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안에 천국에 있느니라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
눅17:20-21





\"바리새인들이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 묻거늘
예수께 대답하여 가라사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21)



우리가 성경을 얼마나 단편적으로 보느냐 하는 것은 본문의 지적만 살펴보더라도 충분히 그 전모를 짐작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는다는 우리들이 예수적인 생각과 예수적인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예수를 십자가에 못박은 바리새인적 개념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꿈꾸고 있기 때문이다.

바리새인들의 잘못은 그들이 교만했다거나 하나님을 믿지 않았다는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잘못은 너무 열심히 하나님을 믿고 충성된 생활을 했지만 그것이 참된 지식을 좇은 것이 아니라는데에 있다(롬 10:2).

교만이란 참된 지식이 없을 때에 일어날 수밖에 없는 하나의 결과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세계는 사도 바울의 고백처럼 너무나 깊고 넓어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측량할 수도 없고 찾을 수도 없는(롬 11:33), 따라서 당연히 표현할 수도 없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자기들의 생각 속에서 정리하고 판단하여 거기에 합당한 개념들만 하나님의 나라로 인정하는 우를 범하였는데 이것이 그들의 교만이었다.
다시 말해서 도저히 인간들 속에서 정형화 될 수 없는 세계를 정형화하여 간직하고 있던 사람들이 바로 바리새인들이었다.

그 정형화 된 개념들 중의 하나가 본문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점이었다.
바리새인들의 생각에는 이 땅위에서 이렇게 이방민족에게 힘으로 억압당하고 경제적으로 피곤한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립되는 세상적 나라였고, 따라서 이러한 눈물과 고통, 슬픔의 세상나라에 과연 언제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였다.

그래서 이 고통의 세계를 벗어나 더이상 눈물이 없고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계 21:4) 하나님의 나라야말로 그들의 삶의 유일한 희망이었고 의미였다. 그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하여 종교적인 온갖 충성과 희생을 아끼지 않았으며 자나깨나 \'하나님을 위한 삶\' 이 체질화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에게 있어 이러한 \'하나님의 나라\' 가 과연 \'언제\' 임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날 우리들에게 예수의 재림이 언제쯤일까 하는 문제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들의 이러한 종교적 삶의 행태는 그들이 예수를 만났을 때 극명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이 평상시에 일반적으로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바로 그 사람 자신이다.
어떻게 보면 선지자 같기도 하고 또 어떻게 보면 천하의 이단 괴수 같기도 한 예수를 만난 바리새인들의 반응은 호기심 섞인 기대가 반이요 이단적인 경계가 나머지 반이었다.

그래서 이들은 예수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시점\' 에 대하여 질문한다. 왜냐하면 다른 문제들에 대해서는 나름대로 정형화 해 놓은 틀이 있었는데 그 문제는 정말 오리무중이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어떨 것이라는 상상도 가능하고 내가 어떻게 하나님을 섬기고 믿어야 거기 갈 수 있을 것인가도 대충 짐작하겠는데 도무지 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때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이 문제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더구나 예수께서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 바 아니요\'(행 1:7) 라고 분명히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여러가지 수단과 방법으로 그 때를 계산하고 측량한다.
그래서 숫제 몇 년 몇 월 몇 일까지를 못박으면서 \'그 날이 가까왔다\' 고 사람들을 기만한다. 이런 기만이 통하는 이유가 바로 사람들의 신앙이 그만큼 예수적이지 못하고 바리새인적이라는 증거이다.

만일 본문의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예수가 \'언제쯤\' 이라고 대답했을 경우를 가정해 보라. 예수는 그의 권능과 유대인들의 기대 섞인 환호 속에 가장 멋진 이단이 되었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의 신앙을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하는 필요성이 이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행위가 어떤가하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문제는 우리도 바리새인들처럼 \'하나님 나라의 도래 시점\' 에 관심이 있느냐 없느냐이다.
만일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예배, 기도, 헌금, 전도한다고 하더라도 - 이런 것들은 바리새인들이 우리보다 한 수 위면 위였지 절대로 우리에게 뒤지지 않는다 -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어느 때에\' 임할 것인가에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면 우리 역시 예수께서 책망하는 대상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말세론을 강의(?)하시면서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때가 가까왔다 하겠으나 저희를 좇지말라\'(눅 21:8)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냐하면 그 때는 가까이온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이기 때문이다.

가까이 왔다는 것의 맹점은 \'아직도 여유가 있다\' 는데 있다.
사도 바울이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 6:2) 라고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은 그냥 믿기만 하면 은혜 받을 날이 가까이 올 것이라고, 서기 2000년이 되기 전에 예수가 재림할 것이라고 기만하는데 그 허위가 있다(이 말은 예수의 재림이 서기 2000년 전에는 절대로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러기 때문에 신앙이 삶이 되지 못하고 관념의 세계에 머물게 된다.
관념이란 현재 이루어진 현실의 삶이 아니라 가깝건 멀건간에 그것이 미래의 기대치일 때를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에게 있어서의 문제도 \'하나님의 나라\' 가 현실적 삶이 아니라 \'언젠가\' 는 임할 하나의 관념이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언젠가는 임할 그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오늘\' 은 종처럼 충성하고 봉사하는 길밖에 없었고 그러한 충성과 봉사의 삶이 하나의 업이 되어 자신을 하나님의 나라로 들어가게 해줄 것이라는 야무진 착각을 하고 있었다.


오늘날은 어떤가. 물론 오늘날 기독교인들 가운데 바리새인들처럼 그들의 충성과 봉사 때문에 구원받는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구원은 \'믿음\' 으로 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이러한 충성과 봉사를 하는 이유는 \'장차\'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갔을 때에 우리가 얻어 누릴 \'상급\' 과 관계있다고 생각한다.
이것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생각은 우리가 그러한 종교적 행위를 함으로써 우리 자신이 \'성화\' 된다는 생각이다.

어쨌거나 하나님의 나라가 미래적 사실임에는 바리새인들의 생각이나 오늘날 기독교인들의 생각이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여기에 문제가 있다.
지엽적인 문제가 좀 다르다고 근본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를 미래에 임할 하나의 사건으로 생각하고 있는 한 우리는 바리새인들의 삶과 신앙보다 더 나을 것도 다를 것도 없다는 사실을 유념해야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나라는 어떤 것인가.
여기서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 에 임하느냐고 묻는 바리새인들에게 \'시간\' 의 문제로 답변하지 않고 \'공간\' 의 개념으로 대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즉 문제는 \'언제냐\' 가 아니라 \'어디냐\' 이다.
하나님의 나라를 \'언제냐\' 의 문제로 끌고 가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람들이 \'언제냐\' 에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 곧 \'지금\' 은 아니라는 반증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어디냐\' 의 문제이다. \'어디냐\' 의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때와 상관없다. 때와 상관이 없다는 것은 우리가 \'언제나\' 누릴 수 있는 하나님의 나라요, 따라서 \'바로 지금\' 의 삶이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나라가 \'지금\' 의 삶인 사람에게는 구원이 따로 있고 상급이 따로 있지 않다. 구원도 현재의 삶이고 상급도 장차 누릴 희망이 아니라 현재 지금 받아 누리는 삶 안에 있다.

그러므로 모든 종교적인 행위도 더이상 행위가 아니요 삶이며, 삶이기 때문에 힘든 것도 부담스러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즐겁고 기쁨만 충만하다는 뜻도 아니다. 삶은 그냥 삶이라는 의미이다. 즐겁고 괴로운 것은 삶을 사는 사람의 감정에 불과한 것이지 그 감정이 삶은 아니다.

삶은 삶만이 주는 맛이 있다. 삶이 주는 맛을 모르는 사람은 감정에 지배된다. 즉 종교적인 충성을 할 때 진심으로 기쁨을 느꼈다든지, 아니면 반대로 부담스러움을 느꼈다든지 하는 것은 자신의 신앙생활이 삶이 아니라 행위라는 결정적인 증거이다.

하여튼 하나님의 나라는 미래의 어느 시점에 - 그 때가 가깝거나 멀거나는 아무런 문제가 아니다 - 우리에게 임할 실체가 아니라 현재 우리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께서 지적한대로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못한다.
\'여기 있다\' 에 이리로 쏠리고 \'저기 있다\' 에 저리로 몰리는 이유는 바로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없기 때문이다. 자기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있는 사람만 하나님의 나라를 본다.


분명히 본문의 말씀대로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는 니고데모를 향하여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면 하나님 나라를 본다고 말씀하셨다(요 3:3-). 거꾸로 이 말씀은 하나님 나라를 보는 사람만 거듭난 사람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우리가 스스로를 향하여 \'나는 거듭난 사람\' 이라고 확신한다고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거듭난 삶 곧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는 삶이 있어야 비로소 거듭난 사람이다. 말씀이 분명히 이것을 증거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스스로를 거듭난 존재로 인식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의 \'천국 여행담\' 에 귀가 솔깃해진다. 물론 본문의 말씀대로 천국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들 모두 천국에 대하여 볼 수 있고 말할 수 있다.

성경은 이를 가리켜 \'나눔\' 이라고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나눔에 참여하는 양쪽 모두 \'천국에서의 삶\' 이 있을 때나 가능하다.
내가 직접 산 천국은 없으면서 다른 사람들이 갔다 온 천국에 현혹되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미혹 가운데 하나이다. 왜냐하면 천국은 자신 속에 가지고 사는 것이지 \'관광 여행\' 으로 갔다 오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성경을 믿지 않는가!
스스로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성경은 성경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이다.
자신의 생각에 부합하는, 자기가 그럴듯하게 생각하고 그러기를 희망하는 사항에 대해서만 믿는다.

그러기 때문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바리새인들이 기대했던 하나님의 나라와 예수께서 가르쳤던 하나님의 나라는 서로 그 모양과 색깔에 있어 하늘과 땅만한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있느냐 없느냐, 그것을 내가 믿을 것이냐 말 것이냐 하는 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인식이나 우리의 긍정적인 반응 때문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믿음이나 기대와 상관없이 우리에게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의 핵심은 그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지금 내 안에 있느냐에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 말씀하신대로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매일같이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지 않는 신앙은 이미 실족한(눅 17:1) 믿음이다.

예수께서 기회 있을 때마다 \'나를 인하여 실족하지 않는 자가 복이 있다\' (마 11:6) 고 말씀하신 이유가 이것이다.
또한 많은 선지자와 사도들이 예수를 향하여 \'부딪히는 돌과 거치는(실족케 하는) 반석\' (벧전 2:8) 이란 표현을 쓴 이유가 이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눈의 이 들보를 빼야한다(마 7:3).
우리가 아무리 그리스도를 생명의 반석으로 믿는다 하더라도 그 생명의 반석을 부딪치는 돌로밖에 보지 못하는 들보 섞인 눈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의 자랑은 웃음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정작 오늘 우리에게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는 시큰둥하면서 장차 우리가 받아 누릴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만 광분하는 이것이야말로 그리스도에 대한 오해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면서 그리스도를 제쳐놓는 이율배반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기대하는 그 날(인자의 날)은 결코 보지 못할 것이다(눅 17:22 ).
예수는 우리에게 그런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고 이처럼 분명히 말하고 있는데 왜 그 말씀을 믿지 않는가.
예수를 믿는다면서 왜 예수의 말씀과 정반대의 사건을 기다리고 또 그런 사건을 보고 왔다는 사람들의 멧세지에 귀를 기울이는가.


\"내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의 말에
내가 몽사를 얻었다 몽사를 얻었다 함을 내가 들었노라
거짓을 예언하는 선지자들이 언제까지 이 마음을 품겠느냐
그들은 그 마음의 간교한 것을 예언하느니라.
그들이 서로 몽사를 말하니 그 생각인즉
그들의 열조가 바알로 인하여 내 이름을 잊어버린 것같이
내 백성으로 내 이름을 잊게하려 함이로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몽사를 얻은 선지자는 몽사를 말할 것이요
내 말을 받은 자는 성실함으로 내 말을 말할 것이라.
겨와 밀을 어찌 비교하겠느냐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보라 거짓 몽사를 예언하여 이르며 거짓과 헛된 자만으로
내 백성을 미혹하게 하는 자를 내가 치리라.
내가 그들을 보내지 아니하였으며 명하지 아니하였나니
그들이 이 백성에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렘 23:25~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