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의 초대장

천국 잔치의 초대장
눅14:15-24





생일 초대장

누군가로부터 초대를 받았다는 것은 기쁜 일입니다. 요즘은 대부분의 초등학생들도 생일날 친구를 초청하는 카드를 보냅니다. 어느날은 제 아들이 시무룩해져서 집에 돌아왔습니다. 친구 생일인데 초대장을 받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느날은 싱글벙글입니다. 같은반 친구들로부터 생일 초청장을 두 개나 받았다는 것입니다. 어떤 친구는 생일날 자기를 꼭 초대해 달라고 아이스크림을 사주며 미리 부탁을 하기도 한답니다. 코흘리게 아이들이지만 초대장을 받으면 신이 나는 것을 봅니다.

완벽하게 준비된 천국잔치

오늘 말씀에는 큰 잔치이야기 나옵니다. 이것은 보통 잔치가 아닙니다. 마태복음 22장에 보면 임금이 사랑하는 자기 아들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한 잔치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대통령이 주재하는 국빈만찬 쯤 될 것 같습니다.

당시 유대의 풍습으로는 잔치에 손님을 청할 때에는 두 번 초청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한번은 잔치 훨씬 전에 시간을 비워두라는 뜻에서 미리 초대장을 보냅니다. 본문의 16절에 기록된 초청이 바로 첫 번째 초청입니다. 그리고는 잔치에 임박해서 하루 전쯤에서 두 번째 초청을 합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습니다.\"하는 17절의 초청이 바로 두 번째 초청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을 위하여 준비하신 천국잔치입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풍성하게 준비되었습니다. 거기에는 영생이 있습니다. 평화가 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 있습니다. 아름다운 찬양이 있습니다. 이 최상의 잔치를 준비하신 하나님께서 잔치의 주인이 되셔서 우리를 초청하고 계십니다.

\"오십시오, 여러분이 원하는 모든 것이 준비 되어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값없이 선물로 주시고자 그분은 사람들을 초청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모든 것을 얻기 위해 여러분이 해야 할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저 가서 먹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오라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이 얼마나 지극한 은총입니까? 이런 잔치가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미 완벽하게 다 갖추어진 잔치, 그저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주인의 기쁨에 함께 동참하기만 하면 됩니다. 주인과 더불어 먹고 마시고 즐기면 됩니다.

초대받은 자들의 반응

그런데 초대받은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 했습까? 18절에 보면 무슨 약속이나 한 것 같이 모두 사양했습니다. 여기 사양이란 의미는 망설임이 없는 즉각적인 거절을 뜻합니다.

첫번째 사람의 사양하는 모습을 보시기 바랍니다. 밭을 샀으매 불가불 나가보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이미 잔치에 안가기로 굳게 결심한 사람입니다. 밭은 안가겠다는 핑계에 불과할 뿐입니다. 아니 밭을 살 때 보지도 않고 샀단 말입니까? 하필이면 이 때 밭을 보겠다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것은 물질 만능 주의에 빠져있는 현대인들의 모습과 흡사합니다. 비지니스가 바쁘다는 핑계로 주일 성수를 등한히 합니다. 땅을 보러, 새로 분양하는 모델 하우스 구경하러 갑니다.

두번째 사람의 사양하는 모습은 어떻습니까? 소를 샀는데 시험하러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어제 새로운 자동차를 샀는데 차의 성능을 시험해 보아야 겠다는 말과 같습니다. 하필이면 왜 이렇게 중요한 초청의 시간에 소를 시험해야만 합니까? 아니 소를 살 때 살펴보지도 않고 샀단 말입니까? 설사 소를 시험해 봐야 한다고 하더라도 잔치가 끝나고 얼마든지 할 수 있지 않습니까? 그저 모든 것은 가기싫은 구실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세번째 사람은 어떻습니까? 장가갔으니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신혼여행을 가야겠다는 것입니다. 그래도 이 사람의 핑계는 가장 그럴 듯합니다. 사실 율법에도 장가간 사람은 1년 동안 군대에 보내지 말 것을 배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대답을 자세히 분석해 보면 촛점이 장가갔다는 데 있지 않고 \"못가겠다\"는 데 있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여기 이 사람의 말을 좀더 정확히 표현을 하면 못가겠다는 것이 아니라 안가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준비하면서 어쩌면 현대인들의 대답과 그렇게 똑같은지 기가 막혔습니다. 전도할 때 흔히들 교회에 나온다고 철석같이 약속을 합니다. 여기 1차로 초청받은 사람들 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막상 주일 아침 전화를 하거나 방문을 하면 왜 그렇게 이유가 많은 지 모르겠습니다. \"배가 아프다\"고 말을 합니다. 왜 멀정하던 배가 갑자기 주일날 아침에 아픕니까? \"시부모님이 올라오실 것 같아서요\" \"결혼식장에 가야하기 때문에요.\" \"시댁에 가야하기 때문에요\" \"출근을 해야 되기 때문에요.....\" 이렇게 주일날 교회에 가자면 갑자기 온 세상의 일들을 혼자서 다 맡아서 하는 사람같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전도하는 그 사람들이 초청을 거절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완전히 다 알아야 믿겠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물론 알아야 면장을 한다고 예수 믿는 것도 알아야 하겠지요. 그러나 그 누구도 하나님에 대해서 성경을 다 알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종 머리가 아플때에 아스피린을 먹습니다. 그렇다고 아스피린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의학적 지식이나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런것은 몰라도 한가지는 알고 약을 먹습니다. 그것은 머리가 아플 때마다 아스피린을 먹으면 낫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아직도 TV를 켤때마다 어떤 과학적 원리로 방송국의 사람들을 안방에서 볼 수 있는 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지식을 알아야 만이 TV를 켤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저 알고 있는 것은 TV를 켜면 보고싶은 프로그램이 나온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 사실만으로 구원은 족한 것이지 모두를 알아야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완전한 지식을 가지지 못했다 할지라도 \"예수를 믿으면 구원을 받습니다.\"라는 말에 \"아멘\"하면 그것으로 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구원은 이루어 집니다.

어떤 사람은 \"난 죄가 너무 많아서 교회를 못나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굉장히 양심적인 사람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람은 마치 \"나는 병이 너무나 많아서 병원에 가지 못하겠다\"는 사람과 같습니다. 병원과 의사는 누구를 위해서 존재합니까? 바로 환자를 위해서가 아닙니까? 이런 사람을 위해서 예수님이 친히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병든자라야 의원이 쓸데 있지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 없느니라.\" 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들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그러므로 죄인은 마땅히 예수를 필요로 합니다. 교회는 시험보고 오는 곳이 아닙니다. 죄인이기 때문에 교회가 필요한 것입니다. 목이 너무 말라서 물을 못 마시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목이 마르기 때문에 물이 필요한 것입니다. 배가 너무 고파서 밥을 못 먹겠다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배가 고프기 때문에 밥이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살기가 너무나 바빠서 좀 한가해지면 나가겠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실 현대인들은 바쁩니다. 집과 직장과 사업 때문에 바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식사할 시간은 있습니다. 밥안 먹고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잘 시간은 있습니다. 잠을 자야만 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아무리 바빠도 생존을 위한 시간은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육체적 생존을 위해서는 시간을 만들면서 왜 영적인 생존을 위해서는 시간은 만들지 아니하느냐는 것입니다. 70-80년의 제한된 인생을 위해서는 헬스클럽에 다니면서까지 시간을 내면서 영원히 계속될 영적생명을 위해서 1주일에 한시간도 낼 수 없단 말입니까?

어떤 농부가 빌리그래함 목사님께 이렇게 물었다고 합니다. \"목사님, 만일 소가 주일날 구덩이에 빠지면 소를 건지시겠습니까 아니면 교회를 가시겠습니까? \" 이 때 목사님의 대답은 명답이었습니다. \"그거야 물론 소를 먼저 건져야 하지요. 그러나 만일 소가 주일날마다 빠지면 제발 팔아치우십시오.\"

어떤 사람은 남편이 반대해서, 부모님이 반대해서...그래서 남편이 허락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그 때 믿겠다고 합니다. 저는 그런분께 이렇게 묻고 싶습니다. \"남편이나 부모님이 지옥가면 함께 지옥 가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무엇이 사랑입니까? 그저 집안의 화평을 위해 남편이나 부모님의 말씀을 고분고분 듣는 것이 사랑이요 공경입니까? 물론 부모님이나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남편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부모님을 진정으로 공경한다면 지옥갈 그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이것이 가장 큰 사랑이 아닙니까? 이 세상에서 전도보다 귀한 사랑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때는 \"다음에...\"가 아닙니다. 바로 지금이 구원의 때요 은혜의 날인 것입니다.

거절한 자들에 대한 주님의 반응

이러한 사람들의 거절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무엇입니까? 21절에 보니 \"주인이 노하여...\"라고 기록되었습니다.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노하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라구요? 물론 맞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사랑이 넘치고 넘치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사랑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사랑으로 주신 모든 기회가 다 지나간 후 이제는 하나님은 더 이상 사랑의 하나님은 아니십니다. 그때부터는 공의와 심판의 하나님으로 나타나실 것입니다. 주님의 호의를 거절한 사람에게는, 주님의 초청을 거절한 사람에게는, 십자가의 희생을 무가치하게 만든 사람에게는, 육신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성육신 사건을 무의미하게 만든 사람에게는 주의 진노가 있을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않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주인의 적극적인 태도

그 다음 주인은 어떻게 합니까? 21절에 보니 가난한 사람들, 병신들, 소경들, 저는자들...을 데려다가 찬치에 채우라고 명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모두 치명적인 결점이 있는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점 때문에 감사하게도 구원받은 동기가 되었습니다. 약하기 때문에 결점이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호의와 친절을 거절하지 않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그 후 사건은 어떻게 전개됩니까? 22절에 보니 종들이 주인에게 보고하기를 그래도 자리가 남는다고 합니다. 이에 주인이 강권하여 내 자리를 채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마련된 잔치자리가 빈자리 없이 가득 채워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채우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강권은 강요와 분명히 다릅니다. 강권은 정성을 다하여 상대방의 인격앞에 지정의로 호소하는 것이지만 강요는 억지로 끌어다 채우는 것을 말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마다 오해하기 쉬운 장면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흔히들 생각하기를 강권이라 해서 싫다는 사람들 억지로 멱살 붙잡고 오듯이 생각하는데 본문의 의도는 간절히 호소해서 상대방의 결정으로 모셔오라는 것입니다.

여기 주님이 마련하신 잔치자리의 빈자리는 바로 여러분이 앉아야 할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여러분이 전도해서 앉혀야 될 사람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여러분의 남편의 자리인지, 여러분의 부모님의 자리인지, 친척의 자리인지도 모릅니다. 아뭏든 우리 주님은 강권해서라도 이 자리가 채워지기를 간절히 원하고 계십니다.

종들의 순종하는 태도

마지막으로 본문을 통해 나타난 종들의 순종을 깊이 배우고자 합니다.

17절에 보면 주인은 잔치에 사람들을 초청을 위해 다시 종들은 보냈습니다. 종의 입장에서 보면 보내심을 받은 것입니다. 사도란 보내심을 받은 자란 뜻입니다. 선교사도 역시 이와 같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최초의 선교사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이 세상에 보내심을 받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은 지금도 저와 여러분을 피 선교지로 보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여러분은 이 보내심에 순종하시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그 마음속에 있는 사람은 모두가 선교사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영혼이 있는 곳이 바로 우리의 선교를 기다리고 있는 피 선교지입니다.

21절에 보면 주인은 잔치자리가 채워질 때까지 길과 산울로 다시 한번 종을 보냅니다. 집이 채워질 때까지 주님은 종들을 보내고 보내고 또 보냈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횟수만 보더라도 무려 네번이나 됩니다. 그리고 이에 대하여 종들은 불평한마디 하지 아니하고 그저 나가서 주임의 명대로 데리고 올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할 일입니다. 우리는 사람들이 그저 스스로 교회에 나올 때까지 앉아 기다릴 수만은 없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너희는 길과 산울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교회)을 채우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지금 여러분 옆의 빈자리가 채워지길 원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일을 위해 여러분들을 부르시고 세상으로 보내주셨습니다. 우리의 할 일은 종들과 같이 \"오십시오. 주님께로 오십시오. 잔치가 다 준비되어 있습니다.\"라는 멧세지를 외칠 뿐입니다.

\"오라\"고 외치는 종들의 순종하는 모습, 바로 이 모습이 여러분의 모습이 되길 바랍니다. 2002년도 봄 부흥성회가 시작됩니다. 우리의 가슴 속에 부흥의 꿈을 꾸는 역사가 일어나기를 원합니다. 메마른 심령 위에 은혜의 단비가 내리기를 소원합니다. 아직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영혼들, 낙심한 자들을 초청하여 잔치 자리를 채울 수 있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성지교회가 여러분의 순종으로 인해 가득가득 차게 되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