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대 헌신 삼상3:1-21 절대 헌신! 오늘날에 찾아보기 힘든 덕목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우리가 사는 사회는 이기주의는 있고 헌신이 없는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헌신이 없는 사람에게는 진정한 복은 찾아오지 않습니다. 드리는 것이 없고야 받는 것이 있을 수 없습니다. 무엇인가를 드리기 전에 취하려고 아둥바둥대어 보십시오. 그렇게 아둥바둥대면 그 아둥바둥대며 찾는 것은 얻을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이상의 복은 다가오지 않습니다. 헌신의 강도, 즉 버리는 강도가 강할수록 은혜의 크기도 더불어 커집니다. 그러므로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계급장 신앙이 아닌 절대 헌신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이제는 \"받는 가치관\"이 아니요, \"주는 가치관\"을 정립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나에게 붙여주시고 알게 하신 분을 위해 기도하십시오. 그분이 하나님께서 나의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보낸 분인지 어떻게 압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용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도해주는 그 사람을 통해서 내가 생각지 않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목사는 성도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성도들을 통해서 목사에게 복이 임합니다. 반대로 성도들은 목사 및 교회 리더들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리더를 통해서 공동체 구성원에게 복이 임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리더에게 \"기도해 달라!\"고만 하지 말고 리더를 위해서 기도를 주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주고자 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십니다. 누가복음 6장 3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곧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주리라!\" 식당에서도 더 좋은 것을 더 많이 주려는 사람에게 사람들이(복이) 몰리는 법입니다. 헌신의 역사가 있을 때 받는 역사도 있습니다. * 말씀이 희귀해진 원인 오늘 본문에서 사무엘의 자세는 \"헌신\"이라는 덕목이 사라져가는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큰 교훈을 주는 본문입니다. 사무엘이 부름받던 당시 이스라엘은 상당히 혼란한 나라였습니다. 왕은 없고 말씀의 권위가 서지 않았습니다. 틈만 나면 하나님을 배반하는 일에 몰두했습니다. 3장 1절 말씀을 보십시오.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와 상당히 유사한 것 같습니다. 오늘날 최대의 위기는 바로 말씀이 희귀한 위기입니다. 강단은 많아지고 있으며 세미나는 넘쳐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홍수 때에 먹을 물이 없는 것처럼 말씀은 여전히 희귀합니다. 나는 이 위기의 가장 큰 원인은 일차적으로 지도자의 잘못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이 희귀함으로 생겼던 위기에 있어서 가장 큰 책임은 엘리 제사장에 있다고 해도 무방합니다. 엘리의 최대 잘못은 무엇입니까. 사무엘상 1-3장을 보면 엘리가 아주 못된 제사장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습니다. 그러면 도대체 엘 리가 무엇을 잘못했습니까. 성경을 보면 그가 잘못된 아들을 두었고, 그 아들을 관리하는 방식이 틀렸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들이 제단에서 수종드는 여자들과 동침했다는 말을 듣고 엘리 제사장이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강하게 야단치지 않고 부드럽게 말한다. \"아들아 왜 그랬니? 소문이 좋지 않구나. 백성들이 보고 있으니까 죄를 짓지 않도록 조심해라.\" 반면에 다른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성전을 더렵혔다면 \"당장 능지처참하라!\"고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식으로 가족과 친인척 관리를 못하니 누가 그 말을 신뢰하며 듣겠습니까. 아무도 신뢰하지 않을 것입니다. 지도자는 매사에 공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친인척 관리에는 더 엄격해야 합니다. 공명정대함은 지도자의 필수조건입니다. 엘리는 자녀에게 더욱 엄격했어야 했습니다. 그 모범적 치리의 원리가 바로 하나님의 치리의 원리였습니다. 하나님의 치리의 가장 위대한 특징은 바로 공명정대함에 있습니다. 원래 사단만큼 하나님 보좌 가까이 있었던 존재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잘못을 더 엄격히 처리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민족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사랑받는 민족이라는 사실 때문에 잘못된 길에 들어섰을 때 어떤 민족보다 더 아픔을 겪었습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공평하신 하나님이십니까. 엘리에게는 그러한 공명정대함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지도력의 상실을 가져 왔고, 결국 나라가 혼란에 빠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말씀은 희귀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지도자의 잘못된 행동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희귀한 것 같은 느낌이 있지 않습니까. * 말씀을 듣기 위한 방법 그러나 그 와중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가 있었습니다. 아무리 사회가 어두워도 말씀을 듣는 자는 반드시 있는 법입니다. 그는 바로 사무엘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듣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기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그에게 그냥 하나님의 말씀이 들린 것입니다. 본문에서 사무엘은 4번이나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고 엘리 제사장 집안에 관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어떻게 사무엘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릴 수 있었습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본문을 보면 사무엘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던 한가지 위대한 원인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절대 헌신\"이었습니다. 그의 절대 헌신은 두가지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하나님께 절대 헌신\"이고, 또 하나는 \"윗 사람에게 절대 헌신\"입니다. 하나님께 헌신했다는 말은 수직관계의 헌신을 말하고 윗 사람에게 헌신했다는 것은 수평관계릐 헌신을 말한다. 이 수직관계의 헌신과 수평관계의 헌신을 동시에 나타낸 것이 십자가입니다. 1. 하나님께 절대 헌신 본문 2절과 3절을 보십시오. \"엘리의 눈이 점점 어두워가서 잘 보지 못하는 그때에 그가 자기 처소에 누웠고 하나님의 등불은 아직 꺼지지 아니하였으며 사무엘은 하나님의 궤 있는 여호와의 전 안에 누웠더니.\" 이 본문을 보면 하나의 대비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엘리 제사장은 자기 처소에 누웠고 사무엘은 하나님의 전에 누웠다는 장면입니다. 엘리의 안일한 모습과 사무엘의 헌신된 모습을 대비해 보십시오. 사무엘도 엘리 제사장처럼 자기 처소에서 편안하게 자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가지 처소에 가지 않고 하나님의 전 안에 누웠습니다. 이 장면에서 사무엘이 얼마나 기도하는 사람이었으며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적인 사람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런 헌신적인 사람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게 됩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자신은 헌신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데 엘리는 안일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으로 인해서 엘리 제사장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엘리 제사장은 먹고 잠만 자서 살만 쪘어!\"라고 말하고 않았습니다. 사무엘은 다른 사람의 신앙형태와 자기의 신앙형태를 단순히 비교해서 우월감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자기의 조그마한 의로 제사장이나 다른 신앙인을 멸시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하나님 앞에서의 헌신이 사람 앞에서의 자랑거리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엘리도 젊었을 적에는 사무엘처럼 헌신적인 모습을 보였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은 간과하고 자기가 현재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헌신적인 모습을 보인다고 윗 사람을 멸시한다면 이 세상에 멸시받지 않을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윗 사람과 자신을 현재의 시간에서 현재의 드러난 상태로 단순히 비교하여 우월의식을 가지지 마십시오. 자신의 헌신이 수십년 동안 절대 퇴색되지 않을 자신이 있는 사람은 현재의 지도자가 비헌신적인 모습을 보일 때 마음껏 비판해도 좋습니다. 그러나 틀림없이 현재 자신이 보여주고 있는 헌신의 깊이와 강도도 언젠가는 변할 것입니다. 자신이 헌신하는 모습에도 때에 따라 높아지고 낮아지는 영적 싸이클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현재 영적 싸이클이 높다고 해도 자꾸만 다른 사람과 비교하지 말고 더욱 겸손한 모습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자세히 보면 다른 사람을 비판하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자기의 유리한 점으로만 생각하고, 혹은 자기의 잘하는 점으로만 보고 단순비교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현재 자기의 기도가 뜨거우면 기도로 신앙 전체를 비교하려 듭니다. 현재 자기가 새벽기도를 하면 새벽기도를 가지고 신앙 전체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현재 자기가 전도를 잘하면 전도로 신앙전체를 비교하려 듭니다. 그리고 그런 태도를 가지고 때로는 지도자를 평가하려고 합니다. 이런 태도는 금물이며 하나님이 절대로 기뻐하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유리한 신앙 종목만 내세워 자기의 신앙 전체가 금메달감이라고 자랑하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의 신앙을 인정하는 것 같지만 속으로는 멸시합니다. 그 자신의 계급장 신앙은 올라가도 사람들은 그의 겸손하지 못한 모습을 보면서 그를 천박하게 생각합니다. 국회의원 선거구를 자기에게 유리한 대로 조정하고 국회의원이 된다면 누가 그 국회의원을 존경하겠습니까. 올림픽에서 자기 나라에 유리한 종목을 대거 편성해 금메달을 독식한다면 누가 그 나라의 금메달 수에 머리를 숙이겠습니까. 순위는 올라가지만 위신은 추락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계급은 높아지지만 멸시의 대상이 되는 그런 모습을 피해야 합니다. 특히 자기가 잘하는 어떤 신앙 형태로 지도자를 단순비교하여 그 지도자의 권위를 무시하는 일은 절대 성공적인 신앙생활을 만들어낼 수 없습니다. 사무엘은 그렇게 단순비교함으로 지도자의 권위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이렇게 성전에서 기도하는데 엘리 목사님은 잠을 자!\"라고 생각하면서 엘리 제사장에 대한 묘한 우월의식을 가지지 않았습니다. 그는 아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나는 배우는 입장에 있는 사람이니까 여호와의 전 안에서 이렇게 불편하게 지내더라도 엘리 목사님은 나이도 많으신데 침소에서 편히 쉬셔야지. 엘리 목사님도 나처럼 젊었을 때는 대단히 헌신적으로 하나님을 찾았을 거야.\" 다니엘은 그런 식으로 좋게 생각하며 자기의 위치를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엘리 제사장에게 절대 충성했습니다. 사무엘이 엘리 제사장에서 절대적으로 충성했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부름을 받는 사무엘의 모습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2. 윗 사람에게 절대 헌신 4절을 보면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데 사무엘은 그 부르는 소리가 엘리 목사님의 소리인 줄 알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의 침소로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고 말하며 잠자다 일어나서 재빠르게 갔습니다. 6절에도 그런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서 사무엘의 엘리에 대한 헌신이 얼마나 훌륭한 것이었는가를 보게 됩니다. 사무엘이 부름을 받고 어떻게 반응했습니까. 그는 \"무슨 일입니까? 왜 그러십니까?\"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했는데 이 말이 주는 뉘앙스에서 우리는 그 장면을 통해 보여지는 사무엘의 헌신도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사무엘은 엘리 제사장의 지침을 철저히 따릅니다(10-11절). 즉 지도자에 대한 절대 헌신의 모습이 이 장면들에서 잘 나타나 있습니다. 현재의 자기의 헌신적인 삶을 가지고 지도자와 신앙을 비교하는 행위같은 그런 행위는 추호도 보이지 않습니다. 지도자에게는 최대한 순종해야 한다는 절대 헌신의 자세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지도자가 공적으로 분명한 도덕적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면, 생각의 차이나 열심의 차이로 인해 나 자신을 나의 지도자보다 높이려는 바람직하지 못한 생각을 가져서는 안됩니다. 절대 헌신의 사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음성을 들려주시고, 그런 사람을 결국 택하셔서 위대한 인물로 만드십니다. 교회를 위해서 헌신할 때, 그리고 소중한 가치를 위해서 헌신할 때 하나님은 틀림없이 갚아주십니다. 한나가 소중한 아들을 한명 바치고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무엘상 2장 21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한나를 권고하사 그로 잉태하여 세 아들과 두 딸을 낳게 하셨고...\" 한나는 한 생명을 바치는 헌신을 통해서 다섯배의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게 하나님의 방법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헌신을 결코 그냥 흘려보내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냉수 한 그릇도 반드시 보상받는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마 10:42). 하나님은 바친 사람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갚아야 하는 채무자는 아니지만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이 후히 갚아주신다는 사실입니다(눅 6:38). 절대 헌신을 통해 하나님의 복을 후히 받아 누리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