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암소들의 헌신! 삼상6:7-16 불과 30년 전만해도 소는 농촌사람들에게는 가족 같은 동물이었습니다. 쟁기로 논밭을 갈거나 짐을 실어 나르고, 사람도 태우고 다니는 자가용이었습니다. 이사를 갈때에 소달구지에다가 짐을 실고 이동했습니다. 그런데 죽도록 일만하고 말라 비틀어진 여물만 먹으면서도 평생 순종하던 소가 늙으면 도살장으로 끌고 가서 가죽과 뼈, 내장 모두 고기로 제공하고 사라집니다. 이처럼 동물 가운데 소는 사람에게 가장 헌신적인 동물입니다. 그래서 요한계시록 4장 7절에도 네 영물의 영상 중에 하나로 송아지가 소개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순종 잘하는 소를 원하셨기에 큰 제사에는 반드시 소를 잡아 드렸습니다. 오늘 우리는 벧세메스를 향해 달려가는 암소 두 마리를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법궤는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아주 소중한 것입니다. 법궤는 이스라엘의 광야 생활에 있어서 중심 목표였습니다. 법궤가 가는 방향에 따라 그들의 방향을 결정하고 순종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40년 위험한 광야 길을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가나안 땅에 정착하고 배부르자 이스라엘은 법궤를 실로에 방치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법궤도 블레셋에게 빼앗기고 사울왕도 전쟁에서 패배하고 말았고 법궤를 책임지던 엘리의 두 아들, 제사장들이 함께 죽고 말았습니다. 이 소식을 듣은 영적 지도자 엘리도 의자에서 넘어져 목이 부러져 죽고 말았습니다. 이스라엘 민족 전체에 먹구름이 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삼상 4:22절을 보면 이 사건을 이가봇이라고 정리하고 있는데 “이가봇!” 하나님의 법궤를 빼앗겼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이 떠났다는 말입니다. 사랑하는 태평양의 성도 여러분! 누구라도 법궤를 빼앗기거나 방치하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납니다. 누구라도 말씀을 빼앗기거나 방치하면 하나님의 축복이 떠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이방인들처럼 대하면 큰일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를 가져와서 자기들이 섬기는 다곤 신상 앞에 두었습니다. 그들은 무지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법궤도 자기들이 섬기는 우상과 동일시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자기들이 섬기는 신상 다곤이 산산이 부서져 있는 것입니다. 결국 블레셋 사람들은 법궤와 자기들의 신상이 다른 능력이 있음을 알고 돌려 보냅니다. 그러나 가드에 도착한 법궤 때문에 가드 사람들의 온몸에 독종이 나서 모두 죽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궤를 가드에서 에그론이라는 한적한 곳으로 옮겼는데 이 소문을 들은 에그론 사람들은 법궤를 본처로 보내어 재난을 면하자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새 수레를 만들고 멍에를 한번도 메지 않았던 젖 나는 소 둘을 끌어와 수레에 법궤를 실고 벧세메스로 보내면서 그들끼리 한가지 원칙을 정했습니다. 그것은 소가 뒤를 돌아보지 않고 곧장 가면, 틀림없이 하나님께서 재앙을 내리신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이 재앙이 우연히 만난 것으로 생각하자고 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암소 두 마리가 법궤를 메고 벧세메스를 향하여 떠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본래 법궤는 소 달구지에 실어서 옮기면 안됩니다. 반드시 이스라엘의 제사장들이 양 어깨에 메고 옮겨야만 하는 것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하나님의 법을 몰랐기 때문에 법궤를 소 수레에 실은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구원받음에 대해 감격할줄 아는 성도는 마땅히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뻐하는 성도는 감사하며 직분을 감당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지 않고 자기 편리한대로 적당히 교회생활 하는 것은 인본주의입니다. 자기 편한대로 자기 방식대로 하나님을 믿으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대로 하는 것입니다. 그 문제에 대한 것은 다음으로 미루고 오늘은 암소에 대한 것을 생각해 봅시다. 밭이나 갈던 소가 하나님의 법궤를 옮길 수 있는 것은 엄청 큰 영광입니다. 이 두 마리 암소는 사람이 포기한 법궤를 대신 옮기는 사역에 쓰임 받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 두 마리 암소는 특별한 소입니다. 두 마리 모두 수레를 한번도 끌어보지 못했고 두 마리가 다 새끼가 있는 어미소입니다. 그런데 이 소들은 법궤를 수레에 실고 가야하기 때문에 새끼와 함께 갈 수 없습니다. 또한 갑자기 어미를 잃은 송아지들이 목메어 울어도 젖을 먹여줄 수 없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배고파 어미를 부르는 송아지, 새끼들의 울음을 듣지만 법궤를 실고 가야만하는 어미 소들! 그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그렇지만 두 암소는 눈물을 흘리면서 벳세메스를 향하여 갔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는 처음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물과 배를 과감하게 버렸습니다. 부모님 곁도 떠나서 오직 3년간 주님만을 따라 다녔습니다. 그들의 생명과 재산과 꿈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선것입니다. 베드로같이 예수님을 따르던 한 제자가 부친상을 당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부친을 장사하러 가겠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립니다. 그러자 주님은 “죽은 자들로 자기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가서 하나님의 나라를 전파하라고 하시면서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하치 아니하다”(눅 9:59~62절)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주님이 제자를 만드실 때 요청하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아야 한다.” “자기 부모자식을 주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주님에게 합당하지 아니하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생활 하면서 인정 사정에 지다 보면 결국 종착지가 어딘지 아세요? 주님과 결국 멀어지고 지옥길로 고속 주행하는 것이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정. 사정. 애정을, 다 버리고 오직 한 길, 주님만을 따라가야 합니다. 배고파 우는 새끼를 버려두고 벧세메스로 뒤돌아보지 않고 가는 암소와 같이 말입니다. 예화) 제가 어릴때 우리집에 있던 암소가 송아지를 한마리 낳았습니다. 외딴집에 살았기 때문에 그 송아지와 저는 아주 친한 친구였습니다. 제가 손만 내밀면 달려와서 손을 핥아 주던 친구였습니다. 송아지 등에 올라타고 장난을 쳐도 어미소는 멀뚱멀뚱 쳐다보며 되새김질만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송아지를 우시장에 데리고 가서 판다는 것입니다. 어미 소는 자기 새끼가 팔려갈 것을 미리 알았는지 전날 밤 잠을 안자고 새끼를 혀끝으로 핥아주고 머리로 새끼를 쓰다듬어 줍니다. 송아지가 팔려가는 날 아침! 암소는 여물도 먹지 않고 울었습니다. 아버지가 새끼목에 밧줄을 걸어 새끼를 우시장에 끌고 나갑니다. 그때부터 눈이 휘둥그레 하얗게 질린 어미소와 송아지는 눈물바다를 이룹니다. 어미를 안 떨어지려고 버티며 어미를 음메 하고 부르는 송아지.... 끌려가는 새끼를 보며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음메 하고 우는 암소... 한동안 팔려간 송아지 때문에 나도 울고 암소도 기나긴 밤마다 “음메~”하며 울었습니다. 말 못하는 짐승인들 어찌 새끼에 대한 정이 없겠어요? 젖은 점점 불어나고, 낯선집에서 엄마 잃은 새끼 송아지들이 울고 있을 것을 생각하면 오늘 벳세메스로 올라가는 어미 소들도 왜 안울었겠습니까? 까닭없이 붙들려 블레셋 사람들의 채찍에 맞아가며 오르막을 올라가는 두 마리의 암소! 울면서 울면서 벧세메스를 향하여 걸어가는 암소! 암소가 걸어간 이 벧세메스 길은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반란으로 도망갈 때 맨발로 울면서 올라가는 감람산 길입니다.(삼하 16:30절) 예수님께서 심한 통곡과 눈물을 흘리신 기드온 시내 저편 겟세마네 바로 그 길입니다. 어느 분은 자신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검고, 자식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붉고, 나라를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푸르다고 하였지만, 주님을 위해서 흘리는 눈물은 인간적인 욕심에 오염되지 않아 색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심한 고통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하나님께 돌렸듯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벧세메스 길로 가는 두 암소같이 뜨거운 많은 눈물이 있어야 합니다. 눈물 없이는 못가는 길이 직분자의 길이고 피 없이 못가는 길이 바로 헌신자의 길입니다. 그래서 영광의 면류관은 이 눈물길을 잘 통과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태평양의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암소들을 통하여 무엇을 깨달아야 합니까? 첫째로, 목표가 정확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두 암소는 울면서 벧세메스 길로 가는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바로 갔습니다. 정확한 목표가 있으면 좌우로 치우치지 않습니다. 천국이라는 목표를 굳게 잡고 있는 성도 여러분! “벧세메스”이 말은 ‘태양의 집’이라는 블레셋 사람들의 말입니다. 그러나 3000년전, 암소들이 태양의 집으로 올라갔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참 빛되시는 주님에게로 올라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께서 계신 천국을 향해 열심히 올라갑시다. 할렐루야! 둘째로 한 교회를 섬기는 성도는 생각이 일치해야 됩니다. 두 암소는 하나님의 법궤를 같이 실고 갈 때 생각을 일치해서 걸어갔습니다. 상여를 메고 좁은 다리를 건너가거나, 오르막을 올라갈 때 매우 힘이 듭니다. 어떤 사람이 자기 편한 길로 걸어가면 반드시 반대편 사람은 고통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암소들은 자기 앞에 놓인 불편한 길을 포기하지 않고 맨발로 걸어갔습니다. 직분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자기에게 불편하고 손해라고 피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키며 인내하며 감당해야 합니다. 또 말 못하는 암소들은 목적이 하나요, 보조가 하나요, 사명이 하나요, 생각이 같았습니다. 그러므로 암소들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정로로만 달려갈 수 있었습니다. 빌립보 교회는 사랑이 넘치는 좋은 교회인데 이 교회를 섬기는 유오디아 집사와 순두게가 유별난 사람이라 종종 생각이 달랐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주 안에서 같은 마음을 품으라고 권면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교회도 우리 모두 한 마음이 되도록 더 노력합시다. 할렐루야! 셋째, 좌우로 치우치지면 안됩니다. 좌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것은 견고하고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할려면 견고해야 하고 흔들려서는 안됩니다. 교회안에는 자유주의 신앙인이 있는가 하면, 보수주의 신앙인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유주의도 보수주의도 치우치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한 길, 하나님의 법궤! 말씀을 중심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여러분! 좌우로 치우치지 마십시오! 지식에 치우치면 바리새적인 형식주의 신자가 되기 쉽고 정에 치우치면 광신주의적인 신비주의자가 되기 쉽고 의지나 머리에 치우치면 사두개인적인 현실주의자가 되기 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 정. 의를 조화시킨 조화된 신앙을 소유해야 합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요? 암소들의 마음 한 가운데에 헤어진 새끼 송아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가 있었듯이 우리 중심에 하나님이 계시고 말씀 중심의 신앙을 가지면 조화로운 신앙생활이 됩니다. 마지막으로 희생의 제물로 생을 마감한 암소들처럼 되어야 합니다. 본문 14절“무리가 수레의 나무를 패고 그 소를 번제로 여호와께 드리고”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성스러운 법궤를 실고 벧세메스까지 올라온 두 암소에게 해방이 아니라 완전한 죽음이 선포되었습니다. 눈물로 헌신하며 걸어온 길, 배고파 우는 송아지를 뒤로하고 달려온 벧세메스에서 그들은 자기들이 끌고 온 수레를 부수어 태우는 불에 희생 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바라봅니까? 나무는 십자가의 상징이요, 번제물은 예수님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 태평양의 성도들도 벧세메스로 올라갔고 번제로 온전히 헌신된 두 암소와 같이 나의 전부를 나를 위하여 죽으신 주님께 온전히 희생의 제물로 드려 봅시다. 할렐루야! 3000년 전에는 암소 두 마리가 하나님의 일에 온전히 헌신했습니다. 이제 2002년 부흥회를 마치고 성령의 불이 붙은 하나님의 교회! 태평양교회에는 우리교회 제직 성도 모두가 헌신자가 되라고 명령을 받은 것입니다. 이제 우리 같이 갑시다. 주님이 면류관을 들고 계시는 저 천국을 향해 뒤돌아 보거나 좌충우돌 없이 꿋꿋이 인내하며 헌신하다가 스데반 집사님처럼 행복한 인생으로 인생을 마칩시다. 할렐루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