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의 해복 잘자란 나무

지금의 행복, 잘 자란 나무
눅9:28-33, 마13:31-32





1.지금의 행복



2008년 무자년도 벌써 한 달이 다 되어가고 있습니다. 해마다 신년 벽두에는 개인이나 기업, 단체 등에서는 여러 가지 거창한 계획을 많이 세워 봅니다. 특히 무한경쟁에 내몰린 기업이나 개인들은 ‘경쟁’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씨름을 하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경영학을 전공하고 그 분야에서 연구하고 학생들을 가르치다 보니 기업체에 나아가 특강을 할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최근의 화두는 경쟁력과 혁신입니다. 대한민국에서 불황과 양극화의 문제, 그리고 고령화에 따른 불확실성이 한층 커지면서 미래의 승자가 되기 위한 싸움은 더욱 치열해져 가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나 불확실한 세상에서도 변화의 단초는 있게 마련이기 때문에 특강에 대한 내용은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고 변화를 통해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도전하라는 것이 주류를 이루고 있습니다. 현재에 안주하기보다는 열정을 가지고 미래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현재의 행복을 접어두자는 이야기지요.




변화의 교훈에는 종종 ‘솔개의 변화정신’이 인용되고 있습니다. 솔개는 시력이 좋아서 사람보다 20배나 더 멀리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또한 솔개는 최고 약 70년의 수명을 누릴 수 있는데 이렇게 장수하려면 약 40살이 되었을 때 매우 중요하고 고통스러운 결심을 해야 합니다. 솔개는 약 40살이 되면 발톱이 노화하여 사냥감을 거의 잡아챌 수 없게 되고, 부리도 길게 자라고 구부러져 가슴에 닿을 정도가 되며, 깃털이 짙고 두껍게 자라 날개가 무거워져 하늘로 날아오르기가 힘들어 집니다. 이즈음이 되면 솔개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이 있을 뿐입니다. 그대로 안주하여 죽을 날을 기다리든지, 아니면 약 반년에 걸친 매우 고통스러운 갱생과정을 수행하는 것입니다. 만약 갱생의 과정을 선택하면 솔개는 먼저 산 정상 부근으로 높이 날아올라 그곳에 둥지를 틀고 고통스러운 수행을 시작합니다. 먼저 부리로 바위를 쪼아 부리가 깨지고 빠지게 만듭니다. 그래야 새로운 부리가 돋아나게 되지요. 그리고 새로 돋은 부리로 발톱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그런 후 새로 발톱이 돋아나면 이번에는 날개의 깃털을 하나하나 뽑아냅니다. 이리하여 약 반 년이 지나 새 깃털이 돋아난 솔개는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신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시 힘차게 하늘로 날아올라 30년의 수명을 더 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변화가 빠른 현실에서 성공하려면 고통스러운 갱생과정을 거친 솔개와 같이 불편과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각고의 자기혁신이 필요하다고 결론을 내려 줍니다.




그러나 저는 개인적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현실에 몰두하는 것을 모두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곤 합니다. 성경에도 ‘지금 이 자리라는 현실’을 부정적으로 보는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날 예수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예수님은 기도하시고 제자들은 자고 있던 중에 갑자기 하늘이 환해지고 광채가 나게 됩니다. 이 때 예수님의 용모가 바뀌고 예수님 옆에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있는 것을 베드로는 옆에 있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목격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이 광경에 행복해 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라고 말합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은 성경학자들은 베드로의 몰염치성(沒廉恥性)에 대해서 맹공격을 퍼붓고 있습니다. 누가는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는 베드로가 황홀한 마음으로 한 말임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가 아직도 자신이 경험하고 있는 靈的 사실의 속뜻을 이해하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한 성서학자는 “초막 셋을 짓겠다는 베드로의 제안은 분명히 상황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른 성서학자는 “우리가 잘 지낼 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쉽게 잊곤한다. 그리고 우리의 즐거움이 충만할 때, 우리 형제들의 필요를 잊기 쉽다. 베드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놀라운 광경을 본 베드로의 이러한 충동적인 반응이 너무나 인간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으로서 자신이 황홀한 경험을 하면서 그 행복한 시간을 연장해 보고자하는 베드로의 입장이 왜 비난을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베드로가 정말 예수님이 어떤 메시아이신가를 알았다면, 즉 예수님의 메시아성(性)을 알았다면,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받아들였을 것이고, 또한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따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당시의 베드로는 우리와 유사한 보통사람이었던 것 같습니다.




또한 누가복음 10장 38절-42절에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베다니의 나사로집에 예수님이 방문하십니다. 마르다는 주님을 편하게 모시기 위해 부산스럽게 바빴습니다. 마르다는 예수님을 초대한 장본인이고 그분께 맛있고 훌륭한 만찬을 대접해 드리기 위해 기쁜 마음과 정성으로 최선의 봉사를 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경고를 받았고 할 일없이 예수의 발 앞에 앉아서 마치 일하기를 꾀부린듯한 마리아는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으니 아무도 그것을 빼앗지 못할 것이다.”라고 칭찬을 받았습니다. 얼핏 보면 전혀 별개의 사건이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가 베드로나 마리아에게 가장 중요했다는 사실입니다.




저는 ‘지금 현재 이 자리가 중요하며 좋다고 하는 속내를 솔직히 고백하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는 현대인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라고 뜬금없이 생각해 보곤 합니다. 인간은 왜 사냐고 물어보면 행복하기 위해서 산다고 합니다. 현대 인간은 삶의 지고의 가치를 ‘행복’에 두고 있는 것이지요. 얼마 전 저는 미국에서 같이 공부하던 한 선배와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는 미국에서 경영학 석사를 취득한 후, 공인회계사 시험에 합격하여 20년 가까이 프린스턴 근처에 회계사사무소를 개업하여 꽤 많은 돈을 벌었고 훌륭한 저택과 좋은 차를 소유하며 남이 보기에는 정말 잘 나가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를 보며 하는 첫 일성(一聲)이 ‘삶이 부질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무엇이 그렇게 후회가 되나?’라고 물어 보았습니다. 되돌아오는 대답은 ‘자식과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경쟁이 치열한 미국사회에서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오직 앞만 보며 살다보니 자신이 생각한 목표는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은데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가족들하고의 관계는 갈수록 소원해졌다는 것이지요.



현대에 있어서 주변 환경의 변화속도는 놀라움을 넘어 경악을 할 정도입니다. 특히 대한민국은 얼마나 빨리 변화하는지 잠시 해외에 나갔다 귀국해 보면 그 변화에 적응하는데도 꽤 시간이 걸리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러나 그 변화에의 적응에 급급하다보면 기존 관계의 함몰을 느끼게 됩니다. 특히 우리는 자녀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우리들 누구나 자녀들이 어렸을 때는 친밀한 관계를 갖습니다. 그래서 같이 있으면 행복합니다. 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애들과 같이 했던 즐거운 추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갑니다. 그러나 자녀가 성장하면서 무한경쟁의 교육환경에 내몰리고 그들의 일상적 삶이 뒤틀리게 되면 그 관계가 나빠지거나 아니면 관계가 나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재미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부모들이 많이 있습니다. 자녀의 미래가 걱정되기 때문에 지금의 행복은 곧잘 뒷전으로 밀려나곤 합니다. 저도 때때로 이러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자식과 만나도 딱히 할 말이 없고, 살가운 정을 나누기는 더욱 어렵다는 것이지요. 엄마는 그래도 좀 나은데 아빠의 경우는 더욱 심합니다. 팔짱도 끼고 싶고 안아주고도 싶지만 안 하다가 하려니 어색하고 쑥스럽기까지 합니다. 용기 내서 뭔가 해보려면 아이는 정색을 하고 피하기도 하지요. 친밀감이 문제가 되는 것이지요.




친밀감을 유지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되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현재 이 시간 여기에서 상황이 주어졌을 때 가까운 사람들하고의 관계에 미리 미리 투자해 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삶의 유효기간’을 주셨습니다. 어떤이에게는 30년을, 어떤이에게는 10년을, 혹은 어떤이에게는 단지 몇 달만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인간들은 모래시계같이 되돌릴 수 없는 제한된 삶의 기간 동안에 보다 행복해지기 위해 동분서주(東奔西走)하지만 그러면서 자신이 갖고 있는 행복의 조건을 까먹고 있는 것을 망각하고 있습니다.




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얼마전에 읽은 <인생수업>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나오고 있습니다.



“ 이번 生과 같은 生을 또 얻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이 生에서처럼, 이런 방식으로 이런 환경에서, 이런 부모, 이런 아이들, 이런 가족과 또다시 같은 세상을 경험하지는 못합니다. 당신은 결코 다시 이런 친구들을 만나지 못할 것입니다. 다시는 이번 生처럼 경이로움을 지닌 대지를 경험하지 못할 것입니다. 삶의 마지막 순간에 바다와 하늘과 별 또는 사랑하는 사람을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볼 수 있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마십시오. 지금 그들을 보러 가십시오.”



살아갈 세월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세월보다 짧아지는 시점에 서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하는 구절인 듯싶습니다. 인간의 삶속에서 새롭게 바뀌는 미래의 변화도 중요하지만 가까운 사람들하고의 관계는 지금 행복해야 합니다. 미래에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 여기의 행복을 유보해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바로 오늘의 행복이 미래의 행복을 위한 초석이기 때문입니다.












2.잘 자란 나무






두 달 전 구역예배에서 구역헌신 예배 말씀증거자에 제가 포함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순간 몹시 당황했습니다. 어떻게든 피할 길이 있으리라 생각했습니다만, 시간이 지나면서 맡겨진 일은 해야 한다는 평신도교회 교인으로서의 책임감이 저를 압도하였고, 오늘 이렇게 여러 교우님들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드릴 성서의 내용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천국의 비유 중 하나입니다. 본문을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다른 비유를 들어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늘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밭에 심었다. 겨자씨는 어떤씨보다 작은 것이지만, 자라면 어떤 풀보다 더 커져서 나무가 된다. 그리하여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인다.




이 말씀은 처음에는 보기에 미미할 정도로 작지만 결국에는 크게 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하나 오늘 저는 새가 깃들일 정도로 잘 자란 나무에 주목하고자 합니다. 씨앗이 싹이 나고 자라나서 큰 나무가 되었을 뿐인데, 자라나고 보니 새들이 날아와 쉬기도 하고 둥지를 틀기도 하여 그 곳에서 생육하고 번성하는 일이 이루어집니다. 새들 뿐만이 아니라 온갖 곤충들도 이 잘 자라난 나무에 근거를 삼고 각각의 모양대로 살아갑니다. 때로는 나무줄기에 구멍을 파고 집을 짓기도 하고 나뭇잎과 나무의 수액을 먹이로 삼기도 하지만 나무는 언제나 변함없이 햇볕을 막아주는 그늘을 만들고 때로는 바람막이가 되어주기도 하여 많은 생명들의 버팀목이 됩니다.




지금으로부터 1년 10개월 전인 2006년 3월 저와 아내는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조심스러운 마음으로 새길 교회를 찾았습니다. 잘 알지 못하였고 오기 힘든 교회였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기독인이라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저 또한 교회를 생각하는 마음이 편치 만은 못했었습니다. 오래전 어느 날 선배 되시는 분이 어떤 교회를 원하느냐고 묻기에 이제는 진보적인 교회를 가 보았으면 한다고 말했습니다. 2003년 이후로 많은 교회들이 수구 냉전적 입장을 표명하면서 그런 마음은 더욱 분명해졌습니다.




1982년 1월 24세 되던 해 스스로 찾아간 교회에서 저 자신과 타인과 세상의 관계를 새롭게 인식한 이후로 교회는 저의 삶의 중요한 근거지가 되었습니다만, 세월이 지나면서 전문적 성직제도가 다수의 신자들을 수동적으로 그리고 교회 안에 권력 중심의 위계 구조를 만들고 있다는 사실과 과도한 교회 건축으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새길 교회는 저에게 있어 오기 힘든 교회가 아니라 저를 위해 예비 된 교회였다고 생각합니다. 20년간 잘 자란 나무와 같이 지친 생명들에게 쉼과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새길 교회는 부족함이 없어 보입니다.




방금 전 말씀을 증거 하신 이명식 형제님과 부인되시는 장숙경 자매님의 정성스런 배려가 없었다면 제가 새길 교회를 알 수도 없었거니와 알았어도 참여하기는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등록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색하고 낯설어 하는 저희 부부를 단지 새 교우라는 이유만으로 집으로 초대해 주신 고운영 형제님과 홍애현 자매님 부부, 새 교우 일수록 소속이 필요하다며 등산모임인 도반 산악회에 참여할 것을 적극 조언해 주신 김덕년 형제님, 도반에서 더욱 친밀감을 갖게 된 오성기 대장님을 비롯한 많은 도반의 가족들, 같은 길을 가는 동반자로서 각자의 삶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열어 보여 주시는 구역 식구들, 오며가며 따뜻한 눈빛으로 악수를 청하여 주시는 여러 교우님들 이 모든 분들이 분명 따가운 햇빛 과 찬바람을 막아주는 잘 자란 나무의 건실한 가지들이었습니다.




분명 바라던 교회였고 교우님들의 따뜻한 배려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저에게는 넘어야 할 고비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새길 교회의 신앙 노선을 어떻게 수용할 것인지의 문제였습니다. 많은 보수 교회들의 한계와 문제점에 대하여는 여러 교우님들과 견해를 같이 해 왔었으나 그 원인이 교리나 신학에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던 저이기에 신. 구약 성서 그리고 예수그리스도, 삼위일체 하나님, 성령 등 신앙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에 대한 새길 교회의 설명은 저를 당황케 하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러함에도 여러 교우님들의 성실함과 진지함은 저로 하여금 속단하지 않게 하였고 좀 더 살펴보고자 하는 마음을 갖도록 했습니다. 그동안 세 번에 걸친 신학 강좌와 류상태 형제님과 함께 했던 성서순례, 김기동 자매님과 함께 했던 성서, 삶 읽기 등을 참여하면서 평소 신앙의 핵심이라 생각해 왔던 ‘하나님 앞에서 오늘의 현실을 예수의 눈으로 보자’는 저의 소신에는 아무런 장애가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길 교회의 버팀목이 되시는 여러 교우님들이 이 부분에 더욱 집중하고 계시다는 사실과 새길의 신학이 성서와 예수를 부인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식화 된 틀에서 우리의 현실 세계에 되살려 내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고 있다고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신학을 공부한 사람이 아닐 뿐만 아니라 지식이 부족한 사람이어서 이해의 시간은 좀 더 걸리겠으나 앞으로 지속적으로 마음을 열고 새길의 신학에 귀를 기울이려 합니다.




어느덧 새길에 참여한 지 2년 가까이 되다 보니 저도 찾아오는 생명들을 맞이할 여러 가지 중 하나의 가지가 되어가는 것 같습니다.




새길20년! 20년의 세월이 쉽게 연상케 하는 것은 성년이라는 단어입니다. 인간의 시간을 그대로 교회에 적용할 수는 없겠으나 흥미로운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대개 사람의 경우 성년이 되기 전 나타나는 현상 중 하나는 신체적 성장이 멈춘다는 것입니다. 새길 교회의 지난 주보들을 통하여 예배 출석인원을 살펴보니 2004년의 평균 출석인원과 요즘의 출석 인원이 거의 비슷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의 경우로 말하면 성년이 되었다는 말이지요. 이제는 사회적 책임뿐만 아니라 증식의 때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저 역시 성장 제일주의는 반대합니다. 다만 우리 모두가 알아야만 하는 아픔이 존재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중 대다수가 경험했을 교회로 인한 아픔과 새길 교회를 찾을 때의 심정을 돌이켜 본다면 여러 교우님들께서도 공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4년간 인원 변동이 없다는 것은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왔고 또 많은 사람들이 떠나갔다는 의미입니다. 교회 성장을 연구하는 분들의 조사에 의하면 대부분의 교회는 100명에서 300명 사이 평균 200명에서 양적 성장을 멈춘다고 합니다. 이는 공동체가 큰 무리 없이 소통할 수 있는 인적 구성이 그러하다는 뜻이겠지요.




방법은 간단합니다. 제2, 제3의 새길 교회의 출현을 돕는 것입니다. 새길은 새길 이기에 같을 필요는 없습니다. 이 모양, 저 모양으로 다양한 시도가 가능하리라 생각합니다. 잘 자란 나무 일수록 증식의 필요와 가치는 분명합니다.

기도 하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의 나라는 평화롭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조화롭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조용하나

누구도 거부할 수없을 만큼 강력합니다.

새길 교회가 열어가는 새 길이 그리되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