나 참 인간적인 사랑이 있는 곳입니다. 거기에서 만나자고 하신 것입니다. 너희보다 먼저 갈릴리에 가시나니...천사의 전언은 하나의 복음입니다. 사랑의 메세지입니다.
환희의 아침은 갈릴리에서 주님을 만나는데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인간적인 복선이 없이 순수한 사랑만 있는 그 갈릴리에서 우리 다 같이 주님을 만나는 축복된 부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문제는 우리모두 그 갈릴리를 알고 있느냐에 있습니다. 물론 여기에서의 갈릴리는 지정학적인 위치로서의 팔레스타인의 갈릴리만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순수한 사랑의 장소가 우리모두의 갈릴리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순전한 사랑으로 가득찬 우리의 마음이 갈릴리가 될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갈릴리로 만들어가야 겠습니다. 우리의 가정을 갈릴리로 만들어야 겠습니다. 우리의 교회를 진정 반목과 대립이 없는 갈릴리로 만들어야 겠습니다. 거기에 주님이 오십니다. 그 장소에 부활의 주님이 오십니다. 갈등과 대립이 없는 사랑의 장소에 부활절의 환희의 아침의 은총이 임하실 것입니다.
3. 환희의 아침의 절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오순절성령의 역사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부활절은 부활절아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부활절아침의 환희는 예수님의 승천후 오순절역사로 이어집니다.
두려움과 공포속에서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한 그 장소에서 이제 저들은 용기와 힘과 새 생명에 넘치는 성령의 역사를 통해 새 역사를 이루어가기 시작했습니다. 예루살렘으 ㅣ비정한 거리에서 새로운 복음의 역사가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생명의 물결이 거세게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유대인의 종교에서 세계교회로 발전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그 폭악한 핍박과 고난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로마의 심장을 복음화 시켜 나가는 기적을 일으켰습니다. 부활의 절정입니다. 부활절 아침의 환희의 절정입니다. 예루살렘교회를 일으키고 세계복음화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성령충만함으로 이어졌습니다. 부활절아침의 환희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완성을 향해서 지금도 나아가고 있습니다. 오늘 아침에도 이 환희는 우리마음속에 이어질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속에 새로운 생명으로 충만해질 것입니다.
이제 부활절은 미래를 향해 나아갑니다. 주님의 재림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곳은 부활의 완성일 것입니다. 그 환희의 절정일 것입니다.
부활절의 새 생명이 이 봄과 더불어 우리의 샘명속에 충만한 시간이 되시길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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