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신의 삶

헌신의 삶
롬6:1-14,말3:7-12





대부분의 종교나 이데올로기는 상징(Symbol)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상징이 의미하는 바는 그 종교나 이데올로기의 역사나 신념의 특징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불교는 연꽃을 상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불교가 연꽃을 상징으로 하는 이유는
불교에서 말하는 탄생과 죽음의 윤회를 연꽃에서 찾았기 때문입니다.

유대교는 두 개의 정삼각형으로 이루는 육각의 별을 상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유대교가 육각의 별을 상징으로 하는 이유는
유대교가 강조하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의 의미를 다윗의 별에 부여했기 때문입니다.

무너지기 전의 공산당은 망치와 낫이 엇갈려 있는 것을 상징으로 하고 있습니다.
공산당이 망치와 낫이 엇갈려 있는 것을 상징으로 하는 이유는
바로 그 그림이 산업과 농업이 어울려 있는
노동자 지상주의를 상징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독일의 히틀러는 만(卍)자를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히틀러가 이 만(卍)자를 상징으로 삼은 이유는
그 상징이 창조와 번영을 나타낸다고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독교는 처음에 물고기 그림을 상징으로 삼았습니다.
요즘 자동차 뒤에 붙이고 다니거나
목걸이 혹은 쁘럿찌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기독교가 이 물고기 그림을 상징으로 삼은 이유는
로마 박해 때 크리스챤들이 서로의 신분을 비밀리에 서로 알리는 상징으로 적합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인데
그 물고기 그림 안에는 \\\'익투스\\\' 혹은 \\\'익수스\\\'라고 발음하는 글자(Ichthys)가 적혀 있는데
그 뜻은 \\\'예수 그리스도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 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물고기 모양의 기독교 상징은
오랫동안 사용되지는 못하고
주로 로마 박해 때 얼마동안 사용하다가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 기독교는 X.P.라는 글자를 상징으로 사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글자는 바로 이러한 것입니다.
(담임목사가 걸치고 있는 스톨 밑에 달린 X.P.글자를 교인들에게 자세히 보여준다)

이 X.P.라는 상징은 그리이스 단어인 \\\'크리스토스\\\'란 말의 앞의 두글자를 나타내는 것으로서
콘스탄틴 대제 때 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상징도 얼마 사용하지 못하고 사라지고
결국 기독교의 상징은 최종적으로 십자가로 낙착되고 말았습니다.

아마 뭐니뭐니해도 기독교를 가장 잘 나타낼 수 있는 것은
바로 십자가라고 모든 사람이 공감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기독교를 가장 잘 표현하는 것으로서
십자가가 기독교의 상징으로 채택되었다는 사실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을 시사하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기독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나 기적이나 부활 보다도
오히려 하나님의 사랑과 예수님의 고난을 상징하는 십자가가
기독교의 본질을 가장 잘 알려주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실 십자가는 그 원래의 의미를 생각해 볼 때 그리 기분 좋은 상징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 십자가는 로마인들에게 최악의 사형집행을 하는 사형틀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십자가는 기독교의 중심, 기독교의 상징으로
오늘날 까지 자리잡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을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가 어떤 사람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일 지 모르나
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하였다\\\'(고전 2:1-2)
고 말하였습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초대교회 이후 모든 기독교인들의 마음 속에
아주 깊은 영향을 미친 상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왜 그렇게 예수님은
십자가라는 가장 처참한 형틀에 사형 당하실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하여
깊이 생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정말 모든 인류를 사랑했으며, 그들에게 바른 말씀을 가르쳤으며
또 그렇게 살아갔기 때문이었습니다.

정말 그는 말씀과 삶이 일치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좀더 깊이 생각해 보면
예수님이 당시의 상황을 너무 흔들어 놓았고 뿌리채 흔들어 놓았기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시각입니다.

예수님은 유대 지도자들에게는 아주 위험 인물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등장하자마자 그들의 전통 중 잘못된 부분을 정확하게 지적하시면서
그들의 삶의 존재 양식을 뿌리채 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전통적으로 받아 내려온 율법을 재해석 하고
엄청난 삶의 변화, 인격의 변화를 요구하며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냥 입을 옷이 없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옷 문제를 해결해 주고
배가 고픈 사람들이 오면 먹는 문제를 해결하여 주고
집 없는 사람들이 다가오면 집 문제를 해결해 주면서
적절히 진리를 가르쳐 주었으면 아무 탈이 없었겠지만

예수님은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시면서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담대히 선포하셨기에
그들은 받아들이기를
이때까지 잘 살아온 자신들의 안정된 삶을 예수님이 마구 건드렸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고
또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내용과 믿음의 스타일 까지 바꾸라고 하는 말에
그들은 발끈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학자 C. S. Lewis 같은 분은
이러한 모습의 예수님이란 의미로 것초월적 간섭자겄라고 표현하였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를 죽일 수 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함께 깊이 생각해 볼 주제가 있습니다.

이 주제는 괭장히 중요한 주제입니다.

이 주제를 이시간 여러분에게 한번 물어보려고 하는데....
마음 속으로 정직하게 답변해 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지금 예수님께서 이시간 여러분에게 나타나셔서
여러분 각자에게 당신의 삶의 구석구석을 다 들여다 보시고
구체적으로 잘못된 부분들을 지적하시면서

그렇게 살면 안된다, 이렇게 살아라
생각도 바꾸고, 가치관도 바꾸고, 삶의 자세와 삶의 방식도 완전히 바꾸어라

네가 벌은 소득에서 온전한 십일조를 나에게 바치고,
가난한 자들과 고아와 과부들을 잘 돌아보아라
그리고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고, 하나님만 온전히 의지하며 살아라.....\\\'

이렇게 우리가 행해왔던 삶의 기존 질서,
삶의 패턴을 완전히 파괴하고
그동안 공들여 쌓아왔던 나의 부, 나의 명예, 나의 권위를 여지없이 다 실추시키면서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내 앞에 다가온다면.....

그러시면서 나의 삶을 이래라 저래라 하고 구체적으로 간섭하신다면....

여러분은 예수님의 말씀을 용납하며,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시겠습니까?......

아니면 당시의 유대인들 처럼 화가 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나 못박으라고 소리치겠습니까?

어느 쪽입니까?..............

이러한 질문을 우리 스스로 자문자답하여 볼 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은 그들만의 죄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그들과 똑 같이 예수님의 초월적 간섭을 싫어하고 있으며
그래서 나 자신의 변화를 기대하지 않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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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는 선악과 사건 이야기가 있습니다.
선악과 사건 이야기는 이미 주일 설교에서 두 번씩이나 언급했던 이야기입니다.

처음에, 선악과란 하나님이 인간을 사랑하여 주신 자유의지라고 설교하였습니다.
두번째, 선악과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최소한도의 끈이라고 설교하였습니다.

그리고 오늘 또, 설교하려는 것으로서
세번째, 선악과는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 주신 삶의 방식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창세기 2장 16절입니다.

\\\'여호와하나님이 그 사람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동산 각종 나무의 실과는 네가 임의로 먹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는 네가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여서
인간이 살아갈 수 있는 모든 기본적 환경인 우주와 해와 달과 별, 산과 바다와 땅,
그리고 짐승과 나무와 각종 꽃들을 먼저 다 창조하신 후
최후에 인간을 만들어 놓고

이제 그 에덴동산에게 마음껏 자유의지를 가지고 살게된 인간에게
하나님과의 최소한도의 끈을 가지고 살게된 인간에게 주신 말씀으로서
이 선악과를 따 먹지 말라는 말씀의 의미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문제라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쉽게 풀어 말씀드린다면
선악과라는 것을 통하여 주신 말씀은
네 식대로 살지말고 내 식대로 살라는 하나님의 명령이었다는 것입니다.

처음에 인간은 에덴 동산에서 정말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모든 것이 풍부한 에덴은 인간에게 있어서 정말 에덴동산이었습니다.
자유의지를 가지고 순간순간 선택하면서도 행복하게 살았고
하나님과 최소한도의 끈을 가지고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불순종 하려는 마음이 아예 없었기 때문이며
기쁨으로 그 말씀에 순종하며 살아가려는 마음이 충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날 인간은 이것을 거부하고 파기하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사탄의 유혹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나타난 인간의 태도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일단 창조하였으면 다 끝난 일이다.
내 인생은 내 것이다.
그러므로 누가 뭐라해도 나는 내 맘대로 살 것이다
내 뜻대로 살겠다
먹고 싶은 것 다 먹고
보고 싶은 것 다 보고
하고 싶은 것 다 하겠다.
물론 신앙생활 하는 것 다 좋지만
신앙생활을 하되 나는 내 식대로 신앙생활 하겠고
인생살이도 내 식대로 하겠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네 식대로 살지말고
내 식대로 살아라!!

바로 이것이 선악과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은
이와 똑 같은 측면에서 다시 한번 더 주의를 환기시킨 것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죄와 악 가운데 젖어 사느냐, 이 불쌍한 인생들아!!
회개하라!!

삶의 방식을 다시 바꿔라!!

인생의 주인 노릇을 네가 하지 말고
하나님이 다시 주인이 되게하라!! 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인간을 향한 주님의 간섭
삶의 방식에 대한 주님의 최대의 간섭이라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로 이것이야말로 바른 삶의 방식이요
바른 신앙생활의 방식이요
행복한 삶의 공식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가 행복하게 사는 삶의 공식은 어렵지 않고 간단하지만
우리의 현실의 삶이 복잡하고 피곤한 것은 다 사탄의 유혹과 시험 때문인 것입니다.

이제 저는 이렇게 쉽고 간단한 삶의 공식
삶의 방식인 내 식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식대로 사는 삶의 원리를
오늘 우리의 현실에 구체적으로 두가지만 적용하여 보려고 합니다.

첫째로 영적으로 죄의 문제에서 거듭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이며
잃어버렸던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는 것이며
끊어졌던 하나님과의 최소한도의 끈이 다시 연결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다시 부르시더라도 거듭난 존재로서 하나님의 품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3-24)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 옛 사람이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하여 다시는 우리가 죄에게 종노릇하지 아니하려 함이니
이는 죽은 자가 죄에서 벗어나 의롭다하심을 얻었느니라\\\'(롬 6:6-7)


\\\'그러므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이 말씀이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내 식대로 살지않고 하나님의 식대로 살라고 말씀하시면서
영적인 측면에서의 헌신의 삶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까?

바로 그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여러분과 저를 이미 만세 전에 택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남은 과제는 나를 향한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는 일인데
그것은 말씀이 충만한 삶을 사는 것이며
거듭난 존재로서 사는 것이며
그리하여 영육 간에 헌신된 삶을 사는 것이란 말씀입니다.

둘째로 내 식대로 살지 않고 하나님 식대로 사는 삶의 원리 두 번째는
육적으로 물질 문제에서 거듭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물질은 다 내 것이다.
내 것이니 내 맘대로 하며 산다는 것이 아니라
이 물질 문제에 있어서도 하나님과의 최소한도의 끈
그 최소한도의 끈을 가지고 살아야 나에게 축복인데
바로 그것이 축복의 선악과라는 끈의 의미로서의 십일조라는 것입니다.

이 십일조는 소득의 십분의 일만 하나님께 바치면
나머지는 다 내 것이란 의미가 아닙니다.

십일조 이외의 십구조 즉 나머지 십분의 구도 다 주님의 것이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대로
먼저는 자신과 가정을 위해서 쓰고
나아가 이웃을 위해 써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어느날 크리스챤 두사람이
서로 같은 자리에 앉아 기차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처음부터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으나
여행을 하며 대화를 나누던 중 서로가 크리스챤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한참동안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주고받던 중 점심시간이 되었습니다.

둘 중 한사람이 마침 준비해온 도시락을 가방에서 주섬주섬 꺼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미처 도시락을 준비해 오지 못한 관계로
그냥 앉아서 그 사람이 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온 그 사람은 도시락을 자신의 가방에서 꺼내더니 뚜껑을 열었습니다.
그 안에는 맛잇게 보이는 제법 큰 샌드위치 두 개와 작은 우유 한병이 들어있었습니다.

도시락을 싸온 그는 먼저 간단히 식사기도를 하더니
샌드위치 한 개를 먹기 시작하였습니다.
매우 시장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은 속으로 나머지 한 개의 샌드위치는 자기를 주지 않겠나 하고
은근히 기대하며 내심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은 흘러 그 사람이 샌드위치 한 개를 다 먹고
우유까지 한모금 먹고 났지만 아무 말도 없었습니다.
조금 있다가 그 사람은 나머지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하였습니다.

옆에서 침을 삼키며 더욱 배가 고파진 한 사람은
그 사람이 나머지 샌드위치를 손에 집어 들려고 하는 순간
참을 수 없어 그분에게 이렇게 점쟎게 말하였습니다.

\\\'선생님, 저는 성경에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제일 좋아합니다\\\'

그랬더니 상대편 크리스챤이 이렇게 말을 받았습니다.

겁네, 참 좋은 성경구절이군요...
그러나 저는 이 말씀을 참 좋아합니다.
네 이웃의 물건을 탐내지 말라....겁

그리고는 나머지 샌드위치를 다 먹어 치우더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현대 크리스챤을 풍자하여 누군가가 꾸며낸 이야기로 보여지지만
이 이야기는 우리에게 오늘날 크리스챤의 실상과 허상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말로는 잘 믿는다고 소리는 요란하지만
철저히 개인적이며 이기적인 신앙생활만 하면서
이웃을 외면하는 현대 크리스챤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일그러진 모습이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성도 여러분

에덴동산과 선악과는 옛날에만 있었던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지금 바로 여기에
우리가 사는 구체적인 현실 속에도 여전히 똑 같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삶의 존재양식의 선택으로서
내 식대로 내 맘대로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 식대로 살 것이냐 하는 것과

주님 주신 물질 내 맘대로 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 원하시는대로 최소한도의 끈인 십일조를 드리고
그리고 나머지 물질도 하나님 원하시는 대로 자신과 가정과 이웃을 위해
바르게 사용하며 살 것이냐 하는 선택의 문제가
항상 우리 앞에 과제로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라 쉬운 문제입니다.
왜냐하면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를 유혹했던 바로 그 사탄의 유혹과 시험을
선택의 기로에 선 순간 말씀에 대한 전적인 순종으로 이기기만 한다면
문제는 간단하게 풀리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문제를 잘 풀어나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충만한 삶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삶
최소한도의 끈을 버리거나 끊어버리지 않고
항상 그 끈을 가지고 살아 나아가는 삶을 살게 될 때
우리의 삶은
하나님이 원하시며 기뻐하시는 헌신의 삶, 축복의 삶이 될 줄로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