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갈수 있을까? 마18:1-14
오늘도 참 좋은 날입니다. 하나님의 주시는 평화가 여러분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제가 어린이날이었습니다. 어린이는 자라나는 새싹과 같은 존재라고 말들을 합니다. 우리가 어린이주일을 지내면서 우리 주님은 어린이를 어떻게 생각하셨는지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어린이에 대한 생각을 나의 신앙에 적용해 보고 대비해 보는 시간을 가지도록 하시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제자들이 누가 천국에서 가장 큰 자가 됩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됩니다. 이러한 제자들의 질문에 예수님은 무엇이라고 대답하십니까? 3절과 4절은 그 대답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가라사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돌이켜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며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그이가 천국에서 큰 자니라. 오늘 본문을 보면 자신들에 관한 관심으로만 가득 찬 제자들의 이기주의적인 모습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습니다. 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아십니까? 이 장 앞에서 예수님은 자신이 어떤 고난을 받을 것인지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의 죽음을 당할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말씀 하셨는데 제자들의 관심은 전혀 다른 곳에 가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천국에서 누가 가장 큰 사람이 될 것인지 여러분 혹시 우리의 신앙에 이런 이기적인 모습은 없는지 내 자신의 신앙의 모습을 살펴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이러한 이기적인 제자들의 모습에 예수님은 무엇을 말씀 하십니까? 겸손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바로 어린아이 같은 겸손 바로 그런 자가 천국에서 큰 자이다.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통해 겸손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먼저 제자들의 모습을 살펴보겠습니다. 제자들이 말한 천국과 메시야의 의미는 예수님의 생각과는 너무도 달랐습니다. 잘못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교회에 대해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소망한 천국은 로마로부터 해방된 평화로운 이스라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바라본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로마로부터 구원해 낼 정치적 지도자였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 상태였기 때문에
진리와 예수님에 대한 제자들의 잘못된 지식은 온 인류의 구세주인 예수님을 이스라엘의 인간적 왕으로 끌어 내렸습니다. 그리고 천국 시민의 영적인 축복을 유한한 인간의 물질적 부요와 권세로 대치하려 하는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잘못된 지식은 자신의 생명이신 예수님을 모든 사람에게 천국을 보장하는 예수님을 그저 모든 육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사로 전락시켜 버리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잘못된 지식은 진실을 바라볼 수 없습니다. 타인의 고통과 슬픔을 알 수도 느낄 수도 없습니다. 단지 모든 일과 상황을 자신이라는 잘못된 기준에 맞춰 생각하고 판단하며 결정해 버리고 맙니다. 나의 신앙의 모습이 혹시 그런 모습은 아닌지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천국에서 누가 제일 큽니까? 물어본 때는 언제라고 했습니까? 예수께서 장차 자신에게 닥쳐올 고난과 죽음에 관하여 말씀하신 직후였습니다. 바로 제자들은 자기들에 관한 문제에만 집착한 나머지 예수님께서 당할 고난과 고통에는 무관심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욕심은 타인을 바라보는 눈을 막아 버립니다. 자신만을 사랑하는 이기주의는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돌아볼 여유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앞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해 목숨도 아끼지 아니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예수의 고통과 무관한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예수를 믿는 것 나의 이익을 위해서 믿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예수님께 질문을 하는 제자들을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베드로는 후에 예수님을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순교한 위대한 사도였습니다. 사도 요한은 주님의 신임을 받는 제자로서 밧모 섬으로 귀양 갔다가 하나님의 특별한 계시를 받은 순결한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형제 야고보는 열 두 사도 중 가장 먼저 순교의 제물이 된 열정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위대하고 훌륭하며 고결한 성품을 지닌 그들이 오늘 본문에서 보여 주는 모습은 어떠합니까? 사랑과 희생, 봉사의 아름다운 모습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분쟁과 분열, 다툼의 모습만이 보일 뿐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줍니까? 아무리 훌륭한 신앙과 재능, 그리고 인품을 소유한 자와 그들이 모인 집단이라 할지라도 이웃을 위한 희생과 사랑의 실천이 없이 자신들의 문제에만 집착한다면 그곳은 사랑과 기쁨, 화평 대신에 시기와 질투, 다툼과 분쟁만이 존재하게 된다는 것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예수님의 제자들의 모습을 보면서 예수님은 교훈 하십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은 어린아이와 같은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린아이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어린아이는 부모를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린아이의 이와 같은 전적인 신뢰를 요구하십니다. 믿음은 부분적인 신뢰가 아닙니다. 전적인 희생이고 봉사이며, 헌신입니다.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소유할 때 천국에 합당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 효정이 윤겸이(전적으로 신뢰한다)
어린아이들의 또 다른 특징은 순진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가식이나 꾸밈이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모습 역시 순수해야 합니다. 외식적인 기도, 위선적인 삶, 형식적인 사랑은 하나님께 통하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의 순수함을 원하시며, 진실한 마음을 바라십니다. 여러분 천국을 소유할 수 있는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굳센 믿음과 반석 위에서는 확실한 신앙입니다. 하지만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그러한 개념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뜻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의 특징은 무엇일까요?
1.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성장하는 믿음입니다.(아이가 태어나 성장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에게는 쉬지 않고 자라나는 역동적인 생명력이 있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끊임없이 움직이며 활동하고 자라납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바로 이렇듯 성장하는 믿음입니다. 과거의 믿음만을 내세우고 자랑하는 앉은뱅이 신앙이 아닌 지금도 생생하게 성장하고 자라나는 살아 있는 믿음만이 우리에게 요구되고 필요하며, 이러한 자들에게 천국이 약속된다는 것입니다.
2.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부모님의 형상을 닮아 가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아니 어린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부모님의 형상을 간직하고 태어납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음으로 새롭게 태어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는 언제나 하나님의 형상이 드러나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우리의 영적인 부모이기 때문에 어린아이가 부모님의 형상을 닮아 성장하는 것처럼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닮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마음속에 새기고 자라나야 하는 것입니다.
3.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겸손한 믿음을 뜻합니다. 어린아이는 약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도리어 그들에게는 커다란 장점으로 작용합니다. 약한 그들은 자연적으로 누구를 의지합니까? 부모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를 소유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겸손입니다.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믿음 나는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 나좀 도와주십시오. 자신의 강함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약함을 고백하고 주님을 신뢰하는 믿음 우리 예수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바로 이런 믿음이라는 것입니다.
4.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순전한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교활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언제나 꾸밈이 없고 솔직합니다. 어린아이들은 가장하지도 않으며, 가식적인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께 지녀야 할 태도는 이러한 순전함이어야 합니다. 그분께는 우리의 교활한 생각이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아무 것도 숨기거나 감출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있는 모습 그대로를 그분께 보여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나약함을 가장하거나 꾸밈없이 솔직하게 드러내어야 합니다. 주님은 이러한 믿음을 원하시며 이러한 자에게 더 큰 위로로 함께 해주시는 것입니다.
5.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사랑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결코 남에게 원한을 품지 않습니다. 그들은 화를 내기는 하지만 악의를 품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도리어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있으며, 미움보다는 사랑을 드러내기에 힘씁니다. 믿음은 사랑의 기초이며 사랑은 믿음의 완성입니다. 온전한 믿음은 온전한 사랑으로 증거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허울 좋은 믿음의 모양이 아니라 실제적인 믿음의 내용인 사랑의 실천입니다.
6.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은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부모의 말에 복종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지적하는 말에 쉽게 응답하고 개선합니다. 순종은 성도로 하여금 무한한 상급의 주인이 되게 하는 열쇠입니다. 때문에 순종은 축복의 시작이며 완성입니다. \'왜\'라고 물어 보지 않는 무조건적인 순종, 전적인 믿음을 바탕으로 한 완전한 순종 이러한 순종은 형식적인 제사를 능가하는 성도의 의무이자 축복인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도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요구하심으로 우리가 이러한 순종과 그로 말미암는 축복의 주인공이 되기를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소유함으로 천국이 여러분의 것이 되는 귀한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본문 5절부터 7절까지는 다른 사람을 실망하게 하고 실족하게 하는 사람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사회에 대한 신앙인의 책임은 슬퍼하는 자에게 위로를 주고 빛을 그리워하는 자들에게 빛을 비추이며, 갈 길을 알지 못하고 방황하는 자들에게 참 길을 제시해 줌으로 그들을 생명으로 인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명을 다하기는커녕 도리어 그러한 길을 역행하여 타인을 실족케 하고 구원의 길까지도 막아버리는 신앙인들이 있습니다. 본문은 그러한 자들에게 임할 \'화\'에 대한 주님의 엄중한 선언입니다.
1. \'실족케 하다\'라는 말의 의미 \'실족케 하다\'라는 의미는 헬라어로 \'넘어지다\'\'오해하다\', 그리고 \'범죄케 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예수 못 믿게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그 사람 보면 예수 믿을 맘이 사라져) 여러분 우리의 일상생활은 물론 말과 행동 몸가짐까지라도 조심하는 경건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아 저사람 예수 믿는 사람이야. 저 사람이 믿는 예수 나도 믿고 싶어 오늘 이곳에 모인 우리 모두가 이런 칭찬을 듣는 귀한 축복을 다 받으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렇지 못할 경우 실족케 하는 자의 결과가 6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같이 읽어 본다) 6 누구든지 나를 믿는 이 소자 중 하나를 실족케 하면 차라리 연자 맷돌을 그 목에 달리우고 깊은 바다에 빠뜨리우는 것이 나으니라.
남을 실족케 하는 자에게는 반드시 화가 있다는 것을 분명히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일생 동안 여러 종류의 결심과 결단을 하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심과 결단들 중 대부분이 인간이 나약함으로 말미암아 중간에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우리 속담에 작심삼일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코 중도에서 포기하거나 흐지부지되어서는 안 될 결심이 있습니다.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우리의 생명과 관계되는 천국과 지옥이 결정되는 신앙의 결단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이러한 결단에 대한 내용을 우리에게 말해줍니다.
오늘 본문에 보면 죄에 대한 책임은 스스로 감당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8 만일 네 손이나 네 발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찍어 내버리라 불구자나 절뚝발이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손과 두 발을 가지고 영원한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9 만일 네 눈이 너를 범죄케 하거든 빼어 내버리라 한 눈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을 가지고 지옥 불에 던지우는 것보다 나으니라
오늘 본문은 범죄의 주체가 타인이 아닌 자신임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범죄의 주체는 항상 나 자신입니다. 그것은 타인이 나의 범죄를 대신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록 내가 타인의 유혹이나 미혹에 의해 죄를 범했다 할지라도 실제적으로 죄를 범한 실체는 내 자신이므로 범죄의 책임은 내 스스로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죄에는 핑계가 없습니다. 아담과 하와의 변명이 하나님께 통하지 않았던 것처럼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결코 남에게 핑계 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분명히 깨닫고 하나님 앞에 책임적인 존재로 우리가 행한 대로 갚으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신앙생활 하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는 우리와 가장 가까운 경로를 통하여 다가옵니다. 본문에 표현된 손이나 발, 그리고 눈은 우리의 신체 중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부분 중의 하나입니다. 그런데 죄는 바로 이처럼 우리와 가장 가깝고 밀접한 경로를 통해 들어온다는 사실을 본문은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즉 죄는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될 가장 중요한 것들, 또는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것들을 통해 들어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삶의 일부분이라 할 수 있는 직업이 죄악의 통로가 될 수 있습니다. 제2의 본성이라고 불리우는 취미도 우리를 죄악으로 이끄는 유혹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는 가족이나, 스승 그리고 친구도 죄악의 도구로 쓰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아끼는가를 생각하기 이전에 내가 가장 가까이하고 사랑하는 그것들이 과연 나와 하나님과의 관계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가를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적은 이익 때문에 더 큰 축복을 저버리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합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익 때문에 더 큰 축복을 놓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손과 발, 그리고 눈을 포기하고서라도 생명을 구하라는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교훈에 대한 가장 강력한 표현입니다. 손이나 발이 생명보다 귀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무리 내 가족과 친구, 그리고 직업과 취미가 중요하다 할지라도 우리의 영혼과는 바꿀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혼을 위해 그러한 것들을 과감하게 포기해야 할 때가 오면 지체 없이 잘라낼 수 있어야 합니다. 부분에 집착하다가 전부를 놓치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말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유한한 세상 안개 같은 화살같이 빨리 가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어도 영원한 세상에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것을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의 결단에는 고통이 있습니다. 결단은 고통을 수반합니다. 그것은 때로 참기 힘든 고통과 뼈를 깎는 아픔을 수반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끊어야 할 죄악의 통로를 끊는 것은 엄청난 고통을 수반합니다. 친구를 끊는 것은 모든 사람들로부터의 외면과 그로 인한 고독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취미를 끊는 것은 내 생애의 모든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 같은 아픔을 수반합니다. 가족관계 혈연관계를 끊는 것은 자신의 근원, 또는 또 다른 자신의 분신과 단절하는 비통함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과 대적하는 위치에 있는 경우에는 가차 없이 끊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모든 것보다 하나님의 말씀이 더욱 중요하고 영생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여러분 유한한 인생 안개 같은 화살같이 빨리 가는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살았어도 영원한 세상에서 지옥에 떨어진다면 그 사람은 가장 불행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결심은 즉시 행할 때 비로소 열매를 거둘 수 있습니다. 주저하거나 머뭇거릴 때 우리의 결심은 약해지고 흔들리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겸손을 요구하십니다. 순종을 요구하십니다. 나에게 이런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있는지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천국은 어린아이 같은 믿음을 소유한 자에게 주어진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곳에 참여한 우리 모두가 어린아이 같은 믿음으로 천국이 여러분의 것이 되는 귀한 축복을 받을 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결코 멸망의 백성 지옥의 백성이 되지 않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