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동체의 헌신 삼상18:6-16 다윗은 이스라엘 왕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많은 왕 가운데 그를 능가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는 누구보다도 하나님을 사랑했습니다. 그는 믿음 하나로 온 나라 안팎을 평정한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왕으로 재임하는 기간 동안 나라는 태평성대를 누렸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이스라엘 사람들은 다윗 시대의 영화를 그리워합니다. 이스라엘의 국기를 보면 한 가운데에 삼각형을 역으로 포개어 놓은 별 모양을 그려놓고 있는데 이것을 <다윗 별>이라고 부릅니다. 국기에까지 다윗의 별을 그려 넣고 그 시절의 영화가 다시 한번 돌아오기를 지금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다윗만큼이나 빼어났던 사람이 「사울」왕입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으로 선택되어 나라를 다스렸는데, 그가 왕으로 선택받을 때의 그의 인품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삼상9:2-“기스가 아들이 있으니 그 이름은 사울이요 준수한 소년이라. 이스라엘 자손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자가 없고,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는 더하더라” 얼마나 잘 생겼는지 이스라엘 전국을 통틀어서 사울 보다 잘난 청년이 없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키는 다른 사람보다 30cm 정도는 더 컸고, 준수하기는 전국에서 제일이어서 왕이 되기에 충분했던 사람입니다. 이런 기본적인 조건으로 보면 오히려 사울이 다윗보다 훨씬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두 사람이 하나가 되어 서로 협력해서 나라를 다스렸더라면 이스라엘은 얼마나 더 좋은 나라가 되었을까 하는 생각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소위 <내각제>를 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대통령을 하고, 다윗이 국무총리를 하던지, 아니면 바꾸어 하든지, 서로 협력하는 사이가 되었더라면 아마 모르긴 해도 지금쯤 이스라엘은 미국을 능가하는 나라가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를 못했습니다. 다윗이 골리앗을 때려눕히고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하고 돌아올 때 연도에 환영인파가 몰려나와 노래를 부릅니다. 그 노랫말이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오, 다윗이 죽인 자는 만만이로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에 사울의 마음에 강한 질투심이 발동을 한 것입니다. 그날부터 사울은 다윗을 미워하면서 그를 죽여 없이할 궁리를 하게 되었고, 그 일에 온 정력을 쏟아 부은 것이 결국은 비극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울」은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기름부음을 받는 것은 남다른 특권을 누리라는 것이 아니고, 자신의 몸을 기름처럼 불태워 하나님께 드리라는 뜻입니다. 전적인 헌신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기름부음을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더 헌신을 해야만 합니다. 일생을 하나님의 뜻과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사울」이 처음 왕이 되었을 때는 하나님께 전적으로 헌신을 다짐한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이었기 때문에 좋은 왕이 되겠다고 다짐도 하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다짐과 노력은 몇 가지 사건 앞에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는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노획한 전리품을 개인적인 목적으로 챙긴 사건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불신한 문제가 되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다윗에 대한 질투심이었습니다.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고 민심이 그쪽으로 쏠리는 것을 느끼는 순간 그만 억제할 수 없는 강한 질투심을 유발하면서 다윗을 죽여버리려는 살의를 품으면서 몰락의 나락으로 떨어지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질투는 파멸의 원인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국 예일대학의 심리학 교수인 「살로비」 박사가 미국 안에서 각종 범죄의 원인을 연구해 보았더니 질투심이 차지하는 비율이 무려 20%나 되었다고 합니다. 질투는 무서운 범죄의 요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사울」과 「다윗」의 관계를 보면서 배워야 할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공동체의 헌신>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흔히 <헌신>이라고 하면 개인의 헌신만을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래서 ‘나만 잘하면 그만이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자신의 헌신만 생각하다가 다른 사람의 헌신을 가로막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른 사람의 헌신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말은 다른 사람의 헌신을 돕는 입장에 서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나의 헌신과 다른 사람의 헌신이 하나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개인의 헌신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공동체가 함께 어우러져서 함께 조화로운 헌신을 하는 것은 더 중요합니다. 성경을 통해서 생각해 보겠습니다. 가령 「사울」이 「다윗」의 헌신을 질투하지 않고, 그의 헌신을 도와주고 격려했더라면 얼마나 더 큰 결과가 나타났겠습니까?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나간 헌신이었습니다. 다윗이 그렇게 헌신했기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도와주셔서 승리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의 입장에서 보면 다윗의 헌신은 대단히 고마운 헌신입니다. 그야말로 업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를 더 좋아하고 사랑했어야 합니다. 그랬더라면 다윗은 더욱 사울을 위해 헌신을 아끼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다윗에 대하여 그렇게 하지를 못했습니다. 그의 헌신에 대하여 질투를 했습니다. 다윗의 인기가 올라가고, 민심이 그에게 쏠리는 것을 고운 눈으로 보아줄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사울의 이러한 질투는 자신은 살인 미수자가 되게 했고, 아주 치졸한 왕으로 전락되고 만 것입니다. 그로 인한 손해는 두 사람의 손해로 그친 것이 아니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손해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은 하나님께도 큰 손실을 드린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공동체 전체의 조화로운 헌신이 형성되지 않으면 개인은 물론이고, 공동체 전체가 손해를 입는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리 다윗의 헌신이 크고 귀했더라도,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의 헌신이 무너져 버리니까 사울은 사울대로 하나님의 버림을 받고, 다윗은 다윗대로 고난을 받아야 했으며, 나라는 나라대로 쇠약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개인의 헌신보다 공동체의 헌신이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내가 하나님께 헌신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우리 교회 공동체 전체가 하나님 앞에 헌신하도록, 그 일을 위해서 협력하고 노력하는 일은 더욱 중요합니다. 엄격히 말하면 나 혼자만의 헌신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사랑이 혼자 하는 것이 아닌 것처럼 헌신도 혼자 하는 헌신은 의미가 축소되는 것입니다. 의미만 축소되는 것이 아니라, 헌신의 결과도 축소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공동체의 헌신은 중요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공동체의 헌신은 질투 앞에서 무기력하다는 사실입니다. 질투라는 것은 엄격히 말하면 자기와 관계없는 사람에게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자기와 가까운 사람, 그리고 친하고 비슷한 사람을 향하여 폭발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슈퍼를 운영하는 사람이 있다고 생각합시다. 그 사람이 과수원을 경영하는 사람을 대하여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사과가 많이 달려서 그해에 큰돈을 벌었다고 해서 그게 질투할 이유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옷가게에 옷이 많이 팔린다고 질투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같은 분야에서 경쟁관계에 있게 되면 질투는 불같이 뜨겁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특별히 이 질투의 불길은 아주 가까운 관계에서 더 사나워 집니다. 그래서 부부관계나 친구관계에서 이 질투의 불꽃이 붙으면 반드시 큰 화재로 번지게 되고, 많은 사람이 화상을 입는 것입니다. 교회 공동체도 예외가 아닙니다. 우리는 서로 하나님의 사랑으로 깊이 맺어져 있습니다. 거기다가 헌신하는 분야가 거의 엇비슷합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 질투의 불길이 번질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많이 있습니다. 게으름이나 인색함 같은 것은 기껏해야 자기 자신의 헌신만을 무너뜨릴 뿐입니다. 그러나 질투는 공동체 전체의 헌신을 부셔 버립니다. 이스라엘 공동체의 헌신이 무너진 것은 「사울」 한 사람의 마음에서 시작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공동체가 온전한 헌신을 이루려면 내 속에서 일어나는 질투를 이겨야 합니다. 그러면 「사울」을 질투의 함정에 빠뜨린 원인이 무엇입니까? 성경을 보겠습니다. 6,7-“무리가 돌아올 때 곧 다윗이 블레셋 사람을 죽이고 돌아올 때에 여인들이 이스라엘 모든 성에서 나와서 노래하며 춤추며 소고와 경쇠를 가지고 왕 사울을 환영하는데, 여인들이 뛰놀며 창화하여 가로되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 한지라.” 여기 「사울」을 보십시오. 「다윗」이 「골리앗」과 싸워서 그를 죽이고 그의 목을 베어 가지고 돌아 왔을 때에는 그를 질투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어린 다윗의 용기를 대견스러워 했습니다. 그래서 「다윗」을 그 자리에서 군대 장관으로 임명을 했습니다. 질투하기는커녕 이런 청년을 발견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승리하고 돌아오는 길에서 터지고 말았습니다. 개선하는 군대를 환영하기 위하여 길거리에 나온 여인들이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릅니다. 그런데 그 노래 말이 심상치 않았습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하는 것입니다. 그 노래를 듣는 순간 사울의 마음에 강한 질투의 영이 발동한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그 때 사울의 마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8,9-“사울이 이 말에 불쾌하여 심히 노하여 가로되 다윗에게는 만만을 돌리고 내게는 천천만 돌리니 그의 더 얻을 것이 나라 밖에 무엇이냐 하고 그 날 후로 사울이 다윗을 주목하였더라.” 자신과 다윗을 비교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사울의 마음에 강한 질투심이 발동한 것입니다. 자신보다 다윗을 더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이 좋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질투의 영에 씌워버린 사울은 다윗을 죽여 버리기 위해서 온 정열을 쏟게 됩니다. 그래서 결국은 비극을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만약 이때 사울이 여인들이 하는 말을 들었을 때 마음속에 질투심을 일으키지 말고, 껄껄 웃었다고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윗을 칭찬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 자신도 다윗을 칭찬해 주었더라면 아마 상황은 완전히 달라졌을 것입니다. 백성들은 그런 사울을 더 존경하고 따르게 되었을 것이고, 하나님도 그렇게 하는 사울을 더 사랑하셨을 것입니다. 축복과 칭찬이 질투와 미움을 이기는 것이고, 결국은 자신을 높이고 잘되는 것이고, 나아가서 공동체 전체의 헌신을 가능케 하는 비결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은 공동체가 힘있는 공동체가 되고, 이런 공동체가 결속력이 강해서 발전하고 부흥되는 것입니다. 새해에도 우리 교회는 여러 기관에서 헌신을 다짐하는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그 헌신은 개인적인 헌신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헌신임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자신의 헌신보다도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가진 헌신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회원 한 분, 한 분의 중요성을 생각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깊은 관심을 가지고 서로 칭찬하고, 축복하고, 기도하면서 헌신을 다짐하시기 바랍니다. 절대로 질투는 금물입니다. 질투는 자신의 헌신도 망가트릴 뿐 아니라 공동체 전체의 헌신을 망가트리는 요인이기 때문입니다.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도 나쁘게 만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 문제에 대하여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빌2:3-5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게 헌신하는 성도들이 될 때 하나님의 축복과 은총이 충만하게 임할 것입니다. 공동체의 헌신에 성공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