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시민권

천국의 시민권
빌3:17-21





오늘 우리 교회에서 사랑하는 믿음의 가족들 가운데 세 분이 세례를 받고 또 한 명의 유아가 유아세례를 받습니다. 기록에 의하면 우리 나라에 기독교가 들어온 이후에 최초로 세례를 받은 사람은 노도사(魯道士) 라는 사람이었는데 1886년 7월11일에 언더우드 선교사님에 의해 비밀리에 받은 것으로 기록이 되어 있고, 같은 해 감리교의 아펜셀러 목사에 의해 배재학당의 두 학생이 세례를 받은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진 우리 나라 사람들의 최초의 세례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한 영국의 존 로스와 맥킨타이어 목사님들에 의해 의주의 청년들이었던 이응찬, 백홍준, 김진기, 이성하 등이 세례를 받은 것을 학설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이 분들이 1874년부터 존 로스 목사님을 만나 성경을 배우다가 1876년에 세례를 받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학계의 정설로 받아들여진다면 무려 10년이 앞당겨지는 일입니다.

세례는 초대교회에서부터 시작되었고, 기독교의 복음이 전파되는 곳마다 베풀어졌습니다. 초대교회의 시작으로 보는 오순절에 성령이 임하였습니다. 이때에 베드로는 성령주심과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과 연관지어 설교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은 마음이 찔려서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물었습니다. 그때 베드로는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행2:37-38)고 도전하였습니다. 여기에서 베드로는 세례를 받는 일과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일을 연관지어 설명하였습니다. 이것은 처음부터 세례는 사람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신앙고백적인 표현으로 나타났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세례는 세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한 믿음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는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에 나도 죄에 대하여 함께 죽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두 번째로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을 때 나도 부활하여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는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가 되었으므로 이제 이 신분에 합당한 의롭고 거룩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사실을 고백하고 다짐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첫 번째 부분과 두 번째 부분보다는 세 번째 부분, 즉 세례받은 자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의 주제는 천국 시민권을 가진 자의 삶에 대한 것입니다. 이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이 본문에서 세 가지 중요한 삶의 태도가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 번째로는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배우라. 두 번째로는 땅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 세 번째로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1.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배우라.

바울은 참된 신자의 삶을 말하기 위하여 자기와 자기가 가르쳐준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7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 또 우리를 본 삼은 것같이 그대로 행하는 자들을 보이라.\" 사실 이 번역은 만족스럽지 못합니다. 이 말씀에서 맨 뒤에 있는 \"보이라\"는 말씀은 헬라어 원문에 \"주목하라\"는 말입니다. NIV성경은 이 점을 역시 \"주목하라\"(take note)고 번역하였는데,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이 이 말을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하게 된 배경은 신자의 바른 행위가 무엇인지를 보이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신자의 바른 행위에 대하여 바울 자신만을 모범으로 제시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보여준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과 함께 모범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신자가 믿음생활을 할 때 따라야 할 모범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바울 자신이 최선의 모범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의 최고의 모범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예수님을 더 이상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모범을 필요로 합니다. 바울은 이러한 의미에서 자기와 자기가 보여준 삶의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들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이 이 본문에서 \"나를 본받으라\"고 말할 때 무엇을 본받아야 할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 가운데는 아주 분명하게 제시하였습니다. 그는 고린도전서 11:1에서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바울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것처럼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역시 바울이 보여준 삶을 따라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빌립보 교회에 많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신과 함께 이들도 함께 신앙의 모범으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으시는 분들은 앞서 믿음생활을 잘 하는 성도들의 삶을 보고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에도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여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감사를 드립니다. 저희 교회의 성장이 더디기는 하지만 든든한 믿음의 기초를 놓기 위한 과정으로 보기 때문에 조급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실제 좋은 신앙의 모범을 보이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시대에 성도의 삶과 불신자의 삶이 구분이 되지 않는 경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전파하는데 결정적인 장애가 되기도 합니다. 오늘날 복음전파에 있어서 가장 커다란 장애가 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도덕적 생활의 수준이 낮다는 것입니다. 영국의 유명한 신학자요 설교자인 마틴 로이드 존스(M. Lloyd-Jones) 목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나는 오늘날의 세계에서 교회가 인간들의 삶에 더욱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데 실패한 것은 전적으로 교인들의 생활이 제대로 되지 않은 일에 있다고 주저없이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좋은 신앙의 본을 본받아야 하고, 우리 역시 이러한 모범을 보이기에 힘써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을 배우기 위하여 경건한 신앙의 서적들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우리는 과거 2천년의 기독교 역사에서 성경을 이해하고 세상에 적용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다 만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쓴 글들을 통하여 그들을 만나고, 그들이 경험한 세계를 접하면서 믿음생활의 지혜를 배우고 경건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들의 책을 통하여 위대하고 거룩했던 사람들과 함께 교제하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멋있고 좋은 일입니까? 그런데 오늘 우리 신자들은 하루 중에 얼마의 시간을 할애하여 독서하는 일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까? 좀 극단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신자가 독서하는 일에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은 신자됨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훌륭한 법률가는 법의 중요한 사례들과 변화들을 끊임없이 연구하고 발전시킵니다. 또한 현명한 주부는 항상 좋은 식탁을 마련하는 일을 위하여 책을 읽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자녀들을 주의 교양과 훈계로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하여 앞서간 믿음의 조상들은 어떤 갈등을 하였으며, 어떻게 키웠는지를 깊이 연구합니다. 그래서 신자됨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신경을 써서 과거 역사 가운데 믿음의 선진들이 어떻게 믿음을 지켜왔고 생활해 왔는지를 살펴보게 되어 있습니다. 신자됨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신앙의 모범을 발견하기 위하여 부지런히 그들이 사색하였던 것을 그들의 책을 통하여 사색하고, 그들의 삶을 배우기 위하여 책을 손에 들어야 합니다. 이것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배우는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는 바울과 바울이 보여준 모범을 따라 사는 사람들의 삶을 배워야 할까요?




2. 땅의 일을 생각하지 말라.

바울은 그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자들이라는 말은 기독교의 복음과 반대되는 생활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우리 번역성경에는 잘 표현이 안되어 있습니다만 18절을 시작할 때 이유를 말하는 접속사 \"왜냐하면\"(헬. ???, For)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을 넣어서 18절을 보십시오. \"(왜냐하면)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바울이 \"여러 번\"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때 바울은 과거에도 여러 번 빌립보 교회에서 바른 삶을 살지 않는 사람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간곡하게 말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바울 당시에 있었던 초기 영지주의자들이나 자신들의 행위로 그리스도를 욕되게 만드는 이름뿐인 그리스도인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오늘 세례를 받은 사람이나 이미 세례를 받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은 이들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이러한 삶을 버려야 합니다.

19절을 보면 바울이 어떤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이 말을 하고 있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요, 저희의 신은 배요 그 영광은 부끄러움에 있고, 땅의 일을 생각하는 자라.\" 여기에 묘사된 첫 번째 특징은 저희의 마침은 멸망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나아가는 길이 행복과 성공, 자기만족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고 비참함과 멸망의 상태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불신자들은 그들이 하는 행위가 행복과 성공, 그리고 자기만족으로 나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두 번째로는 그들의 하나님은 배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배는 헬라어 성경에 \"뱃속\"(헬. ??????, belly)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 속에 있는 욕망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저희의 신은 배라고 하는 뜻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망이 신이 되어 그것의 지배를 받는 것을 말합니다. 네 번째로는 저희의 영광은 부끄러움이라고 말합니다. 특히 여기에 부끄러움은 옳지 못한 일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사람들이 부끄럽게 여겨야 할 것들을 오히려 자랑스럽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한 남자는 한 여자만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런데 여러 여자를 상대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칠만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을 이용하여 불법으로 이익을 얻게 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일을 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사람들은 그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합니다. 여러분! 이러한 사람들을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이러한 일들에 미련을 두고 집착하는 사람들이 땅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의 마침은 멸망입니다.

오늘날 가치가 전도가 되어 하나님이 악하다고 하시는 것은 선하다고 하고, 선하다고 하는 것은 악하거나 어리석은 것이라고 말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정직, 순결, 법, 정의, 성실 이러한 단어들이 무시를 받거나 비웃음거리가 되는 것이 우리 시대의 시대정신이 되었습니다. 심지어 신자들조차도 정직하면 손해를 보고, 법과 정의를 따라 행하는 일을 어리석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우리 대통령이나 정치지도자들처럼 뻔히 다 아는 일을 딱 잡아떼거나, 그 일을 마치 정당방위처럼 생각하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세상에 속한 사람들이고 십자가를 원수로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천국 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이렇게 살아서는 안됩니다. 말과 행함이 일치하고 진실해야 합니다. 바울이나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이 보여준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어거스틴은 \"참회록\"(Confession)에서 그가 깨달은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는 \"주님! 나를 순결하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지만 곧바로 아주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아직 때가 아닙니다.\"라고 기도하는 자신을 깨달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혹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요? 그리스도를 영접한 이후에는 \"나중에 바르게 살아야지\" 생각하지 말고 지금 현재부터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3.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라.

이어서 바울은 신자가 땅을 일을 생각하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삶을 살아야 하는지 그 이유를 20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역시 여기에도 이유를 나타내는 접속사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하늘\"은 우리 신앙생활의 궁극적인 목표인 천국, 곧 하나님 나라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빌라도 앞에서 심문을 받을 때 주님의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8:36). 요한계시록 21장에 묘사된 새 예루살렘은 완전한 천국의 상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명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믿는다면 이 나라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요점은 장차 들어가게 될 일에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동안에도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임을 강조하는 일에 비중을 두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사후에 하늘나라의 시민이 되리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이 세상에서 하늘 나라의 시민으로 살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나라의 이중성의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현재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요 가족입니다(엡2:19).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성(히11:9)을 바라보고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아갑니다(히11:13). 비록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고 있지만 천국의 시민권자로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철학이나 원칙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원리와 이상과 법칙에 따라 삽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삶의 원리와 이상을 이 세상의 삶에서 적용하며 살아야 합니다. 이러한 삶이 우리의 이상이요 현실이 될 때 기독교는 사회를 적극적으로 변화시키는 영향력을 가지게 됩니다. 유명한 신약학자인 로버트슨(A. T. Robertson)은 이 일을 가리켜 \"세계대전의 총성\"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그가 이렇게 말한 것은 우리는 무력으로 세상과의 전쟁을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늘 나라의 이상을 적용하는 전쟁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으로부터 이기적인 목적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전쟁을 종식시키고,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지는 일에 힘쓰고 기도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인 주기도문의 두 번째 간구에서도 하나님의 나리를 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세 가지 관점에서 이해해야 합니다. 하나는 말씀과 성령으로 이루어지는 나라이고, 두 번째로는 역사 가운데 임하는 나라이며, 세 번째로는 종말론적으로 임하는 나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 나라를 이루어주시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이 나라를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늘 나라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한편 우리는 이 세상에서 완전한 천국을 이룰 수 없다는 사실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눈은 하늘로부터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향해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주님은 그 말씀하신 대로 재림하셔서 사람들을 고난과 육신의 연약함으로부터 구원하실 것입니다(롬8:19; 고후5:4). 그래서 우리의 눈은 하늘로부터 오시는 그리스도를 향해 열려 있어야 합니다.

이어서 우리가 기다리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시며, 어떤 일을 하실 것인지를 21절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왜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지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 먼저 오실 주님이 어떤 일을 하실까요?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의 몸까지 하늘 나라의 몸으로 변화시킬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에 보면 우리의 육신에 거하는 몸을 \"낮은 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죄로 타락하여 고난과 죽음을 경험할 수밖에 없는 몸의 상태를 말합니다. 이러한 불완전한 상태가 어떻게 변할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로\" 바꾸게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그리스도의 영광의 몸의 형체는 어떤 상태일까요? 지금 우리가 지니고 있는 이 육신의 몸으로는 덧입혀 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바울은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49에서는 \"…우리가 또한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부분적이기는 하지만 예수님이 변화산상에서 영광의 몸으로 변화되신 것을 베드로와 야고보, 요한이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주님의 몸이 부활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부활하게 될 것이고, 동시에 거룩하고 완전한 몸을 입게 될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명 현대과학으로는 풀기 어려운 신비입니다. 시람은 당시 영지주의자나 오늘날의 구원파나 일부 복음주의처럼 영과 구분으로 구분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은 영과 육으로 되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의 궁극적인 목적은 몸이 부활하여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몸의 부활의 중요성에 대하여 부활장으로 알려진 고린도전서 15장에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는 몸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가 다시 살지 못하였을 것이고, 그리스도가 살지 못하였다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고, 우리의 믿음도 헛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13-14). 그리고 주님이 영광 중에 재림하시면 잠자는 자들이 홀연히 다 변화하여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고전15:49-53).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자기 몸의 영광이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신다\"는 의미는 바로 이러한 의미입니다. 사도 요한도 주님이 재림하시면 우리는 주님과 같이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요1서3:2).

그러면 주님께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을까요? 사자들의 밥이 되어 간 순교자들이나, 화형에 처해진 순교자들은 어떻게 변화될까요? 여기 이 본문에 보면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역사로\" 하실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주님은 만물을 창조하신 분이며(요1:1-3), 또한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많은 기적들을 보이시며,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을 통하여 이미 그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 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이 우리 몸이 부활하게 된다는 보증이요, 증거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하실 영광의 날이 점점 다가오고 있습니다. 이 절정의 날에 모든 것이 변하고, 우리의 몸 역시 완전하게 변화되어 주님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이 세상에 살면서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로서 주님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최종적인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자들입니다. 천국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나 앞서간 믿음의 사람들이 보여준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땅에 속한 일을 버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살아야 합니다. 땅에 속한 사람들의 결국은 멸망이요, 그들이 신은 배고, 그 영광은 부끄러움입니다. 하지만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은 땅에 속한 일을 버리고 앞서간 신앙의 선배들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며 살 것입니다. 이러한 삶이 세례받은 자의 삶이요, 천국의 시민권을 가진 자의 삶의 자태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