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의 행진 젇도의 행진
믿음의 행진, 전도의 행진(2)
왕하6:24-7:7
Merrry Merry Christmas, 즐거운 성탄절입니다. 첫번 크리스마스 때 동방에서 온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물었습니다.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오늘 우리들도 한번 물어봅시다. 우리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십니까? 첫째로, 왕으로 나신 이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예언의 말씀 속에 계십니다. 본문 22절에 “이 모든 일의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고 했습니다. 인류가 범죄한 이래 하나님께서는 즉시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여자의 후손이 죄 가운데서 너희를 구원해 내리라”(창 3:15). 그것은 사랑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나온 사랑의 언약, 사랑은 약속하려 하고 약속한 것은 천지가 없어져도 이루어지고야 마는 것, 이것이 우리가 성경에서 배우는 하나님의 사랑의 성질입니다. 언약에 불변하시는 사랑, 히브리 말로 헤세드, 인자와 긍휼에 가득한 사랑, 헬라 말로 엘레오스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인류를 정말 사랑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가 범죄 아래 있으면서도 한가닥 구원의 소망, 사랑의 빛 속에 살 수 있었고 또 지금도 고통 속에 살고 있는 인류가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는지 모릅니다. 창 3:15에서 원시복음을 선포하신 이후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를 통하여 구약에 무려 456번이나 메시야 예언을 반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그중에 대표적 말씀이 성탄절 예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지요.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여자의 후손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이 세상에 오실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사람들은 갸우뚱합니다. “정말 예수님이 처녀의 몸을 통하여 오셨는가? 그것은 과연 가능한 일인가?” 그러나 그것은 믿음없는 사람들의 넉두리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동정녀의 몸을 통하여 오신 일이야말로 너무도 자연스럽게 받아드려집니다.
천지를 무에서 창조하신 것처럼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시는 특별 창조사역이 처음부터 끝까지 초자연적으로 진행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지요. 그래서 믿는 사람들은 동정녀 탄생을 논증하거나 해명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기뻐하심을 입은 복받은 사람들은 마리아처럼 오히려 하나님께 경배하기를 즐거워하고 감사하는 자세를 취합니다. 성경에 동정녀, 처녀로 번역된 원문 히브리어 alma가 처녀라든지, 헬라어 Parthenos가 순수한 처녀를 의미한다든지, 또는 교리상 예수님이 부정모혈로 태어나지 않아야 원죄에 오염되지 않는 무죄한 분으로 인류의 구주가 되시기에 합당하다는 이론은 구차한 설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완벽하게 틀림없이 성취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의 택하신 백성들에게 성탄절의 별이 나타나 아기 예수께로 인도합니다. 당신의 사랑하는 종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는 영광, 땅에는 평화”란 주제의 성탄절 칸타타를 듣게 하십니다. 첫번 크리스마스 때 나타난 초자연적인 일들이 오늘도 교회 안에, 믿는 자의 가슴, 가슴 속에 성령으로 충만히, 그렇습니다. 은혜 위에 은혜가 충만, 충만하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인류의 범죄 이래 즉각 나타났던 하나님의 복음이 이 역사 안에 구체적으로 개입했던 성탄절 예언이 이루어졌다면 그 완전한 성취를 위하여 예수께서 다시 오신다는 예언은 어떻게 될까요? 성경은 예수 재림 예언을 1,518번이나 했습니다. 예수님은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내가 다시 오리라, I shall come back.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도 모르고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고 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어떻게 아들이 다 알 수 있습니까? 아버지께는 아들이 모르는 일이 많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좀 모자라는 친구들은 예수님이 언제쯤 올 것이라고 점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안 가르쳐 주신 것을 나발 부는 것, 하나님께서 숨겨 놓으신 것을 제 마음대로 펼쳐 버리는 것이 곧 이단이요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 것입니다. 아기 예수의 강림이 역사요 사실이요 우리의 믿음이라면 예수 재강림을 못믿을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언 횟수로 말하면 3배 이상 진리입니다. 우리 왕은 성경의 예언대로 때가 차매 우리에게 오셨고 성경의 예언대로 때가 차매 다시 우리에게 오실 것입니다. 왕의 영적 임재의 장소는 말씀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신 분(요 1:14)이 곧 우리 왕이십니다. 천지는 없어져도 주의 말씀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영원히 있습니다.
둘째로, 왕으로 나신 이는 베들레헴 한적한 말구유에 계십니다. 눅 2장에 보면 들에서 양떼를 지키는 목자들에게 천사가 나타나 교시하였습니다.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 되리라”(눅 2:10-12). 왕으로 나신 이는 먼저 베들레헴에 계셨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그 다음에 예수님은 말구유에 누우셨습니다. 말구유란 말의 먹이를 넣어두는 나무로 만든 통입니다. 그 통속에 누워 계셨다면 예수님은 분명히“먹이”로 오셨음을 암시해 줍니다. 죄로 인하여 어두워지고 천해져서 짐승처럼 되어 버린 우리들에게 자신을 생명의 떡으로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주님은 자기 몸을 우리의 ■먹이■로 내주시며 말씀하셨지요. “나는 생명의 떡이라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라 누구든지 나를 먹고 마시면 영생을 얻으리라”(요 6:55).
예수님께서 왕궁에 계시거나 대학에 계시거나 권부에 계신다면 우리같이 가난하고 죄많고 무식하고 연약한 사람들이 감히 주님 앞에 나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주님은 베들레헴이란 작은 동네, 여관도 아니고 짐승들이 먹고 자는 곳에 계시니 우리는 쉽게 아무 부담없이 주님을 뵈올 수 있습니다. 동방박사들도, 목자들도 아기께 경배하기 위하여 구유간에 갔습니다. 그곳은 냄새나는 곳입니다. 그곳은 온갖 오물이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가운데 하나님이 계셨던 것입니다. 아기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은 정말 죄인과 세리들의 친구였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형제라, 친구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는 유일한 하늘의 임금이요 영생하시는 구주십니다. 우리 주님은 영원히 우리 가운데 계신 겸손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지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시다 함이라” 할렐루야! 진실로 교회는 세상 한복판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상교회는 냄새가 납니다. 그래도 왕께서는 교회 가운데 계십니다. 왕의 현실적 임재의 장소가 말구유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왕으로 나신 이는 십자가 고난 가운데 계십니다. 왜 예수님이 아기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까? 아기로 오신 것은 우리를 위하여 대속의 제물이 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력한 아기로 오신 것, 인생으로 오신 그 자체가 그가 우리 죄를 대신하여 고난받으실 것을 강력하게 웅변하고 있는 것입니다. 원시복음에도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고 말씀함으로 마귀를 멸하려면 먼저 상처를 받게 되리라고 예언했습니다. 이사야도, 천사도 한 아이가 날 것을 말씀한 것은 곧 그가 한 온전한 제물로 하나님께 바쳐질 것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께서 엠마오 도상의 두 제자에게 성경을 설명해 주셨지요.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눅 24:26).
예수님은 이 땅위에서 자기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버리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그것은 또한 우리 인생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평생 주를 위하여, 교회와 선한 사업을 위하여 봉사하고 희생하고 난 다음 남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때가 지나가면 우리는 모두 쓸쓸히 역사의 무대 위에서 사라져가야 합니다. 고르비처럼, 양로원으로 이사가는 부모님들처럼, 늙고 병들고 이용가치가 사라진 인생은 어디로 가는 것입니까? 예수님은 인생이 그렇게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를 보여주십니다. “이 땅위에서 주의 나라를 위하여 고난을 받은 대로 하늘나라에서 상급을 주신다. 노병은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 뉘엿뉘엿 지는 해와 더불어 인생의 황혼을 사시는 성도님들이시여, 인생을 슬퍼하지 마십시오. 시편기자가 말씀합니다. “내가 항상 주와 함께 하니 주께서 내 오른손을 붙드셨나이다 주의 교훈으로 나를 인도하시고 후에는 영광으로 나를 영접하시리니 하늘에서는 주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밖에 나의 사모할 자 없나이다”(시 73:23-25). 왕의 육체적 임재의 장소는 고난받는 세상입니다.
우리 왕은 어디 계십니까? 예언의 말씀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 왕은 약속대로, 예언대로 오셨고 또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왕은 베들레헴 떡집 말구유 안에 계십니다. 그분에게는 벽이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가운데 영원히 임재해 계시면서 영원한 사랑의 친교 속으로 우리를 불러 주십니다. 지상 교회가 비록 냄새가 나도 우리 왕은 그 가운데 계십니다. 문제가 있고 아픔이 있어도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겸손이요 믿음입니다. 우리 왕은 십자가 고난 속에 계셨으며 오늘도 복음 증거의 고난, 당신의 몸인 교회의 고난 가운데 계십니다. 우리가 그분을 더욱 찬양하고 감사하며 감격하는 것은 그분이 우리 대신 고난 받으시기 위하여 아기의 몸, 우리와 같은 나약한 몸을 입으시고 사람이 되사 속죄의 죽음을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동방박사는 몰약을 드려 그 신앙을 표현했고 마리아는 옥합을 깨뜨려 장사지낼 그 몸을 기념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성탄의 찬송은 탄생하신 기쁨만이 아니라 완전한 기쁨을 성취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을 노래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크리스마스의 기쁨은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한 영광으로 인하여 더욱 숭고하고 장엄한 성가곡으로 아롱지는 것입니다. 2003년 성탄절에는 더욱 풍성한 성탄의 기쁨과 영광이 여러분의 영혼 속에 넘치기를 기원합니다. 한 걸음 나아가 말씀과 함께, 교회와 함께, 세상에서 기꺼이 기쁨으로 고난을 받으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