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질의 헌신이 어떠 합니까?

물질의 헌신, 어떠합니까?
신8:17-18.마5:17-19





1. 물질에 대한 지나친 애착

말씀에 들어가면서, 먼저 여러분께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께 헌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의 주인 되심을 믿고 그대로 행하고 있습니까? 이 질문에 여러분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다면, 여러분은 진정한 의미에서 하나님의 사람이고 성숙한 성도입니다. 그러나 만일 여러분이 이 질문에 확신 있게 답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기도를 하지 않아서 그렇습니까? 예배를 밥먹듯이 빼먹어서 그렇습니까? 봉사를 하지 않아서 여러분의 헌신에 문제가 생겼습니까? 아니면 다른 것은 다하겠는데, 물질에 대한 헌신에 자신이 없어서 그렇습니까?

그러면 많은 사람들이 어디에 걸려 넘어지는지 아십니까? 물질에 대한 헌신입니다. 이처럼 물질에 대한 헌신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헌신했다고 해도 물질에 대한 헌신이 따라주지 않으면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했다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돈에 대한 태도는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을 반영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신앙인 에게는 3가지의 중요한 회심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즉, 가슴의 회심, 정신의 회심 그리고 지갑의 회심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3가지를 정직하게 행하기란 너무도 어렵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가슴의 회심\'과 \'정신의 회심\'은 사람이 볼 수 없는 내면의 변화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가슴의 회심\'과 \'정신의 회심\'은 외부적으로 위선으로 치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갑의 회심\', 즉 \'물질의 회심\'은 위선적으로 치장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지갑의 회심\'은 내면의 수준과 사실에 근거하여 정확하게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하는 헌금은 우리의 헌신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준다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동원 목사의 \"쉽게 풀어 쓴 마가복음 이야기\"에 보면 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내용을 잠깐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돈 소리만 들으면 긴장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교회 가니까 돈 이야기만 하더라하는 말이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라는 것도 잘 알고 있습니다. 종교 개혁자 칼빈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의 문제는 교회에서 돈에 대해 너무 많이 이야기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해서 바르게 이야기하지 않는 것에 있다.\' 존 웨슬리도 비슷한말을 남겼습니다. \'나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는 사람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복음을 듣고서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사람이 되었다면 제일 먼저 변화가 있어야 할 삶의 영역 중의 하나가 돈의 사용처라고 생각합니다. 경제 생활은 우리의 가치관이 민감하게 반영되는 영역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 생겼고, 하나님 앞에 정말 감사하게 나 자신을 드리고 싶다고 할 때 그의 헌금 생활의 태도가 달라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헌금이라는 것은 한 사람이 어느 정도로 헌신하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헌금 행위야말로 우리의 헌신 행위의 본질을 명확하게 보여줍니다. 돈의 씀씀이를 알면 그 사람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의 돈 쓰임새야말로 우리의 인생관, 가치관, 세계관을 대변해주는 삶의 영역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헌금은 내 삶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대한 응답입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생각하는 의식의 결정체가 우리의 헌신이어야 하고 우리의 헌금이어야 합니다.

2. 물질로 시험하시는 하나님

그렇습니다. 우리의 육신이 본능적으로 소중하게 생각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 헌신이며, 그러한 의식과 행위는 우리의 삶의 주인이 누구임을 분명히 공포하는 행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소중한 것을 하나님 앞에 포기하는 헌신을 기뻐하시고 그러한 자를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물질을 통해 우리를 시험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시험에 걸려 넘어지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나님은 일찍이 출애굽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그러한 모습을 보셨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누가 그 재물을 모을 수 있도록 하셨는지 분명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신명기8:17-18절의 말씀입니다: \"너희가 마음속으로 \'이 재물은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모은 것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서 걱정이 된다. 그러나 주 너희의 하나님이, 너희의 조상에게 맹세하신 그 언약을 이루시려고, 오늘 이렇게 재산을 모으도록 너희에게 힘을 주셨음을, 너희는 기억해야 한다.\"

때때로 하나님이 주신 선물에 열중하다보면 그것을 주신 하나님이 보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즉 선물이 우상이 된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과 이삭의 경우에 있었습니다. 백살이 다 되어서 얻은 아들 이삭, 얼마나 귀(貴)한 아들입니까? 그러나 점차 아브라함은 그 아들에게 열중하면서 아브라함의 생애 속에서 이삭이 우상(偶像)이 되어 가고 있는 위기(危機)를 하나님은 보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시험하신 것입니다.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하나님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를 강조하셨습니다. 그만큼 이삭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우선적인 존재였고 하나님은 차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아브라함의 신앙의 위기로 보셨고 그를 시험하게 된 것입니다.

시험을 통하여 하나님은 누가 가장 중요한 존재인지를 확인코자 하시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고백 받기를 기뻐하십니다. 그리고 그 시험을 통과한 자들에게 하나님은 이전과 비할 수 없는 축복을 내리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유한 것이 우상인지 아닌지를 분별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하나님을 위해서 그것을 버릴 수 있느냐 없느냐를 확인해 보면 됩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시험을 통해 자신이 아들을 우상으로 삼았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선물되는 아들을 제단 위에 기꺼이 올려놓았습니다. 그렇게 되자 이번에는 하나님이 더 다급해 지셨습니다. 진짜로 되돌려 받고자 하신 의도가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물질로 상징되는 아들의 시험을 통과한 아브라함에게 하나님은 축복을 약속하십니다. 창세기22:16-18절의 말씀입니다: \"주의 말씀이다. 내가 친히 맹세한다. 네가 이렇게까지, 너의 아들, 너의 외아들까지 아끼지 않았으니, 내가 반드시 너에게 큰복을 주며, 너의 자손이 크게 불어나서, 하늘의 별처럼, 바닷가의 모래처럼 많아지게 하겠다. 너의 자손은 원수의 성을 차지할 것이다. 네가 나에게 복종하였으니, 세상 모든 민족이 네 자손의 덕을 입어서, 복을 받게 될 것이다.\"

3.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물질과 선물의 시험을 통과한 자에게 하나님은 지금보다 더 큰 축복을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 우상이 되지 않도록 늘 깨어 있어야 하며, 그 선물이 아무리 좋고 귀하다 할지라도 하나님에 대한 우선 순위가 뒤바뀌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합니다. 이러한 원리는 우리의 헌금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물질을 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헌신의 정도를 물질에 대한 우리의 마음과 행위를 보시고 정확히 체크하십니다. 왜 그렇습니까? 사람은 물질을 사용하는 것으로 자신의 마음과 신앙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마태복음6:21절에서 우리 주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재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그러면서 주님은 모든 물질의 사용에 있어서 우선적으로 주님께 드릴 것을 요구하십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물질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잠언3:9-10절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너의 재산과 땅에서 얻은 모든 첫 열매로 주님을 공경하여라. 그러면 너의 창고가 가득 차고, 너의 포도주 통에 햇 포도주가 넘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남긴 찌꺼기를 먹는 쓰레기통이 아닙니다. 말씀에서와 같이 하나님은 첫 열매로 공경 받기 원하시고 그러한 신앙의 사람들에게 축복의 창고를 여는 열쇠를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가 쓰고 남긴 찌꺼기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의 표현인 것처럼 헌금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면서도 \'하나님 복 주시옵소서\'라고 염치없이 말하지는 않았습니까? 하나님은 우상숭배를 가장 싫어하시는 분이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우상숭배에 있었습니다. 여러분, 우상은 어떤 형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을 신처럼 섬기는 것만을 말하지 않습니다. 우상은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하나님은 차선으로 생각할 때, 그것이 바로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경우에서 우리가 그것을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만일 여러분이 물질을 가지고 자녀를 위해서 가장 먼저 구분한다면, 그것은 이미 자식이 여러분에게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자신의 화려함과 사치 그리고 필요를 위해 우선적으로 물질을 구분한다면, 그것은 여러분 자신이 우상으로 자리잡고 있음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이처럼 이것저것을 다 제외시켜 놓고 더 이상 용도가 없으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는 것을 하나님은 기뻐하지 않습니다. \'고양이 밥\'주듯이, \'개밥\'주듯이 바치는 헌금은 더 이상 헌금이 아닙니다. 사실상 그런 헌금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6:33절에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 원칙을 따를 때, 우리의 삶에 하나님의 축복이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4. 나눔의 예물을 드려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든 것에 우선하여 하나님께 드림으로 우리의 헌신을 보일 수 있는 물질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은 그것을 구약에서는 십일조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는 물질로 하나님께 헌신하는데 기준이 되는 비율의 헌금입니다. 그리고 그 비율은 우리의 욕심과 큰 충돌이 생기는 것이기에 하나님은 그것으로 우리의 물질에 대한 헌신을 확인하십니다. 그러므로 물질에 있어서 십일조라는 마지노 선을 넘지 않고서는 우리의 헌신은 거짓된 헌신이며,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임을 부인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런 말씀을 하실 수도 있습니다. \"신약으로 오면서 십일조가 없어진 것이 아닙니까?\"

신약에서는 십일조에 대한 언급이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구약과 신약의 차이점을 알게 되면 여러분은 십일조가 가장 기초적인 헌금이며 물질에 대한 최소한의 헌신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신앙의 성숙도를 가지고 구약과 신약을 설명한다면, 구약은 어린아이에게 가르치는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법이 무엇이고 어떻게 살아야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인지를 구체적인 내용과 분명한 수치를 가지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반면에 신약은 구약보다는 좀더 성숙한 형식을 취하면서, 외형이 아닌 율법에 담겨있는 정신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제는 어린아이와 같이 가르쳐준 형식에 얽매이는 자가 아니라 자발적이면서도 그 속에 온전한 헌신의 성도가 되길 요구합니다. 그것을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이라 말씀하십니다. 마태복음5:17절의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아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

그러므로 우리는 물질에 대한 헌신의 상징인 십일조가 폐지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물질에 대한 헌신이 10/1일수 있고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이상일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와 사도행전에서는 그러한 예를 실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19장, 누가복음8장과 21장 그리고 사도행전2장에서는 10/1 이상의 헌신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사도행전 5장에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그들 재산의 대부분을 하나님께 드렸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 온전한 헌신으로 인정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죽임을 당하기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아무리 많은 헌금을 주님께 드렸다 하더라도 그 사람의 형편에 비해 생색내는 수준에 불과하다면 하나님께 합당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어떤 성도가 있었습니다. 그는 부자였고 예수님을 잘 믿었으며 다른 사람들에 비해 헌금도 많이 하여 교회에서 칭찬이 자자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하루는 비몽사몽간에 이상한 환상을 보았습니다. 천국에서 예수님께서 성도들에게 상급을 주시는데, 전도를 많이 한 신자에게는 별이 많이 붙은 면류관을 주셨고, 헌금을 많이 한 신자에게는 보석으로 지은 집을 주셨습니다. 심지어 자기 교회의 아이들까지 다 상을 탔는데 예수님께서 자기에게만은 아무 것도 주시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 성도는 너무나도 서운해서 막 울다가 깨 보니 꿈이었습니다. 잠에서 깨어난 그는 자신의 신앙을 진지하게 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립니다. \"아, 내가 주님을 믿기는 했어도 적게 믿었고, 헌금은 다른 사람들에 비해 많이 했으나 내 형편으로는 적었으며, 더구나 교만한 마음으로 바쳤구나!\"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물질의 헌신에 있어서 자신 있습니까?

하나님은 우리가 드리는 물질의 헌신으로 우리의 신앙을 보실 뿐만 아니라, 그 물질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시고자 계획하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가 드린 물질로 주님의 뜻에 따라 필요한 곳에 나누도록 명령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서에 나와 있는 그 나눔의 대상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성직자들과, 가난한 자들과 주의 성전을 통한 사역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십일조의 정신을 나눔이라 말하고 우리는 거기에 충실하려고 십일조를 \"나눔의 예물\"로 부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의 \"나눔의 예물\" 생활이 정상적으로 되어지지 않으면, 교회는 건강할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 확장에 큰 차질을 빗게 되는 것입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헌신이 없는 곳에 하나님의 역사는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헌신하는 자들을 축복하십니다. 그리고 물질로 온전히 헌신하는 자들에게 물질로부터의 자유함을 선물로 주십니다. 그러나 물질의 헌신이 없을 때, 우리는 죽는 그 순간까지 물질의 지배를 받게 될 것이며 물질의 노예가 되어 고통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소유는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모래알처럼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재물뿐만 아니라 명예도 권력도 인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인생과 재물, 명예와 권력, 인간의 욕심에 관해 성경은 아침 이슬 같고 풀의 꽃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직 영원한 것은 하나님의 진리와 이에 대한 믿음뿐입니다. 그래서 마틴 루터는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수중에 많은 것들을 소유했으나 지금은 다 잃어버렸다. 그러나 내가 하나님의 수중에 맡긴 것은 여전히 내 소유로 남아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이슬 같은 우리가 가치 있는 존재로 변화되길 원하십니다. 온전한 헌신을 통해서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